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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 - 100-105

100화 베헤모스 - [3]

계속해서 강력한 괴수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기관포탄으로 쏴 죽이고, 낙하의 충격으로 죽이고, 신체 일부를 찢어 죽였다. 한시도 쉬지 않고 공간이동을 거듭하면서 그렇게 했다.

실시간으로 위치를 옮겨가며 강력한 괴수들만 골라 처치한 보람이 있어서, 당장 물결을 이룬 괴수 떼 중에 딱 봐도 강력한 개체의 수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었다.

저 수많은 데스클로 중에 섞여 있을 역장체며, 아직 게이트 안에 남아있을 강력한 개체들은 또 얼마나 많을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러나 여전히, 날 향한 호출은 끊이질 않는다.

날 부르는 무전을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여기 A급 전사했습니다! 처치 못 한 역장체 날뛰는 중이고요! 빨리 김극 헌터 와서―」

여기저기서 A급 헌터들······ 각성자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그때마다 내가 전사한 각성자를 대신하러 공간이동 해야 했다. 지금까지 최대한 아끼고 아껴서 공간이동 했음에도 현기증을 느끼는 중이지만 가만히 있을 수야 없는 일이었다.

어휴.

방아쇠를 당기면서 공간이동 하자, 시야가 바뀜과 동시에 총구에서 기관포탄이 쏟아졌다. 날뛰던 역장체의 측면을 향해서.

그렇게 또 한 마리 괴수를 죽였다.

이번에도 데스클로 역장체였다. 지겹도록 본 괴수요, 슬슬 한두 마리쯤 처치하기는 어렵지 않게 된 괴수지만 다른 A급들에겐 아니었나보다.

어느 각성자가 이 역장체와 싸우다 죽었나, 봤더니 아는 얼굴이었다. 배가 그여 창자가 쏟아진 남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김요한.

내가 특무대와 실랑이를 벌였을 때, 상황을 촬영하고 헌트웹에 알려서는 날 지원해줬던 친구다. 내 알기로 분명 서울시와의 헌터 계약이 이미 끝났는데 왜 호출에 응했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눈을 감겨준다든가 명복을 빌어준다든가, 뭐 그러지는 못했다. 눈 한 번 감았다 뜬 다음 또다시 날 부르는 곳으로 공간이동 했다.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 불려가다가, 각성자 헌터들이 싸우다 죽은 곳에 불려갈 때마다 아는 인물의 시체를 눈에 담았다.

강준만, 데스클로 역장체한테 목이 반쯤 잘려 죽었다.

김석희 일당 중 하나였는데 얼마 전에 인천 헌터로 데뷔한 친구, 오거의 손에 붙들려 죽었다.

일찍이 A급 헌터끼리 술 마시는 자리에서 얼굴 익힌 역장 외골격 능력자 아저씨, 데스클로에게 배를 그여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형만 씨.

한의사 진료복을 입은 채 목과 몸이 분리되어버린 그 아저씨를 보고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슬픔보다는 다른 감정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허무감.

다른 헌터들은 어째 사냥 중에 동료가 죽어도 무덤덤하더라니,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이런 일을 숱하게 겪고 나면 다들 뇌 한구석이 마비될 만도 하다.

"나 김극인데, 특무대는 안 부릅니까? 상황이 이 지경인데······."

화풀이 삼아 물었더니, 나보다 더 화난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불렀어! 불렀는데 아무도 안 와!」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괴수들과 싸우기 싫어 월급쟁이 생활을 선택한 놈들이니까.

위기 상황에 항명한들 나중에 나라에서 처벌하지도 못하리란 사실을 특무대원 놈들은 잘 알고 있으리라. 나라에서 아무리 화가 나도 놈들에게 징역이라도 선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에 수십 명 단위 초능력 범죄자를 풀어놓을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역겨운 반푼이 각성자들······.

이후로도 나는 계속 싸웠는데, 대충 짐작하기로는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강력한 개체 중 절반 넘게 나 혼자 죽인 것 같다. 강준치가 떠나고 없는 지금 한반도 최강의 각성자로서 당연히 해내야 했던 일이다.

그렇게 괴수들을 죽이면서 별일을 다 겪었다. 저 멀리 뒤에 보낸 팀원들이 칠 미터짜리 데스클로에게 덮쳐질 뻔한 일부터 베헤모스가 사망자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시민들을 꾀어내는 일까지······.

계속해서 쉬지 못하고 싸우던 중에 베헤모스가 방향을 전환했다. 어디로?

무전에서 누군가가 비명 지르듯 외쳤다.

「베헤모스가 대피소로 향하고 있다. 대피소 사람들 전부 멀리 피신시켜!」

베헤모스가 하필이면 그곳으로 가려는 것은 우연이 아닐 터였다. 베헤모스는 정령이며, 영혼과 그 영혼의 위치를 볼 수 있으니까.

베헤모스로서는 지금 수확에 만족할 수 없게도, 게이트를 여는 중에 사람들의 피신이 거의 다 끝나서는 생각보다 많은 영혼을 흡수하지 못한 마당 아닌가. 더 많은 영혼을 거두기 위해, 한 장소에 잔뜩 모인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무전을 들어보니 대피소 인원들을 피신시키려거든 시간이 꽤 필요한 듯했다.

그리고 시간을 벌어주겠다며, 석장실이 나섰다.

「제가······ 제가 한번 유인해볼게요」

「베헤모스를? 무슨 수로······」

「대충 베헤모스 눈에 띄었다가 도주하면 저 따라올 겁니다. 베헤모스나 저나 같은 바위 정령이니까요. 같은 계열 능력자를 흡수할수록 영적 힘이 더 잘 늘어난다니까, 저놈이 보기엔 제가 제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 아니겠습니까?」

석장실은 미끼가 되겠단 말을 퍽 담담하게도 말했다.

그러나 베헤모스의 열선은 초음속 전투기마저 격추하는 수준 아닌가. 일단 표적이 되고 나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데 무슨 용기로?

아니, 용기로 한 말이 아닐 터였다. 죽음을 감수하겠다는 그 말에서는 비장함보다는 체념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 심정을 알 만했다. 자포자기해서는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모양이군.

응원할 기운도, 말릴 기운도 없었다.

나는 계속 날 부르는 곳으로 공간이동을 거듭하며, 베헤모스와 놈을 유인하려는 석장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베헤모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일까? 석장실은 평소보다도 거대한 14미터 크기 바위 거인이 되어 도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것만 해도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크기인데, 수백 미터짜리 베헤모스와 비교하자니 그마저도 난쟁이로 보였다.

그리고 과연, 베헤모스가 그 바위 거인에게 관심을 보였다. 슬그머니 다리를 움직여 석장실이 달리는 쪽으로 이동 방향을 전환하는 걸 보니 틀림없었다.

한편 석장실은 대놓고 죽을 생각은 없는지, 텅 빈 도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건물 뒤로 숨어가며 질주했다. 베헤모스가 열선을 방출하더라도 바로 제 몸에 맞는 게 아니라 엄폐물에 맞도록 신경 쓰며 달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베헤모스에겐 그 노력마저 보잘것없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석장실이 한 빌딩 너머로 달리는 가운데, 베헤모스가 그쪽에 꼬리 끝을 겨누었다. 그러고는 자신과 석장실 사이를 가로막던 그 빌딩에 열선이 발사되었다.

그 꼬리 끝에서 발사된 열선이 빌딩을 꿰뚫고 녹여 버리는 걸 보며 난 지친 와중에도 놀랐다. 콘크리트가 저리 쉽게 뚫리는 것이던가?

나뿐만 아니라 석장실도 놀랐을 것이었다. 석장실 또한 더욱 힘을 내어 달렸지만, 베헤모스가 한 번 더 열선을 방출하자 석장실은 달리다가 쓰러졌다.

바위로 이루어진 다리가, 열선에 당해 녹아버린 것이었다.

쓰러진 석장실은 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베헤모스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베헤모스가 원했다면 바로 바위 거인의 중심을 뚫어 죽여버릴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다리만 파괴해 무력화한 다음 다가가는 것은 너무 거리가 멀면 살해하더라도 그 영혼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가까이 다가가서 죽이려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아직 여유가 있다.

내가 공간이동 했다.

당황했는지 마구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발악하던 바위 거인의 위에 내가 섰다.

바위 거인의 몸뚱이 중심에 석장실이 들어있을 것이었다. 역장 씌운 헌터 라이플로 바위 거인의 몸통을 후려치니 화강암이 깨졌다.

몇 번 더 후려치자 바위 안에 숨어있던 석장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녀석이 날 보고 눈을 부릅떴다.

"김극 형? 왜······"

"공간이동 시키게. 이렇게 바위랑 붙어있으면 질량 때문에 공간이동 못 시키니까 분리 시켜야지."

"날 피신시키겠다고? 뭐하러······"

"이대론 미끼 역할도 더 못 하고 뒤지잖아, 새끼야."

"그냥······ 내버려 둬."

석장실의 말에 내가 코웃음 쳤다.

"내버려 두긴 지랄."

이 간첩 새끼가, 이 난장판을 만들어놓고서 영웅적으로 죽는 꼴은 못 본다. 퍽이나 희생적인 최후로 자기 행적을 세탁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단 말이다.

이 간첩 새끼는 욕을 잔뜩 처먹다가 죽든 말든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비장하게 죽는 꼴은 배알이 꼴려서 못 본다. 절대로.

내가 바위 거인에서 석장실을 끄집어낸 순간, 베헤모스가 뭔가 이상을 느꼈는지 이쪽에 꼬리 끝을 겨누었지만 내가 더욱 빨랐다.

그 꼬리 끝에서 열선이 발사되기 전, 내가 석장실과 함께 공간이동 했다.

어안이 벙벙한 석장실을 골목길에 방치하고서 나는 다시 내 할 일을 하러 나섰다.

「김극 헌터, 지원 필요합니다!」

이젠 대놓고 나만 불러댄다.

