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종말?
'아아아아?!'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거울이 사라지고, 그저 흰 벽만 남았기 때문이다.
거울이 어디 간 거야! 하고 당황하고 있으려니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흰 벽은 매끈하지 않았다.
곳곳에 요철감이 느껴지고 투명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실 거울은 사라진 게 아니라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안에 흰 벽면 같은 게 비쳐 보일 뿐이었다.
"삭!"
놀라운 일이다.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다행히 라니아는 눈을 감고 쪼그려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
나는 거울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폈다.
거울에 비쳐 보이는 흰 벽면. 그 정체는....
'비늘...?'
비늘이다.
지금의 내 비늘 크기가 보리쌀만 하다면, 저 비늘의 크기는 족히 사람 머리통만 했다.
그 압도적인 크기 탓에 그것이 비늘이라는 사실을 늦게 눈치챘다.
비늘이 돋아난 흰 벽이라니.
게다가 그 비늘이 움직이고 있다.
거울이 비춰 주는 것은 대상의 '본질'.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처음에 환생하기 전의 내 모습이 비쳐 보이지 않을까 했다.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조금 움츠러든 모습의 마른 청년 말이다.
그러나 발라냐르 총장은 세계선의 하이라이트 어쩌고라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어 보면 뱀이 된 내 모습이 나올 것 같았다.
솔직히 평범하고 재미없던 전생보다는 뱀이 된 새 삶이 더 하이라이트에 가깝지 않겠는가.
지금 움직이고 있는 저 비늘의 벽.
그것은 아마 내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커진... 나.
'대체 얼마나 커진 거야.'
저 정도는 거대화를 최대 마력으로 써도 안 될 것 같다.
지금 내가 최대로 몸을 키우면 아버지만큼 커질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몸이 너무 무거워서 점프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저건, 아예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미래의 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나타난 것은.
나는 갑자기 어디선가 불덩이가 나타난 건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눈알이었다.
거대한 눈알, 마치 불타듯 주황빛으로 일렁이는.
그래, 사X론의 눈 같은 거 있지 않나. 꼭 그런 눈이었다.
그 눈이 이번에는 벽면을 거의 다 채웠다.
드넓은 궁전의 벽만 한 눈동자라니.
나는 그 끝내주는 거대함에 감동해 버리고 말았다.
-왜, 뭘 보는 거냐!
'안 보여요?'
-그래, 난 안 보여. 젠장할.
귀신은 거울에 안 비쳐 보인다더니.
펠레리안은 거울에 비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울의 내용물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펠레리안에게 보이는 것을 말했다.
-그리 거대해진다고? 네가 그 슈에무라만큼이나 거대해지리라고는 믿기지 않는데 말이다.
슈에무라가 뭐였지. 예전에 마물 도감에서 본 것 같은데.
하여튼 그래 보이는데 어쩐다는 말인가.
나는 눈앞의 불타는 눈동자를 보았다.
거울 속의 내 미래 모습일 뿐이지만 참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강대한 위압감에 정신이 흔들립니다.」
*「사안에게 주시당해 몸이 굳어 버립니다.」
*「눈물이 흐르고, 전신이 떨려옵니다.」
뭔 소리야!
설마 미래의 나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걸까.
심즉살(心卽殺)이요 의기상인(意氣傷人)이 가능한 절대 지경에 오르나 보다.
다만 나는 공포에 떨지는 않았다.
*「특성 '불굴'에 의해 정신공격에 면역입니다.」
나는 정신력 20이라고.
대악마가 귓가에 저주를 속삭여도 조금 무섭고 말 것이다.
다만 미래의 내가 엄청나긴 한 것 같다.
*「@&@&뱀이 사안으로 주시합니다.」
*「특성 '불굴'에 의해 정신공격에 면역입니다.」
*「@&@&뱀이 불길처럼 노려봅니다.」
*「특성 '불굴'에 의해 정신공격에 면역입니다.」
....
계속 뭐라 뭐라 소리가 들린다.
거참, 무섭게도 생겼구만.
저렇게 매서운 눈이라면 친구를 못 사귈 것 같은데.
그 사교성 없는 모습에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뱀이 짓누르듯 쳐다봅니다.」
*「특성 '불굴'에 의해 정신공격에 면역입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거울이다.
하지만 평범한 거울은 아닐 것이다.
저 거울 너머에 있는 내 모습이 분명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까.
'어...!'
섬전같이 떠오르는 아이디어.
저쪽에서 이쪽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이쪽에서도 저쪽에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상태창을 엿본다든가.
그리고 혹시 미래의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을 빌린다든가....
'해 보자!'
나는 미래의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눈싸움에서부터 지면 끝이다.
사실, 저쪽에서 정말 나를 보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저 이쪽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겠지.
그리 생각하니 마음 편하게 눈싸움을 할 수 있었다.
흡, 하고 기합을 주고.
꿰뚫어 본다.
──────────────
[@&@&뱀 lv?????]
[특2$]
[불굴],[정진]-0*#
지끈.
눈앞에서 완성되려던 상태창이 무너진다.
끼야악!
머리가 아파서 몸부림을 쳤다.
정신공격과 별개로 그냥 정보량이 너무 많은 것 같다.
흥.
비웃음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그때였다.
콰직.
-엇.
"어!"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펠레리안과 라니아가 동시에 놀랐다.
나도 고개를 들어서 거울을 확인해 보니.
"키샤아악!"
경악스럽게도 거울에 큼지막한 금이 가 있었다.
거울에 비쳐 보이던 모습도 사라지고 회색으로 빛을 잃었다.
"어떡해! 어떡해!"
"사사삭!"
라니아와 내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거울은 엄청나게 귀한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왕국의 국보 중 하나라고 했던가.
"대체 뭘 한 거예요!"
'아무것도 안 했어!'
정말 아무것도 안 하지는 않고, 거울의 나를 좀 노려봤을 뿐이다.
그것밖에 안 했는데 거울이 왜 깨진 거야!
"싸아아악!"
내 탓이 아니라고 소리쳐 봤다.
"난 죽었다!"
라니아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떻게 거울의 금을 메워 보려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질러 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생겨 버린 금이 사라질 리는 없다.
아무래도 소란이 너무 컸나 보다.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나요?"
"없어요!"
라니아가 비명처럼 답했다.
누가 들어도 무슨 일 생긴 것 같잖아 라니아.
"...네에, 조금 있으면 시간이 끝납니다. 미리 말씀드려요."
"...."
인기척이 사라지고, 라니아가 내게 속삭이며 물었다.
"어쩌죠?"
진지하게 그리 물어보는데, 선생님 된 도리로 참 미안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도와줘요 펠레리몽!
'지금이라도 그거 할까요?'
-뭐 말이냐.
'왕궁 접수 대작전이요!'
이곳은 왕궁 안이니까.
국보 훼손범으로 잡히기 전에 먼저 치는 거다!
-흠, 괜찮을 것 같기도.
게다가 펠레리안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반응.
좋아 이대로 왕국을 접수....
똑똑똑.
"시간이 끝났습니다. 나와 주십시오"
그런데 미처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시간이 끝나 버렸다.
"어떡해욧!"
'일단, 버티자!'
라니아는 문을 막고 버텼다.
참 말 잘 듣는 학생이다.
그런데 사실 그게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오셔야 합니다. 어, 어어 문 여세요!"
"잠깐만요!"
"시간이 지났습니다. 당장 문 열어요!"
시녀가 문을 강제로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누가 봐도 이쪽을 수상하게 보는 눈치였다.
'라니아, 저 시녀를 들여 보내서 처치하자. 살인멸구하는 거다.'
'그게 무슨 개소리예요!'
선생님한테 개소리라니, 그런 심한 말을.
하지만 내 제안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드르륵-
그런 소리가 들려서 문을 보니.
그 위에는 안을 들여볼 수 있도록 작은 창이 나 있었다.
시녀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거울이 깨진 것도 역시.
"헉."
드륵, 탁.
그러고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창을 닫고 떠나갔다.
라니아가 비명을 질렀다.
"끼야아악!"
시녀가 떠나간 이유가 뭐겠는가.
경비병을 불러오려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결사항전하는 거야.'
'싫어요! 자수해 주세요.'
'싫어! 너가 해!'
라니아는 후작가 영애니까 아마 사형은 안 당할 거다. 아마도.
그런데 나는 거울을 깨뜨리지 않았어도 들키면 바로 사형일 터.
자수할 수는 없다.
"괜히 왔어 정말, 난 망했어 정말."
'랩하니 지금.'
나도 정신이 없었다.
어쨌든, 이대로 잡혀 죽을 수는 없는 일.
어떻게든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인질극이다. 인질극을 벌여 어떻게든.
'넵!'
그리고 과연.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서 판단하기로는 으음... 둘? 겨우 둘인가.
무섭게 문을 쾅 때려 부수며 경비병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똑똑똑.
정중한 노크와 함께, 누군가가 말했을 뿐이다.
"진정하세요. 저 혼자만 들어갈게요."
그 목소리가 마치 새가 지저귀듯, 혹은 은구슬이 쟁반 위를 구르듯 맑았다.
게다가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시를 읊는 것 같기도 한 말투.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어, 어어...."
저도 모르게 마르테인 폭투법을 운용하고 있던 라니아도 기세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면사를 쓴 여자애.
-잡아!
"사아악!"
내가 뛰어오르려는 순간.
라니아가 내 꼬리를 확 잡았다.
핑, 하면서 내가 허공에서 일직선으로 펴졌다.
놀란 여자애가 움찔하면서 면사가 살짝 뒤집어졌다.
"꺄악."
"사아악!"
깜짝이야.
나도 놀라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면사 안에 있는 얼굴이 화상을 입었는지 잔뜩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허겁지겁 면사를 정리했다.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공주마마."
라니아가 얼른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주마마라니, 공주였구나.
-제기랄, 인질로 잡았어야 했는데.
펠레리안이 그리 말한 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 공주라는 친구한테 조금 미안해졌다.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고 너무 깜짝 놀라 버린 것 아닌가.
미안한 건 우리 쪽인데 사과까지 하다니.
나도 사과했다.
"사사삭...."
"배, 뱀?"
앗.
너무 대놓고 인사를 해 버렸다.
공주가 나와 라니아를 번갈아 봤다.
"아, 아하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키우는 뱀인데...."
라니아는 천재였던 걸까.
좋은 임기응변이다. 나는 얼른 라니아의 팔로 올라갔다.
그리고 정말 바보 같은 애완 뱀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멍해 보여서 귀엽네요. 놀라서 이런 표정인가?"
"원래 이렇게 생겼어요. 귀엽죠."
"너무 귀엽네요. 이름이 뭔가요?"
"이름이요...? 우르요, 우르."
"우르구나."
공주님이 뱀을 보면 꺄악 하면서 비명을 지르는 게 보통 아닌가.
"귀엽네. 우르."
그런데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했다.
나는 최대한 평범한 뱀인 척했다.
'멍청한 표정, 최대한 멍청한 얼굴....'
-평소 그대로구만 뭘.
거울이 깨진 것을 봤을 텐데도 생각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천사 같은 아이구나. 내 이름은 릴리야."
"사악."
"어머,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네."
라니아가 얼른 설명했다.
"우르는 똑똑하거든요. 아차,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라니아 마르테인입니다."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될지는 몰랐네요."
공주는 슬쩍 거울을 바라보았다.
라니아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저기, 이건...."
"축하드려요."
"네?"
반투명한 면사에 비쳐 보이는 공주는, 빙긋 웃고 있었다.
"거울 속의 자기 자신과 눈이 마주치더니, 거울이 깨진 거죠?"
"아...."
나는 공주의 뒤에서 라니아에게 고개를 끄덕이라 신호했다.
"네 맞아요."
"아주 종종 그런 일이 있어요."
"그런가요?"
그랬던 거야?
그러면 내 잘못이 아닌 건가?
다행이다. 한숨이 포옥 나왔다.
"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항상 대단한 영웅이 되죠. 어머, 뱀이 왜 갑자기 춤을 추지?'
그렇단 말이지.
영웅뱀이 된다는 말이지.
"그러면 근데 어떡하죠? 거울이 깨져 버려서...."
"수복할 수 있답니다. 물만 조금 뿌려 주면요."
그리 말하고 릴리는 분무기 비슷한 것을 꺼냈다.
익숙한 듯 사다리를 가져오더니 칙칙 물을 뿌린다.
신기하게도, 쩍 하고 갔던 금이 천천히 수복되었다.
"봐요. 잘 붙죠?"
이미 한 번 해 보기라도 한 듯한 자신감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최근에 거울을 깨뜨린 사람이 저 말고도 또 있나요?"
라니아를 시켜서 그리 물어보니.
"아, 마지막으로 거울을 깨뜨린 건 군터 경이에요."
나는 깜짝 놀랐다.
"사삿!"
"깜짝이야."
놈도 그랬다고?
역시 군터....
너는 내 라이벌이 맞다.
161. 천재적 잠입
릴리 아르데네 솔리안.
꽃을 좋아하는, 상냥한 마음씨의 공주.
백합의 이름을 딴 그녀의 별명은 예전부터 '백합 공주'였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고가 벌어지고.
그녀에게는 '불타 버린 백합'이라는 그리 상냥하지 못한 별칭 역시 붙었다.
못된 녀석들 같으니라고.
물을 뿌린 뒤 거울이 수복되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깨끗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사고를 친 우리는 오히려 특혜를 얻었다.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담소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라니아의 애완동물이라는 설정으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졸지에 라니아는 철없게 애완동물(독사)을 데리고 거울의 방까지 들어온 못된 아이가 되어 버렸지만,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착하다. 천사 같은 아이야."
나는 릴리의 무릎 위에서 한낮의 졸음기를 즐겼다.
그녀는 내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신기하게 비늘이 수정 같네. 예뻐라."
'그치, 비늘이 멋지긴 하지.'
"왕관도 있고. 너 왕자님이니? 아니면 공주님인가?"
물론 연결의 왕관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뱀에 익숙해 보인다.
"언니는 뱀이 무섭지 않으세요?"
"무서울 건 없지. 키워 본 적도 있고."
또래 애들이라 사이가 벌써 가까워진 걸까. 릴리는 금방 말을 놓았다.
"궁에서요?"
"응, 정확히 나는 아니고, 필리가 키웠지."
"아하, 그랬었구나. 걔는 왜 말을 안 했지?"
라니아가 중얼거리자, 릴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라니아는 그 시선을 알아채고 손을 휘저었다.
"아, 왕자 저하랑 저는 친해요. 반말을 하는 건 에메랄드 스쿨의 규칙 때문인데... 아 일단 왕족은 예외긴 하지만 필리 왕자 저하께서."
"아냐 아냐, 괜찮아. 그리고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어. 필리한테 친구가 둘 생겼다고."
"...놀라신 것 같아서요."
릴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놀랐지. 진짜 친구가 생겼을지는 몰랐거든. 거짓말일 줄 알았어."
"아, 아하하하!"
"시원하게 웃네."
그러게 말이다.
라니아는 안 그래도 내가 궁금했던 것들을 더 물어봐 주었다.
"어쩌다가 거울의 방을 관리하시게 된 거예요?"
듣자 하니, 이 신비로운 왕궁의 국보를 관리하는 것이 다름 아닌 릴리 본인이라고 한다.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왜 이런 귀찮은 일을 자처한 걸까 싶었는데.
"나는 왕위 계승권도 없고, 그리고 이 거울을 좋아하거든."
그렇게 말하면 거울에 어떤 게 비쳐 보이는지 궁금해지는데.
"보여 줄까? 금 간 게 고쳐지면."
"네에."
슬슬 거울이 다 수복될 것 같기는 하다.
나는 라니아의 손목으로 갈아탔다.
그리고 그것을 물어보라고 시켰다.
'아니, 그건 좀 ....'
'왜?'
'너무 예민한 질문일 수도 있잖아요.'
'?'
라니아는 내 질문을 전하기를 주저했다.
'못 물어볼 건 아니잖아.'
'안 물어봐도 될 것 같은데 ....'
그러더니 라니아는 한숨을 푹 쉬고 물어봤다.
"혹시 말이에요."
"응?"
"그 실례가 될 질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아 이거?"
릴리는 알겠다는 듯 웃더니, 면사를 젖혀 얼굴의 화상 자국을 보였다.
"어렸을 때 다쳤어, 뜨거운 물을 뒤집어써 가지고."
"아...."
그랬구나.
그게 궁금했다.
릴리는 별 거리낌 없이 설명해 주었다.
라니아가 내적인 한숨을 쉬었다.
'십 년 감수했네.'
'근데 어쩌다가 공주님이 뜨거운 물을 뒤집어 썼대? 못 고치나?'
릴리는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해 줬다.
"나도 고치고 싶었는데, 어렵대. 처음에 포션을 잘못 써서 더 안 들더라고. 상처를 다 헤집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치료 마법을 써도 흉터는 복구가 안 되거든."
하긴, 생각해 보니 흉터를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봤다.
나를 쫓던 황금이파리 조사관 엘프도 눈에 큰 흉터가 있었더랬지.
혹시 몰라 펠레리안에게 물어봤다.
'고칠 방법 없어요?'
-없겠냐. 잘린 팔다리도 붙일 수 있는 세상에.
