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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OVIVIRENPUNK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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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퓨전펑크에서 살아가는 법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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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노력으론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교환비 박살 난 시대에 태어나, 걸핏하면 갈라치고, 싸잡아 욕하고, 선동되는 못된 사회에서 적당히 눈칫밥 배를 불리며 30년을 살았다.

 

그 결과 그리 멀지도 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는데.' '나 때는 말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젊은 꼰대로 성장했으니, 그야말로 21세기 대한민국에 안성맞춤인 건실한 청년이라.

 

그래도 어디 모난 곳 없이, 부모 속 크게 썩이지 않고 자란 귀한 아들이요, 친구이자 애인이었다.

 

동시에 그는 여느 또래 남자들처럼 라이트한 게이머였다.

 

'라이트'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요즘 들어 부쩍 줄어든 게임 체력을 절감했기 때문에.

 

실제로 직장 생활만으로 충분한 스트레스를 게임에서까지 받고 싶지 않아, 그 좋아하던 온라인 협동 대전 게임도 삭제한 그였다.

 

대신 혼자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PC 혹은 콘솔 게임에 눈독을 들였으니,

세계관과 스토리텔링이 탄탄한 명작들을 두루두루 섭렵하기 시작한 것이 비교적 최근이라.

 

마지막으로 즐긴 게임은, 바이러스가 창궐한 도시에 처음 출근하게 된 신참 순경의 고군분투 일대기였는데, 공포와 액션의 조화가 굉장히 만족스러운 타이틀이었다.

 

후속작도 즐겨볼까 했지만, 같은 장르를 연달아 플레이하는 건 영 성미에 맞지 않았기에 포기했다.

 

그래서 새로 찾게 된 게임이 바로 '프로젝트 네오.'

아는 동생이 적극 추천한 타이틀이었다.

 

"아 형, 진짜 재밌다니까요? 제가 없는 말 하는 거 봤어요?"

"나 사이버펑크 몰라."

"에이 몰라도 돼요. 누군 알아서 시작했나."

 

거절하기엔 닦달이 심했다.

 

어느 순간 그는 게임을 설치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상 시간은 51분 13초.

널널한 막간을 살려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했다.

 

프로젝트 네오.

사이버펑크 장르의 오픈월드 RPG.

 

조금 더 찾아보니, 사이버펑크뿐 아니라 아케인펑크에 바이오펑크까지 결합된 그야말로 짬뽕 세계관이었다.

 

뭘 모르는 그의 눈에는 디스토피아 배경에 로봇, 마법, 좀비를 와장창 때려 박은 느낌이 물씬 났는데, 그런 것치곤 게임성이 뛰어나서 매니악하긴 해도 즐기는 사람이 제법 되는 듯했다.

 

실제로 커뮤니티를 쓱 둘러보니 추천글과 정보글이 주르륵 늘어설 정도였으니까.

 

그가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프네가 처음인 응애를 위한 팁 (24.03.28 최종 수정)

 

그는 지금보다 시간이 훨씬 많았던 학생 시절에도 누군가 먼저 걸어간, 소위 검증된 빌드를 참고하길 즐겼다.

 

어차피 혼자 하는 게임인데 기왕이면 쉽고 편한 게 최고라는 주의였기에.

 

그렇게 마우스 휠을 천천히 내리며 스크린샷과 글줄이 번갈아 나오는 팁글을 정독하길 한참.

마침내 게임이 실행되며 화면이 암전됐다.

 

미리 본 게 있어서 선택은 금방금방 넘어갔다.

 

난이도는 쉬움.

 

플레이 도중에도 조절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일단 가장 순한 맛으로 즐기다가, 적당하다 싶으면 올려볼 생각이었다.

 

인생 경로는 부랑아.

 

원래 이런 게임은 밑바닥서부터 아득바득 기어 올라가는 맛이라고, 기업이나 가문은 영 눈길이 가지 않았다.

 

특성은 범용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이레귤러.

기본 퍽은 빡빡한 초반 물약값 걱정을 덜어준다는 빠른 회복.

 

커스터마이징에는 영 소질이 없어 적당히 훈훈하게만.

성기 사이즈도 조절할 수 있는 건 참신하긴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거기서라도 행복하라고 허용치 내에서 최대로 늘여줬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입력하니 캐릭터 설정은 끝이었다.

 

게임 시작 버튼을 누르기 전, 출출한 배를 달래줄 컵라면과 콜라를 책상에 올려둔 그다.

 

게임을 즐기면서 중간중간 짬을 내어 후후 불어먹는 라면이야말로 별미 중의 별미였으니까.

 

하지만 기껏 준비한 야식을 먹게 되는 일은 없었다.

 

기대감과 함께 게임 시작 버튼을 누른 순간,

그는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눈을 떴기에.

 

축축한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 프롤로그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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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진은 하루아침에 회색 도시의 이방인이 됐다.

 

고개를 들면 구름에 닿은 마천루가 능선을 이루고,

AV라 불리는 항공 차량이 날파리처럼 날아다니며,

걸핏하면 산성비가 추적추적 떨어지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덧칠된 거대한 도시.

 

이름하여 로스트 시티.

 

진이 처음 눈을 뜬 장소는 그 로스트 시티의 밑바닥, 다운 타운이었다.

고향의 지식을 인용하자면, 1980년대의 미국 할렘의 치안과 그즈음 홍콩 구룡채성의 비주얼을 뒤섞은 느낌이랄까.

 

그야말로 무법지대.

총기규제가 세상에서 가장 엄격한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진에게는 모든 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 뿐이었다.

 

실제로 진은 깨어난 첫날 거리를 배회하다 보란 듯이 총에 맞았더란다.

그것도 어깨, 가슴, 복부. 무려 3발이나.

 

그럼에도 죽지 않은 건, 순전히 몸뚱어리가 튼튼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인생 경로가 체력에 30% 가산이 적용되는 부랑자였던 점.

둘째, 스타팅 퍽이 물약값 아끼려고 고른 빠른 회복이었다는 점.

둘 다 큰 도움이 됐지만, 무엇보다 특성이 주요했다.

 

진의 특성 이레귤러는 종(種)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부연 설명답게 끈질긴 생명력을 선물했으니까.

 

그렇게 진은 요령 없이 오직 몸뚱이만으로 거리의 법칙을 배웠다.

멍들고 찢어지고 부서지는 건 다반사요, 걸핏하면 며칠을 굶거나 시체처럼 앓아눕길 반복하면서.

 

그렇게 1년.

진은 용케 살아남았다.

 

용케, 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진도 자신이 이만큼이나 버틸 줄은 몰랐으니까.

 

새삼 스스로가 대견한 것이,

오늘 하루만큼은 사치를 부리기로 결심한 진이다.

나라도 나를 축하해줘야지.

아니면 이 시궁창에서 누가 저를 챙겨줄까. 하는 심정으로.

 

그리하여 쌈짓돈 탈탈 털어서 산 조각 케이크를 들고 자주가던 펍 구석에 자리를 잡으니, 길쭉한 초도 하나 푹 꽂고 불도 붙였다.

 

이후 아련한 고향의 멜로디를 되살려 박수를 짝짝.

 

1주년 축하합니다.

1주년 축하합니다.

자랑스러운 지이이인.

1주년 축하합니다.

와아아아.

 

묵음 처리된 노래를 마친 진이 후- 입바람을 부는 순간이었다.

 

「???」━━━━━━━━━

NEO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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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에 진의 표정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시발···"

 

욕이 절로 흘러나온다.

 

이 빌어먹을 퀘스트창은 제대로 된 힌트도 없이 틈만 나면 튀어나와 사람 기분을 잡쳤다.

 

진은 퀘스트창을 싫어했다.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 혐오했다.

 

퀘스트라면서 죄다 물음표로 도배된 것도 열받았고, 갑자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으며, 무엇보다 주변의 모든 것과 어울리지 않는 저 반투명한 생김새가, 마치 너의 발버둥은 모니터 너머로 비쳐지는 가짜 삶이라고 말하는 듯해서 끔찍했다.

 

그러면 모든 걸 부정 당하는 기분이었기에.

 

"꺼져. 좋은 날이야."

 

진이 허공에 손을 휙 털었다.

그리고 억지로 스마일.

 

이후 기대감을 품고 떠먹은 케이크는, 맙소사.

더럽게 맛없더라.

스펀지 같은 식감에 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당했다. 100% 동물성 생크림을 썼다고 비싼 돈 받아 처먹더니, 이렇게 또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가벼워진 주머니인 것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진은 묵묵히 케이크를 퍼먹었다.

오늘은 뜻깊은 날이니 화내지 말자. 짜증내지 말자.

물론 수중에 한 푼도 남지 않은 건 문제였지만.

 

 

진은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았다.

 

다운 타운에서 개인이 돈을 쟁여두는 건, '나 죽여줍쇼.' 이마에 문신 박아놓는 꼴이기도 했거니와.

 

태생부터가 신용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스트리트 출신이다 보니, 그 흔한 크레딧카드조차 발급하지 못한 것 또한, 진의 하루살이 인생에 한몫했다고 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후회도 많이 했다더라.

아. 그냥 기업이나 가문 고를걸.

미쳤다고 부랑자 같은 걸 골라선.

 

기업을 선택했다면, 다운타운 같은 막장 슬럼가가 아닌 저기 마천루 어딘가에서 서류를 들치며 와인 한 잔의 여유를 갖는 삶을 살 수도 있었는데.

 

가문도 좋지.

마법, 검술, 정령 등등.

과거의 유산을 계승하는 순수주의자들의 일원이 됐다면, 그 또한 분명 고고한 삶이었을 테니까.

 

반면에 부랑자는?

길거리는 약육강식의 정글.

그 생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냥당할 뿐이니.

 

사실 진이 부랑자를 인생 경로로 택한 이유도 이러한 배경 설정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까놓고 말해 고추 달고 태어난 이상 피가 끓을 수밖에 없는 설정이지 않는가.

 

삶과 사투를 동일시하는 도시의 들개들.

밑바닥부터 시작되는 거친 여정. 

 

키워드부터 배드애스적인 면모가 풀풀 풍기니,

날 때부터 콧대 높은 금수저보단 이쪽이 훨씬 끌릴 수밖에.

 

하지만 그건 이 세상을 모니터 너머로 바라보는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기에.

 

그런 점에서 진은 오늘을 자축할 만했다.

 

용케 1년을 버텼다는 점에서.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점에서.

 

 

"어이."

 

껄렁한 목소리였다.

한창 포크질에 열중하던 진이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삐딱하게 내리깐 시선과 눈이 마주친다.

 

역시나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다운 타운에선 초면이라고 예를 갖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진도 마찬가지였다.

 

"왜."

 

진이 우물우물 빵을 씹으며 티나지 않게 눈을 굴렸다.

어느샌가 테이블을 에워싼 사내들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사이버웨어를 장착한 놈은 없고.

아니지. 내장형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진이 말없이 각을 재고 있는 가운데, 처음 인사를 튼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네가 우리 막내를 존나 팼다던데."

"엥?"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로 가늘어진 눈이 뒤늦게 새로운 얼굴을 찾았다.

다른 사내들 뒤에 숨어 비열하게 눈을 흘기고 있는 놈.

눈탱이 밤탱이 된 낯짝이 어딘지 익숙했다.

 

"어, 너?"

 

진이 검지로 상대를 가리켰다.

 

오늘 아침, 의도적인 어깨빵과 함께 지갑을 슬쩍하던 소매치기 면상이 딱 저렇게 생겼다는 걸 떠올리면서.

 

"한 번만 봐주면 다신 눈에 안 띄겠다며?"

 

고약한 손버릇을 응징할 겸 손목을 부러뜨리려고 했더니, 놈이 파리처럼 싹싹 빌며 읊던 말이었다.

한 번만 봐주세요. 다신 눈에 띄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코뼈만 주저앉힌 선에서 보내줬더니.

 

"닥쳐! 이 시발새끼야. 넌 이제 뒤졌어. 알아?"

 

이렇게 패거리로 몰려와선 저렇게 소리를 지른다고?

 

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접시에 남은 크림을 싹싹 긁어 입으로 가져가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들이 하나둘 날붙이를 꺼내들더라.

슬그머니 다가온 칼끝 너머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면상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으면 깽값은 준비했겠지? 꺼내봐. 보고 괜찮다 싶으면 팔다리만 자르는 정도로 합의해 줄 테니까."

 

그에 진이 포크를 입에서 빼며 답하길.

 

"돈 없어. 다 썼거든."

 

그러곤 반들반들 윤이 나는 포크로 가장 가까운 사내의 허벅지를 찔렀다.

 

"······?"

 

고작 식사용 도구가 옷감을 꿰뚫고 살갗 깊숙이 박히는 건 계산에 없었는지, 사내의 비명은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아-악!!"

 

그사이 엉덩이를 빙글 돌린 진이 손잡이만 삐죽 튀어나온 포크를 걷어찼다.

보다 깊숙이 파고든 날이 뼈에 닿았다.

그 결과, 외력을 견디지 못한 뼈가 뚝 부러지고 한층 커진 비명이 펍 안을 가득 매웠다.

 

"미친!"

"죽여!"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일행이 그렇게 외쳤을 때.

진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내지르는 중이었다.

 

빠각!

허공을 가른 주먹이 무릎을 꿇은 사내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뒤로 젖혀진 고개를 따라 핏줄기가 포물선을 그렸다.

 

진은 멈추지 않았다.

곧장 몸을 돌려, 우다다 달려드는 다른 사내의 복부에 무릎을 꽂아넣었다.

 

꺼허억. 폐부를 쥐어짜는 소리와 함께 기울어지는 머리통을 뒤에서 움켜잡고 테이블에 쾅!

얇은 유리판에 운석공을 연상시키는 금이 번지며 그 사이로 핏물이 스며들었다.

 

동시에 진이 머리카락을 꽉 틀어쥔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마음 같아선 몇 번 더 내리찍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서 칼이 날아들고 있었던지라.

 

덥썩.

 

"······?!"

 

설마하니 맨손으로 칼날을 움켜쥐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사내가 눈을 부릅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놈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이대로 칼을 몸쪽으로 당기기만 하면 주인 잘못 만난 손가락들이 우수수 떨어질 테니까.

 

그래서 힘껏 끌어당겼는데.

어랍쇼? 꿈쩍도 안 하네?

 

"뭣?"

 

마치 바위 틈새에 칼날이 걸린 듯한 감각에 사내가 핏대를 세우며 낑낑거리는 찰나.

진의 이마가 사내의 코를 덤프트럭처럼 들이받았다.

펑 터지는 핏물, 날아오르는 싯누런 치아.

 

동시에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이 개새끼가!

 

진이 몸을 돌렸다.

칼날이 뺨을 스치고, 진의 손은 상대의 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대로 높게 들어올려 거칠게 패대기!

일명 초크슬램이 매트가 아닌 맨바닥에 작렬한 그때.

 

탕!

 

느닷없는 총성과 함께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후끈한 열감이 물감처럼 번졌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에 진이 미간을 구기며 얼굴을 돌렸다.

악에 받힌 얼굴로 총구를 겨눈 사내가 보였다.

 

"뒤져!"

 

격분한 외침과 함께 당겨진 방아쇠.

그러나 격발된 탄환은 애꿎은 천장 조명만 산산조각 냈다.

어느새 거리를 좁힌 진이 사내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들어 올린 탓이었다.

 

"무, 무슨 힘이···!"

 

주도권을 잃은 팔이 믿기지 않는지 용을 쓰는 사내의 얼굴에 어김없이 주먹이 틀어박혔다.

