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다음날은 회식이 있었다.
지옥 같은 땅굴에서 무사 귀환한 것을 자축하기 위한 자리였다.
약속 장소는 드안드레의 사무실.
진이 간식 박스를 끌어안은 채 어깨로 문을 열자, 뭐라 신나게 떠들던 링커가 고개를 돌리더니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했다.
"진!"
이어서 후커가 '오셨습니까, 형님!' 소리치며 박스를 건네받았고,
그렉 또한 멋쩍은 얼굴로 악수를 건네왔다.
참고로 그렉은 폐급 용병의 이름으로, 지난 3일 동안 심신이 많이 안정됐는지 낯빛이 몰라보게 좋아진 모습이었다.
들어보니 그새 드안드레와 계약도 했다고.
"···날치기로 지장 찍은 거 아니야?"
"뭐, 뭐라는 거야! 내가 무슨 양아친 줄 알아?"
"뭘 그렇게 발끈한대."
드안드레를 놀려먹은 진이 킥킥거리며 그렉에게 눈을 옮겼다.
"솔로 레벨은?"
"1이야. 처음부터 시작하려고."
"왜. 그래도 용병 짬바가 있지. 활동 기록들 제출하면 전부 인정되는 거 아닌가?"
"난 PMC(민간군사기업) 소속이었거든. 지금껏 내가 처리한 일 대부분은 팀 단위 작전이라, 혼자 주도해서 뭘 해볼 기회가 없었지. 그때는 팀을 위한 완벽한 부속품이 되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솔로로 전향한 이상 개인의 역량이 훨씬 중요해졌으니, 천천히 다시 배워보려고."
"···너 안 더듬으니까 좀 낯설다."
진이 눈을 끔뻑거렸다.
얘가 원래 이렇게 멀쩡했던가?
확실히 섬망 증세가 무섭긴 하구나.
"아무튼 잘 해결돼서 다행이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다."
이후 인간 셋에 안드로이드 하나까지 모여 시시덕거리고 있으려니, 어느 순간 막시모와 나타샤가 함께 사무실을 찾았다.
건물 앞에서 만났다는 그들은, 진이 그랬듯 모두와 인사를 주고받으며 안쪽으로 걸어왔다.
그 과정에서 나타샤가 진의 명치에 팔꿈치를 꽂았고, 진은 짐짓 아픈 척을 하면서 갑작스레 약속을 파투 낸 것을 사과했다.
"미안, 근데 진짜 갑자기 일이 생겼어."
"그래 알아. 어제도 얘기해줬잖아."
"근데 왜 때려."
"그러고 싶었으니까?"
대화는 그즈음에서 끊어졌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후커가 허리를 직각으로 접었기에.
"처음 뵙겠습니다! 누님!"
"아. 네가 후커구나."
이후로도 한동안 시끌벅적한 끝에, 오래된 소파에 둘러앉은 일행이 맥주를 깠다.
곧이어 허공에서 맞닿는 캔들 가운데는 콜라가 하나 섞여 있었으니.
단숨에 원샷을 때린 뒤 꺼억-, 트림을 하는 진의 모습에 막시모가 키득거렸다.
"도대체 술을 왜 싫어한대."
그러다 돌연 손뼉을 짝!
"아 맞다, 너희한테 말할 게 있었는데."
그러고는 가방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는데, 테이블 위로 차곡차곡 쌓이는 골동품에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다 뭐래?"
"땅굴에서 굴러다니길래 몇 개 담았어. 혹시 유적에서 발견된 물건인가 싶어서."
"그럴 정신이 있었다고?"
나타샤의 물음에 막시모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괜히 보부상이겠냐. 아무튼 이것들 전부 감정 맡겨보려고. 만약에 결과가 좋게 나오면, 너희 외상값은 없는 걸로 퉁 쳐줄게."
"내 참."
진이 어이가 없어 피식거렸다.
내내 도망치고, 싸우고, 탈출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던 상황에서 언제 저런 걸 챙겼나 싶어서.
어디 돈냄새 맡는 귀신이라도 들렸나.
"진짜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야."
진이 그렇게 말했고, 막시모는 혀를 쯧 차며 아쉬운 소리를 덧붙였다.
"아티팩트를 못 찾은 게 좀 아쉬워. 영원한 동녘이나, 신의 눈이라도 발견했다면 진짜 인생이 바뀌는 건데."
"···영원한 동녘? 뭐지.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마르지에 가문이 수백 년 넘게 찾고 있는 아티팩트잖아. 찾는 이에겐 차기 가주직을 넘겨준다는 전설의 물건···!"
허공을 떠받들 듯,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중얼거리는 막시모를 향해 진이 물었다.
"그렇게 귀한 걸 왜 잃어버렸는데."
"이것도 몰라?"
너는 진짜 다른 의미로 순수주의자가 맞다, 라고 혀를 끌끌 찬 막시모가 주변을 쓱 둘러봤다.
"······"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에서 옛날이야기를 읊을 타이밍임을 깨달았을까?
맥주캔을 내려놓은 막시모가 목소리를 깔길.
"때는 바야흐로 700년 전, 최후의 흑룡을 얼어붙게 했던 빙술사에 대한 이야기야······"
술자리가 깊어졌다.
자연스레 빈 캔과 병들이 점점 늘어났다.
누군가 흥미로운 주제를 던져, 모두가 열띤 대화를 주고받는데, 실상 뱉는 말보다 들어가는 술이 더 많았다.
금세 꼬부라진 혀가 실속 없는 얘기만 쏟아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휘발성 강한 안줏거리로 테이블 위를 떠돌고, 그걸 누군가 받아먹고 다시 게워내길 반복하는 저녁.
어느 순간 소파에 대롱대롱 널브러진 일행을 바라보던 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귓가에 들리는 소리.
"내가 진짜 열심히 살았그등···근데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호···풀리는 것도 없고······조혼나 힘들기만 했는···그래도 요즘은···좀 뿌듯한 게···"
입을 쩝쩝대며 중얼거리는 드안드레의 모습에 헛웃음을 친 그가 주섬주섬 뒷정리를 시작하자, 후커가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형님! 제가 하겠슴다."
"됐네요. 원래 먹은 사람이 치우는 거야."
이후 깔끔하게 정리를 마친 진이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돌렸다.
"난 먼저 간다."
"들어가십쇼."
"······"
꾸벅 인사하는 안드로이드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드안드레한테 전해 줘. 종종 놀러 오겠다고."
"일이 아니어도 말임까?"
"그래, 일이 아니어도."
"오오! 정말 좋아하실 겁니다!"
눈을 크게 뜨는 후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든 진이 문고리를 돌렸다.
승강기 없는 낡은 건물을 벗어나 대로에 발을 들이자, 밤공기가 이마에 서늘한 입술을 포갰다.
별생각 없이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없이 지저분한 회색이었으니.
그런 하늘마저 가린 건물들의 윤곽은, 마치 괴물의 아가리 같은 기괴한 실루엣을 띠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으려니 꼭 잡아먹힌 기분이 들더라고.
콧잔등을 찡그린 진이 고개를 내려 발길을 옮겼다.
아스팔트 축축한 거리를 걷다 보니, 어느 순간 길가를 두리번거리던 누군가가 쪼르르 다가와 팔을 길게 뻗었다.
깡마른 사내아이였다.
공손하다 못해 비굴한 자세로 내민 너덜너덜한 종이컵 밑바닥엔 광택이 죽은 동전 몇 개가 보였다.
다 더해도 빵값 하나 안 나오는 거스름.
말없이 고개를 든 진이 사내아이를 눈에 담았다.
타인의 적선으로 생을 유지하는 얼굴은 멍으로 얼룩덜룩했으니.
초조함과 우울함, 그리고 체념이 그 안을 지저분하게 채우고 있었다.
"잠시만."
바지부터 자켓 안쪽까지.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적거린 진이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몽땅 다 꺼냈다.
그러고는 그걸 가볍게 말아 아이의 주머니에 쑥 접어 넣고서 말했다.
"너무 오래 들고 다니지 말고. 최대한 빨리 써."
"가, 감사······"
너무 놀란 탓일까.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놀란 아이의 등짝에 손바닥을 얹은 진이 부드럽게 녀석을 떠밀었다.
"감사는 됐으니까, 얼른 가 봐."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먼저 눈길을 거두고 다시 거리를 나아간다.
간헐적으로 드리우는 네온사인, 거리에 쌓인 쓰레기 더미와 코끝을 찌르는 소각된 전자기기의 탄내.
직전까지 웃고 떠들던 진을 비웃듯, 도시는 그렇게 자신의 음울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손을 푹 꽂은 채.
짙은 그늘에 잠긴 골목길을 홀로 걸어갔을 뿐.
언제나처럼.
***
가문 회전이 시작되는 6월까진 두어 달이 남은 상황.
나름 목표라는 게 생기긴 했다만, 그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하여 간단한 일거리를 해치우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진이었다.
물론 말만 간단할 뿐이지.
어지간한 솔로들은 기피할 만큼 위험한 일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진이 누군가.
무려 레벨4의 솔로 아닌가.
'어지간한 솔로'라는 수식어는 더는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막말로 레벨4도 한참 과소평가 된 것이라서.
실제로 레벨5의 솔로와 그 아래 단계를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2위계에 올라섰느냐 아니냐의 차이였으니.
사실상 진은 레벨5 같은 레벨4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솔로 인트라넷에 접속만 했다 하면, 우리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러브콜부터 각종 의뢰까지.
뭔 놈의 메시지가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었으니.
하루를 들여 꼬박 다 읽어도, 다음날이면 가득 쌓인 메시지에 연예인의 기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더라.
그리하여 진이 내놓은 대안이란, 자기소개란에 짤막한 글을 남긴 것이었다.
[R&D 앰배서더입니다. DM 확인 어려워요.]
음, 됐다.
뭐가 됐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진은 만족했다.
어쩔 수 없지.
찾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내 몸은 하나인 것을.
정 급하면 직접 찾아오던가.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진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 연이어 찾아왔으니-.
첫 번째는 집이 생겼다는 것!
엄밀히 따지면 낡은 창고긴 했지만 그게 어딘가.
마침내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리하여 당장 만티코어부터 주차한 진이다.
이후 침대나 테이블 같은 필수적인 가재도구를 들이고, 고생해 준 포우에게 수고비까지 지불하자, 대령에게 받은 1억을 홀라당 다 까먹었더라고.
물론 진은 아무래도 좋았다.
비록 주머니는 가벼워졌을지언정, 적어도 다운타운 내에선 떠돌이 신세를 면했으니, 그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 좋은 일은 뭐냐고?
바로 원더에게 연락이 왔다는 거지.
[잘 지내고 계십니까?]
"나야 잘 지내지. 그나저나 목소리가 좋다?"
[전부 귀하가 힘 써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인트라넷에 그런 글귀까지 남겨주시고. 여러모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이, 받은 게 있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짧은 덕담 뒤에 본론이 따라붙었다.
[이번에도 귀하께 자사의 제품을 제공할 생각입니다.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죠. 후보군을 추릴 때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으으음."
침대에 누워 한동안 고민하던 진이 눈동자를 힐끗.
테이블에 올려둔 홀스터를 바라보며 입을 열길.
"혹시 기존의 제품을 강화하는 것도 가능해?"
[그라비스707 말씀이군요]
"맞아."
애착이 가득한 무기였다.
이제는 없으면 서운할 정도로.
다만, 앞으로도 녀석을 주력 무기로 계속 사용하려면 지금보단 성능이 더 개선되어야 한다는 게 진의 솔직한 평가였다.
그사이 한동안 조용하던 단말기 너머로 원더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루거의 마지막 작품이라···. 좋습니다. 시그니처 격인 무기라는 건 언제나 매력적인 소재니까요. 조만간 저희 쪽 직원을 보낼 테니 믿고 맡겨주시죠.]
"알겠어. 고마워."
[그럼. 이만]
원더가 말한 직원이 진을 찾은 것은 통화가 마치고 채 한나절이 지나기도 전이었다.
확실히 대기업 출신이라 그런지 일 처리가 칼 같더라고.
"잘 부탁합니다···. 아끼는 무기에요."
"···그 선생님. 힘을 좀 풀어주시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손아귀에서 겨우 그라비스를 건넨 진이다.
오늘따라 마음 한구석이 몹시 허전한 게, 아들래미 군대 보낸 부모님의 마음이 이랬을까.
한동안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진이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이럴 때일수록 대화가 필요한 법.
곧장 만티코어를 이끌고 에넥도트를 찾은 진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녕!"
그 쩌렁한 인사에 칼리파와 포우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더라고.
"네가 연락했어?"
"아닙니다. 저는 점장님께서 연락하신 줄 알았는데요."
두 사람의 대화에 진이 고개를 갸웃.
"내 얘기 하고 있었냐?"
그리 물으며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니.
자연스럽게 그 앞으로 물잔을 내려놓은 포우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그러잖아도 알맞은 의뢰가 들어와서요."
그에 진이 고개를 돌려 벽걸이 시계에 눈을 맞췄다.
6월 24일.
가문 회전까지 보름 정도가 남은 상황.
10번대 안쪽 구역에서 개최되는 축제인 만큼, 이동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뭔가 애매한 느낌이라.
시선을 제자리로 돌린 진이 고개를 저었다.
"힘들겠는데. 시간이 조금 안 맞을 거 같아."
그러자 어느새 맞은편으로 다가온 칼리파가 테이블에 팔을 포개며 말했다.
"회전 때문에?"
"어."
"열흘 전에 출발할 생각이라고 했지?"
"그랬지?"
"그럼. 상관없어. 이번 의뢰는 그냥 하루 만에 끝나는 일이거든."
이어진 칼리파의 말에 진이 물로 입을 축인 뒤 되물었다.
"하루 만에 끝난다고?"
"하루도 아니지. 반나절 정도만 경호원 노릇을 하면 되거든."
"경호? 갑자기?"
"응. 이틀 뒤에 다운타운에 콘서트가 열리거든. 그것도 엄청난 샐러브리티의 콘서트야. 소속사에선 위험하다고 기를 쓰고 말리는 와중에도 본인은 예술가라면서 끝까지 순회공연을 고집하는 아가씨지."
칼리파가 눈썹을 으쓱거리며 뒷말을 덧붙였다.
"워낙 몸값이 높은 분이라 그런지. 직속 경호원들도 모자라서 근방 솔로들까지 닥치는 대로 고용하고 있나 봐. 그것도 레벨4 이상으로만. 과보호 같긴 해도 그네들 입장에선 이 동네가 그만큼 위험에 보인다 이거겠지. 아무튼, 관심 있어?"
그 물음과 동시에 한 달 넘게 조용하던 상태창이 불쑥 진의 눈앞을 가렸다.
「시궁창 속 예술」━━━━━━━━━━━
엘리나 비센트를 경호하시오.
*보상 퍽 XP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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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진이 칼리파를 향해 말했다.
"그 콘서트 망할 것 같은데."
< 81화 >
아니, 꼴랑 콘서트 경호하는데 무슨 경험치를.
진이 얼굴을 쑥 뺐다.
이후 부담스러운 상태창 면상을 휘적질로 치워버리는 그에게 칼리파가 물었다.
"망한다니. 갑자기?"
"음. 그런 느낌이 강하게 와."
"···?"
칼리파의 머리 위로 의문표가 떠올랐다.
이는 술잔을 닦던 포우도 마찬가지라.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그리 묻는 바텐더를 향해 진이 대답하길.
"···느낌이, 느낌이 그래."
뜬금없는 느낌론의 등장이었다.
물론 이는 경험치와 난이도의 상관관계.
더 나아가서는, 상태창이란 미지의 힘에 관해 설명하려야 할 수가 없는 진이었기에 이따위 요상한 이론이 탄생하게 된 거지만 말이다.
"흐음."
칼리파가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차분한 눈동자로 진의 얼굴을 살피니, 이윽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감이 그렇게 말하면 따라야지. 알겠어, 진.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자. 내가 더 좋은 의뢰로 준비해 줄게."
깔끔한 결론.
이게 솔로들 사이에서 칼리파가 좋은 링커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였다.
싫다고 말하면 거기에 굳이 사족을 붙이며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
누가 봐도 이거 꿀통인데, 싶은 일은 비단 솔로만 반기는 것이 아니다.
수수료 챙겨 먹는 링커에게도 이는 아주 짭짭한 벌이거늘.
그럼에도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 두 번, 세 번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반나절. 콘서트가 진행되는 몇 시간 딱딱한 표정만 짓고 있으면 끝날 일임에도 불구하고.
진이 지금처럼 성장하기 전에도 같은 태도를 고수했던 칼리파였으니.
지금도 미리 구워둔 수제 쿠키를 접시 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서 요즘 새집은 어때?"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에 진도 밝은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 그게···"
애초에 그라비스를 맡기고 헛헛한 마음을 풀기 위해 에넥도트에 방문한 것이 아니던가.
이 분위기 있는 술집이야말로 진에게 처음 소속감을 선물해 준 감사한 곳이었으니.
몇 시간이고 떠들다가 손님들이 점점 들어와 가게가 붐빌 무렵이 되어서야, 다음에 또 보자, 가게를 떠난 그다.
돌아가는 길에 간식거리도 든든하게 샀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창고 덧문(셔터)을 드르륵— 올려 안으로 들어선 진이 코를 킁킁.
"향초라도 사서 좀 둘까."
무인 모텔에서 지낼 때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며 털썩 침대 위로 엎어진다.
그러자 절로 지어지는 웃음.
푹신한 감촉이 이보다 좋을 수가 없더라고.
역시 사람은 내 공간이 있어야 해.
만고의 진리를 다시금 되새긴 진이 봉투를 부스럭거려 그 안에서 감자칩 따위를 잔뜩 꺼내 협탁에 올렸다.
이러면 쇼타임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침대 위 영역전개.
가장 중요한 단말기도 완충 상태로 베개 옆에 떡하니 배치했으니.
옆으로 돌아누운 진이 오른손은 단말기를 고정, 왼손은 과자를 낚아채 부지런히 입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으음."
이젠 보름 앞으로 다가온 가문 회전인 만큼, 축제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는 데 재미를 붙인 요즘이다.
"지난 수백 년간, 7가문 소속이 아닌 인물이 우승한 경우는, 2번 밖에 없었다? 오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진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유구한 세월 순수주의자의 왕으로 군림한 일곱 가문의 위용도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그들을 뚫고 우승을 거머쥔 2명의 언더독은 더 대단하게 느껴졌기에.
