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결투장
노르드인들을 부추겨, 혹은 몇몇은 매수해서.
왕까지 참관한 아카데미의 솔라리안을 테러한다.
그 작전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이다.
2왕자 대신 3왕자를 제국으로 보내려는 것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북으로, 노르드인에게 복수의 철퇴를 내리치자!'
왕국민들은 이번 노르드인들의 테러에 분노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지펴진 불씨가 왕국의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군비를 확충하고 군세를 일으킬 것이다.
이미 작전은 성공했다.
들킬 이유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노르드인들은 모두 쳐죽일 것이니까.
촉새 같은 자들이 몇 떠벌린다고 해서 판이 뒤집힐 일도 아니다.
총장, 궁정백, 국왕 셋이 작당한 일을 그 누가 어쩌겠는가.
다만 모든 일은 실무자가 필요한 법이다.
계획의 발안자는 셋이었지만, 그 흉참한 일을 직접 수행할 이들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믿음직스럽고 충직한 이들로.
당연히, 왕실정보국만큼 적임인 자들이 없었다.
제비집의 제비들이 나뭇가지를 물어 오며 쌓아 올린 계획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계획의 실무적 책임자는 정보국장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내, '애쉬튼'이었다.
애쉬튼은 관객으로 위장해서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고릴라를 휘감은 거대한 덩굴.
그리고 몸이 덩굴로 이루어져 태어난 '초록 거인'.
'이건, 어디선가....'
기시감이 들었다.
저런 마물은 생전 처음 보았을 텐데 어째서 기시감이 드는 걸까.
그리고 놈이 철사자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을 해치웠을 때.
"허, 허억!"
애쉬튼은 정보국 요원답지 않게 경악했다.
부기사단장이 단박에 죽어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덩굴이 풀려서 부기사단장을 휘감았을 때.
우연하게도 애쉬튼이 앉아 있는 각도에서는 그 내부가 언뜻 보였다.
날카로운 관찰력은 정보국 요원의 기본 소양이다.
운과 훈련의 도움 덕에, 애쉬튼은 분명히 목격했다.
덩굴의 틈 속에서 부기사단장에게 뛰어드는 작은, 새카만 검은 뱀을.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건 분명....'
한때, 정보국을 뒤집어놓은 대사건이 있었다.
대수림에서부터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
그것이 왕국을 헤집고 영웅 마르테인을 죽였더랬다.
그 몬스터 웨이브의 선두로 모두를 지휘하던 거대한 나무 뱀.
그리고 그 머리 위에, 마치 모든 것을 조종하듯 하던 작고 검은 뱀이 있었다.
"거, 검은 사왕!"
제국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검은 사왕이 설마 왕국에 남아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하필 이곳에 나타나. 대체 왜!
당장이라도 국장에게 보고를 올려야 할 사안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민해야 했다.
'잘못 본 건가? 덩굴을?'
그럴 가능성도 분명 존재했다.
요주의 마물로 올라갈 만한, '재앙'이 될 가능성이 있는 마물이 왜 갑자기 여기 나타난다는 말인가.
덩굴과 뱀은 충분히 착각할 만큼 비슷한 형태다.
검은 사왕은 아마도 다른 마물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대단한 마물이 흔할 리가....
"크허어엉!"
그런데 초록 거인이 포효하자마자.
다른 마물들이 일제히 멈췄다.
'이건 분명 검은 사왕의 능력이다.'
검은 사왕이 맞는 것 같다.
보고를, 보고를 올려야 한다.
애쉬튼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으로 가득 찼다.
교수들이 뭉쳐서 퇴로를 뚫고.
노르드인들이 생각보다도 쉽게 제압되어서 피해가 줄었다.
게다가 어느 순간 초록 거인은 그저 한 무더기의 덩굴로 무너져 내렸다.
수수께끼,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정보국과 국왕이 꾸민 계획이 결국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애쉬튼의 마음은 편치않았다.
* * *
[〔속보〕 아카데미의 대혈사! 왕국이 침략당했다!]
왕국의 전역이 분노에 떨었다.
올해 개최되는 솔라리안에는 무려 두 분의 왕자가 참가하게 되어 화제였다.
영명하신 두 왕자의 분투를 지켜보기 위해 국왕 전하까지 솔라리안의 참관을 결정하셨으니 이는 곧 왕국 전역의 축제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축제 도중에 차가운 기름을 끼얹는 사태가 일어났다.
아니, 그뿐이 아니라 그 차가운 기름에 불씨를 던졌으니, 시뻘건 화마가 드높게 치솟았음이라.
저 패악 무도한 노르드인들이 테러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노르드인들의 약탈 행위에 북부 도시들이 신음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적반하장으로 땅을 내놓으라, 물자를 내놓으라 하면서 왕국의 심장인 솔리온 임펠에서 테러를 저지른 것이다.
이 극악한 행위의 결과로 현재 23명의 사망자와 8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국왕 전하께서는 이에 평하시길 '일백 배로 대가를 받아낼 것'이라 하셨다.
이에 북부군을 재개편해 본격적으로 노르드인을 압박할 것으로 보여진다.
북부군사령관으로 임명되리라 여겨지는 인물 중에서는 우선 누구보다 군터 프리한센 경...
...(중략)
허나, 화마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는 법이다.
처참한 테러 상황에서 영웅이 탄생했다.
본 기자가 몇 번의 기사에서 언급했던 왕국이 낳은 천재, '오베른 그리모아르'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몰상식한 자들이 그에 대한 중상모략을 몇 번 일삼았지만, 발라냐르 총장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교수로 발탁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이번에 그는 솔라리안의 참사에서 특출난 활약을 펼쳤다고 한다.
에메랄드 스쿨 내의 신뢰도 높은 정보원 N양의 증언에 따르자면, 이미 발라냐르 총장은 오베른 교수를 자신의 라이벌 내지 후계자쯤으로 여긴다고 한다.
현재 마르테인 후작의 타계 이후 8영웅의 자리는 여전히 한 자리가 공석이다.
본 기자는 새 영웅으로 오베른 그리모아르 교수 이상 가는 적임자가 없다고 단언한다....
「데일리 임펠 中, 기자 바우멧 라이터스」
* * *
대기석에 앉아 있던 오베른은 가십지를 와락 구겼다.
데일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발간은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주간지, 참 근본 없는 가십지이다.
'신뢰도 높은 정보원 N양. 이거 네미 라이터스겠지?'
자기 딸내미를 정보원이라고 칭할 기자는 이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에 그가 오베른에게 천재라면서 기사를 써 줬을 때는 참으로 고마웠지만, 지금은 미워 죽을 것 같다.
궁정백이 암살자를 보낼까 봐 잠도 못 자는 요즘 아니던가.
8 영웅에 편입되어야 한다니.
오베른도 그런 꿈을 꿨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주 어릴 적 이야기였다.
주제 파악이 어느 정도 된 그는 더 이상 헛된 꿈을 꾸지 않는다.
지금은 곁에 뱀도 없다.
오베른은 심호흡을 하면서 대기석에 등을 기댔다.
"환자분, 들어오셔요."
그때 간호사가 오베른을 불렀다.
오베른은 이름을 대지 않았다. 뭐 이런 곳에는 이름을 대고 싶지 않은 방문객들도 많이 오니까.
비싸서 문제지, 비용을 신경 쓰지 않는 귀족이나 관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진료실이라기보다는 응접실에 가까운 공간이 나타났다.
우드톤으로 꾸며진 벽면이며 바닥.
고풍스러운 집기와 가구.
아주 푹신한 벨벳 소파와, 가운이 아니라 정장을 입고 있는 의사.
"환자분... 예, 불안감이 너무 심하시다고요."
안경을 낀 의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잠은 좀 주무십니까?"
"...아니요. 통 잠에 들지 못합니다."
"그렇군요. 일단 잠이 든 다음에는 푹 주무시나요?"
"한 시간마다 잠에서 깹니다. 그리고 깨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어요."
"흐음...."
그렇다. 오베른이 찾은 것은 정신과 의원이었다.
수도인 솔리온 임펠에는 사람의 정신적 질병이나 고통만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원까지 있었다.
과중한 업무에 치이는 관료들이 특히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불안하신가요?"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룬 모든 것들이...."
"평소 업무가 과중하신 편인가요?"
"그렇지요."
"불안이 과대해지는 원인은 다양하게 있습니다... 과중한 업무가 대표적일 것이고요."
의사는 의례적인 이야기를 몇 개 했다.
하지만 오베른은 의사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못했다.
그의 불안감에는 명확한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궁정백이 날 죽일 거라고.'
궁정백은 오베른을 파멸시킬 것이다.
방법은 수십 가지는 있을 수 있다.
암살자를 보내서 쓱싹 할 수도 있고, 그가 코번트를 죽였다는 사실을 이용해 감옥에 처넣을 수도 있다.
"됐고... 약이나 주십시오."
"음, 뭐 그러시지요. 일단 잠을 잘 잘 수 있게 하는 약초로 즙을 낸 것과 불안을...."
의사도 심드렁하게 처방전을 적으려던 순간.
"어! 어어!"
"왜, 왜 그러시오."
"오베른 교수님 아니십니까!"
심드렁하던 의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오베른을 와락 껴안았다.
오베른은 순간 소름이 돋아서 몸서리쳤다.
"제가 에디 라피스의 애비입니다!"
"에디...."
"교수님이 경기장에서 목숨을 구해 주신 그 애요! 2학년의."
기억은 안 난다.
하지만 의사의 표정이 너무 밝아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 병원에서 영웅을 모실 기회가 오다니... 이런, 정밀 검진이라도 ...."
"아니, 됐습니다. 약만 주십쇼."
"그래서야... 아 맞다!"
그리고 그는 허겁지겁 종이와 펜을 꺼내 내밀었다.
"저, 혹시 싸인 좀...."
"...."
오베른은 공황발작이 올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싸인을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의사가 비싼 진료비를 면제해 줬기 때문이다.
가난한 게 설움이었다.
"하아...."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옮겼다.
에메랄드 스쿨로 돌아가, 교수 연구동으로 향했다.
자신의 연구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오늘따라 유독 높게 느껴졌다.
그리고 연구실 앞.
그 문에는 팻말을 붙여 두었다.
'절대 출입 금지. -오베른 그리모아르.'
혹시나 청소부라도 절대 들어가지 못하도록 붙여 둔 것이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쿵, 쿠웅.
안에서는 소란이 들렸다.
오베른은 인상을 찡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크허엉!"
그리고 안에서는 팔이 없는 고릴라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팔이 있어야 할 곳에는, 고릴라의 팔뚝만큼 몸을 키운 뱀이 매달려 있었다.
"사아악!"
"아, 알겠어 대장!"
그리고 고릴라가 팔에 달린 뱀을 마치 자신의 주먹처럼 휘둘렀다.
사람 모양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상대로.
콰앙!
뱀의 대가리와 허수아비의 머리가 맞부딪쳤다.
허수아비의 목이 휙 꺾였지만.
"대, 대자앙!"
뱀도 기절해서 축 늘어졌다.
오베른이 황당해했다.
'이게 대체 무슨 개 같은 짓거리라는 말인가.'
원래 크기대로 줄어든 뱀은 잠시 뒤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연스럽게 오베른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뭐 하고 있던 겁니까."
'고릴라 여사의 팔이 되어 보는 실험을 하고 있었어.'
"그래서요?"
'제대로 하려면 투구를 써야겠더라고.'
진지해서 더욱 어이가 없었다.
뱀은 무려 2왕자의 팔다리를 부러뜨린 고릴라를 탈출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고릴라를 하필이면 오베른의 교수연구실에 숨겼다.
바깥으로는 빼돌릴 순 없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고릴라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게 오베른이라는 것이다.
고릴라가 우물쭈물대며 말했다.
"그으, 교수니임. 밥이 다 떨어졌어...."
오베른은 엄청난 양의 식량과 바나나를 주기적으로 가져와야 했다.
더욱 끔찍한 것은 화장실의 문제였다.
고릴라의 덩치는 엄청났으니, 먹는 양도 배출하는 양도 어마어마했다.
몇 번이나 변기를 뚫어야 했고. 그 탓에 변기 뚫는 뚫어뻥을 이번 주에만 세 번을 빌렸다.
아카데미 내에서 오베른이 바나나를 엄청나게 먹고 엄청나게 싼다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지기 직전이었다.
"하아...."
오베른이 한숨을 쉬고 책상을 보았을 때였다.
그는 흠칫 놀랐다.
빨간색 편지봉투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누, 누가 들어왔습니까?"
'아니, 문틈 사이로 편지를 누가 밀어 놓고 가서 책상에 올려놨어.'
오베른은 안도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체 누가...."
'총장이 보낸 거더라.'
"총장님이요?"
'응, 매너 있게 안 뜯어 봐서 내용은 모르겠지만. 결투장일걸?'
오베른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결투장이라니.
총장이, 그에게 결투장을?
하지만 새빨간 봉투며, 봉투 겉면에 그려져 있는 교차한 칼의 모양.
편지를 봉인한 총장의 인장 하며.
그것은 틀림없는 결투장이 맞았다.
오베른은 허겁지겁 편지를 뜯어 보았다.
171. 다시 일어서리라
'검은 사왕? 푸하핫.'
뱀은 농담을 끝마치기도 전에 웃었다.
고릴라 여사가 그 농담을 받았다.
"바, 방패는 안사왕~ 우, 호호호."
"사사사사삿!"
뱀과 고릴라는 서로를 바라보며 박장대소했다.
오베른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농담이 끔찍하게 재미없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사실 한두 번이면 충분한 농담 아닌가.
문제는 뱀과 고릴라가 저 농담을 벌써 수십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농담을 할 때마다 저렇게 웃어대니, 그저 놀랍고 경탄스러울 뿐이었다.
지겨움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그래서 오베른은 고릴라에게 물어보았다.
무슨 농담인지 이해하고 있는 거냐고.
"몰라아...."
그러면 왜 웃는 것인가도 물어보니까.
"대장이 웃어서.... 대장이 웃으면 나도, 좋아. 우호호."
거기에서는 오베른도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충절인가.
놀랍게도 오베른은 마물 고릴라에게 경의를 품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는 뱀이 재미없는 농담을 할 때 억지로라도 웃어 주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오베른도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결투장 때문이었다.
파직.
편지지에는 알 수 없는 마력이 흘렀다.
적혀 있는 내용은.
「함께 마도를 걷는 자로서, 그대의 고매한 경지를 흠모하던 참입니다.
이에 조심스럽게 진중한 학문적 교류를 나눕고저....」
적절한 예법과 미사여구로 치장된 편지였으나.
그것은 결투장이 맞았다.
당연히 생사를 겨루는 기사나 싸움꾼들의 결투는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주로 하는, 그들의 것보다는 더 고상하고 피를 볼 일이 적은 방식의 결투다.
한 마디로 서로 마법을 겨뤄 보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진짜배기 대마도사 발라냐르 총장이 한낱 천재 호소인인 오베른에게 마법 결투를 신청한 것은 사실이다.
대체 왜!
'네 활약이 멋졌다는 것을 들었나 보지.'
결투장을 함께 읽은 뱀이 그리 논평했다.
'그나저나 정말 뻔뻔한 놈이네, 총장이라는 놈이 사람들을 그리 죽게 만들고. 뭐 죽은 학생은 없다고 해도 너무하잖아.'
뱀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사람 몇 죽어 나간다고 해도 신경도 안 쓰는 뱀이면서, 자기가 가르친 애들은 끔찍이 여긴다.
아무튼 오베른도 공감하는 일이었다.
매번 헤헤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같이 굴던 그 총장이 그렇게 거대한 음모를 꾸몄을 줄이야.
'혼내 주자, 아주 박살을 내 버리자고 오베른.'
'아니 제가 어떻게요...!'
'내가 도와주면... 아니, 그래도 안 되겠긴 하구나.'
기존에 뱀이 도와준 덕에 총장 앞에서 면을 세운 경험이 있긴 하다.
그 대마도사도 설마 지팡이에 붙어 있는 뱀이 술수를 썼다는 것은 모르는 듯했으니.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마법 결투는 그 방식이 다양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면승부다.
이미 대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발라냐르와 맞상대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 거절해 인마.'
'아, 그러면 되겠군요.'
이럴 수가.
뱀이 맞는 말을 했다.
뱀이 생각한 것을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오베른이 괴로움을 느낀 그 순간.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고릴라가 허겁지겁 몸을 숨겼지만, 그 덩치가 소파 뒤에 숨겨질 리가 없었다.
누구인가 했더니.
"편지 열어 봤죠! 나 총장이에요. 들어갈게요."
"안 됩니다!"
"에?"
"제가 나가겠습니다."
총장이 문을 먼저 열려는 것을 막고 간신히 먼저 나갔다.
"출입금지라고 써 두지 않았습니까."
"아니, 우리 사이에 뭐 들어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우리 사이?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길래.
"걱정 마세요. 전에도 안 들어갔으니까. 그래서 편지만 넣어두고 갔는데."
"예에.... 그 결투장 말입니다만."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죠?"
거절할 생각이었다.
"거절은 안 돼요."
"...저는 실력이 부족한지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다 들었어요. 원형 경기장에서의 활약."
그때 뱀이 중얼거렸다. '와 완전 뻔뻔하네'하고.
오베른도 동의하는 바였다. 학생들을 내버려 두고 왕족만 데리고 내빼지 않았나.
"엄청나게 뻔뻔한 놈이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죠?"
정곡을 찔렸다.
오베른은 무표정을 유지해 냈다.
"그리모아르 교수가 궁정백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설마 그 늙은 여우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겠죠?"
"...."
궁정백이 거짓말을 했다고?
그러면 어떤 게 거짓말이었나.
"내가 왕족들을 우선적으로 피신시켰지만, 그건 내가 왕가와 맺은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아이들도 마찬가지. 애들이 죽거나 하지는 않도록 손을 써 놨죠. 실제로 아무도 안 죽었잖아요?"
"믿기는 어려운 말이군요."
"믿음이 부족하군요, 오베른 군. 나이도 어린 사람이. 하여튼 거절은 안 돼요."
발라냐르 총장은 거의 칭얼대다시피 했다.
소년의 생김새여서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뱀이 옆에서 '우웩'이라고 평가했다.
"대결 방식은 창과 방패로 하죠. 그리고 나는 한 손만 쓰는 걸로. 영창은 1분 미만. 그리모아르 교수는 3분 미만. 내가 이기면 아무것도 없고 오베른 교수가 이기면 내가 소원을 들어주죠."
