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의원들 - [1]
각성자 차별금지법이 부결되었단 소식을 들은 뒤, 집에 돌아간 나는 즉시 박미형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없는 상황에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물으니, 박미형 씨가 수화기 너머로도 들리도록 한숨을 푹 내쉬고는 설명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박미형 씨의 말에 따르면, 그 법이 압도적인 차이로 부결된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우선 첫 번째 이유로는, 각성자들에게 나름 관대한 편인 미국에서 큰 사고가 터졌단 것이었다.
「미국 정치 토론회에서 초상 능력 테러가 터졌어요. 그 토론회에 대선 후보들이 참석했거든요? 그런데 청중 하나가 도널드 후보 극성지지자였는데, 그 사람이 도널드가 설전에서 밀리는 걸 보고선 화가 났나 봐. 결국 그 자리에서 민주당 후보가······.」
"그러니까 미국에서 정치인이 죽었다고요?"
「정확히는 '또' 죽었죠?」
"거긴 이미 그런 일 숱하게 겪어놓고 따로 대책도 안 세웠답니까?"
「거기서도 나름대로 정령 능력자들을 배치해 사람들 각성자 여부를 판별하긴 하는데, 그래도······ 알잖아요? 미국이 각성자란 이유로 아예 중요인물 근처에도 못 다가오게 막는 분위기가 아니란 거요. 공식행사처럼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경우엔 어떻게 한 명씩 통제할 방법도 없어서······."
그리고 두 번째 이유로는,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한국 상황이 베헤모스 사태 이후로 더욱 악화했단 것이었다.
「서울 상황 직접 보셨을 테니 아시겠지만, 요새 서울 치안이 안 좋아요. 특히 생계형 강력 범죄가 확 늘었거든요? 이게 다 정부 탓이라며 약탈 나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 과정에 자연스레 생계가 어려운 얼음 능력자들이 범죄 가담하는 일도 확 늘어나선······」
그러니까 대충 요약하자면, 요즘 사회 상황상 얼음 능력자들을 따로 챙겨주잔 분위기가 아니었단 말이리라.
「마지막 이유는요?」
내 물음에 박미형 씨가 화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원래부터 얼음 능력자들 챙겨주잔 법에 국민 공감대가 형성될 리 없었단 거지요? 설령 미리 말씀드린 두 가지 이유가 없더라도 말이에요」
통화를 마친 뒤, 박미형 씨가 말한 사건들을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그것들을 살펴보니 확실히, 둘 다 요새 여론에 영향을 줄 만한 일이긴 했다. 그 미국에서의 정치인 테러 사건이며, 요새 한국에 늘어난 얼음 능력자들의 범죄며 모두 그 여파가 크기도 했고.
그런데 그걸 내가 왜 고려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동족과 인천의 양들을 신경 써야 할 뿐이다. 비각성 찌꺼기들이 좀 죽었다 해서 그 찌꺼기들의 눈치를 살펴야 할 이유는 없다, 결코.
난 바로 단체 항의에 나서기 위해, 여러 각성자들에게 연락을 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맨 먼저 버스 시위에 함께했던 각성자 헌터들에게 연락하니, 협회 차원에서 유감 표명을 하려거든 서명 정도는 해주겠지만 그 이상의 행동에 동참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각성자 헌터들은 다들 바쁜 사람 아닌가. 그 하나 하나한테 따로 연락하기도 쉽지 않았다.
김형만 씨가 살아있었다면 그 아저씨 한 명한테 전화하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의견을 모을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러기도 어렵게 되었다.
여러모로 막막했다. 새로 뽑힌 헌터 협회장,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헌트웹에서 몇 번 대화했을 뿐인 그 사람한테 연락이라도 해봐야 하나? 그 사람한테 협회 차원에서 도와 달라고 요구해야 해?
그리 고민할 때였다.
전화가 걸려왔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그래도 일단 받았다.
「김극 헌터님 되십니까?」
"인천 만세. 김극 맞는데, 누굽니까?"
「박준 의원입니다. 저번에 한 번 뵀죠? 그런데 어이쿠, 진짜 평소에도 인천 만세 하시는구나? 애향심 넘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아요······!」
서글서글한 늙은 남자의 목소리. 그가 주절거리는 동안 난 빠르게 인터넷에 그 이름을 쳐보았다.
그리하여 인터넷에 나온 정치인 얼굴을 보고서야 그가 누군지 알아챘다.
"박준 의원님이면, 저번에 버스 시위 때 나오신?"
「맞아요, 맞아! 기억하시네? 제가 나름 헌터통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일 있으면 우리 당에선 제가 제일 먼저 나서거든요. 이번에도······」
"이런 일이 뭔데요."
「왜, 김극 헌터께서 여러모로 우려하시는 상황이라지 않습니까? 각성자 차별금지법 관련해서 말이에요」
그걸 또 어떻게 아는 건가?
나는 강준치의 심정을 느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청이라도 하셨나?"
「아이고, 그게 아니라! 이미 박미형 시의원한테 전화해서 상황 물어보셨지 않습니까? 박미형 시의원은 그걸 또 이런저런 사람한테 연락해서 자문을 구했고요. 게다가 협회 쪽에도 연락을 돌리셨던데······ 그게 결국 제 귀에도 들어간 거지요. 그래서 말인데 얼굴 좀 뵐 수 없겠습니까?」
"얼굴은 왜요?"
「만나서 이야기하잔 거지요. 안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약속을 잡은 다음 날.
나는 국회의원 박준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버스 시위 때도 보았지만 환갑이 넘는 나이인데도 정정해 보이는 노인네였다. 평소 늘 웃고 다니는지 이마에 주름살도 많지 않았다.
박준은 참으로 친근감 넘치는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김극 헌터, 실물로 보니 더 근사하네요? 내가 젊을 때 이런 풍채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인터넷에선 막 아기인 척한다면서요? 내가 그걸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본격적인 대화에 나서기 전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지 그가 열심히 친한 척을 했지만, 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이 자식이 순혈 서울 종자임을 나는 이미 알고 왔다. 그야말로 사탄의 혈육인 셈이다. 그 뱀 혓바닥에서 나오는 말에 현혹돼선 안 된다.
그런 이유로 내가 내내 표정을 구기고 있었는데도, 정작 박준 의원의 안면에서 웃음기는 떠나가질 않았다.
불현 듯 그가 농담조로 말했다.
"지금부터 민감한 얘기를 할 건데, 대화 녹음 같은 거 안 할 거죠?"
내가 따로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박준 의원이 말을 이었다.
"여동생분이 지금 옥살이하고 계시는데, 이게 참 유감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대통령께서 말입니다. 김극 헌터의 공을 봐서라도 여동생 분의 조기 출소를 고려해봐야 하지 않나 말씀하셨는데······."
그러면서 은근히 내 얼굴을 살피는 것이 내 반응을 살피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즉답했다.
"그년 사면을 하려거든 진작 했어야 하지 않나? 내가 세운 공이 얼만데."
"김극 헌터 공이 어마어마한 거야 모두가 잘 알지요! 국민 전체가 김극 헌터한테 빚을 졌지 않습니까? 인천에서 해주신 일이며 그 거대괴수 상대로 해주신 일이며, 이번에 소월에서 강준치 씨 데려와 준 일이며 모두 ······"
"그래서 내가 그 공 세웠을 때 바로 여동생 년 꺼내주는 게 아니라, 지금 또 내가 이상한 짓거리 할 거 같으니까 연락해온 거 보면······ 거래하자는 거요? 여동생 꺼내줄 테니 지랄 좀 그만해라?"
"아이고,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이로써 김극 헌터의 울분이 좀 가라앉았으면 좋겠다, 이겁니다."
그게 그 말 아닌가. 하여간 간악한 서울 종자 같으니.
내가 으르렁댔다.
"집어쳐요. 나 그년 별로 안 좋아해."
"빈말하시긴? 이렇게까지 여동생 신경 쓰는 오라비가 또 없을 텐데. 이 분이 지금 쑥스러워하시네?"
"내가 그년 면회하러 몇 번이나 찾아갔는지 찾아보면 빈말이란 말이 안 나올 텐데? 그년 생긴 꼬라지를 봤으면 특히 그럴 테고."
간악한 서울 종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여동생분 석방을 위해 수년이나 인권단체 활동에 매진하지 않으셨습니까? 심지어 그 과정에서 각성까지 하셨다고······."
"그건 그거지. 아끼지 않는 물건이라도 일단 내 물건인데, 남이 망가뜨리는 꼴 보면 화딱지 나는? 곧 폐차할 고물 자동차라도 누군가가 거기 발길질하는 거 보면 울컥해서 바로 그놈 다리뼈를 분질러주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으로 화나는 거지 아끼는 여동생이 고생해서 화나는 게 아니요. 그런데 여동생 출소시켜 줄 테니 인권운동가 행세 따윈 집어쳐라? 말도 안 되는 거지."
"김극 씨. 제가 무슨 여동생을 위해 비겁자가 되란 제안이라도 한 게 아니라······"
"됐어요. 어차피 올해 나올 년인데. 그 못생긴 낯짝 좀 몇 달 일찍 보자고 거래씩이나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
"그 말씀인즉 여동생분 출소엔 전혀 관심 없다, 이겁니까?"
나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거만하게 고개만 까닥였다. 국회의원이고 뭐고 비각성 찌꺼기를 상대로는 이러는 게 맞다.
그러고서 내가 말했다.
"애초에 그쪽은 그날의 약속이나 지키는 게 우선 아닌가? 거래 따윌 제안할 게 아니라."
"그날 약속이면, 시위 때 요구하신 사항들 말씀하시는 듯한데······ 그것들은 이미 다 이행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다 이행했다고?"
