115화 신입들 - [1]
「국회의사당에서 한차례 소란이 있었다는 소식입니다······」
TV를 보니 내가 국회의사당 지붕을 무너뜨렸단 뉴스가 나왔다. 또한 그 난동이 각성자 차별금지법 관련 항의였단 내용까지도 나왔는데, 그뿐이었다.
그보다 심각한 내용, 그러니까 각성자 김극이 의원들을 납치해서 협박한 일 따윈 조금도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듯 각성자가 헌정질서를 위협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하지 못했음이 알려지면, 정부를 만만히 본 나머지 현 체제에 도전하려는 더 많은 불순분자가 튀어나올 것이 우려된 것일까? 그래서 아예 사건 자체를 숨기려는 것이고?
요새 언론은 늘 이런 식이다. 사람들이 불안해할 만한 소식, 그리고 현 체제가 어디까지나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을 뿐이란 현실을 결코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외 소식 접하는 게 느린 사람들은 아직도 게이트가 열리기 전 세상과 지금 세상 간에 달라진 게 과잣값 정도밖에 없는 줄 안다.
몇 달 전 강준치가 소월로 떠나겠다며 영상을 올렸을 때, 강준치가 정부의 허락을 받고 떠나는 것이냐며 댓글로 따지던 얼간이도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정부가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리고 또한, 아무리 강력한 각성자인들 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도 그만큼 많은 모양이고.
뭐, 상관없다.
요즘 세상에 여론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고 있다. 각성자의 힘은 인기 투표로 주어지는 게 아닌 법.
그래도 새로 취임한 헌터 협회장은 여론을 신경 쓰는 걸까?
최용은 TV에 나와 이렇게 발언하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각성자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항의하기 위해, 협회의 각성자들이 또다시 모여······」
아, 최용 저 친구. 거짓말 한번 뻔뻔하게도 하는군그래.
분명 최용이 국회의사당에 포효하러 나온 이유는 신입 헌터들의 계약 내용이 맘에 들지 않았던 데다 그 계약이 협회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협회가 무시당했기 때문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째서인지 방송에서는 그마저 각성자 차별금지법 관련 시위였던 것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아마 수백억씩 버는 헌터들이 돈 덜 받는 게 맘에 들지 않아 시위하러 나왔다고 밝히는 것보단 각성자 인권 문제로 항의하러 나왔다고 주장하는 편이 훨씬 모양새가 나으리라 생각해서 저러는 것 같은데······.
쓸데없는 일 같지만 뭐, 굳이 뭐라고 따지지는 않았다.
나는 나대로 바쁘다.
헌터 활동을 쉬어도 너무 오래 쉬었다. 슬슬 다시 헌터로 복귀해야 한다.
*******
다시 한번 A급 헌터 계약을 맺기 위해 협회에 방문했다.
그러고는 내가 처음 헌터 데뷔할 때 받았던 각성자 심사를 다시 치렀으니, 그로써 나야말로 국내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각성자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새로운 능력 검사 기록을 받아든 협회 직원은, 그것을 내가 처음 심사를 받았을 때의 능력 검사 기록과 비교해보더니, 황당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이 정도면 1년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 봐야 하는 수준인데요? 이 정도로 능력이 성장한 경우는 전 세계 기록을 뒤져봐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인데······"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데요?"
내 물음에 협회 직원이 비장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여기서 모든 수치가 열한 배쯤 상승하면 정말 정식 S급입니다."
그리고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아직 멀었네요."
"멀었다뇨? 고작 1년 만에 S급과 비교할 수준이 되었단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건데!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 정도로 능력이 대폭 성장한 전례 자체가 아직 없어요! 대부분 각성자들의 성장 한계치가, 처음 각성했을 때의 능력 수준과 크게 차이 나지 않기 때문에······"
협회 직원이며 여기 모인 스카우터들은 내가 단기간에 이 정도로 성장했단 사실 자체에 기겁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담담한 척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이 검사 결과에 실망했다.
난 아직 멀었단 말이지.
어지간한 S급과의 차이도 이 지경이라면, 나와 강준치와의 차이는 이보다 더 클 것이었다. 강준치는 S급 중에서도 출력이 센 편이라고 하니까.
내가 해내고 싶은 일을 하려거든 여기서 훨씬 더 성장해야 하리라. 강준치가 암묵적인 관용만으로 수호하고 있는 현 체제를 뒤흔들려거든 그와 비슷한 수준이 되어야 할 테니까.
그러려면 역시, 더 많은 괴수를 사냥해야 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당연히도 최대한 빨리 그럴 생각이다.
*******
내가 각성자 심사를 받은 그 날, 국내 지자체에서 온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해외 스카우터들이 내게 온갖 제안을 했다.
그중에는 단순히 돈을 많이 주겠단 제안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일부 해외 스카우터들의 제안에는 '사실상 면책특권 수준으로 무제한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날 놀라게 했는데, 인천 탈환 프로젝트로 내가 보인 성과가 타국에도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김극 씨? 오셔서 인천에서 보여준 일만 해주시면 뭘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정말로 뭐든지요!"
일단 자국에 와서 일해주기만 하면 내가 길가에서 사람을 때려죽여도 죄를 묻지 않겠다고 제안하는(그리고 사실, 나만을 특별대우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자국에서 강력한 각성자들의 범죄를 처벌하길 포기했다고 설명하는) 해외 스카우터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솔직히 말해 그들의 제안이 끌리기는 했다.
내가 바란 초인으로서의 자유가 바로 그런 게 아니었는가? 선생을 실명시킨들, 훈련소 조교의 다리를 분질러버린들, 심지어 놈들을 패 죽인들 그 어떤 불합리한 압박도 받지 않는 진정한 법에서의 자유 말이다.
각성자들이 그런 자유를 누리는 나라가 이미 여럿이었나 보다. 내게 그런 제안을 한 스카우터가 한둘이 아니었던 걸 보니.
그러나 이번에도 한국 지자체와 헌터 계약을 맺었다.
내가 처음 헌터 계약을 맺었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 계약 또한 뉴스며 신문에 떠들썩하게 공개되었다.
"헌터 김극" 강준치 제외 역대 최고액 갱신
헌터 김극 "인천-서울" 동시 계약, 국내 최초 (······)
*******
"서울이랑 인천에서 동시에 활동하게 되었다고요?"
정진영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째서요? 두 지역과 동시에 헌터 계약맺는 건 전례가 없지 않나?"
내가 한숨을 쉬었다.
"나야 뭐, 인천이랑 단독 계약 맺고 싶었죠. 그런데 지금 인천엔 딱히 내가 필요 없다나?"
"김극 씨가 인천에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미친 소리래요?"
"정확히 말하자면 인천에 내가 필요하긴 한데, 적극적으로 사냥 나서줄 필요까진 없대. 난 그냥 인천에 상주하며 놀고먹으면서 괴수들 못 나오게 쫓아내 주기만 해도 돈을 주겠다나?"
이 자리에 나와 정진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어째선지 정진영이 데리고 온 신입 A급 헌터들이 함께였다. 협회를 통하지 않고 서울시와 직접 계약을 맺음으로써 최용을 노발대발하게 한 그 친구들 말이다.
"와······ 가만히 있어도 돈을 주겠다 제안했다고요? 정말?"
신입 헌터 중 하나가 못 믿겠다는 듯 그리 묻자, 정진영은 마치 내 대변자라도 되는 양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람들뿐만 아니라 게이트 내 괴수들 사이에도 유명하다느니. 너무나 유명한 나머지 헌터 김극의 존재만으로 괴수들이 현실에 나오지 못하게 막는 억제 효과가 대단하다느니 어쩌느니.
"심지어 김극 씨가 게이트에 웅크린 괴수들마저 끄집어내서 죽여버리길 거듭하니까! 이젠 게이트 안에서 쉬고 있던 괴수들도 김극 씨가 주변에 다가오면 겁먹고 헐레벌떡 도망쳐버리거든요? 그런 식으로 게이트 내부 청소마저 이루어져서 지금 인천이 그토록 평화로운 거야!"
정진영이 열변하자 신입들 사이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신입 하나가 이렇게 물었다.
"그럼 오빠, 그 제안 받아들여도 되지 않았어요? 직접 사냥 안 뛰면서도 큰돈 받을 수 있으면······"
그리고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헌터란 말이지. 괴수 쫓는 토템이 아니라."
"그래서 인천과 서울 모두에서 활동하기로 계약 맺은 거예요? 인천에만 있으면 괴수 사냥을 할 수 없으니까?"
"뭐, 대충 그래. 인천에 일 터지면 우선 출동하는 조건이긴 한데, 어차피 요새 인천은 잠잠하니까 어지간해선 서울에서 사냥하게 될 것 같네."
