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용병이 쥔 손전등이 벌벌 떨리며 눈앞의 동료들을 비춘다.
한때 바닥에 코를 박고 있던 죽은 자들.
그들이 몸을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줄에 이끌리는 마리오네트처럼, 그렇게.
흐어, 흐어어--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숨소리와 함께 시꺼멓게 죽은 안광이 일행을 향한 순간.
막시모는 자동소총을,
나타샤는 펌프액션 샷건을 정면으로 겨눴다.
당황한 와중에도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단순히 훈련만으론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수많은 실전을 통해 뼛속 깊이 각인된 기계적인 대처.
그래서 베테랑이고, 그래서 레벨3의 솔로다.
하지만 기민한 반응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한순간, 어둠을 몰아내는 자줏빛 전광이 강렬하게 터져 나왔기 때문에.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콰직!!
그 섬뜩한 파열음에 용병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전등을 쥔 팔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둥글게 비춘 배경이 파르르 요동치는 가운데.
그 불안정한 상(相) 너머로 핏물이 폭발했다.
사방팔방 얼마나 강하게 튀었으면, 나타샤와 막시모의 얼굴에 방울방울 점묘화를 찍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키에에에엑!
되살아난 시체들이 기다란 어금니를 드러낸 채 짐승처럼 돌진했고.
그보다 빠르게 뒤로 튕겨 나갔다.
얼굴이 함몰되고, 뼈가 살갗을 찢고, 목이 돌아간다.
파지직!!
자전을 휘감은 주먹이 목덜미를 노리는 시체의 얼굴을 후려쳤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시체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그 궤적을 따라 날아간 살점이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가 검붉은 흔적을 남기며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이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던 놈은 무릎에 턱을 맞고 하관이 통짜로 짓뭉개지며 쓰러졌다.
죽음을 뿌리치고 돌아온 부활자들이, 살아있는 폭풍 앞에 다시 죽음을 맞이한다.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파지지직!!
빛이 번뜩일 때마다 공평한 죽음이 뒤따르니.
어느 순간, 난장 속에서 홀로 우뚝 선 것은 피로 물든 뒷모습이라.
"······"
십자가 박힌 항공 점퍼 위.
비스듬히 측면을 향한 옆얼굴이 보인다.
그 주위를 휘감은 갈지자 뇌전에 일행이 숨을 삼키는 사이.
"후우-"
길게 숨을 뱉으며 광극을 갈무리한 진이 몸을 되돌렸다.
그러고는 피로 물들 손을 툭툭 털며 말하길.
"나 이거 알아. 버서커네. 그렇지?!"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 어쩌다 아는 것이 나와서 우쭐해진 얼굴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더라고.
아, 무서운 거 아니었네.
내가 버서커는 여럿 잡아 봤다는 말씀.
나를 버서커 킬러라고 불러라, 중생들아.
괜스레 우쭐해진 진이 뭐라 입을 열려는 그때.
용병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버서커."
"에?"
"버, 버서커가 아니라고."
"······?"
재차 이어진 부정에 고개를 갸웃거린 진이 슬며시 바닥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필이면 거기엔 두 번 죽어 광택 없는 눈동자가 딱!
"어우."
본의 아니게 시체와 눈을 맞추게 된 진이 그 불손한 머리통을 축구공처럼 뻥 걷어찼다.
그대로 훌쩍 날아간 시체가 어둠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가운데.
잔뜩 찌푸린 눈길을 용병에게 옮긴 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것들은 다 뭔데?"
*
버서커란, 침투형 멀웨어 버서크에 감염된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다.
이 바이러스는 전뇌 소켓을 강제로 오염시킨 후, 뇌에 파괴적인 심상을 끊임없이 주입하니.
그 결과,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격성을 꽉꽉 눌러 담은 괴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즉 버서커는 폭주한 사람이지, 시체가 아니다.
그런데 방금 전 괴물들은 분명 시체들이었고.
"그럼. 뭐 좀비라도 된다는 거야?"
나타샤의 설명을 들은 진의 얼굴이 구겨질 때였다.
"쉿!"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 막시모가 그 검지를 그대로 어둠을 향해 뻗었다.
그러고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길.
"뭐가 온다."
다음 순간, 손전등이 밝힌 빛과 지하의 어둠이 맞닿은 경계 안쪽에서 창백한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너덜너덜 찢어진 평상복을 입었다.
어디선가 도망쳐온 듯한 모습. 거멓게 죽은 안광만 아니었다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을 터였다.
"···지랄 났네."
막시모가 육성으로 중얼거렸고, 나타샤가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10m 남짓한 거리에서 산탄총에 맞은 시체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사이, 슬라이드 펌프를 철컥 당겨 탄피를 제거함과 동시에 장전을 마친 나타샤가 정면을 바라보며 외쳤다.
"너무 많아!"
동시에 진이 정수리에 걸친 고글을 내려썼다.
그러자 보이는 건 초록색으로 물든 세상을 가득히 채운 엄청난 수의 시체들.
상대하기엔 너무 많았다.
어지간하면 여기서 끝장을 보려던 진조차 눈살을 찌푸렸을 만큼.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
다급히 외친 막시모가 어느 순간 뜀박질을 시작한 시체들을 향해 탄환을 짧게 끊어 쐈다.
그사이 다른 길목에서 나타난 시체를 발견한 진이다. 지체 없이 허리춤에서 그라비스를 뽑아 내달려오는 놈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그러고는 반대쪽 팔로 마른기침을 쿨럭거리는 용병을 번쩍 둘러메니.
"따라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오른쪽 길목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 그다.
그나마 시체들이 안 보여서 선택한 길이었거늘.
뜀박질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저 앞에서도 시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문자 그대로 '쏟아'졌다.
석굴의 구조가 어떻게 돼먹은 건지 난데없이 시체들이 천장에서 레고 블록처럼 와르르 쏟아져 벽을 세우는데,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 수밖에 없더라고.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진이 그렇게 소리치며, 양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시체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줬다.
뒤로 넘어가는 놈 뒤로 새로운 얼굴이 확 가까워졌다.
"캬학!!"
목덜미를 노리고 아가리를 쩍 벌리는 면상을 그라비스째 후려친 진이다.
그러고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시체의 정수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그가 활로를 찾아 얼굴을 좌우로 돌렸다.
왼쪽? 오른쪽? 대각선 방향?
에라 몰라! 왼쪽!
고민을 길게 이어갈 틈이 없었다.
그저 직감에 몸을 맡길 수밖엔.
그런 와중에 어깨 위에서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한 용병이다.
"다 죽을 거야! 다 죽을 거야! 전부 다아!!"
"아오! 새꺄! 흔들지 마!"
진이 와락 소리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기절이라도 시키는 건데, 라는 후회는 덤이다.
맘 같아선 그냥 내팽개치고 싶지만, 그러기엔 아직 이 자식에게 물어볼 것이 많다.
지금으로선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이지 않은가.
그러니 어째. 일단 뭐 빠지게 달려야지.
"비켜! 이 좀비새끼들아!"
그라비스의 총구가 연신 불을 뿜었다.
금세 동이 난 탄창이지만 괜찮다.
이럴 줄 알고 넉넉하게 준비했으니까.
왼쪽 어깨 위에서 아주 방방을 타는 용병 새끼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어찌어찌 재장전을 마친 진이 무식하게 내달렸다.
그런 와중에도 뒤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탕! 탕! 탕! 탕!
리드미컬한 박자로 전방 펌프 손잡이를 당기며 시체들의 머리를 분쇄한 나타샤가 혼란한 와중에도 침착하게 삽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빈틈을 노리고 시체들이 거리를 좁혔지만, 그녀는 당황한 기색 없이 유연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한 뒤에 다시 격발을 시작했다.
이렇듯 나타샤가 굉장히 차가운 모습이라면,
막시모는 모든 행동거지가 방정맞기 그지없었으니.
"내 가방! 건드리지 마!"
짧은 다리로 죽어라 내달리던 그가 등 뒤로 바짝 쫓아온 시체들을 향해 수류탄을 휙 던졌다.
심지어 하나만 던진 것도 아니다.
무슨 삶은 달걀 버리듯 세열수류탄을 계속해서 바닥에굴리며 토껴대니.
쾅! 쾅!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폭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해 보면, 둘 다 펜릴과 동급의 솔로들이 아닌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구나.
이 정도면 안심이라 생각한 진이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지금 그의 포지션은 전위. 일명 뱅가드(Vanguard).
팀의 목숨을 책임지는 선봉인즉.
그래. 한눈을 팔 때가 아니었지.
마음을 다잡은 그가 전력을 다해 가로막는 좀비들을 돌파했다.
솔직히 좀비인지는 모르겠다.
왜 자꾸 목덜미를 노리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사람은 아닌 거잖아.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아무리 죽여야 할 적이라도, 정신 건강을 위해 절대로 경험치 취급은 하지 않는 진이었지만, 이런 경우라면 얘기가 다르다고.
와라! 이 새끼들아!
눈을 부릅뜨며 바닥을 박찬 그다.
이후로 벌어진 싸움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시체들.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시야.
위치를 가늠할 수 없는 석굴의 구조까지.
거지 같은 상황이 삼위일체를 이룬 가운데.
지난한 싸움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마침내 수그러든 공세 속에서 시체가 없는 공간을 찾아낸 일행이 엉덩이를 풀썩 주저앉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탓에 뭐라 말도 못 하고,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르기 여념이 없던 그들이 어느 순간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켰다.
"···진, 괜찮아?"
"어. 너는?"
"나도 문제없어."
진과 나타샤가 속닥속닥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벽 밖으로 빠끔 내민 얼굴을 집어넣은 막시모가 작게 말했다.
"시체들은 안 보여. 따돌렸나 봐."
그제야 세 사람의 시선이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축 늘어진 용병을 향했다.
"야. 일어나."
"···? 어, 으어어."
진이 어깨를 잡고 흔들자 신음을 흘리며 눈꺼풀을 든 용병이다.
당장이라도 물어볼 것이 산더미였지만, 안타깝게도 놈의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자꾸만 헛소리를 반복하고 계속 주변을 휙휙 돌아보며 편집증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는 터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더라고.
그래도 일행은 인내심을 가졌다.
통신은 먹통이요, 출입구까지 사라진 상황이다.
고개를 돌려도 눈에 담기는 건 까마득하게 깊은 어둠뿐이었으니,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영혼까지 삼켜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심지어 개떼처럼 달려드는 시체들에 쫓기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대로 가다간 내가 이 꼴이 날 수도 있겠단 불안감 때문이라도, 용병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일행이다.
울면 달래주고, 칭얼거려도 짜증 내지 않고.
배고프다면 식량도 기꺼이 나눠줬다.
그 덕분이었을까.
내내 섬망 증세를 호소하던 용병의 눈에 어느 순간 초점이 돌아왔으니.
"······뭐, 뭐가 궁금한데"
이전보다 확실히 명료해진 발음으로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상태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진은 이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기 위해 곧장 질문을 던졌다.
떨리는 용병의 손에 초코바를 쥐여주면서.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정확히 말해주면 좋겠는데."
"무슨 일···."
용병이 작게 중얼거리며 초코바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우물거리는 입을 달싹거렸다.
"오늘이 며, 며칠이지?"
그에 진이 말없이 단말기를 내밀며 화면을 밝혔고,
날짜를 확인한 용병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버, 벌써 보름이 지났다고?"
그리 중얼거린 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짚었다.
잠깐의 침묵.
이윽고 손 틈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더지 새끼들이 발견한 유적지는 사실 누군가의 무덤이었어. 깨우면, 깨우면 안 되는 게 그 안에 있었는데, 햇빛을 못 쬐서 대가리가 멍청해졌는지. 단체로 정신이 나가선···그걸 신이라고. 자기네들을 제물로 바치고. 아으···"
어느새 얼굴을 타고 올라간 그의 두 손이 머리칼을 꽉 움켜쥐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 괴물 새끼가 여길 돌아다녀. 평소엔 조용하다가, 시간이 되면 사냥을 시작해."
동공이 불안하게 좌우로 움직이는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쇳소리 섞인 가성을 냈다.
"그놈한테 죽으면 다 괴물이 돼. 여기 두더지 새끼들도 전부 그렇게 괴물이 됐어. 그런데도 아직 부족하대. 계속. 계속 더 먹어야 한대."
보아하니 슬슬 발작이 시작될 낌새였기에 진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였다.
한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훅 돋았다.
파직!
의지와 별개로 솟구친 자전이 몸을 휘감는다.
이는 위기를 감지한 광극의 대응이라.
아주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린 진이다.
찰팍, 찰팍-
석굴 입구 너머로 젖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라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겨야 했을 나타샤와 막시모도 이 순간만큼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코를 찌르는 압도적인 혈향.
지하 1층에서 느꼈던 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죽음의 냄새가 그곳에 있었기에.
다음 순간.
어느새 몸을 일으켜 입구를 향해 선 진을 향해.
어둠 너머에서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Ja-had."
< 71화 >
저거 지금 자하드라고 한 거야?
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번쩍이는 생체 전기가 보랏빛으로 주변을 밝히는 지금이다.
나름 시야라는 게 확보된 상황이었음에도 어둠 너머에 있을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듣기 몹시 거북한 음성이 재차 귓가를 파고들었을 뿐이다.
"Jahad-"
한층 더 또렷하게 꽂히는 단어.
자하드. 분명 자하드다.
설마, 자전을 알아보는 건가.
진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자, 용병의 말이 사실이라고 쳐보자.
지하유적에서 무언가 깨어났고,
그게 지금 눈앞에 있는 저놈이라면?
천 년 묵은 고대인이 자하드를 입에 담는 상황 아닌가.
···이게 무슨 의미래.
진의 낯빛에 고민이 스쳤다.
그러면서도 입술을 연신 씰룩거리니.
진의 특기이자 비기.
[저 불리할 때만 자하드 이름 팔아먹기] 전략이 재채기처럼 나올락 말락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빛과 장미의 시대는 봉건제다.
버젓이 신분제가 존재하던 시대였던 즉.
당시 7가문의 위상?
잘은 몰라도 분명 언터처블.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한 지역의 패주로서 평범한 이들에겐 왕이나 가주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좋아! 파악했다. 출제자의 의도.
수능 공부로 다져진 냉철한 감각이 번쩍 빛을 내니,
다음 순간 진이 정면을 향해 말하기를.
"그래, 내가 바로 진 자하드다. 후계자지."
명배우란 바로 이런 것이다.
눈빛이며 어조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것.
혼이 담긴 거짓부렁에 막시모와 나타샤가 흠칫 놀라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느릿한 답신이 돌아왔다.
"Jahad n'gha notog yett liveth."
"···뭐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언어에 진이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찰팍.
젖은 발소리와 함께 어슴푸레한 어둠의 경계면에서 새하얀 맨발이 나타났으니.
다음 순간 진의 눈에 담긴 것은, 얼굴에 피 칠갑을 한 깡마른 대머리의 등장이었다.
일견 산송장같이 보이는 몰골이었지만, 이쪽을 향한 붉은 눈동자에선 기이한 광채가 번들거리니-
홀린 듯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면 어느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핏물에 잠긴 대지, 끔찍한 기억이 숨 쉬는 벽돌담, 잿빛 하늘 아래 동산을 이룬 백색의 시체 더미와 차가운 썩은내.
그리고 그들의 뺨에서 흘러내리는 두 줄기 피눈물이라.
"······"
기괴하기 짝이 없는 공감각을 애써 뿌리친 진이 오른손으로 그라비스를 움켜쥐는 순간.
사내가 메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죄인의 핏줄아. 거짓된 평화는 얼마나 남았지?"
마침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흘러나왔지만, 딱 그뿐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에 진이 고개를 갸우뚱.
왼손으로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하기를.
"나는 네가 무슨 소릴···"
탕─!!
그라비스가 불을 뿜었다.
대화할 것처럼 해놓고 바로 격발!
치사하다고?
싸움에 치사한 게 어딨어!
진이 연이어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가 뒤로 젖혀진 사내의 몸이 지진이라도 난 듯 마구마구 흔들리고, 무게중심이 뒤로 쏠린 몸뚱어리가 바닥에 쓰러졌다.
틱, 틱-
검지에 느껴지는 저항감.
