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얼레기들 - [4]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꾼들은 해산했다.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닌 것이, 그들은 날 상대로 강하게 나올 수 없었다. 시위하러 나왔다는 사람들이 내게 그토록 저자세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폭력 전과 생긴 일을 인터뷰에서 자랑스레 떠벌리는 피투성이 신체강화자한테 다들 겁먹었단 것은 그들이 내게 강하게 나서지 못한 이유 중 두 번째에 불과하리라.
"그 사람들, 제가 이 근처 작전 취소하겠다고 협박할까 봐 겁먹고 물러난 거겠죠?"
내 물음에 박미형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하여간 간악한 서울 첩자들이······"
내가 중얼거리자니 박미형 씨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미워하진 마요. 불쌍한 사람들이야."
그치들이 뭐가 불쌍하냐는 시선으로 쳐다봤더니 박미형 씨가 혀를 찼다.
"애초에 정부에서 시내 한복판에 떡 하니 수용시설을 만든 게 문제예요. 딴 지역 각성자 수용시설들은 최대한 거주지랑 거리 있는 곳에 세웠거든? 그런데 인천에만 유독 시가지 한복판에 세웠잖아."
"여기 주민들이 괴수 문제 때문에 죄다 떠나있으니까 그런 거겠죠?"
"그렇죠. 어차피 주변에 아무도 안 사니까 주민 눈치 볼 필요 없단 이유로 정부에서 대뜸 각성자 수용시설 여기에 세워버린 거야. 나도 건물주라 그 사람들 입장 공감할 수 있는데, 이 주변 건물주들은 지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일걸?"
박미형 씨가 부연하길, 요즘 세상에는 땅 주인에 건물주라고 다 부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미 부자인 사람들이 더 부자가 되기 위해 시위하러 나온 게 아니라고, 거지꼴인 사람들이 거지꼴 좀 면해보고자 나온 것에 불과하다고.
나는 마음속에서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다시금 인천 시민권을 돌려주며 말했다.
"아무튼 또 이런 일 있으면 바로 저 불러요. 일하는 상황 아니면 최대한 빠르게 공간이동 하든 택시 타든 해서 올 테니까."
"아니, 김극 씨. 사람 어떻게 보고 그런 부탁을 하라고 해? 나 양심 있어요. 오늘 한 번 나와준 것도 너무 미안해 죽겠는데······"
"이게 무슨 남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해요? 얼음 능력자 관련이면 내 여동생 관련 일이니까 곧 내 일이지."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곧 내 일이라 느끼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도무지 남 일 같지 않았다.
하지만 박미형 씨에게는 괜히 하는 말로 들린 모양이다.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하여간 김극 씨는 사람이 너무 좋아. 저번에는 양태규 씨한테 이억사천이나 빌려줬다매? 나만 해도 도움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 자꾸 도움받는 건 미안해서 못 해요."
"미안하든 말든 또 이런 일 있으면 불러요, 응?"
내가 몇 번이고 당부하자 박미형 씨가 한숨 쉬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고······ 당분간 이곳에서 게이트 열리지 말라고 냉수 떠 놓고 기도나 해야겠어요."
"게이트 열렸다간 이 시설 탓에 열린 거라고 시위꾼들이 또 목소리 높일까 봐요?"
"그렇죠. 하지만 또 게이트 열린다면 이 근처에 열릴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
그리고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 법이었다.
다음 날, 인천에 게이트가 열렸다. 인천 각성자 수용시설과 삼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
이번에도 휴대전화가 요동쳤다. 전용 앱에서, 문자에서, 카톡에서 헌터들을 부르고 있었다.
"모두 차량 탑승! 모두 차량 탑승!"
만월산에서 작전을 진행하던 우리 헌터들은 그대로 출동했다.
해당 지역과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우리 팀도 따로 헬기를 타지는 않았다. 관용차를 타고서 우리 팀이 출발했다.
그리고 이동 중에 답답함을 느낀 내가 말했다.
"나 먼저 간다? 도착하면 위치 말해라."
성문영이 또다시 뜨악했다.
"또 형 혼자서 가게요?"
난 대답하지 않고 공간이동 했다.
아무 위치로나 대뜸 이동한 게 아니라, 내가 필요할 상황과 위치에 나타났다.
한 상가 건물 3층. 창문을 깨고 건물에 진입하려는 데스클로를 상대로 한 아저씨가 한 자루 대걸레에 의지해 사투를 벌이던 중이었다.
데스클로를 밀쳐내려던 대걸레 자루가 놈의 갈고리발톱에 싹둑 잘려 버린 뒤, 기어이 데스클로가 건물 안에 발을 디뎠다.
아저씨가 비명 지르던 순간에 나타난 내가 망치를 내리쳐 놈을 짓이겼다.
그러고도 아저씨는 이 초나 더 비명 지르다가 겨우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그가 피떡이 되어버린 데스클로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날 향한 그 눈이 크게 뜨였다.
"김극 헌터?"
"인천 만세."
예전에는 이 승리의 주문을 외워도 호응이 시원찮았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살아났다는 사실에 비로소 신이 난 듯 아저씨가 히죽 웃더니, 주먹을 불끈 쥐며 마주 외쳐주었다.
"인천 만세!"
나도 그에게 씩 웃어준 뒤 도로 위로 공간이동 했다. 이번에도 적절한 위치에 이동한 바였다.
나는 헌터 라이플을 들어 저 멀리 고층 건물을 기어가던 데스클로 한 마리를 쏴 맞혔다.
내친김에 도로에서 달리던 데스클로도 쏘려다 말았다. 놈을 노리는 또 다른 헌터가 있었으니까.
'탕!' 총성이 울리더니 질주하던 데스클로가 땅을 구르며 피를 흘렸다.
쓰러진 괴수의 시체를 지나쳐 은빛 바이크 한 대가 저 앞으로 내달렸다.
어설프게 기사 코스프레한 남자, 나이토 상이었다. 저놈도 팀원들을 버리고 저 홀로 부리나케 달려온 모양이지.
자기가 무슨 용기병이라도 되는 듯 바이크 위에서 샷건을 쏘는 폼이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그 바이크 오디오에서는 중세에 연주됐을 법한 군악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실력 외로도 왜 인기가 저리 많은지 알 만했다.
물론 비각성자 주제에 삐까번쩍한 바이크 좀 탔답시고 나보다 더 활약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무전 따윈 기다리지 않은 채 정신적 그물망을 퍼뜨렸다.
그러고는 그물망에 포착된 상황을 파악하여 이동한바, 나는 오 분 만에 다섯 마리 데스클로를 연달아 처치했으며 죽을 뻔했던 인천 시민 두 명을 더 살려냈다.
"김극 헌터, 인천 와줘서 진짜로 고마워요! 세금 낸 보람 이 정도로 크게 느낀 적 처음이야!"
"나 인천 오라 꼬드긴 박미형 시의원님한테 고마워해요. 그분 다음 선거 나오시면 한 표 꼭 주시고······"
"네, 언제 만나면 김극 씨 세뇌해줘서 고맙다고 할게요!"
파악하건대 위험한 상황은 종료된 것 같아서 구해낸 사람들과 잡담이나 주고받던 중이었다.
긴급한 무전이 걸려왔다.
한동안 무전기 너머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은 끝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니까, 게이트에서 이계인들이 나온 것 같다구요?"
「예! 혹시 가능하면 생포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러다가 다칠 것 같으면 괜히 시도하지 마시구요!」
무전으로 계속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계인이란 말이 들린 순간 나는 내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난번에 본 환상을 떠올렸고 환상 속에서 이계인들에게 꼴사납게 패배한 나를 떠올렸다.
긴장감에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공들여 심호흡하던 중에 내 헌터팀이 도착했다.
"형! 방금 무전 들었어요? 이계인이라는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문영은 신난 눈치였다. 나는 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평소처럼 무표정해 보이는 백담비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본 순간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망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몇몇 사람들은 게이트에서 쏟아져나오는 괴물들이 게이트 내부에서 나고 자란 줄 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게이트는 일종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불과하다.
게이트 너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으며, 괴수들은 바로 그 또 다른 세상 출신이다.
소드 월드(Sword World).
게이트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정보를 믿지 못한 어느 미국 정치인에 의한 작명이다. 그가 '게이트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니? 판타지 세계쯤 되나 본데, 그럼 대충 검과 마법의 세계일 테니까 소드 월드라고 불러야 하나?' 하고 비아냥거렸던 것이 너무 유명해져서 곧 그 세계를 부르는 명칭이 돼버렸다던가?
그리고 소드 월드의 특징은 간단하다. 황량함.
소드 월드 사람들은 북한인들보다 가난하고, 북한인들보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며, 심지어 지도자 계층마저 그렇다고 한다.
또한 게이트 너머의 괴수들이 우리 세계의 비옥함에 환장하여 달려들 듯, 이계인들도 우리 문물에 환장하여 달려든다.
처음 게이트에서 이계인들이 나왔을 때, 그들은 대화를 시도하거나 외교사절을 보내는 대신 망설임 없이 우리를 공격했다.
그리고 맨 처음 이계인들에게 공격당한 곳은 청와대도 국회의사당도 아닌 동네 철물점이었다.
왜 그런 곳을 습격했는지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그들에게 철물이 귀했기 때문이다. 습격했던 이계인 중에 딱 한 명 붙잡아서는 어찌어찌 의사소통에 성공한 뒤에 확인한 사실이다.
지구 역시 전근대 이전에는 철이 생각보다 귀한 물건이라 철제 농기구마저 값싸지 않았다던데, 저 세계에서는 기술도 자원도 부족해서 철물 귀하기가 우리 세상의 전근대 이상이라고.
그런 이유로 이계인들은 그다음에도 철물점을 습격했고, 그다음에는 철물점과 정육점을 습격했으며, 이후로는 쌀가게나 대형마트 따위도 습격하여 철물과 식량 따윌 약탈했다.
한국 정부로선 그깟 철물이며 식량 따윈 거저 줄 테니까 이야기 좀 하자고 시도해봤지만 이계인들에게는 들어 먹히질 않았다. 이계인들은 협상의 개념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이쪽에서 대화를 시도할 때마다 인명피해만 일어나기 일쑤라던가.
그래도 한국 정부로서는 아직 저들과 대화하길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다.
그래서 요새는 포로라도 잡아 대화하려 시도 중이라, 저들을 생포하면 보상이 있다.
"이계인 하나 생포할 때마다 최소 십억 맞죠? 나라에서가 아니라 국제단체에서 그 상금 준다던데!"
"맞아요. 소월인 포로를 잡아야 소월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
소월, 소월인······. 무슨 중국 소수민족 이름 같지만 소드월드와 소드월드인의 줄임말이다.
사 년 동안 뉴스에서 자주 보았기에 요새는 퍽 친숙해진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북한인이 그렇듯 이제는 볼썽사나운 이웃쯤으로 여겨지는 소월인과의 첫 조우는, 내 생각만큼 썩 신비롭지도 않았고 내 생각보다 사납지도 않았다.
"저기, 소월인······!"
성문영이 사람 없는 거리에서 두리번거리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거기에 소월인이 있었다.
키 작고, 깡말랐고, 옷 같지도 않은 누더기를 걸친 이계인.
그 소월인은 K-1 소총을 들고 있는 것이 아마도 약탈할 가게를 찾는 중인 듯했는데, 그러나 영업 중인 철물점이나 정육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당황한 눈치였다.
정말로, '다른 세계' 하면 생각나는 놀라운 분위기 따윈 전혀 없었다. 그저 처량하고 꼴사나웠을 뿐이다.
"저놈의 K-1은 고블린이나 소월인이나 다 들고 다니네. 이계 제식무기쯤 되나?"
하도 볼품없어 보여서 긴장감마저 들지 않는 듯했다. 이종호가 헛소리하는 가운데 내가 물었다.
"담비 씨, 정령은 상대가 각성했는지 각성 못 했는지 볼 수 있죠?"
"예, 저도 볼 수 있어요."
"그럼 판별 좀 해줘 봐요."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뜬 백담비가 말했다.
"각성자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이상한데. 환상 속 그 이계인들은 각성자가 분명했다. 각성자가 아니고서야 환상에서처럼 내 다리를 자르는 건 불가능하니까. 근육이 과다하게 발달한 나머지 단두대로 내리쳐도 날조차 들어가지 않을 내 다리를 비각성자가 어찌 잘라낸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이건 내가 환상에서 본 그 순간이 아닌가?
내가 속으로 궁리하던 차에 내 헌터팀이 먼저 움직였다.
"우리 대화 좀 할까요."
백담비가 소월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소월인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외치면서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었는데, 그러다 말고 갑자기 총 들 힘이 사라진 듯 총을 내려놓더니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정확히 뭘 했는지는 몰라도 백담비의 짓이 분명했다. 시선만으로도 비각성자쯤은 능히 제압할 수 있는 각성자의 능력이다.
"한 명 잡았다!"
신이 난 성문영과 이종호가 달려가 즉시 그 남자를 포박했다.
십억짜리 몸값이라기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잡은 셈이었는데, 그다음 발견된 소월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월인의 경우, 이번에는 백담비가 나서지 않았다. 앞서 백담비한테 당한 소월인이 너무 고통스러워하길래 또 그러다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나 혼자 나섰다.
마찬가지로 약탈할 가게를 찾고 있던 그 소월인은 K-1가 아니라 방망이 하나 달랑 들고 있었다. 각성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습격하기 위해 공간이동 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저 뚜벅뚜벅 다가갔는데, 잠시 후 소월인도 날 보았다. 내가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
그리고 소월인은, 내게 덤벼들거나 날 피해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행동을 했다.
그는 날 보더니 두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쩍 하고 벌렸으며,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절했다. 날 향해 큰절을 올린 것이다.
내게 예언 능력이 있더라도 이런 반응을 예상할 수는 없었다. 내가 보디블로라도 세게 먹여줬으면 모를까, 왜 마주치자마자 저런단 말인가?
내가 당황한 사이 성문영이 다가와 그를 포박했지만, 이 와중에도 소월인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내 앞에서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양.
"이 이계인이 왜 이러지?"
이종호가 의문을 표하니 임형택 씨가 대답했다.
"김극 씨가 딱 봐도 각성자니까 겁먹은 거 아닐까? 근육 끝내주게 빵빵한 사람이 헌터 라이플까지 들었으니 누가 봐도 신체강화자잖아."
"약탈하러 와놓고 겁먹었다고요? 김극 형이 각성자처럼 보여서?"
"아마도."
"겁먹었으면 도망이라도 치는 게 맞지 않나?"
"음, 감히 각성자를 피해 도망치는 건 불경한 일이라 생각한 거 같은데?"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물으니 임형택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저번에 소월 관련 책 좀 읽었는데, 소드 월드에선 각성자들이 곧 영주고 왕이래. 단순히 일반인보다 힘센 걸 넘어 완전히 격이 다른 신분인 거지."
"그럼 비각성자들은 곧 백성이고요?"
"아니? 백성보다 더 낮은······ 노예나 가축? 대충 그 정도 신분이라는데? 아무튼 각성자한테 감히 공격이든 도망이든 뭔가를 시도할 엄두도 못 낼 그런 위치랬어."
그러니까 저 소월인은 내가 각성자임을 알아보자마자 납작 엎드리기로 마음먹었단 소리로군.
난 두 발목이 묶인 와중에도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소월인을 보았다. 그가 애원하듯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당연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내게 보이는 태도는 명백했다.
완전한 복종······.
저 절만 해도 어느 문화권에서든 통하는 복종의 제스처였다. 복종해야 할 고귀한 신분을 감히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요, 그 고귀한 신분이 무방비한 자신의 등을 짓밟든 걷어차든 감당하겠다는 제스처였다.
그 사실을 새삼 확인한 순간, 나는 속에서 무언가가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감동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희열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건 간에, 내 안의 욕구 중 하나가 충족되는 느낌······.
그야말로 짜릿했다.
31화 얼레기들 - [5]
나는 살짝 웃으려다 말고 흠칫했다. 이런 젠장.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역겨운 상황 아닌가. 딱히 원한도 없는 불쌍한 남자에게 절받으며 기뻐하다니? 내가 사이버매그니토도 아니고 이게 뭔가.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나는 완전히 사디스트 또라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요새 툭하면 머릿속으로 비각성자 찌꺼기니 뭐니 하는 생각을 거듭한 탓일까?
