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로스트 시티의 세계관은 극도로 진보된 세상이다.
그러나 발전하는 기술에 반비례해 도덕성을 잃은 자본주의는 물질만능주의라는 폐해를 낳은 지 오래라.
쉽게 말해 돈만 있으면 못 할 게 없다는 뜻이다.
일례로, 돈과 수명만 갖다 바치면 깨달음 없이도 인공적인 마나 회로를 새길 수 있고.
마법의 '마'자도 모르는 문외한조차 관련 데이터칩만 꽂아 주면, 기초적인 공용 주문 정도는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
가상현실을 통한 버추얼섹스나 DNA개조, 사이버웨어 장착을 통한 신체력 향상은 언급하면 입만 아프다.
그뿐이랴.
최근에는 두뇌의 화학 작용을 극도로 활성화해 후천적인 사이커를 양성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니.
정말로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정복했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라서.
2024년의 지구가 탈모(시기를 놓친)를 극복하지 못했듯,
로스트 시티의 기술력으로도 재현 불가능한 기술은 분명 존재했으니.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위대한 일곱 가문의 비전마법 되시겠다.
빛과 장미의 시대부터 내려온 찬란한 유산!
순수주의자들의 영원한 자부심!
물론 뒷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비전마법 또한 예전 같지 않다 평하곤 했으니까.
실제로 요즘 들어 다크웹 등지에서,
팝니다. 비전마법. 유출된.
와 같은 출처가 불분명한 데이터칩이 알음알음 거래되는 불상사가 있긴 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대부분이 사기요. 그렇지 않더라도 가장 수준 떨어지는 하급 주문이 몇 개 담긴 경우가 전부라.
이마저도 유출이지, 재현은 아니다.
해서 비전마법에 대한 가치는 여전히 건재하니.
그중 하나가 진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그에 따른 당사자의 반응은 이러했다.
와. 자하드.
와. 번개.
끝.
어느 순수주의자가 있어 우연히 이 모습을 봤다면 아주 뒤집어졌으리라.
무려 비전마법이다.
비! 전! 마! 법!
역사가 어쩌고, 전통이 저쩌고.
위력이 이러쿵, 가치가 저러쿵.
밤새도록 눈 시뻘겋게 자하드의 위대함을 피력하지 않았을까.
그럼, 내내 하품만 쩍쩍하던 진이 졸린 눈으로 이렇게 대답했을 거다.
이봐요, 선생님. 그런다고 못 찍어드린다니까?
경험치 먹이는 게 아니라 숙련도를 쌓아야 한대도 그러네.
나도 서운해. 왜 이런 걸 공략에서 설명 안 했대?
했다.
진이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공략글 말미에는 게임 중 얻게 되는 새로운 별자리(히든)에 대한 서술이 있었으니.
경험치를 통해 성장하는 여타 퍽과 달리 히든 퍽은 숙련도 점수를 쌓아 발전하는 식이라고.
무려 세 문단에 걸쳐 꼼꼼히 작성된 내용이다.
당연하게도 공략글은 문제가 없다.
그걸 끝까지 읽지 않은, 아니 못한 사람만 있을 뿐.
물론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진은 그저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더란다.
작성자씨 당신이 모르는 것도 있군요. 라고.
결과적으로 진에게 자하드의 비전마법은 앞으로 차근차근 쌓아나갈 숙제 같은 거였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별을 밝힐 때마다 요구되는 XP가 점차 늘어나는 마당에 비전마법까지 손수 익혀야 했다면 절로 허리가 휘었을 테니까.
진짜 잡탕 될 뻔했네.
······지금도 그런가?
아무튼 한결 마음이 편해진 진이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완벽에 가깝게 조형된 마나의 길이 보인다.
그리고 심장.
모든 길의 시작이자 끝인 그곳에 자그마한 보랏빛 구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광극]
자하드의 비전마법이 선물한 힘이었다.
살짝 건드리자, 파직! 스파크를 일으키는데 뭔 놈의 성질머리가 말티즈 저리가라다.
"에헤이···"
따끔거리는 통증에 진이 인상을 썼다.
몇 번을 반복해도 그 모양이니.
아무래도 친해지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다고.
쯧쯧 낮게 혀를 차는데, 그사이 완연해진 햇빛이 공장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불쾌한 장소에 참 오래도 있었다.
이젠 떠나야겠다 다짐한 그가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움직였다.
***
불행한 소식이 3개라면 믿겠는가.
진은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이 그런 것을.
우선 200만 크레딧이 사라졌다.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없더라.
갑자기 돈에 발이 달려서 도망간 게 아니고서야.
어떠한 계기로 사라진 건 확실했다.
그래서 추측한바.
크레딧을 챙긴 수도사가 합체 괴물이 됐다가 로칸의 주문에 맞아 죽는 과정에서 지폐도 홀라당 타버렸다는, 지폐 통구이 설이 가장 유력하니.
오늘부로 흑마법사를 자신의 원수라 천명한 진이다.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다 어디 갔어?"
돈만 없어진 줄 알았더니, 아니 글쎄 사람도 없어졌더라.
분명 노숙자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공간은 거짓말처럼 텅 비어있었으니, 살갗에 닿는 찌릿한 마나로 보건대 로칸이 이들을 데려간 건 분명했다.
근데 왜 나만?
영문은 모르겠지만, 여하튼 홀로 남겨졌음을 절감한 진이 서둘러 공장을 벗어났다.
그리곤 저 멀리 보이는 낯선 풍경에 멈칫.
탁 트인 하늘, 길게 뻗은 도로.
그 위를 드문드문 지나치는 차들.
···하이웨이?
후미진 공터 또는 부둣가 따위가 자신을 반길 거라 예상했던 진이 눈을 끔뻑거렸다.
로칸이 43번 구역에서 잡혀 왔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쎄하다곤 했지만, 이게 무슨···.
그 와중에 공장 인근에는 주차된 차량이 단 한 대도 없더라.
돈도 잃어버렸고, 사람들도 사라졌고.
심지어 이제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 상황.
해서 지금이다.
"신세 좀···!"
엄지를 척 치켜세우는 진의 곁으로 트럭이 쌩-하고 지나쳤다.
"······씨."
얼굴에서 가식적인 미소를 날려버린 그가 짜증 섞인 외마디를 내뱉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짼지.
어떻게 된 게 속도를 살짝이라도 늦춰주는 놈이 없다.
오히려 가까워질수록 풀악셀을 밟은 양 순식간에 멀어지니-
"어쩌지."
진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야박한 인심을 멈춰 세우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할까.
바지라도 내릴까.
내 엑스칼리버 보여줘?
생각해 보니 들이박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진의 한숨만 더 깊어졌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
꼬르-
꼬르르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꼽시계까지 울리자,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싶은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진 진이 용단을 내렸다.
일단 벗자!
이는 배고픔이 부끄러움을 이긴 결과라.
물론 벗은 건 바지가 아니라 웃통이다.
그렇게 두터운 항공 점퍼와 그 안의 반팔까지 훌러텅 탈의한 그가 멀찍이 다가오는 차량을 향해 팔을 휘적거리며 소리쳤다.
"제에발! 멈춰어어-!"
그리하여 예술에 가까운 육체미를 발산하는 상체가 나 좀 보소.
멀리서부터 아주 광고를 해대니-
끼이이이익!
놀랍게도 급정거를 선택한 차가 노면에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멈춰 서더라.
"오!"
진이 눈을 크게 뜨는 가운데, 지잉-내려간 유리창 너머로 운전자가 보였다.
선글라스 다리를 잡아 아래쪽으로 살짝 내린 여인.
살짝 추켜 뜬 맨눈으로 진을 확인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타."
***
여인의 이름은 나타샤였다.
자신을 트러커(Trucker)라 소개한 그녀는 3.5톤짜리 준중형 화물차의 오너로, 반쯤 내린 창문 밖으로 담배 연기를 후-내뱉는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조수석 쪽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앍···겡써."
알겠어, 라는 대답은 입속에 가득 찬 치즈버거로 인해 잔뜩 뭉개지고 말았으니-
남이사 어떻게 듣든 다시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한 진이다.
치즈버거에서 감자튀김으로,
감자튀김에서 다시 치킨 너겟으로.
손과 입이 분주했다.
생각해 보면 어제, 오늘 최소 3끼는 굶지 않았던가.
그래선지 몰라도 온몸이 영양분을 쭉쭉 빨아들이는 게 느껴질 정도라.
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신체를 강화하는 이레귤러가 아니고선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기도 했다.
뭐가 어찌 됐든.
남들 눈엔 파멸적으로 보일 뿐인 식사를 마친 진이다.
다만 성에 찰 정도로 배를 불리진 못했다.
안타깝게도 나타샤가 구매한 햄버거는 딱 1인용 세트였기에.
아쉬운 마음에 손끝에 묻은 튀김가루를 쪽쪽 빨던 진이 뒤늦게 운전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넌 못 먹어서 어쩌냐."
"그러게. 내가 웬 거지를 태웠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크흠. 무튼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괜히 멋쩍어진 진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뜩 시선이 닿은 룸미러 속. 상의를 탈의한 남자가 보이더라.
"어우. 미안."
그제야 옷도 안 입고 배부터 채웠음을 깨달은 진이 허둥지둥 반팔을 입으려는 찰나.
"식사에 이어서 이젠 눈요깃거리까지 뺏어가려고?"
나타샤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왜 세워줬는지 잊었어?"
"그럼 딱 10분만···"
"농담이야. 그냥 입어. 이미 실컷 봤거든."
보조개가 깊게 패는 시원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창밖으로 재를 떨던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다시 담배를 물며 정면을 바라보니.
이어지는 물음이 자연스러웠다.
"왜 피투성이래."
"음? 아아."
때마침 반팔 머리구멍으로 얼굴을 쑥 뺀 진이, 옷 군데군데에 튄 핏자국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차를 세우는 놈들이 없었구나 생각하면서.
"그냥 뭐···거지 같은 세상이잖아."
"동의하는 바야."
진이 말했고, 나타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그녀는 굳이 불필요한 뒷말을 덧대가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저 볼을 홀쭉하게 당겨 담배를 태웠을 뿐.
부우우우웅-
화물차가 하이웨이를 가로질렀다.
나아가는 직선 도로는 평이했고, 무심한 눈길에 닿은 풍경들은 천천히 마음에 스며드니.
어느 순간.
인지할 틈도 없이.
해묵은 상념이 진의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누구고, 이 세상은 뭘까.
돌아갈 수는 있나?
따위의 우중충한 생각.
등을 떠미는 새카만 손바닥들.
저 멀리 검은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지잉-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내린 진이 그 너머로 팔을 쭉 뻗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손끝을 스치는 바람에 집중했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다 보니 어느 순간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더라.
식은땀을 흘리며 호흡을 천천히 고른 그가 창틀에 팔꿈치를 얹자,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나타샤가 입을 뗐다.
"그래서 다운타운 사람이라 이거지?"
"응. 맞아."
"잘됐네. 어차피 나도 거길 지나치는 상황이었거든. 그럼 다운타운에서 내려주면 되는 거지?"
그에 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짜? 그럼 나야 고맙지."
"고마우면 복근 한 번 더 보여줄래?"
"옜다! 이건 보너스!"
복근에 이어 잘 발달한 사각 가슴까지.
이건 뭐 코너 속의 코너도 아니고.
짤막한 스트립쇼를 펼친 진이 뒤늦게 밀려드는 자괴감에 주섬주섬 옷을 내렸다.
"시벌······"
그러다 문뜩 운전석 쪽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니.
"너는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나타샤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난 48번 구역에.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마무리할 일?"
"보다시피 물건을 옮기고 있거든."
엄지로 어깨 뒤 화물칸을 가리키는 그녀의 모습에 진이 그런갑다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잠시만.
"나 태울 적에 급정거하지 않았어? 물건 망가졌으면 어쩌냐?"
"아아. 괜찮아 살─"
부아아아아앙!!
요란한 엔진음이 나타샤의 뒷말을 집어삼켰다.
"···뭐야."
그에 눈살을 찌푸린 진이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려는 순간.
탕!!
익숙한 격발음과 함께 사이드미러가 와장창 깨지니.
뒤이어 들려오는 악에 받친 고함.
"야이-씨이발년아!!! 차 세워!!"
"보스를 구해라!!"
"넌 오늘 뒤졌어! 쌍년아!!"
그에 진의 표정이 슬며시 구겨졌다.
이건 무슨.
대체 뭘 얻어 탄 겨?
그와 동시에 상태창이 눈앞을 가렸다.
< 30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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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화 >
돌발!
나타샤를 돕거나(선택)
인질을 구출(선택)
XP 2,500
속독하듯 키워드만 파악한 진이 고개를 돌렸다.
"야. 설마 물건이란 게···"
"응. 사람."
평이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타샤는 오른손만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사이드미러가 한 짝 떨어졌어도 담배를 태우고 그 재를 떨어내는 왼손은 느긋했다.
이모저모 평범한 트러커의 반응은 아니었던지라, 진이 허리춤의 그라비스를 만지작.
그래도 얻어먹은 게 있어서 바로 뽑지는 않고 나름 침착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내가 지금 이런저런 이유로 인질 감수성이 최대치거든? 편파 판정 내리기 전에 3줄 요약 가능할까? 2줄이면 더 좋고."
그사이 가까워지는 엔진음이 있었다.
이년, 저년 하는 욕설이 있었고-
뒤따르는 총성도 있었다.
'탕!' 하는 격발음과 쇠붙이를 스치는 '팅!'
바로 옆쪽에서 들렸다.
얼굴로 치면 귓가를 스친 느낌.
난리 났네.
진이 창가 쪽 손잡이를 움켜쥐며 사이드미러를 재차 확인했다.
룸미러가 무용한 화물차라 보조 사이드미러가 여럿이다.
해서 박살 난 네모길쭉한 거 말고.
그 아래, 상대적으로 작은 거울이 비춘 도로의 풍경을 바라보니.
부우우우웅!
검은 머슬카 2대가 화물차를 바짝 쫓고 있더라.
총알의 출처는 보나 마나 저기, 창문 너머로 상체를 쭉 빼고 있는 저 녀석 짓이다.
놈의 입에서 다시 이년, 저년.
새끼. 목청 디게 좋네.
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타샤가 입을 열었다.
"사기를 당했어. 한두 번이 아니었고, 하루 이틀도 아니었지. 알면서도 참아줬더니 내가 호구로 보였나 봐. 슬슬 선을 넘을 조짐이 보이길래 점잖게 경고했지."
거기까지만 해.
담배 연기와 함께 이어진 뒷말.
나타샤의 보조개가 옴폭 패였다.
"그랬더니 사기꾼이 어떻게 했게-?"
"이 상황에 질문? 야. 지금 총알 날아와."
탕! 팅! 탕! 팅!
리드미컬한 박자로 차체를 스치는 탄환이다.
진의 항변이 당연한 상황인즉.
나타샤가 속도를 높이며 대답했다.
"저 혼자 뜨끔했는지 글쎄 날 죽이려고 하더라. 끝내 선을 넘은 거지. 그 대가로 저기 화물칸에 묶여 있고."
그에 진이 사이드미러를 힐끗거리며 고개를 끄덕.
중간에 느닷없는 질문이 끼여서 그렇지.
이 정도면 얼추 3줄 요약에 가깝다.
이걸 다시 정리하면.
"···그러니까 사기꾼이 선을 넘어서 납치했는데, 납치당한 놈 부하들이 쫓아왔다? 이년 저년 미친년 쌍년 하면서?"
"정확해."
긍정하는 나타샤를 향해 진이 덧붙였다.
"쫓아올 줄 몰랐어?"
"응. 사기꾼 녀석의 전뇌 소켓을 싹 비워버렸거든. 추적당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수를 쓴 모양이네. 모르지. 미리 위치추적기를 삼켰을지도."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타샤가 문뜩 헛웃음을 흘렸다.
"믿고 말고는 자유지만 휘말리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러게 몸이 좀 좋으셨어야지. 응?"
"지금이라도 내려도 되냐?"
"상관은 없는데. 공범이란 오해는 못 벗을 텐데."
돌아가는 상황을 대강 이해한 진이다.
다만 나타샤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도 없는 게 이건 인질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원래 어떤 분쟁이 발생했을 땐 양측의 입장을 모두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근데 그것도 정상적인 상황에서야 그렇지.
총알이 날아온다고. 총알이!
해서 진이 깊이 생각하길 멈췄다.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입에 걸레를 문 총기난사범들보단, 그래도 차도 태워주고 햄버거 세트도 준 나타샤가 낫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라고.
"밥값은 해야지."
결심을 굳힌 진이 창문을 내렸다.
그러고는 상체를 쭉 내밀어 냅다 그라비스의 방아쇠를 당기니.
타앙─!!