순식간에 탄창을 비워낸 진이 신속히 재장전할 때였다.
"······해치웠나?"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마법의 주문과 함께 쓰러진 사내의 몸이 수천 조각으로 쪼개졌다.
직후 검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 그것들은 다름 아닌 박쥐들이라.
"막시모! 너 이씨!"
진이 원망 섞인 목소리를 내뱉자, 밤톨머리가 흠칫 놀란 목소리를 냈다.
"이게 나 때문이야?!"
막시모는 억울할지 몰라도 이건 한소리 들어도 싸다.
박쥐 떼가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날아들었으니까.
그러게 왜 클리셰를!
"온다!"
나타샤가 소리치며 샷건을 내갈겼다.
흩뿌려진 산탄에 갈기갈기 찢긴 박쥐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가운데.
전방 손잡이를 후퇴·전진시킨 그녀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탕!!
다시 추락하는 박쥐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다.
아까 시체들에 둘러싸였을 때도 그랬지만, 탄창 용량이 4, 5발이 한계인 펌프액션 샷건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물량 공세인 것이다.
해서 그녀가 소리를 내질렀으니.
"막시모!"
"젠장! 여기!"
어느새 가방을 뒤적거린 밤톨머리가 소총 한 자루를 꺼내 집어던졌고-
그걸 허공에서 낚아챈 나타샤가 사방을 향해 탄환을 난사했다.
"으아아악! 아아악!"
끝내 발작이 도진 용병이 손바닥으로 귀를 막은 채 비명을 꽥꽥 지르는 사이.
추락한 박쥐들의 사체가 한 줌의 핏물로 녹아 한데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생겨난 피웅덩이 속에서 몸을 일으킨 사내다.
새빨간 발자국을 지장처럼 찍으며 걸음을 옮기는 놈의 시선 끝에 자전을 넓게 떨치며 박쥐들을 태우는 진이 있었다.
진도 그를 보았다.
미간을 와락 찌푸린 채로.
"박쥐에 피? 흡혈귀였어?"
천 년 묵은 고대인, 깨어나선 안 될 것.
오래전 멸종했다고 알려진 이종족(異種族)이 눈앞에 있었다.
"넌 취하기 아깝군. 권속으로 삼아주마."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다섯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탁 펼치니 젖은 손에서 핏물이 흩뿌려졌다.
동시에 진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폭발.
콰아앙!!!
충격파와 함께 혈향이 훅 번지고,
뒤흔들리는 석굴 천장에서 흙먼지가 쏟아졌다.
다행히 거기에 휘말리지 않은 진이었지만 안심할 틈은 없다.
피안개를 뚫고 날아든 박쥐 떼가 인간의 형상을 갖추며 팔을 뒤로 뻗었기에.
쾅!!
자신의 양팔을 폭발시켜 추진력을 얻은 놈이 그대로 다리를 차올린다.
그 정신 나간 공격을 양팔을 교차시켜 막은 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다리가 폭발했다.
달궈진 폭압과 함께 뒤로 주르륵 밀려난 진이 이를 악물었다.
단숨에 피투성이가 된 양팔이다. 그래도 아파서 다행이었다. 신경이 죽은 건 아니라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는 사이, 진의 눈에 박살 난 팔다리를 수복하는 흡혈귀가 보였다.
곧바로 블링크를 써서 덮치려고 했는데, 웬걸.
안 되네?
흑염의 열기로 좌표를 뒤섞어버리던 킬기트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번에는 피안개가 문제다.
사방에 자욱한 저 핏빛 수증기는 마치 구조물처럼 그리로 몸을 이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진이 급한 대로 바닥을 박찼다.
허공을 가른 주먹이 흡혈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확 솟구치는 핏물.
분명 충격이 엄청날 텐데, 뭉개진 얼굴은 비릿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드잡이 싸움에 일가견이 있나? 그럼 거기 맞춰주지."
다음 순간 핏물을 두른 주먹이 진의 복부를 강타했다.
몸 전체가 울리는 듯한 충격.
하지만 이를 맷집으로 씹어낸 진이 흡협귀의 턱을 주먹으로 올려붙였다.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지근거리 싸움이라면, 타하를 제외하곤 밀려본 적이 없는 진이다.
감히 자신의 주전장에서 싸움을 거는 상대를 그냥 놓아줄 리가 있나.
상대의 목덜미를 깍지 낀 손으로 감싸며 바싹 끌어당기니 순간 가까워졌다 싶을 때 엘보로 턱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다시 철컥 깍지를 끼며 목뒤를 잠그니.
이번에는 상대의 복부에 무릎을 올려 친 그다.
중심이 무너지는 상대의 뒤통수를 다시 바짝 당기며 다시 한번 무릎!
폭력의 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상대의 머리를 컨트롤하며 중심을 내 쪽으로 가져오는 클린치 기술.
무에타이의 꽃, 빰.
물론 진은 낙무아이도 아니고, 따로 입식격투기를 배운 적도 없다.
그저 UFC 넘버링 대회 정도만 간간히 챙겨보던 라이트한 격투기 팬이었을 뿐.
하지만 진의 신체 능력은 인간을 초월한 지 오래다.
소위 운동신경이라 불리는 천부의 영역 또한 후천적인 성장을 통해 초인의 경지에 올라섰으니, 그 시절 눈에 담은 프로들의 기술 정도는 어렵지 않게 다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기술들은 무수한 실전 속에서 갈고 닦여, 점차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으니.
이는 진정으로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서.
무아지경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진의 머릿속이 문득 두 세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실선을 비추는 순간.
"훌륭하군."
나지막한 웃음과 함께 진의 콧잔등이 와락 일그러졌다.
강제로 현실로 끌어내려진 의식이다. 타오르는 통증 때문이었다.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자, 옆구리를 파고든 손이 보인다.
그 깊이가 상당히 깊었다.
복막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조금만 더 파고들면 다이렉트로 내장이다.
그게 잡아뜯기면 아무리 진이라도 무사하긴 힘들다.
해서 이 순간 그가 내려야 할 최적의 판단이란, 지금이라도 손깍지를 풀고 상대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구멍 뚫린 옆구리가 회복될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겠지만.
좆까!
진은 오히려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뒤로 젖힌 머리를 끌려오는 상대의 면상에 쾅!
"이! 개새!"
뭔가를 본 거 같았는데, 이걸 여기서 끊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눈앞이 하얗게 물든다.
그리하여 시작된 너 죽고 나 죽자식 개싸움.
이를 포장하면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쯤 되시겠다.
복근을 단단히 조여 상대의 손이 더는 파고들지 못하게 저항하면서도, 절대로 클린치를 풀어주지 않고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채, 치명적인 일격을 퍼붓는다.
물러설 바에 여기서 끝장을 본다는 철혈의 의지에 한층 더 거세진 자전이다.
하지만 상대도 좀처럼 쓰러지질 않는다.
부서지고, 깨지고, 으스러지는 와중에도 주변의 피안개와 박쥐들을 흡수하며 인간의 형상을 유지한 흡혈귀의 손이 끝끝내 복막을 찢고 닿아서는 안 될 깊숙한 곳을 후벼팠다.
그러고는 복부를 관통한 손은 남겨둔 채, 나머지 육신을 박쥐로 흩어버렸다.
"이게···!"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진이 핏발 선 눈으로 자전을 내뿜었다.
그 난폭한 전광에 걸려든 박쥐 일부가 산 채로 타올랐지만, 나머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모여들어 형태를 이뤘다.
그 위치는 나타샤의 등 뒤였으니.
인기척을 감지한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려는 그때.
"흡!"
어느새 달려온 막시모가 제 가방을 크게 휘둘러 흡혈귀를 후려쳤다.
순간 멈칫거리는 놈의 팔이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갈랐다.
간신히 공격을 피하기 무섭게 남은 탄환을 상대에게 모조리 갈겨버린 나타샤다.
직후 뒤로 물러서는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공포나 고통 때문이 아니다.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는 얼굴이 한순간 둘로 겹쳐 보이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둘로 분열된 나타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한 사람은 바닥에 손을 짚은 진을 부축해 등에 업었고,
다른 하나는 폭발에 휘말려 나동그라지는 막시모를 향해 달려가며 바닥에서 샷건을 챙겼다.
탕! 탕! 탕! 탕!
엄청난 연사로 흡혈귀를 저지한 그녀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허리에 두른 카트리지 벨트에서 건전지처럼 생긴 탄환을 뽑아 삽탄을 마치니.
다시 한번 시작된 리드미컬한 격발음 너머, 간신히 정신을 차린 막시모가 몸을 일으켰다.
쿨럭쿨럭 가방을 뒤진 그가, 그 속에서 드럼통을 축소시킨 듯한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았다.
치이이익!!!!
미친 듯이 솟구치는 불티를 확인하기 무섭게 힘껏 팔을 휘두른 막시모다.
빙글거리며 날아간 수류탄이 흡혈귀의 몸에 부딪혀 불길을 일으켰다.
"지금이야! 달려!"
막시모가 그렇게 외치며 이번에는 쓰러진 용병을 일으켜 세웠다.
"새끼야! 살고 싶으면 너도 달려!"
그사이 불길에 휩싸인 흡혈귀를 향해 마지막 탄환까지 모조리 퍼부은 나타샤가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리다가 이내 보폭을 넓혀 달아나는 일행에게 합류했다.
"너 분신술사였냐?! 그거 발현도 되게 낮은 초능력 아니야?!"
막시모의 물음에 샷건 나타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
그리하여 정신없이 줄행랑을 치기 시작한 일행이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
키에에에엑!!!
설상가상, 사방에서 시체들이 덤벼들기 시작했으니.
"막시모! 12게이지 셸(shell : 산탄) 아무거나!"
"맡겨 놨냐?!"
"빨리!"
"아씨! 좀 있어 봐!"
일행이 아주 난리가 난 가운데.
나타샤1의 등에 업힌 진은 그저 이를 악물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야 할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맘처럼 움직여주질 않았다.
귀에선 이명이 울리고, 흔들리는 시야는 모든 사물을 서너 겹으로 겹쳐보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하필이면 상태창까지 툭 떠오르더라고.
「(히든!)진혈의 종족」─────────────
진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YES/NO)
수락할 경우 종족이 변환됩니다.
거부할 경우 24시간 이내에 사망합니다.
─────────────────────
그에 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두워서 안 보여···새끼야······"
< 72화 >
진은 무겁다.
초고밀도의 근육을 탑재한 몸뚱어리라 겉보기보다 체중이 훨씬 많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진을 업은 나타샤는 제법 잘 달렸다.
여리여리하게 보여선 알고 보니 속근육이 꽉꽉 들어찬 체질이었다더라, 같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구력과 근력이었으니.
사실, 사이커들은 기본적으로 신체능력이 일반인보다 우월한 편이다.
DNA 자체를 개조한 강화인간에 비하면 부족할 뿐, 이쪽도 겉보기보다 튼튼한 건 마찬가지라서.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은 무겁다.
100kg이 넘는 몸뚱어리가 축 늘어져 있기까지 하니, 시간이 갈수록 나타샤의 호흡이 가빠졌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 것 같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제는 제 귀에도 들리는 달뜬 숨소리에 진이 고개를 들었다.
"···야, 내려줘."
"됐거든? 너 배에, 구멍, 뚫렸어, 알아?"
달리는 와중이라 뚝뚝 끊어져서 돌아오는 대답.
그에 진이 아랫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다 나았어. 진짜."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를 확인할 수 없는 어부바 나타샤를 대신해 샷건 나타샤가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네."
찢어진 옷 너머로 흉터 없이 매끈한 옆구리를 확인한 그녀가 아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가운데.
허벅지를 감싼 손을 떼어내며 바닥에 내려선 진이다.
그와 동시에 양옆에서 좀비인지 흡혈귀 찌끄러진지 모를 괴물들이 짓쳐들었다.
키에에엑!
동시에 두 팔을 쫙 벌린 진이 놈들의 뒤통수를 각각 움켜잡고 그대로 심벌즈 치듯 쾅! 하고 맞부딪뜨렸다.
입맞춤을 초월한 면상맞춤.
짓뭉개져 딱 달라붙은 안면 째로 쓰러지는 괴물을 뛰어넘은 진이 저만치 앞서가는 일행을 뒤쫓았다.
그러다 순간 휘청.
옆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간신히 바로 세운 그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계속 어지럽다.
하복부의 관통상은 아물었다지만, 문제는 복막을 찢은 흡혈귀의 손이 어느 순간 몸속에서 핏물로 녹아버렸다는 사실이었으니-
찝찝해서 미치겠네. 몸은 왜 이렇게 뜨거워.
진이 이를 악물며 발길을 재촉한다.
앞을 가로막는 괴물들을 뚫어내면서다.
짐작건대 살아생전엔 언더하트의 크루원이었을 놈들이다.
저 봐. 쟤는 잠옷 입고 있네.
진이 파자마를 걸친 시체의 턱을 플라잉 니킥으로 부쉈다.
그 와중에 저기 넘어진 막시모의 모습이 보였다.
발목을 잡힌 것이었는데, 그런 그에게 시체들이 피라냐 떼처럼 몰려들었다.
동시에 진이 오른팔을 위로 들었다.
파지지직!!
광극으로부터 끌어온 뇌기를 길쭉한 창의 형태로 만들어 불끈 움켜쥐고는, 체공 시간이 다하기 전에 냅다 던졌다.
쾅!!
떼거리로 모인 괴물들의 상체가 일제히 터져 나간다.
이걸 막시모의 시야에서 재해석하면 시체들로 가득히 물들던 시야가 거센 폭발음과 함께 확 걷히는 것이었으니, 폭우처럼 쏟아지는 살점을 얼굴에 맞으며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그다.
무사한 밤톨머리를 확인한 진이 안도의 한숨을 휴.
열심히 다리를 놀리며 뇌기가 남은 손을 탈탈 턴다.
광극으로 빚어낸 투사체, 뇌창.
진이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는 기술이었다.
왜냐하면 가성비가 너무 떨어져서.
뇌창을 만들 정도의 마나면, 자전을 못 해도 2분 넘게 두르고 있을 수 있다.
해서 그거 몇 발 던질 바에, 차라리 몸에 번개 두르고 때려패는 쪽이 훨씬 속 편하다고.
여태껏 머릿속에 각인된 기술들을 등한시했던 진이었으니.
그래도 이번엔 급한 와중에 밥값은 했다.
마나가 훅 빠져버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래서 진이 그라비스를 뽑았다.
탕─!!
끈덕지게 달라붙는 괴물들의 이마에 구멍을 뚫어주며 계속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눈앞에 나타샤들이 보이더라고.
이걸 뭐라고 불러야.
좌타샤, 우타샤?
아무튼 두 나타샤가 열심히 총질, 주먹질, 발길질하며 뚫어내는 전방.
그 우글우글한 적진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거대한 포효가 들려오나 싶더니, 다음 순간 거구의 시체가 앞을 막아선 다른 시체들을 어깨로 들이받으며 나타났다.
그어어어!
곰수인이었다.
아마도 수인화한 상태로 숨이 끊어졌던 모양.
곧바로 나타샤(우)가 샷건을 쐈지만, 놈은 머리통이 반쯤 박살 난 채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 터프함의 대명사, 수인 아닌가.
고통도 못 느끼게 된 상황이니 돌파력이 오죽할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놈이 덤프트럭처럼 나타샤(좌)를 치려는 순간.
후미에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진이 놈과 어깨를 쾅 맞부딪쳤다.
그 충격에 진과 곰수인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이 퉁기는 가운데.
보다 먼저 중심을 잡은 진이 그라비스를 탕! 탕! 탕!
머리통이 아예 사라진 곰수인의 몸이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진! 나타샤! 숙여!"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반사적으로 몸을 바짝 숙이는 세 사람의 머리 위를 수류탄 세 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지나쳤다.
이어지는 폭발.
그리고 한결 헐거워진 전방.
"가자!"
진이 앞장섰고, 나머지가 그 뒤를 따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을 정신없이 내달린 끝에, 더 깊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찾은 일행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기에 일단 그 아래로 뛰어 내려가자, 어느샌가 턱밑까지 쫓아온 시체들과 놈들이 내뿜는 죽은 숨결이 목덜미에 스쳤다.
"으아아!! 으아아아!!"
