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진은 한결같다.
그리고 한결같다는 건 장단이 공존하는 성격이었으니.
장점이라면, 타고난 행동력과 직감으로 무슨 일이든 시원시원하게 진행하는 본투비 박치기 공룡이라는 것이고.
단점은, 박치기의 충격으로 본인도 좀 맹하게 살아간다는 것.
이게 멍청한 거랑은 결이 다르다.
멍청한 건 그냥 덜떨어진 거고,
진은 그냥 좀 단순해진 거다.
경미한 뇌진탕 상태를 유지하는 마인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삶 자체가 어질어질하니까!
당장 어제 일도 그랬다.
가벨루스 자하드.
자하드의 가주이자, 자연과 광극을 동화시킨 세기의 거인이 진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건 진짜 로스트 시티가 뒤집힐 사건이 맞다.
그러잖아도 후계 자리가 마땅찮다는 말이 알음알음 흘러나오는 자하드가 아니던가.
유력한 후계였던 막내아들이 스스로를 파문한 이후, 세대교체에 난항을 겪지 않을까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이 시점에 가주의 관심을 받게 된 방계?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도시가 시끄러워질 여지는 차고 넘친다는 소리다.
정작 당사자를 잡고 물어보면 눈을 끔뻑거리며 이렇게 말하겠지만.
가벨루스가 뭔데?
그도 그럴 것이.
진에게 가벨루스란, 집 나간 아들 찾아 헤매는 이름 모를 노인장일 뿐이었기에.
특이 사항이라면 경호원이 많다는 점과 친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는 정도?
당연한 말이지만, 노인장이 찾아 헤매는 천하의 호로새끼가 자신에게 광극을 선물한(?) 로칸이라는 건 전혀 모르는 진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가벨루스와 로칸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할 정도로 연관이 아예 없는 인물들이라서.
그래서 진은 별생각이 없다.
침대에 누워 단말기를 들여다보는 지금도.
"······"
이른 아침이었다.
일어나기도 다시 잠들기도 애매한 시간.
단말기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최근 도시의 이슈를 정리한 토픽란이었으니, 진의 엄지가 위아래로 까딱까딱 움직였다.
솔직히 별 재미는 없더라.
유명한 가수 누구누구가 위험을 무릅쓰고 40번대 구역에서 공연할 예정이라거나,
음독자살한 권투 선수의 뇌를 사이버웨어 의체에 이식해 되살렸다는 뉴스 따위는 진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기에.
솔직히 이런 것보단, 이제는 알 도리가 없는 고향의 소식이 더 궁금했으니.
예를 들면, 2023 롤드컵 우승은 어느 팀이 했을까? 같은 거.
···설마 징동?
너희 골드로드 성공한 거 아니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근데 파워랭킹 1위였잖아.
누가 막냐 걔넬.
아.
저도 모르게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려버린 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이 문제는 그만 생각하자.
고민해 봐야 결론도 안 나오는데.
해서 황급히 머릿속 말풍선을 손으로 휘휘 흩뜨리고서 다시 단말기에 눈길을 돌리니.
슥슥-
화면을 훑어내리던 엄지가 어느 순간 멈칫.
손끝이 멈춘 자리에 익숙한 지명이 있더라고.
[뮤트타운, 도시 곳곳에서 전투 격화, 교통망과 인프라 피해가 극심해······인도적 지원이 불가피한 상황.]
[신흥 군벌 세력 TB와 그 리더, 타하는 누구인가.]
[고립이 장기화될 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지 짐작할 수 없어···]
자연스럽게 저항군 측의 의뢰를 받아, 공장에 폭탄을 설치하던 순간을 떠올린 진이 찬찬히 기사 내용을 살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길어서 그렇지. 요약하면 결국 뮤트타운의 내전이 심화됐다는 글줄이었다.
그리고 하단에 첨부된 사진이 하나.
찌그러진 전차를 밟고 선 거대한 수인이 보인다.
백색 갈기를 휘날리는 사자의 얼굴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맹수 특유의 형광빛 안광과 함께.
"···얘가 타하인가. 빡세게 생겼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진이 이내 단말기를 껐다.
짧게나마 인연을 맺은 저항군 쪽에게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면서.
***
딸랑-
깨끗하게 씻고, 아침밥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은 진이 에넥도트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전 11시 28분.
칼리파가 12시까지 가게로 와달라 부탁했기에 이 정도면 넉넉하게 세이프다.
해서 가게 문을 열어젖히며 진이 한 생각은 '일찍 온 김에 포우랑 잡담이나 나눠야겠다.'였으니-
이게 웬걸?
기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포우와 대화 중인 넙데데한 등짝이 보이더라.
지금 이 시간에 에넥도트에 앉아있는 손님이라면 높은 확률로 솔로일 테니, 괜히 방해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앉은 진이다.
이를 확인한 포우가 말없이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는 가운데.
맞은편에 앉은 덩치가 말하길.
"잘 생각해 봐. 너희한테도 나쁜 제안은 아닐 테니까."
"고려해 보도록 하죠."
"그래, 인마."
고개를 끄덕인 덩치가 테이블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비웠다.
그러고는 볼일 다 봤다는 것처럼 의자를 뒤로 밀며 육중한 몸을 일으키는데···
그 모습에 진이 고개를 갸웃.
뭐지? 왜 나한테 오지?
아닌 게 아니라 그대로 가게를 나설 줄 알았던 덩치가 뜬금없이 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오른손을 품에 쑥 집어넣으며.
품에 손을 넣는다는 것.
대한민국에서 누군가 이 동작을 시전했다?
그것도 약간 부산스러운 움직임과 함께?
보통은 그 안에서 엄지와 검지를 교차한 하트가 뿅! 하고 등장할 확률이 높다. 거기에 잔망스러운 찡긋거림은 덤이니, 뭘 꺼내려고 저러나 눈을 끔뻑이던 사람들이 반박자 늦게 웃음보를 와하하!
하지만 다운타운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뭐? 품에 손을 넣어?
총이다! 총!
진이 반사적으로 그라비스부터 잡았다.
직후 두 걸음 남짓한 거리까지 접근한 상대를 향해 철컥! 총구를 겨누니-
"워워. 진정해, 진정."
양손을 귀 옆으로 당긴 덩치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그러면서 손끝을 까딱까딱 움직이는데, 진이 눈동자만 살짝 굴려 확인한 결과, 검지와 중지 사이에 새하얀 종이 하나가 잡혀있더라.
동시에 이어지는 목소리.
"명함이라고, 친구."
다시 눈길을 정면으로 돌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다.
앞니를 크롬으로 도금한 흑인 남성.
거기에 배배 꼬인 드레드록스. 일명 레게머리.
툭.
그제야 팔을 늘어뜨린 진이 그라비스를 홀스터에 채웠다.
물론 사과는 안 했다.
원래 이 바닥에선 오해할 일을 만든 쪽이 잘못한 거라서.
"명함이라고?"
진이 덩치의 손에서 종이를 탁 낚아챘다.
그리고 거기에 인쇄된 활자에 눈을 맞추니.
[드안드레 링커 사무소]
뭐야. 솔로가 아니었네?
당연히 솔로일 거라 생각했던 진이 눈을 끔뻑끔뻑.
고개를 들어 다시 덩치를 바라봤다.
"링커였어?"
"그럼 뭔 줄 알았는데?"
덩치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관심 있으면 연락 달라고. 참고로 나는 칼리파랑은 다르게-"
"다르게 뭐?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어느새 또각거리며 다가온 칼리파가 뒷말을 잘랐다.
"나가. 드안드레. 괜히 찝쩍대지 말고."
그에 드안드레라 불린 덩치 또한 지지 않고 받아쳤다.
"야, 이걸 찝쩍댄다고 하면 섭섭하지. 내가 뭐 뒷돈을 찔러준 것도 아니고, 관심 있으면 연락 달라고 딸랑 한마디 한 건데."
"그게 찝쩍댄 거야. 굳이 내 가게에서 영업질을 한다고?"
"뭐 어쩌라고. 여기가 무슨 성역이라도 돼? 하여간에 아끼는 솔로라 이거지? 왜, 품에 안고 부둥부둥 키워서 간판스타라도 만들게?"
"모르지, 그건."
"좀 노나먹자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차가운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이어졌다.
그 사이에서 진만 뺨을 긁적긁적.
쟤네 뭐하냐.
정작 자기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자기들끼리 아주 으르렁 난리가 났다.
그렇다고 이걸 말려야 할까?
음, 굳이?
두 링커가 자신을 두고 말다툼을 벌이는 상황이다.
그만큼 자신을 높이 쳐준다는 소리 아닌가.
뭐 나쁘지 않네.
어디 더 해보거라.
그리하여 진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리기 바쁘니, 결국 중재는 포우의 몫이었다.
"두 분 다 진정하시죠."
담백한 한마디에 두 링커가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드안드레만 입을 다물었다.
직전에 말을 뱉은 게 칼리파라서.
주먹다짐으로 치면, 내가 한 대 더 맞았을 때 누군가 중간에서 말린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왜 하필! 시발!
그렇다고 여기서 더 달려들자니 체면이 안 산다.
해서 드안드레가 선택한 건 바로-
"다음에 보자. 진!"
굳이 진에게만 인사 남기고 떠나기!
너는 내가 초면이겠지만, 나는 널 알아볼 만큼 관심이 깊은 사람이란 티를 팍팍 내면서 한 번 더!
"꼭 보자. 진!!"
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서는 그를 향해 칼리파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게 마지막까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반면에 진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작게 킥킥거렸을 뿐이다.
"쟨 뭐 하는 놈인데?"
"드안드레? 링커야. 의뢰를 쳐내는 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한 녀석인데, 문제는 그게 다 소속 솔로들을 휴식 없이 갈아 넣어서 나온 결과란 거지. 드안드레와 일하는 솔로는 대부분이 돈이 절박한 이들이거든. 녀석은 그 점을 십분 이용하는 거고."
"아아."
진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파가 덧붙였다.
"그러니 진, 괜히 녀석이랑 얽힐 생각 마. 피곤해지니까."
하지만 진은 딱히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바지춤에 명함을 찔러넣었을 뿐이니.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겠는가.
*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에넥도트에서 칼리파는 진을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그것은 바로 클라이언트가 진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
"나를? 왜?"
"일을 맡길 사람을 본인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드물지만 이런 경우가 있긴 해."
"너도 누군지 몰라?"
"몰라. 자신이 누구라고 밝히지 않았거든. 너와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데, 이런 반쪽짜리 지명 의뢰는 나도 처음이라서 말이야. 뭘 믿고 덜컥 널 보내겠어. 굳이 대화가 목적이라면, 우리 가게에서 하라고 했지."
그에 진이 쓰읍 입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랬다가 그쪽에서 내가 마음에 안 들기라도 하면? 의뢰는 쫑나고, 나는 헛걸음한 게 되나?"
"그건 걱정하지 마. 만약 우려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쪽에선 계약금의 일부를 지급해야 하거든. 그리고 그건 다 네 주머니로 들어갈 거야."
"그래?"
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거마비라도 챙겨준다는 거네. 다행이다.
그때 칼리파가 말했다.
"그리고 진, 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중에 의뢰비도 챙겨가. 킹스그룸에서 브로커를 잡아 왔던 일. 잊은 거 아니지?"
"아, 맞다."
진이 입으로 박 깨지는 소리를 냈다.
일전에 나타샤한테 받은 크레딧이 아직 넉넉했기에, 잊고 있었다.
말 안 했으면 그냥 까먹고 넘어갔을 텐데.
역시 칼리파. 다운타운 신뢰의 아이콘.
진이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릴 때였다.
딸랑-
12시 땡하기 무섭게 에넥도트의 문이 열렸다.
자연스럽게 진, 칼리파, 포우의 시선이 입구를 향한 가운데.
뚜벅.
선명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선 이는 정장을 쫙 빼입은 남자였다.
정장만 입은 거면 모르겠는데, 왁스로 깔끔히 빗어 넘긴 머리와 오른손에 쥔 서류 가방까지 더해지니.
빈말로도 다운타운과는 어울리지 않은 용모인지라.
그런 그를 향해 칼리파가 말했다.
"당신이 A660ooGun이야?"
"아, 맞습니다. 그런 아이디로 인사를 드렸죠."
"따라와. 진, 너도."
까딱 턱짓한 칼리파가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은 가게 한편에 위치한 접빈실이었다.
"술? 커피?"
문틀에 몸을 기댄 그녀의 물음에,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진과 마주 앉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물이면 충분합니다."
"알겠어."
"왜 난 안 물어보는···"
"콜라잖아."
칼리파가 가볍게 웃으며 문을 찰칵 닫았다.
이제는 둘만 남겨진 방에서 남자가 진을 바라봤다.
"본격적인 얘기는 마실 게 들어온 이후에 하겠습니다. 도중에 흐름이 끊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뭐. 마음대로 해."
진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남자의 눈길이 천천히 아래쪽을 향하니, 이윽고 진의 하반신을 향해 고정된 얼굴이 씩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뭔?
순간 흠칫 놀란 진이 가랑이 위로 손을 포갰다.
뭐지 저 노골적인 눈빛은?
심지어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더 부담스럽다.
왠지 숨이 막히는 기분에, 진이 저도 모르게 큼큼 헛기침을 내뱉는 순간.
"실례하겠습니다."
접빈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포우가 물과 콜라를 테이블에 올린 뒤 가벼운 묵례와 함께 떠나갔다.
그 과정에서 진이 '포우! 얘 이상해!'라는 눈빛을 쏴댔지만 안타깝게도 바텐더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으니.
문이 닫히기 무섭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잘 써주고 계신 듯하군요. 다행입니다."
"···뭣?! 무슨 근거로?"
진의 물음에 남자가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야기에 앞서 제 소개부터 해야겠군요"
또? 하루에 두 번은 귀한데.
라는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
그가 테이블 위로 까만 명함 한 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루거&돌만 사의 영업팀장 원더 더글라스라고 합니다."
"음?"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에 진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에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턱 얹으니.
남자가 매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라비스707의 제조사죠."
< 51화 >
루거&돌만.
로스트 시티의 군수제조사(ManuCorps) 중 하나로, 컨셉이 뚜렷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한 회사였다.
재장전이 불가능하지만, 위력이 준수한 일회용 권총이라거나(가격이 고작 미트볼 한 접시 정도에 불과하다!)
반동은 일절 고려하지 않은 2게이지 트리플 배럴 산탄총, 이라고 쓰고 '그래서 이걸 누가 쓰냐?'라고 읽는, 괴랄한 무기가 여기서 나왔다.
이렇게만 보면 너무 과하지 않나? 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기능 고장이 적고, 컨셉이란 테두리 안에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니, 이 기묘한 매력에 빠져 콜렉터가 된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여튼, 다시 돌아와서.
루거&돌만!
여느 군수제조사처럼 기업·가문 전쟁을 통해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낸 이곳은-
'Maniac But Dependable.'
(매니악하지만 믿을 수 있는)
일명 MBD라 불리는 캐치프레이즈를 우직하게 내세워, 비록 시장 점유율 자체는 크지 않지만, 업계 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기업이었으니.
그런 기업의 영업팀장이 진을 찾은 것이다.
원더 더글라스.
깔끔한 포마드 헤어가 제법 잘 어울리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귀하가 활약하는 영상물을 몇 개 봤습니다. 감사하게도 자사의 무기를 써주고 계시더군요."
그의 시선이 진의 허리춤에 매인 그라비스에 닿았다.
"그 친구 말입니다."
동시에 진이 안심했다.
다행이다. 씨.
이상한 놈은 아니었네.
그리하여 옅은 한숨을 내쉰 그가 홀스터에 손을 얹은 채 말하길.
"그럼, 잘 쓰고 있지. 얘가 내 첫 무기야."
"···첫 무기라고요?"
"엉."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가격도 똑똑히 기억난다.
60% 할인받아 275만 크레딧.
첫 의뢰를 끝내고 받은 돈을 전부 털어서 산.
내돈내산의 결정체.
애착이 안 생길 수가 없는 물건이다.
그게 눈빛에서부터 드러나니, 진을 가만히 지켜보던 원더의 얼굴에 한순간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가 쓱 사라졌다.
물론 그 과정은 찰나에 불과했기에, 다시 고개를 든 진이 본 건 프로페셔널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는 남자의 얼굴이었지만.
"그라비스707. 자사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총신을 지나치게 늘인 탓에 무게중심이 엉망으로 잡혔고, 수인을 타켓으로 한 제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큰 반동을 떠안게 됐죠."
일전에 브로프에게 들은 적 있는 얘기였다.
다행히 원더는 다각형 강선이니, 자력식 반동완충기 어쩌고 하는 전문적인 말로 시간을 허비하진 않았다.
그저 눈앞에 놓인 물잔을 기울여 목을 축인 뒤 천천히 뒷말을 덧붙였으니.
"해서 시판되지 못한 비운의 모델입니다. 구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마지막 문장은 의문표를 붙이지 않았을 뿐이지.
일종의 질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거 양산도 안 된 건데 어떻게 가지고 있니?
진도 그걸 느꼈다.
하지만 그냥 느끼기만 했다.
"인연이었나 보지. 뭐."
"그렇군요."
