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닷새가 더 흘렀다.
그동안 진은···
그냥 먹고 자고 쌌다.
하지만 여기엔 저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으니.
애초에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 힘든 것이, 우선 진은 환자다.
겉으로는 멀끔한 게 생긴 대로 훈훈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실상은 온몸이 아주 걸레짝이 됐다가 겨우 아문 상태라서, 조금만 무리를 해도 여기가 윽! 저기가 억! 아주 눈물을 쏙 빼는 것이다.
진으로서도 이 정도로 컨디션이 바닥을 긴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몸이 보내는 휴식 신호를 구태여 무시하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이유.
둘째는 장소의 문제였다.
이 빌딩 전체가 저항군의 거점이다 보니 어딜 가든 보안, 보안, 또 보안이라서.
혼자서 어딜 돌아다닐 수가 없더라.
그나마 진이 저항군의 의뢰를 처리한, 소위 한배를 탄 용병이기 망정이지.
원래는 체류 자체가 허용이 안 된다.
그러니 행동에 제약이 있어도 뭐 어째.
신세를 지는 입장에선 감내해야 할 불편함일 수밖엔.
해서 진이 편히 있을 수 있는 장소는 예나 지금이나 한곳 뿐이니.
바로 치료실 한구석. 등허리 배기는 딱딱한 침대라.
온종일 거기 누워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는 놈팡이로 전직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상 변명 끝.
아 아침 나왔네.
진이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보고 반색했다.
베이컨, 오믈렛, 해시브라운, 소시지, 토스트.
뭐 하나 빠짐없이 기름진, 아주 만족스러운 메뉴였으니.
여기에 맵싹한 김치에 시원한 동치미만 있었어도 공수 밸런스가 완벽했을 텐데···
채울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식사를 흡입하기 시작한 진이다.
음식이 사라지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니 흡입이라는 말이 딱 맞다.
언제 보아도 신비한 광경. 그야말로 진기명기라.
곁에 있던 알버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매 끼니를 사흘 굶은 사람처럼 먹냐.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이 집, 병원밥, 잘하네."
"먹고 말해. 다 튄다."
그간의 경험으로 진이 접시 하나를 작살내는데 채 몇 분이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아는 알버스가 말을 아꼈다.
그리고 정확히 1분 뒤.
꺼억-하는 트림이 알람 시계마냥 울리니.
알버스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떠날 거라고 하던데. 맞나?"
"뭐야. 누구한테 들었어?"
"누구긴 누구야. 네 주치의지."
"아."
그제야 이 빌딩에서 자신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두 사람밖에 없다는 걸 상기한 진이다.
그나마 말문이라도 튼 벤이 있긴 하지만, 차고지까지 내려갈 일이 없어서.
뭐야.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도 입에 거미줄치고 사는 건 똑같잖아.
진이 헛웃음을 흘리자니, 그런 그를 향해 알버스가 단말기 하나를 내밀었다.
"자."
"······? 고쳤어?"
"그럴 리가. 회로가 아주 녹아버려서 죽었다 깨어나도 못 살린다더라. 대신 최대한 비슷한 걸로 구했지."
전격 마법에 요단강 건너버린 단말기 때문에 한동안 속이 쓰렸던 진이 기분 좋게 그걸 건네받았다.
"어째 너무 받기만 하는 거 같은데,"
"공짜 아니다. 여기서 치료받은 것도, 한 끼에 5인분씩 거덜 낸 것도 나중에 전부 갚아야 할 거야."
진은 알버스의 말이 진담과 농담. 그 어딘가의 미묘한 경계에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나중에 갚아라.
그것은 언젠가 저항군과 다시 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다음 의뢰비에서 차감해."
말을 마친 진이 기지개를 쭉 켰다.
그렇게 한 점 남은 찌뿌드드한 몸살 기운까지 털어낸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가볼까."
***
당연하지만 출정식 같은 게 아니다.
그저 잠시 손을 잡았던 솔로가 제 갈 길 가는 날이었으니, 배웅이랍시고 나온 사람은 알버스와 그레이스.
그리고 만티코어의 첫 출격을 구경하러 나온 벤이 전부라.
떠나기 전.
그래도 인연이라고 셋과 번호를 교환한 진이 오토바이 위에 올라앉았다.
차키 꽂고, 돌리고, 시동 걸고.
웅혼하게 떨리는 차체를 가볍게 쓸어내린 뒤, 이윽고 강렬한 배기음을 터트리며 출발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참 좋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불과 1시간도 안 돼서 사고가 나버릴 줄은.
"으···"
길바닥에 쓰러진 진이 신음했다.
몇 바퀴나 굴러서 멈춘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일단 왼팔은 확실하게 부러졌다.
그쪽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고통보다 더욱 강렬하게 치솟는 감정은 다름 아닌 분노라.
진이 허공을 향해 쇳소리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야이, 개새···끼야······"
물론 상태창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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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방금 전 벌어진 일을 복기했다.
구획과 구획을 잇는 도로.
일명 하이웨이는 당연하게도 신호등이 없다.
차량의 병목을 최소화하고 고속 주행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사실상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평범한 고속도라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길이 하자가 있다는 것.
당연하게도 이 또한 기업·가문 전쟁의 여파라.
도로 공사를 담당한 업체가 도중에 그냥 날랐다.
그랬기에 중앙분리대 없는 구간이 10km가 넘게 이어졌어도 진은 그러려니 했다.
반대 차선에서 달려오던 트럭이 느닷없이 중앙선을 넘어 돌진했을 땐 화들짝 놀라긴 했어도, 미친 순발력으로 피해냈다.
문제는 완벽하게 피하지 못했다는 건데.
하필이면 거기서 상태창이 시야를 가린 걸 어쩌라고.
그야말로 설상가상, 화불단행, 엎친 데 덮친 격이라.
속된 말로 억까 당한 거다.
그리하여 지금.
십수 미터를 날아 다시 십수 미터를 구른 진이 하늘을, 아니 상태창을 향해 울분을 토했다.
"이 씹새끼 진짜! 어떻게 된 게! 단 한 번을···!"
너무 화가 나니까 욕도 제대로 안 나와서 턱근육이 잔뜩 불거지라 이를 악물었다.
피가 몰리니까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찍-
안 돼. 진정하자.
부정···, 아니 긍정적인 생각만 하는 거야.
그래 나는 이레귤러.
죽음을 극복하면 강해지는 전투민족.
카카로트 보고 있나?
나는 무적이다.
재구축은 "신"이고.
혼신의 힘을 다한 주접 덕분일까.
열기가 가득 들어찬 성난 머릿속이 차차 개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 빈 공간을 통증이 채우더라.
"하우···"
기괴하게 꺾인 왼팔을 확인한 진이 신음할 때였다.
딸꾹-하는 소리와 함께 터벅터벅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으니.
"괜찮냐?"
딱 봐도 안 괜찮은 사람한테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이 냄새? 설마 술이야?
그제야 스르륵 사라지는 상태창 너머로 태양을 등진 봉두난발의 중노인이 보였다.
그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공간을 만들며 말하길.
"쪼-끔만 옆으로 더 피하지 그랬어. 잘 꺾다가 왜 움찔했대?"
그와 동시에 진의 이마에서 다시 피가 찍-
"트럭 차주?"
"아아. 맞아."
음주운전이었다 이거지?
사실 상태창도 문제였지만, 근본적인 사고의 원인은 중앙선을 돌파한 트럭에 있었던지라.
주먹으로 책임을 물어야겠다, 결심한 진이 부러진 왼팔을 콱 맞추며 몸을 일으키는 찰나.
"일단 이거라도. 히끅- 받아. 내가 미안하다."
술 냄새를 훅 끼치며 다가온 중늙은이가 진의 손에 무언가를 꼭 쥐여주니.
이는 꼬깃꼬깃 각기 색깔 다른 지폐 몇 장이라.
순간 주먹에 힘이 탁 풀린 진이다.
아 진짜.
나 이런 거에 약한데.
몇 푼 없이 살아봐서 그런가. 그 하찮은 몇 푼이 가진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제대로 씻지 못한 건지, 않은 건지 체취 풀풀 풍기는 노인네가 건네준 돈을 단지 액면가만 보고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이 약간 모자란 거 같기도 하고.
그리하여 진이 화를 내지도 용서하지도 못하고 한숨만 푹-
그러다 이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이봐요. 어르신. 나니까 살았어요, 나니까. 알아요? 다른 사람이었음 벌써 팔다리 수수깡처럼 뚝뚝 끊겨서 아스팔트 위에 산 채로 갈렸을 거라고. 그러니까 오늘부터 밤에 눈 감기 전에 난 살인자다 세 번씩 복창해요. 그래야 양심에 찔려서라도 음주운전을 안 하지."
라고 말하고 보니 눈앞에 보이는 건 알딸딸하게 취한 주정뱅이 중노인이라.
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런 말을 했을까.
진이 후회했다. 당장 저 목숨도 장담 못 할 인간인데.
"나 갑니다."
그렇게 말하며 노인 곁을 지나친 진이 바닥에 쓰러진 만티코어를 세웠다.
아크로바틱하게 날아간 주인과는 달리 웬일로 차체는 크게 망가진 부분이 없더라.
물론 스크린이 박살 나고, 군데군데 긁히고 패인 자국까지. 전체적으로 난리가 나긴 했다.
"에이. 진짜···"
산 지 하루도 안 된 휴대폰 액정 깨졌을 때보다 수십 배는 속이 쓰렸지만 별 수 있나.
이름도 모르는 노인네 두들겨 팰 게 아니라면 그냥 갈 길 가야지.
마음을 추스른 진이 다시 만티코어에 올라탈 때였다.
"어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노인이 친근하게 진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궁금한 것도 많으셔. 진이요. 왜? 나중에 밥이라도 한 끼 사주시려고?"
진이 삐뚜름한 얼굴로 쏘아붙이자니, 노인이 히죽 웃었다.
"온몸이 아주 걸레짝인 게 이러다 제명에 못 죽겠어."
"누구 놀리나. 이게 다 누구 때문에···됐고. 우리 다시는 보지 맙시다. 예?"
진이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도를 높이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인이 코를 훌쩍거리며 트럭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중앙선을 침범한 차를 돌리기 시작하는 차 안에서 삐빅-하는 무전음이 들려왔다.
[대령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아. 오해가 조금 있어서."
[오해요?]
"별거 아니야. 미안할 짓을 좀 했는데, 섭섭지 않게 챙겨···아니, 고쳐줘서 보냈어. 나중에 분명 고마워할걸. 히끅. 그나저나 상황은?"
[스틱스가 움직인 건 정황상 확실합니다. 게다가 이 불길한 마나. 크로우군요. 그런데 말입니다···이래저래 걸리는 게 있습니다.]
"뭐가?"
[마나 검시관 말에 따르면 크로우와 대치한 신원 미상자가 둘 있는 모양인데. 그의 말로는 둘 다 특정되지 않는 인물이라는군요.]
"···특정되지 않는다? 납득하기 어렵군. 크로우, 그 미치광이와 맞붙었다면 적어도 레벨6 이상의 솔로거나 4위계 이상의 순수주의자일 텐데."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마나 패턴 변주에 초점을 두고 조사해 볼까 하는데 대령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에 잠시 말을 멈춘 노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미러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인력 낭비다. 우린 우리가 맡은 일부터 마무리하자고."
[솔로라는 가정하에 저항군 측 계좌 내역을 조금만 더 캐내도···]
"그놈들도 바보는 아니고. 3중, 4중으로 손을 썼을 거다. 그리고 상부는 이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 시말서 쓰기 싫으면 괜히 꼬리 잡힐 짓 말자고. 그럼 이따 보지."
[···예. 이따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무전기가 다시 침묵했다.
이후 조수석을 더듬거려 술병을 잡아챈 노인이 엄지로 병마개를 날렸다.
그러고는 나발을 불며 액셀을 꾹 밟으니.
시정부 소속 특수부대 대령, 존 헤리슨이 운전하는 트럭이 뮤트타운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 20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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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
부아아아앙!!
만티코어가 그 이름에 걸맞은 엔진소리를 울리며 도로를 달렸다.
석양에 타는 저녁놀은 호박빛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제멋대로 솟구친 건물의 숲 아래까진 닿지 못했으니.
거리는 언제나 그랬듯 어두컴컴했다.
낮과 밤을 구분하기 힘든 땅을 비추는 것은 녹슨 가로등과 음울한 네온사인이라.
진이 그 흐릿한 광원 너머의 세상을 바라봤다.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권총을 돌리는 여인, 약에 취해 웃통을 까고 달리는 사내, 행인을 붙잡고 추파를 던지는 섹스토이, 멀리 들려오는 총성, 갱단, 노숙자, 거리의 사람들.
고향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그러나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풍경.
만티코어가 점차 빨라질수록 그 모든 것들은 윤곽을 잃고 하나의 덩어리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부우웅.
어느 순간 대로를 가로지르던 바이크가 속도를 줄여 골목에 들어섰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이 만든 미로처럼 얽힌 길.
그곳을 얼마간 더 나아가던 만티코어가 어스름한 불빛 아래서 멈췄다.
시동이 꺼지고 진이 바닥에 내려섰다.
뻐근한 허리께를 툭툭 두드리며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던 그가 이내 에넥도트의 문을 열었다.
딸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홀로 테이블에 앉은 칼리파의 모습이었다.
길게 뻗은 다리를 허벅지 위로 꼰 채, 술잔에 입술을 포개던 그녀가 열린 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높낮이가 달라진 눈썹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하? 이게 누구야."
"안녕. 칼리파."
손을 흔들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 진이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왜 혼자 청승이래."
"청승이 아니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거야."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칼리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후 언제나처럼 쿠키와 따듯한 우유를 대접한 그녀가 말했다.
"연락은 왜 끊긴 거야."
"아, 그게 단말기가···뭐야. 그 표정은. 설마 걱정했어?"
"···진. 날 무슨 쿠키 내놓는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거야? 소속 솔로의 생사는 링커로서 당연히 확인해야 할 사항이라고."
칼리파가 옅은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정작 진은 고개를 갸웃.
그런 것치곤 처음 눈 마주쳤을 때 너무 담담하던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이미 전반적인 사정을 다 꿰고 있다는 듯 차분한 기색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얘기는 들었어. 죽을 뻔했다면서."
"펜릴이 그래?"
진의 물음에 칼리파는 긍정도 부정도 않았다.
그저 술잔에 입술을 포개고선 부드럽게 한 모금을 삼켰을 뿐.
이후 테이블 위에 잔을 얹은 그녀가 말했다.
"···펜릴은 레벨 3의 솔로야. 전에도 말했지만, 이 정도면 누가 뭐래도 베테랑으로 취급받지. 게다가 펜릴은 어지간한 일에는 좀처럼 수인화를 하는 법이 없어서 사실상 그보다 한 단계 높은 평가를 받아도 부족함 없는 실력자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진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뭐라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라서.
"그래서 별걱정이 없었어. 펜릴이라면 이 정도 의뢰쯤은 신예인 널 데리고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거든."
거기까지 말한 칼리파가 대뜸 자리에서 일어섰다.
쿠키 한 접시 더 주려고 그러나?
진이 기대 서린 눈빛으로 우유를 들이켜는 사이.
다시 돌아온 칼리파의 손에는 쿠키가 아닌 커다란 가죽 가방이 들려있더라.
그걸 테이블 옆에 퉁 내려놓은 그녀가 말했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그 펜릴이 신예에게 목숨을 빚질 거라고."
그에 진이 눈을 끔뻑끔뻑.
"무슨 소리야. 목숨은 서로 빚졌지."
살아남기 위해선 서로의 존재가 절실한 상황이었으니.
응 제발 죽지 마. 너 없으면 나도 죽어.
라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버텼지 않았던가.
"펜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데."
칼리파가 싱긋 웃으며 바닥에 놓인 가방을 향해 턱짓했다.
