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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56-67

56화 계양구 남작 김석희 - [7]

그저 자유롭게, 헌트웹에 들어가 보니 역시나 내 관련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익명 : 영상 보니 김극 혼자 각성자만 여섯 명쯤 털어버렸는데 이거 S급으로 승급시켜줘야 하는 거 아니냐 ㅎㄷㄷ

Ⓐ Justice1994 : 대물 저격총으로 쏜 건데 그냥 맨손으로 잡아버리던데. 이거 보면 김극 저 양반 신경가속 능력도 있는 것 아닌가? 신경가속은 각성해놓고 그 능력이 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더만

강준치의 능력 수준을 떠올리면 말이 안 되는 호들갑이요, 내가 신경가속 능력자란 추측 또한 틀렸지만 다들 영상을 보고서 놀랐다는 것쯤은 알 만하더라.

그 반응들을 즐기다가 이쁜 말투로 글 하나를 작성했다.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 이번에는 극장판이에양!

마법소녀로서 언제나 마을을 지키는 애기버섯이가 이번에는 슬픈 싸움을 했어양 ㅠ

선대 마법소녀였지만 아름다운 인천의 변경에서 너무 오래 활동한 나머지 인접한 마계 서울의 악한 기운에 물들어 타락해버린! 전 마법소녀 김석희(姬) 언니야와의 일전!!!

애기버섯이가 김석희(姬) 언니야를 제정신으로 돌리기 위해 기특하게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지양! 인천을 지키기 위해 애기버섯이, 눈물을 머금고 김석희(姬) 언니야와 싸웠어양!

애기버섯이, 우선 김석희(姬) 언니야의 미모에 홀려 언니를 추종하던 옵바야들을 먼저 쓰러뜨렸고양!

그다음에는 김석희(姬) 언니야의 뇌에 가득 찬 서울의 기운을 빼내기 위해 애기버섯의 버섯 요술봉을 휘둘러 (······)

막 게시글을 올린 차에 전화가 왔다.

박미형 씨였다. 전화를 받아보니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극 씨, 오늘 막 조사 끝났다던데 괜찮아요?」

정말 걱정하는 목소리길래 내가 말했다.

"의외네요."

「의외라뇨?」

"화내실 줄 알았는데 걱정부터 해주시니까요?"

내가 그리 말했더니 전화기 너머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화내고 싶어도 그럴 염치가 있겠어요? 상황 답답하게 돌아가는 거 뻔히 보면서 허공에다 화내는 것 말곤 아무것도 못 해줬는데요.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줬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힘썼는데 왜 혼자 나선 거냐며 오지랖 좀 발휘하겠지만 이래서야 원······.」

"하기야 여러모로 일이 답답하게 흘러가긴 했죠."

「정말 그랬어요. 나야 일개 시의원이니까 내가 제대로 못 도와주는 거야 그러려니 해야겠지만 시장님이 직접 경찰청 쳐들어가서 일 똑바로 하라고 고래고래 고함 지르셨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 나라가 진짜 어떻게 되려고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 하여간 욕봤어요, 김극 씨. 당분간 푹 쉬어요, 알겠죠?」

욕봤다고 표현하기엔 상당히 즐거운 경험이었단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난 그저 침통한 척 말했다.

"하기야, 이번 일이 뉴스에도 계속 나오던데 당분간 근신 좀 해야겠습니다."

「맞아요. 그러고 보니 뉴스에 이번 사건 계속 나오던데 그것부터 상당히 이해가 안 가더라」

"이해가 안 간다뇨?"

「김극 씨도 대한각성연대에서 오래 활동했으니 잘 알겠지만, 각성자 관련 범죄는 뉴스에 잘 안 내보내잖아요? 왜, 우리 활동할 적에 얼음 능력자 셋이 암살 사이트 운영한 사건 기억나요?」

"기억나죠. 얼음 능력자 고작 셋이서 두 달 만에 사람 백 명 가까이 죽인 사건이라 다들 엄청 경악했잖아요."

「그래요. 그런데 그 경악스러운 사건도 뉴스로 안 나왔잖아? 정부에서 얼음 능력자들 탄압하는 타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딱 좋은 사건이었는데도 말이에요」

"괜히 공중파로 내보냈다간 모방범죄만 늘어날 거란 걱정에 정부에서 아예 사건 자체를 묻어버렸죠, 아마."

「그랬죠. 저기 높으신 분들이 지금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게 사회질서 유지잖아요?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은 무조건 언론통제 할 만한 일이었단 말이에요.

이번 일로 힘센 각성자는 범죄를 저질러도 경찰들이 손도 못 댄단 사실을 널리 알려버린 셈인데, 대체 왜 뉴스에 내보낸 건지 모르겠으니까 불안해. 아무 생각 없이 언론 풀어준 게 아닐 텐데······」

"불안하다니, 어떤 정책 빌드업쯤 된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아마도요? 아무튼 김극 씨, 다시 말하지만 여러모로 고생했어요. 하지만 지금 김극 씨만 고생인 게 아니라 김극 씨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거 알죠? 또 이런 일 생기면 그땐 절대 그냥 못 넘어가요」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극 씨?」

이번엔 임형택 씨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 아저씨와 관련해 찔리는 게 있는지라 나는 먼저 사과부터 했다.

"예, 아저씨. 내가 미안합니다. 그래도 내 맘 이해하죠?"

「그러게요. 하여간 내가 화를 내야 하는지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고맙다고 하시죠?"

「그리 속 편한 소린 하지 마요······! 내가 그때 분명 경찰에 넘기라고 말했는데. 그때 김극 씨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왜 기어이······ 내가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는지 압니까?」

이 아저씨가 말은 이렇게 해도 날 위해 여러모로 발품을 뛰었단 걸 알고 있었다.

기자들을 일부러 추레한 몰골로 찾아다녀서는 그때 자기가 신체강화자한테 맞아서 죽을 뻔했다느니, 그걸 김극 씨가 보고 꼭지가 돌았다느니 열심히 하소연했지 아마.

"진짜 걱정 안 해도 괜찮았는데요? 나 혹시 잡혀가더라도 팀원들 줄 퇴직금이 있었으니까 나 깜방 간다고 다들 굶어 죽을 걱정 없었어요."

「아니, 그런 이유로 괜찮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요?"

「아니, 이 사람이······ 하여간 내가 이번만큼은 김극 씨 부하이자 어른으로서 충언하겠는데 또 이러면 절대 안 돼요. 알겠죠? 지금은 김극 씨가 사고 쳐놓고도 집에 편히 있지만, 또 이런 일 있으면 일단 구속부터 될 거란 말이야. 내말 명심해요, 응?」

어째 임형택 씨도 박미형 씨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두 어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정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나는 그때야말로 구속될까?

적어도 이번에 내가 구속되지 않으리란 것쯤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징역을 살게 되는 것은 김석희를 제외한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 일일 테니까.

내가 형을 살게 되어 인천과의 계약이 파기될 경우, 내가 인천에 계약금을 돌려줄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초고층 아파트를 짓기 위해 사둔 건설자재를 압류해서 팔아야 했다. 또한 그랬다가는 아파트 건설을 중단해야 했을 것이며, 그것은 인천시 입장에 좋은 일이 결코 아니었다.

내 초고층 아파트 건설계획은 시장이 직접 눈여겨볼 만치 인천시의 주요 사업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지 않은가. 그 아파트 건설이 중단되는 일은 근처 주민이며 건물주를 비롯해 그 누구도 반기지 않을 터였다.

아파트 건설은 물론 내가 주도하는 인천 탈환 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벌이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인천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계신 인천 시장님이든, 내 활약으로 이득을 보는 인천 사람들이든 내가 잡혀가는 일을 바랄 사람은 이 지역에 없었다.

삼권분립 따위 교과서에나 나올 이론이 현실에 적용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생기는 게 아니고서야, 인천시의 의지가 확고한데 인천법원이 내게 실형을 내릴 일은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감옥에 갈까 봐 불안한지, 지금도 인천 각 곳에서 헌터 김극의 무죄방면을 주장하는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라던가?

그렇듯 날 위해 고생하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난 헌트웹을 다시 켰다.

미리 올려둔 글에 댓글이 잔뜩 달려있었다.

익명 : 김석희면 한때 헌트웹 네임드였는데, 이번에 조직째로 줘터지는 영상 올라오질 않나 이런 식으로 공개 능욕까지 당하네 ㅎㄷㄷ 불쌍하다 진짜

Ⓐ 엘마야캐요 : 불쌍하긴 개뿔? 원래 헌터 하던 새끼가 열심히 일하는 후배 헌터들 보면 응원해주질 못할망정 저러는 게 말이 되나? 사냥 방해나 하다가 나이 든 헌터 납치해서 폭행까지 해서는 이 꼴이 된 건데 인과응보일 뿐이다

Ⓐ syberMagneto : ㄹㅇ 동감

익명 : 각성자가 비각성자 헌터 폭행해서 시작된 사건인데 왜 이 나치가 이런 반응이지······ 또 평소 같은 소리 하면 김극한테 처맞을까 봐 컨셉 깨졌나?

Ⓐ syberMagneto : 너 같은 비각성자 쓰레기는 모를 깊은 사정이 있다 쓰레기야

Ⓑ GoodHunter : 김극 씨 세단 것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는데 정말 끝내주게 세시네요. 사적제재를 옹호하긴 뭐한 일이지만 영상 보며 속이 시원했습니다! 왜 이런 일 터졌는진 저도 곁에서 지켜봐서 이해합니다. 임형택 씨 상태 보곤 저도 울화통이 터졌지요

경찰들이 하도 답답하게 군 탓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사적제재쯤으로 상황을 이해해서 그런가, 어지간해선 다들 긍정적인 반응이긴 했지만 이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긴 했다.

익명 : 인천 탈환 프로젝트도 곧 재개할 거라던데, 이러면 안 되지 않나?

5my지저스 : 안 되긴 뭐가 안 돼? 김극햄이 동료가 폭행당해서 또 이런 일 없게 하려고 큰맘 먹고 저지른 건데, 경찰에서 안 도와줄 거 뻔히 알면서 가만히 있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거야?

익명 : 왜 그랬는진 알겠는데 최소한 구속이라도 했어야하는 거 아닌가?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내버려 두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사회 분위기 가뜩이나 개판인데 이런 식이면 더 개판으로 만드는 일 아닌가······.

Ⓐ 돌머리청년 : 공간이동 하는 신체강화자를 뭔 수로 구속하니? 만화책 속에서 해루석이라도 꺼내서 쓸 거야?

아, 내가 구속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여기에 하나 더.

애초에 날 구속하여 교도소에 보낸단 발상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현재 한국엔 돈이 없다.

경찰 줄 돈도 부족해서 지방 치안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예로부터 재정적자나 일으키는 혐오 시설에 불과했던 교도소에 쓸 돈은?

당연히 없다.

그래서 각성자를 가둬놓는 감옥이라 하면 사람들은 만화 속 초인 전용 특수감옥이라도 상상하곤 하지만, 실제 각성자가 가는 감옥은 일반 범죄자들이 가는 감옥과 똑같다. 강력한 각성자 죄수를 옭아맬 특수한 시설도, 반항적인 각성자 죄수를 능히 제압할 각성자 간수도 그곳에 없다.

그리고 그곳의 배 나온 교도관 아저씨들이 역장 외골격 능력자며 신체강화자 죄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그들이 어떤 사고를 치기 전에 온갖 감형을 해줘서 최대한 빨리 내보내거나, 아니면 아예 잡아넣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나한테 두들겨 맞고 만신창이가 된 김석희가 갑자기 경찰의 습격을 받아 어디 끌려갈 일도 없을 터였다. 경찰들은 김석희가 내게 호되게 당했으며 그 갱단이 사실상 해산되었음을 알게 된 후에도 김석희를 추적하지 않았다던가?

아마도 지금쯤 김석희는 부천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간 기분이 좋다. 김석희가 자유로운 것도, 내가 자유로운 것도 모두.

계속 댓글을 보며 즐기던 중에 헌트웹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 GangStar☆ : 당장 글 안 지우면 죽여버릴 거야

김석희였다. 내가 올린 글에 수치심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덜 처맞아서 건방지게 말하는 것이냐며 위협하려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저 이쁜 말투로 말했다.

Ⓐ BabyBerserker : 안 돼양! 애기버섯이, 처음 촬영하는 극장판인데 홍보 열심히 해야 해양 ㅠ

Ⓐ GangStar☆ : 헛소리 그만하고 이번에 올린 글 지워 제발

Ⓐ GangStar☆ : 지금까지 한 것도 모자라서 날 완전히 밟으려는 거냐?

Ⓐ BabyBerserker : 호에에에······ 그런 거 아닌데양 ㅠ

Ⓐ GangStar☆ : 그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진짜? 영상까지 풀어놓더니, 이렇게 내 체면을 박살 내버리면 내가 뭔 수로 재기하란 거냐?

Ⓐ GangStar☆ : 이대로 완전히 밑바닥에 굴러떨어지면 내가 이판사판으로 나설 건 생각 안 해?

협박에 애원까지 하는 꼴이 처량했다. 나는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 BabyBerserker : 우웅······ 애기버섯이는 작고 어려서 받아쓰기 빵점 받았는데······ 그래서 글로 적어서 설명을 못하겠어양!

직접 말하고 싶은데 애기버섯이한테 전화번호 알려줄래양? 데이트 약속 잡자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고양♡!

그러자 김석희가 전화번호를 보냈다.

내가 전화를 거니 바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김―」

놈의 말을 끊고 내가 말했다.

"선배야. 정말 죽고 싶니? 나 협박하려나 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라. 네가 또 어쭙잖은 습격을 하는 게 쉬울까, 아니면 공간이동 할 수 있는 내가 널 찾아가서 또 조지는 게 쉬울까?"

이쁜 말투로 말하다가 이러니 흠칫한 걸까? 김석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잠시 뜸 들인 끝에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내 체면 좀 살려달란 말이야. 그것도 안 되는 거냐? 이따위로 보스의 위엄 따윈 차릴 수도 없게 내 존엄을 송두리째 없애버리면 내가 어떻게 계속 조직을 운영하란 말이야?」

"보스의 위엄 따위가 뭐가 중요해?"

「못 알아듣겠어? 내가 조직 계속 운영하려면 카리스마가······」

그리고 내가 말했다.

"선배야. 네가 조직의 보스인 건 위엄이 있어서가 아니야."

「뭐?」

"정통성, 유능함, 카리스마······ 그딴 건 각성자가 군주 노릇 할 때 필요가 없어. 그런 건 비각성자 지도자들의 덕목이야. 왜 그런 줄 알아?"

김석희가 침묵하는 가운데 내가 계속 말했다.

"비각성자 지도자들에게 그런 것들이 필요한 건 근본적으로 그들이 특별할 것 없는 족속이기 때문이야. 자기가 다스리는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평범한 족속이기 때문이라고.

왕이니 귀족이니 해봤자 비싼 옷 벗겨놓으면 일개 농부와 아무 차이가 없지. 그러니 위엄이며 혈통이며, 일반인들과 다른 고아한 어휘며······ 온갖 장식으로 자길 남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사람인 척 굴어야 아랫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넌 그럴 필요가 없고."

「왜······」

"넌 각성자니까. 백만대군을 움직이는 왕도 옥새 뺏고 어의 벗겨놓으면 보통 사람과 다를 게 없어지지만 넌 아니지. 내가 직접 싸워봐서 아는데 네 부하 다 합친 것보다 너 하나가 더 강하더라. 그리고 알지? 권력은 총칼에서 나오는 거야."

김석희는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내가 계속 말했다.

"소월인처럼 굴었으면 소월인처럼 생각해야지. 위엄 따윈 네 영주 노릇에 아무런 필요가 없어. 그곳 사람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해도, 그곳의 모든 이해관계를 무시해도 오직 힘만으로 3세계를 통치하는 각성자들처럼······ 너도 쓸데없는 위엄 따윈 챙기려 하지 말고 그냥 힘으로 조직원들을 다스려. 그러면 충분하니까. 알겠어?"

「난―」

김석희는 여전히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난 들으려 하지 않았다.

"부천이면 명예 인천인데, 그곳에서 활동해도 된다고 허락해준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너도 잘 알 거라 믿는다. 그럼 부천 남작? 영주 노릇 잘해라. 이만 끊는다."

그러고서 잠시, 난 이 모든 일을 곱씹고는 희열을 느꼈다.

나는 이번에 승리했다. 강력한 각성자 김석희를 상대로도, 법을 상대로도 이겼다.

후자가 특히 날 기쁘게 했다.

그놈의 법이 이번에는 날 옭아매지 못했단 사실이 너무나도 즐겁다.

부모싸움에 휘말려 등 터진 새우 꼴로 살아가던 시절에도 나는 법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법은 위정자들이 제멋대로 휘두르고자 준비한 회초리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적절하게 휘둘러지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내 부모의 부부싸움에 시끄러웠는지 이웃이 신고하여 찾아왔던 경찰은, 꼭두새벽에 미성년자 아들딸을 세워놓고 서로 싸우던 내 부모를 보고서 왜 아동학대로 고발하는 게 아니라 시끄럽게 하지 말라며 경고만 하고 돌아간 것일까?

내 고등학교 입학 첫날까지 각목을 들고서 학생들을 두들겼던 학주는 왜 폭행죄로 잡혀가지 않은 것일까?

제 지휘관에게 보낸 설문지에 분노하여 훈련생들을 협박하던 훈련소 조교는 왜 규율대로 처벌되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끝내 참지 못해 내가 주먹을 휘두르고서야, 그 잘난 법은 왜 그때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내 날 감옥에 처넣은 것일까?

난 그 모든 일에서 끔찍한 불합리함만을 느낀다.

대충 그런 경험으로, 난 법이 싫다.

내가 선택하여 태어나지 않은 국가에 충성하고 싶지 않듯, 내가 동의한 적 없는 법을 따르고 싶지도 않다.

애초에 난 각성자다. 어느 날 세상에 법이 사라져서 모두가 서로를 죽이고 죽는 아수라장이 되더라도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다.

그렇듯 법이 필요 없는 내가 무슨 이유로 법을 지켜야 한단 말인가?

57화 특무대장 한희석 - [1]

이번 김석희 폭행사건의 여파는 생각보다 오래갔으니, 뉴스에서 계속 이번 일을 언급하며 장작을 넣어줬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이번 사건을 얼마나 상세히 파고드는지, 내가 지켜보며 다 의아할 지경이었다.

내가 김석희의 갱단을 전멸시킬 때, 내가 자비를 베풀어 폭행하지 않고 보내줬던 각성자 둘마저 인터뷰 대상이 되어서는 헌트웹을 뜨겁게 달구고 있더라.

익명 : '김극이 인천의 헌터가 될 것을 조건으로 본인을 몸 성히 보내주었으며, 그와 함께 인천 시의원 박미형을 다가올 시장 선거에서 뽑을 것을 강요······' 진짜 미친 건가 ㅎㄷㄷ

Ⓐ 돌머리청년 : 박미형 씨, 부디 이것 하나만 대답해주십시오. 당신께서 인천 땅의 정점에 오르시거든 그때는 비로소 저 불쌍한 친구를 해방해주실 겁니까?

Ⓐ syberMagneto : 인천, 인천 거리는 게 컨셉이 아니라 팀원이 당해서 잔뜩 흥분한 와중에 현실에서 저랬다니까 너무 당황스럽네······.

내가 인천 헌터가 되라고 강요했던 그 각성자가 실제 헌터 시험을 치르면서 이번에 기사가 뜬 것이었다.

덕분에 내가 더욱 관심을 받게 되었으니 내심 즐거우면서도 조금 불안했다.

왜 이렇게까지 이 사건을 조명하는 것일까?

대한각성연대 활동하면서 잘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재 언론은 정부의 통제를 강력하게 받고 있다.

지금 이 사건이 계속 보도되는 것 또한 시청률을 모으려는 방송국의 의지가 아닐 것이다. 방송국에선 그저 정부에서 지정한 주제를 계속 방송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까, 박미형 씨가 예상했듯 정부가 지금 사건을 통해 의도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꿍꿍이가 대체 뭘지 고민하는 가운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였다.

받아보니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극 씨 맞나?」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특무대장 한희석이요」

그 이름은 처음 들었지만, 특무대가 뭐하는 조직인지 들어본 적이 있기는 했다.

"특무대면 그······ 각성자 모아서 구성했다는 부대요?"

「잘 아네. 그럼 우리가 뭔 일 하는지도 아시지?」

그가 그리 말하는 동안 나는 인터넷에 한희석을 쳐보았다.

그로써 한희석이 비각성자 찌꺼기이며, 서울 종자임을 알게 된 나는 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했다.

"몰라. 끊는다?"

내가 짧게 말하자 그가 당황했다.

「아니, 잠깐만. 왜 갑자기 화가 났어. 내가 반말해서 그럽니까?」

서울 출신 비각성자 찌꺼기가 각성자 부대의 장을 맡고 있다는 게 맘에 안 들어서 그렇다고 설명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대충 대답했다.

"그렇다면? 끊어도 되나?"

「반말한 건 미안한데, 내 하나만 물어봅시다」

"빨리 끊―"

「저번에 강준치 씨와 단둘이서 만났다던데. 그때 무슨 말 나눴습니까?」

"그걸 왜 캐물어?"

「그쪽이 아니라 이쪽에서 묻고 있습니다. 국가안보에 관련된 일이고 엄중히 묻고 있으니까 대답하세요」

놈이 갑자기 분위기를 잡으려는 듯 목소리를 내리깔았지만 꼴 같잖을 뿐이었다. 비각성자 찌꺼기가 저런들 무섭긴 개뿔.

