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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40-50

< 40화 >

전뇌 기술이 눈부신 성장을 이룬 로스트 시티다.

 

당연히 발에 챌 정도로 많은 것이 군소 데이터칩 제조사 및 테크니컬벤처 기업이었으니.

 

액타비스 컴퍼니도 여기에 해당하는 회사였다.

 

자체적인 신제품을 개발하기보단 특허 기간이 만료된 브랜드 데이터칩의 복제품, 일명 제네릭칩을 생산·유통하는데 주력하는 그저그런 제조사.

 

최근에는 트라우마 억제 기능이 있는 타사의 데이터칩 '딥슬립'을 토대로 '마더보이스'라는 제네릭칩을 생산했는데, 선택지가 무려 1,094개나 되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자장가를 불러주거나 동화책을 읽어준다는 옵션 때문에 나름 화제가 됐다나 뭐라나.

 

순정한 몸뚱이를 가진 진으로선 좀처럼 공감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 중에 네 취향 하나쯤은 있겠지'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몇 번 들어봤지만, '이 중에 너희 엄마랑 비슷한 목소리가 하나쯤은 있겠지.'는 좀···.

 

그래서 진은 꼭 필요한 정보만 다시 상기했다.

 

첫째, 액타비스 컴퍼니는 데이터칩 제조사다.

둘째, 브로커의 머릿속에서 찾아낸 장소가 이와 같다.

셋째, 해당 제조사는 36구역에 있다.

 

간만에 깔끔한 3줄 요약에 성공한 그가 흡족해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왜 이들과 함께해야 하는데?"

 

귓가를 스치는 냉랭한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리자, 볼캡에 마스크까지 쓴 옆모습이 보인다.

 

"거절할게."

 

여인, 에안나의 말에 칼리파가 고개를 저었다.

 

"검증 되지 못한 정보를 전달하는 상황이야. 당신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내가 안 괜찮아. 개인적인 자존심의 문제를 떠나서 업계 평판에도 지장이 갈 사항이니까. 설령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지. 안일함을 보인 것만으로도 물어뜯을 여지는 충분하거든."

 

"···내가 어디 가서 이번 일을 떠들고 다닐 사람으로 보여?"

 

"당사자는 입을 다물어도 누군가는 알게 되는 게 이 바닥이야."

 

누가 링커 아니랄까 봐 아주 청산유수다. 진실과 과장을 적절히 섞어서 담담한 톤으로 읊어내니 에안나도 쉽사리 뒷말을 잇지 못했다. 시선을 내리깔고 침묵을 유지하는 게 누가 봐도 고민하는 사람의 얼굴이라.

 

거기에 칼리파가 쐐기를 박았다.

 

"내가 책임을 지게 해주겠어?"

 

와 책임.

진이 감탄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자극하는 저 한마디가 이 세상에서 통할까?

 

놀랍게도 통하더라.

 

"알겠어."

 

에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진과 에릭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둘 뿐이라면 함께할게. 대신 어설픈 호위 노릇은 용납하지 않겠어."

"물론이야. 그냥 없는 사람이라 생각해."

 

듣는 없는 사람 서운한 말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게 다 까탈스러운 아가씨 달래는 일이다 생각하고 입을 다문 진이다.

그건 옆에 있는 에릭도 마찬가지여서 팔짱을 낀 채 별다른 액션이 없었다. 그저 한 번씩 발가락으로 다리털 숭숭 자란 종아리를 긁적거렸을 뿐.

 

그사이 에안나가 몸을 일으켰다. 진이 단말기를 슬쩍 확인하니 시간이 19시 21분. 지금부터 달리면 언제쯤 도착할까 궁금했기에 내비게이션 앱을 실행시키고 엑···타···비···스, 한 글자씩 입력할 때였다.

 

"따라와."

 

짤막한 한마디를 남긴 채 눈앞을 스친 에안나가 그대로 문을 열고 가게를 나서니, 한창 단말기에 시선을 쏟고 있던 진이 뭐가 저렇게 급해 툴툴거리며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잘 다녀오라 인사하는 칼리파와 포우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벌써 시야에서 사라진 의뢰인을 쫓아 서둘러 에넥도트를 나섰다.

 

또 하나의 의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말문이 막힌다고 했던가.

 

지금이 딱 그랬다.

 

···이게 뭐지?

 

진이 눈을 끔뻑거리며 캐노피라 불리는 투명한 덮개 너머의 세상을 바라봤다.

 

넓게 펼쳐진 구름의 대지가 해 질 녘 붉은빛을 머금은 채 발 아래 깔려있었다.

 

AI 수송기라니?

 

상상도 못 한 탈것이었다. 순진하게 만티코어에 시동 넣고 하이웨이를 달릴 준비만 하던 진으로서는 말문이 안 막히는 게 이상한 상황.

 

괜히 거물(진)이 아니라는 걸까.

첫 단추부터 사이즈가 남달랐다.

 

사는 세상이 다르다 이거지.

 

대각선 방향.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에안나를 힐끗 바라던 진이 문뜩 등 뒤로 들려오는 드르렁 코 고는 소리에 피식거렸다.

 

이 와중에도 쪽잠을 자는 헬멧 대가리를 보니, 놀란 건 나밖에 없구나.

 

괜히 혼자만 촌놈 된 기분에 뒤통수를 긁적이던 진도 이젠 이 상황을 그냥 즐기기로 했다.

 

해서 다시 캐노피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나직하게 터지는 탄성.

 

"아."

 

구름이 걷힌 저 아래.

본격적인 밤을 맞이한 도시가 있었다.

 

어지럽게 반짝이는 불빛은 마치 깊은 어둠 속을 밝히는 조각 난 별들처럼 보였다.

 

그렇게.

 

오래전 찬란한 밤하늘을 잃어버린 도시는 그 자체로 새로운 밤하늘이 되어 있었다. 저 안에서 발버둥 칠 땐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네온사인의 은하수.

화려함 속에 스며든 고독.

여전히 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방인.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마음의 간극.

 

어느 순간 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둘러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마음의 빈틈을 파고든 검은 파도는 이미 발목을 적시며 소리 없이 차오르고 있었기에.

 

"하아- 하아-"

 

절로 가빠지는 호흡에 진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1부터 10까지 세려는 순간.

 

"진정해."

 

차분한 목소리.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검은 파도 너머 수송선의 내부가 보였다. 어느새 자신의 손목을 잡은 여인의 얼굴도.

 

생명의 은인을 마주한 기분이 이러할까.

 

마음 같아선 고맙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기엔 숨이 너무 찼던 진이 한동안 호흡을 가다듬은 뒤 입술을 달싹거렸다.

 

"···고맙습니다···땡큐···아리가또···씨에씨에."

 

얄팍한 4개 국어로 감사함을 전한 그가 여전히 자신의 손목을 잡은 에안나를 향해 뒷말을 덧붙였다.

 

"그, 저기, 내가 가끔 이럴 때가 있는데···"

"설명 안 해도 돼."

"어?"

"설명 안 해도 된다고 했어."

 

에안나가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니, 괜히 멋쩍어진 진만 눈을 끔뻑끔뻑.

 

"···아 그래."

 

코밑을 쓱 훔치며 시선 둘만한 곳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발터도 그랬거든."

"어?"

 

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뒷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에안나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고, 진도 구태여 두 번 묻지 않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장은 창밖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더욱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자자, 뇌세포 여러분. 이러다 공황 오면 난리 나니까 다들 아무 주제나 말해보세요.

 

저녁 뭐 먹나요, 탈락.

내일 아침 뭐 먹나요, 탈락.

내일 점심 뭐 먹나요, 탈락.

 

다행히 내일 저녁 뭐 먹지? 라는 생각이 들기 전에 제대로 된 안건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건 바로-

 

왜 퀘스트 경험치가 더 올랐을까?

 

사실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긴 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므로.

 

그리하여 진이 어울리지 않게 사색에 잠겼으니.

 

뭘까. 바뀐 내용이라고 해봐야 한 줄밖에 없는데.

 

[에안나 솔라드가 사망하면 실패합니다.]

 

이게 뭐라고 경험치를 거의 두 배나······음.

 

어?

 

진이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대각선에 앉은 의뢰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하길.

 

설마 이대로 가만히 흘러가면 에안나가 죽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건가?

 

사실 이게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긴 했다.

 

돌이켜보면 기존 퀘스트는 의뢰인과 함께 발터를 찾으라는 문구가 전부였지 않은가.

 

발터를 구하라는 것도 아니고, 감동의 재회를 지켜보라는 것도 아니었으며, 키스해! 키스해! 바람 잡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찾기만 하면 끝일진대.

거기에 의뢰인을 지키라는 제약이 하나 붙자 경험치가 상승했다?

 

그렇다면 발터를 찾고 난 이후에 에안나의 신변을 위협할 만한 일이 터진다는 소리일 터.

 

아니, 어쩌면···

 

진이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어느 순간 고도를 천천히 낮추기 시작한 기체의 표면에 빗물이 투둑투둑 떨어지기 시작했으니 구름 아래로 내려선 수송선에서 딱딱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36구역 상공에 진입합니다]

[목적지까지 5분 남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돌린 에안나가 말했다.

 

"곧 빌딩 상공에 도착할 거야."

 

그러자 진의 등 뒤에서 다가온 손이 그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에릭이었다.

 

[준비 오ᅟᅡᆫ료]

"···야, 너 오타 났어."

 

한심한 작태에 한숨 섞인 코멘트를 남긴 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양 손바닥으로 제 뺨을 철썩철썩 때린 뒤 얼굴을 좌우로 흔들어 푸르르르-오리 우는 소리를 내니.

 

정신 똑바로 차리자.

해야 할 일을 생각해.

우선 에안나를 지킨다.

럼펌펌펌을 그렇게 만든 새끼들도 조진다.

당장은 거기에만 집중하는 거야.

 

[목적지까지 2분 남았습니다]

 

이제는 정말 지상에 가까워진 수송선이다.

 

캐노피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더 이상 추락한 밤하늘이 아니었으니, 소리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홀로그램 광고판과 번쩍이는 네온 라이트가 진의 눈을 스쳤다.

 

[목적지까지 1분 남았습니다]

 

빗줄기가 점차 거세졌다. 이제는 장대비라는 표현이 부족함이 없을 수준인즉.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AI 수송기는 막힘없이 목표한 방향에 다다르는 데 성공했다.

 

[목적지 도착. 착륙을 시도합니다]

 

우우우웅.

 

수평하던 엔진을 지상을 향해 돌려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어느 빌딩의 옥상을 50여 미터 남겨둔 높이에서 호버링을 시작한 수송기가 출력을 줄이며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가운데, 치지직-하는 노이즈와 함께 들려오는 무전이 있었다.

 

"착륙을 불허한다! 다시 한번 알린다! 착륙을 불허한다!"

"당신들은 사유지를 침범했다. 계속해서 착륙을 강행할 경우---"

 

소리가 뚝 끊겼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에안나가 어떤 버튼을 누르자 벌어진 일이었다.

경고를 대놓고 무시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먼저 갈게. 미리 말해두는데 굳이 내릴 필요는 없어. 일이 다 끝나면 알아서 돌아올 테니까."

"간다고? 어딜. 아직 하늘인데?"

 

진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설마 했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에안나가 수송기의 뒤편, 하단 사출구에서 걸음을 멈추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야 이--!"

"하단 사출구 개방."

 

다음 순간 그녀가 선 바닥이 외부를 향해 갈빗대를 활짝 펼치니-

거친 비바람이 기체 내부를 휘감음과 동시에 에안나가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또라이 아니야?!"

 

진이 그렇게 소리치며 사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직후 내벽을 짚고 멈춰 선 그의 눈에 뻥 뚫린 바닥 아래의 풍경이 느린 화면으로 담겼다.

 

옥상에 포진한 수많은 무장병력.

수송기를 향해 겨눠진 크고 작은 총구들.

거칠게 휘몰아치는 비바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증발시키는 열기.

 

──!

 

새하얀 불길이 파문을 그리듯 번져나감에,

일순간 수송기와 옥상 사이의 빗물이 사라졌다.

진의 뺨에 들러붙은 물방울까지도.

 

툭.

 

숭고한 열기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비명은 없었다.

 

그저 잿더미가 되어버린 누군가의 흔적이 뒤늦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만나 까맣게 바닥을 물들였을 뿐.

 

그 중심에서 에안나가 모자를 옆으로 휙 던졌다. 이후 마스크까지 벗은 그녀가 수송기 쪽을 돌아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길.

 

'그냥 거기 있어.'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려 건물에 진입하는 그녀를 보며 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쟤가 위험하다고?

그럴 수가 있나?

누가 누굴 지키라는 거야.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제 와서 돌이킬 방법은 없었으니, 세월아 네월아 수송기가 착륙하길 기다리는 것도 사치라.

 

진이 에라 모르겠다 소리쳤다.

 

"럼펌펌펌을 위하여!!"

 

직후 사출구를 향해 냅다 몸을 던진 그가 순식간에 작아지는 모습에 그때까지도 가만히 서 있던 에릭의 바이저 위로 물음표가 도배됐다.

< 40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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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화 >

발밑이 사라지는 낯선 감각.

 

탁 트인 시야에 진이 눈을 부릅떴다.

 

와씨! 높아!

 

현재 수송기와 빌딩 옥상까지의 거리는 30m 남짓.

 

통상적인 아파트의 층고가 2.7m 정도니, 대충 11층 높이에서 뛰어내린 셈이다.

 

참고로 진은 살면서 번지점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왜냐고? 그야 무서우니까!

 

전여친이 그렇게 가자고 졸라도 단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었는데 이걸 여기서···!

 

심지어 안전장치도 없다.

오롯이 맨몸으로 중력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니, 이는 더없이 순수한 자유낙하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매.

저는 없는데요?

 

그러니 이대로 온전히 가속했다간 최소 중상에 최대 의식불명이다.

물론 죽지는 않고, 하루 이틀이면 의식도 회복하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는가.

 

해서 진이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1초.

 

수송선에서 몸을 날린 뒤 초침이 한 번 딸깍인 시간에 불과했으니-

 

잿빛 눈동자가 목표물을 포착했다.

 

허공을 향해 고개를 꺾은 옥외 조명.

침입자를 노려보는 외눈의 감시자.

 

그 기다란 몸체를 향해 진이 마나라는 통행세를 지불했다.

 

다음 순간.

 

허공에서 번쩍 나타난 진이 미리 뻗었던 손으로 조명 몸체를 움켜잡았다.

 

끼이익--

 

하중을 이기지 못한 감시자의 목이 활대처럼 휘어졌다. 직후 손아귀를 펼친 진이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옥상에 내려섰다.

 

장대비 속에서 쓰러진 시체들에게 잠시 눈길을 준 그가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열기였다.

숯가마에 들어온 듯한 텁텁한 공기.

콧잔등을 구긴 진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층계참과 계단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쓰러진 시체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머리가 백염에 뒤덮여있었다. 불타는 머리통을 제외하면 옥상보다는 예후가 좋은 몸 상태에 진은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도 복장이나 무장 따위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보니 차츰차츰 눈에 익기 시작하는 마크가?

 

위치는 제각각이었지만 모양은 똑같은 그것.

시가를 물고 있는 해골.

그 아래 적힌 [Death Harbour]

 

데스 하버?

일단 액타비스는 아니다.

그렇다면 자사의 경호 병력은 아니란 소리니.

그렇다면 보안업체? 민간군사기업(PMC)?

 

어느 쪽이든 평범한 데이터칩 제조사치곤 과한 조치다. 확실히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라고. 진이 그리 생각하며 뜀박질을 이어갔다.

 

쏴아아아!

 

스프링클러가 사방으로 물을 흩뿌린다. 건물 내부를 가득 채운 열기와 불길이 불러온 반작용이었으니, 밖에서도 난 물난리가 이곳에서도 펼쳐지는 중이었다.

 

아니 근데 얼마나 내려간 거야?

진의 눈썹 간격이 좁아졌다.

 

벌써 10층 가까이 내려왔음에도 에안나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에.

 

설마 비상계단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

 

텅, 탕!

 

층계참을 휘돌던 진이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동시에 머리 위를 지나친 탄환이 벽에 움푹한 탄흔을 남겼다.

 

이것만 보면 진이 총성을 듣고 반응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 총알은 음속보다 빠르기에 소리를 듣고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괜히 총소리를 들었다면 당신은 살았다! 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러니 진이 미리 자세를 낮출 수 있었던 건, 탕! 하는 격발음보다 먼저 계단문을 벌컥 여는 텅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텅과 탕! 사이에 진은 이미 그라비스를 뽑았으니.

 

탕─!!

 

직전의 총성보다 족히 2배는 큰 굉음이 터지고-

누군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뒷걸음치다 풀썩 쓰러졌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진이 핏물을 게우는 남자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췄다.

 

방탄복 덕분에 즉사는 면했으나, 미처 소화하지 못한 충격으로 내부 장기에 지대한 손상을 입었다.

···라는 사실을 죽어가는 눈빛과 옅어지는 호흡으로 파악한 그다. 더불어 아직 숨이 끊어지기까진 시간이 조금 남았다는 것도 짐작했으니.

 

"야, 야. 뭐 좀 물어보자. 제대로 답해주면 편안하게 보내줄게."

"좆까···이 씹쌔야."

"음. 그럴 줄 알았지."

 

진이 곧바로 자전을 오른손에 휘감았다.

마나 회로의 성장으로 한결 운용이 편해진 녀석이다.