노움, 게다가 속은 늙은 노움의 소원을 어디다 쓰겠나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마도사 발라냐르의 소원은 보통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뭐, 난 궁정백도 안 무서워요. 무슨 말인지 알죠?"
"...알겠습니다."
그 말에 오베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내일 낮 12시 월계수 광장에서 만나죠!"
"하아...."
총장은 총총거리면서 사라졌다.
'뭐,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손해는 아니겠군요.'
'그렇지.'
'조용히 진행하면 될 일이니. 최대한 열심히 해 보는 수밖에....'
뱀이 도와주면 큰 망신은 안 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오베른은 곧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 장소가 광장이라고 했나요?'
'그랬지?'
'광장이면 구경꾼들이....'
구경꾼들이 있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광장에서 결투를 한다면 학생이고 교수고 잔뜩 모일 터.
오베른은 아차 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놓고 망신을 당할 위기였다.
그때.
'오베른.'
뱀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 옆에 붙어 있다고 했던 대마도사 유령 알지?'
'예?'
뱀은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었다.
실없는 소리를 한다 싶어서 그냥 넘겼는데.
'그분이 걱정 말래. 도와주겠다고.'
'아....'
'저 건방진 노움 마법사의 콧대를 부숴 버리겠다는데.'
'그, 그렇군요.'
오베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무리 이 세상이 험하고 자비롭지 않으며.
아카데미인 에메랄드 스쿨 또한 마법사나 기사 등을 양성하는 기관이라고 해도.
원형 경기장에서의 테러는 큰 상처가 되었다.
특히 그곳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몸과 마음에는 상흔이 남아 버렸다.
예정된 강의들이 중단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에메랄드 스쿨의 학생들은 어린 만큼 회복력이 있었다.
그들은 곧, 이 예정에도 없었던 방학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라니아와 아마엔, 돌아온 필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숙사의 휴게공간에 모였다.
안락의자에 드러눕다시피 한 자세로 뜨개질을 시도하고 있는 라니아.
책을 읽고 있는 아마엔.
그리고 어째서인가 안절부절못하는 필리.
그렇다. 필리의 마음속은 지금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는 친구들에게 말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그러면 친구들의 반응이 어떨지가 몹시 고민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몇 번 있다면 그나마 좀 수월했겠지만. 애초에 필리는 친구를 만든 것이 처음이었다.
솔라리안이 중단되고, 우승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던 그들의 열정은 거짓말처럼 식어 버렸다.
그래서 라니아가 어울리지도 않게 뜨개질에 열심인 것 아닌가.
'일단 말이라도 꺼내 보자.'
필리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얘들...."
"비상! 비사앙!"
그때 달려온 것이 네미 라이터스였다.
손에 입은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그녀는 붕대 감은 팔을 열심히 흔들며 나타났다.
"뭔데, 데일리 임펠 안 볼 거야."
라니아가 네미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도 네미는 제 아버지의 기사가 실린 데일리 임펠을 읽어 보라고 사방팔방 쏘다녔던 것이다.
"그거 아니야. 뭐가 비상이냐면...."
"아! 맞아. 어때? 이거 새로 배운 뜨개질로 만들고 있는 건데."
"멋진 양말인걸!"
"양말이 아니라 장갑인데...."
"하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데... 하고 라니아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네미는 무시하고 외쳤다.
"오베른 교수님하고 발라냐르 총장하고 한판 뜬대!"
"한판... 뜬다고?"
"그래, 결투!"
책을 보고 있던 아마엔도 벌떡 일어서서 관심을 표했다.
"마법 결투? 언제?"
"지금, 곧? 월계수 광장에서."
"가자!"
"안 그래도 다 구경하러 가고 있을 거야."
라니아도 뜨개질 거리를 정리했고 필리도 따라 일어섰다.
친구들에게 하려던 말은 미처 못했지만....
'제국에 가게 되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곧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얼른 월계수 광장으로 달렸다.
월계수 광장은 '광장'이라고 칭하기에는 미묘하게도 좁은 곳이다.
바닥에 판석이 깔려 있는 공터 정도라고 할 수 있으리라.
주변에 월계수가 심겨 있는 게 특징이다.
전통적으로 마법 결투는 월계수 광장에서 자주 행해졌다.
"와, 다 모여 있네."
어떻게 안 것인지 학생들이 이미 바글바글했다.
다들 심심했던 것이다.
"앞으로 가자, 취재진입니다!"
네미가 뻔뻔하게 그리 외치면서 길을 만들었다.
학생들은 길을 비켜 줬지만, 사실 네미 덕은 아니었다.
일행 중에 왕자인 필리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그들은 맨 앞에 설 수 있었다.
바닥의 판석에 그려진 조각의 배치에 따라, 오베른과 총장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창과 방패 방식으로 진행된대."
"창과 방패?"
필리가 물었다.
네미는 박학다식하여 모르는 게 없었다.
"마법 결투의 방식 중 특히 화끈해서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이야. 순서를 정해서 한 사람은 공격하고 한 사람은 그걸 방어하는 거지."
"그러면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서로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마법의 경지를 겨루는 거니까, 무엇보다 속도를 아주 느리게 해. 화염구를 날린다면 아주 천천히 날려야 하지."
아마엔이 끼어들었다.
"천천히 마법을 쓰는 게 더 어려운 건데."
"그치, 그래서 상대를 크게 다치게 하거나 죽이면 지는 거야."
물론 그렇게 승리를 얻어 봤자 명예로울 리는 없으리라.
"동전 던지기로 선공을 정하는데... 아!"
오베른은 앞면을 골랐고, 동전은 앞면이 나왔다.
오베른이 선공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가 먼저 최선의 공격을 할 것이고, 총장은 정면에서 그 마법을 파훼하리라.
"승부가 어떻게 날 것 같아?"
라니아가 그리 물어봤다.
당연히 총장이 이길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으리라.
하지만 어째선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베른이 이기기를 바라는 것일까.
"글쎄."
그때, 네미가 입을 뗐다.
그녀는 안경을 까딱 추켜올리며 말했다.
"어쩌면... 반반?"
"설마...."
"우리 아버지도 내 평가에 동의하셨어."
네미는 슬쩍 오베른을 가리켰다.
"교수님의 표정을 봐."
오베른은, 늘 그렇듯 무표정이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 철혈의 마음.
누가 대마도사 앞에서 저리 당당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보게 될지도 몰라."
네미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 * *
쿵쾅쿵쾅쿵쾅쿵쾅.
그것은 오베른의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지팡이에 있는 내게도 들렸으니 오베른 얘가 얼마나 긴장했는지는 명확했다.
그래도 표정만은 제대로였으니, 역시 오베른이다.
-한심하기는.
나름 장한 오베른에게 경멸을 담아 비난한 것은 펠레리안이었다.
-저를 돕는 것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겁에 질리다니.
오베른은 펠레리안의 정체를 모른다.
그저 내가 돕는 정도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뱀아, 저 우둔한 녀석에게 최고 출력의 화염구를 빚어내라 명해라.
'예, 오베른!'
오베른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영창을 시작했다.
'제길 이판사판이다!'
정신적으로 그리 외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리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마력의 움직임이 참으로 번잡하군. 다듬을 것이 많아.
지금 움직이는 펠레리안의 손끝에서는, 분명 마력이 발출되고 있었다.
역천.
그가 마법을 되찾기 시작했다.
172. 승부의 결과
'죽을 것 같군.'
오베른이 내적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품은 마력을 전부 끌어모았다.
"인젠스, 스파헤라 플람메...."
오베른도 기초적인 화염구는 무영창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복잡한 영창을 풀어 외우면서 지팡이를 쓰는 것은, 그가 만들 수 있는 최대의 화염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리하였다.
화염구가 커졌다.
본래는 주먹만 한 화염구가 가장 기본적인 크기다.
그것이 점점, 사람의 머리통만큼 커지더니.
직경이 수레바퀴만큼 커지고. 종래에는 오베른의 키보다 더 큰 화염구가 완성되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열기.
지켜보는 학생들의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와, 엄청난 크기의 화염구야."
"저걸 더 이상 화염구라고 할 수 있나...."
대단한 크기의 화염구는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파훼해야 할 총장은 웃었다.
"그게 무슨 마력 낭비죠? 그렇게 마력을 짜내다가는 할 수 있는 게 더 없을 텐데."
마법에 대한 식견이 있는 이들은 의아해할 일이었다.
화염구의 출력을 부풀려 봤자 화염구다.
전장에서 빠르게 일반병들을 타격하기에야 좋겠지만, 천천히 정면승부를 해야 하는 지금 화염구를?
실제로 총장은 손가락질 한 번으로 이 거대한 화염구를 꺼뜨릴 수 있을 것이다.
-건방진 노움 같으니.
그러나 우리의 곁에는.
대마도사 펠레리안이 있다.
'영감님! 대체 언제부터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왜 비밀로 한 거예요. 장난해요?'
-....
내가 보기에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시간이 되면 마법을 써서 나에게서 탈출하려는 심산 아니었을까?
우물쭈물하던 펠레리안이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이 자식아! 지금 말해 줬으니 된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펠레리안이 음흉한 거야 세상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이렇게 순순히 자기가 마법을 되찾았다는 것을 드러내다니.
그것도 오베른을 돕겠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평소에 음흉하던 자가 갑자기 정직해지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나는 진심으로 펠레리안이 조금 걱정되었다.
'생각해 보니까 이미 죽었지....'
-무슨 헛소리냐! 넌 빨리 천뢰령을 외워.
'천뢰령을요?'
-그래, 벼락을 불러내라 이 말이다. 내가 마법을 다룰 수 있다고 해도 스스로가 품을 수 있는 마력은 한없이 0에 가까워. 너와 이 인간 놈의 마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천뢰령은 마법이 아니다.
하지만 뇌전의 힘을 쓰는 스킬이라는 점에서는 마법과 비슷한 효과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다만 문제가 있는데.
'마법이 아니라는 게 티 날 텐데요. 그리고 총장이 알아볼지도....'
-나를 믿어라.
그리 말하는 펠레리안이 몹시 듬직해 보였다.
-벼락을 불러내, 네 최대 출력으로.
'알겠어요. 흐읍!'
-장난하냐!
천뢰령을 사용하기도 전에, 펠레리안이 벌컥 화를 냈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이라는 말이다!
무서워라.
순간 쫄아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최선을 다하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위엄을 소모해 '연결의 왕관lv1'을 강화합니다.」
지팡이의 마력 증폭 효과를 최대한 활용해서.
*「위엄을 소모해 '극복의 왕관lv2'을 강화합니다.」
*「극복의 왕관lv2로 천뢰령lv3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천뢰령lv3이 일시적으로 천뢰령lv6이 됩니다.」
마력을.
전부 쏟아 넣는다.
흐물흐물해져서 거죽만 남을 것 같은 기분으로.
우르릉-
마른하늘에 천둥이 쳤다.
학생들도, 심지어는 총장까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은 없는데 허공에서 스파크가 파직, 하고 튄다.
아이들 몇몇의 머리카락이 부스스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전격 내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벼락이 곧 떨어질 것이다.
3.
2.
부디, 펠레리안이 잘해 주길.
1.
그리고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펠레리안의 몸이 살짝 흐릿해진 것 같았다.
벼락의 속도는 소리의 속도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쩌저저저저정!
아무리 내가 반사신경이 좋다고 해도 이미 떨어진 벼락을 관측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 눈에는 보였다.
벼락은 내게 떨어지는 대신, 오베른의 화염구에 휘감겼다.
당당하게 내민 펠레리안의 저 손가락이 해낸 일이리라.
'인간에게 손을 떼라 말해라! 화염구를 방출해!'
'그, 그러면 폭발한다는데... 에라!'
오베른은 눈을 질끈 감고 화염구의 통제를 놓았다.
그러자 정말 화염구는 폭발할 것처럼 꿈틀댔다.
아이들 사이에서 비명이 나왔다.
하지만 우리의 펠레리안은.
-보아라 뱀. 네게 보여 주기 위해 내가 나선 것이다.
그는 이번에는 양손을 펼치고 있었다.
전격이 휘감고 있는 화염구를 제어 중인 것이 분명하다.
신비롭게도 천뢰령의 벼락도, 화염구의 불꽃도 사라지지 않고 서로 뒤엉키고 있었다.
-언젠가는 너도 나아가야 할 길이다.
그리고 그 뒤엉킴은 점점 빨라지더니. 마치 서로 융합되는 듯했다.
-원소 마법의 융합. 강제적인 합성.
아, 나 이거 나X토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뇌전과 화염의 성질을 합친.
풍둔 나선수리검이다!
-뇌화!
그리고 벼락과 화염이 서로 뒤엉키며 용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것이 입을 쩌억 벌리고 총장을 향해 날아갔다.
쩌저저저저정!
움직이는 내내 마치 공기를 찢는 듯한 소음을 내며.
발라냐르 총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이곳의 모두를 죽이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그는 지팡이를 꺼내 역장 실드를 형성했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흥, 막지 못할 것도 아니면서 엄살을 피우는군.
명백히 더 투명해진 펠레리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역장 실드는 그 개수를 늘려 갔다.
한 겹, 두 겹, 네 겹, 여덟 겹, 열여섯 겹, 서른두 겹 ....
종래에는 수백 겹의 실드가.
콰차차차차창!
순식간에 박살 나고 찢어졌다.
하지만 뇌화로 이루어진 용 또한 그 역장에 휘말리며 찢어져 갔다.
-폭발도 막아야지.
역천의 마법은 특히 악독한 것으로 유명했으니.
용의 형상이 흩어지자, 뭉쳐 있던 마력이 한 번에 폭발하려 했다.
경악한 발라냐르가 직접 나섰다.
양손과 지팡이에 마력을 운집해서 폭발을 억누른 것이다.
파지지지직-
그의 머리카락에 불똥이 번쩍이고 손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윽고 간신히 그 모든 불꽃이며 뇌전을 흩어냈다.
"하아, 하하...."
총장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쳐 있었고 온몸에는 김이 풀풀 피어올랐다.
"기대 이상이네요. 멋진 마법이에요."
그리고 오베른은 감사 인사 대신 차갑게 말했다.
"제 승리군요."
"네?"
"양손, 다 쓰시지 않았습니까."
"아...."
분명 그랬다.
처음에 총장이 내건 조건은 자신은 캐스팅에 한 손만 쓰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처음 역장 실드를 만들 때부터 그는 양손을 전부 썼다.
오베른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지적한 것이다.
'이 약삭빠른 녀석...!'
내가 오베른이었다면 '한 손만 쓰기로 했는데 두 손 다 썼네요. 그러면 내가 이긴 거 맞네? 인정하시죠?' 같은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경멸에 찬 시선을 받았겠지.
하지만 짧고 당당하게 말한 오베른은 ....
"와아아아아!"
"미친!"
학생들의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그리모아르! 그리모아르!"
"교수님! 으아아아!"
지금 학생들 사이에서 오베른의 민심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었다.
원형 경기장에서 그가 보인 활약을 기억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귀에도 위엄이 오른다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렸다.
위엄을 많이 소모해 버렸는데 반가운 일이다.
"하하, 인정해요. 내 패배가 맞네요."
의외로 총장은 자신의 패배를 쉽게도 인정했다.
이렇게 하하호호 웃으면서 끝나는 게 오베른의 바람이었겠지만, 일이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내가 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끝내는 것은 관중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요."
"...?"
"이번에는 내가 창을 들어 보겠습니다. 어디 한번 막아 보시죠!"
발라냐르가 호쾌하게도 외쳤다.
오베른이 잘못 계산한 것은 그에 대한 민심이 떡상해도 너무 떡상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진심으로 오베른이 총장과 동격이라고 믿는 학생들이 꽤 많았다.
"와아! 그리모아-르! 그리모아-르!"
"오베른 교수니임!"
"교수님! 한번 보여 주세요!"
"증명해 주세요!"
뭘 증명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오베른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거절해야 한다.'그리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여기서 내뺄 용기가 없었다.
"후우-!"
노움 총장의 진짜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도 많을 것 같다.
마력의 양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그의 등 뒤에 새빨간 마력의 덩어리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법사라면 몰라볼 수 없는 기초적인 마법이었다.
"마력탄!"
혹은 매직 미사일.
참고로 펠레리안이 쓸데없다고 하여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마법사에게는 기본 소양 같은 주문이란다.
배틀메이지라고 하면 반드시 익히는 기초마법 같은 건데.
오베른이 화염구를 불러낸 것을 보고 같은 방식으로 승부하려는 걸까.
-무속성의 마법으로 뭘....
아무래도 총장 역시 기초적인 마법을 응용하여 대단한 일을 벌이려는 것 같았다.
붉은 마력 덩어리가 하나, 둘, 넷, 여덟. 수도 없이 늘어나더니 100개에 가까워졌다.
"돌파력, 회전. 오래되지 않은, 근래의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력 덩어리들이 마치 미사일 같은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마침내 드릴처럼 회전을 시작하기까지 했으니.
위이이이잉-
그것들이 보여 주는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일관되게 총장을 무시하던 펠레리안도 감탄했다.
-형태 변환을 한 마력탄이라고! 제법 재주를 부리는군.
보이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마법인가 보다.
오베른은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살려 주십쇼!'
내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도 펠레리안의 활약을 기대했지만.
-이젠 아무것도 못 해. 뭘 더 하면 내가 소멸해 버릴 거다.
'헉.'
그럴 수는 없는 일.
'오베른, 적당히 막다가 몇 대 맞고 끝내라.'
'제기랄!'
그리고 오베른은 허겁지겁 실드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백 겹의 역장 실드를 생성했던 총장과 달리, 오베른의 실드 마법은 그리 신통하지 못했다.
총장이 마력탄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콰작, 콰자작!
마력탄 하나가 오베른의 실드 한 겹을 무너뜨린다.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목숨의 위협이 여전히 일백에 가깝다.
실드가 깨지면서 마력이 사방으로 몰아친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게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킬을 훔칠 기회야....'
군터의 경우를 보고, 고수의 스킬은 함부로 훔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정면이라면?
마력과 마력이 사방에서 몰아치는 지금이야말로 기회가 아닐까.
나는 눈에 힘을 주어서 총장을 노려봤다.
──────────────
[???총장 발라냐르 ???lv???]
──────────────
여전히 상태창이 보기 어렵게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쓸 만한 스킬을 훔치는 것이니.
──────────────
[특성]
...[마법광], [가면] ...
──────────────
특성을 넘어서.
스킬로.
──────────────
[스킬]
...[중력마법lv20], [염동파lv20]...