"어, 그때 준치랑 말 좀 나누긴 했지. 들려줘?"

「그래요, 어떤······」

"이따위로 시건방지게 구는 갯강구들을 다 쓸어버리고 각성자들의 세상을 만들기로 했다. 준치가 그러는데 앞으로 각성자 지나갈 때 큰절 안 하는 비각성자들은 삼족을 멸하겠다고 하더라."

「대체 뭔 소리······ 야!」

"아니, 구족이었나?"

「너 지금 나랑 장난쳐?」

"특히 한희석이란 갯강구는 특히 귀찮고 짜증 나니까 잡히면 사지를 썰어버린 다음 버둥거리는 동안 목을 베어 죽이겠다고 했거든? 그 잘라낸 목으로 축구 하겠다고도 말했는데 그랬다간 발 더러워질 테니까 그만두라고 내가 특별히 말렸다. 감사해라?"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내가 놀자고 이러는 것 같애? 너 방금 나 뭐 하는 사람인지 못 들었어?」

"그러고 보니 특무대장이랬나?"

「그래!」

"특무대장이면 특무대 각성자들 월급이나 좀 올려줘라, 응? 각성자 월급이 꼴랑 천이백만 원이 말이 되냐? 비각성자 헌터들도 그것보단 더 번다."

「아니―」

"각성자 커뮤니티에서도 차라리 노가다를 하면 했지 특무대는 절대 안 들어간다고 말이 많거든? 그따위로 조금 주니까 특무대 모집정원 절반도 겨우 채운 거잖아. 네 월급 다 털어서라도 각성자들 월급 올려줘라. 알겠냐?"

「인마, 내가 뭐 기분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뭐 그리 화가 나서―」

"끊는다."

그러고서 정말 전화를 끊으니 계속해서 휴대전화가 울렸지만 무시했다.

휴대전화 설정을 무음으로 바꿔놓고서 헌트웹이나 계속하던 중이었다.

헌트웹 시스템 메시지가 도착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 보낸 것이었다.

Ⓢ Kang : 있냐? 전화 걸었는데 안 받아서······.

Ⓐ BabyBerserker : 있는데양? 왜양?

Ⓢ Kang : 지금 와줬으면 하는데 올 수 있냐? 이번에도 급하거든

그 요청을 내가 어찌 무시하겠는가? 내 마음속에서 저 친구의 중요도는 박미형 씨 다음이요 내 라운드걸과 동등한 수준이다.

Ⓐ BabyBerserker : 바로 갈게양!

즉시 택시를 타고 불러준 주소로 가니, 웬 호텔이었다.

딱 보기에도 5성급으로 보이는 호텔. 베헤모스를 막기 위해 서울에 온 강준치에게 나라에서 잡아 준 숙소이리라.

호텔 안, VIP룸에 들어가니 강준치가 그곳에 있었다.

강준치가 나를 보고서는 간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왔어?"

그리고 여기 있는 것은 강준치뿐만이 아니었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남자 한 명이 함께였는데, 그는 날 보고 놀란 눈치였다.

"어, 김극 형?"

"그쪽은······"

"아, 나 돌머리청년이에요! 석장실, 알죠? 이야, 내가 헌트웹에선 말 놓았는데 현실에선 그러기 어렵네? 개무섭게 생겼네요 진짜. 이런 몬스터가 헌트웹에서 양양거리는 건가······"

석장실이 반가운 듯 말하는 중에 강준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잡담은 나중에 하고!"

초조한 목소리, 나는 강준치를 보며 물었다.

"그래. 뭐 때문에 부른 건데?"

그제야 강준치는 씩씩거리길 멈추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보다시피, 내가 서울 와서는 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거든?"

강준치는 호화스러운 호텔 VIP룸을 불안한 시선으로 훑더니 설명을 계속했다.

"하지만 호텔에서 주는 밥은 믿고 먹을 수가 없으니까, 식사 시간마다 밥 먹으려면 한 시간 넘게 외출해야 했는데······ 아무 식당에 무작위로 들어가서 밥 먹어야 독살을 피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아니, 형! 아직도 그래? 내가 그거 정신병이니까 상담 좀 받아보라고 말했잖아!"

석장실이 어이가 없다는 듯 끼어들었지만, 강준치는 눈 한 번 흘기고는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아무튼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누가 들어와서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내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CCTV를 확인한단 말이야?"

석장실이 "아, 형 진짜······" 하고 중얼거리는 동안 내가 말했다.

"그래서, CCTV에 뭐가 찍히기라도 했어?"

"아니, 나 밥 먹으러 나가 있는 동안 CCTV 녹화가 안 됐더라. 호텔에 왜 이러냐고 물어보니 그 시간에 정전이었다나? 이상하더라고. 하필 나 자리 비웠을 때 십 분 정도 정전이라니 너무 이상하잖아?"

"그게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냐고!"

석장실이 짜증 냈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딱히 이상하진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듣던 중이었다.

강준치는 방의 가운데에 놓인 탁자를 노려보더니, 더욱 초조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내가 즉시 방 수색에 나섰지. 내가 외출할 때마다 누가 혹시 몰래 안 들어왔나 확인하려고 매번 출입문 틈에 끼우고 나가는 종잇조각은 문틈에 잘 끼워져있던데, 이것만으론 안심할 수가 없어 가지고······ 역장으로 각 가구 표면을 더듬으면서 방에 뭐 달라진 게 있나 찾아봤지. 그랬더니 뭐가 발견됐는지 알어?"

"뭐가 발견됐는데?"

내 물음에 강준치가 탁자 위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탁자 위의 조그만 장식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집어 들더니 으르렁거렸다.

"이 씨발 새끼들이 내 방에 이딴 걸 붙여놨어."

나는 그게 뭐지, 하고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그거 혹시 도청기인가?"

"맞아, 도청기! 대충 보면 나무 장식처럼 보여도 역장으로 내부 구조 살펴보니까 기계장치가 맞더라. 도청기가 확실해."

이런 상황을 도청기를 심어둔 누군가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준치 이 친구의 능력 출력이 워낙에 강해서 사람들이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이 친구는 능력의 섬세한 활용 역시 최고 수준이다. 데스클로한테 베였을 때 베인 부위가 폐인지 심장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역장으로 이어붙이고는 구구절절 대화할 수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정부 이 씨발 새끼들이, 나 없을 때 몰래 들어와선 도청기를 붙였단 말이야······! 내가 이대로 여기 있을 수 있겠어?"

"아니, 형. 여기 있을 수 없으면 어쩔 생각인데? 숙소 다른 데로 옮기려고?"

석장실의 물음에 강준치가 대답했다.

"부산으로 돌아갈 거야. 거기 있는 내 집을 너무 오래 비웠어. 거기엔 또 도청기 몇 개 박아놨나, 한 달 정도 쭉 뒤져봐야지······!"

그야말로 강준치다운 소극적인 선택이었다. 감히 도청기를 설치한 정부 기관에 쳐들어가기라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곳에서 떠나버리겠다니?

그러나 석장실은 기겁한 눈치였다.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아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베헤모스는? 준치 형 무서워서 가만히 있는 중인 베헤모스는 어쩌고?"

"내 알 바야?"

"아니, 형! 형 떠나면 서울 사람 다 죽어!"

"내 알 바가 아니라니까! 갯강구 새끼들 다 베헤모스한테 밟혀 뒤지든 잡아먹혀 뒤지든 그걸 내가 신경 써야 하냐구?"

강준치가 소리치는 가운데 석장실이 날 보았다.

대충 저 정신 나간 양반 좀 같이 설득해달라는 것 같았지만, 난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드디어 인천이 한국의 새 수도가 될 날이 왔네."

"댁은 또 뭔 미친 소리를······"

석장실이 화내려는 듯하길래 나는 어쩔 수 없이 방금 발언을 취소했다.

"뭐, 반쯤 농담으로 말한 겁니다. 그래서, 강준치? 진짜 부산으로 돌아가려고?"

"그래!"

"그러면 정부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이해하고서 그러는 거 맞지?"

"정부에서 빡치겠지! 나한테 당장 서울에 붙어있으라고 협박 반 애원 반으로 쫑알댈 테고! 그런데 지금 그 새끼들 눈치 살피는 게 내 목숨 챙기는 것보다 중요해?"

"목숨?"

"내 방에 도청기 숨기는 놈들이 내 방에다 내 모가지 썰어버릴 칼잽이는 못 숨기겠냐고? 어!"

강준치가 소리쳤고 석장실이 말했다.

"아니, 준치 형,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 형 죽일 칼잽이가 세상에 어딨다고 그런 걱정을 하냐?"

석장실은 황당한 눈치였지만 난 저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다.

역장 날붙이 능력자를 두려워하는 것이로군. 정부가 그런 능력을 지닌 자객을 자기 방에 들일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저번에 데스클로한테 베인 이후로 자기 음식에 들어갈 독만큼이나 역장 칼날 또한 경계하게 된 모양이지. 그것이 자기 역장마저 관통한다는 사실을 제 몸뚱이로 확인하고 말았으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상황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저토록 불안해하는 강준치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어쩌면 이것은 내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낼 기회, 꼴 보기도 싫은 정부를 초토화하고 각성자들의 세상을 만들어낼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한국을 소월에 가까운 이상세계로 만들 기회 말이다.

응우옌 따위와 그러기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강준치 이 친구와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할 필요도 없다. 대충 쓰러져서 탈진할 것을 각오하고 강준치의 손목을 붙잡은 채 공간이동을 남발하면 된다.

그리하여 강준치를 부산으로 옮겨버린다면, 그놈의 베헤모스가 게이트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호주와 마찬가지로 서울이 초토화될 것이다. 임기 첫날에도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국민과 각성자들을 규합해내는 각성자 국회의원이라도 나타나는 게 아니고서야 한국의 역겨운 민주사회는 그날부로 끝장날 것이다.

내가 직접 강준치를 옮겨 정부에 밉보이는 상황을 피하고 싶거든 부산행 택시라도 대신 잡아 주면 되리라.

이 친구의 정신병적인 불안심리를 부추겨서, 어떻게든 서울을 떠나게 만들기만 한다면······.

이 모든 생각은 내가 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특히 매력적이었다.

딱 한 가지 문제, 그러니까 인천이 서울과 인접한 땅이며 서울에 튀어나온 베헤모스와 괴수들이 인천 땅을 알아서 피해갈 리가 없다는 점만 무시하면······.

고심 끝에 내가 말했다.

"강준치? 화나는 건 지금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진정해."

"뭐?"

"화나더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란 말이야. 지금 서울 떠나버리는 건 말이 안 돼."

58화 특무대장 한희석 - [2]

강준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항의하려는지 입을 뻐끔거리는 강준치에게 내가 말을 이었다.

"이건 욕 나오는 짓은 맞지만, 적어도 암살의 전조 따윈 아냐."

"그럼 뭔데?"

"이건 윗놈들이 그저 네 생각 캐내려고 발악한 거야. 네 안전이 곧 국가안보에 직결되잖아? 이 와중에 넌 호텔에서 주는 밥도 거부하면서 의심병 환자처럼 굴고 있고. 대체 뭐가 불만이길래 이러는지 알아내려고 이런 거라고."

강준치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윗놈들 심리를 네가 어떻게 알고서 해설이냐?"

"내가 여기 오기 전에도 한놈이 나한테 전화 걸었으니까. 특무대장이란 놈이 내가 너랑 뭔 대화 나눴는지 캐내려고 하던데?"

"설마 알려준 건······?"

"대답 안 했지. 대충 개소리로 넘겼거든?"

"그건······ 잘했네."

"아무튼 대충 그놈들이 강준치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내려고 애쓴다는 건 알겠더라. 아무튼 계속 이런 식으로 의심병 걸린 채 살 순 없어."

듣기 싫은지 강준치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난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가에서 널 죽이려 드는 건 말이 안 돼. 당장 너 없어지면 베헤모스가 서울 초토화할 판인데 뭔 생각으로 널 죽여?"

난 이렇게 사는 건 너한테도 손해라고, 기껏 5성 호텔 머무르면서 맛있는 호텔 밥도 못 먹고 나가서 먹어야 하는 게 말이 되냐고도 말했다.

이것은 각성자 혁명이니 국가 전복이니 온갖 의도 따윈 모조리 집어치운 채, 그저 친구로서 걱정이 돼서 한 말이었다.

일찍이 강준치가 이대로 정부에 대한 의심을 키운다면 언젠가 국가를 뒤엎을지 모른다고 기대하긴 했지만, 이 꼴을 보면서도 그딴 꿍꿍이를 품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홀로 고통받는 것을 보아넘길 수야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쩌라고? 이대로 도청기 심든 말든 그냥 넘기라고?"

강준치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정부 기관에 제대로 항의하고 따지든가. 국정원에서 그랬는지 딴 기관에서 그랬는지 나야 모르지만······."

내가 한창 말하는 중에 석장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짓인지 알겠네요. 내가 도청기 또 하나 찾았거든?"

그 말에 강준치가 두 눈을 부릅떴다.

"어디에서?"

말로 설명하는 대신 석장실은 호텔 벽에 손가락을 가져가더니 쿡, 하고 찔렀다.

그러자 단단한 대리석 벽은 석장실의 손가락을 튕겨내지 못했다.

그 손가락이 파고든 호텔 벽의 아주 작은 일부가 종이처럼 부서지더니, 그 내부가 드러났다.

호텔 벽 안에 웬 소형 기계장치, 아마도 도청기가 들어있었다. 나조차 놀라서 물었다.

"이걸 어떻게 찾았대요?"

"나 암석 능력자잖아요. 호텔 벽이 대리석이니까 그 구조를 감지해봤더니 살짝 빈 부분이 있더라고? 보니까 벽 안에 도청기 숨겨놓고 아주 얇게 벽을 덧씌워서 숨긴 모양인데, 이거 누구 수법인지 알아."

"누구 수법인데?"

"한희석 짓이네요."

"한희석? 특무대장이요?"

"그래요, 그놈."

그리고 강준치가 물었다.

"특무대에서 날 왜 도청하려 해?"

"형이 정신병자인 것처럼 한희석 그놈도 정신병자라서 그래."

강준치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석장실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는데, 그로써 나는 둘이 생각보다 훨씬 더 친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 친한 사람마저 믿을 수 없는 나머지 강준치가 생명의 위기에서 날 대신 불렀을 만큼 그 피해망상이 심각하단 것도 알 수 있었고.

"여긴 서울이잖아? 그리고 수도에서 각성자들이 활개 치지 못하도록 만든 부대가 특무대거든. 서울에서 활동하는 각성자 헌터들은 다 한희석 그 새끼 감시를 받는데······ 형이 정부에서 자길 죽이려 든다고 믿는 정신병자라면 그놈은 반대로 각성자들이 24시간 쿠데타 계획을 세운다고 믿는 정신병자란 말이야."

"그놈의 정신병자 소리 좀 그만할 수 없냐?"

"정신과 가서 상담받고 오면 그만할게. 아무튼 또 다른 정신병자인 한희석은, 각성자 헌터들이 커피 마시려고 모이기만 해도 쿠데타 작당하러 모였다고 생각해선 대체 왜 모인 거냐, 그 의도를 캐물어 대는 그런 놈인데······ 나도 그놈한테 도청 시도당한 적이 있어."

"너도?"

"그래, 특무대에도 암석 능력자가 하나 있거든? 그 친구가 저번에 이런 식으로 서울 A급 헌터들 자주 다니는 커피숍에 도청기 숨기더라. 그 수법 이미 들킨 줄 모르고 형 집에도 그런 것 같은데······.

그러니까 김극 형 말대로 너무 스트레스받진 말란 말이야, 응? 미친놈이 미친 짓 한 거야. 자기한테만 좆같은 일 일어났다 생각해서 바들바들 떨 필요 없다 이거지."

제 의형의 정신건강을 위해 석장실이 열심히 설명해 주는 눈치였지만 강준치가 딱히 귀담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강준치는 그저 한 가지 사실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러니까, 내가 이 일로 누구 조지려면 한희석인가, 그 새끼를 조져야 한다 이거지?"

"그렇긴 한데, 진짜 조지려고?"

"왜, 이것도 말리게?"

"아니? 그래 주면 내 속이 다 시원한데 내가 왜?"

석장실이 웃었고 강준치는 내게 한희석의 전화번호를 요구했다.

내가 휴대전화의 통화기록을 보여줬더니 강준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씨발 새끼, 도청기 설치하고 나서 바로 너한테 전화한 모양이네."

새삼 화가 치밀어오른 듯했다. 강준치가 한희석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 한희석입니다······」

"나 강준친데, 삼십 분 줄 테니까 바로 튀어와라. 안 그러면 베헤모스고 뭐고 나 바로 부산 돌아가는 줄 알고, 응?"

그리고 수화기 너머 한희석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예, 바로 가겠습니다, 바로······」

그로부터 불과 십 분도 되지 않아 한희석이 도착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나왔던 특무대장 본인이었다.

그리고 내게 전화를 걸어서는 대뜸 반말하질 않나,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더니 심문하려 들지 않나 여러모로 무례하게 굴었던 그는 감히 강준치를 상대로는 그러지 못했다.

강준치와 그 사이의 취조가 시작되었는데, 대충 이런 문답이 오갔다.

도청기 네가 붙이라고 시켰냐?

내가 시킨 게 맞다. 정말이지 드릴 말씀이 없다.

왜 그랬냐? 죽고 싶어서 그랬냐?

강준치 씨가 나라에서 받아보라고 권한 건강검진이며 호텔 제공 식사를 전부 거부하거나 연락없이 거처를 수 시간씩 벗어나기가 일쑤인데, 그러시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변명은 됐고 지금부터 널 폭행할 생각인데 그랬다간 나중에 보복할 계획이 있나?

마지막 질문에 한희석은 눈을 질끈 감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리고 평소 강준치의 유튜브 영상에서 볼 수 있는 '참교육'이 시작되었다.

나는 공중에 붕 떠오르더니 바닥과 천장에 연달아 몸뚱이를 부딪치는 한희석을 보았다. 그가 비명 지르지 않고 작게 신음하니 강준치는 그마저 맘에 안 드는 듯 쏘아붙였다.

"어쭈, 소리 참아? 이 와중에 자존심 부려?"

그러자 한희석은 이제 비명을 참지 않았다. 그 입에서 강준치의 가학심을 만족시킬 만치 우렁찬 비명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나는 호텔 방을 나섰다.

덩달아 나온 석장실이 피곤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어휴, 저 형이 처음 만났을 땐 안 저랬거든? 이젠 아주 정신병자가 다 됐다니까요."

"처음 만났을 땐 어땠는데요?"

"예비군 중에서 각성자들 따로 모아다가 부대 편성했을 때 만났는데요. 그때 모인 각성자들끼리 사태 끝나면 각성한 초능력으로 뭐 해 먹고 살지 이야기 좀 나눴거든요? 그때 내가 이 힘으로 택배 상하차 할 생각이라니까 준치 형이 자기도 그럴 거라며 맞장구치길래요, 우리 둘이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했죠 뭐."

"석장실 씨, 암석 능력자 맞죠?"

"맞아요. 그게 왜요?"

"그 능력으로 상하차할 수 있어요? 암석 능력도 힘 세진단 건 들었는데······"

"아, 직접 해보니까 힘들더라고요! 아무래도 힘 조절이 신체강화자보다 어려워서 택배 상자가 망가지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헌터 하는 건데 진짜 서러워······"

우리 둘이서 즐겁게 얘기하는 동안 십 분쯤 지났던 모양이다.

마침내 한희석이 호텔 방을 나섰다. 놈은 여기저기 얻어터진 듯, 눈이 퉁퉁 부었고 옷이 여기저기 찢어졌지만 그래도 제 발로 걸어서 이 장소를 떠났다.

보아하니 강준치의 평소 참교육 대상자들보단 여러모로 덜 당한 모양인데, 아무래도 고위공무원을 제대로 손봐주긴 겁이 났던 것일까?

떠나가는 한희석을 나도, 석장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둘은 강준치를 신경 썼다.

보아하니 강준치의 표정이 후련해 보이는 것이 드디어 분이 풀린 듯했다. 석장실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숙소 옮길 거야?"

"아니."

"그럼?"

잠시 후, 강준치가 우릴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서울에 흔치 않은 빈 땅이었다.

있는 것이라곤 모래뿐인 건설 예정지, 그 중심에 서서 강준치가 말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야."

대체 뭔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강준치가 힘을 발휘했다.

그러니까, 핵폭발보다 강력한 그 역장 능력을.

"어, 어?"

고강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마구 흔들렸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나무고 건물이고 마구 흔들리는 가운데, 땅이 비명 지르는 소리가 났다. 저 하늘까지 닿을 만치 높이 치솟은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길게 느껴진 짧은 시간이 지났을 때, 저 앞에는 큼지막한 구멍 하나와 흙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작은 산이 하나 생겨나 있었다. 아마도 저 구멍을 파내느라 저 산이 생겨났을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치 깊은 구멍이라, 정신적 그물망으로 그 깊이를 파악한 나는 기겁했다.

강준치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지하 800m 깊이에 공동을 파냈어. 당분간 저 안에서 살 거야. 그 어떤 자객도 숨어들지 못하게······."

삼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강준치는 팔백 미터 깊이의 터널과 이백 미터짜리 지하공간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온갖 초상 능력을 자랑하는 각성자들이 들끓는 현대에도 감히 신의 이적이라 불러야 할 무언가였다.

이래도 민주주의가 계속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래도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내가 전율하는 사이, 석장실이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물었다.

"800m 깊이면······ 엘리베이터라도 설치할 생각인가?"

