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여동생 김선 - [1]
오랜만에 슈퍼마켓에 들어갔더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가게 이름은 '싱싱청과'인데 채소와 과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쌀과 라면, 그리고 통조림을 비롯해 보관기관이 긴 가공식품만 보일 뿐이다.
상품들의 가격을 훑었다.
우선 쌀과 라면······, 게이트가 열리기 전과 비교해 두 배씩 올랐는데 이건 유독 싼 편이다. 정부에서 죽을힘을 다해 가격을 고정한 결과물이라던가?
그러나 정부에서 관리하지 않는 상품들의 가격을 보면 절로 아찔해진다. 고무장갑 만칠천 원, 두루마리 휴지 30롤 육만팔천 원······.
특히 밀가루 음식들의 가격이 끔찍하게 올랐다. 한국의 밀가루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데, 바다에 들끓는 물 정령들이 해상 물류비를 끔찍하게 올려버린 탓이다.
이 와중에 밀을 수출하던 국가들의 상태부터 시원찮다. 인도는 식량난으로 말미암아 정식으로 곡류 수출을 중단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아무 명분 없이 침공당했으며 호주는 이제 인간의 땅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이상의 이유로 요새 라면의 주재료는 쌀이며, 밀가루 음식들은 죄다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가격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과자 같은 것은 아예 싯가다. 저기 진열된 십이만 원짜리 맛X산 한 봉지를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어, 저건 좀 말도 안 되게 비싸긴 하네.
다른 과자들은 육만육천 원 정도인데 이건 또 왜 유독 비싼 걸까. 보고 어이가 없어서 물어보았다.
"이건 또 왜 이리 올랐답니까?"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가게 주인이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장 가동 멈춰서 단종될 거란 소문 있으니까 또 올랐지 뭐. 얼마 전에 뉴스 보니까 국회의원 하나가 맛X산 세 박스 사재기했다가 걸렸다드만?"
"국회의원이 사재기를 해요? 부업이라도 하나?"
"꿍쳐뒀다가 나중에 더 비싸게 팔려던 건 아니고, 그냥 원래 좋아하던 과자인데 더는 못 먹게 될 거 같으니까 자기 혼자 먹으려고 산 거라대."
국회의원이 무슨 비리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고작 과자 샀다고 욕먹는 건 살다 살다 처음 본다며, 나라 망한 게 실감 된다며 가게 주인이 중얼거리는 사이 나는 맛X산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걸 계산대에 가져가자 가게 주인은 놀란 눈치였다.
"어, 진짜 사시려구? 총각 돈 많나봐?"
"과자 한 봉지 사 먹을 정돈 되죠."
이윽고 맛X산 한 봉지를 손에 든 채 가게를 나섰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국회의원이나 먹는다는 음식을 별 고민 없이 살 수 있게 되다니? 내가 새삼 출세했단 게 느껴진다.
저 십이만 원짜리 과자를 내가 먹으려고 산 것은 아니다. 교도소 면회에 가져갈 생각이다.
오늘 오후, 난 여동생을 만나러 간다.
그 시간이 벌써 기다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
철창 너머 여동생을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은 수척했다. 원래 뚱뚱했던 녀석이 저리된 걸 보니 맘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차, 여동생이 먼저 불퉁하게 말했다.
"왜 왔어, 씨발 새끼야?"
엄마를 닮은 목소리, 나는 참지 못하고 울컥했다.
"돼지 년이 다이어트 성공했다길래 구경하러 왔지. 이야, 나라에서 살도 다 빼주고 너 감방 들어가길 잘했다, 그치?"
빈정거려놓고서 내 실수를 바로 깨달았다. 이런 등신 사이코 새끼.
여동생의 입에서 또 욕이 튀어나오기 전에 나는 서둘러 가져온 물건을 내밀었다.
"일단 사료나 먹어라, 돼지 년아."
아마 여동생은 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내가 내민 음식을 휙 밀쳐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식욕 하나는 끝내주던 녀석 아닌가. 내가 내민 맛X산 한 봉지와 광어 한 접시(실내 양식장에서 키운 놈이라는데, 말도 안 되게 비쌌다.)를 보고서는 그 얼굴에 지대한 갈등이 떠올랐다.
하기야 평범한 사람들도 생라면을 씹어먹으며 한 끼를 때우는 세상에 교도소 밥이 어떨지는 알 만한 일이다.
끝내 식욕이 이겼다. 여동생이 젓가락을 들어 회 몇 점을 입에 넣더니, 맛X산도 하나 집어먹고는 젓가락질 속도가 빨라졌다.
반쯤 먹었을 때 내가 물었다.
"맛있냐?"
내 말이 조롱쯤으로 들린 걸까? 먹다 말고 여동생이 날 노려보더니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래서 왜 왔어, 씨발 새끼야."
"넌 왜 잘 처먹어놓고서도 지랄이냐?"
"그럼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줄 알았어?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 어?"
"너 이 꼴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너, 씨발 새끼야. 너! 네가 날 그리 줘패서 내 성격 망쳐놓지만 않았어도······!"
처음 듣는 주장은 아니다. 저번 면회에서도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내 탓이라며 저 비슷한 말을 고래고래 외쳐댔으니까.
내가 집에서 저 녀석을 수시로 때린 탓에 제 성격이 비사교적으로 뒤틀리고 말았고, 결국 학교에선 왕따가 되었으며, 그 탓에 이 꼴이 되었단 것이 저 녀석의 주장이다.
"그거야 네가 주짓수를 안 배운 탓이지. 주짓수만 배웠으면 내가 때릴 때 반격하고 학교에서 너 괴롭히는 일진들도 팔다리 꺾어버릴 수 있었는데 주짓수 안 배우고 먹을 거나 처먹어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 아니냐?"
내 말에 여동생이 날 노려보았다.
"씨발 새끼······."
"애초에 처맞을 짓을 한 네가 잘못 아니냐?"
"내가 뭘 어쨌는데!"
"네가 나 수학여행 간 동안 내 책장에 있는 책들 싹 다 헌책방에 팔고 그걸로 신발 사 신은 거 아직도 용서가 안 된다. 참고서까지 팔아버린 건 진짜 뭐 하는 짓이었냐? 엄마란 년은 오빠가 되어서는 그냥 동생 선물 사준 셈 치지 뭘 화내냐며 두둔하고 자빠졌고."
"그거 엄마 짓이었어! 전날 부부싸움 할 때 오빠가 아빠 편들어서 엄마 삐졌잖아? 나 학교 간 사이에 책 다 팔아놓고는 그 돈 절반 줄 테니까 내가 했다고 말하랬단 말야!"
"그럴 거 같더라. 그 씨발년, 괴수 밥 되기 전에 더 팼어야 하는데."
"애초에 네가 아빠 편든 게 잘못이지! 생활비도 제대로 안 주고 등산이나 다니던 씹새끼 편을 왜 들어?"
"부부싸움 할 때 내가 아빠 편을 안 들어서 가족 모두가 아빠 한 명을 핍박하는 구도가 돼버리면, 아빠 그 씨발 놈이 나랑 둘만 있을 때 나한테 온갖 개지랄을 할 게 분명했기 때문 아닐까?"
"아빠가 너한테 뭔 개지랄을 했는데?"
"언제 부부싸움 할 때 아빠 편 안 들고 가만히 있었더니 그 새끼가 뭔 짓 한지 아냐? 나 혼자 오뚜기 스프 끓여 먹고 있는데 갑자기 그 새끼가 왜 지한테 처먹어보란 소리도 안 하냐며 밥상 뒤집는 거 겪어봤어?
스프 허벅지에 엎어져서 화상 입은 자국 초재생능력 생기기 전까지 쭉 남아있었다. 너무 아파서 비명 지르는데 그 새낀 빡친 척 집 나가버리더라?"
지금 생각해도 당시를 떠올리면 울분이 치솟는다. 왜 부부가 쌍으로 괴수 밥이 돼버린 걸까? 둘의 뼛가루가 남았으면 변기에 쏟아붓는 건데 그러지 못해 아쉬운 일이다.
"그게 아빠가 한 짓이지 내가 한 짓이야? 왜 나한테 화내?"
"그럼 너 한 짓이나 계속 얘기해 봐? 결국엔 참고서 다시 살 돈도 안 줘서 인터넷 사이트로 시험공부하는데, 넌 또 오빠가 컴퓨터 안 비켜준다며 엄마한테 달려가서 징징댄 거 기억 안 나냐? 나 그때 컴퓨터 켠 지 십 분도 안 됐는데 엄마는 그걸 또 양보하라며 명령하더라?"
"그거 작작 좀 우려먹어! 그 일 핑계로 나중엔 나 컴퓨터 하루에 오 분도 못 하게 했으면서······"
난 또 새로운 일화를 꺼내서 반격하려다 말았다. 이런 머저리 새끼. 면회하러 와서 이게 뭔 짓인가?
내가 원래 이렇게까지 화를 못 참는 성격파탄자는 아니었는데, 중3 이후로는 이따위로 성격이 망가지고 말았다. 제기랄.
나는 심호흡 했다.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관두자. 우리가 서로한테 얼마나 좆같았는지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냐? 서로 열만 받고 말지······ 먹으면서 들어. 마저 먹으면서."
여동생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며 맛동산 한 알을 씹었다. 내가 계속 말했다.
"내가 너한테 좆같이 군 걸 반성하고 있다곤 말 못 하겠다. 너도 딱히 반성 안 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
여동생이 뭔가 또 말하려는 것 같았다. 또 싸우고 싶지 않았던 내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되돌아가면······ 그때처럼은 다시 안 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
"뭐?"
"만약 내가 시간을 되돌리면 엄마랑 아빠만 또 팰 거야. 그 씹새끼들만······. 넌 안 때리고 그 병신들만 때릴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대충 알아들은 듯했다. 여동생은 날 노려보다 말고 고개를 푹 숙이더니 회 한 점을 더 집었다.
"네가 잡혀갔을 때 맘이 안 좋더라. 내가 너 꺼내 보겠다고 시위하고 그랬던 거 아냐?"
내 말에 비로소 여동생이 입을 열었다.
"그런 주제에 면회는 딱 한 번 왔잖아."
"UFC 쫓겨나고서 가오가 안 살았으니까. 비참한 와중에 너한테 안 좋은 소리 들을 자신이 없더라."
"이젠 뭐 달라졌어?"
"어. 오빠가 이제 돈 좀 벌어."
나는 요새 헌터 활동 중이라느니, 계약금만 오백억이 넘었다느니 얘기를 시작했다. 최대한 잘난 척처럼 들리지 않게 내 근황을 전하고는 말했다.
"그러니 너 나오면 데리고 살아줄 테니까 같이 살자. 돈은 내가 댈 테니까······."
"난 혼자 살고 싶어."
"그럴 거 같아서 따로 알아보니 힘들겠더라. 얼음 능력자 주변에 유독 게이트 자주 열리는 거 아냐? 게이트 안 괴수들한테는 바깥세상 지성체들의 영혼이 보이는데, 각성자는 유독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여서 등대처럼 눈에 띈대. 그 와중에 얼음 능력자가 약해빠진 걸 괴수들도 잘 알고······."
RPG로 치면 일반인을 잡아서 얻는 경험치보다는 각성자를 잡아서 얻는 경험치가 훨씬 많다느니. 그 와중에 각성자면서 약해빠진 얼음 능력자는 일종의 경험치 획득 찬스인 셈이라느니.
그래서 게이트 안에서 봤을 때 각성자의 영혼 패턴이 얼음 능력이다 싶으면 괴수들은 군침을 뚝뚝 흘리며 게이트를 열어버린다느니 하고 설명할 필요는 없는 듯했다.
"나도 알아. 교도소 근처에 게이트 열릴 때마다 나 때문이라며 감방 같이 쓰는 년들이 갈궈대니까."
감방 생활도 수월치 않은 모양이다. 감방 같이 쓰는 놈들도 이년을 괴롭히는 모양인데, 하여간 이 멍청한 년은 대체 왜 주짓수를 안 배워서 이 고생인 걸까?
"아무튼 얼음 능력자 혼자 살기가 쉽지 않은가 봐. 집 구매하는 것도 힘들긴 한데, 어떻게 구매해서 들어가도 이웃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더라."
내 말에 여동생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우물쭈물 물었다.
"그럼 너랑 둘이서 사는 건 괜찮고?"
"아마도······. 신체강화자랑 같이 사는 건 괜찮다던데. 신체강화자는 만만하지 않으니까 괴물들이 가급적 근처에 게이트를 안 연다나? 얼음 능력자랑 신체강화자 둘이 있으면 대충 중화가 된다는 거지. 이웃들은 신체강화자가 무서우니까 항의를 못 하기도하고······."
여동생이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 혼자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너 나오면 같이 살자. 오빠가 아직 집은 안 사놨는데 집 살 돈은 있다. 너 차 사줄 돈도 있어. 운전면허 따면 내가 포르쉐 한 대 사준다."
"포르쉐?"
"어, 포르쉐. 고급차 하면 벤츠랑 포르쉐밖에 몰라서 포르쉐 사주겠단 말밖에 못 하겠네. 네가 더 좋은 차 알면 그것도 사줄게. 그러니까······"
시야가 뿌옜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고서 말을 이었다.
"다시 시작하자. 서로한테 유일한 가족끼리 같이 사는 거야. 같은 집에 살면서 서로한테 뭐 대단한 거 해줄 필요도 없어. 그냥 같이 살면 돼, 응?"
나는 이후로 넌 밥을 차리거나 설거지할 필요도 없다고, 너 출소하면 가정부 고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오빠에게 그럴 돈과 능력이 충분하다고, 넌 출소만 하면 되며 다른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그러고서 눈을 훔쳤다. 여동생의 볼에서도 뭔가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면회가 끝난 뒤 교도소를 홀로 나섰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엄마와 아빠는 툭하면 부부싸움을 벌였다.
둘이서만 싸웠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둘은 그러지 않았다. 둘이서 싸울 때마다 자기가 옳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자길 편들어줄 자식을 하나씩 골라서 패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 길고 피곤한 부부싸움에서 여동생은 늘 엄마 편이었고 아빠는 같은 남자인 내가 자기 편이 되길 강요했다. 어쩔 수 없이 아빠 편을 들 때마다 엄마는 날 죽일 듯이 노려보았는데, 난 그 모든 것이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곤히 자다가 새벽에 억지로 깨워져서 부부싸움에 또다시 동원된 나는 비로소 참지 못했다.
'내 말이 맞는 거 같냐, 아니면 가장 말 무시하는 저 씨발년 말이 맞는 거 같냐'며 자기 편이 될 것을 강요하던 아빠의 복부를 쳤다.
당시 키가 190cm를 넘었던 내 킥 한 방에 아빠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난 그가 쓰러진 뒤에도 한참이나 발길질을 가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던 엄마도 용서할 수 없었다. 이년도 날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찰을 부르거나 하지 않고 당황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그 여자도 두들겨 팼다.
그러자 가정에 평화가 찾아왔다. 엄마도 아빠도 이제 나를 두려워했다. 둘은 집에서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얌전히 지냈으며, 나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여동생에겐 불행이 찾아왔다.
평소 나와 여동생이 다툴 때면 엄마는 무조건 여동생을 편들었기에 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남매의 관계는 그럭저럭 대등한 편이었다.
그러나 내가 엄마의 눈치를 더 살피지 않게 된 시점에, 여동생은 더는 나와 대등하지 않았다.
