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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화 >
이른 저녁.
진은 어깨에 커다란 보따리를 멘 상태로 정크 프라자를 가로질렀다.
이제는 제법 눈에 익은 골목을 이리저리 꺾어 도착한 술집에선 흐릿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포우가 고개를 돌렸다.
"아, 진."
"안녕."
가게 안에는 손님이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얼음잔에 든 술을 홀짝이는 마른 남자였는데, 진은 저자가 그냥 손님인 건지 아니면 휴식 중인 솔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피 묻은 보따리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 솔로가 아닐지 짐작했을 뿐이었다.
"여기서는 좀 그런가?"
진이 그렇게 묻자, 포우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따라오시죠."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중앙 선반 뒤쪽에 위치한 넓은 방이었다.
진으로선 난생처음 보는 기구와 도구들이 비치된 공간이었는데, 철제 장비들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오래된 그네와 열쇠 꾸러미에서 날 법한 냄새가 진동했다.
"여기 내려놓으시면 됩니다."
포우가 방 한가운데 널찍한 테이블을 향해 손짓했고, 진은 묵직한 포대를 그 위로 내려놓았다.
즉시 밀봉된 끈을 풀어낸 포우가 내용물을 확인하고선 천천히 입을 뗐다.
"에드먼 닐슨 본인이군요. 혹 데이터칩이 꽂힌 상태로 운반하신 건가요?"
"아, 그건 아니야."
고개를 저은 진이 품속에서 붉은색 칩을 꺼냈다.
"자 여기."
자연스레 데이터칩을 건네받은 포우가 불꽃 엠블렘이 음각된 표면을 엄지로 쓱 훑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이후 몸을 돌린 포우가 걸어간 곳은 꽈배기처럼 꼬인 전선이 마치 촉수처럼 사방으로 늘어진, 모니터 셋 달린 커다란 컴퓨터 앞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외부 포트에 칩을 꽂더니, 곧이어 화면에 출력되기 시작한 여러 프로그램 창과 그 안을 빽빽하게 수놓은 상형문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진이 보기에는 웬 삼두 괴물이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시각적으로 토해내는 장면인지라.
절로 눈이 피로해지는 기분에 괜히 방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자니, 어느 순간 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출된 데이터칩이 맞군요."
"맞아? 다행이네."
"그런데···"
포우가 뭐라 뒷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등 뒤로 닫힌 문이 열렸다.
"왔어? 빨리 해결했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 코끝을 스치는 스모키하면서도 달달한 향.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칼리파가 진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엉망인데."
"뜨겁더라. 화로구이 되는 줄."
"저런. 고생했네."
작게 웃어 보인 칼리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포대 쪽으로 향했다.
"무겁게 이건 왜 들고 왔대? 우린 데이터칩만 회수하면 됐는데."
"그게-"
진은 물집 때문에 근질거리는 얼굴을 긁지 않게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칩을 빼니까 갑자기 눈깔이 훽 돌아서는 미친놈마냥 덤벼들더라고. 확실하진 않은데 힘도 세진 거 같고, 때려도 아픈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아무튼 좀 이상해서."
"···그랬단 말이지."
칼리파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포우?"
"멀웨어입니다. 로직으로 보건대 폭주 바이러스, 일명 버서크군요. 은폐형 프로세스로 교묘하게 숨겨둔 터라 사용자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짐작건대 일정 시간이 흐르거나 강제로 칩을 제거할 시 발동하도록 설계한 듯하고요."
진이 눈을 끔뻑거렸다.
버서크? 버서커? 나도 잘 알지.
피폭발, 가츠, 철권 녹단, 폭주 서번트.
헤라클레스였지 아마. 길가메시한테 사슬 플레이 당하다 죽을 땐 슬펐는데···.
진이 의식의 흐름을 이어가는 사이.
칼리파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버서크라···. 잠시만 기다려 주겠어?"
진에게 양해를 구한 그녀가 그대로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뭔가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있었던 모양인데, 진은 거기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맡은 일은 끝났으니까.
그때 다시 둘만 남은 방 안에서 포우가 물었다.
"첫 의뢰는 어떠셨습니까."
"글쎄. 할만했···나? 잘 모르겠네. 그냥 뭐 그랬어. 안 죽었음 됐지."
진의 대답에 포우는 포트에서 뽑은 데이터 칩을 지퍼백에 집어넣고선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솔로의 세계엔 3의 거름망이란 말이 있다는 걸."
"······? 거름망?"
"예. 첫 의뢰를 포함한 연이은 세 의뢰. 그리고 그 구간에서 발생하는 신예 솔로들의 압도적인 이탈률을 두고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지퍼백을 꾹꾹 눌러 닫은 포우가 그걸 또 서류봉투 안에 넣었다.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면서.
"모든 거름망을 통과한 비율은 대략 7%. 겨우 그 정도가 살아남지요. 그리고 인정받습니다."
7%.
단순 백분율만 놓고 봐도 2등급보다 1등급에 가까운 수치다. 공부도 그만하면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데, 하물며 목숨 걸고 싸우는 솔로는 오죽할까.
진이 새삼 이 바닥 참 빡세구나 생각하는 가운데, 포우가 입을 열었으니.
"축하합니다. 진. 첫 번째 거름망을 통과하셨군요."
그리고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3의 거름망」───────────────
3번의 의뢰. 3개의 거름망.
진정한 솔로로 거듭나기 위한 조건이었다.
-진행 상태 (1/3)
-의뢰 거절 시 실패
*보상 퍽 XP 10,000
*(알 수 없음) 스토리 해금
─────────────────────
이건 또 뭔.
스토리? 알 수 없다고? 누구 놀리나.
진이 세상 짜증 난, 순화해서 매우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저 눈에만 보이는 글줄을 훑자니, 포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 제 말이 불편하셨다면-"
"아니, 아니야. 그냥 갑자기 속이 안 좋네. 축하해줘서 고맙다."
진이 파리 쫓듯 손을 휘휘 털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다 봤으니까 좀 꺼져.
그러는 와중에 칼리파가 방에 들어왔다.
"여기 보상금."
그녀가 내민 두툼한 돈봉투를 건네받은 진이 그 묵직함에 감탄했다.
"200만···."
"300만 크레딧이야."
"으이?"
그에 진이 흠칫 놀라면서도 순식간에 품속에 봉투를 갈무리하니, 그 절륜한 속도에 칼리파가 웃음을 흘렸다.
"추가금은 버서크 같은 돌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을 깔끔하게 끝내준 보답.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줘."
보답이라고?
진이 얼떨떨한 가운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세상에 대한 상식이 바닥을 칠 뿐. 이래 봬도 진은 번듯하게 대학 나와 취업해, 남의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몸소 경험한 어엿한 사회인이었다.
칼리파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어리숙한 사람은 아니란 소리다.
중개인이 주는 웃돈이란 모름지기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입 싹 닫고 모른 척하지 않은 건 100만 크레딧에 신뢰를 깨지 않겠다는 무언의 호의라.
사람이 쩨쩨하진 않네.
진이 칼리파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0.5단계 정도 격상시켰더란다.
"간다."
볼일을 마친 진이 그렇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러다 문뜩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길.
"혹시 괜찮은 건샵 좀 추천해 줄 수 있어?"
다소 뜬금없는 물음에 칼리파가 턱을 매만졌다.
"건샵? 음···."
짧은 고민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가 입을 뗐다.
"정크 프라자 2단지에 굿네이버란 건샵이 있어. 브로프란 노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물건 하나는 확실해. 관심 있으면 메시지로 정확한 주소 찍어줄게."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뭐 이 정도야."
칼리파는 정말로 그 자리에서 메시지를 보냈다.
가슴팍 안에서 웅-하고 울리는 단말기의 진동을 느낀 진은 잘 받았다는 뜻에서 가슴을 툭툭 두드린 후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끼익. 다시 몸을 세웠다.
"아, 맞다."
"······?"
이번엔 또 뭐냐는 시선을 던지는 칼리파와 눈을 맞춘 진이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물어볼 게 하나 더 있는데."
***
진이 떠난 뒤, 포우는 보따리를 뒤집어 한때 에드먼 닐슨이었던 시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앞뒤로 으깨진 얼굴, 시커먼 멍이 든 옆구리. 그리고 핏발 선 피부까지.
겉으로 드러난 상처뿐 아니라, 육안으로 관측되지 않는 흐름까지도 꼼꼼히 살핀 포우가 말했다.
"마나 회로가 폭주한 흔적이 역력하군요. 버서크가 발동된 건 확실해 보입니다."
그에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칼리파가 물었다.
"복구할 수 있겠어? BH든 뭐든."
"대부분의 데이터가 버서크에 의해 영구적으로 소실됐습니다만, 그래도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포우가 담담히 대답하는 가운데, 칼리파는 검게 물든 닐슨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만약 제압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겠죠."
"그래, 그랬겠지. 가문의 마법을 사용하는 무차별 테러범이라···. 우리 유출범께선 도시를 혼란에 빠뜨리고 싶은 걸까."
칼리파가 팔짱을 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흑마법사들이 돌아왔을지도 모르겠어."
"솔라드 측 중개인에게 알릴까요?"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네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데이터칩만 전달하도록 하죠."
"그나저나 포우."
"예.
"넌 어떻게 생각해. 진 말이야."
자연스레 전환된 화제에 한창 닐슨의 전뇌 소켓을 만지작대던 포우가 고개를 들었다.
"훌륭하죠. 홀로 스틸 핸즈를 궤멸시키고 타격전에서 펜릴에게 우세를 점했을 뿐 아니라, 버서크가 발동된 마법사를 제압한 신예니까요."
"모아 보니 확실히 범상치 않네."
칼리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운타운에서 알아주는 링커였고, 그만큼 많은 솔로와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진 같은 타입은 처음이었다.
링커로서 당연하게 진행한 뒷조사. 그 결과 발견한 클럽 CCTV 영상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영상 속 진은 혼자서 갱단을 몰살시켰다.
맞고, 구르고, 찔려가면서도.
그야말로 몸을 갈아 넣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스타일이라.
오늘만 해도 전신 화상을 포함해 어깨엔 선명한 탄흔까지 달고 왔더란다. 치료가 시급해 보이는 상황임에도, 곧장 에넥도트부터 찾아온 점은 놀랍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딱히 아픔을 숨기지도 않았으니.
그 모든 점이 칼리파에겐 퍽 신선하게 다가왔다.
신체 능력만 보면 어느 바이오 그룹이 비밀리에 만든 강화 인간이라 해도 믿을 정도거늘, 하는 짓은 묘하게 나사가 풀려있었기에.
"확실히 재밌단 말이지."
칼리파의 나직한 혼잣말 뒤로 포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은 뭐였을까요."
"뭐가?"
"마나 회로를 만들기만 하면 아무 주문이나 다 배워 쓸 수 있느냐던 질문 말입니다."
그에 칼리파는 조금 전 에넥도트를 나선 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큰 선택을 앞둔 듯 고민 가득하던 얼굴을.
"모르지. 가문의 비전 마법을 몸소 겪어보니 뒤늦게 마법에 관심이 생겼을 수도."
"시술을 받을 셈일까요."
"글쎄."
칼리파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나 회로 시술.
딱히 추천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제명에 죽고 싶다면 특히나 더.
깨달음 없이 새긴 마나의 길은 수명을 대폭 갉아먹기에. 함부로 시술을 받았다간 골로 가기 딱 좋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순수한 마나 회로라는 게, 어디 얻고 싶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
다운타운 어딘가.
약쟁이들이 기괴한 자세로 굳어있고, 허름한 차림새의 노숙자 무리가 드럼통으로 뗀 장작불에 몸을 녹이는 음습하고 후미진 골목.
그 좁다란 길을 통과하면 보이는 오래된 무인 모텔이 하나 있었으니.
6,000크레딧에 8시간을 이용할 수 있는.
4평 남짓한 싸구려 객실.
곰팡내 진동하는 벽지가 지저분한 그 공간에 휘황한 빛이 번뜩였다.
더없이 순수하고 은은한 푸른빛.
그리하여 그 중심에서 진이 눈을 번뜩 뜨니.
배웠다!
마나 회로.
< 10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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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화 >
빌드.
RPG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용어다.
아이템, 스킬, 스탯, 조합식 등 다양한 성장 요소.
거기서 파생되는 합연산이니 곱연산이니 하는 복잡한 계산법들.
이 모든 것을 일일이 몸으로 부딪쳐가며 게임을 배우기엔 현대인의 시간은 금과 같다.
그런고로.
특정 캐릭터나 직업군의 육성법을 사전에 검색하는 건, 게이머에게 있어 매운 떡볶이를 먹기 전 준비하는 쿨피스처럼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성향이란 게 백이면 백, 전부 다른 법이라서.
누군가는 적당한 가이드라인만을 원한다면,
다른 누군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판단을 의존하는 경우도 있기에, 이러한 영역을 조절하는 건 온전히 플레이어 본인의 몫 되시겠다.
그런 점에서 진은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앞선 이들의 노하우가 꾹꾹 담긴 빌드를 적극 수용.
스트레스 없이 쾌적하게 게임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직장 생활에 심신이 지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사실 학창 시절부터 그런 성향이기도 했고.
그래서 프로젝트 네오는 어땠냐고?
당연히 공략글을 보긴 봤다.
그러니 부랑자, 이레귤러, 빠른 회복이라는 통칭 좀비 빌드를 채택할 수 있었던 거고.
문제는 그 이후의 자세한 육성법은 모른다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건 게임을 진행하며 순차적으로 확인할 부분이지. 예습하듯 공부할 건 아니다.
알트+탭만 누르면 해결될 일을 뭐 한다고 딸딸 외운단 말인가.
자, 여기까지가 게이머로서의 변명.
그리고 지금.
인생 최대의 난제에 빠진 한 남자가 있었으니.
"······뭘 고르지?"
진이 머리칼을 싸잡았다.
이등병 시절, 상꺽 분대장이 평소 호형호제하는 말년병장 앞에서 누가 더 잘생겼냐. 대답 잘해라. 협박조로 물었을 때보다(참고로 둘 다 또라이였다), 바람난 여자친구한테 이틀 전 선물한 에어팟 내놓으라 할지 말지 고민했을 때보다(잠수 타서 못 받았다) 지금이 훨씬 머리가 아팠다.
무려 새로운 별자리를 밝힐 기회 아닌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여러 성좌와 그 시발점이 되는 불 꺼진 별이 보였으니, 그것들을 쓱 훑은 진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 괜찮아 보이는데."
물론 개중에서 유독 관심이 가는 퍽이 있기는 했다.
초능력을 다루게 될 것으로 짐작되는 [사이킥]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쭉쭉 뻗어 나가는 줄기줄기에 텔레파시니 파이로키네시스니 하는 알토란 같은 별들이 나 좀 밝혀줍쇼 차례를 기다리고 있더라.
한때 전세계를 열광시킨 M사의 슈퍼히어로들이 다들 이러한 계통의 능력자들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는 퍽인 것이다.
그럼에도 진이 선뜻 사이킥 능력을 해금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여태 겪어본 적 없는 힘이었기에.
이는 경험을 세상 그 어떤 교본보다 신뢰하는 진의 기준에선 허용범위를 벗어나는 선택지였다.
기껏 골랐다가 성능이 구리기라도 하면?
"절대 안 되지."
말은 그렇게 해도 괜히 눈길이 그쪽으로 가는 게.
아. 휴먼 토치 마렵다.
불꽃 남자. 판타스틱4에서 제일 좋아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대쪽 같은 가치관에 의거. 남은 선택지는 애초에 하나뿐이었으니.
직접 당해봤으며, '가문'이라는 이름 아래 사회 전반에 걸쳐 높게 평가받는 게 분명한 능력.
마나.
마침내 진이 결심을 굳혔다.
"아씨. 몰라."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얼른 눈을 감고, 지팡이 모양의 성좌를 찾아 그 첫 번째 별에 모아둔 경험치를 쏟아 넣는다.
동시에 진의 머릿속에 천둥이 쳤다.
"웁!"
낯선 지식이, 오랜 수련으로 깨우쳐야 했을 관념적인 힘의 진의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몸 내부 구석구석을 회전하기 시작했다.
