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카운트다운
세상에 예의와 도덕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아니라면, 처음 보는 상대에게 뭐 같이 생겼느니 어쩌니 하는 욕을 퍼붓지는 않았으리라.
그래도, 그것만이라면 드넓은 뱀의 마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체 없이 석궁을 발사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내가 공구입백인이 가능한 절정의 검사가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머리가 꿰여 죽였으리라.
상대는 사이코패스가 틀림없었다.
그러니 단검 한 자루를 휘둘러 응징한 것은 당연한 일.
또한 겨우 석궁을 쥔 손가락만 베고 지나간 것은 부처님마저 합장할 나의 자비였다.
허나 옹이구멍 같은 눈으로는 그 대자대비함을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일까.
"으아아아악, 이 뱀 새끼가, 으악!"
손을 움켜잡은 노인네가 욕설을 마구마구 퍼부었다.
조금 전에 츄고타 어쩌고 했었는데, 그 와이번과 닮았다는 이야기는 솔직히 나한테도 욕이다.
손가락 두 개만 더 가져가야겠다 결심했는데.
"물러나시오, 박사!"
옆에 있던 덩치 큰 사내가 내게 발길질을 했다.
고개를 꺾어 화살을 물어 채는 반사신경을 지닌 나지만, 그렇게 쾌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사실 머리와 목 정도다.
사내의 발길질은 꽤나 쾌속해서 피하기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얻어맞는다면 가져가는 것도 있어야지.
상대의 발이 내 몸에 닿는 순간, 나는 그 정강이를 물었다.
까드득!
이빨이 쉽게 박히지 않았다.
이 자식, 각반을 차고 있다.
튕겨 나간 나는 허공에서 중심을 잡고 착지했다.
"아니 무슨...!"
각반을 뚫고 독을 주입하지는 못했지만, 각반을 부숴 놓는 데에는 성공했다.
사내가 발을 털자 바짓단에서 부서진 나무 조각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 땅콩만 한 놈이!"
먼저 욕먹고 공격당한 것은 이쪽인데 억울하다.
사내가 품속에서 손을 꺼내자, 어느새 자루 없이 칼날만 있는 비도가 손가락 틈에 끼워져 있었다.
유엽비도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휘리릭!
사내가 손을 허공에 휘두르자, 비도 다섯 자루가 쏘아졌다.
여기서 일단 물러나는 것은 하수.
겁먹지 않고 침착하게 피하면 일류.
나는 절정이니까 오히려 앞으로 다가간다.
카앙!
악!
비도에 맞을 뻔했다.
신기하게도 비도는 허공에서 이상한 궤적을 그리며 휘었다.
칼날이 비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비늘이 단단하지 않았으면 아마 상처가 났으리라.
그러나 이미 두 자루를 피했다.
*「식심의 도약lv4을 사용합니다.」
급격히 가속해서 나머지 세 자루를 단번에 피한다.
심장을 앗아갈 생각으로 상대의 가슴팍을 물어뜯었다.
으득-
하지만 이번에도 이빨의 감각이 다르다.
녀석은 옷 안에 얇은 사슬 갑옷을 걸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평범한 강철이 아니다. 내 이빨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끄떡없는 것을 보니.
'좋아, 이대로 목덜미로 기어올라서....'
그러려고 했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왕 물어 주려고 했는데.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튀어나와 버렸다.
"사욱!"
포효하려다 구역질이 나서 그런 소리를 내 버렸다.
어디서 비리꼬리한 냄새가 난다더니.
다른 곳이 아니라 저 인간에게 풍기던 것이었다....
"아, 맞다!"
사내가 환히 웃으며 기뻐했다.
"앰플 맛이 어떠냐 이 자식아!"
"사우욱!"
"제기랄, 이까짓 작은 뱀한테 쫄았다니. 내 펀치를 받아라!"
미친.
인간이 그러고는 내게 주먹을 날렸다.
나는 허공에서 한 바퀴 핑그르르 돌며 튕겨 나갔다.
정말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끔찍한 냄새였다.
주먹을 맞았지만 멀리 떨어지니 오히려 속이 상쾌해졌다.
결국 나는 속을 게워냈다.
후우, 좀 살 것 같네.
"정말 짜증 나는군."
조금 전까지 내 펀치를 맞아라! 하며 날뛰던 인간이 다시 진중한 척 폼을 잡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망토를 휙 앞으로 뜯었다.