원더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진이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그래서 날 찾은 이유가 뭔데?"
"저런. 사담이 길었군요."
원더가 눈썹을 가볍게 까딱거렸다.
그러고는 깍지 낀 손을 허벅지 위로 차분히 내려놓으며 말하길.
"본사는 귀하의 전투 능력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행보가 크게 기대되는바. 협업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협업?"
"맞습니다. 정확히는 스폰서십이라고 할까요?"
"스폰서십?"
진이 앵무새처럼 뒷말을 따라 하기만 했다.
그만큼 원더의 제안이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맞잖아.
대뜸 찾아와서 협업이라니?
겨우 동영상 몇 개 보고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수 있다.
특정 기업이 전도유망한 인물과 스폰서십을 체결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당장 진의 고향만 해도 유명 선수를 지원하는 기업이 얼마나 많던가.
그것이 로스트 시티란 세상에서 솔로와 군수제조사라는 지극히 디스토피아적인 느낌으로 재해석됐을 뿐이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특별히 뭔가를 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저희가 주기적으로 지원하는 장비를 착용만 해주셔도 충분하니까요. 제품을 사용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귀하의 몫에 맡기겠습니다."
요컨대 공짜로 제품을 제공할 테니 나머지는 네 알아서 하라는 소리다.
진으로서는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나쁠 게 없는 수준을 넘어 엄청난 이득 아닌가.
심지어 조건이 빡빡하지도 않다.
그냥 착용만 해도 된다니.
진이 콜라를 벌컥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얘네 뭐지. 호군가?
누가 들으면 이마를 짝 소리가 나게 짚을 속마음이다.
기업이 호구?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 아닌가.
그나마 입 밖으로 뱉진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서 진은 모르는, R&D 측의 속내는 이러했다.
본디 가문의 순수주의자들(직계)은 화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냉병기를 다룰 뿐이니. 이마저도 검술의 아나리온, 창술의 거슈타인을 제외하면 나머지 다섯 가문은 냉병기에도 큰 관심이 없다.
시대를 거스르는 고리타분함이다.
하지만 그걸 한심하게 취급할 수도 없는 것이, 그들의 고리타분함은 비전이라는 힘이 모두 상쇄했기 때문에.
콩 반찬 밀어내는 편식쟁이가 키도 훤칠하고, 몸도 좋고, 심지어 건강하기까지 한 상황이랄까.
그런고로 군수제조사는 가문이랑 안 친하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은 거라 달리 개선될 여지도 없는 상황에서···
대뜸 눈앞의 솔로가 등장한 것이다.
자전을 각성했지만, 방아쇠를 당기길 주저하지 않는 혼종.
거기에 아직도 앞길이 창창한 기대주다.
눈독을 들일 여지는 충분한 상황인즉. 여기에 다시 호감 한 스푼.
버서커의 머리통을 반쯤 날려버린 총이 어딘지 익숙한 게.
설마 그라비스?
루거&돌만의 영업팀장쯤 되는 인물이 이런 인재를 놓칠 리 없다.
곧바로 행동에 나선 원더다.
다만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상대는 자전을 각성한 천재 아닌가.
'이미 가문에 입적하기로 얘기가 끝났을지도···'
이런 이유로 그는 본인이 기업 측 인사라는 사실을 사전에 밝히지 않았다.
이는 자하드와 불필요한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한 신중한 판단이었으니, 진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세상 참 복잡하게 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터였다.
아무튼.
원더는 정체를 숨기고 에넥도트로 왔다.
그리고 10초도 되지 않아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진은 떡하니 허리춤에 그라비스를 차고 있었으니까.
이는 그가 계속해서 솔로의 길을 걷겠다는 무언의 수신호였으니(아니다), 이를 바라보는 원더의 시선이 다소 노골적이었을 수밖엔.
해서 지금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이어진 원더의 질문에 진이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사실 고민하는 '척'했다.
여기서 바로 좋다고 해버리면 없어 보이니까.
사람은 적당히 밀고 당길 줄을 알아야 하는 법.
그렇게 진이 속으로 열을 셌다.
1, 2, 3, 45, 678910.
"좋아. 그렇게 할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원더가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서류 가방을 열었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앞서 원더의 입으로 언급된 이야기가 고스란히 명시된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두 사람은 계약서를 한 장씩 나눠 가진 뒤, 가벼운 악수를 끝으로 접빈실을 나섰다.
"배송지는 이 술집으로 하면 될까요?"
"어. 그렇게 해줘."
등 뒤로 들려오는 대화에 칼리파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돌리는 가운데.
어느새 입구에 다다른 원더가 입을 열었다.
"그럼,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담백한 묵례를 끝으로 가게를 나서는 그를 지켜보던 진이 가까운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자 들려오는 칼리파의 목소리.
"저게 무슨 소리야. 진? 배송지라니?"
해명을 요구하는 물음에 진이 3줄 요약을 시전했다.
루거&돌만에서 스폰서십을 제안하기에 수락했다.
물건을 보내줄 장소를 묻더라.
내가 집이 없지 않냐. 그래서 여기로 부탁했다.
미안.
이라는 내용이었으니, 이를 경청하던 칼리파가 한숨을 푹.
"열심히 벌어서 네 공간부터 마련해."
그래도 안 된다는 말은 안 한다.
오히려 한숨 끝에 옅은 미소를 피워 내더라.
"아무튼, 축하해 진. R&D와 스폰서십 계약이라니. 아주 잘 나가네."
"뭘 축하까지···"
괜히 멋쩍어진 진이 손을 휘휘 내젓자니, 포우가 슬쩍 뒷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미래의 솔로왕이 되실 분인데. 저 정도 계약은 너끈하시죠."
"어흠흠."
원래 내가 하면 아무렇지 않은 말도, 남의 입에서 나오면 민망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
진이 못 들은 척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화면에 시선을 땅땅 못 박으니.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칼리파가 피식.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좀 쉬다가 가. 당장은 손님도 없으니까."
그러더니 기지개를 쭉 켜며, 브리핑 룸을 향해 또각또각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링커로서 해야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달칵 문 닫히는 소리에 진이 단말기를 얼굴 앞에서 치우며 입을 열었다.
"···저러고 밤에는 점장 노릇까지 해야 한다고? 너무 피곤할 거 같은데."
"당연히 피곤하실 겁니다. 이틀에 하루씩 밤을 새우시니까요. 하지만 본인이 원하시니 말릴 수가 없더군요."
"그래?"
어느새 쿠키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포우가 말했다.
"이렇게 쿠키를 내어드릴 수 있는 것도, 점장님께서 밤잠을 줄이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미안해서 어떻게 먹냐?"
···라고 말하면서 이미 우물대기 시작한 진이다.
고생해서 만든 거니까 더 맛있게 먹어야지.
칼리파도 그걸 바랄 거야.
음. 그렇고말고.
"그럼 편히 쉬시죠."
"아 맞다, 포우, 잠시만."
진이 뒤돌아서는 포우를 불러 세웠다.
불현듯 떠오른 질문거리 때문이었다.
"솔로 인트라넷 말이야. 거기 어떻게 접속하는 거야? 검색해도 안 나오던데."
그에 포우가 한동안 말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천천히 입술을 달싹거리길.
"제가 일전에 접속 코드를 보내드리지 않았나요?"
"언제?"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
"43일 전입니다."
"아. 그랬어? 전전 단말기라 잘 모르겠는데."
전전? 전전전?
사실 기억도 안 난다.
걸핏하면 태워 먹고, 녹여 먹은 단말기라서.
그때 포우가 말하길.
"아무래도 단말기가 고장 났거나 교체된 상황에서 연락을 드린 것 같군요. 괜찮습니다. 다시 보내드리죠."
직후 진의 단말기가 웅---하고 울었다.
말을 맺는 것과 진동이 울린 것이 거의 동시였기에, 진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포우를 바라본 뒤 다시 단말기에 시선을 돌렸다.
이후 메시지로 온 URL 주소를 클릭하자, 단말기에 앱 하나가 다운로드됐다.
곧바로 앱을 실행시킨 진이다.
그러자 잠깐의 로딩을 거친 디스플레이가 낯선 창을 띄워내니.
다음 순간.
눈에 들어온 건 깔끔한 디자인의 웹이었다.
화면 중심에 위치한 검색창, 그 아래 네모난 캡션으로 구분한 게시판들. 그 모든 것을 감싸는 검은색 배경.
"으음. 이런 느낌? 회원 가입은?"
진의 물음에 발길을 돌려 다가온 포우가 말했다.
"최초 발급된 고유 식별 코드로 입장한 것이니, 회원가입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도 로그인되어 계시고요."
"아, 그러네."
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 오른쪽 상단에 자리 잡은 본인의 프로필을 꾹 눌렀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빨간 점이 깜빡거리는 게 신경이 쓰여서.
그러자 나타난 건-
일렬로 쭈우우욱 늘어진 메시지의 항연이었다.
"뭐야. 이거?"
"지명 의뢰입니다. 그간 계속 쌓여왔던 모양이군요."
"···너무 많은데."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많다.
폭행 사주, 목표물 추적, 납치, 탈취, 살인 청부 등등.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도 이래?"
"그렇진 않을 겁니다."
포우가 작게 웃는 가운데.
메시지가 도착한 날짜를 확인한 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다 최근에 온 거네."
솔로 레벨이 한 단계 올랐을 뿐.
정작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착각이었을 줄이야.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을 뿐.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순간.
띵-
알람음과 함께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91 24.2081, 2 10.3578]
"뭐야, 이건."
아무런 설명 없이 숫자만 주르륵 나열된 메시지에 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화면을 함께 내려다보던 포우가 중얼거렸다.
"···좌표로군요. 뮤트타운입니다."
그 나직한 목소리가 진의 눈앞에 상태창을 불러왔다.
「(전조!)(돌발!)전란의 야수」─────
알버스와 저항군을 구하십시오.
*보상 퍽 XP 4,000
──────────────────
< 52화 >
알버스라면 진도 아는 이름이다.
일전에 뮤트타운의 밀입국을 도왔던 저항군 소속 남성.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져, 부상을 입은 진이 저항군 거처에서 머문 열흘 동안 제법 친분을 쌓았다.
그래서 진은 상태창을 쓱 치웠다.
굳이 이런 거 안 띄워도 갈 생각이니까.
"음. 이 숫자 그대로 내비에 입력하면 되는 건가?"
"진?"
좌표를 복사하는 진을 포우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우선 상황을 살피는 게 좋겠습니다. 좌표를 보낸 발신자가 누구인지 파악부터 한 뒤에-"
"이걸···여기에 붙여 넣으면···어 됐다."
그사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띄워낸 진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 이거 아는 사람이 보낸 거야."
"···?"
확신이 담긴 말투에 포우가 순간 말문이 막힌 사이.
진이 허리를 굽혀 접시에서 쿠키를 챙겼다.
그리고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길.
"나 갈게."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홀라당 가게를 나가버리더라고.
느닷없는 상황에 포우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니, 브리핑 룸이 찰칵하고 열렸다.
"진, 너한테 괜찮아 보이는 의뢰를 몇 개 추려······. 얘 어디 갔어?"
층층이 쌓은 파일철 뒤로 고개를 빼꼼 내민 칼리파의 물음에, 포우가 시선을 정면에 둔 채로 입을 열었다.
"···뮤트타운으로 가셨습니다."
*
부아아아앙-!!!
만티코어가 도로를 질주했다.
펑펑펑 몸에 닿아 터지는 공기 저항에 맞서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인 진이다.
하이웨이로 돌입한 차체가 거리낌 없이 속도를 높였다.
계기판의 바늘이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는 가운데.
정면을 향해 고정된 진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헬멧 바이저 오른쪽 상단에 살짝 닿았다.
[칼리파]
옅은 진동과 함께 보이는 익숙한 이름.
무선 통화 기능이 있는 헬멧이다.
단말기에 걸려온 전화를 띄워낸 것이었으니-
"어 왜?"
통화를 수락하자마자, 동그랗게 꽉 찬 공간 안쪽으로 칼리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너 지금 어디야.]
"아, 인사를 못하고 나왔네. 나 지금 하이웨이. 뮤트타운 가는 길이야."
[거길 왜?]
"예전에 신세를 진 친구가 위험한 거 같아서."
잠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가 끊겼나 싶어 바이저 오른쪽 상단에 다시 눈길을 주니 [···칼리파···] 라는 문구는 여전히 떠 있더라고.
해서 진이 입을 열었다.
"칼리파?"
[지금 뮤트타운 상황이 어떤지는 알지?]
"알지. 내전이 더 심해졌다면서."
[심해진 수준이 아니야. 거짓말 보탤 것도 없이 이젠 안전한 곳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니까.]
"그 정도라고?"
[TB가 저항군 박멸에 나섰어. 강경해. 주민들 사이에 숨어들면 색출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폭탄을 떨어뜨릴 정도로.]
"비유야? 진짜야?"
[비유였으면 좋았을 사실이야. 이젠 주민들도 저항군을 감싸주지 않아. 그랬다간 자기네들도 위험하니까.]
다시 한번 짧은 침묵.
그리고 옅은 한숨.
[그래도 갈 거지?]
"가야지."
[그럴 줄 알았어.]
왠지 표정이 그려지는 말투다.
진이 피식거렸다.
"그 말 하려고 전화했어?"
[타하를 조심해. 누가 뭐라 해도 그 녀석은 진짜니까.]
타하. TB의 리더.
찌그러진 전차를 밟고 선 백사자 수인.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끊을게. 행운을 빌어.]
뚝.
전화가 끊어지자, 바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진이 속도를 더 높였다.
*
이번에도 진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뮤트타운에 입장할 수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게이트를 지나쳐야 했지만, 그곳엔 TB 측 병력이 쫙 깔려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뉴스로 접한 소식이다.
군벌 세력이 구획 전체를 무력 봉쇄했다는 것.
일개 갱단이었던 놈들이 계엄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었지만, TB가 그만한 힘이 생긴 것을 뭐 어쩌겠는가.
그리하여 샛길로 든 진이다.
기억에 의존해 좁다란 길을 얼마나 나아갔을까.
스멀스멀한 악취와 함께 시야 안쪽으로 낡은 하수도가 담겼다.
찾았다.
과거. 알버스를 처음 만난 접선지에 도착한 진이 인근에 바이크를 세웠다.
헬멧을 벗자, 어느덧 어두워진 하늘 아래.
한층 짙어진 악취가 코끝을 찌르고···
저게 뭐야?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커멓게 고인 오폐수 위로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기에.
눈가가 얼얼할 정도의 악취가 단순히 오수 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더 참혹했다.
생전의 모습?
당연히 남아있지 않다.
평범한 사람들은 잘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 익사체의 몰골이다.
퉁퉁 불어 터진 살갗은 죽은 이에 대한 존중을 잊게 만든다.
설령 그것이 내 가족이라도 절로 입을 틀어막게 되는 것이다. 자기혐오가 뒤섞인 구역감. 익사체를 유족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
하지만 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비위가 좋아서가 아니라, 둥둥 떠다니는 살덩이들의 차림새가 어딘지 익숙했기에.
정확히는 브라운 계열의 전술 조끼가 익숙했다.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것이 저항군의 장비라는 것을 떠올린 진이다.
하수도에 숨어있다 방류된 폐수에 휩쓸리기라도 한 걸까.
그도 아니면 TB가 여기에 던져넣은 걸까.
어느 쪽이든 중요하진 않았다.
"······"
말없이 시선을 거둬들인 진이 만티코어를 돌아봤다.
여기서부턴 바퀴 달린 짐승은 통행 불가다.
놓고 가는 심정이 불안하긴 하지만 별수 있나.
애초에 이 도시에서 안전한 주차 장소가 어디에 있다고.
다만 이 하수도 자체가 도시 외곽에 있어 인적 드문 장소였으니, 그걸 믿어보는 수밖엔.
그리하여 진이 하수도를 나아갔다.
헬멧을 다시 푹 눌러쓴 채다.
방독면도 아니고 유의미한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맨얼굴보단 낫지 않겠나 싶어서.
그렇게 냄새나는 길을 걷고 또 걸어 지상으로 연결되는 사다리를 찾은 진이 망설임 없이 그걸 밟고 올랐다.
퉁! 드르르륵-
바닥을 끄는 쇳덩이 소리와 함께 맨홀 뚜껑이 옆으로 밀려난다.
그 아래서 코 위로만 얼굴을 뺀 진이 고개를 휙휙.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가래떡 뽑듯 몸을 쭉 꺼냈다.
적막이 내려앉은 골목길에서 뚜껑을 다시 덮은 그가 단말기에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나아가는 속도를 계산한 기기가 예상 시간을 3시간 23분으로 잡았다.
걸어서는 너무 오래 걸린다.
이미 메시지를 받았던 시점부터 7시간 이상이 흐른 상황.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진이 자연스럽게 보폭을 넓혔다.
성큼성큼 내딛는 발이 지면을 밀어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니, 이윽고 밤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한 진이다.
타다다닷!
주력이 인간의 그것을 아득히 넘어섰다.
주변 풍경이 급속히 변했다.
순식간에 으슥한 골목을 지나쳐,
폐수 방류의 주범인 공장지를 돌파해,
띄엄띄엄 가로등이 늘어선 길을 쭉 내달렸다.
