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100대
세상에는 타고난 선동꾼들이 있다.
말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청중의 열기를 끌어올리고.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리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펠레리안이 그런 사람인가 하면.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가라, 너는 왕국의 종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펠레리안의 제안은 분명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왕국을 접수하라니.
내가 그런 짓을 해도 될까?
이 자리에는 왕자가 둘이나 있다.
당장 혼란을 일으킨 다음에 왕궁으로 쳐들어가서, 왕을 사로잡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왕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어, 그러면 안 되는데....'
-돼!
'안 되는데....'
-된다니깐!
나도 모르게 펠레리안의 지시대로 마력을 조작하려던 순간이었다.
"스승, 아니, 교수님!"
아마엔과 그 친구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마엔은 나를 살짝 본 뒤 오베른에게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저희."
뒤에 있는 왕자는 영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적어도 아마엔과 라니아의 표정은 결연했다.
"아니, 꼭 해 보고 싶어요. 물러나실 필요 없습니다."
"음."
"열심히 해서, 꼭 저 3학년보다 잘해 볼게요."
기특한 녀석.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우당탕탕 반란 대작전을 펼치면 아마엔의 처지가 난감해질 것 아닌가.
아마엔은 이곳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열심히 배우고 싶어 하는데, 마물들을 불러내면 다치는 아이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친구도 없던 녀석에게 처음 친구가 생겼는데 그걸 망칠 수는 없는 일이지.
-참으로 유약하기 그지없는 놈이로다.
펠레리안이 방방 뛰었다.
그 SD 캐릭터 같은 모양새로 화를 내 봤자 전혀 무섭지 않았다.
-성공 가능성이 최소한 5푼은 되었을 텐데....
'...겨우요?'
이 배신자.
겨우 5%의 성공률을 가지고 나를 선동했다는 말인가.
-5푼의 확률로 왕국을 접수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지. 그러면 세상일이 그리 쉬울 줄 알았더냐!
'왜 적반하장으로 화를 낸대.'
-그리고 실패한다고 해도 너 혼자서 내빼는 것은 쉬운 일이니 부담은 적고 남는 것은 많은 유리한 도박이다.
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그의 제안은 기각이다.
그런데, 펠레리안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러면 이건 어떤 던전인가... 흐음.
인스턴스 던전이라는 이곳은 '유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장소다.
마법진을 조작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던전들의 모습을 모방하는 신비한 장소였는데.
-상상이 잘 안 되는데... 이 정도 연대에, 이 정도면.
'영감님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마법진으로 무얼 알아내겠나. 세상에 던전이 수천수만 개는 될 텐데.
그 정도로 던전이 많다고?
어떻게 된 대륙인지 모르겠다. 내가 살던 지구에는 던전 같은 게 없었으니.
-다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두 가지 설정이 섞여서 그런 것 같아.
'뭐가 이상한 건데요.'
-흐음....
펠레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끙끙대기만 했다.
원래라면 묻지 않아도 주절거릴 사람이다. 진짜 그도 잘 모르는 뭔가가 있나 보다.
"그러면, 들어가지."
오베른을 시켜 그리 말하게 했다.
어디 한번.
아직 어린 애들을 데리고 수상하기 그지없는 던전에 들어가 볼까!
* * *
땅속에 입을 벌리고 있는 던전.
우리는 그곳에 들어갔다.
3학년과 1학년이 동시에 사용하게 되었으니, 두 강의의 학생 수를 합치면 족히 스무 명이 넘는 대인원이다.
던전의 크기는 천차만별이어서, 사실 좁은 던전이었다면 함께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던전은 달랐다.
통로가 드넓었다.
신비하게도, 입구의 외양과 내부의 모습이 전혀 달랐다.
내부에는 황토색 사암으로 만들어진 벽돌이 벽을 이루고 있다.
바닥은 그보다 단단한 재질의 판석이 깔려 있다.
벽에는 기묘한 양식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다.
소규모 던전은 아닌 것 같은데. 구현도가 엄청나다.
오베른이 지팡이 끝으로 벽을 통통 두드렸다.
그러자, 천장의 벽돌 틈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떨어졌다.
손으로 받아 보니 황금빛 모래였다.
"...사막의 던전이군."
오베른이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자 데이먼 교수가 나서길.
"너무 당연해서 무가치한 소리를 하는군. 학생들도 곧바로 눈치챘을 것을."
저 자식, 난 몰랐는데.
"그런 것 말고, 사막 어디의 던전인지는 추론할 수 있겠나?"
어느 순간부터, 오베른과 데이먼은 서로 말을 깠다.
사내 분위기가 말이 아니구나.
오베른은 역시 쿨하게 대응했다.
"데이먼 교수. 가르침을 원한다면 조금 더 정중하게 질문하도록."
"...하하, 농담도."
둘은 틈만 나면 신경전을 펼쳤다.
"저 조각의 양식은 알-아람 문명의 양식이다. 눈 셋 달린 독수리를 보면 뻔하지. 그러면 알 아람 문명에서도 어느 왕조일까?"
저 데이먼이라는 녀석이 구라를 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아주 똑똑한 사람인 게 틀림없었다.
대륙 반대편에 있는 사막 문명의 조각 양식 같은 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
그에 반해 좀 더 친근한 지식 수준을 가지고 있는 오베른은 시크하게 무시하려 했지만.
"알 리가 없지. 마법 솜씨 말고는 별것 없을 것 같더니만."
이놈! 오베른은 마법 솜씨도 별것 없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 그러면 오베른이 지는 게 되기 때문이다.
오베른은 그것을 잘 알았으니, 표정관리를 하면서 내적으로 외쳤다.
'도와주세요! 뱀님!'
그리고 나도 외쳤다.
'영감님!'
펠레리안은 한숨을 내쉬고 알려 줬다.
그것을 전해 들은 오베른이 느긋하게 입을 뗐다.
"얕은 식견이로군. 애초에 알 아람이 아니다."
"...학생들이 모르는 이야기라고 어깃장을 놓을 생각인가."
"저건 독수리가 아니야. 검은 매이지. 그리고 알 아람 시대의 독수리 부조는 양쪽으로 날개를 펼친 형상이다. 저건 한쪽 날개만 묘사했고. 알 아흐랍 문명의 부조이기 때문이다."
"자신만만하게 말한다고 다 맞는 소리는...."
"데이먼 리치몬드 교수."
오베른이 우뚝 멈춰 섰다.
큰 신장 탓에, 오베른이 데이먼을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었다.
"슬슬 성가신다."
"...."
"그만 이야기하지. 함정이 나타났으니."
훌륭한 마무리.
오베른이 지팡이를 들었다.
나도 마법 수련을 할 겸. 그리고 오베른은 무영창 마법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척하기 위해서.
마법은 내가 사용했다.
*「중급원소마법:물lv2를 사용합니다.」
거대한 물 덩어리가 허공에서 생성되었다.
"영창도 없이...."
"마력의 흐름을 느끼지도 못했어."
마법의 길을 걷는 3학년들이 감탄했다.
데이먼이 이를 악물었다.
위엄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들린다.
이래서 겉모습이 중요한 법이다.
눈앞의 바닥에 물 덩이를 날리자.
퍼엉!
물 폭탄이 터지고, 순식간에 물이 바닥에 흡수되었다.
단단한 돌바닥으로 보였던 것이 훅 꺼졌다.
모래로 이루어진 함정이었다.
저 꺼진 바닥 아래로 뾰족뾰족한 창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아주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함정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저 위를 지났다간 그대로 빠져서 꼬치구이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 옛날의 코카트리스처럼!
"마무리가 아쉽군."
기어코 데이먼 교수가 한걸음 나서서 마법을 영창했다.
짧은 완드에서 꽤나 큰 마력이 휘몰아쳤다. 데이먼 교수의 마력 보유량도 범상치 않은 듯하다.
"페룸 인- 벤툼!"
멋들어진 영창과 함께, 그의 완드에서 투명한 칼날 같은 게 쏘아졌다.
저 아래 박혀 있는 창들을 향해.
카드드드득!
바람의 칼날이 창날 함정을 무력화한 것이다.
그 여파로 흘러내린 모래가 그 위를 뒤덮었다.
솔직히 제법이었다. 오베른보다 훨씬 더.
"와아아!"
이번에는 1학년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박수를 치는 녀석 중에는 아마엔도 있어서, 나도 모르게 찌릿 노려봤다.
그가 이렇게 함정을 무력화시킨 이유가 있었다.
"지금 남은 함정은 세 개."
"네 개다."
두 교수는 함정 중 치명적인 것들만 찾아 꺾어 두었다.
나머지는 학생들이 직접 연구하고 분석해서 돌파한다.
남은 함정 중에도 제법 위험한 것은 있지만. 이곳은 그 정도 위험은 용인되는 세상이다.
"처음은 누가 할 테냐. 3명 정도가 괜찮겠군."
오베른이 그리 묻자. 당당하게 손을 드는 학생이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2왕자 레온이었다.
조금 전, 오베른은 그에게 제대로 면박을 주었다.
감정이 상했을 법도 하지만 저 미소에는 조금의 균열도 없었다.
"저희가 보좌하겠습니다."
"저도요."
2왕자가 나서자 녀석의 따까리들도 당연하다는 듯 자원했다.
오베른이 눈을 찌푸리며 더 지원할 사람 없냐고 물어보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하긴, 왕자와 그 심복들이 나섰는데 누가 손을 들까.
그리하여 레온 왕자, 뭐시기 기사단장의 아들, 마녀의 딸내미가 나섰다.
시선이 주목되었다.
필리와 달리, 레온 왕자는 누가 봐도 왕자같이 잘생겼다.
기골도 장대한 것이 나중에는 오베른이나 군터처럼 커질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전생에 키가 작은 편이었다.
뭐 불만은 없었다만,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어떨까가 궁금하긴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기사단장 아들이 왕자에게 도끼창 한 자루를 건넨 것은.
뭐, 갑자기 도끼창을 왜 들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함정 중에서는 손으로 건드리기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도끼창일까.
난 도끼창을 싫어한다.
그 옛날, 도끼창으로 메두사맘의 목을 뎅겅 자른 군터 때문이다.
'오베른, 쟤 왜 갑자기 도끼창을 드는 거야?'
별생각 없이 그리 질문했는데.
'레온 왕자는 강철의 제자이기 때문이죠.'
'뭐?'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강철이면 군터?'
'예에, 그렇지요.'
'군터 그 자식의 제자라고!'
설마, 설마 그랬던 건가.
군터가 유명한 기사인 것 같기는 했으니까... 음,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다.
'군터 경과 아는 사이입니까?'
'내 앞에서 그놈을 경이라고 높여 부르지 마라. 그놈은 내 라이벌이자 숙적이야.'
'...그런 관계셨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옆에서 펠레리안이 핀잔을 줬다.
-그놈은 네 존재도 모를 텐데. 세상에 그런 라이벌 관계도 있었군.
싹 무시해 주었다.
그래, 군터놈의 제자란 말이지.
실력이 어떤지 한번 보자.
──────────────
[2왕자 레온lv41]
[이명]
[황금 왕자]
[특성]
[영특함], [냉혈]
──────────────
저거 레벨이 왜 이렇게 높아!
게다가 이명까지 있었다.
황금 왕자라니, 멋지다.
냉혈이라는 특성이 군터와 어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스킬을 보니 확실히 군터와의 연관성이 느껴졌다.
──────────────
[스킬]
[호령lv2], [발라리안 도끼창술lv13]...[천뢰령lv1]
──────────────
천뢰령까지!
얘 앞에서는 천뢰령을 쓰면 안 되겠다.
군터와 천뢰령을 쓰는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저하, 제가 마력탐지를 쓰겠습니다."
마녀의 딸내미가 무언가 중얼거리자, 곧 두 눈이 푸르게 변했다.
그리고 그녀가 저 천장의 한 지점을 가리키자 기사단장의 아들내미가 나섰다.
단창 한 자루를 뽑아 들더니, 천장의 그 지점으로 던진 것이다.
창이 매섭게 날아갔다.
콰아앙!
단창이 천장에 박혔다.
감탄할 만한 일격이다.
기사단장의 아들도 내공을 수련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2왕자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제발 발 헛디뎌서 넘어져라.'
군터의 제자가 망신을 당하면 좋겠다는 소박한 희망을 가졌다.
설마 거기서 2왕자가 그리 외칠 줄은.
"천뢰령-!"
기술명을 말하다니, 혼자서 무협지를 쓰고 있다.
하늘이 막혀 있는 지하에서 왜 천뢰령을 쓰는 건가 싶었는데.
도끼창에서 푸른 섬전이 튀기고....
쩌저정!
굉음과 함께 전격이 튀어 나갔다.
바깥에서 쓰는 것에 비해 위력의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뱀, 눈 크게 보고 배워 둬라!
펠레리안이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나는 이미 마력 탐지를 이용해서 녀석이 하는 짓을 속속들이 살펴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있었으니.
-축전이 가능했구나! 이러면 원거리로도 사용할 수 있겠어. 마치 전격 마법처럼.
축전(蓄電). 즉 천뢰령은 전격을 모아 두었다가 방출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건 연구할 가치가 있다.
왕자의 도끼창에서 뻗어 나간 전격이, 천장에 박힌 단창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천장 안에 숨겨져 있던 기관들을 일제히 망가트렸다.
슈우우욱-
천장의 벽돌 틈 사이로 먼지와 잿가루 같은 게 떨어졌다.
가장 까다로웠던 함정이 무력화되었다.
세 개의 함정이 더 남아 있었으나 그것도 금방 해체했다.
레온과 그 부하들은 함정 밀집 구역을 빠르게 통과했다.
"하핫!"
그리고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드는 것이다.
"와아! 역시 레온 저하!"
"대단합니다!"
3학년들이 마구 손뼉을 쳤다.
데이먼 교수도 씨익 웃었다.
"3분 32초.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기는, 미소가 함지박 같구만.
오베른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걸었다.
그다음 함정 밀집 구역이 나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치명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나니, 남은 함정 개수는 똑같이 4개였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군."
고개를 돌려서 1학년 중 지원자를 뽑았다.
놀랍게도 필리 왕자는 곧바로 손을 들지 않았다.
한참을 눈치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든 것이다.
그것도 라니아가 옆구리를 쿡쿡 찌른 다음이었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군터의 제자인 2왕자에 비해서는 너무 매가리 없는 기세다.
자연스럽게 아마엔과 라니아도 함께 지원했다.
'오베른! 필리 저 녀석 좀 불러와 봐.'
나는 오베른을 시켜서 왕자를 불렀다.
"귀를 가까이."
귓속말을 하려 하니 데이먼이 끼어든다.
"오베른 교수, 힌트를 줄 셈인가!"
"그런 게 아니다. 그저 격려를 해 줄 생각이지."
데이먼을 한번 노려본 뒤, 오베른은 왕자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필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베른, 토씨 하나 바꾸지 말고 그대로 전해라.'
그리고, 오베른은 내 말을 전했다.
"왕자, 3분 32초 이내로 못 끝내면 체벌 100대다."
"...?"
필리는 자기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을 지었고.
오베른도 감격스러운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내가 전한 말을 끝마치지 않았다.
'말해! 끝까지 말해!'
그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귓속말했다.
"진짜 전력으로 100대야."
"...."
필리 왕자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151. 불의 검무
100대?
그걸 100대나 맞는다고?
그렇게 맞으면 죽는다. 분명 죽어 버릴 거야.
오베른의 말을 들었을 때, 필리 왕자의 머릿속을 채운 건 그런 생각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왜 100대를 때리지? 3분 32초면 형님의 기록인데. 그 기록보다 낮다고 100대를 때릴 명분이 되나?'
처음에는 '왜'를 고민했고.
'거짓말이겠지. 말만 저렇게 하고 실제로 100대를 때리지는 않을 거야.'
그다음에는 부정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아아악! 안 돼! 대체 왜! 저 미친놈이라면 진짜 때릴 게 분명해!'
마지막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토해 내는 단계에 다다랐다.
게다가 방금은 좀 이상했다.
평소에는 늘 목소리를 깔고 폼을 더럽게 잡던 오베른 교수였다.
그런데 방금은 그게 뭔가.
'100대 때릴 거야, 진짜 100대야.' 라니.
애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진짜 같아서 더 무서웠다.
필리 왕자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움찔 놀라서 돌아보니 아마엔이었다.
"가서 해치우자."
"...."
"왜 그렇게 벌써부터 긴장해."
"...넌 실패해도 백 대 안 맞잖아."
"그렇긴 하지. 하하."
아마엔은 히히 웃었다.
필리가 순간 '이 평민놈이...!'라고 외칠 뻔한 것을 그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시작."
오베른이 그리 선언했다.
어떡하지, 함정, 일단 저기 하나 있는 것 같고.
순간에도 초가 하나둘 지나간다.
시작되고 나니까 마음이 더 급해진다.
허둥대는 왕자의 얼굴에 무언가가 달라붙었다.
"에푸푸."
거미줄이 얼굴에 달라붙은 것이다.
젠장, 운도 없지. 끈적여서 제대로 떨어지지도 않는다.
왜 새로 생긴 던전에 거미가 있는 거야.
"필리, 걱정 말라니까."
얼굴을 마구 문대고 있는 게 우는 것처럼 보인 걸까.
라니아와 아마엔이 필리에게 다가왔다.
"우리가 바로 끝내 줄게."
그러면 이렇게 여유를 부릴 게 아니라....
그때, 라니아가 양손을 털어내듯 움직였다.
파앙!
허공에서 북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아마엔이 무언가 주문을 외우더니.
"컬럼나, 라피디아."
드드드득-
천장에서 손잡이로 쓸 만한 돌부리가 돋아 나왔다.
라니아가 가볍게 뛰어오른 것이 그 순간이었다.
놀라운 각력이었다.
천장까지 뛰어올라서 튀어나온 돌 손잡이를 움켜잡는다.
그리고 앞으로, 또 앞으로 팔을 움직여 나아간다.
후작가 영애에게 쓰기는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꼭 정글의 원숭이만큼 날렵하다.
"엄청나!"
"마르테인식 폭투법인가 봐!"
좌중에서 감탄이 튀어나왔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작동된 것 같았다.
그긍- 퓩!
함정이 작동하는 소리다.
누군가 아찔하게 비명을 질렀다.
"아쿠아 스쿠툼."
