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말년병장 김요한 - [4]
그리 결투 신청을 받은 순간 난 솔직히 당황했다.
경찰한테서 맞짱 뜨자는 소릴 들은 느낌이다. 명색이 공무원인 저들이 민간인인 내게 저따위 소리를 지껄이다니?
혹시 저놈들이 내 사지만 자르려는 게 아니라 아예 날 죽여서 목격자인 내 입을 막으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닐 터였다.
저들은 내가 불쑥 나타났을 때 '좆됐다'는 당황한 기색 따윈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때 저들은 그저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려다 들킨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의 태도에는 평소에 하던 대로 일했을 뿐인데 방해받으니 짜증 난단 심보가 보일 뿐, 어떤 냉철함 따위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특무대란 조직이 어떤 분위기인지, 저들이 서울에서 어떤 식으로 활동하며 치안을 지켰는지는 이것만 봐도 알 만한 일이다.
법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일단 때리고 찌르는 모양이지? 공무원이란 것들이.
생각해 보면 아까 내게 한 대 맞아서 나가떨어진 놈부터가 그랬다. 화가 난다고 대뜸 내 멱살을 잡으려 들더니 주먹까지 날리는 것은 막 나가던 시절의 나조차 해본 적 없는 행패 아니던가.
그렇듯 법보다 주먹을 가깝게 여기는 태도에서 동질감이 느껴질 법도 하건만, 딱히 그렇지는 않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역겹게 느껴질 뿐이다. 어째서?
나는 일단 행동했다. 내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자신 있음 와보든가."
내가 싸움에 응한 것이 퍽 만족스러웠나 보다. 특무대원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박주헌은 아예 대놓고 히죽 웃었다.
저 앞에 선 그놈을 봤다.
보아하니 학창 시절 선도부 활동을 즐겼을 법한 놈이었다. 선생의 비호를 받으며 조그만 애새끼들을 괴롭히길 즐겼을 법한 놈. 원래는 헌터였다더니, 그때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자 특무대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과연, 박주헌은 싸우는 태도부터 양아치다웠다.
"음, 싸우기 전에 잠깐 연락 좀······!"
박주헌이 무전기를 만지작거리는 척하더니, 불쑥 칼을 고쳐잡고 땅을 박찼다.
박주헌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거리를 좁혀오는 속도가 소름 끼치게 빨랐지만 새삼 놀라진 않았다. 난 이미 역장체들과 여러 차례 싸워봤을뿐더러 소월인 칼잡이와도 싸워봤으니까.
저놈은 내가 발차기 한 방에 죽인 그 소월인보다 느렸다, 확실히.
긴장감이 신경계를 자극했다.
느려진 체감 시간을 통해 상황을 자세히 살폈다.
이 와중에 특무대원 하나가 박주헌의 등 뒤로 슬금슬금 이동하고 있었다. 박주헌의 뒤를 지키려는 것이군. 내가 놈의 등 뒤로 공간이동 하여 반격하리라 예상하는 모양이지? 내가 그리로 공간이동 하는 순간 역으로 날 노리려는 모양이고.
그러나 사실, 공간이동 할 필요도 없었다.
박주헌을 향해, 나 또한 돌격했다.
마주 거리를 좁히다가 박주헌이 칼을 휘두르기 전, 손을 휙 하고 뻗었다.
그리하여 칼을 쥔 박주헌의 손목을 내가 잡아챘다.
손목을 잡힌 박주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이 힘을 주어 제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내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기엔 힘의 차이가 역력했다.
그렇게 내 체급이 훨씬 우위라는 게 드러나자, 박주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놈이 뭔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 턱을 한 대 후려쳐 입을 다물게 했다.
역장 외골격 능력자인 만큼 박주헌이 한 대 맞고 나가떨어지거나 고통을 호소하진 않았다.
그러나 뒤로 젖혀졌다가 앞으로 돌아온 박주헌의 얼굴에는 당황과 굴욕감이 떠올라 있었다.
이대로 한 대 더 때려주면 좋을 것 같은데, 정말 그러지는 않았다. 내 등 뒤에서 특무대원 하나가 덤벼드는 중이었으니까.
뒤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정신적 그물망이 그놈의 기습이며 동작을 모조리 알려주었다.
내 어깨를 베려나 보군. 높이 든 칼의 궤적을 보니 틀림없다.
놈이 칼을 내려치기 전에 내가 먼저 돌려차기를 날렸다. 내 발이 등 뒤에서 기습하려던 특무대원의 양팔에 닿았다.
"컥―"
그 일격에 놈의 역장이 바로 깨졌다. 역장이 보호하고 있던 놈의 팔뼈와 그 살도.
놈의 양팔이 한꺼번에 으깨지면서 그 감촉이 내 발을 통해 전해졌다.
마침내 내가 고개를 돌려보니 끔찍한 꼴이었다. 으······.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뜯겨 나간 특무대원의 양팔, 똑바로 보기 괴로울 만치 처참했다.
꺽꺽거리던 그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눈이 까뒤집히더니 그는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이건 좀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로 잔인하게 굴 생각은 아니었는데. 김석희가 데리고 있던 보잘것없는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도 내 펀치 한 방에 역장이 깨지진 않았건만 이놈은 그 이하였다.
"너무 약한데."
그리고 여기 있던 특무대원들의 표정이 확 변했다. 내가 너무 솔직하게 중얼거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동료 중 하나가 험한 꼴을 당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새끼가······!"
이쯤 되니 본격적으로 다 함께 덤벼들기로 맘먹은 모양이다.
박주헌이 여전히 내게 잡힌 손을 빼내지 못한 가운데, 나머지 특무대원들이 모조리 덤벼들었다.
그 수가 여섯.
양손이 자유로워야 했으므로 나는 박주헌을 휙 밀쳤다. 그리하여 놈을 달려오던 특무대원 하나와 충돌시키고는 나머지 놈들을 봤다.
우선 제 튼튼한 역장을 믿고 맨 앞에서 돌격해오는 놈. 무작정 달려오는 것이 무모해 보이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판단이다.
내 타격 한두 번쯤은 버티고서 칼을 찔러넣으려는 모양이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놈을 두들기지는 않기로 했다.
"이 씹―"
내가 손을 휘젓는 동시에 공간이동 하자 곧바로 놈의 손목이 잡혔다.
그대로 동작을 이어나가, 붙잡힌 놈의 손목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놈의 몸뚱이 전체가 허공을 날았다.
"―새애아으아악!"
그대로 손을 놓아 놈을 아파트 아래로 집어 던졌다. 아파트 높이가 꽤 되지만, 역장 내구력에 자신 있는 모양이니 죽지는 않을 것이었다.
한편 나머지는? 공간이동 한 내 위치를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디야?"
"저기!"
뒤늦게 내 위치를 알아챘는지 또다시 한꺼번에 덤벼들려 했다.
그 수는 이제 자유로워진 박주헌까지 포함해 여전히 여섯.
그 모두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난 공간이동 능력자 아닌가. 그들을 굳이 한꺼번에 상대하거나 포위당해줄 이유가 없다. 나는 언제든 자유롭게 위치를 옮기면 되니까.
그렇게 했다.
하단차기를 날리는 동시에 공간이동 하자 내 발은 맨 뒤에서 돌격하던 놈의 허벅지에 닿았다. 정확히는 그 역장에 충돌했다.
포탄 터지는 소리 속에 놈의 신음이 묻혔다.
"윽―"
이 일격에 놈의 역장이 깨지진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충격에 무게중심이 흔들린 듯 놈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등을 세게 걷어찼다. 놈이 땅을 마구 구르면서 비명 질렀다.
"악!"
그리고 나머지는 여전히 대응이 늦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두 놈이 양쪽에서 덤벼들었지만 난 또다시 합공당하는 일을 피했다.
내가 공간이동 했다. 방금 내게 걷어차여 땅을 구르다가 몸을 일으킨 그놈 앞에 섰다.
내가 놈보다 훨씬, 훨씬 컸다. 그랬기에 놈의 눈동자에는 내가 가득 찼다.
"어······!"
부릅뜬 놈의 눈에 떠오른 경악이 달콤했다.
발달 된 신경계에 힘입어 최대한 빠르게, 그 안면과 가슴과 배를 연달아 두들기고서 무릎까지 걷어찬 다음 박치기를 날려주었다.
이 연타에 놈의 역장이 깨졌다.
기어이 쓰러진 놈의 다리를 짓밟았다. 곧바로 뼈가 부러진 듯, 그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듣기에 좋았다.
"악! 아아악!"
이놈은 무력화됐으니, 이제 남은 적은 다섯. 내가 그들을 보았다.
"좆밥 새끼들이."
특무대원들의 얼굴에 비로소 공포가 감돌았다. 그리고 또한 비장감도.
비장한 표정을 지은 그놈이 특히 위험했다.
그놈이 역장 날붙이에 휘감긴 칼을 움켜쥐고 땅을 박찼다. 놈이 동체시력을 벗어난 속도로 달렸다.
어디로?
내게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었다. 저 뒤의 김석희를 노리는 것이었다. 날 제압하긴 어려운 것 같으니 임무라도 달성하려는 것이리라.
나도 급히 움직여야 했다.
"꺼져!"
김석희를 향해 달려 나가던 놈의 뒤로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놈의 목을 붙잡아 번쩍 들어 올리고서 등을 돌리자, 내게 한꺼번에 덤벼드는 특무대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게 칼질하려는 네 명······, 놈들을 보며 빠르게 판단했다. 공간이동 하여 이 위기를 쉽게 넘길지, 아니면 바로 뒤에 움직이지 못하는 김석희를 지킬지.
뭘 골라야 할지는 뻔했다. 인천 공작은 제 봉신을 저버리지 않는 법.
내가 포효했다.
"김석희―"
가운데에서 달려들던 덩치를 먼저 치우기로 했다. 그놈을 향해 목을 붙잡고 있던 놈을 집어던졌다.
덩치가 던져진 놈과 함께 땅을 뒹굴면서 내가 당장 상대해야 할 적은 셋이 되었다.
"―역장 외골격 꺼놔라!"
그리고 맨 왼쪽에서 달려오던 놈이 가장 먼저 내게 닿았다.
놈이 휘두른 칼이 내 어깨를 향했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다른 둘을 상대하는 게 더 급했거니와 팔 하나쯤 내줘도 괜찮았으니까.
내 왼쪽 어깨가 놈이 휘두른 칼날에 썰리던 그때, 오른쪽에서도 한 놈이 칼을 휘두르려 했다. 이것은 내가 막았다.
난 그놈의 손목을 붙잡고는 그 손목을 휘둘렀다.
그로써 놈이 쥔 칼이 곧 내 무기가 되었다. 역장 날붙이가 씌워진 그 칼날을, 막 내 앞에 도달했던 박주헌의 어깨에 내리쳤다.
베는 감각조차 없었다. 박주헌의 어깨는 깔끔하게도 잘려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뒤이어 박주헌이 텅 빈 어깨를 휘두르고서 눈을 껌벅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노에 가득 차 있던 놈이 상황 판단을 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박주헌이 뒷걸음질 쳐서는 바닥에 떨어진 제 팔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너무 깔끔하게 절단되어 고통도 뒤늦게 찾아온 걸까?
"끄아아아악!"
박주헌이 몇 박자 늦게 비명 지르는 가운데, 내게 손목이 붙잡힌 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이놈의 상황판단력이 뛰어났다면 제 칼의 역장 날붙이를 지금이라도 거뒀으련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놈을 계속 휘두를 수 있었다.
"개새꺄!"
내 어깨를 벤 놈이 또다시 내게 칼을 휘둘렀다. 이번엔 몸을 내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난 내게 손목을 붙잡힌 놈의 칼로 맞섰다. 내가 놈의 손목을 휘두름으로써 두 역장 날붙이가 충돌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맞부딪친 역장의 칼날은 둘 다 깔끔하게 잘려버리거나 아예 폭발하곤 한다.
이번엔 전자였다.
두 칼잡이의 칼이 동시에 잘리면서 둘 모두의 얼굴에 허망함이 떠올렸다. 그리고 경악도.
칼을 잃어 전의를 상실한 두 놈을 붙잡아 한꺼번에 땅에 내리꽂았다.
그 둘의 등을 짓밟으며, 여전히 남아있던 두 놈을 노려봤다.
"계속 할 거냐?"
남아있던 두 놈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러는 태도들이 맘에 들었으므로 놈들은 용서해주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비명 지르느라 바쁜 박주헌과 바닥에 널브러진 특무대원들, 그리고 잘려나가 떨어진 내 팔을 번갈아 쳐다봤다.
잘린 어깨에서 통증이 뒤늦게 느껴졌다. 내버려 둬도 재생하겠지만 접합시키는 편이 훨씬 빠를 것이므로 잘린 팔을 주워들었다.
그와 함께 아까 잘려서 바닥에 나뒹굴던 김석희의 발목도 주워들고는 말했다.
"김석희? 역장 외골격 껐지?"
아까부터 멍하니 있던 김석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히죽 웃어주고는 그 어깨를 붙잡고 공간이동 했다.
사지 어딘가가 잘리거나 아작난 특무대원들은 뭐, 알아서 병원에 가든 말든 하라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서 나는 공간이동 했다.
"치유 능력자, 치유 능력자 있죠? 빨리 와줘요!"
김석희와 함께 병원에 이동하고서 빠르게 치료해 달라고 요구하니 바라는 대로 되었다.
이후로 나는 발목이 다시 붙은 김석희를 인천에 풀어주었으니, 김석희 소탕 작전은 그렇게 끝났다.
68화 말년병장 김요한 - [5]
이번 일이 언론에 공개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헌트웹에는 공개되었다.
헌트웹의 모두가 이번 작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소리다.
5my지저스 : 김극! 김극! 김극!
Ⓐ 돌머리청년 : 김극 그는 영웅이야!
심지어 헌트웹 유저들은 이번 작전의 과정까지 상세히 알게 되었으니, 김요한이 이번 일을 모두에게 고발한 까닭이었다.
나와 특무대원들이 싸우기 전, 김요한은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했던 모양이다.
김요한은 해당 사건의 영상은 촬영하지 못했지만 사진은 수십 장이나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촬영된 사진들이 수십 장 나열된 가운데, 김요한이 사건을 설명했다.
Ⓐ 서울토바기 : 소집될 때부터 뭔가 불길했지. 나 보고 헌터 라이플 가져오란 게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어서.
(······)
결국 김석희가 항복하고 무릎 꿇더군.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김석희 주변을 특무대원들이 둘러싸더라. 딱 보니 느낌이 싸하더라고?
특무대원들이 김석희를 몸으로 가리려는 것 같았지. 대체 뭔 짓을 하려고 가리려는 거지?
그런 생각에 바로 스마트폰 들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놈들이 칼로 김석희를 다 함께 찌르려는 거야. 그때 김극 씨가 공간이동으로 난입해서 김석희를 살려냈고
(······)
김극 씨 진짜 말도 안 되게 세더라? 결국 특무대원 모조리 때려눕히고는 김석희 데리고 공간이동 해서 사라지던데, 그걸 보며 아주 그냥 물개박수를 죽어라 쳤지. 맘속으로 천 번 정도······.
일이 다 끝나고 나중에 전화로 물어보니까, 특무대에선 통제하기 어려운 각성자는 제압해서 체포하는 게 아니라 아예 죽이려는 방침인 듯하더라고? 김극 씨는 그걸 알고 기겁해서 사투를 벌인 것이고
이 점을 강조해서 헌트웹의 모두에게 상황을 전해달라고 김극 씨가 부탁했음.
그 글에 달린 댓글 반응도 열렬했다.
Ⓐ syberMagneto : 비각성 쓰레기들이 정말로 미친 건가?
Ⓐ Dragon : 항복했는데도 바로 죽이려 했단 건 너무 무섭네. 나도 무슨 오해 생겨서 특무대랑 실랑이 벌였다간 항복도 안 받아주고 냅다 죽일 거다, 이건가?
Ⓐ 엘마야캐요 : 어쩐지 지방에선 각성자 범죄자들 상대로 쩔쩔매는데 서울에선 별 잡음 없이 쉽게도 통제하더라니 이런 식이었나
익명 : 그래서 김극은 상태가 어떻길래 지금 직접 설명 못 하고 있음? 팔 잘려서 회복 중이라 타자를 못 치나?
Ⓐ 서울토바기 : 아니? 팔은 이미 붙었는데 애기버섯다운 이쁜 말투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할 자신이 없대. 그러니까 설명은 내게 맡기겠다나?
익명 : 그래서 입 다물고 있는 거임? 진짜 미친 새낀가······.
Ⓐ 돌머리청년 : 김극햄 대단하긴 정말 대단했는데, 이래도 정말 괜찮은 건가? 한희석 그 새끼 뭐 해야겠다고 맘먹으면 법이고 뭐고 좆도 신경 안 쓰던데 대뜸 조지려 드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 Kang : 진짜로 선 넘네······.
이후로는 날 보고 영웅이라느니 잘 했다느니 칭송하는 반응들을 쭉 즐기던 중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박미형 씨인 줄 알고 받았더니 아니었다.
「이 개새끼야!」
한희석, 그 비각성 찌꺼기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내 안면이 구겨졌다.
"희석이냐? 끊는다."
