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CAZADORDECLASEA / Chapter 5 - 38-46

Chapter 5 - 38-46

38화 S급 헌터 강준치 - [1]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의 하늘성 건설이 시작됐어양!

드디어 애기버섯이의 보금자리를 짓는 거지양! 그동안은 인천 시의원 박미형 아줌마(다가올 선거에서 인천 시장 자리를 노리고 계시다니 인천 사시는 분들은 기회가 되면 모두 소중한 한 표씩 부탁드립니다. 기호 2번, 사무실 번호 032-XXX-XXXX) 집에 얹혀살았는데 드디어 독립하게 된 거예양!

독립도 하구, 이제 애기버섯이도 다 큰 숙녀가 된 걸까양? 아껴 입던 곰돌이 팬티는 그만 입구 이제는 섹시하게 입어야 하는 걸까양?!? 애기버섯이 부끄부끄 //∇//

하지만 팬티를 갈아입어두 여전히 애기버섯이는 작고 어려서 집을 짓고 싶어도 어떻게 짓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어양!

애기버섯이는 답답한 마음에 엉엉 울고 있었는데양! 인천 시장 아조씨가 와서는 애기버섯이의 애기 눈물을 닦아주며 공무원 아조씨들 시켜서 어지간한 건 다 알아봐 줄 테니 그만 울고 뚝! 하라고 하지 뭐예양?

그제야 착한 애기버섯이는 뚝 했지만, 히잉ㅠ 이미 잔뜩 울어버렷서양······ 올해는 산타 할아부지의 선물을 받을 수가 없게 됐어양······!

결국 가엾은 애기버섯이 슬퍼져서 또 울고 있어양. 언니옵바야들이 빨리 그만 울라고 토닥토닥 해줘양 히잉히잉히잉 ㅠ

Ⓐ 돌머리청년 : 박미형 씨 저 불쌍한 친구를 그만 놓아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저 친구는 이미 인천과 시의원님을 위해 충분히 일했지 않습니까?

Ⓐ syberMagneto : 왜 이 감동적인 사업을 가지고도 이런 끔찍한 글을 쓰는 거냐······ 이 사업에 주목하는 불쌍한 얼레기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흉참한 짓은 그만둘 수 없는 거냐?

헌트웹에 근황 보고를 올렸건만 어째 이제는 호들갑 떠는 반응이 별로 없다. 대부분은 내 글을 진지하게 읽는 중이다.

Ⓐ 엘마야캐요 :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인천 시장이 직접 나서가며 그 초고층 아파트 건설계획 밀어준단 거네? 괜히 돈만 날리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잘 됐구만 정말

5my지저스 : 사회적 약자를 위해 귀중한 재산을 아낌없이 쓰는 김극햄, 그저 존경스럽습니다. 언제나 위대한 김극햄 찬양해!!

익명 : 얼레기들 받아주는 아파트라길래 혐오 시설 취급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인천시에서도 좋게 보나 봄?

익명 : 벌어들인 수백억 다 인천시에서 쓰는 셈인 데다 집까지 인천시에 지어가며 평생 인천에 뼈를 묻겠단 선언인데 싫어할 이유가 없지. 실제로 근처 주민들 반응도 좋은 모양이고

실제로 상황이 생각한 것보다 좋다. 내가 예의 초고층 아파트 건설계획을 발표한 후, 각성자 수용시설 앞 시위가 멈췄다.

잘 나가는 헌터가 수백억 전 재산을 들여 진지하게 하는 사업이요, 시에서도 대놓고 밀어주니 결과가 괜찮으리라 판단한 모양이다. 어쩌면 유명하기 그지없는 헌터인 내가 상주하리란 말에 얼음 능력자들이 초래할 위험 요소 또한 차단되리라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천시 공무원들이 직접 건설현장에 나온 가운데, 감리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일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함부로 철근 하나 빼먹을 수 없는 환경이라던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돈을 쓴 나로선 그저 다행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헌터 일을 시작한 이후, 오 개월 동안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던 내 헌터팀에 첫 사망자가 생겼다.

김진준.

우리 팀에서 성문영 및 이종호와 함께 양아치 트리오를 구성하던 한 명이다. 양아치라 해서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기고 껄렁거리는 녀석은 절대 아니요, 평소 체력에 자신이 있어서 힘쓰는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죽었다. 못생긴 사자 괴물한테 죽었다.

이번에도 소탕 작전을 진행 중이었다. 나는 정신적 그물망을 통해 파악한 사실을 여기 모인 헌터 모두에게 전했다.

"맨티코어네."

바로 성문영이 아는 척했다.

"맨티코어면 그 짝퉁 사자 맞죠?"

"그래. 일곱 마리가 모여있는데 프라이드 전체가 휴식 중인가 봐."

전설 속 맨티코어는 사자의 몸에 사람 머리며 박쥐 날개며 별 이상한 게 잔뜩 달린 괴물이라던가?

그러나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맨티코어들은 그보다 훨씬 심심한 외형이다. 놈들은 그저 근친교배로 태어난 사자처럼 생겼다. 좀 심하게 못생겼다는 점을 제외하면 지구의 사자들과 큰 차이가 없고, 심지어 유전적으로도 흡사해서 서로 교배까지 가능하다.

맨티코어들이 사자와 특별히 다른 점은 꼬리다. 실제 사자의 꼬리에도 털 속에 가시가 숨겨져 있는데, 맨티코어들의 꼬리털에도 삐죽한 가시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당최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사자의 꼬리 가시와 달리, 맨티코어의 꼬리 가시는 초속 80m의 속도로 발사된다. 심지어 그 가시에는 강력한 신경독이 있어서 신체 어딘가에 맞았다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며, 그 가시의 최대 사거리가 30m란 점이 위협적이지만 그뿐이다.

아무튼 그놈의 가시가 헌터들의 돌격소총보다 대단한 무기는 아니다. 발사되는 속도도 생각보다 느려서 이쪽에서 먼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충분히 사냥할 수 있는 괴수다.

심지어 맨티코어들은 데스클로와 달리 각성자도 아니라서, 백담비와 같은 얼음 능력자들은 놈들을 쳐다보기만 해도 싹 쓸어버릴 수 있다. 만약 놈들이 데스클로만큼 많았다면 얼음 능력이 헌터 직무수행 부적합 판정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담비는 쿨한 척, 아마도 속으로는 활약할 기회가 생겼으니 기쁜 마음으로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그리고 김진준이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저도 끼워줘요. 화력 지원해줄 테니까!"

"굳이?"

"아니, 너무 방심하면 안 될걸요? 맨티코어면 도시 환경에선 눈에 너무 잘 띄어서 잘 숨지도 못하고 빠르게 소탕되는 괴물이잖아요. 그런데도 어떻게 잘만 생존하고 있단 건 보통 놈들이 아니란 뜻 아녜요?"

아마 김진준은 계속 가만히 있기가 근질거렸을 것이다.

평소 내 헌터팀은 나와 백담비를 제외한 인원은 활약할 기회가 거의 없는 편이다.

알다시피 각성자 헌터의 팀원들은 각성자 헌터를 호위하는 역할이다. 신체강화자나 역장 능력자의 경우, 전차가 보병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자기 헌터팀을 호위처럼 거느리고 활동한다.

그러나 공간이동 능력자인 내 경우엔 헌터팀의 호위에서 벗어나 독자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날 호위할 일도 별로 없다. 결국 소탕 작전 중에 내 팀의 비각성자들은 죄다 안전한 후방에서 대기나 하곤 한다.

그런 이유로 내 헌터팀의 비각성자들은 다들 평소에는 총도 잘 쏘지 않았다. 어지간해선 죽을 염려가 없는 백담비만이 앞에 나서서 총질하곤 했는데, 그래서 내 헌터팀의 비각성자 인원들은 '지나치게 꿀을 빠는 게 아니냐'는 뒷담을 들었단 걸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열정 넘치는 김진준으로선 이게 맘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종호랑 문영이, 너희도 이리 와! 짐꾼이니 뭐니 해도 가끔은 총질 좀 해줘야지······"

그렇게 백담비가 앞장선 가운데 양아치 트리오가 그 뒤를 따랐다.

고작 그따위 하찮은 괴수들을 처치하느라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나는 뒤에서 대기했다. 정신적 그물망을 펼친 채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도울 준비나 하던 중이었다.

"진준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는 급히 공간이동 했지만,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내 눈에 시체들 담겼다. 이미 죄다 총알에 꿰뚫려 죽은 못생긴 사자, 맨티코어들······.

그리고 독침조차 아닌 무언가에 몸이 꿰뚫린 듯, 가슴에 불탄 구멍이 생긴 채 쓰러진 김진준과 김진준보다 훨씬 큼지막한 구멍이 뚫렸지만 김진준과 달리 멀쩡히 살아있는 백담비가 보였다.

어떻게 된 거냐 물으니 성문영이 울먹이며 설명했다.

"맨티코어 꼬리에서, 열선이······"

열선(熱線)이면 슈퍼맨이 눈으로 쏘는 그거다. 철판마저 꿰뚫는 초고온의 광선.

이종호가 좀 더 침착하게 설명했다.

"맨티코어 중 한 마리가 열선 능력에 각성했었나 봐요. 우리가 총알 발사하기도 전에 레이저 같은 게 발사돼서······ 씨발."

이 와중에 한 마리가 각성자임을 알아보고 재빠르게 사격하며 온몸으로 맨티코어의 열선을 받아낸 백담비가 아니었다면 모두 죽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백담비의 몸통을 관통해버린 열선이 김진준의 몸에 닿았기에 그가 죽고 말았다고.

매우 드물긴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정령이 아닌 이상 인간을 딱 보고 각성자인지, 무슨 부류의 각성자인지 알아보기 어렵듯 괴수를 상대로도 마찬가지다. 평범해 보이던 괴수가 예상할 수 없는 능력에 각성한 상태인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번 경우에는 하필이면 각성한 능력이 열선이라, 광속을 감지할 수야 없는 이상 내 정신적 그물망으로 그것을 포착해낼 수 없었다.

누군가의 잘못이나 실수라기엔 그저 운이 나빴다고밖에 할 수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몹시 우울했다.

끔찍하게,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치 우울했다.

*******

그날 사냥 작전은 즉시 종료됐다. 이후로 열린 장례식에는 내 헌터팀뿐만 아니라 그날 작전에 있었던 모든 헌터들이 참석했다.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얼마나 우울했는지, 오늘만은 나이토 상마저 고깝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인 김진준의 유족들을 보았다. 김진준의 부모와 남매.

그들과 마주 고개 숙인 다음 내 헌터팀이 있는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상주와 함께 밤을 새운 뒤 며칠이 지나서야 내 헌터팀과 다시 모였다.

다시금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술자리였다. 소주 한 잔을 들이키더니 임형택 씨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김극 씨, 이번에도 부조금 많이 내셨다던데······."

"좀 냈죠."

"얼마나······?"

"십사억."

왜 묻는지 몰라도 일단 대답했더니 임형택 씨가 눈을 껌벅였다.

성문영이 중얼거렸다.

"많이도 내셨네요? 아파트 지으신다더니······ "

"그래서 생각보다 많이 못 냈지."

"지금은 돈 많이 없으실 텐데, 그리 돈 막 쓰셔도 되나?"

"나야 그리 돈 써도 안 굶어 죽지만 유족들은 이대로 굶어 죽을 수 있잖아. 능력껏 넣었다."

"나 죽어도 그만큼 넣어줄 거예요?"

"어."

"씨발, 든든해 뒤지겠네."

"그거 받으려고 진짜 뒤지진 말고."

이 와중에 다들 술 좀 마신 마당이요, 남자들이 모이면 으레 정치 얘기를 하기 마련이라 화제는 갑자기 나라 욕으로 흘러갔다.

"원래는 김극 형이 사비로 유족들 챙겨줄 게 아니라 나라에서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대체 왜 헌터는 싸우다 뒤져도 한 푼도 안 주는 거야? 애초에 보상금 주기 싫으니 헌터 협회까지 따로 만들어서 용병 취급하는 건 아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가며 보상을 안 해주냐고?"

이종호의 성난 말에 임형택 씨가 입을 열었다.

"내가 따로 알아봤는데, 돈을 최대한 아껴야 해서 그러는 거라더라."

"나라 위해서 죽은 사람들 상대로 돈을 왜 아껴요!"

그리고 종합상사 출신답게 임형택 씨는 갑자기 경제 설명을 시작했다.

그가 말하길, 본디 나라에서 돈을 뽑아내는 족족 물가가 오르지 않는 것은 여러 교역국끼리 서로서로 화폐를 교환해가며 한쪽이 과하게 화폐를 생산해도 다른 나라에서 흡수해주는 까닭이라고 했다.

그러나 게이트 열린 이후 요새 각국의 교역상황은 썩 좋지가 않다. 바다를 잠식한 해양 괴수며 물 정령들이 컨테이너선마저 습격하는 탓에 바다를 오가는 서른 척의 선박 중 한 척은 침몰하는 상황이요, 정령들이 들끓는 해역을 피해 다니느라 선박들의 이동 경로가 늘어나면서 운송비 또한 대폭 상승했고 보험료 또한 대폭 상승했다.

이런 상황에 몇몇 나라는 아예 망하기까지 했으니, 각국은 예전처럼 서로의 화폐를 탄력적으로 흡수해주기가 어렵다.

또한 가뜩이나 각 물자가 귀해진 상황 아닌가. 이제는 나라에서 돈을 생산하는 족족 물가가 오를 염려가 있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화폐를 최대한 덜 생산하며 돈도 최대한 덜 쓰려고 노력하는 중이란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 정부가 예전처럼 돈을 썼다간 큰일이 나는 거야. 정부가 안간힘을 써가며 겨우 억누른 쌀과 라면 가격이 자칫하면 두 배가 아니라 이백 배씩 상승해도 이상한 일이 아닌 거지······."

그리고 전사한 헌터들에게 보상금을 주지 않는 것 또한 돈을 아끼려는 정부의 노력 중 하나라는 설명이 나오니, 성문영이 질색했다.

"누가 정부 실드 쳐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대로 돈 절대 주면 안 된다는 거야 뭐야."

"아, 음. 내가 미안해. 술 마시니까 할 말 안 할 말 못 가리겠네."

한편 나는 대화에 끼지 않은 채 울적하게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여전히 울적했다. 내 탓이 아니란 사실은 썩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 탓처럼 느껴졌으니까.

저번에 만난 소월인 각성자, 우소리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비각성자들에게 무기를 들려주는 것이 몹쓸 짓이라고 말했다. 전투는 각성자들의 역할이지 비각성자들은 얌전한 양처럼 가만히 있어야 마땅하단 것이다.

그 말을 따라야 했을지도 모른다.

김진준, 그 불쌍한 놈. 그냥 뒤에서 내 응원이나 하게 내버려 두고 내가 나섰다면 그놈은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 열선에 닿았어도 나는 살았을지도······.

술자리가 계속된 가운데, 자리에 남겨진 것은 나와 임형택 씨뿐이었다.

이 양반은 왜 안 가고 있나 해서 봤더니 얼굴이 붉었다. 공간이동으로 집에 옮겨줘야 하고 생각할 때였다.

"김극 씨는 좋은 사람이야."

임형택 씨의 뜬금없는 말에 내가 반응했다.

"뭔 소립니까?"