 

의식이 날아간 사내의 손에서 물 흐르듯 권총을 빼앗은 진이다.

이후 바닥을 향한 총구가 쓰러진 다섯 사내를 향해 차례차례 불을 뿜었다.

 

이러면 남은 건 하나 뿐이다.

바닥에 주저앉은 소매치기가 턱을 덜덜 떨었다.

진즉 달아나지 못한 건, 눈앞에서 벌어진 싸움이 너무 순식간에 끝난 까닭에.

 

"자, 잠시만. 잠시만요."

 

엉덩이를 질질 뒤로 끌며 손사레치는 놈에게 진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야."

"예? 예예예."

"오늘이 어떤 날인 줄 알아?"

"그, 그게······"

 

소매치기가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다짜고짜 오늘이 어떤 날이냐니?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었지만, 모르겠다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위험할 것 같아서.

 

입을 떼지도 닫지도 못하고 머뭇대는 사내에게, 진이 친절하게 답을 알려줬다.

 

"정답은 1주년이야."

"······? 1주년? 애, 애인이 있으십니까?"

"애인 같은 소리하네."

 

진이 권총을 쥔 손등으로 뺨을 닦았다.

스치는 손길을 따라 핏물이 귀밑까지 번졌다.

 

"30살 먹고 엄마 찾으면서 질질 짜던 찐따가 맞는 첫 번째 생일이라고 오늘이. 그래서 좋게 좋게 넘어가준 거 아니야. 뜻깊은 날이니까."

"무, 무슨 말씀인지······"

"몰라도 돼."

 

직후 건조한 격발음이 귓가를 때렸다.

 

황동색 탄피가 떼구루루 바닥을 구르고, 딱 맞게 탄창을 비운 권총이 슬라이드가 밀린 채 움직임을 멈추자, 그 안에서 화약 냄새가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미간에 구멍 뚫린 소매치기가 머리를 처박고 쓰러진 건 그 다음이었다.

 

그제야 진은 쓰임을 다한 권총을 등 뒤로 휙 던진 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시체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깐만. 이러면 나도 소매치긴가?

아니지, 죽은 사람한테 소유권이 어딨어.

있나? 됐어, 있어도 없는 거야.

대한민국에는 있어도 다운타운은 없어.

빌어먹을 슬럼가.

빌어먹을 게임.

빌어먹을 인생.

 

적당히 자기합리화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새 손에 잡힌 꼬깃꼬깃한 크레딧 다발.

그중 절반 이상을 수리비 겸 청소비에 보태라고 테이블에 올린 진이다.

 

주인과 척을 지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다.

이 바닥 생리가 그랬으니까.

 

실제로 어느새 샷건을 장전한 주인이 테이블 위 지폐를 확인하고서야 조용히 팔을 내려놓았으니.

 

진이 그에게 손을 슬쩍 들어보인 뒤 비틀비틀 펍을 벗어났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혼자서만 특별했던 하루를 뒤로한 채.

 

지친 발길을 따라 길게 이어지던 핏방울이 어느 순간 거리의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1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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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

이 게시물은 프로젝트 네오가 처음인 '쌩뉴비'를 위한 글입니다.

 

0. 서론.

 

각 인생 경로에 따른 육성 가이드를 설명하기 앞서, 프로젝트 네오의 대략적인 배경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나는 스토리 이런 거 관심 없다, 하시는 분은 바로 육성 가이드로 넘어가셔도 무방합니다.

 

···중략···

 

3. 육성 가이드

 

본격적인 육성 가이드입니다.

프로젝트 네오에는 크게 3가지 인생 경로가 있고,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그에 상응하는 특전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인생 경로에 따른 스토리는 앞서 언급하기도 했거니와, 게임을 플레이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부분들이 많기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3-1. 기업

 

사이버웨어 협응력 25% 증가

추천 스타팅 퍽 : 통찰력(안구 모양 별자리)

추천 특성 : 블루 블러드

 

···중략···

 

3-2. 가문

 

마나 회로 제공

추천 스타팅 퍽 : 부동심(심장 모양 별자리)

추천 특성 : 불세출

 

···중략···

 

3-3. 부랑자

 

체력 30% 증가

추천 스타팅 퍽 : 빠른 회복(주먹 모양 별자리)

추천 특성 : 이레귤러

 

 

부랑자는 저렇게 3개 맞추고 시작하면 초반부는 사실상 좀비나 다름 없습니다. 물약 그게 뭐임?

 

초반부터 쳐맞딜이 가능해지는데 진.짜.겁.나.튼.튼.합.니.다.

 

그렇다고 이게 초반에만 국한된 장점이냐?

전혀 아닙니다. 캐릭터가 워낙 튼튼하다 보니 게임이 전반적으로 쾌적해져요.

 

그래서 뉴비분들게 가장 추천하는 빌드기도 하고요.

 

게다가 후반 포텐셜도 굉장한 게 이레귤러가 가진······

 

 

 

***

 

 

 

진은 눈을 떴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 찝찝했다.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바라본 암막커튼 사이, 흐릿한 형광색 빛줄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주황, 노랑, 빨강, 청록, 파랑.

거리를 희롱하는 네온사인의 불빛.

 

난잡하고 무질서한.

도시라는 이름의 거대한 만화경.

 

굳이 커튼을 젖히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을 뒤로하고, 진은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 벽을 더듬거려 도착한 화장실.

 

싸구려 무인 모텔답게 곰팡이가 잔뜩 낀 그곳에서,

진은 힘없이 깜빡거리는 형광등을 머리 위에 둔 채 철썩철썩 거칠게 세수를 했다.

 

포세이돈도 울고 갈 물따귀 세례를 마치고 올려다 본 거울 속, 적당히 잘생긴 20대 초중반의 사내가 충혈된 눈을 뜨고 있었다.

 

오늘로 다운타운 생활 2년차에 접어든 진 되시겠다.

 

"···죽겠네."

 

밤새 잠을 설치고 말았다.

악몽을 꾼 건 아니고, 망가진 몸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동반되는 고열과 몸살 때문에.

 

진이 오른쪽 어깻죽지, 정확하게는 날개뼈 어름을 더듬거렸다.

전날 총상을 입은 부위.

하지만 거짓말처럼 매끈했다.

 

음, 아물었네.

진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무신경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진의 어깨를 파고든 탄환은 9x19mm 할로 포인트(HP)로 탄두 전면이 분화구처럼 파여있어, 관통력이 감소한 대신 착탄점에 가해지는 운동에너지를 극대화한 모델이다.

 

즉, 맞으면 뚫리는 게 아니라 부서진다.

 

실제로 진은 견갑하근을 필두로 회전근개 대부분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더란다.

 

대인저지력이라 해서,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쇼크사하거나 전투불능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진은 그 상태로 전투를 속행한 것도 모자라, 밤새 회복까지 마쳤으니, 몸뚱어리 하나는 상식의 경계선 바깥에 발을 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진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날 어깨를 아작냈던 탄환의 종류? 알 게 뭐람.

 

진에게 지난 1년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사투의 연속이었으니. 체계화된 지식이나 글줄보다는 몸으로 배운 경험을 신뢰할 뿐이었다.

 

예를 들면, 평범한 칼날은 맨손으로 쥐어도 손가락이 잘리진 않더라 같은.

피 땀 눈물 쏟아가며 체득화한 저만의 규칙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규칙들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

진은 무장한 건달 다섯 쯤은 어렵지 않게 담궈버릴 수 있는 싸움꾼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봐야 하루살이 인생이라는 건 변함 없었지만.

 

"후."

 

조금은 우울해진 진이 한숨을 내쉬며 퀭한 눈을 한 거울 속 자신에게서 눈을 뗐다.

 

아니 떼려고 했다.

거울 안에서 떠오른 반투명한 창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완료!)「적응」────────────

축하합니다.

당신은 뒷골목 세상에서 1년을 버텨냈다.

보상 : 퍽 XP 1,000

──────────────────

 

진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전날 총에 맞았을 때보다도, 쓰러진 이들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을 때보다도 더.

 

이는 자신이 날짜를 하루 착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으니.

 

콰앙!

 

생각을 거치지 않고 휘두른 주먹이 거울을 산산조각 냈다. 수천 개로 쪼개진 유리 파편 사이사이로 핏물이 스며드는 가운데, 반파된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어느새 분노로 일그러져있었다.

 

"시발새끼가···"

 

진은 1년 만에 나타난 새로운 퀘스트 창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축하? 사람 시궁창에 처박아놓고 축하?

축하는 해도 내가 해. 네가 아니라 내가.

그리고 그 축하는 어제 끝났어.

 

화를 참기가 힘들었다.

 

30년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남자에게, 어쩌면 모든 것의 원흉일지도 모르는 상태창의 축하는 세상 그 어떤 모욕보다도 끔찍했으니.

 

또 하나의 감정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언젠가 저 네모반듯한 괴물을 박살 내고 말 거라는.

이글거리는 복수심.

 

하여 진이 다짐했다.

 

당장 주는 건 다 받아먹어줄게.

하지만 그 끝은···

 

다량의 XP가 선사하는 상승감. 그로 말미암아 전신으로 퍼지는 짜릿함을 느끼며 진이 피나는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

 

 

 

에어리어 47.

일명 다운타운은 무법과 탈법의 온상이다.

 

그리하여 범죄와 폭력이 만연한 거리지만,

그런 거리에도 안전한 구역 몇 개쯤은 있었으니,

'럼펌펌펌'이라는 24시간 식당이 그중 하나였다.

 

이유인즉, 여기서 파는 햄버거가 끝내주게 맛있었던 탓에, 혹시라도 눈먼 총알에 주인장이 맞아 죽을까 염려한 거리의 동포들이 가게 주위에선 싸움을 피하자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진은 그 잘난 햄버거는 구경조차 못 해봤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는 팔지 않아서.

 

끝내주게 맛있는 햄버거를 만들었던 주인장은 보호가 무색하게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더라.

 

새로 이식한 임플란트가 체내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킨 것이 원인이라는데, 뭐 중요한 건 아니고.

 

결과적으로 럼펌펌펌은 하루아침에 다운타운의 몇 없는 맛집에서, 그 이름만 유지한 채 온갖 싸구려 음식을 취급하는 그저그런 영업점으로 하락세를 타는 듯했으나.

 

재밌게도 일련의 사건 이후에도 합의된 평화는 용케 유지되어, 오늘날 더럽게 맛없는 음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기묘한 가게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아침 끼니를 럼펌펌펌에서 때우는 진이 있었다.

 

창밖이 보이는 2층 오른쪽 후미진 구석 테이블.

 

연식이 20년도 더 되어보이는 구형 스피커를 곁에 둔, 진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였다.

 

진은 패브릭 소재의 낡은 그릴 너머로 들려오는 이름 모를 레트로 풍의 노래를 흥얼흥얼 콧소리로 흉내내며 포크로 찍은 미트볼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늘의 메뉴는 미트볼 스파게티.

 

인공육을 대충 동그랗게 뭉쳐, 대충 삶은 면 위에다, 대충 던져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맛도 당연히 구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끼니를 떼울 수 있다는 거다.

굶는 것보단 백배, 천배. 아니? 만 배 낫다.

 

진은 굶주림이 주는 고통을 기억하고 있었다.

낯선 세상에 떨어진 처음 일주일.

 

진을 가장 괴롭혔던 건, 외부에서 가해진 온갖 형태의 폭력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밤거리의 냉기도 아닌, 텅 빈 뱃속이 내지르는 원초적인 비명이었으니까.

 

하루 온종일. 이성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끝끝내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비명.

 

그때만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게.

미트볼이 이보다 맛있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여 진이 순식간에 접시를 비웠다.

 

배가 든든해지자, 온종일 상태창 때문에 잡쳤던 기분이 점차 누그러지더라.

 

다희야, 네가 괜히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음식으로 푼 게 아니었구나. 이제야 이해가 돼. 근데 그렇다고 딴 남자 고추까지 먹은 건 심했다. 진짜로.

 

이제는 다른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바람난 전 애인을 떠올린 진이 스파게티와 함께 주문한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후 텁텁한 입안을 씻어낸 그가 꺼억- 가스를 뱉을 때였다.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매가리 없는 목소리. 진이 고개를 돌렸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 후드를 푹 눌러쓴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놀라지 않은 이유는, 한참 전부터 주변을 서성거리는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에.

 

마른 체형. 짝다리 짚음.

무게 중심 오른쪽으로 치우침.

여차하면 왼쪽 발목부터 걷어찰 것.

 

속으로 견적을 낸 진이 대답했다.

 

"나한테 볼일 있어?"

"맞아."

 

진의 눈가가 슬며시 좁아졌다.

우물쭈물대는 게 시비나 걸려고 온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여긴 럼펌펌펌이잖아.

 

"일단 앉아."

 

진의 눈짓에 남자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떠듬거리길.

 

"그, 안녕. 반가워. 나는···"

"잠깐만. 그 전에."

 

진이 남자의 말을 잘랐다.

 

"그거 안 먹을 거야?"

"······? 아, 이거?"

 

남자가 손에 쥔 포장지를 슬쩍 들었다.

겉으로 살짝 삐져나온 와플에 진의 시선이 고정됐다.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는 남자의 손을 따라서 계속.

 

"···먹을래?"

"고맙다."

 

진이 냉큼 포장지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딴말이 나오기 전에 와플을 한입 크게 욱여넣고서 우물우물 부푼 볼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무슨 볼일인데."

"너한테 의뢰를 맡기고 싶어."

"음?"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들었나?

 

"나한테?"

"맞아."

"······."

"어제 네가 펍에서 싸우는 걸 봤어. 너 솔로 맞지?"

 

남자가 그렇게 되물었다.

진의 고향이었다면 무례하다 느껴질 만한 발언.

너 솔로 맞지?

그 성격에 얼굴에 애인이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로스트 시티에선 다르다.

 

솔로(Solo)

 

그건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진 싸움꾼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합격 목걸이였기에.

 

일신의 무력을 인정받아,

수많은 의뢰를 처리하며 몸값을 높이는 자들.

달리 말해 용병, 혹은 바운티 헌터.

 

물론 진은 아니었다.

 

진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시비가 걸려오는 엿 같은 거리에서, 매일같이 쌈질하며 번 돈으로 연명하는 하루살이였을 뿐이니까.

 

그 하루살이가 생각했다.

 

솔로가 뭐 별 건가?

의뢰받으면 솔로지.

 

그리하여 고개를 끄덕이길.

 

"뭐. 그런 거 같네."

"···어?"

"맞다고. 솔로."

 

진이 그렇게 말하며 눅눅한 와플을 크게 베어 먹었다.

 

생각해 보면 다운타운 생활도 오늘로 2년 차다.

집도 절도 없이 1년을 버텨 지금.

마침내 의뢰라는 걸 맡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솔로로 활동하면 그래도 하루 세 끼는 챙겨 먹을 수 있겠지.

때려 팬 놈 팬티 속까지 뒤지는 것보단 의뢰비 받는 게 훨씬 낫잖아.

라는 결론에 다다른 진이었다.

 

그랬기에 와플을 우적거리는 얼굴은 평소보다 희망찼으니,

첫 의뢰자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난 현금만 받아."

< 2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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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

로스트 시티에서 의뢰란, 공권력에 기댈 수 없는 지저분한 일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불법에 가깝다는 소리다.

폭행 사주, 탈취, 납치, 살인, 해킹 등등.

 

뭐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으니,

눈앞의 남자는 구출을 요구하더라.

 

"그러니까 동생을 구해달라?"

