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SERPIENTEDELAPOCALIPSIS / Chapter 12 - 110-120

Chapter 12 - 110-120

110. 사악, 나 아기 와이번.

와이번 알의 크기는 타조 알의 몇 배 정도 되는 것 같다.

내가 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이 된 뒤, 몸의 크기가 약간 작아진 덕에 간신히 알에 몸을 쑤셔 넣을 수 있었다.

와이번의 목과 머리는 정말 뱀 같이 생겼다.

다만 목 아래부터는 상상 속의 드래곤과 비슷하다.

다만 앞발이 있어야 할 곳에 날개가 있었는데, 원래 조류의 날개가 앞발이 변형되며 진화한 것임을 떠올리면 합리적인 육체 구조였다.

다리는 두 발로 설 수 있을 만큼 튼실했다.

꼬리 끝에는 언제든 철퇴처럼 휘두를 수 있고 비행의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단단한 돌기들이 달려 있었다.

새끼들의 모습도 엇비슷했다.

뱀인 내가 몸 길이는 길었지만, 머리통의 크기는 확연히 작았다.

──────────────

[리틀 블랙 와이번lv1]

[특성]

[아기]

──────────────

녀석들의 상태창을 보면 그러했다.

내 아기 때와 비슷한 상태다.

반면, '왕지네 유생'이었던 지네 삼 남매와는 조금 다른 느낌.

'그러고 보니 얘들도 삼 남매네.'

지네 아기들이 떠오른다.

아, 와이번들은 원래는 삼 남매가 아니라 사 남매였겠지.

인간들의 바보짓 때문에 삼 남매가 되어 버렸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녀석들은 삑삑 울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딱 먹이를 달라고 조르는 아기새들의 행동 방식이었다.

인간들에게는 잔혹했던 와이번 퀸은 따스한 모성을 발휘했다.

몸속에 저장해 둔 음식들을 게워내 새끼들에게 먹인 것이다.

새끼들은 그 뜨끈하고 걸쭉한 영양죽을 맛있게도 먹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 따듯해지는 광경이다.

'우욱!'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한 바퀴 순배가 돈 뒤에는 또 내 차례가 돌아왔다.

그러자 다른 새끼들이 또 한 번 먹이를 가로채기 위해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삐이이!"

"삑!"

새끼들의 식탐 때문이겠지만, 그것이 몹시 고마웠다.

이게 형제애라는 거구나.

살면서 처음 느껴 본다.

그러나 끔찍한 영양죽을 대신 먹어 주려던 형제들의 배려는 산산이 흩어졌다.

"꾸각!"

와이번 맘이 화를 내며 꼬리로 새끼들을 철썩철썩 친 것이다.

"꾸가각, 꾸각!"

너희들이 불쌍한 막내 밥을 뺏어 먹으려고 해!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하고 혼내는 것 같다.

다른 새끼들이 풀이 죽어서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근성 없는 새끼들.

결국 또 한 번 영양죽을 섭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꼬로로로록!"

끄억.

정말 묘한 맛이다.

곱등이며 피두더지며 모스키토 랫까지.

수많은 괴식에 단련된 나였음에도 목구멍으로 넘기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입에 쓴 것이 몸에는 좋다고.

영양죽의 영양이 엄청나게 풍부했다는 게 문제였다.

*「오블리비언 와이번 퀸 셀레타의 영양죽을 섭취했습니다.」

*「육체와 마성이 성장합니다.」

살면서 이런 것은 처음 먹어 본다.

괜히 새끼들이 영양죽을 달라고 덤벼드는 것이 아니었다.

죽을 삼키는 족족 녀석들의 몸은 눈에 보일 정도로 커졌다.

다만 나는 새끼가 아니라서 그런지 몸이 커지지는 않았고 대신 비늘에 윤기가 더 돌았다.

그것마저 와이번 맘의 눈에는 걱정스러워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내게 영양죽을 강제로 더 먹였다.

"꼬로로록!"

*「오블리비언 와이번 퀸 셀레타의 영양죽을 섭취했습니다.」

*「육체와 마성이 성장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결국 레벨까지 올랐다.

이렇게 진화까지 해 버리는 거 아닌가 싶다.

그러면 와이번 파이톤으로 진화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네.

'그런데 뭐 먹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진화할 수 있는 거예요?'

- 아니면 저 새끼들이 이곳에서 어떤 수로 사냥을 하면서 크겠나. 푸흡.

펠레리안이 웃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와이번의 영양죽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저 먹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수 있다니.

부자들이 이걸 알게 된다면 비싼 값을 치르고도 먹으려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곳에서 공짜로 영양죽을 먹는 것은 참으로 귀한 행운일지도 모른다.

그래,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까딱까딱.

그때, 내 몸에 붙어 있던 이실이가 불만스러운 듯 이파리를 까딱댔다.

자기도 나눠 달라는 뜻 같았다.

'하, 나도 정말 나눠 주고 싶다.'

와이번 맘이 흐뭇한 얼굴로 나와 새끼들의 머리를 꼬리로 쓰다듬어 주었다.

* * *

[마물 토막 정보]

조류형, 비행형 마물에게서 보여지는 각인(刻印) 효과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갓 태어난 새끼가 처음 만난 대상을 제 어미라고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비행형 마물을 길들이려는 시도가 종종 있어 왔다.

그 알만 온전히 구해 온다면, 이론적으로 아주 쉽게 가축화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 때문이다.

그 현실적인 벽을 논하기 이전에. 각인효과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역-각인효과에 대한 것이다.

새끼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여기게 되듯, 어미 마물이 처음 알에서 깨어난 것을 자신의 새끼로 착각하는 일 또한 존재한다.

그 탓에, 뻐꾸기가 탁란하듯 자신의 알을 다른 마물의 둥지에 낳고 떠나는 마물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의하면.

한 겁 없는 뱀 마물이 용의 둥지에 알을 낳고 떠났고.

그 용은 뱀을 새끼용으로 알고 키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 * *

이곳에 거울은 없었다.

겨우 삼 일이 지났을 뿐인데, 어쩐지 살이 찐 것 같은 기분이다.

착각이겠지.

겨우 삼 일이니까.

- 착각은 무슨 착각이야. 뚱뚱해졌다고 말해 줬잖나.

'풍채가 좋아졌다고 해 주시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양죽은 말 그대로 영양이 풍부했으니까.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영양죽의 맛에 적응해 버리고 말았다.

생각보다 먹을 만하단 말이지.

전생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요리를 하지 않으셨기에 어머니의 손맛 같은 것은 나도 모르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어머니 손맛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메두사맘이 줬던 밥보다 훨씬 낫다. 독은 안 섞여 있어서 그런가 보다.

몸통이 오동통해졌다.

뱀이 되어서 좋은 점은, 신기하게 얼굴 살은 찌지 않는다는 점이다.

턱선은 그대로 유지한 채 풍채만 좋아졌다.

나는 그렇다 쳐도 다른 삼 남매는 아니었다.

"삐삐삐"

"께이이잇!"

"츄이이이!"

각자 우는 소리가 다 다르다.

삐삐, 케이, 츄이로 이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삼 남매들은 삼 일 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졌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앞발처럼 작고 의미 없어 보이던 날개가 제법 커졌다.

물론, 아직 비행을 하기에는 형편없게 작은 날개다.

실제로 아직 제대로 된 스킬조차 없는 녀석들이다.

그중에서 제일 덩치가 크고 기가 센 게 바로 삐삐다.

아무래도 셋 중 제일 누나인 것 같은데, 와이번은 수컷보다 암컷이 덩치도 더 크고 세다는 것 같았다.

"삐삐······."

삐삐가 그르렁대며 내게 이빨을 드러냈다.

이빨이 아직 하나밖에 나지 않아서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나를 포함한 넷 중 영양죽을 가장 많이 먹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애기들 밥을 빼앗아 먹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긴 한데 어쩌겠는가.

날개도 다리도 없는 모자란 막냇자식으로 여겨져서 강제로 죽을 먹이니.

그것이 삼 남매에게는 몹시 억울했나 보다.

삐삐는 틈만 나면 내게 덤벼들었다.

"삐익!"

번쩍 뛰어오르더니 입을 벌려 날 물려고 한다.

허나.

겨우 리틀 블랙 와이번lv3의 기습에 당할 내가 아니다.

살짝 피해 준 다음에 꼬리를 휘둘러 주었다.

철썩!

뺨을 맞은 삐삐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삐에에엑! 삐엑!"

누가 보면 내가 물기라도 한 줄 알았다.

거의 엄살이 시바견급이다.

그때, 상대적으로 얌전했던 케이가 덤벼들었다.

"찌잇!"

녀석은 나를 노리는 게 아니었다.

내 등에 매달려 있던 이실이를 노려 덤벼들었다.

하지만 이실이 또한 한 번의 진화를 마쳤으며.

수저를 따지면 와이번보다 훨씬 대단한 세계수 수저를 물고 태어난 녀석이었다.

콱.

이실이가 덩굴을 뻗어 케이의 모가지를 확 잡았다.

날개와 다리가 덩굴에 묶이더니.

뿌드득.

무슨 주짓수마냥 관절기를 걸어 버렸다.

"찌에에에엑!"

또 한 번 엄살스러운 비명이 울렸다.

애들과 치고받고 하는 게 즐거워서 이런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서열정리를 주기적으로 해 주어야 한다.

참고로 우리 서열은 나, 이실이, 나머지 삼 남매 순이다.

가만히 지켜보던 와이번 맘이 슬슬 그만하라는 듯 울었다.

"꾸오오오!"

참, 우리 메두사맘도 이렇게 맘씨가 따듯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새끼와 나를 돌봤다.

'슬슬 떠나야겠어.'

하지만 여기서 영원히 머물 수는 없는 법이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곳 산맥에 찾아온 것은 펠레리안의 던전이 있는 델프람에 찾아가기 위함이 아니던가.

- 괜찮다. 그리 시간적으로 손해를 보지는 않은 것 같다.

높은 칼날 석주 위에서 살펴보건대.

이곳 둥지는 내가 잡혀간 지점보다 더 북쪽에 있었다.

그러니까, 델프람에는 오히려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델프람이 나올 거다.

기회만 생기면 될 것이다.

일단 와이번 맘만 자리를 비우면 된다.

"꾸꾸꾸."

저 정도 덩치의 마물이 밥을 안 먹고 살 수는 없다.

게다가 영양죽도 뭔가를 먹어야지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사냥을 나갈 때가 찾아오리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그 순간이 왔다.

할짝.

와이번 맘은 우리 모두를 핥아 준 다음에 펄럭펄럭 날아올랐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무리 내가 차가운 뱀의 마음을 가졌다고 해도.

와이번이 저렇게 잘 대해 주면 기분이 이상하다.

휘익 날아가는 와이번 셀레타를 보니 더 그랬다.

- 뭐 하냐, 빨리 움직여야지!

그래, 그렇다고 계속 와이번 아기로 살 수는 없잖아.

나는 와이번 삼 남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잘 있어라 얘들아.'

셋은 당연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봤다.

하지만 내가 둥지를 벗어나서 내려가려고 하니.

"삐이이이!"

"케이이!"

'위험해!'하며 허겁지겁 달려와서 나를 잡으려는 것 아닌가.

내가 떠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당연히 나는 뛰어내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 몸에 붙은 이실이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돌기둥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나저러나.

새끼 와이번들은 둥지 밖으로 떠나는 내가 몹시 걱정되었나 보다.

"삐이이! 삐!"

거 참.

계속 소리를 지른다.

이거 조금 문제가 크다.

이 주변에는 와이번 맘의 부하 와이번들이 산다.

혹시나 녀석들이 이 소리를 듣고 날아오지 않을까.

- 그러니까 내가 새끼들을 처리하고 나오자고 하지 않았냐!

'이 쓰레기 요정.'

- 아니, 기절만 시켜 두면······!

얼른 도망쳐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지표면까지 내려올 즈음, 다른 와이번들이 두리번거리면서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다 삼 남매가 너무 삑삑거린 탓이다.

'어디 숨을 데도 없는데!'

땅을 파고 숨기도 쉽지 않다.

흰 구아노로 단단하게 뭉친 땅은 흰개미 정도나 팔 수 있었다.

어디 그늘 같은 곳에 숨으려고 하니.

"꾸가가가가."

"구구국!"

날아오른 성체 와이번들이 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당연히 나를 찾으려는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다.

그들은 구름 낀 하늘을 향해서 울고 있었다.

'······저게 뭐야.'

하늘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곧 구름을 뚫고 처음 보는 와이번들이 나타났다.

녀석들은 전부 흰 계통의 와이번들이었다.

- 다른 빛깔의 와이번들이다. 다른 무리가 습격해 왔나. 네게는 운이 좋은 상황이구나.

이쪽 와이번들은 전부 검은색이니, 다른 무리들이 습격을 온 것이다.

성체 와이번들이 기습에 대응했다.

"꾸가가가각!"

검은 것들과 흰 것들이 허공에서 뒤엉켜 싸운다.

큼지막한 비행 마물들이 싸우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런 와중에, 흰 뱀 한 마리가 사라진 것은 티도 나지 않으리라.

이쪽 우두머리인 와이번 맘이 사라진 것을 정확히 알고 습격한 듯하다.

삼 남매가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괜찮겠지 뭐.'

애써 그리 생각하며 떠나려고 했다.

그때, 구름 안쪽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뭐야.

저것도 와이번인가?

그림자의 크기로 가늠해 보자면 아마, 어마어마하게 거대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구름 안쪽에서 광선이 쏘아졌다.

그것은 정확히 내가 조금 전에 있던 둥지로 뻗어 갔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돌조각이 폭발한다.

이건 '파괴 광선'이다.

와이번 맘이나 우리 아빠처럼, 파괴 광선을 쓸 수 있는 거대한 와이번이 저 구름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삐이이이익!"

새끼들이 추락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에이씨!'

- 제기랄!

나는 어이가 없어서. 펠레리안은 아마도 짜증이 터져서.

동시에 욕을 내뱉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움직였다.

내가 있던 곳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돌조각을 피한다.

그리고 식심의 도약을 이용해, 돌기둥 중간에 있는 돌부리로 뛰어오른다.

그리고 도약, 또 도약.

중턱에 도달했을 때쯤, 떨어지는 삐삐를 발견했다.

투명한 손을 이용해서 녀석을 움켜잡았다.

'어이쿠!'

제법 몸이 커진 녀석의 추락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꼬리로 녀석을 휘감은 뒤, 이빨로 돌기둥을 단단히 묶어서 간신히 잡아냈다.

"케이이!"

그 옆에 둘째인 케이가 떨어진다.

'이실아!'

녀석은 이실이가 처리해 주었다.

덩굴로 단단히 움켜잡았다는 뜻이다.

까드득!

당연히 그 하중은 내가 감당해야 했다.

이빨이 진짜 부러질 뻔했다.

막내까지는 못 구할 것 같은데.

그런데 막내인 츄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설마, 이미······.

"쮸이이이이!"

그런 소리가 들려서 간신히 시선을 돌리니.

'막내야!'

막내가 열심히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활강하고 있었다.

사실상 떨어지는 거지만, 그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괜찮을 것 같았다.

- 인마, 하늘!

다만, 저 하늘에서 흰 와이번이 하강하고 있었다.

정확히 막내 츄이를 물어 채기 위해.

콱.

< 하나가 셋을 상대한다. >

111. 하나가 셋을 상대한다.

산맥은 험지다.

마경 중에 험하지 않은 지형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다른 마경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험지였다.

사막이나, 빙하처럼 식생 자체가 살기 어려운 극한의 환경이기에 험지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물리적인 형태 때문이었다.

뾰족뾰족한 돌산이 널려 있었으며, 칼날처럼 날카로운 돌기둥이 곳곳에 솟아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들은 결코 녹지 않는 만년설까지 쌓여 있으니.

강인한 마물이라고 해도 산맥을 자유로이 돌아다니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마물에게까지 험난한 지형이기에.

그것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비행형 마물들이 득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용만큼 희귀하지는 않으며.

새보다는 훨씬 강인한 마물 와이번.

시간이 지나자, 와이번은 사실상 산맥의 주인이 되었다.

드넓은 마경에 수천 마리 이상의 와이번이 살고 있다.

당연히, 그 많은 마물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수십 수백 개에 달하는 무리로 나뉘어져 있다.

와이번은 수컷보다 암컷이 더 크게 자란다.

게다가 수컷은 어느 정도 자라면 무리를 떠나려 하기 마련이며, 암컷은 제 무리를 지키려는 특성이 있었다.

그래서 와이번 무리의 우두머리는 '퀸'으로 불리는 개체이다.

와이번의 개체마다 그 전투력이 천차만별인 것을 감안하면, 퀸 역시 그러하다.

평범한 와이번과 다를 바가 없는 녀석도 있고.

용처럼 긴 뿔이 자라나고 브레스를 뿜도록 진화한 녀석도 있다.

드넓은 마경을 뒤져 보면 대가리가 두 개 달린 와이번이 있을지도 모른다.

퀸이 된 와이번은 평범한 와이번들과 달리 아주 오래 산다.

다른 무리와의 전투 중 죽지만 않는다면, 진화를 반복하며 강해진다.

사루르누 와이번 퀸 츄고타 또한 그런 존재였다.

그녀는 이미 수백 년 이상을 살아남은 오래된 와이번이었다.

수십 차례의 진화를 마친 뒤, 빛나던 비늘은 잃어버리고 축축한 흰빛 거죽을 가지게 되었으며.

겉보기에는 눈치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강함을 몇이나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츄고타'라는 이름을 얻게 된 즈음.

이미 산맥 동부의 주인은 그녀가 되었다.

흰 비늘을 가진 와이번들은 대부분 그녀의 휘하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서로의 몸 빛깔에 따라 무리를 짓는 것이 와이번이다.

80% 이상의 와이번들이 무채색이었고.

흰색의 무리와 검은색의 무리가 가장 많다.

어느 순간부터, 아니, 아마도 석 달 전부터.

그녀는 산맥이라는 마경을 정복하기에 나섰다.

인간 폭군들이나 가질 법한 '정복욕'이 어떻게 마물의 작은 뇌에 깃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진화의 영향일까. 아니면 어느 날 비행하다가 벼락이라도 맞아서 그 작은 뇌에 악심이 깃들었을까.

그녀의 눈이 이윽고 마경의 남부와, 그 남부의 지배자인 셀레타에게 미친 것은 당연하리라.

츄고타의 심복인 화이트 소드 와이번이 하늘을 활강 중이었다.

다른 와이번들에 비해 주둥이가 길고 그 좌우가 날카로워, 꼭 칼날처럼 보이는 개체였다.

"꾸국."

조금 전, 츄고타가 하늘에서 빛의 심판을 쏘아냈다.

자리를 비운 셀레타의 둥지를 향한 공격이었다. 선전포고와 같은 일이다.