"김극 씨, 참 좋은 사람이라고······. 내가 학원에서 김극 씨 처음 봤을 땐 웬 조폭 새끼가 헌터 하러 왔나 싶어서 불안하기만 했는데 볼수록 좋은 사람인 걸 알 수 있었어······ 학원 원장 그 양반, 나랑 가끔 술 마실 때마다 김극 씨 칭찬 엄청나게 하는 거 모르죠?"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이길래요. 책임감 느끼는 거죠? 팀 리더로서 말이야."

내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니 임형택 씨가 말했다.

"나도 맘이 상당히 불편해요. 죄책감을 느껴."

"죄책감을 왜요?"

"내가 사십 대잖아? 진준 씨보다 두 배는 살았으면서 몸 사리느라 젊은 그 친구가 먼저 죽게 했으니까······."

"형택 씨는 책임질 가족이 있다매요."

"그래요, 마누라랑 딸 하나 있지. 그런데 마누라가 너무 어려. 고등학교 졸업하고서 편의점에서 알바 하던 여자애를 내가 꼬신 건데, 이후론 전업주부나 쭉 시킨 탓에 편의점 알바 말곤 사회생활 따윈 해본 적도 없는 애야."

왜 갑자기 어린 마누라 자랑을 하나 싶은 가운데 임형택 씨는 계속 말했다.

"딸뻘 여자애를 꼬신 내가 미친 거긴 하지만, 그걸 데리고 살자니 인생의 배우자와 함께한다기보단 그냥 딸 하나 더 키우는 느낌이야. 그리고 나 죽었을 때 딸내미 둘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어. 그래서 나 죽으면 진짜 안 된다 싶었는데······"

예전에 본 환각, 그러니까 바위 정령을 피해 자신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주는 대신 다른 동료를 먼저 옮기도록 권하던 임형택 씨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것을 생각하면 젊은이들 대신 자기가 살아남아 죄책감을 느낀단 것이 빈말은 아닐 터였다.

임형택 씨가 말했다.

"나중에 혹시······ 누구 희생해야 할 일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나 희생시켜요."

"예?"

"내 반도 못 산 어린애들 희생시키는 것보단 그게 낫지. 그리고 김극 씨가 죽은 사람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거 보니 절대 나만은 죽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이 좀 걷히는 것 같거든? 김극 씨가 죽은 동료 챙겨주는 거 보니까 든든한 맘이 들어서······."

보아하니 뜬금없이 가족 얘기를 하던 것이 자기가 죽고 나서 제 가족을 부탁한단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놈의 가족이 신경 쓰인 나머지 내가 낸 부조금에도 관심이 크게 있었던 모양이고.

나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를 집 앞에 보내준 다음 집에 복귀했다.

*******

자고 일어나서도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이 꿀꿀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하루 전 헌트웹에 올라왔던 강준치의 영상이나 다시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강준치 저 양반이 웬일로 악당다운 악당을 잡았다. 강준치의 역장 능력이 염동력처럼 발휘되었다. 웬 아줌마의 가방을 훔치려던 소매치기를, 탑승한 오토바이째로 공중에 들어 올려서는 징벌하기 시작했다.

「아파, 씹, 아파! 그만! 제발 그만!」

다시는 소매치기 따윈 시도할 수 없게 하려는 걸까? 강준치는 소매치기의 손가락은 물론 사지까지 다 분질러 버리면서 끊임없이 그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게 했다. 결국에는 전치 몇 주일지 짐작도 안 되는 중환자가 땅에 드러누워 부들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영상의 하이라이트, 공권력이 무의미해지는 장면······.

곧이어 경찰이 와서는 강압적인 말투로 반말 찍찍해가며 상황을 정리할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들이 강준치를 알아보자마자 그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경찰들의 입에서 공손한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아, 강준치 씨? 서울에 오셨다더니 정말이네요. 이렇게 뵈어 영광입니다······」

이제 경찰 둘은 땅에 드러누운 소매치기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이 떠나가는 강준치를 향해 허리 숙여 배웅하는 것으로 영상이 끝났다.

그 부분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마음을 달래던 중이었다.

헌트웹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누군가가 내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웬 잡것이 친한 척하는 것이라면 무시해야 했다.

그러나 알림 버튼을 누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 Kang : 애기버섯 있냐?? 있으면 빨리 좀 대답해라 제발

방금 그 영상의 주인공, 강준치가 내게 쪽지를 보냈다. 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 BabyBerserker : ?

그리고 강준치의 다음 메시지 또한 빠르게 전송되었다.

Ⓢ Kang : 나 좀 도와줄 수 있나? 급하다 진짜 제발

39화 S급 헌터 강준치 - [2]

정확한 상황이야 몰라도 정말 급해 보였다. 나는 이쁜 말투마저 억누르고서 빠르게 글을 적었다.

Ⓐ BabyBerserker : 장소

Ⓢ Kang : 북한산, 은평 코스 진입해서

강준치는 현재 자기가 있는 장소에 대해 이것저것 적어 보내더니, 마지막으로는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 Kang : 그리고 무기 갖고 와. 너무 눈에 띄는 무기는 말고. 너무 눈에 띄면 안 되니까

왜 눈에 띄면 안 된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군말 없이 그 말을 따랐다.

전투 망치와 권총 한 자루만 챙긴 채 밖으로 공간이동 했다.

택시 하나를 붙잡고는 서둘러 말했다.

"신호 위반해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돈 세 배로 드릴 테니까 무조건 빨리요!"

그리고 택시가 달리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대체 왜 날 부른 걸까?

무기를 챙기란 걸 보니 위급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헌터 라이플을 챙겨야 했을까?

하지만 서울에서는 연발이 가능한 자동화기 휴대가 불법이다. 사냥을 마친 뒤 총기를 집에다 대충 던져두는 인천의 헌터들과 달리 서울의 헌터들은 매번 사냥이 끝나면 총기를 경찰서에 맡긴 다음 사냥 나서기 전에 다시 불출 받아야 한다(사실 법적으론 인천에서도 그래야 하는데 인천에서는 경찰이고 헌터고 귀찮아서 그러지 않을 뿐이긴 하다).

그리고 뭐, 애초에 S급 헌터가 그곳에 있지 않은가. 만약 그마저 어쩌지 못할 상황이라면 내가 헌터 라이플을 들고 간들 비비탄총을 들고 간들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조급한 맘을 달래자니, 저쪽에서도 조급함을 드러냈다.

Ⓢ Kang : 오고 있는 거 맞지?

Ⓐ BabyBerserker : 가는 중!

Ⓢ Kang : 최대한 빨리 와라, 제발

Ⓐ BabyBerserker : 혹시 상황 설명 될까양? 뭔 상황인지 알면 더 준비가 쉽잖아양!

Ⓢ Kang : 안 돼. 메시지 누가 볼 수 있다. 오면 설명해 줄 테니까 그냥 오기나 해줘

이후로도 몇 번이나 어디까지 왔느냐는 확인 메시지가 왔다. 딱 봐도 매우 조급한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설명도 안 해주는 마당에 내가 무슨 준비라도 할 방법은 없다.

조급한 맘을 달랠 겸, 그리고 시간을 죽일 겸 유튜브나 켰다.

유튜브에 강준치, 하고 치니 여러 영상이 튀어나왔다.

강준치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각성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각성자 관련 영상이며, 그렇듯 위대하기 그지없는 강준치가 한국인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한 국뽕 영상이며, 강준치가 참여한 작전을 다룬 국방홍보 영상이며······.

그중 한 영상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수소폭탄보다 강력한 사나이'.

홀린 듯이 그 영상을 클릭하니, 영상의 배경은 바다였다.

군함 위, 강준치가 탑승한 컨테이너선을 웬 거대한 파도가 덮친다. 사만 톤짜리 컨테이너선을 뒤집을 만치 큰 파도였지만 강준치가 슬쩍 쳐다보니 파도를 구성하던 물은 파도 치길 멈춘다. 파도치다가 얼어붙은 것처럼, 그 에너지를 잃고 부자연스럽게 물들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화면에 담긴 바다 전체가 움직인다.

광대한 영역의 바닷물 전체가 요동치면서 밀려나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댐이라도 생긴 듯하다.

바닷물이 침범할 수 없는 공동이 바다 가운데에 생겨난다.

그리고 바닷물이 사라진 공간에 거대한 해양 괴수가 드러났다. 아무리 못해도 킬로미터 단위는 될 법한 상어, 대왕고래라도 한입에 삼킬 만치 거대한 놈이었지만 물 없이는 어쩔 수 없는지 그 자리에서 지느러미만 퍼덕거린다.

강준치가 해양괴수를 무덤덤한 눈으로 쳐다본다. 단지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지만, 마치 중간과정을 건너뛰기라도 한 것처럼 다음 순간 해양 괴수의 말도 안 되게 거대했던 몸은 압착된다.

무슨 코믹한 만화영화에 나올 것처럼 납작해졌다······.

영상이 종료되고 나니 내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만 해도 초인 중의 초인이요 A급에서도 상위권인 A++ 판정이지만, S급은 차원이 다르다던가. 이 영상만 봐도 쉬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체급의 차이를 넘어 생물과 자연현상 정도의 차이가 있는 무언가. 진정한 초자연이 각성자의 형체를 이루어 영상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계속 사냥과 훈련을 이어나가다 보면, 나도 저렇게······.

비회원123 : 물이란 게 참 무거워서 여름에 옥상에 조그만 간이 풀장 만들었다가 지붕이 무너지는 경우가 참 많다던데. 키즈카페의 앙증맞은 수영장의 물마저 5톤은 된다고 하고

비회원123 : 그런데 영상에 나온 말도 안 되는 면적 내 바닷물을 통째로 움직이려면 대체······?

슈퍼★대★한국 : 딱 봐도 수폭의 에너지보다 영상 속 현상의 에너지가 훨씬 규모가 커 보이는데요? 역장 능력자는 역장 출력과 역장 내구력이 정확히 비례한다니까 우리 한국의 자랑 강준치 씨라면 수폭도 거뜬히 버틸 것 같습니다 ^^

비회원145 : 아재요, 지금 말하는 수폭은 방사능 안 나오는 환경친화 수폭이요?

Kim첨지死 : 핵폭탄이 장난이냐? 인류의 최종병기가 우스워?

영상 제목에 '수소폭탄'이 있어서 그런가, 댓글에도 수폭 관련 내용이 많았다.

하나하나 흥미롭게 읽자니 택시가 멈췄다.

북한산. 어쩌면 서울 또한 북한일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저 산에 강준치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길 잃은 등산객이 흔히 그렇듯 강준치 본인도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해서 대략적인 위치만 말했을 뿐이지만, 물론 상관없었다.

나는 강준치가 알려준 대략적인 위치에서 정신적 그물망을 펼쳤고 강준치가 포착되자마자 공간이동 했다.

"강준치 씨?"

그리하여 나는 그를 보았다. 한국 유일의 S급 헌터, 강준치.

강준치 또한 나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왔어? 다행히 늦지 않았네. 정말 고맙······"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였다.

환각이 시작되었다.

********

나는 저 너머에 피어오른 버섯구름을 본다.

내가 저지른 짓이다.

정확히는 내가 터트린 전술핵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단 후회와 기어이 한국 땅에 버섯구름을 피워내고 말았다는 음습한 쾌감이 교차한다.

저 폭발에서는 말 그대로 개미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바퀴벌레는 핵폭발에서도 살아남는다지만 그마저도 폭발 범위에 있던 놈들은 형체도 남기지 못했을 테고······.

그러나 바퀴벌레도, 갑각류도 아닌 대형 포유류 하나가 버섯구름이 꺼진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이다. 각성자이기도 하다.

핵폭발이 만들어낸 거대한 참상을 뒤로 한 채, 그가 내게 뚜벅뚜벅 다가온다.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남자다. 얼굴은 아주 잘생기진 않았지만 클럽에서 문전박대당할 만치 못생기지는 않았으며, 키는 176cm쯤으로 역시 크다 작다 말하기 애매하다.

대충 한국 남성의 평균에서 살짝 위로 보이는 저 평범한 남자는, 한국 유일의 S급이다.

'이 미친 새끼가.'

강준치다. 그가 잠든 와중에 그 침실에 직접 터뜨린 핵폭탄이었건만, 그 머리털 하나 불탄 것 같지 않다.

문득 예전에 본 영상과 그 영상의 댓글들이 떠오른다.

'수소폭탄보다 강력한 사나이', 그 영상에서 강준치가 핵을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사람들이 토론했던 걸로 기억한다. 대부분은 아무리 초인인들 결국 한 개체에 불과할 뿐이라 핵폭발에선 버티지 못하리라 예측했던가?

이 순간 밝혀졌건대, 그 모두가 틀렸다.

당장 보니 강준치는 그저 멀쩡하다. 강준치의 몸을 감싸고 있을 단단한 역장에 금이라도 간 것 같지 않거니와, 핵폭발의 열기 속에서 폐가 익어버린 것 같지도, 방사능에 온몸의 세포가 붕괴한 것 같지도 않다.

역장 외골격 능력자의 역장은 그저 단단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것저것 인체에 해로운 요소를 정화하는 필터 기능까지 있는 경우가 꽤 있다더니 강준치의 역장 또한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래도 설마 열이며 방사능까지 모조리 차단해낼 줄이야.

전율이 인다. 가히 감동적이기까지 한 장면 아닌가. 인류의 모든 과학과 기술과 지성이 만들어낸 그 가공할 핵무기가, 저 평범해 보이는 남자 하나를 조금도 해치지 못했다.

이것은 인류가 쌓아 올려온 문명에 대한 초인의 승리요, 인류란 종 자체에 대한 한 개체의 승리라 할 만하다.

그리고 또한, 절망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내 앞에 선 그는 자연재해에 가까우니.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네가 한 거 맞지?'

강준치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공간이동 하고자 시도했고, 실패했다.

'나 노리고 그런 거냐?'

또다시 공간이동에 실패. 어째서?

몸이 어딘가에 단단히 끼어있을 때는 공간이동이 어렵다. 지금이 그런 경우인 것 같다.

저놈의 짓인가? 하지만 각성자의 능력은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데, 대체 어떻게?

발밑을 보니 바닥의 콘크리트가 내 발목을 집어삼킨 상태다. 나로서는 저쪽에서 뭔가 하는 걸 느끼지도 못했는데, 감지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이렇게 된 모양이다.

'난 너한테 해코지한 기억이 없는데······ 나랑 만난 적도 없는 놈이 대체 뭔 원한으로 이런 거냐고, 어?'

그제야 나는 입을 연다.

'너 때문에 베헤모스가 서울 오고 싶어도 못 오잖아.'

강준치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가 쏟아낼 말이 많은 듯 한동안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입술을 깨물고는 짧게 말한다.

'애미 뒤진 테러리스트 새끼. 넌 뒤졌어.'

저 평범한 키와 생김새도 그렇고, 목소리며 협박하는 말투마저 그저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벌이는 모든 일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저 시선 한 번 보내는 것만으로 이루어내는 일마저 그렇다.

강준치가 한 건물을 슬쩍 쳐다본다. 사람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고층 건물이다.

폭파하는 데도 엄청난 양의 폭약이 필요할 법한 그 건물이 공중에 두둥실 떠오른다.

말 그대로 '두둥실'이다. 사람이 밭에 난 잡초를 뽑아도 저리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뽑아낼 순 없을 것 같다. 미리 실로 묶어둔 수수깡이라도 드는 것이 저 정도로 쉬울까······.

그리고 쉽게 들어 올린 물건은 던지기도 쉬운 법.

건물의 옥상이 내게 겨누어지더니, 건물은 이내 화살의 속도로 내게 날아온다······ 아니, 아니다. 정신적 그물망이 그 속도를 판별해냈기로 건물은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내게 날아오고 있다.

