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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100-105

< 100화 >

8구역이 난리가 났다.

갑자기 송출이 중단된 회전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참가자의 팔이 썽둥 잘려버린-

그러니까 수십 년을 주기로 발발하는 찐 유혈사태 때문이구나, 하고 납득하던 시청자들도 슬슬 길어지는 기다림에 머리에 보이지 않는 뿔이 났다.

적어도 무슨 일 때문인지 언질은 해줘야지.

일을 이 따위로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아나리온 가문.

당신들은 뷰어십에 대한 책임도 없습니까?

시청자 수 곱하기 기다림의 시간을 책정하면 매초 달력이 휙휙 넘어갈 정도의 가치거늘···!

도대체 몇 년을 손해보는 건지.

우리가 시간이 넘쳐나서 이러는 줄 알아?

이 와중에 직관하러 간 놈들은 왜 이렇게 조용하대.

아아, 지들만 좋은 거 구경한다 이거지?

그래서 세실이 실격패한 거야? 뭐야.

뭐라도 좋으니까, 정보 좀 풀어봐!!

안달이 난 이들의 언성이 자연스럽게 높아질 때였다.

"잠시만."

누군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니.

"······저게 뭐래?"

그 손끝이 짚은 허공의 끝자락에 거대한 나무가 보이더라고.

그것도 핏물을 양동이 채 뒤집어쓴 듯, 빈틈없이 새빨간 모습이었다.

옛것을 지켜온 프라이머스 존답게, 시야를 방해하는 마천루가 드문 8구역이다.

모두가 핏빛 거목을 눈에 담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니.

당연하게도 그중엔 아나리온 가문도 있음이라.

감히 본인들이 다스리는 땅에 뿌리를 내린 괴이다.

'감히'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바람결을 타고 전해지는 불길한 기운은 고귀한 분노를 이기지 못했으므로.

심지어 저곳에는 가문의 현재와 미래가 함께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가문의 정예들이 검을 뽑았다.

검성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분의 검은 이미 하늘에 닿았으니.

그저 이 땅의 수호자답게,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개중에는 평소 엉덩이가 무겁던 원로급 장로들도 서넛이라.

급히 준비했음에도 그 전력이 도시를 전율케 했다.

도착까지는 고작 10분 남짓.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수송기 안에서 검수들이 말없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으니.

그들은 몰랐다.

만개한 나무가 도시의 관심을 집어삼키는 사이, 다른 곳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가는 동료들이 있었음을.

***

세실 플로렌스.

가주, 나비아 플로렌스의 하나뿐인 외손녀로 일찍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동년배 후계들에 비해 재능이 일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게 어느 정돈가 하니, 정령계와 현계를 잇는 차원문을 여는 데만 어린 날을 다 허비할 정도라.

물론 이는 상대적인 지표로, 누군가는 평생에 걸쳐 노력해도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극도로 복잡한 것이 차원 마법임을 감안하면 세실의 재능은 범부는 한참 넘어선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가문의 일원 중 하나였다면, 그 능력을 재능이란 단어로 재평가 받았을지도 몰랐을 터.

하지만 그녀는 후계였다.

정점에 올라서기까지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증명해 내야 하는 존재.

세실은 노력했다.

자신의 느린 보폭이 그 꾸준함으로 천재들의 오성을 따라잡길 희망한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마침내 제대로 된 정령과 교감하고 계약에 성공했을 무렵.

켄드릭을 보았다.

그는 노력하는 천재였다.

'세실이라고? 반갑다. 이 몸은 소뇌···'

어릴 적부터 오만한 얼굴이 썩 어울리던 켄드릭은 처음 세실을 본 순간, 의외로 환하게 웃었더란다.

그것이 경쟁자가 아니라 판단한 이들에게 보이는 웃음임을 깨달은 건 나중의 일이었다.

자신보다 모자란 사람일수록 다정해지는 사람이라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건 차치하고서, 세실은 주변을 먼저 돌아봤다.

그리고 켄드릭이 평소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두 사람을 눈에 담았다.

류카드 아나리온.

카를로스 거슈타인.

약관의 나이에 차기 가주직을 확정 지었다는 괴물들.

특히 류카드는 그 검성보다도 출중한 재능을 가졌다는 인물이었다.

세상이 백 년을 기다려 낳은 불세출의 천재라고.

부끄럽게도.

세실은 류카드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한 격차였다. 살아내야 할 시간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음에도 벌써 그러했다.

아. 그렇구나.

어째서 켄드릭이 류카드 앞에선 한없이 유치해지는 건지 뒤늦게 깨달은 날이었다.

동시에 티격태격하는 저들 사이에 영원토록 자신의 자리는 없을 거라 확신한 날이기도 했다.

보기 좋게 꺾인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세실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

새벽녘 어슴푸레한 하늘이 노을빛에 물들어 마침내 그 빛을 잃을 때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노력하는 범부는 노력이라도 해야 했기에.

그리고 테아가 나타났다.

자신보다 한 살 많은 방계이자 떠돌이.

할머니, 아니 가주께서 홀로 만행(漫行)에 나셨다 우연히 발견한 아이라고 했다.

무심한 얼굴로 떨쳐내는 손길에 까탈스런 정령들이 엉겨 붙는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 그날부터였을 거다.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후계의 친목 행사에 테아가 걸음했다.

켄드릭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했다.

음침하게 생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같잖은 이유였는데, 놀랍게도 테아는 그 자리에서 그와 싸워 제법 오랜 시간 치고받았다더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되, 마음까진 가깝지 못했던 삼인방과 테아는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최강의 에스콰이어.

정령의 사랑을 받는 존재.

어느 순간 테아는 테아 플로렌스가 됐다.

가문에서 방계에게 성씨를 하사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어느 누구도 그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피곤한 얼굴을 한 테아의 등 뒤에는 고위 화정, 아그니가 불꽃의 숨결을 내쉬고 있었으니까.

짝짝짝.

한 사람을 위한 가문 사람들의 박수세례.

세실은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힘없이 추락하는 그것의 이름은 자존심 따위가 아니었다.

지난 인생이었다.

왜일까.

이 공허한 박탈감이 어쩌면 자신이 살아온 나날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아, 그랬구나.

그 순간, 세실은 애써 외면했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툭.

그리고 부서진 마음이 손쓸 틈도 없이 밑바닥에 닿아 데굴데굴 굴렀을 때.

우렁찬 환호성 속에서 세실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후욱, 후욱-

거친 숨소리를 시작으로 여기저기 찢기고 멍든 피부.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머리칼에 빨갛게 충혈된 눈까지.

누가 봐도 미친 사람이다 싶은 몰골로 세실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몰···라."

그에 켄드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나부터 거둬. 그러다 진짜 죽는다."

어설픈 협박이 아니다. 세실은 이미 생명을 갈아 넣어 마나를 쥐어짜고 있었으니, 그 결말이 어떨지는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바.

잠깐의 소강상태를 빌어 류카드도 목소리를 냈다.

"누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부디 마나를 거둬두세요. 여기서 멈춘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 겁니다."

동시에 세실의 얼굴이 보란 듯이 일그러졌다.

직후, 모두가 처음 마주한 악귀 같은 얼굴이 억눌린 음성을 꾹꾹 씹어뱉었다.

"···용서? 용서라고?"

흰자위 사라진 붉은 눈동자가 눈앞의 네 남자를 담는다.

"누가 누굴?"

"누님···"

이미 이지가 흐릿해진 세실이다. 류카드의 말은 귓전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용서를 구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흑마법사와 결탁해 테아에게 독을 먹인 순간부터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는 뒷말은 목구멍 너머로 올라오지 못했으니, 끝내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찢어지는 포효였다.

"Āeron--!"

목이 터지라 외친 진명(眞名).

그에 소환수가 응답했다.

오오오!

고개 젖혀 포효한 투구가 검푸른 안광을 뿜었다.

칼자루 움켜쥔 두 손을 자연스레 떨어뜨리면서다.

이후 어깨너비로 벌어진 양손에는 어느샌가 각각 다른 무기가 잡혀있더라고.

오른손의 검이 칼날이 위로 향한 장검이라면, 왼손의 검은 칼날이 아래로 향한 단검이라.

다음 순간.

촤악, 발끝으로 바닥을 쓸어낸 소환수가 천천히 자세를 다잡으니.

마주 선 류카드와 카를로스 역시 자신의 애병을 추켜세웠다.

"조심해라."

"한 번 싸워봐서 압니다."

짤막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쾅!

폭풍처럼 서로에게 짓쳐든 셋이다.

채채채채챙!!

맞닿은 냉병기에서 불티가 솟구치는 가운데.

진이 승리를 확신했다.

"이겼다!"

"···갑자기 무슨?"

합류하려다 말고 주춤거린 켄드릭이다.

그런 그의 귓가로 근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쌍검필패. 검을 쪼갠 자. 반드시 죽는다."

고사성어(아니다)를 읊어낸 진이 자전을 파직!

"한 방으로는 모자랐다 이거지? 그럼 정신 차릴 때까지 맞아야지."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소환사를 마무리 짓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쥘 때였다.

[잠시 멈춰주게나]

난데없이 귓가에 꽂히는 소리에 바닥을 박차다 말고 끼이익! 급제동을 건 진이다. 그에 뒤따르던 켄드릭이 덩달아 애매한 자세로 정지해 옆을 돌아보길.

"왜 또!"

"잠깐! 쉿!"

검지를 입술에 포갠 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앞으로 쭉 뺐다.

그러자 이어지는 음성.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생겼네]

검성의 목소리였다.

이는 마나에 자신의 목소리를 실어 보낸 것이었으니-

대기가 술렁이는 지금 같은 상황에 이처럼 또렷하게 제 뜻을 전달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마나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

이를테면 바늘구멍 사이로, 마나로 이뤄진 실타래를 만들어낼 정도의 정교함이 필요한 일이랄까.

물론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진은 '이게 사이버펑크판 전음?' 하고 놀랐을 뿐이지만.

"혼자 무슨···!"

"쓰읍! 쉿! 잠시, 잠시만요. 해줘야 할 일이라니. 그게 뭔데요?"

눈짓으로 켄드릭에게 눈치를 준 진이 상대의 고절한 기술을 육성으로 받아쳤다.

당연하게도 그 목소리가 검성에게 닿을 리 없다.

해서 이 대화란 일방통행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대성당으로 가게]

"갑자기요?"

