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Le Petit
종이는 저질.
하지만 적혀 있는 글씨에는 제법 고아한 필치가 있었다.
「이 편지는 솔리온 임펠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편지를 읽던 펠레리안은 그 문구를 보자마자 종이를 불태웠다.
못된 편지 유행이 번지고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설마 그 편지가 펠레리안에게까지 도달할 줄은 몰랐다.
"제기랄, 할 짓도 없는 새끼들."
짜증이 난 펠레리안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에게 '안식처'라고 부를 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대륙 곳곳에 그를 위한 수백 개의 던전을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다.
던전들은 모두 대의를 달성할 수 있는 연구소거나 중요시설이었다.
그곳들이 펠레리안의 '전초기지'는 될 수 있지만 '안식처'가 될 수는 없었다.
마경 '산맥' 내에 건설한 묘비 던전.
그 지하에 비밀스럽게 지어 둔 이곳은, 그러니까 아주 귀한 장소였다.
펠레리안이 진정 자신의 마지막을 위해 지은 곳이니까.
그는 종종 이곳을 찾았고, 안식처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밀려 있던 편지를 읽는 것이었다.
역천의 마도사에게 편지를 나눌 친구가 있냐 묻는다면, 당연히 없다.
그러나 사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많기도 했다.
"누구 이름으로 온 거야 이건.... 젠킨스?"
편지 뒷면에는 젠킨스 씨에게, 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솔리온 임펠에서 쓰던 이름이다.
솔리온 임펠 어딘가에는 젠킨스라는 마법사가 머무는 작은 집 한 채가 있을 것이다.
그곳의 우편함으로 들어온 편지는 결국 펠레리안에게 전달되게 된다.
그 외에도 대륙 주요 도시 곳곳에 펠레리안의 가짜 신분들이 있었다.
저 사막에서 쓰는 '지니', 동방의 '헤게모니', 그 외에도 '아서', '리들', '펜드래건'까지....
솔직히 말해서 요정 마도사 펠레리안은 인기가 없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을 숨기고 활동했던 몇몇 이름으로는 친구를 만든 적도 있었다.
아주 가끔 그들로부터 편지가 오곤 했었다.
그걸 모으면 제법 쌓이곤 했는데.
오늘은 별로 없었다.
하기사, 신분이 한두 개도 아니니 벌써 수십 수백 년이 지난 인연들이다.
몇 안 되는 친구 중 단명족들은 전부 죽었으리라.
"너무 오래 살았나."
그리 중얼거린 펠레리안은 스스로 내뱉은 말에 흠칫 놀랐다.
너무 오래 살다니.
요정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늙은 요정들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는데....
어쩌면, 펠레리안은 너무 오래 세상에 나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 이상 요정답지 않게 된 걸지도.
"...요정, 그래, 요정이 무슨 소용이냐."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
화륵.
그러자 곳곳에 널브러져 있던 편지들이 일제히 불타 사라졌다.
신기에 다다른 원소마법이었다.
죽기 전에, 쌓인 편지를 읽는 것은 꽤나 낭만적인 최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의 왼팔은 손끝부터 손목까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마도사로서 '혼돈'에 접촉하려다 실패한 대가였다.
역천은 무슨 역천.
결국 마지막 발악도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 탓에 왼팔에서부터 혼돈의 독이 번져 죽을 신세였지만....
어차피 조금 일찍 가는 것일 뿐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이 끔찍한 공허감이 문제였다.
"정령."
-네, 펠레리안 님.
탁상 위에 올려둔 수신기로부터 마도정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곧 죽으면, 전부 불태우고 부숴라. 하나도 남김없이."
-실험을 멈출까요?
"그래. 다 멈춰."
몸을 갈아탈 생각을.
정말 했었다.
그러나 그 요정을 흉내 낸 키메라가 완성된 것을 보고 펠레리안은 큰 충격을 느꼈다.
그것은 요정도 아니고 마물도 아니었다. 그저 기괴한 키메라일 뿐.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왜일까.
아마 그가 믿었던 세상이 무너졌다는 충격 때문이겠지.
'요정을 다시 위대하게....'
정체되어 죽어 가는 요정들.
마치 고인 연못이 천천히 말라붙듯 멸종해 가는 종족을 구하고 싶었다.
하이-엘프로 진화할 방법을 찾아서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여태까지 그를 움직였던 동기가 사라진 순간.
펠레리안은 쓰러져 버렸다.
그의 앞에는 일지가 적혀 있었다.
「황실 지하 정원에 종말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대륙 전체에 시꺼먼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문명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았다. 그것을 막지 못한다면 머지않은 시기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지성체가 죽을 것이다. 요정 역시 마찬가지이고....」
그가 직접 제국의 황궁에 침입해 보지 않았다면.
그 지하에서 자라고 있던 종말의 마물을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대륙의 모든 문명이 멸망할 거라고? 음모론자들의 헛소리 아닌가 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그 모든 머리 아픈 일도 이제 끝이다.
펠레리안은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체온이 급속도로 식어 가고 있었다.
챙그랑.
오른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놓쳤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 않던 독주가 바닥에 쏟아졌다.
좋아하던 비극의 끝부분이 생각난다.
'술잔을 들라. 너를 기다리는 죽음이 칼을 갈며 문 앞에 서 있으니.'
어디서 본 연극이지.
천천히 빛이 꺼진다.
어둠이 밀려온다.
저 동쪽 승려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펠레리안은 지금 차안에서 피안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 영원한 안개의 바다에 빠져 버리려던 순간.
띠- 띠- 띠-
책상 위에 올려둔 수신기가 소리를 내며 점멸했다.
수신기에 연락을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소수뿐이다.
펠레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의 연락은 펠레리안의 숙적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카스피안.
그 인간 대마도사가 펠레리안에게 전언을 보낸 것이다.
수신기에 떠오른 암호가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볼 수 없는 속도로 점멸했다.
그것을 본 펠레리안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흐흐, 찾아오겠다고."
카스피안의 전언을 들은 펠레리안의 반응은.
"내 영지에 침입해, 내 목숨을 구하겠다고? 감히 저가...!"
비웃음이며 분노였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죽음에 체념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반응.
그것이 펠레리안의 마음을 바꿨으리라.
이곳에 앉아서 적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혹여 그전에 펠레리안이 죽더라도, 혼자 비참하게 죽은 모습을 숙적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펠레리안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휘청, 하며 눈앞이 아찔했다.
왼손부터 번져 오는 혼돈의 독.
펠레리안은 왼쪽 팔뚝에 오른손을 얹었다.
팔뚝이 새하얗게 얼어붙더니,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뚝 끊어졌다.
잠깐의 시간벌기를 위해 왼팔을 희생한 것이다.
잘린 왼팔이 의자 위에 툭 떨어졌다.
왼손은 여전히 수신기를 쥐고 있었다.
정교한 마법의 콤비네이션 덕에 피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펠레리안은 창백한 얼굴로 탁상 위를 노려봤다.
카스피안이라면 분명 이 은신처를 찾아내고 들어올 것이다.
그 끔찍한 어린 것은 늘 펠레리안의 상상력을 넘어섰으니까.
그렇다면 이곳에서 잘린 팔과 수신기를 발견하겠지.
안 그래도 카스피안에게 전달할 만한 물건이 있었다.
펠레리안은 품속에서 황금으로 조각된 열쇠를 꺼내 탁상 위에 올렸다.
주저 없이 떠나려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펜을 꺼내, 일지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언젠가 카스피안이 돌아오면 그 글을 읽겠지 생각하며.
글을 적은 뒤 펠레리안은 주저 없이 던전을 떠났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본인도 몰랐다.
죽어 가는 목숨을 얼마나 연장할 수 있을지도 막막하다.
그러나, 목숨을 건지면 다시 돌아오리라.
결심은 그리 단단했겠으나.
펠레리안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 * *
일지에 요정어로 적혀 있기를.
「카스피안, 너는 내 호의도, 빚도, 시체도 가져가지 못하리라!」
일필휘지의 필체다.
한 문장에 어떻게 이리 꼬장꼬장한 성격을 다 담을 수 있을지.
카스피안이라는 인간 마도사는 펠레리안의 라이벌(사실 펠레리안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펠레리안과 서로 동료라고 부를 관계는 결코 아니었다.
적대적인 관계였을 텐데, 어째선지 그가 죽어 가는 펠레리안을 구하러 찾아오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왜였을까?
-그럴 사이가 아니다. 결코!
펠레리안의 불완전한 기억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
'그건 영감님 생각이고 사실 그 카스피안이라는 분은 착한 사람이었던 거 아니에요? 적이지만 구해주는 인격자라든가.'
-푸핫!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새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이며 결함 덩어리야.
길길이 화냈으면 몰라도, 저리 비웃는 것을 보면 사실 같다.
어쨌든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을 보면.
'카스피안이라는 사람은 여기 안 왔나 보네요. 아니며 못 왔든가.'
-그렇구나....
펠레리안의 일지이며, 황금 열쇠. 여러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침입의 흔적 따위도 없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이러면 펠레리안은 아직 살아 있다고 봐야 하는 걸까.
일지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적혀 있는데 또 모르겠다.
'그나저나, 충격적인 내용이 많네요.'
-그러게 말이다.
세상의 비밀들이 기록되어 있는 일지였다.
가장 놀라운 건 역시.
'대륙이 곧 멸망한다니....'
-내가 요정의 진화를 포기하다니....
나와 펠레리안이 놀란 포인트는 조금 달랐다만.
펠레리안이 자신의 숙원을 포기한 이유도 대륙이 멸망할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니, 궤는 같았다.
'황궁이면 제국 거기죠? 거기 지하 정원에 뭐가 있다는 거예요?'
일지에는 '종말'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종말이라는 것은 어떤 마물의 이명 같은 걸까?
-종말은 대륙을 멸망시킬 수 있는 마물을 말한다.
'그 재앙이라는 것과 비슷한 거예요?'
-재앙이라고 불리는 마물 또한 있기는 하지.
네임드 마물 중에서 특히 대단한 것들을 몇 대 재앙이고 어디의 재앙이고 하며 부르기는 한다.
몇몇 마물은 실제로 혼자서 작은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
믿을 수 있어야 말이지. 그런 괴물들이 그리 많으면 이미 진작 대륙이 멸망하지 않았을까?
파워인플레가 심하다. 드래곤X에서 나중에는 크리링마저 전투력 기준으로 지구를 파괴할 수 있다는 설정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종말은 달라. 종말의 마물이 언젠가 대륙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런 예언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내려왔다. 모든 종단이 그런 신탁을 받은 적이 있지.
'마물 하나가 아무리 세 봤자 어떻게 대륙을 멸망시켜요.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왔다 갔다 하는 데만 한세월 걸릴 텐데.'
비꼬는 게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종말의 마물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종말의 마물은 성장의 한계가 없다고 한다. 다른 것을 끊임없이 먹어 치우면서 또 그만큼 강해지지. 결국에는 다른 마물들도 종말에게 복속되어 그의 수족이 된다고 하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불가능하지 않겠지.
성장의 한계가 없다니.
완전 나 아닌가.
'그런 괴물을 황실 지하 정원에서 키우고 있는 거예요? 왜 그랬대?
-나야 모르지. 애초에 믿을 수도 없지만....
펠레리안 본인조차 믿기 어려운 황당한 일이었다.
그래도 펠레리안 본체, 줄여 말해서 펠본체는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세상이 언제 멸망한다는 걸까.
펠레리안이 평생을 매달린 숙원, '요정의 진화'.
그것을 포기할 정도였다면 아마 남겨진 시간이 길지 않았으리라.
나는 열심히 일지를 뒤졌다.
그리고 남은 시간이 적혀 있는 부분을 찾아냈다!
「아마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략 20년.」
20년.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다.
요정의 기준이니까 20년 정도는 어쩔 수 없겠지.
다행히 꽤 남았네.
'잠깐.'
문득 알아챘다.
'20년이면 이미 지난 거 아니에요?'
-어...그렇네.
놀라서 일지를 보니 다음 페이지에 문장이 이어졌다.
「...아니면 늦어도 120년 이내일 것이다. 오오, 피할 수 없는 죽음이여. 이미 마셔 버린 독주여.」
하아. 요정들이란.
이미 멸망의 도중이 되어 버린 걸까?
모르겠다.
언젠가 황궁에 가게 될 기회가 있다면.
지하 정원에서 그 종말이라는 친구를 한번 만나 보고 싶다.
사실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도 없는 착한 친구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아마 영원히 만날 일은 없겠지만.
-저 열쇠를 챙겨라.
황금으로 조각된 열쇠.
자세히 보니, 그것은 열쇠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물건이었다.
흐물텅흐물텅 구부러져서, 독특한 공예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왕립은행의 열쇠이다. 결코 위조할 수 없는 특급금고의 것이구나.
'이걸 그 인간마법사에게 넘기려고 했던 거죠. 뭐가 들었는데요?'
-기억이 안 난다. 열어 보면 알겠지.
펠레리안은 당당하게도 말했다.
내가 은행에 들어가서 열쇠를 내밀고 금고를 열어 달라고 하면 은행원들은 뭐라고 말할까.
'아악! 뱀이야!' 이러거나, '번호표부터 뽑아 주세요' 하겠지.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내게는 세상의 멸망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게 있었다.
'일단 진화부터 하고 생각해 보죠.'
-그래 뭐, 그러거라.
오랜만에.
진화의 시간이다.
* * *
※진화의 주의사항.
-안전한 곳에서 진화할 것.
-감사한 마음으로 진화할 것.
-뭐로 진화할지 잘 선택할 것.
세 가지만 주의하면 진화에는 문제가 없다.
이곳 펠레리안의 지하 던전은 안전하기로는 문제가 없었다.
아주 튼튼하게 지었고, 그 위에 무너진 석탑이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를 잡고 신나는 진화를 하기 위해 잠을 청했다.
잠에 들면 진화의 선택지가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괜찮은 게 있으면 골라서 바로 진화해야지.
펠레리안에게 그리 말하고 잠에 들었건만.
"...사삭!"
나는 당황한 채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왜, 뭔데.
'어, 평소랑 진화 방식이 다른데요?'
선택지들이 뜨는 것은 같다.
하지만 그 진화가, 그저 한숨 푹 자고 나면 끝나는 게 아니었다.
'30일 정도 걸린대요.'
-호오, 변태구나.
'아닌데요?'
-아니, 벌레나 짐승이 모습을 바꾸는 그 변태 말이다.
'아하!'
한마디로 애벌레가 나비가 되고 장구벌레가 모기가 되는 그런 것이다.
번데기가 되듯, 무려 한 달에 걸쳐서 진화하는 건가.
-상황이 오히려 잘되었군.
'그러게 말이에요.'
위험한 바깥에서 30일씩이나 걸쳐서 진화하기는 쉽지 않다.
지하에 갇힌 게 오히려 좋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나는 생각 정리 좀 하고 있을 테니, 진화나 해라.
'그럴까요?'
펠레리안은 그리고 반지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화분에 담겨 있는 이실이가 까딱거렸다.
'음... 너도 반지 안에 들어가 있을래?'
30일이나 걸리면 이실이도 배고프겠군.
안전한 아공간 안에서 지내렴.
이실이와 잡다한 물건들도 아공간에 집어넣은 뒤, 나는 다시 진화를 시도했다.
곧, 수마가 밀려왔다.
* * *
*「진화의 특수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진화할 수 있습니다.」
──────────────
[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lv50+++에서]
1. [리틀 파이톤 헤드 와이번]
──────────────
오 신이시여.
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와 버렸다.
직역하자면 작은 뱀대가리 와이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와이번 퀸 두 마리에게 자식으로 착각당했기 때문일까.
──────────────
2. [크리스탈 더블 크라운 파이톤]
3. [빅 헤드 서펜트]
──────────────
어!
서펜트다!
드디어 서펜트로 진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근데 빅 헤드면 대두가 되어 버리는 건가?
대두는 싫은데....
혹시 빅 헤드 서펜트가 되면 왕관을 잃어버리나.
그러면 문제가 크다.
──────────────
4. [리틀 프린스 서펜트]
──────────────
간만에 만나는 '리틀' 수식어다.
저러면 다시 작아지는 건가.
그런데 그 수식어가 어쩐지 익숙하다.
리틀 프린스, 흐음....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131. 와이번 장례식
무엇으로 진화할지 고르는 과정은 꽤 합리적이었다.
우선, 와이번이 되기는 싫다.
날개가 생기는 건 나쁘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종족을 바꾸는 것은, 내 무한한 가능성을 줄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리틀 화이트 스네이크'에서 시작된 장대한 여정이 여기서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
더 이상 뱀이 아니게 되어 버리면.
이제는 아빠도 아빠가 아니게 되어 버리고, 와이번 맘도 진짜 엄마가 되어 버리는 것 아닐까.
하여튼 나는 아직 뱀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
'크리스탈 더블 크라운 파이톤.'
'크크파'에서 '크더크파'로 진화라.
정석적인 진화트리처럼도 보였으나 굳이 왕관이 두 개나 필요할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오히려 왕도적인 진화가 아니라 변종으로 진화하는 축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진화 트리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걱정되는 게 있었다.
자고로 신화 같은 곳에서는 꼭 머리 여럿 달린 뱀이 나오는 법이다.
히드라나 티폰, 오로치, 구두룡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진화하고 싶지는 않다.
머리가 여러 개라니 무섭잖아.
그런 면에서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우선 3번 빅 헤드 서펜트.
4번 리틀 프린스 서펜트
나는 얼른 서펜트로 진화하고 싶었으니.
이번에 드디어 서펜트 단계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빅 헤드 서펜트는 머리가 큰 서펜트라는 건데, 왜 이런 진화 선택지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내 행적과 대두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길래?
대표적인 대두 종족이라고 할 수 있는 드워프들하고 너무 어울려서 그런가.
나와 함께 다니는 펠레리안의 영체도 머리와 몸통의 크기가 비슷한 형태기는 하다.
리틀 프린스 서펜트는 '리틀'이라는 수식어가 걸린다.
내 머릿속 서펜트는 일단 덩치가 든든한 모양새인데. 리틀이라니.
서펜트 기준으로 작다는 걸까 아니면 진짜 객관적으로 작아지는 걸까.
지금 나는 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으로 진화하면서 예전보다 조금 더 작아졌다.
여기서 약간 더 작아지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차피 거대화로 몸을 키울 수 있으니까.
'...으음.'
사실, 고민이 아주 길지는 않았다.
프린스=왕자 아닌가.
왕자님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지만, 똑똑한 뱀이라면 눈치챌 수 있으리라.
왕자와 '왕관'. 서로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즉, 내 특성인 [왕관] 트리의 정석 루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결정을 내렸다.
*「'리틀 프린스 서펜트'로 진화합니다.'」
시작된다!
원래였다면 여기서 몸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으리라.
비늘이 더 강인해지고.
머리 위에 달린 왕관이 자라는 둥 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선택지 아래에 처음 보는 문구가 써 있길.
──────────────
※현 상태에서 '서펜트'로의 진화는 대략 30일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
애초에 서펜트 말고는 선택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이렇게 될 것은 각오했다.
*「진화를 준비합니다.」
*「수정 고치를 형성합니다.」
오오, 오!
뭔가 내 몸을 덮는 게 느껴진다.
설마, 30일 동안 눈만 데굴거리면서 버텨야 하는 건 아니겠지.
참 타이밍이 좋다.
핵방공호 부럽지 않은 지하 쉘터에서 안전하게 진화를 할 수 있다니.
분명 잠에 든 상태인데 졸음이 밀려왔다.
몽중몽이라.
나는 천천히 수마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면 멋진 서펜트가 되어 있겠지.
그리 기대하면서 말이다.
* * *
"후우, 후."
판당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는 훌륭한 모험가였으며, 뛰어난 로그였다.
하지만 요정과 헤일릿의 달리기를 따라잡기는 몹시 힘든 일이었다.