궁금한 마음에 두 언더독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이게 무슨. 죄다 락이 걸려있더라고.
참나, 수 세기 전 사람에 대한 정보에 왜 이렇게 인색하대.
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저 인생 경로를 기업으로 골랐다면 네트워크 쪽은 빠삭했을까? 같은 망상을 했을 뿐이다.
검은 양복에 올백 머리.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와인잔을 빙글거리는······
이 순간, 맹금류의 발톱처럼 야무지게 오므린 손으로 과자를 낚아채는 사람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상상이었지만, 정작 진의 얼굴은 진지했으니.
아 맞다, 기업이면 머리통에 전뇌 포트 박아야 하지?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다시 화면에 관심을 돌렸다.
그러고는 엄지를 까딱까딱.
흥미가 갈만한 이야깃거리를 찾아 정처 없이 헤매던 중, 우연히 발견한 토픽 하나.
[시궁창을 밝히는 별, 엘리나 비센트]
진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다시 한번 등장한 셀러브리티의 이름 때문은 아니다.
그저 헤드라인이 영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무슨 제목을 이렇게 짓는대."
바보가 아닌 사람한테 바보라고 하면 그건 놀리는 거지만, 진짜 바보한테 바보라 말하면 싸우자는 소리다.
아무리 40번대 구역이 시궁창이 맞다지만.
듣는 시궁창인 기분 나쁘게···!
그리하여 진이 토픽을 클릭했다.
이는 관심보다는,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데-, 하는 반발 심리가 작용한 결과라.
그 표정부터가 사뭇 엄격한 것이 마치 트집거리를 찾는 당직사관 같다고 할까.
아무튼 기사를 쭉 읽는데······
음. 예쁘게 생기긴 했네.
근데 예쁘면 다야?
노래도 잘한다고?
웃기시네. 가수가 노래 잘하는 게 당연한 거지.
솔로가 싸움 못 하면 그게 솔로냐?
근데 많이 잘해?
그러면 한 번만 들어 볼까.
대표곡이 뭔데.
음. 오. 호우. 크흠흠.
잘하긴 하네.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엘리나 비센트?
몇 살이지.
스물다섯, 동생이네.
···다음 노래도 들어볼까.
2시간짜리 메들리?
씁. 좀 긴데.
적당히 듣다가 끄던지 하자.
여기까지가 진의 마지막 심리적 저항선이었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 그다.
"···어?"
시간을 보니 벌써 4시간이 훌쩍 지난 상황.
화면에선 엘리나의 인터뷰가 한창 진행 중이더라고.
[40번대 구역에 계실 팬 분들도 꼭 찾아뵐게요.]
밝게 미소 짓는 얼굴에 진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생각해 보니 참 좋은 친구 아닐까?
다운타운 같은 똥통에 팬들 보겠다고 콘서트를 다 열고 말이야.
어? 여기가 어디야.
길거리 공연하는 사람이 있거든, 깡통 안에 든 푼돈 들고 튀거나 아예 깡통을 발로 후려까는 미친놈들이 즐비한, 예술계의 무덤이자 마굴이잖아.
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다음 라이브 영상을 클릭하니.
사실 로스트 시티에서 눈을 뜨기 전에도 좋아하는 연예인 정도는 있었던 그다.
대한 남아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입대곡.
그 입대곡이 데뷔곡이었던 4인조 걸그룹(훗날 5인조가 되는)을 좋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물론 그것도 학업에 치이고, 직장 생활에 치이는 등. 현실적인 문제로 자연스레 등한시하게 됐지만 말이다.
여하튼.
까까머리 시절의 편린까지 되살아날 정도로, 엘리나의 노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사실이라서.
다양한 컨셉과 이를 커버하는 뛰어난 실력까지.
괜히 인기가 많은 게 아니더라.
"크흠흠-"
분명 흠결을 찾으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계속해서 관련 영상을 찾아보는 자신을 발견한 진이 뺨을 긁적긁적.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괜스레 멋쩍어진 얼굴이다.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을 관통하는 생각이란 게.
···콘서트 도중에 무슨 일이 터지긴 터지는 건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저 경호만 하면 되는 일에 붙은 경험치가 12,000이라는 것부터 말이 안 되긴 했으니까.
한 달 넘게 잠잠하던 상태창이 머리를 들이밀었다면 분명 뭔가 큰일이 터진다는 소리일 터.
테러? 납치?
아니면 바글바글 모인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는?
진이 턱을 매만졌다.
사뭇 심각한 표정.
마치 저녁 메뉴를 선정할 때와 같은 진지함.
그리고 이어지는 나직한 혼잣말이.
"···한다고 할까."
동시에 네모반듯한 방해꾼이 시야를 확 덮쳤다.
「시궁창 속 예술」━━━━━━━━━━━
엘리나 비센트를 경호하시오.
*보상 퍽 XP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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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한 모습에 진이 인상을 팍.
"좀 꺼져봐."
허공에 따귀를 갈겨 상태창을 흩어내자니.
단말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우리의 눈물을 말라죽은 바다에 떨어뜨려-]
[여정을 멈춘 배가 다시 돛을 펼칠 수 있게-]
이어지는 노랫말에 맞춰 발을 까딱거리던 진이 생각했다.
일이 잘 해결되면 사인 한 장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코팅한 다음에 액자에 넣어서 딱 걸어두면···.
꼬리를 문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진이 결연한 얼굴로 단말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키패드를 꾹꾹꾹.
이내 통화 버튼을 누르니.
"아, 칼리파. 바빠? 다른 게 아니고. 그 경호 말인데. 한 번 해볼까 해서. 어어. 그냥 뭐, 회전까지 시간도 좀 남기도 했고. 겸사겸사─"
대화가 이어졌다.
***
"컨디션은 좀 어때?"
굵직한 저음이었다.
마치 동굴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그와 동시에 코를 찌르는 짙은 시가 향.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던 엘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껌을 질겅거리는 뚱보를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하, 그런 얼굴로 말하면 잘도 믿어주겠다."
콧방귀를 뀐 뚱보가 풍선을 불었다.
연녹색으로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던 표면이 어느 순간 팡 터지며 입가에 달라붙는다.
그걸 손으로 떼어 다시 입으로 가져간 놈이다.
연신 아래턱을 움직이며 엘리나를 삐딱하게 응시하던 것도 잠시. 이내 걸음을 옮긴 그가 소파에 엉덩이를 질펀하게 깔아뭉갰다.
그러고는 등받이 위로 양팔을 얹은 채 중얼거리길.
"시발, 좆같은 슬럼 같으니라고. 어떻게 된 게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음식 맛은 구리고, 거리는 더럽고, 침대에는 뭔 얼룩이 묻어있질 않나. 방 치우면서 떡이라도 친 건지, 뭔지. 하여간 미개한 새끼들."
불평불만을 토하는 얼굴이 점점 사나워지는 가운데.
아무런 말이 없는 엘리나의 옆모습을 두 눈에 새긴 뚱보가 말했다.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 뭐어? 40번대 구역에 계실 팬 분들도 꼭 찾아뵐께요오오--"
비아냥 가득한 목소리와 표정.
그에 엘리나가 굳게 닫힌 입술을 뗐다.
"전 구역을 대상으로 한 순회공연이었어. 40번대 구역만 예외일 순···"
"지랄! 여긴 논외야! 시정부에서도 손을 뗀 개좆같은 슬럼이라고! 굳이 여기까지 와서 생쇼를 할 필요가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어?!"
엘리나의 말을 중간에서 자른 뚱보가 시뻘게진 얼굴로 입에서 불을 뿜었다.
"네가 생방에서 그따위 폭탄 발언만 안 했어도 지금쯤 양손 가득 젖탱이를 주무르고 있었을 거라고, 알아?! 하여간 저 하나 때문에 우리만 좆빠지게 고생 중이지. 왜? 고향이 그렇게 그립든?"
"···꺼져."
"하?"
날카로운 단답에 뚱보가 껌을 옆으로 퉤 뱉었다.
그러고는 품에 손을 찔러넣으니,
놈이 캡슐 형태의 알약이 든 약포지를 꺼내며 말했다.
"그래서 받기 싫어? 그냥 가지고 갈까?"
동시에 엘리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턱 근육이 불거질 정도로 이를 꽉 악무는데, 그 모습을 본 뚱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찍소리도 못할 거면서. 반항은."
이죽거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와, 화장대 위로 손바닥을 쾅 내리쳤다.
"처먹고 몸 좀 부르르 떨다가 자라."
"······"
이후 거울을 통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리나가 눈동자만 아래로 떨어뜨렸다.
잔뜩 구겨진 약포지가 시야에 담긴 순간.
그걸 급하게 찢은 그녀가 입에 캡슐 속 가루를 탈탈 털어 넣었다.
이어 떨리는 손이 물잔을 찾아 입으로 가져가니.
절반은 삼키고, 나머지 절반은 턱으로 흘러 금세 축축해진 가슴팍이다.
"하아, 하아."
젖은 턱을 손등으로 닦아낸 그녀가 몽롱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다시 거울을 보았다.
은회색 감도는 머리칼에 연녹색 눈동자가 조화로운 얼굴.
하지만 그보다는 화장으로도 미처 가려지지 않은 짙은 눈그늘이 더 또렷했다.
뻔한 이야기였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삶이지만, 그 이면은 새장 속에 갇힌 종달새에 불과하다는.
출신이 미천하다는 것과 오랜 정서적 학대.
그리고 마약을 통한 길들이기까지.
누군가에겐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진부한 소재다.
그래. 차라리 그게 전부였다면 좋았으련만.
···!
말없이 부들거리던 엘리나의 몸이 순간 크게 휘청거렸다.
시작된 것이다.
지난 몇 달간 그녀를 괴롭힌,
약효가 끝날 무렵에 찾아오는 기현상이.
"아으."
눈꺼풀 위로 대못을 박는 듯한 끔찍한 두통에 엘리나가 반사적으로 머리칼을 싸잡았다.
고통에 벌벌 떠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일어난다.
폐허가 된 심신. 거기에 약물로 인한 강제적인 각성 상태가 불러온 화학적 결과값.
빛과 장미의 시대를 지나 천 년.
인류가 발견한 또 다른 힘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시, 싫어."
엘리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저항할 틈도 없이 머릿속 공간이 확장한다.
확장하고, 확장하고, 또 확장한 그것은 어느 순간 우주가 되니.
광활함 속에 던져진 의식이 비명을 질렀다.
"아으으으!"
점차 심해지는 고통.
어느 순간 엘리나의 눈이 눈꺼풀 뒤에서 휙 뒤집였다.
─────────콰직!
직후 그녀가 마주 보고 있던 화장대가 찌그러졌다.
놀랍게도 파편조차 날리지 않았다.
그저 엄청난 힘으로 압축되어 동그란 형태로 바닥에 쿵 떨어졌을 뿐.
출발선 자체가 다른 끔찍한 재능.
그 이해를 벗어난 광경 속.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엘리나가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본인이 저지른 일에서 눈을 돌리고 싶다는 듯 얼굴을 무릎에 깊이 파묻으면서.
허억허억, 거친 숨소리.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이커가 불온한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 82화 >
부아아아앙-!!
만티코어가 길게 울부짖는다.
이른 아침.
검푸른 새벽 어스름이 안개처럼 깔린 대로를 시원하게 주파한 바이크가, 크고 작은 블록을 지나쳐 어느 순간 속도를 줄였다.
이후 발로 사이드 스탠드를 젖힌 운전자가 바닥에 내려서니.
헬멧을 벗으며 고개를 턴 진이 이내 맞은편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눈에 담기는 건, 다운타운을 대표하는 흉물 중 하나.
이름하야 스트레이 스타디움!
5만 명대의 관중 수용이 가능한 대형 구장을 목적으로 시공되었으나, 당연하게도 가문·기업 전쟁으로 공사 전면 중지!
철골 구조만 완성된 상태로 수십 년 넘게 방치되면서, 눈에 담기만 해도 파상풍에 걸릴 것 같은 끔찍한 흉물로 재탄생하고만 것이다.
심지어 다운타운의 상업지구라 부를 만한 정크프라자에서도 멀리 떨어진 북쪽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그야말로 버려진 장소였으니.
평소라면 얼씬도 하지 않았을 이곳까지 진이 방문한 이유는 하나.
엘리나의 공연이 여기서 열리기 때문에.
칼리파의 말에 의하면, 마땅한 문화 시설이 없는 다운타운에서 그나마 대규모 관객을 수용할 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었다고.
때문에 공연히 확정된 뒤, 시청에서 급하게 수리가 들어갔다고는 하는데-
막말로 좌천당한 공무원들이 무슨 열정이 있을까.
말이 좋아 수리지.
실상은 살릴 수 있는 부분만 대충 콘크리트를 친, 공사라 부르기도 민망한, 보여주기식 심폐소생에 불과해서.
수용 인원이 2천 명대로 대폭 줄어든 것은 기본이요.
경기장 안팎으로 편의 시설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야생적인 풍경까지.
어쩐지 부실한 운영과 열악한 부대시설로 국제적인 망신을 샀던 고향의 페스티벌을 떠올린 진이었다고.
"···다신 안 오겠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우리 동네 민낯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진이 경기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진?"
어깨 너머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갔다.
눈길이 닿은 곳에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드안드레랑 후커.
그리고 그렉까지?
뭐야. 이 심상찮은 트리오는.
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를 때였다.
"너도 구경 온 거야?"
드안드레가 히죽거리며 질문을 던지니
두툼한 손에 들린 저거, 설마 응원봉?
"······"
얘넨 진짜네.
눈앞의 삼인방에게서 짙게 풍겨오는 찐팬의 향기에 진이 선을 그었다.
"난 일 때문에."
"···일? 아아, 경호."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드안드레를 보며 말을 아껴야겠다 확신한 진이다.
직후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이는 뭐라 설명할 길 없는 민망함을 동반한 고요였으니,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지인을 마주할 줄은 모두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일이라는 핑계가 있는 진은 상대적으로 덜 민망하긴 하다.
해서 딴청을 피우는 그렉을 향해 선제공격을 날리길.
"너도 왔네?"
"아. 이번 공연을 경호하는 외부 인력이 레벨4 이상의 솔로로 구성된다는 얘길 들었거든. 나도 솔로로 재출발한 마당에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직접 눈에 담고 싶어서 말이야. 이른바 동기부여를 위한 동행이랄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말을 이어가는 녀석의 손에는 드안드레와 같은 형광봉이 들려있었다.
"···콘서트는 내일인데? 오늘은 리허설."
"두 번 보면 더 좋은 법. 마치 너처럼."
이 새끼, 말빨이?
이 순간 땅굴에서의 후유증을 완벽하게 극복한 그렉의 유창한 언변에, 저도 모르게 압도당한 진이 고개를 끄덕.
"그, 그래. 아무튼 난 간다."
"어어. 그래." "들어가십쇼! 형님!"
멋쩍게 손을 흔드는 드안드레와 허리를 깊게 숙이는 후커에게서 시선을 돌린 진이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경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니.
그 걸음걸이가 이보다 어색할 수가 없더라고.
*
"아, 그쪽이 진 에버나이트?"
그렇게 묻는 이는 한쪽 귀에 인이어를 착용한 사내였다.
피로가 겹겹이 쌓인 얼굴로 진을 바라보는데 그 시선에서 기계안 특유의 인위적인 빛이 반짝였다.
"확인됐어요. 자, 여기. 목걸이 받으시고. 그거 없으면 여기 못 돌아다니니까 잃어버리면 곤란해요. 여분이 없거든."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까?"
진이 그렇게 말하며 제 이름이 적힌 명찰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러자 스태프 왈.
"저 끝에 노란색 천막 보이죠? 저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쭉 들어가면 경호실장님이 계실 텐데······"
손짓으로 대충 설명을 마친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목소리를 갈아 끼우며 일갈하길.
"야야! 조명! 기울었잖아! 정신 똑바로 안 차려?!"
그에 진이 설치에 난항을 겪는 조명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설마, 저게 떨어져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경호라는 키워드 때문이었을까.
별걸 다 의심하면서 스태프가 일러준 장소에 도착한 진이 누가 봐도 나 경호실장이요, 생김새로 말하는 떡대에게 다가갔다.
북적이는 인파에 주변이 혼잡한 와중에도 자신을 향한 접근을 놓치지 않은 상대가 눈을 돌렸다.
허공에서 맞닿는 시선.
동시에 진이 깨달았다.
수인이구나.
되게 강한.
꿰뚫어 보는 시선이 상대의 정체를 짐작하는 사이,
상대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지?"
"진 에버나이트. 솔로야."
"음."
고개를 주억거린 경호실장이 빈 플라스틱 의자를 향해 까딱 턱짓했다.
"저기서 잠자코 대기해"
이어진 고압적인 언사에 진의 눈썹이 꿈틀.
뭐지, 저 싸가지는?
내가 지 부한 줄 아나.
하지만 그런 속내와 달리 순순히 의자에 자리를 잡았으니-
쯧, 엘리나 얼굴을 봐서 한 번은 참아준다.
당사자는 원한 적도 없는 자비를 베푼 그가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주변을 쓱 둘러보는데, 예상외로 솔로들이 몇 명 없더라고.
뭐지?
처음에는 의아할 뿐인 진이었지만, 그 이유를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어쭈.
눈앞을 스치는 경호원들의 눈빛 속에 경멸이 담겨있었다.
한없이 길어지는 '대기 시간'은 덤이다.
애초에 뭘 시킬 생각이 없는 티가 역력했으니.
그건 다른 솔로들도 예외는 아니라서.
외부 인력을 불러놓고 병풍 취급을 한다?
그것도 레벨4 솔로들을?
어디 가서 무시당할 이들이 아닌즉.
노골적인 찬밥 신세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뜨는 이들이 속출할 수밖엔.
물론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왜 조용히 물러나 주는 거냐고.
이 싸가지 없는 새끼들. 참교육해도 모자랄 판에.
그에 대한 대답은 진의 등 뒤에서 돌아왔으니.
"시발···누군가 했더니 말콤이었군."
그 말을 끝으로 일어서는 솔로를 진이 불러세웠다.
"말콤이 누구길래?"
