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회전은 크게 예선과 본선으로 나뉜다.
참가자들이 늦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다는 예선을 지나면, 축제의 꽃 16강 토너먼트가 시작되니, 예선 포함 최소 5번은 승리해야 우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5번을 싸워 경험치 30,000이라.
문과식 나눗셈(진은 공대 출신이다)을 시전하면 한 경기당 6,000 정도의 난도라 생각해야 하는 걸까?
아니. 그러면 경험치를 좀 나눠서 배분하던지.
하여간 융통성이라곤 없어요.
만약에 결승에서 지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아무것도 못 챙기려나.
문뜩 2등도 잘한 거야, 포효하던 어느 프로게이머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피식거린 진이다.
그리고 다시 상태창을 바라보며 생각하길.
역사상 가문 소속이 아닌 참가자가 회전에서 우승한 경우는 고작 2번뿐이라 했던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터무니없게 느껴지는 저 경험치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더라고.
진이 복잡하게 생각하길 그만뒀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경험치는 부수적인 거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리하여 머리도 식힐 겸, 발길이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쏘다니기 시작한 그다.
축제를 5일 남겨둔 도시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카페나 음식점은 이른 아침부터 문전성시를 이뤘고, 야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올해의 우승자가 누구일까 갑론을박 토론을 펼치고 있었으며, 길게 늘어선 노점에선 각 가문의 문장이 박힌 상품들을 판매하는 중이었다.
간만에 느끼는 일상의 풍경.
그 모든 것이 진에겐 신선하게 다가왔지만, 보다 마음이 편안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순수주의자란 것이었다.
지난 1년 하고도 6개월간 얼마나 다양한 군상들을 보았던가.
본인의 유기물 신체를 극도로 혐오하는 기계박이들, 유전자 개조로 반인반수가 된 초인, 99.9% 리얼한 성기 모델을 장착했다며 직접 확인해 보라던 섹스토이와 안드로이드의 목숨은 소중하다는 피켓(Android Lives Matter)을 열렬히 흔드는 로봇들의 집회 등등.
그야말로 거를 타선이 하나도 없었으니.
21세기에서 건너온 이방인의 시선에선 문화충격이란 이름의 연타석 홈런포 그 자체였다고.
막말로 어떻게 저런 걸 받아들이고 이해하겠는가. 그저 익숙해졌을 뿐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지금 같은 상황?
진에게는 이곳이 하와이고 발리고 몰디브다.
그리하여 절로 가벼워진 발걸음이 판석 깔린 대로를 한창 가로지를 때였다.
"꺅!"
무언가 다리에 부딪히는 느낌과 함께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음?"
진이 고개를 내리자, 그곳에는 엉덩방아를 찧은 어린 소녀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더라고.
커다란 눈망울이 끔뻑거림과 동시에 헬륨 풍선 하나가 하늘로 둥실 날아올랐으니.
부드럽게 끈을 낚아챈 진이 그대로 팔을 쭉 내밀었다.
"여기."
얼떨결에 풍선을 건네받은 소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악수하듯 건넨 손으로 아이를 일으켜 세운 진이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아픈 곳은 없느뇨."
네, 하고 돌아온 대답에 앞으론 조심하려무나 점잖게 타이른 진이 그길로 발길을 떼려는 순간.
"······?"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린 시선 끝이 아이의 손에 쥐어진 풍선에 닿으니.
연보랏빛 바탕색에 벼락을 형상화한 심볼?
"너 자하드 응원해?"
다시 한번 돌아오는 대답, 네.
그에 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눈높이에서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파직 솟구친 번갯불이 허공에 자그마한 글귀를 만들었다.
[진 에버나이트도 응원할 것]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었을까.
아이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사가 터진 순간.
잰걸음으로 달려온 부모가 뒤에서부터 소녀를 꽉 껴안았으니-
"너! 뛰지 말라고 했지!"
"엄마! 이 오빠 자하드야!"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제자리에서 폴짝거릴 뿐이라.
"무슨···"
자그마한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뒤늦게 눈길을 옮긴 부모다.
하지만 그땐 번갯불이 사라진 뒤였으니.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피식거리며 몸을 돌렸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동안 진은 제법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라프를 만나고, 에안나와 식사도 하고···
하루를 관광하듯 싸돌아다니면, 다음날은 호텔에 짱박혀 푹 쉬는 식이었으니 심신으로 즐기는 단짠단짠한 일정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투숙 중인 객실이 지나치게 근사한 곳이었다는 것.
아니, 호텔 방 주제에 대형 샹들리에가 웬 말이냐고.
그뿐이랴. 거실과 주방은 기본이요.
헬스장 뺨치는 트레이닝룸, 건/습식 사우나, 드넓은 서재, 값비싼 오브제들까지.
일일이 나열하기 입이 아플 정도로 뭐가 많았으니.
매일 아침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서 눈을 뜰 때마다 엘리나를 향한 감사의 만세삼창을 외치는 게 습관이 된 진이다.
그리하여 개최식 당일.
"만세--!!"
오늘도 어김없이 만세와 함께 하루를 시작한 진이 여유롭게 호텔을 나섰다.
그러고는 대기 중인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발 편하게 이동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경기장을 올려다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더라.
"어우 씨."
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구라도 비슷한 반응이지 않을까.
끝을 모르고 늘어선 인파가 경기장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서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참가자들이 입장하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있다는 점이었으니.
누가 길치 아니랄까 봐, 주변에 묻고 물어 어렵사리 경기장 안으로 들어선 진이다.
"···진짜 크네."
광활한 면적의 필드는 예선 준비로 한창이었다.
천 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을 2개로 쪼개 놓았다. 그리고 각 구획에는 서로 다른 색상의 깃발이 꽂혀 있었으니, 그 모습이 경기장의 거대한 전광판을 통해 4분할된 화면으로 송출되고 있더라.
짐작건대 경기가 동시에 진행될 모양이었다.
하긴 사람이 몇 명인데···
진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제 주변의 참가자들을 훑을 때였다.
"여-"
어느새 나타난 라프가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잠은 좀 잤냐?"
"고럼."
진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라프가 접수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좋겠다. 나는 긴장돼서 한숨도 못 잤는데."
"한숨도?"
진이 고개를 돌려 라프의 옆얼굴을 확인했다.
그러자 보이는 퀭한 눈 밑.
"하루만 못 잔 게 아닌데?"
"이틀 됐어."
"얼씨구."
진이 헛웃음을 흘렸고, 라프는 발끈했다.
"얌마, 7년 만에 돌아온 기회야. 안 떨리면 그게 비정상이지."
그러고는 한탄하듯 덧붙이길.
"더군다나 오늘은 뽑기 운이 얼마나 중요한데. 까딱 잘못해서 죽음의 조에 속하기라도 해봐. 그냥 하이라이트에 박제되는 거라고."
"뽑기 운? 죽음의 조?"
"그게···"
진의 물음에 라프가 뭐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접수대의 직원을 마주한 상황이라.
"이름이?"
"진 에버나이트."
"확인됐습니다. 상자 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주시면 됩니다."
접수원의 안내대로 새하얀 상자에 손을 집어넣은 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작은 구슬들이 상자 안에서 저 스스로 휘돌고 있었기에.
오, 마법?
놀란 마음을 뒤로한 채 손바닥을 스치는 구슬 하나를 움켜쥐어 접수원에게 내민 그다.
"2조군요. 자리에서 대기해주시길."
진의 차례가 끝나고 라프가 구슬을 뽑았다.
11조. 그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와, 씨이벌! 피했다!"
"···? 뭔데 그렇게 좋아해."
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던진 질문에 라프가 한결 맑아진 눈빛으로 대답했다.
"뭐긴, 뭐야. 7가문의 대표들이랑 같은 조에 안 걸린 거지. 걔네는 형평성의 이유로 예선에선 같은 조에 안 묶인다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선의 다른 이름은 쟁탈전이라.
각 조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단 한 명뿐.
우르르 투입된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친 최후의 1인이 깃발을 들어 올리고, 본선에 진출한 영예를 얻게 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문의 대표들은 당연하게도 기피의 대상이다.
이들과 한 조에 묶인 순간, 다음을 꿈꿔볼 수도 없이 광탈하고 말 테니까.
그래서 진은 어떻게 됐냐고?
피했다.
가문의 대표들이 속한 조는 1, 4, 5, 7, 8, 13, 16이었던 덕분에.
물론 진심으로 기뻐하는 라프와 달리 진은 별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나중에 붙어야 할 거, 미리 붙어도 상관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으므로.
어찌 됐든 조도 정해졌겠다.
관객석 일부에 마련된 참가자석에 라프와 함께 자리를 잡은 그다.
그러고 나니 개최식의 시간이었다.
7년만에 돌아온 순수주의자들의 축제답게 눈과 귀가 즐거운 성대한 공연이 이어졌다.
가볍게 손뼉을 치며 호응하길 한참.
어느 순간 경기장 곳곳에서 파문처럼 번지는 웅성거림에 진이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바라본 중앙 단상, 그곳에 반백발의 중년인이 서있더라.
"······"
"······"
동시에 좌중이 침묵했고, 진은 검지로 말하는 나무위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누구?"
그러자 침을 꿀꺽 삼키며 라프가 입을 열었으니.
"검성···"
아연한 혼잣말에 진이 머릿속 정보를 뒤적뒤적.
최근에 주입식으로 열심히 때려 넣은 정보를 떠올렸다.
아나리온의 31대 가주.
검성(剣聖)
게일 아나리온.
젊은 시절의 별명은 광검(狂劍)으로 당시 고위험군의 범죄자를 포함, 수많은 흑마법사를 미친 듯이 썰어버린 인물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본인 역시 수없이 위기를 겪고 또 극복했다고 했으니, 온실 속 화초라는 문장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음이라.
덕분에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음에도 회전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가문 사람들의 속이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목숨을 걸지 않은 수련은 의미가 없단 말을 남긴 희대의 전투광.
물론 이는 20년도 더 된 옛이야기일 뿐이고.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누그러든 건지, 깨달음을 얻은 건지, 지금 보이는 얼굴은 명경지수를 연상시켰으니.
다음 순간.
미중년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얼굴이 좌중을 가볍게 훑으며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편히 즐기길."
딱 한마디.
그게 끝이었다.
원래 개최사고, 축사고, 수상 소감이고 짧을수록 멋있는 법이라고.
지금까지의 침묵은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다 말하듯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검성! 검성! 검성! 검성!
귀가 얼얼할 정도의 연호는 덤이다.
언제고 로스트 시티의 최강자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이들이 바로 다섯 오메가급 사이커, 일곱 가주, 아홉 전설이 아닌가.
도시의 정점에 선 시대의 강자.
그 일좌가 눈앞에 있는 상황이다.
허튼소리라도 주워섬기고 싶고, 일거수일투족 눈으로 좇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즉.
한동안 행사 진행에 차질이 있을 만큼 함성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하여 정신없는 와중에 시작된 1조와 2조의 경기!
우르르 경기장으로 쏟아지는 참가자들의 모습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관객들이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시선은 짜기라도 한 듯 1조에 고정됐으니.
그건 한창 몸을 풀고 있던 진도 마찬가지라서.
두 손을 입가에 모은 그가 있는 힘껏 외치길.
"소뇌-----왕!!!! 파이팅!!!! 16강에서 보자아아아!!!"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응원에 경기장 중앙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켄드릭의 눈썹이 꿈틀.
하지만 의외로 불쾌한 티는 내지 않는다.
전광판에 자신의 얼굴이 단독으로 송출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서 세상에 관심 없다는 듯 오연한 얼굴로 똥폼을 잡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 위치가 경기장 중앙의 깃발 바로 옆이었다.
자연스레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다른 참가자들이 그를 둥글게 에워쌌으니.
뿌우우──!
개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채 그치기도 전이었다.
"공격해!"
"그래봤자 혼자라고!"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참가자 전원이 미리 말을 맞춘 것처럼 우르르 달려든다.
동시에 켄드릭의 눈에서 파직! 번갯불이 솟구쳤다.
*
"와아아아아!!!!"
대부분의 시선이 1조의 경기에 집중된 가운데.
소수의 눈길이 2조에 닿았다.
같은 경기장을 나눠 쓰고 있다곤 하나, 가문의 대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심도가 훨씬 떨어지는 곳이었다.
구태여 시선을 줄 이유가 없었거늘.
그럼에도 누군가는 2조를 빤히 바라보았으니.
놀랍게도 검성이 그중 하나라.
어느 순간 그의 입가에 기꺼운 미소가 맺히길.
"복병이 있었군."
나직한 목소리가 마침표를 찍은 순간.
파지지직!!!!
귀를 찢는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자줏빛 번갯불이 폭발적인 기세로 터져 나왔다.
소뇌왕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출력으로.
< 91화 >
쟁탈전.
깃발의 주인이 될 최후의 1인을 가리기 위한 싸움.
철저하게 개인전의 성격을 띤다는 점이 진은 마음에 들었다.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나 빼곤 다 적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 룰인지.
깃발이라는 상징성을 쟁취한다는 점에서 어린 시절 즐겨봤던 WWE의 머니 인 더 뱅크가 떠오르기도 하고.
음. 머니 인 더 뱅크하면 에지지.
에지하면 스피어고.
스피어는 창.
창술은 거슈타인 가문.
거슈타인 가문의 대표는 카를로스 거슈타인.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다던 동요의 음율을 살려, 연상 암기법을 시전한 진이다.
낯선 이름들을 워낙 많이 접하게 된 요즘이라 이렇게라도 외워야 머리에 남더라.
아무튼 창술은 거슈타인. 창술은 거슈타인.
염불을 외운 진이 주변을 쓱 둘러봤다.
어느새 주변을 가득 채운 경쟁자들이 보였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서로를 경계하는 눈빛들.
기본적으로 옅은 긴장감이 깔려 있긴 하되, 1조보다는 분위기가 훨씬 좋았다.
당연한 일이다.
주목도는 떨어질지언정 소뇌왕의 깔개가 될 운명은 피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잘하면 본선에 진출할 수도 있고 말이다.
작게 움튼 기대감 속에 마침내 개전의 뿔피리가 울렸다.
뿌우우──!
"죽어!"
진의 귓가로 날카로운 소리가 파고들었다.
등 뒤였다. 기습이랍시고 달려든 모양인데 멍청하게 소리를 냈다. 어이가 없으려니 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런 놈들이 있으니까 한 번에 떨어뜨리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용기로 참가한 건지.
휙!
진이 몸을 돌렸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팔뚝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니, 직후 그 위로 묵직하게 얹히는 다리가.
강화 마법을 걸었을까. 표면에 일렁일렁 푸른 마나가 감돈다. 물론 팔뚝은 전혀 밀려나지 않았지만.
"엇!"
공격이 막힐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눈을 부릅뜨는 얼굴이 보인다.
그대로 가로로 눕힌 팔을 위로 쳐올렸다.
반동으로 밀려나는 다리, 자세가 무너진 상대의 모습.
진이 망설임 없이 그 빈틈으로 앞발을 꽂아 넣었다.
퍼어억!!
가슴을 걷어차인 사내가 트럭에 치인 것마냥 날아가는 가운데, 진이 곧바로 머리를 숙였다.
훙!
마나를 두른 목검이 정수리를 아슬하게 스쳐 간다.
'제길!' 아쉬워하는 외마디와 함께였다.
아쉽게 빗나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틀렸다.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을 뿐인데. 이걸 모르네.
간결한 회피 다음엔 즉각적인 반격이 이어졌다. 반원을 그린 다리가 상대의 발목을 때렸다. 바닥에 코를 박고 쓰러지는 뒤통수를 곁눈으로 확인한 뒤 허리를 곧게 편 진이다.
어느새 정면에는 두 명의 사내가 서있었다.
"일단 저놈부터."
"좋아."
사실 방금 전까지 치고받던 놈들이었는데, 갑작스런 공동의 적 앞에 이해관계가 척척 맞아떨어진 모습이라.
짧게 시선을 교환하고 좌우로 찢어서 달려드는 순간.
빠각!
오른쪽 사내의 턱이 들렸다.
관성을 못 이겨 그대로 바닥 위를 주르륵 미끄러지는 그의 모습에 반대쪽에서 접근하던 사내가 흠칫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단단한 주먹에 아랫배를 맞았다. 정확히 간이 있는 위치였다.
"케에에엑---!"
상체를 오그라뜨리며 주저앉는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세상을 뒤덮는 신발 밑창이었으니-
퍼억!!!
면상을 걷어차 상대를 마무리한 진이 어깨를 으쓱.
물 흐르듯 넷을 쓰러뜨린 경쟁자의 등장에 주변의 싸움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이 말해준다.
진짜가 나타났음을.
그에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안 덤벼? 순수주의자 망신 다 시킬래?"
진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다수가 덤벼들 것을 확신한 말투였으니, 그 담담함이 되려 적들을 자극했다.
면전에서 무시당했다고 느낀 것이다.
"이 건방진 새끼가!"
"잘났다 이거지?!"
"후회할 거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가오는 경쟁자들.
그 모습에 진이 씩 웃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동시에 솟구치는 자줏빛 번갯불.
파직, 파지직-!!
방전하듯 날뛰는 뇌전, 그 선명한 빛의 줄기가 몸을 감싼 것도 모자라 주변을 향해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자, 자하드?!"
난폭한 공간 장악력에 모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 순간.
콰직, 진의 발밑이 깨져 나가니-
이어진 움직임은 지상에 내리친 벼락에 가까웠다.
꽈릉!!!
우렛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몸이 붕 떠올랐다.
가장 정면에 서있던 사내였다. 트리플 악셀 뺨치는 회전을 선보이며 장외로 나가떨어지는데, 아무도 그 광경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 했다.