아마 그들이 배려하지 않았다면 낙오됐겠지.
낙오되었다면 참 좋았으리라.
위험해 보이는 둘과 엮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둘은 기어코 판당을 끌고 갔다.
불길이 치솟는 곳으로 달린 것이다.
그 위험한 와이번들이 있는 곳에 굳이굳이 말이다.
마침내 헤일릿이 판당의 손목을 놔주었다.
판당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후우, 허억, 헉."
"석탑이 있다고 했잖아!"
헤일릿의 말에 판당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어...?
"왜 없어."
"부, 분명 있었는데요?"
석탑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분명 새카만 석탑이 있었다.
그것까지 확인하고 돌아왔는데, 다시 돌아온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 무, 무너졌나 봅니다!"
주변이 흙먼지로 매캐했다.
그 거대한 석탑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달려오는 길에 천둥 치는 듯한 굉음이 몇 차례 울렸더랬다.
돌 파편이 야무지게도 쌓여 있다.
하지만 멀쩡히 서 있던 석탑이 왜 갑자기 무너진 걸까.
판당으로서는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그 석탑이 설마 악명 높은 역천의 마도사가 남긴 유산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이리스와 헤일릿이 속삭였다.
"어쩌지?"
"어쩌기는."
펠레리안의 던전으로 추정되는 곳이 무너져 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바위를 치우고 뒤져 봐야지."
그 대답에 헤일릿의 얼굴이 흙색으로 물들었다.
"저 바위들을 우리 둘이.... 아니 셋이 치우자고?"
헤일릿이 놀라서 그리 외치자, 판당이 좌우를 둘러봤다.
셋? 왜 셋이라고 하는 걸까.
"그래야지."
"차라리 인부들을 고용해서 천천히 철거하면 ...."
"...."
"그래 그럴 수는 없다는 거지."
"동족들을 불러올까?"
"요정들을 여기까지 불러오는 데만 또 한세월이겠지."
헤일릿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평소 이리스와 투닥거리기는 했어도 도울 맘은 있었다.
그래서 이곳까지 데려와 준 것 아닌가.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지만 무너진 석탑의 잔해를 뒤져서 펠레리안의 행방을 찾는다?
인부들을 고용하더라도 최소 몇 달은 걸리는 대공사가 될 것이다.
비밀스럽게 처리하려면 몇 년은 걸리겠지.
그러면 그동안 내내 여기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녀가 요정처럼 장생족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솔직히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아니잖아.'
헤일릿은 결심했다.
'그래, 미안하지만 돌아가야겠다고 말하자.'
여기서부터는 요정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헤일릿이 그리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몸을 돌린 그녀의 앞에 허연 덩어리가 철퍽 떨어졌다.
"아악 시발! 깜짝이야!"
사람 몸통만 한 흰색 덩어리.
미처 소화되지 않은 흰개미 마물의 껍질이며 다리가 섞여 있었으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떨어진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새똥, 아니, 와이번 똥이...."
저 하늘 위에 거대한 두 와이번이 퍼덕거리면서 날아다녔다.
저들의 존재는 판당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낌새가 이상하다.
둘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빙글빙글 돌며 날아다닐 뿐이다.
"꾸가가가가각!"
검은 와이번 퀸.
그 괴물이 이쪽을 보고 포효했다.
마치 '감히 접근할 생각하지 마라'라는 듯 경계 어린 눈빛이었다.
'저놈이 경고한 거구나.'
사냥꾼인 헤일릿 랑그레이는 본능적으로 사냥법을 고민했다.
분명 네임드 마물.
사냥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싸워 이기지 못할 마물이라고 해도 숙련된 사냥꾼이라면 사냥할 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냥에 적합한 상황이 아니었다.
"저놈들을 해치우지 않는 이상 접근도 못 할 것 같은데."
"으음...."
이리스도 난처했다.
"일단 사냥해 보자. 우리가 셋이니까...."
"예? 미치셨습니까? 전 빠지겠습니다."
요정마저 당연히 자신을 전력 취급하니, 판당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가 와이번 사냥에 강제 차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검은 와이번의 대가리 하나.
그리고 흰 와이번의 대가리 셋.
"꾸아아아아!"
"구워어어어."
"두우우우우우."
"케레레레레레!"
총 네 개의 머리가 갑자기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길고 크게 우는 것은, 단순히 강함을 과시하려는 포효가 아니다.
부르는 것이다.
동족을, 수하들을.
"어어...."
'와이번 퀸'은 그저 덩치가 커서 되는 게 아니었다.
여왕이 울부짖자 그 권위를 존중하는 와이번들이 저 멀리서 몰려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무슨 떼거지로...."
희고 검은 와이번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서로 싸울 때도 다른 와이번들을 부르지는 않던 여왕들이다.
그들이 이렇게 동족을 불러모은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꾸왁!"
"구워엉!"
명령이 떨어지고.
그 수많은 와이번들이 일제히 지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가.
아무리 오래 산 요정이라도.
막강한 영웅이라도 숨죽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 * *
흐물흐물.
흐물흐물흐물.
예전에 어릴 적.
과학만화책에서 '사해'라는 곳을 본 적이 있었다.
죽을 사(死)에 바다 해(海)가 합쳐진 단어인데, 아무 생물도 살지 못하는 곳이라 사해라고 한다.
물이 너무 짜서 그렇단다.
그 탓에 몸을 띄우면 잠기는 대신 둥둥 떠다닌다고 한다.
나는 수영을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언젠가 가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죽어 버렸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그 사해를 떠올리게 했다.
아늑하고, 축축하고, 찝찔하다.
몸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리틀 프린스 서펜트면 얼마나 작아지는 걸까.
엄청나게 거대하다고 생각했던 아빠도 사실 작았었지.
그리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어차피 거대화를 쓸 수 있으니까.
아버지는 분명 '크고 멋진 뱀'이 맞았다.
나도 크고 멋진 뱀이 되고 싶다.
그 종말이라는 마물처럼.
밥을 많이많이 먹고, 많이많이 강해져야지.
대륙 최고의 뱀이 되는 것이다.
아.
내 꿈이 정해진 것 같다.
나는 행성 최고의 뱀이 되고 싶다.
아주아주 강하고, 강만큼 길고 산만큼 거대한 뱀이.
우주 최고의 뱀이 되는 것이다!
쿵-
정신이 해롱해롱 댔다.
오랜 잠에서 깬 것은 잠시 뒤였다.
쿠웅-
'헉!'
앞이 보인다.
그런데 영, 선명하지 않고 뿌옇게 보인다.
어떤 느낌인가 하면 맞지 않는 안경을 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꼬리로 눈을 부벼 보려는 순간.
몸이 안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어, 왜 안 움직이지.'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전신 마비라도 된 거 아닌가 싶어서 와락 겁이 들었는데.
-일어났구나.
펠레리안이 튀어나왔다.
'저 왜 몸이 안 움직일까요. 혹시 진화가 잘 안 된 걸까요.'
-진화 말이냐?
그리고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아직 진화를 시작한 지 7일밖에 되지 않았다.
'예에?'
내 입장에선 눈 한 번 깜빡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한 달 뒤가 아니라 7일 만에 깨어난 걸까.
-너 그 수정 안에서 완전히 수프처럼 녹아 버렸다.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리더니 다시 자라던데. 아직 완전히 굳지도 않았다.
끼야악.
그렇게 끔찍한 과정을 겪었다니.
생각해 보니 번데기도 초기 상태에는 내부가 걸쭉한 프로틴 드링크처럼 변한다고 들었다.
난 벌레가 아니라 뱀인데도 비슷하구나.
정신을 집중해서 스스로를 관조해 보았다.
──────────────
[리틀 프린스 서펜트lv.0(진화 중)]
[특성]
-
[스킬]
-
[상태]
[진화]
──────────────
오오.
이름이 바뀌었다.
다만 아직 진화 중이어서 그런지 자세한 변화사항은 알 수 없었다.
내 모습이 어떤지도 볼 수 없으니 조금 답답하네.
게다가 아직도 7일 차라면 앞으로 3주를 넘게 이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말이구나.
'엄청 지루하겠네요.'
-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왜요?'
펠레리안이 굳이 대답해 줄 필요도 없었다.
쿠웅!
굉음과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꿈속에서도 이런 굉음을 들은 것 같다.
여기는 한참 지하인데.
바깥에서 누가 공사라도 하나.
콰아앙!
그런데 그 소리가 범상치 않게 크다.
문득 깨달았다.
내 전신이 두꺼운 수정에 뒤덮인 것 같은데, 이 정도로 크게 들리면 실제로는 얼마나 큰 굉음일까.
답이 바로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천장에서 돌덩이가 떨어지면서, 와이번 한 마리의 대가리가 쑤욱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 충격 탓에 나는 기우뚱 쓰러지며 엎어졌다.
눈 부신 빛이 들어왔다.
지상의 태양빛이다.
그렇다면 설마, 석탑의 잔해가 전부 철거된 건가?
펄쩍 뛸 정도로 놀랐지만 몸이 굳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나타난 것은 와이번 맘의 머리였다.
그녀는 몹시 지친 모습이다.
흙먼지에 뒤덮여 있고, 주둥이와 머리에 돌에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꾸, 꾸...."
수정에 뒤덮인 나를 보고 말을 잇지 못한다.
반가움, 경악, 공포, 슬픔.
그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가.
"꾸가아아아악!"
비통한 포효로 터져 나왔다.
내가 딱딱하게 굳어 죽은 줄 아는 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쾅- 콰앙!
그리고 또 한 번 천장이 부서지더니.
이번에는 대가리 셋이 나타났다.
놀라서 오줌을 쌀 뻔했다. 츄고타의 대가리 셋이었기 때문이다.
그 괴물 또한 나를 보고 비통한 포효를 터뜨렸다.
"구우오오오!"
"케레레레레!"
"두루루루!"
두 와이번 퀸이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마구 휘젓는다.
한참이 지나고.
감정이 조금 추슬러진 뒤.
와이번맘 셀레타가 나를 조심스레 물었다.
"꾸오오."
츄고타는 그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나 보다.
그리고 마침내 지상에 올라왔을 때.
'으아아악!'
-어어, 어어!
나는 정신적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제는 평원이 되어 버린 델프람 한가운데.
석탑의 검은 잔해로 뒤덮인 땅에 수백 마리의 와이번이 모여 있었다.
땅을 파고 돌을 치웠는지 모두 지쳐 보이고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그 와이번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이번 맘이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기 저기! 쟤가 왜 여기에!
펠레리안이 고개를 돌려 보라고 했지만 나는 굳어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 이리스, 황금이파리 조사관하고, 저번에 네 비늘을 뽑아갔던 빨간 머리 인간이다!
'뭐요!'
눈알만 휘릭 돌아갔다.
정말 언뜻 보인다.
인간들은 저 멀리서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뒤에 있는 텐트를 보아하니 아예 여기서 죽치고 기다린 모양새다.
펠레리안의 던전을 찾아온 건가, 날 알아보지는 못했겠지?
그때, 와이번맘이 하늘로 고개를 들고 평소와 다른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꾸우우우우...."
낮은 음으로 길게 늘어지는 울음소리.
그러자 다른 와이번들 역시 고개를 들고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우우우...."
츄고타도 따라 하고.
저 아래에 있는 삼 남매도 따라 한다.
이윽고 수백 마리의 와이번이 함께 울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
델프람 전역이 울며 진동하는 것 같았다.
삼 남매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이거....
펠레리안도 나도.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깨달았다.
-네 장례식 중이구나.
'헉....'
태어나기를 날개도 다리도 없이, 모자라게 태어난 흰 막내.
델프람의 모든 와이번이 그를 구하고자 합심했으나.
여기, 딱딱하게 굳은 시신으로 발견되다.
자식을 잃은 어미들을 위하여.
일동 묵념.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일지.
그 순간 나는 새로운 능력을 개화했다.
*「수 많은 와이번들과 동시에 교감합니다.」
*「연결의 왕관lv1을 획득했습니다.」
132. 매직서펜트
놀라운 사실.
짐승도 장례식을 한다.
모든 짐승이 동족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지능이 높고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에게 종종 보이는 행동이다.
코끼리가 대표적이고 고릴라 등의 동물도 그러하다.
와이번과 같은 마물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 새끼가 죽거나, 위대한 퀸이 죽거나 하는 경우, 와이번들은 모여서 함께 애도한다.
물론 그 규모는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무수한 와이번이 한곳에 모여 새끼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그러니까, 아주 보기 드문 일이다.
""우우우우우우-!""
낮은음으로 합창하듯 지르는 울음소리가 서로 공명한다.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장송곡이라고 할까.
이런 광경을 마물 이외의 사람들이 참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요정에게도, 마경을 제집처럼 여기는 사냥꾼에게도 일생에 한 번 오기 힘든 기회였다.
헤일릿 랑그레이.
마물에 대한 뒤틀린 애정을 가진 인간 여인은 전율을 느꼈다.
온몸이 진동했다.
말 그대로, 와이번들이 공명하는 초저주파에 의해 떨렸다는 말이다.
특히 두 마리의 퀸이 내는 울음소리가 압도적이었다.
그 아름답고 위험하며, 몹시 거대한 마물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와중.
요정인 이리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잘됐네."
그 건조하다 못해 버석버석한 반응에 헤일릿이 고개를 홱 돌렸다.
감동한 헤일릿과 달리, 이리스는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이었다.
"이제 던전을 조사하기 쉽겠어."
"뭐라고 이 미친아?"
"?"
이렇게 장엄한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서.
겨우 '와이번들이 석탑 잔해들을 치워 줘서 잘됐네'라니.
인간이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아니 인간이 아니라 요정이구나. 그래서 그럴지도 모른다.
장례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7일 내내 부서진 바위 조각을 물어 옮기고 땅을 파헤쳤던 수백 마리의 와이번들.
그들은 죽은 새끼를 위해 울부짖은 후 하나둘 날아올랐다.
그것마저 장관이었다. 땅에는 순식간에 퀸 두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자 그 새끼가 보였다.
아마 와이번들이 울부짖으며 장례식을 거행하지 않았다면, 그게 와이번 새끼라는 것도 못 알아봤을 것이다.
딱딱한 수정 같은 걸로 뒤덮인 새끼의 사체였다.
마법 같은 것에 당한 건지. 아니면 죽어서 말라붙었는지.
퀸 중 하나는 새끼 셋을 데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들의 형제 같았다.
그리고 여태까지 조용히 뒤에 서 있던 로그, 판당.
그는 그 수정에 뒤덮인 마물을 보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저거 뱀 씨 아니야?'
그 뱀과는 분명 다르게 생겼다.
저 뱀의 비늘이 수정처럼 빛나기는 했지만, 지금 저것은 두꺼운 수정층으로 덮여 있어 전혀 다른 느낌이다.
살아 있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풀썩 엎어진 채로 가만히 있었으니까.
반투명한 수정 내부에는 새빨간 피며 징그러운 것들이 눌어붙어 있어서 기괴했다.
'와이번 알에 숨었다가 물려 갔으니까....'
그 과정을 지켜본 판당이기에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었다.
'불쌍한 뱀 씨,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결국 죽어 버렸군.'
저 안에 있는 뱀이 살아 있다는 판단을 하지는 못했다.
그 정도로 생기가 없고, 자세히 볼수록 더 징그러운 몰골이다.
수정결정 안에 굳지 않은 블러디 푸딩이 들어 있는 모습이랄까.
판단은 슬쩍 옆을 돌아봤다.
이들에게 말해야 할까?
저건 아무래도 와이번 새끼가 아니라, 그가 만났던 뱀 마물 같다고.
'내가 왜?'
하지만 그래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판당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원래의 헤일릿이라면 판당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이 팔려 버렸다.
'꼭, 뱀같이 생겼어... 기형종인가? 수정에 뒤덮인, 와이번 새끼 박제라.... 특수 석화 트랩에 당한 걸지도 몰라. 아니, 그게 분명하겠군.'
마물을 사냥해 직접 옷을 지어 입는 그녀에게는 '수집벽'이 있었다.
가끔씩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이 치민다.
지금이 그랬다. 저 기괴한 수정 와이번 새끼를 보니 가슴이 뛰는 것이다.
그때 이후로 처음이다.
거대한 폴라리스 서펜트와, 그 새끼인 작은 뱀을 봤을 때.
헤일릿 랑그레이는 기어코 새끼 뱀에게 비늘을 달라고 부탁했더랬다.
'가지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강대한 와이번 퀸이 둘이다. 아무리 헤일릿 랑그레이가 왕국 최고의 사냥꾼이라고 해도 어려운 상대.
게다가, 결국 검은 와이번 퀸이 단단해진 새끼를 물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머리 셋 달린 흰 와이번도 따라갔다.
'방법이 있겠지.'
그러나 랑그레이는 포기를 모르는 사냥꾼이다.
그녀가 입을 열어 선언했다.
"우리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 앞으로는 알아서 해."
이리스와의 동행도 여기서 끝이다.
갑작스러운 작별선언에도 요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고마웠어."
"그럼 이만."
그때, 판단이 당황해서 끼어들었다.
"어, 그럼 저는...."
"어, 마음대로?"
"...."
판당의 표정은 기쁜 건지 분한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셋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
물론 그 중 판당은.
'에효, 이제 그냥 집으로 가야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 * *
'아니, 근데 왜 내가 살아 있는지 모르지?'
내가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살아 있는 상태로 내 장례식을 지켜보게 되다니, 이게 무슨 전지적... 하여튼 그것도 아니고.
그런데 펠레리안이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지금 네 꼴이 어떤지 말을 안 해 줬나?
'...어떤데요.'
-뱀 모양 수정병에 담긴 토마토 수프 같다.
'?'
-건더기 많고 썩은 토마토 수프.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상태군. 조금 소름이 끼친다.
어쩐지, 내 상태창도 제대로 안 나오고. 눈알을 360도 이상 돌릴 수 있다 싶었다.
'이실이랑 잡동사니들을 반지 안에 넣어 둬서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으면 거기 다 두고 올 뻔했다.
나는 다행히 펠레리안의 일지를 포함한 것들을 전부 챙겨 놨다.
와이번맘 셀레타는 나를 물고 델프람을 떠났다.
근데, 그렇게 먼 곳으로 가지는 않았다.
원래 있던 둥지가 무너졌으니 새 둥지를 꾸려야 할 상황.
낙점된 새 터는 바로 델프람 근처였다.
원래는 던전을 지키는 골렘 때문에 와이번들에게 기피되었던 만큼, 기존의 둥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골렘은 어느 순간 보니 사라져 있었다.
우두머리가 새로운 둥지를 꾸리자 다른 검은 와이번들도 근처로 몰려들었다.
셀레타는 그중 가장 높은 돌기둥 위에 큼지막한 둥지를 새로 만들었다.
와이번 삼 남매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넓었다.
그리고 그 구석에 내가 있었다.
마치 동상이라도 세워 둔 것 같다. 아니면 그 자체로 묘비라든가.
후두둑.
'또야!'
머리가 뜯겨 나간 독수리 한 마리가 내 앞에 떨어졌다.
독수리를 물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삐삐였다.
"꾸악!"
안 그래도 내 앞에는 개구리부터 각종 산짐승이 굴러다녔다.
이미 썩은 탓에 벌레가 꿈틀거리기도 했다.
지금 냄새를 못 맡아서 다행이지.
'삐삐야! 그만 물고 오라고 했지.'
"꾸가각!"
'아오!'
죽은 막내 오빠를 위한 공물 같은 거였다.
-그래도 챙겨 주는 게 어디냐.
'얘 아무리 봐도 나 살아 있는 거 아는 것 같은데요.'
-그러면 먹으라고 준 건가 보지.
수수께끼였다.
적어도 와이번 맘은 내가 죽은 줄 아는 게 분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 전에 새끼들을 끌어안고 찔끔찔끔 우는 것을 확인했다.
'조금만 있으면 스킬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수정 묘비 노릇을 하면서 이곳 둥지에 머물게 된 지 3일째다. 진화 시작부터는 10일 차.