「끊으면 너 죽―」
바로 전화를 끊었더니 계속해서 벨이 울렸다. 듣기 싫다고 무음으로 설정을 변경할 순 없었는데, 아까 박미형 씨가 이따가 전화할 테니 언제든 전화 받을 준비를 하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박미형 씨와의 통화에 방해될 것이었다.
"왜 그리 집요해, 응?"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더니,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랏일 좀 도우라고 불렀더니 일을 그따위로 망쳐?」
"법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사람 조지는 게 나랏일이냐? 얼음 능력자들은 물증 없어도 유죄 내리고, 민간인은 도청하고, 수배범이면 항복해도 즉결처형하는 게?"
「법이 사회 지키려고 있는 거지 사회가 법 지키려고 있는 거냐, 또라이 새끼야! 너 같은 중졸 새끼한테 설명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걸 내가 일일이 설명해야 돼?」
마구 성내는 걸 보아하니 그 모든 초법적 행위를 어지간히도 당당하게 여기는 듯했다.
어이가 없어서 입 다물고 있자니 한희석이 계속 외쳤다.
「대체 뭘 믿고 그리 깝죽거리냐, 응? 혹시 강준치 그 새끼 믿고 그러는 거냐? 그 쫄보 새끼가 진짜 다 때려치우고 너 도우러 인천에 행차라도 할 것 같아?」
"민간인 도청 한번 열심히 했나 보네. 그 친구 성격 파악도 얼추 끝난 거 보니."
「닥쳐, 새꺄! 그래서 김석희 그 새끼, 어딨냐?」
"방생했는데?"
「개소리하지 말고 빨리 바른대로 말해! 아니, 진짜 풀어줬으면 당장 다시 잡아 와라. 딱 두 시간 준다! 알겠냐?」
그리 협박하더니 통화가 끝났다.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는 생각했다. 특무대장이나 특무대원들이나, 법 알기를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글귀쯤으로 알기는 마찬가지로군.
그러는 태도에 동질감이 느껴지긴커녕 역겹기만 했던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법을 명분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법을 무시하는 행태는 실로 어이가 없다. 저러다가 자기네가 필요할 때만 법을 들이대리란 사실을 알아서 더욱.
저 공무원들이 그러는 게 새삼 놀랍지는 않다. 이미 겪고 또 겪은 일 아닌가.
내가 학주를 폭행하고 소년원에 간 일부터 내 여동생이 무죄추정 원칙 따윈 무시된 채 잡혀간 일까지, 그 모든 일에서 법의 지엄함은 일방적으로 휘둘러졌을 뿐이다.
그 와중에 이번 일까지 겪고 나니, 나 또한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신하게 된다.
약 한 시간 후,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박미형 씨였다.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 안에 계세요. 알겠죠? 꼭 집 안에 있어야 해! 아니면 공간이동으로 최대한 멀리 피신하거나요!」
"피신하라니 왜요?"
「특무대가 인천으로 출발했대요! 여기 경찰들이 막으려 했는데 막을 수 있을 리가 없고, 아무래도 김극 씨한테 들이닥치려 한다는 것 같다는데······!」
특무대가 어떤 목적으로 날 덮치려는지 알 만했다.
내가 수배범 김석희를 데리고 사라졌으니 날 잡아들이면 김석희의 행방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와 함께 내게는 범인은닉죄, 뭐 대충 그 비슷한 죄를 적용하지 않을까?
그리고 특무대를 막기 위해, 박미형 씨가 여기저기에 연락을 돌렸나 보다.
곧 내 집 앞에 수백 명의 인파가 모였다.
우선 인천 주민들······. 내가 특무대에 불려갈 때 피켓을 들고 반대 시위하러 나왔던 그 사람들이 이번엔 날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특무대는 꺼져라! 특무대는 꺼져라!"
그리고 당연한 듯 모인 내 헌터팀이 보였다. 다들 총기까지 들고 온 것이 대체 뭐 하려고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또한 내가 다닌 헌터 학원 원장이며 그곳 학원 수강생들에, 심지어 인천 공무원들까지 총출동했다. 인천 시장님이랑 박미형 씨도 저 앞에 섰다.
아, 그리고 헌트웹에도 이 상황이 알려진 모양이었다.
내가 따로 부르지 않았는데도 헌트웹 동지들까지 여기 모였다. 나는 저번 모임에서 본 각성자 헌터 다섯 명과 나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성자 헌터들을 보았다.
그중에서 석장실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는 지금 화강암을 온몸에 둘러 8미터짜리 바위 거인의 모습이었는데, 정령의 특성상 역장 날붙이조차 무섭지 않은 무적의 갑옷이 분명했다.
예전에 저 친구가 내 바위 정령 사냥 영상을 감상하고서는 본인이 날 못 이길 것 같다며 엄살 부렸던 게 기억나는데, 그건 이쪽을 치켜세워 주려는 사교적 언행이었음을 이제 알겠다.
그래서 저 각성자 헌터들이 이 상황을 대체 어찌 알았나 했더니, 박미형 씨한테 상황을 전해 들은 내 라운드걸이 헌트웹에 이 소식을 알렸던 모양이다.
Ⓐ syberMagneto : 특무대에서 김극 잡으러 출동했단다. 모두 집합!
그리하여 헌트웹의 각성자들이 여기 모였다. 날 지키려는 이유만으로 모인 것은 아닐 테고, 각성자 범죄자를 즉결처형하는 그 초법적 조치에 대한 항의 목적도 있을 테지.
하여간 만화 속에서 이런 장면을 몇 번이고 본 것 같다. 주인공을 지키기 위해 아군이 총집결하는 감동적인 상황.
과연 정말로 감격스럽다. 인천 사람들은 물론 각성자 헌터들까지 날 지키러 모이다니?
머릿속 모든 잡념이 깨끗하게 씻겨나가는 느낌이 든다.
온갖 것들이 복잡하게 뒤섞여있던 세상이 명쾌하게 흑백으로 갈리는 것 같다.
보라, 인천은 선한 것이고 서울은 악한 것이다. 각성자는 옳은 것이고 비각성자는 악한 것이다.
이 명확한 대비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 상황이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수십 분 후, 특무대원들이 내 집 앞에 도착했다.
"김극, 튀어나와!"
이번에는 특무대의 결전병기 한희도 함께였다. 정말이지 쉽지 않겠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곧이어 칼 한 자루씩 들고 온 특무대원들이 날 지키러 모인 사람들과 대치했다. 용역깡패처럼 소리 지르는 특무대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꺼지냐, 진짜 콱 찔러줄까!"
그리고 특무대원들을 몸으로 막으려 드는 사람들을 보며 난 생각했다. 저 선한 이들에게 폐를 끼칠 수야 없는 일이라고.
내가 이대로 저들에게 잡혀가면 어찌 될까. 억지로 유죄판결이 내려질까? 그렇다면 뭐 괜찮다. 어차피 초재생능력자는 불로영생한다니까 한 몇 년 썩고 나오면 될 테지.
만약 날 끌고 가서 그대로 죽이려 든다면, 눈치껏 공간이동이라도 해서 빠져나오면 될 일이고······.
판단을 마친 내가 집을 나섰다. 문을 빠져나와 걸어 나가니 내게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무대원 하나가 외쳤다.
"김극, 저 새끼 잡아!"
그리하여 특무대원들이 움직였고, 날 지키러 모인 각성자들도 그들을 막고자 앞으로 나섰다.
두 무리의 대치가 한층 더 팽팽해지던 그때였다.
그리고, 어?
"어······"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날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택시 한 대가 멈춰서더니,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모두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그럴 수밖에.
그는 수많은 초인 중에서도 돋보이는 슈퍼맨이다. 범속한 영웅들 사이의 닥터 맨하탄이요, 대한민국 초인들의 왕이다.
그는 강준치다.
특무대원 하나가 중얼거렸다.
"강준치? 어떻게······."
왜 서울에 있어야 할 강준치가 인천에 왔느냔 것이겠지만, 날 포함한 이 자리의 헌트웹 출신 각성자 누구도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 모인 모두는 그저 그 이름을 마구 연호했을 뿐이다.
"강준치! 강준치!"
강준치와 눈을 마주친 내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강준치 또한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색하게나마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강준치가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모세의 기적처럼, 자연스레 인파가 둘로 갈라졌다.
갈라진 틈으로 걸어온 강준치는 자연스럽게 각성자들의 사이에 섞였다. 강준치가 마이크를 달라고 하길래 김형만 씨가 바로 내줬다.
마이크를 들고 강준치가 발언했다.
"내가, 나라에서 각성자 징집 시도할 때······ 정말 그랬다간 다 뒤엎는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이번 각성자 동원을 문제 삼는 듯했다.
물론 강준치는 그 이유만으로 여기 온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젠 죄지은 각성자는 항복해도 일단 죽이고 본다고?"
그 언성이 높아졌다. 강준치가 으르렁거렸다.
"어디 나도 죽여봐라, 갯강구들."
69화 말년병장 김요한 - [6]
강준치의 키는 딱 평균이다. 덩치 큰 신체강화자들 사이에 서 있다간 그 모습이 묻혀버리기 딱 좋은 셈이다.
그러나 지금 각성자들 사이에서 강준치의 모습은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그는 거의 번쩍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등에 태양이라도 하나 달고 있는 것처럼······.
강준치는 그야말로 태양신처럼 이곳에 서 있었다.
태양신의 강림에 그 신도들만이 열광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나는?
아, 기분 끝내준다.
나는 지금 특무대원들의 눈에 일렁이는 공포와 불안감을, 그 당혹감을 즐겼다.
저들로선 이 상황이 적잖이도 당황스러울 것이다. 저들의 수장인 한희석도 이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니까. 하여간 비각성자 찌꺼기의 지시에 따르다 보면 각성자들일지라도 저따위로 하찮아지는 법이다.
강준치가 계속 말했다.
"왜 가만히들 있냐? 나도 죽여보라니까? 안 들리냐! ······진짜 안 들리는 것 같은데, 이 마이크 고장 난 거 아닌가······ 대답 안 하나? 역겨운 새끼들이 그 지랄을 해놓고 입 다물고 있으면 내가 돌아갈 것 같아! ······전원 버튼? 안 보여, 눌러줘······ 갯강구 씨발것들, 내가 대답하라고 했다―!"
강준치의 마지막 말은 거의 천둥처럼 울렸다(마이크 전원을 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위엄에 짓눌려서인지 아니면 마이크 음량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 몰라도 여기 모여든 특무대원들이 뒤로 물러섰다.
뒷걸음질 친 특무대원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어떤 위협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지 못했고, 그 손에 들린 칼이며 헌터 라이플 따윈 전부 바닥을 향한 채였다.
특무대원들은 그저 자기네 무전기를 뚫어지도록 쳐다보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윗선의 지시가 있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정확히는 특무대장 한희석의 지시를.
그러나 한희석인들 별 대단한 지시를 내리진 못할 것이었다.
하기야 게이트가 열린 지 아직 사 년 하고도 수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마당이다. 누가 이 초인의 존재에 익숙해졌겠는가? 누가 혼자서 군단을 압도하는 각성자를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할지 알겠는가?
내가 그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건넸다.
"와줘서 진짜 고맙다, 진짜로."
내 말에 강준치는 얼굴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분노로 가득한 시선을 특무대원들에게 향한 채, 마이크만 내리고서 대답했다.
"이걸로 저번에 호텔로 부른 건 쌤쌤이야······ 그건 그렇고 칼 든 놈들 더럽게 많네, 씨벌. 거의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은데, 저거 다 역장 날붙이 능력자들 맞나?"
"아마도?"
"미치겠네. 너 내 옆에서 저 새끼들 잘 보고 있어야 한다. 저 새끼들이 언제 칼빵 놓으려 덤벼들지 몰라서 불안하니까······"
아, 분노로 가득한 시선이 아니었군.
불안감에 가득 찬 시선이었나 보다. 강준치의 눈은 여전히 특무대원들의 삐죽한 칼에서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저토록 암살 위협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현장에 나온 셈인데, 그렇다면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었다.
나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나온 것일까?
그런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이 일이 강준치를 크게 자극한 까닭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각성자 강제 동원과 강력한 각성자는 통제가 어렵단 이유로 대뜸 죽여버리려는 그 행태 말이다.
강준치에겐 발작 버튼쯤 되는 두 가지 요소가 겹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기어이 신이 지상에 강림했으리라.
"삼 분 준다. 삼 분 지나서 여기 남아있는 새끼는 나한테 죽어."
강준치가 선언했고 불과 삼십 초도 지나지 않아 특무대원들은 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물러나는 그들은 정말로 패잔병들이나 다름없었다. 이쪽과 그들 사이에는 충돌 한번 없었는데, 그들은 도망치듯 뛰어서 사라졌다.
그리고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겼다!"
여기 모인 인천 시민들이, 공무원과 인천 헌터들이, 각성자들이 환호했다.
환호하는 사람 중에 섞인 나이토 상을 보며 나는 살짝 놀랐다.
저 비각성 찌꺼기 놈은 이미지 관리에 무지하게 신경 쓰는 놈 아닌가. 특무대의 각성자 동원 이슈가 발표된 날 저놈이 헌트웹에서 아무 말 안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것처럼, 뉴스에 좋지 않게 나올 가능성이 있는 이런 자리엔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저놈이 정말 날 도우러 나올 줄은 몰랐다. 기껏 나와놓고서는 사람들 사이에 숨듯이 섞여 있는 것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준치 형? 여기서 보니 든든하긴 한데, 형이 여기 있으면 서울은 어쩌고?"
어느새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 석장실의 물음에 강준치가 짧게 대답했다.
"내 알 바야?"
"형 말고 내 알 바야! 베헤모스든 그 주변 괴수든 서울에 튀어나오면 서울 사는 난 어쩌면 되나?"
"뭐, 베헤모스 움직이면 누가 보고라도 하겠지······?"
그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백담비가 말했다.
"베헤모스가 걱정되시면 제가 한번 볼게요."
석장실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요?"
"게이트 열어서······"
그러더니 백담비는 자신이 말한 대로 했다.
그녀가 눈을 감고 손을 뻗자, 그녀 앞에 자줏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로써 난 그녀가 정말로 게이트를 열 수 있게 되었음을 알았다.
자줏빛. 게이트 내부의 색채······. 게이트를 본 적 있는 몇몇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게이트가 충분히 확장되자 백담비가 그 안에 들어섰다.
이후로는 특무대도 물러갔겠다, 승자들끼리 잠시 잡담하는 시간이었다.
헌트웹의 동지들이며 내 헌터팀이 내 주변에 몰려와서는 말을 걸어댔다.
"어휴, 김극 씨 고생했어요! 그런데 대체 저놈들이 뭔 자신감으로 김극 씨 잡으러 왔답니까? 김극 씨 공간이동 하는 걸 잡을 방법이 있나?"
임형택 씨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제가 순순히 잡혀줄 거라 예상해서 몰려온 거 아닐까요?"
"설마 그 정도로 빡대가리들일 리가 있을까요? 뭔가 생각이 있어서 몰려왔을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물러 가버렸으니 원······ 이젠 뭔 생각이었는지 알 수도 없게 됐네."
한편 내 주변에 몰려든 사람만큼이나 강준치의 주변에 몰려든 사람도 가득했다.
강준치의 추종자들. 그들은 강준치가 여기 왜 왔는지, 앞으로 어쩔 계획인지 알길 원했다.
"준치 씨, 특무대 하는 짓 보고 개빡쳐서 온 거 맞죠?"
"그런데······?"
"그래서 이제 어쩔 겁니까? 이대로 끝낼 건 아니죠? 기껏 이렇게 모였으니 뭐라도 하면 좋겠는데요!"
"회식이라도 하자고요? 나 밥 먹고 와서 좀 그런데······"
"그런 거 말고요! 준치 씨가 특무대만 쫓아내고 싶어서 서울 방위까지 내팽개치고 온 건 아닐 거잖습니까?"
아주 잠시, 강준치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스쳤다.
그것을 본 나는 강준치가 정말 특무대만 막으러 왔음을, 그 이상의 목적 따윈 없었으며 그저 감정적으로 여기 행차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만큼 동체시력이 좋지 못한 다른 각성자 헌터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강준치와 함께 그 이상의 무언가를 이루어내길 원하는 눈치였다. 그들이 계속해서 의논했다.
"하기야 지금은 김극 씨 체포 막아낸 거 말곤 딱히 상황 달라진 게 없죠? 이대로면 저놈들이 다시 김극 씨 체포 시도할 수가 있는 것이고, 특무대는 여전히 한희석 그 미친 새끼가 지휘할 것이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백담비가 게이트에서 나왔다.
내 라운드걸이 외쳤다.
"베헤모스가 움직이고 있어요, 게이트 안에서······!"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는 가운데, 강준치가 흠칫했다.
"베헤모스가 움직이고 있다고?"
저 뒤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인천 공무원들 또한 기겁한 눈치였다. 인천 시장님께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한편 각성자들은 이 상황을 기회로 삼기로 한 모양이었다.
헌트웹 엘마야캐요, 김형만 씨가 말했다.
"그럼 뭐 고민할 것 있나? 베헤모스 쫓아낼 겸 이대로 서울 가면 되지."
"서울로 가라는 건, 강준치 씨 보고 그냥 복귀하라고요?"
한 각성자 헌터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물었고, 김형만 씨가 웃었다.
"강준치 씨 혼자서 말고, 우리 다 같이 말입니다! 다 함께 서울 가는 거지요. 어때요?"