펠레리안은 팽,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하지만 가능하다뿐이지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릴리는 무려 한 나라의 공주임에도 흉터를 지우지 못했으니까.
"거울의 내가 어떤지 볼래?"
"아... 네."
생각보다 가볍게 그런 제안을 한다.
"아무한테도 보여 준 적 없는 건데."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릴리는 그리 말했다.
그런 귀한 것을 보여 주다니.
우리는 두근두근거리며 거울이 수복되기를 기다렸다.
가장 앞에 릴리가 섰다.
면사를 아예 벗어 버리더니.
츠츠츠....
수복된 거울에 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와아...."
라니아가 순수한 감탄을 터뜨렸다.
"아름다워요."
"사아...."
멋졌다.
끝내주게 멋졌다.
그건 정말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서 있는, 장성한 릴리의 등 뒤에는 큼직한 날개가 달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얼굴의 흉터도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해서 ...."
"정말 멋지네요."
"그런데 사람에게 날개가 달릴 수는 없으니까. 어떤 의미일지는 모르겠어."
인간은 진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날개가 달릴 수도 없다.
아니면 인공날개를 붙인 거 아닐까. 마법이라든가.
"저 미래가 이루어지면 좋겠네요."
"본질의 거울은 미래를 보여 주는 게 아닌 걸 뭐."
"거울에서 본 게 이뤄지기도 하잖아요."
"그렇지."
나는 라니아를 시켜 손을 내밀게 했다.
그리고 릴리의 손을 톡톡 두드려 줬다.
"어머, 나한테 꼭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걸."
"아...."
라니아가 내 말을 전해주지는 않았다.
'언젠가, 흉터를 지울 방법이 생기면 도와줄게. 오늘은 우리가 빚졌으니까.'
나는 그리 말했다.
"필리는 왜 이런 천사 같은 누나분에 대해서 말해 주질 않았지?"
라니아가 그리 중얼거렸다.
거기서 릴리는 말했다.
"천사 같다니, 전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그런 말씀을...."
"그리고 필리는 나한테 미안해하니까."
"미안해해요?"
"으응, 뜨거운 물을 쏟은 게 그 애거든."
공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 * *
"흐아악!"
필리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왜, 으음, 무슨 일이야."
"...."
비명 소리에 놀라서 아마엔도 잠이 깬 모양이다.
필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냐 아무 일도. 꿈자리가 사나워서."
"뭐야... 으음."
아마엔은 금방 다시 잠들었다.
필리도 다시 누워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조금 전에 꾼 꿈이 너무 뒤숭숭했다.
몸은 식은땀에 젖어 추웠고,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그때 기억이....'
옛날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릴리 아르데네.
어머니는 다르지만, 필리가 무척 따랐던 누나.
펄펄 끓는 찻주전자를 엎어서 누나의 얼굴을 망친 필리.
그리고....
'너 때문이야 이 나쁜 새끼!'
면사를 쓴 채 울면서 악을 지르던 누나.
필리는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누나는 필리의 뺨을 때리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부왕은 차갑게 필리를 노려봤고 황비는 울면서 함께 필리를 욕했다.
그때 누나를 말리던 것은 오히려 레온 형님이었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아프고 끔찍하게 불타 죽었으면.'
저주의 말을 들으면서 필리는 함께 울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요즘의 행복한 나날이 오히려 죄책감을 끌어올렸다.
필리는 죄를 지니고 있으니까.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악몽을 꿀 때마다 필리는 며칠 내내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못했다.
그는 슬쩍 아마엔을 봤다.
참 곤히도 자고 있다.
그리고 어제 백합궁을 다녀온 라니아와 뱀 선생님도 있지.
이곳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밀려들어 온다.
저 동쪽 하늘에서 여명이 밝고 있었다.
이제 진정 시작된다.
솔라리안이.
* * *
일주일간 진행되는 대동제.
그리고 대동제에서 펼쳐지는 솔라리안 본선.
솔라리안의 본선은 대동제의 마지막 날 펼쳐진다.
그저 아카데미 학생들 간의 축제가 아니다.
무려 국왕과 왕족까지 참관하는 대형 행사가 바로 솔라리안.
에메랄드 스쿨이 존재하는 수도 3구 전체가 이미 축제 상태였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각종 뜨내기 상인들도 모이는 법이다.
대로변에 시장이 들어섰고. 시장이 아닌 구역에도 각종 간식이며 물품을 파는 노점들이 들어섰다.
모자나 깡통을 놓고 돈을 받는 거리의 악사며 공연자들도 있었다.
야바위꾼도 있었고, 사기꾼들도 있다.
그리고, 광대 또한 있었다.
얼굴에 흰 분을 칠한 광대는 지나가는 행인들 앞에서 마임을 하는 등의 재롱을 피웠다.
시선이 끌리는 장난을 한 뒤 모자를 내밀면서 돈을 받는 방식인데, 정작 모자를 내밀어도 돈을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는 그렇게 채산성 없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가 이번에 고른 것은 장신의 사나이였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끔찍하게 잘생겼다.
그런 그의 앞을 가로막고, 마치 앞에 투명한 벽이 있는 것처럼 마임을 한다.
구경꾼들이 지나가면서 깔깔대고 웃는다.
그렇게 한바탕 마임을 하고 모자를 내미는데.
탁!
사내가 그런 광대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사내의 손목에서 뱀이 튀어나와 광대의 손목을 휘감았다.
"흐억!"
"닥쳐라."
등골이 시린 한 마디.
그리고 사내는 다른 왼손으로 옆에 있던 행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무, 무슨...!"
"손목을 잘리기 싫으면 돌려놓도록."
"...."
"셋, 둘, 하나...."
"네!"
행인이 지갑을 꺼내 건넸다.
장신의 사내, 오베른은 그 지갑을 품에 넣었다.
"둘이서 꽤나 여러 명을 털어먹더군. 욕심이 지나쳐."
"...."
그는 애초에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광대와 행인 2인조가 행인들의 지갑을 털어가는 것을.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희 집에는 병든 어머니와...."
"저는 애가 넷입니다. 와이프는 도망갔어요!"
그들은 허겁지겁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입을 닥치고 듣거라."
오베른이 애초에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가만히 지갑을 털려 준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살고 싶나?"
"예!"
"내가 시키는 것을 하면 경비대에 신고하지 않고 보내 주지."
"무엇이든...."
상습범인 그들이 경비대나 치안관에게 걸린다면 손목이 위험할 것이다.
그들은 오베른이 시키는 어지간한 건 다 할 의향이 있었다.
"저기 저 사람 보이나?"
오베른은 누군가를 가리켰다.
평범해 보이는 사내가 근처의 노점 앞에 서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예, 보입니다만 ...."
"저 사람의 지갑을 털어라."
"네?"
2인조는 당황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주문이라는 말인가.
"왜, 싫나?"
"아니요! 정말 그러기만 하면 됩니까?"
"그렇지."
"하겠습니다!"
그들은 허겁지겁 물러났다.
매일같이 이 짓거리를 해 왔으니 그 정도야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자.
'오베른!'
뱀이 주머니 하나를 물고 있었다.
'나 소매치기 스킬 얻었어!'
'...축하드립니다.'
뱀이 그사이에 광대의 주머니를 턴 것이다.
가난한 오베른은 이런 부수입도 귀했다. 얼른 품속에 넣어 챙겼다.
무덤덤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오베른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정말 저희가 잠입할 수 있을까요.'
지금 둘은 아주 어려운 과제를 앞두고 있었다.
'솔라리안의 과제를 알아내야 한다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
궁정백이 오베른한테 주문한 것은 '3왕자 필리를 솔라리안에 우승시킬 것.'
그러면서 그는 예선의 시험 내용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본선의 시험 내용은 궁정백마저 알아내지 못했다.
'시험 문제를 미리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뱀은 그 중요성을 역설했다. 궁정백도 똑같았다.
본선이 어떤 내용일지를 미리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궁정백은 정보 하나를 물어왔다.
시험 내용을 아는 것은 그 출제자인 발라냐르 총장과 그 측근뿐.
그런데 발라냐르 총장이 최근 파인만 상단이라는 곳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다는 것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동제에 할당된 예산의 절반 이상이 파인만 상단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총장이 횡령을 저지른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본선에 사용될 무언가를 준비하려는 것이리라.
그래서 뱀과 오베른이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나섰다.
여기서는 아마엔, 정확히는 아마엔의 아버지 로일의 도움을 받았다.
리들 상단을 운영하는 그가, 3구 바로 근처에 파인만 상단이 매입한 창고가 있다고 알려 준 것이다.
저 앞의 빨간 벽돌 건물이 창고 건물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평범한 시민으로 위장한 무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셋뿐이야. 내 눈에 보이는 건 그래.'
뱀은 어찌 된 안목인지, 숨어 있다는 세 무인을 확실히 찾아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조금 전 화장실에 간답시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남은 두 명 중 하나가 방금 광대에게 털라고 지시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숙련된 무인을 상대로 소매치기하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리고 마침내.
"이 새끼가!"
"아아악!"
광대가 바로 손목을 붙잡힌 채 제압되었다.
그리고 행인인 척 접근했던 광대의 동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저 새끼, 저 새끼 잡아!"
"뭐야!"
그리고 남아 있던 무인 한 명이 그 행인을 쫓아가 덮쳤다.
'지금이다!'
뱀이 소리치고.
몸을 가볍게 만든 오베른이 얼른 담을 뛰어넘었다.
'나 아무래도 천재 같아!'
뱀이 기쁘게 으스대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162. 미션 뱀파서블
오베른의 운동 능력.
분하게도, 그리 나쁘지 않다.
체력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팔다리가 길쭉하니 시원하게 뻗어 있다.
손도 큼지막하고 몸도 좋다.
내가 언제 한번 '너같이 생긴 애들은 인간적으로 운동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니, 운동 안 했단다.
그냥 타고난 건가 보다.
그러니까 비교하자면 이세계 차X우 같은 사람인 것이다.
거기에 가속, 몸을 가볍게 하는 주문까지 사용하니까 어지간한 닌자 뺨쳤다.
이래서 전투 마법사, 배틀메이지가 무서운 것이다.
정말 숙련된 마법사는 웬만한 기사만큼이나 쾌속하고 강력하게 움직일 수 있다.
물론 정말 숙련된 기사한테는 당할 수 없겠지만.
오베른만 해도 담을 넘어 건물 내로 잠입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저기, 담벼락 뒤에 두 명이 오고 있어.'
그야말로 마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는 내가 붙어 있었다.
'저 문에 마력이 느껴지네, 수상해!'
마력감지를 통해 마력이 깃든 문을 찾아내기도 한다.
펠비게이션에 이은 뱀비게이션 런칭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고리에 가까이 가 봐.'
오베른이 손을 내밀었고, 그 손목에 감겨 있던 내가 문고리를 앙 하고 물었다.
-으음.
문고리에 걸려 있는 마법은 꽤나 복잡했다.
하지만 펠레리안의 지시에 따라 마력을 운용하니.
철컥!
하면서 자물쇠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제법 커서 오베른도 화들짝 놀랐다.
"뭐야."
누군가가 다가온다.
오베른, 숨어!
오베른은 얼른 풀숲 안으로 숨어서 드러누웠다.
그러자 누군가 나타나더니 문을 점검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멀쩡하니까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잘못 들었나...."
경비원은 상투적인 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는 고개를 저으며 떠나갔다.
풀숲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오베른에게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뭐 해 안 일어나고. 어, 너 왜 우니?'
'아뇨. 햇볕이... 눈부셔서요.'
오베른은 얼굴에 나뭇잎을 붙인 채 눈물을 주륵 흘리고 있었다.
그러게, 오베른의 배 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멋지긴 했다.
'자, 그만 여유 부리고 갈까!'
'...예에.'
눈물을 흘릴 시간 따위는 없다.
오베른은 조금 전 매직 자물쇠를 해체한 문을 열었다.
끼익-
소리를 안 내고 열려고 했지만, 약간의 소음이 났다.
긴장한 채 안을 들여다보니 시커먼 계단이 지하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베른이 코를 살짝 막았다.
'누린내, 그리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군요.'
결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냄새였다.
짐승의 냄새와, 알 수 없는 매캐한 향이 느껴진다.
오베른보다 후각이 훨씬 예민한 나한테는 지독할 지경이다.
'으흠, 뭔가 익숙한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은데....'
그 정체가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오베른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다행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별다른 함정이 없었다.
-안타깝기는 뭐가 안타깝느냐.
'아니 그래도 사람이 단단히 맘먹고 왔는데 별게 없으니까요....'
-넌 뱀이잖아.
그렇지.
하기사, 상단의 비밀 창고가 던전도 아니고 함정이며 기관장치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경비를 서고 마법 자물쇠를 걸어 둔 것만 해도 차고 넘친다.
'내가 이런 일까지 하게 될 줄이야....'
오베른이 내적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자기 반 학생들을 위해 수능 시험지를 훔치려는 것과 비슷했다.
도덕적으로 문제지만 사나이적으로는 참작할 만한 점이 있다.
안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창고 같지는 않은데 왜일까.
보통 창고는 어두컴컴하기 마련이다. 혹시 누가 있는 걸까?
'마석을 이용해서 만든 마력 등불이군요. 비용이 높아 화재 위험성이 큰 곳에서 사용하는 건데....'
'흠.'
이곳에서까지 오베른에 탑승하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나는 오베른에게 말했다.
'오베른 여기서 좀 쉬고 있어.'
"정말입니까!"
'....'
그렇게 기뻐하다니, 조금 상처다.
나는 오베른에게서 풀쩍 뛰어내렸다.
매캐한 냄새, 그 향을 쫓아갔다.
그러자 저 한쪽 구석에 잔뜩 적재된 물자가 보였다.
나무 파레트 위에 쌓인 상자들.
그 상자들을 슬쩍 뜯어 보니. 냄새의 정체가 드러났다.
-화약이군.
'화약이죠.'
노란 황지로 단단히 밀봉한 것은 분명 화약일 것이다. 그 특유의 냄새가 났으니까.
그리고 옆에 있는 것들은 틀림없는 폭죽이었다.
'불꽃놀이라도 하려는 건가?'
-이걸로 불꽃놀이를 하면 성대하긴 하겠군.
펠레리안이 빈정댈 만큼, 화약의 양은 과하게 많았다.
-이건 그 노움 놈의 물건이 아닐 수도 있지.
-그렇죠.
내가 아는 것은 이곳이 상단의 창고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화약으로 뭘 한다는 말인가. '폭죽 맞고도 튼튼하게 버티기' 대회 같은 것을 열려는 것도 아닐 테고.
게다가 여기서 나는 것은 화약 냄새만이 아니다.
'이쪽이에요.'
짐승의 냄새가 난다.
마물의 냄새와 피 냄새가 난다.
죽은 마물의 사체라도 있는 것일까.
몇몇 마물의 사체는 비싼 값으로 팔린다고 하니까.
하지만 조금 다르다.
이건 살아 있는 것들의 냄새다.
큼지막한 문이 나타났다.
자물쇠가 걸려 있다.
흐음.
그래, 뭐, 어차피 처음에 자물쇠를 열었을 때부터 침입한 흔적이 남았으리라.
그렇다면 이판사판.
나는 장검 석양을 꺼내 들고 꼬리로 움켜쥐었다.
투명한 손보다는 확실히 꼬리로 휘두를 때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자물쇠를 여는 마법을 사용했다.
"사악!"(알로호모라!)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참격lv5를 사용합니다.」
스킬의 적절한 조합은 마법과 다름없는 법이다.
쩌엉!
굉장한 소음이 울리며 자물쇠가 끊어졌다.
묵직한 문을 밀어서 열었다.
그러자 여태까지 났던 누린내가 더욱 진하게 풍겨 왔다.
'오.'
방 안에 잔뜩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철창'이었다.
철창 안에 갇혀 있는 것들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크르르르...."
"구우오."
침을 흘리고 있는 마물들이다.
상단은 이곳에 사로잡은 마물들을 가둬 둔 것이다.
'설마 이건....'
곧바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검투 경기를 하려는 건가!'
-베스티아리로군.
상단이 살아 있는 마물들을 보관해 둘 이유가 뭐 있겠는가.
거대한 서커스 쇼라도 기획하던 게 아니라면, 마물들과 학생들의 싸움을 연출하려는 총장의 의지일 것 같다.
'대박이다.'
나는 이 세상의 가치관이 전생과 다르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학교 다니는 아가들인데 마물과 싸우게 하다니.
하긴 생각해 보니 마법 학교에서는 원래 그런 경기를 했던 것 같다.
'베스티아리가 뭐예요 근데?'
-마물과 사람이 싸우는 경기를 의미한다. 보통 도박장이나 제국에서 주로 하는 짓거리인데. 노움 녀석 제법 과감하군.
펠레리안이 말하는 베스티아리도 검투 경기가 맞는 것 같다.
왕자까지 껴 있는데 마물과 싸우게 하다니.
나는 이곳에 갇혀 있는 마물들을 둘러봤다.
상단의 동물 복지가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철창에는 피와 오물이 그대로 눌어붙어 있었다. 하긴, 저 마물들을 다른 철창으로 옮기면서까지 씻기고 관리해 주기는 어려웠으리라.