진화 과정을 가늠하자면 3분의 1이 지났다 할 수 있겠다.
펠레리안이 말하길, 겉으로 보기에는 토마토 수프에 덩어리가 더 많아진 느낌이라나.
'연결의 왕관, 이 스킬은 어떤 걸까요.'
리틀 프린스 서펜트로 진화하면서 새로 얻은 스킬이었다.
왕관 시리즈는 각기 '지배', '강탈', '극복' 세 개였다.
여기에 연결의 왕관이 추가된 건데, 아직 제대로 스킬을 쓸 수 없어서 무슨 효과인지 시험할 수가 없다.
-여러 와이번들과 교감하면서 생긴 스킬이라면, 마물의 군단을 이끈다거나 하는 것 아닐까 싶다만은.
'그건 지배의 왕관이랑 조금 겹치는데요.'
그건 또 아닐 것 같다.
나는 사실, 이곳에서 탈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들킨다면 오히려 좋지 않을 것이다.
평생 와이번 둥지에 갇혀 사는 것은 추호도 싫으니까.
'저 애들을 이용하면 빠져나갈 수 있겠죠?'
지배의 왕관을 이용해서 삼 남매의 등에 타 빠져나가기를 기대했다.
-그러려면 이 기회에 수련을 더 열심히 해라.
펠레리안이 그리 말했다.
이렇게 수정에 뒤덮인 상태에서 어떻게 수련을 하란 말인가 하면.
놀랍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빠르고 효율적으로 마법을 수련할 수 있는 상황은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그것도 마법에 한해서는 엄청난 효율로 말이다.
비밀은 다른 게 없었다.
지금 내 마력은 평소의 10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원래는 한곳에 단단하게 뭉쳐 있는 마력이(아마도 그게 단전 아닐까?) 전신에 수프처럼 흩어져 있다.
마법을 쓸 때는 뭉쳐 있는 마력을 실타래 뽑아내듯 구조화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전신에 흩어져 있는 마력을 아주 미세하게 컨트롤하는 게 가능했다.
마력이 전력이고. 마법이 그 전력을 이용해서 빛을 내고 기계를 움직이는 활용법이라면.
원래는 넘치는 마력을 모아 안전하고 튼튼한 가상의 전깃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흩어져 있는 미약한 마력을 자유자재로 주무를 수 있었다.
내 몸을 뒤덮고 있는 수정질이 마력의 매질 역할을 해 줬다.
문과로서 할 수 있는 설명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사실 다 펠레리안이 말해 준 그대로였다.
-스태프에 수정을 다는 이유와 같다. 원래 수정은 손실 없이 마력을 가공하고 증폭시키는 매질이므로.
품격 있는 마도사라면 마땅히 멋진 마법 지팡이를 들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내 상태는.
-너는 그런 면에서 지금 뱀 모양 크리스탈 스태프라고 할 수 있지.
마법 뱀팡이.
어, 형은 마법 지팡이 그 자체야.
마력을 끌어올리자 정말 내 전신의 수정에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섬세하게 다뤄서....
-가장 허접스러웠던 바람 마법을 써 보는 거다.
펠레리안의 친절하기 그지없는 강의에 따라 마력을 주무른다.
수정을 타고 흐르던 미약한 마력이 천천히 허공으로 방출되었다.
마력 가습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그 마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뭉쳤다.
여태까지 몇 번 시도해 봤는데 아직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참고로 나는 다섯 번 만에 성공했다.
이번이 다섯 번째 시도였던가.
아니, 네 번째 시도인 걸로 하자.
나는 근성으로 성공해 냈다.
바람으로 나비 모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입이 있었다면 '사아악!' 소리를 내며 기뻐했을 것이다.
-집중햇!
긴장의 끈을 놓을 때는 아니다.
마법은 분명 성공했다.
-이것이 중급 마법의 시작이다!
'다만 '중급원소마법:바람lv1'을 사용합니다.'하는 메시지는 울리지 않았다.
이것은 말 그대로 편법이므로.
나는 만들어 낸 마법을 천천히 삼 남매가 있는 곳으로 날려 보냈다.
워낙 작은 마력으로 빚어냈기에 마력에 민감한 와이번 맘조차 이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바람의 나비가 삐삐의 뒤통수에 닿은 순간.
퍼엉!
풍선 터지는 소음과 함께 삐삐가 화들짝 놀랐다.
이것이 원래 위력의 100분의 1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뛰어난 성과.
"케케케케!"
"츄푸하하!"
케이와 츄이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삐삐는 참지 않고 동생들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마법의 성공에 뛸 듯이 기뻤다.
물론, 실제로 뛰지는 못했다.
'전 네 번 만에 성공했으니까. 천재 아니에요?'
-다섯 번째 아니었냐?
펠레리안도 확신은 없어 보였다.
바람 마법과 물 마법 정도는 와이번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 수련할 수 있을 것 같다.
구름을 보면 조만간 비가 올 것 같으니, 그때는 물 마법을 수련해 봐야지.
별것 아니어 보여도 확실히 도움되는 수련법이었다.
왜냐하면.
*「더 고등한 마법을 구현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초급원소마법:바람'의 숙련도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초급원소마법:바람lv8'이 '초급원소마법:바람lv9'가 되었습니다.」
물과 함께 가장 떨어졌던 바람 마법의 숙련도가 겨우 이틀 만에 이렇게 올랐다.
–이번 기회에 네 원소마법을 전부 중급 이상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예 스승님.'
-그리 부르지 말아라. 크흠.
말은 그리 했지만 펠레리안도 영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이대로 훌륭한 마검사가 되자. 문무겸비, 마검쌍도다.
그때였다.
"구어어어." "두루루-" "케레렉!"
익숙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와이번이 내려앉은 것은.
'아 얘 또 왔네....'
X됨, 고타 옴.
츄고타가 온 것이다.
일어났던 셀레타는 익숙한 듯 다시 드러누웠다.
츄고타는 더 이상 성질을 부리지도 않았고, 포악하게 화를 내지도 않았다.
석탑에서 땅을 파는 동안 마음 수련이라도 한 것일까.
다만 하루에 한 번씩 이쪽으로 와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떠났다.
"구어."
죽은 자식의 묘비를 보러 매일 온다고 생각하면 조금 슬프겠지만.
정작 살아 있는 나로서는 진심으로 무서웠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와이번맘은 이제 츄고타를 옆집 노인 정도로 대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츄고타가 부담스러웠다.
'빨리 여기서 도망쳐야지....'
이럴 때마다 탈출에 대한 욕구가 마구 치민다.
일단 마법 수련을 더 하고 진화를 기다리자.
며칠만 주어지면 더 강해질 것이다.
* * *
열의 있고 재능 있는 학생과 훌륭한 교수.
둘이 만났으니 공부의 진척은 쾌도난마와 같았다.
겨우 사흘이 더 지나고.
나는 물을 제외한 모든 사대 원소마법을 중급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실수로 둥지에 불을 지를 뻔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밤.
물의 중급마법을 구현하는 데 성공한 순간.
*「'초급원소마법:물lv10'이 '중급원소마법:물lv1'이 되었습니다.」
나는 초급원소 마법사 딱지를 뗐다.
기쁨을 누릴 새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흰 대가리 셋이 튀어나올 줄은 누가 알았던가.
츄고타였다.
츄고타가 폭우를 틈타 나타났다.
늘 괴상하게 울던 녀석이 그날따라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아악!'
-흐어억!
나는 내적 비명을 질러 버렸다.
깨 있는 와이번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래 츄고타가 자주 드나든 탓에 아무도 경계하지 않았다.
와이번맘은 조용히 새끼들을 끌어안고 자고 있다.
그리고 과감한 도둑질은 그렇게 거행되었다.
츄고타는 발톱으로 조심스레 나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빗소리에 날갯소리조차 묻혀 버렸다.
'이 미친 와이번!'
나에 대한 미친 와이번의 집착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다가는 평생 츄고타와 함께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 나를 훔친 다음에는 마경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 버리지 않을까.
지금과 그리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안심할 수는 없다.
츄고타의 눈이 돌아 있는 만큼, 내가 진화를 마치면 다시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호로록 삼켜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내가 제 새끼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공격하거나.
어떡하지. 펠 영감님, 어떡해요!
-어떻게든 해 봐!
하지만 펠레리안도 할 수 있는 것은 응원밖에 없었다.
그래, 마법을 쓰자.
하지만 100분의 1 위력밖에 안 되는 마법으로 뭘 어떻게?
아니면, 내가 부서질까 봐 살살 쥐고 있으니까 옆구리를 바람 마법으로 간지럽혀서 떨어뜨리면....
그사이에도 츄고타는 고도를 높이려 했다.
비구름 속에 숨으려고 하는 것이다.
진짜 미치겠네 이거.
'으아아!'
나는 쓸 수 있는 마법을 썼다.
팍!
츄고타의 정강이에 화살이 박힌 것이 그 순간이었다.
내가 화살 소환 마법을 쓴 것은 아니었다.
간신히 가죽만 뚫고 박힌 화살에는, 부적 같은 것이 묶여 있었다.
그 부적의 룬어가 반짝 빛나더니.
퍼어엉!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내 몸이 쑥 가라앉았다.
츄고타가 나를 놓친 것이다.
"꾸가가가각!"
폭발음에 블랙 와이번들이 눈을 떴다.
츄고타 역시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폭우 속에서 나는 추락했다.
아니,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산산조각 나서 죽는 거 아니야?
그냥 와이번으로 진화해서 비행이라도 배울걸!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챙그랑.
하고 내가 깨지지는 않았다.
"잡았다!"
누군가 나를 받아 냈다.
설마, 이 인간의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가까이서 보니 너무 예쁜데!"
헤일릿 랑그레이, 적발의 사냥꾼이었다.
'잠깐. 위를 봐!'
내가 경고할 필요도 없었다.
단련된 사냥꾼의 감각 탓일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분노한 셀레타가 츄고타에게 날아들고 있었고.
츄고타는 나를 훔쳐간 헤일릿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리 셋이 동시에 입을 벌렸다.
키이잉!
새하얀 빛무리가 어린다.
아, 쟤 파괴광선 있었지.
내가 휘말릴 것은 생각 못 하나 보다.
또 한 번의 죽음을 떠올린 그 순간.
빗방울 사이로 반투명한 바람의 나비가 보인 것은 눈의 착각이었을까.
퍼어어엉!
압축된 바람이 터지며 츄고타의 몸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어.
저거, 내 마법인가?
133. 왕족 강림
츄고타의 거대한 몸이 허공에서 마구 흔들렸다.
그 탓에 우리에게, 정확히는 헤일릿 랑그레이에게 쏘려던 파괴광선이 빗나갔다.
무슨 위력이지.
퍼어엉!
폭풍을 뚫고도 굉음은 선명하게 울렸다.
애꿎게 파괴광선을 맞은 돌기둥이 와르르 무너졌다.
등골이 쭈뼛해지는 위력이다. 역시 미쳤지만 엄청나게 강한 와이번.
'어떻게 한 거지!'
그리고 나는 그런 대단한 마물을 잡고 흔들 정도로 강력한 바람 마법을 부렸다.
혹시나 해서 마력을 점검해 봤지만, 출력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대략 100분의 1의 마력으로 발현된 마법.
그렇다면 내 중급마법의 위력은, 능히 네임드 마물을 일수에 찢어 버릴지도....
-그럴 리가 있나. 기까짓 중급 원소마법 정도로.
'그러면 방금은 뭐예요?'
-...으음.
펠레리안도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위급한 상황에 숨겨진 힘이 튀어나오는 것은 왕도적인 전개인데.
내 안에 무시무시한 잠재력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탐구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균형을 잡고 파괴광선을 준비하는 츄고타.
"꾸가가각!"
그런 그녀를 와이번맘이 덮쳤다.
츄고타가 나를 훔쳐갔다고 생각했나 보다.
사실 여기 아래에 있는데.
"숨자!"
랑그레이는 나를 곧바로 제 백팩에 쳐넣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백팩이었는데, 나는 너무도 쉽게 쑤욱 빨려 들어갔다.
그 안은 무중력의 공간이었다.
온갖 잡동사니가 다 존재하는....
어떤 공간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아공간 안으로 들어오다니!'
이렇게 된 거 랑그레이가 무사히 도망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산맥 어딘가에서 폭풍우가 몰아칠 때.
태양 빛이 훈훈하고 산들바람이 부는 지역도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왕국의 수도, 솔리온 임펠이 그랬다.
왕국 최고의 명문인 에메랄드 스쿨에도 봄날의 햇볕이 내리쬐었다.
창문을 살짝 열어 둬서인지 응접실에 흐드러지는 목련의 향기가 들어왔다.
그 우아한 향기란, 아 매그놀리아여.
평소 문학을 즐기는 젊은 교수 제타로브는 덕분에 요즘 기분이 좋았다.
시라도 한 구절 읊었으면 더욱 풍취가 살았겠지만.
손님 앞에서 그런 주책을 부릴 수야 없겠지.
제타로브는 안경을 고쳐 쓰며 슬쩍 시선을 들었다.
맞은편 소파에는 두 부자가 앉아 있었다.
에메랄드 스쿨에 입학하고 싶어 하는 소년 소녀는 널렸다.
당연히 올해의 입학 정원은 이미 찼고, 또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갈 수는 없지 않은가.
에메랄드 스쿨은 정원 외 입학생의 티오를 꽤 넉넉하게 준비해 둔다.
앞에 있는 소년은 지원자였고, 옆의 사내는 그 아비.
재미있는 것은 지원자인 소년이 전혀 긴장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온하고 침착한 얼굴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반면 아비는 초조한 듯 손톱을 계속 매만지고 있다.
다리를 떨려다가 흠칫 놀라서 멈추기도 한다.
제타로브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면접이라고 해서 너무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지금 점수를 매기는 것도 아니고, 입학처 소속으로서 차 한잔 대접해 드리려고 한 것이니."
"...아, 그, 그렇군요."
학생의 홀아버지, 로일 리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아주, 아주 어리숙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실제로 로일 리들은 촌놈이다.
평생을 솔리온 임펠에서 부유층으로 살아온 제타로브는 말투와 억양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네, 아드님이 아주 명석하시더군요."
"하하,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 녀석, 얼른 고맙습니다. 해야지."
자식 칭찬 하나로 헤벌레하는 꼴이라니.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다. 갑자기 졸부가 된 누군가가 자식을 에메랄드 스쿨에 입학시키려는 일이.
그러나 대부분의 전형에서 막대한 금액을 기부해야 하며, 그런 돈을 내고도 결국 입학시험에서 최종 탈락하는 경우가 많다.
제타로브는 빙긋 웃으며 펼쳐 놓은 파일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았지.'
신흥 상단 '리들'의 상단주 로일.
그 이름은 솔리온 임펠의 상계에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한때 평범한 마차상이었던 인물이, 갑자기 자본금을 마련해 사업을 확장했다.
그때까지도 리들 상단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닫혀 있던 칼레아 산의 붉은 모루 광산이 다시 열렸다.
드워프들의 광산, 특히 붉은 모루 광산은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발생시킨다.
솔리온 임펠의 상계에 거대한 충격이 발생할 정도였다.
결단이 빠르고 과감한 상인들이 모두 칼레아 시로 달려갔다.
드워프들에게 정기적으로 포크만 수입해 와도 큰 수입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상인들이 들은 것은 놀라운 결과였으니.
제타로브는 파일에 첨부된 기사를 읽었다.
「...'아 우리는 이미 계약서를 썼어. 리들 상단하고. 응? 난 자세한 거는 모르고. 하여튼 그렇다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해!'
모든 드워프들은 그리 말했다.
말 여러 마리를 갈아타면서 최속으로 달려간 상인들이 하나같이 증언한 것이다.」
거짓이 아니었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로일 리들은 이미 드워프들과 전매권을 따냈다.
광산 전체의 생산 물량을 리들 상단을 통해 납품하겠다는 독점 계약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계약을, 그리 빠르게 따냈는지는 미스터리였다.
드워프들은 결코 자선사업가가 아니며, 쇠밖에 모르는 멍청이 또한 아니었다.
만약 한 상단이 광산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독점적으로 다루면, 왕국 3대 상단은 왕국 4대 상단이 되리라. 그 정도로 큰 사업이었다.
하지만 로일 리들은 다른 행동을 했다.
「그러나 '리들 상단의' 상단주 로일 씨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붉은 모루 광산의 생산물들을 취급할 권리를 상단 연합과 나눈 것이다. 그것도 몹시 합리적인 수준의 수수료만 받고.
이것은 '반독점법'이 유명무실해진 요즘 세태에 보기 드문 자비며 공정이었다.」
그는 독점적으로 얻은 권리를 과감하게 다른 상단들에게 분배했다.
실제로 그 수수료는 매출의 2% 미만인 경우가 많았고. 드워프들의 생산품이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지녔음을 생각한다면 정말 '자비로운' 결정이었다.
아니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와락 겁을 먹었다든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겠지.'
순진하고 어리숙한 로일의 얼굴을 보면 둘 중 하나가 의심되지만.
제타로브가 생각하기에는 양쪽 다 아니었다.
오히려, 치밀하고 과감한 계산이 있었으리라.
로일이 가장 먼저 납품권을 나눈 것은 상단연합과 대륙 3대 상단 중 둘이었다.
무기를 비롯해 알짜배기 상품을 더 낮은 수수료로 나누었다.
그것보다 영향력이 낮은 자들에게는 좀 더 높은 수수료를 받았고 더 값싼 물품의 판매 권한을 넘겼다.
그 덕에 로일 리들 상단은 '권력'을 얻었다.
가장 큰 세력들이 이 계약 방식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이상, 로일의 권력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귀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빌려줌으로써 아주 강력한 네트워크를 얻었음은 물론이다.
그것이야말로 신흥 상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막대한 자금 같은 것보다 훨씬 귀한 것이니.
기존 기득권 권력에게 용인받고 또 인정받는 ....
'아, 잡생각을 너무 길게 했군.'
안 그래도 로일이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제타로브는 파일의 마지막 부분을 봤다.
「...이상, 임펠의 태양 이달의 인물 특집을 마치겠다. 리들 씨와 그 상단의 번창을 기원한다.
-바우멧 라이터스」
바우멧 라이터스, 악명높은 가십지의 기자가 이렇게 호의 넘치는 기사를 썼다니.
친절하게 뱀이 그려진 리들 상단의 문장까지 삽화로 실어 주었다.
얼마를 처먹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 봐도 로일 리들의 수완을 볼 수 있었다.
"아마엔 군은...."
그리고 또 재미있는 사실.
"틀림없는 마법의 천재입니다."
"아...!"
저 침착하고 선량해 보이는, 아비를 닮지 않은 소년은.
에메랄드 스쿨에서도 보기 힘든 마법의 천재가 맞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의견일 뿐, 이것이 입학 여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니까요.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하하하."
"그래야지요."
로일 리들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기뻐했다.
제타로브는 싱긋 웃으며 생각했다.
'일단 합격은 확실하겠군.'
아마엔 리들.
중등 종합과정으로 1학년으로 입학 확정.
'다음이 누구였지?'
아마엔 리들 다음 학생은 누구였더라.
두 부자를 떠나보낸 뒤, 제타로브는 다시 파일을 뒤져 보았다.
* * *
에메랄드 스쿨에서는 다양한 것을 가르친다.
왕국을 이끌 미래의 재원이라면 학문, 예술, 정치 등 다양한 소양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에메랄드 스쿨은 기본적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상을 추구한다.
마법과 검술, 사냥법, 마물학, 궁술, 등의 실전적인 교육 또한 진행한다.
정원 외 입학자를 뽑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형이 존재하고, 그중에는 무력 특기생 또한 있다.
다만 무력 특기생으로 지원하는 자는 몹시 드문 편인데, 에메랄드 스쿨의 기준이 워낙 높기 때문이리라.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합격할 수 없다.
