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
뮤트타운 상공에 거대한 열꽃이 피었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열기.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느슨해진 추격에 숨을 고르던 저항군 측 생존자들과 지원 요청을 받고 '플랫 아이언'으로 모여들던 TB의 병력.
그리고 모든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던 시정부의 요원들까지.
모두가 그 폭발을 보았다.
다음 순간.
그들 모두가 움직였다.
각자 할 일을 찾아서.
*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입속을 가득 채운 텁텁하고 까끌까끌한 식감.
타고 익어버린 매캐한 냄새.
그리고 전신을 도려내는 듯한 끔찍한 고통.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고통만 오롯이 남은 세상에서 진이 후회했다.
씨이발, 괜히 맞았다.
물론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다.
예상대로 살아남긴 했으되,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았기에 죽도록 괴로운 상황.
이는 불가해한 재생력이 죽은 신경을 되살린 탓이라.
제 기능을 회복한 신경이 가장 먼저 한 일이라고 해봐야 격통을 열심히 뇌로 퍼 나르는 것이라서.
그리하여 윽! 악! 억
문자 그대로 죽지 못해 더 고통스러운 상황인 것이다.
일어, 나야, 하, 는데.
이 짧은 한 문장을 머릿속에서 완성하기 위해 초 단위로 기절하고 깨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어느 순간 깜깜하기만 했던 눈앞에 흐릿하게 윤곽이 맺히길 시작하더라고.
끔찍한 열기에 단백질 변성이 일어난 망막이 재구축을 시작한 것이었으니, 기능을 다한 예전 눈이 흐물텅하게 녹아내려선 눈물처럼 줄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뵈는 게 없어 다행이었다.
만약 진이 이 꼴을 직접 보았더라면 그 참혹한 회복 과정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테니까.
인체연성? 강철의 연금술사?
···라고 중얼거리면서.
다행히 그런 상황은 면한 그가 눈앞이 침침한 가운데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근데 뭔가 이상하더라.
힘이 안 들어가는 건 둘째 치고,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느낌이랄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손바닥을 얼굴 앞으로 바짝 붙인 진이다.
그러자 드러나는 붉은 진실.
미친, 손가락이 왜 4개?
어렴풋하게 길쭉길쭉한 살색의 윤곽 중 하나가 댕강 잘려있더라고.
엄지부터 소지까지 차례차례 구부려보니 와씨 중지가 없네.
이것도 재생되는 건가?
숨만 쉬어도 아픈 와중에 진이 걱정부터 했다.
한때 눈동자였던 것을 뺨에 잔뜩 묻힌 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보이질 않으니 그저 현실적인 고민을 할 뿐이다.
이러다 영원히 손가락 엿은 못 세우나, 하고.
동시에 확신도 생겼다.
자신이 이 정도면 타하는 분명 뒈졌을 거라는 확신.
장갑 관통률이 1,000mm에 달하는 탄두는 타하의 복부에 박힌 채 폭발했다.
압도적인 압력과 열기가 몸속을 걸레짝으로 만들었을 것인즉.
이 정도면 놈이 아무리 단단할지언정 죽어야 옳게 된 세상이다.
진이 그렇게 뇌까리며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신체가 회복을 포기한 죽은 살점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재구축으로 인해 실직한 찌꺼기들을 흩뿌리며 손으로 무릎을 짚은 그가 꺼끌꺼끌한 입속을 혓바닥으로 둥글게 훑은 뒤, 침을 모아 퉤 뱉었다.
그러고는 코를 킁킁거리니, 점차 익숙해지는 탄내 사이로 짙은 혈향이 섞여 들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치들자 보이는 건 피투성이가 된 지면.
그리고 그 위로 엎어진 무언가.
진이 미간을 슬며시 좁히며 안력을 돋궜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맹하게 초점 풀린 눈은 사물의 상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으니까.
그런고로 맛이 가버린 시야에 담긴 것이라곤 희끄무레한 덩어리 정도가 전부.
그래도 저게 타하라는 건 알겠다.
저 정도로 하얗게 덩어리진 물체가 그 백사자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아무렴 어떨까.
이 순간 두 발로 서 있는 건 진이요, 쓰러진 쪽은 타하라.
끝까지 가면 승산이 없을 거란 판단하에 자행한 미친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다 끝났구나, 라는 안도가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주춤.
진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는 버릇처럼 확인한 내면에 경험치가 들어와 있지 않았음을 확인한 직후였으니.
다음 순간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섬뜩한 감각.
하지만 상처를 돌아볼 틈이 없다.
곧바로 몸을 크게 날린 진이다.
눈과 귀가 좀처럼 제 역할을 못 하는 지금.
믿을 것은 촉각뿐이라.
살갗에 닿는 풍압을 통해 공격의 궤적을 읽어낸 진이 허리를 뒤로 젖혔다.
아슬아슬하게 눈앞을 스친 무언가가 고정을 푼 줄자처럼 휘리릭 원위치로 되돌아갔다.
그 끝에 피바다 속에서 중력을 거스른 듯 솟구치는 타하가 있었다.
"---!!!!"
뭐라 크게 소리를 지르는데 들리지 않는다.
사실 중요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타하의 몰골이었으므로.
실타래처럼 길게 늘어난 검붉은 혈액이 갈기갈기 찢긴 몸뚱어리를 느슨하게 연결해 놓았다.
마치 헐겁게 기워진 봉제인형 같은 모양새.
희뿌옇게 번진 시야라곤 하나, 저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바로 눈치챌 수 있다.
3페이즈는 너무한 거 아니냐고!
진이 미간을 와락 찌푸릴 때였다.
지나치게 길어진 팔이 끝내 지면에 손바닥을 붙이니, 마침내 거대한 네발짐승이 된 타하가 크게 포효했으니.
이에 호응하듯 사방에서 번쩍번쩍 켜진 동그란 빛이 진과 타하를 비추더라고.
이건 또 뭐야?
흠칫 놀란 진을 반긴 건, 어느새 주변을 빼곡하게 에워싼 TB 측 병력.
폭발을 보고 몰려든 듯했는데, 그 수가 어림잡아 수백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이미 수인화를 마친 간부들도 적잖았으니.
이 정도면 최소 중대급이라.
저 인원이 건물에 투입됐다면 일행은 무조건 전멸이 확정이었을 터.
그렇게 따지면, 차라리 나한테 와서 다행이긴 한데······
잠시만, 이 새끼들 왜 안 쏘지?
묘하게 길어지는 대치 상황에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줄 알았더니, 웬걸.
먹먹한 귓속을 파고드는 건 웅성웅성 동요하는 기운이었다.
···설마?!
머릿속을 스치는 가정에 급히 타하 쪽으로 눈길을 던진 진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둘러보며 으르렁대는 거대한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특히나 그가 TB의 리더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리하여 진이 생각하길.
이지를 완전히 상실한 수인과, 끔찍하게 변한 보스의 모습에 사고회로가 정지한 부하들?
사람 인생.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직후 바닥에서 콘크리트 파편을 주워 든 진이 전력을 다해 팔을 휘두르니, 손끝을 떠난 돌멩이가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고 사자의 머리에 부딪혀 파삭 박살 났다.
직후 콧잔등이 잔뜩 일그러진 맹수가 머리를 번쩍.
"커허허헝!!"
잇따른 포효에 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도망쳤다.
당연하게도 그 방향 끝엔 TB의 병력이 있었으니.
"시, 시발!!"
"어떻게 합니까!"
우다다다 달려오는 진과 그 뒤를 쫓는 거대한 짐승을 발견한 놈들이 우왕좌왕.
패닉에 빠진 건 간부들도 마찬가지라서.
"보, 보스! 도대체···!!"
명령을 내려야 할 그들이 머뭇거리자,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그리고 그 소리가 기폭제가 됐다.
두두두두두!!!
정면을 향한 총구들이 불을 뿜어대니, 탄환의 절반은 진에게 나머지 절반은 타하에게 쏟아졌다.
진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런 상황에도 나한테 총을 쏜다고?
갸륵한 충성심에 치를 떨며 급한 대로 머리만 보호한 그다.
빗발치는 탄환에 순식간에 팔이 걸레짝이 됐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기에.
망가진 육체를 완벽히 수복하기엔 주어진 시간이 여의찮았다.
그 와중에 보스라는 놈은 죽은 줄 알았더니 치사하게 부활까지 했다.
제대로 된 싸움이 성립될 수 없으니 이렇게 깽판이라도 칠 수밖엔.
해서 지금이다.
에라 모르겠다 적진 한복판으로 돌진해 한데 뒤섞이는 것.
그 기상천외한 물귀신 작전에 일대가 난리가 났다.
"위대한! 수인의! 시대가 오리라!"
정신줄을 제대로 놓아버린 타하가 피아를 식별하지 않고 휘두른 손발톱에 사방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보스! 정신 차-"
다급하게 소리치던 병사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았다.
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던 충성심 높은 이였다.
그런 그의 죽음에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머지 절반의 총구가 자연스럽게 타하를 향했다.
"쏴!"
누군가 외쳤고, 수천 발이 넘는 탄환이 그렇게 타하의 몸을 두드렸다.
난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커헉!"
심장을 꿰뚫린 병사가 부르르 떨다 목이 픽 꺾이는 가운데, 시체를 휙 내던진 타하가 하늘을 향해 일갈했다.
"카스드루바엘의 핏줄들이여!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라!"
느닷없는 괴성에 한창 죽은 TB 병사의 장비를 탈취하던 진이 고개를 돌렸다.
카스 뭐?
"투쟁으로 흘린 피가! 새로운 왕조를 건립하리라!"
시대성과 전혀 맞지 않는 포효가 이어졌다.
"핏물 속에서 왕이 옹립할지니!"
"마땅히 그릇되어 야수의 왕을 맞이할지어다!"
무차별적인 학살을 동반한 염불이었다.
그러면서 본인도 무수한 탄환을 위시한 각종 수류탄 그리고 중화기의 화력에 서서히 걸레짝이 되어갔다.
"이런 씨발!"
간부들도 제 목숨이 위험해지자 보스고 뭐고 타하에게 이빨과 발톱을 박아 넣었다.
그들 역시 강화 인간이다. 사력을 다한 공격은 연이은 포화로 약해진 2위계 수인의 가죽을 뚫고 분명한 상처를 남겼다.
그 대가로 목숨을 잃긴 했지만.
"커허허허헝!!"
단신으로 중대 단위의 무장 병력을 갈아버리기 시작한 타하가 울부짖었다.
오롯이 저에게 집중된, 지형을 바꿀 정도의 포화를 견뎌내며 공격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은 멀리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
평범한 싸움이었다면 필패였다고.
진이 헛바람을 삼키며 타하를 응시했다.
"수인의! 시대가! 오리라!"
광증이란 게 도대체 뭐길래 저 지경이 되는 거지?
단순히 조현병 취급하기에는 문맥이 너무 정확하지 않나?
아닌가. 그냥 귀신 들린 것 같기도 하고.
몰라, 씨. 그게 중요해?
진이 이해를 포기했다.
대신 걸레짝이 된 몸을 움직여 사방팔방 총을 내갈겼다.
애초에 지원을 위해 모여든 병력이다.
즉 한 놈도 살려둘 이유가 없단 소리다.
타앙!
달아나는 병사의 뒤통수를 날려버린다.
죽어라 타하와 싸우는 놈들은 내버려두고, 전장을 이탈하는 인원들만 열심히 솎아냈다.
혼란을 야기하는 외침은 덤이었으니.
"도망치는 놈은 즉결 처형이다!!"
나 빼고 다 적이란 마인드.
뇌를 비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진이었지만, 누구 하나 그를 제대로 마크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기엔 완전히 돌아버린 보스가 너나 할 거 없이 공평하게 죽음을 흩뿌리고 있었기에.
해서 그들은 기회를 놓쳤다.
유일하게 진을 죽일 수 있었던 기회를.
파직!
심장 어림에서 느껴지는 광극의 기운에 진이 눈을 부릅떴다.
돌아왔구나!
마침내 마나를 쓸 정도로 회복된 몸뚱이다.
흐리멍덩하던 시야에 초점이 되돌아온 것도 비슷한 시점이었으니-
잿빛 눈동자에 학살극을 펼치는 타하의 모습이 또렷하게 담겼다. 이제는 몇 남지 않은 TB 측 병력도.
"케헥!"
그렇게 마지막 남은 병사마저 쓰러진 순간.
곧바로 진이 광극을 일깨웠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을 박차니, 어둠을 찢는 갈지자 광명이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로 타하에게 다다랐다.
이후 번쩍 치솟은 빛이 인간의 현상을 갖추었을 때.
진은 타하의 등 뒤에서 놈의 목을 팔로 단단히 감싼 상태였다.
인간이 유일하게 맹수를 제압할 수 있다는 기술.
리어 네이키드 초크.
물론 이 와중에 고작 경동맥이나 조이겠다고 달라붙은 것은 아니다.
이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요, 각오였으니.
다음 순간 진이 이를 아득 깨물며 전력을 다해 마나 회로를 가동했다.
파지지지직!!
폭발적인 기세로 솟구친 자전이 타하를 휘감았다.
7가문의 가운데 가장 난폭하다 정평이 난 힘이다.
그 파괴적인 기운에 휩싸인 백사자가 크게 포효했다.
"커허허헝-!"
거칠게 날뛰기 시작한 놈이 가까운 벽을 등으로 들이받았다.
그 충격에 진이 피를 왈칵 토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몸부림치는 타하의 발악은 온 사방을 다 초토화하기 충분했으니, 너덜너덜한 몸뚱이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라.
당연하게도 그 위에 올라탄 진 역시 실시간으로 개박살 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팔을 조였다.
이대로 떨어지면 무조건 죽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후 악다문 치아에서 쩌저적- 실금이 번지는 순간.
타하가 콧김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위대, 한! 수인···! 시대! 카스드, 루바엘!"
이 와중에도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진이 눈살을 구겼다.
광증에 삼켜진 남자의 모습에서 문뜩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에.
기억으로만 남은 과거를 지키기 위해, 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 고향의 추억을 덧입히는 진이었다.
이는 모든 게 변해버린 이 세상을 향한 이방인의 처절한 저항이었으니.
언제까지고 내가 나일 수 있게.
앞으로도 진은 끝없이 싸울 생각이었다.
몇 번이고 검은 파도에 삼켜지더라도.
그때였다.
진의 가슴 속에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소리 없이 타오른 투명한 열기가 자전과 함께 외부로 발산되기 시작하니, 그 모든 기운에 삼켜진 타하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은 더 이상 사자의 포효가 아니었다.
뼛속 깊이 망가진 한 인간이 내지르는 절규였을 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길고도 길었던 단말마의 절규를 끝으로 새카맣게 익어버린 짐승이 바닥에 쓰러지니.
잿더미 위에서 진이 몸을 일으켰다.
"후우-"
비틀거리며 중심을 바로 세운 그가 충만하게 차오르는 경험치를 느끼며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그러고는 뮤트타운을 향해 우레와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래,
내가 나일 수 있도록.
"적자앙!! 물리쳤다!!!!!"
< 61화 >
호기로운 포효 끝에 앓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으으으."
진이 크게 휘청거렸다.
순간 눈앞이 핑하고 돌았기 때문이었다.
축축한 기분에 하관을 쓱 훔친 손바닥이 새빨갛다. 그 와중에 중지는 여전히 부재중이다.
두 마디 넘게 날아가 몽탕 짧아진 길이. 부러진 뼈와 허연 신경이 훤히 보이는 너덜너덜한 단면까지.
아, 보지 말걸.
원래 인간은 관측한 상처에 더 큰 아픔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괜히 있겠는가.
이렇게 눈으로 확인한 이상 계속 껄끄럽고 아프고 짜증 나는 게 인지상정.
"씨이펄···"
기왕 이렇게 된 거 눈물을 머금고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한 진이다.
어떻게 된 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쩡한 곳이 단 하나도 없더라.
거죽이 덜렁덜렁한 뒤통수부터.
가동범위가 절반도 안 나오는 양팔.
그리고 제멋대로 휘돌아간 왼쪽 발목까지.
굳이 옷을 들쳐가며 속살은 확인하지 않았다.
드러난 것만으로도 이미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었기에.
더군다나 회복도 영 시원찮다.
출혈도 제대로 잡히지 않을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이레귤러의 재구축은 이능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최상급 치유 능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회복이 불가능한 신체를 새로이 수복하는 것.
말이 간단해서 그렇지.
이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작업이라서.
당연하게도 상시 유지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전투를 속행하기 위해, 무리해서 재생 속도를 높이기까지 했다.
뽀얗게 익어버린 안구와 신경이 빠르게 재생된 것도 이 때문이었으니.
급한 불부터 끈 몸뚱어리가 나도 좀 살자.
태업을 선언한 것이다.
물론 진은 이런 사정까진 모른다.
그저 아픈 게 좀 오래갈 건가 보다.
단순하게 결론 내리고, 죽은 타하의 등에서 비틀비틀 내려왔을 뿐.
그러자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환경.
"···이게 말이 되나."
진이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누구라도 이런 반응이지 않을까.
흐릿한 월광 아래 펼쳐진 참상을 목도한다면 말이다.
갈기갈기 찢긴 수백 구의 시체.
이 중에 민간인은 없다.
모두가 용병 짬밥 그득하게 잡순 전투원들인즉슨.
본인들의 최후가 믿고 따르던 보스와의 공멸이 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당연히 못 했을 거다.
그건 이 참변을 유도한 당사자조차 마찬가지라서.
진의 시선이 쓰러진 타하에게 닿았다.
까맣게 탄 와중에도 생전의 위엄이 남은 갈기 달린 머리통이 잿빛 눈동자에 아로새겨졌다.
광증이 치밀지 않은 세계선의 그였다면 이런 결말은 절대 맞이하지 않았겠지.
물론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진이 고개를 돌렸다.
볼 장 다 봤으니, 어서 일행들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가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기는 순간.
툭.
무언가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
등 뒤에서 들렸다.
단지 그것뿐인데 목덜미에서 소름이 쭉 끼친다.
"······"
일순 차갑게 식어버린 공기 속에서 진의 고개가 비스듬히 뒤로 돌아갔다.
눈길이 닿은 곳에 큼지막한 외투를 두른 존재가 있었다.
균일하지 않게 울룩불룩 지나치게 비대한 몸통이 보인다.
당장이라도 옷감을 뚫고 나올 듯, 혹덩이처럼 치솟은 불룩한 윤곽들에는 이목구비가 있었다.
얼굴, 얼굴이다.
수많은 얼굴을 품었으나, 정작 본인의 얼굴은 후드 속 짙은 음영에 숨긴 존재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이후 느릿하게 전진한 메마른 손이 죽은 사자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뚜두두둑-
거죽이 뜯기는 섬뜩한 소리.
다음 순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게 뼈와 분리된 타하의 인면, 아니 사면(獅面)을 쥔 존재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힘없이 축 늘어진 거죽을 얼굴 높이로 들어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둥그런 음영 속에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상하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 녀석이었는데···. 이봐, 이봐?"
그런다고 죽은 머리통이 대답할 리도 없었으니.
일방적인 혼잣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릇이 되기로 했잖나. 한시라도 빨리 벽을 깨기도 모자랄 판에 왜 통구이가 됐을까. 음?"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고개가 이번에는 왼쪽으로 갸웃.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제스처를 남긴 얼굴이 이번엔 옆으로 돌아갔다.