그에 내비게이션에 찍힌 남은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3시간 23분]
[2시간 55분]
[2시간 11분]
·········
······
···
***
동그란 빛이 사방을 휘휘 탐색한다.
위, 아래, 좌, 우.
어둠을 훑어내리며 천천히 움직이던 빛이 어느 순간 낡고 깨진 외벽 앞에서 멈췄다.
다시 위아래.
길게 솟은 폐건물을 확인한 병사가 반대쪽 손으로 주먹을 말아쥔다.
그에 뒤따르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멈춰서니-
딸깍. 전등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헬멧에 부착된 야간투시경을 내리는 병사들이다.
그들의 헬멧 중앙에는 같은 마크가 박혀있었다.
맹수의 발톱에 찢긴 듯한 비스듬한 3줄짜리 상흔.
더 비스트.
저벅.
TB 소속의 병력이 천천히 폐건물로 진입했다.
그런 그들의 최후미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으니 홀로 야투경이 아닌 맨눈으로 건물을 올려다보는 눈빛에 형광빛 색체가 번들거렸다.
"······왔다."
작은 중얼거림.
깨진 유리창 너머를 내다보던 여인이 황급히 머리를 낮췄다.
동시에 좁은 방 여기저기에 눕거나 기대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여인을 향했다.
그중 하나가 물었다.
"몇 명?"
"한 부대쯤. 문제는 간부가 섞여 있어. 눈이 마주친 거 같은데···시발. 모르겠다."
TB의 간부라 하면 당연하게도 수인이다.
야수 혈청을 주입 받아 탄생한 인간 병기이자,
지금의 TB를 만든 원년 멤버들.
자연스레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건 배에 붕대를 감은 알버스도 마찬가지였으니.
이미 한참 전에 전원이 꺼진 단말기를 만지작거리는 그를 향해 여인이 입을 열었다.
"···지원은 힘들겠지?"
"당연하지. 거점이 박살 났는데. 당장 우리한테는 신경도 못 쓸걸."
"시발. 개좆같은."
욕설을 씹어뱉듯 여인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오렌이 타하한테 살해당했으면 안 됐어. 어쩌다가···"
"이미 끝난 일이야."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알버스도 속이 쓰렸다.
오렌 팔머.
저항군의 핵심 전력이자, 레벨5의 솔로였던 초인계 사이커.
그가 타하에게 패했다.
아슬아슬하게 지켜지던 균형이 와르르 무너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지금. 살아남은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절망적인 상황에 짓눌린 알버스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질겅거리는 그때.
"알버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알버스가 눈앞으로 날아드는 무언가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길.
"···격발 장치?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그러자 손을 쭉 뻗은 털보가 피식거렸다.
"그야 네가 부상이 제일 심하니까. 우리 다 뒈지거든 그때 눌러. 타이밍 잘 잡아라. 간부는 데려가야지."
그에 알버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손바닥만 내려다봤다.
이 건물로 숨어들 당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설치한 폭탄이 있었으니,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터뜨리고 다 같이 뒈지자고.
그렇게 합의할 때까지만 해도 정말 누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시발.
쓴웃음을 머금은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움직이자."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방 안의 인원들이 응답하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사전에 조율한 위치를 향해 걸음을 옮기니.
잠시 후.
혼자 남은 알버스가 피가 배어나는 붕대에 손을 얹은 순간.
두두두두두!!!
복도 너머로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막아! 죽여! 따위의 고성도.
알버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니까.
그저 순서가 마지막이었을 뿐이다.
그랬기에 그는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방까지 들어오면 바로 눌러야 할까.
아니면 대화로 시간을 끈 뒤에?
간부라면 누구지.
그러다 문뜩 단말기가 꺼지기 직전, 다급하게 솔로 인트라넷에 접속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나마 연이 닿은 두 명에게 다짜고짜 좌표를 보내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 괜히 그랬다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잡념을 떨친 알버스가 격발기를 꽉 잡았다.
격하게 오가던 총성도 점차 잦아들기 시작한 지금.
그의 엄지가 버튼 위로 천천히 포개질 때였다.
타앙─!!
귀를 찢는 격발음이었다.
"···엇!"
저도 모르게 엄지에 힘이 들어갈 뻔한 알버스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타앙─!!'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직후 문이 쾅 열리며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오니 그들은 각각 여인과 털보라.
두 동료가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누가 왔어!" "뭔가 왔다!"
한순간 머리가 멍해진 알버스가 버튼과 맞닿아있던 엄지를 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누군가 왔는데 우리 쪽 사람인지 확실하지가 않아. 더군다나 헬멧을 쓰고 있어서 특정하기가-"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우렁찬 격발음이 터져 나왔다.
"칫!"
반사적으로 열린 문을 향해 총구를 겨눈 여인과 털보 사이에서 알버스가 눈을 끔뻑거렸다.
헬멧? 누구지?
지금 여기에 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그러는 동안에도 총성은 점차 가까워졌으니.
어느덧 비명 소리가 사라진 복도에서 이번에는 무언가 맞부딪히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부서지고, 깨지고, 으깨지고, 박살 나는 섬뜩한 파열음의 향연 속에서 세 저항군의 낯빛이 점차 굳어졌다.
"······도대체 뭐야?"
잔뜩 긴장한 털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킬 때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크게 흔들렸다.
그 충격이 얼마나 강했는지 천장에서 흙먼지가 쏟아질 정도였으나,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쿵! 쿵! 쿵! 쿵!
연이은 충격에 쩌저저적--! 균열이 번지는 벽을 발견한 알버스가 화들짝 격발 장치에 손을 얹는 순간.
콰앙─!!!!!
굉음과 함께 벽이 산산이 조각났다.
일순간 느리게 보이는 세상에서 보랏빛 전광을 몸에 두른 누군가가 하이에나의 머리통을 바닥에 메다꽂았다.
거대한 망치가 떨어진 것처럼 바닥에 움푹한 운석공이 생긴 가운데.
핏물과 살점으로 얼룩진 파괴의 중심지에서 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53화 >
진이 몸을 일으켰다.
핏물이 잔뜩 튄 페이스 가드를 손으로 훑어내자, 그 너머로 총구를 겨눈 두 남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앉은 알버스까지.
그는 손에 무언가를 꼭 쥔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은 반가움이 아닌 당황과 경계 뿐이라서.
그제야 자신이 헬멧을 쓰고 있음을 인지한 진이 페이스가드를 젖히려는 순간이었다.
커헝!!
등 뒤로 야수가 뛰어올랐다.
하이에나 대가리를 한 수인. 죽어가는 와중에도 놈은 진의 목덜미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렸다.
딱!!
단검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이빨이 빈 공간에서 금속처럼 맞부딪쳤다.
한순간 불티가 튈 정도의 치악력.
하지만 빗나갔다.
이미 상체를 앞으로 깊게 숙인 진이다.
그러고는 오른발을 지면에 단단히 고정한 채 왼발을 뒤로 차올렸다.
번쩍 솟구친 뒤꿈치가 수인의 턱을 부쉈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크게 젖혀진 하이에나 대가리가, 앞으로 쏠린 중심과 함께 그대로 바닥 위를 세차게 미끄러졌다.
그 방향 끝에 세 저항군이 있었다.
그들의 총부리가 걸레짝이 된 수인의 뒤통수를 향했다가 급히 제자리를 찾는 사이.
진이 헬멧을 벗었다.
"푸후-"
시원한 숨결을 내뱉으며 땀에 젖은 머리칼을 좌우로 휘휘 털어낸 그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 두 사람과 뒤늦게 얼빠진 표정을 짓는 알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
*
"···네가 부른 게 확실해?"
진에게 대략적인 설명(3줄 요약)을 들은 여인이 알버스를 슬쩍 돌아봤다.
"맞아."
긍정하는 답변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총구를 천천히 아래로 떨어뜨린 그녀다.
그건 옆에 있던 털보도 마찬가지였다.
"왜 우리한텐 말 안 했어?"
"올 지 몰랐으니까. 헛된 희망 심어주기도 싫었고."
그에 여인과 털보는 납득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진은 '지가 불러 놓고?'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오지. 그러면.
새끼, 못 믿었구만?
까치는 은혜를 잊지 않고,
진은 밥값을 잊지 않는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뭐가 됐든 한국인의 정 아니겠냐며.
결과적으로 경계를 늦춘 두 남녀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오시아라고 해."
"덴이다."
여인, 오시아.
털보, 덴.
당연하지만 진은 그들이 초면이었다.
열흘간 거점에 머물렀다고 모든 저항군을 만나본 건 아니니까. 애초에 병실에만 처박혀있기도 했고.
"진이야."
짧은 통성명을 마친 그가 알버스에게 다가갔다.
"괜찮냐?"
"고맙다. 올 줄 몰랐는데···"
"똑같은 얘기 그만하고. 그래서 움직일 순 있고?"
"배에 구멍 나서 힘이 안 들어간다."
그러잖아도 환부를 바라보던 진이다.
다친 지 오래됐을까. 핏물이 축축하게 밴 붕대가 지저분했다. 이대로면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감염 때문에 큰일 날 판이었다. 아무리 진보한 세상이라도 패혈증엔 답 없지 않나?
그런 거 생각하고 살아본 적 없는 진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덴이 움직였다.
"일단 업혀."
알버스에게 등을 내어준 털보가 제법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철컥이는 기계음. 그의 두 다리가 사이버웨어라는 건 그다음에야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가면 돼. 그때 그 거점?"
"아니 거긴···"
다시 헬멧을 푹 눌러쓴 진의 물음에 알버스가 답하는 순간.
"넌 이제 말하지 마. 내가 설명할 테니까."
중간에서 말을 자른 오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거점은 사라졌어. 우리 쪽 핵심 전력 몇몇이 작전에 실패하기 무섭게 역습당했거든.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다들 뿔뿔이 흩어졌고, 이젠 연락도 닿질 않아."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점이 사라졌다니.
그건 예상 못 했는데.
"다른 곳은?"
"안전 가옥이 있어. 여기서 조금 멀어서 문제지만."
"그럼 답 나왔네. 일단 여기부터 나가자."
진이 박살 난 외벽을 향해 까딱 턱짓했다.
그리하여 복도.
뒤따라 나온 오시아와 덴이 흠칫 놀랐다.
통로 전체가 시체로 뒤덮여있었기에.
그것도 하나같이 처참한 몰골로.
관통상 정도면 얌전한 편이다.
곤죽이 된 면상부터, 가동범위를 넘어 뼈가 돌출된 팔다리까지.
그야말로 벌레처럼 짓이겨진 TB의 병력이었으니-
"······"
세 쌍의 눈동자가 새삼스럽게 앞장서는 진의 뒷모습을 훑었다.
그들은 자전을 봤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눈치껏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붉게 물든 복도에는 적들만 쓰러져 있는 게 아니라서.
눈도 감지 못한 채 핏물 위에 엎어진 동료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를 악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도 죽은 저항군들을 보긴 했다.
조금만 일찍 도착했다면 살릴 수도 있었을 이들.
하지만 그건 결과론에 불과했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으니까.
죽어라 달렸기에 셋이라도 구한 거 아니겠는가.
해서 진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쓰러진 저항군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짧게라도 눈길을 줬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복도를 통과하니 오시아가 말했다.
"이미 총성을 듣고 다른 놈들이 몰려오고 있을지도 몰라. 서두르자."
자연스럽게 일행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타다다닥.
잰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며 층계참에 적힌 숫자를 하나씩 줄여갈 때였다.
문뜩, 선두에 있던 진이 왼팔을 일자로 쭉 뻗으며 멈춰서니 고개를 돌리며 입술에 검지를 포개는 그의 모습에 오시아와 덴이 조용히 총구를 들어 올렸다.
그들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인 진이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아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층계참에 내려서며 주먹을 훅 내지르자, 아래쪽에서 올라온 상대가 고개를 젖혀 공격을 피하더라고. 어쭈?
순식간에 좁아진 거리에서 두 인영이 뒤섞였다.
어둠 속에서 팔과 다리가 파바박! 교차하니,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짧은 공방이 오갔다.
복부를 노리는 무릎을 손바닥으로 막은 진이 반대쪽 팔꿈치를 도끼처럼 내리찍었다. 상대는 팔을 교차해 방어했지만 그 안에 실린 괴력에 주춤 밀려났고, 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어깨를 힘껏 들이받으며 상대를 벽에 몰아붙였다.
콰앙!
동시에 반대쪽 손으로 그라비스를 뽑아 지근거리에서 상대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는 순간-
"···어?"
방아쇠를 당겨야 할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미간을 찡그린 채 이쪽을 바라보는 상대의 얼굴이 퍽 익숙해서.
도깨비 가면?
저도 모르게 그라비스를 쥔 손을 천천히 아래로 늘어뜨린 진이다.
"펜릴?"
"이 냄새······빌어먹을.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들으니 확실하다.
얘, 펜릴 맞네!
진이 반대쪽 팔에서도 힘을 풀었다.
목을 압박하고 있던 팔꿈치가 멀어지자, 펜릴이 작게 기침을 쿨럭거렸다. 목을 매만지는 손에 털이 부숭부숭했다. 손톱도 길게 자란 것이 한순간 부분 수인화를 한 모양.
음 수인화.
···수인?
그에 진이 흠칫.
다시 그라비스를 펜릴에게 겨눴다.
"너, 이완용 같은 새끼! TB랑 붙어먹었구나!"
"무슨 개소릴···내가 그놈들이랑 왜?"
"아닌데 여길 어떻게 와."
"그야 좌표를 보고···그러는 넌 어떻게 여기 있지?"
"나도 좌표를······"
진이 말끝을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털보, 정확히는 그의 등에 업힌 알버스를 바라보니.
"얘도 불렀어?"
"···둘 다 왔네. 미친."
알버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지원도 뭐도 다 끊긴 절망적인 상황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부른 솔로들이 전부 올 줄이야.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나온다.
물론 다친 복부에는 쥐약이라서.
큭큭, 윽!
크크크, 으윽!!
혼자 웃었다 아파했다, 웃었다 아파했다 쌩쇼를 하니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두 솔로도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았다.
아, 얘도(이 자식도) 불렀구나.
해서 불필요한 대화를 전부 건너뛴 둘이다.
곧바로 진이 현 상황과 목표를 전달하자,
펜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전 가옥. 이해했다. 출발하지."
그렇게 늑대수인까지 합류한 일행이 폐건물을 나섰다.
그러자 시야가 닿지 않는 어둠 너머로 고함 소리가 들려오길.
"저쪽인가?!"
"브라보 팀 연락 닿지 않습니다!"
"서둘러!"
벌써 증원군이 온 모양.
그에 오시아가 다급한 손짓과 함께 소리가 들려오는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따라와!"
일행이 서둘러 그녀를 뒤따르는 가운데.
"후우, 후우-"
알버스가 호흡을 고르며 뒤를 돌아봤다.
흐릿한 시선에 폐건물로 진입하는 한 무리의 병사들을 담겼다.
이후 속으로 열을 센 그가 격발 버튼을 꾹 누르니.
구구구구궁--!
곧이어 둔중한 울림이 파문처럼 번져나갔다.
지축이 흔들리는 감각에 뒤를 돌아본 진이 깜짝.
뭐야?
월광을 등진 채 붕괴하기 시작하는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펜릴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는지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때 덴이 말했다.
"알버스가 터뜨린 거다! 저게 시간을 끌어주길 바라야지!"
확실히 그렇게 됐다.
무너지는 건축물은 추격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으니, 일행은 그 틈을 살려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문제는 그 '틈'이라는 게 고작 몇 분도 되지 않았다는 거지만.
"저기다!"
어디선가 쩌렁쩌렁한 외침이 터졌다.
사냥감을 발견한 몰이꾼의 포효와 같다.
허탕을 치며 주변을 두리번대던 추격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온다!"
펜릴이 외쳤다.
그와 동시에 꺾여 들어가는 골목 앞쪽에서 촤아악! 미끄러지듯 나타나는 적이 보였다.
직후 오시아와 덴이 기다렸다는 듯 방아쇠를 당겼다.
펜릴의 경고가 빨랐던 덕분이었다.
두두두두두!!
총구가 불을 뿜었다. 단발이 아니라 연사다. 방아쇠를 2초만 당겨도 탄창을 몽땅 비워버리는 발사속도. 순식간에 걸레짝이 된 적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순간, 오시아의 오른쪽 벽에서 파편이 튀었다.
곧이어 들려오는 '타앙-!'하는 격발음.
음속을 넘어선 탄환이 빚어낸 크랙썸.
탄환이 부딪친 소리가 크랙(Crack),
직후에 도달한 총성이 썸(Thump)이다.
뛰어난 군인은 두 소리의 시간 차를 계산해 적의 위치를 대략 유추할 수 있으나-
진은 그저 본능으로 얼굴을 번쩍 들었다.
시야의 끝자락.
옥상에서 총을 겨눈 병사가 담긴다.
지면에 발을 내린 거치대가 저격을 시사했다.
동시에 진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일행과 저격수 사이의 빈 공간에 몇 번의 번뜩임이 나타났다. 마치 물수제비처럼. 번쩍! 번쩍! 번쩍!