다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면접을 보기도 전에 합격 여부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마르테인가의 여식이라.'
그 마르테인 가문이다. 호랑이 후작이 군림했던 그 가문.
비록 후작이 몬스터웨이브에 휩쓸려 사망하고, 그 영지 중 상당 부분이 초토화됐다고 하나.
마르테인 후작가는 여전히 강호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비극이 있었기에 라니아 마르테인의 입학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비극의 주인공.
그레이림의 영지에서 어머니를 잃고, 피난 간 마르테인 영지에서는 외할아버지를 잃은 영애.
그러다가 갑자기 마르테인의 유력한 후계자가 된 여자애이다.
입학처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여태까지 마르테인에게 받아먹은 기부금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니.
'그래도 적당히 뭐라도 좀 보여 줬으면 좋겠군.'
오늘 오전의 아마엔 리들처럼 말이다.
라니아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촌마을을 뛰어다니는 소년이 입을 법한 간소한 민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아직 키도 작고 몸의 성장도 끝나지 않았지만, 팔뚝이며 주먹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마르테인의 전사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흉터다.
그 옆에는 두 명의 기사가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아가씨, 긴장하지 마시고. 하던 만큼만 하십쇼."
"합격하면 여기 솔리온 임펠에서 지낼 수 있는 겁니다."
올리버와 자레인이라고 했나.
제법 친해 보인다.
듣자 하니 라니아 마르테인이 후작위를 계승할 확률이 높지는 않은 것 같은데.
"준비됐습니다."
"오, 한번 보여 주십쇼."
제타로브는 그때까지도 기대하지 않았다.
라니아가 주먹을 쥐고, 기합을 내지르자.
"하압!"
돌풍이 확 불고.
라니아의 피부가 살짝 붉게 물들었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투기를 내뿜는 저 모습은 분명....
"포, 폭투법!"
마르테인 후작의 전매기술.
'폭투법'.
라니아 마르테인은 무려 그 스킬을 습득해 낸 것이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것도 또 다른 유형의 천재군.'
그녀가 마르테인이 아니라도 받아들였어야 했다.
왜 무력 특기생으로 지원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루에 두 명의 합격자와 두 명의 천재를 만났다.
제타로브는 빙긋 웃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시간을 보니 또 한 명의 면접을 추가로 봐야 할 것 같다.
게다가 그 면접은 면접자가 찾아오는 게 아니라, 면접관인 제타로브가 직접 지원자를 찾아가야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왕궁으로 가는 마차가 몇 시에 있더라.'
제타로브는 라니아를 웃으며 칭찬하면서도 그런 고민을 했다.
* * *
타닥, 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운치 있다.
나는 잠자는 랑그레이의 품에 안겨 있었다.
"흠냐."
잠꼬대가 심한 녀석이다.
그래도 베개로 쓰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하아.
폭풍우가 몰아치는 마경에서 와이번 퀸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을 것이다.
직접 보지 못하고 아공간 속에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아공간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이실이도 잘 지내고 있을 것 같아 안심했다.
보름만 더 버텨 줘 이실아.
진화를 시작한 지 이제 15일이 지났다.
헤일릿이 나를 아공간 백팩에서 꺼낸 시점에는 이미 와이번들의 지역에서 벗어난 뒤였다.
확실히 수완이 대단한 인간이다.
나라면 결코 도망치지 못했을 것 같다.
'와이번 맘하고 츄고타, 너무 안 싸웠으면 좋겠네.'
아마 박 터지게 싸우긴 했을 것이다.
그래도 생사결까지 가지는 않았겠지.
그래 봤자 나는 죽은 자식이고 와이번맘에게는 지켜야 할 삼 남매가 있으니까.
다행히 운이 좋아서 이곳까지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다.
게다가 헤일릿은 나를 데리고 솔리온 임펠에 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이런 기회가 있을 수 있나.
왕립 은행의 금고를 어떻게 열지는 모르겠다.
헤일릿, 이 인간이라면 나를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설마 나를 못 알아볼 줄이야.'
충격적이었다.
나는 날 알아보고 구해 준 건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를 '수정에 뒤덮인 날개 없는 와이번 새끼 박제'로 취급하는 것이다.
배신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는 잡념을 떨쳐냈다.
이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진화에나 집중하자.
얼마 전, 기다리던 메시지가 울렸다.
*「진화과정이 절반을 지났습니다.」
*「특성 '왕관'이 '왕족'으로 진화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왕족이다.
자세히 말하면 왕자.
──────────────
[리틀 프린스 서펜트lv1]
[이명] 우르오로스, 심장 파먹는 뱀
[특성]
[불굴], [정진], [왕족]
──────────────
몸이 조금 바뀌었다.
펠레리안의 말로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는 안 보이지만, 수정안의 내용물이 더 걸쭉하게 굳었단다.
저번에 저 헤일릿 끔찍한 여자가 나를 마구 흔들어 본 적이 있다.
그래도 살아 있는 것으로는 안 보이나 보다.
──────────────
[스킬]
▸ 왕관
[강탈lv4]: 탄성폭주lv1, [극복lv2], [지배lv1], [연결lv1]
▸ 마법
[중급 원소]:불lv1, 흙lv1, 물lv1, 바람lv2
[투명한 손lv15], [경량화lv5]
▸ 기술
-
──────────────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왕관 스킬을 쓰기는 마력이 부족해서, 연결의 왕관은 여전히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왕이면 헤일릿에게서도 도망쳐서....
"누구야!"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헤일릿이 벌떡 일어났다.
나를 옆구리에 낀 채, 한 손은 허리춤에 가져다 댄다.
그러자, 근처의 나무 뒤쪽에서 인간들이 슬쩍 몸을 드러냈다.
그 수가 물경 열을 넘었다.
"흐흐흐...."
하나같이 인상이 험하다.
산적이라도 되나 싶었는데.
"이 자식들!"
헤일릿은 몹시 반가워했다.
"마중 나온 거냐!"
"으하하하, 길드장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왔죠."
험하게 생긴 자들은 모두 사냥꾼이었다.
게다가, 헤일릿 랑그레이의 부하인 것 같았다.
"이제 하루만 있으면 도시로 들어갈 텐데 뭘 굳이."
"오랜만 아닙니까. 그건 뭡니까."
"아 이거?"
헤일릿이 나를 번쩍 치켜들었다.
"보물을 구해 왔다!"
"우와아아아!"
사냥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 용모를 칭찬했다.
"우와 이건 무슨 재질이지. 수정인데, 평범한 수정이 아닌 것 같은데요?"
"역천의 던전에 들어갔다가 죽은 기형 와이번 새끼야. 수정 변질의 석화 함정에 당한 것 같아."
"아 그 수정조각상으로 변해 버리는 희귀 함정!"
"이거 불투명해서 잘 안 보이기는 한데, 자세히 보면 안쪽은 엄청 징그러운데요?"
"그러니까. 끝내주지 않냐."
"예! 끝내줍니다!"
거 칭찬이 과하다.
감탄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크흠, 흠.'
왕족에게 함부로 손 대지 말거라.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는 위풍당당하게 솔리온 임펠에 입장했다.
134. 괴도 뱀팡
헤일릿 랑그레이는 아주 유명한 영웅이다.
왕국에서 제일 명성 높고 강하다는 여덟 영웅 중 하나인데.
다른 이들으 대부분 뭐 기사이니 마법사이니 아카데미 총장이니 하는 높으신 분들인 반면, 헤일릿 랑그레이는 사냥꾼이다.
사냥꾼은 마물을 사냥하는 치들이다.
당연히 3D 직업 중 하나이다.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사냥꾼들은 그리 정중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직업이었다.
그런 사냥꾼들이 몰리는 사냥꾼 길드는 모험가 길드, 로그 길드와 비슷한 인식을 샀다.
즉, 불한당들의 소굴로 여겨지는 것이다.
솔리온 임펠 9구역의 강가에 있는 사냥꾼 길드.
'블랙 덴', 속칭 검은 소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랙 덴의 1층은 여느 길드처럼 선술집으로 운영된다.
그곳에서 단검으로 손톱을 다듬는 이들도 모두 사냥꾼이다.
솔리온에서 한가락 하는 사냥꾼들은 모두 블랙 덴 소속이니 술에 취해 탁상에 대가리를 박고 있는 사이 역시 베테랑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우중충했던 블랙 덴에 활기가 가득 들어찼다.
그들의 길드장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랑그레이-! 랑그레이-!"
"으하하하!"
그녀는 잔뜩 취해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귀한 것을 잡고 돌아왔을 때는 언제나 이런 파티를 벌였다.
"내가 얼마 받았는지 아냐!"
"랑그레이! 랑그레이!"
"자! 봐라!"
그녀가 가죽 자루를 번쩍 치켜들었다.
쩔렁, 하는 소리가 울렸다.
팽팽하게 팽창한 주머니만 봐도 적은 금액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맞추는 새끼한테 금화 열 닢!"
그러자 열화와 같은 성원이 터져 나왔다.
"100 솔라!"
"씨발 그것밖에 안 되겠냐! 전 300이요!"
마찬가지로 취한 탐험가들이 마구 금액을 불러 댔다.
흥에 취해서 금액을 올리는 탓에 나중에는 솔리온 임펠 9구역을 전부 살 수 있는 금액이 나왔지만.
"그래, 500 솔라야. 금화 500닢을 받았다고!"
"우와아아아!"
가게가 쩌렁쩌렁 울렸다.
500 솔라. 평민이라면 일평생 한 번 만져 보지 못할 거금이다.
사실, 랑그레이를 비롯한 특급 사냥꾼들이라면 어려운 의뢰를 완수하고 받을 수 있는 금액이기는 하지만.
"미쳤다!"
"이제 우리 길드 부자 되는 거 아냐!"
여기서 굳이 그것을 지적하는 멍청이는 없었다.
하늘 높이 올라간 길드장의 기분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사냥꾼들은 찬양에 가까운 말들을 외쳐 댔다.
"평생 충성하겠습니다!""으아! 침 뱉어 주세요!"
"와아아아!"
분위기가 극에 오르고.
기분 좋은 경우에 발생하는 랑그레이의 술버릇이 발동되었다.
"젠장, 니들. 난 너희들이 좋다!"
그녀는 자루에 손을 넣더니 금화를 뿌리기 시작했다.
날아가는 금화의 기세며 속도가 거의 암기투척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곳에 있는 사냥꾼들도 몸놀림이 보통은 아니었다.
사냥꾼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금화들을 받아 챙겼다.
어디서 이 돈을 벌어 왔는가 하면.
"으하하, 난 역시 천재야."
헤일릿이 가져온 특별한 마물의 사체 덕택이었다.
'선천적으로 날개와 다리가 없는 와이번 퀸의 새끼가 펠레리안의 던전에 있던 수정 변질 석화 함정에 당해 죽은 것을 와이번 둥지에서 훔쳐온 것.'
그 희소성을 인정받아서 비싼 값에 매각한 것이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랑그레이는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찾아 가져온 뒤 동네방네 그것을 자랑한다.
신나게 즐긴 다음에는, 자신의 애장품 창고에 넣어 두거나 아예 매각해 버리고 만다.
이번에 얻은 그 수정 와이번 박제는 매각 대상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야, 그 징그러운 게 무려 500 솔라에 팔리다니."
헤일릿이 뿌린 금화를 챙긴 사냥꾼들이 시시덕댔다.
"원래 기괴한 것을 모으는 귀족 나리들이 있잖아."
"어디 박제로 쓰려나. 그런 걸 방 안에 전시해 뒀다가는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은데. 으하하."
본디 수정으로 뒤덮여 있으니 당연히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반투명한 수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처참하게 으깨진 피며 고기 조각 같은 게 출렁대고 있었다.
수정 변질 석화 함정에 당하면서 그 내부가 곤죽이 된 상태로 보존되었나 보다.
사냥꾼들은 그리 생각했을 뿐이다.
* * *
진화 16일 차.
'이 배신자.'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그렇게 칭찬을 하더니.
겨우 하루 만에 팔아 치워 버릴 줄이야!
잠깐 칭찬받았다고 헤실거렸던 내가 너무 바보 같다.
-이제야 알았나?
'불난 집에 부채질하지 마십쇼.'
-그리고 처음부터 너보고 예쁘다 예쁘다 한 것도 아니라니까는.
수염 숭숭 난 탐험가들이 나를 보고 칭찬을 했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걸 칭찬으로 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청나네요!', '으어, 무시무시합니다.', '비싸게 팔리겠는데요.', '어우 징그러.'
특히 마지막 그거는 확실히 칭찬이 아닌 것 같았다.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그걸 눈치채다니. 대단하구나.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너무 분하네요.'
-칭찬이 아니라... 아니다, 됐다.
그래. 뭐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어차피 나는 보름만 더 지나면 진화를 마칠 입장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설마, 곧장 다음날 이렇게 깔끔하게 팔아 치울 줄이야.
랑그레이는 나를 보랏빛 벨벳 천으로 감싼 뒤 고급스러운 가죽 케이스에 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길드장 직인을 꺼내더니 인증서 비슷한 것을 즉석에서 만들었다.
그녀는 나를 아마도 어떤 '업자'에게 데려가 내보였다.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스토리텔링을 덧붙였다.
업자는 오른쪽 눈에 단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거기에 돋보기 같은 것도 꺼내서 나를 관찰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데요?"
"수정 변질 마법에 당한 거니. 반쯤은 살아 있다고 볼 수도 있지."
"귀한 물건임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매입하겠습니다."
랑그레이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거금을 받고 떠나갔다.
나쁜 것.
다시 만난다면 적이다.
나는 어떤 박스에 담겨 어디론가 옮겨졌다.
랑그레이가 떠난 뒤, 업자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들렸다.
"500 솔라는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 이렇게 징그럽고 투박한 물건에...."
어떤 자식이야!
말도 안 되는 평가에 분노를 느꼈다. 업자가 얼른 한마디 해 주기를 기다리는데.
"그렇지, 흉물스러운 생김새야. 불길한 마력도 느껴지고. 하지만 뭐 이런 것도 다 수요가 있는 법이네. 취향이 이상한 괴짜들이 한둘인가."
"그래도 한 300 솔라만 쳐줘도 됐을 것 같은데...."
"300 솔라면 충분한 건 맞지."
그런데 인간들은 쌍으로 나를 폄하했다.
자신감을 조금 잃었다.
"하지만 저 여자는 영웅 아니냐. 이렇게 조금 '배려'를 해 주는 것으로 인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아. 그리고 또...."
"예."
"취향 이상한 괴짜 중 가장 돈 많은 권력자를 아니까. 그쪽으로 바로 팔아넘길 수도 있고."
"역시,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끼야악, 나는 취향 이상한 괴짜에게 팔려갈 신세였다.
그리고 정말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또 옮겨졌다.
또 팔린 것이 분명하다.
이번에는 어디로 옮겨진 걸까 궁금해하던 중.
끼익.
가죽 케이스가 열리고 빛이 들어왔다.
하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장갑을 낀 채 나를 잡아 들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유심히 보더니 중얼거렸다.
"참, 나리들 취향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이리 못생긴 것을 700솔라나 주고...."
너는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지금 스킬만 쓸 수 있었어도 바로 광선을 날려 줬을 텐데.
그나저나 500 솔라에서 또 700 솔라로 가격이 올랐다.
이건 나쁘지 않군.
하인은 나를 복도의 장식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도착한 곳은 누군가의 저택인 것 같았다.
이곳의 주인은 엄청나게 돈이 많은 게 분명했다.
복도가 보통 화려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귀족의 집에 팔려왔구나.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게다가 복도를 따라서 수십 개의 장식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 그 위에 모두 진귀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도 있었고, 작은 조각상도 있었으며, 신비로운 도자기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장식품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흐음.
이 집 주인은 제법 취향과 안목이 있나 보군.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진화를 마칠 때까지 잠깐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화려한 복도에서 머물게 되었다.
하인들이며 여러 손님들이 여러 차례 지나갔고.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음으로써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궁정백, 지미어 베롤링거.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이자 대귀족 중 하나의 집이었다.
* * *
진화 시작 20일 차.
4일 동안 이 복도에 있었다.
진화가 더 진행되면서 몇 가지 진전이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조각상으로서의 생활은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지루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들리는 것이 많았다.
복도를 지나치던 부녀가 대화하기를.
"궁정백 지미어는 무서운 사람이다. 괜히 늙은 여우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야. 어디든 귀가 있을 수 있다. 늘 입조심 하거라."
"그럼 여기서도 조용히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소리 차단 마법을 쓰고 있거든."
하인들도 복도에서 수다를 떨었다.
"이번 에메랄드 스쿨에 3왕자가 입학한다는데. 그 병약한 망나니가."
"주인님이 신경 많이 쓰시겠어."
"당분간 조심하자구. 그래도 주인님께서 후원하시는 오베른 경이 교수로 들어간다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별별 이야기를 다 듣게 되었다.
"뭐야, 이 못생긴 뱀은."
그리고, 이건 또 처음 보는 경우다.
웬 뚱뚱한 꼬맹이 하나가 내 앞에 다가왔다.
키도 작아서 눈높이가 나랑 딱 맞았는데, 얼굴에 심술기가 그득하다.
"도련님, 그것은 얼마 전 큰주인님께서 구매하신 물건입니다."
"할아버지는 왜 이런 걸 샀대?"
궁중백의 손자인 것 같았다.
'이런 거'라니.
"수정에 갇혀 죽은 와이번 새끼였나... 하는 것 같습니다."
"야 이 멍청아. 너 바보야?"
자기보다 나이가 세 배는 되어 보이는 하인에게 말이 심하네.
"이건 누가 봐도 뱀이잖아!"
그래도 맞는 말을 한다.
처음으로 내가 뱀이라는 걸 알아본 게 이런 되바라진 꼬맹이라니.
"아뇨 와이번인데, 선천적으로 날개와 다리가 없이 태어난 기형종이랍니다."
"으, 가까이서 보니까 징그러."
"하하하, 저도 끔찍하게 생긴 흉물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싸가지 없는 인간들.
그중 어리고 못생긴 녀석이 나를 만지려고 했다.
"깨뜨려 버려야지."
이 자식이 미쳤나.
어지간해서 깨지지는 않겠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투명한 손lv17를 사용합니다.」
그래.
나는 이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사용하다 뿐인가. 심심할 때마다 연습한 탓에 투명한 손은 이제 레벨이 17이나 되었다.
즉, 무음무취투명하게 애새끼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이다.
따악!
"악!"
꼬맹이는 뒤통수를 움켜쥐며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치였다.
"나, 날 때린 거야?"
"예에? 어어."
설마 투명한 마법 손이 꼬맹이를 때렸으리라고 누가 생각할까.
하인도 꼬맹이도 당황했다.
"네가 나를 때렸잖아!"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해입니다!"
히히, 재밌다.
오늘 아침부터 나는 '왕관' 또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어디 한번 새로 얻은 기술을 사용해 볼까.
*「'연결의 왕관lv1'을 사용합니다.」
무슨 효과를 지니고 있을까.
이름을 보면 공격용 스킬은 아닐 것이다. 다른 왕관 스킬도 마찬가지였지만.
*「대상에 접촉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결의 왕관을 사용하지는 못했다.
몸이 닿아야 하나 보다. 지금은 움직일 수가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뭐. 다른 걸 쓰면 되지.
*「지배의 왕관lv1을 사용합니다.」
그래.
내가 시도하는 것은 지배의 왕관을 사람에게 쓰는 것.
과연 통할 것인가.
물론, 상대의 정신력이 강하거나 똑똑하면 안 통할 것이다.
그래서 그 대상을 저 못된 꼬마로 정했다.
*「인간 꼬마lv1을 지배하는 데에 일부 성공했습니다.」
*「인간 꼬마lv1을 길들이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지배하는 데에 일부 성공했다.
지배하는 데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길들이기에 실패한 건 또 처음이다.
그러면 내가 뭘 할 수 있느냐.