우리 둘의 힘 차이가 곧 우리 사이의 우열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에 불과하던 여동생 또한 부부싸움에 강제로 휘말렸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 중학생에 불과하던 내게 그 사실을 고려할 만한 이해심은 없었다.
당시 내 눈에 여동생은 나와 같은 가정폭력의 희생자가 아니라 외세에 빌붙어 위세를 부리던 여자 이완용쯤으로 보였다.
나는 보복 겸 화풀이를 하기 위해 툭하면 여동생을 때렸고, 엄마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그 녀석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야 했다. 내가 소년원에 가게 되기까지 계속.
그 모든 것을 시간을 되돌려 바꿀 수는 없다. 내게 미래를 보는 초능력이 있든 어떻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지금부터라도 내가 녀석에게 잘 대해주고, 내가 가진 것들을 아끼지 않고 녀석과 나누면, 쓸데없이 뒤틀렸던 우리 둘의 관계도 똑바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우울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헌트웹을 켰다.
22화 여동생 김선 - [2]
Ⓐ BabyBerserker : 언니 옵바야들 언니 옵바야들! 우유 좋아해양?
얼마 전에 애기버섯이가 말이에양! 못된 괴물이랑 싸우다가 그만 햄스터처럼 통통한 볼이랑 앙증맞은 손가락들이 싹둑 잘려 나갔어양 후엥 ㅠ
착한 애기버섯이는 너무 아팠지만 울면 산타 할아부지한테 선물 못 받을까 봐 꾹 참았고양! 집에 와서는 밥 먹고 코 하고 잤어양! 착하고 장한 애기버섯이 쓰담쓰담!
코 자고 일어나서는 치카치카 하려구 화장실 갔지양!
그리구 화장실에서 거울을 봤더니 글쎄, 애기버섯 손이랑 얼굴에서 우유가 흐르고 있지 뭐예양?!?
애기버섯이 설마 젖소가 된 걸까양? 너무 놀라서 자세히 봤더니, 호에에에!!
그 새하얀 건 우유가 아니라 애기버섯이의 피부였던 것이에양! 원래 있던 피부의 색이랑 재생된 부위의 피부색이 너무 달라서 순간 헷갈리고 말았지 뭐예양? 이런 바보 애기버섯 엣큥♡
아래는 원래 피부색이랑 재생된 피부색 사진이에양! 애기버섯이의 우윳빛 피부에 언니 옵바야들 반하지 말기 약속!!
현실의 유명세와 열연에 힘입어 이제 나도 헌트웹의 네임드 중 하나다. 글 하나 올렸더니 댓글 달리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익명 : 이 형 피부 재생된 거 실제로 보면 개무섭다. 평소에 잘 웃지도 않아서 가뜩이나 인상 험악해 보이는데, 재생된 부위만 색 확연히 다르니까 무슨 프랑켄슈타인인 줄;
Ⓐ syberMagneto : 부탁이다······ 그때 그 순간의 감동을 이런 식으로 망가뜨리지 말아다오······.
익명 : 이 새끼는 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 왜 인터뷰랑 인터넷만 하면 또라이가 되는 거임?
Ⓐ 엘마야캐용 : 하기야 그 고생을 했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스트레스 풀어야지. 여러모로 고생했고 앞으로도 힘내라, 파이팅!
YYY : 친구가 이 사이트에 김극 헌터님 떴다길래 와봤는데 이분 맞아요? 진짜?
ㄴ Ⓑ GoodHunter : 놀랍게도······.
ㄴ YYY : 아니 저 그때 이분 덕에 살아난 생존자 중 한 명인데, 그때 너무 멋있으셨고 크게 다친 와중에도 구하러 와주셔서 너무 고맙다고 감사 인사 전하러 왔더니 여기서 이분 왜 이러는 거예요 ㅠ
ㄴ 익명 : 시의원 박미형 씨의 세뇌 부작용인 듯?
음, 좋다. 나쁘지 않아.
이런 식으로라도 모두의 관심을 끌어모으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예전부터 인터넷을 할 때면 이런 식으로 관심을 받으려 애썼는데, 이것도 거지 같은 가정환경의 영향일까? 애정결핍으로 인한 애정 추구, 뭐 그런?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 구출한 인천 시민 분인가양? 반가워양! 너무 반가워양!! 위대한 인천이 한반도 모든 지역을 식민지로 삼을 그날까지 인천 시민분들은 꼭 살아남으셔야 해양!
ㄴ YYY : 김극 헌터님, 제발 ㅠ
기꺼이 팬서비스를 해준 뒤, 스크롤을 내리며 웹서핑을 즐기던 중이었다.
헌트웹에 올라온 글 하나가 내 눈에 띄었다.
Ⓢ Kang : 오늘의 눈에 눈 이에는 이 정의 구현
별것 아닌 제목인데 이상할 정도로 조회수가 높았다. 어째서?
자세히 봤더니 글 작성자의 배지가 심상치 않았다. Ⓐ 배지가 A급 각성자의 증명이듯 저 Ⓢ 배지도 마찬가지다.
S급······, 맙소사.
이름이 강준치였던가? 나는 홀린 듯이 그 글을 클릭했다.
영상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니 한 영상이 재생됐다.
주차된 트럭 짐칸에 지나가던 중년 남성이 쓰레기를 버린다. 구겨진 담뱃갑과 담배꽁초.
'저 씨발 새끼가?"
영상의 촬영자, 젊은 남자가 인상을 일그러뜨린다.
유명 인물이다. 한국의 유일한 S급 각성자, 강준치.
강준치는 예의 중년 남성을 몰래 뒤쫓다가, 이내 남성의 집이 어딘지 알아낸다.
강준치가 그 안에 돌입한다. 3층 빌라의 문짝을 뜯어버리자 그 내부가 드러난다.
'뭐야? 당신 뭐야!'
앞서 쓰레기를 버렸던 중년 남성과 그 아내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놀라서 비명 지른다. 그 자식으로 보이는 청소년들도 기겁하여 얼어붙은 가운데 강준치가 외친다.
'당신 누구? 지랄, 이 씨발 새끼가! 내 트럭에 쓰레기 버려놓고서 어디서 뻔뻔하게!'
강준치의 분노에 주변 사물이 응답한다.
주택 내 가구며 물건들이 한 점으로 압축되듯 찌그러진다. 전자렌지 하나가 눈 깜빡일 순간에 작은 공이 돼버렸다······.
옷장은 두둥실 떠올라 중년 여성이 도망치려던 문을 틀어막는다. 중년 여성이 또다시 비명 지르는 가운데 중년 남성은 문 옆에 세워두었던 샷건을 들어 겨눈다.
'너 뭐야 대체! 손 들어 새꺄, 손―'
그러나 샷건마저도 저절로 찌그러지자 중년 남성의 얼굴에 망연함이 드러난다.
그리고 강준치의 응징이 시작된다. 어디 인터넷 썰로도 본 적이 없는, 너무나 단순하고도 날것인 응징이다.
'씹새끼가 남 트럭에 쓰레기 투척해놓고!'
중년 남성의 몸이 공중에 떠오른다. 그대로 쿵, 쿵. 남성의 몸은 천장과 바닥에 연달아 부딪치기를 반복한다.
'어디서 피해자 행세를 해? 어디서, 새끼야!'
중년 남성의 몸이 한 번 부딪칠 때마다 강준치가 고함 지른다. 감정이 실린 고함이다.
이내 중년 남성이 기절하고서야 강준치는 고함 지르길 멈춘다. 이윽고 카메라가 창밖을 향한다.
창밖의 풍경에서 기현상이 시작된다.
동네 한구석에 잔뜩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던 쓰레기들, 거의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던 쓰레기들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이 주택을 향해 날아온다.
쨍그랑, 쨍그랑. 쓰레기들은 창문을 깨고 들어와 주택에 쌓인다. 쓰레기들은 작은 방을, 거실을, 화장실을 빼복하게 채워 나간다.
사이렌이 울린 것은 집에 쓰레기가 절반쯤 채워졌을 때부터다.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일 있어요?'
문밖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리더니, 힘겨운 신음과 함께 옷장에 막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린다.
자동소총과 방탄복으로 무장한 경관 둘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관 둘이 강준치를 바라본다. 한 경관은 혼란스러운 이 상황의 주범이 바로 그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손 들어!' 외치면서 총구를 겨눈다.
그러나 다른 경찰은 강준치를 알아본다.
'야, 야. 저 사람 강준치······'
그리고, '윽!' 이름을 입에 담았던 경관은 보이지 않는 주먹에 얻어맞은 듯 배를 감싸고 신음한다.
강준치가 경관을 향해 쏘아붙인다.
'씨, 붙여. 새끼야. 강준치 씨! 어디서 짭새가 국민 이름을 함부로 불러?'
한편 앞서 총구를 겨눈 경관도 그 이름을 알아들은 눈치다.
동료 경찰이 당한 짓에 보복하려는 시도 따윈 없다. 그는 금방이라도 쏠 것처럼 겨누고 있던 총구를 슬며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경찰들은 강준치를 체포하거나 제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뭘 봐? 안 꺼져?'
강준치가 윽박지르자 경찰 둘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슬금슬금 물러난다. 카메라를 의식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뒤돌아서서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대로 경찰 둘은 영상에서 출연이 끝난다.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아줌마도 그것을 보았다. 이미 공포로 가득하던 아줌마의 얼굴에 절망이 떠오른다.
그리고 훼방꾼이 사라지자 본격적으로 저지러려는 듯, 강준치가 손짓한다. 그 손짓에 저절로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더니 쏟아진 물은 공중으로 떠올라 기절한 중년 남성의 얼굴을 덮친다.
으으, 하고 아저씨가 정신을 차린다. 강준치가 웃는다.
그리고 약 5분 후, 아저씨의 모든 머리칼과 눈썹은 뜯겨 나갔으며 손발톱도 모조리 뜯겼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 모든 것을 신체에서 뽑아냈다.
또다시 아저씨가 기절한 가운데 카메라가 뒤로 움직인다. 카메라는 집 전체를, 그러니까 발 디딜 틈 없이 집을 가득 채워버린 쓰레기 더미를 비춘다.
저 쓰레기를 다 치우려면 가족끼리 힘내는 것으론 어림도 없고 인부를 여럿 불러야 할 것 같다. 척 보기에도 수백만 원은 줘야 할 터이다. 딱 봐도 없는 살림에 심각한 지출이 되리라.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트럭 짐칸에 쓰레기를 버린 일에 대한 보복이다.
'또 쓰레기 버리면 뒤진다, 진짜.'
그 말을 끝으로 강준치가 쓰레기로 가득 찬 집을 나선다.
영상이 끝났다.
동영상 감상을 마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신선한, 그야말로 머리 깊숙한 곳을 강타하는 충격이었다,
영상의 '정의 구현' 자체가 워낙 자극적이기도 했지만, 그 내용 자체가 매력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고하게 휘말린 아줌마와 청소년들이 불쌍한 탓에 영상 내용에 몰입이 쉽지 않았으니까.
내가 영상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해서 본 장면은 따로 있었다.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놓고서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 버린 장면······.
언젠가 임형택 씨가 말하길, S급 헌터는 법 위에 있는 것처럼 군다고 했던가?
난 그것이 S급 헌터쯤 되면 높으신 분들이 그렇듯 사회의 최상류층으로서 법적인 처벌을 슬그머니 피한다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위법행위를 저질러도 유야무야 기소되지 않는다든가, 은근슬쩍 기소유예 처리된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지금 보니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 모든 행위와 결과에 '슬그머니' '유야무야'나 '은근슬쩍' 따위는 어울리지 않았다.
영상 속 강준치는 그 모든 폭력을 당당하게 저질렀고, 그 모든 위법행위를 담은 영상을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올리기까지 했으며, 그러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따로 검색해 보니 이 사건을 다룬 인터넷 기사 따위도 전혀 없었다. 강준치가 기소되었다는 기사 또한 없었다.
범죄 현장을 목격하고도 아무런 조치 없이 물러났을 뿐인 경찰은, 영상이 올라온 후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 Kang : 트럭에 쓰레기 버리는 갯강구 촬영하려고 8시간 내내 밥도 안 먹고 잠복 중이었는데 보람이 있었다 ㅎㅎ
후환이 전혀 두렵지 않은 걸까. 지금도 강준치는 자기 글에 댓글을 달고 있었다.
나는 로그아웃한 다음 물었다.
익명 : 영상 너무 재밌게 봤는데 질문 좀! 이 영상 삭제 안 당하나요?
Ⓢ Kang : 옛날에 한 번 삭제당했을 때 본사 쳐들어가서 난동 부린 이후론 절대 삭제 안 당하지ㅋ
익명 : 개쩐다······.
Ⓢ Kang : ㅎㅎ 뭘 좀 아는 갯강구네
그놈의 갯강구가 뭔지는 따로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저 글의 하단에 있던 링크를 타고 들어갔다.
국내 스트리밍 사이트에 강준치의 전용 채널이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 올라온 영상들을 훑어본 본 나는 강준치가 앞서 내가 본 것과 비슷한 영상을 일 년 이상 꾸준히 촬영해왔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놈의 정의 구현을 계속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준치가 올린 영상 제목들만 봐도 자극적이기 그지없었다.
'무단횡단하는 할망구 다리 두 짝 다 분질러버림'
'마트에서 새치기하고 모른 척하는 아줌마 눈깔 하나 뽑았음'
'길거리 흡연하는 씹새끼 담배 두 보루 다 처먹이기'
'고교 정벌 1편 - 나한테 중지 날리고 튄 고딩들 다니는 학교에 쳐들어감'
'고교 정벌 2편 – 그놈들 눈썹, 머리칼, 손발톱 모조리 다 뽑았다'
업로드된 영상들의 조회수 또한 대단히 높았다. 모조리 수만 대, 이 정도면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정부 기관 차원의 응징이 없었다고?
23화 여동생 김선 - [3]
나는 업로드된 영상들을 하나씩, 하나씩 재생했다. 그리고 거의 다 감상한 뒤에는 인생에 길이 남을 명작 영화 한 편을 본 것처럼 오랜 시간 전율에 떨었다.
끝내준다. 정말로.
강준치, 그는 신인가?
정말로 신 같았다. 잘 나가는 정치인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위대한 존재처럼 보였다.
강준치의 영상들은 경범죄를 저지른 일반인을 철저히 응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모든 내용이 자극적이었지만, 그중 내가 주목하는 하이라이트는 하나였다.
신고받고 온 경찰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황한 채 물러가거나, 그저 멀뚱멀뚱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장면들······.
바로 그 장면들이 내게 놀라운 수준의 대리만족을 제공했다.
내가 보건대, 이 영상들은 단순히 일벌백계하는 사적제재의 통쾌함만을 담은 것이 아니었다.
이 영상들은 일종의 과시였다. 자기가 법 위에 있다는 과시, 법치 사회 위에 강준치란 개인이 있다는 과시 말이다.
자기가 지나가는 국민을 붙잡아다 폭행하고 고문하더라도, 경찰은 물론 국가와 법 또한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과시······.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이렇게는 하지 못한다. 국회의원에게 불체포 특권이 있다지만 국회의원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폭행하고서 그 범행증거를 영상으로 담아 과시할 수 없다.
그러나 저 각성자는 그러고 있었다.
그러니까 강준치는 살아있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은 물론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헌법보다, 국민 다수보다 저 한 명의 각성자가 더 위에······.
