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유명 헌터 김극 - [3]
나는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언젠가 터질 일이 기어이 터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희 저놈이 지나치게 겁에 질렸으니 나라도 침착해야겠단 생각도.
"시체 처리부터 하고 말하죠? 우선 내가 알아서 할게."
내 말에 한희가 눈을 껌벅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아뇨, 그럴 수는 없······"
그럴 수는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식으로 범죄에 얽히게 했다간 말도 안 되는 폐를 끼치는 셈이니 안 되겠단 건가? 하지만 공간이동 할 줄 아는 나를 이 범죄 현장에 도와달라고 부른 것부터가 시체를 처리해 주길 바라서일 텐데.
내가 살인의 증거를 없애주길 바라지만, 그리하여 내가 범죄를 거들어주길 바란다는 사실을 제 입으로 인정하긴 껄끄러운 모양이다. 그런 미묘한 심리를 읽었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았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비겁하게 구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는 법.
나는 못 들은 척 시체들을 한자리에 모은 뒤, 그 시체들과 함께 공간이동 했다.
사람들과 CCTV가 없는 곳만 골라서는 공간이동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리하여 약 11km 떨어진 야산에 도착한 뒤, 각성자다운 힘으로 땅을 순식간에 깊이 파낸 다음 시체들을 그 안에 파묻었다.
이로써 특무대원 다섯 명은 '실종' 처리될 것이다.
그리고 실종이 사망보다 좋은 점은, 요즘 세상에는 실종자를 찾아내려는 시도 따윈 결코 하지 않아서 실종자 수사는 시작과 동시에 종결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부 각성자들의 초상 범죄는 유죄추정의 원칙을 통해 쉽게도 범인을 판별해내지만, 평범한 양아치들이 누구 죽이고서 뒷산에 대충 파묻는 막무가내식 범죄는 오히려 발각해내기 어려워졌다나? 괜히 치안이 망가진 게 아닌 법이다.
이후로는 근처 가게에 들러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리고 걸레와 락스와 양동이를 샀다. 양동이에 수돗물을 채웠다. 챙긴 물건들과 함께 아까 그 장소로 돌아갔다.
내가 창고에 공간이동 하자, 한희는 여전히 겁에 질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려주었다.
"이걸로 청소해요. 가속 능력 써서 최대한 빨리."
그러고서 나는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서는 주변을 수색했다. 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살피면서, CCTV로 의심되는 물건이 근처에 있는지도 따로 살폈다.
그리고 한희는 불과 2분 만에 완벽하게 청소를 끝냈다. 그는 락스를 풀어 물청소까지 해냈는데, 이로써 증거 인멸이 완벽하게 될지 어떨지야 모르겠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었다.
아무튼,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난 한희의 어깨에 손을 올린 다음 공간이동 했다.
한희를 내 집에 데려가서는, 코코아 한 잔을 타주며 말했다.
"일단 이거 마시고 진정부터 하죠."
"예? 예······."
한희는 코코아를 받아 홀짝이기 시작했지만, 그 손이 가속 능력으로 저러는 건가 싶을 만치 덜덜 떨리는 탓에 입과 손에 코코아가 줄줄 흘러내렸다.
한희가 나와 말을 섞을 수 있을 만치 진정된 것은 그로부터 약 십여 분 후였다.
"어쩌다 그런 거예요? 뭐 대충 상상이 되긴 하는데······."
내가 물었더니, 예상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베헤모스 쳐들어왔을 때요. 그때 제가 끼어들었던 게 문제 돼서······"
"아이고, 그걸 또 들켰어요?"
"예······. 제가 이번에 그 일로 상급 넉넉히 받게 되었으니까, 뭔 일을 했길래 저만 돈 이리 많이 받게 됐는지 선배들이 의아하게 여겼는지 또 파헤쳐서는······."
"그리고 당시에 뭐 했는지 알아내서는 또 지랄한 거예요? 특무대가 괴수 잡는 데 동원되면 안 되는데 왜 안 좋은 전례를 만드느냐, 이러면서?"
"그랬죠······? 특무대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냐, 어쭙잖은 영웅심리로 단체에 피해 입히면 우월감 느껴지냐, 선배들이 뭐 이런 소리를 하면서······"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이마를 짚었다. 하여간 정신 나간 반푼이들.
내가 이럴까 봐 인터뷰에서 박주헌의 공이 컸음은 강조했어도 한희의 공을 언급할 엄두는 내지 못했는데. 다만 따로 포상받을 수 있도록 국안부에 그때 일을 상세히 보고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특무대 놈들은 그걸 또 기어이 파헤쳐서는 트집을 잡아댔단 말인가?
심지어 말로만 트집 잡은 게 아닌 모양이다.
한희의 이어진 말에 따르면, 저번 서울 게이트 사태에서 한희가 데스클로를 처치한 일을 들켰을 때도 신체 여러 부위를 잔뜩 얻어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럴 예정이었다고.
"선배 다섯이 아무도 없는 창고로 절 끌고 왔어요. 그리고 각 잡고 패려는지 저한테 엎드려 뻗치라고 윽박질렀고요. 그런데 이번엔 반항심이 들어서······"
한희는 그리 말하며 몸을 떨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못 참겠더라고요? 솔직히 이건 욕먹을 짓이 아닌데 욕먹으니까······ 엎드려 뻗치란 말 무시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죠. 그러니 선배들이 빡쳤나 봐요. 제 뺨을 치려 하길래······"
"그딴 지시 불응하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요?"
"욱하는······ 욱하는 맘이 들더라구요. 그 싸대기를 대놓고 맞아주기엔 너무 느리기도 했고. 피한 다음 주먹으로 한 대 쳤죠. 저한테 처맞은 그 새끼, 바로 이빨이 나가버리데요?"
"그것도 잘했네. 그리고?"
"그걸 본 나머지가 전부 화가 났는지 칼을 칼집째로 휘두르려 하길래, 저는 반사적으로 칼을 뽑았고요. 그러고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입 다문 채 묵묵히 듣자니, 한희가 다시 몸을 떨었다.
"이제 어째야······?"
한희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어쩌긴? 그냥 지내던 대로 지내요."
"어떻게 그래요?"
"못 그럴 게 있나? 너무 신경 쓸 거 없어요. 데스클로를 죽였을 뿐인데."
"데스클로요? 그게 무슨······"
"그래요, 데스클로. 내 인터뷰 안 보셨나? 특무대 그놈들은 하는 짓부터가 딱 데스클로······"
"인터뷰 보긴 봤는데! 하지만 진짜 데스클로가 아니잖아요!"
한희가 소리쳤고 난 딱 잘라 말했다.
"아니, 데스클로가 맞아."
그리고 내가 부연했다.
특무대 놈들은 각성자가 범죄자랍시고 재판받을 기회도 안 주고 즉결처형하는 악질이었다고. 그러면서 헌터로서도 몸 바쳐 공헌한 박주헌과 달리, 다른 특무대 놈들은 괴수를 죽여 사람들을 지킨 적도 없으니 그저 사람을 죽이기만 한 살인마들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희 너는 어떻냐고 물었다. 넌 이미 괴수를 죽여 사람을 이미 여럿 살렸거니와, 이번 베헤모스 사태에서 세운 공으로는 가히 서울 사람 절반쯤은 살렸다고 봐야 하는 수준 아니냐고.
그 모든 사람 살린 행위들이 무슨 이적행위라도 되는 양 폭행하려 든 버러지들을 해치운 게 어떤 도덕적 문제가 있느냐고도 따져물었다.
물론 어떤 도덕적 근거가 있어서 그리 말한 게 아니라, 녀석의 죄책감을 줄여주기 위해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다 듣고 난 한희는 한숨을 작게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김극 형이나 제가 그리 믿더라도 판사들은 안 믿어줄 텐데요. 데스클로를 죽였을 뿐이란 말······"
"판사들? 왜요, 들킬까 봐 걱정돼요?"
"솔직히, 예······."
그리고 내가 말했다.
"혹시 범행 발각되면 내가 죽였다고 말해요."
"예?"
"김극 새끼가 다 죽였다고 말하라구. 시나리오 하나 뚝딱 아닌가? 미리 입 맞춰볼까요? 그쪽은 특무대 선배들이 지랄하니까 급한 맘에 도와달라고 날 부른 거지."
"아니······"
"그리고 김극은 이번 베헤모스 사태에 특무대가 안 와서 빡쳐 있었거든? 그래서 김극 이 분노조절장애 새끼가, 부르니까 공간이동으로 휙 나타나서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특무대원들 대뜸 다 죽여버린 거야."
"아니······, 김극 형······?"
"왜요, 이마저도 안 믿을까 봐 그래? 뭐 시체가 발견되면 부검으로 내가 한 짓 아니란 걸 들킬지 모르지만, 시체는 제대로 숨겼으니 딱히 발견될 것 같지 않은데······"
"그게 아니라! 내가 미쳤다고 제가 한 짓을 김극 형이 했다고 덮어씌웁니까?"
한희의 아연한 목소리에 내가 손을 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돼."
"그래도 되기는요!"
"나한테 왜 죽였냐 물어보면 데스클로인 줄 알고 죽였다고 하죠 뭐."
한희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죽였다면 뭐 어쩔 건데? 경찰특공대를 출동시킬 리는 없을 테고, 군대에서 박격포 잔뜩 방열해두고 내 집에 포격이라도 할 건가? 아니면 군과 특무대를 모조리 동원해서 내가 공간이동 하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대작전이라도 펼칠 건가?"
내가 어깨를 으쓱이곤 말을 끝맺었다.
"뭐 나라에서 제대로 맘먹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안 그럴걸요. 설령 할 수 있어도 그러려면 힘들고 딱히 얻는 것도 없으니까."