"열어봐."
해서 진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손을 뻗어 지퍼를 열었다.
그러고는 차곡차곡 쌓인 지폐다발을 보고 흠칫.
이게 다 뭐냐는 듯한 눈빛을 쏘는 그에게 칼리파가 말했다.
"2,500만 크레딧. 수수료 뗀 성공 보수 전액이야. 펜릴이 본인 몫을 네게 양도했어."
"···아니. 왜?"
"글쎄. 다음에 만나면 직접 물어봐."
칼리파는 그렇게만 답했고, 진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싸우다가 머리를 다친 거야. 뭐야.
사실 진은 펜릴을 보면 고맙다 얘기하려 했더란다.
그도 그럴 것이 창고가 폭발했을 당시 기절한 자신을 챙겨 탈출한 게 그라서.
그런데 양도라니.
진으로선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었지만, 달리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가방을 몸쪽으로 슬쩍 끌어당기니.
빳빳한 신권 냄새에 현기증이 핑-
이게 다 얼마야.
진이 떨리는 손으로 지퍼를 닫을 때였다.
"물어볼 게 있지 않아?"
칼리파가 그렇게 말하며 잔에 술을 따랐다.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얼굴이 어쩐지 질문을 기다리는 모양새라.
진이 자연스레 포문을 열었다.
"그 흑마법사. 정체가 뭔데?"
예상한 질문이었을까. 즉각적인 대답이 돌아오더라.
"크로우 매드아이. 스틱스 소속의 흑마법사지. 보통은 '그 미치광이'라고 불려."
"···스틱스?"
진에게도 낯선 단어는 아니었다.
스틱스란 이름만 듣고도 바로 이승과 저승을 잇는 강을 떠올릴 수 있었기에.
이는 어린 시절 뇌리에 새겨진 정보였으니.
이게 다 아동 도서계의 전설적인 베스트셀러.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 신화 덕분이다.
30대 중에 이 책 모르면 간첩이지.
진짜 재밌었는데.
물론 진은 스틱스가 단순한 동음어인지, 편의적으로 차용된 현실의 요소인지까진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걸 깊이 따지고 들었다간 분명 공황이 찾아올 테니까.
그사이 칼리파의 설명이 시작됐으니.
"위험도 5등급 이상의 범죄자로 구성된 집단이야. 구성원 전원에게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있지만, 그건 놈들이 얼마나 괴물 같이 강한지를 숫자로 나타낸 것뿐이고 실제론 어떤 바운티헌터도 솔로도 놈들을 노리지 않아. 아니. 있긴 했지. 역으로 사냥당한 시체가 빌딩을 쌓기 전까지는."
그에 진의 윗입술이 꿈틀.
그래서 얼만데? 라고 물어보면 눈치 없는 거겠지.
"동시에 놈들은 우리와 같은 해결사이기도 해. 물론 돈만 준다고 고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자기네들 흥미를 자극해야 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미친놈들이야. 더럽게 까다로워 보이다가도,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장소에서 개판을 치거든."
칼리파가 한 텀을 쉬고 입을 열었다.
"그 창고처럼."
"이해했어."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뭐가 이상하다고 했지.
난이도가 1에서 5도 아니고 갑자기 20으로 껑충 뛴 느낌이라더니.
완전 똥 밟았다 이거네.
진이 혀를 쯧쯧 차며 쿠키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후 손끝에 묻은 부스럼을 털자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리파가 목소리를 깔더라.
"진.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은 위로도 변명도 아니야. 그저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지."
차분하게 운을 뗀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진의 얼굴을 담았다.
"앞으로도 네가 솔로로 살아가는 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거야. 예기치 못한 위협. 통제되지 않는 상황. 그로 말미암아 탄생하는 무수한 변수들. 이 모든 걸 미리 대비하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워. 그래서 결국 개인의 역량만 남는 거지. 이 바닥이 원래 그래. 가혹하다고 할까."
"······"
"그래도 자신 있어?"
이어진 질문에 진은 잠시 말을 아꼈다.
수수료 챙기는 중개인에 불과한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묻는지는 모르겠다만, 전하고자 하는 말 자체는 이해가 됐으니까.
금을 밟은 이에게 던지는 경고.
그 앞은 지옥이야.
그런데 여태 안 그런 적이 있었나?
진은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이후로 단 한 번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칼과 총? 아프긴 하다.
찔리고 부서지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질 않으니, 밤새 끙끙 앓다 보면 가끔은 못 견디게 서러워서 쪽팔리지만 엉엉 울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두려운 것은 사지 멀쩡한 상태로 편히 누워있을 때더라.
생각이 많아지는 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여긴 정말 게임 속인 걸까?
그럼 나는 대체 뭐지?
빙의자? 게임 캐릭터? 왜 하필 난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탈출은 할 수 있나?
만약 돌아가더라도 이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 살지.
빌어먹을 상태창.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러면 어김없이 검은 파도가 몰려왔다.
어느 순간 진은 불을 끄고 잠에 들지 못했다.
단말기를 구한 뒤로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침대맡에 두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진은 자신이 동전의 양면처럼 나뉘어 있다고 느꼈다.
대포알 같은 주먹을 뻥뻥 날리며 어디 하나 부러지든 말든 기어이 전진하는 초인과 밤이 두려워 몸을 둥글게 웅크린 겁쟁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커지는 간극 속.
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를 받아들였다.
바로 상태창이 제시하는 길의 끝에 다다를 것.
그리고 거기에 무엇이 있든 자신의 두 손으로 박살 낼 것.
아직은 요원한 얘기였다.
해서 솔로의 삶이란 그 머나먼 끝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으니.
마침내 진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당연하지. 자신 있어."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칼리파가 옅게 미소 지었다.
"아무튼 정말 고생 많았어. 크로우와 맞붙고도 살아서 돌아오다니. 그것만으로 네 가치는 증명된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기쁜 소식."
"기쁜 소식?"
진이 멀뚱히 되묻는 가운데, 칼리파가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손뼉을 짝 쳤다.
"포우!"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중앙 선반 뒤편에서 바텐더가 짜잔 나타나더라.
"부르셨습니까. 점장님."
그 절묘한 등장이 마치 연출된 장면처럼 느껴졌기에, 괜스레 유쾌해진 진이 실실 쪼개자니 칼리파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직접 얘기해줘. 하고 싶어 했잖아."
그에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인 포우가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진. 공인된 절차를 통해 진급에 필요한 보수를 충족한바. 솔로 인트라넷에 2레벨 솔로로 등재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그와 동시에 진의 머릿속에서 도파민이 폭발했다.
「진급」──────────────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높게.
솔로(Lv2)로 진급했습니다.
보상 : 퍽 XP 2,000
─────────────────
"거름망도 다 통과하지 못한 신예가 진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7레벨 이상의 전설적인 솔로들이나 가지고 있는 위대한 업적이랄까요."
"포우. 오버하지 마."
가볍게 눈을 흘긴 칼리파가 진을 돌아봤다.
"이제부터 좀 더 괜찮은 일을 마련해줄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거야.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
뇌 내 마약으로 어지러운 와중에 그녀가 내민 손을 잡은 진이 흐리멍텅 풀린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흐으래. 나도오."
"······? 너 왜 그래."
이후.
작은 오해를 수습한 진이 묵직한 돈가방을 들고 에넥도트를 나섰다.
퉁.
수납용 트렁크에 가방을 실은 그가 만티코어에 올라탔다.
다시 달릴 준비를 마친 바이크의 엔진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가운데.
진은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어디로 가게 될까.
정해진 건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살아갈 뿐이라.
조금은 부랑자다워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옅은 미소를 흘린 뒤 액셀을 당기니.
부아아아앙!!
흐릿한 달빛 아래. 바이크가 다운타운을 가로질렀다.
< 21화 > 끝
ⓒ 오동냐무
=======================================
< 22화 >
요 며칠 진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또 어딜 다쳤냐고?
아니. 몇 번 시비에 휘말린 적은 있지만 딱히 다쳤던 적은 없다.
그럼 배고프냐고?
하루 5끼. 매 끼니 두 그릇 이상.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것도 아니면 스킬 뭐 찍을지 고민 중이냐고?
이미 어떤 별을 밝힐지는 결정했다. 다만 경험치가 조금 부족했을 뿐.
해서 진이 괴로운 이유는 다름 아닌.
돈이 너무 많아······
돌이켜보면 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쌈짓돈 털어 케이크 한 조각 겨우 사 먹던 비렁뱅이 신세였다.
첫 의뢰로 번 돈은 그라비스 산다고 다 탕진했으니, 카드값 빠져나가듯 사라진 돈이라 내 것이었단 느낌이 별로 없었다고.
그런 그에게 2,500만 크레딧이란 거금이 덜컥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 감당이 될 리가 있나. 온종일 돈가방을 상전 모시듯, 우리 돈님들은 잘 계시는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틈만 나면 지퍼를 열었다가 닫았다가. 열었다가 닫았다가.
이래서 돈도 써본 놈이 잘 쓴다고.
그동안 진이 부린 사치라고 해봐야.
대부분이 식대요. 이를 제외하면 무선 통화 기능이 탑재된 헬멧과 브로프에게 여벌의 탄창을 구비한 것이 전부였다.
해서 여전히 돈가방은 묵직했으니.
이런 표현이 진짜 말도 안 되는 건 아는데.
솔직히 혹덩이를 달고 다니는 느낌이랄까?
지금도 그렇다.
마침 주머니 속 돈이 다 떨어진지라 후미진 골목에 만티코어를 주차한 뒤, 누가 볼 세라 얼른 지폐다발 하나를 꺼내는 순간.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폴짝.
저도 모르게 그라비스를 겨눈 진이 후다닥 달아나는 고양이보다 본인이 더 놀라 총구를 내렸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풀썩 쪼그려 앉으니.
돈가방 경호원 노릇도 하루 이틀이지.
이러다 노이로제가 올 판이라.
···차라리 월세를 구할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이것도 탈락.
결국 남는 돈은 집에 놓고 다녀야 할 텐데 다운타운 치안을 어떻게 믿냐고.
거기에 비단 돈가방만 문제가 아닌 것이 만티코어도 진의 주름살이 깊어지는 원인 중 하나라서.
이게 다 얘가 이뻐서 그렇다.
못 믿겠으면 직접 보라.
전륜, 후륜 모두 21인치 커스텀 휠에 큼직한 타이어를 장착한 데다, 전문가의 손길로 재탄생한 섹시한 카키색 무광 바디를.
군데군데 긁힌 스크래치와 움푹 팬 자국이 아쉽긴 해도 이 정도면 사용감이 조금 있다는 말로 얼버무릴 수 있는 수준이니.
너무 깔끔하기만 하면 샌님 같다 업신여기는(진의 생각이다) 다운타운의 정서상 만티코어는 누구나 탐낼만한 물건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디 주차할 때마다 노심초사.
혹여 웬 썅놈의 새끼가 훔쳐 가진 않을까.
자다가도 몇 번씩 깨서 모텔 주차장을 들락날락하니.
이 정도면 의처증이 아니라 의토바이증 초기 증상이라.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고.
더는 이렇게 못 살아. 속으로 다짐한 진이 단말기를 만지작거려 몇 명 있지도 않은 연락처를 뒤졌다.
해서 결국 칼리파다.
대한남아의 자존심이 허락하진 않지만 신세 좀 진다고 하자.
돈도 맡기고 주차장도 빌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밥도 얻어먹고, 잠도 같이 자고.
거 포우는 몸부림이 심한 편인가?
는 무슨.
"···씨이벌."
차마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한 진이 고개를 푹 떨궜다.
그렇게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길 한참.
단념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던 진의 머릿속을 불현듯 스치는 기억이 있었으니.
서둘러 단말기를 다시 켠 그가 오늘의 날짜를 확인하고는 손으로 이마를 턱 짚었다.
"아, 맞다. 럼펌펌펌."
***
"그래서 지난주엔 많이 바쁘셨다?"
"그렇대두."
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에 쥔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먹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
왜 베이컨에서 종이 씹는 맛이 나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남은 샌드위치의 단면을 살피는 진을 향해, 맞은편에 앉은 제니가 말했다.
"그러면 못 올 거 같다고 미리 말했어야지. 나랑 얘랑 둘이 새벽 3시까지 기다렸다고."
"하하. 난 괜찮았는데···"
'나랑 얘'에서 '얘'를 담당하는 제키가 머쓱한 웃음을 흘리는 가운데.
에라 모르겠다. 남은 샌드위치도 입에 구겨 넣은 진이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나도 말하고 싶었지. 근데 단말기 회로가 아예 녹아버려서······"
이후 주저리주저리.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제니가 이윽고 팔짱을 풀었다.
"그래서 몸은 괜찮은 거야?"
"어?"
"단말기 회로가 그냥 녹진 않았을 거잖아."
"아···병원 신세를 지긴 했는데 지금은 완전 멀쩡해. 볼래?"
웃옷을 살짝 걷은 진이 빨래판 같은 복근을 자랑하자, 이를 빤히 바라보던 제니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공평해. 저렇게 많이 먹는데 왜 군살이 하나도 없는 건데?"
"또, 똥을 엄청 자주 싸는 게 아닐까?"
이어진 제키의 의견에 진이 미간을 꿈틀.
저건 목소리만 떨리지, 못하는 말이 없네.
어찌 됐든 오해도 풀었겠다.
2주 만에 뭉친 세 사람이 식사를 이어갔다.
진에겐 몇 안 되는 편안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하필이면 이때 칼리파에게 연락이 올 줄은.
"어. 칼리파 나 지금 식사 중이라. 조금 있다가······"
[안돼. 진. 긴급이야.]
단호하게 말을 자른 그녀의 목소리가 시간차를 두지 않고 귓가를 파고들었다.
[문자로 URL 주소를 보냈어. 바이러스 같은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눌러도 돼. 그러면 내비게이션 앱이 설치될 텐데 거기 표시된 좌표로 출발해 줘. 자세한 건 통화로 알려줄게.]
"당장?"
[당장.]
이후 단말기를 귀에서 살짝 떨어뜨린 진이 무슨 일이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남매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나 가봐야겠다."
***
부아아아앙!
만티코어가 도로 위를 미끄러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차선을 바꿔 앞차를 추월한 진이다.
그러자 새로 산 헬멧 안쪽에서 칼리파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놀라지 말고 들어. 다운타운에서 빛과 장미의 시대 물건으로 추정되는 아티팩트가 발견됐어. 오늘 자 다크웹에 올라온 물건인데 그 모양이나 특징이 문헌과 놀랍도록 유사해.]
···아티팩트?
빛과 장미의 시대?
이건 또 뭔 소리야.
정말 하나도 안 놀라버린 진이다.
그러다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정신을 퍼뜩.
[진? 듣고 있어?]
"어어. 계속해."
[그럼 계속할게. 내가 발견지를 '다운타운'이라 확신한 이유는 간단해. 판매자가 흔적을 남겼거든-]
그리고 여기까지가 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이후의 설명은 한 귀로 들어와 필터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반대쪽 귀로 탈출했으니.
쉽게 요약하면 이러했다.
다크웹은 접속 허가가 필요한, 혹은 특정 소프트웨어로만 접속할 수 있는 사이버판 암시장이라.
바깥에서는 여기서 뭘 사고파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다만 안쪽에서는 사정이 달라서, 암시장을 이용하는 고객끼리는 서로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면무도회라고 할까.
분명 얼굴을 가리고는 있지만, 자세히 보니 체격이며 목소리며 말투며 아 얘 철수네.
반갑다 철수야. 하고 맞출 수 있는 그런 느낌.
해서 다크웹 이용자는 데이터를 암호화하는 각종 툴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2중, 3중으로 감추는 게 일반적이나.