"저기, 경호실장이란 작자요. 1년 전쯤 2위계에 오른 수인이지. 어디로 스카웃될지 궁금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었군."
"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 새끼들은 우리가 깝치길 기다리고 있을걸? 어쩐지 일이 너무 간단하다 했지."
윗입술을 비틀어 불쾌한 티를 낸 그가 진을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 진, 댁도 여기서 더러운 꼴 보지 말고 그냥 갑시다. 우리가 이런 취급 당할 수준은 아니잖아?"
"날 알아?"
"그럼. 어떻게 모를까."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솔로가 허리춤을 탁탁 두드렸다.
자연스레 그곳을 바라보자, 웬걸.
허리띠에 익숙한 권총 한 자루가 걸려있더라고.
모델명이 R&D로 시작하는···
"그쪽 영상 보고 산 거요. 고정형 총검 부착 전자동 핸드건."
"오우."
저도 모르게 손을 내민 진이다.
직후 뜨거운 악수를 나눈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씩.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표정을 굳힌 솔로가 말했다.
"아무튼 난 갑니다. 댁도 너무 고민하지 마쇼."
그러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멀어지니.
말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이 어깨를 으쓱.
너는 안 가냐? 라는 시선을 던지는 경호원과 한 번 눈을 맞춰주고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럼 그렇지, 고개를 돌리는 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그가 발끈하는 얼굴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그 방향이 앞서 이곳을 떠난 솔로와 완전히 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은 이대로 여길 떠날 생각이 없었으니까.
한번 시작한 일은(그 이유가 뭐였든 간에)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도 했거니와, 이번 의뢰를 잘 마무리하면 새로운 별자리를 하나 더 해금할 수도 있었기에.
그리하여 같잖은 무시에 대한 대가는 나중에 돌려줘도 늦지 않다고 판단.
어차피 뭘 시키지도 않겠다.
명함 목걸이를 방패 삼아, 공연장 이곳저곳을 쏘다니기 시작한 진이다.
그사이 리허설이 시작된 무대 위에선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으니.
"이야. 잘하네."
음원과 크게 차이가 없는 라이브에 감탄하는 순간.
웅---
가슴팍을 울리는 진동에 단말기를 꺼낸 진이 발신자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
"칼리파?"
[진. 공연장이야?]
"어. 지금 막 리허설 시작했어."
[들었어. 그쪽 취급이 완전 개판이라면서. 미리 알았으면 절대 안 보냈을 텐데. 지금이라도 나와. 일은 내가 훨씬 괜찮은 걸로 물어와 줄게.]
"됐어. 내가 하겠다고 말한 건데."
진이 그리 대답하며 주홍빛 녹이 덕지덕지 붙은 철골 아래를 머리를 숙여 지나쳤다.
"그나저나, 칼리파.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만약에 콘서트장에서 무슨 일이 터진다면 그게 뭘까?"
[최악의 상황이라도 가정하는 거야?]
"뭐 비슷해."
[어제부터 느낌이 안 좋다고 하더니. 뭐가 싸한 모양이네.]
이후 으으음, 고민하는 콧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뒷말이 따라붙었다.
[글쎄,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니까. 붕괴 위험이 제일 높지 않을까?]
그에 진이 눈앞의 철골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다른 건?"
[관객 중에 테러범이 있을 수도?]
"그게 드안드레는 아니면 좋겠다."
[뭐야. 걔도 거기 갔어?]
"사무실 식구들이랑 단체로 왔더라."
[···하여간, 뭐. 엘리나가 예쁘긴 하지.]
그에 진이 손에 묻은 녹을 툭툭 털며 말했다.
"그래서 다른 의견은 더 없고?"
[진? 솔직히 말해 줄래. 이거 뭐, 창작 대회 같은 거야?]
칼리파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고, 진도 따라서 키득거렸다.
"그냥 궁금증 정도로 하자."
[글쎄. 알고 보면 엘리나를 포함한 그녀의 팀 전원이 사실은 흑마법사였고, 관객들을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건 어때. 2천 명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주문이 다운타운 전역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거지. 이건 몇 점?]
"60점."
[왜?]
"그럼 12,000보다 높을 거 같아."
[···12,000? 진. 가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를 못 하겠더라.]
한숨이 섞이긴 했지만, 그리 말하는 칼리파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저 소속 솔로와 노닥거리는 이 순간이 즐겁다는 것처럼.
[아무튼 난도를 조금 낮추라는 거지?]
"이해가 빠른데?"
[···그러면 어디 보자.]
칼리파의 고민이 이어지는 가운데.
공연장의 전체적인 약도를 머릿속에 집어넣은 진이 왔던 길을 돌아가려 할 때였다.
퍽!
저만치서 달려오던 누군가가 그의 어깨와 부딪혔으니.
당연하게도 차에 들이박힌 사람처럼 중심을 잃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이고."
놀란 진이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 때였다.
"엘리나! 엘리나! 이런 씨!"
화통이라도 삶아 먹었는지, 우렁차게 소리친 뚱보가 스테이지 뒤에서 고개를 휙휙.
"시발. 어디로 갔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껌을 질겅거리는 그를 바라본 진이 다시 눈길을 쓰러진 이에게 돌리니, 음?
멀리 경기장 구석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이더라.
"···?"
곧바로 진이 성큼걸음으로 따라붙었고,
단말기에선 칼리파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이건 어때? 엘리나가 공연 중에 갑자기 사이커로 각성하는 거지. 그것도 A급 이상의 사이킥 파장을 발산하는 괴물로 말이야.]
[원래 사이킥 능력이라는 게, 잠재의식에 닿아있는 힘이니만큼 각성하기 전까진 그 위험성을 아무도 알 수 없잖아? 모르지. 알고 보니 엘리나가 그 음악성만큼이나 사이킥 능력에 대단한 잠재력을 보유했을지도.]
[이건 몇 점?]
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구석에 쪼그려 몸을 벌벌 떠는 여인을 발견한 까닭에.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그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 저기? 엘리나 맞지?"
"오, 오지 마요!"
새하얀 손바닥이 진을 향해 벽을 쳤다.
그에 진이 똑같이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저쪽이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면,
이쪽은 적대할 생각이 없다는 모양새로.
"알겠어. 진정해."
"아으-"
머리칼을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솟는다.
차가운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든 사람마냥, 온몸을 격렬하게 떨어대는데, 이미 과호흡이 찾아온 상태더라.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보는 것만으로 숨이 죄어오는 듯한 느낌.
검은 파도가 나를 집어삼킬 적에 딱 저렇게 떨지 않았던가.
물 밖에서 익사하는 사람의 심정이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그라서.
"괜찮아. 여기 사람 있어. 진짜야. 어디 안 가."
어루달래는 목소리와 함께 펜싱 선수와 같은 자세로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 진이다.
그 와중에도 엘리나의 떨림은 점차 심해졌으니.
"아으, 아으으으!!!"
질끈 감은 눈꺼풀 너머 눈동자가 머릿속 우주를 영접하듯,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려는 순간.
덥썩-
커다란 손이 엘리나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안녕."
살갗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를 느꼈을까.
"···아?"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엘리나가 희뿌연 시야에 진을 담았다.
"누, 누구?"
"나? 경호원인데, 네 팬이기도 해. 이제 하루 됐어. 따끈따끈하지? 참, 목적은 사인받는 거야. 집에다 걸어놓게."
"······"
그리 대답하는 얼굴을 멀뚱하게 바라보던 엘리나가 뒤늦게 정신이 든 사람처럼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제, 제가 뭘 다치게 하진 않았나요?"
"그러진 않은 거 같은데."
"다행, 다행이에요."
맥이 탁 풀린 사람처럼 안도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진이 손을 놓았다.
이후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이제 오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직전까지 꽥꽥 소리를 질렀던 뚱보가 경호원들을 우르르 이끌고 달려왔다.
괜한 오해를 받을까. 진이 두어 걸음 물러서자 어느새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놈이 소리쳤다.
"너! 갑자기 어디로 달려가는 거야. 시발, 미쳤어?"
그러더니 대뜸 고개를 돌려 진의 목걸이를 확인하곤 사납게 덧붙였다.
"네 위치로 돌아가!"
"참 내."
콧방귀를 뀐 진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육중한 덩치 뒤로 이쪽을 바라보는 연녹색 시선이 느껴져 손을 한 번 흔들어주니, 옆에서 경호원들이 눈으로 불을 뿜더라고.
마음 같아선 한 대씩 쥐어박고 싶었지만, 원래 강자는 자비로운 법.
5레벨 같은 4레벨인 내가 참아준다.
그대로 현장에서 벗어난 진이다.
그러다 문뜩 고개를 돌리니.
"···씁. 뭔가 구린내가 나는데."
엘리나와 깍두기 무리를 바라보는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
하루가 지나,
마침내 공연 당일.
대기실에 앉은 엘리나는 한사코 약을 거부했다.
머릿속에서 범람하는 불가항력적인 공포가 중독을 이긴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몸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기 시작했으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뚱보, 아니 프로듀서가 몸을 일으켰다.
"씨발년이 진짜."
원색적인 욕설과 함께 품에서 약포지를 꺼낸 그가 캡슐을 열어젖혀 그 내용물을 물잔에 쏟았다.
"야. 이년 좀 잡아."
이어지는 명령에 달려온 경호원들이 엘리나의 몸을 옭아맨다.
"놔!"
찢어지는 비명에도 팔다리를 통제하는 손아귀의 힘은 더욱 거세질 뿐이라서.
"쉽게 쉽게 좀 가자. 어?"
푹 담근 검지로 물잔에 회오리를 일으킨 프로듀서가 그대로 엘리나의 뺨을 붙잡고 입안에 억지로 물을 쏟어넣었다.
그러고는 아래턱을 억지로 닫으며 코를 틀어막으니.
발버둥 치는 그녀의 어느새 축 늘어짐에 놈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하여간. 시발."
그러고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쓱 쓸어내며 중얼거리길.
"점점 반항이 심해져서 안 되겠다. 투어 끝나는 대로 이년 머리에 포트부터 박아야겠어. 아주 리셋을 시키든지 해야지. 씨발. 임플란트 거부 반응이 심한 체질이라 약으로 컨트롤하려고 했더니. 아주 미친년이 다 됐네."
인간성 말소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은 그가 곁에서 경호원을 향해 말했다.
"공연까지 얼마나 남았냐?"
"······"
"얼마나 남았냐고."
"······"
"대답 안 해! 이 새끼들이 단체로 돌았나."
그때였다.
짜증 섞인 목소리를 뱉는 프로듀서의 발치에 무언가 데구루루 굴러온 것은.
"···뭐야?"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진 눈에 낯선 물체가 담겼다.
그것은 붉은 공이었다.
굴러온 궤적을 따라 길게 이어진 빨간, 저거 핏줄기인 건가?
설명할 수 없는 섬뜩함에 주춤 물러선 프로듀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 엘리나의 모습이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
그 공허한 시선.
언제부터 서 있었지?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콰직!!
< 83화 >
4-2. 사이킥(Psychic)
마나가 과거로부터 이어진 인류의 숭고한 유산이라면, 사이킥은 인류가 새로운 천년을 맞아 각성한 힘이란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타크래프트나 워해머40k 같은 게임에도 묘사되는 능력이긴 한데, 뉴비분들은 그냥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초능력쯤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우실 거예요.
[대충 어벤져스 짤]
인간의 무의식에 닿은 힘이기에, 각성 전까진 본인이 어떤 계통의 각성자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막상 게임을 진행하시다 보면···
(중략)
사이킥 능력에 대한 등급은 그리스 문자를 차용한
알파(α) - 오메가(Ω)로 구분되며, 오메가로 나아갈수록 위험도가 높은 사이커라 평가받습니다.
해당 등급은 선천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에 모두 영향을 받으며, 당연하게도 선천적인 재능이 뛰어날수록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더불어 오메가급 사이커는 작중에서 걸어 다니는 전술핵이란 평가를 받는 괴물들로, 일곱 가주와 필적하는 수준의······
(중략)
이건 사담입니다만, 프네가 복잡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직업군마다 개별적인 등급이 나뉘어진 탓이라 생각합니다.
솔로는 레벨.
용병은 색상. (빛과 장미의 시대에서 이어진 전통이라고 합니다. 은패 용병, 금패 용병 같은.)
범죄자들은 위험도.
사이커들은 등급.
누가 짬뽕겜 아니랄까 봐, 정신이 하나도 없긴 한데.
이게 다 운영자가 욕심이 그득해서 생긴 결과니.
뉴비분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시고, 어차피 그걸 다 포함하는 개념이 위계라서···
***
콘서트 당일.
스타디움 앞에 도착한 진이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아온 콜라를 땄다.
칙-하는 청량한 소리.
이후 꿀꺽꿀꺽 목을 축인 얼굴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쫓아 자연스럽게 거리를 향했다.
평소 인적이 드문 노스 다운타운이라곤 믿기지 않을 인파였다.
경기장에 확보된 좌석이 고작 2,000석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들 대부분이 엘리나의 목소리를 멀리서나마 귀동냥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그래서 진은 더 막막했다.
저게 다 용의자들 아닌가.
어떤 놈이지? 누가 깽판 치는 거지?
의심 한가득한 눈동자가 주변을 휙휙.
그리하여 내린 결론이란.
······전혀 모르겠다!
소싯적 정독했던 추리 만화책은 이 순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 솔직히 말이 안 되지.
허구한 날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름을 도박판에 올리는 갬블러 탐정한테 배울 게 뭐가 있다고.
예비 장인어른 뒷목을 30년에 걸쳐 벌집으로 만든 초딩 탐정은 말할 것도 없다.
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셜록 홈즈나 좀 읽을걸!
하지만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법.
답답한 마음에 그저 한숨만 푹 새어 나올 뿐이라서.
콰직, 빈 캔을 짜부라뜨린 그가 가까운 쓰레기통을 향해 3점 슛을 날릴 때였다.
"후아! 사람 진짜 많네."
드안드레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옆자리에 앉으니.
깔끔한 궤적을 그린 캔이 쓰레기통에 골인한 건 그다음이었다.
"나이스 샷입니다. 형님."
짝짝짝, 손뼉을 치는 후커와 그런 안드로이드의 곁에 서서 가볍게 손을 흔드는 그렉까지.
트리오의 등장에 진이 입을 열었다.
"왔어?"
"그럼, 와야지. 누가 부른 건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드안드레다.
그러고는 진을 돌아보며 묻길.
"그래서 무슨 일이야. 직접 만나서 할 얘기라니."
"아 그게. 너희 도움이 좀 필요할 거 같아서."
"······뭣?!"
진의 대답에 드안드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도움이? 뭔데, 말만 해."
"그게···"
예상보다 적극적인 반응에 자연스레 설명이 시작되니,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는 세 사람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더라고.
이후 모든 얘기를 다 들은 드안드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길.
"···그러니까 공연 중에 무슨 일이 터질 거란 소리네. 이거 내부 정보 맞지?"
아니나 다를까.
경호 업무를 맡은 진이 주최 측 내부 정보를 자신에게 흘린 것이라 판단한 그였다.
"설마 테러 예고? 이런 상황에 공연을 강행하는 이유가 뭐래."
합당한 질문에 진이 눈을 좌우로 굴렸다.
그러고는 침묵이 더 길어지기 전에 얼른 대답하니.
"쟤넨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는지 사안을 딱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거기에 경호에 대한 자신감도 있는 거 같고. 근데 나는 아무래도 느낌이 좀 쎄해서."
진이 굳이 느낌론까지 들먹이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분명 공연 중에 무슨 일이 터질 건 확실한 상황이니.
갑작스런 난리통에 저 트리오가 휘말릴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불특정 다수도 다수지만, 아무래도 내 사람한테 신경이 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고 양손에 총 대신 응원봉을 든 녀석들한테 밑도 끝도 없이 콘서트를 보지 말라고 할 수도 없으니, 지금으로선 위험을 상기시키는 게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겠지.
"그러니까 무슨 일이 터졌다 싶으면, 바로 사람들부터 챙겨서 안전한 곳으로 인솔하는 거야. 오케이?!"
그에 드안드레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만, 아니 우리만 믿어!"
***
콘서트 15분 전.
만석이 된 좌석을, 진이 백스테이지에서 바라봤다.
공연을 앞둔 무대 위에는 거대한 디스플레이가 있어 엘리나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증폭된 기대감이 공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진도 마음을 편안하게 먹었다.
어차피 병풍 취급을 받는 상황이 아닌가.
바로 뒤에서 가수가 춤추고 노래하는 와중에도, 눈앞에서 환호하는 팬들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경호원의 슬픈 숙명을 떠안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으니.
몰라, 이씨.
그냥 대놓고 보자.
보다가 무슨 일 생기면 그때 난입하든 하면 되지.
그리하여 완전히 책임감을 내려놓은 진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어슬렁어슬렁.
무대 뒤편을 산책하듯 걷고 있을 때였다.
"······?"
한순간 진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거나, 어깨를 툭툭 두드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뒷덜미가 섬뜩해졌을 뿐이었으니.
닭살이 돋은 살갗을 손으로 비비적대는 그의 귓가로 다급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스탠바이 1분 전이에요! 아직입니까?"
야외 대기실 앞. 굳게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는 스태프를 발견한 순간.
이미 진은 그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엘리나! 이제 진짜 나오셔야···!"
그러고는 달리는 속도 그대로 스태프를 낚아채니.
다음 순간.
와그작, 일그러진 철문이 포탄처럼 정면으로 사출됐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이 귓가를 때림과 동시에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카운트다운.
"10!" "9!" "8!" "7!"
허공에서 몸을 빙그르르 회전하며 속도를 줄인 진이 바닥에 착지했다.
"어으? 누, 누구?"
정신을 못 차리는 스태프가 어버버거리는 가운데.
그를 바닥에 내려놓은 진의 눈이 정면을 향했다.
저벅.
문짝이 통째로 뜯겨 나간 건물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하늘로 솟구친 은회색 머리카락이, 희번뜩 뒤집힌 눈동자가, 바닥에서 떨어져 허공을 유영하는 새하얀 발이 보인다.
엘리나.
사이킥 각성을 마친 그녀가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는 함성에 응답하는 것처럼.
"4!" "3!" "2!" "1!"
팟.
마침내 열을 센 경기장이 암전된다.