강준치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써 결정되었다. 우린 이대로 서울에 갈 것이다.
아마 강준치는 여기 모인 각성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에 가면 이득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각성자들은 정확히 그 반대로 생각했을 것이고.
곧이어 박미형 씨가 아는 업체에 전화해서 45인승 대형버스 두 대를 불러왔다.
여기 모인 각성자들은 각각 나뉘어 버스 안에 탑승했다.
그리하여 각성자들을 태운 버스가 드넓은 인천 땅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우릴 태운 버스는 이 나라의 거짓된 수도,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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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비 씨, 섭섭하네. 게이트 열 수 있게 됐으면서 왜 전화해서 자랑 안 했어요?"
"김극 씨 관련으로 특무대와 목숨 걸고 싸웠다느니, 흉악수배범 김석희를 데리고 도주했다느니 흉흉한 소식들만 들려오던데 어떻게 그래요? 제가 무슨 사이코패스인가······."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내가 한가로이 라운드걸과 말 섞던 중이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김요한이 소리쳤다.
"지금 인터넷에 난리 났는데요?"
그 말대로 인터넷을 보니 과연 그랬다.
여러 사이트의 게시판에 우리 관련 소식이 가득했다.
아까 올라온 기사인 '강준치, 서울을 버리다······'부터 얼마 전 올라온 기사인 '남한의 각성자들, 서울로 진격하다······'까지.
"보통 각성자 관련 소식은 언론에서 잘 안 내보낼 텐데 다들 이거 어떻게 아는 거죠? 나라에서 언론통제를 안 했나?"
"국내 언론은 잠잠한데 해외 언론에서 이 사건 알고 기사를 내보냈나 본데요? 그 기사가 번역돼서 여기저기에 퍼 날라진 모양이고요."
나는 김요한과 대화하면서 '남한의 각성자들, 서울로 진격하다'란 제목의 기사를 클릭했다.
거기 달린 댓글들을 보니 다들 북한이라도 쳐들어온 듯한 반응이더라.
Park1994 : 진짜로 나라 뒤집히는 거냐?
꼴뚜기튀김 : 이대로 한국도 제3세계 꼴 나는 것임? 각성자들이 행정부 장악하고, 말 안 듣는 국회의원들 참수하고, 군대도 좌지우지하는?
비회원23 : 내일 코스피 볼 만하겠네······.
이 인터넷 반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 내 모든 각성자들에게 공유되었다. 다들 이 주제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 등신들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 우리가 전차 몇 대 부숴 먹은 것도 아니고."
"해외 언론에서 우릴 거의 쿠데타 반군쯤으로 묘사해서 그러는 모양인데요? 묘사 보니 웃기네요, '몇 개 군단으로 가득 찬 버스가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다······'"
사실 과장된 표현은 아니었다.
이 버스 한 대에 탄 각성자들을 보라. 혼자서도 중대나 대대쯤 초토화할 만한 각성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준치가 이 버스에 타고 있었다. 정말로 버스 한 대에 군단 이상의 병력이 탑승한 셈이다.
"저리 호들갑들 떨 만해요. 해외사례가 많거든."
김형만 씨의 말에 내가 물었다.
"어떤 사례요?"
"글쎄, 각성자 여럿 모여서 술 마시다가 정부 욕하던 중에 다들 술 취해서는 의회 같은 곳에 쳐들어갔다가 진짜로 국가 전복된 경우가 꽤 있다나요? 이런 경우랑 좀 경우가 다르긴 한데, 가까운 대만만 봐도 각성자들 통해서 군이 쿠데타 성공했죠, 아마?"
"어떻게?"
"군 소속 각성자들이 있잖습니까? 웬 사단장이 그 각성자들 회유해서는 휴가인 척 지하철 태워 보내서 정부 인사들 싹 다 사로잡아버린 거죠. 이후론 후속 병력이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수도 장악하다가, 현재는 내전 중이라 하고······ 이런저런 사례 때문에 중국이랑 북한에선 아예 각성자들이 일정 수 이상 못 모이게 하는 중이라데요?"
대한민국에서 지방의 사단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군 병력이 아무 이유 없이 수도로 향할 순 없으니 행군하면서 훈련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며, 병사나 간부들이 상황을 SNS에 올리지 못하도록 관리까지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도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부터가 너무나 눈에 띄고 어려운 일이다. 도중에 상황을 눈치챈 어딘가에서 길이라도 차단해버렸다간 그 모든 시도는 수포가 되고 만다.
반면 각성자들의 쿠데타는 그렇지 않다.
각성자들이 정부를 뒤엎고 싶거든, 수도까지 이동하는 것부터가 무척 쉽다. 걸어서 가든 자전거를 타고 가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된다. 겉으로 보기엔 민간인과 다를 바 없는 각성자들의 이동을 국가에서 그 의도를 눈치채고 차단하기는 어렵다.
후속부대를 통한 보급도 필요 없다. 대충 건빵이라도 한 박스 들고 가면 될 일이다.
이후 상황의 수습이 문제일 뿐, 수도로 들어가는 것이며 주요시설을 장악하는 것까지 모조리 군병력이 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것이다.
이걸 보면 한희석이 각성자들의 모임을 기를 쓰고 감시하려던 것에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리 노력한 보람이 없게도, 지금 이곳에는 정부에 불만을 품은 각성자들이 수십 명이나 모여서는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로선 그야말로 미증유의 사태다.
물론 버스에 탑승한 각성자들은 그 정도로 심각한 표정이며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금 내 옆에 다가와 묻고 있는 강준치만 봐도 그랬다.
"나 몸에서 냄새 안 나냐? 존나 신경 쓰이는데."
"모르겠는데, 왜?"
"요새 제대로 못 씻었어. 영업 중인 목욕탕이 안 보여가지고, 몸 끈적거리면 어쩔 수 없이 호텔 다시 들어가서 씻고 그랬는데······."
"아직도 지하에서 지내냐?"
"거기가 안전하니까 당연하지."
내가 뭐라 말하려던 중이었다.
석장실이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김극 형, 준치 형? 서울 가는 건 가는 거고······ 그래서 어쩔 거예요?"
석장실의 물음에 강준치가 되물었다.
"뭘 어쩔 거냐니?"
"이대로면 높으신 분들 줄줄이 나와서 여러분 대체 왜들 이러시는 거냐, 뭘 원하시냐 물어볼 거잖아요. 그래서, 둘 다 대충 어디까지 생각하세요?"
70화 말년병장 김요한 - [7]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듯 강준치가 말을 흐렸다.
"음······"
석장실이 대답을 재촉했다.
"진짜 이대로 국가 전복이라도 할 건 아니죠? 청와대 쳐들어가서 정권교체 하라고 윽박지른다든가, 뭐 그럴 거예요?"
"굳이?"
"그럼 정확히 뭘 원하는데요?"
버스 내 모두의 시선이 강준치의 입에 집중됐다. 이윽고 강준치가 입을 열었다.
"난 그냥 뭐······ 특무대랑 한희석이 그 새끼만 조지면 됐어. 특무대가 각성자들 동원할 수 있는 법도 없애버리면 좋겠고······."
이 축 늘어지는 대답을 듣고서 탄식하고 싶은 각성자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제기랄.
군단급 전력이 모여서 요구하는 것이 고작 그 정도일 수는 없었다. 이 버스 안의 각성자들을 두려워하며 긴장하던 높으신 분들이 그 요구를 듣고서는 얼마나 우릴 비웃겠는가?
초인이니 뭐니 해도 결국 공권력이 두려우니 요구하는 것마저 별것 없구나, 이렇게 판단하고는 앞으로도 이따위 짓거리들을 계속해서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뭔가 제대로 바꾸려거든 그 이상의 요구를 해야 했다.
다행히도 나만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형만 씨가 말했다.
"그리고 또 무슨 요구를 해야 할까요?"
석장실이 그를 돌아보았다.
"거기서 더 요구하시게요?"
"그래야죠. 이건 어쨌거나 무력 시위잖습니까? 확실히 우리가 너무 급히 모였습니다. 그 탓에 시위 목적도 제대로 못 정하긴 했는데, 그래도 할 수 있는 모든 요구를 해야 한다고 봐요. 또 무슨 기회가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다시 모이겠어요? 지금 할 수 있을 때 해야죠."
"그래서, 당장 생각나시는 요구가 어떤······?"
그리고 김형만 씨가 대답했다.
"난 이 기회에 기존 헌터 협회를 물갈이하든가, 아니면 우리가 아예 새 협회를 세우든가 해야 한다고 봅니다. "
"그러고 보니 형만 아저씨, 헌트웹에서도 헌터 협회 하는 일 없다고 엄청 불평하셨죠 아마?"
"맞아요. 이미 헌터 협회가 있는 데다 꼴랑 여섯 명 모여서 술 마시는 것도 나라에서 기어이 감시해대는 판에 여럿이 모여서 뭔 단체를 설립하기가 어려웠는데, 이 자리에서 하나 만들기로 약속합시다! 아니면 기존 협회를 완전 새것처럼 바꾸거나요!"
이 자리의 모두가 공감할 만한 소리였다. 기존 헌터 협회는 공익을 위하겠단 핑계로 순 나라의 지시만 충실히 따랐지 않은가. 피고인한테 고용된 변호사가 범죄자 편 못 들어주겠다며 검사 편을 드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김형만 씨가 계속해서 언성을 높였다.
"그놈의 어용단체 더는 못 봐주겠습니다. 데스클로는커녕 고라니도 사냥해본 적 없는 놈이 협회장이랍시고 발언하는 꼴은 더 못 봐주겠단 말입니다!"
"그러면 새 헌터 협회장은 누가 맡죠?"
"누구든 간에 우리 이익 잘 대변해줄 양반이어야죠? 딴 주머니 차서 뭐 해먹을 생각 만만한 양반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따로 뭐 챙겨 먹어도 우리 이익 챙겨주는 과정에서 챙겨 먹으면 돼요. 협회를 발판 삼아 정계 진출해도 오히려 환영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당장 헌터 출신 금배지가 한 명도 없는 판이니까······."
이후로도 김형만 씨는 계속해서 우리 이익을 대변해줄 단체의 필요성을 열변했는데, 과연 엘마를 키우는 사람다운 일이었다. 닉네임만 봐도 알 수 있듯 저 직업의 유저들은 자기네 집단의 손해를 결코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담 특무대랑 특무대장 조지는 거랑······ 이 기회에 헌터 협회 설립하는 게 끝이에요?"
석장실의 물음에 내가 발언했다.
"나도 요구하고 싶은 거 하나 있는데······."
"어떤 거요?"
"각성자 차별 금지법, 대충 그런 거 만들라고 윽박질러야 하지 않나?"
이건 좀 생뚱맞은 발언이었나 보다.
"각성자 차별 금지법이요?"
"결국 나라에서 각성자 상대로 초법적 조치를 남발하는 게 이 모든 문제의 핵심 아닙니까? 계속 이러는 걸 막아야죠!"
"계속 이러는 거라면 어떤······"
"얼음 능력자들은 물증 없이 감옥에 처넣거나 수용시설에 처박고! 각성자 수배범은 제압해도 통제하기 어렵다며 대뜸 죽이려 들고! S급한테는 뭔 생각하고 사는지 알아야겠다며 호텔 방에 도청기를 설치하고! 이러는 걸 막아야 한단 말입니다. 전부 각성자란 이유로 법을 초월해서 저 지랄 중인데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얼음 능력자, 어쩌고 할 때는 백담비만 슬쩍 눈길을 줬을 뿐 다들 담담했지만 이후 발언에는 아니었다.
"그게 맞네. 그런데 법 제정하라고 윽박지르면 그걸 바로 들어줄까요?"
"이번 일도 있고 하니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뭐 입법 절차가 있으니까 시간 좀 걸리겠지만 하여튼······"
듣자 하니 여기 모인 각성자들 사이에서 진지한 의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자기 이름이 언급된 덕인지 강준치마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들 버스 안에서 신나게 떠들던 중이었다.
프로펠러 소리가 들렸다. 뭔가 하고 창밖을 보니 헬기 한 대가 우리 버스를 따라 날고 있는 게 아닌가.
"저거 뭐냐? 군용 헬기라서 미사일이라도 쏘려는 거 아니지?"
"방송국 헬기 같은데?"
"아, 이거 뉴스 내보내게 영상 찍으려나 보다."
"우리 관련 뉴스를 내보낸다면 뭐 어떤 논조로 쓰려나?"
"보나 마나 거지같이 쓸 거 같은데? 저 새끼들 뉴스고 기사고 죄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내보내잖어."
다들 방송사에 악감정이 있는 듯 수군거리는 가운데, 김형만 씨가 장난스레 웃었다.
"그럼 영상 못 찍게 막을까요?"
그리 말하더니 김형만 씨가 창밖으로 검지를 내밀었다. 그 검지 끝에서 방출된 한 줄기 열선이 방송국 카메라에 닿자 그 렌즈가 녹아내리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어쭈, 저 새끼들이 카메라 망가지니까 스마트폰 꺼내네. 어떻게든 뉴스 내보낼 거다, 이거지?"
김형만 씨가 혀를 찼고 내가 끼어들었다.
"아예 떨궈버리죠? 마침 지나다니는 차도 없으니 괜찮을 것 같은데."
"죽이자고요?"
"그건 아니고."
나는 설명하는 대신 공간이동 했다.
방송국 헬기 안에 이동하니 우릴 향해 스마트폰을 겨누려던 기자며 기타 인원들이 눈을 부릅떴다.
"안녕."
그들과 조종사를 붙잡고서 다시 공간이동 했다. 그렇게 그들을 길가에 내려놓자 헬기 안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고 김형만 씨가 다시 열선을 방출하자 이번에는 헬기가 아예 폭발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추락한 헬기가 도로에 내리꽂혔다. '쾅!' 완전히 박살이 나서는 화염과 연기를 내뿜기 시작한 헬기를 보며 다들 손뼉치기 시작했다.
"와우!"
대한각성연대에서 활동하던 시절, 공중파 방송을 요청해도 번번이 무시당했던 원한을 이렇게 풀었다. 허망한 얼굴로 자기네가 탑승했던 헬기를 보는 저들을 보니 이토록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이번 일로 언론의 대응이 어떤지, 대중의 반응이 어떤지는 상관없다. 그딴 건 선동하기 좋아하는 나치 새끼들이나 신경 쓰라지.
우리는 그저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할 권리를 챙기면 될 일이다. 초인 각성자로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데도 비각성 찌꺼기들이 차지하고서 내놓지 않고 있는 그 모든 권리를 말이다.
더욱 떠들썩해진 분위기 속에서 버스가 달리던 중이었다.
"어?"
모두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게이트 경보였다. 경보 발령지는 서울. 보아하니 근처였다.
"베헤모스 관련 같은데, 어디야?"
이 와중에 다들 헌터답게 직업윤리를 발휘했다.
경보에서 알린 장소를 향해 버스가 목적지를 전환했다.
우릴 태운 버스는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는 차들을 지나, 허공에 일렁이는 게이트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도사리는 짐승을 보았다.
신이 직접 빚어낸 듯한, 그게 아니고서야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없을 만치 거대한 짐승을.
"베헤모스······."
신화 속 괴수가 거기 있었다.
실시간으로 확장되는 허공의 게이트에서, 베헤모스의 얼굴 일부가 보였다.
베헤모스는 소드 월드에서 수천 년 전 거대화 능력에 각성했다는 맨티코어다.
수천 년이나 살면서 그 거대한 맨티코어는 열선 능력에 이어 석정 능력에도 각성했으니, 이제 베헤모스는 그 꼬리에서 내뿜는 열선으로 전투기며 전투 헬기 따윌 모조리 격추하는 사백 미터짜리 암석 정령으로 유명해졌다.
게이트에 드러난 놈의 안면을 봤다.
보통 암석 정령은 그 외피를 구성한 암석의 크기가 저마다 달라서는 여러 돌덩이를 억지로 붙인 듯 보이기 마련인데, 베헤모스의 경우엔 아니었다.
놈의 몸체를 이룬 암석들은 너무 오랫동안 하나로 붙어있었기 때문일까? 그 암석들은 마치 처음부터 한 덩이였던 것처럼 견고하게 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맨티코어 특유의 흉측한 얼굴이 고스란히 그 암석에 드러나 있었다.
못생기다 못해 혐오스럽게 생긴 맨티코어의 기형적인 얼굴도 저 정도로 거대하면 어떤 신성함이 깃드는 듯했다.
도저히 생물이었던 무언가로는 보이지 않는, 지상을 징벌하기 위해 천상에서 만들어낸 듯한 초현실적 피조물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헤모스는 강준치를 보고 있는 듯했다.
암석 정령인 베헤모스는 각성자의 영혼을 볼 수 있다. 놈은 맨눈으로도 강준치의 능력이며 그 강대함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강준치가 자리를 비웠기에 움직였을 베헤모스는, 강준치가 복귀한 것을 확인하자 사냥할 뜻을 도로 접은 듯했다.
"물러간다!"
그 말대로 베헤모스가 멀어졌다. 게이트 안에서 놈은 겨우 한 발짝 물러났을 테지만 그 걸음이 우리에겐 상당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베메호스가 멀어지면서 게이트 또한 수축했다.
이 와중에 일찍이 기자 정신을 발휘한 적 있는 김요한이 이 모든 상황을 영상에 담는 중이었다.