Yok1974 : 이 자식이 뭔 짓을 해도 왜 절대 처벌 안 하냐? 경찰로 안 되면 특수부대라도 출동시켜서 체포해야 하는 거 아닌가?
ㄴ 2014코리아 : 뭔 수로······. 김정은이 고모부 죽였다고 한국 경찰이 출동해서 그놈 살인죄로 체포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김정은 잡겠다고 경찰은 물론 군대도 나서지 못해요. 그리고 김정은을 처벌 못 할 거면 저놈도 처벌 못 합니다
ㄴ Yok1974 : 저 새끼가 김정은이냐? 저 새끼가 북한에 있어?
ㄴ 2014코리아 : 김정은보다 위험한 놈이고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 있어서 더 문제죠. 자기 군단이랑 합체한 김정은이 부산에 어슬렁거리는 셈인데 무슨 수로 건드립니까?
댓글을 보니 이 또한 충격적이었다. S급쯤 되면 저런 취급인가 보군.
나는 한동안 인터넷에 강준치, S급 등의 키워드를 검색했다. 그리하여 이런저런 정보들을 알아보고는 곰곰 생각에 잠겼다.
학주, 훈련소 조교······, 그리고 방금 헤어진 내 여동생을 떠올렸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나와 지금도 갇혀있는 내 친족을 생각하니 절로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듯 법은 불합리하면서도 강력한 것이지만, 그 법이 강준치 그 남자를 억압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강력한 각성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각성자의 능력은 성장한다. 각성자들이 각자 성장하는 속도와 성장하는 한계가 다르고 게이트가 열린 지 몇 년 되지 않은 마당이라 데이터도 쌓이지 않았기에 정확한 예상은 불가능하겠지만······.
나도 S급이 될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멕시코의 경찰과 군대를 역으로 사살하는 멕시코 카르텔처럼, 한반도를 초토화하고도 이 땅의 법으로 그 어떤 처벌도 할 수 없었던 몽골군과 청나라군처럼, 나도 이 땅의 법을 벗어난 존재가 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아는 각성자의 성장 방법은 하나다. 우선 더 많은 괴물을 죽이는 것.
물론 신성한 인천 땅에 더 많은 괴물이 튀어나오길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나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인천과 나 모두에게 좋을 일이었다. 바로 박미형 씨에게 전화를 걸어 내 생각을 전했다.
"박미형 씨? 제안 드릴 것이 있는데요······"
*******
유명 스포츠 선수에게는 기자들이 따라붙는다. 몸값 비싼 각성자 헌터의 경우도 비슷하다.
나는 내 앞의 기자들과 공무원들을 만족스레 훑었다. 인천 시의회 의장이니 인천 시장 같은 대통령보다 고귀하다고 봐야 할 선출직 공무원이 여럿에 인천 시의원들은 아예 넷이나 몰려와 있었다.
이들이 고작 내 전화 한 통으로 모였단 것이 새삼 놀라웠다.
나는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아아, 인천 만세, 인천 만세. 여기 모여주신 인천의 여러분과 나머지 하찮은 지역에서······"
내가 말하던 중에 박미형 씨가 내 마이크를 압수했다.
사실 뺏기지 않으려면 뺏길 수 있었지만 미리 합의한 대로 순순히 뺏겨주었다. 아무래도 카메라 찍힐 기회는 정치인 꿈나무에게 양보하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
"······그냥 제가 말할게요. 다들 괜찮죠?"
기자들은 안 괜찮은 것 같았다. 기자들이 탄식하거나 "그냥 김극 헌터님 말씀하시게 두면 안 돼요? 그래야 기사 인기 많아지는데!" 하고 항의했지만 박미형 씨는 무시했다. 뻔뻔한 정치인답게도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알다시피 괴수들은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저기 산속에, 하수도 안에, 땅속에, 시골에, 사람들이 떠나가 버린 거리에······ 그리고 버려진 건물 안에도 있어요.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고 인천도 예외가 아닙니다."
게이트에서 빠져나와서는 게이트로 복귀하지 않은 괴수가 많다.
본디 황량하고 피폐한 세계에서 살던 게이트 속 괴수들에게, 우리의 세계는 기름진 축복의 땅이나 다름없는 탓이다. 야생동물 한 마리 보기 어려운 한국의 동네 뒷산마저도 게이트의 괴물들이 보기에는 풍요로운 낙원이다.
"인천의 어느 구역에 괴수들이 자리 잡으면 그곳 주민들은 견디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주민들이 떠나가면 더 많은 괴수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아름다운 인천 땅에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어요.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 우리 자랑스러운 인천 남아 김극 헌터가 나서주었습니다······"
이후로 박미형 씨가 뭔가 전문적인 듯한 말을 줄줄 했지만 요점은 간단했다.
"그러니까 이미 인천에 자리 잡은 괴수들을 수색해서 소탕하겠단 말씀이지요?"
기자의 말에 박미형 씨가 대답했다.
"예, 정확합니다."
"이미 국가 차원에서 여러 번 시도했지만 참패만 거듭했는데요. 그 인명 소실을 생각하면······"
"맞습니다. 게이트가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예비군분들이 동원되었죠. 그중 많은 분들이 사망했거나 실종되었고 말입니다. 현역 군인 분들이 나섰을 때도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고······.
제가 군 경험이 없어서 차마 아는 척은 못 하겠지만, 시가전? 게릴라 소탕작전? 그런 것과 비슷한 경우라더군요. 단순히 병력을 밀어 넣어봤자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고 말이에요. 헌터들을 동원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들인 수고와 인명 피해에 비해 별 대단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지요?"
"이번은 다른가요?"
박미형 씨가 웃었다.
"음, 설명보단 직접 보여드리는 게 빠를 거 같은데······ 거기 양동이 보이시죠? 기자님들 아무나 그 안에 물건 몇 개 넣어보세요. 이쪽에 안 보이게 뒤집어서······ 다 넣었어요? 좋아요, 김극 씨?"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정신적 그물망을 펼쳤다. 그물망이 앞서 기자들이 물건을 숨긴 양동이에 가 닿자 그 내부 또한 감지되었다. 감지된 사물들을 읊었다.
"80 x 170mm 수첩, 15.5cm 길이 볼펜, 163.4 x 78.1 x 8.9mm 스마트폰······"
내가 물건 하나하나를 짚어낼 때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마술은 아닐 테고, 초상 능력인가요?"
"뭐, 그렇죠?"
나는 내 공간이동에 딸린 정신적 그물망과 그 그물망이 범위 내 사물을 매우 정확히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약간이라도 움직이는 사물의 경우에는 더 정확하게 포착해낼 수 있어 생물체의 경우 훨씬 포착하기 쉽다는 사실 등도 말했다.
"반경 1km 하고도 263미터 범위를 이런 식으로 탐색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이 범위가 훨씬 짧았는데 몇 번 사냥하고 나니 확 넓어지더군요. 이 정도로 넓어진 이상 괴수 탐색 작전에 큰 효용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초상 능력에 기초해서 장기 소탕 작전이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해서 여기 박미형 시의원님께 제안 드렸더니 제가 놀랄 만치 빠른 속도로 인천시 차원에서 예산이며 계획 등이 수립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뒤이어 마이크를 더 잡고 싶은지 박미형 씨가 농담했다.
"아니, 세상 참 불공평해. 왜 공간이동 하나에 이런저런 능력이 세트로 잔뜩 달려있대요? 내 얼음 능력으론 커피에 얼음 넣어 먹는 게 가장 활용 잘하는 건데.
제 지인 중에 저 같은 얼음 능력자 한 분이 말씀하신 건데, 능력 잘 활용해도 고드름 날카롭게 날리는 게 고작이라 그냥 총 쏘는 게 낫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거 보면 우리 김극 헌터님은 참 타고났어 정말."
"바로 그 김극 헌터님을 박미형 시의원님께서 최면으로 조종 중이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아니, 이분들이 진짜······."
인천시 공식 유튜브 채널에 지금 촬영되는 이 영상이 올라갈 것이라던가? 이미 자기 몫의 분량을 잔뜩 챙긴 박미형 씨에 이어 시의원이며 시장이며 감투 쓴 분들이 한마디씩 하는 것으로 기자회견은 끝났다.
"어이구, 진짜 복덩이야 복덩이. 내가 사실 김극 씨 너무 인기 좋길래 인천 오실 거라 예상은 못 했거든요? 그냥 얼마쯤 더 올려서 계약 제안하라 말만 해뒀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좋을 줄은 정말 몰랐어······."
나에게도 그렇지만 그분들에게도 다들 만족스러운 자리였던 모양이다. 나는 인천 시장님과 악수했고, 사진을 찍었으며, 집에 가는 길에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할 사십만 원짜리 액자도 하나 샀다.
한편 이 소식이 내 헌터팀에도 전달된 바였다.
미리 작전에 대비할 훈련이라도 할까 해서 팀을 모았더니 성문영이 한마디 했다.
"이 인천 탈환 프로젝트? 이거 형이 제안해서 시작한 거라고 했죠?"
"그런데?"
"진짜 인천시에서 형 엄청 밀어주네요? 말 한번 했다고 바로 예산 잔뜩 편성하고······."
성문영이 질렸다는 양 혀를 찼다. 나는 뿌듯함을 숨기고자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예산 얼마나 편성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정확히는 몰라도 대충은 알죠? 왜, 이번 작전 참가팀에 나이토 상도 껴있던데요. 그 쪽바리 몸값이 얼만지 생각하면······"
그놈의 국적이야 중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토 상이면 그놈 아닌가. 비각성자 주제에 준 각성자 수준으로 돈을 받는다는 인간의 찌꺼기.
그 주제 파악 못 하는 놈이 앞으로 함께할 예정이란 말인가? 그따위 찌꺼기에게 인천의 귀중한 예산이 쓰인다고?
소름 끼치게 불쾌한 일이었다.
*******
24화 B급 헌터 나이토 상 - [1]
"아, 여러분 반갑습니다! 사전에 공지됐다시피 오늘은 사냥에 나설 겁니다. 아, 게이트 열린 건 아니고요! 게이트 열린 긴급사태면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방송 못 하겠죠? 이번엔 우리가 방어하는 게 아니라 공격! 인천시 헌터 분들과 협업하여······"
놈이 지껄이는 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일본산 찌꺼기가 한국말은 잘한다고.
억양이 좀 독특할 뿐 그럭저럭 괜찮은 표준 인천말이었다. 놈은 그 표준 인천말을 카메라를 보며 구사하고 있었다.
유튜브에 올릴 영상을 촬영 중인 모양이지? 역겨운 비각성자 찌꺼기 놈이.
저놈이 바로 나이토 상(ナイトさん)이었다. 실제 이름은 마츠모토 마사시라는데 그따위로 불리는 이유는 스트리머로서의 닉네임이 '나이트 씨'이기 때문이라던가?
하여간 맘에 들지 않았다. 목숨 걸린 사냥에 인터넷 방송라니, 장난하나? 확 카메라를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게다가 저 찌꺼기놈 저거, 차려입은 꼬라지 봐라.
"저 새끼 복장 대체 뭐냐? 저렴한 코스프레 복장이냐?"
내 질문에 성문영이 대답했다.
"인터넷에서 파는 후드티일걸요? 후드가 중세기사 투구 같고 견갑처럼 보이려고 어깨에 이상한 장식 달린 것 빼곤 그냥 평범한 옷이라 보면 돼요. 중세기사 컨셉이니까 저런 복장 입고 다니는 거죠 뭐."
성문영은 별생각 없이 말하는 듯했지만 난 부아가 치밀었다.
흘긋 평소처럼 차려입은 백담비를 보았다. 저 여자가 크롭티 좀 입고 다닌다고 자신이 연예인인 줄 아는 미친년 소리를 듣는 걸 생각하면 저 비각성자 찌꺼기의 장난 치는 듯한 복장은 왜 용납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맘에 들지 않는다. 저놈의 모든 요소가 전부.
뚱하게 있자니 나이토 상이 다가왔다. 쓸데없이 스트리머다운 대사가 그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자, 여러분? 이분이 이번 프로젝트의 주인공입니다. 김극 헌터! 신체강화자인 데다가 텔레포터죠! 이야, 딱 봐도 가진 능력부터가 찬란하죠?
각성 능력만 우월하지 실력은 그저 그런 경우가 많긴 해요! 그러나 일찍이 이분 영상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분은 절대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전직 UFC 파이터답게 최고 수준으로 단련된 근육과 불굴의 투지! 그리고 미리 합 맞춰서 영화 찍나 싶을 수준으로 화려한 공간이동 활용을······"
칭송받는 상황에도 나는 놈을 노려보았다. 비각성자 찌꺼기 주제에 각성자를 평가하는 이 역겨운 상황에 대한 불쾌감을 눈빛에 한껏 담아서.
그 시선을 눈치챈 듯 나이토 상은 당황한 것 같았다. 부자연스러울 만치 환하게 웃으면서 내게 말을 거는 게 아닌가.
"김극 씨, 반갑습니다! 이야. 헌트웹에선 몇 번 뵀는데 직접 뵈는 건 처음이네요! 저, 그런데 제가 혹시 실수라도······?"
마지막 질문은 작게 했다. 왜 내가 초면부터 싫은 티를 팍팍 내느냔 거로군.
차마 네가 각성자도 아니고 인천 사람도 아니라서 사람대접해주기 싫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놈한테 싫은 티를 내려면 어떤 명분이 필요할까.
머릿속 기억을 끄집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이거 생방송 아니지?"
"예, 그렇죠. 녹화방송인데······"
"그럼 사적인 질문 좀 하겠는데, 그쪽 헌트웹 닉네임이 굿헌터였던가?"
"예? 아, 예."
"1년 전에 백담비 관련 글에, 왜 그년 때려서라도 태도 교정 안 했냐며 댓글 달았고?"
얼추 그런 댓글을 본 기억이 나서 물었더니 정확했던 모양이다.
나이토 상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우물쭈물 대답이 돌아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긴 하지만, 그것이 말 안 들으니 때리란 뜻이 아니라······"
"그리고 전과자들 헌터 업계 들어올 거니 물 흐려질 일 주의하란 글도 올렸던 것 같은데. 그거 나 같은 새끼 보라고 올린 거 맞지?"
이 말엔 나이토 상도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입 다문 채 사과의 말을 생각해내려는 듯한 놈에게 내가 쏘아붙였다.
"꺼져, 씹새야."
그러자 나이토 상은 기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죄송합니다, 나중에 해명할 테니까······" 하고 중얼거리고는 물러섰다.
내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성문영이 물었다.
"저 양반이 헌트웹에 그런 글 올렸어요?"
"어."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한대?"
"내가 기억력 하나는 좋아. 이 기억력 덕에 중학교 졸업할 때까진 학원 안 다녀도 반에서 1, 2등 했다."
"그게 진짠지 구란진 모르겠어도 그 대단한 기억력으로 사소한 원한 기억하고서 으르렁거리는 거 보니 존나 무섭긴 하네요······."
성문영이 한 대 얻어맞고는 구시렁거리며 물러난 뒤, 이번에는 웬일로 백담비가 내 옆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일본인 안 좋아해요? 아까 뭐라고 욕하면서 쫓아내시는 거 같던데."
"예, 제가 저놈 좀 많이 싫어하는데······. 그쪽은 나이토 상 좋아해요? 혹시 방송 팬인가?"
"아뇨, 뭔지 몰라도 잘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저도 저 인간 싫어서."