 

아직도 파직! 파직! 털 세워가며 반항하는 게 열받긴 하지만, 그래도 이모저모 유용하긴 하니까.

 

뭐, 이럴 때 숙련도 쌓는 거지. 원래 차곡차곡 쌓는 게 제일 중요한 거라잖아. 그럼 나도 나중에는 에안나처럼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을 지도?

 

자전이니까. 옥상을 뒤덮는 전기 폭풍이면 좋을 거 같은데. 사이오닉 스톰처럼. 음, 스타하고 싶다.

 

그러다 문뜩 드는 생각이.

어, 너무 오래 지졌나?

 

진이 전뇌 포트를 감싼 손을 거두며 말했다.

 

"그래서 생각은 바뀌셨고?"

"끄···, 허어, 허어······억."

 

다행히 협상이 잘 먹힌 덕분에 건전한 분위기 속에서 질답이 몇 번 오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흰 용병이고 계약하에 빌딩에 상주하면서 경호원 노릇을 했다는 거지? 근데 담당하는 구역은 지상층뿐이고 지하에는 뭐가 있는지 모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가 입을 열면 그건 그것대로 공포다.

 

"왜 이렇게 허약해."

 

쯧, 낮게 혀를 찬 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건진 게 없진 않다.

적어도 에안나가 어디로 향했을지는 짐작됐으니까.

 

그리하여 진이 걸음을 옮긴 곳은 엘리베이터였다.

 

마음 같아선 (↓) 버튼 누른 뒤 잠시 기다렸다가 한 번에 쭉 내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건물 내 모든 승강기는 작동을 중지한 상태라.

 

진이 굳이 불 꺼진 승강기 앞에 선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콰앙!!

 

앞뒤 재지 않고 내지른 발길질에 문이 우지끈 우그러졌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하자 너덜너덜해진 문짝이 안쪽으로 떨어지며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살다 살다···"

 

수직으로 뻗은 검은 통로를 바라본 진이 한숨을 내쉬며 겉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항공 점퍼로 가까운 방향의 주행 레일을 감싼 뒤, 그 위를 움켜쥐고선 망설임 없이 강하!

 

어깨너머문장이라고.

 

온갖 액션 영화를 통해 배운 상식을 실전에 적용한 진이 마음 속 스승들에게 리스펙을 보냈다.

땡큐 에단 헌트.

땡큐 제임스 본드.

(저 두 사람은 저런 짓 한 적 없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깔끔하게 미끄러지진 못하고 중간중간 버벅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계단보다는 훨씬 빠르게 바닥에 내려선 진이 이번에는 안쪽에서 문짝을 박살 내며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보이는 건 활활 타오르는 로비.

 

문자 그대로 초토화된 공간에 용병들이 폐품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누구 작품인지는 너무 당연했기에, 다시 점퍼를 걸친 그가 짙게 남은 마나를 쫓아 로비를 가로지를 때였다.

 

꿈틀.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진이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키던 용병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그러고도 다시 부들거리며 상체를 세우는 놈의 면상은 이미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으니, 진이 그대로 달려가 머리를 걷어찼다.

 

동시에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소음.

 

""A'aaah!!!!""

 

불길 속에서 좀비처럼 몸을 일으키는 용병들을 확인한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들이 대가리에 뭘 끼웠는지 눈치챘기에.

 

버서크.

 

모든 시체가 되살아난 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멀쩡한, 정확히는 백염에 머리가 타오르지 않은 놈들만 빌어먹을 포효와 함께 적의를 드러냈으니.

 

오히려 먼저 행동에 나선 건 진이었다.

 

그라비스의 총구가 연이어 불을 뿜었다.

 

포효하던 용병들의 머리가 차례차례 터져 나갔다.

탄창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계속.

 

탁탁. 검지로 전해지는 저항감과 함께 슬라이드가 뒤로 밀린 순간.

 

진이 그라비스의 탄창을 제거하며 팔을 휘둘렀다. 그 궤적 끝에 단검을 내리찍는 용병의 얼굴이 있었다.

 

빠각!

 

골통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놈의 멱살을 낚아챈 진이 이번에는 이마로 얼굴을 들이받았다.

 

그 순간 이성이 나간 와중에도 진의 사각을 노리고 달려드는 다른 용병이 있었다. 놈은 바디 벙커라 불리는 방패로 몸을 가린 채, 그 중심에 작게 뚫린 구멍 사이로 총을 쏘아댔다.

 

연이어 날아든 탄환 중 하나가 진의 어깨를 스쳤다.

나머지는 멱살 잡힌 인간 방패의 들썩거리는 등짝이 전부 받아냈으니-

 

직후 진이 방패 용병의 머리 위로 블링크했다. 조금 높은 위치였다. 번쩍 들어 올린 뒤꿈치를 기요틴처럼 내리찍기 충분할 만큼.

 

기요틴이 사형을 선고했다.

 

와그작! 우그러지는 방탄모와 함께 눈 코 입에서 피를 분사한 용병이 고꾸라지자, 뒤이어 놈의 뒤통수를 짓밟으며 착지한 진이 주인 잃은 방패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그 뒤로 몸을 감추니 곧이어 두두두두! 소총탄이 방패 표면을 두들겼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는 동안 짧게 숨을 고른 진이 그대로 돌진했다. 달리는 속도를 살려 힘껏 올려 친 방패날에 소총을 장전하던 용병의 턱밑이 걸렸다.

 

촤아악!!

반쯤 잘려 나간 목에서 핏물이 솟구치는 가운데.

손에서 방패를 놓은 진이 마지막 남은 용병을 향해 거대한 궤적의 주먹을 날렸다.

 

러시안 훅.

 

강속구를 던지듯 휘두른 주먹에 내리꽂힌 용병이 그대로 지면에 얼굴을 들이받았다. 

 

"···퉤!"

 

모든 버서커를 처리한 진이 침을 뱉으며 그라비스의 탄창을 갈아 끼울 때였다.

 

쾅!

 

로비 반대편에 위치한 비상계단의 문이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열렸다.

 

철컥.

 

자연스럽게 문 너머를 겨냥한 총구 끝에 익숙한 헬멧 대가리가 있었다.

 

[진?]

 

바이저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랗게 글자를 띄운 에릭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멀쩡한 걸음걸이로 보건대 그것이 그의 피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빨리도 온다."

[???? ???? ?????]

 

어딘지 잔뜩 억울해 보이는 물음표를 뒤로한 채, 진이 바닥에 쓰러진 용병들을 턱으로 쓱 훑었다.

 

"얘네도 전부 감염됐더라."

[위에서 몇 명 만났어]

"그래? 아주 난리 났네."

[그런데 이상해]

"뭐가?"

[직원들 없어]

"···어?"

 

그제야 이 빌딩 안을 내려오는 동안 그 어떤 직원도 마주치지 못했음을 깨달은 진이다. 문뜩 살갗에 닿는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일단 가자."

 

가만히 있는다고 답이 나오는 상황이 아니라.

다시 발길을 재촉하기 시작한 진이 나란히 나아가는 에릭에게 정보를 공유했다.

 

그래봐야 별거 아닌 내용이었지만.

 

"지하실에 뭐가 있긴 한 거 같은데. 비상계단이나 승강기로는 진입 못 한다더라. 아마 다른 길이 있나 봐."

[→ → 에안나의 마나 → →]

"그래, 이거라도 따라가야지. 서두르자."

 

해서 두 사람이 달렸다.

 

에안나의 마나는 뭐랄까.

투명한데 뜨거운?

포근한데 파괴적인?

 

아무튼 개성이 뚜렷했기에 그 자취를 뒤쫓는 게 딱히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헨젤과 그레텔 29금 버전마냥 일정한 간격으로 불타는 시체들이 이 방향이 맞아요! 2차 검증까지 해주니 길을 헤매려야 헤맬 수가 없더라고.

 

물론 중간중간 되살아난 용병들이 앞길을 가로막는 불상사가 있긴 했다.

 

하지만 놈들만으로 두 솔로의 돌파력을 저지할 수는 없었으니.

 

몇 번의 전투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진은 에릭의 능력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신체 가속?

거기에 마나 회로도 뚫은 건가.

근데 뭔가 좀 인위적인 느낌.

 

그러는 사이 새로운 입구가 그들을 반겼다.

 

한때 반투명한 장막에 숨겨져 있었을, 하지만 지금은 그 표면이 불에 타올라 사라진 입구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진입한 두 사람이다.

 

내달리는 발소리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길고 좁은 복도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다가, 어느 순간 확장되는 시야와 함께 저만치 밀려났다.

 

다음 순간.

 

푸른 조명이 은은하게 감도는 거대한 공간이 진의 감각에 아로새겨졌다.

 

코끝을 찌르는 알콜 냄새.

음산한 공기.

차가운 형광빛.

저속하게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

 

그리고 그 끝에 에안나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동안 따라잡기도 힘들 만큼 앞서가던 사람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발바닥에 뿌리가 내린 것처럼.

 

아씨, 사람 불안하게 왜 저래?

진이 그러면서도 얼른 에안나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냐? 라고 묻는 대신 고개를 들어 그녀가 바라보고 있을 풍경에 눈을 맞추니.

 

우우우웅-

 

그곳에는 수십 개의 튜브와 연결된 거대한 유리관이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연녹색 액체 안으로 호흡기를 쓴 남성이 보였다.

 

장발이라고 봐도 무방한 머리칼을 출렁출렁 곤두세운 채,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감은 모습.

 

그리고 그런 남자의 몸을 휘감은 무언가가 있었으니-

 

피어올랐다가 식고, 피어올랐다 식길 반복하는.

불온한 꿈틀거림.

 

그것은 검은 불꽃이었다.

< 41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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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화 >

진이 눈을 끔뻑거렸다.

 

일단 사람이 뭘 알아야 같이 놀란다고.

 

왜 저게 뭔데.

검은 불꽃? 흑염? 흑염룡?

 

진은 비전마법마저 색깔 놀이 취급하는 사람이다.

색으로 선악을 재단하지 않고.

색으로 가치를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랬기에 진은 왜 에안나가 몸이 굳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지잉-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

 

그리고 천장 구석에 붙은 스피커를 통해 음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

 

"크큭. 여기까지 오느라--"

타앙!!

 

문장이 반도 완성되기 전에 스피커를 날려버린 진이 에안나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딱딱 튕겼다.

 

"야야, 정신 차려봐."

 

그때였다.

치지직- 전파를 잡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가.

 

"마침내 미끼를 물었--"

타앙!!

 

그라비스의 포효와 함께 라디오를 닮은 기계가 개박살났다.

그대로 선반 위에서 툭 떨어져 바닥에 엎어지는 꼴이 비참했다.

 

이후에도 몇 번의 시도가 더 있었다.

모니터나 넙데데한 무선 장치 따위를 통해서.

물론 진은 안 들어줬다.

 

"과연 백염의--" 타앙!!

"끝내 감정에 휘둘렸--" 타앙!!

"잠깐, 말 좀--" 타앙!!

 

원래 사람이 제일 빡도는 순간 중 하나가 누군가 내 말을 도중에 끊을 때다.

 

한 번만 그래도 괜히 서운하고,

두 번 그러면 슬슬 울화가 치미는 게 정상인즉.

 

무려 다섯 번.

이건 악당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못 참았다.

 

어디선가 다다다다!!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쩌어기 유리관 뒤편.

온갖 기계 장비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사내가 육성을 터뜨리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말 좀 들어! 이 빌어먹을 ㅅㅐ--!"

타앙─!!

 

진이 그라비스로 화답했다.

이걸로 여섯 번.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뒤로 날아간 가운남이 대자로 크게 뻗었다. 구멍 뚫린 이마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뭘 계속 쫑알대 쫑알대기는."

 

진이 총구를 거둬들이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에릭이 박수를 짝짝. 감명 깊은 영화를 본 관객처럼 바이저 표면에 LED 폭죽을 터뜨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히 일곱 번째는 없더라고.

 

이제야 좀 조용해진 주변에 다시 에안나를 돌아본 진이 말했다.

 

"저거 발터 맞지? 칼리파가 보여준 사진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아니야?"

"···맞아."

 

자그맣게 긍정하는 그녀에게 진이 옳다구나 덧붙였다.

 

"그럼 얼른 저걸 부수든 멈추든 해서 사람부터 꺼내야지. 왜 보고만 있어?"

 

그 말에 여전히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에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발터가 아니니까."

"엥?"

 

진의 눈썹이 휘어졌다.

이건 또 무슨 말이래.

발터가 맞는데 발터가 아니라니.

슈뢰딩거의 발터 뭐 그런 건가?

재회의 키스로 관측하기 전까진 알 수 없는?

 

그때였다.

 

"······눈썰미가 좋은데? 역시 진짜는 다르다는 건가."

 

대답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돌아왔으니-

 

이마에 구멍 뚫린 시체가 손으로 바닥을 짚어 상체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닌가.

 

말이 좋아 구멍이지. 어떻게 잘만 하면 주먹도 들어갈 사이즈다. 당연하게도 피가 철철철 쏟아졌으니, 시뻘겋게 젖은 얼굴이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내 작품이 어때?"

 

이번에는 진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이쯤 되니 한 번쯤은 뭐라고 씨불이는지 들어줘야 하나 싶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에안나의 시선이 놈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서늘한 목소리에 살아있는 시체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와중에 눈은 초점 없이 퀭하게 죽어 있었으니, 광대를 기준으로 서로 다른 얼굴을 붙여놓은 것처럼 혐오스럽기가 적수를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무슨 짓이라니. 우린 최선을 다했어. 평생 염원하던 힘을 얻게 해주려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고. 줘도 못 받아먹은 건 이 새끼야. 끝끝내 백염을 각성하지도 못한 천출! 쓰레기! 병신!"

 

저 새끼가 뭐라는 거야.

진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검지가 간질간질했다.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지만, 에안나도 참는 마당에 먼저 나서기가 애매해서.

 

아니 얘는 왜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거야?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길을 슬쩍 돌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에안나는 참고 있는 게 아니라 진즉 폭발했음을.

 

"그 사람의 불꽃이 느껴지지 않아."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게 타오르는 눈동자와 함께였다.

 

"···발터는 죽은 거지?"

"더 나은 삶을 제공한 거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작이니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말을 지껄인 반시체가 새빨간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진이 어렴풋이 깨달았다.

 

상태창이 그저 발터를 찾으라고만 한 이유를.

애초에 구할 수 없는 상태였나?

 

그때였다.

 

취이이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관을 가득 채운 연녹색 액체가 꿀렁꿀렁 순식간에 수위를 낮추자, 그 속에서 발터가 새빨갛게 물든 눈을 번쩍 떴다.

 

콰앙!!!

 

사방으로 비산하는 유리 조각 너머로 분노에 물든 포효가 터져 나왔다.

 

"A'rrrrrrrrr!!"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천장을 향해 울부짖는 용병을 확인한 진이 에안나의 어깨를 덥썩 잡아끌었다.

 

"비켜."

 

뻔한 클리셰 아닌가.

 

사랑하는 이의 흑화에 넋이 나간 비련의 캐릭터.

상대는 날 알아보지도 못하고 미친 듯이 공격하는데.

안 돼! 정신 차려! 나야 나! 제발!

그렇게 변변찮은 반격조차 못하고 걸레짝 될 때까지 처맞다가 뒤늦게 정신 차린 상대방 뺨을 어루만지며 깨꼬닥.

 

이런 복장 터지는 결말 끝에 에안나의 죽음이 있는 거라면 진은 한심해서라도 그 꼴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 뛰쳐나갈 준비를 하니-

 

다음 순간 이어진 에안나의 행동은 진의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화르륵!

 

손바닥 위로 새하얀 불꽃의 구체를 만들어 그걸 냅다 발터에게 집어던진 그녀다.

 

꽈앙!!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찬 열풍이 얼굴을 때리는 가운데.

 

멀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진에게 에안나가 고개를 돌렸다.

 

"저 빈껍데기는 내가 처리해. 그러니 방해하지 마."

 

생각지도 못한 기특한 대답에 진이 감탄했다.

너 의외로 당찬 스타일이었구나.

전대 가주가 참 뿌듯하겠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릿속에 슬금슬금 차오르는 의문이.

잠시만 그러면 도대체 얘가 위험할 게 뭐가 있지?

 

진이 휙휙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바닥을 꿈틀거리는 고깃덩어리가 담겼으니, 그 정체는 폭발한 유리관 바로 옆에 있던 가운남이라.

도대체 어떻게 살아있는지 모를 몰골이 되어선 천천히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다.

 

"백염이···제 발로 찾아왔으니, 계약은, 이행됐다···약속을 지켜라, 스틱스···"

 

뭐?

 

진이 눈을 부릅떴다.

 

스틱스라는 단어 때문만은 아니었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이 있었다. 마치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위험한 감각. 저도 모르게 고개가 젖혀졌다.

 

다음 순간.

 

천장을 부수며 추락한 검은 유성이 그대로 바닥을 들이박았다.

거대한 폭탄이 터진 듯 바닥이 통째로 뒤집히고 막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갔다.

 

──!

 

대처할 틈도 없이 벽에 처박힌 진이다.

 

허파에 있는 공기가 모조리 증발한 듯한 충격에 눈앞이 핑 돌았다.

 

그러나 순식간에 초점을 잡은 눈동자가 다시 정면을 향하니-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시야 안쪽.

 

희뿌연 연기를 뚫고 걸어 나오는 거한이 보였다.