"그래요. 헌터 협회 협회장 헌터들 뜻대로 뽑게 해줬지, 특무대가 헌터들 동원 못 하게 방침 바꿨지. 각성자 차별금지법도 법사위 통과한 거 보면 아시겠지만 대충 구색만 맞춘 게 아니라 제대로 준비해서 발의했어요. 그거 통과시키겠다고 저희 비서관 애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런데 결국 본회의 통과 못 했잖아."
"그건 어쩔 수 없지요? 당시 여론이 그래 갖곤 과반 찬성은커녕 찬성 40표 나온 게 용한 상황이었는데."
"법을 발의하도록 요구한 게 아니라 법을 만들라고 요구한 건데. 결국 법 안 만들어졌으면 약속 안 지킨 거잖아?"
"김극 씨."
"여론이고 분위기고 뭐고,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답답하신 건 알겠지만······"
"그래서 그놈의 법은 언제 생기는 건데? 각성자들 또 모여서 버스 시위 또 하면 그때야 생기나?"
내가 자꾸 반말을 해서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내가 한 말 자체에 화가 난 걸까?
내가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서글서글 웃기만 하던 서울 종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박준 의원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말했다.
"이 사람아, 그게 말이 되나? 힘센 사람들이 몰려와서 윽박질렀다고 국회의원들이 다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법 하나 뚝딱 만들어내는 게 말이 돼?"
"당신네가 좋아하는 법은 만장일치로 잘만 만들던데."
"당차원에서 뭔 지침을 내릴 수 있겠지! 몇몇 법은 황당할 만치 쉽게 통과될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의원 개개인이 반대하면 반대하는 거고 찬성을 하면 찬성하는 거지, 그걸 뭔 수로 통제를 하느냐구?"
박준 의원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계속 말했다.
"힘센 사람이 호통 좀 쳤다고 그럴 거면 여기가 대한제국이지 대한민국인가! 아니, 그따위로 굴 거면 대한제국도 아니고 북한이지! 정말 여길 북한처럼 만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언성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채 박준 의원이 말을 끝맺었다.
"여긴 민주주의 국가예요, 이 사람아! 선출직 공무원들이 여론이며 분위기를 신경 안 쓸 거면 정치를 왜 해! 뽑아준 사람들 말이 아니라 초인 나리들 말을 중히 여길 거면 그게 민주주의 나라냐구?"
음, 난 정치 같은 건 잘 모른다. 그러니 저 말에 어떤 논리적인 반박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 입을 다물게 할 방법은 알고 있다.
"그거, 강준치 앞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나?"
내가 그리 말한 즉시 박준 의원이 날 노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입에서 '강준치 그 새끼 불러올 테면 불러와 봐라, 똑같이 말해줄 테니!' 하는 말 따윈 나오지 않았다.
그야 내가 강준치와 친분이 있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괜히 도발했다가 정말 그를 불러오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리라.
물론, 그리 입 다물게 해봤자 내 속이 시원해질 리는 없었다. 이래봤자 어차피 호가호위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 일로 강준치가 거들어줄 리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허세에 불과할 것이기도 했다.
여기 오기 전 강준치에게 연락하여 지지를 부탁했더니, 그놈이 뭐라 대답했던가?
'내가 지금 그리 나댈 게 아니라 자숙을 해야 하지 않겠냐? 너도 알겠지만 내가 이번에 사고 거하게 쳤는데 뭔 낯짝으로 그 지랄을 하겠냐. 눈치 보여서 참교육 영상 촬영도 멈춘 상황인데, 얼음 능력자 인권운동 하겠다고 갑자기 나대라니 그건 좀······'
'얼음 능력자 인권운동이 아니라 각성자 인권운동이거든?'
얼음 능력자들을 탄압하는 데 익숙해지다 보면 다른 정령 능력자들도 탄압할 것이요, 정령 능력자들을 탄압하는 데 익숙해지면 다른 각성자들마저 탄압할 것 아니겠느냐 내가 말했더니 먹히지 않았다.
'뭐 나중엔 그럴지도 모르지만······ 너나 내가 신경 쓸 필욘 없지 않나?'
'우리가 신경 쓸 필욘 없다니, 그건 또 뭔 소리야?'
'법으로 각성자들을 옭아매봤자 만만한 놈들이나 옭아매지 않겠냐? 나 같은 놈이나 공간이동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데다 성질까지 더러운 너 같은 놈을 뭔 수로 법으로 옭아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법이 아니라 특무대가 갑자기 다가와선 칼로 푹 찌르는 상황······'
진범 씨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강준치는 이번에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제 일이 아니란 것이었는데, 나는 이번에도 놀라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니까.
대한각성연대 시절에도 얼음 능력자들뿐만 아니라 헌터로 활동할 만치 강력한 각성자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음을 기억했다. 유명한 각성자 헌터의 집에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려 해도 우린 그저 잡상인 취급이나 받으며 쫓겨났을 뿐이다.
그러나 대한각성연대 시절과 달리, 헌터 김극의 말은 먹힌다는 걸 알고 있다.
저번 경찰서 난동에서 그 사실을 배웠다. 그때 그랬듯,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당신 뭐야? 그거 내려놓고······"
그로부터 수 시간 뒤, 나는 국회의사당 앞에 섰다. 망치 하나를 단단히 움켜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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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의원들 - [2]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위인은 누구인가?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주저 없이 '세조대왕'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 위대한 대왕의 업적은 다음과 같다.
세조는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폭력이 있으면 복잡한 정치 논리 따윈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철퇴 하나로 정계 최고 권신의 대가리를 깨버렸으며, 깡패들을 거느린 채 조선 역사상 가장 정통성 있었던 왕의 자리를 빼앗았다.
김종서가 북방에서 얼마나 오래 굴렀으며 조선의 정치판에서 얼마나 깊은 노회함을 쌓았는지, 왕이 각지에서 데려올 수 있는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세조가 가진 철퇴와 깡패들 앞에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세조의 덕과 빛나는 업적에 감화된 단종은 제 부덕함을 깨닫고 기꺼이 선양하여 온 백성을 기쁘게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한글 창제며 명량 해전을 뛰어넘는 한국사 최고의 경사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 업적이 왜 그토록 위대하냐면, 이 세조대왕의 행적이야말로 현대의 각성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기 때문이다.
장관입네 의원입네 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노련한지, 전국에 배치된 병력이 얼마나 강대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당장 내 손에 휘두를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다면, 그로써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
전국의 각성자들은 하루빨리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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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 내려놓으래도!"
국회경비대 의경이 소리쳤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망치 한 자루를 들고 뚜벅뚜벅 전진했을 뿐이다.
"망치 좀 내려놔요, 제발! 그걸 여기 왜 갖고 온 거야?"
의경들이 계속 외쳤지만 무시했다.
내가 계속 나아가니, 의경들뿐만 아니라 국회의사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의 시선 또한 내게 쏠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싶어 의아한 듯하지만, 딱히 두렵진 않은 듯한 시선들. 이 목가적인 풍경에 변화가 생기리라고 상상하지 못하는 듯한 얼굴들······.
그 오만한 낯짝들에 두려움이 깃들길 바랐다. 비각성 찌꺼기들답게 겁먹은 얼굴로 날 보길 바랐다.
그리 만들기 어렵진 않을 터였다. 망치 하나면 충분할 테니.
모두의 시선을 충분히 끌었을 때, 의경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연락하기 시작한 그 순간 나는 공간이동 했다.
"어디 갔······"
날 시선에서 놓쳐 당황하던 의경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망치를 높이 들고 내리쳤기 때문이다. '쾅!'
한 번. 딱 한 번의 망치질이면 충분했다. 국회의사당의 돔을 완전히 파괴하는 데는.
천둥 같은 굉음. 잠시간의 고요와 비명.
"뭐야!" "악!"
돔의 파편이 사방으로 휘날리는 가운데, 내가 또 한 번 망치질 하자 그 아래 천장마저 완전히 꺼졌다.
저 아래, 그러니까 국회의사당 안팎의 비각성 찌꺼기들이 비명 질렀으며 비상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게이트가 열린 후, 국가 중요시설 근처에도 언제든지 게이트가 열릴 수 있는 만큼 경계 조치가 엄중해졌다니 과연 그랬다.
순식간에 일단의 경비병력이 여기저기서 뛰쳐나왔다. 그러나 정작 날 발견한 그들은 자기네 손에 들린 돌격소총을 내게 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게 장난감에 불과함을 알 것이다. 역장 외골격을 지닌 초인을 상대로는.
그들이 뭐라고 소리치는 듯했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에 파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사방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훑었다.
그래, 도망쳐라. 어서 도망쳐.
각성자 앞에 선 비각성 찌꺼기들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 소월에서 그랬으니 당연히 한국에서도······.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뛰쳐나오는 얼굴 중에 낯익은 비각성 찌꺼기 하나를 발견했다.
중년의 국회의원이었는데, 그 얼굴을 기억했다. 각성자 차별금지법의 반대자 목록에 저 얼굴이 끼어있었지 아마.
보좌관들과 함께 허둥지둥 도망치던 중년 의원의 옆에 내가 공간이동 했다.
"어?"
중년 의원의 손목을 붙잡은 채, 억지로 그 허리를 숙이게 한 다음 공간이동 했다. 어디로?
달리던 차 안으로.
정확히는 국회의사당의 3km 거리에서 내달리던 차 안으로, 중년 의원과 함께 공간이동 했다.
"이게 무슨······?"
그리하여 주변 배경이 송두리째 바뀐 순간, 중년 의원은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차 안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제 옆에 있던 날 보고서야 기겁한 모양이었다. 그가 차량 좌석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비명 질렀다.
"뭐야!"
"내 얼굴 모르나?"
내가 그리 말을 걸고서야 엄근오는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극? 김극 헌터 맞습니까?"
"맞는데. 아무튼 물어볼 게 있어서 여기 데려왔거든?"
"물어볼 거라니? 오히려 내가 뭔 상황인지 묻고 싶은······"
비각성 찌꺼기의 말 따윈 무시한 채 내가 물었다.