"정말 아무런 걱정이 안 되세요?"
"예, 뭐. 나라의 법이 자연법칙 같은 건 아니잖습니까? 말 그대로 좆같은 거지. 좆 달렸어도 꼴리면 꺼내고 안 꼴리면 안 꺼내는 것처럼 법도 그래요.
모두한테 공평히 적용되는 게 아니라 나라에서 자기네 꼴릴 때나 휘두르는 건데. 특무대원 다섯 마리쯤 죽였다고 나라에서 힘들게 수고를 감수할 것 같진 않네?"
나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말하면서 죄책감 따윈 드러내지 않았으며 속으로도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는 나를 한희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는데, 대충 '이 상황에 이렇게 이토록 태연할 수 있나?'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뭐, 지금 내가 이러는 게 내가 봐도 살짝 놀랍기도 하다.
국가를 상대로 테러 협박을 하지 않나, 지금은 아예 사람 사체 처리를 돕고서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 따위를 하고 있질 않나······.
예전 세상이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이 중범죄들을 저지르면서 태연하다니?
이 모든 것은 저번 경찰서 난동에서 그랬듯 환각 속 테러리스트 김극의 영향이 내게 스며든 탓일까. 아니면 내가 변한 세상에 적응하여 멋대로 행동하면서 그 모든 원인을 환각에 돌리고 있을 뿐일까?
뭐, 이쯤 되어서는 어느 쪽이건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인터뷰에서 대놓고 나라에 협박했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 일도 후회는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말고는 딱히 나설 사람이 없었으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 동족들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한희가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문득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세요? 제가 딱히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없는데요. 도와주신 대가로 돈이라도 드리기엔 돈도 저보다 훨씬 많으시면서······"
그리고 내가 대답했다.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전우잖아. 전우끼리 이 정도도 못 해주겠나?"
그러고서 내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더니, 한희가 또다시 멍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그러길 한참 지나서야 한희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번 일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나중에 시키실 거 있으면 꼭······"
"됐으니까 그냥 잊어요. 딱 봐도 이번 일 잊고 싶어서 환장하는 표정이구만."
"그래도요······."
"정 갚아주고 싶으면······ 그래서, 계속 특무대에 붙어있을 건가? 의무복무기간 남았으니까?"
"아마도······?"
"그럼 나중에 특무대에서 저 조지려 들면 그거나 좀 미리 알려줘요. 저번처럼 다른 특무대원들이랑 나 잡아 죽이라고 지시 내려오면 좀 봐주고요. 알겠죠?"
"예, 과연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알았으면 긴장 좀 풀어요. 이런 일 겪고도 특무대 생활 계속해야 하는 건 유감이지만, 앞으론 좀 편해지지 않을까요?"
"어째서요······?"
"특무대원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그쪽 기합주려던 선배 다섯이 실종됐으니 알아서들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겠습니까? 딱 봐도 그쪽이 빡쳐서 담가버린 상황인데요. 그리 다섯이나 죽이고도 국안부 차관인 아버지가 뒤처리해줘서 아무 일 없이 넘어간다고 상상할지도······."
그리 말하고서 내가 한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여간 그쪽은 이제 겁먹지 말고요. 선배고 지랄이고, 제대로 싸우면 쨉도 안 되는 반푼이들인 걸 이번에 잘 봤지 않았습니까?"
"예······"
"다시 말하지만, 쫄지 마요! 오히려 그것들이 쫄아야지, 응? 저번에도 내가 말했지만, 철갑선이 통통배들 수가 많다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는 거야."
이제는 선배들이 시비 걸면 대놓고 패버리라고, 그러다 폭행으로 특무대에서 쫓겨나면 오히려 잘된 일 아니냐고 내가 말했다.
또한 그리하여 헌터 생활을 시작하면 나와 헌트웹 동지들이 진심으로 환영해주리라고도 말했더니, 그제야 한희는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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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정말로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번 일 절대 안 잊을게요.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꼭······"
한희는 어눌하게나마 감사를 표하고서 내 집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나는 그대로 푹 휴식하는 게 아니라, 당장 해야 할 일을 했다.
여행 준비를 해야 했다. 나라에서 어련히 물자를 준비해줄 테지만, 개인적으로도 여러 물건을 챙기고서야 잠을 잤다.
이번에도 맘 편히 깨어서는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로 향했더니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날 기다리는 사람들.
"김극! 김극!"
여러 공무원, 그리고 박미형 씨와 인천시장님이 맨 먼저 보였다.
그리고 날 응원하러 온 인천 시민들과 나머지 지역의 2등 신민들(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명예 인천 시민권을 부여했다)이 보였다. 그들에게 내가 둘러싸인 채, 사방에서 내 이름이 불렸다.
"김극! 김극, 김극!"
저 사람들이 오늘 왜 이러는지 알고 있다.
오늘은 내가 헌터 생활을 시작한 지 일 년 되는 날이다. 그러니까, 인천시와의 계약이 종료되는 날.
그리고 나는 이대로 다시 인천시와 재계약을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오늘 소월로 떠난다.
소드 월드, 인천 바깥 땅은 다 그렇듯 야만의 땅이요, 가난과 황폐함만이 자리 잡았다는 그곳에. 온갖 괴수들의 고향인 이세계에 나는 강준치를 찾으러 떠날 것이다.
내 여정에 함께 할 통역도 한 명 붙었다.
저번에 소월인 영주 우소리와 대화할 때 만난 적 있는, 한국에 귀화했다는 그 소월인 말이다.
그 왜소한 남자는 이미 날 본 적이 있음에도 다시금 내 근육과 덩치에 압도되었는지 움츠러들었다.
"김극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
소월인 통역은 허리를 깊이 숙여 내게 예를 표했는데, 나는 입으로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딱히 부담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소월인들만 이럴 게 아니라 장차 한국인들도 이래야 하는 법.
한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백담비도 여기 있었다.
게이트를 열어주거나 날 배웅하러 온 줄 알았더니, 그녀는 웬 짐을 바리바리 챙겨 왔다. 어째서?
"나라에서 담비 씨도 같이 가랍니까?"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백담비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자원했어요. 필요할 때마다 게이트 열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 말에 나는 두 눈을 껌벅였다. 저 여자가 나와 같이 가겠다고 자원했다고? 정말?
이미 외국에서 데려온 게이트 담당 인원이 따로 있었는데 어째서······ 물론, 그보다 백담비가 훨씬 낫기는 할 것이었다. 전투 능력이든, 다른 모든 면에서든 간에.
"하지만······ 담비 씨, 황금화살상 받아야 하지 않아요? 그거 1월에 시상식 한다던데."
"이 상황에 상이 문제겠어요?"
난 이 상황에 어찌 대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감사를 표해야 하는지, 고생스러울 텐데 정말 괜찮으냐고 걱정을 표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둘 다 하지 못한 내가 입 다문 가운데, 백담비가 게이트를 열었다.
셋이서 자줏빛 공간에 몸을 넣었다. 백담비가 먼저 그 안에 들어갔고, 소월인 통역이 그 뒤를 따랐다.
내가 마지막으로 게이트에 들어가자니, 등 뒤에서는 내 이름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김극! 김극―!"
그와 함께 이런저런 말이 섞여서 들려왔다.
두 번이나 죽을 뻔했다가 김극 헌터 덕분에 살아났다느니, 김극이 인천시와 계약한 덕에 이후로 인천 빌라들이 떡상해선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느니, 내가 인천의 구세주라느니 한국 전체의 영웅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칭송들.
그들을 향해 잠시, 뒤돌아서서 씩 웃어주며 한쪽 손을 높이 들었다.
내가 그리 시그니처 포즈를 보이자 연호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시야를 게이트의 자줏빛이 잠식했다.
106화 귀환자 - [1]
이 개월 뒤, 나는 소월의 왕 앞에 섰다.
소월의 왕이라 해서 소월 전체를 다스리는 것도 아니요, 고작 이만 명밖에 안 되는 사람들을 다스릴 뿐이지만 그저 독보적으로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소월에서 왕으로 통하는 자였다.
하기야 신장 백이십 미터짜리 거인이라면 그 정도 취급을 받을 만하다.
나는 저 알몸뚱이 거인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저 무지막지한 신장에 필요한 식사량을 수급하기 어려워, 평소에는 언제나 아스트랄계에서 지낸다던가? 지금 이렇게 만나주는 대가로 한국에서 대량의 식량을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말이다.
내가 똑바로 선 채로도 힘겹게 올려다봐야 하는 높이에서, 거인왕 아마루가 말했다.
아마루의 말을 내 소월인 통역이 번역해서 전해주었다.
"찾으시는 인물이 어디 있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다고 하십니다."
아마루는 딱히 힘주어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런데도 그 목소리는 천둥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아마루가 또다시 말했고 통역이 또 번역해주었다.
"그자를 어찌하여 찾으려 하는 것이냐며 하문하시는군요. 그자와의 관계 또한 밝히도록 명하셨습니다."
통역이야 그리 말했지만, 사실 나도 소월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
그래서 아마루가 실제로 한 말은, 통역의 입에서 나온 번역과는 어투가 크게 달랐음을 알 수 있었다.
방금 아마루가 한 말을 인천말로 표현하면 '그 새끼는 왜 찾는데? 너 걔랑 무슨 사이니'쯤 될 것이다.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왕다운 위엄 따윈 조금도 없는, 그야말로 시정잡배의 언어였던 셈이다.
그 와중에 아마루는 왕다운 의복을 걸치긴커녕 아예 벌거벗고 있었다. 머리칼이며 수염도 전혀 관리하지 않아서 지저분해 보이는 모습.
저 거인왕만 특이한 게 아니라, 소월의 군주들은 모두 저렇다.