[로칸의 제자라면 믿을 수 있겠지]

"···아니. 잠시."

[금방 가겠네. 잠시만 시간을 벌어주게나]

"얘 데리고 가도 되는···여보. 여보세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검성의 목소리에 진의 미간을 구겼다.

"아니. 자기 할 말만 하네."

그 툴툴거림에 켄드릭이 현기증이라도 이는지 이마를 탁 짚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전후좌우 가릴 것 없이 촉수 뿌리가 날아들었으니, 진과 켄드릭이 그걸 피하고 때려 부숴가며 입을 열었다.

"설명해! 무슨 일이지?!"

"검성이 전음을! 그러니까 원격으로 목소릴! 보냈는데! 대성당으로 가래!"

"검성께서?!"

"어!"

외마디 긍정과 함께 촉수에 묶인 진이 하늘로 솟구쳤다.

상체를 압박하는 끔찍한 힘을 그보다 더 큰 힘으로 찢어버린 그가 블링크를 통해 켄드릭 곁으로 이동했다.

그의 옆구리를 노리는 뿌리를 힘껏 걷어차면서다.

이를 곁눈으로 확인한 켄드릭이 뇌신조의 발톱을 크게 휘둘러 전면의 뿌리를 찢어발겼다.

"대성당을 왜?!"

"나도 모르지, 인마!"

진이 그리 대답하며 생각했다.

어쩐다.

뜬금없이 검성에게 특수 임무를 하달받은 상황이다.

물론 반드시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외인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신뢰하는 이유가 로칸의 제자란 착각 때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거절할 이유도 없는 게.

가주 짬밥 먹은 양반이 헛소리했을 리가 있나.

분명 이 난장을 해결할 방법이 그곳에 있을 터였다.

더불어 흑마법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진이다.

폐공장으로 납치당해 소중한 200만 크레딧이 불탔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기에.

그뿐이랴. 애꿎은 용병을 잡아다 백염을 뽑아 먹겠다고 온갖 끔찍한 짓을 자행한 것도 잊지 않았다.

잠깐만.

그러고 보면 자전과 순수한 불꽃 모두 흑마법사와 엮인 사건에서 획득했구나. 어쩐지 보상이 말도 안 되더라니.

30,000에 이르는 경험치의 출처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어렴풋이 짐작한 진이 고개를 숙였다.

쐐애액!

정수리 위로 촉수 뿌리가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허리를 세워 번갯불 일으킨 수도로 이를 갈라버린 진이 외쳤다.

"가자! 대성당!"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깊게 생각하지 않은. 요컨대 척수 반사에 가까운 결론이었다.

물론 켄드릭은 그 의견에 쉬이 동조하지 못했지만.

"대체···"

가문의 이름을 어깨에 짊어질 자로서, 자연스레 거목의 정체를 예측한 그다.

사도.

빛과 장미의 시대부터 제국에 기생한 해묵은 거악.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열둘을 지칭하는 단어라 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감히 검성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터.

즉 가장 중요한 전장은 이곳이란 소리다.

그런데 뜬금없이 대성당이라니.

혹시 저 망아지 같은 놈이 검성의 말을 잘못 들은 게 아닌······

소뇌왕의 두뇌회전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 순간 시야가 허공에 붕 떠 있었기에.

발밑의 풍경이 작아진 만큼, 핏빛 거목이 더욱 크게 와닿는 높이.

자신의 옷깃을 잡아챈 손이 있음을 깨달은 건 그다음이었다.

"야이-!"

미처 열불을 토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시야가 훅 바뀐다. 다시 한번 십여 미터를 이동한 것이다.

"입 다물어! 혀 깨문다!"

진이 와락 외치며 정신을 집중했다.

동의를 구하지 않은 연속된 블링크.

감각적인 좌표 선정이 아슬아슬하게 붉은 낙화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 미친 외줄타기에 켄드릭도 몸에서 힘을 뺐다.

목젖까지 차오른 뒷말을 삼키면서다. 미친놈-

그리하여 순식간에 경기장의 상공에 도달한 두 사람이었으니.

별안간 몸이 화악 중심을 잃었다.

지상으로부터 날아든 참격의 여파가 이곳까지 미친 것이다.

도저히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는 검성의 칼솜씨에 휘말려 빙글빙글 아주 난리가 난 두 사람이 또다시 번쩍.

아크로바틱하게 절대자의 권역에서 몸을 빼낸 그들이 여기가 어디여, 그대로 자유낙하를 시작했으니.

진이 다급한 와중에도 눈을 크게 떴다.

이대로 속도가 붙으면 큰일난다.

블링크는 위치를 옮겨줄 뿐.

운동에너지를 없애주진 않으니까.

해서 시야가 닿는 대로 에라 모르겠다, 블링크를 거듭한 진이 마침내 지면을 찾아 우당탕탕 나자빠지니.

사이좋게 불시착한 켄드릭이 참아 왔던 욕설로 대미를 장식했다.

"개자식아!!"

하지만 그땐 이미 진이 바닥을 박차고 내달리기 시작한 이후라.

"이런 씨···"

잔상처럼 남은 자전을 따라 켄드릭이 속도를 높였다.

속도라면 일곱 가문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 자하드다. 작정하고 내달리기 시작한 두 사람이 대성당에 도달하기까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촤아악!

진이 먼지를 일으키며 멈춰 섰다.

쓸어내는 시선에 바닥을 길게 더럽힌 혈흔이 담겼다.

그 끝에 쓰러진 시체가 보인다.

대성당을 지키던 아나리온의 검수였다.

경기장에 이목이 쏠린 틈을 타 무언가 이곳에 왔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되는 것보다 먼저 바닥을 박찬 진이 웅장한 홀을 가로질렀다.

이리저리 방향을 꺾어가면서도 중간에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다. 바닥에 이정표처럼 남은 핏자국과 시체를 따라가기만 하면 됐으니까.

어느덧.

대성당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별채가 나타났다.

성구실.

은총 받은 기물을 보관한다 알려진 그곳에는 어김없이 두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으니.

열린 문 너머로 낯선 존재가 보였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을까. 말없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그 순간 천 개의 칼날이 코앞까지 당도한 듯한 환상에 진이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이는 나란히 선 켄드릭도 예외는 아니라서.

꿀꺽.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른침이 울대를 넘어가는 가운데.

시야의 구석에서 상태창의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가문 회전(드리우는 암운)」━━━━━

사도의 성물 탈취를 저지하시오.

*보상 퍽 XP 30,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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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사도의 등장이었다.

< 101화 >

도망가.

진은 몸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번갯불 같은 경고였다.

머릿속 빨간 비상등이 웽웽 시끄럽게 울리는.

"야."

곁에 있을 켄드릭을 불러본다.

무언가 잘못 됐음을 인지했을까. 돌아오는 목소리가 작았다.

"왜."

"튈까?"

"헛소리. 나는 한평생 도망치는 법을······"

잠깐의 침묵.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다.

"···고려해 보지. 자하드의 미래를 위해서."

그 콧대 높은 켄드릭조차 슬쩍 말을 바꾼다.

체면 차릴 때가 아니었으니.

이 순간 진과 켄드릭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진은 상태창을 힐끗.

켄드릭은 가주 수업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사도.

성구실 안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끝에서 뚝뚝 떨어진 피가 제례용 염포 위로 새빨간 점묘화를 찍어내는 가운데. 어디선가 불러온 바람이 가볍게 눌러쓴 후드를 벗겨냈다.

그러자 드러나는 얼굴.

까슬하게 짧은 머리칼에 한쪽 눈을 안대로 가렸다.

반쪽짜리 삭막한 시선은 죽은 검수들보다 싸늘했으니.

그게 꼭 칼날과 같아서 시야에 담기는 것만으로 살갗이 얇게 베이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마냥 환상통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없었다.

저기 외눈의 까까머리 뒤로 동서남북 쐐기를 박은 검은 말뚝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 중심의 석조 단상 위에는 유리관에 보관된 장검이 있었으니, 진은 어렵지 않게 저것이 상태창이 언급한 성물임을 눈치챘다.

사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게, 지금 이 순간에도 검은 말뚝서 뭉근하게 흘러나온 탁한 기운이 성물(추정)을 감싼 황금빛 장막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저걸 못 가져가게 지키라 이거지?

진이 입술을 하루 꺼내둔 가래떡마냥 질겅질겅 씹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기껏 핏빛 거목을 피했더니, 이번에는 눈빛으로 사람을 회치는 괴물의 등장이다.

검성, 이 양반이 도대체 나한테 뭘 맡긴 거지?

머릿속 의문은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메아리처럼 점점 아련하게 흩어질 뿐이었으니.

1초가 1분 같은 짙은 적막 속에서 사도가 입을 열었다.

"···자하드인가. 어떻게?"

어미에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왜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가 했더니, 저쪽도 이 상황에 의구심이 들긴 매한가지였던 모양.

다만 놈은 진과 달리 저 스스로 답을 찾은 듯 작게 중얼거렸다.

"과연 검성인가. 하늘에 닿은 의념이란 이런 것이군. 괜히 그분께서 조심하라 하신 게 아니었어."

그리 말하는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경기장이 있는 방향.

마치 눈이라도 마주친 듯했다.

"하지만 우리가 더 빨랐다."

놈이 웃었다.

다음 순간, 그는 진과 켄드릭의 면전을 딛고 있었다. 자전으로 강화된 신경계로도 미처 따라잡지 못한 움직임. 뒤따르는 바람결엔 코를 찌르는 혈향이 맴돌았으니.

화악.

엿가락처럼 늘어난 1초 속에서 사도의 양손이 빛살을 그렸다.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은 찌르기.

올곧게 뻗어오는 궤적이 심장을 노렸다.

동시에.

진과 켄드릭이 반응했다.

켄드릭이 바닥을 쿵 지르밟았다. 내디딘 발을 축 삼아 회전한 몸이 폭풍을 닮은 원심력을 자아냈다.

용오름.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함과 동시에 자신의 움직임을 북돋는 기술. 후발선지의 묘리라고 했던가. 와류를 자아내는 손짓이 허공에 갈지자(之) 긴 잔상을 남기고.

가슴팍에 다다른 사도의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따라잡았다.

쩡!

살갗끼리 맞부딪혔다곤 믿기 힘든 소리가 울린 그때.

반대쪽에서도 그 못지않은 소리가 터졌다.

콰앙!

얼얼하게 떨리는 공기 너머.

손등을 크게 떨쳐낸 자세의 진이다.