눈을 돌리기도 전에 사나운 뇌성이 잇따라 터져 나왔기에.
꽈르르릉!!!
명멸하는 경기장에서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반응도 못 하고 쓰러지는 놈, 8할.
힘에 밀려 튕겨 나가는 놈, 1할.
뭔가 잘못됐다! 허둥지둥 뒷걸음질 치는 놈, 1할.
하지만 모든 응시자가 다 이런 것은 아니었으니-
"무시하지 마라!"
"막아!"
짙은 마나를 두른 이들이 달려든다.
몸과 무기를 강화하거나, 투사체를 쏘거나, 각종 주문을 외면서.
진도 피하지 않았다.
짧게 쪼갠 1초 사이에 상대와의 거리를 가늠한 뒤 찰나지간 몸을 움직였다.
쩌엉!
가슴을 노린 검은 손등으로 쳐내고, 머리를 노린 주문 투사체는 고개를 젖혀 피했다. 자세가 흔들린 둘의 가슴팍을 연이어 후려친 다음, 뒤로 접근한 거한이 내리친 도끼가 가속하기 전에 자루를 움켜잡았다.
우지끈!
엄청난 아귀힘으로 손잡이를 뽀개버린 진이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순수주의자들이 짓쳐들었으니.
제자리에 우뚝 선 진이 광극을 힘껏 회전시켰다.
───!!
다음 순간, 진의 몸을 중심으로 뿜어진 반구 형태의 뇌기가 주변을 휩쓸었다.
직후 마지막까지 응전하던 이들이 뻣뻣한 자세로 차례차례 허물어지기 시작하니, 그들을 훑고 지나간 번갯불이 희뿌연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솟구쳐 사라졌다.
"······"
"······"
경기장에는 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켜보는 관객이며,
차례를 기다리며 몸을 풀던 참가자들이며.
심지어는 싸움이 끝나지 않은 1조의 순수주의자들까지도, 격렬한 움직임을 도중에 멈춘 채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니.
모든 시선의 중심에서 진이 손을 툭툭 털었다.
"생각보다 괜찮네."
기계적인 단계를 밟아나가는 탓에, 고뇌의 과정이 생략된 깨달음의 깊이는 다른 2위계에 비해 모자랄 수도 있지만, 그 출력만큼은 같은 위계 안에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다.
이제껏 우직하게 별을 밝힌 마나 회로의 레벨이 5.
거기에 낭비라곤 없이 흡수된 진혈로 더욱 짜임새 있게 강화된 회로는 그야말로 뿌리 깊은 나무 그 자체라서.
만약 이 자리에 게임을 추천한 동생이 있었다면 아마 기립 박수를 치지 않았을까.
따로 가르친 적 없었음에도, 전형적인 이레귤러의 왕귀 루트를 밟아나가는 형의 모습에 감동하면서 말이다.
물론 진은 그런 게임적인 요소에는 일절 관심 없다.
그저 초토화된 주변을 쓱 훑은 뒤 당당한 걸음으로 경기장 중앙, 펄럭이는 깃발을 향해 나아갈 뿐이니.
덥썩, 깃대를 움켜쥔 그가 숨을 흐읍-!
아랫배 빵빵하게 저장된 숨이 이내 쩌렁쩌렁한 외침으로 치환됐다.
"우승 가자!!!"
***
"에, 으, 어?"
잠깐 못 본 새 언어능력을 상실한 라프다.
헤 벌어진 입에서는 단편적인 의성어가 띄엄띄엄 흘러나올 뿐이었으니.
이를 해석하자면,
'너 자하드 방계였어? 에스콰이어? 아니지, 에스콰이어였으면 참가 못했겠지. 그, 그럼 뭔데?'
···정도가 되시겠다.
물론 진에겐 전혀 전달되지 않은 의미였지만.
"씁, 간만에 힘썼더니 피곤하네. 여긴 뭐 치킨 같은 거 안 파나?"
먹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전광판에 단독으로 송출된다.
관객들은 아주 난리가 났다.
"대체 누구지? 가문의 대표가 둘일 순 없는 거잖아!"
"입적하지 않은 방계 아닐까?"
"찾았어! 진 에버나이트. 솔로래. 레벨은 4."
"생각보다 낮은데? 방금 보여준 실력은···!"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보지!"
"아무튼 시발! 존나 멋있었다! 난 시발! 너 응원한다!"
여기저기서 토론과 함성이 교차하고 빗발치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진의 등장을 반기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7가문의 대표가 아닌 참가자 중에 이 정도로 엄청난 등장을 선보인 이가 대체 얼마 만인가.
올해도 어김없이 가문끼리의 경쟁 구도로 흘러갈 줄 알았던 대회에 별안간 다크호스가 등장했다.
심지어 제 입으로 우승을 노린단다.
고착화 된 볼거리가 풍성해졌다.
어떻게 환호를 아낄 수 있을까.
와아아아아아!!!
예선 시작부터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였으니-
홀로 분을 삼키는 이가 하나.
"······"
팔짱을 낀 켄드릭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당연하지만 그도 깃발의 주인이 됐다.
문제는 그것이 진보다 조금 늦었다는 것.
뒤늦게 깃대를 움켜쥐었을 때는 이미 모두의 관심이 저 망아지한테 쏠린 뒤였으니.
지금 이 순간 켄드릭의 귀에는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환호성이 조금 다르게 들리더라고.
소뇌왕 네가 진출하는 건 당연하잖아.
칭찬 맡겨놨어?
꼬우면 먼저 깃발 잡던가~
절로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에 순간 평정심을 잃을 뻔한 그다.
참자, 참자, 참자.
포커페이스 사이로 번진 미세한 균열을 서둘러 수습한 뒤 속으로 생각하길.
이렇게 된 이상 본선에서 이긴다.
오히려 잘 됐어.
못 본 척 넘어갔으면 찝찝할 뻔했는데.
그래, 위기 없는 대관식은 재미없지.
켄드릭이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어으. 사람 많다. 많아."
두 손 가득히 먹거리를 사 들고 온 진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가며 마주친 사람들이 어찌나 잡아대던지.
전후좌우 돌아보며 사진 찍어주랴,
있지도 않은 싸인 만들어서 해주랴,
(덕분에 모든 싸인이 다 다르게 생겨버린)
덕분에 엘리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고.
그사이 필드엔 3, 4조의 경기 준비가 한창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젠 맘 편하게 남은 경기를 감상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재밌겠는데."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팝콘을 와삭와삭 씹으며 바라본 경기들은 하나같이 다 재밌었기에.
물론 진도 사람인지라, 가문의 대표들에게 눈길이 더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
4조 카트리나 마르지에.
암빙(暗氷)의 마르지에답게 광범위한 영역에 온도를 떨어뜨려 참가자들의 행동력에 제약을 둔 뒤, 어느 순간 움직임이 멎은 이들을 가볍게 툭툭 밀어 장외시키는 것으로 깃발 쟁취!
5조 에안나 솔라드.
개전과 동시에 백염을 방출. 경기장 테두리에 불꽃의 장벽을 두른 뒤, 퇴로가 사라진 참가자들을 맞상대하는 화끈한 경기 운영으로 깃발 쟁취!
판이한 성향을 보여주며 본선에 진출한 두 여인을 향해 관객들이 찬사를 보냈다.
당연하게도 나는 누구 취향이네, 누가 더 예쁘네, 같은 의미 없는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서릿발 같은 냉미녀가 이상형에 가깝다? 카트리나.
보다 자연스러운 느낌을 선호한다? 에안나.
솔직히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이런 감상 또한 하나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점점 무르익어가는 분위기 속에 이어지는 7, 8조.
여기가 하이라이트였다.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두 사람이 한 번에 등장한 것이다.
7조 류카드 아나리온.
8조 카를로스 거슈타인.
한 사람은 불세출의 검객(눈 감고 가만히 있음)
다른 하나는 창의 귀신(계속 하품 중임)
진의 눈이 좌우로 바빠졌다.
아니 대진이 이렇게 잡히면 어쩌자는?
동시에 웅혼한 뿔피리 소리.
허리께까지 닿는 은발을 가진 류카드가 눈을 떴다.
철컥.
칼집을 잡은 오른손의 엄지가 칼등을 위로 밀어 올리고, 손잡이를 잡은 왼손이 부드럽게 반원을 그리니.
다음 순간.
부채꼴 형태로 번진 파장이 부드럽게 모든 참가자의 몸을 훑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쿨럭!"
거짓말처럼 우르르 쓰러지는 이들이다.
그 모습이 마치 어설프게 합을 맞춘 연기처럼 보였지만, 보는 눈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했다.
그리고 진도 그중 하나였으니.
와, 마나를 반발시킨 건가?
상대의 마나 회로에 자신의 마나를 흘려 넣어 부하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이 박수를 짝짝짝.
딱 몸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하다니.
소름 돋을 정도의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차차, 8조!
불현듯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느낌에 서둘러 고개를 돌린 진이었지만, 이미 배는 떠나간 뒤였다.
이미 모두를 정리한 카를로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깃대를 잡고 있었기에.
아씨, 놓쳤네.
진과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사방에서 아-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뭐 어쩌겠는가.
나중에 다시보기로 봐야지.
이후 두 명의 우승 후보가 나란히 경기장을 떠나니.
지금부턴 잠시 쉬어가는 타임이었다.
13조의 데이어 하칸이 나올 때까지는 가문의 대표가 없는 경기의 연속이었기에.
해서 진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에 전념했다.
"너도 좀 먹을래?"
"···아니. 토할 거 같다고."
점점 자신의 차례가 가까워지는 라프(11조)만 사색이 되어갈 뿐이었지만.
그러는 동안 9, 10조 인원들이 경기장으로 올라오기 시작했으니, 그에 진이 우물우물 치킨을 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후 편견 없는 시선으로 참가자들을 하나 하나 살피길 한참.
어느 순간 진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잘못 봤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지로 눈가를 쓱쓱 비빈 뒤 다시 확인했지만, 잘못 본 게 아니더라고.
쟤가 저기 왜 있대?
의문 가득한 시선 끝, 눈에 익은 인물이 담겼다.
검은 폭포수 같은 생머리.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장밋빛 도톰한 입술.
과거 휴게소 음식점에서 만난 나사 빠진 여자가 딱 저렇게 생기지 않았던가.
자연스레 손에 든 치킨을 내려놓은 그때.
여인의 눈이 진을 향했다.
그리고 방긋 웃었다.
< 92화 >
지금 나보고 웃은 거야?
진이 괜스레 좌우를 살폈다. 그러고는 기름기 번들대는 검지로 제 얼굴을 가리키길.
'나?'
소리 없이 벙긋거린 입모양은 상대에게 닿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뿔피리가 울렸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경기는 예상보다 훨씬 치열했다.
독보적인 강자가 없다는 건 누구라도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으니,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누군가 상대를 쓰러뜨리면, 뒤에서 기습이 벌어지고, 맞부딪힌 칼에서 불티가 튀고, 주문이 교차하고, 협력하고, 배신하고, 솎아지고 또 솎아진 끝에-
마침내 최후의 1인이 깃발을 움켜쥐니.
핏자국 튄 아름다운 얼굴이 전광판 안에서 미소 지었다.
"10조 승자! 미쉘 라일리!"
증폭된 사회자의 음성이 장내를 떠들썩하게 관통하자, 관객들은 또 한 명의 본선 진출자에게 환호와 격려의 박수를 선사했다.
와아아아!!
그 속에서 진이 애매한 입소리를 냈다.
"쓰읍."
올라가긴 했네.
그래도 구면이라고, 미쉘인지 몽쉘인지 아무튼 걔가 싸우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 그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그랬다.
적당한 체술, 적당한 마나, 적당한 주문.
굳이 비유하자면 작은 육각형에 가까운 스타일이랄까.
좋은 말로는 무난하고, 달리 말하면 무색무취 확 꽂히는 부분이 없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관객들 사이에서도 경기력보단 그 외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뤘다.
"예쁘긴 하네."
"키도 존나 커. 175? 180?"
"이름이 미쉘 라일리랬지? 들어본 적 있냐?"
"여기저기 검색해 봤는데 딱히 나오는 건 없네. 별로 유명하진 않은가 봐."
"그럼 목적은 달성했겠네. 본선 진출만 확정 지어도 몸값은 제대로 올라갈 테니까. 그런 목적으로 참여한 놈들이 어디 한둘이야? 됐어, 다음 경기나 보자."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경기가 으레 그렇듯 형식적인 감상평을 끝으로 빠르게 관심이 식어가는 가운데.
"······"
흑발을 찰랑거리며 경기장을 떠나는 여인을 진이 말없이 바라볼 때였다.
"푸후우--"
떨림 가득한 숨소리와 함께 라프가 몸을 일으켰다.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을 허벅지에 대충 문질러 닦은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 다녀온다."
"어디 보고 말하냐? 야, 야?"
초점 없는 시선에 진이 손가락으로 딱딱 소리를 내며 물었지만, 그땐 이미 경기장을 향해 터덜터덜 내려가는 뒷모습만 보이더라고.
저러다 싸우기도 전에 쓰러지겠네.
사내새끼가 왜 이렇게 새가슴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것도 잠시.
진이 이내 입가에 둥글게 벽을 치고 외쳤다.
"파이팅!!!"
*
결과만 말하면 라프는 붙었다.
"해냈다아아악-!!"
무릎 꿇은 자세로 팔을 번쩍 들고 포효하는데, 눈탱이 밤탱이 된 얼굴 때문일까.
이후 깃대를 끌어안는 모습이 이보다 극적일 수가 없더라고.
"고생했다!"
관객들도 뜨겁게 호응하며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니, 이에 화답하듯 이리저리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라프였다.
그에 군중과 어울려 환호하던 진이 생각하길.
생각보다 되게 잘 싸우네?
벌벌 떨 땐 언제고, 침착하게 경쟁자를 줄여나가는 모습이 꽤 프로페셔널하더라.
그런데 싸우는 스타일이 뭔가 익숙하단 말이지.
어디서 봤지?
간질간질한 머릿속을 뒤적이느라 미간이 좁아진 것도 잠시.
"여기 주문하신 치킨 나왔습니다."
"오오!"
양껏 리필된 음식에 정신이 팔린 진이 다시 경기장에 시선을 뒀다.
이변은 없었다.
13조, 데이어 하칸.
16조, 세실 플로렌스.
남은 가문의 대표들 또한 나란히 예선을 통과했으니, 마침내 길었던 쟁탈전이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고는 곧바로 본선 대진표 추첨의 시간이었다.
검성이 구슬을 뽑으면, 호명된 참가자의 얼굴이 전광판에 비치는 식이었다.
수 시간 넘게 목청을 쥐어짜느라 잠시 방전됐던 관객들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원래 배부른 와중에도 간식 배는 남아있는 법이라고.
조 추첨은 못 참지!
그리하여 모두가 검성의 손과 사회자의 입을 번갈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티모시 헌트! 에안나 솔라드!"
힘찬 외침과 함께 2분할 된 스크린에 두 사람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송출됐으니-
패배를 직감했을까, 작게 한숨을 내쉬는 사내와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한 에안나의 모습에 관객들이 옳다구나 토론의 장을 열었다.
이건 에안나의 낙승이네.
티모시도 제법 잘 싸우던데 운이 없었어.
혹시 모르지. 언더독의 반란이 일어날지.
그럼 집이랑 차 팔아서 티모시한테 걸던가.
···뭣?!
벌써부터 정배니 역배니 생각이 갈린 도박꾼들이 목청을 높일 때였다.
"진 에버나이트! 켄드릭 자하드!"
우렁찬 호명에 한창 콜라로 입가심 중이던 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빨대로 콜라를 쭈압쭈압 빠는 모습이 스크린 반쪽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으니, 반대편에는 눈썹을 꿈틀대는 도련님의 모습이.
당연하게도 관객석이 발칵 뒤집혔다.
직계와 방계의 싸움!
심지어 같은 가문이라니!
역사를 되짚어 유례없는 대진에 모두가 발을 구르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가운데.
초장부터 우승 후보 중 하나를 만나버린 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차라리 잘됐네.
이참에 붙어보는 거지.
애초에 회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도 소뇌왕과의 첫만남 때문이지 않았나.
자연스레 진이 그날의 기싸움을 떠올리는 순간.
와아아아아!
또다시 환호성이 폭발했고,
진은 반사적으로 전광판부터 확인했다.
동시에 눈에 담기는 두 남녀의 얼굴.
"세실 플로렌스! 카를로스 거슈타인!"
과연 난리가 날 만했다.
처음으로 가문의 대표끼리 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정령술의 플로렌스.
창술의 거슈타인.
다만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는 별개로 이어지는 관객들의 예측은 지극히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으니.
"이건 뭐 볼 것도 없겠는데. 무조건 카를로스지."
"동감이야. 테아면 몰라. 세실은 아무래도 카를로스보단 이름값이 쳐지는 게 사실이니까."
"와, 그렇게 생각하니 아깝긴 하다. 테아 대 카를로스라고 하니까 무게감이 확연히 다르네."
"아쉬운 일이지. 그러게, 테아는 왜 갑자기 출전을 포기해선···"
"아, 몰라. 난 무조건 세실이야. 역배 가자아!!"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 역배충은 아까부터 난리네.
그나저나 사람들은 테아가 죽은 줄 모르는구나.
테아 플로렌스.
최강의 에스콰이어로 명성이 드높은 그녀였지만, 지금은 얼굴수집가의 수집품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니.
그 사실을 아는 진으로선 못내 마음이 찝찝하더라고.
그래서일까.
자꾸만 눈길이 화면 속 세실에게 향했다.
죽은 천재를 대신해 참가했을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조금만 자세히 봐도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반면 카를로스는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라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사람들은 카를로스의 승리를 기정사실화 중이었다.