갑자기 뭐 하는 짓인가 하고 보니, 망토를 어떻게 펼치자 마치 그물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조그만 것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 같으니... 포획해 주지."
은근히 만났던 인간 중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잦았다.
밀렵꾼들 눈에는 내가 아주 희귀하고 귀한 마물처럼 보이나 보다.
꼭 혼자 색이 다른, 붉은 갸라도스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그물에 잡혀 줄 생각은 없었다.
계속 조그맣다 어떻다 하는 소리 들어주기도 싫고.
"흐읍!"
인간이 그물을 던졌고.
나는 날아오는 그물에 석양을 뽑아 가볍게 휘둘러 주었다.
쩌걱!
두 동강 난 그물이 허무하게 바닥을 구른다.
검은 그대로 날아가 경악하고 있는 상대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큭!"
과연, 몸에 걸친 사슬 갑옷이 평범한 재질이 아닌 건 분명했다.
드워프 마이스터가 제련한 석양이 한 치 정도밖에 박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를 악물었다.
"이 잔일 페제가 무슨 수치를...!"
그 순간, 인간의 몸에서 연기가 펑 터져 나왔다.
무슨 닌자도 아니고 연막탄을 터뜨린 것이다.
연기가 가시고 나니, 그곳에는 석양 한 자루만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놈은 부끄러움 따윈 조금도 없는 듯 허겁지겁 달려서 도망치고 있었다.
"사아악!"
나는 이리 와! 외치며 쫓으려 했다.
펠레리안이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끼야아아아악!
내가 그를 알게 된 이후로.
펠레리안이 저렇게 체통 없게 꺅꺅 비명을 지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예전, 그가 깃든 반지를 짐승에게 먹였을 때도 저러지는 않았다.
똥이 되어서 영원히 묻히는 것보다 공포스러운 게 있는 걸까.
펠레리안의 얼굴을 보아 하니 그러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에!
'왜, 왜 그래요.'
-이건 꿈이야, 이럴 수는 없어!
'일단 진정 좀 해 봐요.'
이러다가는 펠레리안이 엉엉 울어 버릴 것 같아서 얼른 진정시켰다.
-진정, 그, 그래, 진정해야지.
'심호흡하고.'
-저, 저쪽으로 가 줘. 천천히.
저쪽이라 함은 인간들이 도망친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평소라면 '침입한 쥐새끼들을 찢어 죽여라 뱀!'하고 윽박을 질렀을 인물이 왜?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이미 슬쩍 보았지만 벽에는 기묘한 수조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조 안에는 아주 기괴한 생물이 둥둥 떠 있었는데.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부 동면 중이야.
중얼거리는 펠레리안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원형 복도의 입구로 돌아왔으니.
첫 번째 수조에는 도저히 봐주기 힘든 몰골의 살덩이가 있었다.
둥근 고깃덩어리에서는 팔다리 비슷한 게 제멋대로 뻗쳐 나와 있었다.
'이것도 키메라죠?'
-그래, 키메라가 맞다.
'예전에 만들었던 키메라에 비해서는 형편없네요.'
키메라 파프나챠.
내가 처음으로 싸워 이긴 펠레리안의 키메라.
아니, 당시에는 그놈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약하긴 하네.
그래도 그놈은 멀쩡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멀쩡하다는 말은 잘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몸이 제 기능을 한다는 말이다.
반면 지금 이곳에 있는 키메라들은 정상적인 몰골이 아니었다.
'이때는 아직 기술이 없었나 봐요?'
-무슨 소리....
펠레리안은 의외의 답을 했다.
-키메라 제작기술은 이 던전을 만들었을 때가 훨씬 진보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다음으로 가 보자.
옆의 수조로 갔다.
그곳의 금속플레이트에 적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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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육, No.02〕: 외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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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키메라이며, 별명은 외다리.
다리가 하나 달렸으니까 외다리겠지?
참고로 첫 번째 키메라의 별명은 고깃덩어리였다.
펠레리안의 작명 센스도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왜 '시험육'일까.
-다음.
나는 그다음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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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육, No.03〕: 세눈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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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셋 달리고 눈이 셋 박힌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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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육, No.04〕: 피비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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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에 비늘이 군데군데 돋아난, 징그러운 키메라.
이때의 키메라 제조 기술이 파프나챠 때보다 더 발전했다는 말.
그게 무슨 뜻인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곳의 키메라는 실험이 진행될수록 몇몇 특징을 수렴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로는 '매끈한 피부.'