고상하고 어려운 어휘, 혹은 아예 외국어를 써서라도 자신을 다른 평범한 백성들과 구별하는 것은 지구의 범속한 군주들이나 그러는 법.
소월의 군주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소월의 군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각성자들이며, 각성자들은 굳이 화려한 의복이며 어휘 따위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아도 당연할 만치 범속한 인간들과 다르니까.
저 거인왕의 백이십 미터짜리 신장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미 저 거인보다 훨씬 큰 베헤모스를 봤음에도, 저 크기에서 전해지는 놀라움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경외감마저 느끼며 말했다.
"걔랑 전 친굽니다. 우리 땅에 베헤모스가 침공해왔고 또 침공해올 것 같은데, 그걸 막으려면 강준치 그 친구가 필요하다고 전하십쇼. 아, 베헤모스는 지구에서 이름 붙인 거니까 그리 말하면 모르려나?"
또다시 아마루가 천둥처럼, 그러나 시정잡배 같은 어투로 말했고 내 소월인 통역은 이번에도 근사하게도 번역했다.
"베헤모스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자를 도로 데려가야만 막을 수 있는 것인지 하문하십니다."
그리하여 내가 베헤모스가 어떤 괴물인지 한동안 설명했더니, 다 듣고 난 아마루가 물었다.
"지구에는 그런 괴물이 실존하는 게 사실이냐고 물으십니다. 그게 정말이라면 지구는 참으로 살기 어려운 장소일 거라고도 말씀하시는군요."
그 말에 내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베헤모스 그놈, 소월 출신 괴수 아니냐고 물어봐요."
"잘 생각해 보니 그런 괴물의 존재를 전설로나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그저 전설일 뿐 실존한다고 믿은 적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미 귀공의 영토에 한 번 쳐들어왔다면 어찌 막아냈느냐 하문하시는군요."
나와 내 동료들이 그놈의 꼬리를 잘라 쫓아냈다고 설명하니, 아마루는 큰 소리로 "구라 같긴 한데, 진짜라면 너 보기보다 꽤 하는 놈이었군!"이라고 감탄했다.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나, 그것이 정녕 사실이거든 공이야말로 전사 중의 전사이리라 치하하십니다."
그걸 또 위엄 있게 번역하면서, 소월인 통역은 거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아마루가 큰 소리를 내면서 고막에서 피가 난 탓이었다.
그 소리가 워낙 컸기에 나마저도 꽤 괴로움을 느꼈을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간, 그저 말만으로 이 정도 여파라니? 과연 120미터급 거대화 능력자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거인을 각성자 헌터로서 평가하자면 당연히······.
S급이 확실하다. 이 정도면 지구 어느 국가에서도 무조건 S급 판정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 괴물마저도, 강준치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기는 걸까?
이어진 아마루의 말을 소월인 통역이 번역했다.
"그자를 데리러 왔다면, 이른 시일 내에 데려가도록 명하시는군요. 최대한 빠를수록 좋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 말하는 아마루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부담감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상당한 짜증과, 그 짜증을 견디면서까지 강준치의 존재를 용납한 이유였을 약간의 공포감도.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백이십 미터짜리 거인왕이 보기에도, 강준치의 존재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나머지 최대한 빠르게 제 구역에서 치워야 할 무언가였던 모양이다.
아마루가 우리의 알현 요청을 받아들인 것도 그저 한국에서 주기로 한 식량을 탐내서가 아니라, 제 구역 근처에 터 잡은 강준치를 쫓아내기 위해서였을지도······.
이후로 백담비가 게이트를 열어주었으며, 그녀가 열어준 게이트로 아마루가 들어가 사라졌다.
이후로 우리는 아마루의 부족을 가로질렀다.
그리 걷자니 여기 소월인들 사이에서, 우리는 무척 눈에 띄었다.
소월인들의 키는 전근대 기준으로도 무척 작아서, 하나 같이 140cm를 넘지 못했다. 그 탓에 여기서는 백담비마저 놀라운 장신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2미터를 훌쩍 넘는 나는 대충 거인왕보다 살짝 작은 수준으로 여겨지는 걸까?
내가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주변의 소월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예를 표했다.
이런 일을 겪은 지 벌써 두 달이 지났건만, 백담비는 아직도 이런 대접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애써 소월인들에서 내게로 시선을 돌린 채 말을 걸었다.
"마침내 위치가 식별됐네요?"
"그러게요. 지금까지 이상한 방향으로 온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
"아, 드디어······."
백담비가 한숨 쉬는 가운데 내가 말했다.
"안도하기엔 아직 끝난 게 아니죠.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았잖습니까?"
"그래요, 이제 강준치 그 사람을 설득해야죠, 우리."
백담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게 지금까지 여정에서 가장 어렵고도 끔찍한 일일 겁니다."
"그럴까요?"
"분명히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언가의 직감이 내게 닥칠 미래의 시련을 알려준다.
강준치······. 그놈을 돌아오도록 설득하기는 끔찍하게, 아주 끔찍하게 어려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놈이 정말 돌아오고 싶었거든 진작 돌아오고도 남았을 텐데, 지금까지 돌아오기는커녕 이토록 먼 곳에 틀어박힌 걸 보니 틀림없다.
뒤이어 거인왕이 알려준 장소로 향하니, 내 예언가의 직감은 현실이 되었다.
"저기에 강준치가 있다고요?"
내 물음에 소월인 통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계(=아스트랄계. 게이트 내부를 소월인들은 그리 불렀다)에서 관측한 바로는 그렇다고······."
나는 내 시야를 가득 채운 성채를 보았다.
거대한 바위 산맥을 통째로 깎아서 만들어낸 듯한 성채였다. 말 그대로 산맥 규모였으며, 단단하기도 끔찍하게 단단해 보였다.
소월에서 왕으로 통하는 아마루가 거느린 백성이 고작 이만 명에 불과했던가? 나머지 다른 부족들의 인구는 훨씬 적다. 소월 사람들은 결코 지을 수 없는 규모의 건축물임을 알 만했다.
그리고 사실, 지구인들인들 저 정도 성채를 지으려거든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 성채 주변에 파인, 베헤모스도 통째로 들어갈 해자를 보면 특히 그럴 테고.
그야말로 인간이 아닌, 신이 만들어낸 듯한 성채였다.
여기 소월인들의 말에 따르면, 저 모든 성채를 한 남자 홀로 만들어냈다고 했다. 굉음이 울리길래 공포에 질린 채 보니, 밤사이에 저 성채가 생겨났으며 이후로도 자꾸 보강되어서는 저 정도 규모가 되었다고.
그러니까 이것을 단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냈단 말인가? 강준치 혼자서 그랬다고? 건축 게임에서 이 정도 구조물을 만드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
그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지, 그의 마음의 벽이 어느 정도이며 그가 지닌 경계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듯했다.
강준치와 만나기 전, 나는 심호흡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준비해온 온갖 문구들을 되새겼다.
내가 원한다면 바로 공간이동 하여 성채의 보안을 무력화한 채 강준치의 앞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강준치를 분노케 할 것이었다.
강준치의 경계심을 줄일 겸, 그를 존중하는 뜻에서 그 성채 앞에 서서 외쳤다.
"강준치―!"
이 와중에 백담비는 내가 위험할 수 있으니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기어이 따라온 바였다. 그녀가 양 귀를 틀어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계속 외쳤다.
"나 김극인데,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
몇 번 더 그리 외치니, 반응이 있었다.
보아하니 강준치는 바위산의 봉우리를 통째로 문으로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대한 암석 덩이가 공중으로 치솟더니,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다음 순간, 난간 달린 화물용 리프트와 그 위에 탑승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남자를 보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얼굴의 인상이며 복장 상태며,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과는 꽤 달라졌지만 분명히······.
강준치였다. 그가 과연 여기 있었다!
곧이어 화물 리프트에 탄 강준치가 내 앞에 도달했다.
강준치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내 예언가의 직감이 완벽히 들어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강준치의 핏발 선 눈. 그 충혈되다 못해 광기가 깃든 그 눈을 보니 섬뜩했다.
대체 여기서 그가 무슨 일은 겪은 걸까? 이 와중에 느끼는 적개심은 또 어느 정도이길래 저런 눈이 되어버린 것이고?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흐른 끝에, 강준치의 입이 열렸다.
"여긴 왜 온 거냐?"
나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데리러."
그러고서 나는 긴장했다.
이제 강준치의 입에서 썩 꺼져라, 일 분 안에 안 꺼지면 죽여버리겠다, 뭐 이런 말이 나오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럴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온 대사들을 읊으려 할 때였다.
"진짜?"
"물론······"
그리고 강준치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아니, 왜 이제야 왔어!"
이 순간 내가 느낀 아연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저 거의 혼절할 뻔했다고만 겨우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현기증마저 느끼는 가운데, 강준치가 계속해서 말했다.
"진짜 뭐하다 이제야 온 거야?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한 줄 아냐? 이 거지 같은 곳엔 휴지도 없고! 휴지 대체물도 없고! 냇가에서 볼일 보고 냇가 물로 씻으려니 물속에 큰 물고기는 거의 없는 주제에 송사리며 웬 기생충 같은 건 많아서······!"
그 구질구질한 하소연을 들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온갖 감정들이 몰아쳤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는 데서 느낀 안도감과 허무감, 그리고······ 분노.
그 분노를 억눌러 참아야 했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김형만 씨며 박주헌 등의 얼굴도 대뇌 한구석에 봉인해야 했고.
난 그저 한심한 친구를 대하는 투로 물었다.
"돌아오고 싶었으면 스스로 돌아오면 되지 않았냐? 뭐하러 찾으러 올 때까지 여기 있었는데?"