"아니? 그런 거 설치하면 누가 몰래 들어올 때 이용할 수 있으니까 안 만들 거야. 나 하나야 역장으로 오르내리면 되니까."

"수도랑 전기 연결하려면 힘들겠네······"

"수도랑 전기? 그런 걸 무슨 수로 연결해?"

"업자 불러야지?"

석장실의 말에 강준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 업자고 뭐고 아무도 못 믿어. 업자가 정부에 포섭돼서 도청기 설치하면 어쩌려고 그딴 생각을 해?"

"그럼 수도랑 전기도 없이 살겠단 거야?"

"어."

"형 진짜 미쳤어?"

내가 보기에도 미친 짓이었다. 전기도 수도도 없이 지하에 혼자 살겠다니, 그게 무슨 감옥살이란 말인가?

내가 왜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냐며,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강준치는 내게 설득되긴커녕 오히려 날 설득하려 드는 게 아닌가.

"김극 네가 나한테 이렇게 속 편한 소리 할 때가 아닌데······ 내 보기엔 김극 너도 위험하거든?"

"뭐?"

"내 보기엔 김극 너도 나 못지않게 암살당할 위험이 크단 말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한테도 불안증세 옮기려는 거냐?"

내가 기가 막혀서 물었더니, 강준치는 여전히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정부 입장에 위험하기는 나나 너나 마찬가지야. 이번에 영상 보니까 너 존나 세더라? 혼자 각성자 여러 명을 혼자 때려잡던데, 이건 청와대에 각성자 경호 인력 여럿 배치해 놔도 너 혼자 다 뚫어버릴 수 있단 소리 아니냐?"

"그게 뭐?"

"그러니까 네가 헌터 라이플 들고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서 총기 난사하면 막을 수가 없단 셈인데······ 심지어 너 공간이동 하잖아. 딱 봐도 네가 폭탄 테러라도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막을 텐데 정부에선 기회가 되면 널 제거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 역시 안심해선 안 된다고, 매사에 몸조심해야 한다고 강준치는 어이가 없을 만치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당부했다.

"난 신체강화자라 독 먹어도 안 죽으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자객을 보낼 수도 있지. 그 근육이 역장 날붙이를 튕겨낼 수 있겠냐? 그래서 제안하는 건데······ 너도 이런 공간 하나 만들어 줄까?"

"이런 공간이면 800m 깊이 공동 말이야?"

"그래. 넌 공간이동 할 수 있으니까 아예 입구도 없애버리면 완벽하게 안전해지겠다. 그야말로 너 말곤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은신처가 생기는 거야. 팔백 미터 깊이면 벙커버스터나 핵폭탄도 안 닿을걸······"

"아니. 괜찮아, 정말."

"이 새끼가 속이 편해서는······ 나중에라도 생각 바뀌면 연락해라, 응? 내가 돈 안 받고 만들어 줄 테니까."

내가 슬쩍 석장실을 보니 그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결국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고 나중에 또 만나서 밥이라도 먹어요, 응?"

석장실과 악수한 뒤 나는 귀가했다.

돌아가는 길에 문득 후회가 들었다. 오늘 강준치를 달랜 내 행동에 대한 후회였다.

서울과 그곳의 비각성자 찌꺼기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기회를 놓쳤단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서울에 대한 증오든 비각성자 찌꺼기들에 대한 증오든, 그놈의 환각을 보게 된 이후부터 생겨난 이 부정적인 감정들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 증오가 온전한 내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이 증오는 또 다른 나, 테러리스트 김극의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이 증오를 대행하겠노라 나섰다가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망가지리란 것을 안다.

언젠가 한국 또한 각성자들이 지배해야 한다는 것은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미래를 내가 주도해야 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리고 다음 날, 또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젠 누구 것인지 알게 된 번호였다.

「김극 씨?」

휴대전화 너머 한희석에게 난 퉁명스레 말했다.

"특무대장? 무슨 일로?"

어제 일로 분풀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싶었더니 아니었다.

「사과하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제가 올바로 처신하지 못했어요. 알아보니까 김극 씨 화를 잘 참는 분도 아니던데 제가 정말 크게 실수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나는 당황스러운 맘에 생각했다. 이 비각성자 찌꺼기가 갑자기 왜 이러나? 오늘 강준치에게 혼쭐이 나서는 각성자에게 깍듯이 굴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은 아닐 테고······.

비꼬려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도 이 비각성자 찌꺼기가 내게 아첨까지 하는 게 아닌가.

「제가 따로 조사해보니까 삼 년 넘게 활동한 각성자 헌터들 출동 횟수보다 김극 씨가 지난 팔 개월 동안 출동한 횟수가 훨씬 더 많더군요? 인천에서 헌터들 부를 때마다 빠짐없이 출동해서 몸 사리지 않고 사태진압에 나선 셈인데, 이런 애국자가 또 없는 걸 제가 몰라보고 너무 무례하게······」

이 비각성자 찌꺼기가 왜 갑자기 태도를 전환했는지 잠시 후에 깨달았다.

그때 호텔 방에서 도청기를 부수지 않았더니 이놈이 우리 대화를 엿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강준치를 달래는 것 또한 엿듣고는, 내가 정부에 온건한 입장인 듯하니 잘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내가 강준치와 친한 모양이니 날 통해 강준치를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거나.

어느 쪽이건 참으로 고생한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위도 있는 양반이 오늘 낮에 그리 얻어 터져놓고는 상황을 수습해보겠다며 자존심까지 내려놓고는 이러는 셈 아닌가.

「······하여간 또 뭐 캐묻겠다고 귀찮게 구는 일은 이제 없을 테니 안심하시고, 앞으로도 열심히 사냥에 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만」

통화를 종료한 뒤, 나는 복잡한 맘으로 헌트웹을 켰다.

그러자 게시글 하나가 보였다.

웬일로 강준치가 참교육 영상이 아닌 다른 글 하나를 올린 마당이었다.

들어가 보니 신세 한탄하는 글이었다.

Ⓢ Kang : 새로 꾸민 거처에서 하룻밤 보냈더니 허리 더럽게 아프네. 벌써부터 좆같다······.

더워서 땀 흘렸는데 씻을 수도 없고 변기에 대소변 처리할 수도 없으니까 너무 힘들고 괴롭네 ㅠ

진짜 이대론 못 살겠는데 확 어디론가 떠나버려야 하나?

난 한심한 마음을 억누르며 댓글을 달았다.

Ⓐ BabyBerserker : 그럼 인천 올래양?

Ⓢ Kang : 아니······ 나 밥 먹으려면 여기저기 음식점 돌아다녀야 하는데, 인천은 음식점들 죄 문 닫아서 좀. 인천에 멀쩡히 영업하는 롯데리아며 맥도날드도 몇 없지 않냐?

이 씨발 새끼가?

내가 울분을 다스리는 사이 다른 댓글도 연달아 달렸다.

Ⓐ 돌머리청년 : 준치 형님 한국 살기 싫으면 어디 가시게. 한국 떠나 미국이라도 가시려고?

Ⓢ Kang : 아니, 미국은 핵폭탄이 있어서 나한테 쓸지 모르니까 가기 무서운데

Ⓐ 돌머리청년 : ;; 미국도 싫으면 대체 어딜 가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프리카 쪽 3세계?

Ⓢ Kang : 아예 소월 가면 어떨까

Ⓐ 돌머리청년 : ???

Ⓐ 돌머리청년 : 소드 월드? 북한보다 못 산다는 거긴 왜

Ⓢ Kang : 거긴 각성자들의 존재가 일상이라니까 내가 가서 살아도 그러려니 하지 않겠냐?

Ⓢ Kang : 게이트 언제 열리나 기다려 봐야겠다. 근처에 게이트 열리면 바로 뛰어 들어가야지

나는 슬슬 강준치 이 친구가 인터넷에서 허언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무슨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이 친구는 '내가 가서 뒤엎어줘?' 하고는 그저 가만히 있기 일쑤 아니던가.

이번에도 대충 그런 것이리라. 나는 그리 생각하며 헌트웹을 껐다.

59화 특무대장 한희석 - [3]

그로부터 며칠 지나, 석장실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만나서 술 마시자는 전화였다.

「김극 형 곧 근신 그만두고 다시 사냥 나설 거라 했죠?」

"그런데 왜요?"

「그럼 나중엔 또 시간 내기 어렵겠네요. 오늘 각성자 헌터들끼리 모여서 술 마실 건데 형도 오지 않을래요?」

그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초음속 제트기로 천년을 날아도 끝내 가로지를 수 없을 만치 광대한 인천의 광야를 지나 나는 또다시 서울에 도착했다.

2층 술집에 들어서니 석장실과 처음 보는 남자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훤칠한 모습들을 보아하니 그 모두가 각성자 헌터일 것이었다.

"아, 김극 씨? 그냥 멀리서 체형만 봐도 누군지 딱 알아보겠네!"

그들이 날 알아보며 반가워하는 가운데 술집의 일반인 손님도 날 알아보았다.

"어, 진짜 김극이다!"

한 여자가 그리 외치면서 다가오더니 반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 김극 오빠 팬이거든요?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옆에서 "역시 김극, 유명해 진짜······" 하고 중얼거리는 사이 나는 서울의 비각성자가 감히 내게 서명을 요구하는 이 망측한 상황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내 팬이니만큼 나쁜 사람일 리 없고, 나쁜 사람이 아닌데 서울 사람일 리 없다. 그렇다면 인천 사람이 분명했으므로 난 흔쾌히 사인 요구에 응해주며 물었다.

"인천 사람이죠?"

"아닌데요? 서울 살아요!"

"그럼 지금은 서울 살아도 인천에서 태어난 인천 사람인가 보네."

"아뇨? 서울 출생이에요! 완전 서울 토박인데요?"

"그럼 서울 출생이고 서울 살지만 인천 사람인 분이네요. 싸인 여기!"

내가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던 인천 사람을 일깨워주는 동안 또 한 각성자가 도착했다.

"아니, 김극 씨? 진짜로 헌트웹에서만 이러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러시네······"

고개를 돌려보니, 헌터 중에선 보기 드문 나이 든 중년 남성이 거기 서 있었다.

딱 봐도 잘 배웠는지 예의 바른 중년이기도 했다. 그가 먼저 내게 손을 내밀더니 깍듯이 고개 숙이고는 말했다.

"헌트웹 엘마야캐요입니다. 본명은 김형만이고요. 김극 씨? 우리 던파 유저끼리 친하게 지냅시다."

"예, 김형만 씨 반갑고요! 닉넴처럼 엘마 키우세요?"

"1차 레압 입혀서요, 흐. 한의원 운영하면서 쉬는 시간에 짬짬이 키웁니다. 요샌 헌터 노릇까지 하느라 게임 할 시간이 부족해져서 캐릭 네 개는 유기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나도 이 아저씨를 잘 알았다. 헌트웹에서 나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유명한 어르신이거든.

김형만, 열선 능력자. 53세.

한의원을 운영하는 만큼 원래부터 고소득자이므로 굳이 위험한 헌터 일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제 능력을 썩히는 게 아깝다며 경보가 울릴 때마다 A급 헌터로서 나서기로 유명한 어르신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인물이 모인 가운데 여기 모인 각성자 헌터들은 술을 마시며 담소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번에 여기 김극 형이랑 같이 강준치 형한테 불려갔거든요?"

석장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에 있었던 강준치 도청 사건을 화제 삼아서는 신나게 이야기하더니, 내가 모르는 후일담까지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요새 강준치 형이 저만 보면 게이트 열어주면 안 되냐고 막 징징거려요. 게이트 열어준다고 진짜 넘어갈 것 같진 않고 그냥 말로만 투정 부리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불안해 죽겠어요 아주."

한 각성자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석장실 씨 게이트 열 수 있어요? 장실 씨도 정령급이니까 게이트 열 수 있는 건가?"

"아뇨? 정령이라고 다 게이트 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내 알기로 정령을 여럿 쓰러뜨리고 정령들 기억을 흡수해서 게이트 여는 법을 습득해야 가능한 것이거든요? 전 정령 잡은 적이 없으니까 못 엽니다."

"어, 정령 능력자가 다른 정령 여럿 잡아야 게이트 열 수 있다고요?"

"예."

"더럽게 어려운 조건이네. 그 조건 만족하는 사람이 국내에 있나?"

한 각성자가 그리 중얼거리자 석장실이 날 보았다.

"김극 형 팀원인 백담비 씨가 열 수 있지 않을까요? 김극 형이랑 그 누나가 화염 정령이랑 암석 정령 함께 잡았다매요."

그리고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백담비 씨는 게이트 못 여는 것 같던데요?"

"그래요? 하기야······ 그런데 김극 형, 지금까지 정령 몇 놈이나 잡았더라?"

"셋이요. 암석 둘에 화염 하나."

이쯤 되면 각성자 헌터들 사이에도 경탄할 만한 위업이었던 모양이다.

"오······"

감탄사가 여기 모인 각성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운데 석장실이 말했다.

"김극 형? 나중에 정령 한 마리 또 같이 잡으면요, 백담비 씨한테 딴짓하지 말고 흡수한 기억 중에 게이트 여는 법 있나 찾아보라 해요."

"왜요?"

"정령들은 쓰러뜨린 상대의 기억 흡수하는 거 알죠? 그런데 그리 흡수한 기억은 오래가는 기억이 아니라 꿈처럼 금방 휘발되는 기억이라서, 흡수한 기억을 오래 기억하고 싶으면 일부러 기억을 여러 번 곱씹거나 종이에 적거나 해야 해요. 그렇게 게이트 여는 법을 어떻게든 기억해내면······"

그런 식으로 게이트를 열 수 있게 되면 그 정령 능력자의 몸값은 확 뛴다고, 지구에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정령 능력자가 몇 안 되는 데다 요새 상황이 상황인 만큼 국가 차원에서의 대우가 달라질 거라고 석장실이 설명했다.

그러고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제 장마철이잖아요? 호우 중에 물의 정령 한두 마리쯤 마주칠 가능성이 높으니까 잊지 말고 꼭 전해주셔야······"

그 말에 다른 각성자 헌터들이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곧 장마네? 죽겠다, 아주."

"하기야 사람 또 자아안뜩 죽어나가겠네요. 헌터 노릇 쉽지 않다, 정말······"

영문을 모르고서 내가 끼어들었다.

"장마철이면 뭐 특이한 일 있어요?"

그리고 난 당황했다. 내가 그리 물었더니, 여기 모인 각성자들의 눈길이 내게 쏠리는 게 아닌가.

김형만 씨가 흥미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김극 씨는 올해가 헌터 처음 맞죠? 그런데도 벌써 이 정도라니 진짜 대단한데······ 아무튼 장마철에 A급 헌터 노릇 해본 적은 없겠네요?"

"예, 그렇긴 한데······"

"그럼 잘 들어봐요, 응? 장마철에 뭔 일 생기고 뭔 일 해야 하는지 지금부터 이 선배들이 잘 알려줄 테니까."

옆에 있던 각성자 헌터도 한마디 거들었다.

"원래는 협회에서 알려줘야 하는 건데, 하여간 협회 새끼들이 빠져가지고."

이윽고 김형만 씨는 정말로 내게 장마철 동안 A급 헌터들이 해야 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각성자들이 그 옆에서 한두 마디씩 보태는 걸 귀담아 들으며 난 지겨움 따위가 아닌 지극한 자긍심을 느꼈다.

보라. 각성자 헌터들은 술 마시러 모여서도 사람 지키는 일, 지역 지키는 일을 논하고 있다.

모이기만 하면 어디 빡촌이 물 좋다느니, 이번에 번 돈으로 뭔 차를 살 거라느니 이딴 소리나 지껄여대는 비각성자 헌터들과는 그야말로 수준에서 천지 차이가 나는 것이다. 어쩌면 각성하기 위한 조건에는 높은 수준의 인격 혹은 고아한 품성 따위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후로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김형만 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다들 저놈 봐요."

그가 가리킨 곳을 모두 보았다.

웬 젊은 남자, 딱 보니 기생오라비처럼 잘 생겼고 키까지 멀대처럼 커서는 상당히 눈에 띄는 남자가 우리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김형만 씨가 속닥거렸다.

"아까부터 우리 힐끔거리던데, 수상하지 않아요?"

"애기버섯 팬이 아닐까양?"

"아니, 김극 씨 현실에서 그러진 말고 제발······ 장실 씨, 정령이니까 각성자 유무 확인할 수 있죠? 저놈 각성자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해줘 봐요, 응?"

그리고 석장실이 눈을 감았다 뜨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각성자 맞네요, 저놈."

"뭔 능력이에요?"

"잠깐만요, 역장 외골격에 역장 날붙이에······ 나머지 하난 뭐지? 어디서 본 적 있어도 자주 본 능력은 아니니까 꽤 희귀한 능력 같은데······"

석장실의 말을 들으며 나는 눈을 깜박였다. 정말로 능력이 세 개나 된다고?

A+++급 각성자, 심지어 가진 능력 중 하나는 각성자 시장에서 크게 대우받는 역장 외골격이라니 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저만한 각성자가 아무 이유 없이 옆 좌석 사람들 대화나 엿들을 리는 없지 않은가.

"저놈 저거 특무대 놈이다!"

김형만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질렀다. 우리 모두 일어나 그 젊은 남자를 둘러쌌다.

당황한 젊은 남자가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니, 오해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꾸 발뺌 할래? 준치 행님 불러올까!"

석장실이 그리 외쳤는데, 과연 강준치의 이름을 무시하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젊은 남자는 흠칫하더니 결국 사실을 인정했다.

"맞아요. 특무대 맞습니다······"

"방금 우리 감시하고 있던 거 맞지? 대체 왜 그런 거야?"

"여기 유명한 각성자가 여섯 명이나 모였단 신고가 들어왔길래요······."

물론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야 없는 일이었다.

"각성자들 여럿 모이기만 해도 나라에서 감시하는 거야? 미쳤어, 진짜?"

"아니, 생각해 보세요. 여기 계신 분들이 말이 여섯이지 대대 하나 전멸시켜도 이상하지 않은 전력 아닙니까? 그런 전력이 수도에 모여있는데 모른 척 무시할 수가······"

"왜, 우리가 모여서 쿠데타 작당이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지?"

김형만 씨가 주먹을 움켜쥐더니 계속 소리쳤다.

"저놈들 걱정하는 대로 해줍시다! 당장 국회의사당 쳐들어가서 보이는 금배지들 다 죽여버리고 대통령도 죽여버리고 아주 그냥 다 죽여버려요!"

이후로 다들 분통을 터뜨리자 젊은 남자가 난처해하기 시작했다.

석장실이 손을 마구 휘저으며 말했다.

"들켰으면 빨리 가! 꺼지라고!"

"하지만 형, 이거 제 임무라서······"

석장실이 젊은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가운데,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기 계속 있을 거라고요? 우리 감시하면서, 술맛 떨어지게 그대로 쭉?"

"죄송하지만 그래야······"

저 답답한 태도에 다들 울화통이 터진 듯했다. 석장실이 막 소리 지르려는 듯 입을 크게 벌리던 차에 내가 말했다.

"그럼 우리 감시하면서······ 술 같이 마시죠."

젊은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예?"

"각성자들 모임에 각성자가 끼었으면 같이 마셔야지, 응? 앉아요. 빨리 앉으라니까?"

각성자면 뭐 하는 사람이든 동족 아닌가. 적으로 만난 게 아니고서야 친해질 필요가 있다.

내가 젊은 남자를 억지로 의자에 앉혀서는 술 한잔 따라주니, 김형만 씨는 내가 이 감시꾼을 취하게 만들려고 이러는구나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 그렇네. 술 마셔요, 어서."

김형만 씨의 표정이 환해지더니 젊은 남자에게 술을 잔뜩 따라주고는 어서 마시라며 강요해댔다.

젊은 남자는 어, 어 하다가 기어이 우리가 준 술을 받아마셨는데, 그 당황하는 티만 봐도 사회초년생티가 물씬 풍겼다.

그리하여 젊은 남자를 취하게 만든 뒤, 우리는 역으로 그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성함이?"

"한희······."

특무대장인 한희석 그놈 이름이랑 비슷하군. 나는 그리 생각하며 물었다.

"능력은요?"

"역장 외골격에 역장 날붙이에······ 마지막으로 가속 능력이요."

한희는 더듬더듬 대답했지만, 그 말에 모두 놀란 눈치였다.

김형만 씨가 눈을 크게 뜨더니 물었다.

"혹시 신경가속도 포함된 가속 능력이에요?"

"예, 뭐······."

이쯤 되니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각성자가 능력을 셋이나 가지고 있는 경우도 드문데, 심지어 저런 조합이라니?

딱 봐도 강력한 능력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으며, 특히 가속 능력과 역장 날붙이 능력의 조합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동체시력을 벗어난 속도로 휙 달려와서는 상대가 누구든 단번에 베어 죽일 수 있단 셈 아닌가.

강준치가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 지경이다. 강준치가 이 친구의 존재를 알았다면, 심지어 특무대 소속임을 알았다면 그는 바들바들 떨면서 소월행 게이트에 몸을 던졌으리라.

나는 여기 모인 각성자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어리숙한 사회초년생인 줄 알았건만, 정부의 대 각성자용 결전 병기가 여기 있었다.

이 중에서 석장실이 그나마 태연해 보이기는 했다. 암석 정령의 특성상 역장 날붙이를 통한 급습이 딱히 위협적이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그리고 나 또한 특유의 신경계 발달 덕에 가속 능력자의 속도에 대응할 자신이 있어서, 나름대로 태연하게 이런 질문을 건넬 수 있었다.

"그 능력으로 왜 헌터를 안 하고 공무원을 해요? 특무대 거기 월급도 짜잖아요."