그리고 당연히, 나약한 비각성 찌꺼기가 부르면 지키러 가줘야 한다.

또다시 공간이동 하여, 몇 번이고 괴수들을 죽이던 중에 일이 터졌다.

내가 어찌 반응할 틈도 없었다. 눈 한 번 깜빡일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한창 싸우며 고개를 돌려보니, 베헤모스의 꼬리 끝이 이쪽을 향한 걸 발견했다. 난 이때까지만 해도 반응하지 않았다. 빌딩 여러 대가 엄폐물 역할을 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전차를 녹여 버릴 때보다도 굵은 열선이 내 시야를 잠식했다. 그 굵은 열선은 나와 베헤모스 사이의 건물 여러 대를 관통하더니, 또 한 차례 한 번 방출된 열선이 내게 뜨거움을 선사했다.

끔찍한 뜨거움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김극 헌터!"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았다. 척추라도 당했나 해서 몸을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하반신 전체가 열선에 불타버린 것이었다.

어째서 저놈이 날?

내가 괴수들을 여럿 죽이긴 했지만 그 괴수들이 사실 베헤모스의 부하쯤 되는 놈들은 아니다. 내가 베헤모스 저놈의 몸엔 손도 대지 않았거니와 날 죽이기 위해 건물 여러 대를 관통하느라 에너지 낭비 또한 극심했을 텐데, 어째서 굳이 날 노리고······.

아마도 내가 방금 저놈 먹잇감을 가로채서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내 영혼을 삼킬 욕심은 가득한지, 바로 죽이지 않고 상반신은 남겨놓은 모양이었고.

신체 절반이 통째로 날아가서 그런가,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나도 놀랄 만치 제법 담담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보아하니 내 쪽으로 베헤모스 올 거 같은데, 이 방향에 계속 있으면 저놈이 대피소랑 가까워지나?"

그러나 내가 물어도 전혀 들리지 않는지, 근처 군인들은 그저 나 보고 괜찮냐고만 물어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대충 방향을 짐작하여, 사람이 별로 없는 곳으로 공간이동 했다. 이제 베헤모스는 내 영혼을 삼키려면 훨씬 더 많이 걸어야 할 것이다.

그리 방치되어 바닥에 늘어져 있자니, 웬 인천말이 들려왔다.

"김극?"

겨우 고개를 돌려보니 응우옌이 거기 서 있었다.

하반신이 날아가 버린 내 몰골에 놀랐는지, 큼지막하게 뜬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응우옌이 말했다.

"어쩌다······?"

응우옌, 21세기에 태어난 게 잘못인 저 야만인 새끼. 예언가의 직감이 내게 곧 있을 일을 알려준다.

응우옌 저놈은 이 자리에서 날 죽이려 들 것이다.

틀림없다. 내가 저놈이 숨겨야 할 비밀을 알고 있단 사실과 응우옌 저놈의 인성을 고려하면 저놈이 여기서 날 죽이려 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공간이동 해보려 하지만 실패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반쯤 체념한 채 생각했다.

그래,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그리하여 내 힘을 가져가고. 아주 슈퍼맨이 되어서는 베트남에 새 왕조를 세워보든가. 그런 식으로 각성자 사회에 일조하는 게 베헤모스의 밥이 되는 것보다야 나으리라.

그리 생각하고서 눈 감은 채 가만히 있을 때였다.

내 몸이 상승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의아한 맘에 눈을 떠보니, 응우옌이 날 번쩍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그대로 내 몸이 그 어깨에 얹혔다.

응우옌은 날 짊어진 채,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 아무도 안 보이는 데서 죽이려나 보군, 하고 생각하자니 응우옌이 무전을 했다.

"병원! 병원 어디로 가면 돼!"

병원? 거긴 왜?

예상치 못한 단어에 내가 귀를 기울였다. 내가 정신 차린 걸 느꼈는지 응우옌이 계속 달리면서 날 보고 외쳤다.

"김극 당신, 이렇게 죽으면 안 돼! 나랑 술 한 잔 또 해야지, 어?"

아, 이놈이 날 맘에 들어 한다고 말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의리 있게도 날 구하려는 것 또한 진심인 것 같고.

응우옌의 달리기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평소엔 응우옌 이놈보다 한희가 훨씬 빠른데, 그것은 응우옌에게 신경 가속 능력이 없어서 최대속도로 달리다가 자칫 어디 부딪치기라도 하면 대참사가 나는 까닭이지 이 친구의 각성자로서의 성장 정도가 한희보다 부족해서가 아니다.

일직선으로 달리는 것만큼은 한희보다도 이 친구가 훨씬, 훨씬 빠르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없어서 빈 도로를 달린다면 특히 그렇고.

배경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치 휙휙 스쳐 지나가더니, 눈 좀 감았다 떠보자 병원 안이었다.

날 짊어진 채 응우옌이 소리 질렀다.

"치유사!"

치유사가 뭐냐, 의사도 아니고.

그리 생각했더니 치유 능력자를 부른 모양이었다. 한 여자가 불려오더니, 날 보고서 잔뜩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죽은 거 아니에요?"

"살아있어! 내장 벌써 반쯤 복구된 거 안 보여? 김극 신체강화자니까 좀만 보태면 충분히 살릴 수 있으니 어서 살려내!"

이후로는 뭔가 실랑이가 있던 것 같다.

잘 들리지는 않아도 대충 해석하자면 응급환자가 이미 잔뜩 쌓였다든가, 순번을 맘대로 바꿀 순 없다든가 뭐 이런 말이 들려왔다.

그러자 답답한지 응우옌이 무전기에 대고 뭐라 소리치는 게 들리더니,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극 그 인간 병원에 실려 왔으면! 잔말 말고 당장 그 인간부터 살려!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이유 묻지 말고 빨리!」

무전을 들어보니 국안부 장관 같다. 저 인간은 저리 윽박지를 시간에 김극부터 살려야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난다든가, 뭐 이런 식으로 설명이나 해줄 것이지 왜 자꾸 설명할 시간 없다는 말이나 지껄이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내 몸 곳곳에 웬 수액관 같은 게 꽂혔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물컹한 액체는 대충 초재생능력자용 드링크인 듯했다.

그 영양분을 받아들인 내 몸의 재생력이 활성화됐다.

새 살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타서 없어진 뼈가 솟아나고, 근육이 뼈 주변을 뒤덮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떠보니, 하반신이 생겨나 있었다. 대충 주변에 떨어져 있던, 몸에 맞지도 않는 바지를 끼워 입고는 치유 능력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

"아니, 뭐 제대로 힘 쓰기도 전에 용액 주입하니까 재생되던데······."

"그럼 다행이고."

그러고는 몸 상태를 점검했다. 말할 것도 없이 엉망이더라.

근육마저 잘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몸 자체를 움직일 순 있었다. 분명 아까 열선에 역장이 깨졌는데, 지금은 꽤 쉬어서일까?

어느새 복구된 역장 외골격을 근육 삼아서 몸 자체를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내가 몸을 일으키자 응우옌이 반응했다.

"김극? 뭐해! 쉬어!"

아니, 그럴 순 없다. 내가 비각성 찌꺼기가 아니고서야.

각성자는 초인이다.

각성자는 비각성자보다 우월하다.

심신 양면에서, 아니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 비각성 찌꺼기 따위보다 백배 천배는 더.

하찮은 비각성 찌꺼기들에게 각성자의 우월함을 보일 것이다.

몸을 일으켜 공간이동 할 준비를 하자니, 남자 하나가 이쪽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긴급상황에 파견된 기자인 모양이다. 평소 여유 있을 때라면 손을 번쩍 들어 시그니처 포즈라도 취해줬으련만 지금 그럴 수는 없겠다. 그러는 대신 눈을 마주친 기자에게 씩 웃어보이며 중얼거렸다.

"인천 만세."

그리고 나는 공간이동 했다. 병원 밖 야외로. 한창 괴수들과의 싸움이 벌어지는 옥타곤으로 돌아왔다.

하늘을 보니 이제 뭔가 터지고 있질 않았다. 무인기도, 헬기와 전투기도 날아다니지 않았다. 벌써 전멸한 걸까? 여기저기에 공군 지원을 요청한 줄로 아는데 아직은 소식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 할 일을 해야한다.

"나 김극인데, 폭약 있죠? 최대한 모아줘요. 어디다 쓰려는 거냐구?"

내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저기 저 베헤모스 안 보이나?"

101화 베헤모스 - [4]

정진영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건 꿈이야.

반드시 꿈이어야 한다. 지금 일어난 일이 현실일 수는 없으니 반드시 그래야 해.

약 삼 분 전, 장병곤 씨가 죽었다.

엎드려서 총을 쏘다가, 옆 건물 옥상에서 툭 하고 떨어진 데스클로의 갈고리발톱에 등을 찍혀 죽었다.

그 데스클로는 바로 사살했지만, 장병곤 씨는 움직이지 않았다.

위기를 인지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지고서 끝나버린 일이었다.

끔찍한 상황을 예고하는 복선 따윈 깔리지도 않았는데, 동료 하나가 죽었다.

새삼스럽지만, 김극을 따라다니며 해온 사냥은 참으로 쉬우면서도 안전한 것이었음을 이제 알겠다. 다른 헌터들은 이런 일을 일상처럼 겪어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팀원들이 죽지 않도록, 최대한 모두를 감싸고 보호했던 김극은 지금 여기 없다.

아까 무전을 들어보니 김극은 지금 무사한 것 같지 않았다. 무전이 제대로 들리지 않아서 죽었다는 것인지, 크게 상처 입었다는 것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하여간 지금 부른다고 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상상 이상의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이제는 몸의 제어에서 풀려난 위아래 턱이 쉴 새 없이 떨렸다.

공포와 상념을 뚫고, 임형택 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임형택 씨는 이쪽의 어깨를 연달아 치면서 외쳤다.