상대의 손날을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힘껏 쳐냈다.

켄드릭이 기술로 빚어낸 후발선지라면, 진은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부족한 차이를 갈음했다.

이른바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케이스.

어떻게 한 거냐, 누군가 묻거든.

나도 모르겠다고 답할 것이 분명한.

이 또한 천부의 영역이다.

이레귤러.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진화하는 불합리한 육체이기에 가능한 대처.

그렇기에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원한 성장을 꿈꾸는 잠재력은, 이 순간 주인이 방어에서 만족하길 원하지 않았기에.

직후.

상대의 공격을 쳐낸 손등 아래서 길쭉한 손가락이 짐승의 발톱처럼 오므라드니.

엄지부터 시작해 소지로 끝나는 다섯 갈래 손끝이 벼락을 품었다.

꽈릉!!

우렛소리와 함께 힘껏 내리친 팔이다.

뇌신조의 발톱.

하지만 진은 곧 죽어도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 자연스레 어린 시절 좋아한 반인반요의 기술명을 그대로 카피했다.

그리하여 산혼철조!

방어에서 공격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대로 사도의 가슴팍을 후려치는 구부러진 손끝.

그리고 반발력.

"······!"

찌릿한 통증과 함께 뒤로 크게 밀려난 진이다.

날카롭게 응축된 힘이 으레 그렇듯, 목표물을 꿰뚫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폭발하고 마는, 클리셰적인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이다.

그 말인즉슨. 진의 공격은 사도의 살갗을 뚫어내지 못했다는 소리니.

다음 순간.

희뿌연 흙먼지을 뚫고 나타난 손바닥이 진의 머리통을 움켜쥐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뒤통수부터 떨어져 다리가 솟구쳐 오른다.

제아무리 진이라도 이런 충격이면 잠시 퓨즈가 내려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그랬다.

새하얗게 뒤집힌 눈동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도의 얼굴을 담아내지 못했으므로.

그러나 무의식만큼은 살아있다.

꽈악!

자신의 얼굴을 틀어쥔 상대의 팔을 양손으로 붙든 것이 그 증거였으니-

동시에 켄드릭이 움직였다.

진이 벌어준 찰나의 시간. 이미 세 번째 회전을 마친 그다. 그만큼 가속한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파지지지직!

그 맹렬한 일격을 사도는 한 손으로 가벼이 튕겨냈다.

과거 진은 용오름의 반대 방향으로 돌아 와류를 거슬렀다지만, 이쪽은 그런 시도조차 없다.

그저 본신의 힘만으로 중첩된 흐름을 깨부쉈다.

파훼(破毁)는 하수의 전유물이라 말하는 것처럼.

울컥.

켄드릭의 입에서 핏물이 역류했다.

진에게 패배했던 그날처럼 반발하는 힘을 그대로 뒤집어쓴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다.

쿵!

이를 악물고 찍어낸 발구름.

이어지는 네 번째 회전.

흩어지려는 와류를 그러모아 한 바퀴를 돌아낸 몸이 다시 한번 사도와 맞부딪쳤다.

그리고 어김없이 튕겨 나갔다.

자세가 크게 무너진 상황.

순식간에 선택의 기로에 놓은 켄드릭이다.

지금이라도 용오름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설지,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고 한걸음을 더 나아갈 것인지.

소뇌왕은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했다.

쿵!

그의 투지를 대변하는 다섯 번째 발자국이 지면에 균열을 만든 순간.

"······!"

진이 눈을 떴다.

여전히 사도의 한 팔을 움켜잡은 채다.

정신을 잃은 시간이 짧았던 만큼 다음 동작을 수행하는데 일체의 버벅댐 따윈 없었으니.

쓰러진 자세에서 허리와 엉덩이를 번쩍 들며 발뒤꿈치를 위로 차올렸다.

그대로 상대의 턱에 작렬하는 업킥.

한껏 압축된 속근이 폭발적인 힘을 냈으니-

한순간 사도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동시에 켄드릭이 그의 앞에 섰다.

휘오오오--!

다섯 번을 휘감은 기류는 이제 폭풍이 됐다.

그 속에서 뻗은 주먹이 쾅 하고 사도의 얼굴에 적중한 것을 시작으로, 섬전 같은 연타가 따라붙었다. 하나같이 급소를 노리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자연히.

사도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들썩거리고, 들썩거리고, 들썩거리다가.

별안간 새빨간 안개로 확 흩어졌다.

뭣?!

진에게는 퍽 익숙한 광경.

설마하는 눈동자가 크게 확장된 순간.

후욱!

강맹하게 휘도는 바람결에 빨려 들어간 피안개가 켄드릭의 몸 주위를 새빨갛게 회전했다.

그리고 폭발.

굉음을 동반한 열파에 휩쓸린 진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쿵! 쿵! 쿵!

마른 땅에서 물수제비를 뜬다면 딱 이러한 모습이었을 터다.

제멋대로 튕기는 과정에서 어딜 잘못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오른쪽 시야가 새까맣게 죽은 건 덤이다.

치이이익-!

급한대로 바닥을 짚은 손끝에서 열 줄짜리 고랑이 쭉 패이다 손톱 몇 개가 질서 없이 위로 들렸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급히 몸을 일으킨 진이 얼굴을 때리는 역풍에 눈을 가늘게 뜨며 정면을 살폈다.

시야 끝자락.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주저앉는 켄드릭이 보인다.

그 옆에서 휘몰아치듯 인간의 형상을 이루는 사도 또한.

"···흡혈귀였다고?"

"진혈의 계승자다."

이 시대의 유일한.

짤막하게 덧붙인 사도가 몸을 되돌림과 동시에 켄드릭의 고개가 바닥에 처박혔다.

"만뢰의 손자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소뇌왕이란 칭호가 허명이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능히 가문을 짊어질 수 있는 어깨를 가진 사내였어."

그러면서 꾸욱 발로 켄드릭의 뒤통수를 짓눌렀다.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혀로 핥으면서다.

"그나저나 너는 누구지. 우리가 상정한 변수 중에 너라는 존재는 없었는데 말이야."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움직임이 멎은 뒤통수를 가만히 지켜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뿐이니.

어느새 일그러진 미간.

심사가 뒤틀린 눈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발 치워."

"잘 들리지 않는군."

"발 치우라고. 개새끼야."

그에 사도가 어깨를 으쓱.

보란 듯이 힘껏 다리에 힘을 실었다.

콰직! 한 뼘 더 처박힌 켄드릭의 얼굴이, 그와 맞닿은 바닥에 진한 핏물을 흘려보낸 순간.

진이 바닥을 박찼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쳐 가는 가운데. 지금까지 내내 회전을 멈추지 않았던 심장 속 광극이 그 옆에 웅크린 동료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했다.

화륵!

잦아드는 번갯불을 대신해 반투명한 열기가 솟구친다.

"···뭐?"

사도의 외눈에 당황이 깃든 순간.

진의 주먹이 놈의 복부를 후려쳤다. 눈이 반쯤 돌아간 와중에도 정확하게 간이 있는 곳부터 때렸다. 그러자 이제껏 볼 수 없는 반응이 돌아온다. 처음으로 사도의 미간에 균열이 번진 것이다.

별안간 진의 주먹이 엄청나게 강해진 것은 아니다.

이는 그저 상성의 문제였다.

머나먼 과거.

피의 왕 자네딘이, 솔라드의 가주에게 패배했던 그 순간부터 정해진 인과의 상성.

사도의 얼굴이 위로 번쩍 들렸다.

부서진 턱밑에 화끈한 작열감이 번졌다.

"···놈!"

순식간에 박살 난 턱을 수복한 사도가 주문을 외우는 순간. 다시 한번 진의 주먹이 놈의 상판을 후려갈겼다.

주르륵 밀려난 몸이 끝내 박쥐로 화한다. 그런데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마주한 시야 전체가 한순간 암흑천지가 됐을 정도로.

그래서 어쩌라고?

진이 열기를 강하게 내뿜었다. 거기서 비롯된 아지랑이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박쥐 떼를 태워버렸으니.

저들의 왕을 죽인 불꽃이다.

영혼을 밝히는 순수한 불길, 광염(光炎).

존재 자체가 천적이나 다름없는.

그래도 이건···!

수천 마리 박쥐가 허공을 선회했다.

동시에 분열된 사도의 자아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 이상하다고.

자전의 소유자가 어째서 솔라드의 불꽃까지 품었는가.

이것부터 당혹스러울진대, 문제는 더 있었다.

아무리 천적이라고 한들 체급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는바.

코끼리만 한 토끼를 호랑이가 어쩔 수 있는가?

깔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

하지만 상대는 그런 상식을 무시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이미 알게 모르게 수많은 혈법을 쏟아부었거늘.

그걸 두들겨 맞으면서도 비틀비틀 계속 전진하다니.

단순히 천적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비틀림을 깨달은 사도다.

[넌 뭐냐]

아까와 같은 물음이지만 그 안에 실린 감정은 판이했다.

반드시 죽여야 할 상대를 목도한 듯한 음성.

당연하게도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뱀파이어 로드라면 이전에 한 번 싸워본 경험이 있다. 그때는 아지랑이 한 번 크게 피워올리면 뜨거워서 아주 좋아 죽던데. 어떻게 된 게 이놈은 달라도 너무 다르더라고.

시야를 뒤덮은 무궁(無窮)한 박쥐 떼.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온갖 정신 나가는 주문으로 치환된다. 기껏해야 물고 뜯고 물리력만 행사하던 지하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운용법.

폭발하고, 찌르고, 구속하고, 타격하고, 환시와 환청이 감각을 교란하고, 머리가 아프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켜켜이 쌓인 충격이 골수에 치민다.

말 그대로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사실 이마저도, [순수한 불길] [진혈을 삼킨 자] 덕분에 8할 이상이 약화된 결괏값이라는 것을 지금의 진으로선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

그저 끈덕지게 나아갈 뿐이라.

극한의 아웃파이팅을 펼치는 상대를 어떻게든 내 간격 안에 다시 세워두고자, 잘 떨어지지도 않는 발길을 계속 옮겼다.

어느 순간 진의 몸뚱어리는 주문으로 깎여나간 조각상이나 다름없었다.

진혈의 뱀파이어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회복력과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진즉 쓰러지고도 남았을 터.

