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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 140-150

140. VVIP

발라냐르 총장은 확실히 젊어 보인다.

노움답게 키가 작기도 하거니와, 이목구비도 마치 소년의 그것 같다.

하지만 사실 그의 나이는 최소한 100이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이 때문에 쟁쟁한 교수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전부 총장 자신의 실력 때문이었다.

현 왕국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를 꼽자면 단연 둘이다.

총장 발라냐르 본인, 그리고 마탑의 탑주.

놀랍게도 아카데미의 총장이 마탑의 주인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받는 것이다.

발라냐르가 오늘 보여 준 화려한 콤비네이션도, 사실 진짜 실력에 비해서는 장난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총장은 존중받았고.

촌장의 입에서 나온 말 역시 존중받았다.

"지원자가 또 누구 있죠. 더 남아 있나요?"

"오늘 한 명이 더 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났는데 오질 않는군요."

교무처장이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지원자가 올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누군데요?"

"코번트 악셀이라는 자입니다. 제국의 아셔스 연구소에서 일했던 재원인데...."

"모르는 사람이군요."

그러더니 총장은 생각났다는 듯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오베른 군도 아셔스 연구소에서 잠깐 일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서로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느 순간부터 오베른 군이라는 호칭이 되었다.

말에서 느껴지는 호의로 총장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총장이 입을 뗐다.

"나는 오베른 군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학장이 동의했다. 다른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점수가 가장 높기는 했습니다."

"태도가 조금 오만한 듯하지만, 젊은이라면 응당 그런 패기가 있어야겠지요 ...."

사실 그를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인물도 있었다.

특히 신분을 중시하는 이들은 오베른의 가문이 쇠락했음을 얕보았다.

발라냐르가 씨익 웃었다.

"후후, 여러분들이 걱정하는 것도 알아요. 그대들 중에서 천재 소리 듣지 않아 본 자가 어디 있겠어요."

총장은 교수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방금 본 바로, 오베른 교수는 그저 타고난 재능만 번뜩이는 게 아니에요."

"총장께서는 저희가 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신 겁니까."

누군가 그리 물었고,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노쇠한 대마도사 같았어요. 그렇게까지 느껴지더군요."

그런 평가가 나올 줄이야.

"그 통찰력은 젊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거였죠.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어쩌면 적어도 마법을 보는 눈은... 혹은 지식은, 나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찌 그런 말씀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라는 거죠. 사실 그러기는 힘들 테니까. 그만큼 오베른 군이 독특한 종류의 천재라는 뜻 아닐까요?"

총장은 친절하지만 허언을 하지는 않는다.

교수들 사이에서 탄식과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발라냐르 총장은 내심 생각하기를.

'그런 것치고 마법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했지만....'

한쪽이 대단하면 그보다 못한 점도 있는 거겠지.

어찌 되었든, 오베른에 대한 총장의 평가는 파격적이었다.

이곳에 있는 교수들은 다시 한번 오베른 그리모아르에 대한 평가를 상향했다.

갈채하고, 감탄하며....

* * *

*「학자들이 연결 대상에게 경외심을 품었습니다.」

*「'왕족' 특성으로 인해 '위엄'을 얻었습니다.」

아잇 깜짝이야!

호텔 객실로 올라가던 중, 또 한 번 그런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에메랄드 스쿨의 면접관들 앞에서 들은 바로 그 메시지였다.

'빨리 좀 올라가 봐.'

'예 알겠습니다.'

오베른은 긴 다리로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내가 부자 뱀인 덕택에 오베른은 다시 좋은 호텔을 찾아 묵을 수 있게 되었다.

방으로 가서 확인해 봐야지.

'너, 조금 전에 사람들한테 칭찬받았을 때 말야.'

"예...."

'갑자기 뭐 느껴지는 거 없었어? 막 가슴이 웅장해지고. 그런 거.'

"뭐, 가슴이 조금 뛰기는 했는데요. 원래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긴 하지.'

생각해 보니까 원래 누가 칭찬해 주고 하면 가슴이 웅장해졌던 것 같다.

'근데 그런 거 말고. 진짜로 몸에 힘이 넘치거나 한 거.'

"그러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랬다.

그 '위엄'이라는 것이 내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아 참, 모든 사람이 나처럼 친절한 상태 메시지를 듣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 낭비하지 말거라, 그놈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틀림없으니.

'그래요? 그럼 뭔데요?'

펠레리안에게도 위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도 바로 떠오르는 건 없어서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었다.

-제왕의 특성과 비슷하구나.

기억해 낸 것이 있나 보다.

-종종 제왕의 특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있지. 사람 중에도 있고 마물 중에서도 있다. 진짜 왕족으로 태어난 것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쪽도 있었지.

'오오.'

-그런데 어찌 되었든 그런 자들은 무리를 이끌게 되었어. 군왕이 되거나, 장군이 되는 경우도 있고, 불량배 패거리를 꾸리기도 하지. 마물의 경우에는 동종의 마물을 이끌고....

우두머리 마물을 여럿 보기는 했지만, 제왕 특성은 본 적이 없다.

꽤나 희귀한 특성인가 보다.

-그런데 관찰해 본 결과 특별한 점이 관찰되었으니....

'뭔데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충성하는가, 혹은 얼마나 열정적인 지지를 받느냐에 따라 그 개인의 무력마저 달라졌다는 것이다.

펠레리안의 말을 요약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제왕은 그만큼 강해졌다는 얘기였다.

-너 또한 비슷한 경우겠지. 그 위엄이 '왕족'이라는 특성에 기인했다고 하니까.

확실히 그랬다.

'그런데 그 교수들이 저한테 갈채를 보낸 게 아니잖아요.'

-너가 저 인간 놈과 연결되어 있으니, 그 갈채가 너한테도 돌아갔나 보지.

그런 건가.

그렇다면 참으로 절묘하게 상황이 맞아떨어진 게 분명하다.

나는 '리틀 프린스 서펜트'로 진화하면서 '왕족' 특성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작아지기도 했으니, 누가 작은 뱀에게 존경을 보내고 귀히 여기겠는가.

편견과 선입견의 벽을 깨뜨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부하로써 오베른을 골랐으니.

인간들은 겉이 번드르르한 오베른을 천재라고 착각하며 갈채를 보냈다.

그게 내게 이득으로 돌아온 것이다.

'얘로 골라서 다행이다.'

저 우수에 젖은 듯한 눈을 보라.

사실 멍 때리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때,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면 우르오로스는?'

-고블린들을 말하는 거구나.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걔들은 저를 찬양하니까요.'

설마 고블린들이 나를 다 잊어버렸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지금의 너와 그때의 네가 워낙 다르니 말이다. 아니면 정말 슬슬 너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

' ...으음.'

나중에 나나루크를 만나 봐야겠다.

지금은 그것보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있다.

'위엄을 얻었다는 게 뭔지 자세히 알아봐야겠어요.'

-그러거라.

집중하면 내 몸에 쌓여 있는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나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대략, 3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위엄의 확실한 사용처를 알아내기까지는.

'왕족' 특성에서 기원한 것인 만큼, 왕관 스킬들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발상을 떠올렸다.

*「'연결의 왕관lv1'을 일시적으로 강화할 수 있습니다.」

정답이었다.

내가 얻은 위엄을 이용해서 왕관 스킬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극복의 왕관처럼 일시적으로 스킬 레벨을 올려서 쓸 수 있는 건가.'

처음에는 그런가 생각했지만 조금 달랐다.

위엄을 이용해 왕관 스킬의 기본 효과와는 다른, 특별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 같았다.

기어 세컨드를 쓰면 고무고무 피스톨이 고무고무 제트피스톨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아직 내가 얻은 위엄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지배, 극복, 강탈의 왕관에는 사용할 수 없었고, 연결의 왕관에만 사용할 수 있는 양.

'한번 여기에 써 볼까...?'

내 앞에 있는 것은 마력이 담겨 있는 범상찮은 도자기.

──────────────

[알테아드의 제례용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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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지금은 이실이가 심겨 있다. 이실이의 집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특별히 챙겨온 물건이다.

그런데 정신을 집중하고 그 화분을 보고 있으니.

*「위엄을 소모해 '연결의 왕관lv1'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무생물에, 정확히는 마력이 담긴 아티팩트에 '연결'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걸 아티팩트에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 ...아니야, 일단 지금은 참자.'

사용해 보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이실이의 방석 같은 건데, 그거랑 연결되어서 지금 뭘 하겠는가.

곧 사용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위엄을 얼마나 더 수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나는 오베른을 바라봤다.

저 녀석을 좀 더 잘 움직여 봐야겠다. 연기를 워낙 잘하니까 앞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였다.

똑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나는 슬쩍 뒤로 숨고, 오베른이 문을 열었다.

호텔의 직원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리모아르 님께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에는 에메랄드 스쿨의 인장이 붙어 있었다.

당장 면접을 본 게 오늘인데 설마?

오베른은 문을 닫자마자 허겁지겁 편지를 뜯어 봤다.

나도 얼른 가서 구경했다.

「오베른 그리모아르 님께.

저희 에메랄드 스쿨을 찾아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합격이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잘됐네!'

오베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흐흐흑!"

그러곤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래, 마음이 놓이겠지.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야 벌써부터 울면 어떡해.

그리고 이제 계약 파기도 못 해.

넌 영원히 내 부하다 이 말이야.

오늘까지만 놀고 내일 아침 일어나면 바로 은행에 가는 거야. 알겠지?

오베른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솔리온 왕립 은행.

왕립 은행이라고 해도, 결코 왕의 사적 금고 노릇을 하는 곳은 아니었다.

아주 옛날에는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요즘 시대에도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선진적인 국가라면 신뢰 가는 금융 시스템이 필요하다.

왕이 마음대로 은행의 돈을 빼다 쓴다면 누가 은행을 신뢰할까.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그걸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몇 대 전의 선왕이 은행을 독립시킨 것은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다만 그런 발상을 선왕 스스로 떠올린 것은 아니리라.

저 강대한 제국이 이미 그런 시스템을 확립한 이후였으니까.

허나, 황립 제국은행을 보고 따라 할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어진 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 독립성을 지켜온 왕립 은행이기에 은행원들은 자부심이 있었다.

귀족들이 오더라도 똑같은 손님으로 치부한다.

정중하지만 비굴하게 굴지는 않으며, 꼼꼼하고 엄정하게 고객을 대한다.

그들이 고객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예금액과 자산 규모뿐이다.

상대방의 직위나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고객들이 자신의 재산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지는 않으니 사람 보는 눈이 중요하리라.

'음, 얼치기는 아니다.'

신입 은행원 미카엘은 대기석에 앉아 있는 손님을 보고 그리 생각했다.

VIP들은 곧바로 VIP 창구로 들어갈 테니, 아마 일반 고객이거나 첫 방문일 텐데....

'돈 냄새가 나.'

엄청나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긴 금발을 살짝 묶은 사내였는데, 다리를 꼬고 손의 깍지를 끼고 있는 자세가 멋지다.

품위라고 할 만한 게 느껴지기도 했다.

금방 VIP가 되지 않을까.

가서 차라도 한 잔 내어줘서 얼굴도장을 찍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미카엘은 자신이 잘못 본 줄로만 알았다.

'어...?'

장난감인가. 아니 왜 다 큰 사내가 저런 장난감을?

예쁘긴 하지만, 저건 분명 살아 있잖아.

사내의 손목을 타고 움직이는 수정 뱀을 봤을 때 그리 생각했다.

'안 돼, 은행 안에 살아 있는 동물이라니!'

아무리 VIP라고 해도 애완동물을 은행 안으로 데려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오래되고 엄격한 규칙에 따르면 그러했다.

미카엘은 얼른 선배 행원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근육질의 선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냐."

"저쪽이요!"

미카엘은 선배를 쭐래쭐래 따라서 그 사내에게 다가갔다.

선배가 아주 '친절히' 경고하면, 아무리 귀족이라도 겁을 먹으리라.

"손님."

"아, 이제야 왔군."

그런데, 그 손님이 코트 안 주머니에서 황금빛 열쇠를 꺼냈다.

흐물텅한 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 같은 이상한 열쇠였다.

그것을 본 순간.

선배의 허리가 90도로 숙여졌다.

"금고 이용자시군요.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송구합니다."

"괜찮다. 하지만 더 기다리기는 싫군."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미카엘은 멍청히 입을 벌렸다.

저 무서운 선배가 저리 공손히 대하다니.

그녀를 지나치는 선배에게 '동물 안 쫓아내도 되냐'고 물어보니.

"인마, VIP는 쫓아내도 VVIP는 못 쫓아내."

그리 으르렁댈 뿐이었다.

* * *

어쩐지 은행원들이 열쇠를 보여주자마자 친절해졌다.

'금고 대여비가 꽤 비싼가 봐? 저렇게 친절해지는 걸 보니까.'

오베른에게 그리 물었지만.

'저는 지하대여금고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일반인에게는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나 보다.

펠레리안은 대체 얼마나 부자였던 걸까.

지하금고로 가는 길은 보안이 아주 철저했다.

우선, 내려가는 계단이 없다고 한다.

오직 마법적 기계장치로 작동하는 엘리베이터 하나만 존재해서 비상시에 엘리베이터의 줄을 끊으면 금고까지의 길이 봉쇄된다.

물론 우리는 훔치러 온 것이 아니라 소유한 금고의 내용물을 찾아가려고 온 것이니까 상관없다.

안내하는 은행원은 조금 흥분한 눈치였다.

"익명 금고라니, 저는 처음입니다."

원칙적으로 익명으로는 금고를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 같았다.

지하의 복도를 뚜벅뚜벅 걸었다.

벽에는 철문 여러 개가 붙어 있었다. 저 칸 하나하나가 다 금고다.

그리고 복도의 가장 안쪽으로 도착했다.

그곳에는 특히 거대한 철문들이 존재했다.

도착한 곳은 다른 금고들과 달리 이름이 붙어 있지 않고, 006이라는 번호만 붙어 있었다.

"이곳입니다. 금고문을 개방해도 좋겠습니까?"

오베른이 고개를 끄덕이고, 은행원이 황금 열쇠를 부드럽게 열쇠 구멍에 밀어 넣었다.

키릭, 키리리리릭-

특이한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기 시작했다.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하다. 8,000갈레온? 아니면 민스크라든가.

도저히 짐작이 안 되었지만.

-열린다.

끼이이익-

결국, 금고의 문이 열렸다.

141. 유니크 지팡이의 주인

금고가 열리자 해묵은 공기가 밀려 나왔다.

오래된 도서관의 냄새 같기도 한데, 좀 더 무기질적인 차가움이 느껴진다.

내부는 무척 어두웠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를 안내한 직원이 허리춤에 걸고 있었던 램프를 들어 올렸다.

불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으로 작동하는 물건이었다.

하긴, 자칫해서 안에 불이라도 난다면 그런 난리가 없을 것이다.

버튼을 돌리자 불이 켜졌다.

키잉.

작은 조명이 꽤나 밝다.

사방으로 퍼지는 빛에 금고 안에 있던 내용물이 드러났다.

"저희가 기본적으로 배송 서비스를 제공하기는 하는데... 일단 금고의 물건이 많지 않아서요. 한번 보시죠."

그러게나 말이다.

금고의 거대한 크기와 달리, 안에 있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큐브와.

흑단나무 케이스에 담겨 있는....

-지팡이다-!

케이스 안의 내용물이 보였다.

완드라고 하기에는 길고 스태프라고 하기에는 짧은.

'케인'이라는 명칭이 적당해 보이는 지팡이였다.

'오! 마법 지팡이!'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응당 훌륭한 마법 지팡이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검보다 지팡이를 먼저 만들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저게 무슨 지팡이인지 기억나요?'

-안 난다. 제기랄, 기억을 얼마나 날려 버린 거야?

델프람의 던전에 가고 나서야, 펠레리안은 자신의 기억이 생각보다 많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저 지팡이나 옆에 있는 큐브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눈에 힘을 주어 지팡이를 살폈다.

수정 너머에 있는 지팡이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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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아라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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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이름이 붙어 있다.

아라크네라 함은 거미 아닌가.

흑단같이 반짝이는 검은 막대, 그 위 손잡이의 은세공 장식이 거미의 형태다.

내가 거미를 싫어하기는 해도 그 모습이 꽤 대단한 물건 같다.

아니, 틀림없는 대단한 지팡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금고에 꽁꽁 숨겨 둘 이유가 없고.

-저게 내가 카스피안에게 전하려던 물건이라면....

기억이 없어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있나 보다.

-결코 그저 뛰어나기만 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게.

케이스의 자물쇠 부분이 새빨간 부적 같은 걸로 봉인되어 있다.

불길하다 불길해.

"가볍지는 않아 보이는데, 목적지까지 옮겨 드릴까요?"

"괜찮다."

다른 사람 손에 저것을 들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

오베른은 지팡이와 케이스를 마치 바게트 들듯 잡아 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수수께끼의 큐브 역시.

"어라."

그런데 은행원이 갑자기 당황했다.

"저 물건은 목록에 없었는데."

"이 큐브가 말인가?"

"예‥…."

뭐지.

목록에 없는 물건이 끼어 있다니, 수상하기 그지없다.

"그러면 가져갈 수 없다는 건가?"

"아니요, 이 금고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열쇠를 가져온 분께 소유권이 있습니다. 그것이 저희 은행의 규칙입니다."

"그럼 상관없겠군."

오베른이 재킷의 주머니에 큐브를 챙겼다.

저건 호텔에 돌아가서 살펴봐야겠다.

"돌아가겠다."

"예, 그럼 문 다시 닫겠습니다. 금고의 사용 연한은 아직 100년 넘게 남았으니 자유롭게 들러 주십시오."

은행원이 다시 금고의 문을 닫았다.

"이쪽으로...."

지하 금고들을 지나치는 와중.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니 금고에 적혀 있는 이름들을 살폈다.

