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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77-85

77화 특무대원 한희 - [1]

Q. 신미래 양을 구출하기 위해 두 달 동안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그 헌신에 진심 어린 칭송을 보내는 동시에 축하 또한 보내고 싶다.

- 축하라면 역장 외골격 능력에 추가로 각성한 것 말인가? 고맙다.

Q. 신미래 양 구출 이외에도 칭송할 것이 많다. 김극 헌터의 압도적인 활약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는데

- 실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Q. 김극 헌터의 겸손함에도 새삼 감탄하며······ 이 와중에 새 능력까지 얻었으니 헌터로서의 몸값 또한 한없이 치솟을 줄로 짐작된다. 심지어는 이 정도면 사실상 S급으로 쳐줘야 한다는 의견이 있던데, 본인 생각에는 어떤지?

- S급이 어떤 수준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의견을 낸 모양이다. 유튜브에 '강준치'를 쳐보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다들 알게 될 것

Q. 그래도 김극 헌터가 일반적인 각성자 헌터들보다 월등한 수준임은 부정하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역대급 신인 계약이라 여겨지던 인천시와의 오백억짜리 계약이 헐값이었단 의견이 많을 정도 아닌가.

그리고 내년 1월에는 인천시와의 계약이 종료되어 새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때에도 인천시와 계약할 예정인가?

- 당연하다. 인천 사람이 한국을 아즈텍의 식민지로 팔아넘길 수는 있더라도 인천을 떠날 수는 없는 일

Q. 그래도 만에 하나, 서울 혹은 다른 지자체와 계약할 생각은?

- 미안하지만 나는 헌터인 동시에 문명인이다.

Q. 그게 무슨 소리인지

- 문명을 벗어난 야만의 땅에서는 지낼 엄두가 나지 않는단 소리다.

Q. 그러나 인천 예산이 충분치 않은 줄로 알고 있다. 내년이면 지금보다도 훨씬 치솟을 게 분명한 김극 헌터와의 계약금을 감당할 예산이 인천시엔 없을 텐데

- 그럴 돈이 부족하다면 정부에서 지원해주면 될 일 아닌가

Q. 정부에서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 당연히 있다.

Q, 설명해 줄 것이 있다면?

- 간단한 일이다. 정부에선 내가 김석희와 함께 서울에서 담배 파는 것을 보기 싫을 테니까. 내가 만약 나중에 그러고 있다면 다 정부에서 인천에 돈을 충분히 주지 않아서임을 다들 이해해야 할 것

이번 인터뷰 또한 헌트웹에 옮겨졌다.

거기 달린 댓글들을 보았다.

익명 : 그러고 보니 김극 처음 데뷔할 때만 해도 그 스펙이 엄청난 수준이었는데, 이번에 재검사한 기록 보니까 그 각성 능력들 죄다 말도 안 되게 성장했던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

익명 : 확실히 보통 사냥 좀 해도 저 정도로 능력 상승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나? 사냥 아무리 오래 해도 능력 성장 딱히 안 하는 경우도 많던데

Ⓐ 돌머리청년 : 각성자 자질 따라 다른 거지. 모바겜 캐릭터들 그 등급에 따라 올릴 수 있는 레벨이 다른 것처럼, 누군 경험치 아무리 먹어도 30렙까지만 올릴 수 있고 누군 60렙까지 올릴 수 있고······.

익명 : 그건 자질 차이다 치고, 각성 능력 성장하는 속도도 말도 말이 안 되는 수준 아닌가? 모바겜처럼 뭐 경험치 버프라도 질렀나?

5my지저스 : 김극형과 다른 헌터들 사냥하는 차이 보면 그런 말 안 나올 거임

Ⓐ 엘마야캐요 : 하기야 나 같은 서울 헌터들만 봐도 담당 구역이 정해져 있어서 몇 달에 한 번 정도 사냥하고 그러는데, 김극 저 친구는 아예 인천 전체를 담당구역으로 삼아서는 게이트 열릴 때마다 출동한다며?

Ⓐ 엘마야캐요 : 거기에 인천 탈환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아예 일을 만들어서 사냥하는 수준이었는데, 요샌 훨씬 더 바빠졌다 하고

저 반응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나는 헌터로서 잘 나가고 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훨씬 더 그렇다.

나는 내 라운드걸과 함께 게이트에 들어섰다.

그 자줏빛 공간을 걷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감이 발견됐다.

「데스클로네요. 네 마리······ 한꺼번에 옮길 수 있겠어요?」

백담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간이동 했다. 눈앞의 데스클로 무리와 함께, 게이트 너머 현실로 넘어갔다.

그렇게 나와 괴수들이 공간이동 한 순간, 사방에서 총알이 빗발쳤다.

"쏴! 바로 쏴!"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던 헌터들이 일제히 사격하기 시작했다. 내가 데려온 괴수들을 향해서.

헌터들은 내가 괴수들과 함께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쏘았는데, 내 역장 외골격 능력을 믿고 그러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개인화기 화력으론 내 역장을 뚫기 어렵다.

그리고 과연, 한바탕 총알 세례가 그친 뒤 나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내가 함께 공간이동 하여 끌고온 데스클로들은 벌집이 되어 바닥에 피를 줄줄 흘리며 널브러졌다.

이 작업을 어제도, 그저께도 반복했다. 게이트 내부에서의 공간이동이 가능해진 이후로는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위기랄 것도 없는, 거의 기계적인 작업에 가까운 사냥의 연속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한 달 동안 인천의 영역에 진입한 괴수들을 능동적으로 줄여나가고 있었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놈도, 게이트에 처박힌 놈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사냥했다.

물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나 하나요, 내가 공간이동을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번에 인천의 괴수들을 모조리 정리하진 못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는 중이지만 여전히 사냥해야 할 괴수들이 많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있어서, 인천에 게이트가 열리는 횟수가 확연히 줄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울에서 지난 한 달 동안 스무 번 넘게 게이트가 열릴 동안 인천에는 게이트가 딱 한 번 열리고 말았으니, 내가 진행 중인 게이트 내부 청소가 분명한 효과가 있었음을 모두가 알게 된 마당이다.

얼마 전엔 우리 동네 부동산에서 한 빌라가 사천만 원에 매매 광고 중인 걸 봤다. 원래는 천오백만 원쯤 하던 빌라가 그 정도로 올랐는데, 인천 부동산이 전체적으로 그만큼 올랐다던가?

김씨 성에 극 자 이름을 쓰는 어느 헌터의 덕분임을 내 입으로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오, 형. 저기 봐요!"

일을 마치고서 관용차를 타고 귀가하자니, 길거리의 큼지막한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 김극 헌터, 인천이 당신을 믿습니다!

- 모쪼록 내년에도 올해처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 큼지막한 문구 아래에는 모금계좌며 전화번호 따위가 적혀있었다. 내년 있을 내 재계약을 위해 시민들이 미리 모금 활동을 벌이는 모양이지.

내가 인천 시민들을 실망케 하지 않았음은 저것만 봐도 알 수 있으리라.

"아주 구세주 모시듯 하네요, 정말······."

백담비가 부러운 듯 말했고 난 씩 웃었다.

보다시피 모든 일이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전히 내 꿈에는 그놈의 버섯구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하여튼······.

*******

집에 돌아와서는 또다시 헌트웹에 접속했다.

올라온 글 중에 내 이야기가 없나, 쭉 살펴보다가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헌트웹에 웬 흉참한 글 하나가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 한민족의얼은恨 : 특무대 인원 모집 중입니다! 이 계정에 메시지 주시면 특무대 일 관련하여 조언해 드릴 수 있어요.

Ⓐ 한민족의얼은恨 : 특무대 벌이가 헌터보다 못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금전을 뛰어넘은 가치가 있습니다. 사회 엘리트로서의 권위와 자부심을 얻고 싶으신 분은 특무대를 고려해보시길 권해드려요!

신성한 헌트웹에서 특무대 홍보라니?

참으로 용기가 가상한 짓거리였다. 그 일이 있기 전에도 헌트웹에서 특무대를 업신여기기 일쑤였건만, 이젠 아예 멸시하는 걸 넘어 혐오하게 된 상황에 홍보를 한다고?

과연 댓글에는 특무대 가입문의 따윈 없이, 이 용기 있는 친구를 조롱하느라 바쁠 뿐이었다.

익명 : 특무대면 항복해도 대뜸 죽이려 드는 순 살인마 새끼들 아니야? 살인마가 멀쩡히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거 보니 나 너무 무서워ㅠ

Ⓐ syberMagneto : 실력은 쥐뿔도 없는데 살인이며 폭행에는 거리낌 없어서 외부인력 민간인 헌터 상대로 먼저 덤볐다가 육 대 일로 처발리는 사회 엘리트 ㅎㄷㄷ

Ⓐ 엘마야캐요 : 이 썩을 놈들, 민간인 도청도 너무 당연하게 하더라?

이 축제에 내가 어찌 빠질쏜가? 곧바로 동참하여 이쁜 말투로 세심하게 조롱의 댓글을 적었다.

Ⓐ BabyBerserker : 정말루 그런 납븐 아조씨들이 있나양? 애기버섯이 무서워서 손발이 벌벌 떨려양 ㅠ 특무대? 그 납븐 아조씨들 대충 설명만 들어도 순 불법 조직 같은데······ 당장 경찰 아조씨들한테 신고해서 싹 다 잡아가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양?

Ⓐ 돌머리청년 : 작고 귀여운 애기버섯아! 이 오빠도 너무너무 무섭지만 경찰 아조씨들은 각성자 깡패들 무서워해서 신고해도 못 잡아간대 ㅠ

Ⓐ BabyBerserker : 그럼 어디에 신고해야 저 못된 아조씨들 잡아갈까양?

Ⓐ Dragon : 김극 아저씨라고, 특무대 깡패들이 무서워하는 분이 계시는데 내가 그분 전화번호를 몰라서 못 알려주겠네 ㅠ

Ⓐ BabyBerserker : 헌터 김극과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싶으신 분은 내년 인천시장 선거에 기호 2번으로 출마하실 박미형 씨 시의원 사무실에 문의하면 될 것입니다. 사무실 번호 032-XXX-XXXX

익명 : 앗 박미형 씨 세뇌 또 오작동했다

Ⓐ 돌머리청년 : 봐라, 특무대 친구야. 바이럴 홍보는 바로 이렇게 하는 거다. 사람들이 인천시장 이름은 몰라도 박미형 씨 성함은 다 외우게 만들어버린 이 노하우를 어떻게든 배우도록 해라

이런 식으로 헌트웹의 모두가 특무대원으로 짐작되는 이 친구를 린치하던 중이었다.

전직 특무대원 하나가 댓글을 달았다.

Ⓐ Justice1994 : 한희니?

Ⓐ 한민족의얼은恨 : 아닌데요;

Ⓐ Justice1994 : 아니긴 뭐가 아니냐? 한희석 그 양반이 그 계정으로 헌트웹에 글 쓰는 거 내가 똑똑히 봤는데. 나 강준만인데 기억 안 나냐?

Ⓐ 한민족의얼은恨 : 아 준만이 형? 특무대 나가셔서 잘 지내십니까?

Ⓐ Justice1994 : 역시 한희 맞네. 형은 특무대 나가서 너무 잘 지낸다 인마

Ⓐ Justice1994 : 한희석 그 양반이 네 명의 빌려서 그 계정 만들어 활동했던 거 맞지? 한희석 경질되면서 네가 본인 계정 되찾은 모양이네?

그 대화를 보면서 나는 눈을 의심했다.

이 친구가 한희라고? 모두한테 조롱당하고 있는 이 특무대원이?

황당했다. 한희라면 특무대의 최종병기쯤 되는, 지금 나조차 만만히 여길 수 없을 만치 강력한 각성자 아닌가.

그 잘난 각성자가 사이트에서 고작 조직 홍보나 하고 있다니?

누가 봐도 저 정도 수준의 초인이 할 일이 아니었다. 저만큼 강력한 각성자라면 고위직에 올라 관리업무를 하더라도 제 능력을 썩히고 딴짓을 하는 셈이라 답답할 텐데, 한낱 댓글 알바나 할 일을 하고 자빠진 지금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러고 있나 했더니, 그마저도 다 이유가 있었다.

Ⓐ Justice1994 : 그래서 갑자기 왜 이러고 있냐. 선배들이 시키드나? 딱히 할 일 없으면 남는 시간에 여기서 인원 모집이나 하라든?

Ⓐ 한민족의얼은恨 : 예, 뭐······.

Ⓐ Justice1994 : 보나 마나 그놈들이 한희석 경질되니까 그 아들 괴롭히려고 시킨 모양이다. 너 개인한테 악감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닐 테니까 너무 상처받진 말고

Ⓐ Justice1994 : 하여간 다들 이 친구 좀 그만 괴롭혀. 나이도 어리고 풋풋해선 엄청 착한 애니까, 응?

그러나 헌트웹 유저들은 이 친구가 한희석의 아들이란 사실에 반응한 것일까? 그들은 오히려 한층 신나게 조롱이며 부모 욕 따윌 계속해서 달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러는 걸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지만, 새삼 부아가 치밀었다.

한희, 이 친구는 이렇게 대접받아선 안 된다. 강력한 각성자는 그 자체만으로 존경받아야 마땅한 일 아닌가.

내가 모두에게 대접받듯, 나와 비슷한 잠재력을 지닌 이 친구도 비슷하게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이 친구, 특무대에서는 괴롭힘이나 당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된다.

저번에 만나봐서 알다시피 한희는 어른들 앞에서 쩔쩔매는 심약한 성격 아니던가. 그러니 거친 놈들이 모인 특무대에서 잘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요, 나이까지 어린 데다 사회 경험까지 없을 테니 여러모로 무시당했을 것이다.

이 와중에 상사였던 제 아비가 쫓겨났으니, 이 어린 각성자는 그놈의 조직에서 아예 대놓고 따돌림을 당하는 중이리라.

내가 판단하건대, 한희 한 명이 나머지 모든 특무대 전원을 이기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모두의 위에 군림하긴커녕 그 반대인 걸 보니 끔찍한 불합리함이 느껴진다.

개인의 강함이 조직 생활에서 딱히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던 것은 게이트가 열리기 전 세상일에 불과하다.

게이트가 열린 지금은, 강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두의 위에 설 수 있어야 마땅하다. 개인이 집단을 압도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불이 치솟았지만, 내가 도와줄 방법이라곤 전혀 없었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나는 한희 저 친구를 만날 일조차 없을 것 아닌가.

나는 그리 생각했지만, 내가 한희를 만나게 된 것은 불과 나흘 뒤의 일이었다.

78화 특무대원 한희 - [2]

모름지기 국가는 폭력을 독점해야 한다.

총기 따위 위험한 무기가 민간에 풀리지 않게 단속해야 하고, 사적제재는 엄금해야 하며, 민간인 무장 집단이 제멋대로 설치지 못하게 통제해야 한다. 국가기관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폭력을 행사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단, 하청을 주는 편이 더욱 값쌀 때는 빼고.

알다시피 중세 도시국가들이 용병을 고용해 그들에게 도시를 지키게 한 것은 마키아벨리가 더 일찍 태어나 상비군이 좋고 용병은 나쁘다며 더 일찍 훈계하지 못한 까닭이 아니다. 상비군을 유지하느니보다 용병을 고용하는 편이 더욱 저렴했기 때문에 그 당시엔 용병을 썼다.

마찬가지 이치로, 국가에서 헌터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그러는 편이 더욱 저렴하기 때문이다.

군인이 아닌 비각성자 헌터들이 괴수들과 싸우게 하는 것은, 일자리가 없는 잉여 인력들을 활용하면서 그들이 전사했을 때 보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어서이다.

그리고 강력한 각성자들을 모조리 군인으로 징집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명시적인 권력을 주지 않은 채 보수만 후하게 주는 쪽이 각성자들이 현 사회에 불만을 품지 않은 채 국가에 봉사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서이다.

각성자들을 괜히 군인이랍시고 한 집단에 모아놨다가는 반란 위험만 커질 뿐이요, 그들을 계속 민간인으로 두고 고용하는 편이 오히려 사회비용 측면에서 저렴하다던가?

그리고 각성자 헌터들과 국가 사이의 충돌은, 국가가 그런 식으로 자국민들을 외부 용병 취급하기로 해놓고서는 '그래도 역시 이쪽에서 고삐를 쥐고 있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자꾸 각성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려 들기 때문이다.