이후로도 추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하여 윤곽이 잡힌 본선 대진표다.
16인, 8번의 대진, 4개의 조.
진은 그중 2조에 속했다.
달리 말하면 각각 3, 4조에 속한 류카드와 카를로스는 결승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면 볼 일이 없단 소리였다.
물론 그렇게 되면 둘중 하나는 탈락한 상황이겠지만.
솔직히 조금 아쉽긴 했다.
이왕지사 싸우는 거 우승 후보라는 녀석들만 골라서 싸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남들이 들으면 식겁할 만한 생각을 하며 진이 몸을 일으켰다.
으그그,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온다. 어찌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꼬리뼈가 얼얼한 건 둘째 치고, 엉덩이 아치가 무너진 느낌이었다.
해서 주먹 쥔 손으로 둔부를 툭툭 두드리자니 어느새 다가온 라프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치료를 받고 뒤늦게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이게 누구셔! 본선 진출자, 진 아니야! 응?!"
"얼씨구."
붕대를 친친 감싼 얼굴을 확인한 진이 피식 웃었다.
"지금은 아픈 줄도 모르겠지?"
"아픔이 뭐지? 본선 진출자는 그런 거 모른다만?"
직후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의 오른손이 하이파이브에 가까운 악수로 이어졌다.
"고생했다야." "너도 수고 많았어, 인마."
가볍게 덕담도 주고받았겠다.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며 경기장을 벗어날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정중한 인사와 함께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으니.
허리춤에 칼을 찬 모습에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그에 낯선 사내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전령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이어진 물음.
그리고 돌아오는 간결한 대답.
"검성께서 찾으십니다."
***
날 왜 찾는대.
진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일단 불러서 가긴 가는데 통 이유를 모르겠더라고.
설마 아들의 우승을 위해 경쟁자를 제거할 셈인가?!
얼토당토않은 망상을 하며, 자신을 전령이라 소개한 사내를 뒤따르길 잠시.
정신을 차려 보니 경기장 안에 마련된 귀빈실 안으로 들어선 진이다.
낯선 장소에 방문한 사람처럼 쭈뼛거리고 있으려니, 나직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편히 앉게."
창밖을 향해 뒷짐 진 검성의 목소리였다.
"아, 넵."
진이 냉큼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창가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린 얼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다.
"반갑네. 게일 아나리온이라고 하네."
"진입니다. 진 에버나이트."
오늘도 어김없이 3,500만 크레딧 주고 산 이름을 자랑스럽게 언급한 진이 슬쩍 눈앞의 중년인을 눈에 담았다.
검성.
두 걸음 남짓한 거리에서 마주한 그는 뭐랄까. 놀라울 정도로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연에 동화된 듯하다고 해야 할까.
쪼르륵, 찻주전자를 기울이는 손이 언제 저기에 가 닿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아, 저도 모르게 눈을 끔뻑거린 진이다.
그저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거리감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기에.
"어우야."
"음, 왜 그러나?"
"아 그게, 별건 아니고···"
말끝을 뭉개는 진에게 찻잔을 내민 검성이 물었다.
"별건 아니고?"
그에 진이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짓을 해도 못 맞출 것 같단 생각을···하하."
"못 맞춘다? 나를? 무엇으로?"
흥미롭다는 듯 뒷말을 재촉하는 검성을 보니 뒤늦게 시치미를 뗄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진이 주먹 쥔 오른손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이거요."
"······"
짧은 침묵이 흐르고-
이내 검성의 입에서 껄껄껄 너털웃음이 터졌다.
그에 진도 기다렸다는 듯 따라 웃었다.
넌 왜 웃냐고?
몰라, 씨. 그냥 웃는 거지.
직장생활 꿀팁. 하나.
상급자가 웃으면 일단 따라 웃어라.
다만 빡침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부류가 있으니, 눈치를 봐가며 사용할 것.
다만, 지금 같은 경우는 예외다.
고개를 젖혀가며 웃는 건 진짜 기분이 좋다는 거거든.
그리하여 한동안 두 남자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으니, 슬슬 진의 광대가 저려올 때쯤에 간신히 웃음을 그친 검성이 말했다.
"내 얼굴에 주먹이 닿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인정입니다."
진이 엄지를 추켜세웠고 다시 웃음이 터졌다.
음, 이번에는 가만히 있자.
광대 아파서 안 되겠다.
그리 결론을 내린 진이 건네받은 차를 호로록.
오, 좋은데?
차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목넘김이 참 좋더라고.
은은하게 가슴으로 번지는 따스함을 즐기고 있으려니, 그제야 겨우 웃음을 멈춘 검성이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네."
"아, 별말씀을. 당연히 와야죠."
돌아온 대답에 검성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뒷말을 이어갔다.
"자네를 부른 이유는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이네. 해서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 있겠나?"
정중한 요구였다.
저런 사람이 젊었을 적엔 광검 소리를 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 건지.
사람이 돼서 그 자리에 앉은 건지.
뭐가 됐든 지금의 검성이 호인이라는 건 확실했으니.
진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든 물어보셔요."
"로칸과는 무슨 관계인가?"
"···?"
진이 순간 멈칫거렸다.
원한다면 지금 입고 있는 팬티 색깔(남색)도 기꺼이 알려줄 의향이 있었지만, 저 질문에는 거짓말처럼 말문이 턱 막히더라고.
찔리는 게 있어서가 아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이 안 오더라.
나랑 그 양반이랑 무슨 관계지?
납치 동기?
아니, 선후배였나?
본의 아니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진을 검성은 다그침 없이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저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을 찾은 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으니.
"···스승이신데요. 예."
대답을 들은 검성의 동공이 확장됐다.
"사제 관계라는 건가?"
"그,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어정쩡한 기울기와 각도로 고개를 끄덕거린 진이다.
그리고 생각하길.
로칸 덕분에 자전을 깨우친 건 사실이잖아.
그럼 스승이지 뭐.
내가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그 양반 의견이 무슨 상관이야.
눈치 보지 말자.
얼렁뚱땅 결론을 내린 그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흔들림 없는 어조였다.
"옙. 맞습니다. 스승."
"···역시."
검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마치 의문이 해소된 듯한 얼굴이었다.
"괜히 자네의 모습에서 그 친구가 겹쳐 보인 게 아니었군, 그래."
"로···아니, 스승님을 아세요?"
"알다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검성이 입을 열었다.
"···경쟁심을 자극하는 친구였지. 만날 때마다 항상 반걸음 정도 앞서 있는 게 보였거든. 그땐 그게 어찌나 분하던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어느 순간 현재가 아닌 어슴푸레한 과거를 응시하고 있었다.
"피 흘리고 살았던 젊은 날을 후회하진 않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그 친구와 제대로 결판을 내지 못했다는 것뿐일세. 회전이라는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말이지. 완벽하게 앞지를 순간만을 쫓느라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했어. 시간이 흘러 마침내 내 검에 확신이 생겼을 땐, 그 친구가 가문을 떠난 뒤더군."
넋두리처럼 이어진 말을 진이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로칸과 검성은 동년배다(믿기 어렵지만).
검성은 로칸을 라이벌쯤으로 생각했다.
두 사람은 결착을 짓지 못했다.
다시 지금.
그런갑다 뺨을 긁적이는 진을 바라보던 검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군. 로칸의 제자와 내 아들이라니."
음?
뭔가 묘하게 돌아가는 얘기에 찻잔에 손을 뻗던 진이 멈칫거렸다.
"···예?"
"반드시 결승까지 올라오게나. 내 아들도 분명 그곳에 있을 테니."
< 93화 >
진이 경기장을 나선 건 오후의 여운이 끝나가는, 이른 저녁 무렵이었다.
하늘은 낡은 브라운관에서 재생된 듯한 빛바랜 주홍색을 띠고 있었고, 같은 색으로 물든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중세와 현대 그리고 미래를 복잡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세상을, 시야가 허락하는 만큼 눈에 새기던 진이 어느 순간 코를 훌쩍이며 걸음을 옮겼다.
곤란하게 됐네.
어쩌다 보니 로칸의 후계자쯤으로 오해를 받게 된 상황이다.
그래,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고 쳐.
저들만의 라이벌리에 내가 낄 게 뭐람.
진이 입술을 좌우로 움직여가며 골똘히 생각했다.
라프가 그랬던가. 로칸이 자하드의 차기 가주로 유력했던 인물이라고.
젊은 시절 회전에 두 번 참여, 리핏을 달성할 정도의 천재.
갑자기 가문을 등진 까닭에 은퇴를 앞두고 있던 가주가 수십 년을 더 해 먹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긴 했다만, 비하인드 스토리가 더 있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냐고.
검성이 소싯적부터 로칸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완벽하게 이겨보겠다고, 죽어라 실전으로 실력 쌓아, 이쯤이면 한 번 해볼 만하겠다! '로칸 나왓!'을 시전했더니 뭐 없다고?
아주 파문을 당했어?
그것도 본인 의지로?
이게 사건의 전말이 아니던가.
이후 수십 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똥 누고 못 닦은 듯한 찝찝함은 그대로였는지, 그 마음을 자식 세대에게 투영해 해갈하고 싶어한다라.
진이 피식 웃었다.
말이 사제지간이지, 자신과 로칸 사이는 사실 남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하지만 이제와서 오해를 바로 잡을 생각은 없었다.
오해한 쪽은 오해한 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결과가 좋으면 결선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딱 거기까지만 생각한 진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노을 지는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한결 여유로운 시선으로 주변 풍경을 하나둘 눈에 담으니.
언제 봐도 낯설고 신비로운 전경이었다.
로스트 시티 건립 당시부터 존재했던 1~10번 구역은 일명 프라이머스 존(Primus Zone)이라 불린다.
간단히 말하면 과거의 유산이 가장 많이 남아있기로 정평이 난 구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기증이 날 만큼 높은 빌딩도, 지나치게 복잡한 상업지구도,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교통 소음도 없다.
메가코프가 늘어선 11~20번대 구역과 다르고,
중산층이 살아가는 20~30번대 구역과도 달랐다.
담쟁이덩굴 뒤덮인 고전주의적 건축물.
대리석 기둥을 세워 돔 지붕을 덮은 도서관.
누군가 자라는 동안 키를 쟀을 오래된 돌담벽.
과거를 잊지 않은 순수주의자의 땅.
위대한 일곱 가문의 영토 중 하나.
문뜩 진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하니-
그 끝에는 그랑 투르넬 대성당이 있었다.
이 순간, 노을을 등진 성당의 모습은 더없이 아름답더라고.
유려한 아치와 수많은 조각으로 이뤄진 비정형의 파사드(Facade : 건물 전면 외벽).
곡선으로 빚어낸 건물은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을 선사했으니, 어느 순간 홀린 듯 그리로 발길을 옮긴 진이다.
예선이 끝난 지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온종일 떠들어도 모자랄 안줏거리가 생긴 사람들은 관광이 아닌 술과 음식을 선택한 지 오래였으니-
"실례합니다."
한산한 입구 앞에서 혼잣말로 인사한 진이 새삼스러운 눈길을 떨치며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고요한 내부 전경은 어떤 의미로 경건하기까지 했다.
"이야."
나직한 감탄사와 함께 걸음을 옮기길 잠시.
"······?"
멀리 제단으로 보이는 단상 앞, 기도 중인 뒷모습을 발견한 진이 얼른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설마하니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혹여나 방해가 될까 제단을 삥 둘러 지나치려는 순간.
철컥.
금속 이음새에서 날 법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뭔."
진의 눈이 절로 가늘어진다.
이건 또 뭐야.
갑옷?
보이는 그대로 갑옷을 걸친 존재였다.
일명 풀 플레이트 아머라는 전신 판금을 걸친 모습.
시대를 역행하는 외견에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그때 그?
성왕의 동상 앞에서 혼잣말을 중얼대던 잘생긴 얼굴을 떠올린 그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후욱-
상대의 투구 틈새로 남청색 기운이 스산하게 뿜어지는 게 아닌가.
걔가 아닌가 본데.
동상 앞에서 본 기사와는 전혀 다른, 섬뜩한 기운에 진이 질문을 바꿨다.
"너 뭐냐?"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검푸른 운무에 뒤덮인 갑옷이 허리춤으로 손을 천천히 가져갈 뿐이니.
철컥.
관절부의 디테일을 살린 쇠장갑이 칼자루를 움켜쥔 순간.
"에이론, 멈춰."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다음 순간,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함께 단호한 뒷말이 귓가로 따라붙었다.
"멈추라고 했어."
효과가 있었을까.
당장 발검할 것만 같던 갑옷맨이 칼자루에서 손을 떼며 뒤로 물러섰고, 그와 함께 검푸른 운무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진 또한 자전을 거둬들였다.
이후 그가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쟤랑 아는 사이······엥?"
"죄송합······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놀란 눈을 뜬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세실 플로렌스?
"진 에버나이트 맞죠?"
상대가 저를 알아봤듯 진도 상대를 알아봤다.
어딘지 잔뜩 주눅 들어 보이는 유약한 인상의 얼굴.
전광판을 통해 대문짝만하게 접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플로렌스 가문의 대표, 세실이었다.
쟤가 왜 여기 있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세실이 먼저 입을 뗐다.
"여긴 어쩐 일로······"
"나는 그냥 관광 차 들렸는데. 그쪽은?"
"저는···기도를 하고 있었어요."
"아아?"
그제야 제단에서 기도 중이던 인물이 세실이었음을 깨달은 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어느새 자취를 감춘 갑옷맨이 있던 방향으로 엄지를 뻗으며 말하길.
"그럼 방금 저건?"
"···최근에 계약한 정령이에요."
"나한테 칼 뽑으려고 하던데?"
멀뚱한 물음에 세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게 에이론이 워낙···, 아니, 아니에요. 이게 다 제가 부족해서 벌어진, 그, 그러니까 단편적인 명령을 과잉 해석···아, 저기 그그."
허둥지둥, 안절부절, 진땀뻘뻘.
아무튼 한참을 더듬거리던 세실이 냅다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랫배에 가지런히 포갠 손바닥이며,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허리를 숙인, 그 각도부터가 남다른 사죄의 배꼽인사에 진이 눈을 끔뻑끔뻑.
물론 사과가 당연한 일이긴 했다.
통제되지 않는 대형견을 키우는 연약한 견주?
뭇매를 맞기 딱 좋은 소재지 않나.
자칫 무고한 주변인들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단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 이슈에서 사람들을 가장 분노케 하는 것은 주인의 뻔뻔한 행태라.
우리 개는 안 물어요, 같은 듣는 사람 눈 돌아가는 헛소리가 상호간의 존중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세실은 양반이긴 했다.
지금 이 순간도 연신 허리를 숙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정말."
"아니, 일단, 진정을···"
어찌어찌 그녀를 일으켜 세운 진이 말했다.
"미안하면 다음부턴 안 그러면 되지. 대신 또 그러면 얄짤없으니까, 감당되기 전까지는 함부로 소환하지 마시고. 오케이?"
"네."
"그럼 됐네."
고개를 끄덕이는 세실과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짓는 진. 자연스레 침묵이 찾아왔다.
막말로 피차 처음 보는 처지에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스크린 너머로 쌓은 얄팍한 친밀감이 다 그렇지 뭐.
해서 진이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는 그때.
"떨리지 않으세요?"
절묘한 타이밍에 들어온 질문이 진의 발길을 붙잡았다.
"음, 뭐가?"
"켄드릭를 상대하게 됐잖아요. 떨리지 않으신가 해서···"
"······"
진이 눈을 끔뻑거렸다. 갑자기?
그 멀뚱한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었을까, 세실이 다소 부산스러운 손동작과 함께 떠듬거렸다.
"케, 켄드릭은 엄청나잖아요. 뭐든 잘하고, 빠르게 익히고, 가문 안팎으로 인정받고···류카드와 같아요. 언제나 저만치 앞에 서 있죠. 감히 따라갈 엄두도 못 낼 만큼 멀리······"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불현듯 앗-하는 소리를 냈다.
이후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이 본인이 뱉은 말을 후회하는 티가 역력하더라고.
물론 진은 거기에 큰 뜻을 두지 않고 묻는 말에 대답했다.
"글쎄,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은 해봤어도 떨린다고는······왜? 혹시 떨려야 한다고 생각해?"
이어진 반문에 세실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또다시 침묵이 시작되나 싶었지만, 다행히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진이 말을 이었다.
"하긴 수만 명이 쳐다본다고 생각하면 떨리긴 하겠네. 근데 남들 반응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말마따나 소뇌 왕이 보통내기가 아니라서. 까딱 잘못하면 결선이고 자시고 16강딱으로 마무리될지도? 와 그럼 난리 나겠는데."
라이벌(?)의 제자가 16강에서 탈락하는 모습을 보면 검성이 충격을 받지 않을까 생각한 진이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긴 하지.
대수롭지 않다는 동작과 함께 입을 열었으니.
"왜 많이 떨려?"
이어진 물음에 세실은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미소에 진도 구태여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손을 펼치며 팔을 쑥 내밀었을 뿐이니.
얼떨결에 손바닥을 마주친 세실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을 뿐이다.
"떨리면 떨리는 대로 열심히 해. 나도 그럴 거거든. 그럼 간다."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떠나가는 진의 뒷모습을, 멀뚱히 응시하던 세실이 어느 순간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
꾸욱, 힘 있게 말아쥔 주먹.
이후 다시 제단으로 걸어간 그녀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니.
"···미안해, 언니."
이어지는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예선과 본선 사이의 텀은 일주일로 넉넉한 편이라면,
16강부터 진행되는 본선은 사흘 간격으로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참가자들의 컨디션을 고려하면 보다 넉넉한 휴식 시간이 제공되어야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런 편의를 다 봐줬다간 축제 일정이 지나치게 길어질 뿐이라서.