우렁찬 총성과 함께 뒤쫓아오던 머슬카의 왼쪽 전조등이 와장창!
"시, 시발!"
마찬가지로 뒷좌석에서 상체를 길게 빼고 총을 쏘던 욕쟁이가 화들짝 목을 움츠렸다.
놀란 건 놈뿐만이 아니었는지, 세찬 바람이 스쳐 얼얼한 귓가로 나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포라도 쐈어?!"
하지만 진은 대답 대신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그리고 깨달았다.
생각처럼 잘 안 맞는다는 걸.
첫발도 그렇고 방금 것도 그렇고.
분명 운전자를 노리고 쐈는데, 애꿎은 전조등과 보닛만 차례로 박살 났을 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달리는 차, 불안정한 자세, 극강의 반동을 자랑하는 그라비스. 거기에 한 손 사격까지.
이 정도로 패널티가 덕지덕지 붙으면, 제아무리 진이라도 깔끔한 명중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도 슬슬 감이 잡히는 게 다음번에는 맞추겠다 확신한 그가 재차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머리 집어넣어!"
나타샤의 목소리와 함께 차체가 흔들렸다.
직후 차선을 지그재그로 바꾼 화물차가 앞차 사이를 파고들며 추월을 거듭하니-
이제는 앞차에서 옆차가 되어버린 쇳덩이를 피해 얼른 조수석으로 피신한 진에게 나타샤가 물었다.
"괜찮아?"
"어. 안 부딪혔어."
그보단 확신을 가지고 쏜 마지막 발이 빗나간 게 아쉬웠다.
때마침 탄창을 다 비운 그라비스의 슬라이드가 뒤로 밀린 상황이었기에 더욱.
"아씨. 하필."
브로프에게 구비한 여벌 탄창은 만티코어의 트렁크에 곤히 모셔놓은 상태. 그리고 만티코어는 모텔 주차장에 묶여 있었으니, 공장을 나설 때 칼리파에게 좀 챙겨달라 문자를 보내긴 했다.
무슨 사고라도 쳤냐는 답장을 무시한 건 안 비밀.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귀찮아졌네."
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라비스를 홀스터에 채웠다.
그러고는 목을 좌우로 꺾어 뼈소리를 낸 뒤.
"우선은 내가···"
이어지는 나탸사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창문 너머로 몸을 뺐다.
이번에는 상체뿐만 아니라 다리까지 전부.
휙!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화물차의 지붕에 올라선 진이 등을 떠미는 바람을 느끼며 화물칸 쪽으로 껑충 뛰었다.
그러자 이제껏 사이드미러에 의존했던 뒤쪽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더라.
부아아아앙!!
어느새 차들의 미로를 돌파한 머슬카 2대가 포악한 엔진음을 터뜨리며 거리를 좁히고 있었으니-
이젠 이판사판이라 생각했을까.
여태까지 영 재미를 보지 못했던 권총이 아닌, 소총을 꼬나쥔 채 창밖으로 고개를 빼던 욕쟁이가 트레일러 위의 진을 발견하곤 흠칫.
"씨발! 저길 언제 올라간 거야?!"
당황한 와중에도 총구를 겨냥하는 순간.
진이 정신을 집중했다.
고전역학에서 말하길.
어떠한 물체가 맨 처음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고, 다음 순간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 물체가 언제 어디에 위치할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머슬카가 달려오는 방향, 속도, 그리고 처음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0.1초 뒤에 이 녀석이 어디에 있을지 예측하면···!
초인이 아니면 따라 하지 마시오.
다음 순간.
허공에서 번쩍하고 나타난 진이 발밑을 스치는 머슬카의 지붕에 아슬아슬하게 안착했다.
당연하지만 멋까지 챙길 여력은 없다.
속도가 속도라. 개구리마냥 납작 엎드려 겨우 낙상을 면한 진이 앞머리를 휘날리며 엉금엉금 기었다.
그러고는 충분한 위치에 도달했을 때.
콱 틀어쥔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쨍그랑!!
유리창을 박살 낸 주먹이 운전자의 옆얼굴을 세차게 후려갈기고-
빠아아아앙!!
클락션에 머리를 박으며 쓰러진 동료를 발견한 놈들이 그제야 소리를 꽥!
"오! 씨이발!"
"뭐야!"
참신할 것 없는 비명을 무시한 진이 핸들을 잡았다.
액셀은 정신을 잃은 운전자가 이미 꽉 밟고 있었기에 방향만 조절해 차선을 넘으니.
쿵!
나란히 달리던 다른 머슬카를 옆에서 들이박은 차체가 크게 요동쳤다.
"큭!"
"으억!"
그 충격에 탑승자 전원이 상체를 앞뒤로 요란하게 흔드는 가운데.
조수석 뒷자리에 앉은 욕쟁이가 소총을 철컥 겨눴다.
"죽어! 이 좆만아!"
그러나 총구가 불을 뿜는 것보다, 놈의 옆자리로 블링크한 진이 총열을 덥석 움켜쥐는 게 더 빨랐다.
직후 반박자 늦게 발사된 총알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방으로 빗발치니-
두두두두두!!
폭죽처럼 튀어 오른 핏물이 앞유리 뒷유리를 가리지 않고 차량 내부를 붉게 물들였다.
"개씨발!"
뒤늦게 방아쇠에서 힘을 뺀 욕쟁이가 자신이 불러온 참상에 눈을 부릅뜬 순간.
빠각!
놈의 얼굴에 주먹을 꽂은 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이는 가드레일.
쾅!!
굉음과 함께 허공으로 사출된 머슬카가 그대로 수십 미터를 날아 포물선을 그리며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콰강! 쾅! 콰카강!!
육중한 차체가 몇 번이고 지면을 구르고 또 구르다가 이내 불길에 뒤덮이며 멈춰 서는 광경을.
가로등 기둥에 매미처럼 매달린 진이 내려다봤다.
"어우씨."
하필이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게 이 녀석이라.
도박하는 심정으로 이동했는데 어찌어찌 성공하긴 했다.
이후 기둥을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발붙인 진이 얼굴에 튄 핏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한 대는 놓쳤네."
당초 계획은 머슬카끼리 부딪친 순간.
반대쪽 차 내부로 블링크하는 거였는데, 들입다 소총을 갈기려는 미친놈 때문에 일이 틀어졌다.
"쯧. 아깝다."
진이 콧잔등을 살짝 찡그릴 때였다.
···두두두!
···두두두두!
저 멀리 시야의 바깥쪽에서 간헐적인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국 나타샤가 따라잡힌 걸까.
그래도 해줄 만큼은 해준 것 같은데.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어느 순간 총성이 뚝 끊기니-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익숙한 화물차가 반대편 차선에서 나타나더라.
빵빵! 경적을 울리면서.
"안녕."
어느새 자신 곁에서 속도를 줄인 화물차를 향해 진이 인사를 건넸다.
그에 정다운 인사가 돌아왔다.
"안녕은 무슨. 너 미쳤어?"
***
졸음 쉼터인 건지, 아니면 뭘 만들다가 만 건지.
여하튼 용도를 알기 힘든 자그마한 공터에 차를 세운 나타샤다.
잠시 핸들을 잡고 있던 그녀가 진을 돌아봤다.
"너. 대체······"
말끝이 늘어진다.
어미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벙끗거리더니 이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내리자. 자세한 얘긴 나중에 하고."
이후 진과 나타샤 두 사람이 적재함 앞에 나란히 섰다.
진이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자니, 결쇠를 툭툭 풀어낸 나타샤가 적재함의 문을 열어젖혔다.
텅 빈 내부.
손발이 묶인 남자가 보였다.
갑작스런 빛에 인상을 찡그리던 그는, 곧이어 나타샤를 발견하고는 읍읍! 거세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진의 눈에는 꼭 뭍에 올라온 생선 같았다.
"아주 힘이 넘치시네."
"동감이야."
나타샤가 그렇게 대답하며 적재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사내의 입을 막은 검은 테이프를 뜯어내니 기다렸다는 듯 쌍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씨발년! 니가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케빈 진정해."
"진정? 진정 같은 소리하네. 아직 감을 못 잡았나 본데. 조만간 내 부하들읽······!"
거친 손아귀에 뺨이 붙잡힌 사내, 케빈이다.
그런 그를 노려보며 나타샤가 말했다.
"케빈. 이러니까 네가 삼류 링커 신세를 못 벗어나는 거야. 눈치는 어디 팔아먹었어. 귀는 뒀다가 뭐하냐고. 총소리 못 들었어? 내가 왜 문을 열었을 거 같아. 응?"
그에 진이 고개를 갸웃.
사기꾼이 링커였어?
그럼···
새삼스러운 눈길로 케빈과 나타샤를 번갈아 바라본 진이 머릿속에 정리한 3줄짜리 요약본에, 링커와 솔로를 대입해 곱씹는 사이.
"자신 있으면 계속 소리 질러봐. 재밌을 테니까."
나직한 경고를 남긴 나타샤가 손에서 힘을 풀자,
얼얼한 턱을 아에이오우 움직이던 케빈이 이내 작게 중얼거렸다.
"시발···어떻게 이런······"
비통한 혼잣말.
이후 나타샤가 천천히 입을 열길.
"잘 들어, 케빈. 이대로 널 48번 구역에 팔아넘길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선 나도 수지가 안 맞아서 말이야. 그러니 기회를 줄게. 지금이라도 나한테서 떼먹은 돈 다 내놔. 그럼, 노예 꼴은 면하게 해줄 테니까."
"아쉬워서 어째. 나 돈 없는데? 못 믿겠으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사무실이나 뒤져보시든지."
"하아. 케빈, 케빈, 케빈."
나타샤가 피곤한 얼굴로 도리질을 쳤다.
"뻔한 말을 왜 두 번씩 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그냥 쉽게 좀 가자. 네가 현물을 보관한 장소. 그 위치와 비밀번호 둘 다 말해."
그에 케빈이 코웃음 쳤다.
"지랄. 대가리에 총 맞았냐? 내가 그걸 왜 말해? 어? 그럼 나한테 뭐가 남아서."
"목숨이 남지."
"좆까. 차라리 죽여."
"누가 삼류 아니랄까 봐. 기어이 더러운 꼴을 보겠단 거지?"
나타샤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는 모습에 케빈이 이빨을 드러냈다.
"고문하시게? 어디 해봐. 어차피 통각 센서 꺼버려서 아무것도 안 느껴지니까."
뭣?
통각을 온오프할 수 있다고?
충격적인 사실에 진이 경악한 순간.
따끔!
불현듯 심장 부근에 뜨끔한 통증이 찾아오니.
파직! 파직! 스파크를 일으키는 광극이 무언의 의지를 전달했다.
*
"왜 그래?"
자신의 어깨를 짚은 손바닥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타샤다.
그녀의 눈에 스파크가 휘감긴 검지를 펼치고 있는 진의 모습이 담겼다.
"비켜봐. 내가 해볼게."
< 31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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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화 >
진이 기계를 대하는 방식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저 도구.
과거 스마트폰이란 자그마한 우주에 빠져,
온종일 스크린만 들여다보던 시절에도.
이 기계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움직이는진 전혀 관심 없었다.
그런 건 기술자의 영역이지.
소비자의 영역이 아니니까.
해서 진에게 기계란, 돈을 쓴 만큼 성능이 좋아지는데 그게 특정한 기준을 넘어서면 감성이니 하이엔드니 운운하면서 가성비가 뚝 떨어지는?
드럽게 비싸지만, 아무튼 삶을 윤택하게 해주니까 포기하기는 뭣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감성? 몰라.
하이엔드? 비싸.
어찌 됐든 도구는 도구일 뿐.
기어오르지 마라···!
마인드가 이렇게 생겨먹은 탓일까.
진은 기계가 잘 작동하지 않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충격요법부터 동원하고 보는.
원시적인 대응을 주저하지 않는 사나이기도 했다.
그러니.
고향의 그것보다 훨씬 진보된 기술로 만들어진 전뇌 소켓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뭐가 안 돼?
뭐시기 통각을 막았다고?
에라이, 일렉트릭 쇼크.
파지지직!
당연하게도 전뇌 소켓은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장치인 만큼, 전기적 신경 신호나 뇌파에 굉장히 민감하다.
거길 번갯불로 지졌다?
케빈이 괜히 똥오줌을 지린 게 아니다.
자하드의 비전마법.
자전광극.
그 보랏빛 난폭한 힘은 통각센서'만' 노린 게 아니라 그냥 기기 자체를 면밀히 조져놨으니까.
만약 케빈이 마법사라 이에 대한 방비를 갖췄거나, 혹은 엄청난 부자라서 마나 저항성이 극도로 높은 전뇌 소켓을 장착했다면 얘기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가정일 뿐.
중요한 건 이 세계선의 케빈은 이미 다 불어버렸다는 거다.
자신이 현물을 보관한 장소.
그 위치, 비밀번호.
입고 있는 팬티 색깔.
선호하는 쓰리 사이즈. 은밀한 성적 취향?
그만!
그만 알아보자.
아무튼 다 불어버린 케빈이 의식을 잃고 풀썩 쓰러짐에 진과 나타샤가 천천히 눈을 맞췄다.
"이제 진짜 공범된 건가?"
"···그런 거 같네."
***
나타샤는 진의 도움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챙기게 될 몫의 20%를 약속했고,
그러잖아도 무일푼 신세였던 진은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대로 다운타운에 돌아가도 손가락만 쪽쪽 빨아야 할 판이었는데 오히려 잘됐다고,
옳다구나 조수석에 몸을 실었더란다.
운전도 남이 해주는데 뭐가 대수랴!
···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죠.
전날 한숨도 못 잔 게 화근이었을까. 뒤늦게 눈꺼풀이 살살 무거워지는 게 이러다 까무룩 졸아버릴 것만 같더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방예의지국 출신으로서 조수석에서 잠에 들다니. 그런 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나 허락하는 거라고!
해서 진이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졸음을 이겨내고 있으려니, 어느 순간 나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어떻게, 이제라도 도련님이라고 불러줘?"
"어?"
저건 또 무슨 소리래.
이제껏 말이 없더니 불쑥 던진 첫마디가 도련님?
"보고도 모른 척하긴 좀 그래서."
"······?"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나타샤에 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이 나타샤 앞에서 뭘 보여줬다고 해봐야,
달리는 차 밖으로 몸을 날렸다거나,
맨몸으로 머슬카를 전복시킨 정도가 전부라서.
이것 때문인가.
곧장 검지를 펼친 진이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심장 언저리의 찌릿한 통증과 함께 갈지자 불티가 손가락을 휘감으니-
그 모습을 연푸른 맨눈으로 확인한 나타샤가 콧잔등에 걸친 선글라스를 손끝으로 세웠다.
"···보랏빛 번개. 자전의 자하드."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컵홀더에 끼워놓은 담뱃갑을 뒤적거렸다.
"너무 유명한 힘이잖아. 진."
비전마법이 왜 비전마법이겠는가.
존재 자체로 상징성이 있기 때문인즉.
여기엔 시각적으로 차별화되는 요소도 포함됐다.
솔라드의 백염.
마르지에의 암빙.
그리고 자하드의 자전이다.
감추기엔 티가 너무 난다.
더군다나 가문의 순수주의자들은 애초에 이를 감출 생각도 없다. 타인과 차별화되는 모습이야말로 자신들의 고고한 혈통을 증명하는 길이라 여겼기에.
이는 빛과 장미의 시대부터 이어진 우월주의라.
진이 들으면 콧방귀를 낄 얘기다.
그래봐야 색칠놀이한 번갯불이 아닌가.
물론 강하겠지. 비전마법이니까.
이 도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거인의 유산이니까.
근데 그래서 뭐?
진은 여기에 목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 또한 도구일 뿐이다.
배웠으니 써먹을 뿐인 도구.
도구는 도구다워야 한다는 지론은 새로운 땅에서도 변함없었으니, 이는 그가 순정한 몸을 가지고도 순수주의자가 될 수 없는 이유라.
어쩌겠는가.
누군가에게 찬란한 유산이 진에겐 그저 스킬에 불과한 것을.
그것도 앞으로 몇 개를 더 배울지도 모르는.
해서 대답할 이유조차 느끼지 못한 그가 기왕 검지도 펼쳤겠다, 코를 후비적거리고 있으려니,
이 모습을 나타샤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는 짓이 직계 도련님은 아닌 것 같고. 방계 쪽인가? 사정이 복잡하다면 그냥 넘어갈게."
진은 굳이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저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화제를 돌렸을 뿐.
"케빈이랑은 어떻게 된 건데."
"뭐가."
"뒷돈 챙기는 거 알았는데도 왜 봐줬냐고."
짧은 침묵.
이윽고 칙-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들려오니.
담배에 불을 붙인 나타샤가 창문을 내리고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뻔한 얘기지. 친구였거든."
