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군인들 - [4]
환각에서 빠져나온 뒤,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내 주변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알 만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이리라. 분명했다.
"김극 씨?"
날 쳐다보는 임형택 씨를 보니,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낯짝은 예상보다 훨씬 험악했다.
딱 봐도 울화가 가득한 안면에는 혈관이 거미줄처럼 울룩불룩 돋아났다. 금방이라도 뭔 일을 저지를 법한 낯짝이다.
임형택 씨가 불안한 듯하길래 내가 해명했다.
"괜찮아요. 방금 들은 얘기 들어보니 새삼 화가 치밀어서 그래."
그리 중얼거리면서 지갑을 뒤졌다. 내 명함을 어디 꽂아놨더라?
제기랄, 잘 안 보인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이면서 입 또한 움직였다.
"내가······ 대한각성연대라고······ 각성자들 인권단체 활동하던 놈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얘기 들으면 진짜로 화가 나는데······ 대한각성연대 모르죠? 박미형 씨랑 같이 활동하던······"
"아, 박미형 시의원님? 한국 유일 세뇌능력자로 유명한······"
병사 하나가 중얼거렸고 난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맞아요. 내가 그분이랑 같이 활동하던 단체거든요? 거기서 내가 웬 각성자가 억울한 일 당했단 말 들으면 단체 사람들이랑 같이 몰려갔어요. 그러곤 이 덩치로 위압감 조성하는 게 주 업무였어······"
아, 드디어 찾았다. 내 명함.
"그리고 이젠 내가······ 단순히 위압감 조성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거든?"
그리 말하면서 난 헌터 협회에서 만들어 준 내 명함을 내밀었다.
각성위원회 부위원장 김극, 어쩌고 적힌 명함이다.
그놈의 각성위원회가 정확히 뭐 하는 곳인지는 그 위원회를 설립한 김형만 씨도 모르고 부위원장인 나도 모르지만 상관없다.
모름지기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가 더 중요할 수 있는 법.
난 병사마다 명함 한 장씩 돌리면서 말했다.
"억울한 일 당하면 바로 연락해요. 전역하고서 헌터 하고 싶은데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도 연락하고. 내가 아무리 바빠도 무조건 신경 쓸 테니까······"
이게 빈말이 아님은 방금 내 표정만 봤어도 알 수 있으리라.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가 준 명함을 자기네 앞주머니에 조심히 챙겨 넣었다. 그러고 나서 단추까지 채우는 걸 보니 나중에 어디 버릴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때 포효가 들려왔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저 비슷한 포효를 일찍이 여러 번 들어봤다.
오거의 포효, 거대한 괴수의 포효다.
작고 힘없던 고블린 시절 숨죽여 지내야 했던 울분을 몸집이 커진 후에 해소하려는 걸까? 오거들은 저런 식으로 별 이유 없이 포효하길 즐긴다고 한다.
그리고 마니산에 서식하는 퉁퉁이란 개체는 특히 그렇다고.
그 사실을 내가 아는 것은, 환각 속에서 날 찾아온 병사에게 들어본 바 있기 때문이다.
환각 속, 날 찾아온 각성자 병사들은 지금 내 눈앞의 병사들과는 다른 이들이었다. 왜냐하면 환각 속에서 지금 내 눈앞의 병사들은 일찍이 죽고 없었기 때문에.
환각 속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번 기수는 전부 잡아먹혔어요······ 퉁퉁이, 웬 오거 한 마리 잡으러 나섰다가 그 자리에서 전부······'
'그래서 그리 겁먹은 건가? 또 모조리 괴수 밥 될까 봐?'
'예······. 그렇다고 동원되기 싫어서 항명이나 탈영을 했다간 헌병이 아니라 특무대에서 잡으러 온다던데요······? 그것도 우릴 고이 잡아서 육군교도소에 처넣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즉결처형한단 말도 있고······'
방금 그 환각을 떠올리니 다시금 울화가 치밀었다.
심호흡하며, 내가 물었다.
"퉁퉁이······ 그 오거가 사 미터급이랬나?"
"예. 제가 들은 바로는요."
나는 정신적 그물망을 펼쳤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 괴수의 몸뚱이를 더듬어 보고서 말했다.
"아니, 오 미터급은 되는 것 같은데?"
"오 미터급이요?"
"확실히요. 여기에 워낙 괴수가 잔뜩 몰려있으니까, 저놈이 여럿 잡아먹고 성장했나 보죠? 그리고 저런 괴수들은 크면 클수록 무조건 더 강하고 단단한 거 알 겁니다. 심지어 저놈, 역장체라 했나?"
"예. 예전에 소이탄 뒤집어쓰고도 그을린 자국조차 없었던 거 보면 분명······"
"그렇담 역장 외골격까지 대폭 성장했을 테니 단단하기도 진짜 단단하겠군요. 거대화된 몸집이 관절에 무리를 주는 만큼 거대화 개체들은 거의 확실하게 초재생능력까지 가진 법인데, 어찌어찌 역장 뚫고 상처입혀도 순식간에 재생하겠고요. 저건 진짜 항공 폭탄을 정통으로 맞혀도 살아남을 놈인데······."
내가 중얼거리는 가운데 성문영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예요. 저건 너무 세서 못 잡겠단 거예요?"
"아니? 무슨 일 있어도 반드시 잡고 가야겠단 거지."
이 발언이 무슨 근사한 대사 취급인 모양이다.
나이토 상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맨이 날 집중해서 촬영하는 것이 보였다. 또한 정진영이 내게 엄지를 치켜드는 것도.
어쨌건,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 원래 하려던 사냥을 더욱 철저하게 해야 할 뿐이다.
*******
오늘치 사냥도 마치고서 여기 지휘관인 대령을 찾아갔다. 그에게 군수물자를 내달라고 요청했다.
"군용 폭약, 있는 대로 내줄 수 있겠습니까?"
"폭약을 달라고요? 그걸 어디다 쓰려고······"
"퉁퉁이, 그놈 잡아야죠?"
그리 말하며 난 대령을 바라봤다. 비각성자 찌꺼기인 걸 넘어 서울 종자일 게 분명한 이놈을 보며 생각했다.
환각 속 그 짓거리들, 이놈 짓일까?
그렇다면 이놈을 어디 바다 한 가운데에 공간이동 시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고 나면 각성자 병사들이 소모품처럼 소모되는 일은 없어지는 걸까?
모르겠다.
이놈 낯짝을 보기만 해도 혐오감이 올라왔지만 난 겨우 참았다.
생각보다 그러기 어렵지 않았다.
환각 속, 각성자 병사들을 다루는 군의 행태는 물론 끔찍하게 혐오스러웠지만, 그보다 혐오스러운 놈이 환각에서 또 하나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환각 속 나 말이다.
그놈은 지금 내가 보기에도 역겨운 놈이었다.
그 미친놈, 병사들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자기 망상이나 실현하고 자빠졌다.
왕따 당하는 학생을 도와주겠다며, 학생의 손에 학급에서 난사할 기관단총을 들려주는 것은 학생을 돕는 행동이 아니다.
학생이 학급에서 총질하고 나면 가해자들이야 죽겠지만, 그 여파로 학생의 인생 또한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것 아닌가. 그리하여 그 학생이 벌인 짓이 아홉 시 뉴스에 나오고 나면 즐거운 것은 기관단총을 빌려준 한 명뿐이다.
그로써 그는 자기가 속 시원한 복수를 설계해줬다며 대리만족할 수 있으리라. 학생이 어찌 파멸할 것이든 간에.
환각 속 내가 한 짓이 그와 같다.
절박한 사람을 돕겠답시고, 동족의 복수를 대행하는 척하면서 그들의 등을 절벽 아래로 떠밀어버렸다.
그리하여 평소 망상하던 '비각성자들은 각성자들의 노예'를 실현하고는 저 홀로 흡족함을 느꼈다. 반강제로 소월로 이주한 병사들의 삶이 어찌 될지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내가 일찍이 환각 속 나의 최후를 보고서 한심하다 생각했지만, 한심한 걸 넘어 이토록 역겨운 놈일 줄은 미처 몰랐다.
생각해 보면 그놈은 강준치가 서울을 파괴하는 데 방해된다며 죽이려던 놈이던가?
지금 보니 그놈의 행동 원리를 대충 알겠다.
환각 속 나, 그놈은 같은 각성자 동족이라도 자기 보기에 좋도록 움직이지 않으면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았다.
제대로 된 각성자로 거듭나게 해주겠다며 딴 세상에 보내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장애물이랍시고 전술핵을 터뜨려서 죽여버리려 드는 것이었다.
그 모든 행동이 너무나 혐오스럽다. 그것을 일종의 반면교사로 삼아서 나는 그러지 않아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나는 환각 속 나라면 하지 않았을, 아니 하지 못했을 선택을 할 것이다.
그 선택이란 별것 없다. 지금 하는 제안이 바로 그것이니까.
"퉁퉁이? 그놈 하나 때문에 마니산이 괴수 소굴인 거 뻔히 알면서 전혀 손대지 못하는 마당이라던데요. 저희가 여기 왔을 때 처리해야지 않겠습니까?"
그토록 강력한 괴수를 직접 죽여, 나보다 약한 동족들 대신 위험을 무릅써주겠단 제안은 환각 속 내겐 불가능한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환각 속 나는 지금 나만큼 강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가능하다. 그것이 나와 놈의 결정적인 차이점이고.
"그래요. 옳은 말씀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처치해야······"
이내 대령이 내 요청을 승낙했다.
이후로도 사냥을 거듭해, 약 일주일째 강화도에서 시간을 보냈을 때였다.
우리 헌터들은 이제는 아예 강화도 여관에서 숙식했다. 일과를 마치고 편히 쉬려던 중이었다.
군사 기지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뭐야?"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소리.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비상 신호임은 이해했다. 갑자기 뭐냐?
뒤이어 전화기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 군인이 외쳤다.
「김극 헌터? 여기 게이트 열렸습니다! 지금 와주실 수―」
헌터들을 급히 이끌고 군인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군사기지 내부를 보니, 군인들은 장교든 병사든 모두 일사불란했다. 이 와중에 허둥거리는 인원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다들 정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기야 요즘 세상이 어디 보통 세상인가.