막힌 길을 거침없이 뚫어뜨리는 시원한 탈각의 감각과 누군가 제멋대로 뇌를 주물럭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상충하자 몸 전체에 엄청난 부하가 찾아왔다.
절로 몸이 벌벌 떨리고 입에선 침이 질질 흐른다.
그리하여 다시 눈을 떴을 때.
진은 자신이 푸른빛에 휩싸여 있음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바닥에서 버르적대는 중이었으니.
극심한 후유증에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서 새로운 별이 정답게 자기소개를 했다.
[마나 회로]
그 인사를 받아줄 틈도 없이.
한 줌 남은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결과적으로 진은 마나의 흐름을 깨쳤다.
이는 마치 양수 속 태아가 처음 세상에 나와 코로 숨을 쉰 상황과 같아서, 울음만 터뜨리지 않았을 뿐이지 한동안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시간이 흐름에 어찌어찌 낯선 감각에 익숙해진 진이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사실.
우선, 마나 회로를 가동하면 몸에 은은한 푸른빛이 맴돈다. 이게 은근히 예쁘더라.
둘째, 마나 회로를 가동하는 동안은 눈에 띄게 몸이 가벼워졌다. 처음엔 플라시보 효과인가 싶었지만, 가볍게 제자리뛰기를 했다가 정수리도 모자라, 광대로 천장을 들이박은 뒤에야 착각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체감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일단은 만족이다.
앞으로는 경험치가 충족될 때마다 마법을 하나둘 배워가면 될 터.
칼리파가 말하길, 마나 회로가 있다면 어느 마법이든 익히고 활용하는 건 개인의 자질 문제라고 했던가.
솔직히 처음에는 재능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겪어보니 기우였다. 설마하니 머릿속에 지식을 강제로 쑤셔 박을 줄은 몰랐지.
덕분에 진은 누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마나 회로를 가동하는데 어떠한 어려움도 겪지 않았으니, 그 수준이 불법 시술자의 그것과 궤를 달리했다.
만약 이를 죽은 닐슨이 보았다면, 그 자리에서 관뚜껑을 걷어차며 발광했으리라.
물론 진이 알 바는 아니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배가 너무 고팠으니까.
"와 죽겠네."
그제야 자신이 정신을 잃은 뒤 꼬박 하루를 굶었다는 걸 깨달은 진이 곧장 모텔을 나섰다.
드럼통에 둘러앉은 노숙자들이 골목을 가로지르는 발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가 황급히 눈을 깔았다.
오래전 진의 주머니를 털어먹으려다 역으로 묵사발이 난 경험들이 떠오른 탓에.
"좋은 아침."
진이 배고픈 와중에도 손을 흔들며 골목길을 벗어났다.
이후 간판만 보고 들어간 햄버거 가게에서 와퍼 9개 신기록을 달성한 뒤, 여세를 몰아 근처 옷집에 들러 새로운 항공 점퍼와 반팔 그리고 바지까지 풀세트로 구매를 마쳤다.
깔끔하게 갈아입고 나오니 시간이 딱 점심쯤이라.
진이 품속에서 단말기를 꺼내 문자에 찍힌 주소를 확인했다.
굿네이버.
칼리파가 추천해 준 건샵이었다.
사실 진은 그동안 총기류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집도 없이 떠도는 처지에 관리가 어렵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꼬박꼬박 총알을 살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주먹이며 발길질 따위가 사람 골통도 부수게 된 시점부턴 아예 관심조차 사라졌으니.
어쩌다 총을 쥐는 일이 있어도, 이는 싸움이 벌어진 와중에 남이 흘린 걸 주운 정도에 불과해서 주인 이마에 방아쇠를 당기는 정도가 유일한 사용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펜릴이라고 했던가?
그 늑대 대가리도 인간 상태일 때 거의 제 키만 한 검을 차고 있지 않았나.
날 길이만 1m가 훌쩍 넘는 검을, 2m 10cm에 가까운 신체 스펙으로 휘두른다? 기술이고 뭐고 근접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사거리 싸움에서 답이 없는 수준이니, 팔 하나 내준단 마인드로 임하는 게 아니고선 거리를 좁히기도 힘들겠지.
그때부터 슬슬 원거리 무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던 차.
첫 의뢰에서 터질 게 터지고 말았으니.
닐슨이 마법이니 총이니 아주 난사를 하며 도망치는 동안 진이 한 거라곤 그냥 열심히 쫓기! 밖에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물론 스펙이 깡패라 온몸으로 다 맞아가면서도 결국 따라잡긴 했지만, 사실 권총 한 자루만 있었어도 훨씬 쉽게 풀렸을 일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라.
진이 껍질이 떨어지기 시작한 살갗을 벅벅 긁으며 정크 플라자에 발을 들였다.
언제 와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복잡함.
그래도 이번에는 용케 길을 헤매지 않았다.
단말기에 내비게이션 앱을 다운로드했으니까.
세상에 이 좋은 걸 여태 왜 안 썼을까.
내비게이션 만든 사람은 상 줘야 해.
아아. 오천만 길치의 구세주시여.
그렇게 진이 단말기를 드래곤볼 찾는 레이더마냥 꼭 붙들고 걷길 한참.
어느 순간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직선상 100M 남겨두고 있다 알렸다.
그리하여 진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며 정면을 바라봤다.
지나치게 가까이 붙은 건물 두 채가 만든 샛길.
막장스러운 용적률과 건폐율의 콜라보로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그늘진 길의 끝자락에 2층짜리 건물 하나가 있었다.
거기에 붉은색 깜빡이는 LED 간판.
Good Neighbor.
칼리파가 말한 건샵이 맞았다.
진이 품에 단말기를 넣으며 혀를 찼다.
저렇게나 처박혀 있는 걸 보니, 혼자 발품 파는 정도론 찾아내기가 어려웠지 싶다. 이래서 뭐든 인맥, 인맥 하는 건가.
"계십니까."
불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차가운 쇳내가 코끝을 스쳤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온갖 종류의 총이 빼곡하게 걸린 벽이었다. 그리고 그 벽을 등지고 앉은 채, 자그마한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오! 이야···! 호우! 이거, 이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온갖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진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영상물에 푹 빠진 모습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진이 헛기침으로 눈치를 줬다.
"크흠흠-"
"우앗!"
노인이 해피타임을 급습당한 고등학생마냥 황급하게 디스플레이를 뒤집었다.
"너 뭐야!"
"손님이죠."
"어, 언제 들어왔는데."
"어르신이 신음 낼 때부터요."
진이 그렇게 말하며 뒤집힌 디스플레이를 턱으로 가리키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서 야릇한 교성이 흘러나왔다.
"엇! 이, 이게 왜."
순간 얼굴이 시뻘게진 노인이 부랴부랴 소리를 낮추랴, 그걸 또 숨기랴, 그게 여의찮아서 어깨 뒤로 집어 던지랴 아주 난리부르스를 떨어댔다.
"한창이시네."
"뭔 개소리야! 나 안 봤어!"
"예로부터 강한 부정은······"
"됐고! 무슨 일이냐."
노인이 뒷말을 잘라먹으며 호통쳤다.
하여 진이 답하길.
"건샵에 총 사러 왔지.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심드렁한 목소리에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주인이 이윽고 눈살을 찌푸렸다.
"흥! 어디서 개수작을. 네놈들한텐 안 판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뭔 소리래. 괜히 민망하니까 쫓아내려고?"
"헛소리 말고 썩 꺼지지 못해!"
"거 참."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연기가 아니라면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이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디서 많이 본 전개다.
그래.
예로부터 꼬장꼬장한 상점 주인이 잔뜩 성난 얼굴을 하고서 네놈들한텐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팔아! 소리치는 경우는 대부분이 질 떨어지는 양아치들과 얽힌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괜한 소리가 아니다.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역사적으로 그랬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던가?
뭔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진정하시고 저는 이만······"
이어지는 문장이 채 마침표를 찍기 전.
진은 뒤통수가 찌릿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위기를 감지한 생체 신호.
반사적으로 돌아가는 고개.
데구르르르.
열린 문으로 굴러들어 오는 수류탄이 보인다.
이어서 눈앞을 가리는 빌어먹을 퀘스트 창까지.
「(돌발!)굿네이버」──────────
굿네이버를 지켜내시오.
*보상 퍽 XP 1,500
──────────────────
"아씨."
< 11화 > 끝
ⓒ 오동냐무
=======================================
< 12화 >
세열수류탄.
대한의 남아라면 훈련소 3-4주차에 던져보았을 바로 그것.
귤만 한 크기에 무게도 가볍지만, 그 화력만큼은 수많은 영상매체를 통해 정평이 난바. 살상반경 15m에 위험반경 50m라는 덩치 대비 걸출한 성능을 자랑하는 무기다.
이게 얼마나 위험하냐면, 평소에는 눈빛만으로 사람 잡아먹을 듯 굴던 교관들이 수류탄 교육이 있는 날에는 아주 그냥 천사가 된다.
최대한 긴장을 풀어줘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의도라.
(여기에는 자살기도를 방지하는 목적도 있다)
물론 그럼에도 훈련병은 긴장한다.
숨죽인 채 직관했던 교관들의 시범부터 내 손에 수류탄을 쥐고 그걸 던지고, 숙이고, 귓가에 생생한 파열음까지.
긴장과 집중 속에 행해졌던 일련의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진이 보인 반응은 지극히 조건반사에 가까웠다.
"호 안에 수류탄!!!!"
뭘 어떻게 움직인 건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진열장 반대편에 쪼그려 앉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더라.
게다가 오른손으론 주인장의 목덜미를 꾹 누르고 있었으니.
콰앙!
다음 순간 폭발음이 귓가를 때렸다.
조각난 탄체 파편이 가게 안을 휩쓸자, 사방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난무했다.
"우와아악!!"
진에 의해 강제로 고개가 숙여진 노인, 브로프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다그칠 틈도,
슬쩍 고개를 들어 동태를 살필 여유도 없다.
이번에는 총탄이 빗발치기 시작했으니까.
두두두두!!
다시 한번 가게가 초토화되는 가운데, 진과 브로프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자연스레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피할 곳!"
진이 소리쳤고, 노인은 혼란한 와중에도 용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이, 이리로!"
그리하여 엉금엉금 포복으로 바닥을 기어가자니, 머리 위로 유리 조각이며 깨진 시멘트 따위가 우수수 쏟아졌다.
쨍그랑!
무차별적인 총격에 조명까지 깨졌다.
이젠 눈에 뵈는 것도 없다.
그냥 처음 보는 노인네 엉덩이만 열심히 쫓아갈 뿐.
"여기! 여기!"
진열장 끝자락. 직원실로 보이는 공간으로 들어간 브로프가 다급히 손짓했다. 문이 열려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닫아요!"
뒤이어 들어온 진이 혼자 외치고 혼자 행동했다.
쾅 닫힌 문 너머로 한층 멀어진 총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얼른 문짝에서 떨어진 진이 말했다.
"어르신 뭐 괴물이라도 돼요? 어르신 하나 잡자고 총을 저렇게 갈겨?"
"너, 너! 뭐냐?"
"손님이라니까!"
"진짜 손님이야? 할리파 갱이 아니고?"
이럴 줄 알았지.
질 나쁜 양아치와 연루된 일.
"할리판지, 할라피뇬지 나는 모르겠고. 무기 될 만한 거 없어요? 여기 건샵이잖아."
"설마 싸울 셈이냐? 밖에 몇 명이 있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그럼 뭐 가만히 죽치고 앉아서 오순도순 야동이라고 보려고? 시간 없으니 뭐든 줘봐요. 얼른!"
진의 채근에 브로프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주변 철제 케이스를 하나씩 열어젖히며 내용물을 살폈다.
"뭐가 필요한데?"
"아무거나!"
"···젠장. 내 물건을 이런 초짜한테."
곧이어 쇠붙이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진이 낚아채고 보니 투박한 생김새의 소총이더라.
총열 부분이 두껍고 그 아래 전방 손잡이가 달렸으며.
M4를 닮긴 했는데 조금 미래지향적인?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
사실 이게 옳은 감상인지도 모르겠고.
그때 브로프가 탄창 두 개를 겹쳐 내밀었다.
"쏘는 법은 알고?"
"사람을 뭐로 보고."
진이 그렇게 대답하며 탄창을 결합하는 순간.
요란하던 총성이 잦아들더니 이내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문짝 너머로 들려왔다.
그 소리가 한둘이 아니다. 못해도 열 이상.
그것도 자동화기로 무장한.
이길 수 있나?
총 맞아가며 싸우는데 이골이 난 진이었지만, 열 개 이상의 총구 앞에 표적이 된 경험은 없었기에 확신이 서질 않았다.
차라리 무투파를 지향하던 스틸 핸즈쪽이 그리워지는 순간.
"브로프! 이 씨발 경우 없는 노인네야. 뒤졌어? 뒤졌으면 말 좀 해봐. 또 죽여버리게!"
사나운 목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우리가 좆으로 보였지? 그러니까 버터트립 새끼들한테 물건 대준 거 아니야. 왜? 우리 담궈먹으면 인생 좀 편해질 줄 알았어? 응?"
진은 그 말에 귀 기울이면서도 브로프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비난에 노인의 얼굴은 똥 씹은 듯 구겨져있었다.
그때였다.
"차라리 방금 죽었으면 댁한테도 좋았을 텐데···. 이거 이거 추잡하게 연명하셨다 이거지?"
진은 목소리의 방향이 이쪽을 향했음을 깨달았다.
직후 그의 손이 브로프의 가슴을 거칠게 밀치니, 다음 순간 두다다다!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문짝을 꿰뚫고 날아들었다.
노란 선이 허공을 가르는 가운데, 진이 3층짜리 선반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조정간을 단발에 놓고 탄환 세례가 그치길 잠시 기다렸다가, 그렇게 됐을 때 칼같이 응사했다.
경고 사격 따위가 아니다. 그 짧은 시간 진의 눈은 구멍 숭숭 뚫린 문짝 너머의 인영을 놓치지 않았으니.
탕! 탕! 탕!
간결한 총성과 함께 누군가 쓰러졌다.
"시발!"
깜짝 놀란 비명.
진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다시 선반 뒤에 몸을 숨기는 대신.
오히려 마나 회로를 가동하며 문쪽으로 내달렸다.
전신에 힘이 넘친다.
마치 몸속 어딘가에 저만의 액셀이 있어, 그걸 꽉 밟은 기분.
내딛는 발이 가벼웠다.
반면 발이 닿은 지면은 실금이 번지니.
어느새 푸른빛에 휩싸인 몸이 문을 들이받았다.
콰앙!
그러잖아도 내구도가 한계에 달한 문이 경첩째로 터져 나간 순간.
진은 어둠 속에서 조정간을 연사로 돌렸다.
그러고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불을 뿜는다.
1초에 수십 번씩 뒤바뀌는 명암 속에서 놀라고, 일그러지고, 당황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 못한 모습.
피를 쏟으며 허물어지는 그들을 뒤로한 채,
진은 탄창을 분리하며 정면으로 돌진했다.
앞서 점멸하는 시야로 남은 적들의 위치를 대강 살펴뒀다.
슬슬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한 눈에 총구를 이쪽으로 겨누는 갱단원이 담겼다.
"오, 오지 마! 시발새끼야!"
코앞으로 짓쳐든 푸른빛을 향해 놈이 발작하듯 격발했다.
하지만 진이 훨씬 더 빨랐으니.
자세를 낮추며 머리 위로 총알을 흘려보낸 뒤 개머리판으로 상대의 무릎을 비스듬히 내리찍었다.
"끄아아아악!!"
수수깡처럼 꺾인 다리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통에 힘이 들어간 몸이 뻣뻣하게 쓰러지니, 표적을 놓친 총구가 중첩된 반동에 의해 솟구쳤다.
눈먼 총알을 마구잡이로 흩뿌리면서.
거기에 누군가 맞아 쓰러졌다.
"아악!"
"보고 쏴! 등신아!"
"라이트 켜! 라이트부터 켜라고!"
"지랄하지 말고! 저 파란 거부터 쏴!"
