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한반도 수호신 강준치 - [1]
날 찾아온 석장실을 상대로, 내가 헌터 일을 언제 그만두든 상관없다고 말했던가?
거짓말이었다. 내가 이 헌터 일에 얼마나 큰 보람을 느끼는데 이제 와서 그만두다니?
헌트웹에 내가 올린 글을 봤다.
애기버섯이 위문공연, 어쩌고 하는 글이었다. 강화도에서 퉁퉁이를 쓰러뜨린 다음 날에 올린 글이었는데, 그 글을 올린 지 몇 시간 뒤에야 내가 강화도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뉴스가 나왔지 아마.
그 뉴스를 보고서야 헌트웹 유저들은 비로소 내가 올린 글을 해석할 수 있게 된 듯, 이후로도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린 바였다.
익명 : 빌딩보다 단단했다는 괴수 잡아놓고 이딴 글 올린 거였나 미친놈이??
Ⓐ Justice1994 : 김극, 그는 신인가?
Ⓐ syberMagneto : 김극도 김극인데 백담비 저 여자는 슬슬 얼레기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네. 이쯤 되니 어지간한 A급보다 훨씬 우월한 것 같은데······ 옛날에 저 여자 음해에 동참했던 놈들 싹 다 색출해서 가스실 보내야겠지?
ㄴ 5my지저스 : ㄹㅇ
익명 : 진짜 괴물들이 화염 정령인지 빌딩 스펙인지 신경 전혀 안 쓰고 마주치는 족족 싹 다 잡아버리네? 인터넷에선 똥글이나 올려대는 인간이 ㅎㄷㄷ
Ⓐ 엘마야캐요 : 이 친구 처음 데뷔했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성장세가 말도 안 되는 속도인 데다 성장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도 않는데 이거 참 독보적인 수준을 넘어섰어. 이러다 진짜 한국에 S급 하나 더 생기는 거 아닌가?
저 댓글 한 줄 한 줄을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 도파민이 샘솟는다.
저 모든 칭송, 저 모든 반응에 나는 지대한 자부심을 느낀다.
단순히 인터넷 반응을 볼 때뿐만 아니라, 내가 사냥 다닐 때마다 응원하러 나왔거나 헌터들 도시락을 싸주러 나온 아줌마 아저씨들을 볼 때마다 늘 느끼곤 하는 자부심이다.
내 활동이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내 행동 한 번 한 번에 모든 사람이 반응한다는 자부심······.
정말이지 이 헌터 일을 시작한 이후로 모든 일이 잘 풀렸음을 실감한다. 이 일을 그만두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마도 이게 바로 환각 속 김극 나와 지금 나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 아닐까?
헌터 데뷔할 때부터 동료들이 떼죽음을 당하더니, 자길 향한 음해성 기사까지 퍼진 환각 속 김극이야 헌터 일을 그만두는 데 별 미련이 없었으리라.
그래서 환각 속 김극은 얼마든지 언제 들킬지 모를 사고를 치고 다닐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난 아니다.
지금 내가 가진 명예와 성과를 버릴 수 없기에, 난 도저히 환각 속 나처럼 선을 넘을 엄두를 낼 수 없다.
나라를 뒤엎고 싶다느니, 서울에 핵을 터뜨리고 싶다느니 하는 충동들은 그저 망상으로만 그칠 뿐······.
그리 생각할 때, 저번 진범 씨 사건은 상당히 아찔한 일이었다.
내가 경찰서에서 난동을 부리다니? 다른 헌터가 그랬으면 당장 면허 정지될 뿐만 아니라 바로 특무대가 출동할 일 아니었던가.
난 여전히 그날 거둔 승리에 쾌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좀 찝찝하기도 하다.
경찰에서 패악질을 부린 그 일은 내가 생각해도 꽤 심했다. 평소의 나라면 그 정도로 과격하게 굴진 않았을 텐데, 갑자기 왜 그랬을까?
그날 내가 화가 나서 자연스레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환각을 여러 차례 접한 영향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환각들이 내게 분명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환각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비각성 찌꺼기 같은 혐오 단어를 머리에 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몇 번이나 노력해봤지만 별 효과가 없단 것도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툭하면 그 단어가 뇌리를 스치지 않았던가? 비각성 찌꺼기들이 하는 짓이 너무 끔찍해서 어쩔 수 없긴 하지만 하여튼.
내가 이룬 모든 것을 계속해서 누리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몸을 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헌트웹을 켰다.
유독 조회수가 높은 글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역시나 헌트웹 네임드 중의 네임드가 올린 글이었다.
Ⓢ Kang : 베헤모스 대체 언제 꺼지는 거냐?
나 대체 언제쯤이면 부산 돌아갈 수 있는 거고?
한두 달 호텔에 처박혀 있다 보면 상황 끝날 거라 생각해서 정부 요청대로 서울에 오긴 왔거든?
그런데 벌써 9월 중순인데도 아직 이 지경이네. 베헤모스는 안 떠났고. 난 호텔이 아니라 지하에 갇혀있고.
더워죽겠고 답답해 죽겠고 아주 그냥 미쳐버리겠다 진짜. 헬조선 갯강구들 때문에 이게 뭐냐?
베헤모스고 국가방위고 나발이고 다 좆까라 하고 확 떠나버리고 싶네 진짜······ 아니면 성질대로 확 다 뒤집어버려?
나는 혀를 찼다. 강준치 이 친구, 또 허언하고 있구만?
나도 이제 이 친구의 행동 패턴을 잘 아는 바이다. 그로써 판단하건대, 강준치 이 친구가 말은 이렇게 해도 한국을 떠나거나 국가를 상대로 반기를 드는 일은 결코 없으리란 확신이 든다.
미래까지 엿보는 예언자의 직감으로 내린 판단이니 어긋날 리는 없을 듯하다. 나이토 상이 비각성 찌꺼기인 것만큼이나 확실한 일이다.
지금 이 글도 그저 추종자들에게 위로받으려고 올린 글이 분명하므로 진지하게 반응할 필요까진 없으련만, 어쩐지 퍽 진지하게 반응하는 헌터 하나가 눈에 담겼다.
Ⓐ 돌머리청년 : 형 아직도 그 지하에 처박혀 있어?
Ⓢ Kang : ㅇㅇ······.
Ⓐ 돌머리청년 : 거기에 전기랑 수도 연결 안 된 건 여전하고?
Ⓢ Kang : ㅇㅇ······ ㅠㅜ
Ⓐ 돌머리청년 : 아이고야······.
Ⓐ 돌머리청년 : 왜 그리 사서 고생을 해 이 인간아
Ⓢ Kang : 이게 왜 사서 고생이야 ㅅㅂ
Ⓐ 돌머리청년 : 알아서 고생하는 게 아님 뭔데?
Ⓢ Kang : 아니 진짜 장난하냐? 갯강구들이 도청 시도했다가 걸렸으니 또 당할 순 없으니까 고생하는 건데 이게 왜 내 탓이냐? 나 지금 이미 답답하고 짜증 나서 폭발하기 직전이니까 괜히 깐죽거리지 좀 마라 부탁이다 진짜
Ⓐ 돌머리청년 : 진짜 상태 심각한가 보네? ㅎㄷㄷ
Ⓐ 돌머리청년 : 형 기다려 내가 간다
그 대화를 보며 생각했다.
석장실이 가서 뭘 어쩌려는 걸까. 강준치한테 슬슬 지상으로 나오라고 설득하려고? 아니면 정부에 대한 불만이 가득해 보이니 직접 가서 달래려는 건가?
석장실 저 친구가 정부 측 스파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친한 형을 도우려는 저 행동마저 수상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저 친구, 정말로 정부 측 요원이라면 정말이지 완벽한 성과를 거둔 셈 아닌가? 나와 강준치, 즉 한국에서 강하기로 일이 위인 각성자들을 상대로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는 중이니까.
어쩌면 스파이로서 일부러 중요한 각성자들에게 접근해서 친해진 것일지도······.
뭐, 그래도 역시 저 친구가 스파이란 것은 확실한 일까진 아니다.
단순히 유죄추정이 싫어서 판단을 보류하는 게 아니라, 저 친구가 스파이가 아닐 수 있다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 그 환각에서 날 도와 각성자 병사들과 비각성 노예들이 넘어갈 게이트를 열어준 것은 다름 아닌 석장실 저 친구였으니까······.
*******
9월 말, 드디어 강화도에서의 사냥이 끝났다.
그곳을 정리하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는데, 처음 게이트가 열린 곳이어서인지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인적이 뜸한 곳마다 괴수가 들끓었고 사람의 유해도 여기저기 널려있던 것이 사상자도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을 듯했다.
그 모든 사실을 강화도에서 직접 활동하고서야 알게 됐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숨기기 위해 정부에서 언론에 보도를 자제시켰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젠 끝이다.
이제 강화도에 야생 괴수들은 없다. 언제 다시 게이트에서 튀어나와 번식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하여튼.
10월 초, 내가 이끄는 헌터들은 다시 인천 본토에서 사냥을 이어나갔다.
주로 게이트에 처박힌 괴수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게이트 내부 괴수들의 개체 수가 내가 강화도로 떠나기 전보다 늘었으리라 예상했다. 베헤모스를 따라다니다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괴수들이 게이트 내부에서 여기저기 이동하다가 인천 영역에 여럿 도달했을 테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내 예상보다 게이트 내부 괴수들의 수가 적었다.
심지어 내가 강화도로 가기 전보다 줄어든 것 같았는데, 대체 어째서?
혼자 게이트에 들어가 정확한 상황을 살피고 나온, 백담비가 자기가 본 내용을 모두에게 전했다.
"게이트 내부 괴수들이······ 아예 도망을 치던데요?"
"예? 그게 무슨 소리?"
