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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1-21

11화 바위 정령 - [4]

이번 사건을 다루는 인터넷 기사가 여럿이다. 협회 직원까지 포함해 스무 명 가까이 죽은 사건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 인터넷 기사들의 내용은 조금도 당연하지 않다.

'이게 대체 뭡니까? 각성자인 응시생 한 명은 공간이동을 통해 현장을 벗어남으로써 생존이 확인됐다······ 왜 기사들이 죄다 이런 식으로 끝나요?'

내가 따지자 박미형 씨가 난처해한다.

'김극 씨, 진정해요.'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기사들 보면 나 혼자 공간이동으로 튄 탓에 다 뒤졌단 것 같잖아!'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들을 볼 때마다 온몸이 떨린다.

그 기사들에는 내가 공간이동 하며 두 명을 함께 구출해냈단 언급이 없다. 공간이동 하여 그 괴물에게 맞설 무기를 구하려 했단 언급도 없고, 현장에 돌아갔다는 언급은 더더욱 없다.

인터넷 기사들에서 묘사된 나는 생존자조차 아닌 도망자다. 동료들을 버린 비겁한 도망자. 그 기사들은 초인적 힘이 있으므로 충분히 맞서 싸울 수도 있었을 각성자가 홀로 도망쳤기에 남겨진 자들이 전멸할 수밖에 없었다는 뉘앙스로 작성됐다.

오보의 수준을 넘어선 악의가 느껴진다. 나 하나를 향한 악의가.

심지어 기사에 '공간이동'이 언급된 점에서 특히 악질이다. 국내에 공간이동 능력자란 나뿐이니까. 실명만 적혀있지 않을 뿐 기사에서 언급되는 비겁한 각성자가 누군지 지나치게 특정된다.

'협회 건물에 내가 헌터 라이플, 헌터 라이플! 외치고 다니는 거 들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이딴 기사가 나와요? 내가 두 명 살려내기까지 했는데 그 새끼들 증언도 전혀 없고!'

내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니 박미형 씨는 나를 진정시키려 쩔쩔맨다.

한참이 지나 내가 제풀에 꺾여서야 박미형 씨는 겨우 나를 달랜다. 시의원 이름을 내세워 정정보도 요청을 해보겠다고, 반드시 항의하겠다고 약속해준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안심이 되지 않는다.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헌트웹을 켠다.

내면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심정으로, 사 개월 넘게 간직해온 설정조차 포기한 채 글을 작성한다.

Ⓐ BabyBerserker : 억울합니다. 모두 제발 도와주십시오

위와 같은 제목으로 작성된 글은 금세 사이트의 화제가 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내가 지금 어떻게 억울한 상황인지 알게 된 사이트 이용자들이 댓글을 작성한다.

다행스럽게도, 조롱하는 댓글도 많지만 동조하거나 도우려는 댓글이 더욱 많다.

심지어 미치광이라 여기던 작자마저 날 도우려 든다.

Ⓐ syberMagneto : 이거 네 몸값 깎으려고 수작질하는 거 아니야?

Ⓐ BabyBerserker : 무슨 뜻인지······.

Ⓐ syberMagneto : 희귀한 특수능력까지 있는 신체강화자라면 일반 각성자들 두 배로 대우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국제 각성자 시세로든 국내 시세로든 계약하려면 돈을 천문학적으로 줘야 할 텐데, 그 가격 제대로 주고 계약하기 싫으니까 수작 부리는 거 아니냐고

사이버매그니토, 이 미치광이가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각성자인 내 능력은 누가 봐도 강력하고 유용하므로 정부 기관에서조차 날 제값으로 고용하기 부담스럽다. 국제 시세에 비해 지나치게 싸게 몸값을 매기기도 어려운 것이, 그랬다간 중국 혹은 일본 브로커가 채갈 수도 있다.

그러니 딱 봐도 특상품인 나를 억지로라도 결함상품으로 위장해 값을 깎고자 수작을 부렸으리란 것이다.

Ⓑ GoodHunter : 아무리 그래도 사기업도 아니고 정부 기관에서 그런 유치한 짓을 하나?

Ⓐ syberMagneto : 니 같은 비각성 쓰레기는 모르겠지만 지자체에서 각성자들한테 줄 돈 어떻게든 아끼려고 별짓을 다 한다. 서울 이외 모든 지자체 재정 말라붙은 거 모르냐?

Ⓐ syberMagneto : 유치한 짓, 치졸한 짓 안 가리고 다 해

익명 : 구체적으로 어떤?

Ⓐ syberMagneto : 게이트 열린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다들 각성자면 다 강할 줄 알았지. 그 당시 인천시에서 얼음 능력자랑 4년짜리 고용계약 맺더니 나중에야 계약 파기하고 싶어서 왕따 가해자설 조작하는 걸 봤어

Ⓐ syberMagneto : 그리고 이번 경우엔, 외국인 브로커들은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잖아? 인터넷 짜라시 좀 복사해서 뿌려두면 외국인들 상대로 연막이 될 만해. 그런 식으로 외국인 브로커들 접근하기 떨떠름하게 만들어놓고선 국내에서 헐값에 계약하려는 거지

추측이 너무 황당해서 고스란히 믿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밑으로도 동조하는 댓글이 여럿 달리는데, 그들의 각성자 배지들이 그 발언들에 신빙성을 더한다. 다들 지자체와 계약하기 전에 별별 이상한 이유로 트집잡힌 적이 많다는 것이다.

한편 나는 아까부터 머리가 어지럽다. 가슴이 계속해서 쿵쿵거린다.

정말 나라에서 작정하고 날 음해하고 있단 말인가? 고작 돈 덜 주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내 명예를 이토록 추락시키고 있다고?

난 무의식적으로 내 작성 글에 달린 댓글들을 다시 살핀다.

익명 : 동료들 다 버리고 지 혼자 살아놓고 해명질이네 ㅅㅂ 적전도주는 총살감인데 뒤져라 그냥

조롱하는 댓글을 단 놈들은 대부분 '익명'이다. 추측건대 아마도 모두 비각성자 헌터들일 것이다. 받아주는 곳이 없으니 목숨 내버리는 일이나 하게 된 찌꺼기 인생들.

각성자로서 자기네의 수백 배 수입을 벌어들일 내가 부러우니 저 지랄들인 게지······.

Ⓐ 엘마야캐요 : 데뷔 시작부터 이게 무슨 고약한 일이냐. 힘내라. 내가 선배로서 술 한번 사고 싶은데 쪽지 확인하고

Ⓐ 돌머리청년 : 애초에 얘가 정말 도망쳤다고 해서 비난할 수가 있나? 바위 정령이면 신체강화자는 헌터 라이플 있어도 상대하기 벅찬 거 누구나 다 아는데. 현장 복귀했단 게 진실이든 아니든 기사가 이딴 식으로 작성된 건 뭔가 음습한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 Kang : 헬반도 갯강구 버러지들 하는 짓 수준ㅋ 내가 가서 뒤집어 엎어줘?

반면 특수 배지의 소유자들······, 그러니까 각성자들은 모두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댓글을 달았다.

이 대비가 너무나도 확연하다. 세상이 흑과 백으로 갈리는 듯하다.

화나는 동시에 뭉클하다. 세상에 홀로 버려진 가운데 내 편이 생긴 기분······.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

컴퓨터를 끈 뒤, 생라면을 씹어먹고서 학원에 향한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려야 한다.

학원이 쉬는 날이라 사람은 거의 없지만 헬스하는 사람은 몇 명 있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데, 해명하러 와놓고서 나는 움찔한다. 저들마저 인터넷 기사를 봤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든다.

도망치듯 그들을 지나쳐 학원 로비에 향하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원장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도 웃음기 가득한 양반.

섬뜩하다.

나를 본 원장은 웃지 않는다. 시선이 차가워도 너무 차갑다.

또다시 가슴이 콩닥거린다. 기사를 읽은 걸까? 내가 도망친 탓에 수강생들이 여럿 죽었다고 여기는 건가?

원장의 무표정은 마치 일 분 이상, 거의 오 분쯤 이어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체감상 길게 느꼈을 뿐, 실제로는 고작 일 초 남짓 그런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평생 웃지 않을 것 같던 원장의 얼굴에는 다시금 안타까운 미소가 감돈다.

'아이고, 김극 씨, 이걸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 말이 내게는 왜 뻔뻔하게 살아있느냔 추궁으로 들린다.

'아무튼 정말 고생했어요. 힘들었죠?'

원장은 계속해서 나를 다독이며 열심히 듣기 좋은 말을 해주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까 원장이 아주 짧은 순간 지었던 무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 까닭이다.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

"봐요, 기사가 진짜 많이 떴다니까? '바위를 부수는 망치, 인천에 시원한 큰 소리를 내다', '석정(石靈) 1체 응시생에게 단독제압 돼'······"

성문영이 스마트폰을 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이번 일을 다룬 기사가 인터넷에 넘쳐난다는 것이었다.

"현직 헌터업 종사 중인 각성자한테 이번 일 어떻냐고 물어본 인터뷰도 있네. 석정? 아, 바위 정령이구나. 그러니까 바위 정령은······ 신체강화자 단독으로 상대하기 어려우니까 무기도 없던 그 상황엔 튀는 게 정상이었는데 망치 하나 들고 때려잡다니 진짜 용감하고 대단한 거라고 해줬네요. 이야, 인터뷰한 게 김석만? 아무래도 업계 선배 같은데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사줘요."

이종호도 한마디 거들었다.

"정진영 형한테는 밥 맛난 걸로 사주고요."

그들이 말하길, 유튜브에 정진영의 영상이 올라온바 불과 하루 만에 놀라운 조회수를 기록했다고 했다.

유튜브에 신체강화자가 근육 자랑하거나 초중량급 헌터 라이플로 괴수를 학살하는 영상이야 많아도 웬 무기 같지도 않은 무기를 들고 체급 우위 괴수를 때려잡는 영상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라고.

심지어 공중파 뉴스에도 그때 촬영한 영상이 활용되었으니, 정진영 씨의 공로가 참으로 치하할 만하단 소리였다.

"하기야 유튜브 조회수 보니 수익금 달달할 거 같더라."

내 말에 성문영이 답답한 듯 언성을 높였다.

"지금 수익금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형 몸값 오르는 게 중요한 거죠!"

"몸값은 뭔 몸값?"

"유명해졌으니 몸값도 확 뛰겠지!"

"헌터 몸값이랑 유명도랑 차이가 있나? 왜, 군인이나 경찰이 유명하다고 월급 더 받진 않잖아."

"군인이며 경찰이랑은 다르죠! 왜, 이름값 있는 헌터랑 계약해야 그 지역 땅값 회복되고 그러는 거잖아?"

성문영은 헌트웹에 괜히 그리 사람이 많겠느냐면서, 땅값 신경 쓰는 부동산 투기꾼들이며 유명한 초능력자로 덕질하려는 일반인들이 많기 때문에 헌트웹에 그리 이용자 수가 많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지자체에서 어느 각성자와 계약했는지 신경 쓰는 사람이 상상 이상으로 많으며, 그만큼 각성자의 유명도가 중요하단 것이었다.

12화 바위 정령 - [5]

"나이토 상? 그 쪽바리 헌터는 각성도 안 했는데 너무 유명해서 준 각성자 대우로 계약했다던데요? 그 덕인지 몰라도 서서히 땅값 회복되는 것 같아서 간석동 주민들 모두 만족 중이라 하고요."

"웬 일본인이 비각성자인데 각성자 수준으로 돈을 받는다고?"

"예? 예. 형 같은 A급 수준으로 받는 건 당연히 아니고요. 어중간한 각성자들 있잖아요? 딱 그 정도······"

성문영이 말을 흐리더니 갑자기 내 눈치를 살폈다. 지금 내 표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지?

그리고 확실히, 저 말을 들으니 불쾌했다.

어째서? 일본인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아니, 난 내 국적도 남 국적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왜?

꽤 숙고한 끝에야 방금 그 말이 왜 그토록 거슬렸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웬 놈이 비각성자 주제에 각성자와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음, 이게 비정상인 건 나도 알고 있다. 내가 각성자란 사실에 이 정도의 우월감을 느끼며 남들을 깔아보다니?

한 반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자신이 각성자란 사실에 피해의식이나 느끼곤 했는데. 갑자기 이런 선민의식이 생긴 것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당황스럽다.

갑자기 이렇게 변한 이유로 추측되는 것이 있기는 하다.

오늘 환각을 또 겪었는데, 그 환각에서 나는······.

"김극 씨? 김극 씨! 들어오세요!"

누가 외치는지 보니 협회 직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응원하러 온 학원 수강생들이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날 응원했다.

"힘내요!"

"형, 혹시 A급 못 받으면 내가 좀 충분히 쉬고 나서 심사받으라고 조언했던 거 잊지 마요!"

깐죽거리는 성문영에게 중지를 들어 보인 다음 심사장에 들어섰다.

오늘은 내가 각성자로서 심사를 받는 날이다.

심사장에 나 이외에 심사를 받으려는 각성자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 중에 각성자는 적고, 헌터를 할 만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는 더욱 적다. 헌터를 할 만한 능력을 지녔으면서 실제로 헌터를 하려는 각성자는 더욱 적고.

여기 모인 많은 사람 중에 각성자는 오직 나 혼자뿐, 나머지는 모두 나 하나를 평가하러 모인 사람들이었다.

유니폼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야 협회 직원들일 텐데, 직원이 아닌 듯한 사람도 많이들 보인다.

저 양복쟁이들은 지자체에서 나온 사람들일 것이다. 자기네와 계약할지 모를 각성자를 보러 나왔을 테지. 척 보기에도 인종부터 다른 사람들은 외국인 스카우터들일 테고, 중국 혹은 일본에서 나온 듯한 사람들도 몇 명 보였다.

얼추 보기에도 이백 명은 될 사람들이 나 하나를 보러 여기에 모였다. 그 사실이 나를 벌써 벅차오르게 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준비하시고······"

이후로는 여러 심사를 치렀다.

100m 달리기, 5.8초. 치타보다 살짝 빠름. 얼마 전 학원에서 측정한 것보다 0.8초 빨라져서 흡족했다.

장거리 달리기, 초재생능력 덕에 일정 이하 속도로 달려서는 지치지 않는단 사실만 확인하고 넘어감. 이때 초재생능력을 증명할 겸 누가 메스를 가져와서 내 팔뚝을 살짝 그었는데, 피가 불과 이 초 만에 멎었을 때는 지켜보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또한 놀랐다.

신체강화자용 역기 들어 올리기······.

그 밖에도 이런저런 테스트를 치렀는데, 모두 기준점을 상당히 넘긴 듯했다. 테스트를 치를 때마다 느껴지는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심사 결과가 나쁘지 않으리란 걸 미리 알 만했다.

"이건 교과서에 넣어도 될 수준으로 완벽한 A급인데······"

이후로는 공간이동 하는 시범을 보였는데, 장거리 공간이동을 보여달라면 좀 난처했겠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이 보길 원한 것은 영상에서도 보였던 시야 내 공간이동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정말 영상처럼 똑같이 할 수 있습니까?"

그건 이미 능숙해진 마당이다. 대충 막대기 하나 주워들고서 요구에 따라 보여주었더니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격 심사, 그들이 가져다 놓은 22kg짜리 헌터 라이플을 들고서는 쏘라는 대로 쐈다.

아니, 사실 완전히 시키는 대로 따르진 않았다.

"김극 씨? 지향사격 말고 조준사격을―"

당연한 사실이지만, 비각성자 찌꺼기가 하는 말은 꼭 들을 필요가 없다. 그 비각성자가 인천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아예 무시해도 되고.

나는 조준사격 하도록 요구된 백 미터 표적과 백오십 미터 표적을 연달아 조준하지 않고 쏘았다. 뭔가 지적하려던 협회 직원은 그 모든 사격이 정중앙에 명중한 걸 보고서 눈을 부릅떴을 뿐이다.

이백 미터 표적이며 이동하는 표적까지 연달아 조준하지 않고 맞힘으로써 사격 심사의 모든 목록에 만점을 채워넣기도 어렵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헌터 면허증에는 금박으로 A++ 표시가 붙었다. A급 중에서도 모든 기준을 필요기준 이상으로 만족시켰단 뜻이라고 한다. 졸지에 한우 취급받게 된 셈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더라.

"자, 이제 김극 씨는 정식으로 A급 헌터로 활동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이 A급, 각성자라고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닌 걸 아시죠?"