난 그 질문에 '애국하기 위해'처럼 나치 같은 대답이 돌아오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이 틀렸다. 술이 들어가니 솔직해진 것일까? 한희는 더듬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헌터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시켰다고요?"

"제 아버지가 특무대장인데, 한희석이라고······ 알아요?"

어쩐지 이름이 비슷하더라니, 그놈 아들이었군.

한희가 계속 말했다.

"자기가 특무대장인데 특무대 모집정원이 절반도 안 채워졌다면서, 나 보고 들어와서 자리 채우라고······"

"싫다고 거절하면 됐잖아요?"

"싫다고 했죠! 헌터 하면서 큰돈 벌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니까 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본인이 각성자들 관리하는 사람인데 아들내미 헌터 노릇 하는 거 자기가 방해 못 할 것 같냐면서, 헌터 되면 자기 권한으로 불이익 잔뜩 주겠다고 막 협박하는데······"

음, 박수. 맘만 먹으면 여기 모인 각성자 절반(정확히는 나와 석장실을 제외한 전부)쯤 혼자 썰어버릴 수도 있을 법한 이 친구는 다행히도 국가에 영혼을 판 나치가 아니었다.

"특무대원 월급 천이백만 원이면 뭔 소용이에요? 요즘 물가며 집값이 이 지경인데. 특무대원 월급 받는 걸론 늙어 죽을 때까지 모아도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살 수 없잖아요······!"

다들 긴장감을 누그러뜨린 채 이 젊은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주던 중이었다.

비명이 들렸다.

연달아, 여러 사람이 낸 비명이었다.

창밖에서 난리가 난 것 같았다. 급히 저 아래를 내려다본 우리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사람들이 마구 쓰러지는 것 같은데?"

김형만이 말했고 그 말대로였다.

저 아래 길가에서, 길가를 꽉 채운 사람들이 연달아 쓰러지고 있었다.

셋이 한꺼번에 쓰러지더니 또 하나 쓰러졌다. 아니, 이제 둘 더.

긴장감이 몸을 데우는 가운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다.

대한각성연대 활동할 적, 나는 정부에 탄압받는 각성자들의 사례뿐만 아니라 그 탄압의 이유를 제공한 각성자들의 사례 또한 보고 익혔다. 덕분에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았다.

길거리 각성 능력 난사.

길거리 총기 난사의 각성자 버전이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여러 사람을 해칠 만치 그 능력의 살상력이 높으면서, 그 능력을 헌터 활동 같은 고수입 직종에 활용하는 게 아니라 이따위로 사용할 만한 부류의 각성자는 내 알기로 하나다.

얼음 능력자······.

60화 특무대장 한희석 - [4]

상황 판단을 마친 내가 빠르게 외쳤다.

"장실 씨, 저 아래 사람 중에서 얼음 능력자 누구예요? 확인 좀 해줘요!"

석장실도 민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더니 바로 외쳤다.

"저기 배스킨라빈스 옆에! 사람들이랑 같이 뛰고 있는 저 아줌마요!"

그리고 김형만 씨가 소리 질렀다.

"그렇게 말해선 모르지!"

김형만 씨가 창밖으로 검지를 뻗었다.

열선 능력자인 그의 검지 끝에서, 붉은 광선이 뻗어나가더니 저 아래 사람들에게 닿았다.

원래라면 역장체를 단번에 꿰뚫어 죽일 만치 강력한 고온이어야겠지만 지금은 출력을 최대한 낮춘 걸까? 그 광선에 닿은 사람들은 무사했다. 제 열선 능력을 레이저 포인터처럼 쓰고 있는 셈이었다.

"장실 씨? 내 손가락 움직여서 누가 얼음 능력잔지 가리켜봐요!"

김형만 씨가 외치자 석장실이 그렇게 했다. 이내 열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어라 뛰는 중인 한 아줌마의 몸에 닿아서는 멈췄다. 내가 외치듯 물었다.

"저 아줌마가 얼음 능력자인 거죠!"

석장실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나는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아줌마의 앞에 도달한 뒤, 나는 보았다.

아줌마가 겁에 질린 다른 사람들처럼 뛰는 와중에도 그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며 이리저리 주변을 힐끔거리고 있는 것을, 그 눈은 공포에 질린 토끼의 눈이 아니라 사냥감을 찾아 헤매는 매의 그것임을 보았다.

아줌마의 시선에 닿은, 그 옆에서 힘껏 달리던 한 아가씨가 눈빛에서 총기가 사라지더니 풀썩 쓰러졌다. 그렇게 또 하나 죽었다.

보아하니 틀림없었다. 이 아줌마가 지금 학살극의 범인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특무대원 한희가 내 옆에 도착했다. 공간이동 한 나와 일 초밖에 차이 나지 않는 속도로 도착한 셈이었는데, 저번에 본 응우옌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속도였다.

그러나 응우옌은 이미 몇 년간의 헌터 활동으로 괴수를 사냥해가며 제 능력을 한껏 성장시킨 상태이리라. 반면 지금까지 괴수 한 마리 잡은 적이 없을 텐데도 이 정도인 이 친구의 잠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만했다.

이 대단한 친구라면 이 상황도 알아서 다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이 공무원이지 난 아니었다.

그렇다면 학원에서 배운 대로 괜히 경찰인 양 설치지 말고 저 알아서 하게 맡겨야 하나?

그러나 막상 한희를 보니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한희는 잔뜩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빠르게 오긴 왔는데, 당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

하기야 미행 하나 똑바로 못 해서 바로 들켜버린 저 사회초년생에게 놀라운 사건 대응 능력을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행동했다.

저 아줌마의 눈이 사람들을 보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그 시선에 닿은 이들의 뇌혈관을 얼리지 못하도록 내 손바닥이 아줌마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제야 아줌마는 자신이 들켰음을 파악한 듯했다.

아줌마가 반격에 나섰다. 시선이 가려져 허우적거리던 아줌마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힌 내 손목에서 한기가 퍼져서는 내 온몸을 냉각하기 시작했다. 내 라운드걸이 능력을 과다 사용하여 체온이 급상승한 내게 써주곤 하는 그 능력이다.

각성자를 상대로 이러려거든 직접 신체 접촉해야 한다는 점에서 괴수 사냥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사람 하나 죽이기엔 충분한 위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 아줌마를 상대로 바로 주먹을 휘둘러 기절시키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그저 참고 버텼다.

이 아줌마가 범인이 아닐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니까, 그저 겁에 질려 비정상적으로 행동할 뿐인 가능성을.

나는 어떻게든 한기를 버텨내며, 한희에게 물었다.

"지금 수갑 없죠?"

"예? 예."

"가까운 경찰서 어딨어요? 방향만 빨리 가리켜요. 지금 바로 경찰서에 전화해서 상황 설명해 주시고―"

한희가 가리킨 그곳으로 나는 연달아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경찰서에 들어가서는 그곳 경찰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그로써 아줌마의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그녀의 눈이 가려지고서야 나는 겨우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각성자 헌터들과 술 마시던 곳으로 돌아오니, 다른 각성자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혹시 얼음 능력자가 또 있어서 학살이 계속됐던 건 아니죠?"

내가 묻자 석장실이 대답했다.

"방금 제압한 아줌마가 범인 맞는 것 같은데요? 달리 보이는 얼음 능력자도 또 없고, 김극 형이 그 아줌마 제압한 후부터 학살이 멈췄으니까······"

이후로는 가게를 나와 잡담이나 나누기 시작했다.

"대충 몇 명이나 죽은 것 같아요?"

"한 여덟 명?"

"어휴, 죽은 사람들은 안됐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덜 죽은 편이네."

"그러게요. 길가에 사람이 그리 많았는데, 평범한 총기 난사였어도 이것보단 훨씬 더 죽었을 테니까······ 하여간 다들 빠릿해선 비명 터지자마자 행동해서 다행이야, 정말."

"이거 오늘 뉴스에 나올까요?"

누가 그리 묻길래 난 이런 일은 어지간해선 뉴스에 안 내보낸다고, 정부에서 대충 묻어버린다고 설명하려다 그만두었다.

평소라면 그럴 테지만 이번엔 또 모를 일이었다. 수상할 만치 각성자 관련 뉴스를 고스란히 내보내는 중인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

내 예상이 맞았다. 이번 일은 뉴스에 나왔다.

모두와 헤어지고서 집에 돌아오니, 모든 공중파 뉴스에서 이번 일을 속보로 내보내고 있더라.

「서울 수유동에서 빙정 능력자가······ 때마침 현장에 있던 각성자 헌터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섰기에 사태가 빠르게 진정될 수 있었다는 소식입니다」

헌터 김극, 어쩌고 설명하는 자막과 함께 화면에 내가 등장했다.

공간이동 하여 나타난 내가 아줌마를 제압하는 장면에서 나는 TV를 껐다.

도저히 두 눈 뜨고 더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기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는데, 예상했듯 박미형 씨였다.

「어째 요새는 TV만 틀면 김극 씨가 나오는 것 같네요?」

신난 목소리를 들으니 또다시 활약한 날 치켜세워 주고자 전화한 듯했지만, 난 맞장구 칠 기운이 없었다.

"그러게요. 좀 작작 나와야 하는데."

내가 비꼬듯 대답하자 휴대전화 너머에선 잠시 말이 없었다.

조금 뜸 들인 끝에 박미형 씨가 물었다.

「김극 씨, 지금 기분 안 좋아요?」

"예. 기분이 안 좋네요."

「대체 왜요?」

"충동적으로 행동했다가 정부의 얼음 능력자 탄압에 일조한 것 같아서요?"

「예?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 그걸 신경 쓰고 계셨구나?」

내가 이번에 제압한 얼음 능력자는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틀림없다. 물증은 물론 정황증거마저 없더라도 그저 사건 현장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로 얼음 능력자에게 유죄추정원칙이 적용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하던가? 심지어 이번엔 정황증거까지 확실하다.

이 와중에 나는 범인을 잡았다며 즐거워하기 어렵다.

내가 비록 그 아줌마가 범인이라 판단하여 제압하긴 했지만, 현장에 보이지 않도록 몰래 숨어있던 다른 각성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 아줌마는 그저 수상하게 행동했을 뿐, 진범이 따로 있을 만약의 경우를 나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 비슷한 이유로 감옥에 들어간 얼음 능력자 여동생이 있는 입장엔 말이다.

그리고 내 여동생 비슷하게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울적하게 있자니, 내 심정을 헤아린 듯 박미형 씨가 말했다.

「아, 이번엔 억울하게 체포된 경우가 아니라 진범이 맞을 거예요」

"어떻게 그걸 압니까?"

「제가 이런 쪽으로 인맥이 있어서 아는데, 그 아줌마가 자백을 이미 했대요. 동기까지 확실하다나요?」

그리고 박미형 씨가 설명하길, 얼음 능력자가 길거리에서 총기 난사하듯 학살을 벌이는 경우는 보통의 경우엔 사회에 억하심정이 있는 경우거나 어떤 괴상한 신념을 표출하려는 경우지만 이번에는 아니라고 했다.

이번에 길거리에서 학살을 시도한 그녀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 바로 정령이 되려는 것이었다.

「정부가 숨기려 했는데도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령이 되면 늙어 죽지 않게 된다잖아요? 그리고 그 아줌마가 주름 더 늘기 전에 노화를 멈추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헌터가 되어서 정령 될 때까지 괴수를 죽이자니, 그건 자기가 생각해도 영 실현성 없는 생각인 것 같았다나요? 그래서 보다 안전하게 정령이 될 방법을 찾았다는데······」

"괴수보다 훨씬 수가 많고 죽이기도 쉬운 사람을 잔뜩 죽이는 거요?"

「맞아요. 수십에서 수백 명쯤 죽이면 정령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행동한 거죠. 설령 사형을 받더라도 감형 좀 받다 보면 언젠간 출소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늙어 죽지만 않으면 이득이란 느낌으로······ 여러모로 범인이 확실한 모양이니까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자백도 대충 강요해서 그럴듯하게 받아내면 되는 거고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 자리에서 김극 씨가 달리 뭘 할 수 있겠어요? 사람들 잔뜩 죽게 내버려 둘 게 아니고서야 일단 행동에 나섰어야 했던 건데, 제가 봐도 잘한 일이에요. 대한각성연대 소속 인권운동가로서 보기에도 말이야」

"잘하긴 뭐가요?"

「알잖아요? 해외에선 얼음 능력자 하나가 수백 명씩 죽인 경우도 흔하단 거요. 혼자 할 수 있는 학살의 스케일부터 다르다 보니 기네스북 범죄기록을 죄 갈아치운 모양인데, 한국에도 그런 사례 생길 뻔했던 걸 멈췄으니 다른 얼음 능력자들에게도 다행이죠?」

"그건 또 뭔 소리래요······."

「식인 맹수를 최대한 빠르게 사살함으로써 그 맹수 종에 대한 혐오가 퍼지는 걸 멈췄다는 사냥꾼 얘기 들어봤죠? 그리고 이번에 김극 씨가 한 일이 그래요. 사회의 얼음 능력자에 대한 혐오가 더 커질 뻔한 사태를 도중에 막은 셈이니까······」

대충 그런 이유로 내 이번 행동은 각성자 인권운동의 관점에서도 훌륭한 일이었다며 박미형 씨가 주장했지만, 그저 날 위로하기 위해 그리 말했다는 것쯤은 나도 알 만했다.

대한각성연대 시절에 저 아줌마는 그 어떤 사건이 터졌든, 정황증거가 얼마나 확실하든 간에 각성자를 제대로 된 증거 없이 구속하고 형을 내리면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으니까.

나 또한 그 신념을 물려받은 바였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 활약해서 또다시 언론의 찬사를 받게 되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헌트웹에 들어갔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익명 : 헌트웹의 자랑 애기버섯 만세! 헌트웹의 자랑 돌머리청년 만세! 헌트웹의 자랑 엘마야캐요 만세!

Ⓐ syberMagneto : 애기버섯 얼레기 때려잡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네

내 라운드걸이 이번에도 얼레기, 어쩌고 하는 걸 보고서는 흠칫했다.

하여간 헌트웹의 네임드들이 활약하자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까? 지금 헌트웹은 축제 분위기였다.

Ⓐ 돌머리청년 : 하여간 날 포함해서 다들 행동 엄청 빠르더라? 이번에 행동한 세 명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최소 열 명은 더 죽었을 듯

5my지저스 : 하여간 다들 영웅이네 ㅎㄷㄷ 이번에 특히 김극 햄 보니까 체온 내려가서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데도 끝까지 참아내던데 대단했다 정말

그러나 이 축제 분위기가 끝나는 데는 불과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

다음 날에도 헌트웹은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좋은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 돌머리청년 : 나라에서 진짜 미쳤나?

그와 똑같은 심정으로 난 사이트에 올라온 동영상을 봤다.

국무회의? 아니면 다른 정책토론?

정확히 어떤 자리인지는 알 수 없어도 대충 높으신 분이 나와서 정책을 설명하는 자리임은 알 만했다.

그리고 이번에 정책을 설명하러 나온 인물은 나 역시 아는 인물이었다.

「근래 있었던 사건들, 즉 각성자를 상대로 한 공권력의 무기력함을 보안함과 동시에 갈수록 심각해져 가는 초상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주절주절 정책을 설명하는 작자는 바로 한희석이었다.

특무대장, 제 아들의 창창한 앞길을 막아버린 그 나치 새끼 말이다.

영상 속 자막에서는 한희석을 특무대장이 아니라 '국가안정부 차관'으로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직함을 보며 난 흠칫했다.

헌트웹에서는 특무대를 '헌터 활동할 배짱이 없는 나약한 놈들의 겁쟁이 쉼터'쯤으로 얕보는 문화가 있다. 마찬가지로 특무대장 또한 모집정원 절반도 못 채운 근본 없는 부대의 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더니, 생각보다 훨씬 높으신 분이었던 모양이지.

영상 속 한희석은 김석희 사건, 그리고 이번 수유동 빙정 사건 따윌 연달아 언급했다.

요새 뉴스에서 각성자 관련 사건을 검열 없이 내보낸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안정부에서는, 특무대 예산을 추가로 대폭 증액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며······」

강준치에게 된통 당한 흔적을 숨기려는 듯, 기괴할 만치 새하얀 화장을 하고 나온 한희석은 계속해서 주절주절 말했다.

「또한 특무대에 필요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서는 예산 증액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되는바, 특무대에 추가적인 권한을······」

그리고 마침내 헌트웹의 모두를 분노케 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특무대 활동에 필요한 각성자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긴급 시 지자체와 계약 중인 헌터들을 동원할 권한이 특무대에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영상 속 반대편에서 바로 반박이 나왔다.

「그러니까 지자체에서 계약한 각성자 헌터를 불러다가 괴수 토벌이 아닌 다른 일을 맡기는······ 소위 구급콜을 아예 합법화하겠단 말씀인가요?」

「예, 기존 제도에서는 지자체와 각성한 헌터들의 동원에 한계가 있어서······」

「그게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자체와 계약했건 어디와 계약했건 헌터들은 결국 민간인인데요」

「법적 신분은 그럴지 몰라도 결국 헌터란 직종에는 공익적 성격이 있어서―」

「해병대 모집정원 못 채웠으면 해병대 작전마다 근처 어민들 동원해서 작전 진행한답니까? 애초에 관련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헌터들을 동원해서 경찰이 해야 할 일 맡기겠단 게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인지 모르겠습니다!」

「각성자들의 특성상, 그들을 동원할 경우에는 어지간한 훈련을 받은 전문인력들보다도 훨씬 특출난 성과를 보이리란 판단으로―」

영상 속에서 한창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리고 '특무대 따위 소수정예 부대의 예산을 증액할 게 아니라 지방 경찰력 강화를 위해 경찰 공무원들 월급부터 올려주는 게 우선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더니, 영상 속 한희석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녹봉을 적게 주니 관리들이 생계유지하기도 어려운 나머지 부정부패가 심했다지요? 그런데 그 시절 조선 사람들도 뭐가 문제인지 다 알았어요. 몰라서 문제 해결을 못 한 게 아니라 관리들 녹봉 올려줄 능력이 없으니 뻔히 보이는 문제 해결을 못 한 거란 말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공무원들 월급을 뭔 수로 올려줍니까? 물가가 열 배로 올랐다고 공무원들 월급도 열 배로 올려주면 물가 상승이 열 배 상승에서 멈추겠어요?

당장 돈 아껴야 하는 게 대한민국뿐만이 아니에요. 미국에서 현재 헌터 제도 어찌 운용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무슨 히어로 만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각 지역 각성자들이 코스프레하고서 자경단처럼 괴수 사냥하는 문화가 있습디다. 그 히어로 활동 중에 성과를 보인 몇몇 인원한테 주정부가 접촉해서 헌터 면허 주고 정식 계약하는 거지요.

이게 퍽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헌터 인턴 제도입니다. 성과 입증하기 전까진 각성자들을 돈 한 푼 안 주고 부려 먹으려고 유지 중인 제도라고요.

달러 잔뜩 뽑아내도 다른 나라들이 알아서 물가안정 시켜줄 미국에서도 그리 돈을 아끼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돈 펑펑 쓰면서 공무원들 월급 올려주고 그런답니까? 최소한의 예산으로, 최선의 결과를 내놓아야―」

물론 한희석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말하든 헌트웹의 헌터들이 납득할 리는 없었다.

다들 분노에 가득 차 키보드를 두들기는 중이었다.

익명 : 그러니까, 이제 헌터 면허 있으면 나라에서 맘대로 불러다 쓸 수 있게 된다 이건가?

Ⓐ 엘마야캐요 : 이제 나 무슨 일 있을 때마다 한의원 문 닫고 불려가야 하는 거야? 미치겠구만······.

Ⓢ Kang : 갯강구 새끼들이 내버두니까 정말 선 넘네. 내가 진짜 뒤집어 줘야 하나?

강준치 넌 일단 그놈의 지하에서 나오기나 하고 발언하란 생각이 든 뒤, 난 잠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그날 강준치를 달랜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현장에서 그 얼음 능력자 아줌마를 제압한 일 또한 너무나도······.

너무나도 화가 나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자니, 뉴스에서 날씨를 예보했다.

「한동안 집중 호우가 예상되는 가운데······」

나는 화를 삭이느라 노력하며 애써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장마철이랬나?

이번에 만난 각성자 헌터들이 선배로서 내게 조언해준 내용들이 생각났다. 그 내용을 전해줘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도.

Ⓐ syberMagneto : 또 얼레기들이 문제 일으켜서 이 모양 이 꼴이 돼버렸네

난 이번에도 헌트웹에서 자학 중이었던 내 라운드걸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말하기 시작했다.

"어, 담비 씨? 제가 의논할 게 있는데요. 곧 장마철이잖습니까? 그러니까······"

61화 헌트웹 A급 백담비 - [1]

헌트웹에는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전통이 있으니, 각성자를 숭상하는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용자가 각성자란 사실을 인증하면 헌트웹에서는 닉네임 옆에 근사한 A배지를 달아준다.

이 배지를 달고 있으면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

A배지를 달고 있기만 해도 눈에 띄기에 게시글의 조회수가 대폭 늘어나며, A배지를 단 이용자의 모든 발언에는 놀라운 수준의 권위가 생겨난다. 블라인드에서 삼성 직원이며 법조인을 숭상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리고 블라인드에서 새회사를 멸시하듯, 헌트웹에서는 비각성자 헌터들을 멸시한다.

헌트웹 이용자들이 평가하길, 각성자 헌터들은 각 국가에서 경쟁적으로 모셔갈 만치 중요한 인재이지만 비각성 헌터들은 한낱 인생 막장 용병에 불과하단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비각성자 헌터들을 깔보는지, 짐꾼이란 용어까지 만들어 쓸 정도 아닌가.