순수한 불길의 심상이 자하드 만큼 깊지 못하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아쉬운 순간이었지만, 진은 그런 생각조차 잊고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날아드는 주문을 견디며, 끝이 보이지 않는 박쥐 떼를 하나씩 줄여나간다. 불길을 품은 주먹이 또 하나의 박쥐를 허공에서 터뜨렸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콰아앙!!!

앞뒤로 연달아 날아든 포격 마법에 진의 눈이 휙 뒤집혔다. 이번으로 10번을 채운 기절이지만, 기어이 11번 정신을 다잡았다.

그러나 몸이 더는 말을 듣지 않았다.

기우뚱 뒤로 넘어가는 상체.

애저녁에 힘이 풀린 하체는 무너지는 몸뚱이를 고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로 진이 등으로 쓰러지는 순간.

텁.

누군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여기서 죽는 건 곤란해. 진."

이어지는 나긋한 목소리에선 우아한 장미향이 났다.

"······너."

"잠시만 쉬고 있어."

흐릿한 시야 너머 아름다운 얼굴이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이후 부드럽게 바닥에 눕혀진 진이 쿨럭거리며 정면을 바라보았으니.

또각거리며 나아가는 뒷모습은 분명히 미쉘의 그것이라.

"내 보물을 건드리는 건 용납 못 하겠는데."

다음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거대한 날개 한 쌍이 활짝 펼쳐졌다.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새카만 깃털을 흩날리며.

< 102화 >

대성당의 하늘을 박쥐 떼가 뒤덮었다.

그것은 소용돌이였다.

중앙 첨탐을 휘돌며 지상에 암운을 드리우는 검은 소용돌이.

치치치칫!

수천 쌍의 날갯짓이 칼날 같은 소음을 빚어내고, 수천 쌍의 붉은 눈동자가 음울한 별처럼 반짝인다.

솔라드가 끝내 태우지 못한 '지상'의 마지막 진혈이자, 그 유일한 계승자.

9사도.

이 순간, 분열된 자아만큼이나 촘촘해진 내면의 겹눈이 검은 날개를 펼치는 여인을 담았다.

광택 도는 검은 롱코트를 걸친 채, 머리에 쓴 중절모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가죽 장갑 낀 손으로 가볍게 누른 모습.

아름답다고밖에 할 수 없는 얼굴이 빨간 미소를 짓는다. 원래라면 기이한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았야 했을 표정이었다.

[너, 미치광이]

"안녕. 혈귀."

제법 정답게 인사를 해온다.

하지만 사도는 알고 있다.

저것은 저주받을 이단.

위대한 대의를 저버리고 저승의 강에 귀의한 자.

"간만이네."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반달을 그렸다.

그 위로 매끈한 광기가 스침에, 일순 박쥐들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본디 하나였던 그것들은 이 순간 감정마저 공유한 듯했으니-

[네가 왜 여기 있지?]

다음 순간 수천 개 중첩된 목소리가 지상으로 날아들었다.

[크로우]

크로우 매드아이.

스틱스의 흑마법사이자, '그 미치광이'로 통하는 존재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후 중절모를 고정하던 손이 얼굴을 스치니, 천천히 고개를 드는 얼굴에는 탁한 은빛을 띠는 가면이 쓰여있었다.

새 부리 뾰족한 섬뜩한 생김새.

동그란 두 개의 눈구멍은 무저갱처럼 새카맸다.

진은 고향 땅의 지식을 빌어와 역병 의사의 그것이라 부르는 가면.

그 속에서 웅웅거리는 중성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내 보물을 망가뜨리려고 하니까. 감히."

[보물?]

몇몇 박쥐의 눈동자가 쓰러진 두 사내를 담았다.

피투성이가 된 채 축 늘어진 소뇌왕을 지나친 시선이 그보다 훨씬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내에게 닿는다.

헌데 상태가 조금 이상하더라고.

누워서 배꼽을 바라보는 듯한, 억지로 고개를 세운 모습으로, 핏대를 세우며 연신 악을 쓰고 있었으니.

그 입모양이란 게.

뭣?! 이런 미친, 쿨럭! 너였어?! 역병 까마귀!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쿨럭! 야! 펜릴의 원수! 안 죽었나? 아무튼! 야! 쿨럭!

[저게 네 보물인가. 널 향한 적의가 들불과도 같은데]

"지금은 아파서 그런 거야. 너 때문이란 소리지."

태연하게 받아친 크로우다. 어지간한 남자보다 큰 장신답게 바람결에 펄럭이는 가죽 롱코트가 제법 태가 났다.

하지만 그보다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어깻죽지에 돋은 커다란 검은 날개였으니, 상대의 진심을 읽은 사도가 말했다.

[기어이 방해할 셈인가. 미치광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멋대로인 건 여전하군]

"몰랐나 본데. 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무용한 대화였다.

그래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퍼퍼퍼펑!

박쥐들이 한 줌의 핏물로 화한다.

못해도 백 마리 이상.

코를 찌르는 혈향과 함께 사법으로 치환됐다.

한순간.

상공으로부터 유성처럼 쏟아져 내린다.

이번에는 위력이 반감되지 않은 채로.

동시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면 내 진심을 조금은 알아줄까."

크로우의 몸 주위로 마나가 휘몰아친다.

마찬가지로 영창파기.

굳이 말로 외지 않아도 심상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경지였다. 직후 포말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 마나가 역류하듯 하늘로 솟구치니.

크로우와 사도.

두 사람의 힘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

"억." "악." "컥."

오늘도 진은 굴렀다.

좌로 데굴, 우로 데굴.

좌우로만 구르면 정 없으니.

가끔은 앞뒤로도 데구루루.

불가항력적인 외력에 몸을 동그랗게 말았을 뿐.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 마치 콩벌레와 같다.

2위계 콩벌레라니.

이 무슨 희귀한 개체인지.

어디 전시라도 해놓으면 남녀노소 우르르 몰려올 게 분명했다. 이거 진짜예요? 쑥덕거리면서 말이다.

솔직히 그러잖는가. 2위계쯤 되면 어딜 가든 한자리를 꿰찰 수 있는, 예로부터 약속되고 보증된, 모두에게 인정받는 경지거늘.

무협지로 따진다면 절정쯤 되지 않을까.

물론 신무협, 그것도 4세대라 일컫는 웹소설쯤 오면 절정은 저잣거리 발에 치이는 돌멩이보다 많은, 그만큼 평가절하된 탓에 이젠 여염집 규수에게 손을 대거나, 죄 없는 점소이한테 진상을 부리는 삼류 악당들조차 일단 절정은 먹고 들어간다는 도시전설이······

"헛!"

진이 정신을 차렸다.

바닥에 머리를 한 번 크게 찧었는데 잠시 눈이 돌아간 모양이었다.

꿈속을 헤매듯 횡설수설하던 의식을 붙들어 일단 상황부터 살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해.

박쥐랑 까마귀의 대결?

나쁜 놈 vs 나쁜 놈?

미쉘인지 몽쉘인지는 처음부터 크로우였던 건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진의 눈이 대성당의 파사드(Facade : 건물 전면 외벽)를 향했다.

펑펑 부딪히는 주문의 격돌보다 그 충격파에 계속해서 노출되는 건축물이 아깝게 느껴지는 걸 보면 진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 맞다.

저저, 미친놈들 때문에 다 부서지겠네!

하지만 괜찮다.

그랑 투르넬 대성당.

한때 태양신을 섬기던 자들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다. 축복받은 자재로 만들어진 건물은 내구도부터 남달랐으니, 진의 염려는 아직까진 설레발일 뿐이라.

그래, 아직은.

콰앙─!

굉음 요란한 가운데.

폭심지에서 발산된 충격파가 진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힘없이 구르지 않았다. 집 나간 다릿심이 이제 막 돌아온 참이다. 지면에 단단히 발을 박고 충격을 버텨냈다. 그러고는 옆으로 핏물 섞인 침을 탁 뱉으며 우다다 달리니, 쭉 뻗은 손으로 켄드릭의 옷깃을 낚아채고.

블링크!

미리 눈여겨본 안전한 위치에 켄드릭을 뉘인 진이 그의 뺨을 툭툭 쳤다.

"야, 야! 야! 죽은 거 아니지?"

그러자 찢어진 입술이 살짝 열리더라고.

"······, ···, ······"

찰떡같이 알아듣기엔 소리가 너무 작아 불가피하게 얼굴 쪽으로 귓가를 들이민 진이다.

그제야 어슴푸레 들려오는 목소리.

"···하늘···이, 예뻐···잠시···구경···중이다···"

"넌 저게 예쁘냐? 박쥐 새끼들이 얼마나 위험한데. 너 코로나 모르지?"

핀잔을 주면서도 진이 피식거렸다.

허세를 부릴 힘이 남을 걸 보니 안심이었다.

저만한 회복력은 없어도, 영약으로 세수하고 양치하고 목욕한(?) 몸뚱이 아닌가. 그래, 이 정도는 버텨줘야지.

"일단 누워있어."

그리 말을 남기고 얼른 몸을 일으키는 진의 손목을 켄드릭이 텁 붙잡았다.

"왜?"

하는 수 없이 재차 입가로 가져간 귓가.

소뇌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 번째, 세상을, 딛고 있는 괴물······들이다. 네가···끼어들···곳이 아니···야."

"알고 있어. 알아서 잘할 테니까 하늘 구경이나 더 해."

부들거리는 어깨를 가볍게 때리며 몸을 일으킨다.

방패처럼 버티고 선 성구실의 외벽을 지나, 입구 쪽으로 되돌아온 진이다.

여전히 싸움은 한창이었다.

서로의 숨통을 노리는 주문이 빗발치고,

그걸 파(破)하고 해(解)한다.

흩어지는 주문, 응집, 이어지는 반격.

불과 1분 남짓. 초침이 60번의 보폭을 내딛는 동안 저들은 그 수십 배의 공방을 치고받았다. 몸담은 삶의 밀도가 다르다. 켄드릭의 말이 맞다. 저곳에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적어도 지금은.

해서 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성구실 안 성물을 담았다.

검성의 당부와 상태창의 요구가 하나의 뜻으로 맞닿은 결과가 저기에 있었다.

일단 저것부터 지킨다.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바닥을 박찬 진이다.

파지직!!

이번에는 광극이 울부짖었다.

마나의 소비가 엄청난 광염은 잠시 넣어뒀다.

빌어먹을 흡혈귀 새끼 카운터 역할을 해준 것만으로 가치는 충분히 지켰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직까진 자전이었으니-

쿵!