해외의 여러 사례를 보면 그러는 이유는 대강 알겠지만, 통제당하고 감시당하는 이쪽으로선 참아주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 각성자들이 바로 목동이요 양치기니까.

양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우리가, 왜 역으로 양들의 감시를 받아야만 한단 말인가?

********

평소처럼 사냥을 마치고 집에서 쉬자니,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김극 씨, 요새 바빠죽겠죠? 혹시 시간 좀 낼 수 있을까요?」

김형만 씨였다. 엘마 키우는 사람답게 여럿이 모여 큰 목소리 내길 좋아하는 그 아저씨가 내게 또 만나서 얼굴 좀 보자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술이라도 마시자는 것은 아니고, 예전에 말했던 '협회 물갈이'를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이번에······ 헌터 협회 협회장 선출할 건데 그거 보러 오라 이거죠? 협회 위원으로서요?"

내 물음에 수화기 너머 김형만 씨가 설명했다.

「정확히는 협회장 선출 과정 감시를 위한 공정위원회랑 각성자 헌터들 권익 보전을 위한 각성위원회를 구성할 건데요!」

"뭔가 복잡하네······"

「대충 그날 버스에 탑승했던 사람들 모아다가 위원직 한 자리씩 앉혀줘서는 대충 협회 돌아가는 거 감시하려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극 씨 바쁜 거야 뻔히 아니까, 정 못 오신다면 어쩔 수 없는데······」

"시간 없어도 가야죠. 언제 뵈면 될까요?"

그리하여 나는 헌터 시험을 치른 뒤로는 오랜만에 헌터 협회에 발을 디뎠다.

협회 회의장에 들어섰다.

김형만 씨가 말했듯, 그날 버스에 모였던 각성자 인원들이 주로 모여있었으며 나도 그중 하나였다.

"자, 김극 형? 위원들 사이 투표 결과 나왔어요. 김극 형은 이제부터 각성위원회 부위원장 하세요!"

석장실은 내게 '각성위원회 부위원장 김극' 명찰을 달아주며 그리 말했다.

내가 물었다.

"내가 부위원장이면 위원장은 누군데?"

"위원장은 강준치 형인데, 그 형은 함부로 자리 벗어날 수 없다면서 안 왔네요? 사실 직접 올 필욘 없긴 해요. 김극 형이나 강준치 형이나 뭔가를 할 필욘 없구요. 그냥 이름만 빌려줘서 조직에 무게만 더하면 되니까······"

석장실은 계속 싱글거리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는데, 이제 나는 저 붙임성 있는 태도를 순수하게 바라보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친구······, 수상하다.

정말로 수상한데, 이 의심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파할 계획은 없다.

왜냐하면 이 의심에 따로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석장실을 수상하게 여기는 것은 저번 강준만의 '특무대에는 암석 능력자가 없다'는 증언과 그 이전 석장실의 '특무대의 암석 능력자가 벽에 도청기를 숨겼는데 자기가 그걸 찾아냈다'는 발언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한편 강준만이 거짓말할 이유는 생각해내기 어렵지만, 석장실이 거짓말할 이유는 생각해내기 쉽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석장실이 특무대 비밀요원쯤 되어서는, 다른 특무대원들과 함께 강준치의 호텔 방에 도청기를 심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석장실이 강준치에게 불려가 보니 이미 도청기가 여럿 발견된 상황이요 이대로면 자기가 숨긴 도청기마저 발견될 위기라, 그는 강준치에게 신뢰를 얻을 겸 암석 능력자인 자신만의 방식으로 숨겼음이 드러날지 모를 도청기를 제거하기 위해 당시 그런 설명을 하며 연기를 했단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은 추리 소설과 다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둘 중 하나가 일부러 거짓말을 시도한 게 아니라 그저 뭔가를 잘못 알고 말했을 가능성이 훨씬 큰 법 아닌가.

내가 나중에 특무대 인원들의 신상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대중에 공개된 자료가 없어서 따로 찾아낸 증거가 없었으므로, 일단 그 의심은 내 맘속에만 품기로 했다.

게다가 설령 내 의심이 사실이라 한들 남들에게 알려서 좋을 게 없을 것 같다. 그랬다간 보나 마나 강준치 그 친구가 아주 지랄발광을 할 테니까.

그러지 않아도 온갖 정신병적인 의심에 시달리는 그 친구 아닌가. 그에게 제 의심이 옳았다는 증거를 안겨줬다간 그 정신병은 악화할 뿐 호전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도 강준치가 석장실을 의심하곤 거리를 벌리는 중인데, 굳이 내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겠다며 이간질하듯 언질을 줄 필요도 없어 보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심증만으로 누군가를 범인이라며 몰아세우는 것이 얼마나 역겨운 일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증거 없이 감방에 처넣어진 여동생이 있는 내가 그딴 짓을 해선 안 된다. 절대로.

"자, 모두 모였습니까? 버스에서 뵌 이후로 몇 달 만이죠? 이렇게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그때 나눈 대화를 지금 실현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고요!"

단상 위에서, 김형만 씨가 엘마 유저답게 큰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비록 공정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맡았지만, 사실 제가 여러분보다 뭔가를 잘 알아서 이 자리를 맡은 게 아니거든요? 뭔가 의견 있는 분은 기탄없이······"

그렇게 그날 버스에 탑승했던 각성자들과 그 자리엔 없었어도 명망 있는 각성자 헌터들이 이 자리에 모여서는 그의 발표를 들었는데, 내가 데려온 내 라운드걸도 그중 하나였다.

내 옆에 선 백담비가 작게 속삭였다.

"저 나중에 욕먹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김극 씨가 제 팀원이라고 너무 챙겨주는 거 아니냔 소리 들을 것 같은데······."

얼레기 주제에 이런 자리에 와도 되나, 이런 느낌으로 불안한 모양이지? 달래주기 위해 내가 말했다.

"그런 말 마요. 헌트웹에서도 그날 담비 씨 활약 영상 보고선 다들 감탄 일색이드만?"

"죄송한데 헌트웹이 뭐였죠? 언제 들은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잘······"

저 뻔뻔한 백담비도 위원직 하나를 받았는데, 덕분에 따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매우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왜냐하면 방금 그녀가 화장실에 갔을 때 사이버매그니토가 자신이 협회 위원이 됐음을 암시하며 매우 거만한 말투로 헌트웹에 글 하나를 올렸으니까.

Ⓐ syberMagneto : 형 이번에 각성위원회 들어갔다 ㅎㄷㄷ 각성자가 2년 넘게 헌터 활동했다고 위원 자리 권하길래 별생각 없이 받았는데, 비각성 쓰레기들은 이런 거 못 하지?

그렇듯 각성자 모두가 즐거워하는 자리였다.

김형만 씨가 계속해서 엄격하고도 공정한 새 협회 규정들을 발표하여 모두를 만족케 했다.

"보다시피 이번에 헌터 협회장이며 위원을 할 자격으로 2년 이상 헌터 활동을 했을 것을 명시했는데요! 이로써 우리 각성자들이 은퇴하고서 한 자리씩 차지하긴 어렵진 않을 것입니다!

왜, 비각성자 애들은 한 일 년 정도 헌터 일 하기도 전에 죄 죽거나 은퇴하지 않습니까? 괜히 다수결로 협회 인원 뽑았다간 비각성 헌터들한테 쪽수로 밀릴 테니 특별히 이런 규정을 넣었지요!"

"확실히 좋은데, 그런 식이면 김극 씨 같은 경우는요? 헌터 경력 1년도 아직 못 채운 걸로 아는데 그럼 위원 자리 못 주는 거 아닌가?"

"물론 김극 씨 같은 분을 대비해, 위원들 과반수가 인정할 만큼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인원에겐 자격이 인정된다는 예외 규정을 따로······"

이 와중에 불협화음 하나가 끼어들었으니, 다름 아닌 특무대원 하나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저기······"

문가에서 한창 실랑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불청객 하나가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특무대 제복을 입은 불청객이었다. 모두의 눈길을 받으며 불청객이 말했다.

"절 내쫓으시려는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저 참관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뒤늦게 나타나서 저런 소리를 지껄이는 저 특무대원은 나도 아는 인물이었다.

"한희?"

석장실 또한 한희를 알아보고서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여기 모인 각성자 헌터들이 한희를 노려보았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각성자들이 특히 많았으므로 다들 특무대 제복만 보고서도 그를 싫어할 이유는 충분했다.

"특무대가 여긴 왜 와? '헌터' 협회 회의인 거 안 보여?"

날 선 목소리들이 한희를 향했다. 한희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회의 참관하려고······"

"그러니까 헌터도 아닌 새끼가 참관을 무슨 자격으로 하냐구?"

"저는······"

"뻔하지. 그날 무력 시위 벌인 불순한 각성자 새끼들 모여서 뭔가 작당하는 것 같으니까 감시하러 온 거지. 그렇지?"

누군가 그리 물었는데,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한희는 변명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이렇게 말했다.

"감시하러 온 건 아니지만, 여러분이 외부에 상황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개해주셔야 하는 건 맞습니다. 군대에서도 몰래 사조직 구성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의심을 받지 않으시려면······"

"우린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들인데? 그리고 나중에 회의록 제출하기로 했잖어."

"그래도······"

"그리고 참관을 해도 제대로 된 공무원들이 해야지 왜 근본도 없는 특무대 새끼가 와서 참관을 해? 수틀리면 칼질하는 꼴 볼 일 있나?"

여기 모인 각성자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야 둘이었다. 모든 헌터들에게 평등하지만 각성자 헌터들에게는 더욱 평등한 이 회의를 외부 공개하기 싫어서. 그리고 각성자 헌터 모두가 특무대를 혐오해서.

"특무대 중에 누구 보낼 거면 차라리 박주헌을 보내지 그랬냐? 그 새끼 2년 넘게 활동한 전직 헌터니까 잘하면 위원 해먹을 자격도 있었는데."

"그 선배는 저번 일로 퇴출되셔서······"

"그래서 널 왜 보낸 건데? 아, 대충 알겠네. 특무대 새끼들이 괜히 왔다간 욕먹을 자리인 거 뻔히 아니까 일부러 왕따 당하는 새낄 보냈구만? 평소처럼 건들거리면서 뻔뻔하게 끼어들기엔 김극 형한테 처맞을까 봐 무서우니까 일부러······"

그런 식으로 한희는 모두한테서 욕을 먹었고, 노골적으로 모욕당했으며, 뭔가 반박을 하려 해도 도중에 말을 끊기고 비웃음이나 당할 뿐이었다. 헌트웹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린치당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저 친구가 이 자리에 칼이라도 가져왔으면 특무대에서 무력 시위를 하러 왔다고 받아들이고는 사생결단을 내서라도 쫓아냈으련만, 지금 한희를 보니 빈손 아닌가.

그것을 보니 단순히 특무대를 대신해 욕먹으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동정심이 앞섰다.

또한 내가 비각성 찌꺼기인 한희석의 지시 하에 각성자들을 핍박한단 점에서 특무대를 반푼이 각성자들 취급하고 있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 친구는 예외였다.

왜냐하면 한희 저 친구는 강하니까.

강력한 각성자는 어디서 뭘 하든 존중받아야 하는 법이다.

모두가 계속해서 한희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내가 외쳤다.

"그만, 그만! 다들 잠시 조용히 좀 해봐요."

헌트웹에서도 그렇지만, 내가 헌터들 사이에서 목소리 높일 위치는 충분히 된다.

과연 잠시나마 모두가 조용해진 가운데 내가 한희에게 물었다.

"특무대 선배들이 뭐래요. 여기서 정확히 뭐 하랍니까?"

그러자 여기 모인 모두에게 시달린 탓에 잔뜩 기가 죽었는지 한희가 힘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뭐 그냥······ 뭔 얘기들 나누는지 지켜보라고······"

"그럼 우리 회의 내용 듣고서 특무대에 보고해야 하는 거예요? 그게 임무인가?"

"대충 그런데요······."

"그럼 우리가 회의장에서 뭔 얘기 나눴는진 이따가 내가 설명해 주면 되겠네. 일단은 이 자리 뜹시다."

"예······ 예?"

"괜히 감시하겠다고 사람들 화나게 하지 말고 나랑 같이 다니자구, 응? 슬슬 점심시간인데 밥 먹어야죠? 같이 밥 먹으러 가요. 내가 살 테니."

"예?"

"담비 씨? 나 먼저 갈 테니까 이따가 오늘 모이기로 한 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어어, 하는 한희의 손목을 붙잡고서 내가 그를 회의장 밖으로 끌고 갔다.

그리하여 저번과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내가 한희를 쫓아내기 위해 몸소 나섰다고 여긴 듯 모두가 손뼉 치는 가운데, 그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나와 한희는 회의장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그를 데리고서 식당으로 향했다. 내가 알고 있는 식당 중엔 가장 비싼, 불쌍한 후배 밥 먹이기에 가장 좋을 만한 곳으로.

79화 특무대원 한희 - [3]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희는 사회초년생치고도 기가 약했다.

내가 그를 끌고 간 지 십 분은 넘어서야 그가 겨우 질문을 꺼냈다.

"어디 가는 거죠?"

"아, 호텔이요. 널찍한 식당 딸린."

내가 자길 국밥집에라도 데려갈 줄 알았던 걸까? 예상 밖이었는지 한희가 눈을 껌벅였고 나는 그를 기어이 호텔에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호텔 식당에는 이미 선객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이 날 알아보고서는 바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사장님!"

지금 내게 다가온 것은 웬 노인 부부였는데, 그들이 정진영의 부모임을 눈치챈 내가 고개 숙인 채 예의 바르게 말했다.

"진영이 형 아버님이시죠? 제가 평소에 진영이 형한테 신세 지고 있습니다."

"아니, 아니요! 저희야말로······"

노인 부부의 입에서는 너무나 부족한 아들놈을 챙겨줘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느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느니 온갖 감사의 말이 쏟아져나왔다.

히키코모리였던 자기네 아들이 누구 덕에 거금을 벌어들이는지 아는 모양이었는데, 난 그들 앞에서 너무 거만하게 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인천 공작이 양을 잘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두 부부가 물러난 뒤, 나는 어색하게 서 있던 한희에게 말했다.

"아, 미리 말하는 걸 잊었는데 오늘 우리 헌터팀 회식이거든요? 그래도 은근슬쩍 끼어서 밥 먹기 어색하진 않을 겁니다. 방금 보셨다시피 팀원들 가족들 데려와서 밥 먹는 자리거든."

"팀원들 가족들 데려와서 밥 먹는다고요?"

"예."

"이런 곳에서?"

하기야 가볍게 회식하기엔 지나칠 만치 호화스러운 자리이긴 했다.

요새는 더 잡을 수가 없어서 게이트가 열리기 전 냉동해둔 물량만이 남아있을 뿐인 저기 저 참치회만 봐도, 이젠 사라지고 없는 옛 세상의 영화를 이곳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

"인천시에서 이런 자리 마련해준 건가요? 인천시에 공헌 엄청나게 한 김극 씨를 위해······"

"아뇨? 마침 사냥 쉬는 날이겠다, 팀원들 밥 먹이려고 그냥 제 돈으로 예약한 건데."

"사비로 이런 호텔을 예약했다고요?"

"직원 복지? 뭐 그런 거죠. 쉬는 날에 밥 먹으러 나오라고 하면 스트레스받을 수 있단 건 아는데······"

나는 성문영과 이종호, 그리고 그 가족들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들 좋아하는 것 같죠? 봐요, 다들 가족에 친구까지 데려왔잖아?"

헌트웹에서는 각성자 헌터만을 귀하게 대우할 뿐 비각성자 헌터들은 돈만 많이 벌 뿐인 하류 인생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이 인식이 비단 헌트웹만의 인식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 퍼진 인식이다.

그러니 헌터 일을 하는 내 팀원들이 자기네 가족들에게 체면을 세울 수 있도록, 그들이 헌터 일을 하며 상사에게 대접받는다는 사실을 그 주변 사람들에게 알릴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편이다.

"잠시만요, 잠시 팀원 가족분들이랑 인사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한희 씨는 먼저 식사하고 계세요."

"아, 예."

그러고는 잠시 말한 대로 했다. 내가 먼저 내 팀원들의 가족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종호 어머님?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종호가 일 잘하시는 거 어머님도 아시죠?"