하지만 아마엔이 낭랑하게 외치자. 허공에서 물 덩이가 생겨나 쏘아지는 화살을 막았다.
화살이 물을 꿰뚫었으나 그 경로가 크게 휘었다.
라니아를 한참 비켜났다.
"읏차!"
라니아는 바닥을 한 번 밟지 않고 통로를 건너갔다.
그리고 그 앞의 바닥을 마구 짓밟았다.
콰아앙!
타일이 부서지고 그 안의 기관장치까지 부서졌다.
아마엔이 멍하니 있던 필리 왕자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가자."
통로의 바닥에는 누가 봐도 수상한 구멍들이 가득했다.
원래라면 창이 튀어나오거나 유독가스, 화살 등이 튀어나왔겠지만.
"전부 해제된 건가...!"
아마엔과 필리가 건널 때까지 아무것도 작동된 게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라니아가 있는 곳까지 도달한 순간.
"...1분 58초."
오베른이 기록을 선언했다.
함성과 환호는 잠깐 뒤에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거의 절반이야!"
1학년들 모두가 아낌없이 환호를 보냈다.
2왕자의 입지가 훨씬 좋다고 해도, 3왕자에게 소속감을 느낄 정도의 순수함이 1학년 학생들에게는 존재했다.
3학년 몇 명조차도 손뼉을 치다가 눈치를 보고 멈췄다.
그리고 필리도 오베른을 돌아봤다.
오베른은 놀랍게도.
손으로 따봉을 치켜들었다.
"으하아...."
필리는 그만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가슴은 여전히 콩닥댔다.
"배, 백 대 안 맞게 됐다."
결국 그는 또 한 번 살아남았다.
아마엔이 손을 내밀었고, 필리는 웃으며 손을 잡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을 고깝게 보는 이가 있었으니.
"이건 무효다!"
데이먼 교수였다.
갑자기 무슨 억지를 부리는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왜 트집이지?"
"함정을 제대로 해체한 것이 아니지 않나!"
데이먼은 화를 냈다.
"일시적으로 일부분만 무력화한 것이지. 무게를 제어하는 감지장치를 고장 내서."
데이먼 교수는 옆에서 돌덩이 하나를 잡아서 던졌다.
조금 전 아마엔과 필리 왕자가 걸어서 지나친 위치를 향해서였다.
텅.
돌덩이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카가가강!
하지만 그 순간, 땅바닥에서 철창이 솟아서 돌덩이를 튕겨 냈다.
그것이 천장에 부딪히고.
피피핑!
또다시 다른 구멍에서 철창이 튀어나왔다.
카가각, 퍼석!
돌덩이는 철창 여러 개에 처맞아서 산산조각이 났다.
"자, 다시 작동되잖나!"
"완전한 해체가 아니다 이거군."
필리 왕자는 어처구니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함정이 완전히 해체된 게 아니었다고.
라니아와 아마엔이 멋쩍은 듯 헤헤 웃어 댔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화를 낼 뻔했다.
"살살 걸어서 통과하면 괜찮았어. 뛰면 위험했지만."
아마엔은 당당하게도 그리 말했다.
오베른 교수와 데이먼 교수는 계속 말다툼을 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내 학생들이 더 빨리 통과할 수 있어!"
"그러면 해 보도록."
"레온 저하!"
그런데 아무래도 2왕자도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데이먼 교수가 부르자, 그는 거절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조금 전 라니아가 했던 방식을 비슷하게 따라 했다.
2왕자는 순식간에 필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넘어왔다.
"자, 43초. 우리 레온 저하의 압도적인 승리군."
데이먼의 말에 오베른이 비웃었다.
"장난하나? 그대는 학생들에게 흉내 내고 따라 하는 것밖에 못 가르치나 보군."
"그 말 취소해!"
다 큰 어른들이 애들 앞에서 저렇게 싸우는 것은 솔직히 보기 좋지 않았다.
필리가 앉아서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고개를 든 필리는 흠칫 놀랐다.
함정을 건너온 2왕자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필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혀, 형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건만.
웃는 얼굴로 침을 뱉을 수는 있나 보다.
"누가 네 형님이냐. 이 쓰레기야."
"...."
갑작스럽게 욕을 먹었으니 화를 낼 법도 하다.
성격 더러운 필리니까 특히.
하지만 필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화를 내기는커녕, 겁먹은 개처럼 덜덜 떨었다.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기어코 여기 입학하더니 수업까지 겹치다니."
"제, 제가 일부러 온 것은 아니고 아바마마께서...."
"필리."
레온 왕자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교수들이 싸우는 틈을 타, 다른 학생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자퇴해라."
"네?"
"자퇴계를 내. 여기서 꺼지라는 말이다."
"...국왕 전하께서 제게 에메랄드 스쿨에 다니라고 하셨는데."
레온이 필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아귀에 힘을 주자, 필리는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악!"
"닥쳐, 소리 내지 마."
"끄, 끄윽!"
"네 사정은 알 바 아니니 자퇴해. 너 같은 놈은 뭔가를 배울 자격도 없어. 자퇴해!"
어깨가 끔찍이 아팠지만, 닥치라는 말에 비명조차 못 질렀다.
필리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고인 눈물이 주륵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콱.
라니아가 레온 왕자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지금 무슨 짓이지?"
"저하 손목에 뭐가 묻어서요."
"뭐? 크윽!"
손목에 뭐가 묻었다는 황당한 핑계에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마치 쇠집게로 손목을 잡힌 것 같았다.
레온이 비명을 지르려던 순간. 이번에는 그의 곁을 지키는 기사단장의 아들이 라니아의 손목을 잡았다.
"저하의 옥체에 손을 대다니, 겁대가리가 없군."
"레이디의 옥체에 손을 대다니, 겁대가리가 없네."
라니아는 그대로 받아쳐 줬다.
그녀보다 훨씬 큰 손으로 손목이 잡혔지만, 라니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담담함에 기사단장 아들도 놀랄 정도였다.
그렇게 힘겨루기가 시작되려던 순간이었다.
"어푸푸."
필리가 또 한 번 얼굴을 쓸었다.
그놈의 거미줄이 또 얼굴에 닿은 것이다.
대체, 던전에 거미가 어떻게 들어와서 이렇게 거미줄이....
"뭐, 뭐야 이거."
그런데 거미줄이 보통 질긴 것이 아니다.
머리카락이 잡아 당겨져 아플 정도였다.
필리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본 순간이었다.
그 순간.
환각이라도 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천장에는 이곳에 있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의 입에서 비명도 탄식도 아닌 것이 나왔다.
"어, 어어...."
인스턴스 던전에는 함정은 있어도 마물은 없다.
그저 어딘가의 던전을 모방하는 것이지, 그 던전 안에 살고 있을 마물까지 복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래라면 이곳에 마물이 있을 리가 없다.
바깥에서 들어올 수도 있으니 벌레 정도야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저렇게 거대한 거미 마물이.
그것도, 여러 마리의 거미들이 천장의 움푹 파인 곳마다 붙어 있을 수는....
언제부터 숨어 있던 걸까.
아니, 안에서 기어 나온 걸까.
거미 한 마리가 휙 떨어졌다.
기사단장의 아들, 그 머리 위로.
족히 대형견만 한 크기의 거미가 떨어지는 데에는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독니를 목덜미에 푹 박아 넣자.
"끄아아아악!"
비명 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그가 허둥지둥 머리에 붙은 거미를 떼어냈다.
그리고 발로 쾅 밟자, 퍽 하고 거미의 배가 터졌다.
"어, 으아, 으아악!"
하지만 이미 그의 목덜미는 흉하게 부어올랐다.
숨을 쉬기 힘든지 쌕쌕거리는 소리를 낸다.
"거, 거미다아아!"
필리가 비명을 질렀다.
신호탄이 된 듯 천장에서 수십 마리의 거미들이 쏟아져 내렸다.
필리의 머리 위에도....
피잉!
그때, 광선 하나가 떨어지던 거미를 꿰뚫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오베른이 지팡이를 이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거미들이 천장을 타고 그쪽으로도 몰려갔다.
* * *
내게 펠레리안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갑작스러운 이 사태가 무슨 일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소환 함정이다.
'정말이에요?'
-그것밖에는 이유가 없어.
이곳 어딘가에 존재하는 소환 함정이 작동되었나 보다.
그것이 지정된 좌표에 존재하는 마물을 소환한 것이다.
보기 드문 소환 함정이 하필 있는 이유가 있었다.
-사막의 네크로맨서들은 소환 마법을 많이 쓰지. 그중에서는 벌레쟁이들이 특히 많다. 이런 던전에도 관여했을 법하지.
거미를 부리는 놈들이라니, 천하의 악적들이 틀림없었다.
──────────────
[유적 샌드 바분lv22]
──────────────
확실히 대수림에서 봤던 징글징글한 거미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겼다.
굳이 말하자면 좀 더 퍼석퍼석하게 생겼달까.
하나하나 그리 강한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수가 너무 많다.
특히 저 아이들 곁에 이미 바글바글했다.
다른 애들은 다 죽어도 아마엔과 그 친구들은 구할 생각이다.
'가라 오베른!'
'어, 어떻게요!'
하지만 오베른은 곧바로 달려가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까 오베른은 키가 아주 크다.
몸이 무겁다는 뜻이다.
천장에서 거미들이 몰려오는 와중에 함정을 무시하고 달려나갈 깜냥이 되지 않는다.
거미들 몇 마리가 창에 꿰뚫린 것을 보면 함정은 여전히 작동한다.
게다가 이쪽으로도 거미들이 오고 있다.
그것도 꽤나 많이.
"왜,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내 뒤에 숨은 1학년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쪽으로 몰려오는 거미들이 유독 많았기 때문이다.
'아, 그거구나!'
예전, 크림슨 타란튤라 킹의 내단을 먹고 생긴 부작용.
'거미형 마물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산다'고 했나.
그 일이 스노우볼이 되어 굴러온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일단 거미들을 잡아 보자.
'죽엇!'
*「중급원소마법:바람lv2를 사용합니다.」
놈들을 마구 떨어뜨리고 쳐죽인다.
마성이 조금씩 흡수된다.
몇몇 녀석들이 학생들을 거미줄로 휘감으려 했다.
납치라도 하려는 건가.
아마엔과 그 일행이 걱정되었는데.
"내가 구하겠소! 당신은 이쪽에서 다른 학생들을 지켜!"
그 뺀질뺀질한 데이먼 교수가 나섰다.
아무래도 그가 오베른보다 마법 실력이 좋은 것은 확실한 듯했다.
자신에게 뭔가 마법을 쓰더니 몸놀림이 빨라졌다.
거미들의 시체를 밟고 함정을 휙휙 넘어가서 아마엔이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다.
다행이군.
껄끄러운 녀석이 사라졌으니.
내 진짜 실력을 조금 발휘해 볼까.
'오베른, 멋진 마법 주문을 외워라. 꿰뚫고 어쩌고 하는 거로.'
오베른이 마음에 드는 건 눈치가 좋다는 점이다.
뭔가를 시켰을 때, '네? 뭘 해요?'하고 반문하지 않는다.
내 전생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인물인 것이다.
"파포란스 하스탐, 모르템 인 사일렌토... 침묵 속에서 명하리니...."
1학년이고 3학년이고 전부 내 곁으로 뭉친다.
그 가운데에서 묵직이 주문을 외는 오베른은,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멋졌다.
허나, 진짜 주역은 나다.
*「투명한 손lv17을 사용합니다.」
아공간에서 장검 한 자루와 부적을 꺼냈다.
운철검, 석양이다.
그곳에 붙인 부적이 화염을 일으켰다.
불꽃으로 휘감긴 그 검 한 자루는 영락없는 마법처럼 보였다.
"베고, 꿰뚫으라."
오베른의 말과 함께.
나는 불꽃의 칼춤을 추었다.
사막의 거미들이 마구 썰리고 꿰뚫린다.
수십 개의 다리가 쌓인다. 수백 개의 눈알이 불타면서 고약한 연기를 피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위엄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베른이 '불의 검무'라는 마법을 창안했다는 명성을 얻는 순간이었다.
152. 으아아! 스승님!
*「유적 샌드 바분lv22을 처치했습니다.」
*「유적 리틀 샌드 바분lv11을 처치했습니다.」
불타는 검이 거미를 꿰뚫고 벤다.
벌레형 마물에게 불 속성 공격이 잘 먹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내 원소마법이 중급으로 오르면서, 부적에 담을 수 있는 불꽃도 화력이 강해졌다.
다리 몇 개를 베고 지나가면 다른 다리들도 불꽃에 오그라든다.
*「유적 샌드 바분lv12을 처치했습니다.」
*「유적 샌드 바분lv24을 처치했습니다.」
*「유적 리틀 샌드 바분lv11을 처치했습니다.」
사막에 서식하는 거미 마물인 만큼 좀 더 건조한 것 같다.
그 말은 즉, 더 바삭바삭하다는 뜻이다.
음, 맛이 궁금하다.
하지만 여기서 거미를 와작와작 먹어 버렸다가는 학생들이 비명을 지를 테니까 참아야겠다.
조금 전까지 꺅꺅대며 비명을 지르던 학생들.
1학년이든 3학년이든 겁에 질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소수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마물을 제대로 상대해 본 적도 없는 녀석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조용했다.
내 곁, 정확히는 오베른의 곁에 뭉친 학생들은 이제 감탄까지 했다.
"와아...."
"엄청나."
지능이 낮은 벌레형 마물들은 한번 덤비기 시작하면 후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지독하게 뛰어오르고 독니를 드러내며 덤벼들지만, 그중 나나 학생들에게 닿는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불꽃에 날아드는 나방처럼 그렇게 덧없이 죽어 나간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워낙 많이 처치하다 보니, 놈들과 수준 차이가 꽤 남에도 불구하고 레벨이 올랐다.
좋아!
이 근처의 거미들은 대충 정리했다.
아무래도 몸이 작고 가벼운 녀석들만 이쪽까지 기어 나온 것 같았다.
'소환 마법진이라는 게 대단하네요, 이렇게 많이 데려오다니.'
-마법진의 효율 때문에 보통은 강력한 놈들 몇 마리만 소환하는데... 음.
펠레리안이 불길한 소리를 했다.
-여왕 개체가 안에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설명이 된다.
조그마한 놈들이 여왕의 군세인 것이다.
바깥에 들어온 먹이들을 잡아 와라, 혹은 침입자를 퇴치해라 이런 명령을 받은 거겠지.
그러면 이제, 아마엔과 애들만 데리고 나가면 되겠다.
음, 여왕이라는 놈이 궁금한데.
퀸쯤 되니까 내단을 품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팔자 좋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데이먼 교수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2왕자와, 얼굴이 퉁퉁 부은 기사단장 아들내미, 마녀 딸내미.
그리고 라니아 ....
끝.
...어, 아마엔과 2왕자는?
데이먼의 얼굴을 보니 느낌이 불길하다.
그는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거, 거미들이."
왜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거냐.
웃는 것은 아니리라.
무척 당황한 사람이, 어쩔 도리 없이 짓는 표정이었다.
"거미들이 3왕자 저하를 끌고 갔어."
아마엔은?
"어쩔 수 없었어. 평민 녀석이 저하를 구하겠다고 따라 들어갔다."
그러면 너는 그걸 놔두고 그냥 돌아왔나.
"2왕자 저하가 부상을 입어서...."
오베른이 아무 말 없이 데이먼을 노려봤다.
자기도 당황해서 그런 거겠지만, 오베른의 시선에 죄책감이라도 느낀 걸까.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일단 밖으로 피신한 뒤, 사람들을 불러 구하러 들어가지!"
"...그러면, 늦을지도 모른다."
"우선 피해야 해! 조금 전에 기괴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2왕자 저하께서 중독되셨다니까!"
2왕자는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거미에 물린 건지 팔이 퉁퉁 부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죽어 가는 것도 아니다.
라니아가 울면서 외쳤다.
"아마엔과 필리를 구해야 해요! 거미들이 거미줄로 칭칭 감아서 끌고 갔어요!"
그녀의 얼굴에 죄책감이 드러난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데이먼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다.
어떤 사람은, 위기에 처한 순간 다른 무엇보다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려 한다.
아무래도 데이먼 리치몬드는 그런 인물 같았다.
"자네, 지금 이 상황을 책임져야 할 거야."
" ...무슨 소리지?"
"당신이 억지를 부려서 강제로 1학년과 3왕자 저하를 끌고 들어온 거 아니야! 내가 학장님께 똑똑히 보고하지."
삐뚜름하게 뒤틀린 그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혹시 왕자 저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일은 국왕 전하에게까지...."
데이먼이 뭐라고 하는지는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츠츠츠츠-
비늘이 저절로 검게 물들었다.
*「흑린lv3를 사용합니다.」
오베른이 들고 있는 지팡이.
그 위에 올라가 있는 내가 검게 물든 것을 다른 이들도 보았을 것이다.
정작 데이먼은 그것을 보지도 못하고 침까지 튀기며 뭐라고 말했다.
"부상을 입은 레온 저하와 필베르크도...."
아아, 아마엔은 아무도 생각해 주지 않는구나.
라니아를 제외하고는 말이야.
불쌍한 아마엔, 로일이 이 사실을 알면 나를 얼마나 원망할까.
"나는 분명 들어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나는 진화하면서 '위엄'을 얻었다.
하지만 그 전부터, 수백 마리의 마물을 이끌 때부터.
고블린들을 이끌고 전쟁을 나섰을 때부터.
내게는 '기세'라는 게 생겼다.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무형지기 같은 것이다.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예민한 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둥이를 나불대던 데이먼 교수도 입을 닥쳤다.
그는 눈알을 데굴거리며 나와 오베른을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오베른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그는 조금 당황했지만, 분위기를 읽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팡이를 내밀었다.
데이먼 교수가 움찔 물러났지만.
나는 지팡이에서 뛰어올라 녀석에게 날아갔다.
도저히 못 참겠다.
좀 맞자 나한테.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꼬리치기lv3을 사용합니다.」
나는 조금의 손사정도 두지 않고 꼬리를 휘둘렀다.
뻐억!
수정 비늘로 뒤덮인 꼬리가 데이먼의 뺨을 후려쳤다.
후두둑, 하고 이빨 몇 개가 튀어나왔다.
"끄아아악!"
물리적으로 마음을 빼앗아 주려다가 참은 거야.
나는 쓰러진 놈의 목을 휘감아 조였다.