헌트웹 이용자의 대다수가 비각성자이리란 점을 고려하면 기이한 일이다. 거의 모두가 각성자가 아닌 주제에 각성자의 입장에 이입한 채 활동 중이란 셈이니까.

한편 백담비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자신부터가 제대로 된 A급이 아니면서 사이트에서는 A급에 이입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이지 사이트 설립 초기에 가입해서 다행이다. 당시엔 A배지를 주는 기준이 널널해서 얼레기마저 각성자랍시고 A배지를 발급했다.

그때 배지를 받아둔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익명 : 하여간 한국 각성자들은 너무 온순해서 문제라니까

익명 : ㄹㅇ 한국 대표하는 각성자들만 봐도 존나 모범적이긴 해. 김극이나 강준치나 다들 착해빠져 가지곤 정부가 간댕이가 부어버렸음

Ⓐ 돌머리청년 : ? 김극 햄이나 준치 행님이나 모범생이라 보기는 좀

익명 : 김극햄 이번 영상만 봐도 자기한테 대물 저격총 쏴 갈긴 놈한테 총알 좀 휙 던지고 용서해주던데 존나 관대한 거 아니냐?

익명 : 하기야 해외 평균의 각성자였으면 거기 있던 놈들 모조리 때려죽였겠지? 강준치는 진작 국회의사당 앞에서 데오퓨 찍었겠고

백담비, 헌트웹 닉네임 사이버매그니토는 마구잡이로 새 글이 올라오는 중인 헌트웹을 보며 그 사실을 실감했다.

익명 : 사이버매그니토가 옳았다고 생각하면 추천 좀

Ⓐ Justice1994 : 매그니토 선생님, 당신의 큰 뜻을 저희가 몰랐어요

뻘글이나 올려대는 분탕종자에 불과하던 사이버매그니토가 숭상받는 이 상황만 봐도 지금 헌트웹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성자 헌터들을 동원해서 나랏일에 부려먹겠다는 그 발표가 헌트웹의 이용자 모두를 광분케 했다.

백담비는 헌트웹의 선지자로서 이 사태에 통렬한 일침을 날렸다.

Ⓐ syberMagneto : 비각성 쓰레기들······ 싹 다 가스실에 처넣어야겠지?

평소라면 무시당했을 이 글마저 순식간에 추천을 잔뜩 받아서는 댓글까지 줄줄 달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즐거워졌지만, 백담비는 사실 이 사태에 큰 관심이 없다.

보아하니 정부에서는 일반 헌터들이 아니라 각성자 헌터들을 동원하려나 본데, 그렇다면 이쪽이 무슨 상관인가? 각성자 헌터가 필요하다고 해서 설마 얼레기까지 동원하려 들진 않을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국가에서 강제 동원씩이나 하려 드는 저들이 부럽다. 그만큼 그 쓸모를 인정받고 있다는 셈이니까.

한편 이 상황에 나이토 상 그놈이 눈치껏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제법 통쾌한 일이다.

그 역겨운 놈······. 그놈과 마주칠 때마다 이쪽에서 어떤 충동을 느끼는지 놈도 대충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사냥에서 만날 때마다 이쪽에 이유 없이 굽신거리는 것만 봐도······.

익명 : 보아하니 발표한 대로 정책 강행되겠지?

익명 : 당연하지. 정치할 때 각성자들 신경 쓸 필요가 어딨나? 각성자 헌터라 해봤자 전국에 오천 명도 안 되잖아. 그마저도 죄다 서울에 있거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까 표 셀 때 그냥 없다고 쳐도 되는 수준인데

Ⓐ Dragon : 각성자들 대표로 누가 발언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뭐 대표나 단체 없어?

익명 : 헌터 협회 있잖아

Ⓐ 엘마야캐요 : 그러고 보니 협회에선 대체 뭐 하는 거냐? 김극이 구급콜 당했을 때도 유감 표명조차 없지 않았나?

Ⓐ 엘마야캐요 : 요샌 협회에서 신입 헌터들 교육도 부실하게 하는 걸로 아는데, 이런 식으로 헌터들 전혀 챙겨주지 않을 거면 대체 협회 존재할 이유가 뭐야?

익명 : 아재요······ 헌터 협회 그거 정부에서 만든 어용단체인 거 뻔히 알면서 그러시네. 자국민들 외부 용병 취급해서는 나라 지키다 전사해도 보상금 안 주려고 만든 단체인 거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백담비도 현재 헌터 협회가 무의미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현재 헌터 협회장의 유일한 업적은 데스클로에게 갈고리발톱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붙이려다 실패했다는 것뿐이다. 만약 그 시도를 성공해냈다면 유일한 업적마저 사라졌을 테고.

익명 : 헌터 협회 같은 어용단체 말고, 헌터들 입장 대변해줄 딴 단체가 있어야 돼

Ⓐ Dragon : 각성자 헌터들 위한 단체도 따로 있어야겠지

Ⓐ 돌머리청년 : 정부에서 그런 단체가 운영되도록 내버려 둘까? 이번에 보니까 각성자 여섯 명 모이기만 해도 위협적이라 느끼는지 감시하려 들던데

Ⓐ 돌머리청년 : 각성자 수천 명쯤 모여서 단체 조직하면 국가전복을 꾀하는 반란 세력이랍시고 폭격이라도 하려 드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

물론 백담비는 저 화제에도 큰 관심이 없다. 각성자 단체가 생긴들 이쪽이 당당하게 낄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까.

Ⓐ syberMagneto : 또 얼레기들이 문제 일으켜서 이 모양 이 꼴이 돼버렸네

그저 A배지의 소유자답게 현 상황에 관심이 지대한 척, 정부 욕이며 얼레기 욕이며 비각성자 혐오 발언까지 계속하던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어, 담비 씨?」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백담비는 흠칫했다.

김극. 그러니까 지금 백담비의 보스였다. 실제로 고용관계는 아니지만 하여튼.

"예, 김극 씨. 말씀하세요."

「제가 의논할 게 있는데요. 곧 장마철이잖습니까? 그러니까······」

그 말을 다 듣고 난 백담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물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잘하면 제가 게이트를 열 수 있게 될지 모른다고요?"

「그래요. 물의 정령 몇 마리쯤 해치우면 될 것 같다던데?」

"그러려거든 김극 씨가 너무 고생스럽지 않을까요? 물의 정령 잡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알고 있는데요······."

「고생스러워도 해야죠? 지금 베헤모스 때문에 게이트 내부상황 확인하는 게 엄청 중요한 상황이잖아요. 베헤모스 그놈 어디로 움직이는지, 그놈 따라다니는 괴수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하니까 말이야. 내 보기에 지금 게이트 열 수 있게 되시면 아주 그냥 인천의 보배가 되실 거예요, 아마」

저 남자가 인천, 어쩌고 하는 것을 백담비는 무시하려 애썼다.

처음에야 컨셉인 줄 알았지만 직접 보니 컨셉이 아닌 듯해서 너무나도 두렵다. 계약금을 덜 받으면서까지 인천시와 계약하는 기행이며 평소 행동거지를 보면 여러모로 진심인 것 같은데, 그녀로선 그 광기를 이해할 수가 없다.

"확실히 그럴 수 있게 되면 좋을 것 같긴 한데요. 김극 씨가 왜 저 게이트 여는 걸 신경 쓰시는지······"

「그야 담비 씨 게이트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잖아요? 기회만 되면 들어가려고 하시던데, 아예 직접 게이트 열 수 있게 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

「왜요, 힘들 것 같아요? 하기야 부담스러우면 그냥 없던 일로 해도 되긴 하는데」

백담비는 서둘러 대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참여할게요."

통화를 마치고서 방금 나눈 대화를 곱씹으니 새삼 의욕이 샘솟았다. 자신과 상관없는 인터넷 화제에 식었던 심장이 제대로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저 남자의 팀에 합류한 것은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단순히 헌터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됨으로써 계약금을 간직할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니라 정신건강 면에서도 그렇다.

저 남자의 팀에 들어간 뒤로는 자신이 활약할 기회가 충분히 생겼지 않은가.

지휘하는 김극부터가 자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여러모로 활용하려는 게 눈에 보인다. 그 덕에 몇 번이고 각성자로서 활약할 기회 또한 있었다. 그 덕에 깎여나간 자존감이 얼마나 복구되었는지 모른다.

반면 이전 팀은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순 스윗한 놈들만 모여서는, 이쪽이 여자랍시고 온갖 배려해주는 척을 다 하다가 그들이 보내는 은근한 애정 표현을 무시하니 화가 났는지 놈들이 은퇴할 때 헌트웹에 똥을 싸질렀다. 그 탓에 업계 평판이 최악으로 추락해서는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 이전 팀과 비교하면 이번 팀은 여러모로 좋다.

솔직히 말하자면 감격스러울 정도다.

보스인 김극의 눈치를 봐서인지 이쪽에 껄떡대는 놈이 없는 것도, 이번 팀에서는 다른 각성자 헌터들 수준만큼은 아니어도 자신이 이런저런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있는 것도 모두.

계속해서 헌트웹을 보던 중에 새 글 하나를 발견했다.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 얼음공주와 함께 물의 정령들 토벌 예정!

보스가 올린 글임을 알아챈 백담비는 잠시 굳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그 글을 클릭하고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자, 한글로 이루어진 끔찍한 것들이 그 눈과 뇌를 더럽혔고 백담비는 소리 없이 비명 질렀다.

Ⓐ BabyBerserker : 여름이에양! 만화영화에서 눈이 즐거워지는 특별편이에양!

애기버섯이, 학교 수영복 입고 출격 예정♡♥♡!!

애기버섯이는 숙녀니까 섹시한 비키니를 입어야겠지만 그랬다간 애기버섯이의 몸매를 보느라 시민 아조씨들이 피신하질 못하고 애기버섯이 매력에 사로잡혀 있을까 봐 걱정이 됐지 뭐예양? 그래서 애기버섯이의 매력을 숨기기로 했어양! 기특하고 장한 애기버섯이!!

아무튼, 이번 장마철에 말이에양! 얼음공주 백담비 언니야랑 언니야보다 섹시한 애기버섯이가 출동해서!!

저 남자가 올리는 글들을 볼 때마다 기혈이 뒤틀리고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다.

저러는 것이 남자들 문화인 것 같긴 한데, 백담비 그녀로선 도저히 저 짓거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저와 같은 글을 볼 때마다 사냥에서 저 남자가 어떤 모습인지 떠올리곤 하기에 특히.

광기로 더럽혀진 정신을 정화하기 위해, 백담비는 시선을 돌려 탁자 위를 봤다.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아크릴 스탠드를 봤다.

인천시에서 제작해준 물건이다.

여기저기 누전이 됐는데 위험지역이랍시고 수리기사가 오지도 않아 툭하면 전기계량기가 내려가곤 하는 이 집구석에서 유일하게 맘에 드는 물건이기도 하다.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라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물건.

이놈의 집구석에서도 이삼 년쯤 지나면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저 남자가 짓고 있는 아파트가 완공된다니까······.

얼마 전까진 강준치가 말했듯 확 소월로 떠나버릴까 하는 마음마저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저 남자 덕에 여러모로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니 감사할 일인데, 박미형 씨는 언제쯤이면 저 남자의 세뇌를 풀어줄까?

*******

며칠 뒤, 뉴스에서 봤듯 비가 오기 시작했다.

사흘째 계속된 집중 호우였다.

바닥에 물이 넘쳤다. 그리고 예전 세상에서도 도시에 물이 넘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게이트가 열린 뒤에는 시민 모두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됐다.

그리하여 인천시에서는 현재 인천시의 구세주쯤으로 통하는 헌터 김극을 불러 출동할 것을 요청했다.

김극이 그 요청에 응했으므로, 김극과 함께 백담비는 헬기에 올라탔다.

헬기 안에서 잠시 잡담할 시간이 있었다.

"다른 팀원들은요? 이번엔 안 왔나 본데······"

백담비의 물음에 김극이 대답했다.

"총알 안 통하는 놈들 잡으러 가는 건데 그 친구들 데려올 필요 없죠? 저만 해도 헌터 라이플 놓고 왔잖아요. 담비 씨도 경기관총 안 가져오셔도 됐을 텐데 왜 굳이?"

"그냥, 불안해서요."

백담비의 별것 아닌 대답에 김극이 씩 웃었는데, 그 앞 좌석에 마주 앉은 채 백담비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과연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인가 하고.

자길 챙겨주겠다며 이번 작전에 나서는 것부터가 호의일 것이었다. 그 밖에도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느껴지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들긴 하는데, 또 모를 일이었다. 이 남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딴 팀원들에게도 과할 만치 잘해주니까.

그것만 봐도 정말 좋은 사람이다. 헌트웹에서 활동하는 것만 빼고.

그 헌트웹 활동을 보면 성 정체성이 남다른 것일지도······.

여유로운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였다.

공중에 떠오른 헬기에서, 백담비는 도로를 휩쓰는 파도를 봤다.

평범한 자연현상 따위가 아니라 물의 정령일 것이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괴수들. 식인하려는 욕망에 가득 찬 흉물들.

세상이 이렇게 된 지 벌써 사 년이 지났지만, 심지어 헌터 노릇을 한 지도 삼 년이 지났지만 백담비는 툭하면 이 모든 것이 꿈인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러고는 아이돌 시절 입고 다니던 이 크롭티며 선글라스 차림으로 있다 보면 꿈에서 깨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망상이 드는 것이다.

자신은 팔자에도 없는 총질을 그만두고, 눈앞의 저 남자는 UFC에서 활약하는······.

"아, 저 잠시 갔다 오겠습니다."

김극의 성난 으르렁거림과 그 안에 깃든 초저주파가 백담비를 붕 뜬 기분에서 끄집어냈다.

김극이 먼저 공간이동 하여 사라진 가운데, 사냥이 시작되었다.

62화 A급 헌터 백담비 - [1]

자연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자생력이 충만한데, 오직 인간만이 자제할 줄 모르는 불순물이라 이 모든 조화를 망친단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

알다시피 균은 자연의 기초적인 생물이다. 그리고 밀폐된 용기에 균을 배양하면, 균은 환경 내 한정된 공기를 아끼기 위해 절제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번식한 끝에 환경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는 절멸하고 만다.

그것을 보면 인간 외 다른 생물들은 절제할 줄 알기에 자연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아무리 본능에 충실하게 굴더라도 자연을 파괴할 만한 능력이 없을 뿐이다.

외딴 섬에 방생된 고양이들이 섬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법. 자연의 동물들에게 충분한 능력이 주어지면 그들도 능히 자연을 파괴할 수 있다.

소드 월드는 그 사실이 증명된 세상이다.

소드 월드의 황량함은 소월인들이 지나치게 자연을 개발한 결과물 따위가 아니다.

게이트 너머의 괴수들······. 소월 자연의 일부요 흔한 동물에 불과한 놈들은 제 영육을 살찌우려는 본능과 최대한 오래 생존하려는 본능에 충실했다. 놈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조절 없이 집어삼키고서 그 양분을 자연에 환원하지 않은 채 게이트 안에 틀어박혔다.

그대로 시간이 지나, 소월의 자연은 그 자생력을 잃었다. 그리하여 생겨난 사막이요 황량함이다.

그렇듯 일찍이 자기네 세상을 황폐화한 소월의 괴수들은, 지구에서도 비슷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

자연 그 자체인 정령들만 봐도 그렇다.

*******

"아, 저 잠시 갔다 오겠습니다."

아직 우리 목적지에는 도착하지 못했지만, 나는 먼저 공간이동 했다.

저 아래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간이동 하여 헬기를 벗어나서는 저 아래를 보았다.

지금 부평구는 침수 피해가 심각했다. 보이는 도로마다 물이 차오른 상황이었다.

이렇게 도시에 물이 차오르면 위험하다.

강과 지상의 물이 그대로 연결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그 물을 통해, 바다에 들끓는 바다 정령이며 강 정령 따위 온갖 물의 정령들이 지상을 습격해오기 때문에.

그놈의 정령이며 해양 괴수들로 말미암아 게이트가 열린 지 삼 년 만에 수산자원이 반쯤 씨가 마른 마당이다.

바닷속 사냥감이 부족해진 물 정령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지상의 지성체들을 사냥하려 든다.

길가에서 파도가 쳤다.

파도는 옴짝달싹할 수 없이 길가에 묶인 승용차들을 덮치고 있었다. 창문이 단단히 닫힌 승용차들은 파도에 휩쓸린 뒤에도 무사했지만, 자연현상이 아닌 파도는 그들을 사냥하려는 의지에 가득 찼다.

승용차들을 덮쳤던 물, 그러니까 저 물의 정령은, 그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방향을 전환해서는 방금 그 승용차들을 향해 다시 파도쳤다.

저 정령은 기어이 승용차들의 창문이 깨질 때까지, 그리하여 그 안에 숨죽인 사람들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해서 파도칠 것이다. 기어이 사람들이 드러나면 그들을 익사시켜 그 영혼을 삼킬 것이다.

협회에서 가르쳐준 적 없는, 선배 헌터들이 가르쳐준 물 정령들의 사냥수법 중 하나다.

낙하하며 나는 망치를 높이 들었다.

중력에 당겨진 내 몸에 충분한 가속이 실렸을 때, 나는 다시 한번 공간이동 했다.

"인천―!"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망치질이 또다시 차량을 덮치려던 파도를 강타했다.

중력 가속도가 실린 망치질이었다.

유체를 상대로 한 망치질이었기에 '쾅'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지는 않았다. 손맛 또한 좋지 않았다.

그 대신 묘한 쾌감이 있었다. 거대한 질량의 방해물을 뚫고 기어이 목적지에 닿는 쾌감······.

"만세―!"

거대한 질량의 물을 관통한 내 망치가 끝내 콘크리트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망치에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정령을 이룬 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 번 더 망치를 후려치니 내 머릿속에 묘한 쾌감이 스며들었다. 그로써 난 정령이 죽었음을 알았다.

"괜찮아요?"

내가 승용차에 다가가 묻자 창문이 살짝 열렸다. 그 안에 있던 아저씨가 날 보며 눈을 껌벅였다.

"어······ 김극 헌터?"

"김극 헌터 맞고, 나오세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드릴 테니까."

좋은 쪽으로 유명해지니 좋은 점이 많다. 웬 듣도 보도 못한 헌터의 지시였다면 불응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 경우엔 아니다.

내가 물에 갇힌 승용차들을 돌아다니며 몇 번 외치자 승객들 모두가 내 말을 따랐다.

아홉 명의 사람들이 철벅거리는 물을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한곳에 모였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다 모인 거죠? 좋아요, 다들 손잡으시고. 주문을 외웁시다. 인천 만세!"

"인천 만세―"

그리고 나는 공간이동 했다. 내 손을 붙잡은 사람 둘, 그리고 그 둘과 손에 손잡은 사람들과 함께.

예전 같으면 두 명 혹은 세 명과 공간이동 하는 것이 한계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거듭된 사냥을 통해 함께 공간이동 시킬 수 있는 질량 또한 대폭 늘었다.

아홉 명과 함께 빈 건물 안에 공간이동 했다. 물이 침범하기 어려운 장소,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살았다, 씨발!"

나는 그들에게 씩 웃어주며 다시 공간이동 했다. 저 앞으로 계속 날아가던 헬기 안으로.

다시 백담비가 보였다. 그녀 앞에 앉은 내가 투덜거렸다.

"낙하 충격으로 팔 아파 죽겠네요. 재생이 되긴 됐는데, 그래도 죽겠다. 어휴······ 이거 보면 세상 참 불공평하네."

"세상이 불공평하다뇨?"

"제가 전투용 능력은 신체강화밖에 없으니까 매번 싸울 때마다 몸이 아프잖아요? 김석희 그놈처럼 신체강화에 역장 외골격까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나는 신체강화 하나뿐일가?"

그리 중얼거리다 말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백담비, 그녀의 선글라스 뒤에 숨겨진 눈에서 일렁이는 분노가 보였다. 내가 지금 자랑하는 걸로 느껴지는 모양이지.

다행히도 내 라운드걸은 언제나 흥분하지 않는 냉미녀 이미지를 유지하길 원한다. 그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살짝 떨렸을 뿐 사이버매그니토다운 분노가 새어 나오진 않았다.

"공간이동 포함해 두 개로 만족하시면 안 될까요······?"

"제가 욕심이 좀 많아서요. 얼마 전에 세 개 달고 다니는 친구 보니까 능력 하나 더 각성 못 하나, 뭐 이런 욕심이 듭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저 능력 두 개 맞죠? 세 개가 아니라?"

으스대려고 질문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시 확인하고자 질문한 것이었지만 백담비는 내 네이버 카페 활동 경력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보니까 두 개 맞네요. 아쉽게도······."

백담비가 날 때리고 싶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난 그저 뻔뻔하게 대답했다.

"거참 슬픈 일이네요."

그녀의 눈치를 살필 생각은 없었다.

헌트웹에서 얼레기, 어쩌고 자학하는 여자 아닌가. 그녀가 약해빠진 얼음 능력자임을 고려하는 식으로 말을 골랐다간 오히려 자괴감이 들 것이다.

얼레기고 뭐고, 불쌍한 취급 따윈 하지 말고 동등한 능력자로 대해야겠다는 것이 내 나름의 판단이다.

다행히 그 기분이 아주 크게 상한 것은 아니었던 듯, 내 라운드걸은 한숨만 살짝 쉬더니 내 말을 받아줬다.