군 지휘관들은 병사들이 둔전을 일구게 하는 한편 훈련 또한 착실히 시켰을 것이다. 장병 혹사 논란이 생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각성자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 것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그렇게 했을 테고.
물론 이해해줄 마음은 없다. 절대.
백담비가 서둘러 조그만 게이트를 열더니, 머리통만 그 안에 집어넣었다가 도로 꺼냈다.
"게이트, 찾았어요!"
그리하여 백담비는 그 너머, 또 다른 게이트의 위치를 확인하고서 대략적인 위치를 내게 전했고 내가 직접 공간이동 하여 게이트가 열린 장소를 특정해냈다.
그 정보를 무전으로 모두에게 알리니 무전기에서 당황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예? 거기 탄약고인데······」
무전을 더 들어보니, 자칫 공격했다간 유폭이 일어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쨌건 게이트의 위치는 특정됐으므로 군인들이 그쪽에 방어선을 구성하고 박격포를 방열했다.
그리하여 게이트에서 쏟아져나온 데스클로들은 이미 구성된 화망에 휩쓸려 쓸려나갔다. 데스클로들이 지그재그로 달리든 어쩌든, 아예 피할 공간조차 없이 쏟아지는 총알 세례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중에 섞여 있던 역장체 하나가 박격포탄에 두들겨 맞아 하늘을 날았다. 그것을 보며 혹시 이 사태가 무난하게 끝나려는 건가,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아······!"
포효가 들려왔다. 초저주파 섞인 포효였기에 내 주변 헌터들이 몸을 떨었고, 난 손에 든 물건을 세게 쥐었다.
곧이어 탄약고, 그 강철 컨테이너의 한 벽이 찌그러졌다.
그 강철 벽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고서 한 마리 거대한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을 알아본 병사들이 소리쳤다.
"퉁퉁이!"
소리 지르길 좋아하는 놈이라더니 과연, 놈이 또다시 포효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
이번에는 분노를 표출하려는 것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일주일, 우리 헌터들이 저기 괴수들의 영역을 들쑤시고 다녔으니까.
마니산에 사는 괴수들이든 어떤 정령이든, 위기감을 느끼고서 이번 습격을 감행한 모양이지?
그리고 퉁퉁이는 마니산 괴수들의 결전 병기쯤 되는 듯했다.
순식간에 탄약고에서 빠져나온 그놈은, 이미 구성된 화망을 정면 돌파했다.
소총탄 따윈 그 역장에 맞아 튕겨 나갈 뿐이었으며, 말도 안 되게 빠른 질주로 마구 떨어져 내리는 박격포탄을 죄다 피하거나 간혹 한 발 맞더라도 맞은 티조차 내지 않고 그저 달렸다.
"씨발!" "미친!"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기야 저 괴수는 전차보다 더한 무언가다. 실제 낼 수 있는 물리력도, 견고함도 모두.
그리고 내가 움직인 것은 퉁퉁이가 내달려, 놈의 위치가 탄약고에서 백오십 미터쯤 멀어졌을 때였다.
그 거리를 확인한 내가 공간이동 했다. C4 폭약 800kg와 함께.
더 많았어도 좋았을 텐데, 근처 폭약을 있는 대로 가져온 것이 그게 전부였다.
그 폭약을 내달리던 오거의 목 위에 부착한 뒤, 다시 공간이동 함과 동시에 격발했다.
그리고 굉음이 울렸다. 고막이 먹먹해지는, 지상에서 난 천둥 같은 굉음.
수백 킬로짜리 폭약이면 건물째로 날려버릴 양이라던데, 그 여파를 보니 그 사실이 새삼 실감났다.
천둥과 함께 피어오른 흙먼지 구름이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이제 퉁퉁이의 오 미터에 달하는 거체는 그 흙먼지 구름에 가려져 윤곽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압도적인 광경을 확인한 병사들이 소리쳤다.
"죽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강력하기 그지없는 각성자 반란자들은 군대에서 작정한, 건물째로 날려버리기 위한 공격에서마저 살아남음으로써 정부의 모든 제압 시도를 좌절케 한다더니 바로 저놈이 그렇게 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흙먼지 구름 안에서, 퉁퉁이의 포효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성난 포효였다. 그리고 정신적 그물망을 펼친 나는 놈이 살아남아 화가 났을 뿐만 아니라 상처 하나 입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물망으로 더듬어 보니까 저놈, 역장조차 깨지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중얼거리니 옆에서 이종호가 뜨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놈 죽일 수 있는 거 맞아요?"
확실히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이렇게 해도 다치지 않았다면 대체 어찌 죽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나도 당해내지 못할 진짜배기 괴물이란 생각.
그리하여 꺾이려는 내 전의를 북돋기 위해 나는 생각했다.
저놈이 강대한 만큼, 놈을 죽이거든 그 강대한 힘은 내 것이라고.
흙먼지 구름에서 뛰쳐나온 오거가 질주하는 가운데, 나는 헌터 라이플을 들고 공간이동 했다.
91화 군인들 - [5]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놈이 거대화 한 크기가 오 미터급인 이상 역장 외골격 능력도 그 정도 수준이리라 예상했는데, 건물 하나 날릴 폭약마저 견딜 줄이야.
한 개체가 여러 능력을 한 몸에 가졌을 때, 능력 각각의 자질에 따라 각 능력에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던가? 저놈이 대충 그런 경우인 모양이지.
그래도 방금 폭발로 저 말도 안 되는 역장은 크게 소모되었을 것이다. 이쪽에서 조금만 더 피해를 누적시키면 기어코 깨질 테고.
그리 믿기로 했다. 그리 믿을 확고한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 믿지 않으면 싸움 자체를 시도할 수 없기 때문에.
"우오오오오오오오오―" 퉁퉁이가 포효하며 질주했다.
놈의 체중과 그 다릿심이 무지막지했다. 놈의 발이 땅을 두들길 때마다 끔찍한 지진 소리가 동반됐다. 평범한 사람은 그저 저놈 앞에서 저놈이 내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죽을지 모른다.
그 소음의 근원지에 다가가자니 나 또한 주눅이 들 정도였지만, 참았다.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저놈은 그저 나보다 위 체급일 뿐.
나 역시 놈을 향해 달렸다. 그러면서 헌터 라이플을 연발로 갈겼다.
정확하게 날아간 기관포탄들이 놈의 안면을 두들겼지만, 한 발 한 발이 코끼리도 찢어발길 그 기관포탄들은 그저 놈의 안면에 모래 뿌린 수준의 타격을 주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내 사격은 놈의 질주마저 방해하지 못했다.
오거는 팔뚝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그대로 달렸다.
나는 잠시 헌터 라이플을 계속 쏘다가, 이것만으로는 놈을 저지하기 불가능하다 판단되자 헌터 라이플을 놓고 망치를 쥐었다.
망치를 휘두름과 동시에 공간이동 했다.
망치부터 휘두르며 공간이동 했기에, 공간이동을 마친 시점에 망치는 이미 목적지에 도달해있었다.
그리하여 내 망치가 질주하던 오거의 머리를 두들긴 순간, 오거의 팔이 휙 하고 날 향해 뻗어왔다.
그 거대한 손아귀에 잡히기 직전, 가까스로 공간이동 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게 주변 병사들이 보기엔 놀라운 묘기처럼 보였는지 등 뒤에서 환호가 울려 퍼졌다.
"애기버섯 만세!" "김극! 김극!"
그러나 정작 나는 그리 피해놓고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젠장, 방금 뭐냐?
방금 난 놈의 머리 뒤로 공간이동 하여 기습했다. 시야 밖의 공격이므로 대응이 훨씬 늦어야 정상이었는데 그토록 빨리 반격당하다니?
내가 당황하던 차, 무전기에서 백담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심해요. 저놈 신경 가속 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속으로 탄식했다. 아······.
이쪽도 신경계가 발달 된 덕에 신경 가속 비슷한 짓거리들을 할 수 있다지만, 진짜배기 신경 가속 능력자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접근전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그리 판단하고서 다시 헌터 라이플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오거의 앞을 가로막은 채 헌터 라이플을 쏘려니, 방아쇠를 당길 여유조차 없었다.
놈이 이쪽으로 휙 달려왔다. 놈의 역장 외골격 수준이 거의 슈퍼맨을 연상케 하는 수준인 만큼 그 도약은 거의 미사일 발사에 가까웠다.
난 또다시 공간이동 하여 가까스로 놈의 돌진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날 또다시 놓치자 오거는 즉시 깔끔하게 판단한 모양이다. 걸리적거리지만 자꾸 사라지니 붙잡기 어려울 난 무시하고, 다른 인간들부터 덮치기로.
그리고 이곳엔 놈이 노리기 좋은 인간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오거가 질주했다. 내가 있는 방향이 아닌, 전사들이 화망을 구성한 방향으로. 그들이 쏘는 소총탄은 놈에게 전혀,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 방향의 병사들 사이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씨발!"
저대로 부딪치기만 해도 탱크에 깔린 것처럼 처참한 꼴이 될 것이다. 그러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내가 팔을 뻗으며 질주하던 오거의 뒤로 공간이동 했다. 그대로 내 양 팔이 놈의 발목을 끌어안은 순간, 난 놈의 그 몸뚱이가 끔찍하게 무겁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 다리 하나의 움직임에 내 몸 전체가 끌려가리란 사실도.
그래도 어떻게든 내 몸을 지레로 활용하여 힘을 주었다.
그대로 오거를 힘껏 집어던졌다.
저 뒤로 최대한 멀리. 이쪽도 신체강화자에 역장 외골격인 만큼 몇 톤짜리 괴수를 던져버릴 능력이 충분했다.
투석기로 날려진 것처럼 휙 날려진 오거가 공중을 날며 포효했다.
"아―"
죽다 살아난 병사들이 뭐라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 같았지만 놈의 포효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날려진 오거가 땅에 처박혀 땅을 구른 순간, 난 빠르게 생각했다.
저 괴물놈이 자세가 무너진 틈에 뭐라도 해야 한다. 무엇을?
마침 눈에 익은 괴수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다리에 총알이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데스클로 한 마리.