지배력을 소모하여 잠시 꼬마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악, 아야! 아악!"
꼬마는 갑자기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도, 도련님 왜 이러십니까."
"아아악!"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하인들이 몰려왔다.
꼬마는 자기 얼굴을 때리고, 녀석을 수행하던 사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지배력이 다 떨어진 덕에 꼬마의 자해소동은 멈췄지만. 녀석은 엉엉 울며 도망쳤다.
"이게 뭔."
사내는 망연자실해서 꼬마를 따라갔다.
지배의 왕관이 사람에게도 통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내 능력이 강해진다면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역시 수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러나, 꼬마를 골탕 먹인 일은 내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기분 나쁘고 불길한 물건이군. 창고로 옮겨라."
집사로 보이는 노인네가 다가와서 그리 선언한 것이다.
충격적인 창고행 결정!
집사의 손짓 한 번에, 덩치 큰 장정 한 명이 나를 번쩍 들었다.
그는 나를 들고 저택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그 길이 아주 길었다.
'완전 대저택이네.'
궁정백이 얼마나 부자인지 알 것 같았다.
한참 뒤 집사와 하인은 저택의 깊숙한 곳에 있는 창고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 주시오."
창고 앞에는 경비를 서는 병사들이 있었다.
생긴 것을 보니 한가락 하는 병사들인 것 같다.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귀한 것들은 창고에 보관하긴 하겠네요. 그쵸?'
-허허....
이 정도 부잣집이니 정말 귀한 것들은 복도가 아니라 창고에 보관하리라.
갑부 집 창고에 들어가게 되다니. 살다 보니 이런 경험도 다 한다.
철컹-
마법적 장치가 되어 있는 철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진열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신기한 물건들이 많다.
하인과 집사는 나를 그 신기한 물건들 사이에 두고 떠나 버렸다.
좋아. 여기서 머물면서 진화를 마치면 되겠군.
어떻게 창고에서 나갈지가 문제겠지만 ....
그때였다.
-이런. 허허허!
펠레리안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감탄했다.
'왜요?'
-궁정백이란 놈 말이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거나. 아주 부패한 놈인 게 틀림없다.
나와 달리 움직일 수 있는 펠레리안은 창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살펴봤다.
'무슨 말이에요?'
-제법 대단한 수준의 수집가인 것 같거든.
궁정백, 그냥 요상한 잡화들을 좋아하는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펠레리안은 수십 개의 진열장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 진열장 하나를 갖다 팔면. 성 한 채랑 바꿔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오, 세상에.
-참고로 네 값인 500 솔라로는 여기 진열장에 있는 어떤 물건도 못 살 거고.
말씀 중에 죄송한데 500 솔라 아니고 700 솔라로 가격 올랐습니다.
그것보다 아티팩트들이라니.
돌아갈 때가 온 건가.
괴도 뱀팡으로.
135. C를 눌러 모습을 숨기세요
궁정백, 지미어 베롤링거.
궁정백(宮廷伯)이라 하면 '궁중에 있는 백작'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왕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다.
때문에 베롤링거의 작위는 백작이어도, 여느 공후작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지미어 베롤링거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늙은 여우라는 칭호는 그를 두려워하는 정계의 인물들이 지어 준 것이다.
키도 작고 수염은 염소수염 같아서 외형은 보잘것없었으나.
그가 퇴궁하고 머무는 저택의 안방에서 왕국의 대소사가 결정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지미어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
지금 그 궁정백은 차를 마시며 서류를 읽고 있었다.
코에 걸친 안경이 흘러내릴락 말락 아슬아슬해 보인다.
그가 슬쩍 입을 열었다.
"선물은, 거 그쪽에서 우리 선물 받았어?"
궁정백의 말투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를 처음 만난 사람은 놀라곤 했지만, 지금 곁에 있는 이는 일평생 그를 모신 집사였다.
집사는 익숙하게 답했다.
"새로 황금 서류 캐비닛을 세공해서 보냈는데, 발라냐르 총장이 거절했습니다."
발라냐르 총장이라 함은 에메랄드 스쿨의 총장이었다.
동시에 8 영웅 중 한 좌를 차지하고 있는 강력한 마도사이자 학자.
그가 궁정백의 선물을 거절한 것이다.
"백색 염료로 겉을 칠해서 다시 줘. 그러면 받을 거야."
"...그러면 될까요?"
충성스러운 집사라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흰 염료로 황금을 덮어 버리면 다시 받을 거라고? 그렇게 간단할까.
"원래 학자들은 체면 챙긴답시고 황금 상자에 담아주면 안 좋아해. 발라냐르 그치도 그렇지. 흰 물감으로 대충 칠해서 주면 받을 거야."
"그리하겠습니다."
"흐흐, 꼭 그 자식 같지 않냐? 속은 욕심으로 가득 찼는데, 겉만 검박하게 꾸미는 게."
"하하, 그리합니다."
"새끼... 안 웃긴데 억지로 웃지 마라. 나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
집사는 난처하게 웃었다.
궁정백은 아무리 포장해도 성격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지금처럼.
"아 그리고, 여기 체크한 놈들. 다 죽여."
"...예 알겠습니다."
이 방구석에서 만년필 한 자루로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지를 정할 때를 보면.
그렇게 무자비할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에 있는 그 녀석을 더 후원하고. 보험으로 새로 오베른을 집어넣을 테니까. 곧 온다지?"
"신경 쓰겠습니다."
"3 왕자의 입학 처리는 됐나?"
"예, 곧 처리될 겁니다."
왕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궁정백이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이 여간 위험해 보이는 게 아니다.
"언젠가~ 붉은 해가 뜨며는...."
기분이 좋은 듯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궁정백.
집사는 그에게서 서류를 받아 정리했다.
그때, 바깥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다.
그걸 말리는 소리도 들렸다.
이 저택 안에서 저리 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
"허허."
벌써부터 궁정백이 흐뭇하게 웃고,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할아부지!"
나타난 것은 못생긴 꼬마애였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 한다고, 궁정백은 달려오는 손주를 와락 끌어안았다.
"으잉? 정말 얼굴이 엉망이 되어 버렸네."
"응, 나쁜 새끼."
"그놈이 왜 너를 때렸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여. 허허."
손주의 얼굴은 살짝 빨갛게 부어 있었다.
오늘 낮에 일어난 소동은 궁정백에게까지 보고되었다.
그런데 영 무슨 일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듣자 하니 손주와 함께 다니던 하인이 손주의 뒤통수를 때렸고, 손주가 갑자기 마구 제 얼굴을 때리며 자해했다나.
"할아버지, 그 새끼 어떻게 했어? 혼내 줬어?"
궁정백은 자신 나름대로 상황을 이해했다.
정말 하인이 손주의 뒤통수를 쳤다면, 손주가 자해한 이유는 그 하인을 혼내 주기 위함일 것이다.
이 할애비의 분노를 초래해서 말이다.
아주 깜찍한 거짓말이다.
그것을 굳이 추궁해서 손주를 혼내고 싶지는 않았다.
"오냐 혼내 줬지."
"어떻게? 죽였어?"
"손목만 잘라서 내보냈다."
"에이 재미없어."
그렇게 일을 마무리했다.
"그 재수 없는 뱀 조각상도 버려 버려!"
"뱀 조각상?"
무슨 말인가 싶어서 집사를 쳐다보니. 집사가 설명해 주었다.
"이번에 매입한 물건 중 하나입니다. 뱀이 아니라 와이번 박제인데, 사냥꾼 헤일릿 랑그레이가 구해 온 것으로... 일단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지미어 베롤링거에게는 매일 여러 개의 뇌물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잠시 보관됐다가 지미어 베롤링거의 이름으로 다시 나간다.
때로는 또 다른 뇌물로써, 답례품으로써, 하사품으로써.
집사는 손주가 듣지 못하도록 속삭여 주었다.
"반출 리스트에 올라가 있습니다만... 이번 주 안에 반출될 겁니다."
"그렇군."
그러면 뭐 상관없는 일이니.
지미어 베롤링거는 호탕하게 말했다.
"오냐, 이 할애비가 박살 내서 버려 주마."
"와, 할아버지 최고!"
버려지지 않고 어디론가 팔려 나가겠지만.
손주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흐뭇해졌다.
* * *
진화 시작 21일 차.
뭘 훔쳐 가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
[키클롭스의 외눈 관통자]
──────────────
저 레이피어도 범상치 않다.
키클롭스의 외눈 관통자라. 이름만 들어도 관통력이 대단해 보였다.
역사적인 헤리티지가 있는 명품 아닐까.
이 세상이 만약 게임이었다면, 적어도 유니크 이상의 아이템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 관통 내성 무시+5, 물리 공격력+10, 마법 공격력+5... 등등의 옵션이 마구 붙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칼 두 자루가 있으니 우선순위에서는 탈락이다.
──────────────
[전령의 날개 신발]
──────────────
그리고 황금빛 날개가 그려진 부츠 한 짝이 있었다.
펠레리안이 말하기를 달리는 속도를 빠르게 보정해 주는 물건이라고 한다.
나는 발이 없어서 못 쓰네.
근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실이가 신을 수 있지 않을까.
신발을 신은 덩굴풀이라니, 장화 신은 고양이를 이길 만한 캐릭터성이다.
-귀여울지는 전혀 모르겠구나.
펠레리안은 딱 잘라 부정했다.
아무리 대마도사였다고 해도 그저 알못일 뿐이구나 싶어 탄식이 나온다.
-우선순위를 정해라. 특히 귀한 것들은 누가 건드리면 경보 마법이 작동되도록 되어 있으니까.
'저한테도 그거 걸려 있어요?'
-아니 너는 안 걸려 있어.
'아.'
게다가 크기의 문제도 있다.
펠레리안의 인장 반지에는 아공간 마법이 탑재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저장공간이 그리 넓진 않다.
챙겨갈 수 있는 물건의 크기며 양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물건 중에서도 확실히 탐나는 물건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창고 안에 보존되어 있었던 것 같은 물건이다.
화분으로 쓸 만한 물건이었다.
──────────────
[알테아드의 제례용 청자]
...
──────────────
'저 도자기도 아티팩트 맞죠?'
-그래, 어떤 마법이 깃들었는지는 자세히 확인해 봐야겠지만 말이야.
눈에 힘을 주면 그 이름이 떠오르는 것만 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
[알테아드의 제례용 청자]
-황금 흙
──────────────
황금 흙이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식물에게 좋을 것 같다.
당연히 내가 먹으려는 것은 아니고 이실이에게 주려는 것이다.
얘는 이런 내 맘을 알까.
진화를 마치자마자 물건들을 가지고 튀어야겠다.
나를 징그럽다고 욕하고 복도에 장식품으로 박제한 녀석들에게 청구서를 남기는 것이다.
철컹.
그때, 문이 열렸다.
하인들이 저벅저벅 걸어와서 물건들을 트롤리에 싣기 시작했다.
'어, 너희들 뭐 하는 거야!'
다행히 내가 점찍은 물건들은 싣지 않았지만.
그중 한 명이 갑자기 나를 들어 올렸다.
설마 여기서 나를 꺼내 가는 전개인가.
아직 아무것도 못 챙겼는데!
"아 그건 아직 아니야."
"그래?"
"어, 리스트 보니까 내일 나갈 물건이네. 놔둬 일단."
다행히 하인은 다시 나를 내려놨다.
그러고는 물건들을 싣고 떠나가 버렸다.
'내일이라고!'
내가 내일 이 창고에서 반출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진화를 마친 뒤 괴도 프린스 서펜트가 되겠다는 계획이 무너진다.
'어떡하죠!'
-뭘 어쩌긴. 저걸 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알테아드의 제사용 청자기'를 마음속으로 점찍어 둔 만큼.
펠레리안 역시 꼭 챙겨야 한다는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
[말파스의 양피지]
──────────────
다른 물건과 달리 먼지 구덩이에 처박혀 있다시피 방치된 물건이었다.
그럴 만했다. 누리끼리한 양피지에 불과했고, 그 양마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불길한 마력을 뿜고 있기에 아티팩트로 분류되었을 뿐.
-저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거야. 돈만 많은 수집가들이란 으레 그렇지.
펠레리안은 저 낡은 양피지가 이곳에 있는 모든 물건 중 가장 귀하다고 말했다.
-까마귀 악마 말파스의 힘이 담긴 물건이다. 그 악마의 별명이 '사기꾼의 총통'이라지.
'근데요?'
-저것은 그 교활한 악마가 계약을 할 때 사용하는 양피지야. 저 양피지에 적은 계약 조항은 결코 어길 수 없다. 강제력이 부여되기 때문이지.
헉, 그러면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면 대륙이 멸망한다' 같은 조건을 적어 두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질문을 했더니 펠레리안은 발상이 유치해서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안 되나 보다.
'하여튼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자, 들어 봐라.
듣자 하니 펠레리안의 계획은 제법 그럴듯했다.
-흐흐. 날이 어두워지면 그때가 기회다.
우리는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 * *
괴도로서 이 세상이 마음에 드는 부분은, 씨씨티비가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마법이 있냐고 물어보니 적어도 이곳에는 없다는 것 같다.
그런 건 아주 뛰어난 마법사가 내내 달라붙어 있어야지 가능한 일이라나.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
나와 펠레리안은 우선 이곳 창고의 내부를 살폈다.
여기는 '창고'였지 '금고'가 아니었다.
즉, 환풍은 필수적이었다. 당연히 그를 위한 창문도 있었다.
다만 아무리 몸이 날랜 도둑이라고 해도 저 창문으로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어지간하게 마르지 않으면 통과하기도 어려운 작은 창문이고, 저 위 지붕 바로 밑에 뚫려 있었으니까.
사다리가 있으면 타고 올라가겠지만 경비들이 있어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마법적인 경보 장치도 있을 거고.
그러니까 이 창고는 도둑이 침입하기 몹시 어렵게 설계되어 있다는 건데....
'이미 들어와 있지롱.'
나는 이미 훌륭하게 잠입한 상태였다.
창문 밖이 어둑어둑한 게 이미 캄캄한 한밤중이었다.
도둑이 물건을 훔치기 좋은 타이밍이다.
꼬리 부분에 힘을 주었다.
펠레리안의 반지가 느껴진다.
아공간 마법을 시도해 봤다.
원래는 아주 쉬운 일이었는데, 아직 진화가 완벽히 되지 않아서인지 간신히 성공했다.
'이실아!'
그리고 그 안에서 이실이가 튀어 나왔다.
원래는 엄청 느릿느릿한 녀석인데, 아공간에서 빠져나올 때는 재빨랐다.
이실이는 곧바로 내게 안겼다.
'너도 나 많이 보고 싶었구나.'
철썩철썩.
그런데 이실이가 이파리로 자꾸 나를 때렸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섭섭했나 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반지의 아공간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된 건 얼마 안 됐으니까.
잠시 동안 이실이의 투정을 받아 준 뒤, 나는 녀석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
이실이는 찰떡같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
'해 줄 수 있지?'
그러자 이실이는 내 몸에 붙어 있는 상태로 천천히 덩굴을 뻗치기 시작했다.
길게 뻗칠 수 있는 것은 아쉽게도 두 가닥이 전부인 것 같지만. 이걸로 만족해야지.
우선순위는 양피지와 청자기였다.
그것에 이실이의 덩굴을 조심스레 얹었다.
창고 안은 조용했다.
하지만 잠시 후부터는 아닐 것이다.
'지금!'
그리고 이실이가 잡아챈 물건을 끌어당겼다.
휘리리릭-
마치 길게 뽑아 둔 줄자가 휘감기듯 후루룩 끌려온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투명한 손으로 눈독 들였던 물건들을 챙겼다.
삐이이이이이이-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경보음이 울렸다.
'이실아, 잠깐만 다시 들어가 있어!'
챙긴 물건들과 이실이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삐이이이이-
철컹! 철컹!
진열장들의 주변에 갑자기 철창이 튀어나왔다.
시뻘건 조명이 텅, 하고 켜지기도 했다.
곧 무장한 경비병들이 달려올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골렘이 가동한다!
창고 내부에는 골렘까지 숨어 있던 것이다.
도둑을 퇴치하기 위한 골렘 같은데.
──────────────
[베롤링거 가의 창고 경비]
[특성]
[경비], [골렘]
[스킬]
[비상경보lv10], [참격 내성lv10], [잡아 찢기lv10], [돌주먹lv10]
──────────────
그 골렘의 수준이란....
-형편없군.
'허접골렘.'
지금의 내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중급원소마법:물lv2를 사용합니다.」
물구슬을 만들어 골렘의 머리에 씌운다.
숨이 막혀 죽지는 않겠지만. 놈의 감각 장치가 교란되었다.
녀석은 더 달려오지 못하고 일시 정지했다.
-저 명치 아래다.
*「중급원소마법:바람lv2를 사용합니다.」
바람의 나비가 팔랑거리며 접근한다.
명치 아래의 틈에 나비가 들어가더니.
터엉!
폭발하면서 가슴팍의 보호 장갑을 뜯어냈다.
*「투명한 손lv17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챙겨 둔 레이피어, '키클롭스의 외눈 관통자'를 잡아 날렸다.
뾰족한 칼끝이 골렘의 핵을 꿰뚫었다.
파각!
그것으로 끝이었다.
골렘은 완전히 작동 정지했다.
*「베롤링거 가의 창고 경비를 처치했습니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녀석이군.
하기사. 이 정도 골렘쯤이야.
어, 나는 이미 화이트 혼 스네이크였을 때 너보다 센 골렘을 두 마리나 해치웠어.
잠시 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경비들이 진입을 위해 창고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경보가 울리고 골렘을 처치한 것은 정말 눈 깜짝할 새였으니, 제법 빠른 대처다.
콰앙!
문이 열리고.
"누구냐! 감히!"
경비병이 우르르 들어온 순간.
나는 준비했던 것을 실행했다.
*「투명한 손lv17을 사용합니다.」
그저 투명한 손으로 창문을 깨뜨렸을 뿐이다.
챙그랑!
경비병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제, 젠장, 밖이다. 창밖으로 나갔어!"
'도둑이 벽을 기어올라 창문을 깨고 도망쳤다.'
그들의 눈에는 상황이 그리 보였으리라.
경비병들이 우르르 뛰어나갔다.
뭐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굳이 도망칠 필요도 없었다.
뱀 모양 수정 조각은.
다행히 도둑이 훔쳐 가지 않았고, 3열 선반 2층 한구석에 조용히 있었을 따름이니.
그야말로 완전범죄였다.
136. 가면 쓴 멋쟁이
경비 조장이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침입자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나?"
"예...."
"제기랄, 벌써 4시간이나 지났는데 도둑놈 하나 못 찾았다는 게 말이나 돼!"
결국 화가 폭발했다.
혼나고 있는 이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찾아내! 어떻게든 찾아내란 말이야!"
"하지만 발자국도 없어서...."
"제기랄, 발자국 같은 소리. 네 면상에 발자국 찍어 주기 전에 바깥에서 사냥개라도 데려오란 말이야."
"아, 그, 그러겠습니다."
도둑이 창문을 타 넘은 것은 확실하다.
원래는 그 바깥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경비병들이, 경보 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 탓에 도둑이 빠져나와서 어디로 숨어들었는지를 알 길이 없었다.
흔적 하나 남지 않았으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투명화 마법과 공중부양이 가능한 마법사일 확률이 높아."
"안에서 마법의 사용 흔적이 있었으니... 지금 탐색용 아티팩트를 전부 수색 쪽에 들려 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실상은 혼나는 이보다 혼을 내는 경비 조장이 더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곳, 궁정백 님의 거처 경비를 더 강화해라. 기사들을 소집해."
"그럼...."
"처음부터 소란을 일으켜서 경비병력을 이동시키고, 중요한 곳에 침입하려는 계획이었을지도 모르겠어."
"설마 암살 시도라도...."
'암살 시도'. 부하가 그 단어를 내뱉자 경비 조장은 그를 죽일 듯 노려봤다.