"이거 인터넷에 올리면 반응 죽이겠죠? 준치 씨 덕에 베헤모스가 멈춘 거라는 말 못 믿는 놈들이 꽤 있던데, 이제 다들 준치 씨 떠나면 어찌 되는지 알게 될걸!"
맞다. 이로써 강준치는 이 나라에 자신이 없어서는 안 된단 사실을 증명했다.
강준치로서는 그 사실이 몹시 흡족한 듯했다. 마땅히 한 것도 없으면서 만면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걸 보니.
그리고 강준치는 그 소시민적인 성격과는 별개로 불특정 다수의 관심과 인정을 갈구하는 욕구가 있다. 돈 벌 필요도 없는 주제에 인터넷 방송 채널에 자꾸만 참교육 영상을 올려대는 걸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이 상황에 욕구와 자신감이 충족된 덕일까?
"놀라운 구경 잘했고, 이제 다시 가려던 곳으로 갑시다!"
이후로 우리가 버스에 탑승하여 다시 나아갔을 때도 강준치는 버스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이대로 우리 앞에 군인들이 가로막는다면 기꺼이 충돌할 맘이 있었다. 여기 강력한 각성자들이 수십 명씩 모인 데다 강준치가 우리와 함께였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앞을 가로막은 것은 군 병력이나 특무대 따위가 아니었다.
수십 분 후, 일단의 양복쟁이 무리가 버스 앞에 섰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우리 앞에 선 양복쟁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우리 앞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이렇게 말했다.
"아, 나라 위해 늘 고생하시는 엽사님들!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앞서 그런 일을 겪으신 다음 만나 뵈어야 해서 유감이기도 하고요. 대화를 나누기 전에 사과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자세한 직함이며 이름까진 모르겠지만 TV 정치 채널에서 한 번쯤 본 것 같은 양반들. 그들이 우리를 맞으러 나섰다.
정치에 해박한 듯한 김형만 씨가 그들을 쭉 훑더니 만족한 듯 중얼거렸다.
"이야, 금배지만 다섯에 국안부 장관까지 나오셨네?"
그 높으신 분들이 고개 뻣뻣하게 든 채 썩 꺼지라며 일갈했으면 나부터가 화가 났겠지만, 다행히 그들은 기세등등한 각성자 군단 앞에서 윽박지를 만큼 바보들은 아니었다.
여기 나온 그들은 다들 나이가 지긋해 보였고, 험난했던 근현대를 지나며 온갖 유혈사태를 겪어봤을 터였다. 그로써 어려운 시기엔 가장 단순한 폭력이 법이며 지위 따위보다 훨씬 위협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을 테고.
그 높으신 분들 앞에서 김형만 씨를 비롯해 말 잘하는 몇몇이 나서서 우리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나와 강준치, 석장실과 같은 강력함으로 유명한 각성자들은 그들 뒤에 서서 팔짱 낀 채 그들의 발언에 힘을 보탰다.
"어, 그러니까 한희석이 그놈이 이렇게 설칠 수 있었던 것이 다 이 나라가 각성자들 상대로 법을 안 지키는 분위기가 있는 덕분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거기 불만을 품고 모였구요······"
김형만 씨를 보니 높으신 분들을 상대로 말하려니 긴장되는 듯 이 자리에서야 횡설수설하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박미형 씨며 인천시장님과 친하게 지내듯 잘 나가는 각성자 헌터쯤 되면 다들 알고 지내는 정치인 한둘은 있는 법. 요구사항의 상세한 내용은 그들을 통해 조율하면 될 일이었다.
한편 날이 더웠다.
땡볕에 우리를 맞으러 나온 높으신 분들의 얼굴에서는 연신 땀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싫은 소리 하거나 잘난 척 무언가를 가르치려 드는 일 없이 계속 예, 예 하는 저 위정자들을 보니 내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한민족이란 개념을 나치들이나 숭상할 법한 무언가로 여기는 내가 한국사를 읽으며 느끼는 감상은 나치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몽골군이 고려를 정복했을 때, 청나라가 인조를 무릎 꿇렸을 때 나치들은 그 내용을 읽으며 굴욕감을 느끼겠지만 나는 어떤 쾌감을 느끼곤 한다.
이 땅의 위정자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어떤 강대한 외부의 힘이 기존의 모든 질서와 서열을 무너뜨리는 쾌감······.
내가 지금 느끼는 쾌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 여기 모인 각성자들은 승리했다. 특무대를 상대로 한 승리인지 정부를 상대로 한 승리인지는 이견이 있겠지만, 하여간 우리가 이겼단 사실만은 분명했다.
71화 말년병장 김요한 - [8]
이번 시위를 통해 약속받은 것들이 꽤 있다.
우선 헌터 협회장이 교체되리란 약속을 받았다. 새로운 협회장은 그와 같은 공무원 출신 인사가 아닐 것이며, 우리 각성자 헌터들이 내세운 후보 중에서 선출되리라고.
그리고 내가 제안했던 '각성자 차별 금지법'에 관련해서도 어떤 언질을 받았으니, '무조건 통과시키겠다' 수준은 아니어도 '생각해 보겠다'보다는 훨씬 강력한 약속을 받아낸 바였다. 정확히는 다가올 회기에 추진해보겠다던가?
그 약속은 높은 확률로 지켜질 터였다. 왜냐하면 그리 발언하는 의원들 앞에서 강준치가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으니까.
마지막으로, 특무대에 관해서도 우리가 요구한 대로 되었다.
특무대장 한희석은 경질되는 걸 넘어 처벌될 것이다. 단순히 징계받는 걸 넘어 재판을 받고 감방에 갈지 모른단 뉘앙스로 그곳에 나온 높으신 분들이 말했더랬다.
그리고 이번 일에 관련된 특무대원들은 남은 의무복무기간과 상관없이 전부 방출될 것이다. 특무대가 각성자 헌터들을 동원할 수 있다는 법령은 사라질 것이며, 그 법령이 사라지기 전까지도 특무대에서 각성자 헌터들을 동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들을 너무 선뜻 약속하더라고요? 특무대면 정부의 중요한 대 각성자 조직인데, 바로 칼질해서 힘 줄이겠단 걸 너무 쉽게 약속하니 제가 다 의아할 정도던데요."
내 말을 듣고서 휴대전화 너머 박미형 씨는 코웃음 쳤다.
「특무대가 정부 기관이고 뭐고, 윗분들 보기에는 그네들도 결국 똑같은 각성자란 거겠죠?」
"그게 왜요?"
「힘 있는 각성자 헌터들이 언제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를 위협 세력이면, 서울에서 군기반장 노릇 하려 드는 특무대도 마찬가지 위협 아니겠어요?
괜히 나라에서 특무대에 예산 짜게 준 게 아니에요. 무턱대고 예산 잔뜩 밀어줬다간 김극 씨 같은 각성자들 넉넉하게 모집할까 봐 일부러 적게 준 거지. 괜히 힘 커졌다간 좋을 것 없으니까 말이에요」
그 예산 부족으로 말미암아 특무대는 모집정원의 절반도 겨우 채웠고, 모집한 인원들도 딱히 유명하고 강력한 각성자들은 아니었다.
한희석은 그 상황에 불만을 품었던 모양이다.
박미형 씨가 추측하길, 한희석은 특무대가 확장되길 원했다. 단순히 서울에서만 활동하는 걸 넘어 수도권 전체에서 활동하길 원했다.
그래서 특무대는 김석희를 잡기 위해 부천에서 작전을 진행한 것이요, 체포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공간이동 능력자를 잡겠다며 인천에 몰려온 것 또한 같은 목적이었으리라고 박미형 씨는 주장했다.
「김극 씨가 안 잡히면 한희석 그 양반한테 나쁜 일이 아니었겠죠? 범인 은닉한 채 인천 어딘가에 숨었을 김극 씨를 잡겠다며, 특무대원들을 인천 여기저기에 풀어놓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 식으로 조직의 활동 지역이 넓어지면 자연스레 조직을 확장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테고······
대통령이 한희석 그 인간 대학 선배기도 하고, 대통령이 그 인간 직접 그 자리 앉혔으니까 다들 두고 보는 중이었을 텐데. 그래도 쭉 두고 보기엔 그 수작질이 곱게 보이진 않았을걸요?」
"그래서 밉보이다가 사고 친 김에 잘렸다 이겁니까?"
「뭐, 대충 제 해석은 그래요. 아무튼 고생했어요, 김극 씨! 하여간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뽑았단 말이야? 대한각성연대 출신이 기어이 해내다뇨! 정말 믿기지 않는······」
박미형 씨도 각성자 아닌가. 그녀로선 이번에 우리가 요구해낸 사항들이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중에서 내가 제안했던 각성자 차별 금지법이 특히 맘에 드는 눈치였고.
나는 한동안 박미형 씨의 칭송을 즐기다가, 통화를 마친 후에 또다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예, 강준만 씨?"
「예, 강준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극 씨!」
헌트웹 Justice1994, 전직 경찰이었던 강준만도 이번 일로 혜택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준만은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그는 이번에 특무대에서 나왔다. 의무복무기간이 6년이나 남아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번 작전에 참여한 특무대원들이 대거 잘리면서, 강준만 역시 방출된 것이었다.
사실 당시 강준만은 예비인력으로만 남아있었을 뿐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에 처벌 대상이 아니었는데, 이 아저씨가 나한테 전화해서는 자기도 잘라낼 대상으로 지목해달라고 하더라고.
내가 그렇게 해줌으로써 이 아저씨는 특무대에서 방출되었다. 그리고 이 아저씨의 표현에 따르면 '해방된' 셈이었다.
"고마울 것까지야. 그래서 이제 헌터 활동하실 겁니까?"
「그래야겠죠? 가능하면 강원도에서 활동하려고 합니다! 거기도 괴수 들끓어서 제가 처리해야 할 괴수도 많았는데, 이번에 서울 가서 괴수는 안 잡고 온종일 칼만 휘두르자니 죄책감이 다 들지 뭡니까? 이젠 돈도 제대로 벌면서 그것들 처리해야······」
그렇게 동족 하나가 덕을 보았다니 나 역시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미소 지은 채 슬쩍 물었다.
"그런데 특무대에 암석 능력자는 여전히 남아있죠?"
「예? 누구요?」
"특무대 암석 능력자 말입니다. 한희석이가 그 사람 시켜서 대리석 벽에 도청기 숨기고 그랬다던데? 그 사람도 이번에 잘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서요."
그리고 강준만이 말했다.
「아니, 누구한테 들으신 건진 모르겠는데 특무대에 암석 능력자는 없을 텐데요?」
"어······, 진짜요?"
「아마도요? 특무대 인원이 딱히 많지도 않았으니까 그리 특이한 각성자가 있었으면 기억 안 날 리가 없을 겁니다. 혹시 저 들어오기 전에 나간 사람이 있나?」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서 한숨 쉬었다. 택시 좌석에 등을 기댄 채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이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이 와중에 유일하게 아쉬운 것은 하나였다.
그날, 버스에 타고 있던 우리는 그 이상의 일을 해낼 수도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는 것.
우리는 거기 나온 의원들을 인질로 잡고서 보다 거창한 요구를 할 수도 있었고, 아예 국가 전복을 시도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강준치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강준치가 빠진 전력일지라도 당시 우리는 충분히 강대했다. 강준치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끼리도 무력 시위를 진행하기는 충분했는데도 우린 결국 그 정도 요구에서 만족해야 했다.
결국 기존의 질서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거기 모인 각성자 모두가 강준치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 강준치는 우리 각성자의 왕인 동시에 기존 체제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설령 국가 전복을 원하는 각성자가 있더라도 강준치가 얌전히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저놈도 가만히 있는데 나 따위가 감히······' 하고 생각하고서는 그 뜻을 접게 되는 것이다.
환각 속 테러리스트였던 내가 강준치를 노린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의심스럽다. 그가 한국을 얼마나 혐오하건, 결국 그의 존재 덕에 이 모든 질서가 유지된단 판단으로 일을 저질렀을지도······.
뭐, 어쩔 수 없다. 호가호위도 정도가 있어야지, 강준치를 등에 업고서 일을 진행한 주제에 그가 원치 않는 일을 해낼 수야 없는 법.
결국 뭔가를 제대로 바꾸고 싶거든 내 힘으로 직접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냥을 거듭하여 S급 수준에 도달하면, 그로써 강준치 그 친구와 동등한 수준의 각성자로 거듭나면 그때 나는 비로소 뭔가를 제대로 바꿔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뭔가를 바꾸기는 어려우리란 사실을 이번에 다시금 알았다.
날 태운 택시가 멈췄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교도소로 들어섰다.
내 여동생이 갇힌 교도소였다.
여동생을 만나러 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오늘 교도소장과 만나길 원했다.
교도소장이 그 요구에 응해서는 나를 제 방에 들여보냈다.
"이렇게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김극 씨! 어쩐 일로 만나자고 하신······?"
소장이 평소 수형자들에게는 어떤 태도로 대하는진 모르지만, 그는 적어도 내게는 만면의 미소를 머금은 채 대했다.
그가 저렇게 친절하게 구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TV 혹은 기사를 통해 날 봤으리라.
그리고 나는 웃지 않은 채 말했다.
"교도소에 김선이라고 있죠? 원래 뚱뚱했는데 이젠 비쩍 마른 기지배 말입니다."
"아, 김극 씨 여동생분 말씀하시는 거지요? 물론 알지요!"
그야 당연히 내가 만나자고 하기 전에 확인해봤으리라.
어찌 그러지 않고 배기겠는가? 내가 바로 해외 언론에서 이번 사건의 주동자 중 하나로 다룬 요주의 인물 중 하나였는데.
어떤 해외 언론에서는 강준치보다 나를 더 집중해서 다뤘단 사실을 헌트웹을 통해 아는 바였다.
눈앞의 소장, 저 비각성자 찌꺼기 또한 그 사실을 매우 신경 쓰는 중이리라.
"걔를 좀 신경 써서 보살펴 주셨으면 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약소한 성의를 표시하려고, 여기 이걸 가져왔는데······."
내가 내민 가방을 살짝 열어보더니 소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황급히 가방을 닫더니 비굴하게 웃었다.
"이러실 필요가 없는데, 그래도 뭐······"
그러고는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모든 편의를 다 봐주겠다고 약속하는 소장을 보니 내 맘속 죄책감이 줄어드는 듯했다. 뇌물 받고 저러는 공무원이 상대라면 얼마든지 잔인하게 굴어도 될 것 같았으니까.
내가 말했다.
"그런데, 소장님?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알아보니까 소장님이 아들 둘 키우고 계시던데."
너무 뜬금없는 말이었는지 소장의 미소가 어색해졌다.
"예······"
"이 와중에 김선 그년이 자꾸 징징거리거든요? 감옥 생활 좆같다고, 끔찍하니 빨리 꺼내달라고 징징거리는데······ 그년이 또 징징거릴 때마다 아드님 한 명씩 사라집니다."
"예?"
"요즘 경찰들이 실종 사건엔 수사도 안 하는 거 알죠. 누구 실종되면 한 수십 년 후에 지하 800m 공동에서 발견될 수도 있는 거고요. 아드님들도 대충 그럴 겁니다."
소장의 안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입 다문 가운데 나만 계속 말했다.
"알아들었죠? 그년 편지 검열할 생각은 하지 말구요. 앞으로도 면회하러 올 거고 면회 거절되면 그년 감방에 공간이동 해서라도 뭔 일 있는지 알아볼 거니까."
소장이 얼어붙은 가운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교도소를 나오자니 굴욕감이 느껴졌다.
젠장, 욕지기가 절로 나온다. 내가 저런 비각성 찌꺼기 따위에게 부탁씩이나 해야 하다니? 심지어 아까운 돈까지 써야 했고······.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다. 원래 같으면 저런 부탁 따윈 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번 일을 겪고서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각성자 수배범을 저들이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나니 교도소에 갇힌 내 여동생 관련으로도 걱정이 더욱 커졌다. 방금처럼 비각성자 찌꺼기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는 한이 있더라도 좀 더 신경을 써주기로 결정했고 말이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이 약속을 지킨다면, 그러니까 내가 제안한 그 법이 통과된다면 현재 불합리하게 갇힌 얼음 능력자들은 다시 한번 재판받을 기회를 얻을 것이다. 물증 없이 유죄 판결을 받았던 얼음 능력자들은 풀려날 것이며, 내 여동생 또한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그년의 수감생활이 지금보다 편안하기를 바랄 뿐이다.
72화 공간 능력자 김극 - [1]
오랜만에 강준치의 '참교육' 영상을 봤더니, 평소와 달라진 점 하나를 발견했다.
'뇌물 받는 쓰레기 짭새 참교육'
위와 같은 제목이었던 강준치의 영상은, 제목 그대로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상 속······. 음주운전 단속에 나선 경찰이, 신사임당 한 장을 받고는 단속에 걸린 운전자를 고이 보내주려 했다.
불행히도 그들은 강준치에게 발견된 대가를 치렀다.
'갯강구 씹새끼들이, 장난해!'
고함지르며 달려 나간 강준치는 곧바로 운전자와 경찰 모두를 공중에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는 손발을 휘저으며 당황하던 둘의 머리털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옷을 죄다 찢어버리고, 손발톱까지 뽑아냄으로써 참교육을 수행했다.
평소와 딱히 다른 것도 없는 내용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강준치의 이번 참교육 대상자가 제복을 입은 경찰이었단 점이 날 주목하게 했다.