놀랍게도 협회에서 A급 헌터를 임명하는 기준은 헌트웹에서 배지 주는 기준과 똑같아서 각성자라면 누구나 A급 헌터라 쳐주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명확한 기준을 만족해야 A급으로 쳐준다고 했다.

정확히는 각성자로서 개인화기 이상의 화력 혹은 상당한 수준의 지원을 제공 가능해야 한다고.

그리고 난 이미 신체강화자로서 중화기를 혼자서 들고 쏠 수 있으니 '개인화기 이상의 화력'을 만족하는 것이요, 누가 봐도 유용할 게 분명한 공간이동 또한 능숙하게 쓸 수 있으므로 '상당한 수준의 지원' 또한 만족하고 있었다.

뒤따른 협회 직원의 표현에 따르면, 난 이로써 각성자 헌터 중에서도 위에서 세는 게 빠른 상위권인 셈이었다. 그리 잘난 놈이니 대우해주려는 건지 협회장이 직접 나와 내게 악수까지 청했다.

"그만한 권리와 책임을 짊어진 존재로서 이제 김극 씨는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활동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나치당원이나 할 법한 헛소리를 흘려들으려니 시끄러운 애국가가 울려 퍼져 나를 불쾌하게 했다.

공간이동으로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자니 임명식이 끝났다.

*******

그날 저녁, 나는 78개의 문자 메시지와 그보다 스무 통 많은 이메일을 확인했다. 무슨 에이전트니 뭐니 하는 곳에서 온 것들이었는데, 하나하나 확인하기가 벅차서 건드리지도 않았다.

쌓인 부재중 전화가 몇 건이었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중에서 지인 전화를 걸러내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더라.

「김극 씨, 내일 학원 나올 거예요? 정말 나올 거야? 그래, 그럼 미리 치킨 시켜놓을 테니까 꼭 와야 돼」

「뉴스 봤어요. 김극 씨, 진짜 축하해! 글쎄 나 본회의장 들어가자마자 의장님이 나 보면서 김극 씨 꼬셔보라고 막 권하는 거 있지?」

박미형 씨 말대로 어제 9시 뉴스에도, 오늘 9시 뉴스에도 내가 등장했다. 각성자 사격 신기록 어쩌고 하는 내용에 역대급 A급이니 뭐니 하는 외국 브로커들의 국뽕 자극하는 인터뷰들.

이쯤 되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쓸데없이 다사다난했던 내 인생은, 오늘부로 성공했다.

Ⓐ BabyBerserker : 애기버섯 오늘 A급 자격증 땄어양!

못된 괴물이 칭구들을 괴롭히려 하는 거예양! 애기버섯은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마법소녀 헬벤터로 각성해서 얍! 얍! 하고 물리쳤어양! 그러니까 협회 아조씨들이 와서 애기버섯이 귀엽고 정의롭다면서 A급 헌터 시켜주지 뭐예양?

아래에는 애기버섯 A++ 판정받은 거 인증! 모두가 보고 싶어 할 애기버섯 사진은 공개했다간 옵바야들이 다들 반해버릴 봐 가렸어양~

익명 : 협회 홈페이지 보니까 오늘 A급 딴 거 한 명뿐이길래 이 형님 사진 올라온 거 봤는데 나 지금 너무 무섭다······.

Ⓐ 돌머리청년 : 좆됐다 나도 A급이지만 영상 보니까 이 새끼 계속 이러는 거 내 무력으론 못 막을 거 같은데 준치 형님 어디 계시냐?

이 기쁜 소식을 헌트웹의 동지들에게도 전파한 뒤에는 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 오전, 또 환각을 봤다.

꽤 긴 환각이었다. 저번에 본 환각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내가 공간이동 하여 그 현장을 벗어났을 때 어떤 일을 겪는지 보았다.

나를 비겁자로 묘사한 인터넷 기사들······.

그로 인해 환각 속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죄다 자신을 알아보고 멸시한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렸으며, 박미형 씨의 자금지원과 대출까지 받아 가며 정신과에 다녀야 했다.

내가 보기에도, 환각 속 나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미치광이가 될 만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환각 속 나는 비각성자들을 혐오했고, 한국 정부는 물론 국민마저 혐오했다.

확실히, 장차 서울에 핵폭탄을 터뜨린들 이상하지 않을 인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던 환각과 정반대의 결과를 이루어낸 상황 아닌가. 지금의 내게도 그럴 이유가 있을까?

없다. 이제부터 천문학적인 거금을 벌어들이며 으스대고 살 A급 헌터로서 그런 끔찍한 테러 따위를 저질러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듯 환각과 다른 행동을 취한 나는, 꿈속의 나와도 다른 결말을 맞이할까? 그럴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추측건대 내 미래인 듯하던 그놈의 꿈을 그만 꿀 수 있게 된 것일까?

*******

결과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오늘 밤도 꿈을 꾸었다.

저번에 꾼 꿈과 달리, 이번 꿈에는 임형택 씨며 정진영 등 여러 처참한 몰골의 지인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원장 또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꿈의 마지막은 똑같았다. 그놈의 핵폭발, 그놈의 버섯구름으로 이번 꿈도 끝났다.

또다시 숨을 헐떡이며 일어난 나는 의문을 품었다.

대체 언제쯤 되어야 이 꿈은 끝나는 것일까?

*******

13화 인천 헌터 김극 - [1]

구글에 내 이름을 치면 나오는 인터넷 기사들이 수두룩하다.

그중 최신 기사를 보니 내 헌터 계약에 관한 내용이었다.

"4년 1800억 원" 중국 충칭시, 헌터 김극 상대 초대형 계약 제안

외국에서 온 계약 제안을 지렛대 삼으면 국내 계약이 유리해진다길래 중국에서 온 제안을 공개했더니 이런 기사가 나온 모양이다.

나는 기사 제목을 보고 또 봤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이지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의 금액이다. 1800억 원이면 대체 얼마냐?

도무지 실감이 잘되지 않는다. 이제 평생 로또 따윈 거들떠보지 않아도 되겠단 것만 겨우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히죽거리며 기사를 클릭한 다음 마우스휠을 내렸다. 내용이야 제목에 이미 전부 담겼으므로 댓글부터 보았다.

태극0823 : 하여간 각성자 씹새끼들, 살기 어렵다고 뻔뻔하게 헛소리할 때마다 알류미늄 방망이로 줘패야 돼

ㄴ 착실시공 : 진짜 각성자 인권이 어쩌고 씨부릴 때마다 재벌이 세금 때문에 살기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거 같아서 각성자들 모인 곳에 총기난사 하고 싶어짐

웃다 말고 정색한 채, 한동안 저 댓글들을 노려보았다. 비각성 찌꺼기 새끼들이 감히.

나는 즉시 대한각성연대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장문의 반박 댓글을 작성했다.

저 잘생긴 김극처럼 출세하는 각성자는 전체 각성자 중의 18%도 되지 않는다느니, 약 32%의 각성자들은 각성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살 뿐이며 나머지 50%는 거의 죄인처럼 산다느니 하는 댓글을 달았다.

그러곤 즉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다 무슨 시간 낭비인가 싶어진 탓이다. 대한각성연대 활동이 쓸모가 없었듯 내 이런 행위 또한 아무 쓸모가 없으리란 걸 알고 있지 않은가.

대한각성연대에서 활동할 때부터 익히 느껴온 사실이지만, 저 80%의 각성자들은 공중파 뉴스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뉴스에 나오는 각성자라고는 나와 같은 소수의 운 좋은 경우뿐이다. 그 탓에 대한각성연대에서 각성자 인권 관련으로 호소할 때마다  우리는매번 저 댓글들과 같은 조롱에나 시달려야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리 세상사에 통달한 척 냉소하는 놈들을 두들겨 패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야 했고······.

제기랄.

*******

여기저기서 날아온 계약 제안들이 쌓인 지 벌써 한 달째다. 슬슬 계약을 결정할 시기라 인터뷰 요청도 수두룩했는데, 나야 예전부터 관심받길 즐겨온지라 어지간하면 거절하지 않고 모든 인터뷰 요청을 승낙했다.

Q. 어디서 훈련하고 교육을 받았느냐?

"부평 수렵 전문 학원이라고, 부평역에서 오 분쯤 걸으면 나오는 학원 있거든요? 거기 원장님 인상이 참 좋으시고요, 가격도 참 착해서 제가 지갑 사정이 좋지 않았는데도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었습니다. 가격이 싸다고 수업이 거지 같은 것도 아녜요. 강사님들이 참 능력 있는 분들인데, 그중에서 특히 양태자라고 각성하신 트레이너 한 분 계시거든요? 그분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

Q. 헌터 활동 시작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게 된 것 축하한다. 앞날이 참 밝아 보이는데, 혹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박미형 아줌마요. 아, 시의원 당선되신 분한테 그냥 아줌마라고 부르면 실롄가? 아무튼 인천 시의원 활동하고 계신 박미형 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네요. 대한각성연대 활동할 때부터 그분 신세를 여러모로······"

이런저런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주다 보니 과연, 기습 폭탄 같은 질문 또한 투하되었다.

Q. 소년원과 교도소 신세를 진 걸로 아는데, 해명 혹은 사과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이때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예상한 질문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흠집을 내서 사람 주눅 들게 만들려는 놈들.

아마 질문한 놈은 내가 화내거나 난처해하길 바랐으리라. 그러나 나는 꿇릴 것이 없었다. 전혀.

난 당당하게 대답했다.

"음, 제가 콩밥 먹은 기간이 길긴 길죠. 그 콩밥들 왜 먹었는지 설명해줘요?"

Q. 폭행죄 관련이라 들었는데, 소년원 건부터 해명할 수 있나?

"정당방위였죠. 고등학교 입학 첫날에 버스가 안 와서 약 일 분 정도 지각하니까 학주가 시비를 걸더군요. 정확히 뭐라 했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대충 바닥에 엎드려 뻗치라고 한 것 같아요. 손에는 웬 각목 들고 있었는데 그걸로 빠따라도 치려 한 것 같고요.

나야 뭐, 나보다 키도 작고 어깨도 좁은 놈이 그러니까 같잖아서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죠. 그러니까 그 새끼가 주제 파악 못 하고 제 뒤통수를 각목으로 툭툭 치지 뭡니까. 그럼 선빵친 거잖아요? 바로 면상에 스트레이트를 날려줬어요. 한 방도 못 버티고 뻗데요. 한심해서 얼굴 좀 밟아줬죠. 좆밥 새끼."

내 질문에 기자는 조금 질린 눈치였다. 조금 머뭇거리더니 질문을 이어나갔다.

Q. 그 결과 해당 교사는 한쪽 눈이 실명됐다던데, 할 말은?

"그 새끼가 먼저 싸움 걸어놓고서 안경도 안 벗은 게 잘못이죠? 전 잘못 없습니다. 아, 그 탓에 소년원 가게 된 걸로 악감을 좀 품었긴 해요. 그 새끼랑 그 새끼 가족들은 나랑 길에서 안 마주치길 바라야 할 겁니다."

Q. 교도소는······.

"그것도 정당방위였어요. 공익으로 훈련소 입소했더니 식사 끝나고 훈련생들한테 설거지를 시키는데 고무장갑을 안 줬어요. 훈련생들은 맨손으로 설거지하래. 고무장갑은 취사병들 전용이라나? 그날 저녁에 웬 설문지를 주면서 훈련 중 개선점 있으면 적으라길래 고무장갑 그거 적었더니 조교가 와서 누가 이딴 거 적었냐고 쌍욕을 하더군요.

뭐 꿇릴 것 있습니까? 내가 적었다고 말했죠. 그러니까 그 새끼가 나한테 다가와서 또 쌍욕을 해요. 당연히 화났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더니 그 새끼가 꼬우면 때려보라고 도발하던데, 그럼 결투 신청한 셈이죠? 바로 줘팼습니다."

Q. 그 훈련소 조교는 다리에 영구장애가 생겼다던데

"그 새낀 나한테 고마워 해야 돼요. 그 새끼 한 대 맞으니까 바로 바닥에 쓰러져서 부들거리는데, 딱 봐도 맷집 약한 멸치 새끼라 가슴이라도 밟으면 어디 부러져서 죽어버리겠단 계산이 서더라고. 그래서 다리라도 잘근잘근 밟아준 거니 내가 그 새끼 목숨 살려준 거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장애 생긴 덕에 그 새끼 전역했죠? 보훈처에서 보상도 해줬을 텐데 절 평생의 은인으로 모셔야 해요."

좌중에 침묵이 흘렀고 나는 태연하게 앉아서 멀뚱거렸다.

이후로는 몇 가지 사소한 질문에 대답하니 인터뷰가 끝났다.

그리하여 또 작성된 인터넷 기사가 여럿이었는데, 그걸 우리 친애하는 박미형 씨가 본 모양이었다.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김극 씨?」

"아, 박미형 씨? 제가 인터뷰에서 일부러 박미형 씨 이름 언급했는데 잘했죠?"

「그건 고마운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왜 인터뷰에서 그런 식으로 대답했어요?」

내가 인터뷰에 지나치게 솔직한 태도로 응한 것을 탓하려는 모양이지?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요."

「걱정을 안 하긴? 계약 직전에 사고 치면 안 되죠!」

"걱정 마요. 이런 일로 문제 안 생겨."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내가 여러모로 알아봤는데, 각성자 몸값 깎이는 기준에 도덕성은 없더라고요. 음주운전 해서 사람 치어죽였든 학창 시절에 누구 왕따 시켰든 그런 걸론 몸값 안 깎이데. 보니까 예전에도 얼음 능력자 하나가 왕따설 휘말렸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던 걸 봤어요."

「혹시 백담비 씨 말씀하시나?」

"이름까진 모르는데 여자 얼음 능력자이긴 했어요. 아는 사람이에요?"

「대한각성연대 시절에 제가 지원한 각성자 중에 그런 아가씨가 있어요. 얼음 능력자인데, 당시엔 얼음 능력이 저평가받지 않았거든? 그래서 뭣도 모르고 인천시가 그 아가씨랑 비싼 값에 장기계약했는데 나중에야 그 계약 취소시키려고 조잡한 짓을······」

"그거 맞나보네요. 아무튼 그 얼음 능력자 아가씨도 아무 문제 없었던 것처럼 저도 아무 문제 없을 거 확실해요. 다 그렇대."

「그럼 대체 뭔 일이 있어야 문제가 생기는데요?」

"각성자가 뭔 사냥에 참여했다가 작전지역에서 무단이탈했다든가,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 정신과에 들락날락한다든가, 뭐 이런 정신적 문제나······ 천식이 있다든가, 언제 수술받은 적 있어서 신체 어느 부위에 부상 재발 위험이 있다든가, 뭐 이런 신체 이슈로만 계약에 문제가 생기더군요. 과거에 범죄 좀 저지른 건 괜찮지만 심신 어느 쪽에 문제가 있어서 사냥 제대로 참여 못 할 것 같으면 그건 안 되는 거죠."

나는 헌트웹에서 조사한 사례들, 그러니까 일베 행적이 발각된 각성자며 누구 성희롱하다 고소당한 각성자 등의 경우를 쭉 늘어놓았다. 그들 모두 이후 계약에 그 어떤 문제도 겪지 않았단 사실도.

14화 인천 헌터 김극 - [2]

"가뜩이나 각성자 헌터 모자라서 골골대는 판이잖아요. 저 같은 전과자도 각성자랍시고 모셔서 큰돈 주고 쓰려는데 일베를 했든 성희롱을 했든 학폭을 했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괴수나 잘 잡으면 그만이라 이거지."

내 말에 박미형 씨는 심란해진 모양이었다. 힘 빠진 목소리로 조언하는 걸 보니.

「그래, 하기야 업계 관련 정보는 김극 씨가 더 잘 알겠지 뭐. 그래도 제발 입조심 좀 해요, 응? 내가 보면서 가슴이 막 콩닥거리더란 말야」

나는 알겠다고 웃으며 대답한 다음 통화를 마쳤다.

하여간 날 신경 써주는 건 이 아줌마뿐이라며 흡족해하자니 또 한 번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누구지 하고 봤더니 학원 원장이었다. 이 양반도 인터뷰 왜 그따위로 했느냐 탓하려는 건가?

아니었다. 전화를 받았더니 그저 칭송 일색이더라.