 

180 중반쯤 되는 진보다, 최소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

 

통나무를 연상시키는 팔다리는 칼로 찔러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거대한 몸을 휘감은 검은 불꽃이라.

 

그 세기며 선명함이 발터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했으니, 자신의 만든 화구의 중심지에서 흑염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좋아. 거래 성립이다."

 

그 순간 거한의 뒤에서 거리를 좁히는 잔상이 있었다. 잔상이라 표현한 이유는 그만큼 빨랐기 때문에. 무언가 번뜩였다는 뇌의 신호가 머릿속을 스쳤을 때 에릭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단검이 거한의 목을 비스듬히 찔렀다.

그 궤적 끝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경동맥이 있었다.

더없이 완벽한 타이밍, 더없이 완벽한 속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반응.

 

텁!

 

거한이 손만 뒤로 뻗어 칼날을 움켜잡았다.

에릭은 붙잡힌 무기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곧바로 손잡이를 놓으며 뒤로 크게 거리를 벌렸다.

 

그 냉정한 판단이 그를 살렸다.

 

주먹 쥔 손등이 직전까지 에릭이 있었던 공간을 휩쓸고 지나갔다. '파앙!!!' 귀청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동시에 진이 그라비스의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 두 발, 세 발.

 

연이은 총성에 거한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 순간.

 

블링크.

 

진이 네 번째 탄환을 놈의 등 뒤에서 갈겼다.

 

결과를 확인할 틈도 없이 다시 블링크.

 

이번에는 오른쪽 사선 방향에서 나타난 진이 빙글 고쳐 잡은 그라비스를 상대의 옆구리에 내리찍었다.

 

이후 반대쪽 주먹을 크게 휘두르며 다시 블링크.

 

정면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복부에 틀어박히는 일격.

 

그리고 다시 블링···

 

진이 비틀거렸다. 느닷없는 현기증이었다.

3D 입방체로 세상을 바라보던 감각이 와그작 빠그러진 느낌. 직전까지 명료했던 좌표가 울렁울렁 일그러졌다. 심지어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어딘지도 분간이 안 갔다. 앞? 뒤? 좌? 우?

 

욱-구역질이 치솟는 와중에 진이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귓가에 붙이며 왼손을 정면으로 내질렀다.

 

정면이 정면인지도 모르겠지만.

 

뻐어어억!!!

 

직후 거대한 쇳덩어리에 부딪힌 듯 발밑으로 고랑을 만들며 콰드득 미끄러지는 진을 누군가 자신의 몸으로 붙들어 세웠다.

 

어지러운 와중에 고개를 돌리니 에릭이었다.

 

고맙다 인사를 할 틈도 없었다.

부러진 오른팔을 뿌드득! 방향만 맞게 돌려세운 진이 핏발 선 눈으로 거한을 바라봤다.

 

놈의 몸을 휘감은 흑염이 주변에 거뭇한 아지랑이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지랑이가 영향을 주는 반경으로는 블링크를 쓸 수 없었다. 비슷한 생각을 하려고만 해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으므로.

 

"잔재주를 부리는군. 애송이가."

 

거한이 그렇게 말하며 바닥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그 안에서 찌그러진 매그넘탄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저걸 다 잡았다고?

까득. 진이 이를 악물 때였다.

 

"넌 누구지?"

 

어느새 자신을 마주 보고 선 에안나의 물음에 거한이 씨익 미소 지었다.

 

"킬기트."

"···스틱스의 망령이 여긴 왜."

"거래를 했거든."

"어떤?"

"흑염을 빌려주는 대신 백염을 약속받는."

"뭘 위해서?"

"완벽한 불꽃을 위해."

 

그렇게, 건조한 질답이 오갔다. 짤막했지만 많은 것이 담긴 대화였다.

 

직후 에안나가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은 여기서 나가.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저벅저벅 정면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몸에서 새하얀 광휘가 들불처럼 피어올랐다.

 

"백염은 너 따위에게 허락되지 않아."

"재밌군."

 

다음 순간, 서로 다른 불길이 격돌했다.

 

그 중심에서 피어오른 파괴적인 열기가 지하를 휩쓰는 가운데.

 

에릭이 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당연히 탈출을 말하리라 생각했던 바이저에는 뜻밖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발터 막고 있겠음]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에릭이 달렸다.

저기 폐허 속에서 울부짖는 발터를 향해서.

 

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또 한 번 예상이 빗나갔기에.

얘네는 클리셰를 깨는 게 취민가?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상태창이.

 

분기!

당신의 선택이·····

 

꺼져!

 

읽지도 않고 네모반듯한 방해꾼을 치워버린 진이다.

 

이 순간에도 행동 양식을 지도하려는 꼴이 역겹기가 그지없어서.

 

뭐. 시발. 이 상황에 그럼 나 혼자 도망갈까?

천장에 구멍도 뚫렸겠다.

미안하다 얘들아. 아무리 그래도 스틱스는 아니지.

난 갈게. 손이라도 흔들어줘?

 

좆까.

다 살던가. 여기서 다 죽던가.

둘 중 하나니까.

 

그러고는 전력을 다해 마나 회로를 가동하니-

파지지지직!!!

주인의 난폭한 의지에 반응한 광극이 날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진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다음 단계를 허락하는 진화의 뇌성이었다.

< 42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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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화 >

자하드.

 

고요를 깨트리는.

보랏빛 광명.

 

*

 

천둥이 친다.

 

가로막은 벽을 부수고,

한 단계 넓은 세상을 맞이하는 개벽의 포효였다.

 

이 세상에선 '탈각'이라 부르는 것.

 

깨달음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다.

다만 조건을 갖췄을 뿐.

 

진은 신경도 안 썼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몰랐다.

 

그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숨 쉬듯 자연스럽게 광극을 이끌었다.

 

그렇게.

 

파지지지직!

 

본인의 의지로 처음 보랏빛 번갯불을 전신에 휘감은 그다.

감정이 격해지거나, 특정한 상황에 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현상이었다.

 

머리에 피 쏠렸을 때라 몰랐던,

기껏해야 잠깐 유지했을 뿐인,

하지만 지금은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든 감각.

 

그리고 이 순간에도 뇌리를 파고드는 낯선 심상들.

 

진이 냅다 바닥을 박찼다.

그 모든 걸 천천히 소화할 시간이 없었기에.

 

그러니 일단 돌진이다.

 

번갯불 휘날리며 나아가는 방향 끝에 흑백으로 뒤엉킨 불꽃이 보였다.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겁화라고 했던가.

세상이 파멸하는 날 타오른다는 큰 불길. 그게 눈앞에 펼쳐지고 있더라고.

 

진이 진심으로 놀랐다.

 

아무것도 모를 땐 그냥 대단한갑다 넘겼던 것이, 지금에선 헉-소리 나는 격차로 다가왔기에.

 

그로서는 처음 보는 수준의 싸움.

 

하지만 거기서도 우열은 존재했으니-

 

콰앙!!

 

폭음이 터졌다.

 

동시에 연기를 뚫고 나타나는 익숙한 등짝.

 

진이 반사적으로 팔부터 벌렸다.

어느새 코앞까지 날아온 에안나다.

뒤에서 감싸며 오른발로 바닥을 박찼다.

 

직후 들려오는 '파앙!!' 공기 터지는 소리.

 

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진이 허공을 크게 한 바퀴 휘돌아 착지했다.

허리를 감싼 팔에서 힘을 풀면서다.

자연스럽게 에안나도 바닥에 발을 붙이는 가운데.

 

"먼저 간다."

 

한마디만 남기고 진이 다시 돌진했다.

 

파지지직!!

난폭하게 솟구치는 자전.

 

거한, 킬기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주 달려오는 진을 향해 거대한 주먹을 내지르니-

 

그 궤적을 따라 충격파가 원형으로 터져 나왔다.

 

소닉붐이라고?

이건 선 넘었다 생각하면서도 진은 용케 피했다.

 

보고 피한 게 아니다.

공격이 날아들기 전 미리 방향을 읽고 움직였을 뿐.

 

방식 자체는 총알을 피했을 때와 같았지만, 지금은 온몸의 감각을 극한까지 활용한다는 점이 달랐다.

 

광극에서 뇌기가 줄기차게 뿜어진다.

 

이제는 진도 안다.

 

이게 단순히 눈요깃거리 이펙트가 아니라, 실체화될 정도로 강렬한 생체 전류라는 걸.

 

해서 덩달아 강화된 신경계가, 그로 인해 한층 선명해진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으니-

 

그래도 저 주먹은 터무니없이 빠르다.

보고는 못 피한다.

그래서 미리 파악하는 거다.

 

찰나의 시선 처리, 미세한 호흡의 변화, 가변하는 무게중심까지. 그 모든 것을 사전에 감지하고···

 

지금!

 

진이 크게 상체를 숙였다.

동시에 왼쪽 대각선 위로 포탄 터지는 소리.

고막이라도 나갔는지 귓가가 얼얼했다.

 

하지만 피했다는 게 중요한 거다.

그만큼 거리는 좁아졌고.

그럼 이쪽도 주먹을 내지를 수 있으니까.

 

콰앙! 뇌전을 두른 앞손이 거한의 안면을 때렸다.

진은 멈추지 않았다.

물 흐르듯 상대의 옆구리에 뒷손을 꽂아 넣은 뒤, 자연스레 회수된 앞손으로 다시 반대쪽 옆구리를 때렸다.

 

순간 거한이 물러섰다.

하지만 진은 거기서 더 몰아붙이는 대신 힘껏 거리를 벌렸다.

직후 산사태처럼 떨어진 거대한 주먹이 직전까지 그가 서 있던 바닥을 내리찍었다.

 

지면이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그 여파에 진의 몸도 붕 떠올랐다.

 

시야 안쪽에서 훅 커지는 거한이 보였다.

공중에 몸이 뜬 상태라 대처가 여의치 않다.

상대도 그걸 모를 리 없으니, 이번에야말로 격살시키겠다는 듯 주먹을 뻗어온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로 피어오른 백염이 소닉붐을 일으키는 주먹을 받아냈다.

 

큼직한 폭발을 뒤로한 채 바닥에 착지한 진이다.

뒤이어 그 옆으로 에안나가 나란히 착지한 가운데.

희뿌연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킬기트가 말했다.

 

"애송이, 너 자하드였냐?"

 

진이 고민했다.

 

아니라고 하자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고.

입을 꾹 닫고 있으려니, 숨 돌릴 시간은 필요하더라.

 

해서 당당하게 어깨를 펼치길.

 

"보고도 몰라?"

 

이 순간만큼은 진 에버나이트가 아니라,

진 자하드가 되기로 마음먹은 진이다.

 

그러면서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으니, 오히려 옆에 있던 에안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라.

 

진이 더 당당해졌다.

사칭 좀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어차피 모르잖아.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진의 말을 거짓이라 보기 힘든 것이, 원래 가문의 정통성이라는 건 결국 비전마법으로부터 비롯되는 법이라서.

 

비전이 괜히 비전이겠는가.

천 년 역사 동안 선택받은 이들만이 쟁취한 힘이었으니.

 

대놓고 보랏빛 전광을 휘감은 진의 주장은 그 모습 자체로 설득력이 차고 넘칠 수밖엔.

 

해서 질문이 이어졌다.

 

"자하드가 여기에는 왜?"

 

순간 '럼펌펌펌'을 입에 담을 뻔했던 진이 얼른 말을 바꿨다.

 

"그게 중요해? 중요한 건 네가 가문을 두 개나 건드렸단 거야. 감당할 수 있겠냐?"

 

얘 아빠가 누군지 아냐고, 콱 씨!

 

일단 되는대로 지껄인 진이 킬기트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나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까?

음 생각보다 일이 커졌군, 곤란한데.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더라.

 

"완벽한 불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킬기트가 그렇게 대답했다.

옅은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은 어딘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으니.

 

씨, 안 통하네.

이어질 싸움을 직감한 진이 주먹을 불끈 쥘 때였다.

 

"당신,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어느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에안나가 천천히 뒷말을 덧붙였다.

 

"끝내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라면···저기 빈껍데기부터 처리해 주겠어? 더는 그 사람이 욕보이지 않았으면 해."

"뭐?"

"그럼, 부탁할게."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그녀가 킬기트와 격돌하는 가운데.

 

진이 고개를 휙 돌렸다.

 

"Arrrrrrrrr!!"

 

멀리 짐승처럼 울부짖는 발터가 에릭을 연신 몰아붙이고 있었다.

 

진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사이 180도로 변해버린 용병의 모습 때문이었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이며, 그 안에서 번뜩이는 이빨이며, 과하게 비대해진 팔다리 근육과 그 끝에 번뜩이는 날카로운 손발톱까지.

 

그 와중에 전신을 휘감은 흑염은 에릭을 위협하는 걸로 모자라, 본인의 살갗마저 불태우고 있었으니.

 

그때 발치에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쓰레기 같은 실패작 같으니라고. 비싼 돈 들여가며 신체를 강화해 주면 뭐 해. 끝내 흑염을 감당하지도 못하는데. 이래서 미천한 놈들한텐 투자를 하면 안 된다니까. 그렇지 않아?"

 

바닥에 쓰러진 고깃덩어리가 실실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진이 곧바로 놈의 머리통을 발로 으깼다.

뭐라는 거야. 개새끼가.

 

마음 같아선 몇 번이고 지근지근 짓밟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 에릭이 위험했으니까.

 

진이 바닥을 박찼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손톱이 에릭의 목을 베어버리기 전에 먼저 발터의 몸을 어깨로 힘껏 들이받았다.

 

쾅!!

 

그대로 주르륵 밀려난 발터가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좌우로 크게 터는 사이.

 

순식간에 뒤따라온 진이 사타구니를 향해 발등을 힘껏 차올렸다.

 

아직까지도 거기가 급소인지는 모르겠지만, 효과는 확실해서 발터의 상체가 아래로 숙여졌다.

 

동시에 추락하는 머리통을 반기는 강철 같은 무릎이.

 

콰직! 검은 핏물을 터트리며 발터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이 한 방에 얼굴이 완전히 짓뭉개졌다.

 

하지만 놈은 그 와중에도 양팔을 크게 휘둘렀다.

저조차 불태우는 흑염이 허공에 손톱자국을 남기며 X자로 크게 교차하려는 순간.

 

진이 떨어지는 손목을 덥썩 움켜잡았다.

 

오른손은 왼쪽 손목을,

왼손은 오른쪽 손목을.

 

그리고 이어지는 박치기.

쾅! 쾅! 쾅! 쾅!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어느 순간 진이 뒤로 젖힌 머리를 우뚝 세웠다.

손아귀에 잡힌 상대의 팔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깨닫고서였다.

 

그런 그에게 에릭이 다가왔다.

 

얼굴에 뭔가를 띄워내긴 했는데, 바이저 표면이 깨진 탓에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충 고맙다는 뜻이겠거니 넘겨짚은 진이 발터를 뻥 걷어차며 말했다.

 

"가자."

 

그에 에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의 벨트에서 새로운 단검을 뽑아 들었으니.

 

더 이상의 대화는 무용하다고.

 

곧바로 뒤엉킨 불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 두 사람이다.

 

이미 지하실은 극한의 환경이 조성된 지 오래였다.

 

평범한 사람은 수십 초 안에 온몸의 피부가 벗겨지고 혈액이 펄펄 끓어올라 죽게 될 정신 나간 열기 속에서 쉴 새 없이 맞부딪히는 두 인영이 보였다.

 

팽팽한 상황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힘싸움에서 밀리는 쪽은 에안나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초인과 이미 오래전부터 도시의 전설이었던 괴물의 싸움이었으니,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고.

 

진이 생각했다.

시발. 이게 어떻게 쉬움이야.

 

하지만 이 또한 찰나였을 뿐.

그는 머릿속에서 핑계를 지웠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에 의문을 품어봐야 달라지는 건 없으니, 그저 이 세상이 게임이라는 걸 혼자 인정하는 꼴밖에 더 되냐고.

 

그랬기에 잡념을 비우며 머릿속으로 강하게 소리쳤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는다!

 

다음 순간.

 

진이 전력을 다해 검은 불꽃에 맞부딪혔다.

 

그는 주먹을 날리고, 무릎을 차올리고, 팔꿈치를 내리찍고, 필요하다면 방아쇠를 당기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 모든 공격은 에안나를 지원하는 것임과 동시에 저 스스로가 승리를 가정하고 때려박는 필살의 일격들이었다.

 

에릭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한계까지 가속한 몸으로 불길을 헤쳐가며 단검을 휘둘렀다. 칼날은 상대의 강철 같은 몸을 뚫어내진 못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빈틈을 찾아 공격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합류로 겨우 여유를 되찾은 에안나 역시 사력을 다해 백염을 불태웠다. 저주받은 흑염이 그녀의 의지에 잠시나마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킬기트가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이 기껍다는 듯, 놈은 홀로 우뚝 서서 몰아치는 공격을 전부 받아냈다.

 

1초가 10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가장 먼저 쓰러진 건 에릭이었다.

 

거대한 주먹이 그의 바이저를 후려쳤다.

트럭에 치인 것처럼 날아간 솔로가 그대로 벽에 등을 박고 불길 속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일어서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공백. 급격히 무너지려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진이 자기파괴적 심상에 몸을 맡겼다.

 

[마나 폭주]

 

자전 위로 붉은 기운이 덧씌워졌다.

 

이때쯤 진은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몰랐다.

그저 에릭의 몫까지, 어쩌면 그 이상으로 홀로 시간을 벌었다.