어째선지 이번 아티팩트 판매자는 그 과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불과 몇십 초도 지나지 않아서 계정은 암호화됐지만 이미 늦었지. 볼 사람은 이미 다 봤거든. 그중 하나가 포우였고.]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진이 핸들을 돌렸다.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몸과 함께 코너 길을 부드럽게 휘돈 만티코어가 이내 차체를 바로 세우며 속도를 높였다.
"포우가? 어떻게."
[우연이었어. 포우는 과거의 유산에 관심이 지대한 편이라 틈만 나면 인트라넷을 뒤적거리는 게 일상인데 오늘은 그게 다크웹까지 이어진 거지.]
고상한 취미가 있으셨구만?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래서. 샀대?"
[그랬다면 너한테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겠지. 이미 아티팩트는 팔렸어. 그리고 지금 구매자에게 한창 달려가는 중이지.]
"달려가고 있다고?"
[그나저나 진. 아직 멀었어? 이제 슬슬 보여야 할 거 같은데.]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챈 진이 내비게이션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지니.
이제껏 선으로만 표시되던 경로가 점과 점 사이로 가까워져 있더라.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다는 뜻. 그런데···
잠시만 이거 왜 움직여?
목적지가 자신과 같은 일직선상에 있음을 확인한 진이 급히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맹렬한 속도로 대로를 질주하는 검은색 밴과
그 주위를 비호하듯 에워싼 바이크들을.
"칼리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뭔지 설명 좀 해볼래?"
[찾았구나. 놈들은 스윗드림이라는 갱단이야. 이번에 아티팩트를 찾은 행운아들이지. 동시에 자기네들이 역추적 당한지도 모르는 멍청이들이기도 하고.]
"이거 내비라매. 위치 추적기였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옅은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말했다.
[해서 오늘은 링커 칼리파가 아니라, 의뢰인 칼리파야. 그럼 솔로? 의뢰를 맡겨도 될까. 저 녀석들에게서 반지 형태의 아티팩트를 회수해줄래?]
그에 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야. 다음부터 이런 식이면 곤란해. 나도 내 사생활이 있다고."
[불쾌하게 했다면 사과할게. 우리로서도 방법이 없었어. 다운타운 내에 연락이 닿는 솔로가 너뿐이었거든. 그 대신. 보수는 넉넉히 준비했어.]
가장 중요한 이야기에 진이 열심히 속도를 내는 중에도 귀를 기울였다.
[기본급 1,000만 크레딧에 회수한 아티팩트의 감정가 25%만큼을 추가로 지급할게. 물론 짜증 나는 중개인도 없으니 수수료 따윈 없어. 어때?]
칼리파의 자기비하적 농담에 진이 피식 웃었다.
"좋아. 접수."
[참고로 스윗드림 녀석들은 주업이 인신매매인 쓰레기들이니 괜히 맘 약해질 필요는 없어. 그럼 행운을 빌게.]
직후 뚝- 끊어지는 통화.
마침내 오롯이 홀로 남겨진 진이 목표물을 눈에 새겼다.
바이크는 모두 여덟 대.
아직 저쪽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라.
그렇다면 속전속절.
진이 엑셀을 힘 있게 당겼다.
부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질주한 만티코어가 지그재그 차선을 바꿔가며 거리를 좁히니.
순식간에 갱단을 따라잡은 진이 허리춤에서 그라비스를 꺼내 들었다.
격발이 목적이 아니다.
제아무리 진이라도 시속 120km를 돌파한 차체 위에서 한 손으로 그라비스를 빵빵 쏴댈 수는 없으니까.
해서 손잡이가 아닌 총열을 꽉 움켜쥔 그다.
그러고는 앞지르는 속도 그대로 후미에 있는 갱단원의 뒤통수를 후려치니.
꽈직-!
도무지 사람의 몸에서 났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놈이 계기판에 얼굴을 처박았다.
직후 통제를 벗어난 바이크가 불티를 일으키며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졌고-
그 소리에 나머지 갱단원들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잭!"
"이게 무슨! 적이다!"
동시에 또 다른 머리가 터져 나갔다.
이번에는 안면이 납작 찌그러진 갱단원이 허공을 붕 날았다.
추락한 몸뚱어리가 공처럼 몇 번 튀어 올랐다.
당연하게도 사람의 몸은 공만큼 탄력적이지 못해서.
이미 두 번쯤 튀어 올랐을 때 사지가 죄다 부러졌다.
"이런 시발!"
동료의 참혹한 최후에 분개한 놈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고는 일제히 카키색 바이크를 향해 속도를 끌어올리니.
백미러를 통해 이를 확인한 진이다.
"저 새끼 죽여!"
부아아아아앙!
과열된 엔진음이 도로 위의 싸움에 서막을 알렸다.
< 22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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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
미켈 드루먼드.
스윗드림의 2인자인 그는 지금 매우 초조했다.
진짜 진짜 초조했다.
허벅다리를 덜덜거리고, 손톱을 깨물고, 틈만 나면 창밖을 힐끗거리니.
"야야. 더 밟아 봐. 더."
이미 과속하고 있는 부하만 닦달할 뿐이다.
이게 다 그가 배신자여서 그렇다.
언제 한 번 뒤통수치려고 했지만 그게 오늘이 될 줄이야.
"후우-"
미켈이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 누가 봐도 힘이 단단히 들어간 손아귀. 그리고 그 안에 잡힌 자그마한 케이스가 있었다.
평범한 케이스였다.
물론 당연했다.
그저 급하게 골라잡은 것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물건은 얘기가 달랐으니.
조심스레 뚜껑을 젖힌 미켈의 눈에 요사스러운 빛을 흘리는 붉은 반지가 담겼다.
우연히 발견한 물건이었다.
여느 때처럼 혼자 있는 노숙자를 납치해다가 마약성 수면제를 투약해 달콤하게 재운 다음.
배때지 따고 룰루랄라 장기를 꺼냈으니.
볼 장 다 본 빈껍데기는 태우고, 냄새나는 옷도 불길 속에 던지려는 순간.
이게 뚝 떨어지더라.
평범한 장신구라기엔 표면에 새겨진 꼬부랑글씨와 기이한 빛깔이 딱 봐도 심상찮은.
미켈은 이게 돈이 되리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해서 보스 몰래 블랙넷에 접속.
(이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가 있었다)
몰래 스캔해 둔 반지의 데이터를 판매처에 등재하니.
잠깐만. 이거 0이 몇 개야.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억?
5억?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나타난 구매자가 제시한 돈에 저절로 눈이 훼까딱.
정신을 차려 보니 접선지를 조율하는 자신을 발견한 미켈이 생각했다.
쥐좆만한 갱단 2인자 자리.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뻥 걷어차려고 했더니만.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결심은 애저녁에 끝냈으니 이젠 실행에 옮길 때라고.
평소 자신을 잘 따랐던 부하 아홉을 불러내 빼돌린 물건과 함께 곧장 접선지로 출발한 그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막상 일을 저지르고 나니 두려움이 엄습하는 게.
쥐좆만한 갱단이긴 해도 보스의 실력은 진짜라서.
그 미친놈이 혹여나 뒤쫓아오진 않을까.
반지를 발견했을 당시. 하필이면 옆에 있던 보스 그 새끼가 관심을 보이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진 미켈이 재차 운전석을 향해 소리치는 그때.
"더 밟─!"
끼이이익! 콰앙!
듣기 싫은 마찰음에 이어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니.
한순간 심장이 발바닥까지 뚝 떨어진 미켈이 허옇게 질린 얼굴을 휙 돌렸다.
"······!"
일순 느려진 듯한 시간 속.
자신이 앉은 뒷좌석 오른쪽 자리 창문 너머로, 허공을 붕 날아오르는 부하가 보였다.
직후 노면에 떨어진 녀석의 몸이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는 광경을 목도한 미켈이 꽥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시발! 앙리가 벌써?!"
배신한 보스의 이름을 내뱉는 그에게 운전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혀, 형님! 보스가 아닌데요?"
"···뭐?"
"보스가 아니라고요!"
그에 미켈이 창가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니.
이제 막 부하들과 뒤섞이기 시작한 카키색 바이크와 그 위에 올라탄 운전자가 보이더라.
미간이 와락 일그러진 그가 소리쳤다.
"저 새낀 뭐야?!"
***
요란하게 번쩍이는 네온사인의 바다.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왕복 8차로 대로를 바퀴 달린 짐승들이 질주했다.
부아아아앙!
가열한 엔진음이 귓가를 스쳐감에 행인들은 어깨를 움찔하거나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진 짐승들이었으니, 누군가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 뒈지라지."
정말 그렇게 되어가는 줄도 모르고.
까앙!!
불티가 솟구친다.
목을 노리는 칼날을 그라비스의 총신으로 받아낸 진이 순간 중심을 잃은 상대의 바이크를 발로 밀어냈다.
가동 범위가 무릎 아래서 이뤄진, 충분한 힘이 실리지 못한 동작이었지만 초인의 완력은 그것만으로도 차체를 휘청거리게 만들기 충분했으니.
이내 접지력을 상실한 바이크가 가로등을 들이받으며 산산조각 났다.
물론 운전자도 무사하진 못했다.
충돌과 동시에 목뼈가 뚝 끊어졌으니 보나 마나 즉사라.
이를 백미러로 확인한 진이 저기 앞서가는 밴을 쫓아 속도를 높이려는 찰나.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짓쳐들었다.
그것도 2개나.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은 진이다.
순간 크게 흔들리는 차체를 어떻게든 제어하며 공격이 날아든 방향을 바라보자, 거기엔 양쪽 날갯죽지와 연결된 기계팔을 휘두르는 갱단원이 있었다.
부모님이 낳아주신 손으로는 핸들을,
나중에 사서 붙인 기계팔로는 쌍검을 잡았으니,
그야말로 사이퍼펑크식 괴력몬의 등장이라.
저저, 불효막심한 새끼 보소?
진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어느새 바짝 따라붙은 상대가 칼을 마구 찔러대기 시작했다.
"뒤져!!"
뭐 하나만 걸려라는 식의 무차별적인 공격.
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이었으니, 한 손으로 하는 방어에 익숙지 않은 진의 허벅다리가 크게 베였다.
물감 번지듯 다리 전체로 퍼져가는 뜨거운 통증에 진이 이를 악물었다.
누구는 오른손 왼손 번갈아가며, 운전하랴 공격하랴 방어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저 새낀 아주 살판났다.
불합리한 상황에 자연스레 분노가 끓어오르니.
곧장 홀스터에 그라비스를 채운 진이 짓쳐드는 칼날을 고개만 젖혀 피하고는-
빈손으로 벼락같이 기계팔을 움켜잡았다.
"이, 이거 안 놔?!"
당황한 갱단원의 외침.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
"넌 나랑 같이 좀 달리자."
직후 만티코어가 굉음을 내질렀다.
부아아아앙!!
한순간 지면에서 사출되듯 가속한 바이크다.
그 급작스러운 속도 변화에 갱단원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어어? 으아아악!"
상상을 초월한 악력에 붙들려 공중으로 떠오른 몸이 이내 지면 위로 추락하니.
등 뒤로 들려오는 비명을 무시하며 진이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비명이 잦아들었을 때.
진의 손에는 어깻죽지에서 뜯겨나온 기계팔만 덜렁 들려있었다.
치직! 치지직!
스파크를 일으키는 굵은 전선 다발이 마치 사람의 혈관처럼 섬뜩했다.
물론 진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쓸만한 둔기가 하나 생겼을 뿐이니, 어느새 자신을 사방에서 에워싼 갱들을 향해 힘껏 휘둘렀을 뿐이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 미켈이 있었다.
"시발! 저 새끼 뭐야! 뭔데 쫓아오는 거냐고!"
시선을 뒷유리에 고정한 그가 운전자석 헤드레스트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더 밟아! 존나게 밟으라고!"
이미 한참 전부터 차선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살 떨리는 운전 중이던 부하 입장에선 욕이 턱밑까지 차오를 법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부하로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게.
그도 눈이 있는지라, 하나둘 죽어 나가는 동료들을 보니 절로 오금이 저리는 것이다.
해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의견을 내길.
"혀, 형님! 이거 맞습니까? 계속 접선지로 가는 게?"
"뭐?"
"이미 좆된 거 같은데. 지금이라도 저 새끼 따돌리고 어디든 숨으면 안 됩니까?"
순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눈만 끔뻑이던 미켈이 일갈했다.
"야이 새끼야! 일 다 벌려놓고 여기서 딴 길로 새자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려 5억이다.
그 정도면 새출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갱생하겠다는 게 아니라, 다른 40번대 구역에서 나만의 갱단을 꾸리겠다는 소리다.
앙리 그 미친 새끼 없이.
"이제 몇 분 안 남았어.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접선지다. 도착해서 거래 깔끔하게 마치고 우린 하이웨이 타고 바로 튀는 거야. 46번 구역이든 45번 구역이든 그냥 시발 가는 거라고.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잘 좀 하자. 좀."
그제야 고개를 끄떡이는 부하의 뺨을 뒤에서 가볍게 후려친 미켈이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뒤쫓아오던 추격자는 보이지 않았다.
부하들도 함께 사라진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솔로였나. 빌어먹을. 어쩌다 소문이 퍼진 거지?"
설마 다크웹에서 한 실수 때문에?
고작 10초도 안 돼서 툴을 가동했는데···
일이 안 풀리려니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준급의 해커한테 덜미를 잡힌 모양이었다.
미켈이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어느새 터널로 진입한 창밖을 바라봤다.
됐다. 여기만 빠져나가면 접선지다.
어떻게든 거기까지만 가면 된다. 어떻게든.
미켈이 그렇게 뇌까리며 스스로를 다독일 때였다.
띠링!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 형태의 무언가가 떠오르니.
누군가 화상전화기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앙리]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미켈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하지만 망설임도 잠시.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예 보스."
[보스? 그렇게 부를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무슨 말씀인지."
[시치미를 떼고 있어. 뒤지려고. 아니지. 어차피 죽을 텐데. 좀 뻔뻔해도 괜찮나?]
"예?"
[시발아. 다 알고 있다고. 니가 내 뒤통수친 거. 너랑 같이 출발한 새끼들 중 하나가 나한테 다 불었어. 뭐어? 새출발? 간부직을 줘? 병신 같은 게. 그게 될 거라 생각했냐?]
"······"
[하여간 사고 한 번 칠 거 같더라니.]
"···돌려."
미켈이 운전석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예. 형님? 뭐라고요?"
"차 돌리라고! 좆됐으니까!"
"여기 터널인데? 일단 나가서······"
그와 동시에 차량이 터널을 벗어나니.
[아무튼. 잘 가라. 배신자 새끼야.]
기다렸다는 듯 날아든 커다란 불꽃이 밴을 후려쳤다.
***
아씨. 놓쳤네.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죽기 살기로 덤벼든 마지막 4명의 합공이 제법 끈덕지더라.
이것들이 나중에는 만티코어를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이를 뿌리치는 과정에서 잘못된 길로 든 게 문제였다.
해서 거의 다 잡은 밴을 눈앞에서 놓쳐버렸으니.
영화에선 잘만 쫓던데 나는 안 되네.
상당히 민망한 상황에 진이 뒤통수를 긁적.
그래도 괜찮다.
우리에겐 위치 추적기가 있으니까.
그렇지 칼리파?
정작 당사자는 듣지도 못할 독백을 남긴 진이 핏물이 범벅이 된 기계팔을 휙 내던지고는 다시 속도를 높였다.
더는 방해꾼도 없겠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그다.
단말기가 안내하는 경로를 따라 차선을 이리저리 넘나들길 잠시.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을 끝으로 타깃에 접근을 완료한 진이 크게 반원을 그리며 속도를 줄였다.
그러고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배를 까고 뒤집어진 밴이 불길에 휩싸인 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불꽃에 주변이 주홍빛으로 환할 지경이었으니.
운전대를 꽉 움켜쥔 시체를 지나친 진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를 담았다.