그런데 녀석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밥이라도 좀 챙겨 주지.'
대부분 배가 홀쭉했다. 밥도 제대로 안 주는 것 같았다.
굶주리게 만들어서 호전성을 높이려는 걸까.
──────────────
[갈리타 귀신 거북lv23]
[특성]
[긴 다리]
──────────────
내가 아는 보통 거북과 달리 다리가 길쭉해서 몸놀림이 빨라 보이는 녀석도 있었고.
──────────────
[블랙 긴 목 늑대lv30]
[특성]
[긴 목]....
──────────────
모가지가 조금 길쭉한 늑대도 있었다.
왜 이렇게 길쭉한 녀석이 많아.
공통점은 다들 상태에 [불결]이나 [굶주림] 따위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쯔쯔쯔.
녀석들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펠레리안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불퉁하게 그리 물어보니, 펠레리안이 입을 뗐다.
-어떤 기분이냐.
'기분요?'
-감상 말이다. 저리 구질하게 갇혀 있는 마물들을 본 감상.
'어....'
감상이라고?
나는 솔직히 말해 줬다.
'...별로 맛없을 것 같다 정도?'
-맛없을 것 같다고...? 하기는, 마물이 같은 마물에게 소속감을 느끼는 것도 드문 일이지. 하지만 네놈은.... 으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말하시죠.'
-아니다, 됐다.
펠레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실없는 요정 같으니라고.
말을 하지 않으려는 그를 귀찮게 해서 결국 말하게 만드는 데에는 자신 있었지만, 나는 그냥 넘어갔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나는 마물에게 별다른 동정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마엔을 비롯한 애들이 이놈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고민될 뿐이다.
그런데 철창 사이를 돌아다니려는 내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컹! 컹컹!"
"크루루루루, 쿠왁!"
이 마물들이 내게 이를 드러내며 짖는 것이다.
충격적이기 그지없다.
'얘들아, 너희들 그게 맞아?'
마물로 어느 정도 살다 보면, 다른 마물의 급 정도는 알아챌 수 있는 법이다.
벌레형 마물처럼 뇌가 작다면 모르겠지만.
이 녀석들은 내 상대도 안 되는 녀석들이다.
기껏해야 라니아 선에서 정리되는 마물들임이 분명한데, 나를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더군다나 그 거북 앞을 지나가려던 순간.
"퀙!"
녀석은 자기가 카멜레온인 줄 아는지, 분홍빛 혀를 촥 쏘아냈다.
매섭고 빠르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화살마저 물어 챌 수 있는 뱀이 되었다.
이까짓 혀는 꼬리를 탁 쳐 내고.
단검을 휘리릭 돌려서 땅에 콱.
"꿔거어어억!"
꽂아서 제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귀신 거북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혀끝이 땅에 틀어박힌 채라서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얘들아.
진정해.
기세를 뿜어내자.
시끄럽게 울던 마물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사사삭."
배고파서 잠깐 눈이 뒤집혔던 거지?
나는 칼을 뽑아 주었다.
거북이 얼른 혀를 집어넣고 철창 한구석으로 허겁지겁 피했다.
긴 목 늑대도, 멧돼지를 닮은 녀석들도 낑낑대며 물러났다.
좋은 생각이 났다.
미리, 이 녀석들을 길들여 둘까.
나는 잔뜩 겁먹은 거북이를 노려봤다.
*「지배의 왕관lv1을 사용하여 '갈리타 귀신 거북lv23'을 지배합니다.」
이러면....
*「실패했습니다.」
어?
지배력이 부족한 걸까.
그러면 길들이기라도 ....
*「지배의 왕관lv1을 사용하여 '갈리타 귀신 거북lv23'을 길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잘되지 않았다.
*「실패했습니다.」
*「주인이 있는 마물입니다. 지배력이 더 필요합니다.」
주인이 있다고?
인간들이 설마 이 마물들을 길들인 걸까?
'아니...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것은 몹시.
아주 몹시 어려운 일이다.
총장 본인이 하나하나 마물을 길들였다면 몰라도, 설마 말이야.
그렇다면 차라리 이 중에 이놈들의 우두머리가 있다고 보는 게 맞을 텐데.
어디, 대장 마물이 있나?
"사아아악!"
여기 대가리 누구야! 하고 외쳐 봤지만.
당당히 나서는 마물은 없었다.
철창을 둘러봤지만 이제는 나와 눈을 마주치려는 놈도 없었다.
이런 녀석들 중 우두머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어.
그러다가, 안쪽에 철문이 하나 있는 게 보였다.
이상하게도 자물쇠나 문고리가 없다.
다만 튼튼한 철문에 열쇠 구멍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설마 저 안에 우두머리가 있는 건가.'
꽤 단단한 방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연담....
열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데.
"뱀님!"
오베른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슬슬 시간이 됐습니다."
아, 이런.
우리의 잠입은 제법 계산적으로 진행되었다.
오베른이 침입했다는 걸 들키면 몹시 곤란해질 터.
경비가 교체되기 전에 나가야 한다.
아쉽지만 시험 내용이 뭔지는 알았으니 여기까지 하도록 할까.
나는 호로로록 기어나갔다.
그러던 와중,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저거 뭐야!'
벽면에 열쇠 하나가 걸려 있었다.
설마, 저 안에 있는 철문을 여는 열쇠일까?
그렇다기엔 열쇠가 너무 작은데.
그것을 훔쳐 갈까 고민하다가 다른 생각을 했다.
'복사해 가자.'
*「중급원소마법:흙lv1을 사용합니다.」
누군가 열쇠를 훔쳐 갔다면 자물쇠를 교체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그냥 조용히 복사만 해 가면 되는 일이다.
흙을 단단히 뭉쳐서 열쇠를 그대로 복사했다.
"뱀님!"
"사아아악!"
재촉하는 오베른의 손목 위에 얼른 올라탔다.
쿵쾅거리는 그의 맥박이 여실히 느껴졌다.
겁은 많아 가지고.
"좀, 제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
'바보야, 그런 말 하면 안 돼.'
"네?"
'그런 말 하면, 꼭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고.'
'설마요....' 오베른은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히 우리는 조용히 상단의 비밀 창고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 * *
"자베른 경감님, 오늘 들어온 시신입니다."
"으."
수도치안경비대 소속 자베른 경감이 눈을 찌푸렸다.
솔리온 임펠은 큰 도시이다.
무연고 시신쯤이야 하루에도 몇 구씩 들어온다.
안타깝게도 수도의 치안은 제법 괜찮아서. 그런 시신들은 꼭 한 번씩 경감급의 확인 작업이 이루어진다.
맛좋은 점심을 먹은 직후인 자베른에게는 불쌍한 일이다.
"장난해? 이걸 왜 나한테 보여 줘?"
"절차 아닙니까."
장의사는 불퉁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반쯤 썩어 문드러진 시체보다는 이런 시신이 낫다고 해도, 그래도 너무하지 않은가.
"뼈다구밖에 안 남은 걸 나보고 뭐 어쩌라고!"
처리대 위에 뉘여 있는 시신은 사실 그냥 백골 한 구였다.
그것도 얼마나 물에 푹 잠겨 있었는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꼴에 팬티는 입고 있네."
"그 팬티가 중요하죠."
시신은 팬티만 남아 있었다.
골반 뼈에 붙어서 헐렁하게 남아 있는 속옷.
그게 뭐 중요하다는 걸까.
"귀족 같은데요."
"뭐...?"
"실크 재질에다가 자수로 이니셜도 적혀 있습니다."
자베른 경감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거 어디서 구한 건데."
"하수도랑 이어진, 다리 밑 거지촌에서요."
"거 참."
자베른이 헛웃음을 지었다.
강에 버려진 귀족의 시신이라고?
이건 맡을 만한 사건이었다.
163. 작은 거인의 비약
강물에 시신이 버려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시신의 신원은 노숙자나 병든 거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솔리온 임펠 수도치안경비대가 신원 미상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그냥 대충 도장 찍고 화장해 버린다.
시신은 재로, 그리고 재는 강물로.
강물에서 건져온 시신은 다시 강물로 돌아가리니.
물론 그중에서는 사건이 엮여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잔뜩 취한 취객이 다리 위에서 싸움을 벌이다가 한 명이 떨어져 죽었다든가.
평소에 증오했던 윗집 사람을 죽인 뒤 강물에 던져 버렸다거나.
만약 시신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면 수사가 진행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냥 신원미상자로 처리하여 화장해 버린다.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수도치안경비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사건은 늘 살인적으로 많다.
자베른 경감만 해도 동시에 수십 개의 사건을 담당 중이니.
행정력의 효율적인 사용은 경비대의 중요한 의무다.
"나쁘지 않아, 안 그래도 자잘한 조무래기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다.
'귀족'과 엮인 사건은 늘 최우선 순위로 올라간다.
자베른은 부호와 엮인 사건보다 귀족과 엮인 사건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특히 피해자가,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귀족인 경우를 좋아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악취미적이라고 평가했지만 글쎄.
귀족이 죽은 사건은 어마어마한 판돈이 걸린 도박판 같은 것이다.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찍혀서 피해를 입겠지만, 완벽하게 해결해 내면 탄탄대로가 보장됐다.
"이거 보고는 안 올라갔지?"
"예, 누군지도 모르니까요."
"잠가 놔. 누군지부터 파악해 놓자고."
그리고 이 경우는, 잃을 위험은 없고 딸 가능성만 있는 사건이었다.
피해자를 파악하고 사건을 해결하면 귀족 가문에 찾아가 탐정 흉내를 내면 된다.
만약에 해결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화장해 버리면 되는 일이고.
자베른 경감의 입가가 씰룩씰룩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조수는 영 표정이 밝지 못했다.
"이걸 찾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해골에 팬티밖에 없는데. 귀족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내가 본 바로 실크 팬티에 이름 적어 두는 건 귀족밖에 없어."
"그리고 실크 팬티에 적힌 이름도 그냥 이니셜...."
실제로 그러했다.
단서라고 할 건 실크 팬티뿐인데, 거기에 적힌 이니셜은 'C. D'뿐.
단서가 너무 적다.
추리소설에 나오는 천재 탐정이라면 실크의 재질을 보고 '이런 팬티는 수도에서 한 군데밖에 못 만들지. 빅토리아 시스루의 한정판 남자 팬티다!'라고 곧바로 알아낼지도 모르겠지만.
자베른 경감은 그런 천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베테랑다운 노련미가 있었다.
"다리 밑 거지들 싹 다 조지면 뭐든 나오게 되어 있어. 그리고 이 귀족 놈이 처음부터 팬티만 입고 뒤지진 않았겠지."
그는 담배를 꼬나물며 명령했다.
"이 해골 가지고 있던 미친 거지랑 그 근처 사는 거지들 싹 다 잡아 와 봐."
"예에, 하아."
조수는 건방지게도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가 한숨을 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리 밑에 사는 거지들은 솔리온 임펠의 골칫거리다.
위생상태가 최악인 그들은 늘 썩은 내를 풍겼다.
곧 취조실이 그 썩은 내로 가득 찼다.
해골을 자기 천막 안에 보관하고 있던 정신 나간 노인네는 이미 충분히 털어 봤으니.
거지들의 왕초 노릇을 하고 있는 중년인을 취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불안한 듯 눈을 뒤룩거렸다.
초조한 듯 붙잡고 있는 손에는 손톱 때가 잔뜩 껴 있었다.
조수와 눈이 마주치니, 헤헤 하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그러자 세 개밖에 남지 않은 누런 앞니가 드러난다.
퀴퀴한 냄새에 조수가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베른 경감은 그런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한참 뜸 들이며 담배를 피웠다.
기다리는 게 지겨워질 시점.
그가 갑자기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타앙!
"히억!"
"왜 죽였어?"
갑자기 그리 물어본다.
거지 왕초는 당황했다.
"예에? 죽이다뇨, 누구를요?"
"그 양반 있잖아. 귀족. 네가 누굴 죽인 건지 알아?"
"전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지가 당황했다.
그는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 채 끌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살인이라니. 순간 치안경비대에서 종종 범인을 찾지 못해 거지들을 범인으로 만든다는 소문이 떠오른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어르신이 찾아오셨어. 아드님이 그리 가셨으니 얼마나 분하실까."
"어, 어르신요?"
"왜, 듣고 싶나? 네가 죽인 게 뉘 집 자제인지?"
"아니, 제가 안 죽였다니까요!"
사실 이런 방식의 협박 자체가 그리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죽은 줄 알고 건져냈는데 살아 있긴 했어요, 근데 이미 배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고요."
"...."
"오히려 그놈, 아니 그분이 저희 애를 하나 죽였습니다. 물에 빠진 놈, 아니 분 구해 놨더니...."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자베른 경감이 활짝 웃었다.
처음엔 살아 있었다고? 단서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자세히 한번 말해 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그리고 그는 떨어져 있는 조수를 돌아보며 제 코를 톡톡 두드렸다.
'어떠냐, 내가 냄새가 난다고 했지?'하는 뜻이었다.
"하아."
조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냄새는 무슨 냄새란 말인가. 거지 냄새밖에 안 나는데.
* * *
오베른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의 앞에는 아마엔이 앉아 있었다.
이 학생에게 마법을 가르칠 것.
그것이 뱀의 주문이었다.
요즘은 할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악몽을 덜 꿨다.
코번트, 그 개새끼.
오베른의 약점을 잡고 쥐흔들던 새디스트, 가문만 좋고 실력도 그저 그런 주제에 늘 오베른을 버러지 취급했던 나쁜 자식.
하지만 아무리 나쁜 자식이라고 해도 오베른은 그런 코번트를 죽였다.
배에 얼음송곳을 박아 넣고 강물에 빠뜨렸으니, 악몽을 꾸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의 악몽은 코번트가 살아 돌아오는 것이었다.
배에 얼음송곳이 박힌 채, 흠뻑 젖은 상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오베른의 인생을 파멸시키겠다 선포한다.
이 꿈의 내용을 뱀에게 얘기했다.
혼자서 술을 마신 날 밤에 그랬던 것 같다.
곧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뱀은 그 이야기에 이렇게 답해 주었다.
'만약 그놈이 나타나면 내가 깨끗하게 해치워 줄게.'
그 말이 어째선지 무척이나 든든했다.
뱀에게 진심으로 충성할 마음까지 들었으니, 그의 마음 상태가 불안정하긴 했나 보다.
'이런, 정신 차려야겠군.'
아마엔을 가르치던 중에 잠깐 상념에 빠져 버렸다.
지금 아마엔의 앞에는 큼지막한 종이가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다.
다만 평범한 종이는 아니었다. 마석을 곱게 빻아서 그 가루를 첨가한 물건으로, 마력 감응도가 몹시 높은 비싼 물건이었다.
"명상의 깊이를 적절하게 조정해야 한다. 너무 내면으로 침잠해서도 안 되고, 주변의 자극에 집중이 흐트러질 정도로 얕아도 안 된다."
아마엔은 마치 들리지 않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듣고 있는 것을 알았으니 오베른은 설명을 계속 이어 갔다.
"네가 해야 할 것은 마력의 나무를 그리는 것이다. 마법사라 함은 모두 자신의 영혼에 나무 한 그루를 키운다. 뿌리로부터 나무 기둥이 올라가고, 그것은 사대 원소, 암흑, 빛, 중력, 염동 등의 형태로 갈라져 가지가 된다. 네 마음속에 그려진 나무를 뽑아내라."
이것은 마법사의 잠재력을 측정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당연히 오베른이 창안한 것은 아니고, 대마법사 카스피안이 만들어 낸 측정법이다.
오베른은 적당한 크기의 나무를 그려 내었다.
모자람은 없었지만, 천재성을 드러내지는 못했기에 남들 앞에서 다시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마엔의 손에서부터 먹이 번지듯 마력이 그려졌다.
츠츠츠-
그것은 천천히 올라가서 나무 기둥의 형상을 이루었다.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은 색이다.
'대단히 순수한 마력....'
종이가 아마엔의 마력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엔의 마력량은 그가 영재교육을 받지 못한 평민인 만큼, 평범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 순수함은 과연 범상치 않았다.
나무 기둥이 거의 종이의 전부를 채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이 멈추지 않는다.
'아니... 대체.'
슬슬 갈라져 가지를 뻗칠 시점인데도.
종이의 끝까지 자라나더니.
거기서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츠츠츠츠츠....
마력 감응지를 넘어서서, 나무의 형상이 마룻바닥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풍성한 가지가 하나, 둘, 다섯, 열, 열일곱.
열일곱 개의 가지.
마치 세계수처럼 거대하고 장엄한.
아마엔의 잠재력을 오베른은 시각적으로 목격했다.
"믿을 수 없군...."
늘 쓰고 있던 오베른의 가면이 순간 깨졌다.
그 자신이 지니고 있지 않은 천재성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순간.
오베른의 가슴은 늘 질투로 타들어 갔었는데....
'...괜찮아.'
지금은 어째선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가슴 속 어딘가가 근질근질하다.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진다.
이것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기특함, 기대감, 자랑스러움.
"헉, 교수님, 바닥이...!"
정신을 차린 아마엔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들을 보고 당황했다.
"죄송해요! 이게 왜, 왜 안 닦이지!"
"하하하."