"아이고, 웬 연예인인 줄 알았더니 형수님이셨구나? 형택 아저씨가 참 도둑은 도둑이네요. 아, 따님도 데려오셨네! 따님이 열선 능력자라구요? 이야······"

한창 그러던 중에 백담비가 입장했다. 그녀는 아무도 데려오지 않고 혼자 왔는데, 보아하니 가족도 따로 없거니와 친구는 헌트웹 친구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 헌트웹에도 친구가 있다고 하긴 뭐한 아가씨니까 아예 한 명도 없는 건가.

가엾은 내 라운드걸을 자리에 안내해준 다음 다시 한희에게 돌아왔다.

이미 접시에 잔뜩 음식을 퍼담아 먹고 있는 한희를 보니 내가 다 흡족해졌다.

"잘 드시네. 음식이 입에 좀 맞아요?"

한희는 한창 먹다 말고 움찔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 열린 후로 구경도 못 한 음식이 많네요. 지금 못 먹으면 나중에 절대 또 못 먹겠다 싶은······"

"한희 씨는 이런 식당 올 기회 많지 않나? 아버지가 고위 공직자잖아요."

"그렇다고 집에 돈이 많진 않아요. 아버지나 저나 결국 월급쟁이니까······."

그 말은 꽤 의외였다. 한희석은 국안부 차관 아닌가. 그 정도 직위에 있으면 월급 말고도 따로 돈 들어올 구석이 많을 텐데, 트집잡히지 않으려고 청백리 행세를 하는 모양이지?

정작 그 피해는 그 잘난 아들이 보고 있단 점이 몹시 역겨운 일이었다.

한편 한희는 이 모든 것이 부러운 눈치로 말했다.

"확실히 헌터가 돈 잘 벌긴 하나 보군요? 직원 복지 수준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정말. 김극 씨가 헌터중에서도 대단해서 특히 잘 버신단 건 아는데······."

"부러우면 한희 씨도 특무대 때려치우고 헌터 해요. 나 못지않게 버실걸?"

내 진심이 담긴 말에 한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뭔 수로 헌터를 해요?"

"헌터를 안 하면요? 저번에 들어보니까 한희 씨도 특무대 생활이 만족스럽진 않은 것 같은데, 안 그만두고 쭉 할 거예요?"

"앞으로 몇 년 동안은요······?"

"어째서요?"

"의무복무기간이 남아서요. 약 삼 년 정도······ 그래도 아예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에요. 특무대 활동하면 군 복무는 면제되니까······"

한희가 변명하듯 한 말에 내가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손해지. 특무대 의무복무기간이 사 년에서 육 년이라매요? 그리 길게 묶여있느니 그냥 군 복무 하는 편이 이득 같은데······ 아무튼 그럼 의무복무기간 지나면 바로 헌터 하실 겁니까?"

"그러고 싶긴 한데, 그럴 수 있을지 잘······."

"왜요. 아버지가 헌터 못하게 막기라도 하시나? 헌터 같은 몸 쓰는 천한 일 따윈 할 생각하지 말라, 뭐 이런 건가?"

"헌터가 천하다는 이유는 아닌데, 아버지가 헌터 못 하게 막긴 하세요. 그분께선 제가 공직자를 하길 바라셔서······."

"그래서 특무대에 들어가라고 강요한 거예요?"

"예."

"그래서 특무대 들어갔더니 정작 아버지는 특무대장 자리에서 쫓겨나서 한희 씨만 고생 중이고?"

"예······."

그 숫기 없는 대답에 절로 내 혈압이 높아졌다. 진짜, 이런 씨발.

느낀 심정 그대로 내가 중얼거렸다.

"하여간 특무대 병신 새끼들. 하는 짓 보면 각성자라 쳐주기도 어렵네. 지금 세상이 게이트 열리기 전이랑 똑같은 줄 아는 모양이지?"

난데없는 폭언에 놀란 걸까? 한희가 당황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내가 계속 말했다.

"한희 씨. 내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특무대 전체보다 한희 씨 한 명이 더욱 가치 있어요."

"예?"

"일반인이든 각성자든, 공무원이든 특무대원이든 할 것 없이 아직 다들 바뀐 세상에 적응을 못 했어. 세상이 변했는데 다들 세상 변하기 전 가치관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희 씨가 이렇게 시달리지."

"지금 무슨 말씀을······"

"사람이 다 비슷하게 생겼어도 같은 사람이 아니지. 통통배랑 군함을 같은 배로 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처럼······."

한희가 멍하니 듣는 가운데, 내가 말을 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통통배면, 특무대 각성자 친구들은 중세 정크선쯤 돼요. 통통배쯤 얼마든지 들이받아서 침몰시킬 수 있는······. 그래서 자기들이 아주 잘난 줄 알거든? 정크선들 모여서 함대를 이루면 겁먹을 이유가 없다 이거지.

세상에 배라 하면 통통배랑 정크선밖에 없는 줄 아니까 그래. 어디 바다에서 딴 배가 쳐들어오면 판옥선 몇 대 보내는 걸로 진압될 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으니, 그래선 안 되죠."

내가 조소했다. 그리고 계속 말했다.

"세상이 달라져서는 이젠 수천 톤짜리 철갑선들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상황인데. 정크선이든 통통배든, 함대를 이뤘든 몇 척이든 상관없이 죄다 혼자서 가라앉힐 수 있는······. 그중에서도 한희 씨는 특별한 철갑선인 거 알죠?"

"제가요?"

"당연히요. 한희 씨는 항공모함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 모를 철갑선인데요. 통통배가 지랄하든 정크선이 지랄하든, 싹 다 무시하고 가고 싶은 항로로 나아갈 자격이 충분한 분인데······ 한희 씨도 아직 바뀐 세상에 적응 못 했긴 마찬가지라 그럴 엄두를 못 내시네."

내가 "언젠간 싹 다 들이받아 버리길 바랍니다."라고 말할 때였다.

"이분은 또 누구예요?"

성문영이 다가와 묻길래 내가 소개했다.

"특무대 한희 씨."

"아, 헌트웹 한민족의얼은한 그분?"

한희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전, 내가 먼저 설명했다.

"그리고 헌터 데뷔하시기만 하면 바로 나만큼 대우받으실 분이지."

그러고서 바로 한희의 능력 카탈로그를 설명해줬더니, 성문영은 내가 바란 대로 반응했다.

"와, 개쩌네? 헌터 생활 시작하면 진짜······"

그 반응에 한희의 표정이 일순 달라진 것을 나는 똑똑히 봤다.

여러 감정의 연속이었다. 가속 능력자답게도 몹시 빠르게, 희망과 탄식과 우울감의 감정이 그 얼굴을 빠르게 스친 것을 나는 목격했다.

이로써 특무대 따윈 그만두고 헌터 할 맘이 더욱 커졌을까?

모쪼록 그렇길 바랐다. 그러길 바라서 이렇게 열변을 토한 것 아닌가.

나만큼 대우받아야 할 이 친구가, 한낱 비각성자 찌꺼기의 강요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서는 저보다 훨씬 못한 이들에게 시달리는 것은 내가 다 답답한 일이었다.

계속 식사하던 중에 내가 중얼거렸다.

"아, 협회 회의 끝났다네요?"

한희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나는 폰을 만지작거려서는 한희에게 어느 자료를 전송하고는 말했다.

"여기, 회의 녹음본 보냈거든요? 특무대에 이거 제출해요. 회의장 들어와서 직접 녹음했다고 하시면 되겠네."

뜻밖의 선물이었던 듯, 한희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어떻게······"

"내가 아까 카톡 보내서 따로 마련해달라고 했지. 잘했죠? 자, 이제 임무도 달성했으니까 맘 편히 식사하시면 됩니다. 스마트폰을 하든 바로 집에 가든 해도 돼요. 적당히 쉬다 가요, 응?"

이쯤 되면 내가 정말로 개인적인 호의를 베풀었음을 알 것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한희가 말했다.

"고맙······ 습니다. 여러모로."

그리고 난 씩 웃었다.

"뭘요. 같은 철갑선끼리.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특무대에서 앞으로도 협회 관련으로 한희 씨를 보낼까요?"

"그럴 거 같은데······."

"그럼 괜히 고생하지 말고 나부터 찾아요. 자리에 나 없으면 전화라도 하고. 알았죠?"

한희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는 모두와 함께 식사나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다들 양껏 먹고서 슬슬 자리가 파할 즈음, 슬슬 헤어지든 커피를 마시든 하려던 차였다.

게이트가 열린 이후로 세상이 달라진 것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일이 지나치게 잦아졌단 것이다.

이제는 예고되지 않은 재앙이 너무나 당연한 듯, 빈번하게 터지곤 한다.

오늘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이이이이이잉······' 여기 모인 헌터들의 휴대전화가 일제히 울렸다.

스마트폰을 쳐다본 성문영의 얼굴이 굳었다. 녀석이 내게 말했다.

"형, 게이트 열렸대요······!"

새삼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그 여파, 그러니까 게이트 특유의 온갖 감정들이 내 머릿속에 파고들기 시작했으니까.

나야 이제는 적응이 돼서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 팀원들이 데려온 가족들은 거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자, 다들 피신해야 하니 모이세요. 근처에 대피소 있다는데 거기로 순간이동 해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성문영과 그 가족부터 공간이동 시키려니, 성문영이 물었다.

"형은요? 무기도 안 챙겨왔으니까 같이 피신할 거예요?"

"나? 나야 상황 보고 같이 피신하든 말든 해야지."

대충 대답하고서 성문영과 그 가족들을 피신처로 옮겼다.

그를 비롯해 지금 내 팀원들은 이 상황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다들 무기를 가져오지 못했으니까.

여기는 서울이라, 헌터들이 길거리에서 기관총을 들고 다니든 로켓 발사기를 들고 다니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호탕한 인천 경찰들과 달리 좀스러운 서울 경찰들은 헌터들이 연발되는 돌격소총조차 들고 다니지 못하게 단속하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맨손이긴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총 한 자루 뺏으면 바로 침팬지만도 못해지는 비각성자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인원들을 피신시킨 다음, 나는 서둘러 쓸 만한 무기를 찾았다.

아, 바로 발견됐다. 성문영이 타고 온 픽업트럭 짐칸, 거기 실린 거대 망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녀석이 날 위해서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그 거대한 망치를 손에 쥐니 한희는 비로소 내 의도를 알아챈 듯했다.

한희가 눈을 부릅떴다.

"김극 씨, 게이트 열렸다니까 나서시려고요?"

"예."

"방금은 상황 보고 나설지 말지 결정한다고 하셨으면서······?"

"그거야 보스인 제가 나선다고 했다간 딴 팀원들 피신하기 부담스러울까 봐 그리 말한 거죠? 그리고 저야 뭐, A급 헌터씩이나 돼서 이런 상황엔 당연히 나서야지 않겠습니까."

뭔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한희가 날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특무대는 게이트 열렸을 때 동원됐단 말을 들어본 적이 없네. 특무대원들은 이런 상황에 출동할 의무 같은 거 없습니까?"

내 질문에 한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상당히 뜸 들인 끝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특무대원 사이에 괴수 잡는 건 금지라서요."

"아니, 왜요? 특무대에 괴수 잡으면 징계 받는 규칙이라도 있답니까?"

농담하듯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예. 명문화된 규칙 같은 건 아니지만, 특무대원 사이에 공유되는 암묵적인 규칙이······ 서울시나 경찰에서 괴수 나타났으니 도와달라 요청해도 무시해야 하는 규칙이 있어요."

"아니, 왜 그런 규칙이?"

"특무대원이 한두 번씩 괴수 잡으러 나서기 시작했다간 나중엔 아예 당연한 듯 괴수 사냥에 특무대원이 동원될까 봐요."

"아, 월급 고작 천이백 받으면서 그런 위험한 일 할 순 없단 건가?"

"뭐, 대충요······. 그래서 특무대원 누가 데스클로라도 한 마리 잡았다간, 조직에 피해를 줬단 이유로 선배들이 단순히 갈구는 걸 넘어······"

그리 말하다 말고 한희는 내 눈치를 살폈는데, 왜 그러는지 알 만했다.

하기야 자기가 생각해도 창피할 것이다. 이쪽은 인천 헌터이므로 이 상황에 나설 이유가 없는데도 직업 윤리상 나서려는데, 자기는 선배들이 무서워서 가만히 있겠다니 수치스럽겠지.

사실 나 역시 그 말을 듣고서는 과연 특무대는 밥버러지요 반쪽짜리 각성자 집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늘 말하는 바이지만, 강력한 각성자는 존중해야 하는 법.

한희는 아직 양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게 존중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그 체면을 생각해 내가 말했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혹시 여유 되면 근처 경찰서에서 헌터 라이플이라도 좀 가져와 줄래요?"

"헌터 라이플이요?"

"최소 50kg 이상으로. 물건 가져오는 거야 사냥에 동참했다고 안 치겠죠? 난 바로 현장 나서야 할 테니까 헌터 라이플 가져오면 여기 둬주시고······"

과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던 듯, 그는 이 요구마저 거절하지는 않았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그리 말하더니 한희는 내 육안엔 잘 포착되지도 않는 속도로, 정신적 그물망으로만 그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속도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한희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망치를 단단히 쥔 채, 사냥에 나설 준비를 했다.

인천시와 계약한 헌터인 내가 서울시 사태에 나서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좀 이상한 일이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나서고 싶으면 나서는 거지.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내가 나설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방금 느낀 게이트의 여파를 보건대, 대형 게이트였다. 거대한 괴수며 강력한 괴수들이 튀어나올 것이 분명한.

과연 저 멀리서 거대한 괴수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거기 실린 초저주파에 나는 잠시 찌릿, 하는 감각을 느꼈고 아드레날린이 이 육중한 신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옥타곤에 섰다.

80화 호주의 재앙, 불사조 - [1]

상가 건물 옥상에서 길가를 내려다봤다.

사방이 아비규환이다.

주변 모든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직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가게 안의 직원이며 손님들이 모조리 뛰쳐나와서는 한 방향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영식이! 영식이 어딨어!"

"차 빼, 새끼야! 빨리 차 빼라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도로를 가득 채웠다.

한편 다들 살기 위해 도망치는 와중에도 게이트가 열린 여파를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다.

다들 덜덜 떨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달렸다. 힘 있는 뜀박질은커녕 병든 양들의 질주가 따로 없었다.

이번에 열린 게이트가 크기는 확실히 큰 모양이다. 그 여파만으로도 사람들이 벌써 반쯤 죽으려는 걸 보니.

나는 옥상에서 정신적 그물망을 펼친 채, 3km 반경의 상황을 살폈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거대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곧바로 그쪽을 살피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뭐냐?

기어이 게이트에서 괴수들이 나온 듯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데스클로는 원래 열 마리쯤 모이면 많이 모인 셈이라던데, 내가 처음 참여한 사냥에서는 게이트 하나에서 데스클로가 백 마리 가까이 튀어나왔지 아마?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 심한 상황이다.

괴수대행진······.

언뜻 파악하기에도 수백 마리는 넘을 괴수들이 감지되었다. 데스클로뿐만 아니라 다른 종의 괴수들도 여럿 섞였는데, 놈들은 서로 싸우지도 않았다.

놈들이 다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질량에 압도될 것만 같았다. 어째서 저리 많이도 튀어나온 걸까.

대충 이유는 알 만하다. 그놈의 베헤모스. 그놈이 서울에 너무 깊숙이 들어왔다. 놈을 졸졸 따라다니는 수많은 괴수 또한.

그리고 베헤모스를 따라다니던 괴수들은, 베헤모스가 기어이 현실에 나오려는 듯하다가 그러지 않게 되니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모양이다.

화산이 폭발하듯, 게이트 안에 뭉쳐있던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 이에 맞선 서울시의 대응은 신속했다.

이처럼 베헤모스의 영향으로 서울에서 게이트가 열리는 것이 요새는 빈번했던 상황이라, 군인들이 미리 시내에 배치돼있던 모양이다.

맨 먼저 군인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뒤이어 헌터들도.

정신적 그물망으로 살피건대, 그들이 각자의 위치에 자리 잡는 과정이 일사불란하기 그지없었다. 지방과 달리 서울에서는 구역별로 담당 헌터들이 배정되기에 출동 또한 체계적이고 빠르다더니 과연 그랬다.