나는 정색한 채, 성문영과 그 아래에 깔린 소월인을 보았다. 포박을 마무리하고자 줄을 잡아당기던 성문영에게 말했다.
"아프겠다. 갑자기 칼이라도 뽑아 휘두를 것 같진 않은데, 살살 해라."
"알았어요."
임무 중이라서인지 저 싸가지없는 놈도 오늘은 고분고분했다.
그리고 나는 비각성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등신 같은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냈다. 방금처럼 나 자신을 혐오하기 싫거든 앞으로는 의식적으로도 이런 생각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런 자아 고찰이 가능할 만치 지금 우리 상황은 여유로웠다. 다른 소월인은 내 정신적 그물망에 감지되지 않았고 데스클로 또한 이미 다 죽인 뒤였다.
이 정도면 상황 끝난 것 아닌가, 하고 기대할 때였다.
가슴에 단 무전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각성자 새보금터, 지원 바란다! 각성자 새보금터 지원 바란다!」
각성자 수용시설에서 지원을 바라고 있었다. 굳건한 벽 뒤, 초소의 군인들마저 감당하지 못한 적이 출현한 모양이었다.
한시가 급했다. 내가 바로 공간이동 할 준비를 하는 가운데 무전기에서 나타난 적의 정체를 알렸다.
「각성자, 각성자 소월인! 역장 외골격과 역장 날붙이―」
그리고 나는 연달아 두 번, 최대한 멀리 공간이동 하여 예의 장소에 이르렀다.
시야 바깥 공간이동을 급하게 두 번이나 했기에 현기증이 났다. 그래서 더 공간이동 하지 않고 뛰어서 목적지로 향했다.
수용시설의 정문이 보였다. 얼음 능력자들의 무단 시설이탈을 막을 만치 견고하기로 악명 높은 그 철문은 정작 습격자를 잠시도 막지 못한 듯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철문을 밟고 시설 내에 진입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장면에 순간 눈을 감았다 떴다.
짙은 피비린내. 허리가 동강 난 군인과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잘려 두 쪽이 되어버린 군인이 풍기는 비린내였다. B급 고어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인간이 맞이하기에는 지나치게 추잡한 최후.
다른 군인들도 죄다 목이 잘리거나 어딘가가 잘려 죽어있었는데, 그 수가 언뜻 보기에도 스무 명은 되었다. 내게 무전을 보냈을 군인도 창자를 쏟아낸 채 누워있는 것이 고작 오 분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두를 전멸시킨 모양이다.
바닥에 나뒹구는 팔다리들을 보니 일순 몸이 굳었다.
환상 속, 다리를 잘린 내 꼬락서니가 다시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한이 드는 가운데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환상을 보고 나면 당시의 감정마저 전이되듯 그때 느낀 고통마저 전이되는 걸까? 그 환상은 내가 실제 겪지 않은 일인데도 다리에서 불타는 통증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살짝 머뭇거렸지만, 오래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계속 뛰어서 시설 내부에 진입한 나는 놈을 보았다.
소월인.
아마도 각성자.
키는 백구십 센티미터쯤 돼 보일만치 컸지만, 전체적으로 홀쭉했다. 또한 놈이 움켜쥔 칼도.
뭐 저따위 칼이 다 있나?
대충 봐도 검신이 3미터 길이는 될 것 같다. 하지만 무거워 보이진 않는다. 길쭉한 대신 가늘고 얇으니까.
그러나 내 망치로 내리친들 저 길쭉한 칼은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역장 날붙이가 그 칼날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을 테니까.
저 소월인 각성자는 저 잘난 칼을 휘둘러 이 시설에서도 이미 한 명을 썰어 죽인 마당이었다.
흘긋 보니 한 중년 여성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저 너머, 소월인 앞에 모여있는 얼음 능력자들······. 그들은 저 아줌마와 같은 꼴이 될까 봐 겁먹은 듯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목이 잘린 아줌마를 보았다. 대충 박미형 씨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그녀보다 돈이 없어서 이런 수용시설에 사는 신세겠지만 어쨌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 동태눈을 본 순간 긴장감도, 공포감도 사라졌다.
"야."
내가 으르렁거리자 소월인이 뒤돌아섰다.
일찍 환상에서 보았던 면상이 나를 향했다. 그 입이 열리더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뭐라는 거야, 씹새끼가."
계속해서 뭔가 말하던 놈을 향해 헌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조정간은 단발. 맘 같아서는 연발로 쏴 갈기고 싶었지만, 저놈 뒤에 있는 얼음 능력자들을 생각하여 한 발만 쏘았다.
어김없이 명중한 기관포탄이 놈의 역장 외골격에 충돌했다.
그것이 전투 신호가 되었다.
기습의 이점은 딱히 없었다. 기관포탄을 처맞고도 소월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땅을 박찼다.
역장 외골격. 저번에도 겪었듯 저 씨발놈의 능력은 각성자를 게임 속 보스처럼 만들어 준다. 기관포탄 한 발 맞은 정도로는 잽 한 방 맞은 반응조차 없었다.
그리고 어느 데스클로가 도약만으로 헬기의 높이에 도달했듯, 놈의 도약력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준이었다.
놈은 땅 한 번 박찼을 뿐인데, 다음 순간 놈은 내 앞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게 아닌가. 도약이 아니라 거의 공간이동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환상 속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속도에 대응하지 못해 두 다리를 잃고 말았으리라.
그리고 나는 환상 속 나보다는 훨씬 우월했다. 반사신경이든, 공간이동 하는 속도든 간에.
저놈과 달리, 나는 진짜로 공간이동 했다.
내 눈에 소월인의 뒷모습이 담겼다. 놈의 칼이 내가 있던 공간과 그 양옆의 벽을 잘라내던 그때, 나는 조정간을 연발로 변경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에서 황금빛 선이 쏟아져나왔다. 쏟아져나온 기관포탄들이 놈의 역장 외골격을 연달아 두들겼다.
놈이 계속해서 맞아주지는 않았다.
몇 발 맞았을 때, 소월인은 몸을 회전하는 동시에 땅을 박찼다.
그러고는 방금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눈 한 번 깜빡일 여유도 없이 놈은 내 앞에 있었고, 그 역장의 칼날은 내 앞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움직임을 대강이나마 포착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공간이동 하지 않았다.
내 뒤에 아직 얼음 능력자들이 서 있었다. 이대로면 다 함께 썰리고 만다.
나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채 계속해서 기관포탄을 쏟아냈다.
그리고 놈의 역장 칼날이 내 목을 반쯤 파고든 그때, 내 발길질이 놈의 복부를 강타했다. 교본에 실어도 좋을 만치 깨끗하게 들어간 앞차기.
신체강화자의 힘이 담긴 앞차기였다. 보통 사람이면 그대로 배에 구멍이 뚫렸겠지만, 역장에 보호받는 소월인의 몸은 내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공중을 날던 놈의 몸뚱이에 헌터 라이플의 총구를 향했다. 계속해서 쏟아져나온 기관포탄이 뒤쪽으로 날아가는 놈의 몸을 두들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중에서 놈의 몸이 폭발하듯 터졌다.
내 눈에 놈의 비산하는 피와 살이 담겼다.
아······.
처음 사람을 죽인 셈이었지만 별 대단한 실감은 없었다. 전쟁터에서도 명분 있게 적을 죽이면 심적 충격이 덜한 경우가 많다던데 지금도 대충 그런 모양이지.
아무튼 이겼다. 놈이 강대한 각성자였던 듯, 크나큰 희열이 내 머리를 뒤덮었다. 머릿속 관중석에서 내 이름이 연호되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머릿속 희열을 떨쳐냈다.
그러느라 내 머리가 덜렁거렸다. 목에서는 피가 솟구치는 가운데, 창문에 비친 나는 목이 반쯤 잘려있었다.
갑작스러운 출혈에 머리가 어지러워졌지만 상관없었다. 곧 나을 테니까.
나는 손으로 목을 붙잡아 출혈을 억지로 막으며 얼음 능력자들에게 물었다.
"다들 무사해요?"
목 반쯤 잘린 놈이 그리 물으니 충격적인 걸까. 여기 모인 얼음 능력자들은 대답은 하지 않고 몸을 떨며 신음했다.
나는 계속해서 손바닥으로 목을 가린 채 대답을 독촉했다.
"여기 모든 인원 다 멀쩡히 있는 거 맞아요? 죽은 분 빼고 납치된 분 없냐고요?"
구체적으로 물으니 한 여자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세 명이요, 세 명 잡혀갔어요!"
"어디로요."
여자가 가리킨 곳으로 정신적 그물망을 뻗었다.
그물망에 일단의 무리가 감지되자 나는 거기로 공간이동 했다. 그러고 나니 앞서 그물망으로 파악한 놈들이 보였다.
소월인으로 추정되는 덩치 하나와 졸개 둘. 놈들이 끌고 가는 중인 얼음 능력자 세 명도.
"거지새끼들, 멈춰."
그러자 소월인 세 명이 날 돌아보았다. 졸개로 보이는 둘은 흠칫했고, 덩치는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그뿐이었다.
곧이어 덩치의 살피는 듯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움츠러든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저 덩치도 각성자일 것이었다.
그러나 홀쭉했던 아까 그놈과 달리 저놈은 근육질이었다. 보디빌더 이상으로 근육을 증량한 나와 달리 저놈은 운동선수 특유의 날렵한 근육이긴 했지만, 그래도 쉽게 볼 수 있는 근육은 결코 아니었다. 신체강화자 특유의 근육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 삼 미터짜리 칼도 한 자루 들고 있었다. 그 칼에는 역장 날붙이 특유의 아지랑이가 엿보였다.
신체강화자 겸 역장 날붙이 능력자로군.
소드 월드 각성자 군주들의 가장 흔한 능력 조합이다. 각성자 헌터용 교본에서 그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살려주세요!" "도와줘요!"
소월인들에게 붙잡힌 얼음 능력자 여성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각성자 덩치도 입을 열었다.
"Ak o Seath?"
놈이 뭐라 말하는 듯했지만 역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너머에 시선을 보냈다.
저 너머에서 자줏빛으로 일렁이는 게이트가 보였다. 이 장소에서 이 모든 상황을 끝내야 한다······ 그러나 제기랄, 지금 점검해 보니 아까 탄창을 다 쏟아낸 모양이다. 탄창에 탄환이 한 발도 없었다.
탄창을 교체하고 돌아올 동안 저놈들은 저 게이트에 들어가 버릴지 모른다.
그렇다고 급하게 망치라도 가져와 휘두르자니 저 말도 안 되는 역장 칼날을 버텨낼 리가 없는데······.
내가 놈의 칼을 신경 쓸 때, 덩치도 내 손에 들린 무기를 신경 쓰는 듯했다.
덩치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보니 놈은 아까부터 내 헌터 라이플을 보고 있었다.
하기야 저놈들도 우리 세상과 접한 지 시간이 꽤 지난 마당이다. 대충 어떤 무기가 위협적인지 놈들도 잘 알고 있다. 이 헌터 라이플이면 신체강화자의 신체쯤은 순식간에 찢어버릴 수 있단 것도.
나는 놈에게 관대한 제안을 하는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요란하게 쿵, 하고. 헌터 라이플을 땅에 떨어뜨렸다.
뭔가 말하던 덩치의 눈이 크게 뜨인 가운데, 나는 양손을 눈높이까지 올렸다.
그렇게 격투의 기본적인 자세를 취한 채, 오른손만 앞으로 뻗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리고 도발했다.
"덤벼."
덩치는 내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말을 못 알아들어도 대충 몸짓만 보고 짐작할 만하니까.
또한 놈이 내 '관대한' 제안을 거절하고 칼을 휘둘러올 것 같진 않았다. 나를 보라, 잘나신 각성자 취급받은 지 일 년도 안 된 나조차 비각성자 찌꺼기니 뭐니 할 만큼 오만하다.
그렇다면 각성자로서 군주 노릇 해왔을 저놈은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
물론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공간이동 하여 피신할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탁, 하고. 금속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내가 헌터 라이플을 내려놨듯 덩치도 바닥에 칼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놈은 나와 비슷해 보이는, 아마도 저쪽 동네의 격투 자세로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저놈도 격투를 할 줄 아는 모양인데, 새삼 놀랍지는 않았다. 헌터 교본에서 읽었기로 중세기사가 레슬링과 검술을 단련했듯 소드 월드에서 각성하고픈 자들도 격투술과 검술을 단련한다. 두 행위가 곧 신체강화와 역장 날붙이의 각성 트리거이기 때문이다.
덩치가 스탭을 밟기 시작했다. 나도 비슷한 행동을 취하며 서로 탐색하자니 놈이 먼저 움직였다.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주먹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내게 날아들었다.
한편 나는 놈의 어깨가 꿈틀거릴 때 이미 상반신을 좌우로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왼쪽으로 움직인 내 상반신이 놈의 주먹을 통과시켰다. 놈이 뻗은 팔을 스치고 지나간 내 주먹이 놈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리고 격투가 시작되었다. 옥타곤에서 내려온 지 사 년 만에 벌이는 격투였다.
*******
32화 얼레기들 - [6]
안면에 카운터 한 방 먹이고 싸움을 시작했지만 좋은 시작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놈을 노려봤다.
거리를 벌린 덩치 큰 소월인은 웃고 있었다.
'겨우 그 정도냐?' 하는 자신만만한 얼굴. 뻔한 도발이 아니라 실제로 내 펀치가 그럭저럭 맞을 만했던 것 같다. 내 주먹에 맞은 이상 설령 신체강화자라도 안면이 으스러지고 목뼈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저놈은 코에서 피만 흘리고 끝이다.
쉽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 정정당당한 승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저들을 구출하는 게 중요하므로 지원군부터 불렀다.
"27번지 해동빌라로 와라, 최대한 빨리······"
몰래 무전 하면서도 놈을 봤다. 허리춤에 예비용 무기로 보이는 단검 한 자루가 있었는데, 그것을 본 나는 전투 중에 공간이동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역시나 정정당당한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간이동 따위 '얍삽한' 짓을 했다간 놈이 저 단검을 뽑아 휘두를 것 같았으니까.
덩치가 킁, 하고 코에서 피를 빼내더니 다시 자세를 취했다. 놈이 내게 접근하다 말고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췄다. 전형적인 태클 자세다. 레벨체인지라도 하나 했더니 아니었다.
성난 호랑이처럼, 덩치가 대놓고 덤벼들었다. 양팔을 뻗은 채 날 끌어안으려 했다.
동작이 신속하기 그지없었지만 지나칠 만치 정면으로 들어왔기에 반격이 어렵지는 않았다.
놈의 겨드랑이에 내 팔을 끼워 넣고는 그대로 메쳤다. '쿵!'
나자빠진 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착' 소리가 아니라 망치가 콘크리트를 내리쳤을 때 날 법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쓰러진 데다 걷어차이기까지 한 덩치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그렇다고 놈이 정신을 잃거나 고통에 겨워 몸이 굳지는 않았다.
"Yak―!"
놈은 포효하며 양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놈의 몸뚱이가 공중에 휙 하고 떠오르더니, 그 다리가 허공을 세차게 휘젓자 놈은 곧바로 똑바로 서게 되었다.
태권도에서든 레슬링에서든 존재할 수 없는, 신체강화자만의 만화적인 재정비 방법에 놀랄 겨를이 없었다.
자세를 회복하기 무섭게 놈이 공격해왔다. 놈의 허리와 다리가 거세게 움직였다.
그 동작의 전조만 봐도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든 놈의 미들킥을 내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그대로 놈의 턱을 후려치니 놈이 또다시 물러섰다.
거리를 벌린 놈의 그 표정이 심각해졌다. '젠장' 하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겉으로만 담담할 뿐 사실 내 속내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젠장.
킥이든 엘보든 펀치든 별 대단한 타격을 준 것 같지가 않았다. 살이 아니라 돌덩이를 공격한 느낌.
한편 저놈은 제 공격 시도가 죄다 틀어막혔단 사실에 기겁한 눈치다. 나와 자기 사이의 실력 차이를 느끼게 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놈이 아무리 격투를 수련했다 한들 나 정도로 수많은 격투가들과 경쟁하거나 나만큼 열정적으로 스파링을 뛰었을 것 같진 않다. 이세계의 격투기 수준이 어쩌고, 평가하기 이전에 저놈부터가 내가 섰던 수준의 무대에 서본 적이 없을 놈이다.
그러니까, 아마추어에 불과한 놈.
하지만 격투기에서는 체급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다. 페더급 챔피언은 헤비급 아마추어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법.