디딤발과 함께 가속한 진이 흡! 뒤로 끌어당긴 주먹을 전력을 다해 내질렀다.

그 올곧은 궤적 끝에 첫 번째 쐐기.

터엉!!

반투명한 장막이 이를 막아낸다.

자신에게 가해진 위험을 깨달았을까.

쐐기의 거친 표면 곳곳이 작게 갈라지니 그 사이로 눈깔이 희번뜩!

사이한 안광에서 붉은 광선이 쭉 뻗어오는 것이 아닌가.

양학선도 울고 갈 엄청난 공중회전으로 이를 피해낸 진이 이를 악물었다.

뭐야, 이건!

진은 몰랐지만, 이 또한 아티팩트였다. 지금은 사라진 난쟁이 종족인 만들었다는 진짜배기 아티팩트.

성물 탈취에 쓰이는 장비다. 당연히 이 정도 능력은 있다고 호통치는 듯했다.

지우웅!

각기 다른 각도에서 날아드는 광선.

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진이 거리를 좁혀 재차 주먹을 던졌다. 짧은 궤적으로 꽂힌 연타가 장막을 크게 뒤흔들었다.

타점이 자로 잰 듯 일정했다.

사격으로 치면 탄착군이 완벽하게 맞물린 것과 같다.

방아쇠를 당긴 건 10번이 넘는데, 표적지의 구멍은 단 하나인 채, 그 둘레가 아주 미세하게 변화할 뿐인.

그리고 마침내.

쨍!

장막이 박살 났다.

흩날리는 파편 속을 헤집은 손이 쐐기를 와락 움켜쥐니.

왁, 뜨거!!

손바닥이 타다 못해 아예 눌어붙는 고통에 진이 흠칫.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태 무수하게 아파본 경험이, 이 세상을 살아내며 길러진 억척스런 정신력이 이를 극복했다.

"흡!!"

그대로 길게 뽑아내 힘껏 던진다.

멀찍이 날아간 쐐기분 만큼, 성물을 뒤덮은 불길한 기운이 옅어진 것이 보였다.

반대급부로 진의 눈빛이 밝아졌다.

됐어! 먹힌다!

곧바로 두 번째를 노리고 전진하려는 그때.

번쩍, 하고 뜨이는 눈동자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남은 세 쐐기가 동시에 개안한 것이다.

직후 이어지는 레이저 쇼.

와씨!

마치 미러볼의 회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난잡한 빛의 향연에 진이 눈을 부릅떴다. 언제나처럼 몸이 먼저 나가는 본능적인 회피로 대부분의 광선을 피했지만 그중 하나가 어깨를 스쳤다.

치지지직-!

매캐한 탄내와 함께 지글거리는 옷자락을 확인한 진이다. 몸이 만신창이가 된 지금. 충분히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공격임을 확인한바.

이어지는 광선을 피해 진이 숨은 곳은 성물의 뒤편이라. 정확히는 성물을 감싼 황금빛 보호막에 몸을 가린 것이다.

그런데 웬걸. 한참 전부터 간당간당하던 장막은 집약된 물리력을 받아내기도 전에 흐물텅 녹아내리고 말았으니-

다음 순간.

이어진 진의 행동은 순전히 충동적인 것에 가까웠다.

쨍그랑-!

유리관을 부순 손이 칼자루를 움켜쥔다.

그리고 냅다 휘둘렀다.

부웅!

아나리온의 검수들이 보았다면 뒷목부터 잡았을 무식한 동작.

검로(劍路)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남들은 허례허식을 배제할 때,

본인만 기술을 배제한 꼴이라.

그리하여 오직 힘으로 휘두른 궤적.

그 궤적이 휘몰아치는 광선을 베어낸다.

이 결과에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진 본인이었으니.

"오!"

일단 성과가 있었으니 그걸로 족했다.

곧장 기세를 살려 전진.

은빛 장발 휘날리는 류카드의 일검을 떠올리며 팔을 크게 내려친다.

정작 튀어나온 동작은 절구를 향해 풀스윙을 갈긴 떡메에 가까웠지만.

꽝!!

단숨에 깨어지는 두 번째 장막. 직전의 경험을 살려 손이 아닌 발로 쐐기를 걷어찬 진이다.

이제 남은 쐐기는 단 두 개.

막상 성물을 손에 쥔 지금. 굳이 이것들을 다 부술 필요가 있을까?

당연하다.

이것들, 흡혈귀 새끼가 가져온 물건이잖아.

죄다 부숴주마!

그리하여 진이 어울리지도 않은 검을 휘둘러 나머지 쐐기까지 모조리 도륙 냈다.

"헉, 허억, 헉-"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가라앉힌 진이 비틀비틀 성구실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보이는 건.

다시 까까머리 인간의 형상을 취한 사도와 그런 그를 마주 보고 있는 미쉘, 아니 크로우.

역병 의사의 가면 속에서 으레 중성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망가야 하지 않겠어? 너나 나나."

변조된 목소리는 쉬이 감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진은 지금 그녀가 빨갛게 웃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왠지 그런 기분이었다.

"그가 오고 있어."

"······"

사도가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말려 올라간 잇몸 아래 칼날 같은 송곳니가 날카롭게 빛났다.

"잊지 않-"

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면전으로 블링크한 진이 광염을 휘감은 주먹을 날렸기에.

그 와중에 사도는 수도를 내리쳤지만, 진은 이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기어이 상대의 면전을 후려치는 데 성공했다.

퍼어억!!

상대의 흐름을 끊는 카운터.

광염으로 또다시 카운터.

진혈을 삼킨 자의 효과로 또또 카운터.

3중첩된 카운터 펀치가 잠시나마 두 사람의 눈높이를 나란히 고정시킨 결과, 사도가 피를 울컥 토하며 주르륵 밀려났다.

"이놈···!"

손등으로 하관을 훑는 얼굴이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공격하지 못한다. 그 옆에 선 까마귀가 엄지로 본인의 등 뒤를 쿡쿡 가리키고 있었기에.

사도가 이를 악문다.

"머잖아, 너희 연놈 모두 찢어 죽여주지. 반드시."

직후 피안개로 화한 놈의 기척이 순식간에 멀어지니, 자연스럽게 진의 어깨에 손을 얹은 크로우가 말했다.

"나도 갈게. 무서운 아저씨가 오고 있거든."

"야, 잠시···!"

진이 뭐라 말을 맺기도 전에 씻은 듯 그 자리에서 사라진 크로우다.

아스라이 다음에 또 보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뭘 보긴 또 본다고."

작게 중얼거린 진이 멍하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였다.

터벅.

귓가에 들리는 가벼운 발소리.

자연스레 돌아간 시선 끝에 반백의 중년인이 담긴다. 한 자루 검을 손에 쥔 채 세상을 오시하는 걸음걸이로······

어쩌라고.

지금 그게 중요해?

"아니, 왜 이제 와요! 우리가 몇 번을 죽을 뻔한 줄 알아! 켄드릭은 반쯤 송장인데, 박쥐 떼를 보면서 날씨 타령을 한다고!"

진이 검성이고 자시고 와락 소리부터 내질렀다.

저도 모르게 칼끝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음."

그에 검성이 눈을 끔뻑거리니.

그의 입이 뭐라 떨어지려는 찰나.

뚝.

느닷없이 반으로 똑 부러진 성물의 칼날이 바닥으로 떨어지더라고.

어?

일순 사고가 정지해 버린 진의 아래턱이 천천히 벌어진 순간.

(완료!)

눈앞을 가리는 상태창의 축하 메시지.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밀어닥치는 경험치란 이름의 도파민이 머릿속을 쾅! 강타했다.

"어헉!"

몸을 파르르 떠는 진의 눈이 위로 젖혀진다.

아닌 척 견디기엔 몸이 너무 걸레짝이라.

그대로 철푸덕 쓰러진 진이 검성의 발치에서 코를 박았다.

부러진 성물의 칼자루를 꽉 움켜쥔 채.

< 103화 >

진의 싸움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Don't Try This At Home'이 딱 어울린다.

이는 가까운 인물들의 평가를 통해서도 일찍이 증명된 사실이라서.

과거 진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에넥도트의 점주, 칼리파 가라사대.

쟨 몸을 너무 갈아 넣으면서 싸워.

어떻게 된 게 솔로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걱정만 되는지 모르겠다, 하시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으니.

'저도 그 점이 항상 염려스럽긴 합니다.'

곁에 있던 포우까지 대번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라.

믿는 만큼(일 처리 능력), 걱정도 되는(본인 건강) 야누스 같은 매력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겠다.

당연하게도.

싸우다 정신을 잃는 일도 비일비재.

솔직히 많이 잦긴 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군시절 고된 작업 중 갖는 담배 타임 정도의 빈도랄까. 물론 이는 비흡현자 시점의 서술이다.

쟤네 아까도 피우지 않았나? 또 간다고?

그만큼.

출타가 잦은 게 진의 의식이다.

싸우는 도중에 기절하고, 싸운 이후에 기절하고.

이 정도면 실신 아티스트나 다름없을 지경.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본인의 120% 쥐어짜 싸우는 진이라서.

여력을 한 톨도 남기지 않다 보니, 신체에 부하가 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사실 이런 싸움 방식 때문에 그동안 수많은 위협에서 살아남은 것인지도 몰랐고.

여하튼, 진은 오늘도 기절했다.

여기서 재밌는 점 하나.

때때로 진의 휘발된 의식은, 상태창의 보상이나 우연한 발견 등, 특정한 조건을 만족함으로써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날아가곤 했으니.

*보상 퍽 XP 30,000 , '????'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

음?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우뚝 서 있음을 자각하면서다.

뭔가 중간 과정이 뚝 끊긴 것만 같은 상황.

자연스레 눈이 가늘어지며 입술이 좌우로 움직였다. 턱에 호두가 알을 맺은 건 덤이라.

어디 보자.

사도가 튀었고, 검성이 왔고(늦음), 그 양반 가리키던 성물이 부러졌고(저런), 때마침 퀘스트가 완료.

이어서 지면이 얼굴을 마중 나온 것까진 생생했다.

그런데 다시 여기다.

그러니까 낯선 천장을 맞이한 푹신한 침대 위가 아니라 또, 여전히, 재차 성구실 앞 안뜰이었다고.

다들, 어디 간 거야.

진이 그리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검성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멀리 쓰러져있어야 할 켄드릭도 보이지 않았다. 직전까지 크로우와 사도로 인해 뜨겁게 달궈진 공기는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니.