고성이 뒤죽박죽 섞였다.
하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탄창을 갈아 끼운 진이 재차 방아쇠를 당겼기에.
드르르르륵!
찰나간 총성이 귓가를 때리자, 이번에도 서넛에 달하는 인원이 응전할 겨를도 없이 쓰러졌다.
이제 남은 적은 하나.
가게 밖에서 동료들을 엄호하고 있던,
진의 입장에선 가장 멀리 떨어진 놈이었다.
틱! 틱!
동시에 탄창이 바닥을 보였다.
아오. 하필.
진이 부랴부랴 몸을 날렸다. 동시에 직전까지 그가 있던 위치에 총알이 빗발쳐 그중 하나가 허벅지를 스쳤다.
진은 이를 악물었다. 오른쪽 다리가 불이라도 난 듯 뜨거웠기에.
권총탄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화약과 훨씬 기다란 총열에서 충분한 가속을 얻는 소총탄의 운동 에너지는 코뿔소도 일격에 잠재운다.
제아무리 진이라도 급소에 맞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는 소리.
그 사실을 진도 직감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외려 전신의 마나를 강하게 북돋우며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 바닥을 박찼다.
"······?!"
가늠자를 들여다보던 갱단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표적이 마치 포탄처럼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으니까.
그것도 지그재그. 믿을 수 없는 방향 전환을 선보이면서.
초인적인 완력. 이를 강화하는 마나의 활용이 불가능한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죽어-!"
갱단원이 뒤늦게 총을 쏴 갈겼지만, 이는 애꿎은 허공을 가르고 바닥을 맞힐 뿐이었다.
진이 총알보다 빠른 것이 아니라, 놈의 눈이 진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 호흡.
날숨과 들숨이 한 번 교차하는 시간.
무려 다섯 번의 방향 전환을 마친 진이 발을 크게 굴렀다.
바닥이 움푹 파이며 몸이 중력을 거스른 듯 높이 떠오른다.
일순 하늘을 나는 듯한 도약.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다리가 바람을 일으키며 아래로 떨어졌다.
콰직!
뒤꿈치에 정수리를 찍힌 갱단원이 찌그러진 머리 부피만큼 눈 코 입에서 피를 스프레이처럼 뿜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후우."
진이 더운 숨결을 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떠들썩한 총성이 연이어 울려 퍼진 싸움판은 주변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으니, 저기 골목 초입에서 힐끔힐끔 이쪽을 훔쳐보던 이들이 진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혹여나 불똥이 튈까 두려운 모양이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새로 산 옷이 핏물에 홀딱 젖은 상황이 어이가 없었을 뿐.
"이게 무슨 개난리···"
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건샵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러진 다리를 싸잡고 괴로워하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향해 으르렁대는 브로프를 발견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
노인이 씩씩거리며 남자의 옆구리에 연신 발길질을 가했다.
"아, 으, 악!"
남자는 그때마다 비명을 질렀는데 발길질이 아파서라기보단 그냥 다리의 통증이 극심한 모양새였다.
"경쟁 조직에 물건을 대줘? 너흴 담가 먹으려고 해?"
브로프의 발길질이 거세졌다.
그래 봐야 엉성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그 안에 실린 분노는 갈수록 커졌다.
"너희와 거래를 끊은 이유는, 너희가 어린것들로 배를 불리는 쓰레기였기 때문이다! 스무 살도 안 된 핏덩이를 개조하고! 트라우마를 포맷하고! 그 짓을 반복하다 백치를 만들었기 때문이야!"
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쟤넬 너무 편안하게 죽여줬구나.
절로 후회가 되더라.
"이 버러지 같은 도시에도 선은 있다. 할리파는 그 선을 넘었어."
브로프가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서 총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어떠한 변명도 듣지 않겠다는 듯,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남자의 머리가 크게 한 번 들썩이고 황동색 탄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후우. 후우."
브로프가 숨을 몰아쉬며 총을 휙 집어던졌다.
한동안 머리가 터진 시체를 노려보던 그는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눈길을 돌렸다.
"···넌 대체 뭐냐. 보아하니 평범한 싸움꾼은 아닌 거 같은데."
자신을 향한 말이 분명했지만 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 순간 머릿속에서 도파민이 뭉글뭉글 터져 나오고 있었기에.
「(완료!)굿 네이버」
다량의 경험치가 주는 상승감은 마약과도 같다.
그래서 더 열받는다.
마치 부모의 원수가 쥐여주는 용돈을 받고 헤실거리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라서.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지.
이 개고생을 했는데.
진이 마음을 다잡으며 내면을 관조했다.
아쉽게도 새로운 별을 밝히기엔 경험치가 조금 모자랐다.
하지만 마나 회로를 배운지 채 하루도 안 된 시점에 이 정도 성과라면 충분했다.
그렇게 진이 다시 눈을 뜨는데 코앞에서 브로프가 꽥 하고 소리쳤다.
"귀가 먹었냐─!"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요?"
"네가 대답을 안 하니까 그렇지. 다섯 번은 물었다. 그래서 정체가 뭐냐고."
"아 진짜! 손님이래도! 칼리파한테 추천받고 왔다고요!"
이 할배가 왜 이럴까 진짜.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노인네 성정에 질려버린 진이 브로프의 호칭을 어르신에서 할배로 격하했다.
그리고 그 할배가 중얼거리길.
"···칼리파라고?"
주름진 미간을 좁힌 브로프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아이의 추천이라면···솔로겠군. 신예냐? 처음 보는 얼굴인데."
"참 나. 이 와중에 내 신상명세가 중요해요? 누구 고맙자고 싸운 건 아니지만 이건 순서가 좀···."
"어, 음, 크흐흠."
진의 삐뚜름한 말에 브로프가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했다.
시선을 살살 피하는 게 찔리는 구석이 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미, 미안하게 됐다. 요즘 할리파 놈들 때문에 의심병이 도져서···내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한동안 중언부언하던 브로프가 이내 주름진 손을 내밀었다.
"브로프라고 한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진이 그 손을 맞잡았다.
"진이라고 불러요. 솔로왕이 될 남자니까 얼굴 잊지 마시고."
그제야 통성명을 마친 두 사람이 주변을 쓱 훑었다.
"그나저나 가게가 이 모양이 돼서 어쩐대요?"
"어쩔 수 없지. 할리파 놈들이 정신이 나갔기로서니 이런 미친 짓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한 내 불찰이지."
"보복은?"
"여기 다리 부러진 시체가 보스다. 할리파 갱은 이걸로 끝이야. 사업장이니 잔당 같은 것들은 처리하는 방법이 다 있으니 신경 쓸 거 없고."
그렇게 말하는 브로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긴 다운타운에서 총장사하는 양반이면 보통내기는 아니겠지.
근데 막 비명 지르고 그러지 않았나?
그리하여 진이 머릿속으로 브로프에 대한 평가를 정정했다.
야동 좋아하고, 겁도 많지만 왠지 그럴싸한 총팔이 할아범.
그때 브로프가 입을 열었다.
"손님 대접이 늦었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둘러볼 테냐?"
"여기서요?"
진이 엉망이 된 총기들을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침수차는 좀···"
그에 브로프가 큭큭거리며 입을 열었다.
"누가 여기서라더냐?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 따라와라. 특별히 특제 장비로 보여줄 테니."
< 12화 > 끝
ⓒ 오동냐무
=======================================
< 13화 >
브로프는 진을 지하실로 데려갔다.
그것도 비범한 방식으로.
아니 글쎄 벽에 걸린 총기의 방아쇠를 일정한 순서와 횟수로 당겼더니, 지하실로 향하는 입구가 열리더라.
하여 진이 감탄했다.
미쳤다.
이게 사이버펑크식 건샵?
물론 이는 일종의 트릭으로, 사실 브로프는 거치대에 숨겨진 버튼을 살짝 눌렀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진으로선 새삼스러운 눈길로 앞서 내려가는 백발 성성한 뒤통수를 바라볼 수밖엔.
"여기다."
그렇게 도착한 지하실은 다양한 크기의 철제 케이스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모르고 왔다면 물류 창고쯤으로 생각했을 그곳에서 브로프가 고개를 돌렸다.
"따로 찾는 물건은 있고?"
당연한 말이지만 없었다.
총기에 대해선 딱 대한민국 예비역 수준의 상식만 갖춘 진이라, 이제는 총기번호도 기억나지 않는 K2 정도를 제외하면 M4니 스칼이니 어그니 전부 게임에서 써본 게 전부다.
하여 고민 때문이 아니라, 진짜 몰라서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그게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었다.
브로프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달리 생각해 둔 게 없거든 키워드라도 몇 개 던져 봐라. 그 안에서 적당히 추려줄 테니."
그에 진이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음···. 권총인데 화력은 소총에 뒤지지 않으면서, 연발보단 단발에 특화된, 가끔은 근접전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그런 녀석이면 좋을 거 같은데."
"제법 구체적이군."
브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요구 사항을 충족하는 물건이라면 있긴 하다. 대신 필연적으로 중량이 엄청나지. 감당할 자신은 있고?"
진은 대답 대신 팔을 안쪽으로 굽혔다.
알통을 쥐어짜는 포징. 물론 두터운 항공 점퍼를 걸친 탓에 티는 안 난다.
그래도 그 뜻은 전해졌는지, 브로프가 헛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진도 피식거리며 가까운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구경거리라도 있으면 모를까. 사방이 전부 철제 상자뿐이라 싸돌아다닐 명분이 없다. 그렇다고 남의 물건을 막 열어젖힐 수도 없으니, 그냥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다행히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끙-"
어느새 다가온 브로프가 똥 싸는 기합과 함께 고급진 케이스 하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 크기가 심상찮더라.
"···뭐가 이렇게 크대. 소총 가져온 거 아녜요?"
"그리 착각할 수도 있지."
진이 반응이 퍽 흡족스러운지, 노인 특유의 클클대는 웃음을 흘린 브로프가 이내 케이스를 열었다.
"오."
진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내장된 검은색 실리콘 스펀지. 그 단색의 배경 아래 거대한 은빛 권총이 누워 있었다.
생김새만 보면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총이라 불렸던(예나 지금이나 사실이 아니다) 데저트 이글을 닮았다.
문제는 총신 길이가 족히 두 배는 된다는 것.
이 정도면 개머리판 없는 소총 아니야?
하여 머릿속을 스치는 문장.
···그것은 권총이라 하기엔 너무 컸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무거우며 그리고-
아 베르세르크 보고 싶다.
"그라비스707. 루거&돌만에서 만든 희대의 괴작이다. 전장 32cm, 중량 약 10kg이라는 무식한 스펙에 걸맞게 특수 제작된 .666 R&D 매그넘 총탄을 사용하는 모델이지."
이후로도 브로프는 다각형 강선이니, 자력식 반동완충기 같은 전문적인 용어를 읊어댔지만, 진은 귀만 후비지 않았을 뿐. 대부분의 설명을 흘려들었다.
그나마 흥미가 간 부분이라면 탄생 비화 정도?
"원래는 강화 인간, 정확히는 수인에게 팔아먹으려 기획된 무기였지만 휴먼 폼일 때의 휴대성 문제와 지나친 반동 이슈가 대두되면서 양산은 물거품이 됐지. 해서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단 3개뿐인 프로토타입 중 하나다."
"오······"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프로토타입?
미발매 제품이라는 소리네.
그럼 A/S가 좀 별로지 않나?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한 번 들어봐라."
총과 눈싸움하는 손님은 또 처음이었는지 브로프가 턱짓으로 재촉해왔다.
하여 진이 못 이기는 척 코를 쓱 훔치며 권총 손잡이를 잡았다. 10kg 정도야, 우습지·········는 않네?
"어떠냐? 아령 따위를 생각하면 큰코다치지."
히죽거리는 브로프의 말대로 아령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무거운 건 둘째 치고 무게중심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어서.
전부 글러먹은 생김새 때문이다.
30cm가 넘는 괴랄한 총신에 비해 손잡이는 일반적인 권총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으니, 지탱에 필요한 힘이 상상을 초월할 수밖엔.
이 상황을 모멘트니, 편하중이니 수학적인 공식에 빗대 설명할 수도 있지만 보다 확실한 예시가 하나 있다.
혹시 또라이 같은 간부를 만나, 기합이랍시고 K2의 총구를 손으로 감싸 쥐고서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세워본 적이 있는가?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자세로 10초를 버티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다.
심지어 K2의 중량은 탄창 미포함 3.37kg.
반면, 이 괴물 권총은 총신이 소총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다는 걸 감안해도 중량이 10kg에 달한다.
사실상 들고 조준하라고 만든 게 아닌 셈.
괜히 양산도 못하고 망한 게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정신 나간 물건을 한 손으로 들고 있는 진의 얼굴 또한 자못 심각했으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로프가 이해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버겁지? 내가 괜히 감당할 수 있겠냐 물어본 게 아니라니까. 그래도 다시 봤다. 그라비스를 한 손으로 들 수 있다니···. 네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잘 알았으니, 그건 이만 내려놔라. 그러다 손목 나갈라."
그에 잠자코 있던 진이 말했다.
"할배."
"······? 갑자기 어르신에서 할배?
당황한 브로프의 목소리를 끊고 진이 덧붙였다.
"그래서 이거. 성능은 확실한 거죠?"
"확실하고말고. 화력만큼은 어지간한···어···, 어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브로프가 눈을 크게 떴다. 진이 총구를 까딱거리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아까와 달리 훨씬 여유로운 표정으로.
"너, 너 괜찮은 거냐."
"안 괜찮을 이유가?"
"···슬슬 팔에 지진이 나야 정상인데? 진짜 무겁지 않아? 아깐 인상을 팍 쓰고 있더니만 지금은 왜 이렇게 멀쩡해?"
"음? 아아-, 그건 살까 말까 고민한 거고."
미발매 제품이라는 게 아무래도 좀 걸리잖아.
검증받은 물건이 아니란 소린데.
사실 진에게 그라비스의 중량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묵직한 그립감이 안정적이라 마음에 들었으니, 브로프의 설레발이 우스워질 지경이라.
이는 진이 주먹 성좌를 다 밝힌 초인이어서 그렇고,
종의 한계를 돌파해 진화하는 이레귤러라 그렇다.
아무튼 다 괜찮다!
미발매품인 것만 빼면.
"쓰다가 문제 생기면 고쳐주죠?"
"······"
"3년 무상 서비스. 뭐 이런 거 없나?"
"······"
"아니 왜 대답을 안 해. 그래서 얼마에요? 오늘 일도 있고 하니까, 시가의 30%···에이, 기분이다! 50! 50%만 낼게."
"···뭣?"
물 흐르듯 가격을 토막 치는 진에 브로프가 움찔했다.
뭐 이런 꼴통이 다 있지?
하지만 뭐라 따질 수도 없는 게, 저 꼴통이 생명의 은인이란 사실은 변함없어서.
그리하여 브로프가 귀에서 피가 나기 전에 백기를 들었다.
"······그래. 50%에 넘기마."
그러자 들려오는 목소리.
"튕기지도 않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낮춰서 불렀지. 그냥 30%로 하죠?"
브로프가 뒷목을 잡았다.
***
무려 275만 크레딧.
굿네이버에서 진이 지출한 액수였다.
있다가도 없는 게 돈이라지만, 총알이 빗발치는 난전 가운데서도 소중히 보관했던 품속의 거금이 거덜 날 때는 절로 손이 덜덜 떨리더라(결국 40%로 합의를 봤다).
10kg짜리 쇳덩이도 거뜬하던 팔이 지폐 다발 앞에서 벌벌거리는 모습에 브로프는 끝내 속에 있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고.
'야 이, 꼴통아. 힘 안 빼? 찢어진다?! 찢어진다고!'
여차여차해서 진은 그라비스707의 오너가 됐다.
총이라니.
이는 진에게 있어 의식주를 제외한 첫 소비라.
이성적으로 보면 앞으로의 솔로 생활을 위한 투자요, 감성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첫 선물이었으니.