골목길을 전전하던 밑바닥 인생들.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정말 별것 아닌 이야기였다.
*
오래전 친구였던 남녀가 있었다.
친구라고 해봐야 오가며 인사만 하는 정도였지만, 상대방 등 찔러대기 바쁜 뒷골목에서 이 정도면 우정이라고 할 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사이커로 각성했고,
이를 알아차린 남자는 사업을 제안했으니,
그게 삼류 링커와 신예 솔로의 첫 만남이라.
처음에는 거창한 꿈도 있었다.
남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거물.
여자는 시정부 요원에 버금가는 강력한 사이커.
물론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인맥도 얕고, 능력도 달리고, 경험도 변변찮았던 남자는 어느 순간 슬그머니 꿈을 접었다.
제대로 된 솔로를 영입하지 못한 사무실엔 저와 마찬가지로 변변찮은 삼류들만 득실거렸으니, 이게 링커 사무실인지 갱단 아지튼지 구분이 어려울 지경이라.
그래도 호칭이 보스로 바뀐 건 좋았다고.
그렇게 좆밥들 대장놀이에 심취한 지 한참.
이쯤 되니 슬슬 눈에 거슬리는 게.
저기 저, 혼자 사람 구실하는 레벨 3짜리 솔로년.
이 구역, 저 구역 안 따지고 트럭 하나 몰고 다니면서 의뢰를 처리하는 성실한 꼬락서니가 괜스레 역해지더라.
시발년이. 왜 포기를 안 해?
*
"의뢰비 줄여 부르는 건 그러려니 했지만, 나중에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들만 골라서 보내더라고. 물론 나한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고선."
나타샤가 창밖으로 재를 툭툭 떨었다.
"그래서 적당히 하라고 했더니만, 밤중에 부하들 시켜서 암살 시도까지. 선 넘었지. 그래서 납치했어."
그에 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살짝 충혈된 건, 마음이 아파서.
···가 아니라 중간에 졸았다.
근데 뭐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니까.
"···잘했네. 진즉 빠져나오지 않은 게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내 말이. 휴지보다 얄팍한 우정이 뭐라고. 호구 맞아. 내가 봐도 그래."
나타샤가 쓴웃음을 지었고, 진은 입이 찢어지라 크게 하품을 한 뒤 창문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혹시 다운타운도 괜찮나?"
"무슨 말이야."
"다운타운에 에넥도트라고 술집 겸 링커 사무소가 있거든? 내가 누굴 추천할 입장은 안 되고, 와서 면접이라도 보든지. 후회는 안 할 걸. 거기 점장이 쿠키를 참 잘해."
"···쿠키? 그보다 너 솔로였어?"
진은 대답 대신 단말기를 꺼냈다.
[만티코어 사진 좀 찍어 보내줘. 그립다.]
이후로도 두 사람을 태운 화물차는 하이웨이를 계속 달렸다.
다행히 비밀 장소라는 건, 그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 않았다.
45, 46번 구역과 연결되는 순환길 초입.
눈에 띄지 않는 허름한 마트가 하나 있었으니-
심드렁한 얼굴로 계산대에 앉아 있던 뚱보가 가게로 들어서는 진과 나타샤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그 흔한 어서 오세요, 조차 없는 싸가지였지만.
나타샤는 딱히 개의치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물건 찾으러 왔어."
"···처음 보는데."
"케빈 가넷. !Xce11oIIE#3833."
"······"
잠시 허공을 응시하는 듯하던 뚱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치하네. 그 좆밥은 뒈졌나?"
"중요해?"
"그럴 리가."
작게 키득거린 뚱보가 손깍지를 꼈다.
와. 소시지 먹고 싶다.
진이 저도 모르게 쓰읍 침을 삼키는 가운데.
"더 필요한 거라도 있어?"
"아니. 2차 검증은 필요 없어. 단순 보관만을 목적으로 한 제일 낮은 등급의 계약이니까. 비밀번호를 유출한 본인 잘못이지. 그래서 얼마나 꺼내줄까."
"전부."
"잠시만 기다려."
짤막한 대화를 마친 뚱보가 비대한 몸을 일으키니-
잠시 후 묵직한 돈가방을 가져온 그가 말했다.
"4,280만 크레딧. 보관료를 제외한 전액이다."
"······그게 다라고?"
"왜 거짓말 같나? 매일 도박판 기웃거리던 좆밥한테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군. 계약서라도 보여줘?"
"하아···됐어."
나타샤는 피곤한 얼굴로 돈가방을 챙겼고,
진은 가게를 나서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 안전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뚱보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우리네 보안을 걱정할 거라면, 적어도 레벨5 이상의 솔로는 되고 말하자고. 진."
"······? 내 이름 어떻게 알았냐."
"솔로 인트라넷은 장식인 줄 아나?"
뚱보가 두툼한 손가락으로 전뇌 소켓이 장착된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그 모습에 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솔로 인트라넷에 등재됐다고 했던가.
Lv2.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하여간 미친 세상.
이게 쉬움 맞아?
"다음에 또 보자고. 기대주."
등 뒤로 들려오는 기름진 목소리를 무시한 채 가게를 나선 진이다.
그대로 화물차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니, 적재함에 등을 기댄 나타샤가 보였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
그녀가 말했다.
"고민 중이야. 당장 이 문 열고 저 자식 신나게 패버릴지."
"떼먹힌 돈이 얼만데?"
"글쎄. 못해도 1억은 넘지 않을까."
"······. 대신 패줘?"
물론 그랬다간 확실히 죽는다.
이미 빈사 상태인 케빈이었으므로.
"됐어."
짙은 한숨을 내쉰 나타샤가 진에게 돈가방을 내밀었다.
"900만 크레딧이야. 통 크게 20% 떼주겠다고 해놓고. 이것밖에 안 돼서 미안."
"네가 사과할 건 아니지."
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돈가방을 건네받았고,
동시에 퀘스트가 완료됐다.
짧지만 강렬한 열락의 순간.
수치화된 뇌내 마약이 머릿속에 퍼져나가니. 새로운 퍽을 해금할 충분한 경험치가 모였음을 인지한 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태양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지평선이 보였다.
하이웨이기에 볼 수 있는 광경.
탁 트인 시야 너머 짙게 깔린 노을이 마치 불장난에 심취한 하늘의 짓궂은 민낯 같아서.
"······"
진은 한동안 거기에 시선을 빼앗긴 채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리 뒤로 느긋하게 다가온 감청색 어둠이 세상의 색을 앗아가니.
문뜩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본 진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태양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완연해진 밤하늘.
어쩌면 익숙한 풍경.
오늘도 참 피곤한 하루였다고.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나타샤에게 말했다.
"가자."
다운타운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32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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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화 >
"···손님, 손님?"
누군가 어깨를 툭툭 투드려 눈을 뜬 진이다.
쓰읍-침을 삼키고 눈을 떠보니 여기가 어디래.
아무튼 차는 정차 중이고, 나타샤는 이쪽을 바라보고, 주변은 캄캄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
"잘 잤어?"
진이 흠칫 놀랐다.
남의 입으로 너무 간만에 듣는 대사라서.
그리하여 허둥지둥 턱밑을 닦아내며 묻길.
"나 얼마나 잤냐?"
"글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
그제야 창밖으로 보이는 어슴푸레한 풍경이 눈에 익다는 걸 알아챈 진이다.
단순히 어둡다고 생각했던 배경 속. 어지러운 네온빛과 숨 막히게 들어찬 닭장 건물을 확인한 그가 말했다.
"···정크 프라자네."
"에넥도트를 찍고 달리니까 여기더라. 화물차로는 진입하기 힘들 것 같아서 여기다 세웠어."
"어우. 뭘 이렇게까지."
본의 아니게 풀서비스를 받아버린 진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일 때였다.
"그나저나 잠꼬대 귀엽던데."
혼잣말처럼 이어진 나타샤의 목소리가 전조도 없이 뒤통수를 후려치니.
···뭔 꼬대?!
진의 얼굴이 노상방뇨를 들킨 사람처럼 당황으로 물들었다.
"뭐, 뭐라고 하던데?"
"비밀."
"아니. 그럴 거면 왜."
설마하니 안알랴줌을 당할지는 몰랐던 진이다.
떠듬떠듬 말문을 잇지 못하던 것도 잠시.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남은 잠기운마저 날려버린 그가 돈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지폐 한 움큼을 잡아 대시보드에 내려놓았다.
"데려다줘서 고맙고. 이건 기름값."
"됐네요. 안 받아."
"에헤이- 넣어둬."
"안 받는대도?"
잠깐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물론 승리한 쪽은 진이었다.
이런 고집에서 한국인을 이길만한 민족은 없다.
왜, 기분 좋은 술자리의 마침표를 찍는 과정에서 현금이나 카드를 발도술처럼 내지른 경험이 다들 한 번씩은 있지 않은가.
아아 됐어. 이건 내가 살게. 쓰읍! 됐대도.
여기 계산요! 같은.
물론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다만.
결국 정이라고.
마무리를 좋게 짓고 싶다는 마음 자체는 일맥상통한 것이라서.
아무튼 30만 하고도 얼마쯤 되는 크레딧을 억지로 나타샤에게 밀어 넣는 데 성공한 진이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900만 크레딧을 맞춰서 준 내가 뭐가 되냐는 볼멘소리는 무시했다.
그럴 거면 데려다주질 말던가.
라는 요상한 논리는 덤.
이쯤 되면 듣는 사람이 그냥 져줄 수밖엔.
"···어이가 없어서 진짜."
나타샤가 헛웃음을 치는 가운데.
찌뿌드드한 목덜미를 주물럭거린 진이 그녀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여기까지 온 김에 얼굴이나 비출래?"
"어디. 에넥도트?"
"그렇지?"
"됐어."
예상과 달리 나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은 프리랜서로 지낼 생각이야. 솔로 인트라넷에 지명 의뢰가 몇 개 들어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직 저기 저 자식이랑 남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녀는 엄지로 적재함을 가리켰고, 자연스럽게 진은 지금이 헤어질 때라는 걸 인지했다.
물론 그전에 치러야 할 의식이 하나 남아있었지만.
"번호."
"음?"
가슴께로 쑥 들어오는 구형 단말기를 엉겁결에 건네받은 나타샤다.
"진짜 오래된 모델이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꾹꾹 잘만 누른다.
근데 번호만 찍는 것치곤 시간이 좀···?
예상보다 긴 기다림에 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여기."
나타샤가 다시 단말기를 내미니.
넘겨받아 내려다본 스크린 속엔 풀네임이.
[나타샤 베르무트]
"오. 이름 예쁘네."
"누구랑 어울리는 이름이긴 하지."
"······?"
진이 얼굴을 들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에 옅은 미소를 짓는 금발 벽안의 여인이 담겼다.
"다음에는 에넥도트에서 봐. 술집도 겸한다고 했지? 그땐 같이 마티니라도 한 잔 어때."
그에 진이 눈을 끔뻑.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길.
"좋지. 근데 내가 술을 안 좋아해서. 술 말고 콜라는 마셔줄게. 무튼 조심해서 들어가고. 난 간다."
손바닥을 가볍게 흔든 그가 그대로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렸다.
텅 닫히는 문.
항공 점퍼를 걸친 사내는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리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으니-
지잉. 창문을 내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타샤가 아리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퇴짜 맞은 건가?"
마티니.
진과 베르무트를 6:1 비율로 섞은 칵테일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우리집 고양이 보고 갈래? 의 고급 버전인즉.
물론 진은 그런 거 모른다.
술은 마셨다 하면 다음날이 허기져서 싫어할 뿐이니.
애매한 답변에 나타샤만 이래저래 헷갈렸다고.
그래서였을까.
어둠에 파묻힌 화물차에 엔진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
의외로 진은 에넥도트에 들르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엔 밤이 늦었기에.
···는 핑계고 그냥 몸이 너무 피곤했다.
오죽했으면 다른 사람 앞에서 무방비하게 곯아떨어졌을까.
해서 열 걸음에 한 번 하품하며 도착한 모텔에서 의식을 탁 놓아버린 진이 그렇게 한나절도 모자라 그 이상을 퍼질러 잔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니.
꼬르르륵!
그마저도 배가 고파서 깬 것이라서.
와 잠시만. 큰일 났다.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밥 달라고 아우성치는 아랫배를 부여잡고 후다닥 모텔을 나선 진이 눈앞에 보이는 노점으로 냅다 돌격했다.
"늘 먹던 걸로!"
처음 오는 새끼가 갑자기 저렇게 외치면 당혹스러울 법도 하건만, 다운타운 길바닥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주인은 별말 없이 미리 만들어둔 닭꼬치를 쑥 내밀었다.
그리고 마법을 보았다.
꼬치가 주면 사라지고, 주면 사라지고.
이건 무슨 블랙홀도 아니고.
"뭐 열흘은 굶었어?"
놀란 목소리에 진이 두 볼 가득한 꼬치를 우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느낌."
규격 외의 몸뚱어리라고 해서 땅 파서 장사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을 위해 영양분이 필요한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라서, 영원한 진화를 꿈꾸는 육체란 빈말이라도 연비가 좋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랫도리엔 영 관심을 안 주니 참으로 야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여튼 제자리에서 30cm짜리 꼬치 20개를 흡입한 진의 폭력적인 식성에 주인만 덕을 봤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저게 뭔데 저렇게 맛있게 처먹나. 나도 하나 먹어봅시다 하고 모여드니, 어느새 주변이 복작복작. 줄을 설 지경이었으니까.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졌어?
그 이유를 본인만 모르는 진만 얼른 계산을 치르고 몸을 뺐다.
"허우. 잘 먹었다."
배부른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한층 맑아진 눈빛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에넥도트로 찾아간 진이다.
거기서 만티코어를 챙기고, 트렁크에 돈가방까지 실으니 속이 어찌나 후련한지.
칼리파, 포우 두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못 나눈 건 아쉽긴 했다.
무슨 일인지 점장은 가게를 비웠고, 하나뿐인 바텐더 또한 어느 남성 솔로에게 의뢰 관련 브리핑을 진행 중이었기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와 문자만 하나 남겼다.
[바이크 챙겨 간다]
직후 진이 시동을 걸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다음 행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부아아아앙!!
만티코어를 이끌고 도로 위를 달린 그가 이윽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노스 다운타운이라.
"···벌써 튀었네."
한때 교회였던 폐건물을 바라보며 진이 미간을 꿈틀.
뭐라도 남아있다면 아주 개박살을 낼 생각이었는데, 냄새를 맡았는지 진즉 간판 내리고 튄 모양이었다.
"하여간 뒤가 구린 놈들 아니랄까 봐."
허탕을 쳤음에 진이 쯧하고 혀를 차는 순간.
"···왕꼬추? 너야?"
등 뒤로 들려오는 조심스런 목소리가 있었으니.
고개를 홱 돌린 진이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제프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갈! 사자후를 내질렀다.
"야이씨! 너 어디 갔었어!"
"왐마, 깜짝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야······!"
솔직히 제프가 뭘 잘못한 건 없다.
하지만 괜히 짜증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어서.
"내가 뭔 고생을 한 줄 알아?"
"나, 나야 모르지."
"···그건 그래."
빠른 납득. 왠지 모르게 허탈해진 진이 뒷말을 덧붙었다.
"그래서 뭐 기억나는 건 없고?"
그에 떠듬거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가만히 들어보니 대충 이런 소리였다.
제프는 기억의 공백이 굉장히 커서, 사실상 기도하다 까무룩 졸았더니 그다음은 아예 생각나는 게 없고 눈 떠보니 다운타운 외곽의 미개발 매립지에 쓰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비슷한 시점에 정신을 차린 다른 노숙자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다들 잠든 사이에 내장이 싸구려 임플란트로 싹 교체된 건 아닐까 몸을 더듬거리기 바빴다고.
"딴 놈들은 겁먹고 다 튀었고···나는 네가 안 보여서 혹시나 하고 이리로 온 거야. 이틀 됐어."
우물쭈물 설명을 마친 제프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야말로 어딨다가 이제 나타난 건데? 교회는 왜 저 모양이고. 사제랑 권사들은 다 어디 갔대?"
해서 진이 설명해 줬다.
공짜밥 유인해서 노숙자 그러모은 교회의 실체를.
그 썩 유쾌하지 않은 진실을.
"···씨이벌. 진짜?"
"그렇대도."
"그럼 우릴 다운타운에 다시 던져놓은 게 그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란 거네."
"아마도."
"근데 넌 왜 안 데리고 왔다냐."
"내 말이."
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로칸이 왜 저만 놓고 갔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그 인간 하는 꼴로 봐선 딱히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냥 재밌어 보인다고 순순히 잡혀있던 광인에게 무슨 이해가 필요할까.
아무튼 무사한 거 보니 다행이다.
어찌 됐든 다음부터 공짜밥은 좀 멀리하자.
근데 잠깐만.