"돌아갈 길을 모르니까! 정신 차리고 보니 너무 멀리 왔는데, 사람들한테 길 물어보자니 말도 안 통하겠다, 웬 사람 보기만 하면 칼부터 들이대는 칼잽이들이 득실거리고! 내가 그런 미친 칼잽이랑 몇 번이나 마주친 줄 아냐? 내가 지금까지 자다가 몇 번이나 습격당한 줄 알기나 해?"
저 고생담을 들어보니 돌아가자고 따로 설득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대로 손잡고 끌고 가도 못 이기는 척 따라올 모양새 아닌가.
음, 잘 생각해 보면 사실 이마저도 다 예견했던 것 같다. 역시 내 예언가의 직감은 결코 빗나가지 않는다.
"봐요, 내 예상이 맞았죠?"
내가 슬쩍 그리 말했더니, 백담비가 날 째려보았지만 무시했다.
이로써 두 달간의 여정이 끝났다. 이제는 돌아갈 일만 남았다.
107화 귀환자 - [2]
"슬슬 한국 돌아가야지?"
내가 말하니, 강준치는 어째 바로 승낙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지금 바로?"
왜 저러나 했더니 강준치는 갑자기 태도가 변했다. 아까와는 다른 말을 마구 쏟아내는 게 아닌가.
오늘은 좀 피곤해서 움직이기 싫다느니, 급할 게 뭐 있냐느니······.
심지어는 무턱대고 돌아가면 위험하지 않냐는 말이 그 입에서 나왔을 때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온갖 헛소리로 시간을 끌던 강준치는, 툭 던지듯 이렇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 떠나고서 서울은 어때. 평소랑 똑같나?"
그러고서 강준치는 무심한 척, 그저 문득 생각나서 물은 척 굴었지만 난 그게 아님을 눈치챘다.
자기가 떠나고서 한국이 어떻냐니? 설마 베헤모스 사태를 상상도 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설마 그걸 예상치 못했을 리가 없다.
강준치 이놈이 예언가의 직감을 지닌 나와는 달라서 툭하면 말도 안 되는 억측이나 하는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순 멍청이는 아니다.
이놈이 자기가 떠나면 베헤모스가 나오리란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버스 시위 때, 자기가 서울을 떠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베헤모스가 게이트에서 기어 나오던 걸 이놈도 제 눈으로 보지 않았나?
그렇다면 지금 그리 물은 이유는 어째서인가?
서울에 닥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척, 능청을 떠는 것일 텐데 대체 어째서?
자기가 떠난 뒤 일어난 일을 예상하고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테니까. 자신이 떠난 후 상황을 예상치 못한 척 연기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강준치 이놈, 길 잃어서 못 돌아오고 있다더니 순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강준치가 게이트에 들어가 소월로 넘어간 이후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처음에는 그저 분노에 이성이 마비돼서, 싹 다 망해보란 식으로 최대한 멀리 떠나버렸으리라.
그러나 화가 식고 나서 생각해 보니, 자신의 탈주 여파를 감당하기 어렵단 데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이미 베헤모스가 서울을 초토화했으리라 짐작하고는, 한국에 귀환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여기 눌러앉았으리라.
그러고는 한국에서 먼저 자신을 찾으러 오길 기다렸으리란 것 또한 짐작할 만하다. 한국 측 사절의 반응을 살핀 뒤 자신이 귀국해도 될지 어떨지 판단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죄지은 자신이 숙이고 돌아갈 게 아니라 한국에서 먼저 아쉬운 소리를 내게 하려고······.
강준치 이놈이 소시민 중의 소시민이긴 하지만, 소시민이 오히려 누구보다 뻔뻔하고 비겁해질 수 있는 법.
이 와중에 그 속내를 다 간파했음을 드러내며 통렬한 일침 따윌 가할 수는 없었다. 그러려고 온 게 아니었으니까.
"서울 상황? 심각하지."
"얼마나?"
나는 숨김 없이,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전해줬다. 서울의 상황과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고스란히.
내가 말할수록 강준치의 안면근육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아······ 정말? 그 정도라고······."
강준치의 핏기가 사라진 얼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것도 연기인가? 전혀 이럴 줄 몰랐던 척하려는?
아니, 이번에는 연기가 아닌 듯했다. 정말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보아하니 서울이 초토화될 줄은 예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아니면 설령 예상했더라도 직접 들으니 충격이 컸거나.
"그럼 이대로 내가······ 한국에 돌아가도 되는 게 맞나?"
강준치의 물음에 내가 반문했다.
"못 돌아갈 게 있나?"
"여론이······"
"여론? 강준치 네가 여론을 왜 신경 써?"
내가 코웃음 쳤다.
강준치가 날 바라보는 가운데 내가 계속 말했다.
"네 능력은 민주적인 절차로 주어진 게 아냐. 국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낸 것도 아니지. 다수결 투표나 설문조사 결과에 따라 주어진 것도 아니고. 그저 혼자 알아서 각성한 거야······ 그런데 여론 따윌 대체 왜 신경 써?"
"음······"
"각성자로서의 네게 한국인들은 아무런 권리도 주장하지 못해. 네가 떠나든 가만히 있든, 그 누구도 네게 뭔가를 요구할 권리가 전혀 없단 말이야. 그리고 한국인들이 자기네 요구를 강제할 능력은? 더더욱 없지."
이건 강준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누가, 무슨 자격으로 이 남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이 남자에게 어떤 의무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강준치에게 어떤 의무가 존재하더라도, 누구도 그 의무를 강제할 수 없다면 그 의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 생각하는 동시에, 그날 강준치의 결정에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날 강준치는 화가 났다는 이유로 한국을 떠나버리는 게 아니라, 국회든 정부든 간에 모조리 엎어버려야 했다.
그리고 정 떠나려거든, 나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언질이라도 줬어야 했다. 그런데 이놈은 그러지 않고 그저 떠나버렸다. 그 결과 수많은 목숨을 잃었고.
물론, 이 생각 또한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다.
나 또한 강준치에게 뭔가를 강제할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니까. 그것은 이놈이 내 생각 또한 따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놈이 다른 한국인들의 생각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데 여론 따윌 왜 신경 쓰냐구?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거지."
내가 말했지만, 그래도 강준치로선 그놈의 여론이 여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지금 한국인들 반응이 어떤데? 강준치 그 새끼 잡아 죽이라든가, 뭐 그러고 있지 않나······."
"그야 일부는 그러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부분은 네가 최대한 빨리 돌아와 주길 바라지? 일본에서 유행한다는 추방물? 뭐 그런 느낌으로······."
강준치가 귀 기울여 듣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계속 말했다.
"심지어 정부에서 이미 너 떠난 이유를 구구절절 다 설명했거든? 도청을 했느니 뭘 했느니 다 밝혔단 말이야. 그러니 사람들은 너보단 정부 잘못이 더 크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아마 이게 강준치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잠시 후 우리가 한국을 향해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일 테고.
강준치가 지하에 머물 적 승강기로 썼던, 소월에서는 이동수단으로 쓰는 듯한 화물 리프트에 우리 셋이 올라탔다.
"난간 단단히 붙잡아라? 난간 주변에 역장 구조물을 따로 두를 거긴 한데, 역장 구조물은 내가 집중력 흩어지면 바로 사라지거든? 그러니 혹시 모르니까······"
강준치가 나불나불 경고하더니, 우리가 탄 화물 리프트를 움직였다.
역장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여유가 꽤 있는지 말을 걸어댔다.
"속도 늦출까? 다시 못 볼 풍경일 테니 경치 구경하게······"
그리고 내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소드 월드의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딱히 볼 것도 없었다. 이 소월에 펼쳐진 풍경이라곤 순 사막, 아니면 정글뿐이니까.
직접 다니면서 보았기로, 그 배경 속 내용물 또한 보잘것없었다.
"우리도 지난 두 달간 여기저기 다녀봤는데, 볼 게 정말 하나도 없었어요. 차라리 괴수라도 나타났으면 덜 지루했을 텐데 괴수라곤 순 고블린만 보이더군요? 가끔 데스클로가 보이긴 했지만 그뿐이었고요.
괴수들의 고향이 소월이라길래, 헌터 생활하면서도 못 본 온갖 괴수들이 잔뜩 있을 줄 알았더니 전혀······."
백담비의 말대로였다.
이곳 소월에 생명의 밀도는 작다. 일정 영역에 사는 생명체의 수도, 다양함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
한 농부가 있다.
온갖 농기계와 화학비료를 아낌없이 쓰는 현대적인 농부가 아니라, 전근대 농부들이 그랬듯 자연을 벗하여 살아가는 농부다.
이 농부는 물소 수십 마리를 키운다. 물소들을 먹이기 위해 따로 사료를 사들이는 게 아니라, 숲에 물소 떼를 몰고 가서는 거기 자라난 풀들을 먹인다.
물소들을 충분히 먹인 다음에는, 숲에서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긁어모아서는 집에 가져온다. 가져온 숲의 물질들을 태워서 그 재를 밭에 뿌려 거름으로 삼는다.
그야말로 자연 친화적이기 그지없는 삶의 방식이지만, 자연 또한 그리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이 농부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숲을 파괴하고 있다.
물소들이 숲의 풀을 양껏 먹고 숲을 빠져나가 숲 바깥에서 배설하면, 그 풀만큼의 양분은 고스란히 숲 밖으로 빠져나가는 셈이다. 농부가 숲의 낙엽과 나뭇가지를 숲 밖으로 가지고 나가 거름 삼는 것 또한 마찬가지 행위다. 숲에서 썩어 흙으로 돌아갔어야 할 양분이 숲을 빠져나가는 셈이니까.