괜히 허리춤의 특대 홀스터를 만지작만지작. 본의 아니게 지나치는 행인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물론 진은 퀘스트 창이면 모를까. 멀쩡히 제 갈 길 가는 사람 머리통에 방아쇠를 당길 사이코는 아니었으므로, 브로프가 입이 닳도록 칭찬한 그라비스의 위력을 확인하는 건 좀 더 나중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고로 진은 푹 쉬기로 했다.
화염탄에 직격당한 첫 의뢰부터, 뇌를 주물럭거리는 끔찍한 지식 전수에 총알이 빗발치던 굿네이버의 싸움까지.
슬슬 정신적으로 피로해지던 차다.
하여 20만가량 남은 크레딧을 휴식에 아끼지 않으니,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다가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볼이 터져라 음식을 쑤셔 넣고, 푹 자고, 싸고, 다시 먹고를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수요일 저녁이 돼, 럼펌펌펌에서 제키 제니 남매와 식사도 하고 안부도 주고받았더란다.
"처음에는 출력이 좀 떨어져서 위험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안정적으로 잘 작동해. 네, 네가 보기엔 어때?"
새로운 심장 임플란트를 끼고 온 제키는 간만에 만난 진을 어색해하면서도, 대화가 끊어지지는 않게 저 나름대로 노력하는 티가 역력했다.
진은 그 점이 싫지 않았다.
"확실히 전보단 소리가 좋네."
"그, 그래? 다행이다···. 아참. 이 말을 깜빡했네. 제니 얘. 다시 BH일 시작했어. 예전처럼 공익적인 작업은 아니고, 익명으로 편집이 필요한 영상물을 수주 중이야. 물론 일은 가려서 받고 있고."
"야. 그걸 왜 네가 얘기하는데?"
여느 여동생처럼 못마땅한 시선으로 제 오빠를 흘긴 제니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됐어, 너도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난 BH 임플란트가 없는데?"
"너야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잖아. 또 모르지. 네가 누군가의 머릿속 영상 자료를 뒤적여야 할 순간이 있을지도. 그때가 오면 연락하란 소리야."
진은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이후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럼펌펌펌 앞에서 작별했다.
다음에 보자는 인사와 함께.
"다음이라···"
진은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다음에 보자는, 그 별것 아닌 인사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서.
"···하루살이 주제에 약속은 무슨."
진이 별 한 점 없는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자신은 외로움에 익숙해졌을 뿐, 이 쓸쓸한 밤거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라고.
따박따박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면 그만이었을 190만 크레딧을, 굳이 식사로 상환하라 한 이유도 다 비슷한 맥락이었을지도 몰랐다.
진은 언제고 사람이 고팠으니까.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부랑자와 자신은 어울리지 않아서.
문뜩 인생 경로를 선택할 적 봤던 캐릭터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화면을 등진 채, 지평선을 가득 채운 회색의 마천루를 마주 보고 선 사내.
그는 도시의 들개요, 외로운 싸움꾼이니.
홀로 슬럼가를 제패하고 수많은 위험을 이겨낸 뒤, 높디높은 마천루의 꼭대기에 올라 저가 헤쳐온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결말을 운명이라 받아놓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한들.
배고픔이 두려워 강박적으로 음식을 입에 쑤셔 넣고, 불현듯 찾아오는 공황에 숨을 껄떡거리며, 네모반듯한 창에 혐오와 분노를 느끼는 누군가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인물이지 않았을까.
물론 여기엔 그 어떠한 의미도 가치도 없었다.
이 순간 다운타운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이는 키보드와 마우스로 움직이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제 두 다리로 걷고 호흡하고 바라보는 남자였으니까.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지만,
그럼에도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어느 순간 가로등의 간격이 띄엄띄엄 멀어졌다.
진은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어둠이 아닌, 가까운 모텔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몇 장 남지 않은 지폐로 숙박비를 계산하고,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한 뒤 깊은 잠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됐을 때.
시간을 확인하려 더듬더듬 주워 든 단말기에는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있었다.
[두 번째 의뢰 준비됐어. 솔로왕.]
< 13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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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
"오셨습니까."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진을 반겼다.
"안녕. 포우."
가볍게 인사한 진은 그대로 쭉 테이블까지 걸어 들어와, 일명 스툴이라 부르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칼리파한테 연락받고 왔는데."
"의뢰 말씀이군요."
"맞아."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점장님께서 잠시 다른 용무를 보고 계신지라."
"천천히 해. 나 시간 많아."
진은 그렇게 말하며 바 테이블에 팔뚝을 포갰다.
그러고는 진열대를 가득 채운 술병들을 쑥 훑었다.
라벨부터 화려한, 딱 봐도 비쌀 것 같은 녀석들이 투명한 유리 너머로 전시된 모습이 제법 그럴싸했다.
"···술 진짜 많네."
"이래 봬도 펍이니까요."
"위장 사업 아니었어?"
진이 악의 없이 물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더군요. 점장님이 섭섭하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닌 듯해도 가게 운영에 꽤 진심인 분이라."
"아, 미안.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어."
"아닙니다. 대부분의 링커 사무소가 겉과 속이 다른 것도 사실이니까요. 다만 저희 에넥도트는 그렇지 않다는 것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진이 그런갑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어느새 다가온 포우가 접시와 잔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쿠키랑 우유? 이야, 잘 먹을게."
그러잖아도 아침을 거르고 온 진이 앉은자리에서 간식을 박살 냈다.
순식간에 한 접시를 뚝딱 해치우고 우유로 입가심까지 하니 이보다 완벽할 수가 없더라.
딱 하나 아쉬운 게 솔티 앤 스윗이라고.
즉 단짠의 밸런스였으니, 쿠키로 배를 채우기 무섭게 칼칼한 김치찌개가 떠오르는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구나.
자신의 뿌리를 다시 한번 절감한 진이었다.
"그나저나 못 보던 장비가 생기셨군요."
"아. 봤어?"
포우의 말에 진이 반색했다.
좋은 물건을 사면 적당히 티를 내고 싶은 게 사람 심리라고 내심 언제 알아봐 주나 기다리던 차였다.
곧바로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서 테이블 위에 쿵!
그리고 목소리를 내리깔며 입을 열길.
"그라비스707. 전장 32cm에 중량 10kg의 괴물로 루···뭐시냐 그."
"루거&돌만 말씀입니까?"
"아 그래. 루거&돌만에서 만든 희대의 괴작이지."
왜 괴작이나면, 이게 처음에는 수인들을 위한 무기로 기획됐는데 어쩌고저쩌고······.
이렇듯 맛깔스럽게 이어져야 했을 이야기는 아쉽게도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에 끊기고 말았으니, 눈치도 없이 멀리서 칼리파가 다가오더라.
오늘도 어김없이 붉은 머리칼을 풍성하게 찰랑거리는 그녀가 특유의 씁쓸 달콤한 향기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 진. 많이 기다렸어?"
"쫌만 늦게 오지. 막 재밌어지려던 참인데."
"······?"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을까.
칼리파의 시선이 설명을 요구하듯 포우에게 가닿았고, 바텐더는 그저 옅은 웃음을 흘렸으며, 진은 입맛을 쩝 다시며 그라비스를 홀스터에 꽂아 넣었다.
해서 본론.
"그래서 어떤 의뢴데."
"뭐야, 둘? 나한테만 이러기야?"
칼리파는 짐짓 서운하단 뉘앙스로 말했지만, 정말로 서운한 건 아니었는지 어느새 테이블에 내려놓은 파일철 하나를 진에게 쭉 내밀었다.
"읽어 봐."
진은 그렇게 했고, 칼리파는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서류 첫 장이 사락 넘어가고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어리어 49, 통칭 뮤트타운. 40번대 구역답게 똥통이라는 점에선 다운타운과 큰 차이가 없지만, 이쪽은 사정이 훨씬 좋지 않아. 5년 넘게 이어지던 갱단의 전쟁이 막을 내렸거든."
"전쟁이 끝나면 좋은 거 아닌가?"
"공권력의 개입으로 끝난 게 아니니까. 구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에서 승자가 나온 거야. 모든 정적을 정리한 신흥 군벌 세력이 탄생한 거지."
때마침 진도 칼리파가 언급한 단락을 읽고 있었다.
"그게 더 비스트고?"
"맞아."
칼리파가 긍정하는 가운데 진은 작은 글씨가 빼곡히 새겨진 보고서에 시선을 옮겼다.
더 비스트(The Beast)
줄여서 TB.
야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갱단 전원이 수인인 조직으로 멤버 하나하나가 어중이떠중이 양아치완 질적으로 다른 실력자들.
심볼은 맹수의 발톱에 찢긴 듯한 비스듬한 3줄짜리 붉은 상흔, 리더는 타하라는 사자 수인.
그 밖에도 이런저런 정보가 기재된 글줄을 읽어 내려가던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보고 얘넬 전부 상대하라고? 사이즈가 너무 큰 거 같은데. 내가 아무리 미래의 솔로왕이라지만 이건 좀."
괜히 칼리파가 군벌을 입에 담은 게 아니더라.
운용하는 물자며, 장비며, 그 규모며 모든 것이 일개 갱단을 아득히 벗어난 수준이었다.
딸랑 클럽 하나 운영하던 스틸 핸즈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
다행히 칼리파는 단호했다.
"너 혼자 TB 전체를? 당연히 아니지. 이제 고작 두 번째 의뢰를 맡는 신예한테 그런 미친 짓을 시키는 링커가 어딨다고. 있어도 에넥도트는 아니야. 그렇지 포우?"
물론입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옴에 옅은 미소를 지은 그녀가 다시 진을 바라봤다.
"보고서를 더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번 의뢰는 TB와의 전면전이 아니야. 그들이 관리하는 물류 창고 하나를 파괴하는 일이지."
그에 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물류 창고를 파괴해?
그렇다는 건.
"TB에 맞서는 잔존 세력이 있나 보네."
"그래, 맞아."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파를 확인한 진이 속으로 자화자찬했다.
캬. 날카로운 추측. 나 좀 섹시했다.
물론 이는 사건의 개요를 조금만 따져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이요, 보고서 몇 장만 넘겨 보면 사진부터 캡션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세하게 기재된 정보라.
기껏 에넥도트에서 깔끔히 정리해 준 문서는 마저 읽지 않고, 제 추측이 맞았노라 기뻐하는 진이었다.
하지만 칼리파는 굳이 거기다 대고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 의외로 솔로 중에선 글줄보다 구두를 통한 정보 전달을 선호하는 이들이 적잖은 탓이었다.
글이 3줄을 넘어가면 현기증을 느끼는 부류들.
그런 이유로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은, 진 역시 그런 스타일의 솔로겠거니 하는 착각의 결과였다.
"네 예상대로 현재 뮤트 타운에는 저항군이 존재해. 전쟁에서 승리한 TB의 행보가 독재 정권으로 거듭날 조짐을 보이자, 이에 반발해 뭉친 조직이라 생각하면 편할 거야. 당연하지만 이번 일을 계획한 것도 그들이고."
"오호."
진이 눈을 빛냈다.
저항군이란 키워드에 고향의 지식이 자연스레 수면 위로 떠오르더라.
대한민국 임정과 의열단,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스타크래프트의 레이너 특공대······
아 얘넨 혁명군인가?
진이 독재 자치령에 맞서 싸운 용사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사이, 칼리파가 입을 열었다.
"저항군이 약속한 보수는 3천만 크레딧. 물류 창고를 파괴하기 위한 폭발물은 그쪽에서 제공하기로 했어. 그래서 어떻게 할래. 맡을 생각 있어?"
"······?"
한창 딴생각 중이던 진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얼마라고?"
"3천만 크레딧."
꽈릉!!
진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동시에 3분할로 쪼개진 자아가 한마디씩 내뱉길.
"삼!"
"천!"
"만!"
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숫자인가.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거기에 곱하기 3?
그거 핫도그로 환산하면 몇 갠데.
한 줄로 세우면 몇 미터냐고.
실로 우주적인 공포!
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남들 눈엔 아무래도 정상처럼 보이진 않는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안색을 살피는 칼리파의 시선을 뒤로한 채, 가까스로 정신줄을 부여잡은 진이 격언 하나를 떠올렸다.
공짜 점심은 없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말이었으니, 지금 상황에선 공짜 점심이 3천만 크레딧 되시겠다.
세상천지 쉽게 버는 돈이 어딨겠는가.
살 떨리는 보수가 말해주듯, 분명 첫 번째 의뢰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위험한 일일 터.
이럴 때일수록 경거망동하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
은 개뿔.
돈이 3천만이다.
그리고 어차피 퀘스트 때문에 거절도 못 해.
그와 동시에 네모반듯한 창 하나가 나 불렀냐는 듯 눈앞에 떠올랐다.
「3의 거름망」──────────────
3번의 의뢰. 3개의 거름망.
진정한 솔로로 거듭나기 위한 조건이었다.
-진행 상태 (1/3)
-의뢰 거절 시 실패
*보상 퍽 XP 10,000
*(알 수 없음) 스토리 해금
────────────────────
혐오스러운 상판대기에 진의 미간이 꿈틀.
마음 같아선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용할 건 이용하자. 받아먹을 건 받아먹자.
나는 절대 시스템에 굴복한 게 아니야.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거지. 그러니까 꺼져.
"좋아. 해볼게"
진이 수락했고, 퀘스트 창은 스르륵 사라졌다.
그 너머로 칼리파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라.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어."
그러더니 벽걸이 시계를 힐끔. 혼잣말을 중얼거리길.
"그럼 두 명인가···묘한 조합이 돼버렸네."
"뭐라고?"
"너랑 함께 이번 의뢰를 진행할 솔로가 있거든. 이제 곧 도착하지 않을까 싶은데."
"엥?"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사람이 더 있다고?
"놀랐어? 사실 이것도 보고서에 다 기재된 내용이야. 혹시라도 마음이 변했다면 지금이라도 거절해도 좋아."
"아 상관 없어."
빈말이 아니라 진은 오히려 안심했다.
그래. 3천만짜리 의뢰를 나 혼자 처리하라고 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래서 누굴까.
이왕지사 예쁜 사람이면 좋을 거 같은데. 흠흠.
미션, 파트너, 여성, 미녀.
그리하여 진이 본드걸을 떠올리는 사이.
딸랑-
에넥도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진, 칼리파, 포우.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왔어? 때마침 네 얘기 중이었는데."
"오셨군요."
누가 올지 미리 알고 있던 두 사람과 달리,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진의 얼굴은 똥 씹은 것처럼 굳고 말았으니.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라.
"뭐야.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도깨비 가면 위 눈살이 팍 찌푸려졌다.
***
펜릴은 차라리 혼자면 혼자 했지. 진과는 함께하지 않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아직 거름망도 통과 못한 신예 나부랭이의 뭘 믿고 같이 일을 하냐는 것이 주된 이유였는데, 실상은 진을 훑는 눈빛이며 말투며 다 아니꼬운 것이 그냥 개인적인 감정의 개입이 훨씬 큰 듯했다.
그러니 진도 열이 받을 수 밖에는.
"그래서 신예 나부랭이한테 줘 터지셨어?"
"뭐? 이 새끼가···!"
그에 펜릴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고,
이에 질세라 진도 그라비스를 움켜쥐니.
곁에서 보던 칼리파가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만. 우리 좀 프로페셔널해질 순 없을까?"
쯧.
진이 혀를 차면서도 손아귀에서 힘을 풀자, 칼리파는 작게 고마워 미소 지은 뒤 여전히 씩씩대는 펜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펜릴. 분명 너도 사전에 동의했을 텐데. 협업할 자신이 있는 솔로라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다고 말이야."
"그건 저런 초짜까지 포함한 게···!"
"펜릴."
차분한 어조로 말을 끊은 칼리파가 뒷말을 덧붙였다.
"진을 깎아내리는 건 그쯤 해둬. 너를 위해서도."
그에 언젠지도 모르게 살짝 길어졌던 펜릴의 주둥이가 안으로 들어가니, 옆에서 지켜보던 진이 흠칫했다.
뭐야. 언제 변했어?
그사이 칼자루에서 손을 거둬들인 펜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내가 좀 흥분했군."
"그래. 베테랑이면 베테랑답게 해보자고."
팽팽하던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칼리파가 테이블 위의 파일철을 집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작전 계획부터 꼼꼼하게 살펴볼까?"