그리고 방금 몇 번 겨뤄봤건대, 저놈이 나보다 키가 작고 근육 또한 확연히 적은데도 나보다 저놈의 체급이 월등한 것 같다는 판단이 든다. 저놈이 신체강화자로서 더욱 강력한 것 같다.
하기야 각성한 지 오 년도 안 된 나보다는 저놈이 더 오래 묵은 괴물일 것이요 더 오래 단련하고 더 많은 괴물을 사냥해 왔으리라.
몸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을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그렇다고 포효하지도 않은 채 뇌까렸다.
"덤벼라, 아마추어 놈아."
말을 알아듣진 못했어도 대충 도발임을 알아들은 듯 놈이 나 대신 포효했다.
놈이 덤벼들었다. 놈의 돌진을 제지하기 위한 내 미들킥, 실패했다.
놈의 손목에 내 발목이 붙잡혔다.
상관없다. 공간이동 할 필요조차 없다.
발목을 붙잡힌 순간 나는 온몸을 회전시켰다. 온몸의 체중을 실은 내 뒤돌아차기가 놈의 목에 작렬했고, 이번에는 놈도 견디기 어려웠던 듯했다.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고 있던 놈의 손아귀 힘이 풀렸다.
비틀거리는 놈을 끝장내기 위해 내가 덤벼들었다. 놈의 몸뚱이를 땅에 짓누른 채, 내 두꺼운 팔을 그 못지않게 두꺼운 놈의 목에 걸었다.
잠시 정신을 잃은 듯하던 놈은, 자신이 목 졸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상황을 벗어나려는 듯 놈이 필사적으로 휘두른 주먹이 내 몸을 연달아 두들겼다. 산소가 차단된 와중의 발악이라곤 믿을 수 없는 충격이 내 몸을 강타했지만, 버텼다.
계속해서 놈을 목 조르자니 놈이 온몸을 비틀어 몸 전체를 굴렀다. 놈과 얽혀있던 내 몸 또한 지면을 굴렀고, 놈이 나보다 훨씬 무겁다는 것이 드러났다.
수 톤 트럭이 덮치는 상황에는 가드고 클린치고 다 소용없듯 나는 놈의 끔찍한 무게와 힘에 휩쓸렸다. 나보다 더 강력한 신체강화자라 뼈의 밀도라든가 근육의 밀도 따위에서 우월한 모양이다.
이대로 놈이 힘의 우위를 이용하여 그대로 찍어눌렀으면 오히려 내가 당할 수도 있었을 텐데, 놈은 그러지 않았다.
한 바퀴 구르기를 멈추고 놈과 내가 서로 마주 보며 눕게 된 순간, 놈은 날 거세게 밀쳐 초크에서 풀려나더니 허겁지겁 땅을 굴러서는 나와 거리를 벌렸다.
꽤 멀리 떨어지고서야 놈이 몸을 일으켰다.
한편 나는 천천히 여유롭게, 그러나 실제론 방금 고통을 참아내느라 힘겹게 일어나며 놈을 보았다.
놈의 얼굴에 드러난 공포와 경악을 읽었다.
인간 격투가를 보며 고릴라가 겁을 내고 있었다.
그 고릴라가 기술 따윈 포기한 채 내 목이라도 붙잡고서 무작정 난타하면 끝장난다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됐다. 절대로.
그래서 내 쪽에서 덤벼들었다.
잽을 날리니 놈이 뒷걸음질쳐서 피했지만 그 등이 담벼락에 부딪혔다.
벼랑에 몰린 놈이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펀치를 뻗어왔다. 왼손으로 패링하고는 그 안면을 후려쳤다.
물론 끄떡없었다. 계속해서 서로서로 치고 또 쳤다.
놈이 스윙하듯 휘두른 주먹을 상체만 젖혀서 피해낸 다음 카운터를 먹여줬다. 콧잔등에 제대로 내 펀치가 들어갔는데도 놈은 여전히 몸이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놈은 얻어맞은 즉시 주먹을 뻗는 것이 가능했다.
왼팔로 가드했더니 빗겨서 뻗어간 놈의 주먹이 내 이마를 스쳤다. 찢어진 내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또한 살짝 맞은 충격으로 말미암아 앞서 절단되었다가 도로 붙은 내 목 근육이 다시 찢어졌다. 피부도 함께 찢어져 목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대로 한 대 더 맞았다면 난 아마 죽었겠지만 놈은 그걸 보지 못했다.
거리를 벌렸다간 놈이 그 사실을 알아챌 것 같았다.
나는 살짝 몸을 빼는 척하면서 전진했다. 그러면서 날린 어퍼컷이 놈의 턱을 강타한 순간 놈은 그제야 휘청거렸고, 내가 다리를 걸자 놈이 쓰러졌다.
쓰러진 놈의 몸 위에 올라가 좌우 주먹을 몇 대 때려주자 놈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기절했다. 그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심판 대신 말하는 건데, 내가 이겼다. 새끼야."
뺨을 몇 대 쳐서 그 사실을 확인한 뒤 나는 전율에 떨었다. 이건 단순히 격투가 대 격투가의 대결에서 이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환상에서 본 미래, 그 처참한 미래를 이겨낸 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사냥하고 단련해온 보람을 온몸으로 느꼈다. 반사신경이 이토록 발달하지 않았다면 진작 그 칼잡이한테 죽었을 것이요, 죽도록 몸을 키우지 않았다면 실력 차이고 뭐고 단번에 죽었을 테니까······.
승리감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 자리의 관중을 보았다.
우선 두 소월인을 보았다. 쓰러진 덩치의 졸개일 터인 저 둘은 정말로 구경꾼에 불과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둘은 전혀 싸움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지금은 날 겁에 질린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뭘 봐?"
둘에게 내 시선이 닿은 순간, 둘은 앞서 만났던 소월인이 그랬던 것처럼 땅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얼음 능력자 여성들을 쳐다볼 때였다.
한 얼음 능력자 여성의 입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 지르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자줏빛 게이트에서 데스클로의 앞발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놀라거나 흠칫하지 않았다. 내 정신적 그물망이 내 졸개들의 접근을 알리고 있었으니까.
발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려 이쪽으로 전력 질주 중인 내 헌터팀을 보았다.
맨 앞에서 달려오는 것은 늘 그랬듯 백담비였다. 막 게이트에서 빠져나왔던 데스클로의 대가리에 그녀의 경기관총에서 쏟아져나온 5.56mm 탄환들이 박히자 놈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멋모르고 또다시 게이트를 빠져나왔던 데스클로 한 마리도 백담비의 총질을 버텨내지는 못했다. 빗나가는 총알 따윈 없었다. 백담비는 혹여라도 저 발톱이 제 몸에 닿을 게 두렵지 않은 양, 게이트의 코앞에서 총을 갈겨 댔다.
연달아 게이트를 나왔던 데스클로 두 마리가 그 영거리 사격에 당해 죽었다.
내가 봐도 끝내주게 멋있었다. 정말로.
아까부터 벌벌 떨기만 하던 저 세 얼음 능력자와 백담비가 비교가 되었다. 얼음 능력자 중 한 명에게 핀잔하듯 내가 물었다.
"나 싸우는 중에 이 소월인 둘 제압하고 도망치지 그랬어요? 보니까 저 소월인 둘 다 각성자도 아닌 것 같은데."
"제압이요? 능력 써서요?"
당연한 소리를 하길래 대답은 않고 뻔히 바라봤더니 그녀가 우물쭈물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요."
"본능적으로 능력 어떻게 쓰는지 다 알지 않아요?"
"알아도 잊으려 노력했어요. 무의식적으로 능력 안 쓰려고 연습까지 했고요."
"능력 안 쓰려고 연습했다고요? 왜요?"
"무의식적으로 사람 죽이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러고 보니 대한각성연대 시절에 수용시설의 각성자들에게 능력을 쓰지 않을 것을 강요하며 뭔 이상한 훈련을 시킨단 말을 들었던가.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가 말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미안합니다. 다친 덴 없구요?"
"없어요······ 구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그리고 그쪽은 이미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목이랑 티셔츠가 피범벅······"
"나야 워낙 터프하니까 자고 일어나면 낫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게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더는 괴수들이 나오지 않는 그 자줏빛 게이트, 환각에서 본 그 게이트가 저기 있었다. 환각에서 두 다리가 잘렸던 나는 저 게이트 안으로 기어서 들어갔더랬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땅을 길 필요도, 게이트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
여전히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하는 덩치를 보며 그리 생각하던 중이었다. 백담비의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저기, 게이트 들어가 볼까요?"
질겁한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게이트에 들어가긴 왜 들어갑니까?"
"알잖아요. 게이트에 들어갈 기회 있으면 들어가서 그 안 괴수들의 정보 파악하는 게 권장된다는 거. 게이트에 들어가서 본 정보들 보고하면 인정되는 공적과 포상이 크다던데······."
나나 댁이나 새삼 포상 욕심낼 필요는 없지 않으냐, 하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저번에 화염 정령이 나타났을 때 확인한 사실이지만, 내 라운드걸은 공 세울 기회를 은근히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공을 세워 자기 쓸모를 세상에 증명하고 싶은 듯했다. 그러면서도 혼자 들어가긴 또 무서운 모양이고.
"그러죠 뭐."
그리고 그녀와 함께 나는 게이트 안에 발을 디뎠다.
자줏빛 세계가 우리를 반겼다.
*******
우리 둘이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것은 그로부터 십여 분 뒤였다.
"아, 나왔다!"
"어땠어요? 진짜 저 안에 괴수들 들끓어요?"
이종호며 성문영 등이 이것저것 묻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그들의 말에 집중할 기분이 아니었다.
내 눈에 뒤늦게 여기 온 듯한 나이토 상이 보였다. 불순한 비각성자들의 대표 격쯤 되는 저 씨발놈.
나는 놈을 보며, 목구멍에서 빠져나올 뻔했던 말을 억지로 속에 가뒀다.
개좆같은 비각성자 찌꺼기들······.
*******
Q. 이번 김극 헌터의 전과가 여러모로 화제다. 열두 개체 이상의 데스클로가 출현했는데도 민간인 사망자가 단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이 특히 독보적이었다. 출동 신호가 간 지 불과 오 분 만에 김극 헌터 혼자 구역 내 모든 괴수들을 모조리 정리한 셈인데
- 거리도 가까웠겠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그리고 사실 내가 다 쓸어버린 게 아니라 마츠모토 그놈도 몇 마리 잡았겠다, 결국 민간인이 한 명 죽은 데다 민간인이 아닌 이들의 죽음은 더욱 많아서 순수하게 기뻐하긴 어렵다
Q. 각성자 시설을 지키던 군인들을 말하는 것인가?
- 맞다. 모두 무기를 든 채 죽었다. 인천을 지키다 죽은 그들은 훌륭한 인천 남아들이었다
Q. 그들은 인천 출신이 아니라 서울 보병사단 출신인 걸로 아는데
- 전사자를 모독하지 말라
Q. 잘 알려졌다시피 현재 제3세계 국가들은 각성자들에게 지배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은 특히 강력하여, 개인화기와 박격포 따위로 제압하기가 어려운 특성상 공군이 미약하기 마련인 제3세계 군대와 그 수뇌부를 쉽게 제압하기로 악명 높다.
그리고 CCTV 분석에 따르면 이번에 출현한 소월인 중 하나는 제3세계를 지배하기로 악명 높은 각성자들보다도 월등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제압 자체를 포기해야 할 수준이었다는 평가다
- 역장 외골격 능력자를 말하는 모양인데, 난 제압해냈지 않은가.
Q. 맞다. 그래서 놀랍다. 인천 게이트 사건에 나온 역장체에 이어 막강한 적을 연달아 쓰러뜨린 이 놀라운 전과가 국내를 넘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비결이 있다면?
- 내 발차기 한 방에 죽은 그놈을 이긴 비결 말인가? 워낙에 한심한 놈이라 어떻게 싸웠는지도 벌써 잊었다
Q. CCTV 영상을 확인하니 목을 반쯤 베였던데
-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봤다고 주장하는 걸 보니 놈이 환영 능력도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각성자인 내겐 통하지 않았고
Q. 알겠다(웃음). 예의 각성자를 제압한 뒤, 김극 헌터는 목이 반쯤 베인 채로도 곧바로 납치된 빙정 능력자들을 구출하고자 이동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저번 인천 게이트 사건에서도 부상을 무릅쓴 투지를 보여줬기로 유명한데, 그 불굴의 투혼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 부평 수렵 전문 학원에서 잘 배워서 그렇다. 부평역에서 5분 거리인데 (······) 물론, 초재생능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신체강화자라면 죄다 이래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 부담이 가진 않길 바란다. 부평 수렵 전문 학원에서 잘 배운 내가 특별한 것
Q. 김극 헌터는 빙정 능력자들을 구출 후, 게이트에 진입했다. 백담비 헌터의 증언에 따르면 호주를 초토화한 걸로 알려진 초자연적 거대 괴물체 '베헤모스'가 한반도에 가까이 다가왔으며, 그 이동 방향은 서울이다. 부연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 관심 없다. 베헤모스든 로터스든 인천에만 안 오면 된다
Q. 던파 칭호는 받았나?
-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네X플과 인천 시민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그리고 내게 인천 헌터 할 것을 제안하신 박미형 시의원님에게도 (······)
*******
33화 얼레기들 - [7]
이번 사건도 여러모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니, 게이트에서 나온 놈들의 면면이 워낙에 화려했기 때문이다.
우선 역장 외골격 능력을 지녔던 소월인, 그놈은 각성자 수용시설을 지키던 군인 스물네 명을 2분 만에 모조리 참살했다. 역장체의 습격에 대비해 해당 시설에 배치되었던 기관포며 대전차 로켓 따위는 그곳 군인들의 생존시간을 고작 삼십여 초 늘렸을 뿐이다.
붙잡힌 소월인의 말에 따르면, 그 소월인은 그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다던가?
그리고 내가 격투 끝에 쓰러뜨린 덩치 큰 소월인은 그 일대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영주였다는데, 결국 기절한 채 끌려간 그는 포로가 되었다.
그와 함께 끌려간 비각성자 소월인들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모두 포로가 되어 심문을 받고 있었다. 한국이 오랜만에 포획한 소월인 포로들이라는 것이 뉴스에 나왔다.
그 사실들과 관련된, 헌트웹에 올라온 내 인터뷰를 보았다.
역시나 조회수가 일만을 넘었다. 거기 달린 수백 개 댓글들을 살폈다.
익명 : 애기버섯 현실에선 봐도 봐도 너무 무섭다. 혹시 만나면 눈도 못 마주치겠네 진짜 ㅎㄷㄷ
Ⓐ 돌머리청년 : 나도 저 양반 보니 무서워 죽을 것 같은 게, 목 반쯤 잘려서 피 철철 흘려놓고서 바로 공간이동 해서는 딴 신체강화자랑 주먹질하는 거 대체 뭐냐? 누가 나한테 저거 본받으라고 할까 봐 무섭다 정말로;;
이렇듯 보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칭찬도 있었지만, 인터넷 댓글이 모두 만족스러울 수야 없는 법이다. 눈살 찌푸려지는 댓글도 여럿 있었다.
익명 : 김극햄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대전상대들 대체 왜 저러냐? 30mm 한 탄창 다 비워도 안 죽는 역장체에, 국내에서 처치한 적 없던 화염 정령에, 웬 정신 나간 각성자 소월인 둘에······.
Ⓐ 엘마야캐요 : 하기야 A급 헌터라도 저런 빡센 괴물들이랑 싸우는 건 헌터 생활 중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이긴 하지. 내가 봐도 계약금 너무 싸게 받은 것 같네
익명 : 그런데도 애기버섯 저 양반은 왜 볼 때마다 저런 괴물 쓰러뜨렸단 기사 나오냐? 진짜 현실 직업이 버서커임?
익명 : 김극 저 양반이 정신 나간 분노조절장애라 적 보이면 강해보이든 말든 무조건 달려드는 탓도 있는데, 그거 말고도 인천 특성 탓도 있음
익명 : 인천이 왜?
댓글 중에 나이토 상을 발견한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 GoodHunter : 한국 최대 각성자 수용시설이 인천에 있으니까. 게이트 내에서 서울로 향하려던 괴수들이 도중에 죄다 인천에 가버리잖아?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절로 욕이 나왔다. 이 씹새끼가?