괜히 대진운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운이 좋으면 컨디션 조절도 해가면서 계속 올라가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겨우 승리하더라도 부상의 여파로 저보다 약하다 평가받는 이에게 패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안나는 시작이 좋았다.
그녀의 상대는 티모시 헌트.
쟁탈전에서 활약한 모습을 반추해 보건대 1위계 끝자락에 위치한 실력자였다.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마주하고, 이제는 그 너머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팔다리를 내지르고, 하늘이라 생각했던 벽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고행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터.
대부분의 사람은 도저히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계 앞에 주저앉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 티모시가 그런 남자였다.
"티모시 헌트라고 합니다."
"에안나 솔라드에요."
짤막한 인사와 끝으로 본선의 개막을 알리는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에안나의 낙승을 예상한 것과 달리 경기는 제법 치열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만.
여러 무기를 허공에 부유시켜 싸우는 티모시는 제 마나가 바닥을 치다 못해 바짝 말라버릴 때까지 에안나와 맞섰다.
하지만 끝끝내 닿지 못했다.
백염, 그 숭고한 열기 앞에서 그가 펼쳐내는 모든 기술은 한줌의 재로 화할 뿐이었으니.
굳이 마무리를 지을 필요도 없이, 모든 무기를 잃은 채 완전히 탈진한 티모시에게 에안나가 손을 뻗는 것으로 경기는 종료.
의외로 부축을 받아 일어서는 그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상기된 얼굴은 실낱같은 희망을 찾은 조난자의 그것과도 같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참가자들이 본선에 진출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이유 중 하나라.
이미 다른 세상을 밟고 있는 가문의 대표들과 싸우며 무언가를 깨닫길 간절히 희망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람만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제 몸값과 명성을 드높이러 나오는 놈들도 많았지만 말이다.
"고생했어요."
에안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사회자가 그녀의 이름을 장내가 떠나가라 호명했다.
"승자! 에안나 솔라드─!"
이어지는 경기는 카트리나 마르지에와 마찬가지로 가문의 대표가 아닌 진출자였으니.
에안나에 비하면 민망할 정도로 빨리 끝나버린 경기였다.
패배한 참가자도 뭔가 얻어가는 것이 없었는지 이를 악무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성사된 1조의 8강 대진이 에안나와 카트리나라는 것에 관객들이 즐거워했다.
불과 얼음의 대결이라니, 동서고금 막론하고 흥미가 안 생길 수가 없는 싸움 아닌가.
그 와중에 역대 회전에서 솔라드 vs 마르지에의 역대 전적이 반올림한 52프로로 솔라드가 우세하다는 결과가 전광판을 통해 송출됐다.
"얼씨구야. 자존심 싸움 한번 거하게 붙이네."
본인 경기를 앞두고 몸을 풀고 있던 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릴 때였다.
"준비되셨습니까?"
옆에서 들려오는 관계자의 물음에 진이 시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
"그럼 5초 뒤에 입장하겠습니다."
5, 4, 3, 2, 1.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동시에 드넓은 필드에 모습을 드러낸 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경기장에 올라섰다.
거의 비슷하게 도착한 켄드릭이 보인다.
열 걸음 남짓한 거리.
하지만 두 사람에겐 의미가 없는 간격.
진이 말했다.
"잘 부탁한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
"최선을 다해라. 그래야 할아버지도 마음을 돌리실 테니까."
"싸우는 건 우리 둘인데. 애꿎은 할아버지는 왜 자꾸 끌어들여. 그분 이제 은퇴하실 때 되지 않았냐? 얼른 자리 물려달라 그래."
"그게 말처럼···! 아니, 됐다 너랑 무슨 말을 한다고. 됐으니까 덤벼."
"좋지."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몸에서 파괴적인 전광이 솟구쳤다.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기에 처음부터 최고 출력이다.
파지지지직!!!
공간을 장악하는 강렬한 빛에 관객들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꽈릉──!!
완벽할 정도로 동시에 겹친 뇌명과 함께 두 벼락이 맞부딪쳤다.
< 94화 >
「그것은 먹구름 없는 뇌성이요,
정순한 대기를 찢는 짐승의 포효라」
-신원 미상의 고문서, 자하드 단락에서 발췌
*
일순간 세상이 색을 잃었다.
경기장을 집어삼킨 순백의 화이트아웃.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관객들은 이어지는 우렛소리에 대비하지 못했다.
꽈릉─!
뒤늦게 귀를 막으면 찾아오는 것은 폭음을 동반한 전압이라.
살갗을 스치는 힘에 잔털들이 일제히 곤두섰다. 이에 관객들이 느끼는 감상은 한없이 소름에 가까웠다.
시각과 청각이 마비된 와중 찾아온 찌릿한 떨림은 그렇게 모두의 뇌리에 잊히지 않을 경험으로 각인됐으니.
한줄기 이명 속에서 짧은 심봉사 체험을 마친 관객들이 각기 다른 속도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
그리고 보았다.
경기장을 뒤집힌 하늘 삼아 격돌하는 두 벼락을.
*
진이 주먹을 내질렀다.
시골 할머니 인심으로 뇌력을 꾹꾹 눌러 담은, 절륜한 위력의 스트레이트.
일직선 힘차게 뻗어나가는 궤적을 따라 공기가 우르르 진동했다.
켄드릭은 피하지 않았다.
자줏빛 번뜩이는 시선과 함께 마찬가지로 번쩍거리는 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노리는 주먹을 덥썩 움켜잡았다.
콰앙!
세상서 제일 난폭한 쌀보리.
주먹이 잡혔으니, 이제는 공수 교대다.
퍼엉!
켄드릭이 내 차례라 말하듯 주먹을 날렸고,
진은 그걸 냅다 이마로 받아냈다.
그리고 남는 손으로 상대의 옆구리에 리버샷 한 방!
이에 켄드릭의 눈썹이 작게 일그러진 반면, 진의 눈은 접신한 것마냥 훼까닥 위로 뒤집혔다.
살을 취하려다 뼈를 줘버린, 득보다 실이 더 큰 교환이었지만 괜찮다.
이쪽은 체력바가 조금 빨리 차는 스타일이라서.
직후 진이 눈을 번쩍 떴다. 여기에 만화처럼 효과음을 넣을 수 있다면 희번뜩! 이라는 글귀가 딱 이었을 터.
그리하여 희번뜩 초점을 돌려세운 진이 2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현재 자신은 뒤통수가 바닥을 향해 힘껏 다이빙하는, 그러니까 전형적인 넉아웃 당하기 직전의 자세로 침몰하는 중이다.
둘째, 쓰러지는 자신을 향해 다섯 개의 벼락이 떨어지고 있었으니.
셋째, 좆됐다!
예정에도 없던 세 번째 깨달음과 함께 진이 발바닥에 힘껏 힘을 실었다.
쾅!
지면에 등이 거의 닿은 상황이다. 멋진 회피가 가능할 리가 없으니, 다음 순간 지면과 수평하게 사출된 로켓처럼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쭉 미끄러진 진이다.
직후 다섯 줄기 벼락이 직전까지 진이 있던 위치에 귀착했다.
단숨에 파괴된 지면이 조각조각 솟구친다.
그 너머로 맹수의 그것처럼 손가락을 구부린 켄드릭의 모습이 보였다.
다섯 줄기 벼락이 그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힘이라는 걸 알아채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진은 그게 무엇인지도 알았다.
뇌신조의 발톱이란 거창한 이름을 가진 기술이었다.
정작 진은 이누야사 짝퉁 같다는 이유로 실전에서 사용하길 봉인한, 그저 머릿속 지식으로만 굴러다니는 공격.
생각보다 멋지긴 하네.
이쪽으로 다가오는 켄드릭이 보인다.
발톱의 형상을 갖춘 뇌기가 역방향으로 어깨 어림까지 솟구쳐 크게 너울거리는 모습. 본인이 일으킨 전압에 앞머리가 뒤로 젖혀진 그를 향해, 허릿심만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 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손과 뒷손을 어깨너비로 비스듬히 벌린 채 지면을 가볍게 통통 박차면서다.
발끝으로 잘게 쪼갠 박자가 어느 순간 심장 뛰는 소리와 화음을 이루니, 오직 저에게만 들리는 둔중한 비트와 함께 자연스레 입꼬리를 올린 진이 말했다.
"괜히 소뇌왕이 아니네."
"왜, 거저 얻은 칭호라 생각했나?"
인정한다는 뜻으로 뱉은 말이었는데, 어쩐지 날카롭게 받아치는 켄드릭이다.
하지만 진은 그게 어떤 의미로 귀엽기까지 했다.
새끼, 까탈스럽긴.
가만 보면 사람이 나쁜 것 같진 않은데 왜 이렇게 예민한 건지.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더라고.
당연한 일이다.
진은 켄드릭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몰랐으니까.
잃어버린 20년이 네게 달렸다. 모두가 인정하고 납득할 수 있는 대관식의 주인이 되는 거다. 너는 할 수 있어. 아니, 해내야만 해. 안주하지 마라. 쉬지 마라. 비교당하지 마라. 쫓을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완벽해지는 거다.
눈만 감으면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 주시지 않은 할아버지. 그분의 공허한 시선 끝에는 언제고 숙부의 뒷모습이 있을 뿐이었으니, 떠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은 거인의 그림자는 여전히 가문 전체를 짙게 뒤덮고 있어서. 그 거대한 그늘에 짓눌린 어린아이가 오늘날 인정 욕구에 목마른 젊은 천재로 자라났다는 걸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켄드릭이 말했다.
"만뢰의 유지를 잇는 건 나다. 그러기 위한 지난날이었어."
"누가 뭐래?"
다음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을 박찼다.
천둥소리 아연한 가운데 관객들의 머리칼이 비죽 솟았다.
연이어 뇌성이 터지고, 가열찬 공기의 흐름이 얼굴을 때리고, 경기장이 뒤흔들린다.
어느 순간 관객들도 깨달았다.
이것이 단순히 직계와 방계의 싸움이 아니란 것을.
눈요깃거리나 안줏거리로 소모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는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결선에서 펼쳐져야 했을 격돌을 너무 일찍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뒤늦게 이를 깨달은 이들의 아래턱이 툭 떨어지는 순간.
번쩍.
명멸하는 시선 너머로 켄드릭과 진이 서로의 반대편에 착지했다.
그저 눈이 몇 번 깜빡일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두 사람의 모습은 이전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퉤.
깨진 이빨과 함께 핏물을 뱉어내는 진과 너덜너덜해진 옆구리에 손을 얹은 켄드릭. 순식간에 수십 합의 공방을 주고받은 그들이 재차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켄드릭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괜히 그분께서 눈여겨보신 게 아니었어."
이후 천천히 허리를 곧추세우는 그의 몸에서 번갯불이 일시에 사라졌다.
"류카드에게 쓰려고 아껴둔 건데. 어쩔 수 없지."
그와 동시에 자줏빛 기운이 표표한 물결처럼 주변으로 번져,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좋지 않은데.
방금 전 대사부터 심상찮은 마나의 흐름까지.
모든 것이 비장의 수를 꺼내려는 사람의 그것 아닌가.
다 떠나서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이 안 됐다.
전조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건 달리 말해 모르는 기술이라는 것.
마침내 깨달음의 깊이에서 켄드릭에게 밀린 진이다.
그랬기에 멀뚱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곧장 바닥을 박차며 블링크.
단숨에 상대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하늘로 추켜세운 뒤꿈치를 내리찍는다. 군더더기 없는 궤적에 실전으로 다져진 과감성이 담겼다.
콰앙!!
켄드릭이 양팔을 X자로 교차해 공격을 막았다. 안정적인 방어 너머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진을 향했다. 찰나 교차하는 시선. 동시에 그가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회전했다.
후우우욱--!
직후 잔잔한 물결과도 같았던 마나가 켄드릭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듯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경기장의 잔해들이 소용돌이치는 흐름에 휩쓸리더니, 회전의 중심 방향으로 끌려가 모래알처럼 소멸하더라고.
와류(渦流)? 아니 태풍인가?
진의 머릿속에 땡땡땡 경종이 울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휘말리면 큰일 날 거란 직감이 예리하게 뇌리를 스친 것이다.
기술의 요체를 파악하자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자연스레 눈에 그려졌다. 마음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니, 어느새 오른발을 쿵 구르며 회전한 진이다.
타인의 시선에는 켄드릭과 진,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회전한 것으로 보였을 터.
촤아악!
상대가 의도한 흐름을 거스른다. 당기는 힘이 엄청났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끌려가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휘두른 주먹이 허공을 반바퀴 돌아 켄드릭의 팔꿈치와 충돌했다.
쩡!
팔이 머리 위로 튕겨 올랐다. 충격의 여파로 손아귀 감각이 사라졌다. 주먹을 쥐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쿵!
뒤로 밀린 뒷발을 앞으로 힘껏 내디디며 다시 회전.
이어지는 격돌.
맞부딪힌 살갗에서 굉음이 터진다. 쇠망치에 얻어맞은 듯한 둔중한 충격과 함께 몸이 뒤로 밀렸다. 이제는 팔뚝 언저리까지 감각이 사라진 오른팔을 그저 느낌만으로 제어하며 발을 굴렀다.
콰앙!
교차한 주먹이 서로를 후려친다. 하지만 켄드릭 쪽이 더 빨랐다. 턱이 들린 진의 얼굴에서 핏물이 포물선을 그렸다. 반면 그의 주먹은 애꿎은 허공을 후려칠 뿐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 태풍의 눈이 되어 흐름을 주도하는 켄드릭과 달리 진은 그 흐름을 거슬러야 하는 쪽이었으니까.
억울할 틈도 없이 다시 회전.
다음 순간 켄드릭의 뒤돌려차기가 관자놀이에 얹힌다.
가까스로 팔뚝을 세워 이를 막아낸 진이 지근거리에서 켄드릭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손맛이 부족했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영약을 들이부어 만든 몸뚱어리는 자신만큼이나 단단했으니, 어지간한 공격 정도는 그대로 씹고 들어오는 저돌성을 켄드릭 역시 갖추고 있었다.
꽈릉!!
어느새 뇌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태풍 속에서 진이 왈칵 피를 쏟았다.
미간, 턱, 비중, 늑골, 명치로 이어지는 연타에 고스란히 노출된 대가였다.
특히 미간 쪽이 치명적이었다. 부러진 안와가 가빠진 호흡과 함께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으니.
휘청-, 끈질기게 버티던 몸이 끝끝내 반시계 회전하는 흐름 속에 휩쓸리려는 순간.
뿌득!
어금니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진이 다시 반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아직 안 끝났어!
핏물을 흩뿌리는 그의 눈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투지란 불과 같다.
모두 타오를 때까지 좀처럼 꺼지는 법이 없으니.
그래서 뜨겁고.
그만큼 위험하다.
이 순간 켄드릭을 향해 전진하는 진의 모습이 위태롭지만 찬란해 보이는 이유였다.
콰앙!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충돌에 뼈마디가 뒤흔들린다. 한계에 봉착한 몸뚱이가 비명을 내질렀지만, 들숨에 고통을 함께 삼켰다. 기이할 정도로 강한 의지였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원래부터가 꺾이는 법을 모르는 진이다.
부러지면 다시 붙여서, 망가지면 다시 만들어서 일어섰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지켜낼 삶의 방식.
이 또한 그 연장선일 뿐.
그리하여 지금.
켄드릭을 제외한 모든 번잡한 것들을 지웠다. 이제부터 세상에 단 둘이다. 어느 순간 머릿속에는 이긴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으니-
휘몰아치는 공격을 얼마나 버텨내고 또 버텨냈을까.
찾았다.
진이 눈을 번뜩였다. 전투를 지속할수록 점점 날카로워지는 초인의 감각이 마침내 태풍의 빈틈을 찾아낸 것이다.
소용돌이를 자아내는 켄드릭의 움직임에 해답이 있었다. 그의 손과 팔꿈치. 그리고 무릎과 발끝이 스치는 특정한 위치에서 회전이 생기고 있었으므로.
폭풍처럼 이어지는 공격으로 규칙성을 숨겼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다.
콰앙!
서로의 주먹이 맞부딪힌 순간, 진은 사력을 다해 허리를 뒤틀었다.
힘없이 튕기는 듯 보였던 팔이 크게 반원을 그리며 와류의 한 지점을 강타했다. 미리 눈여겨본 곳이다. 원래라면 켄드릭의 손이 스쳐야 했을 위치를 선점한 것이다.
"으아아아!!"
직후 핏대를 세우며 휘두른 주먹.
그 궤적을 따라 폭풍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반으로 갈라지는 바람결 너머로 환한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
처음으로.
켄드릭이 뒷걸음질 쳤다. 중심을 잃은 듯 크게 비틀거리면서다. 낭패로 얼룩진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느새 따라붙은 진이 태양을 등진 채 주먹을 추켜세운 것이다.
하늘을 향한 주먹 끝에 맺힌 여덟 갈래 빛 번짐.
눈살을 찌푸리는 켄드릭을 향해 팔을 크게 휘두른다.
동시에 켄드릭이 역류하는 핏물을 삼키며 맞잡아 주먹을 뻗었다.
퍼억-!
더없이 정직한 타격음.
그림 같은 크로스 카운터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일순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숨 쉬는 법을 잊은 관객들은 헛바람을 들이킨 모습 그대로 널브러진 두 사람을 눈에 아로새길 뿐이라.
그중에는 좀처럼 남의 경기에 관심을 가지는 법이 없는 류카드와 카를로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으로 경기장을 바라보는 여인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경에 휩싸여 있었으니-
"아아······"
그녀의 달뜬 숨소리와 함께 멍하게 넋이 나가 있던 사회자가 급히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10! 9! 8!"