"네가 그랬나?"
그에 진이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왜 불만 있어?"
기세 좋게 받아치긴 했지만, 사실 머릿속에선 비상벨이 웽웽 요란하기 그지없다.
저거, 그거잖아.
얼굴감별사?
얼굴사냥꾼?
아무튼 그거!
존 해리슨 대령이 쫓는 고위험군 범죄자. 타하를 도와 이번 내전에서 암약했으리라 추측되는 뭐시기.
진이 침을 나눠서 삼켰다.
한 번에 꼴깍 삼켰다간 위아래로 출렁거릴 울대뼈가 '얘, 긴장했대요!'라고 일러바칠 것 같았기에.
절대로 쫀 게 아니야.
싸울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아닌 게 아니라, 마나도 바닥을 치고, 팔다리도 제대로 안 움직인다.
그리하여 진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궁리했다.
어쩌지. 자하드 가주랑 아는 사이라고 할까?
씁. 너무 말도 안 되나?
그럼 로칸이라도 팔아?
아니 근데 그 사람 유명한 건 맞아?
네임밸류가 떨어지면 어쩐대.
그렇게 진이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머리를 핑핑 굴릴 때였다.
"불만? 없진 않아. 계획이 어그러졌으니까."
귓가를 파고드는 기분 나쁜 목소리에 진이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무슨 계획?"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을 끌자고 내뱉은 말이었으니.
당연하게도 대답은 기대도 하지 않았거늘.
웬걸. 상대가 대화를 이어가더라고.
"카스드루바엘의 머리를 수집하는 것."
"카···카스. 잠깐만 좀만 천천히."
"카스드루바엘."
"···아무튼 그게 뭔데?"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시간을 끌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카스드루바엘.
발음하기도 힘든 저 단어는 광증에 사로잡힌 타하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울부짖었던 것이었기에.
곧이어 대답이 돌아왔다.
"빛과 장미의 시대를 주름잡던 야수의 왕이지. 얼마나 대단한가. 그는 멸종한 고대 종족의 정점이자, 최초의 존재요, 모든 수인의 아버지라···!!"
말이 이어질수록 어조가 높아진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놈은 흥분하고 있었다.
진으로선 불쾌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라서.
"빛과 장미의 시대? 그때 살던 수인을 왜 지금 찾아. 걔 이름은 타하야, 타하."
그가 손끝으로 쭈글텅한 사자 거죽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얼굴수집가는 그러거나 말거나 잔뜩 상기된 목소리와 손짓으로 제 할 말을 이어가기 바빴다.
"희귀한 얼굴이 필요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의 얼굴이. 그걸 뒤집어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아아. 아아아!"
놈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라이한 절정의 순간에 진이 똥 씹은 표정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미친 새낀가?
설마하니 잡아 뜯은 얼굴 거죽을 뒤집어쓰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하여간 범죄자는 범죄자인 이유가 있다고.
은은하게 차오르는 불쾌감과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이.
···근데. 이 정도면 슬슬 나타나 줄 때도 안 됐나?
진이 눈을 좌우로 휙휙 굴릴 때였다.
흥분을 차차 가라앉힌 얼굴수집가가 중얼거리길.
"광증에 사로잡힌 3위계 이상의 수인······쉽지 않군.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아쉬운 대로 네 얼굴이라도 받아 갈 수밖엔."
그러고는 비쩍 마른 손바닥을 활짝 펼치니.
"억!"
몸을 끌어당기는 기이한 흡입력에 진이 있는 힘껏 상체를 뒤로 젖히며 저항했다.
"잠시만! 아직! 궁금한 게! 우리 대화를 좀 더!"
자연스럽게 발바닥이 위로 들리며 뒤꿈치가 지면을 치이이익! 긁는 가운데.
속절없이 끌려가던 진이 하늘을 향해 핏대를 세웠다.
"공무원이면 세금값 좀 해!"
그때였다.
한순간 허공이 크게 일렁거리니.
직후 귓가를 통해 파고드는 나직한 목소리가 있더라고.
[그래비티]
쿠웅!!
얼굴수집가의 발밑 공간이 동그랗게 움푹 팼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날아든 투사체가 놈의 주위에 사각형을 그리며 파바박! 박혀 들었다.
빗나간 것이 아니었다.
길쭉한 원통처럼 생긴 투사체의 표면에 십자가 모양의 실선이 생기더니, 직후 사분할된 껍데기가 지면에 찰칵 발을 내리며, 그 속에서 피뢰침처럼 생긴 뾰족한 기구가 새하얀 번갯불을 거침없이 뿜어냈다.
파지지직!!!
순식간에 네모난 전류의 감옥에 갇힌 얼굴수집가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대기의 흐름을 뒤바꿨다.
빙글빙글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한 바람은 어느새 눈으로 보이는 돌풍이 되어 얼굴수집가를 집어삼켰으니.
마침내 인력에서 자유로워진 진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욱!"
그리고 어깨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
"세금도 안 내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직후 자신의 곁에서 걸음을 멈추는 군화를 본 진이 시선을 위로 올리며 헛웃음을 쳤다.
"이 와중에도 술이 들어간다고?"
"사람이 한결같아야지."
대령, 존 해리슨이 히죽거리며 한 손에 쥔 술병으로 나발을 부는 가운데.
어느샌가 곁으로 나타난 Q가 입을 열었다.
"법칙인도자들 전원 집결 완료. 타깃 '얼굴수집가' 확보했습니다."
"드디어 다시 만났군. 빌어먹을 다면자(多面者) 자식. 오늘은 끝장을 보자고."
대령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
투사체가 날아든 방향을 예측해 눈길을 던진 진이다.
부둣가 인근의 건물 옥상들이 차례로 담긴다.
보이진 않지만, 저기 어딘가에 저격 포인트를 확보한 요원들이 있을 터였다.
즉 때마침 구해준 게 아니라, 때가 되어서 구해줬다는 것이었으니 그 철두철미함에 진이 도리질치는 순간.
"커허허헝!!!"
돌풍 너머로 들려온 익숙한 포효에 진이 흠칫.
4페이즈라고?
그 순간 '콰앙!!!' 하는 폭음과 함께 지면이 흔들리며 피뢰침들이 일제히 박살 났다.
동시에 거대한 무언가가 돌풍을 뚫고 하늘로 솟구쳤다.
얼굴수집가였다.
여기까진 진도 달리 놀라지 않았으나, 직후 고개를 내려 지상을 바라보는 후드 속 얼굴이 백사자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대령과 Q의 표정은 덤덤했으니, 마치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라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바로 써먹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사이 깍지 낀 양손을 머리 뒤로 젖힌 얼굴수집가가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지며 팔을 내리쳤다.
콰앙!!!
폭탄이라도 터진 듯 지면이 뒤집어졌다.
하지만 이미 대령과 Q는 그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으니, Q가 진의 옷깃을 잡은 손을 놓았다.
"감사인사는 됐어."
어김없이 목을 졸린 진이 콜록콜록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
타하의 얼굴을 한 얼굴수집가가 고개를 들었다.
"너흰 지치지도 않나?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심지어 목소리까지 생긴 대로 바뀌었으니, 그 기괴한 모습에 진이 눈썹을 꿈틀.
그 와중에 골절된 왼쪽 발목을 억지로 돌려 세웠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설 정도로 아팠지만, 이렇게 해야 회복이 빠르다.
그리하여 대충 응급처치를 마친 뒤 다시 정면을 딱!
그러자 그곳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더라.
단단한 턱선을 가진 남성의 등장에 Q가 입을 열었다.
"No. 22 샌드맨. 속성탄 준비해."
직후 기다렸다는 듯 저격수의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거기에 관통당한 얼굴수집가의 신체 일부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축축하게 허물어지니, 놈이 재밌다는 웃었다.
"하하하! 모르는 게 없군."
"그럼. 몇 년짼데."
대령이 그렇게 말하며 술병을 옆으로 휙 집어 던졌다.
쨍그랑! 조각 난 파편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훅 치솟았다가 멀리 사라지는 가운데.
돌풍을 휘감은 대령의 발이 지면에서 둥실 떠오르니, 얼굴수집가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에어로키네시스. 가지고 싶은 능력이긴 했지."
"어디 뺏어봐라."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돌진한 두 사람이 거대한 충격파를 자아냈다.
이를 시작으로 Q가 정면으로 내달렸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지원사격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이 와중에 진만 정신이 하나도 없다.
잠깐만, 나 환자라고!
그러잖아도 몸도 성하지 않은데 대기가 비명을 지르는 싸움의 한복판에 있자니 속이 울렁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또다시 충격파가 펑!
이리로 데구루루.
저기로 데구루루.
아주 그냥 난리가 난 진이 급한 대로 죽은 TB 병사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질 때였다.
뜬금없이 눈앞을 휙 가리는 상태창이.
「(돌발!)(???)얼굴수집가」──────────
???? 다면자(多面者) ?????
법칙인도자들과 함께 얼굴수집가를 쓰러뜨리시오.
??? ??? ?????
*보상 퍽 XP 150,000 / ???
─────────────────────
그에 진이 토막 난 중지를 세웠다.
응, 안 해.
< 62화 >
영문학의 거장 T.S 엘리엇은 이런 말을 남겼다.
멀리 갈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이는 '도전하는 자만이 쟁취한다.' 라는 격언과 일맥상통했으니.
그에 대한 진의 대답은.
도전 안 해!
콰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바닥이 있다.
어지러운 와중에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오른손에 쥔 찢어진 군복 바지.
그리고 저 멀리 분홍 팬티. 부숭부숭한 다리털.
아 시발.
본의 아니게 고인에게 성추행을 저질러 버린 진이 냅다 바지를 휙 던졌다.
아무리 적이라도 팬티 색깔까진 알고 싶지 않···.
아니. 근데 분홍색 무엇?
그때였다.
콰앙──!!
또다시 굉음이 터져 나온 것은.
수백 미터쯤 되는 젖은 수건을 허공에 털면 이런 소리가 날까.
이 정도면 음파 공격이나 다름없었으니, 눈살을 찡그리며 귓가에 손을 올리는 진을 뒤이어 날아든 충격파가 후려쳤다.
몸이 붕 떠오른다.
낙법도 제대로 치지 못하고 바닥을 우당탕탕 구르다가 주차된 덤프트럭 바퀴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고대로 맥없이 축 늘어지자, 그제야 상태창이 스르륵 자취를 감추더라고. (보류)라는 문장을 남기면서.
"개새······"
화낼 힘도 없어서 그냥 눈꺼풀만 들어 올린 진이다.
저 앞에선 경천동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쐐기형 토네이도와 황톳빛 해일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모래 폭풍이 충돌한다.
역전된 중력으로 떠오른 시체들은 허공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빙글빙글 회전하다가 서서히 한 줌의 핏물로 산화하고-
폭음이 터지고, 충격파가 날아들고, 지반이 뒤집혔다.
어둠을 뚫고 날아든 탄환은 도대체 어딜 맞추는지도 모르겠다.
저기에 끼어들라고?
어이가 없어서 되려 유쾌해진 진이 낄낄거렸다.
각이 보여야 시도라도 하는 거다.
만전의 상태로도 목숨을 걸어야 할 싸움인즉.
지금으로선 절대 무리라고.
경험치 15만?
아깝기보단 그냥 기가 찬다.
타하를 상대하고 받은 경험치가 9천이었으니 대충 계산해 봐도 16배 이상.
물론 얼굴수집가가 타하보다 16배 이상 강한지는 잘 모르겠다.
강함이라는 요소를, 경험치에 빗대서 계산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다만 확실한 건, 얼굴수집가가 타하보다 훨씬 윗줄의 강자라는 거다.
시정부의 특수부대 전원이 나서서 상대해야 할 만큼.
그리하여 진이 마음을 비웠다.
손가락도 까딱하기 힘든데 그냥 구경이나 하자.
어디 팝콘 없나?
아쉽게도 얼굴로 날아드는 건 팝콘이 아닌 박살 난 지반이 토해낸 콘크리트 파편이 전부라서.
퉤퉤! 입에서 돌가루를 뱉은 진이 그냥 퍼질러누웠다.
몰라. 배 째.
그사이 싸움의 양상은 또다시 바뀌었다.
씻은 듯 사라진 모래 폭풍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얼굴수집가가 새로운 거죽을 뒤집어쓴 것이다.
허공에서 스르륵 사라지는 그의 모습에 어디선가 Q가 소리쳤다.
"No. 08 카모플라쥬. 포메이션C. 충격탄 준비해."
그에 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그 도리질에 담긴 감정은 요원들에 대한 감탄이 10, 어처구니없음이 90이었다.
뒤집어쓴 얼굴마다 다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니.
저거 완전 사기 아닌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헛소리와 함께 싸움이 격해졌다.
변검술을 펼치듯 시시각각 거죽을 갈아 끼우는 얼굴수집가와 그때마다 맞춤 전술로 대응하는 요원들.
그 지리멸렬한 파괴의 중심에서 마침내 누군가 뒤로 물러섰다.
툭.
바닥에 떨어진 팔이 세찬 용오름을 만나 갈가리 찢겨 나간다.
한팔잡이가 된 다면가가 너덜너덜한 어깻죽지를 힐끗 내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군, 대령. 그 계급에 있기 아까운 실력인데."
그에 존 해리슨이 바닥에 가볍게 착지하며 말했다.
"술 냄새난다고 장성급 장교들이 싫어하더라고. 주정뱅이랑은 겸상하기 싫다나 뭐라나."
"저런."
"그래서 보여줄 건 다 보여줬나?"
"그럴 리가."
얼굴수집가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앳된 티가 역력한 소년의 얼굴이었기에 더욱 기괴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오늘따라 탐이 나는 얼굴들이 많군. 마음 같아선 전부 다 뜯어가고 싶지만······"
말끝을 늘어뜨린 놈이 하늘을 응시했다.
광기에 번들거리는 시선이 세상의 천장을 훑어내니.
이윽고 나직한 뒷말이 이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직후 천천히 제자리를 찾는 얼굴이 낯설다.
만성피로에 시달린 듯, 짙은 눈그늘을 가진 초췌한 여성의 얼굴에 대령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지금껏 여유를 잃은 적 없던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건 바닥에 파묻힌 몸을 일으키던 Q도 마찬가지라서.
"······테아 플로렌스?"
넘버링되지 않은 이름이 아연하게 허공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여성이 입을 열었다.
"영광으로 알도록. 처음 개시하는 얼굴이니까."
섬뜩한 미소.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
"오라. 화정이여."
다음 순간.
놈이 등진 허공에서 파문이 일었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 무한한 동심원.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물결이자, 서로 다른 세상을 잇는 통로였으니.
직후 그 속에서 불꽃에 뒤덮인 거인의 팔이 대령을 후려갈겼다.
그 크기와 질량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을 만큼 빠른 속도.
동시에 얼굴수집가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Āgni"
그오오오오오!!
이에 응답하듯 거대한 고함을 내지른 무언가가 거대한 팔을 허공으로 추켜세웠다.
움켜쥔 주먹이 어마어마한 열기를 품는 모습에 Q가 급히 외쳤다.
"냉기탄!"
하지만 탄환이 날아드는 것보다 불꽃의 응집체가 지면을 내리치는 것이 더 빨랐다.
─────!!
한참 떨어진 진의 몸이 붕 떠오를 정도의 정신 나간 물리력과 함께 일대의 공기가 증발했다.
압도적인 열파가 돔 형태로 번져나가며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순간.
파앙!
소닉붐을 터뜨리며 날아온 대령이 허공에서 진을 낚아챘다.
엄청난 속도에 살갗이 물결처럼 파형을 그리고 주변 환경이 훅 바뀐다.
"컥!"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곳에 발을 붙인 진이다.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대령을 바라보니 그가 반대편 팔에 안은 Q를 바닥에 내려놓더라고.
"빌어먹을."
하늘로 솟구치는 거대한 불기둥을 바라보며 대령이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그와 같은 시선을 공유하던 진이 생각하길.
···이거 놓친 거겠지?
이럴 줄 알았다.
경험치가 15만 일때부터 알아봤지.
세상 이치를 통달한 도인마냥 혼자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망연한 표정을 짓는 Q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다음에는 나랑 같이 잡을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원래 사는 게 거지 같은 40번대 구역이다.
누가 낫고 말고 경쟁할 필요가 없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똥통의 향연.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은 그게 아니었다.
우리가 제일 좆됐다고 당당히 주장할 만한 구역들이 몇 개 떠오른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뮤트타운이라.
사건의 발단은 몇몇 갱단 사이에 벌어진 알력 다툼이었으니, 단순한 자존심 싸움 정도로 보였던 투닥거림이 도시 전체를 뒤덮는 들불로 성장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원래 싸움이라는 게 길어지면 목적이 변질되기 마련이다.
자릿세를 누가 더 챙기냐, 정도로 시작됐던 하찮은 경쟁은 어느 순간 뮤트타운의 주인을 가리는 갱단의 전쟁으로 심화됐다.
그래, 전쟁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는가.
밥그릇 놓고 방아쇠를 당기는 갱단 새끼들만 뒤지면 또 몰라.
아무 연관도 없는 이들까지 눈먼 총알에 맞고, 칼에 찔리고, 욕보이고, 잔인한 분풀이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으니.
그즈음 뮤트타운은 지옥이란 말이 딱 어울렸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이 거지 같은 도시에 자경단 비스름한 것이 생겨났다.
아무도 우릴 지켜주질 않으니, 우리라도 우릴 지킵시다! 선언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
갱들에게 사랑하는 이를 잃고, 건강을 잃고, 미래를 잃은 이들의 요람.
아마도 시궁창에서 피어난 희망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마침내 길었던 전쟁도 끝이 났다.
이걸로 해피엔드였다면 벅차게 행복했으련만.
뮤트타운을 기다리는 건 보다 큰 절망이었으니. 전쟁 끝에 찾아온 것은 평화가 아닌 신흥 군벌 세력 TB였다고.
그날 이후 자경단은 저항군이 됐다.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뭐라고 불리든 그들은 같은 일을 했다.
사람 목숨을 좆같이 아는 저 씹새끼들로부터 나를,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는 것.
그게 전부였으니까.
다시 1년.
안타깝게도 상황은 점차 절망적으로 흘러갔다.
거점이 무너졌고, 가장 강력했던 동료도 머리가 짓이겨졌다.
이제껏 힘겹게 버텨오던 저항군도 이제는 끝이라고. 모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냉정한 평가를 내릴 때였다.
뜬금없이.
정말 아주 뜬금없이.
어느 결사대에 의해 타하가 죽었단 소식이 뮤트타운 전역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
"···저기요, 진? 혹시 자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단잠을 깨우는 게 미안했기 때문일까. 상당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다.
해서 진이 무시했다.
미안하면 그냥 가라.
"···안 일어나는데요?"
"비켜봐."
다음 주자는 좀 거친 편이었다.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 흔들기까지 했으니까.
진은 애써 무시했다.
얼굴 앞에서 손전등이 딸칵 켜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
다른 건 다 무시해도 이건 안 된다.
숙면 중인 면상에 눈뽕이라니.
군필 대한 남아의 발작버튼 아닌가.
ㅁ뱀? 불침번 근무교대 하셔야···
"어떤 샊!"
마침내 진이 눈을 떴다.
한 방 먹여줄 각오로 주먹까지 꽉 틀어쥐었으니.