다음 순간.
연이은 블링크로 거리를 좁힌 진이 상대의 뒤통수를 공중에서 걷어찼다.
콰직! 지면을 거세게 들이받은 안면이 핏물을 바큇살처럼 퍼트리니, 뒤이어 착지한 진이 바닥에 거치된 총을 들었다.
그러고는 옥상 난간을 밟고 올라, 사방에서 일행을 조여오는 병사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앙-!
전신을 울리는 반동. 원래라면 거치대를 통해 지면으로 흩어져야 했을 운동량이 몸을 쾅쾅 때렸다.
하지만 진은 멈추지 않았다.
탄창을 다 비워낼 때까지 방아쇠를 당긴 이후, 다시 블링크를 반복해 하늘에서 떨어졌다.
마지막 좌표를 하늘로 고집하는 이유는 하나.
동작이 큰 공격을 연계하기가 용이했기에.
후욱!!
일자로 뚝 떨어진 뒤꿈치가 TB의 심볼이 새겨진 헬멧을 부수고, 그 안의 내용물을 으깼다.
훼까닥 눈이 돌아가는 적의 손에서 소총을 확 낚아챈 진이다. 총기 멜빵을 목에 걸어둔 탓에 시체가 피를 흘리며 찰싹 들러붙었지만, 이를 무시하며 주변에 총알을 퍼부었다.
두두두두두!!
1초에 수십 번씩 뒤바뀌는 명암 속에서 일그러진 얼굴들이 허물어졌다. 몇 번의 응사가 있긴 했지만 상황을 뒤바꾸진 못했다.
턱, 턱.
검지에 느껴지는 저항감. 진이 시체와 함께 소총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씁."
문뜩 귓불이 얼얼해 손을 가져가자, 으레 만져져야 할 말랑한 살점 대신에 핏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정신없는 와중에 탄환이 귓가를 스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거둬들였다.
머리에 안 맞았으면 됐지.
남들이 들었다면 깜짝 놀랄 속마음과 함께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건.
촤악!
핏물을 흩뿌리며 허물어지는 적과 그 뒤로 달려오는 펜릴의 모습.
피에 젖은 양손을 X자로 교차한 채다. 상대의 살점을 종이 썰 듯 베어버린 손톱이 붉게 번들거렸다.
"왔냐?"
진의 물음에 펜릴이 콧잔등을 꿈틀거렸다.
"······도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많은 것이 함축된 독백.
그에 진이 씩 웃었다.
넌 아직 자전을 못 봤다. 애송이.
그사이 합류한 오시아와 덴이 탄창을 갈아 끼우며 말했다.
"공세가 좀 수그러들었어. 지금이라면 놈들을 따돌릴 수 있을 거 같아."
"알버스가 제대로 한 건 했군. 이 정도 실력자들이라니."
희망을 느꼈을까. 엉망진창이 된 얼굴에서 옅은 미소를 피워낸 두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
오시아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 옆에 선 덴의 눈동자도 쉴 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진은 왜 그러냐고 묻지 못했다.
당장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 때문에.
"······"
천천히 뒤돌아본 길 끝에 누군가 우뚝 서 있었다.
어깨까지 닿는 새하얀 장발이 인상적인 사내.
어둠을 꿰뚫는 형광빛 안광이 일행의 살갗에 보이지 않는 이빨처럼 닿았다.
더없이 야성적인 눈빛이 일대를 휘어잡는 가운데.
깜빡거리는 가로등의 빛이 남자의 그림자를 벽에 띄워냈다.
거대한 사자의 그림자를.
< 54화 >
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신의 근육이 경직되는 서늘한 감각.
본능이 상대를 경계함에 광극이 눈을 떴다.
파지직!
보랏빛 전광 한줄기가 진의 얼굴 근처를 휘감았다.
마치 번갯불에 의지가 있어, 적을 향해 이빨을 세우는 듯한 모양새였으니.
자연스럽게 사내의 눈이 그리로 가닿았다.
"······"
야수의 시선이었다.
대가리만 짐승의 것으로 교체한 어중이떠중이들과는 격이 다른 진짜배기 맹수의 눈길.
진은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주먹을 꽉 틀어쥐었을 뿐이니.
곧바로 달려들지 않은 건, 곁에서 들려오는 펜릴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타하···!"
도깨비 가면 위로 드러난 콧잔등이 잔뜩 일그러졌다.
표정이며, 말투며 초면을 대하는 느낌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가 응답했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나."
그리고 이어지는 무감정한 한마디.
"배신자."
동시에 진이 펜릴을 곁눈질했다.
배신자라는 말 때문이 아니라, 뿌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커지는 존재감에 절로 눈이 그리로 향했다고.
그사이 수인화를 마친 펜릴이 그 커다란 손으로 끈 풀린 마스크를 잡아 내렸다.
크르르르-
길쭉한 주둥이에서 맹수 특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목을 좌우로 뿌득 꺾은 늑대인간이 입을 열었다.
"배신자는 너무 거창한 거 아닌가? 좆같은 친목질이 싫어서 나간 사람한테."
친목질.
이제는 어엿한 신흥 군벌로 성장한 TB를 깔아뭉개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로 평이했다.
"내면의 목소리를 거부하지 마라. 펜릴."
사내, 타하가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면서 팔을 뒤로 뻗으니,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던 거대한 망치의 손잡이를 움켜쥔 그가 뒷말을 덧붙였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지랄···야수병이 제대로 도졌군."
펜릴이 선홍빛 잇몸을 말아 올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가운데.
진이 힐끔 뒤를 확인했다.
타하의 등장에 피식자마냥 얼어붙은 세 저항군이 보였다.
그중 가장 상태가 좋지 못한 건 당연하게도 알버스였는데,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피가 죄다 복부로 쏠렸는지, 지혈대가 무색하게 축축하게 젖은 붕대가 이제는 맞닿은 덴의 등까지 붉게 물들였더라고.
식은땀을 잔뜩 흘리는 모습으로 보건대 이대로면 출혈로 인한 쇼크가 찾아올 판이라.
진이 결단을 내렸다.
"뛰어!"
그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오시아와 덴이 즉시 몸을 되돌렸다.
냅다 도주하는 그들의 뒷모습에 타하의 눈길이 닿은 순간.
진이 펜릴의 어깨를 확 끌어당겼다.
"일단 튀자!"
"···뭐?"
"의뢰인은 살려야지!"
진도 전투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실제로 덤벼들 준비를 하기도 했었고.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니다 싶은 게.
여기서 발붙이고 싸웠다간, 알버스도 위험할뿐더러 기껏 뚫었던 포위망이 다시 좁혀진다.
그럼, 지금까지의 고생이 다 물거품이 되지 않는가.
그런 꼴은 못 보지.
해서 진이 등을 보이고 달렸다.
누가 그랬던가. 등의 상처는 검사의 수치라고.
하지만 진은 검사가 아니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다!
등짝 훤히 공개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몇 번이고 그럴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상처가 생기면 어때. 어차피 금방 나아서 흉도 안 질 텐데.
하지만 허리춤에 쌍룡검을 찬 늑대인간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이럴 거면 수인화를 왜!"
"내가 하랬냐? 일단 달려!"
그때였다.
등 뒤로 쿵! 쿵! 쿵!
지면을 부수듯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있더라고.
그러다 마지막으로 콰앙!! 하는 폭음이 들려오니-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날아, 한창 내달리는 두 사람을 향해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휘리리리리릭!!
공기를 찢는 회전음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
다음 순간 펜릴이 크게 몸을 날렸고, 진은 전방으로 짧게 블링크했다.
직후 지면이 뒤집혔다.
한순간 자세가 무너진 진이 고개만 젖혀 뒤를 확인했다.
비산하는 콘크리트 파편 너머, 바닥에 꽂힌 망치가 보였다.
진의 눈이 절로 커졌다.
뭐야. 저걸 던진 거야?
쇳덩어리의 크기만 해도 족히 수백kg은 나갈 것 같은 흉물이다.
손잡이와 일체를 이룬 투박한 생김새부터가 시대를 역행한 냉병기인즉.
저런 걸 들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지면으로 내던지는 행위는 지금의 진조차 불가능하다.
상대의 힘이 자신을 명백히 앞선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무섭게 하늘에서 떨어진 백발의 사내가 손을 뒤로 뻗었다.
그러고는 망치 손잡이를 낚아채 팔을 크게 휘두르니-
지면에서 사출되듯 솟구친 망치 머리가 반경 3m에 달하는 궤적을 그렸다.
후웅!
시야를 가리며 날아드는 망치에 진이 반사적으로 몸을 굴렀다.
무협지에선 나려타곤이라 불리는 무적의 회피기.
수치심만 이겨내면 어지간한 공격은 다 피할 수 있어야 정상인데···
세계관이 달라서 그런가 안 통하더라.
콰앙!!
직격타는 피했지만, 지근거리에서 터진 충격파에 휘말린 몸이 붕 날았다.
동시에 눈앞으로 콘크리트 파편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시야를 빽빽하게 가렸다.
이러면 블링크를 못 쓴다.
좌표를 특정할 수가 없으니까.
진이 급한 대로 양팔을 교차했다.
그 위로 주먹만 한 파편들이 파바박 부딪혀 깨지는 가운데 그가 다리를 뒤로 쭉 뻗었다.
밑창에 뭔가 닿았다.
그게 바닥인지, 벽인지 뭔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우선 몸부터 멈춰 세웠다.
그러자 다시 귓가를 파고드는 바람 소리가.
진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숙였다.
후웅!!
육중한 쇳덩어리가 정수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가운데, 손바닥이 바닥에 닿을 만큼 자세를 낮춘 진이 바닥을 쾅! 박찼다.
파지지직!!
자전을 휘감은 몸뚱어리가 그대로 타하의 몸을 거칠게 들이받았다.
효과는 확실했다.
놈이 미간을 좁히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으니까.
하지만 진도 더 따라붙지 못했다.
충돌의 후유증이 예상외로 심했기 때문에.
마치 쇳덩어리에 전속력으로 부딪힌 느낌.
전신의 뼈마디가 지잉—하고 울려 한순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굳이 게임에 비유하자면 스턴에 걸린 위기의 순간.
거대한 망치가 머리 위로 곤두박질치기 전에 누군가 옷깃을 확 낚아챘다.
숨이 켁 막히는 상황에 진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너 자하드였냐?!"
펜릴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대답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게 목이 졸리는 와중이라서.
"켁! 새꺄···!"
신장이 210cm에 달하는 늑대인간의 질주에 바닥에 뒤꿈치가 질질 끌리던 진이 뒤늦게 돌아온 다릿심을 느끼며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직후 스스로 바닥을 박차기 시작한 그가 옷깃을 잡은 손길을 뿌리치며 몸을 돌렸다.
"옷을, 당기면, 어쩌자는, 새끼야!"
띄엄띄엄 끊어지는 말 사이사이에 마른기침이 섞인다.
물론 펜릴은 신경도 안 썼다.
"그럼 대가리 깨지는 걸 보고만 있을까?!"
하긴.
금세 납득한 진이 멀리 모퉁이를 꺾는 오시아와 덴을 확인한 뒤 소리쳤다.
"저 새낀 왜 저렇게 쎈 건데! 다른 수인은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야 타하는···! 탈각을 이룬 수인이니까!"
"탈···뭐?"
"빌어먹을 온다!!"
펜릴이 크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어깨 너머로 느껴지는 바람살.
휘리리리릭!!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좌우로 찢어진 진과 펜릴이다.
그런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나아간 망치가 비스듬한 각도로 바닥에 떨어졌다.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펜릴은 바닥에 칼을 박아 버텼고-
진은 에라 모르겠다 폭발을 등졌다.
등을 밀어내는 충격파를 역으로 이용해 가속한 그가 이쪽으로 달려드는 타하의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콰직!
고개가 살짝 뒤로 젖혀졌지만, 맹수의 시선은 여전히 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 순간.
공중에서 스친 주먹이 서로의 안면을 후려쳤다.
크로스 카운터.
진이 크게 비틀거렸다. 킬기트의 소닉붐 펀치에 비교할 순 없지만, 타하의 주먹도 같은 무게의 쇳덩이로 후려친 것과 비슷한 충격을 줬기에.
그때 펜릴이 검을 휘두르며 난입했다.
날카로운 기습. 날 길이만 1m가 넘는 대검이 타하의 목을 스쳤다.
분명 그랬는데······피가 흐르지 않았다. 살갗이 잘린 것이 똑똑히 보이는데도.
"···너 몸뚱이에 뭔 짓을 한 거냐?"
펜릴이 물었고, 타하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손으로 상처를 지그시 눌렀다가 떼니, 거짓말처럼 절단면이 사라졌을 뿐.
그제야 놈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와라, 펜릴. 기회를 주지."
"뭐?"
"우린 선택받은 존재다. 시대를 초월해 부활한 고대 종족의 후예. 너도 분명 들릴 텐데? 야성의 목소리가."
그에 펜릴이 검을 세웠다.
"개소리하지 마. 우린 그저 혈청을 맞았을 뿐이야. 네가 말하는 목소리란 건, 혈청의 좆같은 부작용일 뿐이고."
"대화가 안 통하는군."
타하가 고개를 저으며 한 발짝 전진할 때였다.
[그래비티]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직한 시동어와 함께 타하의 왼쪽 무릎이 픽 꺾었다.
"······?"
순간 중심을 잃은 그가 오른쪽 다리를 쾅! 내디뎌 몸이 쓰러지는 걸 막았다.
쩌저저적!
발밑으로 균열이 번진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짓눌리는 모양새.
하지만 기어이 쓰러지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니-
그 순간 펜릴과 진의 귓가로 낯선 목소리가 꽂혔다.
"이리로! 얼마 못 버텨!"
골목길의 끝.
한 남자가 다급하게 손짓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박스카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먼저 도망쳤던 오시아와 덴, 그리고 알버스가 그 안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깊이 생각할 틈이 없다.
어느새 새하얀 털이 자라나기 시작한 타하의 얼굴을 확인한 진과 펜릴이 곧바로 몸을 돌려 박스카를 향해 내달렸다.
이윽고 차량에 몸을 싣는 두 사람을 확인한 남자가 운전석에 탑승해 곧바로 액셀을 밟았다.
부우우웅-!
속도를 높이는 차 안에서, 진이 얼얼한 코를 매만지며 운전석을 향해 물었다.
"저항군?"
"······"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진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려는 찰나.
철컥.
별안간 운전자석 헤드레스트에 총부리를 딱 붙인 오시아가 말했다.
"···너 뭐야."
그에 남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도와주러 왔는데 그런 태도면 서운하지."
"신원을 밝혀."
"협박이야? 방아쇠라도 당기려고?"
"못 쏠 거 같아?"
두 사람의 대화에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당연히 저항군이 도와주러 온 거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
그럼, 씨 이걸 왜 탔어?
···라고 타박하기엔 알버스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
아니 많이 안 좋다.
의식을 잃은 상태로 온몸을 잘게 경련하고 있었으니까. 뭘 모르는 진이 봐도 생명이 경각에 달린 모습이라.
이를 룸미러로 힐끗 확인한 운전자가 입을 열었다.
"일단 동료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어? 내 뒤통수 날리면 어디 갈 곳은 있고?"
"없지 않지."
"안전 가옥?"
"······"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거긴 안 가는 게 좋아. 이미 TB가 쑥대밭을 만들었으니까."
이 새끼 뭐지?
진과 펜릴이 눈을 마주친 뒤 다시 운전자를 바라봤다.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저항군도 TB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곤 뭘 많이 안다.
심지어 무슨 마법도 쓰지 않았나? 맞아, 그래비티.
소설이나 게임에서 많이 나오는 중력 마법.
그사이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읽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라고. 조만간 다 알게 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전조등조차 켜지 않은 야간 주행이 이어졌다.
끙끙 앓는 신음 속에서 일행은 창밖으로 비치는 도시의 풍경에 눈을 맞췄다.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
아스라이 흩어지는 비명.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린 듯한 깜깜한 건물들.
어느 순간 박스카가 속도를 줄였다.
"내리자고."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가장 먼저 하차했고, 뒤이어 다른 이들도 하나둘 차에서 내려섰다.
마지막으로 알버스를 챙긴 덴이 주변을 쓱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벙커힐?"
진이 보기엔 황량한 주택가였다.
인기척 따윈 느껴지지 않는.
"여기야."
저만치 앞서간 남자가 까딱 손짓했다.
일행이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진의 곁으로 펜릴이 다가왔다.
박스카에 탑승하기 위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어느새 마스크를 채운 하관을 가까이 들이밀며 목소리를 냈다.
"함정일 수도 있어. 뭔가 이상하면 바로 공격하는 거다."
"그래."
그리하여 어느 건물의 입구.
남자가 벨을 꾹 눌렀다.
그러자 낡은 인터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명이 전사에게 속삭이길, '폭풍이 다가온다.' 이에 전사가 대답하길-]
"야, 쓸데없는 짓 말고 빨리 문 열어. 부상자가 있으니까."
[······이럴 거면 암구호를 만들질 마.]
다음 순간, 징-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남자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자, 좁다란 통로가 일행을 반겼다.