머릿속에 의문표를 띄우며 올려다본 하늘은 지나치게 쾌청했다.

양털 같은 구름이라니.

반가움을 넘어 낯설기까지 한 풍광에 진이 눈을 끔뻑이는 순간.

"여기 계셨군요."

등 뒤로 들려온 목소리가 시선을 뒤로 잡아끈다.

찾았습니다. 덧붙이며 고개를 숙이는 이는, 뭐랄까, 시대상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한 여인이었으니.

그 복장이란, 바로 수단으로.

진의 고향에선, 퇴마 영화의 주연을 맡은 강씨 성의 배우가 찰떡같이 소화해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202N년에는 신학도가 아니고서야 좀처럼 보기 힘들어진 복식이다.

대한민국도 이럴진대 로스트 시티는 오죽할까.

기성복은커녕 로봇 팔다리 덜렁 내놓고 다니는 기계박이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저렇듯 정갈한 차림새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내심 경건해진 진이라서.

할렐루야.

돗자리 깔고 한숨 붙이고 싶은 따스한 날씨도 이러한 감상에 한몫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과 이 상황을 결부시킬 순 없는 노릇.

그래서 뉘신지?

낯선 여인을 바라보는 고개가 갸우뚱 기울 때였다.

"······?"

동시에 이상한 기분을 느낀 진이다. 의지와는 별개로 입속의 공기가 자꾸만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니까.

이건 또 무슨.

진이 의식적으로 입술을 꾹 닫았다.

그리고 세상이 멈췄다.

뺨을 스치던 바람결도 그에 따라 유수처럼 흘러가던 양털 구름도, 면전의 여인도,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

그냥 다 멈췄다.

마치 재생 중인 영상에 스페이스바를 딸깍 누른 것처럼.

그리하여 이 순간.

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였다.

몇 날 며칠이고 이 상태를 유지한 채 똥고집을 부릴 것이냐, 아니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입속에 가둔 공기를 뱉어낼 것이냐.

진이 후자를 택한 것은 체감상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무슨 일이죠."

낯선 음성.

입 밖으로 흘러난 숨결이 빚어낸 소리였다.

"그자가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아나리온의 가주도 함께입니다. 기어이 기사님을 뵐 요량이더군요."

한참 만에 다시 열린 여인의 입에서 나직한 대답이 돌아옴에, 진이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철컥. 어느샌가 백금의 갑옷을 걸친 채로.

"어디에 있습니까."

"좀 전까지는 남쪽 세례당에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모르겠군요. 성당을 멋대로 활보하고 있어서요."

"제가 가죠."

진, 아니 '기사라 불린 누군가'가 걸음을 옮긴다.

나아가는 시야에 담긴 성당은 진이 알고 있던 것과 조금 달랐다. 외견상으로 큰 차이는 없지만, 미묘하게 세월의 태가 덜 탄 모습.

마치 시간이 뒤로 감긴 듯했다.

드문드문 마주치는 사람들도 그랬다.

"기사님."

눈이 마주침에 목례와 묵례로 화답하는 그들은 앞서 만난 여인처럼 예스러운 복장을 갖추고 있었기에.

그때마다 기사도 가벼운 고갯짓으로 화답하니.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 진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꾹 닫힌 입을 열어 통제권을 넘겨준 뒤로는,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는 8K UHD VR 빙의를 체험하기 바쁜 그였기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작태라.

어느 순간.

저벅, 은빛 사바톤이 회랑을 밟았다.

멀리 신을 찬미하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성화(聖畫 : 종교적 내용을 담은 그림)를 새긴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을까.

기사가 다가오는 방향을 향해 알아서 몸을 돌린다.

썩 반가운 미소와 함께였다.

"아. 오셨군."

후드를 쓴 사내가 말했다.

진도 아는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그 목소리와 태가 눈에 익었다.

선견자.

7가주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다는 인물.

황제가 죽은 옥좌 뒤에서 나타난 자.

그리고 그 옆에는 허리춤에 칼을 찬 다른 사내가 있었으니, 그 눈빛에 옅은 초월성이 담긴 자였다.

당연하게도 이쪽이 아나리온의 가주다.

그러니까 검성 할애비의 증조할애비의 고조할애비의 현조할애비.

······로도 부족해서 같은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해야 하는 과거의 인물.

그사이.

자신을 향한 두 시선을 잠자코 받아낸 기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분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자 후드의 음영에 삼켜져 하관만 드러난 얼굴이 대답했다.

"그야, 성왕을 알현하기 위함이지요."

"그렇다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곳에 없으니까요."

"글쎄요. 모두가 당신을 그리 부릅니다. 알드메인."

진이 보이지 않는 팝콘을 우걱거리는 심정으로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진도 바보가 아니다.

이 순간이 이전에 한 번 경험한 적 있는 과거의 한때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자신이 회전에 참여한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했으니-

다음 순간.

기사, 알드메인의 말이 이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에 선견자가 고개를 돌리니.

보이지 않는 눈길이 오색찬란한 성화에 가 닿는다.

글을 모르는 이들도 눈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성인의 가르침을 품은 그림.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나 다름없는 유리를 한동안 응시하던 그가 말했다.

"빛이 저물고 장미가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대도 알잖습니까. 우리의 시대는 임종을 앞둔 노년기와 다름없으니 붙잡기보단 놓아줘야 할 때란 것을."

그가 다시 눈길을 옮겼다.

"우리와 함께합시다. 그대라면 능히 새 시대의 등불이 될 수 있을 터.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

알드메인이 말을 아끼는 가운데.

지금껏 말이 없던 아나리온의 가주가 입을 열었다.

"기도 올릴 대상이 사라진 세상이다. 언제까지 무릎 꿇고 있을 생각이지?"

"가주."

옆에서 선견자가 무어라 입을 댔지만, 가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눈빛만큼이나 칼날 같은 어조였다.

"난쟁이의 왕도 요정의 왕도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결과가 어땠나? 그들의 영락을 보고도 아직까지 느낀 게 없다면, 진즉 미쳐버린 수인의 왕과 뭐가 다르지? 말해보라."

안락사가 그대가 원하는 결말인가?

이어진 말이 쐐기처럼 성왕의 가슴에 박힌다.

시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진은 분명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이어진 그의 말이 더 단단하게 들렸을지도 몰랐다.

"가주. 이 노래가 들리지 않습니까?"

알드메인의 목소리가 찬송가의 선율 위로 부드럽게 섞여 든다.

"외면받았을지언정 우리는 여전히 여기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어제와 같이 진심으로 살아내기 위해서요. 그것이 우리에겐 새로운 지평을 밟고 서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해서 제 미천한 힘은 새 시대가 아닌 마지막까지 저들을 밝히는 데 쓰려고 합니다. 지금껏 그래왔듯, 한 사람의 기사로서. 그거면 족합니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나리온의 가주는 대답 없이 그대로 몸을 돌려 회랑을 벗어났으니,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선견자가 뒤따라 발을 옮기며 말했다.

"언젠가 그대를 기리는 동상을 세우겠습니다. 성왕이여."

"정말 멋대로시군."

알드메인은 헛웃음을 흘렸고,

떠나는 선견자를 향해 뒷말을 던졌다.

"당신들의 방법을 존중하겠습니다. 잊힌다면 잊혀야겠지요.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뿐입니다."

"······"

그 말이 선견자의 발길을 잠시 붙들어 세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뚜벅거리는 발걸음이 점차 멀어지자, 어느새 홀로 남겨진 알드메인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순간.

아련한 시선이 스테인드글라스 가장 높은 곳을 짚어내니, 구름 사이 내리쬐는 빛을 형상화한 그림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정녕 떠나신 겁니까."

일찍이 진이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와 함께.

시간이 가속한다.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흐름이었다.

하지만 알드메인의 삶을 윤곽으로나마 느끼기엔 충분한 속도였다.

그래서 알 수 있다.

그가 본인이 했던 말을 끝까지 지켰다는 걸.

저물어가는 시대의 끝에서, 그 찬란한 빛이 천천히 사그라들 때까지. 그는 대성당을 수호하는 기사였으니.

그렇게 시간이 흘러, 더는 지켜야 할 것들이 남지 않은 어느 날. 조금은 편안한 얼굴로 평생을 휘둘러온 낡은 검에 자신의 기운을 담았다.

성왕의 위업을 공유하는 무기는 이미 성물이라 불리기 충분했고, 훗날 그의 동상이 대성당 중앙에 세워졌을 때 유리관에 덮여 성구실에 보관됐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

"음."

진이 눈을 떴다.

동시에 깨닫는다.

이번에는 진짜로 깨어난 것임을.

틀림없이 초면인 낯선 천장이 이를 증명하고, 무수한 소설의 도입부 첫 문장이 빅데이터로 작용했다.

그래도 마냥 안심할 순 없으니, 천천히 입을 열어 목소리가 내 것이 맞는지부터 확인한 그다.

"아, 아-, 아! 음 맞네."

타인의 감각을 공유하는 경험은 신기했던 만큼 썩 불쾌하기도 한 것이라. 진은 잠시간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뜻대로 움직여주는 몸뚱어리에 작게 안심했다.

그러면서 생각하길.

성왕이라.

마지막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한 사람이란 건 알겠다.

더불어 빛과 장미의 시대, 그 말미가 대충 어떤 상태였는지도.

신들이 세상을 버린 건가?

가주와 성왕의 대화로 유추하건대, 이게 가장 그럴싸한 가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교회가 외면받는 것과 별개로 난쟁이니, 요정이니 하는 이종족들도 현시대에는 없지 않던가.

이미 천 년도 훨씬 전부터 영락했다고 했으니, 오늘날 찾기 힘든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선견자와 가주들은 대체 뭘 하려고 한 거지?

그게 뭔데 성왕은 끝까지 거절한 거고.

"흐으으음--"

머릿속이 복잡해진 진이 골똘한 표정으로 턱밑을 매만질 때였다.

털컥.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니.

"잘 잤나?"

"에?"

멍청한 표정을 짓는 진의 눈에 이리로 다가오는 검성이 담겼다.

잠시만.

보통 이 타이밍에는 하녀? 메이드? 집사? 아무튼 고용인이 먼저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닌가?

일어난 모습 발견하고 깜짝 놀라준 뒤, 문밖을 향해 '깨어나셨어요!' 소리 질러주는 역할 말이다. 이후 상황이 정리되면 높으신 분 만나는 게 일반적인 루트거늘.