직후 무대 위로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화려한 조명이, 풍선처럼 부푼 군중의 긴장감을 화살처럼 관통했다.
와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꾸드득!!
불길한 파열음이 경기장 전역을 집어삼키니.
어느 순간 얼굴 위로 짙게 드리우는 그림자에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비명.
"씨, 씨발! 저거 뭐야!"
경기장 전역의 철골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통째로 우그러지고 있었다.
마치 불가항력의 외력을 만난 것처럼.
꾸드드득!!!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관객의 반응은 크게 셋으로 나뉘었다.
너무 놀라 넋을 놓은 부류.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부류.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는 부류.
마지막 부류가 유독 둔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가까웠으니.
그럴 것이, 그들은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관객들이라서.
이 순간, 그들의 눈에는 무대 위로 번쩍번쩍 부딪히는 두 남녀의 모습이 담겼을 뿐이라고.
살갗이 떨릴 정도로 강렬한, 연이은 격돌에서 마침내 뒤로 주르륵 밀린 쪽은 자줏빛 뇌광을 휘감은 사내였으니.
그의 맞은편 우뚝 선 엘리나의 모습에 열화와 같은 환호가 터졌다.
"연출 미쳤다!"
"시발! 이거지!"
박수갈채에 휘파람까지 아주 난리가 난 관객들이다.
그런 그들을 곁눈질로 확인한 진이 소리쳤다.
"야이씨! 빨리 안 튀어?!"
하지만 이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앰프에서 나오는 깊고 강렬한 비트가 경기장 전역에 울려 퍼진 결과.
그 웅혼한 진동에 몸을 맡긴 관객들은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기 바빴으니, 서로의 열기가 전해져와 마치 불꽃처럼 출렁거리기 시작했다고.
"어휴! 이 등신들!"
답답한 마음에 진이 이를 악문 순간.
───────!!
보이지 않는 힘이 진의 몸을 사방에서 죄여 든다.
마치 세상이 작은 원으로 줄어드는 듯한 압박감.
동시에 진이 본능적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보기에는 허접할지 몰라도, 외부에 노출되는 면적을 최소화하는 최고의 방법이라.
다음 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압력에 진이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에 올린 개미를 꽉 주먹 쥐어 죽일 때, 개미가 느끼게 될 외력이 이와 같을까.
단숨에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보이는 시야 속에서 진이 바닥을 박찼다.
그러고는 에라 모르겠다.
전력을 다해 엘리나를 걷어찬 그다.
당연하게도 관객들의 눈이 뒤집어졌다.
"야이 씨발놈아! 너 어디 살아?!"
"이건 과하잖아!"
"뭐야, 진짜 찬 거 아니지?!"
"엘리나! 엘리나?!"
셔틀콕의 단면처럼 생긴 관객석에서 유독 앞줄에 있는 놈들만 난리였다.
나머지는 우그러지는 철골을 발견하곤 식겁해 도망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퉤!
그사이 핏물 섞인 침을 바닥에 뱉는 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이가 없으려니 웃음이 나오더라고.
"진짜 상상도 못 했네."
엘리나를 경호하라더니.
이거 주어가 잘못됐잖아.
진이 속으로 상태창을 향해 쌍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태창은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다.
엘리나를 경호하란 말의 속뜻은, 엘리나를 학대하는 프로듀서와 그 주변인에게서 그녀를 지키라는 소리였으니.
물론 이쪽도 2위계에 오른 수인과 프로듀서 패거리를 상대했어야 하는 만큼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그녀가 각성하는 상황보다는 나았을 터.
물론 진은 그런 거 모른다.
저기 몸을 일으키는 사이커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을 뿐.
"야, 그냥 좀 누워있음 안 되냐?"
이제 막 관심을 가지게 된 연예인을 쥐어패야 하다니.
대체 왜 저렇게 된 거지?
염동력? 원래 사이커였어?
그야말로 난감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상황.
하지만 진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을 구태여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 바닥을 박찼으니.
콰앙!!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한 몸이 엘리나의 정수리를 향해 뒤꿈치를 내려찍었다.
문자 그대로 벼락같은 일격.
하지만 뒤꿈치가 목표한 타점에 도달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힘이 진을 후려친 것이 더 빨랐다.
"켁!"
투명한 벽에 착 달라붙은 모양새로 밀려나던 진이 그 너머로 블링크했다.
오른팔을 머리 뒤로 쭉 당긴 자세였다.
직후 손바닥 위로 생성된 뇌창을 불끈 움켜쥔 진이 그대로 팔을 힘껏 아래로 내지르니.
꽈릉─!!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자줏빛 낙뢰가 갈지자 난폭한 궤적을 그린 순간.
텅! 텅! 텅!
어디선가 날아든 철골들이 엘리나 앞에 뒤엉킨다.
금속의 울림이 무대 위를 가득 메우고, 모든 철골은 찰나지간 단단한 방벽을 세웠다.
그리고 떨어지는 낙뢰.
콰아앙!!
폭음을 동반한 충격파가 몸을 때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뒤에서 착지한 진이다.
잿빛 시선에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 사방팔방 비산하는 모습이 담겼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으니.
수천 개가 넘는 철편들이 이내 중력을 거스른 듯 허공에 우뚝 멈추고-
그 중심에서 엘리나가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머릿속 우주를 영접하느라 새하얗게 뒤집어진 눈이 초점 없이 이쪽을 향한다.
직후 정확히 진을 겨냥한 손이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물을 튀기듯 탁 펼쳐지니.
파앙-!!
마치 사출되듯, 음속을 돌파해 날아드는 철편에 진의 눈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파지지직!
거칠게 회전하는 광극. 그 안에서 뿜어진 강렬한 생체 전기가 신경계를 강화했다.
깊어진 깨달음이 벼락이 되어 뇌리를 관통하고.
이를 온전히 감당한 초인의 육체가 폭발적인 기세로 움직였다.
콰가가각!!
이 순간, 유성우처럼 빗발치는 철편을 제자리에서 받아치는 사내의 모습은 마치 폭풍과도 같아서.
도무지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격렬한 움직임에 관객들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저, 저게 무슨?"
"이거 퍼포먼스 맞아?"
"시발! 지금 그게 중요해?!"
경악이 환호로 변모하는 가운데.
탁!
마지막 철편을 얼굴 바로 앞에서 낚아챈 진이다.
이후 손을 휙 털어내는 그의 이마에서 빨간 실선이 생기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래도 경호가 맞아?"
이어진 질문에 시야의 구석에 반투명한 문장이 떠오른다.
[엘리나 비센트를 막으시오.]
어느새 달라진 조건을 힐끗 곁눈질로 확인한 진이 중얼거렸다.
"···그래, 까짓것 한 번 해보지 뭐."
이후 전신을 뒤덮은 뇌전이 한층 짙어지는 가운데.
좌우로 목을 뚝뚝 꺾은 진이 엘리나를 향해 말했다.
"미안한데 난 싸움은 안 봐줘."
< 84화 >
"와아악!!"
"나와! 나오라고!"
"도망쳐-!!!
사방에서 비명이 빗발친다.
카운트다운과 함께 시작된 재앙 때문이었다.
─────끼이익!
하늘, 아니 천장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마찰음.
강철의 기둥이 통째로 휘어진다.
변형된 구조물이 생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요동치고, 그 위를 따개비처럼 뒤덮은 진홍빛 녹이 분진처럼 쏟아지니.
이게 무슨 일이야, 달아나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원형을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변형된 구조물이 마치 괴물처럼 보여서.
그것도 그냥 괴물이 아니라, 수십 개의 강철 촉수를 휘두르는 부패한 군집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절로 악 소리가 터질 수밖엔.
"시바아알!! 비켜어어어!!"
"저, 저게 뭐냐고, 우악! 우악! 우악!"
잠깐의 멍때림을 뒤로하고 다시 힘차게 달아나기 시작한 관객들이다.
질서? 그런 거 없다.
체계? 누구세요.
애초에 시민 의식을 기대하기 힘든 다운타운의 주민들이었으니.
솔직히 이런 아비규환 속에 스태프들이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앞사람은 밀고, 뒷사람은 뿌리치고.
아주 난리, 난리, 개난리가 따로 없는 가운데.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인파 중에는 한껏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는 드안드레도 있었다.
"이게 무슨···?!"
공연 중에 무슨 일이 터질 수 있다는 언질을 듣긴 했지만, 그게 이런 상황일 줄이야.
상상을 초월한 광경에 사고 회로가 기능을 멈춘 것도 잠시.
뺨을 착착 때려 정신을 바로잡은 그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저, 저거 염동력인가?!"
"금속을 조종하는 능력일수도 있슴다!"
후커가 그리 대답했고-
"아무튼 초능력이라는 거네. 테러범이 사이커였어?"
드안드레가 콧잔등을 구기며 다시 무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보이는 건 열광하는 관객들.
난리통에도 시선을 한데 고정한 모습들이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드안드레가 흠칫 놀랐다.
저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그게 아니고서야 저기서 저럴 이유가 없······
지 않더라.
콰앙!!!
무대 위에서 격돌하는 두 남녀의 모습이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재생되고 있었으니까.
근데 그 면면들이 매우 익숙한.
"···잠시만, 저거 엘리나 아니야?"
그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그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거 같은데? 설마 사이킥 각성인 건가?"
그때 스크린 너머로 눈이 뒤집힌 아름다운 얼굴이 담기자, 이를 확인한 드안드레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맞네. 씨."
그제야 이 느닷없는 상황을 이해한 그가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혼란한 와중에 뒤처졌거나, 낙오된 관객들이 눈에 담기니.
그런 그들을 향해 첨단을 세우는 강철의 촉수가 보이더라고.
눈을 번쩍 뜬 그가 소리쳤다.
"일단 사람들부터 구해!"
"넵, 형님!!"
"···미치겠군."
동시에 후커와 그렉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건 드안드레도 매한가지라서.
"이 머저리들아! 정신 차려!!"
무대를 향해 뜀박질하는 링커의 두 손에서 내팽개쳐진 응원봉이 하늘을 날았다.
*
후웅!!
여러 철골이 뒤엉킨 강철의 촉수가 날아든다.
여러 철골이 뒤엉킨 강철의 촉수가 날아든다.
이를 확인한 진이 바닥을 박차 그 위로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몸을 돌리며 착지하는 순간, 발 아래의 금속 조각들이 강렬한 충격에 부서져 나가며, 폭약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으니.
일말의 주저도 없이 촉수 위를 내달리기 시작한 진이다.
쾅! 쾅! 쾅! 쾅!
내딛는 걸음마다 또렷한 족적을 남기며 돌진하는 그를 향해 사방에서 또 다른 촉수들이 짓쳐들었다.
진은 멈추지 않았다.
공중에 뛰어올라 몸을 비틀고, 자세를 낮춰 바닥을 스치듯 달리고, 금속의 촉수가 날아들자 그 위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이 모든 것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시간 동안 펼쳐졌으니.
평범한 이들의 시선에선 자줏빛 벼락이 금속의 미로를 순식간에 지그재그 주파하는 것처럼 보였을 터였다.
쾅!!
무언가 깨져 나가는 둔탁한 파열음.
다음 순간 진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모든 공격을 피해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그의 눈에 엘리나의 모습이 담겼다.
경기장을 통째로 구부러뜨려 강철의 군집체? 크라켄?
아무튼 뭐시기를 만든 장본인.
그녀의 코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재능이 신체의 내구도를 너무 앞서 나간 결과였다.
본인도 감당 못 할 힘을 무의식 속에서 펑펑 써댔으니, 반동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진은 상대가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콰앙!!
착지와 동시에 폭발적인 추진력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확 가까워지는 엘리나의 얼굴.
빠각, 진의 이마빡이 눈 뒤집힌 예쁜 얼굴과 부딪힌다.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진이 박치기를 선사했듯, 엘리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그를 후려친 결과였으니.
두어 걸음 밀려난 진이 다시 바닥을 쾅!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엘리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직후 팔을 힘껏 끌어당기며 올려 친 무릎이 복부에 가 닿는다.
펑!!
등 뒤로 둥그런 충격파가 터져 나올 정도의 공격.
분명 내장이 파열돼도 이상하지 않을 일격이었거늘.
엘리나는 쿨럭 마른기침을 뱉었을지언정 쓰러지지 않았다.
지금껏 줄기차게 쏴대던 에너지를 제 몸에 두른 것이다.
방어막은 타격을 흡수해 한곳으로 방출했으니, 그것이 등 뒤의 충격파로 시각화된 것이라.
놀랍게도 그 충격은 반투명한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휘돌더니 그대로 진의 얼굴을 쾅 후려갈겼다.
UFC 선수들에게 인터어가 종종 묻는 말이 있다.
당신이 본인 얼굴에 주먹을 날려 쓰러진다면, 그건 당신이 강한 걸까요? 아니면 약한 걸까요?
예컨대 펀치력과 맷집, 둘 중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두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는 질문 되시겠다.
이에 대한 진의 대답은···!
어우 잠시만. 여기가 어디예요?
살다 살다 내가 날린 공격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줄이야.
코흘리개 시절, 말싸움에서나 써먹던 무지개반사가 실존하는 거였어?
아픈 것도 아픈 건데, 솔직히 말하면 쪽팔린 게 더 크더라고.
뒤늦게 골수에 치미는 민망함.
진이 이를 아득 깨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주먹을 쾅 날리니.
파문을 그리며 울렁 요동친 보호막이 기다렸다는 듯 충격을 튕겨냈다.
이번에는 복부를 얻어맞은 진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곧 사나운 웃음을 짓길.
진짜 존나 아프네.
역시 난가?
나사 빠진 생각을 하며 숨을 흡 들이킨 그가 어김없이 멱살 쥔 손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이어지는 연타 세례.
당연하게도 모든 타격은 반박자 또는 한박자 늦게 퉁겨져 고스란히 진의 몸을 두들겼으니.
나 한 대, 너 한 대.
이 무슨 정직한 교환비인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거울치료를 당하는 진의 몸이 이리 들썩 저리 들썩.
하지만 끝끝내 멱살을 붙든 손만은 놓치지 않는다.
그저 우직하게 다음 공격을 이어나갈 뿐.
진이 이런 무식한 소모전을 택한 이유는 단순히 머리가 뜨거워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 순간 엘리나가 충격을 반사하는 것 외엔 이렇다 할 다른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진은 이를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라 이해했다.
유효타가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 코와 눈에서 피를 줄줄 쏟아내는 것만 봐도, 그녀의 정신력에 여유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몰아붙인다!
폭풍 같은 타격이 전방위로 엘리나의 몸을 두들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반격이 날아들지 않더라고.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진이 주먹을 우뚝 세운 순간.
꿀렁,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물결을 일으킨 보호막의 표면이 안에서부터 밖으로 깨져나가며, 그 안에 응집된 힘을 발산했다.
─────!!
피할 틈도 없이 거기에 맞아 날아간 진이다.
등으로 벽에 처박히자 쿨럭 핏물 섞인 기침이 흘러나왔다.
복부 안에서 끔찍한 통증이 물감처럼 번지는 걸 보니, 내장파열인가.
···심장은 아니네. 다행이다.
제 몸뚱어리에 대해 냉정한 진단을 내린 진이 끙차 몸을 일으켰다.
눈물이 찔끔, 아니 사실 줄줄 흐를 만큼 아팠지만 팔자 좋게 누워있을 순 없었다.
저기 보호막이 깨진 사이커가 비틀거리며 켁켁 각혈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젠 끝낼 시간이다, 판단을 마친 그가 마나를 다시 북돋울 때였다.
퓌요오오오!!!
느닷없는 맹금류의 포효에 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위로 젖혔다.
직후 유성처럼 떨어진 무언가가 지면 가까이서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그대로 엘리나의 머리를 쾅! 짓밟았다.
"이 씨발년!!"
그렇게 소리치는 존재는 맹금의 머리통을 한 수인이었다. 어깻죽지로 돋친 거대한 날개. 엘리나의 뒤통수를 지면 깊숙이 짓누른 발이 보였다.
뭐야, 저건.
순간 눈살을 찌푸린 진이지만,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렇듯 넘치는 생명력을 가진 수인이라면 딱 한 명뿐일 테니까.
말콤.
1년 전, 2위계에 올라섰다는 수인이자 엘리나의 경호실장.
근데 눈이 왜 저래?
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쓰러진 엘리나에게 폭언을 퍼붓는 그는 양쪽 눈이 짓이겨져 끈적한 피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으니까.
프로듀서를 포함한 경호원 전부가 새빨간 구슬이 되었을 때.
말콤은 눈을 당했다.
당연하게도 이는 엘리나의 짓이었으니, 의식을 완전히 놓은 와중에도 말콤이 가장 위험한 상대임을 본능적으로 인지한 것이다.
물론 안구를 노린 게 아니라, 머리통을 짜부라뜨리는 과정에서 가장 연약한 부위가 으깨졌을 뿐이었지만.
"버러지 같은 년이!"
뒤통수를 꽉 움켜쥔 거대한 발이 지면에 망치질을 반복했다.
물고문을 당하듯 위아래로 덜렁거리는 안면에는 어느새 얇은 보호막이 둘려있었지만, 이는 고작 완충제 역할에 그쳤을 뿐. 진에게 했던 것처럼 충격을 반사하진 못했다.
엘리나 또한 한계에 이른 것이 분명한 모양새.
그 증거로 사방팔방 미친 듯이 날뛰던 강철의 촉수도 그 움직임이 한껏 느려진 상태였다.
저러다 죽겠는데.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절만 시킬 생각이었던 자신과 달리, 말콤은 이대로 엘리나를 벌레마냥 뭉개버릴 기세였으니까.
문제는 말릴 명분도 없다는 것.
눈구멍에서 진물을 질질 흘리는 놈한테 자비를 권하는 건 양심이 없지 않나.
재구축이 있는 자신과 달리, 저 친구는 기계안을 끼워넣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 속에 진이 뒤통수를 긁적일 때였다.
또다시 시야의 구석에 상태창이 작게 떠오르니.
[엘리나 비센트를 경호하시오]
다시 한번 바뀐 상태창의 문구에 진이 고개를 갸웃.
왜 또 바뀌었대?
고장 났나?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니, 흐음?
귓가를 파고드는 말콤의 욕설이 뭔가 이상하더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으로 시작해-
~했을 텐데, 로 끝나는 문장 하나하나가 거를 타선이 없었다.