그 데스클로 옆으로 공간이동 하여 놈의 앞다리를 붙잡고는 공간이동 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오거의 안면 앞으로.
그대로 놈에게, 데스클로의 앞발을 푹 하고 찍었다.
그렇게 그 갈고리발톱을 오거의 눈에 박아넣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역장을 가볍게 찢고서, 데스클로의 역장 날붙이가 놈의 얼굴 안에 깊숙이 박혔다.
"끄으오우오―" 비명 같은 포효가 바로 눈앞에 터져 나왔다. 정면에서 온몸에 전달된 초저주파에 내 몸이 일순 굳었다.
또한, 이번에는 놈의 시야 안에 공간이동 한 탓에 놈의 반격 또한 빨랐다.
오거가 팔을 휙 후려쳤다.
역장 외골격 능력자의 견고함과 출력은 정확히 비례한다. 그 말은 곧 놈의 견고함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듯, 놈이 낼 수 있는 출력 또한 말도 안 되는 수준이란 소리다.
내 몸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휘말려 날려졌다. 그대로 내 머리부터 지면에 충돌하려 했다.
그 직전, 나는 가까스로 공간이동 했고 그대로 날아간 내 몸은 바닷물에 처박혔다.
그러자 고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바닷물이 솟구쳤다. 내가 만약 바닥에 그대로 부딪쳤다간 역장이 파괴됨과 동시에 몸 또한 성치 못했으리란 걸 알 만했다.
그래도 일단은 살아남았다. 계속 싸울 수도 있게 되었고.
"인천 만세."
다시 공간이동 하여 원래 전장으로 복귀했다. 그러고는 방금 내 일격이 놈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주었는지부터 확인했다.
눈은 뇌에 직결된 부분인데, 거기에 뭐든 가르는 칼날을 꽂아 넣었으니······.
그래서 놈이 죽었나?
아니, 놈은 죽지 않았다.
실망스럽게도 놈은 살았다.
퉁퉁이가 제 눈에 박힌 데스클로의 발목을 쑥 하고 뽑아내서 바닥에 집어 던졌다. 초재생능력이 있어도 뇌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면 재생이 불가능하다더니, 뇌가 반쯤 잘린 것쯤은 거뜬한 듯했다.
그래도 이 일격이 놈에게 고통과 위기감을 주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다. 놈이 이쪽을 똑바로 보는 걸 보니.
이번엔 정확히 날 향해, 퉁퉁이가 포효했다. 그리고 놈의 포효가 그쳤을 때 내 앞주머니 무전기에서 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극 씨! 들립니까!」
누군가 했더니 그 대령이었다. 병사들이 선 방향을 보니 그가 현장에 직접 나와 무전하고 있었다.
「아까 보니 저놈 집어던질 수 있던데! 또 그럴 수 있겠습니까?」
"기회 봐서요. 어디로?"
「저 탄약고 쪽으로!」
아, 저 양반이 뭘 하려는지 대충 알아들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다시 내 적을 바라보았다.
지금 퉁퉁이는 그 자리에 똑바로 멈춰 있었는데, 지금 날 향해 달려들지 않는 것은 내게 접근해봤자 내가 공간이동 해서 벗어나리란 것을 아는 까닭일 것이었다.
그러나 놈이 날 노리고 있단 사실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멈춰 있는 와중에도 놈의 눈동자는 이쪽을 쫓고 있으니까.
놈이 내가 먼저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단 것을 짐작할 만했다. 그러다가 내가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바로 반격에 나설 작정임을 알 만했고.
그 반격 당했을 때 상황을 상상해보니 소름이 끼쳤다.
방금 놈의 손짓 한 번에 휘말려서는 역장이 거의 깨질 뻔했지 않은가. 또다시 저 무지막지한 손에 휘말렸다간 끝장이다. 최악의 경우 붙잡히기라도 했다간 나는 공간이동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으깨질 테지.
무턱대고 움직일 게 아니라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어떻게?
나 혼자 싸우는 게 아니었으므로, 외부의 요소가 개입했다.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쏴―!"
야간의 어둠을 가르고, 황금빛 선들이 빗발쳤다.
기관포탄들이었다. 저 무지막지한 괴물조차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한두 명이 쏘는 게 아니라 열한 명이 다 같이 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각성자 병사들이 다 같이 쏘고 있었다. 그들은 사방에서 헌터 라이플을 놈에게 난사했다.
퉁퉁이는 당황했는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눈부터 보호하려는 건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러느라 놈의 시야가 가려졌다. 그 탓에 놈은 저 하늘에서 드리운 그림자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 마리, 투명한 얼음 솔개가 드리운 그림자를.
날개폭 십 미터짜리 얼음 솔개였다. 백담비가 조종하는 그 얼음 조형물은 발톱으로 포탄 하나를 나르고 있었는데, 사람이 양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큼지막한 포탄이었다.
그 고폭탄과 함께, 얼음 솔개가 수직 낙하했다.
그 발톱에 들려있던 고폭탄부터 놈의 머리에 닿았다. 그리고 폭발······.
퉁퉁이의 머리에서 성대한 화염이 일었다. 그 열기에 얼음 새는 잠시도 견디지 못한 채 녹아내렸고, 그리하여 생겨난 증기가 놈의 머리 주변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그와 함께 놈의 행동이 멈췄다. 충격을 받은 걸까?
아니, 역장이 남은 걸 보니 그것은 아니다.
놈은 아마 당황했을 것이다. 굉음과 함께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으니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테지.
그렇다면 기회는 바로 지금.
나는 공간이동 하여 퉁퉁이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아까처럼 또 한 번, 온몸이 힘을 실어 놈을 집어던졌다. 아까 주문받았던 대로, 저기 저 탄약고를 향해서.
탄약고의 찌그러진 강철 벽을 뚫고 퉁퉁이의 거대한 몸뚱이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때, 이미 그쪽으로 방열을 끝내두었던 듯한 박격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포탄 여럿이 휙, 휙 떨어지더니······.
화염이 치솟았다. 그리고 폭발, 또 폭발.
화염이 치솟았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폭발이 일 때마다 연달아 화염이 솟구쳤고 굉음 또한 동반되었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이 와중에도 퉁퉁이는 아직 죽지 않았다.
폭발로 인한 굉음보다 큰 포효를 내며, 화염 속에서 그 거대한 괴물이 달려 나왔다.
「발포 중지! 발포 중지!」
그리고 화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퉁퉁이는 거죽이 그을렸다. 눈알도 반쯤 녹아내려서는 뿌연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고.
그 역장이 비로소 깨졌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거리낄 게 사라졌다.
저놈은 이제 역장이 없지만 난 아직 남아있다. 이 차이는 무척 크다.
나는 높은 위치로 공간이동 했다가 낙하하는 힘을 실어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망치를 내리찍자, 오거는 방금 당한 탓에 머리 위를 대비하고 있었는지 양손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고작 손으로 막아낼 일격이 아니었다. 내 망치는 그 손바닥을 뚫고 기어이 그 머리에 충격을 전달했다.
퉁퉁이가 비틀거렸다. 내가 공간이동 하여 땅에 발을 디뎠다.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는 놈을 세게 걷어차서 그 몸뚱이를 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화염의 열기에 고통을 느끼는 걸까? 놈은 넘어져서 네발로 기면서도 화염 속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쳤다. 마침 옆에 게이트가 열려있었다. 그 안으로 놈이 들어가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지 못하게 내가 막았다.
날 무시하고 빠져나가려는 놈의 발목을 붙잡고서 잡아당기니, 놈이 네발로 기다가 아예 넘어졌다.
놈을 질질 끌어서 탄약고 깊숙이, 화염 가운데에 끌고 왔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땅을 박차려는 놈의 오금에 내가 망치질했다. 견디지 못한 놈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하여 놈에게 상황을 이해시켜 주었다.
넌 이 옥타곤을 빠져나갈 수 없다. 날 먼저 꺾지 않고서야.
놈도 그 뜻을 이해했다. 놈은 여전히 반쯤 무릎 꿇은 채, 상반신만 겨우 일으켜서는 내게 주먹질했다.
난 망치를 마주 휘둘러 맞섰다. 그 충돌로 충격파가 퍼졌고 내 손에서 벗어난 망치가 저 멀리 날아갔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감을 회복한 듯 퉁퉁이가 포효했다. 그리고 나는 초저주파에 몸이 저릿한 와중에도 몸을 움직여 공간이동 했다.
두 번. 연달아서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빠르게 가지고 돌아온 헌터 라이플을, 포효하느라 벌리고 있던 놈의 입에 쑤셔 박았다.
이 순간, 오거도 이게 제 위기임을 인지했을 것이다. 가속된 신경으로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더욱 정확히 이해했을 것이다.
퉁퉁이가 총구를 붙잡고서 으깨려는 듯 힘을 주었지만, 난 헌터 라이플에 역장 외골격을 덮어놨다. 그리고 내 역장이 깨지는 것보다 총구에서 기관포탄을 쏟아내는 쪽이 더욱 빨랐다.
오거의 거대한 머리통, 그 뒤통수에서 피와 화염과 기관포탄이 빠져나왔다.
그와 함께 내 역장이 깨지면서 주변 불꽃의 열기가 느껴졌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희열이 내 머릿속을 잠식했다. 일찍이 경험해 본 적 없는 희열······.
그 희열은 짧지만 강렬하게 내 머리를 잠식하고서 사라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옥타곤의 스포트라이트를 대신해, 군사기지의 야간등이 날 비추고 있었다. 난 한 손을 번쩍 들어 내 승리를 모두에게 선포했다.
머릿속과 현실 양쪽에서 내 이름이 연호되었다.
"김극! 김극!"
92화 군인들 - [6]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태가 끝났다.
탄약고 내부 게이트가 닫혔다. 그 게이트를 열었을 정령은 퉁퉁이의 최후를 관측하고서 겁먹었는지 게이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이 와중에 사태가 컸음에도 사상자는커녕 부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다들 웃으며 기뻐할 만했다.
과연, 내가 기지 내부를 가로지르자니 날 둘러싼 군인들이 고함질렀다.
"저 사실 애기버섯 팬입니다!"
"김극, 김극!"
"애기버섯 티셔츠 세 장 살게요!"
그리하여 다음 날, 군사기지는 축제 분위기였다.