지긋지긋한 용병의 비명은 덤.
어쩌다 보니 제일 뒤로 쳐진 탓에 붙잡히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아예 몸을 날려서 우당탕탕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바닥에 엎어진 탓에 할 수 있는 게 엉금엉금 기는 것밖에 없었으니, 괴성을 내지르는 죽은 자의 해일에 꼼짝없이 덮쳐지기 직전.
짝, 하는 박수 소리와 함께 무언가 폭발했다.
콰아앙!!!
이어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바위가 계단 입구에 차곡차곡 쌓이며 길을 막으니.
"이리로 와라. 어서."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일행의 고개가 휙.
쓰러져있던 용병까지 손전등을 비추니.
그곳에는 봉두난발한 노인이 자기 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었으니, 여기서 망설이면 덜 힘든 거다.
일단 가야지, 어째.
그렇게 노인을 따라 어두컴컴한 석굴 안을 요리조리 통과한 끝에, 자그마한 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막힌 공간에 다다른 일행이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다들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로 난리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자신들을 이곳까지 안내한 노인에게 닿아있었으니, 그 시선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노인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닥에 궁둥이를 붙였다.
"저 요란한 불부터 좀 꺼라."
그에 막시모가 용병의 손에서 손전등을 낚아채 불을 딸깍 껐다.
그와 동시에 노인이 손가락을 딱.
"오우."
허공에 둥실 떠올라, 딱 알맞은 밝기로 주위를 밝히는 은은한 광원의 등장에 작게 감탄한 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누구?"
그에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라.
허옇게 멀어버린 오른쪽 눈과, 그렇게 되어가는 중인 불투명한 왼쪽 눈이 진을 향했다.
"왕."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칠 소리였다.
차가 하늘을 날고, 마천루가 구름에 닿은 세상에 왕은 무슨 개 풀 뜯는 소리냐고.
하지만 여긴 특수한 환경이다.
땅굴 안에 처박힌 범죄자들이 만든 왕국.
이름부터가 언더하트 킹덤 아니던가.
그렇다면, 저가 왕이라는 저 노인네의 정체는?
"다미르 하보···비치?"
드안드레의 수첩에 적힌 기록을 떠올린 진에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나다."
다미르 하보비치.
폭발 계열 마법에 통달한 2위계 마법사, 일명 폭탄마.
언더하트를 만든 장본인이자, 땅굴에 30년을 넘게 처박혀있던 노괴였으니.
다만, 임플란트 거부 반응이 극심한 체질이라 노년에 들어 육신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라고 했던가.
땡큐, 드안드레.
수첩의 내용을 머릿속에 되짚은 진이 식은땀이 흐르는 목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당신네 왕국 개판 됐어."
"안다."
무뚝뚝한 대답에 막시모가 하-, 하고 헛웃음을 치는 사이.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나타샤들 중 하나가 노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알아? 뱀파이어라니. 멸종한 지 수백 년은 더 된 괴물을 무슨 생각으로 깨운 거야. 위기의식이라는 게 없어?"
"내가 아니다."
"뭐?"
"배신자들의 소행이지."
그리 대답하는 노인의 미간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혔다.
"빌어먹을 놈들이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석관을 열었다. 유적 안에서 발견됐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대단한 아티팩트가 있을 거라고 믿은 거지."
여기서 진의 고향 사람들이라면, 한 영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파묘.
땅속에서 겁나 험한 것이 깨어났다는 그거.
누적 관객 수가 무려 1,190만에 달한 초히트작 말이다.
물론 진은 그런 거 모른다.
개봉하기 전에 끌려와서.
그래서 별생각 없이 되묻기를.
"······그러니까 댁은 구린내를 맡으셨다?"
"불길한 마력이 가득한 물건이었다. 그렇게 무턱대고 열어선 안 됐어. 절대로."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떠는 노인이 씹어뱉듯 뒷말을 덧붙였으니, 그 내용이란 이러했다.
굴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지하유적.
부푼 마음으로 조사한 그곳에서 언더하트가 발견한 건 거대한 석관이었으니.
원래 열지 말라고 경고하면 더 열고 싶은 법이라고.
그 안에 아티팩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보초를 살해하면서까지 관을 열어젖힌 놈들이 나타난 것이다.
좌우지간 관은 열렸고, 그 안에 새겨진 온갖 마법적인 봉인 장치는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의 화신들이 박살 냈으니, 그 결과 진혈의 일족이 눈을 떴더라.
하필이면 이게 또 로드급이네?
로드급이라 하면, 각종 사법과 피를 다스리는 능력에 특화된 개체로, 자신의 피로 다른 이를 감염시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가능한 존재라고─
막시모가 중간에서 슬쩍 설명을 보탰다.
음, 그래. 고맙다.
아무튼 그런 존재가 깨어났다.
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천 년간 쇠락한 자신의 몸을 회복하는 것이었으니.
추종자를 만들어 제물을 바치게 하고,
그 피로 땅굴 전역을 감싸는 결계를 치고,
뭔가 뭔가 아무튼 마법적인 걸 막 했다고.
사실 디테일한 설명이 있긴 했는데 진은 영 집중하지 못했다.
원래도 이런 쪽 얘기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계속 열이 끓어서 눈도 귀도 멍해졌기에.
왜 이러지, 진짜.
미약한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끔뻑거리자, 상태창이 다시 시야를 가린다.
뭔데, 또.
아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읽지 못한 문장을 힘겹게 한 줄씩 읽기 시작한 진이다.
「(히든!)진혈의 종족」─────────────
진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YES/NO)
수락할 경우 종족이 변환됩니다.
거부할 경우 24시간 이내에 사망합니다.
(남은 시간 22:30:15)
─────────────────────
4초, 3초, 2초, 1초.
30분.
그제서야 제 몸상태를 깨달은 진이 흠칫.
나 감염된 거야?
날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씨. 이게 뭔.
절대 싫어, 새끼야.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겨우 집어삼킨 그다.
뱀파이어라니.
햇빛 쬐면 비명 지르고, 마늘이랑 겨자를 싫어하고, 은과 성수에 약한 그 괴물?
또 뭐 있더라. 물도 싫어하던가?
온갖 매체에서 접한 흡혈귀의 약점이 진의 머릿속에서 촤르륵 나열됐다.
물론 로스트 시티의 뱀파이어는 그런 괴물이 아니다.
나타샤와 막시모가 언급했듯, 그들은 오래전 멸망한 강력한 이종족으로, 광견병에서 비롯된 흡혈귀 괴담과는 태생부터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기에.
근데 어쩌라고.
내 몸에는 그 어떤 변화도 허락하지 않는 진이다.
사이버펑크판 흥선대원군이나 다름없는 쇄국···, 아니 쇄신정책(鎖身政策)의 선두주자였으니.
코딱지만 한 칩셋조차 허락하지 않는 마당에, 뭐?
종족을 바꿔?
이게 미쳤나.
히든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레고 삼키는 거 보여줘?
[진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 어떤 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켜온 정체성을 시험하는 문장을 향해 진이 눈을 부라렸다.
눈빛에 물리력이 존재했다면 상태창은 아마 갈기갈기 찢겼을 터.
동시에 분노가 들불처럼 타올랐다.
그 흡혈귀 새끼.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결판을 내도 모자랄 판에 치사하게 감염을 시켜?
넌 죽었다.
내가 죽어도 너는 죽인다.
진의 이마에 핏줄이 불룩 솟았다.
그러잖아도 열이 펄펄 끓는데 화까지 치솟으니 진짜 한순간 눈앞이 핑 돌더라고.
벅벅 마른세수로 시야를 회복한 그가 노인을 휙 돌아봤다.
"그래서 이대로 숨어있을 거야?"
"···뭐?"
"당신네 왕국이 남의 손에 넘어갔잖아. 범죄자? 신하? 아무튼 부하들도 죄 괴물이 됐고. 왕이라매. 이걸 참아? 복수해야지."
진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덧붙였다.
"생각해 놓은 거 없어? 댁도 2위계 마법사잖아."
"···생존자들을 규합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괴물이 본신의 힘을 되찾기 전에 친다."
"생존자들을 찾을 방법은?"
질문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따지고 보면 침입자가 주인을 다그치는 꼴이었거늘.
눈깔이 은은하게 돌아있는 진의 기세에 밀린 노인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생명 탐지 주문."
"좋아."
고개를 끄덕인 진이 손을 휘저어 상태창을 흩어버렸다.
그러고는 생각을 정리하길.
시간제한, 한정된 공간, 랜덤하게 돌아다니는 보스.
시한부 신세를 받아놔서 그런가.
한없이 게임처럼 보이는 요소가 이 순간만큼은 공황을 일으키는 트리거가 되지 않았다.
그저 혼미한 가운데 열이 받을 뿐이었으니.
그리하여 진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레이드."
< 73화 >
레이드도 좋지만 당장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잇따른 싸움에 피로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으니.
그 몰골들이 마치 90분의 치열한 접전 끝, 휘슬 소리를 듣고 제자리에 풀썩 널브러진 축구 선수와 같았다.
마음 같아선 정신줄 탁 놓아버리고 잠이라도 푹 자면 좋으련만.
그러기엔 해야 할 게 많더라.
상처도 치료해야 하고, 의무적으로 배도 불려야 하고, 상황도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리하여 막시모가 가방을 뒤적뒤적.
바르는 연고부터, 먹는 알약, 푹 꽂는 주사기까지.
뭘 이것저것 계속 꺼내 모두와 나눴으니.
"공짜 아니다. 나중에 다 청구할 거야."
내미는 손길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뒷말을 일일이 덧붙이는 모습에 진이 속으로 생각했다.
좀생이 도라에몽. 근데 밤톨머리를 곁들인.
아무튼 치료도 마쳤겠다.
주섬주섬 식사를 시작한 일행이다.
초코바, 육포, 견과류 등등.
열량이 높은 음식 위주로 입에 쑤셔 넣긴 하는데, 그 동작이며 표정이 하나같이 기계적이랄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래 녹초가 되면 입맛이 뚝 떨어지기 마련이라서.
입맛만 떨어지게?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 소화도 영 안 된다.
먹으면 먹은 대로 더부룩하니 얹히는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어째. 싸우려면 먹어야지.
하지만 예외도 있는 법이다.
억지로 음식을 주워 삼키는 누구누구와 다르게 아픈 와중에도 입맛만큼은 쌩쌩한 진이라서.
제 몫을 다 먹고도 부족해, 막시모에게 외상까지 두둑이 달아가며 전투식량을 양껏 받아낸 그다.
한국인은 밥심이지.
그리 되뇌며 통조림을 따는데, 사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물론 한국인이 인사말로 '밥 먹었어?' 헤어질 때 '다음에 밥 한번 먹자'를 시전할 만큼 밥에 진심인 민족이긴 하나, 고열에 머리가 핑핑 도는 와중에도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 이들은 아니었기에.
그런 무식한 짓은 진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이후 전투식량 다섯 봉지를 박살 내고 벽에 기대어 한숨을 푹 내쉬는 그를 노인이 빤히 응시했다.
"할 말이라도?"
진이 고개를 돌려 묻는다.
무시하기엔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기 때문이었는데,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이.
"너 같은 도둑과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화가 나는군."
뭐지. 갑자기 시비?
눈살을 찌푸린 진이 이내 헹 콧방귀를 꼈다.
"잘잘못 따지기엔 댁도 범죄 저질러서 여기 숨어든 거 아닌가? 그러게 죄짓고 살지 말았어야지."
그에 노인의 눈썹이 꿈틀.
아예 멀어버린 우안과 반쯤 멀어버린 좌안에 흐릿한 분노가 담겼다.
"여긴 내 왕국이다."
"불법 점유지 아니고?"
"무엄한···!"
노인의 손바닥이 합장할 듯 가까워진다.
짝 소리가 불러온 폭음을 기억하는 일행이 흠칫 놀라 전투 준비를 하는 가운데, 진이 피곤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괜히 힘 빼지 맙시다. 피차 서로가 필요한 마당에."
"······"
노인이 보란 듯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끝끝내 손뼉을 치진 못하고 팔을 늘어뜨리니, 바닥서 벌떡 일어난 그가 몸을 돌렸다.
"나중에 오겠다."
그 말을 끝으로 석굴 밖으로 휙 나가버린 노인이다.
시전자가 멀어졌기 때문일까.
허공에 뜬 광원이 어둠 속으로 사그라지자, 막시모가 휴대형 조명을 딸깍 켜고는 밝기를 조절했다.
그러더니 참고 있던 숨을 푸후-
"···또 싸우는 줄 알았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진을 바라봤다.
"야. 저러다 갑자기 눈깔 돌아가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을 거야. 진 말대로 저 녀석한텐 우리가 필요할 테니까."
어느 순간 하나로 돌아온 나타샤가 뒷말을 이었다.
"아까 뱀파이어에 대해 얘기할 때 기억나? 찬탈이라고 했어. 자신의 왕좌를 빼앗은 찬탈자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더라. 말로만 왕이니 뭐니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가 왕인 줄 아는 거야. 30년 넘게 땅굴에 처박혀 있었다더니 현실감각이 어디까지 추락한 건지···"
그녀가 말끝을 흐리는 가운데.
내내 눈치만 살피던 용병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새, 생존자가 더 있을까?"
"모르지. 있다고 해도 너 같진 않으면 좋겠다, 인마."
"······"
합죽이가 된 용병을 보며 피식거린 막시모가 말했다.
"일단 다들 눈 좀 붙여. 저 미친 노인네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그때까진 체력 좀 회복해야지. 일단 불침번부터 정할까?"
그리하여 일행이 가위바위보로 불침번을 정했다.
진은 세 번째였다.
***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몸속에서 피어오르는 부정한 감각.
끝없는 갈증과 영원한 밤을 노래하는 피가 6,000km에 이르는 혈관 속을 내달렸다.
그 붉은 흐름에 몸을 맡긴 수천수백만 적혈구가 보인다.
가운데 옴폭 패인 붉은 원반들. 어느 순간 그 중심이 쩍 갈라지며 마치 웃는 듯한 형상이 된다.
그 속에서 날카롭게 돋아난 이빨, 수백만 붉은 얼굴이 동시에 소리쳤다.
[받아들여!]
"헉."
진이 눈을 떴다.
누군가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벌써 내 차례가 된 걸까.
술에 취한 듯 몽롱한 정신 속에서 어떻게든 몸을 일으킨 진이 벽에 몸을 기댔다.
"···고생했어. 이제 자."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훑어내며 던진 말에 상대는 가만히 이쪽을 바라볼 뿐이다.
목소리가 잠긴 게 티가 났나?
어지간하면 아픈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진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자래도."
그러자 반대쪽에 앉아 있던 실루엣이 슬쩍 조명 쪽으로 가까워진다.
서서히 걷히는 음영.
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너···"
"형, 좀 괜찮아요?"
그리 묻는 얼굴이 익숙하다.
프로젝트 네오가 그렇게나 재밌다고.
한 번만 해보라 닦달하던.
이름보다는 또라이라고 훨씬 더 많이 불렀다.
대학교 후배.
아는 동생.
그리고 지금.
"프네 재밌죠?"
활짝 웃으며 물어온다.
실실 잘 쪼개던, 넉살 좋은 웃음 그대로.
"내가 말했잖아. 복잡해서 그렇지. 익숙해지기만 하면 이만한 게임이 없대도. 그래서 부랑자 빌드는 어때요. 죽이죠? 똥손들도 이 빌드타면 무난하게 중반까지는 간다니까?"
"지랄···"
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머리가 아팠다. 점차 심해지는 두통에 이명이 젖어 들 정도로.
"무조건 가문이나 기업으로 시작하라고 말했어야지. 특성도 이거 말고 딴 거로. 불세출? 생각해보니까 그게 되게 좋았던 거 같아. 뭐랬더라. 천부의 재능···?"
"에이, 지나간 얘기는 하지 말죠. 부랑자 씨."
동생놈이 낄낄 웃는다.
진도 킥킥 웃었다.
그러자 입 찢어진 적혈구들도 박장대소했다.
"지금은 지금에 집중해야지. 지나간 거 계속 들여다보면 미련만 남아서 안 돼."
"너가 나처럼 살아봐. 미련이 안 남나."
"거 참."
난처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는 동생놈이다.