강준치는 아무나 붙잡고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괴롭힐 상대를 가리는 편이다.
일찍이 한희석을 상대로도 손대중했던 걸 보면 알 수 있듯, 강준치는 공직자를 상대로는 그 가학심을 십분 발휘하려 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강준치는 이전까지 경찰 공무원을 건드린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경찰을 건드리자니 그 뒤탈이 두려워서 자제했던 것 같은데, 이번 영상에서는 경찰을 대놓고 건드렸다. 어째서?
얼마 전, 교도소장을 상대로 협박한 바 있는 난 그 변화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교도소장에게 그런 협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일종의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게 이 정도의 힘과 영향력이 있으므로 이 정도 선은 넘어도 괜찮으리란 확신 말이다.
강준치도 이번 일로 그런 확신을 얻었으리라. 그리하여 지금까지 넘지 않았던 선 하나를 비로소 넘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경사스러운 일이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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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byBerserker : 큰일이에양 큰일!
애기버섯이가 너무 귀여워서 큰일!!!
애기버섯이가 너무 귀여운 탓에 애기버섯이 집에 사생팬들이 잔뜩 몰려왔지 뭐예양?
김석희(姬) 언니야 사생팬들도 같이 왔던 모양이에양! 몇몇은 애기버섯이한테 김석희(姬) 언니야 어딨냐고 막 물어보는데, 애기버섯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엄청 무서워서 벌벌 귀엽게 떨고 있었지양!
그랬더니 글쎄, 애기버섯이를 지키러 여러 언니옵바야들이 잔뜩 와줬지 뭐예양(인천 시민들과 함께 맨 앞에서 베이지색 정장 입고 계시던 분이 박미형 시의원님입니다. 그분 얼굴 기억하시는 분들 모두 인천시장 선거에서 한 표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애기버섯이 보디가드인 준치 옵바야까지 오니까 사생팬들이 비로소 물러갔지양!
애기버섯이는 모여준 사람들한테 보답하려고 아이도루 콘서트를 열기로 결정했는데양!
콘서트장으로 향하기 위해 다 함께 버스 두 대(인천시장 선거에 기호 2번으로 출마하실 박미형 시의원님께서 대절해주셨습니다. 버스에 탑승했던 모두가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에 나뉘어 타고서 국경을 넘으니 맨티코어 아조씨에 높으신 분들까지 모두 애기버섯 아이도루 콘서트 보러 몰려왔지 뭐예양?
애기버섯이는 이 열렬한 반응에 신나서!!!
내가 예전에도 헌트웹의 건강미 아이돌쯤 되었지만, 이번 일 이후로는 그 이상의 존재로 거듭난 마당이다.
당장 달린 댓글 수만 봐도 이전과는 자릿수가 달라진 수준이더라.
익명 : 헌트웹에선 이런 똥글이나 올리는 분이어도 그저 숭배합니다 김극이시여
Ⓐ Dragon : 김극, 강준치 = 대한민국 각성자들의 희망임 진짜로
Ⓐ 엘마야캐요 : 이 모든 일이 전부 친하지도 않은 김석희 목숨 구하려다 이루어졌단 게 믿어지냐?
5my지저스 : 김극은 신이야! 강준치는 신이야!
Ⓐ GangStar☆ : 고맙다
Ⓐ GangStar☆ : 고맙다 말하려고 이 글 클릭했다가 내 눈 썩어버린 건 안 고맙고
보다시피 댓글창 분위기는 평소 날 칭찬하던 수준을 넘어섰다. 댓글을 단 이들 중에 A배지 소유자의 비율이 높다는 것 또한 눈여겨볼 일이었고.
예전에는 내 글에 댓글 단 적이 없던 A배지 소유자들마저 댓글을 단 것이 눈에 띈다.
이번에 특무대를 초토화한 것이며, 예비군 소집만큼이나 원성을 듣던 특무대 소집을 무효화 한 것이 여러 각성자들의 주목을 받았으리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 돌머리청년 : 대체 뭐냐? 내가 현장에서 박미형 시의원님 능력 몇 개인지 직접 확인했더니 얼음 능력 하나뿐이었는데······ 이 청년을 사로잡은 것은 각성 능력을 통한 세뇌가 아니라 최면 세뇌였던 건가?
Ⓐ 한민족의얼은恨 : 댓글 엄청 많아서 보러 왔더니 이게 뭐지;;;
계속해서 내 글에 달린 각성자들의 면면을 훑다가 컴퓨터를 껐다.
확실히 이번 일은 놀라운 쾌거요, 두고두고 인생 업적으로 삼아 떠들 만한 일이었지만 내가 이 인기에 힘입어 정치라도 하러 나갈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온갖 것을 갈아 넣은 단백질 쉐이크를 단숨에 들이킨 뒤, 나는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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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일은 좋다.
비각성 찌꺼기니 국가 전복이니, 어느새 머릿속에 가득 차서는 내 온갖 사고에 관여하면서도 이게 정말 옳은 것인지 찜찜함을 느끼게 하는 그 잡념들과 달리 헌터 일 관련으로는 모든 것이 확고하다.
인천의 각성자로서, 괴수 사냥을 할 때 나는 고민할 것이 없다. 난 그저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모든 괴수들을 쳐 죽이고는 덕분에 안전해진 인천 시민들의 갈채를 받으면 될 일이다.
그러니 사냥은 의심할 여지 없는 선한 일이요,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내 헌터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 그들이 날 지키러 기꺼이 달려와줬음을 기억했다.
"이번 일은 정말 고맙습니다! 이야, 내가 내 팀원들 와준 거 보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내가 그들에게 말하던 중에 정진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더 감격했어요!"
이 형이 갑자기 왜 이러나, 하고 바라보니 정진영이 말을 이었다.
"끝내주게 멋있었어요, 진짜······!"
그러면서 입술을 부르르 떠는 걸 보니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번 일로 이득을 본 것은 각성자들이지 이 형 같은 비각성자 헌터가 아니었는데, 왜 이런 반응인 걸까?
이후로도 임형택 씨며 성문영 등과 덕담을 주고받다가 관용차에 탑승했다.
오늘도 인천 시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사냥에 나섰다.
목적지로 이동하던 중, 내 옆좌석에 앉은 백담비에게 말을 걸었다.
"게이트 열 수 있게 된 거 협회에 보고했어요?"
"예, 보고했어요."
"협회에서 뭐래요? 계약금이랑 출동비 올려주겠답니까?"
"아뇨, 그런 말은 아직 없었는데. 다만······"
"다만 뭐요?"
"인천시와 계약금 반환 없이 계약 종료할 수 있게 중재해주겠다네요."
나는 기겁해서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게이트 여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겠단 거였죠. 이번에 베헤모스가 서울에 더 가까이 접근해서 그 위험도가 커지기도 했으니까, 게이트를 열어서 베헤모스 상태 관찰하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사냥 그만두게 해주겠다고······."
내 라운드걸이 내 곁에서 떠날 상황이라니? 말려야 한다는 충동이 들면서도 그래야 할 이유를 떠올리지 못한 나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서 뭐라 대답했고요?"
"그냥 이대로 활동 이어나가겠다고 했어요. 게이트 열고 베헤모스 관찰하는 거야 사냥하면서도 할 수 있으니까······."
그 대답을 듣고서 내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냥 계속하시겠다구요?"
"예."
"의외네요. 게이트만 여는 쪽이 몸도 편하겠다, 여러모로 안전하고 좋을 텐데 뭐하러?"
"전 헌터 일 그만둘 생각이 없어요."
"왜요?"
"결국 이 모든 게 헌터 일을 하면서 얻어낸걸요. 필요한 거 얻었다고 대뜸 그만두고 싶진 않아요. 제 능력이 이 정도로 성장한 것부터가 그렇지만, 김극 씨 곁에서 일하며 얻는 것이 많기도 하고······."
흡족해진 나는 씩 웃으며 내 라운드걸을 보았다.
백담비는 선글라스를 고쳐 썼을 뿐 그저 담담한 척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빨개진 귀만 봐도 그 사실을 알 만했다.
하여간 귀여운 년.
나는 내 라운드걸이 앞으로도 내 옆에서 사냥에 동참하리란 사실에, 그리고 그녀 또한 사냥에서 나름의 성과를 얻고는 보람을 느끼고 있었단 사실에 만족한 나머지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기분 좋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차가 멈출 때까지만 그랬다는 소리다.
차에서 내린 내게 바로 심각한 일이 다가왔다.
한 여성이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불안감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김극 헌터님이시죠?"
"김극 헌터 맞습니다, 인천 만세. 근처 주민분이세요?"
"예, 그런데······"
"용무라도 있으신가요? 있으면 말씀하시죠!"
내가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더니, 안절부절못하던 여성은 겨우 용기를 낸 눈치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나는 어디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여성은 횡설수설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요점은 이러했다.
"그러니까, 이 근처에서 따님이 실종됐다고요?"
"예······!"
"그래서 저희 보고 찾아달라는?"
여성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성문영이 짜증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걸 왜 경찰한테 말하지 않고 우리한테 말하세요? 우리가 그런 일 하는 사람들로 보이시나?"
이런 날 선 반응이 나오는 게 성문영 저놈이 성격파탄자여서는 아니었다.
헌터가 공무원인 줄 알고 이런저런 요구를 하며 귀찮게 구는 사람이 꽤 있다. 그때마다 헌터들은 짜증 내는 걸 넘어 아예 욕설을 내뱉곤 하고. 성문영 정도면 꽤 점잖게 대한 편이다.
그리고 여성은 그 정도 짜증에 위축된 눈치면서도 제 할 말을 했다.
"경찰 찾아가서 말했더니 찾아주려 하질 않아요! 그 애 어디 놀러 간 거 아닌가 제대로 확인이나 해보래요. 이미 다 확인해보고 말하는 거라 했더니, 요즘 세상에 실종자를 뭔 수로 찾느냐면서 돌려보내는데······!"
그 말을 끊고 성문영이 일갈했다.
"당연히 못 찾죠! 가출했는지 데스클로가 물어갔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냅니까? 괜히 사람 찾아내겠다고 위험지역 들어갔다가 자기도 실종되면 어쩌고요?"
이것도 괜히 화내는 게 아니었다.
요즘 경찰들은 실종자 신고를 받아도 수색하러 나서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는 수색한들 실종자를 찾아낼 가능성이 거의 없거니와, 자칫하다간 실종자를 찾으러 나섰던 경찰마저 희생될 가능성이 너무 큰 까닭이다.
그리고 경찰마저 하지 않는 일을 헌터가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헌터는 경찰이 아니니까. 헌터는 그저 민간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헌터를 넘어선 인천 공작이라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지.
내가 손바닥을 펼치자 성문영이 계속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여성에게 물었다.
"따님 사진 있죠? 보여줘 봐요."
"예? 예, 여기요!"
여성이 허둥지둥 폴더폰을 열어 7살배기 여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사진을 머릿속에 담고서는 약속했다.
"사냥하면서 능력껏 찾아보지요."
"정말요?"
"반드시 찾아내겠단 장담은 못 드리지만 일단 노력은 해보겠단 소립니다."
고맙다고 연거푸 말하며 고개 숙이는 여성을 지나, 우리는 이번 작전 예정지로 향했다.
걷는 중에 성문영이 볼멘소리를 냈다.
"형, 그런 약속을 대체 왜 해요?"
"화내지 마라, 인마. 너 보고 찾으라고 안 할 거니까."
"그럼 형 혼자서 찾아보게요? 그 정신적 그물망으로?"
"그럴 건데?"
"정신적 그물망으로 수색하는 것도 다 피로해지는 일 아니에요? 형 그걸로 괴수 찾다가도 툭하면 피로하다며 잠시 쉬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뭐. 왜 업무에 지장 주냔 거냐?"
"그게 아니라, 형은 이미 목숨 걸고 힘들게 일하는데 여기서 더 힘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 차라리 경찰들이 싫다고 해도 억지로 끌고 나와서 수색시킬 일이지, 뭐하러 형이 직접······"
나름대로 내 걱정을 한다고 저러는 모양이라 훈계하기도 난처했다. 나는 그 등을 툭툭 친 다음, 목적지에 도달해서는 잠시 멈춰 섰다.
모두의 호위를 받으며, 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정신적 그물망이 3km 반경으로 뻗어나가 범위 내 사물들의 정보를 내 뇌에 전달했다.
사냥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덤으로, 수색도 함께.
73화 공간 능력자 김극 - [2]
사냥은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정신적 그물망으로 괴수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면 헌터들이 그리로 향해 화망을 구성하여 다 함께 사살했다.
다만 이번에는 과정 하나가 추가되었으니, 괴수를 사살하고 나면 내가 정신적 그물망으로 주변 사물을 샅샅이 뒤졌다.
난 이런 식으로 대충 한두 시간쯤 고생하면 성과가 있으리라 예상했다.
내 공간이동 거리며 정신적 그물망의 범위가 대폭 늘어난 마당 아닌가. 덕분에 사냥할 괴수를 찾아내는 속도마저 예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치 빨라진 마당이다. 날이 지날수록 인천 탈환 프로젝트의 진척 또한 덩달아 빨라지는 상황이고.
그러니까 여자아이 하나쯤 쉽게 찾아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도, 네 시간이 지나도 수색의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여자아이도, 그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답답했다. 살아만 있다면 금방 발견되리라고, 설령 죽었더라도 그 시체 정도는 금방 찾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이쯤 되니 오기가 생겼다. 나는 사냥하는 동안과 쉬는 동안 내내 그 꼬마애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점심시간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쉬는 시간에도 동안 다른 팀원들과 떠들지도 않은 채 정신적 그물망을 뻗어 주변 사물을 살폈지만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그저 오후에 사냥할 만한 괴수 몇 마리만 더 찾아냈을 뿐이다.
이렇듯 아무런 성과가 없자 내 표정이 확 굳었나 보다.
내 불편한 심기를 읽었는지 오후에는 다른 헌터들도 내 수색을 거들었다.
"미래야, 들리니!"
사실 오전에도 그랬지만, 나이토 상과 그 팀원들이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놈들은 지금도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는 중이겠다, 평소라면 저 비각성 찌꺼기가 영상에 좋은 모습을 담으려고 별 지랄을 다 한다며 욕했으련만 지금은 그마저도 고마웠다.
다른 양아치 같은 헌터들도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괴수 무리를 제압하고 나면 그 주변 수풀을 뒤져보는 식으로 내 수색을 거들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그 꼬맹이 대체 어딨냐?"
"진짜 잡혀가기는 한 거냐?"
내가 평소보다 더 무리한 보람이며 나이토 상과 그 팀원들이 목 터지도록 외쳐댄 보람이 없게도, 끝내 7살 여아 신미래가 발견되지 않은 채 사냥은 끝났다.
날이 어두워질 즈음에 위험지역을 벗어나니, 오늘 실종된 딸의 수색을 부탁했던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형택 씨가 내 눈치를 살피고는 말했다.
"김극 씨, 평소보다 피로하실 것 같은데······ 제가 대신 가서 말할까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임형택 씨가 그 여성에게 다가가서 나 대신 오늘의 성과를 전했다.
그러니까, 당신 딸은커녕 그 꼬마 머리칼 한 올도 못 찾아냈단 사실을 말이다.
그러자 여성은 울컥한 모양이었다. 여성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지만, 그녀는 내 앞에서 입을 열려다 말았다.
여성은 그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저 때문에 오늘 고생하셨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말을 흐렸을 뿐이다.
이 여자가 지금 왜 저러나? 내가 멀뚱히 있었더니 성문영이 중얼거렸다.
"형 얼굴이 지금 무섭긴 엄청 무섭나 보네요······."
"지금 내가 왜?"
"지금 형 상태가 엄청 안 좋아 보여요. 담비 누나?"
내 라운드걸이 평소 가지고 다니던 화장도구에서 거울을 꺼내서는 내게 들이밀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얼굴을 보게 되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내 눈. 또한 내 얼굴의 혈관은 여기저기 도드라진 탓에 흉측했다.
오늘 세밀하게 수색하느라 평소보다 훨씬 고생하긴 했다. 그 탓에 신경계가 혹사당해 이렇게 된 모양이지.
그러나 잔뜩 고생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자위할 맘은 들지 않았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모두가 내 눈치를 살피며 해산한 뒤, 난 다른 헌터들과 함께 귀가하는 척하다가 어디 들를 데가 있다며 혼자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오늘 모두와 함께 사냥했던 그곳으로 돌아갔다.
오늘 내내 했던 일을 재개했다.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서는 3km 반경 내 모든 것을 살피고 또 살폈다.
다른 헌터들이야 오늘 충분히 목숨 걸고 일한 마당에 더 고생하도록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겠다, 이쪽 눈치를 보느라고 같이 남으려는 사람도 있을 테니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그렇게 했다.
내가 왜 이 일에 집착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쉽게 되리라 생각했던 일이 잘되지 않아 짜증 나서? 그게 아니면 나이토 상 유튜브에 '김극이 실종된 아이를 구출하다!' 따위로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그리되지 못해서?
이유야 어떻든 상관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천은 내 땅이다.
내 땅에서 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채 편히 잠들 수는 없다. 절대.
그러나 이쪽이 얼마나 비장한 맘을 품었든 그 자체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
날이 완전히 캄캄해질 때까지 수색을 계속했는데도 결국 7살 여아 신미래는 발견되지 않았다.