"각성자 차별금지법 반대했죠?"
"예?"
"왜 반대했어요? 미성년 여자애 납치해서 감금하면 막 쾌감이 느껴지나?"
내 질문을 듣고서야 중년 의원은 겨우 이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그가 심호흡하더니 애써 가다듬은 듯한 목소리로 훈계했다.
"김극 헌터, 왜 이러는진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데······ 이러면 안 됩니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나 빨리 돌려놔요."
"각성자 차별금지법, 왜 반대했냐니까?"
"상황 커지기 전에······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얼른!"
소리치다 말고 중년 의원이 캑캑거렸다.
나는 그의 턱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손목을 돌려서는 그가 억지로 날 보게 하며 물었다.
"각성자 차별금지법, 반대, 왜?"
또 한 번 묻고서 손을 놓아주자 그제야 대답이 나왔다.
"당장엔 현상 유지가 최선이라 생각해서 반대했습니다. 됐어요? 대답 들었으면 빨리 돌려놔요!"
"싫은데."
"미쳤습니까? 내가 협박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걱정이 돼서 묻는 건데, 이러면 큰일 난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그리 묻길래, 나도 물었다.
"내가 이러면 뭐 어쩔 건데."
"어쩔 거냐니······"
"의원 납치한 게 중범죄면 바로 나 수배하든가? 헌터 때려치우고 테러리스트 전직해서 맘 편히 다 납치하고 부수고 뭐 그러게."
그러기 어렵단 걸 안다. 공간이동 할 줄 아는 역장 외골격 테러리스트를 한국에 풀어놓고 싶은 천치는 없을 테니까. 한희석 그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지금 이 행위가 정확히 어떤 법으로 처벌받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또한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가뜩이나 베헤모스가 서울을 휩쓸어 혼란스러운 마당 아닌가. 한국에서 두 번째로 강한 각성자가 난동 좀 부렸다 하여 일을 키우려 할 리가 없다.
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법을 적용하려는 의지가 더욱 중요하단 것을 잘 알고 있다. 폭력 교사를 실명시켰단 이유로 내게 적용됐던 폭행죄가, 일찍이 숱하게 학생들을 두들겼던 그 교사에겐 적용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날 상대로도 법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 것이다.
과연 중년 의원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와 같은 판단을 한 것인지, 아니면 날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인지야 모르겠지만 하여튼.
우릴 태운 차가 계속 달렸다. 중년 의원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뭘 바라는 겁니까?"
"각성자 차별금지법, 다음엔 찬성한다고 약속해요."
"예?"
"약속하면 돌려보내 줄게."
중년 의원이 내 눈치를 살폈다.
"약속만 하면 돼?"
"어서."
"지금 녹음하는 거면······"
"어서."
재촉하며 약간의 초저주파를 흘렸다. 그러자 중년 의원이 태연한 척하면서도 살짝 움찔한 것을 나는 보았다.
결국 그가 말했다.
"약속할게요. 됐습니까?"
"아니, 아직."
"또 무슨 말을······"
"다음에 정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찾아봅니다. 혹시 약속 어기면 또 나 만날 줄 알고."
"예?"
"그때는 약속해도 못 돌아가요."
중년 의원이 입 다문 가운데 내가 계속 말했다.
"알겠죠?"
한 나라의 국회의원인들 이 어처구니없이 유치한 깡패식 협박을 무시하기 어려울 터였다.
왜냐하면 내가 이 협박을 실행하려 들 때 그는 막아낼 수 없을 테니까.
이놈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익히 접했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 상황이 한국에도 닥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라 차원에서 온갖 수작질을 해온 것이리라. 각성자들이 모이는 걸 방해하고, 특무대 따위 꼴같잖은 조직을 꾸리고, 각성자들과 사회고위층 간의 연계를 방해하며······.
그 모든 짓거리는 각성자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왔으리라. 그렇지 않은가?
진정한 초인들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머리로는 알면서도 정작 피부에 와닿진 않아서,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행동했으리라.
그놈의 관성이 파괴되도록,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리란 여지를 남기길 바랐다.
이 걸어 다니는 입법기관의 머릿속에, 그 입법기관을 보호하는 여러 사회적 장치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이해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각성자의 실존하는 폭력 앞에 국민을 대표한다는 신분이며 저 멀리 배치된 병력 따윈 조금도 쓸모없음을 이해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바였다.
"잘 가요. 또 만나지 말고."
이후로도 그 법에 반대한 의원들을 찾아내서 같은 일을 반복했다.
정확히 세 명의 의원을 상대로 그러고서, 네 명째 의원을 데려와 같은 일을 했다.
이 네 명째 의원 이름이, 아마 엄근오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에게도 같은 요구를 했다.
"각성자 차별금지법, 다음엔 찬성할 거죠?"
그리고 엄근오 의원은 이전 의원들과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안 돼, 이 인간아."
그리 거절하더니, 엄근오 의원이 중얼거렸다.
"미치겠네. 나라가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지? 군사정권 시절도 아니고 이게 무슨······."
"약속 안 할 거야?"
"안 해!"
난 잠시, 엄근오 의원의 안면을 멀거니 쳐다봤다.
제 딴에는 의연함이라 믿고 있을, 그러나 내가 보기엔 국회의원씩이나 되는 자신이 해코지당하지 않으리라 믿는 듯한 뻔뻔함이 그 낯짝에 드러나 있었다.
비각성 찌꺼기 주제에 감히.
뭐, 괜찮다. 이렇게 고집부릴 때를 대비한 플랜 B도 준비해놨으니까. 내가 말했다.
"그럼 안전벨트 똑바로 매."
"뭐?"
"안전벨트 똑바로 매라구."
내가 가리킨 전방을 본 엄근오 의원의 눈이 커졌다.
우릴 태운 차량이 저 앞의 한강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함지박만 하게 커진 그 눈에는 저 앞의 강물이 담겼을 것이다.
"왜, 안전벨트 찰 줄 몰라? 내가 채워줘?"
그제야 엄근오 의원이 허겁지겁 안전벨트를 찼다.
그가 안전벨트를 다 찼을 때, 우릴 태운 차량은 막 한강을 향해 도약했다. 원래는 저 앞에 난간이 있었는데, 그건 내가 이 짓거리를 하기 전에 미리 부숴뒀다.
다음 순간, 강물이 우리가 탄 차를 삼켰다.
강바닥이 우리가 탄 차량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차량의 창밖에는 강물만이 보이게 된 가운데, 엄근오가 제 코와 입을 틀어막고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곧 차 안으로 물이 차오를 테니 최대한 버텨보려는 걸까?
그 어쭙잖은 발악마저 하지 못하게 내가 막았다. 엄근오의 양 손목을 내가 단단히 쥔 채, 그 코와 입을 막고 있던 양손을 억지로 떼어내며 내가 물었다.
"약속?"
"아아아악! 씨발, 진짜 씨발!"
꼴사나운 비명이 그 입에서 터져 나왔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내가 바란 건 '항복! 항복! 그놈의 법 찬성할 테니까 제발 살려줘!' 뭐 이런 식의 구체적인 항복 선언이었는데 이 양반은 그저 비명만 질렀으니까.
비명을 꽤 웃기게 질러서 나름 즐길 만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던 항복 선언과는 거리가 있었다.
결국 실패했음을 느낀 내가 한숨 쉬었다.
한편 엄근오는 한참 뒤에야 비명을 멈췄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야 차 안에 물이 스며들지 않고 있음을 깨달은 듯했다. 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창밖의 물속 환경을 둘러봤다.
차가 물속으로 떨어질 때 내가 차에 역장 외골격을 씌워뒀다는 것, 그래서 완전한 방수 코팅이 되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난 그저 투덜거렸다.
"징하네? 끝까지 자긴 안 죽을 거라 믿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그냥 겁이 너무 많아서 대답도 제대로 못 하는 건지 당최······"
그리고 운전수가 말을 받았다.
「뭐 상관없죠? 우리 바쁘잖아요. 한 번 실패했어도 빨리 다음 의원 잡아와서 계속해야······」
머릿속에 직접 전해지는 정령 특유의 정신파. 저 운전수의 건장한 몸뚱이는 살덩이가 아닌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엄근오 의원은, 놀랐고 경황없는 와중에도 우리 대화를 듣고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우리 대화에 끼어들어서는 이렇게 묻는 걸 보니.
"나 말고 다른 의원들한테도 이러려고?"
"찬성 안 한 놈들한테만."
"이백사십 명이나 되는데······?"
"나 요새 헌터 일 안 해. 시간 좀 많아."
엄근오 의원은 잠시 몸이 굳어버린 듯했다.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한동안 눈만 껌벅거렸다. 그러다 말고 그가 중얼거렸다.
"안 돼. 그러면 진짜 안 돼······."
"안 되긴?"
"가뜩이나 나라 꼴 갈수록 개판이 돼가고 있는데 여기서 뭘 더 하려는 거야? 의원들 상대로 각성자가 공갈 협박하는 선례 따윌 만들면 진짜 안 돼. 그랬다간 한국마저 다른 나라와 똑같아지는······"
"나라 꼴 개판 된 게 왜 내 책임이야? 걸어 다니는 수소폭탄 집에 도청기 심고 첩자 심으려다 발작하게 한 놈들 책임이지."
"그놈의 차별금지법 제정됐을 때 대안은 있어? 미국처럼 개판 되지 않게 할 대안이 있냐구?"
"여동생 납치된 놈이 대안을 왜 준비해? 납치범이 네 여동생 돈 안 받고 풀어주면 울 가족 굶어 죽는데 대안은 있느냐 따지는 꼴인데. 납치 피해자 가족이 납치범 사정도 신경 써줘야 하나?"
"여동생 납치? 여동생 옥살이 중인 거 말하는 건가? 여동생은 분명 조기 출소시켜주겠다고 제안한 걸로······"
"난 납치범들이랑 거래 안 해."