그리 한가하게 말을 섞던 중이었다.
모두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여기 모인 모두가 헌터임을 감안하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분명했다.
제 휴대전화를 확인한 신입 헌터의 눈이 흔들렸다.
"게이트······?"
젠장, 뭘 저리 느긋하게 중얼거리는지 모르겠다.
"게이트 열린 거 맞으니까 다들 빨리 준비해!"
내가 독촉했지만 다들 머뭇거렸다. 어째서?
내 알기로 여기 모인 신입들은 계약상 이번 달부터 출동해야 하는 줄로 안다.
다들 헌터 라이플 쏘는 훈련이며 기본 훈련 몇 가지만 겨우 끝마쳤음을 고려하면 가혹한 일이지만, 그래도 계약을 그리 맺었다면 지켜야 한다.
그런데 어째 다들 꿈쩍도 안 하고 멍하니 앉아들 있는 게 아닌가. 다들 뭐 하는 짓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소리치려다 말고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실전 투입 처음인가?"
"예······."
뭐, 헌터 일 자체가 처음인 신입들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나와 함께 1년이나 헌터 생활을 했던 정진영마저 지금 신입들과 함께 굳은 것은 어째서인가?
물론 신입들이 보는 앞에서 왜 그러냐고 지적했다간 망신 주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굳이 정진영만을 쳐다보지 않은 채, 몸이 얼어붙은 신입 한 명 한 명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 떨지들 마요. 나도 함께 출동할 거니까. 다들 담당 구역이 다르던가?"
"예, 아마······"
"뭐, 괜찮아. 다들 무전기 사용법은 숙지했죠? 그걸로 주저 없이 나 불러."
내 말에 신입 한 명이 날 멍하니 바라보았다.
"김극 씨를요?"
"그래요, 날 부르라구. 부르기만 하면 바로 도우러 갈 테니까. 알겠어, 다들?"
나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한 뒤, 나 또한 출동하기 위해 공간이동 했다.
"형 왔다!"
수송기 앞에 백담비와 성문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조직된 내 헌터팀과 함께.
내 라운드걸과 눈짓만으로 인사한 뒤, 새로운 내 헌터팀을 보았다.
그중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학원에 헬스하러 갈 때마다 몇 번 얼굴을 본 인원도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같이 어색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모두 저랑 처음 일하는 거죠? 반갑습니다."
그러자 성문영이 답답한 듯 소리 질렀다.
"아, 그냥 반말해요! 여기에 형보다 나이 많은 사람 한 명도 없으니까."
하기야 딱 봐도 새로운 내 팀원들은 다들 젊었다. 학원에서 에이스만 골라 보내줬다더니, 임형택 씨는커녕 정진영 형 나이쯤 되는 사람도 여기에 없었다.
그 사실마저 이상하게 느껴졌다. 끔찍하게.
그 모두와 함께 수송기에 탑승했다.
우릴 태운 수송기가 현장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새 팀원들이 열정적으로 말을 걸어댔다. 언제나 동경했다느니, 이렇게 팀에 합류시켜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느니······.
그리고 내가 입을 열었다.
"다들 너무 예 차릴 필요는 없고, 그저······"
모두가 날 주목하는 가운데 짧게 말을 끝맺었다.
"다들 죽지 마라. 제발 좀."
그러고서 수송기 밖을 바라보았다.
수송기는 서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 아래에 펼쳐진 풍경 또한 서울의 그것이었고.
얼마 전까지 서울은 헌터들에게 가장 선호되는 지역이었던가?
그것은 서울시에서 가장 돈을 많이 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헌터 일을 하는 것이 지방에서 헌터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고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서울은 서울 주민과 서울 헌터들 모두에게 안전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이 가장 돈이 많고 여력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가장 많은 각성자 헌터들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서울 각 구역을 지키는 각성자들을 경계한 괴수들은 서울에 선뜻 게이트를 열지 못했다.
이제는 아니었다.
반쯤 무너진 도시 너머로, 여기저기서 자줏빛이 일렁였다.
"이게 대체 뭐냐······?"
서울 전역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한두 곳이 아니라 십수 구역에서, 수십 개 게이트가 동시에 열렸다.
베헤모스가 서울을 휩쓴 뒤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게 된 서울의 일상이었다.
116화 신입들 - [2]
시선을 살짝 돌려서는 수송기 바로 아래를 봤다.
이 높은 위치에서도 똑똑히 보일만치 도로를 가득 채운 데스클로의 물결이 보였다.
나야 이미 베헤모스 사태에서 저 비슷한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지만, 새로 합류한 팀원들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인 듯했다. 다들 질린 얼굴로 말을 주고받는 걸 보니.
"데스클로는 많아봤자 열 마리쯤 몰려다니지 않나? 대규모 무리라 해봤자 일백 마리가 안 되고. 저건 대체 무슨······"
"괴수들도 학습한 거지. 베헤모스 따라다니던 괴수들이 뭉쳐 다니면서 재미를 보았잖아? 그런 식으로 단체행동하는 게 낫다는 걸 이제 다들 아는 거야. 같은 지역에서 여러 장소에 튀어나와 동시에 날뛰면 대응이 어려우니까. 이제 놈들도 그걸 알고 전략을 바꿔서는······."
헌터용 앱이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이 근처 말고도 서울 곳곳에 게이트가 열렸다고 한다. 여기만큼 게이트가 집중적으로 열린 곳은 또 없지만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도 소규모 게이트가 여기저기 열렸다고.
이 와중에 유독 조용한 것은 강준치가 머무는 호텔 근처뿐이라나?
그러나 강준치는 여전히 이런 상황에 출동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사고를 쳐서 죄책감을 느끼긴 느끼는 것이지만, 정작 사고 쳤으니 사과할 겸 갯강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은 여전히 없는 모양이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터 라이플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 먼저 간다."
성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생해요!"
살짝 웃어준 다음 헌터 라이플과 함께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도로 옆, 전봇대 위에 섰다.
저 앞에 데스클로들의 물결이 파도치고 있었다. 도로를 가득 채운 데스클로들이 한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저 물결에 휩쓸렸다간 나마저도 순식간에 죽고 말 것이다.
제기랄, 신입들이 왜 그토록 현장 투입되는 걸 겁먹었는지 알겠다. 단순히 경험이 없어서 불안했던 게 아니라 상황 자체가 내가 한창 활동할 적보다 끔찍했다.
이건 거의 전장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아닌가. 아무리 봐도 신입이 경험 쌓기 좋은 환경은 아니다.
물론, 이미 경험 풍부한 나마저 겁먹을 상황은 아니다.
저 살덩이 물결을 상대로는 굳이 조준할 필요조차 없다. 그냥 쏘는 족족 맞을 것이다.
'드르르륵―' 전봇대 위에서 헌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더니 과연 그랬다.
내가 쏘는 족족 피와 살덩이가 튀었다. 그리 순식간에 수십 마리쯤 죽였을까?
달리다 말고 데스클로들이 이쪽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다음 일제히 이쪽으로 달려들었고.
일부는 전봇대를 기어올랐고, 일부는 전봇대에 갈고리발톱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놈들의 역장 발톱에 전봇대가 완전히 잘렸다.
전봇대가 쓰러졌다. 전봇대 위에 서 있던 나 또한 떨어지기 직전, 나는 공간이동 했다. 근처에 있던 또 다른 전봇대 위로.
떨어진 날 향해 발톱을 휘두르려던 데스클로들에게도 기관포탄 세례를 먹여주니, 그제야 놈들 사이에서 비명 비슷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데스클로들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날 찾았다. 또다시 날 향해 달려온 놈들에게도 기관포탄을 먹여주다가, 이번에 올라선 전봇대마저 쓰러지자 또 다른 전봇대로 위치를 옮겼다.
그리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르륵―'
이 비슷한 일이 네 번 연속 반복되자, 데스클로들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데스클로들은 몇 번이고 날 놓치고서 스트레스 가득한 괴성을 지르다가, 이내 날 처치하길 포기했다.
놈들이 다시 물결을 이루어 도로를 타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놈들은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놈들의 꽁무니로 헌터 라이플을 쏘다가, 전봇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놈들을 쫓아 달렸다. 달리면서 놈들을 향해 헌터 라이플을 쏘고 또 쏘았다.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던 놈들의 숫자가 줄어들기는 순식간이었다.
그렇듯 놈들을 쫓아 헌터 라이플을 난사하면서도 나는 정신적 그물망으로 전체적인 상황을 살폈다.
근처에 사람은 거의 없다. 게이트가 열리기 무섭게 인근 주민들은 이미 대피소로 피난을 마친 것 같다.
그래도 다 피하진 못했을 텐데, 생존자는 어디 있지?