이 아가씨도 사람 보는 눈이 있군그래.
동질감이 든 내가 무심결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의 신호였는데, 생각 없이 그러고서 놀랐다.
짝, 하고. 내가 내민 손바닥에 백담비가 제 손바닥을 마주 부딪치는 게 아닌가.
선글라스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백담비 또한 자기가 그러고서 놀란 듯 움찔한 것이 내 눈에 보였다.
"음?"
뭔가 이득을 본 듯한 기분에 씩 웃어주었더니 백담비는 슬그머니 제 위치로 돌아갔다.
한편 계속해서 헌터들이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이토 상은 멀리서 내 눈치를 살필 뿐 내게 다가와 친한 척하지 않았으며, 이 상황에 나는 대충이나마 만족했다.
준비 상황을 확인하러 온 박미형 씨는 불만족스러운 것 같았지만.
"뭔 일 있었어요? 둘이 붙어 다니랬는데 왜 멀찍이 떨어져 있어?"
"옛날에 뭔 일 있어서요."
"내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친하게 지내요. 응? 괜히 불러온 게 아니라 저 친구 데려왔을 때 홍보 효과가 엄청 좋단 말이야. 인천시에서 뭔 일 진행 중인지 알리려고 특별히 큰돈 주고 데려왔다구요."
그래서 몸값이 분수 넘치게 비싼 걸까? 어지간한 각성자들보다 유명하니 홍보 효과가 좋아서?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그놈의 홍보가 중요하단 건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윽고 '인천 탈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
관용차에 올라탄 채,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강력한 괴물 셋을 처치하고서 예전의 몇 배로 넓어진 정신적 그물을 펼쳤다.
1km를 넘는 반경 내 사물들이 내 뇌에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중 움직이는 사물들만을 살폈다.
저건 자동차고, 저건 노숙자인 모양이며, 저것은······.
"찾았네요."
나는 방금 포착해낸 괴수의 위치를 보고했고 그 정보는 여기 모인 헌터 모두에게 전파되었다.
내가 알린 장소를 향해 헌터들이 출발했다.
한편, 나이토 상은 은빛 바이크를 운전하면서도 카메라에 대고 나불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저기 보세요. 골목에 쓰레기가 언덕처럼 쌓여있죠? 시청자 여러분 중에 서울분들은 저런 거 보기 힘들겠지만 지방에 사시는 분들은 자주 봤을 겁니다. 어느 동네가 위험지역으로 지정되어 쓰레기 수거차는 잘 오지 않게 됐는데 아직 주민이 다 떠나지 않은 경우에 이렇게 쓰레기가 잔뜩 쌓여요.
한국만 이런 게 아니라 일본에도 이런 곳이 많거든요? 한국의 경우 서울은 거의 전역이 제대로 관리되는 중이지만 일본은 도쿄에도 이런 식으로 슬럼이 형성된 곳이 많아서······"
저 말을 들으니 저놈에 대한 혐오감이 더 커졌다. 은근히 일본과 비교하며 한국을 추어올리고 있지 않은가. 저런 은근한 국뽕이 더욱 역겨웠다. 아마도 저게 저놈의 인기 비결이리라.
"봐요. 저기 빌라 외벽에 네모난 구멍 보이죠? 자로 대고 자른 것처럼 엄청 깔끔하게 잘렸는데, 데스클로가 역장 날붙이로 벽 잘라버리고 제 몸 집어넣을 구멍을 만들어낸 겁니다. 저러니까 아무리 튼튼한 집에 살아도 소용이 없죠.
이래서 한국에선 빌라와 전원주택이 말도 안 되는 헐값이에요. 괴수들이 습격할 때, 고층이라 올라가려면 고생 좀 해야 하는 아파트보다 저층 건물들이 무조건 먼저 공격받거든.
이 주변 보시면 빌라와 3층 이하 주택뿐이죠? 이런 곳들은 한국에서 정상적인 주거지로서의 가치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일본에서도 맨션 가격이 확 뛰긴 했지만······"
그 말대로 이 주변에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모조리 떠나버린 빌라촌, 저렇게 버려진 주택들이 거래될 이유는 없다. 거의 신축 수준인 빌라조차 재산 가치를 상실해서는 처치 곤란한 콘크리트 더미로 전락한 지 오래일 뿐이다.
이렇듯 사람이 떠나고 없는 동네가 생겨나면 그 주변 거주지들에도 악영향이 퍼져나간다. 버려진 마을과 건물에는 괴수들이 자리 잡기 마련이며, 그 부근 거주지마저 습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근처의 괴수들을 박멸하는 것만으로도 이 근방 전체 건물의 가격이 오를 것이 분명했다.
헌터팀이 멈췄다. 다들 내가 가리킨 건물 주변에 위치를 잡았다.
"자, 다들 위치로, 위치로!"
나와 내 헌터팀에게 배정된 위치는 최후방이었다. 오직 백담비 한 명만 포위망에 낀 채, 우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예비대 역할을 맡았다.
한 마리라도 더 많은 괴수를 사냥할 계획이던 나로선 바라지 않는 상황이라 볼멘소리를 냈다.
"아, 씨. 내가 안에 진입해서 다 쏴 죽이는 게 빠를 것 같은데 뭐하러 딴 헌터들까지 잔뜩 불러와서······"
"형은 시야 바깥으로 공간이동 하면 피로해진다매요. 그러니까 작전 오래 진행하려면 이러는 게 맞는 거 같은데? 또 각성자가 함부로 나섰다가 다치면 안 되니까 아껴야 하기도 하잖아요. 아마 후자가 더 중요한 이유일걸?"
이윽고 누군가가 건물 안으로 뭔가를 던졌다.
잠시 후 웬 연기가 건물의 창틈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는데, 최루 가스인지 겨자 가스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아무튼 저 안의 괴수들이 못 견디고 빠져나오게 하기 위한 화학무기였다. 괴수들이 저 안에 있단 것을 확신하기에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나왔다! 다들 사격!"
마침내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앞서 파악했듯 데스클로들이었다. 네 마리.
보통 이런 상황이면 적들이 창문이나 문으로 튀어나오리라 예상하고 그쪽에 화력을 쏟아부으면 되겠지만, 이놈들의 경우는 아니었다.
데스클로들은 1층 벽에서, 2층 벽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놈들은 늘 저런 식이다. 그 잘난 역장 날붙이로 콘크리트 벽 따윈 순식간에 잘라버린 다음 아무 데서나 뛰쳐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렇듯 어디로 튀어나올지 알 수 없기에 이 자그마한 빌라 하나를 포위하는 데 헌터팀 다섯이 필요했다.
제각기 위치에서 튀어나온 데스클로들이, 포위망을 이룬 헌터들을 향해 도약했다.
그 모두의 집중사격을 받으면서도 기어이 한 마리의 발톱은 끝내 헌터의 몸에 닿았다.
포위망에서도 가장 앞쪽에 있는 저 여자······.
"담비 누나!"
성문영이 기겁하여 소리치는 가운데 데스클로의 갈고리발톱이 그녀의 목을 그었다. 그러고서 바닥에 발 디딘 데스클로는 뒤이은 사격에 결국 고꾸라졌다.
이 와중에 백담비는?
그녀의 반쯤 잘린 목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오는 대신 얼음 가루가 휘날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백담비는 그저 태평하게, 자기 목의 베인 부위에 생수를 부었다. 그리고 정령들의 신체 복구 매커니즘이 그렇듯 생수가 얼어붙으며 손상된 신체 부위를 메웠고, 그녀의 목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그것을 보며 성문영은 어안이 벙벙한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사실 나도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 말을 걸었다.
"왜 그리 놀라? 얼음 능력이 엄청 발달해서는 얼음 정령 된 지 오래라고 저번에 씹덕처럼 말했잖아. 인간 형체가 무너질 정도로 파괴되는 거 아니면 안 죽어."
"아니, 그래도 실제로 보니 놀랍죠······ 하여간 괜히 최선두에 서는 게 아니네······."
확실히 내 가슴도 두근거리고 있긴 했다. 이런 젠장.
새삼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진짜 위험하네.
25화 B급 헌터 나이토 상 - [2]
너무 놀란 탓일까, 심장 박동이 여전히 잦아들질 않았다.
헌터가 이렇게 많으니 문제없이 괴수 학살을 거듭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벌써 한 명 죽을 뻔했지 않은가.
일부러 포위망의 가장 노출된 부분에 백담비를 세워두지 않았다면 시작부터 헌터 한 명이 목에서 피를 콸콸 쏟아내며 죽었을 것이다. 헌터 일이 위험하단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역시 이대로 멀뚱멀뚱 레이더 노릇만 하기는 무리였다. 저 연약하기 짝이 없는 비각성자들을 위해서든,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든 간에.
"자, 시체 다 트럭에 실었죠? 그럼 다시 이동!"
다 함께 이동하면서 또 한 무리 괴수들의 위치를 포착한 뒤, 또다시 헌터들이 한 빌라 주변에 포위망을 구성했다.
그리고 이번에 나는 그 뒤에서 구경만 하지 않았다.
건너편 건물 옥상에 자리 잡은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투척!"
또다시 건물 안에서 연기가 피어났다. 그리고 이번에도 데스클로들이 예상할 수 없는 위치에서 튀어나와 헌터들을 덮치려 들었다.
도약력이 월등한 놈 하나가 여기에도 있었다. 그놈이 3층 벽을 뚫고 나오더니 헌터 하나를 향해 도약했다. 그 도약하는 속도가 전직 격투기 선수인 내가 반응하기에도 벅찰 만치 빨랐다.
미리 전방에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두지 않았다면, 그 그물망이 놈의 이동을 민감하게 감지하지 않았다면 나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어······"
놈의 발톱이 불운한 헌터의 목에 닿기 전, 내 헌터 라이플이 불을 뿜었다. '탕!'
그리고 헌터를 덮치려던 데스클로는 허공에서 조각나며 저 멀리 밀려났다. 허공에 피와 살 조각이 튀는 와중에 튀어나온 데스클로 한 마리도 내가 머리를 쏴 맞혔다.
또 한 구역 정리가 끝났다.
"와, 죽는 줄······"
방금 죽다 살아난 헌터는 어째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자빠진 가운데, 오히려 나이토 상의 반응이 더욱 격렬했다.
"이야, 방금 찍었어요? 찍었어? 좋아. 자, 여러분? 방금 데스클로 두 마리가 연달아 조각나면서 죽는 거 보셨죠? 헌터 라이플의 기관포탄에 맞아 죽은 겁니다! 그러니까 저기 김극 씨가 쏴서 맞힌 거죠!
김극 헌터님, 저기 4층 빌라 옥상에 대기 중이신 거 보이시나요? 원래는 평범하게 뒤쪽에서 예비대 역할만 맡으실 예정이었는데 저분이 진짜 열정이 넘치셔. 지원사격 해주겠다면서 위치 잡으시더니 바로 솜씨 보여주시네요?
저번 인천 대규모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데스클로가 백 마리에 가까웠는데 김극 씨 혼자 그중 칠십 퍼센트 가까이 쏴 죽이신 거 다들 압니까? 그때 현장에 모인 헌터가 삼백 명 넘었단 거 생각하면 좀 말이 안 되는 수치였는데 지금 보여주시는 솜씨 보니 절로 이해가 됩니다!"
저놈 비위 한번 좋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아까 꺼지라 윽박질렀는데도 방송이랍시고 나한테 좋은 소리만 줄줄 할 줄이야.
이런 식으로 소탕 작전이 계속되었다. 연이어 한 무리 데스클로들을 더 사냥한 뒤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김극 헌터님? 지금 어디예요? 근처에 괴수 없는 것 같나요? 그럼 거기 잠시 멈춰주세요······」
갑자기 걸려온 공무원의 전화에 헌터들 전체가 멈췄다. 나도 영문을 몰라 대기하는 가운데 봉고차 두 대가 이쪽으로 오더니 멈췄다.
차에서 내린 것은 공무원들이었다. 그들은 뭔가를 가지고 내렸는데, 그것들을 본 헌터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치킨이랑 피자!"
오 년 전만 해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입에 넣을 수 있었던, 그러나 요즘 세상엔 무슨 경사가 있어야만 겨우 먹을 수 있게 된 음식들이다. 그마저도 피자쯤 되면 운영하는 피자가게 자체가 보이지 않아서 요새 인천에서도 먹을 수 있단 사실 자체를 몰랐다.
저게 어찌나 귀한 음식인지, 고소득층에 속하는 헌터들의 격렬한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들 우리 먹으라고 가져온 거냐, 지금 먹어도 되냐, 하고 묻느라 시끄러웠다.
"식사 시간 13시라고 들었는데? 아직 12시인데 왜 벌써 밥 가져왔대요?"
내가 물었더니 공무원 하나가 설명했다.
"원래 준비된 식사는 따로 있었는데, 이건 근처 주민분들이 드리는 거예요."
"근처 주민분들이요?"
"식사 준비하는 중에 주민 대표분이 오셔서 작전 진행하는 헌터 분들 드리려고 준비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다들 모여서 사진 찍어주시고 드시면 됩니다!"
이 프로젝트가 이미 여러 방식으로 홍보된바, 주변 주민들이 이 작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작전 진행을 기대하고 있던 주민들이 많았는데 작전 진행이 순조롭단 말을 전해 듣고는 신나서 바로 준비한 선물이라고.
다들 오, 하고 감탄사를 터뜨리고는 준비된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공무원들이 웃음을 머금은 채 그들을 사진에 담았다.
"자, 김극 헌터님은 닭다리! 닭다리 들고 사진 찍어야 하니까 가장 때깔 좋은 걸로 하나 잡아 주시고······"
"알겠어요. 알겠는데, 딱 봐도 돈 많이 들었을 테니 내일부턴 이러지 말라고 막아야겠네. 자칫하다간 헌터들 중요한 작전 뛰면 그 근처 주민들이 식사 챙겨줘야 하는 악습 생길라."
나는 잘난 척 중얼거리면서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가슴 한구석이 미치도록 간질거렸다. 맙소사, 이런 기습 공격이라니?
원래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나 혼자 괴수들을 학살할 수는 없게 되었겠다, 꼴 보기 싫은 해외산 비각성자 찌꺼기도 끼어있어서 썩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던 와중에 이런 이벤트가 있을 줄은 몰랐다.
다 돈 벌자고 하는 일이지만, 이런 상황에는 절로 어떤 사명감을 느끼고는 뭉클하게 된다. 뭔가 내면에 채워지는 이 느낌이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말로, 인천 만세.
*******
식사 후 작전이 재개되었다.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는 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내가 빗맞혔다간 누구 하나가 괴수에게 죽고 말리란 긴장감이 내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학원 강사가 어째서 시간 들여 조준할 생각 따윈 하지 말라며 몇 번이고 강조했는지, 어째서 적을 포착한 동시에 조준 사격하거나 지향 사격을 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쏘라 가르쳤는지 알 만했다.
내가 곰 사냥이며 사슴 사냥 따윌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 그런 동물을 사냥하는 느낌으로 괴수들을 사살하려 하면 안 된다.
'좀 더 가까이 오면 더 잘 맞힐 수 있겠지' 하고 괴수들을 접근케 하면 죽는다. 놈들은 인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혀서는 곧바로 그 길쭉한 갈고리발톱으로 사람의 목이든 복부든 베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 본 놈들, 운동능력 너무 우월한데요? 내가 데스클로 한두 마리 본 게 아닌데 오늘 사냥한 놈들은 유독 미친 거 같아. 다들 너무 빠르고 너무 멀리 뛰잖아?"