"허억! 허억!"
뭔가를 품에 꼭 껴안은 모습. 그게 칼리파가 말한 아티팩트라는 건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진은 선뜻 행동에 나설 수 없었다.
쓰러진 남자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낯선 사내들 때문이었다.
그중 눈가에 깊은 흉터가 있는 자가 입을 열었다.
"안 판다고. 애초에 이건 내 물건이라니까?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그에 맞은편의 복면인이 답하길.
"곤란해. 나는 분명 구매자로서 여기에 나왔어. 내 시간을 헛되게 만들 셈인가?"
돌아가는 상황이 요상했던지라, 진이 조용히 헬멧을 벗어 손잡이에 살짝 걸어두자니.
세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을 향하더라.
"넌 또 뭐야?"
"넌 뭐지?"
"···저 씹···쌔."
순간 당황한 진이 아무말이나 내뱉었다.
"나···는 도둑일 걸?"
그리하여.
배신자, 배신자를 족치러 온 놈, 물건을 사러 온 놈.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서로를 마주 봤다.
< 23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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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화 >
진은 눈치가 빠른 편이다.
대한민국에서 30년 세월 살았던 짬 때문에 그렇다.
눈치 문화란 말이 나올 만큼 알잘딱에 예민한 국가 아니던가.
실례로 '함께 일하고 싶은 신입사원 유형'이라는 설문조사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정직한 사원은 선호도가 고작 25%로 꼴찌였던 반면, 눈치가 빠른 사원은 무려 67%의 선호도로 1위를 차지했더란다.
(참고로 2위는 인사를 잘하는 사원이었다)
이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부터가 센스 있으면서 예의도 바른 친구들이니, 남의 돈 벌기 참 어려운 나라라.
그 어려운 걸 대한민국 국민들은 해내야 한단 말입니다!
아무튼 진 역시 대한남아로서 그 뿌리가 어디 가진 않았으니, 비록 갖은 풍파에 예의 스탯은 상당히 깎여나갔을지언정 눈치 살피는 감각은 아직 쌩생했다.
해서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더란다.
저기 쓰러진 놈이 판매자.
복면 쓴 놈이 구매자.
여기까진 쉽고.
저기 눈에 쥐 파먹은 흉터가 있는 놈이 문젠데.
아티팩트가 제 것인 양 떠드는 모양새나, 판매자가 녀석을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보건대···아무래도 상급자인 모양.
그럼 답 나왔다.
물건을 빼돌렸구만?
마침내 아무것도 모르는 놈에서 상황 파악 끝낸 놈이 된 진이다.
그 와중에 뱉은 말이 있어서 오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지만.
"도둑이라고?"
앙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진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발을 추켜세우니.
"도둑은 이 새끼지. 그래? 안 그래?"
"끄으으-"
머리를 짓밟힌 미켈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케이스는 끝까지 놓질 않는 모습이 이것만큼은 사수하겠다는 집념이 고스란히 묻어나더라.
이윽고 그가 떠듬떠듬 대답했다.
"내가···찾은 거야. 씨이바알······"
"하!"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친 앙리다.
그것도 잠시.
그가 살벌한 눈빛으로 발에 힘을 실었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얼마 받기로 했냐? 대체 얼마길래 네까짓 게 내 뒤통수를 칠 생각을 다 했냐고."
여기서는 진도 숨을 죽였더란다.
칼리파가 감정가 뭐라 했던 게 떠올라서.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끈덕지게 버티는 미켈의 입만 뚫어져라 바라보니.
아씨. 좀 말해 봐!
진의 간절한 마음이 닿았을까.
끝내 고통을 견디지 못한 미켈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5억! 5억 크레딧!"
그 순간.
앙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고,
진은 우주적 공포를 목도한 사람처럼 비틀거렸으며,
복면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뭐?"
"시바알! 말했잖아! 5억이라고!"
"···사실이야?"
앙리가 복면인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앙리는 침묵을 곧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광소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하!"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크게 웃던 앙리가 어느 순간 뒤로 젖힌 고개를 끌어오며 말했다.
"미켈! 미켈! 미켈! 다시 봤어. 그래! 이 정도 깜냥은 돼야 스윗드림의 2인자지. 아하하! 5억이라니! 잘했어, 잘했어 미켈!"
직전까지 벌레처럼 찌그러뜨려 죽일 듯하던 배신자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은 그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복면인을 바라봤다.
"안 판다는 말 취소. 그래서 5억은? 내 돈 어딨어?"
···저 새끼가?
그게 왜 니 돈인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진이 있는 힘껏 눈을 부라리는 가운데.
드디어 복면인이 목소리를 냈다.
옅은 노이즈가 낀, 성별을 짐작하기 어렵게 변조된 목소리였다.
"물건 먼저."
"누가 당장 달래? 보기만 하자고."
그에 복면인이 관자놀이 부근에 손을 얹으니,
직후 찰칵 튀어나온 칩을 잡은 그가 말했다.
"블랙넷에서 5억을 인출 할 수 있는 크레딧칩이다. 못 믿겠다면 확인해도 좋아."
"···사양하지 않지."
앙리가 그렇게 말하며 크레딧칩을 빤히 바라봤다.
멀리서 칩을 스캔하는 모양이었는데,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 환희가 담겨있었다.
"아주 좋아."
그러고는 다시 한번 발을 쾅 내리찍으니-
이번에는 손을 짓밟힌 미켈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악!"
저항은 거기서 끝났다. 손뼈가 아작났는데 주먹을 쥘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시끄러우니까 저리 꺼져."
고통에 몸부림치는 미켈을 뻥 걷어찬 앙리가 바닥에 떨어진 케이스를 집으려는 순간.
그라비스가 불을 뿜었다.
타앙─!!
밤공기를 가른 탄환이 앙리의 팔뚝 아래를 터트렸고, 그와 동시에 표범처럼 몸을 날린 복면인이 바닥을 구르며 케이스를 낚아챘다.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한 분업.
하지만 아니다.
진은 복면인에게, 복면인은 진에게 놀랐으니 똑같은 타이밍에 행동에 나선 결과가 이런 식으로 맞물렸을 뿐이었다.
해서 앙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기던 진이 급히 총구 방향을 복면인 쪽으로 돌리는 그때.
"이 개새끼가아아아!!!"
느닷없이 불길에 휩싸인 앙리가 화염으로 대체된 팔을 크게 휘저으니-
그 궤적을 따라 분출된 불덩이들이 전방을 휩쓸었다.
복면인이 먼저였고 그다음이 진이었다.
콰콰광!
응축된 불꽃이 지면과 충돌하며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연기로 자욱해진 도로.
그 속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쾅!
다음 순간 연기를 뚫고 나타난 진의 주먹이 앙리의 복부를 후려쳤다.
물수제비를 뜨듯 노상 위를 두어 번 튕겨 나간 놈이 악을 내지르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드드드드득-
손끝으로 고랑을 파며 속도를 줄이는 데 성공한 앙리의 몸은 어느새 인간과 불꽃을 절반쯤 섞어놓은 듯한 융합체처럼 보였으니-
진이 보자마자 그 정체를 깨달았다.
파이로키네시스트.
불꽃을 다루는 사이킥 능력자.
짜증 나게 왜 멋지고 지랄이야.
진지하게 [사이킥] 퍽을 2번째 시작의 별로 선택할까 고민한 적이 있었던 진이 인상을 쓰는 가운데.
어느새 몸을 일으킨 앙리가 악을 썼다.
"감히이 내 팔으을···! 씨발! 으깨버리겠어!"
사이킥 능력 자체가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것인지, 놈의 몸을 뒤덮은 불길이 거세졌다.
그러고는 앞뒤 재지 않고 허공을 날아드니, 그 모습이 영화에서 보던 그대로라.
자신의 등 뒤로 폭발을 일으켜 가속한 화염인간이 진의 허리를 감싼 채 그대로 하늘 위로 허리를 꺾었다.
진은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려 했지만, 연이은 폭발로 추진력을 얻은 앙리의 돌진에 발이 바닥에서 들리고 말았으니-
그대로 하늘로 솟구친 몸이 허공에서 크게 반 바퀴를 도는 동안.
진은 살갗이 타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상대의 머리통을 팔꿈치로 연신 내리찍었다.
"이! 거! 안! 놓! 냐!"
하지만 화염인간의 골통이 쪼개지는 것보다 진의 시야가 완전히 뒤집히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머리를 향해 쏠리는 피.
하늘과 땅의 위치가 뒤바뀐 역천의 순간.
앙리가 다시 한번 가속했다.
콰앙!!!!
한데 뒤엉킨 붉고 푸른 빛이 지면에 충돌했다.
박살 난 콘크리트 파편이 비산하는 가운데.
폭발의 진원지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앙리가 켁켁 마른 숨을 토했다.
눈에 띄게 사그라든 불꽃.
그럼에도 그는 살아있었다.
충돌의 순간 진을 쿠션 역할로 써먹은 덕분에.
원래는 허공에서 떨어뜨릴 계획이었는데, 머리를 맞다 보니까 순간 판단력을 잃었다.
화염을 발산하는 동안 물리력에 대한 내성이 높아지는 파이로키네시스트의 특징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다.
"괴물 같은 새끼. 누군지는 몰라도 잘 뒤졌다···"
어깨를 부르르 떤 앙리가 길게 심호흡했다.
팔이 박살 난 바람에 너무 흥분했다.
힘을 과하게 몰아 썼더니 당장이라도 불길이 사그라들 지경이라.
들뜬 호흡을 천천히 가라앉힌 그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텁.
억센 손아귀가 뒷덜미를 움켜잡으니-
"켁!"
버둥거리는 앙리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들려오는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새끼야."
직후 앙리가 보고 느낀 것은 간단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바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지면.
콰앙!!
뒤통수가 아닌 안면으로 작렬한 초크슬램에 바닥이 쩍 갈라졌다.
대자로 뻗은 채 경련을 일으키던 몸뚱어리에서 불길이 사그라드니, 대체재가 사라진 오른 팔뚝 아래로 그제야 핏물이 콸콸콸 쏟아지더라.
"후우, 후우."
그 모습을 핏발 선 눈으로 지켜보던 진이 그제야 더운 숨결을 내뱉었다.
30m 높이에서 지면을 향해 로켓처럼 꼬라박힌 탓에 아직도 시야가 핑핑 돌았다. 등허리도 제대로 펴지지 않는 게 뼈마디가 아주 작살이 난 모양.
심지어 진은 몰랐지만, 뒤통수는 두피가 벗겨져 덜렁거릴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목불인견.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수준의 부상인지라.
앙리가 죽으면서 들어온 경험치, 즉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막대한 양의 도파민이 통증을 경감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대로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체감상 저번 카멜레온 수인의 2배는 되는 거 같은데.
···수치화하면 2,000XP 쯤 되려나?
진이 그리 생각하며 손바닥으로 무릎을 짚었다.
자연스레 기울어진 상체에 시선이 지면을 향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신발이 보이더라.
지칠 대로 지친 와중에도 고개를 든 진이 피식 웃었다.
"왜 안 튀었냐?"
그 시선 끝에 복면인이 있었다.
아니 복면과 그 위를 감싼 후드가 모두 타버렸으니, 복면인이란 감상은 옳지 않겠다.
검은 단발, 청백색의 차가운 눈동자.
전체적인 인상이 얼음장 같은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노이즈 없는 진짜 목소리로.
"없더라고."
"뭐?"
그녀는 대답 대신 품에서 꺼낸 케이스를 딸깍 열어젖혔다.
말마따나 정말로 아무것도 안 들어있더라.
순간 멍해진 진이 눈을 비비적거리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있다."
미켈이었다.
그는 앙리한테 걷어차여 날아간 그 위치 그대로 굼벵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에 눈길을 돌린 여인이 그에게로 걸음을 옮기니.
진이 비틀비틀 그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쟤까진 힘들 거 같은데. 어쩌지.
유독 가벼워 보이는 상대의 걸음걸이가 지금 몸상태론 영 견적이 나질 않았다.
해서 경험치도 충족했겠다.
미리 생각해 둔 퍽을 지금 찍어야 하는 걸까.
진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그때.
"거, 거래는 아직 안 끝났겠지?"
미켈이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물건 먼저."
먼젓번과 똑같은 대답.
미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지 품에서 반지를 꺼냈다.
그러고는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리니.
유려한 곡선, 그 위를 수놓은 꼬부랑글씨.
거기에 요사스러운 붉은빛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게 아티팩트?
뭔가 있어 보이긴 하네.
근데 좀 기분 나쁘지 않나?
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반지의 외형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꼼지락꼼지락.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가락, 발가락, 관절 여기저기를 움직여가며 망가진 몸이 적당하게 회복되길 기다렸다.
"···이럴까 봐 아까 미리 빼놨지. 내가 죽어라 케이스만 쥐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 안에 있을 거라 믿었지?"
킥킥 소리 내어 웃은 미켈이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3억만 받지. 그러니까 저기 피 칠갑한 새끼 죽여주고 당신은 물건 가져가. 난 그거면 되니까."
"······?"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등신은 애초에 튀려고 한 여자 앞에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자세히 보니 얼씨구?
눈도 흐리멍덩하게 풀려있는 데다, 온몸이 화상투성인 게 이쪽도 폭발에 휘말린 뒤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여인이 그 바람을 들어줄까 싶어서.
잘 펴지지도 않는 허리를 어떻게든 곧추세우는 진의 귓가로 차가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우리가 찾던 물건이 아니야. 특징은 완벽하게 잡아냈지만 흘러나오는 마나가 저열하네. 그래도 실제로 보기 전까진 깜빡 속았어. 아마도 그 시절의 모조품이겠지. 하아. 이래서 출동하기 싫다고 했던 건데."
옅은 한숨을 내쉰 여인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미련 없는 뒷모습에 미켈이 발광했다.
"야야! 어디 가! 이 씨발년아! 야!야!야! 너 때문에 내가 무슨 개고생을 했는데! 야! 이 ㅈ···"
쌍소리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거짓말처럼 툭 떨어지는 미켈의 이마에는 단검이 꽂혀 있었다.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하게.
진조차 지금의 몸상태론 도저히 피할 자신이 없는, 신기에 가까운 투척술.
해서 숨죽인 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자니,
뒤돌아 멀어지는 듯 하던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라.
"너. 솔로지?"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닌지, 진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반지는 네가 가져."
"그래도 돼?"
"대신 네 의뢰인에게 전해."
청백색 눈동자가 일순 차갑게 번뜩였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만, 계속 과욕을 부렸다간 시정부의 칼이 찾아갈 거라고."
< 24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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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화 >
시정부의 칼.
서릿발 같은 말을 남긴 채 고개를 돌린 여인이 걸음을 옮겼다.
묘하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은 걸음걸이가 소리도 없이 몇 걸음을 나아가고-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공터에 다다라 허공에 발을 턱 걸치니.
슈우우우웅-
중력을 거스르는 엔진음과 함께 터보 라이터를 100배 가까이 확대한 듯한 파란 불꽃 4개가 동시에 점화됐다.
직후 어둠 속에서 반투명한 파랑이 이니, 분명 아무것도 없었을 허공에서 날개 없는 헬기의 윤곽이 드러나더라.
지잉-
저절로 열리는 문에 탑승한 여인이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청백색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한 것 같았다.
이후 바람을 일으키며 떠오른 기체가 순식간에 밤하늘 너머로 사라지니.
그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던 진이 턱을 쩍 벌렸다.
"···미쳤다."
이렇게 코앞에서 항공 차량(AV)을 본 건 처음이다.
심지어 시동이 걸리기 전까진 거기 있는지조차 몰랐다.
이는 광학위장이라 정의되는 기술로,
진의 고향 땅에서는 미국이 개발했네 아니네 십수 년째 소문만 무성한, 현실적으로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정설인 오버 테크놀로지라.