강준치 저 작자는 딱히 힘을 들인 것 같지도 않은데 그 결과가 저것이다.

건물이 시야를 뒤덮는 동안, 나는 신경계의 발달로 말미암아 제법 오랫동안 마지막 생각을 이어나간다.

죽기 전에 훌륭한 걸 봤다느니, 아무리 봐도 어지간한 운석 충돌보다 저 건물 하나가 더 위험해 보이는데 곧 닥칠 여파가 크리라는 생각 따위 잡다한 생각부터······.

마지막에 원하던 결과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분노와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절망, 그리고 결국 내 삶의 끝이 최악의 형태로 오고 말았다는 슬픔이 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이어서는 여동생과 백담비, 박미형 씨의 얼굴이며 다른 그리운 이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걸로 끝이다.

고통은 없다.

눈물 한 방울 흘릴 틈조차 없이 끝나버린 내 삶과 함께 나는 환각에서 추방됐다.

*******

나는 숨을 헐떡였다. 잠시 그러고 말았던 것은 지금 느껴지는 이 분노와 슬픔이 매우 익숙했기 때문이다.

요새도 매일 꾸는 꿈······. 그 꿈에서 깨었을 때 나는 매번 이 지독한 분노와 절망과 슬픔을 느끼곤 했다.

그러니까 방금 본 환각은 내가 늘 보던 꿈의 마지막 장면이었을 것이다. 늘 핵폭발과 함께 꿈이 끝나길래 그 핵폭발에 휘말려 나 역시 죽는 줄 알았더니, 이후로 장면이 더 있었던 모양이지.

나는 살짝 흘러나온 눈물을 훔쳐내고서 강준치를 바라봤다. 방금 너무나도 놀라운 장면을 본 까닭에 그를 평범한 눈으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잠시 그 몸에 생긴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뒤늦게 지금 강준치의 몰골을 확인한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강준치 씨? 몸에서 피가······."

지금 강준치는 피범벅이었다. 티셔츠는 아예 붉게 물들었고 바닥의 흙에도 피를 빨아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어째서?

저 옆을 보니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모를 만치 참혹한 데스클로의 시체 한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강준치가 데스클로의 시체를 눈짓하며 말했다.

"저 새끼······ 데스클로한테 베였어."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저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지?

"예? 데스클로한테요?"

"아니, 씨발 내가 분명 사지를 다 부러뜨려놨는데!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저놈이 갑자기 휙 뛰어올라선 날 확 그어 가지고······"

한동안 횡설수설하는 말과 욕설이 이어졌다. 내가 황망한 마음에 가만히 듣고 있자니, 강준치는 겨우 할 말을 마친 듯했다.

강준치가 한숨을 토해내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론 나 죽어."

"피가 많이 나긴 한 것 같은데, 목숨이 위태로울 것까지야······"

"아냐. 속까지 깊게 베인 것 같애."

"엄살이······"

"엄살이 아니라, 지금 멀쩡해 보이는 건 내부 장기 갈라진 걸 역장으로 붙여놔서 그래! 처음 해보는 것치곤 어찌어찌 목숨 연명엔 성공했는데 이러다 진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어?"

강준치가 다시 횡설수설 말하길, 폐인지 심장이지 하여튼 매우 중요한 장기가 크게 잘린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역장으로 붙여둔 상태이며,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 역장이 소멸함으로써 자신은 죽고 말리라고.

나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자 애썼다.

"어쩌다 산속에 혼자 들어와서 데스클로랑 얽힌 겁니까? 설마 퇴치 의뢰라도 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내가 이런 말 하면 정신병자처럼 들릴 건 아는데, 내가 뭘 괴롭히면서 스트레스를 풀거든······?"

"알아요. 올리신 영상 다 봤으니까."

내 말에 강준치가 눈을 껌벅였다.

"진짜? 아, 나도 그쪽이 헌트웹에 올린 글들 다 봤어. 근육질 떡대인 거 뻔히 알려진 사람이 그러니까 웃기고 재밌더라. 최근에 올린 글에서 곰돌이 팬티 어쩌고 하는 건 버티기 힘들었지만, 아무튼······.

내가 스트레스도 풀 겸, 새 영상을 찍고 싶었어. 그런데 요새 내가 너무 유명해진 탓인지 오늘따라 운이 안 좋았는지 몰라도 괴롭힐 사람이 안 보이더라. 그나마 길거리 흡연충은 여럿 보이니까 그놈들이라도 징벌할까 했는데······"

"흡연충 참교육 영상 벌써 열한 번째 올리지 않았어요? 시청자들 보기에도 슬슬 지겨운지 최근 흡연충 참교육 영상은 댓글 확 줄었던데."

"어, 진짜 내 영상 다 봤나 보네······ 맞아. 내 시청자 중에도 흡연하는 놈들이 많아서 그런가, 흡연충 참교육 영상은 인기가 너무 없어."

"그래서······"

"그러니 이번엔 발상을 전환해서 사람이 아닌 걸 징벌하기로 했지. 동물 말이야. 그런데 햄스터나 비둘기라도 괴롭히자니 양심이 찔리잖아? 들개나 길고양이 괴롭히는 건 수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또 개랑 고양이를 좋아해서······."

그래서 학대한들 양심이 찔리지 않을 동물, 그중에서도 특히 악명이 높은 괴수인 데스클로를 학대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평범한 헌터들이 목숨 걸어가며 싸우는 그 괴물을 S급 헌터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 그 또한 재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고도.

그리고 과연 강준치가 마주친 데스클로를 제압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역장을 직접 그 몸에 쓸 수 없니 뭐니 해도 상관없었다. 어디까지나 그 신체에 직접 사용하지만 않으면 되는 문제요, 강준치쯤 되면 능력의 간접적인 사용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다.

강준치는 달려들 준비를 하던 데스클로를 이 초 만에 완전히 무력화시켰고, 수십 분에 걸친 고문으로 데스클로의 신체를 계속해서 망치던 중에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방금 말했듯, 이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줄 알았던 데스클로가 갑자기 펄쩍 뛰어올랐다고. 그 갈고리발톱이 허공을 긋더니 자기 역장마저 뚫고는 내부 장기까지 갈라버렸단 것이었다.

일부 데스클로는 미약하게나마 역장 외골격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신체가 다 망가졌어도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든가, 아니면 고문의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뒤늦게 역장 외골격 능력에 각성한 것일지도 모르겠단 추측을 말하는 건 이 순간 쓸모가 없을 터였다.

강준치가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나 의사한테 좀 데려다줘, 응?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황망함을 이기지 못해 잠시 멀거니 있었다.

이게 뭐하는 상황인지 당최 모르겠다.

저 남자가 핵폭발에서도 온전하던 광경을 보고서 전율하던 것이 불과 몇 분 전인데, 그 남자가 지금 눈앞에서 데스클로 한 마리한테 당해 죽을 것 같다며 징징거리는 상황을 대체 어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

40화 S급 헌터 강준치 - [3]

강준치, 28세. 그는 국뽕 유튜브에 본인 동의 없이 툭하면 얼굴이 나오곤 하는 인물이지만, 정작 강준치 본인은 노골적인 혐한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준치는 한·중·일 삼국 모두를 혐오하는데 그중 한국을 제일 혐오한다.

강준치의 표현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그 역사며 사회문화를 보면 알 수 있듯 인간종으로 여겨주기 어려운 원숭이요, 원숭이들에게 패배한 한·중은 포유류로 쳐주기도 민망한 곤충이며, 중국인은 그 숫자만 봐도 바퀴벌레인데 한국인은 중국인과 동급이지만 숫자가 적으니 대충 바퀴 비슷한 갯강구란 것이다.

이 모든 발언은 강준치가 유명해진 이후에 직접 내뱉은 발언이란 사실이 그가 가진 한국에 대한 반감을 보여준다.

강준치가 예전부터 그런 식으로 한국을 혐오하지는 않았다.

고교 시절, 강준치의 인터넷 기록을 보면 그는 국수주의적 성향이 강한 커뮤니티에서 툭하면 일본과 중국 욕이나 올려대곤 했다. 당시만 해도 이웃한 국가들을 혐오하는 평범한 한국인이었던 셈이다.

강준치가 혐오하는 국가에 한국이 추가된 것은 그가 군대를 나온 이후다.

예전 인터넷 글에서 본인이 직접 밝혔건대, 강준치의 모친은 어릴 적에 집을 나갔고 부친은 강준치가 15세일 때 사망했다.

자신을 고아라 여기던 강준치는 자신이 현역 대상일 줄 예상하지 못했다.

고교를 졸업하고서 용접을 배우며 일하던 강준치는 자신이 현역으로 입대해야 한단 소식에 기겁했다. 원룸 계약을 이 개월 치 방세를 추가로 줘가며 도중 취소해야 했으며, 가진 가구며 물건은 친하지도 않은 친척 집에 맡기고서 입대해야 했다.

그리고 군 생활 중에 허리가 망가졌다. 아픈 몸으로 제대한 강준치는 친척이 자기가 입대 전에 맡겨둔 물건을 죄 버려버렸단 사실에, 허리가 너무 아픈 나머지 원래 하던 용접 일을 할 수 없게 됐단 사실에,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별 보상을 받지 못했단 사실에 분노했다.

그리하여 강준치는 평소 하던 커뮤니티에서 중국 및 일본 욕뿐만 아니라 한국 욕까지 올리기 시작했다.

그 커뮤니티에서 쫓겨난 뒤로는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모아둔 돈으로 공무원 시험공부에 전념하여 1년 만에 합격했다.

그러나 공무원 노릇은 그가 생각하던 지루할 만치 규칙적이고 합리적이며 칼퇴근이 일상인 목가적 생활과는 멀었다.

공직 사회 특유의 악습과 과로에 시달려 매일 커뮤니티에 자살 관련 글이나 올리곤 하던 중에(허리가 안 좋다고 선임에게 말해도 자꾸 물건 옮기는 일을 자기한테만 시킨다는 하소연이 특히 많았다) 게이트가 열렸고 강준치는 각성했다.

이때 강준치가 하려던 일은 헌터도, 공무원도 아닌 택배 상하차 일이었다. 자기 역장 능력을 활용하면 안전하고도 확실하게 수입을 올릴 수 있으리라 여긴 모양이다.

그러나 국가적 비상사태에 예비군이 소집됐다. 강준치는 다시 소총을 들고 다녀야 했으며, 그 와중에 동료 공무원의 신고로 그가 전투에 적합한 각성자란 사실이 국가에 알려졌다.

결국 그는 특별 관리대상이 되어 이런저런 작전에 질질 끌려다녀야 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국가와 강준치 본인 양쪽에서 모르던 사실이 있었으니, 그가 가진 초자연적 능력은 가히 자연재해의 수준이었단 것이었다.

여러 작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국가도, 강준치도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둘의 입장이 뒤집혔다.

지금까지 한국에 갑질 당하던 강준치는 역으로 한국에 갑질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껏 모인 스트레스를 가학적으로 해소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각성 사실을 신고한 데다 공무원 시절 자신을 불합리하게 대우했던 선임 공무원의 집에 심심하면 쳐들어가 자길 위해 잔칫상을 차리라느니, 부모를 불러와 안마를 시키라느니 강요하여 자살을 시도할 때까지 괴롭혀 중환자실 신세를 지게 만들었다든가. 보훈처에 쳐들어가서는 자길 담당했던 공무원 또한 자살을 시도 할 때까지 괴롭혔다든가 하는 전설 같은 실화들이 전해지는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한국에서 각성자들을 징집하는 게 아니라 헌터 명함을 달아주고 큰돈을 줘가며 부려 먹는 것부터가 강준치의 존재 덕이라던가? 각성자를 대상으로 한 병역법이 발의되려는 분위기 속에서 강준치가 그랬다간 정말 다 뒤엎어 버리겠다고 일갈한 것이 국가정책에 영향을 줬단 소리였다.

이 모든 사실로 말미암아, 나는 직접 만난 적도 없는 강준치에게 크나큰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나처럼 불우한 가정환경을 보낸 인물이요 나처럼 반애국적인 반골이란 사실에 진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나로서는 그가 올린 영상들을 보며 대리만족까지 할 수 있었지 않은가.

심지어 각성자로서도 독보적인 수준이니, 내가 강준치를 우상화하고 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직접 만나본 강준치는 내 생각과는 다른 인물인 듯했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반골 정신으로 무장했을 줄 알았던 강준치는, 내 생각보다 더 평범했다.

그러니까, 필요 이상으로 평범했다. 심지어 고작 데스클로에게 당하고서 죽을 것 같다며 징징거리는 꼴은 내가 상상하던 각성자 왕의 위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사실이 나를 실망케 하고 있었다.

"잠시만, 가까운 병원 위치 알아볼 테니까······"

내 말에 강준치가 고개를 저었다.

"가까운 병원? 안 돼!"

"안 된다니?"

"내가 가까운 병원에 빨리 가고 싶었으면 구급차를 불렀겠지, 인천에 있는 그쪽을 왜 불렀겠어?"

"그러고 보니 구급차 안 부른 이유가 있어요?"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갔다간 난 죽을 거니까!"

뚱하게 듣다 말고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죽는다니?"

"의사 새끼들이 날 죽일 거란 말이야. 정부의 사주를 받아서······!"

나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강준치가 말했다.

"그야 난 민주주의 체제의 위협이고 대충 군단급 전력이면서도 택시 한 대로 수도까지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한 무언가니까. 나라에 돈 없는데, 왜 국가 위기랍시고 각성자들을 억지로 징병하는 게 아니라 큰돈 줘 가면서 헌터 노릇하게 해주는 줄 알아?"

"그쪽이 뭐라고 일갈해서 그렇다고 들었는데요."

"그게 아니라, 힘 있는 놈들이 굶주리고 사회에 불만 가득하면 집구석에 얌전히 있는 게 아니라 국가 전복을 노릴까 봐 그러는 거야. 부와 명예를 안겨줘서 만족한 상태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러는 거라고."

강준치는 각성자들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주지 못한 나라는 죄다 각성자들에게 잡아먹힌 상태라고, 그런 나라에서는 각성자들이 장성이며 대통령이며 다 해 먹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각성자에게 억압적인 정책을 하기로 유명한 중국에서마저 각성자 헌터들에게 돈과 명예를 충분히 제공하는 이유 또한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위정자들이 각성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를 두려워하는 까닭에 배부터 불려놓는 전략이란 것이었다.

강준치가 계속 말했다.

"요새 각성자가 대빵 해 먹는 나라 많다는 거 알지?"

"3세계에서 주로 그렇다던데."

"3세계 말고 이름 꽤 알려진 나라에서도 그래. 저번 인도네시아 쿠데타 아나? 군 장성이 쿠데타 성공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S급 각성자 하나랑 여러 각성자들이 가세해서 성공시키고는 각성자들이 뒤에서 실세 노릇 하고 있어.

요새 북한이 전술핵 왜 생산하는지 알어? 어지간한 화력으론 역장 외골격 능력자 제거하기가 힘드니까 아예 전술핵 터뜨려서 확실하게 죽여버리려고 그러는 거야. 이 와중에 한국 정치인인들 안심이 되겠나?"

"불안하긴 하겠네요."

"이 와중에 난 툭하면 한국이랑 한국 정부 싫다고 지랄하는 놈이잖아. 날 안전하게 제거할 기회가 제공되면 저기 윗분들이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단 말이야······."