뭘 어쩌고 저째?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던 진이 어느 순간 손뼉을 짝 쳤다.
이 새끼들이 단체로 사람을 짐승처럼 굴렸구나, 깨닫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는 바로 말콤이 광증이 치밀어 올랐다는 사실이었으니, 수인 특유의 고질병이 끊어진 이성과 함께 발발한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끄러워! 알아! 안다고!"
허공을 향해 와락 소리친 놈이 느닷없이 엘리나의 옷을 찢기 시작했으니.
"너도 들었지? 다들 널 편안하게 죽이지 말라네. 이 썅년아."
광기에 물든 모습을 확인한 진이 바닥을 박찼다.
직후 새대가리를 향해 내달리는 그의 몸에서 번갯불이 치솟았다.
"······?!"
썩어도 준치라고.
눈은 멀었지만, 정확하게 진이 달려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말콤이다.
그대로 어깨를 들이받혀 날아가는 와중에도 손을 뻗은 놈이 진의 목을 움켜잡았다.
동시에 펼쳐지는 거대한 날개.
다음 순간 인근의 철근과 외벽이 차례로 박살 나기 시작했다. 탄환이 살갗을 관통하듯, 한데 뒤엉킨 수인과 인간이 경기장을 온몸으로 깨부수며 어지럽게 날뛰었다.
송골매는 최대 시속 390km로 하강할 수 있다던가.
날갯짓 몇 번에 아음속(亞音速)에 도달한 수인의 몸이 희끗한 잔상을 남기는 가운데, 그 너머에서 쾅쾅 귀청을 찢는 폭음이 연이어 터졌다.
할퀴듯 지나친 벽에 길게 남는 핏자국은 덤이니.
눈으로 쫓기 벅찬 방향 전환이 몇 번이나 이어졌을까.
어느 순간 눈부신 빛이 허공에서 터져 나옴에, 비스듬히 떨어진 거체가 땅에 처박혔다.
콰가가가가각!!!
지면을 부수며 수십 미터를 미끄러진 뒤에야 멈춘 그것은 날개 꺾인 수인과, 그런 수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움켜쥔 진이었다.
"케, 케겍."
바닥에 갈린 뒤통수에서 핏물을 왈칵왈칵 쏟아내는 수인이 손을 휘저어 진의 뺨을 할퀴었다.
하지만 이는 아무 의미 없는 저항이라.
"···너, 허억, 타하보다, 허억, 약하,구나?"
헐떡거리며 문장을 완성한 진이 뇌전을 머금은 주먹을 하늘 높이 추켜세웠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팔을 내리찍으니.
콰앙--!!
단숨에 곤죽이 된 면상이 그대로 살점과 핏물이 뒤섞인 바큇살을 그린 순간.
(완료!)
퀘스트와 말콤의 경험치가 한꺼번에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엑,윽!
정수리에 벼락 맞은 사람처럼 부들거리던 진이 털썩 대자를 그리며 드러누웠다.
그런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엘리나가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으니.
아무튼 경호 성공!
< 85화>
"허억, 허억."
드안드레가 숨을 헐떡거렸다.
마지막까지 이게 공연의 일부인 줄로만 알던 멍청한 관객놈을 질질 끌어낸 직후였다.
이럴 땐 험상궂은 외모가 도움이 된다.
떡대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덩치에 크롬으로 뒤덮은 치아.
치렁치렁한 레게머리까지.
여기에 인상만 팍 찡그려주면 어지간한 놈들은 알아서 꼬리를 내린다.
정작 본인은 양아치 같아 보인다는 이유로 썩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아무튼 관객들도 대피시켰겠다.
고개를 돌린 드안드레가 상황을 살폈다.
역시나 다른 쪽은 문제가 없더라.
얼빵하긴 해도 전투 기능이 탑재된 안드로이드 후커에 용병 생활로 잔뼈 굵은 그렉.
둘 다 강철 촉수가 날뛰는 경기장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상자와 낙오자들을 잘 인솔하는 중이었으니.
알아서 잘하는 쟤네는 냅두고 나나 정신 차리자.
곧바로 진홍색 분진 휘날리는 철골 사이를 내달리기 시작한 드안드레다.
그야말로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
"누구 없어?!"
난장판이 된 경기장을 콜록콜록 헤집으며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를 찾던 그때.
쿠쿠쿠쿠궁!
육중한 굉음이 사방에서 들려오니.
마침내 강철 촉수가 힘을 잃고 쓰러지더라고.
그에 드안드레가 눈을 번쩍.
진이 엘리나를 제압한 건가?!
작게 안도하며 무대 위로 시선을 옮기는데······, 웬걸?
날개폭이 3m에 이를 것 같은 수인이 엘리나의 뒤통수를 짓밟고 있더라.
거기서 그치지 않고 쾅쾅 지면에 망치질까지.
시발 이건 또 무슨.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강제로 정신을 번쩍 차린 드안드레였다.
파직!!!
한줄기 전광을 남긴 채 달려든 진이 수인의 몸을 들이받으니, 찰나지간 뒤얽힌 두 초인이 허공을 날아 사방을 박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꽈릉! 꽈릉! 연이어 터져 나오는 우렛소리.
퓌요오오-! 맹금의 포효.
삽시간에 깨지고 폭발하는 조명과 외벽들.
그 위로 길게 번지는 선명한 핏자국까지.
그야말로 저들이라 가능한 싸움에서 눈을 돌린 드안드레가 무대를 향해 달렸다.
"형님!"
"저, 저건 또 뭔데! 정신 나갈 것 같네."
어느새 뜀박질 대열에 나란히 합류한 후커와 그렉이 각각 소리친 순간.
콰가가가각!!!
추락인지, 내리꽂힌 건지.
아무튼 수십 미터를 미끄러져, 바닥에 기다란 핏자국을 남긴 새대가리가 컥컥 죽어가는 가운데, 그 위에서 주먹을 쥔 진이 마무리를 맺었다.
그 모습에 드안드레가 보폭을 크게 넓히며 외쳤다.
"두 사람 다 챙겨서 튀자!"
직후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의외로 엘리나가 아니었으니.
"지이이이인!!!!"
아주 기겁하는 링커의 모습에 피식거린 그렉이 서둘러 엘리나를 향해 다가갔다.
***
간만에 진이 병상에 누웠다.
입원 사유가 좀 길었다.
그러니까 쭉 불러보자면······
다발성 폐쇄골절 및 개방골절.
췌장 파열.
비장 파열.
복강 및 횡격막 손상.
복부 내 출혈 등등.
평범한 사람은 하나만 체크해도, 바로 요단강에서 자유형 가능한 치명적 체크리스트.
하지만 진은 용케(?) 살았고,
다발성 장기 부전(MOF)을 막기 위해 개복을 준비하던 마마만 꼴이 우습게 됐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몸뚱어린지······"
"왜 그래, 무사하면 다행인 거지."
"다행이라고? 넌 저게 무섭지도 않냐? 배가 부풀어 오를 정도로 복강 내에 출혈이 쌓였는데, 그게 알아서 가라앉았다고. 그게 어떤 의민지 알아?"
"글쎄. 뭔데?"
"나도 모르겠다, 이 지지배야!"
질린다는 듯 자리를 뜨는 중년 여인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은 칼리파다.
그러고는 시선을 병상으로 옮기며 천천히 입을 열길.
"···나한테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그에 한창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드안드레가 대답했다.
"나는 치료사 인맥이 좀 약해서."
"그래?"
칼리파가 그리 말하며 힐끗 옆을 바라봤다.
솔직히 의외긴 했다.
스트레이 스타디움에서 느닷없이 테러가 발발했다기에 서둘러 그리로 출발하려던 차.
그보다 빠르게 드안드레에게 연락이 왔다고.
'치료사가 필요해!'
'부상자 2명!'
'진이랑 엘리나야!'
다급한 목소리를 떠올린 그녀가 자연스레 팔짱을 낄 때였다.
"···아오 배때지야. 아으. 어. 우아."
시체처럼 누워있던 진이 대뜸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에 두 링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도 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으니.
"···낯선 천장? 아니지, 딱히 낯설지는 않은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링커들을 발견하곤 부스스 상체를 세우길.
"너희가 왜 같이 있대?"
그 천연한 물음에 칼리파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했으니.
"드안드레가?"
진이 새삼스러운 눈길을 던지자, 흑인 링커가 괘념치 말라는 듯 손을 휘적.
"별거 아니었어."
물론 말만 그랬을 뿐. 연신 콧구멍이 씰룩이는 게 딱 봐도 들뜬 티가 역력하더라고.
하지만 오늘은 얼마든지 즐겨도 된다.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고생했어. 다음에 나 필요한 일 있으면 얼마든지 불러줘."
진이 엄지를 척 추켜세웠다.
그러자 더욱 깊어지는 드안드레의 미소.
초신성이라 불릴 정도의 기대주와 커넥션이 더욱 공고해졌다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달아나는 기분이라.
오늘도 드안드레는 행복하다.
"···큭, 큭···"
어깨를 들썩들썩, 악당처럼 실실 쪼개는 그를 지나친 진의 시선이 칼리파에게 닿았다.
"엘리나는?"
"저기."
길게 뻗은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유리벽으로 구분된 개인실이 있었으니, 그곳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병상에 누운 엘리나가 보이더라고.
직후 칼리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코뼈가 부러졌고, 갈빗대도 여럿 나갔어. 그것 빼곤 괜찮다고 하더라. 아직은."
"···아직은?"
진의 물음에, 등받이 없는 의자를 당겨와 앉은 칼리파가 나란해진 눈높이에서 말했다.
"폭주한 사이커잖아. 짐작건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 거야. 일이 이 지경까지 치닫는 동안 주변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한 건지···"
"으음···"
말끝을 흐리는 진에게서 뭔가 냄새를 맡았을까.
"따로 아는 거라도 있어?"
"아, 그게-"
칼리파가 질문을 던졌고, 진은 욱신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입을 열었으니.
자연스레 주워섬긴 이야기라는 게,
전부 광증에 사로잡힌 말콤이 떠들어댄 말들을 옮겨낸 것이라서.
"···뭐?"
수위를 조절했음에도 칼리파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까진 막을 수가 없더라.
"못 할 짓들만 골라서 했네."
"내가 괜히 그 새대가리랑 싸운 게 아니라니까?"
"···그래,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칼리파가 작게 중얼거리며 의식 없는 엘리나와 그녀의 바이탈 사인이 담긴 모니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 천천히 입을 열길.
"30m가 넘는 거대한 철골을 엿가락처럼 휘어버린 사이코키네시스야. 숨기기엔 이미 목격자도, 증거도 너무 많은 상황이고."
"그럼 어떻게 되는데?"
"시정부에서 찾아오겠지."
담담한 결론에 진이 눈을 끔뻑.
"···찾아오면? 데려가서 막 고문하고 그래? 머리통 따서 전두엽 자르고?"
"설마. 그러기엔 너무 유명한 인물이잖아. 더군다나 사이킥 능력은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파헤치지 않은 지 오래야."
칼리파가 그렇게 말하며 손끝으로 진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자연스레 침대에 누운 진이 아그그, 아픈 소리를 내는 가운데.
매끈한 다리를 꼰 칼리파가 말을 이어갔다.
"대신 관리는 들어가겠지. 누가 뭐라 해도 엘리나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사이커란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어쩌면 힘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준 다음, 스카웃할지도 모를 일이고."
"···하긴."
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원석을 찾았는데, 그걸 냅다 부술 정도로 시정부가 멍청할 리가 없지.
"연예인 생활은 이걸로 끝이려나?"
"그럴지도. 물론 아닐 수도 있고. 적어도 무고한 사람을 해치진 않았으니까."
칼리파치곤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녀도 이런 상황이 낯설기는 매한가지일 터.
그걸 모르지 않는 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알아서 하겠지."
"그래. 그러니까 넌 몸부터 돌 봐. 가문 회전. 잊은 거 아니지?"
"아이, 그럼."
"출발하기 전에 가게 들리는 거 잊지 말고. 마마가 괜찮다고 할 때까진 답답해도 좀 얌전히 누워 있고."
어김없이 잔소리를 남긴 칼리파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아직도 큭큭거리는 드안드레의 등을 밀며 병원을 나섰다.
"······"
그제야 홀로 남겨진 진이 천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정부라···"
그러다 문뜩 손을 길게 뻗어 협탁에 놓인 소지품을 뒤적거리니.
그 안에서 단말기를 찾은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기 할 얘기가 있······아잇, 또 술 마셔?"
*
엘리나의 과거사는 평범했다.
평범함의 기준을 40번대 구역으로 낮춘다면 말이다.
남들처럼 가난했고, 불행했고, 외로웠던 그늘진 삶.
그곳에서 그녀를 구한 건 어느 뚱뚱한 사내였다.
10번대 구역에서 온 큰손이라는 그는, 엘리나가 잡부로 일하는 술집에 그 육중한 몸뚱어리를 드러냈으니.
온갖 비명이 난무한 끝에 접대부였던 섹스토이 6대가 모조리 박살 나고서야 그 흉포한 패악질이 끝났더라고.
그런 그가 당시 바닥을 걸레질하던 엘리나를 발견하고 명함을 내민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천금 같은 기회니 반드시 잡으란 가게 주인의 속닥거리는 첨언 따위는 관심 없었다.
다만 마음속으로 저울을 쟀을 뿐이다.
알코올 의존증에 지독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란 작자와 저 미친 돼지 중에 누가 나을지.
엘리나는 돼지를 선택했다.
그가 유명한 프로듀서라는 걸 알게 된 건 나중이었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이 출중함을 깨달은 것 또한 그즈음이었으니.
이후로는 뻔한 이야기라.
반강제로 불합리한 계약서에 지장을 찍고, 밤낮없이 혹사당하고, 얻어맞고, 약에 의존하게 만들어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게 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우주였다.
개연성 없이 도착한 광활한 별의 바다.
숨이 턱 막혔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들어 절로 비명이 터졌다.
살려달라고, 나 좀 꺼내달라고.
목이 찢어져라 발버둥 쳤지만, 티끌 같은 저항은 이 우주의 무엇도 바꿀 수 없었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점점 메마른 마음이 가루로 부서지는 감각에 엘리나가 낙담한 듯 몸을 맡기는 순간이었다.
화악.
따스한 온기가 몸을 감싼 것은.
그게 얼마나 극적이었는지.
또 얼마나 그리웠는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손발을 휘적인 엘리나가 눈앞의 불길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리고 꽉 끌어안았다.
*
"켁!"
진의 입에서 꽉 막힌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용수철처럼 솟구친 엘리나가 갑자기 목을 끌어안은 탓이었다.
그러게, 왜 옆에 있었냐 물어보면 할 말 있다.
갑자기 삐삐삐---
심전도가 위아래로 높이, 좌우로 좁게 난리를 쳐대니.
다음 순간, 엘리나 주변의 케비넷 따위가 우그러질 조짐을 보이더라고.
그러니 뭘 어째.
"이런!"
치료사 마마도 당황한 마당에 나라도 뭘 해야지.
그리하여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얗게 질린 손을 꽉 잡고 불길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
"야. 힘이 왜 이렇게······"
스탠딩 길로틴초크가 이러할까.
농담이 아니라 한순간 시야가 핑하고 돈 진이 힘껏 엘리나를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마주치는 아름다운 얼굴···
은 솔직히 아니다.
코가 부러져 퉁퉁 부은 탓에.
음, 역시 남자고 여자고 코가 중요하긴 해?
진이 그리 생각하는 가운데.
뒤늦게 초점이 돌아온 엘리나가 깜짝.
"다, 당신?"
큰 충격에 기억의 공백이 생긴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여기가 어디죠?로 시작되는 질문 폭격이 시작되더라고.
해서 진이 열심히 손 휘저어가며 설명했다.
네가 갑자기 사이킥 각성을 하는 바람에 공연이 긴급 중단되긴 했지만, 다행히 사상자는 없고, 아무래도 시정부 쪽에 인계될 것 같긴 한데 내가 인맥빨로 믿을 만한 사람을 불렀노라고.
그 모든 말을 들은 엘리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을 뿐이니,어느 순간 입술을 꽉 깨물며 말하길.
"······나 생각났어요."
직후 눈가에 맺힌 눈물이 길게 흘러내리는 모습에 진이 흠칫.
뭐야, 내가 쥐어팬 것 때문인가?
물론 그것도 떠올리긴 한 엘리나다.
한 사람의 사이커로 각성한 탓일까.
줄곧 기억나지 않았던, 내것이었으되 내가 아니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역재생되기 시작했으니.
그 과정에서 프로듀서와 경호원을 붉은 구슬로 만든 모습까지 생생하게 상기했다고.
당연하게도 죄책감은 없었다.
다만, 무고한 사람들이 죽지 않았음에 안도하고 또 안도했을 뿐.
문제는 진이 그걸 모른다는 거다.
나직한 흐느낌으로 시작해 어느새 아이처럼 펑펑 울기 시작한 엘리나의 모습에, 그가 곁에 선 치료사에게 목소릴 잔뜩 낮춰 말했다.
"···내가, 내가 너무 팼나 봐!"
다급한 가성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마마가 흠칫, 서둘러 두 사람을 바라보다 이내 해답을 찾았다는 양 진의 등짝을 착착 두드리며 턱짓하니.
"안아!"
"아, 안으라고?"
"그래!"
속닥거리는 대화가 오간 끝에 진이 조심스레 엘리나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어깨에 푹 파묻혀오는 얼굴.
"······미, 미안."
금세 뜨끈해지는 어깨를 느끼며 진이 그렇게 말했다.
어색한 토닥임과 함께.
< 86화 >
뉴스가 난리였다.
[팝스타 엘리나 비센트, 투어 중 사이킥 각성]
[거대 철골 구조물 조종해..오미크론급 사이커로 추정]
[소속사 측 '묵묵부답' 연일 주가 폭락하는 가운데, 대표 프로듀서 멀킨 비츠 실종]
[또다시 불거지는 책임론. 사이커 통제 여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잇따라...]
[팬클럽 엘리젯, 엘리나를 지지하는 성명문 발표. '언제나 함께할 것.']
[팝스타에서 사이커로, 그녀의 차후 행보는?]
"음···"
엘리나에 대한 내용으로 아주 도배가 된 토픽을 바라보던 진이 단말기를 내렸다.