여러 이름들이 있다.

그러다가 아는 이름이 있어서 펠레리안을 불렀다.

'영감님!'

-음, 카스피안의 금고도 있었군....

저 안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혹시 군터나, 다른 내가 아는 사람의 금고도 있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는 이름을 더 찾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지팡이를 가지고 호텔로 돌아왔다.

좋아, 드디어 유니크 지팡이를 얻었다!

* * *

에메랄드 스쿨, 학기 시작까지 7일 전.

신입생들의 기숙사 입주는 이미 시작되었다.

1학년의 경우 모두 기숙사에 거주해야 했다.

에메랄드 스쿨의 교풍이 엄격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원칙은 있다.

'왕족을 제외하고 아카데미의 학생은 모두 평등하다.'라는 원칙이다.

같은 학년 내에서는 신분고하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간단하지만 실제로 지켜지기는 아주 어려운 원칙.

그러나 확실히 그 규칙은 존재하고 또 지켜져야 한다.

아마엔은 그리 들었다.

다만 어느 정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는 2인 1실.

누구와 같이 살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아주 콧대 높은 귀족가 공자라면 조금 부담스러울 것 같다.

그런 걱정을 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음...."

방 안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안녕 내 이름은 아마엔 리들이야, 앞으로 잘 지내 보자....'어쩌고 하는 자기소개를 준비했건만, 조금 김이 샜다.

잠시 고민한 뒤, 아마엔은 왼쪽 침대를 골랐다.

가방을 풀고 천천히 옷장을 정리했다.

"방 진짜 좋네."

아마엔과 로일, 마차 한 대를 타고 세상을 떠돌던 둘은 단 몇 달 만에 부자가 되었다.

이제는 제법 번듯한 집도 생겼는데, 에메랄드 스쿨의 기숙사가 아마엔의 집보다 더 좋았다.

침대는 거위 깃털을 잔뜩 넣어서 푹신거렸고, 옷장은 척 봐도 명품이다.

바닥에 깔린 러그는 무척이나 부드러워서 얼굴을 비벼 보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엔은 짐을 다 정리한 다음 침대에 걸터앉았다.

룸메이트는 누가 될까.

친절한 아이면 좋을 텐데, 여기서는 친구를 만들 수 있겠지?

평생 떠돌아다닌 아마엔에게 동년배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에메랄드 스쿨에 합격한 뒤로, 기대와 걱정이 함께 찾아왔었다.

지금도 가슴이 조금 두근거린다.

'마법도 많이 배울 수 있을 거야.'

그는 책 한 권으로 마법에 입문했다.

하지만 마법을 제대로 배운 것은 스승님을 만난 뒤였다.

그분은 마물이며 또 뱀이었지만, 진정 마도의 조종이었다.

실제로 스승님에게 배운 것은 에메랄드 스쿨의 입학시험에서도 먹혔다.

'천재'라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마음 같아서는 누구에게 마법을 배웠는지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스승님은 어디 계실까.'

머지않은 날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아마엔으로서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침대에서 발을 달랑거리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기숙사 구경을 나서야겠다.

아마엔은 학생용 로브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1학년 기숙사는 무척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건물이며 정원에서는 오래된 풍취가 느껴졌지만 결코 낡고 더럽지는 않았다.

어쩌면 진짜 품격이라는 것은 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단에 이름 모를 봄꽃들이 피어 있다.

새들이 쪼롱쪼롱 울면서 분수대에 앉아 물을 마셨다.

슬슬 노을이 지고 있어서 햇빛이 새들의 날개 깃털에 예쁘게 부서졌다.

이런 예쁜 정원이 있는 곳에 살게 되다니.

아마엔은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그리 정신을 팔고 다녔으니 누군가와 부딪친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아얏."

"아이코."

아마엔보다 좀 더 덩치가 큰 소년이었다.

코 밑 인중이 거뭇거뭇한 게 2살 정도는 더 많으려나.

아마엔은 얼른 사과부터 했다.

"아, 미안!"

상대 소년은 아마엔을 순식간에 훑어보더니, 역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아냐 나도 한눈을 팔았는걸."

시비를 걸리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오히려 존댓말로 사과를 할 줄이야.

착한 친구인가 보다. 아마엔은 조금 안도했다.

"근데 왜 존댓말을 해? 1학년은 서로 존댓말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혹시 어디 가문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어디 가문이냐고?

아, 그런 건가.

아마엔은 자신의 크림색 금발을 매만졌다.

이 금발도 그렇고, 생긴 것도 그렇고. 아마엔은 종종 귀족가 자제로 오해받곤 했다. 대체 귀족같이 생긴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아 나는 귀족이 아니라...."

"으응?"

자세히 설명할 것도 없었다. 리들 가문의 구성원은 아마엔과 로일 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하자마자 상대의 표정이 와락 구겨질 줄이야.

턱!

그는 아마엔을 거칠게 밀치기까지 했다.

자칫했으면 넘어질 뻔했다.

"무슨 짓이야!"

아마엔이 노려보자, 오히려 소년이 헛웃음을 쳤다.

"천한 놈이 무슨...."

"벡스, 무슨 일이야."

작은 소란에 다른 소년들이 벡스라는 소년 곁으로 몰려왔다.

벡스는 아마엔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 자식이 귀족 흉내를 내잖아. 깜빡 속을 뻔했네."

"뭐어?"

귀족 흉내라니, 언제 그런 적이 있다고.

"난 귀족인 척 한 적 없어."

"이 새끼야, 거짓말하지 마!"

조금 전에는 그리 친절히 굴더니 어떻게 이렇게 태도가 바뀔까.

역시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그리고, 이곳 에메랄드 스쿨에서는 왕족을 제외하고 모두가 평범하다고 배웠어."

"너같이 근본 없는 새끼들만 그러시겠지."

벡스와 그 일행이 눈을 부라렸다.

잘 모르겠지만 다 귀족인가 보다.

덩치도 크고 손가락을 우둑거리는 게 폭력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아마엔은 잠깐 로일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빠가 싸우지 말랬는데.'

하지만, 반대로 스승님은 '누가 까불면 바로 혼내 줘!'라고 하셨더랬다.

아마엔이 왼손을 뒤로 슬쩍 빼고.

벡스가 아마엔의 멱살을 콱 잡으려고 했을 때.

"비겁하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벡스의 앞을 가로막은 소녀가 있었다.

"셋이서 한 사람을 핍박하다니."

아마엔은 조용히 생각했다. '핍박까지는 아니었는데'하고.

"넌 또 누군데...."

"야, 벡스!"

벡스가 짜증을 내려는데 뒤에 있던 소년이 갑자기 말렸다.

그리고 소년이 귓속말을 하자, 벡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마르테인의 여식을 몰라봤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허리를 푹 숙이면서까지 사과했다.

그 태도에 소녀는 오히려 눈을 찌푸렸다.

"여기서는 가문이나 배경이랑 상관없이 평등한 거 몰라?"

"죄송...."

벡스와 그 일당은 당황해서 허겁지겁 물러섰다.

눈앞의 여자애가 제법 신분이 높나 보다. 아마엔은 그리 생각했다.

"난 라니아 마르테인이야. 너무 겁먹지 마, 저런 놈들은 무리 지어 있을 때만 잘난 척할 뿐이니까."

소녀는 자신을 소개하며 그리 말했다.

아마엔은 또박또박 라니아의 말을 정정해 줬다.

"겁 안 먹었어."

"뭐?"

이미 마법은 구축해 뒀다.

아마엔은 손을 들어서 탁, 튕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날아가 벡스의 엉덩이를 퍽 쳤다.

벡스는 한 바퀴 땅을 구르곤 이쪽을 돌아봤다.

그러고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일어서서 다시 도망갔다.

"하하하."

라니아가 꺄르르 웃었다.

설마 이렇게 시원하게 웃을 줄은 몰랐어서, 아마엔도 슬그머니 따라 미소 지었다.

"너 재미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이름이 뭐야?"

"아마엔 리들."

"그렇구나, 난 사실 라니아 그레이림이야. 라니아 마르테인이 되었지만."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와 소년이 인연을 맺었다.

그들이 사실 한 마리의 뱀을 통해 이미 이어져 있었음을, 그때까지는 서로 알지 못했다.

* * *

좋아, 큐브가 뭔지 알아내기는 포기!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바로 메인 디쉬인 지팡이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

[군주의 아라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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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직역해 보자면 왕의 거미라는 거지.

거미는 지팡이고, 그렇다면 이 지팡이의 주인이 원래 왕이라는 걸까.

군주라는 단어에서 내 '왕족' 특성이 연상되어서 마음에 든다.

원래 프린스는 곧 차기 군주인 것 아닌가.

'얼른 봉인을 뜯어 봐.'

"네."

오베른도 탐을 냈다.

그는 제법 패션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것 같은데. 젊고 오만한 천재 교수에게 딱 어울릴 법한 디자인의 지팡이라는 듯하다.

오베른이 조심조심 자물쇠의 봉인지를 뜯어내자.

파스스-

붉은 봉인지가 저절로 불타 사라졌다.

그리고 케이스의 뚜껑이 저절로 텅, 하고 열렸다.

-오오!

느껴진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확실히 보통 물건이 아니다.

-대마도사에게 어울릴 만한 수준의 지팡이다. 이건 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 요정의 양식은 아닌데. 노움이 만든 물건인가.

펠레리안도 감탄할 수준이다.

'영감님이 썼던 것보다 좋아요?'

-으음,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아주 귀한 물건이리라.

"한번 잡아 볼까요?"

'잡아 봐.'

오베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지팡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콱, 잡은 순간.

"크아아아악!"

헉.

오베른의 얼굴이 시뻘게지고, 눈의 흰자가 사라져서 검은자위만 남았다.

"크륵, 크르륵."

송곳니가 조금 뾰족해진 것 같기도.

틀림없이 폭주하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투명한 손으로 오베른의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짜악! 짝!

"으으으, 크아아악!"

하지만 정신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뺨을 치는 대신 꼬리로 오베른의 손목을 후려쳤다.

텅.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오베른은 정신을 차렸다.

"허억, 헉."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울화가 솟구쳤습니다. 꼭... 이 세상을 전부 불태우고 싶은 기분이었어요."

아, 그런 거구나.

-그런 거였군... 역시.

'완전 악취미네요.'

이 지팡이는 '마검'류의 아티팩트였다.

사용자에게 강인한 힘을 주는 대신, 정신공격을 하는 그런 거.

마검을 손에 쥔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랑하는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여 버린 뒤였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군주의 아라크네는 분명 강력한 지팡이다.

하지만 정신을 공격하는 저주가 걸려 있으니, 펠레리안으로서는 계륵이었나 보다.

자기가 미워하던 카스피안에게 준 걸 보니 그만큼 저주를 해제하기 어려웠던 것 같은데....

'저한테 딱 맞는 물건이네요?'

-뭐... 그렇지.

펠레리안이 떨떠름하게 동의했다.

사실, 마검류의 아티팩트야말로 나와 상성이 좋다.

불굴 특전에 의해 정신공격 면역이 아니던가.

나는 오베른의 손목에서 내려와 직접 지팡이 앞으로 갔다.

그리고 과감히 꼬리를 지팡이에 대어 보니.

찌릿!

아니나 다를까 꼬리를 통해서 막강한 마력이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내 머리까지 치밀어올랐으나....

*「특성 '불굴'에 의해 정신공격에 면역입니다.」

그 레퍼토리가 반복될 뿐이었다.

이제는 신선하지도 않구나.

그렇게 내가 새로 얻은 지팡이의 효능을 탐구하려던 순간이었다.

*「연결의 왕관lv1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오.

새로운 루트가 열렸다.

142. 뱀팡이

마물이나 사람에게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눈에 힘을 줘서 물건의 상태창을 볼 수도 있으면 좋을 텐데.

곧바로 연결의 왕관을 사용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 아닌가. 소모할 수 있는 위엄이 무한정인 것도 아닌데.

일단 지팡이가 어떤 효능을 지녔는지를 더 알고 싶었다.

뭐, 정신공격 같은 건 나한테 통하지 않겠지만.

'마법사는 왜 지팡이를 쓰는 거예요?'

-빨리도 물어보는군.

멋지긴 하지만 그저 폼 잡으려고 지팡이를 쓰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지팡이에도 분명 기능이 있을 텐데.

-완드의 삼대 기능이란 게 있지. 첫 번째는 바로 증폭이다.

증폭이라 함은, 내가 10의 마력을 주입했을 때, 12, 15, 혹은 그 이상의 마법 효과를 내는 것이다.

당연히 좋은 품질의 지팡이일수록 마력을 많이 증폭해 준다.

-다만 마력을 많이 증폭할수록 흐름이 거칠어져서 제대로 마법을 구축하기가 어렵다. 좋은 지팡이는 다른 무엇보다 '보조'의 기능이 뛰어나야 해.

'보조요?'

-그래, 마법식의 구축을 돕고, 마력을 정제하는 것을 수월하게 만들어 주는 역량이지. 대체로 이건 지팡이가 길수록 효율이 좋은 경향이 있다.

그럼 10m짜리로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해 봤다.

참고로 마력의 증폭 효과는 얼마나 귀한 재료를 잘 조합해서 썼는지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상이다.

'세 번째는요?'

세 가지라고 해 놓고 두 가지만 말하는 건 뭐야.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거지만... 변질이라는 거다.

증폭과 보조는 단어만 들어도 와닿았는데, 변질은 느낌이 안 왔다.

-마력에도 성질이 있다는 것은 알지.

'예 뭐, 속성공격 같은 거잖아요.'

-그렇지, 그중에서는 4대원소처럼 성질을 변환시키기 쉬운 것들이 있고, 에테르나 혼돈, 빛이며 어둠이며 하는 변환이 쉽지 않은 것들이 있다. 변질은 그것을 쉽게 해 주는 거야.

'오, 그러면 엄청 중요한 기능 아니에요?'

하지만 굳이 설명을 건너뛴 이유가 있었으니.

-우선 그런 종류의 지팡이가 거의 없다는 게 문제다. 사실상 건질 것도 보아야 하는데.... 변질 기능이 있는 지팡이는 하나같이 다른 성능이 형편없거든.

'그래요? 그건 좀 아쉽네.'

-그래, 그러니 신경 쓰지 말아라. 일단 잡고 원소 마법을 한번 써 봐.

그래야겠다.

나는 오베른을 시켜 창문을 열었다.

살살 써 보긴 할 텐데, 혹시 모르니까.

물, 흙, 불은 이곳 내부가 엉망진창이 될 수 있으니까 피하고.

바람 마법을 써 보자.

열린 창문을 통해서 윈드 피스트를 ...!

*「 '중급원소마법:바람lv2를 사용합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초급 원소마법 중 가장 위력이 낮은 것이 바람 마법이었다.

모래와 낙엽을 휘날려서 상대방의 눈을 따갑게 만드는 데에는 아주 효과적이었으나 그뿐이었다.

중급이 되고 나서야 드디어 직접적인 전투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바람의 칼날을 쓸 바엔 투명한 손으로 단검을 날리는 게 더 효과적인 것도 사실.

그렇기에 얕보았던 바람 원소마법이었는데.

쭈욱-

꼬리를 통해 마력이 쭈욱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스태프에 마력을 불어넣으면서, 그것을 손, 아니 꼬리의 연장선처럼 여기라는 게 펠레리안의 설명이었으니까.

옻칠을 했는지 매끈한 흑단 로드를 통해 마력이 흘러가더니.

거미 모양 은장식 부분에서 그 마력이 거대하게 부풀었다.

1.5배 정도로만 마력을 증폭시키면 준수한 지팡이라고 했지.

그런데 이건 최소, 2배.

아니... 3배?

-무슨 증폭 효율이....

내가 어찌할 틈도 없이 마법이 완성되었다.

펠레리안이 알려 준 '바람 주먹' 마법.

공기를 압축시켜서 상대방을 후려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완성된 마법은 '주먹'이라 부르기는 너무 부족한 크기였다.

그래, 바람 공성추 정도로 해야겠다.

결론적으로 원래 그 마법은 열린 창문을 통과해 허공을 향해야 했으나.

콰아아앙!

창문틀과 그 벽 일부까지 박살 내 버리고 말았다.

'와....'

-허, 허허허.

펠레리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뱀, 비로소 원소전투마법에 입문한 것을 환영한다.

불이 아닌 바람으로도 이렇게 직접적인 전투력을 낼 수 있을 줄이야.

제대로 된 장비의 힘이란 역시 대단하구나.

하지만 지팡이가 나보다 크다는 게 문제다.

거대화를 하면 꼬리로 잡고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튼 뱀이 쓰기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었다.

누가 뱀 전용 작은 지팡이를 만들어 주면 좋을 텐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직원이 달려와서 괜찮으시냐, 무슨 일이냐 물었다.

그들은 부서진 창문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미안하군, 마법이 폭주해서 말이지. 배상하겠다."

오베른이 그리 말하면서 직원들을 쫓아냈다.

사실, 배상이고 뭐고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인데.

역시 오베른이 분위기 잡고 말하면 대충 먹히는 것 같다.

방금 마법을 한번 사용해 본 것만으로 지팡이의 성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 '보조'의 기능은 평균 이상. 증폭의 힘은 왕국의 보물급. 너한테 딱 필요한 물건이었군.

'좋아요, 그러면 해 봐도 되겠죠?'

지팡이와 연결되어 볼 차례다.

완전 쫄아 있는 오베른에게 지팡이를 잡고 있으라고 시켰다.

연결의 왕관은 확실하게 접촉되어 있을 때가 사용하기 쉬웠으므로, 나는 지팡이를 휘감고 올라가서 거미 모양 은장식에 몸을 걸쳐 두었다.

정신을 집중해서....

*「위엄을 소모하여 왕관을 일시적으로 강화합니다.」

*「연결의 왕관lv1을 사용합니다.」

*「'군주의 아라크네'와 연결합니다.」

실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위엄만 소모하고 끝인가.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실패하지는 않았다.