...[마법방어lv20], [역장마법lv10], [공포lv20], [은폐lv20]....
──────────────
어떤 것을 훔쳐야 하지?
내가 훔치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자고로 삼킬 수 있는 것만 삼켜야 하는 법.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잠깐, 이거 하나만 있으면 다른 것도 다 딸려 오는 거 아니야?
가성비가 좋아 보이는 먹이가 있었으니.
──────────────
[형질변환 마력탄:회전lv10, 점착lv10, 폭발lv10 ]
──────────────
혹시....
"아무것도 안 할 겁니까? 뭔가 보여 주기 전엔 안 멈춰요!"
총장은 마법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오베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음, 역시 내가 나서야겠군.
나는 과감하게 선택을 내렸다.
*「위엄을 소모해 강탈의 왕관lv4을 강화합니다.」
혹시 모르니 남은 위엄을 탈탈 털어 넣어서 강탈의 왕관을 강화했다.
그리고, 슬쩍.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강탈의 왕관lv4를 사용합니다.」
나는 총장의 마법을 살짝 빌렸다. 강탈은 아니고 빌리는 것으로.
*「일시적으로 형질변환 마력탄:회전lv3을 얻었습니다.」
실패인가?
아니.
*「일시적으로 형질변환 마력탄:점착lv3을 얻었습니다.」
*「일시적으로 형질변환 마력탄:폭발lv3을 얻었습니다.」
성공이다!
세 개의 스킬을 얻은 나는 곧바로 그중 하나를 사용했다.
*「형질변환 마력탄: 폭발lv3을 사용합니다.」
내 코앞.
그러니까, 오베른의 지팡이에서 빨간 마력탄 세 개가 떠올랐다.
둥근 구 모양의 마력탄.
그것은 천천히 날아가더니, 총장의 마력탄 사이에 들어가 폭발했다.
퍼퍼펑-!
수많은 마력탄들을 막아 낼 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 마력탄들의 궤도를 어긋나게 하기는 충분했다.
이대로라면 사방에 마력탄들이 날아갈 상황.
관중인 학생들마저 위험해질 상황에서, 총장은 결국 마법을 거뒀다.
허공에서 마력탄이 흩어져 사라졌다.
"뭘 한 거죠?"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를 오베른에게, 나는 알려 주었다.
'그렇게 말해.'
그리고 오베른이 입을 열었다.
"그저, 총장님의 마법을 따라 해 봤을 뿐입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총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정말 천재가 맞았군요, 교수는."
두말할 것 없는 인정이었고 찬탄이었다.
오베른의 승리가 선언된 것이다.
"와아아아아!"
학생들이 다시 한번 환호했다.
173. 내 잘못이야?
노움은 차를 좋아한다.
그들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각에, 너무 진하고 쌉쌀한 커피는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총장 발라냐르의 집무실에도, 당연히 그의 티 컬렉션이 있었다.
그는 직접 차를 우렸다.
제국의 남부 소도시에서만 나온다는 찻잎의 향긋한 향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자, 드세요."
그리고 오베른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오베른은 기품 있는 자세로 우선 차의 향을 맡고. 한입 마셨다.
"향긋하군요."
어쩔 도리 없이 터져 나온 감탄.
긴장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긴장해 있기 때문에 그 차의 향기가 각별했다.
'나도 먹어 보고 싶어!'
부럽다.
나는 오베른의 지팡이에 수정장식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에 차의 맛을 보지 못했다.
오베른한테 시켜서 찻잎을 달라고 부탁해 볼까.
"돌아갈 때 찻잎을 싸 드리죠."
"아, 감사합니다."
조금 촐싹거리는 것처럼 보이던 발라냐르 총장도 지금은 진중해 보인다.
오베른이 결투에서 승리한 뒤, 발라냐르는 그를 자신의 집무실로 초대했다.
총장이 가볍게 말했다.
"축하드려요, 새 8 영웅이 된 걸."
"쿨럭, 켁! 콜록!"
사레가 들린 오베른이 찻물을 뿜어댔다.
총장은 와하하 웃으면서 자신의 얼굴에 묻은 찬물을 닦아 냈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과하다뇨. 정말일걸요?"
"그게 무슨...."
"8 영웅을 뭐 투표로 뽑는 줄 아세요?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하면 영웅이 되는 거고. 그러니까 사실 인기투표 같은 거예요."
찻물을 뒤집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총장은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원래도 저번의 활약으로 새 8영웅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결투에서 나를 이기기도 했잖아요. 내가 이래 봬도 8영웅 중 최강을 꼽을 때 항상 거론되는 사람이에요."
결투에서 보여 준 것으로 총장의 전력을 짐작하려 들면 안 된다.
그의 진짜 실력은 그것과 비교가 안 된다. 내가 엿본 그의 상태창만 봐도 알았다.
"아마 내일쯤 기사가 쫙 올라올걸요. 구경꾼 중에 네미 양도 있잖아요."
"보셨습니까? 데일리 임펠...."
"저는 데일리 임펠의 애독자예요."
"그런 삼류 가십지를 읽으시면 총장님의 명예가 손상될 겁니다."
발라냐르가 킥킥 웃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영웅이 된다고 뭐 크게 바뀔 것은 없고... 더군다나 오베른 씨는 이제...."
"예?"
"아니에요."
명백히 뭔가 숨기는 것 같은 말투다.
'좋겠다! 나도 영웅 하고 싶어.'
부럽다 오베른.
왕국의 8영웅이라니. 무협으로 치면 신주십이성 같은, 왕국 최강자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 아닌가.
물론 사실 그 명성의 9할이 허풍으로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그래도 부럽다! 나도 영웅이 되고 싶다.
여기서 '마물이 무슨 영웅이냐, 가당찮은 소리 그만해라.'라고 퉁명스럽게 끼어들 요정 하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래야 할 펠레리안은 지금 반지 속으로 들어가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결투에서 힘을 쓴 게 엄청나게 피로하다는 것 같았다.
총장이 또 한 번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사실 오베른 씨가 가짜라고 의심했거든요."
"푸흡!"
"아하하...."
발라냐르가 또 한 번 얼굴에 튄 찻물을 닦아 냈다.
"가끔은 재능이 있는 것 같고, 어쩔 때는 없는 것 같기도 했어요."
"아...."
"파격적인 마법을 많이 보여 줬죠.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 모를, 발상부터 다른 천재성이 번뜩였거든요. 그런데 막상 평소에 보여 주는 마법들은 너무 투박하달까."
"...."
"그러니까. 마치 머릿속에 대마도사 한 명이 들어 있고, 정작 본인은 그 머릿속 대마법사가 시키는 것만 하는 평범한 마법사라고 해야 하나... 설명이 너무 복잡했죠? 하여튼 인상이 그랬다는 거예요. 헛소리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는.
소름 돋아서 비늘이 곤두설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았다.
역시 대마도사는 대마도사이다 이건가, 발라냐르 총장의 통찰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내 존재를 들키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다.
"그런데 이번에는 탄복하고 말았어요. 내 매직 미사일을 순식간에 따라 하고, 게다가 그걸 응용하기까지 하다니."
"아...."
발라냐르가 펼쳤던 매직 미사일, 마력탄은 단순한 기초마법이 아니었다.
차크라를 회전시켜서 나선환을 만드는 것처럼 형태 변환이 가미된 마력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순식간에 복사하는 재능을 선보였다.
물론 강탈의 왕관 스킬 덕택이었지만....
"뭐 의심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약속을 했으니까 들어줘야죠."
총장이 드디어 그 말을 꺼냈다.
"소원 들어주기. 마음껏 말해 봐요."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나와 오베른이 합의를 마친 뒤였다.
오베른은 자신이 쓰고 있던 가면을 조금 벗었다.
와락, 총장의 손을 부여잡고 말하길.
"살려 주십쇼."
아니, 가면 너무 벗은 거 아닌가.
"궁정백이 저를 죽이려 할 겁니다. 그러지 못하도록 해 주십쇼."
"아... 그걸 걱정했군요."
그러나 총장은 묘한 미소를 띠었다.
"걱정 마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살 구멍은 있다잖아요."
"그럼...."
"뭐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어요?"
총장에게는 아무래도 꾀주머니가 달려 있나 보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오베른은, 탄성도 탄식도 아닌 묘한 신음을 흘렸다.
"...괜찮겠습니까."
"괜찮냐구요?"
총장의 해결책은 오베른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고 싶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인데.
"이런 식으로 하면 되죠. 저는 찬성이에요, 아마 국왕 전하도 찬성일 거고."
총장의 부연설명을 들은 우리는 무릎을 탁 치고 꼬리를 탁 칠 수밖에 없었다.
* * *
세상에는 여러 비밀들이 있다.
그 비밀 중에서는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게 있고.
알려지든 말든 의미 없는 게 있으며.
또한 알려질 수가 없는 비밀이 있다.
궁정백과 왕, 대마도사 발라냐르가 합심해서 짠 계획.
왕국의 운명을 바꿀 음모는 그중 어떤 종류의 비밀일까.
셋 전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악독한 음모가 백성들에게 알려지면 안 될 것이고.
알려지든 말든 이미 왕국은 북부 정벌의 전쟁 준비를 시작했으니 의미가 없다.
또한,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누군가 떠든다고 믿을 만한 비밀도 아니었다.
그 계획의 발안자 중 하나인 궁정백의 솜씨였다.
귀신같은 솜씨였으나, 그 잔인한 여우도 얼마 전에 실수를 하나 저질렀다.
한 명의 인간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대상은 오베른 그리모아르.
궁정백은 그 재능 있는 청년을 자신의 수족으로 삼고자 했다.
아주 효과적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오베른은 마음을 꺾지 않았으니, 그것이 궁정백의 첫 번째 실수였다.
자신의 우위가 너무 명백했기에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은 것이 2번째 실수라고 해야 할까.
겨우 며칠 사이에, 오베른은 8영웅이 되어 버렸다.
궁정백은 그것이 누구의 술수인지 알았다.
"발라냐르, 이 영악한 애늙은이 녀석이."
같은 8영웅이자 대마도사인 발라냐르의 솜씨가 분명했다.
오베른은 거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직은, 아직은 어떻게 처치할 만할 것이다.
궁정백의 측근이 얼른 후환을 제거하자고 간언했다.
그리고 늙은 여우가 명했다.
"죽여라."
다만 덧붙이기를.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끌끌."
명령이 떨어졌으니 수행해야 할 것이다.
궁정백의 힘은 위아래로 고루 미쳐 있다.
저 어둠 속에도 궁정백의 수족이 뻗쳐 있으니, 그중에는 암살을 업으로 삼는 이들 또한 있었다.
'오베른 그리모아르를 죽여라.'
그것이 암살자가 할당받은 임무였다.
대상에 대한 정보 말고는 궁정백에 대한 아무런 접점도 없는 이였다.
하지만 그 솜씨만큼은 특급으로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자였다.
무려 새로운 영웅을 죽이는 일 아닌가.
암살자는 성공적으로 기회를 노렸다.
오베른이 에메랄드 스쿨에서 나와 외출을 나선 날이었다.
한낮의 카페.
야외의 테라스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는 오베른.
암살자는 평범한 시민처럼 그 옆자리에 앉았다.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읽고.
자신의 목적을 위장한다.
그러나 그의 발끝은 명백히 오베른의 드러난 목을 향하고 있었다.
특수 제작된 신발의 앞코에서.
보이지도 않는 은침이 발사된다.
퓩.
그리고 암살자는 자신의 목에 파고드는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붓끝으로 그의 목 어딘가를 눌러 마비시킨 자는, 제국의 옷을 입고 있었다.
"쉿."
암살자는 눈알만 돌려 오베른을 바라보았다.
대상은 처치되었는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제국의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소매에 박힌 은침을 털어냈다.
"어머, 호위하길 잘했네요."
"...뭐였소."
"암살자죠 뭐긴 뭐예요."
암살자의 임무는 실패했다.
오베른이 희게 질린 얼굴로 암살자를 보았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호위는 그를 완전히 제압해서 치켜 맸다.
"심문을 해 볼게요. 뭐 나오는 것도 없을 거고 알아봤자 어쩔 수는 없겠지만."
"...그러시오, 고맙소."
정말 궁정백이 암살자를 보낼 줄이야.
오베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 대사를 찾아가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지금 오베른은 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괜찮아, 내가 지켜보고 있었어.'
뱀이 그리 말해도 믿을 수 있어야 말이지.
오베른은 총장의 조언대로 제국 대사를 찾아갔다.
제국 대사는 찾아온 오베른을 반기고 호위까지 붙여 줬다. 마치 궁정백의 암살 시도가 있을 줄 알고 있던 것처럼.
'얘들은 진짜 강해 보이긴 한다.'
다만, 대사가 처음에 제안했던 것처럼 그의 수하로 들어가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필리가 제국으로 가게 되었으니.'
왕자 필리가 2왕자 레온 대신 제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오베른은.
'제가 필리의 전담교사를....'
오베른은 필리의 스승으로서 그를 따라가겠다는 형식이었다.
놀랍게도 그 제안은 곧바로 받아들여졌다.
오베른의 제국행도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여기에는 총장의 입김이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왕자의 스승이라니.'
원래도 에메랄드 스쿨에서 왕자를 가르쳤지만, 이건 또 다른 일이다.
왕자사는 훨씬 더 명예로운 일이다.
'언젠가 왕의 스승이 될지도 모르지.'
'그럴 수 있을까요?'
뱀의 말대로, 그럴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은 너무 막연한 미래지만 말이다.
'얼른 돌아가자, 파티가 시작되겠어.'
뱀이 그리 말했다.
필리와 오베른은 제국으로 떠날 것이다.
갑자기 결정된 사항이지만, 하루빨리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뱀은 '이별 파티'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나는 이제 학교로 돌아가 봐야겠소."
가는 길도 호위해 드리지요.
원래는 제국 대사의 호위였던 이들이 슬쩍 물러났다.
부담스러움을 느끼면서 오베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이 배신자!"
라니아가 그리 말하면서 필리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사실 진짜 두들겨 팬 것은 아니고 애정이 담긴 투닥거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쿠억!"
물론 당하는 필리의 입장에서는 그리 귀엽지 않은 고통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떠나기 3일 전이 돼서야 말하다니...!"
제국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말해야지 말해야지 하다가 결국 3일이 남아서야 말했기 때문이다.
라니아의 화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왕자를 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미, 미안...."
"너무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해도."
내가 이별 파티를 기획하지 않았다면 정말 떠나기 하루 전이 되어서야 말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나."
그러면서 살풋 웃는 것은 놀랍게도 릴리 공주였다.
그녀는 이곳 에메랄드 스쿨의 교수 연구실에서 이뤄지는 조촐한 송별파티에 참여했다.
"정말 사이가 좋구나.... 부러운걸?"
필리와 끔찍하게도 어색한 사이였던 릴리 공주.
하지만 원형 경기장의 테러가 오히려 두 배다른 남매의 관계를 좋게 만든 점이 있었다.
물론 아직 서로의 앙금이 완전히 녹지는 않았겠지만.
'잘했어, 잘했어!'
내가 그런 릴리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어머, 얘는 뭐라고 말하는 거야?"
"아... 뱀, 음, 잘 왔다고 하는 거 아닐까요...?"
라니아가 어색하게 그리 말했다.
아직 릴리는 내 정확한 정체에 대해서 짐작도 못 하고 있을 테니까.
참고로 고릴라 여사는 어쩔 수 없이 흰 천을 뒤집어쓰고 짐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라니아가 아마엔을 불렀다.
"아마엔! 너도 와서 필리 좀 때려 줘!"
그런데 아마엔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는데, 떠난다는 이야기가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걸까.
그때였다.
아마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떨어진 것은.
왜 갑자기 울어 쟤.
"너...너무...."
나는 당황해서 아마엔을 살펴봤다.
너무...?
"너무해요 스승님!"
그러더니 들고 있던 음료수 잔을 내팽개치고 달려 나갔다.
눈물이 반짝 떨어졌다.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아마엔.
"어머... 오베른 교수님을 많이 존경했나 보네."
릴리가 그리 말했다.
떠나는 것은 오베른과 나 또한 포함이니까.
'어, 어어.'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다고 해도 순간 당황했다.
"쟤, 쟤가 왜 이래... 참. 이거 난처하군요."
릴리와 함께 초대된 로일도 당황했다.
그는 내게 슬쩍 중얼거렸다.
"스승님을 저보다 더 따르던 아이라.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거....'
나는 문득 깨닫고 말았다.
'내, 내가 잘못한 건가!'
174. 새로운 이름
중학생 시절.
그리고 학기 초.
나는 당연하겠지만, 친구가 없었다.
당연하다는 게 내가 뭐 부족해서라는 건 아니고, 아마도.
사실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게 문제였다.
이미 다들 친해 보이는데 어떻게 끼어들어서 대화를 나누고 또 친해진다는 말인가.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말해 보니까. '너는 남들 다 사귀는 친구를 왜 혼자 못 사귀냐. 나랑 닮은꼴은 하나도 없어 가지고....'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네이버 지식인에 질문을 올렸다.
──────────────
[질문: 안녕하세요 저는 중학생인데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친구 사귀는 법좀 아르켜주세요.
내공냠냠 신고합니다.
──────────────
그리고 하루 뒤 답변이 달렸다.
아직도 그 내용을 기억한다.
──────────────
답변 1:
내공냠냠
꺼억~
──────────────
당연히 신고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답변은 두 개였다.
──────────────
답변 2:
관심사가 같은 친구들을 찾아보세요. 관심사가 약간 달라도 적당히 관심 있는 척하다 보면 친해질 겁니다.
──────────────
당시에는 그게 벼락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옆자리에 앉은 짝궁이 생각났다.
맨날 잘 모르겠는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보고 있어서 친해질 기회가 없었는데....
참 고마운 선생님이다. 내공 10을 드렸다.
바로 다음 날 선생님께 배운 것을 써먹어 보았다.
"어 그 애니... 그거 아니야? 히도리보치...."
애니메이션에는 관심이 없었으니, 그저 제목을 보고 아는 척 했을 뿐이다.
줄곧 나를 무시하던 짝꿍이 처음으로 반응을 했다.
"이 애니 봤어?"
"아니 보진 않았는데 관심이 있어서...."
"오, 동지였군."
동지란 말을 실제로 쓰는 사람을 그때 처음 보았다.
"원래 보자로는 네 컷 만화였어, 그런데 애니화가 되면서 카미애니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작화가 대단하거든 A-1이 전신인 크로왁스에서 만들어서... 연주 씬 보여?"