손전등을 들고 있던 이가 그제야 불을 끄더라고.
"일어났네."
"야이씨. 이게 무슨 경우 없는···"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알버스란 걸 깨달은 진이다.
그런 그의 뒤로 보이는 면면들이···
그레이스, 펜릴, 그리고 저 누구냐. 그.
"아저씨?"
"···필릭스다."
"아. 그런 이름이었지."
진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긁적.
그러다 보니 화를 내기엔 뭔가 애매해져서.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연 그다.
"자는 사람을 왜 깨워."
"일단 따라와."
까딱 턱짓하는 알버스를 따라 일행이 걸음을 옮김에, 그 모습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진도 부스스한 몰골로 몸을 일으켰다.
야밤에 갑자기 뭔데.
속으로 구시렁대며 걸어간 것도 잠시.
익숙한 휴식 공간에 도착한 그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자그마한 무드등으로 은은하게 불을 밝힌 그곳에는 먹거리가 엄청나게 쌓여있었으니까.
대부분이 통조림이나 전투식량이긴 하지만.
뭐 어떤가. 그런 걸 가릴 진이 아닌데.
"너 내일 다운타운으로 돌아갈 거라며? 송별회는 해야지."
어깨를 툭 치며 말한 알버스가 주변을 향해 휘휘 손짓했다.
"대충 앉자. 너무 큰소리는 내지 말고."
그리하여 일행이 탁상 위를 둘러앉았다.
어쩌다 보니 중간 자리에 앉게 된 진이 탁자에 쌓인 만찬을 보며 말했다.
"시정부 애들이 이걸 다 줬다고?"
"그럴 리가 있냐. 몰래 뽀려왔지."
알버스의 대답에 필릭스가 쯧 혀를 찼다.
"···얹혀사니까 이게 문제군. 먹는 것 가지고도 눈치를 봐야 한다니."
"감내해야 할 부분이죠. 그분들 덕분에 저희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그레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태자, 그때까지도 달리 말이 없던 펜릴도 입을 열었다.
"일단 먹지."
"그래, 그러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진이 곧바로 통조림을 깠다.
그리고 바로 입속으로 투하!
볼을 양껏 부풀린 채 가공육을 우적거리자 자연스럽게 잠도 깨고 심신에 안정도 찾아오더라.
해서 기분이 좋아진 진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덴은?"
"아직 뭘 먹을 정도는 못 돼."
알버스가 그렇게 말하며 초콜릿을 입으로 가져갔고,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폭 수류탄에 맞아 내장에 큰 손상을 입은 덴이었다.
다행히 장기 일부도 사이버웨어 의체였기 망정이지.
원래라면 무조건 죽었을 거라고.
그마저도 내내 의식이 없다가 이틀 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그였다.
"뭐 밥이야, 다음에 같이 먹으면 되지."
진이 두 번째 통조림을 깠다.
파인애플 슬라이스.
여기서는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다.
지난날 꼼짝없이 환자 신세였던 일행은 시정부 측에서 제공하는 배식만 받아먹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단물에 절인 과일을 하나씩 건져 먹던 진이 문뜩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깨닫는다.
덴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더 없다는 것을.
오시아.
개구리 수인과 함께 3층에서 떨어진 그녀는 살아남지 못했다.
함께 추락한 수인은 죽였지만, 직후 그 소리를 듣고 몰려온 병력까진 어쩌지 못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싸움이 혼전 양상으로 접어들기도 전이었으니, 더 눈에 띄었겠지.
성공률이 한없이 0에 수렴하던 작전에서 전사자가 고작 한 명뿐이라는 건 엄청난 성과였지만, 어떻게 그걸 '고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질 뿐이라서.
그리하여 진이 큰 결심을 했다.
눈앞에 놓인 잔에 콜라가 아닌 술을 한가득 따른 것이다.
함께 지낸 시간이 열흘이라, 그의 식성을 아는 일행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짓는 가운데.
그가 넘칠락 말락 출렁거리는 잔을 들며 말했다.
"오시아를 위해."
그에 일행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하나둘 잔을 채운 그들이 차례차례 팔을 들었다.
"오시아를 위해."
다섯 개의 술잔이 허공에서 청아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진에게는 1년하고도 몇 개월 만에 먹는 술.
과거 바닥에 버려진 독주로 목마름을 해결했다가 극심해진 허기에 치를 떤 이후로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짜 다신 안 먹으려고 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마음을 먹은 진이 꿀꺽꿀꺽 원샷을 때렸다.
"크에엑."
속이 타오르는 느낌에 절로 죽을상이 된다.
내 몸속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는 깨달음은 덤이다.
그사이 짧은 추모를 마친 일행이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TB가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기분 좋은 소식부터.
얼굴 수집가를 놓친 시정부 요원들이 열흘 내내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더라는 뒷담.
그리고 플랫 아이언에서의 활약상까지.
이런저런 얘기가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이어졌으니.
개중 진이 가장 열정적으로 떠는 순간은 단연코 본인의 활약상을 언급할 때였다.
내가 누구? 파우스트의 성능을 몸으로 직접 확인한 사나이.
덕분에 단말기가 또 박살 나긴 했지만.
외골격도 망가진 마당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참,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지원군 안 막았으면 너희 전부 송장 치렀다. 진짜.
어폐가 있는 말이었다.
엄밀히 따질 것도 없이, 지원군을 처리한 건 광증에 빠진 타하였으니까.
하지만 뭐 어떤가.
그런 타하를 잡은 게 난데.
그리하여 진이 제 얼굴에 금칠하기 바쁜 가운데.
알버스가 몸을 흠칫 떨었다.
다름이 아니라, 파우스트를 갈겼더니 거기에 진이 번쩍 나타난 것이 갑자기 떠올라버려서.
내가 동료를 희생시켰구나, 혼자서 얼마나 자책했던가.
죄책감을 곱씹느라 바로 죽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버티다가 기적적으로 구조된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었으니.
···잠깐만, 결과적으론 잘 된 건가?
알버스의 표정이 복잡해질 때였다.
"나도 13층에 누구 못 올라가게 막느라······"
펜릴도 공치사에 가세했다.
저 나름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진은 이어지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진의 기준에서 펜릴은 당연히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이게 다 그만큼 믿으니까 그런 거야아아하아아함.
"이 새끼가 아무리 그래도 하품은···"
수인의 이마에 핏줄이 불룩하게 솟았고, 나머지가 작게 웃었다.
"자자, 한 잔 더."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 누군가 건배를 종용했다.
짠. 다시 한번 부딪히는 술잔.
밤을 빌려, 나누는 이야기가 깊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산처럼 쌓여있던 음식이 바닥을 보이고,
이미 했던 이야기가 되풀이되기 시작했을 때쯤.
주섬주섬 뒷정리를 마친 일행이 손을 휘휘 흔들며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잘 자라, 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그리하여 진이 본인의 지정석으로 돌아왔다.
복도 구석,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
거기에 등을 기댄 그가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위험한데."
살갗에 들러붙어 이제는 당연해진 외로움이, 이 순간 작게나마 녹아내린 듯한 기분이라서.
가슴에 치미는 희미한 온기.
이 이상은 곤란했다. 언제고 이 세상을 탈출하겠다는 마음을 품은 그였기에. 더더욱.
"···이럴 때 딱 나와줘야 하는 거야. 새끼야. 네 면상 좀 보고 정신 좀 번쩍 차리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진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날.
떠나는 그에게 대령이 1억을 내밀었다.
< 63화 >
처음에는 뭔가 했다.
Q가 할 얘기가 있다고 부르기에 따라갔더니, 웬걸.
딱 멋 부리기 좋은 가죽 토트백 하나를 내밀지 않겠나.
뭐지, 패션에는 관심 없는데.
칼리파한테 선물로 줄까.
일단 주니까 받긴 한 진이다.
그러자 흔들의자에 앉은 대령이 까딱까딱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확인 안 하나?"
"음?"
안에 뭘 넣었나.
진이 지퍼를 쭉 열었다.
그리고 눈을 끔뻑끔뻑.
"엥?"
진의 고향에서는 지갑을 선물할 때, 그 안에 현금을 넣어서 전달하는 전통? 미신? 아무튼 그런 게 있다.
당연히 만원권보단 오만원권이 좋고.
손때 가득한 구권보단 빳빳한 신권이 좋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다.
이 지갑에 돈이 많이 들어오길 바라는 따스한 마음이야말로, 지폐 한 장에 담긴 진정한 가치 아니겠는가.
쪼금 과장하면 한국인의 정이고.
그러니 단돈 천 원이라도(이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넣어주면 받는 사람으로선 그저 감사할 따름인즉.
가방 안을 채운 빳빳한 지폐 한 묶음?
생각보다 떡값이 제법?
"오우. 뭐 이런 걸 다."
별생각 없이 지폐를 들어 올린 진이다.
근데 처음 보는 색깔이더라고.
더군다나 빳빳한 건 둘째 치고 0이 조금 많지 않나?
일십백천만십만백만.
키야, 백만 크레딧 권? 이런 게 다 있었······
있었···있었으에오우.
급작스러운 언어 능력의 퇴화.
진의 눈동자(2호기)가 흐리멍텅하게 풀렸다.
반투명한 띠지로 한 바퀴 감긴 지폐 한 묶음은 100장이 국룰.
100만x100=1억.
영이 여덟 개지요.
손이 벌벌 떨린다.
얼굴수집가를 마주했을 때도 이렇게 떨진 않았는데.
"이, 이에 무어?"
"뭐긴. 보수지. 벌써 잊었나?"
용케 알아듣고 대답하는 대령에 Q가 감탄하는 가운데.
진이 손안의 우주를 바라봤다.
1억이라는 건 이렇게나 가벼운 거였나.
아니, 무겁다.
핫도그 4만 개의 무게 아닌가.
여기서 무서운 사실 하나.
핫도그 4만 개를 한 번에 먹으면 얼굴수집가도 죽는다.
그만큼 위험한 것.
"어이, 듣고 있어?"
대령의 목소리가 진의 의식에 중력을 달아줬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던 의식이 가라앉음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진이 지폐 묶음을 가방 안에 조심스럽게 넣으며 말했다.
"진짜 준다고? 얼굴수집가를 못 잡았는데도?"
"우리가 너희에게 요구한 건 타하의 제압이었어. 얼굴수집가를 끌어내기 위한 조치였지. 넌 네 역할을 했다. 그저 우리가 실패한 것뿐이야."
Q의 대답이었다.
담담한 어조긴 했지만, 그 속은 엄청나게 쓰릴 터였다.
몇 년간 쫓던 타깃을 눈앞에서 놓쳤으니 얼마나 열받을까.
그런 사람 앞에서 너무 좋아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
진이 지퍼를 쓱 잠그며 말했다.
"뭐 하나만 물어도 돼?"
그에 대령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라.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얼굴수집가의 마지막 얼굴은 누구였어?"
상태창이랑 하도 부대끼며 살아서 그런가.
이게 촉이란 게 있다.
이 자식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 땐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는, 어떤 확신.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다시 마주할 적이라는 거겠지.
그러니 알아야겠다고.
시정부의 요원들을 한순간 찜쪄먹고 달아난 비장의 얼굴 정도는.
"테아 플로렌스다."
"대령님."
"뭐 어때서. 이미 현장에서 볼 거 다 본 녀석인데."
Q의 걱정 어린 시선에 괘념치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은 대령이 다시 진을 바라봤다.
"플로렌스 가문 최강의 에스콰이어지."
"아하."
진이 완벽히 이해했다는 얼굴,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분명 대답을 들었는데, 왜 질문이 두 개 더 생기는 것이지.
플로렌스 가문? 에스콰이어?
"···정령을 다루는 가문이다."
Q가 한숨을 폭 내쉬며 말을 보탰다.
괜히 부관 아니랄까 봐 눈치가 굉장히 빠르단 말이지.
"그리고 에스콰이어란, 방계였지만 능력을 각성해 가문으로 입적한 이들을 뜻하고."
에스콰이어(Esquire)
본인이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의 후손이거나 귀족이나 다름없는 사회 엘리트층을 뜻하는 칭호였다.
즉 본투비 귀족은 아니나, 귀족(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존재를 의미했으니.
용례가 참 적절하게 쓰였다고 볼 수 있겠다.
직계는 아니지만, 가문의 후손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가문에 편입한 천재들이라.
음. 나도 가능하려나···?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최강의 에스콰이어라 불릴 정도면 엄청났나 보네?"
"이러다 최초의 에스콰이어 가주가 나오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 실제로 가문 내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기도 했고."
"가주의 혼외자가 아니냐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죠. 에스콰이어에게 가문의 성씨를 하사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요."
대령과 Q가 번갈아 가며 대답했고.
진은 아하! 이젠 진짜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렇게 설명해 주면 얼마나 좋아.
물론 아직까진 끝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테아 플로렌스는 성인이 되기 전 이미 최상급 화정(火精)과 계약을 마쳤지. 너도 봤겠지만."
"불꽃 거인의 오른팔. 왼팔인가?"
"아그니란 놈이다. 나도 문헌에서나 봤지. 실물로는 처음이라 해줄 말이 많지는 않군."
"근데 왜 팔만 꺼낸 거래? 너희 정도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말하고 아차 했다.
괜히 이 인간들 자존심을 건드린 게 아닐까 해서.
군인들 자존심은 나라의 자존심인데.
근데 잠시만.
시정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지?
그때 대령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닐 거다. 아마 당장은 그게 한계였겠지."
"아 그런 거야?"
"빼앗는다고 다 완벽하게 쓸 수 있으면 그건 사기지. 섭리를 위배하는 사기."
그에 진이 고개를 끄덕끄덕.
암암. 그러면 안 되지.
"댁들도 당분간 바쁘겠네. 예상치 못한 얼굴까지 봐서."
"좀 복잡해지긴 했다만.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니, 신경 안 써도 된다. 그보다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대령이 말끝을 늘어뜨리며 손을 옆으로 쭉 뻗었다.
그러고는 탁자 위 술병을 낚아채 엄지로 뚜껑을 뽕!
벌컥벌컥 목을 채우고는 뒷말을 덧붙였다.
"우리와 일 해볼 생각은 없나?"
"없는데?" "대령님!"
진과 Q의 목소리가 겹쳤고, 두 사람이 눈을 맞췄다.
"그렇게 싫냐."
"그야 네 상식 수준이···잠시만 왜 거절하는 거지?"
"······?"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진이 삐뚜름한 얼굴로 대령에게 눈길을 옮겼다.
"됐네요. 내 인생에 군대는 철원에서 끝났어."
"철···? 군인이었다고?"
"6사단, 청성."
당당하게 왼쪽 가슴을 탕탕 두드린 진이다.
그 모습에 대령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절하는 방식도 참신하군."
혼자서 키득거린 그가 다시 나발을 불었다.
전혀 믿지 않는 모양새.
진은 억울하다.
"그래, 네 뜻은 잘 알았다. 얽매이지 않는 삶도 나쁘진 않지. 그게 자유로운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대령이 그리 말하며 빈 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웃음기를 천천히 거두며 고개를 드는데, 평소처럼 느슨한 눈빛이 아닌 자리에 걸맞은 단단한 시선이 진을 향한다.
"원래라면 네가 법칙인도자들에 합류하면 알려주려고 했지만······일전에 내가 실수한 것도 있고 하니 그냥 말해주마."
왜 갑자기 무게를 잡는담.
진이 눈썹을 까딱거리는 가운데 뒷말이 이어졌다.
"이미 벽을 허문 걸로 보이는데 아직도 알껍질 속에 있군. 하늘이 바뀌지 않았나. 걸어 나와라. 몇 걸음 앞에 2번째 세상이다."
그 말에 Q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진은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내가 그때 탈각을 한 게 맞긴 맞았구나, 하고.
동시에 깨닫는다.
확 와닿진 않지만, 이게 귀한 조언이란 걸.
"고마워."
시원한 미소를 지은 진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런 난 간다.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고. 그때까지 얼굴수집자 못 잡았으면 싸게 도와줄게."
그러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서니.
둘만 남은 방 안에서 Q가 작게 중얼거렸다.
"···무시를 동반한 호의라니 새롭군요."
"그저 호의일 거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놈이 아니야."
"그나저나 그 말씀은 뭡니까. 2위계라니."
"말 그대로다. 누가 대신 벽을 허물어준 것처럼 영 갈피를 못 잡는 것 같기에 한마디 했을 뿐이야. 뭐 가만히 둬도 어련히 잘 찾아갔겠지만."
대령이 닫힌 문을 바라보며 클클거렸다.
"진 에버나이트라···"
*
떠나는 진을 일행이 배웅했다.
무려 다섯이나 된다.
덴까지 비틀거리며 나온 덕분이었다.
뭘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냐고 물으니,
당연한 거라고 해서 조금은 감동한 진이었다.
당연하지만 번호도 미리 다 받아놨다.
혹시 몰라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쳐 일일이 '네 번호 이거 맞지?' 하고 확인하자니.
그 원시적인 모습에 알버스가 어지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앞으론 데이터 좀 미리미리 백업시켜놔, 단말기 터질 때마다 이 짓을 반복하려고?"
"백업을 어디다 시키는데?"
"솔로 인트라넷, 네 계정에. 아니. 이런 것도 설명을 해줘야 해?"
"아직 초짜라서 잘 몰라. 하지만 레벨은 펜릴과 같지."
"···왜 갑자기 지랄이지?"
펜릴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히죽거리는 진에게 차마 뭐라고 더 하지는 못하고 그저 손을 내미니.
흉터투성이 손을 맞잡은 진이 말했다.
"그래서 넌 언제 복귀하게?"
"TB 쪽 잔당은 다 치워야지."
저항군을 도와 조금 더 뮤트타운에 머물기로 결정한 그다.
굳이 그 이유에 대해서 캐묻지 않았다.
타하와 동료였다고 했던가.
말 못 할 사정 하나쯤은 있겠지. 뭐.
진은 그 점을 존중했다.
"아저씨도 건강하시고."
"필릭스라고 몇 번을 말해. 필-릭-스. 제발. 따라 해. 필-릭-스."
발작하는 필릭스를 보며 앞으로도 종종 놀려야겠구나 생각한 진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그레이스를 돌아봤다.
"간다."
"아, 진. 제가 생각해 봤는데."
그녀가 콧등에 걸친 안경을 위로 올리며 얼굴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작게 귀엣말을 속삭이길.
"재구축에 필요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챙기기 위해서 칼로리 캡슐은 어떨까요? 평소에는 효과를 보기 어렵겠지만, 갑작스런 큰 부상에 급한 불을 끌 정도는 될 거 같은데."
"알겠는데 이게 그렇게 비밀스러운 얘긴가?"
"아···, 아니었나요?"
"몰라?"
어깨를 으쓱인 진이 한때 주치의였던 여인을 지나쳐 마지막 동료에게 향했다.
"고맙다는 말 금지."
그에 알버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종종 놀러 와라."
그게 마지막이었다.
뒷걸음질 치며 팔을 몇 번 휘적거린 진이 어느 순간 몸을 돌렸다.
그러다 몇 걸음 못 가 흠칫!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우다다다 내달리기 시작하니.
좆됐다!
만티코어!
*
보름 가까이 방치한 오토바이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양심이 없는 걸까?
이 순간 진은 양심을 버렸다.
제발 무사해라!
어찌나 급했으면 자전까지 일으키며 달렸다.