나는 게임에서 탑뷰 시점으로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듯, 정신적 그물망을 통해 이 모든 상황 전체를 살폈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괴수들이 여러 위치로 갈라져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중에 데스클로 한 무리가 군인 및 헌터들과 마주쳤다. 한 무리라 해도 그 수가 서른 마리는 되었다. 어지간한 게이트 사태에서 나올 데스클로들의 다섯 배쯤 될 숫자다.

질겁한 사람들의 사격이 시작됐다. 허공에 빗발치는 총알들이 내 정신적 그물망을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그러나 데스클로들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군인과 헌터들이 기껏 구성한 화망을 뚫고, 기어이 데스클로 한 마리가 군인 앞에 도달했다. 놈의 갈고리발톱이 휘둘러지려 했다. 약 일 초 후면 사람 하나가 반으로 갈려 죽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나설 상황이다.

나는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던 망치를 위로 휘두르는 동시에, 공간이동 했다.

"아아―"

처절한 비명이 내 귓속을 파고드는 동시에 내가 휘두른 망치가 목표물에 닿았다.

아래에서 위로. 한 군인을 덮치려던 데스클로의 배에.

"―아악!"

'쾅' 소리와 함께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는 걸 보니 역장체였나 보다.

데스클로는 내 망치질에 으깨지는 것이 아니라 공중으로 휙 솟구쳤다.

그렇게 위로 날려진 놈으로선 갑작스러운 상승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데스클로는 추락하며 제대로 된 대응을 하는 게 아니라 네 다리를 마구 휘저을 뿐이었으며, 나는 또 한 번의 망치질로 놈을 완전히 으깨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화망을 뚫고 도달한 데스클로가 한둘이 아니었다.

뒤이어 날 덮쳐온 데스클로 한 마리의 발톱을 머리를 젖혀 피해야 했다. 그러다가 귀가 잘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놈의 앞다리를 잡아서는 뒤이어 달려오던 데스클로들에게 집어던졌다.

네 마리가 동시에 나가떨어져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 만들어낸 틈을 놓치지 않고 돌격했다. 망치 한 자루 쥐고서 앞으로 달리면서 외쳤다.

"나 역장 외골격 능력자니까! 총알 맞아도 괜찮으니 계속 쏴요!"

그러고는 망치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한 놈을 찍어 죽이고 또 한 놈을 걷어차 죽이고 두 놈을 연달아 후려쳐 죽였다.

그러고 나니 남은 데스클로가 더는 없었다.

겨우 숨 돌릴 수 있게 되어 고개를 돌려보니, 헌터들과 군인들이 헉헉거리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 이 사람 알아, 김극······"

죽다 살아난 군인 하나가 중얼거리는 가운데 내가 말을 끊었다.

"게이트 위치 특정됐으니 빨리 전파해요."

"예?"

"빨리 무전부터! 헌터 김극이 게이트 발견했다고······"

내가 이것저것 지시하고 군인 하나가 황급히 무전 하는 동안, 이 자리에 또 한 명의 각성자가 도착했다.

원래 이 구역을 지키고 있어야 할 각성자 헌터는 아니었다.

"이거, 더럽게, 무겁네요······?"

한희였다. 그는 제 몸보다도 훨씬 큰 헌터 라이플을 짊어지고 왔다.

내가 헌터 라이플을 가져와달라고 하긴 했지만 아까 그 호텔에 가져다 두면 된다고 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직접?

"헌터 라이플 챙긴 다음 나 찾아다녔어요?"

내가 물었더니 한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한 짓을 했다고 타박하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만했으니까.

나는 엄지를 세워 보인 다음 전방을 살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너머로 정신적 그물망을 더듬었다.

그러고서 알게 된 사실을 주변의 모두에게 경고했다.

"또 한 무리 옵니다. 이번엔 아까보다 많아요."

그러자 모두가 흠칫하는 가운데, 나는 헌터 라이플을 장전했다.

막 장전을 마쳤을 때 놈들이 도달했다.

데스클로들. 몇 마리인지는 세기도 어려웠다.

이쪽이 게이트에서 가장 가까운 주요 길목이었다. 그리고 저 넓은 도로가 좁아 보일만치 도로를 가득 채운 채 데스클로들이 달려왔다. 살로 이루어진 물결이 저럴까?

데스클로는 딱히 무거운 괴수도 아니건만, 놈들의 질주에 동반되는 소음이 대단히 컸다.

"아······"

괴수들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인 듯 한희마저도 겁에 질린 눈치였다.

그리고 군인과 헌터들은 총을 쏘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나만은 앞으로 나아갔다. 한희가 가져다준, 78kg짜리 헌터 라이플을 앞세운 채로.

데스클로들은 쏘기 좋게 한 덩어리로 달려오지 않았다. 놈들은 이 와중에도 총알을 피하고자, 지그재그로 뛰면서 거리를 좁혀왔다.

그리고 난 천천히 좌우로 총구를 움직여서, 발사된 기관포탄 한 발 한 발이 놈들을 꿰뚫도록 신경 쓰며 전진했다.

과연 78kg 헌터 라이플이 쏟아낸 기관포탄의 관통력은 상당했다. 날아간 기관포탄은 데스클로 한 마리만 터뜨리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뒤에서 달려오던 데스클로들마저 꿰뚫어 죽였다.

그 와중에 모두의 총알을 몸으로 받아내며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데스클로 한 마리가 보였다.

놈의 정체를 알아챈 군인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또 역장체!"

맞다. 역장체. 달리는 속도를 보니 아까 그놈보다도 훨씬 강력한 놈이었다.

그 역장 덮인 괴물이 내게 달려올 때, 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폭발하듯 지면을 걷어찼다.

역장 외골격을 지닌 데스클로며 소월인은 거의 순간이동 하듯 도약할 수 있다.

역장 외골격을 각성한 이젠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아니, 신체강화에 역장 외골격 능력까지 더해져서는 어지간한 이들보다 더욱 월등하게.

다릿심에 역장의 힘이 더해지니 내 추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는 거의 쏘아지듯 발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공간이동 했다.

공간이동 하는 동시에 창을 찌르듯 내 헌터 라이플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헌터 라이플의 총구가 입 벌린 채 달려오던 데스클로의 아가리에 쑤셔박혔다.

그와 동시에 힘주어 헌터 라이플의 총구를 위로 향했다.

그러자 거기 박혀있던 역장체 또한 함께 들어 올려졌다.

그렇게 놈의 다른 행동 전부를 막아버리고는 계속해서 기관포탄을 쏟아냈다.

목구멍 안으로 직접 가해지는 영거리 사격, 높이 들어올려진 역장체는 발버둥 칠 기회도 없었다.

공중에서 놈이 폭발하자 나는 다시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달려오던 데스클로들을 향해 기관포탄을 퍼부었다. 놈들이 터지고 또 터졌다.

그리하여 또 한 번의 괴수 물결을 막아냈다. 바닥에 괴수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가운데, 나는 군인과 헌터들을 살폈다.

"다친 사람은?"

"여기 한 명, 복부가 잘려서는······"

부상자를 데리고서 나는 공간이동 했다. 그를 병원으로 데려다준 다음 다시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서는 전장이 되어버린 시내 전체를 살폈다.

또 한 곳, 내가 필요한 곳을 찾았다.

딱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또 진귀한 상황인데.

전차 세 대가 도로를 가로지르다가 괴수한테 공격당했다.

빌딩 사이에 숨어있던 오거 한 마리가 전차의 측면을 덮친 것이다.

그 장소로 공간이동 하니, 오거가 막 전차들을 뒤집어버리고 있었다. 오거는 전차 한 대를 확 뒤집더니 또 한 대에 달려서는 그마저 뒤집어버렸다. 전차 무게가 수십 톤은 될 텐데, 그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치 황당한 장면이었다.

더 가까이서 보니 과연, 그럴 능력이 충분한 괴수였다.

오거, 육 미터급······.

저런 괴수들은 크면 클수록 예외 없이 더욱 강력하다. 그 말도 안 되는 체중을 견디기 위해, 몸 안에 근육이 더욱 두껍게 차올라서는 더욱 힘이 세지고 더욱 단단해지니까.

보아하니 이 헌터 라이플로도 쏴 죽이려면 시간이 꽤 걸릴 놈이었다. 그리고 저런 놈을 상대하고자 마련해둔 전술이 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전단지를 주워들었다.

그 종이를 빠르게 만지작거려서는 원뿔 하나를 완성했다.

만들어진 전단지 원뿔을 헌터 라이플의 총구에 끼워 넣었다.

마지막으로, 헌터 라이플과 거기 씌워진 전단지 원뿔에 내 역장 외골격을 씌웠다.

이로써 종이에 불과한 전단지는 티타늄보다도 단단한 창날이 됐다. 역장 날붙이 능력자들의 날처럼 뭐든 잘라낼 능력은 없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었다.

그리고 오거가 마지막 전차마저 뒤집어버렸을 때, 나는 저 높은 하늘 위로 공간이동 했다.

공간이동과 동시에 중력이 날 잡아당겼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해방감, 아······!

지면의 오거마저 작게 보이는 공중에서, 나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헌터 라이플을 아래로 향한 채, 저 아래로 내리꽂힐 준비를 했다. 예전 같으면 추락했을 때 내 몸이 견딜 수 없을 만한 높이에서, 역장 외골격의 견고함을 믿고 그렇게 했다.

낙하를 거듭하며 충분한 가속이 실렸을 때, 나는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콱!'

"인천 만세―!"

체중과 가속을 고스란히 실은 채, 나와 헌터 라이플은 벙커버스터처럼 목표물에 내리꽂혔다.

총구에 장착된 원뿔부터 오거의 목에 깊숙이 박혔다. 내가 더 힘을 주자 총구 일부가 놈의 목 안에 쑤셔박혔고.

"구오오오오오―" 갑작스러운 고통에 오거가 포효했지만, 그뿐이었다.

내 헌터 라이플이 그 목을 관통하여 가슴까지 쑤셔박혔는데도, 오거는 아직 죽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예상한 일이니까.

나는 종이에 씌워놨던 역장 외골격을 거두고는 헌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하여 오거의 체내에 박힌 총구에서, 연발로 발사된 기관포탄이 놈을 내부에서부터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오거는 놀랍게도 그마저 잠시 버텨냈다. 심지어 놈은 길쭉한 팔을 휘둘러서는 제 몸에 달라붙은 날 붙잡기까지 했다. 그대로 놈이 날 으깨려 했지만, 난 내 몸과 역장의 견고함을 믿고 버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이겼다.

오거가 죽었고, 난 풀려났다.

가슴팍이 완전히 터져버린 오거가 피를 폭포처럼 흘리며 쓰러졌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 김극, 김극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가득 찬 희열을 무시하며 내가 전차들을 살폈다.

"다들 살아있나······ 살아있네?"

보아하니 전차 안의 운전수들은 멀쩡한지라, 내가 뒤집혀있던 전차 세 대를 똑바로 세워주자 그들이 다시 움직였다.

저 앞으로 이동하는 전차에서 운전수들이 해치를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볼 만했다.

아마도 방금 전투를 인상 깊게 본 모양이지?

운전수들은 날 잠시 괴물 보듯 쳐다보다가, 뒤늦게 자기네 실수를 깨달은 듯 일제히 내게 경례했다.

아마도 감사를 표하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서울 종자에 비각성자 찌꺼기이기까지 한 것들의 인사를 받아줄 이유가 없는 법.

계속해서 강력한 괴수, 내가 상대할 가치가 있는 괴수를 찾아 놈을 쓰러뜨리거나 위급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을 찾아서는 공간이동으로 옮겨주며 내 할 일을 하던 중이었다.

아까 군인 한 명이 내준 무전기에서, 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장실입니다. 저 현장 도착했습니다! 늦어서 죄송―」

이 구역을 담당하는 A급 헌터가 석장실이었던 모양이군. 오늘은 협회 회의에 참석하느라 늦게 도착한 모양이고.

「게이트 위치 이미 파악됐다고요? 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무전기에서 전해지는 목소리는 경박했으나 그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쿵, 쿵 하는 소리가 빠른 박자로 울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서, 나는 괴수들을 맞닥뜨렸을 때보다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높이가 십 미터쯤 될 화강암 거인이, 상가 건물 위로 그 상체를 드러낸 게 아닌가.

거대한 화강암 거인이 질주하며 지진과도 같은 충격을 주변에 전달했다.

저 괴물보다도 괴물 같은 거인은 석장실이 분명했다.

저번 시위 현장에서 봤을 때는 팔 미터 크기였던가? 그것이 최대 크기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땐 몸에 붙일 암석이 부족해서 대충 온 것이요, 제대로 몸을 완성하면 지금처럼 어지간한 3층 건물보다도 커질 수 있는 모양이지.

화강암 거인의 양어깨에는 각각 기관포탑이 장착돼 있었는데, 그 기관포탑들이 일제히 기관포탄을 쏟아냈다. 방아쇠를 당기거나 탄창을 교체하는 것은 바위 정령 특유의 암석 조작 능력을 통해서 해내는 모양이었다. 거인의 어깨에 자갈로 이루어진 팔 같은 게 따로 돋아나서는 바삐 움직이는 걸 보니.

그렇게 끝없이 기관포탄을 쏟아내며, 주변에는 굉음과 충격을 전달하며 화강암 거인이 달렸다. 그야말로 거대로봇이 따로 없었다.

이 와중에 옆을 본 나는 또다시 놀랐다. 언제 왔는지 몰라도 한희가 내 옆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 아닌가.

"헌터 분들 싸우는 건 처음 봤는데, 진짜 다들 괴물이네요······?"

"방금 저 싸움 지켜보고 있었어요?"

"예? 예. 큰 소리 나길래 와봤더니······ 도우려 했는데 도울 필요도 없었네요······."

이 와중에 헬기까지 도착했다.

아파치 헬기 다섯 대. 편대비행 하는 그 헬기들이며 전술 병기가 따로 없는 석장실을 보니 슬슬 상황이 끝났다는 판단이 섰다.

난 이쯤이면 내가 뭔가를 더 할 필요가 없겠다고, 대충 헌터 라이플이나 쏘며 화력지원이나 해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나는 내 눈을 따갑게 찔러오는 붉은 광채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저 위에서 날고 있는, 거대한 붉은 새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저게 뭐죠?"

나와 같은 것을 보고서 놀랐나 보다. 옆에서 한희가 물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불사조······"

맞다. 불사조였다.

달리 표현할 이름이 없었다. 하늘을 붉게 가로지르고 있는 저것은.

온몸이 화염으로 이루어진, 날개폭이 대충 십 미터쯤 될 법한 맹금류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리 날아가던 불사조는 게이트를 향해 비행하던 헬기 편대와 맞닥뜨렸다. 그리고 불사조의 날개가 그들을 스친 순간, 헬기들은 일제히 허공에서 폭발했다.

"어······!"

추락하는 헬기를 향해 나와 한희가 동시에 움직였다.

한희가 떨어지는 헬기를 향해 도약하여 그 안 조종사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공간이동 하여 나머지 조종사들을 구출한 뒤, 한 아파트 옥상에서 저 너머 게이트를 보았다.

정확히는 거기서 튀어나오는 괴수들을 보았다.

베헤모스를 따라다니는 괴수들은 거대하고 강력한 개체를 따라다니다 보면 자신들은 더욱 쉽고 안전하게 인간을 사냥할 수 있다는 사실을 호주에서부터 학습한 놈들이다.

게이트 안에서 더 많은 괴수들이, 데스클로며 오거며 그밖에 온갖 이름이 있거나 새로 이름을 붙여야 할 괴수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하여간 쉬운 일이 없다.

나는 한숨 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81화 호주의 재앙, 불사조 - [2]

지금은 한숨 쉴 여유도 없었다. 나는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 전반적인 상황을 살피면서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정확히는, 불사조의 비행을 올려다봤다.

방금 아파치 편대를 전멸시키며 한국에 화려하게 데뷔한 불사조는, 자기가 더 터뜨릴 것이 없는지 공중에서 살피는 눈치였다. 한 빌딩 위에서 선회 비행하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는 걸 보니.

지금 이곳 서울에서, 저 맹금류의 눈에 인류와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은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

불사조의 국제적인 명칭은 파이어 호크(Firehawk)다.

척 보기에도 판타지 괴수가 따로 없는 놈이지만, 놀랍게도 놈은 소월에서 넘어온 괴수가 아닌 지구 출신의 괴수다.

