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카데미 입학생 신미래 - [2]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난 부릅뜬 눈으로 글에 첨부된 자료를 읽어내렸다.
'헌터 아카데미의 정식 교원 및 강사 목록과 교육 커리큘럼'······.
공개적으로 발표된 자료가 아니라 내부자료를 구해서 올린 듯했는데, 거기 실린 명단을 읽으면 읽을수록 몸이 더워졌다. 이런 씨발.
보면 볼수록 가관인 것이, 김형만 저 아저씨가 왜 저리 화가 났는지 알 만했다.
우선 교장으로 내정된 양반 이름을 보니 헌터 협회장이다.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지만, 이번 11월에 바로 쫓겨날 예정인 양반.
그 양반은 헌터 교육, 헌터 입장 대변 등 협회장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자꾸 괴수들에게 한자어 혹은 순우리말 이름이나 붙이고 싶어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양반이 고블린과 오거를 각각 도깨비와 우렁찬도깨비로 번역하고자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은 반쯤 업계 전설이다.
뭐, 사실 여기까진 용납할 수 있다. 그 양반도 협회장 자리에서 쫓겨난 뒤에 먹고살긴 해야 할 테니까.
수학 강사니 국어 강사니 하는 양반들도 뭐, 누가 하든 상관없다. 그러니 그 교직원 목록에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채워져 있어도 용납할 수 있다.
그러나 날 포함한 헌트웹의 모두를 분노케 한 것은 바로 그 아래 목록이었으니, 한국사 강사부터 체육 강사에 청소년 상담사 등이 죄다 빌런뿐이더라.
익명 : 특수훈련 강사 명단에 군인 출신이 왜 저리 많아?
Ⓐ Dragon : 한국사 강사 경력에 정훈장교 보직 적힌 거 대체 뭐냐? 한국사 수업 대신 정훈교육 하려고?
툭하면 정복 전쟁 벌인 고구려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역사지만 한민족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는 평화의 민족이다, 뭐 이런 거 가르치려는 거냐?
Ⓐ 돌머리청년 : 헌터가 대충 군인 비슷한 일이니까 대충 사관학교 느낌으로 저리 구성한 건가?
교직원 목록에 '비영리 종교법인 신비세계 명상센터' 출신도 여럿 보인다.
이 단체가 뭐 하는 곳인지 안다. 저번에 내가 신미래 양을 구출하고자 발버둥 칠 때, 내 정신수련을 돕겠다며 찾아온 사이비 종교 버러지들.
자기네가 각성자들의 수련을 도울 수 있다며, 자꾸 각성자들에게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검증된 적 없는 불교 및 도교의 명상 수련법을 들이댄다던가?
언젠가는 암석 능력에 각성하려면 땅의 기를 받아야 한다며, 수련자들에게 흙 위에서 맨발 보행할 것을 교육했던 것은 이들이 얼마나 믿을 게 못 되는 놈들인지 알려준다.
그 와중에 나름 세력은 있어서 서울 각성자 센터마다 빨대를 꽂은 채 수익 활동 중이라더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끼어들어서는 청소년 상담사며 특수훈련 도우미 자리들을 꿰찼다.
그리고 온갖 훈련 강사 자리를 차지한, 군인 출신 강사 목록을 보니 저절로 속이 갑갑해진다.
이 인원으로 신체강화자며 역장 외골격 능력자 학생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이란 말인가? 비각성자 찌꺼기들이 감히 어떻게?
정상적인 훈육으로 어림없으리란 건 딱 봐도 명백해 보인다. 교도소에서도 각성자 죄수들을 통제하기 어려워 쩔쩔매는 판 아닌가.
그렇다면 사춘기 각성자들은 또 무슨 수로 통제하려는 것인가?
교직원 목록을 가득 채운 군인 출신들을 보니 안 봐도 뻔하다.
어린 각성자들을 병사들인 양 통제하려는 모양이지? 억압하고 숨 막히게 만들어서, 무조건 윗사람 말에 복종하게 하려는······.
그나마 전직 헌터 출신도 강사 목록에 있긴 했는데, 헌트웹의 동지들이 보기엔 그마저 꼴을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익명 : 박주헌 저 새끼 특수훈련 강사인 거 뭐냐? 저 새끼 저거 사람 죽이려다 특무대에서 퇴출당한 놈인데, 저걸 또 학생들 가르치도록 받아준다고?
하여간 어딜 보든 막장이다.
교직원 목록뿐만 아니라 모집 요강의 주의사항만 봐도 그렇다.
딱 봐도 상당수 학생이 도중에 견디지 못하고 자퇴할 법한데, 그 자퇴를 억제하려는지 학생이 교육과정에서 도중 이탈할 경우 그 가족을 임대한 아파트에서 퇴출한다는 점이 맨 위에 명시돼 있는 것 아닌가.
심지어 학생들이 졸업하더라도 자유롭게 헌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교육과정이 국비 지원이란 이유로, 졸업 후 최소 5년에서 최대 10년까지 어떤 기관에서 의무복무할 것이 적혀있는 걸 보니.
그놈의 아파트를 인질 삼아서, 어린 각성자들을 자기네 입맛대로 다루다가 싸게 부려 먹겠단 심보가 보인다.
이 와중에 군인 강사들과 사이비 종교의 조합이 워낙 인상적인 걸까?
이 자료를 놓고서 헌트웹에는 이런 해석이 많다.
Ⓑ GoodHunter : 이거 혹시 어린 각성자들 상대로 세뇌 교육하려는 거 아닌가요? 중국에도 이 비슷한 각성자 학교들이 여럿 있다던데······.
이 비슷한 의견들이 많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렇고.
이것이 단순 의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열불이 뻗친다.
의도가 이토록 분명해 보이는데도, 제 자식을 기어이 저놈의 아카데미에 밀어 넣으려는 부모가 넘쳐날 것 같다는 점에서 더욱.
익명 : 그래도 지원자는 엄청 많겠는데? 서울에 아파트 준다니까
익명 : ㄹㅇ 각성자 자식 하나 넘기면 서울에 공짜 집 준다니 개이득 ㅎㄷㄷ
그런 식으로 모두가 화가 나서 날뛰던 중이었다.
헌트웹에 글 하나가 또 올라왔다.
Ⓐ 엘마야캐요 : 협회 차원에서 단체항의 들어간다!
협회 소속원 모두 링크 타고 들어가서 동의 서명할 것!
그 명단들을 대표해서 헌터 협회가 공식적으로 항의할 예정이거든? 귀찮아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모두 빠짐없이 (······)
강준치 씨는 이번 일엔 이름 안 빌려주려나?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가 책임지고 준치 옵바 이름 빌려올게양!
그리고 나는 강준치의 계정에 메시지를 보내 그 링크를 첨부해서는 이름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답변 메시지가 돌아왔다.
Ⓢ Kang : 내가 왜?
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대한각성연대 시절에 수집했던 자료, 그중 중동에서 소년소녀 각성자들을 기습용 병기 겸 암살자로 교육하여 활용했다는 사례를 전달했을 뿐이다.
Ⓢ Kang : 내 이름 맨 위에 올려
또다시 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보니 김형만 씨였다.
「준치 씨랑 친하다더니 정말이네! 장실 씨한테 물어봐도 안 될 거라길래 포기했더니 대체 어떻게 서명받은 거예요? 그리고 당연히 김극 씨도 서명했나?」
"다 방법이 있죠. 저도 당연히 서명했고요."
「아무튼 정말 잘했어요! 그리고 말인데, 준씨 이름 아래에는 김극 씨 이름 올려도 되나? 준치 씨 이름 다음으로 압박감 있을 이름이 김극 두 글자라······」
그 말에 난 진심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주시면 영광이죠?"
그리하여 하루 뒤, 헌터 협회는 불과 반나절 만에 각성자 헌터 약 백여 명과 잡다한 비각성자 헌터들의 명단이 실린 항의 서명을 관련 기관에 제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또한 금방 돌아왔다.
Ⓐ 엘마야캐요 : 관련 기관에서 답장 전달했다!
여러모로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니까, 상의할 수 있게 모쪼록 만나달라는데?
결코 협회를 무시한 채 멋대로 일을 진행할 계획이 아니었으며 협회의 도움을 충분히 받을 예정이라네.
아무튼 우리 말을 무시하진 않으려는 모양이니 일단 만나봐야겠거든?
이따 따로 공문 보낼 거지만, 협회 위원직에 이름 올린 사람 중에 이번 일에 나서줄 사람은 따로 연락해주면 좋겠다!
그 소식을 듣고서 나는 조금 놀랐다. 단체 항의에 대한 답변이 이토록 빠르게 돌아온다고?
심지어 글에 첨부된 관련 기관의 답변을 보니, 거의 항복 선언으로 느껴질 수준의 저자세였다.
오해가 있다든가, 그래도 미안하다든가, 그쪽 말을 경청할 테니 모쪼록 만나달라든가······. 아무리 봐도 정부 기관이 일개 협회에 보낸 서신답지 않은 문구들.
강준치의 이름에 겁먹은 걸까? 아니면 그 아래 함께 적힌, 다른 각성자 백여 명의 이름을 보고서 위축된 걸지도.
하여간 특무대에서 왜 그토록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까지 각성자들이 모이는 걸 방해했는지 대충 알겠다.
평범한 자영업자들이 뭉쳐서 목소리를 내거든 대충 표를 계산해보고서 이야기 들어주는 척을 한 다음 무시하면 될 일이지만, 각성자들이 모여서 항의하거든 그딴 식으로 대충 넘기려 들어선 안 된다.
총칼을 든 이들의 항의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순 없는 법.
이번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반나절 만에 적어낸 명단만 해도 육상전함과 그 전함을 호위하는 전차 백여 대나 다름없는 무언가였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여럿 모인 각성자들은 정부를 상대로 직접적인 실력행사가 가능한 모양이다.
아무튼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내가 어찌 빠질 것인가?
나는 이쁜 말투로 글 하나를 작성했다.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 또다시 순결의 위기!!
작고 어린 애기버섯이, 드디어 유치원 졸업······ 내년이면 초등학교 들어가게 되었어양 ㅠ
꼬추 달린 유치원생들은 아직 성에 눈을 뜨지 못해서 귀여운 애기버섯이의 매력에 이끌리지 않았지만, 초등학생 남자애들은 요새 다들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고 알고 있어양!
그러니 학급의 모두가 애기버섯의 치명적인 매력에 이끌릴 텐데 애기버섯이는 대체 어떻게 처신해야 순결을 지킬 수 있을까양? 브라를 덜 이쁜 걸로 차면 될까양? ㅠ
그리고 사실 학생보다는 선생님들이 더욱 걱정이에양!
웬 욕망에 가득 찬 선생님이, 애기버섯이만 교무실로 은밀하게 부르면 학생 신분이라 굴복할 수밖에 없는 애기버섯이는 대체 어떻게 해양?
애기버섯이, 학생들이든 선생들이든 너무 걱정되고 두려워양 ㅠ
거기 달린 댓글들을 읽었다.
익명 : 심각한 상황에 왜 갑자기 글 테러냐 ㅎㄷㄷ 학교 얘기 나오니까 삘 받아선 모두를 괴롭게 할 방법이 새롭게 떠오른 거냐?