그러고는 깍지 낀 손바닥을 베개마냥 베고 누우니, 천장을 바라보는 시선이 떨떠름했다.
비슷한 내용 제목만 바꿔 우려먹는 기사들과 텍스트로 전쟁을 벌이는 댓글란을 바라보자니, 싸우는 것보다 더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의 심기를 건드린 건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다른 하나는 바로-
왜 내 얘긴 없지?
여기서 잠깐!
진도 양심은 있다.
어차피 나 좋자고 한 일 아니던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던 즉.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싸웠는데 어쩌고저쩌고, 영양가 없는 공치사 따위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암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조용한 건 내심 서운하긴 하더라고.
아니 나는 그렇다고 쳐.
드안드레 애들은 관객을 몇이나 구했는데.
절로 입에서 에잉 쯧쯧, 하는 된소리가 나왔으니.
사실 잘 찾아보면 기사가 아예 없진 않았다.
가물에 콩 나듯, 폭주한 엘리나와 맞선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있기는 했으니까.
다만 목격자란 놈들이 죄다 횡설수설.
퍼포먼스와 싸움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통에 입소문을 타지 못했을 뿐.
하지만 괜찮다.
개중에 기계안 단 놈이 하나가 없겠는가.
여러 의미로 비밀이 없는 세상이니, 조만간 알아서 다 퍼지게 될 영상이라.
당장은 엘리나에 대한 이야기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을 뿐이다.
그리고 진은 거기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 않기로 생각했고.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데,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슬쩍 곁눈질을 하니-, 저거 또 왔네.
진이 누운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왜?"
"아, 저, 그···"
오갈 데 없는 손끝을 꼼지락대는 엘리나의 모습에 진이 한숨을 푹.
"벌써?"
"···네."
"에휴, 앉아."
진이 그리 말하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엘리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곧바로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어와 엉덩이를 붙이고 손을 착 내미는데, 익숙하다는 듯 그 손을 맞잡은 진이다.
동시에 투명한 불길이 아지랑이처럼 솟구쳤다.
적의 없이 타오른 그것은 그저 따스한 온기를 나눠줄 뿐이라서.
어느덧 말없이 눈을 감은 엘리나가 남은 손을 움직여 진의 손등 위로 포갰다.
두 손으로 꼭 쥔 타인의 손.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불길.
어딘지 경건하기까지 한 모양새였지만, 정작 진은 음소거로 하품하기 바빴다.
어으, 귀찮아.
한 번 열기를 내어준 게 문제였을까.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강아지처럼 손을 쓱 내미는 엘리나였다고.
난로 취급 뭔데.
진이 제 손을 위아래로 감싼 새하얀 손을 바라보며 그리 생각했다.
팬들이 보면 눈이 뒤집힐 만한 광경이었다.
본인들의 뮤즈와 손을 잡은 남자.
그런데 반대쪽 손으로는 코를 후비적거리는.
···신성 모독?! 아무튼 몰매를 맞아 마땅한.
그러거나 말거나 진은 귀찮을 뿐이다.
'노래하는 엘리나'의 팬인 그는 그렇지 않은 그녀에겐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진이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이유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얼마나 괴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서.
그런 이유로 줄곧 마나를 장작처럼 활활 태운 것이다.
덕분에 하품이 멎질 않았지만.
그리하여 진이 귀찮음과 피곤함이 뒤섞인 얼굴로 생각하길.
됐어, 좋게 좋게 생각하자.
어젯밤에 마나 회로 레벨도 5로 올렸잖아.
이참에 순수한 불길의 숙련도도 쌓고 좋지, 뭐.
고향 사람들은 원영식 사고라고 부르는 긍정 회로를, 진 또한 힘껏 돌릴 때였다.
"···감사합니다."
충분히 마음이 안정됐을까.
고개를 꾸벅 숙인 엘리나가 도망치듯 제자리로 돌아가더라고.
찰랑거리는 은회색 머리칼을 보며 진이 생각했다.
저러고 1시간도 안 돼서 또 오겠지···.
아니나 다를까.
슬픈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으니.
"저기···진?"
"아."
그로부터 이틀간 이어진 인간 난로의 삶에서 진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Q였다.
Q.
시정부 특수부대, 법칙인도자들 소속 요원.
대령의 부관이자 중력 마법을 사용하는 인물.
자주 틱틱거림.
본명 안 알려주려고 함.
진의 머릿속 인적 사항에 기재된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 병원을 찾은 그는, 어쩐지 피골이 상접한 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왔어?"
"부상이 심했나?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힘들다, 진짜."
진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는 밤낮없이 마나를 운용한 결과라.
Q를 바라보는 눈밑이 퀭.
그에 반해 거머리, 아니 엘리나의 얼굴은 반질반질 윤이 났으니.
골절된 비골 또한 마마의 치료에 제자리를 잡은바.
모두가 아는 그 아름다운 얼굴로 되돌아갔다고.
하지만 진은 이제 보기만 해도 넌더리가 나는.
뭐 아무튼.
"인도를 맡게 된 Q라고 합니다."
엘리나를 향해 사무적인 인사를 건네는 Q를 보며 진이 안심했다.
어차피 시정부로 인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모르는 얼굴이 쓱 데려가는 것보단 아는 사람이 낫지 않겠는가.
다행히 연락을 받은 해리슨 대령은 흔쾌히 제 부관을 보내겠노라 약속했으니, 어떻게 시정부 측과 원만하게 얘기가 끝난 모양이더라고.
이후 엘리나가 떠날 채비를 하는 가운데.
짧게나마 사담을 나누게 된 진과 Q였다.
"얼굴수집가는? 어떻게 진전은 있어?"
"소리가 커."
"아, 미안."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는 진에게 Q가 말했다.
"뮤트타운에서 사라진 이후로 행방이 묘연해. 모습을 자주 내비치는 놈이 아니니 다시 숨 고르기에 들어간 거겠지. 그래서 우리도 몇 년 만에 휴식 중이고."
이어진 말에 진이 헉.
"···잠시만. 그럼 몇 년 만에 쉬는 건데, 내가 부탁해서···?"
"그래."
짤막한 긍정에 진이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개인정비 시간 뺏긴 군인?
그리고 인맥 빨로 그걸 뺏은 놈?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아닌가.
절로 고개가 푹 떨어지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사죄에 Q가 피식거렸다.
"됐어. 애초에 나는 쉬는 게 어색해서."
"그 무슨···죽을병인지?"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
워커홀릭, 학술적으로는 과잉적응증후군.
이에 완벽한 면역체계를 갖춘 진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일에서 평안을 찾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나저나···"
그때 가볍게 운을 뗀 Q가, 저기 마마와 포옹을 나누는 엘리나를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추정치라곤 하지만, 잘도 오미크론(Omicron: 그리스 문자 15번째)급 사이커를 제압했군. 쉽지 않았을 텐데."
"뭐 어쩌다 보니?"
"······"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진의 대답에 한동안 말이 없던 Q는, 이윽고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엘리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대령님이 전해 달라 하시더군. 아직도 제안은 유효하다고."
"직업 군인은 관심 없대도."
"그렇게 전하지."
그사이 두 사람 앞에 다다른 엘리나가 말했다.
"준비 끝났어요."
그에 Q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죠."
"···아, 저. 잠시만."
"···?"
뒤돌아서는 Q를 불러세운 엘리나가 손짓으로 양해를 구한 뒤 그대로 시선을 진에게 옮겼다.
"저기, 진."
"왜? 10분 전에도 해줬잖아. 나 이제 진짜 피곤해서 안 돼. 진짜 힘들다고."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만한 이야기였지만, 엘리나는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으니.
이내 주머니를 뒤적거린 그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카드네?"
얼떨결에 건네받은 카드를 손안에서 빙글거리는 진에게 엘리나가 말했다.
"길리어트 호텔을 이용할 수 있는 키카드에요, 투어를 돌 때 묵으려고 만든 건데···당분간은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대신 써줄래요?"
"오오."
그러잖아도 먼 길 떠나야 하는 진이다.
호텔 이용권이라니.
빈말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고마워. 잘 쓸게."
"···제가 회사랑 맺은 계약이 엉망진창이라. 당장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미안해요."
"준 게 없긴 왜 없냐? 싸인만 100장은 받은 거 같은데."
개중에는 지인의 이름을 새긴 버전도 잔뜩 있었으니, 심지어 몇 줄씩 정성스럽게 문구도 새겨주지 않았던가.
특히 드안드레가 좋아할 거 같다고.
두툼한 링커의 얼굴을 떠올리며 킥킥거리는 진을, 엘리나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맑은 눈동자 안에 담긴 얼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향할 때까지.
"왜?"
"감사해요. 제 어리광을 받아주셔서···. 덕분에 살아갈 용기가 생겼어요."
"그, 그 정둔가?"
예상치 못한 감사 인사에 진이 코밑을 쓱 훔치는 순간.
두 팔 벌려 다가온 엘리나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작게 속삭이길.
"빌려주신 온기 잊지 않을게요."
"······"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까.
에라 기분이다, 마른오징어처럼 쥐어짠 마나로 손바닥에 불길을 일으킨 진이 가녀린 등을 토닥토닥.
어우, 어지러워.
한층 짙어진 눈그늘과 함께 품에서 천천히 떨어진 엘리나를 향해 진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다음에 봐요."
미소로 화답한 엘리나가 그제야 Q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가죠."
이후 호송차를 타고 떠나는 두 사람을 창문 너머로 지켜보던 진이 소리쳤다.
"나도 퇴원합니다!"
"뭣?! 잠깐···"
마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바닥으로 창틀을 짚은 진이 날렵한 동작으로 몸을 날렸다.
"찾지 마쇼!"
"미친!"
5층 높이에서 뛰어내린 환자를 쫓아 달려온 치료사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보았다.
근처 음식점으로 돌진하는 뒷모습을.
"······미친놈."
***
배를 불린 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드안드레의 사무실을 들르는 것이었다.
"진!"
"형님!"
언제나처럼 그를 반기는 드안드레와 후커 뿐만아니라, 그렉도 그곳에 함께 있었으니.
"왔나?"
이 정도면 사실상 가족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제 이름과 감사의 문구가 담긴 싸인을 받은 그들은 그게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즐거워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만족한 진이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간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솔로 인트라넷에 메시지 남겨도 되고."
드안드레가 뭐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거절!
바쁘다, 바빠. 펑크 사회.
쉴 틈도 없이 에넥도트로 향한 진이다.
마찬가지로 싸인부터 뿌린 뒤,
(여긴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하더라)
손님이 한산한 틈을 타 대화를 나눴다.
물론 회전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일로 딱 열흘 남았네. 출발하려는 시간은 용케 맞췄다?"
"아이, 그럼. 내가 누구?"
미래의 솔로왕이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귓바퀴에 손바닥을 두른 진이었지만, 칼리파는 그저 피식거릴 뿐이라.
"네가 이런 축제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어진 얘기에 진이 귀에서 손을 떼며 대답했다.
"이래저래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래, 이유가 뭐든 기왕 가는 거 잘하고 와."
"당연하지."
진이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짓자니, 포우가 말을 보탰다.
"당분간은 뵙기 어렵겠군요."
"왜 아쉬워?"
아니라고는 안 하는 바텐더와 그런 그를 보며 짓궂게 낄낄거린 진이다.
떠나는 마당에 수다라도 더 떨면 좋으련만, 그러기엔 오늘따라 손님이 많더라고.
그것도 그냥 손님이 아니라 브리핑을 기다리는 솔로들이었으니.
"엇?"
진을 알아본 솔로들(Lv2)이 먼저 인사를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러다간 방해만 될 듯싶어, 주섬주섬 자리를 뜰 준비를 하는 진에게 칼리파가 봉투를 내밀었다.
"가져가. 미리 구워둔 거야."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냄새로 이미 내용물이 뭔지 알아챈 진이다.
감격한 얼굴을 들어 올리는 그에게 칼리파가 말했다.
"다녀와."
그러고는 솔로들을 이끌고 브리핑 룸으로 걸어가니.
또각또각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포우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가게를 나섰다.
그렇게 몇 걸음을 나아가길 잠시.
문뜩 거리의 풍경을 눈에 담기 시작한 진이다.
하늘을 뒤덮은 끈적한 스모그, 햇빛을 대신한 네온사인이 차가운 그림자를 만들어낸 거리.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각기 다른 목적지를 가진 군상들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소음.
가슴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마치 어긋난 주파수 같은 미세한 균열음.
그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
다녀와.
진의 입꼬리가 작게 뒤틀렸다.
돌아올 곳이 생겼단 사실에 복잡한 기분을 느끼면서.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개를 휙휙 털어낸 그가 단말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거니.
"제키? 옆에 제니도 있어? 아, 다른 게 아니고, 당분간······"
진 에버나이트, 회전 참여를 위해 다운타운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 87화 >
시대를 막론하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존재한다.
다만 그 형태가 바뀔 뿐이니, 위대한 일곱 가문 또한 변화하는 세태에 맞춰 노련하게 새로운 사회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아주 굉장해서, 극도의 다원화 사회를 구축한 작금의 로스트 시티에서도 사람들은 위대한 일곱 가문을 존중하면서도 두려워한다.
빛과 장미의 시대가 막을 내린 지,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말이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전신을 사이버 의체로 대체한 고성능 사이보그가 가문의 순수주의자를 보며 기름침을 꿀꺽 삼키는 쇼츠는 그저 밈이 아니다.
단순히 낄낄 웃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농노의 신분을 탈피한 뒤 십수 세기가 흐른 오늘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그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단 방증이지 않은가.
이게 다 사회에 뿌리 박힌 인식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가문 회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가문 회전(家門會戰)
단순하게는 7년에 한 번, 18~30세의 젊은 순수주의자들이 모여 자웅을 겨루는 축제에 불과하지만, 이를 지배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보면······
"···뭐야, 이게."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선은 왼손의 단말기에 고정한 채, 오른손으론 열심히 리조또를 입으로 퍼나르는 중이었는데 덕분에 볼이 풍선처럼 부푼 모양새였다.
미어터질 듯한 입을 우물거리며 엄지를 슥슥 올린다.
그러자 이어지는 내용이란 게.
축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유대감을 강제로 조성한다는 둥, 지배층의 힘과 권위를 정당화하는 비겁한 수단이라는 둥.
아주 난리였으니.
그제야 해당 게시물의 부제가,
[천년에 걸친 세뇌, 그 끔찍한 진상에 대하여]
라는 것을 발견한 진이다.
가문 회전 검색하고 들어왔는데 왜 이딴 게?
더는 읽을 이유가 사라진 포스팅을 슥슥 훑어내리고 단말기를 탁 뒤집은 진이 식사에 열중했다.
여기서 잠깐! 저 음모론 같은 게시물이 터무니없는 소리만 늘어놓은 건 아니다.
실제로 일곱 가문은 격변하는 시대를 통제하는 대신, 유연한 대처를 통해 지금까지도 그 위상을 견고히 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들을 일루미나티 취급하기에는, 그 못지않게 발전한 세력들도 있었으니.
시정부와 메가코프에 대한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쑥 빠진 것이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래서 편협한 시야로는 공감을 얻을 수 없다고.
관련 내용을 머릿속에서 자비 없이 휘발시켜 버린 진이다.
자연스레 숟가락 움직이는 속도만 빨라졌으니.
한동안 냠냠 쩝쩝 식사를 해치우던 그가 어느 순간 창밖으로 눈길을 옮겼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건 구름을 향해 솟구친 회색의 능선. 소용돌이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회전교차로와 그 위를 오가는 수많은 자율주행 차량.
진의 시선이 가만히 그곳에 머물렀다.
묘한 기분이었다.
뭐랄까. 다운타운이 네온사인 아래 뒤섞인 희로애락의 용광로라면, 이곳은 보다 차갑게 정제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혀로 핥으면 파란 쇠맛이 날 것 같은 풍경.
그것이 진이 20번대 구역에서 받은 첫인상이었다.
어우, 저 로봇은 또 뭐래.
시선 끝에 쿵쿵 육중한 걸음을 내딛는 이족보행 기계가 담긴다.
두터운 장갑 위에 박힌 문구, LCPD.
로봇 경찰들도 돌아다니고, 과연 시정부가 관할하는 도시답달까.
여기선 대놓고 범죄는 못 저지르겠네.
진이 그리 생각하며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러곤 다시 흡입 시작!
왕성한 식탐이 빈 그릇으로 차곡차곡 탑을 쌓으니, 이후 계산대 앞에 선 그가 눈을 부릅떴다.
"뭐, 뭐가 이렇게 많이 나왔대?"
"먹은 만큼 나온 거죠. 어떻게, 확인해 드려요?"
직원이 그렇게 말하며 화면을 빙글 돌리는데, 그제야 음식 가격이 다운타운의 3배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진이다.
맛은 3배가 아니었는데?
충격적인 물가에 말을 잃은 진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계산을 마쳤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가게를 나서니.
오늘따라 다운타운이, 아늑했던 나만의 낡은 창고가 참 그립더라고.
진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이래서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거구나, 하고.
회전에 참여하기 위해 출발한 지도 어느덧 3일 차.
생각해보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초행길이란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30번대 구역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 무슨 입국 심사도 아니고 어찌나 깐깐하게 굴던지.
그나마 전과 없는 레벨4 솔로라는 게 확인됐기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며칠을 잡혀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고.
여하튼 어렵사리 들어온 30번대 구역.
그때부터는 내비게이션에 코를 박은 날의 연속이었다.
대도시에 막 상경한 촌놈처럼 여긴 어디야, 저긴 뭐람? 단말기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대조하며 더듬더듬 발길을 옮겼으니.
전투에 돌입하면 칼날처럼 번뜩이는 방향 감각이 왜 길을 찾을 때만 바보가 되는 건지, 원.
그렇게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경전철 타고, AV 타고, 버스 타고, 열차 타 도착한 지금의 20번대 구역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더 가야 한다.
올해 회전이 열리는 장소는 아나리온 가문의 영지가 있는 8구역이라고 했으니까.
언제 거기까지 가나 싶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기서부턴 '구역 횡단 열차'라고 하여 한 번에 도심을 가로지르는 이동 수단이 있다는 것이었으니.
"기차역은 또 어디야, 씨."
혼잣말을 중얼댄 진이 어김없이 단말기와 아이컨택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회전 교차로, 사거리, 카페, 우회전?