하나 찾았다. 그쪽 공간을 정신적 그물망으로 더듬어 살폈다.
뇌에 전해진 입체 정보를 파악했다.
피난용 지하실 같다.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위협하는 놈들은······.
일순 사람으로 착각했지만, 아니었다.
고블린들이다. 잘 먹고 잘 컸는지 체격이 크다.
그저 잘 먹고 잘 커서 저리 큰 걸까?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식료품을 약탈해선 잔뜩 처먹어서?
이 역시 베헤모스 사태로 인한 괴수들의 변화 중 하나일 것이다.
저 정도 크기면 고블린이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데, 따로 판타지풍으로 오크나 홉고블린이라 불러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덩치 큰 고블린들은 괴수라기보단 강도가 저지를 법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다들 K-2 소총 한 자루씩을 들고는 지하실에 가득하던 통조림을 자루에 쓸어 담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남자를 쏘지 않고 살려뒀다.
나중에 죽이려는지, 아니면 노예 혹은 비상식량으로 잡아가려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헌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기며, 그 남자 앞으로 공간이동 했다.
엎드려 웅크려 있던 남자의 등에 내 발을 올려놓자 남자가 비명 질렀다.
"악! 악······"
그대로 남자와 함께 공간이동 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겨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공간이동을 아껴야 했다.
그리고 또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남자의 몸에도 역장 외골격을 씌워 보호했으니까.
어지간한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의 역장은 자기 신체와 옷, 거기에 목걸이나 손목시계 따위 신체에 밀착된 장신구에나 적용할 수 있다던가?
그러나 내 경우엔 역장을 씌울 수 있는 범위가 그보다 훨씬 넓다. 손에 든 거대한 중화기나 탑승한 차량, 심지어 접촉 중인 사람의 몸에도 역장을 씌우는 것이 가능하다. 일찍이 접촉 중인 사람 여럿과 공간이동 하는 경험을 자주 해서 이런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헌터 라이플에서 쏟아져 나온 기관포탄들이 고블린들을 터뜨리는 동안, 남자는 몸을 웅크린 채 마구 비명 지르고 있었다.
"악! 악!"
이 한심하고 덜떨어진 서울 종자에게 내가 윽박질렀다.
"다 끝났으니까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날 보더니 중얼거렸다.
"어, 김극 헌터? 저 팬인데······!"
아, 서울에 살 뿐인 인천 사람이었군. 이 난리 중에도 발음을 똑똑히 하는 걸 보니 숨길 수 없는 지성이 엿보였다. 내가 친절하게 웃었다.
"다친 덴 없죠?"
"예, 덕분에······!"
"그럼 어서 대피하러 갑시다! 인천 만세."
그 밖에도 도움이 필요한 생존자들을 발견하여 공간이동으로 옮겨주길 반복했는데, 그런 식으로 이 근처 생존자 칠십팔 명을 모두 피난시키는 데는 불과 삼 분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피난소에 수십 초마다 사람을 데려와서 피난소를 가득 채우자, 피난소의 군인은 멍하니 날 바라보며 뭔가 말하고 싶은지 입만 뻐끔거렸다.
이제 다시 괴수 사냥에 전념하려던 차였다.
한 대의 수송기가 근처에 착륙했다.
정신적 그물망을 통해, 수송기에서 내린 이들의 면면을 훑었다.
돌격소총을 든 여덟 명의 헌터와······ 그들의 호위를 받는 헌터 라이플을 든 헌터.
보아하니 신입 A급 헌터와 짐꾼들이었다. 그 밖에도 수송기 몇 대가 연달아 도착하는 걸 보니 여러 A급 신입 헌터들이 막 여기 도착한 듯했다.
아까 봤을 때도 신입들은 한참이나 꾸물거리더니, 출동은 물론 현장 투입 또한 늦었다. 무전으로 누군가가 항의했다.
「왜 이제 온 거야? 정신 안 차려?」
한편 나는 나대로 일하면서, 정신적 그물망으로 현장에 도착한 신입 한 명 한 명의 움직임을 살폈다.
저들이 제 몫을 다 할 수 있을까?
A급 헌터로서 저 신입들의 임무는 고위험 표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첫 사냥부터 가장 위험한 장소에 투입될 것이다.
그리고 헌터들은 대부분 첫 임무에서 죽는다. 아무리 강도 있게 훈련해도 그렇다는데, 저들은 훈련을 얼마 받지 못했다.
맨 먼저 임무에 나선 신입을 집중적으로 주시했다. 정신적 그물망으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폈다.
신입 A급 헌터와 그를 호위하는 짐꾼 나부랭이들은, 데스클로 역장체를 제거하러 나섰다.
이후 상황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신입이 질주하던 역장체를 상대로 헌터 라이플을 쏘았으나 빗나갔다.
그리고 어지간한 맹수를 사냥할 때도 그렇지만, 데스클로를 상대로 빗맞히면 무조건 죽는다. 그 데스클로가 한 번의 도약으로 십수 미터를 뛰어넘을 수 있는 역장체라면 특히 더.
"아악!"
내가 막 공간이동 했을 때, 역장체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공중을 날고 있었으며 신입은 비명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역장체의 갈고리 발톱이 신입에게 닿으려던 차, 내가 놈의 발목을 움켜쥐고는 하늘 높이 집어던졌다.
공중에 높이 날려진 역장체를 향해 헌터 라이플을 곧바로 겨누고, 곧바로 쏘았다. 꽤 단단한 놈이었는지 삼 초쯤 쏘고서야 놈의 역장이 깨져서는 공중에서 지저분한 폭발이 일었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서 신입을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아까 정진영과 함께 나와 커피를 마시던 젊은 청년. 나와 커피 마실 때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그 얼굴엔 짙은 공포가 자리 잡았다.
"괜찮아?"
내가 물었더니 대답이 없었다. 죽을 뻔한 상황에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는지 그는 한동안 헉헉거리다가 겨우 상황을 알아차린 듯했다.
"김극 형? 고맙······"
"괜찮아?"
방금 했던 질문을 다시 했더니, 이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안 괜찮아요······. 더 못 하겠어······"
그 목소리며 손발이 연신 떨렸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할 수 있어."
"아뇨, 못 해요······"
"할 수 있다니까? 넌 특별해."
뜬금없는 말로 느껴진 걸까? 그가 눈을 껌벅거렸다.
"예······?"
"네 내면에 흐르는 이 힘이 느껴지지 않나?"
"내면의 힘이요? 지금 무슨······"
"봐봐. 그 힘이 외부로 표출돼선, 이토록 강력하고 단단한 힘을 이루고 있잖아."
그 어깨, 정확히는 그 어깨에 덮인 역장을 두드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 친구는 꽤 괜찮은 역장 외골격 능력자였다.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벌써 사냥을 포기하기는 아까웠다.
"그러니 일어나, 어서."
그리 말하며 손을 내밀었더니 그가 잡고 일어섰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고도 진정되는지 않았는지 그가 중얼거렸다.
"몸 떨리는 게, 안 멈춰요······."
그리고 내가 말했다.
"떨어도 돼. 막 긴장해서 실수 연발해도 되고."
"그랬다간······"
"괜찮아. 그래도 안 죽어.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응?"
"형이 지켜보고 있다고요?"
"지켜보고 있으니까 도와주러 올 수 있었던 거겠지?"
멍청하게도 "아······." 하고 중얼거리는 녀석과 눈을 마주한 채 내가 말했다.
"익숙해질 때까지 얼마든지 계속 떨고 실수해.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지금처럼 또 도와줄 수 있는 걸 기억하고. 알겠어?"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씩 웃어준 다음, 정신적 그물망으로 다른 장소의 상황을 살폈다.
내 도움이 필요한 또 다른 신입이 있었다.
그쪽으로 공간이동 했다.
이번에는 헌터 라이플을 든 젊은 여자 하나와 그녀를 호위하는 헌터들이 보였다.
"안 가고 뭐해! 저놈 멈춰 있을 때 빨리 움직여야 한다니까?"
다른 헌터들이 재촉했지만, 각성자인 젊은 여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의 사냥감을 보았다. 삼 미터짜리 오거, 벌써 사람 한 명쯤 뜯어먹었는지 입이 피투성이인 저 식인 괴물에게 다가가기 겁나는 걸까?
"슬슬 움직여야지? 나머지도 재촉 좀 그만하고."
내가 다가가서 말을 걸었더니, 젊은 여자가 입을 크게 벌리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김극 오빠! 저 대신 잡아주러 온 거예요?"
"아니."
"그럼······"
"너 하는 거 봐주러. 자, 혼자서 잡으려고 시도해 봐. 문제 생기면 내가 커버칠 테니까 어서."