그런 거 잘 모르는 진은 미네랄 150 가스 100 먹는 종이비행기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와. 클로킹 레이스.
순수하게 감탄한 것도 잠시.
긴장이 풀리자 억지로 버티던 몸에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저도 모르게 풀썩 주저앉은 진이 헉헉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낙하의 충격이 극심했던 모양.
사실 바닥에 부딪힌 직후의 기억이 아예 없긴 했다.
이번에도 재구축인지 뭔지가 된 걸까.
이 정도면 잠깐 죽었다 살아난 수준 같기도 하고.
식은땀 줄줄 빼며 회복하던 진이 문뜩 미켈을 돌아봤다.
"······"
초점 잃은 눈, 머리를 꿰뚫은 칼.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굳이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 그저 판매자라고만 기억될, 어쩌면 며칠만 지나도 잊힐지 모를 그 얼굴을 진은 한동안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고는 겨우 몸을 추스릴 정도가 되었을 때 죽은 이의 손에서 반지를 챙겼다.
***
다들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을 거다.
XX(이)가 너 벼르고 있대.
라는 말을 들어 봤거나, 혹은 전달했거나,
아니면 멀찍이 떨어져서 솔깃하게 귀를 기울였거나.
아무튼 뭐 그런 거.
대개 이러한 경험은 질풍노도의 학창 시절과 닿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XX(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듣는 사람 입장에선 걔가 왜 날···? 공포에 떨 수도, 시발 지가 뭐라도 돼?! 분기탱천하여 화를 씩씩. 이쪽에서 먼저 찾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칼리파의 경우는 둘 다 해당되지 않았다.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니-
재밌네, 라는 혼잣말이 담배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졌을 뿐.
그 무던한 반응에 중간에서 괜히 일름보가 된 기분이었던 진이 안심했다.
자신의 말 때문에 그녀가 크게 당황하거나 분노했다면, 이래저래 찝찝했을 마음이라 더더욱.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더라.
내가 링커를 잘 골라잡았구나.
"걔는 뭐였을까? AV 진짜 멋있던데."
"아마 시정부의 해결사였을 거야. 로스트 시티는 국유재산에 대한 기준이 제멋대로라, 회수가 필요하다 판단하면 직접 손을 쓰기도 하거든. 그렇다 해도 이상하긴 하네. 진품이었어도 시정부가 눈독 들일 만한 물건은 아니었을 텐데······"
말끝을 흐린 칼리파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그러고는 시선을 옆으로 던지며 묻길.
"포우. 실망했어?"
그에 한창 외눈 확대경으로 반지를 이리저리 살피던 바텐더가 렌즈 뚜껑을 딸깍 닫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가요. 진품이 아닌 건 아쉬운 일입니다만, 다행히 이 친구는 그 시절의 물건이 확실해서요. 그것만으로도 소소한 성과는 있습니다."
칼리파는 들었어?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으쓱거렸고, 이를 지켜보던 진은 쿠키를 집으며 말하니.
"빛과 장미의 시대라는 게 되게 가치 있는 시절인가 보네."
"오. 진."
순간 칼리파가 손으로 이마를 짚더라.
"설마 몰랐던 거야? 아니 모를 순 있지만. 그래도 넌···"
"난?"
"겉으로만 보면 순수주의자나 다름없잖아."
······? 그거랑 외모랑 뭔 상관?
이라 생각하던 진의 눈치 레이더가 불현듯 반짝.
순수주의자들이 무엇을 숭상하는 사람들인지 떠올라버린 것이다.
"아, 그럼 빛과 장미의 시대라는 게?"
"그래. 인류가 사이버스페이스란 대격변을 맞이하기 전의 시대야. 순수주의자들이 그리워 마지않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고."
"아티팩트는 그 시절에 소실된 보물들입니다. 가치는 천차만별이지만 아무리 하등품이라도 기본적으로 억 단위라는 건 변함없죠."
자연스럽게 끼어든 포우가 칼리파의 설명에 살을 보탰고, 그걸 또 칼리파가 이어받았다.
"해서 아티팩트를 전문적으로 찾는 트레져헌터도 적잖아. 실제로 현상이 붙은 물건도 많고. 일례로 마르지에 가문이 수백 년째 찾고 있는 '영원한 동녘'은 보상이 돈이 아니야. 차기 가주직이지."
그에 진의 동공이 살짝 커졌으니.
이제라도 솔로 때려치고 트레저헌터나 할까?
물론 생각에서만 그쳤다.
코찔찔이 유년기 시절부터 보물찾기엔 영 젬병이어서.
꼭 내가 뒤질 땐 없더니, 남이 뒤지면 거짓말처럼 손에 뭔가 잡혀 나오더라.
그러니 그냥 하던 거나 열심히 하자.
오늘도 반 푼 만큼의 지식? 상식? 아무튼 뭔가가 늘어난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쿠키를 해치울 때였다.
"그래서 거름망을 다 통과한 기분은 어때?"
이어진 칼리파의 질문에 진이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그냥 뭐. 그런갑다 하는 거지."
"하긴. 너한테는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닐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허리를 숙인 칼리파다.
이후 테이블에 수트 케이스처럼 생긴 검은색 가방을 올려놓은 그녀가 말했다.
"1,300만 크레딧이야 약속한 기본급에 조금 더 넣었어."
"300을? 모조품이잖아. 감정가라고 할 게 있나?"
"성의라고 생각해.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는 바람에 고생깨나 했잖아. 게다가 우리가 갑작스럽게 일을 맡긴 것도 사실이니까. 아무튼 의뢰···"
"잠깐!"
의뢰 완료란 말이 나오기 전에 황급히 손바닥을 든 진이 후우- 크게 심호흡했다.
"마음의 준비 좀."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포우와 눈을 맞추는 칼리파를 뒤로한 채.
진은 저 나름 진지했다.
이번 의뢰가 딱 세 개째다.
자연스럽게 퀘스트도 완료될 테니.
그 보상이 무려 10,000 XP.
도파민이 얼마나 터져 나올지 가늠이 안 간다.
해서 에넥도트에 오기 전에 화장실도 한 번 들렸다.
혹시라도 지리면 안 되니까.
"됐어. 아까 하려던 말 마저 해. 의뢰-?"
두 번 돌린 손바닥을 자신 쪽으로 내미는 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리파가 이내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완료. 의뢰 완료야."
동시에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이 (완료!)라고 빛나니-
[(알 수 없음)스토리가 해금됩니다.]
순간, 세상이 쪼개졌다.
*
뭐지?
흠칫 놀란 진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세상은 쪼개지고, 쪼개지고, 또 쪼개져.
마침내 탄생한 것은 격자무늬 우주라.
무수한 가로선과 세로선이 교차하는 혼돈.
그 중심이 우묵하게 꺼지며 진을 끌어당겼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인력 앞에 그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으므로.
그렇게
불가해한 난수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무한한 통로가 그를 반겼다.
처음에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진이었지만, 밑도 끝도 없이 어딘가로 떨어지는 상황이 이어지자 점차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해서 눈앞을 스치는 규칙석 없는 숫자의 물결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끝을 뻗는 그때.
저 멀리 좁쌀보다 작게 움튼 빛이 떨어지는 속도에 맞춰 그 크기를 불리기 시작하니.
어? 하는 순간 시야 전체를 뒤덮는 환한 빛 속으로 내던져진 진이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뺨에 닿았던 것 같았다.
*
"헉!"
몇 년은 참은 듯한 날숨을 뱉으며 진이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고는 눈 코 입 어깨 따위를 더듬거리는데, 그 꼴이 누가 봐도 악몽을 꾸다 막 깨어난 사람이라.
덩달아 놀란 칼리파가 소리쳤다..
"진-? 진! 왜 그래?"
"···어? 어어. 아니."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진이 눈동자를 좌우로 왔다 갔다.
아직 1개 덜 먹은 쿠키며, 반 정도 남은 우유며 모두 그대로라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건 뭐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해괴한 경험이 벌써 오래전 일처럼 어렴풋했다.
하여 몽롱한 기분도 떨칠 겸.
벅벅 마른세수를 하는 진에게 칼리파가 묻길.
"무슨 일 있어?"
"아냐. 그냥 좀 어지러워서."
"흠."
진의 대답이 영 탐탁잖은지 팔짱을 낀 칼리파가 말을 이었다.
"한 보름 정도만 푹 쉬는 거 어때?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해. 생각해 보면 크로우에 시정부의 요원까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이어 이러는 건 말이 안 돼. 어디 부정 탄 것도 아니고. 악운에 강한 것도 한두 번이지. 이러다 다음번에는···아니다. 말 안 할래. 아무튼 가서 좀 쉬어. 보름 채우기 전에는 찾아와도 일 안 줄 거니까 그런 줄 알고."
"점장님 말씀대로 하시죠. 진."
"아. 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 진이다.
그러다 보니 당장 돈가방 들고 나가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라.
그전에 미리 생각해둔 질문을 던졌다.
"뭐 하나만 물어보고 갈게. 제대로 된 신분을 만들려면 얼마가 필요해?"
언제까지 감당도 못할 현금에 부담감을 느끼며 살 순 없으니.
지금이라도 불법체류자 신세 탈피하고, 통장이라도 만들어보자 던진 물음에 포우가 답했다.
"위조 신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보통 3천만 크레딧 전후로 가격대가 형성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작업자를 연결해 드릴까요?"
***
정신없는 하루를 끝내고 모텔에 도착한 진이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징-하고 울리는 단말기를 바라보니,
문자 2개가 와 있더라.
하나는 포우가 보낸 작업자의 주소였고,
다른 하나는 제키가 보낸 것이었다.
[괜찮아?]
별일 아니었다고, 다음 주에 보자고 답장한 진이 팔을 툭 떨어뜨렸다.
피곤했지만 아직 잠들 수는 없었다.
별의 길을 2개는 밝힐 수 있는.
충만하디 충만한 경험치 때문에.
진이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내면으로 확장된 의식이 광활한 밤하늘을 마주했다.
"······"
움켜쥔 주먹 모양으로 환히 빛나는 별자리를 곁눈질한 진이 고개를 돌려 그보다 훨씬 거대한, 하지만 어두침침한 성좌의 윤곽을 바라봤다.
[마나]
진이 2번째로 선택한 별자리.
처음에는 지팡이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나무에 더 가까운 생김새다.
드높이 솟구치는 줄기를 따라 중간중간 갈라지는 가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어찌나 빽빽한지, 현실적으로 저걸 다 밝힐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
물론 진은 아직 선택지가 그렇게까지 많진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개성 가득한 가지로 쭉쭉 뻗어나가기 전 단단히 중심을 잡아줄 기둥부터 다져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하면 또 의문이 드는 게.
이러면 마나를 다루는 캐릭터가 너무 대기만성형 아닌가?
그렇다기엔 우리 공략글 작성자께선 가문이 초반부의 화력은 가장 우위라고 하셨더란다.
(부랑자는 가장 안정적, 기업은 가장 부유하다고)
그럼 뭔가 있다는 건데.
아오 머리 아파.
공략 좀 제대로 볼걸.
눈 감고 있는 진의 콧잔등이 꿈틀.
해서 아 몰라. 나는 내 할 거 한다.
곧장 별의 길을 쭉쭉 이어버리니.
[마나 회로(Lv2)]
마나의 총량과 출력을 상승시켜 주는, 누가 봐도 필수적인 패시브 먼저 찍어주고-
이어서 다음 별에도 경험치를 쏟아부었다.
그래, 이 녀석이 핵심이다.
갖고 싶은 초능력 순위에서 언제나 상위권에 랭크되는 텔레포트!
···에 비하면 조금 딸리지만, 그래도 누구나 탐낼 법한 바로 그 녀석.
[블링크]
진이 눈을 떴다.
< 25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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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화 >
배움이란, 끝없는 자기 정진의 과정이다.
지성체는 경험과 훈련을 통해 자각하고 인지하며 변화하는 동안 성장을 멈추지 않으니.
한낱 세포에 불과했던 인간이 어엿한 객체로서 자신을 규정하고, 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숭고한 의식인 것이다.
진은 그런 거 없다.
진이 별을 밝힌다는 건,
지난한 배움의 과정은 싹 건너뛰고,
정제된 지식이 머릿속에 다이렉트로 꽂힌단 뜻이니.
그야말로 실전압축형 지식 전수의 끝판왕이라.
난다 긴다 하는 1타 강사도 이런 건 꿈도 못 꾼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쪽이 죽어나간다는 것.
바로 지금처럼.
으악, 내 머리!
범람하는 낯선 지식에 진이 따흐흑 앓는 소리를 냈다.
신체에서 가장 연약한 부위를 누가 제멋대로 주물럭대는 기분이란.
뭐지? 왜지?
마나 폭주 때는 괜찮지 않았나?
진이 아픈 와중에도 억울해했다.
물론 이는 착각에 불과했으니.
당시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용솟음치는 아드레날린에 통증이 무뎌졌던 것도 있고, 마나 폭주의 자기파괴적 심상이 차츰차츰 고통을 집어삼킨 거라서.
사실 안 아팠던 게 아니라 아픈 줄 몰랐던 거다.
해서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 안심하던 진만 호되게 당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 고통은 그리 길진 않더라.
해봐야 20초 남짓?
하여 짧고 굵게 아팠던 진이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니.
아무튼 배웠다! 블링크!
이후 좁다란 모텔 방 여기저기를 번쩍번쩍.
머릿속에 각인된 정보가 현실에서도 바로 적용이 된다는 걸 확인한 진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젠 진짜 한계야.
정신적으로 녹초가 된 그가 씻지도 않고 눈을 감았다.
***
놀랍게도 다운 타운에도 시청은 있다.
버려진 40번대 구역에 어떻게 정부기관이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시정부의 후속적인 조치로서, 자생을 거듭해 이제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성장한 몇몇 구역(모든 40번대 구역이 해당하진 않는다)를 관할하고자 뒤늦게 설립된 것이었다.
당연히 평가는 안팎으로 바닥을 쳤다.
공무원들 입장에선 죽어도 가고 싶지 않은 한직 중의 한직이며,
구역 주민들 입장에선 느지막이 밥그릇에 손을 뻗는 모양새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조직 전체에 무관심과 부패가 공기처럼 퍼져 있으니, 형식적으로나 정부 기관이지 사실상 또 하나의 거대한 갱단이나 다름없어서.
작업자는 이 부분을 공략하는 거라고 일렀다.
"이 바닥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거든."
그렇게 킬킬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남자 앞에는 첩보물에서나 볼 법한 어지러운 화면이 시시각각 새로운 글줄을 써 내려가는 중이었다.
진이 가만히 들여다보니 실종자 명단이더라.
뭐가 이렇게 많아?
누가 다운타운 아니랄까 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대부분은 죽었을 거라 추측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남자, 20대, 실종 3년 이상, 범죄에 가담한 적 없는 깨끗한 놈으로다가···"
작업자가 혼자 중얼거리며 필터를 하나하나 추가하는 모습이 마치 온라인 매장에서 옷을 살 적에 사이즈, 컬러, 가격 등을 미리 입력하는 느낌이라 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뭐. 얼추 비슷한 신상명세는 널렸네. 그럼 이걸로 하자고."
직후 남자가 누군가의 이름을 클릭하자 새로운 팝업창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얼굴.
한쪽 눈이 기계식 의안이라는 것만 빼면 전체적으로 살집이 많은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키보드가 몇 번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니.
어느새 그 자리엔 적당히 잘생긴 남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더라.
진이 뺨을 긁적였다.
이래서 오자마자 사진부터 찍은 거구만?
이럴 줄 알았으면 미용실이라도 한 번 들릴걸.
그때 작업자가 말했다.
"이름 바꿔줘? 그대로 하면 호세 마르티네즈야."
"어우. 그게 무슨. 진, 진으로 해줘."
"···진이라. 그럼 성은 어떻게 할래. 딱히 생각해둔 게 없으면 랜덤으로 돌린다?"