Ⓐ syberMagneto : 제발 그만해······ ㅠ
이렇듯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 우매한 이들도 많았지만, 우매한 자들 사이엔 언제나 현자가 있는 법이다.
Ⓐ 엘마야캐요 : 문장 하나하나에 분노가 묻어나오는 걸 보니 김극 씨도 어지간히 화났나 보네. 김극 씨도 이 일이 대단히 신경 쓰이는 거 맞지?
Ⓐ 엘마야캐요 : 마침 김극 씨가 각성위원회 부위원장이기도 하니 이번에 같이 나서주려는 건가?
익명 : 엥 이게 그런 뜻임??
과연 김형만 씨, 엘마 키우는 사람답게 문해력이 좋다.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는 김극 옵바가 누군진 모르겠는데, 그 아저씨가 그런 의미가 맞대양!
내가 대충 그리 댓글을 달았더니, 아래로는 충격과 공포를 암시하는 온갖 댓글이 달리다가 김형만 씨의 댓글이 달렸다.
Ⓐ 엘마야캐요 : 김극 씨가 흔쾌히 나서주겠다니 아주 그냥 든든하네!
그럼 날짜랑 장소는 협회 통해서 알려줄 테니까 꼭 나와줘요, 응? 김극 씨만 믿을게!
*******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김형만 씨를 비롯한 협회 소속 각성자 헌터들과 함께 정부 인사들을 만나러 나섰다.
우리를 대표해, 김형만 씨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이런 일을 협회에 일언반구도 없이 진행하냐구? 헌터 아카데미인데 헌터 협회를 패싱하는 게 말이 됩니까! 협회가 더는 어용기관 아니게 됐으니 대놓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김형만 씨가 딱히 각성자 인권운동가는 아니다. 그가 지금 신경 쓰는 것도 저놈의 아카데미에서 억압될 어린 각성자들의 인권이 아니었고.
이번 11월에 헌터 협회장이 될 예정인 김형만 씨다. 그는 헌터들의 이권을 대변하길 원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김형만 씨는 이 헌터 아카데미의 온갖 자리가 헌터들의 은퇴 후 일자리가 되길 원했다. 헌터 출신이 아닌 잡배들이 헌터 아카데미의 자리를 채우니까 화가 난 것이었고.
그래서 김형만 씨의 주장 또한 일관적이었다. 그는 이번에 생길 헌터 아카데미의 요직들을 헌터 협회의 몫으로 차지할 수 있길 원했다.
"이번 자료를 어찌 구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임시로 내정된 것이지 확정이 아닙니다! 이걸 놓고 벌써 이게 문제다 저게 문제다 지적하시는 건······"
정부 측 남자가 주절주절 해명하는 눈치였지만, 김형만 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협회 무시할 거 아니면! 협회에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인원 선정해도 될지 대충 골라줘 봐요!"
"아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헌터 아카데미에 헌터 출신들을 보내겠다는데 대체 뭐가 문제야?"
김형만 씨의 엘마다운 행동에 지쳤는지 정부 측 남자가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그러더니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전직 헌터 출신도 내정된 인원 목록에 있긴 합니다."
"전직 헌터 출신? 누구?"
"헌터 활동하시다가 특무대 활동하신 분이거든요? 서울에서 활동하신 분들은 다 그분 이름이며 얼굴 안다던데······"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고 '특무대'를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 그러면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길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대충, 특무대를 두려워하는 헌터다운 위축된 반응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우리는 그가 바랄 만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김형만 씨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씩 웃고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아, 특무대 출신이면 그 친구인가? 어디 데려와 봐요."
그러자 남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예의 인원을 호출했는데, 그가 올 동안 우리는 잠시 작게 속삭였다.
"저 새끼들, 진짜 헌터 업계 관련 일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대충 헌터면 특무대원 꺼린다는 정보만 주워듣고 저딴 협박 비슷한 걸 한 것 같은데······"
그리고 잠시 후, 그 특무대원이 등장했다.
표범 같은 근육질 남자, 박주헌이었다.
전직 헌터 출신 특무대원, 내게 덤벼들었다가 팔이 잘려버린······.
내가 그를 알아봤듯 박주헌 역시 나를 알아봤다.
"너······!"
심지어 박주헌은 날 가장 먼저 발견한 듯했는데, 하기야 2미터 10센티짜리 떡대를 못 보고 지나치긴 어려울 것이었다.
내가 웃었다. 내 옆에 모인 헌터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스쳤다. 비릿한 웃음.
한편 우리 반응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챈 듯, 박주헌을 불러온 정부측 남자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그가 박주헌의 귀에 대고 귓속말하는 내용이 내 귀에 들려왔다.
"서로 이미 아는 사이입니까? 혹시 친해요?"
86화 아카데미 입학생 신미래 - [3]
그 와중에도 박주헌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질문에 대답하며 우물쭈물했다.
"아니, 알긴 아는데. 뭐 친한 사이까진 아니고······."
그러고 나서도 박주헌은 내 눈치를 살폈는데, 그 난처해 보이는 모습이 협회 각성자들 눈에는 퍽 우스워 보였을 것이다.
과연 그들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스쳤다. 김형만 씨가 물었다.
"박주헌 씨, 요샌 지낼 만해요? 특무대에서 나왔다던데?"
무슨 목적으로 말을 걸었는지는 그 장난기 넘치는 표정만 봐도 알 만했다.
저쪽을 기선 제압할 겸, 조롱하려는 모양이지? 그때 특무대원 일곱 명이 내게 덤벼놓고 꼴사납게 져버린 일을 언급한다든가, 그때 팔 잘린 것은 괜찮냐 물어보는 척 은근히 조롱하는 식으로.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렇게까지 저 친구의 체면을 깔아뭉갤 필요는 없었다.
내가 특별히 관대해서가 아니라, 비각성자 찌꺼기 앞에서 각성자를 망신 줄 수야 없는 법.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박주헌 씨, 그쪽도 아카데미 강사 노릇 할 예정이에요? 특수훈련 강사인가?"
"음? 어, 예."
그리고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니까 내정된 교직원들이 그리 많아도 싹 다 버러지던데······. 쓸 만한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했네."
내 말에 김형만 씨가 아연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박주헌 저 친구가 교사 노릇 하는 게 괜찮을 것 같다구요? 헌트웹에서도 교사 목록에 이름 있으니까 욕 뒤지게 먹은 친군데?"
"그래도 난 충분히 괜찮게 생각해요. 박주헌 저 친구처럼 실력 있는 전직 헌터가 교사 노릇 한다는 게 어딥니까?"
"그래도 그렇지······"
"진짜 아카데미 교직원 목록에 순 잡상인만도 못한 놈들밖에 없던데, 그래서 정말 장난하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저 친구라도 명단에 있는 걸 보니 나름대로 나라에서 신경 쓴 거 같기도 하고······."
혹시 못 듣고 넘어가지 않도록, 일부러 '실력 있는'을 발음할 때 말을 또박또박하려고 신경 썼다.
그러고서 박주헌의 얼굴을 흘긋 보니 안도하는 표정이더라. 살짝이나마 내 말에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하기야 저보다 못한 놈이 칭찬하면 아첨이지만 저보다 잘난 놈이 칭찬하면 인정이다.
한 번의 싸움으로 서로의 우열이 판별된 만큼, 나와 박주헌의 관계가 그렇다.
"왜 자꾸 말을 돌리냐니까. 내 말에 왜 똑바로 대답을 안 해요? 그래서 협회에 어디까지 양보할 거냐니까?"
이후로는 계속 김형만 씨와 공무원의 실랑이가 이어졌는데, 처음부터 그랬지만 공무원이 뭐라 말하든 간에 김형만 씨는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혹시 그쪽엔 권한 없어? 그럼 책임자 불러와!"
그리고 저런 실랑이에는 내가 도움 되지 않을 터였다.
나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박주헌을 이 자리에서 꺼내줄 겸, 그에게 제안했다.
"뭣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같이 밥 좀 먹을 수 있나? 내가 살 테니까."
박주헌은 조금 뜸 들인 끝에 대답했다.
"한우 먹어도 되나?"
"당연히 되지. 나 많이 버는 거 알면서 그런 걸 묻네?"
그러고는 김형만 씨의 양해를 구하고서, 그러나 비각성자 찌꺼기 공무원의 양해 따윈 구하지 않은 채 박주헌을 고깃집에 데려갔다.
서로 마주 앉아서는 박주헌의 표정을 살폈더니 영 뚱해 보이길래 내가 물었다.
"왜 그리 심기가 불편해 보이나? 한우 먹고 싶다길래 데려왔더니."
그러자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내 팔 자른 사람이랑 같이 밥 먹는데 그럼 맘이 편할까요?"
"그때 내 팔도 잘렸는데 왜 그쪽만 피해자인 척해? 나도 존나 아팠어."
"어, 그랬나?"
박주헌은 중얼거리면서 담담한 척했지만, 내 동체시력에는 그 미세한 표정 변화가 보였다.
그러니까 그 표정이 풀어진 것이 내 눈에는 보였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딱 봐도 자존심 강할 법한 친구 아닌가. 내게 일방적으로 패배한 것이 그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을 텐데, 나 또한 당시 상처를 입었으며 일방적인 싸움이 아니었음을 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이 저 친구 자존심 회복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체면 좀 살려줄 필요가 있기는 있었다. 여러모로 물어볼 것이 많았으니까.
잠시 후 고기가 나왔다. 직원이 직접 나와 구워준 고기를 먹으며, 계속 말을 섞자니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계속 이야기 좀 나누다가 서로 편하게 말도 놓기로 했다.
그리하여 박주헌의 적개심이 꽤 줄어들었구나 싶을 때 내가 물었다.
"지금 나온 공무원이 국안부 소속인가? 대체 왜 그따위 태도인 거야?"
"음? 그따위 태도라니······"
"협회에서 항의 좀 했다고 바로 공무원이 협상하러 나온 거 보면 정부에선 우리 항의를 꽤 심각하게 여기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공무원 놈은 협상하다가 갑자기 답답한 듯 한숨이나 푹 내쉬지 않나. 말 안 듣는 애새끼한테 체육선생 불러올 거라며 협박하는 것마냥 전직 특무대원 불러올 거라고 압박하려 들질 않나······ 뭘 믿고 그러냐?"
정말이지 황당하다. 윗선에선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서 협상할 공무원을 보냈으련만, 막상 협상하러 나온 놈이 저러다니?
뭐, 그 공무원의 심정을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긴 하다.
그 공무원도 황당했을 것이다. 김형만 씨의 협상하는 태도가 내가 보기에도 좋지 않았으니까. 김형만 씨가 원래 혼자 한의원이나 운영하던 사람이지 무슨 대단한 협상 경험이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 협상하러 나온 공무원의 입장엔, 웬 동네 아저씨 같은 사람이 나와서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 드는 게 아니라 이 앞 도로는 내 가게 앞이니 내 주차공간이라며 빽빽 우기는 수준으로 떼를 쓰고 있으니 어지간히 답답했으리라.