내 등장에 놀라있던 비각성자 헌터들도 이 말에 반색했다.
"진짜 좋은 기회네. 뭐해요? 어서 안 가고!"
한편 젊은 여자는 여전히 두려운지 바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내가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자 이내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겨우 맘을 다잡은 듯했다. 하기야 그녀도 첫 데뷔로 이보다 좋은 상황이 있기 어렵단 걸 알 것이었다.
헌터 라이플을 든 그녀가 식인 괴물을 향해 나아갔다.
곧이어 그녀의 헌터 라이플이 쏟아낸 기관포탄 세례가 삼 미터짜리 오거의 몸을 덮쳤다. 몇 발은 빗나갔지만 나머지는 모두 그 몸에 명중했으며, 오거의 육중한 몸이 터졌다.
"잘 쏘네!"
짐꾼들의 환호성 속에서, 임무를 마친 그녀가 이쪽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고마운 걸 알았는지 그녀가 눈짓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나는 씩 웃어주고서 또 다른 신입을 향해 공간이동 했다.
*******
117화 신입들 - [3]
이후로도 비슷한 일을 거듭했다.
나는 나대로 괴수들을 죽이며 내 할 일을 하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신입들이 전투에 임하거나 곤경을 겪을 때마다 나서길 반복했다.
그런 식으로 내가 도움을 준 신입이 대충 열댓 명은 되었다.
"김극 오빠? 나중에 제가 밥 살게요, 최대한 비싼 걸로!"
그런 식으로 신입 다섯 명은 내 덕에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것 같다. 나머지 인원도 내가 언제든 지원할 수 있음을 알린 뒤에 싸우게 하니 과감히 전투에 나서는 게 가능했던 모양이고.
오늘 밤 헌트웹에 애기버섯 칭송 글이 적어도 열 개는 올라오길 기대해볼 만하겠다.
그러면서 정진영 쪽 상황도 빼놓지 않고 확인했다. 아까 그 형이 다른 신인들만큼이나 긴장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 형이 지난 1년 동안 괴수를 적극적으로 처치했다기보다는 내 보조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정진영을 경력직 헌터라고 불러주긴 민망할지도 모른다. 다른 신입들만큼이나 겁먹은 채 싸우다가, 크게 다치거나 아니면 크게 실수해 망신을 당할지도······.
그리 걱정했건만, 기우였던 모양이다.
내가 정신적 그물망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정진영은 맡은 괴수를 훌륭히 해치웠다.
「정진영, 담당 역장체 해치웠다고 알림」
내가 그쪽으로 공간이동 해보니 과연, 정진영은 데스클로의 시체 앞에 서 있었다.
역장체였을 데스클로는 온몸이 터져 죽어있었는데, 보아하니 제대로 화력을 집중해서 단번에 해치운 듯했다. 사격 솜씨마저 초인적인 나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훌륭한 솜씨였다.
그러고 보면 정진영 이 형, 각성하자마자 역장체 하나를 해치웠다고 했나? 이걸 보면 소위 '짐꾼'으로나마 1년 동안 활동했던 경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닌 모양인데.
"형! 훌륭한데요?"
그렇듯 고위험 표적을 쓰러뜨리고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정진영은, 날 보더니 그제야 표정이 활짝 펴졌다.
"대, 대대, 대단하죠?"
정진영이 말을 더듬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그저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워 주니 정진영 또한 헤벌쭉 웃었다.
이 와중에 신입들만 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전을 들어보니, 기존에 활동하던 A급 헌터들도 각자 맡은 구역에서 제 할 일을 하는 중이더라.
그리고 내가 그렇듯, 특별한 담당구역이 없이 여기저기 필요한 곳에 지원 다니는 베테랑 헌터가 하나 더 있었다.
최용이었다.
저 멀리, 십오 층 빌딩의 옥상에 거대한 드래곤이 자리 잡았다.
정신적 그물망으로 살피건대, 그 빌딩 옆 도로에는 데스클로의 물결이 지나가고 있었다.
최용이 긴 목을 빼어 주둥이를 아래로 향하자, 시뻘건 불줄기가 그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드래곤' 하면 흔히 떠오르곤 하는 화염 숨결이 분명했다.
데스클로의 물결을 강타한 화염은 주변으로 확산하여 이내 도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최용이 불을 뿜길 멈춘 뒤, 불이 꺼지고서 드러난 데스클로들은 모조리 숯이 되어서는 녹아내린 아스팔트와 반쯤 뭉쳐진 게 아닌가.
저 정도 규모 무리라면 역장체도 몇 마리쯤 섞여 있었을 텐데, 분출된 화염이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는지 생존한 개체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 제 일을 마친 최용은, 또 다른 지원 요청에 응하여 다른 장소로 향할 준비를 했다.
저 양반이 저리 화염 숨결을 뿜으려면 체내 가스를 소모해야 해서 이후로 비행하기가 어려워진다던가? 체내 가스를 소모해서 날기 어려워진 상황을 보완하려는지 실시간으로 드래곤의 몸이 변했다.
순식간에 그 날개폭이 늘어나고, 몸 크기가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였다. 체내 가스의 부력 없이 날기 위한 형태일까?
그렇듯 더욱 커진 날개를 펄럭이더니 최용이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최용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진짜 끝내주는데.
보아하니 변신체의 강력함도, 변신의 유동성도 모두 최고 수준이로군. 괜히 환각에서나마 나와 석장실을 제치고 리더 역할을 했던 게 아닌 셈이다.
한편 얼마 전 서울시와 계약을 마친 백담비도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중이었다. 얼음 매를 통한 자폭 전술로 재미를 보았는지, 이번에도 고폭탄을 틀어쥔 얼음 매가 지상에 내리꽂자 성대한 폭발이 일었다.
또한 이 와중에 백담비가 만들어낸 헌터 라이플을 든 얼음 조형물들은 여러 구역에서 데스클로들을 쓸어내고 있다던가? 백담비 한 명이 어지간한 각성자 헌터 여러 명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당장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석장실도 어디선가 활약하고 있을 것이요, 그 밖에 이름 있는 헌터들이 대거 서울에 포진하여 사태 진압 중이라니 그야말로 호화로운 인선이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과한 수준으로 호화스러웠다.
인천과 비교해도 그렇다. 인천에 유명한 헌터라곤 나뿐이었던 데다 나 다음으로 강력한 헌터는 태업하기로 악명 높은 응우옌이었지 않은가?
그렇듯 수도권에 속하는 인천과 비교가 돼도 너무 크게 비교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국가의 역량이 이곳에 집중되었음을 알 만하다.
심지어 이 상황에 투입된 특무대까지 존재했다.
"아, 김극 형?"
늘 그렇지만, 그 친구였다.
"한희 씨?"
나는 마치 공간이동 한 것처럼 내 앞에 나타난 한희를 보았다. 그 손에 들린 길쭉한 칼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칼이 원래 쓰던 것보다 길어졌네요?"
"어, 바로 알아보시네요?"
"당연히 알아보죠? 거의 두 배쯤 길어졌는데, 어떻게?"
그저 칼 길이만 늘인 게 아니라, 역장 날붙이의 길이가 늘어나면서 칼 길이 또한 함께 늘였으리라.
그러니까 그 각성자로서의 역량 자체가 배로 늘어났을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걸 알아본 게 기분 좋은지, 한희는 살짝 웃더니 이렇게 설명했다.
"형 안 계실 때, 데스클로를 많이 잡았어요."
"데스클로를요?"
"예, 데스클로를. 꽤 많이요."
한희는 그리 읊조리더니,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괴수 잡으러 가보겠다며 땅을 박찼다.
내 초인적인 동체시력으로도 따라잡기 벅찬 속도로, 한희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것만 봐도 한희가 내가 소월로 떠나있던 사이 얼마나 각성자로서 성장했는지 알 만했다. 적어도 두 배는 성장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그 몇 배나.
내가 S급이 되기 위해선 열한 배쯤 더 성장해야 한다고 했던가? 실제론 한 다섯 배만 성장해도 된다. 내게는 신체강화와 역장 외골격이 동시에 있지 않은가. 같은 영혼을 삼켜도 두 능력이 모두 함께 성장하기 때문에 성장의 효율이 남다르다.
그리고 가속 능력과 역장 외골격 능력을 함께 지닌 한희 또한, 영적으로 두 배쯤 성장했을지 몰라도 실제론 서너 배는 더 빨라진 느낌이다.
미리 내 묫자리를 알아봐 둬야 하나, 하는 걱정이 절로 든다.
*******
이후로도 여기저기 공간이동 하던 중에 무전이 울렸다.
기합이 바짝 든 목소리. 먼 곳에서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지원 바람!」
"김극이 지원 갑니다."