내가 딱 잘라 말했더니, 엄근오 의원은 또다시 말이 없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끝에, 그 입에서 애원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지 마."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엄근오가 계속 애원했다.
"진짜 그러지 마, 제발. 내가 이렇게 빌 테니까······"
나는 슬슬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렸다.
제기랄, 생각보다 매사에 진지한 놈이었다. 이따위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공수표 약속을 받아내기는 이미 글렀거니와 슬슬 말을 섞기도 피곤했다.
"왜 그리 걱정하는지 모르겠네. 다치지 말라고 안전벨트까지 채워준 거 보면 내가 딱히 과격하게 굴지 않으려는 거 뻔히 보일 텐데."
내가 투덜거리자 엄근오 의원이 애원하다 말고 멍하니 날 쳐다보았다.
"과격하게 굴지 않으려는 거라고?"
"나도 분노조절장애나 뒷감당 안 하는 또라이는 아니라서. 헌터 계속하려면 선을 넘으면 안 되니까, 너무 막 나가면 안 되겠지?"
"뒷감당 생각 안 하는 또라이는 아니라고? 이게 선 넘은 게 아니고?"
"이게 뭐."
"이래놓고?"
엄근오가 또다시 멍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단단히 미쳤구만······."
112화 의원들 - [3]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미쳤다니?
날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맘속 생각을 토해낸 듯한 태도였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욱 불쾌했다.
"내가 돌았다고?"
"돌았지 그럼······,"
"이성적으로 행동했으면 뭐 어째야 했는데. 지엄한 투표로 현 정권을 심판해야 했나? 전국에 십만 명도 안 되는 각성자들 모아다가?"
"각성자들이 워낙 소수라서 정치권에 목소리 내기 어렵긴 하지. 하지만 그래도 사회적 영향력이란 게 있잖아? 그 영향력을 발휘할 생각은 안 해봤어?"
"뭘 어떻게 발휘해?"
"자네는 영웅이야. 인천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에 이름 높은 영웅······. 그 영향력으로 사회에 목소리를 낼 생각은 안 해봤나? 이따위로 미친 짓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직접 호소할 생각은 안 해봤냐구?"
뭔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저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럴 생각 따윈 절대 안 하지?"
"왜 안 하는데?"
답답한 양 캐묻는 엄근오에게 내가 말했다.
"이미 해봤으니까. 내가 대한각성연대······ 각성자 인권단체에서 2년 넘게 활동한 거 아나?"
"그야 당연히 알지?"
"내가 대한각성연대에서 활동할 때, 대표인 박미형 씨가 기회가 될 때마다 기자들 불렀거든. 그래서 우리 활동이 뉴스에 몇 번이나 나왔는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0번이야. 단 한 번도 뉴스가 안 나왔어! 그럼 신문 기사로는? 0번! 인터넷 기사로는?"
부끄러운 줄은 아는 걸까? 엄근오가 입 다문 가운데 내가 외쳤다.
"딱 네 번! 그것도 박미형 씨가 사비로 돈 줘가며 기사 쓰게 한 거야. 그 와중에 기사 셋은 이미 삭제됐는지 구글에 아무리 검색해봐도 우리 단체 관련 기사 딱 하나만 나오는데, 이게 말이 되나?
이래서 사람들이 내 인권단체 활동 내력이랑 거기 대표였던 박미형 씨와의 관계를 몰라. 그러니 우리가 왜 친한지도 몰라서는 아예 박미형 씨가 나 세뇌한 거 아니냔 말이 돌아!"
이게 다 당신네 언론통제의 성과 아니냐고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의원쯤 되는 인물이 더 잘 알 것 아닌가.
과연 엄근오의 표정이 볼 만해졌다. 여러 생각이 오가는 듯한 복잡한 얼굴.
내가 계속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영향력은 지랄! 그리고 또 뭐? 사람들 상대로 호소해? 대한각성연대 시절에 이미 해봤는데, 소용없어!
우리 단체 활동할 적에 웬 아저씨들이 무리 지어 사무실 쳐들어온 적이 있지. 내가 싹 다 휙휙 집어던져서 제압했고! 난 그 새끼들이 정부에서 우리 단체 해산시키려고 보낸 용역 깡패쯤 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더라."
"······."
"쳐들어온 한 놈 잡아놓고 캐물어 보니까 그냥 동네 주민이래. 동네 주민이 왜 쳐들어왔냐 물어보니 얼음 능력자 단체가 동네에서 활동하면 불안하고 땅값 떨어질 수 있으니까 쫓아내려 온 거라나?
평범한 사람들 태도는 죄 그따위지, 겨우 수만 명짜리 각성자 표 필요 없는 정치인들은 아예 모르쇠 일관이지, 공중파 방송국이든 인터넷 짜라시든 다 정부 눈치 보느라 기사 한 줄 안 내주지······ 이 와중에 뭘 어쩌라고?"
엄근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가늘게 떴다. 내가 마저 외쳤다.
"내가 2년이나 허송세월 보내면서 잘 알게 되었는데, 이 잘난 민주주의에서 해볼 방법 다 틀어 막힌 이상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잠시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흘러서야 엄근오가 다시 입을 열었는데, 아까처럼 의연한 투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래선 안 되지. 헌정질서 무너뜨리는 이 행동으로 사회가 입을 피해가 어느 정도인데······."
"사회가 입을 피해? 얼음 능력자들 야무지게 조지는 것도 그놈의 사회가 입을 피해를 걱정해서인가? 그래서 잘난 결단을 내린 거고?"
"그래."
"그럼 내가 그놈의 잘난 결단 했을 때의 리스크가 되어줘야겠네. 사회적 피해 줄이겠답시고 그러다간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단 걸 알려줘야지. 그래야 뭔가 달라질 테고. 아닌가?"
엄근오가 또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렇게 뭔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쌓인 게 많아 보이네. 박준 그 노인네랑 협상이 잘 안 돼서 울컥해선 충동적으로 날뛰는 줄 알았더니······. 그놈의 법에 찬성하라 했나?"
"그래!"
그리고 엄근오 의원이 말했다.
"다음엔 찬성할 걸 약속하지. 그 대신 자네도 하나만 약속해."
"납치범들이랑 협상 안 한다니까?"
"들어 봐. 자네한테도 이로운 제안이니까······,"
뭔 제안을 하려나 팔짱을 끼고 지켜봤더니, 엄근오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책임지고 어르신들 설득해볼게. 자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설명하고, 계속 이 상황 방치했을 때 상황이 더 악화할 수 있단 것도 말해볼게. 그러니까 의원들 납치해서 이러는 건 제발 그만해, 응?"
자기가 동료 의원들을 설득해보겠다고?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쪽이 노력하면 그놈의 법 통과될 수 있나?"
"장담은 못 하지. 그래도 현역 의원이 직접 의견 조율하는 게 이런 깡패짓보단 더 효과가 있을걸. 뒤탈도 훨씬 없을 테고······ 그러니까, 응?"
그러고서 엄근오는 딱 반년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자신이 최대한 힘써보겠다고.
솔직히, 그 제안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다. 반년 만에 성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때 가서 성과를 보고 또 이런 짓을 하든 말든 하란 것 아닌가.
그래도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일을 더 키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운전수를 슬쩍 보곤 생각했다.
나 혼자 이 짓거리 하는 거면 얼마든지 더 일을 키울 수 있겠지만 지금 난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가 함께하는 상황엔 빠르게 그만둘 수 있으면 그러는 편이 좋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엄근오는 그제야 안심한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경고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조언하려는 건데, 이런 사고를 쳤으니 이젠 좀 자중해. 당분간은 헌터 일에만 충실하란 말이야, 응?"
"내가 왜?"
"지금 자네 눈엔 국회의원이든 정부든 모두 무력해 보이겠지만, 계속 이렇게 무력하진 않을 테니까. 지금 나라가 워낙 여력이 없는 데다 아직 변한 세상에 적응이 완전히 안 돼서 변변한 대응을 못 하는 거지, 나름 다 대책을 세우고 있어. 베헤모스 관련으로도 나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준비는 뭔 놈의 준비? 베헤모스 나왔을 때 박격포나 쏘려다 다 빗나가는 걸 내가 봤는데."
"예상보다 너무 빠르고 갑작스럽게 일이 벌어져서 그래. 자네의 이 돌발사태든 베헤모스든 간에. 시간만 더 주어졌으면 대응이 훨씬 달랐을걸."
뭔 준비를 하고 있길래 그런 장담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생각난 것을 입에 담았다.
"뭔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한대. 중국이랑 북한처럼 전술핵이라도 만들고 있나? 역장 외골격이든 뭐든 다 태워버릴 수 있는?"
내가 그리 물은 순간, 엄근오의 눈이 커지려다 도로 작아진 것을 나는 분명 보았다.
그렇듯 엄근오는 표정 관리를 하더니, 말을 돌리려는지 아니면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하려는지 몰라도 이렇게 말했다.
"아까 내가 자네 보고 영웅이라 말했는데, 아부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진심이야."
"흠."
"자네에 대한 자료를 봤어. 파격적인 걸 넘어 감동적이던데. 난세에 인물이 난다더니 나라가 아주 망하려는 건 아닌가 보다, 막 이런 생각까지 다 들었단 말이야."
이어진 말을 들으니 엄근오가 내 관련 자료를 정말 보긴 본 듯했다.
"자네의 일 년간 행적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 단순히 운 좋게 강력한 초능력을 타고난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굴강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지. 각성자라도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이고 무릅쓰면서, 다른 각성자들의 수백 배쯤 치열하게 싸웠지. 기어이 한 지역을 통째로 구해냈고. 저번 베헤모스 사태에선 나라 전체에 큰 빚을 지웠어."
난데없는 칭송에 나는 살짝 기분이 좋아지는 한편 생각했다. 그런데도 내가 소월 돌아올 때까지 여동생 년을 감옥에 처박아두고 있던 건가? 나와 거래할 때 쓰려고? 개자식들.