불이 켜지지 않아 음산하기까지 한 그곳을 통과하자, 이윽고 난로가 켜진 거실이 나타나더라고.
거기에 앉아 불을 쬐던 사람들이 몸을 일으키는 가운데.
그중 하나가 알버스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부상자는 이리로 데려와."
"다녀올게."
"아니, 덴. 같이 가."
덴을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됐는지 오시아가 그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러자 남은 것은 진과 펜릴 뿐이라.
그 둘을 슬쩍 확인한 남자가 여전히 난로 앞에 앉아 술병을 벌컥거리는 누군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대령님 복귀했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짤막한 대답. 이후 병나발을 불며 단번에 술을 들이켠 중노인이 히끅-하는 딸꾹질과 함께 고개를 돌리니.
그때까지도 상황을 살피던 진의 눈이 휘둥그레.
저도 모르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뺑소니범?!"
< 55화 >
노인도 진을 보았다.
만성적인 음주가 낳은 딸기코가 씰룩거렸다.
"···음?"
주름살 깊은 눈이 가늘어진다.
그렇게 1초, 2초···3초.
3초를 채우고서야 나른하게 덮인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갔으니.
"어?"
병 끝으로 진을 가리킨 그가 입을 열었다.
"누구,더라?"
"···뭣?"
진의 표정이 똥 밟은 밑창을 발견한 사람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맞은 놈은 기억해도 때린 놈은 기억 못 한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와닿을 수가 없다.
저저저, 멀뚱멀뚱한 표정. 와 씨.
진이 뒷목을 잡았다.
"어르신, 예전에 교통사고 낸 거 기억해요?"
"으음."
"하이웨이에서 오토바이 탄 사람 쳤잖아. 트럭으로."
"아아-?"
혈압을 상승시키는 추임새에 진의 이마에 핏대가 불룩 솟구치는 가운데.
그제야 노인이 진을 빤히 바라봤다.
"······네가 그 녀석이라고?"
"이거 봐. 술을 그렇게 처마시니까 사람 얼굴도 기억 못 하지. 내가 자기 전에 '나는 살인자다.' 세 번씩 복창하라고 했죠? 그거 하고 있어? 안 하지? 표정 보니까 딱 알겠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쯧.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진이 입으로 머신건을 두다다다 갈겼다.
거기에 난사 당한 노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펜릴은 칼자루에 올린 손을 거둬 뺨을 긁적거렸으며,
나머지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하여 오직 진만이 당당했으니-
그가 알딸딸하게 취한 중노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굳이 따지면 뺑소니는 아니네.
애초에 사과랑 쌈짓돈 받고 용서해 준 거니까.
그래도 얼굴도 못 알아본 건 괘씸하긴 해.
술 취해서 그런 건가?
속으로 자문자답을 이어가던 진의 미간이 어느 순간 천천히 구겨졌다.
새삼스럽게 노인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른 건 아니었다. 그저 낯설면서도 익숙한 호칭이 뒤늦게 떠올랐을 뿐.
잠깐만, 분명 대령님이라고···
그 순간, 뽕! 하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술병을 딴 노인이 병나발을 불었다.
목젖이 위아래로 꿀렁거릴 때마다, 뒤집힌 술병 안의 수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순식간에 한 병을 뚝딱 비워버린 그가 젖은 입술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마나 회로는 회복했고?"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전 나눴던 노인과의 대화를 떠올렸으니-
'온몸이 아주 걸레짝인 게 이러다 제명에 못 죽겠어.'
'누구 놀리나. 이게 다 누구 때문에···됐고. 우리 다시는 보지 맙시다. 예?'
당시에는 본인이 차로 쳐놓고 속 편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
그제야 저 알콜중독자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진이다.
그와 동시에 여태 전원이 꺼져있던 눈치 레이더가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으니-
저항군도 TB도 아닌 제3세력의 대령?
잠시만.
진이 설마 하는 눈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어르신, 시정부 쪽 사람이었어요?"
그에 웃음기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왜? 그러면 안 되는 거냐?"
***
시정부 소속 특수부대 대령, 존해리슨.
그것이 노인의 진짜 정체였으니.
진이 경악했다.
주정뱅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가락 하는 인물이라서 놀랐냐고?
아니.
이런 쪽 반전이라면 나름대로 면역이 있는 그다.
이게 다 로칸이라는 예방주사를 맞은 덕분이라서.
짜잔! 알고 보니 대단한 사람이었답니다, 라는 상황은 그러려니 넘길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진이 놀란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으니.
40대라고?!
그 얼굴이?
"···거, 거짓말이지?"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할 만큼 한가해 보여? 대령님 40대 맞아. 그러니까 계속 어르신이라고···부르지 마. 듣는 대령님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가, 우리가 좀 그래."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일행을 여기까지 안내한 인물.
이름이 Q라고 했던가.
누가 특수부대 아니랄까 봐 이니셜만 뚝 따온 모양.
정작 대령은 풀네임을 다 깠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뭐 아무튼.
"······알콜중독이 무섭긴 하네."
술 하나로 사람이 저렇게까지 겉늙어 보일 수가 있구나. 진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사이.
Q가 어딘가를 향해 까딱 턱짓했다.
"따라와. 동료에게 데려다 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앞장서는 그를 진과 펜릴이 뒤따랐다.
"대령님이 간단하게 말씀하시긴 했지만,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지. Q라고 한다."
"진이야." "펜릴."
짤막한 통성명을 끝낸 세 사람이 건물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인기척을 감지한 센서가 머리 위로 불을 탁 켰고-
Q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은데. 질문이 있다면 해도 좋아."
그에 펜릴이 기다렸다는 듯 운을 뗐다.
"시정부가 어째서 뮤트타운에 특수부대를 파견한 거지? 너희는 지금껏 일관되게 40번대 구역을 무시하지 않았나?"
"미안하지만 가정부터 틀려먹었어. 시정부는 우리를 이곳에 파견한 적이 없거든. 우리가 직접 찾아온 거지."
"···직접? 무슨 이유로."
이어진 질문에 Q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얼굴수집가를 쫓아서."
이후 고개를 제자리에 놓고 다시 발길을 옮기는 그의 모습에 진이 눈치를 살폈다.
이거 지금 놀랄 타이밍인가?
왠지 그런 거 같은데.
"얼굴수집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놀란 척부터 한 진이다.
그러면서 펜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니, 뒷말은 네가 보태라는 무언의 제스처에 펜릴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얼굴수집가라면 십수 년 전쯤 활동하던 고위험군 범죄자 아닌가? 오래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랬다면 우리가 여기에 죽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뭔가 이상해서.
"···잠깐만? 그럼 너희가 뮤트타운에 상주 중인 이유가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게 아니라, 따로 쫓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다?"
"그래."
"그럼 우린 왜 구했대. 전혀 상관도 없는데."
합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내 Q가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지 않아. 거시적으로 볼 때 저항군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선 안 됐거든. 나만 너희를 구한 게 아니야. 이 순간에도 낙오된 저항군을 구출하기 위해서 내 동료들이 도시를 정신없이 누비고 있을 테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며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환하게 넓은 내부.
격자 형태의 복도를 따라서 칸칸이 용도가 구분된 방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었으니-
그중 하나에 알버스가 누워있더라고.
삐-삐-
인공호흡기를 착용한 채 혈액팩을 줄줄이 달고 있는 모습.
머리 옆에 놓인 모니터에서 심전도 그래프가 불규칙한 파형을 그리는 중이었다.
"급한 고비는 넘겼다니 좀 지켜봐."
유리벽 너머의 풍경을 지켜보던 Q가 고개를 돌렸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저항군을 신경 쓰는 이유는 간단해. TB의 배후에 얼굴수집가가 있다는 정황을 발견했거든. 놈에게 접근하기 위해선 TB와 저항군 사이의 힘의 균형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고."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이 보기엔 언더커버의 한탄이 섞인 한숨이었다.
"그래서 여태껏 티 나지 않게 지원을 해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항군 측에서 무리한 작전을 감행해 버렸지."
"무리한 작전?"
"그건 저들한테 물어봐."
Q의 시선이 가리킨 방향으로 진과 펜릴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오시아와 덴이 나란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등 뒤로 Q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희가 솔로란 건 알고 있어. 과거에 저항군의 의뢰를 처리한 적 있다는 것도.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다시 이 난장 속으로 기어들어 왔는진 모르겠지만, 이미 우린 한 배를 탔다는 것만 알아두라고. 그러니 대화 다 나누거든 다시 위로 올라와. 할 일을 알려줄 테니까."
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려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우두커니 선 진과 펜릴의 시선이 천천히 서로를 향했다.
"일단 상황 파악부터 좀 하자."
"빌어먹을···. 그래."
***
지하실엔 한편엔 자그마한 휴식 공간이 있었다.
휴식 공간이라고 해봐야 ㄷ자 소파와 다용도실을 연상시키는 선반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둘러앉을 정도는 됐기에, 일행은 소파에 지친 몸을 기댄 채 서로를 바라봤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털보, 덴이었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군."
내내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밝은 곳에서 다시 본 그의 얼굴은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리고 그건 오시아도 마찬가지였으니, 엉망진창이 된 앞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그녀가 표독스럽게 중얼거렸다.
"시정부라니.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불퉁한 혼잣말 끝으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모두가 복잡한 속내를 정리하는 와중에, 진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흠칫.
(완료!)
퀘스트가 깨지며 충만한 경험치가 도파민이란 이름으로 머릿속을 쿵 때렸다.
순간 누적된 피로가 옅어지는 기분과 함께, 그간 차곡차곡 쌓인 경험치가 새로운 별을 밝힐 준비가 됐음을 엄숙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진은 일단 눈을 떴다.
지금은 교통정리가 우선이었으니까.
"무슨 작전이 어그러졌길래 일이 이 지경이 된 건데?"
그에 오시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썩어들어갔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속이 뒤집어지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화를 삭이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이니.
이어지는 내용은 이러했다.
하루가 다르게 영향력을 불려 나가는 TB를 보며 저항군은 이대로 내전이 이어져선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하여 급히 계획한 것이, 오직 타하를 상대하기 위한 타격대의 결성이었으니.
당연하게도 핵심 전력이 투입됐다.
오렌 팔머.
레벨 5의 솔로이자, 초인계 사이커로 강력한 역장을 두른 채 TB 측 병력을 박살 내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각성제까지 복용한 채 타하와 맞붙었다.
그리고 머리가 으깨졌다.
박살 난 육편 위에서 사자가 포효했고, 그날 저항군의 거점은 무너졌다.
너무도 허무하게.
"그렇게까지 차이가 심했다고?"
"내 말이! 심지어 오렌과 타하가 맞붙은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어. 둘은 지난 2년간 세 차례나 싸웠다고. 전체적인 양상은 오렌이 조금 밀리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따라잡지 못할 격차는 절대 아니었어. 우리가 근거 없이 움직인 게 아니야!"
흥분한 오시아의 말에 덴이 의견을 보탰다.
"이번 싸움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게 오렌이다. 각성제만 복용하면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으니까."
진은 몰랐지만, 각성제는 사이커의 뇌파를 확장하는 일종의 도핑제로 수명을 담보로 그들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강력하게 만드는 약물이었다.
물론 정확한 효능은 몰라도 어휘가 주는 느낌이 있는 법이라고.
대충 비슷하게 알아들은 진이 생각하길.
원래 비등비등해서 약 빨고 왔더니 오히려 머리가 으깨졌다?
그렇다면 답은 둘 중 하나다.
1. 상대가 그동안 일부러 약한 척을 했거나.
2. 상대도 갑작스럽게 강해졌거나.
그때였다.
"둘이 맞붙은 게 얼마 만이지?"
여태 말을 아끼고 있었던 펜릴의 물음에 오시아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5···, 아니. 6개월쯤."
"반년이라."
펜릴이 칼자루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타하의 목을 벴다. 깊진 않았지만 출혈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상처였지. 근데 멀쩡하더군, 오히려 순식간에 아물기까지 했어."
수인의 회복력이 평범한 인간에 비해 월등하긴 하나, 목이 잘린 상처가 십여 초 만에 붙지는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한 그가 진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그 요원의 말이 사실인 모양인데."
"얼굴수집가라고 했지?"
시정부의 특수부대가 쫓고 있다는 범죄자.
TB의 배후로 의심 가는 존재라고 했던가.
놈이 타하에게 무슨 짓을 했다면?
뭔가 냄새가 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길한 냄새가.
하지만 진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알버스를 구하기 위해 뮤트타운에 진입한 순간부터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그였다.
왜냐고?
전적으로 내가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나이 서른 넘게 먹었으면 자기 행동에 책임은 져야지. 암.
상태창과는 어쩌다 보니 뜻이 맞았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진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면 뭐 어떤가. 그 속에서 최선의 답을 찾아 노력할 수만 있다면 충분한데.
그래, 이게 부랑아 스타일이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그가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일단 존 헤리슨인지 뭔지 그 양반한테 가보자. 뭐라고 하는지 들어는 봐야지."
< 56화 >
"아, 근데 일단 밥부터 먹자."
진이 뜬금없이 아랫배를 부여잡았다.
그러곤 윽, 소리를 내는데 그 표정이 칼에 찔리기라도 한 얼굴이라서.
일행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하지만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의 의식은 중차대한 문제를 직면하면, 이를 해결하기 전까지 다른 자질구레한 욕구들은 대충 장롱 속에 쑤셔 넣는 녀석이라서.
위험한 상황을 넘기고 안전을 확보한 지금.
뒤늦게 장롱 속 내용물이 우당탕탕 쏟아진 것이다.
밥 내놔!! 소리를 지르며.
그리하여 진이 벌떡 일어섰다.
이후 지하 공간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그가 양손 가득 통조림을 안고 돌아오는 모습에, 펜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대체 몇 개를 들고 오는 거냐."
"너희랑 같이 먹으려고······음, 안 되겠네."
진이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오시아와 덴을 피해 소파에 몸을 기댔다.
"피곤했나?"
"3일 동안 씻지도 자지도 못했다더군. 긴장이 풀린 거겠지. 갑자기 밥부터 먹자는 누구 덕분에."
"그래서 뭐 줄까."
"···아무거나."
새끼. 결국 먹을 거면서.
진이 피식 웃으며 '가공육'이라 적힌 통조림을 휙 던졌다.
"숟가락은?"
"없는데? 그냥 마시던가 손으로 집어 먹어."
늑대인간이 무슨 식기 타령이야.
손톱만 길게 쭈우욱 뽑아도 포크가 따로 필요 없겠구만.
오. 스위트콘. 맛있겠다.
진이 고개를 젖혀 통조림을 탈탈 털었다.
노오란 알갱이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그걸 한가득 머금은 볼이 우물우물.
그 모습에 펜릴도 마스크를 벗고 식사에 나섰다.
생각해 보니 인간 모습일 때의 맨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진이 슬쩍 시선을 던지니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생김새였다. 칼날 같은 눈매와 퍽 어울리는 날카로운 턱선.
그 위를 뒤덮은 우둘투둘한 흉터들.
"뭘 봐."
"까칠하긴."
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새로운 통조림을 땄다.
그러고는 집게손가락으로 내용물을 몇 번 건져 먹고 말하길.
"TB···아니, 타하랑은 무슨 관곈데?"
"별거 없어. 한때 동료였던 사이지."
"뒤통수라도 쳤어?"
"뒤통수는 무슨. 뜻이 달라서 갈라진 것뿐이야."
"타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 거 같던데. 뭐라더라. 운명? 내면의 목소리?"
그에 펜릴이 가공육을 으적으적 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야수병이 제대로 도진 거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맛탱이가 갓더라고."
"야수병? 그게 뭔데."
진이 질문과 함께 통조림을 던졌고, 그걸 허공에서 낚아챈 펜릴이 대답했다.
"야수 혈청의 부작용. 비이성적인 파괴 충동이 솟구치는데 그 와중에 환청이 들려온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군."
"너도 그래?"
"가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펜릴이 어느 순간 입꼬리를 비틀었다.
"괜히 수인들이 사회에서 외면받는 게 아니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취급이지."
자조적인 냉소에 진의 눈길이 다시 펜릴의 하관을 향했다.
불규칙한 칼자국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저거 손톱자국이다.
아마도 충동이 몰려올 때마다 애꿎은 얼굴에 화풀이를 한 모양이었다.
아주 걸레짝을 만들어놨구나, 진이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시선을 느낀 펜릴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익숙해지면 견딜만해. 나만 해도 몇 년째 문제없이 잘 넘기고 있고."
"근데 타하는 참지 않았다?"
"···녀석은 경우가 달라. 탈각을 이뤘으니까."
그에 진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맞다. 안 그래도 그걸 물어보려고 했었지, 하고.
"야, 너 얘기 잘했다. 도대체 탈각이 뭔데?"
"···질문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냐? 도대체 아는 게 뭐지?"
펜릴이 불퉁한 목소리로 받아쳤지만, 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통조림 국물을 꿀꺽꿀꺽 마실 뿐이었다.
모르면 물어야지. 그럼 어째.
불치하문이라고. 공자께서도 어? 모르는 걸 묻는 일을 부끄러워 말라 하셨다 이거야.