화이트 소드 와이번에게 내려진 임무는 혹시 살아 있을 그 새끼들을 물어 죽이는 것이다.

두 마리는 어찌 되었는지 보이지 않는데 한 마리가 열심히 퍼덕거리면서 활강한다.

알을 깨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엄청난 성장 속도다.

그러나 성체 와이번에게 도망치기는 불가능한 일.

소드 와이번은 날개를 휙 붙이고 떨어져 내렸다.

매서운 속도다.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날개를 확 펼치자, 엄청난 풍압의 저항과 함께 비행 궤도가 바뀐다.

"츄이이이잇!"

놀란 새끼가 비명을 질렀다.

녀석은 곧 산산조각으로 찢어질 것이다.

입에서 침이 주욱 배어 나오는데.

소드 와이번의 시야에 괴상한 것이 잡혔다.

돌기둥에 흰 뱀 한 마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입으로 돌기둥을 콱 물고 버티고 있는데, 꼬리로 새끼 한 마리, 등에서 튀어나온 덩굴로 또 한 마리를 잡고 지탱 중이다.

그 요상한 모습에 시선이 끌려서 알아챘다.

갑자기 허공에서 긴 날붙이가 하나 튀어나왔다.

인간이나 드워프가 쓰는 무기다.

그것이 비행하는 소드 와이번에게 쏘아졌다.

와이번은 코웃음을 치고 주둥이를 휘둘렀다.

날붙이가 날카로워 봤자 그의 주둥이만큼 강인하지는 않으리라.

콱!

하지만 그 날카로운 검은 순식간에 와이번의 아래턱을 가르고 지나갔다.

피가 촥 튀었다.

* * *

시바라는 품종의 강아지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다른 개들에 비해서도 특히 엄살이 무시무시하다.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어디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츄이이익!"

막내인 츄이가 그랬다.

바닥을 구른 츄이는 아주 혼자 자지러졌다.

정작 아래턱이 잘려 피를 쏟고 있는 것은 침입자 와이번이었고.

그리고 그 녀석과 나뒹굴며 싸우고 있는 것은 또 나였는데도!

"츄찌이이!"

"꾸가가가가각!"

성체 와이번의 고함 소리는 더욱 컸다.

지금은 귀엽게 우는 삼 남매도 크면 저렇게 울겠지.

그게 아쉽긴 해도, 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살아남는 게 나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침입자 와이번을 격퇴하려 했다.

아래턱을 날려 버렸을 때까지만 해도 승기가 내게 넘어온 줄 알았다.

하지만 와이번은 역시 평범한 마물이 아니었다.

피를 흩뿌리면서도 츄이를 덮치려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놈의 몸을 물어뜯었다.

비늘 덮인 가죽이 질겨도 너무 질기다.

간신히 이빨을 박아 넣어 독을 주입해도 쉽게 고꾸라지지 않았다.

*「초급원소마법: 불lv6을 사용합니다.」

화르르륵-!

불을 뿜어 보아도 효과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놈의 비늘은 어지간한 화력에 상하지 않았다.

- 와이번 비늘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네 불꽃이 형편없는 것이다. 어찌 아직도 초급 원소 마법 정도에 머물고 있는지······.

오늘따라 펠레리안의 비판이 뼈아팠다.

하기는, 검술에 비해서 마법이 발전하는 속도가 많이 느렸다.

불 마법이 효과가 없는 것처럼 광선도 마찬가지였다.

단번에 명줄을 끊을 만한 공격력은 역시 셀레스티움 검을 급소에 꽂는 것뿐.

하지만 그 방법에도 단점이 있다.

이빨로 물거나 꼬리로 잡는다면 그나마 괜찮지만.

*「투명한 손lv13을 사용합니다.」

투명한 손의 내구력이나 힘은 그리 대단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와이번이 발로 검을 깔아뭉개면.

그 검을 다시 빼앗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놈의 아가리가 내가 있던 곳을 강타했다.

콰앙!

다행히 나 대신 땅바닥의 흙을 삼켰을 뿐이다.

나와 함께 땅에 착지한 삐삐와 케이가 용감하게도 소드 와이번에게 덤벼들었다.

"삐아악!"

"찌잇!"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퀴는 게 전부다.

녀석들의 합공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에 시간을 번 것은 사실이었다.

녀석이 발로 누르고 있는 장검을 다시 가져올 생각이었다.

직접 이빨로 물어서 잡아당길 생각이었는데, 이게 웬걸.

이실이가 덩굴을 내밀어서 검병을 움켜잡았다.

"사아악!"

나는 열심히 몸을 잡아당겨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몸무게 차가 너무 나니까.

결국 단검인 여명을 꺼내서 녀석의 발을 찍으려던 순간이었다.

*「악마사냥꾼의 덩굴풀 이실lv2가 교감lv2를 사용합니다.」

*「지옥불lv1을 사용합니다.」

앗, 안 돼!

지옥불은 가까이서 사용하면 나마저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다.

아주 상위 스킬인 만큼 양날의 검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이다.

다행히, 불꽃이 점화된 것은 내게 붙어 있는 이실이의 몸이 아니었다.

녀석이 뻗은 덩굴.

정확히는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은 그 부분에서 보랏빛 불꽃이 솟았다.

"꾸게에에에에엑!"

검을 깔아뭉개고 있던 와이번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놈의 발에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내가 불꽃을 뿜어대도 겨우 비늘 조금만 불에 타는 데에 그쳤는데.

게다가 그 불은 붙은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숯덩이처럼 검게 탄 발이 뚝, 갈라졌다.

마침내 검이 자유로워졌다.

후우우웅!

검에서 미친 듯한 열풍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잡고 있는 것은 가냘프기 그지없는 덩굴 몇 가닥.

'화염 면역'이라는 이실이의 놀라운 진화 특전 덕택에 그것이 가능했다.

- 허어.

펠레리안이 감탄했듯.

나 또한 순간적으로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덩굴풀에 의해 들어 올려진 셀레스티움 장검.

그 덩굴도, 셀레스티움도 지옥 불을 견딜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재다.

하지만 육신을 가진 그 무엇이 지옥 불 앞에서 멀쩡할 수 있을까.

이 불타는 검은, 천뢰령 이상으로 강력한 공격수단이다.

무엇이든 불태워 죽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독니.

- 이건······ 오러 블레이드 이상이군.

펠레리안이 그리 보증했다.

이전에 부적을 붙여서 오러 흉내를 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배기의 위력이다.

교감 스킬 덕택일까.

나는 가볍게 이실이에게 내 뜻을 전했다.

휘두르라고.

그리고 이실이는 그리하였다.

취익-!

독특한 절삭음이 울렸다.

검날이 비늘을 찢고, 살을 뭉개고 들어가며, 그 안에 있던 피와 수분을 순식간에 증발시켰기 때문이다.

와이번의 목이 잘렸다.

그 단면이 순식간에 새카맣게 타 버렸기에.

피는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역시 와이번 사냥!

한 마리만 처치해도 확실히 레벨이 확확 오른다.

그 정도로 하나하나 강적이라는 것이 문제기는 했지만······.

슥-

검의 지옥불은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당연히 마력이나 그런 소모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천뢰령보다 더하면 더하겠지.

'이실아앗!'

이실이의 상태만 봐도 그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파들파들.

건강하게 탱탱하던 잎사귀가 쭈글쭈글해서 축 늘어진 것이다.

다행히 다친 것은 아닌 것 같고, 배가 많이 고픈 것 같다.

내가 먹은 영양죽을 몰래 나눠 주지 않았다면 더 고생했겠지!

무섭고 거대한 소드 와이번이 통구이가 되어 버리자.

벌벌 떨던 삼 남매가 내게 달려들었다.

"삐이이!"

"께이이이!"

"츄이!"

드디어 막내 형님의 대단함을 알겠니?

지네 삼 남매 시절과 달리, 얘네들은 솔직히 조금 버거웠다.

셋 다 나보다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어미에게 하듯 내게 대가리를 비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비칠비칠 밀려 났다.

땅을 한 바퀴 굴렀을 때 비로소 화를 낼 뻔했는데.

*「리틀 블랙 와이번lv4를 길들였습니다.」

*「리틀 블랙 와이번lv5를 길들였습니다.」

*「리틀 블랙 와이번lv3를 길들였습니다.」

녀석들을 길들여 버렸다.

그래도 이름은 안 지어 줄 거다!

뒤로 물러나려는데, 막내가 철푸덕 자빠졌다.

'츄이야!'

츄이를 잡아 일으키는 순간.

*「리틀 블랙 와이번lv3의 이름을 '츄이'로 지었습니다.」

앗.

*「'리틀 블랙 와이번lv3츄이'가 자신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충격과 공포.

마음에 들지 않다니.

츄이가 대체 어때서!

여태까지 내가 이름을 지어 준 애들은 다 마음에 들어 했는데······.

- 너만의 생각 아니냐?

그렇다면 정말 충격적인 반전이리라.

그러나 츄이가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든 말든, 남은 둘은 자기들만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이 불만스러웠나 보다.

녀석들이 성화를 부리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나머지도 이름을 지어 줬다.

삐삐와 케이 역시 자신들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지어 달라고 했대.

하기사, 자기 엄마는 셀레타라는 멋진 이름을······.

"꾸어오오오!"

갑자기 울린 웅혼한 포효소리는 틀림없는 와이번 맘의 울음소리였다.

굳이 고개를 들고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콰앙!

그녀가 우리 앞에 거칠게 착지했기 때문이다.

몸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외출한 그녀에게도 와이번들이 기습한 것일까.

'혹시 내가 초열지옥검((焦熱地獄劍)을 사용한 걸 봤을까요?'

봤다면 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으나.

그녀는 날개를 길게 뻗쳐 우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고는 대응할 틈도 없이 자신의 발 위에 우리를 올리고 날아오른다.

새끼들은 놀라서 제 어미의 발을 붙잡았다.

손이 없는 와이번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나는 아주 잠깐, 뛰어내려서 도망칠까 고민했지만.

'에잇, 이실아 애들 안 떨어지게 좀 묶어 줘.'

그러다가 얘들이 떨어질 것 같아서 포기했다.

이실이가 덩굴을 뻗어서 삼 남매의 몸을 잘 고정해 줬다.

와이번 맘은 메두사 맘과 비슷할 정도로 거대했다.

우리들이 발에 매달릴 공간도 충분했다.

다만,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깜짝 놀라 외쳤다.

"사아아악!"

와이번 맘이 내 경고를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저 구름의 일부분이 빛나더니.

피잉-

그곳으로부터 파괴 광선이 쏘아졌다.

와이번 맘이 비행 궤도를 확 틀었다.

추락에 가까운 하강.

그리고 광선이 조금 전 그녀가 있던 곳을 꿰뚫었다.

광선의 출력이 어마어마하다.

뒤에 있던 돌기둥 세 개가 단번에 무너졌다.

처음에 둥지를 부쉈던 광선마저 사실 힘을 억제했던 것이었다.

파괴 광선이 강한 스킬이긴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출력이 셀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흩어진 구름 너머.

적의 모습을 본 순간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충격적인 비주얼이다.

-······기형의 마물인지, 아니면 진화의 산물일지.

'머리가 셋!'

머리가 셋 달린 거대한 와이번이 구름 속에 있었다.

반사적으로 두 눈에 힘을 줘 보니.

──────────────

[사투르누 와이번 퀸 츄lv???]

[사투르누 와이번 퀸 고lv???]

[사투르누 와이번 퀸 타lv???]

──────────────

아니 이럴 수가.

이게 셋이야 하나야.

< 뱀의 길 >

112. 뱀의 길

우리 쪽 와이번 대장이 셀레타.

그리고 저쪽 와이번 대장이 츄고타.

셋이 하나를 상대하는 건가.

그러나 아무래도 헷갈린다.

분명 츄고타의 몸은 하나였다.

하지만 그 모가지며 대가리는 셋이다.

그렇다면 한 마리인가 세 마리인가.

상태창을 참고하면 세 마리가 맞는 것 같은데.

또 한 마리인 것 같기도 하다.

- 트윈 헤디드도 아니고 트리플 헤디드 마물이라니.

'희귀한 거예요?'

- 희귀하지, 아주 희귀한 놈이다.

하긴 그럴 것이다.

머리가 두 개 달린 마물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머리가 셋 달린 마물이라.

이 세상에는 아직도 비밀이 많은 것 같다.

- 트리플 헤디드 마물이 자연 발생하다니. 기적 같은 일이야.

'키메라보다 더 엄청나게 생겼네요.'

자고로 머리가 둘 달린 마물은 특별하다.

트윈 헤드 오우거는 전통적으로 마법의 천재쯤으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위대한 대마도사 초와 갈의 이야기 같은 것은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던 것이다.

트리플 헤드 마물이라면 대마도사 정도가 아니라 마법의 신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을 정도 아닌가.

유심히 적을 관찰하던 펠레리안이 가설을 냈다.

- 원래는 머리 하나 달린 마물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진화하면서 머리가 갈라진 것 같다.

생긴 것을 보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세 개의 머리는 모두 콧구멍과 입을 가지고 있었다.

즉, 호흡을 할 수 있고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상대적으로 작은 뇌 또한 다 들어 있지 않을까.

그런데 눈은 아니었다.

세 마리 중 두 마리는 눈이 둘씩 있었는데 나머지 한 마리는 눈이 없었다.

- 갈라진 것이다. 원래 있던 대가리가 세 조각으로 갈라진 거야. 원래는 눈이 좌우로 넷 달렸었겠지.

와이번이 바나나도 아니고 그게 가능한 건가.

츄고타는 주둥이와 대가리의 모양이 삼각형이었다.

한데 모이면 아귀가 맞게 딱 떨어질 것 같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끔찍하게 못생겼다는 의미였다.

그 대가리들이 서로의 우애를 다지려는 듯 한 곳에 모여 대가리를 부볐다.

그러곤 각자 입을 벌려서 파괴광선을 모았다.

레벨 20짜리 파괴광선이 셋.

키이잉-

한데 뭉쳐 동시에 쏘아지자, 평범한 파괴광선을 압도하는 출력의 무언가가 쏘아졌다.

우리를 태우고 날던 셀레타는 엄청난 회피기동을 보여 줬다.

빠르게 날다가 날개를 앞으로 활짝 펼친 것이다.

엄청난 공기저항이 발생했다. 날개의 피막이 찢어질 듯 부풀고, 그 탓에 셀레타의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았다.

덩굴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다면 새끼 삼 남매는 틀림없이 추락했으리라.

그야말로 난폭 운전.

하지만 그 덕에 트리플 파괴광선을 피할 수 있었다.

콰과과광!

광선이 지상을 휩쓸자, 돌기둥이 단번에 여럿 부서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을 본 펠레리안이 탁 내뱉기를.

- 장엄하구나······!

'장엄 같은 소리.'

정말 그렇네요.

헉, '생각'과 생각을 거꾸로 해 버렸다.

- 진화란 이토록 대단한 것이다. 왜 저렇게 비효율적으로 진화했나 싶었는데, 저 와이번은 스스로의 머리를 셋으로 쪼개내서 결국 드래곤의 브레스에 버금가는 힘을 얻었구나.

대단하긴 하다.

모르긴 몰라도, 진짜 드래곤의 브레스가 이러하지 않을까.

아마 강탈의 왕관으로도 저 위력을 뺏을 수는 없으리라.

- 너도 머리를 셋으로 나누는 것 어떠냐.

'우르, 오, 로스 이렇게요?'

- 그래.

절대 싫다.

자기부터 펠, 레, 리안이 된다면 생각해 봐야지.

자신과 자식들을 전부 죽여 버릴 뻔한 파괴광선, 그리고 그것을 쓴 츄고타.

와이번 맘은 츄고타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싸우려는 건가.'

그리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셀레타는 길게 울며 비행 방향을 틀었다.

비늘이 검은 와이번들이 그녀를 따라서 날아올랐다.

셀레타는 무리 전체의 퇴각을 선택한 것이다.

- 우두머리 마물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겠지.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셀레타는 여기서 다 죽는 것보다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에요? 우린 델프람으로 가야 하는데.'

운 좋게 목적지에 가까워졌는데 다시 멀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펠레리안은 하늘과 태양을 슥 번갈아 보더니 내 꼬리 위에 턱 걸터앉고 말했다.

- 괜찮다. 오히려 델프람으로 향하는 것 같은데.

쫓겨난 무리는 펠레리안의 던전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면 잘된 거지 뭐.

그런데 와이번들은 왜 하필 요정 마도사가 만든 던전 쪽으로 향하는 걸까.

* * *

그런 이야기가 있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문명이 붕괴해도, 그것은 사실 문명이 멸망하는 거지 지구가 멸망하는 게 아니라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도 어쩌면 궤가 비슷할지 모른다.

대수림에서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는 인간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주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영지 여럿이 초토화되었으며, 기어코 왕국의 국경을 넘어 대륙의 보병사단 한 부대를 궤멸시킨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 대륙의 관점에서 그것을 본다면.

사실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대수림이 대륙의 인중쯤 된다면.

몬스터 웨이브는 대륙의 인중에 갑자기 큼지막한 여드름이 나서 뻥 터져 버린 것이다.

피가 조금 흐를 수 있겠지만 그것뿐이다.

대륙이 위험해지는 일도 아니었고, 심지어 대수림이 위험해지는 일도 아니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요정들도 마찬가지였다.

요정들은 전통적으로 그래 왔듯 세계수 근처에 모여 살았다.

아무리 마물들이 흉포해진다고 해도, 그 몬스터 웨이브가 세계수마저 휩쓸고 지나갈 리는 없었다.

때문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요정들은 큰 피해를 받지 않았다.

당시, 몬스터 웨이브의 시작점 근처에 있었던 헤일릿 랑그레이는 당연히 요정들의 곁으로 피신했다.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돌아오고.

그리고 요정 과자나 먹으면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 지가 벌써 세 달이 넘었다.

달리는 모습이 사슴 같아서, 꼭 요정과 비슷했던 헤일릿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과자 집 딸내미처럼 얼굴이며 손목 발목이 오동통해졌다.

"렘버스!"

입가에 과자부스러기를 묻힌 채, 그녀는 삼각형 빵 한 조각을 들고 중얼거렸다.

"한 입만 먹어도 배부르다고······."

자리에 있는 누구도 헤일릿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한 입만 먹어도 배부르다고 했잖아. 벌써 네 개나 먹었는데 왜 배가 안 부르지?"

이리스가 그런 헤일릿을 슬쩍 돌아봤다.

"이미 배는 충분히 부른 것 같은데?"

"무엄하다, 이놈."

헤일릿이 빵을 휘저으며 목소리를 깔았다.

이곳은 장로의 거처.

그녀가 뭐라고 하든, 이리스와 장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헤일릿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게 불만스러웠다.

"······왜 안 쫓아내는 거야?"

영웅이라고 해도 엄연히 인간인 헤일릿 랑그레이다.