그리고 누군가 손을 꿈틀거렸다.
켄드릭이었다.
"허억, 허억-"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완전히 풀려버린 다리를 억지로 끌어당겨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그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귓가로 카운트가 이어졌다.
"7! 6! 5!"
일어나야 해!
여기서 쓰러지면 아버지가 실망한다. 할아버지가 등을 돌린다. 숙부의 그늘이 더욱 짙어진다.
"컥!"
시커멓게 죽은 핏물을 한 움큼이나 토한 그가 맘처럼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일어나야 해, 일어나야 해!
하지만 간절한 의지가 무색하게 반쯤 일으킨 몸이 핏물에 미끄덩 나자빠진다.
분명 꼴같잖은 모습이었을 터다.
하지만 켄드릭은 거기에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어느 순간 그의 눈앞에는 가주가 서 있었으니까.
"···하, 할아버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무심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길이 천천히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멀어지니, 어느새 등을 보인 가주의 모습에 켄드릭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저벅.
비틀비틀 걸어온 누군가가 환영을 흩어내며 그의 앞에 우뚝 섰다.
햇빛을 등진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
"재밌었다."
팅팅 부은 얼굴로 그리 말한 진이 팔을 쭉 뻗었다.
무릎 꿇은 채 멍하니 자신을 향한 손을 바라보던 켄드릭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맞잡은 순간.
"흡!"
힘껏 팔을 끌어당긴 진이 켄드릭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집어넣고 허리를 세웠다.
"아."
승자와 나란해진 눈높이 속에서 켄드릭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린 순간.
지금껏 숨죽이고 두 사람을 바라보던 관객들이 일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어떤 우렛소리보다 크게.
< 95화 >
이변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자하드라는 원류(原流)를 공유하는 직계와 방계의 대결은 그 과정부터 결말까지 모든 것이 충격의 연속이었으니까.
서로 죽일 듯 싸우던 두 사람이 동시에 쓰러지고, 승자가 패자를 일으켜 함께 우뚝 서는 모습이라니.
여기에 감화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아무튼 이상한 거다.
해서 그 여파가 어느 정도였는고 하니.
아직 대회가 끝나지도 않았건만, 난 그런 거 모르겠고 이 경기가 최고야. 진 에버나이트? 내가 아는 방계 중 최고였어요. 류카드가 뭐죠. 뉴카드? 새로운 카드라는 뜻인가? 깔깔. 반박? 내가 왜 그런 걸 받아야 하지?
라며, 이성이 잠시 마비된 이들이 인파를 이룰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온 커뮤니티가 난리가 났다.
괜히 평소 순수주의자들을 혐오하는 신인류주의 파시스트들조차 곁눈으로 살피는 대회라고 이게.
자연히 사람들의 입과 손가락이 오늘 경기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는 가운데.
이번 경기의 주인공이자 승리자, 다크호스, 언더독인 줄 알았으나 졸지에 우승 후보로 평가가 격상된-
하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과 단절된 채 침을 질질 흘리며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던 진이 마침내 눈을 떴다.
허파에서 쥐어짜는 듯한 신음과 함께다.
"허---으으---"
흡사 사막에서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지쳐 쓰러진 조난자를 연상시키는 소리.
어느새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했으니,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아랫배을 부여잡은 진이다.
배고파!
그렇다. 진은 배가 고팠다.
그래서 깼다.
구르륵, 배 끓는 소리가 마치 저 깊은 심해에서 부글거리는 크툴루의 불경한 속삭임처럼 들려온다.
진에게 허기란 그런 것이다.
일종의 코즈믹 호러와도 같은 끔찍한 감각.
분명히 먹고 잤는데. 왜 이러지?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침대에 눕기 전, 아픈 와중에도 햄버거 3개를 흡입하지 않았던가.
설마?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가정에 진이 침대 옆 협탁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단말기를 켜 날짜부터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몇 시간이 지난 게 아니라, 몇 시간 하고도 24시간이 흘렀더라고.
이러면 납득이 간다.
24시간 동안 손해 본 끼니가 최소 3끼니, 평소 식습관을 고려하면 대충 15인분 이상을 건너뛴 것이다.
이 무슨 막대한 손해인지.
그리하여 진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지인들에게 온 메시지가 수백 개가 넘게 쌓인 걸 봤지만 일일이 대답할 여유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뱃골에 기생 중인 PTSD란 이름의 괴물이 꼬르륵, 꼬르륵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기에.
해서 대충 자켓만 걸쳐 방을 나선다.
로비로 내려오니 그간 얼굴이 제법 익은 직원들이 지나치는 걸음마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왔다.
원래도 친절한 사람들이다.
달리 바뀐 점을 느끼지 못한 채 곧바로 호텔 탈출!
그대로 무인 택시를 잡은 진이 행선지를 묻는 AI에게 소리쳤다.
"맛집! 맛집!"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식당가.
생각보다 긴 이동시간에 이럴 거면 룸서비스나 시킬 걸 후회하며 택시에서 내린 진이 가까운 음식점으로 우다다 돌진했다.
"늘 먹던 걸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타코를 파는 가게더라.
직후 이 새낀 뭐지? 라는 시선과 함께 다가온 직원을 향해 메뉴판을 검지로 쑥 훑어내린 진이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줘요. 빨리. 배고파 죽을 거 같애."
불안한 눈빛을 확인한 직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복명복창했다.
"메뉴판에 있는 거 다 달라네요!"
"···확실해?!"
"예! 배고파 죽겠대요."
주방장과 대화를 주고받은 직원이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뜩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다시 돌리길.
"쓰읍."
미심쩍은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초조한 얼굴로 허벅다리를 달달 떨며, 손톱 먹방을 진행 중인 손님 놈의 모습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딱 봐도 마약 중독자 같은데 엮이지 말자.
그리 결론을 내린 직원이 곧이어 나온 타코들을 대충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멀어지니-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곧바로 식사에 돌입한 진이다.
허겁지겁이란 말이 딱 어울렸다.
순식간에 앉은자리에서 주문한 음식을 죄 도륙 낸 뒤 입가심으로 콜라를 벌컥벌컥.
"캬하-"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달달한 청량감.
탄산은 언제나 옳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금 깨달을 때였다.
징---
식탁 위에서 몸을 떠는 단말기를 곁눈으로 살핀 진이 메시지를 확인했다.
[야, 살아있냐?]
라프였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경기를 못 봤네.
켄드릭과의 경기에서 당한 부상이 원체 심각했던 탓에 그대로 치료실로 직행했던 진이다.
안타깝지만 다음 경기는 포기하는 게 좋겠다며, 입원을 강권하는 의료진에게 이 정도는 잘 먹고 잘 자면 나아요, 라고 대답한 뒤 비틀비틀 호텔에 돌아온 것이 마지막 기억이라.
16강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확인도 할 겸, 단말기를 낚아챈 진이 우선 산더미처럼 쌓인 지인들의 연락에 답장부터 했다.
칼리파 4통, 몸조심하란 내용들이고.
포우 5통, 뭘 자랑스러울 것까지야.
제키·제니 8통, 그래 럼펌펌펌 그립지. 진짜로.
나타샤 3통, 그놈의 술 약속이 뭐라고.
드안드레 112통, 이 새낀 뭐지?
그 와중에 제법 반가운 이름도 있더라.
알버스를 필두로 한 뮤트타운 동지들이었다.
TB측 잔당을 소탕한 뒤 도시의 자경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들었는데, 여러모로 바쁜 상황에도 회전 소식을 접했던 건지 응원을 아끼지 않더라고.
그중 펜릴이 포함된 건 의외긴 했다.
[나도 조만간이다.]
뭐가 조만간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연락이 왔으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자판을 톡톡 두드린다.
[광증 조심하고. 맛있는 거 잘 챙겨 먹으려무나.]
이후로도 혼자 키득거리거나 코밑을 훔치며 모든 이들에게 일일이 답변을 한 진이다.
그러고는 종업원을 향해 타코를 재주문한 뒤 마침내 16강 결과를 확인하니.
"···흐음."
2조 2경기는 미쉘, 그러니까 휴게소 나사 빠진 여자의 승리였다.
제법 유명한 용병을 손쉽게 쓰러뜨렸다고.
2조를 대표해 자신과 8강에서 맞붙게 될 상대였지만, 그 이상의 감상은 없었다.
어쩌다 여기서 또 만났대.
속으로 중얼거리고 말았을 뿐.
3조 1경기는 당연하게도 류카드의 승리였다.
이건 뭐 특별할 게 없으니 패스.
다음 3조 2경기는 데이어 하칸의 승.
여기까지도 무난했다.
형님, 누님들에게 쩔쩔매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그래도 가문의 대표로 나온 친구가 아니던가. 상대와의 격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멋있게 승리한 모양이더라.
다만 제 다음 상대가 류카드라는 사실이 막막했는지, 이기고도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이 전광판에 그대로 송출되는 바람에 관객들이 폭소했다고.
이런 걸 보면 회전을 개최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단 말이지.
같은 순수주의자이되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가문.
그것도 차세대를 이끌 후계의 인간적인 면모를 직관할 기회 아닌가.
저들도 희로애락을 느끼는 나와 같은 사람이란 동질감은 생각보다 유대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니-
어쩌면 예전에 보았던 음모론자의 게시글이 다 틀린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진이 다음 경기 결과를 살폈다.
4조 1경기, 라프의 승리였다.
이놈 보게.
꾸역꾸역 버티는 게 예술이잖아?
이번에도 눈탱이 밤탱이 되어 간신히 승리했는데 무릎 꿇고 울부짖는 세레모니가 이제는 시그니처 포즈쯤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으아아악! 8강이다아앗-!!'
당시 생생했던 순간을 동영상으로 지켜보며 히죽거린 진이 어느새 테이블 위로 올라온 타코에 손을 뻗었다.
이후 한 입 크게 또띠야를 베어 먹은 그가 볼을 우물거리며 생각하길.
쟤가 워낙 감정 표현이 진솔해서 그렇지.
실력 하나는 확실하단 말이야.
하긴, 그러니까 8강까지 진출한 거 아니겠어?
그러다 문뜩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타깝게도 라프의 다음 상대가 어마어마할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 거슈타인.
일명 창의 귀신.
켄드릭, 류카드와 함께 이번 회전의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인물 아닌가.
지금까지 본인 실력에 대진운까지 겹쳐 8강까지 생존한 라프였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임자를 만났구나, 생각한 진이 마지막 경기 결과를 확인했다.
그리고 타코를 툭 떨어뜨렸다.
"엥?"
그곳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있었으므로.
승자.
세실 플로렌스.
***
웅장한 동상이었다.
오래전 태양신의 사도로서 세상의 삿된 것들을 불살랐다는 인물.
성왕 알드메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기사의 조각상은 오늘도 대성당의 중심에 우뚝 선 채, 지난날 그랬던 것처럼 단단한 시선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누군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세실이었다.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머쥐었음에도 즐거워하긴커녕 강박적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곁에는 검푸른 운무에 휩싸인 기사가 우뚝 서있었다.
세실이 카를로스를 꺾는데 크게 공헌한 소환수.
그런 소환수의 투구가 어느 순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덮은 면갑 속에서 차가운 시선이 어둠을 향하니.
"······"
거짓말처럼 세실이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불어온 바람 한줄기가 그녀의 목덜미를 스쳤다.
절로 소름이 끼친다. 전신의 털이 쭈뼛 솟구치고 피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얼굴이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등 뒤의 하늘에서 무언가 내려선다.
그것은 소리 없이 바닥을 기어가는 거대한 뱀이자, 썩은 고기에서 기어 나오는 수천 마리의 벌레요, 결코 지워지지 않는 피냄새라.
끔찍한 존재감으로 부드럽게 착지하는 그것들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악마의 강림과도 같다. 존재 자체가 비현실의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는 듯했으니, 마주하는 것만으로 숨통이 옥죄어드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사락.
하늘거리는 가운 자락이 바닥을 스친다. 다음 순간 각각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 세실을 바라봤다. 너울너울, 죽음을 형상화한 듯한 기운을 흩뿌리면서.
저런 걸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실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절감하는 것이다.
눈앞에 선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12사도.
흑마법사들을 이끄는 만악(萬惡)의 종주들.
그 일좌를 차지한 차가운 얼굴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승리는 달콤했나?"
세실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목에 뭐가 걸리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소환수를 움직이는 무언의 트리거로 작용했다.
스릉.
말없이 칼을 뽑는 기사와 그런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두 명의 사도.
안 돼.
세실이 공포로 짓무른 성대를 쥐어짰다.
"에이···론! 멈춰."
허공에 파문을 일으키는 목소리.
가까스로 내뱉은 주언에 성큼 전진하던 에이론이 뒤로 물러서며 착검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차가운 얼굴의 사도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언제고 꿈꿔왔던 순간 아니었나?"
앞뒤 문맥을 다 자른 말이었지만, 세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떠듬떠듬 입술을 달싹이길.
"나는······"
"궁리하지 마라. 네가 선택한 것이다."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세실을 향해 사도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역할이 중요함을 상기시키고자 찾아왔다. 우리 두 사람 중 하나가 검성의 시선을 끌 때, 너 역시 그곳에서 제 몫을 다해야 함을 잊지 마라."
이번에도 세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얼음장 같은 시선에 그녀를 가둔 사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책감은 인간에게 가장 쓸모없는 감정이지. 같잖은 기도로 마음의 짐을 덜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그런다고 테아 플로렌스는 살아 돌아오지 않아."
"···알고 있어."
마침내 세실이 답했고, 사도는 그런 그녀에게 무어라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이후 그림자에 녹아내리듯 자취를 감춘 사도들이었으니, 그들이 사라진 공간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세실이 뒤늦게 막힌 숨결을 토해냈다.
"컥, 커허억, 허억-"
땀으로 흥건한 손을 벌벌거리며 얼굴을 닦아낸 그녀의 시선이 어느 순간 성왕의 동상에 닿았다.
일세의 영웅과 대비되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이내 쇳소리를 뱉었다.
"용서하지···마소서."
< 96화 >
축제라곤 하나 회전은 근본적으로 대회다.
당연하게도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도박판이 열리기 마련이니.
시정부가 시행하는 합법적인 사이트부터 블랙넷에 똬리를 튼 불온한 영역까지 그 종류도 참 다양했다.
누가 승리할 것인가? 또는 누가 패배할 것인가.
단순한 예측에 엄청난 액수의 돈이 오간다.
오늘, 누군가는 돈을 열 배로 불렸다. 환호하는 인영 옆으로 좌절하듯 주저앉는 이가 보인다. 그는 담보로 맡긴 집문서를 잃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손에 쥐어진 건 구겨진 복권 한 장이 전부라.
"시발! 이거 사기지! 다 짜고 치는 거잖아!"
"세실이 어떻게 카를로스를 이겨! 내가 얼마를 날려 먹은 줄 알아? 집사람이 애들 데리고 집을 나갔다고! 어쩔 거야!"
"내 돈! 내 돈 돌려줘! 이 개새끼들아!"
경기장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이들이 어느새 인파를 이뤘다.
하지만 그들이 돈을 돌려받는 일은 없다.
경기장 측은 신성한 회전을 욕보이지 말라며 입장을 단호히 했고, 그럼에도 패악을 멈추지 않던 몇몇 악질들이 아나리온 가문의 검사들에게 급소가 베인 뒤에야 소동은 일단락될 수 있었다.
"병신들."
"그러게, 누가 집 팔고 차 팔아서 도박하래?"
한 장 복권에 인생을 망치는 불나방들을 누구도 가여워하지 않은 탓에 대중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도 당황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세실 플로렌스의 승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기에.
*
세실이 이겼다고?
진이 눈을 끔뻑거렸다.
혹시 잘못 봤나 싶어 새로고침을 몇 번 눌렀지만, 그런다고 경기 결과가 바뀌겠는가.
그저 세실 플로렌스란 이름만 반복해서 눈에 박혔을 뿐이다.
당연히 카를로스가 이겨야 하는······
거기까지 생각하던 진이 고개를 푸르르 털었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다고.
편협했던 자신의 예측을 반성한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성당에서 세실을 만난 것이 떠오른 것이다.
켄드릭과의 경기가 떨리지 않느냐며, 떨리는 얼굴로 물어오기에 응원의 하이파이브를 해준 기억이 손바닥에 남아있었다.
테아를 대신해 회전에 참여했다는 등의 이유로 관객들에게 저평가를 당하더니, 결국 스스로 증명해 낸 모양.
괜히 뿌듯해진 진이 해당 경기를 재생했다.
이건 봐야지.
얼마나 치열한 경기였을까.
단말기를 내려다보는 눈이 기대감에 부푼 것도 잠시.
녹화된 경기를 감상하던 진의 입에서 황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엥?"
경기 내용은 일방적이었다.
세실의 손짓에 검푸른 운무에 휩싸인 기사를 필두로 다종다양한 종류의 소환수가 카를로스를 밀어붙이니.
그 정신 나간 합격 속에서 15분을 넘겨 버틴 카를로스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 지경이라.
저처럼 죽을 둥 살 둥 안간힘을 다해 싸우다, 간신히 빈틈을 발견해 이겼을 거라 생각했던 진만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혹시나 해서 댓글을 살펴보니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소환수가 대체 몇 마리야. 정신력이 버텨주나?
-이 정도면 테아가 양보한 게 아니라 그냥 밀린 수준인데?
-내 돈 내놔. 씨발년들아.
-이게 직계와 방계의 근본적인 차이인 거지. 최강의 에스콰이어란 말은 허상이었네. 결국 세상에 증명하는 건 직계인 세실이잖아.
-그럼 방계한테 진 켄드릭은 뭔데.