아마 저놈은 이런 말을 하는 게 각성자 차별이란 의식도 없을 것이다. 저놈 성격상 그저 선배 헌터랍시고 아는 척하고 싶을 뿐일 텐데, 그 점을 이해해도 부아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
계속해서 스크롤을 내렸다.
익명 : 그러고 보니 이번에 잡힌 소월인들도 냉동고 노리고 왔다고 했나?
익명 : 맞음. 각성자 영주들이 자기네 궁전에 들여놓을 얼음 능력자들 잡으러 왔다고 했음. 가능하면 젊고 예쁜 여자들 위주로 잡으러 왔다던데
익명 : 얼음 능력자를 왜 잡아감?
Ⓑ GoodHunter : 얼음 능력자들이 소드 월드에선 가치 있게 여겨진다더군. 소드 월드에서 얼음 능력자들의 지위는 각성자 군주들이 거느리는 궁정 마법사, 혹은 최고급 노예쯤 된다나?
익명 : ? 어째서
Ⓑ GoodHunter : 소드 월드는 냉장고며 에어컨도 없는 곳이지. 그 와중에 얼음 능력자들은 음료도 차갑게 해주고, 더울 때 시원하게 해주고, 육류도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해주니까 여러모로 쓸모가 많대.
게다가 영주쯤 되는 강력한 각성자한텐 얼음 능력자가 위협적이질 않잖아? 그러니 같이 데리고 살아도 공격 당해 죽을 염려가 없어서 더욱 좋다는 거지
Ⓑ GoodHunter : 게다가 얼음 능력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해서 정령이 되면 게이트를 열 수 있게 되는데, 그쯤 되면 지위가 올라가서 판타지 소설 속 궁정 마법사 취급이라더라
익명 : 아무튼 얼음 능력자들 노리러 앞으로도 인천에 잔뜩 쳐들어 올 거다 이거임?
익명 : 인천 수호자 김극햄 ㄹㅇ 앞으로도 고생하겠네
Ⓐ syberMagneto : 진짜 얼레기들 때문에 오백억짜리 각성자만 개고생하게 생겼음 ㅋㅋ
나는 사이버매그니토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여자······.
이를 악물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덩치와의 격투가 끝난 뒤, 게이트에 들어가고서 겪은 일을 상기했다.
*******
게이트에 몸을 넣은 뒤, 내 눈에 담긴 것은 온통 자줏빛인 세계였다.
주변에 사물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줏빛 배경에 빛나는 실루엣들만 무한히 반짝일 뿐이었다.
지구 같기는커녕 현실 같지도 않은 풍경을 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내가 정말 게이트에 들어왔구나.
나는 나보다 먼저 게이트에 들어섰던 백담비를 보았다. 그녀를 향해 물었다.
「어때요, 뭔가 파악이 돼요? 난 눈 어지러워 죽겠는데」
그녀가 지금 앞모습인지 뒷모습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지금 하나의 빛나는 실루엣으로 보였다.
게이트 안, 그러니까 이곳 아스트랄계(界)라 명명된 공간에서 우리는 물질이 아닌 영체(靈體)로 존재하는 까닭이다.
「저도 그래요. 좀 더 적응돼야 할 것 같아」
내 말이나 백담비의 말이나 서로의 머릿속에 직접 전해지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여기 게이트 안에서 우리의 육체는 물질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대를 갖고 있지 않아서 목소리 또한 낼 수 없다. 여기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파장처럼 주변에 전해진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게이트 내부는 사냥에 나서기 전 괴수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유명했지 아마?
주변을 보니 과연 온갖 괴수들이 실루엣의 형태로 휴식하고 있었다.
사냥에 나서기 전의 휴식이리라. 이곳에서 영체로 존재하는 동안에는 굶어 죽을 염려가 없이 무한정 사냥감을 기다리며 대기할 수 있는 것이다.
게이트 내부의 괴물들뿐만 아니라 게이트 밖, 그러니까 우리 세상도 여기서 관측이 가능했다.
나는 저 너머에서 빛나는 푸른빛들을 보았다.
그 푸른빛들을 보기만 해도 추위와 겨울 따위 온갖 차가운 이미지들이 내 머릿속에 직접 전해졌는데, 보아하니 각성자 수용시설의 얼음 능력자들이 분명했다. 게이트 안에서 바깥에 어떤 각성자들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계속해서 이곳저곳을 살폈다.
얼핏 봐서는 뭔 능력인지 모를 각성자가 주변에 한 명 있고······, 더 먼 곳을 바라본 나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일출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저 너머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이글거리는 태양을 보기만 해도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압박감, 스트레스가 내 머릿속에 직접 전해졌다. 그리고 또한, 압박감과 스트레스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폐쇄적인 의지도.
계속 보고 있자니 백담비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압박감이랑 스트레스가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의 각성 트리거 맞죠?」
「아마도요」
「그럼 저건······ 강준치인가 봐요. 지구 최고 역장 능력자」
「그러게요. 게이트 안에서 보면 태양처럼 보인다더니, 그게 미사여구 같은 게 아니었네? 심지어 부산에 있을 양반이 여기 인천에서도 크게 보이는 걸 보니 아주 그냥······」
「이론상 핵폭발 속에서도 무사할 거라잖아요. 하여간 정말 부럽다. 그 인간은 얼마나 인생이 편할까?」
그리 중얼거리는 백담비를 보니 저도 모르게 뿌듯해졌다.
내가 해낸 일이 얼마나 위대한 위업인지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보라, 환각에서 본 그녀는 게이트로 끌려간 처지였는데, 그 미래를 바꿔낸 지금 그녀는 지금 내 옆에 있다.
심지어 원래는 업무 외 목적으로는 말 한마디조차 안 하던 여자였는데, 나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 먼저 말을 걸고는 잡담까지 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그야말로 가슴이 벅차오를 지경이다. 이제 내 라운드걸이 내 곁을 떠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한창 생각하던 중이었다. 백담비가 뒤돌아섰고,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실루엣의 형태로나마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어, 저거······」
백담비가 놀란 듯했다. 그녀가 내 등 뒤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내게 알리려는 듯했지만 난 거기 신경 쓸 수 없었다.
불현듯 현기증이 덮쳐왔다. 또한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도 들자 나는 생각했다.
이제는 익숙한 그거군.
나는 또다시 환각이 나를 덮치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
계속해서 댓글을 보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겨운 비각성자 찌꺼기들. 가스실로 보내 비누로 만들어야 겨우 쓸모가 생길 쓰레기들······.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헌트웹에서도 얼음 능력자 혐오가 상당하다. 내 인터뷰 글에도 갑자기 얼음 능력자 혐오 집회가 열린 듯했다.
익명 : 내가 김극햄이었음 얼레기들 싹 다 쏴 죽이고 싶겠네 ㅠ
익명 : 진짜로, 기껏 애향심에 돈 덜 받아 가면서까지 인천에서 일하기로 했더니 대체 뭔 개고생이냐?
저놈들만 극성인 게 아니라 그 아래에도 저 비슷한 댓글들이 수두룩했다. 내가 얼음 능력자들 탓에 피해를 보고 있으며 마땅히 그들을 미워해야 한단 댓글들이다.
인터넷에 김극, 하고 쳐보기만 해도 내 대한각성연대 활동 이력이 나오는데 아무도 그걸 모르는 모양이지. 하기야 대한각성연대가 뭐하는 곳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관련 기사도 인터넷에 많이 없으니까.
그중 유독 눈에 밟히는 댓글들이 있었다.
익명 : 김극햄 팀에도 얼레기 한 명 있지 않나?
Ⓐ syberMagneto : 백담비?
익명 : 그 미친년 말하는 거 맞음 ㅇㅇ 일 년 전엔 헌트웹에 그년 욕 많았는데 요샌 어째 그년 소식이 없네
Ⓐ syberMagneto : 그년 지금 잘나가는 김극 팀에서 남몰래 기생하는 중 ㅋ
그리고 참지 못한 내가 댓글을 달았다.
Ⓐ BabyBerserker : 납븐말하지 말아양!
헌트웹 스타인 내 등장에 곧바로 온갖 댓글이 우르르 달렸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화난 와중에도 이쁜 말투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며 장문의 댓글을 달았다.
Ⓐ BabyBerserker : 백담비 언니야가 애기버섯이 팀에 몰래 기생한다니? 미친 소리예양! 얼음공주 백담비 언니야는 팀에서 존재감 존나 커양!
얼음공주 언니야 없었으면 애기버섯이는 화염 정령 못 잡고 불타 뒤졌고양! 이후로도 얼음공주 언니야가 맨 앞에서 몸빵 안 해줬으면 애기버섯이랑 같이 사냥하던 옵바야들 여럿 죽어서 애기버섯이 엉엉 울었을 거예양!
이후로도 백담비 그녀의 팀 내 공헌이며 활약 따윌 줄줄 적었더니 거기에도 온갖 댓글이 달렸다. 뜬금없이 이번 내 활약을 칭송하는 아부부터 애기버섯이 전직 아이돌 외모에 홀렸냐는 비아냥까지 다양한 반응들.
그중에서도 내 눈에 유독 돋보이는 것은 한 닉네임과 그녀가 작성한 댓글이었다.
Ⓐ syberMagneto : 팀원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다마는 정말로 진심을 담아 부탁하는 건데, 그 말투며 얼음공주 타령 좀 제발 그만해다오. 보면서 정말 견딜 수가 없구나······.
*******
나는 잠시 후 겪을 끔찍한 상황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제부터 환각을 겪을 예정 아닌가. 그리고 환각은 늘 불쾌한 상황만을 내게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 환각 속 장소를 살피고는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 내가 환각에 들어온 게 맞나? 뭔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보아하니 이곳도 게이트 안이다. 주변의 보랏빛 배경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백담비, 그녀도 내 눈앞에 있다. 현실의 상황과 달라진 게 없어서 내가 지금 환각을 겪는 건지 아니면 피를 너무 흘려서 어지러웠을 뿐인지 긴가민가하던 중이었다.
지금 이게 환각이었음이 다음 순간 드러났다.
내 입이 저절로 열린다. 환각 속 내가 백담비를 보며 소리친다.
'백담비, 허튼짓 말고 가만히 있어······!'
환각 속 나도 결국엔 나이기 때문일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는 자연스레 알게 된다.
나는 백담비 그녀를 붙잡으러 이곳에 왔다. 우리 세상을 떠나 다른 세계로 가버리려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서.
한편 백담비는 내가 이런 장소까지 쫓아왔음에 놀란 눈치다. '여긴 어떻게?' 하는 느낌.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 당황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내 분노 또한 파장처럼 그녀를 휩쓴다.
내가 벌컥 소리 지른다.
'네가 지구를 왜 떠나? 떠나려면 비각성 찌꺼기들이 떠나야지, 네가 아니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해.'
'절이 싫으면 절을 불태워야지! 좆같은 땡중놈들 죄다 숨 막혀서 뒈져버리게!'
'절을 불태워도 결국 떠나야 하는 건 똑같잖아? 중간과정은 그냥 생략하지 뭐.'
'그래서, 내가 너 납치된 거 직접 구해오기까지 했는데! 납치됐던 그곳에 이번엔 제 발로 다시 가겠다고? 제정신이냐, 진짜?'
'미안······.'
나와 대화하는 중에도 백담비는 하던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게이트를 열고 있다.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소드 월드로 떠나려는 중이다.
나는 그녀가 그러지 못하도록 방해하려 하지만 불가능하다. 그녀를 세게 밀쳐도 그녀를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이 세계에서 영체로 재구성된 우리는 서로를 해치거나 물리적인 영향을 줄 수 없는 까닭이다.
마침내 게이트가 열린다.
우리는 게이트 너머에 펼쳐진 세상을 본다. 소드 월드의 사막 같은 풍경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너무 화가 나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저딴 곳에 내 가장 친한 친구가 가서 산다고? 이럴 순 없다. 이럴 수는······.
나는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다. 내 손은 그녀의 손목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올 뿐, 그녀를 옭아맬 수 없다.
그녀의 등 뒤, 게이트가 계속해서 커진다. 소드 월드의 풍경 또한 함께 커진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웃는다. 이번에도 억지로 지은 웃음이다.
나는 그녀의 영체에서 퍼지는 약간의 설렘과 기대, 그리고 그보다 훨씬 큰 긴장과 두려움을 느낀다.
한편 백담비의 뒤에는 다른 얼음 능력자들이 늘어서 있다.
인천 각성자 수용시설의 얼음 능력자들이다. 그들도 백담비를 따라 소드 월드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중 하나를 붙잡고 따지고 묻는다.
'진짜 소월 가서 살려고요?'
'예.'
'대체 왜요!'
'왜, 소드 월드에선 얼음 능력자들이 나름대로 쓸모 있는 취급이라잖아요? 각성자 영주들이 우리 데려가려고 직접 오기까지 할 정돈데.'
'그래봤자 노예잖아!'
'노예든 뭐든, 필요로 해주는 것 자체로 감지덕지해야지 뭐······'
여기 모인 얼음 능력자들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떠나려는 걸까? 백담비도 같은 심정일까?
이내 게이트가 그들을 하나씩 하나씩 삼킨다. 나는 그들 또한 붙잡으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결국엔 백담비와 나만 이 안에 남겨진다.
내 헛된 시도들을 멀뚱히 바라보다 말고, 백담비가 어색하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뭔 부탁······'
'내 집에 컴퓨터 하나 있거든. 그 하드디스크 좀 폐기해줄래? 야동이라도 잔뜩 받아둔 건 아닌데, 헌트웹 자동로그인 설정돼 있어서. 나 그 사이트에서 뭔 헛소리 했는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그 말에 내가 일갈한다.
'사이버매그니토가 부끄럽냐?'
그리고 백담비가 중얼거린다.
'부끄럽지, 응······.'
백담비가 정신적으로 웃는다. 그 어색함 또한 파장이 되어 내게 전해지는 가운데,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겹쳐진다. 포개진다.
육체 없이 접촉한 탓에 맞닿은 입술에서는 아무런 감촉이 느껴지지 않지만 나는 퍼뜩 정신이 든다.
한편 '응, 역시 부끄러······.' 하고 중얼거리더니 그녀가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뒤돌아선다.
뒤돌아선 그대로, 그녀는 두 발짝 걸어 게이트에 들어간다. 그녀를 삼킨 게이트는 순식간에 크기가 줄어 사라진다.
잠시나마 첫 키스의 충격에 굳어있던 나는 뒤늦게 후회한다. 나도 저 안에 따라 들어갔어야 하는데.
나는 한참이나 그 위치에 혼자 서있다가 그녀의 마지막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드디스크를 부숴달라 했던가. 사 년 넘게 함께 해온 유일한 동료가 할 부탁이라기엔 너무나 하찮은 부탁이다.
내가 공간이동 하자 그녀의 집 내부가 드러난다. 그녀가 계약금으로 160억이나 받아 챙겼단 사실을 믿기 어려울 만치 허름한 집이다.
어두컴컴하고 좁은 내부, 스위치를 눌러도 전등은 켜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전기와 수도가 끊겼다며 푸념했던가.
사 년 넘게 아파트 매매를 거절당한 그녀는 주민 모두가 떠나간 이 동네에 이웃 없이 혼자 살았다. 그리고 얼마 전 수도와 전기가 모두 끊겼다.
항의하는 그녀에게 지자체는 얼음 능력자들의 수용시설에 들어가 살 것을 권고했고 그녀는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용시설에서 사느니 한국을 떠나기로, 아예 지구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자신을 노예로나마 가치 있게 여겨주는 그곳으로.
나는 백담비, 헌트웹 닉네임 사이버매그니토의 컴퓨터를 본다.
망치를 들어 올려서는 힘껏 내리친다.
고막을 자극하는 충돌음과 함께 나는 환각에서 추방된다.
*******
34화 대한각성연대 김극 - [1]
「속보입니다. 베헤모스의 예상 진로가 서울로 예상되는 가운데······」
아직도 저런 뉴스를 볼 때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베헤모스' 같은 단어가 뉴스에서 나오다니?
본디 성경에 나오는 괴물이고 뭐고, 21세기에는 그저 RPG에나 나오곤 하던 괴물 이름 아닌가. 그런 판타지스러운 단어가 잘 차려입은 양복쟁이 아나운서의 진지한 목소리로 언급되고 있다. 마치 내가 게임 속 세상에라도 빨려든 듯한 위화감이 든다.