창고가 털린 지금의 상황마저 경비 조장에게는 충분히 버거울 것이다.
더 끔찍한 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푸흐흐, 거기까지 해라."
장미목 의자에 걸터앉은 궁정백이 그리 말했다.
"내 목 따러 온 거였으면 여러 명이 동시에 침입했겠지. 겨우 한 놈이 4시간에 걸쳐서 그리 숨바꼭질을 하겠냐. 나 지미어 베롤링거가 그리 쉬운 놈이야? 새끼.... 대가리가 그리 안 돌아가서 어쩌누."
"소, 송구합니다."
"이미 동튼 지가 2시간이 넘어. 도망친 게 분명한데 푸닥거리 그만하고 애들 물려라. 곧 손님들 올 텐데 동네방네 내가 창피당한 거 소문이라도 낼 참이냐?"
"명에 따르겠습니다."
경비대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그렇게, 궁정백의 창고를 털어간 대도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니.
다름 아닌 궁정백의 바로 옆에 있었다!
-이야, 많이도 털었는데 이리 침착한 것을 보니 대단한 놈이구나. 돈이 많기는 한가 보군.
둥둥 떠 있는 펠레리안이 팔짱을 끼고 지미어 궁정백을 살폈다.
실제로 궁정백은 전혀 분노한 티가 나지 않았다.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궁정백이 들고 있는 것은 창고의 재고를 체크한 리스트였다.
펠레리안이 확인한바, 내 이름은 '수정 와이번 기형종 박제.'였다.
보는 눈 없는 자식들.
그리고 옆에 표기되기를, '반출'이라고 적혔다.
반출 체크가 된 다른 물건들과 함께 이렇게 지미어 궁정백의 곁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반출품들의 운명이 어떤 건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저택이 다시 잠잠해진 뒤,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인사 올립니다, 궁정백. 소위 자레드 레이커스입니다."
"오오, 자네가 자레드로군. 자작에게 아들 자랑은 여러 번 잘 들었네. 이번에 사관학교를 졸업했다고?"
"예, 다행히 수도경비대에 임관하게 되어 이리 인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작은 나무상자를 건넸다.
내용물이 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뇌물이겠지!
"뭘 이런 걸 다."
"아버지께서 늘 감사하다고 말씀 전해드리라고...."
"자작 맘은 내 잘 알지."
허허, 하하 하는 웃음소리.
궁정백은 지금 전통적인 사대부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인사를 받고, 선물을 받는다.
저 별것 없어 보이는 목함 안에는 분명 금은보화가 들어 있을 것이다.
"어, 내 자네를 보니까 생각나는 물건이 있네. 몹시 어울릴 것 같아서 아껴 둔 건데 ...."
그러고는 보지도 않고 손을 더듬어서 물건 중 하나를 고른다.
내 옆에 있던 휘황찬란한....
"어 그, 머리핀이군. 나중에 맘에 드는 영애를 만나면 선물해 봐."
"아... 감사합니다!"
뇌물만 받고 입을 싹 닫는 건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걸까.
궁정백은 자신에게 들어온 물건 중 나갈 것들을 골라서 이렇게 하사품으로 주는 것 같았다.
물건이 뭐고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젊은 장교는 감사하다며 머리핀을 소중히 품에 넣고 나갔다.
그런데 그가 나가자, 궁정백은 목함을 열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대충 뒤로 던졌다.
쩔렁-
목함 안에 들어 있던 금화가 와르르 쏟아졌다.
그것을 하인이 얼른 다가와서 모았다.
'별로 돈에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저런대요?'
-돈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적은 돈에 관심이 없는 것이겠지. 뇌물 장사는 저 정도 되는 놈들에게는 그저 용돈 벌이에 지나지 않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 업무 같은 것일 테고.
펠레리안의 말투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까 펠레리안이 꼰대이기는 해도, 대륙공적 비슷한 취급을 받았었다.
권력자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것도 당연한 것 같다
'난 누구한테 주려는 걸까요.'
-어디든 여기보다 낫겠지.
진화를 진행하는 동안, 여러 고민을 했다.
이렇게 큰 도시에 들어온 것은 처음 아닌가.
이왕 수도까지 온 김에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치울 생각이었다.
첫 번째로는 펠레리안의 금고를 찾는 것.
왕립은행의 특급 금고라고 했다. 그 안에 뭐가 있는지 한번 보고 싶다.
겸사겸사 괜찮은 게 있다면 몇 개 챙겨도 되겠지.
하지만 문제는 내가 열쇠를 가져가 봤자 열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인간 협력자를 찾아야 했다.
사실, 원래는 헤일릿 랑그레이에게 부탁할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 나쁜 인간이 나를 팔아 치워 버렸으니, 새로운 협력자를 찾아야 한다.
로일이나 아마엔을 만나면 좋겠는데 일단 그 둘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말이지.
그런 면에서 이곳은 그리 좋지 않았다.
병사들도 너무 많고, 저 지미어 궁정백이라는 대귀족도 만만해 보이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이면 좋겠다.
좀 어설프고 바보 같아서 부려먹기 좋으면 딱일 텐데.
-인간을 조종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지.
'오호.'
-아예 마음을 탄복시켜서 충성스러운 부하로 만들거나. 대가를 제시해서 고용하거나. 혹은 목숨줄을 틀어잡고 협박해 영혼을 사로잡고 노예로 만든다든지. 그중 제일은 역시....
펠레리안의 인적자원관리법에 의하면.
-세 번째.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왜 그런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마음으로 탄복한다는 게 말이야 쉽지. 그 대상이 자기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면 마음이라는 건 또 갈대처럼 움직이는 법이다. 그러니 탈락. 대가를 제시해서 고용할 경우에는 더 많은 것을 주는 놈이 나타나면 홀랑 배신할 게 분명해. 그러니 노예로 만드는 게 최선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부하가 골렘이랑 마도정령밖에 없지.'
아하 그렇군요!
실수로 생각과 '생각'을 거꾸로 해 버렸다.
펠레리안이 씨근덕대면서 화내는 중.
누군가가 또 들어왔다.
"주인님, 오베른 교수가 도착했습니다."
"오오. 들어오라고 해라."
여태까지와는 달리 궁정백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느껴졌다.
앞으로 들어올 녀석 중에 내 부하(혹은 신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신하 후보를 찾는 왕의 마음으로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들어온 '오베른 교수'를 봤을 때.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조금, 압도당했다.
저벅.
'교수'라는 말에 배 나온 중년인을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장신의 젊은 신사였다.
긴 금발을 단정히 뒤로 묶고, 무척이나 비싸 보이는 코트를 걸쳤다.
속눈썹 역시 길고 피부는 희고 단정해서 학자라기보다는 마치 수도의 유명 모델 같기도 하다.
그러나 느껴지는 분위기가 가볍지는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걷는 것만으로도 기품이 느껴지는 법이다.
오베른이 그러했다.
반면 날카로운 헤이즐색 눈동자와 곧은 콧대. 굳게 다물린 입과 큼지막한 손에서는 사내다움이 공존한다.
"오랜만이구만, 교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궁정백."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게 또 절묘했다.
완벽한 예법인데, 정중하면서도 비굴해 보이지는 않는다.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미소 짓지도 않는다.
여태까지 간이라도 빼다 바칠 듯 헤헤 웃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저 자식, 제법 멋진데요?'
-흐음, 그렇긴 하구나.
펠레리안마저 인정했으니 말 다 했다.
일단 신하 후보로서 가점 부여.
이왕이면 멋진 녀석이 낫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까 로일은 너무 아저씨같이 생겼다는 말이지. 아저씨니까 당연하지만.
"수도에 온 지 얼마나 된 건가?"
"어제 도착했습니다."
"바로 달려온 거군, 고맙구먼, 으허허-!"
궁정백은 오베른 교수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교수와 궁정백이 무슨 사이인지 궁금했는데, 몇 번 들었던 단어가 나왔다.
"에메랄드 스쿨의 면접 일정이 잡혔다며?"
"역시 궁정백이시군요. 이곳에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계시니."
조금 감탄했다.
저 교수는 대놓고 아부하면서도 전혀 아부처럼 들리지 않도록 하는 재주가 있었다.
워낙 진지한 말투로 말하고 생긴 게 번듯해서 그런가 보다.
"흐흐흐, 뭐 이 정도야. 그보다 괜찮겠나?"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제국의 큰물에서 놀다가 여기서 일하게 됐으니 말이야. 자네 연구 성과는 제국 학계에서도 인정받는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에메랄드 스쿨이 명문이라고 해도 그래 봤자 소국의 학교 아닌가."
궁정백이면서 제 나라를 소국이라고 칭하다니. 저 노인은 코스모폴리탄이며 글로벌리스트가 틀림없었다.
"잠시 휴양을 취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돌아왔습니다."
"휴양? 으허, 으하하하!"
왕국 최고 명문의 교수 자리를 휴양이라고 표현하다니, 오만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궁정백의 마음에 든 것 같으니. 잘생긴 놈은 뭘 해도 먹힌다.
-저놈 마법사 같은데. 제 경지를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놈이군.
'오, 그래요?'
-그래. 그리고 제국 학계 정회원이라면 한가락 하는 놈일 거다. 입지도 탄탄할 거고 어쩌면 황실에도 연이 있겠는데.
들을수록 마음에 드네.
언젠가 제국, 그리고 황궁 안에도 들어가 보고 싶은 내게는 탐나는 인재다.
"내 자네한테 거는 기대가 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이번에 삼 왕자가 입학하게 됐어. 자네가 옆에서 잘 관리해 주길 바라네. 어떤 똥파리들이 접근할지 모르니까 지켜 줘야 할 것이고."
"예."
"뭐, 자네가 왕자 곁에 있어 준다면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겠지. 하하핫!"
그리고 궁정백은 덧붙이듯 말했다.
"내가 자네 이야기는 전달해 두긴 했지만. 아무리 나라도 발라냐르 총장을 마음대로 다루지는 못해. 무슨 말인지 알겠나? 해 먹인 게 있으니 괜히 꼬장 부려서 면접에서 떨어뜨리지는 않겠지만...."
"필요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힘으로도 교수직쯤은...."
"으하, 으하하! 그래 그렇지. 하지만 뭐 절차라는 게 있지 않겠나. 자네는 그냥 실력을 조금만 보여 줘. 그러면 교수 임용쯤이야 틀림없는 일이겠지."
살짝 고개를 숙이는 오베른.
겸손해 보이지는 않는다.
"혹시나 자네가 교수가 못 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주 곤란해지니까 말야."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 이후로는 쓸데없는 잡담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엔 건너뛰는 건가 했는데, 역시 선물 교환식이 있었다.
다만, 교수가 궁정백에게 건넨 것은 금전이 아니라 옷소매와 타이에 다는 금빛 장신구였다.
"제국에서 구해 온 타이 핀과 커프스 링크입니다."
너무 가벼운 뇌물 아닌가 싶었는데.
궁정백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 이거 엘메스 아닌가!"
"알아보시는군요."
뭐 브랜드 이름 같은데. 유명한 건가 보다.
"그래, 이건 또 처음 보는 디자인인데.... 내가 컬렉션 카탈로그를 받아 보긴 하거든."
"후후, 별도로 주문 제작한 물건입니다."
"콧대 높은 공방이라 들었는데 주문 제작도 받았나! 역시 자네야."
선물은 저렇게 센스있는 걸 해야 하는구나. 한 수 배웠다.
"나도 자네에게 주고 싶은 게 있는데 어디...."
그는 제 곁을 뒤적이더니 나를 잡았다.
그러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
뭐요. 왜.
"이건...."
궁정백이 나를 다시 내려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오베른 교수가 멋진 말을 했다.
"호오, 멋진 물건이군요."
"그래? 맘에 들면 가져가게."
궁정백은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건네줬다.
그 태도가 조금 찜찜하기는 했지만... 뭐 나쁘지는 않다.
오베른은 나를 받아 들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혹시 이건 어떤 물건인지...."
"그거 말이지."
궁정백의 얼굴을 보니, 분명 나에 대해 까먹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대충 얼버무린 말은.
"수정의 저주를 받은, 날개 달린 뱀... 이었던 것 같군."
'수정 변질 석화 함정에 당한, 날개 없이 태어난 와이번 새끼 박제'에서 그렇게 변했나 보다.
오베른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악마적이군요. 마음에 듭니다."
자식, 웃는 것도 잘생겼군.
나는 오베른의 손에 들려 저택을 떠났다.
* * *
오베른 그리모아르.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제국 학계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그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마법 실력으로 정평이 났다.
제국에서 화려한 이력을 쌓은 그가 왕국으로 돌아왔다.
에메랄드 스쿨의 교수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대단한 녀석을 내 부하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나는 부하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
로일이나 아마엔, 둥켈, 혹은 자인 같은 녀석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태까지와 달리 자신감이 떨어졌다.
오베른은 거물 같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만났던 영웅들. 대표적으로 군터, 마르테인 후작, 헤일릿 랑그레이 같은 애들이 더 대단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느껴지는 포스로 치면 오베른이 더했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는 헤일릿 그 이상한 여자보다 더 세 보였고 군터만큼 냉정해 보였다.
'음, 확실히 부담스러워.'
오베른은 솔리온 임펠의 호텔 방에서 묵고 있었다.
그의 취향이 반영된 듯 고급스럽고 깔끔한 방이었다.
그는 탁상 위에 나를 올려 두었다.
각도를 맞춰서, 오브제처럼 배치한다.
그러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름답구나."
이 자식 뱀 부끄럽게.
"허나 속은 시뻘겋고, 추악해."
역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군.
"마치 나와 비슷하다...."
'뭔 소리래.'
오베르는 그렇게 나를 쓰다듬더니.
갑자기 털썩 주저앉았다.
"제기랄, 궁정백...!"
그러곤 갑자기 땅을 치면서 분노를 터뜨린다.
깜짝 놀랐네.
"그렇게 잘난 척을 했으면서 합격도 못 시켰다고!"
아, 교수직 얘기인 건가.
오베른은 머리를 감싸 쥐더니 무척이나 불안해했다.
"아아, 어떡하지. 자칫해서 실력이 들키기라도 하면.... 진짜 지하감옥행인데."
어라.
엄지손톱을 물어뜯는 오베른에게 조금 전의 위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궁정백 그 새끼는 무슨 엘메스 장신구 컬렉션을 꾀고 있어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가품인 게 들키지는 않겠지. 하아, 그 자식만 철석같이 믿고 돌아온 건데."
헉, 이거 뭐 하는 놈이야?
설마 그 센스있는 선물도 가짜였던 건가.
나도 펠레리안도 깜짝 놀랐다.
-이, 노, 놀라운 놈이구나.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엄청나게 있어 보이는 녀석이었는데, 허풍쟁이에 전부 다 연기였던가.
그렇다면 진짜 배우를 해도 모자라지 않을 수준이다.
무대가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할 녀석이었지만.
-오히려 잘된 것 아니냐.
'네?'
-딱 노예로 부리기 적당한 수준의 녀석이로고....
오, 생각해 보니까 틀린 말이 아니다.
내 앞에 혼자 쭈그려 앉아서 머리를 쥐어뜯는 저 사기꾼을 보고 있자니.
기막힌 발상이 떠올랐다.
137. 악마적인 수정 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싸움에 위태로움이 없다.
또한 사자박토라 하여, 백수의 왕인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는 데에도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나는 사자가 아니라 뱀이었지만 그와 다를 게 없었다.
오베른 그리모아르.
그 잘생기고 냉정한 금발 미남이 사실 생긴 것과 달리 어설픈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관찰했다.
생각할수록 오히려 상황이 괜찮았다.
완전무결한 젊은 천재 교수(냉혹함, 마법의 천재)를 솔직히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 솔직한 생각을 펠레리안에게 말하니.
-내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네 앞에 있는 이 나야말로 저 어리석은 인간이 꾸며 내길 바라던 그 모습이 아니더냐...?
펠레리안이 워낙 진지한 말투로 물어보길래 나도 당황했다.
-내가 젊은 시절 썼던 가짜 신분으로도 제국학회 우수회원이었으며, 마법을 배운 지 5년 만에 마도사의 자격을 얻었다. 그야말로 저 인간이 모방한 모티브 아니겠느냐.
'아....'
-그런데 너는 단 일말의 두려움 없이 함부로 날 대하면서 뭐 그런 걸 불편해하는지 모르겠구나.
할 말이 없었다.
사실 할 말이 너무 많았는데 차마 할 수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솔직히 말했다가는 펠레리안이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 이 뱀의 마음이 워낙 따듯하고 말랑거린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다.
'하여튼, 오히려 다행이에요.'
내가 오베른 그리모아를 관찰해 본 바.
그는 연기력 하나는 기가 막히는 인물이었다.
마법사나 학자가 아니라 배우로 진출했다면 대성했을 텐데, 왜 쓸데없이 마도의 길을 걸었을까.
마탑에 들어가든 오베른처럼 학계에 발을 담든, 본질적으로 마법사들은 학자이자 연구자이다.
다만 성향에 따라서 어떻게 사느냐는 갈리겠으니. 오베른은 야망이 많은 유형이었나 보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몰락 귀족의 자식이었다.
장남은 도박에 빠졌다가 불량배들에게 맞아 죽었고.
누나는 운 좋게 시집을 잘 갔지만 가문이 망한 뒤에는 본가와 연락을 끊었다.
가문이 몰락하고 영지를 잃은 지 오래였지만 그 씀씀이가 쉽게 줄어들 리 없다.
오베른의 어머니는 결핵에 걸려 쓰러졌고, 아버지는 술에 절어 살았다.
부부의 희망이 영석한 막내 오베른에게 쏠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어린 오베른의 눈에는 영특함이 번뜩였다.
어딜 가든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이미 자신을 포장하는 방법을 깨우쳤던 걸지.
그 당시에는 천재성의 편린을 지니고 있었던 걸지는 모른다.
'일단 혼잣말이 많은 친구고!'
오베른은 혼자 있을 때 종종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것도 대부분이 '아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류의 후회하는 말을.
나와 비슷해서 친근감이 들었다.
"그때 유학을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베른은 수염도 나기 전에 제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천재성이 흐려진 것도 대략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허세와 기만으로 돌탑을 쌓아 올렸다.
밑의 돌을 빼 위에 쌓고, 남의 공로를 가로채서 제 것으로 만들었다.
타고난 외모와 말솜씨, 분위기로 쌓아 올린 가짜 신화였다.
그리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하나라도 들키면 인생의 돌탑 전체가 무너진다.
최소한 감옥에 갈 것이고, 모욕당했다 생각한 권력자에게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
그게 두려워진 오베른 그리모아르는 도망치다시피 귀국했다.
에메랄드 스쿨의 교수직이 희망이었다.
오베른의 학문 수준이 조금 낮다 해도, 아직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적어도 그리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가짜로 꾸며 낸 인생이 어찌 순탄대로일까.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 오베른이었지만 속내는 곪아 있었다.
저 젊은 사기꾼은 불안에 침식되어 있다.
매일같이 악몽을 꾸고, 밤만 되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술을 마신다.
나는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며 틈을 찾았다.
무시무시한 뱀으로서.
저 가여운 사기꾼의 심장을 물어서 독을 주입하리라.
그렇게 어둠 속에서 머문 지 며칠이 흐르고.
진화의 완성을 하루 남긴.
진화 시작 29일 차 밤.
'내 노예가 되어랏!'
나는 기회를 잡았다.
* * *
오베른은 유리로 만든 위스키 글라스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호박색 액체.
어쩐지 고급 위스키로 보였지만, 사실 동전 몇 푼으로 살 수 있는 싸구려 럼이었다.
참나무 칩을 넣고 숙성해 색과 향만 뽑아낸, 먹으면 마치 찌르는 듯 날카로운 싸구려 술.
오베른은 그것을 마셨다.
아래층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아련히 귓가를 스쳤다.
'그래, 교수직만 따내면....'