"뭐······ 새······ 달······!"

여기저기서 울리는 굉음에 파묻혀 정확한 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상황과 표정으로 미루어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뭐해, 새꺄! 달려!'

늘 점잖은 임형택 씨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왔다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었다.

정진영은 달렸다.

이 후방까지 괴수들이 침투했다. 그 데스클로 말고도 다른 데스클로들이 저 너머 도로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헤모스가 이쪽으로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후퇴······ 후······!"

잘 들리지도 않는 가운데 임형택 씨가 계속 외쳤다. 후퇴하라고. 그 말대로 정진영은 달렸다.

땅이 너무 흔들리는 탓에 달리기도 쉽지 않았지만 달려야 했다. 장병곤 씨처럼 죽지 않으려면 그래야······.

모두가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중이었다. 한 외침이 울렸다.

「나······ 나 버리고 가지 마!」

등 뒤에서 들린 것 같았다.

그러니까, 시체를 거둘 수도 없이 방치해야 했던 장병곤 씨가 외친 것 같았다!

"장병곤 씨? 살아있었······"

「나 살아있어! 성문영, 이종호! 정진영! 도와줘!」

확실했다. 이쪽 이름이 불렸다!

정진영은 달리다 말고 저 뒤를 보았다.

여전히 장병곤은 저기 쓰러져있는 가운데, 데스클로는 아직 그 위치까지 당도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도우려면 도울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판단을 마쳤을 때, 정진영은 자신이 이미 달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진영은 장병곤 씨를 향해 달려 나갔다.

저 홀로 팀원에게서 떨어져 달리면서, 위기 상황에서도 가슴이 살짝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종호도 성문영도 나서지 않는 가운데 나 혼자 동료를 도우러 나서다니 대단한 것 같다고, 나중에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급박한 와중에 두려움을 가라앉히려면 그런 한심한 생각이라도 해야 했다.

지금도 베헤모스가 전진하고 있었다. 베헤모스가 걷는 박자에 맞춰 지축이 흔들렸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장병곤 씨의 외침은 어떻게 그 굉음을 뚫고 귓가에 온전히 닿았을까?

그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을 때는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

나는 내 앞에 놓인 폭약들을 보았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내 요청에 따라 군인들이 여기저기서 모아준 폭약이었다.

"이게 다예요?"

내 물음에 대령 하나가 대답했다.

"당장에는요. 왜, 부족한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더 많으면 좋았겠지만······.

물론 이 폭약을 다 써도 베헤모스를 처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핵폭탄을 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핵이든 폭약이든 그것만으로 사백 미터짜리 산을 통째로 치울 수야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 정도 폭약이면 그 산에 구멍을 뚫을 수는 있을 것이다. 봉우리 하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을 테고.

내가 하려는 것이 그 비슷한 짓이었다. 산 일부에 손상입히기.

"이 폭약으로 뭘 어쩌려는 겁니까? 암만 봐도 이걸로는 턱도 없는 것 같은데······."

나는 그리 묻는 군인에게 대답했다.

"저 꼬리를 붕괴시킬 겁니다. 폭약을 다 써서, 저놈 뿌리부터요."

"꼬리를? 아, 확실히 그래야······"

베헤모스의 꼬리를 파괴해야 한다.

본디 맨티코어로서 가시를 발사했을, 지금은 열선이나 뿜어대는 저 꼬리를 말이다.

앞서 봤듯 베헤모스는 눈으로도 열선을 방출할 수 있는 모양이지만, 그러나 공중의 헬기며 전투기들을 격추할 때는 눈을 쓰지 않고 꼬리만 써서 열선을 방출하곤 했다.

추측건대 안면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일종의 고정포대일 것이다. 조준 보정 능력이 있더라도, 목을 움직여서는 그토록 빠른 비행체들을 조준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지?

그러니 일단 저 꼬리만 어떻게든 제거한다면, 베헤모스의 열선이 하늘을 가를 때마다 전투기가 한두 대씩 터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곧 공중 지원이 당도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해내야 하는 일이다.

폭격이 멈춘 지금이 아니라면 아군의 공격에 당할 염려 없이 베헤모스의 몸 위에서 작업할 기회가 없을 것이요, 지원하러 온 전투기들마저 모조리 격추당하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지금 반드시 해내야 한다.

폭약과 함께 공간이동 하기 전, 나는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한 남자를 봤다. 정신적 그물망을 통해 겨우 사람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만치 빠른 남자였다.

한희인가?

드디어 특무대에서 지원하러 온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아닌 것 같았다.

한희가 도우러 온 것은 맞았다. 그러나 특무대로서 온 것은 아니었다.

한희는 초고속으로 움직이며 데스클로들을 베고 또 베다가 지쳤는지 잠시 멈췄다. 그리하여 드러난 한희의 모습을 보니 특무대 복장이 아니라 웬 츄리닝을 입고 있었고.

특무대 복장으로 참전했다간 특무대 선배들에게 또 욕먹을까 봐 평상복으로 뛰어온 모양인데.

저 의기에 감탄해야 하는지, 아니면 괴수 사냥을 무슨 쓰레기 무단투기인 양 숨기게 만드는 특무대의 의지에 감탄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움직이며 괴수들을 참살하기 시작한 한희를 보다 말고, 폭약과 함께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나는 베헤모스의 꼬리 앞에 섰다.

그 거대괴수의 몸 위에 서서 최대한 빠르게 작업했다.

공간이동으로 옮길 수 있는 최대 질량만큼의 폭약을 한꺼번에 옮겨서는, 그 폭약들을 베헤모스의 꼬리에 부착했다.

그리 작업하면서 한 자리에 일 초 이상 가만히 있다가는 끝장이다. 바로 열선이 날아와 날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말 테니까.

한두 번의 공간이동으론 모든 폭약을 옮길 수 없어서 여러 번, 필사적으로 빠르게 공간이동을 거듭하며 작업을 이어나갔다.

연거푸 공간이동 한 탓에 현기증이 느껴지는 가운데, 나는 준비된 모든 폭약을 옮긴 것을 확인하고는 격발했다.

그리하여 베헤모스의 꼬리에서 폭발이 일었다. 핵이라도 터진 듯이 성대한 폭발······ 성공이다!

그러나 폭발의 화염과 연기가 걷힌 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여전히 베헤모스의 몸에 붙어있는 꼬리를 보았다.

폭발이 아무런 손상도 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 폭발이 꼬리에 붙어있던 암석들은 모조리 떼어냈으니까.

그리하여 베헤모스의 맨살, 털조차 거의 붙어있지 않은 꼬리의 살가죽이 드러났다.

드러난 꼬리의 살가죽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긁힌 자국조차 없었다. 어째서?

이 상황을 이해해보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하여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석장실이 바위 거인의 형체를 이룰 때 그러듯, 베헤모스는 최대한 많은 바위를 몸에 장착한 채 다녔던 모양이다. 그래서 원래 몸집보다 훨씬 커 보였던 모양이지?

거대화 개체들은 아무리 몸집이 커도 통상 개체와 별 다를 바 없을 만치 재빠른 몸놀림을 보여주는 법인데, 왜 베헤모스는 유독 느릿느릿했는지 이제 알겠다.

거대화 개체로서, 베헤모스의 원래 몸 크기는 이백 미터쯤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암석 정령이 되어서는 몸 전체를 바위로 바꾸는 게 아니라, 몸 주변에 암석을 붙이는 식으로 몸집과 방어력을 보강했을 것이다. 대충 이백 미터 규모의 갑옷을 입고 다녔으리라. 이번에 꼬리의 갑옷이 깨진 모양이고.

지금 폭발로 드러난 꼬리는 그 본체의 일부일 것이다.

아마도, 그 맨살이 갑옷보다도 훨씬 단단할 것이다. 방금 폭발에 아무런 손상도 없는 걸 보니 틀림없었다.

나는 굵기가 구 미터에서 십 미터쯤 돼 보이는 베헤모스의 꼬리를 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대충 오 미터쯤 되는 오거만 해도 얼마나 단단했던가? 기관포탄으로도 단번에 죽일 수 없을 만치 온몸의 근육이 단단했다.

거대화 개체들은 대개 그렇다.

동물의 몸이 이 정도로 크면 뼈와 근육이 제 체중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느니, 제 체중에 짓눌려 죽을 거라느니, 아예 뭍 밖에서는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라느니······.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거대화 개체들의 뼈는 굵고 단단해지며 근육 또한 그 말도 안 되는 체중을 견딜 만치 질기고 강력하게 발달해버린다.

그러니 아마 베헤모스의 근육은 약 이백 미터 규모의 몸뚱이를 지탱하고 움직일 수 있을 만치 발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근육은 얼마나 단단할 것인가?

인간의 병기로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 것인가?

모르겠다. 확인해볼 여유도 없다.

그래도, 인간의 병기가 아닌 다른 파괴 수단을 알고 있다. 놈의 몸뚱이가 아무리 단단한들 먹힐 만한 무기를.

난 빠르게 무전으로 요청했다.

「역장 날붙이! 역장 날붙이 쓸 수 있는 각성자들 최대한 빠르게!」

내 요청에 응해 각성자 두 명을 준비했다는 무전이 곧 돌아왔다.

무전에서 전해준 장소로 공간이동 하니, 내가 아는 얼굴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희랑, 박주헌?"

한희야 예상한 바였지만 박주헌은 의외였다. 내가 물었다.

"한희는 그렇다 치고 넌 왜 왔냐? 헌터도 그만둔 백수 새끼가."

네 특무대 후배들은 상부 명령도 무시하고 오지 않던데, 하고 쏘아붙이기엔 시간이 부족해서 그러지 않았다.

박주헌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 곧 아카데미 강사 될 거잖아."

"그게 뭐?"