「······오후 4시경 강준치 헌터가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게이트 내 괴수들은 게이트 바깥 각성 능력자들의 존재를 관측하고 진로를 변경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과연 강준치 헌터의 서울 도착과 동시에 게이트 내 베헤모스와 뒤따르던 괴수 군집의 이동이 멈췄다는 소식입니다. 군은 앞으로도 기회가 포착될 때마다 최선을 다해 게이트에 진입해 베헤모스의 진로를 예의주시하리라고······」
아무 생각 없이 차량에서 뉴스를 보던 와중이었다.
내 옆좌석에 앉아있던 백담비가 말했다.
"고마워요."
나는 백담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라운드걸도 날 보고 있었다.
"고맙다뇨?"
"베헤모스가 서울 향하고 있노라고 제가 보고하게 해준 거요. 최고 공적자 이름에도 제가 올랐던데······."
그날 둘이서 게이트에 들어섰을 때, 백담비는 거대괴수 베헤모스가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으며 협회를 통해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때 나는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며 옆에서 맞장구나 쳤을 뿐, 자세한 보고와 증언은 모두 그녀에게 맡겼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 또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어떻게든 각성자 헌터답게 공 세울 기회를 원하던 그녀에겐 이번 일이 무척 벅차오르는 모양이다.
사실 내가 주도적으로 증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전 그때 딴 생각하느라 베헤모스고 뭐고 제대로 못 봤다니까요?"
내 말에 백담비는 어색하게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 산만한 게 움직이는 걸 어떻게 못 봐요."
백담비는 그 거대괴수에 대해 증언할 기회를 내가 의도적으로 양보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 난 환각을 보고서 치밀어 오른 울분을 삭이느라 베헤모스가 움직이든 골든 햄스터가 움직이든 관찰할 정신머리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다시 말하는데, 정말 고마워요."
그러고서 백담비가 입 다물었고 차량에는 침묵이 흘렀다.
어색했다.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 내가 조금 시간이 흘러 입을 열었다.
"뜬금없긴 한데, 혹시 헌트웹이라고 알아요?"
백담비가 다시 나를 보았다.
"헌팅웹이요?"
"아뇨, 헌트웹."
"뭐죠. 처음 듣는데. 맞선 사이트인가요."
백담비의 무덤덤한 대답에 나는 생각했다. 이 여자 뻔뻔하기가 과연 얼음공주라 불릴 만한 수준이군.
"헌터들 모여서 잡담하거나 정보 올리는 사이트인데요. 유저 중에 현역 헌터들이 많아서 유용한 정보가 많아요. 그런데 그쪽은 그 사이트 안 들어가는 게 좋긴 하겠다. 거기 유저들이 워낙 질이 나쁘거든."
"뭐, 인터넷이 다 그렇죠."
"그렇긴 한데 헌트웹은 특히 심해요. 내가 그 사이트 활동 중에 화나는 일이 많았어요. 그 사이트에 사이버매그니토라고, 엑스맨 광팬인 듯한 미치광이가 하나 있거든요? 내가 그 사이트에서 처음 본 글이 그 미치광이가 비각성자들 싹 다 가스실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었어."
"웃기는 사람이 다 있네요······."
그리 말하는 백담비의 자세한 표정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제대로 살필 수 없었다.
그놈의 선글라스를 압수하고 싶은 충동 속에서 내가 말했다.
"웃기는 걸 넘어 아주 악질인 놈이야! 언젠가는 내가 각성자는 사이트 규칙 어기고 활동해도 정지 안 당하니 불공평하다고 항의하니까, 사이버매그니토 그 정신병자 놈이 빈정이 상했는지 나한테 엄마랑 같이 목매달고 죽으라고 폭언하지 뭡니까? 그때 나 너무 상처받아서 눈물 찔끔 나왔잖아."
"음, 인터넷에서 욕먹었다고······ 상처받으실 분은 아닌 것 같은데. 김극 씨가."
"아니 그게, 내 엄마 진짜 죽었거든요? 내가 딱히 효자는 아니어도 하필이면 돌아가신 분 가지고 패드립 당하니까 손발이 덜덜 떨리더라구."
그런 정신 나간 악질 유저가 정지도 안 당하고 몇 년째 활동할 만치 질 나쁜 사이트인즉 절대 거들떠도 보지 말라며 내가 몇 번이고 당부하니, 우리의 사이버매그니토께서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한참 지나서야 그녀가 한마디 했다.
"예전 일이니까 지금 위로하긴 뭐한 거 같은데······ 그런 말 들었다고 너무 맘에 담아두지 말고, 힘내세요."
"어, 예전 일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말했나?"
"너무 태연하게 말씀하시길래······."
차량이 멈췄다. 내가 차에서 내리니 먼저 바이크를 타고 와있던 나이토 상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굿 헌팅입니다. 인천 만세!"
나는 눈살이라도 찌푸리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천 만세."
그날 사냥은 17시 48분까지 평소보다 장시간 진행되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만월산에 도사리던 괴수들을 완전히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우리의 작전지역이 이제 다른 곳으로 옮겨지리란 것을, 그러니까 이제는 인천 각성자 수용시설 주변에서 사냥을 진행할 차례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또한, 그 주변 주민들의 눈길이 나와 그 수용시설에 집중되리란 것도.
*******
사냥을 마친 나는 그날도 운동했고, 성문영과 함께 총알에 반응하는 훈련을 거듭했으며, 그 모든 훈련을 마치고서도 귀가하지 않았다.
나와 헤어지기 전 성문영이 물었다.
"오늘도 거기 가요? 시위 방해하러?"
"어."
"이 괴물은 온종일 몸 움직여놓고 피곤하지도 않나······."
"피곤하든 말든 할 일은 해야지."
성문영이 장하다며 엄지를 치켜든 가운데 나는 공간이동을 반복했다. 예전보다 공간이동 범위가 훨씬 늘어난 지금은 걷는 대신 공간이동 하는 것도 꽤 할 만한 일이 된 바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이르렀다.
현기증을 참아낸 뒤, 각성자 수용시설과 그 주변을 보았다. 그리고 눈에 보인 장면에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도 박미형 씨와 근처 주민들이 대치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 주민들에게 다가가려다 말고 문득 그들이 든 피켓을 보았다.
거기 적힌 문구를 보고는 눈을 깜박였다.
'각성자들 인권 해치는 수용시설 유지 반대!'
'각성자들은 자유롭게 살고 싶다!'
저건 또 뭐냐? 왜 갑자기 인권 타령하는 거지?
혹시나 해서 피켓을 든 시위꾼들을 보니, 저 사람들은 내가 기억하는 이 근처 주민들이 틀림없었다. 여기 냉동고를 다른 지역으로 치우고 싶어하는 그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 사람들 전략 바꿨어요?"
내가 다가가서 물으니 박미형 씨가 눈을 크게 떴다가 한숨 쉬었다.
"이 사람이 진짜, 오지 말라는데도 자꾸 오네······ 맞아요. 저 사람들이 전략 바꿨나 봐."
"왜요?"
"김극 씨가 얼음 능력자들 감싸는 거 뻔히 아니까요. 그 사람들 위하는 척하면서 시설 치워보겠다 이거지."
나는 다시금 각성자 인권 어쩌고, 문구가 적힌 피켓들을 보았다.
"그런데 저 주장들 자체는 옳지 않아요?"
"뭐가요?"
"수용시설이 인권침해란 거요. 저도 대한각성연대 활동했으니 알지만, 얼음 능력자들 다 저기서 살기 싫어하잖아요."
각성자 수용시설을 관리하는 게 군이라서 그런가, 군 특유의 갑갑함이 저 시설에도 있다.
저 수용시설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시설 출입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외출할 때마다 상황판에 행선지와 예상 복귀시간을 적는 것이 강제된다.
심지어 통금까지 있어서 21시만 되어도 철문이 굳게 닫혀 시설 출입을 막는다. 숙박비가 공짜인데도 불구하고 괜히 다들 저 안에서 지내길 거부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내게 패드립을 했던 헌트웹 악질 유저 사 모 씨께서는 저 시설에 들어가 살기 싫은 나머지 아예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릴 정도가 아니던가.
그 환각을 보고 나니 저 시설을 보는 내 시선도 바뀐 상태다. 새삼 저 시설을 보기가 불편했다.
한편 박미형 씨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저런 시설이 있긴 있어야죠. 필요악이에요, 저 수용시설이."
"냉동고가요?"
"그래요. 저런 식으로 사람들 가둬놓고 자유도 제한하는 게 당연히 못 할 짓이지만······ 저 수용시설 없애면 저기 사는 사람들이 다 어딜 가서 살겠어요?"
박미형 씨가 자길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날 봐요. 돈 있고 나름 사회적 지위도 있는데도 아파트 한 채 못 사서 원래 세주려고 갖고 있던 빌라에서 살고 있잖아? 보통 사람들은 더 힘들죠. 아파트는커녕 다 무너져가는 다세대주택에도 못 사는 거야."
"나라에선 얼음 능력자들이 죄다 저런 시설에 모여 살길 바라니까요. 그래야 관리가 편하니까."
"그렇죠. 그래서 집주인이 별생각 없이 얼음 능력자한테 세를 주려 해도 나라에서 가만 내버려 두질 않아요. 얼음 능력자한테 세 준 집주인을 항복할 때까지 괴롭혀.
집 주변 상황이 어떻냐며 주기적으로 자꾸 뭘 보고하게 하든가, 얼음 능력자가 사는 이상 괴수 출몰위험이 큰데 왜 긴급 엘리베이터며 비상대피용품들 준비 안 했느냐고 공무원 보내서 자꾸 쪼아대든가, 여러모로 귀찮게 만들어서 못 참고 어떻게든 쫓아내게 만들더라구."
딱히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듣기 편하지가 않았다. 이 역시 그놈의 환각을 본 영향일까?
박미형 씨도 말하다가 울화가 치민 듯 언성을 높였다.
"뭐 얼음 능력자들이 여러 곳에 분산돼 있으면 여러모로 위험한 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그렇지 반쯤 억지로 한곳에 모아놨으면 시설이라도 좀 좋게 해주든가! 저 봐요, 인천은 아예 고종이 아관파천 할 때 지었나 싶은 아파트들을 어떻게 찾아내서는 새보금터랍시고 간판 걸어놨잖아. 장난해?"
"이젠 시의원씩이나 되셨는데, 어떻게 개선 못 하시나?"
내 물음에 박미형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의원 됐다고 뭘 어째? 어림도 없어요. 내가 시의원이 아니라 인천 시장이라도 주민들부터 싫어하는 시설 개선하겠다고 예산 더 타낼 수가 없어. 인도에서처럼 얼음 능력자들 다 죽이질 않는 걸 감사히 여기라고 지껄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뭐······."
하기야 내가 대한각성연대 활동하던 시절에도 저들을 위해 뭔가 해낸 기억이 없다. 핍박받는 각성자들을 위한 시위를 할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호응했던 기억도 없다.
좀비물에서 좀비 또한 사람이라며 좀비 인권을 부르짖는 시민단체는 사려 깊은 사람들로 묘사되는 게 아니라 억지스러운 위기를 자초하는 천치들로 묘사되던가?
당시 각성자를 위한 인권 활동하던 날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딱 그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날 보며 보인 눈살 찌푸리는 표정이며 경멸의 시선 따위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래서 그 시절, 내 자존감은 꾸준히 깎여나갔더랬다.
뭐, 생각해보면 새삼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각성자와 일반인들의 비율은 1/2000쯤 된다니까. 이 정도면 전체 인구 중에 5%쯤 된다는 장애인의 비율보다도 훨씬 적다.
그리고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개선이 되지 않는 마당에 그보다 훨씬 적은 각성자들 인권에 사람들이 주목할 리가.
그렇듯 각성자들이 소수인 이상, 각성자들은 투표를 하든 시위를 하든 간에 유의미한 정치적 힘을 낼 수가 없다.
누군가가 각성자 인권이 어쩌고, 했다간 수백억씩 버는 각성자들을 대체 뭐하러 더 챙겨주냐는 핀잔이나 들을 뿐이다.
그렇듯 이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절대다수의 찌꺼기들이 수가 많답시고 모든 권리를 차지하는 이 추악한 체제에서는, 나와 같은 각성자들이 무언가를 바꿔낼 수가 없다.
이 끔찍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주주의 따위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훨씬 더 올바른 체제, 그러니까 왕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왕이면 세련된 봉건 체제를 도입해도 좋을 것이다.
나 같은 각성자들이 백작이니 공작이니 한 자리씩 차지하고서 나약한 비각성자 백성들을 돌보아야 한다.
왕으로 추대할 인물도 한 명 알고 있다. 강······.
하여간 스트레스를 받으면 별 이상한 망상이나 하게 되는 법이다. 제기랄.
나는 머리를 잠식한 이상한 생각들을 애써 떨쳐낸 뒤, 시위하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그들을 계속 바라보니 내 무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그들은 떠나갔으며, 각성자 수용시설은 비로소 평화를 되찾았다.
박미형 씨가 날 보며 잔소리했다.
"오늘도 너무 고생했는데, 내일은 정말 오지 마요, 응? 김극 씨 매일 엄청 고생하는 거 아는데 부담스럽게 진짜 왜 이러는 거야······."
그로써 비로소 내 일과가 끝났다. 또다시 공간이동으로 집에 돌아오니 밀려온 현기증을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떻게든 씻고 잠들기 위해 누워있던 중이었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발신자를 보니 아는 번호였다. 평소 나를 담당하던 인천 시청 공무원. 늦은 시간에 뭔 일인가?
피곤한 가운데 일단 휴대전화를 들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늦은 시간에 죄송한데, 지금 와주실 수 있으세요? 급한 일이에요!」
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공무원이 부르는 것이 일단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잠들려다 말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
35화 대한각성연대 김극 - [2]
"인천 각성 능력자 새보금터에 가라고? 각성자 수용시설 말하는 거 맞죠? 예, 갑니다······"
피곤해서 공간이동 따윈 시도할 수 없는 마당에, 지나가던 택시에 겨우 올라탈 수 있었다.
공무원이 말한 장소에 도착하니 웬 시끄러운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인천 각성자 수용시설을 보았다. 이름만 거창할 뿐, 각성자 수용시설은 담장으로 감쌌을 뿐인 아파트 단지다.
거기 아파트의 8층 발코니에서, 한 중년 남자가 난간에 한쪽 다리를 걸친 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굴고 있었다. 자살 소동일까?
그 중년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와봐, 새끼들아! 나한테 뒤지고 싶으면 다가와 보라고! 콱 심장 얼려줄까!"
그 협박이 무서운 걸까? 여기 모인 경찰들은 저 남자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담장 뒤에서 대기 중이었다.
보아하니 날 부른 이유가 이 상황 때문일 것이었다. 나는 경찰에게 다가가 물었다.
"뭔 일이에요?"
그리고 경찰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날 알아본 경찰이 눈을 치켜떴다.
"김극 헌터? 김극 헌터가 여긴 왜 왔습니까?"
"공무원이 여기로 오래서 왔는데요."
"초에운이 아니라 김극 헌터를 보냈다고요? 아니, 초에운이 와야 하는데······"
초에운이면 나도 아는 이름이다.
인천시에서 계약한 캄보디아 출신 A급 헌터,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그 시체를 본 적이 있다.
"초에운 씨면 저번 인천 게이트 사건에서 전사했죠."
"어, 초에운이 죽었다고요?"
"예. 저보다 먼저 역장체에 맞섰다가 배 갈라지고 목 베여서."
"아니, 초에운이 아니면 안 될 건데······"
경찰이 왜 저리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따로 조사해봤기로 초에운은 나와 같은 신체강화자였지 아마. 그렇다면 그 양반이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못 해낼 것 같진 않은데, 왜 초에운이어야 한다는 걸까.
"일단 뭔 일인지 설명이나 해줘요. 초에운 씨한테 뭐 시키려고 그랬는데요?"
내 말에 경찰들은 여전히 발코니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중인 중년 남자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 지금 소동 벌이는 거 보이죠?"
"예. 자살 소동 아닌가?"
"그냥 자살 소동이 아니고 자기 화났으니까 다들 자기 말 들으란 식의 자살 소동이에요. 저 사람이 지금 화가 많이 나서, 단순히 자살하겠다고 난리인 게 아니라 자기 날뛰는 거 방해하는 사람 다 죽일 거라고 협박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저 사람이 얼음 능력자라······"
"그래서 누구 다치지 않으려면 각성자가 나서야 하나 보네. 그런데 경찰에는 각성자 없습니까?"