"이왕 새 능력 각성하실 거라면 역장 날붙이가 더 좋지 않겠어요? 공간이동 해가며 뭐든 베어 가르는 최강의 암살자가 탄생할 텐데······."

"역장 날붙이도 나쁘지 않긴 한데, 내가 그거 각성했다간 발작할 친구가 한 명 있어서 안 돼요. 그게 누군지 직접 말은 못 하겠고 대충 강씨 성에 준치란 이름 가진 친군데······."

헬기가 멈췄다. 무전에서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자 잡담은 끝났다.

나는 백담비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니다?"

"예······!"

백담비가 신속한 동작으로 선글라스를 벗어 옆에 내려놨다.

그리고 난 그녀와 함께 공간이동 했다.

저 아래 지하철도, 침수된 선로를 향해서.

공간이동 하니 물에 잠긴 지하철과 철도가 눈에 들어왔다.

전철은 멈춰 있었고, 물에 반쯤 잠겨있었다.

그리고 전철 한 칸의 벽 일부가 예리한 칼로 잘린 것처럼 떼어져 있었는데, 그 뚫린 구멍에서 피 섞인 물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사람들의 죽음.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나는 백담비의 손을 놓고 저 앞으로 돌격했다.

지하철 안에 들어서니 물에 잠긴 사람의 시체 일곱이 보였다. 피는 그들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늦었다, 씨발.

그리고 저 사람들을 죽인 물의 정령이 보였다.

그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앞서 죽인 놈보다 훨씬 큰놈이란 것은 알아볼 수 없었다.

정령은 굳게 닫힌 열차칸 문을 뚫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 몸에서 분출된 물줄기가 이미 문을 절반쯤 잘라냈다······.

뒤이어 물의 정령이 날 본 것 같았다.

놈도 정령답게 이쪽이 각성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 또한 자신과 같은 사냥꾼이란 사실을 말이다.

"씨―"

내가 완전히 접근하기 전에 놈이 먼저 공격해왔다.

아무런 전조 없이 그 몸뚱이에서 발사된 물 한줄기.

내가 평소 총알에 대응하는 것은 일부러 총알의 속도에 대응하는 훈련을 해온 성과지 순수한 반응속도만으로 해내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분출된 물은 총알만큼 빠르진 않아도 충분히 빨랐기에, 내 반응속도로도 완벽히 피해내진 못했다.

차가운 물이 내 볼을 뚫고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신체강화자의 단단한 신체마저 관통하는 고압의 워터제트, 잘못 맞았다간 뇌가 뚫렸을 것이다.

위기감과 함께 분출된 아드레날린이 아릿한 통증을 무시하게 해줬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반격했다. 높이 든 망치를 내리치자 정령의 일부가 흩어졌다.

그러나 전부 흩어지진 않았다. 또한 이미 주변에 물이 흥건한 환경이라서일까, 놈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도 못했다.

물 정령이 손실된 신체를 복구해냈다. 주변에 넘쳐나는 물을 끌어당겨 순식간에 손실된 몸뚱이를 채워버리는 걸 보니 바로 판단이 섰다.

아, 이거 나 혼자선 못 죽일 놈이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데려온 내 라운드걸이 듣도록 외쳤다.

"담비 씨!"

백담비가 전력으로 능력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정확히 그녀의 능력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화염 정령을 처치할 때 본 눈보라의 규모가 상당했다.

이후로 화염 정령이며 암석 정령까지 함께 잡으며 놈들의 영혼을 흡수했을 테니, 지금은 그때보다 더욱 강해졌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능력으로 물 정령의 신체 일부를 동결시킬 수 있다면 그럭저럭 도움이 되리라 예상하여 여기 데려온 바였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힘을 쓴 결과는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상은 간단했다.

"어?"

순식간이었다. 주변의 물 전체가 얼어붙는 것은.

지하철 안, 내 무릎 아래까지 차올랐던 물이 모조리 얼어붙었다.

창문을 보니 열차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선로에 깔린 물마저 저 어둠 속 너머까지 얼어붙었다.

표면만 얼어붙은 게 아니라 깊숙이 얼어붙은 듯했다. 보통 사람의 네 배쯤 무게인 내가 스케이트를 타도 안전할 것 같았다.

내 앞에서 날뛰던 물의 정령도, 주변의 다른 물과 함께 얼었다.

물로 이루어진 몸뚱이 전체가 얼어붙었는데, 고정된 그 형상을 보니 원래 어떤 바다생물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원래는 두족류였을 것이다. 바다에서 헤엄치다가 저도 모르게 각성했으리라. 그 몸체에서 뻗어 나온 물의 촉수들을 보니 알 만했다.

아, 물론 이제는 얼음 촉수였다. 놈은 이제 얼음 정령이라 불러줘야 하겠고.

그리고 내 알기로, 얼음 정령은 정령 중에서 제일 처치하기 쉬운 부류다.

내가 망치를 내리치자 놈을 이룬 얼음들이 부서져 사방에 얼음 가루가 흩날렸다.

두 번 더 망치질하니 얼어버린 물의 정령은 완전히 형체를 잃고 흩어짐으로써 죽음을 맞이했다. 내 머릿속에 스며든 희열을 느끼며 그 사실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담비 씨? 능력 규모가 이 정도였으면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걸······"

말하면서 백담비를 돌아본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로선 쿨한 캐릭터답게 힘을 숨기고 있었느냐 핀잔하려던 것이었는데, 막상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컸던 눈을 더욱 크게 뜬 채,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백담비의 얼굴.

같이 일하면서 반년 넘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저 반응을 보니, 지금 백담비는 자신이 일으킨 현상을 보며 나보다 훨씬 더 놀란 것이 분명했다.

63화 A급 헌터 백담비 - [2]

백담비는 거의 삼십 초 가까이 멀거니 있었다. 자신이 일으킨 현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던 백담비가 비틀거렸다.

깜짝 놀란 내가 서둘러 움직였다. 내 다리가 얼음에 파묻혀 있었지만 힘으로 부수고서 그녀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괜찮아요?"

"예? 예······ 그냥 좀 어지럽네요. 왜 이러지······"

"능력 과하게 써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공간이동 남발하면 현기증 탓에 몸 가누기 어려워지는데."

"그럼 그 탓인가 보네요······"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빨리 명상해요."

"명상이요?"

"게이트 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었잖아요? 정령이니까 방금 쓰러뜨린 저놈 기억 흡수했을 텐데요. 흡수한 기억 중에서 게이트 여는 법이 있는지 살펴봐야······"

백담비는 내 말대로 했다. 내가 그녀를 물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자 그녀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아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물에 잠긴 지하철에 들어가 열차칸 문을 두드렸다.

"이제 안전합니다. 나오세요!"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는데, 문에 귀를 대보니 "절대 문 열면 안 돼. 정령이 사람 잡아먹으면 잠시 사람 말을 할 수 있대······" 하고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문 너머로 공간이동 했다. 잔뜩 겁먹은 채 움츠러든 생존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려는 듯하던 생존자들의 비장한 얼굴에 화색이 돌기는 순식간이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날 본 순간 그렇게 됐다.

"김극이다!"

내가 최대한 겸손하게 말하자면, 이제 인천에서 헌터 김극의 등장은 곧 생존 확정이란 의미로 통한다.

지금 저 생존자들도 내 등장과 함께 살았음을 깨달은 듯했다. 내게 몰려든 사람들이 온갖 질문을 던져댔다.

"건너편 정령은요?"

"잡았습니다."

"와!"

"아무튼 안전하니 다들 나오세요. 아, 건너편이 얼어붙었는데 얼음 아래에 시체가 여러 구 있거든요? 혹시라도 밟지 않게 유의하시고······"

그리하여 열차 칸에서 나온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뭔······?"

완전히 얼어붙은 지하철 선로를 보는 생존자들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방금 시체까지 봤겠다, 죽다 살아난 와중인데도 스마트폰으로 이 광경을 촬영하는 사람 또한 여럿이었다. 다들 이 광경을 얼마나 놀랍게 여기고 있는지 알 만했다.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강준치의 능력 행사를 직접 본 나마저도 지금 이 광경을 보며 현실감이 들지 않을 지경이니까.

역시 얼레기든 뭐든 각성자였다. 지상의 무엇보다 신에 가까운, 나약한 비각성자들을 통치하기 위해 태어난 위대한 족속 말이다.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나머지, 맘 같아선 내 라운드걸의 손목을 붙잡아 높이 들어서는 저들에게 이 모든 게 저 여자가 해낸 일이라고 소리 높여 광고하고 싶을 정도였다. 사람이 여럿 죽은 마당에 그러기는 어려운 일이라 아쉬울 뿐이었다.

사람들을 피신시킨 뒤, 나는 다시 백담비에게 돌아와 물었다.

"그래서, 게이트 여는 법은 알겠어요?"

백담비가 말을 흐렸다.

"아뇨. 모르겠는데······."

"그래요? 하기야 방금 그놈은 딱 봐도 지구 생물이 각성한 걸로 보이더라. 지구 출신이라 그놈도 게이트 여는 법을 몰랐나 본데요. 그래서 그 기억 흡수한들 수확이 없는 건가?"

짧은 대화를 마치고는 그녀와 함께 다시 헬기에 탑승했다.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마철이라 인천 여기저기가 난리였다.

또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중에 대화를 나눴다.

"아까 담비 씨도 자기가 저지른 짓에 놀라는 눈치던데. 최대출력으로 능력 써보신 적이 없어요?"

"작년에 한번 해봤어요. 그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럼 올해 칠 개월 동안 그리 세진 겁니까?"

"예, 아마······?"

"그게 말이 되나?"

"생각해 보니 말이 되는 것 같기도······ 아니, 충분히 가능한 일 같아요."

"어째서요?"

내 물음에 백담비가 대답했다.

"제가 삼 년 가까이 헌터로 일하면서 잡은 괴수들보다 올해에 이번 팀에서 처치한 괴수들이 수십 배는 많은걸요. 게다가 이 팀에서 정령 둘도 처치했으니까······ 김극 씨 덕분이니까 고맙다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기꺼이 그러세요."

"예, 정말 고맙······"

"아무튼 이제는 능력 활용해서 다른 괴수들도 사냥하실 수 있을까요? 수분 부족한 환경에선 여전히 어려우시려나?"

"비 오면 가능할지도······?"

"그럼 비 자주 오길 바라야겠네요? 아무튼 끝내주던데요, 정말! 이젠 얼음공주가 아니라 얼음퀸이라 불러드려야겠어. 엘사가 따로 없던데?"

내 칭송을 백담비는 말없이 듣고 있더니 은근슬쩍 선글라스를 다시 썼다. 그러는 의도를 알 만했다. 오갈 데 없는 제 시선을 가리고 싶은 모양이군.

하여간, 부끄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모양이다. 살짝 올라간 채 떨리는 그녀의 입꼬리를 보니 틀림없었다.

아예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칭송을 거듭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헬기가 또다시 목적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도 백담비의 손목을 붙잡은 채 공간이동 했다.

한 건물 옥상에서 지금 상황을 살폈다.

이곳도 침수지역이었다. 거리 전체에 물이 차오른 가운데, 거대한 해일이 한 도로를 휩쓸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일을 피해 달려 나가는 갈색 피부의 남자가 하나.

"응우옌 씨? 지금 열심히 일하고 계시네요?"

내가 무전기로 아는 척하자 무전기 너머에서 유창한 인천말이 들려왔다.

「내가 반드시 온다고 했잖아!」

저 아래, 물로 가득찬 길가에서 응우옌은 내가 참여한 작전에서는 자신 또한 열심히 일하겠다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보아하니 응우옌은 지금 생존자 구출 중이었는데, 저 거대한 해일을 피해 생존자 두 명을 등에 업고서 달리고 있었다. 종아리까지 물이 차올랐는데도 응우옌은 그 속도가 줄지 않고 놀라울 만치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가속 능력과 역장 외골격 능력의 조합은 과연 사기적이다. 해일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결국에는 생존자를 등에 업은 응우옌이 저 멀리 사라졌다.

그리하여 사냥감을 놓친 해일이 그 기세를 잃었다.

뒤이어 그 몸체가 물로 이루어진, 고대의 포식자 한 마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메갈로돈? 아니면 이름 모를 수장룡?

고대의 수중 포식자였던 어떤 거대한 생물이 정령이 된 듯 보였다. 수면 위로 큼지막한 지느러미 하나를 드러낸 채 헤엄치던 정령이 아무 이유 없이 물줄기를 내뿜어 전봇대 하나를 부쉈다.

저렇게 화풀이하는 걸 보아하니 분노한 듯했다. 기껏 사냥하러 지상까지 원정을 왔건만 방금 사냥감은 놓쳤겠다, 그 이외에도 마땅한 사냥감이 보이지 않아 화가 난 걸까?

하기야 물 정령들의 습격에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은 게이트가 열린 첫해에나 벌어진 일이다. 이후로는 다들 적응이 되었기에 이제는 척 보기에도 침수될 법한 지역에선 다들 피신하거나 고층 건물에 틀어박혀 위험을 피한다.

그래도 여전히 장마철이면 여럿 죽지만, 게이트가 열린 첫해만큼은 아니다.

내 옆에서 정령을 지켜보던 백담비가 문득 입을 열었다.

"보니까 저놈은 그냥 내버려 둬도 될 것 같네요? 딱히 인명피해도 못 일으킨 놈 같은데······"

보아하니 옳은 말이었다. 물 정령이든 화염 정령이든 처치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까다로워서 어지간하면 괜히 처치하려 들지 않고 내버려 두는 편이다. 게다가 저놈은 아까 지하철에서 본 정령보다도 훨씬 강력해 보였다······.

"그래도 잡아보죠?"

내가 말하자 백담비가 날 보았다.

"혹시, 저 게이트 열 수 있게 해주시려고요?"

"그래요. 저놈, 딱 봐도 지구 출신이 아닌 것 같잖아요? 직접 게이트 열고 소월에서 온 정령 같은데요. 저놈 잡으면 이번에야말로 게이트 열 수 있게 되실지도······"

내 설득에 백담비가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또다시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정령의 앞에 나타난 순간, 거대한 물 정령은 우리 두 각성자를 바로 위협적인 적으로 파악한 듯했다.

정령의 몸 곳곳에서 뻗어 나오는 물줄기들······.

방금 놈이 저 물줄기로 전봇대를 부수는 걸 봤겠다, 이번엔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우리가 공간이동 한 뒤, 방금 우리가 있던 곳에 십수 줄기 물줄기들이 지나가서는 창문 따윌 부쉈다.

그리고 우리는? 놈과 더욱 가까운 곳에 도달했다.

정령의 지느러미가 저 옆에 보이는, 물에 잠긴 승용차 지붕 위에.

곧이어 헤엄치던 정령이 우리 앞에 도달했다. 그 지느러미가 바로 앞에 보였다.

유리 파편이며 콘크리트 가루들이 휘날리는 가운데 내가 신호했다.

"지금!"

백담비가 곧바로 손을 뻗자 냉각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정령의 지느러미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능력을 너무 과하게 쓴 탓인지 이번엔 그때만큼 폭발적인 냉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그 냉기가 정령의 거대한 몸뚱이를 순식간에 얼리고 있었으니까.

정령은 위기를 직감한 듯했다. 반격마저 포기한 채 필사적으로 그녀에게서 벗어나려는 걸 보니.

그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디 가냐―!"

몸이 반쯤 얼어붙은 채 빠르게 헤엄치던 정령의 앞에 내가 공간이동 했다. 그러고는 망치를 크게 휘둘러 놈의 정면을 후려치자 정령의 머리통이 수많은 물방울로 나뉘어 흩어졌다.

그 일격에 정령이 죽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백담비의 냉기가 재결합되느라 일순 멈춰선 정령을 따라잡았으니까.

마침내 정령의 몸 전체에 냉기가 퍼졌다.

정확히, 흩어졌던 머리가 복구된 순간에 상어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나는 내 앞에 생겨난 작품을 감상했다.

거대한 고대 수중 포식자의 얼음 동상. 그야말로 장엄하고도 아름다웠다.

"와······!"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동상 앞에서 감탄 중인, 빙판 위의 내 라운드걸의 자태도······.

그녀를 보는 내 가슴이 콩닥거렸다. 사귀자고 대뜸 말하고픈 충동을 애써 참아야 했다.

내가 사실상 그녀의 상사가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입장상 위에 있는 내가 고백이라도 했다간 그녀에게 상당한 갈등과 스트레스를 안겨줄지 모른다는 사실만 아니었다면 진작 고백했을 텐데.

내 고백 실패가 팀에 균열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가능성만 아니었다면 진작 고백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감상에 오래 잠길 수는 없었다.

얼어붙은 정령을 끝장내기 위해, 나는 망치를 높이 들었다. 비 내리는 와중에도 미세한 햇살과 거대한 얼음의 광채로 말미암아 망치가 번뜩였다.

한편 저 위를 보니 방송국 헬기가 우리를 촬영 중이었다. 아마도 백담비의 이적 또한 촬영되었으리라.

더없이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망치를 내리쳤다.

몇 번의 망치질로 거대한 정령의 몸체가 조각났다. 마침내 정령이 죽음을 맞이한 순간 나는 머릿속에 밀려든 희열마저 참아낸 채 외쳤다.

"담비 씨, 명상! 빨리 명상!"

*******

이번 사냥의 성과로 백담비가 기어이 게이트를 열 수 있게 되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정령을 처치하고서 얻어낸 기억으로 그녀가 어떤 실마리를 잡아서는 한창 노력 중이란 것은 안다.

또한 지금 그녀가 몹시 뿌듯해하고 있으리란 것도 안다.

헌트웹을 보니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했듯 방송국 헬기에서 촬영된 영상이 헌트웹에도 올라왔다. 헌트웹 네임드 둘이 동시에 찍힌 데다 영상 자체가 놀라웠던지라 그 반응 또한 열렬하더라.

Ⓐ Dragon : 아이스 에이지 ㅎㄷㄷ

익명 : 얼레기라 불릴 수준이 아닌데? 빙정 능력자가 이 정도 능력 행사가 가능했으면 전 세계적으로 무시당할 이유가 없었지 않나

Ⓑ GoodHunter : 담비 씨가 이 정도일 줄은 매번 뵈면서 몰랐네요······!

이처럼 순수하게 그녀의 위업을 경탄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뜬금없이 내 얘기를 하는 놈들도 몇 있었다.

익명 : 저 가시나 저거 대체 김극 버스를 얼마나 야무지게 탄 거냐?

Ⓐ 엘마야캐요 : 생각해 보니까 김극 덕이 맞긴 하겠네. 김극 저 친구 출동 횟수 보면 3년 가까이 활동한 A급 헌터들보다 훨씬 많던데,

익명 : ?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됐던데 그게 어떻게 가능함?

Ⓐ 돌머리청년 : 김극햄이 헌트웹에서도 광인이지만 현실에서도 광인이라 인천에서 헌터들 부를 때마다 밤중에도 절대 안 빠지고 빠짐없이 출동해서 그래.

Ⓐ 돌머리청년 : 그 와중에 인천 탈환 프로젝트까지 따로 진행하며 괴수 학살했는데 백담비 저 아가씨도 안 빠지고 매번 끼었을 테니 옆에서 경험치 잔뜩 받아먹었을 것

난 그 댓글들을 보며 내 라운드걸이 맘 상했을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라온 댓글 하나가 지금 그녀의 기분이 어떤지 암시했다.

Ⓐ syberMagneto : 얼레기가 제법이네 ㅎ

보아하니 기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 귀여운 년이.

그런데 이 여자가 왜 게이트 열기 위한 수행은 안 하고 헌트웹이나 하고 자빠진 걸까. 전화를 걸어 추궁할까 싶다가 그만두었다.

어쩌면 이제 그녀는 굳이 게이트를 열 필요까진 없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보인 그녀의 위업은 제대로 된 A급 헌터로 쳐주기 충분하고도 남는 수준이었으니까. 어쩌면 인천시에서는 장마철을 대비해 그녀와의 계약연장을 추진할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내가 환각에서 본 백담비는 게이트를 열 능력이 있었는데도 좋지 못한 대우를 받은 나머지 결국 소월로 떠나지 않았던가? 그것을 보면 게이트를 열 수 있게 된다고 하여 무조건적으로 대우받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환각 속에서는 베헤모스가 이미 한국에서 멀어진 상황이라 게이트 내 상황을 살피는 게 급하지 않았던 걸지도······.

씩 웃으며 컴퓨터를 끈 뒤 잠들 준비하던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석장실이 말했다.

「김극 형? 헌트웹에 그 글 봤어요?」

"아, 담비 씨 글이요? 당연히 봤―"

「아니, 그거 말고! 직접 봐요!」

석장실이 그리 말하길래 나는 순순히 헌트웹을 다시 켰다.

그리고 헌트웹의 새로운 화제가 된 글을 보니, 나와 관련된 일임을 알 수 있었다.

Ⓐ 서울토바기 : 특무대에서 김석희 잡겠다고 나한테 협조하라는데 뭐냐?

이거 혹시 구급콜인가 뭔가냐? 구급콜 할 때 메일로 연락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그 아래로 댓글이 잔뜩 달렸다.

아무래도 저번에 발표된 법령이 시행된 것 같다며, 특무대에서 각성자를 동원하려는 모양이라고 사람들이 알려주었다.

곧바로 작성자가 분개했다.

Ⓐ 서울토바기 : 아니, 장난해? 나 정도면 헌터 활동하면서 누구한테 꿇릴 것 없이 돈값 제대로 해왔는데 왜 날 부려 먹으려 들어?

Ⓐ 한민족의얼은恨 : ;; 공문에 작전내용 외부 유출하지 말라고 안 적혀있습니까?