너무 답답한 나머지 덩치 큰 공익요원을 불러와 진상 민원인을 제압하듯 특무대원을 호출했다가 괜히 꼴이 우스워진 모양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놈의 태도가 말이 된다는 건 아니다.
우리 헌터 협회는 일종의 무력 단체 아닌가. 오늘 협상하러 나온 인원들만 봐도 비각성 찌꺼기 따위에게 무시당할 만한 각성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나온 공무원은 협회의 각성자 한 명 한 명을 윗전 대하듯 조심스레 대해야 했다.
모두를 대표해서 나온 김형만 씨는 포함외교를 하러 나온 제독쯤으로 대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아, 그거······."
"위에서 상황 진지하게 여기는 건 맞지?"
"맞지. 내부자료 유출된 것도 그렇고, 그걸 또 협회 각성자들이 물어뜯으려는 것도 상당히 당황스러운 모양이고······ 이번 협상도 최대한 저자세로 나서라는 장관 지시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
내가 그리 물었더니 박주헌이 대답했다.
"관성이지 뭐."
"관성?"
"지금 나온 공무원 봐봐. 그 양반 소속이 원래 국안부에서 헌터 협회에 지시 하달하던 부서거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 양반이 협회보다 입장이 훨씬 위였단 말이지."
"그래서? 계속 자기네가 갑인 것처럼 굴었다고?"
"뭐, 아마도? 이제 협회 물갈이돼서 예전처럼 뭐 시키고 그러진 못하게 된 상황이지만, 뭐······ 그래도 윗선 지시 좀 내려왔다고 공무원들 사고방식이 갑자기 확 변할 수 있나? 아무리 위에서 저자세로 대하라 특별히 지시 내렸어도 고작 협회 상대로 쩔쩔맬 이유가 없다, 뭐 이런 사고방식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 말을 들으니 대충 예상한 바였는데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놈의 관성.
하기야 게이트가 열린 지 아직 약 오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꾸 예전 세상처럼 살아가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리 잘난 능력을 가지고도 저보다 한참 못한 선배며 아비 눈치를 살펴야 한다고 믿는 한희처럼. 반대로 자기가 사회적 위치가 높다는 이유로 힘 있는 각성자를 내려다보려 드는 비각성 찌꺼기가 많다.
사회적 지위니 사회적 영향력이니, 그따위 온갖 잡다한 것들보다 개인의 순수한 힘이 더욱 강력할 수 있게 되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머저리들. 언젠간 전부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할 비각성 찌꺼기들······.
화가 난 김에 분노를 담아 물어보았다.
"그래서 이 아카데미 세운 목적은 또 뭐냐. 머리 커지면 다루기 힘들어질 각성자들 미리 세뇌하기?"
"세뇌까지 하려는 건 아닐걸?"
"그럼 뭔데? 군인이며 사이비 종교 출신까지 끌어모아선 애들한테 뭔 짓을 하려는 거냐구?"
"사이비 종교? 아, 신비세계 센터 애들? 걔네한테 각성자 교육할 능력 없는 건 공무원들도 다 아는데, 그냥 걔네 인건비가 싸니까 쓰려는 거야."
"인건비가 싸서?"
"어. 거기 출신들이 변변한 자격증도 없는 아저씨 아줌마들이라 많이 싸. 그런 주제에 나름대로 업계에서 권위는 있으니 싼값에 괜찮은 각성자용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척하려고 끌어들인 거지. 헌터 경력 있는 각성자들을 강사로 초빙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군인들은 또 뭔데?"
"그거야 뭐, 생도들 통제하려는 건 맞아. 어려서부터 말 잘 듣게 교육하려는 것도 맞고."
"그게 바로 세뇌 아닌가?"
"그런데 뭐 어쩔 수 있나? 정부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데."
그건 또 뭔 개소리인가.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박주헌이 변명하듯 설명했다.
"이건 내 의견이 아니라 특무대에서 배운 내용인데 말이야······ 지금이야 각성자들이 너무 갑자기 생겨난 데다가 관련 제도도 정비가 안 됐으니 임시로 헌터 제도를 운영 중인 건데, 계속 이럴 순 없는 거잖아? 각성자 헌터란 게 알고 보면 민간인들이 전차며 전투기 타고 날뛰는 셈인데, 국가 입장에서 보면 그건 말이 안 되거든?"
난 속으로 생각했다. 말이 안 되긴 개뿔이.
박주헌이 계속 말했다.
"그 전차랑 전투기를 못 타고 다니게 압수할 순 없는 이상 최소 이쪽 통제를 따르도록 해야 할 테니까. 미래에 날뛸지 모를 애새끼들이라도 우선······"
그놈의 국가 입장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도중에 내가 말을 끊었다.
"그래서, 각성자 지원생 많이 들어왔고?"
"아, 진짜 많이 지원했지! 우리나라에 각성한 애새끼가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그중에 너도 알 만한 꼬맹이 하나 있더라?"
"내가 알 만한 꼬맹이라면 누구?"
"이름이 신미래였나? 역장 외골격 가진 여자애가 한 명 지원했던데. 그게 누군지 기억하지?"
나야 당연히 기억한다.
신미래, 그 곰 아래 깔려있던 여자애 아닌가. 내가 그 애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그리고 당시 신미래의 엄마 또한, 딸 옆에 있어주느라 여러모로 고생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런데 그 엄마가 자기 애를 그놈의 아카데미에 지원시켰다고? 그토록 딸을 아끼던 그 여자가?
솟구치려던 화를 억눌렀다.
하기야, 그 여자로선 딸을 위해서라도 그러는 편이 낫다고 여겼으리라.
내가 짐작건대, 그 여자가 딸 옆에 있어 주겠다며 게이트에 한 달 넘게 들어가 있던 걸 보면 그 여자는 당장 변변한 직업도 없을 것이었다. 살기 어려운 처지에 국가에서 보장한 아파트가 매력적으로 보였으리란 점은 따로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래서 박주헌 넌 왜 자꾸 공무원 노릇 하려고 그러냐. 헌터 은퇴하고서 특무대 들어간 것도 그렇고 대체 왜? 헌터 일 하며 돈 꽤 벌었지 않나?"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은 벌었지."
"그런데 왜 자꾸?"
"돈 많다고 쉬긴 뭐한 와중에 뭔가 근사한 일을 하고 싶었으니까. 공직이 상당히 근사해 보였고."
"순 깡패 새끼 같은 특무대며 엉터리 학교 교사 노릇보단 헌터가 훨씬 더 멋지지 않나?"
"그래도 뭐, 헌터는 결국 일종의 자영업이잖아? 역시 나라에서 정해준 자리보다는 덜 근사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런 느낌으로 특무대 들어간 건데······."
그 말에 공감은 할 수 없었지만 뭐, 대충 취향이 다르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 대화를 끝으로 식사가 끝났다. 나와 박주헌은 둘이서 협상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협상장 테이블, 김형만과 마주 앉은 인물을 보고서 박주헌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저 양반 국안부 장관인데?"
나도 저 공무원의 얼굴을 기억했다.
국가안정부 장관. 저번에 우리 각성자들이 버스를 타고 시위하러 나섰을 때 국회의원들과 함께 우리를 맞으러 왔던 그 아저씨 아닌가.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자니 어째, 아까 그 공무원보다는 저 장관이 더욱 진지한 얼굴이었고 김형만 씨의 말을 더욱 귀담아듣는 눈치였다.
김형만 씨는 장관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와 서로 고개 숙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상이 끝난 듯했다. 김형만 씨가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요?"
내가 물었더니 김형만 씨가 방금보다 더욱 크게 웃었다.
"원하던 건 대충 이뤘지! 아까 그놈이랑은 말이 안 통하니까 책임자 부르라고 막 소리 질렀거든요? 그랬더니 국안부 장관이 직접 오더라구? 그 장관 양반이랑 얘기 좀 나눴는데······"
김형만 씨는 자랑스레 설명하기 시작했다.
헌터 아카데미에 협회 사람들을 내려보낼 권리를 얻었다느니, 이것저것 자문하고서 자문료를 챙길 수 있게 되었다느니, 아카데미의 이사 몇 자리는 협회 몫이라느니 어쩌느니.
"외부 강사도 원래는 순 사이비 새끼들 몫이었거든요? 이젠 그것도 우리 협회에서 사람 보내기로 했어! 물론 강의료가 많은 것 같진 않던데, 그래도 은퇴한 친구들 용돈벌이는 되지 않을까 싶더라구?"
그 말을 듣고서 내가 물었다.
"외부 강사, 그거 나도 자원할 수 있어요? 대충 한 달에 한두 번 교단에 서면 되는 것 같던데."
"아니, 김극 씨가? 지금도 엄청 바쁜 걸로 아는데 그럴 짬이 나나?"
"내년에는 어쩌면요? 지금 인천 탈환 프로젝트가 올해 안에 끝날 테니까."
"김극 씨야 당연히 안 될 것 없긴 한데, 방금 말했듯이 강의료가 진짜 용돈벌이 수준이거든? 그마저도 은퇴한 헌터들 기준이지, 김극 씨 같은 현역 입장엔 용돈벌이도 안 되는 수준일 텐데 정말 하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나 명예를 보고서 그놈의 외부 강사 자리를 탐내는 게 아니라, 그놈의 아카데미가 돌아가는 꼴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길 원했다.
그리고 그놈의 아카데미 돌아가는 꼴이 맘에 안 들거든, 직접 간섭할 수 있길 원했다.
그 조그만 꼬마, 신미래를 떠올렸다.
내가 기껏 구출해낸 동족이, 하찮은 비각성자 찌꺼기들 아래에서 이등병처럼 통제될 거라고? 상상만 해도 역겨웠다.
그 꼴을 곱게 보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한편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진 모르겠지만, 김형만 씨는 나 정도 되는 인물이 그저 강사 노릇이나 하는 건 말이 안 된단 이유로 아카데미 이사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기로 약속했다. 강사 노릇을 하더라도 이사 직함 달고 하면 더욱 모양새가 날 것이라 부연하면서.
물론 아직 몇 달이나 남은 내년의 일이므로 당장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껏 모인 각성자들이 또다시 원하는 것을 얻어낸 가운데, 우리는 각자 위치로 돌아갔다.
*******
난 택시를 타고 귀가하려 했지만, 김형만 씨는 날 직접 차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같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잠시 대화를 나눴다.
"형만 아저씨, 원래 헌터 협회 물갈이가 안 되면 헌터들을 위한 새 단체 세우려고 했죠. 대충 어떤 단체를 세우려고 했어요?"
내 물음에 김형만 씨가 운전하며 대답했다.
"음, 생각해둔 이름이 있긴 했는데. 이름 듣고 웃으면 안 돼요?"
"뭔데요?"
"여명 길드······."
그 말에 내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길드라니?
"길드요? 게임에서 유저들 모여 만드는 그거?"
"사실 본래 뜻은 중세 조합을 말하는 거긴 한데······ 뭐, 사실 게임 길드 생각해서 그런 이름 지으려던 게 맞아요."
"아니, 그건 너무 가볍지 않나? 가벼운 걸 넘어 하찮은 수준······."