"얘네들은 이미 사람 여럿 잡아먹고 성장한 놈들이라서 그래요. RPG로 치면 레벨 업? 그걸 꽤 한 거지."
"그런 놈들 잡았으니까 돈 더 주나?"
"글쎄요? 어차피 이놈들만 특이한 게 아닌 게, 게이트 열린 뒤로 괴수들 모조리 꾸준히 강해진 거 알잖아요? 일 년 전 괴수들이랑 요새 괴수들은 수준이 진짜 달라······."
헌터들이 토론하는 가운데, 나름 베테랑에 속하는 장병곤은 오늘 사냥한 놈 중에 역장 외골격 능력을 각성한 놈도 몇 마리 있었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 역장의 견고함이 고작 소총에 뚫릴 수준이라 따로 역장체로 구분할 수준이 아닐 뿐, 그 운동능력과 도약력이 눈에 띄게 월등했던 개체가 몇 마리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위험하다고 느끼고서 쏴죽인 놈들은 거의 다 그런 놈들이었던 것 같다고.
"하여간 다들 신세 지네요. 여기 포카리 좀 드시고······"
"고마워요."
내가 건네주는 음료수를 받으면서 예를 차렸더니 장병곤이 손사래 쳤다.
"어휴, 고맙단 말 하지 마세요. 이런 거라도 안 하면 민망해 죽겠으니까."
"민망해 죽겠다니?"
"김극 씨, 헌트웹에서 각성자들 따라다니는 비각성자 헌터들을 뭐라 부르는지 알아요?"
"글쎄······"
"짐꾼이요. 자칭 각성자들이 비각성자 헌터들 싸잡아서 짐꾼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일단은 각성자 따라다니는 따까리 헌터들은 싹 다 짐꾼이라 불립니다. 짐 들어주는 거 말곤 하는 게 없단 거죠. 오늘 저희가 하는 일이 딱 그 수준이네요."
"그래서 막 자괴감 느껴지고 기분 안 좋아요?"
"아니, 개꿀이라 좋은데요? 서울에서 일할 때도 언제 죽을지 모르긴 마찬가지였는데 이러니까 너무 좋고 감사하네. 데리고 다녀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김극 씨!"
한편 우리 팀의 비각성자 모두 하는 게 없어 찔리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나 말고도 오늘 포위망에 끼어서 제 몫을 해냈던 백담비 또한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담비 누나 오늘 진짜 쩔었어요! 목 잘리고도 태평한 게 아주 그냥······"
처음에는 백담비를 싫어하던 성문영마저 저리 아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더라.
나도 은근슬쩍 한마디 보탰다.
"음, 오늘 데스클로 공격 유도해준 걸로 한 명 목숨 살린 거나 다름없지."
우리 둘의 칭찬에 백담비는 무표정하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는 그러는 백담비의 볼이 살짝 씰룩인 것을 보았다.
그걸로 놀려볼까 하다가 관뒀다.
26화 B급 헌터 나이토 상 - [3]
이후로도 이 동네, 저 동네를 지나치던 중이었다.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 수색하던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수도 안에도 데스클로 한 무리 있는데."
"하수도요?"
나는 괴수들의 숫자와 놈들이 잠복 중인 하수도의 위치, 그리고 놈들의 근처 하수구는 세 곳이라는 등의 정보를 전했다.
헌터 하나가 씩 웃었다.
"이번에는 좀 편할 거 같은데요? 팀 나눠서 말씀하신 하수구 앞에 대기하다가 화력 집중하면 되겠네."
"하수구로 나오는 게 아니라 천장 뚫고 나올 가능성은 없나?"
"없을 거 같은데요? 벽은 잘라낸 다음 밀면 되지만 천장을 잘라내면 콘크리트며 흙 같은 게 다 아래로 떨어지니까 고생스럽잖아요. 게다가 두께도 꽤 있으니까 쟤들 방식으로 뚫고 나오려면 시간 좀 걸릴걸?"
그리하여 우리는 놈들마저 소탕하기 위해 크게 세 팀으로 갈라졌다.
우선 내가 속한 팀, 그리고 백담비가 속한 팀(백담비가 최전방에서 데스클로의 공격을 유도하는 것이 헌터들의 생존에 도움 된다고 판단한 내가 다른 팀에 보낸 것이었는데, 그녀로선 그런 식으로 중히 쓰이는 게 기분 나쁘지 않은 눈치였다).
마지막으로 나이토 상이 이끄는 팀······.
나는 내 앞의 하수도 입구를 보았다. 저 너머 괴물들의 움직임을 모두에게 무전으로 전파했다.
「두 마리, 백담비 씨 쪽으로 가고 있고······ 세 마리 나이토 쪽으로 가고 있으니 준비하고······」
다른 팀에 정보를 다 전달한 뒤에는 정신적 그물망의 범위를 좁혔다. 저 앞에 나올 괴수들을 대비해야 했다.
그리고 데스클로 세 마리가 튀어나온 순간, 나와 다른 헌터들이 일제히 사격하여 놈들을 쓰러뜨렸다.
"좋아!"
이렇게 우리 쪽 괴수는 아무도 다치지 않고 쓰러뜨렸다. 다른 팀은?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보니 백담비 팀도 무탈하게 자기네 몫의 괴물을 처치한 마당이었다.
이제 나이토 상 쪽을 확인하려던 차였다.
무전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도와줘! 나이토 상 쪽인데 도와줘요!」
나는 정신적 그물망을 뻗으며 급히 물었다.
"몇 마리?"
「두 마리······ 한 마리밖에 못 죽였어요! 그중에 한 마리는 총 맞아도 안 뒤져요!」
설명을 들어보니 역장체였다. 내가 맡아 처치해야 할 괴수다.
나는 즉시 그쪽으로 공간이동 했지만 주변에 역장체는 없었다. 그저 목에서 피를 콸콸 쏟아내는 헌터 한 명과, 팔다리의 부상 탓에 신음하는 헌터 두 명이 보였을 뿐이다.
역장체, 역장체와 괴수들은 어딨지?
저 멀리에서 엔진음이 났다. 심지어 음악 소리마저 요란하게 울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놈들이 보였다.
데스클로 두 마리가 한 명의 바이크 라이더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바이크를 몰고 온 헌터는 한 명밖에 없다.
나이토 상.
나는 자길 뒤쫓는 괴수들을 향해 샷건을 쏴대며 은빛 바이크를 달리는 일본인과 그 뒤를 바짝 쫓는 데스클로 두 마리를 보았다. 아, 이제 한 마리였다. 막 나이토 상을 덮치려던 한 마리가 그가 쏜 샷건에 맞아 죽었으니까.
그러나 여전히 역장체는 멀쩡하게 그를 쫓고 있었다. 난 공간이동 하고자 정신을 집중하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았다.
거리를 좁힌 역장체가 땅을 박차고 도약하려는 찰나, 나이토 상이 바이크와 몸을 한꺼번에 젖히는 것을 보았다. 미리 괴수의 세세한 동작을 살피고 이후를 예측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움직임.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역장체를 피해 나이토 상이 바이크를 꺾었다. 급회전하여 다른 방향으로 바이크를 달리면서도, 상반신은 계속 뒤를 향한 채였다.
나이토 상은 다시 자기를 쫓아오는 역장체를 향해 계속해서 샷건을 쐈다. 저따위 탄으론 어림도 없다는 걸 알 텐데 어째서?
저 괴물이 계속 자길 쫓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널 공격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다른 놈들을 노리러 가버리는 게 아니라 붙잡기 어렵더라도 날 계속 따라오라고 총성으로 윽박지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 역장체가 다른 헌터들 사이에서 날뛰었다간 죄다 죽고 말 테니까.
다른 의도일 리는 없었다. 한 박자 한 박자에 생사가 오가는 이 상황에도 똑바로 괴수를 향하고 있는 저놈의 눈동자만 봐도 확신할 수 있었다. 바이크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또한 저놈을 유인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한편 역장체든 나이토 상이든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었다. 그래서 공간이동으로 어디로 이동해야 가까이 붙을 수 있을지 계산하기가 벅찼다······.
시간이 좀 걸린 끝에 어떻게든 성공했다.
마침내 내가 그들 옆에 공간이동 했다. 바로 앞에서 역장체가 달리고 있었다. 놈의 측면을 향해 헌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기던 그때, 나는 샷건의 방아쇠를 당기던 나이토 상과 눈이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 찰나의 순간, 나이토 상의 눈은 제 앞에 나타난 나와 역장체를 번갈아 훑었다. 저 정도 동체시력은 격투기하던 시절에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탕' 소리 다섯 번.
내 헌터 라이플에서 연발로 발사된 기관포탄 다섯 발이 역장체를 조각냈다.
"아!"
그제야 나이토 상은 샷건을 내렸고, 나를 다시금 바라봤으며, 겨우 안심한 듯 웃었다.
그 눈동자에도 생기가 돌아왔다. 콘솔 게임을 이지모드로 하는 중에도 저만큼 차분할 순 없겠다 싶던 눈동자에 비로소 드러난 감정이었다.
"무전 한 지 일 분도 안 됐는데 바로 와주셨구나? 공간이동이 좋긴 정말 좋네요! 가뜩이나 스펙 빵빵한 각성자 헌터가 실질적으로 여러 공간에 동시에 있는 셈이니까······"
이 새끼가 지금 너스레를 떠는 건가, 아니면 아부를 하는 건가?
둘 다 아닌 것 같았다. 보아하니 진심으로 안도한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방금까지는 사실 긴장한 채로도 그리 차분해 보였단 것이로군. 비각성자 찌꺼기 주제에······.
"다친 덴 없고?"
"덕분에요!"
이후로는 뒤처리를 신속히 해냈다.
나는 다친 두 명과 시체가 된 한 명을 공간이동으로 병원에 옮긴 후 현장에 복귀했다.
곧바로 피비린내가 코에 스며들었다. 목이 반쯤 잘린 헌터의 피가 웅덩이를 이룬 마당이었다. 병원에 옮기긴 옮겼지만, 저 피 웅덩이 크기만 봐도 생존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예, 또 한 무리 소탕했습니다. 이번에는 역장체 한 마리 섞였는데 돈 더 주십니까······」
기어이 사망자가 발생했단 사실에 나는 몸이 굳었지만 다른 헌터들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이야, 역장체 떴는데 한 명밖에 안 죽었어. 복권 사야겠다 진짜."
표정만 살펴서는 죽은 인원이 누구의 팀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낯짝만 봐선 다들 담담해 보이는 것이 다들 적당히 침통해 보였고 적당히 태평해 보였다.
그날 우리는 59마리의 데스클로와 이름 모를 괴수(딱히 특별할 것은 없다. 아마존 정글에서 툭하면 신종 생물이 발견되듯 게이트에서도 툭하면 발견된 적 없는 괴물이 새로 튀어나온다) 한 마리를 사냥했다.
이것은 하루 만에 해냈다기엔 너무나 놀라운 사냥 성과라는 듯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날 공중파 뉴스에도 우리가 등장했다.
「인천에서 진행된 지역 복구 프로젝트가 순조로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일곱 시간 동안 진행된 작전을 통해 총 육십 마리 괴수를 사살하여, 두 개 동을 완전히 (······)
예비군 일만 명이 동원되어 열여덟 명이 실종되고 다섯 명이 사망한 결과 고작 한 마리 괴수를 사살했을 뿐인 지난 독수리 작전과 비교할 수 없는······」
새삼 세상이 변했단 게 느껴진다.
작전 첫날부터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 내 기준에는 끔찍하게 불운한 시작으로 느껴지는데, 뉴스에서는 이걸 '경탄스러울 만치 순조로운 시작'쯤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태평하게 인권운동이나 하는 동안 세상은 이 정도로 변한 것 같다.
「이번 프로젝트를 주도한 헌터 김극은 저번 인천에서도 놀라운······」
*******
운동을 마친 후 씻고서 헌트웹에 접속했다.
그러고는 이쁜 말투로 글 하나를 작성하려다 그만두었다. 내가 주도한 작전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날에 그러는 것은 고인 모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뭔가 적는 대신 읽기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헌트웹에 나이토 상을 쳐보았다.
유명인답게 그와 관련된 글이 수두룩하게 쏟아져나왔다.
그리하여 나는 나이토 상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가 단순히 스트리머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놀라운 실력자 헌터로도 유명하다는 사실을, 거꾸로 그 놀라운 실력 덕에 스트리머로도 유명해졌다는 것을 새로 알았다.
또한, 그는 인터넷에서 나이토 상 외의 별명이 또 하나 있었다.
'B급 헌터'.
원래 헌터 등급에 B급 따위는 없다. 각성자임을 뜻하는 A급과 거기서 또 초월적인 수준(super)임을 뜻하는 S급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직 나이토 상에게만 부여된 칭호로, 비각성자이기에 고화력을 퍼부어 역장체 등 강력한 괴수를 타격하는 A급 헌터의 역할은 수행하지 못하지만 바로 그 아래 등급은 된다는 뜻이었다.
'B급'하면 생각나는 좋지 않은 어감과 달리, 순수하게 그를 예찬하고자 붙여준 칭호인 셈이다.
인터넷에서 조롱 목적이 아닌 별명이 붙다니? 정말로 흔치 않은 경우다. 그놈의 실력이 얼마나 감탄스러웠으면······.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계속 마우스를 따닥따닥하던 중이었다.
메시지가 왔다는 시스템 알림이 떴다.
그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GoodHunter : 사죄드리고 싶어 연락드립니다.
말씀하신 댓글을 찾아보니 확실히, 팀원이 당한 모욕에 기분 나쁘실 만하더군요. 그땐 별 대단한 생각 없이 단 댓글이었는데 제가 경솔하고도 무례했습니다. 실제로 만나 뵌 백담비 씨는 충분히 제 역할 이상을 훌륭하게 해내는 분이었던 만큼 제게 그런 모욕을 들을 이유가 없기도 했고요.
또한 전과자, 어쩌고 하며 주제넘게 작성한 글에 대해서도 사죄드립니다.
문제가 된 댓글과 글은 이미 삭제했습니다. 몇 번을 사죄드려도 부족하겠지만, 거듭 사죄드립니다.
원래대로라면 백담비 씨에게도 직접 사과드려야겠지만 그러려거든 인터넷에 백담비 씨를 험담하는 글이 올라온 사실을 굳이 알려야 할 텐데 그 경우 백담비 씨가 불쾌함을 느끼게 되실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제 맘 편하자고 바로 사과드리기엔 조심스럽네요. 여러모로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김극 씨? 오늘 보여주신 실력은 역시 들은 대로 최고였습니다! 위급한 중에 도와주신 것에도 깊이 감사 드립니다!
다시 만날 때는 서로 웃으며 인사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일본인은 사과를 잘 안 한다더니 다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군. 이 정도로 공들인 사과문은 오랜만이었다.
놈의 메시지를 다 읽고 난 나는 바로 컴퓨터를 껐다.
그러고는 오늘 일어난 일과 그놈의 일본인에 대해 생각했다.
그놈은 확실히 내가 원래 갖고 있던 '베테랑 비각성자 헌터'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놈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놈이 좋아질 일은 없을 것 같다.
*******
27화 얼레기들 - [1]
오늘도 그놈의 버섯구름과 함께 잠에서 깼다.