군대도 안 갔다 온 게 뭘 알겠냐, 라고 말했을 때 딱 저런 표정을 지었다고.
나중에 전역 소식을 듣고 축하했더니 뭐라고 했더라?
'별거 없던데요.' 였던가.
진의 눈이 과거를 되짚어 아련하게 끔뻑거릴 때였다.
어느 순간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동생놈이 말하길.
"그러면 더 좋은 기회네요. 이참에 확 새롭게 태어나버리죠."
"뭐?"
"잠시만요."
녀석이 품에 손을 쑥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네모반듯한 무언가를 꺼내 명함 내밀 듯 건네왔으니.
[진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 흡혈귀 회복력 봤죠? 피안개랑 박쥐로 계속해서 체력 보충하는 거. 얼마나 까다로워."
"······"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단점을 없애려고 노력할 시간에 장점을 극대화하는 게 낫다고. 내가 보니까 그거 딱 형을 두고 하는 소리야. 이레귤러의 회복력에 진혈? 이걸 참는다고?"
동생놈의 말이 떠벌떠벌 이어진다.
그때와 같다.
프로젝트 네오를 추천했을 때.
낯선 장르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더니, 게임의 온갖 장점을 나열했던 그때와.
그 말을 들었다가 내가 어떻게 됐더라.
진이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직후 들려오는 목소리.
"그냥 수락하죠?"
그에 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답했다.
"······좆까."
그러자 보이는 건 찢어진 입꼬리가 귀끝까지 닿는 새빨간 타원체.
그것이 말했다.
[받 아 들 여]
동시에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눈을 뜬 진이다.
"···진? 진, 괜찮아?"
걱정 섞인 목소리.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 이마 위의 손은 덤이다.
"열이 심해. 안 되겠다. 조금 더 자."
나타샤가 조심스레 물러서는 순간.
어느새 부스스하게 상체를 일으킨 진이 입을 열었다.
"나 멀쩡해."
"멀쩡한 사람 몸이 그렇게 뜨겁다고?"
"별거 아니야. 배에 구멍 난 것도 낫는 거 못 봤어?"
"그래도···"
"빨리 자. 다른 사람 깨우지 말고."
반강제로 불침번 자리를 뺏은 진이 조용히 팔짱을 꼈다.
그런 그의 눈앞에는 어느새 째깍거리는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남은 시간 19:16:46]
***
노인, 다미르가 다시 석굴을 찾은 것은 근무 시간을 다 채운 진이 잠든 일행을 깨우고 있을 때였다.
"이만하면 충분히 쉬었겠지."
그렇게, 공동의 적을 둔 기묘한 동행이 시작됐다.
목표는 생존자 수색.
사실, 빈말로도 가능성이 높은 계획은 아니었다.
석관이 열린 게 보름 전이었고, 땅굴 전역이 기묘한 어둠 속에 파묻힌 것이 열흘 전이라 했으니, 그 긴 시간을 버틴 이들이 솔직히 몇 명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일단 찾기만 한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목숨을 부지한 만큼, 제대로 된 실력자일 확률이 매우 높았으니까.
물론 저기 용병처럼 맛탱이가 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건 찾고 나서 생각할 문제였고.
그리하여 자칭 왕, 타칭 미친놈의 진두지휘 아래 생존자들의 생존자 찾기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니.
그동안 진의 상태도 점점 나빠졌다.
"형."
걸핏하면 어둠 속에서 얼굴을 슬쩍 내미는 저 새끼가 문제였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저 혼자 사람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기분 나쁜데, 그때마다 남은 시간을 들이미는 건 더 끔찍하더라고.
"15시간 남았어요."
환시와 환청은 사람을 좀 먹는다.
모른 척한다고 나아졌을 것 같으면 이 세상에 조현병은 없었으리라.
"어우. 썩은내. 죽은 지 며칠은 됐나 본데요? 주변 시체들이 새카맣게 탄 걸 보니까 파이로키네시스였던 모양인데···나름 저항은 한 것 같은데 아쉽게 됐네."
"그러고 보니 형 휴먼 토치 좋아하지 않았나? 왜 사이커 빌드 안 탔대. 뭐 그래도 자전이 더 어울리긴 하네."
진은 무시했다.
대꾸했다간 끝도 없을 것 같기도 했거니와, 저 생글거리는 얼굴이 언제 새빨갛게 돌변할지 알 수 없었기에.
그렇게 다시 한참.
"오, 생존자! 카멜레온 수인이네. 징그러워라. 카모플라주를 활용해서 숨어있던 모양인데요? 혓바닥만 길게 뺄 줄 아는 멍청이들보단 훨씬 낫네."
"그리고 11시간 남았어요."
돌담 구석에 위장한 채 숨죽이고 있던 카멜레온 수인이 합류했다.
자기소개를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났다.
다만, 그가 레벨4의 솔로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팀 내 유일한 생존자라는 얘기 정도는 어찌어찌 귀에 담을 수 있었다.
잠깐의 휴식 시간.
어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느샌가 동생놈의 얼굴을 빌린 무언가가 곁에 엉덩이를 툭 붙이고 앉는다.
단지 그것만으로 짙은 혈향이 훅 끼쳐왔다.
수 세기 동안 켜켜이 축적된 죽음의 향기였다.
"형, 그냥 좀 받아들여요. 그편이 모두한테 좋아. 이대로 고집 피우다 죽으면 뭐가 남는데. 다윈상 수상은 할 수 있겠네."
진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이후 일행 근처에 다시 자리를 잡은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막시모가 본인이 찾는 아티팩트에 대해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설명해 준 것 같았는데.
뒤돌아서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뭐지. 뭐였더라.
끝내 떠올리지 못한 채 다시 수색이 시작됐다.
원래라면 전철이 오갔을 기다란 통로를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생존자를 발견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쫓기는 중이었는데, 서둘러 구하고 보니 언더하트의 일원이더라.
여태 뚱한 표정만 짓고 있던 노인이 처음으로 미소를 되찾았다.
"두더지 새끼들. 되게 끈끈한 척 구네. 그래봤자 범죄자 새끼들인 주제에. 아, 형 잘 안 들리죠? 칼잡이래. 언더하트 내에서 냉병기로는 최고라는데?"
사람을 무슨 귀머거리 취급하는데 부정할 수가 없더라.
동생의 얼굴이 또렷해질수록, 나머지 시야는 희뿌옇게 번져갔고.
녀석의 목소리가 선명해질수록, 다른 음성은 물속에서 들려오듯 뭉글뭉글 멀게만 느껴졌기에.
"참고로 8시간 남았어요."
일행은 계속 나아갔다.
휴식과 탐색이 이어진 끝에 생존자 둘을 더 찾았으니, 그들은 각각 임플란트로 전신을 개조한 용병과 언더하트의 마법사였다.
놀랍게도 둘은, 적이지만 서로를 의지한 채 이 어둠 속에서 버티고 있었다고.
옆에서 붉은 머리통이 설명해 줬다.
어느 순간부터 그건 동생의 얼굴도 뭣도 아니었다.
"3시간."
마침내 지하유적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일행이다.
전력도 4명이나 추가된 상황.
이제는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시체들을 수차례 패퇴시키며 일행 내에서 자신감이 붙었을 무렵이었다.
"컥!"
느닷없이 비명이 터졌다.
가슴을 꿰뚫린 언더하트의 마법사가 허공에서 떠오른 발을 바동거리니.
콰직! 으깨지는 심장을 손에 쥔 피의 혈족이 팔을 크게 떨치며 말했다.
"······여기에 다 모여있었군. 좋아."
그 창백한 얼굴이 일행을 향함에, 모두가 전투를 준비하는 순간.
오직 진만이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핏물이 사람의 형상을 이룬 듯한 존재.
진혈이라 불리는 힘의 원류가 찢어진 입을 열었다.
[나를 받아들여라. 너의 잠재력이라면 천 년 전 영광을 넘어설 수 있으리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목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핏방울이 부글부글 치솟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천장에서는 폭포수 같은 핏물이 온 사방에서 쏟아지니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가는 세상이 진의 감각을 현실에서 유리시켰다.
이제 남은 건 코끝을 파고드는 지독한 혈향, 마주한 것만으로 전율을 일으키는 홍해(紅海).
그 중심에서 핏빛 존재가 천천히 양팔을 펼쳤다.
[너를 선택해라]
그 순간, 진의 몸에서 폭발적인 뇌전이 솟구쳤다.
일순 주변이 환해질 정도의 세기였으니.
천천히 고개를 드는 잿빛 눈동자에서 번갯불이 파직.
직후 잇따른 파공성과 함께 핏빛 괴물 앞에 다다른 진이다.
그러고는 지금까지의 모든 울분을 토해내듯 전력을 다해 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니.
꽈릉!
난폭한 뇌명과 함께 팽창한 공기가 사방으로 폭발하는 가운데.
진이 내지른 주먹 그대로 으르렁거렸다.
"난 진이다.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쭉! 알았냐? 이 헤모글로빈 새끼야?!"
< 74화 >
핏물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연이어 솟구친다.
온몸으로 물수제비를 뜬 괴물이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첨벙 잠겼다.
그것도 잠시.
폭발적인 기세로 몸을 일으켜 세운 놈이다.
[기어이 열등한 채로 죽겠다는 건가?]
찢어진 입이 그리 물었고, 진이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
"죽긴 누가 죽어!"
직후 발끝으로 바닥을 강하게 밀어내며 돌진.
순식간에 상대의 지척에 다다라 발길질을 날렸다.
기술명 같은 건 없다.
그저 너 한번 죽어봐라 있는 힘껏 다리를 휘둘렀을 뿐.
거기에 치인 괴물의 몸이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지는 가운데.
그 뒤를 쫓는 진의 몸에서 붉은 스파크가 번뜩거렸다.
[마나 폭주]
초장부터 목숨을 걸기로 결심한 그다.
애초에 시한부 신세지 않은가.
힘을 아끼고 자시고,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그리하여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상대를 따라잡은 진이 맞춰 잡듯 발을 내리찍었다.
쾅!!
짓밟힌 괴물의 머리통이 핏물 속에 잠긴다.
진은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닿을 만큼 깊숙하게 처박힌 괴물의 뒷덜미를 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가까운 벽을 향해 쾅쾅!
도장 찍듯 연이어 안면 찜질을 시작했으니.
"흡! 혈! 귀! 안! 해!"
어절 단위로 이어지는 강제 박치기 공격에, 토마토를 으깬 듯한 혈흔이 벽 전체로 퍽퍽 터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0분 남았다]
짓뭉개진 안면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니.
"···?"
다음 순간, 소리 없이 불길한 대기의 흐름을 느낀 진이 천천히 고개를 비스듬히 위로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핏빛 해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수천수백만 개의 연붉은 포말이 지상을 덮는 그림자와 함께 추락한다.
---!!
영혼으로 느끼는 굉음과 함께, 핏물 속에 삼켜진 진이다.
막강한 와류에 휩쓸린 몸뚱어리가 제멋대로 빙글빙글 회전했다.
푸르르르-! 코와 입으로 역류한 핏물이 폐를 시뻘겋게 물들이는 가운데.
어느 순간 주변을 가득 채운 것은 입 찢어진 적혈구들.
놈들이 광소를 터뜨렸다.
[받아들여!]
[새롭게 태어나는 거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낯선 풍경들이 비췄다.
그것은 시체로 쌓은 산.
죽어 하나된 섬뜩한 악의.
이는 불경한 존재에게 바치는 신도들의 산제물이니,
바라옵건대 그대의 피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소서.
간절하게 무릎 꿇고 빌었던 이들조차 산의 일부가 된 상황에서, 한 소년이 강이 되어 흐르는 핏물 아래 털썩 무릎을 꿇었다.
원래는 제물로 바쳐질 이들 중 하나였으나, 우연히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쉰 아이가 붉은 액체 위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
더없이 핼쑥한, 죽음이 멀지 않은 낯빛.
덜덜거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던 소년은, 어느 순간 체념한 듯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오목하게 구부린 손바닥에 핏물을 담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두 손을 높이 올리며 내용물을 입안으로 흘려 넣으니.
이는 인류 최초로 진혈을 받아들인 존재의 모습이라.
[자네딘]
아이의 이름을 언급한 적혈구들이 말했다.
[너라면 그를 뛰어넘을 수 있다]
[피의 왕이 되는 거다]
그러는 사이 풍경이 바뀌었다.
진혈을 통해 새로이 태어난 자네딘이 다른 이를 권속으로 부리는 모습이었다.
하나의 뱀파이어에서 시작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혈계도.
진혈의 일족은 그렇게 탄생했으니.
그중 자네딘에게 직접 진혈을 세례받은 열두 명의 뱀파이어에겐 '로드'라는 칭호가 하사됐다.
[너는 로드에게 세례받았으나 그를 뛰어넘을 것이다]
[영광된 존재가 되리라!]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불온한 합창이 이어지며, 진의 의식이 점차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때였다.
화륵!
가슴 속에서 미약한 불길이 밝게 움텄다.
마음을 따스히 비추는 열기.
그러자 눈앞에 새로운 풍경이 비쳤다.
오랜 세월이 흘러, 피의 왕이라 불리게 된 자네딘의 앞에는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붉은 머리칼에 껄렁껄렁한 자세.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삼라만상을 모조리 불사를 것 같은······
[솔라드!]
찢어진 입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마치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풍경이 아니라는 것처럼.
하지만 그때는 두 존재가 서로를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뒤였으니.
이후 이어진 싸움이란, 진의 수준으로는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아득한 영역이라서.
다만 이것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기나긴 싸움의 끝에 승리한 이가 붉은 머리칼의 사내라는 것을.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핏물을 퉤 뱉는 그의 양손에는 각각 자네딘의 머리와 심장이 들려있었다.
[너! 어떻게 순수한 불길을!]
[자하드가 아니었나!]
경악하는 목소리와 함께 진이 눈을 번쩍 떴다.
여전히 몸은 휩쓸려 떠내려가는 중이었지만, 어째서일까.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중심을 다잡을 수 있었다.
"더럽게 시끄럽네."
눈앞에는 미소를 잃은 수많은 붉은 얼굴이 악다구니를 퍼붓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넌 누구냐, 정체가 뭐냐 닦달하는데, 이 새끼들은 내 얘길 안 들었나?
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전을 쓰면 자하드.
백염을 쓰면 솔라드.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 비단 사람들뿐만 아니었구나.
이 세상은 어떻게 된 게 적혈구까지 지랄이네.
진이 피식거렸다.
어이가 없으려니 오히려 유쾌해졌기에.
"내가 무슨 힘을 쓰는 게 그렇게 중요하냐?"
그에 진혈이 일갈했다.
[······!!]
그것은 사특한 저주 같기도 했고,
그저 개 짖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셔? 나는 상관없는데."
진의 웃음이 짙어졌다.
자전이고 불씨고 그저 사용하는 힘일 뿐.
중요한 건 언제나 나라고.
단 한 번도 비전마법에 자아를 의탁한 적 없는 그다.
그건 솔라드의 선조가 최초의 흡혈귀를 태워버린 장본인이라는 걸 어찌어찌 알게 된 지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그런갑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뿐.
해서 진은 언제나 진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모습을 끝까지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이 이 낯선 세상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으니.
그 마음을 가만히 되짚은 순간.
눈앞에 세상을 가로지르는 선이 보이더라고.
"오오."
밝은 표정을 지은 진이 거길 풀쩍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이후 파랗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길.
"뭐야, 별거 없네."
그와 동시에 썩어 문드러진 혈액의 바다가 우뚝 멈췄다.
아니, 그것은 바다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혈관 속을 내달리던 저주받은 피였을 뿐.
그것도 고작 200ml 남짓한.
한층 높아진 시선에서 이를 확인한 진이 헛웃음을 흘린 순간.
진정으로 주도권을 되찾은 몸이 자연스럽게 내부의 불순물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진혈의 편린이 비명을 내지른다.
영원한 진화를 꿈꾸는 신체가 포식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큭!"
막시모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흡혈귀에게 가슴을 걷어차인 여파였는데, 그 안에 실린 힘이 워낙 강한지라 몸이 절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완충 기능이 있는 조끼가 무색할 정도의 충격.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에게 수백 마리 날짐승이 덮쳐든다.