"켁, 케엑!"
아마엔과 필리의 복수다!
오베른의 지팡이에 장식되어 있던 뱀이 데이먼 교수의 목을 조르고 있는 이 상황.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 * *
거미줄로 칭칭 감긴 고치.
거미들은 그것을 머리에 이고 총총거리며 던전 안쪽으로 나아갔다.
그것들이 이 던전 속에 소환된 것은 우연이었다.
신비로운 유적의 마법진은 원본 던전의 함정까지 그대로 구현했고, 던전이 형성되던 와중에 그 소환진이 작동된 것이다.
퀸과 퀸이 품고 있던 새끼들 수백 마리가 한 번에 소환되었다.
그로부터 벌써 보름이 지났으니.
퀸과 그 혈육들은 굶주렸다.
"키이익."
"케엑."
거미 몇 마리가 사냥감들에게 눈독을 들였다.
하지만 그것을 호송하는 다른 거미가 독니를 드러내며 위협했다.
"키이이이이익!"
여왕의 먹이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다.
덕택에 고치에 감긴 둘은 아주 잠시 죽음을 유예받았다.
"으흐에엥."
고치 하나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필리가 있는 고치였다.
"꾸에엥, 프흐."
입가에 거미줄이 잔뜩 묻어 그런지, 괴상한 울음소리였다.
게다가 주변에 거미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마음껏 울음을 터뜨릴 수도 없었다.
"우린 다 죽을 거야. 거미한테 잡아먹혀서. 흐어엉."
아마 혼자였다면 이리 울지도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들어줄 사람이 하나는 있었으니 필리는 그리 울었다.
"괜찮아."
"괜찮기는 뭘, 흐어엉."
거미들은 필리가 울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왕에게 줄 먹잇감을 구한 게 기쁜지, 고치를 흔들면서 리듬감 있게 걸어갈 뿐이었다.
울고 있는 필리의 귓가에 아마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괜찮을 거야."
아마엔 역시 옆에 있는 고치에 갇혀 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신기하게도 침착했다.
정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체 어떻게 침착할 수 있는 걸까.
무서워서 돌아 버리기라도 한 건가.
"스승님이 구해주러 오실 테니까."
"오베른 교수가...?"
"어... 음, 뭐 그치."
오베른 교수.
처음 봤을 때처럼 끔찍하기만 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많은 거미들을 해치고 들어와 우릴 구해 줄 수 있을까.
그런 능력이 될지도,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을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 둘의 목숨은 경각에 달했다.
"우린 체액이 쪽 빨려서 죽을 거야. 거미는 그렇게 다른 벌레들을 잡아먹는대."
책에서 그리 읽었다.
다시 한번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납치된 지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거미들이 고치를 땅바닥에 내려놨다.
"키킥, 키키킥."
그리고 수십 마리의 거미들이 일제히 이상한 소리를 냈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곧, 그들을 이곳까지 끌고 온 거미들이 우르르 멀어지는 소리가 났다.
기쁘기는커녕 불길했다.
"안돼안돼안돼...."
필리는 기도 메들리를 시작했다.
광명교부터 화로의 여신까지, 아는 신들에게 전부.
심지어는 오베른에게까지 기도를 했으니. 그가 느끼는 두려움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신도 그에게 응답을 주지 않았다.
고치는 반투명한 거미줄로 되어 있어서, 앞에 그림자가 지는 게 보였다.
툭.
무언가가 코앞에 다가왔다.
길쭉한 무언가였다.
아마도 거미의 다리.
저것이 겨우 다리 하나라면, 아주 거대한 거미임이 틀림없었다.
이가 달달 떨렸다.
감히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그 거미의 다리가 고치를 꿰뚫는 그 순간에도.
서걱.
"끼야아악!"
아니, 결국 비명을 질러 버렸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천국으로 이동해 버린 건 아니었다.
거미의 다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리 크지 않은 뱀 한 마리였다.
조금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흰 뱀.
아, 오베른의 지팡이에 붙어 있던 그 수정 뱀 장식이다.
아니, 사실 장식이 아니었던 건가.
오베른이 부리는 패밀리어였나.
그 짧은 순간에도 복잡한 생각들이 촤르르 스쳐 지나가는데.
그 뱀이 갑자기 꼬리로 필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격려... 한 건가?'
그럴지도.
그리고 필리는 곧 뱀이 어떻게 그를 꺼냈는지 알아냈다.
허공에서 단검 한 자루가 나타나더니, 옆의 고치를 거침없이 그었다.
그 안에서 아마엔이 튀어나왔다.
"헉!"
아마엔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왈칵 흘렀다.
"스승님!"
그러고는 뱀을 와락 껴안는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뱀한테 스승님이라고 하면서 매달리다니.
내색하지 않았으나 아마엔도 많이 무서웠나 보다.
"필리, 이제 괜찮아! 스승님이 오셨어!"
"그, 그건 그냥 뱀이야! 정신 차려!"
필리는 아마엔이 미친 것 같아서 무서웠다.
정신을 차렸으니 얼른 도망쳐야 할 것 아닌가.
"거미들, 거미들이 아직...."
그런데 거미들이 주변에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뒤며 사방의 벽에 거미들이 붙어 있고.
저 안쪽에도 시커먼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어둠을 들여다본 필리가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아악!"
그것은 어둠이 아니었다.
집채만 한 검은 거미가 웅크리고 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유리알 같은 것이 번쩍였다.
하나 둘... 셋 ... 여덟.
여덟 개의 눈이.
거대한 거미가.
다각, 다가각.
그것이 마치 통나무 같은 다리를 펼치며 다가왔다.
도망칠 곳도 없이 죽음이 다가온다.
그런데, 뱀이 아마엔과 필리 앞으로 나섰다.
거미와 비교하기는커녕, 필리의 무릎 정도나 올 작은 뱀이.
마치 거미를 막아서듯 한다.
"스승님이 해치워 줄 거야!"
"정신 차리라니깐!"
아마엔은 완전히 돌아 버린 것 같았다.
뱀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며 외쳤다.
"스승님, 거대화를!"
순간 아마엔이 언령 마법이라도 깨우친 건가 싶었다.
곧바로 뱀이 거대해졌으니까.
그 작은 뱀이 송아지만 해지더니, 사람보다 커지고.
결국에는 저 집채만 한 거미만큼 커졌다.
그리고 입을 쩍 벌리더니.
피잉-!
광선을 쏘아내서 거미의 눈알들을 터뜨렸다.
"퀘에에에에엑!"
거미가 쩌렁쩌렁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뱀도.
"사아아악!"
지지 않는 기세로 포효하더니.
굉음을 내며 솟구쳤다.
터엉!
그 도약은, 정말이지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빨랐다.
콰작!
거미를 물어뜯고 지나간 것 같다.
단단해 보이던 거미의 몸에 구멍이 뻥 뚫렸으니까.
그 구멍에서 거미의 체액과 내장이 와르륵 흘러나왔다.
필리의 입이 떡 벌어졌다.
* * *
뭐야. 별거 없잖아.
*「유적 샌드 퀸 바분lv78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럼 어디, 내단이 있는지 살펴볼까.
남은 잔챙이들은 덤비려면 덤벼.
아... 도망가네.
에이.
153. 구배지례
거대한 수정 뱀.
직관적으로 와닿는 마물의 무서움은 그 크기에 있다.
강력한 독을 가진 뱀이라면 작든 크든 치명적인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뱀이 작은 뱀보다 더 무섭다.
아마도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큰 뱀은, 마음만 먹는다면 이쪽을 한입에 삼켜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그 뱀이 거미를 해치워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 왕자는 두려웠다.
"으아아! 스승님!"
주먹을 치켜들고 날뛰는 아마엔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그 뱀은 거미를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것 같다.
그 장검을 치켜들더니(손은 없었지만, 장검은 살아 있는 듯 움직였다.)
거미를 마구 난도질하는 것이다.
난도질에는 어떠한 법칙이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쓸데없는 다리는 전부 잘라 냈다.
그 거대한 덩치에 비해서 참으로 작은 머리통을 우선 뚝 떼내어 본다.
마치 야자나무의 야자를 자르듯, 머리를 반으로 뚜걱 잘랐다.
그 안에는 희멀건 뇌수 말고는 별 볼 게 없었다.
"쉬리릿."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내용물을 휘적인다.
거미의 내장과 체액이 와르르 흘러내린다.
"우욱."
필리는 저도 모르게 구역질을 했다.
뱀도 아마엔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평범한 비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필리밖에 없는 듯했다.
"사아악!"
그리고 뱀이 마침내 기쁨의 함성 비슷한 것을 냈다.
뱀이 거미의 뱃속에서 꺼낸 것은 주먹만 한 구슬 같은 것이었다.
거미가 몸속에 품고 있던 걸까. 아... 내단, 내단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드디어 뱀이 다시 몸의 크기를 줄였다.
필리를 한입에 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가, 이제는 어린애 팔뚝만 한 크기로 줄었다.
그 극적인 크기 변화가 어쩐지 마음을 안정시켰다.
"휴우."
게다가 뱀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음악도 없는데 덩실덩실 리듬을 타면서 오는 게, 배경음악을 깔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도... 오베른 교수가 키우는 패밀리어겠지. 아니면 뱀 모양 골렘... 이라든가.'
골렘은 아닐 것 같다. 저 정도로 생동감 있는 움직임이라면 특히.
소환수인가 싶기도 한데 저것은 분명 지팡이에 매달려 있던 그 뱀이 맞으니.
평소엔 그저 석상이었다가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살아나는 가고일과 비슷한 걸까.
어찌 되었든, 저 위험한 뱀을 잘 구슬려 봐야겠다.
그리 생각한 필리가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육포를 꺼냈다.
"훠이, 훠이."
그리고 육포를 뱀 앞에 툭 던지더니.
"너무 가까이 오지 말고, 쯔쯔쯔, 차, 착하지."
뱀은 원래 육포 같은 걸 먹지 않는다.
먹이를 주려면 최소한 기절시킨 쥐 정도는 줘야지 한입에 먹는다.
사실 필리는 어린 시절 왕궁에서 뱀을 키워 본 적이 있었다.
악취미라며 싫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필리는 진심으로 그 뱀을 아끼며 키웠더랬다.
생긴 것과 달리, 그리고 품종에 따라 다르지만.
뱀 중에는 온순한 아이들도 있다.
호의를 가지고 대하면 이쪽을 해치지는 않으리라.
"못생겼지만 자세히 보니까 귀엽네. 쯔쯔쯔, 오지 마, 거기 멈춰."
그런데 이 뱀은 아니었나 보다.
갑자기 탕! 소리를 내며 솟구쳤다.
그리고 뱀이 머리로 필리의 명치를 강타했다.
"악! 아프다!"
"사아악!"
'건방진 놈!' 그리 외치는 것 같았다.
뱀은 주저앉은 필리를 슥 노려보더니 아마엔의 팔 위로 올라갔다.
"건방진 놈, 이라셔."
"뭐, 뭐어?"
"스승님이 하시는 말이야."
아마엔이 자신을 놀리는 걸까.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종이와 펜이 나타나 떠올랐다.
「내가 한 말이 맞다.」
'오, 오베른?'
「오베른이 아니니라, 우르오로스 님이라고 부르라.」
필리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떨렸다.
뱀이 오베른과 별개의 존재라는 것은 이야기를 들은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아마엔의 '스승'이 이 뱀이라는 것도 들었다.
"스승님은 아주 오래된 존재시며, 현자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분이셔."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아마엔의 태도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에, 예... 우르오로스 님."
뱀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마엔은 어쩌다 뱀의 제자가 된 것일까.
「그야말로 신화적인 일이지.」
그것을 물어보니, 뱀은 그런 표현으로 일축했다.
하기사, 뱀에게 마법을 배운 평민 소년이라니.
왕자인 필리가 보기에도 마치 동화 속 '대마법사의 어린 시절' 같은 이야기다.
"그러면 오베른 교수는...."
「오베른은, 그래... 내 동료 같은 것이지.」
"동료...."
하긴, 그 인간이라면 이렇게 엄청난 것과 동료 관계가 될 수도 있으리라.
다만 지성이 있다고 해도 마물과 동료라니... 확실히 평범한 인간은 아니구나 싶었다.
「왕자 필리여.」
"아, 넵!"
「네게도 기회를 주겠다. 내 제자가 될 기회를.」
"아...."
필리는 당황했다.
뱀의 제자가 되라고?
아마엔을 슬쩍 돌아보자 그는 환히 웃고 있었다.
이거 맞나? 싶어서 필리가 우물쭈물거리니.
"뭐 해 필리, 기다리시잖아."
아마엔은 빨리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뭐 하고 있냐는 식으로 말했다.
"감사... 합니다?"
「절차에 맞게 구배지례를 해라.」
그건 또 뭐야.
그러자 아마엔이 속삭였다. 아홉 번 절을 하라는 뜻이야, 하고.
못 할 거야 없는 일인데....
일이 흘러가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필리는 마치 휩쓸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번째 절을 할 때쯤이야 제대로 된 생각이 들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어쩐지 어마마마나 부왕에게 말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로써 너는 나의 제자이자 아마엔의 사제가 되었다. 서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야 할 것이며. 너가 내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철저히 비밀로 하거라.」
다행히 비밀로 하란다.
그리고 거기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새 제자를 들인 기념으로 너희들에게 선물을 주겠다.」
거미에서 뽑아낸 내단.
그 내단을 뱀이 삼등분으로 나눈 것이다.
「독이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맛있게 먹으려무나.」
뱀이 내민 내단 한 조각을 필리는 저도 모르게 받아 들었다.
따끈따끈.
아직 온기가 식지 않았다.
「먹거라.」
아, 괜히 제자 하겠다고 했다.
필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 * *
오베른 교수의 지팡이.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던 뱀.
침을 튀기며 지껄이는 데이먼 교수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자.
수정 뱀 장식이 살아 움직이며 데이먼 교수를 두들겨 팼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뱀은 말 그대로 정말 그를 '팼다'.
그뿐이랴. 목까지 조르니 결국 데이먼 교수는 볼품없게 기절해 버렸다.
영창을 할 수 없으니 마법을 써서 벗어날 수도 없었으리라.
그 과정은 생각보다도 짧게 끝났다.
"돌아오라."
오베른 교수가 그리 말하자 뱀이 다시 지팡이로 올라가서 굳었다.
그제야 지켜보던 학생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오베른 교수가 패밀리어 한 마리를 부려서 데이먼 교수를 제압한 것이다.
엄청난 일이다. 제대로 마법을 쓴 것도 아니고, 실제 생물인지 마법적 동물인지도 모를 뱀 한 마리로 같은 교수를 제압하다니.
"너희들 모두. 당장 부상자들을 이끌고 던전 밖으로 나가라."
오베른은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가서 사람을 불러와."
"교, 교수님은요?"
당장 도망가기 바쁜 이들 중, 그나마 다른 이를 생각할 줄 아는 자가 물었다.
"나는 이곳에 남아 거미들을 막고 학생들을 구할 것이다."
겨우 혼자서?
어떻게?
모두가 생각했지만, 오베른은 으르렁대듯 외쳤다.
"방해되니, 당장 꺼져라!"
하긴 여기서 학생들이 돕겠다고 설쳐 봤자 방해만 될 것이다.
그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지나온 길의 함정은 이미 해체하거나 돌파했으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전부 빠져나가자.
혼자 남은 오베른이 지팡이를 다시 내밀었다.
뱀이 툭 떨어지고.
"자, 자, 자, 잘... 부탁드립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하자, 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뱀은 거침없이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오베른은 남아서 뱀을 기다렸다.
일은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혼자 남은 오베른은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피가 날 정도로 마음이 떨렸다.
세상에, 왕자가 거미에게 물려갔다.
게다가 데이먼의 말도 틀린 점이 없었다.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오베른은 가문도 보잘것없고, 그나마 뒷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궁정백은 일이 커졌을 때 결코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다.
"제발제발, 광명신님, 화로의 여신님, 뱀님...."
뱀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그리고 인기척이 들렸다.
하늘이 무심하게도.
앞쪽이 아니라 뒤쪽이었다.
"왕자님이 납치당하셨다니!"
"거미라고, 거미가 대체 왜 인스턴스 던전에서 나와!"
교수들이 서둘러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무릎 꿇고 있던 오베른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궁지에 몰려 있다 하여도.
오베른은 분명 뱀이 인정한 천하의 대배우였다.
"오베른 교수, 대체 무슨 일이오!"
나타난 교수들이 쩌렁쩌렁 고함을 치며 다가오려고 할 때.
"쉿."
오베른은 그들을 저지하면서 손가락을 들어 입술 앞에 댔다.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인데, 교수들도 그 기세에 밀려서 우뚝 멈춰 섰다.
잠시 정적이 이어지고.
결국 참지 못한 이들이 상황을 물어보려 입을 뗐다.
"교수, 상황을 알려 줘야 우리도...."
"쉿!"
"아니 참."
"닥치시오!"
욕을 들어먹은 교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오베른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닥치고 가만히 기다렸다.
오베른 교수는 지팡이를 내밀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참기 힘든 정적이 이어졌다.
사실 진짜 똥줄이 타는 것은 다름 아닌 오베른이었다.
그는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다만 그것을 티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신이시여, 아니 뱀이시여!'
다행히 뱀이 돌아왔다!
뱀은 눈치 없게도 교수들의 등장에 당황하더니.
다행히 오베른의 간절한 눈빛을 알아채고 얌전히 지팡이로 올라왔다.
곧장 딱딱하게 굳어서 영락없는 지팡이의 장식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법처럼 왕자와 아마엔도 나타났다.
"왕자니임!"
"무사하십니까!"
왕자와 아마엔은 몸에 거미줄이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
교수들이 왕자를 칭칭 싸매다시피 했다.
그리고 저 안쪽에서 살아남은 거미 몇 마리가 기웃대고 있었다.
함께 돌아서려던 오베른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지팡이를 슬쩍 보더니.
"다들 물러나 계시오, 거미들을 소각할 테니."
소각이라.
그리고 오베른이 지팡이를 들었다.
아주 작은, 교수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리더니.
"...프리마티오 이그니트."
보랏빛 불꽃이 솟았다.
화르르르륵-
그것은 정말로 공기마저 태울 만한 불이었다.
지옥불.
게헨나(gehenna).