그녀가 어쩌다 엘프들과 인연을 맺었다고 해도, 외부인은 외부인.

막무가내로 좀 묵고 가겠다고 쳐들어왔을 때 쫓겨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랑그레이는 잠깐만 머물다 떠날 거라고 말하고 이곳에 눌어붙었다.

이리스와 장로가 황당해했다.

"잠깐만 머물 거니까 쫓아내지 말라고 했었잖아."

"머물게 해 줘도 문제인가?"

장로가 지적했다.

"아니, 내가 거짓말을 한 거잖아요. 잠깐 머물 거라고 했는데요."

"거짓말이라면, 잠깐이 아니라 더 오래 머물 생각이야?"

대화를 나눌수록 랑그레이는 복장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미 '잠깐'이 한참 지났잖아요."

"랑그레이, 언성을 높이지 마라."

이리스가 헤일릿 랑그레이의 말투를 지적했다.

"언성 같은 소리!"

헤일릿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벌써 세 달째 이러고 있는데 왜 한마디도 안 하지?"

그러자 이리스와 장로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봤다.

"······세 달밖에 안 됐잖아."

"왜 그리 불만이 많지? 싫으면 꺼져."

그게 문제였다.

요정과 랑그레이의 시간관념은 그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이게 문제야."

헤일릿 랑그레이는 분노마저 느꼈다.

"그 느긋한 태도가 요정의 문제라구."

"느긋하게 누워서 과자나 먹은 주제에 오히려 큰소리군."

이리스와 헤일릿은 투닥거리는 게 일상이었다.

헤일릿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짓자 턱이 두 겹이 되었다.

이리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기 몸 관리도 못 하다니, 전투력이 형편없이 하락했겠어."

날렵한 몸놀림을 장기로 삼았던 헤일릿이니만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미안한데."

허나 헤일릿은 냉담하게 반박했다.

"나는 인간이라, 여기서 왕국까지 뛰어가기만 해도 예전처럼 복근 여섯 개 튀어나와."

세계수에서 왕국까지 거리가 얼마나 먼데 그리 쉽게 말하나 싶지만, 그녀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너랑 요정들이야. 너는 나랑 똑같이 과자를 먹어도 살이 안 찌지."

헤일릿이 콱, 이리스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매끈한 살가죽 말고는 별 게 없었다.

"그리고 나랑 똑같은 거리를 달려도 몸이 닳지 않겠지."

사실, 헤일릿은 살이 붙고 말고를 따지려는 게 아니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라. 빙빙 돌리지 말고."

이리스는 이 상황에서도 무표정이었다.

"너희 종족의 그 항상성이 문제라고."

헤일릿이 장로 앞의 티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장로의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붙인 뒤 이리스를 바라봤다.

"이거 보면 몰라?"

"네가 얼굴이 더 크군."

"에이, 싯팔."

그녀는 품속에서 둥그런 로켓이 달린 펜던트를 꺼냈다.

로켓의 뚜껑을 따자. 그곳에는 세밀하게 그려진 초상화가 있었다.

다름 아닌 장로가 어린 소녀를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장로님이랑 나잖아. 어느새 이 양반보다 내가 더 나이 들어 보이게 생겼어."

"우리의 수명이 긴 것을 어쩌겠느냐."

장로가 그 점을 짚었지만 헤일릿은 확고히 고개를 저었다.

"드워프가 엘프의 반도 못 산다고 하지만 걔들은 늙기라도 해요. 그런데 엘프는? 안 변한단 말이에요. 외모도 변하지 않고, 정신도 변하지 않아. 괜히 보다 보면 동물보다 식물에 가까운 종족이라 하는 게 아니에요."

괜한 투정은 아닌 듯했다.

"인간은 마치 불과 같아. 주변의 환경을 불태우고 번성하지요. 나무를 태우고 땅을 일구면서. 영토를 개간하고 마물을 가축으로 만들며. 하지만 엘프는?"

"우리는 물이다 이거구나. 종족 사원소설이라도 꺼내는 거냐."

"그런 건 난 모르겠고. 그 성질 때문에 요정이 쇠락했고 결국에는 멸종하리라는 것도 난 관심 없고!"

랑그레이는 탕, 하고 티테이블을 쳤다.

"왜 아직까지 펠레리안한테 놀아나는지 알 것 같다는 말이지."

이리스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었다.

"······무슨 뜻이지?"

"펠레리안 그 마도사가 누구보다 요정 같지 않은 요정이라는 것은 확실해. 그야말로 불같은 마도사였어."

틀린 말이 아니다.

펠레레안은 누구보다도 요정이라는 종족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었지만, 사실 어떤 요정보다도 요정답지 않은 성정을 지녔다.

좋게 말하면 진취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천박하고 사악하달까.

"그런 사람을 그렇게 고리타분한 요정 방식대로 분석하려고 하니까 될 리가 없지."

"······."

이곳에 머물던 헤일릿 랑그레이는 이리스와 장로를 쭉 관찰해 왔다.

그들이 펠레리안의 흔적을 찾기도 하며, 수련을 하고, 차를 마시는 것을 다 보고 나서 확신했다.

왜 여태까지 이들이 펠레리안의 행적을 찾지 못했는지를 알겠다고.

"애초에 찾을 생각은 있었어?"

"당연한 것을 왜 묻지? 우리가 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나?"

이리스가 복수의 맹세를 한 것도 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짓을 비교하자면, 빈대를 찾기 위해서 혼자서 호텔의 모든 침대를 샅샅이 뒤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언제까지 찾으려고 했는데?"

"뭐?"

"언제까지 펠레리안의 행적을 밝혀낼 생각이었냐고."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시간을 써야 하겠는가.

"······적어도 앞으로 오십 년 이내에."

"이래서 요정이 문제야."

이리스 같은 사람이 호텔의 지배인이었다면 그 호텔은 결국 망해 버릴 것이다.

"빈대를 잡으려면, 빈대가 있을 곳부터 추려내야지."

"무슨 말이야 갑자기. 빈대는 또 뭐야."

"빈대를 옮겼을 만한 행색의 손님이 묵었던 곳을 찾든지. 아니면 호텔 문 닫고 하우스키퍼들을 갈궈서 단번에 전수조사를 하든지. 지배인 혼자서 빈대를 잡겠다고 빨빨 돌아다니면 그게 다 잡히나."

헤일릿 랑그레이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것은 익숙했다.

다행히, 뜬구름 잡는 듯한 소리는 거기까지였다.

"펠레리안의 성격을 감안해야지. 그 노인네는 세상에 다시 없을 진짜야."

"진짜······?"

"그래, 그거 있지. 과시욕은 있는데, 사람들한테 으스대고 싶은데 정작 직접 티 내고 싶지는 않아 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자기를 알아보고, 헉, 저 사람이 그 유명한 역천 아니야? 하고 수군수군거리는 걸 즐기는 그런 성격."

신랄한 평가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걸 왜 몰라? 펠레리안이 한때 수정 가면을 쓰고 다녔던 거 몰라?"

"그랬지."

"왜 가면을 썼다고 생각하는데."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끼어든 것은 다름 아닌 장로였다.

"신분을 숨기려는 것 아니냐?"

"광명주 맙소사."

헤일릿 랑그레이는 이마를 탁 쳤다.

엘프들은 그녀의 기대 이상이었다.

"누가 정체를 숨기려고 수정 가면을 써요! 그럴 거면 그냥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거나. 두건을 썼겠지."

"가면을 쓴 게······."

"신비로운 수정 가면 마도사가 나타났다! 그런 이야기라도 만들고 싶었나 보지. 걔가 왜 갑자기 수정 가면을 그만 썼는 줄 알아요? 이거 내가 직접 들었거든. 글쎄, 대마도사 카스피안이 놀렸다는 거예요. 못생겨서 수정 가면 안 어울리니까 벗으라고."

"그래서 그 이후로 안 쓰고 다닌 거야?"

"네. 마탑 출신 마도사가 알려 주던데요? 컨셉질 하려면 끝까지 할 것이지 짜치게 그만두는 건 또 뭐야."

순진한 엘프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펠레리안의 사고방식이다.

대체 왜 그렇게 타인들에게 추앙받기를 원하며, 또 그리 바라면서도 억지로 추앙을 이끌어 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를 원하는지.

"하여튼 저게 그 녀석이 여태 만든 던전의 지도라는 거잖아요."

벽에는 대륙의 지도가 있었다.

놀랍게도, 이 지도에 표기된 행정구역들은 수백 년 전에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된 듯하다.

그마저도 엘프답다.

"여러분들이야 맨날 대수림에 처박혀서 나가시질 않으니까 모르겠지만. 저 수도만 가도 오페라라는 게 있거든요?"

"오페라가 왜."

"펠레리안이 오페라를 여러 번 봤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그 사람이 제일 많이 봤던 오페라가 카발라의 푸른 밤이라는 거였단 말이지."

갑자기 헤일릿은 붉은 초크를 들어 그 지도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카발라의 푸른 밤은 나도 봐서 아는데. 생명의 나무라는 상징을 무대 미술로 몇 번이나 써요.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주술사도 아니라 정확한 모양은 모르지만······ 이게 맞나?"

"설마······."

던전을 선으로 긋자, 독특한 모양이 생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규칙성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카발라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으며, 그 모양대로 선을 그어 봐야지 그나마 알 수 있을.

원래라면 자연적으로 찾기 힘든 단서였다.

"맞죠? 얘 찐, 아니 진짜 맞다니까요.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바란 거야. 하지만 절대 쉽게 알아차리지는 못하도록 아주 은근하게."

장로가 벌떡 일어섰다.

이것이 생명의 나무의 배치를 상징한다면, 그에 맞는 흐름이나 길을 그릴 수 있었다.

"지혜의 뱀, 뱀의 길의 경로를 따라가면."

뱀의 머리가 존재하는 곳은 북쪽.

"이 근방을 넓게 뒤지면 던전이 하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만약 던전의 배치가 뱀의 길을 따른다면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뱀의 머리를 상징하는 게 마지막으로 배치된 던전이라면.

"여기가 뭔가 의미 있는 던전이라는 거겠죠. 특히 중요한."

"고마워, 헤일릿 랑그레이."

매번 틱틱거리던 이리스가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무기를 착용했다.

장로가 묻기를.

"떠나려는 것이냐."

"예."

"언제?"

"지금요."

그리고 또 한 번, 이리스가 나무 아래로 휙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에이씨, 또, 지랄을, 해요."

랑그레이가 이리스의 후드를 잡았다.

이리스는 후드를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렸다.

"또 세 달 걸려서 가게?"

"그러면······?"

"나랑 같이 가. 며칠만 달리면 워프 관문을 이용해서 금방 갈 수 있어."

"······고마워."

"별말씀을."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

113.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산맥은 대륙의 등뼈 어쩌구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땅속에서 공룡 화석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살짝 허리가 굽어 죽어 있는 공룡 한 마리가 대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선, 공룡의 살과 고기가 있던 부분은 녹아내려서 흔적만 남았다.

그것이 땅이며 대륙과 바다의 경계선이다.

대가리는 우측, 대충 동쪽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큼지막한 머리뼈가 대륙 동부의 대수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국은 그 대가리와 목살까지의 부위를 아우르고 있다.

몸통의, 맛있는 갈빗살이 있었을 부분이 바로 제국이다.

자고로 고기는 갈비가 맛있는 법이고, 제국이 차지한 대륙의 영토는 특히 비옥했다.

그렇기에 먼 옛적 한 사내가 칭제에 성공하고 제국의 이름을 가진 것 아닌가.

제국이 가장 강력한 국가는 맞지만, 그렇다고 대륙의 주인이 제국은 아니었다.

저 위의 설원에는 북부의 야만인들이 있고.

꼬리 쪽의 사막에는 아주 무서운 술탄과 어쌔신, 네크로맨서들이 있다.

저 남쪽 근해에는 무수한 섬들이 있다.

그 군도에 어떤 문명이 자리 잡고 있을지는 제국의 만물 박사들조차 알지 못한다.

한 바퀴 훑었으니, 다시 머리뼈와 목뼈 쪽으로 돌아가자.

두개골에서 이어져 나오는 척추.

그것이 산맥의 시작이다.

넓이는 대수림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 길이는 대수림을 압도한다.

왕국의 북쪽은 전부 '산맥'에 속하고, 그 산맥의 일부는 제국까지 뻗어 나가는 것이다.

즉 동쪽의 산맥과 서쪽의 산맥은 완전히 다른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델프람이 있는 곳은 산맥의 동부였다.

- 한때 오보에 문명의 성지였던 곳이다.

펠레리안의 설명은 그랬다.

오보에 문명은 아주 오래전의 고대문명이라고 한다.

그때의 인간들은 와이번과 친하게 지냈다나.

- 그들의 유적 같은 것들이 많지. 내가 던전을 지은 곳은 그곳이었다.

'어떻게 그런 험한 곳에 지었대요?'

- 당연히 드워프들을 부렸지.

'······회색 망치 마을?'

- 그래.

회색 망치 마을의 드워프들은 사라져 있었다.

혹시 펠레리안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난 모르는 일이다.

'여기는 무슨 던전이에요? 던전마다 다 컨셉이 있었잖아요.'

- 쯧, 컨셉이라니.

펠레리안은 내 표현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내가 처음 갔던 던전은 키메라를 키우는 실험실.

두 번째는 마석 저장소.

세 번째는 무기고였다.

첫 번째는 제외하고라도 챙겨갈 것들이 많았다.

이번 던전에도 그런 것이 있을까.

- 아마도 뭐 있을······ 것이다.

왜인지 확신이 없다.

대체로 펠레리안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두 가지 경우로 나뉘는 법이다.

자기도 잘 모르거나, 혹은 뭔가 구린 것을 숨기고 있다거나.

혹은 둘 다일지도 모르지.

'근데, 영감님이 죽게 되면 이곳으로 와서 죽었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게 어떻게 돼요?'

- 무슨 말이냐.

'아니, 죽으면 죽는 거지. 꽥 하고 죽으면 여기로 올 수가 없잖아요. 죽을 걸 알게 되면 미리 이쪽으로 찾아왔을 거라는 말인가?'

- 둘 다 해당된다. 죽으면 이쪽으로 텔레포트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지.

'텔레포트라는 게 그렇게 맘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아요?'

- 희생과 한정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서약과 제약?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그나저나 자기 죽을 자리를 미리 정해 두다니, 낭만적인 면이 있다.

그리 얘기했더니, 펠레리안은 어울리지 않게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 어느 푸른 밤, 카발라 공주의 발목을 물어 죽인 뱀은 결국 머리가 꿰어 죽었지. 네가 그 비극의 정서를 아느냐······.

'우와 진짜······ 같다.'

무슨 연극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눈빛이 너무 촉촉해서 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마침 그때였다.

와이번 맘이 마른 억새를 잔뜩 물어온 것이.

그녀는 바닥에 부슬부슬한 억새를 잔뜩 깔았다.

새로운 둥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었다.

새와 달리 와이번에게는 깃털이 없으니, 어린 와이번 새끼들에게는 이게 필요하다.

"삐삐삐"

"께에에!"

"츄익!"

새끼들은 어미가 등장하자마자 가까이 가서 대가리를 비볐다.

귀여워 보여도 당장 영양죽을 내놓으라는 엄포나 다름없다.

나 또한 슬그머니 그 옆으로 다가갔다.

절대, 절대 영양죽이 먹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내가 옆에 쭈그려 있으면 와이번 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달려와서 영양죽을 강제 급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말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영양죽을 먹어야 한다.

와이번 맘은 나를 점점 더 걱정했다.

아마 내 몸이 더 이상 커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덧 와이번 새끼 삼 남매는 나보다 세 배는 커져 버렸다.

슬슬 이 막내 형님에게 감히 반항하려는 기색마저 보일 정도다.

'나는 이미 다 컸어요.'

그리 말해 줄 수도 없으니 답답할 지경.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와이번 맘은 영양죽을 나눠 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오는 새끼들을 엄하게 밀친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허공에 대고 꾸구국, 울어 재낀다.

그러자 무리의 블랙 와이번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왔다.

며칠 전, 함께 이 델프람 인근으로 이주한 와이번 맘의 부하였다.

"꾸국!"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무언가를 둥지 안으로 던졌다.

그러곤 곧바로 훌훌 날아가 버렸다.

'뭐야 저게.'

- 끔찍한 마물을 잡아 왔군.

와이번이 아직 살아 있는 마물 한 마리를 던지고 간 것이다.

익숙한 생김새는 분명 모스키토 랫이다.

다만, 평범한 모스키토 랫이 아니었다.

덩치가 다섯 배는 크고, 그 겹눈 역시 기묘하게 번쩍였다.

──────────────

[기간트 모스키토 랫lv32]

[특성]

[흡혈],[악취]

──────────────

모스키토 랫이 아기 주먹만 했으니, 다섯 배 크다고 해도 주머니쥐 정도의 크기였다.

하지만 그 끔찍함은 원래 모스키토 랫의 다섯 배를 훌쩍 넘었다.

과장 없이 백배는 더 끔찍한 것 같다.

똥파리의 그것을 닮은 겹눈.

흡혈을 위한 긴 주둥이는 거머리처럼 축 늘어져 있다.

쥐의 것과 비슷한 앞다리를 모으며, 지금 상황이 불만스럽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놈이 도망치려는 순간.

"따다닥, 딱."

와이번 맘이 입을 탁탁 부딪치며 와이번 피어를 뿜어냈다.

와이번 새끼들에게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정신공격 면역인 내게는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간트 모스키토 랫, 줄여서 기모랫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와이번 맘은 주둥이를 확확 들이밀고, 발톱을 휙휙 긋는 모션을 취했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 사냥법을 가르쳐 주려나 보군.

정말, 참 제대로 된 엄마다.

진짜 엄마도 아닌데 자꾸 내게도 엄마 노릇을 하려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꾸가각!"

와이번맘이 피어를 멈추고 모스키토 랫을 삼 남매 쪽으로 밀었다.

삼 남매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하니.

"츄에에엑!"

"케에에!"

츄이와 케이는 저 혼자 뒤로 나뒹굴었다.

정작 모스키토 랫은 주둥이만 킁킁대고 있는데, 마치 물리기라기도 한 것처럼 비명을 빼액 질러댔다.

하아, 저리 겁들이 많아서 어떻게 이 험한 마경에서 살아남을까.

덩치는 훨씬 작았지만 겁 없이 용맹했던 지네 삼 남매가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와이번 삼 남매에게 너무 일찍 실망했던 것일까.

그들 중에서도 용감한 자가 있었다.

가장 대가 센 맏이 삐삐가 당당히 서 있는 것이다.

삐삐는 기간트 모스키토 랫 앞에 서서 멈췄다.

그리고 둘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덩치는 삐삐가 더 컸지만 기간트 모스키토 랫의 눈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한참의 침묵을 깬 것은 삐삐였다.