치치치치칫!!
듣기 싫은 울음소리에 정신이 번쩍.
반사적으로 품에 손부터 찔러넣은 막시모가 그 안에서 수류탄을 꺼내 힘껏 던졌다.
"꺼-져!"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른 수류탄이 박쥐 떼 한가운데서 번쩍 빛을 뿜었다.
섬광탄.
게임에서도 그저 화면을 희뿌옇게 만드는 그것.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섬광탄이 발생시키는 폭음의 크기는 170~180데시벨로 전투기가 이착륙하는 소음보다 훨씬 더 크기에.
이는 반고리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소리인즉.
청각이 발달한 박쥐들이 단체로 추락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막시모는 못 봤다.
투척과 동시에 섬광을 등져 눈을 보호한 그라서.
삐---
날카로운 이명이 귓가를 스치는 가운데.
상황과 동떨어진 잡념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아티팩트를 노리고 왔더니, 기대했던 아티팩트는 없고 웬 고대종이 부활을 한 상황.
심지어 뱀파이어 로드란다.
운도 더럽게 없지.
드안드레가 전화했을 때 받지 말걸!
하지만 후회했을 땐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서둘러 정신을 차린 막시모가 고개를 휙휙.
그러자 보이는 건, 공중에 뜬 다리를 바동거리는 누군가의 모습이라.
"···케헥!"
답답한 숨결을 토하는 그는 카멜레온 수인이었다.
피안개 속에서 빠져나온 손에 목을 잡혔는데, 표정에 괴로운 기색이 만연했다.
"이런!"
곧바로 소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긴 막시모다.
즉각적인 대응이 피안개 속에서 가지를 뻗은 창백한 팔을 박살 냈다.
직후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수인이 여전히 목을 붙든 손을 뜯어내려는 그때.
콰앙!!
갑작스레 울룩불룩 팽창한 손이 폭발을 일으켰다.
후드득-, 얼굴에 튀는 핏방울을 느끼며 서둘러 그리로 달려간 막시모의 눈에 끔찍한 부상을 입은 수인이 담겼다.
"흐으, 흐으."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숨은 붙어있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미 바닥에 흐른 피가 너무 많았기에.
"사, 살려···"
생을 갈구하는 목소리에 막시모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마약성 진통제를 꺼내려는 순간.
피안개에서 돋아난 수많은 팔이 널브러진 수인을 끌어당기니, 곧이어 섬뜩한 파열음이 울려 퍼지고, 산 채로 뼈와 살이 으스러진 수인이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안개에 흡수됐다.
"미친!"
멜빵끈을 당겨 소총을 내갈긴 막시모가 급히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생각하길.
이게 만전이 아니라고?
분명 천 년을 굶어 쇠약해졌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언더하트 놈들을 잡아먹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그사이 아군 하나가 더 당했다.
전신을 개조한 사이보그 용병이었다.
지치지 않는 육체로 나름 분전하던 그였지만, 임플란트 내부로 스며든 안개가 응고를 거듭하며 켜켜이 쌓여가자, 어느 순간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다가 끝내 목이 척추와 함께 우드득 뽑혔다.
동시에 악에 받친 포효가 터졌다.
"이 더러운 놈!"
이어지는 짝! 박수 소리가 굉음을 동반한다.
폭발을 일으켜 피안개를 걷어낸 다미르다.
이 순간, 노인의 눈은 복수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감히 내 왕국을! 30년에 걸쳐 이룩한 내 모든 것을!"
도망친 곳에서 저만의 낙원을 피워낸 늙은 마법사의 분노가 활활 불타올랐다.
비록 쪼그라든 신체는 전성기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지만, 그럼에도 그 공격성만큼은 세월이 무색한 것이라.
상대를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폭발 마법은 뱀파이어에게 분명 유효타를 적립하고 있었다.
과연 2위계라고 할까.
왕이다, 뭐다 미친 소리를 해대서 그렇지.
노인은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뱀파이어와 대적이 가능한 인물이었으니.
실은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고.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의식을 잃어서 문제지만.
"나타샤! 진은?!"
막시모의 외침에 한창 박쥐들을 향해 샷건을 갈기던 나타샤가 대답했다.
"아직!"
"돌겠네. 진짜!"
절로 울상이 된 막시모다.
실종자를 수색할 때부터 내내 컨디션이 나빠 보이긴 했다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정신줄을 탁 놓아버릴 줄이야.
진이 어떻게 싸우는지 봤기에 더 아쉬울 수밖에 없다.
기껏 하나로 뭉친 생존자들이 허무하게 죽는 모습에 유난히 속이 쓰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만 있었다면 진짜 할만했을 텐데.
그때였다.
퍼퍼퍼퍼퍼펑!!!!
연쇄적인 분진폭발이 지하 공간을 휩쓸고,
뒤이은 충격파가 피안개를 말끔히 걷어냈다.
설마, 폭탄마 영감탱이가 해냈나?
막시모가 기대감 가득한 시선으로 폭심지를 내다봤다.
그리고 입꼬리가 바로 떨어졌다.
그곳에는 살갗이 지글지글 녹아버린 흡혈귀가 노인의 복부를 꿰뚫고 있었기에.
괴로워하는 상대의 얼굴을 눈에 아로새긴 놈이 입을 열었다.
"···노쇠하지 않았다면 위험했겠어. 인정하마. 너 정도면 권속이 될 자격이 있다."
그리고는 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배에 꽂힌 팔만 남겨둔 채 몸을 박쥐로 흩어버리니, 자연스럽게 풀썩 쓰러진 다미르가 이를 악물었다.
"권속이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나는 왕이다! 왕!"
몸의 상처보다는 자존심의 상처가 더 컸을까.
연신 악을 쓰는 그를 대신해, 언더하트의 칼잡이가 박쥐 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거기에 둘로 나뉜 나타샤 중 하나와 막시모가 합류했다.
셋과 하나의 싸움.
처음에는 그런대로 싸움이 성립되는 듯 보였지만, 폭발에 밀려난 안개가 주변을 음습하게 둘러싸자, 언뜻 팽팽해 보이던 균형이 거짓말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칼이 부러진 칼잡이가 바닥을 나뒹굴고,
나타샤의 분신이 목을 뜯겼으며,
막시모는 어깻죽지 살이 한 움큼 날아갔다.
"···쉬운 일이 없네. 그렇지?"
그때까지도 의식 없는 진을 지키던 나타샤가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샷건을 철컥 장전하며 전진하려는 순간.
"푸하. 배불러."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그것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던 흡혈귀도 마찬가지였으니.
"마침내 새로 태어났···"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을까.
자신의 첫 번째 권속을 반기던 표정이 차갑게 굳었으니, 놈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너, 진혈을 어떻게 한 거지?"
진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저 허공을 빤히 쳐다보며 눈을 끔뻑거렸을 뿐.
그렇게, 본의 아니게 상대의 인내심을 살살 시험하던 그가 이윽고 입을 달싹거렸다.
"삼켰다는데?"
그리 말하는 진의 눈앞에는 간만에 보는 상태창이 떠있었다.
「???」━━━━━━━━━━━
NEO ?? ??? 자하드
??? ?? 진혈을 삼킨 자 ????
?? ??? ?? ?? 누군가의 불씨
━━━━━━━━━━━━━━
< 75화 >
흡혈귀의 이름은 발렌티노 옥시투스.
자네딘에게 세례받은 12명의 로드 중 하나로,
왕의 죽음 이후 존속이 위태로워진 일족을 위해 오랜 시간 고군분투한 자였다.
물론 그 고군분투라는 게, 무고한 이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행위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찌 됐든 그는 최선을 다했다.
일족의 부흥과 영광된 그날을 위하여.
[진혈은 계승되어야 한다]
혈관을 흐르는 피는 언제나처럼 속삭였으니.
비록 왕은 죽었으나, 그 유지는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는 광신적인 믿음이 그를 앞으로 이끌었다.
계승된 진혈이 언젠가 왕의 자질을 만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한 밤의 주인이 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적들은 강했다.
위대한 7가문.
그중 태양을 숭상하는 솔라드가 문제였다.
놈들은 악착같이 혈족을 말살하려 들었으니,
왕께서 가주의 여자를 핏물로 취한 것이 화근이었다.
놈은 왕에게 복수를 한 것도 모자라, 제 목숨까지 태워 가며 혈족을 불살랐다.
그야말로 태양의 현현(顯現).
도망가야 한다.
승산이 없다.
발렌티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지금으로선 답이 없으니 다음 천년을 노리자.
그때는 7가문이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있더라도, 우리를, 나를 잊을지도 모른다.
다른 로드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벌써 가주에게 불타버린 놈들만 여섯 아닌가.
훗날은 알아서들 도모하겠지.
발렌티노는 그렇게 스스로를 석관에 가뒀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라.
나는 시대를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발렌티노의 눈이 찢어지라 커졌다.
총포라는 낯선 무기를 봤을 때도, 마법이 아닌 증폭된 뇌파를 다루는 존재들을 만났을 마주했을 때도 그저 흥미롭다 생각했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예외였다.
분명 세례를 내렸을 텐데?
첫 번째 권속될 영광을 내린 어린 자하드가 멀쩡한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코를 후비적거리는 불경함을 보이면서.
"꺼억--"
느닷없는 트림은 웬 말인가.
"진혈!"
평정을 잃은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진혈을 어떻게 한 거지!"
혈족을 이어주는 힘이다.
아직도 왕께서 자신의 목에 깊숙한 성흔을 새겨주셨던 순간을 발렌티노는 잊지 못한다.
친히 입맞춰 내려주셨던 힘이여.
잊을 수 없는 만월의 밤이여.
흡혈귀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다시 말해봐라. 진혈을 어떻게 했다고?"
그에 진이 대답하길.
"삼켰다고 했잖아."
그러고는 다시 길게 트림을 꺼억--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나타샤를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미안."
"···너 괜찮아?"
"아니. 배불러."
진이 그리 말하며 배를 팡팡 두드렸다.
기묘한 포만감이었다.
뭐랄까.
입이 아니라 몸 전체로 식사를 한 것 같은 느낌?
먹어서 배를 불렸을 때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만족스러움이라서.
세포들까지 유난히 맨들맨들한 얼굴로 엄지를 척.
어우, 이 집 선지 잘하네. 잘 먹었습니다.
찬사를 아끼질 않으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진이 히죽히죽.
진혈이 뭔지는 몰라도 배는 확실히 부르네.
그나저나 나 인간 맞지?
그리하여 진이 검지로 볼 안쪽을 쭉 늘이며 나타샤에게 물었다.
"애 송공니 효족해?"
내 송곳니 뾰족하냐는 물음이었는데, 발음이 뭉개진 탓일까?
곧장 대답이 돌아오질 않더라고.
"······"
멍한 표정을 짓는 나타샤의 눈길이 아래쪽을 향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진이다.
바닥에 뭐가 있나?
고개를 갸웃, 자연스럽게 눈길을 아래로 내리던 진이 순간 흠칫거렸다.
허벅지 위를 길게 타고 내려가는, 심상찮은 윤곽과 눈이 딱 마주쳤기에.
"어이구."
저도 모르게 양손을 포개 사타구니를 가린 진이다.
물론 가려야 할 곳은 따로 있지만, 어차피 손으로 다 가려지지도 않는다.
이거 또 왜 이래?
지난번 영약 때와 마찬가지로 과포화 현상을 겪게 된 진이 눈을 끔뻑끔뻑.
제아무리 낯짝이 두꺼운 그라도, 이런 상황은 매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 에? 뭐?"
심지어 저 멀리 쓰러진 막시모조차 계속해서 제 눈을 비비적거리고 있었으니.
밤톨 같은 얼굴에 비친 감정이 황당함이라면, 흡혈귀 쪽은 숫제 분노에 가까워서.
"너···자하드. 이 무슨 흉물스러운···!"
자신이 친히 하사한 진혈이 죄 저리로 몰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초월적인 남성성을 마주한 놈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절대로 부러워서가 아니다.
저 빌어먹을 종자가 진혈을 욕보이지 않았는가.
참을 수 없다. 참지 않겠다.
"놈!!"
바닥을 쾅 박찬 흡혈귀의 몸이 순식간에 피안개에 섞여 들었다.
이 자욱한 핏빛 운무는 피의 일족에게 허락된 상위 능력이다.
범위 내의 모든 장소에 몸을 이동할 수 있으며,
망가진 신체를 재구성하거나,
심지어 그 속에 갇힌 이들에게 환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일종의 영역 전개라고 할까.
비록 예전의 힘을 수복하지 못했기에, 환각이나 각종 사법은 사용하지 못하는 발렌티노였지만, 이 정도로도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상대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분전하던 늙은 마법사도 끝내 쓰러지지 않았던가.
그만큼 까다로운 능력 속에서 흡혈귀가 상대의 빈틈을 노렸다.
다리를 꼰 채로 연신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가증스러운 얼굴이 보인다.
진혈을 삼켰다고?
그런 모욕적인 발언을 듣고도 참을 수 있는 일족이 있을까.
대가는 피로 치러야 할 것이다.
분노한 뱀파이어 로드가 진의 등 뒤에서 실체화를 앞뒀을 때였다.
"···이런 느낌이 맞나?"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
다음 순간.
진의 몸에서 투명한 불길이 은은하게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거기서 비롯된 아지랑이가 피안개를 밀어냈다.
치이이익, 불판에 올린 고기 소리를 내면서.
"크학!"
실체화 중이던 발렌티노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뺐다.
그 반응이 굉장히 격했다.
다급하게 몸을 박쥐로 흩어버린 뒤,
한참 떨어진 곳에서 다시 인간의 형상을 이루니.
화상을 입은 오른쪽 팔뚝을 힐끗 확인한 놈이 왈칵 소리를 질렀다.
"넌 뭐냐!!"
그러자 격한 반응이 돌아오길.
"진이라고! 진! 진! 진!"
핏대를 세우며 일갈한 진이다.
같은 질문을 도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서.
"진 에버나이트! 모르면 외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그를 향해 나타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는 진 자하드라고······"
"아."
그제야 자하드의 성씨를 팔았던 순간이 떠오르더라고.
"그건 이제 음. 복잡한 사정이···"
큼큼 헛기침하며 어물거리는 진에게 흡혈귀가 소리쳤다.
"어떻게 네가 그 불길을···! 솔라드와는 무슨 관계냐! 대답해라!"
쩌렁쩌렁한 외침에 지하 공동이 우르르 흔들린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지는 가운데.
진을 바라보는 흡혈귀의 얼굴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석관 속에 몸을 파묻은 이유가 뭔가.
다 저 불꽃 때문이지 않나.
숭고한 열기, 솔라드.
심지어 저 투명한 불꽃은 분명 왕을 죽인···
"······"
짙은 천적의 악취가 코끝을 찔러,
흡혈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도대체 지상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질문보다는 독백에 가깝다.
하지만 놈이 복잡한 표정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든 진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바닥이 보이게 뒤집은 손. 그 위로 은은히 타오르는 불길을 가만히 바라보았을 뿐.
처음 자신의 의지로 피워낸 불꽃.
아지랑이는 킬기트의 그것을 참고했다.
그 어설픈 카피가 이렇게 효과적일진 몰랐지만 말이다.
"예쁘네."
신비롭게 일렁거리는 어렴풋한 윤곽.
마음 같아선 손안에 움튼 따스함을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불길을 유지하는데 소모되는 마나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진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흡혈귀를 담으니.
저벅.
그대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바닥을 깨부수며 내달리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광활한 보폭으로 어느새 상대의 코앞에 우뚝 선 그가 말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넌 죽인다고 했지?"
"···뭐?"
마음속 결심을 일전에 나눈 대화인 양 언급한 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흡혈귀의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젖혀지는 몸.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멱살을 거머쥔 팔 때문이었으니.
직후 엄청난 힘으로 상대를 끌어당긴 진이 딸려 오는 머리통을 향해 이마를 들이받았다.
분수처럼 터지는 핏물, 와장창 부서지는 이빨.
동시에 흡혈귀의 몸이 박쥐로 분해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피안개로 흩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전이었다면 그 방향을 몰라 잔뜩 긴장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층 넓어진 시야,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사념이 뭉쳐드는 것이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오른발을 축 삼아 빙글 회전한 몸이 허공에 돌려차기를 먹인다.