*******
다음 날, 다시 사냥하러 모이자 성문영이 날 보곤 한마디 했다.
"형, 얼굴 꼬라지가 왜 그래요?"
"오랜만에 던파 좀 밤새워서 했다."
"게임 좀 한 얼굴이 아닌데? 형 혹시······"
또다시 모두가 내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나는 손을 휘저었다.
"됐고. 일이나 하자."
오늘도 제 딸을 찾으러 온 여성을 지나, 우리는 또다시 위험지역에 진입했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없는 구시가지. 나는 눈 감은 채,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서는 버려진 건물을 동굴 삼아 숨어든 괴수들을 내 머릿속에 담았다.
그러다가 정신적 그물망에 생물 하나가 포착되자 나는 눈을 떴다.
방금 포착해낸 놈에 대한 정보를 모두에게 전했다.
"이상한 괴수가 보이는데."
"어떤 괴순데요?"
"비쩍 마른 곰? 대충 그런 느낌인데······."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모를 경우면 으레 그렇듯 백담비가 앞장섰다.
그녀가 경기관총을 들고 나선 가운데 다른 비각성자 헌터들이 뒤따른 뒤, 총성이 몇 번 울리더니 상황이 끝났다.
"어, 이놈 이거 처음 보는 놈인데······"
나는 피 흘리는 괴수의 시체를 봤다.
앞서 그물망으로 살폈듯 곰을 닮은 놈이었다.
비쩍 마른 데다 털도 죄 빠져있을 뿐, 그 골격이 누가 봐도 곰과 같은 놈. 언뜻 보기에는 지구 생물과 큰 차이가 없는 놈이었다.
"이놈 대체 뭐냐? 이 괴수 이름 아는 사람 있어요?"
"아무도 모르나 보네. 그럼 신종인가 본데요?"
세상에 보고된 적 없는 괴물을 발견하기,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게이트의 존재 덕에 그렇다.
한 생물이 게이트 안에 들어가 영체가 되는 순간 노화며 신진대사 따위가 모조리 멈추기 마련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굶어 죽거나 늙어 죽을 괴수들도 일단 게이트에 들어가기만 하면 죽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괴수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쯤 게이트 안에 처박혀 있다가 세상 밖에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미 멸종한 것이나 다름없는 종의 개체들도 게이트에 잔뜩 처박혀 있어서, 땅속에 묻혀 있다가 튀어나오는 유물들처럼 처음 보는 괴수들이 게이트에서 툭하면 튀어나오곤 한다.
카메라맨이 괴수의 시체를 촬영하는 가운데, 나이토 상이 나레이션을 읊듯 중얼거렸다.
"정말 곰처럼 생겼네요? 불길한데······."
"곰이 왜요? 대충 총 쏘니 죽던데요. 데스클로만큼 위험한 놈도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곰은 곰 나름대로 무섭죠."
나이토 상은 일본인답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곰이 정말 많은 사람을 죽인다고 말했다. 심지어 곰이 꼭 사냥감의 숨통을 끊은 다음에야 포식하는 것도 아니어서, 곰한테 사람이 산 채로 뜯어먹힌 경우도 왕왕 있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성문영이 듣다 말고 짜증 냈다.
"애 납치된 상황에 왜 그런 살벌한 말을 합니까? 가뜩이나 엄청 신경 쓰는 인간도 한 명 있는 상황인데······"
그리 말하며 성문영은 나를 흘긋거렸고, 그제야 나이토 상이 눈치껏 내게 사과했다.
이후로도 사냥하며 수색 또한 계속했지만 나만 계속 피곤해질 뿐이었다.
아, 나 말고 내 팀원들이며 다른 헌터들도. 다들 내 눈치를 살피느라 모두가 함께 피곤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상황을 보다 못했는지 백담비가 제안했다.
"그 어린애 말이에요, 게이트에서 한번 찾아볼까요?"
내가 알기로 게이트를 여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걔가 각성자란 말은 못 들었는데요. 비각성자 영혼은 조금만 거리 멀어도 거의 안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요. 한번 시도라도 해볼게요."
나는 조금 뜸 들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담비가 게이트를 열기 시작했고, 이내 생겨난 자줏빛 공간에 그녀가 들어갔다.
그로부터 수십 분 지나, 백담비가 다시 게이트에서 나왔다.
그녀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김극 씨? 들어와 보세요. 빨리요!"
뭔가가 발견된 모양이지? 나는 바로 게이트 안에 들어갔고 자줏빛 세계가 나를 받아들였다.
저 앞에서 백담비의 육성이 아닌 그 정신파가 들려왔다.
「따라오세요······!」
나와 마찬가지로 빛나는 실루엣으로 변한, 그러니까 영체로 변한 백담비를 따라 한동안 게이트 내부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게이트 안에 잠든, 거대한 괴수 몇 마리를 발견했다.
오늘 본 곰 비슷한 괴수였다.
여러 마리였는데, 그중 가장 거대한 곰 한 마리가 내 눈에 띄었다.
웬 여자아이의 머리를 입에 문 채, 그 조그만 몸을 깔아뭉개고 있는······.
「엄마? 엄마, 나 여깄어······」
앳되고 힘없는 목소리, 아니 그 정신파는 곰에게 깔린 여아에게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겨우 발견했다. 게다가 살아 있었다!
난 드디어 저 기지배를 제 어미에게 돌려보낼 수 있겠다는 희열에 잠겨있다가, 여전히 백담비에게서 흘러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백담비가 내게 물었다.
「저 곰, 애 몸에서 치울 수 있겠어요?」
나는 곧바로 당연히 될 거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예전에 본 환각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소월로 떠나려는 백담비.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막으려 하지만 끝내 그녀를 붙잡지 못하는 나······.
모든 것이 영체로 화한 게이트 안에서 물리적인 영향을 주고받기는 어렵다.
그리고 내가 저 조그만 라운드걸 하나 붙잡지 못했다면, 저 곰 새끼는?
「이런 씨발!」
내가 힘껏 밀쳐보았지만, 곰 괴수의 실루엣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놈에게 깔린 신미래 또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외부의 자극을 느꼈는지 그 꼬마애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엄마야, 나 여깄어. 살려줘, 응? 살려줘······」
그 순간 느껴진 끔찍한 기분은 비단 백담비 한 명에게서만 흘러나온 감정이 아니었으리라.
나는 이대로 저 꼬마를 데려가지 못하리란 사실을, 제 딸이 웬 곰의 썩지 않는 비상용 식량이 되어서는 이대로 쭉 고통받아야 하리란 사실을 그 모친에게 전해야 한단 사실을 알았다.
*******
"그 곰 새끼들 앞에 게이트 열어보면 어떨까요? 왜, 게이트 안 괴수들은 정령이 제 주변에 게이트 열 때마다 사냥할 기회 놓치지 않으려고 바로 뛰쳐나오잖아요?"
"이미 해봤어. 게이트 열든 말든 곰 새끼들은 꿈쩍도 안 했고. 비상식 이미 마련해놨으니 굳이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뭐 대충 이런 심보 같던데······."
"게이트 연 상태에서 누군가가 그 근처에서 어슬렁거려 보는 것은요? 그러니까 미끼를 써서 그것들을 게이트 밖으로 꾀어내면······"
"그것도 해봤어. 담비 씨가 자신이 얼음 능력자니까 괴수들이 보면 환장할 거라며 혼자 나와서 어슬렁거렸는데, 그래도 그것들 꿈쩍도 안 하더라."
게이트에 나와서는 여기 모인 헌터들과 이런저런 토론을 해봤지만 별 대단한 소득은 없었다.
난 그저 그 꼬마애를 모친 앞에 데려다 놓기는커녕 곰의 몸뚱이 아래에서 끄집어내기도 불가능하겠단 사실만 재차 확인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답답했던 기분은 이제 끔찍한 기분으로 화했다.
차라리 그 애의 시체를 발견했어도 기분이 이보다 끔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난 내 할 일을 다 했다며, 눈물 몇 방울 흘리고는 울적해진 내 기분을 달래면 끝이었을 테니까. 그런 다음 대충 잠이 들면 다음 날엔 나름대로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그럴 수가 없다.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이대로 시간이 지나도 이 일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도 그 꼬마애는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요, 그 쬐끄만 몸은 곰의 몸뚱이에 쭉 깔려있을 테니까.
그 꼬마애는 계속해서 죽지 못한 채 살아있다가, 어느 날 곰이 햇볕을 쬐기로 맘먹은 그 날 겨우 곰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곰들에게 뜯어먹혀 죽을 것이다. 어쩌면 산 채로. 어쩌면 엄마, 하는 단말마를 내지르면서.
그렇게 그 꼬마애는 살아있는 비상식량으로서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괴수의 아가리에 삼켜져 놈들의 똥이 될 것이다.
그날이 언제일까. 수십 년 뒤? 혹은 수백 년 뒤?
모르겠다. 그날이 최대한 가깝길 바라야 하는지, 아니면 최대한 멀길 바라야 하는지도······.
난 이 역겨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내려 애썼다.
74화 공간 능력자 김극 - [3]
물론 이 상황을 해결할 발상이 그 자리에서 바로 떠오르진 않았다.
결국 오늘도 우리는 해산했다. 나 또한 이미 실종된 어린애를 찾는다는 목적을 달성한 마당에 거기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하릴없이 귀가해야 했고.
집에서는 인터넷에서 게이트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관련 자료가 풍부하지 않았다.
하기야 백담비 같은 정령 능력자 인재를 확보해서는 게이트 관련 조사를 진행하는 국가야 여럿 있지만, 그 조사 결과가 민간에 풀린 것은 아니다. 구글에 검색 좀 하는 정도로는 내가 원하는 상세한 내용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관련 정보는 의외의 인물, 비각성자 찌꺼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쓸모야 있는 편인 나이토 상에게서 얻었다.
"게이트 내에서 서로 물리적 영향을 끼치기 어렵다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라더군요. 영체라고 하지만 정말로 물질을 초월한 영혼, 뭐 이런 건 아니잖습니까?"
나이토 상의 이번 인방 에피소드가 '실종된 신미래 양 찾기' 아니던가. 그래서 나이토 상이나 그 시청자들이나 이 일에 퍽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이토 상은 자기 유튜브 채널에 이번 일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며 공지를 올렸으며, 그로써 자기 유튜브 시청자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내게 전했다. 시청자 대부분이 한국인이긴 하지만 타국 시청자들도 그럭저럭 확보한 나이토 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확실히,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물질적 상태가 나름대로 보존되긴 하던데······."
"맞아요. 게이트에 들어가 영체가 됐다고 해서 착용한 옷이며 손목시계, 팔찌 따위가 싹 다 벗겨지진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영체가 되어도 탈착되지 않는 옷과 마찬가지로······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부터 아이와 괴수가 단단하게 결합 되어 있었다면? 그 결합은 둘 다 영체가 된 후에도 유지될 거랍니다."
내가 직접 게이트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 말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부터 곰 새끼가 아이를 물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둘 다 영체가 됐기 때문에 곰이 아이를 문 결합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고?"
"그렇죠? 게다가 영체끼리 서로 투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곰이 아이를 몸으로 덮고 있다면 그 상태에서 아이가 벗어날 수 없을 거라더군요. 애초에 아이의 사지가 부러져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면 영체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라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으리라고도 했고요."
그러니까 나이토 상이 말해준 정보들을 종합해보면 나온 결론은 간단했다. 그놈의 곰을 게이트 내부에서 치울 방법은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
하기야 사람들이 게이트 내부의 괴수에게 어떤 영향을 줄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 그랬을 것이다. 위험한 괴수가 주변에 있으면 저 멀리 바다 쪽으로 치워버리든가 했을 테지.
결국 방법이 없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포기할 맘은 들지 않았다. 어째서?
내가 다름 아닌 공간 능력자였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난 이번 일을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결론짓곤 머릿속에서 치워버리기 어려웠다.
각 각성자들의 능력엔 그 본질이 있다. 각성하기 위한 트리거와 관련된 본질이다.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각성하는 역장 외골격 능력의 본질은 '마음의 벽'이다.
자신과 외부 사이에 단단한 벽을 만들고는, 물리적 충격이며 방사능이며 다른 초능력(내 공간이동 능력으로 역장 능력자를 함께 이동시킬 수 없는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닐까?) 따위 모든 간섭을 차단하는 것이 그 능력의 본질이다.
그리고 내 공간이동 능력의 본질은 '벗어나는 것'이다.
내 능력은 감옥에 갇힌 여동생의 상태에 불만을 품은 채, 이 땅에서 벗어날 것을 소원하다가 각성했지 않은가. 그러니 대충 그런 해석이 가능할 텐데······.
그렇다면 내 능력으로, 일종의 감옥에 갇힌 그 꼬마애 또한 그곳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내 공간이동 능력의 한계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서 나 혼자 이런저런 연구를 거듭하는 마당이다.
그리고 난 내 공간이동 능력에 지금 이상의 가능성이 있으리라 여기고 있으니, 요새는 뜸하지만 얼마 전까지는 툭하면 보곤 했던 미래의 환각 또한 공간이동 능력의 영향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까닭이다.
정령 능력자들에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내가 가진 능력은 세 개가 아닌 두 개 아닌가.
그러니 내게 미래를 보는 초능력 따윈 없는 셈이요, 미래의 환각은 또 다른 초능력이 아닌 지금 가진 능력의 영향인 셈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은 같이 언급되는 법. 미래의 기억을 내게 주입하고 있는 능력은 분명······.
*******
당분간은 사냥하지 않고 쉬는 날이었다. 덕분에 이런저런 시도를 할 짬이 있었다.
"들어갈게요······"
오늘도 백담비가 베헤모스의 동태를 관찰하기 위해 게이트를 열었다.
난 그 안에 따라 들어가서는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기 시작했다.
게이트 내부에서 공간이동 해보려는 시도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게이트 내부에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부터가 자유롭지 않다. 예컨대 역장의 경우 게이트 내부에서 생성되지도 않는다고 들었다. 하기야 신체 구성이며 물리법칙 따위가 확 변한 상황에서 평소처럼 쉽게 될 리가.
그래도 정령 능력자들이 게이트 내부에서도 게이트를 열 수 있듯, 그 안에서의 능력 사용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닐 터였다.
그리 믿고 능력을 사용해 보았다.
정신적 그물망을 펼쳤다. 그리고, 아······.
그 순간 덮쳐온 멀미며 현기증 따위에 난 쓰러질 뻔했다. 제기랄, 뇌 내 물질 구성도 확 변했을 텐데 이 어지럼증은 대체 어떤 원리로 느껴지는 것일까?
「괜찮아요?」
백담비가 걱정하는 듯했지만 난 대충 괜찮다고 대답하고는 같은 시도를 반복했다.
멀미가 느껴지든 현기증이 느껴지든, 계속해서 그물망을 펼치고 또 펼쳤다.
설마 죽기야 하겠느냐는 심보로 같은 시도를 반복했더니, 나름의 성과가 나오긴 했다.
기어이 정신적 그물망이 게이트 내부에서 펼쳐졌다.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더한 어지럼증이 덮쳐왔지만 예상한 바였다. 난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서 들어온 정보들을 해석하고자 노력했다.
영체들······.
물질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그것들이 감지된 순간, 난 격한 어지러움 속에서도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영체들이 그물망에 포착되었단 것은, 그것들에 내 능력이 적용되긴 한다는 뜻이니까.
더 나아가 내가 이곳에서도 공간이동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러니까 영체로도 공간이동 할 수 있게 된다면?
더 나아가 내가 평소 다른 누군가와 함께 공간이동 하듯, 다른 영체와 함께 공간이동 할 수 있게 된다면 이 모든 일은 곧바로 해결될 터였다.
정말이지 이곳에서 공간이동 하는 것이 가능해지면 더 고민할 것도 없다. 그 꼬마를 깔아뭉갠 곰을 붙잡고 공간이동 하여 위치를 옮겨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런 계산에 공간이동 하기 위한 시도를 해보았지만 실패했다.
같은 시도를 거듭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공간이동을 시도할 때마다 느껴진 어지러움이 너무 강해서 공간이동 하기 위한 집중력이 순식간에 고갈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게이트를 나서야 했다.
*******
게이트 밖에서도 나름대로 계속해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았다.
또 다른 구출 작전을 세우고는 인원을 모아 실행에 나섰다.
그리고 내가 모은 인원 중에는 경찰도 한 명 있었는데, 내가 아는 인물이었다.
예전에 내가 구급콜을 당해 경찰들에게 불려갔을 때, 얼음 능력자 수용시설에서 자살 소동을 벌였던 그 얼음 능력자 중년.
그 중년 남자도 경찰이었으므로 이후로도 경찰 일을 계속했던 모양인데, 그 아저씨가 이번 작전에 함께하게 됐다.
"정말로 돈 안 받고 작전 참가하시려고요?"
내 물음에 얼음 능력자 경장, 진범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내가 경찰인데 시민 구하는 작전에 돈 받고 나서는 게 말이 되나?"
누군가가 괴수에게 끌려가 실종되는 일이야 워낙에 흔해서 새삼 호들갑 떨지도 않게 된 세상이지만, 이번 신미래 양의 사례는 워낙에 특수한 데다 유독 끔찍했기 때문인지 뉴스에도 나왔다.
그리하여 이번 일이 세간의 주목의 받게 된 가운데, 진범 씨가 이번 일에 선뜻 나섰고 말이다.