*「성공했습니다.」

아.

조금 전, 지팡이를 꼬리로 잡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감각이었다.

정말로 지팡이와 내가 한 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마력의 흐름이 막히지 않고 콸콸 이어졌다.

조금 전에 마력의 증폭률이 3배 정도 됐던 것 같은데, 지금 이 상태에서 마법을 쓰면 그 두 배, 아니 세 배까지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면 정말 바람 공성추가 아니라 바람 탱크도 가능할 것 같다.

'와 이거 끝내주는데.'

'그렇습니까.'

'어.... 오베른? 내 목소리가 들려?'

지팡이를 잡고 있는 오베른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에게 시전했던 연결의 왕관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지팡이를 잡고 있는 동안 나와 대화도 할 수 있었고 스킬도 공유 가능했다.

'아, 지팡이랑 내가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건가.'

무생물에 대한 연결의 왕관은 위엄을 이용한 특수사용? 같은 거라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팡이와 연결되어서 뭐가 좋은가 하니.

지팡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녀석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

[군주의 아라크네]

동쪽 군세의 왕에게 바쳐졌던 지팡이.

지옥의 흑단나무에 칠흑의 유액을 바르고, 악취미적인 은제 거미 장식을 달았다.

바엘은 제물을 받았으며, 지팡이에는 그 힘의 편린이 남아 있다.

──────────────

마치 누군가의 상태창을 보는 것처럼 그런 줄글이 보인다.

그뿐이 아니라 지팡이에 깃들어 있는 힘도.

──────────────

[특성]

[증폭+++], [보조+], [변질: 지옥]

[스킬]

...

──────────────

아니아니 이럴 수가.

보이는 것들을 펠레리안에게 말하니, 그는 경악했다.

-지옥 변질이라니, 그런 힘이 숨어 있었던가.... 동쪽 군세의 왕이라면 바엘이라는 악마를 말하는 것이다. 과연, 그러니까 이런 수준의 저주가 걸려 있던 거군.

지팡이는 스펙이 아주 좋은 대신, 보통 사람은 쓸 수 없도록 치명적인 저주가 걸려 있었다.

어쩐지 악마들과 자꾸 엮이는 기분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팡이에는 내재된 스킬도 있는 것 같다.

──────────────

[스킬]

[지옥마법]: 지옥불lv1, 타락lv1

[상태]

[저주: 광기]

──────────────

이실이가 가지고 있던 지옥불 스킬이 있었다.

'지옥 마법'이라. 이것은 특성에 있는 마력 변질과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

보통이라면 쓸 수 없는 지옥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걸까.

연결의 왕관으로는 스킬을 공유할 수 있으니, 나도 지옥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은 내가 기대하는 것 이상이었다.

*「연결된 아티팩트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흡수한다고? 잠깐 빌려 쓸 수 있는 게 아닌 건가.

나도 이실이처럼 지옥불을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강탈의 왕관을 쓸 때랑 비슷한 감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츠츠츠츠-!

지팡이가 반항하기 시작했다.

오베른이 창백하게 질려서 물러날 정도로 어두운 마력을 뿜어냈으니까.

-이게 변질된 마력이다.

지팡이의 스킬을 빼앗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하루 이틀 만에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렇게 독한 마력을 뿜어내서야 조금 곤란해지는데.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는데, 화분에 심겨 있던 이실이가 내게 다가왔다.

정확히는, 지팡이를 기어올라 내 위로 덩굴을 옭아맸다.

'오오!'

지팡이가 뿜어내는 마력을 이실이가 흡수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지옥불을 쉽게 쓰던 이실이다. 지팡이의 마력쯤은 간식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호, 원래보다 훨씬 멋진 모습이구나.

'그래요?'

펠레리안이 그리 칭찬했다.

원래도 멋진 지팡이였다.

그런데 그 머리 부분을 수정으로 만든 뱀 장식과 세계수의 덩굴이 휘감고 있으니.

이제는 유니크 정도가 아니라 영락없이 레전더리 아이템이다.

-그래, 들고 있는 놈이 훤칠해서 그럴 듯해 보인다.

'....'

내가 멋진 게 아니라는 거지.

...음, 잠깐.

그때, 머릿속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오베른, 나 좋은 생각이 났어.'

* * *

"수강신청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라니아가 이마를 감싸 쥐며 말했다.

옆에 있던 아마엔이 빙긋 웃었다.

조금 차가웠던 첫인상과 달리, 라니아는 그녀의 나잇대에 걸맞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별것 아닌 것에도 꺄르륵 잘 웃고, 종종 사람들의 눈치를 과하게 보며, 어떨 때는 남들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런 성격 말이다.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는 아마엔과는 조금 다르다.

"그래도 거의 비슷하게 짤 수 있었네."

"1학년은 공통과목이 많으니까 그렇지 뭐."

에메랄드 교수의 총장은 마도사고, 교수진도 마법사들이 많다.

물론 에메랄드 스쿨이 마법사만 양성하는 곳은 아니다.

학자들 중에 마법사가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

다양한 교양, 학문, 심지어는 체력 훈련까지 있으며 모든 학생이 그 수업을 들어야 한다.

아마엔과 라니아가 듣게 된 '4대원소의 탐구' 역시 공통수업이다.

마법사의 길을 걷지 않더라도 원소마법은 배울 만한 것이었다.

불, 물, 흙, 바람. 세상을 이루는 네 가지 원소.

원소마법은 마땅히 마력의 변질 또한 다룰 것이고, 때문에 마도가 아니라 무도를 걷는 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렇기에 라니아는 수업을 열심히 들을 각오였다.

라니아와 아마엔은 강의실로 들어갔다.

계단식으로 경사가 진 강의실이었는데, 마치 오페라를 하는 극장과 같이 생겼다.

맨 앞자리는 부담스럽고, 맨 뒷자리는 조금 아쉬운 법이니.

라니아와 아마엔은 중앙부근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옆자리에서 짝꿍으로 수업을 듣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서로를 친구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얘, 라니아."

그때,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안경을 쓴 소녀가 라니아의 옆쪽에 앉았다.

그녀는 수첩과 펜을 들고 있었다.

"네미."

네미 라이터스, 라니아의 룸메이트였다.

워낙 활달한 데다 발이 넓어서 이미 다른 친구들이 많은 소녀였다.

아무리 교칙이 그렇다고 해도, 후작가의 여식인 라니아에게 바로 말을 놓은 것만 봐도 그녀의 성격이 짐작된다.

"나 옆에 앉아도 돼?"

"물론이지."

네미는 넉살 좋게도 아마엔과 인사를 나눴다.

"아마엔 리들이지? 나 알아?"

"음...."

"얘는 섭섭하게. 우리 아버지가 너네 아버지 기사 엄청 잘 써 줬잖아."

"아, 바우멧 기자님."

네미 라이터스는 유명 가십 기자 바우멧 라이터스의 친딸이었다.

아버지의 명성은 사실 9할이 악명이었는데, 네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아버지를 존경하여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니.

그녀가 들고 다니는 두꺼운 수첩에는 잡다한 정보며 가십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혹시 남자 기숙사동에서 일 안 났니?"

"일이라니?"

"이번에 또 왕족이 입학하는 거 말야."

"아...."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3왕자가 이번에 우리랑 같이 신입생으로 입학하잖아!"

'왕족을 제외하고 에메랄드 스쿨의 학생은 모두 평등하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왕족은 평등하지 않고 더 존귀하다는 뜻이다.

삼왕자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아마엔은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사실 나는 왕자 저하 건보다 지금이 더 기대돼."

"수업이?"

"응, 그 오베른 그리모아르가 교수로 왔잖아."

4대원소의 탐구 수업을 맡은 교수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교수가 그리 대단한가.

라니아도, 아마엔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니까.

"하아, 이건 진짜 미치겠네."

그런데 네미 라이터스는 아마엔과 라니아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우리 아빠 기사 안 읽어 봤구나. 제국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천재 교수잖아."

"아...그래?"

"아마엔 너는 마법사 지망생 아니야? 그런데 그런 천재 마법사를 모르다니."

꼭 알아야 하나? 아마엔은 그리 생각했지만 네미의 기세에 눌려 말하지 못했다.

듣자 하니, 그녀의 아버지 바우멧 라이터스가 오베른 교수의 기사들을 몇 개나 썼다고 한다.

네미가 신입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퍼뜨리면서 교수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렸으니. 그녀에게 이미 기자의 자질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또 얼마나 대단하냐면... 하긴, 그건 보면 알 거야."

네미는 씨익 웃고 앉았다.

잠시 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다.

학생들도 제자리에 앉아서 수업의 시작을 기다렸다.

아직 교수는 오지 않았는데, 학생들은 모두 그 문만 바라봤다.

신기하게도 떠드는 사람이 없었다.

잡담하는 대신, 모두 교수가 들어올 문만 보고 있었으니.

묘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였다.

"뭔가...."

"쉿!"

라니아가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네미가 막았다.

그리고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교수가 들어왔다.

오베른 그리모아르.

금발의 젊은 천재 마도사.

품격 있고 아름다운 외모.

들고 있는 지팡이마저 고아하고 예술적이다.

"하아, 역시 엄청 잘생겼어."

네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라니아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라니아가 슬쩍 아마엔을 돌아봤다.

그런데 아마엔은 창백하게 질려서 입까지 살짝 벌리고 있었다.

얘는 남자애면서 뭐 이렇게까지 감탄하나 싶었는데.

"스, 스..."

아마엔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의 시선은 오베른이 아니라, 그 지팡이에 꽂혀 있었다.

수정 왕관을 쓴, 작은 뱀이 지팡이에 붙어 있었으니.

"...스승님?"

설마 이렇게 재회하는 건가.

143. 핵꿀밤

스승님이 왜 여기에?

마치 크리스탈 같은 비늘, 그리고 머리에 돋아난 작은 왕관.

그런 뱀이 세상에 둘 이상 있을까.

"네미 라이터스."

"네에."

아마엔이 뱀 선생님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있는 곳이 이상하다.

처음 보는 교수가 잡고 있는 지팡이, 그 위에 마치 수정장식처럼 휘감겨 있는 것이다.

"막스 메이라."

"네!"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다.

아니,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수정 세공품인가.

그런 것 같긴 하다. 스승님이 대체 왜 남의 지팡이에 장식품처럼 매달려 있다는 말인가.

"아마엔 리들."

그래, 그게 맞겠지.

지팡이에 동물 장식을 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드래곤이나 독수리, 심지어는 풍뎅이 같은 것을 조각해 다는 사람도 있다.

저 교수의 취향이 뱀인 거겠지. 안목이 나쁘지는 않네.

"아마엔 리들."

그때 라니아가 아마엔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앗, 네!"

"앞으로 출석은 단 한 번만 부른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학생들이 웃으면서 아마엔을 쳐다봤다.

아마엔은 조금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었어?"

라니아가 속삭였다.

"너도 네미처럼 저 교수의 팬이 되어 버릴 것 같아?"

"아니야, 무슨...."

"마법 천재라잖아. 너도 마도사가 되고 싶다며."

"그냥... 저 뱀, 아니 지팡이가 특이해서."

"뱀?"

라니아도 오베른 교수의 지팡이를 보았다.

"어떤... 헛."

그녀 역시 화들짝 놀랐다.

"아..., 예쁜, 예쁜 지팡이네...."

라니아의 반응은 분명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당황한 아마엔은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둘은 동시에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오베른 그리모아르 교수는 그리 친근한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잡담으로 분위기를 푸는 대신 곧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뱀이 달려 있는 지팡이를 살짝 들더니.

"불."

불덩이가 만들어졌다.

"물."

그리고 그 옆에 물덩이.

"흙, 그리고 바람."

흙의 구체, 공기가 압축된 구체.

네 개의 원소를 상징하는 구체는 흩어지거나 움직이지 않고 허공에 그저 존재했다.

계속 뱀만 바라보던 아마엔의 시선도 그 순간만큼은 오베른의 마법에게 빼앗겼다.

'...대단해.'

비범함이라는 것은 가장 단순한 것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불을 붙이고 바람을 피워 내는 것은 쉽다.

하지만 저렇게 안정적으로 원소의 구체를 만들어 허공에 정지시켜 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베른은 네 개의 마법을 유지한 상태로 말까지 시작했다.

"세상을 이루는 네 가지 원소를 안다는 것은."

그리고 그 구체가 한군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물과, 불, 흙, 바람.

그것은 완전히 섞이지 않은 채 소용돌이쳤다.

"곧 이 세상 전부를 알게 되는 것과 다름없겠지."

오베른 교수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넓은 강의실을 홀로 압도했다.

"수강 취소 기한은 이 주 뒤다. 따라오지 못할 것 같거든 그 전까지 마음을 정하도록."

따라오지 못하겠거든 떠나라는 광오한 한마디.

처음 부임하는 교수로서는 너무 오만하지 않나 싶지만.

오히려 학생들에게는 선망의 눈빛이 깃들었다.

수업 시간은 1시간 40분.

다른 교수와는 달리, 오베른은 중간에 쉬는 시간 한 번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집중력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목소리만 좋은 게 아니라 말도 잘했다.

강의 시작 때 빼고는 대단한 마법을 보여 주거나 하지 않았지만, 강의력은 충분했다.

1시간 40분이 지난 시점, 교수는 정말 칼같이 수업을 끝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그럼."

그리 무정하게 강의를 끝내는 것도 어찌 그리 카리스마 있는지.

네미를 비롯한 몇몇 여학생, 그리고 소수의 남학생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감탄했다.

아마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잠깐만."

라니아에게 그리 말하고 강의실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떠나는 오베른을 붙잡았다.

"교, 교수님."

가까이서 보니 오베른의 키는 정말 컸다.

"무슨 일이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확실히 위압감이 있었다.

주눅이 든 아마엔은, 준비한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지팡이 보여 주십쇼 했다가는 회초리를 맞아도 이상할 게 없다.

"저, 저어, 아, 질문 좀 드리고 싶어서요."

손에 들고 있는 수첩을 내밀며 그리 말했다.

"뭐가 궁금하나."

"바람 마법의 응집 파트에서, 이 계산식이요...."

첫 수업인 오늘 배운 것의 범위를 뛰어넘는 내용이었다.

아마엔은 즉석에서 자신이 떠올린 계산식을 마구 휘갈겼다.

"여기서 마땅한 값이 존재하는지를 모르겠어서요."

수첩을 오베른에게 내민다.

오베른은 살짝 눈을 찌푸리더니 수첩을 받아 들었다.

사실, 방금 휘갈긴 것은 얼마 전 읽은 책에서 본 어려운 문제이다.

교수를 골탕 먹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지만, 조금 혼나고 말겠지.

당돌하게도 아마엔은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그 틈을 타서 흘끔흘끔 오베른의 지팡이를 살펴봤다.

'스승님...?'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스승과 닮았다.

하지만 또, 묘하게 다르다.

수정이 더 아름답게 빛났고, 무엇보다 크기가 너무 작다.

원래의 스승님은 사람의 목도 충분히 졸라 죽일 수 있을 크기였는데, 이제는 목에 걸면 예쁜 장신구처럼 보일 것 같기도 하다.

'아닌가. 착각인가.'

그리고 또. 만약 스승이 맞다면 이렇게 가만히 굳어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가 아는 스승이라면 '반갑다 아마엔!'하고 아는 척했을 것이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

아마엔이 그리 생각하는데.

"아마엔 리들."

"아, 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오베른이 수첩을 돌려줬다.

"다음부터는 질문이 있거든, 교수 연구실로 정식 면담을 요청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베른은 떠나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답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가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수첩을 보니.

"...!"

수첩에 휘갈긴 식에는 답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책에서 본 해답과 완벽히 일치했다.

설마 그 어려운 문제를 단번에 암산으로 풀었다고.

아마엔은 멍하니 떠나가는 오베른을 볼 뿐이었다.

* * *

'아마엔....'

나는 조금 분하고, 조금 서글펐다.

'어떻게 날 못 알아볼 수가 있는 거야.'

오베른의 첫 수업에 아마엔이 있을 줄이야.

출석부를 보고는 동명이인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멀리서 보니 그 크림색 머리카락은 분명 아마엔이 맞았다.

녀석, 마차 짐칸에서 고롱고롱 잠을 자며.

모닥불에 비춰서 책을 읽던 게 엊그제 같은데.

헛소리가 절반인 책으로 마법을 배우던 녀석을 처음부터 가르쳤다.

물론, 사실상 펠레리안이 알려 준 것을 내가 전달해 준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마엔이 펠레리안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림공적의 제자는 곧 무림공적이 되기 마련이다.

아마엔에게 그런 끔찍한 길을 걷게 할 수는 없는 일. 나는 친절한 뱀으로서 아마엔을 제자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왜 확실히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아마엔이 '스승님?' 한마디만 했어도 나는 '서프라이즈!'하고 놀래켜 줬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엔은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도 눈만 데굴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자기 스승이 맞는지 확신을 못 한 것 같다.

-천하에서 너만큼 속 좁은 뱀은 없을 것이다.

'그치만...!'

펠레리안이 비난한다고 해도 할 말은 있었다.

'하늘 같은 스승님이 지팡이 흉내를 내고 있다가 걸린 상황이... 먼저 아는척하기가 좀 그렇잖아요.'

-하늘 같기는 무슨, 허허.

실제로 그랬다.

오베른의 지팡이로서 들어간다는 것은 내 아이디어였다.

그러면 지팡이가 가진 지옥 마법을 흡수하는 동시에, 오베른을 통해 위엄을 수급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먼저 아는 척해야겠다....'

조용한 곳에서 아마엔과 독대할 기회가 있으면 말해 줄 생각이다.

녀석,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반갑네.

그리고 다른 것보다.

내 부하 오베른을 에메랄드 스쿨의 교수로 합격시킨 보람이 있느냐 한다면....