파앙-, 통렬한 타격음과 함께 흡혈귀의 목이 꺾였다.
놈이 실체화를 마친 순간과 진의 다리가 타점에 도달한 순간이 더없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진이 자세를 바로잡기 무섭게 후속타를 날린다.
심장을 터뜨릴 기세로 날아드는 정권.
흡혈귀는 자신의 하체를 폭발시켜 그 추진력으로 높게 날아올랐다.
동시에 진의 주먹이 허공을 때리고, 높게 치솟은 핏물이 그의 머리 위로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하지만 진의 몸을 뒤덮은 열기가 순식간에 혈액을 증발시키니.
이를 폭발시키려던 흡혈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직후 바닥으로 추락하는 그의 몸이 다시 박쥐로 뿔뿔이 분해되려는 찰나.
그보다 먼저 도착한 진이 놈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로켓처럼 튀어 오르는 몸통이 억센 손아귀에 목을 잡혀 덜컥 멈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먹세례.
순식간에 걸레짝이 된 머리통이 취사 중인 밥솥 뚜껑처럼 정신없이 흔들리는 가운데.
웨엑, 피를 게워낸 흡혈귀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그러자 진이 뿜어내는 열기에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있던 피안개가 놈의 손으로 모여들며 검의 형상을 취했다.
이어지는 올려베기.
진의 가슴팍이 쩍 갈라진다.
그에 흡혈귀가 빨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참격을 맞고 순간 비틀거리나 싶던 진이 금세 상체를 바로 세웠으니까.
다음 순간, 그의 몸을 뒤덮은 불길이 왼손으로 모여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흡혈귀가 발악하듯 다시 팔을 내리쳤다.
하지만 핏빛 칼날이 진의 정수리에 닿는 것보다, 불꽃에 뒤덮인 손이 흡혈귀의 얼굴을 덥썩 움켜쥐는 것이 더 빨랐다.
"크아아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팔이 옆으로 꺾이자, 목표를 잃은 칼날이 진의 어깨에 떨어졌다.
깊게 박힌 칼날에 울컥울컥 피가 솟았지만, 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윤곽선 없이 활활 타오르는 투명한 불길은 마치 삿된 것을 멸하노라 선언하듯 한때 로드라고 불렸던 존재의 얼굴을 불살랐다.
그때였다.
목이 찢어지라 비명을 지르는 괴물의 잘린 허리 아래로 무언가 축 늘어진 것은.
찐득한 태반과 함께 바닥으로 철푸덕 떨어진 그것은 흉측하게 뒤틀린 얼굴을 가진 노인이었으니.
그 모습이 바로 피의 혈족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 발렌티노의 본모습이라.
놈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킬 때였다.
"어딜!"
"어우씨! 징그러운 새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려온 나타샤와 막시모가 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두, 탕-!!
산탄과 소총에 부서지고 관통당한 발렌티노의 몸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하지만 놈은 기이할 정도의 생명력으로 포화를 뚫고 나타샤와 막시모를 차례로 후려갈겼다.
그러고는 어둠 속으로 비틀비틀 도망치려는 순간.
타앙─!!
귀청을 찢는 총성과 함께 뒤통수가 터진 흡혈귀가 제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허억, 허억.
쇳소리 가득한 숨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린 곳에는 거대한 총구를 겨눈 천적이 있었으니.
잿더미처럼 부스러지는 옛 육신 너머.
파지직, 솟구치는 기다란 뇌전의 창이 보인다.
그리고 그걸 불끈 움켜쥐는 손까지도.
흡혈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저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자전과 순수한 불꽃을 제멋대로 넘나드는 존재라니.
믿을 수 없다. 마나의 축복이라도 받지 않고서야.
잠깐, 마나의 축복?
동시에 놈이 눈을 부릅떴다.
"너, 너구나! 왕의 그릇이!"
해묵은 숙원을 이룰 존재를 마주한 듯, 버르적버르적 상체를 세운 흡혈귀가 양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들었다. 복종의 자세를 취한 것이다.
"나의 진혈을 취해라. 그리고 우리의 왕이 되어다오! 제발!"
하지만 간절한 외침이 무색하게,
돌아오는 건 헹! 콧방귀 뀌는 소리였으니.
"내가 미쳤냐?"
진이 그렇게 말하며 뇌창을 집어던졌다.
꽈릉!!
공동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허공을 찢어발기며 날아간 투사체가 흡혈귀를 집어삼켰다.
비명은 없었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폭음이 다른 모든 것을 짐어삼켰기에.
높게 솟구친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는 가운데.
진이 그대로 몸을 되돌렸다.
시체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내면을 가득 채우는 엄청난 경험치에 이미 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으니까.
이후 호흡을 가라앉힌 그가 고개를 들자,
바닥에 엎어진 나타샤와 막시모가 보이더라고.
부축을 위해 터덜터덜 그들에게 다가서던 진의 눈이 문뜩 슬며시 가늘어졌다.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하반신에서 눈을 떼지 않는 두 남녀의 시선 때문에.
"뭘 봐!"
진이 와락 소리침에, 막시모가 털털 웃으며 말했다.
"싸우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도대체."
< 76화 >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여기서 어떤 말을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 자기변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진이다.
이럴 땐 그냥 화제를 돌리는 게 상책이라서.
"됐고. 일어설 수 있어?"
쓰러진 두 사람을 부축한 진이 주변을 쓱 훑었다.
핏물 속에 잠긴 시체가 더러 보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이 차례로 합류할 당시의 진은 극심해진 환각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그나마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카멜레온 수인은 흔적도 없이 잡아먹혔으니, 나머지 시신들이 더욱 낯설 게 느껴질 수밖엔.
이제는 흐릿한 공백으로만 남은 지난 24시간이다.
굳이 되짚을 필요 없는 기분 나쁜 기억이기도 했다.
다만, 간만에 보는 동생의 얼굴이 내심 반갑긴 했다고.
비록 그것이 가짜에 불과했을지언정 말이다.
그때였다.
"···뭐가 이상한데."
막시모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다란 막대기처럼 생긴 신호기에 불을 붙였다.
현대판 횃불이나 다름없는 물건.
주변에 깔아둔 조명탄의 빛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기에 미리 대비를 한 것이었다.
그 말인즉슨, 여전히 이곳엔 어둠이 만연하다는 소리였으니.
"뱀파이어가 죽으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니었어?"
불안하게 중얼거리는 막시모의 혼잣말에 대답한 것은 나타샤의 손길을 뿌리친 노인이었다.
"···말했을 텐데. 지하에 피로 그린 마법진이 있다고. 그걸 부수지 않는 이상 어둠은 사라지지 않아."
마법진?
사뭇 판타지스러운 어휘에 진이 뺨을 긁적긁적.
마법과 기술이 혼재된 세상이란 걸 알면서도, 선뜻 피부로 와닿지 않는 개념이었다.
진에게 마법이란, 이해와 깨달음의 산물이 아닌 그저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된 지식에 불과했기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부숴야지."
힘겹게 돌아온 대답에 진이 고개를 끄덕.
그러고는 아랫배를 짚으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노인네를 번쩍 들어 어깨에 짐짝처럼 걸쳤다.
"이 무슨 무엄한! 내려라! 당장!"
"움직이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존심은."
물 밖에서 헤엄치듯 버둥거리는 노인네 저항이 우습기만 하다.
상대가 마나를 일으켜 몸을 강화했음에도 그랬다.
그냥 큰 물고기가 날뛰는 느낌?
이거 월척이네. 월척이야.
그리 생각하던 진이 문뜩 간질간질한 가슴팍에 시선을 던졌다.
분명 흉골이 비칠 정도로 깊게 베였거늘, 피가 멎은 것도 모자라 어물어물 아물어가는 것이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였다.
단순히 흡혈귀가 되길 거부한 것을 넘어, 진혈을 집어삼킨 결과였다.
충만하다 못해, 넘치는 영양분은 진의 회복력을 영구적으로 강화하기 이르렀으니.
그렇게, 인간이되 한층 인간 같지 않게 진화한 몸뚱이였다.
하지만 진의 멘탈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다.
인간 같지 않아도 인간이 아닌 건 아니잖아.
어? 그 뭐냐.
장금이 누님도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하셨다잖아.
나도 인간이니까 인간인 거지.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건가?
뭐 어쩌라고.
야무지게 정신승리까지 마친 진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몸을 추스른 일행들이 보인다.
불꽃신호기를 쥔 막시모, 다시 둘로 분열한 좌타샤와 우타샤.
···그리고 용병?
"뭐야. 너 안 죽었냐?"
"주, 죽은 척하고 있었어."
용병이 민망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마지막까지 싸웠던 언더하트의 칼잡이조차 부러진 칼날이 가슴팍에 꽂힌 채 절명한 마당에, 사람 구실 못하는 폐급 용병이 생존했을 줄이야.
유난히 악운에 강한 사람들이 있다더니.
그게 딱 저 녀석을 두고 만들어진 말인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는 않았고.
미심쩍은 눈으로 용병을 위아래로 훑어본 진이다.
나중에 갑자기 돌변해서는-
사실 나는 사실 매우매우 비밀스럽고 강력한 조직의 서열 3위와 4위를 왔다 갔다 하는 강자로, 엄청 그럴싸하고 무시무시한 이유로 이곳에 숨어든 것이며, 지금껏 호구 같던 내 모습은 다 연기였고, 아무튼 너희는 다 뒤졌다!
라고 할까 싶어서.
"···왜, 왜 그래?"
하지만 얼빵한 얼굴에서 그런 기색은 읽을 수 없더라.
진정으로 2위계에 이르러,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읽는 능력이 훨씬 예민해진 지금도 말이다.
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자."
그리하여 유적!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이자, 땅굴에서 빛을 앗아간 사법이 펼쳐진 곳이었으니.
어느새 도착한 최심부.
신전을 연상시키는 예스럽게 낡은 건물 아래, 피로 그려진 기하학적인 무늬가 바닥을 가득 메워내고 있었다.
"저거지?"
진이 그리 물었고, 노인은 허공을 바라보며 헛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왕이다. 너야말로, 예를 갖춰라."
횡설수설 이어지는 혼잣말이 남 일 같지 않더라.
처음에는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생각했던 진이었지만, 나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둥,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는 둥, 마치 보이지 않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에서 익숙한 감염의 향기를 맡은 것이다.
자칭 왕에게도 24시간이 주어졌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당장은 그가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적혈구 대가리랑 잡담 그만하고 슬슬 집중하지."
진이 그렇게 말하며 노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핏발 선 눈으로 어딘가를 노려보던 그가 세차게 고개를 털었다.
이 인간이 흡혈귀가 되는 것은 곤란하다.
본판이 2위계 마법사인 만큼 어떤 괴물로 재탄생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마치 시한폭탄이랄까.
하지만 그 위험성을 알면서도 예까지 데리고 온 이유는 하나.
그의 마법적 지식이 이곳에서 필요할 수 있겠다는 추측 때문이었으니.
"어떻게, 해제할 수 있겠어?"
문양을 향해 까딱 턱짓하는 진을 떨떠름히 노려보던 노인이 바닥에 시선을 옮겼다.
"···왕에게 불가능은 없다."
그러더니 피로 그린 마법진을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 아닌가.
금세 몰입한 옆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어느새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 나타샤와 막시모에게 차례로 귀엣말을 속삭이길.
"제대로 지켜봐야 해. 만약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알지?"
이미 노인의 상태에 대한 귀띔을 들었던 두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문뜩, 오래된 건축물에 눈길이 닿은 진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뭘 찾으라 했었지, 하고.
내내 경황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던 상태창의 요구가 뒤늦게 떠올라, 저도 모르게 유적을 향해 걸음을 옮긴 그다.
"어디 가?"
"좀 둘러보려고."
"알겠어, 조심해서 다녀와."
좌타샤가 묻고 우타샤가 대답하는 기묘한 상황.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진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독립된 개체 같은 거야?"
"비슷해."
"미쳤다."
분신. 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 번쯤 상상해 봤을 능력이지 않은가.
나 대신 출근해 주고, 공부해 주고, 연재도 좀 해주는 그런 존재.
진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져 나타샤가 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이 상태가 유지되는 범위는 30m에 불과해. 다시 합쳐지면 분신 쪽 경험은 소실되고."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진의 옆구리를 막시모가 쿡 찔렀다.
"혼자 슬쩍하려는 건 아니지?"
"슬쩍하긴 뭘 슬쩍해. 그새 까먹었어? 돈 될 만한 건 이미 저 노인네랑 부하들이 전부 털어먹은 거. 그나마도 죄 골동품이었다고."
"하긴."
김이 팍 샌 얼굴로 막시모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못내 아쉬웠는지 작게 중얼거리길.
"그래도 너 돌아오면 나도 한번 둘러보긴 해야겠다. 그래도 유적인데···"
"맘대로 해."
진이 작게 웃으며 걸음을 뗐다.
그러고는 건축물에 발을 들이니, 손전등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얼굴에 흥미는 딱히 없더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와-, 천 년 동안 묻혀있던 유적이라니! 감탄하기엔 당장 고향 땅만 해도 완공된 지 1,300년이 훌쩍 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가 떡하니 있지 않은가.
빛과 장미의 시대?
우린 삼국시대였다 이거야.
그러고 보니 요즘 애들도 경주에 소풍 가나?
첨성대 키링 생각나네.
냉장고 옆에 걸어두면 나름 예뻤는데.
언제나처럼 삼천포로 빠진 의식 속.
뜻 없는 얼굴로 주변 경관을 이리저리 살피던 진의 시선이 어딘가에 멈췄다.
그것은 뚜껑 열린 석관이었으니.
빛을 쬔 내부를 슬쩍 들여다보던 진의 눈살이 와락 찌푸려졌다.
"어우. 냄새."
머리가 띵할 정도의 악취였다.
천 년 묵은 체취는 썩은내에 가깝더라고.
이미 흡혈귀도 죽였겠다, 얼른 거기서 관심을 끈 진이 다시 유적지를 두리번두리번.
그에 따라서 빛도 요리조리 움직였다.
손전등의 광량은 어둠 너머를 밝힐 정도로 밝지 못했기에, 허공을 비출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무언가 앞에 있다면 빛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저 앞에서 동그랗게 상을 맺는다는 뜻이었으니.
진은 그때마다 가까이 걸어가 그게 무엇인고 일단 확인부터 했다.
물론 죄다 허탕이었지만.
"···뭐가 있긴 한 거야?"
기대와 달리 건질 게 하나도 없는 유적지의 풍경에 진이 슬슬 지쳐갈 무렵이었다.
손전등의 빛이 어딘가를 동그랗게 비췄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범위가 좀 넓더라고.
상하좌우 손을 움직여도 빛이 어둠 속으로 튕겨 나가지 않음을 확인한 진이 얼른 그리로 다가갔다.
"오."
외마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유적지 가장 안쪽에서 마주한 막다른 벽에는 거대한 벽화가 정교한 솜씨로 음각되어 있었으니.
"···뭘 그린 거지?"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의 크기에 진이 한 발짝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현기증이 핑 도는 느낌과 함께.
문득, 진은 어딘가에 서 있었다.
웅장한 규모로 건축된, 여긴 어디지?
어전인가?
둥글게 배치된 고급스러운 의자들과 그보다 높은, 계단 위 단상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옥좌가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 앉은 이들의 모습도.
하나같이 범상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성별도 나이도 모두 제각각이었으나, 진은 그 면면에 깃든 초월성을 편린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거성(巨星)의 윤곽을 밤하늘 작은 점으로 엿보는 듯한 아득함.
그중 눈에 익은 얼굴이 하나 있더라고.
붉은 머리칼에 홍염이 깃든 눈빛.
그는 최초의 흡혈귀를 불태운 사내였으니,
그제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깨달은 진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7가문의 가주들이네.
동시에 진의 시선이 단상 위를 향했다.
가주들보다 높은 곳에서 시선을 내리깔 수 있는 이는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한 명밖에 없잖은가.
왕, 아니면 황제?
과연 옥좌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떨어지는 햇빛을 등진 실루엣.
여기까진 굉장히 멋있었다.
고개가 옆으로 툭 떨어져 있는 걸 확인하기 전까진 말이다.
뭐야. 설마 죽은 거야?