"아저씨, 아직 그 수용시설에서 지내시나?"
"냉동고에서? 응. 따로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괜찮아요? 이젠 좀 견딜 만하신가?"
"응, 덕분에. 그럭저럭 참을 수 있게 됐네. 그날 이후로 점호도 중단됐겠다, 냉동고 바로 앞에 김극 씨가 아파트 짓는 중이잖아? 몇 년 지나면 거기로 이사 갈 수 있을 테니까······"
"이후로 직장 생활은 좀 어떻구요. 그때 경찰들이 몰려가서 면담했던 것 같은데, 어색해지지 않았어요?"
"씨······ 어색하지. 여러모로 좆같어."
약간의 잡담을 마친 뒤, 우리는 작전에 나섰다.
이번에도 미끼 작전이었다.
일찍이 백담비가 미끼로 나서서 게이트 주변에서 어슬렁거려도 놈들이 반응하지 않아서 실패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실패는 백담비가 딱 봐도 강력한 각성자이므로 얼음 능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놈들이 보기에 만만치 않은 상대라 사냥하러 나오지 않았단 해석이 있었다.
그래서 백담비가 아닌 다른 얼음 능력자를 미끼로 쓰자는 말이 나왔다. 위험한 일이라 사람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선뜻 나서준 것이 진범 씨였고.
그리하여 진범 씨가 특정 지점에서 홀로 어슬렁거리는 가운데, 나는 2km 떨어진 위치에서 다른 인원들과 함께 대기했다.
정신적 그물망을 펼친 채 진범 씨의 상황을 살피던 중, 무전기 너머에서 진범 씨가 외쳤다.
「어, 게이트! 게이트 열리고 있어!」
이윽고 게이트가 충분히 열리고서 그 안의 괴수들이 뛰쳐나왔을 때, 나는 거느린 인원들과 함께 공간이동 했다.
"쏴! 바로 쏴!"
백담비에 나이토 상, 그 이외 총을 잘 쏘는 헌터들이 나와 함께 진범 씨 앞에 나타났다.
저 앞에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곰 괴수들이 진범 씨를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놈들 앞에서 내가 헌터 라이플을 연발로 당기자 그걸로 끝이었다.
어떤 긴박한 전투도 없이 곰들이 쓰러지자, 진범 씨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 김극 씨가 각성자들이랑 서울 쳐들어가니까 높으신 분들이 기겁한 이유를 알겠는데? 김극 씨가 이런 식으로 각성자 여럿 데리고서 국회의사당에 공간이동 하거나 하면 진짜 뭐 어쩔 방법이 없겠어······"
그러나 난 그와 함께 기뻐할 수 없었다.
게이트 내부의 곰 괴수들은 총 여섯 마리였는데 이번에 나온 것은 네 마리뿐이었다.
그리고 신미래를 깔아뭉갠 괴수는?
그중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쉰 다음, 내가 짊어져야 할 각성자의 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 시도마저 실패했으니, 결국 인천 공작이 해결해야 할 것이다.
*******
그날 오후, 나는 백담비를 따라 다시 게이트 내에 진입했다.
백담비와 함께, 여전히 곰 아래 깔린 꼬마를 노려보았다.
「엄마······」
당장엔 저 엄마, 하는 것을 들으니 동정심과 함께 뭔가 해야만 한다는 의욕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게 언제까지 그럴까? 이 상황을 지긋지긋하게 접하다 보면 언젠가는 결국 덤덤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내가 이 꼬마애와 어떤 혈연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요, 내가 이 꼬마를 구출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바쁜 와중에 고통까지 받으면서 이 일에 얼마나 전념할지는 나부터가 알 수 없다.
지금 이 오기와 의욕을 보존하기 위해, 앞으로도 내가 계속 고생해야 할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동정심처럼 언제 휘발될지 모를 감정적인 이유가 아닌, 그보다 현실적인 이유를 떠올리려 시도했다.
내가 저 꼬마애를 구출해낼 경우, 어떤 이득이 있을까?
그러니까 꼬마 위, 저 씨발놈의 곰을 공간이동 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우선 언론의 갈채를 받을 것이다. 내가 저번 무력 시위 사건으로 '막 나가는 무법자' 이미지가 씌워졌음을 알고 있다. 이 와중에 이번 구출에 성공해낸다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작 이미지 회복을 넘어선 많은 이득이 보인다.
게이트 내에서의 공간이동이 가능해진다면 많은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우선 내가 어디로든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북한이든 중국이든,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안전하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게이트 내에 고이 처박혀 있던 괴수를 게이트 밖으로 끄집어내는 행위가 가능해질 것이다.
언제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와 사람들을 해칠지 모를, 보이지 않는 폭탄과도 같은 존재인 게이트 내부의 괴수들을 그 안에서 뛰쳐나오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게이트 내부의 괴수를 원하는 장소로 공간이동 시킬 수 있게 된다면? 사냥에 나서기 전 데스클로를 다른 헌터들 앞에 던져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게이트 안에 도사린 위험을 미리 제거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괴수들이 게이트 밖으로 침공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헌터가 게이트 안으로 침공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게이트 내부, 자줏빛이 끝없이 펼쳐진 이 아스트랄계에서 나는 또 한 번 공간이동을 시도했다.
75화 공간 능력자 김극 - [4]
게이트 내부에서 공간이동을 시도한 첫날, 기록할 만한 성과는 전혀 없었다.
공간이동은커녕 정신적 그물망을 통한 좌표설정도 성공하지 못했다. 내가 정신적 그물망을 펼칠 때마다 밀려온 현기증······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집중하기가 끔찍하게 어려웠다.
나는 두 시간 정도 헛된 시도를 반복하다가, 끔찍한 어지러움만 챙기고서 게이트를 나와야 했다.
계속해서 시간이 흘렀다.
"오늘도 힘냅시다! 그리고 김극 씨? 김극 씨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김극 씨는 사냥 마치고도 따로 할 일 있으니까, 이번엔 다른 헌터들이 일 좀 더하게 내버려 두시고······"
사흘째, 헌터 일은 하지 않고 꼬마애 구출에만 전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른 헌터들과 함께 인천 탈환 프로젝트를 재개했다.
사냥을 마친 뒤에야 백담비가 열어준 게이트에 들어가서는 같은 시도를 반복했다.
물론 성과는 없었다. 아직은.
나흘째, 정신적 그물망을 통한 좌표설정에 성공했다.
어떤 노하우가 생겨서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게이트 내부 환경에 적응이 된 덕인지는 알지 못했다. 또한 좌표설정에 성공했을 뿐 정작 공간이동 자체에는 성공하지 못했고.
그러나 이마저도 지금으로선 유일한 진전이었다.
"인천 만세―!"
열흘째, 인천 계양구에 게이트가 열렸다.
베헤모스가 서울에 더욱 깊숙이 진입한 상황이다. 베헤모스가 거느리고 다니는 괴수 떼 또한 함께 이동하면서 그 여파가 인천에도 미쳤다.
쏟아져나온 괴수 무리의 규모가 대단히 컸다. 공간이동을 한계까지 남발하고서야 겨우 사태를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게이트에 들어섰다.
「아니, 오늘은 쉬어야지요? 너무 무리하시는 게······」
백담비가 만류했지만 날 말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여자 앞에서 강한 척 허세 부리려는 수컷의 본능이 폭발했을 뿐이다.
「거뜬한데? 무리 좀 해도 안 죽어요. 봐요」
기어이 정신적 그물망을 펼치고서 공간이동을 시도했을 때, 난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어? 어······.
해일처럼 밀려온 어지럼증에 내 의식이 휩쓸렸다. 그리고 해일에 휩쓸린 사람이 물속에서 심신이 가라앉듯, 나 또한 그리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게이트 안에서 정신을 잃었다.
아니,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유체이탈이라 표현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어디론가 휩쓸려서는 이대로 사라지는 줄 알았던 내 의식이, 흐릿하게나마 주변 상황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게이트에 오래 처박힌 괴수들은 일종의 가수면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던데, 나 역시 그런 상태에 이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 의식은 어떤 흐름에 휘말려, 게이트 내부를 부유했다. 마치 꿈속의 정신처럼······.
그리고 게이트 내부, 아스트랄계는 온갖 지성체들의 감정과 생각이 축적된 곳이다.
아스트랄계에서 오랜 세월 축적된 감정과 생각은 일종의 에너지를 이룬다. 각성자들은 그 에너지를 받아들여 힘을 얻은 자들이다.
내 의식은 맨 먼저, 전사들이 함성을 내지르고 콜로세움의 검투사가 포효하는 영역을 통과했다. 신체강화자로서 각성했을 때 본 환상을 다시 한번 겪은 셈이었다.
그러고서 내 의식은 온갖 답답한 상황에 고통받는 이들의 영역을 통과했다.
이때 나는 관에 갇힌 채 땅속에 파묻혀 관뚜껑을 손톱으로 벅벅 긁는 남자와 감옥에 갇혀 사형일을 기다리는 죄수의 처지를 내 일인 듯 체험했다. 추측건대 이건 아마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이 보는 환상이었을 것이다.
맨 마지막으로, 내가 공간이동 능력에 각성했을 때 본 환상을 다시 겪었다. 다른 이들이 겪었던 탈출과 이동의 장면들이 다시 한번 내 의식에 가득 찼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꿈과 다른 것은, 이 와중에 내 의식은 엄연히 현실에 존재했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게이트 내부에 존재했다. 덕분에 나는 내가 기절한 채 깨어나질 못하자 기겁한 내 라운드걸의 포효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이 미친 인간이!」
그렇듯 주변 상황을 알 수 있었기에 나는 시간의 흐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몇 시간 내내 내가 그러고 있었으며, 정신을 잃은 내 옆에서 백담비가 떠나지 않고 쭉 대기하고 있었단 것도 알았다.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내가 눈을 떴다.
「괜찮아요?」
난 잠시 눈앞의 백담비와 대화를 나누어 정확한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고 나서 물었다.
「제가 최소 아홉 시간 이상 넋 나간 상태였다고······ 담비 씨는 그 옆에서 쭉 이러고 있었어요?」
「그럼 김극 씨 혼자 방치하고 저 혼자 집에 가서 맘 편히 잠이나 자게요?」
「이거 죄송해서 원······.」
백담비가 인천으로 돌아가기 위한 게이트를 여는 동안 나는 무심결에 정신적 그물망을 펼쳤다.
그리고 느껴진 변화에 눈을 껌벅였다.
게이트에서 정신적 그물망을 펼칠 때마다 밀려들곤 하던 어지럼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그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내 의식이 한차례 게이트 내부를 부유하면서, 내 의식이 게이트 환경에 더욱 적응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게이트에서 나와보니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길래 인천 만세, 외쳐주고는 귀가했다.
이후로는 이번 일에 관련해 미담이 퍼진 모양이다. 종일 싸우느라 피곤한 와중에도 꼬마 하나를 구출하기 위해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밤샌 헌터의 미담 말이다(사실, 나 스스로가 그런 나를 매우 멋진 놈이라 여기긴 했다).
나는 오랜만에 방송국과 인터뷰했으며, '신미래 구출 작전'이 헌터 김극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뉴스가 그날 방송에 나왔다.
보름째, 웬 아줌마 아저씨들이 날 찾아와서는 날 돕겠다고 말했다.
"보니까 여러분, 공간 능력자는커녕 각성자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요?"
내가 그리 물었더니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네가 어떤 수련원에 속한 명상 수련자들이요, 내가 내면에 더욱 깊이 침잠할 수 있도록 교육함으로써 내 능력 활용이 더욱 수월해지도록 돕겠단 것이었다.
헌트웹에 검색해보니 놈들이 서울 각성자 센터 몇 곳에 빨대를 꽂아 넣은 사이비 종교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울컥했다. 하여간 비각성자 찌꺼기들이 하는 짓은 역겹기 짝이 없다.
이 비각성 찌꺼기들을 두들겨 팰까 하다가 겨우 참았다. 그러는 대신, 놈들을 게이트 안에 던져넣고는 다음 날 꺼내주었다.
그로써 놈들은 고통받았을 것이다. 게이트 내부는 온갖 감정과 메타포로 가득 찬 곳이니까. 그래서 게이트가 열릴 때마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감정이며 메타포들에 근처 사람들이 자극받는 것이다.
그리고 비각성자들은 각성자들보다 훨씬 민감하게 자극을 받는다. 괜히 게이트 안에 나와 백담비만 들어가곤 했던 게 아니다.
과연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놈들이 고소하겠다면서 난리를 피웠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인터넷 기사에 이번 일이 언급됐을 뿐이다.
스무날째, 신미래의 모친이 우리와 함께 게이트에 들어갔다.
우리가 그녀를 딸 앞에 데려다주었다. 곰 아래 깔린 채 제 어미를 찾는다는 제 딸과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곰에 깔린 제 딸 앞에서, 여성은 칭얼거리는 제 딸의 손을 붙잡은 채 주변에 슬픔의 감정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참 후, 여성은 이제 게이트로 나가라는 내 말을 거부했다.
「안 나오고 계속 여기 계시겠다고요?」
「예······.」
여성은 제 딸 옆에 계속 함께 있어 주길 원했다.
아마 사이비 종교인들이 게이트에서 하룻밤 내내 갇혀있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고는, 일반인이 게이트에 들어가서 시간이 지난들 괴로울 뿐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서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끝내 여성을 설득할 논리를 떠올리지 못한 우리는 게이트에서 나왔다.
이후로 한 달째가 되었고, 거기서 또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게이트가 세 번이나 더 열렸다. 그 모든 사태를 막으러 다니면서 인천 내 괴수들도 사냥해야 했지만, 난 빼놓지 않고 매일 게이트에 몸을 담았다.
비각성자마저 제 딸과 함께 있겠다고 게이트에 들어간 마당 아닌가. 각성자씩이나 돼서 엄살을 부릴 수야 없는 법.
그리하여 한 달 하고도 17일째······.
나는 비로소 게이트 내부에서의 공간이동에 성공했다.
「아, 김극 씨. 드디어?」
평소 바깥에서 하던 만큼 제대로 공간이동 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살짝, 고작 십 미터 정도 공간이동 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당장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게이트 내부에서 내 능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까.
가능성이 보인 만큼 이제는 포기할 수도 없게 된 셈이었다. 나는 이 모든 시도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 슬슬 나 홀로 공간이동 하기는 어렵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공간이동 하는 시도를 해야 했다.
사람을 추가로 고용할까 생각했다. 게이트 내부에 다른 누군가를 데려와선 그와 접촉한 채 공간이동 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백담비가 말했다.
「그러실 것 없이 저 잡고 공간이동 연습하시면 되지 않나요?」
나는 조금 뜸 들인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백담비와 서로 손을 붙잡은 채, 공간이동 하는 시도를 거듭했다.
그러자 아예 공간이동 되지 않음으로써 또다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지만, 심지어 며칠이나 그랬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기도 웃기는 일이었다.
난 잔뜩 지친 내게 성공할 수 있음을 설득했다.
나는 인천 공작이다. 인천 공작은 머저리 테러리스트, 라운드걸이 납치되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보더니 나중에는 그녀가 떠나는 것마저 막지 못한 그 한심한 놈과는 다르다.
그리고 나는 공간이동 했다. 내 라운드걸과 함께.
「성공한 거죠? 그러니까, 이제 드디어······!」
그 순간 주변으로 퍼져나간 그녀의 희열이 내게도 전해졌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양을 되찾을 준비가 끝났다.
*******
"김극 헌터님, 힘내십쇼!"
내가 구출 작전을 실행하기로 한 날,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여럿 모였다. 내 영상을 찍어서는 유튜브에 올리곤 하는 팬도 여기 와서는 날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상황에 내가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당장 공간이동 한 번 하면 상황이 끝나는 게 아니기에 더욱.
나는 내가 막 게이트에서 데리고 나온 신미래의 모친에게 말했다.
"이미 예전에 말씀드린 것이지만, 어쩌면 따님이 죽을 수 있어요. 직접 보셔서 알겠지만 그 곰 새끼는 따님을 단단히 물고 있습니다. 게이트 안에서도 서로 떨어지지 않을 만큼요."
그리고 그 곰은 신체강화 능력의 각성체였다. 어쩌면 나 못지 않게 힘이 셀 수도 있는. 그 사실을 그녀에게 전했다.
"그 곰 새끼가 게이트에 나오고서 외부 자극을 받은 순간, 놈은 놀란 나머지 따님을 물고 있던 턱에 힘을 줄지 모릅니다. 그리되면 어찌 될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것 자체가 잔인한 일이겠지만······"
신미래의 모친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신세로 쭉 있는 것보단 낫겠죠. 부디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전이 시작되었다.
백담비가 게이트를 열었다. 다른 헌터들이 대기하는 가운데, 나 혼자서 게이트 안에 들어섰다.
잠시 후 나는 꼬마와 그 몸을 깔아뭉갠 곰 앞에 섰다.
양손을 뻗었다. 꼬마의 머리를 물고 있는, 곰의 양쪽 턱을 각각의 손으로 붙잡은 다음(힘주어 붙잡진 못했다) 눈을 감고서 정신을 집중했다.
실패해선 안 된다. 절대로.
나는 곰, 그리고 그 턱에 물린 신미래와 함께 공간이동 했다.
게이트 밖으로.