이후로는 늘 그렇듯 끔찍했다. 머리를 잠식한 울화와 우울감을 못 이겨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이 부정적인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최대한 빨리 떠나가길 기다렸다.
조금 진정된 후에도 몸에 기운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하루의 시작이 매번 이러니 그저 끔찍하다.
여전히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헌트웹을 켰다. 그러고는 '글쓰기'를 누르려다 말고 화면에 정신을 집중했다.
YYY : "헌터 김극" 주도 인천 탈환 프로젝트, 불과 석 달 만에 "1/7 대성공"
내가 요새 잘 나가고 있단 게 실감 된다. 관심받으려고 글을 쓰려던 차에 알아서 내 관련 글이 올라와 있는 걸 보니.
글에 첨부된 기사를 보았다.
지난 내 활동으로 인한 성과를 찬미하는 기사였다.
불과 석 달 만에 인천의 위험지역 1/7에 달하는 구역을 완전히 정화했다느니, 작전지역과 그 근처 야생 괴수로 인한 인명 피해가 수년 만에 0건에 달했다느니, 헌터 김극의 525억 계약금 값어치를 반년도 안 돼 넘치게 해냈다느니······.
괴로운 와중에도 날 향한 칭송이며 관심은 달콤했다.
기사의 전문을 쭉 읽어내리던 내 눈길은 어느덧 댓글을 향했다.
익명 : 인천 재개발 발표 봄? 이번에 김극 형 작전으로 수복된 구역 건물주들 잭팟 터졌음;; 건축년도 안 가리고 빌라, 다세대주택, 전원주택 싹 다 밀어버린 다음 요새형 아파트 단지 짓겠다네
Ⓐ 엘마야캐요 : 이 친구 인터뷰 처음 볼 때만 해도 뭔 양아치가 들어와서 물 흐리나 싶었는데 볼수록 진짜 대단하네. 같은 A급으로서 리스펙!
익명 : 일주일에 네 번씩 작전 뛰었다니 개빡세네. 몇 명 죽음?
5my지저스 : 총 3명. 첫날 한 명, 이후로 석 달간 두 명 전사했어
한편 내 추종자도 보인다. 오 마이 지저스, 약 석 달 전부터 생긴 내 추종자다.
익명 : ? 왜 그리 안 죽었음? 저렇게 작전 많이 뛰어놓고 꼴랑 세 명 죽을 수가 없는데
5my지저스 : 성과에 고무되었는지 인천시에서 장비 지원 더 빵빵하게 해줬어. 첫날부터 사망자 나오니까 김극 형이 충격 좀 받았는지 이후론 본인이 더 열심히 나서면서 모두의 위험을 대신 부담해주기도 했고
5my지저스 : 형이 그리 노력해도 아예 안 죽을 순 없어서 결국 두 명 더 죽긴 했는데, 그렇게 누구 죽을 때마다 김극 형이 부조금도 오지게 많이 내더라
익명 : 얼마나 많이 냈는데?
5my지저스 : 그건 모르지. 형이 유족들한테 부조금 액수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했음. 각성자 헌터라면 부조금 얼마쯤 내야 한다는 전통이라도 생겼다간 딴 각성자들한테 민폐라나?
5my지저스 : 하지만 사망한 헌터 팀원들도 부조금 꽤 냈을 텐데, 유족들이 유독 김극 형한테만 손 붙잡고 오열한 거 보면 진짜로 많이 낸 거 같아
내가 인천 공작이었다면 저 친구에게 간석동을 영지로 내려 간석동 기사로 삼았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왜 민주주의 따위가 자리 잡아 내 합당한 권리를 앗아간 걸까?
하여간, 아······.
몸에서 빠져나갔던 좋은 기운이 도로 채워지는 게 체감되고 있었다.
이 좋은 기운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다독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완벽한 가운데 그놈의 핵폭발은 일어날 수 있는 미래가 아니라고, 그 모든 것은 개꿈에 불과하니 아침마다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고 나 자신을 응원했다.
그것이 정말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완전히 기운을 차린 나는 단백질 쉐이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온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식은땀을 닦아내고자 샤워한 뒤 집을 나섰다.
오늘도 사냥의 나날이다.
*******
지난 석 달간 진행된 작전은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전례가 없을 만치 놀라운 성과였다.
기사에서 칭송했듯, 우리는 지금껏 인천의 위험지역으로 설정된 구역 1/7에서 괴수들을 소탕했다. 위험지역으로 설정되지 않은 곳에서도 그렇게 했으며, 그 근방에 빈번하던 야생 괴수 습격을 0건에 가깝게 줄였다.
당연히 내가 작전을 진행한 구역과 그 근처 부동산값은 눈에 띄게 뛰었다. 너무나도 헐값이라 오를 전망이 없었던 빌라며 다세대주택의 가격마저 몇 배로 뛰었다던가? 주거 가치가 없는 건물들이라도 재개발되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덕이라고 한다.
이 와중에 몇몇 구역에서 무너졌던 상권이 복구되었다든가, 떠났던 주민들이 대거 돌아왔다는 소식은 새삼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그리하여 내가 시에서 받은 표창장이며 주민 대표들이 준 꽃다발 등은 이제 둘 공간이 없어 이사 갈 것을 진지하게 고민할 지경이다.
그렇듯 내 인기가 실로 상당하다. 이제는 우리가 사냥하러 모일 때마다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잔뜩 모여들곤 했다. 응원하고자 여기까지 온 사람들.
이번에도 어떻게 결집장소를 알고서 팬이며 주민이며 기자며 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내 소녀 팬 하나가 외쳤다.
"오빠! 저 기억해요?"
"아, 동양 아파트 옥상 계시던 분인가? 폰으로 뭔 카톡만 쭉 보내시던 거 기억나네. 아마도 마지막 인사 같은 거 보내시던 거 같은데 나중에 민망하진 않았어요?"
"엄청 민망했죠······ 하여간 오빠, 직접 뵀을 때도 인터넷에서처럼 이상한 말투 쓸까 봐 걱정했는데 역시 현실에서는 멀쩡하시구나? 진짜 다행이에요!"
"아, YYY?"
"어떻게 알았어요!"
씩 웃어주곤 '인천 만세'라며 폰케이스에 싸인까지 해주던 마당이었다.
저 한구석이 시끄러웠다. 그쪽에 시선을 돌린 나는 남몰래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나이토 상, 여기 봐줘요!"
제기랄, 모든 것이 완벽한 가운데 맘에 들지 않는 점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나이토 상, 저 씨발놈의 비각성자 찌꺼기마저 인기와 명성이 상승했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저놈도 내가 주도하는 작전에 꼬박꼬박 참여하여 영상을 올려왔지 않은가. 그래서 사실 나만 있어도 충분할 이 작전에 저놈도 한몫했다고, 그러니까 저놈도 인천의 구원자 중 한 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생겼다.
끔찍한 일이었다. 정말로.
지금 저놈에게도 팬들이 달라붙어 있었는데, 다행히 근처 주민이며 건물주들이 달라붙은 나보다는 그 수가 적었으나 일단 저놈에게 팬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역겨운 일이었다.
우리 팀의 아리따운 백담비 씨에게도 팬이 없는데, 저 찌꺼기를 추종하는 사람이 있다고?
흘긋 백담비를 보니 과연, 그녀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대충 입을 굳게 다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한편 오늘은 웬일로 기자까지 한 명 왔다.
웬 여자가 내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안녕하세요, 김극 씨! 요새 인천시를 통째로 부흥시키고 있단 히어로시죠? 직접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시작부터 칭송으로 시작된 그녀와의 인터뷰는 썩 나쁘지는 않았다. 다음엔 어느 지역 작전에 나설 것이냔 평범한 인터뷰부터 내년 갱신할 내 헌터 계약은 역대급이리라 기대되는데 그때에도 인천을 선택할 거냔 멍청한 질문까지.
나름대로 성심껏 대답하던 중에 불쾌한 질문 하나가 툭 튀어 나왔다.
"김극 씨, 인천시를 넘어 역대 각성자 헌터 중 최고란 평가를 받고 계신데요! 그와는 정반대로 비각성자임에도 이 모든 성과를 내고 있는 마츠모토 씨······ 소위 나이토 상과 대조되어 흥미롭단 의견이 많습니다!"
갑자기 저 비각성자 찌꺼기가 왜 언급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가요?"
어떻게든 입가의 미소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다음 질문이 특히 불쾌했기에 더욱 그랬다.
"최고의 각성자 헌터와 최고의 비각성자 헌터, 두 분을 라이벌 취급하는 인터넷 의견이 상당합니다! 현재 함께하는 동료인 나이토 상에 대해 의견 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내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분노를 안면에 드러내지 않은 것이 내 최선이었다. 난 눈앞의 여자에게 인천 사람인지 서울 사람인지 묻고 싶은 걸 애써 참고는 입을 열었다.
"마츠모토 씨, 실력 진짜 좋죠. 분명히 헌터 말고 스포츠를 했어도 대성했을 겁니다. 단순히 경험이 많고 총을 잘 쏘는 걸 넘어선 무언가가 있어요.
그 반사신경이며 침착함이며, 훈련해서 다다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더군요. 타고난 걸 넘어 특출났습니다. 같이 작전 뛰면서 대체 어찌 저럴 수 있는지 보면서 놀랄 때가 많아요."
"그렇군요! 자세한 대답 정말 감사······"
"그런데 격투기에서 체급 차이가 괜히 있는 게 아니죠?"
나는 일부러 웃었다. 나이토 상을 흘긋 보며, 마음속으로 중지를 올린 채 말을 이었다.
"저 친구가 경험이 얼마나 많든, 반사신경이 얼마나 좋든······ 저 친구가 위기 중에 얼마나 평정심을 유지하든, 50kg짜리 인간과 700kg짜리 그리즐리베어 이상의 체급 차이가 우리 둘에게 있습니다."
"그건 무슨 말씀······"
"무조건 제가 훨씬 더 세요. 비교도 안 됩니다."
마지막 말은 거의 으르렁거렸지 싶다.
그러나 눈앞의 기자는 서울 사람이 분명했다. 그녀는 내 내면에 깃든 불쾌감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와, 놀라운 호승심! 그런 열정이 바로 지난 성과의 비결인가요? 자, 이제 이번 사냥에 임하시는 각오 한 말씀······"
인천 만세 복창을 끝으로 불쾌했던 인터뷰는 끝났다.
인터뷰를 뒤에서 듣고 있던 성문영이 은근슬쩍 다가왔다. 녀석이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형, 왜 그리 화났어요?"
"화 안 났어."
"딱 봐도 진짜 화난 거 보이던데요? 주먹 쥔 손에 혈관이 무슨 거미줄처럼 돋아나던데, 대충 나이토 상 얘기 나올 때부터 그랬거든요?"
"내가 그랬나?"
"그랬어요. 저번에 사과도 받았다드만 왜 아직까지 그리 싫어해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나는 최대한, 내가 미친놈처럼 들리지 않도록 말을 골라서 대답했다.
"자꾸 비각성자, 비각성자 타령하잖아."
마블이든 디시든, 아니면 일본 소년만화든 으레 아무런 특수능력이 없는 게 특징인 캐릭터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주변 인물은 죄다 특수능력이 있는데 저 홀로 특수능력이 없어서 오히려 더욱 돋보이는, 그런 주제에 인기가 많아서 작가들의 편애에 힘입어 특수능력이 있는 다른 캐릭터들의 몇 배 이상 활약을 하기도 하는 그런 비능력자 캐릭터다.
나이토 상 저놈을 본 이후로 나는 그런 캐릭터들이 모조리 싫어졌다.
배트맨이든 호크아이든, 열등한 일반인이라면 일반인답게 초능력 히어로들이 활약할 동안 주제를 알고 얌전히 팝콘이나 처먹으면 좋겠다.
"그게 왜요?"
"저 새끼가 비각성자인데도 그토록 대단하다고 몇 번이고 강조하는데, 그건 각성자인 내가 대단한 건 그저 각성자라서 그런 거라고 꼽주는 거 아니야? 둘 다 똑같은 조건이면 저 새끼가 훨씬 대단하다고 띄워주면서 나 깎아내리는 거 아니냐고?"
"아니, 뭘 그리 확대해석 해요? 그냥 비각성자인데도 어지간한 각성자들 수준으로 활약하니까 대단한 거지······"
난 한숨을 내쉬었다.
헌트웹에서 나이토 상의 평가도 저 모양 저 꼴이었다. '비각성자인데' '비각성자인데도' '비각성자면서'······.
나이토 상, 저놈은 비각성자란 이유로 특별시 되고 있었다.
각성하지 않고서도 각성자들에 준할 만큼 활약하여 각성자에 준하는 계약을 맺을 정도니 그야말로 진정한 인간 승리란 것이다. 그러니까 어쭙잖은 각성자들보단 비각성자인 그가 훨씬 위대하다고.
내가 볼 때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평가다. 팀에 각성자이면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백담비가 있어서 더욱 그리 느껴진다.
백담비, 저 얼음 능력자는 헌트웹에서의 박한 평가와 달리 분명하게 비각성자 헌터들 이상의 기여를 하고 있다.
그녀는 딱히 화려한 활약을 하지는 않더라도 언제나 가장 위험한 위치에서 위험한 역할을 떠맡는다. 지난 석 달간 진행된 작전에서도 그녀는 그렇게 했다.
자신에게 괴수들의 공격을 유도하는 그녀의 묵묵한 역할 수행이,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자 노력하던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됐던가?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실력이 놀라울 만치 좋긴 하지만 무슨 대단한 무기를 든 것도 아니라서 다른 헌터들보다 딱히 큰 기여를 하진 않았던 나이토 상 저놈보다 백담비의 기여가 훨씬 컸다.
그런데 보라. 그녀는 예쁘게 보이고자 기껏 화장하고 크롭티까지 입고 와서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몇 번 찾아온 기자를 붙잡고 그녀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 설명해줘도 다들 시큰둥했다. 얼레기라도 각성자랍시고 돈 받았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하는 느낌으로 죄다 기사에 칭찬 한두 줄 넣어주곤 넘어가 버렸다.
지금 나이토 상이 옆에 있는 이상, 한낱 얼레기가 아니라 어지간한 A급 헌터가 이 자리에 함께 있었어도 그녀와 비슷한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항의를 했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왔을까? 각성해놓고서도 비각성자보다 월등한 활약을 하지 못했으니 오히려 자신이 부족한 줄 알아야 한다며 욕을 먹지 않았을까?
하여간 화가 난다.
만약 내게 이 모든 것을 바꿀 권한이 있다면, 비각성자들이 헌터 노릇 하는 걸 금지할 것이다. 지난 석 달 세 차례나 경험했듯 나약한 비각성자들이 헌터 노릇을 해봐야 별 도움도 못 되고 죽어 나가기나 할 뿐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아예 못 하게 하는 것이 옳다.
나이토 상 저놈이 가진 'B급 헌터'란 칭호는 백담비처럼 조금 부족한 각성자들의 몫으로 돌릴 것이며, 그들이 지나갈 때도 사람들이 환호하게 할 것이다.
분수를 모르고 우리와 맞먹으려 드는 비각성자는 인천 사람이 아니라면 흠씬 두들겨 패버릴 것이다······.
한창 생각하던 중에 나이토 상이 다가왔다. 그가 씩 웃더니 이렇게 외쳤다.
"오늘도 열심히 해봅시다. 음, 이렇게 외치면 되는 건가요? 인천 만세!"