그 불꽃은 동굴 안쪽으로 파고들어 거미들을 태웠다.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고.
교수들은 눈앞의 젊은 교수가 펼치친 것이 지옥 마법임을 눈치챘다.
오베른의 명성이 또 한 번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 * *
발라냐르 총장.
왕궁에 방문한 그에게, 영 좋지 못한 소식이 전달되었다.
늘 생글생글 웃고 있던 그의 표정에도 금이 갈 만한 이야기였다.
'인스턴스 던전에 마물이 출현했고. 3왕자가 그 거미들에게 납치되었다고.'
천만다행으로 그들은 무사히 구출되었다고 한다.
'오베른 교수가 사역마를 부려 왕자를 구출하고 지옥마법을 활용해 거미들을 소각했다.'라는 결말.
순식간에 총장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왔다.
"하하핫!"
그뿐이랴,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 정도 수준이었나.... 놀랍네요."
마물들을 해치우고 왕자를 구해올 정도로 강력한 사역마를 부리는 것.
그리고 지옥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
마법의 극의에 가까운 발라냐르 총장이었기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다만, 그가 이미 주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숨겨 둔 실력이 있었다는 건데.
"후후, 속에 얼마나 대단한 것들을 숨겨 둔 건지. 마치 양파 같은 사내군요."
"예에."
허겁지겁 달려와 상황을 전한 교수가 난처하게 웃었다.
"뭐, 아무 문제도 없다면 나는 이만 갑니다. 뒤처리는 알아서 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발라냐르 총장은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몸을 돌렸다.
이곳은 왕궁.
왕의 술친구인 발라냐르는 노움제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왕을 찾아온 참이다.
아직 대낮이지만, 술은 꼭 밤에 마셔야 하는 것이 아니니.
휘적휘적 걸어간 발라냐르는 큼지막하고 화려한 문 앞에 섰다.
익숙한 얼굴의 경비병이 발라냐르를 보고는 몸을 돌려 크게 외쳤다.
"전하, 발라냐르 공이 찾아왔습니다."
"들라 해라!"
벌써 술을 좀 마셨나, 목소리에서 취기가 느껴진다.
문이 열리고.
발라냐르는 큰 목소리로 외치며 들어갔다.
"전하, 그대의 친우가 왔사옵니다."
"오오! 발라냐르!"
배가 나오고 얼굴이 발그스레한 국왕이 그를 반겼다.
환히 웃는 발라냐르의 표정에, 순간 금이 갔다.
"으허허, 오랜만입니다 총장."
"...아, 궁정백."
반갑지 않은 손님.
궁정백이 먼저 와 있었다.
154. 내 사람
왕은 배 나온 중년의 사내이고.
궁정백은 비쩍 마른 노인네다.
"으하하하하."
"으허허허."
생긴 것은 전혀 닮지 않은 두 인물이지만 말은 잘 통하는 것 같다.
연회도 아니고, 간단한 안주 몇과 포도주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워할 수 있으니.
하지만 발라냐르 총장이 알기로 왕은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왕이 화술을 갈고닦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인 것은 오로지 궁정백의 덕일 것이다.
저 능구렁이 같은 인간.
발라냐르는 저 뱀 같은 궁정백이 싫었다.
하지만 속에 능구렁이를 품고 있는 것은 궁정백만이 아니었으니.
"와, 이거 얼마 만인가요, 궁정백! 안 그래도 한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종종 총장과 편지를 나누는 것만 해도 저 같은 무식쟁이에게는 자랑거리입니다. 저번에 제가 보낸 선물은 받았습니까?"
황금 캐비닛, 그 뇌물은 잘 받았냐는 이야기였다.
왕 앞에서 대놓고 청탁의 이야기를 하다니.
"아, 그거 말이죠. 너무 멋진 물건이던데요. 제가 쓰기에는 민망스럽게도 좋아서 그냥 학교에 전시해 두었습니다."
"으허허, 그건 오히려 더 기쁜 말이군요."
발라냐르는 훌륭하게 받아넘겼다.
저 동방 도사들이 수련한다는 태극권의 묘리 비슷한 거였다.
"뭔데, 둘이 무슨 소리야."
왕만 그 사이에서 눈을 데굴거릴 뿐이었다.
총장이 얼른 말을 돌렸다.
"전하, 이거 보시지요."
"오오!"
"50년 묵은 싱글몰트입니다. 구해 오기 힘들었죠."
"아 참, 이거 아쉽네."
술을 아주 좋아하는 왕이 웬일로 위스키 앞에서 입맛만 다셨다.
"오늘은 궁정백이 끝내주는 와인을 가져와서...."
"으허허허허, 제국 상탈 지방의 가르네이를 준비했지요."
궁정백이 들고 있는 큼지막한 매그넘 와인 병.
제국 귀족들도 탐내는 귀한 도멘의 와인이었다.
아무래도 발라냐르가 가져온 노움제 위스키보다 귀한 술이다.
하지만 발라냐르는 왕 옆에 걸터앉으면서 하하 웃었다.
"와인 해치우고 또 한 잔 더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그러면 되겠군. 으하하."
발라냐르는 넉살 좋게 대화를 이어 갔다.
술이 한 순배 돌았다.
술을 잘 마시는 왕도 취기가 돌았는지 얼굴이 더 벌게졌다.
노움인 발라냐르는 원래 술을 잘 마시니 멀쩡했는데.
다만 나이 많고 평범한 인간인 궁정백이 너무 멀쩡해 보였다.
발라냐르는 혀를 찼다.
오늘 왕에게 떠보려던 것이 많았다.
특히 왕자들에 대해서.
그런데 이 자리에 궁정백이 있으니 물어보기가 애매하다.
...그냥 눈치를 보지 않기로 했다.
"전하, 왜 갑자기 필리 왕자 저하를 입학시킨 겁니까?"
"응?"
그리 물어보면서 슬쩍 궁정백을 쳐다봤다.
그것을 부추긴 것은 아마 궁정백일 것이다. 하지만 저 늙은 여우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 그거 말야? 그놈도 슬슬 정신 차려야지. 맨날 궁에서 뺀질거리고 있어서 되나."
거짓말이다.
왕과 왕자의 관계는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와는 명백히 다르다.
왕자들은 모두 잠재적으로 미래의 왕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어리석은 왕이 아니라면 미리 왕이 될 자식을 솎아내야 한다.
왕위 계승권은 때문에 확고하게 정해 두거나, 아니면 철저한 정치역학적 계산에 따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현 국왕인 벤자민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1왕자와 2왕자, 두 왕자를 후보로 삼고 서로를 견제시켜서 자신의 왕권을 확실히 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3왕자를 직접 에메랄드 스쿨에 입학시킨 것이다.
1왕자도 에메랄드 스쿨을 졸업했고, 2왕자도 에메랄드 스쿨에 재학 중이다.
느슨했던 왕실의 분위기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라기에는, 던진 돌멩이의 크기가 너무 크다.
3왕자의 배경만은 결코 1, 2왕자에 비해서 밀리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거 참 술맛 떨어지는 소리는. 내가 제국 눈치만이 아니라 이 나라 귀족들 눈치까지 봐야 하나?"
왕이 투덜거렸다.
"이번에 또 제국에서 특사를 보낸다 하네. 그 앞에서 허허 웃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얼굴에 쥐가 날 지경이야."
"하하하...."
이런, 조금 짜증이 날 것 같다.
총장은 조금 직설적으로 나섰다.
"그러면, 3왕자 저하도 제가 '열심히' 가르치면 되겠습니까? 저는 가르치는 것과 연구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인물이라."
'열심히'.
3왕자를 왕권 계승의 후보자로 보아도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왕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참을성 있게 그 답을 기다리려고 하는데, 밉살맞은 궁정백이 또 끼어들었다.
"뭐 총장께서 학생 한 명 한 명까지 신경 쓰실 필요 있습니까. 공사가 다망한데."
"왕자 저하를 일개 학생과 같게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에메랄드 스쿨의 정신이 있는데요, 뭐, 하하하."
총장 앞에서 스쿨의 정신을 운운하다니.
궁정백은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미 3왕자 곁에는 좋은 교수님이 붙은 듯합니다."
"좋은 교수?"
왕이 흥미를 보였다.
"오베른 그리모아르라고, 그 제국에서 천재성으로 명성을 떨친 재원입니다."
"그런 재원이 있었다는 말인가!"
"총장께서도 그 재능을 알아보시고 바로 교수로 채용했지요. 저랑도 인연이 있는 친구인데, 이번에 왕자 저하의 전담 교수로 함께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일이군, 좋은 일이야 허허허."
궁정백이 오베른 교수를 대놓고 언급했다.
자신의 영향력을 어필할 생각인가.
평범한 인물이라면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회한 노움은 그 순간, 실낱같은 빈틈을 궁정백에게서 찾아냈다.
'아, 혹시.'
총장이 본 오베른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그의 전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확실하다.
만약 조금 전,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듣지 못했다면 총장도 오베른을 그저 궁정백의 수족쯤으로 여겼겠지만....
'오베른 그리모아르를 궁정백의 사냥개 정도로 볼 수는 없겠지.'
쓰고 버릴 장기 말 정도의 인물이 절대 아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왕 앞에서 오베른의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궁정백은 그런 인물이니까.
하지만 그것을 지금 총장에게 들켜 버렸다.
발라냐르는 씨익 웃었다.
"네, 그래서 제가 직접 오베른 교수를 왕자님께 붙여 두었습니다. 저번에 제게 '직속'으로 보고했는데 알수록 참 대단한 친구더군요. 그 필리 왕자가 오베른 교수에게는 마음을 활짝 열었다고 하니... 이번에 오베른 그 친구, 아... 실례. 교수한테 맛있는 술이라도 한잔 사 주려고 합니다."
"사이가 제법 좋은가 보군."
"그렇지요. 그 친구도 저와 함께 마도의 길을 걷는 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마법사끼리 통하는 게 있는지라...."
그리고 발라냐르가 궁정백을 슬쩍 보니.
'후후, 역시.'
처음으로 궁정백이 동요를 보였다.
심기가 불편한 듯 눈썹이 아주 살짝 떨렸다.
그렇게, 왕의 술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 * *
「아빠에게.
아빠, 저 네미예요.
벌써 학기가 시작한 지가 두 달이 다 되어 가네요.
2주 전 편지에서는 엄청난 이벤트가 있어서 참 재미있었는데.... 기사 잘 봤어요. '충격! 거미가 2왕자 저하를 잡아먹었다?!'가 제목이었죠.
제목 낚시로 아빠를 욕하는 사람이 많았다면서요.
저는 그래도 늘 아빠를 응원해요. 그런 욕 하는 사람들은 다 자기 돈 주고 잡지 한 번 사 본 적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렇게 제목을 뽑지 않으면 가판대에서 잡지 꺼내 보지도 않을 거면서 말예요.
요 몇 주는 별일 없이 무탈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학생으로서는 보람차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베른 교수님의 과제에서 처음으로 B+를 맞았어요.
겨우 B+ 가지고 뭘 자랑하냐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 교수님은 채점에 가혹하기로 유명하거든요.
과제도 엄청 어려웠어서, B+를 맞은 것은 저와 아마엔 리들 둘밖에 없답니다.
아마엔은 저번에 말했던 그 친구예요.
리들 상단주의 아들. 그런데 특별한 거는 그 상단주 아저씨보다 아마엔이 훨씬 더한 것 같아요.
오베른 교수님도 인정한 마법의 천재거든요.
언젠가는 마탑주가 되지 않을까요? 난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해요.
학생으로서는 잘 지내지만, 기자 지망생으로는 잘 지내지 못하고 있어요.
왕자님도 그렇고 다른 학생들도 조용하거든요.
재미있는 일이 도무지 없었어요.
그래도 이번 주만 지나면 아주아주 큰 빅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어요.
에메랄드 스쿨 대동제!
이번에는 무려 대동제 80주년이라서 더 크게 한대요.
국왕 전하도 참관하러 오신다고 하고, 제국 특사도 참관할 것 같고.
8영웅 중 여럿이 찾아올 테니까 그야말로 올스타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는 불타 버린 백합도 찾아왔으면 좋겠네요.
그분이 궁에서 두문불출한 지 오래이니까.
2왕자와 3왕자 저하 사이의 신경전이 기대가 되어요.
그리고 이번 대동제의 우승자는 누구일지.
당연히 2왕자 저하를 점치는 사람이 많지만, 글쎄요... 어쩌면 이번에는 1학년이 대동제 우승을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건 나뿐일까요.
그러면 아빠도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을 거예요.
...
사랑과 존경을 담아.
네미 라이터스가.」
* * *
──────────────
[리틀 프린스 서펜트lv5]
──────────────
그게 바로 나다.
너만 왕자냐, 나도 왕자다 이 말이다.
오베른 교수의 연구실.
초임 교수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제법 넓은 연구실을 배정받았다.
그 덕에 아마엔, 라니아, 필리 왕자 셋이 들어와 있어도 공간이 좁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는 세 명이 마보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마보 자세란 대충 '앞으로 나란히'와 '투명의자'를 합친 자세다.
왜 그런 것을 하고 있는가 하니.
라니아가 자신이 알고 있는 체력 단련법을 친구들에게 전수한 것이다.
"똑바로 안 하나."
오베른이 차갑게 말했다.
사실 나는 이 녀석들이 오기 전에 오베른에게도 체력 단련을 시켰다.
조금 전까지 헉헉대면서 땀을 흘렸던 주제에, 아주 산뜻한 모습으로 교관 노릇을 한다.
"체력은 모든 것의 기본이다. 마법을 수련하는 데에도 체력 수련은 기본이야."
저리 뻔뻔하게 말하다니.
훌륭하다 오베른.
라니아는 아주 멀쩡한 얼굴이었지만 아마엔과 필리는 달랐다.
그들은 거의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람마다 가진 체력도 다르지만, 가진 인내심도 다른 법이다.
필리의 인내심이 가장 먼저 바닥을 쳤다.
"크아악, 더 못 해! 차라리 날 죽여!"
그러면서 탁 드러눕는다.
오베른은 나를 돌아봤다.
그래, 이제 내가 나설 차례군.
"사아아아악!"(그러면 죽여주지.)
나는 거세게 포효했다.
"히이익!"
그러자 드러누웠던 필리가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좋아 훌륭하군. 학습 효과가 있어.
"사사삭!"
다시 마보를 하라는 뜻이다.
체력을 끝까지 소모했으면, 그다음에는 마나의 수련을 하는 게 좋다.
이건 결코 내가 마음대로 가르치는 게 아니다.
펠레리안에게 배운 마력 수련법.
체력을 극한까지 소모해야만 진정한 명상에 들어가기 쉬워진다나.
필리는 끙끙대면서 다시 마보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런 필리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질겁을 했지만, 이 녀석도 이제 익숙해졌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연결의 왕관lv2를 사용합니다.」
연결의 왕관도 레벨이 올랐다.
그리고 최근에, 필리와 내 관계도 변했다.
구배지례를 하고 정식으로 사제지간을 맺어서 그런지.
*「대상 '왕자 필리lv20'의 관계가 '제자'입니다.」
*「연결의 왕관lv2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연결의 왕관도 그 관계를 인정해 주었다.
*「스킬 '마력감지lv3'을 하루 간 공유합니다.」
마력감지를 공유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평범한 스킬이라고 생각했던 마력감지는 사실 아무나 갖추지 못하는 스킬이라고 한다.
원래는 타고나길 마력과 친화적인 마물이나 종족이 보유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쓰는 마력감지는 마법의 일종이라나.
오감을 이용해서 마력을 감지하는 내 스킬과는 격이 다르다.
그것을 애들에게 빌려주면, 재미있는 효과가 나온다.
'네가 품은 마력이 느껴지나?'
'네, 느껴집니다....'
자신의 몸에 품은 마력을 생생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마법 수련이든, 마나를 다루는 일 전반에 좋은 공부법이 되어 준다.
나는 차근차근하게 마나를 다루는 감각을 알려줬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그런데 그 노크하는 방식이 대충에다가 거침이 없다.
"나 궁정백일세."
게다가 그 뜻밖의 인물은.
당연히 안에서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들어감세."
천만다행으로 나는 곧바로 튕겨 올라서 얼른 오베른의 손을 타고 올라갔다.
저 예의 없는 인간이!
"선객이... 어라."
그는 오베른과 마보 자세를 취한 왕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비비더니.
"허, 허허허!"
오베른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왜 저래 저거.
155. 초빙 강사 특강
궁정백은 뱃속에 뱀을 키우고 있다.
그런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하인들에게도.
사실 망측하기 그지없고 흉한 이야기였는데, 정작 그 평가를 전해 들은 궁정백은 껄껄 웃고 말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의 가신이 화를 내면서 날뛰었다.
감히 주둥이를 함부로 놀린 하인 놈을 크게 벌해야 한다면서.
하지만 궁정백은 웃으며 말하길.
'예로부터 뱀은 현명한 동물이라 하였다. 내가 그런 뱀을 뱃속에 몇 마리나 키우고 있다면, 그만큼 내 지모가 뛰어나다는 이야기 아닌가.'
가신도 어쩔 수 없이 하인을 풀어 주었다.
하지만 그 하인을 다시 본 자는 없었다고 하니.
그 일화조차 궁정백 지미어 베롤링거의 성정을 보여 준다.
지미어는 기억하고 있었다.
3왕자 필리의 모습을 말이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끔찍한 일이 일어난 뒤, 총명했던 3왕자는 비뚤어졌다.
어릴 적에는 제법 귀여운 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성격과 정신이 비뚤어졌기 때문일까. 그 후로는 생긴 것도 음침하니 궁정백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다.
왕자들이 으레 그렇지만, 그도 제 잘난 줄만 알고 다른 이들을 막 대하곤 했다.
레온 왕자나 1왕자는 교육을 잘 받아서였는지, 머리가 굵어지고는 그런 짓을 자제했다.
하지만 방치되어 큰 3왕자는 10대가 된 이후에도 제 버릇을 못 고치고 소란을 피워댔다.
이 궁정백이 무서운 줄은 아는지, 지그시 노려보고 있으면 뱀 앞의 쥐새끼마냥 발발 떨었지만.
"큭."
그 모습을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만 궁정백이라고 해도 3왕자를 컨트롤 할 수는 없었다.
필리는 부왕과 제 어미 말고는 다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 반항에는 기묘하게도 굳은 의지가 깃들어 있어서, 마음속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해'라는 정언명령이라도 있는 듯했다.