"쌤, 베헤모스 날뛸 때 쌤은 뭐했어요? 학생들이 이렇게 물을 때 선생님은 그때 헌터 아니라서 집에서 똥이나 싸고 있었어. 뭐 이렇게 대답할 순 없으니까······"

아, 이 새끼. 상관 명령이랍시고 살인까지 불사할 만치 특무대 일을 진지하게 하더니, 선생 일도 그만큼 진지하게 임하려나 보지?

박주헌은 이후로도 주절주절 설명을 이어나갔다. 말이 많아서가 아니라 긴장을 해소하려는 행동 같았다. 그래서 말 섞을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굳이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특무대 애들 안 움직이는 건······ 이해해야 돼. 나 쫓겨날 때 특무대 분위기 흉흉했어. 특무대장이 직접 내린 명령대로 일했을 뿐인데 죄다 잘렸다며,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랍시고 곧이곧대로 들어선 안 된다는 얘기가 오갔······"

"이해하긴 지랄."

참지 못한 내가 쏘아붙였더니, 박주헌이 코웃음 쳤다.

"하기야 뭐, 굳이 변호할 필욘 없나? 지금은 나도 전직 헌터로서 온 거니까. 전직 특무대가 아니라."

그리고 내가 물었다.

"이번 일, 죽을 위험 큰 거 알지?"

"헌터 일하면서 언제든 뒤지는 게 당연하지."

박주헌에 이어 한희를 쳐다보았다.

이번 작전에 임하기엔 칼이 너무 짧은 것 같은데, 박주헌이 들고 온 것처럼 긴 칼은 없느냐 물어보니 이게 최선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가 역장 날붙이를 씌울 수 있는 최대 길이의 칼이 이 정도란 것이었다.

하기야 한희는 변변한 사냥 경험도 없는 녀석이니까. 박주헌만큼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후로는 무전을 통해 이런저런 신호를 주고받다가, 나는 두 칼잡이의 손을 잡았다.

기다리던 신호가 도착했다.

「지금!」

나는 한희와 박주헌을 데리고서 공간이동 했다.

102화 베헤모스 - [5]

그렇게 우리 셋은 베헤모스의 등에 도달했다. 암석으로 이루어졌기에 생물체의 일부란 느낌조차 들지 않는 그곳에.

바로 앞에 베헤모스의 꼬리가 보였다. 기둥처럼 굵다란 꼬리였다.

"잘라!"

한희와 박주헌이 즉시 움직였다. 두 명은 미리 뽑아 들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한희는 짧은 순간 여러 번, 박주헌은 최대한 큰 동작으로 칼질했다.

언뜻 보기엔 저 둘이서 구 미터 굵기쯤 잘라내기 어려울 것 같지 않았지만, 그러나 쉽지 않을 일이었다.

한 번의 칼질로는 안 된다. 말도 안 되게 길쭉한 박주헌의 칼보다도 저 꼬리가 훨씬 굵으니까.

한 번 깔끔하게 자르고서 끝내서도 안 된다. 베헤모스에게는 초재생능력이 있으니까. 그 사실을 고려하면 깔끔하게 한 번 절단해봤자 순식간에 도로 붙을 것이다.

그러니 재생이 쉽지 않도록 최대한 지저분하게, 여러 겹을 잘라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저 꼬리를 저놈의 신체에서 분리해낼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일을 최대한 빠르게 해내야 한다.

왜냐하면 베헤모스에겐 그놈의 열선이 있으니까. 몸에 달라붙은 모기 한둘쯤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는 끔찍한 무기가.

과연 둘이서 칼질을 시작한 지 약 십 초쯤 지났을 때, 베헤모스도 상황을 인지했는지 꼬리를 움직였다.

나는 이쪽을 겨누려는 듯한 베헤모스의 꼬리 끝을 보고서 눈을 부릅떴다.

제 신체에 열선을 쏘는 것마저 마다하지 않으려나 보군. 예상한 일이었는데도 섬뜩했다.

한편, 저 하늘에서 투명한 것이 반짝였다. 더는 헬기며 전투기가 날아다니지 않는 가운데, 홀로 외로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체.

백담비의 얼음 솔개였다. 최대 크기로 만들어냈는지 날개폭만 해도 얼추 18m는 되어 보였다.

베헤모스는 그 얼음 솔개가 자기에게 날아오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아까 날아다니던 무인기들이 그랬듯 자기 열선을 낭비케 하고자 날린 디코이쯤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저 얼음 조형물에서는 충분한 크기의 영혼이 보이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무사히, 얼음 솔개는 베헤모스의 위에 도달했다.

이 와중에 베헤모스의 꼬리 끝 조준이 끝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 꼬리 끝의 움직임이 멎은 순간, 얼음 솔개가 움직였다.

최대속도로 급강하한 얼음 솔개가 베헤모스의 꼬리 끝에 닿아서는, 얼음 파편을 휘날리며 폭발했다.

그와 함께 솔개가 발톱에 쥐고 있던 물통도 터져나갔다.

단순히 얼음으로만 이루어진 조형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냉기라고 불러야 할 무언가가 베헤모스의 꼬리 끝을 잠식했다.

그리하여 베헤모스의 꼬리 끝이 통째로 얼어붙었다.

뒤이어 베헤모스의 꼬리 끝에서, 열선이 발사되었다.

그 열선이 이쪽에는 닿지 않았다. 얼음 속에서 한 차례 산란 된 열선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암석 외피를 녹였다.

그리하여 꼬리 끝의 얼음 또한 녹아버렸지만, 잠시나마 시간은 벌었다.

여기까지는 작전대로였다. 작전을 제대로 짤 시간이 없어서 여러모로 엉성했지만, 어쨌든 아직은 통했다.

한편 두 칼잡이는 자신들을 스칠 뻔했던 열선에 공포를 느낀 모양이었다. 두 칼잡이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계속 잘라내! 계속―"

한희는 보이지도 않는 속도의 칼질을, 박주헌은 큼지막한 궤적을 그리는 칼질을 쉬지 않고 이어 나갔다.

의외로 가속 능력자인 한희보다 박주헌이 잘라내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박주헌 쪽의 역장 날붙이의 길이가 훨씬 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헤모스에게도 박주헌 쪽이 더욱 위협적으로 판단된 모양이다.

베헤모스의 꼬리 끝에서, 또 한 차례 발사된 열선이 이번에는 박주헌의 몸에 닿았다.

칼질하던 그대로, 박주헌의 몸이 열선에 휩싸였다.

단말마 따윈 없었다. 아마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제발 그렇기를.

열선이 꺼졌을 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박주헌은 뼈도 남지 않았다. 재만 조금 남아있었을 뿐이다.

이 와중에 베헤모스는 제 몸쪽에 열선을 방출하는 과정에서 제 몸을 크게 파괴하지도 않았다. 몸에 생겨난 사마귀를 수술할 때 레이저가 사마귀와 그 부근만을 정확히 태워버리듯, 발사된 열선은 박주헌만을 정확히 제거해버렸다.

이번에도 끔찍한 걸 넘어 허무한 죽음, 그러나 이번에는 눈 감을 여유도 없었다.

난 그저 속으로 짧게 생각했다. 강준치, 그 개자식.

상황이 급박한 걸 아는 걸까. 한희도 계속해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움직였다.

한희는 칼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빠르게 이동했다. 자르는 족족 재생해버리는 그놈의 꼬리를 완전히 잘라내기 위해, 꼬리 주변을 정신 나간 속도로 맴돌며 절단을 이어나갔다.

그러더니 외쳤다.

"다 잘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가 움직였다.

"넌 피해!"

다행히도 한희는 미리 약속한 대로 움직였다. 녀석이 부리나케 몸을 던져 베헤모스의 몸 아래로 떨어지는 가운데, 난 녀석이 떨어지고서 무사한지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난 베헤모스의 등에 홀로 남았다.

그리고 손에 든 망치를 휘둘렀다.

이제 내가 충격을 가해, 두 칼잡이가 잘라낸 저 꼬리를 놈의 몸에서 떼어내야 했다.

양손으로 단단히 잡은 망치에, 모든 힘을 실어 꼬리를 향해 휘둘렀다. 손을 통해 거센 반동이 느껴졌다. '콰앙―'

살가죽을 쳤다고는 믿을 수 없게도 '콰앙' 하는 소리가 났다.

심지어 충격파까지 발생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절단된 꼬리는 지금도 재생하고 있거니와 그 무게 또한 빌딩 수준이었다. 내 망치질 한 번에 꼬리는 바로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니라 살짝 저 뒤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망치질을 계속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있을까? 베헤모스의 꼬리 끝이 이미 날 겨누고 있는데······.

그리고 열선이 발사되기 직전, 이번에도 백담비가 보냈을 얼음 솔개가 물통과 함께 날아왔다.

이번에는 베헤모스가 내버려 두질 않았다. 베헤모스가 꼬리를 빠르게 움직여 그쪽을 조준하고는 얼음 솔개를 격추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온 힘을 다해 망치를 휘둘렀다.

눈앞의 꼬리를 치고, 치고, 또 쳤다.

그리 충격을 가할 때마다 베헤모스의 굵직한 꼬리는 아주 조금씩만 변형될 뿐이었지만, 분명하게 저 뒤로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베헤모스의 꼬리 끝이 날 겨누었다.

그걸 보면서도 하던 행동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난 살짝, 아주 살짝 옆으로 공간이동 하길 거듭하며 망치질을 계속했다.

그런 회피 기동을 넘어서 아예 이 자리를 이탈할 수는 없었다.

내가 이 자리를 잠시라도 벗어나 망치질을 멈췄다간, 조금만 지나도 저 꼬리가 다시 붙어버리고 만다.

내가 공간이동 하며 망치를 또 한 번 휘둘렀을 때, 그놈의 열선이 마침내 발사되었다.

회피 기동한 보람이 있기는 있어서, 열선이 내 몸에 제대로 명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빗나가지도 않았다.

내 한쪽 어깨부터 한쪽 다리까지, 열선에 불타서는 사라졌다.

나는 그대로 쓰러지려다 말았다. 조금만 더.