"한 명 있죠. 얼음 능력자."
"그럼 그분 부르면 되지 않나?"
내 물음에 경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저 사람이라······"
경찰은 발코니의 중년 남자를 가리켰고 나는 눈매를 좁혔다.
주변을 보니 군인들도 뭔가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원래 여기서 근무하던 군인들은 저번에 다 죽은 상황 아닌가. 새로 보충된 인원들은 이런 상황에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구경만 하기 뭐 했던 내가 저 앞으로 나섰다.
시설의 대문을 넘어 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더 다가오면 죽이겠다고 소리치던 중년 남자도 날 알아본 듯했다.
"김극?"
"예, 인천 만세, 헌터 김극입니다."
나를 본 중년 남자는 당황한 눈치였다. 신체강화자 특유의 시력으로 저 표정을 살피건대, 지금 그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설마 내가 올 줄 몰랐던 듯 매우 난처해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더욱 난처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지금 이러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혹시 시위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중년 남자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시위하는 거, 맞아!"
"왜 시위하시는 거죠?"
"그저께부터 이 새끼들이 점호를······ 점호를 시키잖아!"
점호?
"점호라면 교도소에서 인원 점검 하려고 시키는 그거요?"
"그래, 군대랑 교도소에서 하는 그거! 저녁마다 자기 전에 점호를 시켜! 복도에 거주민들 나와서 일, 이, 삼, 이렇게!"
"점호 하는 게 그리 안 좋습니까?"
"당연히 안 좋지! 내가 죄수야? 일하고 돌아와서 씻고 담배 좀 피우러 나갔다 돌아왔더니 왜 점호 빠졌느냐고, 너 기다리느라 사람들 다 못 눕고 대기 중인데 미안하지 않냐고 당직사관 새끼가 지랄하는 게 말이 되냐구?"
저런 수용시설에서는 얼음 능력자들이 인원수대로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걸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던가?
그리고 저번에 군인들이 떼죽음을 당한 상황이라, 수용시설을 관리하는 군인들 입장엔 형식적으로라도 더 철저해진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던 듯했다. 그래서 수용시설에는 귀찮고 짜증 나는 절차 하나를 더 추가한 모양이요, 그리하여 저 남자가 분노해 날뛰게 된 듯했다.
내가 가만히 상황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가운데, 뒤에서 경찰 하나가 작게 말했다.
"그냥 공간이동 해서 끌고 내려오시면 안 됩니까?"
"아니, 억울하다고 시위하는 사람인데 굴욕적으로 끌어 내리면 안 되죠. 화나서 여러분한테 능력 난사하면 내가 막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 뭐 그렇죠······."
난 다시 중년 남자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도와줄까요? 억울해서 지금 이러시는 거 같은데 아는 기자라도 불러볼까요? 하지만 제가 대한각성연대 활동해봐서 아는데 기자들이 얼음 능력자 관련 일론 기사 제대로 안 내줘요."
"기자는 됐고, 나 이 좆같은 곳에서 내보내 줘! 아니면 점호니 뭐니 이 좆같은 짓거리들 좀 멈추든가!"
그리고 나는 저 요구사항을 어떻게 들어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군인도 아닌 내게 점호를 멈추게 할 능력은 없을 것 같고······.
최대한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피곤한 나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당장 생각나는 단순한 방법을 말했다.
"여기서 사는 게 답답해서 그러시는 거면, 당분간 우리 집 와서 지낼래요? 당장 안 쓰는 방 하나 있는데!"
그리고 내 제안에 중년 남자는 당황한 것 같았다.
"아니, 그 정도로 친절하게 도와달라는 건 아니고······ 뜬금없이 그게 무슨······"
"아냐, 와도 돼! 나 혼자 살아! 지금 짐 쌀래요?"
내가 그리 소리쳤고 중년 남자는 내 제안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긴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로서는 저번에 자기네를 지키느라 목이 반쯤 잘리기까지 했던 헌터를 늦은 시간에 고생시키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었다.
결국 중년 남자는 한동안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항복했다.
"씨, 내가 미안해······."
그는 이내 소동을 멈췄다. 난간에서 발을 빼더니 자기 집에 들어가 버렸다.
이후로는 경찰들이 들어가 그를 설득했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김극 씨, 도와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경찰보다 나으시네······"
나한테 감사하던 경찰에게 나는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이거 제가 해야 하는 일 맞아요?"
"예?"
"아니, 이거 아무리 봐도 헌터가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절 부른 건지 당최······ 이렇게 경찰 하는 일에 제가 끼어도 되는 거 맞습니까? 혹시 뭐 잘못되면 위법성 조각 사유, 그런 거라도 있나?"
내가 이래 봬도 형법 시간에 대놓고 잠든 적은 없는 놈이다. 원래는 형법 수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는데, 형법 강사가 나한테 공부 이렇게 열심히 하는 줄 몰랐다며 커피 한 잔 뽑아준 뒤로는 수업 시간에 딴짓하기 미안해져서 나름대로 수업을 열심히 듣기까지 했다.
그래서 알게 됐기로 이런 일에 나 같은 헌터가 나서면 안 된다.
헌터는 총을 들고 다닐 뿐 어디까지나 형법상 사인 아닌가. 자기가 경찰인 줄 알고 나대면 안 되는 것이다.
일단 내가 배운 바에 따르면 그랬지만, 피곤해서 따지고 들기도 귀찮았던 데다 공무원이 날 괜히 부르진 않았으리라 생각해서 일단 나서보긴 했다.
그런데 역시 찜찜한지라 새삼 확인하려 드니, 경찰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흐렸다.
"글쎄요······ 전 잘······"
담당 공무원한테 물어봐야 하나, 하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뭐야. 김극 씨가 여기 왜 있어요?"
박미형 씨였다. 정말로 '네가 여기 왜 있냐'는 표정이길래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담당 공무원이 여기 오라고 했는데요."
"공무원이? 공무원이 김극 씨를 왜 불러?"
"저야 모르죠? 부르니까 중요한 일이겠거니 하고 왔는데 정작 저 부른 공무원은 안 보이고······ 뭔 상황인지 당최 모르겠네요."
내 대답을 들은 박미형 씨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저 아줌마가 주먹을 꽉 쥐는 것이, 왠지 몰라도 화가 난 것 같았다.
화가 난 그대로, 박미형 씨는 억지로 지은 게 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김극 씨, 오늘도 사냥했죠? 꽤 늦게까지 일하다가 돌아온 걸로 알고 있는데······."
"예, 뭐."
"그럼 지금 피곤해 죽겠네? 어서 들어가 봐요. 어서, 어서요. 내가 타고 온 차에 김극 씨 태워주라고 말할 테니까······."
억지로 지은 그 미소는 점차 굳어가고 있었는데, 나는 왜 그리 화가 났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확실히 늦은 시간에 너무 피곤해서 오지랖을 부릴 여유가 없었다.
나는 박미형 씨가 내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좌석에 등을 대자니 저 뒤에서 박미형 씨의 고함이 들려왔다.
내가 박미형 씨를 만난 뒤로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성난 고함이었다.
"미친 새끼야! 네가 제정신이야? 돌아버린 거야 진짜?"
휴대전화에 대고 뭐라 외치는 박미형 씨를 놀라서 바라볼 때 차가 출발했다.
차가 꽤 멀어질 때까지, 박미형 씨의 고함은 계속해서 귀에 파고들었다.
*******
자고 일어나서도 어제 있었던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담당 공무원을 포함해 그 누구도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았던 탓이다.
대체 무슨 일이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나는 헌트웹에 접속했다.
Ⓐ BabyBerserker : 언니 옵바야들, 언니 옵바야들! 애기버섯이 질문 있는데양!
그러고는 어제 있었던 일을 꽤 상세하게 적어서 올렸더니, 곧바로 댓글이 여럿 달렸다.
Ⓑ GoodHunter : 어, 그거 구급콜······.
Ⓐ BabyBerserker : 구급콜이 뭐지양? 구급 하고 붙은 걸 보니 긴급한 일로 헌터 부르는 제도인가양?
Ⓑ GoodHunter : 아뇨, 구급차 할 때 구급이 아니라 9급 공무원 할 때 9급입니다. 9급 공무원이 헌터 불러낸다고 구급콜이에요
뭔 소리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제 박미형 씨가 포효했듯, 3자가 보기에도 화날 만한 일인 것 같았다.
Ⓐ syberMagneto : 비각성 쓰레기들이 진짜 미쳤음?
익명 : 이거 진짜임?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익명 : 김극한테 구급콜? 인천시 미쳤나
댓글 달리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그 반응들은 어째 죄다 비슷했다. 다들 황당하거나 화가 난 듯한 반응.
그놈의 구급콜을 내가 당했단 사실이 저들의 반응을 저토록 격렬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놈의 구급콜이 뭔지 알아보기 위해 검색해 본바, 저들의 반응이 대강 이해되었다.
Ⓐ syberMagneto : 거기 시청 공무원들 원래부터 다 죽이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진짜 다 죽이고 싶네
구급콜이란 악습이 있다.
관청에서 각성자 인력이 급히 필요할 때, 지자체와 계약한 각성자 헌터를 불러내어 일을 시키는 악습이다.
예전과 달리 요새는 긴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지자체와 경찰과 소방 쪽이 전부 합심해서 대응해야 한다. 그래서 예전보다 각 기관은 서로 긴밀히 연락하며 도움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경찰 혹은 소방 쪽에 각성자가 긴급히 필요할 때, 지자체에서 자기네와 계약한 각성자 헌터를 보내 일을 시키는 경우가 있다. 각성자 범죄에 대응해야 할 경우라든가, 민가에 소수의 괴수가 나타났을 때와 같은 경우다.
또한 나도 진작 눈치챈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은 당연히 불법이다. 애초에 헌터는 지자체 소속이 아니라 협회 소속이요, 죽어도 보상금 한 푼 못 받는 외부인력이라 공무원이 뭔가를 직접 지시하는 구조가 아니다.
이번 일처럼 경찰들의 일인 경우는 특히 그렇다. 형법 강사가 가르쳤듯 헌터는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이므로 경찰이 하는 일에 나섰다가 누굴 다치게라도 했다간 법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지자체의 높으신 분들은 헌터에게 지시 내리는 역할을 하급 공무원에게 떠맡긴다. 일이 잘못됐을 때 책임질 수 없는 최하급자에게 책임을 넘겨버리는 셈이다.
그래서 8급이나 9급 공무원 등이 각성자 헌터에게 연락하여 위법적인 임무 지시를 내리게 되는데, 9급 공무원이 각성자를 부려 먹는 게 워낙 임팩트가 커서 구급콜이라 불린다고.
Ⓐ BabyBerserker : 아무도 애기버섯이한텐 그런 거 있다고 안 알려줬는데양?!
익명 : 그야 네가 강준치만큼이나 이런 일 당할 리가 없는 사람이라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던 거지 애기버섯아······.
Ⓐ 돌머리청년 : 닉네임 돌머리버섯으로 바꿀래?
그리고 내가 이런 일을 당했단 사실에 다들 황당해하는 이유도 알게 됐다. 모든 각성자 헌터들이 이런 갑질을 당하는 것은 또 아니란 것이다.
Ⓐ 엘마야캐요 : 애당초 구급콜은 서울 공무원들 전용 스킬인데? 어째서 인천에서 그랬지?
Ⓐ BabyBerserker : 왜양? 서울 종자들이 간악해서인가양?
Ⓐ 엘마야캐요 : 아니; 서울쯤 돼야 A급 헌터들이 계속 계약 연장하고 싶어서 공무원들 눈치를 보니까;
Ⓐ 엘마야캐요 : 그것도 사냥에 자주 빠졌거나 실적이 안 좋거나 해서 계약연장 안 될까 봐 불안한 A급 상대로나 갑질하지, 실적 좋은 A급 상대로는 서울에서도 구급콜 따위 시도 못 해
Ⓐ 엘마야캐요 : 그런데 인천에서 딴 헌터도 아니고 김극을 상대로 구급콜? 내가 선배로서 이게 뭔 상황인지 설명해 주고 싶지만 이건 내가 봐도 말이 안 된다 진짜
저 선배 헌터가 부연하길, 인천과 같은 지방의 공무원들은 A급 헌터들을 상대로 구급콜 따윈 시도할 수 없다고 했다.
서울과 달리 지방은 각성자 헌터들에게 열악한 환경이라,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 각성자 헌터가 눈치를 봐야 하는 게 아니라 지자체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그런데도 각성자 헌터들에게 가장 기피되기로 악명 높은 인천에서, 날 상대로 구급콜 따윌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것이다. 내년 계약 갱신을 위해 받들어 모셔도 모자란 와중에 '감히' 어찌 그럴 수 있느냔 셈이었다.
Ⓐ 돌머리청년 : 지방에서도 구급콜 하는 경우 있긴 하다더라
Ⓐ 엘마야캐요 : 난 처음 들어보는데?
Ⓐ 돌머리청년 : 그쪽은 한국인이니까 모를 만하지. 한국인 A급한텐 못 그러고, 외국인 A급 상대로 갑질하는 거니까
Ⓐ 엘마야캐요 : 외국인 A급 상대로 그런다고?
Ⓐ 돌머리청년 : 외국인들은 뭐가 뭔지 잘 모르잖아? 헌터가 할 일 아니더라도 공무원이 일단 시키면 계약에 있는 내용이겠거니 하고 따르니까 막 부려 먹기 편한 거지
Ⓐ 돌머리청년 : 그러고 보니 인천에 그 캄보디아 A급 죽지 않았나? 원래는 그 캄보디아 각성자 부려 먹다가 이번엔 저 친구 부른 건가 혹시?
Ⓐ syberMagneto : 비각성 쓰레기들이 진짜 미침??
계속해서 상황을 해석해보고자 애쓰는 듯한 댓글들이 우르르 달리는 가운데, 정신적으로 피곤해진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쯤 되니 나도 슬슬 상황이 이해되었다.
경찰들이 초에운이 아니라 왜 내가 왔느냐고 물어봤던 사실로 짐작해보건대, 본디 인천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면 캄보디아 출신 A급 헌터 초에운을 불러와 부려 먹었으리라(확인해 보지 않아도 인천에 잠입한 서울 종자들의 소행이리라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양반은 저번 게이트 사건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래서 경찰에서 연락해왔을 때 마침 당직 근무 중이던 내 담당 공무원은 초에운 씨를 보낼 수가 없었고, 다른 각성자 헌터라도 대신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와중에 내 담당 공무원은 스무 살쯤 된 놈이다. 군대도 안 다녀온 고졸 사회초년생. 나 역시 그때는 그랬지만 그 나이에는 뭐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허락도 안 받은 채 그냥 저지르고 보는 경우가 잦다.
아마 그놈은 자기가 하는 일이 합법인지 아니면 관례에 불과한 악습인지도 잘 몰라서, 인천시와 계약한 헌터면 당연히 보내도 되는 줄로만 알았을지도 모른다.
실제 이유야 어느 쪽이건, 내 담당 공무원은 이미 죽은 초에운 대신 날 현장에 보냈다.
그리하여 나를 본 경찰들은 뭔가 잘못됐다 싶었겠지만 정확히 뭐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는 알지 못해서 대충 상황이 흐르다가, 어영부영 상황이 끝났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박미형 씨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고는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으리라.
Ⓑ GoodHunter : 아니, 이건 너무 심각한데요. 어제 우리 거의 18시까지 사냥했잖습니까? 쉬는 날에 불러도 너무 화날 텐데 목숨 걸고 사냥했으니 푹 쉬어야 할 사람 부르는 건 말이 안 되죠
Ⓐ syberMagneto : 이건 가스실론 모자라고 삼족을 능지처참해서 죽여버려야지
Ⓐ syberMagneto : 아니면 구족을 참수해서 광화문에 효수하든가
익명 : 저 컨셉충이 옳은 말을 하는 경우도 다 있네 ㅠ
Ⓐ syberMagneto : 하여간 백담비 그 얼레기도 당한 적 없는 일을 저 잘난 인간이 당할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네? 어이가 없어서 진짜
Ⓢ Kang : 여전히 갯강구들 하는 짓 보면 답답해서 숨이 콱 막히네······.
Ⓢ Kang : 내가 서울에 있으라고 돈만 안 받았으면 바로 쳐들어가서 다 뒤집어 엎어버리는 건데, 누가 나 대신 잠시 베헤모스 좀 막아줄 사람?