"뭐 그래라."
진이면 충분했던 진이 고개를 끄덕이자니.
금세 작업을 마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좋아. 넌 지금부터 진 에버나이트야. 뭔가 존나 멋진 거 같기도 하고······무튼 카드로 할래, 현금으로 할래."
마침내 오고야 만 결제의 순간에 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현금."
"그래. 3,500만 크레딧이다."
"뭣?! 3,000만 아니었어?"
"그랬지. 시청 쪽에서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에 접근 가능한 메인넷 사용료를 올리기 전까지는 말이야. 나도 하청이거든. 별수 없어."
그에 진의 낯빛이 시커멓게 죽었다.
3,000만 크레딧이라는 것도 마음의 준비를 한참이나 해야 했는데, 거기서 500을 더 달라니.
시정부 개새끼들아! 불법체류자도 좀 살자!
속으로 포효한 진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품에 손을 찔러넣었다.
거기서 지폐다발 다섯 뭉치를 꺼내, 미리 액수를 맞춘 돈가방 위에 얹으니-
건네는 손이 파들파들. 간질 환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라.
"···거 받는 사람 미안하게."
작업자가 말만 그렇게 하며 돈을 챙겼더란다.
짧은 인사를 남기며.
"잘 가라. 진."
***
[진 에버나이트 / M4100227-AREA 47]
"······"
진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에 쥔 신분증을 가만히 내려봤다.
이 조그만 걸 가지자고 쓴 돈이 무려 3,500이었다.
가진 돈 대부분을 거의 탈탈 털어 넣었으니,
이래서 네모반듯한 것들은 안 돼.
괜히 상태창까지 싸잡아 욕한 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수중에 남은 돈은 2백만 언저리.
여태 헬멧 사고, 기름 넣고, 탄창 보충하고, 숙식 해결하느라 쓴 거 빼면 딱 저만큼 남아있더라.
분명 적은 건 아닌데, 앞으로는 지퍼를 열면 언제나처럼 반겨주던 그윽한 돈냄새를 못 맡는다는 사실은 조금 우울하긴 했다.
이래서 사람은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른다고.
위대하신 돈님을 잠시나마 혹덩이라 생각한 자신을 나무란 진이 촉촉한 눈으로 신분증을 바라봤다.
그래도 막 슬프지만은 않았다.
드디어, 마침내, 기어이, 끝내.
위조긴 해도 신분이라는 게 생겼으니까.
그래서일까.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이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진은 생각했다.
그게 비록 빌어먹을 다운 타운이라 할지라도.
그때였다.
"···왕꼬추? 왕꼬추 맞지?"
누군가의 목소리에 진이 눈썹을 꿈틀.
진이라는 좋은 이름 놔두고 어떤 새끼가?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들자, 누군가 태양을 등진 채 서 있더라.
꾀죄죄한 얼굴에 아무거나 막 주워 입었을 게 분명한 파멸적인 패션을 자랑하는 남자.
진을 담은 눈동자에 확신이 서렸다.
"너 맞구나? 나야. 제프. 혹시 누군지 모르겠어?"
곧장 자세를 낮추며 같은 눈높이에서 밝게 인사를 건네는데 진으로선 글쎄. 누군지 잘···.
구취 때문에 당황스럽기만 하달까.
"우리가 아는 사이라고?"
"그럼. 내가 너한테 밥도 몇 번 나눠주고 그랬는데. 양은 별로 안 됐지만. 아무튼 맞지? 밤마다 울었잖아. 너."
갑자기 치부를 훅 찌르고 들어오는 게.
그제야 기억이 날 듯 말 듯.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했던 기간을 떠올린 진이다.
제프라.
아무래도 노숙자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인 모양이었는데, 여전히 아리송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허기와 저체온증에 시달리던 다운타운 1, 2개월 차의 진은 반쯤은 짐승이었기에.
"······"
괜히 울적해진 진이 무릎에 손을 대고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친했어?"
"어. 그게···네가 말이 잘 안 통했다 보니까. 뭐 그냥 그랬지? 나도 그땐 추워서 제정신이 아니기도 했고."
뒤따라 일어선 제프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길래 죽었나 했더니. 못 본 새 엄청 멋있어졌네. 솔직히 긴가민가했어. 그땐 이렇게 생겼는지 몰랐거든. 새끼···위아래로 다 가졌네. 아무튼 다시 봐서 반가웠다?"
악수를 하려고 했을까. 팔을 뻗던 그는 순간 자신과 달리 멀끔한 진의 손을 보더니 뻘쭘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었다.
"큼큼. 그럼 간다. 잘 지내라."
"잠깐만."
돌아서는 제프를 불러세운 진이다.
"럼펌펌펌이라도 갈래? 내가 밥 한 끼 살게."
"······?"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이던 제프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 잘 먹고 다녀."
"아니. 괜히 거절하지 말고. 가자니까?"
"아니. 진짜 괜찮대도."
배 곯던 시절 생각해 다시 한 번 권했지만 돌아오는 건 거절이라.
때아닌 실랑이가 이어졌다.
가자고.
안 간다고.
에헤이 가재도?
아잇 안 간다고!
따위의 얘기가 이어지던 도중 마침내 제프가 꽥 소리쳤다.
"럼펌펌펌 맛 없다고!"
"아?"
너무 뜻밖의 이유라 진이 눈을 끔뻑거리자니,
제프가 손을 휘휘 털었다.
"거긴 너무 맵고, 짜고, 시고, 달고 중간이 없잖냐. 싫어 안 가."
"거지가 밥투정?"
"그리고 니가 뭘 사줄 필요가 없는 게, 나 요즘 더 괜찮은 곳에서 잘 먹고 다녀."
그에 진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묻길.
"너가?"
"그렇대도. 말해줘?"
"해 봐."
진이 까딱 턱짓하자 제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쩌어기. 노스 다운타운에 순수주의자 몇 명이 교회를 열었어. 알아 교회라니. 그네들이나 생각할 발상이지. 아무튼 무슨 신을 믿는다는데 알 바야? 중요한 건 거기서 무료 배식을 해준다는 거지."
대충 기도하는 시늉만 하면 밥을 준다고! 글쎄.
이어지는 말에 진이 고개를 갸웃.
다운타운에서? 무슨 그런 호구들이?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마음을 함부로 폄하할 수 없는 노릇이라.
그리고 순수주의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대중적인 판타지 세계관에 기저를 둔 사람들이라면, 아무래도 이쪽이 인류애가 있어도 더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드는 와중에.
"정 못 믿겠으면 같이 한 끼 하러 가던가."
이어진 제프의 말에 진이 고민했다.
한 번 가볼까?
순수주의자, 순수주의자 말만 많이 들어봤지.
실제로 부딪혀본 적은 한 번도 없잖아.
이 참에 정보도 한 번 얻어보자.
여차하면 새로 배운 블링크 써먹는 거지. 뭐.
해서 진이 묻길.
"밥 많이 줘?"
"많이 주고 맛도 좋아."
"···가자."
이후 만티코어는 모텔 주차장에 놔두고, 제프를 따라 노스 다운타운으로 출발한 진이다.
도착해 보니 정말 교회가 있더라.
내부도 진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퓨(Pew)라는 번듯한 이름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교회 혹은 음악실 의자라 부르는 벤치가 좌우로 늘어선 기도실 끝에는 넓은 단상이 있었으니.
고향 땅이라면 십자가가 매달려 있어야 할 그곳에 물 항아리를 팔로 감싼 여인의 조각상이 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
사제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 왈.
자비의 여신 네페트라라고 하더라.
"환영합니다. 형제여. 어머니의 품이 당신을 감싸길."
처음에는 흥미롭게 경청하던 진이 슬슬 고파지는 배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진짜 밥 주나요."
"물론입니다. 따라오시죠."
사제를 따라 내려간 지하에서 진은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허름한 차림새인 게, 1년 전 진들이 한 무더기로 앉아 있더라.
"넉넉하게 드시고 기도실로 올라오시지요. 어머니의 자비를 함께 나눕시다."
정신을 차려보니 앞접시 하나 들고, 긴 배식 줄을 횡단하게 된 진이다.
심지어 자율 배식이더라.
할렐루야!
이거 아닌가. 아무튼.
"내가 뭐랬냐. 끝내주지?"
옆에서 팔꿈치를 꾹 찌르는 제프의 말에 4겹으로 겹친 피자를 한입에 씹은 진이 우물우물 부푼 볼로 말했다.
"이러면 얘넨 뭐가 남아?"
"듣기로는 신도 중에 돈 많은 놈들이 있나 보더라. 그리고 이 음식들 전부 다운타운이 아니라 다른 구역에서 들여오는 거래."
"미쳤다. 럼펌펌펌이 이거 반만 됐어도 좋았을 텐데."
해서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올 때까지 식사를 한 진이 신앙심 충만하게 1층으로 올라가니.
뭐시라 뭐시라 설교도 들어주고, 나름 기도도 하고,
내일 봅시다 신나게 헤어졌다더라.
다운타운에도 희망은 있었어!
잔뜩 들뜬 진이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교회를 찾았다.
「(돌발!)공짜는 없다」─────────
공장을 탈출하십시오.
*보상 퍽 XP 5,000
──────────────────
그리고 당했다.
납치.
< 26화 > 끝
ⓒ 오동냐무
=======================================
< 27화 >
진은 3가지에 약하다.
우선 배고픔이요,
둘째는 돈이니.
마지막이 정이다.
그중에 순위를 매기자면, 배고픔은 일단 논외고.
그래도 정이 돈보단 반걸음 정도 앞선다고 할 수 있겠다.
해서 약점 1, 2위가 배고픔과 정이라는 건데.
이 부분을 교회가 스며들듯 공략해 버린 것이다.
가면 밥도 주고(중요), 따듯한 말도 해준다.
이미 여기서 심신이 풍족한 게 일찍이 다운타운에서 느끼지 못한 감정이라.
심지어 한 끼 무료로 해결하니 돈도 아낄 수 있네?
진이 어울리지도 않는 교회에 연이어 참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네페트라? 넷플릭스?
이름도 헷갈리는 여신은 솔직히 별 관심 없다.
그녀가 빛과 장미의 시대. 찬란했던 옛 시절을 대표하는 12신 중 하나라는 것과 자비를 상징한다는 것만 가볍게 이해하고 넘겼을 뿐.
그도 그럴 게.
사제가 침 튀겨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자비의 교리라는 건, 작금의 시대상과는 너무 괴리가 큰 것이라.
진이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려 한들 동조할래야 동조하기가 힘들다 보니 한 귀로 흘려들은 것도 있었더란다.
해서 진에게 자비의 교회란, 일말의 믿음도 없이 그저 맛있는 거 먹고 사람들이랑 좀 부대끼는 친목의 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눈 떠보니 어두컴컴한 지하실이라는 건 좀 충격이긴 했다.
"···뭐야."
만세는 왜 하고 있나 싶어서 고개를 드니, 천장을 향해 올라간 양팔이 손목 부근에서 쇠사슬로 묶여있더라.
고매하신 자비의 여신께선 속박 플레이를 즐기시는 걸까.
죄송한데 저는 그런 취향이 아닌데요.
숨 쉬듯 신성모독을 갈긴 진이 사태 파악에 나섰다.
보자. 그러니까 이른 저녁쯤 교회를 방문했고-
평소처럼 든든하게 배부터 채운 뒤, 기도실 맨 뒷줄에서 남들 등 뒤에 숨어 지루한 설교를 듣고 있자니.
오늘따라 잠이 솔솔. 눈꺼풀이 나른한 게.
감자튀김을 너무 많이 먹었나?
그렇다기엔 평소 열정적으로 설교에 임하던 신도들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꼴이 단체로 꿈나라에 초대라도 받은 모양새라.
밥에 수면제라도 탄 건가.
생각했던 것이 마지막.
눈 떠보니 지금이었다.
"어이가 없네."
진이 헛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정말로 무슨 짓을 하긴 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으니까.
동시에 네 생각이 맞아, 라고 말하듯 떠오르는 네모반듯한 창.
「(돌발!)공짜는 없다」─────────
공장을 탈출하십시오.
*보상 퍽 XP 5,000
──────────────────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갑지 않은 낯짝이 불쾌한 와중에, 이 새끼가 오늘은 팩트폭행까지 하네?
처음에는 도끼눈으로 상태창을 노려보던 진이었지만, 이윽고 천천히 눈매가 가라앉았다.
"···그래. 공짜는 없지."
알고 있다.
그런 건 없다는 거.
속아주더라도 한 번쯤 믿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해서 배신감보단 허탈감이 훨씬 더 컸다.
역시는 역시 역시구나.
"개같은 세상."
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쓱 둘러봤다.
요 며칠 알고 지낸 노숙자들이 정육점의 고기들처럼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가운데, 형형색색 괴상한 누더기를 껴입은 제프의 얼굴도 보이더라.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그는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음. 쟤도 잡혔군. 다행이다.
설마하니 제프가 처음부터 자신을 꾀어낼 목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닐까. 잠시나마 의심했던 진이 한 줌 남은 인류애를 지킬 수 있음에 안도할 때였다.
"어이."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니-
진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래. 이쪽."
대각선으로 10m쯤 떨어진 거리.
한 중년인이 몸을 살짝 흔들어 자기 존재를 피력했다.
뼈대는 조금 있는 듯하나, 그럼에도 깡말라 볼품없는 몸에 땟국이 흐르는 후줄근한 옷.
이쪽도 영락없는 노숙자 몰골이긴 한데, 어째 영 낯이 안 익었다.
교회가 아닌가?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누구?"
"나? 네 선배."
"······? 뭔 소리래."
"너희보다 내가 먼저 잡혀 왔거든. 그럼 선배지."
음?
눈을 가늘게 뜬 진이 고개를 갸웃.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건 알지만,
잡혀 온 마당에 선후배 타령하는 게, 이건 뭐 똥물에서 위아래 찾는 것도 아니고.
저 양반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도리어 유쾌해져버린 진이 피식 웃었다.
"그럼 생색만 내지 말고 선배로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해봐요.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그에 눈을 끔뻑거리던 중년인이 답하길.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아니 선배라매."
"선배는 맞지. 한 1시간 정도···?"
에이씨. 내 이럴 줄 알았지.
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척 봐도 나사 빠진 인간한테 뭘 기대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문뜩 억울한 게.
보통 이런 상황에선, 초췌한 몰골로 여기는 어디고 어떤 어떤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네- 라고 말한 뒤 꾀꼬닥 숨넘어가는 인물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한 번쯤은 편의적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럼 내가 그 시체를 품에 안고 반드시 복수해 줄게!
어? 그러면 안 되는 거냐고.
속으로 구시렁거린 것도 잠시.
어쩔 수 없이 자기 쪽에서 뭔가를 알아내 보자 결심한 진이다.
"저기, 아저씨, 아저씨? 선배-?"
"어? 왜."
"댁도 공짜밥 얻어먹다가 끌려왔어요?"
"나? 나는 그냥 자다가 눈떠보니 여기던데."
어쩐지 모르는 얼굴이라고 했지.
납치하는 수법이 마냥 똑같진 않은 모양.
고개를 끄덕인 진이 다시 물었다.
"다운타운 주민은 맞으시고?"
"···다운타운? 거긴 47번 구역 아닌가? 나는 43번 구역에서 왔는데. 레지타운이라고."
잠시만. 이건 좀 변순데.
다른 구획 사람이었어?
전국구 납치범. 뭐 그런 건가?
진이 긴가민가하는 사이, 중년인이 소변이 마렵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생리현상이라. 긴장하면 별수 없긴 하다.
하여 진이 그냥 조금씩 싸서 말려 보라고 제안하려는 순간.
그의 감각에 무언가가 포착됐으니-
"쉿!"
날카로운 입소리로 경고를 한 진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저벅.
언젠지도 모르게 가까워진 발소리.