망치마저 열선에 녹아내렸기에 맨몸으로 마무리를 해야 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베헤모스의 꼬리에 살짝 붙어있는 털을 붙잡은 채, 나는 그 꼬리에 박치기했다.

뒤져라, 괭이 새끼.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제발.

그리고 내 박치기에 베헤모스가 죽는 일은 없었지만, 그 충격은 꼬리에 전달되었다. 그 꼬리가 더 뒤로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허리의 반동을 실어 또 한 번 박치기하자, 망치로 내려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콰앙' 하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뭔가가 바위에 떨어지면 날 법한, '쿵' 하는 소리도.

어지러움 속에서 눈을 뜬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챘다.

마침내 베헤모스의 꼬리가 낙하를 시작했다.

그 뿌리에서 분리된 꼬리가, 베헤모스의 몸뚱이에 쿵 하고 부딪쳤다가 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꼬리털을 붙잡고 있던 나 또한 함께 떨어져 내렸지만,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공간이동 하여 낙하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 으, 아······.

공간이동 하고도 땅을 한 차례 굴러야 했다. 역장은 방금 파괴된 탓에 맨몸으로 충격을 견뎌야 했고.

그러고 나니 주변의 군인들이 달려왔다.

"성공했네! 잘했어요, 진짜 잘했―"

"김극 당신! 대체 뭘 하려나 했더니 기어이!"

뒤이어 응우옌이 달려와서는 정수기 물통만 한 용기를 내게 내밀었는데, 초재생능력자용 드링크였다.

그 내용물을 받아마시며 상황을 지켜보자니, 꼬리를 잃고도 베헤모스는 아직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싶은 욕망이 가득한 듯했다.

그러니까, 베헤모스의 전진이 계속되었다는 소리다.

나와 군인들은 멍하니 그 전진을 지켜보았다. 계속되는 지진에 몸을 들썩이던 중이었다.

"아······!"

마침내 공군 지원이 왔다.

미군에서 보내준 건지, 아니면 일본이나 중국에서 보내준 건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베헤모스를 향한 폭격이 재개되었다.

처음 국군에서 준비한 공군 병력만큼 하늘에 맴도는 전투기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베헤모스의 몸에 타격이 가해지는 일 자체가 중요했다. 그러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간 놈은 기어이 한반도 전체를 횡단하고 말 테니까.

그리고 계속 자신에게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전투기에 맞서, 베헤모스는 양 눈의 열선을 발사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안면을 통해 쏘는 열선은 그 조준 속도가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몇 차례고 베헤모스의 안구에서 발사된 열선은 전투기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텅 빈 허공을 스치다가, 운 나쁜 전투기 한 대를 겨우 파괴했을 뿐이다.

이 상황에 애가 타는지 베헤모스가 포효했다.

그 포효만으로도 내 주변 군인들은 몸이 성하지 못해서, 눈살을 찌푸린 채 귀를 감싸 쥐고 주저앉아야 했다.

그리고 군인들이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베헤모스는 등을 돌린 채였다.

그러니까, 베헤모스가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게이트에서는 계속해서 괴수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물결을 이룬 그 괴수들을 향해, 베헤모스의 양 눈에서 방출된 열선이 괴수 무리의 중심을 휩쓸었다.

그런 식으로 열선이 지상을 몇 번 휩쓸자 물결을 이루고 있던 괴수들은 모조리 불타 사라졌다.

베헤모스, 저놈이 평상시엔 자기를 따라다니는 괴수들을 직접 해치지 않는데, 그것은 저놈이 괴수들에게 동지애를 느끼거나 놈들을 부하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이 죽인 괴수들의 영혼 또한 그 절반쯤은 자기가 흡수할 수 있는 까닭이다.

쓰러뜨린 괴수의 영혼은 쓰러뜨린 당사자에게 흡수되는 것이 맞지만, 비각성자가 괴수를 쓰러뜨린 경우엔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 식으로 주인 잃은 괴수의 영혼들은 가장 강력한 인력에 이끌려 베헤모스에게 흡수되고 만다.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쓰러진 괴수들의 영혼을 흡수한 것만으로도 베헤모스는 충분한 수확을 얻었을 텐데, 이제 돌아가야 할 때가 되니 지금까지의 수확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걸까?

베헤모스는 이제는 직접 괴수들을 죽이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짐승이 하는 짓이란 늘 저렇다. 인간이 보기에 공생하는 것 같아도 실은 그렇지 않은 추악한 짓거리들.

기껏 게이트 밖으로 나온 괴수들을 짓밟고 태우면서, 베헤모스는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게이트가 베헤모스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리하여 지진 또한 멈춘 순간, 곧바로 사람들의 환호가 들린 것은 우연이 아니라 굉음 또한 더 들리지 않게 된 덕에 비로소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리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주변 군인들도 서로를 얼싸안더니 눈물을 흘리며 마구 고함지르기 시작했다.

내 가슴에 단 무전기에서는 국안부 장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극 헌터, 들립니까? 그쪽이 뭘 해냈는지 알아요? 당신이 서울 사람 모두를 살렸습니다!」

계속 지껄여라, 등신 새끼.

내가 응답하지 않았는데도 무전기에서는 계속 놈이 외쳐댔다.

「내 말 들리죠? 내가 정말 국민을 대표해서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한편 날 향해 다가온 군인들도 여럿 있었다.

군인들이 내게 수고했다느니, 덕분에 살았다느니 열띤 목소리로 뭐라 말했지만 난 그들과 함께 즐길 여유가 없었다.

내 팀원들, 그 녀석들은 어떻게 됐나?

백담비는 무사한 걸 이미 확인했으니 이제 나머지를 살펴야 했다. 아까부터 정신적 그물망으로 내 팀원들의 위치를 살폈지만, 그들이 멀리 떠났는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내 팀원들을 찾으러 나섰다.

그들이 발견된 것은 약 십 분 뒤였다.

나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떨어뜨린 채 바닥에 주저앉은 성문영과 이종호를 보았다.

그리고 정진영을 보고서는 눈을 껌뻑였다.

정진영은 내가 예비용으로 가지고 다니게 했던 75kg 헌터 라이플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한 손으로. 대체 어떻게?

지금 정진영은 피투성이였다.

한쪽 팔과 한 다리를 잃으면 당연히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정진영은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사라진 채, 그렇듯 사지의 절반이 사라지고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방금 말했듯 헌터 라이플을 들고서.

심지어 정진영이 헌터 라이플을 든 자세는 내가 평소 저 물건으로 사격할 때의 자세였는데, 양손을 써야만 가능한 견착 자세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곧 알게 되었다.

정진영의 팔다리 절반은 사라졌지만, 그것을 대신할 무언가가 생겨나 있었다.

나는 피와 먼지가 묻었기에 겨우 윤곽이 드러난, 정진영의 투명한 팔다리를 보았다.

저 투명한 팔다리가 무엇인지 알 만했다. 역장 외골격. 특이하게도 잃어버린 사지를 대체하는 형식으로 생겨난.

형 각성했구나, 하고 축하할 수는 없었다.

정진영도 축하받을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다가가자 정진영은 부릅뜬 눈으로 내게 헌터 라이플을 겨누었는데, 나인 걸 뒤늦게 알아본 듯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더니 그 입이 열렸다.

"병곤 형이랑, 형택 아저씨······ 형택 아저씨가······"

나는 팀원 중에 보이지 않는 두 명, 장병곤과 임형택 씨의 부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정진영이 말을 이었다.

"형택 아저씨는, 날 도우려다······ 처음에 돌아가란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않아서······"

역장 외골격 능력은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각성한다는 사실, 그리고 저 표정이며 목소리만 봐도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만했다.

김형만 씨의 참수된 시체를 봤을 때 그랬듯, 나는 눈을 힘주어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는 시체조차 회수하지 못했다는 두 명을 찾아내기 위해, 무너져버린 서울시를 걸었다. 온갖 괴수며 헌터의 시체가 널린 그곳으로.

그렇게 베헤모스의 침공이 끝났다.

아니, 1차 침공이 끝났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2차'를 암시하려면 마땅히 그래야 하리라.

103화 유명 헌터 김극 - [1]

Q.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감사의 말부터 전하고 싶다. 김극 헌터가 이번 사태 해결에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

현장 군인들의 증언과 현장에 남은 흔적을 보면, 김극 헌터가 이곳저곳 쉬지 않고 옮겨 다니며, 출몰한 고위험 괴수들의 절반 이상을 혼자서 제거했거니와 무엇보다 베헤모스의 격퇴를 직접 주도해서 성공했다.

아예 김극 헌터가 서울을 지켰단 말이 많은데, 본 기자 또한 한 명의 국민으로서 다시 한번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 미안한데 별로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겸손하게 굴려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지나칠 만치 날 치켜세우느라 죽은 군인들이며 헌터들의 공을 줄이는 수준이라 듣기에 여러모로 불편하다.

베헤모스 격퇴 건에 대해서도 나와 대동했던 박주헌 헌터의 공이 특히 컸다. 그를 비롯한 전사자들 모두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리고 또한, 정부에 경고 또한 전하고 싶다.

Q. 경고라면 어떤?

- 정부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이번에 죽은 헌터들에 대한 보상을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출동비의 몇 배를 주고서 보상이며 배상을 다 한 셈 치려 들었다간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Q. 그러나 헌터들에 대한 보상을 우선시하기엔 현재 나라의 상황이 심각하다. 이번 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시민도 너무 많다.

정부로선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 우선일 텐데, 아무래도 고소득층에 속하는 헌터들에 대한 보상 및 배상은 우선순위가 낮지 않겠나?

- 아니, 헌터들에 대한 보상이 최우선이다.

헌터들이 싸웠고, 헌터들이 죽었다. 심지어 출동할 의무가 없었던 헌터들마저 부름에 응했다가 대거 전사했다.