 

몇 번은 유효타라고 할 만한 것이 들어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얼마나 기절했던 거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 멀리, 이제는 홀로 싸우는 에안나를 향해서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시야의 바깥에서 누군가 저벅 걸음을 옮기는 것이 느껴졌다.

 

에릭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뜻밖의 인물이었다.

얼굴이 짓뭉개진 채 아주 천천히 한 발짝, 또 한 발짝 전진하는 그는 발터였다.

 

진은 그를 바로 지나치지 못했다.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시선 속에서 그로선 이해하지 못할 감정의 파랑이 요동치고 있었기에.

 

다음 순간, 발터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 순간에도 스스로를 태워내는 흑염이 아니었다.

더없이 숭고한 열기.

그의 평생이 허락하지 않았던 불꽃.

 

백염.

 

불꽃이 타올랐다.

그리고 이내 흑염과 뒤섞이니.

 

투명한 불꽃이 절망 속에서 불씨를 피워냈다.

< 43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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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화 >

*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그 사람이 사라졌을 때.

그리고 영영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에안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여긴 로스트 시티였으니까.

 

거대한 빌딩의 그림자가 사람들의 영혼을 집어삼키는 도시. 삶과 죽음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만화경.

 

발터는 심지어 용병이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삶이었으니, 크게 다치거나 사경을 헤맨 날이 적지 않았다.

 

에안나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선택받지 못한 남자가 선택한 삶이었기에.

 

그래서 연습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이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 부재감에서 오는 슬픔을, 그 슬픔마저 희미해질 먼 미래를 혼자 머릿속에 그려냈다.

 

분명 우중충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랬으니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겠지.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웃었나? 걱정하는 사람 무안하게 울어버렸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오래된 이야기였다.

가끔 꿈에서 나오는.

 

 

발터는 유리관 안에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간만에 곤히 자는 듯한 모습이라 그랬을까.

 

눈앞의 저것이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에안나는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2년 만의 재회는 그렇게 조용히, 마주할 수 없는 시선 속에서 끝이 났다.

 

어느 순간 분노가 밀려왔다.

유일하게 연습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는 흑염의 주인이 있었다.

 

스틱스의 망령.

저주받은 동족포식의 불꽃을 다루는 자.

 

들어본 적 있다.

세대를 거듭하며 이어진 일인 전승의 이단.

그중에서도 최강이라고 했던가.

 

에안나는 죽음을 각오했다.

 

살아남을 수 없음을 직감해서가 아니었다.

숭고한 사명감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휘몰아치는 분노를 마음이 텅 빌 때까지 게워 내고 싶었다.

 

그랬기에 그 결과는 그녀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도망치라고 했던 건데.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에안나의 눈이 흔들렸다.

 

어느샌가 자신의 곁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 때문에.

 

만약의 사태를 위한 거라며, 그 여자 링커가 붙여준 이들.

 

솔직히 탐탁지 않았다.

 

저보다 약한 이들이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이 순간 자신이 살아있을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저 둘 덕분이었으므로.

 

그들이 끊임없이 부담을 덜어준 덕분에 그녀는 이단자의 불길에 계속해서 맞설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언제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들이 저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게.

 

솔로라서?

단순히 의뢰인을 지켜야 하기에?

 

아니, 그렇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저들이 조금 특별한 경우겠지.

 

···특별한?

 

문뜩, 아주 문뜩 궁금해졌다.

발터도 저런 용병이었을까.

 

왠지 그랬을 것 같았다.

그는 책임감이 넘치던 사람이었으니.

그래, 그 점을 좋아했었다.

 

어느 순간.

 

에안나는 분노마저 잊었다.

그저 백염을 피워올리고 또 피워올렸다.

이미 한계에 달한 몸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콰직!

 

가장 먼저 헬멧을 쓴 솔로가 쓰러졌다.

 

곡예나 다름없던 움직임은 한 번의 일격에 무너지고 말았으니, 그가 불길 속으로 쓰러짐과 동시에 파괴적인 붉은빛이 솟구쳤다.

 

자전을 두른 사내.

그가 동료의 빈자리를 메꿨다.

 

아니 메꿨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는 홀로 균형을 맞춘 것도 모자라, 일순간 전투의 흐름을 이쪽으로 가져오기까지 했기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압축된 검은 불길에 연이어 얻어맞은 자하드의 핏줄이 벽과 바닥에 차례로 머리를 처박고 쓰러진 지금.

 

남은 건 에안나 뿐이었으니.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몇 번의 공방을 거쳐, 끝내 바닥에 쓰러진 그녀에게로 킬기트가 쿵쿵 육중한 걸음을 옮겼다.

 

어지간한 수인조차 압도하는 덩치.

 

올려다보는 시선에선 가히 거인이나 다름없는 존재를 향해 에안나가 핏물을 쿨럭이며 물었다.

 

"···흑염을, 흑마법사들에게 제공, 한 건가?"

 

그에 킬기트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작은 불씨에 불과하긴 했지만."

"···어째, 서?"

 

에안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일인 전승이라는 건 그 나름의 비전이다.

불온한 힘이라고 할지언정, 세월을 거듭하며 이어진 유산이라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을 눈앞의 사내는 타인에게 편린이나마 제공했노라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으니-

 

"왜 가문의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벅찬가 보지? 그저 거래일 뿐인데도."

 

킬기트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그의 몸을 휘감은 흑염이 한층 더 거세게 타오르며 주변 공간을 거뭇한 아지랑이로 물들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현기증을 유발하는 모습.

하지만 에안나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그저 거래? 그게 당신이, 그 힘을 대하,는 방법이야?"

"뭐가 문제지?"

 

킬기트가 한 걸음을 쿵 내디뎠다.

숨이 죄어올 정도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함께.

 

"내가 바로 흑염이다."

 

다시 한 걸음.

 

"이 힘으로는 누구도 날 능가할 수 없다."

 

에안나의 코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누구도!"

 

그대로 압박감에 질식할 것만 같은 그때.

 

"······?"

 

불현듯 킬기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서서히 눈썹을 추켜세우니.

 

쿨럭쿨럭 핏물 섞인 기침을 토하던 에안나 또한 같은 방향을 향해 힘겹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투명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그 너머 따스한 시선을.

 

 

 

***

 

 

 

뭐야, 이건 또.

 

진이 당황했다.

진짜로 당황했다.

 

마나 폭주를 가동한 마당이다.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멀뚱히 서 있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안다.

 

···아는데!

저걸 어떻게 그냥 지나쳐.

 

발터가 걷고 있었다.

 

아주 그냥 개박살을 내서 마지막에 뻥 차서 날려버린 그 녀석이, 느릿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완전히 짓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얼굴에 그나마 눈이라고 뚫린 구멍 두 개. 그마저 하나는 완전히 으깨져 멀건 액체가 줄줄 흐르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멀쩡한 오른쪽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더라고.

 

물론 동공과 흰자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시뻘건 눈알인 건 이전과 똑같았지만, 그 안으로 느껴지는 감정만큼은 더는 폭력적이지 않아서.

 

지금이라도 마무리를 지을까 말까 고민하던 진이 끝내 주먹에서 힘을 푸는 순간.

 

발터의 몸에 불길이 치솟았다.

 

백염이었다.

에안나와 같은 숭고한 열기.

솔라드의 비전.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으니.

 

새하얀 불길이 주인의 몸을 뒤덮은 흑염을 만나 소리 없이 뒤섞였다. 그리고 공멸을 예상한 진의 예측을 비웃듯 어느 순간 하나가 되어 투명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경계였다.

어렴풋한 윤곽 같기도 했고, 투명한 파동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광경이 진의 머릿속에 조용히 스며드는 순간.

 

"···!"

 

멀리서 킬기트가 번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는 발터를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으니-

 

무어라 소리치는 그를 향해 발터가 보폭을 넓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어느새 달리기 시작한 그의 입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어눌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Arrrrrrrgh!!!"

 

진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스쳐 가는 발터와, 광소하며 주먹을 말아쥐는 킬기트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낸 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닥을 박차고, 발터를 앞질러, 그렇게 킬기트의 정면으로 돌진했다.

 

본능이 그러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은 자신의 본능을 믿었다.

 

원래라면 무조건 피했을 주먹을 향해 맞잡아 주먹을 내지른 것 또한 전부 그 때문이었으니-

 

진은 마음을 먹었고, 그렇게 뇌기는 동조했다.

 

꽈릉!

 

벼락이 친다.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내리꽂히는 것이 아닌, 일직선으로 곧게 뻗으며.

 

다음 순간.

 

허공에서 두 주먹이 충돌했다.

귀를 찢는 굉음은 그다음에야 울려 퍼졌다.

 

──!!

 

맞닿은 주먹 사이로 충격파가 터졌다.

 

원래라면 공중으로 흩어져야 했을 힘이 고스란히 진과 킬기트의 팔로 역류했다.

 

펑! 펑! 펑! 펑!

 

손에서부터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이어지는 모든 근육과 뼈가 일시에 터지고 깨지는 소리.

 

진의 오른팔이 머리 뒤로 확 젖혀지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몸이 그대로 붕 떠올라 크게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허공을 나는 그의 눈에 주춤거리는 킬기트의 모습이 담겼다.

그런 그를 와락 끌어안는 발터의 모습도.

 

직후 거대한 불꽃이 치솟았다.

 

"Arrrrrrr!!"

 

이지를 상실한 괴성. 하지만 그런 발터의 몸에서 솟구친 불길은 더없이 찬란했으니, 영혼을 태워 밝히는 불꽃은 그렇게 흑염을 살라먹고 킬기트의 몸을 불가사의한 질량으로 짓눌러 바닥에 처박았다.

 

그사이 왼손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킨 진이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고, 눈앞은 핑핑 돌고, 오른팔은 누가 믹서기에 넣고 돌린 것처럼 끔찍하게 아팠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그라비스를 꺼내 킬기트의 머리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안 통하는 거 안다.

근데 빡쳐서 이대로는 못 가겠다고.

 

"럼펌펌펌의 복수다!"

 

기어이 머리통이 가볍게 흔들리는 꼴을 보고서야 고개를 돌린 그가 바닥에 쓰러진 에안나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등을 보이며 자세를 낮추길.

 

"업혀. 빨리."

 

에안나는 멍청하게 되묻지 않았다.

곧장 팔을 뻗어 진의 목을 감쌌으니.

그러면서도 시선은 다른 쪽에 고정된 상태였다.

 

"···발터?"

 

귓가를 스치는 혼잣말 속에 몸을 일으킨 진이 이번에는 불길 속에 축 늘어진 에릭을 향해 다가갔다.

 

눈앞이 흐릿한 게 얘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더라.

하지만 시체라도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없었기에 일단 들었다.

 

"···큽!"

 

그 즉시 걸레짝이 된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진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삼킬 때였다.

 

"Arrrrrrr!!!"

 

포효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여전히 투명한 불꽃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거기에 파묻힌 킬기트가 거대한 팔을 훙훙 휘두르며 불길을 떨치려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진은 이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킬기트를 감싸안은 발터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후두둑 부서져 흩어지고 있었기에.

 

그때였다.

 

이제는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상해버린 머리통이 이쪽을 바라본 것은.

 

그리고 울려 퍼지는 외침.

 

"Gaaaaaa!!!!"

 

동시에 진이 시커먼 연기가 솟구치는 천장의 구멍을 향해 뛰어올랐다.

 

눈에 뵈는 것도 없고, 열기에 노출된 피부가 그대로 녹아내렸지만, 가까스로 턱을 밟고 올라서는데 성공한 그가 등 뒤로 발터의 이름을 울부짖는 에안나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텅!

 

비상문을 걷어차고 깜빡깜빡 끊어지는 정신줄을 부여잡으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내려올 때는 금방이었던 길이 이렇게 멀 수가 없더라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속적인 열기에 변형, 팽창해 버린 빌딩이 지하를 기준으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진이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갈기갈기 찢겨버린 마나 회로로 인해, 광극과 마나도 쓸 수 없었기에 정말 몸뚱어리 하나만 믿고 옥상까지 다다른 그가 저기 눈앞에 보이는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목을 감싼 채로 의식을 잃은 에안나 그리고 에릭과 함께 풀썩 주저앉은 그가 이제는 정말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말했다.

 

"···안전한 곳, 으로 출발, 해······"

 

[이륙합니다]

 

이윽고 불꽃을 뿜어내는 엔진음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진의 눈앞에 (완료!) 성공을 축하하는 상태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의식이 끊겨버린 그는 이를 보지 못했다.

< 44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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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

···!! ···!!

 

물 먹은 듯 멍한 귓속으로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진이 생각했다.

눈꺼풀이,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고.

고작 한 겹짜리 얇은 피막 주제에 도저히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아서.

 

진이 끙,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밤새 아파본 사람은 다 공감할 혼자만의 싸움.

몸은 가위에 눌린 것처럼 움직이질 않는데, 힘들기는 뒤지게 힘든 상태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진짜 겨우겨우 눈을 뜨니, 세상이 온통 시뻘겋게 번쩍거리고 있더라고.

 

그에 진이 화들짝.

지옥인가?!

나 죽은 거야?

 

그와 동시에 살면서 지은 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으니.

 

아로스 PC방 사장님, 22번 자리 CD키 뽀려서 죄송합니다. 집에서 워크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제가 그때 초등학생이라 용돈이 일주일에 꼴랑······!

 

참회의 브리핑을 시전하던 진이 어느 순간 눈을 천천히 끔뻑끔뻑.

잠깐만, 죽었는데 주마등이 스칠 수가 있나?

 

집 나갔던 정신머리가 돌아왔다.

 

그러자 한참 전부터 정신 좀 차리라고 시끄럽게 보채던 비상벨이 뒤늦게 귓가에 웽웽웽웽!

 

그리고 이어지는 낯선 목소리가.

 

[경고, 기체 손상 감지]

[신속히 탈출하십시오]

[경고, 기체 손상 감지]

[신속히···]

 

반복되고 강조되는 소리는 강아지만 불안하게 하는 게 아니라고.

 

이게 무슨 일이야.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던 진이 어욱! 비명과 함께 다시 쓰러졌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 때문이었다.

정정해야겠다. 아무래도 지옥 맞는 거 같다.

아니면 이렇게 아플 리가.

 

진이 고통을 삼키느라 핏대를 잔뜩 세웠다.

홍당무가 된 얼굴이 이를 악문 채 부들부들.

 

하지만 계속 그럴 수도 없다.

들리지 않았을 때라면 모를까.

이 순간에도 탈출하라 난리를 떠는 AI 음성을 무시할 순 없었으니까.

 

결국 아픔을 참고 몸을 일으킨 진이다.

 

대놓고 기울어진 수송선 내부가 보였다.

그러고 저기 구석에 각각 기역 자, 니은 자로 처박힌 에안나와 에릭의 모습까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여기서 나가야겠다, 판단한 그가 쓰러진 두 사람의 발목을 하나씩 잡고 질질 끌었다.

모양새가 썩 좋진 않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당장 진부터가 취객이나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나아가는 중이었으므로.

 

해서 어렵사리 수송선 입구에 다다르니,

센서에 이상이라도 생긴 걸까?

문이 돌부리에 걸린 것마냥 반쯤 열리다 닫히고 다시 열리다 닫히고를 반복하고 있더라.

 

타이밍 잡고 싹- 지나가기엔 공간이 여의찮은 데다 지금은 함께 지나가야 할 부상자도 둘이나 있어서.

 

진이 벽을 더듬거려, 플라스틱 덮개를 열어젖히고, 그 안의 수동 개폐 버튼을 꾹 눌렀다.

 

이후 문을 직접 밀어젖혀 수송기에서 내려선 그가 낯선 풍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또 어디야?

 

무채색 흐릿한 하늘 아래, 황무지가 보였다.

삭막한 바람이 불어오는 땅.

개간되지 않아 퍼석퍼석한 잡초가 즐비한···

 

아니 그래서 어디냐고.

분명 안전한 위치로 가달라고 말하지 않았나?

 

진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불붙은 기체가.

 

"헉."

 

깜짝 놀란 진이 서둘러 에안나와 에릭을 수송선에서 멀찍이 떨어진 땅바닥으로 옮겼다.

 

한숨은 돌렸고.

 

저답지 않게 벌써 지쳐버린 진이 무릎에 손을 얹은 채 불타는 수송선을 바라봤다.

 

설마 격추당한 건가?

 

그게 아니고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잘 날던 수송기가 느닷없이 황무지에 떨어질 일은 없었으니까.

 

해서 진이 머리를 굴리길.

 

누구 짓이지.

설마 킬기트?

아니면 액타비스 컴퍼니?

그도 아니면 살아남은 용병?

 

당연하게도 이렇다 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셋 다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진이 생각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수송선으로 돌아가서 블랙박스라도 확인-

 

"꺼윽···!"

 

저도 모르게 아픈 소리가 터진다.

자연스럽게 통증이 밀려온 곳으로 이동한 시선이 오른팔에 닿은 순간.

 

"미친."

 

진이 흠칫 놀랐다.

이게 내 팔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점퍼가 터져 겉으로 드러난 팔은 멀쩡했을 때와 비교해 족히 2배는 부풀어 있었기에.

 

단지 붓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니.

 

손등부터 어깨에 이르는 오른팔 전체가 그야말로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이 정도면 멍이 아니라 괴사에 가까워 보일 정도.

 

진조차 제 몸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걸 보는 건 처음이라서.