미동도 없는 옥좌의 주인을 보며 진이 눈을 비비적거리는 사이.
드높은 등받이 뒤로 제3의 인물이 나타난다.
누구지?
눈을 가늘게 떠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늘진 음영만이 있을 뿐.
그 속에 감춰진 시선이 가주들을 훑고, 가주들의 눈도 그를 향했다.
이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하다.
초침이 한 번 째깍거리고, 목뒤로 넘어간 마른침이 울대를 꿀렁이며, 작은 물방울이 수면 위로 똑 하고 떨어지는 찰나의 시간이 영겁처럼 늘어난다.
한없이 길게.
그러다 어느 순간 인지를 초월한 탄력성으로 본래의 속도를 되찾으니.
그와 동시에 이어지는 음영 속 목소리.
새로운 시대가 올 겁니다.
"헛!"
돌연 사출되듯 의식을 되찾은 진이 비틀거렸다.
식은땀 젖은 옷이 등과 찰싹 들러붙어 차갑게 축축한 가운데.
시야의 한구석에서 (완료!)라는 글씨가 점점 옅어지는 게 보인다.
툭.
바닥으로 떨어진 손전등이 데구르르 구를 때였다.
구우우우웅----!!
느닷없이 유적지 전체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하니.
멀리서 꽥! 비명이 터졌다.
"우왁 씨발!" "진! 돌아와!"
겹쳐서 들리는 막시모와 나타샤의 외침에 진이 서둘러 손전등을 주워 유적지를 내달렸다.
그사이 사방을 짙게 물들였던 어둠의 채도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지하, 그 검정에 채도가 어디 있겠냐마는.
진은 분명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암흑이 인위적으로 세상을 덮은 불길함이었다면, 그것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 지금은 그저 빛의 부재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어둠이랄까?
아무튼 뭔가 한결 낫더라.
근데 왜 무너지는 건데?!
"무슨 일이야!"
"우리도 몰라. 다미르가 마법진을 불태웠는데 그러니까 갑자기···!"
허둥거리는 막시모의 옆으로 집채만 한 돌이 쿵! 추락했다. 용병이 얼른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그대로 깔렸을지도 몰랐다.
"으아!"
기겁하는 밤톨머리를 지나친 진의 눈이 멀리 무릎 꿇은 자세로 양팔을 넓게 벌린 노인의 모습을 담는다.
"거기서 뭐 해!"
"···마침내 되찾았노라. 나의 왕국. 나의 땅."
핏발 선 눈으로 부르르 전율하는 마법사를 확인한 진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를 포기했다.
"튀자!"
이러다 단체로 순장될 판이다.
언제 흡혈귀로 변할지 모르는 자칭 왕은 내버려두고 일행이 후다닥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게 사이버펑크식 던전 브레이크?!
진이 으악 소리를 지를 때였다.
눈앞에 갑자기 상태창이 툭 떠오르더라고.
(돌발!)(긴급!) 20분 내로 던전을 탈출-
"좀 꺼져! 나도 알아!"
진이 와락 소리치며 바닥을 박차고.
그를 뒤따르는 일행들의 뒤로 거대한 암석이 연이어 떨어지니-
마침내 길었던 임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77화 >
구구구궁--!!
암석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사방에서 뿌연 먼지가 풀풀 날리며 시야를 가린다.
끼요옷, 으아악, 엄마야! 하는 비명은 덤이다.
갑작스러운 붕괴라니.
이거 너무 억지 아니야?!
진이 정신없이 내달리는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진은 몰랐지만, 이번 붕괴는 30년 세월에 걸쳐 차곡차곡 진행된, 이른바 예정된 재해였기에.
우선 언더하트가 땅굴에 터전을 잡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미완공된 지하에 우글우글 모여 살면서 무엇을 가장 먼저 축냈겠는가.
그래, 맞다.
지금 머릿속을 스치는 그거.
물, 정확히는 지하수!
본디 전응력이라고 하여, 물과 흙이 함께 상부 지반을 떠받치는 범위가 결코 적지 않거늘.
그런 역할을 해주는 심층 지하수가 점점 고갈되어 공동이 생겼으니, 이게 끝이면 다행이게?
지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미명 아래, 무분별한 확장 공사가 무려 30년 세월 동안 이어지기까지 했다.
지반 침하가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는 상황.
대형 재해를 암시한다는 수백 번의 징후와 수십 건의 경미한 사고는 이미 충족한 지 오래라.
그런 와중에 지하유적과 석관이 발견되고, 그 안에서 10세기 전 흡혈귀가 튀어나온 것이다.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다.'
힘을 회복하지 못해 활동량에 제약이 있던 흡혈귀는 먹잇감이 달아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물의 피로 땅굴 전역에 결계를 둘렀으니, 이게 웬걸?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 결계가 무너지는 지반을 붙들어줬다고.
근데 그것이 자칭 왕에 의해서 파훼 되어버린.
재앙의 원흉인 언더하트의 창시자가 제 손으로 피날레까지 장식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붕괴 시작!
아무것도 모르는 일행은 그저 죽어라 달릴 뿐이다.
"와아아악!"
"달려!"
"누구야! 옷 잡아당기지 마!"
내딛는 발밑이 우르르 흔들리고, 벽을 타고 천장까지 거미줄처럼 이어진 균열이 점점 깊어지며 그 틈새에서 흙먼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이것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엎친 데 덮친 격, 배회하던 시체들까지 덤벼들었다.
키에에에엑!
죽음에서 돌아온 악의는 맹목적이다.
간절한 욕구는 그것을 영영 되찾을 수 없게 됐을 때 증오로 변질되기에.
살아있는 시체란 그런 것이다.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로 이뤄진 역설의 존재.
해서 놈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
무너지는 공동 따위 안중에도 없다.
그저 살아있단 이유만으로 인간들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낼 뿐.
"온다!"
다음 순간, 흔들리는 평행선 위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부딪히니.
핏물이 폭죽처럼 비산하는, 그 격렬한 맞물림 속에서 자줏빛 전화(電火)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파지지직!!!
단숨에 부수고 나아가 막힌 길을 뚫어낸다.
"비켜-!!"
진이 소리쳤다.
적을 섬멸하는 영웅의 포효가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그러니까 급똥이 마려워 미치겠는데 누가 자꾸만 앞을 가로막는 상황에서 내지르는 분노의 외침이랄까.
사실 그것보다 훨씬 다급하다.
급똥은 바지에 지리면 끝이지만, 여기선 제 시간 안에 탈출 못 하면 죽는다고!
나머지 일행들도 말만 안 했을 뿐, 다들 심각하기는 매한가지라서.
모두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황에서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전투를 속행했으니.
"비, 비켜! 씨발!"
사태의 위중함이 폐급 용병까지도 권총을 쏴재끼게 할 정도였다.
재밌는 건, 쐈다 하면 전부 이마를 관통하는 게 사격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더라고.
열흘 넘는 시간을 어둠 속에 파묻혀 맛탱이가 살짝 가서 문제지. 실력만큼은 확실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거기에 코멘트를 달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사이 진동이 더 심해졌다.
천장에서 떨어진 낙석들이 마치 거대한 화살촉처럼 지면에 꽂히는 가운데, 그중 하나가 나타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위, 위험해!"
용병이 비명을 지른 순간.
바닥을 박차며 몸을 날린 누군가가 나타샤의 등을 떠민 뒤 정작 본인은 피할 틈도 없이 짓뭉개졌으니.
그 숭고한 희생자는 다름 아닌 또 다른 나타샤라.
가까스로 살아남은 본체가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에, 진이 그리로 팔을 쭉 뻗었다.
"나타샤!"
그 외침에 나타샤도 반사적으로 팔을 펼친다.
서로를 향해 뻗은 손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았다.
직후 진이 움켜쥔 손아귀를 힘껏 끌어당기자, 튕기듯 바닥에서 몸이 떠오른 나타샤가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착지했다.
"나가면 나랑 술 먹어 줄 거야?!"
"클리셰 금지!!!"
진이 그리 외칠 때였다.
어느 순간 귓가에 껄떡껄떡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더라고.
가로막는 시체를 후려쳐 날려버린 그가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했다.
그러자 보이는 건 눈이 반쯤 풀린 밤톨머리.
체감상 100kg은 너끈히 넘을 것 같은 가방이 끝끝내 감당하기 버거워진 모양이었다.
맘 같아선 당장 버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동안 막시모가 가방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너무 많이 본 그라서.
"어후, 씨."
어느새 가방 손잡이를 꽉 틀어쥔 진이 팔을 번쩍.
그러자 자연스럽게 팔다리를 데롱거리며 함께 딸려 온 막시모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 외상값, 줄여줄게."
이즈음에는 진도 대답할 여력이 없었기에 그냥 앞만 보고 달리기만 했다.
어느 순간 일행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바로 그 계단이 맞았다.
이제는 정말 고지가 코앞이라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층계를 완등(完登)한 일행의 눈앞에 던전의 입구, 아니 개찰구가 담겼다.
"흡!"
몰지각한 승객들이 그러하듯, 도움닫기로 펄쩍 개찰구를 뛰어넘은 진이 자신을 뒤따르는 나타샤와 용병까지 챙겨 발길을 재촉했다.
[돌아가!]
핏물로 찍은 경고문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세워주고, 길게 늘어선 지하도까지 가로지르고 나면-
보인다! 햇빛!
마침내 등장한 탈출구에 진이 속도를 높였다.
구구구궁---!!!
등 뒤로 들려오는 연쇄적인 파열음을 뿌리치듯, 밝은 빛 속으로 뛰어든 그다.
그리웠던 자연광이 해일처럼 얼굴을 덮치자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질끈 감기더라고.
갑작스런 빛에 노출된 탓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지만, 그래도 입가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시바···살았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내가 다시 던전 들어가면 사람이 아니다.
그리 다짐하자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이, 그대로 대자로 벌러덩 드러누운 진이다.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길 한참.
그나저나 그건 뭐였을까.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스치는 풍경이 있었다.
어전에 모인 일곱 가주와 왕.
그리고 정체불명의 사내.
새로운 시대가 올 거라는 말.
진이 기억하기로, 오늘날의 로스트 시티를 만든 것은 위대한 일곱 가문과 인류 최초로 사이버스페이스를 발견한 선견자였다.
혹시 후드를 뒤집어쓴 그 자식이 선견자였던 건가.
그럼 그 자리가 개국 현장이었어?
오늘부로 국호를 로스트 시티로 바꿉니다-.
자자, 테이프 커팅 준비하시고. 뭐 그런 거?
잠시만 그럼 왕은 왜 그렇게 쓰러져있던 거지.
설마 찬탈?
도대체 나한테 이걸 보여준 이유가 뭔데.
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환상 속 장면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임을 인지한 것과는 별개로, 그 안에 담긴 진위까지는 유추하기가 쉽지 않아서.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는 느낌에 진이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몸부터 일으켜 세웠다.
당장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다들 괜찮아?"
그렇게 물으며 일행을 향해 몸을 돌리던 그가 흠칫.
"······"
주변을 에워싼 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으니.
써밍을 당한 격투기 선수처럼 눈매를 잔뜩 찌푸린 진이 주변을 쓱 훑었다.
"이건 또 뭔···"
흐릿한 시야에 추켜세워진 총구들이 보인다.
렌즈를 닦듯, 검지로 눈을 비비적거린 뒤 다시 정면을 바라본 진이다.
"너희 뭐냐?"
그 순간, 총구를 겨냥한 사내들의 중심에서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글쎄다."
짤막하게 대답하는 그는 오른쪽 안와에 기계안을 박은 사내였는데, 빙글거리는 눈동자가 진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진 에버나이트?"
작게 중얼거린 사내가 이윽고 하하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솔로 업계의 초신성이셨군. 이거 영광인데. 만나서 반갑다."
단번에 자신을 알아보는 상대를 보며 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가우면 총부터 내리던가."
그 불퉁한 목소리에 사내가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그건 곤란······어이! 총 내려! 뒤지기 싫으면!"
놈이 갑자기 어딘가를 보며 와락 소리쳤다.
그 방향을 곁눈질하자, 조심스럽게 바닥에 권총을 내려놓는 폐급 용병이 보였다.
음, 아니지.
이런 상황에서도 나름 저항하려고 한 걸 보면 폐급은 떼줘야겠다.
진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기계안을 박은 사내가 일행을 향해 뒷말을 덧붙였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야. 어디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 봐. 벌집으로 만들어서 좆을 쑤셔줄 테니까."
애초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나타샤와 막시모였지만, 상대의 경고가 원체 저열하다 보니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진도 마찬가지였다.
성질 같아선 확! 그라비스로다가, 저 으스대는 면상에 바람구멍을 뚫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일행이 무방비하게 당할 수도 있어서.
음, 어쩌지.
진이 호흡을 고르며 생각할 때였다.
철컥.
손바닥에서 길쭉한 총구를 뽑은 기계 눈깔이 그걸 진에게 겨냥하며 입을 열었다.
"긴말하지 않겠어. 땅굴에서 찾은 아티팩트를 넘겨.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지."
"얼씨구, 지랄하네."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낸 진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 실수."
동시에 이어지는 격발음, 타앙!!
귓가를 스친 탄환이 벽면에 균열을 만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
"···어이, 유망주. 레벨4를 달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이 바닥에서 겸손을 모르는 새끼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모르나 보지?"
"···?!"
진이 눈을 부릅떴다.
레벨4라고?
그새 또 올랐어?
놀란 표정을 짓는 진의 표정이 만족스러웠을까.
기계 눈깔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깝칠 생각 말고, 저 아래서 찾은 거 전부 내려놓고 꺼져."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진이다.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생각하길.
저놈들 아마 트레져헌터겠구나.
지하 유적에 아티팩트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오긴 했는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안으로 내려가기보다는 생존자를 기습하려고 한 걸 테고.
근데 왜 굳이 방아쇠를 안 당기고 협박을 하지?
진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당연하게도 그 이유는 본인 때문이었다.
진 에버나이트.
자전을 각성한 천재, 전란의 종결자, 초신성.
온갖 수식어로 떡칠이 된 그였으니.
제아무리 저들이라도 무턱대고 공격하기가 애매한 것이다.
해서 괜한 싸움보다는,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기싸움을 펼치는 것이었고.
물론 이 판단은 생각보다 효과적으로 먹혀들어서,
진도 상당히 난감하긴 했다.
머리 아프게 됐네.
남은 마나도 거의 없는데, 씨.
이미 갈취를 결심한 새끼들한테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줘 봐야 믿어주지도 않을 터. 어쩔 수 없이 유혈 사태가 발발할 것 같긴 한데.
쟤네가 쏘는 총을 내가 몸으로 다 맞아주고 시작해야 하나? 그 다음엔 탄창을 교체하기 전에 죄다 박살 내는 거지.
미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계획한 진이 천천히 눈길을 주위로 떨쳤다.
그리고 빠르게 전략을 수정했다.
우선 적들의 위치를 머릿속에 새기고,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파직!
심장 속 광극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마치 자신은 준비가 됐다고 말하는 듯한 모습.
좋았어.
보다 깊어진 심상 속에서 광역기라 불릴 만한 것을 건져낸 진이다.
한 번도 써본 적 없지만, 숨 쉬듯 자연스럽게, 주문을 생략한 뇌기를 발치에 집중시키기 시작하는데······
잠시만, 뭐지?
저 익숙한 얼굴은.
우연히 시선이 닿은 폐차 뒤에서, 고개를 빠끔 내민 레게머리를 발견한 진이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고는 마나를 응집시키며 말하길.
"···물건이라면 저 가방 안에 있는데?"
진이 주먹 쥔 손에서 엄지만 펼쳐 바닥에 널브러진 막시모와 가방을 동시에 가리키자, 그 손끝을 지켜보던 기계 눈깔이 답했다.
"그럼 가방을 이리로 던져. 내용물은 우리가 직접 확인할 테니까."
"그러던가."
"···진?"
막시모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열중쉬어 자세를 한 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한 밤톨머리가 조용히 가방을 벗으니.
"···시발."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가보를 앞으로 던진 그다.
다만 무게가 무게인지라 멀리 날아가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보부상?"
그 와중에 막시모를 알아본 기계 눈깔이 침을 꿀꺽.
아티팩트 안에 담긴 아티팩트?