그런 걱정에 구급차도 부를 수 없었다고, 그랬다간 정부기관에 자신이 중상 입었단 소식이 알려질 테고 수술 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고 부연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을 불러야 했다는 것이었다. 의아함을 느낀 내가 물었다.

"헌트웹에서 돌머리청년이랑 친하지 않았어요? 그 암석 능력자 성함이, 석장실? 그분이랑 서로 형님 동생 하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왜 그 사람을 안 부르고······"

"장실이 그놈은 안 돼. 믿을 수가 없어."

"왜요?"

"그놈은 나랑 친분 있다는 거 나라에서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 몰래 접촉해서 뭔 작업을 해놨을지 어떻게 알어?"

이 정도 의심이면 병이었다. 이 와중에 아파서 죽을 것 같다는 사람이 말은 또 더럽게 많아서 정말 위급한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에서 강준치를 제거하길 원하리란 주장 또한 믿기가 어려웠다.

환각에서 확인했듯, 강준치는 거대괴수마저 내쫓는 한국의 강력한 방패 아닌가.

게다가 해양괴수와 바다 정령들의 위협을 무시하고 한국의 컨테이너선들이 무사히 세계 각국을 오가게 지켜내는 강준치의 공로란 가히 국뽕 유튜브에 출연할 자격이 충분한 것이어서, 현재 한국의 상황이 타국들보다 나은 것은 정부의 물가조절 정책이 성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강준치의 공로란 주장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정부에서 굳이 죽이려 들 거라니? 그게 말이 되나.

내 보기에 지금 강준치는 일종의 피해망상에 불과했다.

평소 그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겠답시고 저지르는 짓들이 죄다 범죄 수준이요, 본인도 자기가 막 나간단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서 지레 찔리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국가에 밉보였노라 확신을 하고는 위험한 상황이 닥치자 절로 겁먹은 모양이다.

"그럼 난 어떻게 믿고?"

슬슬 짜증마저 느끼면서 그리 물었을 때였다.

돌아온 강준치의 대답에 나는 놀랐다.

"그쪽은······ 믿을 수 있어."

"어째서?"

"그쪽 인터뷰들 모조리 챙겨봤으니까. 인천은 버릴 수 없어도 나라는 팔아먹어도 된다고 당당하게 말했지 아마? 딱 봐도 애국심이라곤 쥐뿔도 없는 게 내 맘에 딱 들더라. 이후로도 그쪽 소식 주기적으로 전해 들으면서 인터뷰할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 읽었지······.

심지어 학주랑 훈련소 조교 패서 전과까지 있다고 말하던데, 나도 입대했을 때 훈련소 조교 새끼들 장애인 될 때까지 패고 싶었거든? 난 망상으로 그쳤지만 누군가는 진짜 실행에 옮겼다니 내적 친밀감이 무럭무럭 샘솟더라."

그 말에 난 흠칫했다. 내가 강준치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과 몹시 흡사한 이유로 저쪽도 내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또한 느낌이 묘했다. 내가 저쪽 동영상을 모조리 챙겨볼 때 저쪽은 내 인터뷰들을 챙겨보고 있었다니? 내가 저쪽 팬이었는데 저쪽도 내 팬이었다고 밝히는 듯한 기분······.

내가 물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친밀감을 느껴서 믿을 만하다고 여기는 겁니까?"

"아니, 그쪽은 딱 봐도 반사회적인데 전과까지 있는 진짜배기니까······ 국가에서 각성자들 포섭을 해도 이런 반사회적 또라이를 포섭하진 않았겠구나 싶더라."

"내가 반사회적이고 싶어서 반사회적인 게 아니라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래요. 엄마나 아빠나 좆같은 놈들이었거든."

"어, 나도 그래."

강준치는 아프다는 와중에도 씩 웃더니 물었다.

"강준치가 무슨 생선인 줄 알어?"

"썩어도 준치란 말이 있으니까 아마 강준치도······"

"아니, 좆같은 생선이야. 냄새나고 맛대가리 없고 뼈도 많아서 먹을 수가 없는데 심지어 낚을 때 손맛도 없어서 낚시꾼들이 낚을 때마다 질색하는 그런 꽝 생선."

강준치가 킬킬거렸다. 그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우리 아빠는 툭하면 가게 문 닫고 낚시하러 갈 만큼 낚시광이었지. 그런 쓰레기 놈이 마누라 배에서 나 튀어나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길래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예상하기 어렵진 않지?"

제 부친을 망설임 없이 '쓰레기 놈'이라 부르는 그 패륜적인 태도에서 내가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느꼈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대충 설명하자면,처음 강준치의 과거 이력을 알았을 때 느낀 그 친밀감이 다시금 내 가슴을 채우는 가운데, 강준치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몇 살이지?"

"28."

"동갑이네. 도움받는 처지에 계속 이쪽만 반말하기도 뭐한데 말 놔······ 좋아, 친구? 다시 말하는데 나 좀 도와줘."

이 시점에 나는 내면에서 저 친구를 내 십년지기 절친으로 격상시킨 마당이었다. 내가 물었다.

"정확히 어떻게 도와달라고?"

41화 S급 헌터 강준치 - [4]

그리고 강준치가 요구했다.

"면허 없이 영업 중인 의사한테 데려다줘. "

"뭐?"

"무면허 의사한테 데려가 달란 말이야. 정부에서 그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그런 의사여야 정부의 사주를 받지 않았을 거라 확신할 수 있잖아?"

난 방금 이 친구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줄 마음이었지만, 음······. 아무리 그래도 이따위 요구를 들어주기는 어려웠다.

"너 내부 장기 잘렸댔지 않았나? 폐인가 심장인가가."

"그런데."

"딱 봐도 끔찍하게 심각한 상태인데 무면허 의사가 그걸 어떻게 고쳐? 큰 병원 가도 수술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치유 능력자는······ 그중에 몰래 영업하는 사람을 찾아보면······"

나는 한숨 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런 돈 되는 능력을 지닌 부류의 각성자들은 절대 자기가 가진 능력을 숨기거나 몰래 영업하질 않아. 진작 다 큰 병원에 소속됐단 말이야."

"그래도······ 큰 병원에 가선 안 돼. 큰 병원이면 내 치료 기록이 정부에 전달될 거 아냐? 그랬다간 내 역장이 역장 날붙이에 맥없이 뚫린단 사실이 알려질 테니까······."

"약점을 공개할 수 없다는 거야?"

"그래. 정부에서 각성자들 모아서는, 특무대? 하여튼 뭔 특수부대를 조직하고 있다고 들었거든? 그 부대에 역장 날붙이 능력자를 육성해서 날 상대할 계획이라도 꾸리게 되면······"

"역장 날붙이가 아무리 견고한 역장인들 절단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일 텐데.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그래도, 내 역장마저 그렇다는 게 알려서는 안 된다고!"

이후로도 난 무면허 의사나 숨겨진 치유 능력자 따윌 찾으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가능한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강준치는 계속해서 절대 큰 병원에 가선 안 된다며 우겨댈 뿐이었다.

"내가 병원에 가는 순간, 이건 너무 큰 부상이라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경찰이 올 거야. 그리고 경찰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서 상부에 보고하는 순간 정부에서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거고!"

이 또한 그놈의 피해망상에서 나온 고집이리라. 나는 또다시 한숨을 참아내곤 말했다.

"정부에서 뭔 짓을 하든, 경찰에서 뭔 짓을 하든 내가 막을게."

"뭐?"

"내가 수술실 입구 지키고 있다가 누가 허튼짓하면 콱 죽여버리겠다고."

허세라 느낀 걸까? 강준치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사람 죽여본 적은 있냐?"

"얼마 전에 한 명 죽었지. 소월인 역장 외골격 능력자였는데, 내가 발차기 한 방에 몸 터뜨려 죽였다."

"아, 네 목 반쯤 잘랐다는 그놈······"

그리 중얼거리더니 강준치는 잠시 입 다물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지금 내 말을 믿으려 노력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러고 보니 이놈 사람 죽여봤지. 나도 마침 사람이고······' 따위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고.

그가 오래 생각에 빠져있을 여유는 없었다.

내 정신적 그물망에 무언가의 이동이 감지되었다.

형체를 보니 데스클로였다. 강준치의 위치를 살필 때 몇 마리가 산에 있다는 것을 미리 파악해뒀기에 대화하는 내내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둔 마당이었다.

그리고 수풀 속에서 데스클로가 도약했다.

상처를 입은 강준치를 노린 듯한 도약이었다. 그 도약하는 속도가 정말 화살처럼 빨랐다······ 제기랄, 나는 이놈들의 속도에 꽤 적응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놈들을 상대하는 것이 가장 까다롭고 싫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실수했다간 누군가의 목이 날아간다는 부담감은 여전히 견디기 어렵다.

그 사실을 티 내지는 않았다. 나는 미리 들고 있던 망치를 내리쳤고, 강준치의 바로 코앞까지 도달했던 데스클로의 등에 망치 머리가 닿았다.

등가죽과 척추뼈가 함께 뭉개져 버린 데스클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강준치는 눈을 부릅뜬 채 나와 데스클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자신 넘쳐 보이고자, 일부러 무덤덤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봤나?"

"뭘······"

"어떤 씹새끼가 허튼짓하면, 이 괴수 새끼마냥 바로 쳐죽인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확실히 목숨 살려준 셈인데, 맞나?"

내가 널 죽이기를 원했으면 내 손 더럽히지 않고 죽일 기회가 방금 있었을 것이요, 정말로 그 목숨 살릴 의지가 충만함을 암시했더니 대충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래, 진짜 목숨 빚졌네. 씨벌, 떡대 봐라. 힘쓰느라 팔뚝에 혈관 돋은 거 보니 오줌 지리게 무섭네······"

"병원에서도 확실히 지켜줄 테니까 얼른 병원이나 가자. 위급하다면서 자꾸 시간 끄는 건 그만두고."

이내 내 설득에 강준치가 항복했다. 그가 눈을 감았다 뜨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가자. 병원."

"걷긴 어렵나? 그럼 공간이동 시켜줄 테니까 역장 해제해."

"역장을 왜 해제해?"

"역장 덮인 상태에서는 공간이동이 함께 안 돼. 함께 공간이동 하려면 신체접촉을 해야 하는데, 이때 내 손이 상대방 신체가 아니라 역장에 닿게 돼서인지 아니면 역장의 질량이 너무 커서인지 몰라도 역장 외골격 능력자는 같이 공간이동 시키기 어렵더라. 같이 이동하려면 역장 꺼야 해."

강준치는 매우 머뭇거리는 눈치였지만 결국에는 내 말을 따랐다. 아마도 방금 내가 자길 죽일 생각이 없음을 목숨 빚을 지게 됨으로써 확인한 덕분이 클 것이다.

"아, 씨. 잘 때도 역장 치워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내가 강준치의 팔뚝을 붙잡았으며, 우리 둘은 공간이동 했다.

미리 불러둔 택시에 강준치를 태우고서 병원으로 향했다. 여전히 불안한 듯 강준치가 물었다.

"어디 가?"

"인천 성모병원."

"왜 인천에? 아, 하기야······ 인천 병원이라면 정부에서도 미리 손 못 써놨겠네. 미리 손을 써도 서울 아니면 부산 병원에나 접촉했겠지······"

"아마도. 그러니까 미리 인천 만세 외쳐 놔."

"미친 새끼, 아무한테나 그 미친 소리 하라고 강요한다더니 구라가 아니었······"

"인천 만세, 어서."

"그래, 씨발······ 인천 만세."

결국 강준치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약속한 대로 나는 응급실 앞을 지키고 선 가운데, 가끔 수술이 어찌 진행되는지 흘긋거렸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가운데, 그 말을 따라 웬 여자가 손을 뻗었다.

그녀가 강준치의 싹둑 잘린 장기에 손을 댔다. 그 손에서 초록빛 연기가 빠져나와 강준치의 장기에 정체불명의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었다.

치유 능력이다. 이 병원에 저런 능력자가 있다는 걸 알기에 굳이 이곳으로 데려왔다.

'각성자는 같은 각성자의 신체에 능력을 직접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 아예 각성자를 상대로는 능력이 먹히지 않는 줄 알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각성자는 어디까지나 능력의 발생지점을 다른 각성자의 신체로 설정할 수 없을 뿐이다. 이미 발동된 능력은 별 무리 없이 다른 각성자의 신체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역장 날붙이 능력은 멀쩡히 다른 각성자의 신체를 절단하며, 내 공간이동은 다른 각성자의 신체를 이동시킬 수 있다. 역장 날붙이 능력은 자신의 칼 아니면 발톱에서 발현되는 것이요, 내 공간이동은 내 신체를 통해 발현되는 것이라서 그렇다.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치유 에너지는 저 각성자의 손에서 발생했기에 같은 각성자인 강준치에게도 분명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의사가 겸자를 써서 잠시 이어붙인 절단 부위가 순식간에 도로 연결되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시간이 흘러 수술을 마친 뒤, 마취가 풀리기 무섭게 강준치는 병원을 나섰다. 병원 수속조차 제대로 밟지 않는 막무가내 퇴장이었다.

"큰 수술 마쳤는데 요양해야 하지 않나?"

내 물음에 강준치가 진절머리 쳤다.

"됐어. 병원 밥 주는 걸 어떻게 믿고 받아먹어?"

"병원 밥이 뭐 어때서?"

그리고 강준치는 맛없는 건강식을 먹기 싫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쓸데없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누가 음식 주는 거 절대 안 받아먹어. 배달시켜 먹는 것도 최대한 자제하지."

"그러면 식사 어떻게 해결하는데? 직접 다 차려 먹나?"

"아니, 길거리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가게에 들어가서 사 먹지. 그런 식이면 내가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미리 짐작이 안 될 테니까."

"너 죽이려고 누가 독이라도 섞을까 봐 그래?"

"물론."

이미 여러 번 확인한 사실이지만 확실했다.

강준치의 피해망상은 심각했다. 하다못해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않을 정도라니?

강준치가 말했다.

"아무튼 덕분에 살았네. 이 은혜는 반드시······ 아니, 아니다. 빚은 바로 갚아야지."

"바로 갚겠다니?"

"너 얼음 능력자들 받아주는 초고층 아파트 짓겠다고 전 재산 썼다며. 그래서 지금 빈털터리에 아파트 지을 돈 모자라서 대출도 받아야 한다던데 맞나?"

"그렇긴 한데, 돈이라도 주려고?"

"줘야지. 넘쳐나는 게 돈인데."

나는 돈이 아닌 다른 것을 요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면 좋지."

"그래, 기다려 봐······ 계좌이체로는 내가 주려는 만큼 이체가 안 되네. 날 밝으면 은행 가서 이체할 테니까 기다려, 알겠지? 그럼, 여러모로 도와줘서 고맙다 정말······."

*******

그렇게 강준치와 헤어진 다음 날, 나는 강준치가 보내온 액수를 보고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헌트웹 메시지로 내가 받은 충격을 전달했다.

Ⓐ BabyBerserker : 준치 아조씨 돈 진짜 많이 보냈네양?!? 애기버섯이는 돈에 혹하는 값싼 소녀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너무 감동감동 호에에에에♥♡♥!!