 

진의 물음에 남자가 초췌한 얼굴을 끄덕였다.

 

"맞아. 그 애가 위험해."

"으음."

 

진이 주먹을 쥐어 포장지를 둥글게 뭉쳤다.

조금 전까지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 정리하면서.

 

"동생이 그 뭐? BC? BHC? 무슨 편집자라고?"

"BH 편집자야. Brain Holic. 설마···몰라?"

"알아야 해?"

"아, 아니 그건 아닌데······"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다 문뜩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너 전뇌 소켓이 없구나. 혹시 순수주의자야?"

"순수주의자? 아아, 가문? 아니 난 가문 아닌데? 부랑자 골랐거든."

"······?"

"왜?"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두 사람이 동시에 머리 위로 의문표를 띄웠다.

 

진은 반(反)임플란트 사상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남자는 진의 뜬구름 잡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라고 해봐야, 게임 시작 전 눈팅한 공략글이 전부인 진이다.

그마저도 스토리는 귀찮아서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 세계관 한정, 밑바닥 상식을 자랑하는 그가 당당하게 묻길.

 

"그래서 그 BH라는 게 뭔데. 들어나 보자."

"어어. 그, 그게···"

 

분위기에 휩쓸린 남자가 떠듬떠듬 설명을 늘어놓았다.

 

"BH는 타인의 경험을 신경전달을 통해 간접 체험하는 기술이야. 시각, 후각, 촉각, 청각, 미각 같은 오감은 물론이고 대상자가 느낀 감정까지도 생생하게 전달하지."

 

이야, 그런 게 있었어?

 

진이 눈썹을 까딱 세웠다.

 

확실히 여기가 진보된 세상이긴 하구나.

다른 사람 경험까지 체험할 수 있고.

누가 나처럼 살아볼 사람 없나?

하루아침에 게임 속에 유기되기.

 

"그래서 BH는 범죄자를 교화하거나 각종 분야의 교육 자료로 쓰이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긍정적인 요소로 널리 활용되고 있어.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지만···"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의 일부가 함께 빠져나온 것처럼 짙게.

 

"BH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그저 쾌락만을 좇는 도구로서 암암리에 거래되기도 해. 일종의 스너프 필름 같은 거지."

 

진이 단박에 그 말을 이해했다.

말이 좋아 체험이지, 사실상 빙의나 다름없는 기술 아닌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딥페이크로 온갖 범죄가 판쳤던 마당에, 하물며 오감과 감정까지 재현할 수 있다면···.

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내 동생은 공사장 안전 수칙 따위를 제작하던 편집자야. 안전모를 미착용한 인부에게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까? 정도를 체험시켜주는. 그런 애가 갱단의 BH 제작이라니. 맨정신으론 못 버틸 거야."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사이.

 

진은 팔짱을 낀 채, 볼 안쪽을 질겅거리는 중이었다.

 

할까? 말까?

듣자 하니 갱단과 척지는 일이다.

어설프게 들쑤셨다간 일이 복잡해질 텐데.

 

그렇게 고민이 길어지는 가운데,

침묵 속에서 진의 낯빛을 살피던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의뢰비는 줄 수 있는 대로 줄게."

"······!"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네.

제일 중요한 걸 안 물어봤잖아?

 

의뢰라 처음인지라, 아직 몸값이란 게 없는 진이다.

그래서 속으로 적당히 가늠하길.

 

10만 크레딧 정도면 한다고 할까?

아니지. 이럴 땐 일단 20만부터 지르고 못 이기는 척 깎아주는 식으로···

 

"200만 크레딧이면 될까? 전액 현금으로."

 

팟.

순간 진의 머릿속 전원이 꺼졌다.

 

잠시 후, 이성이란 퓨즈를 더듬더듬 찾아 끼운 무의식이 맹렬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길.

 

미트볼 스파게티가 2천 크레딧이니까.

200만이면 스파게티가 1,000인분.

하루 세 끼 호사를 누리고도 333일.

그러고도 0.3일이 남아서 와플을 하나 더 살 수 있는.

 

"맡겨줘."

 

어느새 남자의 손을 양손으로 감싼 진이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

 

 

 

갱, 갱단, 갱스터.

 

풀어서 길거리의 마피아들.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다운 타운에서 갱단이란, 양아치 셋만 의기투합해도 탄생하는 폭력써클과도 같은 거라서 하루에도 십수 개가 출범하고 또 사라지니까.

 

물론 개중에는 다운타운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갱단도 여럿 있었지만, 다행히 스틸 핸즈는 그 정도 체급은 아니었다.

 

이름값으로만 따지면 중하위권 애매한 그 어딘가.

 

하지만 무시할 수준은 결코 아니다.

 

스틸 핸즈는 그 이름에 걸맞게 조직원 전원이 사이버암을 장착한 살벌한 싸움꾼들이었으니까.

 

다만 진이 보기엔 멀쩡한 팔 잘라다가 굳이 강철팔로 바꿔 끼운 정신이상자들에 불과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몰라?

부모님한테 받은 귀중한 몸에 무슨 짓인데?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진도 할 말이 없는 게.

그의 육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닌.

스탯과 스킬 그리고 특성의 조합물일 뿐이라서.

 

그리하여 진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막돼먹은 세상에서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자신이 아닐까 하고.

 

물론 이 몸에도 기원이 있고, 그에 따른 배경스토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눈 떠보니 시궁창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을 뿐인 자신에겐 아무래도 꿈결 같은 이야기라.

 

솔직히 관심도 없었고.

실제로 아는 사람도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진은 처음부터 진이었다.

 

게임 속 캐릭터가 으레 다 그렇듯.

 

됐어. 그만.

기껏 멘탈 잡아놓고 또 이러네.

집중하자. 첫 번째 의뢰잖아.

나도 이제 어엿한 솔로라고.

 

자꾸만 깊어지려는 존재론적 회의감을 억지로 떨쳐낸 진이 뺨을 착착 두드리며 발길을 재촉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클럽이었다.

 

[STEEL NIGHT]

 

상호가 새겨진 총알이 깜빡깜빡 점멸하는 권총 모양 LED 네온사인 아래.

강철의 팔짱을 낀 가드가 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흠."

 

제법 잘생긴 얼굴에 큰 키.

위아래로 걸친 항공 점퍼와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아랫도리 윤곽이 심상치 않은 20대 중반의 사내.

 

이 정도면 널널하게 합격이다.

 

"···들어가."

 

진이 까딱 턱짓하는 가드를 지나쳤다.

 

'X발 존나 크네.'라는 떨떠름한 혼잣말을 뒤로 한 채 문을 열자, 쿵쿵거리는 소음과 함께 지하로 향하는 기다란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스틸 나이트.

스틸 핸즈가 관리하는 사업장이자 아지트다.

 

분명 이곳에 자신의 동생이 붙잡혀있을 거라고.

남자는 초췌한 낯빛으로 몇 번이고 강조했었다.

 

제니라고 했지.

 

피랍된 BH 편집자의 이름을 머릿속에 되새기던 진은 문뜩 자신이 계단을 다 내려왔음을 깨닫고 요란한 소음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번쩍거리는 조명과 그 아래서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잿빛 눈동자에 담겼다.

 

"오."

 

진이 작게 감탄했다.

열락에 취해 몸을 흔드는 인파를 보니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지? 여태 나만 먹고 살기 팍팍했던 건가.

 

왠지 인생을 절반쯤 손해 본 것 같다는 생각 속에, 진이 카운터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품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지폐를 펼쳐놓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제일 싼 걸로 한 잔."

"······."

 

바텐더가 별 거지새끼를 다 본다는 눈길로 크레딧을 챙기는 동안. 등받이 없는 원형 의자에 앉은 진이 몸을 180도 돌렸다.

 

하나, 둘, 셋···

 

클럽 내부는 넓었지만, 그럼에도 갱단원을 눈으로 솎아내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춤을 추지 않으면서, 양팔이 사이버암으로 이뤄진 깍두기를 찾으면 됐으니까.

 

그리하여 진의 눈에 포착된 갱단원이 모두 8명.

 

그리고 그중 하나가 어디론가 이어지는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저기네.

 

진이 속으로 확신하는 사이, 등 뒤로 무언가를 탁!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얼음잔에 담긴 술이 보였다.

쌩하니 돌아서는 바텐더의 뒷모습도.

 

"참 나."

 

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잔을 손에 쥐었다.

 

이후 가볍게 홀짝인 싸구려 술이 목젖을 타고 넘어가며 화한 열감을 선사했다.

 

"······콜라나 달라고 할 걸."

 

사실 진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술을 마신 다음날은 꼭 허기가 졌기 때문이었다.

 

인슐린 분비로 인한 일시적 저혈당 상태는, 공복감에 PTSD가 있는 그에겐 굳이 사서 찾고 싶지 않은 불쾌한 기분인지라.

 

그리하여 진이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정확히는 아랫배에 손을 얹은 채 눈앞을 스치는 갱단원의 뒤를 밟은 것이었다.

 

"아으. 뭘 잘못 먹었나?"

 

다급하게 칸막이 하나를 골라 들어간 갱단원이 황급히 바지춤을 풀어헤치는 가운데, 뒤이어 화장실에 도착한 진이 주변을 살폈다.

 

적막한 가운데 좌변기 앞에서 몸을 푸르르 떤 사내가 벨트를 추켜세우는 모습이 보였다.

 

"푸후우우우. 아, 취하네. 취해."

 

취기 가득한 혼잣말과 함께 비틀비틀 화장실을 나서는 그를 확인한 진이 등 뒤로 달칵 걸쇠를 채웠다.

 

이후 연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나는 칸막이 앞으로 걸어간 그가 문고리를 당겼다.

 

잠깐. 이거 왜 그냥 열려?

 

당초 문짝을 뜯어낼 셈이었던 진은 저항 없이 열린 문 너머, 변기에 앉은 갱단원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씨. 왜 문을 안 닫고 지랄이야.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다리털 수북한 정강이 사이. 해먹처럼 걸린 흰 팬티가 역겨워 눈을 돌리자, 그때까지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갱단원이 뒤늦게 소리쳤다.

 

"야! 이 X발새끼야! 당장 안 닫케헤헥!"

 

하지만 진의 발차기가 더 빨랐으니, 순식간에 신발 밑창에 얼굴을 직격당한 갱단원의 고개가 핏물을 뿌리며 뒤로 꺾였다.

 

"좀 자라."

 

진이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충만감.

 

"···됐다."

 

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딱 한 명 정도 남았을 거 같더라니.

 

 

사실 진에겐 계획이 있었더란다.

 

어찌 됐든 홀로 갱단을 상대하는 일. 아무리 돈이 좋아도 목숨을 앞설 수는 없으니, 이번 의뢰를 수락한 대는 저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레벨업 같은.

 

 

진이 눈을 감았다.

 

그대로 정신을 집중하면,

어느새 확장된 의식은 드넓은 밤하늘을 비추고.

분명 감았을 터인 눈앞에 반짝이는 별자리가 떠오르는 것이다.

 

[빠른 회복]이란 이름의 첫 번째 반짝임으로부터 시작된 주먹 모양의 별자리.

 

진의 성취는 마지막 점 하나를 남겨두고 있었다.

 

지난 1년을 죽어라 구르고 또 굴러 별의 길을 하나씩 이은 결과물이었다.

 

전날 양아치 무리를 손본 것과, 오늘 새벽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XP로 숙련도가 거의 다 찼고.

 

체감상 딱 한 놈만 더 담그면 불 꺼진 콩나물 대가리에 빛이 들어오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한 명이 화장실 변기 위에서 쓰러졌으니,

성운 사이로 한줄기 빛이 올곧게 이어지고,

그리하여 빛은 마지막 잠든 별을 깨워 밝혔다.

 

진의 내면에서 새로운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초인]

 

마침내 하나의 성좌를 이룬 별무리가 환히 빛나는 것을 끝으로 진이 눈을 떴다.

 

한층 단단해진 육체와 그만큼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을 느끼면서.

 

"가볼까."

 

진이 고개를 좌우로 뚝뚝 꺾으며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저기 입구를 지키는 갱단원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말아쥐는 주먹. 정신없이 울려 퍼지는 클럽의 비트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고하는 듯했다.

< 3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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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

제니는 제법 유능한 BH 편집자였다.

 

BH 편집자가 유능하다는 건, 영상미를 극대화하는 재능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불필요한 감정은 덜어내거나 수정하고, 특정 감각을 적재적소에 강조 또는 축소하는 센스 말이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돈도 많이 벌었다.

 

상류층의 삶을 체험하는 BH를 몇 개 찍어냈더니, 허영심에 찌든 서민들이 알아서 지갑을 벌려주더라.

 

계좌에 따박따박 찍히는 숫자들이 어찌나 만족스럽던지. 처음 한두 달은 영상 속 주인공처럼 호텔에서 이것저것 다 골라잡기도 했다.

 

물론 그 즐거움이 오래가진 않았다.

 

"······극 빈곤층 체험? 미쳤어? 이런 걸 누가 보는데."

"누가 보긴. 돈 많은 놈들이 보지. 돈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이젠 가난까지도 사고 싶은 돼지새끼들이."

 

함께 일하던 PD가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한 말이었다.

그가 가져온 원본 영상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너저분한 옷을 입은 거지가 누군가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처참하게 폭행당한다. 이후 거지는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거리를 배회하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음식물 쓰레기에 손을 대고, 허겁지겁 배를 채우던 도중 갑자기 나타난 가게 주인의 호통에 놀라 달아나다 그만 AI 트럭에 치여 날아간다.

 

이후 바닥을 붉게 물들이며 널브러진 거지를 폐품 보듯 지나치는 군중들의 시선을 끝으로 영상은 페이드 아웃.

 

머리가 뜨거워졌다.

애초에 BH 임플란트는 누가 달아준 건지.

심지어 거지는 어린아이였다.

 

"촉각이랑 미각은 제대로 다듬어. 너무 아프거나 역겨우면 난리 난다? 흐음, 후각도 만지긴 해야겠네. 하여간 좆같은 걸 주워 먹어서는. 아! 자살 충동 최소화하는 거 잊지 말고. 그리고······"

 

이어지던 PD의 디렉팅은 기억나지 않는다.

변기를 부여잡고 속을 게워 내던 순간만이 생생할 뿐.

 

그날로 제니는 일을 그만뒀다.

 

벌었던 돈도 전부 빈곤층을 위해 후원했다. 후원사가 사기 업체란 걸 뉴스에서 본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배운 게 편집 일이라, 결국 다시 BH를 잡게 됐을 때도 제니는 공익적인 작업물에만 손을 댔다.

 

공사 안전 수칙, 공공시설 대피 안내 따위의 영상물.

 

봉급은 쥐꼬리만 해졌어도 마음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납치를 당했다.

 

불법 BH 사업에 뛰어들겠다는 갱단 새끼들한테.

수준도 딱 예상 가능한 수준이었다.

술에 취한 고객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죽어도 만들지 않겠다 난리를 쳤더니.

처음에는 밥을 끊고, 두 번째는 물을 끊더라.

그게 하루 전이었다.

 

이게 그 아이가 겪었을 고통일까?

이런 걸 체험한다고? 또라이 새끼들.

 

그렇게 정신이 점차 흐려지는 와중이었다.

 

문밖에서 쾅쾅거리는 소음과 격렬한 외침이 번갈아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뭐지?

제니가 힘겹게 고개를 든 순간.

 

콰직!

 

철문이 안쪽으로 우그러졌다.

 

직후 문고리가 세차게 위아래로 덜컥이더니 이내 안에서 잠겼다는 걸 깨닫기라도 한 듯 움직임이 멎었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콰앙!