심지어 강준치 같은 거물까지 나타나서는 이번에 내가 겪은 일을 성토하던 중이었다.
계속해서 내가 당한 일에 대해 온갖 글이 올라오던 헌트웹에, 또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익명 : 벌써 이번 일 기사 떴다 ㅎㄷㄷ
36화 대한각성연대 김극 - [3]
그 말대로 이번 일을 다룬 인터넷 기사가 이미 올라와 있었다. 딱 보니 제목부터가 자극적이기 그지없었다.
- 인천시, "헌터 김극"에 있을 수 없는 공무원의 '갑질'
'인천 탈환 프로젝트'의 주역으로 유명한 헌터 김극을 상대로 인천시 공무원이 불법적인 업무 외 지시를 내려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16일, 헌터 김극은 10시부터 18시까지 진행된 목숨 건 소탕 작전을 마친 상태였으며 그로 인해 피로한 가운데 (······) 22시 40분경 걸려온 인천시 공무원의 업무 외 지시 전화에 응해 (······)
논란이 된 공무원 A 씨는 "김극 헌터와 인천 시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 그러나 관련 지시가 불법인 줄 인지하지 못했다. 또한 그날 김극 헌터가 늦게까지 작전에 참여해 피로했던 것은 인지했지만, 당시 야간이라 상급자에게 조언을 구할 수 없었으며 긴급상황인 이상 당직자로서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라며 해명했다.
보아하니 대놓고 피해자가 누구고 가해자가 누군지 설정된 비난조 기사였다. 내 담당 공무원을 아주 반쯤 죽여놓겠다는 어떤 의지가 느껴질 지경이다.
이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도 올라왔길래 보니 죄다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박미형 씨가 아는 기자들에게 바로 연락하여 작성케 한 기사들이 틀림없었다. 이걸 보니 그날 박미형 씨가 제대로 화가 났구나 싶다.
한편 이대로 끝이 아닐 것 같다.
헌트웹에 상주하는 기자도 꽤 있던가? 내가 방금 작성한 글을 보고서 기사를 쓸 놈도 꽤 있을 것이다. 이대로면 아예 뉴스에도 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그리되면 인천 망신인데, 앞서 작성한 글을 지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생각해보면 나 하나 맘 편해지자고 그냥 좋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인천시와 계약할, 나 이외의 다른 각성자 헌터를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초에운에 대해 생각했다. 의외였다. 설마 외노자랍시고 갑질이나 당하고 있었을 줄이야.
또한 서울의 일부 각성자 헌터들 또한 비슷하게 부려 먹히고 있다던 모양인데, 이것 또한 충격적이었다.
A급 헌터쯤 되면 모두 남 눈치 따윈 보지 않고서 선민의식을 가슴에 품은 채 잘들 사는 줄 알았는데, 다 그렇지는 않았단 말이지.
정말이지 남 일 같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이 중소기업에서 상사에게 갑질 당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느낌······.
내 주변 사람이 저런 일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 맘이 불편했다. 내가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한 구급콜보다는, 그쪽이 훨씬 내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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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이라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있자니, 과연 이번 일을 다룬 기사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올라왔다. 내가 상당한 유명인사요, 인천에 격렬한 애정 표현을 해왔단 것도 유명해서 사람들이 보기엔 저 기사 내용들이 상당히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Park1994 : 오백억 넘게 받았으면 당연히 부르면 달려와서 일해야지, 다들 재산 수백억짜리 부자 걱정해주고 지랄이네 ㅉㅉ
그 기사들의 댓글을 보면 위와 같은 서울 종자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그런 댓글에는 비추천이 수두룩하게 붙었고, 대부분의 댓글은 인천시와 그 공무원에 대한 비난이었다.
5my지저스 : 인천 만세, 인천 만세 하니까 정말 호구 잡았구나 여겼나 보네? 하여간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
비회원12 : 인천 공무원 다 합쳐도 지난 반년 동안의 김극 공헌만도 못하지 않나······ 공무원들 싹 다 월급 압수해서 김극 줘라
비회원14 : 내년에 인천시 김극 헌터랑 계약연장 실패하면 이번 일 때문인 줄 알고 관련자들 싹 다 참수해야
이 와중에 나라고 해서 기사나 읽으며 한가롭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기자며 내 담당 공무원 등을 계속 상대해야 했다.
"아, 임희선 기자님? 예, 뭐 맘이 불편하죠. 그래도 여전히 인천 만세 할 맘이 드냐고요? 당연한 말씀을 다 하시네. 결국 이건 서울의 악습이 인천에 번진 불운한 사태 아니겠습니까. 다 서울 종자들이 문젭니다······"
"······그런데 각성자 헌터들이 이런 갑질을 당하는 건 확실히 절대 그냥 넘길 수 없죠. 돈을 많이 받든 어떻든 간에 다들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어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악습 박멸을 해야······"
"영태 씨? 어, 저도 기사 봤죠. 그래, 미안하면 됐어. 설마 그쪽이 악의적으로 날 노예 취급하려던 것도 아닐 텐데 내가 뭘 어쩌겠어. 당분간 맘고생 좀 할 텐데 결국 시간 지나면 다 잊힐 테니까 어떻게든 맘 추스릅시다. 아니, 공무원 그만두진 말고. 공무원 그만두면 일할 데는 있나······"
이 와중에 인천 시청도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오후에는 공사다망하실 인천 시장께서 내 집에 직접 강림하시어 내게 사과의 말씀을 건넸다.
"정말 미안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절대 없을 거라 약속드리고요. 이번 일 저지른 그 공무원에 대해서도 엄벌을 약속드립니다."
"어, 저 그 친구랑 친한데요. 그 친구 엄벌하면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엄벌하더라도 그 친구 말고 더 높으신 분을 벌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니까 그 친구 한 명이 주제넘었던 게 아니라 이미 공무원들 사이에 만연하던 악습 같던데요. 제가 전화로 해명 들어보니 그 친구, 업무 인수인계받을 때 그게 불법이란 말도 못 들었다고 하더군요."
시장께선 그저 난처한 듯 죄송합니다,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답답함을 느낀 내가 물었다.
"그놈의 악습은 대체 왜 있는 거랍니까? 공무원들이 계약한 각성자들 상대로 군기라도 잡으려는 건 아닐 테고."
내 날 선 질문에 시장은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나와 자기 둘뿐임을 확인하고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각성자 시세가 너무 올랐지 않습니까? 각성자가 필요한 일은 많은데, 당장 땅 지키고 사람 지킬 각성자 헌터 고용할 돈도 부족해서 쩔쩔매는 마당에 공기관인들 각성자를 따로 고용할 여유가 안 된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
대충 뭔 소리인지는 알 만했다.
게이트가 열리면서 초인 각성자들이 탄생한바, 사회 각 곳에 능력 좋은 각성자들이 배치됐을 것 같지만 현실이 그렇지가 않다.
경찰서에도, 소방서에도, 심지어 군대에서도 신체강화자나 역장 외골격 능력자 따윌 특채해서 부려 먹지 못하고 있다. 그놈의 각성자 몸값이 너무 비싼 까닭이다.
강력하고 능력 좋은 각성자라면 헌터를 하거나, 위험한 일을 하기 싫다면 차라리 어디 고급 아파트 단지 경비 일을 할 일이지 공무원 박봉을 받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내가 여동생을 면회하러 간 교도소만 봐도 그렇다. 거기 수감 된 각성자 죄수들을 생각하면 혹시 폭동이라도 일어났을 때 대응하려거든 교도관 중에 실력 있는 각성자가 있어야 할 테지만, 그곳에서 각성자일 법한 교도관은 본 적이 없다.
하기야 예나 지금이나 교도소는 만년 적자인 시설인데, 무슨 수로 큰돈을 줘가며 각성자를 고용한단 말인가? 결국 게이트가 열리기 전이나 이후나 교도소에서는 평범한 공무원인 배 나온 아저씨 교도관들이 스트레스받으면서 근무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정이 어려우니 이해해달란 염치 없는 말씀은 드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김극 씨가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인천을 위해 공헌한 바가 얼마나 많습니까? 앞으로도 얼굴 붉히지 않고 좋은 관계 맺으려거든 말로만 그칠 게 아니라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엄벌까진 원하지 않으신다니, 보상을 중점적으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은 논의를 거쳐서······"
뭔가 보상을 해주긴 해준다니 확실히 맘이 누그러지기는 했다.
난 보상보다는 추후 이런 일이 없도록 유의 바란다, 뭐 이렇게 대협처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러고 보면 진작에 계획해온 일이 하나 있다. 그에 관련해 말을 꺼냈다.
"그 보상 말인데, 혹시 개인적인 부탁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히 개인적이어도 괜찮죠. 어디 말씀해보세요."
내가 한 제안에 시장께선 조금 생각해보더니 딱히 어렵지는 않으리라 대답했다.
사실상의 허락이라 판단한 나는 내친김에 내 계획을 확정 지을 겸 기자들에게 전화까지 걸었다. 그들에게 내 계획을 광고했다······.
그리하여 내가 원하던 기사가 작성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박미형 씨의 전화였다.
「김극 씨, 초고층 아파트 지을 거라고요? 수용시설 바로 앞에?」
"예. 저 부자인 거 실감 나죠?"
*******
Q. 인천 각성자 새보금터 앞에 초고층 건물을 건설할 예정이라는데 사실인지?
- 맞다. 구두 약속이긴 하지만 인천 시장님께 건설 허가 약속도 이미 받은 상태다. 가능하면 40층 이상으로, 현재 가진 돈이 부족하면 대출이라도 받아서 건설할 것
Q. 현재 시멘트와 철근값이 치솟아 건설비가 만만찮을 텐데, 이미 지어진 건물을 사들이는 게 아니라 굳이 새로 지으려는 이유가 있는지?
- 입주민을 내 뜻대로 받기 위해서다. 정확히 말하자면 빙정 능력자들, 소위 얼음 능력자들도 입주민으로 받아들일 계획이다. 이미 세워진 아파트를 구입했다간 기존 거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힐 테니 그러기가 어렵다. 누군가 반대할 염려가 없도록 아예 새로 세울 것
Q. 빙정 능력자들에게 유독 온정적인 듯한데 이유가 있다면?
- 내 여동생도, 팀의 동료도, 평소 날 자주 신경 써주셨던 박미형 시의원님도 빙정 능력자다. 그 밖에도 빙정 능력자 지인이 많다. 또한 수년에 걸친 대한각성연대 활동으로 그들의 처지를 잘 아는바 (······)
유감이지만 다른 지역 얼음 능력자들까지 한 지역에 몰리는 것은 곤란하다는 걸 알고 있다. 기존 인천 거주가 확인된 얼음 능력자 위주로 세를 주든 입주권을 주든 할 예정이다. 그러니 해당 지역에 지금보다 빙정 능력자가 늘어날 염려는 없으리란 걸 미리 밝히고 싶다.
Q. 그리 세운 아파트에 김극 헌터 본인이 직접 거주할 것임을 강조하던데, 근처 주민들을 배려하는 것인가?
- 맞다. 내가 그곳에 직접 거주하리란 사실이 중요하다.
Q. 자세한 설명 바란다.
- 게이트 내의 괴수들은 게이트 바깥 각성자를 보고서 근처에 게이트를 열지 말지 결정한다고 들었다. 강력한 각성자인 내가 있다면 게이트 내 괴수들이 빙정 능력자들을 보고서도 게이트를 열기 전에 고민할 것.
설령 근처에 게이트가 열리더라도 내가 가장 먼저 출동에 나설 수 있게 되는데, 그로써 괴수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면 근처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현재 인천 각성자 새보금터 앞 근처 주민 분들의 시위가 잦은데, 그분들에게도 이번 내 계획이 도움 될지도 (······)
*******
「아니, 그래서 그 건물 짓는 데 전 재산 다 털어 넣을 예정이라고요?」
"예."
「미쳤어요?」
박미형 씨의 물음에 나는 쿨하게 대답했다.
"돈이야 더 벌면 되지. 저 계약금 말고도 사냥 나설 때마다 돈 잔뜩 받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미쳤어, 진짜! 수용시설 앞에 건물 세웠다간 그거 건설비나 챙길 수 있는 거 맞아요? 아무리 봐도 돈 날리는 것 같은데······」
"뭐, 자선사업 한다 여기면 되겠죠?"
「자선사업 한다 여기는 게 아니라 진짜 자선사업이라서 문제고 전 재산 들여서 그러니까 더 문제죠! 아니, 나도 자선활동 좀 해본 적 있지만 그리 막무가내로 그런 적은 없는데, 진짜 왜 그러는 거야?」
열을 내는 박미형 씨를 보니 정말로 당황한 것 같았다. 내가 얼음 능력자들을 위해 뭔가 나서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나는 딱히, 이번 일로 돈을 쓰는 게 아깝지 않다.
왜냐하면 남들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름 아닌 내 동포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백담비는 헌트웹에서 본인이 잘나가는 A급 헌터인 것처럼 행세한다. 어쩌면 그녀는 단순히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A급 헌터들에게 자신을 이입하고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는 지자체와 계약하고서 A급 헌터로 활약하리라 믿었던 그녀 아닌가. 자신을 정말 A급 헌터라 여기고서 활동하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과 정신건강에 도움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녀는 헌트웹에서도 A급 배지를 단 인원들에게만 친한 척하며 강력한 각성자들과 동질감을 공유하는 것일지도.
한편 나는 그녀와 반대다. 나는 헌터 생활한 기간보다 대한각성연대에서 활동한 기간이 훨씬 길다.
그 기간, 나는 '하찮은' 각성자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그들의 입장에 공감했다. 그래서 헌터 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본인이 각성자란 사실에 주눅까지 들어있던 쪽이다.
그리고 강력한 각성자로서 수백억을 쓰고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따윈 느끼지 않을 만치 잘나가게 된 지금은 당연히, 나는 헌트웹의 잘나가는 A급 헌터들에게도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강하고 약한 모든 종류의 각성자가 남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다.
얼레기든 S급 강준치든, 저 모두가 내 동족이요 동포라고 여기고 있다. 각성자라면 뭐 하는 사람이든 모두······.
동포 하나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 라운드걸, 백담비.
「저기, 김극 씨? 이번 기사 보고서 연락 드리는데요. 혹시······」
"아, 입주권 문의하시려구?"
「예, 괜찮으시면······.」
애초에 나는 그녀가 출연한 환각을 보고서 이번 계획을 꾸린 바였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잘됐네요. 내가 먼저 이번 일로 전화하기엔 지인한테 옥장판 강매하는 느낌이라 좀 그랬거든? 잘 될지 어떨지 몰라서 더욱 그래요.
아직 첫 삽도 안 뜬 상태지만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번에 지을 아파트 주변 인프라는 딱히 기대하면 안 될 거예요. 아파트 안에 마트랑 편의점은 들여놓을 계획이긴 한데······"
어린 시절, 내 아비는 툭하면 애국 타령을 하곤 했다.
내가 일본 만화를 보다가 들키면 매국노라며 지랄하질 않나, 한국 축구팀이 경기를 뛰기만 하면 축구에 관심 없어도 반드시 보라며 밤중에 깨우질 않나. 국가에 세금도 어떻게 덜 내려고 별짓을 다 하던 주제에 가족 앞에서는 아주 독립투사가 따로 없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어릴 적부터 나는 애국심이 없었다. 한민족이란 개념에 소속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부모란 놈들이 내 스트레스의 주된 원인이다 보니 가족이란 울타리에서마저 별 대단한 소속감을 느낀 적이 없어서, 효도니 애국이니 하는 단어만 들어도 거부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래도 조국인데, 그래도 부모인데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저 역겨웠다.
그 어린 시절의 사고방식은 지금도 내게 영향을 주고 있다.
국가든 부모든, 내가 선택한 적 없고 선택할 수도 없었던 것에 아무런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의 권위 또한 인정하지 않을 것이요 그것들에 충성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들에는 기꺼이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내가 살아가기로 한 내 고향, 내가 동포로 받아들이기로 한 자들을 위해 헌신할 것이다.
수가 적은 내 동포, 각성자들······. 그들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소속감을 느껴야 할 울타리라 생각한다.
국민의 절대다수인 비각성자 찌꺼기들이 그들의 고충을 외면한다면, 같은 동포로서 나라도 그들을 위할 것이다. 비단 얼음 능력자들만 위할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무언가를 해야······.