여기서 토막상식. 불치하문의 '하'는 아래 하(下)자를 쓰니, 아랫사람 혹은 학식이 부족한 사람을 뜻했다.
즉 저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질문하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었으니.
솔로 레벨도 같고, 상식도 몇 수는 위인 펜릴은 어떤 식으로든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원래 글은 반만 배운 놈이 더 당당한 법.
진은 빤히 대답을 기다렸고,
펜릴은 피식 김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 탈각!
껍질을 깨고 나온다는 뜻 그대로, 인간이 모든 면에서 한 단계 성장한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단어였다.
사용하는 힘에 관계 없이 특정한 조건과 깨달음을 통해 맞이하는 개벽의 순간.
이는 눈앞을 가로막은 벽을 깨부수고, 더 넓은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니.
그렇게 만난 세계 또한 다음 세계를 가로막는 새로운 벽이라.
나를 감싼 세상이자, 저 너머를 향한 경계라는 뜻에서 위계(位界)라는 명칭이 붙는다나 뭐라나.
"으음."
진이 흥미진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그런 순간을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킬기트와 싸웠던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꽂혔을 때, 한순간 세상이 확 달라 보이지 않았나?
마치 새 안경을 쓴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지만, 당시에는 확실히 뭐가 달라도 달랐던 거 같다고.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크로우, 로칸, 킬기트 같은 이들은 몇 번째 세상에 발을 딛고 있을까?
어째서 그들의 강함을 파악하는 게 한없이 막연하게 느껴졌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사는 세상이 달랐구나.
그때 펜릴이 하던 말을 이었다.
"평범한 이들은 평생토록 경험하지 못하는 게 바로 탈각이다. 레벨5 이상의 솔로들이 바로 이걸 해낸 놈들이고······잠깐, 어쩌다가 얘기가 여기까지 샌 거지?"
짜증 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던 그가 진을 바라봤다.
"···아무튼, 타하가 탈각을 이룬 수인이라는 건 이만하면 충분히 이해했겠지."
"2위계."
배운 걸 바로 써먹은 진이다.
사실 아직까진 입에 익지 않은 낯선 단어라 괜히 한 번 발음해 본 것도 있었고.
"본론으로 돌아가서, 타하가 점잖게 미친 소릴 하는 이유가 바로 탈각 때문일 거다. 수인은 탈각을 거듭할수록 광증이 점점 심해지니까. 정확히는 벽을 허무는 과정에서 광증에 사로잡힐 위험이 극도로 올라간다고 하더군."
본인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일까.
펜릴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몸을 파묻었을 뿐이니.
어느새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더라고.
그렇게 진이 혼자 남은 순간.
상태창이 떠올랐다.
「(전조!)전란의 야수2」────────
타하를 처치하고 TB를 와해하시오.
*보상 퍽 XP 9,000
──────────────────
떨떠름한 얼굴로 눈앞의 네모난 박스를 바라보던 진이 조용히 팔짱을 꼈다.
"경험치 되게 많이 주네. 또 얼마나 고생시키려고."
작게 구시렁거린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진이 눈을 뜬 건 소음 때문이었다.
다급한 발소리. 악악거리는 비명.
그리고 짙은 피 냄새.
반사적으로 벌떡 소파에서 일어선 그의 눈에 들것에 실려 움직이는 사람들이 담겼다.
그들이 구출된 저항군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중 제 발로 터덜터덜 움직이는 사람이 둘.
한 명은 초면이었지만, 다른 한쪽은 진도 아는 얼굴이었다.
예전 저항군의 거점에서 신세를 지던 시절에 주치의 노릇을 했던 여인.
아마 이름이-
"그레이스?"
"···진?"
피와 흙먼지가 엉겨 붙어 엉망진창이 된 얼굴에 놀란 기운이 감돌았다.
"당신이, 어떻게?"
"알버스가 불러서 왔어."
"···알버스도 여기에 있나요?"
"있긴 한데, 대화는 힘들 거야."
그사이 정신을 차린 오시아와 덴이 그레이스와 함께 걸어온 다른 저항군과 얘기를 나눴다.
극적인 해후였지만 오가는 대화는 절망적이었다.
누가 죽었다, 누가 죽었다 하는.
산사람의 어깨를 짓누르는 이야기들.
곧이어 힘없이 툭 떨어지는 고개.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다시 그레이스를 바라보니.
"멀쩡한 건 너랑 저 사람뿐이고?"
"네, 맞아요."
대답이 돌아오긴 했지만, 이쪽도 딱히 멀쩡해 보이진 않았다.
반쯤 넋이 나간 게 솔직히 말해서 그냥 움직이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더라고.
이런 꼴이면 빈말로도 도움이 안 된다.
그게 몇 명이든 간에.
"쉬고 있어."
진이 그렇게 말하며 그레이스를 지나쳤다.
비명이 울려 퍼지는 복도를 통과해, 빙글빙글 3층 높이에 달하는 계단을 오르니 다시 벽난로가 있는 거실이다.
그에 가만히 불을 쬐고 있던 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히끅-, 왔나?"
그 겉늙은 면상을 삐뚜름하게 쳐다보던 진이 이윽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나아가는 와중에 손을 뻗어 의자를 챙기니, 자연스레 상대의 맞은편에 착석한 뒤 빤히 눈을 맞췄다. 그리고 입을 열길.
"이게 맞아?"
앞뒤 문장 다 자른 질문에 대령이 고개를 갸웃.
그 와중에 인기척을 느끼고 방문을 연 Q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대령이 그를 향해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무슨 소리냐?"
"밑에 있는 사람들 얼굴 못 봤지? 사기가 팍 꺾여선 아주 흐물흐물 난리도 아니야. 저대로는 못 싸워. 몇 명이 모이든."
거침없는 말투였다.
뒤에서 지켜보는 Q가 흠칫거릴 정도로.
물론 진은 신경도 안 썼다.
노인도 아니고, 어디 아픈 사람도 아니고, 무려 특수부대의 대령 나으리 아닌가.
굳이 공대를 써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말끝이 확 짧아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만 상대하는 입장에선 그 온도 차가 극심한 것이라, 대령이 헛웃음을 쳤다.
"그래서?"
"이대로 패잔병들 계속 모아들여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소리야. 이미 거점은 박살 났고, 가장 강력했던 동료도 죽은 마당에 퍽이나 힘이 나겠다."
그에 Q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 발짝을 옮기는 순간.
재차 그를 제지한 대령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그 부분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찮아. TB를 상대할 병력은 필요하거든. 히끅-"
"댁들이 상대하면 되잖아."
"그랬다간 목표물이 발을 빼고 말 테지."
"···얼굴수집가?"
"그래."
대령이 그렇게 말하며 술병을 기울일 때였다.
저벅.
거실 너머에서 펜릴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없이 팔짱을 끼는 그를 슬쩍 확인한 대령이 젖은 입술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희의 도움이 필요한 거다."
""우리?""
진과 펜릴이 동시에 답하는 가운데.
대령의 눈짓을 받은 Q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너희 두 사람을 필두로 타격대를 구성할 계획이야. 목표는 타하의 처치. 더불어 너희가 놈과 TB 측 병력을 상대하는 동안 우리는 얼굴수집가를 쫓는다."
요컨대 오렌이 성공하지 못한 작전을 대신하라는 소리였으니.
다음 순간.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성공 보수는 각각 1억 크레딧을 약속하지."
"히익!"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잔뜩 들이켠 진이 그 반동으로 사레가 제대로 들렸다.
쿨럭쿨럭 아주 난리가 났으니, 정신이 없는 와중에 앞쪽에서 누가 병을 내밀더라고.
급한 대로 그걸 낚아채 한 모금을 마시기 무섭게 푸훕! 정면으로 미스트를 분사한 진이다.
술이잖아!
대령이 크하핫,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펜릴이 입을 열었다.
"우릴 그 정도로 고평가한다고?"
"충분히 고평가받을 만하지. 크로우를 상대하고 살아남은 솔로라면 말이야."
Q의 대답에 한창 손등으로 젖은 턱밑을 훔치던 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대?"
"일을 맡길 인물들인데 이 정도 조사는 해야지."
그리고 다시 펜릴의 목소리.
"크로우가 개입할 가능성은?"
"다행히 녀석은 뮤트타운에서 손을 뗀 걸로 보여. 아마도 잠시 이해관계가 맞물렸던 거겠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원은 없나? 명색이 시정부의 요원이면서."
"미안하지만 우리도 예산이 빠듯해서 말이야. 의뢰금만으로도 성의는 충분히 보였다고 생각하는데."
거기까지 말한 Q가 진과 펜릴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솔직히 거절할 이유가 없긴 했다.
다량의 경험치와 거액의 크레딧을 한 번에 챙길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스쿼드였으니-
인원이 더 붙는다고 해봐야 고작 살아남은 저항군 몇몇이 전부일 텐데, 전력이 너무 빈약하지 않나?
듣자 하니 지원도 제대로 못 해주는 거 같은데.
그때였다.
지이이잉----
가슴팍 속에서 진동이 길게 울렸으니.
"아, 죄송."
멋쩍은 미소를 지은 진이 단말기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혹시 칼리파인가 싶어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른 그가 귓가에 단말기를 붙였다.
"여보세요?"
동시에 귓가에 꽂히는 사무적인 목소리.
[원더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귀하께 장비를 지원하고자 하는데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라주시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온갖 장비들의 사진과 정보가 메시지로 주르륵 전송되기 시작됐으니, 이를 확인한 진이 눈을 부릅떴다.
순간 단말기를 손바닥으로 덮은 그가 고개를 옆으로 쭉 빼고 헛기침을 큼큼!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스피커 쪽으로 대며 말했다.
"그, 저, 미안한데. 전부 줄 수 있을까?"
< 57화 >
원더는 말이 없었다.
"······"
조용한 단말기와 그 때문에 더 적나라게 느껴지는 주위의 시선들.
진이 아차 했다.
너무 철면피였나?
그래, 다 달라는 건 양심 없지.
그럼 2개, 아니 3개만···
[이유가 있으십니까?]
침묵을 깬 목소리에 진이 흠칫.
"아 잠시만."
눈짓으로 주변에 양해를 구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정면에 보이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빈방이더라.
이후 등으로 문을 밀어 닫은 진이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며 말하길.
"아아, 들려?"
[네, 말씀하시죠.]
"내가 지금 뮤트타운이거든?"
설명이 이어졌다.
구구절절한 부연 없이 최대한 간결하게.
그리하여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저항군을 도와 TB와 싸우는 중인데 전력이 턱없이 밀리는 상황이라 도움이 필요하다. 어떻게 안 되겠니?'
였으니.
이윽고 원더가 응답했다.
[흥미롭군요. 와해된 저항군이 마지막으로 펼치는 최후의 작전이라. 서사 자체는 확실히 마음에 듭니다.]
그에 진이 소리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기업놈 아니랄까 봐.
죽고 사는 문제에 서사 타령이네.
물론 부정적인 답변보단 이쪽이 백배 낫긴 하지만.
···이라고 생각하자마자 들려오는 우려의 목소리가.
[하지만 성공률이 턱없이 낮게 들리는 것도 어쩔 수가 없군요.]
"어. 음."
진도 이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사실 저것도 되게 순화해서 말해준 거 아닐까.
'자살하러 가십니까?'가 아닌 게 어디야.
그사이 단말기 너머에선 톡톡톡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 보이진 않아도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원더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더라고.
그리고 어느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좋습니다. 지원해드리도록하죠.]
"···엉?"
길어지는 기다림에 반쯤 포기하고 있던 진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정말?"
[원하시던 것 아니셨습니까?]
"맞지. 어, 맞아."
[작전에 투입될 인원들의 정보를 정리해서 보내주시면 그에 맞춰 장비를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화끈한 지원 예고였다.
영업팀장이라더니, 사내에서 영향력이 큰 편인가?
물론 진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길.
"알겠어. 정해지는 대로 연락할게."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뚝 끊어지니.
단말기를 멀뚱하게 바라보던 진이 중얼거렸다.
"···이게 되네."
*
허공에서 물결치던 홀로그램 파형이 잦아든다.
상대와의 음성 연결이 끊겼다는 뜻인즉.
통화를 마친 원더가 조용히 팔짱을 꼈다.
"···저항군이라. 범상한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스폰서십을 체결한 지 하루도 되지 않는 마당에 전쟁터라니.
어지간해선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법이 없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저런 의뢰만 골라 맡으니, 미친 듯한 성장세를 보이는 걸까.
확실히 다르다.
이미 도시의 전설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러했듯이.
원더는 진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솔로 등급에 빗대자면 최소 5레벨, 어쩌면 그 이상도 넘볼 수 있을 거라고.
이번 스폰서 체결에 있어 윗선의 결재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행동으로 나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과감한 판단이야말로, 밑바닥 출신이던 그가 뼈대 굵은 군수제조사의 팀장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으니-
다시 한번 판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음에,
유능한 야심가는 기꺼이 외줄 위로 발을 올렸다.
실패하면 지금껏 다져온 입지가 크게 흔들리겠지만,
반대로 성공한다면 더 높은 곳까지 날아오를 날개를 얻을 기회.
R&D는 실험적인 발상을 기조로 삼은 회사답게 사원들의 행동에 큰 제약을 두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실패를 용납하진 않는다.
해서 이번 일은 원더에게도 일종의 승부수나 다름없었으니,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재밌군."
*
루거&돌만의 지원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진은 시정부의 의뢰를 기꺼이 수락했다.
대령과 Q는 굳이 전화 내용을 캐묻지 않았으니.
작전 개시일은 내일 밤 9시가 될 거란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지하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는 진에게 펜릴이 다그쳐 물었다.
"R&D라니? 후원사가 있었다고?"
"어."
"언제부터?"
"어제. 에넥도트에서 싸인했어. 아직 잉크도 안 말랐을걸."
"···무슨."
펜릴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진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래 봐야 넷밖에 없었지만.
"오시아! 덴! 그레이스! 저 뭐야, 아저씨!"
그 외침에 저항군들이 천천히 모여들었다.
여전히 우울감이 만연한 얼굴.
듣기로는 치료를 받던 동료 셋이 더 죽었다고.
그럼에도 진은 심심한 위로가 아닌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나와 펜릴을 중심으로 타격대가 구성될 거다.
당신들이 거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루거&돌만이 우릴 지원할 예정이다.
기업이 왜 우릴 지원하냐고?
내가 누구? R&D 앰배서더.
복합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타하를? 오렌도 실패했는데?
그래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어.
갑자기 이게 무슨?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차차 마음을 추스른 저항군이 의견을 통일했다.
"무조건 해야지. 이대로 끝낼 순 없잖아."
"그래, 정신 차리자고."
마지막을 불태울 기회라고 생각했을까.
퀭하기만 하던 눈빛에 천천히 생기가 돌아왔으니.
이제야 볼만한 얼굴이 된 저항군들을 슬쩍 곁눈질한 진이 단말기를 들었다.
늑대인간이 하나(변신하면 210cm 정도)
하반신이 사이버웨어로 이뤄진 남성에.
오른쪽 눈이 기계안인 여성······
타닥타닥.
엄지를 두드려가며 원더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한 사람 더 추가해."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일행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수액걸이를 잡은 알버스가 있었다.
"괜찮겠어?"
"방금 한 놈 더 갔다. 산사람은 밥값 해야지."
광대까지 닿을 눈그늘을 하고서 그가 말했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몰골.
하지만 누구도 알버스를 말리지 못했다.
빈말이라도 거절하기엔 여유가 없었기에.
"무르기 없다."
"당연하지, 인마."
대답과 동시에 진이 알버스까지 포함한 스쿼드의 정보를 원더에게 전송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손에 쥔 단말기의 진동과 함께 답장이 왔으니-
거기에는 개개인에게 지원될 장비의 물품과 사용법.
그리고 보급이 떨어질 좌표와 시간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
새벽이 지나 아침.
그리고 다시 오후가 될 때까지.
한나절 남짓한 시간 동안, 저마다 휴식을 취한 일행이 다시 한곳에 모였다.
이번에는 대령도 함께였다.
그래도 작전 브리핑이라고 술병은 쥐고 있지 않더라.
불룩한 건빵 주머니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타깃은 '플랫아이언'이라는 빌딩에 있다. 부두 근처에 버려진 미완공 건물이었지만, 최근 TB가 손을 보고 거점화시켰지."
대령의 말에 저항군 멤버들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흘 전까지만 해도 TB와 전쟁을 하던 이들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직접적인 도움은 줄 수 없지만, 그래도 탈것 정도는 제공하도록 하지. 건물 밖에 전술차량이 있을 테니 그걸로 움직이면 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작전 개시 전, 들려야 할 장소가 있는 일행이었기에 더더욱.
"그럼, 무운을 빌지."
딸꾹질 없이 브리핑을 마친 대령이 몸을 돌리자,
일행이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라 건물을 나섰다.
"저거네."
뚜껑 덮인 픽업트럭처럼 생긴 중형 군용차량이 그들을 반겼다.
"운전은 내가 할게."
군화끈을 바짝 조인 오시아의 말에 일행이 차례차례 차량에 탑승했다.
덴이 조수석에 탑승하고 나머지가 그 뒤로 타는 형식이었다.
"일단 장비부터 챙기자고."