본디 놈은 호주 북부의 솔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주 원주민들의 증언과 최근 논문에 따르면, 호주의 일부 맹금류들은 고의로 화재를 일으킨다. 불붙은 나뭇가지 따위를 옮겨서는 들불이며 산불을 일으켜 불을 피해 달아나는 소동물들을 쉽게 사냥한단 것이다.

그리고 호주의 솔개 또한 방화 행위를 저지르는 맹금류 중 하나다.

추정컨대 놈은 솔개였을 적 자신이 일으킨 화재에 휩쓸려 온몸에 불이 붙었을 것이다.

어지간하면 그대로 불타 죽었어야 하련만, 온몸에 불이 붙는 것이 화염 능력의 각성 조건인즉 놈은 각성했을 것이다. 이후로 놈은 화염 정령으로 거듭났을 것이며, 호주에서 숱한 사람들을 사냥한 끝에 저 크기로 성장했을 것이다.

내가 어찌 그리 잘 아느냐면, 저놈이 워낙 유명한 놈이기 때문이다.

호주의 재앙, 파이어 호크. 한국 헌터 협회에서 또 제멋대로 번역하길 불사조.

일찍이 호주의 공군은 베헤모스의 열선뿐만 아니라 저 날짐승에 의해서도 궤멸했다. 불사조의 비행 속도가 실제 전투기만큼 빠른 것은 아니지만, 저 날짐승이 전투기들의 근처를 날기만 해도 그 불운한 기체들은 공중에서 모조리 터져나갔다고.

그러니 저 불타는 솔개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이상, 공중에서의 화력지원은커녕 수송기가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셈이다.

그래서 내가 어째야 하나?

달리 어쩔 방법이 없다.

신경이 쓰여도 깔끔하게 포기해야 한다. 이전에 화염 정령 한 마리를 잡아봤다는 것은 저 불사조를 상대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땅에 붙어 다니기라도 했던 그 화염 정령과 달리 저 맹금류는 훨훨 날아다니는데, 내가 저걸 뭔 수로 잡을 것인가?

공간이동을 거듭하여 공중에서 망치라도 휘두르자니, 공중에서 망치질을 한들 충격파가 만족스럽게 터질 리가 없다. 저놈의 불로 된 신체에 제대로 된 타격을 줄 방법이 없는 셈이다.

「화염 정령 잡는 방법, 따로 뭐 없습니까?」

「중국에선 전술핵 터뜨려서 그 충격파로 화염째로 소멸시켜선 화정 세 마리인가 잡았다던데」

「그런 거 말고, 우리 장비로 할 수 있는 방법은요!」

「몰라!」

무전을 들어보니 다들 답답해하면서도 별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쪽도 잠자코 지상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다가 눈을 떴다.

정신적 그물망에 수십 마리 데스클로들의 질주가 감지되었다.

그 데스클로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그 너머 빌딩이 목적지인 듯했다.

괴수들이 게이트에서 미리 사냥감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뛰쳐나온단 점을 고려하면, 분명 저 빌딩 안에 사람들이 모여있으리라.

과연 내가 그 빌딩 안에 공간이동 하니,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원래 이 빌딩에서 일했을 법한 회사원들.

데스클로가 벽을 타고 올라오기 어려운 고층이었지만 다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기야 창가만 봐도 지금 자기네가 사냥의 표적이 되었음을 알 만하리라.

"모두 모여!"

내가 소리쳤다.

그러자 겁먹었던 그들은, 날 알아보기 무섭게 화색이 되었다.

"김극이다!"

나는 한곳으로 모인 그들과 함께 공간이동 했다.

서른네 명이나 되었으므로 세 번에 나뉘어서 그들을 피신시켜야 했는데, 역장 외골격 능력을 각성하기 전이었다면 한두 번 더 공간이동 해야 모두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신체강화자인 내 체중부터가 보통 사람들의 다섯 배쯤 되니까.

그리고 내 역장 외골격이 다른 능력자들의 역장과 다른 점은, 역장을 둘렀을 때 나는 공간이동 하기가 수월해진단 것이다.

역장을 둘렀다고 실제 체중이 정말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쩐지 역장을 두른 채 공간이동 할 때는 내 체중이 대폭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같은 능력이라도 각성자의 개성에 따라 세밀한 부분에서 각자 다른 법이라더니 실제로 그랬다. 어쩌면 내가 각성할 당시 상황이 그랬던지라 이런 변화가 생겼을지도.

"감사합니다!"

내가 대피소로 옮긴 서울 종자들의 인사치레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내 할 일을 했다.

빌딩 안 사람들을 사냥하러 그 안에 뛰어들었다가 아무 사냥감도 발견하지 못한 데스클로들, 당황했는지 주변을 마구 두리번거리던 놈들을 상대로 헌터 라이플을 쏴 갈기던 중이었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지간하면 무시했을 텐데, 발신자가 내 라운드걸이라 받았다.

휴대전화 너머 백담비가 물었다.

「김극 씨, 지금 서울에 난리 났다던데 거기서 일하고 계신다고요?」

"예? 예!"

「지금 어디예요!」

왜 묻는지 대충 눈치챘다.

"여기 오려구요?"

「예!」

"왜요! 여기 서울인데!"

우리 담당 지역도 아닌데 굳이 왜 끼려는 것이냐, 대충 그런 의미를 담아 물었더니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 상 받아야 해요!」

"뭔 상이요?"

「황금화살상이요! 정부에서 직접 주는 상인데······!」

그것이 뭔 듣도 보도 못한 상인가. 모르겠다.

평소 같으면 구글에라도 검색해보련만, 탄창 갈아낄 시간도 부족한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무튼 본인이 오고 싶다니 말리진 않았다. 통화를 종료하고는 계속해서 사냥에 전념했다.

"한희 씨, 탄창 가져왔어요?"

"예, 이게 마지막······!"

한희가 가져다준 헌터 라이플 탄창을 교체하며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시야에 담긴 불사조를 보고서는 눈을 부릅떴다.

저 새대가리 새끼가, 지금 어디로 날아가는 거냐?

놈이 날아가는 방향을 보니 저대로면 어느 빌딩에 부딪힐 상황이었고, 과연 그랬다.

불사조가 웬 빌딩에 들이박았다.

보통 새 같으면 저대로 추락했으련만, 저놈의 몸은 화염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제든지 몸 크기가 변하는 유동적인 몸이다.

제 몸보다 작은 창문을 뚫고 들어간 불사조의 불타는 몸은, 반대편 벽의 창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놈이 휩쓸고 지나간 빌딩 층 전체가 화염으로 가득 찼다.

방금 저게 뭐 하는 짓이었는지 알 만하다. 사냥. 놈이 호주의 들판에서 하던 짓을 이곳 빌딩 숲에서도 하는 모양이지.

내가 알기로 불사조가 헬기며 전투기를 터뜨리는 것은 단순히 재미로 그러는 것이요, 실제 사냥은 저런 식으로 고층 건물을 습격하여 그 안 사람들을 태워죽이는 방식으로 해낸다던가?

그리고 정신적 그물망으로 그 빌딩 안을 더듬어 보니, 제기랄. 당연히 그 안에도 사람이 있었다.

내가 평소에 서울 종자니 어쩌느니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 건물 안으로 공간이동 했다.

"물! 무울!"

화염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사람을 붙잡고 공간이동 했다. 그러길 여러 번 반복했다.

효율적으로 공간이동 하기 위해, 사람을 여럿 모아 한꺼번에 공간이동 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 전에 죄다 타죽을 상황이었으니까.

사람이 발견되는 족족 바깥으로 옮기자니, 구출을 마쳤을 때 나는 지쳤고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몸 또한 너무 뜨거웠다. 이건 공간이동을 남발해서일까? 아니면 불 속을 휘젓고 다닌 탓일지도.

역장 외골격이 열에 대한 내성을 제공한다지만 그마저 완벽하진 않다. 열선 능력이 역장체를 쉽게도 뚫어버리는 걸 보면 한계가 있는 모양이니까.

내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빌딩 밖으로 공간이동 하려던 차였다.

창밖에서 날아온 굵직한 물줄기가 내 얼굴을 강타했다. 이런, 씨······.

눈살을 찌푸리며 창밖을 보니, 소방차 네 대가 돌아다니며 화재 진압하느라 애쓰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걸 보고서 욕설을 지껄이려다 말았다.

데스클로며 여러 괴수가 날뛰는 상황엔 소방차 내부인들 안전할 수가 없는데, 여러모로 다들 고생이었다.

이 와중에 각성자 헌터인들 쉴 수 있을 리가 없다.

정신적 그물망을 통해 석장실을 보니 그 역시 바삐 일하고 있었다.

석장실은 지금 데스클로 수십 마리 사이에 돌격하고 있었다. 데스클로의 역장 발톱 따위는 자신의 내부에 닿지 않는단 사실을 믿고서, 데스클로 무리에 돌격해서는 육중한 다리로 놈들을 짓밟고 기관포탄으로 휩쓸고 손에 든 길쭉한 봉으로 때려죽였다.

평소라면 저 전술병기 혼자 날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련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이곳저곳이 온통 난리였으니까.

이 와중에 특무대만큼이나 한가한 서울의 각성자가 하나.

「사태가 생각보다 너무 심각한데, 이 정도 규모면 강준치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연락해봤더니 현장에 데스클로 없으면 오겠답니다!」

「아, 씨! 안 오겠단 거네······」

무전을 듣고서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상황에 안 오겠다고? 정말?

강준치가 한국을 싫어한다면서 정작 한국을 떠나지도 않는 주제에, 계속 갯강구니 뭐니 하며 열심히 혐한 정서를 드러내는 것은 이럴 때를 대비한 것일지도 몰랐다.

강준치는 자신을 극렬한 한국 혐오자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이 나서면 쉽게 해결될 상황에 나서지 않고 편히 휴식이나 취하는 나태함에 대한 자기변호를 완성한 셈이었다. 그러니까 대충, 사람들이 죽든 말든 혐오스러운 갯강구들이 죽는 것이므로 자기가 나설 이유가 없단 식으로······,

이 와중에 화재 진압하던 소방차들이 데스클로 무리에 휩쓸렸다. 내가 소방차 안 소방관들을 안전한 곳으로 공간이동 시켜줬을 때였다.

「대피소! 대피소에 샌드웜 한 마리가 침입 시도 중! 석장실, 빨리 그쪽으로―」

「나 거기까지 달리려면 한참 걸려!」

그 무전을 듣고서 나는 곧바로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김극인데, 대피소는 내가 맡겠습니다."

그러고는 공간이동 했다. 대피소 앞으로.

게이트 사태에 대비한 대피소는 지하에 있으며, 두꺼운 강철 문과 그보다 두꺼운 콘크리트 층으로 보호받는다. 데스클로의 뭐든 자르는 칼로도 뚫을 수 없을 만치 견고한 보호 수단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바위 정령을 상대로는 무력했다.

나는 대피소 안으로 굴을 뚫는 중인 괴수 한 마리를 보았다.

샌드웜(Sandworm)이었다. 바위로 덮인 지렁이 같은 놈.

바위 정령이 되기 전에는 장어 비슷한 어류였을 것이다. 소월에서는 건기마다 땅속에 묻혀 지낸단 종인데, 그리 땅속에 지내는 과정에서 바위 정령으로 각성하는 경우가 많다던가?

그리고 지금, 몸길이가 칠 미터쯤 되는 샌드웜이 대피소의 천장을 구성하는 콘크리트 층을 분해하고 있었다.

벌써 그 두꺼운 콘크리트 층이 거의 다 뚫렸다. 벌써 깊숙한 굴 하나가 파였는데, 바위 정령 특유의 괴력과 암석 조종 능력을 통해 굴을 파냈을 것이다.

이대로면 저 아래 대피소가 드러날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는 땅을 박차며 공간이동 했다.

"이리 와, 새꺄―!"

헌터 라이플에 역장을 씌운 채, 그 총구를 샌드웜의 바위 외피에 쑤셔 박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면서 힘으로 놈을 질질 끌어냈다. 굴 파느라 집중하던 놈은 얼마 저항하지 못하고 내게 끌려 나왔다.

놈을 대피소에서 충분히 먼 위치로 끌어내서는 또다시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아까 내려놨던 망치를 들고 왔다.

그것을 놈에게 내리쳤다.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그렇게 놈을 두들기길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샌드웜의 몸체를 이루었던 바위가 산산조각나 모조리 바닥에 떨어지고, 주변에 암석 잔해가 널브러졌을 때, 결국 놈은 죽었지만 나 역시 잔뜩 지친 채였다. 몸도 지나치게 움직였거니와 공간이동도 지나치게 썼다.

그러나 이 와중에 쉴 수는 없었다.

날 향한 무전이 걸려왔다.

「김극 씨, 아직 대피소 앞입니까?」

"그런데 왜······"

「게이트에서 또 데스클로들 튀어나왔습니다. 척 봐도 일흔 마리는 되는데, 그쪽으로 가고 있고요! 공간이동 해서 자리 벗어나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미리 알아두시라고―」

공간이동 해서 자리를 벗어나라고?

나는 방금 샌드웜이 파낸, 깊숙한 굴이 파여버린 대피소 위를 보았다.

저걸 보니 내가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저 굴 안에 데스클로가 들어가 발톱 몇 번 휘두르면, 대피소 안으로 통하는 통로가 순식간에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야 하나?

헌터 라이플의 탄은 진작 다 쓰고 없다. 한희가 새 탄창을 구하겠다며 어디론가 달려간 마당이지만, 아까 그가 말하길 마지막 탄창이라 했으므로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망치를 휘둘러가며 싸워야 한단 소린데, 그건 미친 짓이다.

뭐든 잘라낼 수 있는 칼날을 가진 데스클로들을 상대로 근접전을 벌이는 것 자체가 끔찍하게 위험한 일인데, 그것도 수없이 많은 수를 상대로?

그럴 수는 없다. 이쪽의 반사신경이 얼마나 좋든 순식간에 베여 죽고 말 것이다.

공간이동을 거듭해 둘러싸이지 않게 위치를 변경해가며 싸우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텐데, 아까 들은 숫자를 상대로는 그러기도 어렵다. 저놈들의 숫자를 반쯤 줄이는 것보다 이쪽의 신경계가 타버리는 것이 먼저일 테니까······.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백담비였다.

「저 왔어요! 지금 어디······」

그녀가 알려준 장소로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나는 경기관총 한 자루를 가져온 백담비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과 저기 멈춰선 소방차 두 대를 보니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서 대피소 근처 건물 안으로 공간이동 했다.

그다음 급히 설명했다.

"담비 씨, 저번에 눈보라 일으켰죠. 이번에도 그럴 수 있어요?"

"어느 규모로요?"

"최대 규모로요. 그것도 완전히 시야가 가려질 만큼 자욱하게······ 지금 말고, 저 아래에 데스클로들 들이닥치면 그때! 알겠어요?"

백담비와 함께 일할 때 좋은 것은, 그녀는 경험이 많은 만큼 급한 상황에 쓸데없는 질문 따윌 하지 않는단 점이다.

지금도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이후로 건물 안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자니,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도로를 가득 채울 만치 수많은 데스클로들이 저 아래에 들이닥쳤다.

"지금!"

내가 외쳤고 백담비가 내 말을 따랐다.

그녀의 시선이 저 아래 데스클로들에게 닿았다.

그러자 그 중심에서 하늘색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냉기를 한껏 담은 소용돌이였다.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그 규모를 부풀려서는 도로를 넘어 거리 전체를 휩쓸었다.

마치 세상 전체를 가려버린 듯한 눈보라였다.

이제 데스클로도, 대피소 입구와 거기 뚫린 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저 눈보라 안에선 내 모습 또한 보이지 않으리라. 그러니까, 데스클로들의 눈에.

눈보라가 일종의 연막이 되리라 믿고서 예의 요청을 했는데, 보아하니 효과가 있었다.

잠시 후, 데스클로들이 내던 발소리가 그쳤다. 놈들의 질주가 멈춘 것이다. 단순히 추워서는 아닐 테고, 무턱대고 움직이기엔 눈보라에 시야가 가려진 탓이리라.

과연 내 눈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저 앞에 펼친 정신적 그물망이 놈들의 존재를 똑똑히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나는 저 아래로 공간이동 했다.

그다음에는 망치 한 자루 쥐고서,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거센 눈보라를 가르고 망치를 내리쳤다.

포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쾅―!'