내가 선 곳에서 오른쪽 맞지? 잠시만···.
단말기를 이렇게 돌려야 하나? 아니면 이렇게?
온갖 뻘짓을 하며 나아가길 한참.
우여곡절 끝에 열차를 타는 데 성공한 진이다.
"어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좌석에 몸을 파묻으니, 그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슬라임처럼 축 늘어진 상체가 엉덩이를 좌석에서 밀어내 무릎이 저만치 앞으로 튀어 나갔다.
문제는 그 무릎에 다른 사람의 무릎이 닿았다는 것.
그에 꾸벅꾸벅 졸던 진이 흠칫.
"쓰읍-, 죄송."
입가를 타고 흐르는 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잡을 때였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가 넉살 좋은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온 것은.
진이 바라보니 팔짱을 낀 사내였다. 전체적으로 멀끔하게 생겼기 때문일까. 콧잔등을 가로지른 흉터가 유독 도드라져 보이더라고.
"형씨도 회전에 참여할 모양인가 봐?"
이어진 말에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턱에 생긴 침 자국을 손으로 문지르며 대답하길.
"티가 나?"
"나도 처음 회전에 참여할 때, 딱 형씨 같았거든. 오가는 길이 어찌나 먼 지···아, 내 소개를 안 했네."
사내가 손바닥을 스쳐 짝 소리를 냈다.
"라프라고 해. 형씨는?"
"진이야."
"오오. 간단해서 좋구만.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어도 될까나?"
"다운타운."
"다운타운이면···에어리어 47?"
사내, 라프가 놀란 눈을 떴다.
"진짜 멀리서 왔네. 피곤할 만했다."
40번대 구역에 대한 멸시인가 했더니, 단순히 거리가 멀어 놀란 모양이더라.
그사이 잠에서 깬 진이 묻길.
"그러는 그쪽은 어디서 왔는데?"
"나는 에어리어 36, 리건 시티. 와본 적 있어?"
"아···"
아니, 라고 대답하려던 진이 순간 고개를 갸웃.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더듬으니.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더라고.
"액타비스 컴퍼니?"
"오! 맞아. 거길 알아?"
알다마다, 그곳에서 킬기트와 치고받지 않았던가.
흑마법사들에게 납치된 발터를 찾아, 에안나 그리고 에릭과 함께 투입됐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게 벌써 몇 달 전이라니.
진이 새삼스럽단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뉴스에서 봤어. 무너졌다고."
"말도 마. 난리도 아니었어. 스틱스에 흑마법사까지 얽힌 대형 사고였다니까? 심지어 놈들과 싸운 게 솔라드 가문이란 소문도 돌더라. 하긴 그랬으니까 그 커다란 빌딩이 안에서부터 완전히 녹아버린 거 아니겠어?"
그에 진이 적당히 맞창구를 쳤다.
"그래, 진짜 뜨거웠겠더라."
"내 말이. 참, 그러고 보니 이번에 다운타운에서 큰 사건 터지지 않았나? 엄청 유명한 가수가 갑자기 사이커가 됐다며."
어쩌다 보니 그 모든 현장에 다 있었던 진이 괜스레 뺨을 긁적긁적.
"맞아, 그랬다더라."
대충 얼버무린 뒤 화제를 돌리니.
"그래서 이전에도 회전에 참여했다고?"
"아아. 맞아. 난 이번이 두 번째."
주먹 쥔 손에서 검지와 중지를 펼쳐 V를 만든 라프다.
그러자 자연스레 마디마디 박인 굳은살이 보이더라고.
"오우."
저게 다 노력의 흔적이란 생각에 진이 감탄하자, 그 반응이 제 손가락을 보고 나온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라프가 엣헴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는 게 있음 물어보라 이거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내가 뭘 모르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궁금한 것도 괜찮아?"
"고럼, 고럼. 뭐든 말해."
"이번 회전에서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이 있어?"
"엥? 너무 뻔하지 않나? 당연히 가문의 대표로 나온 후계들이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라프에게 진이 덧붙였다.
"그중에서."
"그중에서라···"
한동안 턱을 쓰다듬으며 골똘한 표정을 짓던 라프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한 명만 고른다면, 난 류카드 아나리온."
제 선택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진이 물었다.
"아나리온이면 이번에 회전을 개최하는 가문이네. 왜? 홈그라운드라서?"
"···엥?"
떫은 음식을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라프다.
그에 진이 고개를 갸우뚱.
왜, 홈 어드밴티지 몰라?
2002년 대한민국 4강 신화 읊어줘?
동시에 대답이 돌아오길.
"형씨 말대로 익숙한 장소라는 게 실력 발휘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번에 회전이 치러지는 장소가 8구역이 아니었다 해도 난 류카드를 골랐을 거 같네."
"그 정도야?"
"내 생각은 그래. 천고의 재능, 불세출의 검객. 이명부터 완전 낭만있잖아. 7년 전에도 우승 후보로 거론되긴 했어. 당시엔 나이가 한 살 모자라서 참여하진 못 했지만."
이어지는 설명에 진이 머릿속에 타닥타닥 새로운 정보를 입력했다.
류카드 아나리온.
검을 다루는 가문의 후계자.
천고의 재능, 불세출?
···잠시만.
내가 바라던 삶을 사는 애가 여기 있었네.
진의 표정이 절로 떨떠름해졌다.
고생이라곤 모르고 자랐겠구나, 편견에 가까운 생각이 배를 쿡쿡 찔러 복통이 일었으니.
곧바로 머릿속 인적 사항에 몇 줄을 더 기입하길.
온실 속 화초(일 거임)
고추 작(지 않을까)
안하무인(이 분명)
뇌피셜 가득한 결론을 내린 뒤 콧김을 푹-.
만나게 되거든 부랑아의 삶이 뭔지 보여주마 다짐했다고.
그러는 동안 라프의 말이 이어졌다.
"켄드릭 자하드도 대단하긴 하지. 20살도 되기 전에 2위계라. 캬, 그만큼 가문에서 거는 기대가 크다고 하더라고. 괜히 자하드의 희망이겠어?"
"아?"
홀로 전의를 불태우던 진이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소뇌왕. 걔가 자하드의 희망이었어?"
"형씨는 보기보다 훨씬 아는 게 없구만? 신선한데."
라프가 피식거리며 뒷말을 이어갔다.
"로칸 자하드가 스스로를 파문했단 얘기는 들어봤나 모르겠네. 원래라면 가주 직을 물려받아야 했을 양반이 갑자기 사라진 통에, 만뢰가 은퇴를 미뤄가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잖아."
"뭣?!"
동시에 진의 정수리에 천둥이 쳤다.
쩍, 짱돌 깨지는 소리를 동반한 깨달음.
"로, 로칸이 가주가 될 사람이었다고?"
머릿속으로 익숙한 대사가 스친다.
예나 선정이 딸이에요.
I Am Your Father-.
가문 내에서 중책을 맡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가주직을 맡을 정도의 성골이었을 줄이야.
뒤늦게 깨달은 진실에 아래턱이 툭 떨어졌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네."
"20년 전쯤에 회전을 2회 연속 우승한 괴물이야. 모르면 안 되지."
라프가 그렇게 말했고, 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하 웃었을 뿐이었다.
그사이에도 기차는 쭉쭉 나아갔다.
자기부상 기술을 통해 레일에 닿지 않고 미끄러지는 속도가 엄청났으니, 순식간에 뒤바뀌는 창밖의 풍경을 얼굴 옆에 두고 두 남자의 말이 오갔다.
라프는 타고난 떠벌이었고, 진은 원래 오는 사람 안 막는 호인이라.
자연스럽게 야, 너 하며 말까지 놓았으니.
이후에도 비슷한 관심사를 열심히 떠들어대는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
우뚝한 콧대를 가진 차가운 인상의 미인.
가슴께까지 흘러내린 흑발을 가볍게 쓸어 어깨 뒤로 넘긴 그녀가 빨간 미소를 지으니.
"또 만났네."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진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 88화 >
흔들림 없이 고요한 열차는 자신의 속도를 차창 너머의 풍경으로 증명했다.
구역 횡단 열차, 일명 하이퍼루프.
수천km에 이르는 노선을 정차 시간 포함, 15시간 만에 주파하는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뭐랄까. 조금 낭만이 없다고 해야 하나.
원래 기차 여행은 느긋한 맛인데 말이지.
"······"
흐릿한 잔상으로 스치는 별천지를, 그 진보한 세상을 진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새삼 느끼건대 정말 커다란 도시였다.
초거대 도시, 초거대 도시해서 그러려니 했지만 사실 이 정도면 가히 대륙급 면적 아닐까.
그 웅대한 규모에 놀라야 하는 건지.
그런 땅을 십수 시간 만에 가로지르는 기술력에 감탄해야 하는 건지.
진은 알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엔 자신은 기술적으로나 생각으로나 모든 것이 촌놈이었으니까.
마법과 과학이 혼재된 미래의 땅을 살아가는, 반도에서 온 이방인.
뭐 어쩌겠는가. 그게 난데.
옅은 미소와 함께 낭만과는 거리가 먼 차창에서 눈을 뗀 진이, 저기 먼저 잠든 라프처럼 팔짱을 끼고 눈꺼풀을 닫았다.
깨어날 때쯤 도착하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
[우리 열차는 잠시후 에어리어8에 도착하겠습니다.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도록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안내음에 부스스 눈을 뜬 진이다.
씁.
입에 고인 침부터 삼킨 뒤 팔을 뻗어 라프를 흔들어 깨우자, 푹 떨어진 고개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어, 왜. 어?!"
"도착했대."
잠이 덜 깬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초점 없는 맹한 얼굴로 열차에서 내린 진이다.
플랫폼으로 내려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재밌는 건 그들 대부분이 얼굴이 멀끔하더라는 것.
여기서 얼굴이 멀끔하다는 건, 잘생겼다는 게 아니라 머리에 전뇌 포트를 박지 않았단 뜻이었으니.
전국 순수주의자들이 여기 다 내렸구나!
여기도 순수주의자, 저기도 순수주의자.
이야, 저놈 저거 관자놀이 깨끗한 거 보게.
옅게나마 느껴지는 고향 땅의 향취에 진의 얼굴이 활짝.
절로 가벼워진 걸음으로 역을 벗어나는데-
와, 이건 또 뭐야.
완전 중세 유럽이네?
누천년 세월을 초월한 고풍스런 양식의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으니, 태양빛을 받아 다채롭게 반짝이는 스테인글라스의 상태가?
짜잔-, 네온사인이었답니다.
그뿐이랴.
담쟁이덩굴 뒤덮인 외벽에는 홀로그램 형태의 터치스크린이, 오래된 석상 위를 날아가는 건 비둘기가 아닌 배달 중인 드론이더라고.
괜히 가문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까. 그야말로 과거의 유산과 현대의 혁신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풍경이었다.
물론 진의 심미안에는 어딘지 해괴망측하게 보이는 조합이었지만 말이다.
생크림에 짜장면을 비빈 듯한...?
바나나 위에 케첩을 뿌린 느낌?
아닌가. 그건 좀 맛있을 거 같기도 하고.
어찌 됐든 진, 에어리어8 도착!
다운타운을 벗어난 지 나흘 만에 다다른 목적지였다.
"그래서 계획은 있고?"
라프의 물음에 진이 고개를 돌렸다.
"글쎄. 개최식까지 날짜도 좀 남았겠다. 도시 구경이나 해볼까 싶기도 하고. 여긴 뭐가 유명하대?"
단말기에 두드려보면 될 정보를 굳이 옆사람에게 묻는 건, 라프가 설명하길 좋아하는 성격임을 알기 때문이라.
결코 진이 핑거 프린스여서가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랑 투르넬 대성당은 가줘야지."
"···대성당?"
진의 표정이 똥을 씹었다. 과거 친구 따라 교회 갔다가 납치당한 경험이 떠오른 것이다.
"거기도 공짜밥 줘?"
물론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라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지만.
"공짜밥은 무슨. 대성당이 자선 단체도 아니고."
"그래?"
"어쩔래. 지금 출발할까?"
이어진 질문에 진이 망설였다.
고추 둘이 대성당 관광은 좀 아니지 않나 싶었기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이 마음을 다잡았다.
까짓것, 여기까지 왔는데 가보지 뭐.
파리에 가면 개선문과 에텔탑을.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을 봐야 하듯.
그랑 투, 뭐시기 대성당도 비슷한 느낌 아닐까.
그리하여 진이 손뼉을 짝.
아무 곳이나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가자!"
*
스페인의 전설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는 말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하느님이 만든 선이다, 라고.
그 철학은 그의 반평생이 담긴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미완)에 고스란히 녹아내렸으니-
만약 가우디가 200살쯤 장수하여 대성당을 완공했더라면, 지금 진이 바라보는 풍경을 재현해 내지 않았을까.
그만큼 입이 떡 벌어지는 풍경이었다.
"···우와."
그랑 투르넬 대성당.
인간의 창조성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세기의 걸작.
이를 바라보는 관광객들의 수많은 감상평 중 진의 것을 채택하자면, 눈 닿는 곳 모두가 황홀경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정도가 되시겠다.
해서 그저 우와, 우와.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처럼 고개를 움직였을 뿐이라.
단말기 사고 처음으로 사진도 찍은 진이다.
[미쳤음.]
짤막한 소감을 동반한 메시지를 지인들에게 전송한 뒤, 계속해서 성당을 둘러보는 그에게 라프가 말했다.
"태양신 루엘을 모시던 곳이었다더라. 빛과 장미의 시대에 교세가 가장 거대했다네."
"오오. 태양신."
청자의 적절한 리액션은 화자의 텐션을 올려주는 법이다.
진이 관심을 보인다 싶으니 라프가 히죽히죽.
콧잔등의 흉터를 구겨가며 말을 이었다.
"성세를 누리던 시절엔 7가문 이상의 영향력을 자랑했다는데···뭐, 그것도 옛말이지. 천 년이 지났어도 여전한 7가문과 다르게, 태양의 교단은 사라지고 대성당은 이제 관광 명소가 됐을 뿐이니까."
"그러네. 왜 망했대?"
"글쎄다. 그 부분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고 하던데, 난 역사학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네. 뭐 도태됐을 수도 있겠지.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신을 믿냐. 안 그래?"
그의 말마따나 순수주의자라고 다 신앙심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진으로선 신기한 일이긴 했다.
자신의 고향이라면 모를까.
이 세상은 천 년 전까지만 해도 신앙심이 물리적 에너지로 치환되는 곳이지 않았나.
신의 힘을 빌리던 이들을 조상으로 둔 로스트 시티의 주민들이, 심지어 순수주의자들조차 딱히 신을 찾지 않는 건 흥미롭긴 하더라고.
그리하여 진이 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이게 다 기술의 발전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혈청과 호르몬으로 신진대사를 조절하고, 주기적으로 DNA 코드를 재조정해 수명을 늘이는 시대가 아니던가.
자연스레 기도빨보단 약빨이 더 중요해진 걸 수도.
아무렴, 시대상이 그렇게 변한 거겠지.
순수주의자들도 마음이 떴을 만큼.
캬, 날카로웠다.
진이 만면에 뿌듯함을 머금은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동상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니.
성왕(聖王) 알드메인.
석조 단상처럼 생긴 작품 설명란을 쭉 읽어 내려갈 때였다.
"···정녕 떠나신 겁니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진이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웅성웅성 백색 소음이 가득한 이곳에서 유독 또렷하게 들리는 음성이었기에.
그러자 그곳에는 백금의 갑옷을 입은 웬 코스튬 플레이어가?
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추켜든 옆얼굴이 그린 듯이 멋진 사내였다.
그에 진이 저기요, 말을 걸려는 순간.
"여기 미술품 떼다 팔면 비싸려나?"
"아서라, 대성당 전체를 아나리온 가문이 관리하는 거 몰라? 대가리 썽둥 잘릴래?"
"시발, 말도 못 해? 그냥 궁금하다고."
서넛쯤 되는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친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졌을 땐, 직전까지 서 있던 코스튬 플레이어도 없더라고.
"이건 또 뭔···"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에 진이 눈을 비비적거리자니, 어느새 다가온 라프가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만하면 많이 둘러본 거 같은데. 슬슬 식사나 하러 갈까?"
"그래,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진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기습적으로 휙!
번개같이 뒤를 돌아봤지만, 뭐 없더라.
이런 식이면 난 모른다고, 새끼야.
제대로 된 힌트를 줘야지.
진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고,
상태창은 조용했다.
***
진의 식사는 어떤 의미에서 폭력적이다.
접시 위 음식을 마치 부모의 원수인 양 찍고, 가르고, 다져서 입으로 가져가니까.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먹지 않나요? 라고 묻는다면, 진은 그 속도가 남들의 2배 정도 된다는 게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입으로 가져가는 용량도 2배 정도 되니.
문과식 계산법에 따라 접시가 쌓이는 속도가 남들의 4배!
진과 가장 식사다운 식사를 많이 한 제키·제니 남매조차 때때로 흠칫거릴 정도의 속도거늘.
이를 처음 보는 라프는 말 다 했다.
"배에 거지가 들었나. 천천히 먹어, 인마."
"이 집, 스파게티, 참, 잘하네."
원래 맛있는 게 있으면 그것만 계속 시키는 진이라서.
손을 휘적휘적, 직원의 시선을 끌어온 뒤 빈접시를 들어 올리며 V를 짠!
내가 이렇게 잘 먹었다! 멋지지!
···가 아니라 똑같은 걸로 2접시 더 달라는 의미였으니.
같은 제스처를 이미 몇 번이나 본 직원이 주방을 향해 크게 외치길.
"미트볼 스파게티 두 접시 추가요!"
그 모습을 고개 돌려 지켜보던 라프가 헛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하루에 똥 몇 번 싸냐?"
"아씨. 밥 먹는데."
진이 짐짓 인상을 찌푸리자, 미안 미안 사과한 그가 포크로 면을 빙글빙글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식사가 이어지길 한참.
어느 순간 적당히 불러오는 배에 대화할 여유가 생긴 진이 말했다.
"넌 어쩌다 회전에 참여하게 된 건데?"
쑥 들어온 질문에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라프가 대답했다.
"이유야 뭐 이것저것 많은데. 일단 견식을 넓히려는 게 제일 크지."
"견식?"