삐삐는 크게 입을 벌리고 포효했다.

"삐이이이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워크라이쯤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기대하던 격렬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삐이이이!"

"찍찍."

"삐이이이이이!"

"찍찍, 찍."

삐삐는 그냥 계속 입을 떡 벌리고 있고, 모스키토 랫은 당황한 듯 찍찍거릴 뿐이었다.

- 아, 그거군.

'뭐 알겠어요?'

- 입을 벌리고 있으면 먹이가 입속에 들어오는 줄 아는 것이다.

'아······!'

새도 아닌데 이토록 새대가리스러운 발상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기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지······.

"꾸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것은 다름 아닌 와이번 맘이었다.

그녀는 이 험한 세상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와이번 맘이 나를 돌아봤다.

내가 뭔가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 그냥 가만히 있을 거냐?

'예.'

굳이 관심을 끌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말았으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와이번 맘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이다.

'왜, 왜 저래······.'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가기도 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 한다고.

공포스러운 와이번 퀸도 제 자식들은 아낀다.

그런데 얼마 전, 다른 무리의 습격으로 인해 원래의 둥지까지 잃은 참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새끼들이 한 마리의 마물 노릇을 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막냇자식으로 여기는 나는 몸도 작고 날개도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마음이라도 가볍게 해 줘야지.

아아, 조금만 발휘해 볼까. '진심'을.

*「식심의 도약lv4를 사용합니다.」

타앙!

꼬리로 바닥을 후려치면서 반탄력을 얻는 것이다.

그것으로 정확히 방향을 조절해, 적을 물어뜯고 지나간다.

그것이 식심의 도약의 원리.

내 입에는 어느새 새빨간 고깃덩이가 물려 있었고.

"찌익!"

기간트 모스키토 랫은 비명을 토해내며 쓰러졌다.

"삐삐삐!"

"츄이이!"

그걸 본 삼 남매들이 합창하듯 울었다.

그들은 나를 흉내 내려는 듯 쓰러진 기간트 모스키토 랫을 뜯어 먹었다.

꿀꺽.

입에 문 고깃덩이를 삼켰다.

이 정도 했으면 영양죽의 값을 일부나마 치른 걸까.

와이번맘을 돌아보니 그녀는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꾸라라라라락!"

그러고는 춤을 추듯 덩실거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부드러운 날개의 피막으로 나를 마구 쓰다듬었다.

와이번맘 식의 칭찬 방법임이 틀림없었다.

"사악!"

까딱까딱!

이실이도 조금 기뻐하는 것 같다.

나도 기분이 좀 좋아졌다.

- 와이번한테 칭찬 좀 받았다고 그리 좋으냐.

아무래도 나는 칭찬에 약한 타입 같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먹이 사냥 교육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일까.

기분이 좋아진 와이번 맘이 과감한 도전을 시작했다.

"깍깍, 꾸각깍!"

뭐라고 일장 연설하듯 말한다.

날개를 퍼덕이면서 깍깍거리는데, 어째선지 슬슬 와이번 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들에게 먹이를 가져다줄 수는 없단다.

언젠가 너희들은 스스로 사냥을 나서야 해. 그리고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인자하면서도 아직 젊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더빙하기에 적절할 것 같다.

츄고타는 무서운 마귀할멈 목소리가 어울릴 거고.

그런데 문제는 와이번맘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꼬리로 둥지 아래를 슥 가리켰다는 것이다.

"꾸악."(뛰어)

뛰라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건 어렵다.

와이번 삼 남매도 겁을 먹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삐, 삐이이······."

"꾸아아악!"

안 뛰면 밀어 버리겠다는 태도였다.

그러자 용맹하게도, 머뭇거리던 삐삐가 둥지 위에서 휘익 뛰어내렸다.

"사아아악!"

내가 놀라서 내려다보니, 삐삐는 허공에서 핑그르르 돌며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닿으면 홍시처럼 펑 터져 버릴 듯 아찔하다.

"삐엑!"

천만다행으로 삐삐는 용맹하게 포효하며 날갯짓을 하는 데에 성공했다.

추락하는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더니, 바람을 타며 활강까지 한다.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둘째 케이를 와이번 맘이 갑자기 밀쳐버렸다.

"케이이이이!"

갑자기 이렇게 화끈한 교육법을!케이 다음에는 츄이일 것이고.

그다음은 분명히 나일 것이다.

내 차례가 오기 전에 어떻게 도망칠 방법을 찾으려 했다.

설마 거기서 가장 겁 많은 츄이가 스스로 뛰어내릴 줄은 몰랐다.

"츄우!"

둘째 케이를 구하려고 했던 건지.

아니면 어느새 제법 잘 비행하는 첫째 삐삐가 부러웠던 건지.

츄이는 이미 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와이번 맘이 나를 밀친 것이 생각보다 빨랐다는 것이다.

터엉!

아니, 그래도 날개가 없는 걸 알잖아!

설마, 날개 없는 자식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배신감을 느끼면서 추락했다.

절벽에서 떨어져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으리라.

'이실아!'

도와줘 이실에몽.

나는 이실이가 덩굴을 길게 뻗어서 절벽을 붙잡아 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은 와이번 삼 남매를 보고 뭔가 착각을 한 것 같다.

파닥파닥.

그 이파리를 날개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파닥이는 것이다.

당연히 아기 손바닥만 한 이파리 날개로는 날 수가 없었다.

나는 매섭게 추락했다.

< 묘지기 골렘 >

114. 묘지기 골렘

와이번 새끼인 척하다가.

비행 교육을 위해 밀쳐져서 추락사.

세상에서 가장 바보같이 죽은 뱀 부문, 영예의 대상 수상!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아찔한 추락의 감각이 몸에 짜릿하게 퍼질 때.

내가 든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이실아, 너라도 살아라.'

내 몸에 붙어 있는 채로 추락하면 이실이도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몸이 가벼운 이실이는 따로 떨어지면 문제가 없으리라.

까닥까닥.

그러나 설마 그렇게 곧바로 말을 알아들을 줄이야.

너 그렇게 똑똑했니.

휘익!

마치 전투기의 콕핏이 긴급 사출되듯.

이실이는 내 몸에서 휘익 떨어졌다.

'이실아······!'

밀려오는 이 배신감은 뭘까.

이 배신자 키메라 식물.

그래도. 너는 행복하게 살려무나.

나 없어도 잘.

여기는 너무 척박하니까.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당분간은 삼 남매 애들하고 지내, 조금 더 자랄 때까지.

이 말들이 이실이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전달될 수 있을 것 같다.

'교감lv2'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실이의 덩굴손이 내 몸에 닿아 있을 때만 작동하는······. 아!

'이실아!'

녀석은 혼자 도망친 게 아니었다.

덩굴손을 내 몸에 걸친 채 '뛰어오른'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삐이이이!"

벌써 비행에 꽤나 익숙해진 삐삐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막내 형님을 구하려고 하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늘 처음 배운 비행이다.

빠르게 추락하는 나를 잡아채는 것은 어려울 터.

여기서 이실이의 과감한 결단이 도움됐다.

길게 뻗은 덩굴이 삐삐의 목에 목줄처럼 걸렸다.

추락하던 내 몸에 강력한 장력이 가해졌다.

"사칵!"

순간 척추가 다 부서지는 줄 알았다.

다행히도 이실이의 덩굴에는 탄성이 있었으니.

나는 통, 튀어서 높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착지할 곳이 있었다.

턱, 하고 올라선 곳은 삐삐의 등 위였다.

"삐이이이!"

녀석은 뿌듯한 듯 포효를 질렀다.

무려 나를 태우고 비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케케케."

"츄익!"

그 옆으로 케이와 츄이 또한 따라붙었다.

와이번 삼 남매와, 뱀 한마리, 그리고 덩굴풀 하나가 비행한다.

- 첫 비행에 이 정도로 능숙하다니. 역시 와이번은 하늘의 왕자라는 건가.

하늘의 왕자였구나 얘네.

실제로 셋은 어설프게나마 편대비행 같은 것을 수행했다.

비행은 몹시 싫어하는 나였다.

잠재력 20 덕택에 비행 스킬을 배울 수 있었지만 안 배운 이유가 있었다.

태생적으로 날개가 없었기에 날아 봤자 방향을 조절할 수도 없었고, 높은 것이 본능적으로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거 재밌는데!'

하늘을 나는 데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삐삐의 등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내가 올라타기에는 충분했다.

원래라면 손발이 없었기에 잡을 것도 없어서 무서웠겠으나 지금은 이실이가 내게 딱 붙어 있다.

이실이의 덩굴이 삐삐의 목에 걸려서 마치 고삐 같은 느낌이었다.

와이번 라이더가 된 기분이다.

실제로 그게 맞기도 했고.

'올라가자!'

살짝 고삐를 당긴 것을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녀석을 길들였기에 내 의지가 통한 건지.

삐삐는 휘익 상승했다.

저 둥지 위에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와이번맘이 보인다.

설마 이렇게 될 걸 예측한 건 아니겠지만.

기뻐하는 것을 보니까 내 마음도 나쁘지 않다.

새끼 와이번들은 본격적으로 비행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맏누나인 삐삐는 성격이 용맹해서 스타일이 저돌적이었고, 둘째인 케이는 개중 속도가 가장 빨랐다.

'옮겨 타자, 이실아!'

이실이가 덩굴 하나를 케이에게 길게 뻗은 순간, 내가 훌쩍 뛰어올랐다.

조금 위험하긴 해도 멋진 스턴트였다.

이번엔 케이의 위에 올라타서 고속비행을 해 봤다.

'마법을 곁들이면······.'

*「초급원소마법:불lv7을 사용합니다.」

불덩이를 쏘아 보았다.

그것 아는가?

시속 100km로 달리는 자동차 위에서, 정면으로 시속 100km짜리 비비탄 총을 발사하면.

비비탄 총의 속도는 무려 200km가 된다!

맞나? 하여튼 그럴 것이다.

평소에는 느릿하게 날아가던 불덩이가 훨씬 빨리 쏘아졌다.

퍼엉!

돌기둥에 부딪혀 폭발하는 불덩이.

충분히 위력적인 일격이다.

'다음은 츄이한테!'

"츄이이익!"

나는 케이에게서 뛰어올라 막내의 등 위로 올라탔다.

예전에 다 같이 둥지에서 떨어질 때 혼자서만 비행에 성공했던 막내였다.

과연 츄이의 비행은 셋 중 가장 테크니컬했다.

급강하했다가 허공에서 한 바퀴 도는 것은 그야말로 곡예비행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엄살이 많던 녀석인데, 하늘에서는 겁이 없다.

셋 중 비행 실력은 최고였다.

내 기분도 더 고양되었다.

'완전 전설의 출현.'

비행의 참맛을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우리는 한참을 날았다.

그리고 펠레리안과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 저기가 델프람이다.

이대로라면 델프람의 던전에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저 석탑이요?'

- 내 던전이야. 저 석탑이!

저 멀리 돌기둥이 없는 구역이 보였다.

다만, 그 한가운데에 눈에 띄게 색이 검은 석탑이 하나 있었다.

마치 검은 오벨리스크 같다.

'다른 던전하고 생긴 것부터 다르네요.'

-'묘비'라고 이름 붙인 곳이지.

펠레리안은 본인이 죽으면 저곳으로 가기를 원했다.

'대체 무슨 던전이에요?'

아직도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기에 물어봤을 뿐이었다.

펠레리안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예?'

-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어.

펠레리안도 그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늙은 마도사의 영혼은 그 온전한 전체가 아니다.

영혼을 일부 찢어서 반지에 숨겨둔 것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기억은 가지고 있지만, 종종 누락된 기억들이 있다.

스스로의 존재가 위협받는 기분이리라.

'거 가 보면 알겠지!'

- 그, 그래. 맞는 말이다!

안에 뭐가 있는지는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는 일 아니던가.

여태까지랑 별다를 것도 없었다.

'가즈아!'

사아악! 하고 호령하자, 내가 이끄는 와이번 군단(새끼 세 마리)이 검은 석탑을 향해 비행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아직 어리고 작다고 해도,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역시 편하다.

기어가려면 한참 걸릴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순식간에 펠레리안의 던전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너무 가까이 가지는 말고, 저 앞에서 멈추면······.

펠레리안의 말을 듣고 멈추기도 전에, 우렁찬 포효가 천지를 진동했다.

"꾸오오오오오!"

새카만 어둠이 우리를 덮쳤다.

분명 한낮이었는데 갑자기 밤이라도 된 건가 싶을 정도.

검은 장막의 정체는 와이번맘의 날개였다.

그녀는 자신의 거대한 날개로 우리를 휘감아 착지했다.

생각보다 거친 착지였다. 바닥을 우당탕 구를 정도로.

왜 갑자기 그러는가 싶어서 와이번맘을 보니.

"꾸가가가가!"

그녀는 엄청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와이번 피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그 분노가 저릿저릿하게 느껴진다.

"삐삐익!"

용감한 삐삐마저 겁먹어서 벌벌 떨고, 다른 동생 둘은 이미 벌러덩 넘어져서 자지러지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 정도로 끝냈을 와이번맘이었건만.

이번에는 단단히 혼을 내기로 결심한 듯했다.

꼬리를 매섭게 휘두른다.

철썩! 철썩!

제 자식들의 엉덩이를 후려친다.

즉, 빠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새끼들은 따가운 고통에 엉엉 울어댔다.

내가 자식을 키워 보지는 않았지만, 저게 어떤 의도인지는 알 것 같았다.

- 공포를 각인시키는 양육법이군.

저 석탑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교육하는 것이다.

괴악한 마도사의 영지에 접근하면 큰일을 치른다.

아주아주 무서운 일이 생기리라. 하면서.

일부러 과하게 화를 내고 엉덩이까지 때리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리라.

문제는 그 화살이 나한테도 향했다는 것이다.

내 몸통보다 거대한 꼬리에 얻어맞을 절체절명의 상황.

나는 본능에 따라 행동했다.

"사아아······."

입을 살짝 벌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한 것이다.

내게 날아오던 꼬리가 허공에서 움찔 멈췄다.

와이번맘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연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을 유지하자.

마침내 내 입가에서 침이 한 방울 뚝 떨어진 순간.

와이번 맘이 꼬리를 슬쩍 내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꼬리로 자신의 눈가를 훔쳤다.

놀랍게도 와이번맘의 눈가는 어느샌가 촉촉해져 있었다.

갑자기 왜 우는 거지?

내 명석한 두뇌로도 도저히 단서를 잡을 수 없었다.

- 험난한 세상에 모자란 자식을 홀로 내버려 두게 될까 마음이 아픈 것이겠지.

'아니 그럴 수가!'

-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지으니 부모 맘이 걱정스럽지 않겠느냐.

멍청한 표정이 아니라 순진한 표정을 지었던 건데.

'근데 왜 그렇게 와이번맘을 잘 알아요? 전생에 와이번이었나? 아니면 엄마셨나?'

- 헛소리는.

결국 와이번맘은 내 머리를 슥슥 핥아 주기까지 했다.

어미가 자식을 핥는 이유는 무엇인가.

- 청소하려고 하는 거지. 주로는. 아니면 그냥 본능적으로 아껴서 그러든지.

나는 아주 깨끗하고, 또 와이번 맘의 진짜 자식도 아닌데 말이다.

주동자인 내가 빠따를 맞기는커녕 오히려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삼 남매는 그게 분통했나 보다.

"삐케케케케!"

"츄아아악!"

거칠게 항의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꼬우면 너희들도 날개랑 다리를 떼어 버리렴.

어느새 둥지들이 모여 있는 무리로부터 꽤 떨어져 버렸다.

아무래도 오늘 당장 저 석탑까지 가기는 무리일 듯했다.

펠레리안은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꾸가각!"

새끼들은 아직 성장이 다 끝나지는 않아서 땅바닥에서부터 혼자 날아오르기는 힘든 것 같았다.

결국 와이번 맘이 한 번에 우리를 등에 태웠다.

그 사이 새끼들의 몸집이 커져 버려서, 전부 발 위에 매달리게 할 수는 없었다.

후웅, 훙-!

날갯짓이 묵직하다.

와이번 맘은 우리를 전부 태우고 날아올랐다.

손이 없는 새끼들은 어미의 등에 납작 엎드려 붙었다.

그 모습이 자못 불안해서 녀석들을 덩굴로 한데 묶었다.

"꾸국."

평안했던 비행이 갑자기 거칠어진 게 그 순간이었다.

꾸궁······.

저 앞에서 굉음이 울렸다.

"삐삐삐."

"케에······."

새끼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어찌 이 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

돌기둥이 무너지는 소리다.

파괴광선에 둥지가 파괴되는 소리다.

침략의 소리다.

"께에에에엑!"

우리는 등에 매달려 있기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와이번 맘이 파괴광선을 시전하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머리를 훅 젖히고, 입에서 광선을 뿜어낸다.

콰아아아아!

구름을 가르고 광선이 나아간다.

무엇을 쏘아 맞추려던 것인가. 다른 와이번? 혹은 ······.

고개를 내밀자, 곧 알 수 있었다.

와이번 맘은 저쪽에서 날아오는 또 하나의 광선을 쏘아 맞춘 것이다.

광선과 광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콰콰콰콰콰!

그 결과는 광선 하나의 소멸, 그리고 다른 광선의 굴절이었다.

힘이 약해서 사라진 것은 와이번 맘의 광선이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트리플 헤디드 와이번 츄고타.

그녀의 광선이 우리의 옆을 지나간다.

뜨거운 열풍이 확 휘몰아쳐서, 삼 남매가 자칫 떨어질 뻔했다.

- 또다시 습격을?

이미 한 번 습격해서 와이번맘의 둥지를 빼앗은 츄고타였다.

동물의 무리가 상대 무리를 공격하는 경우는 영역 다툼 때문인 경우가 많다.

즉, 영역을 빼앗은 지금 곧바로 습격을 올 이유는 없었다.

"사아아악!"

하지만 이미 일어난 상황을 어쩌겠는가.

츄고타는 무리를 이끌고 이곳 델프람까지 찾아왔다.

와이번 맘이 세차게 날갯짓을 하며 속력을 높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최악이었다.

하필 새끼를 전부 등에 태운 채다.

와이번 맘의 덩치를 생각하면 무리는 없겠지만 속도를 내기에는 불리할 것이다.

'그' 츄고타와 싸워야 하는 지금은 더욱.

"그우우우우"

"워어어어."

"드으으으!"

츄고타의 머리 셋이 내는 울음소리는 마치 지옥의 소리처럼 기괴했다.

와이번 맘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오히려 조금 더 빠르다.

'이러다가는 애들이 다 죽겠어요.'

와이번 맘이 두려워하는 것도 등에 태운 새끼들이리라.

'얘들아. 도망쳐라.'

나는 새끼들을 바라봤다.

새끼들과 내 눈이 마주쳤다.