백담비는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말 그대로요. 괴수들이 도망치고 있어요. 정확히, 김극 씨가 있는 곳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그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생각하던 중에 정진영이 뭔가 깨달았다는 양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김극 씨 보고 도망치는 거 맞죠?"
임형택 씨가 말을 받았다.
"김극 씨를 보고? 아······ 생각해 보니 그거 말곤 이유가 없네?"
"진짜로요! 왜, 강준치 있는 곳으론 게이트 괴수들이 못 나오잖아요? 그거 비슷한 거죠! 그리고 어지간한 괴수들 입장엔 김극 형이 강준치보다 훨씬 무서운 게, 김극 형은 게이트에 처박힌 괴수들도 끄집어내서 죽여버리니까······"
"확실히 게이트에서 그거 보고 괴수들이 겁먹어서 저리 반응하는 거겠지?"
"예! 다른 괴수들은 게이트 안에서 그걸 몇 번이고 목격했을 테니까!"
그 대화를 나이토 상의 카메라맨이 녹화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번 나이토 상 유튜브 방송 제목은 '게이트 안 괴수들도 기겁하게 하는 남자'쯤 되겠군그래.
보다시피 시작부터 좋았다. 그렇게 10월, 나는 게이트 안팎의 괴수들을 구석구석 정리했다. 이미 사냥을 마친 곳도 최근에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 싶으면 다시 가서 그 주변 괴수들을 수색해 제거했다.
인천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했다. 지도를 펼쳤을 때 인천과 미국 중에 어디가 더 넓은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치 인천 땅이 광활함을 고려하면 참으로 힘겨운 일었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그리하여 10월 말, 마침내 인천 탈환 프로젝트가 끝났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그 수를 줄인 보람이 있는 건지, 아니면 정진영 형의 추측대로 게이트 내부 괴수들이 내게 겁먹어서는 죄다 떠나버린 것인지 몰라도 끝내 11월이 될 때까지 인천에서 게이트는 열리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리하여 11월 초, 인천은 축제 분위기였다.
*******
TV든 인터넷이든, 여러 매체에서 내 얘기를 하는 중이다.
'인천 탈환 프로젝트, 초기 목표의 300% 초과 달성 후 종료 (···)', '인천의 평온한 10월, 한 지역에 피어난 희망 (···)' '헌터 김극, 데뷔 후 1년 동안의 기적 (···)'
지금도 여러 공중파 뉴스에서 이번 일을 다루고 있었다. 게이트가 열린 지 5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사태종결의 희망이 보인 것 같다느니, 내년 1월 헌터 김극에게 주어야 할 계약금은 역대 최고액수일 거라느니 어쩌느니.
언론이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는 중이며, 요새 있던 일로 정부에 내가 찍혔으리란 점을 생각해 보면 날 향한 언론의 열렬한 찬양은 신기한 일이기도 했다.
정부에서 날 싫어하는 건 분명할 텐데, 그래도 내가 눈에 띄게 활약하면 그 활약상을 반드시 뉴스에 내보내 주곤 하는 것이었다.
정부 입장엔 내가 싫은 건 싫은 거고,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을 국민에게 전할 기회를 놓치기는 싫은 모양이지?
지금쯤 헌트웹에도 날 칭송하는 글들이 가득할 텐데. 아쉽게도 당장 스마트폰을 켜서 그 글들을 찾아 읽을 수는 없었다.
"헌터 김극을 위해 건배!"
인천시장님께서 건배사를 외치더니 회장의 모두가 비슷한 문구를 외쳤다. '헌터 김극을 위해······'
그러고서 인천시장님은 자랑스러운 걸음걸이로 다른 공무원이며 시의원들 앞에 나아가시더니, 자랑스레 말씀하셨다.
"내가 처음에 김극 씨한테 보낼 계약서 견적 짤 땐 말이야! 솔직히 이 정도 성과 거둘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세계에서 유이한 공간이동 능력자라는데 그게 뭐가 대단한진 잘 모르겠고, 일단 전직 UFC 파이터라니까 파이팅은 넘치겠구나, 딱 이 정도로 생각해서 계약서 보냈지.
그러니까 응우옌 그 씨발놈처럼 돈 처먹고 태업하진 않겠구나, 뭐 이 정도로 생각했단 말이야. 알다시피 각성자 헌터란 게 딱 그 정도만 해주면 돈값 충분히 하는 것이거든?
수억 원짜리 미사일 펑펑 날리느니 그냥 각성자 헌터 쓰는 게 훨씬 싸게 먹히니까, 대충 몇 달에 한두 번 출동해서 안 내빼고 싸움 제대로 해주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계약하려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 봐요! 내가 지금까지 인천에 기여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한 게 많고 똥줄 빠지게 애쓴 게 얼마나 많은데, 지금까지 내가 벌인 모든 일 중에 김극 씨한테 계약서 보낸 그게 제일 으뜸이야······"
딱 보기에도 기분 좋은 듯한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 또한 기분 좋게 콜라 한 잔을 더 들이켰다. 그러자 인천 시장님이 부리나케 달려와서는 바로 한 잔 더 따라 주었으며 난 호탕하게 한 잔 더 들이켰다.
정말로, 그저 최고의 날이었다.
"준치 형,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씨발 스파이 새끼가?"
96화 한반도 수호신 강준치 - [2]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눈에 익은 사람들이 회장에 가득했다.
박미형 씨를 위시한 인천 시의원들은 물론 날 따라다니며 헌터들 밥 챙겨주던 아줌마 아저씨들까지. 그리고 내 헌터팀의 가족들과 헌터 학원 원장까지 여기 있었다.
저쪽을 슬쩍 보니 주민대표 아저씨가 내 학원 원장과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부평 수렵 학원이면, 부평역 5분 거리에 있다는 거기 맞죠?"
주민대표 아저씨가 반갑게 아는 척하자 학원 원장이 머리를 긁었다.
"어, 우리 학원이 그리 유명했던가요?"
"유명한 걸 넘어 아주 그냥 귀에 박혀버렸죠! 김극 헌터가 인터뷰할 때마다 그놈의 부평역 5분 거리에 있는 부평 수렵 학원 어쩌고 해대서요! 젊은 애들은 아예 밈처럼 쓰던데요?"
"아······ 어쩐지. 학원 수강생들이 밥 어찌 그리 빨리 먹었냐고 물어보기만 해도 부평 수렵 학원에 다니면 이 정돈 기본일 수밖에 없다며 이상하게 대답하더니······"
내가 그동안 신경 쓴 보람이 있어서, 내가 다닌 저 학원은 내 덕을 여러모로 보았다. 오전반 오후반을 나눈 뒤로도 수강 신청이 너무 넘쳐나서, 이젠 학원에 등록하려거든 따로 몇 개월씩 대기해야 할 정도라니까.
그리고 내 덕을 본 사람이 여기도 하나 더.
인천 시장님이 내게 콜라 한 잔을 또 따라 주시면서 히죽 웃으시길래 내가 말했다.
"어휴, 저도 술이라도 따라드려야 할 텐데 자꾸 받아마시기만 하니 민망해서 원."
"민망할 게 어딨어요? 김극 씨를 위한 자린데, 그냥 신나게 마셔요!"
"그래도요. 이거 너무 죄송해서라도 후원 적당히 해드리면 안 되겠는데······!"
정치 후원금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년 4월에 있을 총선에 인천 시장님께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다니까, 그때를 위해 내가 후원하기로 약속했거든.
그리고 인천 시장님이 살짝 움찔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 그게. 김극 헌터께서 주시기로 한 후원금은 아무래도 미리 거절해야 할 것 같아요."
"어째서요?"
"그게, 요새 국회의원쯤 되면 지켜야 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나 봅니다. 금배지 달고서 유력 각성자들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며 사적인 도움을 주고받으면 안 된다나? 각성자 헌터한테 정치 자금 받는 것도 문제 될 수가 있다고, 이번에 당 차원에서 경고를 받아서는······"
예상치도 못한 말에 내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 각성자들이 뭐 조폭이라도 됩니까? 이쪽에서 건넨 정치 자금이 문제 되게?"
"그게, 국회의원쯤 되는 정치인과 사이 돈독해진 각성자가 정치깡패 아니면 정치인의 사병처럼 될까 봐 다들 걱정하는 모양입니다. 미국만 해도 도널드가 각성자들 고용해다가 정적들 제거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저 음모론 아니던가요?"
"실제로 각성자들과 유력 정치인들이 손잡고 혼란 일으키는 중인 나라도 많다는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그런 일을 방지하려고 각성자와 거리를 두게 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시장님이 부연하길, 현재 한국에 대기업 소속 각성자가 없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했다.
대기업이 경호업체나 PMC의 형태로 각성자들을 모아 단체를 조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만, 정부 차원에서 눈을 부라리며 막기 때문에 대기업에서 감히 그러질 못한다고.
어느 대기업에서 각성자 수십 명이라도 고용했다간 규모가 작아 보여서 덜 위험해 보일 뿐, 실질적으론 나라 안에 기업 소속 군대가 탄생하는 셈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철저히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현재 민간인 각성자들은 어디 중소기업 경호업체나 헌터 협회에 소속될 뿐이며, 정·재계와 각성자 사이의 연결을 막으려는 이 모든 조치는 나라에서 각성자들의 군벌화를 경계하는 까닭이란 것이었다.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정부에서는 각성자들이 조직되는 일을 경계했다······ 문득 목 잘린 김형만 씨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인천 시장님이 당황해서는 말했다.
"미안합니다. 즐거운 자리에서 이런 말씀 드리면 안 되는 건데. 그렇다고 후원금 주신다는 말에 얼버무리고 대충 대답 회피하자니 그건 그것대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확실히 각성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나치들한테 핍박받는단 생각에 불쾌해지긴 했지만, 빠르게 부정적인 생각을 머릿속에서 쫓아냈다. 이 좋은 자리에서 표정을 붉힐 수는 없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뇨, 제가 먼저 말 꺼낸 건데요 뭘. 오히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고맙네요."