바닥을 닦는다고 허둥지둥하는 아마엔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오베른을 아마엔과 아이들이 멍하니 바라봤다.
오베른은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크흠, 저기서 수세미를 가지고 와서 닦아라."
"아, 네!"
수세미를 찾으러 가는 아마엔의 뒷모습을 보니 깨달았다.
'스승 노릇에 빠져 버린 건가.'
뱀이 시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교수로 취직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 너무 심취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뱀이 뭐라 뭐라 했다.
'이야, 아마엔은 역시 대단해. 엄청나지 오베른.'
'아...예.'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은데, 그 카스피안이 만들었다고 했지?'
뱀이 종알종알 계속 말했다.
허어 참, 말이 많은 마물이다.
근데 저렇게 굴어도 이제 밉지 않은 맘이 드는 건 왜일까?
아마엔의 마법 성취는 매일매일 일취월장했다.
라니아야 한 사람 몫을 가장 잘해 주고 있다.
문제는 필리 한 명인데....
오베른은 필리를 봤다.
그는 마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마법적 재능은 평범.
신체적인 조건은 최악.
다른 무엇보다 약한 체력이 문제였다.
저런 녀석이 마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레온 왕자보다 더 잘 해내야 하는 상황인데.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때였다.
'와!'
뱀이 탄성을 터뜨린 것은.
'다 흡수했다!'
'흡수요? 지팡이요?'
'그래, 지팡이의 지옥 마법을 내 것으로 만들었어!'
뱀은 이 대단한 지팡이의 능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계속 지팡이에 매달려 있었던 것인데, 결국 그 놀라운 것을 해냈나 보다.
'여기서 써 볼까?'
'진정하십쇼 다 불타 버립니다.'
교수연구소에서 지옥불 마법을 썼다가는 대화재가 일어날 것이다.
뱀은 신나는 듯 기쁨의 춤을 추었다.
'자, 이 지팡이는 완전히 네 거야.'
'감사합니다....'
지팡이에 휘감겨 있던 덩굴풀도 뱀의 몸 위로 올라탔다.
지옥 변질된 마력을 잔뜩 흡수한 덩굴풀은 상당히 오동통해졌다.
'그러면 이제, 어디 한번 큐브를 열어 볼까?'
뱀은 그리 말하고 지팡이에서 내려갔다.
반지를 낀 꼬리를 대충 휘젓더니 허공에서 큐브 하나가 똑 떨어졌다.
꼬리에 큐브를 올려두고 한참 정신을 집중하더니.
철컥.
큐브가 저절로 해체되더니 내용물이 드러났다.
"사아아악!"
뱀이 그것을 보고 놀라 펄쩍 뛰었다.
* * *
대체 큐브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함께 놓여 있던 지팡이는 제법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잔뜩 긴장했는데.
'이, 이게 뭐야!'
지팡이와 달리, 큐브는 흡수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다만 열기 위해서 몹시 고약한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구조였는데, 나는 연결의 왕관이라는 스킬 덕에 그 귀찮은 과정을 스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내용물은, 액체가 담긴 작은 앰플.
'포션 같은 건가.'
솔직히 조금 실망스러웠다.
퀘스트 보상으로 장비템을 받는 것과 소모템을 받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뭔지 얼른 봐라.
'알겠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눈에 힘을 주어 살펴보았다.
──────────────
[작은 거인의 비약]
──────────────
그렇게 써 있었다.
거인이면 거인이지 '작은' 거인은 또 뭐라는 말인가.
다행히 앰플에는 그 설명서로 보이는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한번 읽어 봤다.
──────────────
비약을 마시면 일주일간 '근력', '민첩성', '내구력' 등의 신체능력이 급상승한다.
일주일이 지나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온다.
──────────────
어.
또 약간 미묘하다.
나는 이미 충분히 강력한 뱀인데.
음 거대화했을 때 먹으면 좀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쪽지 아래에 써있는 문구가 또 있었다.
요정어로 써 있었는데.
──────────────
제국은행 대여금고, 41048.
──────────────
또 다른 금고인가!
'아니 뭐 방탈출 해요?'
-무, 무슨 말이냐.
자꾸 단서가 튀어나오는 게 꼭 방탈출 게임하는 것 같다.
어찌됐든 지금 중요한 건 이 비약인데.
'대체 이런 약을 왜 금고 안에 넣어 둔 거예요.'
-기억 안 난다고 했지 않으냐!
펠레리안이 왠지 부끄러워했다.
그것을 보니 사실 기억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수상했지만.
'마침 잘됐다.'
사실, 설명을 보면 나보다 더 비약이 필요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지금, 저기서 바들바들 떨면서 마보자세를 하고 있는 필리.
"사악!"(필리!)
그리 부르니, 마보 자세를 취하고 있던 필리가 고개를 돌렸다.
"저, 저요?"
그래, 너.
그런데 용케도 알아들었네.
164. 머슬핏
"엄마, 아니 어마마마가 이상한 거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필리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니, 물론 비약을 먹고 깨꼬닥 죽어 버린 것은 아니고.
비약을 먹고 나서 끙끙 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소파에 눕혔다.
"나 죽는 거야?"
그러면서 필리는 눈물을 주륵 흘렸다.
아마엔과 라니아가 당황해서 나를 봤다.
오베른의 시선은 나를 비난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펠레리안을 바라봤다.
-걱정 마라 죽진 않을 테니.
' ...이거, 영감님이 카스피안한테 주려고 했던 거죠?'
- ...아마 그렇겠지.
큐브를 찾은 것은 펠레리안의 대여 금고 안이었다.
그리고 펠레리안은 카스피안에게 금고를 열어 보라는 전언을 남겼었다.
아마도 카스피안에게 지팡이와 함께 전하려던 물건일 터.
나는 합리적인 추론을 해냈다.
'독이라도 섞은 거 아니에요?'
그러자 펠레리안이 소리를 질렀다.
-이노오오옴! 나를 누구로 아는 것이냐! 하늘을 뒤집는 대마도사인 내가 겨우 인간 마도사 하나 해코지하려고 독을 쓴다는 게 말이 되냐!
작은 몸으로 방방 뛰면서 역정을 낸다.
'아니... 저주받은 지팡이도 준비해 놓고선....'
-...크큼. 그건, 그건 그놈이 지팡이에 저주가 걸려 있는 것을 못 알아챌 리가 없으니. 해코지하기 위해 숨겨 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왜 맨날 불리할 때면 소리를 지르신대.'
귀 아프게 말이다.
나도 펠레리안과 함께한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이럴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게 그의 레퍼토리라는 것도 알았다.
-여하튼 독은 안 들어 있다. 작은 거인의 비약은 무척 귀한 물건이야. 카스피안 그놈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했는데, 그 때문에 전달했는지도 모르지.
'사이 안 좋은 것 아녔나요.'
-...나도 그놈에게 저 귀한 것을 왜 줬는지는 모른다. 작은 거인의 비약은 신체능력을 짧은 기간 동안 강화시켜 줘. 부작용도 거의 없지. 그래서 귀한 것이고. 저건 아마도 비약이 몸에 작용하는 여파일 것이다.
그때, 라니아가 소리를 질렀다.
"어어!"
뭐야!
나는 허겁지겁 필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비약의 효과'를 눈으로 확인했다.
'저, 영감님. 부작용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가 언제 없다고 했나. 거의 없다고 했지.
'아니 그래도 저건 ....'
부작용... 이 아닌가?
"뭐,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요?"
필리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잡았던 소파의 나무팔걸이가 부러져 버렸다.
우지끈.
놀란 필리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팔다리가 아주 조금 길어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둘레였다.
빈약했던 팔뚝에 울끈불끈한 근육이 붙었다.
불룩 솟아난 핏줄 하며, 마치 한평생 몸을 단련한 기사 같다.
"이게 뭐야!"
아마엔과 라니아가 움찔 물러났다.
확실해졌다.
작은 거인의 비약, 그 부작용은 근육이 붙는 것이었다.
'괜찮지 뭐, 보기 좋은데 하하하.'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명백히 수상한 변화이긴 했지만, 어차피 일주일 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도 할 거고.
그렇게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있으려니.
당장 정오가 지날 무렵, 필리에게 급보가 왔다.
'솔라리안에 참가하게 된 것을 격려차 부르니, 2왕자 레온과 3왕자 레온은 저녁까지 입궁하라.'
국왕으로부터의 호출이었다.
비상사태였다.
* * *
솔리온 왕국의 2왕자.
레온 아데네스 솔리온.
곧 있을 솔라리안을 대비해서 수련을 하던 중, 그는 국왕으로부터의 호출을 받았다.
얼마 전 미리 이번 본선의 주제가 '베스티아리'라는 정보를 입수한 참이다.
마물과의 전투는 몹시 어려운 일, 그것을 대비하는 중요한 시간이었는데 저녁 식사 초대라니.
어명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레온은 지금의 이 상황이 그리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저녁 식사에는 레온만 부른 것이 아니었다.
왕자와 공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것이다. 왕은 종종 이런 식사 자리를 열었으니 알았다.
그리고 오늘이라면 누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레온의 품에는 꽃다발이 안겨 있었다.
수도 최고의 플로리스트에게 급히 들러 준비한, 화려한 꽃다발이었다.
각양각색의 이국적인 꽃들을 모아 둔 이것을 누님께 전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솔라리안의 우승을 기원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얼마 전, 예전에서 1위를 빼앗긴 이후로 레온의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이번 본선에서는 반드시 1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걸어서 백합궁 앞까지 도달했다.
특별하게도 릴리 공주는 자신의 궁 하나를 따로 배정받았다.
그녀가 거울의 방 관리자라는 특별한 직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백합궁에는 왕자인 레온조차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누이에게 동생 레온이 찾아왔다 전하거라."
하인에게 그리 명했다.
하인은 깊게 읍하며 들어갔다.
약간 긴장한 레온은 발끝으로 땅을 파면서 기다렸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부러 기다리게 하는 것인가 싶어질 쯤.
하인이 돌아왔다.
"뵙고 싶지 않으시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
레온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하인은 조금 난처해했지만, 그렇다고 명을 어기고 왕자를 들이지는 않으리라.
"꽃이라도 전달해 드릴지요?"
그 말이 오히려 레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 같다.
"되었다."
그는 하인이 보는 앞에서 꽃다발의 꽃을 잡아 뜯었다.
채 전달되지 못한 꽃들의 뜯기고, 꽃잎이 사방에 날렸다.
너덜너덜해진 꽃다발을 레온은 근처에 대충 휙 던졌다.
그러고는 망토를 휘날리며 뒤로 돌았다.
하인이 황망해했지만, 레온은 그것을 신경 쓰지도 않고 떠나갔다.
표정은 얼음장같이 차가웠지만 가슴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누이와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은 안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 일 아닌가.
이렇게 먼저 동생이 손을 내밀면 맞잡아 줄 것이지.
더 이상 왕족으로서의 가치도 없는 누이여.
입맛이 쓰고 화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그때.
하필 배다른 동생 필리를 마주친 것은 우연의 산물이었을까.
필리 역시 꽃다발을 들고 백합궁을 향하고 있었다.
레온을 본 그는 당황해서 얼른 꽃다발을 뒤로 숨겼다.
그 꼴이 한심해서 레온은 평정을 잃고 말았다.
"네놈이 여기 무슨 일이냐."
평소와 달리 가시 돋힌 감정을 숨기지 못한 것만 봐도 그랬다.
"리, 릴리 누님을 만나 뵈려고."
"하! 정말 분수도, 염치도 모르는 놈이구나."
"...."
그리고 레온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필리가 입고 있는 옷이 요상하기 그지없었다.
자기 몸에 전혀 맞지 않는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는데, 품이 워낙 커서 가오리 같기도 했고 마대 자루를 뒤집어쓴 것 같기도 했다.
"옷은 어디 거지 같은 것을 주워 입어서."
레온은 무척 기분이 나빴고, 그 나쁜 기분을 동생에게 풀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종종 그래 왔듯, 멱살을 콱 움켜쥐었다.
"이... 어?"
그런데 감각이 이상했다.
평소라면 종이 인형처럼 흔들거렸어야 할 필리인데, 지금은 마치 밀이 가득 든 포대 자루를 잡은 느낌이다.
" ...하여튼. 백합궁은 이미 내가 다녀왔다."
"혀, 형님이요?"
"그래, 누님을 만났지. 네 이야기도 나왔고."
"무슨 이야기를...."
레온의 눈빛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여전히 너를 혐오하시더군. 네 잘못을 아직도 곱씹고 계시더라. 역겨워서 다시는 네 얼굴을 보기도 싫은데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솔라리안을 참관하게 되어서. 기분이 우울하다고 말씀하시더군...."
정작 문전박대당한 것은 본인이면서, 레온은 그리 말했다.
"그런...."
필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의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이 툭, 땅에 떨어졌다.
그 꽃다발마저 레온의 것에 비해서는 훨씬 투박했다.
"그러니까 누님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고 꺼져라."
레온이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필리의 가슴팍을 미는데.
툭.
마치 쇳덩이를 미는 듯했다.
자신의 손 감각이 이상해졌나 하고 레온이 당황하니, 그제야 필리가 아잇쿠, 하면서 밀려 났다.
"...마음에 안 드는 놈."
레온은 떨떠름해하면서도 떠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후우."
필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갑자기 우락부락해졌으니 기존의 옷은 맞지 않았다.
일주일만 버티면 되는데 하필 오늘 호출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오베른과 뱀은 근육을 가릴 수 있는 '오버핏'이라는 옷을 찾아서 입혀 주었다.
원래는 드워프들이 입는 옷이라고 하는데 불명예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레온에게 변화를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서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물론, 곱씹어 보니 충격적인 내용이긴 했다.
"역시, 누님은...."
필리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
원래라면 감히 찾아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레온이 그에게 품었던 악한 의도대로, 오해가 쌓이려는 순간이었는데....
"아니, 그래도 뱀 선생님이...."
필리는 아리송해하면서 푸른 꽃다발을 주워들었다.
어제, 뱀 선생님이 조잘거리며 알려 줬다.
'아 그러니까 릴리 걔가 너한테 당한 게 있기는 했어도. 영원히 얼굴 안 보고 살 생각은 아니라던데? 시간 되면 꽃이라도 가져가 걔가 요즘 좋아하는 꽃이.... 응? 진짜냐고? 그러면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니? 바보 아니야 이거....'
그리고 '아차, 릴리가 비밀이랬는데.' 이래 버리는 것이다.
황당하긴 했지만, 늘 어두컴컴했던 마음속에 약간의 빛이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일단 꽃만 두고 가자. 몸도 이러니까....'
뱀의 싼 입 덕분에 오해가 쌓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레온의 혀 놀림이 효과를 잃은 것이다.
결국 필리는 백합궁 앞에 꽃다발만 두고 후다닥 도망쳤다.
* * *
릴리는 마음이 안 좋았다.
그녀가 레온을 문전박대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통쾌하거나 기분 좋을 이유는 없었다.
마음이 답답해서 궁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어머."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것도, 푸른 백합을 모아 만든 꽃다발이.
"블루 릴리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개량되어서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품종이기에, 소수의 인물 말고는 그녀가 블루 릴리를 좋아하는 사실을 아직 모를 텐데.
'설마 레온이....'
문전박대당한 레온이 두고 간 것일까.
꽃다발을 보니 입맛이 더욱 썼다. 인사라도 받아 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
그렇게, 꽃다발의 주인에 대한 오해가 생기려던 순간이었다.
"필리 왕자께서 두고 가셨습니다."
"아, 그래?"
문 앞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던 하인이 그리 말해 주었다.
오늘 아침 깨끗하게 청소했던 문 앞이 다시 더러워졌고, 그는 빗자루를 들고 꽃다발의 잔해를 치우던 중이었다.
하인은 또한 덧붙였으니.
"레온 왕자께서는 방문을 거절당하자 꽃다발을 갈기갈기 찢어서 내팽개치고 가셨습니다."
"어머.... 그,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뱀이 필리에게 블루 릴리에 대한 것을 전해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푸른 백합의 향기를 맡고 살풋 웃었다.
오해는 쌓이지 않았다.
* * *
"...하여 본선을 시자악, 합니다아아!"
총장이 확성 마법으로 예의 멘트를 내지르고
솔라리안의 진행요원들이 일제히 폭죽을 발사했다.
퍼엉! 퍼퍼펑!
하늘에 아름다운 불의 꽃이 수놓았다.
'아, 이러려고 폭죽을 그렇게 많이 쌓아 뒀구나!'
나는 감탄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석이라도 갈아 넣은 것인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불꽃은 선명하게 보였다.
"어 왔구나!"
그때 아마엔이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반겼다.
"으응. 하하."
돌아온 것은 근육필리였다.
몸에 근육이 잔뜩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리비리한 행동거지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필리의 손 위로 올라타서 물어봤다.
'어 누나랑 화해했어?'
'아니 화해를 어떻게 해요....'
듣자 하니 꽃다발만 냅다 던지고 왔다는 것 아니겠는가.
어우 답답해.
-이놈아, 저 왕자 놈이 저지른 죄가 있는데 화해가 가당키나 한 소리냐. 그 공주 여자애는 평생을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았는데.
'그렇다고 평생 모른척해요? 미안하다는 이야기라도 하든지.'