시야가 변했다. 자줏빛 세계가 사라지고 햇볕이 쏟아진 순간, 영체였던 우리 몸은 아무런 지연도 겪지 않은 채 곧바로 유기체 몸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나는 내 심장 박동을, 내 손을 통해 전해지는 곰의 감촉과 그 역겨운 숨결을 느꼈다.
대기 중이던 헌터며 기자들이 고함질렀다.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곰이 제 턱을 다물지 못하도록 놈의 양턱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양손을 당기는 동작보다는 단순히 턱을 다무는 것에 힘을 주기가 훨씬 쉬운 법.
갑작스러운 상황에 곰이 발작하듯 반응했고, 나는 곰이 입 다물려는 것을 저지하기 어려웠다.
가슴이 폭발적으로 두근거렸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둬야 하는 건가? 두 달 고생한 보람도 없이?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정신적 그물망을 통해 어떤 흐름을 느꼈다.
게이트가 열리면 그렇듯, 그 안에서 온갖 감정이며 메타포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게이트에서 쏟아져나온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신미래의 조그만 몸에 스며드는 것을 이 순간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곧이어 신미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아······!"
처음 봤다. 한 각성자가 각성하는 순간은.
게이트에서 여러 시도를 거듭하며 내 정신적 그물망은 더욱 세밀해졌으며, 이전에 감지할 수 없던 것들을 감지할 수 있게 된 마당이다.
정신적 그물망이 신미래의 피부를 덮은 투명한 막의 존재를 내게 알렸다.
난 이 순간 저 꼬마가 역장 외골격 능력에 각성했단 사실을, 이제 곰이 턱에 힘을 준들 저 꼬마는 죽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신미래에게 스며들었던 그 압박감과 스트레스의 에너지가 내게도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내 머릿속에 또다시 환상이 스쳤다.
순장된 여인. 거대한 새의 부리에 붙잡혀버린 시궁쥐. 감옥에 갇혀 사형일을 기다리는 죄수. 나무에 묶인 채 사람들에게 돌을 맞는 도둑. 십자가에 매달린 반역자······.
압박감과 스트레스의 순간들. 온갖 추상적인 상징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이나 겪어본 일 아니던가?
76화 공간 능력자 김극 - [5]
그리고, 아······.
살짝 어지러웠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러 변화가 체감된다.
우선 몸이 확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실제로 체중이 줄어든 것은 아닐 테고, 몸에 단단한 외피가 덧씌워져서는 체중이 분산된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또한, 곰의 양턱을 맨손으로 붙잡느라 느껴야 했던 불쾌한 감촉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확실하다. 나는 역장 외골격에 각성했다.
헌트웹에서 읽어본 적 있는, 다른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이 각성 당시에 경험했다는 환상과 좀 다른 내용의 환상을 여럿 본 것 같지만 그것이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눈앞의 곰을 노려봤다.
내 동족을 내놔라, 짐승 새끼.
나는 힘주어서, 저 역겨운 곰의 아가리를 벌렸다. 방금까지는 놈의 턱 힘이 내 팔심보다 강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기어이 곰의 아가리가 쩍 하고 벌려졌다.
신미래의 머리통이 풀려났다. 그리고 내가 온 힘을 다해 곰을 밀치자 비로소 신미래가 자유로워졌다.
"어!"
물론 여전히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나든 곰이든 살짝 움직이기라도 했다간 그 조그만 몸을 짓밟고 말 것이다.
과연 걱정됐는지 그 모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래야!"
그러나 보아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외치기도 전에 한 놈이 부리나케 뛰어와서는 바닥에 널브러진 신미래를 안아 들고서 저 멀리 안전한 곳으로 물러났으니까.
보니까 나이토 상이었다. 하여간 여러모로 활약하는 놈. 어쩌면 저 불경한 비각성 찌꺼기가 앞으로도 인천 시민의 종으로서 봉사할 수 있도록 노예 문서를 수여할지 고려해 볼 만한 일이었다.
한편 입에 물고 있던 제 비상식량을 빼앗긴 채, 밀쳐져서 엉덩방아까지 찧으니 곰은 비로소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곰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놈의 키가 나와 엇비슷하단 것이 드러났다. 놈이 살짝 더 크긴 했지만 하여튼.
한편 키만 봐도 날 만만찮은 상대라 여긴 듯, 곰이 포효했다. '크허어어엉―' 그 지저분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듣기 싫었다.
닥쳐라, 짐승 새끼.
말 대신 행동으로 내 뜻을 따르도록 만들어줬다.
휙 하고, 울부짖느라 벌린 곰의 아가리에 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이빨 몇 개를 부수고 놈의 입속에 파고든 내 주먹이 그 입천장을 후려갈겼다. 입속이 찢어진 듯 내 안면으로 놈의 피가 튀겼다.
이 일격에 곰은 휘청거리면서도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곰이 내 주먹을 물었다. 강하게 물렸는지 손이 빠지지 않을 정도였는데도 통증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새삼 새 능력을 각성했단 사실이 실감됐다.
"형!"
불안한지 뒤에서 성문영이 소리쳤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로써 난 거리를 벌리기 어려워졌지만, 그것은 날 물고 있어야 하는 짐승 새끼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판단하건대, 내가 이 짐승보다 강했다. 그것도 훨씬.
놈을 상대로 마음껏 난타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난 곰에게 주먹을 물린 그대로, 자유로운 다른 주먹을 놈을 향해 뻗었다.
예전보다 훨씬 빠르고 가볍게 느껴지는, 그러나 그 위력이 훨씬 배가된 주먹질이었다.
이제 나는 주먹을 휘두르며 공기저항 따윈 느낄 수 없었다. 더 무거운 헌터 라이플을 들고자 지나칠 만치 근육을 부풀린 탓에 주먹질할 때마다 느끼곤 했던 불편한 감각도 더는 느낄 수 없었다.
내 근육뿐만이 아니라 내 가죽마저 근육과 똑같은 힘을 내어서는 내 모든 동작을 보조하는 듯한 감각이다.
안팎에서 동시에 낸 힘으로, 짐승의 두꺼운 몸을 연달아 후려쳤다.
'쾅!' 매 주먹질에 포탄 터지는 소리가 동반됐다. 그 포탄이 단단한 어딘가에 명중하여 폭발하는 소리도.
곰이 휘두른 앞발을 피하고는 한 방 더 주먹을 꽂아 넣자 내 주먹이 놈의 가죽을 찢었다. 놈의 몸에서 피가 튀겼다.
그와 함께 카메라 불빛들이 번쩍거렸다. 날 향한 카메라들······ 그 역시 나쁘지 않았다. 파이터의 무대에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휘황한 것은 당연한 법.
허리에 힘을 실어, 곰의 불룩한 배를 후려갈기자 놈이 비틀거렸다.
이쯤 되니 내가 전혀 위기가 아님을 깨달았는지 여기저기서 환성이 울려 퍼졌다.
"오!"
이 와중에 총성 또한 연달아 울렸다.
크다 못해 육중하기까지 한 총성이었다. 다들 이 정도 괴물을 상대론 돌격소총 따윌 쏴봤자 피부에나 좀 박힐 뿐임을 알고 있어서 최대한 강력한 무기들을 가져온 마당이다.
백담비만 봐도 어디선가 50구경짜리 대물 저격총을 가져와서는 쏘는 중이었는데, 벌써 몇 발이고 명중시킨 듯했다.
그러나 이 정도 괴수가 몇 발 맞는다고 죽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약한 괴물이 아니다.
곰은 온몸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여전히 내 주먹을 문 아가리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또한, 그 와중에도 그 흉흉한 시선은 내 얼굴을 똑바로 향한 채였다.
아마 저 짐승 새끼는 지금쯤 아드레날린이 팽팽하게 돌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내가 또 한 번 주먹 한 방을 꽂아 넣은 순간 곰이 반격했다. 제트기 날개처럼, 공기를 휙 가르며 덮쳐오는 놈의 앞발이 순간 내 시야를 잠식했다.
붙잡힌 채로 피하기엔 어려운 경로라서 피하지 않았다. 내 팔꿈치로 콱 쳐서 튕겨내고는 텅 빈 놈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뭔가 부러뜨린 감촉이 느껴졌다. 갈비뼈 몇 개쯤 부러진 모양이지.
숨쉬기가 어려워진 듯 곰이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이 와중에 심판이 경기를 멈추라고 지시하지 않았으므로 난 놈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이미 내가 여러 번 쳐서 육질이 연해졌을 놈의 배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내 주먹이 놈의 배에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그 뱃속 깊숙이 말이다.
내 손에 놈의 창자가 만져진 순간 난 역장 외골격 능력에 각성한 것에 감사했다. 그 더러운 것을 붙잡아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이 곰에게 초재생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마저 버티지는 못했다. 이 와중에 총성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면서 곰의 등에서 피가 튀고 있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피를 줄줄 흘리게 된 곰은 기어이 쓰러졌다.
그제야 난 곰의 아가리에 물려있던 주먹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그 과정에 생겨날 상처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거칠 것 없이 그저 우악스럽게.
곰의 이빨 몇 개가 더 부러지면서 내 주먹이 풀려났다. 이 짐승 새끼가 입에서도 피를 토하고 있었는지 풀려난 손마저 피범벅이었다.
난 온갖 더러운 것이 묻은 양손을 휙휙 털었다. 내 몸에 피가 튀었지만 눈살 찌푸릴 필요가 없었다. 곰의 피는 내 몸이 아니라 역장에 튀겼을 뿐이다.
순식간에 깨끗해진 내 손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한쪽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지금 막 짐승이 죽었다. 그와 함께 내 머릿속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함성을 만끽했다.
'킴극! 킴극―!'
또다시 카메라 불빛이 번쩍였다.
이 휘황한 옥타곤의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나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승자로서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와중에 라운드걸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아직 안 끝나지 않았어요? 게이트 안에 한 마리 남았잖아요."
아, 그 말이 맞다. 아직 저 게이트 안에는 곰 한 마리가 더 남아있다.
빙정 능력에 각성한 놈인데, 얼음 정령은 정령 중에서도 제일 약한 쪽이므로 놈마저 때려잡기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게이트에 들어가니 곰의 실루엣이 허둥지둥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제 동족의 최후를 보고서 가수면에서 깨어난 것일까? 사족보행하는 짐승답게 그 뛰는 속도가 제법 빨랐지만 내게서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놈마저 게이트 밖으로 꺼내서는 어렵잖게 처치한 뒤에야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형? 방금 피가 옷에 안 묻고 휙 털어지던데, 그거 혹시······"
다른 헌터들, 그리고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는 겨우 눈을 뜬 신미래와 그 조그만 몸을 끌어안은 그 모친을 보았다.
게이트 안에서는 서로의 모습이 실루엣으로만 보였으리라. 그러니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은 오랜만일 것이었다.
엄마, 하고 칭얼거리더니 신미래가 먼저 울음을 터뜨렸고 그 모친이 뒤이어 울었다.
난 어릴 적부터 모친한테 사랑받은 기억이 거의 없어서 이런 상황에 대리만족을 느끼곤 한다.
이 상황을 내가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지극한 자부심을 느끼며 나는 웃었다.
*******
곰 두 마리를 처치한 뒤에도 휴식을 취하진 못했다.
난 한동안 기자들의 여러 질문 공세에 시달렸는데, 그것은 차를 타고 귀가하는 중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역장 외골격에 각성한 게 맞다고요?"
"그렇다니까."
"신체강화에 순간이동, 여기에 역장 외골격까지······ 미쳤네, 진짜."
이종호가 중얼거리는 가운데 성문영이 말했다,
"형, 그럼 이제 A+++급이네요?"
"그렇지. 그게 왜?"
"아니 뭐 그냥, 미쳤다고요. 애초에 형 신체강화 하나만으로도 역장이랑 신체강화 둘 다 가진 김석희 줘패지 않았어요?"
"그랬지?"
"거기에 역장 외골격 더해졌으니 근력만 따져도 두 배쯤 강해졌겠네요? 이젠 진짜 A급으로 부르기 뭐한 수준 아닌가······"
저들의 칭송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난 겸양 따윈 떨지 않은 채 그 모든 칭송을 즐겼다.
지금 난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이번에 또다시 각성하며 새삼 확신한 사실이 있었으니, 바로 각성자야말로 범속한 자들을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번에 새로이 각성한 과정은······ 내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내가 보기에도 영웅적이었다. 덕분에 주로 사회의 약자들이 역장 외골격 능력에 각성한다는 편견이 단번에 사라졌을 정도다.
고난과 시련을 뛰어넘은 끝에 얻은 새 힘이라니? 여기서 어떤 신성을 느낀들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겪은 각성들은 매번 그랬다. 옥타곤에서 승리하고서, 여동생을 위해 시위하다가, 한 꼬마를 구출하기 위해 애쓰다가 나는 각성했다. 위대한 행위의 결과물들.
이걸 보면 각성이 격을 갖춘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비각성자들은 그럴 자격이 없기에 각성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을 테고.
각성자인지 비각성자인지의 차이가 어째서 격의 차이인지도 이로써 알 수 있으리라.
이 와중에 같은 각성자인 백담비마저 부러웠는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번에 능력 또 하나 각성하면 좋겠다고 하시더니 기어이 각성하셨네요······ 그래서 만족스러우세요?"
"무척요. 아주 그냥 끝내주는데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다. 무척, 너무나도 만족스럽다.
역장 외골격.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능력이다.
더욱 단단해지고 더욱 강력해질 수 있는 능력. 평범한 자들이 날 더욱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
저번에 백담비는 공간이동 할 수 있는 내가 추가로 각성한다면 역장 날붙이를 얻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말했지만, 내 생각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역장 날붙이를 각성하는 순간 강준치가 벌벌 떨며 내 눈치를 살피게 되겠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특무대에 들어갈 것도 아닌데, 친구 하나 겁주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애초에 역장 날붙이 자체가 정부에서 좋아하는 능력이다. 체급을 무시하고 누굴 상대로든 데미지를 줄 만큼 위력은 강하지만, 정작 몸이 단단해지거나 빨라지진 않아서 경찰특공대라도 만났다간 그들의 총탄에 무력하게 당해야 하는 능력. 집단의 폭력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능력······.
그따위 능력은 필요 없다.
반면 역장 외골격은 정부에서 가장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능력이다.
어지간한 개인화기는 우습게 무시하는 역장의 특성상, 역장 외골격 능력자를 상대로 어쭙잖게 병력을 보내봤자 절대 제압할 수 없다. 이 와중에 역장 외골격의 소유자는 초인 중에서도 몹시 빠르고, 몹시 강력한 편이다.
그러니 한 각성자가 집단을 상대로 날뛰기에는 이보다 나은 능력이 없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각성자 반란은 대부분의 경우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이 주도했으며, 나 역시 비슷한 상황에 대비해 그 능력을 원했다.
차량 TV에서 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장이었다면 초저주파를 느꼈을 법한, 신체강화자의 외침이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나는 TV에 나온 도널드를 봤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명 사업가로서 웬 영화에 나왔단 것만 알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이제는 미국에서 현 대통령을 제외하곤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저 남자가 바로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대선 경쟁상대였던 유력 정치인들 상당수가 암살당한 지금은 그를 제칠 인물이 따로 없다던가?
그 정치인들을 살해한 암살범은 정황상 얼음 능력자들이 분명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은 세계 대부분의 국가와 달리 얼음 능력자들을 탄압하지 않는 나라이다.
왜냐하면 바로 저 도널드가 강력하고도 유명한 각성자로서, 다른 각성자들의 입장을 대변해 그 모든 탄압 시도를 틀어막고 있기 때문에.
도널드는 신체강화자이자 역장 외골격 능력자이며, 거기에 열선 능력까지 각성한 초인이다. 본인은 S급이라 주장하는, 실제로 S급 수준은 아니지만 그 주장이 아예 무시될 정도는 아닐 만치 강력한 각성자.
원래 그는 노인이었지만 신체강화자에 딸린 초재생능력으로 말미암아 젊어졌다. 그리하여 TV에 나온 것은 금발 미남 젊은이 한 명이다. 그 외모와 그가 가진 능력이 다름 아닌 슈퍼맨을 연상시키는 것이 미국 내 그의 인기 비결일지도 모른다.
한편 그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세 가지 능력을 지니게 되어서일까? 지금 난 그에게 놀라울 만치 동질감을 느낀다. 그가 미국에서 그랬듯, 나 역시 이 나라의 동족을 지켜내야겠단 의무감도.
이번에 나는 전보다도 강해졌으며, 앞으로도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로써 비각성자 찌꺼기들이 날 두려워하게 만들 것이다. 놈들이 내 눈치를 살피게 만들 것이다.
이번에 올라온, 이 일 관련 인터넷 기사를 보니 내 의도는 벌써 반쯤 성공한 듯했다.
내가 신미래를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새 능력에 각성했다는 기사였는데, 거기 달린 댓글 중에 한 댓글이 유독 내 눈에 띄었다.
비회원122 : 공간이동 하는 새끼가 이젠 총알도 안 박힐 만치 단단해졌는데, 이제 저 새끼 어떻게 막아야 하는 거냐?
대부분의 댓글이 칭찬 위주인 와중에 부정적인 반응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댓글이었는데, 그 많은 칭찬보다도 저 불안해하는 반응 하나가 내겐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더라.
씩 웃으며, 나는 비장한 맘을 품은 채 헌트웹을 켰다.
77화 특무대원 한희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