Ⓐ 서울토바기 : 찾아보니 있네. 그런데 내 알 바야?

Ⓐ 한민족의얼은恨 : 닉네임 보니 서울에서 활동하고 계신 A급 헌터 같으신데, 서울은 특무대 관할이니까 귀하 상대로 불이익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걱정되어 말씀드리는데 서둘러 이 글 지우시는 게 좋겠어요

Ⓐ 서울토바기 : ㄱㅊ 어차피 나 올해 9월이면 서울이랑 계약 종료임 ㅋ 이 년 가까이 헌터 노릇하면서 돈 벌 만큼 벌었겠다, 계약연장 할 생각 없으니까 어떤 불이익 주든 말든 안 무섭다

Ⓐ 서울토바기 : 이 씹새끼들이 말년병장을 부려 먹으려 들어? 부른다고 내가 말 듣나 봐라 씹새끼들

직감적으로 남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 메일을 확인해봤더니 과연, 특무대에서 온 메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김석희 소탕 작전, 어쩌고 적힌 메일이었다.

64화 말년병장 김요한 - [1]

오랜만에 여동생을 면회하러 갔더니 녀석이 이런 말을 했다.

"오빠, 나 여기서 꺼내주면 안 돼?"

갑자기 이게 뭔 소리인가.

"어떻게?"

"공간이동으로······. 포르쉐는 안 사줘도 되니까, 응?"

내 안면근육이 굳었다. 여동생은 자신을 탈옥시켜 달라 말하고 있었다.

곤란한 부탁이나 하고 자빠진 이기적인 년.

나는 입 밖으로 나올 뻔한 욕설을 겨우 삼켰다. 최대한 말을 골랐다.

"네가 무기징역이거나 사형이었으면 정말 꺼내줬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라서 탈옥까지 시켜주기엔 좀 애매하다. 너 형기 고작 일 년 하고도 몇 달 남지 않았냐?"

"그래도······"

"게다가 얼마 전에 또 감형받았다고 변호사가 말하던데. 나름대로 모범적으로 잘 지내는 모양이야. 그렇지?"

"그건 그냥 교도소에 사람 꽉 찼으니까 감방 비우려고 그러는 거야."

"뭐 어떠냐? 더 빨리 나오는 게 중요하지."

내가 웃어 보였지만 여동생은 웃지 않았다.

"오빠, 나 너무 힘들어."

여동생이 칭얼거렸고 난 깊게 한숨 쉬었다.

"그렇다고 내가 너 꺼내주면 뭘 어쩔 건데. 탈옥범으로 수배돼서 평생 숨어 살려고?"

"외국 가면 되잖아? 억울하게 수감 됐다고 망명 신청해서······."

또다시 입 밖으로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요즘 세상에 망명은 지랄.

감옥에 갇혀 지내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를 전혀 모르는 모양이지. 요즘 세상에 외국이라 해서 제 인권을 챙겨주리라 믿다니?

순진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 정도면 그저 답답할 뿐이다.

"얼음 능력자는 한국 포함해서 모든 나라가 이민 절대 안 받아줘. 외국 가도 평생 숨어 살아야 할 텐데, 일 년 하고도 몇 달을 못 참아서 인생 망칠 일 있냐?"

난 조금만 더 참으라고, 일 년 하고도 몇 달만 더 버티면 호화스러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말했지만 여동생이 설득된 것 같지는 않았다.

여동생은 제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날 원망하는 것이 분명했다.

면회를 마치고 떠나가는 내게 여동생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자기밖에 모르기는 똑같은 년이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은 다 잊었는지 자신을 완전무결한 피해자로 규정하는 년. 중학교도 몇 년 꿇었겠다, 감옥에서 또 몇 년 썩었으니 이젠 성인이 다 됐는데도 여전히 그 정신머리가 사춘기 중학생 수준인 년······.

나는 화나는 마음을 겨우 참고 생각했다.

녀석은 왜 그런 부탁을 했을까. 내가 십수 명을 폭행해놓고도 감옥에 가지 않았단 뉴스를 보고서 제 오빠가 법 위에 존재한다고 믿게 된 것일까?

그리 믿었다면 녀석의 생각이 틀렸다. 여동생을 고작 일 년 몇 달 일찍 감옥에서 나오게 하겠답시고 완전한 무법자로 낙인찍힐 생각은 내게 없다.

지금 생활이 지속되길 원하는 내게, 녀석의 부탁은 들어주기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다.

속이 답답하다.

내가 결국에는 나치들의 법에 갇힌 유대인에 불과하단 것을 실감하게 된다. 김석희와 깡패 새끼 몇 놈 때려놓고는 공권력을 상대로 승리했다며 자축했던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난 아직 법도, 사회도 벗어나지 못했다.

진정 벗어나려거든 더 강력해져야 한다. 강준치처럼, 법이고 뭐고 깡그리 무시할 수 있는 진정한 초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얼레기에 불과했던 내 라운드걸이 보여준 급격한 성장은 내게 희망을 준다.

지난 몇 달, 백담비가 각성자로서 대폭 성장했듯 나 역시 대폭 성장했다. 이대로 괴수를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앞으로도 쭉 그럴 수 있을 텐데······.

이 와중에 특무대에서 날 불렀단 사실은 날 더욱 화나게 한다.

사냥할 시간도 부족한 이 마당에 그딴 곳에서 날 부르다니?

울화통이 터진다. 정말이지 이대로 상황 흘러가는 걸 보아 넘기기 어려울 지경이다.

*******

내가 관용차에 탑승했을 때, 내 뒤에서는 여러 아줌마 아저씨들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김극 데려가지 마, 씹새끼들아!"

"놀고먹는 헌터도 아니고 김극 씨를 대체 왜 데려가!"

여기 모인 그들은 인천 시민들이다.

그들이 들고 온 시위용 피켓이 그들이 모인 이유를 알려준다.

'김극 특무대 소집 반대'

여기 인천 시민들은 내 특무대 소집에 항의하러 모였다.

당연히 그들은 화낼 만하다. 그들의 세금으로 고용된 나는 인천을 위해 일해야 마땅한데, 갑자기 서울의 특수부대에서 날 데려가 쓰겠다니?

나뿐만 아니라 인천 시민들에게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나야말로 인천에서 제일 바쁘고도 중요한 헌터 아닌가.

긴급 시에는 거의 언제나 내가 제일 먼저 출동하거니와, 난 평상시에도 인천 탈환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바쁜 몸이다.

그렇듯 매일 인천을 위해 일하는 내가 특무대에 며칠 끌려가는 것만으로도 인천엔 큰 손해인 셈이다. 내가 끌려가서 일하다가 크게 다치거나 죽어서 돌아오기라도 했다간 인천의 재앙임을 고려하면 더욱.

내 특무대 소집이 인터넷에 노출된 순간(내가 헌트웹에 은근슬쩍 그 사실을 암시했다) 인천 시청이며 사람들이 난리가 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인천 사람들의 항의를 특무대에서 반영해주진 않았다.

기어이 날 태운 관용차가 목적지에 이르렀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날 맞으러 온 특무대원이 인사했다. 칼 한 자루를 찬 젊은 남성이었다.

"김극 씨? 어휴, 실물이 더 무섭네. 반갑습니다!"

웬 비각성자 찌꺼기가 요원이랍시고 싸가지 없게 굴었다면 무시했으련만. 이 친구는 허리에 찬 칼만 봐도 각성자인 게 분명한 데다 싹싹하기까지 해서 막 대하기 어려웠다.

"예, 저도 반갑네요. 그쪽은?"

"특무대 신입 강준만······ 그보단 헌트웹 동지로 절 소개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스티스 1994 압니까?"

"어, 알죠. 그게 강준만 씨?"

"예! 저 맞습니다!"

아, 그렇다면 저 친구가 저리 친한 척할 만도 하다.

나와 같은 A배지의 소유자 아닌가. 헌트웹의 네임드.

Justice1994. 김석희의 갱단이 깽판을 치는 상황에 경찰들이 무기력하게 굴어 헌트웹의 모두가 아연할 때 저 친구가 등장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려는지 자신이 각성자 특채로 경찰에 들어갔다고 소개하더니, 지금 자신은 박봉에 불만을 품어 모든 의욕을 잃었다고 주장했지 아마.

당시 그가 말하길, 데스클로가 나타났다는 주민 신고를 받아도 자신은 대충 산책하고 돌아올 생각이 가득하다고 말했던가?

그 발언에 헌트웹의 모두가 격분한 나머지 저 친구의 신상을 캐낸 일이 있다.

그리하여 그가 어디서 활동하는 경찰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된 뒤에는 모두 저 친구를 동정하게 되었으니, 그가 사실 말만 그따위로 했을 뿐 실제로는 어지간한 헌터보다 더 많은 괴수를 처치해왔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소규모 괴수를 처치하는 것 또한 요새 경찰의 임무 중 하나인데, 저 친구의 경찰서에선 저 친구가 각성자란 이유로 모든 괴수 관련 출동을 저 친구에게 전담시켰다.

그리하여 저 친구는 겨우 월급 사백만 원 받으면서 수많은 괴수들을 목숨 걸고 사냥해야 했다고.

"헌트웹에선 경찰이라 하시더니 특무대로 소속 바꿨어요?"

내 물음에 강준만은 어색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사실 다 때려치우고 헌터나 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경찰 의무복무기간이 많이 남아서 그럴 순 없었고······ 얼마 전에 특무대로 소속 바꿀 수 있다 하더군요? 그리고 특무대 월급이 각성 특채 경찰의 세 배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다면 이 친구가 특무대 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셈이다.

난 그의 안내를 받으며 특무대원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다가 물었다.

"한희 씨는요?"

"오, 한희 아십니까? 그놈은 이번 임무에 안 끼었습니다."

"왜요? 그 친구 능력이 딱 봐도 엄청나던데."

"그래도요. 누구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임무잖습니까? 한희석 그 새끼가 자기 아들은 이런 임무에 투입 안 시킵니다."

"아들을 아껴서요?"

내 물음에 강준만이 코웃음 쳤다.

"글쎄요? 뭐 그럴지도 모르겠고. 그게 아니면 왕이 전쟁 일어나도 자기 지킬 최정예 근위대는 자기 옆에 남기는? 뭐 그런 이유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특무대에 박아넣은 제 심복이 다치거나 죽으면 안 된단 계산에 최대한 아껴두려는 것 같은······"

보아하니 자기네 지휘관인 특무대장을 존경하진 않나 보군. 이 친구에 대한 친근감이 더욱 커졌다.

"그래서 전 대체 왜 불렀답니까? 사냥만 다녀도 바빠죽겠는데."

"그야 뭐, 이번 작전이 특무대에 대단히 중요하니 부를 수 있는 최고 전력을 불렀다고 봐야겠죠? 김극 씨가 김석희 일당 다 때려눕힌 분 아닙니까. 사실 김극 씨 하나만 있어도 작전 성공이 보장되는 셈이니까······ 그리고 김극 씨가 외부에서 부르기 가장 적합한 인재란 판단도 있었답니다."

"제가 왜요?"

"글쎄요, 간부들은 김극 씨가 상당히 협조적일 분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간부란 놈들이 미쳤나?"

"그게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왜, 김극 씨가 구급콜 당했을 때도 경찰들이 부탁한 거 들어주고 나서야 왜 자기 불렀냐며 물어보셨다지 않습니까? 그때 경찰 요청에 순순히 협조해준 기록 보고 김극 씨가 상당히 협조적일 거라 판단한 걸지도······."

내가 그때 경찰들의 요청에 아무 저항 없이 응해주긴 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너무 피곤해서 복잡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던 데다 그 경찰들은 인천 경찰들이었으므로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며, 날 부른 것은 인천 사람이 아닌 서울의 비각성 찌꺼기였다.

그 차이는 크다, 정말로.

"그 판단이 틀렸단 걸 알려줘야겠네요."

내 반항적인 말에 강준만은 그다지 싫지 않은 눈치였다.

"마땅히 그러십쇼! 진심으로 기대할 테니······"

강준만은 씩 웃더니 내게 문득 물었다.

"그런데 김극 씨, 역시 불만 가득하신 모양입니다?"

"그럼 기분 좋겠어요?"

"하기야. 그런데 의욉니다? 불만 있으면 아예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소집 불응하면 벌금 내야 하잖아요."

"까짓거 벌금쯤 내실 줄 알았지요. 계약금만 오백억 넘게 받으신 분이잖습니까? 내년 계약은 훨씬 어마어마한 규모일 거라던데······"

강준만은 부러운 듯 그리 말했는데, 그 말이 옳았다.

난 아예 소집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러겠는가?

이번에 특무대에서 헌터들까지 소집하여 잡으려는 표적은 김석희다. 계양구 변경백이었던 그 친구 말이다.

소위 김석희 사건은 특무대에 이 말도 안 되는 권한이 주어진 계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김석희와 그놈 세력을 소탕하는 것은 특무대장으로선 대충 선거 공약쯤 되는 중요한 일이리라. 한희석은 경찰력으로도 손대지 못하던 각성자 갱단을 소탕하고는 특무대에 이런 권한이 주어진 게 옳은 일이었음을 증명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놈의 증명을 방해하고 싶다.

특무대에 어떤 권한이 주어지든, 감히 공권력이 각성자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이고 싶다.

게다가 김석희는 이제 부천의 남작으로, 내가 영지를 주어 내려보낸 내 봉신 아닌가. 인천 공작인 내가 그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충 그런 생각으로, 난 이번 작전을 방해하러 이곳에 왔다.

한희석은 날 부려 먹기 편한 전력이라 여겨 작전에 넣었겠지만 난 그 기대를 철저히 배반할 것이다.

당연히 작전 내내 태업할 것이요,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무언가도 할 맘이 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맘을 품고 온 듯한 각성자가 한 명 더.

"요한 씨, 헌터 라이플 어딨어요?"

특무대 여성의 질문에 한 중년 남성이 만사가 귀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거 안 가져왔는데 왜요."

"제가 전화했을 때 챙길 거 다 챙겼다면서요!"

"챙길 거 챙겨왔는데요. 여기 핸드폰 밧데리 세 개."

"아니, 작전 내내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시려고요?"

"그런데요."

저 중년 남성이 누구인지 알 만하다.

헌트웹 '서울토바기'가 틀림없다. 말년병장이나 다름없는 자길 불렀다간 절대로 말을 들어 먹지 않겠노라 헌트웹에 선언한 그 양반이다.

특무대 여성과 실랑이를 벌이던 서울토바기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더니 그 역시 씩 웃었다.

역시 같은 맘을 품은 동지로군. 확실했다.

65화 말년병장 김요한 - [2]

작전이 시작되기 전 잠시 웹서핑을 했다.

각성자 헌터들이 특무대에 동원되는 상황을 다들 어찌 생각하는지 알아봤더니, 일반인들의 반응은 헌트웹과 또 다른 것이 나를 분노케 했다.

각성자 헌터들이 이번 정책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본 다음 거기 달린 댓글들을 봤다.

Yok1974 : 남들 다 쫄쫄 굶는 중에 수십 수백억씩 버는 놈들이 나라에서 일 좀 시킨단 게 뭐 그리 서럽다고 불평불만들을 품고 있나?

ㄴ 돼지먹은지얼마나되지 : ㄹㅇ 각성자들한테 거액 주는 거야 국제 시세대로 안 쳐주면 딴 나라 갈 거니까 어쩔 수 없다 쳐도 그 돈 받았으면 최소한의 봉사는 해야지

ㄴ Yok1974 : 그 봉사마저 싫다고 저 지랄들인데 배가 부른 거지. 특권층 납셨어 아주

인천만세매일복창 : 그래서 김극 왜 데려가냐고 ㅅㅂ 그 양반 있어야 뭔 일 터졌을 때 제대로 대응이 되지, 김극 불려 나갔을 때 게이트 열리면 최소 수십 명은 더 죽는 건데 이게 말이 되냐?

ㄴ 마니산등산객 : 애초에 인천에서 고용한 헌터를 서울 특수부대에서 맘대로 데려가 쓰는 게 어이가 없네. 인천 동의도 없이 저러는 게 말이 되나?

ㄴ Dok : 인천 새끼들 헛소리하는 거 보소. 누가 보면 인천 세금으로만 김극 고용한 줄 알겠다? 인천 만년 재정 적자라 예산 없는 걸 정부에서 지원금 준 덕에 고용한 거니 당연히 정부에서 맘대로 빌려써도 되지 왜 그리 따져대

보아하니 내가 구급콜을 당했을 때와는 반응이 상당히 다르다.

그때는 불법이었지만 지금은 합법이라서일까? 헌터들을 부려 먹는 이 상황에 그러려니 하는 사람이 대충 절반이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이 반의반이다.

이 상황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이 없거니와 있더라도 댓글에서 조롱이나 당하고 있다.

그 반응들을 보니, 이미 화가 난 상태였음에도 열불이 더욱 솟구친다.

이 작전에 철저하게 태업하거나 아예 분탕을 쳐야겠다는 의욕이 더욱 커졌다.

*******

특무대원들과 외부인력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작전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특무대원 하나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예상보다 작전이 어려워졌습니다. 작전 시작하기 전부터 작전계획 누출시킨 어느 분 덕분에······ 그분께서 과가 있는 만큼 더욱 열심히 작전에 임해주시면 좋겠는데요. 과를 공으로 덮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헌트웹 서울토바기, 본명 김요한이 들으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정작 김요한은 스마트폰 만지기 바빠 브리핑에 관심도 주지 않는 중이었다.

"원래 김석희 일당은 부천의 위험지역, 즉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없는 장소에서 활동했지만 특무대에서 자기네를 잡아들이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다음에는 부천 원미구 상동 시가지에 숨어들었습니다. 사람들 많이 사는 곳에 섞인 탓에 여러모로 난항이······"

물론 이 와중에도 김요한은 스마트폰 삼매경이었다. 대체 뭘 하는 걸까, 모바일 게임이라도 하나?

내가 흘긋 보니 김요한은 헌트웹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메시지로 뭔가를 잔뜩 적고 있었는데, 그걸 보니 헌트웹 동지로서 친근감이 마구 샘솟았다.

그러나 작전 설명하던 특무대원이 보기엔 언짢았나 보다. 그가 빽 하고 소리 질렀다.

"요한 씨, 듣는 척이라도 좀 하세요!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시면 그냥 안 나오신 걸로 치고 돌려보낸 다음 벌금 물릴 겁니다!"

"내가 지금 예비군 훈련 뛰러 왔나? 강제 퇴소로 협박이나 당하고······."

김요한은 벌금 내기는 싫은 듯 순순히 스마트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대놓고 껄렁거리는 자세로, 그러니까 벽에 등을 기대고서 팔짱을 낀 채 천장을 올려다보기 시작한 김요한을 보니 작전이 시작된 후 내용을 물어본들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한창 말하다 말고 특무대원이 내게 질문했다.

"김극 헌터? 그 뭐냐, 정신적 그물망? 그걸 펼쳐서 일정 거리 내 사물을 포착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맞습니다. 그래서요?"

"그걸로 김석희 일당을 찾아줄 수 있겠습니까? 놈들 은신처가 어딘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김석희가 거기 있는지 확인만 해주시면······"

나는 아무런 고민 없이 즉답했다.

"힘들겠는데요. 그걸로 범위 내 사물 파악은 가능해도 사람 얼굴까지 구별할 정도는 아니라서."

"아, 그렇습니까? 그럼 그건 우리 요원들이 맡기로 하고······"

거짓말이었다. 정신적 그물망으로 사람 얼굴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집중하면 못할 것도 없다. 내게 집중씩이나 할 맘이 없을 뿐이다.

그리고 작전이 시작된 후, 불과 삼십 분 만에 김석희가 발견되었단 무전이 전파되었다.

특무대원이 내게 급히 말했다.

"이미 출동한 특무대원들이 현장에 있습니다! 김극 씨가 바로 공간이동으로 가주시면······"

"공간이동으로요? 그걸로 어떻게?"

"예? 여기 지도에 표시된 장소로 이동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지도에 뭐 공간이동 좌표라도 적혀있대요? 내가 여기 전에 와본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지도만 보고 공간이동을 합니까."

나는 답답하다는 듯 그리 말했는데, 특수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는 이래서 좋다. 내 능력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거짓말을 해도 구별할 방법이 저들에겐 없다.

특무대원이 당황한 가운데, 또다시 무전기가 울렸다.

한 특무대원이 상황 보고를 했다.

"김석희가 우리 대원들 접근을 눈치챘답니다! 대원들이 현장을 벗어나기 전에 김석희 놈이 먼저 덤벼들었다고······"

모두 긴장한 기색으로 무전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충돌의 결과를 알게 되었다.

"우리 각성자 대원 다섯 명 전부 쓰러졌답니다!"

"다섯 명이? 거기 김석희 한 명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나?"

"김석희 하나한테 전부 쓰러졌다고······"

특무대원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김요한이 실실 웃으며 한마디 했다.

"뭐 그리 놀라? 김석희 그 친구 엄청 세. 헌터 할 때도 괴수 잔뜩 때려잡으면서 승승장구하던 친군데, 괴수 한 마리 잡아본 적 없는 특무대 솜털들이 덤벼봤자······"

아, 나왔다. 헌트웹 유저 특유의 특무대 무시 발언이다.

헌터들은 괴수 사냥을 거듭하며 능력 활용에 익숙해지겠다, 괴수들을 쓰러뜨리고 나면 그 능력 또한 성장하므로 각성자 헌터들의 전투력은 특무대원 따위와 비교할 수도 없단 것이 헌트웹의 주장이다.

그것이 특무대원 듣기엔 거슬렸던 듯 그중 하나가 따졌다.