-고쳐 줄 것도 아니고, 말뿐인 사과는 가치가 없다 이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걔도 필리랑 관계를 개선하고 싶대요. 그러면 다른 이야기죠.'
-으음.
펠레리안은 어쩐지 더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대진표 발표한다!"
라니아가 외쳤다.
"본선의 주제는, 베스티아리! 학생들은 원형 경기장 안에서 마물과 싸울 겁니다!"
귀신같게도 3인 일조로 마물과 싸운다.
즉 8팀의 경기가 치러지는데 각기 점수를 매겨서 두 팀만 통과시키고 비로소 결승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대진표은 완벽히 랜덤으로 짰습니다. 공개합니다! 가장 먼저 있을 경기는...!"
과연 진짜 랜덤일까?
"필리 아덴 솔리온, 라니아 마르테인, 아마엔 리들의 1조!"
하필이면 우리였다.
그리고 우리 애들 셋이 상대할 마물은.
"거대 사마귀입니다!"
필리의 얼굴이 흙색으로 물들었다.
"왜 하필 또 벌레야...."
벌레형 마물과 인연이 깊은 왕자로구나.
165. 뜻밖의 만남
당장 내일 있을 경기를 앞두고 대비책을 짜던 중.
필리가 입을 뗐다.
"근데 사마귀는 생각보다 할 만할 것 같은데요."
뭐?
모두가 그런 필리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조금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아니, 벌레는 관절이 가늘잖아요. 뼈대도 그렇고. 딱, 이렇게."
필리는 칼을 잡고 휘두르는 듯한 모션을 취했다.
"썩둑하고 잘리지 않을까요? 아니면 이렇게 몸으로 확 밀치면 와드득하고. 부러질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있다.
세 치 혀로 세상을 오시할 수 있는 입검의 경지.
아무래도 왕자 필리 아덴 솔리온은 그런 경지에 오른 것 같다.
나조차도 논검 대결로는 그를 이길 수 없으리라.
나는 종이에 일필휘지로 적어 외쳤다.
'갈!!'
"갈...?"
'너는 사마귀가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사마귀 마물을 상대해 본 적이 있으세요?"
'있다마다.'
라니아의 질문에 그리 대답했다.
'옛날에, 대수림에서 충왕이라는 네임드 마물과 싸운 적이 있어.'
오베른은 '또 허풍이군....'하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가감 없는 사실이다.
'충왕 리옥크라는 대단한 괴물이었지. 이 건물의 크기랑 비슷했다고 하면 믿을 수 있니?'
"아니요."
'하지만 사실이야.'
거짓말이 아니었다.
'당시 그림자 숲에는 마물의 세력이 셋 있었지. 마치 삼국지처럼.'
촉나라라고 하면 당연히 우리.
그리고 위나라는 실버백 침팬지 아킴스가 이끌던 손 있는 패거리들.
마지막 오나라가 충왕과 벌레군단일 것이다.
'충왕은 수만 마리의 벌레 마물들을 이끌었어.'
아이들은 여전히 잘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천천히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여러 간부급 마물들이 있었지. 사악한 인면 거미, 그리고 대장군 지네맘.'
"지, 지네 뭐요?"
'마음 착한 한 여인이 있었단다.'
그리고 그 벌레들 중에서는 당연히 사마귀 또한 있었다.
직접 맞상대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이끌던 '동물원의 짐승들' 크루가 꽤나 고전한 상대였다.
'예전에 한 소드마스터가 한 말이 있어. 고양이의 체중이 수십 배가 나간다면. 그래서 만약 사람과 같은 체중이 된다면. 그것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기사 여럿이 필요할 거라고.'
"소드마스터 누가요?"
'마찬가지로 100kg의 사마귀가 있다고 생각해 봐.'
"아니 어떤 소드마스터가.... 네에."
'몸이 거대해지면 그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골격도 단단해지지. 벌레의 근력은 자기 체중대비 어마어마하게 강해. 체중이 늘어나도 힘이 강한 건 마찬가지다.'
실제로 100kg도 되지 않을 사마귀는 수백 키로는 나갈 멧돼지를 쉽게 잡아 들었다.
'보여 줘야겠군. 거대해진 마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거대화lv2를 사용합니다.」
나는 몸을 키웠다.
딱, 100kg이 나갈 정도로.
그러니까 아나콘다처럼, 대략 체장 6m의 길이로 서서 아이들을 내려다본 것이다.
필리가 와락 쫄았다.
"어, 어어...."
나는 위압감을 끌어올렸다.
이미 오베른을 통해 수급한 위엄의 양이 상당하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바, 위엄이 오르면 내 위압감 역시 강해지는 것 같다.
무형지기에 보너스가 붙는다고 해야 할까.
곧, 라니아와 아마엔마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나는.
"사사사사삿!"
호탕하게 웃어 주었다.
'어떠냐, 무섭지?'
그제야 애들은 내 강의를 마음 깊이 이해한 것 같았다.
"뱀 경의 말씀이 틀린 게 없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박수까지 쳤다.
"벌레형 마물은 아주 무섭지요. 특히 위협적인 요소는 바로 그 외골격입니다."
사마귀의 외골격은 원래 그리 단단하지 않다.
손으로 누르면 파사삭 부서질 정도.
"만약 딱정벌레 계통의 마물이었다면 그 갑피를 부술 수 있는 것은 라니아 아가씨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마귀라도 거대한 놈들은 몸이 아주 단단하죠."
그는 단검과 장검을 동시에 꺼내 들었다.
"검, 이런 얍실한 무기로는 외골격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다른 무기를 쓸 겁니다."
원래 벌레형 마물들을 상대할 때는 모닝스타 같은 것이 최고다.
뾰족한 가시가 박힌 쇠구슬을 사슬에 매달아 휘두르는 둔기인데, 반동과 원심력을 이용하면 벌레들을 수월하게 으깰 수 있다.
"모닝스타가 최고지만, 그것은 숙달되기까지가 몹시 어렵지요."
올리버가 검을 집어넣고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손도끼와 방패였다.
"여러분들은 이걸 쓸 겁니다."
필리와 라니아에게 손도끼와 방패를 나눠 줬다.
아마엔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는데.
"저는요?"
"아마엔 군은 불꽃 마법을 쓸 겁니다. 벌레는 불에 상극이지요. 그리고 라니아 아가씨와 왕자 저하가 전열을 맡아서 마법사를 지키는 대열입니다."
역시 노련한 사냥꾼답게 그는 벌레를 사냥하는 방법을 알았다.
"사악!"(좋아!)
그러면 특훈을 시작해 볼까.
주어진 시간은 겨우 하루.
사실, 도끼와 방패에 익숙해지기도 벅찬 시간이었다.
그러나 특훈을 진행하면서 밝혀진 사실이 있었으니....
단 한 명 때문에, 나와 올리버가 열심히 강의한 것 중 상당수가 쓸모없어져 버렸다.
'야!'
필리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었다.
'너 왜 그렇게 힘이 센 거야.'
한 시간도 안 돼서 도끼 두 자루를 부러뜨려 버린 것이다.
그것이 사마귀를 상대하는 데에 어떤 변수를 만들어 줄지는,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 * *
"자자, 조금 있으면 접수 마감합니다! 승패로 걸 수도 있고 우승자 맞히기도 가능합니다! 우승자를 맞히면 배당이 무려...."
왕자까지 출전하는 솔라리안임에도 불구하고 도박꾼들이 돌아다니면서 호객을 했다.
아니 오히려 왕자들이 출전한다는 사실에 도박들이 더 성행하고 있었다.
오베른은, 조용히 인내심을 갈고닦았다.
'걸고 싶다.'
걸고 싶었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필리와 그 일행의 우승에 몽땅 걸고 싶었다.
겉보기에는 부유한 귀족처럼 보이는 오베른이었지만, 사실 알거지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에메랄드 스쿨의 교수가 학생들의 승패에 돈을 걸다니 말이다.
'그래도, 제발 이겨 다오...!'
내기는 못 해도 그는 누구보다 간절히 제자들의 승리를 바랐다.
9할은 필리를 우승시키라는 궁정백의 협박 때문이었지만, 나머지 1할쯤은 어느덧 스승이 된 오베른 개인의 욕심이었다.
"입자앙-!"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세 명의 참가자가 입장했다.
필리, 아마엔, 라니아였다.
그들이 원형의 경기장에 입장하자 관객들이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뭐니 뭐니해도 본선의 첫 경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 자리에는 왕과 솔리온의 유력 인사들까지 자리해 있었다.
오베른은 교수석에 앉아 손에 땀을 쥐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이들도 잔뜩 긴장한 눈치다.
'잘해야 할 텐데... 그치?'
'예....'
뱀의 말대로였다.
그렇게 경기를 지켜보려는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다가왔다.
"오베른 교수님?"
짜증이 나서 돌아보니, 특이한 복식을 입고 있는 사내였다.
제국의 양식이다.
오베른도 움찔 당황했다.
"대사께서 찾으십니다."
"대사요...?"
제국으로부터 대사가 파견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제국의 대사는 원칙적으로 솔리온의 국왕과 대등한 입장.
그런 자리인 만큼 강력한 지위의 사람이 왔을 것이다.
"예, 외부의 시랑이시자 1급 행정관이시고 황제 폐하의 명으로 대사로 임명되신, 마간 사레브 후작이십니다."
"아...."
외부의 시랑, 1급 행정관, 제국 후작, 셋 중 어느 것 하나 대단치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사레브 가문은 당연히 오베른도 알고 있는 유력가였다.
"안내해 주시지요."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간 사레브는 오베른이 두려워하는 궁정백보다도 대단한 인물이었으니.
제국 대사는 과연 왕족들과 같은 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주변에 앉은 이들도 하나같이 제국의 복식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수염이 길고 눈매가 날카로운 중년인이 하나 있었다.
"그대가 오베른 그리모아르군."
"사레브 후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오베른이라고 해도 늘상 연기하던 오만함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저를 부른 이유가 뭘까.
긴장감의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긴장하지 말게. 이쪽으로 편히 앉아."
"예, 감사합니다."
사레브 후작은 오베른을 앉힌 뒤 수하에게 손짓하여 서류를 넘겨받았다.
"오베른 그리모아르. 솔리온 임펠 4구에서 출생. 어머니는 ...."
제국 후작이 읊기 시작한 것은 오베른의 인생사였다.
"교우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고. 천재라는 평가를 받으며 수도 마법영재원에서 차석 졸업. 차석? 흐음... 그리고 제국으로 유학을 왔지."
오베른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사레브 후작이 말하는 것들은 꽤나 자세한 정보였다.
그중에서는 어떻게 알아냈을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로 내밀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생토마토를 싫어한다든가, 수업시간에 도망쳤던 일이라든가.
"천재라고 불린 것치고는 그리 대단한 성과를 내지 못했군. 오베른 그리모아르."
"...."
가슴이 쿵쾅거렸다.
오베른은 숨겨야 할 것들이 많은 사람이다.
천재가 아니면서도 천재인 척했으며, 최근에는 사람을 죽였다. 코번트를.
후작이 그것조차 알아냈을까.
"제국의 정보력은 아주 뛰어나지. 사람 한둘만 쓰면 한 사람을 탈탈 털기는 쉬운 일이야."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뱀은 늘 그런 것을 곧바로 눈치챘다.
'오베른, 평정심.'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표정을 가다듬었다.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전향서를 냈었더군, 황립 마법연구소에. 그리고 연구소에서는 자네를 떨어뜨렸지."
"...!"
"실속이 없다. 그게 자네에 대한 평가였어."
설마 그때부터 오베른이 '가짜' 그 자체라는 게 파악된 건가.
그러면 이제부터 오베른의 미래는....
"하하하."
그런데 설마 후작이 그 순간 웃음을 터뜨릴 줄이야.
"뭐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나?"
"...예?"
"이거 참 망신이야. 황립 마법연구소의 안목이 겨우 그 정도였다니."
그는 서류의 아래쪽을 툭툭 두드렸다.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대단한 성과를 거뒀더군."
"대단한 성과라니...."
"노움 발라냐르는 황제 폐하도 인정한 마법의 수재이지. 그가 저번 학회에서 자네 칭찬을 얼마나 늘어놓았는지 몰라. 지옥마법과 염동마법의 새 체계를 개발해 냈다며. 내가 마법은 잘 모르지만 황마연 놈들은 꽤나 깨졌을 거야."
오베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발라냐르 총장님, 뱀 님, 감사합니다.
안도감에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그는 속으로 눈앞의 후작을 마구 욕했다.
'제기랄. 할 짓 없는 새끼. 가만히 있는 사람 불러서 괜히 긴장하게 만들고.'
'어어, 오베른 고운 말 써야지.'
칭찬이나 늘어놓자고 부른 건 아니었을 터.
"지금이라도 제국에 전향하게."
"예?"
오늘따라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게 자꾸 반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늘 인재에게 너그럽지. 내가 돌아갈 때 함께 따라오는 게 어떤가."
"아...."
"대우는 이곳에서 받는 것에 두 배로 해 주지. 제국민이 될 기회라고. 내가 이런 제안을 아무에게나 하지는 않네."
그야말로 자선이라도 베푸는 듯 오만한 말투다.
하지만 오베른은 후작의 말에 어떤 과장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두 배의 대우를 받고 제국의 대귀족 아래로 들어간다고? 게다가 그가 직접 나서서 회유를 해?
이건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원래의 그였다면 곧바로 충성을 바치겠다 엎드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
"왜, 대우가 마음에 들지 않나?"
후작은 기분 나빠 하는 대신 정말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
"정말... 관대한 제안에는 무척 감사드리지만...."
스스로도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저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라."
다행히 사레브 후작은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왕자를 가르치는 일 말인가?"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은지라."
"하하, 하하하!"
후작이 웃자, 그 옆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
오베른은 얼굴이 훅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충절이 대단해.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군. 가 보게나."
"그럼, 좋은 말씀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베른은 제국의 예법으로 인사를 올렸다.
떠나려는 그에게, 후작이 말했다.
"상황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기회는 열어 두겠네."
"...감사합니다."
어쩐지 묘한 말투다.
그리고.
콰앙!
경기가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고, 거대한 사마귀가 등장했다.
사마귀는 곧바로 돌진해 오고, 라니아와 필리가 도끼와 방패를 들고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그리고 달려가던 필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방향을 바꿔 도망쳤다.
"하아."
옳은 선택이었나 정말.
오베른은 입맛이 썼다.
166. 냅다 불지르기
3인의 아이들이 그 작은 뱀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눈알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 마물의 특성과 스킬을 파악할 수 있었다면.
──────────────
[우드스킨 톱날 사마귀lv32]
[특성]
[포악함], [작은 뇌]
[스킬]
[가속lv8], [물어뜯기lv10], [도약lv10], [잡아채기lv7], [폭주lv3]
──────────────
아마 그런 정보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초월적인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보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있었다.
이 마물을 포획해 온 사냥꾼들은, 저 산맥의 동부 어귀에서 사마귀를 데려왔다.
마물들은 서식지에 따라 그 특성과 진화 방식이 변한다.
대수림의 벌레 마물과 산맥의 벌레 마물은 그 특징이 다르다.
식생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차이다.
산맥은 대수림에 비해 춥고 먹잇감이 더 적다.
때문에 마물의 덩치가 더 큰 경향이 있으며, 만만한 최하위 피식자 마물이 적다.
사냥을 위해서 사마귀는 대수림과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우드스킨.
외골격이 나무껍질과 비슷한 형태로 진화한 것이다.
그 강도 역시, 어지간한 나무보다 단단하다.
"퀴레레레레레레!"
괴상한 울음소리가 원형 경기장을 가득 채운다.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대개 그렇듯, 그 포효에는 위압감이 깃들어 있었다.
사마귀에게 달려들려던 필리는, 으아악 하면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행동.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마르테인의 비기를 이어받은 적통의 후계자.
라니아 마르테인이 사마귀를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
라니아는 마치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다.
그가 손으로 들고 있는 도끼가 덜덜 떨렸다.
아마엔이 그것을 눈치챘다.
주문을 외면서 캐스팅 중이었는데, 사마귀가 그런 라니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주문을 중단하고 외쳤다.
"라니아! 움직여!"
"...아!"
라니아가 얼른 방패를 들어 사마귀의 앞발을 막았다.
콰직!
그런데 놀랍게도, 앞발이 라니아의 방패를 그대로 꿰뚫었다.
힘 대 힘으로는 벌레 마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앞발을 회수하니 방패 역시 어이없게 딸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니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대체 왜일까.
라니아는 놀라운 재능으로 마르테인 가의 가르침을 흡수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지금 경지는 어지간한 기사를 뛰어넘을 정도다.
눈앞에 있는 사마귀 마물도 침착하기만 하면 상대할 수 있다.
"정신 차려 라니아!"
그런데 지금은 다리가 굳고 몸이 떨렸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떠올리고 만 것이다.
영지를 불태우고, 그녀가 타고 있던 마차를 휩쓸었던 몬스터 웨이브를.
정작 지금은 그 몬스터 웨이브의 선두에 있었던 뱀 선생님한테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참, 요상한 삶이다.
콰악!
간신히 앞발을 피했다. 그녀가 조금 전 있던 자리에 사마귀의 앞발이 꽂혔다.