하여 늑대인간 본드걸을 맞이하게 된 진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 14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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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
로스트 시티는 초거대 도시다.
압도적인 규모만큼이나 유구한 역사는, 그 기원이 무려 용이(놀랍게도 상상하는 그 드래곤이 맞다) 존재하던 시절에 닿아있으니.
이는 아주 오래전.
위대한 일곱 가문과 인류 최초로 사이버스페이스를 발견한 선견자 하나가 뭉쳐 시작된 이야기라.
···(중략)···
이후 수많은 갈등과 조정의 연속 끝에 로스트 시티는 불안정한 중앙집권 체제에서 구획자치라는 분권화를 이루니 이는 시정부와 가문. 그리고 기업 간의 첨예한 이권 다툼이 발생한 원인으로 평가받는다.
···(중략)···
시간이 흐르며 인구 밀집 현상이 큰 문제로 대두되자, 시정부 측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주거구역을 확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발한 기업과 가문 간의 전쟁으로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면서, 정부 주도하에 야심 차게 진행되던 사업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이때 버려진 구획이 오늘날의 40번대 구역이다.
이후 수많은 갱단과 전범들이 이곳을 점거하면서······
······
······
진이 디스플레이를 아래서 위로 쓱쓱 훑었다.
더 이상 화면이 내려가지 않을 때까지 까딱거리던 엄지를 치우자, 이 포스팅이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알람 설정을 해달라는 문구가 보였다.
진은 그 요구대로 하는 대신 댓글란을 켰다.
-로스트 시티의 역사는 공기다. 분명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 줄 요약 좀.
-순수주의자 병신새끼들 다 뒤졌으면. 순수주의자 병신새끼들 다 뒤졌으면. 순수주의자 병신새끼들 다 뒤졌으면. 순수주의자 병신새끼들 다 뒤졌으면.
여기도 똑같네.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진이 이내 화면을 끄고 단말기를 품에 찔러넣었다.
그러고는 눈동자만 슬쩍 움직여, 운전대를 잡고 있는 펜릴을 힐끗거렸다.
어색해 죽겠네.
진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불편한 분위기의 차 안이 얼마 만이더라.
아마 여행 도중에 바람핀 걸 들킨 여자친구를 집까지 태워줬을 때 같은데, 지금 생각해도 아주 나쁜 년인 게 아무리 관계가 끝장났다고 해도 기껏 데려다준 남친한테 고맙다, 미안하다, 잘 살아라 같은 형식적인 말도 없이 홀랑 내려버리더라.
그래놓고선 새 오빠한테 전화로 헤어졌다고, 이제 속 편히 만나자 했겠지?
그냥 휴게소에 버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
"후."
진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사는 세상이 달라진 전여친의 만행 때문이 아니라, 그때와 비견되는 무거운 공기가 영 불편해서.
괜히 단말기 네트워크로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하고, 딴청을 피우고,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한계가 있더라.
그리하여 진이 결심을 굳혔다.
좋든 싫든 한배를 탄 마당에 언제까지 이렇게 꿍해있을 순 없지 않겠는가. 고추 달린 새끼들이 유치하게 말이야.
해서 큼큼 목청을 다듬고 입을 열길.
"거···접선지까진 얼마나 남았대?"
"······"
"많이 먼가?"
한 번은 무시했던 펜릴이었지만 두 번은 아니었다.
도깨비 가면 위로 보이는 콧잔등이 씰룩거리다 싶더니 이내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2시간은 더 가야 한다."
"아직도?"
"누가 들으면 어디 옆 동네 놀러 가는 줄 알겠군."
"그건 아니지. 근데 솔직히 좀 새롭긴 해. 다운타운 밖으로 나가는 게 처음이라."
진이 창밖을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내뱉은 말에 펜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운타운이 고향인가?"
"아니. 고향은 따로 있는데."
펜릴이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하는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다시 시선을 정면에 두니 이러다 다시 침묵이 찾아올 판이라.
다급해진 진이 입을 열었다.
"그!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펜릴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물었고,
진은 머릿속에 없는 질문을 쥐어짜냈다.
"수인으로 변신할 때마다 팬티 찢어지고 그러냐?"
"······"
그렇게 침묵이 찾아왔다.
***
모든 구획은 게이트를 통해 입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당연히 펜릴과 진은 피해야 할 방법이었다.
둘은 물류 창고를 파괴하기 위해 뮤트타운을 방문하는 상황이었기에, 게이트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카메라에 얼굴이 찍히는 불상사가 생겨선 안 됐으니까.
접선지가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멀쩡한 길로 진입할 수 없으니, 불법적인 루트를 채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도와줄 존재가 자신을 알버스라 소개한 저항군 소속의 남성이었으니.
"일단 이것부터 써."
접선지에서 조우한 그는 서로의 신원을 확인하자마자 대뜸 방독면을 내밀더라.
"음?"
진이 그걸 주섬주섬 받아 쓰면서 생각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한 용도인 건가?
아니었다.
알버스가 안내한 장소는 오염수가 줄줄 흐르는 낡은 하수도였기에.
"인근 공장 부지에서 폐수를 무단 방류하거든. 정화 시설을 전혀 가동하지 않아서, 각종 중금속이 뒤섞인 건 기본이고 COD 수치도 300을 훨씬 웃돌아. 이 정도면 그냥 독극물 수준이지."
그에 진이 흠칫. 이거 완전 폴아웃이잖아.
"···잠시만. 그럼 갑자기 폐수를 방류하면 우리 다 쓸려 내려가는 거 아니야?"
"걱정 마. 방류 날짜는 모레니까."
불안한데.
진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방독면을 끼고 있어 티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곳이 아니고서는 TB의 눈을 피하기가 쉽지 않거든."
알버스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하수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좁아진 시야, 불편한 호흡 속에 얼마나 걸었을까.
지상으로 연결되는 철제 사다리 앞에서 알버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했는지 바닥에 나란히 놓인 커다란 가방 두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옮긴다고 우리 애들이 피똥 쌌지. 너흰 우리와 다르게 거뜬하겠지?"
진이 무슨 말인가 싶어 가방을 들어보니 확실히 묵직하더라.
체감상 50kg는 나가는 듯했으니. 실제 무게는 그보단 가볍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평범한 성인 남성이 감당하긴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초인에겐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하여 진이 유치원생 소풍 가방 메듯 아무렇지 않게 알버스를 바라보니, 이는 강화인간인 펜릴도 똑같아서.
"···역시."
두 사람을 보며 작게 감탄한 알버스가 입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건 대구조물폭약 2정과 원격 기폭장치야. 기폭장치의 작동 범위는 100m고, 정확히 120초 후에 폭발하도록 설계됐어. 제대로 설치하면 순식간에 건물을 주저앉힐 녀석이니, 미리 안전한 위치로 피하는 거 잊지 마. 뭐 알아서 잘들 하겠지만."
이후 폭탄을 설치하는 요령 및 재접선 위치를 추가로 설명한 알버스가 손바닥을 가볍게 마주쳤다.
"내 얘긴 이걸로 끝. 더 궁금한 거 있어? 없으면 이만 헤어지자고."
그러고는 몸을 돌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행운을 빈다."
그렇게 알버스가 떠나간 뒤.
사다리를 오른 진과 펜릴이 맨홀 뚜껑을 밀고 지상에 발을 디뎠다.
답답한 방독면을 벗고 올려다본 하늘은 어느새 짙은 쪽빛으로 물들어있었으니, 어느새 도깨비 가면을 하관에 채운 펜릴이 까딱 손짓했다.
"가자."
뮤트타운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다.
언제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음습한 골목길은 다운타운이나 여기나 매한가지였으니까.
사실 굳이 차이를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었지만, 진은 이곳에 관광이 아닌 의뢰를 해결하러 왔단 사실을 상기했다.
지금 어깨에 짊어진 가방 안의 내용물이 돗자리와 도시락 따위가 아닌, 건물을 날려버릴 폭탄이라는 것도.
그래서일까.
묘한 긴장감이 집중력을 높이자 주변 환경이 보다 또렷하게 오감으로 와닿았다.
차갑게 흐느끼는 달.
피부에 스미는 어둠.
고요하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
담뱃내 그윽한 경비병의 잡담.
"확실해. 여섯 명이야."
진이 벽 밖으로 빠끔 내밀고 있던 머리를 집어넣으며 말하자,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펜릴이 반응했다.
"전우조로 둘씩 세 팀이라. AI 터렛도 없고. 방비는 느슨한 편이군."
"느슨한 거 맞아? 쟤네 전부 수인이라매."
너 같은.
이라는 뒷말은 붙이지 않았다.
뭔가 뭔가 인종차별적인 말 같아서.
그때 펜릴이 대답하길.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TB는 더 이상 수인들의 집단이 아니야. 정확히는 수인들'만'의 집단이 아니지. 구획 전체를 아우르는 마당에 구성원을 가려 받아선 능률이 안 나오니까. 그런 이유로 저기 저 자식들은 승자에 빌붙은 기회주의자 혹은 돈 받고 고용된 용병일 뿐이야. TB의 원년 멤버들은 전원 간부로 신분상승한 지 오래라, 이 야밤에 순찰이나 돌진 않거든."
"하긴."
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히 개국공신이란 말이 있겠는가.
힘들 때도 어려울 때도 함께였으니, 비록 같은 배에서 나오진 않았을지언정 우린 형제다! 외치는 도원결의식 친목질은 고대부터 내려온 승자들의 유구한 전통이었기에.
"물론 창고 안에는 간부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관없어. 마주치면 제거한다. 그뿐이야."
펜릴이 그렇게 말하며 벽에서 등을 뗐다.
"슬슬 움직일까. 계획은 잊지 않았겠지."
"지정된 위치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곧장 건물을 벗어난다. 기폭장치는 조우한 뒤 함께 누르되, 약속된 15분이 지나도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땐 혼자라도 격발. 맞지?"
"그래."
고개를 끄덕거린 펜릴이 머리를 좌우로 뚝뚝 꺾으며 말했다.
"발목 잡지 마라."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달빛 아래서 사라졌다.
뿌옇게 솟구치는 흙먼지. 어느새 저만치 달려나간 뒷모습이 보인다.
엄청난 속도였다. 수십kg짜리 폭발물을 짊어지고 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늑대의 속도는 시속 60km에 달한다고 했던가.
순식간에 사담을 나누는 경비들에게 다다른 펜릴이다.
"누구···!"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경비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펜릴은 이미 그들의 등 뒤에 있었다.
"컥!"
"끄윽!"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목덜미를 부여잡으며 쓰러지는 경비 뒤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이 보였다.
그 끝에 날카롭게 솟은 손톱까지도.
부분 변화라.
진이 감탄하며 가방끈을 아래로 바짝 조였다.
넋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사전에 합의한 15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으니까.
쾅!
마찬가지로 바닥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 진이다.
다만 앞서 펜릴이 돌진한 창고 정문이 아닌, 부지를 크게 우회해 뒷문을 노렸다.
4층 높이의 콘크리트 물류 창고는 폭약 한두 개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단발로 그런 게 가능하려면 지진폭탄이나 벙커버스터쯤은 되야한다고 했던가.
하여 구조적으로 취약한 포인트를 저항군을 통해 사전에 입수했으니.
펜릴이 지하 1층과 지상 1층을.
진이 지상 2,3층을 맡기로 합의를 본 상태다.
즉 서로의 행동반경이 겹치지 않는다.
또한 겹쳐서도 안 된다.
두 솔로가 서로 다른 곳에서 난리를 피우면 저들도 큰 혼란을 겪을 테니까.
꾹.
진이 나아가는 발끝에 힘을 실었다.
눈에 띄게 가까워지는 창고 뒤편. 주차된 화물차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선 그곳에 담배를 태우는 경비가 있었다.
"쓰읍. 후─"
곧 닥칠 미래는 꿈에도 모른 채, 연기를 뿜어내는 얼굴이 여유로웠다.
어찌나 태평한지 곁에 있는 동료에게 담뱃갑을 내밀 정도로.
"너도 한 대 빨래?"
"좋지."
"시발 드럽게."
앞니로 담배를 빼가는 동료를 보며 인상을 쓴 경비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그러고는 부싯돌을 찰칵.
불을 붙여주려는 순간.
콰직!
담배를 꼬나문 동료의 얼굴이 벽에 틀어박혔다.
핏물이 얼굴에 튄다.
"···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으깨진 동료의 머리통을 바라보던 경비는 한 박자 늦게 꿈틀거리는 뒤통수를 움켜쥔 손을 발견했다.
"적···!"
반사적으로 겨눈 총구가 불을 뿜는 일은 없었다.
반응할 새도 없이 날아든 주먹이 얼굴에 꽂혔기에.
쿵.
안면이 함몰된 경비가 풀썩 주저앉았다.
경험치가 들어왔으니 굳이 생사를 확인할 필요가 없는 바.
진이 곧바로 닫힌 철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15화 > 끝
ⓒ 오동냐무
=======================================
< 16화 >
창고는 거대했다.
일명 랙(Rack)이라 부르는 아파트 3층 높이의 거대한 선반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있으니.
진의 고향시로는 창고형 할인마트인 미국의 C브랜드, 마찬가지로 창고형 가구 매장인 스웨덴의 I브랜드와 매우 흡사하달까.
왜 저항군이 이곳을 타격하려는지 이해가 가는 게.
이만한 물량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파괴한다면 TB 측에 막심한 손해를 입힐 수 있을 터.
그런 생각 속에 진이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지하와 지상 1층은 펜릴의 몫이었기에, 여기서 한가로이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하여 2층을 건너뛰고 바로 3층으로 직행하니, 이는 역순으로 내려와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
타다닷!
난간대를 잡고 층계참에서 커브를 돌던 진의 눈에 배를 긁으며 계단을 내려오는 사내가 담겼다.
"어?"
침입자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허리춤에서 총을 뽑는 반응이 달려드는 진에 비해 현저히 느렸다.
퍽!
복부에 주먹을 맞은 사내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부터 바닥에 고꾸라졌다.
부딪히는 소리가 좋지 못했다.
쓰러진 자세 그대로 움직임이 멎은 사내를 뒤로한 채, 3층에 다다른 진은 곧바로 다목적실이라 적힌 문짝을 걷어찼다.
각종 가재도구 뒤편으로 커다란 기둥이 보였다.
본래 창고형 건물은 내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판넬 따위의 경량화 된 자재를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처럼 콘크리트 외벽에 복층 형태인 경우, 안정적인 구조를 위해 필연적으로 건물 중심을 가로지르는 코어가 있기 마련이었으니.
그게 눈앞에 보이는 기둥이요.
폭발물을 설치할 포인트 되시겠다.
찌익-
곧바로 가방을 내려놓은 진이 지퍼를 열고, 그 안에서 큼지막한 철제 원통을 꺼내 들었다.
마치 꽁치캔을 좌우로 크게 늘린 듯한 단순 무식한 생김새였으나, 그 안을 꽉꽉 채운 건 지구의 그것보다 진보된 폭발물이다.
해서 이름부터가 대(對)구조물폭약.
물론 진은 이 녀석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그저 제대로 터지기만 하면 건물 하나쯤은 수월하게 주저앉힐 수 있다던 알버스의 말을 떠올렸을 뿐.
더불어 폭탄을 설치하는 요령도.
기왕이면 매설을 부탁했지?
그렇지 않으면 충격파를 비롯한 에너지가 대기 중으로 흩어진다던가.
진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고는 기둥 외벽을 연거푸 쾅쾅쾅!
균열이 생긴 콘크리트를 파내고, 다시 주먹을 휘둘러 안을 넓히길 반복한 뒤 그 틈새 안에 폭약을 쑤셔 넣었다.
당연하지만 원래 매설은 이런 식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콘크리트라니?
삽질하면 파낼 수 있는 맨땅도 아니고.
사실 이는 엄청난 무게의 폭탄 가방을 아무렇지 않게 메는 두 솔로를 보며 알버스가 즉석에서 제안한 방법으로.
너희 정도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심리가 작용한 요구였다.