 

경첩째로 떨어져 나간 문 너머, 누군가 어깨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낯선 얼굴. 한 손에는 피떡이 된 갱단원의 머리통을 움켜쥔 남자가 주홍빛 조명을 등진 채 입을 열었다.

 

"제니?"

"······아?"

"금발에 녹안. 맞네."

 

진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휙 털었다.

그 방향을 따라 던져진 갱단원이 벽에 얼굴을 박은 뒤 핏물을 주르륵 남기며 미끄러졌다.

 

"누, 누구야?"

"구하러 왔어."

 

진이 무릎을 굽혀 제니를 살폈다.

퀭한 눈동자. 핼쑥한 낯빛.

손발이 뒤로 묶여 쓰러진 모양새가 처연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건······어떻게 알고?"

"네 오빠가 알려주던데."

 

진이 그렇게 말하며 제니의 손목을 결박한 케이블 타이에 검지를 비집어 넣었다.

그대로 힘을 줘 당기자 팡! 하는 소리와 함께 끈이 터져 나갔다.

 

"아으."

 

제니는 고통과 함께 자유로워진 손목을 주물럭거리며 똑같은 방법으로 발목의 결박을 풀어내는 진을 바라보았다.

 

"···너 솔로야?"

"아마도?"

 

파앙! 두 번째 케이블 타이가 끊어졌다.

놀라운 괴력이었다.

제니도 놀랐고, 진도 놀랐다.

 

나 좀 강해졌네?

퍽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인데 이전보다 힘이 배는 강해진 느낌이었다.

괜히 마지막 스킬이 아니었다 이거지.

 

"걸을 수 있어?"

"미안해······힘이 안 들어가."

 

손으로 바닥을 받친 채 몸을 일으키려던 제니가 풀썩 쓰러졌다.

 

누구라도 3일을 굶고 하루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면 이렇게 된다.

 

사실 지금도 현기증이 너무 심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든 제니였다. 이 순간 웽웽웽 소란스러운 비상벨 소리가 환청인지 진짜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그럼 잠시만 그대로 누워있어."

 

진이 점퍼를 벗어 둥글게 뭉쳤다.

 

이후 제니의 머리맡에 점퍼를 끼워 넣은 그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 걸음을 옮기니, 문턱을 지나치며 자연스레 넓어진 시야에 일그러진 깍두기들의 낯짝이 담겼다.

 

"이런 씹······"

"이게 무슨 개같은 상황이야."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동료를 확인한 몇몇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는 가운데, 그들 뒤로 쿵쿵거리는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직후 누군가 깍두기 무리를 헤치며 모습을 드러내니.

 

"어떤 새끼야!"

 

잔뜩 분노한 얼굴이 고릴라를 닮은,

양 팔꿈치에 커다란 유압 실린더를 장착한 사이버암이 위협적인 거한이었다.

 

"이 시발놈이. 너야? 내 사업장을 발정난 개새끼 좆질하듯 들쑤시고 다닌 게?"

 

표현 보게?

진이 피식 웃었다.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발정난 개새끼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남의 사업장을 들쑤신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왜 이렇게 꽁꽁 숨겨놨냐고.

찾기 힘들게.

 

"보아하니 우리 편집자를 노린 모양인데.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넌 뒤졌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좆만 한 새끼 같으니라고."

 

고릴라남의 부리부리한 눈이 스캔하듯 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안와에 박힌 전자 안구가 붉은빛을 번뜩이니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듯 놈의 미간이 좁아졌다.

 

"···임플란트가 하나도 없다고?"

 

마치 물구나무를 선 채 생활하는 사람을 본 듯한 말투.

저 정도면 천연기념물이라 봐도 될 정도였다.

 

물론 저 정도로 말끔한 상태를 유지하는 몸뚱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순수주의자라 하여, 반(反)임플란트 사상에 물든 고리타분한 놈들이 있긴 있었으니까.

 

첨단의 시대를 역행하는 검과 마법의 후손들.

혹은 그 추종자들.

 

하지만 맨손으로 부하들을 쌈 싸 먹은 사내에게선 순수주의자 특유의 푸른 기운 '마나'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그리하여 저만의 결론에 다다른 고릴라남이었다.

 

"설마 강화인간?"

 

동시에 진이 바닥을 박찼다.

말 더럽게 많네. 싸움을 입으로 하나?

 

쿵!

 

순식간에 상대 앞에 다다른 진이 상체를 비스듬히 숙이며 뒤로 당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풍압을 동반한 오버핸드 라이트 훅.

 

고릴라남이 흠칫 왼팔을 세웠다.

 

직후 쇳덩이와 피육이 맞부딪혔다고는 믿기 힘든 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콰앙!

 

"···미친!"

 

팔 전체가 울리는 충격에 고릴라남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진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이어진 레프트 바디샷이 고릴라남의 활짝 열린 복부를 후려쳤다.

 

"커헉!"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도 용케 쓰러지지 않은 건, 순전히 강화 외피 덕분이었다.

 

총탄을 방어하기 위해 삽입한 인조 거죽.

비싼 돈 들인 보람이 있다.

그 덕에 반격할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까.

 

"개새끼가!!"

 

고릴라남이 이를 악물며 양팔을 휘둘렀다.

아니, 휘둘렀다기보단 발사에 가까웠다.

 

그의 사이버암이 팔꿈치 아래로 피스톤 운동을 반복하자, 강철 주먹이 초당 10회의 속도로 진의 상체를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두두두두두두!!

 

두꺼운 콘크리트 담벼락도 단숨에 허물어뜨릴 연타에 진이 뒷걸음질 쳤다.

 

마치 코앞에서 투포환 세례를 받아내는 듯한 감각.

11자로 바짝 당겨 올린 팔이 순식간에 얼얼해졌다.

 

이건 반칙이지!

진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막기만 해선 답이 안 나온다.

 

아무리 자신이 튼튼하기로서니 이대로면 다진 마늘 신세를 면하지 못할 터.

 

그리하여 진이 자세를 극단적으로 낮췄다.

 

주변을 에워싼 깍두기들의 눈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한 모양새. 즉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보스! 됐습니다!"

"죽여버립쇼!"

 

하지만 고릴라남은 그 환호에도 웃지 못했다.

 

눈앞에서 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대자로 뻗었다면 모를까.

그냥 사라졌다.

설마···!

 

다음 순간 고릴라남의 발목이 와그작 꺾였다.

 

"아악!"

 

여긴 별로 안 튼튼하네?

양손으로 빨래 짜듯 상대의 발목을 비틀어버린 진이 그대로 팔로 크게 원을 그렸다.

 

그 궤적을 따라 크게 다리가 휘돌아버린 고릴라남이 불안정한 자세로 고꾸라졌다.

 

그 와중에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으니,

진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후웅!

 

전력을 다한 발차기가 아뿔싸 고개를 돌리는 고릴라남의 안면을 후려쳤다.

 

뒤로 젖혀지는 얼굴.

뚜둑. 끊어져선 안 될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

 

곧이어 뻣뻣하게 굳은 상체가 통나무 쓰러지듯 뒤로 넘어가자, 더는 생체 신호를 감지하지 못한 사이버암이 푸쉭-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스틸 핸즈의 보스. 커크는 그렇게 죽었다.

진의 머릿속에 고릴라남이란 이름으로 기억된 채.

 

"···보스! 이런 개X발!"

"지. 진짜 뒤진 거야?"

"거짓말이지? 말이 안 되잖아."

 

갑작스런 보스의 죽음에 깍두기들의 눈이 크게 흔들리는 가운데, 진이 손을 툭툭 털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이러한 상황. 무쌍 시리즈를 한 번이라도 즐긴 대한의 남아라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식이 있었으니.

 

숨을 크게 들이쉰 진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적장 물리쳤다!"

 

 

 

***

 

 

 

메트로폴리스의 회색 능선이 태양을 삼킨 늦은 저녁.

 

한 남자가 초조한 얼굴로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제키.

 

럼펌펌펌의 2층 오른쪽 구석진 자리에 웅크려 앉은 채, 애꿎은 엄지를 까득까득 깨물던 그의 귓가에 어느 순간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

 

흠칫 돌린 시선에 뚱뚱한 중년인이 담겼다.

 

감자튀김을 산처럼 쌓은 트레이를 든 그는 적당한 빈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붙였고, 제키는 한숨을 내쉬며 눈길을 거둬들였다.

 

미친 짓이었을까?

불안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다운타운에서 제대로 된 솔로를 찾기란 어렵다.

몸값도 몸값이거니와 애초에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기에.

 

중개인 끼고, 수소문하고, 뭐하고 뭐하는 사이에 동생이 죽을 판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동생의 구출을 부탁했다. 

 

그가 솔로가 아니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세상천지에 BH를 모르는 솔로가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람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제키는 절실했으니까.

 

"하아······"

 

짙은 한숨이 유리창에 희뿌연 서리로 맺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것이 아닌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는 가운데.

다시 한번 등 뒤로 계단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이고 꺾였던 기대감이지만, 그럼에도 제키는 또다시 기대감을 품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축 늘어진 누군가를 어깨에 둘러멘 가짜 솔로를.

그럼에도 믿을 수밖에 없었던 남자를.

 

"여기 있었네. 미안. 좀 헤맸다."

 

제키를 발견한 진이 눈썹을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제, 제니!"

 

소파에 내려놓은 여동생의 얼굴을 확인한 제키가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제니의 눈꺼풀을 들추고, 손가락에 코를 대고, 말을 걸고 온갖 난리부르스를 떠는 동안.

 

"어구구구."

 

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어디 한군데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면서 여기저기 맞고, 찔리고, 찢어진 결과였다.

 

아파 죽겠네.

보통 적장 물리쳤다고 하면 기가 팍 꺾이는 게 정상 아닌가?

 

눈에 불이라도 켠 듯 달려들던 깍두기들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뭐 덕분에 스킬 포인트는 많이 쌓았지만.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쓸 일이 있겠지.

 

"저, 정말 네가 구한 거야?"

"왜. 나 없는 동안 다른 놈한테 일 맡기기라도 했냐?"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왜 당연한 걸 묻고 있어.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진이 그렇게 말하며 의식을 잃은 제니를 바라봤다.

 

"스틸 핸즈 새끼들이 가둬놓고 굶긴 모양이더라. 급한 대로 물만 조금 먹이긴 했는데, 식사는 수액부터 맞힌 다음에 주든지 해. 뭐 수프도 좋겠네."

 

그러자 제키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야야. 왜 이래?"

 

눈앞에서 다 큰 남자가 우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하여 진이 손사래를 치자, 제키가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더듬더듬 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딱 봐도 의뢰비를 꺼내려는 모습이라 진이 급하게 그를 말렸다.

 

"이런 건 좀 조심스럽게 하자. 응?"

"아. 미안."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제키가 급히 눈가를 훔쳤다.

 

하여간 사내새끼가 마음이 저렇게 약해서야 원.

본인이 1년 전에 엄마 찾으며 질질 짠 건 잠시 잊은 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후 마음을 추스른 제키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문뜩 살갗에 닿는 기묘한 감각에 눈을 가늘게 떴다.

 

식은땀 흐르는 창백한 낯빛.

쇠맛 나는 불규칙한 호흡.

미세하게 떨리는 입가.

기계음 섞인 심장 소리.

죽어가는 흙과 나무의 냄새.

 

한층 발달한 감각이 전해주는 정보를 눈이 아닌 온몸으로 받아들인 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돈 어디서 났냐?"

"뭐?"

"의뢰비 어디서 났냐고."

"······"

 

잠시 말이 없던 제키가 마른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장기를 팔았어."

"심장이지?

"그, 그걸 어떻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왜 하필 심장인데."

"···수요가 제일 높으니까."

 

그 말인즉슨 멀쩡한 심장 떼다가, 싸구려 중의 싸구려 임플란트로 갈아 끼웠다는 소리였다.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상태가 영 이상하다 싶더라니.

 

"아씨···진짜."

 

진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10만 크레딧만 줘."

"뭐?"

"10만 크레딧만 달라고. 어차피 그 정도만 받아도 이 일 맡으려고 했으니까."

"그게 무슨······"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거리는 제키에게 진이 뒷말을 덧붙였다.

 

"끝까지 들어. 나머지 190만 크레딧은 앞으로 조금씩 갚는 거야. 매주 수요일 19시. 럼펌펌펌 2층 이 자리. 메뉴는 내 마음대로. 알간? 참고로 난 많이 먹는다."

"아, 알겠어."

"그럼 내놔. 돈. 와플 사 먹게."

 

진이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이후 제키가 조심스레 내민 10만 크레딧을 챙긴 그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네 동생 잘 챙기고, 너도 적당한 모델로 심장 다시 갈아 끼우던가 해. 지금은 싸구려라도 너무 싸구려야. 이대로는 길어야 5일 본다."

"···고마워."

"간다."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뒷모습을 향해 제키가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고마워!"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며 손등이 보이게 손을 휘휘 흔들었을 뿐. 

 

이후 1층에서 와플 두 개를 구입한 그가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를 향해 발을 내디디니.

 

평범한 다운 타운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 4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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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 >

우웅.

 

테이블 위 휴대폰이 몸을 비튼다. 키보드 마우스에서 손을 떼지 않고 눈동자만 굴려 확인하니 '또라이' 한테 온 전화다.

 

터치 패드를 오른쪽으로 쓱 훑은 뒤,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어, 왜?"

"형. 뭐해요?"

"게임."

"프로젝트 네오?"

"아니, 롤."

"아 뭔 롤이에요. 30살 이상은 라인전 서면 불법인 거 모름? 그냥 스팀겜해요. 이왕이면 프네로."

"그거 나랑 안 맞아. 잠시만···이게 죽어?"

 

잠시 통화에 정신이 팔렸더니 적 다리우스가 도끼로 머리를 쪼개버렸다. 아, 플쓰고 죽었네. 탑 망함. 진짜 망함.

 

"왜 뭐가 안 맞는데. 너무 복잡해요? 어려움?"

 

동생 녀석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어본다.

 

화면도 회색빛으로 물들었겠다, 막간을 살려 불만을 토로했다.

 

"들어봐. 일단 부랑아가 너무 구려. 거리의 들개? 외로운 싸움꾼? 웃기시네. 이거 설명 바꿔야 한다니까? 퍽치기, 소매치기, 아리랑치기 및 각종 묻지마 폭력에 시달립니다로. 내가 다른 인생 경로는 안 해봐서 딱 잘라 비교는 못 하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야-, 한겨울에 장작 땐 드럼통 주변 자리 놓고 거지들이랑 일기토 펼쳐봤냐? 하수구 똥내 나는 골목에서 코 막고 음식물 쓰레기 뒤져봤어? 같은 팬티 두 달 동안 입어봤냐고. 시발.

 

총은 또 어떻고? 이건 진짜 답이 없어. 어떻게 된 게 맞아도 맞아도 당최 적응이 안 돼요. 이젠 누가 주머니에 손만 넣어도 흠칫할 지경이라니까? 괜히 미국 경찰이 예민한 게 아니야. 사람이 절로 그렇게 변해.

 

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넌 사람 죽이는 기분 모르지? 나도 알기 싫었다? 근데 어떡하냐. 웬 미친놈이 내 주머니에 든 푼돈 털어먹겠다고, 칼로 등이며 옆구리며 가슴이며 존나 찔러대는데. 피는 철철 쏟아지지 머리는 핑핑 돌지, 이러다 뒈질 판인데 별 수 있어?

 

정신 차리고 보니까 내가 그놈 위에 올라타 있더라.