패배가 확실해지는 경우에는 진행요원들이 개입해서 경기를 중단시킨다.
생각해 보니, 그러면 더 이상 무서울 일이 없지 않을까.
라니아의 마음이 그리 약해진 순간이었다.
짜악!
누군가 그녀의 뺨을 때렸다.
아니, 투명한 손이.
"아, 아마엔!"
어이가 없어서 돌아보니.
아마엔이 자기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 관객석들이 보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오베른 교수.
그리고 그의 지팡이에 앉아 있는 뱀 선생님.
저 뱀이 뺨을 때린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퀴레레엑!"
탐색을 끝낸 사마귀는 이쪽을 만만한 상대라 여긴 것 같다.
거침없이 육탄으로 돌격해 온 것이다.
다행히 라니아는 정신을 차렸지만 그녀의 고전이 누군가의 마음을 불타게 만든 것 같았다.
"젠자아아앙!"
쫄아서 도망치던 왕자가 돌아오고 있다.
필리의 얼굴에는 여전히 공포가 깃들어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그의 발을 돌린 것이다.
그 이름은 우정.
내심 믿고 있던 라니아가 위험에 빠진 모습을 두고 넘기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달려왔으니 라니아도 반가웠지만.
"위험해 라니아!"
필리는 사마귀가 아닌 라니아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자, 잠깐-!"
"피해앳!"
그리고 필리는 라니아를 밀쳤다.
원래의 필리였다면 그저 평범하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필리는 '초근육' 상태였고.
모 고수가 말하길 파괴력=근육x스피드였다.
콰아앙!
라니아는 트럭에 치인 것처럼 멀리도 날아갔다.
"아아악!"
핑그르르 돌면서 날아가는 라니아의 모습이 마치 만화 같았다.
그녀는 성대하게 추락했다.
마르테인 가의 수련법이 워낙 뛰어나서 머리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라니아, 기절.
다행인지 불행인지 필리는 자신이 벌인 일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방패를 들어 사마귀의 앞발을 막는 데에 급급했다.
콰앙! 쾅!
조금 전처럼 한 번에 방패가 부서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끔찍하게 무거운 공격이다.
필리는 돌아온 것을 조금 후회하며 외쳤다.
"도, 도와줘 라니아!"
라니아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필리는 그리 외쳤다.
뒤에 있던 아마엔은 이 한편의 촌극을 전부 보아서 알았다.
필리에게 '라니아는 너 때문에 기절했어, 혼자 어떻게든 해 봐!'하고 외칠 수도 있었겠지만 그리 하지 않았다.
"아만 투, 이그나티오...."
또다시 주문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
화염마법을 끝까지 외웠다.
뱀 선생님이야 무영창으로 마법을 뿅뿅 쏘았지만, 아마엔은 정석대로 주문을 캐스팅했다.
초급 화염마법으로 펼칠 수 있는 최고의.
화염구를....
"이그니트!"
창졸간이지만 필리는 그 영창의 뜻을 알아챘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날린 것을 보면 알았다.
사마귀의 앞발은 허공을 갈랐고.
필리가 몸을 피한 틈으로 불덩이가 날아갔다.
몸을 날리는 도중에 필리는 그 과정을 보았다.
열풍이 그를 휘익 스치고. 불덩이가 사마귀의 몸통에 정확히 적중한다.
아니, 적중하기 직전이었다.
사마귀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불덩이를 '베었다.'
마법적 불덩이를 잘랐으니 폭발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퍼엉!
그 폭압에 의해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렸다.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사마귀는 불에 휩싸여 있었다.
필리가 희색을 띠며 웃으려 했는데.
"퀴레레레레렉!"
저 끈질긴 사마귀는 머리통에 불이 붙은 채로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폭주'의 순간이었다.
곧 죽을 것이 확실했지만 놈은 마구 앞발을 휘두르며 달렸다.
불덩이를 쏜 원흉. 아마엔을 향해.
"안 돼!"
필리는 벌떡 일어났다.
전열에게 할당된 임무는 후열의 마법사를 지키는 것.
대체 라니아는 이런 위급한 상황에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라도 뭔가를 해야 했다.
"아마에엔!"
조금 전 라니아에게 그랬듯.
아마엔에게 달려가 밀쳐서 날려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 대신, 아마엔에게 달려가는 사마귀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온 힘을 다해, 도끼로 찍어....
쩌걱!
도끼가 박혔다.
동시에, 도끼 자루가 부러져 버렸다.
필리는 황당한 눈으로 자루밖에 안 남은 도끼를 바라봤다.
사마귀는 멈추지 않았다.
방패는 걸레짝이 됐고 도끼는 잃어버렸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나.
그때, 뱀 선생님과 했던 대화가 번개같이 떠올랐다.
'정 급박한 상황이 되면 그냥 몸으로 뛰어들어.'
'네? 마물한테 어떻게 그래요....'
'지금 네 힘은 엄청나단 말야. 주먹으로 치든지, 조르든지 해.'
'예....'
대답은 했지만 그럴 자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마물과 육탄전을 벌이라니.
하지만 정작 그럴 상황이 닥치니 몸은 꽤나 쉽게 움직였다.
그래야 한다는, 아마엔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필리는 라니아에게 배운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곡선을 그리듯.
퍼엉!
그리고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순간, 묵직한 사마귀의 몸이 살짝 떠올랐다.
주먹으로부터 느껴지는 타격감에 전신이 떨린다.
이번엔 오른손으로.
퍼어엉!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난다.
사마귀의 입에서 진액 같은 것이 푸확 하고 뿜어져 나왔다.
치명적인 공격들이 들어오자, 폭주한 사마귀는 본능적으로 필리를 노렸다.
필리가 고개를 숙여서 놈의 앞발을 피한 것은 반쯤 운이었다.
후웅!
그러나 그 운이 계속 지속되기는 어려울 터.
그것을 알았기에 필리는 숙인 그대로 사마귀에게 태클을 걸었다.
뱀 선생님의 조언대로였다.
'사마귀는 하체가 부실하잖아. 그러니까 딱 태클을 걸어서 이렇게 샤샤삭!'
이게 진짜 먹히네 싶었다.
사마귀는 그대로 한 바퀴 굴렀으니까.
'네 말대로 관절이 약하긴 하니까, 이렇게 관절을 확 부러뜨리든지 아니면 목을 뽑아 버리란 말이야.'
스스로 뱉어 낸 진액 때문에, 땅을 구르면서.
사마귀의 몸에 붙었던 불도 꺼졌다.
하지만 여전히 뜨겁기 그지없었다.
사마귀의 머리통을 콱 잡으니, 손바닥이 벗겨지는 듯 뜨거웠다.
"끄으으읍!"
잔뜩 힘을 주자, 필리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뿌득, 뿌드득.
그리고 기괴한 소리가 잠시 울리더니.
빠지지지지직!
필리는 정말로 사마귀의 머리를 뽑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전신에 짜르르 뜨거운 기운이 흘러 퍼졌다.
경지가 오르는, 레벨이 상승하는 감각이었다.
사마귀를 죽여 마성을 흡수한 것이다.
"돼, 됐다."
스스로도 얼떨떨해서 그리 중얼거리니....
곧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우아아아!"
승리의 순간이었다.
* * *
대단한 경기였다.
게다가 경기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이 환호와 함성은, 대부분이 필리를 향한 것이었다.
"허어, 3왕자가 저러한 용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제국의 대사 마간 사레브 후작이 그리 감탄할 정도였다.
오베른은 조금 전 자신이 떠나온 그쪽을 바라봤다.
후작의 부하가 무언가를 마구 적고 있었다.
"대놓고 왕자들을 평가하고 있어."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누군가 끼어들었다.
오베른은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아는 목소리였고, 아는 인물이었다.
궁정백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궁정백, 인사 올립니다."
"괜찮어, 박수나 치게."
"왜 아래까지 혼자 오셨는지...."
"왜기는, 자네가 대사랑 너무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고 있길래 와 봤지."
"...."
하기사 그럴 줄 알았다.
오베른이 대사와 대화하는 모습은 너무 대놓고 드러났다.
그것도 대사의 계획일지도 몰랐지만.
"허튼 생각은 말게. 자네한테는 내가 있잖아? 필리 왕자를 저리 훌륭하게 가르쳤는데 말이야. 하하하...."
궁정백이 오베른의 등을 두드렸다.
"자네는 내 사람이지. 그렇지?"
"예에, 그렇지요."
궁정백은 사람 좋은 노인네처럼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갑작스러운 말을 던졌다.
"오늘, 많은 것이 결정될 것이네, 지금 솔리온의 국운이 풍전등화인 것을 아는가?"
"풍전등화요...."
"그래, 원래 제국도 두려워하는 강대국이었던 우리는 점점 쇠락해 가고 있어. 저 대사가 거들먹거리는 것만 봐도 볼 수 있지. 왕국이 직면한 문제가 넷이나 있는데 어디 한번 말해 보겠나?"
골치 아파 죽겠는데.
오베른은 가까스로 짜증을 숨기고 말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시지요."
"자네가 그리 말하니 말해 주지."
궁정백은 손가락을 하나 올렸다.
"제국이 왕권을 잡고 흔드는 게 첫 번째 문제야. 왕자 한 명을 교육해 주고 황제를 알현시켜 준다면서 볼모로 잡아가지. 그것도 왕세자를 말이야. 참으로 국치나 다름없는 일이니."
"예."
"두 번째는 작아지는 군세야. 저 북방의 야만족이며 제국이며 상대해야 할 적이 많은데. 군비를 늘리려고 할 때마다 사사건건 제국이 개입해서 막고, 온건파라는 놈들이 들고일어나고 이런 게 한두 해가 아니지."
"그러합니다."
"그리고 왕국민들의 정신력이 해이해졌어. 아무도 싸우고 지킬 생각을 안 하지. 이제는 분노할 줄도 모르게 된 것이야."
마지막은 차치하더라도 앞의 두 개는 확실히 왕국이 가지고 있는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는, 오베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이 죽어 간다네."
"...."
"국왕 전하의 내장에 종양 덩어리가 과도하게 증식하는 병증이 생겼다더군. 온갖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해 봤는데, 앞으로 딱 3년 남았다네. 많이 남은 것 같기도 하고 적게 남은 것 같기도 해."
3년 뒤면 아직도 왕자들이 어릴 시점이다.
국왕의 건강은 그 자체로 기밀인 것을.
부담스러운 정보를 알아 버렸다.
"나 궁정백은 다시 없을 애국자 아닌가.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 고민했지. 적어도 앞의 세 개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 방법이 뭔지 궁금하지 않나?"
"...경청하겠습니다."
솔직히 듣고 싶지 않았으나.
오베른은 예의상 물었다.
"임팩트야. 임팩트."
궁정백은 말라 비틀어진 주먹을 들었다.
"한 방에 모든 것을 바꾸는, 임팩트."
흰자가 적게 보이는 눈알이 번들거렸다.
오베른은 그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궁정백의 눈은 명백히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만 생각하는 자의 눈이었으니까.
'오오, 이제 다음 경기다!'
그때, 그런 발랄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뱀이었다.
뱀은 궁정백이 뭐라고 하든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다음 경기에만 관심이 있었다.
2왕자의 경기였다.
오베른도 궁정백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경기장을 내려다봤다.
2왕자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경기장 안에 있었다.
그그긍-
그리고 마물이 등장하는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고릴라랑 싸우다니, 얘들도 힘들겠네.'
뱀이 그리 중얼거렸다.
2왕자가 싸울 상대는 고릴라 마물이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고릴라 마물이 등장한 순간.
'...어?'
뱀이 당황했다.
* * *
영장류 마물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실버백 아킴스라는 네임드 마물과 싸운 경험이 있는데, 그놈이 영장류 마물들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 믿을 수 있는 수하 중 하나가 바로 고릴라였다.
말도 통하고 마음씨도 착한 마물.
고릴라 여사라고 불렀지만, 아마 정확한 이름은 '스트롱 암 고릴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 아래에서 왕자와 대치하고 있는 마물의 이름은 그게 아니다.
──────────────
[아이언 암 고릴라lv21]
──────────────
그리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크허어엉!"
지성이 없는 마물처럼 포효를 한다.
하지만 나는 알아봤다.
그녀의 눈빛에 숨겨진 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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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온화함], [충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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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남아 있는 특성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달아 준, 강철 의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릴라 여사!'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167. 뱀과 콩나무
펠레리안.
천형을 받고 태어난 엘프.
요정의 이단아.
역천의 대마도사.
그리고, '한 뱀의 가장 가까운 관찰자'.
지금 펠레리안은 펠레리안이라고 할 수 없다.
아마도 영혼의 조각.
게다가 기억까지 마음대로 조작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기억 속의 '나'와 지금의 펠레리안을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뱀 앞에서 그리 티를 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실은 펠레리안에게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고 자아가 뒤흔들리는 대사건이었다.
마법사에게 자아는 전부다.
세상의 어떤 족속들보다도 마법사의 자아는 단단하고 확실해야 한다.
대마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재능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자아가 뒤흔들렸으니 대단한 위기였다.
제대로 된 육체가 있었다면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정신은 육체를 따라가는 법이니까.
하지만 몸이 없는 펠레리안은?
그는 소멸의 위기를 겪었다.
최근 그가 말이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대로 자아가 더 흔들린다면 존재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가까스로 자아의 편린을 붙잡았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시 세워야 했다.
그의 삶의 원동력, 여태까지의 가치관, 기억을 이용해.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자아를 확립해야 했다.
'펠레리안.'
'천형을 받고 태어난 엘프.'
'요정의 이단아.'
'역천의 대마도사.'
그것들은 모두 과거의 것들이다.
조각으로 나뉜 영혼의 일부인, 지금의 펠레리안이 세운 업적이며 얻은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뱀의 가장 가까운 관찰자.'
그것만은 지금의 펠레리안이 얻은 정체성이 맞았다.
게다가 아마도 유일한 업적이다.
분하고 인정하기 싫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반지 속에 깃든 그를 주운 것은 뱀이었고.
정신이 깨어난 직후부터 계속 뱀과 함께했으니까.
기억이 얼마나 조작되었는지 모르는 지금, 확실하고 실존하는 것은 뱀의 관찰자로서의 기억이었다.
'그래, 그런 것이다.'
그 순간 펠레리안은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아마.
이전의 펠레리안과 지금의 펠레리안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게 변한 것은 아니겠지만....
파직.
펠레리안은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적어도 대마도사로서의 소양과 지식은 머릿속에 전부 들어 있었다.
지금의 영혼체로는 본디 마법을 쓰지도, 물리력을 행사하지도 못했지만.
파지직.
글쎄.
이제는 아니다.
조금 더 있으면 기초적인 마법 정도는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
힘을 많이 쓴다면 물리력도 행사할 수 있다.
이렇게 말이다.
뱀의 머리를...!
탁!
'앗 깜짝이야.'
뱀이 펠레리안을 노려봤다.
'왜 때려요!'
-이 녀석아. 몸 색깔!
'아차!'
뱀의 비늘 끝이 검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뱀은 얼른 평정심을 가다듬었다.
흑린을 쓴 모습은 이미 또 다른 가면처럼 활용하고 있는 정체성이다. 이미 한 번 드러내 버렸지만 자주 드러내서 좋을 것은 아니다.
뱀이 저리 분노한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고릴라를 이곳에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펠레리안도 고릴라 여사를 알아봤다.
괴성을 지르면서 2왕자 파티와 싸우고 있다.
-마치 지성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는데....
'고릴라 여사가 바보가 되어 버린 걸까요?'
-그렇게 진화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바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건데, 대체 왜?'
대수림에서 잘살고 있을 줄 알았던 고릴라를 이곳 경기장에서 만났으니 당황할 법도 하다.
하지만 '뱀의 관찰자'로서 펠레리안은 특이한 점을 눈치챘다.
역시, 그런 거군 하며.
뱀은 마물에게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인간이나 사람에게 보편적인 동정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아는 사람.
자신과 가까운 것들만을 아낄 뿐이다.
사마귀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합공당해 죽을 때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지만.
잠깐 거두었던 고릴라를 보니 꼬리를 동동 구르는 것이다.
재미있는 녀석이다.
사람들은 으레 그런 자들이 많지만.
마물 중에 그런 것들은 별로 없으니까.
'안 되겠어요. 구해 줘야겠어.'
뱀이 그런 결정을 하리라는 것도 대강 알았다.
-기다려 봐라 이놈아. 어찌하려고?
'어....'
그리고 펠레리안에게는 욕심이 생겨났다.
'뱀의 관찰자'. 그것에 그치지 않고.
'뱀의 스승'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그러지 말고.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만 해 봐.
* * *
팔에 쇳덩이를 달고 튀어나온 고릴라.
제법 강해 보인다.
"아이언 암 고릴라라는 마물이야. 대수림에서 잡아 온 개체지."
궁정백은 오베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저놈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계획을 세웠네."
"우리... 말씀이십니까?"
"누가 있겠나. 나와 전하지. 그리고 뭐, 발라냐르도 끼었고."
궁정백과 국왕, 그리고 발라냐르 총장.
사이가 좋지 않을 셋이 힘을 합친다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하지 못할까를 따져보는 쪽이 옳으리라.
"저 마물은 글쎄, 말이 통하더군."