*「연결 대상의 명성이 퍼집니다.」

*「추종자 두 명이 생겼습니다.」

*「특성 '왕족'으로 인해 '위엄'을 얻습니다.」

실제로 효과가 넉넉했다.

아니, 난 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

어떻게 수업 한 번 했다고 추종자가 생기지?

내가 우르오로스로 추종받기 전에는 전쟁을 끝내 주고 적장을 물리치기까지 했다.

-생각보다 말을 잘하기는 하더군.

'하긴 가르치는 데에는 그게 더 중요하겠죠.'

오베른의 마법적 재능은 그저 '수재' 수준이었지만.

그가 가진 외모와 화술, 거기에 펠레리안의 지식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천재적인 시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방금도 그랬다. 아마엔이 가져온 문제는 펠레리안이 한 눈으로 암산해서 답을 알려 주었다.

내게는 아주 형편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오베른의 개인 연구실이 있는 교수연구동에 들어갔을 때였다.

갑자기 입학처장이 오베른에게 달려왔다.

"그리모아르 교수."

"아, 처장님."

"자네가 고생이 많게 되었어. 잘할 수 있지...?"

"무슨 말씀이신지...."

되물었음에도 입학처장 노인네는 허허 웃고 떠날 뿐이었다.

다른 교수들도 오베른에게 다가왔다.

"자네같이 잘생기고 젊은 친구가 적임자지."

"우리 같은 노인네는 싫어하실 거야. 말도 잘 안 통할 거고."

"너무 걱정하지 말게. 어찌 되었든 이곳에 입학한 이상 학생의 신분이야. 자네는 우리 에메랄드 스쿨의 교수이고."

그렇게 한마디씩 던지고 가는 것이다.

갑자기 격려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느낌의 안도감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영광스러운 일이지. 왕자 저하를 전담하다니."

무슨 일 때문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올해, 에메랄드 스쿨의 신입생으로 솔리온 왕국의 3왕자가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입학한 왕자의 학교생활 적응을 위해, 교수 한 명이 전담해서 면학을 돕고 상담, 관리를 맡게 되었으니.

그 영광스러운 자리가 신임 교수 오베른 그리모아르에게 돌아갔다.

아마도 짬 처리라는 세상의 원리에 의해서 말이다.

-진짜 왕자 등장이구나.

어디 한번 진짜 왕족 얼굴 좀 볼까.

* * *

사실, 왕자를 가르친다는 것은 교수들에게도 나름 영광 아닌가.

물론 3왕자가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도.

'왕자의 스승'이라는 칭호는 누구나 탐낼 법한 것이다.

그것을 신임 교수인 오베른 그리모아르에게 맡긴다고?

비록 총장의 극찬을 받고 임용되었다고 하지만, 경력도 뒷배도 없는 몰락 귀족가의 젊은이에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모두가 사양하는 과실에는 흠결이 있는 법이다.

너무 떫거나, 혹은 시거나.

3왕자 필리 아덴 어쩌고저쩌고 솔리온 역시 그런 떫은 과일일 것이다.

나와 오베른은 그 3왕자를 만나게 되었다.

수업에 들어오기 전, 면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흐음, 별로 왕자같이 생기진 않았네.'

나는 필리 어쩌고 왕자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필리라는 이름도 조금 대충 지은 느낌이었는데, 생긴 것도 그저 평범한 느낌이다.

갈색 머리카락, 눈가 아래에 있는 주근깨.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 눈빛이 불퉁하고 눈 아래 다크서클이 내려앉았다는 정도일까.

'오히려 아마엔이 더 왕자같이 생겼네요.'

-왕족이라고 뭐 별다를 것 없다. 이놈은 그중에서도 유독 말라붙은 배추같이 생겼다만.

'에이, 그건 좀 심했다. 그냥 평범하게 생겼구만.'

하지만 왕족이라는 신분은 인간들에게 무척 부담스러운 것이었나 보다.

오베른은 잔뜩 긴장한 태도였다.

"저하의 커리큘럼은 우선 이렇게 정했습니다. 제가 1학년을 상대로 진행하는 모든 수업을 넣었습니다만. 달리 듣고 싶은 수업이 있으십니까?"

물론, 그렇다고 비굴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베른 나름대로의 처세술이었다.

정중하지만 당당하게 군다. 그것이 오히려 얕보이지 않는 방법이었으니.

"딱히 별로, 아무거나 상관없어."

사람과 대화할 때는 눈을 봐야지!

왕자는 도무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다리를 떨며 방 안을 구경하는 것뿐이다.

오베른은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나였으면 복 나가니까 다리 떨지 말라고 혼냈을 텐데.

평범하게 생긴 필리 왕자의 입에서.

평범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더럽게 재미없네."

"...."

오베른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천재 교수라고 해서 연구실에 재미있는 거라도 있을 줄 알았지. 근데 여기는 뭐 우리 아버지 집무실보다 더 재미없어 보여."

"교수의 일이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베른이라고 했나. 애초에 넌 누구야?"

필리 왕자는 생긴 것만 평민이었나 보다. 말뽄새는 망나니 왕자가 맞았다.

"그리모아르? 들어 본 적도 없어. 애초에 정말 천재 마법사는 맞아?"

"...."

헉, 설마 왕족의 통찰력 같은 게 있는 건가.

알아본 것은 놀라웠으나, 자꾸 까부는 게 슬슬 봐주기 힘들었다.

"그 못생긴 지팡이는 좀 재미있네."

'...나?'

"그거 나한테 줘 봐. 구경 좀 하자."

왕자는 손을 턱 내밀었다. 지팡이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교권이 땅으로 추락했구나.

오베른, 이런 학생은 혼내 줘야겠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베른은 나를 건네주려고 했다.

'미친놈아 날 왜 줘.'

'아, 죄송합니다. 제가 권위에 약해서....'

오베른은 지팡이를 내밀려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뭐 해? 안 주고."

"...."

오베른에게 한마디 시키길.

"저하, 잠깐 저쪽을 보시겠습니까?"

왕자가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나는 마법을 사용했다.

*「투명한 손lv16를 사용합니다.」

투명한 손이 왕자의 관자놀이를 강타하고, 필리 왕자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랑그레이에게 배운 기절 펀치다!

"허, 허어억!"

오베른이 경악했다.

'괜찮아, 진정해. 기절시킨 것뿐이야.'

솔직히 이렇게 깔끔하게 성공할 줄은 나도 몰랐다.

'드, 들키기라도 하면...!'

'나 포션 있어. 깔끔하게 끝낼 수 있어.'

왕자가 진짜 죽은 것도 아니고, 상관없었다.

너희들한테나 왕자님이지 나한테야 그저 버릇없는 꼬마야.

그리고 나는, 그냥 혼내 줄 생각으로 무력을 쓴 게 아니었다.

'어디 한번 왕족은 뭘 가지고 있는지 볼까.'

왕족의 상태창에는 가져갈 만할 게 있을까.

나는 두 눈에 힘을 주고 필리 왕자를 살폈다.

144. 금쪽이 치료사

필리.

귀여운 필리.

어렸을 때까지는 국왕이 그리 부르며 귀여워했더랬다.

물론 그것도 이제 옛날 일이지만....

느껴지는 강렬한 두통에 필리는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통증이라는 말인가.

주먹에 관자놀이를 얻어맞아서 골통이 흔들리기라도 한 것 같다.

"크윽 ...."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다.

뭐지, 여긴 어디,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거지.

필리 왕자가 누워 있는 곳은 소파 위였다.

몸에는 좋은 냄새가 나는 담요가 덮여 있었으니,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어느덧 노을이 지기 시작해서 방 안이 온통 주황빛이었다.

점심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면담을 시작했던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난 건가.

'면담...!'

그래, 왕자는 그를 전담으로 맡게 된 오베른 교수와 면담을 하던 중이었더랬다.

그런데 왜 이렇게 누워 있는 건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깨어나셨습니까."

그리 말한 것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오베른이었다.

손에는 책이 들려 있다. 독서 중이었나 보다.

"너무 달게 주무셔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내가 잠들었다고?"

단잠을 잤다기에는 머리가 너무 지끈거리는데?

하지만 잠들었다고 하니까 잠든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언제 잠든 걸까.

마지막 기억은 분명....

"아, 지팡이!"

지팡이를 달라고 했었는데.

대체 어쩌다.

오베른은 아직도 그 지팡이에 손을 얹어 둔 채였다.

그걸 노려보니, 교수가 픽, 웃었다.

"또 잠들고 싶으신 겁니까."

"무슨 말이야?"

"제 지팡이는 아무나 다룰 수 없는 물건이지요. 자격이 없는 자가 잡으면 그대로 의식을 잃고 잠에 빠져 버립니다."

"내가... 지팡이를 잡은 거야?"

"그러셨지요. 깨어나실 때까지 두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거짓말! 너 나를 속이려는 거지. 그런 지팡이가 어디 있어."

"그러면, 다시 한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오베른이 슬쩍 지팡이를 내밀었다.

지팡이 위에 달린 뱀 장식.

아주 사실적이어서 정말 수정 비늘을 가진 뱀처럼 보이는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히이익!"

필리는 공포를 느끼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째선지 모르겠다.

머리가 욱신 아파 왔다.

"됐어, 치워."

"그러면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 면담은 여기까지 하시지요."

오베른이 손을 내밀어 문을 가리켰다.

명백한 축객령이다.

그 태도가 어찌 그리 망설임 없는지. 필리는 황당함까지 느꼈다.

"그래, 간다."

그래서 성큼성큼 교수실을 나가려던 중.

"저하."

오베른이 불렀다.

뒤돌아보니, 그 젊은 교수는 무척이나 차갑고 무감정한 얼굴로 선언했다.

"사적으로 뵐 때는 이렇게 왕족에 대한 예를 표하겠습니다만, 왕명에 의해 에메랄드 스쿨에서는 저하께서도 그저 학생입니다. 저는 교수로서 학생을 대하듯 할 것입니다."

"...."

"있을 수 있는 무례에 대해 미리 말씀드립니다."

하. 대귀족도 아닌 자가 왕자에게 미리 무례를 경고하는 것인가.

필리 왕자는 조금 분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흥."

그리 말하고 연구실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왕자가 방을 나서고.

3, 2, 1.

탁.

오베른이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하아, 하아, 하아 내가 왕족을...."

그는 경망스럽게 호흡했다.

이러다가는 정말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라마즈 호흡법을 알려 줬다.

'따라 해, 히, 히, 후. 히, 히, 후.'

"히, 히이, 후."

다행히 과학적인 호흡법 덕에 오베른은 금방 평안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손을 달달 떨었다.

"사형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뭘 사형까지야.'

"만약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그리고 너 책 거꾸로 읽고 있었어.'

"헛!"

걱정도 많기는.

오베른은 훌륭한 연기력과 마스크를 가지고 있다. 얼뜨기 왕자 정도 속여 먹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다.

왕자가 잠든 사이.

나는 녀석의 상태창을 살펴봤다.

그것이 어땠느냐 하면....

──────────────

[왕자 필리lv20]

[특성]

[왕족], [망나니]

──────────────

허접 왕자.

다만 객관적으로 레벨이 20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낮지 않은 수치이다.

왕족인 만큼 사냥을 시켜서 마성을 흡수시킨 걸까.

분명 편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

[스킬]

[고함지르기lv4], [솔리온 왕가 검술lv1], [초급원소마법:불lv2]....

[상태]

[미약한 뇌진탕], [기절]

──────────────

허접하기 그지없는 스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왕자면 뭔가를 배우기 아주 쉬운 환경이었을 텐데, 애써 배웠을 솔리온 왕가 검술이나 마법 같은 것도 레벨이 아주 낮았다.

아마엔과 비교하기에도 미안한 수준이었다.

일단 내가 애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아마엔이니까.

'그래도, 빼앗을 만한 것도 없어서....'

강탈의 왕관을 제대로 써 보고자 했는데, 마음에 드는 게 안 보였다.

솔리온 왕가 검술이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철사자 제식 검법이 있는데 굳이?

다만, 별로 없는 스킬 중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게 딱 하나 있었다.

──────────────

[흉내내기lv10]

──────────────

필리 왕자가 가진 스킬 중 가장 레벨이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강탈하지는 않았다.

이미 흉내 내기의 상위 스킬을 보유한 녀석이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

[오베른 그리모아르lv43]

[특성]

[미인], [수재], [허장성세]

[스킬]

[상급원소마법:불lv9] ...[연기lv10]

──────────────

무려 연기lv10을 가진 사나이 오베른 그리모아르.

현재 내가 강탈의 왕관으로 얻은 것은 '탄성폭주lv1'이다.

그리고 여전히 탄성폭주를 완전히 내 스킬로 만들지는 못했다.

쓸 곳이 없어서 숙련도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한 나는 과감한 선택을 내렸다.

탄성폭주를 버리고 연기를 취한 것이다.

*「강탈의 왕관lv4로 '연기lv10'을 빌립니다.」

*「일시적으로 '연기lv3'을 얻었습니다.」

아예 빼앗은 것은 아니고 빌리는 것으로.

왜 이것을 빌렸느냐 하면.

*「연기lv3을 사용합니다.」

이 스킬은 지팡이 행세를 하는 내내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때, 좀 더 지팡이 같아?'

'예, 더 자연스럽습니다.'

강탈의 왕관은 사이클을 빨리 돌리는 게 중요하다.

언제 총장이 가진 맛도리 스킬들을 맛볼 기회가 올지도 모르는데. 미리미리 잡다한 스킬들은 얻어 놔 줘야지.

나는 이제 더 완벽한 뱀팡이가 될 수 있었다.

연기의 활용법은 또한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고....

"하아."

오베른이 소파에 털썩 앉더니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왕자가 좀 얌전히 있어 줄까요?"

그 얼뜨기를 전담하게 되었다는 게 부담인가 보다.

하긴, 조금 전에 보니까 그렇게 안하무인에 말썽쟁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자가 얌전히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는.

'그럴 리가 있나. 완전 망나니 새끼 같던데.'

"앞으로 고생스럽겠네요."

카리스마 있는 천재 교수 연기를 해야 하는 오베른.

그 권위를 존중해 주지 않는 망나니 왕자의 등장은 무척이나 좋지 않은 일이었다.

'뭘 걱정해.'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리 걱정할 게 아니었다.

'내가 있잖아. 그리고 그런 녀석들은 다 다루는 방법이 있어. 금방 얌전하고 말 잘 듣게 할 수 있다니까.'

"...그렇습니까?"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오베른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그래, 아무리 잘 물고 험한 녀석들이라고 해도 하루만 주면 얌전하게 만들 수 있거든.'

"잘 문다고요...? 물기까지 하면 너무 문제아 아닙니까?"

'인간 아이들은 아니었고 마물 아이들. 100마리도 넘게 길들였어.'

"왕자를 길들일 수는.... 하아."

오베른은 절망했다.

진짠데. 그림자 숲에서 수많은 금쪽이 마물들을 얌전히 만들었던 내 실력을 직접 보지 못해서 못 믿나 보다.

'난 진담이야.'

걱정 말라구.

* * *

"좀 긴장되네. 칼, 너는 실제로 3왕자님을 뵌 적 있는 거지?"

"파티에서 봤지."

칼이라는 잘생긴 소년이 당당히 말했다.

"아는 사이겠네? 혹시 친해?"

"인사만 몇 번 나눴던 거지, 친우라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야."

겸손한 듯 그리 말했지만 어쩔 수 없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백작가의 직계혈통인 칼 레이만은 왕자와 친분이 있었으니,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이번 신입생 중에서 특히 입지가 높은 자였다.

"물론 예전에 왕자께서 내 생일 때 선물을 보내주시긴 했지만 말이야."

"와아...."

삼왕자가 신입생으로 입학한다는 소문은 이미 쫙 퍼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삼왕자의 목격담이 여러 명에게서 나왔다.

오베른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삼왕자 저하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던데."

"오베른 교수님도 엄청 무서운데."

학기가 시작한 지 이미 2주가 흘렀다.

오베른의 수업을 들어 본 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그 젊은 천재 교수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매료되거나, 혹은 압도되는 자신의 모습에 불쾌감 같은 것을 느끼거나.

전자이든 후자이든 둘 다 지금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여겼다.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왕자와 교수가 맞부딪치면 누가 이길까 같은 것이다.

"일단 제때 오기는 할까?"

왕자의 등장을 점쳐 보느라, 소년 소녀들이 소란스러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두가 확 조용해졌다.

저벅.

강의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등장했다.

필리 왕자였다.

갈색 머리카락과 살짝 퀭한 눈. 주근깨.

옷에는 왕족을 상징하는 순금 단추가 달려 있다.

원래라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왕족에 대한 예를 갖춰야 한다.

하지만 이곳 에메랄드 스쿨에서는 그 예법이 예외적으로 적용된다.

면학에 방해되지 않도록, 예법을 간략히 하거나 생략하라는 내용이 수십 년 전에 왕명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왕자는 터벅터벅 올라와서 아무 자리에나 대충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이들에게 빈정거렸다.

"인사를 하려면 똑바로 올리고, 그러지 않을 거면 시선을 거둬라."

그러자 몇몇 아이들이 얼른 다가가서 왕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왕자 저하, 강녕하셨습니까."

"함께 수학하게 되어 영광이어요."

쏟아지는 인사에도 왕자는 귀찮아하기만 했다.

전부 인사를 하러 간 것은 아니었다.

라니아와 아마엔의 경우, 그냥 조용히 뒤에 있었다.

다만, 특별히 친한 척을 하는 이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칼이라는 소년이었다.

"하하, 오랜만입니다, 저하."

그는 자신의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인사했다.

"저번의 선물은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같은 수업을 듣게 되다니, 예전에 왕자 저하와 호숫가에서 뛰어놀던 것이 생각나서 참으로...."

"넌 누구냐?"

"예?"