그래서 오베른 그리모아르에게 3왕자를 맡길 때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3왕자는 위압감이 있는 사람에게 약하니, 오베른의 앞에서는 조금이나마 얌전하게 굴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다.
얼마 전, 왕과의 술자리에서 총장이 하도 오베른 그리모아르에게 침을 바르길래 한번 와 봤다.
다름 아닌 그 총장에게, 그토록 고평가받을 만한 인물이었는지는 몰랐으니까.
확인해 볼 겸, 그리고 협박, 혹은 회유해서 자신이 무슨 처지인지 깨닫게 해 줄 겸 온 것이다.
하지만 설마 이곳에서 마보 자세를 취한 왕자를 보게 될 줄이야.
"어떻게 했나."
"뭘 말입니까."
능청스럽기는.
궁정백은 눈짓으로 왕자를 가리켰다.
오베른은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체력 단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워낙 체력이 약하시기에."
"하하, 하하핫!"
궁정백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자네는 코끼리에게 물구나무를 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군. 몰라봤음에 사과함세."
"...."
"잠시 우리끼리만 얘기할 수 있나?"
"좋습니다."
그리고 오베른은 왕자와 학생들에게 손짓했다.
"나가 있어라."
"네."
왕자를 포함한 삼인방은 얌전히 인사하고 나갔다.
그 공손한 모습에 궁정백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앉으시죠."
"그래, 내 원래는 말이야...."
소파에 털썩 걸터앉으며 궁정백이 말했다.
"청구서를 내밀러 왔다네."
"청구서 말입니까?"
"그래, 내가 자네에게 베푼 은혜와 후원금이 한두 푼이던가."
은혜와 후원금은 같은 말이군, 하면서 그가 자신의 수염을 매만졌다.
"받은 게 있으면 사람은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해. 나는 자네에게 많은 걸 주었지.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자네를 샀다는 것과 다름없어."
여태까지 오베른에게 보인 태도와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지미어 베롤링거에게 후원받은 자들은 언젠가 이렇게 쓰임받는 순간이 오는 법이다.
"다만."
지미어는 품속에서 금액이 적히지 않은 수표를 꺼냈다.
"내가 셈을 잘못 치렀나 보군. 자네의 가격을 잘못 계산했어, 내 생각보다도 비싼 자였구만."
그는 소파 앞에 있는 펜을 들더니, 백지수표와 함께 내밀었다.
"자네를 사고 싶네, 마땅한 가격을 적게."
"...."
오베른의 표정은 담담했다.
하지만 그 손은 귀신같이 움직여서 펜을 잡아챘다.
지미어가 반갑게 미소를 지은 순간이었다.
펜을 쥔 오베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궁정백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베른의 팔뚝에는 수정 뱀 한 마리가 단단히 감겨 있었다.
잠깐의 침묵 뒤, 펜을 쥔 오베른이 자연스럽게 필통에 펜을 꽂았다.
"저를 돈으로 사실 수는 없습니다."
"...방금 거의 샀던 것 같은데 말이네."
"그럴 리가요."
궁정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뭐, 수표로 살 수 없는 것이야 세상에 널렸지."
그리고 백지수표를 여러 조각으로 찢어서 흩뿌렸다.
흩날리는 종잇조각을 오베른이 멍하니 바라봤다.
* * *
'정신 차려!'
나는 정신적으로 강력히 외쳤다.
'오베른 이 새끼야! 정신 차리라고!'
연결의 왕관으로 이어진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오베른의 영혼이 반쯤 가출한 상태라는 것을.
'눈앞에 별이 반짝입니다....'
'별이 아니라 수표 조각이야.'
'으흐흐흑.'
이러다가는 아무리 오베른이 대배우라고 해도 눈물이 흘러나와 버릴 것이다.
'돈쯤은 내가 벌게 해 줄게.'
' ...뱀이 돈이 어디 있습니까.'
'내 돈으로 호텔에 묵던 주제에, 진짜니까 걱정 마라.'
나는 오베른에게 약속했다.
'이 내가 약속한다. 큰돈을 벌게 해 주겠다고.'
'진짜죠?'
'그래, 그러니까 빨리 표정 관리하고 저 노인네 말 좀 들어봐.'
다행히 오베른은 금방 스스로를 추슬렀다.
"궁정백께서 제게 베푼 호의에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게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도움을 받은 자의 도리로서 돕겠습니다."
"내게 우정을 내세우는 자는 늘 결말이 안 좋았는데. 흐흐."
아무래도 궁정백은 오베른이 마음에 쏙 들은 것 같았다.
"별것은 아닐세. 이번 대동제에 솔라리안이 열리는 것을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대동제는 에메랄드 스쿨의 축제 기간을 뜻하고.
솔라리안은 학년 구분 없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아카데미란 사실, 학식과 무력을 동시에 갈고닦는 기관이다.
솔라리안은 학생들 중에서 특히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는 빅 이벤트였다.
"그 대회에서 3왕자 저하를 우승시키게."
"...."
나와 오베른의 감상은 오랜만에 일치했다.
'그게 되겠냐.'
'그게 되겠냐,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말이 심한 쪽이 오베른이었다.
"말이 되냐고 생각하는 거겠지."
순간 뜨끔해서 놀랐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이번 솔라리안의 결승은 3인 1조로 진행될 거거든."
아직 오베른조차 전해 듣지 못한 내부 정보였다.
외부인인 궁정백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처음으로 치러질 예선의 종목은 '보물찾기'일세."
"아."
"기억해 두면 좋을 거야. 숲에 금화 여럿을 숨겨 둔 다음에 그것을 찾아낸 이들만 통과시키는 형식이라지."
기억해 두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 거야?
"왕자 전하를 최소한 3등 안에 들게 해야 해."
"우승시키겠습니다."
오베른을 시켜서 그렇게 질렀다.
"하하핫! 자신감 하나는 대단하군."
"다만, 그를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뭐가 말인가."
상뱀이라면 때가 왔을 때 과감하게 질러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지금은 황금 고블린, 아니 물주가 눈앞에 있었다.
"영약과 비약, 그리고 소소한 아티팩트들입니다."
왕자는 어렸을 때부터 귀한 것을 많이 먹고 자라서 의외로 마력이 풍부하다.
라니아 역시 마르테인에 들어간 뒤로는 좋은 것들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우리 아마엔은, 그리고 오베른은 영 속이 비쩍 곯아 있다.
나처럼 마석을 잔뜩 포식하는 건 아니더라도 비슷한 게 필요하다.
나는 마력량을 늘릴 수 있는 각종 재료와, 쓸모 있는 아티팩트들을 주문했다.
물론 내가 그것들을 알아서 주문한 건 아니고, 펠레리안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주문하면 된다.
'이렇게 많이 주문해도 될까요?'
오베른이 걱정했다.
대단한 걸 주문한 건가?
내 요구에 대한 궁정백의 반응은....
"자네... 백지수표는 거절하더니 이럴 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웃었다.
"그래, 몸값이 비싸다 이거지. 좋다 준비해 주겠네."
대체 내가 얼마 치를 요구한 걸까.
"그 대신! 나도 실패 시에 뭔가를 받아 가야겠어."
궁정백도 손해를 보지는 않을 심산인 것 같았다.
"우승하지 못할 시, 자네의 목숨을 받아 가겠네."
"...."
오! 나쁘지 않은 거래다.
빨리 끄덕여 오베른.
오베른의 맥박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기세'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인물이었다.
"물론입니다."
그 말투에는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궁정백은 또 한 번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가 떠나가고.
오베른은 다리를 후달달 떨며 소파에 쓰러졌다.
"난 죽었다."
"사악!"
걱정 마, 우승시키면 되잖아!
* * *
대동제와 솔라리안에 대해서 애들과 이야기해 봤다.
셋 다 당연히 참가하겠다는 답이었다.
다만, 1등을 하라는 이야기에 필리는 당황했다.
"1등까지는 조금...."
"왕자, 그대는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를 걱정하나? 참가를 결심한 이상 1위를 노려라. 셋 모두 다."
"제가, 1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필리의 태도는 요 몇 달 새 많이 고분고분해졌다.
오베른은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해야지. 내가 그리하도록 만들 것이다."
"아...."
오베른이 처음으로 뜨거운 열기를 내비쳤다.
그 모습에 어떤 생각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필리는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아마엔, 라니아."
"네!"
"너희들은 최선을 다하되, 필리가 우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경쟁자들을 붙잡고 끌어내려서라도. 너희들이 떨어지더라도 그래야 해."
라니아가 엑, 하고 당황했다.
하지만 아마엔은 전혀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라니아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건 절대 기밀이지만, 1차 시험의 종목은 보물찾기다. 저 테페리 숲 곳곳에 숨겨져 있는 금화를 모으는 게 시험 과제일 것이다."
"...그런 걸 말해 줘도 되는 거예요?"
"절대 기밀이라고 하지 않았나. 당연히 비밀이다."
오베른은 멀쩡한 얼굴로 시험문제를 셋에게 노출했다.
그야말로 교수 자격이 박탈될 만한 사유지만.
"2왕자 저하도 이미 들어 알고 계시겠지."
저쪽에서도 이 정도 정보쯤은 미리 들었으리라고 가정하는 게 맞을 것이다.
2왕자, 그쪽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너무 걱정은 말도록."
하지만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우선, 라니아의 신체 능력은 아카데미의 학생 중에서도 순위권에 들 정도로 대단하다.
마르테인 가문의 비전 수련법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저 쪼끄마한 애한테 엄청난 잠재력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리고 아마엔은 의외로 잔뼈가 굵다.
숲을 다니는 것에도 능숙하고 마법도 잘 쓰니까 걱정은 하나도 안 된다.
문제는 필리였는데, 내가 돕기로 결정했다.
"뱀 경이 너희에게 붙어 도울 것이다."
오베른은 내 파트너라는 설정이니까, 내 호칭을 뱀 경이라고 했다.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나는 지팡이에서 내려와 필리에게 다가간 뒤 그 손목에 찰싹 휘감겼다.
이대로 소매를 내리면 전혀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걱정 마! 내가 도와줄 테니까.'
'아, 네에....'
필리 녀석은 내게 존칭을 꼬박꼬박 잘 썼다.
이렇게 준비의 8할이 끝.
"그리고, 숲을 탐험하는 데에도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그것을 가르쳐 줄 일일 강사를 모셨다."
라니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곳은 에메랄드 스쿨이 아니었다.
주말을 맞아 셋을 데리고 근교의 숲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쪽에 '누군가'들을 불렀으니.
"기사 자레인 경과 사냥꾼 올리버 씨다."
저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둘이 나타났다.
"아가씨,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이쪽이 교수님이시고, 허어어어억!"
그리고 그들은 펄쩍 뛰어내린 나를 곧바로 알아본 듯했다.
그렇게나 반가운지 입이 쩍 벌어졌다.
"사악!"
자인, 올리버! 오랜만이야!
156. 뱀을 우습게 보지 말 것.
어느날, 뱀이 되어 떨어져 버린 이세계.
어머니 메두사맘은 기사에게 목이 잘려 죽었고, 형제들은 서로 싸우다가 인간들에게 불타 죽었다.
혼자 희게 태어난 나는 숲에 흘러 들어가 그리 살았다.
벌레들에게 물어뜯기고 또 벌레들을 씹어먹으며, 지네 부부를 만나고 코카트리스에게 물려 죽을 뻔하고.
그렇게 조금씩 진화하면서 살아남았다 이 말이다.
그런 내게 친구 같은 것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친분 관계가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고블린 부족과 나나루크, 지네맘, 고릴라 여사, 그림자숲의 마물들, 아빠, 펠레리안, 드워프들과 로일....
아니 생각해 보니 많긴 하구나.
이렇게 아는 이들이 많아지다니.
전생의 인간관계보다 오히려 지금의 뱀간관계가 더 넓고 깊어진 것 같다.
하여튼, 자인과 올리버도 내가 아는 인간 중 하나다.
사실 아는 '인간'의 수는 적은 편이다.
옛말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한 번 만나는 것도 대단한 인연인데 이 먼 땅에서 다시 만나다니.
자인과 올리버에게도 인연의 끈이 닿아 있음이 분명하다.
"사아아악!"
그래서 그렇게 반겨 준 건데.
"흐어억!"
"...."
명색이 기사라는 자인은 비명을 지르고 올리버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너무 반가워서 그러는 거 맞지?
"왜, 왜, 왜, 여기 계십니까?"
그나마 침착한 올리버가 그렇게 물었다.
왜를 3번이나 붙일 정도로 궁금했나.
그것을 보니 라니아가 미처 내 존재를 얘기하지 못했나 보다 싶었다.
'이곳에서 오베른과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
"그렇군요...."
'라니아는 내 훌륭한 학생이지.'
올리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그, 그건 참으로 잘된 일이군요."
자인을 돌아보니 그는 라니아와 쑥덕거리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 변화가 다채롭다.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이 두 아저씨들은 라니아를 무척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자인에게도 인사해야지.
그에게 다가가자 자인은 나를 보고 펄쩍 뛰었다.
펄쩍 뛸 만큼 반갑다는 거지.
나도 따라서 펄쩍 뛰어 줬다.
"오, 오랜만입니다."
'그래 반가워 자인. 근데 왜 자꾸 자레인이라고 부르는 거야?'
"아 그건 제가 철사자 기사단에서 ...."
자인이 홀린 듯 대답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올리버가 섬전같이 달려와서 자인의 옆구리를 때렸다.
"욱!"
"하하하, 자레인,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 그런 거구나.
내가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다.
철사자 기사단 출신이었던 자인은 신분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기사 자인은 그곳에서 마물들에게 휩쓸려 죽었으니, 이곳에 있는 것은 그저 자레인이라는 방랑기사 느낌으로.
'그런 컨셉이구나.'
"아... 예에."
그렇다고 주먹질까지 하다니.
내가 알기로 기사는 사실상 귀족이고, 사냥꾼은 실력이 좋다 해도 야인이었는데.
친구가 된 거구나.
나도 중학생 때 친구들이 저렇게 나를 때리고 그랬으니까 잘 안다.
조금 흥분한 것 같던 그들은 다행히 곧 진정했다.
놀자고 부른 것은 아니지 않던가.
올리버가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은 뒤 말을 했다.
"숲을 탐색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왕자에 대해서 예를 표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왕자 저하를 뵙습니다. 사냥꾼 올리버입니다."
"기사 자레인입니다."
예전의 필리였다면, 자신에게 곧바로 예를 표하지 않았다고 방방 뛰었을지도 모른다.
"아, 예 반가워."
하지만 금쪽이 훈련법이 통했는지.
아니면 그 둘의 요란한 반응에 기세가 눌렸는지 모르겠지만, 필리는 얌전히 인사를 받았다.
"크흠, 예에, 뭐 그리고 한 마디 올리자면."
올리버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되찾으려는 듯 확실하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최고의 적임자를 찾으셨습니다."
그 자신감에 '오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블랙 덴 소속은 아니지만, 사냥꾼으로서의 역량은 블랙 덴의 사냥꾼들에 비해서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블랙 덴이라고 하면 다름 아닌 헤일릿 랑그레이의 사냥꾼 길드이다.
올리버는 그 최고의 사냥꾼들보다 자신이 낫다고 말하고 있었다.
"테페리 숲은 그리 험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역시 오래된 숲인 만큼 금화 몇 닢을 숨겨 둘 곳은 차고 넘치겠지요. 마물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뭐 마경하고 비교할 만한 곳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자신감이 좀 생기십니까?"
올리버가 씨익 웃었다.
삼총사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거기서 갑자기 올리버가 호통을 쳤다.
"하나, 둘, 셋!"
웃던 올리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방금 여러분 셋은 전부 죽었습니다."
"무, 무슨...."
"왕자 저하는 썩은 나무 속에서 사는 벌에게 수십 방을 쏘여 죽었고, 라니아 아가씨는 숲에서 길을 잃어 굶어 죽었으며, 거기 아마엔 군은 멧돼지에 배가 받혀 죽었어요!"
삼총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올리버의 기세가 무시무시해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분위기가 충분히 차가워지고 나서야 올리버가 빙긋 웃었다.
"숲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방금 말한 것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개인의 무력과 숲에서 살아남는 일이 꼭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되지 않은 자라면, 심지어 오러를 쓰는 기사라도 숲에서 죽어 나자빠지곤 합니다. 자레인 경, 내 말이 맞지?"
"올리버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죠.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저는 가장 중요한 것들만 속성으로 가르치겠습니다."
히야.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예전에 페랑 유파 단검술을 배울 때도 느꼈지만, 저 올리버라는 사냥꾼의 강의력은 제법 나쁘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오베른보다도 나은 것 같다.
오베른, 너도 올리버를 보고 배워.
"중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길을 잃지 않는 것, 두 번째는 길을 찾는 것, 세 번째는 길을 만드는 것."
오호, 그럴듯한 말을 한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죽습니다. 특히 마경에서 밤을 보낼 은신처를 찾지 못하면 죽을 확률이 절반이나 올라가죠. 체력을 온존하지 못하면 감각마저 둔해지기 때문입니다. 제 강의를 듣는 이상 여러분들은 길을 잃지 않을 겁니다. 약속드리지요."
자신의 족집게 강의를 들으면 수능 만점이 가능하다는 식의 자신감이다.
그 자신감에는 원인이 있었다.
그는 배낭에서 여러 겹으로 접어 둔 종이를 꺼냈다.
"테페리 숲의 지도입니다. 시험날까지 숲의 지도를 보지 않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외우십쇼."
펼쳐진 것은 다름 아닌 시험 장소의 지도였던 것이다.
밝혀진 비밀이 생각보다 시시하자, 학생들은 에이 하는 소리를 냈다.
특히 필리가 코웃음을 쳤다.
"겨우 지도 가지고 그렇게 잘난 척을 한 거야?"
이 녀석 아직 제 버릇을 못 고쳤구나.
내가 바로 궁둥짝을 때려 주려고 하는데, 올리버가 진지하게 말했다.
"휘이이- 퍽!"
"뭐, 뭐야."
"무슨 소리인지 압니까?"
올리버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왕자 저하께서 꼴등으로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지도도 안 외우셨고 딱 보니 몸도 느려 보이시니, 1차전부터 떨어지시겠군요."
"큭."