생각해 보면 너 따라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냐.
웃기시네. 지가 제일 많이 처먹어놓고.
따위의 정겨운 대화가 이어졌으니, 결국 어휴 됐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진이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부웅 멀어졌다.
그에 저저 잘 나간다고 사람 무시하는 거 보게, 삿대질하려던 제프가 멈칫.
언젠지도 모르게 손에 쥐어진 지폐 몇 장을 확인하고는 눈을 번쩍 떴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고맙단 인사를 하기엔 이미 시야에서 너무 작아져버린 노숙자 동기를 바라보며 제프가 코밑을 쓱 훔쳤다.
***
며칠이 흘렀다.
그간 진은 본인이 잘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먹는 거, 자는 거, 싸는 거.
그도 그럴 게, 어차피 칼리파가 말한 보름을 채우려면 아직도 시간이 꽤나 남은 상황이었다.
괜히 싸돌아다녀봐야 사건 사고만 터질 것 같았기에, 가만히 침대에 누워 하루의 대부분을 흘려보냈으니, 밥 먹고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면 일체 움직이는 일이 없었다.
다행인 점은 웬일로 상태창이 잠잠했다는 것.
뜬금없는 타이밍에 한 번씩 튀어나와서 사람 속을 뒤집는 녀석마저 조용하니, 아 이게 진짜 휴식이지.
간만에 진짜배기 심신의 풍요를 느낀 진이었다.
아무 생각을 안 할 수 있어서 마냥 행복한.
음악을 크게 틀지 않아도 잠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밤.
해서 오늘이었다.
오후 늦게 잠에서 깨어나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길 잠시.
슬슬 고파지는 배에 몸을 일으킨 뒤, 모텔방을 나서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니, 그 발걸음의 끝에 럼펌펌펌이 있었다.
수요일 19시. 2층 오른쪽 구석 자리.
낡은 스피커가 오래된 노래를 부르는 곳.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건 미안함 때문이었다.
매일 먼저 와서 자신을 기다렸던 남매였으니까.
그뿐이랴.
최근에는 밥 먹다 말고 중간에 뛰쳐나간 적도 있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그 전주에는 본의 아니게 파투도 한 번 냈고.
그래서 오늘은 이쪽에서 한턱내자는 생각으로 미리 테이블을 꽉꽉 채웠다.
그러고 보니 약속 시간까지 20분 남짓 남았더라.
자연스레 팔짱을 낀 진이 귓가를 스치는 노랫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기울이려고 했다.
타앙!!
난데없는 격발음이 귀청을 때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엥?"
럼펌펌펌에선 절대로 나선 안 될 소리에 진이 코 먹는 소리를 내며 정면을 바라봤다.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선으로 곧게 뻗은 팔이, 그 끝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총부리가 보였다.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더 뻗는다.
시체다. 관자놀이가 관통된 모습.
폭죽처럼 터져 나온 피가 창문을 더럽혔다.
그리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탕!
비명을 지른 여인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뻣뻣하게 굳은 몸뚱어리가 그대로 쓰러지는 가운데.
연이은 속사를 마친 사내가 느닷없이 양팔을 번쩍 들었다.
"A'hhhhhh!!!!!"
쩌렁쩌렁한 포효. 그와 동시에 더없이 강렬한 열기가 그의 몸으로 응축되기 시작하니-
한순간 느려진 호흡 속에서 진이 그라비스를 뽑았다.
타앙─!!
직후 우레와도 같은 총성이 상대의 머리를 향해 터져 나온 순간.
「(전조!)(돌발!)전염되는 의지」──────
버서커를 제압/살해하시오.
*보상 퍽 XP 3,000
──────────────────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
그와 동시에 거대한 불길이 럼펌펌펌 2층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 33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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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화 >
강렬한 불길이 럼펌펌펌을 휩쓸었다.
그 불길은 결코 자연적인 화염이 아니었다. 한계까지 응축되어 단단한 질감이 느껴질 만큼 억제되었다가 단번에 고삐가 풀려버린, 열류의 폭풍이었다.
휘몰아치는 충격파에 유리창이 안에서 밖으로 동시에 터져 나갔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추측하는 이유는 정작 진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해서. 고막이 나간 건지, 달팽이관이 나간 건지 이 순간 먹먹한 귓속을 가득 채운 건 삐---날카로운 이명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눈앞이 핑핑 돌고, 온몸에 작열감이 가득한 와중에도 진은 품에 안은 물건의 상태부터 살폈다.
낡은 스피커.
고백하건대 왜 얘를 끌어안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다고.
진이 소리 없이 물었다.
친구야, 너 지금 노래하고 있니?
그 물음에 답하듯, 손끝으로 전해지는 떨림이 있었다.
그게 마치 심폐소생술에 성공한 익수자의 콜록거리는 숨소리 같아서.
진이 안심했다.
이후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의 눈에 불길에 뒤덮인 풍경이 담겼다.
어차피 손님이라곤 자신을 포함해 4명이 전부였던 조용한 시간대라.
그중 둘이 죽었으니, 테러를 저지른 장본인이 일렁거리는 화염 속에서 양팔을 벌린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라비스에 맞아 머리통 일부가 날아간 상태에서도 놈은 살아있었다.
뭉개진 철제 골통 안쪽으로, 혈관을 대신하는 전선이 합선을 일으킨 것처럼 파직! 파직! 불규칙한 번개불을 튀겼다.
기술이 허락하는 선까지 기계화시킨 몸.
하지만 그건 딱히 놀랍지 않다.
순수주의자들이 순정한 몸에 대한 자부심이 있듯,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해서 중요한 건 저 강철의 몸뚱이가 아니라.
그 속에서 느껴지는 마나다.
자제력을 잃고 활활 타오르는 열기.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끝끝내 자신조차 집어삼키는 업화.
그때 테러범이 고개를 돌렸다.
"···!! ··! ······!! ····!"
이쪽을 바라보며 뭐라 소리를 지르는데 아직 명료하게 들리진 않는다.
진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답답해서라기보단,
그저 심사가 뒤틀렸기 때문이었다.
해서 저기 악을 쓰는 미친놈과 마찬가지로 절로 목에 핏대가 섰다.
야이, 개새끼야! 여기 어딘지 몰라?
럼펌펌펌이라고!
아무도 여기선 안 싸운다고!
이 좆같은 도시에서 몇 안 되는···!
제 귀에도 닿지 않는 외침이 상대에게 닿을 리 없다.
어차피 저 새낀 저 새끼대로 악을 쓰고 몸을 비트는 상황이었으니.
그래, 넌 너대로 떠들어라.
나는 나대로 너 조질랜다.
거친 파랑을 일으킨 마음의 반작용일까.
심장의 광극이 스스로 반응했다.
파지직!!
어느새 옅은 보랏빛 전류를 몸에 두른 진이다.
정작 본인은 인지조차 못 했다.
그저 힘껏 달려간 끝에 상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잡아채 그대로 바닥에 메쳤으니.
단숨에 으깨지는 뒤통수에서 핏물이 아닌 윤활유가 뿜어졌다.
보통의 인간은 여기서 무조건 죽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테러범은 그 상태에서 자신의 머리통을 움켜쥔 진의 오른팔을 양손으로 덥썩 싸잡았다.
맞닿은 부분이 발화점이 됐다.
예고도 없이 치솟는 불꽃.
끔찍한 작열통.
그리고 좆까.
진이 불붙은 팔로 허공에 크게 원을 그렸다.
여전히 테러범의 머리통을 꽉 움켜쥔 채다.
놓치지 않는다.
이미 다섯 손끝 전부가 기계화된 상판대기를 파고든지 오래였기에.
후웅!
거센 풍압을 동반한 궤적. 허공을 휘돌아 다시 직선으로 떨어진 머리통이 바닥에 틀어박혔다.
테러범의 다리가 일자로 솟구친다.
목은 꺾였고, 찌그러진 눈구멍에선 기계 안구가 돌출됐다.
하지만 놈은 그 와중에도 불길을 일으키길 멈추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쩍 벌어진 입은 고통이 아닌 맹목적인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으니.
타올라라, 타올라라. 더 뜨겁게. 더 거세게. 종국에는 저조차 태워버릴지라도.
진도 멈추지 않았다.
이쪽도 열받았긴 마찬가지였으므로.
저 새끼 정체? 몰라.
버서커? 어쩌라고 시발.
왜 여기서 지랄이야.
왜 하필 럼펌펌펌이냐고.
요 며칠 얌전하던 눈깔이 완전히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꽈드득!
자신의 오른팔을 싸잡은 상대의 양손을 초인적인 완력으로 뜯어버린 진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발목을 허공에서 낚아챘다.
그러고는 숨을 흡-들이마시며 어깨를 쭉 늘어뜨리니.
직후 세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쥐불놀이가 시작됐다.
쾅! 쾅! 쾅! 쾅!
어느 초록색 괴물이 신이라 깝죽거리는 토르 동생을 묵사발 냈던 방식 그대로다.
전후좌우 패대기쳐진 몸뚱이가 파편으로 비산하고, 강렬한 충격은 바닥에 작은 크레이터들을 스탬프처럼 찍어냈다.
진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내리치고, 내리치고, 또 내리쳤으니-
어느 순간 테러범의 몸뚱어리가 로켓처럼 솟구쳐 쾅! 천장을 크게 들이박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잡고 휘두르던 중에 손아귀에 쥔 발목이 끊어져 버린 결과였다.
"······"
순간 가벼워진 오른손을 내려다본 진은 혼자 덩그러니 남은 발을 어깨 뒤로 집어 던진 뒤, 불길에 뒤덮인 팔을 왼손으로 팍팍 두들겨 꺼트렸다.
그렇게 드러난 팔은 화상으로 엉망진창이었지만,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탓일까. 아직까지 고통은 그리 크지 않았으니.
진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저기 걸레짝이 되어 널브러진 테러범을 향해서.
놈은 더 이상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완전히 찌그러진 골통에선 피와 기름이 함께 흐르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고, 수수깡처럼 부러진 팔다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만(卍)자를 그렸으니, 중간중간 관절을 뚫고 나온 부속들로 인해 그 꼴이 더욱 참혹했다.
쉽게 말해 인간이 바람개비가 됐다.
이는 눈깔 뒤집힌 초인의 풀스윙 빨래 털기가 낳은 결과라.
진이 한때 머리였던 덩어리를 지르밟으며 말했다.
"너 뭔데."
초주검을 만들어놓고 질문이라니.
늦어도 너무 늦었다.
물론 미리 물었어도 원하는 대답은 못 들었겠지만.
"됐다."
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발에 힘을 실으니-
우지직!
깜빡깜빡 불만 들어오던 머리통이 벌레처럼 짜부라지고.
동시에 천장에서 스프링클러가 촤아아악 물을 흩뿌렸다.
경험치 때문인지, 화상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
방울방울 뜨겁게 느껴지는 물줄기를 가만히 얼굴로 받아내고 있으려니, 서서히 회복되는 청력에 계단을 뛰어오르는 다급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진?!"
"어어···지, 진!"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익숙한 얼굴들.
아 맞다. 얘네 보려고 했지.
주변에서 뿌옇게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머리에 들어찬 열기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 진이다.
그 빈자리를 슬그머니 채우기 시작하는 고통의 전조를 느끼며, 그가 남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녕."
***
촤르륵!
얼음이 물속으로 풍덩풍덩 쏟아진다.
벌써 일곱 봉지째였다.
하지만 아직도 다섯 봉지가 더 남았다.
"으으, 추워. 이제 그만."
얼음물로 가득 찬 욕조 속에서 목만 빼고 있던 진이 새로운 봉지를 칼로 북 뜯어내는 제니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귓등으로도 안 듣더라.
"시끄러워. 지금 네 꼴이 어떤 줄 알아?"
"모, 몰라. 혹한기 4주차의 그것? 아니면 작년 겨울?"
"뭐라는 거야."
또다시 풍덩풍덩.
저게 더 쏟아진다고 물 온도가 눈에 띠게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통증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오른팔이 아팠다.
이게 다 신경까지 손상된 3도 화상 탓이라, 사실 이 정도면 얼음 끼얹는다고 효과 볼 수준은 진즉 끝났다.
그러니 화타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고개를 절레절레.
어휴. 이거 잘라야겠는데요? 라는 소신발언과 함께 조조에겐 써먹지 못한 도끼를 높이 추켜세우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진이다.
적어도 진에 한해서는.
신경에 손상을 입었으니 오히려 통증이 없어야 정상인 상황인즉.
지금도 진이 쓰리고 따갑고 뜨겁고 가렵고 미치겠는 까닭은 이미 몸뚱어리가 열심히 회복 중인 탓이라.
이레귤러, 초인, 부랑자
좀비 빌드는 오늘도 옳았다.
물론 진은 그냥 아팠고.
"···됐어"
끝내 마지막 봉지까지 탈탈 털어 넣은 제니가 변기에 털썩 앉으며 고개를 돌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녀의 물음에 한창 통증과 추위의 콜라보로 이빨을 딱딱 마주치고 있던 진이 대답했다.
"몰라. 너희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웬 테러범 새끼가 손님 관자놀이에 총을 쏘잖아.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개보다도 못한 새끼."
"······"
잠시 말이 없던 제니가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뭐래?"
"···난리도 아니야. 럼펌펌펌뿐만 아니라, 정크 프라자 3단지에도 비슷한 일이 터졌대. 그쪽은 총기 난사, 열일곱이 죽었고 다섯이 크게 다쳤어."
화장실 밖에서 들려오는 제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나 싶더니, 이윽고 문틀에 기대고 선 그가 뒷말을 이었다.
"범인은 평범한 갱이었는데 의외로 사살하기까지 시간이 꽤 소요됐나 봐. 근처 식당에 있던 솔로가 아니었다면 족히 그 배는 죽거나 다쳤을 거라더라. 근데 그보다 문제는···"
뒷말을 흐리는 혈육의 모습에 제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래?"
"범인이랑 싸웠다는 솔로가 중태래."
"뭐?"
제니가 그렇게 되물었고, 얼음물에 잠겨 연신 으그극 소리를 내던 진도 고개를 돌렸다.
"말 그대로야. 상대를 사살하긴 했는데 그 과정에서 본인도 크게 다친 모양인가 봐. 내가 본 내용으로는 목숨을 장담하기 힘든 상황인 듯했어."
그에 모두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솔로라 하면 혼자서 무장한 양아치 서넛은 여유롭게 찜 쪄 먹을 수 있는 실력자를 뜻한다.
하지만 그게 또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서.
원래 실수 한 번에 목숨이 오가는 바닥 아닌가.
그러니 이게 참 뭐라 단정짓기는 어렵고.
다만 솔로, 그 친구가 방심하지 않았을까.
진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여기. 당시 상황이 찍힌 동영상이야."
어느새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제키가 모두가 보이도록 테블릿을 들고 영상을 재생했다.
시작은 바닥이었다. 그리고 긴장한 숨소리.
숨어서 촬영 중이었을까. 한동안 움직임이 없던 카메라가 어느 순간 들썩들썩 조심스럽게 어딘가를 비추니, 그곳에 혈전을 벌이는 두 사람이 있더라.
때리고, 피하고, 거리를 벌리고 총을 쏘고.
다시 맞부딪히고, 빈틈을 노리고, 반격하고.
이렇게만 놓고 보니 대체 누가 갱이고 누가 솔로인지 구별이 안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친놈처럼 괴성을 지르는 쪽이 갱이겠구나, 하고.
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탕! 탕! 탕!
이름 모를 솔로가 마침내 갱의 심장에 총탄을 연이어 박아 넣으니, 쓰러진 상대를 확인한 그가 몸을 되돌리는 순간.
"A'aaah-!"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선 갱이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뒤돌아선 솔로의 목덜미를 콰직 내리찍었다.
뒷목을 싸잡은 채 비틀거리는 솔로.
마지막 기습을 끝으로 쓰러지는 갱.
시발 시발 거리는 다급한 욕설과 흔들리는 화면.
영상은 그렇게 끝났다.
"음. 방심하긴 했네."
진이 에잇 쯧쯧거리는 혼잣말을 제니가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평범한 갱이라기엔 너무···값비싼 전투 데이터칩을 꽂기라도 한 걸까."
"럼펌펌펌 테러범이랑 쟤랑 연관이 있으려나?"
"···글쎄. 지금으로선 뭘 알 수가 없네."
그에 진이 미간을 지그시 구겼다.
생각해 보니 첫 의뢰가 딱 이런 상황이었던 것 같아서.
에드먼 닐슨? 한슨? 존슨?
아무튼 그놈도 유출된 데이터칩을 뺏더니 지랄발광하지 않았던가.
그때도 포우가 버서크라고 했지, 아마.
뭔가 구린내가 폴폴 나는 느낌.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
야. 거기 있지?
뭐라도 보여줘 봐.