"아, 씨. 비웃지 마. 가볍게 들리는 걸 노린 게 맞아요! 그리 게임 길드처럼 이름 지어놓으면 하찮게 여기곤 정부 견제가 줄어들 것 같았으니까······"
신호가 바뀌어 차가 멈췄다. 김형만 씨가 잠시 뒤를 돌아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하기야, 역시 좀 웃기죠? 길드라니, 내가 생각해도 살짝 어이가 없는······"
그렇게 김형만 씨와 눈을 마주쳤을 때였다.
난 현기증, 그리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였다.
오랜만에 겪는 현상이었다.
또 다른 미래, 현실이 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미래의 한 장면이 또다시 내 머릿속을 잠식했다.
*******
'아니, 아저씨. 우리 모임 이름을 여명 길드로 짓겠다고요? 그걸로 헌터 협회를 대신하겠다고?'
환각 속 내 물음에 환각 속 김형만 씨가 대답한다.
'예. 역시 이상한가?'
'당연히 이상하죠! 쟁쟁한 각성자 모임 이름이 왜 그따위야. 이 아저씨가 던파를 너무 많이 해서 현실과 게임 구분이 어려워졌나?'
내 항의에 김형만 씨는 어색하게 웃는다. 그러고는 설명한다.
'가볍게 들리는 걸 노린 거예요! 그리 게임 길드처럼 단체명 지어놓으면 하찮게 여길 테니 정부 견제가 줄어들 것 같기도 했고, 또······'
'또, 뭐요?'
'뭐라고 해야 하나······ 화나잖아요?'
'화나다뇨?'
'아니, 생각해봐요. 각성자들이라고 왜 정부 허락 없이 모이면 안 돼? 각성자끼리 친목 좀 나누자고 모여도 그놈의 특무대에서 죽어라 압박하는데, 숨 막혀 죽겠어요.
우리도 평범한 시민인데, 게임 길드에서 유저들 모이는 것처럼 당연히 쉽게 만나고 뭐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게임에서 만나듯 쉽게 만나자는 의미에서 그런 단체 이름을······.'
그리하여 나와 김형만 씨는 단체 하나를 조직한다.
여명 길드. 정말이지 게임 길드처럼 들리는 단체명이요, 이 이름을 지으면서 김형만 씨는 정부에서 이 모임을 가볍게 여기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각성자들의 단체 이름이 길드든 어떻든, 그런 건 저들이 보기에 중요하지 않았다.
단체를 설립한 지 두 달 뒤, 나는 김형만 씨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지난 두 달, 국안부에서 경고를 거듭 보내왔다. 국안부 장관이 직접 보냈다는 특무대원이 말하기를, 불온한 모임을 멈추라고 세 차례나 경고했다.
김형만 씨는 그 경고를 따르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
김형만 씨는 집에서 잠들다가 그 목이 잘려서 죽었다. 단두대를 써도 그토록 깔끔하게 자르기 어려울 만치, 너무나 반듯하게 목이 잘려서 죽었다.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식으로 죽였으리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
환각에서 빠져나온 나는 숨을 헐떡이려던 걸 애써 참았다.
그러나 내 표정이 좋지 않았나 보다. 김형만 씨가 기겁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극 씨 갑자기 말하다 말고 왜 그래요? 뭐 문제 있어?"
"아뇨, 그게 아니라······."
날 보며 걱정하는 김형만 씨를 도로 앞을 보게 한 뒤, 난 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강준치의 정신병적 추측이 옳았다고.
87화 군인들 - [1]
이번 환각을 보고서 특히 충격받은 점은, 환각 속 정부의 행동이 내 예상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단 점이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에서 특무대를 통해 온갖 불법행위를 저지르긴 했다. 도청이며 각성자 모임 염탐, 각성자 수배범 즉결처형 시도 등의 온갖 짓거리들. 각성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온갖 추잡한 행위들······.
그러나 그 행위들은 최소한 은밀하게 이루어졌지 않은가.
대놓고 누가 저질렀는지 알리려는 듯한 참수 쇼는 내가 경험해온 정부의 행위와는 분명하게 달랐다. 방식도, 과격함도 전부.
이로써 몇 가지 추측이 가능했다.
우선 내가 보는 환각 속 미래들은, 지금 이 현실에서 이어진 미래가 아니라 어떤 평행세계의 미래임을 가정할 때(내가 분명 백담비가 소월에 납치되는 일을 막아냈는데도 이후 본 미래에서 백담비가 일찍이 납치됐던 것으로 나왔으므로 그리 가정했다)······.
그 평행세계에서 강준치는 정부를 지금보다 훨씬 덜 혐오했을 것이다. 그 세계의 강준치는 내 도움을 받지 않은 채 정부에서 보내준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 치료받았을 것이요, 그로써 정부에서 본인을 살해하길 원하리란 망상이 상당히 줄었을 테니까.
그 세계의 강준치는 나와도 친하지 않았을 것이며, 내 집 앞에 특무대가 몰려왔을 때 편들러 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각성자들의 버스 시위에도 가세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 세계의 강준치는 각성자들의 편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의 각성자 탄압을 방관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평행세계의 나는 지금의 나와 비교하기 민망할 만치 약했을 것이요 헌터로서도 지금 나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환각 속 김형만 씨든 환각 속 김극이든, 각성자들의 구심점이 되기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니 특무대에서 김형만 씨의 목을 대뜸 잘라버린들 다른 각성자들은 그저 겁에 질릴 뿐, 항의 혹은 보복하기 위해 단체행동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지금 이 현실에서, 내 도움으로 죽다 살아난 데다 도청 시도까지 경험한 강준치는 정부에 예전보다 더 큰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각성자 헌터들은 이미 두 차례나 결집했으며, 단체행동을 통해 정부를 상대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음을 경험했다.
이 마당에 김형만 씨의 목을 싹둑 자른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없음을 정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목 아니면 강준치의 목을 자르면 모를까······.
제기랄, 강준치가 평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지하 팔백 미터 아래에 틀어박혔는지 알겠다.
지금 내 머릿속은 내 옆에 슬쩍 다가온 누군가가 품에서 역장 두른 나이프를 꺼내 찌르려는 특무대원이 아닐까, 잠잘 때 특무대원이 침투하는 걸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따위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래서야 어떻게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까?
이 와중에 내가 본 환각은 앞으로 현실이 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미래란 점에서,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그 미래를 신경 써야 할지 알 수 없단 점에서 더욱 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야말로 이 모든 걱정이 정신병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리고 그놈의 정신병적 걱정을 줄이기 위해, 나는 몇 가지 조치에 나섰다.
Ⓐ 한민족의얼은恨 : 특무대에 들어오면 얻을 수 있는 군 면제 혜택! 메시지 보내시면 친절히 상담해드립니다!
익명 : 느금마
여기까지는 평소 헌트웹의 풍경이다. 선배의 지시로 한희가 특무대를 홍보하고, 거기에 날 선 댓글이 달리는 것.
그리고 예전 같으면 그 밑으로 온갖 조롱 댓글이 주르륵 달렸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A배지의 소유자들이 총출동하여 한희를 어화둥둥 해주기 시작했다.
Ⓐ syberMagneto : 감히 비각성 쓰레기가 각성자한테 쌍욕? 비누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 엘마야캐요 : 이 친구한테 험한 말 하지 말라. 이 친구가 김극 씨 도와서 시민 구하느라 노력했단 거 못 들었나?
Ⓐ Justice1994 : 그래놓고 특무대에서도 욕 잔뜩 먹었다는데 어린 친구가 진짜 장해. 의무복무기간 지나면 헌터 업계에서 활약할 텐데 그때가 기다려지네
우선 김형만 씨며 강준만, 사이버매그니토 등 헌트웹에 영향력 있는 네임드들을 꼬셔서는 한희가 올리는 글마다 옹호 댓글을 달도록 만들었다.
한희가 헌트웹에 올 때마다 스트레스가 아닌 편안함을 느끼도록, 이 헌터 커뮤니티에 친근감을 느끼도록 유도하기 위한 조치였다.
물론 단순히 댓글만 이쁘게 달아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나중에 협회 차원에서 금전을 모아서는 한희를 비롯한 특무대원 몇 명에게 몰래 전달할 계획도 있다.
특무대에 확실한 우리 편을 만들어서는 그 내부활동을 정탐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김형만 씨에게는 따로 보디가드를 두는 게 어떻겠느냐 권했다. 현재로선 김형만 씨가 특무대의 최우선 암살목표가 될 것 같진 않았지만, 혹시 몰랐으니까.
그랬더니 물론, 나는 강준치 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 엘마야캐요 : 김극 씨, 뭔 암살 걱정을 해······ 준치 씨한테 옮은 거 아니야?
그 밖에도 생각해둔 조치들이 꽤 있다.
강준치에게 부탁해 지하 수백 미터 공동에 거주지를 마련하고는 그 통로를 없애 암살 위협을 줄이자든가, 모르는 사람이 팬이랍시고 접근하면 몰래 정신적 그물망을 펼치자든가.
그야말로 강준치나 할 법한 생각들······.
너무 바쁜지라 그 모든 생각을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나는 인천의 헌터이며, 오늘도 사냥에 전념할 뿐이었다.
*******
이번 우리 인천 탈환 프로젝트의 목적지는 강화군이었다.
김포와 부천 같은 인천의 잃어버린 고토마저 장차 탈환할 계획이긴 하지만, 당장 인천에서 야생 괴수들이 들끓는 곳은 강화군만 남은 까닭이다.
다른 헌터들과 함께 차량에 탑승하려니, 저 뒤에서 온갖 함성이 울려 퍼졌다.
"김극! 김극!"
"인천 탈환 끝난 뒤에도 쭉 인천에 남아요! 알겠죠!"
날 응원하러 나온 인천 시민들이었다.
저 아줌마 아저씨들은 내가 서울 게이트 사태에 끼어든 이후 더 극성이 됐는데, 내가 서울에서 활약하여 서울 종자들에게도 주목받게 되었으니 이대로면 김극을 서울에 뺏길까 봐 저런다던가?
물론 좋은 일이었다. 저리 열렬하게 관심받는 것이 싫지 않았으므로 나는 만족스레 인천 본토를 떠날 수 있었다.
강화대교를 넘어 강화 섬에 진입하니, 나이토 상이 방송을 시작했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한국 쌀값이며 이젠 쌀로 만드는 한국 라면값이 이 어려운 시기에도 억제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나이토 상의 카메라맨이 창밖, 그러니까 배추 모종을 심느라 한창인 젊은 남자들을 비췄다.
"저기 일하는 분들 대부분이 ROK ARMY 활동복 입고 있는 거 보이죠? 저기 강화 섬에서 농사짓는 젊은 분들이 거의 다 현역 군인들이거든요!
아, 원래 농사짓던 분들은 다 어디 갔냐구요? 아시다시피 섬이나 시골처럼 인적이 뜸한 곳은 괴수들의 공격을 더 자주 받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괴수들 입장엔 노리기가 훨씬 쉬우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게이트가 열린 뒤로 시골 땅에 버려진 논밭이 많거든요? 대한민국에선 정부가 버려진 논밭을 매입해 직접 농사짓고 있죠!"