대령이 모든 일과를 취소한 뒤, 축제 음식과 맥주들을 마련해서는 장병들이 먹고 마시게 했다.
그 축제 음식이란 PX를 통째로 털어왔다는 냉동 음식이었는데, 그중에 냉동 치킨이라고 올라와 있는 것은 튀김옷이 제대로 안 입혀졌거니와 튀김옷 안 닭고기도 너무나 조그마한 무언가였지만 요즘 세상엔 이마저도 만만한 음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병사 하나가 마치 두꺼운 스테이크라도 써는 듯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 치킨을 입에 물더니, 이 '귀한' 음식을 마련해준 지휘관을 내 앞에서 칭송했다.
"이야, 부대 자금으론 이것들 전부 사기 어려웠을 건데! 부대 자금 말고도 연대장님께서 사비를 따로 크게 쓰셨나 본데요?"
여기 연대장이 그 대령이지 아마.
"연대장님 좋아하나 봐요?"
"그야 좋아하죠? 일이랑 훈련 빡세게 시키는 거야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아무튼 그분 정도면 뭐······"
나 역시 냉동 음식 몇 점을 입에 넣고서 축제를 대강 즐겼다.
그러고는 지통실에 들어가니, 대령이 한창 부하 간부들을 상대로 말하는 중이었다.
"아니, 영상 보니까 C4 800kg 제대로 부착됐고 제대로 터졌는데 그걸 또 버틴 거였네? 그러고 나서 대전차고폭탄 정통으로 처맞고 탄약고 유폭에도 휘말렸는데 살아남았어? 이게 무슨······"
대령이 이번 사냥의 영상자료를 보는 듯하길래 난 잠시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가 내 존재를 알아챘다.
"북한에서 각성자 통제하겠답시고 전술핵 만들 땐 북괴 놈들이 아주 그냥 개오바를 떠는구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사람이 저 능력 갖추고 날뛰면 어찌 제압해야 할지 당최······ 아이고, 김극 헌터님 왔어요?"
"예, 인천 만세."
"어서 와요! 왜 왔는진 모르겠지만 어서 여기 앉으시고! 내가 이번에 김극 씨한테 너무 고마운 거 알죠?"
대령은 그리 호들갑을 떨더니 계속해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이번에 보니 그 오거를 잡는 것보단 항모를 하나 격파하는 게 훨씬 쉬웠을 거라고, 내가 없었으면 대체 뭔 수로 그 괴물을 잡았을지 몰라 막막하기만 했을 거라고, 퉁퉁이 그 괴물이 얼마나 많은 인명을 해친 줄 아느냐 묻더니 내가 수많은 목숨을 살린 셈이라고 구체적으로 내 업적을 칭송했다.
보아하니 내 비위 맞춰주려고 저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아서 난 잠시 머뭇거렸다.
저 미소를 망치긴 미안한 일이지만, 난 저 군인이 싫어할 만한 화제를 꺼내러 여기 찾아왔다.
잠시 뜸 들인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각성자 병사들 동원할 예정이었다던데, 맞습니까? 퉁퉁이 그놈 잡으려고, 그 병사들을 말년 즈음에 동원할 예정이었다던데······."
내가 그리 물었더니, 대령은 살짝 당황하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디서 들었는진 모르겠는데, 대충 그럴 예정이었던 게 맞습니다. 그래서 사냥 경험 쌓으라고 헌터 분들 따라다니게 한 거고요."
이 미친 새끼가.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다.
"그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진짜 그랬으면 보나 마나 다들 퉁퉁이 똥 됐을 텐데요."
내 비난에 대령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곤 설명했다.
"변명하자면, 우선 예전에 헌터 협회에서 분석해준 바에 따르면 충분히 우리 인원으로 잡을 수 있단 분석이 있었어요. 그놈이 사 미터급 오거니까 역장의 견고함도 대충 그 정도 수준일 거라고 분석됐거든요? 그 정도면 잡으러 나섰을 때 인원 희생이야 있겠지만 아예 잡으러 나서면 안 될 급은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최소한의 희생으로 그놈 잡을 방법이 그 외엔 딱히 없었으니 그렇죠? 괴수 사냥할 때 병력만 잔뜩 밀어 넣는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건 독수리 작전 때 증명된 사실이고, 평소 게이트에 틀어박혀 지내는 놈들 상대로 폭격 거하게 때려도 소용없단 게 이미 입증됐고······ 결국 소수 인원을 보내야 했는데······"
"그래도 그렇지, 각성자 병사라 해봤자 결국 다 평범하게 살다가 군에 끌려온 어린 친구들인데요. 희생자 나올 게 뻔한 위험한 임무에 각성자란 이유로 그 친구들만 보내는 건 일종의 차별 아닙니까?"
이번 내 비난에도 대령은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누굴 희생시키든 언젠간 꼭 그래야 했어요. 그리고 꼭 누굴 희생시켜야 한다면 최소 인원을 희생시키는 게 옳았구요."
"군 생활 내내 고생시키고서, 말년에 죽을 장소로 보내는 게 옳다고요?"
"예. 말년에 갑자기 그런 일 시키는 게 더럽고 치사한 건 저도 알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욕 처먹고 말지요. 그게 가장 뒤탈 없이 싸게 먹힐 방법이었는데요."
더 말을 섞다간 싸우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비각성 찌꺼기든 뭐든, 일단 함께 싸운 전우끼리 얼굴 붉히기는 꺼려졌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지통실을 나섰다.
물론 고개 좀 끄덕였다고 해서 내가 그 말에 수긍했단 것은 아니었다.
굳은 얼굴로 기지를 가로질렀다. 그러다 각성자 병사들과 마주치자 그들이 먼저 아는 체했다.
"아, 김극 형!"
바로 반가워하길래 나도 씩 하고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들 A급 헌터 계약할 때 경력에 써넣을 한 줄 추가됐구만? '마니산의 공포, 항모보다 튼튼한 괴물을 같이 잡다'······."
"아니, 같이 잡았다기엔 좀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쏜 걸론 기스도 안 난 거 같던데. 그냥 그놈 좀 머뭇거리게만······"
"그게 같이 잡은 거지. 그리고 그런 거물한테 총 쏴본 경험이 얼마나 귀합니까? 몇 년 활동한 A급 헌터들도 그런 거물한테 총 쏴본 적 없을 텐데. 다들 안 쫄고 잘 쐈으니 충분한 거지 뭐."
그리 말하고서 손바닥을 펼쳤더니, 바로 내 뜻을 알아챈 병사가 나와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렇게 열한 명 모두와 하이파이브를 마치고서 내가 말했다.
"내가 준 명함 아직 안 버렸죠? 전역하고서 헌터 하고 싶으면 연락해요. 미리 업계 정보 알고 싶으면 싸지방에서 헌트웹 접속하는 것도 좋고! 나도 거기 활동하거든······"
"그러고 보니 누가 김극 형이 헌트웹 네임드 애기버섯? 뭐 그런 거랬는데 그게 대체 뭐예요?"
"그런 거 있어요. 신성한 또 다른 자아가."
"뭔 소리래? 아무튼······ 이번에 고마웠어요, 진짜로."
"음?"
"처음에 헌터들이랑 마니산 오르란 지시 들을 때만 해도 내가 또 뭔 고생을 해야 하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따라 다녀보니까 그때 보고 접한 일들 평생 못 잊을 것 같아. 내가 이번에 헌터들한테 어떤 환상 생겼다, 진짜."
누가 그리 오글거리는 말을 하나 봤더니, 내가 목숨 한 번 구해준 그 친구였다. 데스클로한테 죽을 뻔했던 그 친구.
그 친구를 포함한 모두에게 씩 웃어 보인 다음 그들과 헤어졌다.
관용차를 타고 다른 헌터들과 귀가하자니, 다들 흡족한 표정으로 푹 쉬고들 있었다.
백담비는 특히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어느샌가 또 그놈의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이번 자신의 기여로 말미암아 자신이 황금화살상에 더욱 가까워졌다고 여기는 모양이지?
내 옆자리 성문영이 말을 걸었다.
"형, 이번에 잡은 놈 역대급이었죠?"
"진짜 끔찍한 수준이었지. 원래 계획대로 우리끼리 잡으러 나섰다간 몇 명 죽었을 거다."
"좋게 끝났으니 됐죠. 그래서 그놈 잡고 나서 어때요? 더 세진 거 같아요?"
"응."
"얼마나요?"
"아주 많이."
"정확히 얼마나?"
성문영이 그리 물었을 때, 차량 내 거의 모든 인원이 날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저들이 보스인 내가 잘 나가는 상황에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낀단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평 지하상가 길이만큼 많이."
"뭔 소리래?"
인천 남아가 이 말도 못 알아듣나? 멍청한 놈.
굳이 말로 설명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이번에 내가 휘두르다 망가져서는, 자루와 분리되어버린 망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 망치 머리에 검지를 가져간 다음, 쿡 하고 찔렀더니······.
"슈퍼맨이야?"
망치 머리에 뚫린, 내 검지 깊이의 구멍을 보며 성문영이 그리 중얼거렸다. 다른 인원들의 시선 또한 거기 쏠린 채 한동안 다들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심지어 남자들의 대화에 관심 없는 척, 혼자서 콧노래나 흥얼거리던 백담비도 이쪽을 슬쩍 보더니 눈을 마구 깜박이는 것을 난 똑똑히 목격했다.
하여간 귀여운 년. 나는 만족스레 웃었다.
*******
집에 돌아와서는 헌트웹에 이쁜 말투로 글 하나를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 아이도루 데뷔 후 첫 위문공연!!
애기버섯이가 글쎄!! 이번엔 강화도 군부대에 위문공연 하게 됐지 뭐예양?
처음엔 두렵고도 떨렸어양! 군인 아조씨들은 여자 본 지 오래돼서 굶주린 수컷들이라던데, 애기버섯이의 매력에 몇 배는 취약할 것 아니겠어양 ㅠ
그래도 군인 아조씨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어양! 애기버섯이, 두렵고도 창피했지만 애써 이쁜 옷 입고 무대에 올랐더니······!!
퉁퉁이라고 웬 납븐 아조씨가 무대에 난입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뭐예양?