그리하여 하수도 도착!
바닥 위를 촤아아악 미끄러지며 급제동하는 그의 눈에 만티코어가 담겼다.
중후함이 돋보이는 카키색 무광바디.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누군가 만티코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므로.
"도둑이야!"
목청을 높이며 돌진하자 상대도 흠칫 놀라며 품에서 권총을 꺼낸다.
당연하지만 진이 훨씬 빠르다.
그래서 상대의 얼굴도 먼저 알아봤다.
"에?!"
안면을 향하던 주먹으로 총신을 움켜잡은 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올렸다.
직후 울려 퍼지는 탕!
"으!"
강제로 만세를 하게 된 상대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직후 뒤꿈치로 바닥을 밀며 달아나려는 그에게 진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나야, 나. 진."
"···어?"
꼬질꼬질한 얼굴이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순간 말문이 막힌 모양이라서 진이 뒷말을 덧붙였다.
"너 이름이, 그 뭐냐······벤이지? 나 모르겠어? 내가 저 바이크에 이름 붙여줬잖아. 만티코어. 원래는 라이언 XR인지 뭐였다매."
생각나는 대로 열심히 떠든 게 효과가 있었을까.
그제야 저항군 엔지니어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어리더라고.
"기, 기억나지."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진은 겨우 진정한 벤에게 전투식량을 내밀었고,
벤은 그걸 걸신들린 사람마냥 처먹었으니.
이윽고 배를 불린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꺼내는 얘기라는 게.
"···그러니까 거점이 무너진 이후에 여기저기 숨어지내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
고개를 끄덕이는 앙상한 얼굴에 진이 말을 이어갔다.
"그건 알겠는데 소식 못 들었어? 타하가 죽었어. TB도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고."
"알아."
"근데 왜 돌아가지 않고. 여기 있어 봐야 시궁창 냄새만 밸 텐데."
"···그 시궁창에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벤이 그렇게 말하며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그리로 눈을 옮긴 진이다.
한 번 파냈다가 다시 덮은 흔적이 역력한 흙바닥이 보인다.
직후 오폐수를 확인한 그가 그냥 시커멓기만 한 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설마 익사체를 다 건져낸 거야?"
"어."
짧은 한마디에 많은 것이 담겨있다.
인간의 비위가 용납하지 않는 그 험악한 시신들을 손수 건져내서 다 파묻기까지.
벤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모멸감을 느꼈을지 진은 쉬이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어설픈 위로 대신, 축 처진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생했다."
"그리고 만티코어는 훔치려고 한 거 아냐. 내 작품이 여기 덜렁 놓여있길래 급한 대로 상태만 확인한 거지. 왜 버리고 갔냐? 키도 꽂아 놓고."
"···뭣?!"
흠칫 놀란 진이 이내 코밑을 쓱 훔쳤다.
"사정이 있었어. 미안."
"네가 주인인데 왜 미안하냐. 다시 찾으러 왔으니 됐다."
그렇게 짤막한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이 눈치껏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만티코어에 올라 시동을 넣던 진이 문뜩 벤을 바라보며 물었다.
"야, 너 덴이랑 무슨 사이냐. 덴, 벤, 덴, 벤. 수염도 북슬북슬한 게 비슷하네."
"내 형인데?"
"···아?"
진이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 동네도 혈육 이름은 비슷하게 짓는 경향이 있네.
덴, 벤.
제키, 제니.
그러고 보니 걔네랑 럼펌펌펌도 가야 하는데.
진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그럼 잘됐네. 네 형한테 연락해서 얼른 합류해. 그리고 반드시 이 몸의 활약상을 듣도록."
그 말을 끝으로 차체를 돌린 진이 속도를 높였다.
부아아아아앙!!
마침내 뮤트타운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
알버스를 구하려고 시작했던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전란도 종식(?)시키고, 굵직한 퀘스트도 해결하고, 인맥도 늘렸다는 사실에 진이 만족했다.
그게 끝이게?
말 그대로 억 소리 나는 보수금까지 챙겼으니-
간만에 기분이 더없이 청량하더라고.
심지어 지금은 하이웨이를 쌩쌩 가로지르는 중이다.
헬멧이 이승을 하직한 탓에, 얼굴로 바람이 고스란히 날아와 꽂혔지만 그게 되려 상쾌한 것이다.
원래 기분이 좋으면 세상이 다 아름답게 보이는 법.
그리하여 진이 속도를 높였다.
가자! 다운타운으로······!!
못 갔다.
휘발유가 다 떨어져서.
"아니. 씹."
연료가 간당간당하면 말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본인부터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냅다 하이웨이로 진입했으면서, 속으로 벤을 욕한 진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바이크가 아예 뻗어버리기 전에 휴게소를 찾았다는 점이랄까?
당연하지만 주유만 하고 바로 출발할 진이 아니다.
눈앞에 음식점이 보이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까.
배는 채우고 다시 출발해야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음식점 입장!
정크푸드를 파는 곳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콜라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려주더라고.
이는 코크 플로트라고 불리는 간식이었으니.
음.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그 맛에 만족한 진이 가볍게 4잔을 더 주문했다.
그러고는 소파 의자에 몸을 파묻고 편안하게 남은 콜라를 꿀꺽꿀꺽 마시는데.
어쩐지 정면이 좀 소란스럽더라고.
슬그머니 눈길을 던지자, 그곳에는 누가 봐도 나 건달이요, 하는 덩치들이 어느 테이블을 에워싸고 있다.
"드라이브 시켜준대도? 내 차 못 봤지? 샤니칼A33. 아주 그냥 좆돼. 내 좆도 좆되고."
난데없는 좆의 향연에 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도대체 저런 좆같은 추파를 받는 대상이 누군가 싶어서.
그러자 보이는 건 오뚝한 콧대를 가진 차가운 인상의 미인.
윤기 있는 흑발이 어깨선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가슴께까지 흘러내렸다.
음. 예쁘긴 하네.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콜라를 꿀꺽거릴 때였다.
귀찮음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여인의 시선이 문뜩 어딘가에 고정되니.
이후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본 덩치들이 반색했다.
"진작 이럴 것이지!"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장신의 여인은 그대로 가게를 가로질러 진의 맞은편 좌석에 엉덩이를 탁 붙일 뿐이었다고
뭐여?
당황한 진이 눈을 끔뻑.
뒤쫓아온 덩치들도 눈을 끔뻑.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흑요석 같은 눈동자 속에 진을 담아낸 여인이 도톰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난 네가 마음에 들어."
< 64화 >
여기서 잠깐!
로스트 시티에서 눈을 뜨기 전의 진은 번호를 따이는 쪽이 아니라 한없이 따는 쪽에 가까웠다.
성공률은 무려 100%!
···이고 싶은 90.
아니 어쩌면 80.
이었다면 좋았을 70이거나 60.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이분법적인 사고로 50.
하지만 아쉽게도 사실은 그것보다 조금 낮은 4할타자.
를 꿈꾸는···
그만, 그만하자.
여하튼 진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
껍데기는 나름 근사하니 개연성이라면 충분했지만.
정작 몸뚱어리 주인은 지난 30년을 외모빨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이렇듯 난데없는 관심에 면역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앞뒤 다 자르고 다짜고짜 네가 마음에 든단다.
'저기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같은 상투적일지언정 듣는 사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인 대시라면.
이쪽은 그야말로 극한의 살초.
나는 말했으니 너는 대답하라는, 허례허식을 배제한 사파스러운 대시는 한순간 진의 뇌를 정지시키기 충분했으니.
멍한 눈이 버퍼링 걸린 듯 끔뻑끔뻑.
그리하여 입을 연 것은, 이 촌극을 지켜보던 건달 중 하나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건데? 둘이 아는 사이야?"
두툼한 손이 탁자를 턱 짚는다.
그러자 손등에 박힌 전갈 문신이 딱!
이게 뭔고 하니.
뮤트타운, 즉 에어리어 49에 자리 잡은 스캐빈저의 일원이란 증표 되시겠다.
보스는 전갈의 하네타.
온갖 독극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용독술의 대가로, 전갈을 특히 좋아해서 미골(尾骨: 꼬리뼈) 끝에 기다란 사이버웨어 의체를 결합한 것으로 유명했다.
근방에선 적수를 찾기 힘든 강자라는 것이 중론.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
원래 보스의 위상이란 부하의 위상인 법이다.
그리하여 대감집 머슴이 눈을 부라렸으니, 얼레?
이 빌어먹을 연놈들이 관심도 없네?
하네타라고 하네타.
전갈의 하네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라 순간 당황한 것도 잠시.
시선이 절로 험악해졌다.
심볼을 무시해?
이는 자신만 무시한 게 아니라,
보스를 무시한 것이고,
나아가 스캐빈저 전체를 무시하는 행동이 아닌가.
해서 사내가 결심을 굳혔다.
나중에 진탕 가지고 놀아야 할 년은 잠시 보류하고.
저 반반한 낯짝부터 조져놓기로.
개 같은 새끼.
얼굴이 잘생겼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이 씨발놈이···감히 내 여자를 넘봐?"
희대의 개소리를 지껄인 놈이 허리춤의 권총을 향해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덜컥 굳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멍청한 표정은 덤이다.
이윽고 떨리는 눈동자가 서서히 아래쪽으로 떨어지자, 그곳에는 손등을 꿰뚫은 단검이.
"아아아악!"
뒤늦게 비명이 터졌다.
꼬챙이 신세가 된 손이 고통으로 쫙 펼쳐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전갈이 뻣뻣하게 죽어가는 모습과도 같더라.
하필 단검이 꽂힌 위치가 전갈 문신의 몸통 쪽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사내는 단검을 빼낼 생각조차 못 했다.
칼날로 손을 찍어버린 장본인이 아직도 손잡이를 꽉 틀어쥐고 있었던 탓에.
"···이. 이! 미친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향해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긴 속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하길.
"방해야."
예상 못 한 상황과 대사에 스캐빈저 일당이 단체로 벙찐 가운데.
당황하긴 진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엇?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자니 눈이 마주친 여인이 빙긋 웃는다.
그때였다.
"야이 개새끼들아······! 멍청하게 보고만, 있지 말고! 시발! 뭐라도 쫌!"
바락바락 악을 지르는 사내의 목소리에 스캐빈저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으니.
"시발놈이···!"
"얼굴만 믿고 설쳐?"
순식간에 너클이며 망치며 나이프 따위를 꺼내 드는데 어째 이상한 것이 그 악의가 오롯이 진을 향하고 있더라고.
"아니. 왜 난데?"
진이 엥? 하고 눈썹을 꿈틀거리는 가운데.
스캐빈저들이 와락 덤벼들었다.
첫 번째는 너클을 낀 놈이었다.
턱을 노리고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무조건 맞춘다고 생각한 공격이었을까.
텁.
제 주먹이 상대의 손바닥에 잡히자 눈을 크게 뜬 놈이다.
"어···?"
멍청한 외마디가 채 끝나기도 우드득 손이 우그러졌다.
마치 압착기에 빨려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끄아아···!"
붙잡힌 손이 너클과 함께 사이좋게 짜부라짐에 놈의 입에서 침이 줄줄 샜다.
"개새끼가!"
그사이 망치를 든 스캐빈저가 팔을 힘껏 내리쳤다.
분명 최선을 다한 공격일 텐데, 진은 어쩐지 우습기만 했다.
저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거운 대형 망치를 휘두르던 수인이 떠올라서.
다음 순간, 머리 뒤에서부터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던 망치가 뜬금없이 신발 밑창에 가로막혔다.
어느새 소파에 허리를 파묻은 진이 다리를 쭉 올려 찬 것이다.
징---
길게 요동치는 망치.
미처 해갈되지 못한 충격은 고스란히 손잡이를 움켜쥔 손으로 전도됐다.
"악!"
스캐빈저가 고통스런 얼굴로 망치에서 손을 놓쳤고.
그사이 진이 탁자에서 재떨이를 낚아채 집어던졌다.
쩍!
고개가 뒤로 젖혀진 놈이 그대로 뒤통수로 바닥을 들이받는 가운데.
나이프를 든 마지막 스캐빈저가 덤벼들었다.
"시, 시발!"
에라 모르겠다 내지르는 칼을 고개만 젖혀 피한 진이 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빠각, 하는 통렬한 격파음.
직후 수수깡처럼 부러진 다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진 스캐번저가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는 모습에, 손등을 꿰뚫린 사내가 반대쪽 손으로 허리춤의 권총을 잡았다.
하지만 놈은 뽑지 못했다.
그전에 진과 눈이 마주쳤으니까.
"···"
덤덤한 잿빛 시선 속에서 그는 어떤 선을 보았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선.
동시에 깨닫는다.
총을 뽑으면 분명 저길 넘어서게 된다고.
"내, 내가···우리가 잘못했다. 조용히 사라질 테니 용서해 줘."
팔을 늘어뜨리는 그의 모습에 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쭈, 감이 좋은데.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라, 나름 손속에 사정을 둔 그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으니, 만약에 상대가 정신 못 차리고 계속 덤벼든다면 그냥 죽여야겠다고.
나름의 기준을 딱 정해놓은 상태였는데, 저 눈치 빠른 녀석이 그 선을 넘지 않았다.
그래, 사람은 눈치가 있어야지.
고개를 끄덕거린 진이 눈길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렇다는데?"
"······"
잠시 말이 없던 여인이 단검을 쥔 손을 위로 들었다.
피 묻은 칼날이 쑥 빠짐에, 핏물이 왈칵 솟구치는 손등을 감싼 사내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가자. 막내 챙겨."
그가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자리를 뜨자.
다리가 부러진 스캐빈저의 양쪽 겨드랑이에 머리를 끼운 다른 놈들이 죽을상을 하고 가게를 벗어난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이 문뜩 억울해졌다.
"···도대체 왜 날 공격한 거지?"
그때였다.
"여기."
말없이 싸움을 살피던 식당 주인이 코크 플로트 4잔을 탁자에 내려두고 가더라고.
아 맞다. 눈을 크게 뜬 진이 동봉된 빨대로 콜라를 쭉 빨았다.
그러고는 뒷말을 덧붙이길.
"다음부턴 차라리 도와달라고 해. 네가 마음에 드네, 마네 헛소리를 하니까 쟤네가 더 지랄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칼은······됐다. 말을 말자."
한숨을 푹 내쉬는 그의 모습에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난 정말 네가 마음에 들어. 계속 찾았는걸."
"아이 진짜. 또 이러네."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가 아픈 앤가?
핏줄이 옅게 비칠 만큼 하얀 피부며, 자기주장 강한 이목구비에 가슴께까지 떨어지는 차분한 흑발까지,
보기 드물게 예쁜 외모긴 한데.
그것만 빼면 하는 짓이 영······.
덩치들을 줄줄이 달고 와서는 갑자기 마음에 든다고 호감을 표시하질 않나.
치근덕거리는 양아치의 손에 대뜸 칼을 꽂지 않나.
나사가 빠져도 제대로 빠진 모양새라서.
얼굴이 예뻐도 속이 곪은 애를 만나면 인생 조진다고 저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발동한 진이다.
물론 제멋대로 측은함까지 장전해 버렸지만.
"됐고. 콜라 좋아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잔 하나를 쭉 내민 진이 거기에 빨대까지 탁 꽂아서는 손날을 세웠다.
"마셔봐. 평범한 콜라에 비하면 좀 슴슴하긴 한데 아이스크림이랑 섞이니까 맛있더라."
그러자 새카만 눈을 깜빡거리던 여인이 이내 빨대를 쫍.
고풍스런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나 썰 것 같은 외모로 생각보다 꼴깍꼴깍 잘 마시더라고.
그 모습에 흡족해진 진이 주인에게 햄버거 10개를 추가 주문하고 고개를 돌릴 때였다.
"네가 궁금해."
어느새 절반 가까이 줄어든 콜라를 내려놓은 여인이 말했다.
"이름이 뭐지?"
집요함은 인정해야겠네.
진이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진 에버나이트."
"···진 에버나이트."
곱씹듯이 이름을 되뇐 여인이 어느 순간 빙그레 뒷말을 덧붙였다.
"마음에 들어."
"그러셔?"
이쯤 되니 진도 그러려니 했다.
처음에야 흠칫 놀랐을 뿐. 맥락도 없는 호감 표시는 더 이상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해서.
다만 상태가 이상한 건 확실한 것 같으니, 밥이라도 든든히 먹여서 보내야겠다 생각했을 뿐이다.
"자 편안하게 골라 잡숴. 부족하면 더 시키고."
어느새 식탁을 가득 채운 정크 푸드를 가리킨 진이 당장 본인부터 열정적으로 식사에 돌입했다.
일찍이 노점에서 왕꼬치 20개를 흡입하고 행인들을 끌어모은 전적이 있는 그다.
뭐든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식욕을 덩달아 증진시키는 효과를 일으키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 효과가 빛을 본 걸까?
여인이 매끈한 손을 뻗어 햄버거를 하나 잡았다.
그러고는 깨작거리는 법 없이 제법 그럴싸하게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으니.
이내 우물거리는 입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디서 오는 길이야?"
"나? 뮤트타운."
"거기서 뭘 했는데."
"말해도 못 믿을걸?"
"궁금해."
"나중에 뉴스로 찾아보려무나."
진이 그렇게 말하며 습관적으로 옆자리에 놔둔 토트백을 만지작거렸다.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안에 담긴 금액을 떠올리면 자꾸만 손길이 가더라고.
그사이 여인의 시선이 가방에 닿는 것을 느낀 진이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는 넌 어디서 왔는데?"
"12번 구역."
"으음?"
진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이게 흰소릴 하네.
그도 그럴 게, 10번대 구역이라면 로스트 시티 내에서 별천지에 속하는 곳이 아닌가.
초거대기업, 일명 메가코프가 하늘 가까이에 산맥을 이뤘으니 그 모습이 마치 천구를 받드는 거인신처럼 보인다고 했던가?
참고로 그 안쪽으로는 시정부와 7가문의 영역이다.
뭐든 간에 일반인들에겐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장소.
적어도 49번 구역 인근 휴게소 식당에서 언급될 곳은 아니다.
해서 진은 여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물론 대놓고 무시하지도 않았지만.
"좋은 곳에서 왔네."
식사가 이어졌다.
그동안 여인은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고.
무슨 대답이 돌아오든 그 끝에는 네가 마음에 든다는 미소로 귀결을 지었다.
그 패턴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진 역시 건성건성 질문을 해치우며, 식사만 열심히 이어갈 뿐이었다.
"어떻게 그만큼 강해진 거지?"
"그냥 열심히 굴렀어."
"대단한데."
"암암. 내가 좀 많이 대단하긴 하지."
이런 대화가 몇 번이 더 오갔을까.
어느새 식사를 마친 진이 불룩 튀어나온 배를 팡팡 두드렸다.
"어으. 잘 먹었다."
그러고는 꺼억- 트림을 길게 내뿜으며 말하길.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다."
콧잔등을 찡긋거린 진이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때까지도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진 에버나이트. 우린 다시 보게 될 거야."
"잘 살아. 그리고 다시 보는 건 좀 고려해보자."
옅은 미소를 지은 진이 그대로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이후 바이크 트렁크에 토트백을 조심스럽게 넣은 그가 시동을 넣고 하이웨이에 몸을 실었다.
보는 사람이 머쓱해질 정도로 한 치의 미련도 없는 모습.