저 고릴라가 말인가.
포효하기만 하고 말은 못 하는 것 같은데.
"말이 통하면 마물이라도 못 다룰 것 없지. 거래라는 게 가능해지니까. 마물과 거래를 했어, 놈과 놈이 이끌던 원숭이들의 목숨을 걸고."
궁정백은 가능하다면 마물마저 지배할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리 하였고.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하여....
"2왕자를 제국으로 보낼 수는 없네."
그때였다.
고릴라가 섬전같이 달려들어 2왕자를 잡아챈 것은.
나머지 둘은 일순간 배를 얻어맞고 튕겨 나갔다.
2왕자 레온은 발버둥을 쳤지만, 고릴라의 무쇠 팔은 억세게도 그를 움켜쥐고 있었다.
"저 사레브 후작은 2왕자를 볼모로 잡아가기 위해 왔지만, 보내 줄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
궁정백의 말이 끝난 직후.
일순간 조용해진 경기장에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우둑!
"아아아아악!"
레온 왕자의 팔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오베른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고릴라는 왕자의 왼쪽 다리까지 부러뜨렸다.
"2왕자는 공식적인 솔라리안 중 큰 부상을 입어 제국으로 갈 수 없게 되었고. 1왕자는 저 북방에서 야만인들과 싸우고 있으니 갈 수 없네."
궁정백은 흥얼거리듯 말했다.
설마, 그런 계획을 위해서 왕자의 팔다리를 공개적으로 부러뜨렸다고.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한 만큼, 의도된 계획이라 의심할 자도 없으리라.
"왕자 저하를 구해라!"
당연히 경기는 중단되었다.
고릴라 마물에게 이성이 있고, 거래를 했다는 것은 진실일 것이다.
놈은 레온의 팔다리를 깔끔하게 부러뜨렸음에도 그 마무리는 하지 않았다.
마치 흥미를 잃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왕자를 던질 뿐이었다.
병사들은 허겁지겁 레온을 들것에 올려 싣고갔다.
궁정백이 말했다.
"그에 반해 필리 왕자는 참으로 뛰어난 행적을 보였으니, 저 마간 사레브가 레온 대신 데려갈 만해."
"...."
"다 자네 덕이지. 자네가 열심히 가르쳐서야. 안쓰러운 일이긴 하네만, 왕은 필리를 싫어하거든. 하필 가장 아끼는 딸내미 얼굴을 못 쓰게 만들었으니 말이야."
오베른은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궁정백의 안배인 것일까.
그리고 그의 안배가 이것으로 끝나기는 한 걸까?
'와 저거 완전 나쁜 놈이네.'
그때 뱀이 감탄했다.
오베른은 비로소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뱀이 그와 함께 궁정백의 계획을 들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임팩트가 부족해. 이것으로는 겨우 문제 중 하나만 해결할 수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정도가 아니네."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뱀이 중얼거렸다.
'오베른, 나는 릴라 여사를 구한다.'
오베른은 순간 뱀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몰랐다.
'이런 곳에서 죽어도 될 부하가 아니야. 내가 책임지고 구해 줘야지.'
'책임요...?'
'저 말 많은 노인네는 잘 데리고 있어. 다녀올 테니까.'
뱀이 지팡이에서 툭 떨어졌다.
그리고 스르륵 어딘가로 기어 내려가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오베른은 뱀이 저 고릴라를 살리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사자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발라냐르 총장, 왕의 수호기사들이 있는 이곳에서.
그래 봤자 뱀 한 마리가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가? 얼굴이 허옇게 질렸어."
궁정백이 호오 하며 웃었다.
"아, 네, 놀랐습니다."
"으음, 리액션이 좋은 타입인지는 또 몰랐구만. 하여튼 들어 보게...."
궁정백이 더 지껄였지만.
오베른은 솔직히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 * *
꾸물꾸물.
기어간다.
길들인 것들에 대해서는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러면 앞으론 아무거나 길들여서는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고릴라 여사는 분명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하다.
눈앞이 아니면 솔직히 모르겠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병사들이 창을 들고 고릴라 여사를 포위하고 있었다.
-네 정체를 들키면 말짱 황이다. 오베른 그놈이며 네 제자들한테도 좋지 않아.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나는 기로에 서게 된다.
고릴라 여사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잠자코 있어서 다른 이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야 하나.
'이러면 될 거예요.'
-대가리 내밀지 말고.
그리고 뱀갈공명인 내게는 봉추가 붙어 있었으니, 펠레리안이 뛰어난 계책을 냈다.
꾸물꾸물.
기어갔다.
*「중급원소마법:흙lv2를 사용합니다.」
흙 마법을 사용해서 지하에 구멍을 파고 이동 중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창을 든 병사들의 발소리다.
고릴라 여사는 마치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대체 무슨 협박을 받은 거야 여사.
-이쯤이면 되겠군.
나도 멈췄다.
그리고 내 몸에 타고 있는 이실이에게 말했다.
"사사삭"(이실아, 너밖에 없다.)
도와줄 것은 이실이뿐이었다.
오베른의 지팡이 위에 매달린 뱀 모양 조각상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그 조각상에 덩굴풀이 뒤덮고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은근히 식물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게다가 서로 다른 덩굴풀을 구별하는 것도 못한다. 그 크기가 달라서야 더욱이....
*「연결의 왕관lv2를 사용합니다.」
이실이와 나는 또 한 번 연결되었다.
재미있게도, 녀석과 나의 관계는 참으로 특별했다.
아마엔과 내가 스승-제자 관계인 것처럼.
*「대상의 관계가 '자식'입니다.」
이실이는 내 자식이라고 한다.
어쩐지, 길쭉하고 꿈틀거리는 게 나랑 꼭 닮았다 했다.
마음으로 키운 내 덩굴.
*「사흘간 '거대화lv2'를 공유합니다.」
이실아, 가 보자고!
그리고 이실이가 거대하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마구, 이파리를 뻗친다.
땅을 뚫고 솟아 올라간다.
드드드드드-
목표는 최대한 거대하게.
천천히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경량화lvl5를 사용합니다.」
나는 이실이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그리고 이실이의 이파리에 매달려 함께 상승한다.
흰 몸은 가린다.
*「흑린lv4를 사용합니다.」
조금 전부터 화는 나 있었으니까 문제는 없었다.
땅에서부터 솟아오른 거대한 덩굴풀.
마치 잭과 콩나무에 나온 그 풀처럼.
나와 이실이는 솟아올라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창을 들고 있던 병사들이 황망하게 우리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관객들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채지 못했다는 얼굴로 입을 헤 벌리고 있다.
'이실아. 둥글게.'
이실이는 끊임없이 자라났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덩굴을 빙 둘러서 고릴라 여사를 가렸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를 차단한 뒤.
나는 이실이의 이파리 위에서 외쳤다.
"사아악!"
고릴라 여사가 나를 바라봤다.
'오랜만이야.'
그녀는 신기하게도 내 마음을 이해했다.
그렇기에 내 첫 참모였으니.
"대, 대장...?"
시간이 흘러 오랜만에 조우했을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포악함을 가장했던 얼굴이 순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나 맞아.'
나는 고릴라 여사 앞으로 툭 내려앉았다.
"대자아아아앙!"
'조용히 해!'
"우어어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솟아 나왔다.
'여기서 도망치자.'
"어, 어떻게?"
'뭐 일단....'
소란을 일으켜야 하지 않겠는가.
'불을 지르자고.'
*「연결대상 '악마사냥꾼의 덩굴풀 이실lv12'이 지옥불lv2를 사용합니다.」
이실이가 사방으로 지옥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돋아난 공포.」
*「인간들이 연결 대상에게 경악하고 두려움을 품습니다.」
*「거대한 양의 위엄을 획득합니다.」
오호.
위엄은 공포로도 얻어 낼 수 있구나.
좋은 걸 알았다.
168. 어느새 이렇게 강해지다니
필리는 부왕을 무서워했다.
어릴 적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따듯한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필리 아덴 솔리온은 아직 아이라고 할 수 있었고, 사랑은 충분히 받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죄'에 기인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필리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데에는 꽤나 큰 심력이 쓰이는 법이다.
그래서 필리는 어떤 측면에서는 빨리 철이 들고 말았다.
모든 사람이-심지어는 가족처럼 가까운 인물들 또한- 그를 사랑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반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전혀 철이 들지 못했으니.
필리는 균형적이지 못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도 밝게 웃었다.
"허허허, 잘했다 필리!"
부왕이 그를 칭찬하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 만인지.
"네게도 나와 닮은 구석이 있더구나, 나도 어릴 적에...."
"헤헤...."
부왕은 진정 기뻐 보였다.
하기사, 필리 본인이 생각해도 조금 전 자신의 활약은 대단했다.
사마귀 마물의 목을 통째로 뽑아 버리다니, 미친 거 아닌가.
비록 비약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잘했다. 아주 잘했어. 제국 대사가 보는 앞에서 말이야.... 네가 내 명예를 드높였다."
칭찬에 몽롱했다.
마치 하늘에 붕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 저 앞에서 2왕자의 경기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형님이 고릴라와 싸우고 있는데, 부왕은 그걸 보지도 않고 필리만 칭찬해 주고 있다.
"참,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술만 벌컥벌컥 들이켠다.
그 모습에서 어쩐지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필리는 저도 모르게 여쭈었다.
"아바마마, 혹시 근심스러운 일이라도 ...."
"근심...?"
"주, 주제넘은 질문이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필리는 얼른 사죄를 올렸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까.
왕은 웃지도 않고 정색하며 술을 들이켰다.
"꺄아아악!"
"레, 레온 저하가!"
그때, 비명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도 왕은 경기장을 보지 않았다.
무심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필리가 경기장을 돌아봤을 때는.
"아아아악!"
고릴라 마물이 형님의 팔다리를 분지르고 있었다.
비명과 혼란이 이어졌다.
왕은 그 내내 경기장을 보지 않았다.
술만 들이켜고 있는 그 모습이 명백히 이상했다.
드드드-
그때, 땅이 뒤흔들렸다.
"꺄아악!"
또 한 번의 비명.
병사들이 고릴라를 처치하기 위해 포위했는데, 그것을 막으려는 듯 거대한 덩굴이 솟아났다.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저, 전하."
왕 역시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2왕자의 몸부림에는 눈길도 안 주더니, 솟아오른 덩굴에는 크게 당황한다.
술잔을 내던지며 벌컥 일어나더니.
"발라냐르-!"
노움 총장을 부른다.
총장이 훌쩍 뛰어왔다.
몸을 가볍게 해서 말 그대로 훌쩍.
둘은 코앞에서 귓속말을 나눴다.
바로 앞에 있던 필리에게는 언뜻 들렸다.
'자네인가?'
'제가 아닙니다.'
'그럼 저게 뭐야?'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쨌든, 원안대로 진행을.'
'그래야겠지.'
뭘 하려는 걸까.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필리.
그리고, 거대 덩굴이 불꽃을 뿜어 댔다.
뜨거운 지옥불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막앗-!"
왕족을 지키는 기사들이 왕의 앞을 막아섰다.
필리는 여차저차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불길은 실제로 관중석까지 밀려 왔으니.
발라냐르 총장이 혹시나 모를 위험을 대비해 뛰어올랐다.
"흡! 인젠스 스크툼!"
곧 허공에 반투명한 역장의 방패가 떠올랐다.
불길은 그것을 뚫지 못하고 위로 튕겨 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대마도사라고 해도 관객석 전부를 커버할 만큼의 역장 방패를 순식간에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저 왕이 있는 곳만 막았을 뿐이니 사람들은 느껴지는 열풍에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그리고 그것은 화상에 트라우마를 가진 한 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릴리 아데네스, 그녀는 왕과 꽤 떨어져 있는 곳에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는 그 비명 소리를 명확히 알아들었다.
필리는 주저하지 않고 릴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저쪽, 제국의 대사가 있는 곳에도 불길이 미쳤다.
발라냐르처럼, 불길을 막을 대사의 호위 역시 당연히 있었다.
제국 양식의 의복을 입은 마도사가 훌쩍 날아오르더니, 손가락을 모아 그 앞에 바람을 불었다.
물이 뿜어져 나오고 그것이 불길과 부딪쳐서 수증기로 폭발했다.
취이이이익!
뜨겁게 달아오른 수증기가 되어 관객석을 덮쳤다.
하필이면, 공주가 있는 곳까지 수증기가 미쳤으니.
필리는 뭘 판단할 겨를도 없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불덩이도 아니고 날아오는 수증기를 상대로 어떻게 누나를 지킬 수 있을까.
필리는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행동했다.
"흐아아압!"
양팔을 풍차처럼 마구 돌린 것이다.
후우우우웅!
그리고 그게 효과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멍한 표정의 릴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필리...."
콱.
필리는 저도 모르게 누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우, 우선.... 도망가요."
남매는 오랜만에 손을 잡았다.
* * *
'참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간은 급했고, 릴라여사의 말은 느렸다.
그래서 그냥 대충 들었다.
뭐 부하 원숭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거래를 했다는 것 같다.
원숭이들을 살려 주는 대신, 자기 혼자 잡혀서 시키는 대로 했단다.
참 착한 고릴라다.
원숭이들은 이미 풀려났을 텐데 왜 끝까지 그렇게 말을 잘 들었는가 싶었더니.
"이 목에... 폭탄 목걸이...."
릴라여사의 목에 펑 터지는 목걸이가 걸려 있던 것이다.
"열쇠가.... 있어야 해."
"사아악!"
그 열쇠가 혹시 이 열쇠인가.
저번에 지하창고에 잠입했다가 수상해 보이는 열쇠를 복사해 둔 게 있다.
그것을 넣고 돌려 보니.
철컥.
하고 목의 구속구가 빠졌다.
나는 그러자마자 그것을 바깥으로 던졌다.
퍼어엉!
간발의 차였다.
저 바깥에 있는 녀석들이 얼른 구속구의 폭탄을 작동시킨 게 분명하다.
'도망치자.'
"어, 어떻게 도망치지."
참모인 만큼 고릴라 여사의 지능은 똑똑했다.
이 상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우선 삼단 합체야!'
일단 펠레리안의 계책을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가상의 마물을 하나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펠레리안은 그리 말했다.
나는 고릴라 여사의 어깨 위로 올라탔다.
*「위엄을 사용해 '연결의 왕관lv2'를 강화합니다.」
본디 연결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
하지만 위엄을 사용하여 스킬을 강화한다면.
*「아이언 암 고릴라lv21과 연결됩니다.」
*「연결 대상과의 관계가 '부하'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실이와 연결되었으니.
우리는 곧 하나였다.
*「거대화lv3을 공유합니다.」
고릴라 여사가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보다 약, 키가 다섯 배 정도로.
*「경량화lv6을 사용합니다.」
끔찍하게 무거워졌을 체중을 견딜 수 있도록 보조한다.
거대해진 고릴라 여사의 몸을 마찬가지로 거대해진 이실이가 칭칭 감았다.
그리하여 세상에 드러난 것은.
이족보행을 하는 거대한 초록 거인.
"으아아아아악!"
관객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는 덩굴들의 틈 사이로 겁먹은 인간들을 보았다.
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연결 대상이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합니다.」
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초록 거인이라는 가짜 마물의 등장이 제법 임팩트가 크기는 했나 보다.
좋아, 이대로 어그로를 끈 다음에 조금 버티다 쓰러지면 된다.
이곳에는 강자들이 많다.
병사들도 한둘이 아니고, 에메랄드 스쿨들의 교수들도 있다.
왕의 호위기사도 있으며, 무엇보다 영웅 중 하나인 발라냐르 총장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격퇴할 것이다.
이실이는 식물이다. 게다가 그냥 식물도 아니고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
그냥 평범한 덩굴풀하고는 달라서 '머리'라고 할 만한 것이 사실 존재했다.
맨 처음부터 새싹의 형태로 있었던 떡잎이 그 전체였다.
그 이외의 부위는 조금 잘리거나 떼어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즉, '이실이의 거대해진 몸뚱이를 시체인 척 남겨두고 도망치는 것.'
그것이 펠레리안이 구상한 최선의 계책이었다.
'근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나 고릴라 여사가 맞으면 어떡하죠?'
-그거야 뭐,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
하긴, 뭐든지 100%로 성공할 계책은 누구도 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총장도 마법을 캐스팅하는 대신 국왕 곁에 붙어 있는 것 같다.
'참모, 포효라도 해 봐.'
"아, 알겠어어."
머리만 내놓은 고릴라 여사가 크게 포효했다.
"크허허허헝!"
그와 동시에, 마치 포효가 기폭제라도 된 것처럼.
퍼퍼퍼퍼펑!
관객석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뭐, 뭐야!
내가 한 게 아닌데 마치 내가 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관객석에서 몇몇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르드 사람은 복수를 잊지 않는다앗!"
그중 확성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우렁우렁하게 외치는 사내가 있었다.
-북방 민족이군. 노르드라면. 솔리온과 사이가 좋지 않은 민족이야.
북방 민족?
사내가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으니, 이국적인 털옷이 드러났다.
"너희 왕국은 오늘 죗값을 치를 것이다아아!"
그는 그리 말하면서 품속에서 깃발을 꺼내서 펼쳤다.