캐릭터들이 열심히 네 줄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난 베이스의 얘가 제일 마음에 들어. 쿨하달까. 연주도 대단하지?"
네 줄 기타가 아니라 베이스였구나. 사실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려서 좋고 말고를 알 수 없었다.
"응, 대단한 것 같아."
"실제 연주를 하는 영상을 찍어서 그 손 모양의 싱크를 그대로 땄거든.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부분이지."
"나, 나도 이 캐릭터가 제일 좋은 것 같아!"
"뭐야...."
그 친구의 눈빛이 순간 변했다.
"나카마였나."
"나카마?"
"동지보다 위에 있는 거지."
그는 주먹을 슥 내밀었고, 나는 얼떨결에 그 주먹을 마주쳤다.
나카마는 진실로 친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이리라.
친구만 생겨도 감지덕지였는데 지식인 선생님 덕에 나카마가 생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공 20을 드릴걸....
그 후로 나는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같은 내용으로 끝났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런 과거를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친구에게 여자친구가 생겼을 때부터 일어났다.
친구의 여자친구라면 내 친구이기도 한 것 아닌가 생각해서 처음에는 기뻤다.
아니, 사실 계속 기뻤다.
둘이 놀던 것을 셋이 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은 어느 날 갑자기 끝났다.
"야! 넌 대체 눈치가 없냐."
"왜, 왜?"
오늘따라 말이 없길래 몸이 안 좋나 했는데,
친구의 여자친구가 나한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당황해서 친구를 바라봐도, 친구는 먼 산만 볼 뿐이었다.
"재혁이가 너 싫어하는 거 몰라?"
"날...싫어한다고?"
"그래. 나까지 티를 팍팍 냈는데 어떻게 눈치 한 번을 못 채냐?"
"...."
충격적이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당시의 나를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가. 우리 노는데 좀 그만 끼어들고!"
그 여자애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친구가 결국 떠나는 나를 잡지도 않았다는 게 슬펐을 뿐.
나카마라며... 나쁜 자식.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누가 나를 싫어하는 것을 잘 눈치채지 못한다'고.
지식인 선생님에게 또 물어보니, 그리 나쁜 게 아니란다. 오히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재능이라나.
하지만 설마하니.
누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잘 눈치채지 못할 줄이야.
아니 정확히는 아마엔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알았지만.
내가 떠난다는 사실에 그렇게까지 슬퍼할 줄은 몰랐다.
* * *
'어떡하지!'
나카마는 잃었지만 제자마저 잃고 싶지는 않았다.
로일은 걱정 말라고 했지만 나는 초조해서 어찌할 수 없었다.
파티가 끝나고 남은 오베른, 아마엔, 라니아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들은 진지하게 각자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내가 선정한 의견은....
'필리, 네가 말 잘했다. 아마엔에게 선물을 줘야겠어.'
필리는 선물과 함께 사죄를 하라며 조언을 해 줬다.
내가 그 의견을 선택한 것은, 필리가 직접 실행해 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에 릴리를 파티에 초대할 정도로 사이를 회복했으니 더욱 신뢰가 간다.
'그러면 문제는, 무슨 선물을 주느냐야.'
거기가 또 문제였다.
오베른이 진지하게 말했다.
"금화 한 자루를 주는 게 어떨까요."
라니아가 멍한 표정으로 오베른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오베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덧붙였다.
"두 자루?"
"사악!"
나는 꼬리로 바닥을 탁 쳤다.
'기똥찬 생각이다!'
세상에 금화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안 그래도 이번에 로일한테 정산금을 어마어마하게 받은 참이다.
즉, 갑부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화 두 자루를 주면서 사과하자.'
라니아가 얼굴을 감싸 쥐며 한숨을 쉬었다.
아닌가? 너무 적나?
로일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에 아마엔의 용돈을 크게 늘려줘서 별로 효과적이지 않을 겁니다."
아뿔싸!
내가 부자가 된 만큼 로일과 아마엔 역시 부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화의 효과가 떨어질 텐데.
"그럼 금화는 저를 주십쇼."
그때 갑자기 오베른이 그리 중얼거렸다.
다들 그를 쳐다보자 얼굴이 곧 벌개졌지만 말을 회수하지는 않았다.
'싫어.'
"...."
돈이 얼마나 귀한 건데.
우리는 아마엔에게 무슨 선물을 주느냐의 문제에서 답보했다.
답을 준 것은 라니아도, 필리도, 오베른도, 로일도 아니었다.
아주 의외의 인물이었으니.
-끄응... 선물은, 큭. 선물은 그 사람이 기뻐할 것을 줘야 하는 거다.
숙취에 고생하는 부장님처럼 머리를 감싸 쥐며 펠레리안이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나서 진지한 얼굴로 당연한 이야기를 하다니.
그러나, 펠레리안은 나와 함께한 시간 때문인지 내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쓸쓸한 늙은이가 잘난 척 아는 체하는군, 하고 생각하나 보군.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지만.
-생각해 봐라. 그 꼬마 인간한테 너는 뭐지?
'하늘 같고 존경스러운 스승님이겠죠.'
-...뭐, 하여튼 스승으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것이다.
'마법을 더 가르쳐 줘요?'
-그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지.
'그럼요?'
내가 수수께끼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을 펠레리안은 안다.
그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했다.
-마탑에 데려가라. 왕국을 떠나기 전에 마탑은 한번 들러 봐야지.
'마탑요?'
마탑이라니.
아카데미만큼이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곳 아닌가.
-그래, 그곳으로 가서 그 꼬맹이를 정식 제자로 등록해 줘.
'등록이라니.'
펠레리안의 아이디어가 뭔지 조금 더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엔은 분명 기뻐할 것이다.
* * *
비행 청소년도 아니고.
말 잘 듣고 착한 아마엔이 도망쳐서 가 있을 곳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엔은 본인 기숙사 방에서 발견되었다.
쪼그려 앉아 있던 그는 축 처져 보였다.
하지만 펠레리안이 제안했던 이야기를 하자.
"정말요?!"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나와 오베른, 아마엔은 그대로 아카데미를 나와 마탑으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우리는 자세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오베른이 아마엔에게 중요한 사항들을 설명했다.
마탑에서는 마법사 등록을 할 수 있다.
아마엔도 마법사로 등록할 만한 실력이 되었으니 가야 할 텐데, 그때 스승이 누구인지도 등록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었으니.
"너도 알겠지만, 뱀 경의 제자로 너를 등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슨 말인지 알지?"
초급 마법사라고 할 수 있는 아마엔이 제 스승은 뱀입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일단 내 제자로 들어간다. 그리고 내 스승을 뱀 경으로 올릴 거야. 너와 나는 뱀 경으로 이어지는 같은 계보를 가지게 되는 거지."
놀랍도록 충격적이고 과감한 계획.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어느 정도 등위가 높은 오베른은 자신이 사사한 스승의 이름을 마탑에 등록할 수 있었다.
초보 마법사인 아마엔과는 입장이 다른 것이다.
아마엔의 사부는 오베른, 오베른의 사부는 나.
나는 따라서 아마엔의 사조(師祖). 그렇게 사제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괜찮겠나 그걸로?"
그리 말하는 오베른은 답지 않게 아마엔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마탑에 스승으로 등록할 수 있는 마법사는 하나뿐.
그것을 오베른으로 삼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 어쩌나 싶나 보다.
하지만 아마엔은.
"물론이죠!"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기뻐 보였으니.
"오베른 교수님도 제 스승님이신데요."
"...."
오베른 저거 또 우는 거 아니야.
은근히 눈물이 많은 성격이니까.
다행히 울지는 않았지만, 오베른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크흠, 큼. 도착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어느새 마탑 앞에 도착해 버렸다.
탑이라길래 원기둥 모양의 건물인가 생각했는데, 의외로 직육면체의 빌딩이었다.
다만 놀라운 점은 다른 건물보다 훨씬 높다는 것.
이곳이 수도의 외곽이라고 해도 근처의 건물에 비해서 압도적인 높이를 자랑했다.
창문의 위치가 워낙 제각각이라 층수를 가늠하기는 힘들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20층 빌딩만 했다.
건물의 넓이 또한 저택이 부럽지 않았으니 정말 빌딩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마법사란 어떤 면에서 최고의 건축공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건축에 가장 탁월한 종족을 꼽으면 드워프겠지만.
건축에 가장 탁월한 직업을 꼽으라면 무조건 마법사다.
펠레리안의 던전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마탑 솔리온 임펠 지부.]
대문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얼른 들어가라. 오늘 내에 해야 할 일이 많다.
펠레리안은 참고로 따로 해야 할 일을 주문했다.
어쩐지 적극적이더라니. 그가 아마엔을 위해서 그리 고민했을 리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접수처의 접수원이 빙긋 웃으며 그리 말했다.
"5등위 마법사, 오베른 그리모아르. 6등위 승급과 사제 등록을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쪽은 1등위 마법사 아마엔 리들입니다."
"아하, 우선 이쪽 양식을 적어 주실까요."
마치 동사무소에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생각보다 사무적인데 이곳.
오베른과 아마엔이 열심히 양식을 적던 중.
"그리모아르 님은 사제 등록이 되어 있지 않네요? 사사한 스승도 새로 등록하시는 건가요?"
마탑에 등록된 오베른의 스승은 없었다.
오베른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스승님의 존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접수원은 펜을 들고 그리 물었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내 이름이 마탑에 등록되는 거니까...
처음에는 우르오로스라 적으려 했다가 마음을 바꿨다.
새 신분을 하나 만든다는 이름으로.
"배...."
뱀뱀.
그리 말하라 시켰는데.
"배.... 크흠."
"배요?"
오베른은 그것을 말하기를 몹시 어려워했다.
"배, 뱀뱀...."
"...지금 장난치시는 거죠?"
아니 이럴 수가.
아무리 그래도 장난치는 거냐니.
그때 오베른이 부탁하지도 않은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뱀배...미안."
"뱀배미안 님이요?"
카스피안, 펠레리안.
대마도사의 이름은 ~이안으로 끝나기는 한다만.
"그렇소. 뱀배미안이시오."
"알겠습니다."
내 마법사 이름이 뱀배미안으로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175. 대마법사 뱀배미안과 그 제자들
-뱀배미안이라니....
펠레리안은 나를 비웃었다.
아주 폭소하면서 낄낄거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왜요, 영감님하고 비슷한데. 그 카스피안이라는 대마법사하고도 비슷하고.'
-정떨어지는 소리 하지 말어라.
내가 보기에는 완전 비슷하고 엄청 멋지기만 하구만 괜히 갈구는 것이 확실하다.
"뱀배미안 님, 멋진 이름이네요."
그때 접수원이 그리 말해 주었다.
오베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자식, 저렇게 놀랄 정도는 아닐 텐데.
"그, 그런가요."
"예. 대마법사다운 풍취가 느껴지는 존함이세요."
그렇단다. 역시 내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어딘가 일그러져 있지. 저 접수원도 마탑 소속의 마법사이니까 상식이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펠레리안이 그리 말했다.
솔직히 매드 마법사인 자기가 제일 일그러진 사람이면서 저리 말하다니. 뻔뻔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말이 아주 근거 없는 험담은 아니었다.
-원래도 마법사들은 범상한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 마법사들을 탑에 집어넣고 서로만 교류한다고 생각해 봐라. 지들끼리 얼마나 일그러지겠느냐. 그래서 내가 마탑의 마법사 놈들을 싫어해.
'그 카스피안이라는 아저씨도 그랬어요?'
카스피안은 펠레리안 활동 당시의 마탑주다.
펠레리안보다 훨씬 어리지만 마법의 경지는 펠레리안을 넘어섰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둘 간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놈은... 마탑의 마법사 같지는 않았지.
그런데 의외의 평가가 나왔다.
-어떤 의미에서 미쳐 있기야 하지만, 이곳의 도라이 같은 노인네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어려서 그런지 모르겠지만서도.... 됐다. 이 얘기는 하지 말지.
안 그래도 접수원이 오베른과 아마엔을 안내하고 있었다.
"승급을 위해선 기본적인 필기시험과 고위 마법사의 면담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선 필기부터 응시하시죠."
오베른은 지금 8영웅의 1인으로 꼽히게 된 화제의 인물이었다.
마탑이 폐쇄적이긴 한 것 같다. 그런 오베른에게 필기시험까지 치르게 하다니.
바깥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까.
"두 분이시니까. 그냥 같은 시험장에서 보시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시험지를 가지고 올 테니."
무슨 수능 보는 것도 아니고 말야.
나는 슬쩍, 아마엔의 어깨로 옮겨탔다.
그리고 묻기를.
'아마엔. 시험 치는 거 도와줄까? 내가 도와주면 만점 맞을 수 있어.'
펠무위키가 있는 이상 마탑의 시험은 문제가 아니다.
마탑에서 시험을 통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등위는 7등위까지.
1등위는 왕초보 마법사로서, 마법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1등위 마법사로 취급된다.
아직 마탑에 등록을 하지 않은 아마엔도 당연히 1등위 마법사다.
아마엔은 2등위 마법사로 승급을 하려는 게 목적이다.
"아니요! 제 스스로의 힘으로 시험을 보겠습니다."
장하게도 아마엔은 그리 말했다.
나는 아마엔의 머리를 꼬리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평소에도 마법을 열심히 공부했던 아마엔이다.
적어도 3등위까지는 자기 힘으로 쉽게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다시 오베른에게 돌아갔다.
오베른이 획득하려는 것은 6등위.
사실, 6등위부터 공식적으로 '마도사'라고 불릴 자격이 부여된다.
마도사가 마법사의 업그레이드 버전쯤으로 취급되는 것 같다.
8영웅 중 하나로 불리면서 마도사가 아니면 면이 영 서지 않을 것이다.
'너는? 도와줄까?'
"음."
오베른도 결의에 차서 말했다.
'필기시험 정도는 제 힘으로 보겠습니다.'
'장하다 오베른!'
오베른도 그리 말했다.
그 역시 제법 성장했나 보다.
곧, 접수원이 돌아왔다.
"시험지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접수원은 혼자가 아니었다.
웬 늙은이 둘이 함께 들어왔다.
둘 다 고깔모자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게 척 봐도 대마법사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앞니 빠진 마법사 한 명, 그와 대비되게 잘생긴 노인 한 명이다.
"아, 이분들은 마스터 알칸두라와 마스터 데자카이십니다."
마스터라는 칭호는 정말 대마법사, 혹은 대마도사라고 불리는 인물들에게만 수여된다.
등위로 따지자면 8등위 이상.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저 두 노인네는 이곳 마탑에서도 대단한 마법사라는 뜻이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뭔가 기시감이 드는 생김새다.
그런데 내가 마탑의 마도사를 만나 본 경험은 없었는데.
...아니.
있었나.
있었다!
그때, 키뱀이의 등 뒤에 타서 몬스터웨이브에 휩쓸리고 있었을 때.
군터가 웬 마법사들을 데리고 우리의 앞길을 방해한 적이 있었다.
당시 화염룡을 만들어 날리던 못된 마법사들이 아닌가!
'비상!'
나는 군터가 허리춤에 칼처럼 꽂아 둔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상태.
숨을 수도 없으니 최대한 수정 장식의 연기를 했다.
다행히 그 마법사들은 내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때는 흑린을 써서 검은 사왕 폼이었으니까.
"구경 왔지이, 클클."
"그 건방진 노움 발라냐르가 그리 침을 튀겨 대면서 칭찬한 녀석 아니야."
그들은 오베른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근데 아직도 겨우 5등위야?"
"요즘 젊은 친구들은 마탑에 소속감이 없는 이들이 많으니...."
발라냐르 총장은 아예 마탑에 적을 올리지도 않았다는 듯했다.
"뭐 필기시험은 당연히 만점이겠군."
"굳이 봐야 하나? 빨리 면담이나 했으면 좋겠어."
그들의 기대치는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오베른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저, 뱀 님.'
그는 자연스럽게 시험지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조금만 도와주십쇼.'
그러면 그렇지.
나는 펠무위키를 불러냈다.
* * *
필기시험 결과는 당연하게도....
박살!
박살 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오베른이 시험에게 박살 난 게 아니라 우리가 시험을 박살 냈다는 것이다.
5등위 마도사의 필기시험은 당연히 객관식이 아니고 논술형이다.
그리고 펠레리안은 문제를 슬쩍 보곤 신들린 무당처럼 답을 읊기 시작했다.
-미시계의 위상변화에 관해서는 관측시의....
오베른은 그저 그 답을 받아 적기에 바빴다.
그러니 사실상 '조금만 도와 달라'는 요청이 '전부 대신 해 주세요'나 마찬가지로 반영된 것이다.
펠레리안은 그리 배려 있게 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
답을 바로 받아 적기만 하는 오베른이 오히려 벅찰 정도였으니, 바깥에서 보면 일필휘지로 답을 써 내려 간 것처럼 보였으리라.
"저놈 저거 폼 잡는 거 보게. 클클."
"마치 고민도 안 하는 듯 거침이 없군."
마스터 알칸두라와 데자카가 그리 평했다.
시험의 문제는 오베른의 것이 훨씬 어려웠지만 아마엔도 오베른과 비슷한 시점에 답안지를 완성했다.
"어디 우리가 직접 평가하지."
"앗."
접수원이 당황했다. 마스터들이 답안지를 휙 가로채 간 것이다.
"우리가 채점할 수도 있잖아. 마스터니까."
"그렇긴 하지만... 예 그리 하십쇼."
원래라면 시간이 조금 걸렸을 일인데, 이들은 이 자리에서 즉석으로 채점을 하려는 듯했다.
우선 아마엔의 것부터.
아마엔이 본 시험이라고 해 봤자 2등위 마법사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 대단할 것이 없으니, 마스터들은 한 번 슥 읽어 보는 것으로 합격의 가부를 정했다.
"합겨어억!"
"훌륭하군."
성의가 없어 보일 정도로 대충 평가한 것 같은데 접수원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매번 답안지들 구경할 때마다 형편없으니까 떨구라고 하시는 분들이."
"매번은 뭘, 너 또 오버한다."
"뵐 때마다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앞니 빠진 알칸두라 마스터가 아마엔의 답안지를 슥 내밀었다.
"너도 한번 읽어 보아라."
그리고 접수원도 아마엔의 답지를 보았다.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접수원도 떨떠름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군요. 아직 에메랄드 스쿨 1학년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네에, 맞아요."
"허. 스쿨의 수준이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아카데미 수준이 높은 게 아니라 아마엔의 수준이 높은 거야.