엄마가 바쁜 지금, 애들을 지휘할 것은 나였으니.

'셋, 둘, 하나······.'

이실이의 덩굴을 풀었다.

삼 남매는 두려워하는 얼굴이었지만.

'강하!'

"사악!"

다행히 내 지시를 들어주었다.

혹은 미끄러졌을 뿐인지 모르겠지만.

100키로는 넘는 무게가 덜어졌으니 차이가 클 터.

와이번 맘은 덕택에 조금 더 가속할 수 있었다.

쐐애애액!

츄고타의 머리 중 '츄'가 겨우 한 치 앞을 물어뜯고 지나갔다.

와이번 맘은 간신히 그것을 피했다.

걱정스럽게 새끼들을 내려다보았지만, 녀석들은 열심히 내려가고 있었다.

어디 돌기둥 사이의 그늘에 숨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지금은 녀석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피이이이잉!

츄고타가 다시 트리플 파괴광선을 준비한다.

저 위력이야 한 번 목격해서 알고 있었다.

나는 이실이의 덩굴을 와이번맘의 목에 고삐처럼 걸었다.

아이들에게도 성공했으니 어쩌면.

고삐를 확 잡아당겼고.

내 뜻이 전달된 건지, 아니면 와이번맘과 생각이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로 급격히 상승했다.

트리플 파괴광선은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공기를 불태워 플라즈마를 발생시킬 정도로 강력한 광선은.

우리를 지나쳐 저 뒤의 석탑을 향했다.

- 아, 안 돼!

펠레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저 파괴광선이 던전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면······.

콰아아아아앙!

하지만 놀랍게도 광선은 석탑에 닿지도 못했다.

무형의 벽.

결계일지 실드일지 모를 것이 저 강력한 광선을 막아 낸 것이다.

- 돼!

'잔뜩 쫄았으면서.'

- 으하하하!

펠레리안은 던전의 방어시스템이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 생각났어.

'뭐가요!'

- 저쪽, 석탑으로 가까이 가라! 와이번이 델프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지.

더 물어볼 시간은 없었으니, 나는 덩굴을 휙 잡아당겨서 신호했다.

'엄마! 저쪽이에요!'

"사삭, 사사사아악!'

그리 외치며.

와이번맘도 펠레리안의 던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새끼들이 도망치고 있는 방향과 던전은 정반대.

그녀는 결심했다는 듯 방향을 정했다.

츄고타를 던전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 저거, 저거다!

내 눈에도 보였다.

거대한 오벨리스크.

그 벽에 뚫린 구멍에서, 사람 형태의 골렘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멀리 있어서 작아 보이지만, 엄청나게 거대한 녀석이었다.

녀석이 이쪽을 바라본다.

적의가 느껴진다.

접근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암석의 경비병이 보이는 의지.

- 내 오벨리스크의 거병이!

< 삼단 합체 >

115. 삼단 합체

오벨리스크의 거병(골렘)!

그리고 머리가 세 개인 츄고타.

푸른 눈도 아니고 용도 아니지만, 츄고타에게 이명을 붙이자면 '궁극의 초록 눈의 백와이번'. 쯤이 될 것이다.

골렘과 츄고타의 대결은,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빅 이벤트였다.

아쉬운 것은 내가 안전한 곳에서 관람하는 게 아니라, 와이번맘과 함께 그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 봤자 그냥 골렘 아니에요!'

내가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오벨리스크의 거병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저 골렘이다.

게다가 크기도 츄고타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반면 이쪽 와이번들은 둘 다 '보스 몬스터'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괴물들 아닌가.

셀레타 또한 네임드 마물이었다. 분명 실버백 침팬스 아킴스보다 강할 것이다.

그런데 츄고타는 그런 셀레타의 강함을 압도했다.

한낱 골렘이 츄고타를 막을 수 있을까.

- 이 녀석······! 내 골렘이 얼마나 대단한데.

하지만 펠레리안은 가당찮다는 듯 그리 말했다.

네임드 마물의 위험도를 모를 양반은 아니니, 저 골렘이 정말 그리 센 걸까.

'예전에 본 경비 골렘은 별 것 없었는데······.'

- 그 골렘들은 다 부서졌었잖아.

내게 마법을 가르쳐 준 펠레리안의 골렘들.

던전을 지키고 있던 그 골렘들은 반파되어서 대부분의 기능을 잃은 상태였지만, 원래라면 꽤 강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파괴광선을 가지고 있긴 했지요.'

그리고 고급 원소마법까지 쓸 수 있는 대단한 골렘이었다.

'그래도, 너무 멍청했어요.'

완력이 세다고 무조건 강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물소가 사자보다 힘도 덩치도 훨씬 좋지만, 노련한 사자는 혼자서도 물소 떼를 압도하기 마련이다.

눈을 가리면 정지하는 멍청한 골렘.

지금의 나라면 힘만 세고 바보 같은 그 골렘이 멀쩡했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 골렘이 멍청한 것은 사실이다.

'이 바보 같은 놈!'하고 내게 일갈하지 않을까 했는데, 펠레리안은 의외로 침착했다.

- 하지만 압도적인 출력은 그런 것들조차 극복하는 법이다.

'출력'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지상으로 뛰어내린 골렘이 땅바닥에서 창을 뽑아냈다.

아무것도 없는 돌바닥에서 창이 튀어나왔으니, 뽑아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마법을 아는 나는 바로 깨달았다.

- 고급 원소마법, 그중 '대지의 창'이다.

땅에 발만 딛고 있다면 저런 창을 무한하게 공급받을 수 있으리라.

그 창의 강도 또한 범상치 않음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뽑혀 나온 창의 두께보다 땅에 생긴 구멍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골렘이 마치 숙련된 창던지기 선수처럼 팔을 뒤로 쭉 뻗는다.

'오.'

확실히 저번에 던전에서 만난 골렘과는 구별이 된다.

살아 있는 생물의 근육처럼, 석재로 조각된 몸체가 서로 맞물리며 늘어난 것이다.

- 피해라.

'피해야지요!'

다행히 골렘이 노리는 것은 광선을 쏜 츄고타였다.

내가 덩굴을 당기자 와이번 맘이 몸을 틀었다.

그리고 골렘이 창을 던졌다.

'던졌다'라는 건 사실 내 추측이다.

나는 그 골렘이 창을 던지는 과정을 보지 못했다.

창을 던지기 직전의 자세와, 창을 던진 후의 자세.

그 사이의 과정이 마치 끊긴 듯했다.

영화의 필름이 있다고 치면, 중간의 과정을 자른 다음에 앞뒤를 이어붙인 느낌이라고 할까.

아찔한 파공성.

그것만이 골렘이 창을 던졌음을 확실하게 했다.

키이이이잉-

그런 소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쐐애액도 아니고 퍼억도 아니고 키이잉이라니.

투창이 일순간 소리의 속도를 넘었음을 의미했다.

그 충격파가 만들어 낸 돌풍이 뒤늦게 퍼졌다.

떨어지지 않도록 와이번맘의 등에 딱 붙을 수밖에 없었다.

- 후흐흐, 으흐하하하하하-!

펠레리안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저거 뭐에요? 어떻게 한 거예요?'

나 또한 이 험난한 세상에서 굴러 본 관록이 있다.

내가 상대하고 마주쳤던 이들 중에는 대단한 강자 역시 존재했다.

대수림의 네임드 마물들이 그러했고, 군터 같은 영웅들이 그러했다.

아주 강인하고 특출난 신체 능력은 종종 마법 같은 일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

'아무리 힘이 세도 저게 가능한가?'

내 눈에 보이지도 않는 투창이라니.

단순히 힘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 가속 마법의 중첩. 내 골렘학의 정수를 담았다.

어쩐지 엄청나게 대단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투창이 어떤 결과를 내었는가.

투창은 기어코 츄고타를 꿰뚫었다.

"구우우우-!"

비명인지 포효인지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쩌렁하다.

강력한 두개골이고, 두툼한 가죽이고 다 꿰뚫었을 투창이다.

'아······.'

그런데 창은 그저 날개에 구멍을 뚫어 놨을 뿐이었다.

'······아?'

그렇다고 츄고타가 추락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 머리 셋 달린 와이번의 날개는 엄청나게 거대했으며, 훈장과도 같은 흉터와 구멍들이 이미 날개에 가득했으므로.

"구어어!"

골렘의 무자비한 공격은 말 그대로 총알처럼 날개를 뚫고 지나가 애꿎은 돌기둥 몇 개를 부숴 놨을 뿐이었다.

'에이 뭐 이래!'

- 제기랄. 역시 정밀 조정이······.

게다가 한 번 엄청난 속도를 보여 준 골렘은 이제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왜 또 느려졌대요.'

-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

펠레레안, 또다시 신뢰 상실의 위기.

하지만 그는 허구한 날 '시간과 예산을 더 주신다면······.'을 말하는 괴짜 박사마냥 자신감 있었다.

- 걱정 마라. 지금은 방비 태세 1단계일 뿐이니, 3단계, 아니 2단계까지만 가도 저 대가리 셋은 잡을 수 있으리라.

그러면 어떡해야 방비 태세 2단계가 되는가 하니.

그 정도의 소란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 같았다.

와이번맘과 츄고타가 얽혀 싸움으로써 조건은 충족되었다.

"꾸어어어어!"

"구우우!"

네 개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효 소리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두 와이번 퀸은 서로 광선을 쏘면서 견제하던 것을 멈추고 마침내 맞부딪쳤으니.

콰아아앙!

서로 물고, 할퀴고 후려친다.

그 육중한 체구 탓에 목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강력한 타격을 준다.

셀레타의 머리에 얻어맞은 고, 아니 츄가 휘청였다.

하지만 동시에 타가 셀레타의 어깻죽지를 물어뜯는다.

꾸웅- 쿵!

돌기둥에 부딪혔다 하면 되려 지형지물이 무너진다.

나는 와이번 맘을 도울 방법을 찾았다.

'지옥불은 우리 모두한테 위험하고, 천뢰령도 마찬가지고.'

와이번 맘의 등에 매달려 있으니, 하늘과 땅이 10초에 세 번은 바뀐다.

가만히 버티기만 해도 토할 것 같으니 정밀한 타격은 당연히 어려웠다.

아예 츄고타에게 뛰어들까.

그러면 상대하기가 조금 편할 것 같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펠레리안이 외쳤다.

- 2단계다!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뭔가 바뀌었다.

오벨리스크에서 두 마리의 골렘이 더 기어 나왔다.

- 세 마리가 전부 다 나오는 것이 방비 태세의 2단계.

저 두 마리가 또 창을 던질까.

"꾸어어!"

와이번맘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츄고타의 대가리 하나가 그녀의 가슴팍을 물어뜯은 것이다.

피가 뿜어져 나오면서 추락이 시작되었다.

"사아악!"

나는 복수해 주었다.

단검 여명이 쾌속하게 날아가 고의 눈구멍에 박혔다.

소름 끼치는 비명.

그러나 녀석은 떨어지는 우리를 보는 게 아니라 새로 나타난 골렘들을 보았다.

골렘을 가장 큰 위협요소로 판단하는 듯했다.

츄고타는 겁먹지 않고 대응했다.

하긴, 날개 피막에 구멍 하나 났다고 골렘들에게 겁을 먹으면 마경의 퀸이 되지는 못했으리라.

놈들은 머리를 한곳에 모아 트리플 파괴광선을 시전했다.

망설일 것 없는 최대 출력으로.

후웅-!

공기를 불태우는 빛의 선이 그어졌다.

허공의 한 점에서, 파괴광선은 이전처럼 보이지 않는 실드에 막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츄고타도 작정을 한 듯하다.

광선이 끊기지 않고 계속 뿜어졌다.

그동안 나와 와이번맘은 지상에 추락했다.

콰아앙!

격렬한 충격.

와이번 맘은 내가 깔리지 않도록 배부터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솟아오른 흙먼지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어질어질한 공중보다는 지상이 낫다.

휘청거리며 몸을 가누고 있는데, 저 흙먼지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우선 골렘들이 전부 모여서 허공에 손을 뻗고 있다.

마치 실드에 힘을 불어넣는 듯한 모습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그 너머였다.

골렘들이 모여 있는 곳 반대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다른 와이번인가 하기에는 바닥에 붙어 다니는 게 이상하고, 흰개미라고 하기에는 두 발로 걷는 모습이다.

사람이었다.

아니, 드워프들인가. 설마 회색 망치의?

그들은 골렘들이 정신을 팔고 있는 틈을 타 석탑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보였다.

땅에 붙어 다니는 것들의 시야는 제한적이다.

아차 하는 사이에 그들의 자취를 놓쳤다.

'저기 영감님.'

펠레리안에게 방금 본 걸 말해 주려고 하는데 그는 정신이 팔려 하늘만 보고 있었다.

- 과연, 특출난 마물이로다. 그 마력의 양까지 저리 깊다니.

놀랍게도 츄고타는 아직도 파괴광선을 내뿜고 있었다.

저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광선'만 해도 길게 뿜어내면 순식간에 마력을 다 소진하고 만다.

그보다 훨씬 마력 소모가 클 파괴광선을, 세 개의 머리로 단번에 뿜어내는 것을 아직까지 유지 중이라니.

츄고타는 그 비주얼만큼이나 지닌 마력 역시 대단했다.

- 실드가······.

'······녹고 있어!'

보이지 않는 벽이 파괴광선을 막고 있었건만.

그것도 무한하지는 않았나 보다.

광선이 부딪치는 허공이 시뻘겋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콰직-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팔을 치켜들고 있던 골렘들이 일제히 넘어졌다.

힘겨루기에서 츄고타가 명백하게 승리했다.

"구구국, 구국."

그것은 틀림없이 비웃음이었다.

골렘들을 넘어뜨린 츄고타가 고개를 숙여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와이번 맘과 나를 끝장내려는 것이 분명했다.

녀석과 눈이 마주친 순간.

"구구구–"

"끼에에에에에엑!"

"캬아아악!"

놈의 머리 셋이 일제히 분노한 듯 포효했다.

대체 왜 갑자기 저렇게 성질을.

'아니 오벨리스크의 거병 어쩌고 하더니. 그냥 별거 없는 골렘이었네!'

- 한낱 골렘이 아니다, 거병이다······!

설마 이 상황에서도 저리 당당하게 굴 줄이야.

그때, 넘어졌던 골렘들이 천천히 일어섰다.

- 실드가 부서졌어. 그것이 방비 태세 3단계로 넘어가는 조건.

'3단계가 되면 어떻게 되는데요?'

- 골렘이 힘을 합쳐 침입자를 적극적으로 격퇴하지.

'여태까지랑 별로 다를 거 없잖아요!'

-'힘을 합쳐', 그리고 '적극적으로'라니까는.

일어선 골렘들이 달려왔다.

그러나 그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게다가 달려와서 뭐 어쩌려고.

츄고타는 갑자기 우리에게 그 모든 적의를 돌렸다.

입에 거품을 잔뜩 물고 괴성을 지른다.

미친 와이번 아냐 이거.

- 조, 조금만 기다려 봐라!

미친 와이번이 우릴 향해 똑바로 떨어지고 있다.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나만 도망치면 와이번 맘은 아예 뭉개질 터.

'이실아!'

초열 지옥검으로 저 괴물과 단판 승부를 벌일 각오를 마쳤다.

- 합체한다!

'뭐라고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펠레리안의 목소리에 나도 골렘 쪽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골렘 세 마리가 달려오면서 하나로 뭉쳤다.

그러곤 거대한, 또 한 마리의 골렘으로 변하더니.

그 붉은 눈빛을 번쩍 빛내며 '가속'했다.

우두두두둑!

콰아앙!

굉음과 뼈 부러지는 소리는 거의 동시에 들렸다.

달려오던 골렘은 어느새 나와 와이번 맘을 지나쳐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강하하던 츄고타.

- 내가 말했잖나. 쉽게 막아 낼 거라고.

이번에는 펠레리안이 으스대는 것을 용납할 수 있었다.

녀석의 머리 하나가 완전히 부러졌다.

이제 녀석은 츄고타가 아니라 츄고가 되어 버렸다. 아니면 고······.

하여튼, 꼴좋다!

< 셋, 혹은 다섯. >

116. 셋, 혹은 다섯.

골렘이 가까이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

[오벨리스크의 거병-3단 합체]

──────────────

아, 3단 합체구나!

세 마리의 골렘이 합쳐져서 하나가 된 삼단 합체 오거병.

그리고 한 마리의 와이번이 머리를 세 갈래로 나눈 와이번 츄고타.

그들은 태생부터 서로 맞서 싸울 운명으로 태어난 것 아닐까.

골렘의 상태창을 더 살펴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특성]

[수호자], [골렘], [합체]

[스킬]

[중첩lv5], [삼위일체lv1], [초가속lv2], [강타lv10], [견고함lv10], [충격파lv10], [마력 내성 lv10], [참격 내성lv20], [열 내성lv20], [독 면역lv-], [산성 내성lv5], [위협 감지 lv5], [자가 수복 lv10]······

[상태]

[경계태세]

──────────────

대단해 보이는 스킬이 한두 개가 아니다.

예전에 만났던 펠레리안의 경비병A와 B의 상위호환이라고 할까.

스킬에 표기되어 있지 않는 재질의 강인함까지 따지면 정말 강할 것이다.

녀석에게 빌리고 싶은 스킬이 몇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거대화도 아직 완전 습득하지 않았거니와 자칫하면 이쪽으로 어그로가 끌릴지도 모르니.

"끄르릅-."

놀랍게도 츄고타 중 타는 아직 살아 있었다.

목이 흉하게 꺾인 채로, 입에서 분홍빛 침과 함께 울음소리를 흘렸다.

놈이 그 적의를 골렘에게 향했다.

-골렘은 죽지 않는다, 불안정하지도 않지. 외부의 힘으로 부서지지만 않는다면, 주기적으로 유지보수만 한다면. 영원히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펠레리안은 생전의 자신이 만들어 낸 역작을 감상했다.

이 골렘은 그 위대한 역천의 마도사조차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정도 골렘을 준비해 둔 던전은 손에 꼽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골렘이 불안정한 키메라보다도 못한 점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뭔데요?'

강의를 들을 시점은 아닌 것 같지만 궁금하다.

-골렘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작자가 기능을 추가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발전하지는 못해.

그럴 것이다.

골렘에게는 레벨이 없으니, 레벨업도 못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초가속, 삼위일체, 그리고 중첩. 모두 대단한 스킬이다. 영웅에게 어울릴 능력이며 또 기술이지.

저 골렘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움직임은 그런 스킬들의 연계였다.

-네가 알다시피, 기술의 조합은 종종 더하기가 아니라 곱셈과 같은 효과를 낸다. 저 연계기 또한 그런 것을 가정하고 구현한 것이야.

삼위일체, 트리니티(Trinity).