하지만 자신이 없다.
만약 그 발라냐르 총장이 참관한다면?
그 초인은 오베른이 쓰고 있는 가면 따위야 단번에 꿰뚫어 볼 것이었다.
그러면 끝이다. 단번에 그는 추락할 것이다.
불안이 치밀어오르니 손이 떨렸다.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잔을 놓쳤다.
퍼석-
하고 잔이 깨졌어야 했다.
싸구려 위스키가 카펫을 적셔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잔은 바닥 부딪치기 직전의 상태로 정지해 있었다.
우뚝, 기울어진 그대로.
술을 너무 마셔서 환각이라도 보는 것일까.
오베른은 일순간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그 잔이 떠올라서 다시 탁상 위로 올라갔다.
여기서부터는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탁상 위에 놓인 펜이 떠오르더니 저절로 움직여 노트 위에 글씨를 쓰는 것이다.
「가여운, 오 가여운 그리모아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환각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오베른에게 필담을 전하고 있는 상황이 분명하다.
「아무리 도망쳐 봐라. 너는 망신을 당할 것이고 모든 것이 탄로 날 것이다. 죽음이 너를 쫓고 있으니. 끝까지 도망쳐 봐라 그리모아르.」
숨이 거칠어졌다.
오베른은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호흡이 무너진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연기였다.
누군가 마법으로 글을 쓰는 건가.
아마도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도청을 당하고 있을지도.
오베른이 입을 열었다.
"겁 없는 놈이군. 하찮은 것이 감히 누구를 위협하는 거지?"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성에가 낄 듯 차가운, 오만한 천재 오베른의 말투가 맞았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 내심 긴장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설마.
그러자 창문이 떨듯 진동하고 사방에 바람이 불어 재낄 줄이야.
파라라라락!
그것이 꼭 웃음소리 같았다.
방 전체가 오베른의 연기를 비웃는 것 같았다.
「하하하, 겁먹은 새 같구나, 그리모아르. 그러나 네 연기로 속일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니. 내 예언하지. 너는 곧 죽을 그 날까지 다른 사람들을 속여 넘기려다가 비참하게 목이 잘릴 것이다.」
평소의 오베른이라면 침착하게 연기를 이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궁정백 앞에서도, 제국의 황실에서도 태연하게 가면을 유지하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오베른의 비밀을 알고 있다.
제국이 아닌 이곳 왕국에는 그럴 만한 자가 없을 텐데.
혹시 사람이 아닌 걸까. 그렇다면 악마라도 되는 것인가.
그의 기만과 거짓을 꿰뚫어 보고 비웃는 악마가 나타난 것일까.
오베른은 간신히, 떨림을 억누르고 물었다.
" ...누구냐."
「어둠 속을 기는 것. 희고 또 검은 것. 마도의 조종. 하늘을 거스르는 것.」
아아.
떨리는 손을 억지로 움켜잡았다.
누군가가 마법을 이용해 오베른을 농락하는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그렇겠지.
펜이 저절로 움직였다.
'살아 있는 물건' 주문일까.
'투명한 손' 마법으로 펜을 쥐고 움직이는 건가. 아니, 그런 평범하고 단순한 마법은 설마 아니겠지.
혹은 염동력으로 멀리서 조종하는 것은... 그렇다면 이 방 내부를 보고 듣는 마법적 장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벌레나 쥐를 패밀리어로 삼아 숨겨 뒀거나.
오베른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확실한 대처는 하나뿐이다.
마법을 막는다.
그래, 그 정도 아티팩트는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만큼 오베른은 아티팩트에 집착했다.
품속에서 꺼낸 정육면체의 큐브를 비틀자, 그것은 네 조각으로 나뉘었다.
오베른은 그 조각들을 방 안의 네 코너에 흩뿌렸다.
떼구르륵-
마력의 간섭을 막는 차폐막이다.
효과가 오래가지는 않지만, 바깥에서는 이 차폐막을 뚫고 관찰 마법을 쓰지도, 패밀리어를 부리지도, 살아 있는 물건 마법을 쓰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각사각-
펜은 그런 오베른을 비웃듯 움직였다.
「그럼, 지옥에서 보자. 오베른 그리모아르.」
"너, 너는 누구냐! 악마냐!"
펜이 힘을 잃고 뚝 떨어졌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베른은 공포에 질렸다.
방 안에는 그와 얼마 전에 받은 수정 뱀 박제뿐이었다.
병에 남은 싸구려 럼을 단번에 들이켠 다음, 오베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다.
그리 떨다가 꺼무룩 잠이 들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숙취에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보니, 탁상에는 어제의 메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럼 지옥에서 보자. 오베른 그리모아르.」
악마적인 악필이다.
꿈이 아니었다.
오베른은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어디로?
제국에도 왕국에도 그가 도망칠 장소는 없었다.
당장 내일이 그의 면접일이다.
오늘은 그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마법 시약을 사야 한다.
오베른은 서둘러 몸을 단장했다.
금방 멀끔해졌지만 눈 아래의 그늘만은 숨기지 못했다.
그것이 오히려 어울려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그는 짐을 마구 싼 뒤 호텔 방을 나섰다.
그러고는 로비로 내려가 퇴실하겠다고 말했다.
"저어, 혹시 숙박하시던 와중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셨을지...."
"...큭."
그리 묻는 로비의 직원을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짐을 담은 수트 케이스를 들고 무작정 걸었다.
경비도 부족하니, 여관으로 갈 수밖에.
이번에는 누가 쫓아오지 못하게 신경을 썼다.
인파 속에 숨어 들어가, 강가로 갔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1층에 선술집을 운영하는 여관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요구하길.
"1인실, 코너 방으로. 혹시 그 옆방도 비어 있으면 같이 지불하지."
"어...."
여관의 여급은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보는 귀족적인 미남이 이런 곳에 찾아왔으니, 당황할 법도 했다.
"방이 없나?"
"아뇨, 있어요!"
방에 들어가 짐을 대충 처넣고 나왔다.
이번에는 창이며 천장을 뒤져서 미리 마법적 방어장치를 해 뒀다.
밖에서 도청하거나 원격으로 마법을 쓰지는 못하리라.
그는 비틀거리며 여관을 나왔다.
이제 마법 시약을 파는 곳으로 가서... 일단 내일을 위해 사야 할 물건들을....
턱.
누군가 오베른과 부딪쳤다.
장신인 오베른과 키가 비슷한 자였다.
갈색 머리카락과 자신만만한 미소, 살짝 처진 눈의 사내.
"오베른?"
"...."
"이거 오베른 그리모아르 아니야!"
마법 시약을 파는 가게 앞에서.
제국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기생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야, 이 새끼.... 진짜였나 보구나."
"...코번트?"
"코번트? 하하."
게다가 그 동기생이, 오베른의 허세와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일 확률은?
"넌 코번트 님이라고 불러야지. 오랜만에 봐서 까먹었나 보네."
"...."
"네가 갑자기 학회 정회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지 뭐냐. 하하, 어떻게 한 거야? 뇌물?"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오베른은 신경 쓰이는 점을 물어보았다.
"...'진짜였나 보다'니, 그건 무슨 말이지?"
"새끼 목소리 깔기는...."
코번트가 말했다.
"너, 에메랄드 교수직 지원했다며. 이번에 나도 지원했거든."
"...."
"참 잘됐다. 반가워 아주."
그 문구가 떠올랐다.
「지옥에서 보자, 오베른 그리모아르.」
정말로, 오베른은 하룻밤 만에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회포도 풀 겸 술이나 한잔하자! 흐흐."
코번트가 오베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오베른은 휘청, 흔들리면서 끌려가다시피 걸었다.
* * *
진화 30일 차.
진화까지 남은 시간, 대략 10분.
이전엔 반투명한 수정을 들여다보면, 새빨간 덩어리 같은 게 꿈틀거렸다고 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펠레리안의 묘사에 따르자면, 피는 여전히 묻어 있지만 육체가 완성되었다고 했다.
──────────────
[리틀 프린스 서펜트lv1]
──────────────
진화를 마치는 동안, 마성을 소모해 스킬 몇 개를 함께 진화시켰다.
나는 더 강해졌다.
이제, 수정을 깨고 나오기만 하면 된다.
'아주 악마적인 뱀.'
-그래그래.
'저 연기 어땠어요?'
-글씨 쓰는 것도 연기라고 할 수 있냐?
그게 어때서.
논검도 비무로 쳐 주는 법이다.
왜, 상상력이야말로 최고의 그래픽엔진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젯밤 내 혼신의 연기 덕택에 오베른 그리모아르는 완전히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내가 챙겨온 말파스의 양피지.
나는 그걸 이용해서 오베른 그리모아르와 계약을 맺을 계획이었다.
'한번 흔들어 놨으니, 협상하기 더 좋아졌겠죠.'
며칠 동안 그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을 이용해 오베른을 흔들어 두었다.
나를 두려워하는 것 같으니, 내 몸 크기가 작다고 얕보지는 않겠지.
-이걸론 부족하단 말이야. 진정 노예로 만들려면 아예 정신과 이성을 무너뜨려야 한다.
'생각해 보니 노예로 만드는 것까지는 조금....'
-나약한 소리!
'어, 그나저나 얘는 왜 이렇게 안 돌아오는 걸까요.'
화제를 돌리려고 한 말이지만 확실히 신경 쓰였다.
이미 한밤중이 되어 창밖이 어두웠고, 비까지 내렸다.
우르릉-
천둥까지 치는 험한 밤이다.
뭐 외박이라도 하는 걸까. 참 뱀 걱정되게 말이야.
쩌저저정!
번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깜짝 놀랐네.
돌아온 것은 당연 오베른이었다.
우산도 없었는지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철퍽, 철퍽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턱, 하고 문을 닫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지금도 나를 보고 있나. 악마...."
뭐지 왜 저래, 또 연기 타임인 건가.
그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머리를 감싸 쥐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나는 지옥에 떨어진 건가."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했다.
펠레리안이 알려 줬다.
-피, 손에 피가 묻어 있다.
'헉!'
오베른은 손에 피를 묻힌 상태로 돌아왔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데, 그럼 남의 피인가.
"죽였어, 그래, 내가 코번트를 죽였다."
그는 울면서 중얼거렸다.
코번트가 누군데....
"죽일 수밖에 없었어!"
쩌저저정!
천둥이 요란했다.
펠레리안이 클클 웃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목소리가 자못 음흉했다.
-바로 지금이다. 악마에게 혼을 팔 수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왔어!
진화 완료까지 5....
4, 3, 2, 1.
나는 투명한 손으로 펜을 들었다.
쩌저적.
동시에, 내 몸을 뒤덮고 있던 수정 조각에 금이 갔다.
악마적인 서펜트, 강림.
138. 노예계약
취기였을까.
혹은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 듯.
오베른 역시 그의 추한 비밀을 알고 있는 코번트를 물 수밖에 없던 것일까.
취한 코번트에게 뺨을 맞아서일지도 모른다.
수치심과 분노가 왈칵 치밀어 올라서 그랬던가.
아니면 차가운 이성이 개입했을지도 모른다.
코번트가 이곳에서 오베른을 만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달리 없었을 것이다.
만나자마자 바로 술집에 갔으니, 다른 이에게 '내가 오늘 누구를 만난 줄 알아?'하고 떠들 시간도 없었겠지.
술집에서 빠져나온 뒤, 그들은 비틀거리면서 걸었다.
캄캄해진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모든 것을, 피마저 씻겨 내려 줄 만한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그 밤.
솔리온 임펠의 하수가 섞여서 넘실대는 강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 강에는 하루에도 몇 구의 시신이 유기된다.
코번트쯤 더해져도 아무도 모르겠지.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딴 논리적인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오베른은 그저 머리가 하얗게 질렸을 뿐이다.
그의 뺨을 친 코번트가 하하 웃었을 때. 이미 마법을 시전해 버렸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원소 마법.
'얼음송곳'.
푸욱!
그것이 코번트의 배에 틀어박혔을 때, 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가웠을까, 뜨거웠을까?
자고로 증오하는 누군가를 몰래 죽이기에는 얼음송곳만 한 마법이 없다. 전통적으로 검증되기를 그랬다.
녀석은 오베른을 움켜잡으려 했지만.
탁, 하고 손을 뿌리쳤더랬다.
코번트는 풍덩 하고 하수구에 빠졌다.
새카만 물은 단번에 그를 집어삼켰다.
죽음은 코번트와 함께 오베른의 추악한 비밀마저 삼켜 버렸으니.
오베른은 기쁘고 후련했더라.
하지만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스스로가 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네 말대로 나는 지옥에 떨어진 건가."
악마의 예언이 사실이 되었다.
이제는 알았다.
누군가 그를 보고 있다면, 그 운명까지 훑어보았음이 틀림없다.
이렇게 사람의 영혼을 유린하고 농락하는 것은 악마뿐이겠지.
"죽일 수밖에 없었어...."
변명, 그저 구차한 변명.
하지만 신도 아닌 악마에게 살인을 변명할 이유가 뭘까.
후두드득.
새카만 잉크가 울고 있는 오베른 앞에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또다시 그 펜이 춤추고 있었다.
이 악마는 무엇을 원하고 그에게 찾아온 걸까.
펜이 움직여서 왼쪽 손등에 글을 썼다.
「거짓과 기만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나?」
악마가 왼손에 구원을 제안했다.
「원한다면 전부 주지. 네가 원하는 교수직을 주마. 그리고 여태까지 접하지 못한 심유하고 깊은 마도의 지식, 막대한 부를,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진짜 힘을...!」
진짜 힘이라.
고개가 저절로 움직였다.
끄덕.
펜이 떠오르더니, 오른쪽 손등에 글을 적었다.
「고개를 들어 내 모습을 보아라.」
쩌저적, 툭.
눈앞에 수정 조각이 후두둑 떨어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오베른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녀석'이 와 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건가.
흰 뱀이 수정을 깨고 나왔다.
평범한 뱀이 아니라는 것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세상 어떤 뱀이 수정 왕관을 쓰고 있으며, 그 비늘이 저리 반짝일 수 있다는 말인가.
놈은 불꽃처럼 빛나는 두 눈으로 오베른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오베른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작군.'
기껏해야 팔뚝 이쯤 될까. 아직 성체가 아닌 듯도 보였다.
악마의 폴리모프라면 왜 저렇게 작게 변신했을까.
하지만 크기로 상대의 힘을 짐작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으리라.
"...대가는?"
떨리는 목소리로, 오베른은 중요한 것을 물었다.
"원하는 것은, 내 영혼인가?"
그 말을 듣고, 뱀은 깍깍 웃기 시작했다.
* * *
시커먼 아저씨 영혼으로 뭘 하라고.
받아서 국수 끓여 먹을 것도 아니고 그딴 건 필요 없었다.
얘는 너무 잘생겨서 자의식 과잉이라도 생겼나.
-이번엔 제법 연기가 괜찮았다.
'뭘요. 그래도 진화를 해서 좀 더 위엄 있게 보이나 봐요.'
-그건.... 아니, 됐다.
아직 거울을 보지는 못했지만 대충 내 모습이 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늘이 더 고풍스럽게 반짝였다.
다만 사이즈가 확실히 작아진 것 같은데, 그건 다음에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나는 펜을 다시 움직였다.
「네 영혼이 나한테 왜 필요하지?」
"...어?"
그리 묻자 오베른은 얼빠진 얼굴을 했다.
'악마니까...?'
「나는 네게 도움을 주고 너는 내게 도움을 주고, 그뿐이다.」
나는 엄밀하게 설명해 주었다.
-인마! 노예로 삼으려면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놔둬 봐요 그냥!'
구체적으로 확실히 적어 두고 계약서로 명시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저 오베른이라는 인간을 어떻게 이용할까.
나는 며칠 내내 그것을 고민했고, 결국 가장 현실적이고 훌륭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나와 계약을 맺는 것이다.」
"계약 ...."
「읽어 보고 서명하도록.」
궁정백의 창고에서 얻은 물건.
──────────────
[말파스의 양피지]
──────────────
악마가 계약을 할 때 사용하는 그 양피지로, 나는 이 인간을 노예로 삼으리라!
-하아.
펠레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끝까지 '이게 진짜 맞는 건지....'하며 고민했었다.
오베른은 천천히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백색의 서펜트(이하, '갑'이라 함)와, 인간 오베른 그리모아르(이하, '을'이라 함)은 다음과 같이 고용계약을 체결한다....」
처음으로 내가 '갑'인 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이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인지.
오베른이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떠냐 이 악마적인 계약서가.
아무리 가혹하고 잔인한 조건이라도, 너는 서명할 수밖에 없으리.
* * *
오베른은 계약서를 정독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그는 팍팍한 삶을 살아왔다.
신분을 들키지 않고 빠르게 돈을 벌기 위해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고용당해 본 경험도 많다.
그리고 지금 이 고용계약서는....
「제1조.
1)'갑'은 '을'을 고용하며, '을'의 '마도사'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조력'을 제공한다.
2)'조력'의 범위는 '마도 지식의 제공', '무력적 도움' 등을 포함한다.
3)'갑'은 '을'이 에메랄드 스쿨의 교수직에 임용될 때까지, 최선의 조력을 다한다.」
갑이 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계약서 제1조의 내용이 뱀이 오베른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계약서를 본 적이 있던가.
게다가 그 조항이 아주 세련되고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결코 길거리의 고용계약서가 아니다.
'역시 악마인가, 방심해서는 안 돼.'
달콤한 말로 속여넘긴 뒤 영혼을 훔치려는 수작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오베른은 그리 생각했다.
「...
4)'을'은 '갑'에 고용되어 '용역'을 제공한다.
5)'용역'의 수행과정에는 위험이 동반할 수 있으며, 이에 관해 '을'은 '갑'에게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
6) '갑'과 '을'은 서로의 사회적 지위와 생명,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의무를 다한다.」
'뭐라고...!'
오베른은 순간 전율했다.
악마의 계약은 거짓을 적을 수 없다.
하지만 6항, 서로의 사회적 지위와 생명,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의무를 다한다니.
악마가 내걸기에는 너무 선진적이고 자비로운 계약서 아니던가.
「제2조.
...
2) '을'은 '갑'의 지시사항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3) '을'이 '갑'의 지시사항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경우, 이하의 귀책 조항에 따라 페널티를 부과한다.
-말을 싸가지 없게 할 경우, 주먹 한 대
-말을 두 번 싸가지 없게 할 경우, 손가락 하나
-명령을 듣지 않을 경우, 칼침 한 대
...」
물론 가혹한 내용도 있었지만,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와서는 오베른의 마음 한구석에서 의구심이 솟아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지옥이 지상보다 살 만한 곳 아닐까.'
오베른은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적혀 있는 조항이 그의 망설임을 해소했다.
「특약사항)
'을'이 '에메랄드 스쿨 교수 임용'과정에서 탈락할 경우. 상기의 고용계약을 파기한다.」
사실 지금 오베른은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영혼까지 팔 수 있을 정도였으니.
수정 뱀에게 고용당하는 것 정도야.
오히려, 강대한 악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득 아닐까.
서걱서걱.
오베른은 자신의 이름을 적고 그 옆에 서명까지 마쳤다.
"혈판도 찍을까요?"
'어....'
뱀이 대답하기도 전에 오베른은 엄지손가락을 찔러 피를 냈다.
그리고 서명 위에 피로 지장을 찍었다.
뱀은 펜을 들어 싸인만 했다.
양피지가 빛나기 시작했다.
파르르르륵!
놀라운 일이었다.
양피지가 불꽃에 휩싸였다. 보랏빛 불꽃이다.
다만 종이가 탈 기색은 없었고, 불이 꺼지자 써 둔 글씨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하하하하!'
뱀이 펜을 열심히 움직여 글을 썼다.
'계약에 의해, 너는 이제 내 부하다.'
"...?"
고용계약서를 썼으니 당연한 일을 왜 굳이 강조하듯 말하는 걸까.