그리 말해 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당장 3등위 시험을 봐도 문제가 없겠군요. 머지않은 시기에 또 방문하도록 하세요."
접수원의 말투가 조금 바뀌었다.
기대되는 후배를 만난 선배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오베른의 차례였다.
알칸두라와 데자카는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답안지를 읽어 보았다.
다섯 장을 빼곡하게 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길이의 답지였다.
기대가 되는 듯 만면에 웃음을 짓고 답지를 읽는 마스터들.
그들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사락... 사락.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한 번 읽은 것으로는 부족한지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그리하여 오베른의 답지를 읽은 두 마스터의 반응은 상반되었다.
잘생긴 노인네, 데자카의 반응은 우선.
"...아름답군."
경탄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리라니. 이게 말이 되나? 처음 본 문제가 아닌가. 대체 어찌 이렇게 정리를 도출하는 과정이 물 흐르듯 아름다울 수 있지?"
그는 마치 아름다운 자연현상을 목격한 여행가와 같은 얼굴이었다.
어느 겨울날, 산행을 하다가 얼음 폭포를 만났는데.
떨어지면서 얼어붙은 얼음 폭포가 마치 흐르는 구름과 같이 보인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처럼.
얼굴에 상쾌한 미소가 떠올랐다.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나. 우주 만물을 품고 있기라도 한 건가!"
그리고 내 옆에 있던 펠레리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마탑 놈들이라고 해도 눈깔은 제대로 박혀 있군.
펠레리안의 대리시험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다만, 곧 문제가 드러났다.
성공적이어도 너무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장난해!"
이 빠진 노인네 알칸두라는 버럭 화를 냈다.
"이 정리를 지금 머릿속으로만 도출해 냈다고? 데자카 이 정신 나간 노인네야. 어린놈한테 그리 농락당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흠, 왜 지랄이지?"
"이놈이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어. 카스피안이 살아 돌아와도 처음 보는 난제를 이런 식으로 정리해 내지는 못할 거다!"
아무래도 너무 완벽한 답안을 써 버린 것 같다.
오베른은 훌륭하게도 조금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카스피안은 할 수 있다. 저놈들은 자기 마탑주의 실력도 제대로 모르는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상황을 타파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러다가는 저 노인네가 오베른에게 실력 좀 보자고 결투를 신청할지도 모른다.
'어떡하죠...!'
'진정해 오베른, 침착하게 간다.'
나는 메가폰을 잡은 감독의 자세로 연기를 지시했다.
오베른은 명배우답게 훌륭히 수행했다.
"오해를 하신 것 같군요. 이 문제는 제가 예전에 본 게 맞습니다."
"그치? 거 봐! ...근데 어디서? 내가 만든 난제인데."
"제 스승님이 알려 주셨습니다만."
"스승님?"
접수원이 귓속말로 수군거렸다.
"그래서 그분 존함이 ...."
"뱀, 뱀배미안입니다."
오베른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마스터들은.
"음, 마력이 느껴지는 이름이군."
"대마도사스러운 풍취가 있어."
뱀배미안이라는 이름을 인정했다.
"그분이 나와 똑같은 발상을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내 논문을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기꺼운 일이야. 허허허."
모든 마스터들은 마법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다.
오베른의 답변에 알칸두라는 오히려 흡족해하기 시작했다.
"잘됐네, 자네와 스승님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볼까?"
"저... 마스터 알칸두라. 실기시험은...."
"야 인마, 필기가 이렇게 완벽한데 실기는 무슨 실기야. 우리 면담으로 대체해."
"아...."
어차피 6등위 마도사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마스터 한 명 이상의 승인이 필요하다.
두 마도사는 오베른과 아마엔을 끌고 가다시피 했다.
"그래서 스승님은 어떤 분이신가. 세상에 은거기인이 참으로 많아. 마탑 밖의 세상도 그리 넓은 것을."
"아... 제국 분이십니다."
"그럴 줄 알았지. 아직 살아 계신가?"
그들은 대마도사 뱀배미안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은 듯했다.
"그렇긴 할 텐데. 저도 만나 뵈기가 힘들어서..."
"허허 고고한 취향이시로군. 자세히 이야기 좀 나눠 봅세."
우리는 그들의 연구실로 끌려갔다.
풀려난 것은 해가 뉘엿뉘엿 진 후였다.
* * *
노을이 붉게 물든 거리.
오베른, 나, 아마엔이 거리를 걸었다.
아마엔과 오베른의 가슴팍에는 브로치가 걸려 있었다.
오베른의 브로치는 은으로 만들어진, 룬어로 6이 적혀 있는 것.
그리고 아마엔은 동으로 만들어져 2라 적혀 있는 브로치였다.
"...감사해요, 스승님."
아마엔이 그리 중얼거렸다.
그게 나한테 한 말임은 분명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꼭이요."
떠나는 길, 나는 아마엔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늘 달고 다닐 수는 없을 테지만, 내 목에도 목걸이처럼 브로치를 걸었다.
은으로 이루어진 룬어 7이 조각된 브로치.
두 마스터의 기분이 많이 좋았나 보다.
그들은 오베른의 스승 뱀배미안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허가되지 않는 일이지만, 오베른의 스승으로서 7등위의 브로치를 수여한 것이다.
이것만 차면 전 대륙 어느 마탑에서도 7등위 마법사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
물론 실제로 나타나서 등록하지 않는 이상 의미 없는 일이지만.
-거 참, 요즘 마탑 놈들은 정신머리가 없구만. 만나 본 적도 없는 마법사를 7등위로 올리자니.
펠레리안이 밉살맞게 빈정댔다.
'등위 없다고 질투하지 마세요.'
-질투 같은 소리!
있지도 않은 어깨가 으쓱하는 기분이다.
대마도사 뱀배미안.
언젠가 대륙에 그 이름이 퍼지리라.
176. 범죄 현장
송별식이 있었다.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베른은 교수직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가 떠나는 이유는 왕자사로서 제국에 함께 가기 위함이었는데.
궁정백과 왕의 의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망나니 왕자였던 필리의 이미지가 요사이 많이 바뀌었다.
제국으로 떠나는 '유학'이 사실상 볼모로 잡혀가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은 왕국민 모두가 알았다.
자연스레 필리는 '비극의 왕자'가 된 것이다.
조금 전, 에메랄드 아카데미를 떠나서 대로를 걸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필리에게 경의를 표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필리보다 더 이미지가 좋아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넌 살았네. 오베른.'
'...그러게나 말입니다.'
오베른이었다.
그가 저지른 죄가 폭로되어서 감방에 잡혀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영웅이 되었다.
게다가 떠오르는 샛별과 같은 지금 상황에서, 주저 없이 왕자를 돌보겠다며 동행을 택했다.
제국행이 볼모행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는 지금.
그것은 분명히 영웅적인 행동이었다.
'궁정백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지. 우하하.'
궁정백도 더 이상 오베른을 건드리기는 어려우리라.
발라냐르 총장의 의도대로 가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말이다.
제국 대사와 그 일행은 이미 워프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한 번의 조촐한 송별식이 있었다.
특히 가까운 이들.
아마엔, 라니아, 로일 등이 워프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잘 있어 아마엔.'
"스승님...."
아마엔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나도 꼬리로 그를 껴안고 등을 톡톡 두드려 줬다.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어엿한 마도사가 되어 있으렴.'
"마도사요? ...네, 알겠어요."
나는 열심히 마법을 수련하라는 뜻이었는데, 아마엔은 6등위 이상을 따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지만 분명 쉽지 않은 길이 되겠지.
라니아와도 인사를 나누고.
라니아와 필리, 아마엔도 함께 껴안았다.
그 모습이 보기에 기꺼웠다.
"아가씨, 부디 보중하십시오."
라니아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자레인 경이 보좌를 잘 할 테니 그의 말을 잘 따르시고... 제국에서의 일을 마치면 저도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올리버였다.
올리버는 충격적인 사실을 말했다.
자기가 사실 왕국민이 아니라 제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우리와 함께 제국으로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왕자 필리의 하인 역할로.
필리에게 허락된 동행은 둘뿐이었다.
스승인 오베른과, 수발을 들어줄 하인 하나.
그런데 하인을 왕궁에서 데려오면 누가 붙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궁정백이 자신의 사람을 붙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올리버의 자원은 반가운 일이었다.
라니아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잘 다녀와요. 아저씨."
"...!"
올리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저씨라니. 어찌 들으면 그저 거리감 있는 호칭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올리버에게는 '아빠' 혹은 '삼촌'이라는 말처럼 들렸나 보다.
"어찌 이리 금방 자라셔서...."
냉혈한처럼 보이던 올리버가 라니아를 와락 껴안았기 때문이다.
라니아도 결국 울상을 짓더니 눈물을 찔끔 흘렸다.
아름다운 이별이군. 음음.
마침내 우리는 워프게이트가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허가받은 이들 외에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다.
"흑윽, 흑흑."
필리가 잉잉 울었다.
나는 그의 어깨 위로 올라가 등짝을 탁 때렸다.
'인마! 정신 차려!'
"흐흐으...."
'제국에 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그렇게 나약한 모습 보일 거야? 제국 대사 앞에서도 그렇게 굴 거얏!'
"...."
'뚝!'
필리도 울음을 그쳤다.
이래서 정신력이 낮은 친구들은... 정신력 20인 나는 친엄마가 형제자매들을 터뜨려 죽였을 때도 의연했는데 말이다.
혼재규어 뱃속에서 한번 버텨 봐야 세상의 무서움을 좀 알지.
물론 나는 선생님으로서 필리가 겁이 많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도 제국 대사의 앞에서 얕보일 수는 없다.
"오 왔구만."
마간 사레브 후작.
그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 반갑소. 마간 사레브요."
"반갑습니다. 후작."
본디 귀족이라고 해도 왕자에게는 합당한 예를 표해야 한다.
그러나 후작은 여유롭게 반존대를 했고, 필리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 대사는 외교적 지위로 솔리온의 국왕과 동급이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필리는 약간 긴장한 상태였다.
제국 대사가 얼마나 깐깐하게 굴지, 혹은 오만하게 굴지.
대놓고 모욕을 받아도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게 필리의 입장 아닌가.
"편하게들 지내게. 앞으로 갈 길이 머니. 그대들을 위해 마차를 준비했는데 구경하겠나?"
하지만 다행히 대사는 소탈하게 굴었다.
"아, 넵!"
"원래는 말 여섯이 끌어야 할 육두 마차 크기야."
워프게이트 앞에는 정말 거대한 마차가 있었다.
사람 열 명은 들어가 지내도 괜찮을 듯한 마차.
다만 신기한 것은 그것을 끄는 말이 겨우 두 마리뿐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혈통의 준마라고 해도 마차를 움직이지 못할 텐데.
"이리 와서 바퀴의 축을 보게나."
바퀴는 세 쌍으로 총 여섯 개.
자세히 보니 바퀴의 모양이 범상치 않았다.
"마석으로 동력원을 만들어서 이 거대한 마차를 움직일 수 있게 했지. 솔리온에도 이런 마차가 있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겠지. 변방에 이런 게 굴러다닐 리가 있나. 다름 아닌 황도의 기술이니."
아무래도 제국 귀족 특유의 방자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왕자 그대를 위해 준비했네. 이곳에서 편안한 여정하게나."
사레브 후작이 마차를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후한 대접이다.
저 제국 후작, 사실 착한 놈인 거 아니야?
그리고 후작은 오베른에게 와서 친한 척을 했다.
어깨동무를 턱 걸치니 오베른도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몰랐는데 자네는 취향마저 고상하구만!"
"아... 취향 말씀이십니까?"
무슨 취향을 말하는 걸까.
"그래, 마물을 키우다니 말이야. 게다가 그렇게 잘 길들인 마물은 처음 보았네그려."
사레브 후작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마차에서 깜짝 등장을 한 것은 다름 아닌 고릴라 여사였다.
"2왕자의 팔다리를 부러뜨린 그 녀석을 자네가 포획했을 줄이야. 어찌 숨겼나? 으하하하!"
고릴라 여사를 오베른의 연구실에 혼자 남겨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나는 정공법을 택했다.
사레브 후작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리고 사레브 후작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유쾌해, 아주 유쾌해. 나는 이래서 마도사들이 좋단 말이야. 아주 파격적이거든."
'마물을 함께 데려가고 싶다.'라는 말도 안 되는 요청을 사레브 후작이 받아들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보게나. 치잇, 칫!"
혀를 튕기는 소리를 내자, 앞에 있는 후작의 마차에서 작은 동물이 튀어나왔다.
"아름다운 마물이지. 투 테일드 패럿이라는 녀석이야."
새빨간 털을 가진, 꼬리 둘 달린 족제비 마물이었는데, 길들여졌는지 후작의 손을 타고 호로록 어깨까지 기어올랐다.
후작은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 아몬드를 꺼내서 마물에게 주었다.
"종종 물리고 감전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참으로 귀족다운 취미라고 할 수 있지."
왕국에서는 마물을 키우는 것이 터부시된다.
실제로 사육을 금지하는 법안이 있을 정도.
하지만 지금의 제국은 달랐다.
"황제 폐하께서도 흠뻑 빠져 계신 것이니, 제국 귀족에게 마물을 키우는 것은 품격을 함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
그것은 전대 황제부터 이어져 온 유행이었다.
수왕제.
그가 와이번 기사단을 만들겠다며 와이번들을 기르던 게 시초였다.
원래부터 마물을 길들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수왕제는 제국의 뛰어난 석학들에게 마물학의 연구를 지시했다.
인재와 돈을 쏟아부으니 발전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마물을 길들이는 방법이 체계적으로 개발된 것이다.
황제가 마물 기르기에 취미를 붙이자, 대귀족들이 그것을 따라 했다.
곧, 돈 좀 있고 힘깨나 쓰는 이들은 마물을 한둘 키우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 뱀은, 자네의 패밀리어라고?"
그리고 후작은 나를 가리켰다.
나는 평소와 달리 지팡이가 아닌 오베른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고.
"맞습니다."
오베른은 그리 대답했다.
드디어 지팡이의 수정장식 신세에서 벗어났다.
이제 연기는 집어치워도 된다고 하니 후련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후작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다.
"부럽군, 이래서 마도사들이 부러워."
"무슨 말씀이신지."
"저 아름다운 흰 빛깔. 흰 마물 아닌가."
"아아...."
뭐라고.
지금 흰색을 칭찬해 준 건가.
오베른은 대충 이해한 것 같은데, 나는 무슨 말일지 궁금해서 귀(없음)를 기울였다.
"흰 마물은 황제 폐하의 것이지. 황족 이외에는 흰 마물을 키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오.
황제의 색, 화이트.
"흰 마물의 값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정부지이고. 키우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락된 것은 마법사의 패밀리어뿐이라네."
몰래 흰 마물을 키우는 지방 귀족들도 많다나.
사치의 방법도 참 다양하다.
'옳게 된 나라다. 제국.'
백색의 마물이 대우받는 세상이 존재했다니.
물론 그렇다고 인간들의 애완동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펠레리안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황제의 애완동물로 사는 것도 편하긴 하지 않겠느냐.
'흠, 그런가.'
-그렇기는 무슨... 농이었다. 농.
꽤 솔깃했는데. 농담이었구나.
"자 들어가서 쉬고, 우리는 잠시 둘이 얘기하지 않겠나?"
오베른이 필리를 따라 마차에 오르려고 하자 후작이 그리 말했다.
난 오베른을 보내고 그냥 마차로 올라탔다.
내부는 아주 화려하고, 또 안락했다.
"와, 침대가...."
"사악!"
안은 마치 기차의 특급 객실 같았다.
고급스러운 나무로 벽과 바닥이 마감되어 있었으며.
바닥에는 푹신푹신한 융단이 부드럽게 깔려 있다.
총 네 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공간이 좁지 않았다.
나는 침대 대신 나를 위해 마련해 둔 바구니를 차지했다.
안락하고 좋구만.
잠시 시간 난 김에 이번에 얻은 것들을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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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프린스 서펜트lv14]
[이명] 우르오로스, 심장 파먹는 뱀, 검은 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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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 꽤 올랐다.
다음 진화는 언제 될까?
이실이나 고릴라 여사의 진화가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우선 새로 얻은 이명, 검은 사왕부터 뭔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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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왕]
왕관을 쓴 검고 작은 뱀이라.
흉험한 몬스터웨이브를 일으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무시무시한 마물.
현재 왕국과 제국이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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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왕이란다.
심장 파먹는 뱀도 내 속도를 빠르게 해 주는 효과가 있었는데.
이 이명의 효과는 뭘까.
'흑린은 조심히 써야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자칫하면 정체를 들킬 테니.
내가 흑린을 썼던 모습이 별개의 마물로 간주되어서 명성이 퍼진 게 분명하다.
그래도 제법 멋져서 마음에 드는 별명이었다.
그리고 특성 '왕족'으로 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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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위엄: 별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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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을 너무 많이 소모해 버려서 별로 남지 않았다.
이건 또 언제 모을 수 있으려나.
스킬도 전체적으로 레벨이 조금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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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 왕관
[강탈lv4]: 형질변환 마력탄 :회전lv3, 점착lv3, 폭발lv3, [극복lv2], [지배lv1], [연결lv3]
▸ 마법
[중급 원소]:불lv2, 흙lv4, 물lv5, 바람lv2
[투명한 손lv19], [경량화lv5]
[지옥 마법]: 지옥불lv2, 타락lv1
[형질변환 마력탄]:회전lv3, 점착lv3, 폭발lv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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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옥 마법 중에 저 '타락'이라는 마법이 조금 궁금했다.
펠레리안의 말에 의하면 정신공격을 위한 마법이라는데, 성기사들을 상대할 때 특화되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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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
[거대화lv3], [철사자 제식 검법lv7], [페랑 유파 단검술lv10], [광선lv6], [천뢰령lv3], [식심의 도약lv8], [맹독:신경독lv6], [독비늘lv3], [꼬리치기lv5], [참격lv7], [마력 감지lv4], [가속lv8], [연기lv5]
▸ 생존
[내성]: 독lv10, 출혈lv3, 고통lv10, 열lv14, 냉기lv1, 석화lv1, 전격lv1, 충격lv2
[생존본능lv7], [흑린lv5], [수영lv1],[숨 참기lv10], [은밀lv10], [길 찾기lv1]
[상태]
[여유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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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이 많이 길어지긴 했다.
이 세상이 만약 소설이라면 반 페이지에 불과했던 상태창이 여러 페이지로 늘어나지 않았을까.