그리하여 차량이 거리를 주파했다.
1차 목표는 루거&돌만에서 보낸 보급을 챙기는 것.
이윽고 약속된 좌표에 도달한 일행이 숨죽인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저기!"
덴이 번쩍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가리킨 방향.
날렵하게 생긴 기체 한 대가 허공을 슥 스쳤다.
동시에 화물칸을 연상시키는 철제 박스가 떨어졌으니.
이를 발견한 진이 흠칫.
그냥 저렇게 떨어뜨린다고?
자고로 공중 보급이라 하면, 커다란 낙하산에 매달린 채 새빨간 연기를 내뿜으며 떨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때였다.
영락없이 자유낙하를 하는 줄만 알았던 박스의 하단부에서 푸른 불꽃이 점화된 것은.
그러더니 부드러운 선회를 선보이며 일행들이 모인 공터에 착지하더라고.
"오우."
상상도 못 한 최신 기술에 놀란 진이 감탄하는 가운데.
[R&D] 로고가 위풍당당하게 박힌 박스가 저 알아서 입구를 좌우로 펼쳤다.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는 장비들.
"···미쳤군."
"완전 제대로잖아."
일행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전에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눈앞에서 펼쳐진 장비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던 모양.
하지만 멍청하게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으니.
"빨리 자기 물건부터 챙겨."
누군가의 말과 함께 모두가 서둘러 장비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전날 메시지로 전달된 것과 똑같다.
강화외골격, 일명 엑소 스켈레톤(Exo-Skeleton)이라 불리는 기계식 의복이 시작이었다.
진의 고향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인 물건.
하지만 완성도 면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경량화된 티타늄 베이스 합금으로 만들어진 바디는 착용자의 운동 능력을 부작용 없이 대폭 상승시켜 주며, 나아가 신경 증폭 물질로 이뤄진 전투 자극제가 내장되어 있어 이를 투여할 시 짧게나마 강화 인간에 필적하는 반응 속도를 얻을 수 있다고.
당연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충전 사격이 가능한 관통형 SMG 라고 쓰고-
킬 비스트라고 읽는 기관단총이 넉넉한 탄창과 함께 모두에게 지급됐으니.
"······"
펜릴이 어쩐지 찝찝한 표정으로 이를 챙기더라.
또 있다.
열 감지 기능이 탑재된 방탄 페이스.
그리고 그런 방탄 페이스가 장착된 티타늄 헬멧.
고정형 총검이 부착되어 급하면 냅다 주먹을 날려도 문제없는 전자동 핸드건.
거기에 바디캠 달린 고성능 플레이트 캐리어(경량 방탄복)까지.
호화로운 셋업에 진이 감동했다.
이렇게까지 해준다고?
가슴 한편이 절로 뜨거워진다.
이게 애사심?
고향 땅에선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절로 주먹을 불끈 쥔 그다.
"···계약하길 잘했다."
"야, 혼잣말할 시간에 네 무기나 챙겨."
펜릴이 어깨를 툭툭 쳐 박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진이다.
그러자 보이는 건 육중한 대전차 로켓.
강화인간(은 아니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그렇게 보낸) 진과 수인인 펜릴을 위한 무기였다.
전장이 1,400mm에 이르는 데다가, 탄두 탑재 시 무게만 무려 30kg 가까이 나가는 괴물이었으니, 사실상 이 정도면 포신을 똑 떼온 것에 가깝다.
물론 진은 기합조차 없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건 펜릴도 마찬가지라서.
그 모습을 지켜본 알버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이윽고 모든 준비를 마친 일행이 다시 차량에 탑승했다.
"플랫아이언으로 출발한다."
부아아앙!
거리낌 없이 도로를 주파하는 차 안에서 덴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작전에 성공한다면, 도시 전역에 흩어져있을 저항군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다. 리더가 살해된 마당에 추살을 이어가진 않을 테니까."
그 말에 한창 턱끈을 조절하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TB는 타하의 영향력이 지대한 단체죠. 그가 없다면 분명 스스로 와해될 거예요."
긴장을 풀기 위한 긍정적인 대화.
거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이던 진이 문뜩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맞은편의 알버스와 시선이 마주치니.
잠시간 말이 없는 가운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실소를 터뜨린 두 사람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니가 불렀잖아."
"올 줄 몰랐지."
"모르긴 왜 몰라. 밥값 청구할 거라고 말해놓고선."
진이 그렇게 말하며 팔꿈치로 옆에 앉은 펜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리고 나만 온 거 아니다? 얘도 있어."
"그래, 너도 고맙다. 펜릴."
그에 펜릴이 언짢은 표정과 멋쩍은 표정이 반씩 섞인 얼굴로 대답했다.
"TB가 설치는 게 꼴같잖았을 뿐이야."
"하여간 배신자 새끼."
"배신한 적 없다고 했을 텐데."
눈에 쌍심지를 켜는 펜릴과 그러건 말건 코를 후비적거리는 진을 향해 알버스가 말했다.
"다 끝나면 술이나 한잔 하자고."
"어어. 클리셰 멈춰."
손바닥을 척 세운 진이 도리질 쳤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싸워. 그런 마음가짐이어야 해."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펜릴이 미간을 꿈틀거렸고,
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어느 위인의 말씀이다 이거야."
그 순간, 팅! 하는 소리가 차량을 스쳤다,
동시에 운전대를 잡은 오시아가 소리치길.
"경고 사격이야. 멈추라는데?!"
"웃기고 있네."
진이 사납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상부 뚜껑을 열어젖히고 상체를 쭉 내미니 어느새 어깨에 대전차용 로켓을 얹은 그다.
정면에 십여 층짜리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첨탑처럼 개조된 외벽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TB의 병사들도.
이 순간 진은 어떤 사명감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홍보였으니-
이만한 지원을 받았으면 언급 정도는 시원하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어쩌지.
모르겠다. 씨. 그냥 하자.
그리하여 조준.
뭔가 이상함을 느낀 TB측 병력을 향해 거대한 총열을 겨눈 진이다.
목표는 포착했고, 이제 딱 외치기만 하면 되는 타이밍인데,
문제는 갑자기 제원이 떠오르질 않더라고.
원더가 보내준 메시지에는 열압축 뭐시기 포탄?
탠덤 탄두? 어쩌고? 였던 거 같은데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아서.
이러는 와중에도 점차 가까워지는 건물에 진이 뇌를 비웠다.
그러고는 냅다 외치길.
"루거앤 돌만의 아무튼 엄청 강한 폭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아아앗!!"
직후 굉음과 함께 거대한 탄두가 허공을 날았다.
< 58화 >
진이 기억하지 못한 대전차 로켓의 정보는 이러했다.
파우스트α.
일회성 방어체계를 꿰뚫기 위해 고안된 이중 탄두(Tandem-charge)를 사용.
장갑 관통력이 1,000mm 이상이 나오는 괴물.
육중한 중화기가 꽁무니에서 엄청난 화염을 뿜었다.
화악!!
발사의 후폭풍을 뒤로한 채 탄두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눈 깜짝할 새 착탄점에 다다른 투사체가 강철로 덧대진 외벽을 뚫고 들어갔다.
거기까지가 불과 1초 남짓.
직후 대기가 일그러지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고온·고압의 열파가 건물 내부를 휩쓸고.
앞유리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일행들의 동공이 붉게 물드니.
일련의 과정이 바디캠에 기록되는 가운데.
진의 몸이 앞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후면 사출구로 가스가 뿜어져 반동을 상쇄시켰다 한들, 포신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것까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동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해서.
어욱!
뼈 전체가 울리는 충격에 진이 헛바람을 삼켰다.
이게 다 파우스트 알파가 보그 무기라서 그렇다.
R&D의 야심작 보그 시리즈.
전신을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를 위한 전용 장비의 등장이었으니-
예상 못 한 멘트와 타이밍에 어디선가 원더가 엉덩이를 들썩.
물론 진은 그런 거 모르겠고 어지럽기만 했다.
살면서 방아쇠나 당겨봤지, 로켓 런처를 언제 발사해 봤겠는가.
발포하는 요령이 없었던 탓에 머리를 딱 붙이고 쏜 게 화근이었다고.
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해서.
착탄점에서 가장 가까운 2, 3층의 유리가 폭압에 죄다 터져 나갔다.
그 안에 있던 놈들은 보나 마나 충격파에 내장이 터졌거나, 화구에 삼켜져 소사(燒死)했을 터.
이게 열압축포탄의 장점이다.
적군만 잡아내면서, 건축물의 손상은 억제할 수 있으니까.
결과적으로 적과 일행, 양측 모두 난리가 났다.
"고, 공격이다!"
"시발! 저항군인가!"
느닷없는 포격에 TB측 병력이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고-
"뭐, 뭘 쏜 거야?"
"저 새끼들 정신 못 차린다! 지금!"
"정문으로 돌입할 거야! 다들 아무거나 꽉 잡아!"
오시아가 와락 소리치며 액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
부아아앙!!
과열된 엔진음과 함께 펜스를 '텅!'하고 들이받은 차가 그대로 건물 입구로 돌진하자,
때마침 우르르 뛰어나오던 적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두다다다!! 빗발치는 총알과 함께 차량 앞유리를 뒤덮는 새하얀 균열들.
하지만 오시아는 멈추지 않았다.
직선으로 내달린 차량이 가로막는 적 두어 명을 하늘로 날려버린 뒤, 그대로 와장창창!!
로비인지 뭔지, 아무튼 넓은 공간에 끼익 멈춰 서는 동시에.
"내려!"
덴이 뒤돌아보며 외쳤고,
펜릴이 문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보이는 건 엉덩방아를 찧은 채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있는 병사.
타앙!!
놈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뒤로 넘어가는 머리통 너머로 기관단총을 쥔 알버스가 차량에서 뛰어내렸다.
위로 젖혀진 페이스가드를 철컥 내리면서다.
열 감지 기능이 발동한 안면부가 멀리서 달려드는 적들의 모습을 붉은 윤곽으로 또렷하게 묘사했으니-
철컥!
지체없이, 흔들림 없이, 망설임 없이.
총구가 불을 뿜었다.
적들이 차례로 고꾸라진다.
헬멧째로 머리가 꿰뚫리는 관통탄.
그냥 격발했음에도, 이 정도다.
충전 사격 시 위력은 배 이상 상승할 터.
그만큼 반동도 극심해지겠지만 큰 문제는 없다.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강화외골격이 이를 흡수해 줄 테니까.
미쳤군.
알버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R&D라면 자판기 총이나 파는 괴짜 회사 아니었나.
재장전 불가(Do Not Reload)의 대명사.
길거리를 보면 꼭 한두 개씩 버려져 있는 담배꽁초와도 같은 물건.
허구한 날 눈에 띄는 것이 그런 식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편견이 생길 수밖엔.
그사이 두 명의 적을 더 처리한 알버스가 탄창을 교체했다.
뭐랄까. 선입견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보통내기가 아니었구나, 하는.
그리고 이는 원더가 정확히 의도했던 것이었으니,
기본이 안 되는데 괴짜 짓을 할 수 있는 제조사는 없다.
해서 이번 작전은 그 당연한 사실을 알려주는 일종의 쇼케이스라고.
물론 그 결말이 어떻게 끝맺음 될진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지만.
"부상자 있나?"
"없어."
순식간에 1층에 있던 적들을 쓸어버린 일행이 한데 모였다.
"그럼 바로 출발한다. 열기가 심할 테니까 각오해."
그렇게 말한 덴이 계단을 향해 내달렸다.
껑충거리는 보폭이 가젤과 같다.
원래도 하반신이 사이버웨어 의체였던 그다.
거기에 외골격까지 달아놓으니, 사람이 아주 그냥 날아다니더라고.
타다다닥!
순식간에 계단에 이르는 그를 뒤따라 일행들이 속도를 높일 때였다.
"내가 쏴야 했는데."
짜증 섞인 목소리에 진이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파우스트를 둘러맨 펜릴이 보였다.
소임을 다한 진의 무기는 차량에 곤히 모셔놨지만, 펜릴은 그러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이 등에 매달고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많이 걸리적거린다.
무게를 떠나서 1,400mm에 이르는 전장 때문에.
하지만 어쩌겠는가.
불만이면 빨리 쐈어야지.
그사이 폭심지였던 2층에 도착한 일행이다.
후끈한 열기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내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생존자는 없었다.
잔뜩 비틀린 구조물 사이, 불붙은 시체들만이 지글지글 타오를 뿐.
이는 3층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불에 탄 시체가 몇 구인가 정도의 차이.
해서 일행이 곧바로 계단을 밟고 뛰어올랐으니.
문제는 오시아가 계단을 밟는 순간 벌어졌다.
"히이바아아알!!!!!"
잔뜩 짓뭉개진 발음과 함께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번쩍 튀어 올랐다.
반쯤 녹아내린 얼굴이 개구리를 닮았다.
"쭈거어어어!!"
엄청난 도약으로 단숨에 오시아를 낚아챈 놈이 그대로 불길을 뚫고 깨진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뒤이어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웽웽웽! 하는 경보음은 덤이다.
"오시아!"
화들짝 놀란 비명. 창가를 향해 달려가는 그레이스의 어깨를 덴이 잡아끌었다.
"안 죽었다. 고작 3층이야!"
그의 말대로 곧이어 아래쪽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끄아아악!' 발악하는 비명과 무언가 쾅쾅 부서지는 소리도.
그뿐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소란을 듣고 몰려들 TB의 지원 병력이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은 단호했다.
"우리의 목표는 타하다! 잊지 마!"
그 외침에 그레이스가 창가에 고정된 눈길을 돌렸다.
동시에 진이 그녀의 등을 떠밀며 4층으로 달렸으니-
"왔다!"
"죽여!"
이미 준비를 마친 적들이 일행을 향해 탄환을 퍼부었다.
그때부턴 정신없는 싸움의 시작이었다.
총알이 빗발치고, 수류탄들이 좌우로 크게 포물선을 그렸으며, 자욱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그 연기를 뚫고 수인화를 마친 간부들이 달려들었다.
양손에 단검을 쥔 생쥐 대가리가 둘.
즉시 진과 펜릴이 나섰다.
진의 주먹이 한 놈의 머리통을 부쉈고-
펜릴의 발톱이 다른 놈의 울대뼈를 잡아 뜯었다.
두 사람 역시 외골격을 장착했다.
평범한 이들에 비해선 효율이 떨어질지 모르나,
도움은 차고 넘친다.
적어도 진이 마나를 아낄 수 있을 만큼.
탕!!
쓰러진 적의 후두부에 총알을 박아 넣은 알버스가 피에 젖은 페이스가드를 훑어내며 소리쳤다.
"계속 가!"
다시 전진.
그렇게 5층, 6층, 7층.
난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큭!"
일행 사이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필릭스, 그레이스와 함께 구출된 저항군이었다.
근거리에서 샷건을 맞고 무릎을 꿇었다.
방탄복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내장이 진탕되는 충격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다.
"좆같은 새끼! 뒤져."
낮게 으르렁댄 상대가 다시 한번 샷건을 쏘아붙였다.
타앙!!
몸을 데굴데굴 굴러 이를 회피한 필릭스가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쾅 때렸다.
동시에 그의 동공이 확장됐다.
전투자극제 투여.
신경 증폭 물질이 뇌를 자극하자, 일순 느려진 세상 속에서 그가 허리춤의 핸드건을 뽑았다.
타타타타탕!!
한발도 빠짐없이 미간에 때려 박힌 탄환에 적이 기우뚱 쓰러졌다.
쿵! 쿵! 쿵!
몇 배는 빨라진 듯한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필릭스가 엄청난 속도로 탄창을 교체했다.
그러고는 정면을 향해 총구를 철컥 겨누니, 그곳에는 하이에나의 얼굴을 한 수인이 네발로 달려들고 있었다.
타아앙!
등 뒤로 들려오는 총성에 한창 층계참을 오르던 진이 고개를 돌렸다.
시야의 바깥이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격렬한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었을 뿐.
누구지?
그 순간, 뒤돌아보고 있는 그를 향해 누군가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헬멧을 스쳤다.
스친 이유는 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다음 순간.
그라비스가 포효했다.
타앙─!!
몸이 붕 떠오른 적이 벽에 등을 부딪치고 주르륵 미끄러지자,
진이 놈의 머리를 축구공처럼 걷어찼다.
8F라고 적힌 벽에 핏물이 촤악 튀겼다.
발등에 들러붙은 눈알을 털어낼 틈도 없이 그라비스를 추켜세운 진이 격발했다.
계단 위에서 상체를 쭉 빼고 사격을 준비하던 놈의 목에 커다란 바람구멍이 생겼다.
"흐으으!"
최후의 들숨과 함께 놈이 철퍼덕 쓰러진 순간.
"저기다!" "좆같은 저항군 새끼!"
또다시 적들이 밀려들었다.
진이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등 뒤에선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지만, 거기에 신경을 쏟을 틈이 없었다.
어느샌가 혼전 양상으로 돌입한 싸움이다.
정신없는 와중에 다들 뿔뿔이 흩어져선 지금에 이르렀다.
증원군이 비상계단과 승강기를 통해 사방에서 쏟아지니, 지나온 층이라고 안전하지 않고, 앞서갔다고 해서 길을 뚫어준 것도 아니다.