"그래서,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건데?"
"자네는 한국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인물이란 말이야. 인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그 초인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고! 그 힘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해."
"힘 낭비가 아니라 제대로 쓰는 거라니까."
"그러지 말고, 제발! 괜히 이렇게 계속 정부를 자극하면 정부 대응도 더 험악해질 테니까, 한쪽이 극단화되지 않도록 제발······."
거기까지 말 섞고서 나는 엄근오와 헤어지기로 했다.
엄근오의 손목을 붙잡고서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국회의사당에 돌아왔을 때, 일단의 무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날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김극입니다.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날 향한 시선들과 날 겨눈 역장 칼날들을 보았다.
특무대원들이었다. 하기야 국회의사당 지붕을 아작냈는데 저놈들이 얌전히 있을 리가.
그리고 특무대원들 사이, 유독 앳된 한 청년을 보았다.
한희. 나와 눈을 마주친 녀석이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녀석을 보고서도 내가 담담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한희, 저놈은 내가 이 정도로 성장했음에도 여전히 꽤 위협적인 놈이다. 일 대 일이라면 딱히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러려거든 내 집중력을 저 한 놈에게 온전히 쏟아야 한다.
그렇게 저 한 놈만을 신경 쓰다가 다른 데스클로들의 역장 날붙이에 찔리기라도 했다간 낭패인데······.
한희 저놈이 날 죽이고 싶어 안달 났으리란 사실을 고려하면 특히 낭패였다. 보나 마나 한희는 부모·형제의 원수보다 날 더 죽이고 싶은 상태일 테니까.
왜, 내가 저놈의 살인 행적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듯 제 범행을 도운 날 죽여 마음의 평온을 확보하고 싶을 만하다. 일찍이 응우옌 그놈이 (내 상상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희 저놈도 분명 그럴 것이다.
내가 저놈에게 얼마나 잘 대해줬건, 뭘 어떻게 도와줬건 간에 어차피 머리 검은 짐승은 믿을 게 못 된다. 박미형 씨와 내 라운드걸만 빼고······.
"거기 꼼짝 말고 엎드려서 손들어라, 씹새끼야! 의원님 어서 돌려보내 주고―"
그리 외치면서도 저기 모인 특무대원들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차피 거리를 좁힌들 공간이동으로 벗어날 텐데 의미 없는 행동이라 여겨서일까? 아니면 내가 지금 국회의원 하나와 함께 있으니 인질을 해칠까 봐?
그런 걱정을 하지 않도록, 내가 엄근오의 등을 떠밀어 특무대원들 사이에 보내주었다.
그러자 특무대원들은 인질의 안전을 확보함으로써 안심하는 게 아니라 당황하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그 심정을 알 만했다. 인질을 핑계로 대치 상황을 이어나가고 싶었던 모양이지?
망치를 들어 올리며, 내가 웃었다.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데스클로들?"
그렇듯 내가 무기를 쥔 데다 인질까지 무사히 보내줬음에도 특무대원들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와 충돌하기 싫은 걸까? 하기야 그렇겠지.
특무대원들은 계속해서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내가 공간이동으로 이 자리를 벗어나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안 된다. 내겐 도망칠 생각이 없다.
공간이동으로 이 자리를 쉽게 벗어날 수 있겠지만, 저 반푼이들한테 여럿 모이면 날 위협할 수 있단 환상을 줄 순 없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특무대가 싫다.
내 힘을 과시할 겸 최소한 두세 놈의 다리는 분질러주고 이 자리를 떠나든 말든 해야겠다.
"야, 김극! 당장 시키는 대로―"
"데스클로들이 말을 하네?"
저 모두와 싸우다가 사지 한둘 썰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 따가리 해야 하리라.
"신기해도 데스클로들은 보이는 족족 조져야지."
내가 웃으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특무대원들의 표정이 구겨지더니, 그들 또한 날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충돌이 예상되던 그때였다.
웬 고함이 들려왔다.
"이 염병할 데스클로 새끼들, 썩 안 꺼져!"
욕마저 어색한 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챘다.
정진영? 저 양반이 여긴 왜?
심지어 정진영은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헌터 라이플을 든 채 달려오는 정진영과, 그 뒤를 따르는 일단의 무리를 보았다. 다들 초인적 속도로 달려오는 것이 모두 각성자인 듯했다.
순식간에 여기까지 달려온 각성자들은 내 주변에 섰다. 날 지키려는 걸까?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한희를 보았을 때보다도 더욱 당황했다. 내 옆에 선 정진영에게 물었다.
"형이 여길 왜 와요?"
그러자 정진영은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기사 보고서요! 이런 일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지 어떻게 안 와요?"
아니, 내가 정확히 뭘 하는 줄은 알고 도우러 온 건가?
나는 날 도우러 온 인원 중에 은근슬쩍 섞여 있는 석장실을 발견하고는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이 간첩 새끼는 또 왜 같이 왔단 말인가?
이 와중에 날 향한 증원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특무대원 하나가 눈을 부릅뜨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공중에!"
그리고 나와 각성자들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몇몇은 놀란 듯한, 몇몇은 또 기뻐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협회장!"
한 명, 아니 한 마리?
인간의 형체가 아닌 무언가가 하늘에서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 날짐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있는 곳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하늘을 올려다본 난 그 크기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날짐승은 날개폭만 삼십 미터는 될 것 같았다. 그 날개는 피막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신체 대부분은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용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서양식 드래곤.
현실 이름 최용, 헌트웹 닉네임 Dragon이 분명했다.
김형만 씨가 전사한 뒤, 새로이 선출된 헌터 협회장이기도 했다.
113화 의원들 - [4]
모두의 시선을 거대한 몸에 집중시킨 채, 드래곤이 천천히 날갯짓하여 하강했다.
나는 저 거대한 드래곤, 헌터 협회장 최용을 봤다.
그 이름이나 헌트웹 닉네임만 봐선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테지만, 놀랍게도 최용은 용으로 변신할 수 있는 각성자다.
변신 능력자. 특별히 드문 능력은 아닌데, 그래도 각성자 헌터 중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능력이다.
변신 능력자들은 어지간해선 짐승의 형태로 변하므로 무기를 쓰기 어려운데, 그 점부터가 헌터 활동하기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른다. 인간의 몸뚱이건 변신한 짐승의 몸뚱이이건 괴수들과 직접 치고받는 일 자체가 너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뭐든 자르는 칼날을 지닌 데스클로들을 상대로 달라붙는 일 자체가 죽기 딱 좋은 일이라서 그렇다.
그런데도 변신 능력자가 A급 헌터로 활약한다면 그 비결은 딱 하나뿐이다. 그러고도 살아남아 활동을 이어나갈 만치 강하다는 것.
각성자 하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방금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드래곤의 형상이었던 최용은, 착륙하자마자 순식간에 그 몸의 형태가 변했다.
우선 몸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컸던 날개 크기가 줄어들더니, 그 대신 몸뚱이 크기가 8미터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뒷다리도 더 길고 굵어져서는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앞발이라 불러야 했던 드래곤의 손은 사람 손처럼 변하더니, 등에 메고 있던 헌터 라이플을 쥐고 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평소 쓰는 것보다도 크고 무거운 헌터 라이플이었다.
한편 최용은 변신한 채로는 사람 말을 하지 못하는지, 말하는 대신 포효했다. 그 포효가 특무대원들을 움츠러들게 했다.
"씹······"
특무대원 몇몇이 뒷걸음질 치자 내 곁에 모인 각성자들이 키득거렸다.
그러자 특무대원들이 이쪽으로 욕설을 지껄였지만, 그뿐이었다. 놈들이 감히 이쪽에 달려들진 못했다.
한편 나는 내 옆에 선 기관포를 든 이족보행 드래곤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경상도에서 활동하는 헌터가 아니었다면 훨씬 유명했을 법한 헌터 아닌가.
그래서 든든하긴 한데, 대체 그가 여기 왜 왔단 말인가?
"대체 왜 온 거예요?"
내가 슬쩍 물어보니 정진영이 대신 대답했다.
"김극 씨 도우려고요!"
"그러니까! 내가 뭐 하려는지 알고서 도우러 온 거긴 해요?"
"대충 알 것 같은데요? 김극 씨도 헌트웹에 올라온 글 보고 화나서 달려온 거 아닌가?"
헌트웹에 올라온 글?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스마트폰을 켜서 헌트웹에 들어가 보니, 한희가 보낸 메시지가 먼저 보였다.
Ⓐ 한민족의얼은恨 : 김극 형? 지금 특무대에서 형 난리를 쳐서 출동한답니다
Ⓐ 한민족의얼은恨 : 지금 접속 안 했어요? 우리 국회의사당에 대기할 거니까 알아둬요
내가 저번에 부탁했던 대로 미리 위험을 경고해준 모양인데. 지금 중요한 건 아니므로 헌트웹에 올라왔다는 글이나 찾아서 보았다.
Ⓐ Dragon : 나 헌터 협회장인데, 이번에 또 협회가 무시당했다.
베헤모스 사태로 수도권 A급 헌터들 절반이나 전사해서 그 빈자리 메우려고 서울시가 혈안인 거 알지?
각성자 헌터들을 각 구역에 배치해두기만 해도 게이트 열리는 일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는데, 이번에 각성자 헌터 죽은 구역마다 게이트 열리는 일이 대폭 늘었다. 민간인 피해도 말도 안 되게 늘었단 모양이고
그렇듯 위급상황이니까 좀 무리하게 인원 충당하려는 건 아는데, 그래도 정도가 있는 거 아니냐?
서울시에서 이번에 막 각성한 신입들 헌터 데뷔시켜서는 제대로 훈련도 안 시키고 헌터 라이플 쏘는 법만 가르쳐선 현장 투입하려던 거 다들 알지?