저놈이 간악한 속내를 숨긴 배신자이며 내게 해코지하리란 미래라도 봤으면 얼마나 속이 편했을까?
하지만 내 언제 발동될지 모를 예언 능력은 그런 미래를 보여주지 않았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인천 만세."
내가 딱히 열렬히 호응해준 것 같진 않지만, 그마저도 기분 좋은 듯 나이토 상은 씩 웃더니 제 팀을 이끌러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사실 놈에 대한 혐오감이 비이성적인 걸 아는 나는 심호흡했다.
남에게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휩싸인 나 자신을 달래려 시도했다.
애써 이성적인 생각을 했다.
나이토 상 저놈 또한 분명히 인천을 위해 기여하고 있었고, 날 해코지할 것 같지도 않았으며, 일단은 함께 싸울 동료 중 하나였다.
그 껄끄러운 동료와 함께, 나는 만월산에 향했다.
그 안에 온갖 괴수들이 들끓는 나머지 근처 부평과 간석동에 광범위한 슬럼가를 만들어 버린, 그 안의 괴수들을 소탕하기만 해도 수많은 주민이 돌아올 것이요 근처 땅값과 상권이 부활하리라 기대되는 유라시아 최고의 영산(靈山)으로.
*******
28화 얼레기들 - [2]
만월산에서의 사냥도 순조로웠다.
산 군데군데 괴수들이 파낸 땅굴이 숨겨져 있어 무턱대고 병력이 전진했다간 인명피해가 극심할 법했지만, 그거야 비각성자 찌꺼기들의 한계일 뿐이다.
내가 이끄는 헌터들은 그저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괴수가 멍하니 야외에 있으면, 내가 위치를 알려주기만 해도 다른 인원들이 저격으로 알아서 처리했다.
괴수가 어디 땅굴 따위에 숨어있으면, 땅굴 안에 수류탄이든 뭐든 까 넣고서 기다리기만 해도 됐다.
그 경우 땅굴 입구에서 대기하면 괴수들이 알아서 입구로 튀어나오는데, 나는 그때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정신적 그물망을 그 앞에 펼쳐놓았다.
정신적 그물망은 펼쳐진 범위 내에서 거슬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개체를 판별해냈다. 그와 같은 개체가 감지되면 내가 나섰다. 역장체도 버티기 힘든 기관포탄으로 놈을 처리했다······.
위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다른 인원들도, 나도 이 과정에 익숙해졌다.
나만 해도 그물망을 통해 놈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일에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이제는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그물망으로 감지하고 판단하는 것이 편할 정도 아닌가.
오전 내내 사냥을 반복했던 우리는 또다시 주민들이 챙겨준 식사(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 그러더라)를 마치고서 산을 탔다.
나는 걸으면서 탐색한 결과를 말했다.
"저기 수풀에 고블린 아홉 마리 있네."
그 말에 긴장한 헌터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블린이면 그저 데스클로 밥에 불과한 놈들 아닌가.
게이트에서 맨 처음 등장한 탓에 이후 생겨난 규칙의 예외가 되어버린 데스클로를 제외하면, 괴수들에게는 최대한 여러 국가에서 유명한 가상의 괴물 이름을 붙이는 편이다. 이상 개체-183 따위로 괴수 이름을 붙이면 품위야 있겠지만 빡대가리 헌터들이 외우기도 어려워하겠거니와 국가 간에 쉬이 통용되지도 않는다나?
그리고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고블린은 딱히 RPG 속 고블린처럼 생기진 않아서 그저 털 뽑힌 회색 원숭이로 보일 뿐이지만, 놈들의 위상은 RPG 속 고블린과 비슷하다.
놈들에게 불을 피울 정도의 지능은 있지만 그뿐이다. 크기부터가 사람보다 작아서 별 위협이 못 된다. 체급에 비해 힘이 좋아서 아이나 여성이 습격을 당할 수 있는 데다 번식하게 내버려 뒀다간 놈들을 잡아먹고 살 데스클로마저 번식할 수 있으니 보이는 족족 처리해야 할 뿐인 짐승이다.
철컥, 하고. 나이토 상이 샷건을 장전했다. 그가 말했다.
"이건 저희가 처리하죠!"
대충 음식물쓰레기 자기가 나가서 버리겠다, 정도의 말투였다. 나도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이토 상과 소수의 헌터들이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이동했다.
약간의 편집증적인 걱정으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두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그 와중에 일이 일어났다.
그물망을 통해 고블린 사냥이 잘 진행되는지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지도 않던 와중에, 나는 그물망을 찢어발길 만치 맹렬한 어떤 운동체를 포착했다.
이쪽에서 쏜 총알? 아니었다.
역방향에서 날아온 총알.
위험을 감지한 순간 내 온몸의 신경이 반응했다. 지금 시야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이 순식간에 뇌에 전달됐다.
정신적 그물망을 통해 윤곽을 파악하자니, 고블린 하나가 K-2 소총을 들고 있었다. 맹렬한 운동체는 그 총구에서 빠져나왔다. 총알이 분명하다.
총알이 나아가는 방향에는 뭐가 있지?
나이토 상. 틀림없다. 외국인이다 보니 국내에서 연사가 되는 자동화기 사용이 불가능한 나머지 들고 다니는 저 샷건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저게 나이토 상이든 누구든 가릴 상황이 아니다. 나는 판단을 마친 즉시 공간이동 했다. 고블린과 나이토 상의 사이 공간으로.
그러면서 가드하듯 양팔을 앞으로 내밀었는데, 날아든 총알은 정확히 팔뚝 안에 박혔다.
소리의 속도는 총알보다 느리기에 총성은 그다음에야 울렸다. '탕!'
아드레날린이 돌지 않는 중이라 그 통증을 온전히 느끼는 가운데 내가 뭔가 할 필요는 없었다. 옆에 있던 헌터들도 천치가 아니라서 각자 든 총을 쏘았으니까.
총성 몇 번이 울리더니, 고블린들은 모조리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뒤이어 눈을 부릅뜬 헌터들이 나를 보았다.
"김극 씨? 여긴 어떻게······ 아니, 공간이동 한 줄 몰라서 묻는 건 아니고, 상황 어찌 알고서······"
나는 대답하는 대신 씨, 하고 신음했다.
내 팔뚝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서야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다. 주변의 헌터들이 부산을 떨어댔다.
"아니 씨발, 어떡해? 박혔어!"
*******
"그러니까 나이토 상 그놈의 위기를 감지하자마자 형이 텔레포트 해서 총알 대신 맞았다구요?"
성문영의 물음에 내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내 희생정신에 칭송을 아끼지 않아도 된다."
"칭송이고 지랄이고 그게 뭔 미친 짓이에요!"
"목숨 하나 살렸구만 미친 짓이라니?"
"아니, 눈앞에 웬 떡대가 공간이동 해서 나타나면요! 그 뒤에 있던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감싸주러 왔구나, 하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놀라서 일단 쏘고 보지 않을까요?"
"그런가?"
"애초에! 고블린이 총 겨누고 있는 상황에 어떻게든 빨리 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으니까, 고블린 쏘려다가 형 쏠 수도 있는 상황 아니었어요?"
나는 급한 와중에 뭔 그런 계산을 할 수 있었겠느냐며 핀잔하면서도 생각했다. 확실히 위험한 상황이긴 했군.
생각해보니 앞에서도 뒤에서도 총알을 맞을 수 있는 순간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팔 따위가 아니라 등에 총을 맞았다간 어찌 될지 모른다.
용케 내 뒤에 있던 나이토 상이 날 향해 쏘지 않았기에 팔만 다치고 끝날 수 있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왜 그 상황에도 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나이토 상 그놈, 대체 왜 안 쏜 거지?
고블린이 먼저 쏘긴 했지만 그땐 이미 나이토 상도 눈앞에 있는 치명적인 적을 파악했으리라. 그다음 박자에는 나이토 상이 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안 쏜 걸까. 늘 차분하던 놈이 죽을 상황에 처하니 얼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나이토 상이 내 공간이동을 파악하고서 방아쇠를 당기려다 멈췄을 리는 없다. 고블린의 총알은 이미 발사되어 있었고 난 그 중간에 끼어들었으며, 그 과정에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반사신경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처럼 특별한 경우거나 특수한 종류의 각성자가 아니고서야······.
이 생각에 오래 골몰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저놈 대신 맞아주면 안 되죠. 대체 왜 저딴 놈 살리려고······"
백담비가 내 총상에 얼음을 대주면서 웬일로 잔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걱정을 받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끝내주게 유쾌했다. 라운드걸이 날 챙겨주는 것이 기꺼워서만은 아니었다.
이 모든 상황, 그러니까 앞선 상황 자체가 기꺼웠다.
그러니까 내가 나이토 상을 구해낸 그 상황 말이다.
역시 계약금이 준 각성자 수준이든, 실력이 얼마나 좋든 비각성자는 각성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맥없이 죽을 뿐이다.
그 사실을 새삼 증명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와 함께 내가 왜 나이토 상 저놈이 그토록 싫었는지도 그 이유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놈이 비각성자 주제에 그토록 훌륭한 헌터인 양 구는 것 자체가 거슬렸던 것이다. 놈의 존재는 비각성자는 아무 도움도 못 되니 각성자가 괴수를 쓰러뜨릴 동안 뒤에서 얌전히 칭송이나 바치면 된다는 내 이론을 파괴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 내가 놈을 구해냄으로써 다시금 그 이론이 증명되니 내 기분 또한 좋아진 셈이다.
음, 어디 가서 말할 수 없는 이유였다······.
"김극 씨 총알 맞았으니까 오늘은 이만 끝내죠?"
임형택 씨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문영이며 이종호도 시마이, 시마이 하고 외쳤는데 평소 같으면 열렬한 환성이 뒤따랐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다들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이렇게 관심받는 기분, 짜릿한데.
당연히 나이토 상도 내게 우물쭈물 다가와서는 말을 걸었다.
"저, 어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두 번이나 목숨 구해주신 셈인데 이걸 대체······?"
워낙 기분이 좋았기에 난 놈을 향해 웃어줄 수 있었다.
"됐어요. 서로 목숨 걸고 싸우는 건데 도울 수 있음 당연히 돕는 거지 뭘."
"그래도······"
"정 고마우면 헌트웹에 내 칭송 글이나 올리시든가. 이번은 특별히 이쁜 말투로 댓글 달아줄 테니까."
이후로도 나이토 상은 한참이나 감사의 말을 떠벌리다가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내 팔뚝에서 뭔가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그리하여 바닥을 구르는 것을 보니 총알이었다.
총알이 재생된 살에 밀려 빠져나온 것이다. 그걸 보고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원래는 병원에서 적출할 예정이었는데. 내 초재생능력이 원래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공간이동의 범위가 넓어졌듯 재생력 역시 눈에 띄게 향상된 모양이지?
"괴물이다, 진짜······"
성문영을 한 대 쥐어박음으로써 오늘의 사냥이 끝났다.
그리고 팀과 함께 귀가하는 길, 나는 사냥을 일찍 마친 것을 후회했다. 상처가 생각보다 더 빨리 회복되었다. 이대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학원에 가서 근력운동이라도 하자니 내 운동을 도와야 할 양쌤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인데, 이대로 뭘 해야 하나?
"문영이, 혹시 알바 할 생각 없나?"
"뭔 알바요? 나 요새 형 덕에 돈 많이 벌었잖아요. 따로 알바 같은 거 할 필요 없는데?"
"내가 고용주인 알바라서 알바비 빵빵해. 돈 더 벌고 싶으면 따라와, 어?"
그렇게 성문영을 꼬드겨 집에 데려와서는 가지고 있던 K-2 소총을 들게 했다.
그 총구를 날 향하게 하고는 지시했다.
"좋아, 그걸로 나 쏴라."
"미쳤어요?"
"그게 아니라, 훈련하려는 거야, 인마."
"뭔 훈련이요?"
"내가 오늘 발사된 총알에 반응했잖아? 심지어 반대 방향에서 날아왔단 이유만으로 위험 감지에 성공하고는 사람 목숨까지 살렸고."
"형 대단한 거 알겠으니까 자랑은 그만······"
"그러니까 내 신경계가 총알의 속도에 반응한 셈인데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르겠어? 180km/h 너클볼을 쳐서 홈런 기록한 것보다 대단한 일인 걸 모르겠냐고?"
"듣고 보니 대단하긴 한데 그게 뭐요······"
나는 이런 놀라운 일이 한 번으로 그쳐선 안 된다고, 앞으로도 가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려거든 단순히 럭키 펀치가 반복되길 비는 게 아니라 제대로 훈련을 해야 할 것이며, 훈련하려거든 아까와 같은 상황을 재현해야 할 것이라고도.
"그럼 비비탄으로······"
"비비탄으로 실탄 속도가 나오냐?"
"그렇다고 굳이 형을 향해 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아요? 그냥 딴 표적에 쏘는 거에 반응하면 안 되나?"
"있지 물론. 내 뇌가 위험한 상황인 걸 인지해야 신경이 더 가속되는 것 같거든."
"그래도 이걸 왜 하필 나한테 시켜요?"
"넌 툭하면 말로 사람 상처 주는 소시오패스니까 총알로 사람 아프게 해도 맘이 편하지 않나?"
"아니, 말로 사람 상처 주는 건 지금 형이고요······."
"걱정 마. 안 죽어."
"그게 유언 1위라던데······?"
이후로도 한참이나 불평을 토해낸 끝에 성문영은 기어이 내게 총 한 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나는 총구를 빠져나온 총알이 펼쳐둔 정신적 그물망을 맹렬히 가로지르며 내 신경을 자극하는 것을, 심지어 육안으로도 그 총알의 움직임이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것을 느끼고는 희열에 떨었다.
지난 석 달, 나는 데스클로들의 인간의 동체시력을 벗어나곤 하는 움직임들을 포착하기가 점차 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적들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결과가 아니라 내 신경계마저 초인적인 영역에 이른 결과였다.
추측하기로, 신경계를 자극하는 텔레포트와 정신적 그물망을 꾸준히 활용해온 여파로 내 신경계마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수준으로 발달하고 있었다.
신경가속 능력자 중엔 정말로 총알의 속도에 반응하고 대처하는 경우가 있다던가? 이대로면 나 역시 그런 영역에 이를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총알의 속도에 한 번이나마 대처했으니 앞으로는 더욱더······.
그제야 총성이 울렸다. '탕!' 성문영의 목소리도 뒤이어 귀에 파고들었다.
"안 아파요? 왜 웃어 진짜. 미치겠네······."
29화 얼레기들 - [3]
울상이 된 성문영에게 계속해서 총을 쏘게 했다.
그리고 나는 날아온 총알들을 손으로 붙잡거나 피해 보려 시도했지만 잘 되진 않았다. 마지막 시도에서는 총알에 손가락부터 들이댔다가 손가락 한 마디만 날려 먹었을 뿐이다.
"아, 씨발, 진짜!"
손가락이 잘려 나간 나보다는 성문영이 더욱 고통을 호소했다. 아파 죽을 지경에도 녀석이 비명 지르는 걸 보니 웃겨서 웃음이 다 나오더라.
결국 성문영이 더는 못 해 먹겠다며 포기를 선언했기에 내 훈련은 예정보다 일찍 종료해야 했다.
이후로 성문영이 운동하겠다며 도망친 지 한 시간쯤 지나, 학원 헬스장에서 나와 재회한 성문영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학원엔 또 왜 왔어요?"