순간 칼의 미소가 굳었다.

"누군데 친한 척이야 이 새끼야."

"칼, 레이만.... 예전에 함께 파티에서...."

"내게 친한 척 굴던 놈들이 어디 한둘인 줄 알아?"

칼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설마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할 줄이야.

아마도 그래서 변명 같은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전, 저희가 친우라고 생각했는데...."

"친구? 너와 내가 친구라고? 하핫!"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때였다.

설마 여기서 벡스가 나설 줄은 아무도 몰랐으리라.

그리고 그리 말할 줄은....

"저는 저자와 달리 왕자님의 친구가 되는 건 감히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그 순간 모두 벡스가 미친놈인 줄 알았다.

평소에 그리 칼에게 굽신대던 녀석이었는데 갑자기 이러다니.

"넌 또 뭐냐."

"제 이름은 벡스 갈란츠. 왕자님의 충실한 수하가 되고 싶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왕족에 대한 예를 표한다.

칼과 친한 이들은 황당한 눈으로 벡스를 바라봤다.

뒤에 앉아서 구경하던 라니아와 아마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전 미친놈이네 저거...."

한때 아마엔에게 시비를 걸었던 벡스는 사실 귀족이 아니었다.

신분 상승의 꿈에 절어 있는 소년이긴 했는데, 설마 왕자를 만나자마자 저럴 줄이야.

필리 왕자 역시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웃기는 새끼들이네, 정말."

"헤헤...."

"그런데 나는 딱히 수하는 필요 없는데, 친구나 만들면 좋겠지만."

"아, 친구가 되어 드릴 수도 ...."

"물론 너 같은 놈을 친구로 삼을 수는 없지. 내 심복이 되고 싶으냐?"

"무, 물론입니다. 시켜만 주신다면."

왕자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 내 친구를 참칭한 저 버릇없는 녀석의 뺨을 한 대 쳐라."

"...예에?"

왕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창백해져 있는 칼이었다.

아무리 벡스가 왕자의 환심을 사고 싶다고 해도 어찌 백작 아들의 뺨을 때리겠는가.

"그, 그것은 좀...."

"뭐야,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냐? 뺨을 치래두."

"어...."

"네놈. 왕족의 말이 우습나?"

"그럴 리가요!"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칼은 우뚝 가만히 있었고. 벡스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쳐라. 뺨을 쳐."

그 차가운 명령에 벡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살살 때리면 괜찮겠지.

찰싹!

벡스가 백작가 공자의 뺨을 쳤다. 정말로.

"푸하하하하!"

조용해진 교실에 왕자의 웃음소리만 울렸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벡스의 귀에, 믿기지 않는 소리가 들렸다.

"칼 레이만. 귀족의 뺨을 친 저 무도한 놈을 벌해도 좋다. 원하는 만큼."

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벡스는 숨을 삼키며 창백해진 얼굴로 벌벌 떨었다.

레이만 백작가는 무투술로도 유명하다.

칼만 해도 저 주먹 하나로 곰의 머리통을 깨부술 수도 있으리라.

"쳐라. 칼 레이만."

"...."

"너는 배알도 없나?"

허나 칼은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것이 귀족의 자존심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다.

라니아가 눈을 찌푸렸다.

'조금 심하지 않아?' 그렇게 아마엔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어디 갔어!'

아마엔이 옆자리에 없었다.

놀랍게도 아마엔은 왕자와 칼 사이에 서 있었다.

"저하, 그쯤에서 그만하시지요."

설마, 저런 성격이었나.

그나마 아마엔과 친했던 라니아도 그가 저리 나설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당당하고 올곧은 자세로 왕자의 앞을 막아섰다.

"수업 시간에 소란이 과합니다."

"넌 무슨 잡놈이냐. 감히 누구 하는 일을 막아?"

지엄한 왕자의 말에, 아마엔은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스승, 아니, 교수님이 오셨습니다."

모두가 강의실의 문 쪽을 돌아봤다.

그곳에 있었다.

오베른 그리모아르 교수가.

늘 함께 가지고 다니는 그의 수정 뱀 지팡이를 들고.

"내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무슨 소란이지?"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는.

분명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145. 그때 그 싸가지?

카리스마, 혹은 존재감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은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존재감을 가늠한다.

그 존재감이 얼마나 무거우냐를 가르는 기준은 여러 개가 있다.

상대방의 체구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아름답게 생겼느냐도 중요하리라.

혹은 목소리가 끝내주는 저음이라든가, 입고 있는 옷이 아주 비싼 부티크의 것이라든가 따위의 것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도 물론 중요하다.

학생들이 보는 오베른 그리모아르는.

그 모든 방면에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명문가의 자제들도, 심지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왕자라도 그것을 느꼈다.

그의 등장에 일순간 침묵이 가라앉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베른 그리모아르가 가진 카리스마는 그저 외적인 부분만이 아닐 것이다.

행동과 언사에 거침이 없다. 귀족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왕족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 같다.

무엇을 믿고 그리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의 마법.

자신이 원한다면 지금 들고 있는 저 수정뱀 지팡이에서 기적을 발휘할 수 있기에.

그렇기에 저런 자신감이 나올 수 있는 것 아닐까.

학생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리 생각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라."

오베른이 그리 말했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혹시 왕자의 분노를 산다면, 하다못해 백작가 자제인 칼의 분노도 부담스러울 지경이니.

대답이 나오지 않자. 오베른은 지팡이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너. 네가 말하라."

지목받은 것은 라니아였다.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왕자님이 애들을 서로 싸우게 시켰어요."

왕자와 칼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무 직설적인 답이었다.

그것은 분명 마르테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라니아는 왕국을 통틀어서도 몇 안 되는 후작가의 적통이니.

그녀는 가감 없는 사실을 전부 말했다.

왕자가 패악질을 부린 것까지 다.

"...그렇군."

그녀가 말을 마치자 모든 학생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오베른을 바라봤다.

그는 왕자의 잘못을 꾸짖을까. 아니면 대충 넘어갈까.

오베른은 아주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살짝 눈을 감더니, 다시 뜨고 말했다.

"한심하고, 무도하고, 패악스러우니."

분위기가 이렇게 싸늘해질 수가 있을까.

″도저히 왕자가 보일 도량이 아니다."

교수는 직설적으로 왕자를 비난했다.

필리 왕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질 정도였다.

"에메랄드 스쿨이 왕족의 입학을 받는 것은, 선왕의 의지에 따라 어린 왕족을 귀족, 평민과 함께 수학하게 하여 눈을 넓히고 신 아래 왕족 역시 인간임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유래가 분명 있었더랬다.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니, 회초리를 들겠다."

오베른은 뱀이 달린 지팡이로 셋을 가리켰다.

"왕자 필리 아덴 솔리온, 벡스 갈란츠, 칼 레이만. 아래로 내려와라."

에메랄드 스쿨 안에서 교수는 왕족에게도 체벌을 할 수 있었다.

명문되어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런 것이 일어나는 경우는 몹시 적다.

아무리 교수라도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벡스 갈란츠, 너는 마치 간신배처럼 행동하여 왕자의 눈을 흐리게 한 죄, 세 대다."

"네...."

"칼 레이만. 너는 귀족으로서 왕자의 무도한 언행을 바로잡고 충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을 저버렸으니 세 대다."

"받겠습니다."

둘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 아덴 솔리온, 그대는 아량을 갖춰야 할 왕자로서 오히려 패악을 부리고 면학 분위기를 해쳤다. 이에 세 대다."

"...내가 겁먹을 줄 알아?"

왕자는 오히려 반항적인 미소를 지었다.

에메랄드 스쿨에서 체벌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그 품격을 심하게 훼손하지 않도록, 절차에 따라서 허벅지 뒤쪽을 회초리로 친다.

왕자도 체벌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설마 첫날부터 맞을지는 몰랐지만.

"반성의 마음을 되새겨라, 움직이면 다시 처음부터이니."

시작은 벡스부터였다.

놀랍게도 오베른은 뱀이 달린 자신의 지팡이를 회초리로 삼았다.

정말 지팡이를 다용도로 쓰는군 싶었다.

딱- 딱- 딱-

벡스가 윽, 하는 신음을 냈지만. 세 대는 그렇게 끝났다.

그다음은 칼 레이만이었다.

딱- 딱- 딱-

이번에는 신음 한번 없었다.

오히려 '지도편달 감사합니다'하고 오베른에게 감사 인사를 할 뿐이었다.

"다음."

그리고 왕자의 차례가 왔다.

필리 왕자는 분했다.

교수가 기선제압을 하려는 것 같은데, 그걸 알아도 분하다.

오베른에게는 분명 세게 때릴 용기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허벅지를 맞다니.

조금의 표정 변화도 보여 주지 않으리라.

굳은 마음을 먹은 왕자가 벽을 보고 섰다.

곧, 오베른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팡이가 허벅지에 닿는 순간.

짜악!

격통.

마치 채찍으로 후려친 듯한 격통.

"끼야압!"

왕자는 기어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 *

라니아로부터 왕자가 패악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설명들었을 때.

오베른이 마음속으로 내린 결정은 '그냥 무시하기'였다.

그것을 내가 막았다.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을 보고도 그냥 넘어간다면 교권이 무너질 것이 당연하다.

교권이 무너진다는 것은 오베른의 권위 역시 무너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짤짤이로 위엄을 수급하던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용납할 수 없는 일.

'혼내 주는 거야!'

'그, 그치만... 뱀님. 저건 왕자인데....'

'나도야!'

내 스스로 그런 말을 뱉을지는 몰랐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결국 오베른은 체벌을 선언했다.

벡스와 칼은 허벅지 세 대를 맞고 물러섰다.

맹세코, 나는 그 정도면 괜찮았다.

'그래, 잘했어.'

왕자의 차례가 왔을 때였다.

설마 오베른 이 자식이 때리는 순간 손목에 힘을 뺄 줄이야.

솔직히 셋 중 제일 나쁜 게 왕자 아니던가.

이러다가는 톡 하고 지나갈 텐데.

저 금쪽이 왕자는 '그러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비웃을 게 분명하다.

그 꼴을 볼 수는 없었기에 지팡이에 매달려 있던 내가 꼬리에 스냅을 줬다.

*「꼬리치기lv3을 사용합니다.」

날아오는 화살도 물어 챌 수 있게 된 나다.

내 스냅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짜악!

하지만 타격음은 확실했다.

"끼야압!"

조금 전까진 자신만만하더니 저런 비명도 지를 수 있었던가.

왕자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적당히 치리라는 모두의 기대가 배반되었다.

왕자가 놀라서 돌아보고.

모든 학생들이 나와 오베른을 쳐다봤다.

그리고 내가 기대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왕족을 공개적으로 처벌했습니다.」

*「연결 대상이 보여 준 공명정대한 행적에 다수의 사람이 감복합니다.」

*「상당한 위엄을 얻습니다.」

헉.

그거구나.

일진 왕자를 혼내 주는 선생님한테 감복하는 그거.

왕자는 놀란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움직이면 다시 처음부터다.'라는 말을 용케 기억했나 보다.

그리고 두 대째.

짜악!

이번에는 스냅을 좀 더 살살 줬다.

그래도 아프긴 아픈가 보다. 왕자는 끼엑! 하며 몸을 꿈틀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저 위에 있는 아마엔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놀란 표정이었다.

혹시, 내가 스냅을 준 걸 눈치챈 걸까.

"움직였다아!"

갑자기 그리 외칠 줄이야.

아마엔이 내가 움직인 것을 본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왕자가 소리를 질렀다.

"저, 저 개자식이! 진짜 조금밖에 안 움직였는데."

억울함의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움직인 걸 인정해 버렸다.

오베른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처음부터 하는 수밖에 없었다.

왕자는 총 다섯 대를 맞았으며.

오베른은 증거 인멸을 위해 세 명에게 모두 치유마법을 걸어 줬고.

강의실의 법도는 다시 올바르게 세워졌다.

오베른의 카리스마는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또한 아마엔은 왕자를 가로막고, 왕자의 체벌에 3대를 기어코 추가시킨 또라이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위엄을 수급했으니.

모두 잘되었다. 짝짝짝

* * *

교수연구동으로 들어가자마자 누군가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교무처장이었다.

"오베른 그리모아르 교수, 당신 미쳤소?"

소문이 빠르기도 하다, 어떻게 벌써 안 거지?

"왕자 저하를 체벌하다니. 그것도 첫날에!"

오베른은 내심 잔뜩 긴장했지만, 내가 당부한 대로 당당히 나갔다.

"학칙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절차는 지켜졌고요."

"학칙 같은 소리. 이거 젊은 사람이 왜 그리 꽉 막혔나. 필리 왕자의 입학은 국왕폐하께서도 신경 쓰시는 일이야. 그분의 아픈 손가락이 삼왕자 저하라는 것도 못 들어 봤나."

오베른은 그런 교무처장을 우묵히 노려봤다.

'어 여기선 뭐라고 대답해야 하죠?'

-나도 모르지.

내가 오베른의 연기를 일일이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타입이라 해야 할까.

그리고 오베른은 대배우의 자질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뭐, 뭐야?"

캬.

사실 겁 많은 오베른이 저렇게 과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저 뒤에서 발라냐르 총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 두 분 싸우지 마시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발라냐르 총장은 오베른을 무척이나 아꼈다.

"뭐 오베른 교수가 사적인 감정으로 왕자를 핍박했겠어요?"

"끄응...."

"그리고 뭐, 다치신 것도 아니라고 하고. 사실 제가 들은 게 있거든요. 국왕전하께 말이에요."

발라냐르 총장은 실제로 국왕의 술친구이기도 했다.

"삼왕자의 어리광을 절대로 받아주지 마라. 말을 안 들으면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내. 그 애새끼는 버릇을 단단히 고쳐 줘야 해."

"헛...."

"내 말이 아니라 전하께서 그렇게 말하셨다는 거 아녜요. 하하."

그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잘한 행동이군.

교무처장도 더 이상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총장님은 그리모아르 교수에게 너무 너그러우십니다."

"하하, 그렇게 보였나요?"

교무처장이 괜히 눈을 흘기며 물러나고.

총장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 노움은 솔직히 조금 부담스럽다. 당장이라도 내 정체를 알아챌 것 같아서 나는 더 열심히 지팡이인 척 있었다.

*「연기lv3을 사용합니다.」

오베른에게 가져온 스킬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오베른 군."

"예, 총장님."

"궁정백의 후원을 받고 있죠?"

"...."

헉, 총장이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침묵이 답이다.

"키론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요?"

키론이 뭔데.

듣고 있던 펠레리안이 알려 줬다.

-신화다. 평범한 양치기의 재능을 알아보고 가르친 스승, 그리고 기어코 그 양치기를 왕으로 만들었다는....

즉, 총장은 묻고 있는 것이다.

궁정백과 네가 설마 삼왕자의 왕위계승권을 밀고 있는 거냐고.

'진짜야 오베른?'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압니까. 전 모릅니다!'

하지만 오베른도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쉬운 길은 아닐 텐데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하 의뭉 떨기는."

"그럼, 다음 수업 준비가 바빠서 이만."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총장에게서 멀어졌다.

이쪽을 바라보는 묘한 미소가 징그럽다.

미안한데, 그 싹수 노란 왕자한테는 왕이 될 깜냥이 없어 보이더라.

* * *

그리고 아마엔.

오늘 하루의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아마엔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의 일로 아마엔을 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

왕자의 미움을 산 게 분명한 어리석은 평민을 불편해하는 게 절반.

그리고 왕자의 권위 앞에서 당당히 군 모습에 선망을 느낀 이들이 나머지 절반.

하지만 아마엔의 기분을 좋게 만든 것은 그것과 전혀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분명 스승님 같아!'

대체 어쩌다가 스승님이 교수님의 지팡이 흉내를 내게 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장식처럼 굳어 있던 그 뱀은 분명 움직였다.

'혹시 나를 만나러 오신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기분은 좋기만 했다.

그런데, 누군가 맞은편 침대에 앉아 있었다.

설마.

아직까지도 입주하지 않았던 룸메이트가.

"...너 뭐냐."

오늘 모두의 앞에서 두들겨 맞은 3왕자였다니.

146. 삼총사

왜 이 자리에 삼왕자가 있다는 말인가.

학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엔의 룸메이트로 입주한 사람은 없었다.

사정이 있어서 늦게 입주하는 것일까, 아니면 방을 혼자 쓰게 된 걸까.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는 했다.

하지만 설마 그 자리가 삼왕자의 자리였다니.

왕족이면 충분히 독실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적어도 칼 같은 귀족가 자제랑 방을 쓸 것이지, 왜 굳이 아마엔의 방으로?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촤르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놀란 것은 필리 왕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왕의 엄한 명령에 의해 왕자는 특별대우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는 평민처럼 2인 1실의 기숙사를 쓰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솔직히 조금 긴장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차피 평범한 것들은 왕자를 알아 모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맞은편 침대의 주인이던 저 평민 아마엔은 달랐다.

'그쯤 하시지.'하면서 왕자를 가로막은 것은 물론.

왕자가 교수에게 허벅지를 맞던 와중에, '저 새끼 움직였어요!'하고 외친 무도한 놈 아닌가.

이곳은 밀폐된 방, 보는 눈은 없다.

저 평민 놈이 흉악한 이빨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불안과 예민함이 남들보다 과도한 필리 왕자는 그리 생각했다.

아마엔이 갑자기 움직였을 때 움찔 놀란 것도 그 탓이었다.

그런데 정작, 아마엔의 입에서는 기대치 못한 말이 나왔다.

"조금 전의 일을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하."

"...사과?"

"움직였다고 말한 것 말예요."

그 탓에 세 대나 더 얻어 맞앗는데 갑자기 사과라고?

"오해였어요. 저하가 움직였다고 일러바친 게 아닙니다."

"그럼...?"

처음에는 아마엔이 그저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다.