세 개의 개체가 힘을 합치는 데 일어나는 필연적인 힘의 손실.

에너지의 열 손실. 피할 수 없는 엔트로피의 증가.

츄고타는 머리가 셋이 되면서 마력 변환에 손해를, 연산능력과 인지, 기억능력에 심각한 손해를 보았다.

반면 골렘 셋은 삼위일체 스킬 덕에 전혀 손실 없이 서로의 힘을 합칠 수 있었다.

초가속은 말 그대로 가속 스킬의 상위호환.

놀라운 속도로 가속한다. 그 여파를 감당할 수만 있다면야.

마지막으로 중첩.

스킬을 반복하고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근육과 혈관, 신경 따위를 가지고 있는 살덩이들은 초가속을 중첩하여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무기물로 조립된 골렘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연계기를 골렘은 또 한 번 사용했다.

눈이 시뻘겋게 빛나더니, 방열판이 드러나며 냉각수를 전신에 휘돌려 가속을 준비한다.

골렘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점멸하듯 사라졌다.

곧, 수십 번의 타격음이 동시에 울렸다.

퍼퍼퍼퍼펑!

츄고타는 허공에서 미친 듯 브레이크댄스를 췄다.

펠레리안의 골렘이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수십 번의 타격을 수행한 것이다.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케첩 같은 피를 토해 냈다.

저 정도면 뱃속이 곤죽이 되지 않았을까.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행 능력.

펠레리안의 골렘은 정말 그 정도의 전투력이 있었다.

그가 만든 골렘의 힘이 저 정도라니. 펠레리안을 보는 내 시선이 바뀔 수준이었다.

하지만 펠레리안은 그리 흡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골렘은 성장을 못 한다고 했지. 그러니 내가 기능을 추가한 시점의 능력 그대로군. 만약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만 발전했더라면······.

'라면?'

-지금 저 와이번은 수백 조각으로 터져 나갔을 것이다.

골렘과 달리 키메라나 마물은 발전할 수 있다.

레벨업이 가능하고, 스킬도 더 강해질 수 있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진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반면 골렘은 만들어진 그 시점보다 나아질 수 없다.

오히려 정기적으로 보수, 점검하지 않는다면 고장이 날 뿐.

삐걱-

골렘의 관절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펠레리안의 불만이 무슨 말인지도 알 것 같다.

'뭐 그래도 충분히 세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여전히, 오벨리스크의 거병은 강했다.

"구우우어어!"

포효하며 날아오르려는 츄고타.

또 한 번 골렘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타격음이 울렸다.

그동안 나도 구경만 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와이번맘의 입에 포션을 쏟아부었다.

덩치가 커서 한두 병으로는 바로 일어나지 못한다. 어느새 포션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덕택에 와이번맘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얼른 도망쳐야 한다. 골렘이 적의를 우리에게 돌리기 전에.

또 와이번 삼 남매도 챙겨야 하고.

"꾸우우."

와이번 맘이 천천히 날개를 펼쳤다.

다행히 비행이 가능할 듯했다.

그때였다.

퍼어엉!

고개를 돌려보니, 골렘은 공중에서 째트킥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츄고타의 거구가 저 멀리 튕겨 나간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른다.

후웅, 훙-

와이번맘이 급히 나를 태우고 떠올랐다.

골렘의 고개가 우리 쪽으로 움직였다.

위협요소였던 츄고타가 배제되었다고 판단한 듯했다.

-괜찮다! 던전 반대쪽으로 움직이면 쫓지 않을 거야.

제작자인 펠레리안의 설명대로였다.

던전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순위인 골렘은 굳이 도망치는 우리를 쫓지 않았다.

"꾸오오오-!"

목숨을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와이번맘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녀의 울음소리에는 오히려 비통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무리는 이미 와해되고 있었다.

츄고타가 끌고 온 화이트 와이번들이 블랙 와이번들을 물어뜯고 있다.

'큭······.'

흰색 마물들은 모두 힘을 합쳐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 내 동료는 검은 이들이고 적은 흰 것들이다.

나는 흰 것들이 가장 작은 검은 것들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다.

이곳의 땅은 와이번들의 구아노 때문에 흰색을 띠었다.

그러니까, 블랙 와이번 새끼 삼 남매는 쉽게 눈에 띌 것이다.

"꾸각!"

녀석들을 먼저 발견한 건 내가 아니라 그 어미였다.

셀레타는 비명처럼 울부짖으며 고도를 낮췄다.

저 아래, 돌기둥의 그림자 속에 세 마리의 새끼 와이번이 숨어 있었다.

제 어미를 보고도 달려 나오지 못하고 서로 딱 붙어 덜덜 떨고 있다.

다행히 셋 다 무사해 보인다.

와이번 맘은 바닥에 충돌하다시피 착지했다.

그리고 상처 입은 날개를 펼쳐 제 새끼들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삼 남매도 삐약삐약거리며 어미의 품에 달라붙었다.

얼른 태워서 도망친다. 와이번 맘의 생각은 그뿐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하늘에서 보았을 때 너무 눈에 띄는 것이었다.

위로부터 걸쭉한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주르르륵, 철퍽.

그것은 타액이 섞인 토혈(吐血)이었다.

언제부터 배 속에 있었을지 모를 고기 조각과 함께, 걸쭉한 핏덩이가 철퍼덕 튄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위, 흰 돌기둥에 츄고타가 붙어 있었다.

희었던 몸은 시커먼 피멍이 잔뜩 들어 있었고, 입과 콧구멍에서는 피가 계속 떨어진다.

전신이 이미 스스로가 뱉고 흘린 피로 잔뜩 젖어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몸에서 뻗어 나온 머리 세 개.

그중 하나는 처참하게 목이 꺾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구구구구-"

"끄으우."

"국, 꾸욱,"

어딘가 비틀려 있는, 세상 전체를 증오하는 듯한 울음소리.

나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와이번, 미쳤네요.'

진짜 미친 와이번이 분명했다.

마물이라고 해도 엄밀히 말하면 짐승, 저리 다치고 목숨이라도 건졌으면 얼른 도망가야지.

"퀘엑, 퀘에에엑!"

왜 또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인가.

돌기둥에 몸을 퍽 퍽 부딪치며 날아오는 것은 분명 광기였다.

삼 남매가 자지러지며 어미에게 달라붙었다.

와이번맘은 새끼들을 매달고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열심히 퍼덕였다.

'후우.'

아수라장이다.

그래도 여태껏 겪은 아수라장들에 비해서는 아직 견딜 만하다.

특히, 그때보다는 낫다.

세계수의 뿌리 앞에서 마물들의 난전이 벌어졌을 때.

새끼를 잃은 지네맘이 울부짖으며 아이들을 찾을 때보다는 말이다.

'······.'

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란다.

와이번맘이 우리를 태우고 마침내 날아오른 시점.

나는 그래서 뛰어내렸다.

츄고타의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와이번맘이 자신의 진짜 자식들을 데리고 물러날 수 있도록, 안심시켜 줘야 할 것이고.

내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줘서.

*「거대화lv1을 사용합니다.」

거대화를 사용.

*「'거대화'를 완전히 습득했습니다.」

*「거대화lv1이 거대화lv2가 되었습니다.」

타이밍이 좋다.

거대화의 경험이 쌓이고.

무조건 커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확실히 알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가 있다.

충분히 뛰어오를 수 있도록.

이빨에 적의 거죽의 파고들 수 있는 날카로움이 유지되도록.

그리고 또.

저 미친 와이번이 감히 나를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크기로.

나는 거대해졌다.

츄고타가 나를 봤다.

"키에에에에엑!"

미친 여왕이 울부짖고.

그녀는 방향을 꺾어 내게 충돌했다.

* * *

「와이번 둥지에서 살아 돌아온 로밴튼 씨의 인터뷰, 그 후일담中」

······그렇게 인터뷰는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박사의 트라우마가 자극되어 일어난 소동이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비록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었지만, 내가 불쌍한 학자에게 품은 경의까지 바래지지는 않았다.

어쩌나 저쩌나, 그는 무엇보다 츄고타의 둥지에서 한 달이 넘게 지내다가 살아 돌아온 인물이다.

아물 수 없는 정신적 흉터를 몇 개 지니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로밴튼 박사에게 뜨거운 초콜릿과 꿀빵을 건넸다.

담요를 걸치고 있던 그는 사양하지 않고 초콜릿을 마셨다.

그리고 오히려 관대한 제안을 했다.

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시오. 인터뷰에 실어도 되고, 싣지 않아도 되고.

기: 아······.

로: 추태를 보인 일에 대한 사과요.

사실 물어볼 게 있었다.

츄고타의 둥지에서 탈출하게 된 구체적인 여정에 대해서였다.

로밴튼 박사는 특이하게도 그 여정에 대해 몇 번이나 다른 진술을 해 왔다.

진실은 무엇일까.

그게 내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로: 그걸 궁금해할 줄 알았지.

로밴튼은 품속에서 독주가 담긴 병을 꺼내 뜨거운 초콜릿에 섞어 마셨다.

로: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일지 거짓일지는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기: 듣겠습니다.

로: 츄고타의 강함과 흉폭함은 제국에서도 주목하고 있었지.

기: 아······ 제국이요.

제국이 연관되었기에, 이 이야기를 이제서야 후일담 형식으로 풀게 되었다.

로: 당시의 황제가 와이번 기사단의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아나? 제 딸인 황녀를 수호할 와이번 기사단을 만들고 싶다고.

기: 수왕제가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로: 그래서 산맥에서 가장 뛰어난 와이번의 새끼를 노린 거야. 츄고타는 새끼가 넷 있었거든. 넷을 전부 납치하겠다는 생각이었겠지. 원래는 알을 훔치려 했던 건지는 몰라도.

기: 그러면 설마······.

로: 레인저들을 보냈는지 마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성공했어. 무려 새끼 네 마리를 하룻밤 만에 납치했거든. 츄고타가 울부짖는 소리로 그때 잠에서 깼네.

기: 납치범들을 보셨습니까?

로: 아마도. 저 아래 네 방향으로 흩어지는 인간들을 봤으니까.

기: 그들이 당신을 구하지는 않았군요.

로: 아냐, 일말의 자비는 베풀었지. 그들이 잠든 내게 포션을 뿌려 주었어. 아니면 내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겠는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귀가 맞는 설명이었다.

다리 하나가 잘리고 어깨가 관통되었는데도 살려면 그런 도움이 있어야 할 테니.

로: 츄고타는 새끼를 되찾으려 날아갔지.

기: 그러면······.

로: 녀석도 대단한 놈이야. 기어코 새끼들을 되찾아오더군. 희고 창백한 새끼를 물고 날아왔어.

로밴튼 박사는 피곤한 듯 얼굴을 쓸었다.

로: 그런데 살아 돌아온 새끼가 없었네.

기: 아······.

로: 정확히는, 처음 물어온 녀석은 숨이 붙어 있었지. 그런데 두 번째 새끼의 사체를 되찾아오는 사이 죽어 버렸어. 츄고타가 귀가 찢어질 정도로 비통하게 울더군. 제 자식은 아꼈나 보지? 사흘이 더 지나서 세 번째 새끼의 사체를 물어왔을 때는 녀석의 모습이 바뀌었고.

기: 모습이 바뀌다니요?

로: 진화겠지 뭐 다른 거겠나. 다만······ 흉측하게 바뀌었지. 머리가 갈라지고 눈알 두 개가 더 생겼어. 새끼를 찾기 위해서 그리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네 번째 새끼를 찾으러 떠났어.

네 번째 새끼도 찾아왔을까?

그리 물어봤더니.

로: 모르지.

의외의 답이었다.

로: 세 번째 놈을 물어온 지 열흘은 더 지난 같은데 안 돌아오더군. 그사이 상처가 아물어서 나는 둥지를 도망쳤고. 그 후로는 놈을 보지 못했네.

초콜릿 담긴 잔을 든 로밴튼 박사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큭큭, 웃었다.

로: 모르지, 완전히 미쳐서 아직도 네 번째 새끼를 찾고 있을지도. 그러면 꼴이 좀 좋겠군.

로밴튼 박사는 그 뒤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이 인터뷰의 끝이었다.

* * *

콰악!

거대화한 나는 츄고타의 어깨를 깨물었다.

쭈욱, 확실하게 맹독을 주입했다.

이어질 격렬한 난투를 기다렸건만.

할짝, 할짝.

츄와 고가 피를 흘리며 내 머리를 핥기 시작했다.

'뭐여.'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 0918 >

117. 0918

내 '맹독:신경독'은 독 내성이 조금 있다고 무시할 것이 아니다.

혈액독의 고통보다야 조금 덜하긴 하겠지만. 어깻죽지를 통해서 짜르르 고통이 퍼져 나갈 것이다.

자기가 물린 것을 모를 리는 전혀 없었다.

지금 내가 대롱대롱 그 어깻죽지에 매달려 있지 않은가.

츄고타의 머리 둘이 내 정수리와 왕관을 할짝할짝 핥았다.

와이번의 머리통이 뱀과 닮기는 했지만, 혀의 구조는 조금 다르다.

뱀의 혀보다는 고양이의 혀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와이번맘이 꼭 이렇게 나를 핥아 주었다.

그러니까, 츄고타는 마치 새끼의 몸 손질을 도와주는 어미처럼 날 핥고 있다는 것이다.

저 삼두와이번이 왜 나를!

-널 제 새끼로 아나?

'왜 갑자기요? 미친 거 아니야?'

와이번맘이 나를 새끼로 아는 것은 이해가 된다.

내가 그녀의 알을 깨고 튀어나왔으니까. 생긴 것이 조금 이상한 새끼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츄고타는 나를 제 새끼로 알 건덕지가 없다.

제 새끼들이랑 내가 똑같이 생겼나?

-몸이 흰 것이 솔직히 저 오블리비언 와이번보다 이놈들이 너와 닮기는 했지.

물론 츄고타도 나도 몸이 희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도 그거 하나로 나를 새끼로 착각하는 것은 정신 나간 일이지.

"구우우······."

······물론 츄고타가 미친 와이번이 맞기는 했다.

그래서 나를 할짝대는 츄고타의 품이 엄마 품처럼 따뜻했냐 하면.

'저 오줌 마려워요.'

오줌 싸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츄고타의 상태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몸을 핥을 때마다, 오히려 피가 묻어 시뻘게졌다.

츄고타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계속 할짝댔다.

"그우······."

츄의 입에서 부러진 이빨과 타액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뤄러러럭!"

고가 갑자기 입에서 피와 토사물을 뿜었다.

내가 주입한 신경독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츄고타 중 '타'에게는 눈이 달려 있지 않았다.

뇌는 아마도 있는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목이 완전히 부러져 있는데도 살아 있다.

타는 역으로 꺾여 덜렁거리는 머리를 내게 가까이 가져와 킁킁댔다.

"귀이, 쉬이······."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몸이 달달 떨렸다.

조금 전 비장하게 다짐했던 싸울 의지가 달아났다.

공포는 츄고타가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극에 달했다.

"쉬······."

"히, 히······."

"테에······."

여태까지 그우우 거리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목소리다.

귀신과도 같은 몰골로 귀신이 낼 법한 소리를 한다.

"쉬이, 히이······"

"테에······"

거의 동시에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 세 음절이 하나의 단어 같기도 했다.

"쉬······ 히이······ 테.

언어인가.

말인가.

환생 특전으로 언어 능력을 얻어 버린 나라면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순간 펠레리안이 외쳤다.

-오보에어 같은데!

'오보뭐요?'

-오보에 말, 그 고대어 있지 않으냐.

고대어?

고대어라고 말을 들으니까, 어째선지 조금 알 것 같다.

"쉬히······테."

츄고타의 머리 셋이 동시에 말하는 음절을 이어 들으면.

직역해 볼 수 있겠다.

"쉬······히테······."

내······아가······.

끼야아아아악!

그 뜻을 이해하니까 더 무서웠다.

내 두려움을 눈치챈 것일까.

진짜 엄마, 아니, 진짜는 아니구나.

하여튼 와이번맘이 돌아왔다.

"꾸가가가가각!"

그녀는 츄고타에게 덮쳐들어 마구 발톱을 휘저었다.

"꾸오오오!"

"카아악!"

츄고타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와이번맘의 기습적인 제트킥 덕택에 나는 츄고타에게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탁.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삼 남매를 태우고 날아올랐던 와이번맘이, 나를 구하러 돌아온 것이다.

아니 애들 데리고 도망치라고 거대화까지 써서 맞섰건만.

이러면 내가 시간을 끈 것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저것에게는 네가 가장 작고 약한 막내처럼 보일 텐데 어쩌겠느냐.

그래, 세상일은 이성적으로만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삼 남매라도 구하는 것이 옳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삐삐삐-"

"께에!"

삐케츄 삼 남매도 울부짖으며 제 어미를 응원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츄고타는 그리 부상을 입은 상태로도 여전히 강했다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와이번맘을 쉽게도 뿌리쳤다.

-자가 회복 관련 능력이 있나 보군. 머리가 꺾여도 죽지 않는 생명력이라니.

아닌 게 아니라 오히려 골렘에게 당한 직후보다 몸이 나아진 것 같았다.

츄고타의 시선은 그 와중에도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쉬" "히······" "테······!"

내 아가! 하고 쿵쿵 달려오는 츄고타.

날개를 앞발처럼 사용해 기어오는 모습이 꼭 에일리언 같다.

"사아앙!"

나는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와이번맘이 그런 츄고타에게 광선을 쏘고 꼬리를 물어뜯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거미처럼 와다다다 기어가는 츄고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 차라리 츄고타가 내게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러면 와이번맘의 등에 매달린 삼 남매는 조금 안전할 테니.

다시 펠레리안의 던전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삼단 합체를 유지하고 있는 골렘이 서 있었다.

놈은 일정 거리 이상 좁히지 않고 이쪽을 가만히 노려봤다.

마치 수문장처럼 든든한 모습이다.

츄고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골렘뿐이다.

자, 저 무서운 와이번을 내게서 떼어 줘.

그런 마음으로 접근하던 중이다.

-잠깐.

펠레리안이 그리 경고했고.

갑자기, 얌전히 내게 붙어 있던 이실이가 내 앞에 지옥불을 뿜었다.

그리고 나는.

두근.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

이건 틀림없는 생존 반응의 발동이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몸을 튕겨 움직이는 것.

그리고 가장 빨리 사용할 수 있는 스킬.

*「천뢰령lv1을 사용합니다.」

이실아 조금 찌릿해도 참아야 해.

풀 포켓몬이 전기에 약했던 것 같은데. 조금 걱정되긴 한다.

쩌저저저정!

내리친 벼락 때문에 눈이 부셨다.

하지만 다행히 나와 이실이가 벼락에 직격당하지는 않았다.

분명 저 먼 곳에 있었던 골렘이 어느 순간 내 꼬리를 움켜잡고 있었고.