닫힌 철문 너머로 인기척이 다다랐다. 직후 무언가를 풀어내는 차가운 마찰음이 촤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지니, 곧이어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세 사람이 들어왔다.
모두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이가 긴 로브를 입었는데, 후드까지 푹 뒤집어쓴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시대를 역행한 복장.
실눈을 뜬 진에게는 중세시대 수도사를 흉내 낸 코스어 정도로 보였으니.
이내 놈들 사이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몇 명이지."
"서른둘입니다."
"···서른둘이라. 넉넉하진 않군."
"죄송합니다. 당장은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한 놈이 질문하면, 다른 두 놈이 번갈아 가며 대답하는 식이었는데.
그중 죄송하다 사과하는 목소리가 귀에 익더라.
어머니의 품이 당신을 감싸길.
푸근하게 미소 짓는 사제의 얼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미간을 꿈틀거린 진이지만, 이를 눈치채지 못한 놈들은 이 순간도 조금씩 그에게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거래까지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조금의 부족함도 있어선 안 돼. 서둘러라."
"예."
코앞에서 들려온 대답.
다음 순간 진이 눈을 번쩍 떴다.
후웅!
미친 허릿심이 허공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가운데, 폭발적으로 솟구친 두 다리가 가장 뒤에서 걸어오던 수도의 목을 뱀처럼 휘감았다.
"······!"
번개같은 속도.
이 정도면 낚아챘다고 보는 게 가깝다.
꾸구국!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강제로 까치발을 들고-
호흡을 갈구하는 손이 목을 감싼 허벅지를 뜯어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모두 덧없는 저항일 뿐이다.
뿌드-
뿌드드득-
교차하는 허벅지 사이로 끊어지는 숨을 느끼며 진이 다리에서 힘을 푼 순간.
촤르륵 흔들리는 쇠사슬 소리에 앞장서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어, 어떻게!"
"···치밀한 어둠의 종이여-!"
우리 사제님은 당황했고,
그 뒤에 있던 상급자는 곧장 주문을 외더라.
괜히 짬대우 받는 게 아니라 이거지?!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결박된 양팔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콰앙!!
말뚝째로 천장에서 뜯겨 나오는 쇠사슬. 그와 동시에 진이 정신을 집중했다.
목표로 삼은 지점을 향해 마나라는 통행세를 지불한 의식이 어딘가로 쭉 빨려 들어가니-
다음 순간, 전환되는 시야와 함께 진의 몸이 주문을 외는 수도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지면을 향해 팔을 내리치는 모습 그대로.
퍼어어억!!
채찍처럼 휘둘러진 사슬이 상대의 머리통을 휩쓸었다.
비록 음속을 돌파하진 못했지만, 그 안에 실린 파괴력은 인간의 두개골을 두부처럼 으깨버리기 충분하다.
비틀···쿵!
그대로 쓰러진 수도사가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자 놈의 발밑에서 부글부글 끓던 빨간 웅덩이도 거짓말처럼 잠잠해지며 원래의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으로 돌아오더라.
저게 뭐였을지 딱히 알고 싶지 않았던 진이 곧바로 마나를 일으켜 손목을 감싼 사슬을 이리저리 풀어내고 보니.
이제 남은 건 우리 사제님뿐이라.
본인을 사이에 끼고 앞뒤로 생겨난 시체에 몸을 움찔.
후드 아래로 드러난 하관이 뒤늦게 뭐라 입술을 떼려는 그때.
진이 사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블링크를 쓸 필요도 없다.
코앞에 있는 놈한테 무슨.
"아악!"
그대로 주저앉는 놈의 뒷머리를 후드째로 움켜잡으며 반대쪽 손바닥으로 얼굴을 쩌억!
초인적인 힘으로 내리친 손바닥이다.
평범한 이에겐 여래신장이나 다름없는 일격.
아니나 다를까.
안면이 통째로 내려앉으며, 핏물과 싯누런 이빨들이 후두두둑 쏟아지니.
"어어. 사제님 정신, 정신 차려요."
진이 짐짓 놀란 목소리로 다시 손바닥을 내리쳤다.
쩌억!
이열치열이라고.
손바닥 맞고 휘발된 정신을, 다시 손바닥 맞고 되찾은 사제가 핏물을 껄떡껄떡 토했다.
"···커, 커헉."
"아 깼네."
"너···너어···"
"너라니. 형제님, 형제님. 웃으며 부를 땐 언제고. 사람 섭섭하게."
진이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자연스레 상대와 눈높이를 맞춘 그가 여전히 꽉 틀어쥔 뒤통수를 뒤로 젖히며 물었다.
"여기 어디예요?"
별다른 동요가 느껴지지 않는 평이한 물음.
하지만 사제의 눈에는 공포가 서렸다.
매일 실실 웃으며 밥만 축내던,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 그대로라서 더 두려운 것이다.
"아 존대가 입에 붙어가지고···"
그사이 혼자 쯧-하고 혀를 찬 진이 이번에는 질문을 바꿨다.
"됐고. 사람 납치해다가 공장에서 뭐 하는 건데?"
"공장···인 걸 어떻게···"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도 의문을 떨치지 못한 사제의 귓가에 똑같은 질문이 틀어박혔다.
"여기 뭐 하는 곳이냐고."
"···변이, 변이체······"
반쯤 놓아버린 정신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가짜 사제가 축 늘어졌다. 이미 첫 번째 일격에 안면 전체가 곤죽이 된바. 지금까지 버틴 게 용했다.
그제야 손아귀에서 힘을 푼 진이 몸을 일으켰다.
"······"
중년인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든 말든.
품속을 탁탁 더듬은 손을 이번에는 허리춤으로 뻗은 그가 휑하게 허공을 스치는 손에 콧잔등을 구겼다.
"···아씨."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시야의 한구석에서 떠오르는 상태창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뭘 계속 탈출하래. 그라비스도 찾고, 돈도 찾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러고는 뚝뚝 소리가 나게 목을 꺾으니.
"난 여기 뒤집어엎어야겠으니까. 보상을 더 올리던지. 아니면 꺼져 좀."
진의 눈에 은은한 똘기가 번들거렸다.
< 27화 > 끝
ⓒ 오동냐무
=======================================
< 28화 >
존 윅이라고.
진이 참 좋아했던 영화가 있다.
전직 킬러인 주인공이 반려견의 복수를 하는 내용인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100분짜리 러닝타임 내내 사람만 죽인다.
찔러 죽이고, 쏴 죽이고, 때려죽이고.
그렇게 주인공 손에 황천길 가신 분들만 83명이라나 뭐라나.
해서 거의 분당 한 명꼴로 죽어 나가는 적들이 뱉는 단골 유언이 있었으니-
바로 "그깟 개새끼가 뭐라고!" 가 되시겠다.
하지만 이는 반려견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무지몽매한 발언이다.
주인공에게 있어 그 조그마한 강아지는 죽은 아내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으니까.
즉 남들 눈에는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당사자에겐 더없이 소중한 보물일 수 있단 소리다.
그리고 지금.
진은 존 선생의 분노를 십분 이해하는 중이었다.
내 돈!
내 총!
진에게는 그것들이 반려견이고 애인이다.
피땀 흘려서 번 돈.
그 돈으로 산 생애 첫 무기.
단순히 액면가로 정의할 수 없는.
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물건을 건드려?
사람 좋은 척, 자비 운운하더니 뒤통수 갈긴 정도로는 부족했다 이거지?
"···다 뒤졌어."
진이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며 한 걸음을 쿵 내디딜 때였다.
"그냥 가려고?"
뒤통수에 닿는 목소리에 아차차.
"아 맞다."
급히 몸을 돌린 진이 자신을 지켜보는 중년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쇠사슬 잡고, 힘껏 쭉 당기니-
뚜두둑---쾅!
엄청난 장력을 견디지 못한 쇠사슬이 말뚝째 천장에서 뜯겨 나오더라.
자연스레 바닥에 발이 닿은 중년인이 한결 느슨해진 손목을 비비적거리며 사슬을 풀어내는 가운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합시다."
"뭘?"
"여기 있는 사람들 좀 챙겨줘요."
진이 턱으로 인간 정육점을 가리켰다.
"나중에 정신 차리면 얼마나 놀라겠어. 그러니 댁이, 아니 선배가 응? 선배면 선배답게 상황 설명 잘 해주고 안심도 시켜주고. 이해했어요?"
"뭐라고 설명하고 안심시켜주랴?"
"납치당한 거 맞다. 근데 걱정할 필요 없다. 왜냐? 미래의 솔로왕이 해결하러 갔으니까. 정도로 가죠?"
말하고서도 눈앞의 중년인이 영 미덥잖았던 진은 이후로도 두 번 세 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확인까지 받고서야 다시 몸을 돌렸다.
아 흐름 끊겼다.
이게 원래 딱 화났을 때 쭉 이어가야 하는 건데.
해서 다시 집중.
···내 총아, 너를 처음 사던 날, 온 다운타운이 네 이름을 속삭였단다.
그라비스.
음. 이 정도면 됐다.
자연스럽게 분노 일발 장전한 진이 바닥에 떨어진 쇠사슬을 주워 양 팔뚝에 휘휘 감고는 곧바로 열린 문밖을 나서니.
"······"
그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중년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
진은 천성이 사이코가 못 된다.
또라이 같은 세상에 떨어졌지만, 자신이 생각한 기준, 그러니까 인간으로서의 마지노선은 한 번도 넘어본 적이 없다는 소리다.
예컨대 살인.
이제는 하루에 몇 번을 저질러도 아무 감흥이 없을 만큼 익숙해진 행위라 하나, 그럼에도 진은 이를 자신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
자신의 손길이 닿은 죽음은 곧 일용할 경험치가 된다는 걸.
하지만 이를 아는 것과 이용하는 건 천지차이라서.
흐음-, 새로운 별 밝히긴 XP가 살짝 모자라니까,
어디 갱단 10명 정도만 죽여버리면 되겠다.
이런 마인드는 정신병 걸리기 딱 좋다.
안 그래도 불안불안한 진의 멘탈이 견딜 수가 없는 형태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고,
예외의 순간도 있긴 하다.
바로 상대가 명백한 악인일 때.
이건 뭐 사람 거죽을 뒤집어쓴 짐승, 아니 그 이하의 무언가다?
그럼 경험치 취급해도 정신적으로 아무런 타격이 없다.
오히려 이쪽에서 환영이다.
세상에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들을 수거하고,
경험치까지 챙기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 마당 쓸고 동전 줍는 격이라.
이번 경우가 딱 그랬다.
공장을 탐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이 발견한 것은,
기괴한 액체가 부글부글 끓는 거대한 시험관과 가죽 벗겨진 시체 아래서 뭐라 뭐라 염불을 외는 수도사들이었으니까.
그 수가 얼핏 봐도 열 이상.
시체는 족히 그 배는 됐으니.
이제는 고인이 된 사제님의 유언을 빌리자면,
변이첸지 뭔지를 만드는 중인 건 확실한데.
온갖 더러운 꼴 다 본 진조차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그 참혹함이 글줄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저게 무슨?
밥맛 떨어지게.
여기서 맹점은 저놈들이 왜 저러고 있는지는 진에게 딱히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그저 쳐 죽일 이유가 하나 더 늘었을 뿐.
그것도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을 방향으로.
붕붕-
팔뚝을 휘감고도 길이가 남아 바닥까지 닿는 쇠사슬을 양손으로 각각 세차게 돌린다.
몸 주변에서 위협적인 풍압이 일어나는 가운데.
진의 눈이 아직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수도사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러고는 가장 적절한 위치를 찾아 정신을 집중하니-
휘발되듯 사라지는 마나. 요동치는 시야. 블링크.
동시에 머리통 4개가 무른 토마토처럼 터져 나갔다.
퍼버버벅!!
비명은 없었다.
애초에 자기네들이 뭐에 당했는지도 몰랐을 테니까.
"무슨!"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시체의 코에 무언가를 주입하던 놈이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놀란 눈에 핏물을 흩뿌리며 쓰러지는 동료들의 모습이 담긴 순간.
진은 놈의 뒤에 있었다.
촤르륵!
카우보이가 날뛰는 짐승에게 올가미를 던지듯, 절륜한 손목 컨트롤로 상대의 목에 쇠사슬을 휘감은 진이 무방비하게 노출된 오금을 발로 걷어찼다.
이어 주저앉는 놈의 허리를 발바닥으로 받치며 양팔을 힘껏 끌어당기니-
문자 그대로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가, 끝내 반으로 접힌 수도사의 뒤통수가 뒤꿈치와 상봉했더란다.
그 과정에서 뿌드드드득-, 추간판이 단체로 탈출하는 소리는 덤이다.
"침입자다!"
"시정부의 개인가?!"
"막아! 당장 막아!"
마침내 적들도 진을 인지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하관이 각기 다른 감탄사를 꽥 지르더니, 즉각적인 반격에 나섰다.
주문을 외고, 팔뚝을 칼로 부욱 그어 피를 내고,
누구는 총을 뽑는데···
그라비스! 아니 얘야! 네가 왜 거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진 않겠지만.
아무튼 자신의 애병이 남의 손에 들려있는 걸 확인한 진이 눈을 부릅떴다.
해서 곧장 그리로 달려들려는 순간.
"···사특한 지하의 짐승이여!"
누군가 내내 웅얼거리던 주문을 마지막이 되어서야 쩌렁쩌렁하게 외치더라.
덕분에 진의 시선이 그리로 가 닿았다.
그리고 보았다.
들끓는 핏물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네발짐승을.
초장에 한 3일 푹 담근 핏불이 있다면 저럴까.
온몸이 붉은 와중에 이빨만 새하얀 근육질의 짐승이 사나운 주둥이를 씰룩거렸다.
그 수가 셋이라.
팔뚝을 그어 바닥에 피를 떨어뜨린 수도사의 숫자와 정확히 일치했으니.
커헝!
피로서 계약 맺은 짐승들이 지면을 박찼다.
평범한 이라면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은 흉포한 기세.
하지만 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안 싸워주면 그만이니까.
자고로 소환수를 상대함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소환사를 조지는 거라고.
이는 만화, 영화, 게임, 소설 등.
각종 매체에서 십수 년간 쌓인 빅데이터로 일찍이 증명된바.
이러한 공략법을 어엿한 문화인이자 게이머였던 진이 모를 리가 있나.
곧장 양손의 쇠사슬을 폭풍처럼 휘두르며,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시간차 거의 없는 점멸에 소환사들이 갈려 나갔다.
"어, 어떻게!"
"말도 안 돼!"
사방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저들이 저렇게 놀라는 이유는 간단했다.
본디 공간이동이란, 실전에서 써먹기 가장 어렵다 평가받는 기술 중 하나다.
이는 X, Y, Z축으로 이뤄진 3차원 입방체에 좌표를 찍고, 그 좌표로 의식과 몸을 넘나드는 위험천만한 행위인즉.
2D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뇌에서 3D로 변환하는 감각이 천부적이지 않고서는 함부로 남용할 수 없는 능력인 것이다.
요약하면, 감각이 탁월하면서도 공간이동이란 개념을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데.
이 까탈스러운 조건을 완벽히 충족하는 적합자가 바로 진이라.
초인의 감각, 머리에 강제로 주입된 지식의 콜라보가 지금의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퍼어어억!!!
있는 힘껏 휘갈긴 사슬에 마지막 소환사가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번쩍거리는 진의 꽁무니를 쫓아 이리저리 뜀박질만 반복하던 짐승이 한 줌의 핏물이 되어 바닥에 철퍼덕 쏟아지니-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느낌에 진이 비틀.
마나를 너무 몰아 쓴 탓에 눈앞이 침침했다.
그래서 일단 급히 손으로 뭔가를 짚었는데.
다시 보니까 거죽 벗겨진 인간이 담긴 원통이더라.
"어우 씨!"