「김극 씨, 나 고마워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해요? 인터뷰에서 우리 학원 직접 언급해줬던데, 나 너무 감격해서 눈물 나오려는 거 있지?」

이후로도 쭉 감사와 날 향한 칭찬만 이어질 뿐, 통화가 끝날 때까지 내 인터뷰에 대한 지적 따윈 한 마디도 없었다.

역시 학원 원장도 업계 관련자이긴 한 모양이다. 뭐가 문제가 될 것이고 뭐가 문제가 없을 것인지 사람 좋은 그 역시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 헌터 업계가 이런 곳이다.

*******

이후로도 내가 받은 계약 제안들은 언론 등에 공개되었다.

가뜩이나 국제 시장에서 각성자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만 하는 마당이다. 그 와중에 내가 받은 제안들이 공개될 때마다 사람들은 질투하거나 부러워했을 뿐 말도 안 된다며 황당해하지는 않았다.

나 같은 각성자에게 한 달에 수십억을 주더라도 한 발에 수억 수십억씩 하는 미사일을 끝도 없이 날리는 것보단 훨씬 싸게 먹힌다는 걸 다들 알고 있다.

결국 내가 받은 계약 제안들은 날마다 조금씩 상향되었고, 날 다룬 인터넷 기사에는 이런저런 비각성자 찌꺼기들의 질투가 중첩되었으며, 결국 그날이 왔다.

어디와 계약할지 결정하는 날, 난 거창하게 기자들까지 불러 모았다.

내가 아니라 협회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이런 식으로 어느 각성자가 어느 지역과 계약했다고 떠벌리는 것이 그 지역 땅값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이유였다.

이번 회견에도 직접 행차하신 협회장이 내게 친한 척 말을 걸었다.

"서울시 2년에 1500억 제안 받으셨다면서요? 충칭시? 아무튼 중국에서 처음 한 제안보다 비싼 금액에 이런저런 편의도 봐주는 조건이던데 축하드립니다. 이야, 강준치 그 씨발놈 제외하면 신인 중 신기록이네?"

"이후로 중국에서 더 높게 부르긴 했어요. 확실히 중국이 돈이 많더라."

"그래도 중국 가실 건 아니죠?"

"중국은 안 가죠."

"오, 그러셔야지! 애국······"

"애국적인 이유는 절대 아니고, 한·중·일 모두 각성자를 엄청 괴롭히지만 그중에서도 중국이 제일 심하다고 들어서."

"그럼 일본에서 중국 정도로 불렀으면 일본 가셨을 거예요?"

"아뇨? 국내랑 계약할 건데요."

협회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날 보았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양반이 정부에서 꽂아 넣은 반쯤 공무원 같은 작자라는 건 헌터 모두가 안다. 이 양반이 협회 이름으로 뭘 결정 내리는 건 사실상 정부의 뜻에 불과하단 것도.

이 천치 같은 협회장 말고도 내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신인 신기록 축하합니다! 다음부턴 서울에서 뵈는 거죠?"

그들은 죄다 '서울 2년 1500억'을 언급하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1년 차 신입으로서 맺은 계약이 이 정도면 성과를 보인 다음 번 계약은 얼마나 대단하겠느냐고.

난 매번 겸손하게 굴기도 뭐해 그저 웃어넘겼다.

그런데, 서울? 말도 안 되는 소리.

처음부터 내가 계약하려던 곳은 정해져 있었다. 다른 모든 계약 제안들은 그곳과 더 나은 조건으로 계약하기 위한 디딤돌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발표하게 되었을 때, 난 이렇게 선언했다.

"인천으로 결정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인천이랑 계약할 겁니다. 1년 525억, 통 크게 불렀던데요? 인천 시민들이 제게 보내는 기대가 얼마나 높은지 체감했으며 절대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리란 약속을 이 자리에서······"

난 계속해서 한국의 정신적 수도를 수호하게 되어 영광이라느니, 위대한 인천의 영광이 이어나가게 하겠다느니 어쩌느니 했고 기자들은 황당한 얼굴이면서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걸 잊지 않았다.

날 향해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들 속에서 나는 저번에 환각을 떠올렸다.

그 불쾌한 일을 겪은 나······, 그러니까 환각 속 나 또한 인천과 계약했다. 1년 290억. 지금과 달리 환각에서는 인천이 유독 높게 부른 것이었는데, 인천시 시의원으로서 박미형 씨가 힘쓴 결과라고 했다.

덕분에 환각 속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계약을 맺어 각성자 헌터들 사이에서도 체면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 전체가 자신을 혐오한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던 환각 속 내게, 인천이 그토록 좋은 조건을 제시해준 것은 일종의 구원처럼 느껴졌다. 한국인 모두가 꺼리는 자신을 오직 인천에서만 받아들여 준 것으로 느꼈던 셈이다.

그리하여 환각 속 나는 이미 애정을 품고 있던 인천에 충성심마저 품게 된 것 같은데······.

지금의 내가 인천과 계약하는 것은 그때의 은혜를 이어나가려는 것일까?

아니면 거창하게 은혜씩이나 갚으려는 건 아니더라도, 다른 좋은 조건들을 마다하고 굳이 인천을 고른 것은 환각을 겪고 나서 인천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진 탓일까?

그러니까, 지금 내 결정이며 지금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인천에 대한 자긍심은 환각을 겪은 영향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다른 곳이 더 높게 불렀다 한들, 어차피 1년 지나 더 나은 조건으로 갱신하면 되는 것이기도 하니까······.

한편 기자들에게는 내 결정이 참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듯했다. 기자들 쪽에서 요청한 바에 따라 추가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그 인터뷰란 아래와 같다.

Q. 인천을 고른 이유가 있는가?

-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맨 먼저 앞서 언급했듯 인천시 시의원이신 박미형 씨가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날 지원했는데, 그분께서 가능하면 인천시랑 계약하지 않겠느냐 직접 제안하시더라. 그분 제안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Q.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또 다른 이유는?

- 인천 사람이 나라는 팔아먹어도 인천을 버려선 안 되니까.

Q. 아무리 그래도 나라를 팔면 안 되지 않나?

- 그래도 된다. 다음 질문 없나?

Q. 인천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이해하겠다. 하여튼 인천 이외로도 유능한 각성자가 필요한 곳이 많고 계약조건마저 월등했던 곳이 많은 줄로 아는데, 그 모든 제안을 제쳐두고서까지 인천을 골라야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 애초에 다른 곳은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서울 사람 만 명 목숨보다 인천 사람 한 명의 목숨이 더 귀한 게 당연하다.

Q. 마치 인천 이외 지역 사람에겐 인권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 비(非)인천인에게 인권이 있는 게 더 이상하다. 인천의 인과 인권의 인이 같은 발음인 게 어떻게 우연인가?

저건 내가 대답했지만 정말 명문인 것 같다.

이후로도 여러 질답이 오갔던 인터뷰는 농담 식의 마지막 질답으로 종료되었다.

Q. 혹시 인천 시의원 박미형 씨께서 세뇌를 했나? 정말 그렇다면 나중에 기회가 될 때 당근을 흔들어 구원요청을 해달라.

A. 박미형 씨는 정신조종 능력자가 아니라 빙정 능력자(소위 얼음 능력자의 정식 명칭)인 줄로 안다. 애초에 각성자의 초상 능력은 같은 각성자에게 통하지 않는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인터뷰 중에 박미형 씨를 여러 번 언급한 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었다. 정치인이 이름 알려져서 나쁠 것 없다길래 최대한 기사에 이름이 언급되게 하려고 나름 애를 썼다.

음, 내가 이토록 의리가 있는 놈이다. 정작 박미형 씨는 그 사실을 알아주는 것 같지 않았지만.

「김극 씨, 인터뷰 중에 기자 누구 때렸어요? 아니면 기자 누구 멱살 잡고 쌍욕이라도 한 거야?」

바로 전화를 걸어온 박미형 씨의 목소리는 또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안심시켜 줄 겸 태연하게 대답했다.

"안 때렸고 욕도 안 했는데, 왜요?"

「인터뷰 나온 거 보니까 악의적 편집 수준을 넘었던데, 아직 기사들 안 읽었어요?」

"봤어요. 왜곡 없이 제대로 잘 내보냈던데?"

이 오해를 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

15화 인천 헌터 김극 - [3]

이후로 내 마지막 인터뷰는 이 사이트 저 사이트 가리지 않고 인터넷을 마구 떠돌았다. 내가 인천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그 인터뷰 말이다.

내가 좀 필터 없이 인터뷰를 하긴 했는데, 그 탓에 뭔가 컬트적인 인기가 생긴 것 같다. 인터넷에 '박미형'만 쳐도 '세뇌 능력자'가 연관 검색어로 뜨질 않나, '김극'을 치면 '인천 또라이 각성자'라고 뜨질 않나.

헌트웹에도 똑같은 인터뷰 글이 벌써 세 번이나 올라왔는데, 그 댓글들을 보니 웃겼다.

Ⓐ 돌머리청년 : 저 친구 헌트웹에서만 정상이 아닌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도 정상이 아닌가 보네;;

익명 : 그냥 현실에서도 컨셉질 하는 거 아님?

Ⓐ 돌머리청년 : 저건 컨셉 절대 아님. 단순 컨셉이면 서울 버리고 인천에 못 가

익명 : 그냥 인터뷰 내용만 저따위면 인터뷰 그냥 관심 받으려고 일부러 인터뷰 웃기게 했구나 하겠는데, 실제로 돈 덜 받고 훨씬 빡셀 게 분명한 인천 고르고서 저러니까 진짜 사람이 미친 거 같은데······.

Ⓐ syberMagneto : 저 인간 진짜 현실에서도 저러나?

익명 : 내가 저 형이랑 같은 학원 출신인데 저 형 현실에선 안 그래;

익명 : 저 형이 학원에선 진짜 근엄해. 말수도 많지 않고 수업 시간에 잡담도 안 해

익명 : 신체 단련 시간엔 과장 아니고 초재생능력 활용하겠다며 팔 부러질 때까지 운동하고 그래서 내가 존경하던 형인데

Ⓐ 엘마야캐요 : 뭣;;

익명 : 사실 평소에 잘 웃지도 않고 말투도 상당히 공격적이라서 처음엔 말 걸기도 쉽지 않은 형이었거든? 저 엄격근엄하던 인간이 어째 인터넷이랑 인터뷰에선 미치광이가 되니까 내가 진짜 당황스러워

Ⓐ syberMagneto : 그래서 저 친구, 인천에서 일하기로 해서 너희 학원 반응 어때?

익명 : 학원 반응이 왜?

Ⓐ syberMagneto : 힘든 데 갔다고 싫어하지 않나? 각성자 입장엔 서울에서 일하는 것보다 인천에서 일하는 게 열 배는 힘들 건데, 자기네 각성자 수강생이 열악한 데 가버렸다고 학원에서 안 좋아해?

익명 : 아니, 우리 원장쌤은 딱 봐도 엄청 좋아하고 있음. 저 형 서울 갔으면 저 형 헌터팀에 우리 학원 사람들 꽂아 넣기 힘들어지는데 인천 가기로 한 덕에 학원 사람 많이 보낼 수 있게 됐다고

익명 : 김극 씨야말로 성자라고 막 칭송하던데?

댓글들을 쭉 감상하다 보다 보니 내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가까운 시일 내에 내가 꾸린 헌터팀을 협회에 보고해야 했다.

팀에 넣을 인원은 이미 다 정했다. 평소 데리고 다니는 멤버들을 앞으로도 데리고 다닐 작정이다.

성문영, 김진준, 이종호, 정진영, 임형택 씨······.

이 중에서 임형택 씨와 정진영은 최선의 인원이라기엔 너무 부족한 사람들이긴 하다.

우선 정진영 그 형은 반사신경이 최악에 가까운데다 평소에 너무 어리바리해서 위기 상황에 얼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수준이다. 하지만 그가 찍은 영상이 내 몸값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지 않은가?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데리고 다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임형택 씨의 경우에는, 체력이 너무 부족해서 극한상황에 퍼질 것 같단 문제가 있는데······.

음, 뭐. 솔직히 누굴 데리고 다니든 상관없지 싶다.

나는 내가 처음 괴수를 쓰러뜨린 그 날, 바위 정령과 싸웠을 때를 떠올렸다.

평소 누구보다 헬스를 열심히 하던 김진준이든, 헌터 업계 정보를 잘 안다며 잘난 척하는 성문영이든, 체력에 자신 없는 43세 임형택 씨든 그날 모두 똑같이 쓸모없었던 것을 기억했다.

정말로, 모두가 똑같았다.

그날 그 폐건물에서 비각성자 헌터 지망생들은 모두 날 칭찬하는 기계에 불과했다.

함께 싸우는 동료가 아닌 구경꾼들. 그날 그들의 손에 들릴 물건으로는 소총보단 팝콘이 더욱 어울렸으리라.

그날 그랬듯 어차피 다 똑같은 비각성자인 이상 다 비슷하게 쓸모없지 않을까?

뭐, 그날의 사건은 너무 극단적인 사례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모두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후의 만남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난 상황이 종료된 후에 맞닥뜨린 헌터들을 떠올렸다.

난 현장에서 오래 활동한 헌터라면 일반인들과 다른 오라라도 피워낼 줄 알았다. 그러니까 생사의 고비를 넘어가며 괴수들과 싸워온 베테랑 헌터라면 설령 각성하지 않았더라도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점이 있을 줄 알았단 소리다.

아니었다. 그 헌터들은 그저 총 든 양아치에 불과했고 심지어 그들이 들고 온 총은 전부 K-2였다. 그 바위 괴물을 상대로는 흠집이나 겨우 내고 말 돌격소총이다.

분명 바위 정령이 출현했다고 전파됐을 텐데 왜 소화기만 들고 왔느냐 내가 물으니 그들이 뭐라 대답했던가.

애초에 바위 정령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고 대답했지 아마?

'바위 정령 같은 괴물이야 나중에 도착할 각성자 헌터가 상대할 거구요. 우리는 그냥 협회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면 지급될 수당이나 챙기러 온 거죠. 일단 현장에 출동했단 것만으로 돈 주기도 하잖아?'

그 말을 듣고 난 내 감상은 간단했다. '제대로 일할 생각이라곤 없는 찌꺼기들'.

그들에게 얼마나 오래 활동했느냐 물으니 뻐기듯 1년이나 활동했다고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 양아치들이 우리 학원의 전직 헌터 강사보다도 오래 활동한 베테랑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더랬다.

그날 내 안에서 '베테랑 비각성자 헌터'에 대한 환상은 철저히 깨졌다.

그날 목격했건대 각성하지 못한 헌터들이란 도시를 지켜낼 생각이며 중요한 일을 담당할 생각 따윈 전혀 없는 밥버러지들에 불과했다.

그걸 보면 내 팀에 굳이 실력자씩이나 넣어야 할 필요는 없겠다 싶다. 보아하니 일단 비각성자인 이상 다 똑같을 것 같거든.

비각성자들이 체력이 좋든, 얼마나 오래 활동했든 어차피 다 비슷비슷한 수준 아닌가. 평범한 사람이든 육상 세계 챔피언이든 전부 치타보다 훨씬 느린 법.

그리하여 나는 그저 내가 활약할 때 칭찬 리액션이나 기깔나게 해줄 인원이면 충분하겠단 생각으로 내 팀을 결성했다. 원장은 학원 사람들을 잘 챙겨준다며 기뻐했고.

한창 생각을 정리하는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박미형 씨였다. 무슨 일로 전화했느냐 물으니 박미형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추천할 인원이 있어서요」

"추천할 인원이요? 헌터 말씀하시는 건가?"

「예! 김극 씨, 아직 헌터팀 다 안 꾸렸죠? 제가 따로 알아보니까 신규 헌터팀엔 베테랑들이 붙어서 이것저것 알려줘야 한다네요. 그래서 제가 베테랑 헌터 한 명 추천해주려 하거든요?」

"어, 제가 다니는 학원에서 이미 베테랑 두 명 추천해주기로 했는데."

「그래요? 어떻게 안 되나?」

박미형 씨가 당황한 기색이길래 난 바로 결정을 내렸다.

"뭐, 학원에 연락해서 한 명 덜 추천하라고 하면 되겠죠?"

「오, 그래주면 정말 고맙겠는데 정말 그래도 될까요?」

"내가 당연히 우리 여사님부터 신경 써야지."