내가 이뤄 온 것이 정리된 '업적'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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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경비대장 살해]
[지네의 친구]
[고블린의 맹우]
[마물의 우두머리]
[몬스터웨이브의 저지자]
[악마 살해]
[수도의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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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얻은 수도의 테러리스트가 무슨 업적인가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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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의 테러리스트]
왕국의 수도에 테러를 일으켰습니다.
수도의 검은 조직들이 조금 더 우호적으로 변합니다.
──────────────
참내.
나는 오히려 테러를 막은 입장인데 왜 이런 업적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왕국으로 가는 길은 꽤 길 것이다.
워프게이트로는 국경을 넘을 수 없으니까. 몇 주는 걸리겠지.
그동안 필리나 고릴라 여사랑 놀기도 하고.
오랜만에 수련도 좀 해야겠다.
제국 대사도 괜찮은 사람 같으니까, 오랜만에 힐링 여행이 되면 좋겠는걸.
나는 그런 순진한 생각을 했다.
참으로.
운명이란 폭풍 같은 것을 모르고, 또....
* * *
우르릉-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출발한 지 며칠이나 되었지? 열흘?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덜 되었나.
그리고, 이번에는 또 한 번 벼락이 가까운 곳에.
쩌저저저정!
창문을 통해 주변이 환해졌다.
그러자 드러났다.
제 침대가 아니라 마차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국 대사, 사레브 후작이.
오베른은 몸을 벌벌 떨면서 그런 사레브 후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코앞에 손을 가져다 대고, 목덜미의 맥을 재고 부산을 떨더니.
"어, 어어. 어어어어!"
당장이라도 졸도할 듯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주, 죽었습니다아."
쩌저저정.
때마침 들리는 천둥처럼, 놀랍고 끔찍한 소식이었다.
"아니, 주, 죽였습니다?"
"사아아악!"
내 탓이 아니야!
177. 라한, 다나
워프 게이트는 대륙의 신비이다.
먼 거리를, 마석만 좀 소모하면 여럿이 안정적이고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은 지금으로서는 아주 어려운 일이라나.
펠레리안의 말마따나 텔레포트 계열 마법은 몹시 어려운 것인 듯했다.
발라냐르가 왕족들을 데리고 왕궁으로 단체 텔레포트하는 마법을 쓴 적 있지만, 그것은 그가 대마법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워프게이트마다 그런 대마법사가 상주하면서 워프를 시전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아카데미에서 왕궁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니.
그렇다면 워프게이트는 어떻게 작동한 것일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비밀은 바로 고대 기술이었다.
먼 옛날 장거리 이동수단으로 기능했던 유적들을 발굴하고, 그것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보수한 것이다.
유적을 보수하는 것도 아주 발전된 기술이 필요해서, 지금도 제국만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이다.
즉, 왕국의 워프게이트 역시 제국이 보수해 준 것이다.
원래라면 워프게이트로 국경을 뛰어넘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여정 또한 수도 근교의 워프게이트를 통해서 국경에 가장 가까운 게이트로 이동하고.
또 마차로 국경을 건너서 제국 측의 워프게이트를 이용하는 순서다.
워프게이트의 초장거리 이동을 통제한 것은 전쟁에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문제가 있다.
제국은 부정하고 있지만, 제국 측의 워프게이트로는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들이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당연한 일이지. 그놈들이 그 기술을 폐기했을 리가 없다.
펠레리안은 그리 논평했다.
그렇기에 왕국이 제국을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외교적 문제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오랜만에 평온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니까, 왕국에서 워프게이트를 건넌 지 3일쯤 되었나?
나는 고릴라여사의 재활 훈련을 돕고 있었다.
"사아아악!"(왜 못 해!)
"미, 미아안."
고릴라 여사가 머쓱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양팔이 없으니 발로 긁는 것이다.
고릴라라서 발을 손처럼 쓸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아니야, 뭐 마법이 어렵기는 하니까.'
필리와 오베른은 고릴라가 양팔을 잃은 게 불쌍하다 여겼다.
협박당한 사정을 듣고, 릴라 여사의 성정이 유순하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양팔이 부재한다는 사실이 그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양팔과 양다리를 잃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게다가 양팔이 없는 것은 충분히 대처할 방법이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역시 '투명한 손' 마법이었다.
그것은 내가 아직 미약한 뱀일 때부터 배웠던 마법이었다.
그 자체가 수준 높은 마법은 아니니까,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릴라 여사라면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펠레리안은 코웃음을 쳤지만 나는 진지하게 가르쳐 보았다.
이래봬도 누굴 가르쳐 본 경험이 꽤 있었으니까.
"전혀 안 돼에."
그러나 릴라 여사는 단 한 번도 마법을 완성하지 못했다.
-마물이 마법을 쓰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느냐. 그런 마물은 극히 드물어.
펠레리안이 나를 칭찬해 주었다. 아니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면 또 내가 팔이 되어 주는 수밖에 없나.'
머리에 헬멧을 쓴다면 릴라 여사의 주먹 역할도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의수를 맞춰주는 거 어때요?"
필리가 그리 제안했다.
릴라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의수가 있으면 좋겠어어...."
그 흉악하고 정밀했던 철제 의수는 왕국에 남겨두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의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국의 황도로 가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때까지 발로 연습하자.'
"알겠어어...."
릴라 여사는 다시 나무막대를 검처럼 잡았다.
놀랍게도, 한 발로 서서 남은 발로 검을 잡은 것이다.
'철사자 제식 검법, 제1식!'
"이야압!"
예전부터 고릴라 여사는 신기하게도 내 말을 잘 알아들었다.
연결의 왕관이 없었을 때부터 그랬지.
이번에도, 내가 보여 주는 시범 동작에 따라 나무막대를 휘둘렀다.
후웅!
놀랍게도 나쁘지 않은 자세.
마법에는 재능이 없던 릴라 여사지만 무기술에는 재능이 있었나 보다.
"와아!"
필리가 박수를 짝짝 쳤다.
작은 거인의 비약이 약효를 다한 지 오래여서, 필리는 다시 원래의 몸 상태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게 또 완전히 도루묵이 된 것은 아니었다.
머슬 메모리가 남아 있어서 그런 건지 힘이 더 세지고 체력도 좋아진 것이다.
아마 살아 있던 펠레리안의 원래 의도대로 카스피안이 비약을 먹었다면.
병약했다던 그의 몸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후우, 후."
한 발로 검을 휘두르고 한 발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릴라 여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세가 무너졌다.
숨을 헉헉대며 힘들어했지만 포기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나서야 나는 휴식시간을 선언했다.
지친 릴라 여사에게 필리가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왜 열심히 하냐니. 그냥 하는 게 프로의 자세다.
하지만 나도 문득 궁금해지기는 했다.
릴라 여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내 상상을 뛰어넘은 이야기였다.
"대장의... 호위무사가, 되고 싶어어."
'호위무사?'
그녀의 발상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멋있잖아아."
멋있지. 호위무사는 멋있다.
그것은 요 직접 보았으니 알 수 있었다.
제국 대사는 그 위치에 걸맞은 호위무사를 데리고 있었다.
하인과 마부들을 제외하고 두 명의 남녀다.
제국 양식의 검은 무복을 입고 있는데, 그것이 보통 멋있는 게 아니었다.
둘은 마치 부부처럼도 보였다.
서로 무척 닮았고, 말수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정 중에 문제가 생기려고 할 때마다 튀어나와서 대사의 마차를 지켰다.
'걔들이 멋있기는 하지.'
그리 인정했던 나는, 순간, 눈썹(없음)을 꿈틀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해야 할까.
호위무사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뭐라고 수군거린다.
아무래도 한 명은 말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수화를 나누기도 했다.
말을 못 하는 쪽이 명백히 우리를 손가락질했다.
그러곤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고 빙빙 돌리는 제스처를 했다.
'지금 저거 우리 보고 도라이라고 하는 거지!'
멋지다고 칭찬해 주고 있었는데 분하다.
그들이 양손에 낀 검은색 장갑을 벗지 않아서 그 손가락질이 더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이다.
필리에게 한마디 하라고 시키려던 참이었다.
하인 중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마스터 오베른."
오베른은 아직 마스터라고 불리기에 한참 남은 사람인데, 하인은 그리 불렀다.
쉬고 있던 오베른이 고개를 돌렸다.
"후작님께서 찾으십니다."
"...무슨 일이지?"
후작은 매일 오베른을 불렀다.
이유는 다양했다.
"다도를 즐기자고 하십니다."
"...알겠다."
함께 차를 마시자는 이유가 가장 많았다.
보통은 오베른 혼자 갔는데, 그가 내게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뭐지 싶어서 올라가니까.
'같이 가 주십쇼.'
'왜?'
'그 후작 조금 불편합니다.'
불편하다고?
그런 얘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시간은 없었다.
나는 오베른과 함께 후작의 마차로 들어갔다.
그리고 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우와, 뭐 이렇게 넓어.'
우리 마차는 총 네 명이 쓰고 있다. 오베른, 올리버, 릴라 여사, 필리.
하지만 이 마차는 무려 대사 사레브 후작 혼자 쓰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는 킹사이즈 침대가 있었고.
바닥과 고정된 소파와 티테이블이 또 있었다.
후작은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도에 취미가 있었는지, 직접 찻물을 우리고 있었다.
왕국의 차와는 또 다른. 녹차 비슷한 차다.
다구 역시 좀 더 제국스러운 화려함이 있었다.
대사가 오베른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대사."
"대사니 뭐니 딱딱하게 부르지 말고, 후작님이라 부르게."
후작님이나 대사나 비슷하게 딱딱하지 않은가 싶은데.
"...예 후작님, 부르신 이유는?"
"우리 사이에 뭐 이유가 있어야 부르나. 그냥 담소나 나누려고 불렀지."
보다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후작은 묘하게 친한 척을 했다.
그는 후르륵 차를 마시곤 말했다.
"아마 황도에 도착하면 황제 폐하를 접견할 기회가 있을 것이야."
"예."
"쉽게 허락되는 기회는 아니지.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분이니."
오베른이 살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제국의 황제는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저 서방의 사막 왕국이나 북방의 노르드인들은 황제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하나, 그 권위마저 무시할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자네에게 오늘 황제 폐하의 앞에서 취해야 할 예법을 알려 주려고 하네."
"아, 감사합니다."
그걸 또 어디서 배울 수 있겠는가. 오베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말로 후작은 제국의 예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황제가 허락하기 전에는 고개를 들지 말아야 한다거나. 물러날 때는 뒷걸음질로 물러나야 한다거나.
왕국의 예법보다 훨씬 더 엄격한 듯했다.
예법 교육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담소를 나누었다.
"자네, 황립 동물원에 대해 아나?"
"예,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저런, 황도까지 유학을 와서 뭘 했나그려."
오베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유학 시절에 돈이 없어서 매일 말라붙은 빵만 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나는 들어서 알았다.
"그 동물원이야말로 황도의 가장 큰 명물이지. 세상의 희귀한 동물이며 마물들은 전부 모아 놨으니까."
마물 사육 기술이 발달한 제국인 만큼, 그 동물원에는 동물 말고 마물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흰 마물과 동물을 모아 둔 곳이 정말 대단해."
뭐라고! 그런 곳이 있는 건가.
정말 가 보고 싶다.
그리고 또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흰 기린과... 아니, 나는 그 흰 와이번을 가장 좋아하지."
"흰 와이번이요."
"그래, 저 마경 '산맥'에서 새끼 때부터 잡아 와 기른 녀석이야."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츄고타.
그 불쌍하고 기괴한 와이번의 새끼가 설마 그 동물원에 있는 것일까.
내 머릿속에 동물원에 대한 것이 가득 찼다.
후작은 웃으며 오베른에게 말했다.
"황도에 도착하면 한번 같이 가 보지."
"예... 영광입니다."
마치 능숙한 데이트 신청 같구만.
잠깐의 다도회는 그렇게 끝났다.
우리는 후작의 마차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광경은.
"사아아악!"
나는 격노할 수밖에 없었다.
필리가 어쩔 줄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고릴라 맘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우리를 보고 대화하던 후작의 호위 둘이 릴라 여사를 핍박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분노해서 달려갔다.
당장 마음을 빼앗아 버릴 기세로.
"사악!"
그리고 뛰쳐 올랐는데.
채앵!
호위무사들의 반응이 보통 기민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무기를 뽑아 들고 나를 겨눴다.
릴라 여사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여기서 다 죽는 거야.
너희 둘도.
그리고 저 뚱뚱한 후작도 전부.
내 비늘을 검게 물들이고 벼락을 불러내려던 순간.
"아니야아!"
릴라 여사가 나를 막았다.
곤두섰던 비늘이 가라앉았다.
"나를, 도와주려고 하던 거야아 ...."
무슨 말이야 그게!
지금 릴라 여사의 몸에는 밧줄 같은 것이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런데 도와주려고 하는 거라고?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밧줄은 무언가를 고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밧줄이 고정하고 있는 것은 나무막대.
그 생김새가 조악해서 곧바로 무엇인지 몰랐는데.
"임시 의수를 달아 준대애."
임시 의수라고?
하긴, 후크 선장님의 갈고리 팔도 의수라면 의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무막대 몇 개를 겹친 것은 의수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근데 너희들 그냥 무사 아니야? 너희들이 어떻게 의수를 달아.
남자 무사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손만 휘적이는데, 아무래도 말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저는 다나고, 이 친구는 라한이라고 합니다."
그리 말한 것은 여자 무사였다.
"라한."
남자 무사에게 뭐라고 수화를 하더니.
남자 무사는 오른손에 낀 긴 가죽장갑을 뺐다.
'어라.'
장갑 안에 있던 것은 부드러운 살갗 대신, 금속으로 만들어진 의수였다.
"라한도 의수를 사용해서요."
그래?
178. 가운 시
라한과 다나.
확실히 제국의 작명법은 왕국의 작명이랑 다르단 말이지.
두 호위무사는 처음부터 조금 느낌이 달랐다.
엄밀히 말하면 사레브 후작의 호위는 둘보다 훨씬 많다.
마부도 그렇고, 하인도 그렇고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사시가 되면 그들은 후작을 호위하기 위해 무기를 쓰는 것도 주저하지 않으리라.
실제로, 지금 우리의 수발을 드는 하인들도 제대로 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베른에게 암살자가 찾아왔을 때 그를 제압한 자가 지금 마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호위무사'는 둘이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잡일도 하지 않았으며, 명백히 구분되는 검은 무복을 입고 있다.
아마 솜씨도 뛰어나지 않을까.
당연히 영웅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어지간한 기사보다 강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느낌이 왔다.
'그거 뭐야?'
나는 종이에 적어서 그리 물었다.
라한이라는 남자가 입을 살짝 벌리고 감탄했다.
하긴, 글을 쓸 줄 아는 뱀을 어디서 보기나 했겠는가.
라한의 무기는 신기하게 생겼다.
허리춤에 고정된 벨트에 사슬이 달려 있었고, 그 끝에는 날붙이가 달려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잡고 휘두를 만한 손잡이가 안 보인다.
"사슬 낫의 일종입니다."
나는 수화를 알아듣지 못하니, 옆에 있는 다나가 대신 말해 주었다.
그들은 연결의 왕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서로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사슬 낫, 저게 사슬 낫이구나.'
"평범한 사슬 낫은 아닙니다만."
'혹시 진짜 이름이 제니는 아니지?'
라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갑자기 생각나서.
"종종 사슬과 날 부분에 독을 발라 두기도 합니다."
'의수라서 쓸 수 있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의수의 활용 방안은 무궁무진하니까요."
라한이 차고 있는 의수는 퀄리티가 정말 좋아 보인다.
예전에 릴라 여사가 찼던 노움제 의수보다 부족하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으음, 의수를 그냥 손의 대용품 정도로 생각했던 날들을 반성하게 된다.
의수에게는 의수만의 활용법이 있는 것을.
"라한의 의수는 제가 정비하고 관리해 주거든요."
다나는 공구며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인지는 모르겠지만 라한의 의수를 뚝 떼 보이기도 했다.
관절부를 마른 수건으로 닦더니 기름칠을 다시 해 준다.
손가락이 세밀하게 움직이는 것까지 확인한 뒤 다시 라한의 팔에 껴 주었다.
그 모습은 프로페셔널한 동시에, 어딘가 다정해 보였다.
혹시....
'둘이 부부야?'
"그렇습니다."
라한이 살짝 웃고, 다나가 그리 말했다.
성격이 확실히 달라 보이는 부부다. 팔이 없는 라한은 미소가 많았고. 칼단발의 다나는 차가워 보인다.
궁합은 잘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나저나 나....
'방금 완전 날카로웠다.'
눈치가 많이 늘지 않았나?
단서도 없이 이 둘이 부부라는 걸 알아차리다니.
"누가 봐도 알잖아요...."
'그런가?'
필리가 그리 핀잔을 주었다.
감히 선생님한테 핀잔을 주다니.
그 둘은 왕자가 나한테 존대를 한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여기가 왕국도 아니고 뭐 상관없겠지.
'그래서 릴라 여사한테 의수를 달아줄 수 있는 거야?'
"제대로 된 의수는 수도에 가야 달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보면 어깨 아래로 팔뚝이 조금 붙어 있어서.... 제가 아는 장인에게 데려가면 적절한 의수를 달 수 있을 겁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임시 의수뿐이네요."
의수 이야기를 했더니 다나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그냥 정비해 주는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도 관심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 다나는 라한의 예비 의수 부품을 가져왔다.
"의수를 조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금 여기서 조악하게나마 만들 수 있는 건 한 팔뿐입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선 질기고 가는 노끈으로 릴라 여사의 목과 어깻죽지, 겨드랑이 부분을 칭칭 감아 의수를 단단히 고정한다.
관절은 팔꿈치 부분을 굽힐 수 있는 딱 하나뿐.
그리고 그 끝에는 손가락 대신 쇠꼬챙이가 달려 있었다.
다나는 뿌듯한 듯 이마의 땀을 훔쳤다.
"완성입니다."
'이건 의수가 아니라 살인 무기잖아.'
꼬챙이로 할 수 있는 것은 찌르기밖에 없지 않나?
"아니야아. 이렇게 쓸 수도 있어어."
릴라 여사가 의수 끝에 달린 꼬챙이로 바나나를 푹 찍어 먹었다.
껍질도 안 벗기고 먹다니. 호쾌하다.
"라한의 의수에도 달려 있는 기능입니다."
라한이 손을 내밀어서 손목을 꺾어 보이니.
철컥!
손목의 관절부에서 칼날이 퓩! 하고 튀어나왔다.
역시 살벌한 녀석들이다.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응?"