"가문의 후계들이 모이는 자리잖아. 또래라도 바라보는 세상이 아예 다르다고. 그런 녀석들이 싸우는 걸 구경하고, 운이 좋으면 한 번 겨뤄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안 오고 배기겠어."
그렇게 말한 라프가 검지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모르지. 그런 경험들이 막힌 벽을 뚫는 계기가 되어줄지."
"그렇구만."
"그러는 넌? 다른 이유라도 있고?"
그에 진이 위로 뜬 눈을 좌우로 움직이며 말했다.
"재밌을 거 같아서? 궁금한 것도 있고."
"재미. 중요하지."
라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진도 마지막 접시를 비웠다.
그러고 나니 늦은 저녁이라.
자연스럽게 가게 앞에서 헤어지기로 한 두 사람이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서로 묵으려는 숙소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재밌었다. 심심하면 연락하든지."
번호를 교환한 라프가 그 말을 끝으로 멀어지자, 진이 내비게이션을 실행시킨 단말기에 눈길을 줬다.
그러고는 화면과 주변 환경을 대조하며 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그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빌딩 앞.
그 외관에 적힌 이름.
호텔 길리어트(Hotel Gilliott)
로스트 시티를 대표하는 럭셔리 호텔 그룹이었다.
"···여기 맞지?"
40층에 달하는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본 진이 작게 중얼거리며 으리으리한 정문을 향해 나아갔다.
뭔가 애매한 느낌에 정문 대신 쪽문으로 입장하자, 대리석 바닥 반짝이는 로비가 두 눈 가득 담겼다.
"저, 그 숙박을 하러 왔는데."
쭈뼛쭈뼛 주변 눈치를 살피며 프론트데스크로 다가간 진의 말에, 문이 열린 순간부터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리셉션 직원이 웃으며 말하길.
"예약하셨나요?"
"아뇨."
"그럼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일반 객실 1박에 120만 크레딧···"
띠용! 하고 몸이 튀어 오를 만한 가격에 진이 한동안 귀를 닫고 뇌를 보호했다.
그러고는 직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품에서 카드를 내밀었으니.
"이걸로 대체 가능한가요?"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건네받은 카드를 스캐너처럼 생긴 장비에 찍은 직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엘리나 비센트 님의 카드로군요."
"아. 이거 훔친 게 아니고···"
진이 얼른 상황을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아,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 소유주께서 양도하셨다 기재되어 있네요."
직원이 그렇게 말하며 진의 얼굴을 기계안으로 스캔하니, 이윽고 그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길리어트 호텔에 방문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진 에버나이트 님."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양복을 쫙 갖춰 입은 컨시어지가 공손한 자세로 자신을 따라오라 앞장섰으니, 그 뒤를 따라 탑승한 승강기가 그대로 38층으로 직행하더라고.
이후 VIP 어쩌고, 보안이 저쩌고.
컨시어지가 뭐라 설명하는데 진은 그냥 네네, 고개를 끄덕일 뿐이라.
곧이어 띵-하는 소리와 함께 목적지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얼떨결에 밖으로 내리자,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럼 편안한 휴식 되시길."
뒤늦게 닫힌 문을 확인한 진이 뒤통수를 긁적긁적.
세인트 블랙이라고 했지.
자신의 객실 이름을 되뇌며, 매우 개인적이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홀을 지나칠 때였다.
저기 한 구석에 모여 담소를 나누던 남녀 가운데 몇몇 시선이 진을 향하니.
"······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본인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진이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익숙한 면면.
"에안나?"
에안나 솔라드.
간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을 지나친 눈동자가 그 옆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담았다.
"어이, 소뇌왕!"
그와 동시에 켄드릭이 입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힘차게 분사했다.
"푸웁!!!!!"
< 89화 >
7가문 사이엔 유서 깊은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과거, 인편·마편 등으로 정보를 주고받았던 시절부터 존재했던 그들만의 작은 사회.
특이하게도 이름은 없다.
이유인즉, 이름에는 힘이 있으니 명명된 7가문의 결속은 지엄한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음이라.
괜한 잡음 만들지 말자는 조상 세대의 판단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해서 이들의 모임에는 이름이 없다.
그저 이유만이 존재할 뿐.
그리고 지금.
길리어트 호텔 38층, 오직 VIP들을 위한 홀에 비슷한 연령대의 남녀가 넷 모였다.
남자 둘, 여자 둘.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만에 보는 사이었지만 썩 반가워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도리어 불편한 기류가 감돌기까지 했으니,
이어지는 침묵을 끊어낸 것은 나직한 한마디였다.
"···우리가 전부라고?"
목소리의 주인은 선이 또렷한 미남이었다. 고급스러운 정장을 빼입고 광택 흐르는 구두를 신었는데, 단추를 풀어 느슨한 와이셔츠 안으로 단단한 흉근의 윤곽이 범상치 않았다.
좋게 말하면 절제된 야성미요, 속된 말로는 여자 여럿 울리게 생긴 이 남자의 이름은 켄드릭 자하드.
세간에는 소뇌왕이라 불리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3명이나 안 모인 건 심각한 것 같은데. 안 그래?"
그러자 합석한 이들에게서 각기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서로 다른 느낌으로 아름다운 두 여인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한숨을 내쉬며 묵묵부답 말을 아꼈고.
지금껏 난처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다른 셋의 눈치만 살피던 청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류카드 형님이나 카를로스는 그렇다 쳐도 세실 누님은 좀 의외긴 하네요···하하."
그에 켄드릭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 냉병기를 다루는 놈들이 문제다.
류카드 아나리온.
카를로스 거슈타인.
하나는 검 말고는 세상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놈이고,
다른 하나는 귀찮아서 숨은 어떻게 쉬나 싶을 정도로 태생이 빈대다.
그런 주제에 각각 불세출의 검객, 창의 귀신으로 불리니, 심지어 이 자식들 가주직도 따놓은 당상이라더라.
그 점이 소뇌왕의 심기를 거슬렀다.
누구는 할아버지 눈에 들겠다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밤잠 줄여가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거늘.
저흰 아쉬울 게 없다 이건가?
아무리 그래도 모임은 나와야지.
누구는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켄드릭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모습에 그의 낯빛을 주식 차트처럼 들여다보던 청년이 얼른 와인을 따랐다.
"형님! 일단 드시죠!"
켄드릭의 기분이 음봉을 쳤으니, 이땐 물이든 술이든 타야 한다.
그것이 이 모임에서 가장 연소자(年少者)인 그가 살아남는 방법이라.
데이어 하칸.
대지의 힘을 다룬다는 하칸 가문. 그 대표로 출전한 청년을 향해, 누군가 입을 열었다.
"세실 언니는 계속 연락이 안 돼?"
그렇게 묻는 이는 흰 티에 청바지를 걸친 여인, 에안나였다.
에안나 솔라드.
솔라드의 전대 가주가 말년에 품은 고명딸이자, 현 가주의 막냇동생.
그리고 한때 진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료.
그런 그녀의 물음에 청년, 데이어가 말했다.
"네. 참석이 힘들 것 같단 전화가 마지막이었네요. 아마 바쁜 일이 있으신 거 아닐까요?"
그러자 돌아오는 차가운 목소리.
"하, 바쁜 일은 무슨. 원래라면 테아한테 밀려서 회전 구경도 못했을 계집애가 어울리지 않게 비싼 척이야."
여태 한마디도 없던 여인이 코웃음 치며 창밖의 야경에 시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에 데이어가 아하하 기계적인 미소를 짓는 가운데.
와인을 홀짝이던 켄드릭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길.
"···개판이군. 가문을 대표하는 이들이 이렇게 책임감이 결여되어서야."
그러면서 류카드를 재수 없는 칼잽이놈, 카를로스를 나무늘보 같은 창잡이라 까내리는데 정작 똑같이 불참한 세실은 입에 담지도 않더라고.
참 투명하다고 해야 할까.
같은 천재 소리를 듣고 자라 저보다 먼저 가주직을 확정 지은 두 사람과 달리, 에스콰이어에게 밀린 직계에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가주직에 목을 매는 그다운 반응이었다.
짐작건대 세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오히려 친근하게 말을 걸지 않았을까.
경쟁자가 아니라 판단되면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켄드릭이었으니까.
물론 이는 아무 의미 없는 가정에 불과했으니.
"형님 한 잔 더 드려요?"
이 와중에 데이어는 토라진 형님 마음 달래주기 바쁘지.
다른 하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야경만 바라보고 있지.
에안나로선 이 상황이 다 지겹기만 했다.
···이래서 참석하기 싫었는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게 다 나이가 애매해서 문제라고.
가문의 중책을 책임진 오빠들은 나이며 직책이며 더는 회전에 참여할 상황이 아니고.
조카들은 아직 어리거나 준비가 부족했다.
그리하여 차례가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물론 막냇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가주께선 다칠 것 같으면 그냥 적당히 져주고 돌아오라 말씀하시긴 했지만 말이다.
"하-"
어쨌거나 저쨌거나 답이 없는 분위기에 그녀가 한숨을 내쉴 때였다.
띵-
멀리 엘리베이터 도착하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후 누군가 그 안에서 내려서니, 무심결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에안나다.
그러자 보이는 익숙한 옆모습.
자연스럽게 놀란 얼굴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여니.
"······진?"
쓱 고개를 돌리는 상대의 얼굴에 서서히 반가움이 담겼다.
"에안나?"
그 목소리에 켄드릭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이어지는 밝은 인사.
"어이, 소뇌왕!"
켄드릭의 입에서 분수쇼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
"오."
진이 감탄했다.
켄드릭의 입에서 분사된 와인이 허공에서 결정의 형태로 순식간에 얼어붙었기 때문에.
"······"
이후 창밖을 바라보던 서릿발 같은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눈꼬리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는데, 진으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뭐 어떠랴.
그러잖아도 낯선 호텔의 분위기가 영 껄끄럽던 차.
익숙한 얼굴을 둘이나 발견한 그가 당장에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자신을 향해 몸을 일으키는 에안나를 향해 미소 짓길.
"간만이다야."
정다운 인사와 함께 가벼운 포옹이 이어졌다.
다만 에안나는 악수를 위해 팔을 뻗었으니, 어색하게 안긴 모양새가 되어 딱딱하게 굳었을 뿐이라.
"아."
당황한 표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떨어진 진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어, 소뇌 왕."
"네, 네가, 여길, 왜?"
"어, 그래. 나도 반갑다."
저답지 않게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짓는 켄드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곁에 자리를 잡은 진이다.
그러고는 너는 누구세요? 라는 표정을 짓는 맞은편의 남녀를 향해 입을 열길.
"진이라고 해. 반갑다."
느닷없는 통성명.
원래라면 대꾸할 이유가 없었지만, 까탈스런 켄트릭에게 친근하게 굴고 에안나와 포옹을 나눌 정도의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데이어 하칸입니다."
"···카트리나 마르지에."
돌아온 두 사람의 대답에 진의 눈이 커졌다.
"오, 나 알아. 하칸, 마르지에!"
손뼉을 짝 치는 모습이 마치 간만에 아는 문제를 발견한 열등생의 그것과 같다.
회전에 참여하겠다고 최근 몇 주 열심히 가문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던가.
자세한 역사까진 몰라도 이젠 이름과 특색 정도는 안다고.
배운 티를 내고 싶어 굼질거리던 입이 냅다 선수를 쳤다.
"하칸은 대지고 마르지에는 얼음 맞지?"
순수주의자면 다섯 살배기도 알 법한 이야기였지만, 말하는 사람이 워낙 당당하니 분위기에 휩쓸린 데이어가 고개를 끄덕끄덕.
"그, 그렇죠?"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보니 진과 악수 중인 자신을 발견한 그가 옅게 웃었다.
숨 막히던 분위기가 상대의 등장과 함께 스르륵 풀린 것을 느낀 것이다.
모임의 막내로서 형님·누님들의 비위를 맞추려 부단히 노력하던 그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손님일 수밖엔.
요약하면 아무튼 호감인 상황.
"와인 한 잔 드릴까요?"
"아니, 난 술 못 마셔. 콜라로 주라."
"아, 넵! 여기! 콜라 한 잔!"
데이어가 그리 외치는 가운데.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진을 밀어낸 켄드릭이 아까 했던 이야기를 다시 물었다.
"대답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 그야 회전에 참여하려고."
"뭣?! 내가 분명······"
거기까지 말한 켄드릭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순간 자신에게 쏟아진 시선 때문이었는데,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최근 할아버지의 관심이 이 망아지 같은 녀석을 향하고 있음을 들킬까, 머릿속에서 문장을 정리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 혹시 가문에서 입적 제안을 받은 거냐?"
"아니?"
아니란다. 그러면 일단은 안심이다.
설마하니 가주께서 접촉한 게 아닐까 식겁했던 켄드릭이 문뜩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회전은 굳이 왜 참여하려고?"
"내 맘이지, 인마.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너한테 보고해야 돼?"
뚱한 표정으로 켄드릭의 말을 받아친 진이 고개를 돌리며 입을 뗐다.
"누가 소뇌 왕 아니랄까 봐. 애가 융통성이 없어요. 왜 이렇게 취조를 해대. 안 그래?"
동의를 구하는 시선에 데이어가 눈길을 슬쩍 피했다.
그러면서도 입술을 안으로 쓱 말아넣는 모습이 영락없이 웃음을 참는 표정이라.
들어버린 것이다. 소뇌^왕을.
데이어의 마음속에서 진의 호감도가 한층 상승하는 순간이었다.
그사이 근사한 유리잔에 담긴 콜라가 테이블 위로 내려서니, 정중한 인사와 함께 뒤돌아서는 직원을 바라보며 진이 어깨를 으쓱.
"그냥 캔으로 줘도 되는데."
괜히 비싼 호텔이 아니구나, 생각한 그가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하길.
"자자, 반갑습니다."
테이블 중앙으로 쑥 치고 들어오는 팔에 데이어와 에안나가 본인들의 잔을 내밀었다.
이후 자신을 카트리나라 소개한 마르지에 가문의 여식까지 건배에 참여.
청아한 소리와 함께 맞닿은 잔들이 각기 흩어져 제 주인의 입술에 포개졌다. 물론 켄드릭만 빼고.
그의 얼굴은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을 욕할 때보다 더 굳어졌으니, 현 상황이 그저 당황스럽고 열받기만 해서.
뒤늦게 동생들 앞에서 분수쇼를 시전했다는 수치심까지 더해진 결과. 와인 한잔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다.
용서하지 않겠다.
죄목도 정해졌다.
할아버지의 관심을 가져간 죄.
갑자기 회전에 참여한다고 사람을 당황하게 한 죄.
동생들 앞에서 사람 얼굴을 낯 뜨겁게 만든 죄.
사형 확정.
제발 본선까지 올라와라.
친히 박살 내주마.
혼자 전의를 활활 불태우는 소뇌왕과 달리 나머지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형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아이, 그럼. 가능하지."
미친 친화력으로 데이어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한 진이다.
이는 데이어가 원체 살가운 성향인 것도 한몫했으니, 이후로도 진을 붙잡고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더라고.
그럴 때마다 진은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은 대답하되, 상대가 곤란할 법한 이야기들은 대충 얼버무렸다.
예컨대 에안나와 어떻게 알게 됐냐는 질문이 그랬다.
실종된 남자친구를 찾겠다고 에넥도트를 방문했다는 개인적인 얘기를 당사자의 허락도 없이 어떻게 늘어놓겠는가.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물론 위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뭐든 신나게 대답한 그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진의 활약상을 알게 됐으니.
"뮤트타운 내전이라면 들은 적 있습니다. 형님이 그 전란을 막은 당사자라니. 정말 대단한데요?"
"엘리나 비센트와 싸운 인물이 당신이었어? 그녀에게 키카드를 양도받았고?"
만족스러운 리액션이 이어지는 가운데.
본인의 단말기를 꾹꾹 눌러 솔로 인트라넷을 뒤적이던 카트리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초신성이라 재밌네."
여태 얼음장처럼 차갑던 얼굴이 그제야 조금 누그러지니, 그 모습이 마치 상대가 자신과 어울릴 만한 최소한의 자격을 갖췄음을 인정하는 듯한 모습이라.
마침내 처음으로 진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보아하니 자전을 각성한 방계 같은데. 왜 자하드에 입적하지 않은 거지? 혹시 에스콰이어 신분이면 회전에 참여하지 못할 걸 염두에 둬서?"
하지만 그녀가 대답을 듣는 일은 없었다.
꾸르륵-
우렁찬 소리와 함께 아랫배를 짚은 진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으니까.
"미안한데. 다음에 얘기하자."
"···갑자기 왜?"
"아까 미트볼 스파게티를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신호 왔어. 간다."
부끄러움을 잊은 대답과 함께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 그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직계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긴장해. 난 우승하려고 왔거든."
그러더니 몸을 돌려 후다닥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
"······"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데이어가 뒤늦게 켄드릭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멀어지는 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 파직! 번갯불이 솟구쳤으니, 그건 급똥에 질문이 패스당한 카트리나도 매한가지라.
쩌저저적-
서리가 번지기 시작한 창문에 데이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찰나.
"그럼, 나도 이만 쉬러 갈게."
기다렸다는 듯 에안나마저 자리를 뜨는 것이 아닌가.
"누, 누님?"
졸지에 분노한 두 사람의 사이에 노출된 그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두 분 다 일단 진정을······"
***
다음날.
궁궐 같은 객실에서 하루를 보낸 진이 든든하게 조식을 챙겨 먹은 뒤 호텔을 나섰다.
이후 이색적인 8구역의 풍경을 눈에 새길 틈도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접수처까지 이동한 그다.
길게 늘어선 대기줄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자연스레 그리로 합류.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직원을 마주한 진의 몸을 연푸른빛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 쭉 훑었다.
"이름이?"
"진 에버나이트."
"등록 완료되었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기다림에 비하면 허무할 정도로 빠른 일 처리에 진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옆으로 물러선 순간.
열흘 가까이 조용하던 상태창이 안녕! 모습을 드러냈다.
「가문 회전」━━━━━━━━━━━━
7년 만에 돌아온 순수주의자들의 축제.
대회에서 우승해 당신을 증명하시오.
*보상 퍽 XP 30,000
━━━━━━━━━━━━━━━━━━
"아."
간접적으로 난이도를 스포당한 진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 90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