"그리 잘나셨으면 직접 나서서 뭔가 보여주시죠?"

"내가 왜?"

김요한이 또다시 실실거렸고 특무대원들의 얼굴엔 '이 새끼 대체 왜 데려온 거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로선 유감스럽게도 그게 바로 김요한이 유도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결국 특무대원들끼리 알아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당한 대원 중에 칼잽이 몇 명이었지?"

"하나요."

"이제부턴 칼잽이만 모아서 덮치게 해야겠군."

칼잽이가 대체 뭔가, 했더니 역장 날붙이 능력자를 말하는 듯했다. 잠시 후 현장으로 떠난 특무대원 모두가 칼을 차고 있었던 걸 보니.

나는 본부에 남은 강준만에게 물었다.

"특무대원 중에 역장 날붙이 능력자가 많네요? 역장 날붙이 능력자는 드문 편일 텐데······."

"신체강화자나 역장 외골격 능력자 위주로 대원을 뽑긴 하죠. 그런데 그렇게 뽑아놓고 일과 중에 상당한 시간을 검도 훈련 시키거든요."

"검도 훈련을요?"

"칼 휘두르는 게 역장 날붙이 능력의 각성 트리거잖습니까? 그러니까 추가로 능력 획득하게 하려고 훈련 시키는 겁니다. 보다시피 나름대로 성과가 있어서 역장 날붙이에 각성한 대원들이 일부 있고요."

그 말을 듣고서 난 꽤 놀랐다. 특무대 각성자들은 괴수 토벌에 동원되지 않는 대신 훈련에만 전념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구나.

특무대가 생각보다 살벌한 조직이란 생각 또한 들었다.

역장 날붙이를 얻기 위해 일부러 훈련한다니?

헌터 시장에서 역장 날붙이 능력은 딱히 고평가되는 능력이 아니다. 뭐든 베어 가르는 칼날을 얻어 제 체급을 뛰어넘는 강적을 상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 매력적이지만, 애초에 괴수들을 상대로 근접전을 벌이는 것 자체가 넌센스 아닌가.

각성자 헌터들의 주 무기는 칼이 아니라 헌터 라이플이다. 팀원들의 지원사격 속에서 헌터 라이플로 강력한 화력을 쏟아내어 강적을 잡아내는 것이 일반적인 A급 헌터들의 주된 전술이다.

만약 웬 각성자가 역장 날붙이를 휘두르겠답시고 저 홀로 돌격했다간 그 등에 총알이 박힐까 봐 팀원들이 지원사격도 제대로 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역장 날붙이 능력 하나만 달랑 있는 경우는 A급 헌터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요, 역장 날붙이 능력을 추가로 얻은 신체강화자의 경우에도 평소엔 헌터 라이플을 쏘다가 일부 상황에만 칼을 뽑아 휘두를 일이지 칼부터 냅다 휘둘러선 안 될 일이다. 가속 능력이라도 추가로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러다간 목숨이 여러 개라도 결국 죽고 만다.

그래서 각성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지만, 그들은 주로 신체강화자가 되기 위해 격투기를 하거나 다른 트리거 행동을 하지 검을 휘두르는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다.

이 와중에 굳이 역장 날붙이 능력을 얻기 위해 훈련할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같은 인간, 그중에서 각성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각성자들은 주로 건물 내부에 있을 것이며, 좁은 공간에서 싸울 때 근접 병기에 덧씌워진 역장 날붙이는 충분한 효용이 있을 것이다.

또한 쓰러뜨려야 할 각성자를 발견했을 경우, 행인인 척 그 옆을 지나가다가 역장 날붙이가 덧씌워진 나이프를 꺼내 푹 찌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각성자들을 상대하기 위한 조직이라더니, 그러기 위한 준비만은 철저한 듯했다.

내가 특무대원들을 하나둘씩 훑어보는 가운데, 또다시 무전이 울렸다.

「김석희가 헌터 라이플을 들고 저항합니다······ 진입했던 세 명 전부 당했습니다!」

"헌터 라이플에 맞았다고?"

그 보고에 특무대원들이 기겁했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중화기에 당했단 소리니까. 그렇다면 다들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이 마당에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아까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 아파트 내부에 이동했다.

헌터 라이플을 든 김석희, 그리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특무대원 셋이 내 눈에 담겼다.

특무대원들은 다들 신체강화자 아니면 역장 외골격 능력자라, 기관포탄에 맞았다고 해서 곧바로 그 몸뚱이가 조각난 상태는 아니었다. 한 명의 다리 한 짝이 통째로 날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살아 있었다.

"김극?"

날 보고 김석희가 눈을 부릅떴지만 나는 내 할 일부터 했다.

피 흘리는 특무대원들을 붙잡고서 공간이동 했다.

그들을 병원에 옮겼다. 큰 병원인 만큼 치유 능력자가 있을 테니 다들 살아남을 것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공간이동 하여 방금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역시나 김석희가 거기 있었다. 뒤늦게 내가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부천 남작."

김석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미친 새끼가. 내 조직 조져놓더니 이젠 아예 나 잡으러 왔냐?"

"그게 아니라······"

내 말을 끊고 김석희가 입을 열었다.

"그때 나 보고 헌터 라이플 들라고 했나? 자, 바라는 대로 지금 들었다. 너무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쏴 죽여줄게, 씹새끼야."

그리고 김석희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너 잡으러 온 거 아니다."

"그럼 담소하러 왔냐?"

"아니, 너 도망치는 거 도와주러."

내 말에 김석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멀리 공간이동 시켜주겠다고. 지금 아파트 입구에 특무대원들 있을까 봐 못 벗어나는 거지? 최대한 먼 곳으로 피신시켜 줄게. 그런데 역장 덮고 있으면 함께 공간이동이 안 되거든? 역장 외골격 잠시 해제해봐라."

이 고마운 제안에 바로 승낙의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김석희는 대뜸 헌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기진 않았지만, 날 향한 총구 방향을 바꾸지도 않은 채 말했다.

"싸물어. 싸울 맘 없으면 꺼져."

"내 말 못 믿겠냐? 내가 지금 수작 부리는 거 같아?"

"어. 못 믿겠고 애초에 믿어도 네 도움 받을 생각 없다."

"왜, 나한테 처맞아놓고 도움받긴 좆같아서?"

김석희의 표정이 일그러졌을 뿐,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사실인 듯했다.

내가 계속 따져 물었다.

"멍청한 새끼야. 넌 왜 자꾸 그따위로 자존심을 챙기려 드냐? 내가 그거 다 쓸데없다고 말 안 했냐?"

"지랄하고 자빠졌네."

"야, 새끼야!"

"가오를 안 챙길 거면 대체 왜 사냐?"

66화 말년병장 김요한 - [3]

그 말을 듣고서 나는 김석희를 피신시키길 빠르게 포기했다.

비장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설득하기 쉽지 않아 보였거니와, 애초에 설득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언제 다른 특무대원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상황 아닌가.

"그래, 혼자서 잘 해봐라. 절대 잡히지 말고, 응?"

결국 나 혼자 작전본부에 돌아오니, 특무대원 하나가 날 붙잡고 말했다.

"보고 받았습니다. 중상 입은 특무대원들 병원으로 옮겨주셨다면서요? 덕분에 세 명 살았는데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

"예. 기꺼이 감사하세요."

난 흡족한 맘으로 대답했지만, 그는 날 치하하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도만 보고선 공간이동 못 한다고 말씀하셨으면서. 방금은 대체 어떻게······?"

"아, 그게 사람들이 쓰러지는 게 그물망에 포착되더라고요? 그 장소로 이동한 거라······"

내가 변명했지만 통하지 않은 것 같았다. 특무대원은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덩치 큰 특무대원 하나는 아예 화를 냈다.

"야, 이 씨발 새끼야! 너 지금 장난쳐? 똑바로 말 안 해?"

그리 화내는 놈은 우락부락한 덩치였다.

딱 봐도 상당히 강력한 신체강화자로 보였다. 특무대에 은퇴한 헌터 출신도 몇 있다더니 그중 하나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편 나는 변명하길 포기했다. 당당하게 선언했을 뿐이다.

"난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씹새끼가!"

놈이 내 멱살을 잡으려 들길래 내가 그 손목을 붙잡았다. 그랬더니 놈은 아예 울컥했나 보다.

놈이 주먹을 뻗었다. 내 안면을 강타하려던 그 주먹을 머리만 살짝 젖혀 피한 뒤, 난 이미 잡고 있던 놈의 손목을 잡아당겨 놈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그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한 방이면 충분했다. 놈이 부들거리더니 쓰러졌다.

좌중에 정적이 흘렀다. 난 당황한 척 물었다.

"아, 반사적으로 그만. 이 친구 초재생능력 있어요? 없다고? 그럼 이 친구도 병원 데려다주고 오지요."

그 말대로 쓰러진 특무대원을 병원에 옮기며 난 웃었다. 이로써 특무대원 한 명을 더 제거했으니, 김석희에게 소소한 도움이 됐길 바랄 뿐이다.

작전본부에 돌아오니 또다시 김요한이 특무대 모두를 비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깝친대? 헌터 중에서도 대빵급인 김극이 좆으로 보이나. 순 좆밥들만 모여선······"

작전이 잘 진행되지 않는 중에 외부인력들의 태도는 이 모양이니, 분위기는 당연히도 흉흉했다.

난 이제 특무대에서 나한테 당장 꺼지라고 말하거나 고소하겠다는 협박이라도 해올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그들이 정말 그러지는 않았다.

이후로도 중상자가 발생하면 내가 바로 공간이동 하여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게 병원으로 옮겨주었는데, 그 도움이 당장엔 중요하게 여겨진 모양이다.

덕분에 난 쫓겨나지 않았고, 계속 특무대원들의 대화와 무전을 엿들으며 작전을 방해할 수 있었다.

작전을 어찌 방해했느냐면, 이런 식이었다.

헌트웹을 통해 김석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현재 상황을 전해주고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주기 위한 메시지였다.

Ⓐ BabyBerserker : 이번에는 역장 외골격에 역장 날붙이 능력 가진 옵바야 다섯이 김석희 언니야 있는 곳으로 간대양! 그리고 이번엔 누구 다쳐서 쓰러지더라도 나머지가 전부 돌격하기로 했어양!

좁은 공간에서 싸우면 헌터 라이플이 있어도 칼잡이들 상대로 한 우위가 줄어들어양.

그러니까 당장 그 장소 벗어나세양! 탁 트인 장소여야 싸울 만할 거예양!

헌트웹은 서버가 해외에 있어서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보다 안전하리란 판단에 그리 메시지를 보냈는데, 과연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급한 와중에 김석희가 헌트웹 메시지를 확인할지 의문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조마조마한 맘으로 계속 메시지를 보내던 중이었다.

등 뒤에서 난 목소리에 난 흠칫했다.

"적과 내통을 하시다니, 이럴 수가······"

뜨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더니 김요한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난 안심했다.

"······나 같은 분이 또 있었을 줄이야?"

김요한이 자기 스마트폰 화면을 내게 보여주었고 난 눈을 크게 떴다.

놀랍게도 김요한 역시 나와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작전내용을 김석희에게 헌트웹 메시지로 전달하는 일 말이다.

Ⓐ 서울토바기 : 역장 날붙이 능력자 다섯 명 추가로 감

Ⓐ 서울토바기 : 전원 역장 외골격 능력자. 앞으로 7분 뒤 도착할 것 같다니까 준비해라

누가 신호를 주거나 시키지도 않았건만, 내가 하이파이브 하기 위해 손을 들었을 때 김요한 역시 손을 들었다.

서로 마주친 손뼉이 짝,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우리 둘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

이후로는 작전본부 자체가 이동했다. 날 포함한 모두가 현장으로 향했기에 나는 김석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저 위에서는 아파트 숲에서의 추격전이 한창이었다.

김석희가 우리 조언을 귀담아들었던 모양이다. 김석희는 내가 지시한 대로, 아파트 안에 남아있는 게 아니라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왔다.

아파트 옥상에서 김석희와 특무대원들이 전투했다. 그들은 아파트 옥상 사이를 뛰어넘고 또 뛰어넘으며 싸웠다.

내가 처음 만난 데스클로 역장체가 도약 한 번에 공중을 날고 있던 헬기에 닿았듯,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의 도약력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와중에 신체강화자이기까지 한 김석희의 도약력은 더욱 뛰어났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특무대원들을 상대로 거리를 잘도 벌려가며 그들을 농락하는 것이 보였다.

"아아악!"

아, 아파트 사이를 뛰어넘으려던 특무대원 하나가 김석희의 헌터 라이플에 맞았다.

그 기관포탄에 특무대원의 역장이 바로 깨지진 않았지만, 옥상 사이를 뛰어넘으려다 말고 그가 추락해버렸다. 그가 바닥에 충돌하기 전 내가 공간이동으로 붙잡아 주었기에 그는 살아남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공헌했으니 작전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날 추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덕분에 난 계속 편안한 마음으로 김요한과 함께 상황을 구경하며 잡담까지 할 수 있었다.

"제 이름은 아까 들었죠? 김요한입니다. 어휴, 김극 씨. 유명한 분을 다 뵙네."

"예, 요한 씨. 저도 반갑고요. 헌트웹 꽤 오래 안 하시다가 최근에 다시 활동하시는 것 같던데 절 아시는 눈치네요?"

"그야 헌트웹을 안 하더라도 모를 수가 없는 분이니까 그렇죠? 김극 씨가 요새 업계에서 거의 전설이던데."

"전설이고 뭐고 결국 정부에 잡혀 온 노예네요."

내가 신세타령했더니 김요한이 호응했다.

"저도 이번 작전 불려와서 너무 좆같아요."

"하기야 그쪽도 시간 낭비 같아서 너무 화나죠?"

내가 그리 물었더니 김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시간 낭비라서 화나는 건 아니고요. 돈은 그럭저럭 주긴 주니까 사실 용돈벌이 수준은 되는데······ 애초에 작전 자체가 좆같잖아요?"

"아, 김석희랑 친하셨나? 그래서 그 친구 붙잡으려는 게 싫은 겁니까?"

"그게 아니라······ 보세요. 특무대원 중에 순 칼잽이들만 잔뜩 데려왔는데 그것만 봐도 살의가 가득하잖아?"

난 칼 한 자루씩 차고 온 특무대원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요한이 말했다.

"저한테는 헌터 라이플 들고 오라던데 미친 거죠. 대체 그걸 왜 가져오래? 그걸로 김석희 쏴 죽이란 건가? 하여간 작전 시작하기 전부터 살기등등했던 게 맘에 안 들어요. 처음부터 제압 따윈 생각도 안 한 것 같잖아요? 게다가······"

"게다가?"

"우리 자칫하면 헌트웹에서 역적 될걸요? 보세요."

김석희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그걸 보니 헌트웹의 한 글이었다.

Ⓐ Dragon : 이번 김석희 소탕 작전 무조건 실패해야 하는데······ 보아하니 성공할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하다

익명 : 성공할까 봐 왜 불안함? 너도 각성자 범죄자라서 잡힐까 봐 무서움?

Ⓐ Dragon : 그게 아니라 헌터 동원해서 작전 성공시킨 사례 생기면 다 좆될 거 아니야? 딱 봐도 특무대에서 공들인 작전일 테니 각성자 인력도 잔뜩 동원될 테고, 일찍이 김석희 패거리 혼자 싹 때려잡은 김극도 참여한다니 이번 작전 성공할 것 같은데 그랬다간······?

Ⓐ 엘마야캐요 : 하기야 이번 작전 성공하면 언론에서 특무대 성공, 외부인력 동원 성과 어쩌고 하면서 앞으로 각성자들 막 부려다 쓰겠네? 진짜 성공하면 큰일 나겠구먼······.

그것을 보며 나는 새삼 긴장했다. 대한민국의 역적이 될 수는 있어도 헌트웹의 역적이 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김요한이 말했다.

"저부터 헌트웹에 김극 씨가 태업했다고 잘 말해줄 테니 김극 씨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욕 안 먹게 우리 둘 다 노골적으로 태업했다고 헌트웹에 똑똑히 적읍시다, 알겠죠?"

"물론 기꺼이······ 아, 또 누구 다쳤다네요. 병원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고생하세요."

그런 식으로 사이좋게 잡담하거나 특무대원 누군가가 중상을 입으면 바로 병원에 데려다주는 식으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내가 이 작전에 참여하길 꺼린다는 걸 알아채서일까, 아니면 외부인력인 내가 헌터 라이플에 맞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어서일까? 어떤 이유에서건 특무대에서 나한테 직접 김석희를 제압하라 요구하지는 않았기에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한 남자가 관용차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한 마리 표범 같은 남자였다. 근육질 몸인데도 날렵해 보였다.

차에서 내린 그에게 여기 모인 특무대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김요한도 그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아, 박주헌? 저 새끼가 나서는 건 큰일인데."

"왜요, 유명한 사람인가?"

"그럭저럭요? 전직 헌터예요, 저 새끼. 이미 벌 만큼 벌었으니 헌터 은퇴해놓고 아예 놀긴 뭐하다며 특무대 들어간 친군데······ 씁, 역장 외골격 하나로도 더럽게 세던 친구가 칼까지 찬 거 보니 역장 날붙이도 새로 각성했나 본데요?"

곧이어 박주헌이 헬기에 탑승했다. 그를 태운 헬기가 싸움이 벌어지는 아파트 위로 상승하더니, 헬기가 멈췄다.

그리고 박주헌이 헬기에서 떨어져 내렸다. 아마도 역장 외골격의 단단함을 믿은 듯, 낙하산도 펼치지 않고서 맨몸으로······.

박주헌이 옥상에 안착하자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 굉음이 났다. 그러나 박주헌은 상처 하나 없을 터였다.

벌떡 일어난 그가 칼을 들고 김석희에게 달려드는 것이 멀리서도 내 눈에 보였다.

그로부터 약 오 분 후, 결착이 났다.

한쪽 발목이 잘린 김석희가 비명 지르다가 이내 양손을 들고 무릎을 꿇었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제스처였다. 항복.

「김석희가 제압됐습니다!」

그 소식에 나도, 김요한도 한탄했다.

"저 멍청한 새끼. 그러니까 내가 공간이동 시켜주겠다고 할 때 넙죽 받아들였어야지 괜히 고집을 부려선······"

"아, 김석희 걔가 그걸 거절했어요?"

"예. 가오 챙긴다고 꺼지라던데요?"

내 말에 김요한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자업자득이니 우리가 뭘 더 해줄 수는 없겠습니다."

그렇듯 김요한은 포기한 듯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더 도울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정신적 그물망을 펼친 채, 상황을 계속해서 살피던 중이었다.

김석희가 무릎 꿇은 가운데, 특무대원들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난 이대로 특무대원들이 김석희를 포박하리라 예상했다. 그러고는 헬기에 태워 병원에서 치료받게 한 다음 재판을 받게 하리라고. 그게 절차니까 말이다.

그러나 내 예상이 틀렸다. 김석희의 주변에 모여든 특무대원들은 김석희를 완전히 둘러쌌다.

그리고 수갑을 꺼내 드는 게 아니라······.

특무대원들이 일제히 칼끝을 김석희에게 겨누더니, 그것을 김석희의 몸에 찌르려 할 때 나는 공간이동 했다.

그때 한 명은 제 칼을 김석희의 목에 꽂아 넣기 직전이었다.

나는 놈의 목을 붙잡아서는 저 앞으로 휙 던져버린 다음, 김석희를 잡아 저 뒤로 세게 던졌다.

"김극?"

특무대원들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김석희를 보았다. 그는 아직 역장 외골격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함께 공간이동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김석희를 지키고 섰다. 그리고 특무대원들에게 따졌다.

"이미 항복했잖아요. 항복했는데 왜 죽이려는 겁니까?"

그리고 특무대원 하나가 대답했다.

"김석희 이 새끼, 신체강화에 역장 외골격 더블이잖아요. 수갑 채운다고 제대로 포박이 되겠습니까? 감옥에 가두면 뭐 얌전히 있겠고요? 보나 마나 맨주먹으로 벽 부수고 탈출하겠지."

"그래서, 기껏 제압해서 어디 가두려 해도 불가능할 테니까 아예 숨통 끊어버리겠다?"

"뭐, 어쩔 수 없이······"

특무대원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내가 물었다.

"통제하기 어려운 각성자는 항복하더라도 안 받아주고 죽여도 된단 법이 있습니까?"

"글쎄요, 저흰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 잘······ 찾아보면 뭐 관련법 있지 않을까요?"

"내가 각성자 인권단체 몇 년이나 활동해서 잘 아는데, 그런 법 절대 없는데. 그런 법이 있으면 박미형 아줌마가 그거 트집 안 잡고 내버려 뒀을 리가 없거든? 힘세고 잘 나가는 각성자들도 각성자 탄압 문제에 관심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소재니까."

그리고 특무대원 박주헌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내게 물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요?"

"왜 법을 초월해서 이 새낄 죽이려 드냐구? 나도 이 새끼랑 이 새끼 패거리 상대할 때 주먹이나 실컷 휘둘렀지 누구 죽이지는 않았는데 그쪽은 선을 넘네."

"그쪽은 법 잘 지키는 것처럼 말하시네."

"법 집행하러 온 쪽에서 할 말인가?"

박주헌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물었다.

"김극 씨, 초재생능력 있나?"

"있는데 왜. 칼 들고 덤비려구?"

박주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좌우로 꺾더니 그가 말했다.

"그렇담 사지 썰어도 별문제 없겠네. 아까부터 다들 그쪽 좆같아 하던데 잘 됐다. 우리 한판 뜹시다."

67화 말년병장 김요한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