외국인이든 서울 바깥 헌터든, 법과 규정 따윈 무시한 채 위기 상황이란 이유로 막무가내로 데려와 싸우게 한 탓에 그리되었다.

이 마당에 나라 사정이 어떻다느니, 이중배상금지 조항이 있어서 일정 액수 이상 배상할 수 없다느니 지껄이면서 법을 준수하고 합리적으로 구는 척 충분한 보상을 하지 않았다간 내가 결코 가만히 있지 않겠다.

Q. 자꾸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정부를 상대로 응징이라도 불사하겠단 말인가?

- 내가 지금 테러 예고하는 게 맞다. 내가 그럴 수 있음을 모두 알 것이다. 실행에 옮기는 게 어려울 뿐인데, 그마저도 화가 나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고.

Q. 아직 정부의 대응은 발표되지도 않았는데, 진정하는 게 어떨지

- 차기 헌터 협회장으로서 헌터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주던 김형만 씨가 살아계셨다면 훨씬 이성적으로 대응했을 텐데, 김형만 씨도 이번 사태에서 몸 아끼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분께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

그리고 난 김형만 씨가 아니라서 김형만 씨처럼 구는 법은 모르겠다.

다만 헌터 라이플을 쏘는 법은 안다. 그 물건이 괴수가 아니라 사람에게도 먹힌단 것도 안다. 청와대 주소와 국회의사당 주소도 알고.

(······)

Q. 카메라에 촬영된 김극 헌터의 투혼이 인상 깊다.

하반신을 통째로 잃어 죽을 위기를 겪었음에도, 신체 재생을 마치기 무섭게 김극 헌터는 바로 전선에 복귀하여 베헤모스 격퇴 작전을 주도했다. 그 장면을 본 국민들의 반응이 비극적인 와중에도 뜨겁다.

아무리 각성자로서 신체를 복구할 수 있다지만, 그런 일을 겪고서도 바로 전장에 복귀할 맘을 먹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초인적인 투혼을 발휘한 이유가 있다면?

- 부평역에서 5분 거리인 부평 수렵 전문 학원을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고려해도 내가 좀 무리하긴 했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했다.

Q. 반드시 그래야 했던 이유라면,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 아니,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 상황에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몸 사린 놈들이 있었으니, 반대쪽에선 나라도 열심히 일해야 세상의 균형이 맞았다.

Q. 그 상황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몸 사린 사람들이라면, 특무대를 말하는 건가?

- 맞다. 이제부터 특무대원들은 두 발로 걷는 데스클로다. 더도 덜도 아니고 그저 데스클로가 확실하다.

Q. 특무대원들이 데스클로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지

- 헌터를 공격하고, 헌터를 죽이려 들고, 역장 날붙이를 휘두르며, 괴수들과는 싸우지 않으면서 인간의 법과 지시를 무시하는 생명체가 있다면 누가 봐도 데스클로지 그게 어딜 봐서 인간인가?

Q. 어째서 출동 명령에 불응했느냐는 질문에 특무대원들은 괴수 대응이 자기네 의무가 아니란 해명을 하던데. 그에 대한 김극 헌터의 의견이 있다면?

-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특무대에서 그토록 본연의 의무를 중시한다면 저번 김석희 사건에서 헌터들이 불합리하게 동원되어 부려 먹힐 때도 사정을 봐줬어야지.

당시에는 헌터들이 자기네 지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단 이유로 대뜸 주먹부터 휘두르던 놈들이 중요한 상황에는 상부 지시도 무시하는 것을 어떻게 곱게 보나?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터 어느 특무대원이 헌터를 핍박하거든 데스클로가 헌터를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내가 직접 대응하겠다.

Q, 직접 대응하겠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 헌터를 상대로 특무대가 출몰했단 신고를 받으면, 바로 내가 공간이동으로 현장에 나타나서 대응하겠단 소리다. 주먹과 발로 대응할지 헌터 라이플과 망치를 들고 대응할지는 몰라도 하여튼 가만히 있진 않을 것.

Q. 특무대를 상대로 폭력까지 불사하겠단 발언은 꽤 충격적이다. 하기야 이번 일로 친하게 지냈을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너무 전사했다. 특무대가 불참한 탓에 헌터들만이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분노로 말미암아 그리 말하는 건가?

- 화나는 것도 화나는 건데, 그보다 큰 다른 이유가 있다.

Q. 자세한 설명을 바란다

- 가장 중요한 상황에는 상관 지시마저 불응하던 특무대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상황에 법을 들먹이며 질서의 수호자 행세하려는 꼴은 못 본다.

특히 헌터 상대로 그러는 꼴은 못 본다. 전직 헌터를 상대로 그러는 것 또한 결코 두고 볼 수 없다.

전직 헌터요, 현재는 살인 혐의로 수배 중인 김석희만 해도 이번 사태에서 부천시에 침범한 괴수들을 상대로 싸워가며 해당 지역을 지킴으로써 범죄자 헌터조차 특무대원보다 나음을 증명했다. 이 와중에 특무대에서 무슨 자격으로 범죄를 저지른 각성자들을 심판하겠단 건가?

(······)

거기까지 읽고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인터뷰에 악의적 왜곡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인터뷰할 당시의 감정을 떠올리니 새삼 언짢아졌을 뿐이다.

내가 한 발언들 자체는 고스란히 인터뷰에 실렸다.

내가 엄연히 정부 기관인 특무대가 하는 일을 방해할 것이며 폭력까지 불사하겠다고 말했건만, 어째 그마저도 인터뷰에 실린 걸 보니 살짝 놀랍기도 했다.

어지간해선 사회 분위기를 해친단 이유로 그 선언 자체를 잘라내거나, 아니면 내가 그럴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을 모조리 쳐내고는 대충 무법자처럼 굴기로 선언한 부분만 실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는다니?

언론이 현재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음을 고려하면, 그것은 곧 정부의 의지일 것이다.

정부도 현재 특무대를 곱게 보지 않는 중임을 그로써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인터뷰가 검열되는 과정에서 헌터들에 대한 보상을 우선시하라는 내 요구 또한 정부에 전달됐을 것이다.

정부에서 그 요구를 얼마나 무게감 있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심각하게 고려하긴 할 것이다.

모쪼록 그러길 바란다. 날 위해서든, 정부를 위해서든 간에.

이 와중에 뉴스에서도 이번 일을 다루고 있다.

TV를 켜보니 국안부 장관이 고개 숙인 채 말하고 있더라.

「정말이지 국민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본인의 책임을 통감하는 바이며 (······)」

이번 일의 전말을 정부에서 숨길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그러지 않았다.

여러 언론에서는 베헤모스가 나타난 계기, 그러니까 강준치가 소월로 떠나게 된 일의 자초지종을 발표했으며 그 결과 국안부 장관을 비롯한 관련 인사들이 대거 물갈이되었다.

정부에서 이 정도 참사를 겪고 나니, 불현듯 자기네 잘못을 크게 깨닫고는 반성하려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자기네 체면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음을 정부에서도 아는 것이리라.

「강준치는 계속된 도청 및 감시 시도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으며 (······)」

강준치. 그가 돌아왔을 때 심기가 또 불편해지는 일이 없도록 정부에서 미리 신경 쓰는 모양이다.

그러니 정부의 지시를 받은 언론에서, 자기네가 무슨 강준치의 변호사쯤 되는 양 강준치가 아무 이유 없이 떠난 게 아님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리라. 과연 이번 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저 변호에 얼마나 공감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리고 이 점에서는 나도 정부와 의견이 같다.

강준치, 그가 돌아오게 해야 한다.

좋든 싫든, 강준치 개인에 대한 호감이 어떻든 간에 반드시.

*******

정말이지 이번 사태는 끔찍했다. 인명피해든, 재산 피해든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베헤모스가 다닌 근처 건물들이 우르르 무너진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베헤모스가 지나친 지반들이 송두리째 꺼졌다. 무너진 건물들을 모조리 철거하더라도 과연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지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공군 전력이 거의 궤멸했다느니, 군인들이 몇 개 사단 단위로 전사했다느니,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사망한 시민들이 수천 명이라느니 하는 것들은 너무 암담해서 굳이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이 와중에 내가 차마 넘길 수 없는 것은, 출동한 헌터들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는 점이다. 일반 헌터들보다 보호를 받는 만큼 상대적으로 덜 죽었어야 할 A급 헌터들마저 비슷한 비율로 전사했고.

그저 끔찍해 죽겠다.

후방으로 멀리 보내뒀는데도 두 명이나 죽은 내 헌터 팀의 경우는 오히려 적게 죽은 편이라던가? 각성자 헌터를 포함해 아예 한 명도 빠짐없이 죽어버린 헌터 팀이 한둘이 아니라고.

이 모든 일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국방은 또 어떨지, 이후로 게이트가 열렸을 때 대응 능력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는 당장 방송에 나와 떠드는 전문가가 없다. 정부에서 그러지 못하게 통제한 까닭일까?

물론, 굳이 전문가씩이나 되지 않아도 다들 이후 상황을 예상할 수 있긴 하다.

'매우 암담'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가방끈이 짧아도 이 정도는 안다.

나라에서 아무리 숨긴들 한국인들이 바보는 아니다. 대충 인터넷만 뒤져도 서울 부동산 붕괴로 무슨 은행이 파산할 위기라느니 어쩌느니 이런저런 정보를 주워듣기 어렵지 않은데, 나보다 좋은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이 상황의 심각함을 어떻게 모를까?

이 와중에 TV에서는 나, 김극 헌터의 이번 활약을 연신 떠받들어댄다.

그놈의 병원에서 신체 재생을 마친 후 바로 공간이동 하여 전선에 복귀하는 장면은 TV에 몇 번이나 나왔는지 셀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다.

이건 언론과 정부에서 내게 깊이 감사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희망적인 뉴스를 내보내려 해도 그러기가 어려우니 대충 영웅이라도 하나 내세워서 사람들의 눈을 돌리려는 시도임을 알 만하다.