그리 응답하고서 공간이동 하여 지원 요청이 온 장소로 향했다.
그러고서 거기 도사린 괴수들을 보았다.
오거였다. 삼 미터급. 심지어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가 함께였으며, 그 옆을 따르는 크고 작은 고블린들이 열다섯 마리는 되었다. 고블린들은 모두가 K-2 소총을 들고 있기까지 했다.
이게 대체 뭐냐?
고블린들이 총기로 무장한 것보다는 다른 점에서 더욱 놀랐다.
오거가 저리 단체행동하는 건 처음 본다.
오거는 본래 고블린이라지만, 놈들은 거대화하여 몸뚱이가 커지면 기존에 함께하던 무리를 모조리 잡아먹는지 아니면 내버리는지 몰라도 하여간 혼자 다니는 경향이 강한데. 저놈들은 같은 오거끼리 함께 다닐 뿐만 아니라 자잘한 졸병까지 데리고 다니다니?
전차와 전차를 호위하는 보병들이 생각난다. 전차 혼자 다니다간 대전차 화기에 너무 쉽게 무력화될 수 있으니, 보병들이 전차에 보호받는 겸 전차를 보호해야 한다던가?
비슷한 이유로 각성자 헌터들 또한 비각성자 헌터들을 대동하여 다니는데, 저 괴수들 또한 우리 전술을 보고 따라 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오거는 워낙에 눈에 띄는 개체라 대전차 화기에 노려지거나 헌터들의 집중표적이 되는 일이 많으니까, 저렇게 같이 다니며 서로를 보호하려고······.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좋지 않다. 앞으로의 일이 저절로 염려된다.
괴수들이 단순히 식인을 거듭하여 물리적으로 강해질 뿐만 아니라, 저렇게 전술 면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길 줄이야?
우리가 괴수들에게 적응하는 한편 괴수들 또한 우리에게 적응하고 있다. 이미 여러 번 확인한 사실이지만, 정말로 신입들이 활동하기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김극 형! 도우러 왔어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헌터 라이플을 든 신입이 날 보며 반색하고 있었다. 앞서 죽을 뻔했다가 내 도움으로 살아난 친구였다.
저 친구는 신체강화자랬던가? 그렇다면 저 친구는 저 고블린들이 든 돌격소총에 맞아도 위험하겠군그래.
그리 판단하고서 내가 말했다.
"내가 먼저 가서 시선 끌 테니까, 나 날뛰는 거 보면 그때 지원해요."
내 제안이 뭐 그리 놀라운지 몰라도 신입이 눈을 크게 떴다.
"형이 먼저 가서 시선 끌어 주겠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공간이동을 몇 번 했다. 헌터 라이플을 내 팀원들에게 맡긴 다음 망치를 들고 나섰다.
내 역장을 씌운 망치를 단단히 쥐고서, 저 하늘 위로 공간이동 했다. 망치를 높이 들어 올리며, 무전기에 대고 신호했다.
"이 초 뒤!"
중력이 내 몸을 끌어당겼다. 가속이 충분히 실렸을 때 내가 외쳤다.
"일 초 뒤!"
망치를 내리침과 함께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완전히 내리쳐진 망치는 정확한 목표지점에 명중했다. '쾅!'
망치는 오거의 굵직한 목뼈를 분쇄한 뒤, 그러고도 그 충격을 주변에 전달했다.
헌터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굉음과 함께 주변 땅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흙먼지가 요란하게 일어나 주변을 가렸다. 이 모든 것이 내 망치질 한 번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
이 요란스러운 와중에 신입은 제 할 일을 해냈다.
그 손에 들린 헌터 라이플에서 기관포탄이 쏟아져 나와서는 당황하고 있던 고블린들을 휩쓸었다.
한편, 난 흙먼지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또 다른 오거에게 달려들었다.
이리 와라, 괴수 새끼.
오거의 굵은 팔을 잡아당기며 짧게 쥔 망치를 내리쳤다. 놈의 머리통을 내리치자 그 두개골과 목뼈가 모조리 아작난 감촉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머리를 통해 전해진 희열이 놈의 완전한 죽음을 알렸다.
그리 딱 두 번의 망치질을 마치고 나니, 주변에 살아남은 괴수라곤 전혀 없었다. 상처 하나 없는 완벽한 괴수 소탕이었다.
내가 흙먼지 속에서 걸어 나오자, 신입과 다른 비각성 헌터들이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한동안 그들은 날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말고 신입이 입을 열었다.
"형 활약하는 거 영상으론 몇 번 봤는데, 직접 보니 몇 배는 화끈하네요? 대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니?"
"직접 괴수한테 접근해서 망치만으로 죽여버리는 거요. 역장 날붙이 있는 사람들도 감히 괴수들 상대론 달라붙을 엄두도 못 낸다던데, 형은 어떻게 그러는지 당최······ 전직 UFC 파이터라 그런가? 배짱부터가 저랑은 아주 그냥 차원이 다르네요······?"
내가 하는 짓을 보고서 자신감이 줄어든 모양이다. 첫 데뷔부터 제 초라함을 느끼게 내버려 둘 순 없다. 내가 위로 차원에서 말했다.
"내가 특별히 용감해서 그런 건 아니죠?"
"용감해서가 아니라고요?"
"왜, 난 공간이동 있잖아요? 언제든 내뺄 수 있으니까 딱히 두려울 게 없는 거지. 그러니까 괜히 따라 할 필요도 없고 딱히 주눅들 필요도 없어요."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한편 지원 요청을 듣고 달려온 베테랑이 나뿐만은 아니었던 듯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들어보니, 저 위에서 최용이 우릴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최용이 바닥에 내려앉더니, 그 몸 크기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방금까지 드래곤의 형태였던 최용은, 얼마 전에 봤듯 왜소한 남자가 되었다.
최용이 우릴 보며 말했다.
"와, 벌써 상황 끝났네요? 김극 씨가 신입 챙겨준 거야?"
"뭐, 그렇죠?"
"대단하다 정말. 오늘 김극 씨가 쭉 신입들 챙겨줬다더니 또 그랬나 본데, 직접 보니까 진짜 흡족하네요! 협회에서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다 해주시네?"
내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협회에서 신입들 따로 안 챙겨줘요? 생각해 보면 나만 해도 따로 교육 못 받고 대뜸 게이트 열렸으니 역장체 잡으라며 던져졌던 것 같은데. 이런 식이면 인원 소모가 너무 크지 않나?"
그리고 최용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협회 차원에서 A급 헌터들 현장 투입되기 전에 신입 연수를 하긴 하는데, 그것만으론 어째 좀 부족하죠?"
"예. 전담 사수를 붙여주면 훨씬 낫겠는데요?"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아시다시피 A급 헌터들 몸값이 오지게 비싸서는 협회 예산으론 누구 보모 노릇 하라고 붙여주기도 어렵고. 헌터들은 지자체와 계약하는 프리랜서들이니까 협회에서 신입 좀 챙겨주라고 지시한들 누가 따를 리도 없고.
김극 씨 같은 호걸이 아니고서야 누가 또 그럴 리가······ 얘기 들어보니까 김극 씨가 신입들 죽을 뻔할 때마다 공간이동으로 난입해서 살려주고, 여러모로 커버쳐주고 그랬다던데 맞아요?"
그 질문에 신입이 나 대신 열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서 내 도움을 받아서 죽다 살아났다느니, 이번에 또 도움을 받았다느니 어쩌느니.
최용이 오, 하고 감탄했다.
"진짜 제대로 챙겨줬나 보네? 저 멀리서는 베테랑도 한 명 죽었다길래 신입들은 아무리 못해도 이 할은 죽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어째 신입 중엔 한 명도 안 죽었다잖아요. 내가 그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제가 나선 보람이 좀 있죠?"
"그럼요. 잘했어요, 정말! 진짜 잘했는데, 좀 아쉽기도 하네."
"예?"
아쉽다니, 뭐가?
혹시 멀리서 죽었다는 베테랑도 내가 나서서 살려줘야 했다고 책망하는 건가 생각했지만(내 정신적 그물망 범위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아니었다.
최용은 지금 내가 너무 많은 사람을 살렸다고 책망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신입 중에 한 절반쯤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래야 협회 안 통하고 멋대로 계약하면 큰일이 난다는 걸 정부랑 다른 신입들한테 경고할 수 있었을 테니까."
최용이 그리 말한 순간,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싸하기 그지없는 침묵이었다. 그 말을 들은 신입도, 다른 헌터들도 아연한 얼굴로 최용을 쳐다보았다.
아마 나도 그랬던 모양이다. 내 얼굴을 본 최용이 흠칫하는 듯하더니, 부리나케 수습에 나섰다.