"이해해주시니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도 받은 도움 잊을 생각은 없으니까, 언제든 연락해요. 알았죠? 가능한 선에서 적극 도울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의원 나리들도 알게 모르게 알고 지내는 각성자 한둘씩은 다 있나 보던데요 뭘. 초선 주제에 그러고 다니면 밉보일지 모르겠지만 뭐, 인천 남아끼리의 의리가 먼저 아니겠습니까?"
뭔 의리를 지키겠단 건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내가 인천 탈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서 그 과정에 인천 시장님이 매번 목소리 실컷 내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했거든.
덕분에 내 인천 탈환 프로젝트는 현 인천 시장님의 업적 중 하나가 되었으니, 이번에 시장님이 나갈 총선에서 거둘 성적은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공석이 된 인천 시장직은 박미형 씨가 넘겨받으리라. 인천 시민들의 지지와 인천 공작인 내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임명을 받아 인천 시장직에 올라서는 인천 땅을 적법하게 통치하실 테지.
곧이어 미래의 인천 시장, 박미형 씨도 내게 다가왔다.
"김극 씨. 시장님이랑 뭔 이야기를 그리 오래 해요? 어휴, 너무 잘 나가니까 내가 이렇게 함부로 말 걸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함부로 말 걸었다간 남들이 보고 세뇌 능력 정밀조작하는 줄 알까 봐요?"
내가 놀렸더니 박미형 씨는 날 살짝 노려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 걱정도 물론 있구요! 하여간 요샌 환장하겠어, 진짜. 누구 만나기만 해도 다 날 알아봐서는 자긴 제발 세뇌하지 말아 달라고 놀려대니까······"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어휴, 진짜 농담으로도 그런 말 하지 마요! 나도 요샌 헷갈려. 얼마 전엔 길가다가 마주친 시민이 내 시의원 사무실 번호를 줄줄 외우길래, 놀라서 어떻게 아는 거냐고 내가 물어봤죠.
그랬더니 그쪽에서 내가 세뇌 능력으로 자기 머리에 정보 주입한 거 아니냐고 막 따지는 거 있죠? 딱 봐도 밈으로 갖고 놀다가 외워버린 것 같던데, 얄미워 죽겠어 진짜."
길거리 시민들마저 얼굴을 알아볼 만치 정치 꿈나무가 무럭무럭 성장하도록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로 대충 알아듣기로 했다. 실제로도 그 비슷한 뜻일 테고.
내가 히죽 웃었더니, 박미형 씨가 날 또다시 살짝 노려보고는 계속 말했다.
"시장님이 이미 하신 말씀 반복일지 모르겠는데, 진짜 헌터 해보라고 권유할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잘 나가실 줄은 진짜 몰랐어요. 그땐 그저 먹고 살기 막막할 거 같으니까 헌터라도 해보라고 권한 거였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말도 안 되게 커버리더니, 이젠 여러모로 큼지막한 사고까지 치고 다니니······"
"내가 치고 다니는 사고라면 그 뭐냐, 버스 시위사건이며 진범 씨 사건이요?"
"예. 그것들!"
"왜요, 제가 사고치고 다녀서 걱정되시나?"
"그야 걱정되죠. 그래도 뭐, 말릴 수야 있나요? 대한각성연대 출신이 이렇게 활약하는 걸 보니 단체 운영했던 보람이 느껴져서 흐뭇하긴 해."
이걸 또 잘했다며 응원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만, 대한각성연대 시절만 해도 박미형 씨는 나보다 더한 강경파였지 아마? 국가의 사정이 어떻건 한 발짝도 양보해선 안 된다고 부르짖던······.
칭찬받았단 생각에 내가 씩 웃는 가운데 박미형 씨도 웃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무튼 이렇게까지 잘 나가니 보기 좋네요, 여러모로! 이제 여동생분만 자유로워지면 완벽한데······."
이후로 나는 여기 모인 아줌마 아저씨들에게도 일일이 다가가서 감사의 말을 건넸으며, 모두에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한 다음에는 내 헌터 팀과 시간을 가졌다.
이 업적으로 그놈의 황금화살상은 확정이라 여겼는지 무표정한 척하면서도 자꾸 입꼬리가 천장에 닿으려는 백담비, 요란하게 웃고 떠드는 이종호와 성문영, 조용히 제 가족들과 밥 먹는 장병곤과 정진영을 지나쳐 임형택 씨의 가족 앞에 섰다.
임형택 씨의 딸, 7살 여아 임새롬이 내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극 아저씨!"
이 조그만 아이도 내 동족이었다.
열선 능력자. 그것도 놀라울 만치 강력한 수준의.
"오, 새롬이. 요새도 마법소녀 만화영화 보니?"
"응! 달빛 소녀 디아나, 요즘도 너무 재밌어요!"
나는 씩 웃으며 지갑을 꺼냈다. 이 귀여운 녀석에게 용돈을 주고서 제 엄마 곁으로 보내고는 임형택 씨와 따로 대화를 나눴다.
"새롬이 쟤가 마법소녀 만화영화 보다가 열선 능력 각성했다고 했죠? 조준 보정 능력까지 딸린?"
"예, 아마. 제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러다 각성한 게 맞을 거예요. 뭐 쏘거나 찌르는 게 열선 능력 각성 조건이라던데? 새롬이 쟨 마법소녀 장난감 활 쏘고 놀다가 각성했다니까······"
일곱 살짜리 어린애라고 무시해선 안 된다. 저 아이는 그 악명 높은 베헤모스의 능력 일부를 지닌 아이 아닌가.
김형만 씨만 해도 열선을 목표물에 명중시키기 위해선 따로 조준이 필요해서 반지 형태의 가늠쇠를 검지에 장착한 채 열선을 방출하는데, 저 애는 귀찮게 그럴 필요도 없다. 그냥 대충 손가락을 겨누고서 쏘고 싶은 데로 쏘면 거기에 열선이 명중한다.
베헤모스도 마찬가지라서, 놈 또한 조준도 하지 않고 꼬리 끝에서 마구 쏘는 열선이 초음속 전투기까지 격추해낸다던가?
너무 어려서 그렇지, 당장 괴수 앞에 데려다 놔도 너무 겁먹지만 않는다면 바로 A급 헌터 노릇을 할 수 있는 셈이다.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일곱 살짜리에게 그 정도 능력이 있는 것만 봐도 비각성자들과 각성자들의 차이는 하늘이 내린 것이며, 정부에서 어찌 발악한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것임을 모두 알 수 있으리라.
한편 임형택 씨는 이미 꽤 취한 듯 보였는데, 이 아저씨는 술이 들어가면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말을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과연 잠시 후, 임형택 씨는 난데없는 말을 꺼내서 날 당황케 했다.
"올해로 헌터 그만두겠다고요? 왜요?"
내 물음에 임형택 씨가 설명했다.
"슬슬 힘에 부치는 걸 느껴서 그래요. 내가 좀만 더 젊었으면 돈 더 벌기 위해서라도 버텨보겠는데, 다 늙어선 팀에 별 기여도 못 하면서 버티기는 어렵네. 당장 학원에도 김극 씨 팀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 난 젊은 친구들이 널렸던데. 팀에서 별로 하는 일도 없는 내가 계속 버티고 있으면 민폐예요."
어이없는 소리였다. 내 팀원이면 내 칭송만 열심히 하면 충분한 일 아닌가. 어째서 그 이상의 기여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내 보기엔 베테랑 헌터 장병곤이든 체력 없는 중년 헌터 임형택 씨든 둘 다 대단찮은 비각성 팀원일 뿐인데······ 이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봤자 위로가 될 리는 없어서 목구멍 안으로 삼켜야 했다.
"아니, 민폐는 무슨! 평소에 그런 생각 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마요!"
내가 그런 생각하지 말라며 거듭 말리니, 임형택 씨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사실, 그거 말고도 이유가 있긴 있어요."
"뭔 이윤데요?"
"마누라가······"
임형택 씨는 딸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여기저기 쏘다니고 있는 자기 아내를 눈짓하고서 말을 이었다.
"저 철없는 가시나가, 자꾸 김극 씨한테 연줄 대보라지 않습니까? 새롬이 쟬 헌터 아카데미 들여보낼 수 있게 말입니다."
"아니, 내가 분명 그 학교 막장이니까 절대 들여보낼 생각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당장 월세 내기도 어려운 처지라면 모를까, 먹고살 돈 충분하실 상황에 그럴 이유가······"
"나도 그리 설명했지! 그런데 아직 포기를 못 했나 봐."
"그놈의 서울 아파트 때문에 그래요?"
"그런가 봐요. 이러다간 저 가시나가 나 몰래 멋대로 새롬이 그놈의 아카데미에 넣으려 할까 봐 걱정이야. 차라리 내가 집에 상주하면서 마누라 감시하든가 해야지, 철없는 둘만 집에 내버려 두자니 걱정이 돼서 원······"
그런 이유라면 나도 말릴 수가 없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맘 바뀌면 언제든 얘기해요."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그리고 김극 씨? 지금까지 너무 고마웠어요. 여러모로 말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만둘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말을 벌써?"
"그만두기 직전에 또 말하면 되겠죠? 아무리 말해도 부족하니까 그래도 되지 뭐. 그러니 다시 말씀드리는데,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 부족한 아저씨 데리고 다녀줘서, 그러면서 핍박하지 않는 걸 넘어 잘 대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아니, 이 아저씨가 민망하게 진짜······"
"진짜로 고마워! 내 첫 직장 사수도 이보다 더 날 챙겨주진 않았는데 말이야."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떠나려는 듯했다.
아쉬웠다. 내 생각보다도 더. 내 가장 훌륭한 칭찬 머신이자 팀의 최연장자로서 팀의 두 양아치가 시끄럽게 굴면 늘 점잖게 조용히 시키곤 했던 저 아저씨가 곁에서 떠난다니? 나 자신도 놀랄 만치 섭섭했다.