 

혹시라도 움직일까. 움직여서 또 나를 찌를까. 그게 너무 무서워서 계속 두들겨 팼을 뿐인데 어느 순간 숨을 안 쉬더라고. 한 일주일 잠을 못 잤어. 매일 그 새끼가, 으깨진 얼굴이 꿈에 나와서.

 

근데 있잖아. 시간이 지나니까 이 짓도 무뎌지더라. 솔직히 요즘은 사람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악몽은 무슨. 잠만 잘 잔다니까?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거라고,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다짐했으면서 결국 익숙해진 거지. 총 맞는 건 아직도 아픈 주제에.

 

어때. 네가 봐도 조진 거 같지? 내 생각도 그래.

 

만약에, 진짜 만약에 기적이 일어나서 눈 떠보니 다시 한국이라고 해도, 내 삶은 그때 그 시절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거 같거든.

 

그래서 그런가. 가끔은 숨이 잘 안 쉬어지대?

이게 공황인가 싶기도 하고.

 

시발 모르겠다. 사실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 누가 나이를 물으면 그냥 1살이라고 할까 봐. 왜 그런 거 있잖아. 유튜버들이 많이 하는······그래, 부캐. 나도 유튜버들처럼 부캐 하나 만들었다 치지 뭐. 좆같은 세상에서 아득바득 살아가는 부랑자 컨셉으로. 어때?

 

이렇게라도 자위해야 마음이 좀······

아씨, 떠들다 보니까 정신이 드네.

 

야, 이거 꿈이지?"

 

다음 순간.

휴대폰 너머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네 형. 당연히 꿈이죠. 그러니 일어나셔야겠는데요? 아무래도 도둑 든 거 같은데."

 

 

 

 

진은 눈을 떴다.

 

어두컴컴한 시야에 적응하기도 전에 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눈을 움직이니, 어둠 속에 숨죽인 인영들이 보였다.

 

진도 그들을 봤고, 놈들도 진을 봤다.

 

부자연스러운 침묵.

불현듯 터지는 고함.

 

"들켰다!"

"쏴!"

 

그와 동시에 진이 이불 위에서 몸을 굴렸다.

퓩퓩퓩! 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누워있던 곳에서 솜털이 연이어 솟구쳤다. 뭐야, 소음기야?

 

그 와중에 팔이 화끈한 게 어디 한 발 맞은 모양이었다.

 

직후 침대를 바리게이트 삼아 등을 기댄 진이 손만 뻗어 눈앞에 보이는 의자 다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방향만 대충 어림짐작해 힘껏 집어던지니.

 

훙!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가른 의자가 무언가와 부딪혀 아주 산산조각이 났다.

 

"잭!"

"이런 X발!"

 

얼굴이 반파된 채 쓰러지는 동료를 발견한 다른 두 사내가 기겁하며 의자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이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난데없이 그들의 눈앞에 벽이 생겨났다.

밥상처럼 뒤집힌 침대라는 벽이.

 

"커헉!"

 

포탄처럼 날아든 침대에 치인 두 사내가 우당탕탕 뒤로 나자빠지는 가운데, 뒤이어 달려온 진이 뒷발을 크게 휘둘렀다.

 

쾅!

 

측면에서 옆구리를 걷어차인 사내가 멀리 튕겨나 벽에 부딪혔다. 이후 도무지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핏물을 웩 하고 게워낸 놈이 자신이 만든 붉은 웅덩이에 코를 처박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두 번째 불청객까지 처리한 진이다.

이제야 잠이 좀 깨는 듯했다.

 

하여 이번에는 오른발을 축 삼아 몸을 회전하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뒤를 노리는 마지막 사내의 목을 움켜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퓩! 퓩! 퓩!

 

목표물을 잃은 총구가 헛된 방향으로 총탄을 뿌렸다.

 

그중 한 발이 진의 허벅지를 파고든 것은, 진에게도 사내에게도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진은 아팠고, 사내는 편히 죽을 기회를 날렸다.

 

그리하여 늦은 밤.

 

와장창 창문 깨지는 소리와 함께 피떡이 된 사내가 허공을 날았다.

 

5층 높이에서 떨어진 그의 사인은 추락사가 아니었다.

 

"아으 씨."

 

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난장판이 된 방 한가운데서였다.

 

"···뭐하는 새끼들이야."

 

진은 몰랐지만 야밤의 침입자들에겐 나름의 멸칭이 존재했다.

 

스캐빈저.

 

후미진 무인 모텔을 돌아다니며, 도어를 따고, 강도질을 일삼는.

필요에 따라서는 살인도 서슴치 않는 약탈자들이었다.

 

진은 2년 차에 접어들고서야 이들을 처음 맞닥뜨렸으니,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학무지경의 말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겠다.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진이 작게 중얼거리며 오른팔에 힘을 꾹 줬다.

근육을 조여 총알을 빼보려 한 건데 시도만 좋았다.

 

애꿎은 핏물만 퐁퐁 솟구칠 뿐. 정작 총알은 감감무소식이니, 이러면 새로 차오른 살이 탄을 밀어내길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

 

2시간쯤 걸리려나.

초인 퍽을 해금했으니 더 빠를지도?

 

그렇게 자신의 회복력을 가늠한 진이 널브러진 시체 두 구를 향해 다가갔다.

이어진 합당한 노략질.

생각보다 짭짤하진 않더라.

 

하필이면 창밖으로 내던진 놈이 돈을 관리하고 있었던 탓이었는데, 그런 사정을 알 길 없는 진은 웬 거지 일당에게 보쌈 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하여간 이 동네는 늘 새로워. 늘 짜릿해."

 

아무리 피와 시체에 무던해진 진이라고 해도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이미 침대며 창문이며 죄다 박살 난 상태이기도 했고.

 

그리하여 세면대에서 목만 대충 축인 진이 방을 나서려는 순간.

뜬금없이 반투명한 창이 시야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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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좀 잠잠하다 싶더니 또 지랄이네.

진이 손을 거칠게 휘저었다.

 

"꺼져."

 

아무 도움도 안 되면서 이래라 저래라.

 

덕분에 새벽부터 언짢아진 진이 주머니에 깊게 손을 꽂은 채 걸음을 옮겼다.

 

 

 

***

 

 

 

갑작스러운 습격에, 개 같은 퀘스트창까지.

 

비록 어젯밤을 망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진은 요 며칠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가만히 있어도 막 들뜨는 느낌? 그런 기분?

 

처음엔 주머니 사정이 풍족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10만 크레딧이란 돈은, 진이 이 세계를 표류한 이래. 한 번에 쥐어본 액수로는 최대 수치였기에.

 

덕분에 하루 세끼 다 챙겨먹고, 숙소도 별 고민 없이 턱턱 잡고, 낡아빠진 속옷과 양말도 새로 사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단 그런 이유로 기분이 좋다고 볼 수는 없는지라.

 

그럼 뭘까?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이 감정의 출처는.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진이 마침내 결론에 이르길.

 

아. 이번에 번 돈은 정당한 대가였구나.

 

한결 머리가 트이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지난날 진의 돈벌이 수단은 단순했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 자리를 잡는다.

껄렁한 건달, 양아치, 삼류 갱단원이 시비를 걸어온다.

옳다구나 때려팬다.

주머니를 턴다.

 

이른바 미끼 전략.

 

솔직히 좋은 돈벌이 수단은 아니다.

 

더군다나 쓰레기들의 주머니와 팬티 속을 뒤지는 일에 성취감이 어디 있겠는가. 냄새만 안 나면 감지덕지다.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차.

 

처음 경험한 의뢰가,

일을 마무리하고 받은 돈이,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진의 가슴을 뛰게했다.

 

어쩌면 조금은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작은 희망.

 

그리하여 진이 핫도그를 씹다 말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 뭐 좀 물어봅시다."

 

그러자 소시지를 굽던 퀭한 눈의 중년인이 미심쩍은 눈으로 말하길.

 

"뭔데? 환불은 안 돼. 벌써 반이나 처먹었잖아."

"에헤이, 사람을 무슨 거지로 아나. 그런 거 아녜요."

"그래? 그럼 하나 더 사 먹어."

 

이게 무슨?

하지만 진은 그냥 그러기로 했다.

어차피 출출하던 차였으니까.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노점 주인이 새로운 핫도그를 내밀며 그렇게 물었고, 진은 건네받은 핫도그를 한 입 크게 베어 먹으며 대답했다.

 

"솔로가 되려면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아요?"

"뭐?"

"몰라요?"

 

노점 주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솔로는 왜. 용병짓에 환상이라도 있어?"

"아니. 그래서 알아요, 몰라요."

"나야 모르지. 그런 걸 알았으면 내가 한가롭게 핫도그나 만들고 있게?"

"하긴···."

 

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핫도그에 입을 가져가는데, 노점 주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이건 알지. 링커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거."

"링커?"

"뭐야. 링커를 몰라? 뭐 달나라에서 왔어? 에휴 쯧. 그래가지고 이 바닥에서 어떻게 버티려고. 오래 살긴 글렀다."

 

주인이 고래를 절레절레 젓자, 입 안 가득한 핫도그를 우물거리던 진이 도끼눈을 떴다.

 

"듣자하니까 이 양반이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뭘 한 번에 말해주는 게 없어. 이럴 거면 어? 핫도그 추가 안 했지. 이게 다, 어! 그 뭐야. 그래. 정보룐데!"

 

콱! 장사 접고 싶어?!

파멸적인 기세로 비산하는 음식 조각에 주인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이고 다 튀네. 그, 그만! 말해주면 되잖아!"

"씁. 진즉 그럴 것이지."

 

어디 읊어보라는 듯, 손을 까딱이는 진을 흘겨본 주인이 말을 이었다.

 

"링커가 링커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어어? 주먹은 왜 쥐어. 누가 말 안 해준데? 중개인이야, 중개인. 의뢰인과 솔로를 이어주는. 쉽지?"

 

아하. 말 그대로 링커(Linker)였구만?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

 

"근데 왜 중개인 따위의 눈에 들어야 하는 거지?"

"뭐?"

"몸으로 뛰는 건 난데 지네가 뭐라고 사람을 가려 받아. 아니지. 애초에 날 섭외하지 않은 것부터가 잘못됐네. 안목이 그 따윈데 무슨 일을 같이 할 수 있겠냐고. 안 그래요? 그나저나 핫도그 맛있네. 하나 더 줘봐요. 아니다. 두 개. 소스 듬뿍 뿌려서."

"······."

 

주인장이 슬며시 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반반할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보니 잿빛 눈동자 안에 은은한 똘기가 번들거리는 것이 아 이놈도 다운타운의 주민이 맞구나 납득해버린 그였다.

 

처참한 상식 수준으로 보건대, 블랙넷을 들락거리다 실수로 BCI칩 일부가 손상된 모양이지.

 

그리하여 적당히 어루달래길.

 

"굳이 링커가 찾아오길 기다릴 필요가 뭐 있나. 먼저 찾아가면 되지. 자, 여기 핫도그."

 

진이 주인이 내민 핫도그 두 개를 받아들었다.

 

먼저 찾아간다라.

내키진 않지만 별 수 있나.

 

후미진 골목길에 쪼그려앉아 누가 시비를 걸어주길 기다리는 것도 질렸다.

 

일다운 일을 하면서 부족하게나마 사람처럼 살아보자. 그러면 언젠가는 다운타운을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듣기로 에어리어 30 안쪽 구획은 그래도 치안이 갖춰져 있다던데. 거기서는 적어도 자다가 총 맞는 일은 없겠지. 맞아. 그럴 거야. 그래야 해.

 

속으로 중얼거린 진이 마지막 돈을 털어 산 핫도그를 입에 쑤셔넣었다. 그러고는 우물우물 뭉개진 발음으로 눈치를 살피는 주인을 향해 말했다.

 

"아는 링커 있으면 아무나 말해봐요. 당장 찾아갈라니까."

< 5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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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화 >

다운타운의 중심지에는 거대 복합 상가가 있다.

 

일명 정크 프라자.

 

용적률이 1,000%를 넘어서는 닭장 건물들이 동서남북 빈틈없이 빼곡하게 붙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숨이 턱 막힌다.

 

일조권을 보장받지 못한 그늘진 거리에는 형형색색의 네온간판이 태양을 대신해 음울한 빛을 뿌리니, 환경 오염으로 인한 흐리멍덩한 날씨까지 더해져 정크 프라자는 언제나 낮과 밤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괜히 진이 다운타운의 전경에서 구룡채성을 떠올린 게 아니다.

1993년 사라진 홍콩의 마굴이 여기에 있었다.

좀 더 화려하게. 좀 더 정신없이.

 

"거기, 잘생긴 오빠."

 

야릇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진이다.

 

빛이 들지 않는 골목. 초록색 쓰레기 박스 위에 걸터앉은 여인이 요염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 나랑 같이 시간 보내지 않을래? 싸게 해줄게."

 

그러고는 허공을 둥글게 잡은 손을 입가에 톡톡 치는데 그 박자에 맞춰 혀로 볼 안쪽을 볼록하게 밀어댄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 진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돈 없어."

"싸게 해준대도. 오빠 얼굴 정도면 나도 일하는 느낌은 아닐 거 같은데."

"고추도 안 서."

"······? 진짜?"

"진짜."

 

순간 말문이 막힌 여인에게 엄지를 추켜세워준 진이 고개를 돌렸다.

 

슬프게도 진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주머니는 텅텅 비었고, 고추는 원래 안 섰다.

 

아, 한국에 살던 시절은 아니고.

게임 속에 떨어진 직후부터.

 

처음에는 그저 심리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자, 슬슬 의심이 되는 게 다름 아닌 이레귤러더라.

 

그간 진의 목숨을 구원해준 특성.

하여 이제는 가물가물한 설명란을 떠올려보면.

 

자가포식 및 에너지 효율 극대화. 그리고 진화 정도가 적혀있던 것 같은데, 이를 토대로 뇌피셜을 굴린 결과 생식 능력에 필요한 에너지가 다른 쪽으로 이용되고 있지 않나 생각한 진이었다.

 

회복이라거나 근육 강화라거나. 아무튼 뭐 그런 거.

 

지난 1년 동안 골격근량 자체는 큰 변화가 없음에도, 꾸준히 힘이 강해지는 걸로 봐선 사실상 확실했다.

 

인간의 근육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단면적 1cm2당 약 4kgf의 근력을 낼 수 있을 뿐이지만, 진의 괴력은 그런 상식을 옛날옛적에 넘어섰으니까.

 

그마저도 최근 초인 퍽을 뚫으며 더 강해졌고.

 

잠깐만.

초인인데도 생식 능력 회복이 안 돼?

 

진이 자못 심각해진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물론 성격이 성격인지라 고민을 길게 이어가진 않았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직 활성화 못 한 별자리도 많잖아.

모르지. 그중에 하나쯤은 해결책이 있을지도.

 

실제로 진의 내면에는 불 꺼진 성좌들이 매우 많았다.

 

문제는 해금 조건을 모른다는 것.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고른 [빠른 회복]이 주먹 모양 성좌의 첫 번째 별이었음을 고려하면, 가장 기본이 되는 퍽을 뚫어야 그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건 알겠는데 지금으로선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략 좀 꼼꼼히 볼 걸.

이제 와서 이런 후회가 무슨 소용이겠냐만.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야?"

 

진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정크 플라자 4단지 A구역]

 

높이 걸린 간판을 보아, 핫도그 가게 주인이 설명한 위치에 도착하긴 했는데 거리가 워낙 난잡한 탓에 그만 뇌정지가 와버렸다.