아니, 잠깐만. 마음의 준비 좀.
···됐어.
이제부터 셋 센다. 딱 나와라.
지금만 허락해주는 거야.
···삼, 이, 일.
상태창은 조용했다.
이런 개새끼.
진이 이를 아드득 깨물 때였다.
"그 저기···"
제키가 품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내들었다.
"혹시나 해서 이걸 챙겨오긴 했는데."
이어지는 목소리를 따라 진과 제니의 눈길이 자연스레 돌아갔으니-
두 사람 모두 보았다.
제키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잡힌 전선 축 늘어진 기계안을.
< 34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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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화 >
사이버 의안.
혹은 기계안이라 불리는 그것은 당연하게도 베이스가 카메라다. 복잡한 설명 필요 없이 시각 데이터가 담기는 1차 저장소라는 뜻이니.
저기 시신경 대신에 얇은 전선이 주렁주렁 달린, 지금도 뭔가 움직일 것만 같은 저 가짜 눈알이야말로 이번 럼펌펌펌 테러 사태의 유일한 증인이자, 단서라.
어떻게 저걸 주워올 생각을 했대.
진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키. 드디어 네가 밥값을!"
"······? 아니 나를 평소에 어떻게."
제키는 아주 잠깐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진이 시뻘건 오른손을 물 밖으로 내밀어 엄지를 척 내미니 그제야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대책 없는 놈이 기뻐하니,
소심한 놈이 히죽거리는.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유일한 기술자가 나섰다.
"이리 줘."
혈육의 손에서 기계안을 낚아챈 제니가 신중한 눈으로 물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모습에 진이 덩달아 상체를 들썩이는 찰나.
"넌 거기 한 시간 더 누워있어. 나오기만 해봐."
척 겨눠진 검지와 함께 서릿발 같은 경고가 날아드니, 진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얼음물에 다시 몸을 뉘었다.
아 춥다.
이러다 쪼그라드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면서.
***
제키·제니 남매의 집은 사우스 다운타운 외곽에 위치한 분리형 원룸이었다.
자취 경험이 있는 진에게는 익숙한 크기.
아마도 8-9평 남짓한?
혼자 살기 딱 좋은 공간을, 대충 둘로 나눠 남매는 그렇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침대는 싱글 사이즈 하나라.
둘이 돌아가면서 하루는 소파에서 잠든다고.
하여튼 그곳에 진이 방문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아. 과일 주스라도 한 박스 사 올걸.' 제 빈손을 탓하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대한민국 사람이었다.
정작 남매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 가운데.
제키가 준 옷으로 갈아입은(원래 옷은 타버렸다) 진이 슬그머니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후 어색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자니 누군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라.
제키였다.
말없이 감자칩 한 봉지를 쓱 내밀기에 얼떨결에 그걸 받고 보니 약간 머리가 멍한 게, 그러고 보니 내가 누구 집에 와본 적이 있던가?
진이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본능적으로 봉지부터 까고 볼 때였다.
"몸은 좀 괜찮아?"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제니가 그렇게 물어오니-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둔 질문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손과는 별개로 목소리는 평이했던지라, 진이 감자칩을 한 움큼 집으며 대답했다.
"한 시간 채웠어. 더는 못해."
"그래그래. 고생했네."
제니는 어련하실까 피식거렸고, 진은 소파에서 일어나 모니터 셋 달린 컴퓨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제니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팔뚝을 걸치며 묻길.
"건진 건 좀 있어?"
"거의 없어. 멀웨어에 감염돼서 대부분의 정보가 소실됐더라. 참고로 이 로직. 버서크야."
제니가 그리 말하며 키보드를 탁.
그러자 중앙 모니터에 프로그램 창 하나가 불쑥 떠오르니, 그 안에는 그물망처럼 가로세로 촘촘히 쪼개진 표면을 가진 새빨간 덩어리가 있었다.
일정한 형태가 없는 몸을 늘였다 줄였다.
또 늘였다 줄였다.
그러다 느닷없이 프로그램 창을 안쪽에서 쾅 들이받는 모습이 난폭하기 그지없어서.
진이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이게 그 버서크야?"
"맞아. 시정부가 금지한 불법 멀웨어."
제니가 한숨을 내쉬며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리로 시선을 옮기자, 케이블을 통해 컴퓨터와 연결된 기계안이 보이더라.
"디바이스에 연결하기 무섭게 보안 프로그램을 박살 내면서 침입하더라. 겨우 막았어. 외부 장치로 몇 번이고 확인했을 땐 잠잠하더라니···. 우연이 아니라면 은폐형 프로세스를 쓴 거겠지."
은폐형 프로세스.
이것도 어딘지 귀에 익더라고.
아마 포우한테서 귀동냥하지 않았을까.
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제니가 기계안을 만지작거리며 뒷말을 덧붙였다.
"만약 정크 프라자 쪽 총기난사범도 사정이 같다면. 진, 네 말대로 이건 테러일지도 몰라. 갑작스레 폭주한 불특정한 인물이 무차별적으로 행하는···"
잠시 아랫입술을 질겅이며 모니터를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시선을 진에게 돌렸다.
"아무튼, 아까도 말했다시피 버서크 때문에 데이터 소실률이 굉장히 커. 퍼센티지로 따지면 98.7% 정도. 살아남은 자료도 완벽히 복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고.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시도는 해볼게. 어떻게 할래?"
그에 진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부탁할게."
럼펌펌펌이 테러를 당한 마당이다.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빡쳤던 게 잠잠해졌을 뿐이지.
지금도 불길에 휩싸인 가게를 떠올리면 절로 울화가 치미니, 이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이게 다, 그 맛없고 서비스 구린 공간에 알게 모르게 정을 준 탓이라서.
힘들기만 했던 과거라 곱씹기는 싫다만, 낯설게 생긴 지폐를 꼭 쥐고 방문한 첫 가게였다고 거기가.
냄새나고 더러워도 사람들은 무관심하고,
옆에서는 낡은 스피커가 달래주듯 노래하고,
입으로 욱여넣던 와플은 이상하게 한 입, 한 입이 목이 멨던···
음. 그만 생각하자.
진짜 다 때려부수고 싶으니까.
해서 진이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와그작와그작. 애먼 감자칩을 학살하며 화를 삭이고 있으려니.
이를 가만히 살피던 제키가 시기적절하게 새로운 과자나 통조림 따위를 먹기 좋게 까서 밀어 넣었다.
그래도 알고 지낸 시간이 달은 넘겼다고.
눈에 쌍심지를 켠 진의 얼굴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를 감지하고는, 이를 달래고자 하는 배려와 센스가 돋보이는 행동인즉.
집안 살림 거덜 낼 기세로 처먹는 건 변수긴 했다.
맞다. 얘 대식가였지.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한 제키가 뭐라도 사러 가자 몸을 일으키려는 그때.
"···건졌다. 대어야."
여동생의 한마디가 그를 살렸다.
안도하는 숨소리를 뒤로한 채 곧장 컴퓨터 쪽으로 걸음한 진이다.
의자 등받이를 팔로 감싼 그가 제니가 보여주는 영상 속 화면에 집중했다.
지직-
지지지직-
일명 글리치(Glitch)라 불리는 화면 깨짐 현상이 한동안 이어지다 위태롭게 초점이 잡히기 시작하니.
마치 1인칭 게임을 하는 듯한 시야 너머, 얼굴이 흐릿하게 블러 처리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잘 선택했어. 후회하지 않을 거야.]
[···문제없는 거 맞지?]
[몇 번을 묻는 거야. 문제없다니까. 그냥 프로세스끼리 충돌나지 않게만 주의해. 그 정돈 할 수 있잖아.]
[시발. 알았어. 지금 계좌로 돈 보낸다.]
짧은 침묵.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남자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지 않을까 짐작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좋아, 거래 성립이야. 자, 여기 물건.]
이후 남자가 테이블 위로 자그마한 케이스를 쭉 내밀었다.
그걸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든 영상의 주인공이 케이스 표면에 새겨진 불꽃 모양의 엠블럼을 쓰다듬는 것을 끝으로 화면이 다시 지지직 깨졌다.
"···솔라드잖아."
어느새 곁에 다가온 제키가 나지막히 중얼거렸고-
제니 역시 놀란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유출된 비전 마법을 암암리에 판매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들었지만, 그게 사실이었을 줄은······"
그 소리에 진이 콧잔등을 구겼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더라니.
이거 완전 에드먼 존슨 그 자식이랑 같은 상황이네.
아무튼 뭔가 역추적이 되고 있단 사실에 눈을 빛내던 것도 잠시.
진이 미간을 지그시 좁히며 물었다.
"판매자 얼굴은 왜 저렇게 희뿌옇대?"
"불법적인 일을 하는 놈이잖아. 교란 장치를 달았을 거야.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하네. 어떤 경우는 얼굴이랑 목소리가 아예 삭제되는 경우도 있거든."
"그럼 못 찾아?"
"아니. 다 방법이 있지."
제니가 그렇게 대답하며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았다.
이후의 과정은 이러했다.
30초 남짓한 영상에서 보이는 배경과 주변음을 오려 붙이듯 긁어모아 3D 조감도를 만들어낸 제니는 곧장 다운타운의 네트워크에 접속. 자신이 만든 파일을 토대로 유사성이 높은 건물들을 서치했다.
뭘 모르는 진의 눈에는 구글 이미지 검색이나 다름없는 짓이었고, 실제로 큰 틀에서는 비슷하긴 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니가 입을 열었다.
"3개 정도 나오네. 그중에서 유사성이 70%가 넘는 장소는 여기뿐이고."
"···베이프샵?"
직후 진의 눈에 번쩍번쩍 요란하게 빛나는 홍보글이 담겼다.
이 세상에 없는 극상의 맛!
888가지 조합식! 프라이빗 룸 제공! 섹스토이 다수!
이 모든 걸 킹스그룸에서!
어우. 정신없어.
진이 모니터 쪽으로 쏠려있던 상체를 곧추세우며 눈을 비비적거리자니, 제니가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일단 난 여기까지야.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네."
"완전 됐어. 고맙다."
"···잠깐만 지금 가려고?"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창 현관 쪽으로 걸음하던 진이 고개를 돌렸다.
"왜."
"몸을 생각해서라도 오늘은 쉬고 내일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오늘은 시간도 늦었고."
이어진 제니의 말에 진이 어깨를 으쓱.
어느새 하얀 껍질이 일어나기 시작한 오른팔을 머리 쪽으로 굽혀 튼실한 알통을 쥐어짠 그다.
"보이지? 이미 다 나았어. 그럼 다음에 보자."
"아니, 진?"
당황한 음성을 남겨두고 다시 몸을 돌린 진이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말릴 틈도 없이 사라진 뒷모습을 지켜보던 남매가 서로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
킹스그룸.
대외적으로는 베이프샵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상은 온갖 액상형 마약을 조합·판매하는 지하 클럽이었다.
일단 들어갔다 하면 심신이 흐물흐물해져 여기가 바닥인지, 침대인지, 나랑 입을 맞추는 게 남잔지 여잔지도 모를 정도로 취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으니-
그 입구에 진 등장!
"···통과."
입구를 지키던 가드가 까딱 턱짓했다.
저번 스틸 나이트도 그렇고, 이번 킹스그룸도 그렇고.
이런 검문에서 진은 매우 자유로운 편이었다.
확신의 프리패스상이라고 할까.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크고, 몸도 좋다.
그러다 보니 이미 줄 설 때부터 끈적한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
입구컷 그게 뭔데.
진이 누가 나를 막을쏘냐 당당하게 입장했다.
그러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어깨를 턱 잡히니-
"무기는 놓고 가라."
나직한 가드의 제지.
머쓱한 얼굴로 허리춤의 홀스터를 벗어 건넨 진이다.
"······!"
예상치 못한 무게였을까.
순간 표정이 굳은 가드가 그라비스를 보관함에 넣는 모습을 확인한 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기다란 복도를 가로질러, 꾸벅 인사하는 직원이 열어주는 유리문을 통과하기 무섭게 보이는 몽환적인 광경.
음울한 보랏빛이 나른한 조명으로 내려앉은 공간에서 여기저기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몽롱한 눈으로 깊게 담배를 태우고 있더라.
울려 퍼지는 노래도 잔잔한 템포라 그런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일반적인 클럽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흐느적대는 사람들을 보면 여기나 스틸 나이트나 제정신 아닌 것 같은 건 똑같아서.
진이 우두커니 선 상태로 생각했다.
이제 뭘 어쩌지?
일단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그다음이 약간 막막해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고민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슬그머니 허리춤을 감싸는 게 아닌가.
"처음인가 본데. 좀 알려줄까?"
피부를 크롬으로 대체한 여인이었다.
매끈하다 못해 광이 나는 얼굴이 어깨에 턱을 포갰다.
"응?"
진이 식겁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심미성이었기에.
백인이 하얘서 백인이고.
흑인이 검어서 흑인이면.
저 번쩍거리는 건 뭐라고 해야 해.
크롬인? 미치겠다 진짜.
"부끄럼이 많네. 자기는."
그사이에도 크롬인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뱀처럼 손을 뻗어왔으니-
그 손길이 위험한 곳을 스치기 직전, 진이 에라 모르겠다 밑도 끝도 없이 본론을 싸질렀다.
"여기 불법 데이터칩 팔지?"
"······"
순간 크롬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너 뭐야."
그리고 떠오르는 상태창.
「(전조!)전염되는 의지2」──────
버서크의 흔적을 조사하시오.
*보상 퍽 XP 2,500
─────────────────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느새 목에 닿은 칼날을 느끼며 진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결 후련한 표정이었다.
일단 여기가 맞다는 거지?
그럼 간단하네.
"깽판 치면 되겠구만."
"뭐?"
다음 순간 크롬인의 손목을 뿌드득 꺾어버린 진이 비명을 지르려는 얼굴에 박치기를 선사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뿜어지는 피는 붉은색이라.
은색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코를 부여잡는 상대의 복부를 걷어찼으니.
우당탕탕 날아간 몸뚱어리가 벽에 부딪히는 동시에 숨을 흡-들이마신 그가 쩌렁쩌렁한 포효를 내질렀다.
"사장 나와─!!"
< 35화 > 끝
ⓒ 오동냐무
=======================================
< 36화 >
뭐든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분명 상태창은 '조사'하라고 나름 점잖게 표현한 것을.
전후 사정 다 덮어두고, 일단 여기가 맞긴 맞나 보네. 그럼 안심하고 '깽판' 쳐도 되겠다고 해석한 진이다.
이러한 간극의 시발점은 다름 아닌 공황 때문이라서.
검은 파도를 피해, 뭐든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버릇이 만든 건전한? 자기합리화가 사태의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요약하면, 진은 대부분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되, 막상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더라도 그 속에서 최선의 답을 찾아 발버둥 치는 식으로 이 세상에 적응했으니-
좋게 생각하면 비범한 행동력에 대범한 간땡이를 가진, 그야말로 솔로에 최적화 된 인물상이고.
반대로 말하면 그냥 뒤가 없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애초에 진은 들이박을 생각으로 여기 왔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가드들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먼저 공격한 것도 전부 이 같은 마음가짐 때문이었으니.
다음 순간.
초인의 날아차기가 가드의 얼굴에 작렬했다.
콰직!
붕 떠서 날아간 몸이 그대로 벽에 부딪혀 주르륵 미끄러진다.
의식을 잃은 가드의 고개가 툭 떨어지는 것보다, 진이 다음 상대를 포착하는 게 더 빨랐다.
당황한 얼굴로 제 동료를 쳐다보는 놈이 두 번째.
싸움 중에 눈을 돌려?
원래 기본을 잊으면 대가를 치르는 법이다.
이 순간 진이 팔자에도 없는 선생 노릇을 했다.
착지하는 다리를 지지대 삼아 반대쪽 다리로 크게 반원을 그리니, 그림 같은 하이킥에 관자놀이를 맞은 가드의 눈동자가 훼까닥 뒤집히더라.
마지막 가드는 그래도 사람 구실을 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쓰러진 동료들과 달리 일단 진의 얼굴을 향해 손바닥을 크게 휘둘렀으니까.
갑자기 싸대기를?
아픔보단 치욕을 주려는 타입?
눈을 가늘게 뜨고 날아드는 손바닥을 지켜보던 진이 순간 반짝거리는 빛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혔다.
쐐액!
다섯 개의 칼날이 코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제야 허공을 스친 가드의 손이 강철로 이뤄졌음을, 그리고 그 끝에 손톱이 아닌 흉악한 칼날이 부착됐음을 깨달은 진이다.
시도는 좋았다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진이 자세가 무너진 상대의 턱에 카운터 펀치를 집어넣었다.
고개를 젖힌 순간, 본능적으로 휘두른 오른손이 벌인 일이었다.