그래도 뭐, 만나려거든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이후로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오늘 겪은 즐겁고도 짜릿한 일들을.
평생 잊지 못할 그 광경들을 머릿속에 재생하고 또 재생했다.
연회에 참석하기 전, 우리 헌터팀은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거리마다 꽃비가 내렸고 내가 탄 퍼레이드 카에 던져진 꽃다발 수십 개가 실렸다.
그리고 퍼레이드에 참석한······ 수만 명? 아니, 대충 어림잡아도 십만 명은 넘는 인천 시민들을 떠올렸다.
연예인 공연에 나온 것도 아닌, 헌터에게 환호하러 나온 시민이 그토록 많았다.
'김극―! 김극―!'
그들이 연호한 내 이름은 지금도 거대한 메아리가 되어 내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그때 본 광경을 평생 대뇌 깊숙한 곳에 간직해두고서 기분이 나쁠 때마다 곱씹으면 좋을 것 같다.
미소를 머금은 채 집에 들어가려던 차였다.
전화벨이 울리길래 전화를 받았더니, 웬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극 헌터? 김극 헌터 맞지요?」
"예, 김극 맞습니다. 인천 만세. 누구십니까?"
「국안부 장관 류지선입니다. 지금 급히 와주세요! 주소 말씀드리자면 서울시―」
말만 존대지 사실상 명령하는 것과 다름없어서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울? 내가 서울엘 왜 가?"
단순히 기분이 나쁠 뿐만 아니라, 국안부면 특무대를 휘하에 둔 상위기관 아닌가. 그곳에서 부른다고 갔다간 특무대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날 습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안부 장관은 내 반말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빠르게 말했다.
「급한 일입니다. 제발 빨리요! 공간이동 남발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자세한 사정은 이따가 설명할 테니까······」
"아니, 뭘 알아야 가든 말든 하지? 그런 식으로 설명 똑바로 안 해주면 못 갑니다."
「그럴 여유가 없어요! 그래도 최대한 짤막하게 설명하자면, 나라의 안위가 달린 일입니다······ 강준치가 떠났단 말입니다!」
그 말에 비로소 나는 상황의 급박함을 알아챘다.
"강준치가, 서울에서 떠났다고?"
「서울뿐만 아니라 지구에서! 상황 이해했죠?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 없어요! 빨리 택시를 타든 어쩌든 해서 이동부터 해주십시오. 알겠습니까? 예? 알아들었죠!」
97화 한반도 수호신 강준치 - [3]
관용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백담비와 함께.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장관을 상대로 자세한 상황을 물었으며, 이런 문답이 오갔다.
나한테 바라는 일이 뭔가?
소드 월드로 떠나버린 강준치를 도로 데려와 주길 바란다. 그와의 친분이 있는 걸로 아니까······.
강준치가 소드 월드로 떠났다면, 몇 시간 전에 떠났나?
약 두 시간 전에.
내 알기로 오늘 석장실이 강준치의 집에 찾아간 것으로 아는데. 그 와중에 떠나버린 건가?
맞다.
그렇다면 현장에 가까이 있을 석장실이 아니라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이유가 있나? 나보다는 석장실이 강준치와 더 친한 줄로 아는데.
그것은······ 대답해주기 어렵다.
강준치를 설득해서 데려오려거든 자세한 상황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숨기지 말고 똑바로 대답하라. 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건가?
내가 물었다.
"뭘 어쨌길래 강준치가 떠난 건데? 강준치와 함께 있던 석장실이 뭔 짓을 하다가 언더커버 요원 신분을 들키기라도 한 겁니까?"
내 마지막 질문에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휴대전화 너머 상대방이 바뀌었다.
석장실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나는 언더커버 요원 같은 거 아니야! 준치 형도 그렇고, 김극 형까지 왜 그런 의심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어쩌다 일이 터진 건데? 뭘 했길래 준치가 반쯤 미쳐서 소월로 이민 가버린 거냐구?"
내가 그리 물었더니, 석장실이 구구절절 해명했다.
그 해명에 내 해석을 섞어 풀어내자면 이런 식이었다.
오늘, 석장실이 강준치의 집에 찾아갔다. 수도공사며 전기공사 견적을 낼 기술자들과 함께.
이 사람들을 왜 데려왔느냐 묻는 강준치에게, 석장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준치 형이 언제 여기 떠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최소한 전기랑 수도는 연결돼야 할 것 아니야?'
'그래도 그렇지, 내가 왜 기술자들 안 부르는지 뻔히 알면서 뭐하러······?'
'안심해,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 엄선해서 데려온 분들이니까! 형 부자인 거 알아서 바가지 씌울 순 있어도 정부가 시켜서 도청기 숨기고 그럴 사람들은 아냐!'
형을 생각해주는 이 제안에 강준치는 고마움에 앞서 수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준치는 일찍이 석장실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지 않은가.
정확히는 정부에서 석장실과 접촉해서는 자기네 꼭두각시로 삼았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 의심이 너무나 강렬해서는, 데스클로에게 당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도 가까운 석장실이 아닌 날 부를 정도가 아니었던가?
석장실이 의심스러운 이유란 것은 고작 '나와 석장실이 친한 것을 정부에서 이미 파악했을 테니 따로 접촉했을 것이다'라는 얼토당토않은 것이긴 했는데,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미 강준치가 의심하고 있었단 사실이다.
그리하여 친한 동생이 그리 제안했을 때, 강준치는 경계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뭘 노리고?'
결국 석장실과 기술자들을 지하공동에 들여보낸 강준치는, 제 의심을 해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휴대전화 너머, 석장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준치 형이 잠시 스마트폰 좀 빌려달라 하더라. 지하에 전기가 안 통하니까 자기 스마트폰 충전을 못 했다나? 그래서 빌려줬지. 잠금도 풀어서······」
그리고 강준치는, 빌린 석장실의 스마트폰으로 웹서핑이라도 하려던 게 아니었다.
강준치는 석장실의 스마트폰에서 그간의 카톡과 문자메시지 기록을 뒤졌다.
그리고 찾으려던 것을 찾았다.
그는 석장실과 한희석 사이의 통화기록들을 발견했다. 또한 석장실이 국안부 장관과 나눈 문자 메시지까지 보고는 눈이 뒤집혔다.
그중에서 국안부 장관이 보낸 문자, '몇 시간 뒤에 특무대에서 강준치 방에 도청기 숨길 예정이라는데 이쪽에서도 도청기 하나 줄 테니까 하나 심어봐라'를 들이밀며 강준치가 격하게 추궁했다는 것이었다.
'준치 형,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씨발 스파이 새끼가?'
그 자리에서 석장실이 데려온 기술자들은 모조리 손발톱이 뽑혔다고 한다. 아마 도청기를 숨기기 위해 데려온 기술자쯤으로 여기고서 그랬으리라.
강준치의 행동은 단순히 화풀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분노는 단순히 친한 동생의 배신을 깨달음으로써 생겨난 단발적인 분노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그의 내면에 스트레스는 겹겹이 쌓여있었을 것이다. 정부에서 자길 제거하길 원한다는 스트레스, 정부에서 자길 감시한다는 스트레스, 친한 동생마저 믿기 어려울 수 있다는 스트레스, 그 탓에 덥고 불편한 지하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스트레스······.
그리고 마침내 제 의심이 사실로 드러나버린 상황에, 강준치는 제 추리가 옳았다는 쾌감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인 그 모든 스트레스가 일제히 폭발했을 것이다.
참기 어려운 실망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의 실망과 분노는 석장실을 보냈을 정부에, 더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에 미쳤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을 떠났을 것이다. 소드 월드로. 예전에 헌트웹에 슬쩍 언급했던 말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소월이 한국보다 살기 좋으리라 믿어서가 아니라, 한국에 복수하기 위해서. 제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헌트웹의 각성자 헌터들이 가끔 하는 망상이 있는데, 대충 이런 식이다.
자기 지역의 수호자쯤 되는 헌터인 자신이 떠나버리면 그곳에 사는 모두가 전전긍긍하리란 망상. 더 나아가 언젠가 자신이 국가를 수호할 만치 강력하고 중요한 헌터가 된다면 국민 전체가 자신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며 애걸복걸하리란 망상이다.
강준치에겐 그 망상을 현실에 옮길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참지 않고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한국에 사는 모두가 자신의 부재를 느끼도록. 자신이 한국에서 사라지면 무슨 일이 터지는지 실감하도록 아예 떠나버렸을 것이다.
자신이야말로 한반도의 수호신이었으며, 수호신을 잃은 한국인들이 어떤 위기에 처하는지 깨닫도록 소월로 가버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네가 한희석이랑 국안부 장관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내 물음에 석장실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랬어」
"그런데도 언더커버 요원이 아니라고? 그럼 뭐냐. 뭐 인터폴 요원이라도 돼?"
「난 그리 거창한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난 그냥, 민간인 협력자야! 각성자들이 평소에 무슨 생각하는지 전해주고, 각성자들과 정부 사이를 조율하려 애쓰는······」
그리 말하더니 석장실은 그리 굴면서 자기는 돈 한 푼 받지 않았다고, 금전 이외 다른 특혜를 받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가 공식적인 것도 아니라서, 가끔 한희석의 집에 찾아갔기에 자연스레 관계를 들킨 한희를 제외하고는 다른 특무대원들과의 친분도 딱히 없다고. 가끔 지령을 받긴 받았지만 단순히 저쪽에서 부탁하면 들어줄 뿐이었다고도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돈 한 푼 안 받고 정부 따까리 짓을 했다 이거냐?"
내 물음에 석장실이 소리쳤다.
「필요한 일이었어!」
"간첩질이?"