Ⓢ Kang : (따봉)

Ⓢ Kang : 그런데 이 미친 새끼가, 어제 얼굴 직접 봐놓고서 이 지랄 할 맘이 드나 ㅎㄷㄷ

Ⓢ Kang : 네 근육질 떡대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데 이러는 거 보니 못 버티겠다 진짜

공사 자재 가격이 너무나 치솟은 나머지 내가 원하는 수준의 초고층 아파트를 지으려거든 지금 가진 돈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대출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내년에 벌어들일 돈까지 추가로 들여가며 완공할 계획이었는데, 강준치는 나조차 놀랄 만한 거금을 보내왔다. 공사에 쓰일 자재를 가격이 더 치솟기 전 모두 사들일 수 있을 만한 거금을.

나는 근심 중 하나가 사라졌음에 기뻐하는 한편 생각했다.

역시, 강준치가 은혜를 갚겠다고 할 때 여동생에 관해 부탁하지 않은 건 잘한 것이었을까?

당시 나는 강준치에게 내 여동생을 감옥에서 꺼내달라는 요구를 할까, 하는 충동을 느꼈더랬다.

강준치가 교도소에 성큼성큼 들어가 내 여동생을 꺼내올 경우, 어쩌면 그것은 탈옥으로 취급되지도 않을지 몰랐다.

웬 각성자의 존재가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원칙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음을 정부와 매스컴은 공개적으로 알리길 원하지 않는다. 강준치가 뭔 행패를 저지르든 그게 뉴스에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니 강준치가 내 여동생을 꺼내온들, 그 일은 인터넷 기사에조차 나오지 않을지도······.

그러나 나는 결국 예의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하나는 내 여동생이 곧 감옥에서 나오는 까닭이다.

녀석의 수감 기간은 이 년도 채 남지 않았다.

다섯 명이나 죽인 것치곤 상당히 빨리 나오는 셈인데, 감방이 포화상태라 감방을 비우기 위해 별별 이유로 수감자들의 형기를 줄여준다던가?

또한 증거가 없는데도 정부 방침으로 유죄를 내려야 했음을 고려한 탓인지, 아니면 왕따 피해자였음을 고려해서인지 몰라도 판사가 처음부터 형기를 짧게 내리기도 했다.

그렇듯 곧 출소할 여동생을 꺼내겠다고 굳이 S급 각성자에게 부탁씩이나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예의 요구를 강준치가 심히 탐탁잖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여긴 까닭이다.

어제 직접 만나봤건대, 내 생각과 달리 강준치는 딱히 철저한 무법자가 아니었고 정부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무적의 초인도 아니었다.

그는 정부를 상당히 위협적으로 인식하는 모양새였지 않은가. 심지어 한 번 죽을 뻔했다 살아난 탓에 정부에 대한 그의 경계심은 더욱 커져 있을 터였다.

이 와중에 강준치로서는 교도소에 쳐들어가 여자 하나 탈옥시키는 요란한 위법행위를 저지르길 꺼릴지도 몰랐다. 그랬다간 자신에 대한 정부의 위협 판단 수준이 더욱 커지리라 여길 테니까.

하여간, 직접 만나본 강준치는 내가 생각하던 인물과는 여러모로 다른 인물이었다.

내가 그에게 인간적인 호감이며 동질감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그 점은 분명히 실망스럽다.

제3세계와 인도네시아 등에서 강력한 각성자들이 기존의 체제를 뒤엎었듯, 한국에서는 강준치가 그 역할을 해내리라 생각했다. 언젠가 각성자들이 현 체제에 불만을 느끼고 일제히 일어서는 그날이 오면 모두의 대표로서 강준치가 나서리라 기대했던 셈이다.

지금 보니 헛된 기대였던 듯하다.

강준치는 지나치게 평범했으며 지나치게 소시민이었고, 나라를 뒤엎을 혁명가 혹은 찬탈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누군가가 자신의 식사에 독을 탈지 모른다고 걱정하면서 하는 짓을 보라. 그는 자신을 죽이려 들지 모른다고 여겨지는 정부를 짓밟길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가게에나 대뜸 들어가 음식을 주문한다는 매우 소극적인 저항 방식을 선택했다.

강준치가 왜 그토록 소시민다운지는 대충 짐작이 된다. 아마 그는 지금 자신의 상황에 충분히 만족하는 까닭이리라.

그는 인생에서 비참하고 초라했던 시절이 길었다. 공무원 시험을 1년 만에 합격한 비결은 어떻게든 먹고 살 방법을 마련하겠다는 절박함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 절박했던 시절과 비교할 때, S급 헌터로서 목숨 좀 살려줬다고 천억 넘게 송금할 수 있는 지금은?

강준치가 느끼기로선 본인의 처지는 더 상승할 여지가 없을 만치 완벽한 상태이리라.

그러니까, 그는 굳이 국가 전복씩이나 해가면서 뭔가를 더 얻어내야겠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혐한이니 한국인은 갯강구니 뭐니 해봤자, 그로서는 지금 한국에서 누리는 삶만으로도 충분한 나머지 말도 안 통하는 외국으로 떠날 생각 따윈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강준치 그에 대한 기대는 남아 있다.

내가 본 환각······. 아마도 또 다른 내가 맞이했을 미래로 보이는 그 환각에서, 강준치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환각 속 강준치 또한 데스클로를 학대하겠다며 산에 들어갔다가 죽을 뻔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 같다.

그리고 환각 속 나와 강준치가 초면이었던 걸로 보아, 환각 속 강준치는 자신을 도울 사람을 마땅히 찾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믿을 수 있을 만치 반정부적인 각성자는 흔치 않으니까.

그렇다면 목숨이 위태로웠던 환각 속 강준치는 어쩔 수 없이 119를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서는, 불안에 떨며 수술을 받은 끝에 무사히 살아났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에 대한 그의 불신은 상당히 걷혔을 것이다.

하지만 환각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강준치는, 각성자 동지인 내가 본인을 지켜냈기에 살아남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정부가 자길 죽이려 한다는 피해망상 또한 여전하다.

그러니 언젠가, 그 피해망상이 더욱 크게 자극될 상황에 처한다면 그때에는······.

*******

42화 비각성자 정진영 - [1]

정진영은 제 앞에 마주 앉은 김극을 바라봤다. 자신보다 머리 두 개쯤 더 크고 좌우 넓이로는 비교하기도 민망할 지경인 저 UFC 출신 각성자를 말이다.

저 남자와 같이 활동한 지도 이미 반년이 넘었다. 덕분에 이젠 저 남자를 보기만 해도 움츠러들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 앞에서 태연하기는 어려웠다.

이쪽이 34세라 연상이란 이유로 당당하게 대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까진 히키코모리였던 놈이 어디서 감히······.

"요샌 좀 어때요. 할 만해?"

김극의 물음에 정진영이 말을 흐렸다.

"예, 뭐······."

그러자 김극이 눈살을 찌푸렸는데, 그것만으로도 정진영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말하는 거 봐선 전혀 괜찮은 거 같지 않은데, 뭐 문제 있어요? 혹시 성문영 그 양아치 새끼가 시비라도 거나? 그 새끼 나한테도 툭하면 기분 나쁘게 말해서 신경 툭툭 건드리거든······."

"아뇨, 아니에요. 다 너무 좋아요, 정말."

허겁지겁 말하긴 했지만, 의외로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정진영은 지금 자신이 속한 헌터팀이 진심으로 좋다.

우선 벌이부터가 좋다. 저 김극과 활동하면서 정진영은 태어나서 자신이 벌어들이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거금을 벌어들이고 있지 않은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백수 아들을 먹여 살려야 해서 자기네 노후 자금이 축날 거라며 울상이던 부모님들, 두 분은 이젠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 덕에 생존할 수 있다. 그 사실은 정진영에게 뿌듯함과 비틀린 승리감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이 와중에 팀 내 동료들도 맘에 든다.

우선 팀에 백담비가 있다는 사실부터가 큰 위안이다. 원래는 기껏 어느 헌터팀에 들어가도 말주변 없는 자신 혼자 왕따가 되리라 걱정했는데 이 팀에는 자기만큼 말 없는 백담비가 있어서 너무나도 든든하다. 팀에 합죽이 하나보단 둘이 있는 게 덜 눈치 보이고 맘이 편하니까.

워낙 사람이 좋아서 굳이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임형택 씨의 존재도 위안이요, 성문영이랑 이종호가 이쪽을 만만히 보고 놀려대는 게 짜증 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참아넘길 만하다.

다른 헌터팀에서 활동했다면 그 둘은 애교로 보일 만큼 더 끔찍한 놈들이 가득했으리란 것을 안다. 지금까지 활동하며 다른 헌터팀을 보면서 파악했건대, 다른 팀엔 진짜배기 양아치들이 가득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런 양아치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종류인 줄 알았던, 눈앞의 신체강화자가 예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인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위안이다.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이런 말 하면 눈치 보여서 말하기 어려운 거 아는데, 그래도 꼭 말해."

"예······."

"그리고 슬슬 은퇴해야겠다 싶으면 그것도 꼭 말해요. 퇴직금 줄 돈 미리 준비해야 하니까 말이야."

김극의 말에 정진영은 눈을 크게 떴다.

"퇴직금 주시겠다고요? 왜······?"

"아, 팀에서 떠나라고 우회적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고!"

"그게 아니라, 우리한테 퇴직금을 준다면 김극 씨가 사비를 써서 주셔야 할 거 같은데 그게 이해가 안 돼서요. 엄연히 따지자면 우린 김극 씨가 고용한 인원도 아니잖아요? 굳이 돈을 쓰셔야 하는 건가······"

정진영의 물음에 김극이 한숨 쉬었다.

"팀에서 한 명 죽으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들어서 이러죠. 내가 진준이 유족들한테 부조금을 세간의 기준보다 많이 내긴 했는데 죽은 본인한테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돈 잔뜩 번 보람도 없이 한 명 죽으니까 영 맘이 안 좋아.

게다가 요샌 상황이 갈수록 위험해지잖아요? 그놈의 베헤모스 때문에 말이야. 당분간 쭉 위험할 것 같은데, 더 위험해지기 전에 벌어둔 돈 충분하면 이만 은퇴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애."

"하기야, 다른 헌터들 얘기 들어보면 적당히 돈 벌었을 때 은퇴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괜히 꾸역꾸역 계속 활동하다간 언젠간 죽으니까······."

"그치? 그러니까 우리 팀에서도 누가 은퇴할 결심이 섰을 때 바로 은퇴할 수 있도록 퇴직금을 내가 주면 좋지 않을까 싶더라구요. 부조금 내는 것보단 퇴직금 주는 쪽이 돈도 덜 들 거 같기도 하고······."

정진영은 눈을 껌벅였다. 생긴 것만 봐서는 이쪽을 공장에 처박아놓고는 월급은 절반쯤 뺏어가게 생겼는데, 실제로는 아예 낼 필요도 없는 부조금이며 퇴직금을 주겠다고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생긴 것만 봤을 때는 이 정도로 사람이 좋을 줄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 정도로 주변 사람을 챙기려 들 줄은 몰랐다.

학원 원장만 봐도 이쪽과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김극이 헌터 데뷔하면 입 싹 씻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건만 그가 데뷔하고서도 학원을 꾸준히 홍보해주거나 일부러 집에서 먼 학원 헬스장에 출석해가며 학원과 자신 사이의 연결을 과시해주는 것이 고마워 죽겠다고 말한 것을 언제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슬슬 은퇴할 맘 있으신가?"

김극의 질문에 정진영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요? 돈 꽤 벌지 않았나?"

"그래도······"

"하기야 쌀값 라면값 빼곤 모든 물건 가격이 실시간으로 오르고 있는데 통장에 0 좀 많다고 안심이 안 되긴 하겠다. 현재 부모님이랑 사는 아파트는 월세랬지 아마? 서울 아파트는 너무 비싸서 못 사겠지만 인천 아파트는 좋은 걸로 한 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가격 더 오르기 전에 한 채 사둬요."

저 남자가 딱히 놀라운 조언을 해준 것은 아니었지만, 정진영은 그 말을 듣고서 눈을 껌벅였다.

가슴에 무언가가 차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 감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감동? 감격?

어느 쪽이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속되게 이르자면 기분이 째졌다. 퇴직금을 주겠단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현재 부모님과 사는 아파트가 월세란 것까지 다 기억해주다니? 이쪽은 그걸 대체 언제 말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부모마저 이쪽이 한 말을 매번 기억 못 해서 생일날에 이쪽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힌 굴비를 구워놓곤 '너 이거 좋아하지?' 하며 으스대지 않던가. 부모보다 저 남자 쪽이 이쪽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 같다······.

"아무튼 오늘도 고생했고, 앞으로도 계속할 거라니 쭉 힘냅시다. 인천 만세."

"예, 인천 만세······!"

김극은 정진영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이만 가보라고 했다. 정진영은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 집으로 향했다.

걸으면서 방금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그날 암석 정령과의 일전에서 영상을 촬영한 것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짓이 아닐까 싶다. 그때 영상을 촬영하지 않았으면 감히 김극에게 팀에 끼워달란 말도 못 했을 것이요, 그랬다면 지금 자신은 이토록 행복하지 못했을 테니까······.

집에 와서는 헌트웹에 접속했다.

정진영의 계정은 헌트웹에 나름의 존재감이 있는 바였다. 그 유명한 김극 팀의 짐꾼이란 게 알려진 까닭이다.

5my지저스 :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 ㅎㄷㄷ 김극 형 오늘로 나흘 연속으로 출동했는데 그 와중에 팀원 아무도 안 다친 거 실화냐?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출할 겸, 그리고 자신이 김극 팀의 일원임을 과시할 겸 평소처럼 김극 칭송 글을 올렸더니 바로 댓글이 달렸다.

Ⓐ syberMagneto : 너 김극 팀 짐꾼인 거 같은데 맞지? 거기 있는 얼레기 요새 어떤 거 같냐. 남자들끼리 있을 때 막 그년 뒷담하고 그러나?

팀의 '말 없는' 동지로서 차마 그녀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5my지저스 : 백담비 씨 말하는 거 같은데, 전혀······. 애초에 그 사람이 김극 형 다음으로 활약하는데?

Ⓐ syberMagneto : 굳. 그런데 구라치는 거 아니지?

5my지저스 : 거짓말 전혀 아님. 예전 같으면 얼음 능력 줘도 안 가졌겠지만 담비 씨 보니까 얼음 능력도 충분히 괜찮은 거 같거든? 그래서 나 이번 겨울에 일부러 얇게 입고 다니면서 얼음 능력 각성하려고 노력해볼까 생각 중

Ⓐ syberMagneto : ?

5my지저스 : 추위 느끼는 게 얼음 능력의 각성 트리거라잖아. 나도 추위 제대로 느껴서 얼음 능력 각성 시도해 보려는 거임. 얼음 능력이 딴 능력들보다야 안 좋아도 각성 안 한 것보단 훨씬 나은 거 같아서

Ⓐ syberMagneto : 열등한 비각성자로서 각성자의 우월함을 깨우친 건 갸륵하다만 그런 이상한 짓은 절대 하지 말아라. 집 구하기 너무 힘들어진다······.

얼음 능력에라도 각성하고 싶단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정진영이 지난 반년 사냥에 참여하며 느낀 바가 있었으니, 각성자가 괜히 큰돈을 받는 게 아니란 사실이다.

정말이지 팀의 두 각성자를 제외한 인원들은 전부 짐꾼에 불과했다. 베테랑이라던 장병곤마저 팀의 두 각성자에 비하면 너무 존재감이 없어서 전혀 으스대질 못하는 상황 아닌가.

팀의 김극을, 백담비를 떠올렸다. 겉모습만 봐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특별해 보이는 그들.

자신도 그들처럼 각성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되면 얼마 전까진 삼십 대 히키코모리에 불과했던 이쪽도 그들처럼 특별해질 수 있지 않을까?