그건 내가 어떻게 막아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따로 알아보니까, 서울에서 이번에 데뷔한 각성자 개개인한테 따로 공무원 보내서는 거의 다 계약 마쳤더라.
신입들이 맺었다는 계약서 보니까 죄다 올 2~3월부터 현장 투입 되는 조건이던데. 훈련도 못 시키고서 바로 헌터 일 시키는 게 말이 되는 거냐?
하도 어이가 없어서 협회 안 통하고 맘대로 헌터 계약하다니 뭔 짓이냐고 따졌거든? 그러니까 공무원은 당장 서울에 게이트가 심심하면 열려서 사람들 막 죽어 나가는 마당에 사람들 살리는 게 우선 아니냐고 역으로 호통을 치던데?
심지어 신입들이 맺은 계약 내용도 반쯤 사기 수준인 게 (······)
빠르게 글을 읽어보니, 대충 헌터 협회가 무시당했다며 모두의 목소리를 내자고 부르짖는 글이었다. 덤으로 무리하게 일찍 현장에 투입될 처지인 데다 계약도 불합리하게 맺은 신입 헌터들을 보호하자는 내용이기도 했고.
그리고 내가 이 글을 보고서 난리 치려는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 그래서 도우러 온 것이고?
오해를 정정해줄 필요를 느껴서 내가 난리 치던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했더니, 정진영은 딱히 당황한 티도 내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뭐 어때요? 어느 쪽이건 다 각성자들 위한 건데."
"그래서 계속 나 돕겠다고요?"
"당연히! 겸사겸사 이번 일 따지기도 하면 좋죠?"
이렇게 대화마저 나눌 만치 우리 측 상황은 여유로웠다.
방금까지 나 혼자 있을 때도 그랬지만, 특무대원들은 이쪽과의 싸움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보라. 석장실마저 어느새 주변 콘크리트를 흡수해선 바위 거인의 형상이 되어서는 내 왼쪽에 서 있었다. 이 와중에 내 오른쪽에는 이족보행 하는 드래곤까지 하나 서 있으니 모양새가 아주 무시무시했고.
반면 특무대원들은?
딱 보기에도 모양새가 초라했다. 다들 길쭉한 칼 한 자루씩 들고 있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밖에 딱히 특출나 보이거나 유명한 각성자도 보이지 않았고.
저 반푼이들의 모습과 이쪽 든든한 각성자들을 비교하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헌터 제도는 이래서 좋다.
헌터 제도는 강력한 각성자들에게 부와 명예를 보장한다. 그로써 헌터 제도는 각성자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도 현 체제에 불만을 품지 않도록 만들지만, 그와 동시에 국가의 입장에는 어느 병기보다 강력하므로 국가 소속이어야 마땅했을 각성자들을 그저 민간인으로 남게 만든다.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군과 경찰, 특무대 따위에 소속된 공직자 각성자들보다 헌터로 활동하는 민간인 각성자들의 질이 훨씬 높아진다. 나든 최용이든, 이 자유로운 인간병기들이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받는 무력 집단보다 훨씬 월등해진다.
지금 헌터와 특무대의 대치만 봐도 어느 쪽이 강한지 눈에 보일 정도 아닌가.
딱 봐도 양쪽 각성자들의 체급이 다르다. 당장 특무대원 중에 한희를 제외하면 딱히 헌터로서 대성할 만한 인원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놈의 체급을 무시하는 역장 날붙이 때문에 경계를 늦출 수가 없을 뿐, 맞붙어도 이쪽이 밀리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쪽은 여유롭게, 저쪽은 긴장한 채 대치하던 중이었다.
카메라 불빛이 번쩍였다.
"찍지 마요! 찍지 마!"
딱 봐도 외신 기자인 듯한 외국인이 이쪽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데, 국회경비대 의경들은 그 카메라를 뺏고자 달려들고 있었다. 비각성 찌꺼기들 주제에 감히 각성자들의 싸움에 개입하려는 게 아니라 자기네가 할 수 있는 일이나 처리하려는 태도가 몹시 보기에 좋았다.
한편 주제넘게도 이 상황에 끼어들려는 비각성 찌꺼기가 하나 있었으니, 엄근오 의원이었다.
"그만! 그만! 다 돌아가!"
엄근오가 특무대원들에게 뭐라 소리쳤다. 들어보니 당장 해산하고 물러가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여기서 더 일을 키우기 싫은 걸까?
하기야 국회의사당 앞에서 특무대와 헌터들이 맞붙었다간 일종의 내전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어떻게 막고 싶은 것일지도.
그리고 특무대원들은 그 지시에 따르기로 했는지, 슬슬 자리를 뜨려는 눈치면서도 내게 도발하길 포기하진 않았다.
"야, 김극? 의원님한테 감사해라."
한 특무대원의 말에 내가 물었다.
"왜? 지금 이 자리에서 나 못 조져서?"
"잘 아네."
그리고 내가 웃었다.
"아쉬우면 안 되지? 칼 들어."
"뭐?"
"칼 들라구. 삼 초 뒤에 공간이동 할 거니까 숫자 세라. 삼······"
특무대원은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설마 내가 바로 반응할 줄은 몰랐단 얼굴.
"이······."
녀석이 눈을 부릅뜨더니 허둥지둥 칼에 역장을 씌웠다. 그리 싸울 준비를 마친 녀석을 보며, 나는 숫자를 셌다. 일.
나는 오른손을 뻗으면서, 쫙 펼치고 있던 손가락에 힘을 주며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내가 공간이동 마쳤을 때, 내 움켜쥔 손에는 특무대원의 목이 잡혀 있었다. 녀석이 칼을 쥔 손도 내 왼손에 붙잡힌 채였고.
내가 잘하는 그것이다. 공간이동 하는 즉시 행동을 마쳐버리기.
"읍, 읍!"
그대로 특무대원의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놈의 몸이 통째로 공중에 떠올랐다.
놈이 공중에서 다리를 마구 움직여 내 가슴을 걷어찼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녀석의 발은 내 단단한 역장이나 두들겼을 뿐이다.
그로부터 이 초도 되지 않아 놈의 저항이 멈췄다. 축 늘어진 녀석을 내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주변을 둘러보니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로선 놀랄 틈도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빠르게 끝날 줄은 몰랐을 테니.
"또 나 못 조져서 아쉬운 사람?"
내가 물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웬 특무대원이 슬쩍 한희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한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없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공간이동 하여 각성자들 사이로 복귀했다.
"김극, 김극!"
각성자들 사이에 환호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특무대원들은 축 늘어진 동료를 업고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김극! 김극―!"
이 와중에 이쪽으로 다가온 엄근오 의원이 열심히도 소리쳤다.
"당신들도 돌아가요! 다 끝났으니 어서 돌아가!"
기관포를 든 드래곤과 바위 거인 앞에서 그리 호통치는 것이 멋있어 보일 법도 하건만, 그 목소리는 각성자들의 환호에 파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외치는 것이 퍽 애달파 보이기도 했다.
뒤이어 최용이 변신을 풀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웅장했던 드래곤의 모습과 달리 평범하다 못해 왜소하기까지 한 남자가 내 옆에 섰다.
최용이 날 보며 외쳤다.
"김극! 드디어 실물로 보게 되다니!"
그러고는 양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길래, 난 씩 웃으며 물었다.
"여기 왜 왔어양? 애기버섯이 쓰담쓰담 해주러 왔어양?"
정진영이 데려온 각성자들은 내 이쁜 말투에 기겁하는 눈치였지만 헌트웹에서 오래 활동한 최용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내게 반가움을 표시하느라 바빴을 뿐이다.
"대충 그래요! 내가 원래 경상도에서 활동하잖습니까? 그래서 버스 시위에도 참여 못 했고요. 그게 좀 한이 됐는데 이번에 김극 씨 날뛴단 거 보고 바로 달려왔죠!"
"그런데 경상도 활동하시는 분이 어떻게 딱 맞춰서 오셨지?"
"아, 내가 이번에 서울이랑 헌터 계약해서요! 이미 돈도 많이 벌었겠다, 원래 헌터 그만두고 협회장 일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요새 서울 상황 안 좋다고 제발 그만두지 말라며 애걸복걸을 하길래 계속 헌터 일도 하게 됐지 뭡니까? 그래서 정작 협회장 일에 전념하기 어려워졌는데, 그래도 이런 일엔 나서야······!"
이후로도 최용과 말을 섞어보니, 그는 새 협회장으로서 무게 잡으려는 시도 따윈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날 최대한 대우해주려는 태도만 느껴졌을 뿐이다.
이것만 봐도 예전 헌터 협회장과는 천지 차이였다. 괴수들에게 순우리말 이름 지어주는 데나 집착하던 그 비각성 찌꺼기는 잘 나가는 헌터든 강력한 각성자든 다 협회장인 자기 아래라 생각하는지 공무원 특유의 권위 의식을 보이지 않던가?
그러나 최용 이 친구는 현역 헌터답게, 누가 더 강하고 잘 나가는 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눈치였다. 은근슬쩍 날 여기 모인 헌터들의 대표로 추켜세우는 걸 보니.
나는 정진영이 데리고 온 각성자들을 봤다.
"여러분은? 여러분도 저 도우러 왔습니까?"
내가 그리 물었더니 다들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한 여자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이번에 헌터 데뷔하거든요? 그리고 평소 존경하던 김극 선배님 뵐 기회라길래 바로······!"
"아, 선배님이라 부르지 마요. 나도 헌터 활동 1년밖에 안 했는데 이런 식이면 나도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선배님 해야 하잖아? 나 그런 거 싫어해."
"······예, 그럼 김극 오빠! 아무튼 김극 오빠 도울 기회라길래 바로 왔어요. 잘했죠?"
칭찬을 바라는 눈치길래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그 옆의 다른 각성자들도 신입인 걸까? 그들 또한 내게 비슷한 태도들을 보였다.
"원래도 김극 형 팬이었어요!"
"사인 좀!"