그리하여 본디 숲의 생명이 먹어 치우거나 숲에 녹아들었어야 할 그 모든 영양분이 숲 바깥으로 유출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지속된 숲은 겉으로 보기에만 생명력 짙은 녹색일 뿐, 서서히 간직하고 있던 양분을 잃고 자생력 또한 잃어간다.
굳이 숲을 밀어 골프장을 만들지 않더라도, 독한 화학약품을 뿌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숲의 내부를 파괴할 수 있는 셈이다.
소드 월드의 괴수들이 수천수만 년 동안 벌여온 짓거리가 바로 그런 일이다. 땅의 생명력과 자생력을 죽이는 일.
소월의 포식자들은 기괴할 만치 빠르고 강력하다. 피식자들이 남아나지 않을 만치 탁월한 사냥 능력으로 주변 환경의 사냥감들을 절멸시키고 만다.
그리 사냥감들을 잃고 나면 포식자들마저 죽어야 하건만, 사냥감이 사라진 소월의 괴수들은 그대로 굶어 죽는 게 아니라 게이트에 들어가 죽음을 유예한다.
그러면서 자기네 육체를 이룬 양분을 자연에 환원하지 않는다. 설령 죽더라도 그 육체가 썩지 않는 게이트 안에서 그저 버틸 뿐이다.
그렇듯 포식자들만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게이트 안에 축적되는 일이 오랜 세월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소드 월드는 그 강력한 괴수들마저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게이트 내부에 도사리는 괴수들은 수십억 지구의 인류가 보기에도 끔찍하게 수가 많지만, 정작 소월에 돌아다니는 생명이라곤 조그마한 소동물이며 쬐끄만 고블린밖에 없는 것이다.
소월에서 베헤모스가 전설 속 괴물인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이리라. 베헤모스로선 게이트 안에서 벗어나 소월을 활보할 엄두가 나지 않았으리라.
베헤모스의 몸집을 고려하면 놈이 움직일 때마다 소모되는 양분 또한 상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곳 소월의 빈곤한 환경을 고려할 때, 이곳에서 베헤모스가 사냥에 나선들 어떻게 그 배를 채울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이만 명이나 모여 사는 인간의 터전엔 놈과 체급이 비슷한 거인왕이 버티고 있었으니, 베헤모스로선 그저 수천 년을 게이트 안에 처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여간 괴수들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저 끔찍한 놈들이란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단순히 사람을 해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살아가야 할 땅마저 황폐하게 만드는 버러지들······.
괴수들이 끔찍한 만큼 괴수들을 사냥하는 헌터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직업이며, 헌터 중에서도 독보적인 각성자들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들임을 알 수 있으리라.
그대로 얼마쯤 날았을까?
저 아래에서 손 흔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국인들이었다. 강준치 수색을 위해 게이트를 넘어왔을 사람들.
"아! 김극 씨! 그리고······"
소드 월드와 지구의 좌표는 1:1로 대응된다. 소월에서 이동하면 지구에서도 그만큼 이동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만큼 날아온 보람이 있어서, 한국이 멀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아쉬움······. 짙은 아쉬움이 이 순간 내 머릿속에 가득 찼다.
*******
몇 시간 후 게이트를 나오니, 과연 한국이었다.
주변에 깔린 무너진 건물, 처참하게 금이 가고 어긋나버린 도로를 보니 서울이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본 강준치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게 뭐냐······?"
직접 보니 더욱 쇼크인 모양인데.
그러나 강준치의 표정과 목소리에 깃든 동요는 다음 순간 사라졌다. 강준치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연락을 받고 공무원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릴 향해 공무원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준치 씨, 오셨습니까!"
"김극 씨, 백담비 씨? 정말 수고했습니다!"
한편 강준치는, 지나가던 시민들이며 여기 모인 공무원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잠시 부담스러운 눈치였지만, 곧이어 뻔뻔하게 요구했다.
"폰 좀 줘봐."
강준치가 공무원에게서 스마트폰을 받아들고는 한동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두가 놀라 흠칫했다. 강준치가 스마트폰을 만지다 말고 욕설을 지껄이는 게 아닌가.
"이런 씨발?"
공무원들의 몸이 굳은 가운데, 강준치가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떠나기 전에 올린 동영상 누가 지운 거야? 댓글 얼마나 달렸나 보려니 지워졌네! 내가 분명 내 영상 지우면 다 죽여버린다고 말 안 했어!"
그러자 공무원들은 계속 쩔쩔매며 고개를 조아렸으며, 강준치는 계속 으르렁댈 뿐이었다.
저건 또 왜 저러는 거냐? 방금까지만 해도 충격받은 반응이더니······.
아, 적반하장 전술이군.
기껏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저러는 걸 보니, 강준치가 지금 느끼는 죄책감이 정말 크다는 걸 오히려 알 수 있었다.
평소 느끼는 스트레스를 참교육 영상 따윌 찍어가며 해소하는 놈 아닌가. 이 처참한 서울의 풍경을 본 순간 견디기 어려운 죄책감을 느끼고는, 저렇게 버럭버럭 소리 지름으로써 죄책감이며 그 죄책감으로 인한 스트레스마저 해소하려는 모양이지.
나 또한 강준치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부 공유했다.
감히 한국의 수도를 참칭하는 간악한 서울이지만, 이 무너진 풍경을 보니 흡족하기가 어렵다.
도시 전체가 온통 어둡다.
분위기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도시가 어둡다.
불 꺼진 건물이 많아도 너무 많다. 베헤모스가 서울 건물들을 부쉈지 발전소를 부순 건 아닐 텐데 왜 이 지경이 됐나?
고작 두 달 만에 서울에 전기가 끊긴 건 아닐 테고, 서울 반파로 인한 경기침체 어쩌고 하는 문제일 것이었다. 그날 이후 폐업한 가게며 기업 또한 한둘이 아니리라.
*******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도착한 소식이 한국 전체에 전해진 모양이었다.
나와 백담비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온갖 질문을 받았다.
강준치를 어떻게 설득해서 데려왔느냐는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확실히 강준치 그 친구,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더군요. 감시당하고 도청하며 계속 불안하게 사느니 차라리 맘 편한 소월이 낫다나요?"
내가 강준치를 데려온 공을 부풀리려고 일부러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강준치와 미리 입을 맞춘 바였다. 강준치로서도 자신이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서 안달 난 마당이었다고 밝히긴 싫을 테니까.
"아무리 한국이 싫더라도, 거기 사는 친구들과 지인들을 생각해서 제발 돌아와 달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내가 그리 말했을 때, 기자들과 주변에 모인 공무원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짝짝짝······'
나는 당연한 듯이, 백담비는 쑥스러운 동시에 기쁜 듯이 그들의 반응을 즐겼다.
이후로도 쏟아진 여러 질문에 대답했다.
주로 강준치에 대한 질문 위주였지만, 우리의 소드 월드 여행에 관심을 보이는 기자도 꽤 있었다.
"소월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백담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대답했다.
"끔찍한······ 너무 끔찍한 곳이었어요."
그와 동시에,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멋진 곳이던데요? 진짜 끝내주게요!"
108화 각성자 정진영 - [1]
강준치의 복귀 사실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다음 날, 베헤모스 사태 이후 전례 없이 폭락했던 코스피가 치솟았다.
이대로면 곧 재생이 완료될 듯했던 베헤모스의 꼬리는, 강준치의 서울 복귀와 함께 재생되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베헤모스가 만만치 않은 강적의 복귀를 확인하여 서울에 다시금 뛰쳐나올 의욕을 잃은 나머지 재생을 위한 노력을 줄인 것으로 추측됐다.
그리고 강준치가 서울에 다시 자리 잡은 그 시점, 일찍이 폭락했던 서울 부동산 가격마저 복구되기 시작했다. 내 듣기로 서울 부동산 위기로 은행들마저 파산을 고려할 상황이었다던데, 이로써 급한 불은 끈 셈이라나?
이 모든 것은 국민 다수의 노력, 정부의 판단이며 정책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단 한 명의 각성자가 집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벌어진 일······.
단 한 명의 행동에 나라가 통째로 요동쳤으며, 수많은 사람이 죽었거나 죽다 살아났다.
그렇듯 수백 수천만 명에게 영향을 준 각성자의 행동은, 어떤 굳건한 신념이나 의지에 의한 게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이 강준치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일어났다가 끝났음을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 귀환!!!
언니옵바야들, 그리고 아조씨들 안녕? 모두의 아이도루 애기버섯이가 소드 월드 모험을 끝내고 돌아왔어양!
용사 애기버섯이가! 얼음공주 백담비 언니야와 함께! 잡혀간 준치 왕자를 구하러 떠났다가 귀환한 거예양!!
모험을 떠나기 전 애기버섯이는 소월의 모두에게 애기버섯이의 귀여움을 전파할 꿈에 부풀어 있었어양! 하지만 막상 가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슬펐어양 ㅠ
그래도 애기버섯이를 만난 소월 언니옵바야들은 모두 애기버섯이의 큐트함에 반해서 하트눈이 되었으니, 애기버섯이는 충분히 만족해양!
그리고 소월의 언니옵바야들도 애기버섯이를 사랑한다니, 애기버섯이를 소월에 뺏길까 봐 슬슬 위기감 느껴지지양?
그래도 안심해양! 애기버섯이는 이렇게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준치 왕자까지 함께 데리고 한국에 돌아왔으니까양!
모두를 버리지 않은 애기버섯이가 너무 기특하지양? 장하지양? 머리 쓰담쓰담 해줘야겠지양?? 에헤헤······.
애기버섯이의 자세한 모험담은 극장판을 기대해주시고양!
오랜만에 보는 언니옵바야들, 모두 사랑해양!
두 달 만의 헌트웹 접속이었다.
이쁜 말투로 글 하나를 올렸더니, 댓글 달리는 속도며 추천 올라가는 속도가 심상치 않더라.