김극이야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특출난 모양이니 각성한들 그처럼 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종호나 성문영 따위보단 훨씬 우월해질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베테랑인 장병곤보다도······.

사실 예전부터 각성자에 대한 관심이 꽤 있었다. 학원 다닐 적 김극을 가끔 흘긋거린 이유가 그것이었다. 인터넷에서만 보던 각성자를 실제로 보니 너무나 신기하고도 부러웠더랬다.

'요새도 새로 각성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모양이니까. 나도 어쩌면······.'

문득 인터넷에 '각성하는 법'을 쳐봤다. 거기 나온 내용을 읽어내렸다.

얼음 능력자, 춥다고 느끼면 각성한다. 각성 조건이 어처구니없이 쉬운 데다 하필이면 게이트가 열렸을 때 한국이 겨울이었던지라 한국에는 유독 얼음 능력자가 많다.

화염 능력자, 온몸이 불에 휩싸이면 불타는 감각 속에서 각성한다. 얼음 능력과 비슷한 조건인 것 같으면서도 훨씬 어려운 조건이다. 일부러 조건을 맞추겠다고 불에 뛰어들었다간 각성하긴커녕 그 전에 불타 죽을 확률이 훨씬 크다는 점에서 더욱.

신체강화자, 신체를 단련하거나 격투기를 수련하는 과정에서 각성한다는데 이쪽은 헬스장에서 아무리 운동해도 몸이 여전한 걸 봐선 포기해야 하지 싶다.

역장 날붙이 능력자, 칼을 휘두르다 보면 각성한다는 이유로 요새 진검으로 검도 수련시키는 곳이 많다던가? 언젠가 검도 도장에 등록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역장 외골격 능력자······.

정진영으로서는 오히려 이쪽에 각성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이 저 능력의 각성 트리거라는데, 이쪽도 압박감이며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은 자신 있으니까.

하지만 각성하기 위해선 그 트리거만 만족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자질이 훨씬 중요하다던가?

그래서 조건을 꾸준히 만족한다고 아무나 각성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들었다.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이야 한국에 널렸어도 그 강력한 역장 외골격 능력에 각성한 사람은 극소수 아닌가······.

자신이 각성한 상황을 망상하던 중이었다.

스마트폰이 울렸다.

바로 보니 헌터 소집을 알리는 신호였다. 또 게이트가 열렸단 것이었다.

심지어 게이트 규모는 대형인 것 같다고, 가능한 많은 헌터들이 출동하길 바란다고 알리고 있었다.

이런 사태에 그 김극이 가만있을 리 없다. 정진영은 곧바로 컴퓨터를 끈 뒤 소총과 탄약을 챙겨서는 출동할 준비를 했다.

*******

43화 A급 헌터 응우옌 - [1]

이번 달에는 인천 탈환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못했다.

게으름이라도 피웠던 것은 아니다. 요즘 들어 게이트가 너무 빈번하게 열린 탓에 24시간 대기하다가 일이 터질 때마다 출동해야 했을 뿐이다.

이 피곤한 상황의 원흉은 이미 알고 있다. 그놈의 베헤모스.

우릴 태운 헬기 안에서 성문영이 짜증스레 말했다.

"베헤모스 그 새끼, 대체 언제 돌아간대요?"

일찍이 베헤모스가 서울 가까이 접근했고, 강준치의 서울행으로 말미암아 그 거대괴수의 전진은 멈췄다.

그러나 베헤모스는 아직까지 왔던 길로 돌아가거나 방향을 전환하여 다른 곳을 향하지는 않았다.

베헤모스는 서울에서 가까운 그 지점에 그대로 멈춰 섰다. 어쩌면 그 거대괴수는 기다리다 보면 강준치가 그 자리에서 떠날지 모른다고 기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강준치가 이대로 쭉 버틴다면 베헤모스는 결국 떠나겠지만,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문제는, 베헤모스가 혼자 다니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베헤모스의 이동은 언제나 수만 마리 괴수 떼를 동반한다. 정확히는 괴수들이 멋대로 베헤모스를 따라다니는 것으로, 괴수들로서는 베헤모스와 붙어 다니기만 해도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체장 400m에 달하는 암석 정령인 베헤모스가 현실에 출현하면, 놈이 생성한 초대형 게이트에서는 그 거대괴수가 만들어낸 혼란을 틈타 사냥하려는 괴수들의 해일이 뒤따른다.

그 괴수들의 해일에서 이탈한 괴수들이 한국을 습격하고 있다. 아마도 참을성이라곤 조금도 없어서 가까운 곳에 사냥할 인간이 득시글거리니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놈들일 텐데, 그로 인한 피해가 막심했다.

이 와중에 서울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이 덩달아 피해를 보는 중이었다.

서울에서든, 인천에서든 툭하면 게이트가 열렸고 쉴 틈이라곤 전혀 없었다.

최근에는 나흘 연속으로 게이트가 열려서 나흘 연속으로 출동해야 했다. 심지어 오전에 이미 출동했건만 저녁에 또 게이트가 열리고 말았다. 그래서 현장으로 향하는 중이고.

"우리 지금 나흘째 출동이잖아요? 이번엔 그냥 쉬었어도 아무도 형 욕 못 했을 건데······."

성문영의 말에 내가 말했다.

"안 돼. 나 쉬지 않고 사냥해서 아파트 층 더 올려야 해."

"아니, 돈은 이미 다 모였다매요······."

나는 자꾸 불평하는 놈에게 뭐라고 하려다 말았다. 하기야 비각성자가 각성자의 페이스에 따라오길 바라서는 안 되는 법.

"그렇게 힘드냐? 그렇다면 내가 좀 미안하긴 하다."

"아니, 내가 힘든 건 아닌데요. 내가 힘든 게 문제가 아니라 형 고생하는 게 문제죠. 매번 출동하면 거기 괴물 절반 이상은 형 혼자 때려잡아야 하잖아······?"

성문영이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가운데 이종호의 신음이 들려왔다.

"아, 다 왔나 보다······."

나 또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감정들이 내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이 현상을 처음 겪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견딜 만했다. 아마도 그날 이후로 괴수들을 여럿 사냥하여 영적으로 크게 성장한 덕분이 아닐까.

덕분에 헬기 안에서, 나는 정신적 그물망을 펼친 채 저 아래의 상황을 파악할 여유가 있었다.

약 2km 반경에서 펼쳐지는 상황들이 내 머리에 전달됐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가운데 필사적으로 그 정보들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그 모든 정보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데 성공한 내가 입을 열었다.

"나 먼저 간다."

이제는 다들 내 독자행동에 익숙해졌는지 항의하는 인원도 없었다. 장병곤이 빠르게 말했다.

"착륙하고 자리 잡으면 위치 보고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냥에 나설 준비를 했다.

헬기 위에서 헌터 라이플의 사격 자세를 취했다. 조정간을 연발로 설정한 다음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 방아쇠를 누르는 동시에 공간이동 했다. 어디로?

앞서 파악한 장소 중에 가장 위급한 곳, 그러니까 막 어느 가족을 덮치려던 데스클로의 측면으로.

시야가 바뀌었다. 데스클로와 벌벌 떠는 한 가족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악―"

공간이동 하기 전 미리 방아쇠를 누르고 있었기에 탄환은 내가 공간이동을 마치기 무섭게 발사되었다.

총구에서 쏟아져나온 30mm 기관포탄들이 데스클로 두 마리를 연달아 찢어발겼다.

연발로 설정되었기에 총구에서는 계속해서 탄환들이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지만, 나는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탄환을 낭비할 생각 또한 없었다.

"어, 아? 김극 헌―"

아쉽게도 날 알아본 아저씨에게 인천 만세, 해줄 여유도 없었다.

나는 미리 파악해둔 위치로 또다시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시야가 바뀌면서 보이게 된 들어온 한 무리 맨티코어들······, 웬 경찰들을 포위한 채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고 있던 그 사자 괴수들에게도 이미 발사되고 있던 탄환들이 날아갔다.

저 앞에서 고기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그리고 저 짝퉁 사자들의 죽음을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다음 공간이동 할 장소를 살피고 있었다.

"어? 어!"

죽다 살아난 경찰들이 기겁한 듯했지만, 이번에도 손 한 번 흔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약 사 초 남짓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총구를 아래로 내리며 또다시 공간이동 했다.

한 8층 건물의 옥상에 발을 디뎠다.

앞서 아래로 향한 총구에서 여전히 총알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덕분에 건물 벽을 타고 오르고 있던 데스클로들을 향해서도 아무런 지체 없이 곧바로 기관포탄 세례를 퍼부어줄 수 있었다.

데스클로들의 조각난 시체가 추락하는 동시에 나는 또다시 앞서 확인해둔, 또 다른 위급한 장소로 공간이동 했다.

그곳에서 마주친 괴수들에게도 저항할 여유 따윈 주지 않고 탄환을 퍼부어줬다······.

그런 식으로, 나는 일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열한 번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내 그물망에 포착됐던 모든 괴수를 처치했으며 놈들의 식사가 될 뻔했던 사람들을 살려냈다.

강준치의 환각을 겪은 이후로 가능해진 재주였다. 시야 밖 공간이동을 짧게 연달아, 그것도 정확하게 반복해내는 재주 말이다.

그리고 한 번 이러고 나면 나는 거의 쓰러져 죽을 것 같은 상태에 이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끔찍한 현기증 속에서 사물이 구별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몰아쉬던 중이었다.

가슴에 단 무전기에서 성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우리 자리 잡았어요! 우리 지금 어딨냐면―」

도저히 공간이동 할 상황이 아니었지만, 난 어떻게든 그곳으로 공간이동 하고자 애썼다.

두 번 실패한 다음 세 번째에 겨우 성공했다.

내 헌터팀의 사이에 공간이동 했다.

이번 공간이동을 마치기 무섭게 몸이 기우뚱거리면서 쓰러질 뻔했다.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자 애썼다.

이대로 쓰러지면 안 된다. 아직 사냥이 진행되는 중이니까.

그러나 정신력 따위가 다 무의미하게도, 온몸이 끔찍하게 뜨거웠다.

며칠 전에 딱 한 번 경험해본, 능력의 과다 사용과 그로 인한 신경계 과부하에 따른 체온 상승이다.

이 상태에서는 초재생능력조차 발휘되지 않는다. 이대로면 정말로 죽고 말 것이다.

날조차 더워서 이대로 쓰러질 것 같은 가운데, 나는 내 라운드걸을 쳐다보며(정확히 쳐다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네 명쯤으로 늘어난 듯 보였으니까) 입을 뻐끔거렸다.

'빨리 그거······.' 하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백담비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고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서둘러 다가와 내 등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리고, 아······.

그녀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무언가가 내 등골을 타고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온몸의 단백질이 변성될 만치 상승했던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겨우 살 것 같다.

잔뜩 달궈졌던 내 신경계마저 정상적인 온도로 돌아오자 비로소 초재생능력 또한 복구되었다. 익어버린 뇌세포들도 하나둘씩 재생되는 가운데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방금까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던 백담비의 목소리를 겨우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걱정스레 묻고 있었다.

"괜찮아요?"

내 목소리 또한 다시 나왔다.

"덕분에요. 그리고 나 방금 탄창 다 썼는데······"

내가 중얼거리면서 옆을 흘긋 보았더니, 이제는 다들 척하면 척이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종호와 성문영 둘이서 내 55kg짜리 헌터 라이플을 들어 올린 가운데 정진영이 탄창을 교체하는 중 아닌가.

탄창 교체를 마친 헌터 라이플을 내가 한 손으로 번쩍 들자 이종호가 새삼 놀라운 듯 감탄사를 흘렸다.

"오······"

임형택 씨가 물었다.

"김극 씨? 곧 죽을 듯 상태 안 좋았던 거 보아하니 며칠 전처럼 또 무리한 것 같은데······ 그래서 어때요, 다 죽였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나와 있던 놈들은 모조리."

임형택 씨는 자기가 물어놓고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성문영이 혀를 찼다.

"어우 씨, 죽이네······, 형, 빨리 인천시에 계약 갱신해달라고 해요. 헌트웹에서도 형 너무 싸게 계약한 거 같다고 다들 난리잖아?"

나는 내 활약으로 인한 내 팀원들의 반응과 칭송을 즐기면서도 최대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뇌와 온몸의 신경계를 휴식시키고자 애썼다.

다음 전투를 대비한 휴식이었다.

앞서 보고된 바로는 지금 발생한 것은 대형 게이트였다. 그리고 거대한 게이트에서는 거대한 괴수가 뛰쳐나오는 법이다.

그놈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놈이 나오거든 내가 사냥해야 한다.

오래 휴식하지는 못했다. 무전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형 괴수입니다! 버스만 한 놈이요! 대로 쪽으로 유인 중인데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정확한 위치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나이토 상이었다. 헬기를 타고 온 우리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현장에 도착했더라니, 혼자서 게이트의 위치를 찾아다니고 있었던 듯했다. 그러다 예의 대형 괴수를 맞닥뜨린 모양이고.

나는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고서 정신적 그물망을 펼쳤다.

그리고 공간이동 했을 때, 난 이미 상황을 그물망을 통해 파악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놀랐다.

바이크 배기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지축이 울리는 소리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고, 쿵쿵거리는 육중한 소리는 그 소리에 걸맞지 않은 빠른 박자로 울렸다.

저 앞 도로에서 달리는 두 빠른 것들을 보았다.

나이토 상이 예의 은빛 바이크에 타고서 달리고 있었다. 거의 최대속도로 달리는 듯했다. 쫓아오는 괴수를 유인하고자, 최대한 사람이 없는 대로변 쪽으로······.

뒤이어 나이토 상을 쫓아 달리는, 그 말도 안 되게 빠른 바이크를 맹렬히 추격 중인 집채만 한 괴수를 보았다.

흔해빠진 표현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집채 크기였다. 딱 대형버스가 저 정도 크기일 것이었다.

그 대형 괴수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볼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놈이 지나치게 빨리 달리고 있는 탓이었다.

내 눈이 다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저렇게 말도 안 되게 거대한 놈이 잔상만 남기는 속도로 달리고 있다니?

물론 내 할 일부터 해야 했다.

방아쇠를 당기자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내 헌터 라이플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선은 표적의 지나치게 빠른 속도에 불구하고 한 발도 빗나가지 않은 채 놈의 거대한 몸뚱이를 두들겼다.

저 너머 먼 곳, 놈의 꽁무니에서 피와 고기가 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대형 괴수가 멈췄다. 놈이 급정지한 탓에 거대한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그 흙먼지 너머에서 나이토 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반응이었다.

"김극 씨!"

그러나 나는 저 비각성자 찌꺼기의 반응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잔뜩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대형 괴수의 머리가 빠져나왔다.

저놈을 어찌 묘사해야 하나. 귀와 코와 엄니가 다 떨어져 나간 채 얼굴이 뭉개진 멧돼지?

그저 끔찍하게 못생기고 흉포해 보이는, 그 와중에 몸에 털이 하나도 없는, 그래서 몸 전체가 근육질임이 훤히 보이는 거대한 사족보행 괴수가 나를 보았다.

대형 괴수가 땅을 박차더니 날 향해 달려왔다.

그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그저 소름이 끼치게, 거의 초현실적으로 빨랐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공간이동 했다.

*******

44화 A급 헌터 응우옌 - [2]

인터넷 잡지식만 대충 주워 삼켜도 거대괴수가 어째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지 알 수 있는 법이다.