복싱 팬들 사이에선 흔히 슥빡이라 통하는 그것.
(진짜 슥- 피하고 빡! 친다는 뜻이 맞다)
영어로는 풀백 카운터가 터지자 가드가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크게 휘청거렸다.
다리가 풀린 탓일까. 그는 이어서 날아드는 왼손 스트레이트에 반응조차 못했다.
콰직!
그렇게 세 번째 가드가 쓰러졌다.
꿈틀대는 크롬인까지 합치면 무려 네 명이 나가떨어진 상황이었지만, 이 난리 통에도 주변은 그 흔한 비명조차 없이 고요했으니.
사장 나오라 소리친 진만 괜히 민망해져 주위를 쓱 훑었다.
자연스레 눈에 담기는 몽롱한 얼굴들.
우리는 약에 꼴아서 아무것도 몰라요.
여전히 손님들은 환상 속을 허우적댈 뿐이었다.
쓰읍, 후-
쓰읍, 후-
기계적으로 액상형 담배를 피워대면서.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서 쓰러진 가드들을 발견하곤 흠칫 놀라는 사람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늘 약발 제대로네."
너무나 당연하게 환상이라 여기고 현장을 쓱 지나치니, 이건 뭐 코앞에서 동료가 암살당해도 이 악물고 모르는 척하는 NPC나 별반 차이가 없더라.
그 얼빠진 모습을 지켜보던 진은 문뜩 이 공간이 자욱한 운무로 가득하단 걸 인지했다. 더불어 쓰러진 가드들이 필터 달린 마스크를 끼도 있다는 것도.
이러면 사람 심리상 어쩔 수가 없다.
찝찝해서라도 낄 수밖엔.
해서 그나마 멀쩡한 마스크를 벗겨 본인 하관에 채운 진이 코를 찌르는 쿰쿰한 냄새에 눈썹을 꿈틀.
더군다나 축축하기까지.
아오. 더러워 죽겠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썼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되돌아가서 그라비스를 챙겨올까도 싶었지만, 이래저래 동선만 낭비될 거 같아 차선책으로 가드의 품에서 권총을 챙긴 진이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지하로 내려갔다.
한층 짙어진 운무가 그를 반겼다.
왜 이렇게까지 흐려졌나 싶어 주변을 살펴보니 글쎄 천장에 뚫린 구멍에서 희뿌연 연기를 살포하고 있더라.
어느 순간 손님들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퍼질러앉아 액상 담배를 태우던 1층과는 달리 문 닫힌 방만 쭉 늘어진 모습이, 홍보 문구에서 떠들던 프라이빗 룸이 바로 이곳인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도 좀 더 노골적이라서.
진이 가까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오."
오묘한 조명 아래.
한데 뒤엉킨 살색에 절로 감탄이.
워후. 이야. 아이고?
여성분들이 화끈하시네.
음. 저런 것도 버서커가 아닐까.
굉장히 흥미로운 광경에 잠시 우두커니 서있던 진이 문을 탁 닫았다.
그리고 옆방.
"아."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남자끼리는 관심 없다고.
존중은 해도 내 앞에선···!
스스로 선택한 안구 테러에 진이 문을 콰앙!
내가 뭘 본 거지. 손으로 이마를 탁 짚을 때였다.
"저 새끼다!"
자욱한 운무 너머로 들려오는 고함이 있었다.
···다섯, 아니 여섯.
서로 다른 박자로 쪼개지는 발소리만으로 상대의 위치와 인원을 파악한 진이 권총을 들었다.
9x19mm 탄을 채용한 모델이다. 그라비스에 비하면 장난감처럼 느껴질 만큼 가벼운 무게. 그랬기에 속사에선 이쪽이 앞선다.
탕! 탕! 탕! 탕!
쉴 새 없이 불을 뿜는 총구.
그 박자에 맞춰 비명이 터졌다.
진이라고 뭐가 제대로 보여서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 게 아니다.
열감지 기능이 있는 기계안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이 정도로 흐릿한(거리감이 안 잡혀 블링크를 쓰기도 어려운) 운무 속에서는 진도 안력이 아닌 다른 감각들을 십분 활용했다.
바로 지금처럼.
스릉-
칼집에서 칼이 미끄러지는 소리.
등 뒤.
곧바로 왼팔을 든 진이 겨드랑이 사이로 오른팔을 집어넣어 탄환을 쏟아냈다.
탕! 탕! 탕!
야심 차게 기습을 준비하던 가드가 이마와 가슴 그리고 복부에 차례대로 구멍이 뚫려 쓰러졌다. 그리고 다신 일어서지 못했다.
진은 계속 나아갔다.
가로막는 이들이 나타나면 방아쇠를 당기고, 주먹을 휘두르고, 가끔은 눈먼 총알에 스치기도 하면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꼬불거리는 복도를 몇 개 지나치고.
VIP라 적힌 문을 통과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여기더라.
지하 3층의 커다란 집무실.
온갖 액상 샘플이 전시된 그곳에서, 가죽 의자에 앉아 CCTV와 연결된 화면을 바라보던 대머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을 향해 이죽거렸다.
"시발. 당당하기도 하셔라."
익숙한 음성. 테러범에게 데이터칩을 내밀던 판매자의 목소리가 딱 저랬다고.
진이 턱밑으로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네가 여기 사장이야?"
"그래. 이 새끼야. 내가 사장이다. 불만 있어?"
"불만? 있지."
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는 길에 탄창이 동난 권총을 멀리 집어던졌다.
"네가 웬 머저리한테 팔아넘긴 데이터칩 때문에 내가 자주 가던 가게가 폭발했거든. 손님도 둘 죽었어. 안심하고 밥 먹다가."
그에 대머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럼펌펌펌?"
"알고 있네. 그래 럼펌펌펌. 거기가 테러를 당했다고. 어쩔래? 너 이제 무림공적이야."
"무···뭐? 뭐라는 거야. 그 좆같은 구멍가게가 날아간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상대가 핏대를 세우든 말든 진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눈동자만 굴려 자연스럽게 집무실을 쓱 훑다가 어느 시점에 다시 대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했잖아. 네가 판 데이터칩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없는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겠냐. 억울한 척을 하려면 좀 성의 있게 해라. 소리만 지르면 단 줄 아나."
"······"
웬일로 대머리가 입을 다물었다.
누구라도 말문이 막혔다고 생각할 만한 광경이었다.
그 입가에 흐릿한 미소만 머금지 않았다면 말이다.
콰앙!!
진의 기준에서 왼쪽 벽이 박살 났다.
그 너머로 코뿔소의 머리를 한 수인이 돌진해왔다.
무오오오오!
파괴전차처럼 들이닥친 놈이 거대한 외뿔을 아래서 위로 크게 퍼올렸다.
살인적인 박치기가 목표물을 향해 난폭한 포물선을 그려낸 순간, 진이 놈의 머리 위에서 뚝 떨어졌다. 블링크였다.
동시에 미리 뻗은 팔로 단단하게 놈의 목을 휘감으니.
느닷없이 숨통을 졸리기 시작한 코뿔소 수인이 집무실 안을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무오오-옭!!
통나무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팔은 그 비대함 때문에 등에 손이 닿지 않는 불상사를 초래했으니, 놈은 급한 대로 자신의 목을 휘감은 팔뚝을 뜯어내려 용을 쓰며 사방팔방에 등을 들이받았다.
전시장이 박살 나고, 액상 마약이 터져 온몸을 적셨다.
충돌 한 번, 한 번이 트럭에 치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럼에도 진은 팔을 풀지 않았다.
상대가 날뛰면 날뛸수록 더 힘껏 팔을 조였다.
너 죽고 나 살자의 진흙탕 싸움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는 게 그라서.
해서 이미 풀악셀을 밟은 마나회로가 신체력을 더욱 향상시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치킨 레이스의 승자가 결정됐다.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널브러진 코뿔소 수인의 입에서 보글보글 피가래가 끓어오르는 가운데, 마침내 팔에서 힘을 푼 진이 몸을 일으킬 때였다.
"라, 라이트닝!!"
집무실 구석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중얼중얼 염불을 외던 대머리가 손을 번쩍 뻗었다.
직후 한줄기 새하얀 빛이 진의 심장을 때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엥?"
두 사람이 동시에 놀랐다.
대머리는 황망한 표정으로 멀쩡한 진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진은 심장의 광극이 작게 으르렁대는 느낌을 받았다.
약자멸시라고 해야 할까.
어딘지 불쾌한 티가 역력했다.
동시에 머릿속에 각인된 정보가 적절하게 첨언하길.
비전마법은 저보다 낮은 출력에서 행해진 동일 속성 주문에 대한 저항성을 띤다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지식이라는 건.
"···시발."
괜히 짜증이 솟구친 진이 핏물 섞인 침을 모아 옆으로 퉤 뱉었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니, 다가오는 그를 보며 대머리가 야단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이미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을 만큼 벽에 딱 달라붙어 있었음에도.
놈은 오지 말라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러기도 전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기에.
"커헉!"
주먹인지 발인지, 아무튼 뭔가에 얻어맞은 배를 부여잡은 그가 저도 모르게 무릎을 풀썩 꺾었다.
동시에 억센 손아귀가 멱살을 틀어쥐었다.
부들거리며 올려다본 시선 끝에 천장의 조명을 등진 남자가 있었다. 깜빡거리는 조명, 불안하게 뒤바뀌는 명암 속에서 오로지 잿빛 눈동자만이 또렷했다.
직후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대머리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눈앞이 하얘질 정도의 충격.
부러진 이빨을 채 뱉어내지도 못했거늘.
이번에는 왼쪽이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숨돌릴 틈도 없이 왼쪽.
대머리의 뺨이 좌우로 불을 뿜었다.
손등에 골이 흔들리고, 손바닥에 살갗이 터졌다.
몇 번 왕복하지도 않았건만, 이미 대머리는 바지춤을 축축하게 적신 채 축 늘어진 지 오래였다.
왜 이렇게 허약해.
딱 한 대만 더 때리고 심문해야겠다 생각한 진이 손을 드는 순간.
지잉---, 가슴 속 단말기가 길게 진동했다.
"······?"
뺨을 내리치려던 손을 품에 집어 넣은 진이 단말기를 꺼냈다. 이후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가 통화 버튼을 누른 뒤 단말기를 귓가에 붙이며 말했다.
"나 지금 바쁜······"
[진, 한창 일하는 중에 미안한데 조금만 살살해줄래? 뭐 죽지만 않으면 돼.]
담담한 와중에도 당황이 섞인 목소리.
칼리파였다.
< 36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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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화 >
단말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진이 멈칫거렸다.
그러고는 주변을 쓱 훑으며 말하길.
"···여태까지 날 미행한 거야?"
진이 아는 어느 드라마였다면 돌아오는 대답은 어눌한 발음의 '물논'이었겠지만, 다행히 칼리파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녀가 잠시 뒷말을 흐렸다.
작게 한숨을 내쉰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이내 가다듬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가니.
[유선상으로 할 얘긴 아닌 거 같네. 에넥도트로 올 수 있어?]
"지금?"
[조금 있으면 그리로 솔로 하나가 도착할 거야. 그 친구랑 대머리 챙겨서 복귀하면 돼. 괜찮을까?]
칼리파가 그렇게 묻는 가운데.
그때까지도 주변을 살피던 진의 눈길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천천히 멈춰 섰다.
부서진 벽 너머. 층고 높은 천장에 매달린 CCTV 한 대.
반구 형태의 플라스틱 돔 안에서 기척 없는 시선을 던지는 렌즈와 눈을 마주친 그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뭔지는 몰라도 일단 인사는 해야지.
동시에 귓가에 헛웃음이 파고드니.
[승낙한 걸로 알게. 그럼 나중에 보자.]
"뭐 그래."
진도 자연스럽게 단말기를 귀에서 떼는 순간.
급히 이어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 진? 곧 도착할 솔로 말인데. 그 친구가 조금 특이한 편이야. 그러니까···음. 너무 놀라지 말라고. 진짜 끊을게.]
"···뭐야?"
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통화가 끊긴 단말기를 내려다볼 때였다.
저 멀리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으니-
곧이어 보스를 찾으라는 둥, 습격자를 잡으라는 둥.
때늦은 외침이 들려오더라.
아직도 남은 놈들이 있었어?
진이 시끌시끌한 등 뒤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물론 병력이라는 게, 꼭 건물 내부에만 상주하란 법은 없으니 지원군이 얼마쯤 더 몰려오는 거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했다.
해서 대머리의 멱살을 거머쥔 손에서 힘을 푼 그가 손바닥을 툭툭 마주치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윽! 억! 악! 컥!
느닷없이 짧은 비명들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도 전부 다른 목소리. 그 말인즉슨 누군가 아주 빠른 속도로 다수를 제압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이윽고 커헉! 하는 비명과 함께 누군가 우당탕탕 계단 아래로 미끄러졌다.
"······"
목에서 왈칵왈칵 피를 쏟는 가드의 눈이 진을 향했다.
어떤 의사가 그랬던가. 죽어가는 것들이 밟는 5단계의 절차가 있다고. 부정에서 시작해서 수용으로 끝나는 그거.
그것이 지금 가드의 눈동자 속에서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일단 부정의 단계는 확실히 지난 거 같고, 그다음이 분노요. 3단계가 뭐였더라?
체념? 새로운 논리의 탄생?
진이 곰곰이 생각하는 그때.
꾸욱.
쓰러진 가드의 옆얼굴을 짓밟으며 등장하는 슬리퍼가 있었다.
다리털 숭숭 난 다리가 있었고, 하와이안 느낌의 반바지와 셔츠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얼굴.
큼직한 검은색 헬멧을 썼는데 특이한 점이라면 페이스 실드, 즉 바이저 부분이 디스플레이로 이뤄졌더라.
아닌 게 아니라 이쪽을 바라보는 헬멧 대가리가 얼굴로 글을 적기 시작했으니.
[진? 진? 진?]
의문표까지 똑같은 글자 3개가 서로 다른 색상으로, 오른쪽 화면 끝에서 등장해 왼쪽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오른쪽에서 재등장하는 광경에 진이 눈을 끔뻑.
뭐야. 저건.
딱 봐도 이상한 것이 아 쟤가 그 솔로구나.
1초 만에 납득한 그다.
"내가 진이긴 한데."
그러자 헬멧 대가리가 박수를 짝짝.
디스플레이에 다시 글자를 띄우길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어우 눈 아파. 그냥 한 번만 하면 안 돼?"
그렇게 대답하던 진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썹을 꿈틀.
죽음의 5단계를 착실히 밟아나가는 중이라 생각했던 가드가 얼굴이 밟힌 게 너무 화가 났는지, 분노 가득한 얼굴로 팔을 쭉 뻗는 것이 아닌가.
흘린 피를 생각하면 회광반조나 다름없다.
아니면 신체를 개조한 탓에 명줄이 질기거나.
중요한 것은 녀석의 손에 쥐어진 권총이었으니, 덜덜 떨리는 총부리가 야자수 그려진 반바지 사이를 겨누는 순간.
푹.
가드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상태로 숨이 끊어졌다.
관자놀이에 칼날이 깊숙이 박혔으니 당연한 결과라.
진이 어느새 가드의 등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헬멧 대가리를 바라보았다.
중간과정이 생략된 신기루 같은 움직임.
관자놀이에서 쑥 뽑아낸 단검을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
진이 나직이 감탄하는 사이.
다시 한번 디스플레이 위로 LED 전광판을 연상시키는 글씨가 날아다녔다.
[복귀하자 복귀하자]
그에 진이 피식.
한 번 줄여주긴 했네.
***
간만의 에넥도트였다.
쿠키는 더 간만이었다.
각양각색 먹음직스런 자태들.
그중에서 진이 선호하는 녀석은 초콜릿 베이스에 반으로 가르면 안에서 마시멜로가 쭉 늘어지는 스모어 쿠키로, 일단 달아서 좋았고 두 번째는 초코파이가 생각나서 좋았다.
솔직히 진의 군번이 눈물 젖은 초코파이를 떠올릴 정도로 연식이 깊지는 않다만, 그래도 고향 땅을 대표하는 과자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초코+마시멜로 하면 자연스럽게 그쪽이 떠오르더라고.
물론 맛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과자보다 수제로 만든 쿠키 쪽이 훨씬 좋다.
해서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입안 가득한 달콤함을 만끽하고 있으려니,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칼리파가 옅은 한숨을 푹.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입을 여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럼펌펌펌 테러의 진상을 쫓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킹스그룸까지 가게 된 거라는 거지? 그 과정에서 널 도와준 BH 편집자가 있었고."
진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 라고 대답했다간 입에서 부스러기가 튈까 봐.
그리하여 한동안 저작운동에 힘쓰던 진이 어느 순간 입속 공간에 여유를 느끼며 말하길.
"이제 내 차롄가?"
그에 칼리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물어봐."