하기야 내가 요새 한국 헌터들 사이에선 가장 유명하단 걸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소월로 떠나있던 사이, 내가 곧 한국 각성자 헌터들의 상징쯤으로 떠오른 걸까?
그렇게 나는 평소 내 팬이었다느니, 날 동경했다느니, 심지어 베헤모스 사태에서 내가 공간이동 시켜줘서 살아남았다느니 외쳐대는 새로운 각성자들 사이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랑스러운 동시에 부담스러웠다. 몹시.
*******
114화 의원들 - [5]
이후로 나는 내 팬임을 자처하는 신입 각성자들에게 사인을 해줬으며, 그 모두와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그 한 명 한 명과 악수한 다음 차비까지 줘서 집으로 돌려보냈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 나도 귀가하려는데, 최용이 날 붙잡고는 이렇게 제안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만났는데 우리 밥이라도 먹읍시다, 예? 제가 살 테니까!"
날 도와주러 온 사람이 밥 한 끼 먹자는데 거절할 수야 없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 더 불러도 되죠?"
"당연히 되죠! 그런데 누구요?"
"오늘 저 도와준 사람이요."
그러고서 한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더니, 곧이어 백담비가 도착해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최용도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아, 이분! 물 정령 상대로 아이스 에이지 시전하시던?"
"맞아요."
백담비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흐뭇한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내 눈엔 보였다.
최용이 계속 물었다.
"그런데 이분이 오늘 김극 씨 도와줬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시위에선 이분 못 뵀는데······"
"그게, 담비 씨가 따로 내 일 도와준 게 있어요. 정확한 건 비밀이고!"
그리 말하고서 나는 백담비에게 눈짓했다. 그로써 '오늘 운전하느라 수고했어요.' 뭐 이런 의미를 전달했는데, 대충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이후로 식사에만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최용이 자꾸 내게 친한 척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제가 예전부터 김극 씨 엄청나게 만나 뵙고 싶었던 거 알아요? 내가 경상도에 있느라 바쁘지만 않았으면 진작 찾아뵈러 가는 건데!"
"절 만나고 싶었다고요? 어째서?"
"매번 활약하시는 거 봤으니까! 그러니까, 각성자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제가 예전부터 누군가는 총대를 메고 각성자들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지 뭡니까? 그런데 제가 망상하던 걸 김극 씨가 현실에서 딱······!"
이후로도 최용은 계속해서 내 행적을 찬양하기 시작했으니, 대충 이런 식이었다.
김극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각성자 헌터들은 특무대에 툭하면 불려가 합법적 구급콜에 시달렸을 거라고. 단순히 각성자들끼리 친목을 다지려 하기만 해도 특무대가 방해했을 것이며, 헌터 협회는 헌터들의 이익을 전혀 대변해주지 않았으리란 소리였다.
"그날 김극 씨가 김석희 목숨 구하려고 나서주면서 이 모든 답답한 상황이 변한 것 아닙니까! 그날 김극 씨 도우려고 헌터들이 모여서는 버스 시위 벌이면서 그제야 각성자들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는데······!"
평소 칭송 듣기 좋아하는 나조차 부담스러울 만치 과한 찬양의 연속이었다.
이쯤 되면 어떤 의도가 있어서 내게 아첨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라, 나는 슬쩍 스마트폰을 켜서 저 친구가 평소 헌트웹에서 어떤 발언들을 했는지 확인해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놀랐는데, 지금 저 친구가 날 칭송하는 게 영 뜬금없는 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Dragon : 각성자들 대표로 누가 발언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뭐 대표나 단체 없어?
Ⓐ Dragon : 이번 김석희 소탕 작전 무조건 실패해야 하는데······ 보아하니 성공할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하다
Ⓐ Dragon : 김극, 강준치 = 대한민국 각성자들의 희망임 진짜로
Ⓐ Dragon : 김극 아저씨라고, 특무대 깡패들이 무서워하는 분이 계시는데 내가 그분 전화번호를 몰라서 못 알려주겠네 ㅠ
최용이 헌트웹에 작성한 글이며 댓글을 보니 평소에도 내 칭찬을 자주 하던 양반이더라.
이 양반이 언제부터 그랬나 했더니, 내가 김석희 관련으로 특무대와 한 판 붙었을 때부터였다.
"내가 그날 김극 씨 한 일 보고 진짜 감격했잖아요! 그날 버스 시위도 참여하려고 헌트웹에 올라온 글 보고 바로 택시 타고 출발했는데, 말씀드렸다시피 경상도에서 출발한 탓에 너무 늦어버려선······"
이후로도 쭉 날 향한 찬양이 이어졌지만, 난 그 칭찬을 즐기기 어려웠다.
여러모로 심란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나니 새삼 걱정이 드는 것이다. 내가 너무 과격했던 게 아닌가, 정말 선을 넘은 게 아닌가 하고.
나름대로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긴 했다. 인명피해를 내지 않았거니와 의원들을 납치해서 협박했을 뿐 신체에 상해를 가하려 않으려 신경 썼다.
그러나 오늘 차 안에서 엄근오가 내게 뭐라 말했던가?
'과격하게 굴지 않으려는 거라고? 뒷감당 생각 안 하는 또라이는 아니라고? 이게 선 넘은 게 아니고? 이래놓고?'
그 경악 어린 얼굴 또한 기억에 선명하다.
'단단히 미쳤구만······.'
그 진심 어린 반응을 떠올리니 이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돌아버린 걸까? 환각 속 테러리스트 김극처럼,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걸까?
이 역시 환각의 영향인지, 아니면 내 지난 삶과 대한각성연대 활동의 영향인지 당최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말이 돼서 더욱 분간하기 어렵다.
테러리스트 김극의 추한 행적과 최후를 반면교사 삼기로 마음먹은 바였다. 그리고 나마저 그리되지는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는데, 도저히 생각대로 되질 않는 것 같다.
하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만 몰입해도 그 영향을 받아서는 특정 정당이며 특정 인종 따윌 혐오하게 되기 마련 아닌가. 하물며 내 경우엔 아예 기억이며 감정이 뇌 내에 여러 번 직접 주입되는 중인데, 어떻게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오늘 내가 한 모든 행동은 테러리스트 김극이나 할 법한 짓거리였던 것일까?
앞으로는 정말 자중해야 하나, 생각하며 문득 내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신입들이 서울시랑 사기 계약 맺었댔죠. 어떤 식이에요?"
"아, 그게요! 대충 어떤 식이냐면······"
최용의 설명을 다 들은 뒤, 나는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여러모로 애매했기 때문이다. 이게 왜 사기란 건지 알 수 없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니까 원래 A급 헌터 계약은 계약금을 지급한 다음 출동할 때마다 추가 수당을 지급하는 형식이었는데······ 이번에 신입들이 맺은 계약에선 출동 시 추가 수당이 사라졌다 이거죠?"
"정확히는 계약금에 이미 그 추가 수당이 포함돼있단 이유로 안 주는 거죠! 그런 식으로 실제 주는 돈은 얼마 안 늘었는데, 계약금만 뻥튀기를 한 거지!"
어쩐지 아무리 각성자 몸값이 높아졌더라도 정진영이 나와 비슷한 계약금을 받는 것은 신기하다 싶더라니, 계약방식이 달라져서 그랬던 모양이다.
"왜 그런 식으로 계약방식을 바꿨답니까? 선지급이 딱히 지자체에 유리한 방식은 아닌 거 같은데······?"
"물론 다 이유가 있습니다. 계약금 많이 주는 척, 그러니까 돈 많이 주는 척 눈속임하려던 거죠! 왜, 국내에서 외국인 각성자들 몸값이 확 높아진 거 알죠?"
"베헤모스 사태에 계약조건 어겨가며 무리하게 외국인 각성자들 동원해서 절반쯤 죽게 만들었으니까요. 외국인 각성자들 사이에 한국이 기피 지역이 돼버렸으니까 더 줄 수밖에 없지."
"그래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제 외노자들한테 웃돈 줘야 한국 오게 만들 수 있는데, 자국민 내버려 두고 외국인 계약금만 올려주긴 어렵잖습니까? 그러니 자국 헌터 계약금도 외국인이랑 비슷하게 올려준 척하려고, 계약을 그런 식으로······"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애매했다. 결국 계약 사기라기보단 그저 계약방식이 바뀐 게 아닌가, 뭐 이런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그리고 서울시에서 신입 각성자들을 제대로 훈련시키지 않은 채 일찍 현장 투입하려는 것도, 물론 욕먹을 짓이긴 하지만······ 이 역시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은 만큼 일단은 본인들 선택 아닌가?
마치 강제징집이라도 당한 것처럼 협회장이 국회의사당 앞에 나타나서 포효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짐작건대 김형만 씨가 살아 있었거든 대충 유감 표명만 하고 말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협회를 거치지 않고 계약한 점만 문제 삼았으리라.
이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최용 이 양반, 김형만 씨보다 훨씬 강경하구나.
보아하니 엘마를 키우던 김형만 씨보다도 훨씬, 훨씬 본인 집단이 손해 보는 일을 참지 못하는 성격인 모양이다.
또한 그런 성격이라 나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에서 각성자들을 대변해 지랄하기로는 나보다 더한 놈이 또 없으니까.
그리고 김형만 씨를 대신해 새로이 헌터 협회장에 오른 최용의 됨됨이를 확인하니, 아까 하던 걱정이 더욱 커졌다.
역시, 내가 이번에 나선 것은 실수였을까?
보아하니 앞으로도 각성자 헌터들과 정부 간의 충돌이 잦으리라 예상된다.
그것은 최용의 성격이 이렇기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론 나 때문이기도 하다. 앞선 버스 시위에서, 그리고 이번 일로 각성자들은 정부를 상대로 한 기싸움에서 승리했으니까.
보나 마나 앞으로도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각성자 헌터들은 전혀 참지 않은 채 정부를 상대로 단체행동에 나서리라.