연이은 방송으로 말미암아, 날 알아보는 사람이 훨씬 늘었다.

그전에도 내가 유명하긴 했지만 그래도 본직은 연예인이 아닌 헌터라 모두가 알아보는 수준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날 몰라보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보라, 이제는 그저 길에서 걷기만 해도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대는 수준 아닌가.

신체강화자의 청력 덕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려온다.

"아, 저기 김극······"

"혼자서 인천 땅값 폭등시켰다는 그······"

나중에는 이 반응을 즐길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팀원들의 장례식에 참여하러 온 지금은 도저히 속으로도 웃을 수가 없다.

장례식장마다 만원이었다. 이 와중에 내 헌터 팀을 위한 장례식장을 빌리느라 내가 따로 손을 써야 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이미 내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 왔어요?"

내 팀원뿐만 아니라 익숙한 사람이 여럿이었다. 그들과 함께 장례식에서 해야 할 일들을 했다.

한창 그러고 있자니, 학원 원장도 장례식에 참여해서는 절을 했다.

그러다 날 발견했는지 원장이 내게 다가왔다.

'저번에 죽은 김진준을 포함해 이번에 팀원 셋이나 죽었으니 슬슬 학원에서 새 인원 충원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이라면 내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으련만, 다행히도 원장이 그 정도로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다.

"임형택 씨, 나랑 나이도 비슷해선 학원 끝나고서 술도 같이 자주 마셨는데······."

그리 중얼거리는 원장의 눈에 맺힌 눈물이 보였다. 확실히, 임형택 씨가 여러모로 인망이 있는 사람이긴 했다.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내가 그리 말하며 한숨 쉬자 원장이 반응했다.

"그랬으면 안 죽었을 거라구? 빈말로도 그런 말은 말아요. 그런 논리면 다른 팀원들이 더 책임을 느낄걸."

그리 한 마디 훈계하더니, 원장이 민망했는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김극 씨? 이번에 정말 고생했어요. 솔직히 김극 씨면 우리 학원이 아니라 다른 학원에 다녔어도 당연히 잘했을 거긴 한데. 김극 씨가 우리 학원에 다녔다니 자랑스러워, 정말······"

평소 같으면 그 칭송을 즐겼으련만,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나는 원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장례식장을 훑었다.

상주로서 임형택 씨의 아내도 보였다. 나보다 어린 여자. 그만큼 철이 없는 여자다.

그 딸도 함께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죽은 상황을 이해했는지 눈가가 퉁퉁 부었다.

그쪽으로 다가갔다.

104화 유명 헌터 김극 - [2]

"형수님? 어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을 걸자 임형택 씨의 아내, 성미란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딸만큼이나 눈이 퉁퉁 부어있었는데, 꽤 운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의외라 해야 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임형택 씨의 말에 따르면 그 아저씨는 자신이 잘나가던 종합상사 중역 시절, 자기 재력만 믿고서 만만해 보이는 편의점 알바생이었던 그녀를 꼬드긴 것이라 하니까.

심지어 둘 사이에 대단히 알콩달콩한 연애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원나잇 하려다 덜컥 임신해선 결혼한 것이라 들었다.

어디 인터넷 썰로 올라왔으면 욕먹기 딱 좋았을 그 관계에서 어떤 진정한 사랑이 있었으리라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지금 이리 우는 걸 보면 나름대로 정이 들었던 걸까? 그렇길 바랐다.

그녀와 이런저런 말을 섞다가 내가 물었다.

"따님을 헌터 아카데미에 보내고 싶어서 제게 부탁 좀 해보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 생각이 아직도 여전하신지······?"

그리고 성미란이 대답했다.

"새롬일 거기 왜 보내요?"

"아, 이제 헌터 아카데미 안 보낼 겁니까?"

"당연히요! 서울 지금 개박살 나서 거지 동네 막 늘어나기 일보 직전이라잖아요. 인천 아파트에 남는 게 더 나아요."

이 여자, 친구도 아닌 날 상대로 말하는 어휘가 되게 저렴하네.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기어이 그놈의 아카데미에 보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간 내가 어찌 대처해야 할지 당최 알 수 없는 판이었으니까.

이후로는 상주인 그녀를 도와가며 장례식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장병곤 씨의 장례식에서도 그렇게 했다.

그러고는 잠시, 내 헌터 팀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이후 일정을 논해야 했다. 내가 앞으로 다들 어쩔 계획이냐 물어보니, 성문영은 이대로 쭉 헌터 활동할 계획이라 대답했다.

그리고 이종호가 말했다.

"전······ 은퇴하려고요."

하기야 그런 일을 겪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퇴직금 보내게 계좌번호 보내놔라. 그동안 수고했다. 여러모로 고마웠고."

"저야말로 고마웠어요, 정말. 사실 제가 이렇게 정신에 상처 입은 척 엄살 부리는 것도 김극 형 아니었으면 안 받아줬을 거래요. 딴 헌터 팀이었으면 그냥 병신 취급으로 쫓겨나고 말았을 거라던데······."

이종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라고 한 뒤, 나는 마지막으로 정진영을 쳐다보았다.

오른팔과 왼쪽 다리를 잃은 정진영은, 겉으로 보기엔 별로 티가 나지는 않았다. 긴 팔에 긴 바지를 입은 데다 역장 외골격으로 대체된 오른팔엔 장갑까지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명한 역장 손에 장갑이 없으면 자기도 제 손을 보지 못해서 여러모로 헷갈린다나?

"그래서 진영이 형은? 이제 어쩔 겁니까."

"나? 난 왜······"

"이번에 각성하셨잖습니까. 계속 제 팀에 계시기는 뭐할 텐데요? 형도 이제 A급 계약 맺어야 할 텐데, 혹시 관련 절차 도와줄 사람 필요하시면······"

내가 그리 말했더니 정진영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나, 난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뇨?"

"나도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까요. 굳이 헌터 일 계속하며 돈 더 벌어야 하나 싶은 게······."

정진영은 A급 헌터로서 벌어들일 거금마저 포기하려는 듯했다.

특무대의 그 수많은 반푼이들을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말리고 싶었다.

내가 말했다.

"오지랖 부리긴 뭐하지만, 난 1년 계약이라도 맺고 돈 벌어두는 게 맞다고 봐요."

"어째서······?"

"그야 나라가 더 어려워질 거잖아요? 물가 더 오르면 지금까지 벌어둔 돈으로도 부족할 수 있겠고요. 차라리 지금 최대한 벌어두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내 입으로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이번에 국내 A급 헌터들이 절반 가까이 죽은 만큼 헌터 시장의 각성자 몸값이 대폭 치솟을 예정이었다. 이번에 외국인 각성자까지 끌어들여서 여럿 죽게 만들었으니 외국인 각성자들을 데려오는 비용도 훨씬 늘어날 테고.

또한, 이 험한 시기에 각성자로서의 능력을 썩히기는 아까운 일이었다. 대충 그런 생각을 담아 조언했더니 정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요······."

이후로도 나는 얼굴을 익힌 헌터들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김형만 씨의 장례식에서 나는 생각했다.

김형만 씨, 딱 일 개월만 더 지났으면 헌터 협회장으로 취임할 예정이었다.

정부를 상대로 그토록 좋아하던 엘마 행동을 실컷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 희망차던 미래가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다른 전사자들 또한 연달아 머릿속에 떠올랐다.

임형택 씨, 몇 개월 뒤였으면 제 딸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철없는 여자 혼자 딸을 키워야 한다. 지금까지 임형택 씨가 벌어둔 돈이 있거니와 내가 부조금까지 거하게 넣었으니 생활에 어려움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걱정된다.

그러고 보니 임형택 씨, 자기가 혹시 사냥 중에 죽었을 때 제 가족을 부탁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이후로도 내가 신경 써야 하리라.

박주헌, 그가 헌터 아카데미 강사 노릇을 그리 진지하게 하려는 줄은 몰랐다. 그걸 보면 강사 노릇을 꽤 잘했을 것도 같은데, 이젠 아니다.

심지어 박주헌은 그 아카데미의 유일한 헌터 출신 내정자였는데, 그가 죽고 없으니 이제 헌터 아카데미에 헌터 출신 교사는 날 제외하곤 단 한 명도 없게 된 셈이다. 여러모로 끔찍한 일이다.

여러 장례식에 참여하느라 며칠 내내 밤을 새웠기에 끔찍하게 피곤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그리하여 늘 그렇듯 꿈을 꾸었다. 서울에 버섯구름이 피어나고, 내 죽음으로 끝나는 그놈의 꿈을.

그리고 잠에서 깨니, 나는 내가 놀라울 만치 편안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꿈을 꾸고 나면 충격적이고도 끔찍한 삶을 경험한 여파로 땀을 뻘뻘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곤 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또다시 그 꿈을 꾸고 나서 깨었는데도 그저 심신이 평온했다. 어째서?

꿈보다 현실이 더욱 처참해졌기에 더는 꿈속의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게 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환각 속 나와 동화된 나머지 꿈속의 광경에서 끔찍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 탓일까?

모르겠다. 물론 한가하게 정신과 상담이나 받으러 갈 시간은 없다.

바쁘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많다.

*******

아침 일찍 국안부의 호출에 응해 불려갔다.

"어, 김극 씨. 왔어요······?"

나와 눈이 마주친 백담비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는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중요한 각성자인 만큼 지금까지 국안부의 일에 협조하느라 동료들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 라운드걸만큼이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국안부 공무원(인천 출신이었다. 그래서 무시하지 않기로 했고) 하나가 내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베헤모스는 지금도 잃어버린 꼬리가 재생되고 있어요. 게이트 내부에서 말입니다."

지금까지 게이트 내부에서 관측한 결과를 내게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가 계속 말했다.