「그래, 그 간첩질이! 한국마저 다른 나라들 꼴 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일 막겠답시고 정부에서 각성자들 강력히 탄압하고 싶어 하는데, 너무 심하게 탄압하지 않도록 누군가가 중간에 조율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효과는 있었고?"
「저번 버스 시위만 봐도! 내가 중간에 각성자들한테 국가 전복 의도까진 없다고 전해주지 않았으면 의원이랑 장관이 나와서 순순히 협상하는 게 아니라 어떤 강경 대응을 했을지 모르는 일이고! 이번에도 준치 형이 너무 스트레스받는 것 같길래, 정말 수도랑 전기 연결해주려고 했을 뿐인데······!」
난 석장실이 예전에 해준 얘기를 기억했다.
그는 게이트가 열리고서 반년쯤 지나 치안이 급격히 무너졌을 때, 식료품점에서 일하다가 강도들에게 습격당했다고 했다. 그가 머리를 얻어맞아 쓰러지니 강도들은 죽은 줄 알고 지레 겁먹었다고. 그리하여 시체를 숨기려던 강도들한테 그대로 생매장당했다가 암석 능력자로 각성했다던가?
그렇듯 무법자들에게 일상이 무너진 경험이 저 친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단순히 자기가 좋아서 그랬거나.
어느 쪽이건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강준치의 방송 채널을 봤다.
새 영상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3분짜리 영상. 편집한 흔적조차 없는 짤막한 영상이었는데, 흔들리는 카메라 속에 강준치의 성난 표정만 실린 그 영상에는 강준치의 분노가 물씬 담겨있었다.
「갯강구 씹새끼들. 내 존재만으로도 좆같다 이거지?」
영상 속,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강준치가 말했다.
「꺼져줄게. 바라는 대로 꺼져줄 테니까 너희들끼리 어디 잘살아 봐라, 응?」
그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다들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다.
비회원23 : 뭡니까? 강준치 이민을 간대요?
Park1994 : 한국 떠나고 싶으면 썩 떠나라 호로 새끼
Yok1974 : 베헤모스 아직 안 떠나지 않았나? 강준치 저놈 마음대로 떠나면 안 될 텐데, 국가에서 허락은 해준 건가?
비회원115 : 좆망 ㅋㅋㅋ
실시간으로 더 올라왔을 댓글을 보기 위해 새로고침을 누르니 영상이 사라졌다. 혼란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영상을 삭제해버린 모양인데.
단순히 인터넷 영상 지우는 것 외에도, 이 상황에 정부의 조치는 신속했다.
계양구에 도착하니, 이미 비상사태에 걸맞은 광경이 보였다.
베헤모스가 한국에 도달한 시점부터 국가에서 마련해뒀을 매뉴얼과 대응 계획을 실행에 옮긴 걸까?
정부에서 위험지역의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있었다. 도로를 가득 채운 차들은 미리 배치된 경찰들의 안내에 따라 한 방향으로 움직였고, 민간인들의 피난을 가로막지 않는 경로로 전차와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프로펠러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헬기며 수송기들이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시민들을 피난시키는 동시에 공군, 육군을 가리지 않고 병력을 배치하는 듯했다.
이 와중에 민간인 헌터인들 예외는 아니었다.
스마트폰이 울리길래 보니 헌터 앱에 연락이 와있는 게 아닌가.
"나한테도 출동 명령 왔네. 서울로 출동하라는데요? 나 인천 헌터인데 뭔 권한으로 서울에서 부르는 거지?"
내 말을 백담비가 받았다.
"저한테도 연락 왔어요. 명령 내용 보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수도권 헌터들은 모두 소집하는 것 같은데요?"
보아하니 정부에서는, 강준치의 부재를 확인한 그 시점부터 이미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려는 듯했다.
그러니까, 베헤모스가 서울에 튀어나오는 상황을 말이다.
강준치와의 일전이 두려워 서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 괴수는 이제 그 강적이 사라졌음을 인지했을 것이다.
일찍이 호주에서 벌어졌던 사태를, 그 사백 미터짜리 거대괴수와 놈을 따라다니는 괴수 떼와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했다.
"여기부턴 공간이동으로 갑시다. 담비 씨? 내 손 잡아요."
백담비와 손잡고서 공간이동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강준치의 임시 거처에 도달했다. 그 팔백 미터 깊이 지하공동에 말이다.
그곳 입구 앞에는 국안부 장관과 여러 공무원, 그리고 옷이 여기저기 찢어진 피투성이 석장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강준치한테 게이트는 누가 열어준 겁니까? 괴수들이 연 게이트에 들어가기라도 한 거예요?"
"내가······ 내가 열어줬어."
석장실의 대답이었다. 내가 물었다.
"저번에 못 연다고 하지 않았나?"
"열 수 있는데 숨겼어. 열 수 있단 거 알려지면 준치 형이 술 마시곤 소월로 떠나버리게 게이트 열어달라고 졸라댈까 봐······"
그러나 석장실이 게이트를 열지 못한다고 말해도 강준치가 고개를 끄덕였을 리 없다. 석장실이 뭐라 말하든 강준치가 손발톱을 뽑아가며, 목숨을 위협해가며 정령이니 열 수 있지 않으냐고 마구 윽박지른 걸까?
그 위협에 못 이겨 석장실이 결국 게이트를 열어준 모양이요,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모양이다.
석장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 몰골을 보니 더 화내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내가 진짜······"
내가 한숨 쉬었다.
"어쩌겠냐? 일이 이렇게 됐는데."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었다. 저번에도 베헤모스는 강준치가 서울을 떠나자마자 튀어나온 게 아니라, 그가 떠난 지 꽤 시간이 지나서야 게이트를 열었으니까.
그 전에 강준치를 데려오면 모든 위기는 사라진다.
어쩌면 강준치는 지금쯤 게이트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막상 소월에 도착해서도 멀리 떠나진 못하고 게이트를 빠져나온 근처에서 머뭇거리고 있을지도.
그렇다면 내가 가서 데려오면 될 일이다.
곧이어 백담비가 게이트를 열어주었다.
평소 드나들던 아스트랄계가 아니라, 소월 쪽 아스트랄계로 통하는 게이트였다.
그 자줏빛 세계에 들어가니 의외로 괴수들의 실루엣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소월의 괴수들은 이미 사냥감이 넘쳐나는 지구로 떠나버린 모양이지?
그러나 괴수들은 물론, 우리가 찾으려던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단 게 문제였다.
「여기가 소월 영역 맞죠?」
내 물음에 백담비가 대답했다.
「맞아요. 맞는데······ 안 보여요!」
"진짜, 씨발."
내가 욕을 지껄이는 가운데 백담비가 절망감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강준치가 안 보여요!」
인천에서도 부산에 있는 강준치의 영혼이 보였던가? 태양처럼 거대하게······.
그런데도 지금 강준치의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인천과 부산 사이의 거리보다 멀리 있음을 의미했다.
강준치가 제 몸을 직접 역장으로 옮기긴 어렵지만 자기가 오른 탑승물을 옮길 수는 있다는데,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지하공동과 지상을 오르내리기 위해 준비한 작업 리프트에 타고서, 그 난간을 꼭 붙잡은 채 저 멀리 비행했을 것이었다. 순식간에 수십 킬로미터를 넘어 그 이상의 거리로 멀어졌을 것이었다.
「돌아가야겠습니다.」
내 말에 백담비가 반문했다.
「강준치 더 안 찾고요?」
「이 정도로 멀리 가버렸으면 내 공간이동으로도 못 찾아요! 수 킬로미터 내에 있어야 수색을 하든 말든 하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도 모르는 것을······ 이젠 강준치를 데려올 생각을 할 게 아니라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고서 게이트를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상황을 전하니, 다들 한숨을 내쉬면서도 각자 할 일을 했다.
"류지선이다. 강준치 못 찾았다. 현 조치 그대로 이어나가라 하고······"
여기 모인 모두의 몸이 떨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버스 시위 때, 그때에도 베헤모스가 게이트를 열었다.
당시에는 다른 각성자들과 함께 있던 상황이라 심리적으로 든든했기에 나는 몸을 떨거나 흠칫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머릿속에 전해진 이질감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지만, 이번에 나는 흠칫했다.
그 이질감을 견디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후에 닥칠 일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상상 속 풍경을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저기에!"
고개를 돌려 한 공무원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도시의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빛나는 자줏빛······.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98화 베헤모스 - [1]
게이트가 실시간으로 커지고 있다.
게이트가 괴수들이 드나들 만한 크기로 부풀어오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베헤모스의 초현실적인 몸집이 빠져나올 만큼 커지려면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릴 테고.
이 와중에 온갖 수송기들이 지상에 착륙했다.
수송기에서 내가 아는 헌터들이 내렸다.
맨 먼저 김형만 씨, 입고 있는 연두색 진료복이 바로 눈에 띄었다. 한의원에서 일하다가 옷도 못 갈아입고 급히 불려온 모양이지?
경찰이었다가 특무대에 들어갔다가 최근 헌터가 된 강준만도, 분명 올해 9월로 서울과의 헌터 계약이 종료된다더니 어째선지 불려온 김요한도 보였다. 그 밖에도 협회에서 만난 바 있는 헌터들이 여럿이었다.
그 대부분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이었지만, 앞서 확인했듯 수도권 헌터들도 여기 불린 바였다.
억양 독특한 인천말이 귀에 박혔다.
"뭐야? 날 서울에 왜 부른 거야? 나 인천시랑 계약한 거 아니야?"
응우옌이었다. 당연히도 그가 평소 거느리고 다니는 헌터 팀도 함께였고.
그 외에도 온갖 피부색 다양한 남자들이 헌터 라이플을 들고 내렸으니, 서울 외 수도권에서 주로 활동하는 외국인 각성자들도 봐주지 않고 죄 불러온 듯했다.