"농담인 거 알죠?"
"진짜 농담이요?"
"당연히 진짜! 농담, 농담!"
118화 신입들 - [4]
최용이 몇 번이고 농담임을 강조했지만, 분위기는 쉬이 수습되지 않았다.
최용이 난처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진짜 미안해! 내가 원래는 안 이러는데, 변신하고 나서 실언을 자주 해요!"
"변신하고 나서 그런다구요?"
"예, 변신하고 나서! 미국 논문 보니까 변신 과정에 호르몬이 급격히 바뀌어서 생기는 문제 중 하나라나? 변신하고서 한동안은 머릿속 생각이 필터링 안 거치고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나오는데······!"
그러나 기껏 해명한 보람도 없이 여기 모인 헌터들의 표정은 더욱 기괴해질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말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농담이 아니라 진실한 생각이었단 소리 아닌가.
그러니까, 정말 신입 헌터 중 절반이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최용 이 사람, 위험한 인간이네.
애국자의 각성자 버전일까? 툭하면 조국을 위한다느니 동포를 위한다느니 소리를 지껄이지만, 그 과정에 자국 청년들을 전장으로 보내 희생시키는 건 모두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는?
역시 김형만 씨가 살아남아 협회장이 돼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너무 당황하시네. 그러지 마요, 사람이 맘에도 없는 소리 할 수도 있는 거지. 그래서 지금 상황 대충 끝난 거 같죠?"
수습을 도우려는 내 말에 최용이 허겁지겁 반응했다.
"예? 아, 예! 무전 들어보니까 슬슬 다 끝난 거 같네요? 이제 시마이 쳐도 될 거 같은데요? 남은 일은 짐꾼들한테 맡겨도······"
짐꾼 저것도 비각성자 헌터들을 비하하는 용어라 헌트웹 밖에서 쓸 단어가 아닌데. 변신 후에 말 고르는 데 문제가 생긴단 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못 들은 척 넘기는 가운데 최용이 말했다.
"그럼 다들 일 마칠 준비합시다! 맘 같아선 신입들 모아다가 회식이라도 시켜주고 싶은데 다들 피곤해서 얼른 집에 가서 뻗고 싶을 테니 그랬다간 민폐겠지? 자자, 다들 오늘 고생했고······"
*******
Q. 김극 헌터의 재계약 후 첫 활약에 진심 어린 경의를 보내는 바이다. 이번에도 특출난 활약을 보였는데, 부평역 5분 거리 수렵 전문 학원에 다닌 수강생이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 설명할 건가?
- 그쪽도 각성자였나?
Q. 예언 능력에 각성했느냐 물으려는 것이라면, 김극 헌터의 지난 인터뷰들만 봐도 그런 능력은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김극 헌터의 예전 인터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김극 헌터는 일찍이 서울 사람 만 명의 목숨보다 인천 사람 한 명의 목숨이 귀하다고 발언한 바가 있다.
심지어 인천 이외 지역 주민들에겐 인권이 없으므로 지킬 가치가 없다고 발언하기까지 했는데, 이후 행적을 보면 좋은 의미로 언행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 언행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Q. 작년 서울에 벌어진 게이트 사태에서 김극 헌터는 출동할 의무가 없었는데도 적극 조력해 파이어 호크를 제거하는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벌어진 베헤모스 사태에서도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지 않은가? 김극 헌터야말로 누구보다 서울 방위에 힘쓴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 인천뿐만 아니라 서울과도 계약을 맺은 걸로 볼 때, 당시엔 쑥스러워서 맘에도 없는 소리를 했거나 아니면 그동안 생각이 바뀐 것인지?
- 둘 다 절대 아니다. 애초에 난 이번에도 서울 사람들이 아니라 인천 사람들을 지켰다
Q. 서울 사람들이 아니라 인천 사람들을 지켰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 인천 사람이 있는 곳이 인천이다. 인천 사람인 내가 출동한 곳이니 그곳도 인천이고 (······)
*******
집에 가서 헌트웹을 켠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선배 노릇을 한 보람이 있군.
헌트웹에 올라온 내 관련 글이 한둘이 아니었다. 날 향한 찬양들.
김극이 서울 첫 데뷔부터 이번 사태에 출몰한 괴수의 삼 할을 쓸어버렸다느니(내가 사용하는 헌터 라이플 구경이 유독 커서 대충 판별이 되었다), 그리 활약하면서 자기 일에만 전념하는 게 아니라, 뉴비들을 적극적으로 챙겨준 덕분에 여러 신입이 성공적으로 헌터 데뷔할 수 있었다느니······.
그와 같은 내 칭송 글 중 하나를 클릭해보니, 이해경이라는 신입이 올린 글이었다.
Ⓐ 이해경 : 김극 오빠, 이번에 진짜진짜 고맙습니다!
김극 선배 도움을 받아 첫 사냥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는데, 그게 협회 차원에서 해준 게 아니라 김극 선배가 자발적으로 도와준 거라 하더라고요?
첫 실전을 누군가 돕더라도 자기 팀에 속한 베테랑 헌터들이 돕는 거지, 이렇게 A급 선배가 도와주는 일은 없다던데 이게 얼마나 행운인지 당시엔 몰랐어요!
당시엔 제가 워낙 긴장해서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도 못했는데, 그게 엄청 후회되거든요? 여기서 공개적으로 감사하고 싶어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나중에 밥 한 끼 살게요!
Ⓑ GoodHunter : 김극 씨가 같은 팀원이며 동료 헌터들 진짜 잘 챙겨주지. 앞으로 같이 일할 수 있게 되었었다니 행운이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글에다 내 미소만큼이나 이쁜 말투로 댓글을 달아주었다.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의 응원을 받아 싸울 용기를 낼 수 있었다니 당연한 일이에양! 이것이 바로 애기버섯이 귀여움의 마법! 뾰로롱~♡!♡
그러자 김극이다, 찐 김극 출현, 어쩌고 하는 답댓글이 잔뜩 달렸다. 작성자도 반응해서는 댓글을 달았고.
Ⓐ 이해경 : 이거 진짜 김극 오빠예요? 왜 자꾸 이런 식으로 말해요? 현실에선 안 이러시잖아요. 이러지 마요 제발 ㅠ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는 늘 이렇게 말하는데양? 유치원에서도 꼭 이렇게 말하라고 배웠어양!
Ⓐ 러그소라게 : 아니 진짜, 김극 형? 오늘 멋있어서 반할 것 같았는데 왜 이러는 겁니까 진짜
Ⓐ BabyBerserker : 남자든 여자든 애기버섯한테 반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양! 부끄러워 하지 말기♡♥♡!
Ⓐ 이해경 : 아아악!! ㅠ
Ⓐ syberMagneto : 즐겁구나
아, 저 생생한 반응들을 보니 정말로 흡족하다.
단순히 신입들이 내 글에 저리 열렬히 반응해주는 게 즐거울 뿐만 아니라, 이로써 새로운 동포들이 여럿 생겨났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었음에 자부심을 느낀다.
한창 웃던 중에 메시지가 왔는데, 한희가 보낸 것이었다.
Ⓐ 한민족의얼은恨 : 김극 형, 오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 BabyBerserker : 한희 옵바두양!!
Ⓐ BabyBerserker : 그런데 오늘은 특무대 옷 입고 계시던데, 그래도 돼양? 평소엔 선배들에게 들키면 안 된다면서 평상복 입고 나오시던 걸로 기억하는데양?
Ⓐ 한민족의얼은恨 : 예, 이젠 그래도 됩니다! 저번에 특무대에서 괴수 사태에 투입될 요원들을 따로 선별했는데, 그중 하나가 저라서요. 정식으로 돈 더 받고 괴수 잡는 중입니다!
괴수를 잡는 대가로 돈을 더 받게 되었다고?
얼마나 돈을 더 받는지 물어보니 일 년에 삼백억을 받게 되었단 대답이 돌아왔다. 한희가 헌터 시장에 뛰어들 경우 책정될 몸값과 비교하면 헐값이겠지만, 공직자로서 일하는 중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괜찮게 받는 셈이리라.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지 꺼림직함을 느껴야 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희 개인에게 그 정도 돈을 줄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곧 정부에서 특무대 예산을 대폭 늘렸단 셈 아닌가. 그리고 돈을 더 쓴다면 더 질 높은 인재들을 확보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나한테도 위협적일 만치 강력한 각성자들 말이다.
예컨대 증액된 예산으로는 헌터 시장에서 고평가되는 능력이라 특무대에 데려오기 어려웠던 열선 능력자도 몇 명 데려올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날 잡으러 온 특무대원 중 몇 명의 검지에서 열선이 뿜어져 나온다면······.