82화 호주의 재앙, 불사조 - [3]

망치에 닿은 살과 뼈가 통째로 으깨졌다. 그 감촉을 양손으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내 안면으로 괴수의 살과 피가 튀었다.

얼굴에 묻은 오물을 닦아낼 틈은 없다.

망치를 내리치고 휘두르고 내리쳤다. 저 앞으로 힘차게 내리쳤다가, 그 반동을 실어 뒤쪽마저 두들겼다.

쉬지 않고 망치를 움직이자니, 역장 안에 스며든 눈보라의 감촉이 감미로웠다. 격한 운동과 계속된 공간이동으로 뜨거웠던 몸이 조금씩 식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와중에 백담비라고 놀지 않았다. '드르르륵―'

내 라운드걸은 건물 위에서 경기관총을 거치해놓고 쏴 갈겼는데, 허공에다 막 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놈들을 향해 사격했다. 하기야 그녀는 정령이므로 눈보라 안 영혼들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한편 자기네가 죽어 나가는 것을 데스클로들도 인식한 듯했다. 그러고는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걸까?

눈보라 안, 멈춰 있던 데스클로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놈들은 앞도 살피지 않고 그저 달렸다. 그리 마구잡이로 질주하다 갈고리발톱을 동족에게 부딪쳤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베거나 물어뜯으며 난리가 났지만, 워낙 수가 많았기에 무탈하게 저 앞으로 달려 나가는 놈들도 몇 있었다.

이대로면 몇 놈은 눈보라에서 벗어날 텐데, 그랬다간 골치가 아파진다. 데스클로는 몇 마리만 날뛰어도 사람들에겐 재앙 아닌가.

과연 눈보라 바깥으로 빠져나간 데스클로들이 그물망에 포착되었다.

그러나, 오······.

내가 걱정했던 사태, 그러니까 눈보라를 벗어난 데스클로가 굴 안으로 들어가 대피소에 침투하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눈보라 바깥에서는 사람 하나가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칼 한 자루를 휘두르며, 데스클로가 눈보라 속에서 뛰쳐나갈 때마다 놈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족족 베어버렸다.

저 칼잡이가 누구인지 따로 확인할 것도 없었다.

한희였다. 녀석은 지금까지 도우미 역할이나 자처할 뿐이었지만,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기어이 괴수를 손수 죽이기로 맘먹은 모양이지?

눈보라가 서서히 그치는 가운데, 나는 괴수들의 피와 살로 가득 찬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과연 한희가 칼 한 자루 쥔 채 저 앞에 서 있었다. 데스클로들의 시체를 밟고 선 칼잡이의 모습이 그리 근사할 수가 없더라.

내가 씩 웃어주니 한희 또한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한희가 말했다.

"이건 모쪼록 비밀로······"

"그러긴 너무 아깝지 않나? 공을 세웠는데 비밀로 해야 한다니 어이가 없네······ 아무튼 뭐,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나야말로! 하여간 헌터가 칼 휘둘러서 괴수 잡는 건 처음 봤는데, 이건 이거대로 괜찮네요? 망치로 괴수 처치하는 건 한국에서 내가 최초인 걸로 아는데, 그쪽은 한국에서 칼로 괴수 처치하는 최초가 되는 건가?"

내 말에 한희가 슬며시 미소 짓는 걸 보니 칭찬 몇 마디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그 기분이 더 좋아지도록, 내가 잘했다는 의미로 그 어깨를 두드려주자 한희는 움찔하면서도 히죽 웃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새 탄창을 구해보겠다며 휙 하고 사라졌다.

한편 백담비가 건물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위를 올려다보더니 내게 물었다.

"이제 저거 잡을 거죠? 불사조?"

나 또한 그녀가 보는 하늘을 보았더니, 불사조가 저 위를 날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건 못 잡죠. 왜요, 잡고 싶어요?"

"예. 가능하면······"

하여간 이 여자가 공을 세우려는 욕심은 나 못지않다.

그 점이 무척 맘에 든다. 진짜로 귀여운 년.

"아까 말했던 그 상 받으려구요? 황금화살상?"

"예······!"

"그래도 안 돼요. 봐봐, 저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는데 저걸 뭔 수로 잡아?"

내가 그리 말할 때였다.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던 백담비가 두 눈을 부릅떴다.

나는 삿대질하고 있던 저 위로 고개를 돌리고는 흠칫했다.

불사조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어째서?

심지어 불사조는 아까보다 훨씬 커 보였는데, 그것은 내 눈의 착각이 아닌 듯했다.

놈은 사냥에 유리하도록 제 크기를 부풀린 것 같았다. 십 미터였던 날개폭을 십육 미터로 부풀린 불사조가, 이쪽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그 하강하는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랐다.

나는 즉시 백담비의 손목을 붙잡고서 근처 건물 옥상으로 공간이동 했다.

곧이어 우리가 있던 곳을 불사조의 이글거리는 날개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자리의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는 가운데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까까진 내가 뭘 하든 본체만체하더니, 저놈이 갑자기 왜······.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려다 말고, 난 백담비를 보고서 상황을 이해했다.

백담비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가 말했다.

"저를 노리나 본데요?"

나는 우리가 있는 옥상으로 솟구친 불사조를 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런가 본데······!"

또다시 불사조가 이쪽을 덮치려 드는 가운데, 나는 백담비와 함께 공간이동 하여 최대한 멀리 이동했다.

한편 두 번이나 우릴 노린 걸 보니 확실해졌다. 저 새는 백담비를 반드시 사냥해야 할 표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모름지기 얼음 능력자는 만만하면서도 가치 있는 사냥감이다. 그래서 게이트 안의 괴수들은 얼음 능력자들을 노리기 마련이요, 거기서 더 강해진 얼음 정령인들 그 신세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심지어 내가 신체강화 혹은 거대화 능력을 지닌 괴수를 사냥하면 그 힘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듯, 정령끼리도 마찬가지다. 화염 정령에게 얼음 정령이란 자신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난 분홍빛 새끼 쥐쯤으로 보일지도 모르지.

내가 백담비를 대피소 안에 넣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그녀가 물었다.

"그러면 이제는 잡을 수 있을까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던지라 잠시,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지금 본인을 미끼로 쓰자는 거예요?"

"예. 이대로 유인하면 저 새를 망치가 닿는 곳까지 끌어내릴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름지기 사냥할 가능성이 보인다면 사냥해야 하는 법.

저 악명 높은 불새라면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할 필요가 있는 것이, 놈은 소월 태생의 정령이 아니라 지구 출신의 정령이므로 스스로 게이트를 여는 방법을 모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이 모든 사냥이 끝나면 알아서 게이트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한반도를 떠돌지 모를 놈이다.

기회가 있을 때 해치우는 게 좋으리라.

"그래서 이제 어쩔까요. 제가 도로에서 노래라도 부르며 유인해볼까요?"

백담비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도로에서 유인해봤자 소용없을걸요? 작살 같은 걸 맞혀서 땅에 옭아맬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담비 씨, 저번에 콧노래 흥얼거리는 거 들어보니까 노래 부르시면 쟤가 도망갈 것 같은데······"

"예?"

백담비가 눈을 크게 떴고 내가 서둘러 설명했다.

"건물 안으로 유인하잔 말입니다. 일단 안에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어렵게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물론 저 불새가 건물 안에 들어갔다가 바로 빠져나갈 수 있음을 이미 봤다. 그러니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으려거든 따로 준비가 필요했다.

「장실 씨? 상황 대충 종료됐죠. 여유 있으면 협조 좀 해줄래요? 우리가 지금 저 파이어 호크 잡으려는데······」

무전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뒤, 서로 준비가 됐을 때 우리는 작전을 실행했다.

불사조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그 근처 빌딩 안으로 공간이동 했다. 백담비와 함께.

"자, 옵니다!"

이 미끼는 과연 효과가 있었다. 불사조가 저 앞으로 날아가다 말고 갑자기 수직으로 하강하는 걸 보니.

우리가 이 안에 있음을 알고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건물 안에 있더라도 정령은 그 영혼을 볼 수 있다.

과연 하강하던 불사조는 순식간에 우리가 있는 3층 높이에 도달했다.

뒤이어 창문의 구멍으로, 불사조가 이 건물 층에 파고들었다.

창문을 통과하기 위해 줄어들었던 불새의 몸이 다시 부풀어오르던 그때, 나는 백담비를 잡고 공간이동 했다.

그렇게 그녀를 저 아래층에 치우고는 나 혼자 복귀했다. 연속적인   공간이동.

나 혼자서, 이곳으로 날아오던 불사조를 맞이했다.

놈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망치를 내리쳤다. '쾅!'

망치가 불사조의 화염 몸체를 관통하여 바닥을 내리쳤다. 그로써 생겨난 충격파가 불사조의 몸체를 휩쓸었다. 불사조의 몸 일부가 흩어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그러나 공격당한 와중에도 불사조는 내게 관심이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놈은 사라진 백담비를 찾으려 애쓰는 눈치였다.

백담비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지만, 녀석은 날 사냥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놈은 정령인 만큼 내가 역장 외골격 능력자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요, 열 내성이 있는 만큼 죽이기가 어렵단 걸 아는 것이리라.

그리고 내가 예상했듯, 백담비가 보이지 않자 불사조는 나와 싸우려 드는 게 아니라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불사조가 저 앞으로 날아 창밖으로 빠져나가려던 그때였다.

거대한, 아주 거대한 거인의 얼굴이 불사조가 향하려던 창문을 가로막았다.

석장실. 그의 거대한 암석 손바닥을 보고서 불사조는 그 방향으로 날아가려다 말고 멈췄다. 저 무지막지한 손에 붙잡혀선 안 된다는 것쯤은 놈도 알고 있을 터였다.

결국 불사조가 방향을 전환했다. 측면으로 나가려는지 제 자리에서 선회하다가, 조금 날아가다 말고 또다시 공중에서 멈췄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부자연스러운 정지였다.

불사조가 빠져나갈 이 층의 출구는 얼음에 가로막혀 사라졌다.

이 건물의 창문들이 일제히 얼어붙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얼어붙는 걸 넘어, 창문과 그 주변을 집어삼킨 얼음벽이 생겨났다.

앞서 소방차들이 돌아다니며 물을 뿌려댔다. 그 탓에 이 빌딩의 이 층에도 물이 흥건했다. 백담비가 그 능력을 발휘하기 충분할 만큼. 괜히 이 장소를 고른 것이 아니었다.

공기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네 방향의 벽이 모조리 얼어붙었다. 심지어 출입구마저 얼어붙자 저 불새가 빠져나갈 곳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이 층에 있는 것이라곤 둘뿐이었다. 나, 그리고 저 괴수.

뒤이어 백담비의 능력이 다시 한번 발휘되었다.

아까 그랬듯, 이 층에서도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욱 짙은 눈보라였다. 눈보라는 소용돌이치며 벽과 천장과 바닥을 세차게 두들겼다. 그리고 또한, 나와 불새의 몸도.

그리고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이 눈보라 속에서, 저 불새의 존재만은 확연했다.

아니, 놈의 존재는 오히려 눈보라에 갇힌 지금 더욱 뚜렷해진 것 같았다. 불과 얼음이 만나 맹렬히 상호작용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눈보라 속에서도 휘황한 불사조의 광채를, 그 화염 몸체와 눈보라가 접촉하며 퍼지는 증기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정령은 영혼을 볼 수 있으니, 놈 또한 나를 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괴수와 헌터가 서로를 명확히 인식했다면, 이제 둘이서 벌일 행동은 하나뿐이다.

"날 봐라, 새끼야―!"

내가 달려들었고 불사조가 세차게 홰를 쳤다. 뜨거운 열기가 동반되는 날갯짓.

그렇게 불사조는 뒤로 물러나면서도 반격했다. 놈의 이글거리는 발톱이 허공을 휘저었다.

나는 피하지 않고 계속 돌격했으며, 화염 속에서 망치를 내리쳤다. '쾅!'

망치에서 퍼진 충격파에 불사조의 몸이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합쳐졌으며, 비로소 분노한 듯 놈은 아까보다 세차게 날갯짓했다.

그 거대한 날개가 날 휩쓸었다. 나는 화염 속에서 숨을 참은 채 다시 망치를 내리쳤다. 이번에도, '쾅!'

그렇게 우리 둘은 눈보라 속에서, 사생결단을 내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 결정적인 타격은 주지 못하면서, 열과 충격만을 주고받으며 싸웠다.

내가 놈의 일부를 사방으로 퍼뜨릴 때마다 놈도 어김없이 날 열과 화염으로 뒤덮었다. 역장 외골격이 아니었다면 진작 타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역장 안으로도 열과 화염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또한 격한 움직임으로 인한 열 또한 내 몸을 덥히는 중이었다.

마치 내 몸마저 불덩이로 느껴지는 가운데, 난 웃었다.

짜릿했다. 신화 속 존재처럼 불과 증기를 흩뿌리는 눈앞의 저 불새도, 놈과 망치 한 자루 쥐고 맞서고 있는 내 존재도.

이 순간, 눈앞의 저 불새가 특별한 만큼 나 역시 특별하단 것을 나는 실감할 수 있다.

비각성자 찌꺼기들은, 그 평범한 존재들은 이와 같은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요 앞으로도 경험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입을 벌렸다간 그 안으로 열기가 스며들 것이었으므로, 나는 소리 없이 포효하며 망치를 내리쳤다.

그렇게 또 한 번 망치와 열을 주고받으니, 역장 외골격 속으로 스며든 열기를 견디기 어려워졌다.

이 와중에 내 상대인들 멀쩡하진 못했다. 이 층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날개폭이 십육 미터 크기였던 불사조의 양 날개가 칠 미터쯤으로 줄어든 것을 보고서 나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알아챘다.

질식하기 직전, 나는 공간이동 하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도주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역습을 위한 준비일 뿐.

공중······. 나는 지금 공중에 있었다. 하늘이라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높은 위치에.

숨을 깊게 쉬어 차가운 공기를 한껏 음미한 뒤, 나는 낙하를 시작했다.

하늘의 공기와 중력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잠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 낙하를 온몸으로 만끽했다.

그리고 내 몸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가속도가 실렸을 때, 나는 비로소 공간이동 했다. 내 적수가 기다리고 있는, 열과 증기와 눈보라로 가득찬 그곳으로.

여전히 증기를 피워내는 신화 속 괴수가 다시금 눈앞에 보인 순간, 나는 망치를 내리쳤다.

그와 함께 인천 만세, 하고 외친 것 같은데 그 소리가 내 귀에 들리진 않았다. 그 외침보다 훨씬 거대한 소리가 내 고막에 가득 찼으니까.

단 한 번의 망치질이 모든 상황을 종료시켰다.

저 하늘에서의 가속이 온전히 실린 망치질이었다.

내 망치가 불사조의 몸체를 가르고 바닥에 닿은 순간, 그 충격이 내게도 전달되었다.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내 역장이 깨졌다. 이후로도 남은 충격이 팔과 다리를 통해 퍼지면서 전신의 장기에 출혈이 일어났지만, 괜찮았다. 죽지만 않는다면야.

뒤이어 충격파가 퍼졌다.

항공 폭탄이라도 터뜨린 듯, 층 전체를 휩쓰는 충격파······ 나는 그 충격파에 불사조를 이루고 있던 모든 화염이 휩쓸리는 것을, 눈보라와 화염이 한데 뭉쳐 사방으로 파도치는 것을 보았다. 그로 인한 증기의 폭발적인 확산도. 이 모든 것이 그저 압도적이었다.

마침내 충격파가 저 바깥으로 퍼졌을 때, 이 층에 남은 것이라곤 나와 증기뿐이었다.

그리하여 불사조가 죽었다. 내 머릿속에 내 이름이 연호되며 희열이 찾아왔지만, 그 희열을 오래 즐기진 못했다.

아······.

뜨거운 증기 속에서 나는 피를 토했다. 다리를 움직이자니 움직여지지 않았다. 충격이 머리에도 퍼진 듯, 공간이동 하려다 실패했고.

다시 공간이동 하기 위해 애쓰다가 또다시 실패한 그때였다.

방금 충격파로 말미암아 유리와 얼음벽마저 모조리 깨져버린 마당이었다.

그리하여 훤히 뚫린 저 바깥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새였다. 날개폭이 십 미터쯤 돼 보이는.