"저 뱀... 분 말입니까."
다나가 필리에게 그리 물었다.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인가 보다.
필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답을 주었다.
"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지 않을까."
"선생님이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나는 의외의 말을 했다.
"선생님도 뭘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나도?'
"네, 의수는 어렵더라도 간단한 걸 만들 수는 있습니다."
날 위해 뭘 만들어 주려는 거지?
엄청나게 기대된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나는 정말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었다.
라한이 짐 마차 쪽으로 가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금속 부품들 같았는데, 결합하고 나니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바퀴가 넷, 두 쌍이 달린.
스케이트보드나 롤러스케이트 같은 판때기.
하지만 몸을 걸칠 수 있는 손잡이 같은 게 있는 그것은 분명.
'씽씽이다.'
씽씽이를 마지막으로 타 본 게 언제였던가.
무려 고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때 사촌 동생의 씽씽이를 뺏어 탔었으니까.
"사아아악!"
나는 다나에게 감사를 표하고 얼른 올라타 보았다.
씽씽이라는 게 그냥 올라가 있는다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나가 나를 밀어 주려고 했지만, 사실 필요 없었다.
*「투명한 손lv19를 사용합니다.」
투명한 손으로 내 스스로를 잡고 들거나 움직일 수는 없다.
물건에 올라타서 비행을 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펠레리안식 표현을 따르자면 좌표설정이 뒤엉켜서 시전이 중지되는 게 당연하다나.
하지만 바퀴 달린 물건을 미는 정도는 가능한 것이다.
쐐애애액!
나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무척이나 상쾌했다.
'어, 어어!'
문제는 멈추는 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나와 씽씽이는 그대로 나무에 부딪혔다.
쿠웅!
다행히 씽씽이는 부서지지 않았고, 나도 머리가 깨지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우수수수수-
나뭇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쏟아지는 나뭇잎 너머로, 수풀 속에서 웅크린 것들이 보았다.
"크르르릉-"
늑대 떼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국경의 무인 지대를 건너는데 마물들을 마주치지 않을 리가 없다.
숨어서 습격의 순간을 노리고 있었던 건가. 조용해서 있는지도 몰랐네.
그리고,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늑대가 있었다.
놈과 내 눈이 마주친 순간.
"크허어엉!"
마치 호랑이같이 포효하며, 거대한 늑대가 나를 덮쳤다.
* * *
가장 높은 곳에 앉아서 뱀을 관찰하고 있던 마부가 얼른 소리를 질렀다.
"마물이다! 늑대 떼입니다!"
하인들은 곧바로 대형을 이뤘다.
창을 비롯한 무기들을 들고 대사의 마차를 둘러싼 것이다.
그리고 그 호위 병력 중 가장 강력한 둘, 라한과 다나는....
"라한, 마차를 지켜 줘."
라한이 대사의 마차를 지키는 역할을.
그리고 다나는 마물들을 격퇴하는 역할을 맡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역할 분배였다.
늘 침착한 다나였으나. 지금은 불안이 치밀었다.
이 근처에 사는 늑대 마물은 아마도 다이어 울프. 보통 늑대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포악하다.
뱀이 위험하다.
"오베른 교수님, 뱀 선생님을 구하러 가지요."
"아...."
하지만 오베른은 그리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마법사라면 제 패밀리어를 애지중지하는 게 당연한데.
"예, 뭐, 가지요."
달릴 생각도 없이 터벅터벅 따라오는 것 아닌가.
그때, 거대한 늑대가 뱀을 덮쳤다.
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귀여운 뱀이 으깨졌겠군, 그리 생각했는데.
"어이쿠, 이런."
오베른이 태평한 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늑대가 땅에 머리를 처박고 뱀을 으적으적 씹고 있는데, 대체 마법사라는 사람이....
다나도 기분이 안 좋아진 그 순간이었다.
쑤욱.
늑대의 정수리에서 새빨간 뿔이 휙 솟아올랐다.
다이어 울프에게서 뿔이라니, 특수종인가.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캐앵!"
"깨애애앵!"
늑대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뭔가 하니.
단검 한 자루가 사방을 날아다니며 늑대를 찌르고 베고 있다.
"그냥 놔두죠."
오베른이 태연히 말했다.
"혼자 끝낼 것 같은데."
누가?
거리가 가까워지자 다나도 눈치챘다.
우두머리 늑대의 미간 사이에서 튀어나온 것은 뿔이 아니라 검 한 자루였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그리고 그 검을 움직이는 것은 분명 뱀이었다.
픽, 쓰러진 우두머리에게서 검을 회수한 뱀이 빠르게 기기 시작했으니까.
그렇다. 뱀은 분명 검술을 쓰고 있었다.
염동마법으로 늑대들을 사냥하는 것이다.
열 마리 가깝게 숨어 있던 늑대들의 절반이 순식간에 죽었다.
깨갱대며 도망치던 절반 중 또 세 마리가 죽었다.
겨우 두 마리 정도가 허겁지겁 도망에 성공했을 뿐이다.
"...대단하시군요."
다나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패밀리어를 이렇게 잘 다루시는 마법사는 처음 봤습니다."
"저요? 아, 아니, 예, 감사합니다."
오베른이 큼큼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이상함을 다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늑대들을 다 해치운 뱀이 다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석 꺼내는 것 좀 도와줄래?'
다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잠시만요."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피가 잔뜩 묻어 있는 뱀의 머리를 닦아 주었다.
뱀은 기분이 좋은 듯 가만히 있었다.
* * *
에이 시시해.
늑대가 나타난 뒤로 마물들은 덤벼들지 않았다.
아마도 살아서 도망간 두 늑대가 내 무서움을 알린 것 아닐까.
다나, 라한과도 어느 정도 친해진 것 같았다.
두 무사는 결코 사회성이 좋은 타입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아마도 내가 사람이 아니라 뱀이기 때문에 서로 편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잠시 마차를 멈추고 쉬고 있었다.
"음, 드디어 도착했구만."
대사가 오랜만에 마차에서 나왔다.
저 거대한 마차 한 대를 혼자 사용하고 있는 만큼, 대사는 아주 산뜻한 얼굴이었다.
저번에 보니까 대사의 마차에서는 뜨거운 물도 잘 나오는 것 같으니.
산 아래로 도시가 보였다.
"저 작은 도시의 이름은 가운 시라고 하네."
가운이라는 이름의 도시구나.
당연히 황도에 도착한 것은 아니고, 그냥 물자를 보급할 겸 들른 도시이다.
그래도 금방 워프게이트를 통해 황도까지 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가서 행정관부터 만날 걸세. 내가 제국 대사인 동시에 감찰관인 것을 말해 주었지?"
제국의 도시는 기본적으로 황제로부터 임명받은 행정관이 다스리는 경우가 많았다.
봉토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도시를 지닌 제후는 그 수가 몹시 적었다.
그렇기에 마간 사레브 후작의 권위가 그리 높은 것이었다.
"아마 융숭히 대접할 걸세. 오베른 자네는 즐기기나 하라고."
"예에...."
뭘 즐기라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운 시의 관청에 도착하자. 그 대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아, 사레브 후작님. 영명하신 후작님의 존안을 뵙게 되다니. 영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지엄한 칙명을 받고 가운의 행정관이 된 보리단이라고 합니다."
"보르단 행정관! 반갑네, 반가워. 이쪽은 오베른 교수이고, 이쪽이 필리 왕자."
"보리단입니다만.... 여독이 많이 쌓이셨을 텐데. 제가 확실히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명색이 감찰관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예에, 제가 얼마나 청렴하고 결백한지 잘 보여 드리겠습니다."
감찰관이라는 후작에게 행정관은 쓸개라도 내줄 것처럼 굴었다.
"배가 고프군."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히 하겠습니다!"
배가 고프다는 후작의 말에 행정관은 곧바로 연회를 준비했다.
드디어 따끈한 밥과 맛 좋은 인간들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군.
나도 그리 기대했다.
다만, 연회가 시작되자.
필리와 내 얼굴은 희게 질렸다.
원래 내 얼굴은 희긴 하다만.
179. 본보기
"새끼 돼지를 통째로 구웠습니다. 애저구이는 이곳 동부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행정관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관료'이다.
귀족이 아니며 황실로부터 임명받은 임명직이라고 할 수 있다.
황실의 경우, 한 행정관이 도시를 다스릴 수 있는 기간은 최대 5년이라고 한다.
5년이 끝나면 다른 지역으로 가거나 다른 일을 맡아야 한다.
오베른이 내게 설명해 주길 그것이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한다.
'땅'과 '백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즉 힘을 가진다는 뜻이다.
자신의 영지 내에서 봉토 귀족은 사실상 작은 왕이나 다름없게 된다.
실제로 궁정백이나 대귀족 같은 경우는, 솔리온의 국왕조차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영주를 행정관으로 바꾸면서 황제는 자신의 힘을 더욱 강고히 했다.
'똑똑한데.'
나는 그 설명을 듣고 감탄했다.
예전에 역사 수업에서 비슷한 내용을 본 것 같은데.
-다만 부작용 또한 있지.
펠레리안이 그리 말했다.
-겨우 5년 임기를 채우고 떠날 행정관에게 책임감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귀족 영주가 꼭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지가 귀족의 소유물이므로, 영주는 늘 적절한 '정도'를 찾는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멍청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영지를 부강하게 하고 자신의 힘을 강하게 하려는 욕구가 그들에게는 존재한다.
하지만 행정관들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부를 축재하고 떠날 것이나 생각하겠지.
마치 전형적인 조선 시대의 탐관오리 같지 않은가.
상급 마법 매관매직(Buying Jobs magic)을 발휘한 뒤, 그 코스트를 보충하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낼 사또처럼.
이곳 제국도 그렇게 부패가 성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작용은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 감찰관이 있는 것이다.
마간 사레브 후작 같은 고위귀족, 혹은 고위관료를 감찰관으로서 도시들에 돌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후작은 행정관과 으허허허 웃으면서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
"이거 드십시오, 저희 도시의 명물인 레몬으로 만든 술입니다."
"상큼하구먼."
후작은 얼굴이 살짝 벌겋게 달아올라서 껄껄 웃어 댔다.
그 모습이 감찰관답지 않고 한심해 보였는데, 그리 얘기하니까 펠레리안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리 물렁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글쎄.
술이 몇 순배 돌고 밤이 깊어졌다.
필리는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오베른은 간만에 고급술을 맛보는 게 기꺼운지 술만 홀짝댔다.
나는 그냥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들을 계속 먹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자 행정관의 얼굴에 음흉한 표정이 돌기 시작했다.
"슬슬 아이들을 부를까요? 관청 안에 별실이 있습니다만."
"아이들?"
"예, 가운 시의 여자는 아름답고 피부가 고운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여서 후작님의 눈에 찰지는 모르겠지만."
뭐라고!
하기사, 이런 세상에서 이런 방식의 접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후작을 보는 행정관의 눈알이 데굴거렸다. 눈치를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후작은 그 제안을 기다렸다는 듯 덥석 받았다.
"으허허, 좋지, 자네랑 둘만 마시면 술맛이 날 리 있나."
그러더니 갑자기 나와 오베른이 있는 곳으로 비틀비틀 다가오는 것이다.
"오베른! 자네도 같이 가지. 가운의 처자들이 이쁘다지 않나."
"아...."
술 냄새가 훅 밀려온다.
오베른은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지 않았다.
"저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죄송합니다."
"에잉, 젊은이가 그리 체력이 약해서야. 이래서 마법사들은... 평소에 운동 좀 하게나."
"하하, 예, 그러겠습니다."
운동은 자기나 할 것이지. 배가 남산만큼 나와 가지고.
후작은 다시 뒤뚱뒤뚱 행정관을 향해 갔다.
행정관은 얼른 그를 부축하듯 팔짱을 꼈다.
"하하, 가장 아름다운 아이들을 부르겠습니다."
"아니, 뭐 예쁘면 좋긴 하지만. 그래... 성격이 담대하고. 피를 봐도 무서워하지 않는... 흐흐, 얌전한 애들로 부르게."
"...예에. 헤헤."
후작의 섬뜩한 취향에 행정관도 조금 당황했지만.
곧 간신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
그때, 후작이 갑자기 이쪽을 돌아봤다.
"먼저 가지 말고, 조금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나아."
우리보고 그리 말한다.
저 자식. 이래라 저래라야. 마음에 들지 않는군.
뭐 우리가 어딜 가겠는가. 마음에 안 드는 후작과 행정관이 사라지니까 오히려 좋다.
이실이도 꺼내서 음식 좀 줘야겠다.
릴라 여사를 구할 때 너무 무리를 해서일까. 이실이의 덩치는 아주 작아졌다.
본체라고 할 수 있는 떡잎 부분은 무사하지만 길이가 훨씬 줄었다.
영양 보충 좀 시켜야지 하고 스프를 앞에 가져다주니, 이실이는 덩굴 뿌리를 뻗쳐서 스프를 먹었다.
'아이고 잘 먹는다.'
식물에게 나트륨은 쥐약이겠지만.
이실이는 평범한 식물이 아니라 키메라니까 괜찮겠지 뭐.
아, 생각해 보니까 라한하고 다나는 이실이를 처음 봤겠구나. 소개해 줘야지.
나는 라한과 다나가 마음에 들었다.
말을 못 해서 수화를 한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서로 대화를 할 때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담소를 나눌 수도 있었다.
하여튼, 그래서 라한과 다나를 찾으려고 하니.
'엥, 없어졌네?'
분명히 조금 전까지 테이블 반대편에 둘이 있었다.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로 사라진 걸까.
'라한하고 다나 못 봤어?'
필리한테 그리 물어봤다.
"어, 못 봤는데요. 왜요?"
'그냥, 안 보이길래.'
"화장실이라도 갔겠죠. 뭐."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같이 화장실을 가다니.
아니면 둘이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으러 나갔나. 부러운걸.
참고로 필리나 오베른은 라한, 다나 부부를 별로 안 좋아했다.
왠지 께름칙하고 음침하다나.
지가 제일 음흉하면서 말이다.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좋지는 않지.
'아닌데, 좋은데요.'
그런데 참.
다나, 라한.
하필 내가 펠레리안에게 그렇게 반박하자마자 그러면, 내가 면이 안 서잖아.
둘은 비명 소리와 함께 복귀했다.
"으아아악!"
"꺄악!"
하인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
연회장으로 올라오는 계단 아래에서 났다.
그리고 비릿한 쇠 냄새.
다나와 라한이 등장하기도 전에, 나는 피 냄새부터 맡았다.
그리고 라한과 다나가 나타났다.
"으아아아악!"
이번에 비명을 지른 것은 다름 아닌 필리였다.
필리는 자신의 양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나는 손이 없어서 눈을 가리지 못했다.
"지, 지금 뭐 하는 것이오!"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를 하인이 둘을 막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돌아온 둘은 연회장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손에 두 개씩 들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머리통이었다.
공포, 혹은 고통에 일그러진 머리통의 머리카락을 잡고, 마치 장바구니처럼 잡고 나타난 것이다.
"병사, 병사들을 불러! 커헉!"
다나가 소리치는 하인의 복부를 걷어찼다.
하인은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픽 기절했다.
둘은 우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조금 전 후작과 행정관이 들어간 별실이다.
그 앞에는 행정관의 부하로 보이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무, 물러나."
그는 칼을 뽑아서 라한에게 겨눴다.
칼끝이 덜덜 떨린다.
라한은 사슬낫을 뽑지도 않고, 의수를 휘두르지도, 윽박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퀭한 눈으로 병사를 노려봤을 뿐.
한참 조용히 노려보고 있으니, 놀랍게도 병사가 칼을 먼저 내렸다.
그리고 눈을 깔고 슬그머니 한 발자국 물러난다.
'살기로군. 음음.'
살기를 뿜어내서 병사를 제압한 게 분명하다.
라한과 다나가 들어가자마자 병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으니까.
그리고, 곧 별실 내부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으허어억!"
먼저 튀어나온 것은, 언제 들어갔는지도 모를 여자들이었다.
거의 헐벗다시피 한 복장이 보통 남사스러운 게 아니었다.
"사악!"(눈 가려!)
얼른 미성년자인 필리의 눈을 꼬리로 쳤다.
필리가 우아악, 하며 눈두덩이를 감싸 쥐고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곧, 후작과 행정관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들어갈 때는 행정관이 후작을 부축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반대였다.
후작이 행정관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왔다.
다리가 풀린 행정관은 도무지 서지를 못했는데, 후작의 근력이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종이 인형처럼 비실거리며 끌려온다.
"으하하하, 내가 부탁했잖아. 피를 봐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아이들을 데려오라고."
"으, 으흐으."
"귀 터지는 줄 알았네. 뭐야, 자네 오줌 쌌나?"
"죄, 죄송합니다아."
"부리나케 장부를 조작하고 숨기려고 하면 숨겨질 줄 알았나. 술에 약까지 타?"
"그, 그저 잠을 잘 잘 수 있는... 헙."
후작이 행정관의 손목을 놓자 행정관은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라한, 다나."
후작이 신호하자, 라한이 머리통 하나를 던졌다.
"이건 추관의 머리. 열심히 장부를 조작하고 있었다는군."
"으으."
텅!
"이건 누구야, 서좌군. 여자를 데려온 게 서좌라면서?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창기를 데려와 접대를 하나. 황제폐하의 감찰관이 우스워?"
"아닙니다!"
"이거 뭐, 적당히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심하더군. 종사도 있지 라한."
텅!
떨어진 머리통이 데구르르 굴러서 행정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행정관은 정말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감찰관은 종종 지방 관료들에게 '저승사자'와 동의어로 취급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비유가 아니었다.
"적당히 해야지 나도 적당히 받고 떠나지 않겠는가. 다나."
"예, 후작님."
"칙명에 의한 감찰관의 권한에 따라. 즉결 심판이다."
그리고 다나는 그렇게 했다.
천만다행일지 행정관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서걱-!
잘린 그의 머리통이 고통으로 일그러지지는 않았으니까.
"잘 기록해라 라한, 다나. 보고서에 올리기는 해야 할 테니."
후작은 언제 술에 취했냐는 듯 멀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보니 술이 아주 센 편인가 보네.
"자자, 놀랐는가 자네."
후작은 오베른에게 그리 물었다.
"조금 놀랐습니다."
거짓말이다.
조금이 아니라 엄청 놀랐을 것이다. 총장에게 결투장을 받았을 때만큼이나 맥박이 거세게 뛰고 있었으니까.
"가서 우리끼리 술 한잔이나 하지."
"어...."