통화가 끝나고서 학원에 연락했더니 과연, 원장은 '그래요? 알겠어!'하고 내 결정을 즉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 나는 박미형 씨와 카페에서 만났다.

박미형 씨 옆에는 박미형 씨가 데려온 '베테랑 헌터'가 앉아있었다. 그녀를 보고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여자가 진짜 베테랑 헌터가 맞나?

도무지 그렇게는 안 보였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코 아래만 봐도 미인이었고, 긴 생머리가 겨드랑이까지 닿았으며, 어디 잡지에나 나올 법한 배꼽이 드러난 크롭티를 입고 있었다.

혹시 박미형 씨가 베테랑 헌터를 추천하겠다면서 날 데려와서는 맞선을 주선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때였다.

박미형 씨가 데리고 온 여자를 소개했다.

"이 아가씨가 헌터 일을 2년 하고도 4개월이나 했어요. 헌터 최장 기록이랑 2개월밖에 차이 안 나더라. 진짜 업계 베테랑 중 베테랑인 셈인데 대단하지 않아요?"

음, 2년 4개월 경력이라. 대부분의 헌터가 1년 이내로 죽거나 은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대단한데.

하지만 역시나 헌터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이분 성함이?"

"백담비요. 이름도 이쁘죠?"

저번에 들어본 이름이었다.

"백담비 씨면 전에 말씀하신 그분 아녜요? 시에서 쫓아내려고 수작부린 얼음 능력자······"

"맞아요, 맞아. 이야, 김극 씨 중학생 시절까진 문학 소년이었다더니 기억력이 참 좋아!"

박미형 씨는 손뼉을 치더니 불현듯 저 2년 4개월짜리 베테랑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열린 지 막 1년이 지났을 때 기억해요? 그쯤이면 다들 각성자의 존재에 익숙해졌을 무렵인데······."

맞다. 각성자 징집이며 뭐며 여러 가지가 논의되다가 결국 헌터 제도가 시작된 시기였다.

그리고 각성한 사람이면 누구나 헌터가 되어야 한다는 정신 나간 분위기가 그때에는 있었다.

"정말이지 그땐 남녀노소 안 가리고 각성했는데 괴수랑 싸우지 않으면 매국노란 분위기였잖아요? 그때 사람들 눈에 막 아이돌 데뷔한 백담비 씨가 눈에 띈 거지. 백담비 씨가 얼음 능력자 중에서도 유독 강력한 편이거든요? 그 강해 보이는 능력으로 괴수와 싸우는 게 아니라 팬서비스나 한다는 사실이 당시 사람들을 화나게 했어요."

이어진 박미형 씨의 설명에 따르면, 온갖 악플이며 항의 편지가 백담비의 아이돌 그룹을 향했다고 한다. 매국노니 뭐니 하는 열띤 비난 여론에 그녀의 소속사는 굴복했다고도.

그리하여 백담비는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 임시로나마 헌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원래는 몇 달 정도만 헌터 활동을 하다가 그룹에 복귀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끔찍한 불경기잖아요. 이 아가씨가 헌터 일 하는 중에 소속사가 부도나고 그룹도 해산돼버린 거죠. 이제 어떡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잠깐 하고 말려던 헌터나 계속했지. 그런데 알잖아?"

어쩔 수 없이 백담비가 헌터 활동을 이어나가자니, 그녀가 지닌 얼음 능력은 괴수 사냥에 별로 쓸모없단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그리고 얼마 전 인천시는 백담비가 훈련되지 않았을 뿐, 그 능력이 척 보기에도 강력하므로 시간이 지나면 강력한 각성자 헌터가 될 줄 알고서는 그녀를 최대한 오래 쓰기 위해 4년짜리 장기계약을 맺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 160억짜리 계약금을 통째로 날려 먹은 셈이었다고.

그리하여 인천시는 그녀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계약금을 회수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고약한 시도를 거듭했는데(선량한 인천 사람들이 그럴 리는 없으니 아마도 인천시에서 서울 사람이 감투를 쓰고 암약해온 모양이다), 그런 시도가 요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극 씨 계약에도 한 달에 몇 회 이상 출동해야 한다고 적혀있죠? 백담비 씨 계약에도 그리 적혀있는데, 요새 출동하기 어려운가 봐요. 이대로면 계약 위반이랍시고 안 봐주고 계약 파기시킬 것 같애."

"요새 출동하기 어렵다니, 왜요?"

"원래 있던 헌터팀은 해산됐는데, 글쎄 다른 헌터팀에서 이 아가씰 안 받아준대요. 아무래도 다들 인천시 눈치를 보나 봐······."

"그래서 제가 이 아가씨를 팀에 끼워주면 좋겠단 거구요?"

"맞아요. 어차피 돈이야 시에서 주는 거니까 돈 문제는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리고 이 아가씨가 베테랑으로서 이것저것 가르쳐줄 거고······ 부탁해도 될까?"

박미형 씨는 대한각성연대 시절부터 도우려고 애써온 아가씨이기 때문에 차마 내버릴 수가 없다고, 내가 인천시에서 싫어하는 그녀를 팀에 받아들인들 오백억 넘게 주고 계약한 나한테까지 눈치를 주진 못하리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안 될 것 없죠?"

"아이고, 김극 씨 고마워요, 진짜!"

박미형 씨는 한 차례 호들갑을 떨더니 백담비를 바라보았다.

"팀에 받아준대, 잘 됐어! 뭐해요? 빨리 감사해야죠!"

그 말에 백담비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고마워요······."

그 대답이 박미형 씨로서는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박미형 씨는 왜 목소리가 그리 기어들어 가느냐며 백담비를 꾸중하더니 계속해서 따졌다.

"일단 그놈의 선글라스부터 좀 벗어봐요! 지금 보니까 아까부터 쭉 쓰고 있었네? 대화할 때 선글라스 안 벗으면 예의 없는 줄 몰라? 빨리 벗으래도!"

성화에 못 이긴 백담비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하늘색 눈이 드러났다. 아이돌 데뷔했다더니 과연 미인이긴 하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을 때였다.

어······.

갑작스러운 현기증. 나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환각이 시작되었다.

*******

16화 얼음 능력자 백담비 - [1]

환각 속 나는 자줏빛으로 일렁이는 게이트를 본다.

게이트 앞에 선 이계인(異界人)들을 본다. 그리고 이계인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백담비를 본다.

백담비, 그녀는 납치되고 있다. 머나먼 이계로 끌려가고 있다!

'배액다암비이이!'

내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지만 지금은 발성조차 쉽지 않다. 목에 가득 차오른 피가래 탓이다.

놈들을 노려보기 위해 상반신을 드는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까 통째로 잘려 나간 두 다리는 내 옆에 널브러져 있다. 이 와중에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오로지 초재생능력 덕이다. 상처가 덜 심각해서가 아니라.

끔찍한 울분과 답답함 속에서 나는 나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내지른다. 저 깡마른 이계인들을 향한 욕설이다.

저 다른 세계에서 북한 주민들보다 거지 같이 산다는 버러지들. 풍족한 이 땅을 향한 약탈에 나선 침략자들······.

그들에게 포박된 채, 백담비는 나를 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뭐 해보겠다고 여기 있지 말고 어서 공간이동 해. 살아야―'

백담비의 말이 끊긴다. 이계인들이 그녀를 잡아당긴 탓이다.

이계인들은 나를 흘긋 쳐다보더니 저 앞으로 나아가버린다.

결국 이계인들은 게이트로 사라진다. 그들에게 붙들려 있던 그녀도 함께.

나는 한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피를 한 바가지 토해내고는 게이트를 노려본다.

저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 어떻게?

나는 애써 정신을 집중해 공간이동 한다. 게이트 바로 앞으로 이동한 다음 애벌레처럼, 상반신만 꿈틀꿈틀 움직여 내 몸을 게이트 안에 억지로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내 동료와 이계인들을 삼켰던 게이트는 나마저 집어삼킨다.

시야가 자줏빛 세계로 가득 찬다······.

*******

시야의 전환과 함께 나는 현실로 복귀했다.

그러고는 숨을 헐떡거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격해진 감정 또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제기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뭐라도 때려 부수고 싶은 기분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참아야 한다. 이 분노의 유래가 정상이 아닌 것을 안다. 이 자리에서 표출이라도 했다간 무슨 취급을 받을지도 뻔하고.

계속해서 울화가 내면에서 소용돌이 치는 가운데 박미형 씨가 말했다. 다행히 내게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담비 씨, 이제 팀 옮길 거면 활동 지역이 달라질 테니까 이사해야죠? 내 소유 빈 건물이라도 좀 보여줄까?"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나 돈 많은 거 아시잖아요."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긴? 우리 같은 얼음 능력자한테 누가 집 쉽게 빌려준대요? 내가 시의원 명함 들이밀어도 얼음 능력자랍시고 아파트 안 팔아줘서 환장하겠는데 담비 씨가 뭔 수로 집을 구해?"

"사람 안 사는 동네에 헐값으로 파는 빌라들 많잖아요. 그중 하나 사서 이미 잘살고 있어요."

"뭐? 미쳤어, 진짜 미쳤어······."

둘이 대화하는 동안 나는 심호흡을 거듭했다. 덕분에 겨우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그럼 팀에 정식으로 합류하는 걸로 알고, 팀원에 그쪽 이름 넣어서 보고하지요. 팀원끼리 언제 만날래요? 내일?"

내 물음에 백담비가 어조 변화 없이 대답했다.

"시간 정해주시면 바로 나갈게요."

금방이라도 축 늘어질 듯한 힘없는 목소리였다. 방금 박미형 씨랑 대화할 때도 저 모양이던데, 이 여자가 우울증이라도 앓고 있는 걸까?

정말이지 싸가지가 없는 걸 넘어 감정 표현조차 없었다. 지금도 내게 직접 은혜를 입게 된 백담비가 아니라 박미형 씨가 더 고마워하는 눈치 아닌가.

"김극 씨, 오늘 정말 고마워요. 나 때문에 학원에도 싫은 소리 해야 했을 텐데 정말 미안해. 이제 김극 씨가 나보다 잘 나가니까 내가 돕겠다고 말하기가 뭐하긴 하거든? 그래도 나중에 제 도움 필요하면 망설임 없이 바로 전화해요, 응?"

박미형 씨가 배웅하는 가운데 나는 둘과 헤어졌다. 그리고 협회에다 기존 인원과 학원에서 보내주기로 한 인원, 이번에 합류하기로 한 백담비의 이름을 넣어서 내가 거느릴 헌터팀의 명단을 적어 보냈다.

그러고는 팀원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자 맨 먼저 성문영에게 전화했다.

내가 여자 하나가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전해주니 성문영은 의아한 눈치였다.

「여자 헌터요? 여자는 각성자 아니면 헌터 일 잘 안 하는데?」

"각성자 맞아. 얼음 능력이지만."

「에이, 얼음 능력자면 노각성으로 쳐야지······ 그래서 이뻐요?」

이쁘다고 대답했더니 어째 녀석은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심지어 뭔가 심상찮은 걸 눈치챈 듯, 녀석은 이렇게 묻는 것 아닌가.

「이쁜 얼음 능력자면, 씨······. 혹시 그 여자 이름이 백담비는 아니죠?」

"맞는데, 아는 여자야?"

그리고 성문영이 한숨 쉬듯 대답했다.

「백담비, 몰라요? 헌트웹 슈퍼빌런 중 하나잖아!」

*******

「확실히 형은 모르실 수도 있겠네. 그 여자가 유명했던 게 한 일 년 전이거든요? 한번 검색해봐요!」

성문영이 그리 말하길래 시키는 대로 해봤다.

그리고 과연, 헌트웹에 백담비 석 자를 치니 검색 결과가 몇 페이지를 넘어가는 게 아닌가.

나는 검색하여 나온 글들을 쭉 훑어보고서는 혀를 찼다. 이거 참,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였구만.

성문영이 예쁜 여자가 합류한단 소식에도 떨떠름하던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백담비는 헌트웹에서 악명 높은 정신병자였던 것이다.

백담비가 직접 헌트웹에서 활동하며 혐오스러운 사진이라도 올려댄 것은 아니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백담비 자체가 기피되고 있었는데,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그녀가 얼음 능력자 주제에 수백억 계약금을 받아 챙긴 사실 자체가 헌트웹의 모든 계층이 분노할 일이었다. 각성자 헌터든 비각성자 헌터든, 한낱 '얼레기'가 그런 돈을 받았단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익명 : 백담비 그년 줄 돈이면 외국에서 각성자 세 명은 사왔겠네······.

Ⓐ syberMagneto : 진짜 얼레기가 그 돈 반납 안 하고 꿋꿋하게 계속 활동하니까 다들 환장함 ㅋㅋ

그리고 백담비와 같이 활동한 헌터들의 평가마저도 좋지 않았다. 헌트웹에 올라온 경험담을 들어보면 그녀에 대한 평가는 이런 식이었다.

'자기가 아직 연예인인 줄 아는 정신병자.'

'동료 장례식에도 크롭티 입고 올 년.'

처음엔 백담비도 정상이었다는데, 헌터로 활동한 지 일 년쯤 지나니 맛이 가버렸다고 한다. 그 사실을 복장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고도.

익명 : 어느 날 사냥 가야 하는데 백담비 그년이 선글라스 쓰고서 크롭티에 재킷까지 차려입고 온 거지. 심지어 화장 풀세팅인 게 난 걔가 어디 놀러 가려다 급하게 사냥하러 온 줄 알았어.

그런데 다음 날이랑 그다음 날에도 똑같애. 크롭티에 화장에 선글라스······.

원래는 그냥 다른 헌터들처럼 평범하게 입고 다니더니, 갑자기 무슨 아이돌처럼 세팅하고 다니기 시작한 거야.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이후로도 쭉 그래.

눈요기도 하루 이틀이지 맨날 이러니까 슬슬 부담스럽지. 이년이 갑자기 왜 이러나, 슬슬 진짜 아이돌 복귀하려고 이러나? 하고 인터넷에서 조사 좀 해봤더니 얼마 전에 이년 소속사가 망했다네?

그제야 이년이 왜 이러는지 알았지. 연예계 복귀할 희망이 사라지니까 미쳤구나.

특히 그놈의 선글라스를 절대 안 벗더라. 대화할 때도 안 벗고 밥 먹을 때도 안 벗고 상황 브리핑 중에도 안 벗고······.

사냥 나가서 총 쏴야 할 때면 그때야 겨우 선글라스 벗는데, 선글라스 왜 평소에 절대 안 벗는지도 알 만해. 평소에도 팀원들이랑 말 섞거나 시선 마주치기도 싫어하는 게 확 티 나는데 그 썩은 표정 가리려고 그러는 거지, 미친년이

팀에서의 태도가 정말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와 함께한 팀원들의 원성을 몇 개나 더 찾아볼 수 있던 걸 보니.

익명 : 누가 걔한테 수고했다고 음료수 뽑아준다? 자기가 이쁘니까 작업 건다고 생각하는지 됐어요, 하고는 진짜 끝까지 안 받아. 그래서 걔만 빼고 동료들한테 음료수 하나씩 돌린다? 지 꼽준다고 생각하는지 우울증 발작해서 며칠은 말 걸어도 무시해.

팀원들이 태도 좀 고치라고 말해도 죽어도 안 들어. 심지어 높으신 분 말도 안 듣더라. 인천 시장이 직접 저 아가씨 복장이 사냥이랑 안 어울리는 거 같다고 노골적으로 눈치 줘도 들은 척도 안 해

Ⓑ GoodHunter : 이런 말 하긴 뭐한데, 말이 안 통한다면 팀원 중 누군가가 폭력으로라도 태도 교정하려고 시도한 적 없나? 헌터들이 여자 동료라고 끝까지 스윗하게 굴었을 거 같진 않은데

Ⓐ syberMagneto : 뭔 수로? 비각성 쓰레기들은 얼레기조차 이길 수 없어 쓰레기야

익명 : 인정하긴 싫은데 저 새끼 말대로 그년이 꼴에 각성자라 일반인은 그냥 갖고 놀 수 있었음. 실제로 누가 빡쳐서 주먹이라도 들면 그년이 역으로 조져버리니까 어떻게 팰 수도 없고, 그냥 팀원들 속만 터지는 거지

그렇듯 헌트웹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백담비가 헌터팀을 새로 구하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의 업계 평판이 지독하게 좋지 않았던 것이다. 박미형 씨 추측대로 위대한 인천시에서 압박이라도 한 탓이 아니라.