"이건 또 뭔······"

몸만 얼음일 뿐, 방금 불사조와 똑같이 생긴 새였기에 잠시 흠칫했지만, 나는 잠자코 그 새가 내 양쪽 어깨를 붙잡도록 내버려 두었다. 누가 보냈는지 알 만하니까.

날 붙잡은 얼음 솔개는 뜨거운 증기를 뚫고서, 날 이 건물 밖으로 데려갔다.

그리하여 저 바깥, 도로의 풍경이 보였다.

저 아래 서 있는 내 라운드걸도.

"······백담비?"

저 아래, 소방차 옆에서 백담비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시야가 흐릿했지만, 초재생능력이 발휘되고 있는바 지금 막 시력이 복구되었다.

복구된 시력으로 보니, 백담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표정과 같은 목소리로 내게 외쳤다.

"괜찮아요? 뭔가 터지더니 못 움직이는 것 같던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목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난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웃었다. 진심을 담아 기분 좋게 웃었다.

힘들고 더웠지만, 끝내주는 하루였다. 여러모로.

83화 호주의 재앙, 불사조 - [4]

Q. 역대급 규모의 사태였는데, 막상 피해는 의외로 크지 않았다. 피해가 극히 적었던 이유로 김극 헌터의 지원이 맨 먼저 꼽히는 상황이다.

상당수의 괴수가 김극 헌터에 의해 처리되었으며, 당시 사망할 수 있었던 수많은 시민이 김극 헌터에 의해 생존했다. 이 놀라운 활약에 비결이 있다면?

"부평역에서 오 분 거리에 있는 부평 수렵 전문 학원에서 훈련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않을까요?"

Q. 담당 구역이 아니었는데도 선뜻 나서준 것에 감사한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주저하지 않고 나선 이유가 있는지

"나설 수 있는 상황이니까 나섰죠. 내가 왜 가만히 있겠습니까? 내가 무슨 특무대원도 아니고."

Q. 그날 일로 특무대에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을 줄로 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그때 생긴 감정이 여전한 것 같은데

"오히려 그때 생긴 혐오감이 더욱 커졌죠. 이 상황에도 안 나서는 걸 보니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특무대원들이 각성자인데도 봉급을 너무 적게 받는다고 생각했더니, 이번에 보니까 지금 받는 것도 너무 많이 받는 것 같더군요. 뭐 그런 밥버러지들이 다 있답니까?"

Q. 하기야 그리 말할 정도로 김극 헌터는 그날 노력했음을 안다.

그날 김극 헌터가 자신을 구출해줬노라고 증언한 사람이 놀라울 만치 많다.

그날 구출된 시민이든 사태 진압에 나섰던 군인이든, 당시 현장에 있던 거의 모두가 김극 헌터의 도움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평소 서울 사람들은 살려낼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슬프게도, 저는 그 간악한 서울 종자 중에 인천 사람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했습니다."

Q. 화염 정령에 이어 불사조까지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매번 놀라운 기록을 세우는 중이다. 특히 이번 불사조는 워낙 악명 높은 괴수였던 만큼 해외에서도 주목 중인데, 소감이 있다면 (······)

*******

"와······ 저거 봐라, 저거!"

TV 뉴스에서는 한참 동안 내 인터뷰를 내보내더니, 내가 봐도 근사한 장면을 내보냈다.

눈보라 속, 증기를 내뿜는 불새와의 사투······.

마지막 일격에 그 괴수와 층 전체가 휩쓸리는 장면으로 영상이 끝났다.

충격파가 건물 안 CCTV를 박살 냈는지 이후 장면은 담기지 못했지만,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덕분에 내가 지쳐서 빌빌거리던 모습이 방송되지 않았으니까.

아, 내가 건물에서 탈출하는 장면은 외부 CCTV에 담겼는지 뉴스에 나왔다.

정말이지 판타지 같은 장면이었다. 얼음 솔개가 날 운반하는 영상을 보며, 내 팀원들이 한 마디씩 감상을 토해냈다.

"엘사네?"

"아오키지 아닌가? 분명 만화책 볼 때 저 기술 본 것 같은······"

그리고 내 헌터팀 모두를 대표하여, 내가 내 라운드걸에게 물었다.

"어디서 난 새 기술이에요?"

한편 백담비는 모두에게 주목받는 이 상황에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신체강화자답게 시력이 초인적인 나만이 그걸 볼 수 있었을 것이다)에 힘을 주며, 담담한 표정과 목소리로 설명했다.

"정령이······ 쓰러뜨린 적 기억을 일시적으로 흡수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불사조를 쓰러뜨린 다음 그 새의 기억도 제게 흡수됐죠. 쓸 만한 기억이 있나, 바로 흡수한 기억을 살펴봤는데 딱히 쓸 만한 기억은 없었구요······"

"그리고?"

"다만 불사조가 평소에 어떻게 날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새가 행동하던 기억만은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았죠. 그 와중에 김극 씨 상황을 보니까 급한 것 같더군요······ 얼른 그곳 온도부터 낮춰보려고 능력을 사용하려니까, 방금 불사조가 날갯짓 하던 기억이 머릿속에 꽉 찬 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아, 그러니까 흡수한 기억 속 불사조의 행동하는 법을 그대로 본떠서 얼음으로 형상을 만들어보니까 정말 날았다? 그걸로 절 도운 거고요?"

"예······."

이 여자가 자꾸 말꼬리를 늘어뜨리는 것은 지금 기운이 없어서가 아닐 것이다. 반대로 너무 신났단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기운 없는 척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거, 지금도 돼요?"

백담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을 슬쩍 굴렸다. 그리하여 지금 팀원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검지를 치켜올렸다.

그 검지 끝에 주변 공기 속 수분이 모이더니, 작은 솔개의 형상을 이루었다.

"와!"

이윽고 투명한 솔개가 날갯짓하며 공중에 떠오르자 여기 모인 모두가 감탄했다. 백담비의 입꼬리는 슬슬 일반인들 눈에도 보이는 것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치 파들거리기 시작했고.

그리고 나는 저 귀여운 년, 하고 생각하면서도 감탄했다.

정령이 흡수한 기억은 쉽게 휘발되기에 흡수한 기억을 잊지 않으려거든 따로 노력해야 한다던데. 지금 이렇게 쉽게 재현하는 걸 보니 이후로도 당시 기억을 곱씹으며 여러모로 애쓴 모양이지.

이렇듯 평소에도 능력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걸까? 이 여자가 집에서는 헌트웹에 똥 같은 글만 올리느라 바쁜 줄 알았더니, 기특한 일이었다.

한편 TV에서는 계속 내 관련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뭔 시뻘건 게 휙 지나가더니 거기 있던 모든 물건에 불이 붙는 거야! 내 주변에도 불붙어선 확 퍼지지 뭡니까. 불 속에서 내가 허우적거리던 중이었거든? 그런데 김극 그 양반이 휙 나타나서는―」

"아주 김극 특집이 따로 없네요, 진짜."

성문영이 그리 중얼거렸지만, 뉴스에서 순 내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뉴스에서 집중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서울의 게이트 대응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가'에 대해서였다.

그러니까 뉴스에서는 서울이 이번 역대급 위기를 얼마나 별 피해 없이 넘겼는지, 해외사례와 비교하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최대한 공들여 설명하고 싶어 했다.

아, 이번 일을 해외에서 주목하고 있다는 국뽕 멘트까지 나왔다. 제기랄.

저따위 발언이야 거슬려도 중간중간 날 칭송하는 것마저 무시할 순 없는지라, 계속 집중해서 뉴스를 보던 중이었다.

「서울의 각 구획에는 거금을 들여 계약한 각성자 헌터가 따로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칭송하느라 열변을 토하던 TV는, 갑자기 비난조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당시 사건 지역을 담당했던 각성자 헌터는 현장 도착에 평소보다 7분 이상 늦었던 것으로 알려져 세간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

당시 헌터 협회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보냈다가 늦었다는 해명인데요. 전문가들은 이런 식으로 담당 지역을 지켜야 할 각성자 헌터들이 따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진다면 이번과 같은 (······)」

당시 석장실이 협회 회의에 참석하느라 조금 늦었던 일을 지적하는 모양인데, 황당했다.

"이거 뭐냐? 방금까진 역대급 대응이었고 역대급으로 피해가 적었다며 칭송하더니, 왜 갑자기 까내리는 거야?"

"글쎄요? 뉴스 기사 담당이 서로 달랐나?"

잠시 저놈들이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칭찬하다가 비난하다가,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가?

헌터팀과 해산하고서 귀가하고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김형만 씨에게 전화해서 의견을 물어보니, 김형만 씨는 코웃음을 치고서 제 의견을 말했다.

「대응이 완벽했다며 열심히 칭찬한 건 서울 부동산값을 신경 쓴 것 아니겠습니까? 서울은 이 정도 위기가 닥쳐도 끄떡없는 곳이라고 선전해야 부동산값이 유지될 테니까······」

"그러다 말고 갑자기 담당 A급 헌터가 지각해서 이후 대응이 우려된다며 깎아내린 건요?"

「그야 뭐, 나라에선 각성자들 모이는 게 너무 싫은가 보죠? 어떻게든 트집 잡아서 쿠사리 넣는 걸 보니, 웃겨 진짜」

듣자 하니 내 생각과 얼추 비슷한 해석이더라.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라에서 우리 각성자들이 협회를 통해 한 집단으로 조직되는 꼴을 보기 싫을 것이요, 그걸 훼방 놓으려고 언론을 시켜 나팔을 불게 했단 느낌이었는데 남이 보기에도 뻔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언론공작에 어찌 대응할 것인가, 하고 물었더니 김형만 씨는 그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경 쓸 게 뭐 있습니까? 우리가 뭐 표 벌어야 하는 정치꾼들도 아니잖아요? 우리야 뭐, 우리 할 일이나 똑바로 하면 되는 거지」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나?"

「물론 기분 엄청 나쁘죠! 너무 노골적으로 이러니까······ 하여간 나라에서 하는 일 맘에 안 드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이번에 왜, 나라에서 서울에다 헌터 아카데미 만든다잖아? 그런 거 만들 돈 있으면 현직 헌터 훈련용 예산이나 팍팍 줄 것이지······」

그 말을 듣다 말고 난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헌터 아카데미요?"

「예, 헌터 아카데미. 이번에 인원 모집해서 내년 초에 바로 열 거라던데. 처음 들으시나?」

"예, 처음 듣네요. 나라에서 운영하는 헌터 학원 같은 건가? 총 쏘는 법이며 괴수 정보 가르치는······"

「아니, 헌터 학원이랑은 다른 것 같아요」

"어느 점에서요?"

「헌터 학원은 성인들 데려다가 바로 헌터로 써먹을 수 있게 훈련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헌터 아카데미에서는 8세에서 17세까지 모아다가 교육한다던데요」

이건 또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미성년자들을 데려다가 헌터 훈련을 시킨다니?

"당장 현직 헌터들 교육은 그리 부실하게 하면서요? 그 와중에 헌터 할 애들 미리 모아다가 교육을 하겠다고?"

「내 말이! 내가 예전부터 헌터들 교육이 부실한 걸 매우 고깝게 생각했거든? 그래서 합숙 훈련 기간 늘리고 교육내용 충실하게 할 방법 없나 따로 알아봤는데, 예산이며 지원금이 말도 안 되게 적으니까 어쩔 수 없어. 그 예산 갖곤 아무리 노력해도 예비군 교육 수준으로 부실할 수밖에 없는 거 있지?

이 와중에 애들용 학교를 세우겠다니, 대체 뭔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진짜 헌터 할 애들 모으는 건 맞나? 모집 요강 보니까 주로 각성자 어린애들을 모으는 것 같던데, 딴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통화를 마친 후에도 난 방금 들은 대화 내용을 곱씹었다.

헌터 아카데미라. 그것도 각성자 위주로 모집한다고?

나라에서 어린 각성자들을 모아다가 뭔 일을 하려는 걸까. 곱게 보아 넘기기 어려운 일이었다.

보나 마나 변변찮을 것이 분명한 일이요, 변변찮은 걸 넘어 분통 터질 일일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나라에서 하는 일들은 죄 그랬다.

*******

한희는 아버지 옆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

「불 속에서 내가 허우적거리던 중이었거든? 그런데 김극 그 양반이 휙 나타나서는―」

뉴스에서 김극, 그 이름이 언급된 순간이었다.

아버지, 한희석이 중얼거렸다.

"김극 저 새끼 저거, 이대로 계속 설치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데······!"

한희는 아버지가 이렇게 혼잣말할 때 혼잣말하는구나, 하고 넘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다간 아버지는 '나 혼자 말하나?' 이러면서 자신의 발언이 무시당했단 사실에 노여워할 것이다.

분명하다.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툭하면 그랬으니까.

한희는 언제나 아버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 기울인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그 화제에 관심 있는 척 일부러 말을 받았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봐라, 저 새끼 계속 헌터 하게 내버려 두니까 한도 끝도 없이······ 레벨 업?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대충 뭐 그런 걸 하잖아. 보통 각성자들은 어느 정도 괴수 잡다 보면 성장이 멈춘다던데 김극 저 새끼 성장은 언제 멈추는 건지 모르겠네. 진작 헌터 노릇 더 못 하게 막았어야 했는데······."

"어떤 식으로······?"

"그날 충돌했을 때 근신을 시키든가 헌터 활동 정지를 시키든가 했어야 한단 말이다! 그러지 않고 계속 괴수 잡게 내버려 두니까 이게 뭐냐? 이 와중에 역장 외골격까지 각성했으니까 저 새끼 저거 공간이동 하며 테러라도 벌였다간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데. 이거 누가 책임질 거냐구?"

아버지는 지금 손쓰기 어려울 만치 강력한 각성자는 당연히 나라에 위협이 된단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평소의 지론이라 새삼 놀랄 필요는 없었다.

어쨌건 아버지가 그리 열변을 토했으니, 귀담아들었단 증거로 이쪽 의견도 내놓아야 했다.

한희가 말했다.

"그래도 김극 저 사람은 매우 모범적인 편이던데요? 제가 따로 조사해보니까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저만큼 몸 사리지 않고 사태 터질 때마다 노력하는 헌터가 또 없다던데. 인천은 이미 저 사람 덕을 잔뜩 보았고, 서울도 이번에―"

"각성자 새끼들이 나라 어려운 마당에 노력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그것보다 먼저 나라 지시를 잘 들어야지! 중국 봐라. 그 뭐냐, 훠선?"

"중국에 그 화정(火精) 능력자요? S급이라는······"

"그래, 훠선 그놈이 김극 저놈보다 훨씬 센 급인데도 공산당 말 잘 듣잖아? 하기야 그놈은 소방관 일 하다가 각성한 모범생이라니 당연한 건가? UFC? 뭐시기 싸움장에서 싸움질이나 하던 김극 저 새끼랑은 마음가짐부터 달라 가지곤······"

하다 하다 공산당과 그 휘하 각성자 칭찬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내심 어이없는 가운데, 표정 관리를 실패한 모양이었다. 이쪽 얼굴을 본 아버지가 물었다.

"내가 말하는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내 말이 맘에 안 들어?"

"예? 그게, 아뇨······"

"그러고 보니 너, 이번에 김극 저 새끼 도와서 일했다고 했나?"

"예? 예······."

정말이지 고생했다. 가속 능력은 신경계를 과로케 하는 능력이라,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잔뜩 지쳐서는 상황이 종료되자마자 드러누워야 했다.

그리고 그 활약에 대한 아버지의 감상은 이러했다.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아버지의 표정이 일순 풀리더니, 그가 말했다.

"잘했다."

순간 한희는 안심하는 동시에 약간의 기쁨을 느꼈다. 저 양반도 아들내미가 사람 구하느라 애쓴 일은 칭찬하구나, 하고.

그리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아버지가 계속 말했다.

"김극 저 새끼, 가족은 죄 죽었거나 감방에 있는 데다 깊게 사귀는 친구도 따로 없어서 감시책 붙이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던데······ 네가 그 역할 맡으면 되겠네."

"예?"

"예? 는 무슨, 새끼야! 이번 기회에 김극 저 새끼랑 좀 친해지란 말이다. 평소에 뭔 생각하고 지내는지, 뭔 불만이 있고 뭔 계획이 있는지 그런 것 좀 파악하게. 응?"

한희가 당황스러워 멍하니 있는 가운데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연락 주고받고······ 알겠냐?"