아니면 왕자를 농락하려는 것일지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마엔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 조금 믿기 어려우실지도 모르겠지만."

"말하라."

"지팡이, 지팡이에 달린 뱀이 움직인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뭐? 하, 하하...."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하하하하, 이거 웃기는 녀석이다."

"하하...."

점점 웃겨서 크게 웃고 말았다.

아마엔도 따라서 웃었다.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이렇게 금방 기분이 바뀌곤 하는 것도 어린 소년들의 특권일 것이다.

"저하께서는 왜 독실을 안 쓰시고 여기에 오셨나요."

아마엔의 질문에, 기분이 나아진 왕자는 솔직히 답해 주었다.

"부왕 전하의 명령이었어. 평범하게 생활하면서 친구를 만들라고 하시더군."

"친구...요?"

"내가 말했잖아. 친구를 만들고 싶다고."

분명 그랬더랬다. 벡스가 수하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친구를 만들고 싶다고 했었지.

다만 칼이 친구를 자청했을 때는 형편없이 면박을 줬다.

"격의 없이 편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건 어릴 때가 마지막이라고 말야. 말을 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만들라 하시더군. ...너도 나한테 말 한번 놓아 볼 테냐?"

"제가요?"

그렇게 제안한 것은 분명 변덕이었을 것이다.

"알겠어."

하지만 아마엔이 시원하게도 말을 놨을 때.

"잘 부탁해. 룸메이트니까. 내 이름은 아마엔 리들이고, 위대한 마법사가 되는 게 꿈이야."

"어...."

필리 왕자는 기분이 이상했다.

어색하긴 하지만 영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위대한 마법사라고?"

"응, 넌... 근데 너라고 불러도 진짜 괜찮나?"

"그래, 뭐 괜찮지. 저하라고 하면서 말 놓는 것도 웃기지 않나."

"그래. 넌 꿈이 뭐야?"

"꿈?"

글쎄....

잠시 생각해 봤다.

왕자의 꿈이라면 훌륭한 왕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필리 왕자는 왕위 계승권에서 떨어져 있다.

1왕자가 있었고, 이곳 에메랄드 스쿨에 이미 입학해 있는 2왕자가 있었다.

"...잘 모르겠네."

"그래? 그러면 여기 지내면서 찾으면 되겠다."

쉽게도 말하는군.

그리 생각했지만, 필리 왕자의 입에서는 왠지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너도 그 교수놈을 추종하냐? 다른 녀석들처럼 말야."

"오베른 교수? 아니."

문득 생각이 나 물어봤는데 아마엔은 시원스럽게 부정했다.

"딱히 교수님을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아.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대단하긴 뭐가 대단해. 그런 정도의 마법사는 궁정에 널리고 널렸어. 너도 위대한 마법사가 되고 싶다면서 쉽게 감탄하지 마라."

"그런가...."

사실 아마엔이 존경하는 것은 교수가 들고 있던 뱀이었지만.

아직 그것까지 말하기는 어려운 사이다.

둘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살아온 궤적에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둘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왕자는 마차를 타고 상행을 다녔다는 아마엔의 이야기에 흠뻑 매료되었다.

아마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궁 안에 있는 수정도서관의 이야기를 듣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필리 왕자는 아마엔에게 언젠가 수정도서관에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렇게 수다를 떨던 와중이었다.

타닥.

창문에 돌조각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가 화들짝 놀라고, 아마엔이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아하."

아마엔은 창문을 열고 밖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왕자가 궁금히 여기어 아마엔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하, 마르테인의 불쌍한 여식이군."

"라니아에 대해 알아?"

"당연히 알지 모르겠나. 제라드 후작의 후계자가 된 애잖아."

왕자는 아마엔과 저 아래의 라니아를 번갈아 보았다.

"설마... 이거냐?"

진지한 표정으로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왕자.

"새끼손가락이 뭐? 라니아는 친구지."

"기숙사까지 찾아와서 창문을 두드리는... 아니, 됐다."

순진한 표정에 괜히 말을 꺼낸 왕자가 머쓱해지는 기분이었다.

"부르는 것 같은데 가 보자."

"나도?"

아마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면 그럴까.

아마엔을 따라서 쭐래쭐래 나가자.

정원에 라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으엑."

그리고 함께 나타난 필리 왕자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리 그래도 보자마자 저렇게 싫은 티를 내다니.

괜히 따라 나왔나. 필리는 순간 그리 생각했다.

"라니아, 이쪽은 필리. 왕자 저하가 맞아. 알고 보니 내 룸메이트였어."

"필리라고?"

"말 놓기로 했거든. 필리, 너도 인사해. 라니아야."

왕자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라니아와 인사했다.

"...필리 아덴이다. 너도 말 놔도 된다."

"아... 그래."

어색해하긴 했지만, 라니아도 아마엔처럼 망설임 없이 말을 놓겠다 대답했다.

이런 성격이니까 둘이 친하게 지냈군.

왕자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참으로 어색했지만.

그것이 친구 관계의 시작이었다.

* * *

"하아."

오베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말라니까.'

건방진 왕자 좀 혼내 준 것으로 너무 걱정이 많다.

'아니, 궁정백이 왕자 곁에 잘 있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말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궁정백 그 탐관오리 노인이 오베른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는 듯하다.

후원자의 부탁은 사실상 명령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런 녀석은 원래 처음에 기선제압을 해야 해.'

내 입장은 확고했다.

그 왕자를 마물로 비유하자면, 털과 엉덩이 색이 화려한 긴꼬리원숭이 같은 놈이다.

몹시 포악해서 밥을 주는 사람한테도 이를 드러내는.

그런 놈은 초장부터 기선제압을 해야 오히려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오베른도 나름 인간관계의 묘리를 아는 인물이었다.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긴 하지요.'

'그래, 그러니까 집중이나 해.'

오베른이 다시 가부좌를 취했다.

명상을 위한 자세다.

지금 나는 오베른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마법을 습득했던 체계가 조잡하다. 고출력의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마나 회로가 좁아.

'너는 그러니까 마법을 습득해 온 방식이 참 조잡해. 센 마법을 펑펑 쓰기엔 마나 회로가 좁아.'

정확히는 펠레리안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베른 역시 마도의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내 조언이 얼마나 날카롭고 도움이 되는지를 금방 눈치챘다.

'네 재능은 나쁘지 않아.'

'정말입니까...?'

'그래, 천재라고는 할 수 없지만 둔재라고도 할 수 없어. 제대로 수련만 한다면 마탑의 마도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펠레리안이 그리 보았으니까 틀림없겠지.

그는 오베른의 재능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한눈만 팔지 않았다면 좋았겠지. 자신의 실력을 부풀리기 위해 너무 잡다한 것들을 건드려 버렸다.'

'....'

다만 그게 문제였다.

오베른은 마법 시약 등을 촉매로 활용해서 마법을 쓰는 일이 잦았다.

자신의 부족한 마력 등을 부풀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의 성장을 가로막았으니, 이제부터라도 나쁜 버릇을 고친다면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될 수 있으리라.

'제게 왜, 이렇게 해 주시는 겁니까.'

오베른의 정신적 질문에는 떨림이 깃들었다.

나는 대답해 주었다.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떠날 텐데. 네가 계속 교수 노릇을 하려면 이대로는 안 될 것 아냐.'

'...!'

갑자기 오베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뭐 잘못 말하기라도 했나 싶었는데,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닌 듯했다.

'제게 그렇게까지 해 주시다니....'

명백히 감동을 먹은 눈치다.

이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렇게 오바할 거 없어. 계약서에 써 놓은 거잖아.'

'감사, 감사합니다.'

눈가가 촉촉해지기까지 했다.

좀 부담스러운데.

-대단한 일이지, 어떤 마법사가 이렇게 쉽게 가르침을 베풀겠냐.

'그런 건가.'

그런가 보다.

*「당신의 자비에 마법사 한 명이 진심으로 감복합니다.」

*「특성 '왕족'으로 인해 '위엄'이 상승합니다.」

오베른이 거짓 감동을 꾸민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위엄을 수급하다니,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그러면 명상하고 있어.'

'예...!'

나는 오베른의 어깨에서 내려와 다시 지팡이로 향했다.

지팡이에 한 번 위엄을 소모해서 연결의 왕관을 사용하고 나니, 그다음에는 굳이 위엄을 소모하지 않아도 지팡이에 연결의 왕관을 사용할 수 있었다.

지팡이에 올라가서 정신을 집중하니.

츠츠츠-

지팡이가 다시 뭉클뭉클한 지옥의 마력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지옥변질이 된 마력은 평범한 생물에게 독이나 다름없게 작용한다.

하지만 이쪽에는 이실이가 있다.

녀석은 새카만 마력을 마치 간식처럼 먹어 치웠다.

내가 지팡이에서 흡수하려는 것은 지옥마법.

이것을 흡수하면 나도 마력의 '지옥변질'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지옥불', '타락' 등의 마법 역시 쓸 수 있게 되는데, 펠레리안에 의하면 엄청난 일이라는 것 같다.

아무리 내가 뛰어난 뱀이라고 해도 습득이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잊고 있었겠지만 나는 잠재력 20의 엄청난 뱀이다. 세상에 배우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한 20% 정도 흡수했나.'

지팡이 녀석은 꽤 끈질겼다.

다만 '위엄'을 소모해서 연결의 왕관 스킬을 강화하면 그 흡수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오베른 녀석을 통해 위엄을 더 수급하면 몇 달 안에 완전히 스킬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러고 나면....

나는 시선을 돌려 큐브를 바라봤다.

──────────────

[황제의 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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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의 이름에는 놀랍게도 '황제의'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황제라니, 멋지잖아.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큐브의 정체는 수수께끼나 다름없어서 무슨 용도인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냅다 부숴 볼까 했는데 몹시 단단해서 부수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정체를 알아낼 수단이 있었으니.

'지팡이를 흡수하고 나면 저걸 열어 봐야겠어요.'

위엄을 사용해서 연결의 왕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써 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한 번에 하나만.

마치 강탈의 왕관처럼, 연결의 왕관으로 아티팩트와 연결하는 것은 한 번뿐이다.

일단 지팡이의 마법을 먼저 흡수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뭐 급한 일도 아니고 말이야.

뱀답게 앞으로의 계획을 가다듬던 중이었다.

순간 날카로운 감각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악!"

오베른에게 얼른 경고했다.

명상을 하던 오베른이 급히 지팡이를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무언가가 창문을 뚫고 날아왔다.

챙그랑- 팍!

서찰이 묶인 돌멩이였다.

오베른과 내가 얼른 창밖을 바라보니.

복면을 쓴 누군가가 저 아래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경고한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목을 긋는 제스처를 하더니,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거 미친놈인가.

*「광선lv4를 사용합니다.」

피잉-!

도망치던 자의 오금에 광선이 적중했다.

그는 으악! 하며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147. 사부(蛇傅)

창문을 깨고 들어온 것은 서찰이 묶인 돌멩이였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 석궁의 볼트 같은 것이었다면.

혹은 폭탄이나 마법이었다면.

내가 날린 건 출력을 조절한 광선이 아니라 단검 한 자루였을지도 모른다.

제압을 위해 출력을 조절한 광선은 강력한 지건과 비슷하다.

허벅지에 구멍이 난 기분일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비명을 지르고 엎어졌겠지.

'저거 뭐 하는 자식이야.'

내려가서 잡아야겠다.

그전에 뭘 던진 건지 확인해 봤다.

돌멩이에 묶여 있는 서찰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새빨간 종이였다.

거기에 거친 필체로 적혀 있기를.

「3왕자는 포악하고 무도한 자다. 그 잔인한 왕자의 스승 노릇 하면서 이미지를 회복시키려는 뻔한 수작이겠지. 이 권력의 개야! 누구에게 사주받았나!」

이건 또 뭔 말이야.

3왕자의 스승 노릇을 한다고?

수업에서 3왕자를 가르치는 것 가지고 이런 투서를 던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그 되바라진 왕자 허벅지를 때려 줬다는 소문이 쫙 퍼진 것 같은데.

설마 그것 때문에 이런 얘기가 도는 건가.

'아니 발라냐르 총장도 그러더니 왜 다들 김칫국만 마신대요?'

-뭔 국?

펠레리안은 오베른을 슬쩍 눈짓했다.

-다 계획이 있어서 하는 놈처럼 생기지 않았냐.

'끙....'

발라냐르도 '키론'이 되려는 거냐, 즉 궁정백과 내가 3왕자를 밀려는 것이 아니냐 물었다.

오베른이 권력의 개인 것은 맞았지만 그런 대단한 계획을 가지고 매를 든 건 아니었다.

'가자 오베른!'

"예!"

이제 척하면 척이다.

나는 오베른의 지팡이에 휘감겼고, 오베른은 지팡이를 들고 나갔다.

밖은 이미 소란스러웠다.

비명을 듣거나 내가 쏜 광선을 본 사람이 있었나 보다.

침입자의 곁에 교수와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이곳 에메랄드 스쿨의 보안은 제법 엄중할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복면을 벗기자 드러난 얼굴은 생각보다 앳되었다.

아니, 애초에 성인조차 아닌 것 같았다.

"야 이 자식아, 학생이면 학생답게 굴어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그에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교수가 있었다.

설마, 돌을 던진 게 에메랄드 스쿨의 학생인 것일까.

그는 이쪽을 보더니 당황해서 시선을 돌렸다.

엄지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할 때까지만 해도 당당하더니 말이야.

"아는 자입니까?"

오베른이 다가가 그리 물었다.

청년과 소년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녀석에게 고함을 치던 건 다름 아닌 교무처장이었다.

"아, 오베른 교수, 자네가 이 녀석을 제압한 건가."

"예. 이걸 던졌더군요."

증거물인 돌멩이와 붉은 서찰을 가져왔다.

교무처장은 붉은 서찰을 읽더니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 허어."

듣자 하니, 돌팔매 테러를 한 저 녀석은 3학년 학생이란다.

3학년 대상 수업은 가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런 투서를 던졌을까.

"하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됐구만. 사춘기라 그런지 아주 혈기들이 넘쳐서...."

징계위원회를 열고 징계를 내리면 되는 일 아닌가.

오베른이 교무처장한테 물어보니, 그가 작게 속삭였다.

"3학년에 2왕자 저하가 재학 중인 것 알지. 그분을 추종하는 학생들이 꽤 있는데, 아무래도 그중 하나 같아."

"하."

오베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피식 웃을 뻔했다.

"원칙적으로는 징계위원회를 열어야 하지만... 일을 크게 키우면 상황이 복잡해질 거야. 내가 책임지고 이 녀석을 혼내 줄 테니 맡겨 주겠나?"

교무처장이 그리 말했다.

나는 오베른에게 고개를 끄덕이라 했다.

"정식으로 오베른 교수에게 사죄드려라, 네 부모님도 모시고 와서."

"예? 제발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부모한테 혼나는 걸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애가 맞기는 한 것 같다.

-왕자들의 기 싸움인가 보군. 흔한 일이다.

'그러면 그 2왕자란 놈이 시킨 걸까요?'

-그럴 수도 있다만, 시키지도 않은 일을 저 혼자 벌였을 수도 있지.

2왕자와 3왕자는 어머니가 다른 듯했다.

2왕자는 이미 에메랄드 스쿨에 입학해서 3학년이었고, 3왕자가 따라 입학하는 것이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보기에 마음에 안 드는가 보다.

'포악하고 무도하다'는 평. 내가 본 필리 왕자는 그런 망나니가 맞았다.

내 생각에도 왕위를 이어받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음 생각해 보니까 인간 왕국이 강대해지면 나한테 좋을 건 없네요.'

-그렇지 이 마물아.

나나루크는 고블린 왕국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러면 인간들의 힘이 약해져야 더 좋을 텐데, 3왕자가 왕이 되는 것도 괜찮을지도.

"그런데 말이네, 교수."

교무처장이 오베른에게 귓속말을 했다.

키 차이가 나서 까치발을 하고 있다.

"정말 궁정백께서 3왕자를 밀고 계신 건가?"

평소에는 오베른을 안 좋게 보더니, 목소리가 간드러진다.

그 질문에 오베른은 적절하게 대답했다.

"제가 그분의 의중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 하하... 그렇지."

교무처장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친한 척을 했다.

"자네가 3왕자 저하의 전담 교수를 맡겠다고 자원했다고 들었는데, 그때부터 범상찮다 했어."

"...그렇군요."

오베른이 자원했다고?

그런 적은 없는데, 혹시 궁정백의 입김이 있었던 걸까.

교무처장은 그 이후로도 더 질척이다가 떠나갔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오베른에게 물어봤다.

'궁정백이란 그 노인네가 그렇게 대단해?'

'대단한 권력자이지요. 나이 많은 두 공작을 제외하고는 가장 권세가 강할 겁니다.'

돈은 많아 보였다.

그런 자가 필리 왕자를 밀고 있다는 거지.

오베른을 곁에 붙여서.

음.

흐음....

'왕의 스승이라.'

왕자의 스승도 사실 어감이 나쁘지는 않은데.

왕의 스승은 어감이 더 좋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궁정백께서 보상을 약속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보상이라고?'

'예, 삼 왕자 저하를 잘 지도한다면 마땅히 포상하겠다고 하셨죠. 뭘 준다고는 안 하셨지만 베푸는 게 후하신 분이니 기대해도 될 겁니다.'

그의 창고 안에 있던 아티팩트들이 머릿속에서 좌르르 스쳐 지나갔다.

미처 챙기지 못했던 탐나는 물건이 많았더랬다.

그런 걸 요청하라고 시킬까.

'뭐, 이제 필리 왕자님이 저를 미워하실 것 같긴 합니다만.'

'뭘, 한 번 혼낸 거 가지고.'

의욕이 약간 솟아 버렸다.

그 왕자를 아마엔처럼 착한 제자로 만든다면, 언젠가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영감님, 왕국의 문장 기억나요?'