이 와중에 나이토 상만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무 헌터나 소집한 게 아니라 A급 헌터들만 불렀으리라. 현명한 처사였다. 하기야 렉카 차나 타고 다니는 어중이떠중이 헌터들까지 죄 불렀다간 놈들이 오는 길에 시민들 피난길이 가로막힐 테니까.
한편 또 하나의 수송기에서 눈에 익은 사람들이 내렸는데, 그들이 내 헌터 팀임을 발견한 내가 눈을 부릅떴다.
상황이 급박한 와중에도 내가 다가가 물었다.
"뭐야? 다들 여기 왜 왔어?"
성문영이 그걸 왜 묻느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라에서 부르니까 왔죠?"
비각성자들이니 굳이 부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날 보좌하라고 국안부에서 굳이 불러낸 모양이군.
내가 요청하지도 않은 일을 굳이 하니 화가 났다. 내가 으르렁댔다.
"돌아가. 여기 인천 아니야."
무의식적으로 초저주파가 흘러나온 걸까?
성문영이 움찔했지만, 그러면서도 녀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은 여기서 싸울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 형이 마구 쏠 헌터 라이플, 그거 탄창 갈아줄 사람은 있어야······"
"정 남으려면 헌터 라이플 담당 인원만 남든가!"
내 말에 임형택 씨가 어색한 말투로 반문했다.
"세 명이 헌터 라이플 탄창 가는 동안 곁에서 지켜줄 사람도 있어야죠?"
기어이 다 여기 남겠다는 것 같았다. 저걸 만용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동료애라 해야 할까?
어느 쪽이건 지랄 말고 싹 다 꺼지라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실랑이할 여유가 없었다.
"아!"
정진영이 고함지르며, 저쪽 하늘을 보았다.
날 포함한 모두가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모두 정진영 형과 같은 표정이 되었다. 기겁하고 움츠러든 모두의 얼굴.
저 하늘의 게이트가 충분히 확장됐다.
폭만 해도 수십 미터로 부풀어 오른 게이트에서, 기어이 베헤모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 저 얼굴······.
근친교배의 여파로 태어난 기형 사자와도 같은 일그러진 얼굴. 못생기다 못해 흉측한 맨티코어의 얼굴.
암석으로 구성된 그 흉측한 얼굴이 수십 미터 규모인데, 그 주변 갈기 때문에 실제 크기보다 훨씬 커 보였다. 그리하여 그 머리통은 거의 백 미터는 되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저번에도 느낀 사실이지만, 저 못생긴 얼굴마저 저 정도 규모이니 어떤 초자연적인 위엄이 깃들었고 말이다.
인간을 벌하기 위해 저 하늘에서 내려보낸 것 같은, 종말과 신성이 함께 하는 무언가······.
그 낯짝을 오래 감상하지는 못했다. 여기저기서 날아온 포탄이며 미사일이 그 얼굴을 무자비하게 두들겼기 때문에.
온갖 폭발이 베헤모스의 얼굴에서 파편을 튀게 했다. 베헤모스의 거대한 얼굴이 불꽃과 연기로 뒤덮였다.
나오자마자 이따위 대접을 받으니 화가 난 걸까?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베헤모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놈의 눈빛이 변하더니······.
암석 사이에 웬 수정으로 이루어진 베헤모스의 눈에서, 시뻘건 열선이 뿜어져 나왔다.
전차를 송두리째 뒤덮을 만치 굵다란 열선이었다.
그 열선이 지상을 한 번 그었고 그 경로에 있던 전차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큼지막한 흑표 전차가 있던 그 자리에는, 쇳물인지 용암인지 모를 것들만 바닥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저기 닿았다간 내 역장이고 뭐고 바로 죽겠다. 제기랄.
그러나 전차들이 전멸한 것쯤은 놀랄 일도 아닌지, 계속해서 날아온 발사체들이 베헤모스의 안면을 타격했다. 불꽃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그 소리를 뚫고 들리도록, 내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최소한 후방에 있어! 알겠어?"
내 팀원들이 이마저 거부하진 않았다.
"예? 예······!"
부릅뜬 눈으로 성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공간이동 하여 모두를 저 뒤로 옮겼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백담비가 맨 앞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을 도맡아줄 테지만, 지금은 백담비도 저들과 함께 해줄 수 없다.
예전처럼 비각성자들처럼 싸우기엔 백담비도 각성자로서 성장할 대로 성장한 마당 아닌가. 예전과 달리 백담비는 한 명의 A급 헌터로서, 강력한 괴수들을 제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움직일 예정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각성자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나약한 비각성자들끼리만 싸워야 한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나.
평소라면 결코 용납할 일이 아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급박해도 너무 급박했다.
내 헌터 팀을 후방으로 보낸 뒤에, 백담비 또한 그녀를 필요로 하는 장소로 옮겨준 뒤에, 나 혼자 다시 베헤모스가 잘 보이는 곳으로 공간이동 했다.
마침내 머리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빠져나올 만치 확장된 게이트에서, 베헤모스가 한 발짝을 지상에 내디뎠다.
그때 울린 소리는 '쿵'이 아니었다.
저 소리를 대체 어떤 의성어로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느낀 대로 말하자면, 세상 전체가 울렸다.
콘크리트 바닥들이 요동쳤다. 빌딩들은 갈대처럼 휘청거렸고, 간판이며 표지판 따위가 태풍에 휘말린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가로수는 아예 통째로 뽑혀서는 여기저기 굴려다니기 시작했다.
단 한 발짝, 그것도 온전히 체중이 실린 한 발짝이 아니라 몸뚱이 대부분은 게이트 안에 남겨둔 채 내디딘 발걸음이 그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 몸뚱이 전체로 걷는다면 그 여파는 어떨 것인가?
알기 싫어도 곧 알게 되었다.
마침내 몸 전체가 빠져나온 베헤모스가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변 빌딩들이 무너져내렸다.
보아하니 철근을 충분히 섞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내진설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든가.
어느 쪽이건 베헤모스의 몸이 닿지 않았는데도, 빌딩들은 무력하게 주저앉거나 쓰러졌다.
그와 함께 굉음이 울렸다. 거대한 운석이 땅을 연달아 두들기는 듯한 굉음이.
내 고막이 먹먹해지는 동시에 내 헌터 팀을 저 뒤로 보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각성자들은 저 소리에 노출되기만 해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저 주변에 있었단 이유만으로 양쪽 귀에서 피를 흘리며 죽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지진 또한 더욱 커졌다. 콘크리트들이 요동치는 걸 넘어 물결쳤다. 내 체중이 보통 수준이었다면 지금 서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상뿐만 하늘 또한 난장판이었다.
완전히 몸을 드러낸 베헤모스를 타격하기 위해 더 많은 화력이 동원되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폭격기들이 날아다니며 항공 폭탄들을 쉼 없이 떨어뜨리고 있었다. 베헤모스의 열선을 대신 맞도록 준비했을 무인기들도(베헤모스가 영혼을 볼 수 있는 만큼, 사람이 있는 척 위장하기 위해 닭 따윌 무인기에 실었다던가?) 수없이 날아다니며 내 눈을 어지럽혔다.
한편 베헤모스의 저 꼬리 끝 열선이면 무엇이든 격추할 수 있단 것이 사실이었다.
베헤모스의 거대한 꼬리에서 발사된 열선이, 막 항공 폭탄을 떨어뜨렸던 전투기 하나를 녹여 버렸다.
공간이동으로 그 조종사를 구출하려는 시도 따윈 해볼 수도 없었다. 그러기엔 열선도, 전투기의 폭발도 너무 빨랐다.
난 그 끔찍한 참상에서 눈을 돌렸다.
내가 신경 쓸 것은 저 거대한 괴물이 아니었다. 베헤모스를 상대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거니와, 공군이 저 거체를 쉼 없이 폭격하는 상황에 내가 베헤모스의 몸에 달라붙기라도 했다간 나마저 휘말리고 만다.
나는 뒤따라 나올 괴수들을 신경 써야 했다.
호주에서 그랬듯, 베헤모스의 뒤를 따라서 행진할 괴수들을.
과연 베헤모스가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 몸으로 인류의 온갖 병기들을 받아내며 나아가는 동안, 저 뒤 게이트에서 수많은 괴수의 실루엣이 일렁였다. 그 괴수들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게이트에서, 맨 먼저 나온 것은 데스클로 떼였다. 척 봐도 수백 마리는 될 괴수 떼.
국방부에서는 놈들을 쓸어버릴 준비도 미리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 차례 포성이 울리더니, 게이트에서 나온 데스클로들을 향해 온갖 포탄이 쏟아졌다.
그러나 데스클로들의 이동지점을 모조리 초토화 해야 했던 포탄은 제대로 그 지점에 맞지 않았다.
이상한 궤적을 그리더니, 웬 건물이나 타격하는 포탄들을 보며 군인들이 당황한 눈치였다.
군인들이 소리치며 의논했다. 당장 화가 나서 소리치는 게 아니라, 이 굉음 속에서 서로에게 소리를 전달하려면 어쩔 수 없을 것이었다.
"왜 저리 빗나가는 거야?"
"땅이 너무 흔들리니까! 선박 위에서 박격포 쏘면 배가 흔들려서 제대로 안 맞는 것처럼, 땅이 너무 출렁거리니 탄착점이 어긋나서······"
그리 번번이 빗나가는 포탄을 본 순간, 바로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 강화도 군사기지에서 게이트가 열렸을 때, 군인들 사이에 부상자며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게이트의 위치가 일찍이 식별되어 특정한 지점에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그렇듯 괴수들의 이동 경로가 좁혀지니, 평소라면 박격포로는 맞힐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역장체마저 포격으로 타격할 수 있었던가?
지금도 그럴 수 있어야 마땅했건만 그러지가 못했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데스클로들은, 바로 포병들의 화력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도시 여기저기로 달려 나갔다.