소중한 공연을 방해받으니 프로정신 충만한 애기버섯이는 두려웠던 와중에도 화가 났어양!
바로 퉁퉁이 아저씨만큼 음치인 백담비 언니야를 내보내 맞서게 했어양! 둘이서 음공(音功) 대결을 시작하게 했더니!!! (······)
거기 달린 댓글들을 감상했다.
누구인지 딱 봐도 알 수 있는 이들이 유독 눈에 띄었고.
Ⓐ syberMagneto : ······.
익명 : 헌트웹 애기버섯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싸지방 옆자리 동기가 이거라고 알려주던데 나 낚인 거죠? 이거 김극 형 아니죠?
Ⓐ 돌머리청년 : 유감스럽게도, 이게 김극 형이 맞단다
익명 : 개소리 말고 아니라고 말해 빨리 빨리
Ⓐ 한민족의얼은恨 : 이번에 뭔 일 해내셨는지 먼저 듣게 됐거든요? 그래서 칭송해 드리려고 이 글 클릭했더니 또 왜 이러고 계실까;;
새로운 유입들이 들어와서는 신선한 반응을 보여주니 즐겁구나. 당분간은 역치를 더 올리지 않아도 되겠다.
날이 어두워져서는 이번 내 활동이 뉴스에 나왔다. 그리하여 내가 올린 글과 내 활동이 무슨 관련이었는지 깨달은 사람들이 더욱 많은 댓글을 거기 달았고.
익명 : 항모만큼 단단했다는 괴수 잡아놓고 이딴 글 올린 거였나 미친놈이??
이런 반응들을 볼 때면 늘 짜릿하다. 내가 고생한 보람을 훌륭히 느끼게 해준다.
이 열렬한 반응들 덕분에, 이번 내 활약을 복기하며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
그러나 그놈의 꿈을 꾸게 된 후로는 늘 그랬지만, 역시 잠든 동안엔 편안하지 못했다.
*******
아······.
언제나 그랬듯,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깼다.
식은땀을 연신 흘리며, 꿈에서 본 내용을 되새김질했다.
평소처럼 꿈을 꿨다. 끝이 언제나 핵폭발로 끝나는 그 꿈······.
그리고 이번에는 그 중간과정을 엿보았으니, 그 꿈에서 지난번 환각의 이후 전개를 보았다.
꿈에서, 나는 뜻이 맞는 동지의 도움으로 게이트를 열었다.
소월로 통하는 게이트 말이다.
그리하여 꿈속의 나는 기어이 각성자 병사들과 비각성 찌꺼기들을 소월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서 나는 드디어 비각성 찌꺼기들에게 제 분수에 맞는 삶을 살게 해주었다며 기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로부터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내가 기껏 소월로 보낸 각성자 병사들이 한국에 귀환했다. 내가 그들에게 딸려 보냈던 비각성 노예들, 장교 및 부사관과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꿈속의 나는 치열한 소월에 정신적으로 나약한 각성자들을 보내두면 알아서 환경에 적응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각성자 병사들은 결국 소월의 영주들처럼 행동하리라고, 같이 보내진 비각성 찌꺼기들은 소월의 노예들처럼 행동하리라고 기대했다.
그 예상이 틀렸다. 소월로 가게 된 각성자 병사들은 수백 명에 달하는 비각성자들을 마음껏 학대하지도, 노예처럼 대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 병사들은 노예로 쓰라고 딸려 보낸 비각성자들에게 설득을 당했던 모양이다. 정확히 어떤 설득인진 모르겠지만, 대충 이런 미친 짓은 그만두고 다 같이 돌아가야 한단 설득이었으리라.
그리고 추측건대, 처음 보는 각성자 여럿이 제 영토 근처에 몰려다니길 원치 않았던 근처 소월인 영주가 제 궁정의 빙정 능력자를 시켜 지구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어주었을 것이다.
그 게이트를 통해 내가 보낸 모두가 귀환했다.
그리고 소월에서 돌아온 그들은, 어떤 이유로 소월에 보내졌는지 숨기지 않고 모두에게 밝혔다.
'공간이동 능력자로 유명한 헌터 김극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작자가 우리한테 소월로 가라고 강요했는데, 단순히 우리만 가라는 게 아니라······'
'퇴근하고서 집에서 쉬고 있었어요. 분명히 문을 잠가뒀는데! 웬 말도 안 되게 큰 근육질 남자가 불쑥 방 안에 나타나서는······'
그리하여 며칠 연속으로 뉴스에 내 얼굴이 나왔다. 각성자 우월주의 사상범, 수백 명을 납치한 김극 어쩌고 하는 자극적인 문구들.
당연히도 나는 수배되어 헌터 노릇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요, 어쩔 수 없이 헌터에서 테러리스트로 직종을 전환했을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체험하고 나니 딱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심하고도 추잡해 죽겠다고.
하여간 등신 새끼. 모든 게 제 망상대로 이루어지리라 믿고 행동하는 건 대체 뭔가?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환각 속 나, 그러니까 또 다른 내 정신머리가 심각했던 만큼이나 당시 한국의 상황 또한 심각했다고.
그 각성자 병사들은, 그따위 미치광이를 찾아가서는 결국 그따위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지 않은가. 그것은 곧 그 미치광이 말고는 그 누구도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단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불운한 각성자 열한 명이 그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뻔했다. 평범한 절대다수가 희생하느니 소수의 각성자가 희생하는 게 옳다는 그놈의 논리에 내몰려서는 괴수의 항문으로 빠져나올 뻔했다.
그 누구도 그 각성자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한국의 기자도, 정치인도, 평범한 시민들도 전혀.
이 갑갑한 상황을 막으려면 어째야 하는가?
적극적인 투표나 활발한 정치참여 따위로는 안 된다.
징그럽게 많은 비각성 찌꺼기들 사이에서 우리 각성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저 비각성 찌꺼기들에게 맞먹을 만한 큰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환각 속 김극의 방식을 따라해서야 안 되겠지만, 그밖에 어떤 방식으로든······.
나라도 내 동족들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
우리 중에 가장 강력한 강준치가 나서지 않는다면, 나라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이번 일로 증명됐듯, 수가 적은 우리는 명백히 탄압받고 있다. 나치들 사이에서 고통받던 유대인들처럼, 수용소로 내몰리고 포그롬에 휘말려 죽어 나가고 있다.
심지어 신체강화자나 역장 외골격 능력자 같은, 힘있는 동족들마저 저런 처지에 놓였을 줄은 미처 몰랐다. 대한각성연대 시절에 경험했듯 얼음 능력자 같은 힘없는 동족들이나 고통받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머지도 예외가 아니었다니?
내 동족이 저 나치들 사이에서 살아남게 하려거든, 누군가가 나서서 이 모든 것을 바꿔야 할 것이다.
정말로 필요하다면, 서울 한복판에 버섯 한 송이를 피워내는 한이 있더라도······.
한창 생각하는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진범 씨?"
그 경찰 아저씨였다. 그 얼음 능력자 경찰 말이다.
「김극 씨? 김극 씨 맞죠. 나 좀 도와······ 도와줄 수 있어요?」
수용시설에서 자살 소동 벌일 때도 우렁찼던 그 아저씨의 목소리는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더없이 힘없는 목소리로 진범 씨가 애원했다.
「김극 씨가 대한각성연대라고, 웬 각성자 인권단체 활동하던 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맞죠?」
그 말하는 태도만 봐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꼰대 기질이 다분해서는 내가 더 어리단 이유로 초면부터 쭉 반말하던 양반 아니던가. 그 아저씨가 지금 이토록 비굴하게 애원하다니?
내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93화 빙정 능력자들 - [1]
한국에서 얼음 능력자들의 범죄는 정말 쉽게, 자주 발각된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완전 범죄가 가능할 텐데도 그렇다.
대부분의 경우, 얼음 능력자들은 실제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그 시도가 발각된다.
얼음 능력자들이 웬 인터넷 사이트에서 살인 청부를 받은 경우에 주로 그렇다.
이제 경찰들은 어지간한 사이버 범죄에는 수사에 나서지 않지만, 그렇다고 경찰들이 인터넷에 관심을 거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이버수사대 인력 상당수는 이제 인터넷의 초능력 살인청부업자 꿈나무들을 찾아내는 데 매진하고 있다.
그리하여 살기도 퍽퍽하겠다, 제 초능력을 활용하면 살인을 저지르고도 증거를 남기지 않으리라 믿고 나선 얼음 능력자는, 웬 인터넷 사이트에서 살인 청부를 받은 뒤 의뢰인과 접선하려다 십중팔구 의뢰인인 척 현장에 나온 경찰들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진범 씨가 담당한 일이 바로 그런 초상 범죄 관련 일이었다.
지금까지 인터넷에서 얼음 능력자의 청부살인 시도가 포착되면, 진범 씨가 동료 경찰들과 함께 출동하곤 했다고 한다.
이때 정면에서 얼음 능력자를 제압하는 일은 진범 씨가 맡곤 했다. 왜냐하면 궁지에 몰린 얼음 능력자가 능력을 활용해 발악할 때, 같은 얼음 능력자인 진범 씨를 상대로는 그 시도가 통하지 않을 테니까.
바로 그런 일을 하던 진범 씨가, 이제는 역으로 살인범으로 몰렸다.
"모함이야!"
진범 씨의 말을 내가 받았다.
"모함이요."
"어, 모함! 애초에 내 동료란 새끼들이 날 안 좋아했어! 내가 게이트 열린 지 얼마 안 됐을 때, 각성자랍시고 늦은 나이에 경찰서에 특채됐거든?"
"예. 저번에 말씀하셨던 것 같네요. 그래서?"
진범 씨가 큰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대충 그때부터 짭새 새끼들이 날 안 좋아했어! 특채된 당시에나 신기한지 관심 보였지. 얼레기가 영 쓸모없는 거 밝혀지고는 슬슬 없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하더니······"
얼레기, 하는 말에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진범 씨는 계속해서 하소연했고.
"이후론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매번 야간당직 안 서니까 다들 맘에 안 들어 했고! 내가 워낙 체력 딸리는 데다 운전면허도 없으니까 뭘 시킬 수가 없다며 짜증 냈고······ 뭔 소리인지 대충 알지?"