벼락은 골렘에게 내려쳐 놈의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너를 위협 요소로 판단했구나!

그런 것이 분명했다.

네가 아무리 빨라도 벼락보다 빠르겠냐!

천뢰령으로도 저 골렘을 무력화할 수는 없었지만, 놈을 마비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날 잡고 휘두르려고 했어요.'

잡힌 꼬리가 뻐근하다.

녀석의 얼굴 쪽이 조금 녹아내려 있었다.

이실이의 지옥불을 뚫고 기어코 나를 움켜잡았던 것이다.

잡힌 꼬리가 빠지지 않았으니, 나는 거대화를 해제했다.

몸의 크기가 줄어서 스르륵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골렘이 잠깐 마비된 지금.

그 사이에 저 단단한 녀석을 해치울 수 있을까?

-오히려 잘됐어.

펠레리안에게는 다 수가 있었다.

-왼쪽 무릎, 왼쪽 무릎 뒤다!

왼쪽 무릎이 어쨌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체 없이 골렘의 왼쪽 무릎 뒤쪽으로 뛰어올랐다.

왁 깨물어 주니.

-그 위에 저 네모난 거, 뚜껑 따 봐!

무릎 뒤쪽에는 정말 네모난 금속 뚜껑 같은 게 있었다.

-거기에 제어판이 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상태를 초기화할 수 있을 거야.

이 강력한 골렘은 엄연히 펠레리안이 직접 만든 물건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백도어를 만들어 둔 것이다.

아공간에서 여명을 꺼낸 뒤 제어판의 뚜껑에 틀어박았다.

그리고 지레의 원리를 이용해 뚜껑을 똑 따 버렸다.

티잉!

사각형의 금속 뚜껑이 맥없이 떨어지고.

그 안에 복잡한 기계장치가 있었다.

액정 같은 것은 없었지만, 숫자가 적혀 있는 그것은 분명 비밀번호 입력기였다.

물론 아라비아 숫자는 아니었지만!

-관리자 모드로!

'비밀번호가 뭔데요!'

-던전 자체랑 연결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펠레리안이 머리를 쥐어뜯어 기억해 냈다.

–0918, 그래, 공구일팔!

'아!'

버튼을 누르려다가, 나는 알아채고 말았다.

'이거 혹시 날짜? 누구 생일이에요?'

-야 이 새끼야 빨리 눌러!

나는 얼른 비밀번호를 눌렀다.

* * *

펠레리안의 던전.

묘비.

골렘 세 마리가 전부 튀어나온 것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에게 천운 같은 일이었다.

비좁은 내부에서 그 골렘 경비병들과 마주친다면 죽음은 피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우회로를 고민 중이었는데, 설마 와이번들이 골렘들을 이끌어 낼 줄이야.

잔일 페제, 제국 출신의 그 레인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살아남은 회색 망치의 드워프 열 명과 동행한 인간 하나를 이끌고 곧장 던전 내부로 기어들어 갔다.

회색 망치 드워프들은 오래전에 이 던전을 직접 축조한 바 있다.

잔일 페제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놀랍게도 그 던전에 혼자 접근했을 때였다.

던전 안쪽에 있는 정초석에 회색 망치 부족이 지었다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골렘 때문에 그 이상으로 접근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확인한 잔일 페제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회색 망치의 부족에 찾아가 그들을 협박했다.

역천의 마도사에게 협력했던 죄를 묻겠다며.

당연히 드워프들이 그런 협박에 쉽게 굴복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잔일 페제는 무려 황실의 명을 수행하고 있던 진짜배기였다.

게다가 협상과 협박 양쪽에 능숙한 인물.

협력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면서 살살 달래니, 드워프들은 따라왔다.

그러던 와중에 성질이 폭발한 드워프들과 싸움이 벌어지긴 했으나.

잔일 페제 본인이 가진 무력만 해도 그들의 상상 이상이었다.

잔일의 부하 몇 명도 죽었지만, 용감한 드워프들은 그때 싹 다 죽었으니.

남은 드워프들은 겁쟁이들뿐이었다.

잔일은 그들을 데리고 던전을 빠르게 돌파했다.

던전의 기관장치들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이었으니, 그 방비 수준에 비해 돌파는 꽤 빨랐다.

"이거 나 혼자 들어왔으면 한참 전에 죽었겠구만."

잔일은 그리 중얼거렸다.

피곤에 절은 드워프들이 잔일을 노려봤다.

"우리가 쉽게 돌파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요."

잔일 페제는 중년이라고 하기에는 늙었고,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인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저 문까지는 열어 보시지."

"······."

드워프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관문에 매달렸다.

그 관문은 '문'이라는 표현보다 '벽'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었다.

복잡한 문양과 숫자가 그려져 있었는데, 마법과 기관이 설치돼 있는 게 분명하다.

"낭만적이게도 지었단 말이야."

잔일은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벽의 구조물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노인이 앉아 있었다.

"비밀번호······ 흐음."

관문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그런 류의 장치 같았다.

드워프들은 이 문을 뚫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철컥.

드워프 하나가 무언가를 잘못 건드렸나 보다.

삐이이이이-

경고음과 함께 관문 전체가 빨갛게 빛을 뿜었다.

이내 빛이 멎어 들었지만 드워프들은 욕설을 내뱉었다.

"벌써 네 번째 실패야! 무슨 함정이 나올지는 우리도 모른다고."

"흐음······."

잔일은 난처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그쪽은 잘 모르겠소?"

그가 질문한 상대는 옆에 앉아 있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둔 뒤 대답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박사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 기호학과 고고학의 전문가 아니신가."

"기호학과 고고학을 안다고 던전을 뚫을 수가 있나. 그저 도움은 조금 되겠지만."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잔일 페제가 기뻐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떠오르는 수가 있다는 뜻이리라.

"믿고 있었소, 로밴튼 박사."

"흥."

후드를 벗은 노인의 이름은 로밴튼.

한때 와이번에게 납치되었던 불운한 사나이.

그가 이곳에 돌아와 있던 것이다.

그는 문 앞에 다가가 조각들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어어, 조심해."

"쉿."

드워프들이 막으려는 것을 잔일이 제지했다.

로버트 밴튼 박사는 신경도 쓰지 않고 문에 조각된 숫자를 꾹꾹 눌렀다.

0.

9.

1.

그리고 ······.

9.

경고음이 울렸다.

삐이이이이이-!

"아, 8인가? 7일지도 모르겠군."

드워프들이 혼비백산했다.

비밀번호를 다섯 번 틀려 버렸다.

* * *

펠레리안의 조언에 따라 골렘의 무릎 뒤쪽에 있는 제어판을 조작했다.

숫자 버튼을 틀리지 않도록 조심히 누른다.

0, 9, 1, 8

누군가의 생일일지도 모르는 네 자리 숫자.

그러나 띠리링, 하면서 골렘이 멈추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삐삐삐삐삐.

마지막 8을 누르기 직전.

주황빛으로 제어판이 점멸했다.

그리고 예전 펠레리안의 던전에서 들었던 마도 정령의 목소리가 울렸다.

-비밀번호를 연속해서 5회 이상 틀렸습니다.

-제어실에서 직접 락을 해제해 주세요.

뭐?

< 사상 최악의 마도사 >

118. 사상 최악의 마도사

비밀번호를 연속해서 5회 이상 틀렸다니.

이게 무슨 아X폰도 아니고.

'아직 한 번밖에 안 눌렀는데요. 비밀번호 까먹은 거 아니에요?'

-절대 아니다. 내가 헷갈릴 리가 없어.

떠올리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던 것 같은데.

-거기다 제대로 누르기 전에 저 말이 나온 것 아닌가.

생각해 보니 그랬다.

0918 중 8을 누르기 직전에 경고음과 함께 주황빛 경고등이 나왔으니.

'던전 내부랑 연동되어 있다고 했지요.'

-그래, 그러면 설마······.

펠레리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탄식했다.

-소란을 틈타 쥐새끼들이 숨어 들어간 건가.

저번에 찾아갔던 던전은 이미 싸그리 탈탈 털린 뒤였다.

중요한 알짜배기들은 아예 도둑맞았고, 그 터마저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체험전시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설마 이 마경 깊숙이 숨겨진 던전도······.

'벌써 털리진 않았겠지요. 아마 비밀번호에 막히지 않았을까요?'

그리 위로해 줬더니 펠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바로 지금, 저 안에 있을 거야!

'아까 본 게 있는데······.'

나는 아까 드워프인지 뭔지가 던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다.

펠레리안은 역정을 냈다.

-그런 중요한 것을 왜 지금 말해!

'말할 틈이 없었잖아요.'

-······그렇기는 하군.

머리 셋 달린 와이번, 삼단 합체 골렘.

그 사이에서 드잡이질하던 나를 1열 직관했던 펠레리안이다.

말할 새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리라.

'뭐 어떻게 해요. 이거 풀려면.'

-제어실에서 직접 제어해야 해. 내 음성과 마력 파장을 입력해서······.

던전 제어실이 바깥에 있을 리는 없다.

저 골렘이 지키고 있는 던전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인데.

어불성설이다.

이 제어판을 연 것부터가 골렘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다.

'그냥 도망치고 다음에 와야겠어요.'

-그럴 수는 없어.

펠레리안은 혼령과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나는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음을 눈치챘다.

-방비 태세가 4단계로 올라갔다. 던전 내부의 보안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을 거야.

그런 건가.

멀리서 보기에 석탑은 별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안의 쥐새끼들이 청소되면 상관없겠지만, 놈들이 버티면 큰일 난다.

'어떻게 되는데요······?'

-방비 태세 5단계로 넘어가지. 그 시퀀스의 이름은······.

어쩐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마석 보관소에서도 그랬다.

그 귀한 마석을 잔뜩 보관해 둔 던전.

혹시 누군가가 강제로 던전에 침범하려고 하거든 던전이 폭발하도록 만들었다나.

그런 심보를 가진 펠레리안이었으니, 이번 던전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지 않을까.

-소각이지. 안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뜨거운 업화로 전부 불태우리라.

'중요한 것이 있긴 한가 보군요.'

-아마도······.

비록 펠레리안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몰랐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빨리 들어가서 그 방비 태세를 해제해야 할 것이다.

자칫하면 코앞에서 던전이 다 불타 버릴지도 모르니.

끼긱-

천뢰령의 전격은 골렘을 아주 잠깐 멈춰 뒀을 뿐이다.

천뢰령을 연속으로 사용해서 조금 더 시간을 벌까 생각했는데, 그만뒀다.

나야 무사하겠지만 이실이가 어찌 될지 모른다.

더군다나 겨우 몇 초 벌겠다고 마력을 전부 쓸 수는 없는 일.

터엉-

골렘의 장갑이 벌어지더니, 내부의 방열판이 드러났다.

그곳에서 뜨거운 열풍이 방출되었다.

놈의 몸에서 꾸륵, 꾸륵, 냉각수가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 녀석이 초가속을 준비하고 있다.

조금 전의 회피는 사실 요행에 가까웠다.

이번에도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내 곁에는 나를 도울 사람, 아니 와이번들이 꽤 있었다.

와이번맘이, 최대 출력의 파괴광선을 뿜었다.

콰콰콰콰콰-!

골렘의 내구력이 확실히 대단하기는 했다.

눈 부신 태양 빛을 가리듯 손을 치켜들어 안면부를 지키는데, 그 파괴광선을 그저 물줄기 막아 내듯 한다.

밀려 나고 달궈지긴 하지만 그 정도뿐이다.

하지만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초가속을 위해서는 열을 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방열판을 노출하고 냉각수를 돌리는 것이다.

파괴광선이 다시 그 방열판을 달궈서 골렘의 가속을 저지할 수 있었다.

"사아악!"

이런 기막힌 방법이 있었구나.

나도 불을 뿜어야겠다.

평소 펠레리안은 내 마법이 형편없다고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내게는 초급원소마법의 위력을 뻥튀기할 수단이 있었으니.

뛰어넘는 뿔.

아니 이제는······.

*「극복의 왕관lv1을 사용합니다.」

더 발전한 스킬로, 원소 마법의 위력을 올린다.

*「일시적으로 '초급원소마법:불lv7'이 중급원소마법:불lv1이 됩니다.」

*「중급원소마법:불lv1을 사용합니다.」

내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갔다.

이실이의 지옥불만큼 뜨겁고 매섭지는 않지만, 평소보다는 훨씬 큰 불길이다.

이실아 빨리 마력을 회복해 주렴.

화르르르-

불길이 골렘의 드러난 방열판으로 쏟아졌다.

좋아, 이대로 과열돼서 고장 나도록······.

터엉!

그러나 골렘이 내게 로켓펀치를 날려 버렸다.

뜨거워지면 초가속을 못 쓰는 거지 못 움직이는 게 아니었으니까.

크아아악 하며 허공으로 튕겨 나가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파괴광선을 쓰던 와이번맘이 나를 구하러 날아왔다.

그러나 힘을 회복하고 있던 츄고타가 더 빨랐다.

"쉬히테!"

그녀는 나를 확 물었다.

아프게는 아니고, 마치 호랑이가 제 새끼를 물어 옮기듯 조심스럽게.

물론 비주얼로 따지면 황새가 지렁이를 잡아먹으려는 듯 보이겠지만.

'안 돼-!'

츄고타는 나를 빼앗아 가겠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아직 제대로 날지를 못하니 거침없이 땅바닥을 기어간다.

"사아아악!"

그만하라고 외쳐도 소용없다.

하긴 말이 통할 리가 없다.

-오보에어로 말해 봐라!

'예?'

-너, 알아들을 수는 있잖아!

오보에어.

그러고 보니, 확실히 놀라운 일이었다.

'쉬히테'는 오보에어로, 내 아가라는 뜻이었다.

츄고타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 마물일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지능이 높아 저절로 말을 깨우친 거라면 실버백 아킴스나 인면지주처럼 공용어를 썼겠지, 왜 오보에어를 쓰겠는가.

-과거에 오보에인에게 배운 말일지도 모르지. 인간들이 마물과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든 언어!

그런가.

그러면······. 근데 나는 뱀이라서 말을 못 하는데.

해 봤자 사악! 이나, 쉬리릿, 이나 키야악, 하악! 정도나 가능하다.

-와이번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 마물도 말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니 괜찮다.

'뭐 아무거나 말릴 단어를 알려 줘요!'

내가 언어적 재능이 있다고 해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을 자유자재로 떠올릴 수는 없었다.

펠레리안이 알려준 단어들을 대충 따라 해 봤다.

"쉬익 키-"

멈춰 라는 뜻이었다.

츄고타는 멈추지 않았다.

"키익, 킥!"

화나다. 라는 뜻이었다.

내가 화났다는 것을 말해 줬지만, 자식과 함께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어미는 멈추지 않았다.

"스슷, 세케에! 히이치-"

마구 단어를 말해 본다.

순간, 츄고타가 멈췄다.

마지막 단어에 반응한 것이다.

"히이치-!"

그 단어가 츄고타를 멈추게 했다.

츄고타는 갑자기 제자리에 딱 멈춰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에선 불길이 뿜어져 나올 듯하고, 입에서는 그르릉대는 초저주파가 흘러나온다.

'도둑'.

그것이 '히이치'라는 오보에어의 뜻풀이.

츄고타는 지금 도둑을 찾고 있었다.

*「광선lv1을 사용합니다.」

나는 광선으로 골렘을 맞췄다.

타격을 입히려던 게 아니다.

왜 '도둑'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골렘이 도둑이라고 가리킨 것이다.

놀랍게도 츄고타는 반응했다.

미친 듯이 분노해서.

"퀘에에에- 타아-!"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외치고 있었다.

'돌려줘-!'

하고.

그녀의 거대한 체구가 뛰어올라 골렘을 덮쳤다.

기우뚱, 하고 오벨리스크의 거병이 엎어졌다.

놈에게도 위협적인 상황일 것이다.

초가속을 사용하려는 듯 냉각수를 긴급 방출했으니.

취이이이익!

무서운 기세로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열기 배출을 마치면 곧바로 초가속을 사용할 터.

그것을 눈치채고 판단한 건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행동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츄고타는 제대로 대응했다.

지근거리에서의 파괴광선.

세 머리는 그 여파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광선을 뿜어 댔다.

콰콰콰콰-!

애써 식힌 방열판이 다시 달아올랐으리라.

그뿐이랴. 츄고타는 그 단단한 골렘을 마구 물고 흔들었다.

그사이에 나는 도망칠 수 있었다.

골렘도 츄고타도 나를 보지 않는 지금이 기회였다.

"꾸와악!"

와이번맘이 나를 바라봤지만.

"사아아악!"

나는 외쳤다.

'빨리 애들이나 데리고 도망쳐요!'하고.

진짜 엄마는 아니지만, 엄마처럼 돌봐 줘서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인연의 끝이 다가왔으니.

내가 셀레타와 함께 가면 츄고타는 또 나를 쫓을 것이다.

나는 던전을 향해 달렸다.

골렘과 츄고타는 서로 뒤엉켜 싸우느라 그것을 알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간 석탑에는 입구가 있었다.

입구라고 해야 하나, 어디로 통할지 알 수 없는 창문이 여러 개 뚫려 있다.

혼자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위쪽, 저 위쪽 우측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랏!

훌쩍 도약해서.

펠레리안이 말한 구멍으로 쑤욱 들어갔다.

* * *

"후우, 훅."

잔일 페제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 자리했던 여유는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 있었다.

그래, 정확한 시점을 따지자면 드워프들이 마침내 문을 강제로 개방한 순간.

기어코 함정이 작동된 순간이었으리라.

처음에는 딱딱하게 말라붙은 모래가 쏟아진 건 줄 알았다.

그것이 동결건조 되어 보존되던 마물, 좁쌀만 한 빈대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금방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빈대가 드워프들의 몸에 달라붙었다.

드워프들은 답지 않게 비명을 질러댔다.

좁쌀만 한 빈대들의 배가 순식간에 붉은 포도알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것이 수백 수천 마리씩 달라붙었으니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모든 드워프들이 죽었다.

잔일 페제, 그리고 로밴튼 박사가 살아남은 것은 천운이었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레인저들은 다들 판단과 결단이 빨랐으니.

잔일 페제는 제국에서 얼마 전에 개발된 특수 앰플을 곧바로 자신의 이마에 부딪혀 깨뜨렸다.

생선 비린내와 비슷한 악취를 풍기는 액체가 몸을 적셨다.

그는 체통도 잊고 로밴튼 박사와 껴안다시피 몸을 피했다.

마물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악취를 풍긴다고 했나.

앰플은 정말 효과가 있었다.

바닥에는 빈대가 가득했으나, 둘의 반경으로 깨끗한 원이 생겼다.

빈대들은 일정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한 발자국씩 걷는 거요."

로밴튼도 떨며 끄덕였다.

둘이 한 발자국 내딛자, 빈대들이 우수수 물러났다.

천만다행이었다.