"2왕자 저하는 참고로 통과했을 겁니다. 그쪽에서도 지도를 안 봤을 리는 없으니까요."
"지금 마, 말 다 했어!"
나는 웃어 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필리가 나대지 못하도록 엉덩이를 때려 주었다.
*「꼬리치기lv3을 사용합니다.」
짜악!
필리가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왜, 왜 나만 때려요."
"사아악!"
나머지 애들은 벌써 열심히 지도를 보고 있으니까.
필리도 엉덩이를 부여잡으면서 지도를 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올리버의 눈에 고마움이 담겼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지도를 제대로 읽으려면 독도법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뭐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으니 그냥 지도를 통째로 외우십쇼. 따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3명의 머리가 생각보다 잘 돌아간다는 거였다.
지도를 완벽히 외우기는 사실 꽤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대략적으로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라니아가 제일 떨어지고, 아마엔이 가장 머리가 좋았다.
필리는 의외로 중간은 갔다. 그것만 해도 꽤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지금까지는 사실 사냥꾼이 가르치든 동네 농부가 가르치든 의미 없는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 올리버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냥꾼의 기술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길을 잃지 않는 법.
"머릿속에 지형지물을 알고 있고,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알 수 있다면 길을 잃을 일은 없습니다."
올리버가 보여 준 것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이 나무와 바위를 보십시오. 이걸 가지고 동서남북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
투덜대는 필리는 꼬리를 살짝 들어 보여 주면 입을 닥친다.
"이것만 봐도 절반은 압니다. 위에 보면 가지가 유독 많은 쪽이 있죠? 태양빛을 잘 받아서입니다. 저쪽이 남쪽일 확률이 높습니다."
"...."
"바위를 보시면 이끼가 붙어 있는 쪽이 있습니다. 이끼는 습하고 어두운 쪽에서 잘 자라지요. 이쪽이 북쪽일 확률이 높습니다."
"...오."
"자레인."
자인을 부르자, 자인은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 검에 오러가 맺히고.
서걱!
그리 굵지 않은 나무를 단번에 베어 냈다.
"베인 나무의 그루터기에는 나이테가 있지요."
다들 과학 실습 수업에 나온 중학생처럼 몰려든다.
"이쪽 촘촘한 부분이 북쪽, 헐거운 쪽이 남쪽입니다."
방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다만 이것들은 정확한 게 아닙니다. 여러 방식을 써서 함께 검증하면 좋습니다."
설명에 막힘이 없었다.
"10분의 시간 정도만 쓰면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자가 보이시죠?"
잘린 나무 기둥의 그림자 끝에 표시를 한다.
10분을 기다리자 그림자가 이동했다.
움직인 그림자의 끝을 처음 표시한 곳과 이어서 선을 긋는다.
"시작점이 서쪽이고, 끝점이 동쪽입니다."
공자님이 말씀하시길.
길에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으면 그중에는 반드시 스승이 될 수 있는 이가 한 명은 있다고 했다.
숲에서 나고 자란 마물임에도 올리버에게 배울 점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수업을 듣다 보니.
*「길 찾기lv1을 습득했습니다.」
그런 스킬을 습득할 정도였다.
진작부터 이런 스킬이 있었다면 대수림에서 아주 든든했을 텐데.
감사합니다, 올리버 선생님!
그로부터 며칠간.
올리버는 열심히 자신의 지식을 전수해 주었다.
* * *
'휴 다행이다.'
라니아의 부름을 받고 왕자를 포함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지 대략 일주일 째.
대도 '처인 페랑'의 단검술을 이어받은 백전노장의 사냥꾼 올리버가 떠올린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 뱀'을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끔찍한 몬스터웨이브에서 목숨을 건지고 라니아까지 구한 것은 분명 천운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확신할 수 없는 게 있었다.
그들을 죽이지 않았던 뱀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몬스터웨이브를 이끄는 것처럼 보였던 저 뱀이 모든 것의 원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말이다.
뱀을 마주쳤을 때, 마치 생쥐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어 버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때에 비해 작아져서 조금 헷갈렸지만 분명 그 뱀이 맞았다.
자인과 올리버는 라니아와 함께 마르테인 가에 들어갔다.
라니아가 마르테인 식 전투술을 열심히 수련한 것처럼, 그들 역시 스스로를 갈고닦았다.
자인은 오러를 훨씬 더 크게 뿜을 수 있게 되었고.
올리버 역시 그런 자인을 상대로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뱀은 그때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해진 것 같았다.
저 위압감 넘치는 에메랄드 스쿨의 교수를 하인 부리듯 다루는 것만 봐도....
'눈치채지 못했나 보군.'
게다가 사실, 올리버는 뱀에게 캥기는 것이 있었다.
다행히 뱀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 주어진 일주일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여기까지, 제가 전수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수했습니다. 당장 모레 대동제가 시작하니 그동안 푹 쉬시기를 바랍니다."
세 명의 몸은 흙투성이였다.
뱀 역시 마찬가지였다.
뱀은 어찌 된 놈인지 뭔가를 배울 의지가 넘쳤다.
지도를 달달 외운 것은 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사사사삭!"
함께 인사를 마쳤다.
이제 드디어 떠날 수 있겠군.
올리버가 그리 생각하면서 홀가분해하는데.
갑자기, 뱀이 라니아의 어깨 위에 친근하게 올라탔다.
몸을 고정하려는 듯 꼬리로 라니아의 목을 살짝 감싸는데.
라니아는 무덤덤했지만 그 뱀의 위험을 아는 올리버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갑자기, 뱀이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올리버. 물어볼 게 있는데."
그렇게 말을 한 것은 라니아였다.
"아, 뱀 선생님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예? 어, 네에."
뱀은 이제 닿은 대상에게 목소리를 전할 수 있었다.
"다른 애들은 다 비켜 봐, 올리버랑 할 말이 있으니까."
뱀이 라니아의 입을 빌려 그리 말했다.
놀랍게도, 교수와 왕자를 포함한 이들이 군말 없이 물러났다.
이곳에서 뱀의 권위가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실 말씀이라는 건 무슨...."
"내가 얼마 전에 만난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긴장한 채로 뱀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판단이라고, 알아?"
아아.
올리버는 그만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이름이 뱀에게서 왜 나온단 말인가.
"동문이더라고, 그러니까... 페랑 단검술을 같이 익힌 동문 말이야."
라니아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줄 모르는 듯 보였다.
올리버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듣자 하니 내가 익힌 페랑 유파 단검술이 완전하지 못하다던데? 난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랬다.
예전, 뱀이 단검술의 전수를 요구할 때, 올리버는 후반 삼식을 제외한 단검술의 전반부만 전수했다.
누군지도 모를 마물에게 비전 단검술을 넘기기 싫어서였다.
설마, 그것을 저 마물이 눈치챌 줄이야.
단검이 허공에서 천천히 회전했다.
라니아의 목을 뱀이 움켜쥐고 있다.
지금, 뱀은 협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기만하고 능멸한 죄를 물으며.
쉬리릿, 혀를 낼름댄다.
"어때? 터무니없는 이야기지...?"
올리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보다 무해한 마물이구나. 그리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라니아는 이제 올리버에게도 소중한 사람이다.
그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 * *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갑자기 올리버가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라니아도 나도 깜짝 놀랐다.
왜 그래요, 올리버 선생님!
"페랑 단검술의 후반식을 전부 전수하겠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제가 가진 비전기술들도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아가씨를 해치지 마십쇼!"
"사아악!"
내가 라니아를 왜 해쳐!
'잠깐.'
그런데 뭐라고.
정말 후반식 같은 게 있었나.
어찌 됐든, 좋은 일이네!
157. 재림 뱀갈공명
올리버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사죄하더니.
하루 종일 나한테 미처 가르쳐 주지 못했던 페랑 유파 단검술의 후반식을 가르쳐 주었다.
*「페랑 유파 단검술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페랑 유파 단검술lv7이 페랑 유파 단검술lv8이 되었습니다.」
참, 이런 게 있었으면 처음부터 가르쳐 줬으면 얼마나 좋아.
좀처럼 오르지 않았던 페랑 유파 단검술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겨우 이틀 만에 단검술의 레벨을 4에서 8까지 상승시켰을 정도였다.
강의를 마치고, 올리버는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실실 웃었다.
나이도 자실 대로 자신 양반이 왜 저러는지.
여하튼 시간은 흐르고, 대동제가 시작되었다.
축제 이름이 참 친숙하다. 물론 언어는 다르지만.
"제80회 대동제를-"
확성 마법에 의해 커진 노움 총장의 목소리가 짜랑짜랑하게 울린다.
"시작- 합니다아아악!"
목소리를 크게 키우는 마법을 차치하더라도 훌륭한 발성이다.
마치 모 캐스터의 오프닝 멘트를 보는 듯하다.
그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화려한 폭죽이 터졌기 때문이다.
환한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으로 이루어진 불꽃이 하늘을 선명하게 수놓았다.
퍼퍼펑!
요란하고 화려했다.
학생들의 등록금이 터지는 소리였다.
대동제는 말 그대로 축제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야만의 세상이다.
아카데미의 주전공들이 검술이나 마법 같은 것인데, 아무리 좋게 포장한다 한들, 그것은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니.
대동제에는 각종 부스며 기획 행사를 하기도 하지만 메인 행사는 따로 있었다.
"동시에, 솔라리안의 시작을 선포- 합니다아아악!"
솔라리안이라는 이름의 '전사' 선발 대회이다.
솔리온 왕국의 이름인 '솔리온'은 태양을 일컫는 옛 표현이다.
솔라리안은 왕국이 세워지기도 전인 고대에, 이곳에서 진행된 '태양의 전사'를 선발하는 과정의 이름이다.
지금은 '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을 선발하는 이벤트의 이름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학생이란 즉 가장 강한 학생이다.
그 강함을 어떻게 측정하는가는 방법이 갈릴 일이겠지만.
"매년 솔라리안의 시험 내용은 바뀌었죠. 이번엔 무려 80주년의 빅매치. 가장 특별하고, 가장 스케일이 큰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총장은 그리 외쳤다.
"오늘 치러질 예선, 그리고 일주일 뒤 있을 본선. 어느 쪽도 놓칠 수 없는 엄청난 경기일 겁니다-!"
나는 오베른과 함께 교수석에 있었다.
저 아래에는 단체 주문한 로브를 걸친 학생 일백여 명이 서 있었다.
솔라리안에 지원한 학생들이었다.
"132명의 지원자 중, 예선을 통과하여 살아남는 것은 오직 24명뿐!"
물론 예선에 떨어진다고 죽지는 않는다.
나는 아래에 있는 학생들을 살폈다.
당연히 나의 제자들 또한 저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아마엔이 이쪽을 보고 살짝 손을 흔들고 있다.
그 옆에 잔뜩 긴장한 표정의 필리 왕자, 하나도 긴장되어 보이지 않는 라니아가 서 있다.
"그러면 떠날 학생들에게 큰 환송을-!"
그리고 함성이 터져 나왔다.
폭죽이 다시 한번 터지고, 학생들과 교수석 아래에 그려진 마법진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험장까지 걸어가도 되겠지만 에메랄드 스쿨과 발라냐르 총장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100명이 넘는 대인원의 중거리 워프 마법진.
비용도 많이 들고 위험부담도 있는 일이지만, 총장의 대마법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파앗!
마력의 파도에 휩쓸리는 느낌이었다.
으아아압, 하는 느낌이 잠시 지속되더니, 눈앞이 환해졌다.
-저 노움 녀석, 마법을 쓰는 방식이 제법 깔끔하군.
펠레리안의 감상은 담백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놀라운 감각이었다.
쑤욱 하는 느낌이 지나가고 나니까, 에메랄드 스쿨에서 울창한 숲 한가운데로 이동한 것이다.
'텔레포트 마법, 저도 배우고 싶어요!'
-아서라, 네가 익히려면 한참은 걸릴 거다. 그리고 이건 워프 마법이야.
내 마법 재능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던 펠레리안이 저리 말할 정도라면 무척 어려운 마법일 것이다.
"와하하하, 놀라셨지요."
발라냐르 총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곳은 테페리 숲. 여러분들의 예선은 바로 이 숲에서 진행될 겁니다!"
나는 애들을 바라봤다.
얘들아 놀란 표정 지어야지!
다행히 삼총사들은 최대한의 연기력을 발휘해서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오베른과 달리 부족함이 느껴지는 연기다.
"예선의 규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게임의 이름은 바로, 보물찾기!"
총장이 손가락을 들자, 허공에 금화 세 개가 떠올랐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그림이 촥 펼쳐졌다.
금화에는 각각 1, 2, 3이 적혀 있었다.
"이곳 테페리 숲 곳곳에는 이런 금화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보다시피, 금화에 적혀 있는 숫자가 각각의 점수입니다."
보물찾기는 맞지만, 조금 특이한 방식의 보물찾기다.
찾은 금화의 점수들의 합계를 낸 뒤, 위에서부터 24명을 잘라서 합격시키는 것이다.
최대한 높은 점수의 금화를, 최대한 많이 모으는 게 게임의 목표.
잘 생각해 보면 그리 만만하지 않다.
우선 점수가 높은 금화가 더 험하고 위험한 곳에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딱히 '금화를 모으라.'는 말 이외에는 별다른 규칙이 없다.
즉, 다른 학생을 습격해서 금화를 빼앗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건 자칫하면 아수라장이야!'
굳이 그것을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학생들은 곧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세상이다.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오베른이 슬쩍 학생들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아마엔이 눈치 좋게 오베른의 곁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내가 폴짝.
오베른의 손목에서 아마엔의 손목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필리의 손목으로까지.
잔혹한 규칙에는 더욱 잔혹한 계획을 세우는 게 당연하다.
그 계획이란, 바로 사부님이 직접 참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리 게임이요, 직접 훈수 대작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삼총사 모두 합격하는 게 목표였다.
이미 나는 사상 최악의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워 둔 바다.
다만 중요한 것은 1차 시험이 아니라 2차, 즉 본선이다.
예선이야 24명 안에만 들면 된다.
극적인 우승을 위해서는 오히려 이번 게임에서 두각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총장이, 게임의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게임이 끝났을 때, 보유한 금화는 참가자의 소유입니다!"
"와아아아아!"
거기까지는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돈이 차고 넘치는 소수의 갑부집 자제들을 제외하고, 금화는 적은 돈이 아니다.
용돈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이들은 학교의 자비로운 결정에 환호를 했다.
"그리고 예선의 1위에게는 아주 특별한 부상이 주어질 겁니다."
1등 상? 그런 건 못 들어 봤는데.
"왕궁에 존재하는 거울의 방. 그곳에 들어갈 기회입니다!"
순간 침묵이 가라앉았다.
뭔데, 거울의 방이 뭔데!
수상한 수군거림이 학생들 사이에 퍼졌다.
환호를 터뜨리는 이들은 없었지만, 그곳이 뭔지는 다들 아는 분위기였다.
'필리! 거울의 방이 뭐냐!'
그렇게 물어보니, 필리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답했다.
'왕궁에 있는 특별한 공간이에요... 그곳에는 본질의 거울이라는 게 있고요.'
'본질의 거울?'
'자신의 본질을 보여 준다는 아주 특별한 거울이에요.'
나는 당황했다.
아니, 아무리 너희들이 '그 마법 학교 삼총사'와 비슷하다고 해도 자기 욕망을 보여 주는 거울까지 나와 버리면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어!
아마엔이 거울을 봤더니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환히 웃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나와 버린다거나 하면 안 되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본질의 거울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보여 주는 거울 따위가 아니었다.
'대상의 본질을 보여 주는 거울이에요.'
'너도 써 봤어?'
'아뇨, 왕자들은 거울의 방에 들어가는 게 절대 금지거든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본질의 거울은 미래의 자신을 보여 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꼭 미래만 보여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젊거나 어린 사람이 거울을 보면 성장한 모습이 떠오르는 게 보통이랍니다.'
'그러면 ....'
'예전에, 왕자가 본질의 거울을 보는 게 금지 사항이 아니었을 때, 두 명의 왕자가 본질의 거울을 봤죠.'
왕자들이 그곳에서 본 것은, 각자 왕관을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한다.
거울을 본 두 왕자는 모두 자신이 왕이 될 운명이라고 굳게 믿었고, 왕실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왕자 하나는 왕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죽었죠.'
'그러면 그 본질의 거울이 틀린 거 아니야?'
'글쎄요, 당시에는 수십 명의 왕자 중 그 둘만이 왕이 된 자신의 모습을 봤으니, 또 모르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경우 본질의 거울에 비친 미래는 실현된다고 한다.
내 마음속에 무언가가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아주 뜨거운 호기심이었다.
'보고 싶어....'
'선생님이요? 거울을?'
'나라고 못 볼 것 있나! 너희 중 1등을 한 명 만들어서 끼어들어 가면 되지!'
나는 원래부터 심리테스트며 MBTI 검사 같은 것을 아주 좋아했다.
내가 죽기 전 즈음만 해도 MBTI가 아주 유행해서 스몰토크 하면 MBTI 얘기부터 했는데.
물론 나는 친구가 없어서 스몰 토크를 해 본 적은 없다.
참고로 내 MBTI는 당연하게도 ....
"보고 싶다...."
그때 그리 중얼거린 것은 다름 아닌 라니아였다.
그녀 역시 본질의 거울을 보고 싶었나 보다.
하기사, 가문도 이름도 잃은 라니아는 자신의 본질이 뭔지 궁금할지도 모른다.
음....
라니아.
아무래도 제자가 된 아마엔, 필리와 달리 그녀에게는 조금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좋아!
찰싹!
나는 라니아의 손 위로 올라탔다.
*「연결의 왕관lv2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라니아에게 말하길.
'라니아!'
'아, 네, 넵.'
'1등 하자.'
라니아는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총장이 외치길.
"기한은, 해가 질 때까지. 그러면...."
치켜든 발라냐르의 손에서 불똥 같은 게 솟아올랐다.
휘익- 퍼엉!
"시작입니다!"
학생들이 숲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 자자~ 선입수장~
* * *
테페리 숲은 적당하게 넓다.
적당하게 넓은 게 어느 정도냐 하면, 대수림 아캄분지의 절반 정도 된다.
숲을 횡단하는 데는 한나절이면 충분하지만 숲 전체를 수색하는 데는 하루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 숲을 아마엔과 필리가 걷고 있었다.
규칙은 그저 금화를 찾아 모으는 것.