자그마한 점으로 멀어지는 그를 창가 너머로 가만히 지켜보던 여인이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그때보다 훨씬, 아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구나. 고작 몇 달 만에 저런 성장이라니. 정말 마나의 축복이라도 받은 걸까?"
그녀가 고운 손끝을 창가에 짚었다.
"···가지고 싶어. 내것으로 만들고 싶어."
장밋빛 도톰한 입술 사이로 잔뜩 뒤틀린 열망이 뚝뚝 끊어졌다.
"진. 에. 버. 나. 이. 트."
곧이어 떨리는 손이 핏기 없는 주먹을 쥐었다.
"안 돼. 아직은 안 돼. 조금, 조금 더 무르익은 뒤에······"
"······"
그때 몸을 부르르 떠는 여인을 말없이 지켜보던 가게 주인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개조된 차량이 하나둘 휴게소에 몰려들었으니.
그 안에서 내린 이들이 순식간에 식당 안으로 우르르 밀어닥쳤다.
모두가 몸 이곳저곳에 전갈 문신을 박았다.
그리고 그건 가슴팍을 웃옷으로 가린 식당 주인도 마찬가지라.
그가 손에 붕대를 친친 감은 사내를 향해 말했다.
"안심해 그 새낀 갔으니까."
"확실해?"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주인을 보며 안심한 사내가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봤다.
여전히 창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너희들에겐 관심도 없다는 것처럼.
"씨발년. 팔자가 좋아?"
놈이 목을 뚝뚝 꺾으며 덧붙였다.
"우릴 다 상대하려면 몸에 있는 구멍을 다 써도 밤이 부족할 텐데."
그 순간 여인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얼굴에 새삼 감탄한 것도 잠시.
왠지 어두워진 듯한 시야에 스캐빈저들이 저마다 눈을 비비적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짙은 어둠이 몰려와 사방을 무겁게 짓눌렀다.
조명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전등을 켤 정도로 늦은 시간이 아니었기에.
"뭐, 뭐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스캐빈저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헛숨을 들이키는 사이.
누군가 손끝을 뻗었다.
"저기···!"
자연스럽게 모두의 눈동자가 그리로 가 닿았다.
그리고 보았다.
세상의 빛을 삼키는 듯한 어둠 속에서 허공에 손을 뻗는 여인의 모습을.
곧이어 그녀가 무언가를 잡아 얼굴로 가져갔다.
그것은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은빛 가면이었으니.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스캐빈저 하나가 후다닥 자리를 뜨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짓뭉갰다.
꽈직!
기괴하게 꺾인 팔다리를 제외하면 한줌의 핏물만 남아버린 시체에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리는 가면 너머로 중성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하네타가 부하들 때문에 죽겠군."
다음 순간 여인의 등 뒤로 새카만 날개 한 쌍이 활짝 펼쳐졌다.
태양을 가리는 불온한 날갯짓.
종말을 노래하는 검은새.
크로우.
동시에 암흑이 찾아왔다.
< 65화 >
진이 다운타운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도시의 풍경이 그를 반겼다.
시들어가는 꽃처럼 허무하게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그늘로 가득 찬 좁은 골목길.
세상에 대한 분노를 형상화한 듯한 그래피티와 그 위를 뒤덮은 커다란 성기 모양의 낙서.
반달리즘을 욕보이는 또 다른 반달리즘.
그 지저분한 벽면을 본체만체 지나치는 행인들의 눈빛 속엔 쓸쓸함이 담겨있으니.
그들을 밝히는 거리의 빛은 차갑게 요란할 뿐이라서.
따스함을 갈구하며 올려다본 붉은 노을은 어째서 위로가 아닌 외로움을 선물하는 건지, 왜 간신히 묻어둔 기억을 되살리는 건지.
무관심하게 서로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터였다.
그들에게 이 좁다란 하늘은 태어나서부터 평생을 함께한 세상의 천장에 불과했으니까.
그저.
이 땅에 기원을 두지 않은 이방인만이 낡은 모텔 창가에 앉아 어둠 속에 잠겨가는 풍경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도시에 완연한 밤이 찾아왔을 때.
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 억지로 잠에 들었다.
그날 그는 꿈을 꾸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
진은 며칠 동안 모텔에서 두문불출했다.
우울증이 도지기라도 했냐면 그건 아니었다.
이따금 검은 파도가 종아리를 찰싹찰싹 때리는 일은 있었어도 거기에 삼켜지는 일은 눈에 띄게 줄었기에.
뭐 아무튼.
본론부터 말하면 진은 수련 중이다.
아니! 연못에서 자라는 하얀 꽃 말고.
닦을 수(修)에 단련할 련(鍊)자를 쓰는 그거.
수련이라니.
세상에 이보다 진과 안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이레귤러라 숨만 쉬어도(는 아니다) 몸뚱어리가 조금씩 강해지고.
경험치만 갖춰지면 어떤 스킬이든 가장 완벽한 상태로 익힐 수 있다.
요컨대 남들은 몇 년씩, 아니? 몇십 년씩 걸리는 과정을 훅훅 넘어갈 수 있다는 말씀.
그런 주제에 팔자에도 없는 수련이 웬 말이냐면.
이게 다 마음 한편에 남은 찝찝함 때문이다.
그 찝찝함의 출처란,
타하를 쓰러뜨리던 순간.
내면에서 치솟았던 불길이었으니.
······그건 대체 뭐였지.
천장을 올려다보는 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짱을 낀 채, 구부려 세운 오른쪽 무릎에 왼발을 탁 얹었다.
그러고는 발목을 까딱까딱.
뭘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편히 누워있는 자세 쯤으로 보일지 몰라도, 진에게는 이게 다 수련의 일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단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영역을 저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찰'하는 중이었으니까.
"흐으음······."
평소에는 꿈쩍도 안 하는 마음속 핫팩이 그때는 어떻게 활활 타올랐을까?
공황이 온 것도 아니었는데.
마나를 한계까지 쥐어짜서?
아니야. 어제 확인해 봤잖아. 그냥 힘들기만 했지.
그럼 뭘까?
도대체 뭐냐고오오.
"아오."
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쓸어내렸다.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간질간질한 게.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아주 미칠 지경이었다.
코가 시큰시큰한 게 조금만 더 자극하면 시원하게 재채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조금이 부족해서 계속 콧잔등만 움찔거리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하며,
알은 새의 세계라고.
어떤 위대한 문학가가 말했던가?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던 그 말과 탈각이 다르지 않다.
탈각(脫却).
한계를 깨부수고 그 너머로 나아가는 순간.
일찍이 이 과정을 경험한, 소위 2위계 이상의 존재들은 하나같은 제 손으로 벽을 짚은 이들이었다.
더듬더듬 한계를 마주하고,
그에 굴복하지 않고 힘껏 팔다리를 휘두르고,
마침내 균열이 번진 벽 너머로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기까지.
이 세계의 강자라면, 응당 거쳐야 할 과정을 상태창의 힘을 빌려 몽땅 다 건너뛴 진이다.
해서 그 부작용이 이 순간 고뇌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그 '벽'이란 것이 인지하기도 전에 우르르 무너졌는데.
그러니 뒤늦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경계를 왔다 갔다 헤맬 수밖엔.
덕분에 진은 요즘 하루하루가 답답해 죽을 맛이었지만, 세상사가 원래 그런 것이다.
자그마한 깨달음, 그 아련한 깨우침이 쉬운 듯 가장 어려운 법이라서.
***
진이 모텔을 나선 건 무려 일주일만이었다.
그사이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면 참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었으니.
솔직히 말하면 가만히 앉아 머리 싸맨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더라.
성미가 안 맞는다는 게 정확했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머리를 썼다고!
위풍당당하게 자기 객관화를 마친 진이다.
부족한 게 있다면 몸으로 부딪쳐가면 된다는 결심은 덤이었으니.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활동 개시!
기분도 전환할 겸 간만에 쇼핑부터 나섰다.
처음은 옷가게.
"제발! 제발! 다른 옷 좀 사! 네 몸뚱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어?"
주인이 절규하든 말든 소용없다.
언제나처럼 항공 점퍼, 티셔츠, 청바지.
그리고 가죽 부츠까지.
풀 착장을 마친 진이 값을 치렀다.
"이게 내 교복이야. 좀 익숙해져라, 너도."
이후 오전 장사만 하는 핫도그 노점에서 배도 채우고 단말기도 하나 구매한 그다.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쳐 그 안에 적힌 번호를 저장하고 나니, 문뜩 떠오르는 알버스의 말.
'제발 백업 좀 해라.'
그리하여 진이 포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다 따로 적어두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기억하는 연락처 중 하나다.
나머지는 칼리파 그리고 제니 정도?
제키는 좀 더 분발할 필요가···
어, 받았네.
"포우?"
[진? 진입니까?]
"어 나야.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저번에 보내준 솔로 인트라넷 주소 좀 문자로 보내줄래?"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보다 괜찮으신 겁니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다급하다.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괜찮냐는 말을 두어 번 더 물어볼 정도로.
침착함을 잃은 포우라. 이거 귀한데?
괜히 흥겨워진 진이 킥킥거리며 답했다.
"괜찮으니까 전화했지. 조만간 찾아가서 설명해 줄게. 아, 그리고 부탁할 게 하나 더 있는데."
[말씀하시죠.]
"어쩌다 보니까 내가 1억 크레딧 정도가 생겼거든? 그래서 집을 좀 구해볼까 하는데. 자그마한 공간이라도 좋으니까 혹시 알아봐 줄 수 있어? 내가 이쪽으로는 아는 게 없어서."
[물론입니다. 맡겨주시죠.]
"진짜 너밖에 없다."
진이 단말기를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꾸벅 숙이는 가운데.
포우의 말이 이어졌다.
[진, 괜찮으시다면 이 번호. 점장님께 알려드려도 되겠습니까?]
"칼리파한테? 당연히 되긴 하는데···뭐지? 이 섬뜩한 기분은? 혹시 걔 화났어?"
[3주 가까이 연락이 끊기셨으니까요.]
"음. 조졌네. 일단 그렇게 해줘."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는 걸로 하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동시에 도착한 메시지.
진이 자연스럽게 URL 주소를 클릭했다.
순식간에 단말기에 앱 하나가 설치됐으니, 이전의 경험을 살려 프로필을 딸칵.
"···어우 뭐가 또 이렇게."
끝도 없이 늘어선 메시지에 순간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안 읽은 페이지 수가 무려 10장.
한 페이지에 출력되는 메시지가 30개니, 못해도 300개가 넘는다는 소린데.
그새 이렇게 쌓였다고?
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장 윗줄의 메시지를 엄지로 꾹 눌렀다.
[원더입니다. 회신 기다리겠습니다.]
[중복된 메시지입니다(87). 해당 사용자를 차단하시겠습니까? YES / NO]
"에?"
R&D가 아닌 원더 개인에게 온 메시지.
무려 87번이나 같은 내용을 전송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러잖아도 원더에게는 한번 연락해야겠다 생각했던 진이다.
곧바로 단말기를 두드렸다.
[이제 봤어. 미안해.]
그러자 3초도 지나지 않아 프로필 계정을 통해 누군가 통화를 걸더라고.
"여보세요?"
[진이십니까?]
단말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에 진이 고개를 끄덕.
"맞아. 원더지?"
[······살아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이어서 들려오는 안도의 한숨에 진이 반성했다.
내가 주변 사람들한테 좀 소홀하긴 했구나. 하고.
"미안. 단말기가 고장 났었어."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파우스트를 맨몸으로 받아내셨으니까요.]
"다 보고 있었구나?"
바디캠이라면 진도 이미 확인했던 바다.
물론 전투 중에는 경황이 없어 까맣게 잊었지만.
"녹화가 잘 됐을지 모르겠네."
[완벽합니다. 물론 타하의 최후가 담기지 못한 건 아쉬운 일입니다만. 그게 아니더라도 제가 필요한 장면은 이미 차고 넘치게 확보한 상태라서요.]
원더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말투에서부터 들뜬 티가 역력하다.
어지간히 좋은가 보네.
진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일 때였다.
[잠시 안내할 사항이 있는데 통화 가능하십니까?]
"어 괜찮아. 말해."
원더의 물음에 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리니.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러했다.
현재 뮤트타운은 특정 스쿼드에 대한 관심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뚫은 상황이라고 말이다.
일명 '최후의 결사대'
그 이름부터 심상찮은 이 스쿼드는 분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전력으로, TB의 본거지로 돌진.
그들의 전력 대부분을 무력화했을 뿐 아니라 타하를 살해하기 이르렀으니, 사실상 군벌 세력을 토벌한 일등 공신이라.
도대체 그들이 누구냐는 말이 끊이질 않는다고.
그리고 여기.
해당 스쿼드의 활약상이 고스란히 담긴 녹화본을 가진 원더가 있었다.
지금껏 조용히 때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지금이라면 편집본을 공개하기 딱 좋은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지체되면 도리어 관심도가 떨어질 테니까요. 해서 금일 18시에 영상을 업로드할 계획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마음대로 해.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진의 덤덤한 대답에 원더가 덧붙였다.
[편집본을 미리 보시겠습니까? 요청 사항이 있으시다면 충분히 반영하겠습니다.]
"됐어. 난 그런 거 몰라."
진이 눈앞에 원더가 있는 것처럼 손사래 쳤다.
내가 유튜버도 아니고 무슨.
어련히 알아서 잘해줬겠지.
그리하여 진이 슬슬 통화를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인사가 많이 늦었네. 덕분에 살았어. 나도 내 친구들도. 진짜 고맙다. 이 은혜 안 잊을게."
[별말씀을. 전부 서로를 위한 일 아니었겠습니까.]
"그래도."
[전해드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진.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들어가."
그렇게 두 번째 통화까지 마친 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적으로 나누는 대화는, 아무리 짧아도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정신적으로 피로하니까 자연스럽게 단 게 땡긴다.
그러고 보니 칼리파표 쿠키를 안 먹은지도 오래됐지.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 진이 자연스럽게 에넥도트를 향해 만티코어를 몰았다.
솔직히 걱정도 되더라.
칼리파는 소속 솔로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링커이니만큼, 3주간 연락이 두절된 걸로 엄청나게 잔소리를 해댈 터.
선물이라도 사가야 하나?
면죄부를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에넥도트가 보이는 골목이더라.
아무래도 선물은 다음에 사줘야겠다 생각한 진이 그대로 가게를 향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진! 진!"
억지로 목소리를 낮춘 탓에 쇳소리처럼 느껴지는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엥?
가로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면상이?
근데 영 낯설지가 않다.
배배 꼬인 레게머리가 인상적인 흑인.
그는 과거 진에게 명함을 내밀었던 링커였으므로.
이름이 드안드레였지? 아마.
칼리파와 대판 싸웠던 녀석이라 기억한다.
소속 솔로들을 갈아 넣기로 유명하다고 했던가.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쉿! 쉿! 쉿!"
두툼한 손가락을 입술에 딱 붙인 드안드레가 다급하게 손짓했다.
"이리로!"
왜 저런데?
진이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저렇게 간절하게 부르는데 못 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무슨 일인데 그래?"
"왔구나."
가로등 뒤로 걸어온 진을 향해 드안드레가 반색했다.
그에 크롬으로 도금한 앞니가 햇빛에 반짝반짝.
"혹시 나 기억해? 예전에···"
"알아. 드안드레 아니야?"
"오 세상에."
놀란 얼굴로 이마에 손을 턱 짚은 그가 이윽고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이러면 얘기가 빠르지."
놈이 그렇게 말하며 에넥도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말하길.
"진, 너 나랑 의뢰 하나만 하자. 진짜 끝내주는 일이야. 실망 안 시킬게. 정말. 진심. 죽은 우리 엄마를 걸고."
그에 진이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렸다.
"아니 그건 왜 거는 건데."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저렇게까지 말하면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잖아.
< 66화 >
진의 고향에는 어머니의 명예를 걸고 결백을 증명하는 패륜적인 인증법이 있다.
그만큼 내 말은 진실된 것이니 제발 좀 믿어달라는 뜻.
물론 보는 사람 입장에선 심히 불쾌할 수도 있다.
가만히 있던 어머니는 무슨 죄야, 라고.
그렇지만 진은 옅게 헛웃음을 쳤을 뿐. 평소처럼 속으로 삼강오륜 들먹여가며 젊은 꼰대짓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드안드레의 말이 딱 초중고 시절.
그러니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기에.
그 시절 남자애들은 조금이라도 억울한 상황에 직면했다 하면 일단 주먹 쥔 손에서 엄지와 소지만 쭉 펼쳐 각각 혓바닥과 이마에 지장을 찍고 보지 않았던가.
자랑은 아니지만 그땐 그랬다고.
생각해 보면 옆나라에는 걸핏하면 지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어버리는 소년 탐정이 있었으니, 결은 다를지언정 혈육의 명예와 본인의 의지를 결부시킨단 점에서 만국 공통의 철없는 정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뭐 아무튼.
본의 아니게 추억에 잠긴 진이 입꼬리를 올리고 있자, 드안드레 입장에선 대화가 잘 풀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때 구미가 당겨?"
"궁금은 하네."
"좋아. 그럼 자세한 얘기는 안에서 하자. 따라와."
드안드레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휙 돌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골목을 나아가니,
그 떡대 좋은 뒷모습에 진이 고개를 갸우뚱.
뒤에서 야야야, 하고 불러세웠더란다.
"에넥도트에서 안 하고? 여기 코앞인데."
"뭐? 저길 왜? 나도 사무실 있어. 술도 있고!"
어딘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한 모습.
에넥도트에서 얘기하자는 게 그렇게 예민하게 굴 이야긴가?
진이 눈을 끔뻑이며 덧붙였다.
"난 칼리파가 만든 쿠키 먹으려고 온 건데?"
"씻팔, 그깟 쿠키. 나도 줄 수 있어! 그것도 존나 많이. 아주 산처럼 쌓아줄 테니까 그냥 가자."
음. 저렇게까지 말하면 뭐라 할 말이 없다.
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드안드레를 뒤따랐다.
그리하여 정크 프라자 5단지!
에넥도트가 있는 2단지와는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진 장소.
드안드레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닭장 건물이라.
그 흔한 엘리베이터조차 없어 계단을 올라 도착한 3층 오른쪽 복도 끝.
벽에 걸린 자그마한 현판이 두 사람을 반겼으니.
[드안드레 병신 링커 사무소]
"······?"
진이 제 눈을 의심했다.
병신?
놀랍게도 진짜 저렇게 적혀있다.
[드안드레] 와 [링커] 두 글자 사이에 누군가 칼자국을 새겨놓은 것이다.
취소선이랍시고 중간에 찍찍 검은색 마커를 그어놔서 더 낯 뜨겁다.
그뿐이랴.
살짝 기울어 더 가슴 아픈 현판은 동그랗게 그을린 담배빵으로 도배가 되어 있더라고.
이 정도면 주변에 원한이라도 산 거 아니야?
진이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정작 드안드레는 덤덤하게 문을 열었다.
"나 왔다."
그러자 들려오는 우렁찬 외침.
"오셨습니까, 형님!"
어디 삼류 건달 영화에서나 볼 법한 대사와 함께 90도로 허리를 숙인 사내가 보인다.
"그래. 그래."
드안드레가 손을 휘휘 내젓자, 그제야 상체를 세우는 사내.