 

이 길이 저 길 같고, 이 골목이 저 골목 같은 느낌.

와. 잠시만 어지러워.

 

저 혼자 스턴에 걸린 진이 눈을 끔뻑거릴 때였다.

 

퉁!

등짝에 닿는 둔탁한 충격.

이어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

 

"아이···"

 

진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 한 사내가 있었다.

 

칼끝처럼 솟은 눈매에 하관을 가리는 도깨비 가면을 썼다. 진에 버금가는 큰 키에 허리춤에는···음. 칼을 찼네?

 

그것도 뒷골목 양아치들이 누구 하나 담그려고 품은 손바닥만 한 나이프가 아니라, 사선으로 뻗었음에도 그 길이가 바닥에 근접한 장검이다.

 

굳이 따지자면 생김새는 환도나 일본도와 유사한데 길이는 투핸디드 소드에 가까웠으니, 100년째 행방이 묘연하다는 충무공 이순신의 쌍룡검이 딱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저렇게 긴 걸 어떻게 뽑지?

팔의 가동범위보다 칼날이 더 긴 거 같은데.

 

진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갑자기 왜 멈추고 지랄이야."

 

이어진 사내의 말에 진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상대의 말투가 띠껍긴 한데 자신이 갑자기 멈춰선 건 사실이라서.

 

"거 미안합니다. 내가 이 동네가 안 익숙해서."

"비켜."

 

사내가 어깨로 진의 어깻죽지를 치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휘청.

튕겨 나간 어깨를 수습하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데 눈빛이 살벌했다.

 

진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뭐 이 약골아.

그러게 이기지도 못할 어깨빵은 왜 쳐?

 

하지만 둘의 눈싸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 무리의 인파가 시끌시끌 둘 사이를 가로질렀기에.

 

그리고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땐 사내도 그곳에 없었다.

 

"···뭐야."

 

맥이 탁 빠진 진이 주먹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하긴 꼴에 칼이라고 찬 물건이 뽑지도 못할 장식품이 아니던가. 남들은 지레 겁먹었을지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하지.

 

코웃음을 한 번 쳐주고 다시 주변을 둘러본 진이다.

그리고 곧바로 어지러워졌다.

 

"아 그래서 어디냐고."

 

 

 

***

 

 

 

비슷한 장소를 열 번쯤 빙글빙글 돌았을 즘.

 

진은 마침내 핫도그 가게 주인이 말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이건 뭐 시장통에 숨은 맛집도 아니고, 장애물 없이 1, 2분이면 충분한 거리 사이에 온갖 샛길이며 노점들이 실타래처럼 뒤얽혀있더라.

 

사실 대부분의 사람에겐 내비 앱만 키면 해결될 문제긴 했다. 헤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주소만 입력하면 시야에 최단 거리 경로가 홀로그램 형태로 산출되는 시대였으니까.

 

하지만 이는 BCI칩을 꽂지 않은 진에겐 전제부터 글러먹은 일이었으니, 친절과 담을 쌓은 행인들에게 묻고 물어 겨우 찾은 술집 앞에서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간판을 확인했다.

 

[Anecdote]

 

에넥도트. 제대로 왔네.

 

진이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그를 반겼고, 동시에 기다란 탁자 뒤에서 유리잔을 닦던 젊은 바텐더가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요. 편히 앉으시길."

 

바텐더의 인사를 받으며 둘러본 내부.

 

원목 재질의 탁자 앞에는 등받이 없는 원형 의자가 적당한 텀을 두고 비치되어 있었다.

거기에 벽부등 및 풋라이트 등의 조명이 필요한 만큼만의 빛으로 가게를 나른하게 밝히니, 전체적인 느낌이 여기가 다운타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분하더라.

 

방금 전까지 도떼기시장 한가운데서 길을 헤맸던 진은 인지부조화가 오는 기분이었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적당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고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바텐더에게 말했다.

 

"당신이 링커?"

 

그 물음에 바텐더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로신가요?"

"음, 어. 의뢰를 맡아봤으니까 맞지 않을까 싶은데."

"성함이?"

 

성함이라니. 공손한 말투가 간지러워 반사적으로 귀를 후벼판 진이 입을 열었다.

 

"진."

"알겠습니다. 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바텐더가 그렇게 말하며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선은 진을 향하고 있었으되 다른 공간을 유영하는 듯 오묘한 빛깔을 흘렸다.

 

이윽고 초점이 또렷해진 바텐더가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솔로 인트라넷을 서치한 결과 일치하는 대상이 조회되지 않는군요. 혹 레벨5 이상의 솔로신가요? 그렇다면 단순 조회가 불가능한바.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순간 얼떨떨해진 진이 뺨을 긁적였다.

 

"나는 그런 거 없을걸."

"무슨 말씀인지."

"진짜 솔로가 되려고 온 거라서. 인증 딱지 같은 건 안 붙었어.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고."

"아. 이해했습니다."

 

바텐더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럼 49구역은 어때?"

"최악이지. 타하가 모든 클랜을 통합한 이후로 거긴 작은 독재국가나 마찬가지야."

"타하. 야심이 큰 남자였지. 너도 조심해."

"조심은 무슨. 그래봤자 기업 똥받이 새낀데."

"그 말. 타하 앞에서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술병이 진열된 중앙 선반 뒤편에서 한 쌍의 남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진의 미간이 꿈틀했다.

 

감탄이 나올 만큼 풍성한 붉은 머리칼의 여인 때문이 아니라, 그 옆에서 나란히 걸어오는 사내 때문에.

 

날카로운 눈매, 하관을 가린 도깨비 가면.

그리고 비상식적으로 긴 장검.

 

그는 거리에서 진에게 어깨빵을 놓았던 사내였다.

 

"···음?"

 

사내도 진을 봤다. 가면 위로 드러난 눈에 불쾌감이 서리는 가운데 곁에 선 여인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음? 손님이 있었네."

"진이라는 분입니다. 솔로가 되고 싶어 찾아오셨다군요. 아마도 계약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텐더의 말에 여인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래?"

 

그러더니 보폭을 넓혀 진의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또각거리는 걸음걸이를 따라 스모키하면서도 달달한 향기가 확 풍겨왔다.

 

"그래. 진, 솔로가 되고 싶어서 왔다고?"

 

그 목소리에 한창 사내와 눈싸움 2차전을 벌이고 있던 진이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거둬들였다.

 

"아, 어."

"일단 뭐라도 좀 마실래?"

"나 돈 없는데."

 

진의 말에 여인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라 여긴 건지, 아니면 공짜로 내줄 셈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선반에서 술병을 하나 잡았다.

 

콜라 달라고 할까.

 

잠시 고민하던 진은 여인이 내미는 술잔을 그냥 받았다. 얻어먹는 처지에 반찬투정까지 하긴 좀 그랬으니까.

 

"통성명부터 다시 시작할까? 난 칼리파야. 보다시피 에넥도트의 점장이고."

"진. 솔로왕이 될 남자."

 

해적왕, 용병왕, 기사왕 등등.

온갖 XX왕 가득한 스낵 컬처를 소비하며 자라온 진은 대충 솔로에다 왕자를 붙여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굳이 따지면 솔로킹이 맞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럼 득템도 겟템이고, 발컨도 풋컨이게?

 

그 당당함이 칼리파에게 먹혀든 모양이었다.

 

"···솔로왕?"

 

낯선 단어를 입안에서 굴린 칼리파가 이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여리여리한 체구와 달리 제법 호탕한, 그래서 오히려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재밌네. 마음에 들어. 지금 당장 계약서를 가져오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진. 유머 실력이 쓸만하다는 것만으론 솔로가 될 수 없어. 정확히는 나와 계약할 수 없지. 에넥도트는 어중이떠중이완 일이 하지 않거든."

 

한순간 진은 칼리파의 홍채에 맺히는 붉은 기운을 봤다. 인공 안구? 아니 그렇다기에 그것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실력도 확인할 겸. 우선 적당한 의뢰 몇 개만···"

"그럴 필요 없어."

 

칼리파의 말을 끊고 들어온 건 도깨비 가면의 사내였다.

그는 진을 다시 목도한 이후로 불상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있었는데, 여태 끼어들 순간을 기다린 사람처럼 기회가 생기자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괜히 먼 길 돌아가지 말고 나랑 한 번 붙여봐. 그렇지 않아도 저 자식한테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거든."

< 6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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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화 >

사내의 말에 칼리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그나저나 확인할 게 있다니. 두 사람 구면이라도 돼?"

"그렇다고 쳐두지."

 

사내가 그리 말하며 진을 바라봤다. 아니, 처음부터 그는 진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거지?"

 

뭘 어쩌긴 어째.

진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실력도 보여줄 겸 저 싸가지도 때려 팰 기횐데.

 

사실 어깨빵 하나로 진이 호승심을 불태우는 건 아니었다.

이래 봬도 초등학교 바른 생활, 중학교 도덕,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을 사사한바. 다운타운의 1년이 제아무리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로서니, 어깨빵 하나로 눈깔 뒤집히는 막돼먹은 놈으로 자라진 않았다.

 

하여 이 순간 진이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상대가 풍겨오는 야성적인 투기에 몸이 절로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시작할까?"

 

목을 뚝뚝 꺾는 진의 모습에 칼리파가 끼어들었다.

 

"잠깐. 여기선 곤란해."

 

물러섬 없는 두 남자의 눈빛을 확인한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바텐더를 향해 말했다.

 

"포우. 훈련실로 안내해."

"네. 칼리파님. 두 분, 따라오시죠."

 

바텐더가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앞장 섰다.

 

진은 그를 뒤따르며 이 주점이 겉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견 창고라고 생각했던 공간의 문을 열자, 그 너머에 제법 큰 공터가 나오는 것만 봐도 평범한 술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장 사업 같은 건가.

 

그런 생각 속에 정신을 차려보니, 진은 어느새 다섯 걸음 남짓한 거리를 두고 도깨비 가면 사내를 마주보고 있었다.

 

사내가 말했다.

 

"펜릴이다."

"그래."

 

자기소개는 생략한 진이다.

통성명은 이미 충분했으므로.

 

"펜릴 뭐 때문에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해. 괜한 사고치지 말고."

"노력하지. 장담은 못 하겠지만."

 

칼리파와 펜릴의 대화를 듣는 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것들이 아주 쌍으로.

 

시작도 전에 자신의 패배를 상정하는 이들 앞에서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열받은 진이 대뜸 바닥을 박찼다.

 

선수필승!

 

단숨에 거리를 좁힌 뒤 주먹을 날린다. 그 갑작스런 일격에 펜릴이 반응했다. 순식간에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하고는, 보다 자세를 낮춰 다리로 바닥을 쓸었다.

 

텅!

 

지지하는 발목을 걷어차인 진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그대로 허리부터 바닥에 떨어지는 찰나. 진이 양손을 아래로 뻗어 바닥을 짚었다.

 

낙법과는 거리가 멀다. 두 다리가 뜬 상태에서 하중을 오로지 손목으로 받아내는 행위였으니 골절되기 딱 좋은 자세라.

 

하지만 초인의 괴력이 이를 극복했다.

 

한순간 단단하게 바닥을 지지한 팔뚝에 핏줄이 솟는가 싶더니, 허릿심을 살려 탄력적으로 두 다리를 차올린다.

 

마치 유명 격투 게임의 흑인 카포에라 캐릭터가 연상되는 스프링 킥.

 

쓰러지는 진을 쫓던 펜릴이 급하게 양팔을 교차했다.

 

쾅!

 

충격에 뒤로 밀려나는 상대를 향해 진이 따라붙었다. 추격하듯 던진 주먹이 옆구리를 때렸고, 순간 헐거워진 안면 방어를 놓치지 않은 반대쪽 다리가 머리를 노렸다.

 

왼손 잽에서 이어진 오른발 하이킥.

 

펜릴은 상체를 드러눕듯 젖혀 공격을 피했다. 얼굴 위를 스치는 다리와, 살갗으로 전해지는 풍압이 가면 위 눈빛을 당황으로 물들였다.

 

진의 다리가 허공을 휘돌아 다시 바닥에 닿은 것과 펜릴이 허리를 곧추세운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의 간격은 아주 가까웠다.

 

서로의 주먹이 교차했다.

 

펜릴은 자신의 공격이 진의 얼굴을 맞혔다는 사실에, 그리하여 코뼈를 완전히 주저앉혔다는 결과에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귀 옆에서 북 터지는 소리가 울렸기에.

 

스쳤을 뿐인데도 귓가가 얼얼했다.

 

카운터 펀치가 환상적으로 꽂혔기 망정이지. 흘리지 못했으면 저걸 얼굴로 받아낼 뻔했다.

 

무슨 몸뚱어리가···!

 

어깨끼리 부딪칠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마치 쇳덩어리를 친 느낌.

믿기 힘들어서 착각이라 여겼다.

자존심이 긁혀 회복이 필요했다.

 

하지만 직접 몸을 섞어보니 착각이 아니더라.

이 새끼 이상하다.

제대로 끝내지 않으면 위험해.

 

펜릴이 그렇게 생각하며 후속타를 준비할 때였다.

 

핏물을 흩뿌리며 뒤로 넘어가던 진의 얼굴이 마치 오뚜기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순간적으로 날아간 의식을 회복한 것이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덤이었다.

 

직후 펜릴의 주먹이 진의 얼굴을 강타했다.

하지만 진은 골이 흔들리는 충격을 버텨냈다. 아까는 예상 못 한 카운터였지만, 이번에는 보고 맞았다.

뇌는 예상한 충격에는 어지간해선 퓨즈를 내리지 않는다.

하여 안면을 대주며 거리를 좁힌 진이 팔을 뻗으니, 급히 물러서려던 펜릴의 목덜미에 손깍지를 단단하게 채웠다.

 

"···어딜! 도망가려고!"

 

직후 팔을 밑으로 끌어당기며 차올린 무릎이 펜릴의 복부를 때렸다.

펜릴은 다급하게 팔꿈치를 들어 막았지만 그 충격에 전신의 뼈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진이 재차 팔을 내리눌렀다. 그 힘이 워낙 강했던 탓에 펜릴의 머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후속타의 타점이 복부에서 머리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빠각!

 

무릎에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당한 펜릴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저항하는 힘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

진은 마무리를 짓고자 했다. 딱 한 방이면 확실하게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속에 다시 한번 무릎을 차올리는 순간.

 

진은 어느새 상대와 거리를 벌린 자신을 발견했다.

이는 이성이 아닌 본능의 영역이었으니,

가슴 부위가 네 갈래로 길게 찢어진 항공 점퍼가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크르르-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는 펜릴이 보였다.

크게 휘둘렀을 팔을 아래로 떨군 채, 천천히 고개 드는 얼굴은 회색빛 털이 부숭부숭 돋아있었다.

 

도깨비 가면이 툭 떨어진다.

 

그리하여 보이는 건 길어진 주둥이, 20cm 이상 자란 키, 부풀어 오른 근육과 날카롭게 돋은 손톱이었다.

 

이 모든 요소를 한데 충족시키는 생명체를 떠올린 진이 중얼거렸다.

 

"늑대인간?"

 

크르르-

 

펜릴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후 샛노란 안광을 진에게 고정한 그가 기다란 칼자루에 손을 얹는 순간.

 

"그만."

 

칼리파의 목소리가 팽팽한 공기를 꿰뚫었다.

 

주먹을 꽉 틀어쥔 채 이어질 싸움을 대비하던 진은 눈앞을 가로막은 바텐더를 보았다.

 

"멈춰주시겠습니까, 진."