Ⓐ Dragon : 애기버섯이! 돌아왔구나!!
익명 : 오 강준치 귀국했다고 기사 뜨더니, 역시 김극도 ㅎㄷㄷ
익명 : 인천과 서울의 구세주! 대한민국의 구원자 김극 귀환!!!
Ⓑ GoodHunter : 이야 마침내! 정말 고생하셨고 돌아오신 거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GangStar☆ : 이 새끼 이거 소월에서 헌트웹 못 해서 어떻게 참았냐? 암튼 잘 돌아왔다
환영과 칭송 위주의 댓글들이었다. 잘 돌아왔다느니, 이번에도 큰일을 해내서 나라를 구했다느니 하는 말들.
그러나 날 반겨주는 저 무리에 돌머리청년이며 엘마야캐요, 서울토바기 등은 역시 없군.
난 기쁨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며 댓글을 읽어내리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 러그소라게 : 우욱씹······ 여기 추천 준 새끼들 뭐냐? 나만 볼 수 없지, 뭐 이런 심보로 추천 파파팍 누른 거냐?
ㄴ 익명 : 김극 티셔츠도 다섯 벌 샀다는 놈이 애기버섯을 못 알아봐?
Ⓐ 러그소라게 : 아니 이게 김극이었음? 찐으로??
Ⓐ 다이아몬드 : 김극 헌터, 여기선 이런다는 거 말로는 들었는데 직접 보니 어지럽네요;;
ㄴ Ⓐ Boid : 진짜루······ 김극 사진 보고 이 글 보니 두 배로 당혹스럽네ㅋㅋ
딱 보니 유입이 많다. 기존 헌트웹 유저들은 담담한 가운데 유독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니 틀림없다.
그중에서도 처음 보는 A배지 소유자들이 여럿 눈에 띈다. 어째서?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질문했다.
Ⓐ BabyBerserker : 처음 보는 분들이 많네양! 못 보던 사람들이 왜 이리 늘어난 거지양? 새 칭구들 모으려고 네이버에 헌트웹에 광고라도 했나양?
익명 : 그게 아니라 새로운 헌터들이랑 각성자들이 늘어나서 헌트웹에도 유입된 것임요
Ⓐ BabyBerserker : 새 헌터들이 늘어난 것은 그렇다 쳐도 각성자가 늘어났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양?
익명 : 베헤모스 사태로 각성한 사람이 꽤 있음요. 역장 외골격 능력자가 특히 여럿 생겨났다던데?
익명 : 그건 그렇고 김극님이랑 말 섞으니 기분 째지네요 ㅎㄷㄷ 이 대화 스샷 찍어놓고 협회에서 자랑해야지 ㅎㅎ
아, 무슨 말인지 이제야 이해된다.
하필이면 추운 겨울에 게이트가 열려서는 한국에 얼음 능력자가 넘쳐나게 되었던 그때처럼, 베헤모스 사태는 정진영과 같은 사례를 여럿 만들어냈을 것이다.
생존에 직결되는 위협을 받은 그 날, 영혼을 자극할 만치 강렬한 스트레스를 느낀 사람이 한둘은 아닐 테니까. 그로써 많은 이들이 역장 외골격에 각성했으리라.
그들이 겪은 고통에 유감스러워해야 할지, 아니면 동족이 새로 여럿 탄생했음에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들의 닉네임 하나하나를 눈에 담던 중이었다.
또 한 명의 새로운 A배지 소유자가 내게 댓글을 달았다.
Ⓐ 5my지저스 : 김극햄? 돌아왔군요!!
정진영이었다. 올해로 35살 되는 양반.
나보다 여섯 살이나 연상인 이 형이 나한테 햄, 햄 거리는 것은 도무지 적응되질 않는다.
Ⓐ BabyBerserker : 우우웅? 김극햄이 뭐 하는 옵바인지 애기버섯이는 몰라양♥! 그래도 애기버섯이가 돌아온 건 맞아양!
그렇듯 말을 받아주면서도 나는 떨떠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소월로 떠나기 전 이 형을 헌트웹에서 본 기억이 아직 선명했던 탓이다.
그때 헌트웹에서 이 형이 어떻게 굴었던가. 자신과 별로 심각하지도 않은 논쟁을 벌이던 사람에게 대뜸 비각성 쓰레기라며 쏘아붙였지 아마?
두 달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당시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설마 요즘도 이러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해서 정진영의 작성글을 확인했더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 5my지저스 : 지능이 낮으면 각성을 못 하는 거냐? 왜 익명의 비각성자들이 작성한 글에선 시궁쥐만큼의 지성도 안 느껴지냐?
Ⓐ 5my지저스 : 짐꾼들이 헌터 출동비 낮아졌다고 징징거리는 거 양심 있냐? A급이 중요한 일 다 하는 동안 짐이나 들고 다니는 주제에 뭘 더 바라는 거냐?
Ⓐ 5my지저스 : 비각성 쓰레기들 득실거리는 거 보면 징그러워서 현기증 나는 각성자는 개추
이 형은 왜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냐?
두 달 전에 이러는 걸 봤을 땐 동료를 잃은 충격이 워낙 커서 상태가 안 좋구나, 하고 넘어갔건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정상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오히려 악화해버렸지 않은가.
정진영이 작성한 글 중 하나를 클릭했다.
거기 달린 댓글들을 보았더니, 과연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익명 : 병신 보존의 법칙이라도 있나? 사이버매그니토 그 인간이 베헤모스 사태에서 죽으니까 왜 또 이런 새끼가 튀어나오냐? 그 레이시스트의 유지를 잇기로 작정한 거냐?
익명 : 이 인간이 사이버매그니토보다 심한 것 같은데?
익명 : 사이버매그니토도 처음 활동할 적에나 표독했지, 한 일 년 전부턴 점점 독기가 빠지는 게 눈에 보였는데······.
익명 : 확실히 그 인간, 한 반년 전부턴 독기가 빠져도 너무 빠졌지 아마? 이젠 컨셉 유지하려고 의무적으로 가스실 운운하는 게 아닌가 싶을 수준으로 순해져서 너무 심심해졌다 싶더라니, 그보다 심각한 병신이 새로 생겨났네
ㄴ Ⓐ 5my지저스 : 비각성 쓰레기들 모여서 부들부들~ 여기가 쓰레기장인가? 확 소각해버려야 하나?
그놈의 비각성 쓰레기 어쩌고. 대체 왜 그러는 건가?
나도 비각성 찌꺼기니 뭐니 속으로 되뇌기는 한다. 하지만 차마 그 혐오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엄두는 나지 않았는데, 정진영 이 형은 어째서?
심지어 신상까지 특정된 주제에 뭔 생각으로 이러는지 당최 모르겠다. 정말 그날 일로 미쳐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혀를 끌끌 차며 옷을 차려입었다.
오늘 내 헌터팀과 만나기로 한 바였다. 약속장소로 공간이동 하니 백담비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본 백담비가 말을 걸어왔다.
"심란해 보이네요. 여동생분 관련 일 때문인가요?"
갑자기 여동생 얘기가 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정진영 형 상태가 맛이 가서요."
"정진영 씨가요? 맛이 가다니, 어떤 식으로······?"
"헌트웹에서 보니까, 그 형이 비각성 쓰레기 어쩌고 헛소리하고 있더군요?"
내 라운드걸은 전직 연예인다운 연기력으로 모른 척했다.
"비각성 쓰레기요? 그게 무슨······."
"왜, 사이버매그니토라고 저번에 저 괴롭혔다던 사이코 기억하죠? 비각성 쓰레기가 그 사이코 말버릇이었거든? 정진영 형이 이제 그걸 따라 하는 것 같아요. 하필 따라 해도 왜 그런 인간을 따라 하나?"
선글라스 너머 백담비의 눈이 흔들렸다.
"그거······ 큰일이네요?"
"당연히 큰일이죠! 딱 봐도 정신과 상담 좀 받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알잖아요? 지자체에서 각성자 몸값 깎으려고 혈안이라 정신과 기록 있으면 바로 흠결 삼아서 몸값 내려버린단 거요. 그러니 무턱대고 정신과 보낼 수도 없고 어째야 하나 몰라."
"그렇죠, 확실히······. 하지만 인터넷에서 그런다고 정신과 보낼 것까지야······?"
"하여간 내가 사이버매그니토 그 인간 누군지 알게 되면 바로 공간이동으로 찾아가서 멱살 잡고 따질 겁니다. 왜 착한 형한테 나쁜 물 들였냐고 지랄발광을 하며 따져야지."
백담비가 불안한 듯 자기 상의를 만지작거렸다. 멱살 잡힐 경우를 걱정하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사이버매그니토, 그 사람 탓은 아니지 않을까요? 말씀 들어보면 인터넷 관심종자에 불과한 것 같던데요. 정진영 씨가 그토록 멀리 있는 사람 영향을 받았을 리가 없······"
"그럼 가까운 사람 영향으로 그리된 걸까요? 하지만 사이버매그니토 같은 사이코가 그 형 주변에 있을 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백담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게요······." 하고 말하는 가운데 뒷담의 주인공이 도착했다.
"두 분 모두 두 달 만이네요? 반갑습니다!"
정진영이었다. 그가 여전히 장갑을 끼고 있는 데다 소매 사이로 얼핏 드러난 손목 부분은 텅 비어있길래, 내가 물었다.
"진영이 형, 아직 팔다리 회복 안 시켰어요?"
"예!"
"왜요? 이제 충분히 치료할 수 있지 않나? 치유 능력자에게 가면 복구할 수 있을 텐데."
사태 당시에는 급한 환자들이 너무 많아 순번이 밀린 탓에 치유 능력자에게 치료받을 기회가 없었던 줄로 안다.