근데 다시 보니 사람이 아니더라고.
인공 피부를 덧씌우지 않은 강철의 이목구비가 진을 향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어. 안녕."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주자, 안드로이드가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원래 저래?"
"몰라. 최근에 인격 데이터 업데이트를 했는데 오류가 있었는지 저 꼬라지가 났어."
드안드레가 그렇게 대답하며 소파에 엉덩이를 깔아뭉갰다.
"편히 앉아."
금붙이로 장식한 손끝을 따라 맞은편에 자릴 잡으며 진이 주변을 쓱 훑었다.
반전은 없더라.
안팎으로 낡은, 지저분한 사무실 안으로는 퀴퀴한 곰팡내가 진동할 뿐이라서.
노후화된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잔뜩 겉멋을 부린 드안드레가 입을 열었다.
"쿠키 사오라 할까?"
"됐어. 그냥 하던 얘기나 계속해."
진이 뚱하게 대답했다.
끝내주는 의뢰라고 호들갑을 떨기에 슬쩍 기대했더니, 기대 이하의 사무실을 보고 김이 팍 새버렸다.
에잉 쯧쯧. 텄네. 텄어.
그 떨떠름한 기색을 읽었을까.
드안드레가 흠칫거리며 말했다.
"이봐, 친구. 나 아직 말도 안 꺼냈어. 다 들은 뒤에 실망해도 안 늦는다고."
그에 진이 어디 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거렸고.
드안드레가 소파 뒤로 고개를 돌리며 손뼉을 짝짝 쳤다.
"후커! 자료!"
"넵, 형님!"
각 잡힌 대답과 함께 안드로이드가 파일철을 공손히 드안드레의 손에 쥐어줬고-
드안드레는 그걸 또 진에게 쭉 내밀었다.
"읽어봐."
그러자 보이는 제목.
[Top Secret]
"···뭐지? 이 꼴값은?"
"꼬, 꼴값이라니. 그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고."
"그러셔?"
진이 헹 콧방귀를 뀌며 파일철을 펼쳤다.
역시 3줄 요약은 아니구나.
마이너스 10점.
음 그래도 정리를 제법···.
깔끔한 문단 구분과 적절한 사진 배치로 가독성을 확보한 자료에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순간 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직후 잿빛 눈동자가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니.
이를 바라보는 드안드레의 낯빛에 긴장이 감돌았다.
마치 귀빈에게 음식을 대접한 셰프의 모습이 이러할까.
맛이 있다, 없다 말이라도 해주면 참 좋으련만.
가만히 우물우물 음식을 씹기만 하시니,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도통 속내를 유추할 길이 없어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드안드레가 마른침을 꼴깍 삼킬 때였다.
마침내 숟가락을 내려놓은 귀빈이 입을 떼길.
"···지하 유적?"
그에 드안드레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끝내주지?"
"흐으음."
진이 콧김을 내뿜었다.
흠이 아니고 흐음도 아니고 흐으음이다.
뭔가 썩 내키지 않는 듯한 애매한 반응에 드안드레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잠시만······"
진이 뒷말을 흐린다.
그 미적지근한 태도에 드안드레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그는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진이 짜증을 참고 있다는 것을
「파묻힌 것」──────────────
지하 유적에서 ???을 찾으시오.
-의뢰 거절 시 실패
-보류가 불가능한 퀘스트입니다.
*보상 퍽 XP 14,000
*(알 수 없음)이 진행됩니다.
────────────────────
갑작스런 상태창의 등장이었다.
파일철을 펼치고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까꿍! 하고 나타났으니, 그 네모난 상판대기를 노려보느라 정작 자료는 몇 글자 읽어보지도 못한 진이었다.
이런 게 불쾌하다는 거다.
마치 행동 양식을 강제하는 듯한 등장.
아니, 설명을 들은 뒤에 나타나도 되는 거잖아.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면 뭐 어쩌라고?
미간에 혈관이 불룩 솟구쳤다.
어차피 하게 될 일이라도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걸 지키지 않으니 화가 치솟을 수밖엔.
하여간 개념도 없고 눈치도 더럽게 없는 새끼.
이렇듯 속에서는 울화통이 터진 진이었지만, 기분이 태도가 되어선 안 된다는 가르침에 의거. 드안드레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미안한데 말로 설명 해줄 수 있을까?"
"아. 물론이지."
드안드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태 자료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갑자기 다시 설명해달라는 게 선뜻 이해되진 않았지만, 거절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은 법이라서.
기왕 이렇게 된 제대로 된 브리핑이나 해보자 결심한 그다.
"로스트 시티의 지하도에 대해서 알고 있어?"
"아니?"
"뭐 그럴 만하지. 후커? 영상 띄워."
드안드레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에 후커라 불린 안드로이드의 기계안에서 빛이 찡-
벽에 네모반듯한 형태의 이미지를 투사했다.
"오우."
빔 프로젝터가 따로 없는 모습에 진이 휘파람을 부는 가운데.
어느새 벽에는 동심원 형태의 지도가 보였으니,
그 아래로 빨간 실선이 복잡한 듯 정교하게 쭉쭉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로스트 시티의 지하노선이야. 일명 메트로 웹. 존나 쾌적하다곤 하는데 우리랑은 영 인연이 없는 물건이지. 너도 다운타운 주민이라 잘 알겠지만 40번대 구역에는 지하도가 없거든."
"왜?"
"전쟁 때문이지. 메가코프와 가문에서 발발한 전대미문의 혈투. 당연하게도 절대 승자가 나와선 안 되는 싸움이었어. 시정부가 하던 일 죄다 접고 중재에 나서기 급급했을 만큼."
그에 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뮤트타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TB가 고작 1년 만에 얼마나 성장했던가.
메가코프와 가문의 전쟁?
자칫 잘못하면 도시의 균형이 붕괴할 대사건인즉.
시정부 입장에서 40번대 구역에서 손을 뗀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덕분에 한창 공사 중이던 지하도는 개발 중지.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방치된 거지."
드안드레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이후 장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그가 볼이 홀쭉하게 연기를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을 거 같아? 버려진 지하도 말이야."
"누군가 자리를 잡지 않았을까? 유령 도시가 될 거라 생각했던 40번대 구역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처럼."
"정확해. 날카로운데?"
드안드레가 박수를 짝짝.
그 뒤에서 후커도 박수를 짝짝.
진은 어깨를 으쓱.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내가 좀 날카로운 편이긴 해."
별거 아닌 추측에도 맛깔나는 리액션이 돌아오니 엣헴 신이 난 진이다.
물론 이는 진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한 드안드레의 어화둥둥 처세술이었으니, 엄청난 기대주로 불리는 솔로와 인연을 맺고 싶다는 절실함의 발로라 볼 수 있겠다.
괜히 2주 넘게 에넥도트 앞에서 잠복하며 눈이 빠져라 진을 기다린 게 아니란 소리다.
"네 말대로 그 땅굴엔 범죄자 놈들이 꽉꽉 들어찼어. 두더지 같은 새끼들이 거길 저만의 왕국으로 삼은 거지. 언더하트라는 이름으로."
어느새 얘기에 몰입한 진이 뒷말을 재촉했다.
"···언더하트. 그래서?"
"막말로 모가지에 현상금 걸린 새끼들이 득실거리는 땅굴에 누가 관심을 가지겠냐? 여태까진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느낌으로 반쯤 마굴 취급을 받았는데···최근에 일이 하나 터졌어."
거기까지 말한 드안드레가 주변을 쓱 둘러봤다.
그러고는 누가 듣기라도 하는 양 목소리를 낮추길.
"언더하트 놈들이 땅굴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다는 거야. 근데 그게 단순히 인재가 아니었던 거지. 누가 알았겠냐고. 붕괴된 지반 아래에 지하 유적이 파묻혀 있을 거라고."
"···유적?"
"그래. 심지어 그 양식이 빛과 장미의 시대라더라. 생각해 봐. 족히 천 년은 된 건축물이라고. 그 안에 무슨 보물이 있을지 상상이 가?"
"오오."
진이 한껏 집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연스럽게 팔짱이 껴지더라고.
"···잠깐만. 그런 내부 정보를 네가 어떻게 알아?"
"언터하트의 크루원 중에 친분이 있는 놈이 있어. 헤나토라고, 그 새끼가 땅굴살이를 하기 전부터 알던 사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연락을 주고받은 지 벌써 햇수로 4년이 넘었지. 좆같은 놈이긴 한데 그래도 물어다 주는 정보는 믿을 만해."
드안드레가 그렇게 말하며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더 이상 이건 나만의 비밀 같은 게 아니야.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소문이라면 이미 알음알음 퍼지고 있다고. 최근에는 몇몇 용병들이 팀을 이뤄서 땅굴에 투입됐다는 소문도-"
"어어? 잠깐."
진이 손바닥을 척 세웠다.
그러고는 검지만 빼고 나머지 손가락을 다 접은 뒤 책상 위의 [Top Secret]를 가리키며 말했다.
"뭔가 이상한데? 이건 허세라고 쳐도. 요새는 남들도 아는 정보에 끝내준다는 수식어를 붙이던가? 너 설마 이렇게 어머니를······"
동시에 드안드레가 손사래쳤다.
"오해야! 선점을 못 해서 그렇지. 내가 처음 이 정보를 낚은 게 거진 3주 전이라고!"
"음? 3주 전이면···"
"그래. 너랑 나랑 처음 만났던 바로 그날. 자존심 굽혀가며 칼리파한테 협업을 제안했는데, 그 계집애가 날 못 믿겠다고 퇴짜를 놨다고! 근데 봐. 사실이었잖아! 으아아아!"
개탄스럽다는 듯 가슴을 팡팡 두드린 드안드레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소문이 좀 났으면 어때? 아직은 고급 맞아. 충분히 거금 받고 팔만한 정보라고."
"그래?"
진이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끄는 링커를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근데 왜 하필 난데. 시간이 3주나 있었다며. 너랑 같이 일하는 솔로들은 어따 팔아먹고?"
"그야 걔네는 이만한 의뢰를 맡기엔 너무 좆···밥이 아니고. 어. 음. 그래!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어. 아무튼 그런···"
좆밥? 걔네?
저렴한 어휘 선택도 선택이지만, 뭔가 묘하게 들리는 문장을 곱씹던 진이 물었다.
"너 설마 3레벨 이상의 솔로랑 계약을 못 했어?"
동시에 드안드레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총알에 심장을 관통당한 듯한 모습.
후커가 비명을 질렀다.
"형님!!!"
후다닥 달려들어 축 늘어진 어깨를 흔드는데, 이걸 웃어야 해 울어야 해.
진이 자못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한 명 있어."
마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처럼 힘겹게 눈꺼풀을 든 드안드레가 말했다.
"아니. '한 명밖에' 없지. 그마저 내 말은 잘 듣지도 않아. 씨이이부랄넘."
구수한 욕설 뒤로 넋두리가 이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난 그저 의뢰를 빨리빨리 처리하는 링커로 차별점을 두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싼마이 새끼들만 잔뜩 몰려들어서는···허구한 날 형님! 형님! 내가 링커지. 양아치 건달이야? 어?"
"형님···!"
"닥쳐, 새꺄! 너는 따라 해도 왜 그런 걸 따라 하고 지랄이야. 업데이트 때문에 그런 거 아니지? 그냥 나 놀리려고 그러는···어욱."
분을 못 이기고 뒷목을 잡은 드안드레다.
그러자 다시 한번 형님!!! 하는 후커의 포효.
동시에 진이 고민을 마쳤다.
그냥 웃자.
이걸 어떻게 참아.
고개를 젖히고 폭소하는 그의 모습에 드안드레가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비웃어라. 새꺄."
마침내 유망주에게 잘 보이길 포기한 그다.
그러고 나니 저도 이 상황이 웃기더라고.
푸흐흐- 바람 빠지는 웃음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웃음보가 터진 두 사람을 지켜보던 후커도 눈치껏 하하하하.
그리하여 세 얼간이가 한참을 쪼갰으니.
마침내 가장 먼저 웃음을 그친 진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시야의 구석에서 답을 기다리듯 반짝거리는 상태창을 말없이 노려본 뒤.
다시 드안드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도 안 늦은 거 맞지?"
"뭐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는 링커를 향해 진이 말했다.
"한 번 들어가 보려고. 그 땅굴."
< 67화 >
진은 퍽 기분이 좋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드안드레가 마음에 들었다.
재밌잖아.
낡은 사무실에서 이상한 안드로이드와 함께 부대끼고, 변변찮은 솔로들과 함께 일하지만.
그럼에도 더 높은 곳을 꿈꾸는 링커라니.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링커라는 거다.
형님 소리 들으며 떠받들리길 즐기는 삼류 양아치가 아니라.
더불어 어떻게든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살갗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진이 보이지 않는 목걸이를 드안드레에게 걸어줬다.
합격!!
사실, 진은 마음의 벽이 그리 높은 사람이 아니다.
잘 지내고 싶단 생각으로 진실하게만 다가온다면, 누구든 손쉽게 폴짝 뛰어넘을 수 있으니, 벽이라는 말도 과하고. 오히려 허들에 가깝달까.
그 널널하고 주관적인 기준을 드안드레가 의도치 않게 넘어선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만약 상태창의 개입이 없었더라도 상대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을 거라는, 뭐 그런 거?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게 진짜 중요하다.
상태창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닌.
내가 원해서 하는 일에 니가 무임승차한 거야, 라는 정신승리가 가능하니까.
말장난처럼 느껴져도 진은 진지하다.
유치할지언정 이러면 기분이 훨씬 덜 나쁘기에.
그러니까 다음부턴 눈치 챙겨라.
진이 스르륵 사라지는 상태창을 노려볼 때였다.
"···땅굴을 들어가겠다고?"
멍한 얼굴로 드안드레가 되물었다.
"내 정보를 써먹어 주겠단 소리네? 진짜지?"
"이런 걸로 거짓말을 왜 해."
"오, 오오! 오오오!!!"
드안드레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 모습이 마치 요리왕 비룡에서 누룽지탕을 한입 잡순 심사위원의 그것과 같아서.
지복(至福 : 지극한 행복)!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는 중국풍 BGM에 진이 혼자 실실 쪼개고 있으려니.
그사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드안드레가 말했다.
"지, 진짜 고맙다. 상상도 못 했는데."
그에 진이 어깨를 으쓱.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하길.
"고마울 것까지야. 그리고 이건 의뢰도 뭣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일방적으로 정보를 넘겨준 거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이거 나름 고급 정보라며. 바라는 게 있으니까 알려준 거 아니야?"
진이 그리 질문하며 생각했다.
지하 유적에 있다는 보물을 부탁하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니.
"우리 사무소랑 계약하자. 장기 계약은 바라지도 않아. 딱 의뢰 1건."
검지를 꼿꼿하게 세운 드안드레가 뒷말을 덧붙였다.
"이후에 내가 물어오는 일이 마음에 든다면 계약을 연장하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거절하고 바로 쫑내는 거지. 당연하지만 거절하더라도 의뢰 횟수는 차감돼.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을, 그것도 슈퍼 을을 자청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드안드레는 괜찮다.
왜냐하면 진에게 의뢰를 물어다 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저 황송한 마음으로 내 빈약한 스쿼드에 반짝반짝 빛나는 기대주 하나를 놔두는 것이다.
이걸로 어디 가서 이빨 털 생각?
추호도 없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알 사람은 저절로 알 것인즉.
'진 에버나이트가 너희 사무소랑 계약했다던데 사실이야?'
누가 묻거든.
'고마운 일이지.'
담백하게 대답만 해주면 끝이니까.
그렇게 되면 상상은 듣는 사람의 몫이다.
원래 의문은 추측을 낳는 법이라고.
드안드레가 생각보다, 웅성웅성.
수완이 괜찮은 모양인데? 술렁술렁.
이렇듯 긍정적인 소문이 다운타운을 한 바퀴를 싹 돌아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사무실을 찾는 솔로들이 조금이나마 늘어나지 않을까?
걸핏하면 사고를 치고, 의뢰를 말아먹고,
나 몰라라 뒷수습을 떠넘기는 주제에.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 계약을 종료하면, 이때다 싶어 사무실을 테러하는 싼마이 양아치 새끼들 말고.
진짜배기 솔로들 말이다.
레벨은 낮아도 돼.
그건 차차 발전하면 될 문제고, 그냥 함께 아득바득 정상을 향해 나아갈 열정 가득한 놈들만 와도···!!
그리하여 지금.
그 원대한 계획의 첫걸음이 되어줄 존재가 눈앞에 있었으니.
"······"
기도하듯 딱 붙인 양손을 입술 위에 얹은 드안드레의 귓가로 평이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뭐 그러던지."
"···오, 오오!! 오오옷!!!!"
재차 난리가 난 드안드레를 바라보는 잿빛 시선이 멀뚱하다.
왜 저렇게까지 좋아한대.
누가 보면 로또라도 당첨된 줄 알겠어.
여느 때처럼 태평한 진이다.
아니 거기서 한술 더 떴으니-
딸랑 의뢰 1개짜리 단기 계약에도 저렇듯 행복해하는 드안드레를 보며, 나도 삶에서 작은 행복을 놓치고 살진 않았을까.
반성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더란다.
물론 이는 드안드레의 속내를 알지 못했기에 나오는 순수한 반응이었지만, 만약 알았다고 한들 결과적으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터였다.
내 이름을 팔면 괜찮은 애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고?
어떻게, 솔로 인트라넷 프로필에 글이라도 올려줘?
홍보를 해줬으면 해줬지.
그걸 빌미잡아 링커를 쥐고 흔들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터.
"너희 형님이 영 정신을 못 차린다야."
입꼬리를 슬쩍 끌어당긴 진이 후커를 돌아봤다.
"네가 계약서 들고 와야겠는데?"
***
깔끔하게 계약도 마쳤겠다.
"먹고 싶은 건 다 담아!"
기념으로 사무실에 배달 음식을 잔뜩 시킨 드안드레다.
생각지도 못한 회식이었지만 진은 빼지 않는다.
차곡차곡 쌓은 피자를 하마처럼 크게 베어 먹고는 우적우적.
볼따구가 찢어져라 음식을 집어넣고 저작운동에 힘을 썼다.
바로 앞에서는 잔뜩 들뜬 드안드레가 후커에게 인공 피부를 사주겠다 호언장담하고 있었으니.
이를 바라보던 진이 문뜩 주머니 속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단말기를 꺼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하지만 누구 것인지 외워서 알고 있다.
그리하여 진이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안녕, 칼리파."
"······?!" "······?!"
드안드레와 후커가 동시에 흠칫거리는 사이.
스피커 너머로 이름의 주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왜 이렇게 해맑으실까. 우리 솔로님께선?]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어느새 단말기 근처에 바짝 고개를 들이댄 드안드레와 후커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그들에게 입 모양으로 '너희 뭐하냐?'라고 말한 진이 고개를 뒤로 빼며 말했다.
"너랑 통화하니 좋아서 그러지 뭐."
[말이나 못 하면.]
"연락 못 해서 미안. 단말기가 또 고장이 났걸랑. 참고로 이번 사인은 폭사였어. 흔적도 못 찾겠더라."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잔소리가 시작됐다.
단말기가 고장 났으면 끝이냐?
3주 내내 뭐 했냐.
남한테 빌려서라도 연락을 해줘야 이쪽도 상황을 파악할 거 아니냐.