저 역겨운 놈. 나라에서 병사들 혹사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저토록 신나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전 세계적으로 각국에서 식량 가격 안정시키느라 노력하고 있지만, 한국만큼 성공적인 경우는 드뭅니다! 일본 쌀값만 해도······"
이미 찌푸리고 있던 내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이젠 국뽕까지 시작하는군. 한국인들 듣기 좋도록, 주로 일본과 비교해가며······.
"일본은 아무래도 땅이 한국보다 넓다 보니 한국만큼 체계적으로 관리하진 못해요. 그 탓에 버려진 논밭이 한국보다 더 많이 생겼습니다.
아, 일본에선 시골에 빈 논밭이 생기면 어떻게 하냐구요? 그 버려진 논밭에 야쿠자들이 무단으로 점거해선 거기 땅이며 농기계며 비료들을 주인 허락받지 않고 몰래 써서 쌀농사 짓고는 시장에 팝니다! 대마 농사 안 짓고 왜 쌀농사를 짓느냐구? 쌀 파는 게 더 안전하고 확실하게 돈 되니까 그렇겠죠?
물론 병사들한테 농사시키니까 인건비가 덜 드는 데다 정부 차원에서 직접 생산하고 유통하니까 쌀값이 억제되는 것이긴 해요. 최저임금 못 받는 병사들과 가격 경쟁해야 하니 한국 농민들 불만도 상당하고······.
그래도 이게 참 대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식량 관리하려는 곳이 많지만, 한국만큼 성공한 경우는 드물거든요! 기껏 나라에서 식량 가격 낮게 설정해놔도 암시장이 형성돼서 실질 가격은 확 올라버린다나? 그에 비하면 편의점에서도 싸게 쌀을 살 수 있는 한국이 얼마나 대단하느냐면······"
저놈의 씨발 좆같은 국뽕 방송이 끝난 것은 우리가 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차에서 내린 백담비가 해변가로 향했다. 물놀이라도 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녀가 손짓하자 바닷속 물이 얼어붙어서는 짐승의 형상을 이루었는데, 이내 뭍으로 한 마리 얼음 짐승이 걸어나왔다.
곰이었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곰.
저번에 신미래를 구출할 때 얼음 정령 곰 한 마리를 함께 잡았는데, 놈과 똑같이 생겼다.
백담비가 놈을 잡고서 그 기억 또한 되새겼는데, 이번에 그 곰을 조형하는 데 성공해서는 사냥에 써먹기로 한 것이었다.
"백담비 씨, 놀라울 만치 대단해진 거 보세요! 이제 누가 저분을 얼레기라 깎아내리겠습니까?"
성문영과 이종호, 정진영과 장병곤이 끙끙대며 헌터 라이플을 가져왔다.
넷이서 그 헌터 라이플을 얼음 곰의 팔에 올려놓았다.
얼마 전까지 내가 쓰던 55kg 헌터 라이플, 내가 새로 78kg짜리 헌터 라이플을 쓰게 되면서 더는 쓰지 않게 된 그 물건을 백담비가 값싸게 샀다. 그 물건을 자기가 만든 얼음 조형물에 들려주었고.
"저번 방송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 곰이 진짜 저 헌터 라이플을 쏩니다. 심지어 잘 쏴요! A급 헌터로 인정받기 위한 기준이 중화기 이상의 화력을 내는 것인데, 담비 씨는 이제 그 조건을 완벽히 만족하신 셈이거든요? 보다시피 진짜 중화기를 쏘고 있으니까!"
저 얼음 곰을 보면 여러모로 백담비가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저 얼음 곰은 사람처럼 이족보행 할 수 있도록 몸체 무게중심이 전반적으로 수정되었거니와 손가락은 사람의 그것이라, 단순히 곰 한 마리를 복제한 걸 넘어 따로 생물 하나를 창조했음을 알 만했다.
물론 근본은 곰에 불과하기에 탄창 교체 같은 섬세한 작업은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데, 그거야 딱히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같이 다니는 헌터팀에게 맡기면 될 일이니까.
정말로, 내 라운드걸은 당당한 A급 헌터가 되는 데 성공했다.
다른 얼음 능력자들도 이러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소월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증언에선 얼음 능력자가 이럴 수 있다고 말한 내용이 없었으니까.
혹시 백담비가 최초일까? 그저 최초일 뿐 다른 얼음 능력자들도 이러는 것이 가능하다면 좋겠는데. 이렇듯 모두에게 성장할 여지가 있음이 판명된다면 천 번의 각성자 인권운동보다 나은 대우 변화가 있을 테니까.
뿌듯함에 잠겨 얼음 곰과 그 곰을 만들어낸 백담비를 지켜볼 때였다.
나는 카메라맨의 움직임에 따라 백담비 또한 움직이는 걸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설마 카메라 의식해서 고개 돌리고 있는 거예요? 얼굴 보이게 하려고?"
내가 다가가 슬쩍 물었더니, 백담비는 흠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평소에 그토록 나이토 상 싫어했으면서? 지금은 그 방송에 잘 보이려고 애쓴단 말인가요?"
"맞아요. 제가 방송 출연 욕심에 굴복했어요. 제가 참으로 비열한 여자입니다."
저리 순순히 인정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었다.
"혹시 이것도 황금화살상 받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에요?"
"예. 이렇게라도 제 발전 수준을 세간에 광고해야 하니까······."
"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놈의 상을 받고 싶어 하는데요?"
내가 황당해서 물었더니 백담비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시상식이 공중파 방송에 나와요."
그 말을 듣고서 나는 뒷말을 기다렸지만, 백담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기다리다 못한 내가 또다시 물었다.
"그게 끝이에요?"
"예."
"공중파 나오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매일 수천만 원 벌던 연예인들도 게이트 열리고 나선 예전의 반의반도 못 번다던데요. 이젠 어지간한 연예인들보다 담비 씨가 훨씬 더 잘 나가는 것 아닌가?"
"그래도요. 저한텐 중요해요. 김극 씨야 툭하면 뉴스에 나오니까 제 심정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말하고서 백담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하여 엿듣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말을 이었다.
"······그래야 미련을 버리고 성불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그놈의 공중파 방송에 당당히 출연해야······."
난 그녀를 놀리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그 심정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녀가 아이돌을 반강제로 그만두어야 했던 일을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저 소망이 못다 한 아이돌 일과 관련됐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므로 내가 애써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이번에 담비 씨? 헌터 아카데미 관련 서명 하셨더라. 진짜 잘했는데! 서명 그거 헌트웹에 올라온 글 보고 한 거 맞죠?"
"아뇨? 헌트웹이 뭔진 모르겠고, 제게 서명 부탁한다는 공문이 왔더라고요. 그 공문 보고서······."
"공문 오기 전에 이미 담비 씨 서명이 있던 것 같은데?"
"그랬나요? 기억이 잘······. 뭔가 잘못 보신 거 아닐까요?"
확실히 이 여자가 아이돌을 그만둔 것이 안타깝긴 하다. 이 뻔뻔함을 보면 연기력도 뛰어날 텐데, 어디 드라마에 출연해도 아이돌 발연기 논란 따윈 터지지 않았으련만. 아이돌 음치 논란이면 모를까.
약간의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군인들이 일하는 논밭을 넘어, 옛 관광지 쪽으로 향했다.
마니산 주변의 관광지. 이제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긴 채 괴수들이 쉽게 넘어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로 가로막힌······.
바리케이드 주변으론 군인들이 위치한 초소들이 즐비했다.
우리가 한 초소 옆을 통과하자니, 초병이 우리 보고 잠시 기다려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네 지휘관이 우릴 만나고 싶어 한단 것이었다.
"어째서?"
"정확한 이유는 저도 잘······."
88화 군인들 - [2]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년 군인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계급은 대령, 그가 내게 악수를 청하더니 히죽 웃었다. 살가운 웃음.
"김극 헌터님이시죠?"
"예, 김극 맞습니다. 인천 만세."
"반갑습니다. 제가 여기 연대장입니다!"
"그래서 연대장님, 저희랑 만나고 싶어하셨다고요?"
"예, 다름이 아니라······ 이제 강화 섬에서 괴수 정리하실 거라던데. 맨 먼저 마니산 괴수들부터 제압하실 것 맞지요?"
대령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거기가 괴수 소굴이라죠? 거기부터 소탕하고 나머지도 차근차근 정리해야······"
"그러시는 게 옳죠! 그래서 마니산 올라가실 때 말입니다. 저희 장병들 좀 딸려 보내도 될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장병들을요?"
"일반 장병이 아니라 각성자 장병들입니다! 초인 병사? 뭐 대충 그런 거죠!"
각성자 병사들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나는 눈을 껌벅였다.
대령이 말을 이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다들 휴대용 중화기(헌터 라이플을 말하는 모양이다) 훈련도 제대로 받았고 하니까······."
"그래서, 그 각성자 장병들 데려가서 저희가 뭘 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어휴, 뭐든 시키셔도 되죠! 길 안내를 시키셔도 좋고, 괴수 제압할 때 화력지원을 시키셔도 좋고······"
그러니까 병사들에게 특정한 임무가 있어서 데려가란 게 아니라 일단 사냥에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로군.
왜 그런 요청을 하는지는 알 만했다. 민간 헌터들이 이 지역에서 원래는 군이 해야 할 소탕 작전을 벌이려는데, 이곳 군 지휘관으로선 그 와중에 멀뚱멀뚱 구경만 했다고 보고하긴 민망할 것 아닌가.
나중에 헌터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노라고 보고하기 위해 그리 요청하는 모양이지?
뭐, 이유야 어떻건 상관없다.
이미 우리가 이룬 성과가 내가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판국 아닌가. 새삼 군을 끼워준다고 해서 공을 뺏길 염려는 전혀 없었으므로 나는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병사분들 데려갈 테니 해당 인원 준비해주시고······"
이렇게 흔쾌히 허락할 줄 몰랐는지 대령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아이고, 진짜로 감사합니다!"
"아무튼 저희가 오후까지 계속 일할 예정이거든요. 장병들 식사 추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산 위까지 식사 올려보내긴 어려울 텐데."
"그거야 뭐, 전투식량 챙겨가게 하면 되지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대령은 데려간 장병들에게 정말 뭐든 시켜도 된다고, 험한 일 시키느라 다친 채로 돌아오게 해도 좋다고 연신 웃으며 강조했다.
크게 다치더라도 국군병원에 치유 능력자에게 보내면 된단 것이었는데,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 반응하기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마니산에 오르기 전, 우리 헌터들 사이에는 열한 명의 병사들이 합류했다.
한국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각성자 병사들 말이다.
"반갑습니다!"
내가 병사들에게 힘차게 인사했더니 힘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 저희도······"
그러고는 여기 모인 병사의 능력을 물어보니 죄다 신체강화자 아니면 역장 외골격 능력자더라. 놀라운 일이었다.
신체강화든 역장 외골격이든, A급 헌터들 사이에서야 가장 흔한 능력이라지만 흔하다고 해서 가치 덜한 능력인 것은 절대 아니다. 능력을 세 개나 지닌 내 앞에서야 초라해 보여도 사실 그중 하나만 지녀도 헌터 업계에서 어깨에 잔뜩 힘준 채 으스대며 지낼 만한 고가치 능력 아닌가.