지금 오베른에게는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끌려가다시피 고개를 끄덕였다.
* * *
후작은 거칠게 데뷔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수족인 라한과 다나를 시켜서 말이다.
라한에게 그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상대에게 죄가 있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게 익숙해서, 그 손끝에 끈적한 피가 스며들어 버렸지만.
라한은 이런 날 늘 울적했다.
하지만 후작의 뜻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그가 후작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오늘 피를 본 게 오히려 앞으로 피 볼 일을 줄여 줄 것이다.
'황제에게 감찰관으로 임명받은 사레브 후작이 가운 시의 행정관을 죽였다.'
그런 소문이 쫙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후작은 본보기를 보인 것이다.
황제의 힘이 전 제국에 미친다는 것을 행정관을 참수함으로써 알렸다.
가운 시를 찾은 것도, 행정관을 죽인 것도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으니.
"아...."
눈을 피해 버리는 필리.
저처럼, 새로운 일행들이 그들을 꺼리게 된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사람의 머리통을 들고 나타난 살수들을 가까이 여기겠는가.
당연히 어렵게 여기고 가까이 두지 않을 터.
사람의 말을 하는 뱀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그런가?
"사아아악!"
뱀이 갑자기 그렇게 쉭쉭대는 것은, 경계하기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뱀이 쓴 글씨를 읽어 보니 아니었다.
'잘난 척하지 마.'
잘난 척? 라한이 언제 잘난 척을 했다고?
라한은 글씨를 적어서 물어봤다.
'제가 어떤 잘난 척을 했습니까?'
'조금 악당같이 군 것 가지고, 필리와 나를 보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잖아.'
그렇긴 했다만, 어떻게 알았지.
'또 나를 두려워하는군, 어쩔 수 없는 숙명이겠지. 하면서.'
'....'
라한은 어째선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짜 악당은 여기 있어. 보여 줄까?'
'네 보여 주십시오.'
뱀은 그리 말하고 어디선가 화분 하나를 가지고 왔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새싹이 심겨 있었다.
다만 평범한 식물은 아닌 것 같다. 살아 있는 동물처럼 이파리를 흔들댔으니까.
'이실이라고 해.'
'이실이요....'
'그래, 이실이는 도시를 세 개 정도 무너뜨렸지. 자세히 말해 주기는 좀 그렇지만.'
장난하나 지금?
농담이라기엔 진지하다. 말이 아니라 글씨로 대화하기에 더....
'그리고 악마 하나도 사냥했지. 도시 세 개는 무너뜨렸지만 드워프 도시 하나를 구했으니까. 앞으로 도시 두 개 정도를 구하기 전까지는 대단한 악당이라고 할 수 있어.'
'그, 그렇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지금 위로하는 건가?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뱀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사앗!"
'악!'
그러자 뱀이 라한의 손을 물었다.
독은 주입하지 않은 것 같지만 따끔했다.
'건방지군.'
'죄송합니다.'
그것이 위로라면 참으로 기묘한 위로였다.
180. 사건의 재구성
후작의 '기강 잡기'는 가운 시 이후로도 이루어졌다.
그는 한 도시에 들어갈 때마다 거하게 접대를 받았다.
어쩔 때는 문제가 없었는지 술 몇 잔만 마시고 떠날 때도 있었고.
언제는 막대한 양의 뇌물을 슥 하고 받아 챙기기도 했다.
가운 시 때처럼 행정관과 그 부하들을 썩둑썩둑 썰어 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가끔은 피를 보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피를 볼 도시와 피를 보지 않을 도시를 어떻게 구별할까.
당연히 내가 그것을 구분할 방법은 없었고, 잠깐 도시를 들렀을 뿐인 후작 역시 한눈에 파악할 수는 없으리라.
미리 받은 정보가 있을 게 분명하다.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어 버린 행정관이 있을 것이고 도시가 있을 것이다.
그 죄가 어지간한 곳이라면 후작은 가볍게 질책만 한다.
가운 시의 이야기를 들은 행정관은 그것만으로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용서를 빌었다.
선을 아슬아슬하게 탄 행정관들에게는 징계를 내린다.
돈을 탈탈 털어 내는 게 대표적이다.
받아 낸 돈이 후작의 주머니로 들어갈지 아니면 제국의 국고로 들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정도 이상 선을 넘은 도시에서는 반드시 피를 본다.
함께 했던 여정이 열흘쯤 되고, 도시 몇 개를 지나면서 나는 재미있는 점을 눈치챘다.
피를 보기 전, 후작은 반드시 라한과 다나를 불렀다.
그러면 라한과 다나는 도시에 들어가기 전에 무기를 손질했다.
그날도 그랬다.
바당제 시에 들어가기 전.
라한과 다나가 조용히 칼을 갈고 있던 것이다.
다나는 자신의 단검들을 손질했고, 라한은 사슬의 기름때를 닦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깜짝 놀래켰다.
"사삿!"
"악 깜짝이야!"
다나가 화들짝 놀랐다.
라한은 더 놀란 것 같은데, 신기하게 놀랄 때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너희들 또 누구 썰려고 하는 거지.'
"썰다뇨, 살벌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 말하면서 다나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참 충성심이 좋네.'
"...."
라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나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일이니까 하는 겁니다."
그래도 정말 후작의 말을 잘 듣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이들의 실력은 아주 탁월한 수준이다. 보면 볼수록 더 그렇다.
후작 같은 대귀족이기에 거느릴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라한이 슬쩍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라한과 다나의 목에는 문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초커를 찬 줄 알고 기괴한 패션 센스라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마법이 깃든 문신이었다.
라한이 수화를 했다.
손가락을 들어서 입 앞에서 검지와 엄지를 여러 번 접었다 핀다.
'후작이 말만 하면.'
그리고 손가락을 한군데 모았다가 입을 맞추고 활짝 벌린다.
'펑, 터집니다.'
알아, 알아.
라한은 나에게 이미 알려 주었다.
다나가 라한을 나무랐지만, 내가 라한과 친해진 걸 어떡하나.
후작은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두 무사의 충성을 얻어냈다.
그것은 폭탄 목걸이의 착용이었다.
후작이 시동어를 외면 라한과 다나의 목이 폭발해서 죽는다.
그런 끔찍한 짓거리를 했다가는 오히려 자다가 슥삭 살해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마간 사레브는 그에 대한 방비도 다 해 두었다.
'후작님이 돌아가셔도 우리는 죽죠.'
세상에, 후작의 숨통이 끊어져도 이들의 문신이 폭발한다는 것이다.
그것참 지독한 안배였다.
'그러면 후작이 자연사하면 어떻게 해? 아니면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다나는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죠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남은 계약 기간은 7년. 그 후에 풀어주겠다는 것이 후작의 약속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근데, 내가 생각해 보니까 후작이 약속을 안 지킬지도 몰라. 어쩌면 그때 되니까 풀어주기 싫다면서 오히려 너희들을 슥삭할지도....'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몹시 날카로운 추론이었다.
라한과 다나가 호들갑을 떨 줄 알았는데.
'맞는 말씀입니다.'
라한은 참 쓴웃음을 잘 짓는다.
그날은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당제 시에서는 결국 피를 볼 일이 생겼다.
다만, 상황이 고약하게 돌아갔다.
* * *
바당제 시의 행정관의 죄는 세금 착복이다.
황실로 올라갈 세금을 탈루한 것이 그 죄였다.
사실 행정관들이 저지르는 크고 작은 죄 중에서 의외로 흔한 죄이다.
그리고 세금 탈루는 그 탈루한 금액이 얼마냐 크냐에 따라서 죄질이 나뉜다.
행정관 잘로의 죄질은, 그런 면에서 판단하자면 사형이었다.
그것도 가족까지 삼족을 멸할 만큼의 금액이었다.
세금을 빼돌리는 것도 적당해야 눈을 감아주는 법이다.
마간 사레브 후작도 그 보고서를 보고 얼마나 황당해했는지.
"이건, 어디다 꿍쳐 놨을 게 분명한데, 회수해야겠어."
바당제 시는 그 특유의 모피사업 덕택에 제법 부유한 도시였다.
하지만 도시에 진입한 순간부터 문제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인심이 야박했다.
들어 보니 세율이 가혹하다는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많은 돈을 빼돌려서 대체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다나와 라한은 그것이 수상해서 더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돈이 어디 갔는지를 알아냈다.
"딸의 치료비에 쓴 것 같습니다."
"뭐? 어떤 치료가 필요했길래 그 많은 돈을 치료비로 써?"
"그게, 치료가 불가능한 병 같습니다."
치료가 불가능한 병은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불치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는 늘 막대한 돈을 날리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라한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나와 그 사이에서 낳았던 어린 딸을.
열병에 걸려서 죽어 버린,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 그 딸을.
'어찌 처리할까요.'
"뭘 어떻게 해."
그런 질문을 한 것도 라한의 기분이 우울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돈을 회수하지 못하면 그 가죽이라도 벗겨 가야지 폐하께 면이 서지 않겠나."
잘로 행정관의 사정이 어쩌든 저쩌든, 후작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다나와 라한도 말없이 복종했다.
잘로 행정관은 처음부터 자신의 위기를 예감했으리라.
술에 마비산을 타고 오히려 이쪽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후작도, 라한과 다나도 술에는 입 한 번 대지 않았다.
감히 황제의 감찰관을 사로잡으려던 병사들은 고기 조각이 되었다.
피와 내장의 냄새가 관청의 중앙복도를 잔뜩 적셨다.
다나가 직접 행정관을 제압했다.
후작이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손가락을 하나 꺾으라는 뜻이었다.
뿌드득.
"끄아아아아아악!"
행정관 잘로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얼굴은 볼이 폭 패여 있었다.
누가 봐도 부유한 도시를 골수까지 뽑아 먹은 탐관오리의 관상은 아니었다.
"잘로, 이 친구야. 우리 안면도 있었잖나. 왜 이렇게 되었어."
"제발... 제발."
"제발은 무슨 제발이야. 국고로 들어가야 할 세금을 그리 꿍치면 어떡하나. 다 쓰진 않았을 것 아닌가. 남은 것이라도 내놔."
"없습니다. 하나도 없어요."
"거짓말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손가락 하나 더.
뿌드득, 하고 또 비명.
하지만 잘로 행정관은 비실해 보이는 것과 달리 제법 기백이 있었다.
다나와 라한은 그를 질질 끌고 관사까지 찾아갔다.
그곳엔 이미 행정관의 가족들이 포박되어 있었다.
"그 병들었다는 딸내미는 어딨어?"
그런데 세상에, 그 딸이 없는 것이다.
언제 숨겨 뒀는지.
"벌써 빼돌렸나. 자네 정말 미친 거야?"
후작이 잘로의 얼굴을 콱 쥐었다.
"자식은 또 낳으면 되는 것이야. 그런데 기껏 병든 딸년을 고치겠다고 인생을 망쳐? 이해가 되지 않는구만."
"...후작님은 자식이 없으십니까?"
"있어. 있으니까 더 모르겠는 거지. 거 참...."
잘로의 나머지 가족들도 다 포박되었다.
"자네의 잘못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되었군. 자네는 고문당한 뒤 처형당할 거고, 그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퉤!"
잘로가 후작에게 침을 뱉었지만 다나가 그것을 손으로 막았다.
후작은 허허 웃었다.
"수색해서 딸내미를 찾아내. 찾아낸 다음에 보는 앞에서 고문하지. 그러면 꿍쳐 둔 돈이 어디 있는지 좀 기억 날 테니."
후작이 자신의 하인들에게 그리 명하고 다나와 라한에게 손짓했다.
'일'은 거의 끝났다.
떠나는 궁정백을 다나와 라한이 뒤따랐다.
그리고 라한이 발을 내디뎠을 때.
오래된 마룻바닥이 작은 비명을 질렀다.
끼이이익-
별다를 것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라한의 발달된 청력으로 그 작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꺅-, 흡.
놀란 비명과, 숨을 참는 소리.
라한은 일순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래에 누가 숨어 있다.
아마도 비밀 공간일 것이다.
그리고 분명, 지금 이 자리에 보이지 않는 행정관의 딸이 숨어 있겠지.
정말 찰나의 순간에 그것을 모두 파악했다.
라한이 고민한 시간 또한 그만큼 짧았다.
아주 잠깐 멈춰 섰을 뿐이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바닥을 뜯어 볼까.'
'그냥 모른 척할까.'
'어차피 결국 발견할 것이다.'
'아니, 들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
'이미 자금 회수는 어려울 거야. 굳이 이 불쌍한 여자애의 수명을 더 줄일 필요가 있을까.'
'무슨 물렁한 생각을. 정신 차려.'
'...하지만.'
머릿속에 폭풍이 휘몰아친다.
프로답게, 라한이 머뭇거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뭐 하나?"
하지만 고개를 들어 보니, 후작이 이미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한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떨림도 주저함도 없었다.
하지만 후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본다.
그 손목에 그려진 문신.
그것은 라한과 다나의 목에 그려진 문신과 연동된 술법이었으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
후작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리고 천천히 라한의 목을 움켜잡았다.
목을 조르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손아귀에 힘을 주지는 않았다.
"심장이 과하게 뛰는군."
표정은 꾸며도 어찌 심장 박동까지 조절할까.
후작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발을 들어 쿵 굴렀더니.
"꺅."
작은 비명 소리가 마룻바닥 아래에서 울렸다.
멍청한 것.
저 아래 숨어 있는 소녀에게 라한은 그런 생각을 품었다.
그리고 눈앞에 별이 떴다.
빠악!
후작이 거침없이 라한을 후려친 것이다.
그리고 쓰러진 라한을 마구 걷어찬다.
"정신을 못 차렸어. 들개를 주워와 길러 줬더니. 어?"
격한 구타.
다나는 얼굴이 희게 질려 가만히 있었고, 하인들은 얼른 마룻바닥을 뜯었다.
구타는 고통스러웠지만, 아마 그것으로 벌은 갈음될 것이다.
뜯긴 마룻바닥에서 한 여자아이가 끄집어 내졌다.
비쩍 마르고 병약해 보이는 아이였다.
비명을 지르며 발악하는 소녀와, 아비의 울부짖음.
라한은 맞으면서도 눈을 질끈 감았다.
* * *
흥얼흥얼.
"사삿~"
오늘은 마차에서 잔다나?
바당제 시 분위기가 보통이 아닐 테니 오히려 마차가 안락할지도 모른다.
나와 오베른, 필리는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관청 안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후작이 돌아온 것은 밤이 으슥해진 다음이었다.
"사악!"
나는 깜짝 놀랐다.
라한의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누구한테 두들겨 맞았는지 멍이 들고 퉁퉁 부어 있다.
나와 눈을 마주치니까 쓸쓸히 미소 지었다.
저러니까 진짜 바보 같군.
"오베른 군."
그때, 후작이 오베른을 불렀다.
"피곤하군, 나와 술 한잔하지 않겠나."
제안이라기보다는 명령 같은 말투.
오베른은 별로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장소가 있을 리 없으니 오베른은 후작의 마차로 들어갔다.
후작의 마차에 있는 것은 차만이 아니었다.
유리 장식장에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브랜디며 위스키가 있었다.
후작은 소파에 털썩 걸터앉더니. 위스키를 잔에 콸콸 따라 한입에 들이켰다.
호쾌하게도 마신다 싶었다.
오베른이 맞은편에 앉으려고 하니, 후작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거기 말고 이쪽에 앉게, 말 크게 하기 힘드니까 말이야."
"아... 예."
오베른이 소파 옆자리에 앉자 후작이 위스키를 그에게도 따라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건배를 제안했다.
챙.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후작은 또 한 번 위스키를 전부 들이켰다.
너무 과음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
오베른도 위스키를 홀짝 마셨다.
확실히 좋은 술인가 보다.
감탄하는 표정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뭔가를 발견했다.
"후작님, 피가...."
"아."
후작의 손등이 까져 있었다.
주먹의 너클 부분인데, 설마 라한을 때린 게 후작이었나.
"기르는 개가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패야지 어쩔 수 있나."
"...."
"후후, 겁먹었나?"
겁먹었겠지.
오베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설마.
"걱정할 것 없네."
후작이 오베른의 손등에 부드럽게 자신의 손을 얹을 줄이야.
오베른의 팔뚝에 소름이 우수수 돋는 게 느껴졌다.
"난 자네가 마음에 들어. 정말이니까."
그리 말하는 후작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
"후작님, 이게 무슨."
오베른이 손을 빼려고 하는데.
꾸욱.
후작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를 부끄럽게 할 셈인가."
미친.
이 자식 미친놈이다.
오베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당연히 무서워서 뛰는 것이다. 나도 공포에 질려 버렸는데.
"눈을 감게."
"싫습니다."
"감아!"
오베른 이 자식은 얼마나 겁이 많은 거야.
정말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후작이 입술을 주욱 내밀었다.
그 끔찍한 입맞춤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내가 도망치려는 순간.
오베른이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외쳤기 때문이다.
'사, 살려 주십쇼!'
나도 더 이상 이런 비극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천뢰령lv2를 사용합니다.」
출력을 조절하면 실내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으니.
치지지지직-
스턴건에 맞은 사람처럼. 후작이 덜덜 경련하다가 픽 쓰러졌다.
콰앙!
그리고 머리를 탁자에 부딪치며 자빠졌다.
"허억, 허억!"
오베른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마구 후작을 밟기 시작했다.
"이 미친 새끼!"
오베른, 진정해!
한참 그러고 나서야 오베른도 정신을 차렸다.
"후우, 얼른 도망치죠.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정신 차리고....'
슬쩍 감전시켰으니 후작은 자기가 어떻게 쓰러졌는지도 모를 것이다.
어떻게 뒷수습을 잘만 하면....
그때였다.
"찍, 찌익."
후작의 품속에서, 새빨간 족제비 같은 놈이 튀어나왔다.
아, 후작이 기르던 마물인데 처음부터 같이 있었던 걸까.
그 족제비는 후작의 얼굴 앞에서 얼쩡댔다.
적어도 자기가 기르는 마물한테는 상냥했던 걸까.
마치 주인을 걱정하는 듯했다.
후작이 완전히 기절한 것을 확인한 놈이 후작의 목을 콱 깨물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 사사삭!"
"허억!"
마물은 후작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고는 잠깐 가만히 있었다.
마치 독이 주입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고 놈은 환기구를 통해 쏙 빠져나가 버렸다.
"어...?"
오베른이 당황해서 후작을 살폈다.
목에 생긴 이빨 자국이 이미 보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어?"
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렸으니.
쩌저정!
그런 천둥 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