그리하여 다음 날, 헌트웹에서 묘사한 대로, 그리고 전날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돌처럼 입고 나온 백담비를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성문영도 나와 마찬가지 심정인 듯했다.

"진짜 헌트웹에서 본 그대로네요? 크롭티에 선글라스에, 높으신 분이 그러지 말라 지적해도 끝까지 저런다더니······."

"진짜네."

"형이 어떻게, 안 될까요?"

"나보고 뭘 어쩌라고."

"헌트웹에서 보니까 저 여자를 지금까지 아무도 교정 못 한 이유가, 저 여자가 각성자라서 일반인 헌터는 어떻게 건드릴 수가 없어서 같거든요? 근데 형도 각성자고 저 여자 능력은 형한테 안 통하니까 저 여자도 형은 무서울 거야 아마."

"그러니까 목소리 내리깔고, 좆같이 굴면 좆같이 대해주겠다며 윽박지르기라도 하라고?"

"예!"

"글쎄, 꼭 그래야 하나? 하이힐이라도 신고 있었음 뭐라고 하겠지만, 저게 딱히 움직이기 불편할 복장은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입고 싶은 대로 처입으라지 뭐."

"저대로 잘 싸우든 말든 다른 팀들 눈치가 보이잖아요? 팀 분위기도 해칠 거 같고······."

나는 잠시 성문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문영아. 내가 어릴 때부터 누가 나한테 명령하는 걸 싫어했거든? 아빠가 지 마실 물 떠오라고 시키든 교사가 머리 몇 센티로 깎으라 시키든 죄다 기분이 나빴단 말이야."

"그래 보여. 그래서요?"

"그래서 나도 남한테 어지간하면 명령 안 한다. 내가 그렇듯 남 기분도 나쁠 거 같아서."

내가 기껏 내 신조를 말했더니 성문영은 제대로 알아들은 눈치가 아니었다.

"저 여자 꼬시려고 지금부터 잘 보이려는 거 아니죠?"

"나 꼬추 안 선다, 새끼야."

"어, 왜요?"

"신체강화자로 각성하면서 생식능력에 갈 영양이 죄다 근육에 가고 있으니까. 덕분에 근손실도 안 생겨서 아주 좋아죽겠다, 어?"

잠시 후 모이기로 한 내 헌터팀이 전부 모였다.

한 명 빼고 전부 아는 인원이었다.

학원 원장이 추천해서 팀에 넣게 된, 약 팔 개월 활동했다는 베테랑 헌터가 자신을 소개했다.

"장병곤입니다! 이야, 제가 설마 다니던 학원 덕을 보게 될 줄은 진짜 몰랐는데요. 정확히는 저 넣도록 허락해주신 김극 씨 덕이죠? 팀에 넣어주셔서 진짜 너무 고맙습니다! 다들 잘 부탁드리고요······"

이후로 약 일주일이 흘렀고 우리는 장병곤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업계 돌아가는 사정이며, 탄약 싸게 사는 방법이며, 괴물 상대하는 요즘 방법이며······.

장병곤 그와 친해지기도 쉬운 일이었다. 그는 베테랑인 데다 나이 또한 많은 편인데도 날 상관 모시듯 깍듯이 대했고, 나 이외 모두에게도 후배 대우하며 으스대는 게 아니라 싹싹하게 굴었다.

영리한 처신이었다. 각성자인 내게 굽신거리는 거야 당연한 일이요, 이들 중 다섯 명이나 원래부터 알던 사이인 이상 베테랑이랍시고 선임 노릇하려다간 팀에서 고립될 수 있을 테니까.

당연히도 장병곤은 자연스레 팀에 섞였다.

그리고 백담비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그 어떤 반전도 없이 그녀는 헌트웹에서 묘사된 그대로였다.

백담비는 평소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누가 먼저 물어보지 않는 이상 베테랑으로서의 조언 따윈 해주지 않았으며, 그놈의 선글라스를 절대 벗지 않았다.

지금도 선글라스를 낀 채 가만히 앉아만 있는 백담비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우울증 환자 같은 여자랑 내가 친해질 수가 있나?

모르겠는데, 환각 속 나는 해낸 모양이다.

환각 속 나는 저 여자와 깊은 관계인 듯 보였으니까. 저 여자가 납치되니 절규하며 게이트 안으로 따라 들어갈 정도였지 않은가. 어쩌면 단순 동료를 넘어선 긴밀한 관계였을 수도 있겠다.

환각 속 내 분노가 전이된 듯, 지금의 나 또한 그 장면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환각 속 나와 일체화되어 그 분노에 공감하기가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 본 환각에서는 다들 아주 처참하게 죽었지 않은가. 그 끔찍한 장면을 보고서 어떤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여자는? 환각 속에서 몸 성히 납치돼서인지 심각성이 덜하게 느껴진다. 그 일을 기필코 막아내야겠다는 사명감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내 휴대폰뿐만 아니라 모두의 휴대폰이 그랬다.

장병곤이 진동하는 자기 스마트폰을 확인하고서 외쳤다.

"게이트 열렸답니다. 다들 준비해요!"

17화 얼음 능력자 백담비 - [2]

문자 메시지, 카톡, 헌터 전용 앱 등 모든 메신저가 한 가지 문장을 외치고 있었다. '시민들은 피신하고 헌터들은 집결할 것.'

"예, 준비됐습니다. 갈게요!"

성문영이 곧바로 협회 직원에게 전화하여 우리 팀이 준비되었음을 전했다.

우리가 지정된 장소로 달려가니 전용 헬기가 대기 중이었다.

이미 이날을 대비한 헬기 탑승 훈련까지 마쳤음에도 몇몇 인원이 탄성을 내질렀다. 심지어 베테랑인 장병곤마저도.

"내가 헌터 활동하면서 헬기를 타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우릴 태운 헬기가 목적지로 향했다.

이때까지는 다들 크게 불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 속에서 서로 말 섞을 여유마저 있었다.

"긴장돼요?"

성문영이 외치듯 물었고 정진영도 외치듯 대답했다.

"예, 좀······!"

"난 좀 설레는데? 첫 작전이잖아요! 돈 받으면 뭐부터 살까? 막 상상하니까 두근거려 미치겠네!"

이종호가 긴장 탓에 심장 박동 거세진 거 아니냐며 웃어대던 중이었다.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에 웬 기괴한 소리가 뒤섞였다.

사이렌 소리 같았다. 창을 통해 아래를 보니 경광등을 장착한 차들이 요란한 불빛을 뿜어내며 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수년 전 세상이라면 렉카 견인차들이구나, 하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헌터들이네요."

렉카차 비슷한 차들답게 하는 짓도 렉카차 비슷했다. 죄다 경광등을 번쩍이고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려대며 주변의 차량에 양보를 강요했다. 몇몇 차량은 최대한 빨리 가려는지 아예 인도까지 침범해 가며 질주하고 있었다.

과거 렉카들의 악명을 요새는 헌터들이 계승했다더니 과연 그렇다. 장병곤이 혀를 찼다.

"지방은 일 터질 때마다 헌터들 때문에 막 혼잡해진다더니 진짜네? 진짜 개판······"

저놈이 지금 서울과 비교해 인천을 깎아내리는 건가?

"서울은 뭐가 잘났다고 질서 있게 출동한답니까?"

불퉁하게 쏘아붙였더니 장병곤이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

"서울이 잘나서 규율이 잡혔다기보단 어쩔 수 없는 거죠. 서울은 인구가 많고 헌터 고용할 돈도 많으니까 구획 별로 담당 헌터들 정해놓고 출동케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인천 같은 지방은 인구수도 적고 헌터 고용할 돈도 부족하니 그게 안 되지. 헌터들이 지역 전체를 영역으로 삼아서 출동해야 해요. 그러다 보니 맨날 이런 개판이 벌어지는 거야. 하여간 상황이 열악하니 어쩔 수 없어요. 다들 지방 떠나서 서울 가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니까······."

같은 이유로 인천 같은 지방은 각성자 한 명이 커버해야 할 범위도 서울보다 훨씬 넓다고, 그래서 각성자 헌터들에게는 특히 지방과의 계약이 기피된다고 장병곤이 덧붙였다.

불쾌해진 나는 시선을 돌렸다. 계속해서 저 아래 헌터들을 노려보았다.

저 혼잡한 모양새를 보니 한 가지 생각이 굳어지고 있었다.

비각성자들은 총을 들었든 헌터 활동을 오래 했든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생각 말이다.

다들 어떻게든 빨리 현장에 도착하려고 애쓰는 것이겠지만, 그 꼴이 저리들 오합지졸이어서야······.

물론 이것은 동료들을 옆에 두고 하기엔 너무 미안한 생각이라 애써 떨쳐냈다.

그리고 어차피, 그런 생각을 이어나갈 여유마저 곧 사라졌다.

"어, 씹······?"

잡담하던 동료들이 입 다물고 신음했다.

나는 모든 생각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 추상적인 비디오가 재생되는 듯했다. 내 것이 아닌 온갖 감정이, 온갖 개념의 메타포들이 내 머릿속에서 날뛰고 있었다.

장병곤도 눈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게이트 영역에 들어온 거예요. 씨, 이 정도로 강렬한 건 처음인데······ 좀 지나면 적응되니까 너무 걱정은 마시고요."

게이트의 여파가 강렬할수록 더 거대한 게이트가 열린 것이라고, 그 안에서는 보통 더 많은 괴수들이 쏟아져나온다고 배운 바 있다.

이 정도면 상당한 규모 아닌가 싶은데, 벌써 불길했다.

흘긋 백담비를 보니 일행 중에 혼자 담담해 보였다. 나도 무덤덤한 척 연기하자니 정말로 점차 괜찮아졌다. 이내 머릿속이 그럭저럭 맑아졌을 때였다.

"어, 저기!"

성문영이 소리 지르며 창밖을 가리켰다. 창밖을 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12층 아파트들이 모여있는 소규모 아파트 단지.

그 옥상마다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그들을 노리는 괴수들이 자그마하게나마 보였다.

신체강화자의 우월한 시력을 통해 파악하건대, 하이에나 비슷하게 생긴 괴수들이었다.

그 괴수들이 벽을 기어올라 12층 옥상을 향하고 있었다. 그 벽 등반하는 속도가 멀리서 보기에도 기괴할 만치 빨랐다.

이대로면 수십 초 후, 놈들이 옥상에 도달할 것이 분명했다. 옥상으로 피신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고.

"집결 장소, 이따가 무전으로 알려."

내 말에 성문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예?"

오래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난 헬기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면서 괴수가 옥상에 도달하기 직전인 아파트를 보았다.

아, 한 마리가 막 아파트 옥상에 올랐다. 뒷걸음질 치는 아파트 주민들을 향해 놈이 달려들었다······.

"형?"

그리고 나는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왼손에는 헌터 라이플을, 오른손에는 시에서 특별히 제작해준 전투 망치를 움켜쥔 채 중력에 몸을 맡겼다.

"형―"

낙하산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몸이 순식간에 가속하는 가운데 나는 망치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공간이동 한 순간, 내가 내리친 망치는 목표물에 정확히 도달했다. 낙하하는 속도와 중량을 싣고서. '쾅!'

"악! 악! 아, 어······."

비명을 내지르던 아저씨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정확히는 내 망치에 형체도 남지 않고 으깨져 버린 괴수의 시체를 보고 놀랐으리라.

그 긴장을 덜어줄 겸 내가 입을 열었다.

"인천 만세."

"예?"

"인천 만세!"

"예? 예, 인천 만세······"

승리의 주문은 이쯤이면 됐으리라.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55kg짜리 헌터 라이플을 들었다.

건너편 아파트 벽에도 한 무리 하이에나를 닮은 괴수들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놈들을 향해 헌터 라이플을 겨눈 뒤, 조준하지도 않고 바로 쏘았다.

이윽고 불꽃과 함께 발사된 30mm 기관포탄이 놈들을 산산조각내기 시작했다. 한 발에 한 놈씩 조각냈다. 놈들의 몸이 터지는 소리와 총성은 거의 비슷한 박자로 울렸다.

죽어가는 괴물들은 단말마의 비명 따윈 터뜨리지도 못했다. 그저 총성과 고기 터지는 소리만이 연달아 울릴 뿐.

*******

게이트는 어디서든 열릴 수 있다. 폐건물 안에 열릴 수도 있고, 아파트 단지 지하 주차장 깊숙한 곳에 열릴 수도 있으며, 심지어 바닷속이나 저수지 안에도 열릴 수 있다.

그래서 게이트가 정확히 어디에 열렸는지 발견해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근처에 게이트가 열렸단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무척 쉽다.

게이트 안에는 지금까지 이 땅에 살아온 지성체들의 생각이 쌓여있다. 감정, 개념, 상징 등 온갖 형이상학적인 것들이 축적된 장소다.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 그 안에 축적된 것들이 쏟아져나온다.

그리하여 근처의 지성체들은 온갖 감정과 개념과 상징의 물결에 휩쓸린다. 심지어 잠들어있던 중에도 뇌에 밀려든 정보들이 기괴한 악몽을 구성하는 탓에 정신이 퍼뜩 들어 깨어나게 된다.

게이트가 괴수들이 빠져나올 크기로 확장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그래서 게이트가 열렸단 사실을 알아챈 시점에 도망칠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충분히 주어지진 않는다.

아파트며 상가 건물이며, 건물들의 옥상마다 이 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비명 지르고 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아비규환이다.

한 건물의 옥상에서 또 한 번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곳 사람들을 덮치기 위해 괴수들이 벽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모든 헌터들이 저 괴수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데스클로(Deathclaw)다. 가장 흔한 괴수.

하지만 흔하다고 약한 괴수가 아니다. 초자연적 규모의 거대괴수들을 제외하면, 데스클로들은 지금까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고 가장 많은 각성자들을 죽였기로 악명 높다.

데스클로들의 발 위엔 길쭉한 갈고리발톱이 달려있는데, 그 갈고리발톱은 아지랑이 같은 에너지에 휩싸여 있다.

역장 날붙이.

역장이 모여 빚어낸 단분자 커터로, 그야말로 뭐든 잘라낸다.

이 잘려 나가는 것에 아무런 예외가 없다. 티타늄이든 콘크리트든 저 날에 살짝 닿기만 해도 베인다. 심지어 단순한 단분자 커터의 개념을 넘어선 것이, 미사일마저 막아내는 특출난 역장 능력자의 역장마저 가장 보잘것없는 데스클로의 역장 날붙이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라버린다는 걸 배운 바가 있다. 아예 공간을 베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준이다.

당연하지만 신체강화자의 근육 따윈 저 발톱 앞에서 식칼 앞에 놓인 두부만도 못한 무언가다.

그러니까 저놈들을 접근케 하면 일반인이든 나든 어쩔 수 없이 죽는다.

그 사실을 명심한 채, 헌터 라이플을 쏘고 또 쏘았다.

'탕!' 막 창문에 몸을 집어넣으려던 데스클로 한 마리를 쏴서 산산이 조각냈다. 조정간 점사로 설정한 채 연달아 쏘아서 순식간에 여러 마리를 조각냈지만 여전히, 아파트마다 벽을 타고 오르는 데스클로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나는 계속 사격하며, 놈들을 향해 목이 찢어지도록 포효했다.

"날 봐, 개새끼들아―!"

내가 무슨 게임 속 탱커는 아니다. 이 포효에 무슨 도발 기능이 달려서 근방 적들의 어그로를 모조리 끌어오지는 못한다.

다만 이 안에 깃든 초저주파가 잠시나마 놈들을 멈칫하게 했다.

그리고 지상에서 달리던 몇 마리 데스클로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놈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내가 십이층 짜리 아파트 옥상에 있단 사실 따윈 데스클로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놈들은 한 번 도약으로 아파트 벽 2층 높이에 달라붙어서는 그대로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모험가가 양손의 피켈로 빙벽을 등반하듯 놈들도 그렇게 했다. 데스클로들이 뭐든 잘라내는 갈고리발톱을 벽에 박아 넣고서 비틀어 몸을 고정시켰다. 그 상태로 더 높은 위치에 발톱을 박아넣는 식으로 벽을 순식간에 기어올랐다.