나 또한 대충이나마 기억하는 내용이 있다. 생물의 몸집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중은 대폭 늘어나는 데 비해 근육의 단면적에 비례하는 근력은 크게 늘지 않는 탓이라던가?

그런 이유로 영화 속 거대괴수쯤 되면 제 몸의 무게조차 견딜 수 없어 몸이 터져 죽고 말리라고 했다. 뭍에 나온 고래가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부 장기가 짓눌려 죽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듯 현실 생물들은 몸이 지나치게 커질 수가 없는 법이요 지나치게 커졌다간 문제가 생기는 법인데,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대형 괴수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원래 지구의 생물들과 달리, 괴수들은 몸집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강대해진다. 그리고 또한, 놈들은 그 커진 몸집에 비례해 근력이 증폭되며 더욱 빠르고 더욱 단단해진다.

저 멧돼지 흉물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공간이동 하여 발 디딘 건물의 옥상에서, 나는 저 대형 괴수가 방금 내가 있던 곳을 들이받는 장면을 보았다.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땅이 흔들렸다. '쿠르릉―'

저 멧돼지가 들이받은 부분뿐만 아니라 건물의 외벽 한 면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콘크리트 가루가 거세게 피어올랐다.

멧돼지의 돌진은 맞은편 벽까지 부순 채 그 몸이 건물을 빠져나오고서야 멈췄다.

놈은 멈춘 그 자리에서 킁킁거렸다. 자기 돌진에 내가 산산조각이 나서 죽은 게 맞나, 냄새로 살피는 듯했다.

이윽고 내가 죽지 않았음을 알아챈 듯했다.

멧돼지가 몸을 돌려 날 노려보았고 난 그 못생긴 면상을 향해 기관포탄을 퍼부어주었다.

내가 있는 건물을 들이받아 무너뜨리려는 듯했다. 내가 올라선 건물을 향해 놈이 똑바로 돌진해왔다.

내가 그 등짝에다 쉬지 않고 30mm짜리 황금빛 선을 선물해 주었지만, 놈은 기어이 죽지 않고 내가 있던 건물을 들이받았다.

또다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놈의 쿠르릉, 소리도.

건물 전체가 요동쳤지만 나는 난간을 잡고 버텨냈다. 그러느라 잠시 사격을 멈췄다가 다시 방아쇠를 당겨 놈의 등짝을 더욱 너덜거리게 만들어줬다.

그리 잔뜩 쐈는데도 놈은 죽지 않았다. 내가 쏜 부위에서 벌써 출혈이 멎은 걸 봐선 초재생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신체 강화 능력에 각성한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저 거대한 몸뚱이를 유지하려거든 골밀도든 근력이든 초자연적인 향상이 필요하기도 하니까.

딱 봐도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저놈은 아마 호주에서도 끔찍한 난동을 부렸을 것이다. 그 불운한 땅에서 숱한 건물들을 부수며 사람들을 양껏 잡아먹었을 것이다.

그래도 놈을 죽이지 못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놈은 날 공격하기 어렵지만 난 얼마든지 놈을 공격할 수 있지 않은가.

난 오히려 저놈이 날 피해 도시 중심으로 피하려 들 상황을 걱정해야 했다.

과연 일방적으로 퍼붓는 내 사격을 버티기 힘든 듯, 멧돼지가 몸을 돌렸다. 놈은 건물들 사이로 도망치려는 듯했다.

그리고 계속 놈이 내게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 나는 멧돼지의 앞으로 공간이동 했다. 놈의 바로 앞에서 방아쇠를 당기자 또다시 피를 본 놈이 격분하며 달려들었다.

그 속도 또한 무지막지하게 빨랐지만 데스클로의 도약하는 순간의 속도에 비하면 느려빠졌다. 난 그저 향상된 동체시력만으로도 가뿐히 그 돌격을 피해준 다음, 날 지나친 놈의 꽁무니에 계속해서 사격했다.

나 또한 신체강화자라서 잘 알지만 초재생능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대로 쭉 쏴대면 결국 죽으리란 확신이 들 즈음이었다.

찢어지는 비명이 울렸다.

"건물 안으로오! 건물 안으로오오!"

이 근처에서 난 비명이 아니었다. 저 너머에서 난 비명이었는데, 어째서?

가슴팍의 무전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오거 나타났습니다! 한 마리, 4미터급이요!」

그 사실을 굳이 무전으로 알려줄 필요조차 없었다. 다음 순간 내 눈에도 그놈이 똑똑히 보였으니까.

나는 저 너머에서 한 건물 벽을 타고 오르는 거인을 보았다.

놈은 한 빌딩의 창문에 손가락과 발가락을 집어넣어 가며, 10층짜리 건물 벽을 쉽게도 오르고 있었다.

오거였다.

그러니까, 거대화 능력에 각성한 고블린이었다.

거대화는 자기 몸집에 불만을 느끼면 발현되는 각성 능력이라지 아마? 고블린들은 종 자체가 자기네 몸뚱이에 불만이 많은지 유독 거대화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개체들에는 따로 이름까지 붙었다.

한편 오거가 오르는 건물의 옥상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이 다 함께 지르는 비명이 꽤 멀리 떨어진 내 귀에도 닿고 있었고.

"밀치지 마! 밀치지―"

딱 봐도 저쪽이 급했다. 나는 곧바로 공간이동 하여 그 건물의 옥상에 섰다.

저 앞을 노려보았다. 막 옥상 끄트머리를 붙잡은, 오거의 큼지막한 손가락이 보였다.

이미 그쪽에 겨누고 있던 헌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바로 당겼다.

연발로 몇 발 쏘자 오거는 갑작스러운 통증을 버티지 못한 듯했다. 오거가 비명을 지르며 건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어서 쿵 떨어지는 걸 보니 놈은 추락한 듯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신했다.

놈의 4미터짜리 거대한 몸뚱이만 봐도 여러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저 무거운 몸뚱이로도 원숭이처럼 벽을 타고 오르기 위한 근밀도가 어느 정도일지, 그로 인한 신체 내구성이 어느 정도일지······.

이 와중에 옥상의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피신하고자 좁은 입구에서 서로를 밀쳐대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포효했다.

"차분히 들어가요, 차분히! 급하게 안 들어가도 당장 급한 상황 넘겼으니까 차분히 들어가!"

내 유명세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급하게 서로를 밀치며 건물 내부로 들어가려던 사람들이 일제히 날 바라보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오거까지 사라졌음을 파악하고는 내 말대로 하기로 맘먹은 듯했다.

그제야 다들 일사불란하게 피신하는 가운데, 심지어 한 명은 날 알아보고서 응원하는 여유까지 보여줄 정도였다.

"힘내요, 김극 헌터! 인천 만세!"

승리의 주문을 외우길래 나도 그렇게 했다.

"인천 만세!"

이 순간에는 정말이지 그놈의 주문이 간절했다. 내가 봐도 쉽지 않은 상황 아닌가.

난간 아래를 보니 과연, 오거는 멀쩡히 살아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어서 저 멀리, 내가 내팽개치고 온 멧돼지 괴수 또한 보았다.

그 멧돼지 놈은 갑자기 내가 시야에서 사라진 상황이 당황스러운 듯 아까처럼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내가 없단 걸 확인했는지, 멧돼지 놈은 슬슬 먹잇감 사냥에 전념하려는 듯했다.

사람이 가장 많이 있을 법한 장소, 그러니까 도시 깊숙한 곳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걸 보니. 내가 아까 저걸 막으려고 일부러 저놈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는데, 그 노력이 허사가 되려는 마당이었다.

이 와중에 오거가 나를 보았다. 내가 놈을 쏘려고 하니 놈은 총이 뭔지 대충 아는 듯했다. 놈이 큼지막한 손바닥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그 탓에 내 기관포탄은 놈의 손바닥만 관통했을 뿐 그 면상을 타격하진 못했고.

그리고 내 사격이 계속되던 중 오거가 반격했다. 놈이 제 옆에 있던 경차를 번쩍 들어 내게 집어던졌는데, 나는 급히 사격을 중단하고 몸을 피해야 했다.

한편 멧돼지는 계속해서 도시 중심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여러 번 돌진해서 지쳤는지 나름 속도를 줄여 달리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끔찍하게 빨랐다.

내가 이 미친 원숭이 괴물부터 처리할 수 있도록 나이토 상이 아까 그랬듯 저 멧돼지를 유인해주면 좋겠지만, 그러기는 힘들어 보였다.

나이토 상은 이미 상황을 파악한 듯 멧돼지라도 다시 자기가 유인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컴온! 컴온!"

나이토 상이 바이크 음악을 최대로 켠 채, 샷건을 마구 발사하며 멧돼지의 눈길을 끌고자 발악하는 중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놈은 아까와는 달리 제 꽁무니에 달라붙은 나이토 상을 본체만체했다.

저 멧돼지가 방금 내 기관포탄의 맛을 본 탓이리라. 놈의 몸뚱이에 피를 잔뜩 흘리게 했던 내 사격에 비해, 소리만 요란할 뿐 아프지 않은 나이토 상의 사격 따윈 무시해도 된다는 걸 학습해버린 모양이다.

멧돼지 계속해서 나이토 상을 무시한 채 도시를 향해 달려나갔다.

오거도 그렇지만 저놈 또한 무시해선 안 됐다.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본바, 저 너머 도로에는 도시에서 탈출하려는 승용차들이 여럿 있으니까. 내버려 뒀다간 그들이 저 멧돼지의 발굽에 짓밟히고 말 것이었다.

이 와중에 오거는 날 향해 자꾸 뭔가를 집어 던져대고 있었다. 나무 하나가 내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떨어지려 했다. 나는 급하게 걷어차서 나무를 걷어내고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그쪽은 안 피하고 뭐 해요!"

남자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촬영하려고······"

"이 상황에 촬영은 무슨 촬영!"

"내가 김극 헌터 팬이라서······!"

나는 소리치려다 말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팬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남자가 어색하게 웃더니,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어쩔 거예요? 저쪽도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저놈 처리하러 떠나시면 여기 있는 우리 다 죽을 거고······"

그리고 내 대답은 짧았다.

"둘 다 상대해야지, 당연히."

남자가 오, 하고 감탄하는 가운데 나는 난간 너머로 뛰어내렸다.

쿵, 하고. 공간이동조차 하지 않은 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하여 또 한 그루 가로수를 집어던지려던 오거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는 크게 포효했다.

"따라와라, 새꺄!"

놈은 내 말대로 했다. 성난 고릴라처럼 날 향해 놈이 달려들 때 나 역시 뛰었다.

그러나 놈이 훨씬, 훨씬 빨랐다. 놈에게 순식간에 따라잡힐 위기였기에 나는 공간이동 하여 거리를 벌리고는 다시 소리 질렀다.

"오라고, 새꺄!"

오거는 이 말 또한 따랐다. 또다시 순식간에 날 따라잡은 놈을 피해 공간이동 하니 저 앞에 멧돼지가 보였다.

등 뒤에서는 오거가 달려오다가 급히 멈췄다.

그리하여 나는 두 거대한 괴수의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두 놈은 서로를 인지한 듯 잠시 멈춘 채였다.

난 문득 든 생각, 그러니까 이이제이를 노리겠단 생각으로 멧돼지의 안면을 향해 헌터 라이플을 쏘았다.

내 생각대로, 격분한 멧돼지가 견디지 못하고 돌진했다. 놈의 돌진 방향에 오거가 있었다······ 제기랄.

게임이나 만화처럼은 되지 않았다. 오거는 멧돼지의 돌진을 파쿠르 하듯 옆의 건물을 박차고 뛰어 피해내더니, 이 상황의 원흉인 날 노리고 달려들었다.

내가 급히 놈에게 사격했지만 오거는 도구를 쓸 줄 알았다. 옆에 있던 트럭을 우악스럽게 밀어서는 방패차 삼아 나에게 돌격했다. 그리고 내가 옆으로 피하자 놈은 그 트럭을 날 향해 휙 던졌고 나는 가까스로 몸을 던져 피해냈다.

바닥에 엎어진 날 향해 두 괴수가 달려들었다. 죽을 상황이라 급하게 공간이동 해서는 몸을 일으키며 다시 뛰었다.

한편 아까부터 내가 알아듣지 못할 내용을 읊어대던 무전기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나 현장 왔다! 지금 가니까 힘내봐!」

누가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난 그저 내 목숨을 건지느라 바빴을 따름이다.

저 빌어먹을 괴수 둘은 베헤모스를 따라다니며 안면이라도 튼 것일까? 둘은 서로 싸우지도 않았거니와 심지어 협동정신까지 발휘했다. 멧돼지가 날 도망치지 못하게 막으려는 듯 대로를 막고 선 가운데 오거가 펄쩍 뛰어들었다.

원근감을 무시하고 내게 휘둘러지는 오거의 집채 만한 팔이 내 시야를 잠식했다.

내가 공간이동 해서 피하고 나니 어지러웠다. 아까 공간이동을 과하게 한 것도 있어서 더욱.

그래도 계속 몸을 움직여야 했다.

난 저기 가만히 서서 내 빈틈을 노리려는 듯한 멧돼지 놈을 경계하며, 날 향해 자꾸 뭘 집어던지거나 달려드는 오거를 피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최대한 몸을 움직여 피하려 노력했지만, 정 공격을 피하지 못할 상황에는 공간이동을 해야 했고 현기증은 갈수록 거세졌다. 그 현기증을 견뎌내려 애썼다.

그냥 건물 안으로 공간이동 해서 이 상황을 벗어나자는 유혹 또한 뿌리치려 애썼다. 내 목숨 하나 건지자고 그랬다간 두 놈이 내게서 벗어나 각자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요, 이 도시에 무슨 아비규환이 펼쳐질지 몰랐다.

그저 이대로 버티다 보면 지원이 오기는 오리라 믿고 버텼다. 누가 무전에서 외쳤듯, 전차든 아니면 헬기든 간에 오리라.

그리 내 목숨 건지고자 애쓰기를 오 분쯤 지났을 때였다.

웬 억양 독특한 인천말이 귀에 파고들었다.

"내가 반드시 온다고 했잖아!"

그쪽에 시선을 돌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여기에 지원 온 것은 두 명의 헌터였다.

우선은 은빛 바이크에 올라탄, 아까부터 안 보였던 나이토 상.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이토 상은 그 큼지막한 바이크의 뒤에 누군가를 태우고 왔다.

그 누군가는 피부가 갈색인 남자였는데, 나이토 상이 바이크를 멈추자 그 남자 또한 급하게 바이크에서 내렸다.

급하게 왔는지 그는 아직도 쓰고 있던 선글라스부터 집어 던지더니 상황을 보고는 딱 봐도 욕설일 법한 소리를 내뱉었다.

"điên!"

그러고는 그가 가지고 온 헌터 라이플을 들어 겨누었는데, 그것만 봐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각성자 헌터. 베트남 출신, 응우옌.

그리고 내가 외국인 각성자 헌터들에 대해 아는 사실은, 그들의 실력이 별로일 수는 있어도 배짱들은 하나같이 두둑하단 것이다. 딱히 사람을 가려서 데려온 덕분은 아니고 외국인 각성자들의 몸값이 내국인 각성자보다 싸다는 이유로 지자체에서 일이 터지면 일단 저들부터 현장에 투입해서 그렇다.

과연 경험 풍부할 헌터인 응우옌은 이 난잡한 상황을 보고서 머뭇거리는 게 아니라 웃었다. 흰 치열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웃었다.