"그러니까 경찰서 왕따였다 이 말씀인가요?"
"그래! 그나마 유일하게 나한테 적합한 일이 초상 범죄 관련 업무였어. 그래서 그거라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그마저 못마땅했는지 그 씹새들이 이젠 대놓고 날 파묻으려고······"
하기야 저번 자살 소동에서 경찰들이 진범 씨를 대한 태도는 결코 동료 경찰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지 아마.
경찰들에게 진범 씨가 동료 경찰을 해치지 않으리란 믿음이나 신뢰가 있었다면 그들이 바로 건물에 올라가서 말리든 설득하든 했을 텐데, 내가 현장에 도달할 때까지 경찰들은 죄다 담장 뒤에 숨어있던 것을 기억했다. 그걸 보면 애초에 진범 씨는 동료 경찰들과 사이가 최악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정확히 어떤 혐의를 받으셨다고요?"
"내가 같이 출동한 동료 경찰을 살해했다잖아!"
진범 씨가 빽 소리 지르더니, 횡설수설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에 두서가 없었지만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진범 씨가 동료 경찰이랑 같이, 살인 청부 받고서 현장에 나온 얼음 능력자를 잡으러 출동했고······ 동료 경찰이 픽 하고 죽으니까 진범 씨가 범인으로 몰리셨다?"
"어!"
"증거는요?"
"없어! 그냥 당시 근처 CCTV에 나 말고 다른 얼음 능력자가 안 찍힌 게 유일한 증거래. 이게 말이 돼?"
진범 씨가 호소했고 내가 대답했다.
"말이 안 되죠. 당연히."
"그렇지? 딱 봐도 나 맘에 안 드는데 뭔가 의심스러운 일 생기니까 기회다 싶어서 나 매장하려는 거 맞지? 그래서, 나 도와줄 거야?"
"당연히요. 변호사 선임이든 뭐든 다 나한테 맡기십쇼."
내가 말했고 진범 씨가 애타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한 몇 달 뒤에 이런 일 있었으면 뭔가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곧 각성자 차별 금지법 발의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리 말하고서 내가 부연했다. 곧 발의될 예정인 그 법이 지금 미리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왜냐하면 현재 얼음 능력자들을 물증 없이 유죄 판결 내리는 것은 어떤 특별법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국가 방침에 따라 판결을 그따위로 하는 것 아닌가. 곧 생길지 모를 법에 따라 국가 방침이 달라진다면, 그 법이 생기기도 전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고 내가 말했다.
그러나 진범 씨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하지만 내 알기로 요새도 각성자 관련 범죄에서 물증 없이 유죄 판결 내려지긴 마찬가지라던데······"
"그런가요?"
"어······ 내가 관련 일 하니까 잘 알지······?"
나는 다시 한번 한숨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무튼, 날 믿어요. 판결이 어찌 내려질진 몰라도 최소한 맘 편히 수사하고 판결 내리게 내버려 두진 않을 테니까."
그러자 진범 씨는 연신 고맙다고,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또다시 '고맙다'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유치장을 뒤로 한 채, 나는 경찰서 복도를 걸었다.
이번 진범 씨와의 만남은 경찰서에 허가를 받고서 한 일이 아니었다. 내 멋대로, 공간이동 해서 진범 씨가 갇힌 유치장에 들어와서는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날 상대로 꼬투리를 얼마든지 잡을 수 있을 텐데, 경찰서의 경찰들은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 꼴을 보기가 싫었다. 나는 일부러 체중을 실어 걷기 시작했다.
이제 내 체중은 평범한 성인 남성의 여섯 배쯤 된다. 내 한 발짝 한 발짝이 경찰서 복도의 타일에 금이 가게 하며 큰 소리를 내는 가운데, 한 경찰이 중얼거렸다.
"아따, 시끄럽네? 대체 뭔 소리······"
잘 걸렸다, 씹새끼.
난 바로 그 소리가 들린 쪽으로 쿵, 쿵 소리를 내며 걸어가서는 그따위로 말한 경찰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틀어쥐었다.
"지금 나 들으라고 씨부린 거냐?"
내가 윽박질렀더니 그제야 경찰은 상황을 파악한 듯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그 기겁한 표정을 보니 나한테 시비 걸려고 그리 중얼거린 게 아니라 정말 뭘 모르고 시끄러워서 중얼거린 듯했지만, 난 그가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경찰이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는 차, 내가 머리통을 붙잡은 경찰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이 자리의 모든 경찰들에게 잘 보이도록, 아파서 컥컥거리는 그 신음이 이 자리의 모두에게 잘 들리도록 그렇게 하며 윽박질렀다.
"그런 거 맞지, 응?"
그러나 내가 이토록 난동을 부리는데, 경찰들의 반응은 어째 신통치 않았다.
경찰들이 머뭇거리며 날 바라보더니, 나이 든 경위 하나가 애걸했다.
"놔줘요, 응? 그 친구가 잘못했으니까······"
짜증 났다. 난 이따위 반응을 바라고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말했다.
"시민이 난동을 부리는데 왜 말로 해? 다들 총 없나? 경찰서니까 헌터 라이플도 있을 텐데, 쏴 봐요. 어서."
내가 그리 말했지만 경찰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움츠러든 눈길만이 날 향할 뿐이었다. 심지어 깡패인지 형사인지 구분도 안 될 만치 험악하게 생긴 경찰마저 그러고 있는 걸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쏴보라니까. 왜 안 쏴? 여기 아저씨들만으로 안 될 것 같으면 어서 특무대도 불러오고 뭐 그러라니까?"
내가 괜히 도발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화풀이 하려고 이러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번 일이 커지길 원했다.
혹시 상황이 심각해져서 저번처럼 특무대가 내 집 앞에 몰려온다면? 오히려 좋다. 그러면 헌터 협회에서 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요, 더욱 일이 커져서는 아예 한 국가적 사건으로 비화할지 모르니까.
그리하여 이번 사건과 얼음 능력자를 상대로 증거 없이 유죄 판결을 내려대는 현 행태가 뉴스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기를 바랐다.
그러니 일이 커지게 어서 반항해라.
여기저기 연락하고, 비상벨도 울리고 뭐 그래보란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김석희가 계양구 변경백으로 활동할 적 경찰들이 보여주었던 무기력함은 날 상대로도 적용되었다.
일개 시민 주제에 감히 경찰서에서 경찰을 죽일 것처럼 굴고 있는 날 상대로, 권총 한 자루 겨눈 경찰 따윈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내게 소리 지르며 위협하는 경찰조차 한 명도 없었다.
하여간 한심한 놈들. 이걸 보니 너무 유명해진 것도 좋지 않다. 딱 봐도 총알 따윈 통하지 않을 것이겠다, 내 관련 일로 강준치까지 출동해선 나라가 반쯤 뒤집힐 뻔한 일까지 겪고 나니 내가 이렇게 패악질을 부려도 제지할 엄두가 전혀 나지 않는 모양이지?
설령 날 제압할 자신이 없더라도 이번 일 그냥 넘길 수 없을 거라며 윽박지르기라도 할 만한데, 그러는 놈조차 한 명 없다니······.
"용의자 구속되면, 맨 먼저 경찰 단계에서 수사하던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계속 으르렁댔다.
"내가 지금부터 외압을 하겠는데, 수사 좆같이 했다간 관련자들 싹 다 실종될 줄 알아! 내가 여기 있는 당신들 싹 다 동네 뒷산에 파묻어도 아무도 찾으러 안 나설 거 잘 알지?"
혹시 누가 찾으러 나서봤자 어디로 공간이동 시켰는지 CCTV에도 나오지 않을 거다, 어쩌고 계속 협박하려던 차였다.
나이 든 경위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가 내게 협박하려는 줄 알고(그러면 난동을 더욱 크게 이어나갈 수 있어서) 반색했지만, 실망스럽게도 아니었다.
나이 든 경위가 말했다.
"진범 그 인간이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그 인간은 유력한 용의자가 맞습니다."
"뭐?"
"누가 봐도 그 인간이 범인 맞다구요! 그놈은 단순히 동료 경찰이랑 사이가 나빠서 살인 저지른 것도 아니고―"
뭔 소리를 더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내가 도중에 끊었다.
"진범 그 아저씨가 범인인지 아닌진 내 알 바가 아니지. 그래서 물증은?"
내 물음에 경위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계속 말했다.
"뒤진 놈 몸뚱이에서 영적 DNA라도 검출됐나? 뒤진 놈 폐에서 검출된 얼음 결정들이 진범 그 양반 얼굴 형상이라도 이루고 있었어?"
"아니······"
"아니면 닥쳐요."
내가 일갈하니, 더는 입을 여는 경찰조차 한 명도 없게 되었다.
정말이지 실망스러웠다.
나는 계속 붙잡고 있던 경찰을 바닥에 내팽개친 뒤, 경찰서 테이블이며 서랍장 따윌 마구 걷어찼다.
걷어차인 물건들은 단순히 날아가거나 박살 나는 걸 넘어 가루가 되어 고운 입자가 흩날렸다.
발길질 한 번에 충격파까지 퍼져서는 그 주변을 초토화했다. 여기 모인 경찰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잠시 그들의 반응을 즐겼다.
그런 식으로 한동안 난리를 피우다가 경찰서를 나섰다.
제기랄, 보아하니 싹 다 서울 종자들이 틀림없었다. 하여간 서울 종자들이 인천에 섞여드니 이런 일이 생기곤 한다.
아무튼, 이번 내 패악질이 내가 바란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어도 충분한 경고는 될 것이었다.
너희가 살인범으로 내몰려던 한 얼음 능력자의 뒷배로는 각성자 김극이 있노라고, 평소 하던 대로 물증 없이 유죄로 내모는 절차를 거쳤다간 재미없으리라는 경고 말이다.
*******
다음 날,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내가 그리 난동을 피웠는데도 인터넷 기사 하나 올라오지 않았다.
내가 유명인이며, 유명인은 술 마시고 운전하다 걸리기만 해도 뉴스에 뜨는 법임을 생각하면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놀라진 않았다. 각성자 관련 일은 대개 이렇단 걸 대한각성연대 시절에 익히 경험했으니까.