세상에서 제일 흥분되는 원 플러스 원에 그가 곁에 선 부하에게 까딱 턱짓했다.
"조심해서 들고 와."
그 명령에 조심스레 발길을 뗀 부하가 총구를 정면에 둔 채 조심스럽게 전진할 때였다.
툭, 데구루루----
조약돌 굴러오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스쳐 기계 눈깔이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발치에 멈추는 동그란 수류탄 하나.
"···?!"
화들짝 놀란 그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콰앙!
강렬한 폭발이 그를 집어삼키니.
폐차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흑인 링커가 목청을 높이며 수류탄을 미친 듯이 집어던졌다.
"내 솔로들한테 손대지 마라!"
드안드레, 아무튼 등장.
동시에 진이 제자리에서 발을 세차게 굴렀다.
"기술명 생략!"
직후 한 줌 남김 없이 소모된 마나와 함께 하늘로 치솟은 뇌조가 먹잇감을 노리듯 지상으로 낙하했다.
< 78화 >
드안드레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어디가 불편한 사람처럼 한참을 뒤척뒤척.
눈을 감으면 그 검은 배경 위로 자꾸만 덧씌워지는 상념들 때문에 차라리 뜬눈을 선택한 그다.
그러고 나면 익숙한 풍경이었다.
싯누렇게 삭은 배관이 복잡하게 얽힌 천장.
그 안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움직인 시선이 벽을 타고 내려오면, 어느새 보이는 건 자그마한 사무실이다.
창문을 열어도 쿰쿰한 냄새가 빠지지 않고,
단열이 되지 않아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찌든 때가 만연한 공간.
그런 사무실의 귀퉁이에 앉아 있던 낡은 안드로이드가 끼익 고개를 돌렸다.
"형님, 안 주무십니까?"
"후커."
"넵, 형님. 물이라도 좀 드릴까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드안드레를 확인한 안드로이드, 후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허리께까지 오는 낮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뚜껑을 따며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
각 잡힌 자세로 물병을 건네는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드안드레가 빤히 바라봤다.
인공 피부를 이식해 줄 여력이 없어 강철 면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다니는 녀석이다.
인간과 차이가 없는 수준을 넘어, 엄청난 기술력까지 겸비했다는 뉘 집 바텐더와는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그게 언제고 못내 마음에 걸렸다고.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며 물병을 건네받은 드안드레가 텁텁한 목을 축였다.
"왜 미안하십니까?"
"몰라, 새꺄."
괜히 툴툴거린 드안드레가 빈 병을 찌그러뜨렸다.
그러고는 네온빛 일렁거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묻길.
"우리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더라?"
"2,668일 11시간 40분 36초 지나가고 있슴다."
"···벌써 7년이 넘었어? 시간 더럽게 빠르네."
드안드레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사무실을 훑었다.
문뜩, 이곳의 문을 처음 열어젖힌 순간이 떠오른다.
'좋아! 여기서 역사를 쓰는 거야!'
허드렛일, 위험한 일, 더러운 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세 든 곳.
[링커 드안드레]
사무용 책상 너머로 호기롭게 명패를 내려놓던 자신의 모습을 겹쳐본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후커, 넌 아직도 내가 링커로 성공할 수 있을 거 같냐?"
"당연함다! 이 후커, 단 한 번도 형님을 의심한 적 없슴다! 항상 말씀하셨잖습니까. 밑바닥 삼류 인생도 보란 듯이 성공하는 걸 이 망할 도시에 증명하겠다고 말임다!"
"새끼,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선···."
드안드레가 피식 웃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후 옷걸이에 걸린 자켓을 챙기는 그에게 후커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41번 구역. 땅굴에."
"예? 거긴 갑자기 왜···"
"이미 정보가 알음알음 샌 상황이라는 게 아무래도 찜찜해. 하이에나 놈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기껏 잘 해결하고 나와서 무슨 일이라도 터져봐. 내 인생 최대 작전에 차질이 생긴다고."
"형님은 이번에 정보만 제공하신 거 아님까? 작전은 아니었던 걸로···"
"작전 맞아."
"······?"
후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어느새 사무실 입구에 다다른 드안드레가 문고리를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소속 솔로들의 무사 귀환. 그게 내 작전이다, 이 말이야."
그리하여 지금.
내 식구 지켜라, 수류탄을 난사하는 링커의 등장!
"이 개새끼들아아-!"
투척이 끝나기 무섭게 소총을 갈기기 시작하니-
거기에 진의 주문까지 펼쳐졌다.
2위계에 올라서며 이전보다 훨씬 깊어진 심상이다.
당연하게도 자하드를 상징하는 번개 모양 별자리까지 덩달아 해금이 된 상황.
머릿속에 강제 주입된 수많은 주문 중에서 광역기다운 광역기를 시전한 것이다.
퓌요오오오!
자줏빛 맹금류가 비상한다.
뇌신조(雷神鳥).
날갯짓에 벼락을 뿌린다는 천둥새로, 자하드를 상징하는 영물이 드높은 시선에 적들을 담았다.
"저, 저게 뭐야?"
"시발! 도망쳐!"
뭔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느낀 트레져헌터들이 뿔뿔이 흩어지려는 찰나.
낙뢰처럼 지면을 향해 강하한 뇌조가 응축된 뇌기를 터뜨리자, 거기에 휩쓸린 트레져헌터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거기엔 비명조차 없었다.
압도적인 전압에 노출된 심장이 단번에 기능을 상실한 탓에.
"미친."
"이게 자하드···?"
그야말로 절륜한 위력에 모두가 말문을 잃었지만, 개중에서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진이라서.
"오우."
눈이 휘둥그레진 그가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실 위력도 위력이지만, 그보다는 뇌조의 형상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때깔 미쳤다.
마나만 많이 안 잡아먹었어도 참 좋았을 텐데.
···그건 욕심인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 상황은 순식간에 일단락됐으니 헐레벌떡 달려온 드안드레가 진의 몸상태를 휙휙 확인했다.
"다친 곳은?!"
"없는데."
"역시!"
한껏 밝은 표정으로 진의 어깨를 싸잡은 드안드레가 팔을 흔들흔들, 자연스레 진의 얼굴도 오뚜기처럼 흔들흔들.
"너 솔로 레벨 오른 거 알아? 벌써 4레벨이라고!"
"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짐짓 놀라는 척 입술을 동그랗게 만 진이 휘파람을 휙 불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렇게라도 해줘야겠다 싶었기에.
"나중에 축하 파티라도 하자. 음, 잠깐만-"
드안드레가 쓰러진 막시모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뭐라 대화를 나누는데, 그 내용인즉.
"무슨 깡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죽으려고 작정했어?"
"아무튼 도움 됐잖냐. 그러니까 계약 연장 좀."
"······"
드안드레의 활동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크롬 이빨을 잔뜩 드러내는 파멸적인 미소를 지으며 남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길.
"나타샤 맞지? 너 의뢰 완수율이 92%가 넘더라. 우리 사무실엔 너처럼 책임감 강한 인재가 필요하거든. 여기 내 명함인데. 혹시 관심 있으면···"
"친구. 혹시 용병이야? 소속은? 프리랜서? 오, 잘됐네. 앞으로 나랑 같이···근데 말을 왜 이렇게 더듬어?"
당당한 영업질에 나타샤가 하하 웃어젖히는 가운데.
서로 눈이 마주친 진과 막시모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걸 느끼면서.
***
"으어."
쓰러지듯 베갯머리에 얼굴을 쿵 박는다.
제때제때 세탁하지 않아 쿰쿰한 냄새가 진동하는 싸구려 베갯잇이었지만, 이마저도 어찌나 반가운지.
3일 가까이 빛이 들지 않는 음습한 지하에 갇혀있던 탓일까. 싸구려 무인 모텔이 5성급 호텔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참을 뭉그적거리던 진이 생각했다.
드안드레가 큰일 해줬네, 하고.
돌아오는 길, 자처해서 운전까지 도맡은 링커 덕분에 밤늦게나마 다운타운에 도착한 일행이었다.
여하튼 호감작 하나는 확실하게 한 드안드레다.
심지어 용병과는 구두로 계약을 따내기까지 했으니, 아주 입이 귀에 걸렸더라고.
솔직히 용병 입장에서도 나쁜 제안은 아닐 터였다.
자신을 제외한 팀원도 전멸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마당에 저 식구는 죽어라 챙기는 링커를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도 사격술이 깔끔한 게 멘탈만 잘 잡으면, 서로 윈윈하는 관계가 되겠거니 생각하던 진이 어느 순간 스르륵 잠들 뻔한 정신을 흠칫 붙잡았다.
아직은 안 된다.
확인해야 할 게 남아있었으니까.
그리하여 진이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천천히 내려온 눈꺼풀이 시야를 검게 물들이고, 곧이어 그 위로 촘촘히 떠오르기 시작한 별들이 한 폭의 은하수를 그려낸다.
내면세계에 돌입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성운과 성운 사이를 가로지르는 눈에 여러 별자리가 담긴다.
주먹 모양, 나무 모양, 번개 모양.
각각 [초인] [마나] [자하드]라는 이름을 가진 성좌들.
하지만 진이 이곳을 찾은 건, 익숙한 면면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
조금 더 옆으로 움직인 시선 끝.
찾았다, 새로운 별자리.
[순수한 불꽃]
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성좌는 [자하드]에 비견되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만 의외긴 했다. 내심 새 식구의 이름이 솔라드가 아닐까 생각했던 진이었기에.
뭐, 이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중요한 건, 여태 얌전히 따듯하기만 했던 불꽃에도 확실한 상징성이 부여됐다는 거니까.
이후 [순수한 불꽃]도 경험치가 아닌, 숙련도를 쌓아 발전하는 별자리란 것을 확인했을 때였다.
"······?"
밤하늘의 구석, 여간해선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그곳에 음습하게 쪼그린 무언가를 발견한 진이다.
불그스름히 빛나는 그것은,
역십자에 박쥐 날개가 돋은 기괴한 문양의 별자리였으니.
[진혈]
익숙한 이름에 진이 눈에 힘을 빡.
"이 쉒!"
반사적으로 주먹부터 확 올리자, 마치 목을 움츠리듯 별자리가 위태로운 빛을 흘렸다.
하지만 놀라긴 진도 매한가지라서.
나 흡혈귀 된 거야?
얼른 눈깔에 힘주어 상세한 정보부터 훑었다.
[사용이 불가능한 능력입니다 / 사유 : 인간]
[패시브화 진행 중······]
[완료 시 기존 별자리에 귀속됩니다]
뭐라 막 떠오르는 문장에 잿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안심하길.
아무튼 인간이라는 거지?
단순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곧장 내면세계를 빠져나온 진이다.
굳이 눈은 뜨지 않았다.
그대로 잠들었기에.
***
이번에 진에게는 자축할 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단말기가 멀쩡했다는 것.
지금껏 수도 없이 명을 달리했던 개복치 같은 기계가 웬일로 잘 버텨줬더라고.
그리하여 지인들에게 연락부터 돌린 진이다.
"하루 늦었네. 그래도 이 정도면 합격. 무사해서 다행이야, 진."
가장 먼저 칼리파에게 생존 신고부터 하고,
이어서 포우와도 유선상으로 대화를 나눴다.
"···흡혈귀 말입니까?"
원래도 빛과 장미의 시대에 관심이 지대한 바텐더는 흡혈귀란 얘기에 저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질문 공세를 퍼부었으니, 그 열정에 진이 어버버 당황할 정도라서.
때마침 에넥도트를 찾은 손님이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팔자에도 없는 QnA를 몇 시간이고 늘어놓을 뻔했다고.
"참, 일전에 부탁하신 계약 건 말입니다. 매물을 몇 개 확보하긴 했습니다만, 어떻게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메시지로 전송해 드릴 테니 확인하시고 다시 연락주시죠."
"오, 알겠어."
이후 포우가 전송한 거주지 후보 명단을 살핀 진이 어렵지 않게 하나를 선택했다.
사우스 다운타운에 위치한 큼지막한 창고였는데,
여기라면 더는 주차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을 것 같기도 했거니와 도보로 3분 거리에 럼펌펌펌이 있다는 점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기로 할게]
이런 쪽에선 길게 고민하지 않는 진이 저답게 칼같이 답장을 마쳤다.
그러고 나면 다음 일정은 제키·제니 남매와의 식사 약속이라.
도대체 몇 번을 미룬 건지 모르겠는 외식? 빚 청산?
아무튼 만나서 즐거운 식사를 위해 럼펌펌펌에 들른 진이, 수리를 끝낸 2층을 확인하곤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거기에 낡은 스피커와의 감격스러운 해후까지.
"오랜만이다, 야!"
반가운 마음에 포옹을 하자, 녀석도 오래된 노래로 정답게 인사를 건네더라고.
이후 제시간에 맞춰 도착한 남매와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낄낄거리며 퍼먹고 있으려니, 새로 걸린 벽걸이 티비 너머로 뉴스가 흘러나왔다.
[뮤트타운의 전란이 종식된 가운데, 비밀리에 TB를 지원하던 기업들이 꼬리 자르기에 나선 정황이 밝혀져···]
[공중요새, 아포피스가 25년 만에 로스트 시티 인근 상공을 지나친다는 소식입니다.]
개중에는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소식도 있고 그러지 않은 것들도 있었으니, 기호에 따라 진의 눈이 화면에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그러는 와중에 이어진 소식은 진보다는 남매 쪽에서 큰 관심을 보였으니.
"···가문 회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그, 그러네. 이번에는 누가 우승하려나."
두 사람의 대화에 한창 소시지를 우물거리던 진이 물었다.
"가문 회전이 뭔데?"
"위대한 일곱 가문이 주최하는 순수주의자들의 축제라 생각하면 돼. 다음 세대를 이끌 인물들이 나와서 우열을 가리는 거지."
제니의 설명에 진이 피식거렸다.
그거 완전 사이버펑크식 용봉지회네.
하여튼 별게 다 있다니까.
거기까지만 생각한 진이 회전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그보다는 두 사람과 못다 한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즐거웠다.
지금껏 아껴둔 이야기들이 테이블 위의 음식보다 훨씬 많이 쌓여있었으니까.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떠들다 보니 어느덧 깜깜해진 창밖이다.
다운타운의 치안을 고려하면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에, 슬그머니 남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진이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동행을 선언했다.
"레벨4 솔로가 해주는 에스코트야. 너희니까 특별히 공짜로 해줄게."
"네네. 감사합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뭐지 그 반응은?"
이 또한 잡담의 연장선이라고.
티격태격 걷다 보니 금세 목적지였다.
무탈하게 보디가드 노릇을 끝낸 진이 남매의 등을 떠밀며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
"늦었는데 자고 가."
그렇게 말하는 제키를 향해 됐네요, 웃어 보인 진이 몸을 돌렸다.
쌀쌀한 밤공기에 코를 훌쩍이며 왔던 길을 되짚어가자니, 문뜩 가슴팍에서 단말기가 웅—몸을 비튼다.
"여보세요."
[진?]
"어, 난데."
그러자 단말기 속에서 나타샤가 뒷말을 덧붙였다.
[지금 바빠?]
"바쁘진 않아, 근데 왜?"
[별일 없으면 술이나 한잔할까 해서.]
"지금? 우리 내일 보는 거 아니었어?"
[그건 막시모랑 드안드레까지 끼는 거잖아. 난 지금 우리 둘이 만나는 걸 말하는 건데.]
이어진 대답에 진이 뺨을 긁적긁적.
"그래? 근데 술은 좀···"
[생각 없어?]
간식 배는 남아있어도, 술 들어간 공간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진이라서.
털레털레 대로를 나아가는 얼굴에 시시각각 고민이 깊어졌으니.
길어지는 침묵이 어색함으로 변모하기 직전.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하길.
"에이. 기분이다! 먹어줄게! 어디로 갈까?
큰맘 먹고 음주를 결심한 진의 대답에 가볍게 들뜬 목소리가 돌아올 때였다.
"······"
진은 이어지는 나타샤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짙은 어둠,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응달 속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이들이 어느새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으므로.
"···잠시만."
조용히 단말기를 귓가에서 떨어뜨리는 진을 응시하는 놈들의 눈동자에서 미세한 번갯불이 파직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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