그래 백번 양보해서 너무 바빴다 치자.
근데 펜릴한테서 연락이 먼저 오는 건 무슨 경우냐.
닷새 전에 전화가 와선 네가 이틀 전에 다운타운으로 출발했다고, 에넥도트엔 들렸냐 묻는데 내가 할 말이 없더라.
쉴 새 없이 귓속으로 때려박히는 말말말.
근데 그게 전부 맞는 말뿐이라서 절로 합죽이가 된 진이다.
본인이 생각해도 무신경하긴 했었다고.
해서 사죄의 뜻을 담아 공손한 자세로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이자니.
입으로 두두두! 총을 쏘던 칼리파가 어느 순간 한층 잦아든 목소리로 묻길.
[···그래서 가게 앞에 바이크만 세워두고 또 어딜 간 건데?]
동시에 드안드레가 볼살이 떨릴 정도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으나, 진은 무시했다.
뭐 어때서.
죄지은 것도 아닌데.
"아, 그게-"
그리하여 진이 설명을 시작했다.
드안드레를 만난 것부터 그와 계약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계약이라고?]
"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 녀석이 기어이 널 구워삶았나 보네. 혹시 옆에 있어?]
"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바꿔 줄까?"
[부탁할게.]
이어진 말에 흠칫 뒤로 물러서는 드안드레의 어깨를 턱 붙잡은 진이 그에게 단말기를 넘겼다.
그것도 귓가에 딱 붙여서.
"···난데 왜."
긴장한 목소리로 전화를 넘겨받은 드안드레가 대화를 시작했다.
"뭘 갈아넣어, 갈아넣긴. 그럴 생각 없어."
"나한테도 귀해. 너만 그런 줄 알아?"
"알지, 안다고. 나 그렇게 상도덕 없는 사람 아냐."
"땅굴? 그건 내가 보낸 게 아니고 진이 직접···."
"아니 진짜래도. 죽은 우리 엄마의 명예를 걸고···."
어떤 실랑이가 오갔을까.
"야야. 진. 네가 받아봐."
부루퉁한 얼굴로 다시 단말기를 건네주는 드안드레에 한창 치킨을 뜯던 진이 팔을 뻗었다.
"어 왜."
[진, 땅굴에는 네가 들어가겠다고 한 거야?]
"맞아."
[갑자기 왜?]
"찾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
칼리파는 그게 뭐냐고 캐묻지 않았다.
잘된 일이었다.
정작, 진도 그게 뭔지 몰랐기에.
왜 상태창에서도 그저 ???라고만 표기되지 않았던가.
보류가 불가능한 퀘스트.
막대한 경험치와 더불어 약속된 추가 보상.
(알 수 없음)이 진행됩니다.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그래. 챙길 건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진이 그리 생각할 때였다.
[잘 들어, 진. 폐쇄적인 집단 내에서 발생한 의문스러운 사건이야. 심지어 소식을 접한 용병들과 솔로들이 팀을 짜서 투입됐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내부자들만 알아. 위험한 건 두말하면 입만 아프지.]
거기까지 말한 칼리파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허탈함 섞인, 하지만 그게 꼭 싫지만은 않은 미소가 눈앞에서 그려지는 듯했다.
[그래도 할 거지?]
"그럴 생각이야."
[좋아. 하지만 혼자서는 안 돼.]
"엥? 그러면?"
[에넥도트에 신입이 들어왔어. 중고 신입이지. 실력도 좋고, 성격도 털털해서 마음에 들어. 무엇보다 너랑 아는 사이더라?]
"······? 누구?"
[이것 봐. 섭섭할 사람이 또 한 명 늘겠네. 가만 보면 아주 선수라니까.]
쯧쯧, 혀를 찬 칼리파가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그 친구를 붙여줄게. 물론 위험한 곳이니만큼 의사를 묻긴 하겠지만, 여태 보여준 태도를 봐선 그냥 하겠다고 할 거 같네.]
"어···. 일단 알겠어."
[날짜 나오는대로 연락해. 그전에 얼굴도 한 번 비추고. 그럼 끊을게.]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종료됨에 진이 기다렸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아오! 좀 떨어져 봐."
그러자 단말기에 귀를 딱 붙이고 있던 드안드레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멀어졌다.
"궁금하잖아."
그러고는 코밑을 쓱 훔치며 묻길.
"그래서 에넥도트에서 지원을 붙여준대?"
"그렇다는 거 같네. 그나저나 누구지···."
최근 몇 달 동안, 너무 많은 사건이 몰아친 탓일까. 이렇다 하고 딱 떠오르는 얼굴이 없어서.
어쩐지 기억날락 말락. 간질간질한 기분에 진이 미간을 움찔거릴 때였다.
"너만 괜찮으면 나도 솔로 한 명을 붙여줄까 하는데 혹시 생각 있냐?"
"음?"
드안드레의 제안에 상념에서 벗어난 진이 고개를 갸우뚱.
"좆밥들이라며?"
"아잇! 한 명 있다고 했잖아. 4레벨 같은 3레벨이야."
"네 말은 잘 안 듣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긴 한데. 아니, 잠깐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내가 일전에 땅굴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제일 먼저 걔한테 물어봤거든. 그러니까 하는 말이 저 혼자서는 위험해서 절대 안 들어간다, 딱 잘라 거절하더라고. 근데 지금은 얘기가 달라졌잖냐. 너랑 칼리파가 붙여줄 솔로까지. 3레벨이 최소 둘. 이러면 그 자식도 마음을 돌릴 것 같아서 그러지."
"그러냐."
진이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각했다.
뭐 실력자가 많아서 나쁠 건 없지.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럼, 걔도 불러봐. 대신 난 늦어도 내일 출발할 거니까 그런 줄 알고."
"바로 물어볼게."
드안드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잔뜩 상기된 얼굴.
무려 3레벨 솔로들로 구성된 작전에 참여할 기회다.
뒷골목 양아치 세력 싸움과는 그 깊이부터가 다른.
절로 심장이 쿵쿵 뛰는 그런 의뢰.
···어쩌면 나 프로페셔널해 보일지도?
"어, 여보세요? 나야 드안드레."
지금 이 순간.
드안드레는 그저 즐겁다.
***
목표가 정해졌으면 행동한다.
그게 진이었으니, 땅굴에 투입되기 전 장비부터 재정비한 그다.
일단 그라비스의 탄창을 보충하기 위해 건샵부터 찾았다.
솔직히 원더에게 연락하면 될 것 같긴 한데, 지난번에 거하게 받은 것도 있거니와 탄창 좀 달라고 메시지를 보내긴 좀 없어 보여서.
그리고 우리 야동 사랑꾼 얼굴은 주기적으로 봐야지 않겠어?
"할배! 탄창 줘요!"
언제나처럼 굿네이버의 문을 박차고 들어간 진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이 땡그래져선 단말기를 바라보는 브로프가 있더라고.
진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무슨 장르래?"
그리 말하며 브로프의 손에서 단말기를 쏙 빼앗은 그다.
저번에는 똑같은 상황에서 인간 남성과 수인 여성의 파멸적인 사랑을 목도했던바.
오늘은 무슨 영상일까, 화면을 바라보기 무섭게 들려오는 우렁찬 외침.
"루거앤 돌만의 아무튼 엄청 강한 폭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아아앗!!"
"···뭣?!"
땀에 젖은 살색으로 뒤덮여 있을 줄 알았던 화면 너머로 탄두가 허공을 가르고 곧이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압도적인 불길.
생을 앗아가는 염화.
그 속에서 떠오르는 글자?
보그 시리즈. 압도적인 파괴력!
R&D, 파우스트α!
"아?"
진이 멍한 표정으로 단말기를 툭 내려놓았고,
브로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으니.
"···꼴통. 너 대체 뭘 하고 다닌 게냐?"
"아니 편집본이란 게 이런 식이었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다.
"···루거앤 돌만의 주식이 오늘 10%가 넘게 올랐다고. 이런 소스가 있었으면 미리 언질을 줘야지···!!"
"약간 쇼츠 형식인 건가? 좀 민망하긴 하네."
브로프가 전신을 부르르 떨어대는 사이.
뺨을 긁적거린 진이 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일단 탄창 줘요. 나 급해."
"아니. 설명부터! 루거앤 돌만이랑은 뭐가 어떻게 된 게냐. 어?!"
"아. 다음에 설명해 줄 테니까. 빨리."
노인네 닦달을 대차게 씹어버린 진이 기어이 탄창을 챙겨 건샵을 나섰다.
"무조건 들러어어어!"
절규하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약속 장소인 에넥도트로 이동한 진을 반긴 건, 등짝을 후려치는 칼리파의 손바닥이라.
그 매콤한 손길을 낄낄거리며 받아준 그가 말했다.
"화 풀어."
"영상 봤어. 아주 목숨을 땅바닥에 버리려고 작정했더라?"
"앰배서더잖아."
멋쩍은 대답 이후 포우에게 1억이 담긴 토트백까지 맡긴 진이다.
"잘 부탁할게."
"염려 마십시오. 돌아오시기 전까지 괜찮은 매물을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최고야."
엄지를 척 올린 진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렇게, 함께 땅굴에 투입될 인원을 잠자코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딸랑-
깔끔한 종소리와 함께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아."
진을 발견하곤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보조개가 깊게 패는 시원한 미소.
동시에 진도 상대를 알아봤다.
"아아?!"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금발의 여인.
오래전 하이웨이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던 날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더라고.
"나타샤?"
동시에 여인이 입을 열었다.
"마티니 마시기 참 어렵네, 그치?"
< 68화 >
시원시원한 발걸음이 가까워진다.
빈티지한 연갈색 자켓에 청바지.
목이 긴 가죽 장화.
거기에 멋들어진 선글라스까지.
금발을 찰랑거리며 다가오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미국의 66번 국도를 가로지르는 트러커를 떠올리게 했으니.
물론 진짜 트러커 중에 저렇게 멋들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
수천 마일 대륙을 횡단하는 일이라는 건, 사실 한없이 3D 직종에 가까운 것이라서.
찌그러진 캔커피를 조수석에 산처럼 쌓은 이들한테 무슨 멋을 찾겠냐고. 솔직히 그건 너무 한 거지.
하지만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이 세상 못 산다.
해서 중요한 것은 느낌? 아우라?
아무튼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그거!
진의 고향에서는 이를 상(相)에 빗대곤 했으니.
과즙상, 강아지상, 뱀상.
그 종류도 참 다양하지 않던가.
그렇게 치면 아메리칸 웨스트 상도 있을 법하잖아?
어느새 맞은편 소파에 착석하는 여인이 바로 그런 느낌의 소유자라.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흐릿한 미소와 함께 선글라스를 벗은 얼굴이 진을 바라보았다.
"간만이야, 진."
"아아. 너였구나."
진이 저도 모르게 손뼉을 짝.
잊고 있던 기억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치더라고.
나타샤 베르무트.
자신을 배신한 링커를 납치하여 우당탕탕 활극을 만들어낸 레벨3의 솔로이자 트러커.
헤어지던 순간에 새 직장도 구할 겸. 에넥도트에 얼굴을 비추는 게 어떠냐 제안했던 것이 떠오른다.
아. 맞다. 그랬지.
진이 박 깨지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진짜 기억나는 거 맞아?"
나타샤의 표정이 바뀌었다.
눈이 살짝 가늘어진 게 못 믿겠단 느낌이 다분했으니.
"미리 들은 거 아니고?"
"왜? 그때처럼 복근 보여주면 믿을래?"
진이 웃옷을 잡으며 던진 말에 나타샤가 피식거렸다.
"아주 까먹은 건 아닌가 보네."
참고로 두 사람은 헤어질 때 번호를 교환했었다.
물론 나타샤의 번호가 담긴 단말기는 예전 킬기트와의 싸움에서 장렬히 녹아버리셨으니.
그 이후로 나타샤에게 따로 연락이 왔는지 아닌지는.
관측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라서.
그런 거 모르겠고.
진이 밝게 인사했다.
"여기 좋아. 주인장이 쿠키를 잘 구워."
"······진?"
등 뒤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진이 눈알만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무튼 반갑다. 같이 간다고 해줘서 고마워."
"도와야지. 예전에 신세 진 것도 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떼인 돈은 어떻게 됐냐? 라는 질문이 이어지기 직전.
딸랑-
가게 문을 열고 낯선 이가 들어왔다.
"크흠흠."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거기에 자신을 향해 쏠리는 눈동자들까지.
갑작스럽게 쏠린 이목에 작게 헛기침하는 그는 커다란 배낭을 맨 젊은 남성이었다.
근데 키가 좀 작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도 진의 가슴팍에 닿을락 말락한 정도였으니, 잘 쳐줘도 160 초반? 어쩌면 그 아래?
그리고 진은 남자의 이름을 알았다.
드안드레에게 미리 언질을 들은 덕분이었다.
뭐라고 그랬더라, 웬 땅딸보가 나타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막시모?"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짧게 자른 머리 때문일까.
밤톨처럼 생긴 얼굴이 짧은 보폭으로 부지런히 걸어와 손을 척 내미는데, 맞잡아보니 굳은살이 제법?
"맞아, 내가 막시모야. 반가워."
"진. 이쪽은-"
"나타샤."
가볍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넨 나타샤가 덧붙였다.
"네가 그 보부상이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
그에 진이 새삼스런 눈길로 막시모를 보며 생각했다.
제법 인지도가 있는 친구구나, 하고.
"다 모인 거 같으니 그럼 간단하게 브리핑 시작할게."
마침내 한자리에 모인 세 솔로를 확인한 칼리파가 벽에서 등을 뗐다.
그리고 또각또각 소파를 향해 다가오는 순간.
딸랑-
다시 한번 열리는 문.
이번에는 또 누구야?
단체로 돌아가는 고개 너머로 레게머리의 링커 등장!
"······?"
"난 신경 쓰지 말고. 할 거 해."
눈을 가늘게 뜨는 칼리파에게 까딱까딱 손짓한 그가 적당히 떨어진 위치에서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자못 진지하게 그냥 쳐다만 봤다.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건 중요한 것.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저건."
막시모가 한껏 민망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일단 시작할게."
뭐 저런 게 다 있냐는 눈빛을 쏘던 칼리파가 다시 브리핑을 시작했다.
땅굴의 위치, 언더하트의 조직도, 그리고 땅굴에 투입된 스쿼드의 정보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그리 길지는 않더라.
"당장 알려줄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야. 그만큼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거든.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리 말한 칼리파가 진에게 눈을 맞췄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마."
"왜 날 보고?"
"그럼 누굴 볼까?"
"아?"
멀뚱멀뚱한 진의 얼굴과 함께 브리핑이 종료됐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나타샤였다.
"그럼 내 차로 움직일까?"
"오 화물차." "좋아."
나머지 두 사람도 동의한바.
세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진."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진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가온 드안드레가 수첩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일단 주니까 받기는 받은 진이 똑딱이로 잠긴 겉장을 딱 떼며 묻자, 드안드레 왈.
"나한테 정보 넘겼다는 놈 기억나? 헤나토."
"어. 기억나지."
"그 자식이 여태 떠벌거렸던 얘기를 거기에 정리해 뒀어. 땅굴살이에 염증을 느끼던 놈이라서 살살 긁어주기만 해도 저 알아서 조직 얘기를 늘어놓곤 했거든. 도움이 되면 좋겠다."
그에 진이 수첩을 내려다보니, 이야 이게 뭐람.
지하 내부 단면도부터 크루원에 대한 정보까지.
빽빽한 글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참고할게. 고맙다."
수첩을 품에 챙긴 진이 드안드레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친 뒤, 칼리파와 포우에게도 손인사를 건네며 뒤돌아섰다.
"······"
이윽고 가게를 나서는 세 사람을 말없이 눈으로 좇던 드안드레가 가까운 의자에 엉덩이를 털썩 붙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칼리파 포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무 고마워할 건 없어. 내 팀의 성공적인 작전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지. 그게 링커 아니겠어?"
저가 생각해도 멋진 대사를 내뱉은 드안드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긴 밤이 되겠군."
이후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멀어져가는 그에게 포우가 말했다.
"기왕 오신 김에 커피라도 한 잔-"
"됐어."
그 말을 중간에서 자른 칼리파다.
그녀의 눈이 똥폼을 잡으며 가게를 나서는 링커에게 고정됐다.
"그냥 즐기게 냅둬."
***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
달리 말해 시정부한테 찍힌 악질들이다.
물론 그 격차는 천차만별이라서.
예를 들면 스틱스.
멤버 개개인이 구역 하나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초강자라거나.
얼굴수집가.
오랜 세월 정부와 악연을 이어온 해묵은 악(惡)의 경우는 그 목에 걸린 액수가 기본 100억 단위다.
그중에는 0이 하나 더 붙는 경우도 있었으니.
진이 알면 그 자리에서 우주적 공포를 느끼며 까무러칠 수준이랄까.
다만, 이런 현상금은 사실상 상징성에 가깝다.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위험함을, 그저 돈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로 치환한 느낌이라고.
해서 그 돈을 노리고 제 목숨을 버리는 멍청한 바운티헌터는 없다.
이들 영역부터는 깊은 은원 혹은 신념의 문제로 부딪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물론 줄 세우기 좋아하는 무지몽매한 분석가 호소인들이 말하길-
300억짜리가 200억짜리보다 강하고.
300억짜리가 500억짜리보다 약하다는.
단순 숫자놀음에 매몰된 개소리를 지껄이기도 하지만, 그냥 너그럽게 넘어가자···.
굳이 따지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니까.
다시 돌아와서.
이렇듯, 현상금을 자신을 나타내는 하나의 키워드로 써먹는 괴물들이 존재한다면.
반면, 그저 그런 놈들도 있기 마련이다.
여기는 진짜로 쫓기는 쪽.
현실적인 금액, 현실적인 강함.
그래서 목을 노리는 놈들도 존나게 많은.
뭐든지 애매한 게 최악인 법이다.
엄두도 못 낼 만큼 강한 게 아니고서야,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나보다 윗줄에 있는 놈들은 차고 넘치는 게 이 도시라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애매한 범죄자 새끼들이 목을 간수하려면 말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하나의 결과로 귀결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뭉치는 것!
집결하여 단체를 이루고, 체계를 갖춰.
추적자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언더하트가 바로 그런 집단 중 하나였다.
40번대 지하도를 장악한 범죄자 집단.
과거 기업·가문 전쟁에서 온갖 패악을 저지른 전범들이 모여 발족한 이 조직은,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끝에 저들만의 왕국을 탄생시킨 지 오래라.
누군가는 이들을 일컬어 땅속의 스캐빈저라고도 불렀다.
리더는, 폭탄마 다미르 하보비치.
폭발 계열의 마법에 통달한 2위계 마법사로, 방치된 땅굴을 개척하는데 지대한 공헌······
진이 수첩을 팔랑 넘겼다.
좌우로 움직이는 눈동자에 흥미가 가득했다.
3줄 요약이 아니면 짜게 식어버리는 성격을 감안하면, 이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니 그만큼 수첩의 내용이 알찼다고 볼 수 있겠다.
"···진짜 정리 제대로 했네."
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수석 뒷자리. 그러니까 화물차의 침대가 위치한 자그마한 휴식 공간을 돌아보며 말했다.
"드안드레가 생각보다 일을 잘하는데?"
그러자 거기에 앉은 막시모가 대답하길.