-삼두 독수리가 뱀을 물고 있는 것 말이냐.

'네, 그 못생긴 문장.'

왕국을 상징하는 동물은 머리 셋 달린 독수리였다.

그것이 뱀 한 마리를 물고 있는 게 왕국을 상징하는 국장이다.

흉참하기 그지없고 미적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림이다.

그걸 바꿔 달라고 해야지.

'왕관을 쓴 수정뱀으로...!'

그러면 왕국의 기사들은 내가 그려진 문장을 달고 다녀야 할 것이다.

심지어 군터마저도.

무시무시한 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야심만만한 계획을 들은 펠레리안의 반응은 맥이 없었다.

-국사(國師)가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이 겨우 그런 것이냐.... 너는 참 늘 내 상상을 뛰어넘는구나.

'헤헤, 진짜 발상 좋죠?'

-...그래 그렇다고 하자꾸나.

생각해 보니까 나나루크도 고블린 왕국을 만들 텐데.

거기 문장에도 나를 넣어 달라고 부탁해 봐야겠다.

-그 왕자가 순순히 굴까. 호된 꼴을 보았으니 피해 다닐 수도 있겠지.

하긴, 그 지적도 일리가 있다.

아무리 오베른이 신경 쓴다고 해도, 선생이 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다.

아카데미 생활에 있어 교우관계가 아주 중요할 텐데, 성격이 그래서는 친구 하나 만들 수 없겠지.

'오베른, 내일 그 왕자놈 면담 한 번 더 하자.'

'예에...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침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지팡이에 매달려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왕자는 혼자 앉아 있지 않았다.

무려 두 명이 그 옆에 앉았는데, 왕자를 그리 어려워하지 않고 격의 없게 장난까지 치고 있었다.

어느새 왕자에게 친구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그 친구들은 내가 아는 인물들이었으니.

아마엔과 라니아였다.

'아마엔 이 복덩이 녀석!'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뒀다.

* * *

옛말에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다.

왕과, 스승과, 어버이의 은혜는 같다는 뜻이다.

그 과정이 사실 '어쩌다 보니'에 가깝지만.

나는 아마엔을 제자로 삼았다.

그렇다면 나는 스승으로서 아마엔에게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마치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아버지가 자식을 지키려는 것처럼, 나는 아마엔을 지키고 가르쳐야 한다.

비록 내가 워낙 바쁜 뱀이기에 늘 그의 옆에 붙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났으면 스승된 자로서 아마엔이 바라는 마법적 지식을 전수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강의가 끝나고, 나는 오베른을 시켜 아마엔 삼총사에게 다가갔다.

"히에엑!"

필리 왕자가 경기를 일으켰다.

그때 맞았던 허벅지 다섯 대의 고통이 다시 떠오른 걸까.

오베른의 등장에 경계하는 것은 아마엔이나 라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면담 좀 하지."

그러자 왕자가 발작을 했다.

"앞으로 절대 당신과 면담을 하지 않을 거다!"

아니, 뭐 이렇게까지 질겁할 게 있나.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지금 내가 찾는 것은 왕자가 아니었다.

"필리 왕자, 그대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뭐?"

"자의식 과잉도 그럴 수가 없군."

오베른은 웃지도 않고 빈정거렸다.

그러자 왕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대신, 오베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아마엔 리들."

"아, 넵!"

아마엔이 똘똘하게 대답했다.

"잠시 면담 좀 하지."

그렇게 말한 오베른은 내가 감겨 있는 지팡이를 살짝 들어 보였다.

의아해하던 아마엔이 활짝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곧바로 우리를 따라왔다.

필리 왕자와 라니아는 당황해하더니, 쭈뼛거리면서 뒤따랐다.

오베른이 아마엔을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교수연구실 앞까지 도착했을 때.

"따라온 것은 좋지만, 면담은 일대일이다. 앞에서 대기하도록."

왕자와 라니아는 복도 앞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아마엔만 오베른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교수님...?"

"후우."

오베른이 한숨을 내쉬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소리 차단 마법으로 문밖의 녀석들이 엿듣지 못하게 방비한 뒤, 오베른은 의자에 휙 드러누워 기댔다.

"아이고. 힘들어라."

카리스마 넘치던 천재 교수가 이렇게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니, 아마엔이 살짝 당황했다.

오베른이 저러는 건 다 내가 미리 말해 뒀기 때문이다.

아마엔에게는 약간의 비밀을 공개할 거라고.

나는 지팡이에서 내려왔다.

아마엔의 입이 쩍 벌어졌다.

"스승니임!"

"사아악!"

아마엔이 내게 달려왔다.

나도 그에게 폴짝 뛰어올랐다.

스승과 제자의 해후는 따스한 포옹을 동반했다.

"스승님이 맞죠, 왜 이렇게 작아지신 거예요."

"사사삭, 사악, 삭!"

*「거대화lv2를 사용합니다.」

거대화를 이용해 몸을 더 키웠다.

"아하, 크기를 조절하실 수 있었지."

그게 아니라 진화한 거야.

나는 얼른 펜을 꺼냈다.

'잘 지냈니 아마엔. 많이 컸네.'

"많이 컸죠. 친구도 생겼어요."

'쟤들 말이지? 잘했어. 로일은?'

"아버지는 지금 ...."

나와 아마엔은 도란도란 담소를 나눴다.

아마엔도 내게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왜 오베른 교수님의 지팡이로... 계신 거예요?"

'아, 오베른 말이야?'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오베른도 긴장한 태도를 했다.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는 걸 각오한 것 같았다.

'내 파트너야. 여기 있는 동안 서로 돕기로 했어.'

"와아... 스승님의 파트너.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노예라는 말 대신 파트너라는 표현을 썼다.

오베른의 면을 세워 주기 위한 게 맞았는데, 오베른은 크게 놀란 기색이었다.

조금 감동을 먹은 것 같기도 하다.

'마법은 많이 배웠니?'

"열심히 했죠! 안 그래도 부탁드리고 싶었는데. 제 마법 실력을 좀 봐 주시면 안 될까요?"

아마엔은 내 직전 제자이다.

당연히 봐 줘야겠지.

그러던 중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글로 계속 필담을 나누는 것도 귀찮고.

새로운 능력이 생겼던 참이다.

'손을 내밀어 봐라, 아마엔.'

"이렇게요...?"

나는 거대화를 해제한 뒤, 아마엔의 손 위로 올라갔다.

*「연결의 왕관lv1을 사용합니다.」

아마엔은 느낌이 묘한지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성공했습니다.」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연결에 성공했다.

'내 목소리 들리니?'

"헛, 스, 스승님이에요?"

내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되어 제법 감동한 눈치였다.

벅차오른 듯한 눈빛을 뒤로하고 아마엔의 마법을 봐 주려던 순간이었다.

*「연결 대상 '아마엔 리들lv14'의 관계가 '제자'로 정립되었습니다.」

*「연결의 왕관lv1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어라.

148. 재능뱀

관계가 정립되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오베른에게 사용했을 땐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연결 대상 오베른 그리모아르의 관계가 '노예'로 정립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는 들은 적이 없는 것이다.

아마엔이 새삼스럽게 지금에서야 내 제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아마엔과 내게는 어느 정도 이상의 깊은 관계-스승과 제자라는-가 있고.

오베른과 내 관계는 아직 그 정도로 깊지 않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연히 계약서로 맺어진 고용 관계니까.

흠, 조금 섭섭하긴 하군.

하여튼, 아마엔과의 관계가 이점으로 나타난 것 아닐까.

연결의 왕관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뭐가 달라졌는지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아마엔, 스승님의 기술 중에 제일 배우고 싶었던 게 뭐니.'

"아, 당연히...."

광선과 거대화가 그 답변이었다.

이 안에서 잘못 거대화했다가는 천장이 부서질 수도 있으니, 나는 아마엔에게 광선을 빌려주었다.

*「연결의 왕관lv1을 사용합니다.」

*「스킬 '광선lv3'을 하루 간 공유합니다」

아, 확실히 다르다.

'하루 간'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즉, 연결의 왕관을 해제한다고 해도 아마엔은 하루 간 광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신 내가 소모한 마력이 어마어마했지만.

이건 꽤나 활용도가 높은 것 같다.

어쩌면.... 이실이에게 거대화를 쓰게 할 수도 있겠는데.

머리가 핑핑 돌아갔지만 우선 눈앞의 아마엔에게 집중했다.

"스, 스승님...."

'한번 써 봐. 나한테.'

아마엔은 나를 믿고 광선을 쐈다.

피잉!

나는 단검 여명을 꺼내서 그 광선을 튕겨 냈다.

천장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렸다.

"와아...!"

'하루 간 선물이야. 마음에 안 드는 놈을 만나면 엉덩이에 구멍을 뚫어 주렴.'

나는 아마엔의 상태창을 살폈다.

연결의 왕관을 쓰면 굳이 집중할 필요도 없이 쉽게 상대가 들여다보인다.

──────────────

[아마엔 리들lv14]

[특성]

[천재], [조숙함]

──────────────

아마엔의 레벨은 14. 왕자가 20이었으니까 그보다 낮지만, 사실 다른 학생들과 비교하면 높은 편이었다.

레벨은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마물을 잡아야지만 오른다.

이 세상에선 마성이라는 것이 경험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벨이 오를수록 힘이 직관적으로 강해지냐.

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게임 속 세상도 아니고, 레벨이 오를 때마다 힘스탯이 오르는 식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다만 마물의 경우에는 진화를 하기 때문에 레벨을 올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아마엔은 인간이다.

인간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기량을 갈고닦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기량의 정도는 스킬로 구현화된다.

──────────────

[스킬]

[초급원소마법:불lv9], [초급원소마법:물lv8], [초급원소마법:흙lv9], [초급원소마법:바람lv10], [투명한 손lv10]....

──────────────

아마엔이 내 제자라는 것은 그가 익힌 마법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초급원소마법을 기초로, 투명한 손 마법을 통한 염동마법 입문.

내가 마법을 배운 경로와 똑같다.

펠레리안이 도와주긴 했지만 그렇기에 아마엔은 내 제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성취를 들여다본 내 감상은....

'아마엔.'

"네."

'마법을 열심히 수련했구나!'

아마엔이 환히 웃었다.

그랬다.

저번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비해서 원소마법의 숙련도가 몹시 상승했다.

즉, 그때 이후로도 마법을 열심히 수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보았을 때도 느낀 바지만. 확실히 뛰어난 재능이다.

그 눈 높은 펠레리안도 아마엔의 실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마엔이 엄청난 노력가라는 사실이다.

이 성과는 열심히 마법을 수련하지 않는다면 이룰 수 없었으리라.

즉 아마엔은 '노력하는 천재'라는 뜻.

'하지만 직접 마법을 쓰는 것과 그저 스킬의 레벨을 올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 원소마법들 한번 써 봐.'

아마엔에게 그리 말하고 오베른도 아마엔 뒤로 오게 했다.

아마엔은 방의 한가운데에 서서 마법을 시전했다.

이실이와 교감을 썼을 때처럼.

아마엔이 마법을 쓰는 게 내게도 느껴졌다.

*「초급원소마법:불lv9를 사용합니다.」

*「초급원소마법:물lv8를 사용합니다.」

*「초급원소마법:흙lv9를 사용합니다.」

*「초급원소마법:바람lv10를 사용합니다.」

조금이라도 손이 거칠다면.

출력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방 안이 엉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마엔은 그것을 섬세하게 제어해 냈다.

바람이 흙을 싣고 움직이고, 물이 그것이 감싸 흩어지지 않도록 묶어 두었고.

그 혼합물이 일렁이는 불꽃들 사이로 휘몰아쳤다.

참으로 안정적인 마법 운용법이었다.

-머지않아 중급의 경지에 접어들겠군.

그것이 펠레리안의 한 줄 평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까지 떠올라 있었다. 아마 내 표정도 비슷하겠지.

" ...얼마나."

갑자기 입을 연 것은 아마엔의 마법을 지켜보던 오베른이었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와 꽤 긴 시간을 함께한 바, 지금 저 표정은 연기가 아닌 것 같았다.

"마법을 배운 지는... 얼마나 된 거지?"

"아... 4년 정도 된 것 같아요."

당황한 아마엔이 그리 말하자, 오베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군."

"근데 원소마법을 시작한 건 1년 전이고, 실제로 스승님을 만나서 제대로 배운 건 넉 달 정도 된 것 같아요."

"뭐, 뭐라고!"

오베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쟤 왜 저래, 싶어서 보고 있으니. 펠레리안이 코웃음을 쳤다.

-저 자식, 자신과 저 꼬맹이의 재능을 비교하고 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아하, 그래서 저렇게 우울한 표정이구나.

지금 오베른의 마법 수준은 사실 나보다도 훨씬 높다.

하지만 그가 초급원소마법을 마스터하는 데에는 1년보다 훨씬 긴 시간이 소요되었으리라.

음, 저리 쳐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사악!"

내가 호통을 치자 아마엔과 오베른 둘 다 나를 보았다.

나는 아마엔에게 말했다.

'열심히 하긴 했지만 자만하지는 말아라. 나도 마법을 배운 지 1년도 안 돼서 4대원소마법을 전부 중급 이상까지 습득했어.'

중급에 진입한 게 한 달도 안 됐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오베른도 볼 수 있도록 굳이 글로 적어서 말했다.

"역시 스승님...."

"1년도 안 돼서라니...."

중급과 초급의 벽은 확실히 두껍다.

아마엔도 오베른도 감탄했다.

'그리고 나는 마검사다. 아마엔, 너 내가 오러 쓰는 거 봤지?'

"오러라고!"

오베른이 참지 못하고 소리 내 경악했다.

"네 봤어요!"

아마엔이 저렇게 확실히 말하니까 오베른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서로 재능의 우열로 도토리 키 재기 하지 말고, 앞으로도 묵묵히 열심히 하도록.'

남들과 과하게 비교하는 것은 제 살 깎아 먹기나 다름없는 법이다.

흐뭇하게 제자와 노예를 보고 있으려니, 펠레리안이 한 마디 던졌다.

-네 제자한테 추월당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사실 펠레리안의 말처럼 위기감이 느껴진다.

얼른 중급원소마법 레벨을 올리든지, 좀 더 고급 마법을 배워 둬야겠다.

나는 아마엔의 마법을 조금 더 봐 줬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그런데 그 싸가지 없는 왕자하고는 어떻게 친해진 거니?'

"아 필리요?"

아마엔이 필리 왕자와 친해지게 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들어 보니, 인연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었다.

'호오 그렇구만....'

그렇단 말이지.

아마엔을 통해서 왕자를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 * *

라니아는 교수연구실의 문에 귀를 대고 있었다.

뒤에서 필리 왕자가 그 모습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아무 소리도 안 들...."

"쉿!"

왕자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라니아는 집중을 하는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곧 한숨을 쉬고 귀를 뗐다.

"하나도 안 들려. 마법을 써서 소리를 막은 것 같아."

"벌써 들어간 지 한 시간은 됐어!"

아마엔이 1대1 면담을 위해 방으로 들어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나올 기색이 없었다.

사실 그냥 돌아가도 되는 일이었지만, 이들은 아마엔이 걱정되어서 그러지 못했다.

왕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교수가 아마엔을 두들겨 패고 있을지도 몰라."

"에이, 설마!"

라니아는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지만, 왕자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그놈 아주 나쁜놈이더만. 어쩌면 우리가 아마엔을 구해야 할지도...."

라니아가 보기에 왕자는 틀림없이 경증의 피해망상과 불안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생각을 바보 취급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좋은 대처가 아닐 터.

라니아가 좋게좋게 말해 주려는 순간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아마엔이 나왔다.

그가 나오기 전까지 기척은 전혀 없었기에 라니아도 왕자도 깜짝 놀랐다.

"너, 너, 괜찮아?"

왕자가 그리 물었다.

"괜찮냐고...? 당연히 괜찮지."

아마엔은 헤실헤실 웃었다.

두들겨 맞기는커녕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듯한 모습이었다.

"엄청 칭찬받았어. 하하."

"칭찬을 받았다고? 그 교수가?"

"뭐... 그렇지."

아마엔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제 보니 입안에 사탕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캔디까지 받아 온 건가.

"무슨 꿍꿍이인지...."

왕자는 짐작 가는 게 있었다.

그가 면담을 거부하니까 아마엔을 구슬려서 끌어들이려는 속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절대 면담 안 한다!'

그리 결심하던 중.

문이 열리더니 오베른이 고개를 내밀었다.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가. 잘됐군. 너도 면담을 하자."

"싫다!"

왕자가 그리 거부하자. 오베른은 눈을 찌푸렸다.

"그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자의식이 지나치군... 라니아 마르테인."

"어, 저요...?"

"들어와라."

라니아는 자신을 가리키며 영문 모를 표정을 했다.

하지만 오베른은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았고, 그녀는 얼떨결에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복도에는 이제 아마엔과 필리 왕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젠장... 대체 뭐야!"

필리가 절규했다.

도저히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마엔에게 안에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물어봤지만, 아마엔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친구의 정에 호소해도 안 통했고 왕자의 권위를 내세워도 무시당했다.

결국 라니아가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는데.

나온 라니아에게 얼른 물어보니.

"무슨 얘기 했어?"

"아... 비밀."

라니아마저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 역시 필리 왕자가 뭐라고 해도 마음을 꺾을 타입이 아니었다.

잠시 후 오베른이 나와서 묻기를.

"필리 왕자, 면담을 할 텐가?"

"...."

이번에는 도저히 왕자도 싫다고 할 수 없었다.

"제길!"

그는 그리 투덜대면서도 오베른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 * *

하여튼 말이야.

꼬마애들은 엄청 금방 친해진다.

라니아, 아마엔, 필리 왕자 셋이 함께 붙어 다니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들이 뭐 그리핀도르 삼총사도 아니고. 성비 구성도 똑같이 짜서 말이야.