아니, 기어오른단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놈들은 벽을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옥상 난간에서 놈들에게 총알을 쏟아내는 나 또한 성벽 위에서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병사들에게 기름을 뿌리는 느긋한 느낌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저 개새끼들은 뛰는 속도로, 그러니까 거의 인간이 달리는 속도로 벽을 탔다. 내가 총을 쏴서 놈들을 조각내는 속도보다 놈들이 내게 닿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또한 이 와중에 내가 펼친 정신적 그물망이 위험을 경고했다. 사각지대에서 접근해오는 놈들의 존재가 그물에 포착됐다.

순식간에 옥상에 다다른 데스클로들이 사방에서 내게 도약했다.

그리고 나는 공간이동 했다. 뒤에 지켜야 할 사람들이 모여있으므로 너무 멀리는 아닌 바로 옆 아파트 옥상에.

시야가 변하자마자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그로써 내가 있던 곳에 모여있던 놈들을 조각냈다.

"여기요! 여기!"

내 등 뒤에서 사람들이 소리쳤다. 보아하니 구조용 헬기를 향해 외치는 것이었다.

곧이어 구조용 헬기가 살아남은 사람들을 연달아 태웠다.

아, 구조용 헬기뿐만 아니라 공격 헬기도 한 대 왔다. 웅장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저 강철의 맹금류를 보라.

데스클로들이 느끼기에도 위협적인 모양이다. 공격 헬기의 기관총 세례를 피해 흩어지는 한 무리 데스클로들이 보였다.

저 헬기 한 대라면 이 근처를 전부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어?"

누군가가 신음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보고 놀랐을 장면을 나도 봤다.

지면에서 뛰던 데스클로 한 마리. 언뜻 보기에는 다른 데스클로들과 별 차이도 없어 보이는 괴수 한 마리가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아니, 공중으로 쏘아졌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 것이다.

놈의 도약이 4층 빌라보다 높은 공중에서 날고 있던 헬기에 닿았다. 놈이 갈고리를 헬기 외벽에 쑤셔넣더니, 놈의 몸이 기어이 헬기 내부에 들어가 버렸다.

공격 헬기가 마구 요동쳤다.

그리고 나는 공격 헬기 내부를 향해 공간이동 했다.

시야가 급격히 바뀌었다.

"악! 악!"

배가 갈라져 창자를 쏟아내는 중인 기관총 사수, 동료의 상황과 자신에게 닥칠 운명에 어쩔 줄 모르는 헬기 조종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크고 살찐 데스클로 한 마리도.

놈이 나를 보았을 때, 나는 살아남은 조종수와 죽어가는 기관총 사수를 붙잡고 공간이동 했다.

아파트 옥상, 그 위에 모여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 앞에서 내가 외쳤다.

"헬기 오면 이 사람부터 태우라고 해요!"

둘을 내려놓던 중에 요란한 폭발음이 났다. 그곳을 흘긋 보니 헬기가 추락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데스클로는?

놈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멀쩡했다. 추락으로 인한 충격도, 폭발과 그로 인한 화염도 놈의 털 한 오라기 상하게 하지 못했다.

불타는 헬기에서 솟구쳐 나온 데스클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사냥감을 찾아낸 듯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는데, 그 달리는 속도가 거의 공간이동으로 보일 만치 빨랐다.

연달아 구조 헬기가 도착했다. 그 헬기들이 옥상의 사람들을 태우고 날아갈 동안 나는 그 근처에서 호위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의 말이 공중으로 멀어져가는 동안 무전기가 울렸다.

「형! 우리 집결했어요! 장소가 어디냐면―」

18화 얼음 능력자 백담비 - [3]

얼마 전, 백담비와 관련된 환각을 본 뒤로 시야 밖 공간이동이 훨씬 수월해졌다. 나는 정신적 그물망을 펼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동료들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리고 공간이동.

도로 위에 자리 잡은 내 헌터팀이 보였다.

"나 보고 싶었냐?"

내 말에 성문영이 나를 돌아봤다.

"형, 막 돌발행동 하면 안 되죠!"

방금 내 덕에 이백 명 넘게 살았다고 핀잔할 여유는 없었다. 이곳에도 괴수들이 덮쳐들고 있었으니까.

"전방! 쏴!"

이쪽을 향해 질주하는 데스클로 네 마리.

놈들은 절대로 쏘기 좋게 일직선으로 달리지 않는다. 놈들은 지그재그로 기묘하게 달려오는데, 한 번 도약할 때마다 불규칙적으로 수 미터씩 뛰어넘는다. 비단 스톰트루퍼가 아니더라도 놈들을 상대로는 모조리 빗맞힐 수밖에 없어 보인다.

놈들을 어떻게든 쏴 맞히기 위해, 우리 헌터팀은 쏘고 또 쐈다.

팀의 맨 앞에는 누가 버티고 서있지?

백담비였다.

맨 앞에서 경기관총을 쏘는 백담비가 보였다. 그놈의 크롭티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만 봐도 그녀임을 알 만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경기관총이 끊임없이 불을 내뿜었다.

저리 쉬지 않고 쏘아도 총열 교체든 냉각수든 필요 없다는 사실을 훈련 중에 들어서 알았다. 그녀는 얼음 능력자이며, 사물의 온도를 시선 혹은 신체접촉만으로 낮출 수 있다.

백담비와 나머지 모두의 사격에 세 마리 데스클로가 기어이 총에 맞아 지면을 굴렀다.

세 마리 모두 죽은 듯했다. 남은 것은 한 마리.

"왔다, 왔다!"

기어이 한 마리 데스클로가 지척에 다다랐지만, 백담비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움찔하거나 몸을 피하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캭!' 하는, 새된 데스클로의 비명이 귀를 파고들었다.

달리던 데스클로의 앞에 솟아난 얼음 말뚝이 놈의 질주를 멈추게 했다. 그 얼음 말뚝은 데스클로가 화를 내듯 휘두른 발톱에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잘려 나갔지만, 그 잠시간의 지체를 놓치지 않았다. 모두가 바로 사격하여 놈을 죽였다.

저걸 보면 확실히, 얼음 능력자라고 해서 각성하지 않은 일반인이나 다름없단 건 헛소리다. 그저 그 강력함이 수십억씩 줘가며 계약할 정도가 아닐 뿐이지.

나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이 보기에도 백담비의 기여가 컸던 듯했다. 성문영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담비 누나, 나이스······."

그동안 탄창 교체를 마친 나도 가세하려 했지만, 근처의 데스클로들은 모두 쓰러져 널브러진 뒤였다.

겨우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마당에 나는 팀원들을 살폈다.

"다들 무사해?"

"예, 예에······."

보아하니 다들 다치거나 죽지는 않았다. 하기야 이쪽은 작전지역에서 후방에 속했다. 그나마 안전한 장소인 셈이다. 그 안전한 곳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총을 쏴대느라 죄다 눈에 핏발이 서 있었지만 어쨌든.

'탕, 탕!'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뒤늦게 헌터들이 도착해서 포위망을 결성하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나는 팀원들에게서 내 전용 탄창을 전달받았고, 생수와 칼로리 보충용 에너지바까지 건네받았으며 다시 싸울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리며 대기했다.

단순히 총질해서 자잘한 괴수들을 쏴 죽이는 것은 평범한 헌터들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아까처럼 급박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내가 몇 마리 더 죽이겠다고 나서야 할 이유가 없다.

나 같은 놈, 그러니까 각성자 헌터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진짜배기 괴물을 처치하기.

아까 본, 헬기를 덮친 그놈과 같은······.

게이트에서 나온 괴수 중엔 무리의 리더격 괴수가 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 괴수는 단순히 무리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특출나게 강력하다.

로켓포나 무반동총으로 맞히기엔 지나치게 빠르면서 소화기로 처치하기엔 지나치게 단단한 괴물.

내 임무는 그런 놈들을 맡아서 처치하는 것이며, 내 헌터팀의 임무는 내 수발을 들거나 일종의 고기 방패로서 날 지켜내는 것이다. 괴수가 날 노리기보다 먼저 저들을 노리든, 그 괴수를 저들이 먼저 죽이든 그 결과 내가 살아남는다면 내 팀원들의 임무는 달성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노릴 사냥감이 특정됐다.

무전으로 비명과도 같은 전파가 울려 퍼졌다.

「역장체! 역장체 출현!」

역장체가 뭔지 배워서 안다. 내가 아까 본 그놈이다.

정신적 그물망을 펼치자 유독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포착됐다.

"나 먼저 갈 테니까, 무전에 나온 장소로 이동해!"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시야 바깥으로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공간을 넘어왔는데도 이미 늦었단 사실이 판명됐다.

피비린내가 강하게 풍겼다. 여러 시체가 널브러진 가운데, 나는 창자를 쏟아내고서 목까지 잘려진 근육질 시체를 보았다.

이런 씨발.

죽은 와중에도 움켜쥔 헌터 라이플을 보니 신체강화자였다. 일정 구경 이하라면 총알도 막아내는 근육이 말끔하게 잘려나간 뒤였다.

그 피부는 갈색이었다. 원래 국적이 어딜까. 라오스? 캄보디아?

아무튼 외국에서 돈 주고 데려온 각성자였던 모양이다. 배와 목 양쪽이 베인 것을 보아 치명상을 입고서도 헌터 라이플을 놓지 않고 끝까지 사격한 것 같았고.

그러나 그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 목이 잘려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인천시에서 그에게 붙여줬을 헌터팀의 시체도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를 위해, 나는 마음속으로만 잠시 묵념했다.

그러고는 이 모든 것을 일으킨 괴수를 봤다.

아까 봤던 놈이었다. 한 번 도약으로 공중에 떠 있던 헬기를 덮치고 추락에서도 멀쩡했던 놈.

인간이 그렇듯 동물도, 괴수도 각성할 수 있다. 그리고 데스클로들은 종 전체가 선천적인 역장 날붙이 각성자이며, 그중 특출난 몇몇 개체는 역장 날붙이 능력뿐만 아니라 역장에 관련된 또 한 가지 능력에 각성한다.

역장 외골격.

인간의 경우 각성하기만 해도 아무런 훈련 없이 바로 A급으로 쳐주는, 사실상 전투에 가장 특화된 각성 능력이다.

예의 능력에 각성하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역장이 전신을 감싼다. 역장의 특정 부위에 집중적으로 충격을 받으면 그 부위만 뚫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위의 역장이 손실된 역장을 뒤덮는다. 그렇기에 역장을 완전히 파괴하기 전엔 그 신체에 그 어떤 피해도 입힐 수 없다.

또한 강화외골격의 개념과 비슷하게 역장 자체에 동력이 있다. 그래서 단순히 방어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역장을 통해 생물의 근력을 넘어선 힘을 낼 수가 있다. 그 말도 안 되는 도약력 또한 역장 외골격을 통해 발휘한 것이 분명했다.

저런 놈을 역장체라 부른다. 나 같은 각성자의 몸값을 백 배쯤 높여주었다고 평가되는 괴물이다.

"안녕."

한편 놈도 날 알아본 듯했다. 재회의 인사를 나누거나 울부짖으며 위협하려는 시도 따윈 없었다.

놈의 모든 행동은 빨라도 지나치게 빨랐다.

뭔가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놈은 이미 내 코앞에서 갈고리발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펼쳐낸 공간이동이 아니면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등이 드러난 놈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연발로 발사된 30mm 기관포탄이 놈의 역장을 마구 두들겼다. 내 손바닥 셋을 겹칠 만큼 길쭉한 탄이다. 거기 닿은 생물은 몸에 구멍이 뚫려 죽는 게 아니라 산산조각이 나거나 동강이 나서 죽는다.

그리고 놈의 경우엔, 비비탄에 맞은 것 같았다.

휙 돌아선 놈이 다시 나를 덮치려 들었고 놈이 도약하는 속도는 화살의 속도만큼 빨랐다. 단순히 몸을 움직여 피해내리란 보장이 없었다.

나는 도로 너머 맞은편에 있던 건물 옥상으로 공간이동 했다.

내가 있던 공간을 스친 놈이 보였다.

이렇게 두 번 놓치니 슬슬 화가 난 걸까. 놈이 고개를 들어 하울링 했다.

'아우우우우우우······' 일종의 지원 요청 신호인 모양이다. 곳곳의 빌라에서 입에 피가 묻은 데스클로들이 나와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놈들이 내가 있는 건물을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수가 열을 넘지만 내가 한꺼번에 그 모두를 상대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여전히 펼쳐둔 정신적 그물망이 내 팀의 접근을 알려주고 있으니까.

"쏴!"

지정된 장소에 도달한 내 팀원들이 날 위한 사격을 시작했다. 벽을 타고 오르던 데스클로들이 추락하는 가운데 나와 놈의 일 대 일 결투가 재개되었다.

저 너머 건물의 옥상에서, 역장체가 날 향해 도약했다.

내가 있는 옥상의 건물이 더 높았고, 놈과 나의 거리가 꽤 되었다. 그래서 놈이 체공하는 동안 나는 헌터 라이플의 탄창을 송두리째 비워낼 수 있었다.

저녁이었다. 슬슬 도시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총구에서 분출된 30mm 기관포탄이 어둠 속에 굵다란 황금빛 선을 수놓았다. 황금빛 선은 공중에 떠 있기에 피할 수도 없게 된 놈의 몸뚱이에 정확히 가 닿았다.

저 황금빛 선에 실린 운동 에너지는 어느 정도일까? 나마저도 저 선에 닿았다간 곧바로 고깃덩어리가 돼버리지 않을까?

그 가공할 황금빛 선을 뚫고, 괴수가 옥상에 안착했다.

날 향해 놈이 지그재그로 달려올 동안 나는 뒷걸음질 치며 헌터 라이플을 쏘았다. 내 사격 실력은 말 그대로 초인적이다. 내 지향사격이 놈의 몸체를 몇 번이고 맞혔지만, 놈은 여전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죽어라, 제발.

초조해진다. 이 30mm 탄환 몇 발이면 어지간한 역장체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던데 저놈은 대체 뭐냐? 역장의 견고함은 개체별로 천차만별이라더니, 저놈은 유독 특출난 괴물인 모양이지.

마치 RPG 속 보스를 상대하는 것 같다. 내 공격으로 아무리 보스의 HP를 깎아도 눈에 보이는 상처나 손상 따윈 없다. 심지어 HP가 0이 아닌 이상 운동능력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이 움직이는데, 이 와중에 HP가 몇 남았는지 표시되지도 않는단 점이 나를 절망케 하고 있다.

아니, 아니다. 지금까지의 사격이 놈의 역장을 충분히 파괴했을 것이다. 다만 얼마나 더 파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뿐.

"와, 새끼야."

그리고 놈이 왔다.

탁 하고, 놈이 도약했다. 가까운 위치에서 날 향해 놈이 쏘아졌다.

그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고 이번엔 타이밍 좋게 공간이동으로 피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헌터 라이플을 내려놓으며, 스트레이트를 피하듯 몸을 옆으로 젖혔다.

아······.

얼굴 한구석에서 통증이 퍼졌다. 갈고리발톱이 내 귀와 볼의 일부를 잘라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공중의 데스클로가 내 옆을 지나칠 때, 나는 놈의 앞발을 붙잡았다.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쾅!'

신체강화자의 초인적 힘으로 내리친 것이다. 옥상의 콘크리트 바닥이 분쇄되어 돌가루가 휘날리는 가운데 놈은 여전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내가 또다시 놈을 들어 패대기치려니 놈은 휘둘러지는 중에도 다른 쪽 앞발을 휘둘렀다.

그 낫질이 놈을 틀어쥔 내 손에 닿았다. 통통한 애벌레 세 마리가 붉은 똥을 흘리며 공중을 날았다.

중지부터 약지까지 잘려 나갔지만 상관없다. 엄지와 검지만으로도 놈을 붙잡긴 충분하니까.

또 한 번 놈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퉁!'

이번엔 '쾅'이 아니라 '퉁'이었다. 뭔가의 변화를 포착했다.

놈의 몸체에서 깨진 유리창과 같은 균열이 엿보였다. 그 균열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비로소 역장이 깨졌다.

마지막으로 발악하려는 놈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리고 역장이 사라진 놈의 몸은 방금 기관포탄 세례에도 멀쩡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듯, 내 팔뚝에 실린 힘을 이겨내지 못한 채 바닥에 닿자마자 죽처럼 으깨졌다.

놈의 잔해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헐떡였다. 그러다가 웃었다.

내가 이겼다. 또다시.

"아."

이번에도 머릿속에 관중의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승리가 내게 힘을 주었다.

놈의 모든 것, 놈의 영혼이 내게 스며들었다.