 

정중하게 미소 짓는 얼굴에 손아귀에서 힘이 절로 풀렸다.

그건 펜릴 쪽도 마찬가지였는지, 바텐더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모습은 어느새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선 칼리파가 말했다.

 

"뭘 얼마나 진심으로 하려고? 테스트는 끝났어, 펜릴."

"······빌어먹을."

 

씹어뱉는 듯한 욕설.

 

그대로 몸을 돌린 펜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훈련장을 벗어났다. 휘청거리는 걸음걸이에 바텐더가 곧장 따라붙으려 했지만, 칼리파가 손을 뻗어 막았다.

 

"됐어. 그냥 가게 냅둬."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칼리파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 피범벅된 코를 씰룩거리며 아픈 표정을 짓는 진이 담겼다.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확실히 재밌는 손님이 왔네."

 

 

 

***

 

 

 

에넥도트에는 객실까지 딸려있더라.

 

하긴 훈련소까지 있는 마당에 객실이 무에 특별할까.

 

하여 침대와 책상 그리고 의자 정도가 전부인 단출한 방에서 진은 짧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이걸 휴식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퉤!"

 

가래낀 핏물이 양동이에 철푸덕 떨어졌다.

이후에도 진은 피가래를 계속해서 뱉어냈다.

 

코뼈가 완전히 내려앉은 탓이다. 입으로만 호흡하려니 목뒤로 자꾸만 핏물이 넘어오는데 이게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아주 미칠 노릇이라는 걸.

 

더군다나 유효타라고 맞은 2대가 전부 얼굴이었던 탓에 코뿐만 아니라 안면 전체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진은 그냥 참았다.

어디 부러지고 깨지는 건 이제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아픔까지 익숙해지면 참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아픔은 언제나 새로워서 도무지 적응이 안 되더라.

 

"퉤엣!"

 

어김없이 핏물을 뱉은 진이 양동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길.

 

위험했지.

 

그나마 코를 맞았기 망정이지. 피격 지점이 관자놀이나 턱이었다면 회복하는 속도가 느렸을 터.

그럼 후속타도 클린히트로 여러 방 맞지 않았을까.

자연스레 훨씬 어려운 양상이 펼쳐졌으리라.

 

하지만 싸움이 그런 식으로 흘러갔더라도 진은 본인이 졌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펜릴이 인간 상태였다면 말이다.

 

늑대인간이라니.

도대체 이 게임 장르가 뭐지?

 

사이버펑크, 아케인펑크, 바이오펑크 그놈의 펑크펑크펑크. 누군가에겐 낯설기만 한 온갖 장르가 짬뽕된 게임이었으니 거기에 늑대인간 하나 추가된다고 뭐가 그리 달라지겠느냐마는.

 

그래도 이종족까진 생각지 못했던 진이 낄낄거렸다.

 

즐겁고 행복해서 웃은 건 아니었다.

그냥 바보처럼 웃었다.

찢어진 아랫입술로 피 섞인 침을 뚝뚝 흘리면서.

 

이러다 아주 흡혈귀에, 엘프도 나오겠어?

만나면 순수를 증명해 보라며 질질 짜게 만들어볼까?

우리 아리따울 귀쟁이들은 소문대로 명사수려나?

활은 몰라도 총은 있는 세상이잖아. 잘 쏘겠지. 뭐.

하여튼 지랄이다. 진짜 지랄이야.

간신히 익숙해지나 했더니.

 

진은 웃었다.

 

일그러진 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는지 웃는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호흡이 일정한 리듬을 잃었다.

 

"하아, 하아-"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제멋대로 날뛰는 가운데.

진이 자리한 객실 안으로 검은 파도가 들이닥쳤다.

손쓸 틈도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순식간에 발목이 잠기는 것을 시작으로 검은 물은 허벅지를 적시고 복부를 지나 금새 가슴팍에 닿았다.

 

진은 이것이 공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숨이 더욱 가빠졌다.

 

"허억! 허억! 허억!"

 

지금 여기엔 총알도 맨몸으로 버티는 초인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이방인임을 절감하는 한 남자가 있었을 뿐.

 

 

진을 구한 건 작은 노크 소리였다.

 

똑똑똑.

 

그 평범한 외부음에 턱밑까지 차오른 검은 물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괜찮으십니까?"

 

숨을 헐떡이는 진의 눈에 걱정스런 표정을 한 바텐더의 얼굴이 담겼다.

 

"심박수가 지나치게 빨라 찾아왔습니다. 혹 무슨 문제라도?"

 

포우라고 했던가.

심박수를 읽고 나타나는 것도 그렇고, 저 혼자 다른 세계관에 사는 듯한 말투며 기품 있는 동작이며.

영 사람처럼 안 느껴지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익사하기 직전이었던 진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맙다야. 덕분에 살았어."

"진?"

"가끔 이래. 이제 괜찮아. 진짜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아. 드디어 코 뚫렸네. 잠시만."

 

포우는 진이 양동이에 시뻘건 콧물을 연거푸 풀어내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진이 고개를 들어 부기가 가라앉은 얼굴을 보였을 때, 그는 준비한 말을 전했다.

 

"그럼 함께 움직이실까요? 그렇지 않아도 점장님께서 기다리시던 차였습니다."

< 7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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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 >

"···정말로 아물었네?"

 

기다란 탁자를 사이에 끼고 다시 만난 칼리파는 마주 앉은 진을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주저앉은 콧대에 치료를 권했더니 이 정도는 괜찮다며 양동이 하나만 달라던 얼굴을 기억했다.

 

잘생긴 외모가 무색해지는 부상이었거늘, 지금의 진은 콧등의 검푸른 멍만 제외하면 거의 멀쩡해 보였다.

 

"회복력이 대단한데."

"그런 편이지?"

 

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쿠키를 집어 먹었다.

초코칩 잔뜩 박힌 간식이 선사하는 혈당 스파이크.

절로 기분이 좋아진 진이 생각했다.

역시 스트레스에는 단 음식만 한 게 없다고.

 

그리하여 앉은 자리에서 쿠키를 도륙 내는 진을 지켜보던 칼리파가 포우에게 간식을 더 내오라 눈짓했다.

 

"솔직히 놀랐어. 펜릴과 그 정도로 싸우다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포우."

"네. 그가 수인화까지 쓰리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

 

포우가 그렇게 말하며 쿠키로 채운 접시를 내려놓았다. 진은 기다렸다는 듯 집게손가락으로 쿠키를 낚아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걔는 뭔데. 진짜 늑대인간이야?"

"펜릴, 늑대 수인이고 이 바닥에선 알아주는 솔로야.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지."

 

알아주는? 베테랑? 역시 난가.

 

저 코 깨진 것도 잊고 어깨가 올라간 진이었다.

 

물론 승부를 내지 못한 건 아쉽긴 했다. 하지만 쌍룡검 휘두르는 2m 10cm짜리 늑대인간과 굳이 사생결단을 내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라.

 

다음에 만나면 핫도그나 노나 먹을까.

고추 새끼들끼리 치고받으면서 친해지는 거지 뭐.

진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자, 그럼 일 얘기로 돌아가서-"

 

분위기를 환기한 칼리파가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얹으며 말했다.

 

"솔로가 되고 싶다고 했지?"

"맞아."

"잘 찾아왔어. 계약부터 진행할까?"

"이렇게 바로?"

"시간 끌 필요 없지. 검증도 끝난 마당에."

 

칼리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포우가 종이 한 장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형식적이긴 하나 계약섭니다. 읽어보시겠습니까?"

"아, 잠시만."

 

그에 과자 부스럼 묻은 손바닥을 허벅지에 쓱쓱 닦은 진이 종이를 집는 순간이었다.

 

「솔로」──────────────

 

거리의 들개였던 당신은 마침내 한 사람의

용병으로 인정받을 기회를 얻었다.

 

 

*승낙 시 타이틀 솔로(Lv1) 획득

*새로운 스타팅 퍽 해금 가능

─────────────────

 

"···!"

 

진이 저도 모르게 손에 쥔 계약서를 내팽개쳤다.

하지만 눈앞의 반투명한 창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펄럭이는 종이를 허공에서 낚아챈 칼리파만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무슨 문제 있어?"

 

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NEO ?? ??? ????]가 아니다. 새로운 퀘스트 창, 새로운 글귀, 새로운 보상. 이 세상은 게임에 불과하며, 네 인생은 가짜에 불과하다 조롱하는, 언젠가는 박살 내야 할 네모반듯한 괴물.

 

여기에 비하면 쌍룡검 늑대인간은 애교 수준이다.

 

이제는 그냥 막 튀어나오겠다 이거지?

 

절로 속에서 욕지기가 치솟았지만, 진은 부정적인 감정이 고랑을 파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챙길 건 챙겨야 했으니까.

 

"···할게. 계약."

"응?"

"계약하겠다고."

 

칼리파의 손에서 계약서를 낚아챈 진이 곧바로 펜을 쥐고 사인을 휘갈겼다.

 

동시에 눈앞의 퀘스트 창이 (완료!)라는 황금빛 글씨와 함께 눈 녹듯 자취를 감췄다.

머릿속에 짜릿한 상승감을 남기면서.

 

동시에 진은 자신이 새로운 성좌에 불을 밝힐 권한을 얻었음을 깨달았다. 당장은 경험치가 부족해 해금하진 못하지만. 그건 차차 의뢰를 통해 채워가면 될 문제였다.

 

그리하여 진이 옅은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계약서를 챙긴 칼리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여간 종잡기 어려운 남자네. 뭐 그게 솔로다운 거지만···. 아무튼 진? 에넥도트와 함께하게 된 걸 환영해. 앞으로 잘해보자고."

 

이어 액세서리 없는 새하얀 손이 탁자를 가로질러 다가왔다. 그 손을 맞잡은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해."

 

 

 

***

 

 

 

3508 S Down Town BLVD,

Area 47, LC

 

로스트 시티는 주소 표기법이 영문이다.

하여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완벽한 역순이니.

 

이를 풀어서 보면.

 

로스트 시티의 에어리어 47 (Area 47, LC)

사우스 다운타운을 넓게 가로지르는 길.

(S Down Town BLVD) 되시겠다.

 

그래서 번지수 3508에 뭐가 있느냐?

 

바로 럼펌펌펌이 있다.

 

맛도 드럽게 없고, 가격도 싸지 않지만 그래도 안전은 한 애증의 24시간 영업점.

 

그곳에 진이 방문했다.

공짜 음식을 먹기 위해서.

 

아니지. 잔금을 치르는 일인데 공짜라곤 볼 수 없지.

 

진이 일주일 전 약속을 떠올리며 계단을 올랐다.

 

[너의 사랑은 어디로 간 거야?]

[존재하긴 하는 거야?]

[여기 있긴 한 거야?]

 

오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별 노래를 들으며, 언제나처럼 2층 오른쪽 구석 자리로 이동한 진이다.

 

그곳에서 그는 창밖을 바라보는 금발의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네가 나왔대?"

 

진이 소파에 앉으며 던진 물음에 여인, 제니가 고개를 돌렸다.

 

"오빠가 아니라서 실망했어?"

"나야 누군들 상관없지."

 

그렇게 말하는 진의 시선은 이미 테이블 위에 한가득한 음식들에 쏠려 있었다.

 

페퍼로니 피자, 핫도그, 옥수수빵, 프라이드치킨, 삶은 콜라드 그린에 마요네즈로 버무린 콘샐러드까지.

 

"오."

 

두 팔 걷어붙인 진이 바로 식사에 돌입했다.

 

과연 럼펌펌펌다운 퀄리티였다.

 

페퍼로니 피자는 도우를 소금물에 재웠는지 미치도록 짰고, 핫도그 소시지는 고무를 씹는 듯했으며, 옥수수빵은 퍽퍽하니 자꾸만 목이 메는 데다가, 프라이드치킨에선 따뜻한 누린내가 진동했다.

 

하지만 상대가 진이다.

 

뭐든 잘, 열심히, 강박적으로 처먹는데 도가 텄으니 순식간에 접시를 비우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니가 말했다.

 

"여기보다 맛있는 곳도 많은데."

"편안하게 못 먹잖아."

"···화나는 일 있었어?"

"왜?"

"그냥 그래 보여서."

"있긴 했는데. 괜찮아. 밥 먹으니까 괜찮아지네."

 

진이 그렇게 말하며 콘샐러드를 한 입 크게 떠먹었다.

 

"몸은 좀 어때."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어."

 

제니가 미소 지었고, 진은 전보다 밝아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콘샐러드를 퍼먹었다.

 

"다행이네. 제키는? 심장은 새로 갈아 끼웠고?"

"응. 지금은 회복 중. 이것도 덕분에."

"뭘 계속 나 덕분이래."

"들었어. 네가 의뢰비를 안 받았다며."

"안 받긴. 덕분에 일주일 잘 버텼다. 그리고 잔금은 이미 치르고 있잖아. 매주 수요일 19시 럼펌펌펌. 아직 많이 남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평소에는 입에 거미줄치고 살거든. 그러니까 나와서 이렇게 얘기나 해. 제키까지 해서 둘 다 와도 좋고."

 

이어진 진의 말에 제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떼길.

 

"···넌 뭐랄까. 다운타운과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어? 그럼 안 되는데. 그렇게 초짜로 보여?"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거기까지 얘기하던 제니는 '이래 봬도 2년 찬데···.'라고 중얼거리는 진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됐어. 식사나 마저 해."

"뭐야."

 

식사가 이어졌다.

 

진의 뱃골이 제니의 예상보다 훨씬 컸던 탓에, 두 사람은 프라이드치킨을 추가로 주문했다. 그게 그나마 먹을 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옷은 왜 그래?"

"아. 이거?"

 

가슴팍이 네 갈래로 갈라진 항공 점퍼를 내려다본 진이 오늘 있었던 일을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솔로로 살아보기 위해 링커를 찾아간 일.

길을 헤매던 와중에 당한 어깨빵.

에넥도트에서 다시 마주친 펜릴.

 

싸움 부분은 MSG를 좀 쳤다.

나는 멀쩡하고 쟤는 거의 실신 상태였는데 갑자기 2페이즈마냥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더라고.

 

제니는 그 얘기를 놀란 눈으로 경청했고,

그 과정에서 유익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수인이라는 건 이종족이 아니라,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일종의 강화인간이라는 것.

 

수인들의 신체 능력은 모든 면에서 동체급의 인간을 압살할 정도이며, 수인화를 할 경우 그 차이는 더욱 현격해져 살아있는 병기라 봐도 무방하다고.

 

"어쩐지. 주먹이 매콤하더라."

"······? 한 대도 안 맞았다며."

"어디까지 얘기했지?"

 

한 시간 넘게 핏물을 게워 냈던 얘기는 자연스럽게 넘겼다. 여기서의 진은 유효타를 맞지 않고 승리했기에.

 

하여 칼리파와 계약을 했다는 것을 끝으로 다소 급하게 이야기를 마친 진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걸 주더라고."

"전화기네."

"내가 BCI칩을 꽂지 않았다니까, 연락할 수단은 있어야지 않겠냐더라."

"그래도 너무 구형 아니야? 에넥도트면 꽤나 잘나가는 링커 사무실로 알고 있는데."

"내가 직접 골랐어."

 

진이 일축했다.

 

실제로 칼리파는 화상 연락이 가능한 액세서리형 전화기를 여럿 보여줬지만, 정작 진이 고른 것은 요즘은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디스플레이 형식의 단말기였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냥 제일 스마트폰처럼 생겼기에 골랐을 뿐.

 

"번호 찍어봐."