"일단 쟤부터."
진의 손끝이 소파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헬멧 대가리를.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화면에 [Zzz···]라는 문장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더라.
"에릭. 얘기했다시피 솔로야. 네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면 저 녀석이 킹스그룸을 뒤엎었겠지."
"···얼굴에 저건 뭐래? 컨셉이야?"
진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의성어를 바라보며 묻자,
같은 시선을 공유하던 칼리파가 대답했다.
"에릭은 오래전에, 신체에 부담이 가는 시술을 많이 받았어. 그 대가로 이런저런 것들을 잃고 또 포기해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목소리야. 말을 못 하니 저런 식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 거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거둬들였다.
"발성기관 임플란트를 삽입하라 해도 진짜 제 목소리가 아니라고 거부하니 어쩌겠어. 요란스러워도 그러려니 해야지. 대신 저렇게 보여도 실력은 확실해."
"저 친구 레벨이···?"
"4."
이야.
진이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휙 불었다.
펜릴보다 높잖아.
그간 나름 주워들은 게 있는 진이다.
이제는 레벨4가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다.
레벨1은 신예 혹은 괜찮은 수준의 싸움꾼.
레벨2는 1보다 강하다!
레벨3은 2보다 강하며 베테랑!
음. 잠시만.
이게 의미가 있는 구분인가?
이러다 4는 3보다 낫다는 소리나 할 것 같으니, 그 전에 잠깐!
확실한 건, 레벨 5부터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거다.
이때부턴 솔로 인트라넷에서도 검색되지 않고, 그 인원도 현격히 줄어들며, 슬슬 돈이 아닌 저만의 기준에서 몸을 움직인다나 뭐라나.
예전에 포우가 지나치듯 말하기론 어떤 기준점을 넘어선 단계라고는 하던데.
말하고 보니 결국 레벨4는 3보다 낫고 5보다는 못하다는, 하나 마나 한 결론으로 이어져서.
에라이.
콧잔등을 찌푸린 진이 말했다.
"그래, 쟤 대단한 건 알겠고. 다음 질문.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만난 건데? 포우가 그 대머리는 왜 데리고 간 거고?"
이어진 질문에 칼리파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아니라 진열장에서 술병을 꺼내와 얼음잔에 따르고, 그걸 또 빙글빙글 돌려서 한 모금을 마신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에드먼 닐슨을 기억해? 네 첫 의뢰 말이야."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그 사건과 이번 일이 비슷하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럼 이건? 추가로 받은-"
"100만 크레딧."
진이 지체없이 대답했다.
이런 건 또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그라서.
덕분에 그라비스를 살 수 있지 않았던가.
"맞아. 100만 크레딧. 내가 그 돈을 얹어준 건 단순히 네가 일을 잘 처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정당한 거래였지. 정확히는 에드먼 닐슨의 몸뚱어리 값."
그 말을 끝으로 칼리파가 술잔을 살짝 기울여 입술을 적시니.
이어지는 목소리에선 달짝지근한 향이 났다.
"링커 일을 하다 보면 뭔가를 깊게 파고들어야 하는 순간들이 있거든. 그런 게 다 정보고 힘이라서 말이야. 당시에는 그게 에드먼 닐슨의 시체였던 거고."
2달 전의 진이었다면 음 시체를?
이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제키가 챙긴 눈알 하나로 기술자인 제니가 뭘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는지 직접 보지 않았는가.
그랬기에 칼리파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대충 추측이 가능했다.
유출된 비전마법, 그걸 담은 데이터칩.
그리고 버서크.
이 정도면 조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어지는 얘길 들으니 실제로도 그랬던 모양이더라.
"처음부터 재미를 본 건 아니야. 알다시피 닐슨은 완전 피라미였잖아? 심지어 버서크 때문에 대부분의 기록이 소실되기도 했고. 그래도 뭐 어쩌겠어. 주어진 게 그 녀석 몸뚱이뿐인데. 실낱같은 단서라도 찾으면 차근차근 뒤를 캤지. 그렇게 여러 번 허탕을 치다가 겨우 제대로 된 정보를 건졌고."
그에 진이 테이블 쪽으로 몸을 당기며 물었다.
"그게 뭐였는데?"
"어느 용병의 실종."
"엥?"
"활동명 룬베어. 본명 발터 그레이. 동료들에겐 자신을 파이로키네시스라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은 솔라드 가문의 방계로 피가 옅었음에도 혈연 계통을 각성한 인재였어. 어린 시절에는 재능을 인정받아 가문의 마법도 여럿 익힌 모양이더라. 물론 반쪽짜리 핏줄에, 그 재능이라는 것도 특출난 편은 아니라서 결국 버려졌지만."
이게 다 무슨 소리래.
순간 당황한 진이었으나, 그래도 눈치가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저 나름 차분하게 흩어진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하기 시작했으니.
실종된 방계 출신의 용병.
암암리에 거래되는 불법 데이터칩.
활활 타오르는 불꽃.
평범한 갱 주제에 솔로와 치고받을 정도로 능숙했던 전투 기술까지.
원래 추리란 상상력이 한 스푼 가미되는 일이다.
해서 진이 저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했으니.
이어지는 칼리파의 말이 그의 생각과 같았다.
"누군가 발터를 납치했고, 그의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정보를 데이터화하는데 성공했어. 그게 유통되기 시작한 거지. 버서크가 덧씌워진 상태로."
긴 얘기에 목이 탔을까. 칼리파가 술잔을 기울였다.
진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녀가 잔을 내려놓았을 때 입을 열었다.
"돌아가는 사정은 대충 이해했는데. 그래서 나한테 연락은 어떻게 한 건데?"
"그래, 그 얘기가 남았지."
그에 칼리파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으니,
자연스럽게 마지막 설명이 시작됐다.
생각해 보면.
에드먼 닐슨의 시체에서 발터라는 용병의 실종까지.
허접한 단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사건의 얼개를 파악하는데 성공한 칼리파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인즉, 그 과정에서 브로커가 누군지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있나. 당연하게도 그녀는 킹스그룸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만 그동안은 이렇다 할 물증이 없었기에 차분히 때를 기다렸다고.
그러던 차에 사건이 터진 것이다.
바로 옆 단지에서 버서크에 감염된 것이 확실해 보이는 갱이 총기난사를 일으켰고, 그 소식을 접한 그녀는 누구보다 빨리 청소부들에게 돈을 먹이고 범인의 시체를 확보했으니.
비록 직접적인 거래 현장이 담긴 데이터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대신 놈이 킹스그룸에 들락날락했다는 다수의 정황증거를 발견.
이거면 됐다고.
곧바로 믿을만한 실력자인 에릭에게 의뢰를 맡긴 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포우와 함께 킹스그룸의 CCTV를 해킹한 순간.
두 사람이 발견한 것은, 생포해야 할 대머리의 뺨을 연신 갈겨대는 익숙한 옆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어. 근데 아니더라. 전화를 하니까 받더라고."
칼리파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완료!)
진의 머릿속에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여기까진 뭐 익숙하다.
문제는 그게 한 번이 아니었다는 것.
(완료!)
원래 맞은 데 또 맞는 것이 제일 아프고,
예상치 못할 때 맞으면 기절한다고.
연이은 도파민 해일에 진이 손에서 쿠키를 툭 떨어뜨렸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신발 속에서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가운데.
상태창이 불쑥 면상을 들이미니.
「(전조!)전염되는 의지4」──────
의뢰인과 함께 발터를 찾으십시오.
*보상 퍽 XP 6,000
─────────────────
진 에버나이트.
미리 할 거 다 해준 링커 덕분에 한 단계 스킵하다.
< 37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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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화 >
진은 매사에 솔직한 편이다.
아프면 아픈 대로, 화나면 화나는 대로.
굳이 감정을 숨기는 일 없이, 가감 없이 속내를 얼굴에 그려내는 편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헤벌쭉은 안 된다.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쪽팔리고, 눈 풀린 상태로 입에 침이 고이는 건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해서 진이 표정 관리에 애를 썼다.
그 와중에도 도파민 폭탄을 때려 맞은 머릿속은 아주 그냥 난리가 났으니-
여기 시든 꽃을 적시는 물줄기가 있다.
땀에 젖은 목덜미를 훑어내는 바람이 있고.
기나긴 밤을 견뎌 맞이한 여명이 있었다.
다행히 일련의 성취감은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눈 녹듯 사라졌지만, 그 여운은 잔향처럼 남아 은은히 이어지는 가운데.
눈꺼풀을 좀 떨어댄 것만 빼면, 포커페이스 유지에 성공한 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찬물 좀."
"음? 그래, 알겠어."
그에 칼리파가 고개를 끄덕.
테이블 위에 떨어진 쿠키를 집어 접시 위에 올려놓은 뒤 몸을 돌렸다.
이후 그녀가 건네주는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진이 그제야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이런 경우가 있지?
설마하니 퀘스트가 연달아 완료될 줄이야.
그 텀이 얼마나 짧았는지, 첫 번째가 스트레이트라면 두 번째가 어퍼컷이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그대로 녹아웃 당할 뻔했단 뜻인즉.
나라서 버텼다. 진짜.
진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쿠키를 다시 입에 가져갔다.
그러고는 생각하길.
왜 스킵된 거지.
혹시 칼리파한테 발터의 얘길 들어서?
원래는 내가 직접 알아내야 했던 정보였던 건가.
이래서 '눈치껏'이 참 중요하다고.
결과를 되짚어 어렴풋한 사건의 공백, 즉 맥락을 파악한 진이다.
보통 이런 쪽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을 센스가 좋다고 한다. 이는 공부머리와는 다른 영역이라서, 한 번 말하면 두 번 세 번 되묻지 않고 아아 무슨 말인 줄 알겠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른바 답답함이 없는 스타일인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의뢰인과 함께 발터를 찾으십시오.]
난데없는 상태창의 배 째라 식 통보에도 엥 의뢰인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래.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것이 아니라 쿠키를 우물거리는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으니.
"그래서 누군데?"
"···? 뭐가?"
"발터를 찾는 사람 말이야. 애인? 가족? 원수?"
칼리파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을 그 붉은 눈동자에 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말하길.
"알고 있었어?"
그에 진이 똑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여줬다.
"그럼 몰라?"
칼리파는 링커다.
솔로와 마찬가지로, 대가 없이 움직이는 이가 아니라는 소리니.
그런 그녀가 굳이 레벨 4짜리 솔로를 투입한 것도 모자라, CCTV를 해킹하면서까지 브로커의 신원을 확보하려고 한 이유가 뭐겠는가.
"의뢰받은 거 아니야? 음 아니지. 네가 먼저 연락을 취했을 테니까 의뢰를 제안했다고 해야 하는 건가?"
이어진 진의 말에, 칼리파는 그녀로서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탄.
"대단한데? 이럴 때 보면 꼭 베테랑 솔로 같단 말이야."
잠깐만. 평소에는 어땠다는 소리지?
칭찬인지 아닌지 다소 헷갈리는 반응에 진이 눈을 가늘게 뜨는 가운데, 당장 레벨3을 달아도 되겠다며 너스레를 떤 칼리파가 뒷말을 덧붙였다.
"네 말이 맞아. 의뢰인이 있어. 그리고 의뢰인에게 먼저 접촉한 것도 내가 맞고."
이후 이어진 그녀의 설명을 3줄로 요약하면 이러했다.
일, 칼리파는 닐슨의 시체를 통해 발터란 용병의 실종을 알아냈다.
이, 정보를 얻었으니 써먹을 대상을 물색했다.
삼, 아니나 다를까. 오래전부터 발터의 행방을 쫓던 인물이 있더라.
어. 3줄로 부족하네.
아무튼 사. 그래서 먼저 연락을 취했다.
아직도 그 사람을 찾고 있냐는.
만약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바로 비즈니스적인 대화를 나눌 요량으로.
해서 지금이다.
여전히 발터를 찾길 희망했던 의뢰인과 힘들게 구한 정보를 돈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한 링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꼽사리 낀 솔로(Lv2)까지.
기묘한 동행이라 해야 할까.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인즉.
칼리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진. 네 덕분에 브로커를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었어. 그 부분에 대해선 확실히 보상할게. 에릭에게 약속한 보수만큼 네 몫을 준비할 생각이야. 그리고···"
잠시 말끝을 늘어뜨리던 그녀가 물었다.
"넌 끝까지 갈 생각인 거지?"
그에 진이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초에 럼펌펌펌을 불바다로 만든 테러, 그 원흉을 조지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던가. 돌아가는 꼴이 복잡해졌다고 소기의 목적이 변했을 리가.
"어. 끝까지 가야지. 그러니까 뭐가 나오면 나한테도 바로 알려줘. 말마따나 그 대머리를 먼저 잡은 것도 나고,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난데. 그 정도는 공유할 수 있지?"
"그래. 그럴게."
칼리파의 담담한 승낙에, 진도 한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진으로서도 이쪽이 훨씬 편하다.
굳이 번갯불로 지져가며 대머리를 심문해야 할 귀찮음을 덜었으니까.
그나저나 벌써 한밤중이라고.
어느새 새카맣게 물든 창밖을 바라보는 옆얼굴을 향해 칼리파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오늘은 가게에서 자고 가. 빈방이라면 꽤 있으니까."
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
익숙한 객실이었다.
오래전 펜릴과 한바탕 싸우고 코가 깨졌던 날. 양동이를 끌어안고서 목뒤로 넘어가는 핏물을 퉤퉤 게워 냈던 곳이 바로 여기였기에.
그때는 의자였지만, 지금은 침대에 누운 진은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받친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펜릴은 잘 지내려나.
하여튼 정 없는 새끼.
어떻게 된 게, 그 이후로 한 번을 못 봤네.
죽기 살기로 함께 싸웠던 늑대인간을 떠올리던 진이 문뜩 미간을 찌푸렸다.
덩달아 떠올라버린 불길한 자태 때문에.
검은색 가죽 롱코트와 중절모.
탁한 은빛을 띤 새 부리 가면.
크로우 매드아이.
세간에는 '그 미치광이', 진에게는 '역병 의사'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녀석과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새낀 봐준 게 맞다고.
손짓만으로 자신과 펜릴을 유린하던 괴물이 머릿속에 아른거려 한동안 입술을 질겅이던 진이 이번에는 사슬에 묶인 중년 거지의 얼굴을 되새겼다.
로칸.
자하드 출신이면서 도대체 왜 노숙자로 살아가는지 모를 인간.
땟국 질질 흐르는 꾀죄죄한 얼굴이 번개처럼 거리를 좁힐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광극을 어느 정도로 키워야 그런 속도가 나올까.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크로우가 심해와도 같은 숨 막히는 두려움이었다면,
로칸은 닿을 수 없는 하늘 너머의 번뜩임이었기에.
여기서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의문.
그래서 누가 더 강할까?
아무개 vs 아무개.
고추 달고 태어났다면 살면서 수도 없이 해봤을 망상이자 놀잇거리다.
이걸 유치하다고 하는 놈들은 진짜 반성해야 한다.
전성기 시절 토니 퍼거슨 vs 그 시절의 하빕.
20 담원 vs 15 SKT.
뉴건담 vs 사자비.
이게 안 궁금하다고?
결론이 안 나니까 부질없다고?
모르는 소리. 결론이 안 나니까 재밌는 거다.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으니까.
물론 진은 혼자였던 관계로 조용히 천장을 배경 삼아 그 안에 크로우와 로칸을 던져넣었다.
자,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그렇게 한참 동안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진이 내린 결론은···
음. 전혀 모르겠는데?
맥빠지는 소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뭘 알아야 어디가 길고 짧은지 어림짐작이라도 하지.
그 둘의 수준을 제대로 이해조차 못 하는 주제에 가정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괜히 자신의 부족함만 깨달은 진이 코밑을 쓱 훔쳤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꺼풀을 닫으니-
다시 눈을 뜨면 이곳은 밤하늘.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는 작은 우주.
"······"
진이 자신의 내면세계, 그중에서도 나무의 형상을 띤 거대한 별자리를 응시했다.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저걸 어떻게 다 밝히나 싶다.
여기서 토막상식.
실제로 프로젝트 네오는 1회차에 [마나]의 별자리를 다 밝히는 게 매우 어렵다.
경험치 보상이 가장 높게 책정된 쉬움 난이도면 모를까. 다른 난이도에선 엄두도 못 낼 수준.
막말로 죄 찍을 수 있다면 빌드가 왜 있겠는가.
그럼 반대쪽에서 '다 찍지도 못할 별자리를 왜 만들었는데?'라고 소리쳐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생겨먹은 게임인 것을.
실제로 이 문제는 다른 별자리라고 크게 예외는 없어서, [사이커]라고 후반 가서 나는 파이로키네시스이자 텔레키네시스이며 동시에 그레비키네시스다. 크큭. 이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짬뽕탕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극한으로 성장시킨 캐릭터가 훨씬 강하니 말이다.