화들짝 놀라 정권을 내지른 진이, 깨진 유리 너머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액체를 피해 후다닥 뒤로 거리를 벌렸다.
"안 돼! 이 미친놈! 그만해라!"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이제는 몇 남지 않은 적들이 그렇게 소리쳤다.
딱 봐도 기겁하는 모양새였기에, 진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팔을 붕붕.
사정거리 안쪽의 시험관을 닥치는 대로 다 깨부쉈다.
밑도 끝도 없는 깽판이었지만, 당하는 쪽에선 눈이 뒤집히는 광경이었으니.
"노오오옴!!!"
인간 풍차가 되어 빙글거리는 진을 향해 으레 피와 살점을 제물로 바친 주문이 날아들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투사체.
그리고 한발 빠른 블링크.
어김없이 상대의 사각을 잡은 진이 주먹을 휘둘렀다.
빠각!
후두부를 가격당한 골통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을 때.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허둥지둥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 다른 수도사의 머리가 우두둑 꺾였을 뿐.
이렇게 되니 남은 적은 하나라.
진이 발치에 쓰러진 시체를 툭 걷어차며 입을 열었다.
"야. 그거 내려놓지? 어차피 쏘지도 못할 거. 미련은 왜 이렇게 많아."
그러자 피 칠갑한 바닥 위에서 양손에 그라비스를 쥔 마지막 수도사가 이를 악물었다.
"···너를 안다."
"날?"
"시정부의 요원 중 공간술사라 불리는 사이커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 반쪽짜리 정보였군. 차가운 인상의 여인이라더니······"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시정부가 왜 나와?
보아하니 뭔가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세상 얄팍한 추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건 뭐 시정부가 아니고선 자기네 공장을 공격할 곳이 없다고 단언하는 수준 아닌가.
"시끄럽고."
굳이 그 편협한 사고방식을 교정해 줄 마음은 없었던 진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내 총이나 내놔. 아프게 죽기 싫으면."
그에 수도사는 그라비스의 총구를 힘겹게 제 턱 밑에 겨누는 것으로 답했다.
"우둔한 불신자야. 죽음은 끝이 아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지."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니.
타앙─!!!
엄청난 반동에 퉁겨 나간 몸이 등으로 쓰러지더라.
"······"
설마하니 상대가 자살할 줄은 몰랐던 진이 황당한 표정으로 머리통 날아간 시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푸쉬이이익.
고약한 악취와 함께 사방에서 죽은 수도사들의 몸이 일제히 녹아내리더니, 이내 제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꿈틀꿈틀 한데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그것이 머리 둘, 다리 넷 달린 끔찍한 괴물의 형상을 갖춘 건.
고오오오오!!
5겹짜리 치열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우렁찬 포효.
그에 진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어진 그라비스를 주워들었다.
"미친 세상. 이젠 진짜 별게 다 튀어나오네."
직후 그가 전방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순간.
콰지지지지직!!!
어깨 너머로 날아든 보랏빛 전류가 괴물을 집어삼키니.
광란하는 불빛 아래서 거대한 신형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고-
이내 새까맣게 익어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진이다.
시선이 닿은 곳에 중년인이 서 있었다.
한쪽 팔을 곧게 뻗은 자세로.
기껍다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그가 말했다.
"어떻게. 이만하면 선배다웠나?"
< 28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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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
진이 가만히 중년인을 바라봤다.
가열된 대기가 열풍을 퍼뜨려 머리카락을 휘날리니.
그 열류 속에서 느껴지는 건 다름 아닌 짙은 마나의 향취라.
진 역시 마나를 다루는 자로서 눈이 아닌 몸으로 느끼는 어떠한 울림이 있었다.
단순히 위력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그 속에 쌓인 시간이, 세월이, 그리하여 역사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살갗 위로 뜨겁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진은 낯선 감정에 압도되기보단 당장 해야 할 일을 했다.
시선은 여전히 중년인에게 고정한 채, 그라비스를 든 팔만 뒤로 뻗었다.
그러고는 방아쇠를 당기니.
타앙─!!
타앙─!!
타앙─!!
무려 세 번의 격발음.
새카맣게 타들어 서서히 숨이 끊어져 가는 괴물의 머리통을 손수 날려버린 그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
남이 차려놓은 진수성찬을 숟가락도 아니고 국자로 있는 힘껏 떠먹은 진이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도파민 폭죽에 몸을 부르르.
때마침 퀘스트까지 완료된 터라 자극이 두 배지요.
"하오. 씨."
진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를 악물었다.
좋은데 좆같다.
강제로 주입되는 성취감과 보상감.
그로 인한 원초적인 쾌락이 살아갈 의욕을 선물한다.
마치 시들시들한 화분에 노오란 영양제를 거꾸로 10개씩 꽂아 넣는 것처럼.
그렇게. 도중에 꺾이지 않도록.
"네가 이 지랄 안 해도. 어차피 끝까지 가···!"
진이 떨리는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굳이 따지면 초침이 몇 번 째깍거리며 나아간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체감상 한없이 길게 느껴진 열락의 시간을 견뎌낸 진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그러고는 멋쩍은 미소.
"아. 기다리셨나?"
그에 중년인이 피식거렸다.
"요상한 녀석."
"댁만 할까···요?"
평소처럼 대답하려던 진이 흠칫.
약간 기어드는 말끝만 살짝 높였더란다.
거기에 애매한 시선처리는 덤이다.
생각해 보면 저기 저 중년인.
엄청난 위력의 주문을 쏴붙인 것관 별개로 정작 본인은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시선이 맞닿은 지금도 솔직히 평범한 노숙자로만 보이니, 홀라당 타 죽은 괴물이 유일한 물증이라.
이런 걸 무협지에선 반박귀진이라고 하던가?
어쩌면 수준 차가 많이 나서 못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게 그거다.
진이 상대적 약자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인즉.
이 순간 필요한 건 눈치였으니.
내가 혹시 말실수한 게 있었던가?
진지하게 기억을 되짚는 그때.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해라. 괜히 머리 굴리지 말고."
"그래도 돼요?"
"언제는 내 눈치 살폈나?"
"···하긴."
원래도 반존대를 일삼던 진이다.
새삼 말투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으니.
순간 찾아온 침묵에 진이 슬쩍 중년인을 바라봤다.
"······"
미지의 강자.
존재 자체가 변수 덩어리인 인물인 만큼 여차하면 블링크를 난사해서라도 튈 생각이었지만, 느물느물한 상대의 표정을 보건대 기분이 좋았으면 좋았지 갑자기 해코지할 느낌은 아니더라.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도 없었기에, 언제라도 마나를 끌어올릴 준비를 마친 진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잡혀 들어온 거예요?"
"뭐?"
"잠입수사. 그런 게 아닐까 해서."
당장 자기 머리 터뜨려 자살한 놈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시정부의 요원이라 의심하지 않았던가.
해서 나름 합리적인 추론 끝에 던진 의문표였거늘.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아니? 아까도 말했던 거 같은데. 자다가 눈떠보니 여기였다고."
"···그럼 뭐 한다고 계속 매달려있었대."
애당초 저 인간이 쇠사슬을 못 풀었단 게 말이 안 된다. 진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풀 수 있는 결박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으니.
"그야 궁금했으니까. 망종들이 설치는 꼴을 지켜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거든. 그래서 적당히 어울려 줄 요량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놀라운 걸 보게 됐군."
중년인은 웃었고, 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잡혀있었단 소리다.
이모저모 제정신은 아닌 듯한 언행.
해서 이제라도 슬쩍 발을 뺄 준비를 하는데.
"그래서. 너. 이름이 뭐냐."
갑자기 질문이 훅 들어오네?
물론 말해주는 게 어렵진 않다.
오히려 달갑기도 했고.
"진 에버나이트. 이름 멋지죠?"
냅다 풀네임을 갈겨버린 진이 눈썹을 찡긋거렸다.
3,500만 크레딧 주고 산 성씨.
남들 귀에도 착 잠겼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근데 중년인의 반응이 묘하더라.
"···에버나이트라. 가명이냐?"
그에 진의 표정이 께름칙해졌다.
설마 위조된 신분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가?
솔직히 알아차려도 아무 상관 없긴 하지만.
성만 듣고 유추할 수 있는 건 문젠데.
하여 진이 이제 막 정들기 시작한 성을 바꿔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중년인이 까슬한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가명이 아니라면 의외군. 어디 사연 많은 방계쯤으로 생각했더니···"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
"아니지. 차라리 그놈들 피가 안 섞인 편이 좋지."
혼자서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진이야 삼천포로 빠지는 게 일상이라 쳐도,
중년인도 그 못지않은 마이웨이라.
서로 마주 보고만 있지. 각자 딴소리를 지껄이는 통에 분위기만 영 어수선했다.
그렇게 둘 다 구시렁구시렁.
남들이 보면 저게 뭐람?
고개를 갸웃거릴 법한 대치가 한동안 이어졌으니.
먼저 상념에서 벗어난 건 그래도 젊은 진이었다.
"······? 음 잠시만. 저기요. 저기요?"
손가락을 딱닥 튕겨가며 저를 부르는 소리에 마침내 중년인도 눈을 끔뻑이며 이쪽을 바라봤다.
"음. 무슨 말 했나?"
"이제 하려고요. 그래서 선배는 성함이?"
"나는 로칸이다."
자신을 로칸이라 소개한 중년인이 가만히 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게 마치 어떻게 반응하나 확인하는 모양새라.
그 분위기를 읽은 진이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유명하신가 보네."
저 딴엔 최선의 반응이었지만, 솔직히 빈말로도 좋은 대답은 아니라서.
만약 진이 자신의 자그마한 삶의 테두리를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너머의 거대한 세상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어지는 질문은 이랬을 터였다.
'자하드의 성을 쓰십니까?'
그랬다면 로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을 것이다.
자신은 오래전 그 이름을 버렸다고 덧붙이면서.
자하드.
위대한 7가문의 일좌.
로스트 시티의 하늘에 닿아있는 이름이다.
드높은 마천루조차 고개를 젖혀야 할 것인즉.
눈앞의 사내는 이를 걷어찬 광인이었다.
그런 광인이 껄껄 웃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는 상판대기가 기꺼워서.
"멍청한 놈이로고."
"뭣? 아무리 선배라도 날, 아니 이 몸을, 아니! 저를 모욕한다면···"
뭘 할 수 있지?
쓰읍-, 도망?
할 말이 궁핍해진 진이 뒷말을 삼키자,
로칸이 입꼬리를 당기며 물었다.
"그래서 스승이 누구냐."
"그런 거 없는데요."
"······"
즉각적인 대답에 한순간 말문이 막힌 로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이 없다. 그 정도로 극순한 마나를 가지고도."
봐서 안다.
극순할 뿐만 아니라 이를 운용함에 있어서도 조금의 막힘이 없다. 세상을 담을 도화지를 가졌는데 명필이기까지 한 놈이란 소리다.
그런데 스승이 없다니.
"독학했단 소리냐?"
"뭐 그런 셈이죠."
진이 긍정했다.
상태창에 대해 말할 순 없으니 이게 최선이다.
그리고 혼자 배운 건 아니라도, 독하게 배우긴 했다.
머릿속을 헤집는 고통을 견뎌내지 않았던가.
엄살이 아니라 진짜 아프다.
절로 입에서 침이 질질 흐른다고.
갑자기 떠오른 고통에 PTSD가 도진 진이 어깨를 부르르 떨 때였다.
느닷없이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오니.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크게 고개를 젖힌 로칸이 이내 푸들거리는 입술을 열었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육신이 실재하다니. 7가주들이 알면 아주 뒤집어지겠군. 그치들의 면면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로칸의 얼굴은 어딘지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영문을 모르는 진으로선 그저 눈을 끔뻑일 수밖엔.
"거 같이 좀 웃읍시다."
하여간 제정신은 아니라니까.
진이 머릿속에 로칸에 대한 프로필을 따닥따닥 작성했다.
반박귀진의 노숙자.
근데 살짝 맛탱이가 간.
거지 같은 도시여서 그런가.
어찌 된 게 점잖게 나이를 먹은 사람이 없네.
진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자니.
그사이 웃을 거 다 웃고, 혼자 떠들 거 다 떠든 로칸이 만족스럽게 덧붙이길.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덕분에 좋은 구경했다. 가만히 묶여있길 참 잘했어."
"뭐. 즐거웠다면 오케입니다."
영혼 없는 대답을 마친 진이 그럼 이제 갈 길 가자고 마지막 인사말을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네가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는 모르겠다만 거기에 줄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로칸이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을 내디디니 다음 순간 그는 진의 코앞에 있었다.
반응조차 못 했다.
다만 자줏빛 뇌광 한줄기가 허공을 갈지자 수놓았다 아련하게 흩어질 뿐이니.
한순간에 목격자가 된 진의 귓가로 로칸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별 건 아니다. 그저 기초적인···"
이어지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 멈춘 듯 한없이 더디게 흘러가는 시야 너머로 저 홀로 보통의 속도를 유지하는 손가락이 올곧게 다가오니-
가슴에 닿은 손끝에서 작은 스파크가 솟구치는 순간.
꽈릉!
진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쳤다.
세상에서 가장 난폭한 첨단이 규칙 없는 필치로 전언을 새기는 순간이었다.
좆됐···
눈이 훼까닥 뒤집혔다.
***
진이 정신줄을 부여잡은 것은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꼴이 가관이었다.
눈은 퀭하니 초점이 없고, 팔다리는 다빈치의 인체비례도처럼 대자로 쫙 펼쳐져 있으니-
공장 천장을 올려다보는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개···시···벌."
필설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 푹 절여졌기 때문일까.
심신이 아주 파김치가 된 진이다.
시야 한구석에서 깜빡깜빡 나 좀 보소, 아주 지랄을 해대는 상태창을 가만히 방치할 뿐 아니라, 화도 내지 않았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렇게 한참.
공장 창문을 통과한 어슴푸레한 달빛이 새벽 박명의 푸른빛에서 다시 여명이 될 때까지.
밤새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있던 진이 마침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후 산발이 된 앞머리를 마른세수와 함께 쓸어 넘긴 뒤 둘러본 주변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더라.
일단 거죽 벗겨진 시체들이 죄다 잿더미가 되었고-
용도를 가늠하기 힘들던 각종 장비 또한 죄다 박살 난 탓에 원래의 형태를 떠올리기 어려웠다.
아마도 로칸의 짓인 듯했는데.
진으로선 얼탱이가 없을 뿐이었다.
"···아니, 사람을 왜 여기다 버려두고 가. 자기 때문에 내가···"
쇳소리 가득한 혼잣말도 잠시.
끝내 시야의 구석탱이에 눈길을 던진 진이다.
포기를 모르는 반짝임이 거기에 있었다.
"왜. 왜. 도대체 뭔데. 어?"
관심을 주기만을 기다렸던 걸까.
다음 순간 상태창이 눈앞을 가렸다.
「???」━━━━━━━━━━━
NEO ?? ??? 자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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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너야?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안 반가운 얼굴에 도리질을 치던 진이 순간 움찔.
"어?"
눈 비비고 다시 바라본 상태창 속에서 낯선 문장을 재차 확인한 그가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순식간에 밤하늘을 비춘 내면세계.
그곳에서 진이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렇게 성운과 성운 사이를 횡단하던 시선이 어느 순간에 이르러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니-
찾았다.
전에 없던 새로운 별자리.
이는 로칸의 안배가 아니었다.
그조차 이런 상황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누가 알았겠는가.
그저 축복받은 육신에 자그마한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흘려 넣은 마나가, 이 세계를 홀로 불합리하게 살아내는 누군가에겐 '계기'로 작용할 줄은.
하여 지금.
자그마한 빛이 움튼 첨단 위로 웅장한 벼락이 진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자하드]
7대 가문의 비전 마법이 소리 없는 뇌성을 터뜨렸다.
< 29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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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