그러나 이젠 여유가 있을 텐데 왜 아직도 치료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치료비도 정부에서 전액 부담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야 뭐······ 지금 이대로도 생활하는 데 딱히 불편하지 않고, 또······ 유니크하니까?"
정진영의 말에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유니크하다니?"
"그게, 딱 봐도 특별하잖아요? 뭔가 근사하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아들었다. 각성자인 걸 티 내고 싶어서 일부러 팔다리 잘린 채 다니는 중이란 말이군.
"그건 그런데, 그래도 불편하지 않나? 신체 좌우 무게중심이 안 맞을 텐데요?"
"괜찮아요, 괜찮아! 멋이 우선이죠······"
마지막으로 성문영이 도착했다.
우리를 본 성문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진짜 왔네요? 뭔 고생 하셨는지 어제 TV에서 봤어요. 김극 형, 담비 누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그렇듯 우리 둘에게 인사한 성문영은 바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녀석이 정진영에게만 인사하지 않은 걸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실수인 것 같은데 지적해야 하나? 정진영 이 형, 워낙에 소심해서 이런 사소한 일도 일일이 맘에 담아둘 것 같은데······.
그러나 다음 순간, 난 성문영이 정진영에게만 인사하지 않고 넘어간 게 실수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성문영이 문득 정진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성문영은, 뒤늦게 자기 실수를 알아차리고 정진영에게 고개라도 까닥이는 게 아니라,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고개를 휙 돌려 버렸을 뿐이다.
정진영도 마찬가지였다. 무표정하게 성문영에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그 역시 나와 백담비만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냉랭했다. 어째서?
109화 각성자 정진영 - [2]
뭐, 둘이 심하게 싸웠든 말든 상관없긴 하다.
정진영과 성문영은 원래도 성격이 맞지 않아 서로를 찐따에 양아치 취급하던 사이 아닌가. 게다가 이제는 둘이 같은 팀에서 일할 것도 아니니까······.
정진영이 각성하여 따로 팀을 꾸릴 예정인 만큼, 둘을 화해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진 못했다. 그러니 굳이 뭔 일이 있었느냐 물어보지도 않기로 했다.
"그래서, 시킨 대로 새 팀원들 구성해놨냐? 학원에서 새 인원 보내주겠대?"
내 물음에 성문영이 대답했다.
"예! 학원에서 에이스급들만 따로 뽑아선 네 명 보내주던데요? 이번엔 저번처럼 친한 사람들 뽑은 게 아니라 실력으로 뽑은 거니까 다들 믿을 만할 겁니다. 체력기준 미달에 사회성까지 부족한 찐따는 한 명도 없을 거고요!"
그 말에 '체력기준 미달에 사회성까지 부족한' 정진영이 울컥했나 보다.
"굳이 에이스씩이나 필요한가? 어차피 김극 씨 팀에선 김극 씨랑 백담비 씨가 중요한 일 다 하는데. 나머지 짐꾼들은 말 그대로 짐이나 들고 다니던 게 기억 안 나나······?"
정진영의 말에 성문영이 눈을 부릅떴다. 이 와중에 늘 쿨한 척하고 싶어 하는 백담비마저 놀란 눈치였으며,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그만."
내가 성문영에게 눈짓하여 신호를 주니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쉰 다음 말했다.
"정진영 형은요. 같이 다닐 팀원들 다 구했어요?"
"저요? 예. 학원에서 보내준 사람들로 팀 구성했지요."
"잘됐네. 그래서 지자체랑 계약은 했고요?"
"그것도 이미! 서울이랑 1년에 480억······ 사실 집도 인천에 있는 만큼 인천이랑 계약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인천 괴수들은 이미 김극 형이 싹 다 처리해서 당장 계약해둔 외노자 A급들만으로도 충분하다나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진영이 변명하듯 횡설수설하는 가운데 내가 감탄했다.
"이야, 1년 480억이면 나랑 거의 비슷하네요? 하기야 형 역장 외골격 되게 세더라. 시작부터 75kg 헌터 라이플 들고 쏠 정도니까······. 게다가 일반 헌터로서 1년 활동한 것도 경력으로 쳐줄 테니까, 경력자 취급으로 더 받은 건가?"
내 말에 성문영이 바로 반박했다.
"그게 아니라 물가부터 너무 올랐겠다, 각성자 몸값이 너무 치솟아서 그래요! 저번 사태로 기존 서울 헌터들이 절반이나 전사했잖아요?"
"하기야······."
"서울에선 새로 각성한 사람들 빈자리에 넣어서 땜빵하고 싶어하는데, 협회에서 훈련부터 제대로 시키고 현장 투입해야 한다며 기를 쓰고 막는 중이라던데요? 이 상황에 형이 신입으로 데뷔했으면 그 열 배는 받았을걸요?"
이 말에는 정진영도 뭐라 대응하지 않는 걸 보니 사실인 듯했다.
성문영이 고개를 돌려 백담비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이제 담비 누나는 어쩔 거예요? 담비 누나도 인천시랑 계약 종료된 걸로 아는데. 이젠 서울시랑 새로 계약하실 건가?"
그리고 백담비가 대답했다.
"김극 씨가 어디와 계약하는지 보고 저도 정해야겠죠······?"
"왜요? 설마 이후로도 김극 형이랑 같이 활동하시게요?"
쑥스러웠는지 백담비는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쿨한 표정으로, 그러나 귓바퀴가 살짝 빨개진 채 백담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왜요? 그리 세트로 붙어 다니면 딴 A급들만큼 돈 못 받지 않나?"
"그래도요."
"게다가 이젠 누나도 독립할 능력 넘치잖아요! 심지어 지금 서울시 헌터 공백 상태라 담비 누나가 계약하자고 하면 국안부 장관이 맨발로 달려 나와서 계약서에 사인할 텐데······?"
성문영의 물음에 백담비가 대답했다.
"돈은 이미 벌 만큼 벌었어요. 이 정도로 돈 번 사람들이 그렇듯, 이젠 돈을 넘어선 다른 가치를 추구할 때가 되었고요."
"돈을 넘어선 다른 가치가 뭔데요?"
"명예와 사회적 기여? 그리고 강력한 괴수 잡아가며 각성자로서 더 성장하기 위해 계속 헌터 활동하려는 건데······ 그러려면 저 혼자 활동하는 것보단 김극 씨랑 활동하는 편이 더 낫지 싶더군요."
한편 성문영은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눈치였다. 백담비의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와 백담비를 번갈아 쳐다보는 것이 뭔 생각을 하는지 알 만했다.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대체 소월에서 두 달이나 같이 다니며 뭔 일이 있었던 거지?'
굳이 해명해주지 않은 채, 이번 모임을 파했다.
정진영과 성문영은 헤어질 때도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각자의 갈 길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나와 백담비만 남겨진 가운데, 내가 입을 열었다.
"담비 씨, 황금화살상 시상식 아직 안 열린 거 알아요?"
내가 말을 마친 그 즉시, 백담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날 바라봤다.
"정말요?"
"예. 시상식 개최하려던 방송국도 상태가 안 좋아서 원래 개최하려던 1월에 개최 못 했다던데요? 그래서 2월로 미뤄졌다던데."
"아······. 그걸 어떻게······?"
"돌아오자마자 바로 그것부터 찾아봤죠? 그랬더니 그런 소식이 나오더라구요."
그야말로 바라 마지않은 일이었나보다. 백담비는 그놈의 무표정마저 깨진 채 한동안 계속 입을 뻐끔거렸다.
내가 그 뻐끔거리는 입에 타이밍 맞춰 손가락을 넣으면 어떨까, 하고 고민하는 동안 백담비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어째선지 몰라도,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도 김극 씨한테 전하려던 소식이 하나 있는데."
"소식이요? 어떤?"
"김극 씨가 여동생분 관련해서 밀어붙이려던 법 있잖아요? 그 왜······"
그러고 보니 내 어두운 표정을 보자마자 여동생 관련 일이냐며 물었지 아마? 내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그놈의 황금화살상을 알아봤듯, 내 라운드걸 또한 내 관련 일을 신경 쓴 모양이다.
"각성자 차별금지법?"
"예, 그거요. 그게 우리가 소월로 가있던 동안 발의됐다던데······."
그 결과가 좋지 못했으리란 걸 이 시점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말하다 말고 백담비가 내 눈치를 살폈기 때문이다.
나는 불길함을 느끼며 물었다.
"설마 통과를 못 했습니까?"
"아뇨, 통과는 된 거 같아요. 다만 본회의 투표에서······."
이어진 설명에 따르면, 재석의원 287명 중에 반대만 240명이었다고 했다. 무효는 7표에 찬성 40표에 불과했다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
정진영은 집에 돌아가기 무섭게 헌트웹을 켰다.
마음속 울분을 담아 글 하나를 작성했다.
Ⓐ 5my지저스 : 짐꾼들이 주제 파악을 못해도 너무 못하는데 왜 이러는 거냐?
특히 김극 팀 짐꾼들은 꿀을 빨아도 엄청 빨았던 거 모두 잘 알지 않나? 그 와중에 김극햄은 또 아랫사람들에게 이것저것 퍼줘서 짐꾼들 대우 끝내주게 잘 받았는데, 정말 자기 기여가 커서 대우 잘 받았다고 여기는 건가? 뭘 믿고 설치는지 당최······?
성문영이 보라고 쓴 글이었다.
그 쓸모도 없는 비각성자 새끼. 각성자들 사이에서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목소리 높이는 꼴을 보기가 역겨웠다.
그 와중에 이쪽에 시비까지 걸었는데, 각성자와 싸울 엄두는 나지 않으니 말로만 툭툭 건드리는 꼴이라니? 기회가 되면 제대로 손봐줄 예정이다.