즉 부탁한 알버스조차 반신반의. 되면 좋고 아니면 말라는 식으로 툭 던진 말에 불과했으니.
아 그런 거 몰라.
진은 했다.
하라니까. 할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1차 폭탄 매설을 끝낸 진이 움직이려는 찰나.
웽웽웽웽─!!!
벽면의 경광등에서 붉은빛이 요란하게 회전하며 창고 전역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거기에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까지.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챈 TB가 대응에 나선 게 분명했다.
짐작건대 펜릴 쪽에서 일이 터진 모양.
애초에 잠입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이게 자연스러운 수순이긴 하다.
물론 진은 한마디를 덧붙였지만.
"발목 잡지 말라더니···!"
한결 가벼워진 가방을 둘러멘 진이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서둘러야 했다. 첫 번째 폭탄은 큰 어려움 없이 설치했지만, 경보가 울리기 시작한 이상 지금부터는 얘기가 다를 터.
아니나 다를까. 아래서부터 계단을 밟는 발소리들이 점점 커지나 싶더니 무장한 병력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2층으로 내려가던 진과 3층으로 올라오던 그들의 시선이 층계참을 사이에 끼고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다음 순간.
"쏴!"
누군가의 외침에 선두에 선 TB측 경비 두 사람이 선제 사격을 시작했다.
각각 심장과 머리를 노린 총구가 불을 뿜으니.
일순 느려진 시간 속.
진이 마나 회로라는 액셀을 전력으로 밟았다.
두두두두두!!
탄환이 벽을 때려 콘크리트 파편이 와르르 쏟아지는 가운데, 코앞에서 표적을 놓친 경비의 눈에 지면으로 내리꽂히는 푸른빛이 담겼다.
빠각!
공중에서 상대의 머리통을 걷어찬 진이 그대로 경비들 사이로 착지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더운 숨결.
당황한 적들의 눈빛이 적의로 물드는 데는 찰나면 충분했으니.
복싱에는 토투토라는 말이 있다.
Toe-To-Toe.
이는 서로의 발끝이 닿아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펼쳐지는 정면대결을 뜻하는 단어라.
이 말을 1대 다수에 적용할 수 있다면 분명 지금과 같은 그림이 나올 터였다.
"죽어!!!"
경비 하나가 허벅지에서 뽑은 검을 찔러왔다.
진은 고개를 젖혀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뻥 뚫린 상대의 안면에 어퍼컷을 선사했다.
아래턱이 박살 난 경비가 채 쓰러지기도 전,
누군가 뒤에서 진을 끌어안듯 붙들었다.
경비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거한이었다.
"잡았어!"
그에 진의 정면에 선 다른 경비가 권총을 뽑았다.
망설임 없이 머리를 겨눈 총구가 불을 뿜으려는 순간.
진이 두 다리를 공중에 들어 그대로 상대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 반발력에 진을 붙들고 있던 거한의 몸이 주르륵 떠밀리자, 그와 동시에 진이 앞으로 숙인 머리를 세차게 뒤로 젖혔다.
꽈직!
코뼈가 함몰된 거한이 눈을 까뒤집고 쓰러짐에, 단단하게 옥죄던 팔에서 저절로 힘이 풀리더라.
그를 뿌리친 진이 곧바로 주먹을 내질렀다.
거기에 턱을 맞은 또 다른 경비의 손에서 역수로 쥔 칼이 뚝 떨어지니, 이를 허공에서 낚아챈 진이 거칠게 상체를 휘돌렸다.
"······컥!"
곧게 뻗은 손끝 너머. 목에 칼날이 박힌 마지막 경비가 풀썩 쓰러졌다.
뒤통수에 대고 방아쇠를 당길 심산이었는지, 한 손에 권총을 꽉 쥔 모습이었다.
"어우 씨. 터질까 봐 조마조마했네."
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느샌가 늘어난 가방끈을 아래로 꽉 조였다.
혹시라도 격렬한 움직임 도중에 폭약이 터지지 않을까 염려한 혼잣말이었는데, 사실 그럴 일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흑색화약과 달리 현대에 개량된 폭약은 매우 둔감해서 불을 붙여도, 일반적인 고형원료가 타듯 그냥 타기만 할 뿐이니까.
괜히 뇌관까지 달아가며 2중, 3중으로 폭발시키는 게 아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더라도 심적으로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한시름 놓은 진이 다시 걸음을 움직여 2층에 도착한 때였다.
"왜 이렇게 시끄럽나 했더니 쥐새끼가 있었구만?"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복도 끝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 곳곳을 도배한 피어싱,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갯빛 물을 들인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카락.
그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사내였지만, 정작 진은 그의 오른쪽 팔뚝에 새겨진 문신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마치 맹수의 발톱에 긁힌 듯한 세 줄짜리 상흔이 말해줬다.
그가 TB의 원년 멤버.
즉 수인이라는 것을.
"너 저항군이지?"
대답을 바라고 던진 말이 아닌지, 사내가 혀를 날름거리며 뒷말을 이어갔다.
"하여튼 쥐새끼들 아니랄까 봐 눈치는 존나게 빨라요. 여기에 뭘 보관하는지 벌써 눈치를 깐 모양이지?"
그에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물류 창고를 파괴한다는 말을 들었을 뿐.
무엇을 보관하고 있는 물류 창고인지는 들은 바가 없어서.
하지만 고민을 길게 가져갈 틈이 없었다.
"뭐가 됐든.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씹쌔야."
다가오며 보폭을 서서히 넓힌 사내가 어느 순간 껑충 뛰어올랐으니까.
후웅!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발길질에 진이 양팔을 X자로 교차한 순간.
사내는 걷어찰 듯하던 다리를 회수하며 느닷없이 입을 쩍 벌렸으니.
휘리리릭!
그 안에서 탄력적인 기세로 쏘아진 혀가 무방비하게 노출된 진의 목을 친친 휘감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미처 대처할 틈도 없이 발이 땅에서 떠올랐다.
쾅!
그대로 벽에 충돌한 진이다.
뒤통수가 먼저 닿은 탓에 한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잠시간 끊긴 의식이 회복되기 무섭게 이번에는 반대쪽 벽이 그를 반겼다.
콰아앙!!
그다음은 천장, 그러고는 다시 바닥.
순식간에 상하좌우 모든 벽면을 들이받은 진이 쿨럭- 마른기침을 내뱉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당장이라도 목뼈를 부러뜨릴 듯 죄어오는 쇠심줄 같은 혀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핏발 선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니.
어느새 알록달록한 비늘에 휩싸인 카멜레온 대가리가 돌출된 눈을 떼구루루 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살아있다고? 너 뭐냐?"
진이 이를 악물었다.
카멜레온 수인?
생긴대로 노네.
입에서 소리가 나오질 않아, 험악한 눈빛으로 속내를 대체한 진이다.
이렇게 된 이상 문답무용이라고.
그가 깜빡깜빡 흐려지는 의식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마나를 일으켰다.
"···뭣?!"
푸른빛을 휘감는 진의 모습에 카멜레온 수인이 흠칫.
"순수주의자?"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놈이 재차 혀를 채찍처럼 휘두르려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체중을 최대한 살려 몸을 뒤로 기댄 진이 팽팽하게 늘어난 혀를 한 손으로 잡고 당기기 시작했으니까.
엄청난 힘에 몸이 질질 끌려가기 시작한 수인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이 힘은?
왜 기절하지 않지?
지금이라도 풀고 거리를 벌릴까?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난 얼굴로 힘을 쓰는 저 또라이는 진심으로 자신을 코앞까지 끌고 올 셈인지,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손목을 돌려 혀를 팔뚝에 휘감고 있었다.
이제 와서 목을 풀어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수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꿈틀.
"가까이 가면 뭐 어쩔 건데!"
오히려 전진을 택한 놈이 양팔을 휘둘러, 날카로운 손톱으로 진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피를 철철 흘리는 상대의 모습에 잔뜩 흥분한 파충류 대가리가 그렇게 소리친 순간.
철컥.
은빛의 총구가 차가운 감촉으로 이마에 닿았다.
타앙──!!
엄청난 반동에 튕겨 나간 진이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케헥! 쿨럭! 컥! 커헉!"
시뻘건 얼굴로 한계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내길 한참.
간신히 들뜬 호흡을 가라앉힌 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 카멜레온 수인이 우뚝 서 있었다.
머리통이 사라진 채.
"···성능은 확실하네."
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른손에 쥔 거대한 권총을 바라봤다.
역시 그라비스707.
전장 32cm에 중량 10kg.
수인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인의 파괴자. 대수인용 결전병기?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진이 속으로 횡설수설했다.
뇌로 공급되는 혈류가 오랫동안 차단된 탓이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족히 10번은 기절했을 상황이었으니, 한동안은 상태가 메롱일 수밖엔.
당연하게도 판단력 또한 엄청나게 떨어진 상태라.
진즉 쏴도 됐을 그라비스를 코앞에서 갈긴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덕분에 상대가 피할 틈조차 없었으니,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었지만.
"후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 진이 3층에서 그랬듯 2층에도 폭탄을 매설했다.
단말기를 확인하니 약속된 시간까지 5분 남짓한 상황. 이만하면 탈출까진 넉넉하다 판단한 그가 침착하게 기폭장치를 품에 찔러넣었다.
이후 계단을 내려가며 1층의 동태를 살피는 순간.
콰앙!!
거센 폭음과 함께 누군가 선반에 처박혔다.
처음에는 펜릴에게 당한 경비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진은 이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진 건, 경비가 아닌 거대한 늑대인간이었으니까.
"펜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제법 튼튼하군. 얼마나 더 버틸지 궁금한데."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진의 뒷덜미를 자극했다.
동시에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위기!)??? ???」──────────
감당하기 어려운 적.
탈출 요망.
─────────────────
< 16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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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
낯선 세상에 떨어진 지도 어언 1년. 하고도 몇 주.
그간 진에겐 참 많은 위기가 있었다.
총에 맞고,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부서지고.
열흘을 굶고, 식중독에 사경을 헤매고.
여름에는 일사병, 겨울에는 동상까지.
죽지 못해 살아있던 순간과, 죽을 힘조차 없던 끔찍한 나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건 또 뭐야.
감당하기 힘든 적?
탈출하라고?
평소의 진이었다면, 대문짝만하게 시야를 가린 상태창에 침이라도 뱉었을 터였다.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분노 가득한 혼잣말을 덧붙이면서.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굳이 상태창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의 불길한 존재감을.
그때였다.
"···음, 하나가 더 있었나?"
마치 길가의 벌레를 발견한 듯한 건조한 목소리.
그에 진이 흠칫. 난간에서 거리를 벌리는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후려쳤다.
정확히는 그가 발 디딘 철제 계단 전체를.
터어어엉!!
반응할 틈도 없이 튕겨 나간 진이 와류에 휩쓸린 물고기처럼 허공을 세차게 휘돌았다.
세상이 위아래 좌우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가운데.
둔탁한 충격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불규칙하게 휩쓰니.
이리 튕기고 저리 튕기며 바닥에 추락한 진이 허읍- 숨을 삼켰다.
아니. 삼켰다기보단 강제로 들이마신 것에 가까웠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지금처럼 예기치 못한, 그것도 도를 넘는 충격에는 누구라도 진처럼 된다.
고통이 바닷물처럼 코와 입으로 밀려드니, 맨땅에서 익사라도 할 듯 숨을 꺽꺽대는 것이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다면 나았으련만.
비정상적으로 강인한 육체는 이 와중에도 고통을 딛고 망가진 몸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해서 반강제로 정신을 차린 진이다.
깊게 찢어진 이마에서 줄줄 흘러내린 피가 시야를 가려 불편했지만, 진은 혹시나 모를 후속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악착같이 바닥에 처박힌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보았다.
지하실로 이어진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오는 존재를.
괴인은 은은한 광택이 도는 검은색 가죽 롱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거기에 손과 발은 각각 가죽 장갑과 부츠로 맨살을 가렸으니.
그것들 또한 세상의 모든 빛을 삼킨 듯한 검은색이기 때문이었을까.
유일하게 탁한 은빛을 띤 새 부리 가면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진의 고향에선 역병 의사의 전유물로 알려진 그것.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섬뜩한 생김새만큼이나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면이 쓰러진 진을 향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
"살아있네?"
그렇게 중얼거린 놈의 시선이 진에게서 펜릴에게로.
펜릴에게서 다시 진으로 왔다 갔다 움직였다.
"···내가 부족했나? 아니면 너희가 튼튼한 건가?"
손바닥을 펼쳤다 접길 반복하던 놈이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내가 약할 리 없지. 너희가 튼튼한 게 맞아."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
곧장 몸을 일으키려던 진이 찌릿한 통증에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급히 시선을 내리깔자 완전히 꺾여버린 오른쪽 발목이 보였다.
이대로는 뛰기는커녕 걷지도 못할 상황.
그 와중에 시야 한구석에선 상태창이 도망치란 경고문을 시종일관 띄워대니, 이건 도움은커녕 도리어 화만 돋울 뿐이었다.
"도와줄 거 아니면 좀 꺼져······!"
진이 그렇게 으르렁거리며 발목을 움켜잡고 돌렸다.
뿌드득!!
단순골절을 복합골절로 악화시킨 그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미치게 아팠을뿐더러, 실제로도 미친 짓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난 경험을 돌이켜보건대, 뼈가 붙는 방향을 미리 맞춰놓지 않으면 회복이 훨씬 오래 걸렸으니까.
"씨이···바알!"
진이 이를 악물 때였다.
커헝!!
난데없이 짐승의 포효가 터져 나오며, 죽은 듯 쓰러져있던 펜릴이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엄청난 도약. 그와 동시에 허리춤의 칼자루를 뽑으니.
칼날의 길이만 1m가 넘는 대형 환도는, 2m가 훌쩍 넘는 늑대인간의 손에서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거리감을 희롱하는 일격.
진이 상상 속에서 추측했던 바로 그 공격이었다.
쐐애애액!!
동시에 괴인이 고개를 돌렸다.
단지 그뿐이었거늘.
펜릴의 검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크르르르!!"
펜릴의 주둥이에서 짐승 특유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팽창한 팔 근육을 보건대 엄청난 힘을 쏟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수인의 완력이 무색하게 칼날은 도무지 진도를 빼지 못하고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걸. 넌 수인이면서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타하는 수인이 우월하다 맹신하는 레이시스트인 만큼 TB와 대립하기보단 함께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지 않나."
괴인의 물음에 펜릴이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는 넌? 스틱스의 흑마법사가 왜 TB에 들러붙었지? 무슨 더러운 속내가 있어서?"
"들러붙는다? 뭘 모르는 소릴 하는군. 우린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인데 말이야."
괴인이 나직히 중얼거렸고,
그 순간 진은 그라비스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불을 뿜은 총구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 미친 반동을 완력으로 제어한 진의 검지가 쉴 새 없이 뒤로 젖혀졌다.
타앙! 타앙! 타앙! 타앙!
귀를 찢는 굉음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진이 중첩된 반동에 의해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그 와중에 브로프의 말을 떠올리길.
특수 개조된 .666 R&D 매그넘 탄환이라고 했던가.
그라비스의 우월한 성능을 바탕으로 발사되는 이 쇳덩어리의 위력은 50m 안쪽 지근거리에 한정.
대물 저격총마저 능가한다고.
실제로 카멜레온 수인의 머리통을 터뜨리며 이것이 장사꾼의 허풍이 아님을 확인한 바.
진이 상체를 세우며 기대했다.
빌어먹을 괴인이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습을.
그러나.
정작 진을 반긴 건 여전히 펜릴과 대치 중인 괴인이었으니.
땡그랑-
놈의 롱코트, 아니 물결치는 장막을 뚫지 못한 총알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순간 무지갯빛으로 일렁거린 장막 너머로 괴인의 가면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게 무슨.
그라비스마저 통하지 않은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흥미롭군."
괴인이 양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오른손은 펜릴, 왼손은 진을 향해.
그 즉시 놈의 손끝에서 솟구친 불꽃과 뇌전이 엄청난 속도로 두 사람에게 날아들었다.
"흡!"