"운동하러 왔지 그럼 던파하러 왔겠냐?"
"손가락 하나 날려 먹고 운동하겠다고요? 딱 보니까 아직 절반밖에 재생 안 됐는데 미쳤나······"
녀석이 기겁하든 말든 난 내 할 일을 했다. 이제는 나한테서 따로 수고비를 받는 양쌤의 도움을 받아 가며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일반인은 네 명이 모여도 들지 못할 무게의 바벨을 내리길 반복했다······.
"와, 진짜 개빡세······"
그렇게 온몸을 혹사 중인 날 구경하거나 폰으로 영상을 찍는 구경꾼이 몇 달 전에 비해 네 배는 되었다.
내가 열심히 이 학원을 홍보했겠다, 정식 헌터로 활동하면서도 학원에 매일 운동하러 찾아온단 사실이 알려졌기에 학원비가 비싸졌는데도 불구하고 수강생이 열 배는 늘어났다던가?
수강생이 어찌나 늘었는지 이제는 오전반 오후반을 따로 편성해야 할 정도라며 원장이 벅찬 목소리로 말해줘서 알고 있었다.
계속 운동하다 지쳐 쉬는 시간, 성문영이 생수를 내밀길래 벌컥벌컥 마셨다. 다 마시고 나니 성문영이 내게 말을 걸었다.
"형 이미 정령이고 역장체고 혼자 다 때려잡을 정도 아니에요? 특히 저번에 게이트 큰 거 열렸을 때 나온 역장체는 베테랑 A급 헌터도 어떻게 못 잡을 수준이라 형이 그때 못 잡았음 어떻게 잡을지 견적이 안 나오는 수준이었다던데."
"네 싸가지 없는 주둥이에서 나오는 칭송이 꽤 듣기 좋구나. 계속해 보거라."
"아니, 형 칭찬하려는 게 아니라······ 형 저번에 화염 정령 잡고서 성 기능 좀 돌아온 것 같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 병원에서 검사해보니까 무정자증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라 자손 생산은 못 해도 즐기는 건 될 거라더라. 그래서?"
"그럼 시간 있음 여자랑 놀든가 하지, 이 정도면 이미 A급 헌터로서 만렙 찍은 거 같은데 왜 자꾸 마조 수준으로 단련하느냔 거죠."
뭐 저런 헛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 아직 만렙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난 대답하는 대신 일찍이 본 환상을 떠올렸다. 이계인들에게 붙들려 게이트로 사라지는 백담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이계인들에게 다리가 잘려나간 내 몰골도 떠올렸다.
예의 환상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백담비는 팀에서 정진영과 함께 가장 말 적게 하기 승부에서 1, 2위를 다투는 중이긴 하다.
그래도 그때와 소소하게나마 달라진 것이 꽤 있다.
가끔 백담비 쪽에서 먼저 내게 말을 거는 일이 드물게나마 있다든가. 요새는 팀원들이 뭘 몰라서 헤맬 때 따로 가르쳐달라고 요청하지 않아도 그녀가 나서서 가르쳐주는 경우가 있다든가 하는 부분이다.
아마도 백담비로서는 우리 팀이 그녀가 속했던 예전 팀보다 훨씬 더 괜찮게 느껴지는 모양이지.
물론 나와 그녀의 사이는 여전히 어색하며, 우리 둘은 사귀는 사이라기는커녕 친한 사이라 하기도 뭐하긴 하다.
그래도 그녀의 태도가 살짝 달라졌듯 그 여자를 향한 내 생각도 살짝 달라졌으니, 환상에서 본 그 일이 실제 일어나면 내 기분은 매우 끔찍할 것 같다. 확실하다.
이후로도 구경꾼들의 경탄과 성문영의 핀잔을 음악 삼아 운동하다가 또다시 쉬는 중이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성문영이 중얼거렸다.
"어, 헌트웹에 글 올라왔다."
"나이토 상?"
"예, 그놈이요. 오늘 뭔 일 있었는지 글 올렸네."
Ⓑ GoodHunter : 오늘 죽다 살아났습니다 ㅠ
고블린 몇 마리를 쫓아갔는데, 고블린 한 마리가 뭘 주워들더니 글쎄 놈이 저한테 돌격소총을 겨누지 뭡니까?
예전에 예비군들 괴수 소탕작전 뛰고 여럿 실종됐을 때 분실된 총기가 많다죠? 그중 하나를 고블린들이 보물마냥 간직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 이젠 죽었구나 체념하는데 제 앞에 웬 커다란 벽 같은 게 나타나서 저 앞을 가로막데요?
물론 진짜 벽이 아니라 김극 씨였죠. 그분 등 진짜 말도 안 되게 넓어요;; 아무튼 김극 씨가 공간이동 해서 제 앞을 막아선 그때 날아온 총알이 그분 팔뚝에 (······)
하여간 아직도 제가 살아있단 사실이 실감이 안 되네요.
이 자리를 빌어 김극 씨에게 거듭 감사 드립니다. 인천 만세!
5my지저스 : 그걸 어떻게 상황 파악하고서 대신 총 맞아준 거임? 개쩌네 ㅎㄷㄷ
Ⓐ syberMagneto : 비각성자 쓰레기 대신 각성자가 총알 맞아주는 게 말이 되나? 너 일본인이니까 당장 할복하든가 아니면 사실 각성자였다고 인증하든가 둘 중 하나 골라라 역겨운 새끼
익명 : 애기버섯 왜 현실에선 저리 당황스러울 정도로 상남자인 거임;
이미 댓글도 여럿 달려있었다. 나도 거기 몇 줄을 보탰다.
Ⓐ BabyBerserker : 모두가 그리워하던 애기버섯 등장♡!♡!
하여간 애기버섯이가 위상변화 요술을 쓸 줄 알아서 다행이었지양! 아조씨의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븜서커 마법을 써서 얍삐! 하고 기사 아조씨를 지켜냈어양!
그러고서 아파서 히잉 ㅠ 애기버섯이 그만 히끅히끅 울 뻔했는데 얼음공주 백담비 언니야가 얼음 요술로 애기버섯이 안 아프게 해줬어양! 덕분에 착한 애기버섯이, 이번에도 산타 할아부지한테 선물 받을 수 있게 됐고양!
모두 장한 애기버섯이부터 쓰담쓰담 해줘야겠지만, 그 다음엔 얼음공주 언니야도 칭찬해주기! 애기버섯이랑 애기손가락 걸고 약속♡!!
Ⓐ syberMagneto : 저번에도 말했지만 제발 그만해다오······.
계속해서 댓글이며 반응을 감상하던 중이었다. 성문영이 질린 듯 중얼거렸다.
"형은 대체 왜 이런······"
고개를 들어 녀석과 얼굴을 마주쳤다. 그러자 녀석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르더니, 녀석이 물었다.
"아니, 평소에도 그리 엄격 근엄한 표정으로 애기버섯 말투 작성했어요?"
"지금 내 표정이 어떤데?"
"상당히 화나 보이는 게 말 걸기 무서워지는 표정인데요? 어이가 없네, 진짜······"
지금 내 표정이 그렇다고?
확실히 당장 내 기분이 별로기는 했다. 그 이유가 뭔지도 알았다.
나는 나이토 상이 작성한 글을 보며 생각했다.
이 자식, 왜 영상은 안 올린 거냐?
내가 살신성인 정신으로 그놈을 감싸는 그 영상이 글에 첨부되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아닌가. 그러면 사람들 반응도 더 좋았을 것이요, 내가 내 활약을 몇 번이고 다시 감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카메라맨이 현장에 있었던 걸 기억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놈을 감싸는 장면이 담긴 영상 따윈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놈의 유튜브 채널을 들어갔더니 역시나 오늘 영상은 올라오지 않았고 말이다.
하여간 나이토 상 저놈은 왜 자꾸 소소하게 미운 짓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눈살 한 번 찌푸리고는 다시 운동에 전념하던 중이었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는 사람이 건 전화였다.
「김극 씨? 혹시 시간 되세요?」
"어, 최세희 씨? 저야 잘 있죠. 어쩐 일로?"
「지금 시의원님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거든요? 경찰엔 이미 신고했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김극 씨한테도······」
나는 즉시 장소를 불러달라 했다.
그러고는 그녀가 말한 장소로 공간이동 했다.
*******
공간이동 하여 내 눈에 담긴 장소는 익숙한 곳이었다.
허름한 저층 아파트 단지. 단지 주변은 성벽처럼 높고 굵은 견고한 벽에 둘러싸였다. 벽 주변에는 경비초소가 여럿 설치되었으며, 초소 위에는 경비 아저씨가 아니라 소총을 든 군인들이 올라섰다.
단지 입구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인천 각성 능력자 새보금터'. 물론 그리 불러주는 사람 따윈 없다.
이곳은 각성자 수용시설, 소위 '냉동고'라 불리는 곳이다.
대한각성연대에서 인권운동 하던 시절에 자주 와본 곳이라 잘 아는 곳이기도 하다.
원칙상 얼음 능력자만 수용하는 시설은 아니지만 굳이 냉동고라 부르는 이유도 알고 있다. 어지간해선 시설에 얼음 능력자만 가득 채워지는 까닭이다.
이제는 널리 알려졌듯, 얼음 능력자처럼 약하고 만만한 각성자는 게이트 안의 괴수들에게 최우선 표적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얼음 능력자 근처에 게이트가 열리는 일이 빈번한데, 얼음 능력자들이 여럿 모여 사는 곳은?
아예 게이트 다발 지역으로서 군인들이 상주해가며 지켜야 할 위험구역이 돼버린다.
그런 이유로 이런 각성자 수용시설은 지역의 대표적인 혐오 시설이다. 심지어 이 수용시설에는 인천의 얼음 능력자뿐만 아니라 서울의 얼음 능력자까지 잔뜩 수용 중이라던가?
주변을 둘러보니, 혐오 시설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지금 여기에도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혐오 시설 반대 시위 말이다.
"냉동고 인천에서 치워라! 서울 얼음덩이들 인천에서 치워라!"
"우리도 이제 좀 잘살아 보고 싶다!"
"서울 얼음, 인천 보관 반대!"
온갖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는 사람들 맞은편에 박미형 씨가 있었다. 또한 저 아줌마가 대한각성연대 시절부터 데리고 다니던 최세희 씨는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쪽에 다가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두 아줌마를 포위하듯 감싸고 있던 시위꾼들이 흠칫했다. 그들이 내게 길을 터주듯 양쪽으로 일제히 흩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이제 유명인이다. 날 알아본 사람들이 죄다 눈을 부릅뜬 가운데, 좀 철없어 보이는 남자 하나는 이렇게 외쳐댔다.
"박미형의 결전병기! 세뇌당했다더니 진짜로······"
어이가 없어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더니 남자는 주춤하고는 물러섰다.
심지어 나를 향한 남자의 시선에는 아연함까지 떠올랐다. 어째서?
생각해보니 지금 내 몸에는 아까 훈련할 때 솟구쳤던 피가 그대로 묻어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운동하면서 땀 흘릴 테니 샤워해서 한꺼번에 닦아내겠단 생각으로 안 닦아냈었지 아마.
거기에 손가락까지 잘린 채 피투성이로 온 내가 무서운 듯, 시위꾼들이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박미형 씨도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기겁한 눈치였다.
"아니, 왜 왔어요? 오늘 총알 맞았다매······ 아이고, 진짜로 중환자가 납셨네!"
"총알 정도야 뭐. 이 정도는 자고 일어나면 다 나을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니, 내일 회복되든 말든 오늘 죽을 고비 넘긴 사람 도움받는 건 경우가 아니죠! 심지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상태가 심각한데 대체 왜 왔어요? 혹시 최세희 씨가 불렀어?"
"아뇨? 그냥 친구가 상황 전해주길래 와봤는데요. 아무튼 무슨 일이에요?"
내 물음에 박미형 씨가 호들갑을 떨다 말고 혀를 찼다.
"뻔하죠 뭐. 냉동고 같은 혐오 시설, 여기에 두지 말고 딴 곳으로 치우라는 거지."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인권운동 하는 와중에도 여러 번 본 상황이니까.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다.
"딴 곳이면 몰라도 여기에선 그런 시위 없었잖아요?"
그것은 인천 시민이 타 지역 사람들보다 인격적으로 우월하다는 천억 가지 증거 중 하나였는데, 다름 아닌 박미형 씨가 그것을 부정했다.
"그거야 여긴 혐오 시설이 있든 없든 이미 땅값 초토화된 곳이라 새삼 시위할 보람도 없어서 조용했던 거지요. 그런데 요새 인천 땅값이 회복되고 있잖아요? 탓하려는 건 아닌데 누구 덕분에······.
심지어 여기도 땅값 오를 전망이 보인다더라고요? 그 와중에 저 시설이 여기 땅값 오르는 거 발목 잡을 거 같으니까 모여든 거지."
다시 말하지만 결코 김극 씨 탓하려는 게 아니라며 박미형 씨가 강조하는 가운데, 나는 지금 이 상황을 파악해보았다.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만월산 이후 우리의 작전지역이 이 근처였던가. 그것은 곧 이 근처 지역 땅값도 오르리란 것을 의미했다. 그러자 자포자기 중이었던 이곳 땅 주인이며 건물주들이 비로소 땅값을 사수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나는 시위꾼들을 보았다. 그들을 향해 '이러면 작전지역에서 이 근처를 빼버리겠다'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러시면 제 맘이 불편하죠. 지역 살려보자고 다 같이 으쌰으쌰 하는 중인데, 이렇게 이상한 여파가 나타난 걸 보면 막 우울해지지 않습니까."
내가 차분히 말하자 시위꾼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중 하나가 우물쭈물하더니 이렇게 소리 질렀다.
"댁이 우울해지긴 왜 우울해져요? 냉동고 치우는 거랑 그쪽이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지갑에서 대한각성연대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대한각성연대라고 아십니까? 지금은 해산됐는데, 얼마 전까지 사회에서 억압받는 각성자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저도 거기 꽤 오래 몸 담았는데······."
"아니, 얼음 능력자도 아니면서 뭐하러 이런 활동을 했대요?"
"제 여동생이 얼음 능력자라서요. 심지어 동료 하나도."
내가 질문에 대답할수록 상대방의 안면에 곤혹스러움이 늘었고 언성은 낮아졌다.
"어······ 씨, 여동생분도 이런 수용시설에서 지내세요?"
"아뇨? 감방에요. 증거도 없이 각성자랍시고 네 명 죽였다면서 감방 보내더라고. 너무 열 받아서 헌터 되기 전까진 쭉 인권운동 했지 뭡니까."
"그래도, 어······, 이런 수용시설이 인천에 남아있으면 여동생분이 안 좋아하지 않을까요? 주변에 수용시설 있으니 이런 데서 살라고 이웃들이 압박할 수도 있잖아요. 그럼 너무 싫을 텐데······"
"글쎄요? 걔랑 나랑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요. 내 여동생, 이런 수용시설에서라도 나랑 떨어져서 살 수 있으면 좋아할지도 모르죠. 일단 얼른 출소하기나 해야 어디서 살지 물어보든가 할 텐데. 저번에 면회했을 때 생각하니 씨발 눈물이 다 나오려 하네······."
그러고서 나는 우수에 넘치는 얼굴로 상대를 뻔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미 안면에 곤혹스러움이 가득하던 그는 한동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그게, 어, 그게요······" 하고 중얼거리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어······ 죄송합니다······."
30화 얼레기들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