당연하게도, 팀을 이뤄도 상관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수십 명이 함께 몰려다녀도 상관없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 효율이 떨어지겠지만.
뱀의 작전에 따라, 아마엔과 필리는 같이 다니기로 했다.
숲은 어두침침했다.
마물도 살고 있는 만큼, 어디선가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필리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가 옆에 걷는 아마엔에게 점점 달라붙었다.
"아, 아마엔."
"일단 왕나무를 찾자."
'왕나무'는 지도에도 표시되었던 지형지물 중 하나였다.
금화를 대충 아무 데나 흩뿌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한 개의 금화도 찾지 못했지만, 우선 금화가 있음직한 거대한 나무를 찾아가기로 했다.
"북쪽, 북쪽을 찾아야...."
"아까 방향은 확인했잖아."
긴장한 필리와 달리 아마엔은 침착했다.
게임이 시작된 지 대략 30분 정도 흘렀을까.
기대했던 금화보다 먼저 나타난 게 있었다.
부스럭!
이번에는 확실한 기척이었다.
여태까지 느긋했던 아마엔도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했다.
"이런, 마물이 아니었네."
그리 중얼거리면서 수풀에서 나온 것은 두 명이었다.
조끼에 달려 있는 명찰은 파란색.
3학년의 명찰이다.
"왕자 저하, 처음 뵙겠습니다."
"이, 이놈!"
마물 대신 사람이 튀어나왔지만.
어떨 때는 사람이 마물보다 위험한 법이었다.
"금화는 많이 모아 두셨습니까?"
"아직 하나도 못 모았어. 그러니까 꺼져라!"
필리가 호통을 쳤다.
적어도 같은 1학년이었다면, 왕자의 권위를 내세운 호통이 통했을지도 모른다.
"하하, 솔라리안에 참가한 입장에서 그리 물러날 수는 없지요."
"왕자 저하는 잠시 쉬셔야겠습니다."
'주머니'는 금화를 담기 위해 배부된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금화를 많이 모아도 소용없었다.
필리가 궁지에 몰린 고양이처럼 으르렁댔다.
"형님이, 형님이 시키신 일이냐?"
"후후."
2왕자의 입김이 작용한 걸까.
필리는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지금 꺼져라."
"주머니를 내놓으십쇼. 그러지 않으면 강제로 가져가겠습니다."
"그래에, 경고를 듣지 않겠다 이거지."
그때, 3학년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필리가 웃은 것이다.
"설마, 옆의 마법사 꼬맹이를 믿고 계신 겁니까?"
"아마엔을 믿긴 하는데, 그것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게 있지."
"그게 무슨...."
3학년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어딘가의 나무 위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그것도, 떨어지는 기세로 무릎을 내밀어 3학년 한 명의 관자놀이를 강타하며.
뻐억!
얻어맞은 3학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다.
"으악!"
정작 맞지 않은 3학년이 비명을 지르고.
깔끔한 니킥을 보여 준 소녀가.
1학년 중 최강의 신체 능력을 가진, 삼총사 중 인간병기, 라니아가 깔끔하게 그의 턱을 돌려찼다.
쩌억!
완벽하게 들어갔다.
* * *
'이건 회축이다!'
라니아의 발차기는 아주 탁월했다.
마르테인가의 무술이 이 정도였군.
"후우."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라니아를 고른 것은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
"얘들아! 뒤지자!"
그녀가 외치자 아마엔과 필리가 우르르 달려와서 3학년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나온 동전은 꼴랑 1짜리 네 개.
'쟤들 하나씩, 라니아 넌 두 개.'
나는 완벽하게 동전을 분배했다.
그리고 라니아를 통해 지시했다.
"난 다시 숨을게, 조금 전처럼 허접 흉내 내고 있어!"
"허접 흉내를 낸 건 아닌데 ...."
라니아는 다시 기척을 숨기고 나무 그림자 속에 숨어들었다.
아마엔과 필리는 다시 허접처럼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게임이 시작되면 분명 3학년들이 필리를 노릴 것이다.'
그쯤은 예상한 바.
그렇다면 가장 강한 라니아와 함께 숨어 있다가 역으로 기습해서 코인을 털어먹는다는 게 바로 내 계획이었다.
이, 사악하고도 무시무시한 계획.
그래.
뱀갈공명이 테페리 숲에 재림했다.
158. 흑화
"아아, 3왕자 저하. 이렇게 으슥한 곳에 혼자 계시면 어떡합니까."
"네놈, 내 금화를 노리는 것이냐?"
"눈치가 좋으시군요. 맞습니다."
"넌 얼마 모았지?"
"굳이 아실 필요 있으십니까."
감히 왕자를 비웃으며 말하는 3학년들.
필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하긴,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예? 으어억!"
3학년들이 구덩이에 쑥 빠졌다.
아마엔이 미리 흙 마법을 이용해 파 둔 함정이었다.
황망해하면서 구덩이에서 기어 나오려는 3학년들의 위에 아마엔이 흙을 퍼붓기 시작하자.
"어푸, 어푸우!"
물 바깥에서 익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눈치챈 3학년들이 얼른 주머니를 던졌다.
그것을 라니아가 탁 잡아챘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사아악!"
"으악, 배, 뱀이다!"
내 소리를 들은 3학년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얼른 입을 다물고 그들이 던진 주머니를 뒤졌다.
처음으로 2가 적힌 금화가 나왔다.
역시 아마엔을 혼자 놔두니까 더 만만히 여기는 놈들이 생기는 것 같다.
녀석들이 가지고 있던 금화의 점수를 합치면 총 7.
아마엔과 필리에게 1원씩 주고 라니아가 5원어치를 챙겼다.
5원어치라고 하니까 적어 보이지만, 아마 금화의 가치를 따지면 500만 원은 될 것이다. 한국 돈으로 말이다.
사냥은 계속되었다.
똑같은 전략을 쓰다 보면 사냥감이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여러 바리에이션을 시도해 봤다.
숲 한가운데에서 아마엔과 필리가 마구 싸우기 시작했다.
"이 더러운 평민 놈이, 금화를 내놔라!"
"포악한 왕자야, 평민의 주먹을 받아라!"
그리고 평민 펀치! 아마엔이 필리의 배를 쳤다.
그게 생각보다 강했나 보다.
컥, 하고 숨을 토해 내는 필리의 얼굴에 배신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3학년들이 튀어나왔다.
"덮쳐!"
이번에 나타난 놈들은 조금 똘똘했다.
후후후, 왕자님 금화를 내놓으십쇼, 하는 대신 곧바로 덮쳤으니까.
그러나 라니아가 빠르기는 훨씬 빨랐다.
그녀는 호랑이처럼 달려와서 3학년의 등짝을 걷어찼다.
"쿠억!"
뱃속에 들어 있던 것을 토해 낸 3학년의 금화를 털어간다.
'다음!'
다시 숨어서 아마엔과 필리를 이동시킨다.
또다시 다른 학생을 마주쳤다.
"잡앗!"
이번에는 상대가 한 명이길래 그냥 셋이 한 번에 덮쳐들었다.
"어어, 저는 2왕자님 편이 아니에요, 2학년이에요!"
"금화를 내놔라!"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구분이 의미 없는 법이다.
우연히 마주친 2학년은 금화를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런 행위들이 이어지고.
어느덧 태양은 하늘의 꼭대기를 지나 기울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난 것이다.
배가 꼬르륵거렸기에, 우리는 산새를 잡아 구워 먹었다.
"우리가 잡은 산새 중에 교수님들의 패밀리어가 있을 수도 있어."
"그러면 그러라지."
애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종종, 우리들을 지켜보는 듯한 새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아마 높은 확률로 교수진들의 패밀리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학생들을 구경 중이리라.
일단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새를 구워 먹었다.
새 사냥은 내가 했지만, 그것을 손질하고 굽는 방법은 올리버에게 배운 것이다.
역시 인간들의 조리 방법은 훌륭하다.
아무리 내가 뱀이라고 해도 깃털도 손질 안 한 것을 한입에 삼키는 것보다, 이렇게 잘 구워 먹는 게 더 맛있었다.
'한번 모은 금화를 계산해 보자.'
슬슬 주어진 시간의 절반 이상이 흘러갔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무지막지하게 금화를 쓸어모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시간당 매출이 이 정도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일단 곳곳에 숨겨져 있던 금화들이 꽤 많이 회수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소문도 이미 퍼졌으리라, 3학년들을 역으로 사냥하는 무서운 1학년들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태까지 사냥한 3학년들을 살인멸구 할 수는 없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오히려 그러니까 이제 순위 굳히기가 가능할 거야.'
우리는 사실상 세 명이 한 조로 활동했다.
전투력이 가장 높은 라니아의 기여가 제일 컸지만. 일단 금화를 한군데에 모아 봤다.
그냥 사냥만 한 것이 아니라 곳곳에 숨겨진 금화를 찾은 것도 있었다.
큼지막한 바위 위.
유독 높은 나무의 꼭대기.
말라 비틀어 죽은, 예전에 지네 부부가 집으로 썼을 법한 옹이구멍 속.
그런 곳마다 으레 금화가 숨겨져 있었다.
이런 걸 겨우 축제 게임에 쓰다니. 에메랄드 스쿨은 얼마나 돈이 많은 걸까.
상대적으로 찾기 어려운 곳에서 발견한 2원 금화가 다섯 닢.
쉽게 찾은 1원 금화가 여덟 닢.
총 점수 18점
보물찾기 활동을 통해서 찾은 건 그 정도였다.
그리고 '인간사냥'을 통해 얻은 것은.
1원 금화가 서른다섯 닢.
2원 금화가 열두 닢.
총 점수 59점.
즉, 수집한 금화 총점 77.
행운의 77원!
우리는 이제 부자다!
다시 금화를 나눠 가졌다.
아마엔과 필리가 각각 15점씩, 라니아는 47점을.
라니아가 조금 미안해했다.
"이래도 되나...."
"괜찮아. 너 본질의 거울을 보고 싶다고 했잖아."
나머지 둘은 이 분배에 동의했다.
1등이 되어서 거울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셋 중 라니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왕자인 필리는 1등을 해도 거울을 못 볼 테고 아마엔은 별 신경 안 썼다.
"그런데 3짜리 금화가 하나도 없네?"
"그러게, 대체 얼마나 찾기 어려운 곳에 숨겨 둔 거야."
흐음, 맞는 말이다.
아마도 무척 찾기 어려운 곳에 있을 듯한데, 그런 곳을 탐사해야 할까.
사실 3원짜리 코인을 찾는 것보다 인간사냥의 효율이 여태까지는 훨씬 좋았다.
이 정도만 해도 순위권은 따 놓은 당상이고.
1등도 노려볼 만한 것 같은데.
-아, 아, 테스트, 테스트.
그때, 총장의 목소리가 하늘에서부터 울렸다.
쩌렁쩌렁 울리는 게 확성 마법을 쓴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하늘에서부터 들린다고?
필리가 손가락을 들어 저 하늘 위를 가리켰다.
"열기구다!"
새빨간 풍선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틀림없는 열기구였다.
저런 것까지 동원하다니.
마치 확성기로 말하는 듯, 목소리는 웅웅 울렸다.
-여러분의 멋진 활약은 잘 지켜보았습니다. 재기 넘치는 전략을 활용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요.
역시 지켜보고 있었군.
내가 전면에 나서지 않아서 다행이다. 앞으로는 산새들을 잘 지켜봐야겠어.
"우리 칭찬받은 거지?"
"그런 것 같은데."
애들이 히히 웃으며 시시덕거렸다.
-벌써 시간이 절반도 안 남았는데요, 중간 결과를 중계하겠습니다.
오, 이런 친절을 베풀 줄이야.
우리는 두근두근거리면서 총장의 말을 기다렸다.
-중도 포기자 31명이 발생했습니다. 이런이런 안타깝네요.
내 생각보다 적은 수다.
주머니를 빼앗기지 않은 이들은 다시 열심히 도전했으리라.
-그리고 현재 24등의 금화 점수는.
여기가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예선은 기본적으로 순위 경쟁이 아니라 24명 안에 들기만 하면 되는 거니.
다른 이들의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8이네요, 이런, 다들 분발해야겠어요. 상위권들이 하위권들의 금화를 다 빼앗았나 보군요. 하하하!
탄성이 터져 나왔다.
24등이 확보한 금화의 점수가 겨우 8 수준이라면, 아마엔과 필리는 그 두 배 가까이 확보한 것이다.
통과가 거의 확실해졌다.
"1등도 우리겠는데!"
"쉿! 설필패 몰라?"
"설필패가 뭔데...."
"설레발 치면 필패. 자레인한테 배웠어."
자레인이 라니아에게 참 좋은 걸 가르쳤다.
-그리고 영예의 1위는... 와! 대단하네요, 2위와 큰 차이가 있어요!
'후후, 뿌듯하구만.'
나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나도 모르게 설레발을 쳐 버린 것이다.
내가 당연히 1등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2왕자 저하가 점수 55로 1등입니다. 아니, 60, 오, 68, 72 압도적 1등이네요!
뭐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55에서 72. 순식간에 점수가 올라갔다.
-리더십 역시 중요한 가치지요. 충성스러운 심복들을 많이 둔 것이 이렇게 이어지는군요. 대단합니다. 2위가 47점인데, 이 차이는 좁히기 어렵겠는데요.
나, 아니 라니아가 2위.
이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뻔하군.
그리고 산새가 아니라 주머니를 통해서 금화의 점수를 파악하는 것 같다.
총장의 힌트가 아니더라도 명백한 상황이다.
-그러면,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하시길!
2왕자 녀석은 3학년 거의 전부와 2학년 중 일부까지 장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따까리들에게 자발적으로 금화를 상납받은 것이다.
24등이 겨우 8개밖에 안 가지고 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니 왕자는 1등 해 봤자 거울의 방 못 들어가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지?"
라니아가 황당해했다.
하지만 필리는 이를 악물 뿐이었다.
"형님은 늘 1등을 원하던 사람이니까."
"...우리 금화도 라니아에게 전부 몰아주는 건 어떨까? 앞으로 더 확보하면 될 것 같은데."
아마엔이 그리 제안했지만 내가 제지했다.
'그러지 마.'
거울의 방보다 중요한 게 예선 통과다.
이제 금화를 얼마나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불리하다.
차라리 다른 방법을... 어떤 방법을 써야 하지?
그때.
-아 맞다.
다시 한번 총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러분들, 점수 3의 금화를 보지 못해서 궁금했을 거예요. 3점짜리 금화들은 여태까지 숨겨져 있었다가 이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뭘 좀 아는 총장이군.
자고로 단체 게임에서는 10점짜리 문제만 내다가 마지막에 100점짜리 문제를 내야 재미있는 법이다.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달콤한 보상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 말하고 목소리가 뚝 끊겼다.
하지만 총장은 내 생각보다도 쇼맨십이 있었다.
휘이익- 퍼엉!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였다.
'라니아!'
라니아는 잽싼 면이 있었다.
내가 그녀를 부르자마자, 마치 다람쥐처럼 날쌔게 나무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아!"
저 숲 한구석의 하늘에 폭죽이 터졌다.
-저쪽이 그 3짜리 금화가 있는 곳인가 보군.
애들 장난 같아서 흥미가 없다던 펠레리안도 입을 뗐다.
'저쪽, 그 고목과 꽃밭이 있는 곳이잖아.'
"맞는 것 같아요."
나도 지도를 달달 외웠기에 저쪽에 뭐가 있는지쯤은 알았다.
라니아가 바닥에 탁 착지했다.
폭죽을 이야기하자, 아마엔과 필리도 몸이 달은 느낌이었다.
"당장 달려가자, 그리 멀지 않으니까!"
라니아도 고개를 끄덕이고 다 같이 뛰어 가려던 순간.
"쉬익!"
나는 그들을 멈춰 세웠다.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스승님...?"
달걀을 한 바구니에 넣는 건 겨우 달걀 너덧 개밖에 없는 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우리는 코인이 아주 많다.
오히려 역발상이 필요하다.
'라니아, 네 코인을 전부 애들한테 넘겨라.'
"네?"
'그게 맞아.'
라니아는 당황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아마엔은 역시 대사형답게 내 계획을 바로 이해한 듯했고, 필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나는 주변에 산새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글을 적어서 말했다.
'저쪽은 라니아만 간다. 너희들은 이쪽을 지켜. 누군가는 금화를 지켜야 해.'
"그러면... 차라리 저 혼자만 남고 한 명은 라니아를 도우는 게...."
'필리와 아마엔은 함께 있는다. 그게 균형이 맞아.'
솔직히 말해서 필리는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고 아마엔을 데려가면 혼자 남은 필리가 금화를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을 깨달은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라니아, 가자!'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폭죽이 터진 곳이 그리 멀지 않은 상황. 지금은 기회였다.
라니아는 재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최고 속력으로!'
바람이 쌔앵 스치고, 나뭇잎이 라니아의 얼굴을 때렸다.
피부에 생채기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라니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한때 그레이림의 철부지 소녀로 살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빠르고 강해졌는지 모르겠다.
내가 본 어지간한 기사보다 더 몸놀림이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폭죽이 터진 곳에 도달했다.
그곳은 꽃밭이었다.
꽃들이 땅의 영양분을 다 흡수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사이에 있는 고목들은 모두 말라붙어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고목.
그 나뭇가지에, 새빨간 주머니 하나가 걸려 있다.
"저거다!"
그렇게 외친 것은 라니아가 아니었다.
반대쪽에서 다른 학생 하나가 튀어나온 것이다.
2학년 명찰을 달고 있다.
라니아와 2학년의 눈이 마주치고.
누가 신호할 것도 없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저쪽도 기사 지망쯤 되는 것 같다. 속도가 빨랐다.
나는 위험을 알아챘다.
'라니아, 위!'
다행히 라니아도 '그것'을 보았다.
얼른 멈추고 튕기듯 몸을 물린다.
위잉-!
하지만 그 습격자는 끈질겼다.
재빠르게 날아오는 그것을 라니아가 걷어찼다.
파삭!
끔찍한 소음이 울렸다.
"으익!"
라니아가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발끝에 터져 죽은 그것은 족히 손가락 두 개 만한 말벌이었다.
"꾸아아아아악!"
비명은 반대편에서 달리던 학생에게 나왔다.
보니까 그쪽은 말벌에게 쏘인 것 같았다.