-그건 상대가 진 에버나이트였기 때문.
-내 돈 내놔. 씨발놈들아.
잔뜩 어지러운 댓글란에 진이 단말기를 껐다.
뭐가 어찌 됐든 세실은 이겼고, 그 결과 이번 회전이 점점 예상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만은 확실했다.
어쩌면 결선에 오는 게 류카드가 아니라 세실일지도?
아니, 아니지.
그전에 류카드가 데이어한테 질 수도 있잖아.
세실이 라프한테 질 수도 있는 거고.
음, 이건 아닌가.
아무튼 함부로 단언하지 말자.
세상에 당연한 건 없으니까.
진이 그런 생각 속에 몸을 일으켰다.
남들은 서너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타코를 혼자 20개 가까이 박살 낸 채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라는 표정을 짓는 직원에게 값을 치르니, 거스름돈을 돌려받기 전 막간을 살려 진이 입을 열었다.
"회전 봐요?"
"···네? 아, 네에."
뭔가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진은 개의치 않았다.
오래전에 고깃집 알바를 해봐서 안다.
이게 참 미소를 유지하기 힘든 일이란 말이지.
해서 거스름돈을 건네받으며 말하길.
"그럼 진 에버나이트 응원하는 거 잊지 마시고. 무슨 일이 생기걸랑 솔로 인트라넷에 메시지 남기시고. 운이 좋으면 내가 볼 수도 있으니까."
"···어? 예?"
멍한 표정을 짓는 직원에게 고생하시라 뒷말을 남긴 진이 가게를 나섰다. 그러고는 아직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인 택시에 탑승하니.
"잠깐! 잠깐만요!"
뒤늦게 뛰쳐나온 직원이 본 것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가는 택시의 뒷모습이었다.
*
진이 호텔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땅거미 진 건물 주변에 흐릿한 불빛이 둥둥 떠다녔다. 그중 하나가 점점 가까워지기에 가만히 지켜보니, 소리 없이 날아온 드론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더라.
비싼 호텔 아니랄까 봐 경계가 삼엄한 모습이다.
자다 눈 떴더니 스캐빈저가 까꿍 하던 무인 모텔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보안 수준.
역시 돈이 좋긴 해.
진이 그리 생각하며 호텔에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에게 마주 인사한 뒤 탑승한 엘리베이터는 부드럽고 빠르게 그를 VIP 라운지에 데려다 놓았으니.
자연스레 객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진이 어느 순간 발을 멈췄다.
천천히 돌아가는 시선 끝에, 홀로 통유리 창가에 앉아 와인을 들이켜는 켄드릭의 모습이 담긴다.
"혼자 뭐하냐?"
읏챠, 맞은편 소파에 앉는 그를 켄드릭이 곁눈으로 힐끗 확인했다.
그러고는 다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말하길.
"꺼져."
"여기 콜라 한 잔이요!"
"······"
켄드릭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든 말든 기지개를 쭉 켠 진이 말했다.
"자하드는 어느 구역에 있댔지?"
"그건 왜 묻지?"
"아. 거기도 여기처럼 신기한 느낌인가 해서."
켄드릭은 말이 없었고, 진은 대답을 기다리고 던진 말이 아니라는 듯 자연스레 뒷말을 덧붙였다.
"알다시피 난 다운타운 출신이잖아. 거긴 여기랑 완전 딴판이거든. 일단 하늘이 이렇게 훤히 보이질 않아요. 닭장 건물들이 따닥따닥 붙어서 길거리에 빛도 잘 안 들어. 걷다 보면 이게 낮인지 밤인지 분간도 안 된다니까? 그에 비하면 여긴······아, 감사합니다."
콜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웨이트리스에게 가볍게 고갯짓하는 진을, 켄드릭이 말없이 눈에 담았다.
어느새 천천히 돌아간 얼굴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풍경이 탐이라도 나는 건가?"
"뭐?"
"불가능하진 않아. 가문의 주인이 되면 이 모든 걸 발아래에 둘 수 있으니까."
이어진 켄드릭에 말에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켜던 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겠지? 명색이 가주인데 그 정도는······잠깐만."
순간 확대되는 동공.
급히 켄드릭을 향해 손바닥을 벽처럼 세운 진이다.
그러고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어느새 검지만 펼친 주먹을 연신 흔드는데, 그 산만한 제스쳐에 켄드릭이 멍든 눈두덩이를 찌푸렸다.
"뭐지?"
"잘됐다. 프라이머스 존은 물가가 너무 높아서 엄두가 안 났는데."
"무슨 소릴···"
"나중에 너 가주직에 오르면 나한테 어디 목 좋은 곳에 건물 하나만 싸게 남겨주라. 시가의 절반, 아니 20% 정도로. 어때?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게 무슨···아니, 그전에. 우리 사이가 뭔데?"
구겨진 얼굴을 유지한 채 되묻는 켄드릭이다.
그런 그에게 진이 코를 후비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고추끼리 시원하게 치고받았으면 친구지. 뭐."
그 평이한 대답은 양동이에 담긴 얼음물이 되어 켄드릭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낯선 감정에 홀딱 젖어버린 기분이랄까. 분명 축축하고 차가워서 짜증이 솟구치는데 이상하리만치 상쾌하기도 해서.
어느 순간 켄드릭이 푸핫-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진은 같이 웃어주지 않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 웃어주는 건 검성급이 아니고선 택도 없기에.
"아니, 그래서 집 싸게 해줄 거야. 말 거야."
단호한 물음. 그에 켄드릭이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고려해 보지."
"오오···!!"
"내가 가주가 될 수만 있다면."
"음?"
한창 기뻐하던 진이 미간을 찌푸리자니, 와인잔에 입술을 포갠 켄드릭이 가볍게 목을 축인 뒤 창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반짝이는 야경을 응시하는 눈빛은 어딘지 깊게 침잠해 있었으니, 그 속에 비친 풍경은 어느새 환호하는 관객들의 모습이 되어있었다.
패배자인 자신에게도 박수를 아끼지 않는 얼굴들.
결과가 아닌 과정을 위한 찬사.
한평생 패배한 적 없었음에도, 패배감에 찌든 채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날의 함성.
문뜩.
하늘에 닿은 자신의 손을 발견한 켄드릭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것은 하늘이 아니었다.
다음 세상을 막아서는 거대한 벽이었을 뿐.
2위계에 올라선 지 6년.
마침내 그 끝에 다다른 후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처음 패배를 선사한 장본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우승해라. 그 외에는 어떤 결과도 용납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으니.
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유리잔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청아한 소리였다.
해묵은 무언가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
와아아아아!!
마침내 시작된 8강.
구하기가 밤하늘의 별 따는 수준이 되어가는 중이라는 매표에 성공한 관객들 사이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럴 땐 참가자라는 게 참 좋단 말이지.
티켓 구할 걱정 따위 없이 특등석에 자리를 잡은 진이다.
경기장이 한눈에 담기는 탁 트인 전경, 푹신한 등받이가 그 이상 안락할 수 없는 의자, 각종 과일과 비스킷이 한가득 담긴 접시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놓여있다.
8강까지 올라왔더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더라고.
옆에서 벌벌 떠는 라프와는 달리 한껏 편안한 자세를 취한 진이 곧 시작을 앞둔 1조 경기에 눈을 맞췄다.
에안나와 카트리나.
솔라드와 마르지에를 대표한 두 여인은 어느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으니, 진의 얼굴에 흥미가 감돌았다.
얼음과 불의 노래라는 소설명을 떠올리면서다.
만약 에안나가 이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얌전한 얼굴로 이리 말했으리라.
불과 얼음의 노래라고 해줘.
우리가 승률이 더 높은걸.
그야말로 가문판 연고전!
아니 고연전인가? 아무튼!
유구한 세월 은근히, 아니 대놓고 라이벌리를 형성한 가문의 여식들이 지금 이 순간 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시작은 카트리나였다.
"표정이 좋네."
"뭐가?"
"최근 몇 년 동안 매일 죽을상이었잖아. 누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은 것처럼."
노리고 던진 말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실제로 연인을 마음에 묻은 경험이 있는 에안나는 웃지 못했다.
하지만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녀 또한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다.
죽어서도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발터를 기억한다.
그 따스한 눈빛을 에안나는 잊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더군다나 지금 이곳엔 자신을 지옥 속에서 구원해 준 존재가 있지 않은가.
다음 순간 에안나의 얼굴이 멀리 관객석에 앉은 진을 향했다.
그에게 짧게 머문 눈길이 자연스레 카트리나에게 돌아가니, 어느새 그 안에는 숭고한 열기가 하얗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시작할까?"
"급하기도 하셔라."
그리 대답하는 카트리나의 몸 주위에서 검은 얼음꽃이 봉우리를 맺었다.
암빙(暗氷).
마르지에 가문을 상징하는 냉기의 결정체가 백염을 향해 검은 이빨을 드러낸 순간.
콰앙!!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든 두 사람이다.
그렇게 이어진 싸움은 지금까지의 모든 경기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선사했다.
백염과 암빙.
서로 상충하는 두 기운은 결코 섞이는 법이 없었으니, 오직 서로를 파괴하고 물어뜯으며 상대의 뼈와 살을 깎아내렸다.
화륵!
압도적인 열기에 모든 얼음이 희뿌옇게 기화되는 듯싶다가도.
쩌저적!!
다시 결정의 형태를 복구하며 불꽃을 살라먹는다.
그때마다 경기장의 기후가 훅훅 뒤바뀌니, 뭘 모르는 관객들도 유불리를 온도로 알아챌 정도였다.
피부가 익을 것 같으면 에안나가,
이빨이 덜덜 떨리면 카트리나가 유리한 거다.
이 얼마나 직관적인지.
위와 같은 과정은 전투가 격렬해질수록 더욱 선명한 차이를 드러냈으니, 손바닥 뒤집듯 변화하는 기온과 풍경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열꽃과 얼음 결정이 번갈아 위세를 떨친다.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이 그렇게.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라고.
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마침내 경기장에 침묵이 내려앉으니, 압도적인 수증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카트리나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안나라.
"···미안하지만 카트리나, 너한테 지기엔 내가 마주했던 세상이 너무 커."
흑염의 주인을 떠올리며 뱉은 말은 쓰러진 이에겐 닿지 못했다. 그저 쩌렁쩌렁한 사회자의 음성이 장내를 진동시켰을 뿐.
"승자! 에안나 솔라드!!"
상대전적에서 1승을 앞서 나간 솔라드.
이 순간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었다.
작게는 도박꾼들이요, 크게는 가문의 일원들이라.
다만 이 순간만큼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터질 뿐이다.
와아아아아아!!!
"에안나! 에안나! 에안나!"
"백염이 최고다! 존나 멋있어!"
"에안나! 여기 한 번만 봐줘!"
그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진이 움직였다.
켄드릭을 쓰러뜨린 다크호스의 등장.
당연히 관객들은 목청이 터지라 그를 반겼으니-
"왔구나."
성큼성큼 경기장에 올라서는 그의 맞은편에서 흑발의 미녀가 미소 짓는다. 수천 송이의 장미가 한꺼번에 개화한 것 같은 눈부신 미소였다. 하지만 그 가시가 너무도 날카로워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어떻게 여기서 보냐.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진이 목을 좌우로 뚝뚝 꺾으며 내뱉은 말에 미쉘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인연이라······"
그와 동시에 울리는 웅혼한 뿔피리 소리.
뿌우우──!!
진이 자연스럽게 광극을 회전시킬 때였다.
열 걸음 남짓 떨어져 있던 미쉘이 눈앞에서 나타났다.
중간 과정을 생략한 듯한 등장에 진이 흠칫.
블링크?
거리를 벌리는 게 아니라 좁히는 데 쓴다고?
다음 순간.
미쉘이 양팔을 훅 벌리더니 대뜸 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마치 오래된 연인과 해후한 것처럼 따스하게.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
"인연은 시시해. 운명은 어때?"
< 97화 >
뺨으로 맞댄 살결에선 우아한 장미 향이 풍겼다.
수천 송이 만개하는 짙은 기품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검은 장미.
꽃말은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
비틀린 욕망이 축복받은 신체를 꽉 껴안았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과 함께였다.
까마귀는 반짝이는 것을 수집하는 습성이 있다고 했던가.
미쉘에겐 이 순간이 바로 그럴지도 몰랐다.
"하아."
그녀의 달뜬 숨결이 목덜미를 스친 순간.
동시에 진이 생각했다.
이거 스탠딩 길로틴인가?
가급적 그라운드 대결은 피할 것?
이 포지션에서 이어질 수 있는 초크 기술을 적어도 열댓 개는 알고 있는 진이다. 해서 지금 상황이 위험하다 판단. 상체를 뒤로 힘껏 젖혀 목을 휘감은 미쉘을 뿌리쳤다.
"훠이!"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상대의 가슴팍을 뻥 걷어차서 거리를 벌렸을 진이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화끈한 반격을 선사하기엔 상대의 반응이 너무 미온적이었기에.
생각보다 너무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싸울 의지가 없는 느낌?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제 자리에 우뚝 선 상대는 바라보면서다.
"안 덤벼?"
그에 미쉘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언뜻 보면 그저 아름다운 것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를 인내하려 애쓰는 불안정한 떨림이 입꼬리에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빈말로도 정상으론 안 보이는 모양새.
"뭐지. 왜 가만히 있냐."
"방금 껴안았던 거 맞지?"
"보이지 않는 수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관객들도 어리둥절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인데 마주한 진은 오죽할까.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상대가 저 모양인데 힘이 날 리가 있나.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힐 때였다.
"진 에버나이트."
마침내 미쉘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또렷한 발음으로 뒷말을 덧붙이길.
"너는 아름다워."
"···뭐?"
"그때와 또 달라. 언제 두 번째 세상에 올라온 거니? 그게 기쁘긴 했을까? 대체 어디까지 나아갈 셈이지?"
미쉘의 어조는 제 눈동자만큼이나 어두웠고 또 반짝거렸다.
"무궁한 잠재력, 존재 자체가 모순. 그래, 이젠 확신할 수 있어. 네가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는 걸."
가면을 벗은 역병 의사는 그렇게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네겐 자격이 있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자격이.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
미쉘이 천천히 팔을 벌린다. 두말없이 품을 내어줄 테니 응석 부리지 말고 달려와 자신에게 안기라고 말하는 듯했다. 허리께까지 떨어지는 비단 같은 흑발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한 번만 더 안아봐도 될까?"
당연하지만 진은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저 시큰둥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니.
"괜히 들어줬네."
그의 몸에서 자줏빛 뇌전이 솟구친 순간.
미쉘이 뒷말을 이었다.
"···아쉬워라. 어쩔 수 없지. 힘들겠지만 나도 더 참아볼게."
그리고 그게 끝이었으니.
압축된 시간 속에 상대를 향해 돌진하던 진이 끼익—급제동을 밟았다.
"···에?"
입에서 절로 요상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느새 저 멀리 경기장 밖으로 블링크한 상대를 발견한다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논란의 여지조차 없는 완벽한 장외(場外).
"뭐야."
진이 맹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그 못지않게 얼빠진 얼굴로 눈을 끔뻑이던 사회자가 급히 마이크를 잡았다.
"스, 승자! 진 에버나이트!!!"
환호성은 없었다.
*
한동안 장내가 소란스러웠다.
기껏 8강까지 진출한 참가자가 스스로 경기를 포기하다니. 그것도 얼굴 뽀얗게 다친 곳 하나 없이 유유히 떠났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의지가 꺾인 것도 아니다. 그냥 방긋방긋 웃으며 그렇게 떠난 것이다.
오호통재라. 이 무슨 속 뒤집어지는 상황인지.
뒷말이 안 나오면 그게 이상할 지경이라서.
"갸아악! 거, 거짓말이지?"
"지랄하지 마! 이게 말이 되냐고오!!"
"···시발, 장기 팔아 때려박은 돈인데···"
"엄마. 아들이 미안해."
돈 잃은 노름꾼들부터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이들은 휴전선 근방의 포병과도 같아서, 전시 상황이 터졌다 하면 일단 깡그리 죽어난다.
게거품 물어가며 억! 윽! 엑!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광경이 도미노 쓰러지듯 장관이었다. 그 와중에 유언마냥 한마디씩 뱉는 게 어떻게 보면 행위예술 같기도 하고.
물론 이번에도 동정은 없다.
아니, 애초에 배당 차이가 진 –840, 미쉘 +611까지 벌어진 상황이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진에겐 8,400크레딧을 걸어야 고작 1,000크레딧의 수익이 발생할 뿐이고,
미쉘에겐 1,000크레딧만 걸어도 6,100크레딧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구조라.
그만큼 진의 승리가 유력했단 소리다.
생각해 보라, 켄드릭이란 걸출한 대어를 잡고 올라온 다크호스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미미한 참가자의 대결이지 않은가.
당연히 배당이 엄청난 차이를 보일 수밖엔.
다만 그저 역배 또 역배.
지금까지의 손해를 메꿔 보겠다고 더 큰 수렁에 몸을 던진 이들만 차가운 현실에 크아악 절규할 뿐이라.
개중에는 자금 마련을 위해 내부 장기를 싸구려 임플란트로 교체한, 순수주의자의 정체성까지 포기한 이들도 수두룩했다고.
다만 이번에는 평범한 관객들도 뿔이 났다.
이쪽도 어렵게 티켓을 구한 이들이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소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렇듯 허무한 결말이라니.
"이건 티켓 비용에 25%는 환불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차라리 미리 기권하던가. 김빠지게 이게 뭐야."
"저런 건 다시는 못 나오게 해야 돼. 시발."
절로 구시렁구시렁. 미쉘을 욕하는 이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덕분에 진만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에이씨."
당연한 말이지만 진이 미안할 건 하나도 없다.