새하얀 전광과 함께 들이닥치는 전류를 확인한 진이 아직은 불편한 다리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피했다고 생각한 뇌전의 줄기는 선반의 철골을 타고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궤적으로 끝끝내 그를 따라잡았다.
그리하여 전류가 몸을 타고 흐르기 직전.
진이 주머니 속 기폭장치를 누른 것은 머리가 아닌 한없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니.
직후 난생처음 겪는 격통이 그를 덮쳤다.
치지지지지직-!!
전신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내부 장기가 세포 단위로 손상을 입었으며, 겉으로 보이는 피부가 새빨갛게 타올랐다.
"······꺼, 컥."
눈을 까뒤집은 채 입에서 연기를 뿜은 진이 바닥에 머리를 박고 고꾸라졌다.
그렇게 꿈틀꿈틀 생사의 경계선을 오가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시커멓게 그을린 펜릴이 그의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와 축 늘어졌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눈높이로 마주쳤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은 없어도, 입술을 달싹이는 정도는 가능한 진이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너······괜찮냐?"
그에 다 죽어가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
사실 진의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는 게 한두 개가 아닌지라.
도대체 저 미친놈은 뭐냐고.
왜 창고를 지키고 있는 거냐고.
애초에 TB쪽 사람은 맞냐고.
마음 같아선 펜릴의 어깨라도 흔들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없었으니까.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한없이 최악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쏘냐.
진이 핏발 선 눈을 부릅떴다.
지랄하지 마. 이렇게 뒈지려고 내가 그 지옥 같은 순간들을 견딘 줄 알아?
집착에 가까운 생존본능이 아드레날린을 펑펑 분비시켜 간신히 정신줄을 부여잡은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가능성을 떠올리며 말했다.
"···폭탄, 곧 터진다. 이제 90초 정도 남았어."
"너도 눌렀냐?"
놀랍게도 펜릴이 그렇게 되물었다.
그도 이 꼴이 나기 전에 기폭장치를 작동시켰던 모양.
상호 간 합의는 없었지만 같은 결과를 도출한 두 사람이 쓰게 웃었다.
해서 진이 먼저 제안하길.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저 괴물한테서? 대놓고는 절대 불가능해."
"그럼 싸울 순 있고?"
"···1분 정도라면 어떻게든."
"좋아. 접수."
작전이라기엔 민망한 수준의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이 손과 팔뚝으로 바닥을 짚었다.
진도 진이지만, 기어이 몸을 일으키는 펜릴도 평범한 수인은 아닌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괴인이 짝짝 손뼉을 치지도 않았을 테니까.
"또 일어나는군. 놀라워."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비틀거리는 상대를 향해 찬사를 아끼지 않던 그가 대뜸 손끝으로 진을 가리켰다.
"특히 너. 보아하니 수인은 아닌 것 같은데 회복력은 그들은 월등히 앞서는군. 아니, 아니지. 단순한 회복과는 결이 달라. 뭐랄까. 오히려 재구축에 가까울 정도로······"
"시끄러워. 이 역병 의사 코스어 새끼야."
감전의 후유증으로 다리가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진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그에 펜릴이 주둥이를 씰룩거렸다. 늑대의 얼굴이라 감정을 유추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왠지 분노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조소 정도로 보였으니.
"발목 잡지 마라."
어느 순간 사나운 얼굴로 돌변한 그가 정면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까보다 훨씬 빨라진 속도였다.
분명 아끼고 있던 비장의 수를 사용한 것일 터.
이에 질세라 진도 눈을 감았다.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진의 의식은 웅장한 밤하늘 한가운데 놓여있었으니.
두 번째로 밝힌 시작의 별.
[마나 회로]
그로부터 파생된 무수히 많은 줄기 너머로, 자신을 먼저 밝혀달라 아우성치는 불 꺼진 별들이 보였다.
카멜레온 수인을 쓰러뜨리며 별의 길을 이을 충분한 경험치를 확보한 진이다.
이 순간.
신중하게 이것저것 따져 보고, 물어보고, 고민해 가며 선택하려고 했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뭐든 좋다.
1분을 버틸 수만 있다면······!
파지지지직!!!
다음 순간 눈꺼풀을 든 진의 몸에서 푸른 전광이 솟구쳤다.
그 강렬한 스파크에 핏물이 기화되고-
은은한 푸른빛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사방팔방 날뛰기 시작하니.
[마나 폭주]
머릿속에 새겨진 자기파괴적인 심상에 진이 몸을 맡겼다.
쩌적..!
실금이 번지는 지면을 짓밟으며 돌진한 그가 순식간에 괴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고는 이미 검을 휘두르는 펜릴의 옆으로 합류하며 내달리는 속도 그대로 발길질을 날리니.
창고 폭발까지 52초.
정해진 결말을 받아놓은 채.
새 부리 가면의 괴인, 인간, 늑대 수인이 한데 뒤섞였다.
< 17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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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화 >
마나 폭주.
무수한 별 가운데 유독 구석에 짱박혀있던 녀석이었다.
마치 나한테 관심 주지 마시오. 라고 말하는 듯한 모양새.
그럼에도 진이 이 녀석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다.
'폭주'라는 키워드가 포함된 스킬치고 단기전에서 위력이 떨어지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진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더없이 가벼운 육체, 그 안에서 휘몰아치는 엄청난 힘을 느끼며.
스윽..!
괴인이 가볍게 손짓했다.
단지 그뿐이었지만, 펜릴과 진은 각자 서로의 반대편으로 크게 거리를 벌렸다.
콰앙!!
직후 두 사람의 등 뒤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보이지 않는 힘에 노출된 3층짜리 선반의 철골이 우지끈 구겨지며, 포장된 물자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사이 단숨에 거리를 좁힌 진이 주먹을 날렸다.
후웅-, 터엉!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무언가에 막히는 소리가 짧은 간격을 두고 터져 나왔다.
허공을 일렁거리는 무지갯빛 역장.
반발력으로 인해 뒤로 밀려난 진이 곧바로 허리춤에서 그라비스를 뽑았다.
타앙-!!
음속을 돌파한 황금빛 실선이 역장과 충돌했다.
직전 주먹으로 두들긴 위치를 정확히 노렸다.
투웅!
착탄점에서부터 파문을 그린 충격파가 숨겨진 역장의 윤곽을 들췄다가 물결치듯 사라지는 가운데.
새빨갛게 달아오른 탄두가 끝내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기까지가 불과 한 호흡이라.
"재밌군!"
괴인이 하하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근처 선반의 철골이 드드득- 휘어지며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진의 손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격 마법.
치지지직!
갈지자 굽이치는 뇌전이 새하얀 빛을 뿜으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펜릴의 검이 철골을 서걱-하고 잘라냈고-
압박에서 벗어난 진이 아슬하게 전격을 피하며 크게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2층 선반을 디딤판 삼아 공중에서 회전.
괴인을 향해 뒤꿈치를 내리찍었다.
터엉-!!
하지만 이 또한 역장에 가로막히니.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후려쳤다.
그 즉시 허공으로 사출된 진이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반격을 예상하고 미리 몸을 웅크렸음에도, 충격에 전신의 뼈가 울릴 정도다.
뭐 이런 개사기 기술이 다 있지?
죽어라 때려도 역장이 모든 충격을 흡수하고,
조금만 틈을 보여도 철골도 우그러뜨리는 투명 망치가 날아든다.
거기에 자매품 체인 라이트닝까지.
이러다 로켓단의 고통을 깨달을 판이라.
진이 또 한 번 뼈저리게 통감했다.
저 빌어먹을 역병 의사는 진짜배기 괴물이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
만약 혼자였다면 마나 폭주 할애비가 와도 무조건 죽었다.
그러니 지켜야 하는 것이다.
저기 홀로 시간을 끌고 있는 늑대인간을.
"커헝!!"
포효를 내지른 펜릴이 손에 쥔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에 사방에서 날아들던 철조물들이 일제히 반으로 썰려 나갔다.
이후에도 펜릴은 날아드는 마법을 피해 가며 토악질 나오는 역장을 향해 칼날을 몇 번이고 내리쳤지만, 분전이 무색하게 투명한 외력에 얻어맞고 지면에서 발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튕겨 나간 위치가, 마법에 의해 제멋대로 휘어지고 부서진 철조물이 깔린 곳이었으니.
이러다 늑대 꼬치가 탄생할 판이라.
진이 포탄처럼 날아오는 거구를 중간에서 받아냈다.
치이익..!
가까스로 등판이 꿰이기 전에 멈춰 서는데 성공한 그가 비틀대는 펜릴에게 물었다.
"몇 초 남았냐?"
"20초? 15초? 모르겠군."
"힘 좀 짜내봐. 저거 몇 번만 더 치면 뚫릴 것 같으니까."
진이 그 말을 끝으로 바닥을 박찼다.
시야의 한 점에서 점차 확대되는 역병 의사가 보였다.
놈을 감싼 역장과 그 귀퉁이에 생긴 미세한 균열까지도.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속으로 되뇌며 마나를 쥐어짜낸다.
파지직!!
한층 거세진 붉은 스파크.
그러잖아도 인간을 초월한 주력이 거기서 한 번 더 가속을 이뤄냈다.
저도 놀랄 정도의 속도로 거리를 좁혀낸 진이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마침내 역장이 토하는 소리가 달라졌다.
살갗에 닿는 감촉. 손맛에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전까진 꾸덕꾸덕한 진흙을 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두터운 철판을 치는 느낌.
해서 진은 멈추지 않았다.
발을 바닥에 붙이고 쉴 새 없이 주먹을 내뻗었다.
뻗고, 뻗고 또 뻗었다.
그 과정에서 역병 의사가 쏟아낸 온갖 종류의 마법이 온몸을 걸레짝으로 만들었지만, 그는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다.
더더욱 공격에 박차를 가했을 뿐.
스파크가 더욱 짙어진다.
파지직!!!
고통을 삼킨 빛이 이윽고 이성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 후에 포기해야 할 것은 목숨이니.
이는 응당 치러야 할 대가이자, 수순이라.
그보다 먼저 역장이 깨진 것은 어쩌면 작은 기적일지도 몰랐다.
···쨍그랑─!
흩날리는 파편과 함께 피투성이가 된 진의 몸이 뒤로 넘어가는 가운데.
섬전과도 같은 찌르기가 괴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크르르르!"
펜릴이 주둥이를 일그러뜨렸다.
그러고는 한 발, 두 발. 사력을 다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끝에 지하실로 연결되는 계단이 있었으니, 자신이 올라온 그곳을 향해 괴인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갑 낀 손으로 칼날을 움켜잡은 그가 천천히 가면 쓴 얼굴을 들었다.
"상상도 못 한 유흥이야. 정말이지···즐거워."
전에 없던 섬뜩한 목소리. 직후 놈의 몸에서 새카만 기운이 넘실거리니 이윽고 거대한 날개의 형상으로 펼쳐지려는 순간-
철컥.
어느새 그라비스를 겨눈 진이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좀 꺼져!!"
콰앙─!!
우레와 같은 총성.
5m 남짓한 거리에서 직격탄을 맞은 괴인의 몸이 기우뚱 뒤로 넘어갔다.
진의 눈에는 일련의 과정이 한없이 엿가락처럼 늘어진 슬로우모션으로 보였으니.
째각. 째각. 째깍-
부지런히 초침을 움직이던 체내 시계가 마침내 한 바퀴를 돌아 종을 땡-
그와 동시에 천지를 집어삼키는 굉음이 창고 안을 휩쓸었다.
***
정말 끔찍한 하루였다.
평소 좋아하던 라면을 편의점에서 산 진이다.
출출한 속을 기분 좋게 달래보자! 하고 기쁜 마음으로 봉투를 북 찢었는데.
아니 글쎄.
다시마 하나 보고 산 제품에 다시마가 없더라.
이게 말이 돼?
남들은 2개 나왔다고 인증샷 찍어 올리는 마당에 난 이게 뭐야.
상심이 컸지만 그래도 별수 없는 게.
이미 물까지 올린 마당이라.
면 넣고, 스프 넣고, 후레이크 넣어다가.
대충 후루룩후루룩 잘 먹었다.
문제는 그날 저녁부터 온몸이 욱신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증상이 극심해져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더라.
뼈마디가 갈라지고, 근육이 녹아내리고, 내부 장기가 타들어 가는 느낌.
그 원초적인 고통에 진이 밤새 몸부림쳤다.
기절했다 깨고, 다시 기절했다 깨길 얼마나 반복했을까.
마침내 창문 너머 새벽 박명이 어스름한 빛으로 세상을 물들였을 때.
심신이 흐물흐물해진 진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완료!)위기」────────────
살아남았습니다.
보상 : 퍽 XP 3,000
──────────────────
*
*
*
"너구리!"
맥락 없는 외침과 함께 의식을 차린 진이 가장 처음 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근데 이건 뭐 특별할 게 없다.
집도 절도 없는 부랑자가 매일 눈뜨면 낯선 천장인 건 당연한 거고.
그보다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감각에 정신이 번쩍. 곧장 몸을 일으키며 비명처럼 소리치길.
"밥!"
움찔하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낯선 얼굴이 눈을 끔뻑거리다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그에 진이 금단 증세가 온 마약 환자처럼 손을 떨며 대답했다.
"아니. 전혀. 미안한데 먹을 거 좀 없어? 급해."
"자, 잠시만요."
여인이 서둘러 자리를 뜨는 가운데 진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남들이 보면 이게 무슨 촌극이냐, 주접떨지 말라 욕할 수도 있지만 사실 보기보다 심각한 상황인 게.
진은 허기에 대한 PTSD가 있어서 자칫 방치하면 공황까지 이어진다.
이번에는 유독 그 정도가 심했으니, 이건 뭐 닷새는 내리 굶은 수준이라.
잠시 후 헐레벌떡 돌아온 여인의 손에서 접시를 낚아채, 내용물이 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볼이 미어터져라 마구 쑤셔 넣었다.
우적우적 씹다 보니 아 이거 애플파이구나.
집 나간 이성과 함께 혈색도 돌아온 진이다.
"뭐야. 이건···"
뒤늦게 자신의 팔에 꽂힌 수액 바늘을 확인한 그가 온갖 의류 장비가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저기."
"···네?"
"여기가 어디야?"
"저항군 거처다."
대답은 여인의 입이 아닌 전혀 엉뚱한 쪽에서 들려왔으니.
천막을 걷고 들어온 사내가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몸은 좀 어때."
"어 너?"
그나마 낯익은 얼굴이었다.
의뢰 초반. 진과 펜릴의 밀입국을 도운 사내.
알버스였지. 아마.
어렵사리 그의 이름을 떠올린 진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왜 여기 있는데? 창고는? 시간이 많이 흘렀어?"
"워워. 진정해. 다 말해줄 테니까."
진이 누운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온 알버스가 털썩 궁둥이를 붙이며 말했다.
"우선 물류 창고는 무너졌어. 아주 폭삭 내려앉았지."
"그럼···"
"맞아. 의뢰 완료야. 돌아가서 네 몫을 챙기면 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하지만 덮어놓고 좋아하기엔 아직 듣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지라.
진이 더 해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그게 궁금한 거지? 별 건 없어. 그 늑대 수인이 의식을 잃은 널 데리고 접선지로 복귀했을 뿐이지."
"아. 펜릴."
그제야 함께 싸운 동료? 친구...?
아무튼 수인을 기억해 낸 진이 아차차 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걔는 어떻게 됐는데."
"너랑 마찬가지로 며칠 끙끙 앓았지. 그래도 너보단 사정이 좋아서 그제 다운타운으로 돌아갔어."
"···뭣?"
이 새끼가?
그럼 난 어쩌라고.
우리 전우애가 고작 이 정도였어?
하루아침에 운전기사를 잃은 진이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러다 문뜩 알버스를 바라보며 되묻길.
"그나저나 며칠이라니. 내가 그렇게 오래 누워있었어?"
"오늘로 닷새째야. 그중에 사흘은 진짜로 송장 치르는 줄 알았지."
"음?"
"죽다 살아나서 모르겠지만, 너 체온이 48도까지 올라갔어. 주치의 소견에는 단백질 변성에 내부 장기가 돌처럼 굳고, 시신경 손상으로 실명까지 했다더라."