얼굴이 퉁퉁 부어서 도망치고 있었다.
'벌, 벌이에요!'
말하지 않아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둘러보니 벌집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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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궁둥이 말벌lv14]
──────────────
말벌 수십 마리가 벌집 앞에서 웅웅대며 호버링 중이다.
접근을 경계하는 게 틀림없다.
하긴, 점수 3짜리 금화치고는 너무 눈에 띄는 곳에 있다 싶더니.
독이 꽤 센 것 같다.
한 대쯤은 몰라도 여러 대 맞으면 위험할 것 같은데.
아무리 라니아의 몸놀림이 빠르더라도 말벌 떼를 피해 없이 통과하기는 어려우리라.
'라니아, 너 호신강기 못 쓰니?'
'그, 그게 뭔데요!'
'아냐, 됐다.'
아직 그 정도 경지는 아닌 것 같다.
라니아가 슬금슬금 물러나려는데, 어느새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저쪽에 2왕자가 있어요!"
2왕자는 따까리들을 무려 열 명 가까이 데려왔다.
그리고 말벌 군락이 있는 것도 순식간에 눈치챈 것 같았다.
즉각 상황을 분석하고 명령을 내린다.
"종심진으로 재빠르게 파고든다. 마법을 쓸 줄 아는 녀석들은 좌우에서 화염 마법을 쓰면서 간다! 쏘이면 안 돼!"
그러더니 척척 진형을 이루는 것이다.
제법이다.
'어, 어쩌죠?'
라니아와 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다.
물러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아갈 수도 없다.
'큭....'
사실, 내가 나서면 된다.
저 벌들은 아마도 내 단단한 수정 비늘을 꿰뚫지 못할 것이다.
그냥 가서 챙겨오면 되는데.
'눈이 너무 많은데.'
내가 나서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확 여기서 전부 조져 버릴 수도 없고 말야.
...아니, 그렇게 할까?
잠시 고민하고 있으려니.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라니아, 너 징그러운 거 잘 견디니?'
'쏘이는 건 싫어요!'
이거 실망이다.
설마 내가 그런 것을 요구할 리가 없지 않은가.
설명을 들은 라니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면 믿고, 뛸게요.'
'그래!'
라니아가 달리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벌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2왕자 쪽에서도 황당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마르테인인가, 무슨 멍청한 짓을."
"자살이나 다름없군."
그들은 비웃으면서 천천히 전진하였고.
라니아는 벌들을 쳐내면서 달렸지만, 기어코 벌 몇 마리가 몸에 달라붙었다.
"아 징그러!"
그리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얼굴이 퉁퉁 붓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찾아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라니아를 통해 말벌들을 무시할 방법을.
*「연결의 왕관lv2로 흑린lv3을 공유합니다.」
라니아는 비늘이 없었다.
그 대신 피부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모되었지만.
뭐, 저 정도 거리 쯤이야.
벌침은 라니아의 피부를 뚫지 못했다.
하지만 얼굴에 달라붙는 말벌은 끔찍한 것이었으니.
"으허엉!"
라니아는 울면서 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3학년들이 놀라 외쳤다.
"뭐 뭐야!"
"마, 마르테인이 흑화했다아!"
가라, 검은 섬전 라니아.
159. 본질의 거울
흑린(黑鱗).
검은 비늘.
본래 비늘이 있는 마물이나, 리자드맨 정도나 쓸 수 있는 스킬이다.
당연히 인간이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본 뱀은 잠재력에 한해선 대륙급 뱀재이므로, 못 사용하는 스킬이 없다.
심지어 방향을 조절할 수는 없지만 비행 스킬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내 특성이 영향을 끼친 걸까.
연결의 왕관으로 공유하는 스킬은 인간이 사용할 수 없을 스킬도 적용되었다.
즉, 비늘이 없는 라니아가 흑린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력 소모량이 배가 되는 것 같긴 한데, 라니아는 영약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마력이 풍부했다.
다만 흑린이 어떻게 구현될까 조금 궁금했는데, 피부가 검어지는 것으로 구현되었다.
인종이 바뀐 것처럼 된 것은 아니다.
몸을 타르에 담갔다가 뺀 것처럼 광택이 번들번들 돌았다.
즉, 몰골이 우습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뭐야아!"
라니아는 몹시 쪽팔렸나 보다.
'부끄러워하지 마, 아주 멋져.'
'하나도 안 멋져요!'
'흐흐, 아냐, 흐 멋져.'
진지하게 격려해 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직 오베른만큼의 연기력을 갖추지는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내 비웃음은 오히려 효과가 있었다.
흑린은 원래 쉽게 마음대로 발동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화'가 나야지 발동하는 종류의 특별한 스킬.
그래서 잘 발동될지 궁금했는데 라니아는 흑린을 쓸 수 있을 만큼 화가 나 있었나 보다.
왜 화가 났을까.
파바박!
그녀는 아주 빨랐다.
말벌만큼은 아니어도, 적어도 꿀벌 엇비슷하게 빠르기는 한 것 같다.
침이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벌은 얼굴과 몸에 달라붙으며 그녀를 괴롭혔다.
채찍처럼 주먹을 휘두르면 말벌이 퍽 터져 죽는데.
그 진액이 단단해진 피부에도 선연하게 느껴지나 보다.
"막아라, 마르테인을 막아-!"
그리 외친 것은 다름 아닌 2왕자였다.
말벌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달려가는 라니아에 비해, 진형을 갖추고 돌파하는 그들이 훨씬 느렸다.
뭘 어쩔 건데, 너희들이 뭘 할 수 있는데.
"발을 묶어라!"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들이 있었다.
달리던 라니아의 발이 땅에 푹 잠기더니, 흙들이 그녀의 정강이까지 솟아서 발을 잡았다.
"아오!"
라니아는 순수한 근력만으로 발을 뽑아냈다.
하지만 저쪽의 마법사는 하나가 아니었으니, 얼음송곳 하나가 라니아를 향해 쇄도했다.
이놈들이 적당히 해야지.
*「광선lv4를 사용합니다.」
지근거리에서 광선을 발출했다.
저쪽에서는 그냥 라니아의 손목이 번쩍인 것처럼만 보이리라.
티잉!
얼음송곳의 궤도는 확 뒤틀려서 튕겨 나갔다.
그럼에도 물리력이 제법 강했는지, 퍼억! 하고 나무에 박혀 버렸다.
라니아가 홱, 마법사를 노려봤다.
"저 새끼가...."
너무 험한 말은 쓰지 마 라니아.
하지만 정말 나쁜 새끼기는 했다. 흑린이 없는 상태에서 맞았으면 목숨도 위험한 마법이었으니까.
"계속 견제하면서 나아간다!"
그러나 2왕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따까리들을 격려했다.
라니아의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저쪽은 쪽수도 많고 마법사도 있다.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라니아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다는 말인가.
유인원처럼 돌멩이나 던질 것도 아니고.
'아!'
그리고 나는 적벽에서 화공을 떠올린 제갈량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눈앞이 탁 트였다는 말이다.
'라니아, 쟤들을 조질 방법이 있어.'
'네?'
'저거, 잡아서 저거 던져!'
저거라고 해 봤자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다.
라니아는 자신의 손목을 슬쩍 바라보고, 내 머리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봤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다 뒤졌어!"
그녀가 나무를 휙 기어올라(정말 산원숭이 같았다) 손에 움켜잡은 것은.
말벌집이었다.
그녀는 가차 없이 말벌집을 강제 철거해서 2왕자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얼음송곳을 날린 녀석들에게 전혀 과하지 않은 선물이었다.
"으아아악!"
진형 한가운데에 말벌집이 떨어지고 말벌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니 난리가 났다.
학생들은 벌을 피하려고 하거나, 벌을 잡으려고 손발을 휘둘렀다.
진형이 무너졌다.
"진정해라! 그리 위험하지 않아! 여러 대만 맞지 않으면 된다! 진형을 유지해!"
레온이 제법 씩씩하게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애초에 대열을 유지하는 것은 군인의 미덕이다.
에메랄드 스쿨 재학생들의 전투력은 당연히 일반 병사들에 비해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병사처럼 행동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라니아가 기어코 말벌집을 하나 더 던졌다.
그것은 정확히 2왕자 레온의 대가리를 맞췄다.
"으악!"
진형이 완전히 무너졌으니 이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라니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중앙의 가장 큰 고목에 접근했다.
산원숭이처럼 나무를 기어오르더니.
팍.
금화가 담긴 붉은 주머니를 잡아챘다.
쩔렁 하는 소리가 손목에 감긴 내게도 들렸다.
라니아는 3학년들이 있는 반대편으로 달렸다.
학생들이 이를 갈았지만, 말벌이 있는 꽃밭을 뚫고 그녀를 쫓을 자는 없었다.
우리는 통쾌하게 웃었다.
"와하하하!"
"사사사사삿~"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다시 필리, 아마엔과 합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제야 주머니를 열어 볼 틈이 생겼다.
"빨리 열어 보자."
주머니가 아주 묵직했다.
아이들이 기대감을 가지고 주머니를 열어 봤다.
찬란하게 번쩍이는 금빛.
아이들이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총장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총장이 아니라 수련회 교관을 했어야겠구만.'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3점짜리 금화는 무려 100닢.
300점 어치였다.
* * *
-그러면, 예선 '보물찾기'의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보물찾기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것은 '소풍'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도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잔뜩 긴장했던 학생들이, 예선이 보물찾기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표정을 기억해 보면 아마 그럴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예선 대회 주제가 '데스매치'라든가, '죽음의 지옥 차륜전' 이런 거였으면 학생들은 아마 사색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지금, 대회가 끝나고 모인 학생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이미 중도 탈락해서 이탈한 게 40여 명.
죽진 않았어도 혼수상태가 된 1명.
부상자 40여 명. 게다가 그중 20명은 말벌에 쏘여서였다.
-24등, 벨 아포티, 10점이네요! 23등은....
총장은 친히 합격자들의 이름을 불렀다.
낮은 순위부터 높은 순위까지.
그리고 드디어 중요한 이름이 나왔는데.
-4등, 레온 아르데네 솔리안. 101점, 와우!
72점이었는데 기어코 101점까지 모았다.
아마 자기 따까리들의 금화를 악착같이 뽑아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등이었다.
레온 왕자의 잘생긴 얼굴이 흙색으로 물들었다.
-그다음에는 공동 2등이네요 필리 아덴 솔리안, 아마엔 리들 105점! 사이가 좋은 두 친구군요, 아하하!
아마엔이 필리에게 손을 내밀고, 필리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마주 손뼉을 쳤다.
보기에 흐뭇하도다.
그리고, 마침내.
-영예의 1등은, 라니아 마르테인! 167점으로 압도적인 1등입니다.
원래의 내 계획은 아마엔과 필리의 점수를 라니아에게 몰아줘서 1등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총장이 주머니 하나에 300점을 몰아넣어 둔 덕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 제자 셋이 자랑스럽게 대상 최우수상, 최우수상을 받은 것이다.
물론 1등을 제외하고는 딱히 별다른 보상이 없지만.
그래도 기분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모두 고생했습니다! 통과한 24명은 이어질 본선에 대비해 푹 쉬어 두도록 하세요. ...그리고, 1위 라니아 양은 이쪽으로 오시길.
속전속결이라.
왕궁으로 찾아가서 거울의 방에 들어갈 기회는.
바로 다음 날에 주어졌다.
* * *
'오, 이게 왕궁이구나.'
솔리온 왕국의 궁성의 첫인상.
그것은 '희다'였다.
성벽을 쌓아 올린 벽돌의 재질이 조금 특별한지도 모른다.
대리석 비슷한 걸까.
태양 빛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났다.
"라니아 양, 왕궁은 처음인가요?"
"네 처음입니다."
총장의 질문에 라니아가 또박또박 의젓하게 대답했다.
라니아보다도 키가 작은 총장은 그녀를 대견하다는 듯 씨익 봤다.
"그거 알아요? 교수들이 누가 1등 할지 내기를 걸었다는걸."
"그런가요?"
그랬던 걸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건 누굴까요."
"음, 2왕자 저하 아닐까요."
"정답이에요. 그러면 나는 누구를 골랐을까요?"
"글쎄요...."
"필리 왕자를 골랐지요. 왠지 그럴 것 같더라구요."
바보.
1등은 라니아야.
"그런데, 정작 오베른 교수가 라니아 양을 고를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오베른.
내 결정을 꿰뚫어 본 것이다.
"정말 라니아 양이 우승했네요. 혹시 오베른 교수가 몰래 당신을 도왔나요? 마법이나, 여타 수단을 통해서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다.
"...아니요."
"하하, 긴장하지 마요. 2왕자 저하는 더 노골적인 조력을 받았을 테니까."
애들한테 저런 말을 해도 되나?
총장은 직접 라니아를 에스코트하겠다며 궁 내부로 함께 들어왔다.
"다시 한번 축하해요. 거울의 방에서 좋은 것을 보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기까지밖에 못 오겠군요. 백합궁은 출입금지라."
안내는 여기까지였나 보다.
그는 조금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별궁 앞에서 멈춰 섰다.
꾸벅 인사하고 가려던 라니아가 문득 발길을 멈췄다.
"...총장님도 거울을 본 적 있나요?"
총장은 하하 웃었다.
뭐가 웃긴 거지, 하나도 안 웃긴데.
"아니요, 나는 거울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
"난 내 본질을 아니까요."
참 자신만만한 노움이다.
라니아의 궁금증은 다 풀리지 않았다.
"거울이 정말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 주는 걸까요? 누구는 미래를 보여 주는 거울이라던데."
"글쎄요. 괜히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여 주는 건 아니겠지요. 다만 '미래를 보여 주는 거울'이라는 것은 그 거울의 기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표현입니다."
"그러면요?"
"으음, 라니아 양도 이해할 만한 쉽고 간단한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
"유력한 세계선의 하이라이트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네요."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총장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가볍게 손을 흔들고 휙 사라져 버린다.
라니아는 백합궁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백합궁에서는 큰 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달려서도 안 됩니다."
시녀로 보이는 이가 라니아에게 속삭이듯 말해 줬다.
이 궁에서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알려 주는 것이다.
"복도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살짝 아래를 보고 다니십시오. 혹시나 흰 구두를 신은 분을 마주치시면, 바로 고개를 들지 마십시오. 고개를 들더라도 놀라거나 놀란 티를 내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뭐 백합궁에 나폴리탄 괴담이라도 살고 있는 거냐.
조금 과한 주의사항이었는데, 시녀가 너무 공손하고 친절하게 부탁해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말을 따랐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지만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으리라.
소매 틈으로 주변을 살폈다.
뭐 별달리 특별한 곳은 아니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 있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난다 정도.
시녀가 안내한 곳은 복도 끝에 있는 방이었다.
"이곳이 거울의 방입니다. 이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면 문을 두드릴 테니, 그때 나오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그러면, 아름다운 것을 보시기를."
궁도 그렇고 시녀도 그렇고.
어쩐지 신비한 분위기가 있다.
라니아는 잠깐 주저하더니, 곧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이익.
방 안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시녀들도 이곳까지는 들어올 수 없다는데, 누가 내부를 정리한 걸까. 안은 제법 깨끗했다.
"아."
하지만 라니아는,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거대한 거울이었다.
궁답게 천장이 높았고. 당연히 벽의 면적도 컸다.
그런데 거울 한 채가 그 커다란 한쪽 벽면을 거의 가득 채우고 있었다.
'뭐야, 나도 보자!'
라니아는 홀린 듯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라니아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와, 엄청 멋지네.'
'저게... 저인 거죠?'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저게 거울인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움직이는 그림, 혹은 TV처럼도 보인다.
배경은 전쟁터 한가운데였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저 멀리 병사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이 보였다.
우중충한 하늘에는 화살이 날아다니고, 공성병기가 불붙은 돌덩이를 쏘아 던진다.
함성 소리와 쇳소리가 들릴 것 같다.
그 전장의 한가운데에 여기사가 서 있다.
오른팔을 제외한 전신에 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 있는데, 드러난 오른팔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다.
마치 흑린 스킬을 오른팔에만 사용한 것처럼.
"저건, 마르테인 폭투법의 극의...."
언젠가 라니아는 죽은 호랑이 후작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으리라.
그 오른팔로 들고 있는 것은 아주 큰 깃발.
병사 서넛이 달라붙어서 세워야 할 만큼 큰 전기(戰旗)였다.
어른이 된 라니아는 찢어지고 불탄 자국이 있는 깃발을 들고 있었다.
왕국의 깃발도 아니고 제국의 깃발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양식의 깃발이다.
"...저 영웅이 되나 봐요."
그리 내뱉은 라니아는 스스로의 말에 흠칫 놀랐다.
그래, 맞다.
저것은 틀림없는 영웅의 모습이었다.
언젠가 영웅이 되기를 꿈꿨던 변방 영지의 소녀는, 진정 영웅이 될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갑자기 라니아의 눈에 눈물이 또륵 고였다.
"어 왜 이래 나."
슬픈 것은 아니란다.
분명 슬픈 것은 아닌데, 어쩐지 눈물이 난다고, 라니아는 그리 말했다.
"멋지네요. 정말."
그리고 라니아는 자신의 모습을 감상했다.
내심, 조용히.
말은 못 했지만 나는 혼자 생각했다.
'슬슬 나도 보고 싶다....'
거울에 내 모습은 비쳐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라니아가 비켜 줘야 할 것 같은데.
-빨리 비키라고 해 봐라.
'아무리 그래도 울 정도로 감동한 애한테 ....'
다행히 라니아는 나를 기억해 줬다.
'아, 뱀 선생님도 한번 보세요.'
'고, 고마워.'
다만, 나는 라니아에게 부탁을 했다.
'저쪽에서 눈감고 있어야 해. 절대 보면 안 된다.'
'알겠어요.'
'동화 많이 읽었지? 이런 곳에서 호기심 때문에 눈 돌렸다가는 큰일 나.'
'진짜 약속할게요.'
라니아는 구석에 가서 눈을 가리고 쪼그려 앉았다.
혹시, 거울에 전생의 내가 비쳐 보이면 어떡해.
라니아가 거울을 볼 수 없는 각도에 선 것을 확인하고, 나는 거울 앞에 섰다.
후우, 심호흡.
바닥을 보고 있던 고개를.
'흡!'
들었다!
'아아아아?!'
그리고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을 보고 말았다.
160. 종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