잠시 후 올린 글에 달린 댓글을 보았더니, 예상치 못한 댓글이 하나 있었다.
Ⓐ syberMagneto : 이러는 거 진짜 보기 안 좋으니까 그만하지 않을래?
사이버매그니토였다. 헌트웹의 대표적인 네임드. 정진영 본인도 저 사람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어째서?
다른 사람들도 이쪽이 올린 글의 내용보단 죽은 줄 알았던 네임드의 귀환에 더욱 신경 쓰는 눈치였다.
익명 : 엉 찐이다 ㅎㄷㄷ
익명 : 사이버매그니토 정말 살아있던 거임? 베헤모스 사태로 죽은 거 아니었나?
Ⓐ GangStar☆ : 작성글 검색해보니 진짜 같은데. 그런데 왜 나치 동료가 늘어났는데 기뻐하질 않고 말리는 거임? 진짜로 컨셉 포기함?
Ⓐ syberMagneto : 우으······ 내 컨셉은 이미 뺏겼어······.
Ⓐ GangStar☆ : 그러니까 컨셉 뺏겨서 이젠 더 안 그럴 거다?
Ⓐ syberMagneto : 응. 내 죄를 깨달았어······ 회개해서 이젠 착해질 거야
익명 : 거울 치료 효과 확실 ㅎㄷㄷ
Ⓐ Dragon : 아니 내가 분명 사이버매그니토 이 인간 베헤모스 사태 이후에도 멀쩡히 댓글 다는 거 봤다니까? 왜 다들 이제야 놀라서 호들갑을 떠는 거임?
Ⓐ Dragon : 그리고 또······ 그 전직 경찰 본명이 강준만이었나? Justice1994 그 인간도 살아서 글 싸는 거 내가 봤는데 왜 다들 안 믿는 거지?
익명 : 아니 강준만은 모가지 반쯤 잘린 거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임?
Ⓐ Dragon : 내가 그 사람 헌트웹에 생존 신고하는 거 봤다니까?
익명 : 네가 봤다는 생존 신고 글 그거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오는데 대체 뭔 소리임? 뭘 잘못 보고서 자꾸 그리 주장하는지 모르겠네 진짜
익명 : 받아들이기 싫겠지만 강준만은 베헤모스 사태에서 전사한 거 맞아······.
베헤모스, 그놈의 베헤모스.
그 단어가 뇌에 입력된 순간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날 있었던 일, 그날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자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생각을 통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기어이 임형택 씨의 얼굴마저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정진영의 위아래 턱이 덜덜 떨렸다.
그날 있었던 일마저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날, 임형택 씨는 존엄하게 죽지 못했다.
그 아저씨의 죽음은 허무했다.
*******
'장병곤 씨, 일어나봐요! 도저히 못 일어서겠어요?'
정진영은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하는 장병곤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쪽에서 재촉해도 그가 움직이지 못하길래 그 몸을 아예 뒤집어보았다.
그리하여 장병곤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동공이 풀린 채 핏기가 사라진 동료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제야 정진영은 뭔가 잘못됐음을 눈치챘다.
'야, 씨! 개······'
뒤에서 임형택 씨가 욕설과 함께 뭐라 외치는 듯했지만, 굉음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데스클로 한 마리가 시야에 담겼다. 놈이 이쪽을 덮쳤다.
옥상에서 떨어졌나? 아니면 숨어있다 기습한 건가? 알 수 없었다. 정진영도 반사적으로 총질해서 몇 발 맞히긴 했다.
그러나 정진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오른쪽 다리가 잘려 나간 뒤였다.
'악!'
땅바닥에 엎어진 정진영이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그 오른팔마저 잃었다. 데스클로의 역장 날붙이가 통증을 느낄 여유조차 주지 않은 채 깔끔하게 팔이며 다리를 잘라버렸다.
이 와중에 정진영도 지난 사냥 경험이 헛된 것은 아니어서, 앞서 이쪽 총질에 당한 데스클로가 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긴 했다.
'씨발! 씨발······'
피투성이가 된 데스클로가 제 몸에 엎어진 뒤, 정진영 또한 더 움직이지 못했다.
정진영은 어떻게든 데스클로의 시체에서 빠져나오고자 노력했다. 데스클로 한 마리가 여기 출몰했다면 더 많은 데스클로들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이대로는······.
굉음마저 뚫고, 성난 목소리가 울렸다.
'종호, 문영! 너희는 쭉 뛰어! 내가 가서······"
임형택 씨였다. 그 혼자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버려지지 않았단 생각에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던 그때였다.
골목에서 한 형상이 튀어나오는 걸 정진영은 보았다.
데스클로였다. 특유의 도약력으로, 그 괴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뛰쳐나와서는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임형택 씨에게 도달했다.
그 갈고리발톱이 임형택 씨의 머리에 꽂혔으며, 그걸로 끝이었다.
임형택 씨는 머리가 반쯤 갈라진 채 죽었다.
그 과정에서 임형택 씨는 어떤 대단한 희생이나 마지막 활약을 하지도 못했다. 기껏 위험한 상황에 영웅적으로 나선 보람도 없이, 영화 속 엑스트라처럼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죽었다.
정진영은 그 허무감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멍하니 데스클로의 이어진 행동을 바라봤다.
데스클로, 그 도약력으로 볼 때 역장체가 분명한 괴수는 저 멀리 도망치던 이종호와 성문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장체가 그 둘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꼼짝도 못 하는 이쪽은 언제든 돌아와서 뜯어먹을 수 있으니 생생하게 살아 도망치는 둘부터 사냥하려는 건가?
정진영은 놈을 향해 총질하려 했지만, 무심결에 움직이려던 오른팔은 진작 잘려나가고 없었다.
몸을 일으켜서 반격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압박감 속에서, 이대로면 죽을 것 같다는 스트레스와 방금 겪은 상황에 의한 스트레스 속에서 정진영은 환각을 보았다.
각성자들이 각성할 때 본다는 환각이 분명했다······.
체감한 시간은 길었지만 실제 스친 시간은 순식간이었나보다.
정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역장체는 여전히 달리고 있으며 이종호와 성문영은 쫓기는 중이었다.
문득 장병곤 씨의 시체 옆에 널브러진 헌터 라이플이 눈에 띄었다. 김극이 돌아오면 언제든 가져가서 쏠 수 있도록 장전까지 해둔 물건이었다.
새로 생겨난 역장 팔과 역장 다리의 힘으로, 그 물건을 들고 쏘았다. 초심자의 운인지 원래 솜씨가 좋았던 건지 몰라도 날아간 기관포탄은 역장체를 정확히 관통했다.
끔찍한 와중에 희열이 느껴졌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희열 속에서 정진영은 생각했다. 내가 저 둘을 구했다!
정진영은 그 둘에게 달려갔다. 이종호와 성문영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성문영은 이쪽의 역장 외골격을 보고서 흠칫한 듯했지만, 잠시뿐이었다. 그가 버럭 소리질렀다.
'이 씹새야! 너 구하려다 임형택 씨가 죽었잖아!'
'어쩔 수 없었어! 장병곤 씨가―'
'어쩔 수 없었긴, 등신 새끼야! 아까 그 목소리에 홀려서 사람들 안전한 데서 기어 나오는 꼴 보고서도 그걸 또 속아? '
이 상황에 비난을 받으니 정진영은 울컥했다.
'급박한 상황에 머릿속에 목소리가 직접 울리는데 뭔 수로 속임수인지 아닌지 판단해! 너희도 장병곤 씨가 외치는 줄 알았는데 무서우니까 안 나선 거 아냐?'
'아, 그러니까 너는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를 도우려 한 의리 있는 남자지만 우린 동료 내팽개치고 도망치려 한 씹새끼들이다?'
'어!'
이후로도 격한 말싸움을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사실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당시 자신은 용기를 내어 장병곤 씨를 구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이종호와 성문영 그 두 양아치 쓰레기마저 구해냈단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당시 역장체가 근처에 있었던 이상, 설령 그때 모두가 계속 뛰었어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리 없으니까.
그나마 자신이 각성하여 헌터 라이플을 들고 놈을 제거했기에 세 명이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데, 감히 이쪽을 비난하다니? 성문영, 그 양아치 쓰레기가 자기 비겁한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이쪽을 역으로 공격하는 게 틀림없다.
그와 함께 또 하나 확실한 사실이 있다.
그날 각성한 역장 외골격은 보상이다. 의리 있게, 용기를 내어 행동한 보상.
성문영은 임형택 씨를 제물로 바쳐 각성하니 좋냐고 이쪽을 비난하지만······ 그건 질투심에 그러는 것이 틀림없다.
헌트웹에서도 그랬다. 익명의 비각성자들은 각성자들을 숭상하는 동시에 질시하는 법.
하여간 성문영도 그렇고, 평범한 비각성자들이 하는 짓은 왜 그토록 추하단 말인가?
반면 각성자들은 그렇지 않다.
각성자들은 특별하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정진영은 각성자 중에 가장 자주 접한 김극을, 백담비를 떠올렸다.
외모부터가 일반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들. 독보적으로 영웅적이거나 아름답게 생긴 그들은 일반인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태연히 해냈다. 김극의 경우에는 아예 인천의 영웅에 나라의 영웅이 된 상황 아닌가.
정진영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용기를 낸 보상으로 각성했으니······.
이젠 나도 그들 중 하나다. 데스클로 한 마리한테 벌벌 떠는 비각성자가 아니라, 그 괴수들을 쓸어버릴 각성자요 초인이다. 헌트웹에서도 배지를 발급해주는 선택받은 인간이다······.
팔다리가 쑤신다.
너무, 끔찍하게 쑤신 나머지 정진영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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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의원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