그런 과정 다 건너뛰고 등장한 검성에 진만 어안이 벙벙해졌다고.

"아, 예예."

얼떨결에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뜩 반으로 두 동강 난 성물이 머릿속을 스친다.

지켜달라 보냈더니 뽀개버린.

아무튼 안 빼앗겼으니 그걸로 오케입니다, 라고 넘기기엔 좀 많이 귀중한 물건.

해서 진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쪽도 늦게 왔으니 비긴 걸로 치자고.

하지만 이어진 검성의 말은 타박이 아닌 사과였으니.

"미안하네. 사상자를 내지 않고 가느라 조금 지체되고 말았어."

그에 진이 조심스레 딴지를 걸었다.

"그, 애초에 보내지 않았으면 어땠을···는지요?"

"음? 어째서. 원래 벽을 깨려면 저보다 강한 자에게 도전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가능만 했다면 류카드를 그리로 보냈을 걸세."

미친놈인가?

시발, 알면서 보냈어?

뒷골이 절로 뻐근해진다. 저 인간이 왜 광검이라 불렸는지, 그 편린을 목도한 기분이랄까.

사실 여기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으니.

검성의 합류가 지연된 이유는, 그가 사도의 기운을 거스르며 등장한 크로우의 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 시간을 지켜 도착했을 터.

물론 그런다고 진과 켄드릭을 대성당에 보냈다는 대전제 자체는 변하지 않으니, 그 과격한 육성법이 실로 미쳤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라서.

그리하여 진이 검성을, 과거 그의 적이 그러했듯, 미친놈 바라보듯 쳐다봤을 뿐이었다.

검성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나저나 성물 일은 말일세."

헉, 올 게 왔구나.

대번에 표정이 굳어진 진이 어떻게 변명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 순간.

심장 한편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그 부위를 긁적인 그다.

그 손끝에 무언가 걸려 저도 모르게 쑥 빼내고 봤다.

"너무 괘념치 말게나. 워낙 오래된 물건이라 충분히 그럴 수 있······음?"

검성의 동공이 점차 확장된다.

진의 손에 잡힌 길쭉한 빛의 막대를 확인한 직후였다.

하지만 놀라긴 당사자도 매한가지라.

"이, 이게 뭐여?"

산책 중 동의도 없이 어깨에 앉은 참새를 발견한 심정이 이러할까.

황당한 표정을 짓는 진의 눈앞에 으레 상태창이 번쩍 떠올랐다.

「???」━━━━━━━━━━━━━━

NEO ?? ??? 자하드

구시대의 빛 ?? 진혈을 삼킨 자 ????

?? ??? ?? ?? 누군가의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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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화 >

무수한 장르소설이 난립하는 작금의 세대.

이 중에서 남자의 심금을 가장 울리는 장르를 고르라 한다면, 아마도 높은 확률로 '무협'이 1위를 먹지 않을까.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요컨대 MZ. 그중에서 Z에 한없이 수렴하는 세대일수록 말이다.

걔네 맨날 주먹질 칼질에 기술명 붙이는 중2병들 아녜요? 더군다나 버젓이 관이 있는데 사적으로 무장한 깡패들······

갈!!!

그 손짓 발짓에 담긴 서사를, 필설로 다 풀어낼 수 없는 인생을, 세대를 거듭한 역사를 모르는 너는 사내가 아니다! 그리고 뒷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이 멋진 장르에 틀니가 결합된 무시무시한 합성어가 날아드니 자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협(俠)까지는 가지 말자. 진짜 큰일 난다.

아무튼.

기술명 좀 외치면 어때.

요즘은 입으로 안 외치고 마음속으로 외치거든?

아니면 지켜보던 구경꾼이 대신 언급해 주기도 하고.

뭣보다 멋있잖아.

그래, 멋!

사실 이게 참 중요하다고.

고추 달고 태어난 이상 포기할 수 없는,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굳이 저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아 몰라 멋있었잖아 한잔해,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들 말이다.

예컨대.

심장서 무언가를 꺼내는 행위 또한 충분히 그 '멋' 이란 영역에 포함될 수 있겠다.

생(生)을 상징하는 장기.

그 속에서 꺼내는 서사 담긴 보구.

요즘에는 가슴골 사이에서 꺼낸다고도 하는.

그런 일이 진에게 일어났다.

*

"···음? 어? 엥?"

멍청한 소리가 3연타를 쳤다.

왼 가슴이 간지러워 긁적거렸더니, 웬 뾰루지 같은 게 느껴져 쭉 뽑았는데, 그게 빛의 막대기인 상황.

뇌정지가 안 올려야 안 올 수가 없다.

아니. 제발.

어디까지 갈 셈이야. 대체.

그리고 검성 또한 한순간 사고가 멈췄다.

'검성'이라 불린 이후 아마도 처음 있는 의식의 공백이었을 터.

궂은일 마다하지 않은 로칸의 제자를 위로하려던 참이다.

혹여 성물을 망가뜨린 일에 죄책감을 느낄까, 괜찮단 말부터 꺼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잘 해보려다가 일어난 일이잖는가.

사내대장부가 그런 것에 주눅 들어선 어디 쓸까.

물론 부러진 성물을 본 원로들의 원성이 자자하긴 했다.

무려 성왕의 물건이었다는 둥, 그 안에 담긴 신성이 사라졌으니 이제 어쩔 거냐는 둥. 노구가 무색하게 쩌렁쩌렁. 어찌나 시끄러운지들.

하지만 검성은 신경도 안 썼다.

젊은 날, 칼 한 자루 쥐고 세상을 유랑했던 사내다. 가문에서 제발 좀 돌아오라 간곡히 부탁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수없이 사선을 넘어 마침내 제 의지로 발밑에 사선을 그어낼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

그야말로 대쪽 같은 성정.

고로 그는 단호했다.

성물, 빼앗기지 않은 것으로 족하다. 지금 중요한 건 이를 지키기 위해 죽은 검수들과 다친 후계들이니-

'내가 보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들 하시지요.'

부러진 성물의 책임 소재가 진에게 없음을 원로들에게 딱 잘라 언급하고 여기에 왔다.

그런데.

"···신성?"

검성의 눈이 진이 움켜쥔 빛에 고정된다.

망가진 성물과 함께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힘이다.

사실 부러진 칼날보다 이쪽이 한없이 본체에 가까웠다. 비록 미약하나 옛 시대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깃들었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상황.

"맙소사."

검성이 아연히 중얼거리는 그때.

진은 서둘러 심장을 관조하는 중이었다.

광극과 광염.

오랜 동거로 익숙해진 광씨 형제들까진 익숙했다.

그런데 여기에 낯선 빛을 곁들인.

시야를 희롱하고 사라진 상태창에 따르면 [구시대의 빛]이란 이름을 가진 녀석이었으니.

허락한 적도 없는 객식구가 또 늘어났음에 진이 이마를 철썩 짚었다.

"······조졌네. 이거 어째요?"

그리 말하며 손에 들린 빛을 검성 쪽으로 쭉 내밀자, 검성이 멀뚱하게 그걸 내려다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는 게 아닌가.

"낸들 알겠나?"

"아. 진짜."

이 양반은 왜 이렇게 답이 없을까.

진짜 싸움만 잘하는 건가.

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

올해 회전은 참 풍성했다.

류카드, 카를로스, 켄드릭.

그 이름부터 쟁쟁한 우승 후보들로 시작해, 혜성처럼 등장한 다크호스와 캐릭터 확실한 참가자들까지.

치러지는 경기는 수준이 높았고, 그 결과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손에 땀을 쥐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소문난 잔치에 진수성찬이 펼쳐진 격이라.

여기까진 참 좋았다.

그래, 사도가 난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누가 대회가 한창인 가문 회전에 악의 종주가 나타날 것을 예상했을까.

그날, 8구역에서 핏빛 거목을 보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름다운 만큼 불길했던 낙화 또한 모두가 기억한다.

그랬기에 그 속에서 단 한 사람의 사상자도 내지 않은 검성의 위업이 더욱 칭송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 명이 넘는 목숨이 구원받은 그곳에서 보이지 않게 활약한 이들은 더 있었다.

바로 본선에 진출한 십수 명의 참가자들.

아나리온 가문의 검수들을 도와 밀려드는 흑마법사들을 상대했다. 물론 그 판단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제 몫만 다해도 보상을 두둑이 챙길 수 있겠구나, 명성을 올릴 좋은 기회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차라리 함께 싸우는 게 이득이겠다 등등.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당연하다는 듯 흑마법사들을 향해 달려든 이들도 적잖았으니, 이는 7가문의 대표들이라.

심지어 에안나와 카트리나의 경우 서로에게 입은 부상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에도, 온몸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증명했다고.

다만.

사도는 달아났다고 했다.

군중의 목숨을 방패 삼은 놈답게 몸을 내빼는 것도 비슷한 방법을 이용했으니, 마지막 일으킨 마나의 폭풍을 검성이 와해시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했을 거라나, 뭐라나.

이상 라프의 설명이었으니.

"···넌 진짜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야."

진의 말에 침대머리에 등을 기대고 있던 라프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 뭐가? 커흑."

왼손으로 무통주사 버튼, 일명 자가통증조절기를 꾹꾹꾹꾹 누르면서다.

쿨타임이 15분이라고 몇 번을 말했음에도, 금붕어마냥 계속 저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 아픈 모양이었다.

하긴.

12시간에 걸친 접합수술을 받은 사람이 바로 멀쩡해지면 그것도 말이 안 되긴 한다. 심지어 잘린 부위가 기이한 마나에 의해 오염된 지라 정화·재생 주문을 쏟아붓느라 의료진이 고생깨나 했다고.

당연히 환자 본인도 절대안정이 필요한 상태.

그런 주제에 양손 가득 먹거리를 들고 나타난 진을 보자마자, 너 잘 왔다, 미주알고주알 쉴 새 없이 입을 떠벌거리니, 이 모습을 보고 어찌 대단하단 말이 안 나오겠는가.

"음. 역시 말하는 나무위키."

"뭐? 안 들려. 좀 크게 말해봐."

"별거 아냐."

꾹꾹꾹꾹. 버튼 난타하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진이 감자칩 봉투를 열어젖혔다. 병문안이랍시고 산 군것질거리 중 하나였는데, 내가 먹고 싶은 것 위주로 골랐다 보니 자연스레 손이 그리로 가더라. 라프의 상태로 보건대 간식 챙겨 먹을 컨디션은 아닌 것 같으니, 그냥 내가 해치우잔 마인드랄까.