배를 가득 채운 빈대들은 가만히 있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밟으니, 퍽하고 핏물이 터져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야겠어. 효과가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

"나갈 때는 어떡하려고?"

"괜찮소, 앰플이 하나 더 있으니까."

둘은 열린 문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허공에서 튀어나온 것은.

-침입자로군.

한 명의 엘프였다.

다만, 엘프답지 않은 생김새를 한 엘프.

노인의 모습이다.

코는 마녀의 것처럼 매부리코였으며.

엘프답지 않게 지저분한 회색 수염이 자라 있다.

결코 조화롭다고 할 수 없는 이목구비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눈이었다.

새카만 눈알.

어둠 속을 기는 쥐의 눈을 닮았다.

그렇다고 볼품없다고 말할 수 있는 외모는 아니었다.

오히려 무시무시했다.

황제나 쓸 법한 고급 비단으로 만든 로브며.

금실로 수놓아진 룬어들.

그리고 화려한 장신구와, 마도구로 보이는 반지.

누군지 몰라볼 수가 없었다.

그가 제대로 활동했던 시절로부터 이미 백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

"여, 역천."

잔일 페제가 그 불경한 이명을 중얼거렸다.

당시에는 제국의 황제마저 두려워했던 대륙 최강의 악당이었다.

-쥐새끼들이 잠긴 문을 기어코 열고 들어오나.

"살아 있었나!"

경험 많은 레인저가 두려움을 느꼈다.

역천은 실로 그러한 존재였다.

말 한마디, 단어 하나로 파멸을 부를 수 있는.

-이곳이 너희들이 기대하던 곳간이 아닐진대······. 돌아가라. 너희들은 쌀 한 톨도 얻지 못할 것이다.

경고.

돌아가라는 경고였다.

제국인인 잔일 페제와 달리 로밴튼 박사는 역천의 두려움을 제대로 몰랐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경고에서 이상함을 찾았거나.

그는 불경하게도 역천의 옷자락에 손을 뻗친 것이다.

잔일 페제는 박사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박사의 손은 그냥 쑤욱 들어갔다.

"······환영이잖아."

"······아!"

갑자기 나타난 역천의 정체는 사실 환영이었다.

잔일은 조금 민망해졌다.

역천의 등장에 너무 지레 겁먹어 버린 걸까.

"드, 들어가지."

당황을 숨기면서, 앞으로 걸었다.

환영을 스윽 통과했다.

그냥 지나쳐 가려고 하니.

-이곳에는 재화도, 보물도 없다.

펠레리안의 환영은 허공에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저 수치와, 후회와, 망집만이 남아 있을 뿐 ······. 그러니 돌아가도록 해라.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잔일 페제와 로밴튼 박사는 계속, 계속 들어갔다.

119. 사상 최악의 흰 뱀 등장

잔일 페제와 로밴튼 박사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그 자리에 뱀 한 마리와 덩굴풀 하나, 그리고 혼백 조각 하나가 나타났다.

흰 뱀은 나타나자마자 구역질을 했다.

* * *

"쿠웨에에엑!"

진짜 토 나올 것 같은 냄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이실이는 레몬을 깨문 사람이 얼굴 구기듯 몸을 구겼다.

식물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이실이의 리액션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판단 냄새다!'

이건 판단의 냄새였다.

와이번들이 던전에 쳐들어왔을 때, 판단은 끔찍한 냄새가 나는 앰플을 뒤집어썼다.

그 냄새가 분명했다.

홍어 청국장을 생선 내장에 넣은 뒤 일주일간 실온숙성하면 이런 냄새가 날까.

"쿠웨엑-!"

-거 정신 사납게 오바 좀 하지 말어라!

펠레리안이 버럭 소리를 쳤다.

놀랍게도 펠레리안에게는 이 냄새가 그저 조금 비린 정도라는 듯했다.

마물에게만 통하는 악취라니.

독하기 그지없는 냄새지만, 실제로 독은 아닌 것 같다. 그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여기를 지나친 것이 분명해.

저 바닥에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징그럽기 그지없는 광경이긴 해도, 산전수전 다 겪은 내게는 문제없다.

-고대의 흡혈 빈대를 동결시켰던 거야. 으음....

펠레리안은 눈을 찌푸렸다.

-뭐지, 마법적 환영을 보이는 장치가 있다.

'기억 안 나요?'

-저걸 설치한 기억은 없다.

펠레리안의 기억에는 구멍 난 부분이 여럿 있었고. 이것도 그중 하나 같았다.

'드워프들이 죽어 있어요.'

곳곳에 드워프 사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미라처럼 바싹 말라 있었는데, 배가 적포도알처럼 부푼 빈대들을 보니 사인을 알 수 있었다.

-더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하는데... 믿지 못할 단신족들 같으니라고.

펠레리안은 제 동족보다 드워프, 노움과 더 친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드워프라는 자들이 벌써 두 번이나 펠레리안의 던전을 팔아 치우려고 한 것이다.

-저쪽으로 가 봐라.

펠레리안이 그리 말했다.

드워프들을 몰살시킨 빈대가 보이지 않는 듯한 말투다.

'으, 냄새야....'

하지만 나 또한 빈대들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침없이 그 한가운데로 입장했다.

우선 우두머리로서 수백 마물을 이끌던 경험으로 얻은 위엄.

그것을 아낌없이 뿜어냈다.

빈대 중 예민한 것들은 천천히 몸을 피했다.

"사아악!"

물론 호통을 쳤음에도 겁 없이 덤벼드는 녀석들도 있었다.

놈들은 내 피를 빨기 위해서 몸에 붙었다.

'간지럽지도 않네.'

하지만 그중에서 내 수정 비늘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콰지지직-

오히려 내게 깔려서 바삭바삭하게 부서지는 녀석들이 많았다.

들어오는 마성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미약했으니, 나는 펠레리안의 지시에 따라 금방 문 옆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위에 구멍 보이지?

'네.'

-저기로 들어가라.

'열린 문 말고요?'

-저기가 환풍구니까 오히려 나을 것이다. 먼저 들어간 놈들을 따라잡아야지.

그렇다면야.

단검을 틀어박고 비틀어서 환풍구를 막고 있던 철망을 뜯어냈다.

그리고 훌쩍 도약한다.

약간 아슬아슬하게 매달리니까, 이실이가 덩굴을 뻗쳐서 환풍구에 들어가는 걸 도왔다.

-앞으로 쭉 기어가면 된다.

던전을 만들 때, 침입자들이 환풍구로 들어가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미션 X파서블 같은 영화에서 보던 것과 달리, 환풍구는 좁디좁았다.

뱀인 나 정도나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

펠레리안이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가며 길을 찾았다.

-이쪽이다.

대략적인 던전의 구조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기억이 제대로 안 나는 거 아니에요?'

-그래, 던전의 내부 중 기억이 나지 않는 공간들이 있어.

'그래서요?'

-기억이 안 나는 곳으로 가고 있다. 그쪽에 내 본체가 기억을 소각한 이유가 숨겨져 있을 테니까.

똑똑하기도 하지.

다만, 나는 조금 놀랐다.

펠레리안의 꾀가 기발하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그가 사용한 '본체'라는 어휘 때문이었다.

그가 자기 자신을 그리 부른 것은 처음 같은데, 어쩐지 단어가 가진 울림이 묘하다.

'나'와는 달리 '본체'는 별개의 존재 같지 않은가.

나는 펠레리안의 지시를 따라 환풍구를 꼬불꼬불 기어갔다.

다행히, 환풍구 안에 함정이 준비되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가는 길이 복잡하고 좁아서 좀 심심해졌다.

그래서 펠레리안에게 물어봤다.

'이 던전에 뭐가 숨겨져 있을까요?'

펠레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한 번 더 정리하려는 것 같았다.

-죽은 뒤의 안배에 대한 것이겠지.

펠레리안의 이명은 '역천'이다.

하늘을 거스른다는 말인데, 사실 거슬렀던 것은 세상 전체였다.

그는 종족의 뜻을 거슬렀고, 국가와 문명의 법칙과 도덕을 거슬렀다.

그리하여 악당으로 불렸으나. 펠레리안은 나름대로 억울한 면이 있던 것 같다.

-그놈들이 나를 어찌 부르든 상관없다. 개새끼든 소새끼든, 제국의 적이든 뭐든 나는 관심 없는 일이야. 내게는 숭고한 목적이 있었으니....

어찌 되었든 펠레리안은 정복광이나 쾌락 살인마 같은 유형의 악당이 아니었다.

분류하자면 매드사이언티스트로 보는 게 적합하리라.

그것도 자신이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 모든 세상을 불태울 수 있을 정도로 돌아 버린.

-요정을 다시 위대하게. 그 쇠락해 버린 종족을 하이-엘프로 진화시키는 것이 내 목적이었다.

펠레리안이 그런 목적을 이야기할 때는 그 목소리 톤이 연극 투처럼 극적으로 변한다.

그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이 꽤 길어서일까.

어째선지, 그 어투에서 묘한 인조미가 느껴졌다.

마치 녹음된 말을 다시 트는 것처럼.

그 말을 반복함으로써 지친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이 말이다.

-내가 죽더라도 그 목적이 이뤄지기를 바랐어. 그렇다면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무언가를 남겨 놨겠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펠레리안이 하던 것은 사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연구'였다.

사람 종족은 진화를 하지 않는다. 인간, 요정, 드워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자연법칙을 극복하여 요정을 진화시키려는 게 펠레리안의 연구였으니.

전 대륙에 흩어진 던전들 또한 엄밀히 말해 연구를 위한 거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구실 아닐까요?'

-연구실....

'모든 요정을 하이-엘프로 진화시키기 위한 연구, 다 못 마쳤다고 했죠?'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실마리는 잡았지만 그뿐이었지. 끝내 연구를 완성하지는 못했어. 내가 죽었는데 연구를 어떻게 하느냐.

머릿속에 재치 있는 발상이 번뜩였다.

'골렘을 만들어 둔 거지요.'

-골렘?

'네, 싸우는 골렘이 아니라 연구원 골렘. 영감님이 죽어도 엘프를 진화시킬 연구를 계속 수행하도록 말이에요. 끊임없이 실험하고 탐구하는 골렘들이 저 아래에서 연구 활동을 지속해 왔을지도 모르죠.'

-허어, 그것은 또... 참으로....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 봤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듯한 것 같다.

펠레리안도 우뚝 멈춰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멍청한 생각이구나!

'....'

-연구가 쉬운 줄 아나? 나 같은 천재가 평생을 매달렸음에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야. 연구원 골렘 같은 소리 하네.

정떨어지는 노인네.

참 정을 주고 싶어도 이렇게 얄밉게 말을 한다.

'그럼 뭔데요. 솔직히 관심 없는데.'

-발상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합리성의 화신 같은 놈이다. 이 세상에 100을 내놓지 못한다면, 완성한 10이라도 내놓으려고 했을 것이다.

펠레리안의 추정은 그러했다.

-내가 해 놓은 연구가 없지는 않지. 죽은 뒤 그 성과를 요정 장로 회의와 세계수에 전송했을 것이다.

'요정들하고 사이 안 좋잖아요. 바로 폐기하지 않을까요?'

-읽어 보기는 했겠지. 그랬다면 내 과실과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그 성과를 활용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요정족 전체가 멸망할 운명이니까.

펠레리안은 그리 믿나 보다.

'근데 그건 너무 아직 안 죽어 본 사람스러운 생각이고요.'

그 말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냐.

'죽어서도 이루고 싶은 걸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죽을 때쯤 후회할 것을 고려해 봐야 하는 것 아니에요?'

-....

요정 전체의 진화고 어쩌고.

그래, 그것도 중요하다.

펠레리안은 자신의 긴 인생 전부를 거기에 바치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그를 막는 것들은 모두 응징하였으니, 최악의 악당이라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죽어 본 나는 알고 있었다.

죽을 때가 되어서 후회하는 것들이 있다.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것들.

그렇게 모질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싶었던 것들.

아니면, 도저히 전하지 못했던 말들.

그렇게 살지 말걸.

다르게 살걸.

그런 후회가 밀려오지 않겠는가.

'너무 후회되어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하는 것들 없어요?'

내 생각이 펠레리안에게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있기는 하지.

'뭔데요?'

-...그날.

펠레리안은 조용히 말을 하다가 나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에이!

스윽-

주먹은 당연히 내 얼굴을 통과했다.

-꼬치꼬치 물어보기는!

나는 펠레리안에게 맹세를 받은 적이 있다.

내가 계속 답을 요구한다면 펠레리안은 응답해야 한다.

그래도 그건 너무 못된 일이겠지.

'뭐 누구를 좋아했는데 고백을 못 해서 죽기 전에 영상편지를 남겼다든지 그런 거일지도.'

-만약 그런 거였다면 내 손으로 직접 이곳을 불태우고 싶구나.

그럴듯한 생각이 났다.

'혹시 리치가 되려던 거 아니었을까요?'

-뭐?

'그 있잖아요. 죽기 싫은 마법사가 해골바가지가 된 다음에 영원한 수명을 손에 넣는 그거.'

-언데드 소서러, 내가 그것이 되려고 했다고?

'못다 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펠레리안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이노옴!

'어우.'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요정인 내가 그딴 짓을 할 리가 있겠어!

펠레리안은 크게 모욕을 당했다는 듯 굴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자신의 종족이 요정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다.

아마 모든 요정 중에 가장 자부심이 강하지 않을까.

-순수혈통의 요정인 내가 언데드가 되었으리라고!

거의 망집에 가까울 정도로 제 종족에 집착하는 마도사.

'예예, 실수실수.'

-칵.

그 후로도 계속 궁시렁대는 것을 흘려넘겼다.

뭐가 숨겨져 있을지는 직접 보면 알 일이다.

* * *

잔일 페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레인저다.

보랏빛 인장이 붙은 의뢰서를 열 번 넘게 받았다. 그중에서 실패한 것이 없었다.

보랏빛 인장이라 함은 황실의 인장이다.

잔일이 황실의 의뢰를 수행해 왔다는 뜻이니, 그가 얼마나 잔뼈 굵은 인물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하여튼, 던전 돌파에도 소양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와 함께한 로밴튼 박사는 또 어떤가.

박사는 이곳 산맥 마경과 그 문명에 대해서 전문가였다.

오보에 문명을 비롯한 고대사에도 정통했고, 각종 기호와 신화에 대해서도 지식이 해박했다.

그러한 지식들은 던전을 돌파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둘에게 운이 따랐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겨우 둘이서 이곳까지 무사히 들어왔다.

"후우...."

잔일의 입에서 김이 나왔다.

공기가 마치 겨울처럼 차가웠다.

마법에 의해 유지되는 공간이었다.

"...실험실이오."

로밴튼이 중얼거렸다.

"뭐요?"

"실험실. 역천의 실험실이야."

잔일도 마도사의 연구실, 공방 등에 들어가 볼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실험실이라니?

그러나 이곳은 그 표현이 걸맞았다.

"끔찍하군, 끔찍하기 그지없어."

산더미 같은 보물과 마도구를 기대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도, 펠레리안의 던전은 들어올 가치가 있었다.

제국의 적이 꽁꽁 숨겨 둔 던전이라니.

황실이 기뻐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던전 안에 있던 내용물은 솔직히 역겹기 그지없었다.

생리적인 거부감이었다.

턱.

로밴튼 박사는 겁도 없이 수정판을 매만졌다.

"거 조심하시오. 깨어나면 어떡해."

"역천이 키메라에 탐닉했다더니 사실이었군."

수정판 너머에는 '배양액'이라고 할 만한 것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희미한 조명 속에서 살덩이 하나가 보인다.

눈알이 셋 있고, 팔인지 촉수인지 헷갈릴 것들이 마구잡이로 붙어 있다.

키메라라는 말도 못 쓸, 말 그대로 살덩이다.

잔일과 로밴튼은 천천히 걸었다.

"점점 발전하고 있어."

로밴튼이 중얼거렸다.

한 명의 학자로서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실험체를 순서대로 보관해 둔 것이다.

초기의 키메라, 그리고 후기의 키메라까지.

다섯 번째 수조에 들어 있는 것은 약간의 균형미가 있었다.

물론, 머리와 등허리까지 털이 붙어 있었고, 앞발에 역관절이 붙은 이상한 생김새였지만.

똑똑.

로밴튼이 수조를 두드리자 잔일이 기겁했다.

"뭐 해요!"

"걱정 마시오. 설마 깨어나기라도 하겠나."

"죽은 것들이기는 하지?"

"글쎄...."

로밴튼은 불길함을 느꼈다.

점점 완성도가 높아져 가고 있는 키메라들.

이상한 것은 이족보행(二足步行)이 가능한 형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족보행 키메라를 만들었다고? 굳이?

키메라를 만들려면 다리가 넷 이상 달린 것이 낫다. 그건 정말이지 당연한 상식이었다.

"잠깐."

로밴튼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벽면에 휘갈긴 낙서였다.

저런 것이 생길 때가 종종 있다. 수첩 같은 것을 두고 왔을 때, 급하게 떠오른 생각을 대충 메모한 것이다.

"읽을 수 있겠소?"

"후우, 먼지 좀 털어 내고."

학자인 로밴튼은 요정어를 알았다.

그래서 펠레리안이 적었을 그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박사의 눈동자가 파르르.

숨을 헉, 들이킨다.

순식간에 희게 질려 버린 로밴튼의 안색을 보고 잔일이 당황했다.

"왜 그러는...."

터엉!

그 순간이었다.

천장에서 금속판이 요란하게 떨어졌다.

잔일은 본능적으로 대거를 뽑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환풍구로 추정되는 곳의 뚜껑이 열려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흰 뱀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다.

"이게, ...뭔."

어쩐지 멍청하게 생긴 뱀이다.

환기구의 먼지가 잔뜩 묻어서 더 바보 같아 보였고.

"으아아악!"

그런데 그 뱀을 본 로밴튼이 비명을 질러댔다.

전혀 무섭게 생기지 않았는데 왜 저럴까.

석궁까지 뽑아 든 박사는, 비로소 나타난 것이 그저 뱀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씩씩댔다.

"제기랄! 츄고타 그 개 같은 것의 새끼랑 꼭 닮아 가지고."

그러고는 뱀에게 거침없이 석궁을 발사했다.

나무랄 일은 아니었으나.

피잉-

볼트가 뱀을 꿰뚫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뱀은 날아온 볼트를 입으로 물어 챘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믿을 수 없는 장면에 잔일도 순간 상황판단을 재빨리 하지 못했다.

뱀이 눈을 찡그린 순간.

어디선가 검은 단검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그 단검은 석궁을 쥔 로밴튼 박사의 손을 베고 지나갔다.

서걱!

후두둑, 핏방울과 잘린 손가락들이 허공을 날았다.

"흐아아아아악!"

박사의 비명은 조금 뒤에 따라왔다.

120. 카운트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