언론을 통제하는 정부로선 얼음 능력자 관련 사건도, 경찰들이 일개 시민의 난동에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단 사실도 대중에 알리고 싶지 않았으리라.
답답한 나머지 요새 얼음 능력자 관련 판례 따윌 읽어보며, 차 안에서 종이와 눈씨름 하던 중이었다.
내가 읽고 있던 자료를 백담비가 흘긋 보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진범 씨 관련 일로 신경 쓰시는 거죠?"
나는 자료를 읽다 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얼음 능력자 관련 커뮤니티가 있어서요. 저도 거기 가입했고요. 오랜만에 거기 올라온 글 슬쩍 보니까, 요새 김극 씨가 진범 씨 관련 일로 여러모로 애쓰면서 인천 얼음 능력자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다던데······ 아닌가요?"
이 여자는 그런 커뮤니티에 가입까지 했으면서 헌트웹에선 얼레기, 얼레기 이렇게 막 비하했던 건가.
나는 내 라운드걸의 흉악함에 경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있긴 하죠?"
그리고 흉악무도한 백담비가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지금 짓고 계신 아파트도 그렇고, 남 일에 그 정도로 돈과 시간을 쓰시다니요."
"대한각성연대 활동하던 시절 버릇 살려서 이러는 거죠, 뭐."
"그 단체는 진작 해산됐지 않나요? 그런데도 쭉 이러시는 걸 보니 대단해요, 정말로."
내가 평소 임형택 씨나 정진영 형의 아첨에는 익숙해도 이 아가씨의 칭찬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쑥스럽고 어색한 나머지 내가 코를 긁적이자니, 백담비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저도 도울 수 있을까요?"
94화 빙정 능력자들 - [2]
솔직히 그 제안을 듣고서 기겁했다.
이 여자가 대체 뭘 돕겠단 건가? 내가 경찰서에서 했던 일 비슷한 패악질을 도우려는 건 아닐 테고······.
"뭘 어떻게 도우려는 겁니까?"
내 물음에 백담비가 대답했다.
"그거야 저도 잘 모르죠. 일단 직접 가서 제가 도울 일 뭐 있나 보려고요."
"갑자기 왜요?"
"뭐, 저도 진범 씨랑 짧게나마 안면 튼 사이기도 하고. 우리가 하는 일에 도움 준 분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별 대단한 이유는 없다는 셈이군. 나는 이 여자를 말려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마침 오늘 할 일은 딱히 폭력적인 일이 아니니까. 이 여자를 데려가서 동참시켜도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루치 사냥을 마친 뒤, 나는 내 라운드걸을 데리고 냉동고로 향했다.
이 시설의 정체를 알아차린 백담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인천 각성자 수용시설. 그러나 순 얼음 능력자들만 갇혀 지내는 곳.
내가 짓고 있는 초고층 아파트 앞에 있는 그 시설은 여전히 흉물스러운 외관과 칙칙함을 자랑했다. 그것만 봐도 백담비가 이 시설에 들어가길 극구 거부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시설 입구 앞에 도착한 백담비는, 선글라스 너머 눈을 크게 떴다.
"저거 뭐예요?"
백담비가 가리킨 것은 내가 설치한 현수막으로, '김극 저택 주변 빌라 임대 : 월세 칠만 원 ~ 십이만 원'이라 적혀 있었다.
"제 집 근처 빌라 몇 동 사서 여기 사람들한테 임대 주고 있거든요? 그거 광고예요."
"월세가 말도 안 되게 싼데······"
"애초에 빌라가 싼값이고 하니까, 건물 막 쓰지 않을 정도의 월세만 받고 집 빌려주는 중이죠 뭐."
"그러면서 별문제 없었나요? 근처 주민이 항의한다든가······"
"딱히요. 얼음 능력자가 괴수 꾄다지만, 지금까지 괴수 한 마리도 안 튀어나오던데요?"
"그래요? 아, 하기야 김극 씨가 여기 사니까······ 게이트 내 괴수들이 튀어나오려다 말고 다 도망치겠네요······?"
나는 씩 웃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내 뒤를 따라오며 백담비가 물었다.
"언제부터 이러신 건가요?"
"여기 사람들한테 집 빌려주는 거요? 저번에 진범 씨 자살 소동 겪고 나서요."
"그때부터 쭉 하고 계신 거예요?"
"예."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이네요? 하여간······ 대단하시네요."
"그 말은 이미 하신 것 같은데?"
"그럼 또 할게요. 여러모로 대단하세요, 정말."
이 여자가 자꾸 왜 이럴까. 임형택 씨와 정진영 형의 아부 솜씨를 보고서는 저게 올바른 사회적 처신이라 믿고 본받으려는 걸까?
난 이번에도 어색하게 웃어넘겨야 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백담비는 흥미가 동하는 듯 계속해서 물어댔다.
"그럼 수용시설 안엔 지금 아무도 없어요? 여기 사는 얼음 능력자들이 다 김극 씨가 빌려주는 집으로 떠났으면······"
"아직 꽤 많이 남아있죠. 월세 칠만 원 낼 돈 없는 사람도 많고. 시설 떠났다간 시설에서 주는 공짜 밥 못 먹으니까 그게 무서워서 못 떠나는 사람도 많고······."
그리 대화를 나누면서 수용시설 내부로 들어섰을 때였다.
"아, 김극 형 오셨네! 어서 와요! 진범 아저씨 관련으로 온 거죠?"
수용시설에 거주하는 청년 하나가 이쪽을 보더니 내게 반가이 인사하고는, 내가 데려온 백담비를 보며 눈을 껌벅였다.
그가 내 라운드걸의 크롭티 차림새에 주목한 것은 아닐 터였다.
"어, 백담비?"
백담비, 그녀의 이름이 청년의 입에서 나왔다.
백담비는 선글라스를 벗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절 아세요?"
"아, 미안해요. 아무튼 알긴 알아요."
"어떻게요?"
청년이 내게 눈짓했다.
"여기, 김극 형이 알려줘서······"
"김극 씨가 절 알려줬다고요?"
"예! 이것저것, 여러모로 알려줬죠?"
우리는 그 청년을 지나쳐 걸어갔다. 내 뒤에서 백담비가 항의했다.
"대체 저 가지고 무슨 말을 한 거예요?"
난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돌 출신이라더니 노래 되게 못부른다든가 뭐 그런 이상한 말은 안 했어요. 그냥 뭐······"
백담비가 항의하고 싶은 표정이길래 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어떤 미래를 보여준 거죠. 그러니까, 헌터로서의 미래 말입니다."
백담비는 항의하려는 듯하다가 말고 말을 흐렸다.
"예? 무슨 말씀인지······"
"얼음 능력자 상당수가 일 구하기도 어려워서 수용시설에서 주는 공짜 밥에 연명하는 처지거든요? 죄다 변변한 일자리도 없는 처지란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꼬신 거죠. 헌터 해볼 생각 없냐고요."
"얼레······ 음능력자들한테 헌터를요?"
난 저 고운 입에서 나올 뻔했던 흉참한 단어를 못 들은 체하며 설명했다.
"예, 헌터를요. 얼음 능력이 헌터 노릇하기 안 좋기로 정평이 난 능력이긴 하죠. 그런데 이제 성공사례가 떡 하니 생겼잖습니까? 바로 제 옆에 말이에요. 그래서 담비 씨 이름을 팔았습니다."
"제 이름을 팔았다구요?"
"뭐 거창하게 그런 건 아니구. 그냥 담비 씨 활약 사례나 영상자료 같은 거 보여주면서 꼬드겼어요."
"그게 뭔······"
"봐라, 얼음 능력으론 헌터 노릇 못 한다지만 제대로 성장하면 충분히 할 만하다. 얼음 능력자가 제대로 성장하면 고점이 이 정도다. 헌터로서 충분히 활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령이 되면 늙지도 않게 된다. 아예 판타지 마법 같은 일도 가능하다. 뭐 이런 걸 보여주려고······"
내 설명에 백담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그러던 그녀가 문득 물었다.
"그런 걸 어떻게 보여주는데요?"
"뭐, 여기저기 찍힌 영상 많잖아요? 뉴스에 나온 영상이며, 나이토 상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이며······ 그 영상 모아다가 영상 편집자 고용해서는 대충 백담비 헌터 하이라이트 영상? 뭐 그런 걸 만들어서 여기 사람들에게 보게 한 거죠."
"그런 영상 만들었다고 여기 사람들이 보긴 보나요?"
"잘만 보던데요? 심지어 딱 봐도 헌터 할 맘 없어 보이는 아줌마도 여러 번 봤대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대충 자기 능력이 활약하는 걸 보며 대리만족하는 게 아닐까 싶더군요?"
내가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만 해도 백담비는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내 말이 과장은 아닌가, 아예 사실이긴 한가 의심하는 모양이지?
그녀의 의심이 풀린 것은 우리가 수용시설 복도를 걸을 때였다.
우리가 지나친, 수용시설 거주민들이 모두 우리를 알아보았다. 나뿐만 아니라 백담비 그녀도.
여러 사람들이 백담비에게 아는 체했고 그때마다 내 라운드걸은 쑥스러운 듯 고개만 꾸벅거리며 지나치던 중이었다.
쿨한 척하는 내 라운드걸마저 무시하기 어려운, 그녀의 팬 하나가 나타나서 말을 걸었다.
"담비 언니? 담비 언니 맞죠! 저 언니 팬이에요! 저도 헌터 학원 등록했는데······!"
한 젊은 여성의 말에 백담비가 어색하게 물었다.
"헌터 학원에 등록했다고요?"
"예, 부평 수렵 전문 학원에요! 김극 씨가 학원비 지원해줘서 등록한 거긴 한데, 단순 그 이유 말고도 언니 영상 보고 반했거든요? 그래서······"
그러니까 대충 백담비의 활약 영상을 보고서 자신도 헌터 할 맘이 생겼단 소리였다. 그러고서 그 여성은 계속해서 빠르게 온갖 말을 쏟아부었다.
언니 너무 이쁜 것 같다든가, 헌터가 여러모로 지저분한 일인 줄 알았는데 언니 영상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든가, 나도 언니처럼 되고 싶다든가······. 말 그대로 아이돌을 대하는 듯한 말들.