난리 났네.
새삼 이게 얼마나 미친 작전이었는지 실감이 된다.
고작 여섯 명이 적의 거점을 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진은 달렸다.
가로막는 적들을 분쇄하면서.
8층.
그라비스의 탄창이 바닥났다.
핸드건을 잡았다.
9층.
페이스가드가 망가졌다.
열감지 기능을 쓸 수 없는 와중에 연막탄이 발밑에 깔렸으니, 희뿌연 시야 속에서 오직 감각만을 이용해서 전투를 이어갔다.
10층.
핸드건의 탄창도 바닥났다.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무시했다.
11층.
일행 중 누군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생사를 확인할 틈도 없이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뒤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12층.
수인화한 펜릴이 간부 셋과 싸우고 있었다.
이미 바닥에 쓰러진 놈까지 합치면 넷이다.
밀리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이 마주친 늑대인간은 거칠게 고개를 내저으며 일갈했다.
"위에! 타하가 있다!"
진이 달렸다.
마지막 층을 향해서.
그리하여 13층.
이전까지와 달리 고요가 내려앉은 그곳에 타하가 있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의 중심에 앉아, 등 뒤로 붉은 문신을 빼곡히 박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까지 왔나, 자하드."
"대장이라고 광고하냐? 혹시나 했는데 진짜 꼭대기에 있었네."
진이 핏물을 옆으로 퉤 뱉었다.
"일어나, 새끼야."
그에 타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거대하기 짝이 없는 망치의 손잡이를 잡으며 말하길.
"너는 내 상대가 아니다. 그때 깨닫지 못했나?"
놈이 이전의 싸움을 간접적으로 언급했을 때였다.
파지지직!!!
세상에서 가장 난폭함 지저귐이 공간을 가득 메우니-
"···깨닫지 못했군."
타하가 입꼬리를 비틀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턱이 젖혀졌다.
주먹에 맞았음을 깨달은 건 그다음이었다.
"···?"
예상을 벗어난 속도에 순간 멈칫거린 타하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망치가 허공에 원을 그렸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아무것도 없었으니-
공중에서 한 바퀴를 회전한 진이 타하의 얼굴 높이에서 양다리를 폭발적인 기세로 내질렀다.
콰앙!!
통열한 타격음.
무식한 드롭킥을 얼굴로 받아낸 타하가 주르륵 밀려나는 가운데.
바닥에 착지한 진이 으르렁거렸다.
이전보다 한층 선명해진 자전을 두른 채.
"그때랑 다를 거다. 개자식아"
"···무슨."
타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그로서는 알길이 없었다.
오직 진에게만 허락된 밤하늘. 그 안의 찬란한 별자리가 한 단계 높은 곳에서 광휘를 흩뿌리고 있다는 사실을.
[마나 회로(Lv4)]
< 59화 >
R&D의 지원만 믿은 것이 아니다.
한나절의 휴식 시간.
홀로 고통을 감내한 진이었으니-
그리하여 지금.
자줏빛 벼락을 휘감은 사내가 돌진했다.
굳게 말아쥔 주먹이 타하의 복부에 꽂혔다.
타점을 중심으로 둥글게 말린 몸뚱어리가 바닥에서 떠올랐다.
100kg이 넘는 거구가 중력을 거스르는 광경은 마치 짜고 치는 레슬링 경기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쾅!
그대로 멀찍이 튕겨 나가나 싶던 타하의 몸이 허공에서 덜컥 정지했다.
오른팔로 움켜쥔 망치 손잡이 덕분이었다.
수백kg에 육박하는 대형무기가 버팀목 역할을 했고, 다음 순간 놈이 다리를 차올렸다.
턱을 노리고 솟구치는 무릎을 팔꿈치로 찍어 막아낸 진이다.
직후 한 걸음 안쪽으로 파고들며 반대쪽 주먹으로 타하의 안면을 '쩍'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이번만큼은 타하도 억지로 버티지 못했다.
오른팔이 손잡이를 놓쳤고 그의 몸이 뒤로 날았다.
진이 그 뒤를 쫓았다.
달려가는 힘 그대로 넘어진 타하를 걷어찼다.
타하는 양팔을 11자로 들어 날아드는 정강이를 막았지만, 그 안에 실린 힘에 바닥 위를 등으로 미끄러졌다.
진의 추격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손톱을 땅에 박아 속도를 줄이는 상대의 위에 올라탄 그가 주먹을 내리쳤다.
뇌기를 두른 주먹이 벼락처럼 타하를 두드렸다.
기이할 정도로 단단한 몸뚱이가 연신 흔들리며 마침내 피가 튀었다. 진득한 검붉은 액체, 비정상적인 혈액이 자전을 만나 순식간에 말라붙었다. 시커멓게 굳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 순간 진은 벼락을 내리치는 폭풍 그 자체였다.
의지를 가진 채 적을 분쇄하는 폭풍.
그 난폭한 의념.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아껴둔 마나가 폭발적인 기세로 쏟아졌다.
뇌성과도 같은 고함과 함께였다.
"으아아아--!!"
쩍쩍 갈라지는 콘크리트 속으로 타하의 몸이 깊게 박히기 시작했다.
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상대를 곤죽으로 만들겠다는 듯 쉴 새 없이 주먹을 내리꽂었다.
증발되는 피,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타격음.
그때 그 주먹세례를 비집고 솟구친 무언가가 진의 가슴팍을 둔중하게 때렸다.
궤적은 크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엄청났던지라, 진의 몸이 흔들렸다.
동시에 허벅지가 좌우로 벌어졌다. 꽉 붙들고 있던 상대의 상체가 비대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직후 새하얀 기둥이 자세가 무너진 진의 턱을 후려쳤다.
골통 전체가 흔들리는 충격. 두개골 안쪽에서 앞뒤로 진탕된 뇌가 퓨즈를 내렸다.
진의 동공이 한순간 눈꺼풀 위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되찾았다.
뇌진탕을 극복하는 엄청난 회복력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상대의 후속타는 이미 얼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촤악!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찢었을 때, 진은 5m 떨어진 거리에서 고개를 드는 중이었다.
"아씨···"
짜증 가득한 중얼거림 뒤로 아래턱에서 핏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가슴팍을 붉게 물들이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까지 시뻘건 점묘화를 남겼다.
그리고 타하가 몸을 일으켰다.
"······"
자연스럽게 진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한 뼘 이상 높아진 눈높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거대한 상체는 새하얀 털로 뒤덮여 있었으니, 그 위로 보이는 것은 풍성한 갈기를 가진 백사자의 얼굴이라.
탈각을 거친 수인이자, 뮤트타운을 전란으로 몰아넣은 하얀 맹수가 마침내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아오.
진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변신하기 전에 밀어붙여 끝장내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씨.
절로 한숨을 나올 때였다.
"저항군과는 무슨 사이지."
갑작스런 질문에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답문용 덤벼들 줄 알았더니 아니네?
그러잖아도 살점이 뭉텅 뜯긴 턱밑을 지혈하느라 손등으로 상처를 꾹 누르던 진이 속으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별 사이 아닌데."
"그런데 여기까지 왔다?"
"왜, 그럼 안 되냐?"
그러자 타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잘 됐군."
놈이 푸른빛 눈동자를 빛냈다.
"우리와 함께하자. 너는 자격이 있다."
"···음?"
난데없는 스카웃 제안에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더러 TB로 들어오라고? 갑자기?"
"그래."
"난 수인 아닌데?"
"상관없다. 너라면 야수 혈청을 견디고도 남을 테지."
아, 그런 뜻이었어?
진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는 와중이었다.
시야의 구석에 미니미한 창이 스크롤 내린 화면처럼 둥실둥실 위로 떠오르길.
[분기! 선택지가 추가되었습니다.]
[저항군을 배신하고 타하와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수인이 될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신의 결정이 세상에 변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선명하게 나타나 차차 옅어지며 사라지는 문장들에 진이 눈썹을 꿈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으니.
"미쳤냐? 수인은 무슨 수인이야."
상태창과 타하를 동시에 저격하는 혼잣말이었다.
수인이 웬 말인가.
나는 사람이야, 사람.
쬐끄만 칩셋조차 삽입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 마당에, 대가리가 짐승으로 탈바꿈되는 상황?
곧 죽어도 싫다.
게다가 어떤 형태의 수인이 되는지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던데, 만약에 그지 같은 동물이라도 걸리면 어떡하라고.
타조 수인, 당나귀 수인, 하마 수인, 낙타 수인.
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심지어 오랑우탄이나 침팬지가 나오면?
이건 사서 퇴화하는 꼴이잖아.
애초에 영장류의 왕이 인간인데 어?
진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짐승 머리통이 된 자신을 거울로 보기라도 하는 날엔,
살아갈 용기가 바로 사라지지 않을까?
아무튼 절대 싫다.
심지어 수인은 가끔 광증이 치민다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미쳤어?
"거절!"
단호한 외침에 타하가 잇몸을 말아 올렸다.
"···위대한 고대 종족의 후예가 되길 거부하는 건가?"
"지도 한땐 인간이었으면서 뭔 소리야. 부모님한테 죄송하지도 않냐? 수인이 됐다고 해서 뿌리까지 잊으면 안 되지. 새꺄."
진이 그렇게 말하며 턱에서 손을 뗐다.
더는 핏물이 흐르지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손끝으로 타하를 가리킨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난 너 같은 독재자 꿈나무랑 겸상 안 해."
자신을 콕 짚은 일침에 타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열등한 채로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겠지."
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인 우월주의에 빠진 정신병자와 무슨 대화가 더 필요할까.
그저 피가 멎었으면 된 일이라고.
전의를 다진 그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파지지지직!!
다시 한번 자전이 몸을 휘감았다.
출력이 상승해 더욱 강렬해진 생체 전기가 육체의 반응 속도를 끌어올렸다.
찰나를 늘여 영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하드의 비원이 담긴 능력.
그리하여 한순간 느리게 흘러가는 진의 시야 속.
유일하게 본연의 속도를 유지하는 백사자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포효하니-
"커허허헝-!!"
기다렸다는 듯 진이 바닥을 힘껏 박찼다.
다음 순간.
지상에 강림한 낙뢰와 전란의 짐승이 뒤엉켰다.
***
"일······! ···버스 ······ 차려!"
귓가로 웅웅거리는 소리가 파고든다.
힘겹게 눈을 뜨자 바닥이 좌우로 흔들흔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는 시야다.
"으윽···"
극심한 현기증에 눈을 질끈 감은 알버스의 귀에 다시 조각조각 분리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정···차려! ···끼야!"
직후 억센 손아귀가 팔을 잡아끌었다.
바닥에 파묻힌 몸이 쑥 솟구치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허우적거린 다리가 겨우 바닥을 짚었고, 그렇게 반쯤 강제로 일으켜 세워진 알버스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보이는 건 얼굴 반쪽이 피투성이가 된 털보였다.
"···덴?"
"움직여! 빨리!"
먹먹한 귓가를 뚫고 마침내 선명한 외침이 파고든 순간.
툭-, 데구르르.
두 사람의 발밑으로 안전핀이 제거된 수류탄이 굴러왔다.
동시에 알버스의 몸이 옆으로 크게 날았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덴이 거칠게 가슴팍을 걷어찬 것이었으니-
우당탕탕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손으로 귀와 코를 꽉 틀어막은 알버스다.
당연하지만 눈과 입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발밑으로 굴러온 건 폭압으로 사람을 죽이는 고폭 수류탄이었기 때문에.
다음 순간 폭음과 함께 퉁겨나간 알버스가 등으로 벽과 충돌했다.
"···컥!"
허파의 공기가 증발하는 듯한 충격에 절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바닥에 철푸덕 엎어져 버르적대는 그를 향해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있었다.
"쓰러졌습니다!"
"타겟 무력화!"
"확인사살해!"
그에 알버스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왼쪽 가슴팍을 쾅 후려쳤다.
보이지 않는 슈트 내부에서 혈관을 통해 전투 자극제가 주입되자, 일순 동공이 훅 확장되며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던 몸이 고통을 잊었다.
철컥.
쓰러진 자세 그대로 몸을 빙글 돌린 알버스가 그대로 SMG의 방아쇠를 당겼다.
우수수 쓰러지는 TB측 용병들.
전투불능이라 판단한 상대의 느닷없는 응사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코를 박았다.
물론 알버스라고 무사하진 못했다. 확인사살을 위해 날아든 탄환이 페이스가드와 방탄조끼 그리고 발목에 명중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고통이 아닌 조급함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쓰러진 덴을 향해 절뚝절뚝 달려가자, 미동도 없이 쓰러진 털보가 보였다.
귀와 코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폭압에 고스란히 노출된 듯한 모양새.
"덴? 덴!"
흔들고 불러도 대답 없는 동료의 왼쪽 가슴팍을 쾅 내리친 알버스가 그대로 가까운 방에 덴을 던져 넣고 문을 닫았다.
당장은 이것밖에 해줄 수 없다.
그렇게 외골격의 도움을 받아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한 알버스다.
난간을 잡고 비틀비틀 계단을 오르자니 문뜩 머릿속에 의문이 스쳤다.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저항군이란 사명감 때문에?
사람 목숨을 좆으로 아는 신흥 군벌 세력을 타도하려고?
먼저 죽어간 동료들을 위해서?
모르겠다.
사실 중요한 것 같지도 않았다.
알버스가 잡념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러고는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다른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12F.
층계참을 휘돌아 다음 층에 도착한 그의 눈에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수인들이 보였다.
여럿이 하나를 압박하는 전투였다.
당연하게도 하나는 펜릴이었다.
13층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은 채,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그의 발치에는 사지가 절단된 사체들이 가득했으니, 그중에는 짐승의 머리를 한 간부들도 무려 셋이나 됐다.
도대체 혼자서 어느 정도의 병력을 상대하고 있었던 걸까.
계속 충원되고 또 충원됐을 텐데.
알버스는 이를 헤아리는 대신 킬 비스트를 들었다.
그리하여 조준간 충전.
우우우웅-
10, 20, 30, 40······
가늠자 아래의 자그마한 디스플레이에 떠오른 숫자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80, 90···
그리고 100.
검지가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타앙─!!
허공으로 솟구치는 총구와 함께 격발된 관통탄이 펜릴의 옆구리에 손톱을 박은 수인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꿰뚫고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뭣?!"
갑작스런 동료의 죽음에 한창 펜릴을 몰아붙이던 간부 중 하나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서걱!
전투 중에 눈을 돌린 대가로 머리통이 베인 놈이 잘린 단면에서 핏물 내뿜으며 풀썩 무릎을 꿇었다.
곧이어 바닥에 떨어진 사슴 대가리가 꺼떡꺼떡 오뚜기처럼 흔들거리는 가운데.
"크오오오!!"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곰수인이 그 육중한 덩치로 펜릴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알버스가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총구를 추켜세우는 순간.
"파우스트! 챙겨!"
육탄전을 펼치기 시작한 펜릴이 뚝뚝 끊어지는 포효를 내질렀다.
그에 알버스가 바닥에 떨어진 중화기를 발견했으니.
반사적으로 그리로 달려간 그가 로켓 런처를 안아 들었다.
배려라곤 없는 무게에 순간 몸이 휘청거렸지만, 외골격 덕분에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혈전을 펼치는 두 수인을 피해 마지막 층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알버스다.
복부의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아랫배가 축축했다.
하지만 무시했다.
극한의 상황이 뿜어낸 아드레날린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전투 자극제가 신체의 한계를 극복한 덕분이었으니-
어느새 13F.
"아···"
알버스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온갖 지옥 같던 혈전을 치렀던 그였지만, 눈앞에 펼쳐진 싸움은 그것들을 모두 넘어서는 것이었기에.
벼락이 번뜩이고, 거대한 쇠망치가 허공을 가르고.
주먹이 맞부딪치고, 거기에서 비롯된 충격파가 유리창을 모두 터뜨렸다.
직후 두 인영이 서로의 반대편으로 물러섰다.
피투성이가 된 타하를 보고 주먹을 불끈 쥔 것도 잠시.
뒤이어 오른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인 진을 발견한 알버스의 눈이 잘게 흔들린 순간.
가쁜 숨을 헐떡이던 진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버스는 진의 입모양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저기로 쏴.
그렇게 말하는 손끝은 박살 난 창문 밖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알버스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진을 믿고 파우스트α를 어깨 위로 얹었다.
탄환이 박힌 오른발이 움직이지 않았기에 부득이하게 무릎 쏴 자세로.
동시에 부러진 팔을 우두둑-! 제자리로 돌린 진이 발밑을 부수며 전력으로 내달리니, 코앞으로 날아드는 망치 머리를 아슬하게 회피한 그가 그대로 타하를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번쩍!
자리에서 사라진 순간.
콰아아앙!!!
알버스가 탄두를 발사했다.
따로 신호를 주고받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더없이 완벽한 타이밍.
슈우우욱!!
투사체가 깨진 유리창 사이를 통과한 그때.
약속된 위치에서 진과 타하가 동시에 나타났다.
"···놈!"
몸부림치는 수인을 사력을 다해 붙든 진이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누가 더 튼튼한지 보자."
그리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 60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