저게 노르드 민족의 깃발인가.
근데 왜 갑자기.... 설마!
'테러리스트들인가!'
이건 테러다.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고 칼부림까지 하는 것을 보니까 명확하다.
그리고 왕족들은.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아주 명예로운 선택을 했다.
"전하를 보호해라! 뭉쳐!"
발라냐르 총장 곁으로 왕과 왕족들이 모였다.
부상을 입은 레온, 필리와 릴리 공주까지.
그리고 기사들은 그 주변을 호위하듯 하더니.
발라냐르 총장이 자신의 지팡이까지 꺼내서 영창을 했다.
막대한 양의 마력이 모이더니.
"무베르 아드 팔라티움-!"
세상에!
그들은 사라져 버렸다.
-오호 단체 텔레포트라고. 미리 마법진이라도 깔아 뒀나.
왕족만 쏙 내빼고 말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대응이었다.
"야만족들이 마물을 불러냈다!"
누군가 그리 외쳤다.
아닌데, 저 북방 민족 테러리스트들이 우리를 불러냈다고?
콰아앙!
테러리스트들은 마물들을 가둬 둔 우리의 문까지 열었다.
그 안에서 굶주리고 있던 더러운 마물들이 잔뜩 튀어나왔다.
녀석들이 애꿎은 관중들에게 덤벼들려던 순간이었다.
'참모! 쟤들 길들인 거 너 맞지?'
"어어, 맞다아."
'나대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해!'
고릴라 여사는 알겠다고 한 뒤 포효했다.
"크허어엉!"
달려들던 마물들이 멈춰서 우리 곁에 얌전히 둘러앉았다.
그 모습이 인간들에게는 제법 무섭게 보였나 보다.
*「인간들이 공포에 떱니다.」*「당신의 위엄이 더욱 상승합니다.」
위엄이 수급될 대로 수급되었다.
조금만 더 모으면....
"이노옴!"
그때 관객석에서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뛰어내렸다.
도끼창을 든 무인이었다.
나는 도끼창이 싫은데 말이야.
게다가 저 어깨에 달린 사자 모양의 장식은....
"철사자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베르거 탕겐트가 저 마물을 해치우겠소!"
그가 번쩍 하면서 쇄도했다.
그리고, 이실이가 불쾌한 정신파를 뿜는 게 느껴졌다.
순간 시야가 기우뚱 기울었다.
초록 거인의 발목 부분. 이실이의 덩굴 한 무더기가 도끼창의 오러에 잘려 나간 것이다.
조금만 높았으면 고릴라 여사의 발목까지 잘렸으리라.
그래, 군터의 부하이자 기사단의 2인자다 이거지.
쿠웅!
우리가 넘어지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야만족들을 사살해라! 마물은 내가 맡겠다아!"
기사는 참으로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가 다시 도끼창을 들고 덤벼들었다.
이번에도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주먹을 휘둘러!'
나는 그리 명령했다.
고릴라 맘은 무거워진 오른팔을 기사를 향해 휘둘렀다.
"느리구나!"
군터랑 다르게, 이놈은 너무 말이 많다.
덩굴이 칭칭 감긴 주먹과 오러를 휘감은 도끼창이 충돌하려던 순간이었다.
그 충돌의 결과가 어떨지는 명확했다.
더 이상 이실이가 싹둑싹둑 잘리는 건 바라지 않았다.
'이실아! 풀어!'
말 그대로, 칭칭 감겨 있던 덩굴이 확 풀렸다.
그리고 나는 이미 고릴라 맘의 오른 주먹으로 옮겨 간 뒤였으니.
*「흑린lv3을 사용합니다.」
기사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마 놈이 본 것은, 자신에게 튀어 오르는 새카맣고 작은 뱀이었을 테니.
*「식심의 도약lv6을 사용합니다.」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저 기사보다 내가 더 빨랐다.
덩굴이 잔뜩 엉겨 붙은 도끼창을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더.
팍.
나는 기사의 목을 물고 지나갔다.
음, 짭짤한 맛.
그리고 다시 덩굴에 엉겨 붙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기사는 기어코 덩굴을 숭덩숭덩 자르고 물러나며 빠져나갔지만.
"컥, 커억."
그 목에 '맹독: 신경독lv5'를 듬뿍 주입했으니.
얼굴이 보라색으로 물들며 풀썩 엎어졌다.
생각보다 시시하네. 군터의 직속 수하래서 조금 쫄았는데.
사실 엄청 약한 놈인 거 아니야?
*「철사자 부기사단장 베르거lv145를 처치했습니다.」
아니네, 센 놈이었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것도 꽤나 센 놈이었다.
그런 놈을 내가 한 방에 해치웠어!
169. 검은 사왕
"많이도 죽는구나."
궁정백이 그리 중얼거렸다.
오베른은 사실 궁정백의 말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의 신경은 전부, 원형 경기장에 나타난 초록 거인에 쏠려 있었다.
그 초록 거인의 몸을 이루고 있는 덩굴풀이 자신이 평소 지팡이에 달고 다니던 그 덩굴 아닌가.
면상에는 고릴라의 얼굴이 뽁 튀어나와 있고 사방에 불꽃을 흩뿌린다.
공포에 질린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장관이야, 장관일세."
그런데 궁정백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북방 노르드인들의 테러는 분명 미리 알고 있었으리라.
"자네는 알고 있지? 일반 민중들이 귀족과 부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한다는 사실을."
"...예."
몰락 귀족가 출신인 오베른은 알았다.
"평민들이 저들끼리 술을 마시면서 귀족들을 욕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 귀족들도 그것은 알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귀족을 존경하고 또 경애한다네."
그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성향일 것이다.
"그런데 왕족까지 참관한, 아카데미의 행사에서 이런 테러가 벌어진다니. 민심이 어떻게 되겠는가."
"반응이 격하리라 생각합니다."
"불이 붙을 거야. 불씨조차 사그라들어 버린, 개돼지나 다름없이 먹고살기만 생각하던 민중들의 가슴에 불이 붙을 거라는 말이지. 왕이라도, 귀족이라도 백성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해. 그것은 수많은 정치학자들이 연구한 진리일세."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그것을 말하는 것이 다름 아닌 왕국의 궁정백이었다.
"...아이들이 좀 더 많이 죽었으면 좋겠군."
그 한마디에, 오베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초록 거인은 궁정백의 계획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궁정백은 갑작스러운 거대 마물의 등장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놀란 것은 철사자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 나섰을 때였다.
"기사 베르거는 제법 강하지, 철사자 기사단 3인자쯤 되었나."
궁정백은 부기사단장이 초록 거인을 쓰러뜨릴 줄 알았을 것이다.
사실 오베른도 그랬는데.
"끄어어어억!"
선전하는 것 같던 부기사단장은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어서 나자빠졌다.
"...죽었군. 허허."
뭐가 재미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궁정백은 허허 웃었다.
그가 마치 이런 상황을 동물원 구경하듯 하는 이유를, 오베른은 곧 알 수 있었다.
노르드인 테러리스트 중 하나가 궁정백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석궁을 쏘았다.
티잉!
그런데 그 볼트가 궁정백의 바로 앞에서 튕겨 나갔다.
누군가가 겨우 손바닥만 한 버클러를 들어 튕겨 낸 것이다.
호위무사임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대단한 실력을 지닌.
"궁정백, 슬슬 물러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잠깐만."
궁정백은 호위무사를 막고 오베른을 돌아봤다.
"오베른."
"...예."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자네에게 다 해 주는지 아나?"
안 그래도 그게 궁금한 참이었다.
솔직히 듣기 싫었다.
왕과 총장, 궁정백이 계획한 음모라니.
게다가 노르드인의 테러를 조장해 자국민을 죽이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이것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류의 정보였다.
"자네를 완전히 샀기 때문일세."
"...."
"뭐 자네가 이런 이야기를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닌대도 누가 믿겠느냐만. 자네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었어. 흡족한 일이야."
뭔 개 같은 소리냐.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슬슬 나가지. 따라오게, 말 상대가 있으면 적적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오베른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어떻게 떠난다는 말인가.
아마엔도, 라니아도, 그가 가르치는 다른 학생들도 있다.
무사한 자들도 있었지만 마물이나 노르드인들과 대치 중인 아이들도 있다.
"먼저 가십시오. 저는 아이들을 구하겠습니다."
"놔두게. 내 말 못 들었나?"
"죄송합니다만...."
"자네,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나 보군."
궁정백은 웃었다.
"나는 자네의 영혼을 사로잡았어."
노친네가 갑자기 무슨 징그러운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코번트를 죽인 살인자 오베른 군. 친구를 강에 밀쳐 죽였나? 아니면 죽인 뒤 강에 밀쳤나."
"...."
천하의 오베른조차 거기서 표정관리를 해내지는 못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그걸 언제, 어떻게 알아냈다는 말인가.
"왜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게 중요한가? 자네는 살인자고 내 한마디로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마치 발밑의 땅에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오베른은 그 구멍 속으로 추락했다.
무저갱, 저 지옥 아래로.
가장 차가운 한빙 지옥, 니플헤임으로.
"내 노예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군."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발목에서부터 무언가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손목에 휘감긴 것은 뱀이었다.
어떻게, 어느새?
뒤를 돌아보니, 초록 거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거대한 덩굴풀 무더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릴라는 보이지 않았다.
'오베른, 뭐 해! 빨리 애들 구하러 가야지.'
뱀이 늘 그렇듯 약간 얼빠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궁정백...."
"오냐."
"당신은 내 영혼을 가질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오베른은 이미 영혼을 이 뱀에게 팔아 치웠지 않았나.
"...허허, 겁이 없군."
'저 노인네 뭐야.'
뱀이 천진난만하게도 말했다.
'내가 해치워 줄까?'
순간 유혹이 들었지만.
오베른은 그저 등을 돌렸다.
"더 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네."
오베른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궁정백이 코웃음을 치며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아마엔하고 애들을 구하고, 저 테러리스트들 때려잡고. 그리고 무엇보다 고릴라 여사를 숨겨 줘야 해. 저기 덩굴 아래 숨어 있거든? 어떻게 빼돌려야 하는데 .... 듣고 있어?'
"...."
'오베른, 왜 울어, 울지 마.'
오베른은 눈물을 훔치고 계속 달렸다.
* * *
"네미, 내 손을 잡아라!"
"꺄아아악!"
에메랄드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각종 영재 교육을 받았으며.
마법을 비롯한 신체 능력 또한 뛰어나다고 해도 애였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노르드인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데에서 겁을 먹지 않는 아이는 없었다.
네미 라이터스도 그랬다.
그녀는 도망치려다가 발을 헛디딘 건지, 난간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오베른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서 끌어올렸다.
"으허엉!"
그녀는 오베른을 껴안고 울어 댔다.
"사악!"
"흐윽, 네?"
"가라, 가라고 했다."
"방금 사악이라고...."
오베른은 그런 네미 라이터스를 밀쳤다.
그녀는 도망치면서도 뒤를 돌아봤다.
"저기, 아마엔과 라니아가 다른 아이들을 구하러 내려갔어요."
"알고 있다. 어서 가!"
오베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그게 조금 전까지 울어서라는 것을 알았지만, 네미의 눈에는 분노하는 교수님처럼 보였으리라.
'오베른, 이대로는 안 돼.'
나는 그리 경고했다.
노르드 테러리스트들은 갇혀 있는 마물들을 풀었다.
베스티아리가 계획된 팀은 여덟이었지만, 준비된 마물들은 자잘한 것까지 스무 마리가 넘었다.
거기에 노르드인 테러리스트도 스물은 되는 것 같다.
문제는 처음에 나와서 왕국을 규탄하고 죽은 이를 제외하고는 전부 민간인으로 위장한 상태라는 것이다.
혼란의 도가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더 깽판을 쳐야 한다 오베른.'
'무슨 개소립니까!'
개소리가 아니라 뱀소리이며, 뱀소리는 개소리와 달리 들을 가치가 있다.
'여기가 복잡하고 사람이 밀집된 원형경기장이라서 이렇게 혼란이 큰 거야. 우선 사람들을 다 내보내야 해.'
'입구가 무너졌잖아요.'
아마도 그 폭약을 활용해, 테러리스트들은 입구부터 무너뜨렸다.
하지만 나는 오베른의 그런 변명에 어이가 없었다.
'너희들 마법사잖아!'
그제야 오베른도 깨달은 게 있는 것 같았다.
그 혼자라면 입구를 뚫는 데 한세월이 걸리겠지만 ....
"처장님! 교수들이 모여야 합니다!"
이곳에는 에메랄드 스쿨의 다른 교수들도 모여 있다.
그들은 각각 학생들을 구하고 노르드인들을 상대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오베른은 교무처장을 찾아내 교수들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염동마법과 중력마법으로 입구부터 열고 사람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러다간 노르드 놈들이...."
"아이들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마, 맞지, 자네 말이 맞아."
교무처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참고로, 지금 오베른이 하는 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교수들이 힘을 합쳐서 무너진 입구를 뚫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베른은 그 대신.
'저 높이 올라가.'
가장 높은 단상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가 하는 눈빛이 쏠렸다.
흉험한 눈빛의 노르드인 몇이 석궁을 쏘았지만, 허공만 스치고 빗나갔다.
"후우, 후."
'나를 치켜들어 오베른.'
단상의 뾰족한 지붕 위에 올라선 오베른이 지팡이를 높게 치켜들었다.
아래가 잘 내려다보인다.
곳곳에서 피를 보고 있는 노르드인들.
떠나던 제국 대사가 호기심을 가지고 이쪽을 지켜보는 것.
다른 아이들을 지키고 있는 라니아와 아마엔.
그리고, 고릴라 여사가 숨자마자 통제를 잃고 날뛰는 마물들.
나는 내 몸 안에 쌓여 있는 위엄을 느꼈다.
그래, 이럴 때 쓰려고 모아 둔 것 아닌가.
*「위엄을 대량으로 소모해 '극복의 왕관lv1'을 강화합니다.」
*「위엄을 대량으로 소모해 '지배의 왕관lv1'을 강화합니다.」
차례차례 스킬을 강화하는 게 비법 레시피다.
*「'극복의 왕관lv1'을 사용해 '지배의 왕관lv1'을 강화합니다.」
*「'지배의 왕관lv1'이 일시적으로 '지배의 왕관lv5'로 변화합니다.」
곱하기의 곱하기, 그것의 곱하기.
강화 계수의 제곱과 같은 일이다.
원래라면 지배력의 부족으로 한두 마리 정도 지배하는 게 다였으나.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마물들이....
*「크라울러 거대 박쥐lv20을 완전지배합니다.」
*「늪 거대 어금니 카멜레온lv41을 완전지배합니다.」
*「블루 혼 호그lv33을 완전지배합니다.」
*「독가시 긴팔 원숭이lv27을 완전지배합니다.」
*「랫서 이블 판다lv33을 완전지배합니다.」
...
마물 중에서는 애먼 관객을 물어뜯는 녀석도 있었고.
배고픔에 빠져서 관객이 쏟은 팝콘에 대가리를 처박고 있던 멧돼지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개체가.
일제히 스무 마리에 가까운 마물들이 일시 정지했다.
놈들은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를.
오베른이 있는 이쪽을 올려다봤다.
나는 오베른에게 신호했다.
'뭐라고 말해 봐. 빨리.'
오베른은, 아주 잠깐만 머뭇거리곤 입을 열었다.
"물어뜯으라, 저들을."
그리고 나는 마물들에게 그리 명했다.
마물들이 정확히 노르드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덤벼들었다.
"어엇, 어어억!"
"피해, 일단 물러나라!"
이전과는 다르다.
마물들은 마치 잘 훈련받은 병사들처럼 정확히 노르드인들만 노리고 덤벼든다.
각각이 내 지시와 명령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도망쳐, 바깥으로 도망친다!"
아이들과 관객들이 뻥 뚫린 입구로 빠져나간다.
테러리스트들 역시 그러려 했지만 마물들이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저놈, 저 마법사 놈부터 해치워!"
누군가 그렇게 외치자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석궁의 볼트들이 날아왔다.
하지만.
티티팅!
오베른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실드 마법이 구현되었다.
저 아래의 교수들이 오베른을 보호한 것이다.
좋아. 완벽해.
나는 마물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관객들을 따라 바깥으로 도망치게 한 것이다.
그중에서는 양팔이 없는 고릴라 한 마리도 끼어 있었다.
여사의 팔은 이실이의 거대 덩굴 아래에 깔려 있었고.
이실이의 본체는 고릴라 여사의 몸에 작아진 채로 붙어 있을 것이다.
화르륵!
덩굴 속에서 연기와 불꽃이 솟아올랐다.
저것은 거대화를 해제하기 전, 이실이의 떡잎을 떼고 남은 덩굴의 잔해이다.
불이 꺼지고 나면, 인간들은 고릴라 여사의 의수만 찾아낼 수 있으리라.
'우하하하!'
완벽한 계획.
-이게 먹힐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잠깐만 시간 벌면 돼요, 잠깐만!'
교수들이 천천히 노르드인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그것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업적 '수도의 테러리스트'를 획득했습니다.」
아니, 잠깐만.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왜 테러리스트야!
*「이명 '검은 사왕'을 얻었습니다.」
이건 또 뭔데!
170. 결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