나로선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다.
고귀하고도 우월한 각성자들이 비각성 찌꺼기로 구성된 정부를 상대로 참아줄 이유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당장 나로선 핍박받는 동족들을 챙기는 것이 우선 아닌가?
그러니까, 얼음 능력자들 말이다.
이미 정부를 상대로 여러 번 승리했으므로 따로 챙겨줄 필요가 없는 강력한 각성자들과 달리, 얼음 능력자들에겐 여전히 내 도움이 필요하다.
나로선 그들부터 돕는 것이 우선인데, 새 헌터 협회장의 성격이 이래서야 좋지 않다.
이대로면 내가 얼음 능력자들의 입장을 대변할 일보다는 헌터로 활동할 만치 강력한 각성자들의 입장을 대변할 일이 더욱 많아질 것 아닌가.
아직 그놈의 각성자 차별금지법 하나 제정하지 못한 마당에 그러기는 부담스러운 일인데······.
한편 엄근오의 경고 또한 떠오른다.
계속 정부를 자극하면 정부 대응 또한 더욱 험악해질 테니까, 제발 좀 자중해달라는 애원이었다. 내가 이러는 것이 각성자들에게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는 경고였지 아마.
엄근오가 경고했듯 이제부터라도 자중해야 하나?
특무대도 요샌 패악질 부리는 일이 적어졌겠다, 정부도 요샌 각성자 헌터들을 상대로 여러모로 굽히는 만큼 굳이 내가 더 날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대충 그런 생각이 들던 중이었다.
"이번에 다 좋은데, 강준치 씨가 참여 안 해준 게 좀 아쉽네요? 버스 시위 때처럼 강준치 씨도 끼었으면 효과가 직빵이었을 건데."
최용의 말에 내가 무심결에 대답했다.
"준치 그놈은 자숙 좀 해야겠다던데요? 당분간 얌전히 지낼 생각이랍니다."
"아, 그래요? 그럼 자숙기간 좀 지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나?"
"꿈 깨요. 어지간한 일 아니면 절대 안 끼려고 하더라."
내가 딱 잘라 말했더니 최용이 실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하기야, 그렇겠죠? 그러고 보면 준치 씨, 게이트 열린 지 얼마 안 됐을 때 각성자들 강제징집 하지 말라고 목소리 높여준 이후론 늘 침묵했어. 버스 시위 때 나와준 거 말곤 딱히 각성자들 위해 행동에 나선 적이 없네?"
그리 말하더니, 최용은 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또다시 그 입이 열렸다.
"준치 씨도 김극 씨처럼 나서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 중얼거리는 최용과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아······.
난 또다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였다.
몇 달 만에 겪는 환각이 분명했다······.
*******
'강준치는 이번에도 안 도와준대?'
환각 속 내 물음에 환각 속 석장실이 대답한다.
'꿈도 꾸지 말래. 아니, 연락도 하지 말라는데?'
'어째서?'
'너 요새 평판 안 좋잖아, 뭐 이러더라? 그놈의 여명 길드부터 탈퇴하고서 연락하든 말든 하라는 것 같던데······.'
그 말에 환각 속 최용이 신음한다.
최용, 그는 목 잘려 죽은 김형만 씨에 이어 여명 길드의 수장을 맡은 각성자다.
최용이 한탄한다.
'하기야, 내가 요새 길거리 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나 알아보고 욕하더라.'
'우우, 여명 길드 쓰레기! 뭐 이렇게?'
'내용은 대충 비슷한데, 그보단 더 험악하게.'
분명 언론의 영향일 것이다. 뉴스에서 요새 우리 모임을 표적 삼아 수차례 방송했으니까.
김형만 씨의 살해에 반발한 우리가 각성자 헌터들의 파업을 주도했는데, 그 탓에 사람이 여럿 죽었다는 이유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파업은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발생한 민간인 피해를 명분 삼아 정부의 태도가 더욱 강경해질 뿐이었으니까.
최용이 계속해서 한탄한다.
'우리가 김형만 씨 죽었다고 그제야 화나서 뭉칠 게 아니라, 그 전에 미리 뭉쳐야 했어. 미리미리 목소리 좀 내야 했고. 다 한 명씩 따로따로 나뉘어선 나라에서 뭘 하든 대응을 안 하니까 이 지경이 된 거 아냐?'
그리고 석장실이 반문한다.
'밥 좀 같이 먹으려고 모여도 특무대에서 눈을 부라리는데 어떻게?'
'국안부가 지랄하든 특무대가 눈을 부라리든,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인물이 하나 있지······ 강준치.'
'강준치?'
'그래, 강준치. 강준치가 우리 편 들어주기만 해도 정부에서 이렇게 대놓고 우리 찍어누르려 들진 못했을 거 아니야? 강준치 그 새끼, 설마 국안부에서 각성자들 위치 실시간으로 파악하겠답시고 스마트폰에 뭔 앱 깔라고 강요할 때도 안 나서줄 줄은 진짜 몰랐다.'
국안부의 그 요구는 지금 생각해도 노골적이었다. 단순히 실시간 위치 파악을 하겠단 것도 물론 끔찍한 일이지만, 그 와중에 문자며 전화마저 감청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지 않았던가?
그 밖에도 점점 각성자들을 향한 정부의 통제 시도가 노골적으로 강화되는 것이 느껴진다.
정부에서 대체 왜 그러는지 알고 있다.
중국의 예를 따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각성자 통제에 성공한 그 나라를.
'우리만 이러는 게 아니라, 강준치도 나서주면 얼마나 좋을까?'
최용의 말에 내가 눈살을 찌푸린다.
'강준치 그 새끼, 요샌 그냥 얌전해. 한국에서 전술핵 만들겠다고 정식 발표한 이후론 참교육 영상도 안 찍잖아? 지 역장으로도 핵 버틸 자신은 없으니까······.'
'쫄보 새끼. '
한창 말하던 중에 TV 뉴스에서 웬 여성의 목소리가 울린다.
정부의 한 프로젝트가 성공했음을 알리는 뉴스다.
「국가안전부의 발표입니다 (······) 다이애나 프로젝트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그 뉴스를 듣자마자 석장실이 한숨 쉰다. 그와 함께 내 표정은 구겨지고, 최용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다.
다이애나, 저 염병할 씨발년.
다이애나는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 여신이다. 그리고 그녀의 신화 중 하나는 사냥꾼 오리온을 쏘아죽인 일이다.
그 일화만 생각해도 저놈의 다이애나 프로젝트가 사냥꾼, 즉 헌터들을 겨냥한 것임을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아무리 강력한 각성자들인들 정부에서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음을 과시하려는 프로젝트다.
'기어이 전술핵 만들었나 보네.'
그리고 내가 문득 입을 연다.
'저 새끼들 전술핵 만들면, 내가 쌔벼올까?'
'뭐?'
'저 새끼들이 만든 전술핵 훔쳐서 내가 역으로 국가에 협박하는 거지. 원전에 터뜨리겠다느니 울산 공업단지에 터뜨리겠다느니 하면서······'
'그건 좀······.'
석장실이 혀를 차는 가운데 최용은 내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기야 거의 나만큼이나 정부의 행보에 반감 가득한 친구 아닌가. 최용은 이렇게 제안한다.
'그러지 말고 아예······ 강준치 집에 터뜨리는 건 어떨까? 그 새끼 잘 때, 그 집에 몰래.'
'강준치 집에?'
'왜, 강준치가 죽으면 베헤모스가 서울에 기어 나올 거 아냐?'
'아예 한국을 망하게 하자고?'
질겁하는 석장실에게 최용이 담담히 말한다.
'안 될 것 없지. 한국이 망하든 말든 상황이 이보단 나아질 것 같은데, 아닌가?'
'만에 하나 핵폭발에서도 강준치가 살아남으면?'
내 질문에도 최용은 막힘없이 대답한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지? 강준치한테 자기가 핵폭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초인인 걸 깨닫게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놈이 그제야 정부가 무섭지 않아서 행동에 나서게 될지도······'
'오······.'
'아, 생각해 보니 이건 안 되겠다. 핵폭발에서 준치 그 새끼 살아남으면 핵 터뜨린 김극 너부터 조지려 들 텐데. 다른 방법을 떠올리는 게 낫겠네. 역시 원전 테러가 최곤가? 뭐, 결정은 공간이동 할 줄 아는 김극 네가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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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에서 빠져나온 나는 내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환각에서 전해진 울화로 인한 손 떨림이었다.
그래도 이미 이런 환각을 여러 번 겪어봤다. 덕분에 표정을 관리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방금까지 내가 하던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내가 자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설마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니.
내가 잠시 김형만 씨의 일을 잊고 있었다. 우리 초인들을 두려워하는 비각성 찌꺼기들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나올 수 있는지, 내가 극단적으로 굴지 않아도 저들이 그럴 수 있음을 잠시 잊고 있었다.
"최용 씨?"
"예?"
"앞으로도 뭔 일 있으면 무조건 저 불러요. 아무리 바빠도 무조건 달려갈 테니까."
내 말에 최용이 만면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더없이 만족스레 웃더니, 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말씀만으로도 든든하네! 이야, 진짜 김극 씨 말곤 믿을 사람이 또 없어요! 오늘 김극 씨 도우러 몰려온 신입들뿐만 아니라 저도 김극 씨 팬인 거 알죠?"
환각 속에서는 최용이 우리 각성자들의 리더였다. 최용 저 친구가 우리 중에서 가장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최용보다 내가 더 강해진 지금은, 내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하리라.
그와 함께 나는 환각 속에서 본 또 다른 정보를 떠올렸다.
다이애나 프로젝트라고 했나?
환각 속 내가 강준치를 상대로 터뜨린 전술핵은, 바로 그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물건을 훔쳐낸 것이었다.
그놈의 전술핵 프로젝트가 언제 어디서 이루어지는지 환각 속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지식을 물려받은 지금의 나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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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신입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