"그래서 수술은 잘 됐대?"

그리 물으며 와작거리는 진에게 라프가 말했다.

"한동안은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데 괜찮아. 무사히 붙은 걸로 만족해야지."

그러더니 아픈 와중에도 흐-, 하고 웃으며 덧붙이는 것이다.

"확실히 7가문이 대단하긴 해. 서비스가 보통 좋은 게 아니야. 듣기로는 크레딧도 챙겨줄 건가 보더라."

응당 받아야 할 산재보험비 같은 게 아닐까, 라는 말을 진은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참가자의 팔이 흑마법사에게 붙어먹은 배신자에게 날아갔으니, 주최측인 아나리온 가문에서 사후 처리를 해줘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고향 땅만 해도 이 부분에선 워낙 양아치인 기업들이 많은지라. 뭐 아무튼.

"세실은 그럼 도망갔단 거지?"

"어. 정확히는 사도가 데려갔지. 정신이 가물가물해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크흑."

라프는 진통제 주기보다 빠르게 찾아오는 고통에 치를 떨었고, 진은 감자칩을 우적거리며 잠시 세실을 떠올렸다.

눈꼬리가 약간 팔(八)자로 쳐진 유약한 얼굴과

악귀라도 들린 듯 지랄발광을 하는 면상이 도무지 한사람의 그것 같지가 않았다.

뭐가 진짜였을까, 라는 생각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저 결과만이 남았다.

흑마법사와 결탁한 가문의 후계요, 이번 사태를 통해 뒤늦게 공론화되기 시작한 테아 실종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는 지워지지 않을 낙인으로서.

"류카드와 카를로스가 간신히 잡은 기회를 놓쳤다더라. 빈사 상태라 칼침이든 창침이든 그냥 한 방 놔주면 끝낼 수 있었는데도 머뭇거렸다나? 팔 잘린 입장에서 할 얘긴 아니지만, 난 이해해. 지인의 모가지를 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그것도 걔네 입장에선 하루아침에 딴사람이 된 느낌이었을 텐데."

대인배 같은 라프의 말이 이어졌다.

제법 평온한 표정을 짓는 게, 약속의 15분이 이제 막 돌아온 모양이었다. 물론 1분만 지나도 깨질 짧은 평화였지만.

"그나저나 넌 어쩔 거야? 회전도 취소된 마당에."

그리 묻는 얼굴이 벌써 균열이 번진다.

아으으, 신음을 흘리는 라프를 바라보며 덩달아 아픈 표정을 지은 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당분간 좀 바쁠 거 같은데."

"바쁘, 다고?"

"가문 애들이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 아쉬운가 봐. 다들 도련님에 아가씨들이라 그런가. 진짜배기 실전 한 번 치러보더니 막 피가 끓는 모양이더라고. 이렇게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데 모여서 교류나 좀 하자더라."

"거기에 네가, 낀다고? 어, 째서?"

"몰라. 오라던데."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던 진이 라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음엔 에안나랑 같이 올게. 됐냐?"

"···사랑한다."

"그럼, 간다."

한마디 말로 라프의 얼굴에서 고통을 지운 명의, 진이 몸을 일으켰다. 주섬주섬 자기가 사 온 과자를 다시 챙기면서.

***

사실 진에게 수련이란 큰 의미가 없다.

익힌 것에 한해서는 이미 숙련도가 MAX인 그니까.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어 말을 아낄 뿐.

실은 난해하고 복잡한 비전마법의 구결을 눈감고도 줄줄 욀 수 있을 정도로 이론도 빠삭하달까.

막말로 이쯤 되니까 그냥 막 꺼내다가 쓰는 거다.

가령 켄드릭이 사용하는 걸 보고 괜찮은데? 바로 실전에서 써먹은 산혼철조(뇌신조의 발톱)처럼.

그렇다고 뭔가를 억지로 배울 필요도 없다.

어차피 열심히 별 밝히고, 숙련도 쌓다 보면 저 알아서 깊어지는 심상이라서.

그럼에도 진은 기꺼이 후계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이유? 별거 없다.

그냥 사람 좋아하는 특유의 둥글둥글한 성격이 발동됐을 뿐.

재밌잖아.

저들끼리 열심히 토론하는 것도, 친선전이랍시고 살살 싸우는 것도, 다 끝나면 둘러앉아 식사하는 것도.

딱 비슷한 나이대 여럿이 모여야 나올 수 있는 특유의 바이브가 묻어난달까. 서로 막 친한 사이도 아니고 오히려 어색한 쪽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나쁘지 않은 느낌?

물론.

진에겐 다른 목적도 있었다.

그것도 제법 음흉한 속내였으니.

그건 바로, 바로-

이참에 비전마법 다 뜯어내자!

로칸의 전기 찜질로 말미암아 '자하드'의 별을 밝혔던 기억을 떠올린 그다.

그리하여 저 순진무구한(?) 후계 놈들의 배움을 죄다 흡수. 비전마법 대통합을 이루겠단 야심 찬 계획를 세우고 뛰어들었건만.

음? 안 되네.

후계들의 배움이 일천했던 탓일까.

아무리 공자 왈 맹자 왈 떠드는 소리에 귀 기울여도 머리에 딱 꽂히는 그게 없더라고.

스파링? 비무?

여튼 손속을 나눠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검술 한 번 배워보겠다고, 심장에서 빛의 막대기까지 꺼내가며(후계들이 단체로 비명을 질렀다) 류카드에게 덤빈 결과.

전적, 10 : 0

압도적인 류카드의 우위였으니-

마침내 11번째 승리를 쟁취한 은빛 장발남 왈.

"···왜 자꾸 검으로 덤비시는 겁니까."

"너한테 검술을 좀 배워볼까 해서?"

"······?"

"······?"

짤막한 문답 뒤로 서로를 멀뚱히 쳐다본 두 사람이다.

"그런 거라면."

놀랍게도 류카드는 정말 진에게 검을 가르쳐줬다.

그것도 제법 열과 성을 다해서.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포기했다.

"이런 말이 실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형님은 검에 대한 재능이 일천하십니다. 그러니 부디 그 귀한 힘은 검이 아닌 다른 곳에 써주시길."

어설프게 막대기 붕붕거리는 진을 보며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자 켄드릭이 곁에서 꼴좋다며 하하하 웃었더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자전을 두고 갑자기 검술을 익히려 든다고? 왜 성물이 너 같은 변절자를 택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차라리 내게 깃들었다면···!!"

"이건 선생이 부족한 탓이다."

"웃기는군. 옆에서 본 내가 더 잘하겠는데."

"좀. 꺼져."

빛 몽둥이를 휘둘러 미라꼴을 한 켄드릭을 쫓아낸 진이다. 그런 그에게 류카드가 말하길.

"아버지께 한 번 연락을 드려보겠습니다."

"뭣?"

그리하여 검성 등장!

로칸의 제자가 검술을? 하하 재밌는 일이군. 웃으며 시작한 1:1 지도. 누군가에겐 억만금이나 다름없는 귀한 시간이었으나.

"음. 자넨 안 되겠는데."

아들보다 빨리 진을 포기한 검성이다.

"헛된 곳에 힘 빼지 말고 해오던 공부에 힘쓰게나."

짤막한 말을 남기고 그대로 퇴장.

이제는 선생 탓도 못 하게 된 진이 한숨을 내쉬자니,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류카드가 입을 열었다.

"모든 사람에겐 각자의 형(形)이 있습니다. 형님의 형에 검이 맞지 않는 것이니 너무 실망하지 마시길."

이후에 들은 건데, 아나리온 가문의 비전 검혼(劍魂)은 검수가 갈고 닦아낸 형에 깃드는 힘이라더라.

즉 처음부터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뒤늦게 빨간약을 들이킨 진이 재차 한숨을 푹.

세상사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그때였다.

"진. 너무 실망하지 마. 왜 실망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에안나의 위로 섞인 목소리에 진이 어깨를 으쓱.

"아. 괜찮아."

사실 딱히 실망하진 않았다. 애초에 어쩔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두는 성정이 아니기도 했고,

해서 볼장 다 본 빛의 막대기를 다시 집어넣는 그때.

욱씬.

심장에 뻐근한 통증을 느낀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또 이러네.

이게 다 초대받지 못한 신입의 등장 이후부터 생긴 일이다.

현재 진의 심상 공간은 딱 2인 가구가 살기 좋은 크기.

그 말인즉슨 아직 셋은 좀 무리라서.

어쩔 수 없이 얼굴 붉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누군가 똥 마려울 때, 누군가는 외출 준비하며 샤워 중인, 그런 상황이 심장 안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파지지직!!

비좁아진 공간에 광극이 짜증 섞인 번갯불을 튀기고.

화륵.

광염도 점잖게 불편함을 호소하는 가운데.

새 식구 [구시대의 빛]이 엉덩이를 붙였다.

광씨 형제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힘이었지만, 그래도 자리 차지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라.

자연스레 세 기운이 부대끼기 시작하니, 뻐근한 심장의 통증은 여기서 비롯되는 중이었다.

사이좋게 지내라. 좀.

속으로 중얼거리던 진이 불현듯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만.

세 개의 기운만으로 이렇듯 포화 상태일진대 만약에 다른 기운까지 받아들이면?

암빙이든 검혼이든 뭐든 말이다.

짐작건대 그대로 심상 공간이 찢겨나가지 않을까?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헉.

그제야 자신이 최선을 다해 자살 시도를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진이 헛숨을 들이켰다.

비전마법 대통합은 무슨.

그냥 뒈질 뻔했네.

이러면 일단 심상이 깊어지는 게 우선이겠는데.

세입자들의 쾌적한 공간 확보를 위해서라도.

앞으로의 싸움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딛고 선 두 번째 세상을, 보다 멀리 나아가야 할 이유를 절감한 진이 눈을 감아 내면에 침잠할 때였다.

부웅.

가슴팍에서 울리는 단말기의 진동에 에이-, 콧잔등을 찌푸리며 눈을 뜬 그다.

주섬주섬 확인한 화면.

그곳에는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잠시 잊고 있던 이의 메시지가.

[원더입니다. 일전에 맡겨주신 그라비스의 업그레이드를 마쳐 연락드립니다. 직접 전달해 드리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 105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