그러나 지금 우리 사이에 합류한 각성자 장병들은, 강력한 각성자 특유의 당당함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나마 신체강화자 병사나 몸집이 커서 구분이 될 뿐, 역장 외골격을 지닌 병사쯤 되면 이게 초인 병사인지 그린캠프 끌려온 관심병사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병사들의 표정이 다들 어두웠다. 여기 강제로 끌려왔냐고 물어보면 축 늘어지는 목소리로 '아뇨······.' 하고 대답할 표정들.
보다 못한 내가 상병에게 물었다.
"혹시 걱정되는 점 있어요?"
"아뇨······."
"그러지 말고! 뭐 문제 있으면 말해봐요. 그쪽 지휘관한테 말 안 할 테니까. 응?"
그리 말해도 다들 대답을 안 하길래, 난 잠시 나이토 상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맨에게 손짓했다.
"거기, 카메라 좀 치워봐요!"
그제야 장병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명이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저희, 괴수 사냥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건가요?"
"응? 딱히 적극 동참할 것까지야······ 왜요, 맨 앞에서 총질하라 시킬까 봐 걱정되시나?"
농담처럼 물었더니 장병 하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예······. 저희가 괴수 사냥 경험이 많지 않은데, 어느 정도까지 지시를 하실지 몰라 걱정되는 면이 좀······."
"아, 평소에 강화도에 있으면서 괴수 잘 안 잡아요? 그러려고 올라온 게 아닌가?"
"왜 여기 올려보냈는지는 저희도 잘······"
"아무튼 별로 사냥 경험 없으시면 그냥 구경만 해요. 등산하러 올라왔다, 여기고 그냥 따라오면 돼. 아무것도 안 시킬 테니까. 알겠죠?"
내가 말했더니 그제야 장병들이 안심하는 듯했다. 비로소 그들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는 걸 보니.
그렇게 우리는 관심병사인지 초인 병사인지 당최 구분할 수 없는 병사들을 끌고서 산을 올랐다.
걸어가는 중에 헌터들이 잡담했다.
"그나저나 예전에 강준치가 각성자 징집하면 다 뒤집어버리겠다며 정부 상대로 윽박지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정말 각성자들 징집 안 하고 헌터 제도가 도입된 걸로 아는데, 군에 각성자 병사가 따로 있었네. 어떻게 된 거지?"
"이건 각성자를 징집한 게 아니라 징집했더니 각성자인 경우라 괜찮은 거 아닌가?"
한편 날 포함한 각성자 헌터들이 먼저 제 할 일을 했다.
내가 사방에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서는 근처 괴수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가운데, 백담비는 게이트를 열었다.
열린 게이트 주변으로 헌터들이 빈틈없이 서서 화망을 준비했다.
나는 백담비와 함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게이트 안팎 괴수들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저 멀리서도 그 존재감이 뚜렷한 베헤모스를 흘긋 보았다.
「베헤모스 저 새낀 한국에 꿀 발라놨나? 대체 왜 안 떠나고 쭉 있는 거랍니까?」
내가 중얼거리니 백담비가 대답했다.
「그게, 괴수들 입장엔 게이트 내부에서 이동하는 것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네요. 게이트에서 이동하는 과정에 영적 에너지? 뭐 그런 게 소모된다던데. 오래 걸으면 칼로리가 소모되는 것처럼요」
「아, 그러니까 영적 칼로리를 소모해서 여기까지 기껏 왔는데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긴 뭐하다?」
「아마도요. 그래서 기회가 생길 때까지 쭉 대기하려는 걸지도」
「하기야 강준치가 무섭긴 해도 그 친군 언젠가 늙어 죽을 테니까. 게이트 안에서 쭉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강준치가 떠나든 늙어 죽든 할 테니 그때 나오려는 건가?」
그리 말을 섞으면서도 나는 어느 괴수 무리에 접근했다.
대충 나무늘보처럼 생긴, 처음 보는 괴수였다.
백담비가 먼저 게이트에서 나가 신호를 주도록 한 뒤, 나는 괴수 무리와 함께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시야가 바뀐 순간, 나와 내가 붙잡은 나무늘보 괴수에게 총알이 퍼부어졌다.
말 그대로 사방에서 총알이 쇄도했다. 내가 공간이동 시킨 나무늘보 괴수 세 마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곧바로 온몸에 구멍이 뚫려 죽었다.
요새 내가 이끄는 헌터들 사이에선 따로 긴장하거나 놀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번 달에만 해도 수백 차례 반복된 게이트 내부 괴수 제거 작업 아닌가.
그러나 이 일을 처음 접하는 장병들이 보기엔 놀랐는지, 저 뒤에서 지켜보던 그들이 부릅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왜요, 좀 신기해요?"
"좀이 아니라 엄청······!"
진심으로 그리 반응하는 것 같아서 흡족해졌다.
"아니, 왜요? 뭐 대단한 전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게이트 여는 거나 얼음 곰이 기관포 쏘는 거나, 공간이동 하는 거나 전부 진짜 마법 같아서 놀라운데요······?"
아, 하기야 내 능력이든 내 라운드걸의 능력이든 흔한 신체강화나 역장 외골격보다 화려한 탓에 더욱 마법 같긴 하지.
나이토 상의 카메라맨이 흥미로운 듯 병사들의 반응을 담는 가운데, 나 또한 기분이 좋아져서는 더욱 기운을 내어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내가 게이트 내부에서 괴수를 끄집어내고, 그러면 대기하던 다른 헌터들이 화력을 퍼부어 끌려나온 괴수를 사살하고······.
내 헌터 팀이든 다른 헌터들이든, 같이 일한 지 꽤 되었기에 이젠 다들 손발이 척척 맞는다.
나이토 상도 여유가 넘치는지 괴수가 죽자마자 바로 카메라에 대고 방송 멘트를 할 정도였다.
"오늘도! 여기 마니산에서도 저 인천 구원자 김극 헌터의 괴수 싹쓸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는 게 방송 나갈 때마다 외국인들이 이거 조작 아니냐, 이게 사실이면 저 김극 헌터 몸값 오백억이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 뭐 이런저런 댓글을 왕창 달거든요?
심지어 얼마 전엔 어떤 나라 공무원이란 사람이 김극 헌터 자기네한테 이적시키도록 설득 성공하면 저한테 사례하겠단 문의도 있었는데······!"
그리고 아까 그랬듯, 이게 우리 사이에나 이게 지겨운 반복 작업이지 장병들이 보기엔 몹시 놀라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괴수들의 시체가 차례차례 쌓여가는 가운데 또다시 흡족한 반응이 장병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개쩐다······"
앞서 약속했듯 병사들은 저 뒤에서 구경이나 할 뿐이었지만, 저 반응만으로도 나는 저들을 데려온 보람을 느끼기 충분했다.
그러니까, 날 기분 좋게 해준 대가로 밥 한 끼 살 보람은 충분히 느꼈던 셈이다.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내가 장병들에게 물었다.
"내가 군대가 아니라 교도소를 다녀온 놈이라 정확히 모르는데, 내 알기로 군에서도 회식할 때마다 치킨이랑 피자 자주 먹는다고 들었거든요? 그거 요즘도 그래요? 요즘도 군에서 삼겹살 회식이며 치킨 회식이며 자주 하고 그러나?"
그랬더니 장병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게이트 열린 이후로는 전혀······."
"그럼 외부 음식 좀 그립겠네? 먹고 싶은 음식 세 종류만 말해봐요. 점심 식사로 그거 주문할 테니까."
요즘 세상엔 비싼 음식 사주는 게 더는 흔한 일이 아니게 된 탓일까?
딱히 대단한 제안이 아니었는데도 장병들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저희 몫도 시켜주시려고요?"
"우리 치킨 먹을 때 그쪽 비상식량 먹고 있으면 눈치 보여서 밥이 넘어가나? 당연히 시켜줄 테니까 어서."
"삼겹살처럼 냄새나는 건 안 되겠죠?"
"괴수들이 냄새 맡고 오면 오히려 좋죠? 편하게 쏴죽일 수 있잖아요. 주저하지 말고 아무거나 말해요. 아무거나."
장병들이 주저한 끝에 치킨, 삼겹살, 보쌈을 말했으므로 난 전화해서 그 음식들을 주문했다.
그 음식들이 산 아래 배달왔을 때, 내가 직접 공간이동 해서 그 음식들을 가져오자 헌터들이 요란하게 손뼉 쳤고 각성자 장병들도 덩달아 손뼉을 침으로써 난 박수 세례에 휩싸였다. 덕분에 행복해진 기분으로 음식값을 결제할 수 있었다.
"김극 씨, 저도 이 좋은 장면을 방송에 내보내면서 여러모로 이득 보는 중이거든요? 그러니 음식값 절반은 제가 결제해도 되는데······"
이 중에서 나 다음으로 돈이 많은 나이토 상이 그리 제안했지만, 난 딱 잘라 거절했다. 비각성 찌꺼기 따위가 어딜 감히.
*******
이후로도 우리는 게이트 내부와 외부의 괴수들을 분간하지 않고 제거했다.
그리고 배불리 음식을 먹어 기분이 좋아진 덕인지, 아니면 내가 약속대로 아무런 일을 시키지 않았기에 불안감이 줄어든 덕인지 몰라도 장병들은 드디어 헌터 무리에 섞였다.
슬슬 헌터와 병사들이 잡담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계속 사냥을 이어나가는 도중, 자신을 신체강화자라 소개했던 병사 하나가 물었다.
"이따 괴수 잡으실 때 저도 같이 쏴봐도 될까요?"
"음? 같이 괴수 잡아보고 싶어요?"
"예. 전역 후에 저도 헌터 할 예정이라······"
기특한 친구였군. 난 진심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물론 그래도 되지! 잠시만, 저 방향에 야생 괴수 하나 있으니까 놈들 상대로 한번······"
그리고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스스로 나섰던 병사에게 다른 헌터들과 함께 괴수 사냥하는 경험을 시켜주니, 그 병사는 긴장이 풀렸는지 몸을 살짝 떨면서도 웃었다. 아마 머릿속에서 희열을 느끼는 중이리라.
"나중에 헌터 할 계획 있는 분은 지금 나서봐요! 이거 좋은 기회거든? 실수해도 괜찮아! 내가 다 커버할 수 있으니까, 응?"
내가 다른 장병들에게도 그리 제안했더니, 하나둘씩 손을 들어서는 괴수 사냥에 동참해볼 것을 자처했다.
그리하여 이번 사냥은 예비 A급 헌터들의 첫 사냥 경험 캠프가 되었다. 단순히 총만 쏘는 게 아니라 진짜배기 사냥 경험이 될 수 있도록, 야생 괴수들을 상대로 조심히 접근해서 사격하는 경험을 몇 번 시켜줌으로써 선배 헌터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그러고 나니 슬슬 사냥을 파할 때가 되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병사 하나가 말했다.
"김극 헌터님, 싸지방에서 인터뷰 하신 거 봤을 땐 그냥 미친 인간으로 생각했는데······ 직접 뵈니 생각보다 진짜 친절하시네요? 사람도 엄청 좋으시고요."
"제가 어찌 감히 인천 시민을 막 대하겠습니까? 인천 만세."