 

가늠해 보길, 완치까지는 최소 사나흘은 걸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사박-

 

이질적인 소리를 감지한 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가까워지던 인기척이 우뚝 멈췄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잠깐 이어지나 싶더니, 이윽고 근처 큼지막한 바위 뒤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켰네?"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그는 꾀죄죄한 차림새의 남자였다.

여기까지는 노숙자와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지만, 멜빵끈 연결된 소총과 탄띠는 얘기가 다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예닐곱 쯤 된다면 더더욱.

 

"어떤 병신이 발소릴 냈대?"

"올슨일걸?"

"나 아니거든 씹쌔야."

"잡아떼는 거 보니까 맞네."

 

어느새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 사내들이다.

 

그중 하나가 쓰러진 에안나의 얼굴을 훑으며 말했다.

 

"와 씨이발. 생긴 거 봐라. 존나 예쁘네."

 

그러자 곁에 있던 놈이 도끼눈을 뜨길.

 

"눈독 들이지 마. 오늘은 내가 첫 번째야."

"왜 니가 첫 번짼데?"

"저번에 꼴등으로 쑤셨으니까! 이 좆만아!"

"닥치고 누가 저기 수송기부터 뒤져 봐!"

 

진이 대충 돌아가는 꼴을 깨달았다.

 

도시 바깥에서 활동하는 폭력 조직이 있다더니 딱 저런 놈들이구나 하고.

 

짐작건대 추락한 수송기를 보고 몰려든 게 아닐까?

 

근데 이 새끼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진이 삐딱하게 서서 놈들이 떠드는 꼴을 바라봤다.

 

뭐라 뭐라 격렬하게 싸우긴 하는데, 욕설을 걷어내고 나면 그냥 이렇게 요약이 가능하더라고.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하자!

아우! 아우! 아우!

저 헬멧 대가리는 뭐지?

몰라 남자면 죽이고 여자면 겁탈하자!

아우! 아우! 아우!

 

더는 들어줄 필요가 없다 생각한 진이다.

곧바로 가장 가까운 놈의 면상에 그라비스를 갈겼다.

 

타앙-!!

 

머리통 하나가 박살 났고, 진은 이를 악물었다.

반동만으로 몸이 부서질 것 같았기에.

 

이게 다 마나 폭주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걸레짝이 된 몸뚱이거늘, 안쪽으론 마나 회로까지 갈기갈기 찢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오장육부가 난자당하는 듯한 고통이 엄습하는 상황.

 

하지만 움직였다.

 

방금 전 한발로 총알이 다 떨어진 그라비스를 손에서 놓으며 정면으로 달렸다.

 

쓰러지는 시체의 손에서 소총을 낚아채 주변으로 난사했다.

셋이 더 쓰러졌고 남은 둘이 응사했다.

진이 바닥을 굴렀다.

그 상태로 방아쇠를 당겼다.

남은 둘도 쓰러졌다.

하지만 진도 날갯죽지와 오금에 총알을 맞았다.

 

순식간에 끝난 싸움.

 

한동안 엎어진 자세 그대로 숨을 고르던 진이 꿈틀꿈틀 몸을 일으켰다.

그라비스를 챙겨 홀스터에 채운 뒤, 시체들의 품을 차례차례 뒤적거리는 순간.

 

콰앙─!!

 

수송선이 폭발했다.

 

"······시발."

 

짜증 낼 힘도 없었던 진이 하던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시체들의 품에선 건질 게 아무것도 없더라.

 

애초에 도심 밖에서 생활하는 놈들이다.

도태됐거나, 도망쳤거나.

어느 쪽으로든 열악할 수밖엔.

 

그나마 물이라도 한 병 찾은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라고.

비틀거리며 에안나와 에릭을 향해 되돌아온 진이 그들의 입에 물을 흘려 넣었다.

 

에릭 같은 경우는 바이저를 어떻게 벗기는지 몰라, 평소 빨대를 꽂던 구멍 안으로 쪼르륵 물을 따랐다.

 

그러고 나니 찰랑찰랑 바닥을 보이는 물병이라.

 

정작 본인은 입술만 적신 진이 빈 병을 어깨 너머로 휙 던졌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

 

"···괜, 찮아?"

 

에안나였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흐릿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깼냐?"

 

그러자 다시 똑같은 질문.

 

"괜찮, 아?"

 

그제야 진이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핏물로 축축해진 바지가 보였다.

평소라면 진즉 멎어야 할 피가 오늘따라 늦게까지 흐른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안 좋긴 진짜 안 좋은 거 같다고.

 

하지만 심각해 보이는 건 에안나 쪽도 마찬가지다.

분명 마나 회로에 이상이 올 정도로 힘을 쏟았기는 이쪽도 매한가지였을 테니, 식은땀을 바가지로 흘리는 그녀의 얼굴은 열병을 앓는 환자처럼 새빨갰다.

 

그리고 보통 저런 사람은 오한을 느끼고 있을 확률이 높다.

체온이 올라간 만큼, 외부 온도가 낮다고 느끼기에.

 

"난 괜찮고. 넌 이거 입어."

 

진이 그렇게 말하며 오른팔이 터진 항공 점퍼를 에안나의 어깨에 둘렀다.

 

그사이 수송기 쪽에서 2차 폭발이 일어났다.

 

이제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단 판단을 내린 진이다.

 

저 불길을 보고 어떤 쓰레기들이 모여들지 모른다.

그러다 보면 결국 자신도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올 거라고.

 

해서 무거운 몸을 일으킨 그가 에안나 쪽으로 등을 내밀었다.

빌딩을 탈출했을 때와 같았다.

 

에안나는 등에 업혔고, 진은 최대한 상체를 굽힌 채 노는 팔로 에릭을 들었다.

 

원래 어부바라는 게 업힌 사람 허벅지를 손으로 받쳐야 안정감이 생기는 법이었지만, 챙겨야 할 놈이 하나가 더 있으니 어째.

 

이런 불편한 자세라도 그냥 갈 수밖엔.

 

그래서 진은 걸었다.

 

방향을 하나 정해놓고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어느덧.

 

하늘의 색이 차차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귓가에 에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 해."

"뭐가?"

"몰래 나온, 거라서···가문에,서 당장 날 찾는 게···쉽지 않을 거야."

"단말기는?"

"열기에 녹은 거, 같아···"

"이래서 순수주의자들이 안 된다는 거야."

 

진이 피식거렸고, 에안나의 손이 그의 관자놀이 부근을 스쳤다.

 

"당신,도···마찬가지잖아."

"뭐 그렇긴 하지."

 

어둠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즈음 진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호흡이 점차 가빠질수록 에안나의 떨림도 점점 심해졌다.

 

가끔 그녀의 머리가 풀썩 어깨 위로 떨어질 때면 진은 힘든 와중에도 그녀를 깨웠다. 잘은 모르지만 저렇게 잠들면 큰일 나지 않나 싶어서.

 

그러면 에안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얼마 못 가 다시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그런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어느새 하늘엔 별이 떠있었다.

 

이제는 진도 슬슬 한계였다.

 

팔다리에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헐떡거리는 것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에안나가 말했다.

 

"···뭐 좀 물어,봐도 돼?"

"뭔데."

"그건, 발터였을까?"

"······"

 

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고민을 이어가다가,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괴물은 아니었어. 그건 확실해."

"···그렇,지?"

 

다행이다.

에안나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머리를 떨궜다.

또 잠드나 싶어 진이 급히 말을 붙였다.

 

"야야. 너 나중에 다운타운 또 올 거야?"

"···그건 왜?"

"오면 내가 맛집 데려가 줄게. 내 친구들도 소개해 줄 겸."

"거기가 어딘,데?"

"럼펌펌펌이라고-"

 

진이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거기가 주방장이 인간이 아니라 로봇인데···

휴머노이드? 아니, 그냥 기계팔만 왔다 갔다 해.

덕분에 연중무휴 24시간 영업이라 진짜 괜찮아.

 

사소한 단점이라면, 주방장이 간을 영 못 맞춘다는 거?

그래도 애는 착해.

1초도 안 쉬고 거기서 일만 하잖아.

잠깐만-. 그러면 잘해야 하는 건가?

 

아무튼 노래! 거기가 또 노래가 참 좋은데.

내가 2층 스피커를···

 

진이 계속 떠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기에.

 

어느 순간 등 뒤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음에도 입술을 달싹이길 멈추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진의 가슴 속에 아주 작은 불씨가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은.

 

인지도 하지 못할 정도로 작은 열기.

불꽃이라기엔 너무나 하찮은.

하지만 그것은 분명 그곳에 있었다.

 

동시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

NEO ?? ??? 자하드

??? ?? ???? ????

?? ??? ?? ?? 누군가의 불씨

━━━━━━━━━━━━━━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진은 그걸 보고도 그냥 걷기만 걸었다.

 

그렇게 또 한참이 흘러.

 

코와 입으로 피를 주르륵 쏟으며 멈춰 섰을 때.

 

거짓말처럼 누군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또각또각.

굽 높은 구둣발 소리.

그와 함께 훅 끼쳐오는 달콤하면서도 스모키한 향기.

 

"여기 있었구나.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너, 어떻게, 여길···"

 

진의 물음에 칼리파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변수를 통제하는 건 개인의 능력이라고 했잖아?"

< 45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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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화 >

불타는 수송선 주위로 기웃기웃 모여든 인영들이 있었다.

남루한 차림새. 하지만 무장을 갖췄다.

 

스캐빈저였다.

 

도시의 외곽, 일명 아웃랜드에 기거하는 기생충 무리.

 

미개간지에 터를 잡고, 문명 지역과 떨어져 저들만의 문화를 발전시켜 온 거대 클랜이었다.

 

유대감은 약하다.

 

하나의 이름을 쓰고 있으되, 자기네 구역 밖에서는 딱히 뭉칠 일도 부딪힐 일도 없는 족속들이라서.

 

요컨대 구역마다 성향이 천차만별이란 소리다.

 

일례로 다운타운 인근의 스캐빈저들은 기본적으로 도시 내에 진입하길 꺼리지 않았기에, 저들끼리 전우조로 짝을 지어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흔했다.

 

진이 모텔에서 자다 습격당한 게 딱 그런 경우다.

 

여기.

 

41번 구역의 스캐빈저들은 얘기가 조금 달랐다.

 

이들은 폐쇄적인 성향이 훨씬 강했다.

 

스스로를 고립시켰다고 해야 할까?

어지간해선 도시에 얼씬대는 일이 없다는 뜻인즉.

 

허접한 수준의 자급자족을 제외하면,

밥벌이라고 해봐야 강도질이 전부라서.

 

그날그날 하이웨이 등지를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다가 만만해 보이는 차량이나 운전자를 털어먹는 게 일상인 놈들이었다.

 

그 치들이 오늘 아주 날을 잡았다.

 

아니, 글쎄. 우리네 구역(국유지다)에 불타는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저런 기체는 그 껍데기만 떼서 팔아도 돈이 된다고.

 

가까운 놈들부터 차례대로 몰려들었으니-

 

해서 지금이다.

 

짬이 덜 찬 놈들은 불 끄느라 여념이 없고,

 

짬 좀 먹은 놈들은 한때 형제였던 고깃덩어리를 내려다보며 쓰읍 입맛을 다시는 상황이.

 

"···병신 같은 새끼들. 하늘에서 떨어진 놈을 어떻게 못 해서 다 뒤졌다고?"

 

짜증 가득한 혼잣말.

이어지는 옳소! 옳소! 동조하는 소리.

 

그 와중에 누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세를 낮췄다.

 

"근데 왜 이 새끼만 얼굴이 이러냐? 아주 아작 났는데? 혼자 다른 거 쳐맞은 거마냥."

 

"진짜네. 와 시발 뭐냐?"

 

그라비스가 해친 시체를 이모저모 뜯어보는 놈들이 몇 명 늘어나는 그때.

 

누군가 바닥에 길게 이어진 핏자국을 가리켰다.

 

"어쩔래. 쫓을까? 한 명인 거 같은데."

"갔는데 남자면 손해 아니냐? 그리고 피 좀 봐라. 이미 뒤졌을 거 같은데. 굳이?"

"그래도 애들 죽이고 튄 새끼잖아. 확인은 해야지."

"애매한데. 벌써 해도 졌고."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상황에 머리를 벅벅 긁던 놈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애들 시키자."

 

그러자 다시 옳소! 옳소!

 

어떻게 된 게, 누구 하나 '쟤네 불 끄느라 고생 중인데?'라고 말하는 놈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막내들이 서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었으니.

 

이런 상황이 자연스럽다는 듯, 목청이 제일 큰 스캐빈저가 수송기 쪽으로 고개를 확 돌렸다.

 

"아무나!! 이리-"

 

그리고 뚝 끊기는 말문.

 

"···어?"

"왜 그래?"

 

멍청한 소리를 내는 그를 따라 나머지도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건,

 

갈기갈기 해체된 몸뚱어리, 철퍽철퍽한 핏물, 뜨겁게 꿀렁거리는 내장.

한때 인간이었을 살과 뼈가 뒤죽박죽 섞인 난장.

 

지금 보이는 빨간 저게 노을빛인지, 불꽃인지, 아니면 핏물인지.

 

소리 없이 공중에 떠 있는 또 다른 기체에는 눈길도 가지 않았다.

 

죽은 형제들의 잔해를 밟으며 걸어오는 남자만이 눈에 아로새겨졌을 뿐.

 

그가 이쪽을 바라봤다.

 

그 순간 모든 스캐빈저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장기들이 요동친다.

마치 자유를 갈망하듯 그렇게.

당장이라도 살갗을 찢고 터져 나올 것처럼.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됐다.

 

펑!

 

거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촤악-번졌다.

 

거짓말 같은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남자가 허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미 도망친 거 같은데."

 

혼잣말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그의 전뇌 포트에 깜빡 불이 들어오더니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으니까.

 

[오, 그래?]

 

만약 진이 들었다면, 잠깐만 이 목소리?! 그 새끼다! 반시체 가운남! 이라고 외쳤겠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쫓을까?"

 

[아니 됐어.]

 

"왜?"

 

[노력했다는 시늉이면 충분해. 막말로 시늉도 아니지. 달아나는 수송선도 타격했고, 실제로 추락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여기까지만 하자고. 원하는 걸 손쉽게 넘겨주면 곤란해. 아직은 흑염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거든.]

 

"킬기트가 그냥 넘어갈 것 같진 않은데."

 

[괜찮아. 부상이 심해서 당장은 제 몸 돌보기도 벅찰 테니까.]

 

"킬기트가?"

 

남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에 이마를 뒤덮은 기묘한 문양의 문신이 함께 찌그러졌다.

 

"상상이 잘 안되는데."

 

[나도 그래. 그 괴물이 몸져눕는 꼴을 다 보다니. 그러면서도 마침내 찾았다고 좋아하는 걸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라니까.]

 

"찾아? 완전한 불꽃인지 뭔지 그거? 지랄 났군."

 

[뭐 이해해야지. 세상 모든 불꽃을 집어삼키는 게 목적인 놈이니까. 그걸 위해서 전승된 힘이기도 하고. 아무튼, 이만 복귀해도 좋아. 고생했어. 딱히 고생은 안 했겠지만.]

 

뚝.

 

통신이 끊겼다.

 

"······"

 

한동안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꺼낸 길쭉한 네모 은박지를 벗겨 내용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질겅질겅.

푸후-

 

사람 십수 명을 몰살시킨 것치곤 너무 태연자약한 얼굴로 풍선을 분 그가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에 일직선으로 쭉 이어진 혈흔이 담겼다.

힘겹게 다리를 끌었으리라 짐작되는 쓸린 자국도.

 

이윽고, 팡! 하고 풍선이 터졌을 때.

 

남자는 느긋하게 자신이 타고 온 수송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변수를 통제하는 건 어쩌고,

개인의 능력이다 저쩌고.

 

그런 거 모르겠고.

칼리파는 신인가?

 

진이 경탄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이 정도는 해야 링커인 건가?

 

궁금한 것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이미 침몰하기 시작한 정신이다.

 

그대로 풀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으니,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모습이라면 부축하는 새하얀 손 정도?

 

해서 전말을 알게된 건,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으니-

 

칼리파가 제때 도착할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에릭 덕분이었더라.

 

내부에 임직원이 없다는 걸 인지했을 때.

버서크에 감염된 용병을 확인했을 때.

그리고 킬기트가 나타났을 때.

 

총 3차례에 걸쳐 그는 에넥도트에 연락을 취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연락은 구구절절한 글줄이 아닌,

 

자신의 바이저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일종의 항법 데이터였으니, 이를 해석한 칼리파는 두 번째 연락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좌표를 찍고 움직이고 있었다고.

 

"물론 네가 아니었으면 아무 의미없는 짓이 될 뻔 했지만."

 

칼리파가 그렇게 말하며 병상에 누운 진을 바라봤다.

 

"그 꼴로 어떻게 에릭까지 챙겨올 생각을 했대?"

 

원래라면, 이게 바로 차기 솔로왕의 품격이니 뭐니 아주 주접을 떨었을 진은 이 순간 엄지만 부들부들 추켜세웠다.

너무 아파서 대답할 힘도 없었다.

숨만 쉬어도 고통스러운 건 반칙 아닌가?

 

서럽고 힘들어서 그런가.

눈가만 촉촉해지더라.

 

그 모습에 칼리파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던 중년 여인이 하! 콧방귀를 꼈다.

 

"그러게. 누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몸을 굴리래?"

 

그러고는 모니터에 비친 바이탈 사인을 확인하며 중얼거리길.