상상만으로도 유쾌하지가 않다. 어지간한 열선 좀 맞는다고 내 역장이 바로 녹아버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놈의 열선과 관련되어 재미 본 적이 별로 없지 않은가.
엄근오가 말하길, 정부에서 현재 여력이 없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더니 이 역시 그 변화 중 하나인 걸까?
그래도 역시, 한희 저 녀석이 전보다 좋은 대우를 받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저놈이 나중에 날 죽일 것이든 아니든 간에.
복잡한 생각을 뒤로한 채 타자를 쳤다.
Ⓐ BabyBerserker : 드디어 조금이나마 대우를 받게 되었군양? 진심으로 축하해양!
Ⓐ 한민족의얼은恨 : 모두 김극 형 덕분입니다!
살짝 미소 지은 뒤, 계속 헌트웹이나 즐기던 중이었다.
「김극 헌터님 맞습니까? 수상 관련해서 연락드렸는데요」
전화가 왔길래 받았더니, 방송국에서 건 전화였다. 그리고 그쪽에서 한 질문에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한테 황금화살상 받고 싶은 생각 있냐구?"
내 물음에 방송국 직원이 설명했다.
「예, 현재 인천 탈환 프로젝트의 공로로 대상 수여가 예정돼 있습니다. 그런데 김극 헌터께서 공사다망하신 걸 알고 있으니까, 거절하시려면 얼마든지 거절하셔도······.
저희 쪽에서 이렇게 말씀드리긴 뭐하지만, 딱히 권위 있는 상은 아니거든요? 상금도 그다지 크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은근히 내가 수상을 거절하길 바란단 것이 느껴졌다. 하기야 얼마 전 국회의사당 지붕을 무너뜨렸다고 뉴스에 나온 무법자를 공중파 방송에서 상 주긴 뭐할 테지.
물론, 나 또한 그놈의 상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뭐, 난 안 줘도 돼요."
「그렇습니까? 그럼 그리 알고······」
"나 말고 담비 씨 줘요, 담비 씨. 인천 탈환 프로젝트에서 나 다음으로 공로가 컸거든? 그 아가씨 덕분에 죽다 살아난 사람이 수십 명에 그 아가씨가 쏴죽인 데스클로가 몇 마리냐면······"
*******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헌트웹에 올라온 글을 본 나는 눈을 부릅떴다.
Ⓐ Dragon : TV에서 황금화살상?
뭔 헌터들 대상 시상식 열린다고 며칠 전에 방송국에서 협조 요청문 보내왔던데, 이거 뭔 상이냐? 요청문 보니까 일정 앞당겨져서 오늘 시상식 방송한다고 하는데, 내가 워낙 바빠서 미처 챙기질 못했네
그놈의 황금화살상 시상식 일정이 앞당겨졌다고?
기겁해서 TV 편성표를 보니, 시상식은 앞으로 수십 분 뒤였다.
맙소사, 자칫하면 내 라운드걸이 TV에 나오는 걸 놓칠 뻔했다.
부리나케 TV를 켰다. 그와 함께 휴대전화를 켜고는 불길함을 느꼈다.
내 라운드걸에게서 온 연락이 없었다. 어째서?
방송국에서 내게 연락했던 것을 보면 수상 대상자에겐 미리 연락하여 일정을 조정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백담비는 미리 제 수상 소식을 알고 내게 연락해야 했다.
그리하여 내게 같이 시상식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하든, 아니면 내 덕에 이런 상까지 받게 되었다며 기쁨을 공유하든 했을 텐데······ 지금까지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그 침묵의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수십 분 뒤, 드디어 그놈의 시상식이 열렸다.
「드디어 대상 발표입니다! 다들 인천 탈환 프로젝트를 아실 겁니다! 작년 김극 헌터의 주도로 인천을 수복한 국가의 경사였죠! 그리고 대상이 수여될 오늘의 주인공은, 김극 헌터와 함께 최대 공로자 중 하나였던―」
TV 속 사회자가 목청을 높이는 가운데, 장막 뒤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츠모토 마사시!」
그리고 한 비각성 찌꺼기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한국인 여러분들이 부르기엔 이름이 너무 길죠? 나이토 상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놈의 낯짝이 TV에 보인 순간, 난 쥐고 있던 리모컨을 움켜쥐었다. 꽤 비싼 리모컨이 완전히 으깨졌지만 거기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나이토 상, 저 비각성 찌꺼기가 기어이 각성자의 몫을 가로챘다. 그것도 내 라운드걸의 몫을.
*******
119화 내 라운드걸 - [1]
TV를 끄려고 해도 리모컨이 박살 나서 그럴 수가 없었다.
멍하니 TV를 보니, 사회자가 나이토 상의 손을 번쩍 든 채 신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분의 수상 자격을 의심할 수 없을 겁니다! 혹시 잘 모르실 분들을 위해 설명해드리자면, 인천 탈환 프로젝트는······」
사회자가 인천 탈환 프로젝트의 성과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관중 사이에서 과장된 탄성이 쏟아지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대체 왜 백담비가 밀려난 건가?
혹시 정부의 보복인가? 백담비가 나와 친하니, 내 라인에 상을 주지 않으려는?
그런 의심이 문득 들었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닐 터였다. 왜냐하면 저놈의 황금화살상은 주지 않는다고 보복씩이나 될 만치 대단한 상이 아니니까.
애초에 백담비가 저 상을 받길 원한다는 것은 나 정도나 알고 있었지 않은가. 심지어 나조차 그녀가 왜 저 상을 받고 싶은지 알지 못하는 마당인데, 정부든 방송국이든 그녀에게 상을 주지 않는 것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고 판단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백담비가 얼음 능력자라서일까? 정부는 얼음 능력자들을 미디어에 드러내길 꺼리곤 했다. 그리고 얼음 능력자인 그녀가 TV에 나와 상을 받았다간 얼음 능력자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질까 봐?
「그럼 이제, 수상 소감을 여쭙겠습니다! 지금 소감이 어떻습니까?」
사회자의 질문에 나이토 상이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좀 얼떨떨하네요」
「아니, 얼떨떨하다뇨?」
「제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여러모로 의심스러워서······. 아는 분들은 잘 알겠지만, 인천 탈환 프로젝트를 대표해 상 받을 자격이 있을 공로자는 제가 아니거든요」
「오! 여기서 소개할 만한 또 다른 공로자가 있나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김극 헌터는 워낙에 바쁘신 나머지 이미 수상을 거절하셨습니다!」
이 상에 대단한 가치가 없으므로 나이토 상은 마땅히 백담비가 받아야 할 상을 대신 받으며 죄책감씩이나 느끼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또 아니었나 보다.
TV 화면 속 나이토 상이 입을 열었다.
「김극 씨를 제외하면, 백담비 씨······. 그분 공로가 특히 컸죠. 제 유튜브 영상 보신 분 중엔, 영상이 주로 제 활동 위주로 편집되다 보니까 그거 보고 제 공로가 그분보다 큰 줄 아는 경우가 간혹 있던데 실은 아니거든요? 담비 씨가 늘 묵묵히 맨 앞에서 괴수의 시선을 끌어가며 위험한 일을 도맡아준 공이 특히 큰데······」
그리고 사회자가 헤벌쭉 웃었다.
「일본인이셔서 그런가? 역시 겸손하십니다!」
「겸손하게 굴려는 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쳐도, 이야! 그것참 대단한 일 아닙니까? 아무런 초능력도 없는 일반인이, 각성자들 사이에서 활약한 끝에 각성자한테 밀리지 않는 공을 세웠다니요!」
「아니, 확실히 밀렸다니까요」
「설령 밀렸더라도 부끄러울 게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죠! 게이트가 열린 후 생긴 초능력이 아닌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본연의 능력만으로,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끝에 이토록 돋보인 것은 누가 뭐래도―」
사회자의 열변을 들으며, 난 그제야 왜 저놈의 상이 나이토 상에게 주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인간 승리! 그야말로 진정한 인간 승리라 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이 상은 단순히 인천 사람들을 대신해서 주는 상이 아니라, 이 활약을 보고 용기를 얻을 평범한 사람들! 이 험난한 시대에 자신도 특별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깨달았을 평범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수여하는······」
저놈의 황금화살상, 비각성자라서 줬구나.
그러니까, 나이토 상이 각성자가 아닌데도 활약한 것을 높이 산 모양이었다. 비각성자인 점을 고려해 그 공적을 몇 배쯤 가치 있게 부풀려 평가해선 상을 준 모양이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왜, 히어로 코믹스엔 꼭 비능력자 히어로가 있지 않은가?