"아, 저 대구 출신······"
"지금은 인천에 있으니까 인천 사람이지 뭔 헛소리야. 아무튼 다가올 시장 선거에서 박미형 씨 뽑을 거죠?"
"예? 예, 꼭······ 아무튼 생각보다 엄청 여유도 있으시고. 여러모로 놀랐네요."
"놀랄 것까지야?"
"아니, 진짜 놀랐어요. 솔직히 이번에 대동할 때 상당히 걱정했거든요? 누군가가 뒤에서 구경하다 말고 갑자기 사냥 경험해보고 싶다고 말할 땐 욕 뒤지게 처먹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그러자 내 헌터팀에서 백담비 다음으로 베테랑인데 존재감은 정진영만도 못한 장병곤이 히죽 웃더니 입을 열었다.
"아, 진짜 딴 헌터팀에서 사냥 경험해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면 꽤 욕먹었을 수 있어요. 어지간한 헌터팀은 다들 신경이 날카롭거든요? 평소 스트레스 많이 받는 군부대에서 일병이 뭐 실수하면 필요 이상으로 갈구는 것마냥 분위기가 날이 서 있단 말이야? 까딱하면 목숨이 달아나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긴 한데······."
"여기 분위기는 특이한 건가 봐요?"
"그렇죠! 여기야 뭐, 다들 맘이 아주 편아아안하지? 사망자 발생한 지도 꽤 오래됐고, 김극 씨 성격도 보다시피 아주 호탕하기 그지없고······"
한창 기분 좋게 잡담하던 중이었다.
어떤 생물이 자연환경에 섞여서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경우에는 내 정신적 그물망에 포착되지 않는 경우가 꽤 있다. 내 정신적 그물망은 움직이는 물체부터 파악하는 편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한 데스클로가, 수풀에 섞인 채 쭉 가만히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무리의 맨 뒤에서 장병들이 지나갈 때야 대뜸 습격에 나섰던 모양이고.
내 정신적 그물망에 그 데스클로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수풀에서 뛰쳐나온 데스클로가 한 장병을 덮칠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움직였다.
손에 쥔 헌터 라이플을 앞으로 휙 찌르며 공간이동 했다. 그제야 장병 하나가 반응해서는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고.
"어―"
그리고 공간이동 한 내가 그 장병의 옆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헌터 라이플의 총구를 저 위로 뻗었다.
사람 키까지 높이 도약했던, 막 장병 하나를 덮치려던 데스클로의 복부에 내가 찌른 총구가 처박혔다.
그대로 내가 방아쇠를 당기자, 데스클로는 갈고리발톱 한 번 휘젓지 못하고 몸이 터져 허공에서 폭발했다.
데스클로를 이루고 있던 피와 살점이 흩날렸다.
"―어?"
89화 군인들 - [3]
내 헌터 라이플은 78kg짜리인만큼 총구 또한 길쭉하기 그지없다.
그 총구에 찔린 데스클로의 시체 또한 멀찍이서 폭발했지만, 폭발이 성대해도 너무 성대했다. 놈의 피와 살점이 여기까지 닿았다.
그 탓에 나와 내가 감싼 병사의 몸에 시뻘건 것들이 잔뜩 묻었다.
내가 피와 살점으로 찐득해진 병사를 바라보자니, 병사는 몇 박자 뒤에야 겨우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병사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
쿨하게 굴고 싶었던 내가 도중에 말을 끊었다.
"아, 미안해요."
"―습, 예?"
"나야 역장 있으니까 몸 좀 털면 끝나는데 그쪽은 돌아가자마자 빨래부터 해야겠네. 고생이겠다. 그렇죠?"
어어, 하는 병사의 몸을 털어준 뒤 나는 앞장서서 산을 내려갔다.
그러면서 등 뒤의 대화를 듣지 않는 척, 유심히 귀 기울여 들었다.
"괜히 업계 1위가 아니네요······ 김극 씨가 강준치 제외하면 한국 1위 맞죠?"
웬 병사의 물음에 성문영이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죠. 실력이든 성과든 저 형보다 잘난 사람이 당연히 없지?"
"진짜 끝내주네요. 방금 그래놓고 담담하네? 심지어 김극 씨 말고도 다른 헌터 분들도······ 방금 우리 모두 기겁했는데, 헌터 분들은 생각보다 안 놀라시네. 혹시 예전에도 이런 일 자주 있었어요?"
"자주 있었죠? 심지어는 언젠가 누가 총알 맞으려는 거 공간이동 해서 대신 맞아준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 그건 방송에 안 나와서 좀 섭섭했는데. 이번 활약은 제대로 찍었나?"
뒤이은 카메라맨의 목소리.
"어, 찍었어요. 찍었어!"
"채팅 반응은 어때요?"
"워낙 채팅이 많아서 직접 설명해 주긴 어려운데 일 끝나면 집에 가서 직접 봐요. 대리만족 끝내줄걸?"
이후로 병사들을 데리고 초소에 돌아가니 대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령에게 오늘 일어난 일을 대충 알려주니 그는 눈에 띄게 좋아했다.
"인원마다 한 번씩 괴수 잡아볼 수 있게 경험시켜주셨다고요?"
"예. 잘했습니까?"
"잘했을 뿐입니까? 내 부하가 이랬으면 바로 포상 휴가든 뭐든 해줄 수 있는 거 다 해주는 건데!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게 한이네!"
그리 대령은 한참이나 호들갑을 떨어대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하여간 정말 고맙습니다. 당분간은 계속 여기서 일하실 거랬지요? 오늘 데려가신 장병들, 앞으로도 쭉 같이 데리고 다녀주실 수 있겠습니까?"
"본인들이 좋다면요."
그러고 나서 내가 직접 물어보니, 병사들은 이후 우리 일정에도 동행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오늘 잔뜩 먹여준 음식들 덕분인지 아니면 등산이 군 일과보단 낫다고 여겨서인지 몰라도 하여튼.
집에 돌아와서는 몸을 씻고 컴퓨터를 켰다.
유튜브의 나이토 상 채널에 들어가 오늘 올라온 방송을 클릭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번 내 활약은 칭송받을 만했다. 그 칭송들을 즐기길 원했다.
그리고 과연, 오늘 영상에는 이번 내 활약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 김극 뒤도 안 돌아보고 공간이동 해서 사람 살려내는 거 뭐냐 ㅎㄷㄷ 저거 대체 어찌 반응한 거냐. 김극 가속능력도 있나?
- 각성자 능력은 최대 세 개뿐이라니까 김극도 가속 능력 없을 텐데 뭐냐 대체
내 활약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칭송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감상한 다음 유튜브 댓글까지 감상하려니, 눈에 띄는 댓글이 몇 있었다.
- 저걸 또 살려낸 김극도 김극인데 나이토 상 반응속도도 진짜 말이 안 되는 수준이네. 데스클로 뛰쳐나온 순간 바로 샷건 겨누는 거 다들 봤나?
- 하여간 둘 다 반응속도 진짜 또라이 수준······.
- 이게 단순히 반응속도 좋다고 넘어갈 수준인가? 혹시 나이토 상도 신경 가속 능력자 아님?
- 신경 가속이면 좋은 능력인데 왜 숨김? A급 헌터로 활동할 기회인데 등신임?
- 신경가속 하나만으론 A급 헌터 못 해 먹지? A급 헌터는 단순히 각성자가 잘 싸운다고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 각성자가 역장체 같은 단단한 괴수들 잡을 능력이 되면 인정하는 거니까.
- 그리고 신경가속은 일반인보다야 잘 싸워도 화력 면에서 우월한 능력이 아니니까 A급 판정받기 힘들걸? 신경가속 하나만으론 그냥 특출나게 잘 싸우는 비각성자 헌터 취급일 텐데, 그마저도 그냥 비각성 헌터 여러 명 고용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 돈은 많이 못 받을 가능성도 있고
- 오히려 비각성자인데 각성자 수준으로 잘 싸운다, 이런 평가 받으려고 일부러 각성한 사실 숨겼을 가능성이 있는 듯?
그 댓글들을 쭉 읽고서 생각했다. 나이토 상이 정체를 숨긴 각성자일 수 있다고?
새삼 놀라진 않았다. 사실 나도 몇 번이고 해본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결론을 이미 내린 마당이다.
하여간 멍청한 새끼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정말 나이토 상이 비각성자인 척하는 각성자였다면, 그 사실로 이득을 보는 중이었다면 백담비가 입 다물고 있었을 리 없다.
나이토 상을 싫어하기로는 나 못지않은 데다 각성자 여부를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녀 아닌가. 심지어 쪼잔하고 음흉하기까지 한 내 라운드걸이라면 헌트웹 계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그 사실을 폭로했을 것이다.
또한 난 게이트 안에서 나이토 상의 영혼을 몇 차례고 봤다.
사실, 놈의 영혼을 보며 긴가민가하긴 했다. 여러모로 애매했으니까.
나이토 상의 영혼은 일반인들의 것보다야 밝게 빛났지만, 어디까지나 오차 범위였다.
게이트 안에서 관측할 때, 각성자의 영혼은 비각성자의 영혼보다 더 밝거나 다른 빛깔로 빛나지만 간혹 예외가 있다.
그 각성자의 힘이 비각성자와 별 차이 없을 만큼 미약한 경우다.
영적 자질이 보잘것없어도 무조건 각성하는 데스클로들의 경우에는, 전원이 역장 날붙이 능력에 각성했는데도 그 영혼을 보면 딱히 특출나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 아마?
그리고 나이토 상의 영혼도 썩 특출나지 않은 것이, 그 옆 정진영의 영혼만 봐도 나이토 상의 영혼보다 밝을 정도였다.
그러니 게이트 안에서 그 영혼만 봐서는 구분이 어려웠다. 애초에 신경가속 자체가 워낙 드문 능력이라 슬쩍 보기만 해서는 판단이 어렵기도 하고······.
그러나 이 와중에 결정적인 증거가 있으니, 바로 나이토 상이 내 맘에 안 든단 사실이다. 놈이 진짜 각성자였다면 내가 놈을 싫어할 리 없는데도 혐오스러운 걸 보면 확실했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그 혐오감이야말로 나이토 상이 비각성자 찌꺼기에 불과함을 알려준다. 그렇지 않은가?
*******
이후로도 마니산에서 사냥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우린 병사들과 꽤 친해졌으니, 이제는 슬슬 민감한 말을 주고받을 정도가 됐다.
"각성자들이 군에 특채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경우엔 모두 하사관 이상이라 들었거든요? 각성자가 병사 계급으로 군 생활하는 건 처음 보는데······ 그래서 어때요. 각성자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뭐 그런 경우 없나?"
내가 물었더니 병사 하나가 흔쾌히 대답했다.
"생각보다 크게 다르진 않아요. 다른 병사들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
"똑같다구?"
"예. 우리 일과랑 딴 병사들 일과랑 거의 똑같아요. 쌀이랑 배추 농사짓고, 정훈교육 같이 받고······ 딴 병사들보다 워낙에 힘이 좋으니 에이스 취급받긴 하는데 그거 말곤 뭐······ 아, 우리 주특기가 죄다 휴대용 중화기 관련이긴 하네요? 그래도 그거 말곤 없네."