놈들에게 쏟아진 소총탄 사격도 거의 없는 것이, 저곳에서 병사들이 총이라도 쏘기엔 베헤모스의 몸에서 너무 가까웠다. 저곳에 배치된 병사들이 있어봤자 진작 다 베헤모스의 이동이 내는 여파를 견디지 못했으리라.
보다 못한 그곳으로 내가 공간이동 했다.
저 앞에서 괴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드르르륵 하고, 헌터 라이플을 난사하자 마구 달리던 데스클로들이 터져나갔다.
잠시나마 통쾌한 맘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잠시뿐이었다.
「김극 씨, 자리 벗어나요! 베헤모스의 시야에 닿으면 안 됩니다! 놈 입장엔 김극 씨가 최우선 표적일 테니까!」
나도 안다. 답답해서 그런 거지.
베헤모스의 꼬리 끝이 날 겨눈 순간 난 공간이동 하여 자리를 이탈했다. 다음 순간 발사된 열선에 내가 있던 자리가 녹아내리는 것을 목격하고서 난 그 위력에 치를 떨었다.
난 숨을 고른 채, 게이트에서 계속하여 빠져나올 괴수들을 기다렸다.
거대하고 강력한, 심지어 단단하기까지 한 괴수들을.
소드 월드의 진정한 주인들. 그 강력한 괴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나를 비롯한 각성자들이 여기 불려온 마당이다.
곧이어 놈들이 게이트에서 빠져나와 서울에 발을 디뎠다.
게이트의 크기가 컸기에 빠져나온 괴수들의 크기도, 종류도 다양했다.
맨 먼저 오거들이 보였다. 베헤모스를 따라 몰려다니며 친분을 쌓은 듯, 저 거대한 놈들이 여섯이서 몰려다니는 것을 보니 황당했다.
더욱 황당하게도 체장이 칠 미터쯤 될 데스클로도 보였으며, 저번에 본 그 멧돼지 같은 놈도, 그들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샌드웜들도, 그 밖에 여러 정령을 비롯해 학명을 알아볼 수 없는 괴수들까지 여럿 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맨 먼저 빠르게 움직인 것은 육 미터짜리 오거였다.
그 오거는 반쯤 무너진 빌딩 숲에 가로막히지 않았다. 놈은 휙 하고 여러 건물들을 순식간에 뛰어넘더니, 그나마 멀쩡히 서 있던 한 건물에 달라 붙었다.
그 건물 옥상에 기관포와 병사들이 올려져 있었다.
오거가 그들을 노렸다. 오거가 각층의 창문에 손가락을 끼워 넣어 순식간에 빌딩을 오르더니, 그 위의 군인들을 향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내가 공간이동 했다.
병사들의 비명이 이미 먹먹해진 고막에 파고들었다.
"아아아악!"
그리고 내 앞에는 한 마리 오거가 있었다. 그 거대한 괴수를 향해 손을 쭉 하고 뻗었다.
그리하여 쩍 벌리고 있던 오거의 턱에 내 손가락을 쑤셔 넣고는, 그대로 손을 아래로 휙 잡아끌었다.
내 손길에 이끌려, 오거의 몸이 건물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낙하 중인 오거를 향해 헌터 라이플을 쏴 갈겨 그 배를 찢어발겼다.
그대로 오거는 낙하하자마자 죽음을 맞이한 듯했다. 그 영혼이 내게 흡수되는 것이 희열을 통해 느껴졌다.
정신을 추스르고서, 내가 군인들에게 물었다.
"여기 계속 있어도 돼요? 자리 옮겨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공간이동으로······"
그러나 군인들은 고막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모양이었다. 내 말을 듣지 못하는 걸 보니.
내가 빠르게 휴대전화로 문자를 적어 보여주니, 중사 하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고마운데 남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마워요."
이 나약한 비각성자들을 위험한 곳에 내버려 두기 갑갑했지만, 내버려 두어야 했다.
이곳 말고도 내가 가야할 곳이 여럿 있었다.
「역장체! 올 수 있는 헌터 응답―」
"김극인데, 내가 간다."
나는 즉시 빌딩에서 몸을 던졌다.
낙하하며 중력이 충분히 실렸을 때, 공간이동 하며 헌터 라이플의 총구를 아래로 향했다. 역장을 씌운 총구였다.
그리하여 공간이동을 마쳤을 때는, 온갖 총알을 몸으로 받아내며 날뛰던 데스클로 한 마리가 헌터 라이플 총구 아래에 놓였다.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마구 쏘면서 놈을 총구로 찍어버렸다. '쾅!'
그리 역장체마저 처치하고서 주변을 보니, 군인들은 핏발 선 눈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날 보며 "고맙······" 어쩌고 중얼거렸고.
그들이 왜 그리 긴장했는지 알 만했다.
보아하니 벌써 세 명이나 죽었다. 부상자도 발생했지만, 내가 병원으로 옮겨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부상자 후송을 핑계로 저들이 후방으로 빠지게 내버려 두면 모를까.
이쪽에서 뭔가 더 해주기엔, 이쪽을 부르는 곳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김극 헌터? 거기 상황 끝나는 대로―」
"끝났으니 바로 간다."
그리고 또다시 공간이동 하여 이번에도 크고 강력한 괴수 한 마리를 죽였다.
이번에는 웬 멧돼지를 닮은 놈이었다. 군인들이 기껏 버스 세 대로 구성한 벽을 뚫어버리고, 그 너머 군인 여섯을 깔아뭉개 죽여버린 놈. 그 눈에 헌터 라이플을 처박아서는 뇌를 뚫어 죽어 버렸다.
순식간에 거물을 세 마리나 죽였지만, 지금 열린 것은 폭만 해도 백 미터나 되는 게이트였다.
그 안에서 쏟아져나오는 괴수들도, 그 수많은 괴수 중에 섞인 강력한 괴수들도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99화 베헤모스 - [2]
정진영은 위아래 턱이 자꾸만 부딪치자 입술을 깨물었다. 턱에 힘을 주어 억지로 고정한 채 생각했다.
'김극 형이 돌아가라고 윽박지를 때 못 이기는 척 돌아갈걸.'
사실 이쪽이 김극보다 형이지만, 대충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로 맘먹었다. 그리고 또한 형 말을 진작 들었어야 한다고도.
정진영은 베헤모스를 보았다. 김극이 팀원 모두를 후방으로 이동시켰기에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도 저 괴수의 움직임은 똑똑히 보였다.
400m짜리 암석 정령이자 거대화한 맨티코어······ 저 거대괴수를 보며 생각했다.
'저놈이 헌트웹에서는 웃음거리 취급이었다고?'
얼마 전까진 정말로 그랬다.
각성자들의 버스 시위사건 당시, 제 앞에 강준치가 도달하자 베헤모스가 게이트에서 나오려다 말고 뒷걸음질 쳐서 물러난 적이 있다. 그 뒤로 헌트웹에서 베헤모스는 소위 쫄보 취급을 당했지 아마.
어제까지만 해도 베헤모스는 대충 만화 속 한심한 캐릭터와 합성해서 가지고 노는 조롱거리 취급이었는데.
전혀 오래되지 않은 그 과거가, 이제는 믿기지 않는 오래전 일로 느껴진다.
헌트웹을 즐기던 그때처럼, 전의를 북돋기 위해 억지로라도 저놈을 비웃으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이쪽이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그 누가 이 상황에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이곳은 베헤모스와 멀찍이 떨어진 곳인데도 그 여파가 전해졌다.
땅은 쉼 없이 출렁이는 가운데, 가로수며 신호등이며 죄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몸을 떨어댔다.
가장 나대길 좋아하던 성문영과 이종호조차 얌전히 입 다물고 있는 가운데, 장병곤이 소리쳐 위험을 경고했다.
"저기, 옥상에!"
정진영이 고개를 올려보니, 거대한 괴물 하나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진영은 놈을 본 순간 질겁하여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데스클로였다. 대충 봐도 칠 미터는 될.
코끼리보다 거대한 저놈이 저 높은 곳에 어떻게?
아마 평범한 데스클로처럼, 대충 건물을 기어올라서는 건물을 여럿 뛰어넘었을 것이다. 거대화한 괴수들은 몸집에 걸맞지 않은 날렵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법이니까······.
정진영은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발사된 총알은 그 거대한 몸에 도무지 맞지를 않았다.
총을 쏴서 맞히기엔 땅이 너무 흔들렸다. 베헤모스와 꽤 떨어진 곳인데도 그랬다.
그리고 오히려 총격이 저쪽을 자극한 듯, 그 거대한 데스클로가 이쪽으로 도약했다.
정진영이 마지막을 직감하고 눈을 감으려던 차였다.
"이 씨발 새끼가―!"
김극의 포효, 그 익숙한 음성을 듣고서 정진영은 눈을 떴다.
그리고 보인 장면에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어느새 나타난 김극이, 자기 몸보다도 훨씬 거대한 데스클로를 맨몸으로 멈춰 세운 채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극이 데스클로의 앞발을 양손으로 각각 붙잡은 채였다. 거기 달린 갈고리발톱에 살짝 닿기만 해도 몸이 바로 갈라질 텐데, 어떤 용기로 저리 달라붙을 수 있는지 보면서도 전혀 모르겠다.
"형이 붙들고 있는 동안 우리가 쏴서―"
이종호가 급히 외쳤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데스클로와 실랑이를 벌이던 김극이, 우악스럽게 근육을 꿈틀거리더니 데스클로의 한쪽 앞발을 뜯어냈다.
데스클로가 비명 지르는 가운데 김극이 또다시 힘주어 데스클로의 나머지 앞발마저 뜯어냈다.
정진영은 홀린 듯이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앞다리 두 짝이 떨어져 나간 데스클로의 목을 김극이 움켜쥐더니, 그대로 힘을 주자 그마저 뜯겨 나갔다.