실명? 진이 저도 모르게 눈가를 더듬거렸다.
마나 폭주의 후유증인가?
그렇다기엔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알버스가 너무 잘 보이는 상황이라.
제 회복력이 엄청난 걸 알면서도 괜히 농담을 던진 진이다.
"그거 완전 돌팔이네."
그에 구석에 박혀있던 여인이 눈에 띄게 움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천막 밖으로 나가니.
"···쟤야?"
"쟤야."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에 알버스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살았으니 다행이지. 듣자 하니 너도 강화인간 같던데. 맞지?"
"뭐 대충은."
아니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고개를 끄덕거린 진이 마지막 남은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웬 괴물이 창고를 지키고 있던데."
그에 알버스가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너희가 맞닥뜨린 상황을 직접 본 게 아니라 확답은 해줄 수 없어. 다만.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공장은 단순한 물류 창고가 아니었다는 거야."
그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놈들의 사후 처리가 신속했던 탓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폐허가 된 지하에서 시체 몇 구를 찾았어. TB 측 경비 병력을 말하는 게 아니야. 변이체였지. 마나만 주입하면 곧바로 일어나 움직였을."
변이체?
그건 또 뭔데.
진의 미간이 지그시 좁아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얘기가 이어질 것만 같은 기분.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모르겠어? TB가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은 거야. 그 미친놈들···어쩌면 뮤트타운만이 목적이 아닐지도 몰라. 이 정도 사안이면 우릴 사람 취급도 않는 시정부가 움직일지도 모르지. 시발···"
그렇게 말하는 알버스의 얼굴은 세상 심각했지만, 솔직히 진에겐 선뜻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변이체란 게 흑마법의 대명사쯤 되는 건가?
아무튼 그 역병 의사가 흑마법사란 거지?
그놈이 TB랑 손을 잡은 거고.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도 그 창고에 뭐가 있을 거라 예상해서 너흴 보낸 건 아니야. 그저 허브에 타격을 줘서 물자 공급에 차질을 빚게 할 셈이었지. 그래도···미안하다."
고개를 숙이는 알버스의 모습에 진이 볼을 긁적였다.
"됐어. 안 죽었으니."
원체 개새끼들만 가득한 다운타운이라.
이런 류의 사과에 취약한 진이었다.
더군다나 도망만 치라고 빽빽 아주 지랄을 하던 상태창이 너 살았구나? 경험치까지 넉넉하게 주고 간 마당이라.
어찌 됐든 손해는 아니라 판단한 진이 으그그-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눕는데, 알버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니. 이 바닥에 대가 없는 수고는 없지. 덕분에 우리도 얻은 게 크기도 하고."
그에 귀가 솔깃해진 진이 다시 으그그-상체를 세웠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뭐긴 뭐겠어, 솔로. 보상이지."
< 18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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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화 >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과거. 주거지 확충에 시정부가 열을 올리던 시절의 40번대 구역은 성공이 보장된 노른자위 땅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에, 온갖 기업과 시공사가 투자를 아끼지 않았더란다.
해서 부티크 스트리트니, 엔터테인먼트 메가 타워니 하는 사뭇 호화스러운 이름이 꽉꽉 들어찬 도시계획도가 수립됐으니.
만약 그대로 진행됐다면 오늘날의 40번대 구역은 윤택한 삶을 보장하는 안식처이자 관광지로서 오랜 시간 각광받았을 게 분명했다.
느닷없이 발발한 기업과 가문 간의 전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두 고래의 싸움은 모든 것을 뒤바꿨다.
낙원을 꿈꾸던 땅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수많은 흉물을 남긴 채로.
해서 사학가들의 관점에서, 저항군이 거처로 사용하는 33층짜리 빌딩은 그 시절의 불온한 유산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지 않은 세계선에선 번쩍번쩍한 5성급 호텔이었을 건물은 온갖 마개조 끝에 요새화를 이룬 지 오래였으니.
훈련실, 막사, 작전실, 무기고 등등이 실압근처럼 꽉 들어찬 상태라.
이런 걸 처음 보는 진이 와- 감탄했다.
"진짜 군대 맞네···"
"우리가 무슨 소꿉놀이하는 자경단인 줄 알았나 보네."
앞장서 걸어가던 알버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묻길.
"그나저나 꼭 지금 확인해야겠어? 너 중환자라고. 며칠 전까지 사경을 헤매던."
"궁금하잖아."
보상 얘기를 듣자마자 병상에서 몸을 일으킨 진이다.
바퀴 달린 수액걸이를 달달달 끌고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 주치의라던 여자가 화들짝. 더 쉬어야 한다며 만류했지만, 사나이 앞길 누가 막을쏘냐.
기어이 알버스를 앞장세우고 그 뒤를 따랐더란다.
근육통에 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이러다 실망할까 무서운데."
"뭐 어때. 공짜···아니 보너스잖아. 주면 고맙지."
걱정 반, 농담 반 섞인 알버스의 말에 그렇게 답한 진이 문뜩 시선을 뒤로 던졌다.
그에 몇 걸음 떨어져 걸어오던 주치의가 호다닥 근처 기둥 뒤로 숨더라.
뭐야. 왜 저래?
딱히 이성적으로 어필될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던 진이라.
걱정이 돼서 저러는 건가? 하고 고개를 갸웃.
다시 앞을 바라보고 수액걸이를 달구지마냥 달달달 끌었다.
이후 알버스를 따라 탑승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지하 4층에서 띵-하고 열리니.
휘발유 냄새 그윽한 거대한 차고지가 진을 반겼다.
작게는 경차부터 크게는 장갑차(정확히는 병력수송장갑차)까지 있는 그곳에서 알버스가 목청을 높였다.
"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니.
"작업 중인가···."
작게 중얼거린 알버스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조금 걷다 보니 어디선가 옅은 음악 소리가 들려오더라.
가까이 다가간 소리의 진원지에는 보닛을 열어 놓은 차량이 있었으니, 그 아래로 빼꼼 튀어나온 두 다리를 알버스가 툭툭 걷어찼다.
"아씨. 뭐야?"
짜증 섞인 목소리. 직후 납작한 카트 위에 누워있던 누군가가 차량 아래서 미끄러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알버스?"
숯 검댕 묻은 얼굴이 인상을 한 번 팍 쓰더니 몸을 일으켰다.
북슬북슬한 수염을 기른 그는, 남들 귀에도 들릴 만큼 볼륨을 높인 헤드셋을 벗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나 일하는 거 안 보여?"
"이것도 일의 연장···일단 소리부터 좀 낮춰."
알버스가 눈을 질끈 감으며 던진 말에,
벤이라 불린 사내가 삐뚜름한 표정으로 음악을 껐다.
"잔소리는···그래서 용건이 뭔데?"
"여기 있는 솔로께서 아픈 몸을 무릅쓰고 네 물건을 보고 싶으시다네."
알버스가 엄지만 편 주먹을 어깨 뒤로 척 가리키자, 자연스레 벤과 진의 눈이 맞닿았다.
짧은 침묵.
이내 아아-, 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털북숭이다.
"너가 걔구나. 소문은 익히 들었다."
"내 활약상이 벌써······"
"꼬추가 그렇게 크다매?"
"뭣?"
진이 당황한 와중에도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두툼한 손을 맞잡았다.
"반갑다. 그러잖아도 물건은 준비해 뒀어. 따라와."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는 격한 악수를 마친 벤이 쿵쿵 앞서 나갔다.
"······"
"······"
남겨진 알버스와 진 그리고 먼발치에 선 주치의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알버스가 헛기침 섞인 목소리를 냈다.
"너 완전 피투성이였다고. 옷도 완전 걸레짝이라 갈아입힐 수밖에 없었지. 소문은···난 모르는 일이야."
그러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니.
진이 고개를 돌려 주치의를 슬쩍 바라봤다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다시 발을 움직였다.
"자. 여기야, 여기."
손뼉을 짝짝 치는 벤의 앞에는 하얀색 천에 둘러싸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 실루엣만 보고도 내용물을 짐작한 진이 눈을 크게 떴다.
어어, 이거 설마?
"네 친구가 말해주던데. 뚜벅이라며? 요즘 같은 세상에 발로 뛰는 솔로라니. 너무 정직한 거 아니야?"
벤이 히죽 웃으며 천을 확 들치니.
진의 예상대로 오토바이가 짜잔 하고 나타나더라.
무광 카키색 바디에 중후함이 돋보이는 미래지향적인 디자인. 그러면서도 이것저것 손을 많이 봤는지 깔끔하기보단 거친 느낌을 풍기는 녀석이었다.
"와. 오우. 쓰읍, 이야."
강렬한 첫인상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하는 진을 우쭐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벤이 말했다.
"멋지지? 기본 뼈대는 녹턴 인더스트리스의 라이언 XR이지만, 나머지는 죄다 뜯어고쳤어. 덕분에 무게는 원본보다 조금 더 나가지만 엔진 성능을 그만큼 끌어올렸으니 큰 차이는 느끼지 못할 거야."
간단한 설명에도 절로 흥이 돋는지, 벤이 묻지도 않은 오토바이의 제원과 기술을 솰라솰라 떠들기 시작했다.
물론 진은 그 말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젝터 분사압이 어쩌고, 가변 밸브 타이밍이 저쩌고.
이거 완전 브로프 그 할배랑 똑같네.
이제부터 벤을 젊은 브로프라 기억하기로 결심한 진이었다.
그래도 말하는 사람 성의를 봐서 고개를 끄덕끄덕.
저 나름 열심히 동조의 제스처를 취하자니 어느 순간 젊은 브로프가 불쑥 의문표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름은 뭐로 할 건데?"
"어?"
"이름. 모름지기 이동 수단에는 멋진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이 녀석을 라이언 XR이라 부를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그러고는 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는데.
기대감 가득한 눈빛에 진이 미간을 구겼다.
아씨. 왜 이런 걸 시키는 거야.
사람 부담스럽게.
그러면서도 급하게 머릿속을 쥐어짜니.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직전.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이는 데 성공한 진이다.
"···그 뭐냐. 이 녀석 기본 뼈대가 무슨 라이언이었지?"
"라이언 XR."
"그래 라이언 XR. 아무튼 사자라는 거잖아. 거기에 네가 날개도 달아주고, 꼬리도 가시 박힌 놈으로다가 바꿔준 거지. 업그레이드한 거니까."
"음.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벤을 확인한 진이 뒷말을 이었다.
"커다란 날개에 가시꼬리를 휘두르는 괴물 사자. 그런고로 만티코어 어때?"
일단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본 그가 안 봐도 될 눈치를 살피는 순간.
"오오오! 딱이야! 딱! 괴물 사자! 만티코어!"
벤이 치열을 다 드러낼 정도로 크게 웃기 시작했다.
"작명 실력이 대단한데? 좋아, 솔로. 오늘부로 네가 만티코어의 주인이야. 어디 거칠게 달려보라고!"
직후 벤이 무언가를 팅! 하고 날려 보내니, 허공에서 그걸 낚아챈 진이 손바닥을 펼쳤다.
차키를 확인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상받기 한 번 힘드네."
***
키도 받았겠다.
먼지바람 휘날리며 훌쩍 떠났다면 좋았으련만.
진은 여전히 환자복을 입은 채 등허리 배기는 딱딱한 침대에 누워었었다.
영화 같은데서 보면 부상을 입고 깨어난 주인공이 터프하게 수액을 빼버리고 겉옷만 걸쳐 떠나는 장면이 있던데.
안타깝게도 몸이 너무 안 좋았던 진은 얌전히 수액을 다 맞기로 했다.
저거 한 방울, 한 방울이 다 돈인데.
아까워서라도 맞아야지.
그렇게 다짐하고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얼굴에 몸을 움찔거렸다.
새카만 가죽 롱코트를 걸친, 장신의 새 부리 가면.
그에게는 역병 의사로 각인된 괴물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다.
펜릴이 없었다면,
폭탄이 제때 터지지 않았다면,
기적적으로 역장을 뚫지 못했더라면.
수많은 변수 가운데 단 하나라도 달라졌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죽었을 테니까.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의 요소가 잘 맞아떨어져 목숨을 구했다는 건, 어찌 보면 행운이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더없이 찝찝한 결과라.
무엇보다 역병 의사가 죽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느껴지고 그런 게 아니라 경험치가 안 들어왔다.
진이 획득한 경험치는 퀘스트를 완료한 보상이 전부였으니, 그렇다는 건 놈은 그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아 어딘가에 있다는 뜻일 터.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절로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게.
가만히 있기 불안해진 진이 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마나를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수만 개의 바늘이 몸 안쪽을 찌르는 격통이 없었다면.
"······!!"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진 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가락 발가락 오므려가며 고통을 인내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커튼을 걷으며 들어와 주사를 쭉 주입하더라.
잠시 후, 간신히 진정한 진이 수액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하는 여인을 향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가, 감사···"
"조심하셔야 해요. 회로가 갈기갈기 찢어진 수준이라, 함부로 마나를 일으켰다간 쇼크사할지도 모르니까."
핵심을 짚는 말이었다.
해서 진이 아픈 와중에도 묻길.
"······의사라더니. 마법사였어?"
"미천한 재능도 그렇게 불릴 수 있다면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한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알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의자를 끌어와 침대맡에 자리를 잡았다.
"그레이스라고 해요."
"···진이야."
난데없는 통성명에 진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진. 혹시 당신 몸 상태에 대해 알고 있나요?"
"내 몸?"
뭐야. 시한부 판정인가?
온종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졸졸 쫓아오던 주치의의 말에 진이 절로 긴장했다.
해서 불안감을 느낀 여느 환자들처럼 횡설수설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길.
"왜 그래. 그렇게 안 좋아? 아닐 텐데. 내가 회복력이 좀 말이 안 되는 편이거든. 지금은 이렇게 골골거려도 며칠이면···"
"맞아요. 말이 안 되죠."
진의 말을 자른 그레이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당신은 분명 죽었으니까요."
시한부가 아니라 사망 판정?
진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하는 표정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봤다.
"나 살아있는데?"
"맞아요. 살아있죠. 죽었다는 건······미안해요. 표현이 지나쳤네요. 그저 놀라워서 그래요. 단백질 변성에 장기 전체가 응고되기 시작한 사람이 다시 눈을 떴다는 게."
"말했잖아. 내가 회복력이 끝내주는 편이라고."
"아뇨 그것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아요. 재, 재구축이라면 모를까."
이어진 말에 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스의 주장은 역병 의사도 똑같이 언급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재구축?"
"치유의 상위 개념이에요.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죠. 자가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극한에 몰린 신체가 손상 부위를 파괴하고 새로 구축하는 능력. 그것도 단순한 복구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전보다 더 강하게 만든다고 전해져요."
의견을 피력한 그레이스가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 이 말을 할까, 말까 종일 고민했던 모양이었다.
죽다 깨어난 사람 앞에서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지.
진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다시 한 번 낯빛을 굳힌 그레이스가 뒷말을 이으니.
"만에 하나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 정말 재구축이 맞다면. 진. 당신은 살아남는 한 계속해서 강해질지도 몰라요. 마치···진화하듯이."
진화.
그 순간 진이 자신의 특성을 떠올렸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딱 하나만 들고 시작할 수 있는 그것.
다른 스킬처럼 여러 개를 고를 수도 없고, 나중에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그야말로 게임 플레이의 아이덴티티가 되는 요소를.
이레귤러(Irregular)
종의 한계를 돌파한다는 모호한 설명이 의미하는 바를 드디어 깨달은 진이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이,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와닿게 될 줄이야.
진이 복잡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는 오래전 보았던 게임의 추천글을,
또 그걸 작성했을 이름 모를 작성자를 떠올렸다.
그는 이런 것들을 예상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에게 프로젝트 네오란 그저 모니터 너머의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했을 테니.
그저 고인물이 뉴비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실패 없는 조합을 짜준 거겠지.
참 얄궂게도 그 글을 읽은 누군가가 미친 세상에 납치됐을 뿐이다.
그래, 그런 거다.
세상 그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오직 나만 아는 이야기.
한동안 헛웃음을 흘리던 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세상."
< 19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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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