그리 한 차례 팬미팅을 마친 뒤, 나는 내가 수용시설에 전해준 그녀의 활약 영상을 그녀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그제야 내 말이 사실임을 믿게 된 듯, 백담비가 중얼거렸다.
"기분이 묘하네요."
"기분이 묘하다니, 왜요?"
"저도 잘······ 하여튼 묘해요."
그리 중얼거리더니, 백담비는 또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복잡한 생각에 잠긴 듯한, 그 와중에도 살짝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상징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걸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군가의 희망이자 목표일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된 걸지도.
그렇다면 이 흉참한 여자가 헌트웹에서 얼레기, 어쩌고 하지 좀 말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그 말을 직접 할 수는 없어서 답답한 가운데 백담비가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뭐할 건가요?"
"별것 없어요. 길거리에서 이번 사건 관련 유인물 뿌릴 예정이거든요? 뿌릴 유인물은 이미 다 만들어놨으니까 담비 씨도 대충 같이 뿌려주시면······"
*******
전단지 돌리는 일 외에도 나는 여러 일을 했다.
진범 씨를 구속 중인 경찰서에 툭하면 들이닥쳐 행패를 부렸고, 헌트웹에도 이쁜 말투로 관련 글을 써서 올렸으며, 헌터 협회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내 지원 요청에 대한 협회의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고려해보겠다.'
협회에서 그따위 모호한 대답을 내놓더니, 지금까지 결정을 보류함으로써 날 답답하게 하던 중이었다.
마침내 협회에서 사람이 날 찾아왔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네가 협회 대표로 온 거야?"
내 물음에 석장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그래서 사람들이랑 말 나눈 결과 좀 말해줄까?"
석장실, 이 친구와는 이제 말까지 놓게 된 사이였다.
이 친구 친화력이 보통 수준이 아니겠다, 저번 서울 게이트 사태에서 이 친구가 담당구역에 살짝 늦게 도착했을 때 내가 일종의 커버에 나서줬던 것을 계기로 밥 한 끼 먹어 먹고서 더욱 친해졌거든.
"말해줘 봐. 다들 뭐래?"
"우선 형만 아저씨는 회의적이셔. 이게 헌터 관련 일이 아닌데 협회에서 목소리 내는 게 맞나? 뭐 이런 생각이신 거지."
석장실의 말에 나는 혀를 찼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입맛이 썼다.
"그래. 그 아저씬 그러실 거 같더라. 그리고?"
"준치 형은, 김극 형도 예상하겠지만······"
"관심 없대지?"
"응. 자기와 관련 없는 일로 나대기 싫다나?"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협회 의견도 그거야? 나설 이유가 없다?"
석장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분위기이긴 한데, 알잖아? 형만 아저씨만 해도 당장 느끼기엔 영 떨떠름하지만, 이게 김극 형 요청인 만큼 딱 잘라 거절하긴 뭐하다고 하시더라. 다른 사람들도 김극 형 요청인 만큼 좀 더 신경 써야 한단 식이었고. 그래서 아직 의견이 정리된 게 아니야."
"협회 의견이 안 정해졌으면 넌 여기 왜 온 건데?"
"나야 뭐, 형 생각을 물으러 왔지."
"내 생각을 왜?"
그리고 석장실이 대답했다.
"형이 왜 이렇게까지 하나 해서.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니까 이미 한 따까리 한 거 같던데? 게이트 열리기 전이었거나 형이 경찰특공대 보내서 제압할 수 있는 각성자였으면 진작 체포됐을 수준으로······ 형, 그러다 면허 취소될까 봐 안 무서워?"
"뭔 면허. 헌터 면허?"
"그래, 그거. 아직 협회장 그 양반인 거 알지? 그 양반 사실상 공무원이니까 나라에서 한마디 하면 바로 형 면허 취소해버릴 건데, 걱정되지 않나?"
그 물음에 난 일부러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 이제 강화도만 마저 정리하면 인천 탈환 프로젝트 끝나."
"그게 벌써? 하기야······."
"초고층 아파트 올릴 공사 자재도 미리 다 구입해놨고. 번 돈도 충분히 쌓였고. 이 정도면 갑자기 면허 박탈돼도 잘 먹고 잘살 거 같은데?"
내 말에 석장실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 단호하네. 솔직히 당황스러울 정돈데······."
"당황스러울 것까지 있나. 아무튼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떤데?"
"내 의견 말하자면······ 솔직히 나도 좀 그래."
"헌터 관련 일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막 나서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지금 얼음 능력자 통제하는 게 필요한 일이라 보거든? 거기에 이렇게 달려들어서 물어뜯으려 하니까 좀 그래."
이 자식이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누가 스파이 아니랄까 봐 대놓고 정부 편을 들다니?
내가 항의의 의미를 담아 석장실을 뻔히 바라보았다. 석장실이 말을 이었다.
"미국 봐. 얼음 능력자들이 정치인들 암살했는데도 증거 없다며 풀어줬지. 덕분에 이젠 아주 그냥 혼란스럽잖아? 이제 미국에선 웬 중고딩 새끼들도 얼음 능력 각성해선 지가 초능력 암살자랍시고 인터넷에서 암살 청부받아서는 사람 죽이고 다닌다고."
"그러니까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맞아. 그렇게 생각해. 미국이야 원체 총기사고도 많이 나던 동네라 그런 식으로 사람 더 죽어 나가도 그러려니 하는 모양인데, 한국도 같은 꼴 될 거라 생각하면 그건 너무······."
그리고 내가 말했다.
"사회질서고 뭐고 그런 건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야."
"왜?"
"그런 거 신경 쓰는 놈은 이미 많으니까. 정부 편드는 놈들도 이미 많고. 정부가 유능해서 쌀값이 안정된다느니, 정부가 일 잘하는 덕분에 굶어 죽은 사람이 적다느니, 그러니까 정부 일에 괜히 어깃장 놓지 말아야 한다느니······,
얼음 능력자들 탄압하는 게 인권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필요악이라느니, 그런 식으로 말하는 놈들은 충분히 많아. 그러면서 냉정하게 현실 파악하는 척 구는 놈들은 더욱 많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그렇듯 정부 편을 들어줄 사람은 이미 많단 말이야. 이 와중에 나까지 그럴 필요가 있나?"
"음······."
"이 와중에 각성자들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지? 그중에서 얼음 능력자들 편들어주는 사람은 더욱 없고."
사람들은 죄다 이런 식이다. 잘 먹고 잘사는 각성자들 편을 왜 들어주냐? 인권 타령 어쩌고 하기 전에 네 집주변에 얼음 능력자 있으면 기분이 좋겠냐?
생각하기만 해도 울화통이 터지는 말들······.
너무 흥분한 탓에 잠시 심호흡해야 했다. 그리 숨을 돌린 다음 나는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까, 나라도 이쪽 편을 들어야겠지!"
그리고 조금 뜸 들인 끝에, 석장실이 입을 열었다.
"형 생각은 알겠는데, 내가 경찰서 가서 물어보니까 진범 그 양반이 진짜 살인범이 틀림없대. 그리고 사실 각성자들 생기기 전에도 정황증거만으로도 유죄 판결 내리는 경우가 꽤 있었지 않나? 이번 일도 딱히 막 억울할 것까지야······"
아직도 날 설득하고 싶은 모양인데. 난 딱 잘라 말했다.
"진범 그 아저씨가 진짜 살인마인지 아닌진 내 관심사가 아냐. 난 솔직히 지금 교도소 갇혀있는 내 여동생도 진짜 사람 죽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거든?"
"응?"
"그런데도 난 그년 꺼내겠다고 몇 년이나 허비했다. 그년이 살인했건 어쨌건, 아무 증거 없이 유죄 된 게 빡치니까."
이건 또 의외의 말이었나보다. 석장실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여동생이 교도소에 갇혀있다고? 그건 또 뭔 소리래."
"내가 말 안 했던가? 나 여동생 하나 있는데, 그년이 뭔 꼴을 겪었냐면······"
난 여동생 년 관련 일을 짧게 설명했다. 그리하여 생긴 박미형 씨와의 인연이며 대한각성연대 활동 일에 관해서도.
내 설명을 다 듣고 난 석장실이 말했다.
"아, 그래. 이제야 형이 왜 그리 이 일에 지극정성인지 이해가 되네. 난 또 뭔 이상한 물이 들어선 이러나 했더니만······"
석장실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말을 끝맺었다.
"그렇다면야 뭐, 어쩔 수 없네."
"그럼 더 설명할 필요 없는 거냐?"
"아마도? 아무튼 얘기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내가 가서 전달할게."
지금 이놈이 내 말을 협회에 전달하겠단 걸까? 아니면 내 추측대로 이놈이 정부 측 요원 비슷한 뭐시기라서 관련 정부 기관에 보고하겠단 걸까?
후자라도 상관없었다. 보고하려면 보고하라지.
그리되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내 입장이 이토록 강경하며, 여동생 관련으로 특히 발작 중임을 정부에서 알게 되면 그년이 더 일찍 출소할 수도 있을 것 아닌가.
사실, 그 못생긴 낯짝을 더 일찍 보게 된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질 것 같진 않지만 하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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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협회 차원에서 이번 일에 관련해 유감 표명을 냈다. 이번 유감 표명에는 강준치가 동참하지 않았으므로 무게감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아무튼 그 많은 각성자들이 내 편을 들어준 셈이었다.
그리고 또 일주일 뒤, 진범 씨가 무혐의로 풀려났다.
내가 경찰들을 겁준 것이 먹힌 것일까? 아니면 협회의 유감 표명이 효과가 있었거나.
혹은 이번 일을 키우기 꺼렸던 정부가 빨리 덮고 지나가잔 식으로 수사를 일찍 종료시킨 걸지도······.
"고마워! 정말 고마워, 김극 씨!"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풀려나서 내게 울면서 감사하는 진범 씨가 억울한 척 했던 건지 아니었는지도 딱히 중요하지 않았고.
난 그저 웃었다. 대한각성연대 활동하던 시절 거둔 적 없는 승리를 겨우 거두었기 때문에. 대한각성연대 김극과 달리 헌터 김극의 활동은 효과가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나는 웃었다.
95화 한반도 수호신 강준치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