미쉘이 웃으며 경기장을 벗어나는 모습은 관객 모두가 똑똑히 본 사실이고, 그 선택에 진이 관여한 부분은 개미 오줌만큼도 없었으니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했음에도 찝찝한 기분이라니.
진이 에잉 쯧쯧 혀를 차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어수선한 관객석과 경기장을 번갈아 보며 생각하길.
도대체 뭐 하는 여자지?
미쉘 라일리.
생각해 보면 첫 만남부터 영 이상하긴 했다.
'난 네가 마음에 들어.'
그땐 살짝 나사가 풀린 정도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혼자서 흰소리를 떠벌거리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경기를 포기하는 것도 그렇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뿐이라서.
에라 모르겠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머릿속을 비울 때였다.
"무슨 생각해?"
드르륵, 의자를 뒤로 빼는 소리와 함께 옆자리에 앉는 에안나다.
무지 흰티에 청바지.
특색 없는 편안한 복장이지만, 옷걸이가 워낙 사기인 탓에 언제고 뭇 남성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그녀는 조금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카트리나와 죽어라 싸우지 않았던가.
"몸은 괜찮아?"
"버틸 만······아니, 아파."
말을 바꾼 에안나가 의자를 옆쪽으로 돌리며 팔을 내밀었다.
"심각하지?"
"미친. 이게 뭐래."
진이 흠칫 놀라 중얼거렸다.
새하얀 살결과 대비되는 검푸른 멍 자국이 마치 무성한 가지처럼 뻗어있는 것이 아니겠나.
이에 대한 대답은 에안나가 아닌 그 옆에 앉은 라프에게서 돌아왔으니.
"아, 암빙의 힘이야. 먼지보다 작은 얼음 결정이 살갗 안으로 침투하는데, 상대의 마나를 흡수해서 결정꽃을 피워내. 시간이 흐를수록 마나 회로를 걸레짝으로 만드는 거지. 그래서 마르지에 가문이 장기전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 거고······"
누가 말하는 나무위키 아니랄까 봐, 제 경기가 점점 다가온다는 압박감에 벌벌 떨면서도 완벽한 설명을 마친 라프였다.
"흐음···, 스택형 디버프 같은 느낌인 건가. 그나저나 넌 따듯한 물이라도 좀 마셔라. 그러다 쓰러질라."
"괘, 괜찮···"
"몸이라도 좀 녹여줘?"
진의 염려까진 괜찮은 척 넘긴 라프였지만, 이어진 에안나의 물음에는 절로 황송한 표정을 짓더라고.
"그, 그럼 저는 영광입죠. 예."
"잠깐만."
다음 순간 에안나가 가볍게 떨쳐낸 손짓에 반경 3m 정도의 온도가 따스해졌다.
체감상 3도 정도는 오른 느낌?
자연스럽게 라프의 아래턱이 흔들리는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더라.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에안나 양. 저는 라프라고 하고, 여기 진과는 의형제 같은 사이로, 예. 이 친구와의 첫만남은 하이퍼루프였으며, 네.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해 지금까지 함께하게 된, 그리하여 한날한시에 죽자 맹세했으니······"
"반가워. 세실 언니와 경기를 치르게 됐지?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
"아. 감사합니다. 만약 지더라도, 아니 지는 건 가정하지 않고 반드시 스승님의 명예를······"
이 새끼 왜 이래?
갑자기 허언이 도진 것도 모자라 두서까지 없어진 라프의 모습에 진이 헛웃음을 쳤다.
긴장으로 인한 더듬거림과는 또 느낌이 달랐으니, 설마 에안나 때문인가?
그 와중에 에안나와 가볍게 악수까지 한 라프가 팔꿈치로 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고는 복화술에 가까우리만큼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웅얼거리니.
나지막한 목소리에 서운함이 꾹꾹 담겨 있더라고.
"···왜, 말하지 않은 거지?"
"뭐가."
"···에안나 양과 아는 사이면 진즉 말했어야지."
"말 안 했나? 근데 그게 중요해?"
"내, 내가 그렇게, 에안나파라고 말했는데···"
진이 뒤통수를 긁적이는 모습에 라프가 콧김을 푹 뿜을 때였다.
"경기 시작해."
에안나의 말과 함께 뿔피리가 길게 울렸으니-
얼른 경기장을 향해 돌린 시선에 격돌하는 류카드와 데이어가 보였다.
이번에도 가문 간의 대결이다.
검술의 아나리온.
대지의 하칸.
전광판에 비친 상대전적은 45 : 55로 하칸 가문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지만, 그건 이전 세대의 결과일 뿐이라서.
지금 아나리온 가문의 대표는 다름아닌 류카드다.
검성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도 제 존재감을 잃지 않은 불세출의 검객.
그런 그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형님! 갑니다!"
데이어가 와락 소리친다. 물론 관객들에게 그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직후 그의 몸이 은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모두가 똑똑히 보았다.
대지의 힘을 숭상하는 하칸 가문은 신체의 고유 저항력을 어마어마하게 상승시키는 능력이 있으며, 마나의 갑옷을 두른 그들의 내구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비슷한 실력이라면, 냉병기를 다루는 아나리온과 거슈타인을 상대로 높은 상대전적을 자랑한다고.
에안나의 팬, 라프가 설명했다.
"이번 가문의 대표들이 워낙 쟁쟁해서 묻힌 감이 있지만, 데이어도 하칸 가문에선 굉장한 기대주라더라. 나이도 이제 19살 아닌가? 저보다 나이 많은 형, 누나들 다 제치고 나온 것만 해도 말 다······"
나무위키의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스릉.
돌진하는 데이어를 바라보던 류카드가 검을 뽑은 것은.
이어지는 아스라한 궤적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혜성을 닮았으니,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등지고 서 있었다.
"······"
"······"
너나 할 것 없이 고요한 가운데. 철컥 착검하는 소리만이 또렷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사람들이 그러하듯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데이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직후 전신을 뒤덮은 마나 갑옷에 실금이 도드라지더니 곧이어 쩌저적, 빙판길이 갈라지는 듯한 균열음을 일으키며 산산조각이 났다.
콰앙-!!
유리알처럼 반짝거리며 흩어지는 파편 속에서 정작 데이어는 다친 곳 없이 멀쩡했으니.
"···졌어요."
마나를 일으키는 대신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 그다.
동시에 쥐 죽은 듯 고요하던 관객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진도 이번만큼은 박수를 치지 않을 수가 없더라.
"미쳤네. 진짜."
세상이 100년을 기다려 내보낸 천재라더니 진짜더라고.
괜히 불세출의 검객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방금 사선으로 베어내는 그 동작은 진에게도 한없이 찰나에 가까웠으니까.
피할 수 있을까?
자전을 최대 출력으로 일으킨 상황이라면 반응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문뜩 호승심이 끓어오른 진이다.
어느새 잿빛 눈동자는 은빛 장발을 휘날리며 떠나는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괜히 검성이 제 아들의 결선 진출을 단언한 게 아니었다.
포스트 검성이 아닌 그저 류카드란 이름으로 존재하는 사내.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갈 때였다.
"다, 다녀온다."
순식간에 제 차례가 찾아왔다는 사실에 라프가 퀭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쯤 되면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맞다.
진이 보기엔 저건 무대 공포증이라기보단, 대기 공포증에 가까웠으니까.
막상 경기가 시작하면 누구보다 열심히 임할 것을 잘 알기에 그저 등짝을 철썩 후려치는 것으로 응원은 끝!
그리하여 마지막 4조 경기.
경기장에 올라선 세실을 바라보던 에안나가 입을 열었다.
"세실 언니가 카를로스를 이길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다 그랬을걸? 괜히 난리 난 게 아니잖아."
"테아가 말도 안 되는 천재였을 뿐인데,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더 괴로워했지. 세간의 평가에도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이었고."
"그래도 이젠 완전히 평가가 달라지지 않을까? 카를로스를 잡았잖아."
"···그러게."
에안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고,
뿔피리 소리와 함께 진이 고개를 돌린 순간.
상태창이 시야를 가렸다.
「가문 회전(드리우는 암운)」━━━━━━
7년 만에 돌아온 순수주의자들의 축제.
대회에서 우승해 당신을 증명하거나,
????의 ???을 ????시오.
*보상 퍽 XP 30,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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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혀 바라본 경기장.
무언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핏물을 휘날리며 빙글거리는 그것은,
라프의 팔이었다.
< 98화 >
"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은 라프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른팔이 날아간 상황에서도 상대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눈을 감지 마라.
두려움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는 것이니.
마지막까지 적의 모습을 살펴라.
그것이 너를 구하리라.
귀에 인이 박이게 들었던 잔소리.
그 잔소리가 이 순간 그의 목숨을 살렸다.
쐐액!
검푸른 잔상을 남기며 날아드는 칼날이 보인다. 양팔 멀쩡할 때도 못 막았던 공격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체를 크게 젖혔다.
아슬아슬하게 옷자락을 스치는 칼날, 섬뜩한 절삭음과 함께 바닥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한 라프다.
동시에 외톨이가 된 그의 왼팔이 흐릿해졌다.
허리춤에서부터 사출된 짧은 번뜩임.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자세가 무너진 와중에도 완벽한 투척이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쩡!
짧은 불티와 함께 단검을 쳐낸 소환수다.
휘두른 검을 회수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회심의 투척이 무위로 돌아간 것과 라프가 반쪽짜리 낙법을 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여기까지가 한 호흡.
잘린 팔이 머리 옆으로 떨어진 건 그다음이었으니.
콸콸콸, 핏물을 게워 내는 팔뚝을 부여잡는 라프에게 소환수의 칼날이 곧게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
이번에도 라프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스승의 가르침이다.
그가 알려준 수백 가지 기술 중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게 고작 [똑바로 죽음 직시하기]라는 것이 심히 통탄스럽기는 해도 그는 가르침에 충실했다.
덕분이었을까.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듯한 찰나.
자신 앞으로 나타난 두 인영을.
번뜩이는 발검과 파직 솟구치는 번갯불을.
쩌엉!!
무형의 충격파가 경기장 위로 거센 파문을 일으킨다. 그 속에서 은빛 장발이 휘날렸다.
내려치는 검과 막아내는 검이 횡십자로 교차한 가운데, 류카드의 눈이 옛 시대의 투구를 응시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소환수의 건틀릿을 단단히 움켜쥔 손이 있었으니, 와씨 깜짝이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진이라서.
솔직히 말하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니, 축제라매.
팔을 자르는 건 좀 아니지.
황당함 묻어나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세실을 향했다.
"누구 죽일 일 있어?"
류카드도 비슷한 생각이었을까.
칼날끼리 맞닿은 첨예한 대치 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선을 넘으시는군요. 언제부터 회전이 누군가를 해하는 자리였습니까. 막지 않았다면 머리가 잘렸을 겁니다."
그에 세실이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두 난입자를 바라봤다.
"그래, 그랬겠지."
어처구니없을 만큼 빠른 긍정이었다.
달관한 듯 힘없는 목소리는 이 상황을 쉬이 납득하지 못해 숨죽이는 관객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어졌다.
"맞아, 그랬을 거야. 그러라고 했고."
"···누님?"
"나도 이젠 모르겠어. 류카드. 너는 이런 기분을 느낀 적 있을까.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데, 그 실수가 너무도 커서 돌이킬 수 없는 기분을 말이야. 아마 없겠지. 너는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 너는 천재니까. 나와는 다르게."
세실의 눈이 류카드 옆에 선 진에게 향했다.
"그리고 당신도."
"뭐?
"켄드릭과 싸우는 모습을 봤어. 눈부시더라. 문뜩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생각했어. 얼치기 같은 계집애가 떨리지 않냐고 묻는 게 얼마나 같잖았을까. 응?"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멋대로 타인의 생각을 재단하는 행태가 거슬렸던 것은 아니다. 유약하기만 한 줄 알았던 얼굴에 기름때처럼 끈적한 열등감이 배어나는 것도 딱히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저 손바닥이 흥건했다.
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은 덤이다.
왜냐고? 몰라.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이 순간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
그사이 세실의 말이 이어졌다.
"왜, 나한테서만 다 빼앗아 가는 건데? 조금은 나눠줄 수도 있잖아. 나만, 나만 계속 혼자였잖아. 아무도 관심 없었잖아. 어째서 할머니는 언니한테 성씨까지 물려준 거지? 나를 조금만 생각했다면 그렇게까진 할 필요 없었는데. 그건 너무 잔인한 건데······"
진은 이어지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지금은 개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아?"
관중들이 고개를 들었다. 한 사람, 두 사람, 점점 더 늘어나는 시선이 같은 시야를 공유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을 아 벌렸다.
이르게 찾아온 노을이라 생각한 그것은 한 존재가 뿜어내는 핏빛 마나였기에.
직후 날개 없이 부유하던 존재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섬에, 드넓은 원형 경기장이 강제로 붉은빛을 잉태했다.
이는 항거할 수 없는 자연재해라.
눈 깜빡할 사이 전후좌우 새빨갛게 물드는 시야에 관객들이 패닉에 빠진 순간.
1층 관중석 쪽에서 눈이 멀 정도의 빛이 번뜩였다.
────!!
태풍을 연상시키는 바람 소리가 대기를 가른다.
직후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던 핏빛 하늘이 절반으로 쪼개지고, 그 너머로 다시 청명한 하늘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직도 여력이 남은 충격파는 범종의 울림처럼 넓게 경기장 전역으로 퍼지더니 불안에 떠는 모두를 훑고 그렇게 아련하게 흩어져갔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관객들의 고개가 차례차례 풀썩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소리를 지르던 자, 넋을 놓은 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자.
그게 누구건 예외는 없었다.
몇몇 강력한 의식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고개를 아래로 떨궜으니, 그 수가 수천을 아득히 넘었다.
실로 개세적인 광경.
아직도 머리칼을 흔드는 아득한 바람결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검성이 서있었다.
어느새 오른손에 검을 쥔 채다.
다음 순간.
일검에 하늘을 베어낸 검사의 고요한 눈이 이제 막 경기장에 발을 붙인 존재를 향했다.
"······"
상대도 검성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얼굴을 가린 후드를 뒤로 젖히니, 그 속에서 시체처럼 창백한 낯빛을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검성을 뵈오."
"인두겁을 쓴 짐승이 겁을 상실했군."
검성도 상대를 알아본 듯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길.
"널 11사도라 기억한다. 아직도 그러한가?"
"20년 전에는 그랬지. 지금은 6번째요."
"꽁무니를 빼던 놈이 많이 자랐군."
"그땐 그대도 검성이 아니라 광검이었지."
침묵이 내려앉은 경기장에 오직 두 사람의 목소리만 또렷했다.
이 상황에서조차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은 감히 그 대화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기 급급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진이라서.
뭔데, 갑자기.
라프의 팔이 썽둥 잘리고, 싸움을 말리려고 나왔더니 세실이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고, 갑자기 손에 땀이 차다가 시야가 빨개지기에 하늘을 바라봤더니, 웬 핏빛 아우라를 뿜어내는 송장 대가리가 검성이랑 대화하는 상황?
선생님 진도가 너무 빨라요.
그리하여 혼란을 틈타 아까는 미처 살피지 못했던 상태창을 확인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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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에서 우승해 당신을 증명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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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 이거 또 말 바꿨네.
처음에는 우승하라고 바람을 넣더니 은근슬쩍 OR를 갖다붙였다.
???의 ???을 ????시오.
이게 뭔, 씨.
세실의 개소리를 들으시오?
라프의 잘린 팔을 붙이시오?
상태창의 변덕을 이해하시오?
개새끼야, 알려줄 거면 좀 성의 있게 알려주던가.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넌 이게 재밌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속이 뒤집힌 진이다.
그래서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그리하여 눈앞에 당면한 문제부터 해치우고자 마음 먹은 진이었으니, 그의 눈이 용케 지혈을 마친 채 쓰러진 라프를 담았다.
"내 친구 팔을 잘라?"
다음 순간 강철 같은 무릎이 소환수의 복부를 후려쳤다.
콰앙!!
거기서 끝이 아니다.
팔뚝을 움켜쥔 손을 비틀어 당긴 뒤, 딸려오는 머리통을 반대쪽 손바닥으로 감싸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러고는 다시 반대쪽 손을 번쩍 들어 다섯 손가락에 먹구름을 찢어발기는 심상을 담아내니-
받아라, 산혼철조!
꽈릉!!!
다섯 줄기 벼락, 뇌신조의 발톱이 소환수의 흉갑에 틀어박혔다.
경기장이 와락 뒤집힌다. 뾰족하게 융기한 지반 끄트머리를 발판 삼아 뛰어오른 진이 그대로 팔을 머리 뒤로 끌어당겼다.
파앙-!
손틈 사이로 길게 가지를 뻗은 뇌창을 파공성과 함께 집어던진 순간.
"에이론 죽여버려!!!"
세실이 악을 쓰듯 울부짖으니.
직후 구덩이 속에서 번쩍 솟구친 검푸른 검격이 뇌창과 맞부딪쳤다.
콰아앙!
강대한 충격파가 몸을 떠밀어 허공에서 크게 한 바퀴 회전한 진이다.
그런 그의 눈에 지면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 소환수와 웅얼웅얼 주문을 외는 세실의 모습이 한꺼번에 담겼다.
소환사부터!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진이 세실의 정면으로 블링크했다. 몸이 목표로 했던 위치에 도착함과 동시에 미리 뻗은 주먹이 세실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쾅!
강한 반발력이 살갗을 타고 전해졌다. 부르르 진동하는 허공에서 비늘처럼 생긴 반투명한 윤곽이 얼핏 보였다가 사라졌다.