 

"HR 정상, NIBP, ABP 조금 높지만 문제 없고, SPO2 괜찮고, RR도 빠르지만 이 정도면 뭐······"

 

가만히 집중하는 옆모습에 칼리파가 입을 열었다.

 

"괜찮은 거야?"

"그래, 도저히 이해는 안 가지만."

 

'어떻게 되먹은 몸뚱어리야?' 라는 혼잣말을 끝으로 휙 돌아서는 여인이다.

 

진이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의사가 저래도 되는 거야? 생각하면서.

 

"좀 까칠하지? 마마 말투가 원래 좀 그래."

 

무슨 마음인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칼리파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에릭은 다른 곳에서 회복 중이야. 이전부터 걔를 담당하던 의사가 있거든. 그걸 의사라고 불러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아, 에안나는 가문으로 복귀했어. 일탈이 너무 길었던 거겠지. 급해 보이더라."

 

칼리파가 그리 말하며 진과 눈을 마주쳤다.

 

"조만간 찾아오겠다는데? 무슨 약속을 했다며?"

 

그에 조용히 올라가는 엄지.

 

"궁금한데? 그게 뭔지."

 

못 알려줄 것도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말이 안 나오는 진이라서.

 

힘없이 엄지를 축 늘어뜨리자니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파가 어느 순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대화하기 좋은 때가 아닌 듯싶네. 몸이 낫거든 에넥도트로 와. 나머지 얘긴 그때 가서 하자. 지금은 푹 쉬어둬."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킨 칼리파가 저만치 떨어진 중년 여인을 향해, 저 친구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건물을 나섰다.

 

"저년이 눈치를 주고 가네. 참 내."

 

또각또각 멀어지는 칼리파를 향해 마마가 헛웃음을 흘렸고, 진은 그제야 지친 얼굴로 눈을 감았다.

 

 

 

***

 

 

 

열흘.

 

진이 병상에서 몸을 털고 일어서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남들이 보면 기적이나 다름없는 회복력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왜 이렇게 오래 걸렸지? 하고 뒤통수를 벅벅.

 

심지어 아직도 아프다!

 

다만 참고 움직일 수준은 됐다는 뜻이니, 그마저도 겉모습만 그렇고 마나 회로는 이제 겨우 걸레짝에서 조금 나아진 수준이라서.

 

그럼 얌전히 누워서 더 치료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 절대!

진은 결심을 굳혔다.

 

"나 퇴원합니다!"

"누구 마음대로!"

 

저 멋대로 병원을 탈출하는 진을 중년 여인, 마마가 뒤쫓았다.

저 자식이 바늘은 언제 뺀 거야?! 소리치면서.

 

물론 순순히 따라잡혀 줄 진이 아니다. 아파도 초인은 초인. 바람처럼 계단을 밟고 도망치는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왁 소리를 질렀다.

 

"배고파서 못 참겠다고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휙 돌리니 거기에 익숙한 얼굴이?

 

"억!"

 

아슬아슬하게 급제동에 성공한 진이 에안나를 향해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있냐?"

"···당신이 여기 있다길래."

"음?"

 

당황한 와중에도 대충 칼리파한테 듣고 왔겠거니 이해한 진이 뒷말을 덧붙였다.

 

"밥은 먹었고?"

"아니."

"잘됐네. 따라와."

 

곧바로 에안나를 데리고 럼펌펌펌을 방문한 진이다.

 

2층은 아직 한창 수리 중이었기에, 두 사람은 1층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한차례 홍역을 치렀기 때문일까.

가게는 한산했다.

 

그래서 진은 부담 없이 음식을 주문할 수 있었다.

 

그것도 산더미처럼.

 

"···이걸 다 먹는다고?"

"모자랄 거 같은데."

 

진이 그렇게 말하며 핫도그를 쫙 벌렸다.

그러고는 그 안에 감자튀김을 꽉꽉 눌러 담은 뒤 한입 크게 베어먹으니.

와! 짜고, 달고, 시고(?) 입속에서 아주 개난리가!

그대로구나, 럼펌펌펌!

 

이상한 부분에서 감격한 진이 순식간에 핫도그를 뚝딱 해치우는 모습에, 에안나가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이후 피자를 맛본 그녀가 조용히 물을 찾았다.

 

"···매워."

"매워? 보통은 짠데 오늘은 왜 그렇지?"

"······"

 

다음 순간.

 

에안나의 눈이 피자 다섯 조각을 겹치는 진에게 고정됐다.

살짝 커지는 동공 안에 담긴 일종의 기대감? 황당함?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진은 충족 시켜줬다.

정신 나간 수준의 한입과 함께.

 

그리고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아. 진짜 맵네. 왜 이러냐.

 

그러면서도 뱉긴커녕 두 볼 가득한 피자를 우물거리는 그의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에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가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가게야?"

 

그에 진이 고개를 갸웃.

 

"···제일 좋아하냐고?"

 

아. 음. 어. 그러니까···

뒷말이 길어진다.

 

이게 뭐라고 쉽게 대답이 나오질 않는지.

괜히 애꿎은 뺨만 긁적긁적.

 

사실 진도 안다.

 

럼펌펌펌이 더럽게 맛없는 가게라는 걸.

 

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바닥에서 주운 낯설게 생긴 지폐를 꼭 쥐고,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저기 저 문을 열었을 때를.

 

성실한 기계팔은 손님이 냄새가 난다고 면박을 주지도, 발도 걷어차지도 않았으니.

 

어느새 손에는 따듯한 와플이 하나 들려있더라고.

 

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계단에 닿았다.

 

누가 빼앗기라도 할까. 도망치듯 뛰어 올라간 2층에서 그는 낡은 스피커가 노래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와플을 우적우적 씹었다.

 

솔직히 맛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궁상맞게 질질 짜면서도 열심히 턱을 움직였으니, 그게 이 세상에서 처음 맘 놓고 먹어본 식사였다고.

 

살면서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글쎄. 진은 자신이 없었다.

 

"···그런 거 같네."

 

어느덧 계단에서 눈길을 거둬들인 진이 에안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좋아하는 가게 맞아."

"알겠어."

 

짤막하게 대답한 에안나가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음식을 골라 먹기 시작했다.

아무런 내색 없이, 아무런 불평 없이.

 

식사가 이어졌다.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그저 달그락달그락 접시 부딪히는 소리만 테이블 위를 오갔을 뿐.

 

시간은 흘러.

많게만 보이던 음식이 바닥을 보였을 때.

두 사람은 가게를 나섰다.

 

짙은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에안나가 입을 연 것도 그즈음이었다.

 

"발터도 당신이랑 비슷했어."

"······"

"멀쩡히 잘 웃는다 싶다가도 갑자기 사라져서 찾아보면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지. 내가 놀라서 이유를 물어보면 그 사람은 항상 똑같은 말만 했어. 왜 그러냐고 묻지 말고, 그냥 다 괜찮다고만 말해달라고."

 

문뜩 수송기에서의 일을 떠올린 진이다.

갑자기 공황이 몰려왔던 자신에게 에안나가 했던 말이 딱 저랬던 거 같다고.

괜히 멋쩍어진 그가 코를 훌쩍거릴 때였다.

 

"그럼 난 가볼게. 아, 그리고 이거."

 

에안나가 대뜸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이후 슬쩍 펼쳐본 손바닥 안에는 고급스럽게 장식된 유리병이 있었다.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영롱한 액체를 본 진이 묻길.

 

"이게 뭔데?"

"선물."

"뭐야. 그냥 마시면 돼?"

"응."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에안나가 발길을 뗐다.

얼굴은 이쪽을 향한 채 뒷걸음으로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그러다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니, 그 사이로 들릴 듯 말듯 이어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다 괜찮을 거야. 당신도, 나도."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진은, 더는 에안나가 보이지 않을 때쯤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가까운 무인 모텔에 들러 찌뿌드드한 몸을 침대에 휙 던지니, 왠지 몰라도 오늘따라 더 잠이 오지 않더라고.

 

해서 한참을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다 불현듯 떠오른 유리병의 뚜껑을 뽕! 열어젖혀 입에 액체를 털어넣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부드럽게 그의 세상을 덮었다.

 

*

 

이상하리만치 몸이 개운한 가운데.

 

헉! 하고 침대에서 눈을 뜬 진이다.

뭔가 뭔가 이상한 기분 때문이었다.

 

한참을 잊고 있었던.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

 

뭐지. 이거?!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내려보니.

 

잠시만 왜 다리가 세 개?

< 46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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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화 >

이레귤러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영원한 성장을 거듭하는 몸은 당연하게도 그에 걸맞은 영양분을 탐하기 마련이니.

 

진의 미친 듯한 식성은 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1년 차 초반, 굶주림으로 인한 절망적인 경험까지 겹친 결과.

진에게 식사란, 단순히 배를 불리는 행위를 넘어 저기 무의식 깊은 곳에 맞닿은 무언가라서.

 

간단히 말해 엄청나게 많이 먹는데, 그걸 또 강박적으로 처먹는다는 소리다.

 

그런 주제에 군살 하나 없는 까닭은, 올림픽 메달리스트조차 능가하는 칼로리 섭취에도 불구하고 몸이 남김없이 영양분을 다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한 톨도 남김없이.

 

그러고도 모자라서 하자가 생긴 거다.

 

그러니 진의 몸뚱어리도 할 말은 있다.

 

니가 주는 게 한참 부족하다고.

 

이 정도론 신체를 강화하고 다친 몸을 회복하기도 빠듯하니 더! 더! 더! 달라고.

 

그리고 오늘.

 

1년 하고도 몇 개월 만에 드디어.

 

항상 굶주린 진의 몸뚱이에 단비가 쏟아졌다.

 

영약이었다.

 

 

*

 

 

음, 어, 와, 오우.

 

사람이 놀라니까 감탄만 나온다.

아니, 이게, 참, 호우.

 

언어 기능의 퇴화라고 할까.

뭐라고 말이 잘 안 나오는 느낌.

 

진이 이 비슷한 느낌을 어디서 받았는지 떠올렸다.

 

그래, 아쿠아리움!

 

어린 시절, 부모님 손잡고 방문했던 거대한 수족관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스쳤으니.

 

아이의 시선에선 웅장하기까지 했던 유리 너머의 풍경.

파아란 물을 가로지르던 거대한···

거대한···

음. 그만 생각하자.

 

진이 손바닥으로 제 뺨을 착착 후려쳤다.

혹시 잠이 덜 깼나 싶어서.

하지만 얼굴이 얼얼할 때까지 이어진 셀프 손찌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오, 와, 음, 어후.

 

또다시 무조건반사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뱉은 진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솔직히 말하면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한 그였다.

 

왜냐고?

 

그야, 애당초 이 문제 때문에 우울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 정정. 우울할 '틈'도 없었으니까.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풍족함 속에 부족함이 보이는 법이라고.

 

당장 먹고살기도 빠듯한, 하루하루 치열한 삶을 사는 사람이 뜬금없이 거울을 보며 난 왜 대머리일까 한탄하지 않듯, 비슷한 맥락으로 진 역시 자신의 결함을 머릿속에서 배제한지 오래였던 것이다.

 

해서 진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하다.

삼족보행?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그때였다.

 

킁.

 

저도 모르게 씰룩거리는 콧잔등.

동시에 미간이 와락 찌푸려지니.

잠깐만, 이게 무슨 냄새야.

 

뒤늦게 인지한 악취를 쫓아 주변을 슥 둘러보던 진이 흠칫 놀랐다.

 

검붉은색으로 잔뜩 오염된 침구 때문이었다.

 

단순히 얼룩이 든 수준을 넘어, 미처 흡수되지 못한 노폐물이 이불 위로 피딱지를 이뤘다.

 

코를 찌르는 악취의 진원지가 어딘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와. 씨."

 

진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거의 펄쩍 뛰다시피 침대에서 내려서는데 어쩐지 몸이 가벼웠다.

 

보름을 앓아 이제는 만성이 되어버린 근육통이 더는 느껴지지 않음을 깨달은 건 그다음이었다.

 

진이 저도 모르게 오른팔부터 확인했다.

 

깨끗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시커먼 어혈이 낙인처럼 도배돼 있던 팔이 원래의 살빛을 되찾았더라고.

 

그뿐만이 아니다.

 

파지직!

 

난장판이 된 집구석에 통 힘을 못 쓰던 광극까지 번갯불 튀겨가며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니.

 

그제야 마나 회로가 멀쩡해졌음을 깨달은 진이다.

 

그것도 전보다 훨씬 질기고 탄탄하게.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기억을 되짚기 마련이다.

 

꾸르륵- 아랫배의 불길한 징조를 감지한 사람이 저 먹은 음식을 머릿속에 역순으로 나열하듯 진도 똑같은 과정을 거쳤으니.

 

솔직히 눈치를 못 챌 수가 있나.

자연스레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에 시선이 가 닿았다.

 

선물이라더니.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걸 받은 느낌.

 

역시 있는 집 자식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긴 재벌 3세만 되도 사는 세상이 다르던데.

천 년 역사의 가문이면 말해 뭐해.

천 년이면 거의 조선 왕조의 2배쯤 되는 세월이잖아.

진짜 길긴 길다. 길어? 와, 쓰읍, 어후.

 

넋 놓고 눈을 아래쪽에 두고 있던 진이 반박자 늦게 고개를 세게 털었다.

 

"하-"

 

그러고는 옅은 한숨을 내쉰 뒤 욕실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

 

 

 

***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이 겪은 것은 일종의 과포화 현상이었다.

 

항상 제한된 에너지를 쪼개고 쪼개 신체를 강화하랴, 다친 몸 회복시키랴,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저 나름 알뜰살뜰 용을 쓰던 몸뚱어리가 난데없이 영약이라는 폭포수를 맞이했다.

 

당연히 변화가 극적일 수밖엔.

 

순식간에 걸레짝이 된 마나 회로가 수복됐고,

누적된 부상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러고도 남은 에너지는 신체를 강화하는 재료가 됐다.

천천히, 하지만 일말의 낭비도 없이 진의 신체는 영약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또 빨아들였으니.

 

그 과정에서 아랫도리의 반란도 무참하게 진압되고 말았다고.

 

아 덧없어라.

한여름 밤의 꿈이여.

 

"···뭐야."

 

당연하게도 이런 사정을 알 길 없는 진이다.

 

그저 다음날 원상태로 돌아온 몸뚱이에 고개를 갸웃.

 

너 가버린 거니?

야, 야?

 

대답 없이 시무룩하기만 한 녀석이다.

 

물론 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나마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럼 됐지.

아예 답이 없다는 건 아니니까.

더군다나 문제를 타개할 약(?)도 찾았고.

 

됐다. 완벽해.

또 저 편한 대로 상황을 해석한 진이다.

 

실은 이번 영약 섭취로 인해, 신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에너지의 상한선이 상당히 올라가 버렸기에, 비슷한 수준으로는 같은 효과(과포화)를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그런 걸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저 한결 후련한 얼굴로 이제야 밖에 나갈 수 있겠다, 생각했을 뿐이라고.

 

해서 본의 아니게 남들 눈 의식해서 모텔에만 처박혀있던 진이 방을 나섰다.

 

여느 때와 같은 다운타운의 거리가 그를 반겼다.

 

누가 언제 치울지 기약 없는 담배꽁초와 형형색색의 명함들, 먼지 쌓인 실외기, 느릿하게 점멸하는 전등.

 

좁게 드러난 하늘은 지저분한 회색빛이었다.

육안으로는 시간대를 짐작하기 힘든 빛깔.

 

하지만 진은 무려 다운타운 2년 차다.

눈을 가늘게 뜨며 어림짐작하길.

대충 14시에서 15시쯤 됐겠거니 생각했다.

 

어림짐작하는 이유는 단말기가 또 고장이 나버렸기에.

 

이번 단말기의 사인은 [압도적인 열기에 장시간 노출] 되시겠다.

 

해서 진이 간만에 쇼핑을 했다.

 

구형 단말기도 하나 구하고, 이어서 근처 옷 가게에 들러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로운 착장도 마쳤다.

 

그리고 계산을 딱 하려고 하는데, 주인 왈.

 

"맨날 똑같이 입는 거 지겹지 않아?"

 

몇 번 방문했더니 얼굴이 익었던 걸까.

 

나 너 누군지 안다, 라는 뜻이 함축된 질문에 진이 고개를 돌려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살폈다.

 

그러고는 널찍한 등판을 거울에 비추며 말하길.

 

"뭐가 똑같아? 자수가 다르잖아. 이건 십자가. 저번에 산 건 뭐였더라. 호랑이? 도깨비?"

 

"아니, 그 뜻이 아니라 스타일을 말하는 거잖아. 항공 점퍼에 청바지 그리고 가죽 부츠. 매일 같은 것만 사니까 그렇지. 와꾸도 괜찮은 놈이 왜 변주를 안 주냐. 옷걸이 아깝게."

 

"난 이게 좋아."

 

진이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섰다.

 

그러다 괜히 고개를 갸웃.

내가 이상한 건가?

 

진이 이 스타일을 고수하는 건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차림새가 딱 이와 비슷해서.

그리고 그 꼴로 몇 달을 생활했기 때문에.

 

정이 들었다고 봐야겠다.

 

인간은 원래 익숙한 것에 안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진은 그런 경향이 유독 강했다.

 

럼펌펌펌은 2층 오른쪽 구석 자리.

잠자리는 사우스 다운타운의 무인 모텔.

아침 장사만 하는 핫도그 노점.