각성자들의 성장 한도와 성장 속도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다던데, 느낌상 나는 성장 속도가 빠른 편인 것 같다. 몸에 차오른 새로운 힘이 이번에 받아들인 영혼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케 해주고 있다.

나는 전신을 지배하는 전능감을 무시하려 애쓰며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역장체 죽였습니다!"

그랬더니 탄성과 함께 치하의 말이 돌아왔다. 이쯤 되면 상황이 대충 정리된 것 같다고, 정말 수고했으며 슬슬 휴식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정말 고생했고, 어디 다친 데 없죠? 나머지는 여기 모인 헌터들이 정리할 테니 김극 씨는 이만 쉬어요!」

그러나 그때였다.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폭발하여 화염을 비롯한 무언가를 잔뜩 쏟아내는 아파트의 10층을 보았다.

가스폭발? 맞다. 하지만 이 상황에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닌 것은 아니란 것이었다.

어느 놈의 짓인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정령······.

게이트 안에서는 괴수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괴수들은 게이트를 열지 못한다.

게이트를 여는 것은 정령의 능력이다.

그리고 정령과 괴수 무리는 공생한다. 정령이 게이트를 열면 기다리고 있던 괴수들이 빠져나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다.

그 난리 틈에 정령도 은근슬쩍 빠져나와서는 사냥을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인간을 사냥하여 안전하게 자신의 영혼을 살찌운다.

나는 폭발이 일어난 아파트의 옥상을 보았다. 아직 구출되지 못한 사람들이 거기 모여있었다.

그 아래층에서 즐거워하고 있을 불타는 정령을 상상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저 너머 아파트의 옥상에 아까 내가 떨어뜨린 망치가 떨어져 있었다. 그 앞으로 공간이동 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아직 사냥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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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얼음 능력자 백담비 - [4]

학원 강사가 여러 괴수들의 상대법을 가르칠 때, 그 대부분의 내용은 데스클로에 관해서였다. 제일 많이 상대할 괴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화염 정령에 관해서는?

암석 정령의 경우 딱히 상대할 일이 없으리란 이유로 한 일 분쯤 가르쳤던 학원 강사는, 화염 정령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새끼랑 마주쳤으면 주변 동료한테 빨리 머리에 한 방 쏴달라고 하세요. 불타 죽는 것보다 편하게 일찍 가야지?'

그때 그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비각성자 헌터 지망생들을 향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자리의 유일한 각성자였던 나까지 포함해 한 말이었을까?

모르겠다.

나는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제가 갈 겁니다. 수송기 꼭 보내주시고요······"

그러고 난 다음 공간이동을 하자니 쉽지 않았다.

이미 공간이동을 너무 남발한 탓이다. 심지어 시야 바깥 공간이동도 몇 번이나 썼던가?

현기증에 머리가 어지러워도 너무 어지럽다. 젠장.

아드레날린이 핑핑 돌던 때는 몰랐는데, 사냥이 다 끝났다고 생각해 긴장이 풀린 지금은 몸이 절로 비틀거렸다.

그 탓에 공간이동 시도를 한 번 실패하고서야 예의 아파트 옥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엄마아······."

"사랑해, 응? 사랑해······"

어지러운 와중에도 옥상의 생존자들은 이미 다들 공황 상태인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아파트의 각 층들이 펑, 펑 차례로 터지는 게 아닌가.

내가 화염 정령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놈이 지금 대충 뭘 하는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아파트 전체에 화재를 내어 도망칠 길을 없애버리는 모양이지.

또 한 층이 요란하게 폭발했다. 마치 전쟁터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옥상의 한 남자가 나를 바라봤다. 그가 날 알아봤다.

"김극 헌터?"

"예, 인천 만세."

"저희 좀 공간이동으로 옮겨줄 수······"

거절할 기력도 아껴야 했다. 고개를 휘휘 저으니 남자가 날 설득하려 했지만 너무 어지러워서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진 않았다.

난 내 할 일을 하기 위해, 그러니까 홀로 정령을 사냥하기 위해 옥상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그마저 불가능한 일임이 곧 드러났다.

계단이 열과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정령을 만나기도 전에 숨 막혀 죽을 순 없었으므로 난 다시 옥상으로 올라와 외쳤다.

"이따가 정령 올라옵니다. 다들 양옆으로 몸 숨겨요. 양옆으로 몸 숨겨······!"

몇 번 그리 윽박지르니 다들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집중력을 회복하고자 눈 감던 중이었다.

무전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형! 화염 정령 나타났댔죠! 싸우려는 거예요?」

성문영의 목소리, 나는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그래야 할 거 같은데."

「이길 수 있어요? 화염 정령 그거, 신체강화자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괴물 맞아?」

이 새끼가.

대체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다.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래라저래라 질책이라도 하려는 건가? 제 딴에는 걱정이 돼서 뭐라고 하려는 것이겠지만 솔직히 짜증이 났다.

이래서 비각성자들은 어쩔 수 없다. 도움이 안 되면 응원이나 할 일이지, 어디서 감히······.

뒤이어 비각성자는 아닌, 그러나 세간에선 비각성자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흘렀다.

「김극 씨? 화정(火精) 상대하려는 거면, 저 데려가요」

나는 짜증이 솟구쳐 입 다물고 있던 와중에도 눈을 껌벅였다.

백담비, 평소엔 맨날 입 다물고 있던 이 여자가 갑자기 뭔 소릴 하는 건가?

"화염 정령······, 잡아봤어요?"

「본 적도, 없긴, 한데」

그녀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헉헉거리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고. 저 여자가 지금 대체······.

왠지 모를 직감에 건물 아래쪽을 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이 건물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백담비인 것 같았다. 공간이동으로 데려가기 좋게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려는 듯했다. 그로써 그녀가 날 도우려는 게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여자가 날 도울 수 있는 게 맞나? 일일이 추궁할 여유는 없었다.

난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공간이동 하여 그녀의 앞에 도달했다.

"어······.."

백담비가 달리다 말고 내 옆에 멈췄다.

나는 현기증으로 어질어질한 가운데 그녀를 봤다.

백담비, 그녀는 생수통을 한 아름 안고 있는 것이 여기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애초에 저걸 왜 가져온 건가. 이 미친년이 생수를 퍼부어 화염 정령의 불이라도 끄려는 건가?

내가 뭔가 묻기 전에 백담비가 먼저 물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

백담비의 눈길이 귀와 볼 일부가 잘려 나간 내 얼굴, 그리고 손가락 세 개가 잘려 나간 내 왼손을 번갈아 스쳤다. 내가 작게 말했다.

"피 멎은 거 같죠."

"예, 그런데······."

"그럼 됐지."

"그래도 그 상태로 싸우려고요?"

"그쪽이야말로, 웬일로 뭘 하겠다고 나선답니까."

"그냥, 뭐······."

"아무튼 같이 싸우겠단 거 맞죠?"

백담비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잡담할 시간이 아까웠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채 옥상에 복귀했다.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영 쓸모없다 싶으면 아파트 아래로 휙 집어 던지면 될 것이다. 이 여자가 자기소개할 적 제 능력을 설명한 바에 따르면 고작 그 정도로는 죽지 않을 테니까.

곧바로 백담비가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불에 덜 타도록 나름 애써볼게요······."

백담비가 들고 있던 생수를 내게 휙 뿌렸다. 그리하여 공중에 휘날린 물이 그녀의 시선에 닿자 자잘한 얼음 조각들로 바뀌었는데, 백담비의 손짓 하에 휘날리던 얼음 조각들이 내 몸에 달라붙었다.

불에 덜 타도록 해주겠다더니 이게 그건가 본데. 각성자의 몸에 직접 능력을 쓸 수 없는 한계상 간접적으로 능력을 쓰느라 힘이 들겠지만 나름대로 능숙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내게 공간이동으로 옮겨 달라며 조르는 사람들, 가족 누군가에게 전화해 사랑한다고 끝없이 중얼거리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의 가운데에서 난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오래 쉴 순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악!"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나도 고개를 돌렸다.

연기로 가득 찬 옥상 계단을 올라오는 시뻘건 광원이 어지러운 시야에 담겼다. 놈의 매 걸음이 화염과 연기를 동반했다.

화염 정령이 올라오고 있었다.

연기 속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놈의 형상은 불타는 실루엣으로나마 보였다. 마치 불덩어리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테고.

그것만 봐도 알겠지만 소총탄이든 기관포탄이든 먹히지 않는 괴물이다. 그나마 고폭탄 따위의 폭압으로 형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먹힌다던데, 워낙에 희소한 괴물이거니와 시선만으로 전차의 엔진과 탄을 동시에 폭발시킬 수 있는 괴물이라 성공사례는 몇 없다고 들었다.

저놈한테 얼음 능력자의 능력은 통하나? 모르겠다. 다만 과도한 기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맞설 결심을 마쳤다.

나는 놈을 상대하기 전 주변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우선 관중, 양 옆에 잘 배치됐군. 죄다 겁먹은 표정인 게 맘에 안 들지만 하여튼.

라운드걸, 어째서 탱크탑이 아니라 크롭티를 입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 옆에 잘 서 있고······.

좋아, 모든 준비가 완벽하다. 나는 현기증을 이겨내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나는 옥타곤에 서 있다.

"뜻, 뜨뜨뜨. 뜨······."

나는 내 입으로 입장곡을 연주하며, 옥타곤에 올라온 상대를 노려봤다.

지금 막, 불덩어리 하이에나 한 마리가 옥상에 발을 디뎠다.

화염 정령이다.

그 머리와 몸체도, 사지와 꼬리도 전부 불꽃으로 이루어졌다. 황금빛으로 이글거리는 눈과 콧구멍이 화염으로 이루어진 얼굴에서 번뜩였다.

생긴 것을 보니 데스클로가 화염 능력에 각성하고서 영적으로 성장한 끝에 탄생한 정령이리라. 특유의 갈고리발톱이 역장을 머금고 번뜩였다.

"인천 만세."

나는 대결에 앞서 서로 글러브를 마주치려 했지만 심판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령은 심판의 신호를 기다리지 않았다. 놈이 먼저 행동했다.

화염 정령이 불타는 아가리를 쩍 벌렸다. 아가리 안에서 검붉은 것이 일렁였다.

뭘 하려는지 몰라도 심상치 않았다. 빠르게 판단을 마쳐야 했다.

옆으로 피할 준비를 해야 하나?

안 된다. 양옆에 관중이 서 있으니까.

격돌을 대비해 내가 숨을 크게 들이켰을 때, 정령의 입에서 굵고 거센 화염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놈의 화염이 굵어도 너무 굵었다.

시야를 가득 채워버린 화염을 보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돌진.

곧장 앞으로 달렸다. 눈을 감은 채, 정신적 그물망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지해 나아갔다.

"악!"

화염 줄기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드는 내 꼴이 관중이 보기에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나 보다.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온갖 비명이 온몸이 달궈지는 중에도 기꺼웠다. 내 고통에 공감한단 것은 날 응원하는 관중이란 셈이니.  내가 이토록 인기가 많다.

온몸의 피부가 벗겨지고 혈액이 끓어오르는 고통을 아드레날린에 힘입어 무시했다. 계속 땅을 박찼다.

기어이 놈 앞에 도달한 내가 망치를 내리쳤다. 그 일격에 충격파가 동반되도록, 그 충격파들이 불마저 꺼뜨리도록 강하게.

'쾅!' 과연 망치질과 그로 인한 충격파가 놈의 형체를 무너뜨렸다. 놈이 뿜던 화염 줄기도 그와 함께 멎었다.

그래서, 죽였나?

아니다. 놈의 화염을 완전히 꺼뜨리지는 못했다.

내 일격에 사방으로 퍼져버린 불꽃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또다시 하이에나의 형상이 눈앞에 생겨났다. 순식간에 재생한 놈이 갈고리발톱을 휘둘러 내 가슴팍을 베었다.

솟구친 피가 화염에 바로 증발했다.

이 악물고서 내가 다시 망치를 내리쳤다. '쾅!'

또다시 충격파가 놈의 형상을 무너뜨릴 때, 나는 전신을 감싸며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냉기를 느꼈다.

눈을 살짝 떠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서는 놀랐다.

폭발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

라운드걸이 대결에 개입했다. 나 혼자 해낼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굳이 책망하지는 않으리라.

소용돌이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정령의 화염은 건재했다. 몸이 복구되기 시작한 놈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크기가 언뜻 보기에도 크게 줄었다.

다시 형상을 이룬 화염 정령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내리치려던 망치를 더욱 세게 망치를 내리쳤다.

'쾅!' 이번에도 어김없이 놈의 형체가 무너져내렸다. 망치질이 만들어낸 충격파가 놈의 화염을 꺼뜨리는 동시에 놈을 이룬 화염이 사방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멀리 밀려난 화염은, 눈보라가 가장 강하게 몰아치는 영역에 휘말렸다. 수증기가 폭발하듯 솟구치며 정령의 화염들을 집어삼켰다.

한편 내 앞에서 놈이 또다시 재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볼품없는 불꽃이었고 그 사이에서 반투명한 무언가가 반짝였다.

척 보기에도 최후의 불꽃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망치를 또다시 휘두르자, 내 앞에서 마지막으로 불타려던 화염은 꺼졌다.

이내 휘몰아치던 눈보라도 걷혔다. 수증기 속에서 나는 뒤돌아섰다.

희뿌옇게 보이는 생존자들을 눈에 담았다.

또다시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관중의 함성과 현실에서 저들이 외치는 함성이 겹쳤다. 메아리치듯 계속해서 내 이름이 연호 됐다.

"김극! 김극! 김극―!"

쓰러뜨린 정령의 영혼이 내게 스며드는 가운데, 나는 팔을 높이 들어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백담비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 표정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지금 백담비는 신난 표정이었다. 난 저 여자가 귀찮거나 짜증 난 표정 이외 표정을 지을 수 있단 사실을 지금 처음 알았다······ 그녀는 양쪽 주먹을 움켜쥔 채 '아자'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

백담비가 보기에 내 꼴이 지금 말이 아닌 듯했다. 그녀가 움찔하더니, 황급히 이렇게 물었다.

"괜찮아요? 아니, 대답하지 마요. 세상에, 피부 전체가 타버렸네. 바로 물집이 올라오는 거 보니까 속까지 탄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저렇게 호들갑 떠는 것도 이번에 처음 보았다.

나는 현기증 나고 온몸에 불타서 아파 죽을 지경에도 문득 그녀가 귀엽다고 느꼈다.

정령의 영혼이 내게 스며들며 그 열기가 옮겨붙은 것일까. 각성한 이후로 언제나 축 늘어져 있던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가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승리감과 뭔지 모를 느낌에 취한 내가 웃었다. 내 상태가 좋지 않아 내 눈치를 살피던 백담비도 어색하게나마 덩달아 웃었다.

내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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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말도 안 되게 단단한 놈이었죠. 방송국 헬기 영상에 찍힌 거 다들 보셔서 알겠지만 기관포탄을 비처럼 처맞아도 안 죽데? 현장을 보니 제가 교전하기 전에 이미 외국 출신 각성자가 이미 여러 번 쏘셨던 것 같더군요. 예, 돈값 못하고 허무하게 죽었다고 욕먹는 그분이요.

그 각성자 분이 몇 발 쏴서 맞힌 시점에 역장체 그 씹새끼는 산산조각이 나야 정상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터프한 놈이 튀어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텐데, 정말로 운이 안 좋았던 셈이에요. 그 각성자의 원래 국적이 어딘진 모르겠지만 최후만 봐도 명예 인천인이 맞습니다. 잠시 그분을 위해 묵념」

「학원에서 말입니다, 게이트 한 번 열렸을 때 데스클로 그놈들이 열 마리쯤 나오면 많이 나온 거라고 배웠거든? 그런데 딱 봐도 한 장소에 수십 마리가 우글거리니 너무 황당했다니까?」

「게이트에서 기어 나온 놈 중 2/3 이상 저 혼자 잡았다고요? 그걸 어떻게 확인······ 아, 기관포탄에 터져 죽은 건 딱 봐도 티가 나는구나? 그렇습니다. 인천을 수호하고자 하는 제 의지가 그토록 강합니다」

「솔직히 제가 거의 다 한 거 같긴 한데 제 팀원들도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죠. 역장체 그 씹새끼랑 싸울 때 지원사격 받으니 감동해서 눈물 나올 뻔했다니까? 팀에 나이 좀 있는 분들이 있어서 불안하기도 했는데 다들 우려와는 달리 제 역할 잘 해내서 기쁩니다.