보호막으로 위기를 넘긴 세실이었지만, 몸이 튕겨 나가는 것까진 막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하늘과 땅이 정신없이 뒤집히는 와중에도 기어이 주문을 다 읊는 데 성공한 그녀의 손끝이 달려드는 진을 가리켰다.
"익스플로전!"
직후 자그마한 불씨가 도화선에 붙은 불처럼 세실의 검지를 타고 순식간에 이어지더니, 손끝에 닿은 순간 정면에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키며 진을 집어삼켰다.
그때였다.
팟!
발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세실의 등 뒤에서 나타난 류카드가 검을 내리쳤다.
섬전 같은 내려베기.
하지만 이를 막아내는 칼끝이 있었다.
쩡!
어느새 자세를 바로잡은 소환수, 에이론이 류카드를 향해 검격을 떨쳐냈다.
눈 깜짝할 순간 두 검사의 칼날이 허공에 수없이 많은 실선을 자아내니-
동시에 세실이 웩, 검은 핏물을 토했다.
그것은 반동이었다.
사악한 자들의 편법을 빌려, 자신의 위계를 거스를 정도의 소환수를 이 땅에 불러온 반동.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핏대를 세우며 와락 소리쳤다.
"샐리스트!"
직후 연쇄 폭발이 빚어낸 화염이 인간의 형체를 갖췄다.
[오오오!]
우렁찬 외침과 함께 놈이 주먹을 휘둘렀고, 그 주먹은 폭발을 뚫고 나타난 진의 발길질과 허공에서 충돌했다.
커다란 열풍이 앞머리를 들춘다.
하지만 진은 사납게 웃을 뿐이라.
아그니인지 뭔지.
테아의 거죽을 뒤집어쓴 얼굴수집가가 소환했던, 그 상반신만 해도 십수 미터에 육박하던 화정(火精)에 비하면 저 불꽃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확신 속에서 두들겨낸 주먹이 불꽃 정령의 몸에 큼지막한 구멍을 여러 개 뚫어냈다.
화악!
힘없이 흩어지는 불길 너머로 세실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너희 같은 천재는 몰라! 나도! 나도!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게 소리치는 그녀의 등 뒤로 허공에 파문이 일렁거린다.
직후 그 너머로 이름 모를 정령들이 우르르 쏟아졌으니.
카를로스를 패배로 몰아넣었던 진격의 재림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다.
당시 선봉을 맡았던 에이론이란 소환수는 류카드와 검격을 주고받고 있었기에.
해서 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유수를 헤치는 연어처럼.
밀려오는 정령들을 말 그대로 때려부수며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칼바람에 살갗이 찢어지고, 바닥에서 돋은 손아귀에 발목이 잡히고, 불길과 얼음이 몸을 때리고 꿰뚫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물밀듯 한 공세를 받아내며 노도처럼 나아간 진이 마침내 마지막 막아서는 돌덩이를 어깨로 들이받았다.
쾅!!
산산이 조각나는 파편을 뚫으며 한 걸음을 쾅 내디딘 진이 놀란 눈을 부릅뜨는 세실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여자는 죽어도 못 때리는 옆나라 노랑머리 요리사와 달리 눈이 돌아간 진은 손속에 사정 따윈 없었으니.
벼락같은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쨍그랑, 부서지는 보호막과 함께 바닥 위를 길게 미끄러진 세실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으로 소리쳤다.
경험치 내놔!
하지만 그런 일은 없더라고.
상태창 잠잠한 가운데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이 우르르르 흔들렸다.
놀란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고개를 돌린 진이다.
그리고 보았다.
세계수란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핏빛 거목이 경기장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 앞에는 검성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99화 >
진이 한창 날뛰고 있는 그때.
검성과 사도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무섭도록 고요한 적막이 마치 태풍의 눈과 같았다.
저 밖이 얼마나 요란스럽든, 결국 시작과 끝은 이곳에서 결정 나리란 사실을 숨 막히는 존재감이 증명하는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도였다.
"과연 훌륭한 축제요."
사자(死者)를 연상시키는 창백한 머리통이 의식 잃은 관객석을 길게 훑는다.
핏기 없는 입술이 파란 호선을 그렸다.
"순수주의자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경우는 극히 드물지. 척박한 시대에 이 얼마나 값진 풍경인지···. 마음 같아선 저 사이에서 이 축제의 끝을 함께하고 싶을 정도요."
"헛소릴 하는군. 존재 자체가 죄악인 망종이 여흥을 입에 담다니. 이곳에 네 자리는 없다.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영원히."
날 선 문장과 달리 검성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목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겉모습도 그랬다.
허릿춤의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철검이었다.
기교 없이 쭉 뻗어, 그 끝에서 뾰족하게 맞물린 검신부터 손잡이 역할에 충실할 뿐인 투박한 칼자루까지.
천지 사방 음울한 기운을 떨쳐내는 사도의 핏빛 광원에 비하면 지나치리만큼 소박한 모습이라.
하지만 검성은 무던했다.
마치 이거면 충분하다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불길함이 도를 지나쳐 허공을 일그러뜨릴 정도인 핏빛 기운은, 정작 검성 한 사람의 간격을 파고들지 못했기에.
허공에 아로새긴 매끈한 경계선.
핏빛 기운이 그 위를 헛돌아 더욱 또렷해진 청명한 영역 안쪽에서 검성이 입을 열었다.
"다른 놈들은 아직인가. 기다려줘도 나타나질 않는군."
또다시 평이한 어조.
그에 사도가 관객석을 향한 눈길을 거둬들여 검성을 바라보았다.
"여기엔 나뿐이오."
"그런가."
짤막한 대답이었다.
아니, 기수식이었다.
"그럼 홀로 죽으라."
검성의 말이 마침표를 찍은 것과 동시에 사도의 오른팔이 날아갔다.
하늘과 땅을 잇는 은빛 궤적.
그 속에서 솟구친 피는 썩은 녹빛이었다.
사도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잘린 팔에 미련을 두지도 않았다.
그저 무사한 왼팔을 옆으로 뻗었다.
직후.
관객석을 향한 손바닥에 핏빛 기운이 강렬한 빛으로 움트니, 유형화된 기운이 광선처럼 길게 뻗은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 방향 끝, 고개가 푹 떨어진 관객들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든 순간.
후욱!
바람결을 동반한 검격이, 경기장의 허리 부근을 지나던 광선을 베어냈다.
결속력을 잃고 흩어진 마나가 힘없이 흩어지는 가운데.
사도의 손이 이번에는 정면을 향했다.
핏빛 기운이 해일처럼 일었다.
우우우우.
지상을 향해 휘어지는 파도 끝에 맺힌 원념들이 사특한 노래를 불렀다.
다음 순간.
검성이 오른발을 축 삼아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휘도는 궤적 속에 철검이 원을 그렸다.
부드럽게 떨쳐내는 칼끝.
거짓말처럼 해일이 일시에 소멸한다.
밀려오던 반대 방향으로 길게 그림자를 남기며, 그렇게.
화악.
경기장의 천정에 닿은 검풍이었다.
지상으로부터 뻗어 그곳까지 가 닿았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가까운 하늘에 아련한 바람을 일으키니.
다음 순간.
사도의 손바닥에 붉은 실선이 생겼다.
그리고 투두두둑.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4개가, 절반으로 갈린 손바닥 단면을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바닥을 물들이는 진녹색 혈흔.
"···못 당하겠군."
사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팔 하나와 반대쪽 손가락 네 개를 잃은 것치곤 제법 여상한 육성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듯했으나, 입가의 씁쓸한 미소만큼은 진짜처럼 보였다.
"더 벌어졌는가. 애석하게도."
비슷한 순간이 과거에도 있었다.
그때는 광검과 11사도였다.
실력은 한 뼘 차.
그 한 뼘이 모자라 사도는 패배했고,
그 한 뼘이 부족해 광검은 달아나는 사도를 끝장내지 못했다.
20년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떠한가.
광검은 검성이, 11사도는 6사도가 되었다.
서로가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답보하지 않고 살아냈다.
하지만 그 보폭은 현저하게 달랐으니.
이 순간, 죽은 생선처럼 광택 없는 눈동자가 눈앞의 사내를 담았다.
한 자루 검으로 도시의 정점에 선 성인.
세월 해친 칼끝으로 시대를 짚어.
마침내 검성(剣聖)이라 불리는 거인을.
그 거인이 입을 열었다.
"너로는 안 된다."
담담히 읊조리는 격차.
그에 사도가 대답했다.
"부정하지 않지."
순순한 긍정 뒤로, 사도의 가슴팍 핏빛 광원이 음습하게 주변을 삼킨다.
검성을 제외하면 모든 공간에 그 영역을 떨친 힘이다. 당연하게도 정신을 잃은 관객들 또한 예외는 아닌즉.
"하지만 이곳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도 있소."
만 명 목숨을 볼모 삼는데 주저함이 없다. 애초에 이곳을 노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말하듯 태연자약한 태도였다.
흑마법의 본질은 희생과 제물에 있다고 했던가.
군중의 목숨값으로 저울의 균형을 맞춘 사도가 파랗게 웃었다.
검성은 흥분하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경기장 한편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눈길을 던졌으니, 이윽고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플로렌스의 여식에게 손을 댔는가. 저런 표정을 짓는 아이가 아니었거늘."
잇따라 터지는 충돌음. 치열한 각축전의 현장에서 세 남녀가 어지럽게 뒤얽히고 있었다. 온몸에 검푸른 운무를 두른 소환수와 함께.
사도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손을 댔다? 그 견해는 정정할 필요가 있겠소, 검성. 믿고 말고는 그대의 자유나, 세실은 스스로 우리를 찾아왔소. 누구보다 간절히 갈망한 쪽은 그녀 자신이었으니 단언하건대 여기엔 타락도 배신도 없소. 그저 한 인간의 선택이 있었을 뿐."
"무엇이 부족해서? 가주감은 아니었을지언정 가문의 대들보로 성장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이였다."
"그런 평가를 무척이나 혐오하더군. 천재들의 우매한 잣대라며."
"······"
세실을 바라보는 검성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책망보다는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이었으니.
어느샌가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 그다.
이번에는 보다 멀리, 경기장 너머를 바라봤다.
육안으로는 닿지 않는 무언가를 응시하듯이.
동시에 사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정확히는 가슴 정중앙의 광원에서 지금까지완 비교도 할 수 없는 빛이 터져 나온 것이다.
꾸드드득----!
천지를 비트는 굉음. 그 속에서 무언가가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지면이 크게 뒤흔들리는 가운데.
압도적인 밀도로 응축된 마나가 하늘로 무수한 손길을 뻗어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 순간, 시간을 빨리 감은 것처럼 자라나 경기장의 하늘을 촘촘히 뒤덮은 그것은 숫제 가지의 형상을 띠고 있었으니까.
이렇듯 변화는 순식간에 찾아왔으니.
어느샌가 경기장의 중심에 핏빛 거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둘레가 40m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성인 서른 명이 팔을 뻗고 둘러 잡아야 겨우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경기장 가장 높은 곳에서조차 목이 뒤로 젖혀지는, 그러고도 한눈에 담기 힘들 만큼 거대한 괴이.
그에 너울너울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사특한 마나를 홀로 베어내던 검성이 말했다.
"부패한 세계수의 씨앗. 제법 크게 키워냈군."
[다시 어울려봅시다, 검성. 오래전 그때처럼.]
이제는 육성이 아닌 웅혼한 울림이 대답했으니.
거기에 검성의 대꾸는 없었다.
그저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저벅.
언제나처럼 한 자루 검을 손에 쥔 채.
***
와씨, 저건 또 뭔?
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전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다.
아드레날린이 유전처럼 뿜뿜 솟구쳐 심신이 칼끝처럼 벼려졌을진대, 저도 모르게 에엑? 멍청한 리액션이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당혹스러운 것이다.
경기장 중앙을 우뚝 점거한 거목이라는 건.
뭐가 저렇게 크대?
진이 놀란 와중에 깨달았다.
저것이 자신의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불안감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동그란 원형 경기장의 하늘을 핏줄처럼 뒤덮은 무성한 가지.
그 위로 만개한 붉은 잎사귀 한 장, 한 장이 모두 마나의 결정체였다.
소름이 쭉 돋는다.
그래도 2위계라고 보는 눈이 달라진 지금.
저것이 얼마나 엄청난 이능인지 피부로 깨달은 것이다.
일단 지금 밟고 있는 세상은 훨씬 뛰어넘었다.
그 본질이 자신의 하늘 너머에 있는 게 확실한즉.
확신할 수 없지만 3위계 끝자락, 어쩌면 그 이상.
조졌다!
상황을 직시한 진의 눈이 커진 순간.
거목이 크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시작된 분분한 낙화.
수만 장 핏빛 잎사귀가 하늘하늘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함에 진이 반사적으로 뇌창을 길게 뽑아낼 때였다.
후욱─!
들이마실 숨결이 어딘가로 쑥 빨려가는 기분과 함께 거대한 참격이 솟구쳤다.
일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직후 소리 없이 반으로 잘린 잎사귀들이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키니, 때아닌 폭죽놀이에 귓가가 멍멍.
하늘을 수놓은 요란한 버섯구름에서 눈을 돌리자, 저 멀리 낡은 검을 휘둘러낸 검성이 보인다.
맞다. 저 양반이 있었지.
평범한 무기 하나 들고, 여유작작하게 걸음을 옮기는 모양새가 마치 거죽 팬티 한 장 걸치고 거대한 괴물을 썰어내는 고인물 그 자체라.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진이 뒤늦게 상황파악에 나섰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는 말이었으니, 그제야 정신을 잃은 관객들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
혼란을 막기 위해 검성이 손을 썼다는 사실을 모르는 진이다. 해서 그새 저 많은 사람들이 전멸이라도 했나 싶어 흠칫 놀란 것도 잠시.
부릅뜬 눈동자에 혼란한 광경이 비쳤다.
A부터 P열까지. 구획마다 마련된 입구에서 후드를 쓴 불청객들이 우르르 밀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딘지 익숙했으니.
과거, 교회 잘못 나갔다가 납치당한 날.
사람을 변이체로 개조하던 흑마법사 놈들이 딱 저런 고루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고.
저 새끼들이?
진의 눈빛이 험악해질 때였다.
챙!
갑작스런 흑마법사들의 등장에 검을 뽑은 이들이 있었다.
검성이 자아낸 대규모 혼절 사태에 휘말리지 않은 진짜배기 중 하나.
바로 아나리온 가문의 검수들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입구를 막아선 채 밀려드는 적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데, 삽시간에 피와 불티가 튀어 올랐다.
그런 싸움이 수십 군데서 일어났으니.
여기까지가 불과 몇 분. 경기장으로 웬 시체 대가리가 강림한 이후 펼쳐진 개판이었다.
이쯤 되면 돌아가는 꼴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회전에 흑마법사들이 난입했다.
확실해진 대명제에 정신이 번뜩 뜨인 건 비단 진 뿐만이 아니었을 터.
실제로 관객석 이곳저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가까운 싸움터로 달려가 아나리온의 검수들에게 힘을 보태는 그들은 본선에 진출한 열댓 명의 진출자였다.
당연하게도 그중에는 가문의 후계들도 있었다.
에안나의 백염과 카트리나의 암빙이 적들을 불태우고 얼렸으며.
마나 갑주를 두른 데이어가 쏟아지는 파상공세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난장 속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역할을 이행하는 모습들이 대단했지만, 이 순간 진에겐 넋 놓고 따봉을 올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악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세실이 핏발 선 눈으로 염불을 외기 시작했기에.
"등에 칼 꽂혀 쓰러진 만병의 왕이여! 참칭 당한 덧없는 꿈의 주인이여! 눈 뜨라!"
그리 소리친 입가에서 핏물이 울컥 쏟아진 순간.
오오오오!
한창 류카드와 검을 나누고 있던 소환수의 투구 안에서 메아리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놈의 검이 빨라진다.
천천히 우위를 점해가고 있던 류카드의 미간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팽팽했던 간극을 뚫어내고 뺨을 스치는 칼날.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진하게 배어 나왔다.
동시에 진이 움직였다.
세실이 뿜어내는 마나에서 익숙한 향취를 느낀 그다.
마나 폭주? 난리 났네.
생을 태워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내는 금기를 시전한 상대를 향해 진이 아까 만들어둔 뇌창을 집어 던질 때였다.
콰앙!
전조도 없이 땅을 뚫고 솟구친 거대한 뿌리가 날아드는 투사체를 막아냈다.
그 대가로 뿌리는 몸체 절반이 뭉떵 뜯겨나갔지만, 그사이 지면에서 몸을 일으킨 다른 개체들이 아음속의 속도로 진을 쫙쫙 후려쳤으니.
치이이익!
진이 발밑으로 연기를 피워올리며 뒤로 밀려난 것과 류카드의 검이 튕겨나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직후.
한순간 발이 굳은 두 사람을 향해, 각각 엄청난 수의 뿌리와 소환수의 검이 짓쳐든 순간.
파지지지직!
콰가가각!
서로 다른 격돌음이 절묘하게 터지니.
두 사람을 노리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진을 노리던 촉수 형태의 뿌리가 뻣뻣하게 몸이 굳었으며, 류카드의 심장을 노리던 칼끝이 불티를 일으키며 묵빛 창대를 길게 스쳤다.
때맞춰 등장한 지원. 굳이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지금과 같은 난리통에 자전을 흩뿌리고, 장창을 빙글대는 사내가 어디 흔하겠는가.
그리하여 지금.
"세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켄드릭이 그렇게 물었고-
"······퉤."
카를로스가 입에서 침을 탁 뱉어내며 면전의 소환수를 응시하니.
반파된 경기장 위.
진을 포함해 회전의 우승 후보로 거론된 4명의 참가자가 우뚝 섰다.
< 100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