 

자연스럽게 번호를 교환한 진이 품에 전화기를 집어넣었다.

 

이후 새로 주문한 치킨이 바닥을 보였을 때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잘 먹었다. 건강 잘 챙기고 다음 주에 보자."

"너도 몸조심해."

 

제니와 헤어진 진은 그길로 가로등이 달빛을 대신한 밤거리를 홀로 걸었다.

 

불법 개조한 바이크 몇 대가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요란한 배기음과 함께 멀어지는 펑키한 스타일의 폭주족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어느 순간 하늘에선 비가 떨어졌다.

 

비를 피해 들어선 처마 아래엔 먼저 온 낯선 사내가 둘 있었다. 한쪽은 몸조차 가누지 못할 만큼 쩔어버린 약쟁이였고, 다른 한쪽은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뻑뻑 태우며 반대쪽 손에 쥔 명함을 노려보는 중년인이었다.

 

셋 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던 관계로 처마 밑은 조용했다.

 

 

진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빗물로 가득 찬 웅덩이를. 그 안에 비친 빌딩 숲의 네온사인을 바라봤다.

 

그 잡다한 빛깔들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연신 부서지고 흩어지길 반복하다가 갑자기 요란한 물줄기로 튀어 올랐다.

 

누군가 웅덩이를 밟고 지나간 탓이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담배를 태우던 중년인을 닮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 빗속으로 뛰어들었을까.

고개를 돌리자, 중년인이 사라진 자리에는 축축이 젖어 들어가는 명함과 꽁초만이 유품처럼 남아있었다.

 

[삽니다. 신선한 장기. 고가 매입]

 

진이 그 노골적인 문장에서 눈을 떼는 순간.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약쟁이가 말을 걸어왔다.

 

"···약 조, 좀 있어어?"

"아니."

"뭐드든 좋아. 로오망, 블랙라락, 마이이티하티, 펜타아메멕스."

"없는데."

"시이발. 알게겠어."

"추워? 이거라도 벗어줘?"

 

점퍼를 벗는 진을 본 약쟁이가 고개를 저었다.

 

"야, 약 빠빨아야 괘괜차찮아져."

 

이후 퀭한 눈으로 어렵사리 몸을 일으킨 약쟁이는 힘 풀린 다리로 빗속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진은 어둠이 약쟁이를 삼키고 나서야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다 천천히 벽을 타고 미끄러져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비는 좀처럼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은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한참을 구멍 뚫린 하늘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다시 눈을 떴을 때, 새로운 하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백칠십 하고도 삼일.

 

안주머니 속. 구형 단말기가 진동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의뢰 준비했어. 에넥도트에서 보자]

< 8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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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 >

에넥도트.

 

기다란 탁자를 사이에 끼고 다시 만난 칼리파는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찾아와줘야 할 물건이 있어."

 

그러면서 파일철을 내밀었다.

 

진이 그 안에 정리된 서류와 클립으로 고정한 사진들에 시선을 두는 사이, 칼리파의 말이 이어졌다.

 

"데이터 칩이야. 적혀있다시피 솔라드 가문의 비전 마법이 담겨있는 물건이지."

 

마침 진도 그 부분을 눈으로 읽는 중이었다.

 

불꽃을 형상화한 듯한 엠블렘이 보였다.

그 아래 적힌 Solard라는 글씨까지도.

 

"비전 마법이면 엄청 대단한 거 아닌가?"

 

진의 어설픈 지식으로도 이 세계에서 '가문'의 위상은 엄청난 것이었다.

 

순수주의자들로 이뤄진 강대한 조직.

첨단의 시대를 거부하는 검과 마법의 계승자들.

 

이틀에 한 번꼴로 부랑자 말고 가문할 걸 후회했던 진이었으니, 다른 하루는 기업이라.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칼리파가 답했다.

 

"대단하지. 하지만 유출된 건 기초적인 마법 몇 가지에 불과해. 물론 그마저도 솔라드 입장에선 수치겠지만."

"음."

 

자연스레 진의 눈이 서류를 향했고, 칼리파 역시 말을 이어갔다.

 

"솔라드 측에서 유출 경로를 조사하는 가운데 데이터칩이 복제된 정황이 포착됐고 그중 하나가 여기, 다운타운에 흘러들어왔어. 그리고 그걸 누군가 획득했지."

"그게 이 녀석이다?"

 

진이 누군가의 머그샷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얼굴 절반을 문신으로 뒤덮은 남자. 코뚜레를 연상시키는 피어싱을 한 그는 살기등등한 얼굴로 카메라 렌즈가 있었을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드먼 닐슨. 불법 시술로 마나 회로를 몸에 새긴 녀석이야. 원래도 블랙넷에서 이런저런 싸구려 공용 마법을 설치하는 놈으로 유명했어. 그 결과 성격이 비틀려선 걸핏하면 살인을 저지르는 또라이가 됐고."

 

마나 회로?

 

지극히 판타지스러운 단어도 그렇지만, 그걸 시술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은 묘한 감상을 느끼며 계속해서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소속 갱단에서도 발을 뺐네. 나름 3인자인데도."

"가문과 얽힌 일이니까. 의리니, 식구니 웃기지도 않은 유대감 타령하며 싸고 돌 수 없는 거지. 덕분에 우린 거리낄 게 없어졌고."

 

어떤 식으로든 그 녀석 머리에서 데이터 칩만 회수하면 된다는 거야, 라고 덧붙인 칼리파는 어느새 손에 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성공 보수는 200만 크레딧. 중개 수수료는 제한 금액이야. 어때?"

 

200만.

 

예전 제키가 여동생을 구해달라며 제시했던 액수였다. 미트볼 스파게티를 삼시 세끼 333일 동안 먹을 수 있는, 그러고도 돈이 남아 와플까지 사는 게 가능한 거액.

 

이것만으로도 진에겐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이다.

 

더불어 닐슨이란 가짜 마법사를 처리하면 경험치까지 낭낭하게 챙길 수 있을 터.

 

그러잖아도 새로운 퍽 해금에 필요한 XP가 부족한 진이었으니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좋아. 할게."

 

 

 

***

 

 

 

에드먼 닐슨.

 

칼리파가 부연하길, 데이터 칩을 머리에 박아 넣었다는 그는 현재 저 나름의 은신처에서 며칠째 칩거 중이라 했다.

 

그리고 그 은신처란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로, 온갖 그래피티가 무질서하게 도배된 흉물 그 자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까지 잔뜩 쌓여있어 악취가 코를 찔렀다.

 

 

진은 철근을 대충 용접한 계단을 밟고 올랐다.

 

402호.

 

닐슨의 집 앞에 도착한 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부수고 들어가야 하나?

 

지금 자신의 힘이면 도어락 하나 부수는 건 일도 아니긴 했다.

 

처음에는 주소를 착각한 배달원인 척 굴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괜한 어설픈 연기로 상대가 냄새를 맡게 되면 곤란했다.

 

그리하여 속전속결. 결심을 굳힌 진이 도어락을 붙잡을 때였다.

 

"···너 뭐야?"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에 진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비닐봉지를 양손 가득히 든 남자가 어정쩡한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쪽 얼굴 절반이 문신으로 뒤덮인 빡빡이.

 

한순간 진과 놈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짧은 침묵.

 

다음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씨발!"

 

달려드는 진을 향해 비닐봉지를 냅다 집어 던진 닐슨이 손을 뻗었다.

 

"붐 라이트─!"

 

다음 순간 진은 폭압을 동반한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어욱!"

 

코앞에서 섬광탄이 터진 기분이 이럴까. 게임에선 시야만 하얗게 되는 수준이던데, 실제로 당해보니 눈물과 침이 질질 흐르는 건 기본이요. 균형을 잡기 어려울 만큼 몸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 또한 찰나일 뿐이다.

 

비정상적인 회복력이 혼란을 겪는 자율신경계를 안정시키자, 진이 붉게 충혈된 눈을 번쩍 떴다.

 

각종 통조림부터 휴지, 면도기에 이르기까지.

 

봉지에서 쏟아진 생필품이 어지러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가운데, 멀리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닐슨이 보였다.

 

진이 곧바로 복도의 난간을 밟고 뛰어올랐다.

 

도약력이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가볍게 넘어섰다.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듯한 체공 시간. 그러면서도 목표물을 놓치지 않았으니, 황급히 계단을 밟고 내려가던 닐슨의 눈이 커졌다.

 

쾅!

 

2층과 3층을 잇는 층계참에 희뿌연 먼지가 솟구쳤다.

그야말로 무식한 착지였다.

 

"미친?!"

 

내려갈 길이 막혀 식겁하는 닐슨을 향해 진이 거리를 좁혔다. 허공을 가르는 주먹. 발작하듯 울려 퍼지는 외침.

 

"실드!"

 

물고기 비늘을 확대해 촘촘히 이어 붙인 듯한 역장이 주먹을 막아냈다. 그것만으로 역장은 크게 흔들렸고, 이어지는 연타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박살 났다.

 

하지만 그사이 닐슨은 이미 몸을 뺐으니.

 

이제는 위층으로 달아나기 시작한 마법사를 진이 뒤쫓았다.

 

"이 시발아! 그만 쫓아와!"

 

이대로는 따라잡힌다고 생각했을까. 닐슨이 대뜸 품에서 총을 꺼내 뒤로 쏴 갈겼다.

 

팅! 팅! 팅!

 

눈먼 총알이 철근에 맞아 불똥이 튀어오름에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딴 게 마법사?

 

그러나 순수주의자가 아닌, 불법 시술로 마법을 배운 닐슨에겐 화기란 그저 또 하나의 무기일 뿐이다.

 

그리하여 기어이 탄창을 다 비워내니.

 

그중 도탄된 총알 하나가 진의 어깨에 박혔다.

 

철근에 맞아 궤적이 갑자기 바뀐 탓에 반응하기가 여의찮았다. 그것도 심장 쪽으로 날아드는 것을 급히 상체를 틀어 어깨에 맞은 것이었다.

 

운 좋게 총알로 당구를 친 닐슨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순간 멈칫거리는 듯했던 진이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으니까.

 

"시발. 시발. 시발!! 뭐 하는 새끼야 대체!"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뱉은 닐슨이 이를 악물었다.

 

때마침 옥상에도 다다랐겠다. 더는 피할 곳이 없어지자 이판사판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주문을 준비했다.

 

블랙넷 표층에 굴러다니는 싸구려 공용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진짜배기 마법.

 

이게 고작 초심자 수준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을 땐 절망했다. 자신의 수준으로는 고작 한 번 쓰기도 벅찬, 쓰는 것만으로 신체에 부하가 오는 기술뿐이었으니까.

 

사용하는 순간 전투 불능은 확정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몰린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니.

 

"통구이로 만들어줄게. 이 좆만한 새끼야."

 

닐슨이 코피를 주르륵 흘리며 중얼거린 순간.

 

진이 변화를 감지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한곳으로 모여든다.

 

그렇게 한데 뭉친 부정형의 기운은 이윽고 이글거리는 불꽃의 구체가 되어 닐슨의 손바닥 위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선명히 느껴지는 열기를 동반한 채.

 

그 모든 과정이 2초 안에 일어났다.

 

"죽-어어어!"

 

직후 닐슨이 야구공처럼 불덩이를 집어던졌고.

동시에 진이 허벅지에 힘을 실었다.

 

한계 이상으로 발달한 속근이 엄청난 힘으로 수축하자, 마지막 디딤발과 함께 폭발적인 전진력이 발생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진이 양팔을 X자로 교차하며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묵직하게 날아든 불덩이가 그와 충돌했다.

 

콰앙!

 

폭발이 만든 충격파에 떠밀린 닐슨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또한 인접한 거리에 있었던바.

숨이 턱 막히는 열기를 피해 엉금엉금 바닥을 기면서도 속으론 쾌재를 불렀더란다. 저걸 정통으로 맞은 이상 뼈도 추리지 못했으리라 확신하면서.

 

 

"···해치웠나?"

 

그리하여 그가 금어를 뱉고 말았을 때, 시커먼 연기 속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답했다.

 

"그 말은 죽은자도 되살리지."

"······?!"

 

다음 순간 연기를 뚫고 나타난 다리가 쓰러진 닐슨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덤프트럭에 치인 것마냥 붕 떠오른 몸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정신없이 나뒹굴다 물탱크에 충돌했다.

 

뒤이어 진이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손바닥으로 어깨에 붙은 불을 탁탁 때려 끄는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있었다.

 

"마법 개사기네."

 

휘몰아치는 작열감에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화상이란 신경이 손상되기 직전 단계인 2-1도가 통증이 가장 심하다. 그리고 지금의 진이 딱 그 상태였다. 조만간 물집이며 진물이며 아주 난리가 날 터.

 

하지만 진은 늘 그랬듯 그냥 참았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도 있었고.

 

"커, 커헉. 오지, 오지 마."

 

닐슨은 숨을 껄떡대는 와중에도 진과 멀어지기 위해 뒤꿈치로 바닥을 밀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닥칠 일을 예견한 것처럼.

 

"이. 이건 내 거야. 내 거라고."

 

관자놀이 부근을 감싸 쥔 채 콩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그를 내려다보며 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정신 못 차렸구만."

 

그러고는 저항하는 팔을 억지로 뜯어낸 뒤, 전뇌 소켓의 엑세스 포트를 살폈다. 촘촘하게 박힌 칩 가운데 붉은빛이 감도는 녀석이 있었다.

 

"불꽃 엠블렘······이거네."

"야야! 이 씨-발놈아아! 뽑지 마, 제발! 아직 다운로드 못 끝냈다고. 그대로 뽑으면 나 좆돼! 개새꺄!"

"아씨. 정신 사납게."

 

퍽!

 

 

진이 발광하는 면상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마침내 조용해진 닐슨의 관자놀이에서 칩을 빼기 위해 절절매던 진은, 우연히 손끝으로 칩 끝부분을 꾹 누르면 전체가 튀어나온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플로피디스크랑 비슷하네. 하긴 써봤어야 알지."

 

우여곡절 끝에 목표물을 회수한 진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닐슨이 손만 뻗어 발목을 덥석 움켜잡은 것은.

 

"···?"

 

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벌써 정신을 차린 건 둘째 치고,

발목을 쥐어짜는 악력이 심상치 않았기에.

 

위기를 감지한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반대쪽 발로 닐슨의 손목을 짓밟은 진은 한순간 느슨해진 손아귀에서 붙잡힌 발을 빼내며, 어느새 반쯤 몸을 일으킨 닐슨의 얼굴을 걷어찼다.

 

발등을 타고 전해지는 감각이 말해줬다.

안면을 완전히 으스러뜨렸노라고. 분명 그랬을진대.

 

"A'hhh!!!!!"

 

뒤로 젖혀진 닐슨의 얼굴이 괴성과 함께 제자리로 뚝 떨어졌다. 잉크를 풀어놓은 듯 검게 물든 눈이 진을 향했다.

 

"A'hhhhhh!!!!!"

 

또다시 괴성을 내지른 닐슨은, 달아나기 급급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하지만 진은 당황한 와중에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거리를 벌렸고, 덮쳐드는 닐슨의 상체를 회피했으며, 물 흐르듯 발목을 걸었다.

 

그리하여 달리는 속도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상대의 뒤통수에 망치질하듯 발을 연거푸 내리찍으니.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찌릿한 상승감이 치솟았다.

 

만족할 만한 XP를 획득한 진이 턱밑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품에서 꺼낸 붉은 데이터칩을 쓰러진 닐슨과 번갈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이거 뭔데?"

< 9화 > 끝

ⓒ 오동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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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