대체 언제 그리 빨리 친해졌을까.

어른이 되면 새 친구를 사귀기는 무척 어려워지는 법이다.

그건 내가 아주 잘 안다.

...생각해 보니까 나는 어렸을 때도 친구 사귀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네.

나도 아마엔이나 라니아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니아에게도 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삼삼한 사과를 했다. 예전에 라니아가 줬던 단검을 박살 냈기 때문이다.

라니아는 떨떠름하게나마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다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라니아와 친구들을 잘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필리 왕자.

경계심으로 똘똘 뭉친 그에게 내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베른의 입을 빌려 조금 떠 보았다.

그러자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잘 해야 해."

그 한 마디가 처음으로 필리 왕자가 제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다.

"잘 해야 해, 어머님께 그리 약속했어. 학교에서, 잘 하겠다고."

그런 자식이 첫날부터 사고를 치려고 했냐.

오베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잘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요?"

둘만 있을 때는 오베른도 존대를 했다.

"잘...."

"비교 대상이 있습니까? 누구보다 잘해야 한다거나."

"...."

필리 왕자가 오베른을 노려봤다.

하지만 눈싸움으로 오베른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별로 없으리라.

왕자는 금방 눈을 깔았다.

그런 그에게 오베른은.

대신, 아주 진한 명대사를 던졌다.

"저하께 각오만 있다면, 제가 그리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이야."

"2왕자 저하보다 더 낫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해 드리지요."

"지금 왕족을 상대로 장난치려는 건 아니겠지.... 불경죄는 사형이야."

오베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여기서 차마 대답하지 못할 만큼 소심한 인간이라는 걸.

그러나 왕자에게는 오베른의 모습이 진중하게만 보였나 보다.

잠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면담은 그렇게 끝났다.

내가 파악하기로는, 3왕자와 2왕자가 서로 대립하는 형국 같은데.

2왕자는 어떤 녀석일까.

3왕자랑 비슷한 망나니일까.

그것을 알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면담일로부터 이틀 뒤.

'던전과 고대문자 해석'이라는 강의를 위해 실습을 나갔을 때였다.

아마엔 삼총사를 비롯해 열 명의 학생을 이끌고 스쿨의 후원을 찾았다.

그런데, 우연인지 착오인지 모르겠지만 그곳엔 이미 다른 학생들이 있었으니.

"어라, 이번 수업에서는 저희가 사용 신청을 냈는데요."

"이쪽도 승인을 받았습니다만."

인스턴트 던전의 사용 신청이 겹친 것이다.

그런데, 상대 교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삼학년이기도 하고, 2왕자 저하가 계시니 그쪽에서 양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건방지기는.

가라 오베른.

"거절하겠습니다."

왕자는 이쪽에도 있다!

149. 역천의 야망

에메랄드 스쿨은 명실상부 솔리온 왕국 최고의 명문 아카데미이다.

그렇다고 입학하는 학생들이 모두 다 천재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같이 최소한 수재 소리는 들을 법한 인재들이다.

재능이 떨어질수록 그 신분은 높다.

왕국에서 신분이 높다는 사실은, 그저 배불리 먹고 비싼 옷을 걸칠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언젠가 손가락질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고.

그 부모는 권력자거나 막강한 마법사, 고명한 학자, 성직자, 혹은 무인이라는 뜻이다.

그런 뛰어난 아이들이 에메랄드 스쿨에 입학하고.

뛰어난 교수진들 아래에서 수학하게 된다.

1년만 있어도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3학년쯤 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미 부적응자나 쭉정이들은 걸러진 지 오래이다.

에메랄드 스쿨의 커리큘럼은 그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하는 게 아니었다.

실전적인 '훈련' 또한 있었으니, 저 앞에 있는 3학년들은 전부 그것을 겪어 낸 이들이다.

우선 나이가 더 많다는 것부터 다르다.

성장기이기에, 최소한 한 뼘 이상씩은 키가 컸다.

1학년들은 긴장한 얼굴인 데 반해 3학년들은 여유가 넘쳤다.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바라보거나, 서로 수군대며 킬킬대는 자도 있었다.

"저기 키 큰 남자. 백금 기사단 단장의 아들이야."

네미 라이터스가 수군댔다.

그녀가 펜으로 가리킨 소년은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 보였다.

떡 벌어진 가슴근육 하며, 덩치만 본다면 어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 옆에, 눈 찢어진 여자애 있잖아. 그래, 머리 올백으로 넘긴 언니. 저 언니 엄마가 그 유명한 가시나무 마녀고."

모든 1학년이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네미 라이터스 같은 경우는 오히려 살짝 흥분한 기색으로 그렇게 수군거리는 것이다.

듣고 있는 라니아도 많이 긴장하지는 않았다.

"넌 그런 걸 어떻게 다 아는 거니?"

"그런 거라니, 이 정도 정보력은 기자 지망생한테 당연한 일이지."

네미의 아버지 바우멧 라이터스는 '가십거리를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 형편없는 기자'라는 평가를 듣고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딸에게는 존경받는 기자인가 보다.

하지만 기사단장의 아들이니 마녀의 딸이니 하는 것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 저 3학년 중에 있다.

2왕자, 레온 아데네스 솔리온 왕자.

그가 누군지 네미에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어쩐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키가 크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용모부터 눈에 띈다.

강렬한, 마치 태양을 닮은 금발 때문이다.

아마엔의 크림색 금발과는 또 달랐다.

건강한 주황빛 윤기가 일렁이는 묘한 금발.

지금 국왕의 머리 색과 똑같다.

콧대가 오똑하고, 속눈썹이 긴 눈은 속내를 쉽게 알 수 없게 한다.

굳게 다물린 입에서는 강단 있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족을 상징하는 금색 단추에, 붉은색 망토를 등에 걸고 있다.

붉은 망토는 무척 눈에 띄는 편인데 그게 몹시 어울렸다.

"왕자야. 레온 왕자. 황금 왕자."

'황금 왕자'라는 별명이 붙기에는 생각보다 앳되어 보인다.

필리 왕자보다 두 살쯤 더 많을까.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필리보다 훨씬 더 안정되어 보인다.

다른 3학년들이 그를 호위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네미는 처음으로 본 2왕자의 인상을 수첩에 적었다.

'당당해 보임, 잘생겼음. 이미 3학년들을 장악한 듯함? 조사 필요.'

그리고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1학년 동기들을 슬쩍 돌아봤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교가 되어도 너무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3학년이 뭐 한마디 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겁들을 먹은 모습이었다.

벡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랬다.

라니아, 칼, 아마엔 정도나 침착한 모습일까.

특히 3왕자의 표정이 아주 볼 만했다.

네미는 자신이 적은 3왕자의 인상을 다시 살폈다.

'성격 안 좋음, 겁 많음, 설치류 같은 예민함? 다크서클이 심함.'

그리 영양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3왕자의 성격을 잘 보여 주기도 하는 메모였다.

다른 누구에게 보였다가는 불경죄로 끌려갈 만한 내용도 있다.

네미는 거기에 한 문장을 추가했다.

'2왕자를 아주 무서워함.'

2왕자와 3왕자의 사이가 나쁜 것은 사실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사이가 안 좋은 것도 다양한 유형이 있을 텐데, 필리의 표정을 보면 느낌이 온다.

2왕자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다.

흘금흘금 곁눈질을 하다가 2왕자가 이쪽을 돌아보니 얼른 고개를 피한다.

명백히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그런 필리의 모습을 보고, 2왕자는 픽 비웃는다.

그 미묘한 기류를 알아챈 네미는 희열을 느꼈다.

'재미있어!'

역시 그녀의 꿈은 기자가 맞았다. 그것도 유명인들의 가십을 다루는 잡지의 기자.

"억지가 심하시군요."

"억지를 부리는 것은 그쪽 아닌가? 1학년 강의라고 해서 인스턴트 던전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높은 학년이 우선권을 가지는 게 관례입니다."

"들어 본 적도 없는 관례군."

교수들이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렸다.

인스턴트 던전이란 에메랄드 스쿨이 품고 있는 여러 신비 중 하나이다.

스쿨의 후원에는 땅속으로 이어지는 작은 동굴이 있다.

동굴의 주변에는 금과 타일로 구성된 복잡한 마법진이 있는데, 자그마치 1,000년은 된 마법진이라고 한다.

그 마법진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니, 동굴 내부를 던전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단순히 미로나 함정만 구현한 게 아니라, 실제로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던전의 모습을 제대로 본떠서 말이다.

마탑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달려들어 분석해 본 바. 지금은 따라 할 수조차 없는 고대의 마법이라고 한다.

보름에 한 번 내부가 뒤바뀌는데, 어떤 던전으로 바뀔지는 원래 '완전 랜덤'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마법진을 조작하여 던전의 난이도를 바꿀 수 있게 되었다.

1년에 수십 명씩 사상자를 내던 수상한 동굴은, 1년에 한 자릿수 이하의 사상자만 냈다.

그 이후로는 이렇게 에메랄드 스쿨에서 교육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 쪽에는 2왕자 저하가...."

"자꾸 왕자를 들먹이는데."

오베른 그리모아르 교수는 차갑게 말했다.

"이쪽에도 왕자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교수로서 내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어."

그 오베른 교수라면 물러나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학기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사용 신청을 해 두었다. 당신 수업에서는 다음에 사용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냉정하던 교수가 저리 으르렁대며 맞서는 것을 보니.

어째선지 1학년 학생들은 든든함을 느꼈다.

특히 필리 왕자가 그랬다.

2왕자의 입지는 3왕자보다 훨씬 높다.

하지만 오베른은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왕자 저하."

그때, 네미 라이터스가 필리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뭐, 뭐야."

"그런데 말이에요, 저 교수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에요."

오베른과 맞서는 3학년 담당의 젊은 교수 말인가.

생각해 보니 오베른만큼이나 젊은 것 같다.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당황한 듯한 모습이 별로 세 보이지는 않은데.

"데이먼 리치몬드, 젊은 나이에 마탑의 인정을 받은 천재 교수니까요. 오베른 교수보다 더 유명하죠."

"...하나도 안 궁금한데."

"히히."

그리고 데이먼 교수가 안경을 벗었다.

범생이 같던 인상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당신, 초임인 주제에 너무 건방지군."

"초임이고 말고가 문제인가."

"인스턴트 던전을 써 본 적도 없을 텐데."

그는 팔뚝 길이의 완드를 꺼내 휘둘렀다.

그러자 동굴 앞의 마법진이 마력을 받아 빛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고대문자가 떠올랐다.

"직접 신청했다고 했지. 마법진의 알고리즘 설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읽을 수나 있나?"

안경을 벗은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오베른에 밀리지 않는 분위기를 풍긴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고대어를 제대로 모르면 인스턴트 던전을 다룰 수 없어."

오베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의 상징이나 다를 바 없는 수정뱀 케인.

그것을 꺼내 마법진을 향해 내밀었다.

"해석 마법이라도 쓰려고? 그런다고 될 것 같 ...."

"연대 400. 내가 요청한 설정 사항이군."

"뭐?"

"규모는 150헥터, 함정도 구현되었으며."

마법진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를 읽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내 요청사항과 당신의 요청사항이 둘 다 섞여서 반영되었군."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던 건가?"

"그리 보이나?"

"...."

학생들은 오베른이 무엇을 말한 건지, 데이먼 교수가 왜 저리 놀랐는지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오베른이 아주 탁월하고 비상한 행동을 했음은 눈치챘다.

"우리 교수님 멋지다!"

네미가 갑자기 소리쳤다.

칼과 벡스를 비롯한 이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네미를 돌아봤다.

"박수...."

필리 왕자가 갑자기 그리 말한 것은 네미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바, 박수쳐!"

필리로부터 시작된 박수 소리가 점점 커졌다.

짝짝, 짝짝짝짝-

대부분의 학생들은 얼떨결에.

아마엔과 네미 정도만 열성적으로 손뼉을 쳤다.

데이먼 교수와 3학년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교수는 다른 누구가 아닌 2왕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상황이 우습게 되었군요, 교수님."

이쪽과 달리, 교수가 2왕자를 알아모시는 것 같았다.

"같이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같이요?"

"네, 인스턴트 던전에 데이먼 교수님과 저 교수님의 요청사항이 섞여서 반영되었다면 말이에요."

"허어, 자비로우면서도 현명한 발상이십니다. 다만 저쪽에서 받아들일지...."

"제가 직접 부탁드리지요."

2왕자는 저벅저벅 오베른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

2왕자, 레온은 오베른이 아무 대답도 안 하기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을 티 내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상황이 조금 난처하게 되었습니다만, 부왕께 관용은 왕자의 미덕이라 배웠습니다."

"...."

"이에 그대에게 제안합니다. 인스턴트 던전을 같이 이용하는 게 어떻습니까."

왕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자비이며 배려였다.

실제로, 그를 따르는 3학년 학생들이 뒤에서 짝짝 박수를 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이 뻣뻣한 교수도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겠지.

그리 생각했는데.

인사하려는 듯 숙여지는 오베른의 고개가 우뚝 멈췄다.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슬쩍 보더니.

아주 잠깐 머뭇거리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방금 한숨을 쉰 건가.

"이건 또 필리 왕자보다 더하군."

레온은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설마 3왕자랑 그를 비교한 건가.

"왕자 레온 아데네스 솔리온. 그대는 교수가 아니라 학생이다. 어떻게 가르치고 말고를 학생이 결정하나?"

오베른의 차가운 말투가 레온 왕자의 명치를 후벼 파듯 했다.

"주제넘는 짓 그만하고 들어가라. 그대의 교수를 불러와."

"...."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3학년 학생들과 데이먼 교수의 입이 쩍 벌어졌다.

"푸하하핫!"

그리 웃음을 터뜨린 것은 뒤에 있던 필리 왕자였다.

2왕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 *

필리 너도 이제 내 제자다.

필리가 '박수쳐!'라고 외친 순간, 나는 어마어마하게 감동했다.

아마엔을 사형으로 잘 모시고, 스승을 아비처럼 여기거라.

*「왕족이 공개적으로 연결 대상을 지지합니다.」

*「상당한 위엄을 얻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필리는 그리 왕자답지 못한 녀석이지만, 엄연한 '왕족'이었다.

그가 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평소보다 훨씬 많은 위엄을 얻었다.

펠레리안이 이 상황에 대해서 논평하기로는.

'부랑자의 충성과 기사의 충성은 그 값어치가 다른 법이다.'라고 하였다.

즉 미우나 고우나 왕족인 필리가 나를 지지하는 것은 그만큼 큰일이었다.

왕족과 엮이면서 얻은 이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2왕자 녀석은 생긴 것부터 아주 번드르르했다.

시든 배추같이 생긴 필리와는 달랐다.

나는 잘생기고 똘망똘망한 녀석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교수를 제끼고 찾아와 관용을 베풀겠다고 하니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에게 면박을 주자.

*「연결 대상이 공개적으로 왕족의 과오를 지적했습니다.」

*「그 공명정대한 모습에 다수가 감탄합니다.」

*「위엄을 상당수 얻었습니다.」

이 정도로 위엄을 쌓았으면, 이제 다른 왕관 스킬도 강화해서 써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엄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베른이 식은땀을 흘렸다.

'하아, 배가 아픕니다.'

'왜!'

'스트레스 때문에요....'

'양배추즙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다음에 양배추즙이라도 챙겨 줘야겠다.

결국 우리는 협의했다.

인스턴트 던전을 같이 쓰는 것으로 말이다.

나쁘지 않다, 저 2왕자 녀석이 얼마나 잘할지 한번 보고 싶기도 하고.

-뱀아.

펠레리안이 나를 부른 것은 그때였다.

'왜요?'

-천재적인 발상이 떠올랐다.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펠레리안은 진짜 천재였다. 오베른 같은 가짜와는 달랐다.

'무슨 발상이 떠올랐길래.'

-인스턴트 던전이 완성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 한다. 마법진으로 가까이 가 봐.

뭔지 모르겠지만, 얼른 오베른을 시켜 움직였다.

오베른은 또 한 번 배 아픈 척을 했지만, 결국 말을 들었다.

펠레리안의 지시대로 지팡이를 마법진에 가져다 대자.

-이곳의 원리는, 대충 세상에 존재하는 던전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 같다. 안에 있는 내용물을 따라 할 수는 없어도, 그 기관이며 구조는 그대로 따라 만들어지는 건데....

'그러면....'

-마법진을 조작해서. 내 던전 하나를 그대로 모사하도록 만들자고.

그게 가능한 일인 건가!

하지만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그럼 뭐가 좋은데요?'

신비한 마법으로 비슷한 던전의 구조를 만든다 해도, 그 내용물까지 완벽히 구현하는 것은 아닐 텐데.

굳이 그런 짓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 던전 중 특별한 함정이 있는 곳이 있다.

인스턴트 던전에는 대부분의 함정이 구현된다고 듣기는 했다만.

'무슨 함정이....'

-마물 소환진.

마물 소환진?

그런 게 있나 하고 얘기를 들어 보니.

-대수림에 좌표를 지정해 두어서, 위험한 마물들을 소환하여 침입자를 격퇴하는 마법이다. 그것을 잘 조정하면, 어쩌면 수백 마리 이상의 마물을 끌어낼 수 있어.

'어....'

-혼란을 일으키는 거다. 여기 왕자가 둘 있으니 이놈들을 인질로 잡고 마물들을 왕성으로 이끈다. 그리고 혼란을 틈타 왕의 신변을 확보하기만 하면 게임 끝이야.

갑작스런 이야기에 조금 당황했다.

잠깐 잊고 있었다.

펠레리안, 분명 빌런이었지.

-여태까지의 소꿉놀이는 즐거웠느냐!

'네에....'

-그럼 이제 가자, 이 왕국이! 네 손아귀, 아니 네 꼬리에 휘감길 것이다!

솔직히 조금 혹하기는 했다.

150. 10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