초인이 아닌데도 초인들 사이에서 활동하는, 그래서 오히려 초인들보다 눈에 띄며 어지간한 초인 캐릭터보다도 큰 비중으로 큰 활약을 하는 캐릭터들이다.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것 자체가 개성인 캐릭터들······.
이미 말한 적 있듯, 난 그런 캐릭터들이 싫다.
원래도 싫었지만 나이토 상 저놈을 본 이후론 끔찍하게 싫다. 못 견디게 싫다!
그 역겨운 흉물들은 단순히 초인이 아니란 이유로 일반인 작가와 일반인 독자들의 애정을 받아서는, 초능력도 없는데 그 정도라느니 어쩌느니 온갖 칭송과 관심을 받고 작중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다.
그리고 평범한 작가의 편애 속에 이루어진 평범한 캐릭터들의 과도한 활약을 보며, 마찬가지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비각성 찌꺼기들은 대리만족을 느낀다.
이제 나는 아니다.
그저 역겨운 일이다. 정말로.
"이 영광스러운 상을 인천 탈환 프로젝트에 함께 했던 헌터 동료들에게 바칩니다. 맨 먼저 절 대신해 이 상을 받아야 마땅했던 김극 헌터와 백담비 헌터에게, 그리고 그 이외 여러 동료들과 지금은 죽고 없는 동료들에게······"
나이토 상, 저 비각성 찌꺼기가 맘에도 없는 가증스러운 소릴 지껄이는 동안 난 TV 화면을 더욱 자세히 살폈다.
나이토 상 이외 수상자들을 훑어보니, 방송국에서 수상 대상자들을 정확하게 공적을 따져 선별한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경상도 대표로 최우수상을 받은 헌터만 해도 최용이 아니라 웬 듣도 보도 못한 신체강화자였으니까.
대단한 상이 아닌 만큼, 대충 연락 닿은 헌터들한테 상을 마구 던져준 모양이지? 저 대충 사는 비각성 찌꺼기들이······.
저 씨발놈의 방송국에 공간이동 하고 싶은 충동이, 그러니까 방송국에 쳐들어가 직원이고 사회자고 죄다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이 일순 들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애초에 누구한테 상 주라고 지시할 권한이 내게 없었거니와, 저따위로 상을 준 저쪽으로선 별거 아닌 상에 왜 지랄이냐며 억울해 할 것인데다······.
그랬다간 나보다는 내 라운드걸이 더욱 욕먹을 터였다.
나와 백담비가 사귀는 사이란 소문이 도는 마당 아닌가. 이 와중에 그녀에게 상을 주지 않았다고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항의라도 했을 때 벌어질 일은 뻔하다.
그깟 상 좀 못 받았다고 남자 친구를 시켜 깽판 치게 만들었다며, 내가 아니라 그녀가 더욱 비난받으리라. 가뜩이나 그녀가 김극 버스를 타서 크게 성장했단 음해를 받는 상황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비난까지 받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항의보단 위로가 우선이었다.
나는 바로 백담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겨우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담비 씨? 지금 시간 돼요?"
이 짧은 질문에 대답이 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백담비의 심정을 유추할 수 있었지만, 수화기 너머 그녀는 그럭저럭 '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시간 돼요. 용무라도?」
"용무랄 것까진 없고, 차라도 한잔하면 어떨까 해서요."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또한 오래 뜸 들인 끝에 들을 수 있었다.
「그래요. 차 마셔요, 우리. 어디로 갈까요?」
"기다려요, 제가 데리러 갈 테니까. 집 앞에 나와계시면 제가 가서······"
그리고 공간이동으로 예의 장소로 향하니, 평소대로 선글라스에 크롭티 차림인 백담비가 서 있었다.
그녀와 커피숍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커피 두 잔 시키고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무표정한 입에서 무감정한 입이 흘러나왔다.
"시상식 보고 걱정돼서 연락하신 거죠?"
"솔직히 말하자면, 예."
"고마워요. 고마운데, 그러실 필욘 없었어요."
"그런가요?"
"예. 애초에 대단한 상이 아니잖아요? 상금도 보잘것없고요. 권위도 전혀 없어서 헌터 협회장이란 작자도 그런 상이 있는 줄 모를 정도였고."
"그렇긴 한데······."
차마 '그토록 황금화살상, 황금화살상 노래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내가 더 말하려다 말고 입 다문 가운데, 백담비 또한 입을 다물었다.
꽤 오래 침묵이 흐르던 중, 내가 뭔가 말을 꺼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면서도 그러지 못하던 중이었다.
백담비의 선글라스 아래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그것이 커피숍 조명을 반사해 반짝였다.
못 본 척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곧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마치 봇물이 터지기라도 한 듯 더욱 존재감이 선명해질 뿐이어서, 그녀는 물론 나 또한 어쩔 줄 모른 채 잠시 공황에 빠졌다.
다행히 내가 먼저 움직일 수 있었다.
"사장님? 계산이요!"
커피 두 잔 값으로 오만 원권 세 장을 빠르게 던져주고는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사실 거슬러줬어도 얼마 받지 못했을 것이다) 백담비와 함께 공간이동 했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빠르게 공간이동 해야 했기 때문에, 급한 대로 내 집에 이동했다.
그렇게 내 집에서, 사람들의 보는 눈이 사라지자 백담비는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리는 내지 않고 조용히 울다가, 문득 입을 열어 내게 말했다.
"안아줘요."
"예?"
"안아줘요, 빨리."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내가 다가가 백담비를 끌어안았다. 그녀 또한 날 끌어안았다.
가슴팍으로 그녀의 숨결을 느끼며, 한참 동안 그렇게 둘이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길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내 몸을 감싸고 있던 팔을 떼어냈다. 나 또한 양팔을 회수해 그녀를 풀어줬다.
백담비가 뒤로 물러섰다. 이제야 겨우 진정한 듯, 그러나 여전히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만나자고 해줘서 고마워요. 혼자 있었으면 진짜 견디기 어려웠을 거야."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여전히 슬픈 건지, 아니면 부끄러운 건지 모를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술 있어요? 맨정신으로 있기엔 너무 부끄러운데. 술이라도 좀 마셨으면······"
잠자코 그 말을 따랐다. 손님 접대용으로 사둔 편의점 와인을 맨손으로 마개를 뽑아서는 잔에 따라서 나도 마시고 그녀도 마셨다.
그리 마시고 또 마셨다.
이제 신체가 유기물질이 아닌 백담비나, 신체강화자인 나나 취하려 해도 취할 수가 없는 몸이지만 그러다 보니 우리는 취했다.
평범한 인간일 적 습관이 나와서는 정신적으로 취했는지, 상황과 분위기에 취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우리 둘 다 확실히 취했단 것이다.
어찌나 취했는지, 백담비는 평소의 쿨한 컨셉마저 내던진 채 욕설을 내뱉었다.
"나이토 상 그 좆같은 쪽바리 새끼. 진작 가스실에 처넣어야 했는데!"
그녀 내면의 사이버매그니토가 튀어나와 나를 당황케 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백담비, 그녀는 저토록 분노하고 슬퍼할 자격이 충분했다.
각성한 이후 일반인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억울한 일을 여럿 겪어온 그녀가, 이제 와서 각성자란 이유로 일반인에게 자신이 원하던 영광을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녀가 왜 그토록 그 상을 원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가 느꼈을 슬픔과 불합리함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비각성 찌꺼기들에 대한 울분을 담아 외쳤다.
"나도 나이토 상 그 씨발 새끼, 볼 때부터 맘에 안 들었어! 동종업계 동사자 뒷담이나 하는 음습한 새끼가!"
우리 둘은 그렇게 취객들처럼 마구 고함을 질러댔는데, 정확히 무슨 말을 외쳤고 누굴 욕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횡설수설 하듯 감정적으로 외치기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 둘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었고 둘 다 알몸이었다.
*******
"실수한 건가······."
내 말에 백담비가 반문했다.
"뭐 어때요? 임신할 몸도 아닌데. 뭐가 큰일이라고 그리 심각한 표정이에요? 혹시 내가 책임지라고 말할까 봐 걱정돼?"
"그게 아니라, 내가 먼저 고백한 다음 이러려고 했는데 계획이 망가졌으니 문제죠."
"아, 먼저 고백하려고 했어요? 그럼 내가 이긴 걸로 쳐도 되나?"
"뭘 이긴 걸로 치겠단 건지 모르겠는데, 뭐 맘대로 해요."
우리 둘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내가 그녀의 얼굴을 잡아당겼고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우리 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우리 둘의 입술이 포개졌다. 서로의 혀가 얽혔다.
첫 키스의 감촉은 차가웠고, 뜨거웠으며, 쑥스러우면서도 짜릿했다.
아마 그녀도 그리 느꼈을 것이다.
*******
120화 아카데미 이사 김극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