"그래서 각성자랍시고 괴수 잡는 일에도 딱히 동원된 적 없는 거고요?"
"예. 지금까진······. 바리게이트 넘어오려는 괴수 상대로 총질해본 적은 있는데 그거 말곤 딱히?"
그 말을 듣고서 정진영이 중얼거렸다.
"의외네요? 군에서 몸값 비싼 각성자들 최저임금도 안 주고 막 부려 먹을 기회 놓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일반 병사들 취급이라니······?"
이건 나도 의외였는데, 생각해 보면 아주 놀랄 일까진 아니었다.
군에서 각성자 병사들을 험하게 다루기는 꺼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해외 각성자들의 반란은 군 소속 각성자들이 일으킨 경우가 많으니까.
군 소속 각성자들은 자연스레 부대 단위로 뭉치게 되는 데다, 각성자 헌터들의 처우와 자신들의 처우를 비교하며 불만을 품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일단 각성자들이 내부에서 부대를 뒤집어엎으려 시도했다간 군부대로선 그 시도를 막아내기가 어렵기도 하고······.
그러니까 군과 정부로선 최대한 무탈하게, 대충 헌터 라이플 사용법만 숙지시키고서 사회에 내보내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려던 차였다.
병사가 말했다.
"아, 그래도 각성자 병사들 관련해서 안 좋은 소문이 있긴 해요."
"뭔 소문이요?"
"각성자 병사들을 평소에 위험한 임무에 내몰지 않는 건 처우에 불만 품으면 골치 아프니까 자제하는 건데······ 그 각성자 병사가 복무기간 얼마 남지 않으면 슬슬 자제하지 않고 막 부려 먹는다나요?"
"막 부려 먹는다니, 어떤 식으로요?"
그리 물으며 난 카메라를 치우도록 지시했다. 그걸 확인하고서야 병사가 설명했다.
"그게, 말년 각성자들 모아다가 게이트 사태 진압이나 야생 괴수 소탕 같은 위험한 임무에 투입한다는 말이 꽤 있어요. 생명 수당으로 삼십만 원쯤 더 주고서······.
그런 일에 투입해서 불만 품어도 어차피 죽으면 끝이겠다, 임무에서 생환해서 군에 불만을 품더라도 말년이면 곧 전역할 테니 문제가 될 것이 없으리란 계산에 그런다나요?"
내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어지는 가운데, 병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강화도만 해도······ 전역 시기 비슷한 각성자들이 유독 한 연대에 많이 모였는데, 이게 이후 강화도에서 있을 대규모 작전 대비해서 모아둔 것이란 말이 있더군요.
사회 나가면 헌터 활동 가능할 각성자들을 모아다가 훈련만 쭉 시켜서는, 말년 즈음에 한꺼번에 강화도 작전에 투입할 계획이라는······ 각성자라도 죽을 위험이 큰 작전에 말입니다."
난 스스로 느끼기에도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 보면 여기 마니산만 해도 진짜배기 괴수들이 많다죠, 아마? 게이트 사태 초기에 사람 잔뜩 잡아먹고서 대폭 성장한······."
내 물음에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퉁퉁이라고 알아요?"
"퉁퉁이? 아뇨."
"4미터급 오거인데, 역장 외골격에도 각성해서 전차포 맞고도 멀쩡한 놈이거든요? 평소에 막사에 다 들리도록 포효를 시끄럽게 자주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는데, 그놈만 봐도 여기 마니산 괴수들은 진짜······"
그놈의 '퉁퉁이'란 말을 듣고서 병사와 눈을 마주쳤을 때였다.
아? 아······.
나는 또다시 어디론가 빨려 들려가는 감각에 휩싸이고서 놀랐다.
또 미래의 환각을 보려는 모양인데, 어째서?
김형만 씨와 관련된 환각을 본 지 딱히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또 왜······.
*******
환각 속 나는 눈앞의 병사를 본다.
환각 속 나는 저 병사의 처지에 동정하는 한편 경멸감을 느낀다.
각성자씩이나 되어서는, 일개 비각성자 지휘관들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처지라니? 불쌍하면서도 한심하다.
그리고 눈앞의 각성자 병사는, 자기 부대의 각성자들을 대표해 날 찾아왔다. 내게 그놈의 군부대에서 탈출시켜 달라 부탁하기 위해서.
그가 말하길, 강화도에 있는 그 부대에서 자기네를 탈출시켜 달라고······ 가능한 먼 곳으로 공간이동 시켜달란 것이었다.
각성자 병사가 호소한다.
'우리 이대로 부대에 남아있으면 싹 다 죽어요! 행정병이 작전장교 서랍 정리하다가 뭔 문서 보고 알려준 건데······ 연대에서 우릴 말도 안 되는 작전에 투입할 예정이라 하거든요?
우리 모두 말년병장이니까, 전역하기 전에 죽을 위험 큰 위험한 작전에 투입할 예정이랍니다. 그런 식으로 군에서 이득을 챙기려 한다는······'
강화도에서 복무하는 각성자라면 그런 걱정을 할 만하다.
마니산,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제일의 성산(聖山)인 그곳은 한국에서 첫 게이트가 열린 곳이다.
그리하여 그 신성한 산은 강화도 주민들과 당시 관광하던 사람들, 그리고 이후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피로 얼룩졌다.
저번 정권이 벌인 독수리 작전의 결과만 봐도 심각하다.
이곳 마니산에 틀어박힌 것으로 추정되는 괴수들을 소탕하기 위해, 예비군 일만 명이 동원된 작전이다.
그 성대한 작전에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여럿 발생한 끝에 이루어낸 성과라곤 데스클로 한 마리 사살한 게 고작이다. 그 데스클로마저도 지휘관이 너무 민망한 나머지 따로 시체를 구해와서는 작전 도중 사살했다고 주장했으리란 의혹이 있다.
하기야 당시는 게이트와 그 안 괴수들의 생태를 전혀 모르던 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괴수들이 평소엔 게이트 안에 숨어지낸단 사실도, 야생 괴수들도 평소엔 굴을 파거나 동굴 등에 숨는단 사실을 몰랐다. 그런 이유로 괴수들이 있을 법한 장소에 폭격하거나 기관포 장착한 헬기 몇 대 띄운들 재미 보지 못한단 사실도 당시엔 몰랐다.
심지어 괜히 숨어있을 괴수들을 내몰겠다고 불이라도 질렀다간 그 자리에서 데스클로 몇 마리가 화염 정령으로 각성해서는 더욱 큰 골칫거리로 화할 수 있는 것이요, 사람들을 잡아먹고서 가뜩이나 강력했던 괴수들이 더욱 강력해져서는 더 큰 위험으로 거듭나리란 사실도 당시엔 미처 몰랐다.
그 모든 무지가 악화에 악화를 거듭해 생겨난 지옥이 이곳 마니산이다.
그리고 병사는 자기네가 그 마니산에 투입될 예정이라 말하고 있다.
각성자란 이유로 그런 사지에 내몰릴 예정이라고. 그러기 전에 한국을 벗어날 수 있게 망명시켜달란 것이다.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환각 속 내가 비로소 입을 연다.
'망명시켜줄 수 있지. 하지만 외국은 안 돼. 거기까지 옮겨주는 것도 힘든 일이니까.'
그리고 난 그 목소리에 깃든 차가움에 놀란다.
아까 느낀 두 감정, 동정과 경멸 중 경멸의 비중이 더욱 큰 목소리.
'그럼······ 어디로 보내줄 수 있습니까?'
병사의 물음에 환각 속 내가 대답한다.
'소월로 보내주지.'
'소드 월드요?'
'그래, 소드 월드. 각성자들의 낙원. 거기로 보내줄 테니 가서 살아.'
너무 예상외의 대답이었으리라. 병사는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입을 연다.
'그치만, 소월은 북한만도 못한 곳이라던데······.'
'괜찮아. 북한도 김씨 일가는 잘 먹고 잘살지 않나? 소월에선 힘 있는 각성자들이 그런 경우지. 물론 너희끼리만 가면 개고생일 테니까······ 너희 대신 고생할 노예들을 같이 보내줄게.'
'노예요?'
'그래, 노예, 잡아서 보내줄게.'
병사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본다. 노예를 잡아주겠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하는 얼굴로 쳐다보길래 환각 속 나는 설명할 겸 묻는다.
'강화도에도 군인 아파트 있지? 너희 부대 부사관이며 장교들은 물론······ 그놈들 가족까지 싹 다 같이 소월에 보내주지.'
'그 인간들을 왜······?'
'그 비각성자 찌꺼기들을 소월에 데려가서 노예로 부려 먹어. 처음에야 반항하겠지만, 힘 차이를 알려주면 결국 순응하겠지. 오히려 길들이는 과정이 더욱 재밌을 거야. 왜,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나?'
내 물음에 반문이 돌아온다.
'미쳤어요?'
황당함 가득한 반문이다. 그리고 환각 속 나는 제대로 설명할 생각은 하지 않고 피식 웃을 뿐이다.
'미쳤긴 세상이 미쳤지. 비각성 찌꺼기들이 각성자한테 명령내리는 게 말이 되나? 최저임금도 안 주고 그러는 게 말이 돼?'
'그래도 그렇지, 그걸 어떻게······?'
'애초에 비각성 찌꺼기들이 태어난 이유가 바로 각성자들 노예로 봉사하기 위한 것 아닌가? 노예로 태어난 것들이 장교입네 의원입네 지시 내리고 명령하니까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지. 그래서 지구가 소월만 못한 거고······ 소월에 가봤나? 그곳에 대해 잘 알아?'
'아뇨······'
그리고 내가 웃는다.
좋은 웃음이 아니다. 결코.
'난 일찍이 가봤지. 소월은 좋은 곳이야. 지구보다 훨씬 더.'
그 웃음은 나약한 각성자 동족에 대한 비웃음, 그리고 자신만은 누구보다 각성자답게 굴고 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웃음이다.
그런 웃음을 머금은 채 내가 말을 잇는다.
'그 좋은 곳에 보내주겠단 거야. 얼마나 좋은 제안이냐? 심지어 노예까지 딸려 보낸다는데 왜 꺼리는지 당최······.'
그 자리에서 각성자 병사는 알겠다고 대답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난다.
한편 나는 떠나간 동족이 내 제안에 승낙할 날이 오길 기대한다.
워낙 파격적인 제안이라 바로 대답하진 못했을 테지만, 그 제안을 곱씹어보면 꽤 매력적일 것이다.
단순히 먼 곳으로 떠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길 부려 먹던 이들과 그들의 가족마저 노예 삼을 기회라니?
그 망상에 가까운 관계 역전을 내 손으로 직접 이루어내고 싶은 소망이 가득하다.
그리고 각성자 병사는 며칠 뒤에 또다시 날 찾아온다. 휴가를 써서 날 찾아오는 것이라 한 명이 연속으로 찾아오긴 어려웠는지, 이번엔 다른 각성자 병사다.
그가 굳은 얼굴로 내게 말한다.
'갈게요, 소월.'
'노예들도 함께?'
'예. 노예들도 같이.'
그리고 내가 웃는다.
'좋아, 형제들. 드디어 진짜배기 각성자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구나. 그렇지?'
90화 군인들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