"심지어 서울을 떠나지도 않았고요. 베헤모스 그놈,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더군요? 그걸 보면 아마도······ 꼬리 재생을 마치면 다시 서울에 나오려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옆에 인구 많은 일본과 중국까지 있는데, 굳이 서울에 또 기어 나오려 한단 말입니까? 어째서요?"

내 물음에 공무원이 대답했다.

"지금 한국의 전력 공백을 베헤모스도 아는 겁니다. 놈은 정령이니까, 사람들을 죽여 그 기억을 흡수했을 테니까요. 강준치가 떠났다는 것도, 공군이 궤멸에 가깝다는 것도 다 파악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 상황이면, 자기가 꼬리 재생을 마치기만 하면 그때야말로 실컷 포식할 수 있으리란 것을 베헤모스가 눈치챘단 소리이리라.

내가 묵묵히 듣는 가운데 공무원이 계속 말했다.

"혹은, 이번에 크게 다쳤으니 화가 나 보복하려는 걸 수도 있겠군요."

"지가 침공해놓고 화가 났다고요?"

"왜, 인간이 돼지 도살하려다 돼지한테 물려서 피 봤으면 내가 먼저 돼지를 해치려 했으니 자업자득이라며 곱게 받아들이진 않을 거잖습니까? 저 씨발 돼지 새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며 분노하겠죠. 베헤모스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물론 지금 괴수 심리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물었다.

"그래서, 그놈 꼬리가 언제쯤 재생을 마칠 것 같습니까? 그놈이 언제쯤 게이트에서 다시 기어 나올 것 같고요?"

"게이트에서 관찰한 대로면 약 3개월에서 4개월······"

나는 한쪽 눈을 치켜떴다. 그렇게 빨리?

"게이트 안에서는 신진대사가 거의 멈추잖습니까. 그런데도 재생이 수개월 내로 끝난다고요?"

"정확한 이유는 저희도 잘······ 놈이 초재생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정령이기도 해서 그토록 빠른 게 아닌가 추정 중이긴 합니다마는······."

공무원은 말을 흐리더니, 3개월이란 예측마저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부연했다. 그건 그저 관찰로 추측한 것일 뿐, 정확한 시일 따윈 알아낼 수 없다고.

당연한 일이었다. 괴수의 신체 재생속도 따윌 누가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베헤모스는 바위 정령이기까지 하니, 외피를 이룬 바위들을 상실한 신체 재생에 소모할 수 있기도 하다. 놈이 잃어버린 꼬리를 되찾을 날짜는 언제든 더 빨라질 수 있는 셈이다.

그 전에 강준치를 데려와야 한다.

"아시죠? 이미 일부 인원이 소월로 넘어가서 강준치를 찾아내려 애쓰는 중입니다.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셨듯이······"

"저도 곧 그래야 할 테고요."

강준치에게 석장실이 간첩으로 찍힌 상황 아닌가. 이제는 강준치와 가장 친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러니 나야말로 강준치를 가장 잘 설득할 수 있을 것이거니와, 나는 공간이동을 써서 광범위 수색에 나설 수 있기도 하다. 소월에서 강준치를 데려오기엔 나보다 적합한 인원이 또 없었다.

그런데도 소월로 바로 떠나지 못한 이유는, 장례식 참여며 퇴직금 및 부조금 지급을 해야 했던 데다 이번 전사자들을 향한 정부의 보상을 예의주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 정부의 전사자 보상안이 발표됐다.

헌트웹에도 그 보상안 글이 올라왔다.

내가 바란 것만큼 충분한 보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보기엔 예상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익명 : 정부가 드디어 정신 차렸나? 웬일로 전사자 보상 제대로 챙겨준대냐?

Ⓐ Dragon : 이것도 사망한 각성자들 몸값 생각하면 헐값 같은데?

익명 : 그래도 원래는 보상 쬐끔 주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뭐······.

보다시피 다들 이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들이 언제 죽어서는 유족들만 남겨질지 모르는 처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익명 : 김극이 으르렁댄 덕분인가? 보상 똑바로 안 해주면 국회랑 청와대에 기관포 난사하겠다며 협박했으니까.

익명 : 진짜 정부에서 겁먹어선 보상 똑바로 해주기로 결정했나?

Ⓐ Dragon : 확실히, 김극 그 양반 전과 보면 겁먹을 만하지. 그 양반 분노조절장애까지 있어서 빡돌면 진짜 그럴 수도 있으니까.

이후로는 잠시 영웅 김극을 칭송하는 시간이었다.

이 마당에 헌터들 신경 써주는 건 김극밖에 없다느니 그리 총대 메고 목소리 높여줘서 고맙다느니······.

그걸 보며 기분이 좋아지려다 말았다. 평소라면 거기 댓글을 달아줬을 엘마야캐요며 돌머리청년 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헌트웹에 올린 글마다 점잖게도 응원 댓글을 달아주던 엘마야캐요는 이제 없다.

나와 친해지려고 그랬던 건지,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그랬던 건지 몰라도 내 글마다 나 보기 좋을 댓글을 달아주던 석장실도 이제는 헌트웹에서 활동하지 않는다.

우울해진다. 헌트웹을 끄려다 말았다.

이 와중에 유독 눈에 띄는 글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익명 : 그 정도로 정부에서 김극 씨 협박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안 좋은데······? 아무리 그래도 이번 인터뷰는 수위가 너무 셌어.

그 글에 대한 반박이 즉시 올라왔다.

Ⓐ 5my지저스 : 그럼 김극햄이 아니면 누가 국가 상대로 그리 나설 수 있었는데?

아, 오마이지저스 이 인간.

내 팀의 일원인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정진영 형이었나 보다. 새로 A 배지를 단 걸 보니 틀림없다.

익명 : 아니, 헌터들을 위해 나서준 건 잘했지만 아예 테러 협박을 한 건 과했단 거지.

익명 : 김극이 그 정도로 한국의 구세주 노릇을 했으니까 점잖게 말했어도 정부에서 무시하지 않았을 텐데······ 굳이 그 정도로 윽박질러야 했나?

Ⓐ 5my지저스 : 조선 정부를 상대로 점잖게? 돌았음?

익명 : 아니 왜 욕함;;

Ⓐ 5my지저스 : 김극햄이 협박 수준으로 윽박지르지 않았으면? 조선 정부는 더 안 챙겨줘도 되는 줄 알고 예전처럼 좆같이 보상했어, 무조건

익명 :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 헌터들 역할이 얼마나 컸는데? 심지어 베헤모스가 또 튀어나올 수 있는 만큼 헌터들 또 동원해야 할지 모를 상황에 그럴 리가

Ⓐ 5my지저스 : 정확히는 각성자들을 또 동원해야 할 상황이지? 서울 바깥 각성자들까지 죄 끌고 오는 식으로? 그리고 넌 각성자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을 테고

Ⓐ 5my지저스 : 너 같은 비각성 쓰레기는 베헤모스 어쩌고 말할 자격이 없으니까 그냥 닥쳐

정진영이 작성한 저 댓글을 보고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이 형이 갑자기 왜 저러나?

Ⓐ syberMagneto : 왜 갑자기 내 컨셉 뺏어가냐; 보기 안 좋은데 그러지 마라;;;

심지어 내 라운드걸마저 당황한 가운데, 나 역시 당황해선 정진영이 작성한 글들을 다시금 읽었다.

저 형, 현실에서도 얌전한 사람이지만 헌트웹에서도 얌전한 사람 아니었나? 늘 내 칭송 글이나 올리곤 하던 정진영 형이 쓴 글이라곤 믿을 수 없는 발언······.

조선 정부, 어쩌고 국가 자체를 비하하듯 말하는 투에서는 강준치가 갯강구 운운하던 것이 연상된다.

심지어 비각성 쓰레기, 어쩌고 하는 건 또 뭔가? 얼마 전에 각성해놓고선 왜 벌써 저러는지 모르겠다.

뭐······. 조금 생각해 보니 갑자기 왜 저러는지 알 만하다.

이번 일로 보통 충격을 받은 게 아닌 모양이다.

추측건대, 정진영은 정부에서 각성자 헌터들을 소집하는 과정에서 이 모든 죽음이 야기되었다고 믿는 모양이다. 정부에서 각성자 팀이란 이유로 인천 쪽 헌터인 우리를 모조리 서울에 불렀으니까. 그것이 우리 팀원들이 죽은 진정한 이유라 여기는 모양이지?

내가 직접 끼어들어서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이었다.

내 헌트웹 계정에 메시지가 왔다.

Ⓐ 한민족의얼은恨 : 김극 형, 지금 저 좀 도와줄 수 있나요

한희였다.

뭘 도와달란 건지 모르겠지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 BabyBerserker : 뭐든지. 말만 해양!

Ⓐ 한민족의얼은恨 : 도와주실 거면, 제가 말하는 장소로 와주실 수······?

한희는 그리 부탁하며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와달라고, 약속장소에 도착할 때는 누구한테도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고 당부했다.

누군가한테 들키지 말고 와달란 말은 어째서인가? 특무대 전체를 비하한 나와 친하게 지내는 걸 특무대 선배들에게 들켰다간 곤란해서인가?

의아했지만, 어쨌건 그 요구대로 해주었다.

아직 공간이동은 내 신체강화와 역장 외골격만큼 성장하지는 못해서 한희가 말한 장소까지 공간이동만으로 이동하기는 어려웠지만, 택시를 좀 타고 가서는 현기증이 날만치 공간이동을 남발했다.

그리하여 최대한 빠르게 그 장소에 도달했다.

한희가 말한 장소에 가보니, 컨테이너 창고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한희가 특별히 당부한 대로, 공간이동 하여 그 창고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잠시, 몸이 굳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

창고 안에 들어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시체 다섯 구였다. 특무대 제복을 입고 있는.

한희는 그 특무대원들의 시체 사이에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한희가 날 보고서야 겨우 그 얼굴에 표정이 생겨나더니, 울 듯한 얼굴로 녀석이 물었다.

"저, 이제 어찌해야······?"

105화 유명 헌터 김극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