해서 진의 고민이 깊어졌다.
어쭙잖게 이런저런 스킬 찍었다간 답도 없을 거 같다고.
유년기부터 단련된 게이머의 감각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으니-
이럴 때 가장 안전한 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냥 우직하게 기본기만 다지기.
말인즉슨, 별자리의 세로선. 그러니까 기둥을 담당하는 커다란 별들(그만큼 경험치도 많이 요구하는)부터 찍고 보겠다는 것이니.
당장 다양성은 조금 떨어질지언정 그런 건 나중에 히든 별자리로 충당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다 떠나서 비전마법은 저보다 낮은 출력에서 행해진···그 뭐야. 동일 속성 주문에 대한 내성을 지닌다매.
당장 킹스그룸의 대머리만 해도 제 부하가 목 졸려 죽어가는 동안 열심히 준비한 라이트닝이 광극의 헛기침 한 번에 허사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런 걸 몸소 겪었는데 여기서 어떻게 차근차근 파이어볼 이딴 걸 찍냐고.
그리하여 진이 결심을 굳혔다.
직후 그가 목표한 바를 향해 여태 모인 경험치를 힘껏 들이붓자, 하나의 별에서 시작된 빛줄기가 공허한 성운 사이를 올곧게 가로지르고 눈 감고 있던 별을 깨웠다.
그와 동시에 시작되는 고통.
전신에 뻗은 마나 회로가 심장을 중심으로 한층 넓어지고 보다 단단해지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각이 폭풍처럼 휘몰아침에 절로 정신이 아찔해진 진이다.
또또 시작이지!
제발 살살!
물론 그런 건 없더라.
이윽고 땀에 홀딱 젖은 몸이 침대 위로 슬라임처럼 축 늘어졌을 때는, 이전보다 심후한 마나가 몸속을 부드럽게 흐르는 중이었으니, 넓어진 집구석에 만족한 광극이 이리저리 날뛰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마나 회로(Lv3)]
한 단계 성장한 회로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허흐···' 바람 빠지는 신음을 끝으로 고개가 픽 꺾인 진이었으니-
자신이 계획한 성장 방식이 오직 이레귤러만이 선택할 수 있는 왕귀형 빌드인 줄도 모르고 드르렁드르렁 아주 제대로 곯아떨어졌다더라.
***
진이 눈을 뜬 건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 때문이었다.
일어날 생각이 없었기에 못 들은 척 계속 퍼질러져 있으려니 슬그머니 열리는 문 너머로 식사하시겠습니까? 하는 포우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라.
밥?
그 즉시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킨 진이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용케 객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어제 앉았던 그 자리에 엉거주춤 궁둥이를 붙이는데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은 헬멧 대가리가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더라.
"그래 안녕. 너도 밥 먹으러 나왔어?"
[나는 커피. 나는 커피.]
"아씨. 한 번만 하라고."
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릴 때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진."
어느샌가 다가온 포우가 접시를 테이블에 올렸다.
스크램블 에그, 소시지, 베이컨, 베이크드 빈즈 따위가 정갈하게 채워진 식단이었으니, 소위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라 불리는 아침식사에 진이 눈을 휘둥그레.
"잘 먹을게."
첫입은 소시지였는데 육즙이 쭉 배어나는 게 시작부터 만족스럽기 그지없더라.
그리하여 식사에 탄력을 낸 진이 순식간에 한 접시를 뚝딱 비워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따듯한 우유를 내미는 포우다.
매번 쿠키를 내어주는 칼리파도 그렇고 얘네는 술집이 아니라 식당을 차렸어야 하지 않을까.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온기가 느껴지는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묻길.
"그 대머리한테서 뭐 좀 건졌어?"
"브로커 말씀이군요. 예. 건졌습니다."
"이야, 벌써? 대단한데?"
"그런데 말입니다···"
포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딸랑-
청아한 종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술집을 방문하는 손님이라면 주정뱅이 아니면 당연히 솔로겠거니,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진이다.
그리고 움찔.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그라비스에 손을 얹었으니.
어느 순간 가게 안에 들어선 낯선 여인이 천천히 시선을 좌우로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에넥도트···맞지?"
그렇게 묻는 여인의 눈동자 속에선 새하얀 화염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 38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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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화 >
진이 흠칫 놀란 이유는 기시감 때문이었다.
일전에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감각.
이는 로칸이 자전을 일으켜 괴물을 쓰러뜨린 순간과 유사했으니, 그날의 강렬한 분위기가 저기 홀로 선 여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로칸에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진이다.
완벽하게 갈무리되어 반박귀진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했던 로칸과는 달리, 그녀의 기운은 보다 솔직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었으되, 그 기세는 개세적인 위력을 자랑했던 자전에는 못 미치는 느낌이었기에.
그리하여 진이 안심했다.
너 로칸이 아니구나?
한순간 긴장했던 어깨가 자연스럽게 이완되고, 손이 그라비스가 아닌 허벅지에 안착했다.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아직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에릭은 바이저 표면에 물음표를 잔뜩 도배하고 있었고,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로 손님을 반기던 포우조차 이번에는 짧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결국 여인의 말에 대답한 쪽은 진이었다.
"맞아. 에넥도트."
그와 동시에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있었다.
백염을 품은 눈동자.
그 숭고한 열기.
동시에 진의 광극이 반응했다.
정작 본인은 의식조차 못 한 가운데 파직! 보랏빛 전광이 얼굴 근처를 가볍게 휘감고 사라지자, 이를 유일하게 발견한 여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묻길.
"당신이 이곳의 주인이야?"
"아니? 말단 직원인데."
"···뭐?"
여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날 놀리려는 거야?"
"···어느 부분에서?"
이번에는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리긴 뭘 놀려.
당장 내 뒤에 있는 바텐더는 사장 오른팔이고,
저기 있는 헬멧 대가리는 무려 레벨4 짜리 솔로인데.
아무리 생긴 꼴이 우스워도 그렇지.
어떻게 눈길 한번을 안 주고 말이야.
그렇게 뇌까리며 에릭 쪽을 슬쩍 돌아본 진이 화면을 가득 채운 물음표를 발견하고는 슬며시 시선을 거둬들였다.
아씨 왜 계속 저러고 있어.
커버를 못 치겠네.
그러는 본인도 머리가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것은 물론 눈에는 눈곱까지 꼈다.
이게 다 아침밥 먹겠다고 씻지도 않고 달려온 결과라.
정작 당사자는 그런 거 관심 없고 당당하기만 했으니,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암튼 난 아냐. 주인은 따로 있거든."
"그럼, 당신의 주인을 불러줘. 그와 대화해야겠으니."
"날 찾아?"
때마침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특유의 달달하면서도 스모키한 향기를 이끌고 또각또각 가까워졌다.
"에넥도트의 점장 칼리파야. 뭘 도와줄까?"
이어진 칼리파의 말에 여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천천히 옮겨갔다.
"당신이 링커?"
"하루의 절반은 그렇게 살지. 그 모습을 원해?"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그 침묵 속에서 진이 홀짝 우유를 들이켰다.
그만큼 짧은 시간이었으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기도 전에 누군가 입을 열었다.
칼리파였다.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챈 듯한 말투.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
"당신이 답답하게 구니까."
여인이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등받이 없는 원형 의자에 착석하니, 이제껏 강렬한 눈동자에 사로잡혀 주의깊게 보지 못했던 전체적인 차림새가 뒤늦게 눈에 들어오더라.
등허리에 닿는 검은 생머리, 깊게 눌러쓴 볼캡과 마스크, 흰티에 청바지까지.
진에겐 어쩐지 낯익은 모습이었다.
고향 땅에서 몰래 사생활을 찍힌 연예인들이 딱 저런 착장으로 기사에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히곤 했었기에.
무난하게 입었는데 옷걸이가 무난하지 않아서 오히려 눈에 띄는 느낌이랄까?
원래 예쁘고 잘생긴 사람은 볼캡으로 얼굴의 반을 가려도 태가 나는 법이라고.
아니 근데 왜 자꾸 힐끗거려?
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여인이 칼리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다 할 소식이 없는 거야. 분명 브로커를 잡아들였다고 했으면서."
그와 동시에 진의 시야 한구석에서 빨주노초파남보 요란하게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아. 신경 쓰인다.
계속 먼저 쳐다봐주면 버릇 나빠질 거 같은데.
그러면서도 저도 모르게 슬쩍 돌아가는 눈이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에릭이 얼굴로 의사전달을 하고 있더라.
[→ → 의뢰인 → →]
'나도 알아.'
진이 입 모양만 움직여 대답했다.
누굴 바보로 아나.
그러자 다시 한번 뒤바뀌는 글씨.
[→ → 솔라드 → →]
이 또한 예상한 바다.
괜히 여인에게서 로칸이 겹쳐 보였겠는가.
거기에 불꽃을 품은 눈빛.
백염에 대해서는 조예가 없는 진이었지만, 불꽃이란 키워드에 가문을 섞으면 나오는 이름은 하나뿐이었으니.
'나도 안다고.'
쓸데없이 친절한 선배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는 뜻깊은 시간을 마친 진이 이어지는 대화에 다시 집중했다.
그러지 않아도 칼리파가 입을 막 연 참이었다.
"녀석을 잡은 게 전날 저녁이야.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어. 조금만 시간을 가지고-"
"안 돼."
여인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이 순간에도 발터는 고통받고 있을 거야. 그 사람의 상황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내 시간의 흐름은 당신들과는 달라. 나는 이미 충분히 기다려줬어. 이 이상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그에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는 말만 봐도 의뢰인이 발터의 원수는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럼 가족인가. 혹시 여동생?
[딸? 딸?]
아, 미친. 계속 눈이 저리로 가네.
진이 인간 전광판을 피해 애써 고개를 돌릴 때였다.
"그 인내심이란 게 오늘 저녁까진 남아있는 건가?"
칼리파의 물음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여인이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올게."
"여긴 항상 어두워."
"알아."
저녁까지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이후 몸을 일으킨 여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서자,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딸랑-하는 종소리만이 그녀를 배웅했다.
"완전 막무가내네. 이래서 있는 집 자식이란···"
닫힌 문을 바라보던 칼리파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진열장에서 술을 꺼내니, 그녀가 저 마실 한잔을 준비하는 동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에릭이 테이블 쪽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고.
진은 진즉 식사를 마쳤음에도 제자리를 지켰다.
둘 다 뭐라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이좋게 뒷말을 기다리는 모양새였기에, 이른 시간부터 낮술로 입안을 헹군 칼리파만 옅게 웃었다.
"우리 솔로들께서 궁금한 게 많은가 보네."
그 말에 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화답했고, 에릭은 바이저에 심전도 그래프를 띄웠으니, 당연한 수순처럼 칼리파의 말이 이어졌다.
"어느 정도 예상했겠지만, 우리 의뢰인이 거물이거든. 굳이 따지면 거물이 될 예정인 떡잎이라고 해야 할까?"
"누구길래?"
진의 물음에 답한 건 포우였다.
"에안나 솔라드. 전대 가주의 늦둥이 딸입니다. 설마 직접 이곳을 방문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군요."
순간 진의 눈이 커졌다. 생각보다 엄청난 배경에 놀란 게 아니라, 자신의 추측이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뭐야 그럼 발터랑 가족이 아니었어?
가족 아니고 원수 아니면···
진이 바로 옆에서 삑-삑-삑- 점차 빨라지는 심전도 소리를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지?"
"뭘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맞아."
여상한 대답에 흠칫 놀란 진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그,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같은 핏줄인데?"
"진. 7가문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작게 잡아 천 년이라고."
"아 그렇지."
진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518년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린 지 100년도 훌쩍 넘은 고향 땅에서 살아가는 전주 이씨가 260만이다. 외가를 2번만 건너도 다들 남처럼 사는 사이거늘, 동성동본도 폐지된 마당에 괜한 호들갑을 떤 것이다.
물론 7가문의 방계가 수백만에 달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세월이 세월인지라 그 수가 절대 작지 않다나.
해서 이번 사건의 쟁점은 동성동본이 아니라, 직계와 방계의 사랑이었다.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여인과 가문에서 내쳐진 비루한 용병의 사랑.
"발터는 오래전 혈연 계통을 각성했고, 그의 부모는 가문에 어린 아들을 맡겼어. 거기서 유년기를 보냈고."
옅은 피 가운데서도 인재는 나타나는 법이라고, 칼리파는 이것이 가문이 방계를 유일하게 품는 순간이라고 했다.
그리고 진은 무협지를 빗대 상황을 이해했다.
원래 구파 같은 곳에서도 재능 있는 애들 모아다 몇 대 제자, 몇 대 제자 이름 붙여가며 먹이고 가르치고 재우지 않던가.
거기서 특출난 놈들은 원로 누구누구 눈에 들어서 빼어난 절기를 사사하고 단번에 인생역전하는 거고,
수준 떨어지는 놈들은 몇 년이 지나도 사조들 위패나 닦는 거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발터는 후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크게 발전하지 못하는, 누구는 저 위로 나아갈 때 혼자서 싸리비 들고 가을에는 낙엽, 겨울에는 눈 쓸기 바쁜 부류.
물론 이건 과하게 내려친 거고, 실제로 발터는 꽤나 재능이 있었지만 결국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와중에 전대 가주 막내딸과 눈이 맞았으니, 진정한 승리자는 이쪽이 아닌가 싶지만.
진이 하품을 참았다.
뻔한 이야기였다. 결국 발터는 쫓겨났고, 에안나는 그를 잊지 않았고, 두 사람은 가문 밖에서 몰래 사랑을 키워나갔고 어쩌고저쩌고.
해서 진이 진부함이란 용의 얼굴에 눈을 콕 찍었다.
"혹시 발터를 납치한 게 전대 가주는 아니겠지?"
"···손끝으로 짓뭉개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싶은데."
"그냥 해본 소리야."
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고,
칼리파는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의뢰인이 요구한 내용은 간단해. 발터가 납치된 위치를 자신에게 넘길 것. 거길 박살 내는 건 자신의 몫이란 거지."
그에 진이 포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머리한테서 뭔가를 건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게 혹시?"
"예. 실험실의 위치입니다."
"···뭐야. 그럼 다 끝났잖아. 아깐 왜 안 알려줬대? 설마 나한테 먼저 알려주려고?"
진의 말에 포우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이유도 좋았겠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아무래도 함정 같아서요."
"함정?"
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칼리파가 천천히 고갯짓하며 입을 열었다.
"심증이 그래. 전뇌에 이중 삼중으로 보안을 걸어두긴 했는데, 이게 또 작정하고 풀려고 하면 못 풀 수준은 아니었거든. 그런 것치곤 그 안에서 발견된 정보가 마침 딱 필요했던 거라서 말이야."
"공교롭다는 거네?"
진의 말에 칼리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만약의 상황을 배제할 순 없으니까."
동시에 에릭이 심전도 그래프를 지우고 문장을 띄웠다. 웬일로 반복 없이 한 줄로 길게.
[무슨 일이 생기든 그건 그 여자의 몫]
"맞아. 나야 그냥 정보만 넘기면 끝이지. 애초에 그게 거래 조건이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일회성으로 휘발되는 관계가 아니거든."
[이후로도 좋은 관계 유지?]
"그래. 무려 솔라드에 연줄을 대는 일이니까. 그래서 찝찝함이 남지 않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싶었고, 시간을 더 두고 검증의 시간을 가지려고 한 거야. 근데 우리 의뢰인께서 그 시간을 버티질 못하시겠다네?"
칼리파가 그렇게 말한 뒤 술잔에 입술을 포갰다.
이후 한 번에 내용물을 들이켜는 그녀를 보며 진이 생각했다.
참 복잡하게 산다고.
링커는 원래 저런 건가.
기다림에는 영 적성이 없는 진이라, 당장 본인만 해도 포우에게 위치를 들으면 바로 쳐들어갈 생각이어서.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진이 볼땐 저러다 발터가 잘못되는 게 의뢰인에겐 더 충격이겠다 생각하는 와중, 문뜩 칼리파와 눈이 마주치니, 그녀가 마치 속내를 읽었다는 것처럼 천천히 입을 열더라.
"무슨 생각해?"
"변수를 통제하는 건 개인의 실력이라던 어느 링커의 명대사?"
"너, 진짜···"
그 어느 링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진과 에릭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생각이 정리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어차피 의뢰인 혼자서도 실험실은 박살 내고 남겠지만,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그걸 너희들이 차단하는 걸로."
동시에 진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전조!)(변경!)전염되는 의지(?)」──────
의뢰인과 함께 발터를 찾으십시오.
*에안나 솔라드가 사망하면 실패합니다.
*보상 퍽 XP 10,000
───────────────────
아니 잠깐.
경험치 왜 더 주냐?
< 39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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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