외투는 항공 점퍼.

바지는 청바지.

 

좋아하는 것, 선호하는 것.

자그마한 삶의 테두리.

그래서 때로는 지키고 싶은 것.

내가 나일 수 있도록.

 

진이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조금씩 삶의 테두리의 안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익숙한 술집의 문을 열었다.

 

딸랑-

 

청아한 종소리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진을 발견한 바텐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진."

"안녕, 포우."

 

손을 흔들며 중앙 테이블 쪽으로 걸어온 진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주변을 쓱 둘러봤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네?"

"감사한 일이죠."

"전부 다 솔로들이야?"

"그렇진 않습니다."

"그래?"

 

진이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고는 눈을 움직여 동종업계 종사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손님들을 가볍게 훑었다.

 

그중 몇몇과는 시선이 마주치기도 했다.

 

다행히 '뭘 꼬라봐?' 같은 대사는 없었다.

애초에 진이 적의를 가지고 지켜본 것도 아니고,

눈길이 닿았다고 해봐야 그저 스친 정도에 불과해서.

 

어느새 고개를 제자리에 놓은 진이 포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칼리파는 지금 링커 모드?"

"네. 한창 브리핑 중이십니다. 어제부터 내내 바쁘시군요. 귀한 분이 찾아오시기도 했고."

"아, 어쩐지."

"바쁘신 거라면, 나중에 연락드리도록···"

"괜찮아. 나 시간 많아."

 

진이 신경쓰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털었다.

그에 포우가 고개를 까딱이니.

어느새 테이블 위엔 쿠키와 우유가.

 

아, 이거지.

진이 눈이 밝아졌다.

 

메뉴만 보면 이게 술집인지 디저트 가겐지.

남들이 아롱한 불빛 아래서 술잔에 입술을 포갤 때.

저 혼자 달고 고소하기 바쁘다.

 

그래도 조용한 가게 분위기를 해치고 싶진 않았기에 평소처럼 '처'먹지는 않고 조용히 입을 우물거리고 있으려니.

 

그 마음을 아는지 부드럽게 웃어 보인 포우가 말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활약상이 엄청나셨다고."

"아. 들었어?"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하긴."

 

가문과 스틱스가 엮인 일이다.

 

아픈 와중에 들은 거라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칼리파의 말을 떠올려보면.

 

그날 액타비스 컴퍼니 빌딩은 끝내 붕괴했으니,

곧바로 시정부가 진상조사에 착수했다던가?

(30번대 구역이기에 가능한 조치였다)

 

그 결과 밝혀진 사실이란, 액타비스의 임직원들이 흑마법사들과 결탁했거나 혹은 그들이 흑마법사였다는 것.

 

물론 이는 시정부 측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자료가 아닌, 알음알음 새어 나온 찌라시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 액타비스 컴퍼니의 주가는 바닥을 쳤다나?

 

더불어 그날 빌딩 붕괴의 현장에서 전신에 극심한 화상을 입은 거한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말들이 붙길 시작됐다고.

 

킬기트가 움직였나? 웅성웅성.

흑염이 화상을 입었다고? 웅성웅성.

설마 솔라드인가? 웅성웅성.

 

뭐 이런 식이었으니, 이미 사건의 얼개를 파악한 이들이 적지 않을 거란 것이 칼리파의 추측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었는데.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간질간질한 기분에 진이 골똘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포우가 입을 열었다.

 

"진, 혹시 들으셨습니까?"

"뭐가?"

"럼펌펌펌과 킹스그룸의 CCTV 자료가 최근 솔로 인트라넷에서 꽤 화제가 됐다는 것 말입니다."

"아니?"

 

진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포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단말기를 잠시 빌려주시겠습니까?"

"음? 아. 어."

 

저도 모르게 손을 포개려던 진이 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내 넘겼다.

 

"그럼."

 

포우가 크롬으로 코팅된 손끝을 디스플레이에 얹었다. 직후 시계 방향으로 동그란 원이 화면 중심에 그려지더니, 완벽한 원이 되었을 때 영상 하나가 재생되더라.

 

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화면에 비친 풍경이 익숙했기에.

럼펌펌펌이네? 2층이고.

 

근데 활활 불타고 있는···

 

다음 순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화면 속에서 누군가 바닥을 쾅 박찼다.

 

보랏빛 전광을 둘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누군가를 바닥에 내리꽂는데, 상대가 불길을 뿜어내며 저항하든 말든 난폭한 쥐불놀이를 멈추지 않더라.

 

"···나네?"

"역시 모르셨군요."

 

포우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거둬들였다.

 

"여기에 킹스그룸의 영상까지. 해당 영상의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평판이 크게 오르셨습니다. 원래라면 돈과 의뢰 횟수로 충족시켜야 할 요소를 단숨에 채우셨죠."

 

그때까지도 화면에 코를 박고 있던 진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

 

"축하합니다. 진. 벌써 베테랑인가요?"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상태창이 떠올랐다.

 

「진급」──────────────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높게.

 

솔로(Lv3)로 진급했습니다.

 

보상 : 퍽 XP 5,000

─────────────────

 

"인트라넷에 접속해 보시죠. 찾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 47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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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화 >

솔로 인트라넷.

문자 그대로 솔로들이 사용하는 사설 플랫폼이다.

주된 기능은 클라이언트와의 은밀한 매칭.

또는 정보 교환 및 거래.

여기서 '자기 PR'은 선택의 영역이다.

저는 누군데요, 이런저런 일들을 했고, 성과는 이렇게 냈어요. 같은 정보를 등재하는 것 말이다.

당장 진의 고향 사람들만 해도 배달 음식 주문할 때 주문 많은 순, 리뷰 많은 순부터 누르지 않는가.

구매자의 심리가 원래 이렇다.

뭔가 눈에 보이는 게 있어야 믿음이 가는 법이니.

고로 적절한 자기 어필은 클라이언트를 끌어들이는 좋은 홍보 수단이라.

많은 솔로가 자신의 정보를 시각화된 데이터 대시보드로 제공하곤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게 필요 없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낭중지추. 주머니 속 송곳 같은 존재들.

나는 그냥 내 할 거 했을 뿐인데, 주변에서 먼저 알아봐 주는, 떡잎부터 다른 종자 말이다.

진의 경우가 그랬다.

*

비밀이 없는 세상이다.

어느 솔로 하나가 버서커를 때려눕히고, 이어서 마약 업장 하나를 박살 내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

충분히 나돌 수 있다.

심지어 흔하다.

마케팅 목적으로 본인의 전투 장면이 담긴 영상물을 업로드하는 솔로나 용병이 좀 많은 게 아니라서.

근데 잠시만.

이번에는 좀 심상치 않은 게···.

단순히 잘 싸우는 수준이 아닌데?

게다가 버서커를 제압할 때 번쩍인 보랏빛 전광?

자전, 자전이다.

이름 모를 자하드의 방계가 능력을 각성했구나!

이는 로스트 시티가 발칵 뒤집힐 대사건으로, 다운타운이 피로 물들고 럼펌펌펌이 다시 폭발할 것인즉.

호사가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긴장하라 세인들이여.

여기 벼락을 두른 초인이 등장했으니.

이는 차기 솔로킹의 등장이라!

-물론 이런 일은 없었고.

다만 화제가 되긴 했다.

비전을 각성한 방계란, 가문 쪽에서도 눈여겨보는 천재이기에.

그런 인물이 고작 레벨2의 솔로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을까.

솔로 인트라넷의 AI 기반 성과 분석 시스템이 진부한 평가 과정을 전부 건너뛰었다.

그리하여 진 솔로 레벨3 달성!

덤으로 도파민까지 팡팡 터졌다.

얼떨떨한 와중에 내면에서 솟구치는 열락의 감정을 티 나지 않게 넘긴 진이다.

그러고는 포우를 향해 묻길.

"···내가 레벨3이라고?"

"그렇습니다."

"음. 어. 벌써?"

진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싫은 게 아니라 당황스러워서.

솔직히 말해서 내가 베테랑은 아니지 않나?

마냥 단순한 거 같아도, 이런 쪽에는 또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진이다.

본인이 생각해도 성장세가 좀 가파르긴 한 것 같다고.

이래도 되는 건가, 고민했으니.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을 뿐.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뭐 어쩔 거야.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그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동영상 2개 풀렸다고 레벨 3?

이거 뭐 솔로 별거 없구만!

펜릴은 따라잡았고, 게 섰거라 에릭!

머릿속에서 늑대수인과 헬멧 대가리를 차례로 떠올린 진이 쿠키를 우물거렸다.

그러다 문뜩 깨닫길.

주변의 시선이 뭔가 묘하더라고.

별생각 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도 있는 반면, 몇몇은 흥미로운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

음. 갑자기 체할 것 같네.

그리하여 진이 포우에게 말했다.

"나 이거 먹고 가볼게. 그리고 내 단말기 번호 새로 저장해."

***

진이 떠나고 한참 뒤에야, 칼리파가 브리핑 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행운을 빌어."

함께 방에서 나온 솔로 두 명을 배웅한 그녀가 조금 피곤한 얼굴로 중앙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어느덧 한산해진 가게 안을 쓱 둘러보다가, 곁으로 다가오는 포우를 향해 말했다.

"별일 없었어?"

"별일은 없었고, 진이 다녀가시긴 했습니다."

"진이?"

"몸이 회복됐다는 걸 알릴 겸 찾아오셨다더군요."

그에 칼리파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회복? 마마는 환자가 병원에서 탈출했다고 길길이 날뛰던데.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거야."

"적어도 생체 반응은 모두 정상이셨습니다."

"네가 그런 거면 그렇겠지."

최고급 안드로이드인 포우의 판단이니 의심할 여지는 없다.

하지만 칼리파는 마마의 실력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성격이 괄괄해서 그렇지. 실력만큼은 다운타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치료술사였으니까.

그러니 결론은 간단하다.

진의 몸뚱어리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회복력을 가졌다는 것.

여기까지만 놓고 보더라도 평범한 솔로의 범주는 아득히 넘어섰다.

하지만 그보다도 놀라운 건-

"동영상 얘긴 했어?"

"네. 역시나 모르시더군요."

"그럴 거 같더라니."

칼리파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주제에 혼자 태평했을 얼굴이 상상이 가서.

"결국 우리만 놀랐다 이거지?"

헛웃음을 흘리는 칼리파에게 포우가 술잔을 내밀었다.

오묘한 빛깔이 일렁이는 칵테일.

미드나잇 스펙트럼.

그녀가 좋아하는 술이었다.

"자전 자체에 큰 의미를 두시지는 않는 듯 보였습니다. 그저 솔로 등급이 올랐다는 사실에 놀라시더군요."

"도대체가···"

칼리파가 말끝을 흐리며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초점이 명확하게 잡히지 않은 눈길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한때를 헤매는 듯했으니.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억나, 포우? 예전에 첫 의뢰를 마친 진이 우리한테 무슨 질문을 했는지."

"건샵을 추천해달라 하셨죠."

"그다음은?"

"마나 회로 말씀이군요."

"맞아. 정확히는, 마나 회로를 만들면 아무 주문이나 다 배워 쓸 수 있냐고 그렇게 물었어. 그게 언제지? 석 달은 됐을까?"

칼리파가 다시 칵테일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양이 조금 많았다.

"자하드의 먼 방계? 그럴 수 있어. 비전을 각성한 거? 놀랍지만 불가능하진 않지."

술잔이 다시 기울어졌다.

짧은 침묵.

이윽고 젖은 입술이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마나 회로를 익힌 지 고작 몇 달도 되지 않은 애송이가 해낸 일이라면?"

칼리파가 어느새 비어버린 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포우, 어쩌면 진은 이 도시의 새로운 전설이 될지도 몰라."

도시의 전설.

위험한 발언이었다.

위대했든, 추악했든, 신비로웠든 그 칭호를 얻은 이들은 언제나 잊히지 않은 족적을 남겼으므로.

그리고 그 족적으로 이뤄진 것이 오늘날의 로스트 시티였다.

"······"

안드로이드 바텐더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빈 칵테일 잔을 치웠을 뿐이니.

어느새 칼리파는 어둠이 내린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만들어낸 흐릿한 실루엣이 마치 불길에 비친 그림자처럼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그 모습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와 같아서.

어느 순간 칼리파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쩌면 이번 의뢰의 가장 큰 수확은 에안나가 아니라 진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잔잔한 음악 소리가 그녀의 뒷말을 감싸안았다.

***

요 며칠 진이 느낀 게 있다.

그건 바로.

솔로 레벨이 3이 됐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딱히 없다는 것.

마치 페이지를 한 장 넘겼을 뿐, 내용은 여전히 같은 책을 읽는 기분이랄까?

문뜩 고향에서 서른 살 됐을 때가 떠오르는 게.

그때도 비슷했지. 아마.

앞자리가 3이 됐다고 해서 어른이 되진 않았잖아.

그냥 새삼스럽기만 했지.

마흔이나 쉰도 그럴까?

음. 모르겠네.

결과적으로 진의 하루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먹고, 자고, 싸고.

싸고, 먹고, 자고.

자고, 싸고, 먹고.

쉴 땐 제대로 쉬어야 한다는 지론 하에 사흘 정도를 푹 쉬긴 했으나, 그렇다고 뜻 없이 시간을 태우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바로 지금처럼.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던 진이 조용히 내면을 관조했다.

완벽하게 조형된 마나 회로.

솨아아-

극순한 흐름이 마치 파도처럼 몸 전체를 회전한 뒤, 다시 심장을 향해 나아간다.

모든 힘이 순환하는 장소.

그곳에 광극이 있었다.

실타래 같은 번개를 몸에 두른 보랏빛 구체.

지금은 얌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진이 마음을 먹는다면 언제라도 눈을 뜰 든든한 힘이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진의 심장 속에는 새로운 식구가 있었다.

바로 여리디여린 불씨 하나가.

처음 이 녀석을 발견했을 때, 진은 어리둥절했더란다.

누구세요?

불씨로서는 억울한 반응이었다.

이 자리를 지킨 게 벌써 보름도 더 됐건만.

주인이란 놈 반응이 이래서야.

물론 진도 할 말은 있다.

불씨가 처음 피어올랐을 당시, 한창 황무지를 가로지르던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오죽하면 상태창까지 못 보고 그냥 걷기만 했겠는가.

뭐 아무튼.

처음에는 껄끄러운 객식구처럼 느껴지던 불씨였지만, 며칠 지켜보니 얌전히 따스한 모습에 천천히 마음을 연 진이다.

그리고 그 따스함이란 게 어딘지 익숙한 것이라서.

발터.

영혼을 태워 흑염을 불사르던 남자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게 그저 착각은 아닐 터였다.

그 녀석이 남긴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진은 이것이 발터의 불씨라고 믿기로 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기에.

자, 그럼 결론은 내렸고-

넌 그래서 능력이 뭔데?

진이 짓궂은 삼촌처럼 불씨를 쿡쿡 찔러댔다.

물론 손가락이 아니라 마나로.

하지만 묵묵부답이다.

광극이었다면 진즉 개지랄을 떨었을 텐데, 얘는 얌전하기가 어찌나 얌전한지. 건드리는 맛이 영 안 난다고 해야 할까?

괜히 머쓱해진 진이 혹시나 새로운 별자리가 생기진 않았을까? 내면을 살폈지만, 그것도 아니라서.

도대체 얜 뭐야.

불씨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진이 일단 모르겠다, 시선을 외부로 돌렸다.

이미 마음의 식구로 받아들인 힘이다.

당장은 허접하긴 한데 뭐 어떡해.

그런가 보다 해야지.

그리고 뭐 따듯하긴 하니까.

해서 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꼬르륵-

때마침 배꼽시계도 울렸겠다.

곧장 모텔을 나서 주차장 한편에 고이 모셔둔 만티코어에 엔진을 넣은 그다.

부아아앙!

땅거미 내리기 시작한 도로 위를 내달려 도착한 곳은 이런저런 음식 가게가 즐비한 골목이었으니-

바이크에서 내려 천천히 거리를 배회하던 진이 문뜩 어느 가게 앞에서 발을 우뚝 세웠다.

[맛있는 꼬치]

단순하기 그지없는 상호.

하지만 그 안에서 풍기는 냄새만큼은 진짜였으니.

진이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오?"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각종 꼬치가 담긴 접시가 둥근 컨베이어 벨트 위를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회전꼬치?

접시 색깔로 가격을 구분하는 걸 보면 사실상 확실했다.

이런 데가 다 있었네.

묘한 감상 속에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진이 지나가는 접시를 쓱쓱 납치했다.

냄새에 비하면 맛은 그냥저냥 먹을 만한 수준이었다.

솔직히 배신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저녁 식사로는 합격점이라고.

그렇게 진이 부지런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 와중에 평범한 입맛을 가진 손님들은 한두 접시만 먹고 인상을 구긴 채 자리를 뜨니, 음식물 쓰레기만 아니면 뭐든 잘 먹는 진만 홀로 남았더라.

그 와중에 주변을 쓱 둘러보며 하는 생각이 '아싸, 나 혼자 다 먹을 수 있겠다.' 였다고.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와는 다릅니다.'라는 문장이 이보다 어울릴 수가 없다.

그렇게.

진이 벨트까지 풀고 전력으로 식사에 임하려는 순간.

뚜벅.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주름살 잡힌 얼굴이 천천히 가게 안을 훑어보더니 이윽고 어딘가에 착석하는데, 하필이면 그게 진의 오른쪽 옆옆 자리였다.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컨베이어 벨트 특성상.