"그 자식이 원래 일은 꼼꼼하게 잘해. 이미지가 개떡 같아서 그렇지."
"어쩌다 그렇게 됐대?"
"걔 생긴 걸 봐라. 대부업체 보스가 따로 없잖아. 그런 얼굴로 솔로를 모집하니까, 번지수 잘못 찾은 똥파리들이 꼬인 거지. 눈치껏 잘 걸러내는 것도 링커의 자질인데, 그 새낀 다 품어보겠다 설쳤어. 밥값도 못하는 놈들 똥기저귀 다 치워가면서. 솔로가 던지고 간 의뢰를 본인이 처리한 적도 있을걸?"
그에 진이 고개를 끄덕.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겠더라고.
해서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며 말하길.
"너라도 잘 해줘야겠네."
"모르지. 주변 똥파리들 다 걷어내면 생각해 볼 수도."
막시모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워낙 키가 작은 탓에 침상에 눕지 않고 양반다리를 하고 있어도,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는 그였다.
그런 주제에 배낭은 뭐가 저렇게 큰지.
사람보다 공간을 더 차지하는 물건을 굳이 화물칸에 싣지 않고 저렇게 불편한 동승을 고집하는 이유를, 진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저 애착 배낭인가 보다 생각했을 뿐.
그때였다.
"그나저나 너흰 왜 땅굴에 들어가려고 하는 건데?"
막시모의 질문에 진이 수첩에 눈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아. 찾을 게 있어서."
"난 진을 도우려고. 이전에 빚진 게 있거든."
이어서 대답한 나타샤가 룸미러로 막시모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나도 특별할 건 없어. 그냥 고대 지하 유적 안에서 쓸만한 아티팩트라도 하나 건질 수 있을까 싶어서 슬쩍 찔러보는 거지. 너무 후발주자인 거 같긴 한데···."
밤톨 같은 얼굴이 조수석에 앉은 진의 옆얼굴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래도 뭐. 이쪽엔 초신성도 있고 하니까."
자그마한 혼잣말.
물론 진은 못 들었다.
자신을 향한 세간의 평가가 날로 치솟는 걸 모르고, 그저 수첩에 가만히 시선을 고정했으니.
그나마 딴짓이라고 해봐야, 제키·제니 남매와의 대화방을 들락날락한 정도라서.
본의 아니게 럼펌펌펌 외식을 몇 주째 미루게 된 것에 대해 장문의 사과를 보낸 그다.
[다치지나 마]
[화이팅!]
돌아온 남매의 답변에 피식거린 진이 단말기를 끄고 조용히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화물차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에어리어 41, 언타이틀타운.
한때 찬란한 계획도시를 꿈꿨던 택지는 현재 앙상한 철골만을 노출한 채, 조용히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으니.
그 중심에 동그랗게 녹슨 표지판.
[Metro Web / 40th Division]
끼익, 끼익-.
까딱거리는 입간판 소리.
그리고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좀 으스스하네."
막시모가 어깨를 살짝 떨며 손전등을 켰다.
딸깍.
빛이 비친 곳에는 그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동그랗게 모습을 드러낼 뿐이라서.
"너무 늦진 않았겠지."
"일단 가자."
진이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밟고 아래로 향했다.
유적지가 발견된 곳은 지하3층, 플랫폼.
거기서도 한층 더 아래.
머릿속에 정보를 되새기며 내려가다 보니, 어느 순간 지하도에 발을 디딘 일행이다.
이 순간, 그들을 반긴 것은 짙은 피냄새였다.
죽음을 닮은 금속의 비린내.
사방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
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범죄자들의 요람, 그들의 왕국으로 향하는 지하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파된 그곳을 숨죽인 채 얼마나 나아갔을까.
우연히 바닥에 얼룩진 혈흔을 발견한 진이, 그 지저분한 자국을 쫓아 천천히 손전등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벽.
그곳에는 붉은 손자국으로 찍힌 전언이 있었으니.
[돌아가!]
섬뜩한 글귀와 함께 상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전과 달라진 형태로.
「(던전!)파헤쳐선 안 될 것」────────
지하 유적에서 ???을 찾으시오.
*보상 퍽 XP 18,000
*(알 수 없음)이 진행됩니다.
────────────────────
던전?
눈이 침침한 사람처럼 코앞까지 얼굴을 당겨 글자를 읽은 진이다.
던전 맞더라고.
이후 천천히 눈을 감은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좆됐다.
< 69화 >
던전!
성의 중앙탑 가장 높은 부분을 뜻하는 프랑스어 동종(Donjon)에서 유래한 단어다.
원래 건물 고층이 탈출하기가 어려운 법이라고.
이야, 중앙탑 꼭대기?
저기다 가둬 놓으면 절대 도망 못 치겠는데.
어디 감옥으로 한 번 써 봐?
이러한 중세인의 발상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던전의 시발점이라.
물론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탑에는 '진짜' 죄인을 가두지 않았거든.
생각해보라.
성에 구금될 정도의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높은 사람이라서.
그 안에서도 대접받으며 별다른 아쉬움 없이 지냈으니 감옥이란 말은 어폐가 있는 것이다.
고로 진짜 죄수들이 갇히는 진짜 감옥은 탑이 아닌 지하에 있다.
이름하여 우블리에트(Oubliette)
갇히면 며칠 내로 탈수로 죽게 된다는 공포의 독박형!
꺼내줄 마음? 없다.
들여다볼 마음? 당연히 없다.
애초에 옥사시킬 생각으로 집어넣은 것이니, 며칠이나 버틸까 간수들끼리 내기 정도는 할 수 있으려나.
이렇듯, 무시무시한 의미를 내포한 것이 던전이거늘.
어째서인지 진의 고향 동년배들에겐 액션 쾌감! 으로 더 알려진 단어다.
물론 진이라고 다르진 않다.
던전이라고 하면 뭔가 괴물이 득실거리는 그런 걸 떠올리게 되는 게 당연한즉.
그런 게 눈앞에 대문짝만하게 떠오르니 순간 움찔거릴 수밖엔.
게다가 경험치는 또 무슨 일인데.
18,000 XP?
숫자놀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진이라지만, 적어도 경험치와 고생의 정도가 XY축 정비례라는 것쯤은 안다.
그동안 몸으로 배운 사실이었으니까.
심지어 기존의 14,000에서 훌쩍 상승했네?
하루 만에 이런 변화라면,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애초에 지하유적이 발굴된 게 3주 전이라고 했으니, 무슨 일이 생겼어도 이상하진 않은데···
진이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인상을 팍 썼다.
[돌아가!]
벽에 적힌 그 문장에 기분이 팍 상해버린 탓에.
그냥 점잖게 마커로 적으면 어디 덧나나?
왜 핏물, 그것도 손바닥으로 그려놨어.
기분 나쁘게 진짜.
본디 인간은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해 공포를 가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진도 마찬가지라서.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보이지 않는 유령이나 귀신을 더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것이다.
이럴 때 대범하면 참 좋으련만.
참고로 진은 전 여자친구가 공포영화를 보러 가자고 할 때마다 절대 싫다고 내뺀, 이건 네가 UFC 안 보는 거랑 같은 맥락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한.
아무튼 호불호가 확실한 군필 대한 남아다.
꼴깍.
입속에 고인 침이 양껏 목뒤로 넘어가긴 했지만.
절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싫은 거야.
편식이랑 비슷한 거라고.
진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되게 촌스러운 방법으로 겁을 주네. 진짜 이 밑에 뭐가 있긴 한가 봐."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나타샤가 손에 쥔 손전등을 위아래로 왔다 갔다.
벽과 바닥에 튄 혈흔을 살피는 가운데.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막시모가 팔을 흔들었다.
"여기, 이리로 가면 될 거 같아."
그러고는 손전등 끝부분을 입에 물고 무너진 기둥 잔해를 툭툭 걷어차며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으스스하다더니. 거짓말이었어?
이런 치사한.
"가자. 진."
나타샤가 그리 말하며 걸음을 옮김에, 진이 순간 그녀를 불러세웠다.
"나타샤."
"응?"
"넌 지금이라도 돌아갈래? 신세라면 나중에 밥으로 갚아도 괜찮으니까."
이런 부분에서 모질지 못한 진이다.
도와주려고 같이 온 건 고마운데 이러다가 사달이 날까, 걱정이 되더라.
자신이야 막대한 경험치부터 그 밖의 보상까지 챙길 것들이 많고, 막시모는 아티팩트에 욕심을 내는 상황이니 그렇다고 쳐도 나타샤는 그저 헬퍼 느낌으로 따라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여기가 던전이래!'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해서 조심스레 의견을 물은 건데, 나타샤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더라.
"선 긋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됐어."
눈썹을 한 번 까딱거린 뒤 돌아서는 그녀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재촉했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부턴 될 대로 되라, 하고.
지하 1층 전형적인 지하도의 그것과 같았다.
플랫폼, 그러니까 승강장으로 내려가기 전 풍경 말이다.
대리석 원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공간을 떠받치고 있는 드넓은 공간.
원래라면 언더하트의 크루원들이 상주했을 그곳에는 짙은 어둠이 침묵을 휘장처럼 두르고 있었으니.
주변에 동그란 빛을 쏴대며 얼마쯤 걸었을까.
저 멀리 깜빡거리는 불빛 아래 개찰구가 보이더라고.
재밌는 점이라면, 이곳에 플라스틱으로 사각을 두른 간이 초소가 있다는 것이었다.
보초를 서는 곳이었다는 소리다.
고작 개찰구 주제에. 보초가 웬 말이야, 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벽면에 휘갈겨진 글씨를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라서.
[Under Hearts Kingdom]
"여기가 입구인가 봐."
작게 중얼거린 막시모가 그 짧은 다리를 앞세워 개찰구를 통과했고, 그 뒤를 나타샤와 진이 차례로 뒤따랐다.
그러자 보이는 건 다시 한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진이 슬쩍 손전등을 비춰 보니, 음. 진짜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게, 차라리 뭐라도 튀어나오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그때.
"잠시만."
막시모가 양해를 구하며 가방을 벗었다.
그러고는 동여맨 끈을 풀어 안쪽으로 손을 쑥 넣는데, 어라? 가방 깊이보다 팔이 더 들어가더라고.
"···음?"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한 진이 손전등을 그리로 비췄다.
그리고 보았다.
가방 밖으로 바동바동 물장구를 치는 짤록한 다리를.
동시에 그 안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
"나 좀 꺼내줘!"
마치 저 깊은 동굴에서 외치는 듯한 소리에 진이 눈을 번쩍.
"웜마!"
세상 사람들, 가방이 주인 삼켜요!
화들짝 놀란 그가 막시모의 발목을 잡아 쭉 당겼다.
직후 가방 속에서 뒤집힌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고구마를 캔 것처럼 뭔가가 주렁주렁 많이도 매달려 있더라.
뒤늦게 양팔 가득 무언가를 끌어안은 막시모를 확인한 나타샤가 급히 손을 뻗었다.
"뭘 이렇게 많이 챙긴 거야."
"너희 것도 같이 꺼내느라···그나저나 나 좀 내려놓으면 안 되냐?"
강제로 물구나무를 선 막시모가 대롱대롱한 시선을 던짐에 진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를 잡은 막시모가 아픈 소리를 냈다.
"아으, 살살 놓으면 어디 덧나냐?"
하지만 진은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턱짓했다.
"그게 다 저 안에서 나온 거라고?"
방탄조끼에 관절을 보호하는 보호구.
거기에 매끈한 고글까지.
심지어 소총도 나왔다.
상식을 깨는 내용물에 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방에 닿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타샤가 방탄조끼를 걸치며 말하길.
"진은 네가 신기한 모양인데, 어떻게 누가 설명할래?"
"내가 하지 뭐."
어느새 몸을 일으킨 막시모가 조끼와 보호구를 진에게 차례차례 넘기며 말했다.
"이 가방이 우리집 가보거든. 경량화와 확장 주문이 걸린 아티팩트란 말씀. 그래서 이것저것 많이 담아놓고 있어. 어느 때라도 대비할 수 있도록."
"오?"
진의 눈에 흥미가 스쳤다.
그도 그럴 것이, 아티팩트라는 걸 직접 눈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무려 빛과 장미의 시대의 유산 아닌가.
사실, 마법의 명맥이 끊긴 건 아닌 만큼, 오늘날에도 아티팩트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긴 한다.
그 시절만큼 대단한 물건이 나오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이는 위대한 장인의 종족이 사라진 탓에 빚어진 기술의 실전 때문이라.
그런 이유로 아티팩트란, 일종의 로스트 테크놀로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거 모르는 진은 이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뭐가 엄청 많이 들어가는 가방?
완전 인벤토리잖아.
어쩐지 꼭 안고 있더라니.
그리하여 그가 양해를 구하길.
"한 번 들어봐도 돼?"
"뭐. 그래."
막시모의 흔쾌한 허락에 가방을 한 손으로 잡아 올린 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경량화 맞아? 돌덩어리가 따로 없는데?"
묵직함을 넘어선 무게.
진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무거운 거라서.
막시모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경량화 맞는데. 담은 게 너무 많아서 그래. 내 키가 괜히 이렇게 된 게 아닌······근데 잠시만, 너 어떻게 그걸 한 손으로······"
뒤늦게 떠듬거리는 밤톨머리에게서 시선을 돌린 진이 가방을 내려놓고 고글을 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럼에도 항상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시야가 펼쳐진다.
야투경인데 거기에 추가 기능을 곁들인.
적외선 파장의 길이를 감지, 전자적인 기법으로 색을 입히는 열상장비였다.
"오. 비싼 거네."
"공짜 아니야. 적외선 조명 달린 비싼 물건이라고. 고장 나면 청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러냐."
진이 눈썹을 으쓱거리며 주머니에 손전등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제일 먼저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으니.
그리하여 지하 2층!
······인데 뭔가 이상하더라.
인지 못 한 어느 시점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벽을 문이 아닌 몸으로 부딪쳐 통과한 느낌이랄까.
마치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한 감각.
진만 그런 기분을 느낀 건 아니었다.
"뭐야?"
"어?"
뒤이어 바닥에 발을 디딘 두 사람도 순간 제 몸을 더듬거리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으니-
"계단 어디 갔어?"
막시모의 말이 모두의 속마음이었다.
직전까지 밟고 내려온 층계가 보이지 않았기에.
대신 그 자리에는 벽이 있었다.
처음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다는 양.
놀란 일행의 얼굴을 향해 모르쇠를 시전하는,
심지어 두드리니 만져지기까지 하는 진짜 벽이.
"아이씨. 내 이럴 줄 알았지."
괜히 던전이 아니라는 걸까.
출입구가 사라진 상황에 진이 눈을 질끈.
나 갇혔구나, 라는 상황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그다.
반면에 일행은 그저 어리둥절.
이게 무슨 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벽에게 성추행을 마구마구 저질러대고 있었으니.
"1층에 아무도 안 보이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네."
"···이래선 진짜 마굴이잖아."
그래도 괜히 베테랑 소리를 듣는 건 아닌지, 비교적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두 사람이다.
그리하여 일행을 반긴 것은 승강장이란 이름의 거대한 카타콤이었다.
수백 개의 석굴이 마치 미로처럼 뒤얽힌 장소.
정신 차리고 보니 그 속에 떨어진 세 사람이 천천히 전진했다.
죄 똑같이 생긴 것 같은 석굴을 몇 번이나 이리저리 오갔을까.
일정한 기준 없이,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1시간 이상 나아갔을 무렵.
마침내 진의 눈에 무언가 담겼다.
온통 초록초록한 와중에 희미한 붉은빛이 어른어른한 형체를 갖췄다.
그 윤곽이 벽에 기댄 사람의 모습이라.
미동도 없이, 마치 죽은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떨군 낯선 이의 등장에 진이 등 뒤로 손바닥을 세웠다.
잠시 멈추라는, 만국 공통의 수신호.
그러고는 빠끔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살피는데, 자세히 보니 주위에 쓰러진 인원이 더 있었다.
다만 그들은 붉지 않다.
녹색 배경에 그대로 녹아든 꼴이었으니, 굳이 맨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차갑게 식어가는 시체가 확실해서.
조용히 고개를 돌린 그가 목소리에서 힘을 빼고 속닥거렸다.
"앞에 시체가 잔뜩이야. 앞서 진입한 스쿼드 같은데 생존자는 한 명. 벽에 기대고 있는 중."
"무장 상태는?"
"몰라. 확인하고 올게."
거기까지 말한 진이 벽에서 등을 퉁! 밀어내며 곧장 쓰러진 인영에게 다가갔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뭔가 나올 듯 말 듯, 계속 사람을 쪼는 분위기에 스트레스를 받던 차다.
그 와중에 눈으로 보이는 무언가 등장하니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더라고.
어느새 상대의 앞에 다다른 진이 고글을 정수리 위로 들어 올렸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인기척을 눈치챈 생존자가 이쪽으로 손전등을 비췄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광량 변화에도 해상도는 유지됐지만, 그러면 굳이 야투경을 쓸 이유가 없다.
"···누, 누구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그렇게 물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진이다.
떨리는 눈동자, 차게 식어가는 입술, 희미한 맥박.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분명한 사내의 모습을 눈에 새긴 그가 입을 열었다.
"용병?"
"마, 맞아."
사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래 작전에 투입된 이상, 타인과 사사로운 대화는 금하는 것이 용병이라지만.
그런 걸 지키기엔 너무 오랜 시간 어둠 속에 절여졌던 걸까.
퀭한 눈빛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내는 절박한 고갯짓을 반복할 뿐이었다.
"지, 지원인가? 그런 거야? 여, 여긴 무전도 안 터져서 다 포기 해, 했는데."
지나치게 간절한 어조부터가 영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냥 일행이 지원군이라 믿고 싶은 모양새.
거기에 대고 진은 현실을 깨닫게 해주지 않았다.
물어볼 게 있었으니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데?"
"으, 아으, 으으으."
그러자 대뜸 머리를 싸잡고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한 용병이다. 입에서는 침이 주르륵 흐르고 잔뜩 충혈된 눈동자가 갈피를 잃었다.
"···시, 시발! 그, 그거! 깨우면 안 됐는데! 보, 보물 아니야! 보물 아니야악!! "
거의 발작을 일으키는 사내를 지켜보던 나타샤가 자세를 낮춰 그의 몸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전투 조끼 안에서 주사기 하나를 찾은 그녀가 라벨을 확인한 뒤 곧바로 사내에게 바늘을 꽂았다.
진정제쯤 되는 물건이었을까.
가까스로 떨림을 벗어난 사내가 침 범벅된 입가를 손등으로 훑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다 지워지지 않았는지 시선을 사방으로 떨치며 말했다.
"여기서 나가야 해. 너희, 너흰 어디로 들어왔어? 여기가 몇 층이지? 3층? 2층?"
그에 나타샤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하길.
"진정하고 아까 하던 말부터 마무리할까?"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천천히 심호흡한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깨, 깨어나면 안 될 게 깨어났어. 천 년은 더 된 괴물이야. 그냥, 그냥 묻혀있게 놔둬야 했는데. 이 씨발, 두더지 새끼들이. 그걸 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아."
사내의 말은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그전에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기에.
부릅뜬 그의 시선을 따라 일행이 얼굴을 돌렸다.
동시에 모두의 낯빛이 일그러졌다.
그곳에는 방금까지 쓰러져있던 시체들이 기괴한 자세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70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