꿈틀거리던 데스클로를 향해 김극이 헌터 라이플을 마구 쏘자 그제야 놈의 발버둥이 멈췄다.
저번에 퉁퉁이, 그 괴물 오거를 잡고서 힘이 세졌다며 자랑하더니 저 정도일 줄이야.
그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고서 김극은 태연히 중얼거렸다.
"미친 괴수 새끼들이 얌전히 길 따라다닐 것이지. 자꾸 삼차원 기동을 하네?"
김극은 그러고서 이쪽을 보더니, 인상을 구기며 외쳤다.
"여기도 안전하지 않은가보다. 더 뒤로 가자!"
그리 외치더니 김극이 모두를 붙잡고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정진영을 포함한 모두가 더 후방으로 옮겨진 가운데, 김극은 들고 있던 헌터 라이플을 내려놓더니 팀원들이 미리 탄창을 채워둔 예비용 헌터 라이플을 대신 들어 올렸다.
"이 헌터 라이플도 탄창 갈아두고······ 위험한 일 있으면 무전으로 불러야 한다. 알겠어? 평소 사냥하던 때는 내가 정신적 그물망으로 위기 감지하고 도우러 와줄 수 있었지만 이번엔 못 그래.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까······"
김극은 일방적으로 쏘아붙이더니, 순식간에 공간이동 하여 사라졌다.
그 뒤로 무전을 들어보니 방금 그리 경고한 이유를 알 만했다.
"김극 씨, 진짜 바쁜가 보네? 여기저기서 죄다 김극 씨만 불러대고······"
임형택 씨가 중얼거렸는데, 그 말대로였다.
무전으로 상황을 파악하건대, 여기저기에서 김극을 호출했고 그때마다 김극이 공간이동 하여 거기 있던 위협적인 괴수를 제거했다.
무전으로 듣고 있는 이쪽에서 놀랄 만치 김극은 빠르게 괴수를 처치했는데, 그러고도 쉬는 게 아니라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한두 마리 괴수가 날뛰는 게 아니었고 한두 곳이 위험한 게 아니었으므로, 위험한 곳의 모두가 김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강준치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제일 강한 각성자가 바로 저 남자니까. 심지어 그 강력한 초인이 공간이동으로 위치까지 실시간으로 옮길 수 있으니, 제일 부르기 편하고 든든한 지원군이리라.
그렇듯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불러대는데도 김극은 거절하지 않고 그 모든 요청에 응하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병사들로는 상대할 수 없을 만치 강력하고 단단한 괴수들만 골라서 상대하고 있을 텐데도 그럴 수 있다니? 이종호가 중얼거렸다.
"김극 형 혼자서 다른 각성자 백 명 몫은 동시에 해내네. 맨날 그랬는데 이번엔 특히······"
그리고 끔찍한 점은, 영웅 하나가 그리 초월적으로 활약하는데도 여기저기서 잔뜩 죽어 나가는 것이 확실하단 점이었다.
보라, 저 하늘만 봐도 뭔가가 자꾸 폭죽처럼 요란하게 터지고 있다.
하늘에 가득한 헬기며 전투기들을 격추하기 위해, 베헤모스의 열선이 쉬지 않고 하늘을 붉게 절단하고 있었다.
정진영은 반쯤 멍하니 생각했다.
이 짧은 순간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은 자유롭게 천국에 갔을까, 아니면 각성자 헌터들이 괴수들을 쓰러뜨리고서 그 영혼을 흡수하듯 죽은 사람들 또한 죽어서도 자유를 잃고 저 거대한 괴수에게 빨려 들어가 흡수됐을까?
보아하니 후자인 것 같았다. 이곳에서 죽은 대부분의 영혼이 저 거대한 괴수의 몸에 합쳐진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징조가 드러났다.
머릿속에 직접, 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건물 안은 위험해! 이대로면 곧 무너져!」
머릿속 외침은 끊이지 않고 울렸다.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들. 가족을 찾는 애달픈 목소리들.
「구급대입니다! 건물 안에 그대로 계시면 죽습니다! 다들 빠져나오세요!」
「엄마! 살려줘! 엄마? 엄마! 나 밖에 있어!」
상황을 파악한 듯, 임형택 씨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반응하지 마! 베헤모스가 말하는 거야. 건물에 숨은 사람들 다 꾀어내서 빠져나오게 하려고······"
암석 정령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겪어봤다. 머릿속에 직접 전해지는 정신파.
그 정령 놈이 웬 아줌마를 잡아먹어서는, 한국말로 프리허그를 해주겠다느니 해치지 않겠다느니 하며 온갖 괴상한 소리를 지껄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리고 베헤모스 저 거대한 정령은, 더 많은 한국인을 잡아먹어서는 더욱 지능적으로 그들의 기억을 활용하는 듯했다.
「지하에 대피해 계시면 위험합니다. 구호용 수송기가 대기 중이니 모두 지상으로 나오세요!」
「아빠, 나 영순데 아빠 지금 어딨어? 아빠가 안 보여! 나 지금 상가에서 걷고 있는데 아빠가 안 보인단 말이야······」
그 말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머릿속에 직접 전해진 목소리였으니까. 굉음 속에서도 그 목소리들만은 지나칠 만치 잘 들렸다.
그리고 베헤모스의 목소리들에 반응한 듯, 홀린 듯이 건물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당신들, 도로 들어가요! 저거 다 베헤모스가······!"
그러나 저 멀리서 계속 울려 퍼지는 굉음 탓에 들리지 않는 걸까?
이쪽의 외침은 전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저 겁먹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을 보니 정진영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답답했다. 동시에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임형택 씨가 쉬지 않고 고함질렀다.
"다들 가만히 있어! 가만히! 너무 크게 외치지도 말고! 괴수들에게 위치 알려주는 꼴이니까!"
그 말대로 가만히 있자니 갑갑했고, 공포스러웠고, 이 모든 것이 그저 끔찍했다.
절망감을 잊기 위해 애써 희망적인 생각을 해보고자 애썼다.
이 모든 상황이 그래도 영상에서 본 호주의 참상보다는 낫다고.
그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베헤모스의 접근 따윈 알지 못한 채 놈과 놈이 이끄는 괴수들을 맞이해야 했던 호주와 달리, 한국은 놈의 접근을 파악하고는 미리 대비를 해둔 덕에 이렇게 저항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불사조인지 파이어 호크인지 하는 미친 새도 김극 형이 제거했고······.'
그놈의 불새를 제거한 덕분에 공중의 상황 또한 영상에서 본 호주보다는 훨씬 나았다. 호주의 공군은 그놈의 불새가 휙 하고 날자 한꺼번에 반쯤 동시에 터져 전멸했던데, 지금 한국 공군은 그렇지 않으니까.
지금도 하늘에서 온갖 비행체들이 열선에 닿아 요란하게 터지는 중이지만, 그래도 열선에 격추되지 않은 나머지 헬기나 폭격기들은 계속 날아다니며 저 거대한 몸을 꾸준히 타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주보다 한국의 상황이 더 나쁜 점이 있다면, 지금 서울에 튀어나온 괴수들은 일찍이 호주에서 영육을 살찌운 바 전보다 더욱 강력해진 개체들이란 점이었다.
그 수많은 괴수는 인간이야말로 최고의 사냥감임을 확신한 채, 저들끼리 싸우지도 않고서 물결을 이뤄 모든 것을 휩쓸고 있었다.
괴수들의 물결이 도로를 가득 채워서는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진영은 이번에도 멍하니 생각했다. 저 방향에 대피소가 있던가?
「누군가 여력 있으면! 대피소 쪽 지원 가서―」
그 도움 요청에도 김극이 응했다.
괴수들의 물결 앞, 한 전봇대 위로 김극이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전봇대 위에서 김극이 헌터 라이플을 난사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저 남자의 특징 중 하나지만, 김극은 그 사격의 명중률 또한 초인적이다. 정신적 그물망을 통한 보조 덕이랬던가?
지금도 마구잡이로 쏴 갈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날아간 기관포탄 한 발 한 발이 정확히 괴수들의 몸에 명중했다.
그 기관포탄 사격이, 괴수 물결의 기세를 늦출 만치 빠르게 괴수들의 수를 줄여나가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같이 다니면서 좀 익숙해졌다 싶더니, 멀리서 행동하는 거 보니까 괴물은 진짜 괴물이네. 혼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죄다 죽여버리는 게······"
성문영이 중얼거렸고 정진영도 방금 콩알만 해졌던 심장이 다시 부풀어 오른 게 느껴졌다.
피부에 와닿는 위기 상황이라서일까, 저 초인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특히 더.
그러나 그리 생겨난 희망이 다시 쪼그라들었으니, 정진영은 무심결에 베헤모스를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지금까지 잔뜩 폭격한 보람이 있어서, 베헤모스의 몸은 딱 봐도 크기가 줄어든 마당이었다.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400m였던 그 체장이 지금은 300m쯤으로 줄었으니, 국군이 그저 무력하게 당하기만 것은 아님을 척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 날아다니는 헬기며 전투기의 수는 확연히 줄어든 가운데, 베헤모스의 파괴된 암석 외피가 다시 복구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무너진 건물의 콘크리트가, 앞서 떨어져나갔던 베헤모스의 암석이 도로 공중에 떠올라 그 거체에 달라붙었다.
정진영은 군사학에 문외한이지만 척 보고 알 수 있었다. 저 괴물을 인간의 힘으로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째서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강준치가 돌아오든가, 아니면 저 괴물이 충분히 많은 인간의 영혼을 집어삼키고서 만족하게 한 뒤에야 저 괴물을 서울에서 떠나게 할 수 있으리라.
계속 베헤모스를 쳐다보다 말고, 정진영이 질겁했다.
베헤모스가, 그 거대한 몸으로 할 수 있다고 믿기지 않을 만치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지금까지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 같았다. 대피소가 있다는 그곳으로······.
100화 베헤모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