진을 지나친 뒤에 노인한테 접시가 간다는 뜻이다.

장판교에서 조조의 군세를 마주한 장익덕의 심정으로 '내 뒤론 그 어떤 접시도 지나가지 못한다!' 결심한 진에겐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접시 10개가 지나가면 그중에서 1, 2개 정도는 남겨서 노인장 드시라고 양보할 수밖엔.

그것도 여러 개로 맛보시라고 종류별로 하나씩 토스한다고 나름 노력했다.

자, 이번에는 염통 들어갑니다!

그때마다 노인이 쓱 접시를 챙기면 오 마음에 드셨나 괜히 뿌듯해지고,

본체만체 넘겨버리면 이게 아닌가 속이 쓰렸으니 혼자서 쌩쇼도 이런 쌩쇼가 없다고.

물론 진은 진심이었다.

원래 뭔가에 꽂히면 다른 건 눈에 잘 안 들어오는 게 남자라는 동물 아니던가.

해서 이번에는 목살을 넘길지, 오돌뼈를 넘길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먹성 한번 대단하구나."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오른쪽 귓가를 파고들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진이다.

그러는 사이 목살과 오돌뼈를 모두 놓쳐버리는 대참사 발생!

아, 안 돼.

가슴이 미어졌지만, 진은 기본적으로 동방예의지국 태생이다.

늘 가슴 속에 장유유서를 품고 살아가니, 어른이 웃으며 말을 걸었으면 본인도 웃으며 대답하는 습관 정도는 손에 피를 잔뜩 묻힌 지금에도 남아있었다.

"혹시 부족하세요? 좀 더 남겨드려?"

"일없다. 내 뱃골은 너처럼 크지 않아."

"아. 그럼 미리 말을 하시지."

덧없이 노인 앞을 지나치는 접시를 보며 진이 아이고 한숨을 내쉬자, 그 시선을 따라서 눈길을 옆으로 움직인 노인이 허허허 웃더라.

그게 퍽 듣기 좋아서 진도 낄낄거렸다.

"그래도 더 드셔요. 원래 나이 들수록 잘 드셔야 해."

"어떻게? 네놈처럼 씹지도 않고 삼키기라도 하랴? 그건 자신 없다."

"에이. 누가 나만큼 먹으래요?"

진이 그렇게 말하며 지나가는 접시들을 쓱쓱 납치했다. 그러고는 내용물만 쏙 골라 먹고 층층이 접시를 쌓으니 이미 탑이라도 불러도 될 만한 것이 2개.

알록달록하게 참 높기도 하다.

노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만큼.

"이름이 뭐냐?"

"예? 진 에버나이트요."

진이 어김없이 풀네임을 밝혔다.

3,500만 크레딧 주고 산 이름이지 않는가.

이럴 때라도 언급해 줘야 돈 쓴 보람이 있다고.

"이름 멋지죠?"

그에 노인이 껄껄.

그러고는 다시 질문을 던지길.

"출신은?"

"다운타운이요."

갑자기 웬 호구조산가 싶었지만, 진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원래 이게 노인장들이 관심을 드러내는 방식 아닌가. 휴가철에 어디 산골에 놀러만 가도 '아이고 어디서 왔는가?'하고 말을 걸어오는 평상 위의 어르신처럼 말이다.

"여기서 20년을 넘게 살았다?"

"그렇죠?"

굳이 따지면 1년 하고도 3개월쯤 됐지만,

그걸 밝혀버리면 앞서 출신지랍시고 다운타운을 언급한 게 이상하지 않겠는가.

해서 대충 고개를 끄덕인 진이 자연스럽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는 어르신은 다운타운 주민은 아닌 모양이네요?"

"무슨 근거로?"

"같은 주민끼리 출신을 뭐 한다고 물어봐요. 서로 딱 보면 가닥 나오는데."

"그래, 그렇지. 네 말이 맞다."

노인은 웃었고,

진은 우물우물 꼬치를 씹었다.

노인장 웃는 소리가 참 호탕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 문뜩 머릿속을 스친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니.

"그래서 다운타운은 어쩐 일로 오셨대요?"

그러자 노인 왈.

"집 나간 아들놈 찾아서 움직이다 보니 여기까지 왔구나."

"아이고 저런."

진이 절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은은하게 열불이 나는 게,

어떤 호로 새끼가 집을 나가서는 늙은 아비가 이 똥통까지 기웃거리게 만드나 해서.

짐작건대 천하의 상종 못 할 개망나니 새끼가 아닐까.

< 48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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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화 >

맘 같아선 '뭐 하는 호로새끼-'로 시작하는 F-word를 두다다 내뱉고 싶었지만, 혹시나 듣는 노인장 기분 나쁠까 싶어 목 끝까지 차오른 문장들을 꼬치와 함께 삼킨 진이다.

그러고는 입을 우물거리며 묻길.

"같이 찾아드려?"

"뭐?"

"집 나갔다는 아들놈 이름이 뭐예요. 다운타운에 있는 건 확실하고?"

예상치 못한 말이었을까.

노인의 얼굴이 묘해졌다.

반면 진은 당당하다.

본인은 진심으로 던진 질문이었기에.

애초에 진심이 아니면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 진은 지금 반백수라서.

새로운 의뢰를 받기 전까진 여유가 있는 상황이다.

지난 며칠 푹 쉬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친할아버지가 생각나는 노인장을 돕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는 소리다. 그리고 뭔가 애잔하잖아. 저 나이에 무슨 다운타운이야. 다운타운은.

심지어 그 흔한 보조 임플란트도 하나 안 보인다.

브로프 할배도 팔꿈치며 무릎이며 전부 크롬 외관절로 교체한 마당에.

그보다 족히 열 살은 많을 것 같은 양반이 맨몸?

하여간 순수주의자들이 이래서 안 되는 거야.

순수주의자라고 해봐야 몇 명 만나보지도 못한 주제에 선입견 가득한 속마음을 뇌까린 진이 어느 순간 결심을 굳혔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척.

"잠깐 기다려봐요."

노인을 향해 살색 벽을 세운 그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주인에게 다가갔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기계 팔에 일을 전담한 채, 정작 본인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놈팡이가 보였다.

팔을 쭉 뻗어 코앞에서 손가락을 딱딱!

선명한 소리에 흠칫 놀란 주인이 쓰읍-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계산. 저기 노인장 것까지."

"아. 그래. 어디 보자······어?"

쌍둥이 거탑을 발견한 주인이 일순 말문이 막혀 눈만 끔뻑끔뻑.

어쩐지 기계 팔들이 풀가동 중이더라니.

혼자서 회전율을 담당한 위인이 있었구나.

"하하. 오늘 장사 접어도 되겠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주인이 접시를 스캔하는 동안.

진이 노인을 향해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러고는 계산을 마치고 그에게 다가가니.

"일단 나가죠."

"누구 맘대로 내 것까지 계산해?"

"다 드셨담서. 이제 소화시키셔야지."

어이없어하는 노인을 일으켜 가게 밖으로 나선 진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이 뭔데요?"

"이름만 대면 찾을 수 있다더냐? 네가 뭐 그리 잘나서."

"안 잘났는데요? 그냥 같이 찾아보자. 이거지."

뚱한 대답에 노인이 고개를 젖힌 채 너털거렸다.

주름진 눈가가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굴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노인이 말했다.

"일단 좀 걷자."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뒷짐을 진 채 터덜터덜 앞서가는 게 아닌가.

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여?

이 타이밍에 갑자기 산책을?

노인네가 겁도 없이 골목을 나아가는데, 저대로 내버려두자니 뱉은 말도 있고 이모저모 애매해서.

"거 참."

진이 보폭을 넓혔다.

이후 자연스럽게 노인과 나란히 발을 맞추니, 나아가는 걸음걸이에 지저분한 바닥이 밟혔다.

짓눌려 단단하게 굳은 껌자국, 연탄재처럼 굴러다니는 꽁초, 바닥에 떨어진 문어발 전단,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혼자더냐?"

노인의 질문에 진이 헛웃음을 쳤다.

"궁금한 것도 많으셔. 아니, 같이 아들 찾아주겠다니까 왜 계속 호구조사를 하실까. 혹시 따님 중에 미혼인 분이라도 있나?"

그러면서도 못 이기는 척 덧붙이길.

"혼잔데 뭐 문제 있어요?"

"말본새 하고는. 그냥 궁금해서 물었다."

"으음?"

기묘한 동행이 이어졌다.

물론 동행이라고 해봐야,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면서 각종 술집과 음식점이 즐비한 골목을 휘휘 돌았을 뿐이었지만.

이러니까 진짜 산책 같긴 하네.

진이 그렇게 생각하다 문뜩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노점에 서서 핫도그를 먹던 남자와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가볍게 맞닿았다가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가운데.

노인이 말했다.

"갑자기 아들은 왜 같이 찾아주겠다고?"

"음."

진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하루아침에 자식새끼 사라진 부모 마음이 왠지 이해돼서 그렇다고 하면 오지랖인가?

솔직히 말하면 아들이 좀 부럽기도 했고.

그래도 저 노인장은 다운타운이 위험하긴 해도 어떻게 기웃거릴 수라도 있지. 누구 부모님은 그것조차 못 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잖아. 게임 켰다가 사라진 자식을 무슨 수로 찾아. 시발, 시발, 시발.

아, 시발···

마지막 시발은 앞선 것과 이유가 달랐다.

갑자기 숨이 턱 죄어오는 게, 무의식적으로 트리거를 당겨버렸구나.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절로 목덜미가 서늘해졌으니.

서둘러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려는 찰나.

화륵-

불씨가 천천히 타올랐다.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온기가 골수에 치미는 우울감을 밀어낸다. 위태롭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숨이 쉬어졌다.

"푸후우----!"

마치 십 년은 참은 듯, 해묵은 날숨을 몰아쉬는 진을 노인이 쓱 돌아봤다.

"왜 한숨을 그렇게 쉬어?"

"아? 어? 숨이? 오 그러네. 와."

불을 처음 발견한 원시 인류의 심정이 이랬을까.

진이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만화였다면 머리 위로 띠용! 이라는 효과음이 대문짝만하게 박혔을 터.

밥값 못하는 줄만 알았던 불씨의 효능이 공황 퇴치였다니?!

물론 완벽한 퇴치는 아니다.

아직도 우울감은 꽈배기로 한 번 쥐어짠 걸레 속 물기처럼 음습하고 축축하게 마음에 들러붙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게 어딘가.

깊은 어둠 속을 허우적대지 않았음에, 익사할 것 같은 공포를 피했음에 진이 저도 모르게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쿵, 쿵, 쿵.

맥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그때였다.

"크흠흠-"

"음?"

언짢은 헛기침에 잠시 유기했던 정신이 돌아온 진이다.

한껏 좁아졌던 시야가 차차 원상태를 찾으니, 어느새 눈앞에는 자신을 지켜보는 노인의 얼굴이?

꿰뚫는 듯한 시선에 진이 아차차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뭐라고 하셨더라?"

"되었다."

그러고는 휑하고 앞서가는데, 에헤이 설마 삐진 거야?

그래봐야 노인네 보폭. 길쭉길쭉한 모델 다리를 가진 진에겐 별거 아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단 두 걸음 만에 곁으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어르신, 같이 가요."

그러면서 손을 뻗어 노인장 어깨를 주물럭.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하지만 지금의 진은 기분이 좋다.

난생처음 공항을 퇴치한 직후이기도 했고,

꼬장꼬장한 뒷모습에서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의 모습도 옅게나마 겹쳐 보였기에.

해서 그냥 적당히 비위를 맞췄더니.

얼씨구? 그게 또 통한다.

"크흠. 그래서 아들은 왜 찾아주겠다고."

"아아. 그냥 뭐···이래저래 신경 쓰이니까?"

"물러 터진 놈이로고."

말만 불퉁할 뿐, 말투는 어느새 누그러진 노인이다.

진은 그러려니 했다.

동시에 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했지만.

그사이.

뜻 없이 지나치던 주변 풍경이 언제부턴가 슬슬 눈에 익기 시작했으니, 어느덧 골목을 크게 한 바퀴 휘돌아 다시 꼬치집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걸음을 세웠고,

먼저 입을 연 건 노인이었다.

"아들놈의 이름은 없다. 집을 떠날 때 이름을 버렸으니, 그래서 무명자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런데 굳이 왜 찾으시려고?"

"아비니까."

덤덤하게 대답한 노인이 진을 바라봤다.

"도움은 됐다. 난 이만 가볼 테니, 너도 그만 갈 길 가거라."

"······"

진은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애초에 괜찮다는 사람 붙잡고 몇 번이고 같은 얘기를 되물을 성격도 못됐거니와, 골목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으니.

"건강하시고. 잘 챙겨 드시고."

가볍게 쥔 주먹을 흔드는 그를 본 노인이 주름진 입매를 말아 올리며 몸을 돌렸다.

그렇게 뒷짐 진 노인의 모습이 차차 멀어지는 가운데.

진의 감각이 무언가를 포착했다.

그것은 아주 미약한 부자연스러움이었다.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천천히 발길을 떼는 인기척들.

초인적인 감각을 가진 그를 제외하면 누구도 인지 못 한 움직임.

진이 멀리 시선을 던졌다.

노점에서 핫도그를 우물거리던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경호원이 많으시네."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만티코어가 주차된 쪽으로 발길을 떼려다 말고 멈칫.

뜬금없이 후다닥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니.

"핫도그 5개만 줘요. 그 종류별로."

아직도 배가 덜 찬 진이다.

***

노인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범한 걸음걸이였다.

평범한 생김새였다.

평범한 느낌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그래서 눈길이 가지 않는.

그래서였을까.

만만해 보이는 이가 지나가면 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시비를 거는 양아치들도 오늘만큼은 얌전했다.

애초에 그들은 노인이 자신의 곁을 지나치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기에.

마치 풍경과도 같다.

그저 그 자리에 있다고만 인지할 뿐.

그 이상의 관심을 요구하지 않는 시야 밖의 배경처럼.

노인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발자취를 따라 서서히 모여드는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나치던 행인이요, 노점에서 군것질하던 남자였으며, 치근덕대는 사내들을 벌레 보듯 무시하던 여성이자, 인근 옥상에서 시체의 눈을 감기는 중년인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합류가 이어졌다.

노인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뒤따르는 자들로 채워진, 거인의 윤곽이었다.

저벅.

어느 순간 노인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턱선이 굵어 강인한 느낌을 풍기는 남자였다.

그는 노점 아래서 진과 눈이 마주친 자였으니, 고개를 푹 숙이며 예를 갖춘 뒤 무겁게 닫힌 입술을 달싹거렸다.

"진 에버나이트, 에넥도트라는 링커 사무실과 협업 중인 솔로입니다.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이례적인 속도로 성장···"

"핏줄은?"

말을 자르며 들어오는 질문에 남자가 대답했다.

"가계나 혈통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에버나이트라는 성 또한 본인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먼 방계라."

노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뜩 옅은 웃음을 흘리니.

뒤따르던 이들이 소리 없이 흠칫.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주인의 모습에 완벽에 가깝게 갈무리된 기척이 살짝 깨질 뻔한 자들도 있었다고.

"뭐가 됐든 더없이 기꺼운 일이다. 직계라는 놈들조차 빌빌대는 작금의 세태에 밑바닥의 들개가 광극을 빚어냈다. 놈들도 보고 배우는 게 있겠지. 아들놈의 흔적을 따라왔더니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만났어."

노인의 웃음이 짙어졌다.

다음 순간.

자연과 동화된 존재감이 편린으로나마 현현했다.

쿠르르르릉—쾅!

먹구름 너머로 번뜩인 뇌전이 다운타운의 상공에 거대한 갈지자 상흔을 남겼다.

노스 다운타운에서 사우스 다운타운에 이르는 압도적인 전광이었다.

자전이 아닌, 진짜 자연의 번개.

"왁! 깜짝아."

"씨, 씨발 뭐야?"

주변이 화들짝 난리가 난 가운데.

노인을 반걸음 정도 뒤에서 따르던 남자가 말했다.

"가문으로 데려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두어라.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꽃이다. 성정이 로칸과 같아. 억압하려 들면 오히려 부서질 것인즉, 차라리 자유롭게 풀어두도록.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그에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니, 노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기대되는군. 어디까지 성장할지."

로스트 시티에는 온갖 도시 전설이 있다.

자하드의 가주가 스스로를 파문한 후계를 찾아 이따금 가문 밖으로 모습을 내비친다는 얘기 또한 그중 하나였으니.

자하드의 29대 가주.

만뢰(万雷)

가벨루스 자하드.

집 나간 아들을 대체할 만한 원석을 발견한 그가 흡족한 미소를 띤 채 다운타운의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진도 번개를 봤다.

그리고 남들처럼 깜짝 놀랐다.

"워씨! 무어야?!"

어눌한 탄성과 함께 입에서 핫도그 파편이 뿜어졌다.

심장 속 광극도 덩달아 파직! 번갯불을 뿜는 가운데.

"···비 오나? 아닌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진이 다시 핫도그를 향해 입을 아 벌린 순간.

지이이잉----!

"얶!"

가슴팍을 때리는 요란한 진동에 또다시 흠칫 놀란 진이 품에서 단말기를 꺼냈다.

직후 엄지를 연타해 밝힌 화면 너머로 짤막한 메시지가 보였으니-

[이제 슬슬 일해야지. 솔로왕?]

칼리파였다.

< 50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