그에 대한 한희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누구 앞이라고 '싫다'라고 대답하겠는가?

"예······."

"친해져야 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정 주진 말고! 만약의 경우엔 잘라내야 하니까. 저 새끼 저거 공간이동 하니 일단 경계심 품으면 잡을 방법도 없을 텐데. 저놈 치우려면 두 번째 기회는 없다고 생각하고, 첫 번째 시도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이후로 한희는 아버지의 각성자 관리 지론, 즉 그가 특무대장 하던 시절에 각성자들을 어떤 식으로 보고 생각했는지 들어야 했다.

그 모든 지론을 특무대장에서 쫓겨난 지금 집에서 말하는 걸 보아하니, 아버지는 언젠가 자신이 특무대장직에 복귀하리라 믿는 듯했다. 그때를 대비해 아들을 미리 정신무장 시키려는 모양이고.

그리 수십 분째 붙잡혀 있다가 겨우 방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한희가 한숨을 푹 쉬며 스마트폰을 보자니, 카톡 하나가 와있었다.

특무대 선배가 보낸 것이었다. 그 첫 문장을 보자마자 한희는 생각했다.

조졌네.

[김창식]

이 사진 뭐냐. 어떻게 해명할 거냐?

첨부된 사진은 한희 자신이 데스클로의 시체를 밟고 있는 사진으로, 당시 대피소에 숨어있던 시민 누군가가 몰래 촬영한 듯했다. 그것이 인터넷에 퍼져서는 특무대원들도 알게 된 모양이고.

이제 출근하면 어떤 수모를 당할지는 뻔했다. 한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생각했다.

출근하기 싫다.

그리고 직장에 있느니보다는 낫지만, 집에 있기도 싫다.

어디에 있든 감옥에 갇힌 것 같다.

끔찍한 기분 속에서, 한희는 망상하듯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서울에 게이트가 열렸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그 날.

당시 한희는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괴수를 상대로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특무대 선배며 아버지와 달리, 헌터 김극은 그리 노력한 자신에게 훌륭하다고 말해줬다.

자신의 활약이든 솜씨든 놀랍다고, 그토록 대우받고 칭송받는 김극 자신과 이쪽이 동급인 양 대우해주었다.

그러기에 앞서, 호텔 식당에서 김극 그가 뭐라 말했던가. 이 정도 능력이 있는 한희 자신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해줬지 아마?

주변 사람들이 죄 이 모양이라, 그렇게 인정받을 기회가 평소에 많지 않아서일까.

그때 들은 말들이 새삼 맘속에 스며드는 것 같다.

그날이 그립다.

괴수들이 날뛰고, 자신 또한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그날이······.

84화 아카데미 입학생 신미래 - [1]

나는 일찍이 대한각성연대에서 활동하며, 해외 각성자들의 사례를 여럿 보고 들었다.

정확히는 각성자들이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를 주로 접했다.

예컨대 동유럽에는 각성자 갱단들이 난립하고 있다.

동유럽 국가 대부분에는 헌터 제도가 없다. 이 말은 곧 강력한 각성자들이 합법적으로 돈과 지위를 얻을 수단이 없단 뜻으로, 그런 곳에서 각성자들은 경찰 혹은 군인으로 특채될 수 있을 뿐이다.

그따위 월급쟁이 생활을 원치 않는 각성자들이 당연히 많다. 그런 각성자들은 자연스레 갱단을 구성하여 각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

이 와중에 한 악명 높은 각성자 갱단은, 아예 유럽 전역을 무대 삼아 날뛰고 있다.

그들은 차 한 대에 타고서 유럽의 각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만만한 국가에서는 대놓고 강간이며 강도질 따윌 저지르다가 만만하지 않은 국가에서는 눈치를 보며 적당히 숨어 지내는 식으로 활동 중이다.

EU에서 결성한 각성자 특수부대가 한 차례 동원되어 그들을 토벌하고자 시도했지만, 해당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알다시피 각성자들끼리의 싸움은 단순히 쪽수만 많다고 유리한 게 아니다. 해당 갱단에는 S급이 아닌가 의심되는 초인 하나가 있어서, 그 각성자 혼자서 특수부대 각성자 수십 명을 모조리 살해했다.

이후로는 더욱 거칠 것이 없어졌는지 그들의 범죄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 요새 그들은 대낮에 강간하고 살인하면서 그 영상을 촬영한 스너프 필름과 섹스 비디오를 인터넷에 올리고는 찬양받는 중이다. 그 외에도 온갖 말초적인 쾌락을 만끽하며 지내는 중이라던가?

일본에서는 한 바람 능력자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하고 있다.

카마이타치라 불리는 친구인데, 길거리 행인을 상대로 칼바람을 휙 날려서는 그 온몸을 여기저기 베어 출혈을 일으켜 기어이 죽여버린다.

어떤 특이한 사상을 품고서 벌이는 살인이 아닌, RPG에서 슬라임 죽이며 경험치 노가다하는 감각으로 벌이는 살인이다.

바람 능력(정확히는 풍정 능력이다)에 각성하려거든 바람을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데, 그 특성상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는 중에 간혹 각성하는 능력이지만 그 친구의 경우에는 도쿄 타워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하다가 각성했다. 심지어 재능이 뛰어났는지 각성하자마자 바로 정령으로 화해서는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그리고 워낙에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친구였던 데다 사이코패스 기질 또한 있던 친구라서, 앞서 말했듯 사람들을 단순히 제 능력 성장을 위한 경험치로 보고서는 거침없이 살해하고 있다.

이 와중에 바람 정령은 정령 중에서도 특히 제압하기 어려운 종류인지라, 일본 당국은 매일 국민이 수십 명씩 죽어 나가는 상황에도 전혀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는 중이다. 또 다른 바람 정령이 탄생할 게 두려운 듯, 일정 높이 이상에서의 투신자살을 금지하는 법을 만든 것이 그들이 벌인 유일한 조치였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에서 각성자 관련 문제가 발생했다.

북한에서는 각 지방에서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는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전술핵을 필사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한 신체강화자 장군이 왕족 중에 각성자가 없음을 근거로 삼아 저들이 어찌 특별한 혈통일 수 있겠냐며 신 왕조를 창립하려 시도 중이다.

미국에서는 암살 의뢰를 받은 얼음 능력자들이 유력 정치인들을 살해한 바 있으며······.

이 와중에 한국의 경우에는, 우울하게도, 수많은 해외사례에 비하면 거의 아무런 문제가 없는 축에 속한다.

각성자 갱단이랍시고 경찰들마저 두려워하던 김석희 일당을 보라. 그들이 공권력을 무시한 채 벌이는 짓은 고작 담배팔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또한, 강준치가 정부를 상대로 각성자들을 강제징집 하려 들다간 모조리 죽을 줄 알라며 윽박지른 덕에 전 세계에서 가장 일찍 도입된 편인 헌터 제도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돈과 명예와 지위를 원하거든 헌터를 하면 된다는 간단한 사실 덕에, 국내의 강력한 각성자들은 범죄나 국가 전복에 관심 없이 그저 괴수를 사냥하느라 피땀을 흘리며 일하는 중 아닌가. 또한 최강의 각성자 강준치는 가끔 시민들이나 괴롭힐 뿐, 기존 체제를 위협할 무언가를 저지르진 않았다.

이 와중에 한국의 각성자들이 치는 사고라곤 얼음 능력자들이 돈 받고 누군가를 암살하려다 경찰에 붙잡히는 것이 고작이니, 이토록 살기 어려운 중에 괜히 국뽕 TV에서 한국이 딴 나라들보다 훨씬 낫다며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마저도 부러워할 만큼 각성자 관련 문제가 유독 적은 나라가 하나 있으니, 바로 중국이다.

초인 중의 초인, S급 각성자들마저 공산당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기로 유명한 그곳. 각지 각성자들의 신상은 완전히 관리되는바, 등록된 모든 각성자들의 이동 경로를 CCTV를 통해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미성년 각성자들은 따로 모아 당에 충성하는 훈련을 시키는 그곳.

그리고 내 보기에, 한국은 타국보다 나은 편인 현황에도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는 지금 상황에서 더 나아가 중국을 본받으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어쩌면 그놈의 헌터 아카데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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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탈환 프로젝트도 슬슬 끝이 보인다.

그러니까 인천 본토에 남아있던 괴수들을 거의 다 소탕하는 데 성공했단 소리다.

게이트에 처박힌 괴수들이며 강화군의 괴수들은 아직 제대로 손대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놀라운 진전이 틀림없다. 백 명도 안 되는 인원이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이룬 성과임을 고려하면 더욱.

"김극 만세!"

"만세! 진짜 만세!"

이 성과로 말미암아, 오늘 나는 인천시장님과 악수했으며 박미형 씨의 치하를 받았고 날 헹가래 치려던 시민 몇 명의 손목과 허리를 부러뜨렸다.

또한 내 헌터팀은 모두 시에서 특별지급한 보너스까지 받은 마당이다.

내 팀원 모두가 싱글거리는 가운데, 백담비는 차 안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딱 봐도 신나 보이길래 내가 물었다.

"황금화살상? 그거 받을 확률 높아진 것 같아요? 그래서 기분 좋으신가?"

제 기분을 들킨 게 어지간히도 당황스러운 걸까? 백담비는 흠칫하더니, 조금 뒤에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예······."

"내가 그거 유명한 상인 줄 알고 따로 인터넷에 찾아봤는데, 검색 결과가 잘 안 나오던데요? 그거 대체 무슨 상이래요? 황금화살상이라고는 총상금 삼억짜리 소박한 상 하나만 있드만······"

"아, 그거 맞아요."

"총 수상자 열 명에, 수상자 한 명당 상금 삼천만 원씩 돌아가는 그 상이요?"

"예."

나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내가 괜히 그 상을 모르던 게 아니었군. 헌터들 상당수가 존재도 모르거니와 따로 관심도 두지 않는, 요즘 물가에는 상금마저 소박하기 그지없는 상 아닌가.

그런 보잘것없는 상을 대체 왜 받고 싶어 한단 말인가? 의문이었지만, 괜히 물었다간 무례한 질문이 될 수 있어서 참았다.

한편 백담비만큼이나 임형택 씨 역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임형택 씨가 날 보며 미소 짓더니 말을 걸었다.

"제가 김극 씨 덕을 정말 많이 봐요."

"새삼스럽게요?"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새는 더욱 그래. 마누라만 해도 내가 처음에 헌터 하겠다고 말했을 땐 세상 망한 것처럼 굴었거든요?"

"왜요?"

"당시에도 헌터는 실직자들이 죽을 거 감수하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직업 취급이었으니까······. 결혼할 당시에만 해도 잘 나가던 남편이 완전히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졌구나, 하고 절망한 거죠.

그런데 요새는 아녜요. TV에서 김극 씨 얘기를 많이 하잖아? 나도 그 팀원이구요. 그 덕인지 그제야 남편이 제대로 된 일을 하는구나, 하고 감탄해주더군요? 그래서 마누라가 저번 회식도 기꺼이 참석한 거고······."

내가 흡족하게 그 이야기를 듣자니, 임형택 씨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인지 마누라가 요새 헌터에 부쩍 관심이 생긴 것 같거든요? 그래서 상의하고 싶은 게 있는데······"

"상의요? 어떤?"

"김극 씨도 알다시피, 제 딸이 얼마 전에 각성했거든요?"

성문영으로선 처음 듣는 소리였나 보다. 녀석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랬어요? 저번에 회식할 때 본 걔가?"

"어, 걔 맞아. 지가 마법소녀인 줄 아는지 프릴 달린 공주옷 입고 온 걔."

"걔 진짜 귀엽던데! 뭔 능력인데요?"

"열선 능력."

그 말을 듣고 이종호가 흠칫했다.

보아하니 열선 능력을 지닌 맨티코어에 의해 친구가 끔찍하게 살해된 기억이 선명한 모양인데.

그러나 소시오패스 기질이 있는 성문영은 태연해서, 녀석은 기꺼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열선 그거 헌터 해 먹기 진짜 좋은 능력 아닌가? 헌트웹에 엘마야캐요 그 아저씨는 다 늙은 나이에도 열선 능력 하나로 데스클로며  역장체 잔뜩 잡았다던데!"

"그렇지? 하여간 그 능력을 썩히는 게 아까운지, 마누라가 딸을 헌터 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아. 헌터 아카데미였나, 이번에 새로 생기려는 곳에 딸 입학시키려는 거 보니까······."

난 그 말을 듣다 말고 표정을 굳혔다.

헌터 아카데미? 어쩐지 영 꺼림직하던 그것이 이런 자리에서 언급될 줄은 미처 몰랐다.

"형수님이 딸을 헌터 시키려 한다고요? 아예 헌터 아카데미에 넣으려 하고?"

"예. 어떨 것 같아요? 김극 씨가 보기에는요."

난 최대한 말을 골랐다. 이 왠지 모를 꺼림직함을 설명할 단어를 생각해내려 애쓰다가 이내 말했다.

"좀······ 거시기한데요."

"거시기해요? 어째서?"

"저나 아저씨나 헌터 일 하는 와중에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헌터 이게 자식에게 선뜻 권하기는 좀 거시기한 일이잖습니까? 돈 많이 버는 건 맞고 유명해지면 명예도 따르긴 하는데, 그래도 워낙 위험하고 힘드니까 말입니다. 그런 일 하라고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애 등 떠미는 건 조금······."

"하기야, 내년에 학교 들어가려는 미취학 아동 진로를 부모가 미리 정해주는 건 너무한 일이긴 하죠?"

"잘 아시네."

"사실 나도 마누라한테 김극 씨가 말한 것처럼 똑같이 말했어요. 그래도 마누라는 여전히 딸내미 헌터 아카데미 넣길 원하더라구?"

"형수님이요? 왜요?"

"글쎄, 헌터 아카데미에 각성자 자식을 들여보낸 가족들은 서울에 아파트를 공짜로 임대해준다나요? 암만 봐도 그 서울 아파트가 탐나서 그러는 것 같은데······."

나는 혀를 찼다. 그놈의 서울, 그놈의 아파트.

서울 사는 게 일종의 신분 상승으로 간주되는 요즘 아닌가. 더 나아가 아예 궁궐 취급받는 서울 아파트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월급으로 천이백만 원 받는 한희마저 이대로는 평생 일해도 서울에 아파트 한 채 못 사지 않느냐며 징징거렸던가?

그걸 보면 알 수 있듯, 게이트가 열린 이후 서울 아파트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거래되는 중이다. 덕분에 서울 아파트는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리 벌이가 좋아도 평생 살 수 없는 천상의 장소 취급받는 중이고.

그런 곳에서 살게 해준다니, 충분히 유혹당할 만하다.

"그래서 따님이 헌터 아카데미 입학하면 어쩔 겁니까. 가족 전부가 서울 가서 살 거예요?"

내가 물었더니, 임형택 씨가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인천에서 헌터 해야 하니까 못 가고, 마누라랑 딸만 서울 가지 않을까요? 아무튼 마누라는 딸이 나중에 꼭 헌터 할 게 아니더라도 일단 아카데미에 들여보내는 건 괜찮지 않나, 뭐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헌터 아카데미가 이번에 새로 생기는 곳이니까 대체 뭐 하는 곳인지 모르잖아? 그래서 김극 씨한테 물어본 거죠. 이번에 김극 씨 헌터 협회 간부 되셨으니까, 뭐 아는 거 없으신가 해서······."

그렇다면 이 아저씨도 내심 딸이 그놈의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않길 바라겠군. 세상에 기러기 아빠 노릇 하고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마누라가 부탁한 것이니 무시하긴 뭐해서 내게 물어본 모양이었는데, 난 대충 헌터 아카데미가 뭐 하는 곳인지 알아보고서 제대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약속을 대충이나마 지키기 위해, 헌트웹에 접속했을 때였다.

우연히도 바로 관련 정보 글이 눈에 보였다.

Ⓐ 엘마야캐요 : 헌터 아카데미 이거 대체 뭐 하는 곳이냐?

이게 헌터 육성하려는 학교가 맞긴 한 거냐?

헌터 아카데미인데 어떻게 강사며 교직원 목록에 헌터 출신은 단 한 명밖에 없을 수 있나?

심지어 나머지는 죄 군인 출신 아니면 사이비 종교 출신으로 꽉꽉 채워놨는데, 이게 말이 되나?

85화 아카데미 입학생 신미래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