오베른은 알 수 없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뱀이 꼬리를 내밀었다.
그 제스처가 꼭 악수를 하자는 것처럼 보였다.
오베른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 작은 꼬리를 맞잡았다.
그리고, 신비로운 일이 벌어졌다.
뱀의 왕관이 번쩍 빛나더니.
키이잉-
손에서 찌릿, 정전기가 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력이 꼬리와 손끝을 따라 흘렀다. 마치 뱀과 이어진 듯하다.
그리고 귀에 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 들려?
분명 뱀이 말하고 있는 것이 맞았다.
입을 뻐끔거리지는 않아도 확실하다.
-오베른, 나는 뱀이야.
"아... 예."
-바보같이 말로 하지 말고, 머릿속으로 말해 봐. 집중해서 독백하듯.
'이렇게... 말입니까?'
-그래그래 그거야. 꽤 재능있네.
그런 건가, 이런 것엔 재능이 있는 것인가.
오베른은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은 악마입니까?'
-아니야, 리틀 프린스 서펜트지. 악마 따위랑 비교할 게 아니고. 하여튼 앞으로 잘해 보자. 너한테 건 기대가 커.
뱀은 오베른의 손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해 봤자 팔뚝만 한 작은 뱀이어서 똬리를 틀면 모자 속에 숨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너한테 시킬 게 많은데, 일단 내일이 그 면접날이란 거지?
'예, 맞습니다.'
-나랑 펠... 아니 내가 도와줄 테니까 가서 면접 뿌수고 잠깐 은행 좀 같이 가자.
'은행이요?'
-응, 거기 대여 금고가 있어서.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심부름을 시키듯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는 걸까.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뱀이 말할 때마다 떠오르는 감상이 있었다.
'...생각보다 얼빠진 목소리군.'
하지만 이미 달리는 뱀 위에 올라탄 형국이었다.
* * *
에메랄드 스쿨이라고 했지.
수도 한가운데에 그 정도 규모의 아카데미가 있을 줄이야.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면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나타난다.
건물 여러 채가 드문드문 있는데, 가운데에 있는 5층짜리 본관만 해도 대저택이다.
꼭 대학교 캠퍼스 같다. 그것도 미국이나 유럽에 있는 명문대학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차에서 내렸다.
스르륵 기어 내려간 것은 아니고, 오베른의 손목에 매달린 상태였다.
"이쪽입니다, 오베른 교수님."
아직 임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오베른은 교수라고 불렸다.
오베른 자식, 폼 잡는 게 보통이 아니다.
걸음걸이마저도 냉철한 젊은 천재 교수 그 자체다. 어제 무릎 꿇고 질질 짜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면접장에 들어갈 때까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긴장되지 않아?'
'엄청 되죠.'
정작 속으로는 달달 떠는 것 같은데.
티를 안 내는 게 거의 대배우 수준이다.
'연결의 왕관lv1'.
새로 얻은 그 스킬 덕택에, 나는 접촉한 대상과 자유자재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글씨로 필담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비밀스러운 방식이다.
물론 연결의 왕관의 효과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오, 그리모아르 교수!"
"실물은 처음이군."
방 안에 들어가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에메랄드 스쿨의 교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베른은 가슴에 살짝 손을 얹고 인사했다.
면접을 맡은 교수들이 덕담 비슷한 것을 던졌다.
"기대가 아주 커요."
"제국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눈치가 빠른 나는 알 수 있었다.
곱지 않은 시선 또한 쏟아진다.
과연 소문의 젊은 천재가 얼마나 대단할지, 직접 보고 확인하겠다는 태도다.
"준비하신 창작 마법을 보여 주시면 될 것이오."
면접관들이 앉아 있는 곳 앞에는 탁 트인 연무장이 있었다.
저절로 수복되는 허수아비 세 대가 저 먼 곳에 서 있었는데, 우선 창작 마법을 보여 주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후후. 기대가 되는군요."
"그 혹시 파동론과 불꽃 축제에서 창안했다는 그 마법이신가?"
교수들이 그리 물었다.
"아니."
원래는 그랬다.
오베른은 당초 불꽃 마법을 선보일 계획이었단다.
마법 시약을 사용해서 좀 더 화려하게 보이도록 얕은수를 쓰면서....
"아직 공개하지 않은 마법입니다."
"호오, 혹시 급조한 건 아니시겠죠? 하하하!"
오베른은 아주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글쎄, 어제 새로 창안한 것이긴 합니다만."
"...허허."
슬쩍 비꼬았던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법의 이름은 무엇인지."
"굳이 짓지 않았습니다."
"...자신감이 대단하십니다."
오베른은 허수아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일단 보여 주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주문을 읊지도 않았고. 수인을 맺지도, 스태프를 들지도 않았다.
그저 길고 흰 손가락을 살짝 들어 허수아비를 가리켰을 뿐.
"꿰뚫으라."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가 울리고.
'지금이닷!'
내가 마력을 불어넣었다.
*「연결의 왕관lv1을 사용합니다.」
*「스킬 '광선lv3'을 공유합니다.」
그러자 오베른의 손끝에서 광선이 발사되었다.
피잉!
허수아비의 미간이 꿰뚫렸다.
그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적어도, 면접관으로 나온 교수들은 비슷한 마법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이게 무슨!"
"아니, 마력의 구축 과정이 보이지도 않았어!"
그야 마법이 아니니까!
오베른은 뿌듯해하지도 않았고, 긴장한 눈치도 아니었다.
태연하게 한마디 던질 뿐.
"내가 창안한 마법을, 그대들이 한눈에 간파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그 광오한 한마디에도 아무도 화를 내지 못했다.
음, 내가 배우 하나는 잘 고용한 것 같다.
139화. 더 존경하고 갈채하라
연결의 왕관!
리틀 프린스 서펜트가 된 뒤로 얻은 새로운 왕관 스킬.
스킬 하나를 습득하기 위해 한 번의 진화가 요구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연결의 왕관은 그만큼 대단한 스킬인가.
'지배', '강탈, '극복'의 왕관처럼 말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왕관 스킬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탈의 왕관은 아주 요모조모 잘 쓰고 있다. 이걸로 얻은 스킬이 몇 개던가.
하지만 '지배'나 '극복'은 달랐다.
지배로는 똑똑하고 강한 것들을 어찌하지 못한다. 내 힘이 아주아주 강해진다면 모르겠지만 지배력에도 한계가 있다.
극복의 왕관은....
솔직히 유틸리티성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잘 못 쓴다.
일단 마력을 많이 소모하게 되는 게 가장 큰 문제점이다.
나는 투명한 손 같은 범용성 높은 스킬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스타일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고지능형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극복의 왕관은 단번에 강한 화력을 퍼부을 때 유용할 것 같다.
단단하고 질긴 마물보다 인간을 상대로 싸울 때 특히 그럴지도.
그렇다면 이번에 새로 얻은 '연결의 왕관'은 어떤 스킬인가 하니.
간단히 표현하자면 이실이가 가진 '교감'의 상위 스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감과 마찬가지로 상대방과 접촉한 상태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접촉한 상대와는 머릿속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굳이 글씨를 써서 대화할 필요가 없으니 훨씬 빠르고 편하다.
그리고, 스킬을 공유할 수가 있었다.
*「연결의 왕관lv1을 사용하여 '광선lv3'을 공유합니다.」
다만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조건이 있다.
적에게는 사용할 수 없지만, 내 부하나 동료에게 쓸 수 있는 유틸성 스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광선은 본디 인간이 쓸 수 없는 스킬이다.
'멋지고 대단한 마물이 입으로 광선을 발사하는 것'. 그것이 광선이라는 기술의 본질인 것이다.
*「성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베른은 광선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펠레리안이 경악한 것을 보면 엄청난 일인 것 같았다.
내 잠재력 20으로 얻은 '정진' 특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입에서 광선을 발사했으면 그리 멋지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오베른은 멋지게도 손끝에서 광선을 발출했다.
키이잉!
그 위력이 극강하지는 않았으나, 마법사들의 상식을 넘어섰다.
빛이 모이고, 쏘아진다.
사대 원소 마법 중 어느 것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마도에 발을 담근 교수들이 모두 전전긍긍했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오!"
면접관이라 함은 상대를 분석하고 시험하는 입장.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면접 대상에게 가르침을 요했다.
오베른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빛 마법을 분해해 그 미립자 차원에서 파동 에너지를 응축시켰을 뿐."
뭐라는 거야.
대충 꾸며 말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까.
면접관들의 표정도 아리송했다.
"그러면... 어떻게 직선으로 발출하는 거요. 마력이 마구 날뛸 텐데?"
"실시간으로 계산식을 수정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그게... 어떻게...."
오베른은 자신의 관자놀이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암산으로 했다는 말이다.
너무 과한 허세 아닌가 했는데, 확실히 오베른은 허풍의 프로였다.
어느 누구도 '헛소리!'하고 소리치지 않았다.
그저 감탄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을 뿐.
'이렇게 쉽게 넘어가다니.'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면접관이었으면 박살을 내 줬을 텐데.
생각보다 쉽게 일이 끝난다 싶었다.
여기서 강적이 나타날 줄이야.
짝, 짝, 짝, 짝.
누군가 나타났다.
젊어 보이는, 아니 어려 보이는 느낌의 사람이었다.
수염도 없었고 키는 오베른의 명치 정도로 올까.
바닥에 살짝 끌리는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인간은 아니었다.
-노움이다.
펠레리안이 그리 말했다.
내가 처음 보는 종족이었다.
노움이라 함은 손재주가 좋고 마법이 특기인 종족이라고 들었는데.
면접관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라냐르 총장님!"
"말씀도 안 하시고 오실 줄이야."
소년으로 보이지만 노움이라면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확실히 존경받는 것 같다. 면접관들의 반응만 봐도 그렇다.
발라냐르 머시기우스, 8영웅 중 1인이라니까.
그리고 오베른의 반응은....
'으아아악, 조졌다!'
정신적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았다.
그저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저런 걸 보면, 진짜 술 마시고 혼자 있을 때 말고는 전혀 약점을 보이지 않는 인간 같았다.
'진정해 오베른.'
'발라냐르 총장이 직접 면접에 나올 줄이야... 다 간파당할 거야!'
펠레리안이 혀를 찼다.
-이 겉만 번드르르한 쓰레기 놈이, 지금 자기가 누구의 조언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고.
오베른은 펠레리안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의 조언을 내 조언처럼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베른은 듣지 못하게, 아주 잠깐 연결을 풀고 물었다.
'저 노움 알아요?'
-내가 활동할 때는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놈이다. 내 수준과 비교해서는 형편없겠지.
'모르는 사이면 사실 엄청 대단한 마도사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노움은 장명족이다. 적어도 100살은 넘었을 텐데 이제야 이름이 알려졌다면 그리 대단하지는 않을 것이야.
펠레리안식 논리였지만 굳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총장은 뚜벅뚜벅 걸어와 우리 앞에 섰다.
"재미있군요."
"처음 뵙습니다. 오베른 그리모아르입니다."
"반가워요."
작은 총장은 악수를 청했다.
오베른은 정중하게 맞잡았다.
그리고 총장이 묻길.
"이렇게 한 거예요?"
손을 슥 들더니. 검지를 한 바퀴 돌린다.
그러자 마력의 폭풍이 몰아쳤다.
손톱 끝에 흰색 빛 뭉치가 모이더니.
그것을 허수아비에 가리키자, 광선이 쏘아져 나갔다.
콰앙!
허수아비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이 노움, 마물도 아닌 주제에 내 광선을 흉내 내다니.
교수들이 대단하다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정작 그 멋진 일을 해낸 총장은 별로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네, 쓸데없이 마력 낭비가 많고. 관통이 아니라 폭발해 버리고. 무엇보다... 깔끔하지 않아."
그는 오베른을 올려다보고 소년처럼 웃었다.
"어떻게 한 거죠?"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오베른은 조금 전처럼 대충 어려운 말을 주워 담지 않았다.
사기꾼으로서 더 프로페셔널하게 대흥했으니.
"후후."
그저 빙긋 웃었을 뿐이었다.
"에이 재미없어. 비밀이다, 이거죠?"
그런데 그게 먹혀들었다.
발라냐르 총장은 면접관들처럼 채신머리없게 매달리지 않았다.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타, 눈에 힘을 주어 발라냐르 총장을 관찰했다.
내가 만난 네 번째 영웅이 어떤 놈인지 볼까.
그런데, 확실히 놀라웠다.
──────────────
[????? 발라냐르 ???lv???]
──────────────
이렇게까지 상태창이 제대로 안 보이는 사람은 처음 봤다.
군터를 비롯한 다른 영웅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고, 네임드 마물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설마 그렇다면 내가 여태까지 만난 인물 중 눈앞의 노움이 최강이라는 걸까.
펠레리안에게 이것을 물어보니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다른 이들을 한눈에 꿰뚫어 보는 것은 분명 놀라운 재주지만. 탐색에 관련된 마법이나 아티팩트들도 분명 존재한다. 저 음흉한 노움은 그것을 경계하고 자신을 꽁꽁 감추나 보지.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포기할 마음은 없다.
내가 실제로 만난 마법사 중에 제일인 것은 분명하니, 보고 빌려 갈 스킬이 있지 않겠는가.
──────────────
[특성]
...[마법광], [가면] ...
──────────────
역시, 정신을 집중하니 보이는 게 있다.
특성을 넘어서.
스킬도....
──────────────
[스킬]
...[중력마법lv20], [염동파lv20]...
[최상급원소마법:4원소] ...[중급원소마법:에테르lv5] ....
──────────────
중급원소마법 ... 에테르?
원소마법은 4대원소를 활용하는 것 아닌가.
빌려 갈 가치가 있는 상위 스킬들이 여럿 있었다. 침이 뚝 흘러나올 것 같았다.
'후우, 참아야지.'
하지만 지금 여기서 강탈의 왕관을 사용했다가는 분명 들킬 것이다.
예전에, 군터에게 천뢰령을 빼앗았을 때도 그랬다.
놈은 그 먼 거리에서도 이상한 걸 알아채고 창을 던졌었다.
"멋진 창작 마법이긴 한데,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점수를 매기기는 어렵네요."
그런데 총장은 갑자기 그리 말했다.
"다른 것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요."
저거 어떻게 한 건지 안 알려 줬다고 삐진 거 아냐?
그럴듯하다. 마법사들은 원래 그런 족속이니까.
오베른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하다면, 어떤 것을 보여 드릴지요."
"마도사에게는 눈썰미가 아주 중요하죠."
노움 총장 역시 손가락으로 제 눈 옆을 톡톡 두드렸다.
"이번에는 오베른 씨가 나를 따라 해 봐요. 따라 할 수 있는 만큼만."
저거 봐라. 역시 자기가 내 광선을 못 따라 해서 심통이 난 게 분명하다.
노움은 손가락을 들어서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화륵.
불꽃의 선이 그어졌다.
그런데, 그 불꽃이 조금도 뜨겁지 않다.
또한 태울 장작도 없이 허공에 고정된 채로 일렁일 뿐이었다.
그리고 총장이 휙 손가락을 젓더니, 불꽃의 윗부분이 여러 갈래로 벌어졌다.
벌써부터 탄성이 터져 나왔다.
"힌트는...."
총장이 탁,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수증기가 응결되기 시작했다.
"아주 기초적인 마법만을 활용했을 뿐이라는 거예요."
응결된 물방울은 떨어지는 대신 허공에 맺히기 시작했다.
노움 마도사가 무엇을 표현했는지는 명확했다.
교수들이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
"나무다, 나무를 표현하셨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마법의 콤비네이션이라니...."
여러 마법을 동시에 활용한 콤비네이션.
그것을 어떻게 연계할까로 서로 기량을 뽐내는 이것이야말로 마도사들의 유희였다.
"한번 흉내 내 봐요."
지금 총장은 오베른에게 시험을 던진 것이다.
자신의 마법 콤비네이션을 간파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오베른은....
'...전혀 모르겠어.'
반쯤 패닉에 빠졌다.
오베른이 허풍으로 이루어진 사람이긴 하지만, 사실 바보는 아니다.
마법사인 만큼 당연히 똑똑한 편이었고 실제로 나이에 비해서 성취도 높다.
그러나 8영웅 중 하나인 마도사가 작심해서 낸 시험을 즉석에서 간파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제발 도와줘요!'
나한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옳은 판단이다 오베른.'
위엄 있게 말한 뒤, 나는 슬쩍 옆을 보았다.
도와줘요, 펠레리안!
펠레리안이 궁시렁거리면서도 설명을 시작했다.
-불꽃의 원소마법을 저온으로 피워 낸 거다.
'불꽃의 원소마법을 저온으로 피워 낸 거야.'
"불꽃의 원소마법을 저온으로 피워 내셨군요."
펠레리안의 말을 내가 따라 하고, 내 말을 오베른이 따라 한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삼 단계 소통.
-매질 없는 불꽃이라고 눈속임을 했지만, 바람과 흙 마법을 통해 나무를 형상화했어.
오베른은 그 말을 부드럽게 읊으면서 시범을 보였다.
그래, 잘해야 해!
그는 비슷하게 따라 했다.
화륵-
정말, 불꽃의 선이 허공에 그어졌다.
-허공에 떠 있는 흙먼지를 매개로 수분을 끌어모았으니. 그게 나뭇잎인 것이고.
탁.
오베른은 손가락을 튕겼다.
사실 전혀 필요 없는 동작이었는데, 확실히 멋있었다.
수분이 응결되어서 나뭇잎의 역할을 했다.
"오오...."
"비슷해!"
오베른이 단숨에 총장의 콤비네이션을 눈치챈 것처럼 보였으리라.
하지만 사실, 자세히 보면 부족함이 느껴진다.
일단 크기가 훨씬 작았고, 바람 마법의 컨트롤이 미숙했다.
원본이 없었다면 나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대원소가 하나의 나무를 이루고 있다... 이거, 세계수군.
펠레리안의 말을 오베른이 자연스럽게 대사로 소화해 냈다.
"세계수를 형상화하셨군요."
"어?"
총장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요?"
"사대원소가 하나의 나무를 이루고 있다... 그 점에서 착안했습니다."
"오베른 씨, 마법만 잘하는 게 아니었군요. 지식도 그리 깊을 줄이야."
오베른의 추측이 맞았다고 인정한 것이다.
곳곳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다만 다섯 번째 원소, 그것이 부족하다고 전하여라.
"다만, 부족한 것이 하나 있군요. 에테르...."
총장이 순간 정색했다.
"...어떻게 알았죠?"
"...."
오베른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싱긋 웃었다.
총장은 결국 쓴웃음을 짓더니 품속에서 팔뚝 길이의 백색 완드를 꺼냈다.
그것을 휘두르자.
파츠츠츠...
나무의 이파리에서 오색의 스파크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저게 에테르인지 뭔지 하는 원소마법인가 보다.
"비로소 세계수에 꽃이 피었군요."
"당신은 진짜군요. 이렇게 누군가에게 감탄한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총장은 다시 한번 오베른에게 악수를 건넸다.
"과한 칭찬입니다."
지켜보고 있던 면접관들도 일어나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 순간만큼은 질투도 시기도 없었다.
마도에 발을 담근 자들로서 순수히 감탄할 뿐.
아름다운 마법을 보인 발라냐르 총장에게.
그리고 그것을 한눈에 간파한 젊은 천재 교수에게.
박수와, 갈채를.
'부럽다....'
쏟아지는 박수와 선망의 환호.
이쪽을 보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존경심이 깃들어 있었다.
다만 나는 오베른의 소매 안쪽에 감겨 있을 뿐이었는데. 그 순간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연결되어 있는 대상에게 갈채가 쏟아집니다.」
*「존경과 경외를 한 몸에 받습니다.」
연결의 왕관 덕택에 존경을 나눠 받는 건가.
그래서 뭐 하는데?
*「'왕족' 특성으로 인해 '위엄'을 얻습니다.」
...위엄?
140. VV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