"그래요, 응. 응. 아직 고맙다고 하긴 이르다니까? 하여간 그쪽을 위해서든 절 위해서든 잘 됐으면 좋겠네요. 인천 시장님도 이거 긍정적으로 생각하셔서 여러모로 도와주기로 하셨으니까 자기 전에 인천 만세, 꼭 외치시고······."
*******
37화 소월인 우소리 - [1]
인천을 벗어나면 모조리 야만의 땅이다. 문명과 지성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신적 황야요, 인천의 부와 명예를 질투하는 부족들의 아수라장이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면, 내가 서울에 왔다는 뜻이다.
날 태운 관용차가 달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하나라도 더 많은 한국인들을 집어삼키기 위해 오늘도 한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곧이어 웬 슈퍼가 보였는데, 그 가게에 진열된 상추와 수박을 보니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인천은 한창 식품 사막화가 진행 중 아닌가. 인천에서 채소나 과일은 대형마트에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물건인데, 여기 서울에서는 웬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그런 걸 팔고 있다니?
이래서 다들 서울에 살고 싶어 안달인 모양이지.
"잘 오셨습니다, 김극 씨! 바쁘신 와중에 불러서 정말 면목이 없군요."
목적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니 웬 양복쟁이가 날 반겼다. 딱 봐도 서울 종자에 비각성자 찌꺼기라서 대화할 가치를 느끼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가운데, 양복쟁이가 계속 말했다.
"자, 안으로 드시죠. 그 오만한 소월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낮부터 환하게 전등이 켜진 복도를 지나(이마저 보기 싫다. 이제 인천의 건물들은 대낮에 전등 따윈 켜지 않는다) 우리는 철문이 굳게 닫힌 한 방 앞에 도착했다.
철문의 유리창 너머로 한 남자가 보였다. 양팔과 두 다리가 매우 두꺼워 보이는 구속기구에 속박된 남자였다.
"알아보시겠죠? 저놈······."
물론, 사로잡힌 저 소월인을 나는 바로 알아보았다.
저번에 내가 격투 끝에 쓰러뜨린 그놈이었다. 덩치 큰 각성자 소월인.
"아시다시피 약탈하러 온 저놈들한테 대화 좀 하자고 해도 들어 먹힌 적이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소월인 각성자들 상대로 말이에요. 소월을 지배한다는······.
저놈들 상대로 그동안 대화를 시도해서 성공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백기를 들고 대화를 시도하든 선물을 싸 들고 대화를 시도하든 다 씹혔죠. 준비한 선물만 냅다 뺏겼을 뿐이지, 말은 한마디도 못 섞었단 말입니다."
양복쟁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저놈은 심지어 붙잡힌 후에도 대화를 거부하더군요."
그러나 CCTV로 당시 수용시설에서의 전투를 분석해본바, 소월인 각성자가 나한테만은 대화를 시도했다고 했다.
심지어 붙잡힌 저놈은 무기를 내려놓고 주먹으로 싸우자던 내 요구에도 응한 걸로 보아, 나만은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 같다고.
"어쩌면 딱 봐도 각성자여야만 대화상대로 쳐주는 걸까요? 딱 보기에 각성자가 아닌 것 같으면 천한 노예라 생각해서 무시하는 거고?"
정말 그렇다면 오만한 미친놈이로군. 나는 자기 말에 호응을 기다리는 듯한 양복쟁이에게 대답해줄 가치를 느끼지 못해 입 다문 채 그리 생각했다.
"아무튼 그래서 김극 씨를 부른 겁니다. 김극 씨는 딱 봐도 신체강화자겠다, 저번처럼 저놈이 김극 씨만은 대화상대로 인정할 것 같거든요. 아, 통역이 왔네요! 이제 안으로 드시죠."
철문이 열렸다. 나와 양복쟁이, 그리고 소월인 출신 통역이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덩치 큰 소월인이 나를 보았다.
그 입을 열게 하고자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바로 말했기 때문이다.
"아, 그 격투의 달인? 다시 봐서 반갑군."
덩치는 그렇게 말했다. 통역이 옆에서 번역해주기 전에도 난 놈의 소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맙소사.
놀라운 일이었지만 자칫하면 내가 신성한 인천 출신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을 염려가 있었으므로 티를 내진 않기로 했다. 그저 속으로 환각을 본 여파로 생긴 능력일까, 하고 추측했을 뿐이다.
"나도 반갑다고 전해줘요. 이렇게 붙잡힌 거 보니 유감이라 전해주고."
이윽고 나는 양옆에 통역과 양복쟁이를 둔 채 덩치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양복쟁이가 뭘 물어보라고 내 귀에 속삭이면 내가 그걸 말하고, 통역이 옮기는 기묘한 대화였다.
"이름은?"
"우소리."
"몇 살인가?"
"사백오십. 사백 이후론 정확히 세질 않아서 조금 틀릴지도 모르지만 대충 그즈음이다."
덩치는 자기가 수백 년이나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게 말이 되나?
혹시 이쪽과 저쪽의 1년이 다른가 싶어 보통 사람들은 몇 살까지 사느냐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어지간해선 스물 하고도 몇 년쯤 더 살다가 죽던가?"
그로써 저 덩치 큰 소월인이 정말 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리 오래 살았느냐 물어보니 덩치가 대답했다.
"자네나 나 같은 각성자 중에, 상처가 빨리 낫는 능력까지 생긴 경우에는 늙지 않게 된다. 이미 늙었다면 늙기 전으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그러자 양복쟁이가 내게 속삭였다.
"초재생능력을 말하는 모양이군요? 초재생능력이 있으면 노화가 멈춘다는 모양입니다. 하기야 이미 추측하고 있던 사실이니 새삼 놀라운 사실은 아니지만······"
난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불로영생하는 몸이었음을 확인받은 기쁨과 수백 년이나 살아온 강대한 각성자를 상대로 이겼단 자부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고는 양복쟁이가 질문을 이어나가기 전 입을 열었다.
"나도 질문 하나 하자. 정령도 안 늙나? 더 정확히 묻자면 인간이었는데 정령이 된 쪽도 안 늙는 건가?"
"물론 늙지 않지. 그들의 본체는 살덩이가 아니니까."
어쩐지 내 라운드걸이 몇 년 전 사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어려 보이더니 화장빨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이 역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씩 하고 웃자니 덩치가 물었다.
"격투의 달인, 그쪽은 몇 살이고?"
"아직 서른도 안 됐지."
"어리군. 그런데도 그 정도로 강하다니 무척 감탄스럽다. 그 비겁하면서도 강력한 무기가 있었는데도 내려놓고 맨손으로 싸우자고 한 건 아주 근사한 제안이었고. 비록 내가 지기는 했지만······."
"그쪽이야말로, 격투에서 밀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허리에 찬 단검을 뽑지 않던데. 승패와는 상관없이 아주 근사했어."
내가 덩치와 칭찬을 주고받는 것이 양복쟁이로선 아니꼬웠던 걸까? 그가 자기 질문이나 대신 말해줄 것을 재촉했다.
주제도 모르는 비각성 찌꺼기가 감히······.
나는 맘에 들진 않았지만 그 요구를 따랐다.
"대한민국에 귀순할 생각이 있나?"
"아니."
"어째서 귀순하기 싫은가?"
"이곳은 양 떼 주인이 주인 노릇을 안 하는 이상한 세상이니까."
"양이 뭐냐?
"이거랑 이거."
덩치는 내 옆 양복쟁이와 소월인 통역을 가리켰다.
보아하니 비각성자들을 대충 양 취급하는 것 같았다. 소월인 각성자들 사이에서 비각성자들은 가축 취급이라더니 정말인 모양인데.
다음 문답에서도 그 사실이 드러났다.
"지금까지 왜 이쪽의 대화 시도를 모조리 무시했나? 어째서 모든 교섭 요청을 무시하고 약탈하기만 한 건가?"
"양들과 대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
"비각성자와 대화할 이유가 없다는 뜻인가. 어째서 그런가?"
그리고 덩치의 대답은, '비각성자들은 천해서 말을 섞기 싫다'는 뉘앙스조차 아니었다.
"야생 양들이 모여있고 그중 몇 마리를 잡아가고 싶을 때, 양 떼의 우두머리와 대화를 시도하는 건 이상한 짓이다. 물론 야생 양들이 아니라 주인 있는 양들이었다면 그 주인과는 대화를 해야겠지만."
말 그대로 덩치는 비각성자들과 대화하는 것을 '이상한 일'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체면이 안 서는 일도, 귀족으로서 하면 안 된 일도 아닌 그저 이상한 일.
그러니까, 우리가 가축과 대화하지 않는 것이 가축들을 천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대화할 가치가 없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한 영토를 다스리는 영주가 맞나?"
"물론 그렇다."
"당신 영토에서 몇 명을 다스리나?"
"이천 마리."
"이곳 한국엔 오천만 명이 살고 있다. 인천엔 백팔십만 명이 살고 있고."
그리고 덩치는 무덤덤하게 물었다.
"양이 참 많군. 그래서?"
이 반응에 양복쟁이는 당황한 것 같았다. 저놈이 다스리는 조그만 영토와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여기 대한민국이 대단한 곳임을 알림으로써 주눅 들게 하려던 모양인데, 그 시도가 전혀 통하지 않은 탓이리라.
"혹시 거짓말이라 생각하는 건가. 내 말을 못 믿겠나?"
"믿는다. 믿는데, 그리 많은 건 야생 양들이지, 자네 소유의 양들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들 가치가 없다."
"왜 가치가 없나. 영토 내에 사람이 많아야 그 땅이 강한 것 아닌가."
"양들이 많으면 강하다니 그게 뭔 소린가?"
나라와 인구수, 그리고 그에 따른 병력 동원 따윌 말하니 덩치는 코웃음 쳤다.
"양들을 전투에 쓴다니? 왜 그런 아깝고 몹쓸 짓을 하지?"
그리고 나는 양복쟁이가 시킨 대로 스마트폰을 켰다. 테르시오 방진, 팔랑크스 방진 따위 전 근대인이 보기에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압도적일 병사 집단의 사진을 덩치에게 보여주었다. 이걸 봐도 평범한 사람들이 무리 지은 게 쓸모없어 보이냔 물음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번에도 덩치는 코웃음 칠 뿐이었다.
"양에게 철붙이를 들려주다니? 참 이상한 방식으로 철을 낭비하는군."
"어째서? 딱 봐도 강해 보이지 않나?"
내 물음에 덩치가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내가 칼 한 번 휘두르면 다 죽을 것이다. 모여있어서 단번에 전부 베어버리기 편할 것 같군."
그렇다고 하나하나 떨어져서 싸우게 두면 아예 칼 휘두를 가치조차 없는 무언가가 될 테니 역시 양에게 철붙이를 들려주는 건 이상한 짓이라며 덩치가 덧붙였다.
"저 무식한 새끼가 진짜······"
양복쟁이가 답답함을 호소했지만 나는 덩치의 말에 공감했다.
화력의 증대와 함께 밀집대형은 전근대의 미련한 짓으로 전락했다던가?
그리고 눈앞의 각성자는 3미터짜리 역장 날붙이를 휘두른다. 그 한 번의 칼질이 수류탄 이상의 위력이 있을 테고.
그러니 소드 월드에서 각성자들을 상대로 한 밀집대형이란 전술적 가치가 없는 무언가이며, 병사들을 산개시키는 것 또한 단위 전투력이 너무나도 막강한 각성자 군주에게는 소용없는 짓일 터였다.
나는 문득 이쪽 세상의 위대한 전사들, 항우와 리처드 1세를 떠올렸다. 만인지적이라던 항우는 수많은 기병과 싸우다가 결국 전사했고, 사자왕 리처드는 일개 소년병이 쏜 쇠뇌에 맞아 죽었다.
소드 월드에선 그런 불쾌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저번 그 소월인은 현대무기로 무장한 군인들마저 우습게 전멸시켰던가? 그렇듯 현대화기로도 각성자를 쓰러뜨리기 어려운데 일개 소총만도 못한 활이며 창칼 따위를 비각성자들에게 들려준들 초인 각성자들을 상대로 효용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이유로 소드 월드에서 비각성자들을 병사랍시고 무장시키는 것은 아무런 전술적 가치가 없는 일로 통하는 것 같았다. 전투는 순전히 각성자들의 역할이요, 수많은 병사로 이루어진 군대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듣기에, 정말로 멋졌다.
위대한 영웅과 전사들이 평범한 다수에게 쓰러지지 않는 세상이라니? 어떻게 그런 근사한 세상이 있을까······.
한편 그와 같은 이유로, 나라에 인구가 많으면 더욱 강하고 우월하다는 논리 또한 저 각성자 군주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대단하고 살기 좋은 곳인지 강조하는 귀순 설득 또한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귀순해오거든 대우를 상상 이상으로 좋게 해줄 것이다. 먹고 싶은 것은 뭐든지 먹게 해줄 것이고 재산도 충분히······"
"됐다. 내가 가진 양들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건 전부 얻을 수 있다. 충분히."
이후로도 비슷한 대화가 반복될 뿐 설득되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김정은에게 북한보다 남한이 더 잘 사니까 남한으로 넘어오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 주장한들 회유할 수 없듯, 저 친구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묻는 말에 전부 대답했으니, 난 이제 떠나도 되나?"
그리고 난 양복쟁이의 말을 옮겨주었다.
"이 친구는 절대 안 된다는데."
그러면서 나는 양복쟁이를 눈짓했지만, 덩치는 양복쟁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양에게 물은 게 아니라 네게 물었다. 다시 묻겠는데, 이만 떠나도 되나?"
"나보고 속박을 풀어달라는 건가?"
"아니, 알아서 떠날 생각이다. 하여간 이 정도면 함부로 네 영지를 약탈한 값은 치른 것 같군. 이만 떠나도 되나."
"떠날 수 있음 떠나. 그런데 그러면서 누구 해치진 말고."
내가 그리 대답하자 양복쟁이가 질색했다. 나를 노려보더니 통역을 향해 당부했다.
"절대 안 된다고 해요."
그러나 저 통역 또한 소월인 아닌가. 그는 비각성 찌꺼기와 각성자 중에 누구 말을 따라야 할지 알고 있었다.
통역은 양복쟁이가 아닌 내 말을 번역했고 덩치는 만족한 듯 웃었다.
"떠나도 되지만 그러면서 양들을 해치진 말라? 내 그러지. 그런데 한 가지 묻겠는데, 나와 같이 온 그는 죽었나?"
내 발차기 한 방에 죽은 그 역장 외골격 능력자를 말하는 듯하길래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덩치는 씩 하고 웃었다.
"대단하군, 그는 아주 강대했는데도 이기다니! 그렇다면 말인데, 우리 땅으로 넘어올 생각이 없나?"
뜻밖의 제안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소드 월드로?"
"그렇다. 그가 죽었으니 그가 키우던 양들은 주인을 잃었지. 네가 넘어오면 누구와도 다툴 필요 없이 그 양들을 치며 살면 된다."
"끌리는 대답이지만······ 거절하지."
"어째서?"
"난 내 땅을 지켜야 하니까."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우리는 철문을 나왔고 양복쟁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말이 안 통하는군요. 보아하니 저놈 귀순 시키려면 저 같은 놈이 아니라 박미형 씨가 필요하겠는데요? 각성자한테도 통한다는 최면 세뇌 능력으로 한국에 충성하게 만들어야겠는데······
그런데 저놈, 탈출할 생각인가 보죠? 꿈도 야무지지. 탈출하는 거 제압하면 기가 꺾여서 좀 고분고분해지려나?"
그러나 강력한 각성자를 가둬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그 사지를 묶어놓았어도 그렇다.
그날 밤, 뉴스에 소월인 각성자의 탈출 소식이 나왔다.
탈출 당시 CCTV 영상도 공개되었으니, 그 사지를 묶어둔 구속기구는 마치 휴지라도 되는 것처럼 덩치의 손가락에 잘려버렸다.
영상 속, 순식간에 구속에서 풀려난 덩치의 손톱이 희미하게 빛났다.
역장 날붙이 능력, 칼이 아니라 손톱으로도 쓸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공간이동 하지 않았듯 저쪽은 그걸 활용하지 않았던 모양이고.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탈출할 수 없는 척 이쪽에서 주는 밥이나 얻어먹으며 얌전히 있다가, 서울에 게이트가 열리자 그 징조를 느끼고는 바로 탈출하여 게이트로 들어가 버렸다.
끝내줬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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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S급 헌터 강준치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