저랑 이 사람들이 부평 수렵 전문 학원에서 배웠어요. 부평역에서 오 분쯤 걸으면 나오는 학원인데, 거기 커리큘럼이 충실하고 가격도 그 정도면 저렴해서······」

「아, 그리고 백담비 씨. 솔직히 기대 안 했는데 엄청났죠. 그 아가씨가 자기소개하면서 자기가 정령의 영역에 도달한 수준이라고 했거든? 그땐 이 여자가 뭔 씹덕 같은 소릴 하는지 이해 못 했지.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렇게 씹덕 같은 소리로 자기소개 할 만해요. 다들 영상으로 그때 눈보라 개쩌는 거 봤죠? 백담비 씨가 한 겁니다. 상황이 좀 특수하긴 했지만 아무튼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가능하면 앞으로도 쭉 데리고 다니고 싶네요.

그러니까 부끄러움을 안다면, 이 아가씨 음해해서 계약 파기하려던······ 인천에 숨어든 서울 종자는 당장 목매달아 사죄하기를 바랍니다. 예? 인천에서 간악한 짓 하는 놈들은 다 서울 종자가 맞지. 내가 다 안다니까요」

「어, 화염 정령 잡은 거 국내에서 제가 최초예요? 진짜? 그럼 뭐 칭호 같은 거 붙여주나? 현실 칭호 못 주면 던파 칭호라도 주면 안 됩니까? 속강 22짜리 종결 급으로 주면 좋겠는데. 카인 서버구요, 모험단 명은······」

「A++급 헌터 김극, 인천 재정 고갈 난 와중에도 500억 넘게 주고 데려온 값을 넘치도록 해냈단 평가 일색이라······ 음, 맞습니다. 제가 그리 잘난 놈입니다. 인천 시의원으로 재직 중이신 박미형 씨가 절 여기서 헌터하라고 초빙했단 걸 모두 잊지 마시구요」

「인천 만세! 인천에 사시는 여러분 모두 힘든 시기지만 어떻게든 이겨내기 바랍니다. 힘들어도 꾸역구역 살아남으면 결국엔 승자 아니겠습니까. 예? 인천 밖에 사시는 분들이요? 그 사람들이야 뭐, 알아서 살든가 말든가······. 다시 한번 승리의 주문을 외우고 할 말 마치겠습니다. 인천 만세!」

20화 얼음 능력자 백담비 - [5] (수정)

나는 내 인터뷰 기사를 보며 웃었다.

초재생능력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모든 신체 손상이 복구되었지만, 기사에 삽입된 사진 속 나는 손가락 세 개와 얼굴 일부가 잘려 나간 상태였다.

사진 하단에 '극심한 부상을 입고서도 투혼을 발휘해 계속 작전에 임했다'고 적힌 걸 보니 흡족했다. 내가 이 정도로 고생한 걸 알아주지 않았으면 섭섭할 뻔했지 뭔가.

아, 생존자 인터뷰도 함께 있었다. 김극 헌터가 척 보기에 상태가 좋지 않은 와중에도 상황을 통제하여 생존자들을 신경 썼더라는 인터뷰······ 이것도 만족스럽군.

그렇듯 내가 분투한 결과 해당 아파트 단지의 89세대, 정확히는 사백오십칠 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단 내용을 끝으로 기사는 끝났다.

한국망함 : 사진에 저 광전사랑 저따위로 인터뷰한 또라이가 동일 인물임 진짜로?

ㄴ : ㄹㅇ ㅋㅋ

Yonsik95 : 저 새끼 화 못 참아서 두 명 장애인 만들었다고 자랑스레 떠벌릴 때는 맘에 안 들었는데. 뒷일 생각 안 하고 사는 양아치 새끼가 운 좋게 각성해서 떼돈 벌게 됐구나 싶으니 기분 더러워서······. 괴수 상대로도 분노 조절 안 하고 무조건 들이받는 거 보니 든든하네 진짜

ㄴ 비회원댓글 : 김극 저 친구랑 중학교 동창입니다. 저 친구 중학교 졸업할 때까진 덩치만 더럽게 컸지 맨날 맨 뒷자리에서 얌전히 역사책 같은 거나 읽던 애였어요. 분노조절 장애 아닙니다

ㄴ Yonsik95 : 교실에서 책이나 읽었다고? 맨날 쌈박질하는 양아치가 아니라?

ㄴ 비회원댓글 : 적어도 제 기억엔 양아치 아니네요. 맨날 표정이 어둡긴 해도 누구랑 싸운 적도 없는 애거든요? 고등학교 입학 첫날에 사고 쳤대서 놀랐는데, 지금 보니 기억 속 모습이랑 확 달라져서 의아할 따름입니다

비회원댓글 : 저 새끼 왜 자꾸 인터뷰 저런 식으로 하는 거임? 웃기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컨셉이야?

ㄴ Happy22 : 웃기려는 건지 컨셉인지 모르겠지만 언행일치로 의욕 넘쳐 보이는 거 보니 좋네. 지방이랑 계약해놓곤 툭하면 지역 비하나 해대는 양아치들 널렸는데 저러는 거야 뭐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려도 끝이 없다. 댓글 수가 사백 개를 넘긴 까닭이다.

심지어 기사의 조회수는 십만 대로, 일개 지방의 사건을 다룬 기사라기엔 놀라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 내 인터뷰가 웃겼는지 이번에도 온갖 사이트에서 퍼 나른 탓이리라.

음, 쏟아지는 이 관심이 그야말로 짜릿했다.

한편 백담비도 이 기사를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닌가.

"그때 제가 씹덕 같은 소리 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너무하시네······."

나는 피식 웃고는 다른 동료들을 살폈다.

모두의 시선이 백담비와 날 향한 채였다. 백담비가 잡담한 것이 퍽 놀라운 모양이지?

내가 실실거리는 가운데 우리 팀을 태운 차량이 출발했다.

일반 차량이 아니라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개조된 버스였는데, 내가 지붕 위에 올라가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자, 김극 헌터 올라왔습니다!"

앞서 연설하고 있던 시의원 박미형 씨가 내 손을 높이 들었다. 마이크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듯 말했다.

"다들 박수 보내주시고요!"

쏟아지는 박수 세례와 연호 되는 내 이름······, 나는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날 태운 차량이 한국의 진정한 심장―모래내 시장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벅찬 맘으로 생각했다.

아무튼 계속 살고 볼 일이다. 내가 이런 퍼레이드에 주인공으로 참석하게 될 줄이야?

내 옆에서는 박미형 씨의 열띤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다들 공사다망하신 와중에도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 가치가 있죠 다들? 이번에 다들 기사 보셨잖아요! 여기 김극 헌터가 참 장한 일을 해냈······"

결과적으로 그리되었을 뿐, 내 이번 활약을 치하하고자 열린 퍼레이드는 아니었다.

원래부터 내가 인천시와 계약한 사실을 광고하기 위해 이런 퍼레이드를 열 예정이었는데, 이번 내 활약이 유명했기에 구경하러 온 사람이 많아졌고 날 향한 치하가 늘어났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긴 하다. 헌터 하나와 계약했단 이유로 지자체 차원에서 퍼레이드씩이나 열어주다니?

경찰청장이든 소방서장이든 그 지역의 안전을 책임질 누군가가 새로 부임하더라도 이런 호들갑을 떨지 않는 법 아닌가. 헌터에게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건 특이한데,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주변 부동산 가치 회복을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나로서는 그놈의 땅값이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단 건지 얼마 전까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 사건을 겪고서는 얼추 이해하게 되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천시는 이번과 같은 예상하지 못한 대규모 사건에도 훌륭히 대응할 수 있음을 입증했으며······ 인천 시민 여러분을 지켜낼 능력이 있음을······"

한국인 모두가 서울로 가지 못해 안달 난 세상이다.

서울에 인프라가 좋다느니 일자리가 많다느니 하는 이유가 아니라 다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서울로 가고자 한다.

부동산 시세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부터 비쌌던 서울 부동산 가격은 이제 당시의 열 배 이상 올랐으며, 지방 부동산값은 오히려 내렸다.

당장 인천만 해도 온갖 건물이 똥값이다.

당장 저기 모래내 시장역 근처 빌라를 보면 매매가가 천오백만 원에 불과하다. 요새 치솟은 물가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인천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도 죄 이 모양인데, 지방에 살면 더 쉽게 괴수 밥이 되리란 걱정 탓에 그렇다. 실제로도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서울과 비교해 지방은 괴수들의 습격에 대비할 예산이 부족하다. 몸값 비싼 각성자와 계약할 돈도, 여러 장비를 배치할 돈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서울과 비교해 확연히 괴수들의 습격을 잘 방어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 와중에 게이트 속 괴수들도 바보는 아니다. 놈들에겐 노리기 쉬운 곳부터 노리려는 경향이 있다.

일찍이 큰 피해 없이 습격에 성공했던 장소를 반복해서 노리는 경향 또한 있다.

게이트가 열렸을 때, 쏟아져 나온 괴수들을 제대로 처치하지 못한 지역에는 이후에도 게이트가 다시 열리곤 한다.

그리하여 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곳은 그대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만다.

그리되면 지역 상가가 망해버리고, 주민들이 떠나간다. 세입은 줄어들고, 예산이 더욱 부족해진다. 게이트에 대비할 능력은 처참하게 줄어든다.

결국에는 동네가 완전히 망했다는 낙인이 찍혀버린다. 주민이 너무 줄어든 나머지 지자체는 물론 정부마저 해당 지역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게이트 이후 도시의 슬럼은 그런 식으로 탄생한다.

지방에는 그와 같은 슬럼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 운영하는 가게라곤 없이 길가에 무단배출된 쓰레기만 쌓여가는, 이사 갈 기력조차 없는 노인네들과 노숙자들만 남아 괴수한테 잡아먹힐 날만 기다리는 죽음의 땅이다.

그리고 이번 인천 게이트 사건의 사망자는 총 서른 명. 대부분 헌터들, 그리고 빈 건물에 무단으로 숙식하던 노숙자와 반응이 굼떠 제때 피신하지 못한 노약자 몇 명에 불과했다.

이것은 '거의 피해 없이 막아낸' 편에 속했다. 서울의 가장 견고한 지역에서도 기대하기 어려운 성과라던가?

그렇듯 이번 게이트를 훌륭히 막아낸 결과 또한 훌륭하다. 예의 아파트 단지 근처 부동산 가격이 전체적으로 올랐으며 해당 아파트의 가격은 큰 폭으로 올랐다고.

그것은 그저 부동산 투기꾼들이 미소 지으리란 사실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곳 주민들이 사는 땅을 포기하여 떠나지 않으리란 것을, 근처의 편의점과 맥도널드 지점이 계속 운영되리란 것을 의미한다. 그곳 주민들이 분리배출 한 쓰레기는 그대로 영영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악취를 풍기기 전에 수거될 것이며, 지자체와 국가 또한 그곳 시민들을 계속 돌보리란 것을 의미한다.

한편 내 헌터팀도 버스 위로 올라와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백담비가 유독 신나게 손을 흔들어댔는데, 누가 보면 행사에 초빙된 연예인인 줄 알 정도였다. 옆에서 그녀를 흘끔거리며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문영이 그토록 웃길 수 없더라.

"사진 찍습니다! 자, 웃으시고······"

나도, 학원 출신들도, 심지어 백담비도 미소 지은 가운데 퍼레이드가 끝났다.

동료들끼리 모여서 커피나 한잔하자니 다들 잡담을 시작했다.

"진영이 형, 왜 자꾸 발 아래를 쳐다봐요? 바닥에 뭐 떨어졌어?"

"미안, 발이 가려워서."

"발 가려워요? 왜요?"

"무좀인가 봐······."

"아니, 씨발. 평소에 샤워 안 해요? 가까이 다가오지 마요······"

남자들의 이 너저분한 모임에는 놀랍게도 백담비 또한 함께였다.

나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감도는 백담비를 흘긋 살폈다.

오늘 그녀는 쭉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째서? 자기가 연예인인 줄 아는 정신병자답게 오늘 연예인처럼 사람들 앞에서 관심받으니 좋아서?

얼마 전까지라면 나도 그리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놈의 정령이 나타났을 때 백담비는 함께 싸우기를 자처했다. 이미 계약금으로 수백억 원을 챙겼으니 사람들이 욕을 하더라도 활동만 꾸역꾸역 이어나가는 것이 그녀의 최종목표일 줄 알았던 나로서는, 그때 그녀가 나선 것이 참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놈의 정령을 쓰러뜨렸을 때의 반응을 보니 이제는 알겠다.

그녀에게도 활약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제 역할을 해내려는 그런 열망, 각성자답게 남들이 하지 못할 무언가를 해내려는 그런 열망 말이다.

지금까지 활동하며 아무 열기를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저 활약할 기회가 없었던 탓이리라. 그러니 그녀는 활약할 수 있을지도 모를 상황에 즉시 나섰던 것이며, 활약 비슷한 것을 해낸 후에는 그토록 기뻐했던 것이리라······.

"지방에선 사냥 나선 다음 날에 돈 바로 안 주네요? 나 서울에서 활동할 땐 사냥한 다음 날에 무조건 돈 줬는데."

"어쩔 수 없죠. 요새 지방은 있는 돈으로 헌터들 돈 주는 게 아니라 돈 줘야할 때마다 서울에서 빌려다 지급하는 거래······"

장병곤과 성문영의 잡담을 듣던 내가 물었다.

"다들 돈 아직 못 받았어요?"

"네. 월말에 준대요."

"난 어제 바로 받았는데?"

"와, 각성자 돈은 바로바로 주나 보네? 나빴다 정말."

투덜거리더니 성문영이 먼저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갈 길을 가는 가운데 나는 여전히 예의 군화를 신고 있는 정진영을 보았다.

아직 돈을 지급하지 않았다면 저 형도 무일푼일 것이다. 내가 정진영을 불렀다.

"진영이 형? 형은 나랑 어디 좀 가죠."

이 형은 아직도 날 무서워한다. 지금도 갑자기 움찔하는 것이 왜 자길 따로 부르는지 몰라 불안한 눈치였다.

"어? 왜······"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 어깨를 붙잡고서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신발 매장 앞,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정진영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가운데 내가 말했다.

"신발 두 켤레 골라봐요. 평소 신고 다닐 거랑 사냥 중에 신고 다닐 걸로 한 켤레씩."

"신발 고르라고요? 갑자기 왜······?"

"무좀 걸렸다매. 딱 봐도 균 잔뜩 번식했을 군화나 신고 다니니까 그런가 본데, 군화는 버리든가 세탁 맡기든가 하고 딴 신발 신고 다닙시다."

"무좀 걸린 거,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잡담하는 거 듣고서 신경 쓰고 있었지."

내 말에 정진영이 눈을 크게 떴다.

한참이 지나 눈치를 살피던 정진영이 신발 두 켤레를 골라왔다. 내가 대신 결제하니 그 눈이 또다시 커졌다.

매장을 나와서는 약국에 데려갔다. 약값도 대신 결제하고는 한 마디건넸다.

"내가 사냥할 당시엔 경황이 없어서 말 못 했는데, 이번에 잘했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합시다, 응?"

그리 말하면서 어깨를 몇 번 쳤더니, 이번에도 정진영은 기괴하게 반응했다. 그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어깨가 흔들렸다. 고작 격려 한 번에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 몰랐던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주고는 공간이동 하여 그와 멋지게 헤어졌다.

하여간 자금의 여유가 생기니 좋다. 무좀약 가격마저 끔찍하게 비쌌는데, 헌터쯤 되어야 그걸 부담 없이 살 수 있겠더라.

집에 돌아온 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현재 동료들을 챙겼으니 예전 동료들을 챙길 차례였다.

"어, 양태규 씨. 저 김극인데 기억해요? 대한각성연대에서 어깨 노릇하던 놈 기억하죠, 그게 전데······ 아, 기억한다구요? 요새 제 소식 잘 보고 있어요? 그럼 설명할 필요 없을 테니 잘됐네.

제가 얼마 전에 계약금 받아서 여유가 있거든요. 저번에 헤어질 때 돈 필요한데 대출받을 데 없어서 막막하다고 하셨잖아? 그러니까 제가······ 아, 네. 네. 이자는 됐고 여유 되면 천천히 갚으면 돼요. 계좌 문자로 줘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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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여동생 김선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