왜 웃는지는 몰라도 겁먹고 움츠러드는 것보다야 나았다. 적극적으로 뭔가 할 맘이 있단 뜻이니까.

내가 그를 향해 소리 질렀다.

"돼지 새끼! 돼지 새끼부터 딴 데로 좀 데려가!"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알아서 판단한 건지 몰라도 응우옌은 그렇게 했다.

응우옌이 멧돼지를 향해 총구를 겨누더니 사격을 시작했다. '드르륵―' 그가 든 헌터 라이플은 34kg짜리로 보였는데, 내 것보다야 위력이 약해도 저 역시 끔찍하게 아플 것이다.

과연 몇 발 얻어맞은 멧돼지는 고통스러운 듯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돌려 그를 향해 돌진했다.

멧돼지를 피해 응우옌이 반대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응우옌은 역장 외골격 능력에 더해 가속 능력까지 각성했다. 그 와중에 신경은 가속되지 않아서 자기 속도를 자기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 흠일 뿐, 그 달리기 속도만으로도 멧돼지 놈에게 따라잡히지 않기에는 충분했다.

응우옌과 그를 뒤쫓는 멧돼지가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오거를 바라봤다. 드디어 둘만 남았다.

이 씹새끼. 죽여주마.

오거가 내게 달려들었을 때 나는 공간이동 했다. 내 헌터팀이 있는 그곳으로.

"형? 지금 대형 괴수 둘 나타나서 형 혼자 붙잡고 있었다던데 맞아요?"

성문영이 뭔가 묻고 싶은 듯했지만 대답해줄 겨를이 없었다. 난 헌터 라이플을 쿵, 하고 내려놓으며 외쳤다.

"탄창 교체, 빨리!"

그러고는 내 헌터팀이 날 위해 늘 가지고 다니는 예비용 전투 망치를 대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공간이동 했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 위로.

그 높은 옥상에서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중력이 날 끌어당기자 지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내 발이 지면에 닿기 직전, 나는 또다시 공간이동 했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오거의 머리 위로.

오거는 제 머리 위의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놈은 피하거나, 손바닥을 들어 피하려 하지 못했다.

낙하하는 가속도를 실어, 내가 힘껏 내리친 전투망치가 오거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45화 A급 헌터 응우옌 - [3]

금속이라도 내리친 듯 '쩡' 소리가 났다.

이윽고 내 발이 바닥에 닿자 오거가 비틀거렸다. 방금 망치질로 놈의 뇌가 골통 안에서 거세게 흔들렸을 것이다. 딱 봐도 몸을 가누기 어려워 보였다.

그 뒤통수에 망치질 한 번을 더해주니 마침내 오거가 나자빠졌다.

끝장낼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쓰러진 오거를 향해 다시 한번 망치질하려던 차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거가 쓰러진 그대로, 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는 것이 아닌가.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벌써 정신을 차렸단 말인가? 불의의 습격을 당해 그렇게 머리를 처맞았는데도?

초재생능력자가 충격에서의 회복이 빠르단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오거는 연달아 내리쳐진 내 망치에 연거푸 얻어맞으면서도, 기어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역장 따위로 몸을 감싼 것이 아닌, 그저 살과 근육만으로 보여주는 맷집이 저 정도였다.

이윽고 오거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놈의 짐승다운 시선이 똑바로 날 향했다.

저 거대한 괴수와 마주 보며, 나는 한 가지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지겨움? 아니었다. 공포? 역시 아니었다.

경이로웠다.

명색이 신체강화자인 내 몸은 기관포탄 몇 발이면 조각날 것 같은데, 이놈은 내 기관포탄에 잔뜩 얻어맞고도 거뜬히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기습당한 와중에도 이 정도 여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거대화 능력과 신체강화 능력은 사실 같은 종류의 능력이라던가.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될 방법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저놈을 죽이고 저놈이 지닌 힘을 빼앗아야 했다.

저놈도 베헤모스를 따라다니며 여러 사람을 잡아먹었을 괴수다. 아까 본 멧돼지가 그랬듯 저놈도 호주에서 실컷 날뛰었으리라. 거기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길래 저토록 강대한 힘을 얻었을까?

그 힘을 내 것으로 삼고 싶다.

그러니 힘도 목숨도 내놔라, 못생긴 고릴라 새끼.

솟구친 욕망이 이미 지친 내 몸에 활력을 주었다. 내가 오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운데, 놈의 입에서는 분노 어린 초저주파가 흘러나왔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오거가 날 보며 울부짖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위협일까? 아니면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선전포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불시에 달려들었다. 울부짖느라 쩍 벌리고 있던 오거의 주둥이에 망치질했다.

'콱!' 놈의 턱과 이가 동시에 부러져서 피가 흩날렸다.

격분한 오거가 고통의 비명을 지르더니 주먹을 내리쳤지만 그곳에 있던 나는 이미 공간이동 하고 없었다.

아주 살짝, 놈의 주먹질만 피할 만큼 옆으로 공간이동 한 다음 망치를 다시 내리쳤다. 바닥에 닿은 놈의 손가락에 내 망치가 강타했다. 그래서 그 충격이 온전히 놈의 손가락에 가 닿았다.

내 망치질이 콘크리트를 부순 듯 콰직,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오거의 손가락에서도, 손가락뼈가 박살 난 듯 끔찍한 소리가 났다.

오거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까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느라 놈의 손은 이미 내 망치에 잔뜩 얻어맞은 마당이다. 그 때문에 뼈란 뼈가 죄다 금이 갔을 그 손가락에 망치질 한 번을 더해주자 놈이 좋아서 죽으려 했다.

오거가 완전히 으스러진 듯한 제 손을 숨겼다. 그러면서 멀쩡한 손을 내게 휘두르길래 그 손 또한 같은 꼴로 만들어 주기로 했다.

망치를 크게 휘둘렀다. 목표물은 놈의 주먹.

오거의 주먹도, 내 망치도 공기를 가르며 서로를 향했다.

놈의 주먹과 내 망치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발생한 충격파가 내 얼굴을 따갑게 할퀴었다. 그리고 망치가 진동했다. 짜릿한 충격이 내 팔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오거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오거는 뒤로 펄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날 바라보는 놈의 눈동자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공포가 자리를 잡았다.

오거가 양손을 모두 가랑이 사이로 숨기는 걸 보니 놈의 양손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듯했다.

오거는 그 부러진 손가락뼈들이 도로 회복될 때까지 시간을 벌려 하거나, 아니면 발차기라도 시도하지는 않았다.

싸움에서 불리함을 느낀 짐승들이 흔히 그러듯, 오거는 뒤로 펄쩍 뛰더니······.

"야, 튀지 마!"

뒤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한 오거를 보며 내가 고함질렀다. 물론 놈은 계속 뛰어 멀어질 뿐이었다.

이제 나는 놈을 쫓아가서 망치질해야 할까? 아니, 놈이 나보다 빠르니 따라잡기가 버겁다. 아마 공간이동을 여러 번 써가며 망치를 휘둘러야 할 텐데 그런 낭비가 또 없을 테고.

나는 이내 공간이동 했다.

내 헌터팀 사이에 돌아오니 녀석들이 이미 탄창을 교체해두었다. 각성자를 모실 줄 아는 귀여운 녀석들 같으니.

"담비 씨는? 안 보이는데······"

"담비 누나는 게이트 찾으러 갔어요!"

짧은 문답을 나누며 내 헌터 라이플을 들어 올렸다. 이제 공간이동 하려던 차에 정진영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힘내요!"

덕분에 피로한 와중에도 씩 웃으며 공간이동 할 수 있었다.

또다시 시야가 바뀌었다. 저 앞에 달리느라 바쁜 오거의 등이 보였다.

그 등짝에 대고 헌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양궁 선수들이 화살에 화살을 꽂는 묘기를 보여주듯 나도 그렇게 했다.

훤히 드러난 오거의 등짝, 그 등골에 헌터 라이플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선을 연결했다.

연발로 당겨진 기관포탄들이 그 등을 맹렬히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총알이 빗나가거나 다른 부위에 맞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정확하게, 계속해서 같은 부위에 쏘아주니 오거는 더 버티지 못했다.

오거가 몇 발짝 더 뛰다가 풀썩 엎어졌다. 내가 다가가 몇 발 더 쏘아주자 결국 놈이 끝장났다.

강대한 적의 죽음과 함께, 머릿속에서 내 이름을 연호하는 환각이 시작됐다.

'김극! 김극! 김극―!'

이번 함성은 평소보다 요란했고 길게 이어졌으며, 내 몸을 새로이 타고 흐르는 힘 또한 그 어느 때보다 거대했다.

그리고 또한 희열도······.

내가 그동안 적을 쓰러뜨리고서 경험한 그 어느 희열보다도 지금 느껴지는 희열이 훨씬 컸다. 어째서?

추측하기로는 이놈이 신체강화자와 같은 계열의 각성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같은 계열의 각성체를 쓰러뜨리면 영적 흡수가 훨씬 더 잘 된다고 하니까. 정말로 그 어느 때보다 큰 영적 성장을 이뤘을지도······.

"김극, 김극!"

아, 이번엔 실제 관객이 있었던 모양이다. 현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희열에 잠겨있던 내 신경을 자극했다.

"아주 그냥 일방적이네요! 역시 한 마리만 따로 상대하니까 좆밥이었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내 팬이라던 그 양반이었다.

스마트폰을 내게 들이댄 것이 아까부터 쭉 촬영 중이었던 듯했다. 남자가 물었다.

"지금 찍은 거 유튜브에 올려도 될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고맙다고 연거푸 말하더니 계속해서 물었다.

"이제 그 귀 없는 멧돼지? 그놈 잡으러 갈 거죠?"

"그래야죠."

"그럼 혹시, 거기에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되는······?"

이런 얼빠진 새끼가.

내가 안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윽박질렀다.

"뭐 그딴 질문을 해요?"

"아, 죄송······"

"당연히 되지."

남자의 표정이 활짝 펴지는 가운데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공간이동 했다. 웬 건물 옥상에 남자를 데려다주고는 난간 아래를 바라보았다.

멧돼지 괴수와 응우옌이 저기에 있었다.

둘 사이에서 현란한 액션이 펼쳐지고 있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멧돼지도, 응우옌도 지친 모양새였다.

멧돼지는 몸 곳곳에 기관포탄을 얻어맞은 흔적이 역력했다. 몸 여기저기에 물집이 생겨난 멧돼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놈은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돌진할 것처럼 발굽으로 바닥을 긁어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위협에 불과해 보였다. 놈이 정말로 돌진하지는 않았다. 이미 몇 번이고 돌진했다가 별 재미를 못 본 탓에 온몸에서 힘이 빠진 것일까?

한편 상가 건물에 몸을 숨긴 응우옌도 마찬가지 상태였다. 그는 지금 탄약도 기력도 부족한 듯했다. 티셔츠가 땀에 흠뻑 젖은 가운데, 헌터 라이플을 멧돼지에게 겨누고만 있을 뿐 정작 쏘진 않았으니까.

한편 나라고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이미 공간이동을 남발했거니와 방금은 웬 고릴라를 상태로 오함마질까지 실컷 하고 온 마당 아닌가.

그리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응우옌 씨? 탄약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는데, 저놈 이마에 남은 탄약 다 쏴줄 수 있어요?"

「김극? 오케이, 오케이······」

그리 말하더니 응우옌이 벌떡 일어나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총구에서 날아간 탄환들은 내가 주문했듯 멧돼지의 미간을 두들겼는데, 멧돼지 놈의 머리뼈가 워낙 단단해서인지 별 대단한 피해를 주진 못했다. 그저 놈의 미간에 상처만 겨우 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영상 잘 찍어야 해!"

그리 외치며 나는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잔뜩 성나있을 멧돼지의 머리 위에 발을 디뎠다.

그러자마자 있는 힘껏, 발을 내리찍었다.

방금 생겨난 멧돼지의 미간 상처에 내 발을 쑤셔 넣었다.

이미 멧돼지의 초재생능력이 발휘되고 있었다. 내가 발을 집어넣은 놈의 상처에 새 살이 차오르면서 내 발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단단하게 붙잡혔다.

언뜻 느끼기에도 놈의 재생력이 무시무시했다. 내 발이 아픈 걸 넘어 으스러질 정도였지만 참았다. 저 돼지 놈은 더욱 아플 테니까.

과연 이물감을 느낀 멧돼지가 발광하기 시작했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귀 아프도록 울려 퍼졌다.

놈이 날 떼어내려는지 턱을 땅바닥에 마구 부딪쳤지만, 그 상처 안에 발이 고정된 나는 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구 흔들리면서도 헌터 라이플을 겨누었다. 저 괴수의 토 나올 만치 단단한 몸뚱이에서 가장 부드러울 것이 분명한, 놈의 안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륵!'

총성이 요란하게 울렸고 그 소리를 파묻을 만치 멧돼지가 요란하게 비명을 질렀다.

내 총알이 놈의 안구를 뚫고 깊숙한 곳에 파고드는 가운데, 멧돼지가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 적당한 건물에 머리를 부딪쳐 날 으깨려는 것이리라.

환각 속 강준치와의 일전이 문득 떠올랐다. 환각 속 나는 발이 콘크리트에 파묻힌 탓에 공간이동에 실패했던가?

그렇다면 지금 나 또한 공간이동으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없게 된 셈이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더 공간이동 할 기력도 없었다.

나는 멧돼지가 마구 달리는 중에도 방아쇠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총구에서 기관포탄은 쉬지 않고 쏟아져나왔다. 쏟아져나온 기관포탄은 착실하게 놈의 눈꺼풀과 안구를 뚫어내고 있었다.

그렇듯 눈깔이 터지자 이 멍청한 돼지 놈은 방향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놈이 똑바로 달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달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쏠 수 있었고, 계속해서 발사된 기관포탄은 끝내 놈의 뇌에 닿았을 것이다. 뇌마저 단단하진 못할 테니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죽음의 질주가 멈췄다.

멧돼지가 무릎 꿇었고 그 거대한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다시금 내 머릿속에서 내 이름이 연호되기 시작했다.

아, 아아······.

이놈이 아까 그 고릴라 놈보다 강력한 괴수였던 듯했다. 이번의 희열과 내 몸에 새로 흐르는 힘은 아까 오거를 쓰러뜨렸을 때보다도 훨씬 컸다······.

내가 힘껏 발을 빼내자 이미 초재생능력이 사라진 멧돼지의 살과 근육은 내 발을 더 붙들지 못했다.

피 묻은 발로 거대한 괴수를 짓밟고 그 몸뚱이에 올라섰다. 높은 위치에서 내 팬을 보았다.

입을 쩍 벌린 그가 스마트폰 카메라를 내게 겨누고 있었다. 카메라맨 앞에서는 포즈를 취해줘도 좋을 것이었다.

내 앞에 펼쳐진 찬란한 조명 아래 옥타곤을 보며, 나는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려 내 승리를 선언했다.

포즈를 취해준 보람이 있어서 그가 멋지다느니 끝내준다느니 마구 소리치는 가운데, 응우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던 대로 미쳤구만? 반쯤 돌아버린 친구네, 정말······."

흘긋 눈길을 돌리니 응우옌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날 보며 흰 치열이 드러나도록 씩 웃었다. 처음 봤을 때도 저리 웃더라니, 뭐가 좋아서 자꾸 웃는지는 모를 일이다.

물론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의 희열과 승리감을 만끽하느라, 오 분 내내 포즈를 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헬기며 전차 따위가 도시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상황은 이미 다 끝난 뒤였다.

*******

46화 A급 헌터 응우옌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