털이 달리고 울룩불룩했던 키메라의 피부는, 번호가 올라갈수록 점점 매끈해졌다.
두 번째로는 '사지가 제대로 달릴 것.'
사지(四肢)란 팔다리 한 쌍을 말한다.
즉 양팔과 양다리가 있도록 진화하는 것이다.
이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다리가 서넛 달리거나, 팔 대신 촉수 같은 게 돋은 키메라도 있었으니.
사지가 제대로 달린 것처럼 보이는 키메라는 여덟 번째가 되어야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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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육, No.08〕: 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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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별명이 무슨 의미인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놈의 다리는 아름답고 매끈하게 뻗어 있었다.
색은 석고상처럼 하얗지만, 다리며 팔은 조형적으로 흠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무용수의 발가락은 더 투박하고 현실에 짓물러 있겠으나.
골방에서 연구만 했을 펠레리안이 떠올릴 법한 작명이라고 말하면 너무한 것일까.
매끈하게 뻗은 팔 역시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늘어뜨려 놓았다.
다만, 나는 그 부자연스러움을 금방 눈치챘다.
'손이....'
팔이 조금 길다 싶었는데, 손이 있어야 할 곳에 달린 것은 발이었다.
즉, 팔이 없이 네 개의 다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얼굴도 기괴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두 눈과 코가 없고 입만 달려 있었다.
-다음.
펠레리안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9번 수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사람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건....'
그래.
정확히는, 요정을 닮아 있었다.
길고 낭창하게 뻗은 팔다리.
무엇보다, 긴 귀.
마지막 남은 수조는 요정의 특징을 가진 키메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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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육, No.09〕: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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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정하지 않은 키메라.
'요정' 혹은 '엘프'라 이름을 붙이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흉참하구나.
팔다리가 달려 있다고.
긴 귀가 달려 있다고 요정인가?
그럴 리 없었다.
굳이 자세히 보지 않더라고 해도 저 키메라를 요정으로 착각할 구석은 없었다.
피부는 동굴에서만 자라는 개구리의 것처럼 축축하고 창백했으며, 탁한 눈동자는 물고기의 것처럼 좌우로 돋아 있다.
요정을 흉내 낸 키메라.
이런 것을 만든 목적은 무엇일까.
플레이트 옆에 휘갈겨진 낙서로 그 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에 써 있기를.
「흉하고 부족하여 도저히 옮겨 탈 수 없다.」
펠레리안은 몸을 떨었다.
그의 본체.
역천의 마도사는 죽기 전 다른 몸으로 옮겨 타고자 계획했던 것이다.
그것도 요정을 닮은 키메라를 직접 만들어 가며.
-이럴, 이럴 수는... 없어.
펠레리안은 상처 입은 짐승이 끙끙대듯 말했다.
그에게 자부심과 자존심을 빼면 무엇이 남겠는가.
한낱 비루한 몸뚱이만 남을 뿐, 적어도 스스로의 정신은 숭고하다 믿었을 텐데.
나는 마치 남의 일기장을 훔쳐본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혹은, 엿들어서는 안 될 고해성사를 들어 버린 듯.
죽음이 두려워 요정으로 죽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흉측한 인형으로 옮겨 타고자 했던 역천의 마도사.
- ....
나는 펠레리안의 존엄이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 끔찍한 정적을 깨뜨린 것은 경보음이었다.
삐이이이-
어디 데프콘이라도 발동됐나 싶은 사이렌 소리.
새빨간 조명이 사방에 번쩍이기도 했다.
그리고, 예전 펠레리안의 던전에서 들었던 마도 정령의 목소리가 울렸다.
-방비 태세 4단계가 해제되지 않아, 소각 및 발파 절차에 들어갑니다.
-30초 후, 소각 절차가 시작됩니다.
'뭣!'
30초?
내가 아무리 열 내성이 높다고 하지만 소각이 시작돼도 멀쩡할까?
아니, 아닐 것 같다.
어, 어어....
30초면 도망칠 수도 없고, 어디 숨을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조, 좋아!
그런데 펠레리안이 갑자기 그리 외쳤다.
무슨 방법이 있으려나 해서 들어 보니.
-이대로 다 같이 불타 죽자꾸나! 잘됐어!
'시, 싫어요!'
-깨끗하게 태워버리는 것이야!
난 아직 죽기 싫다.
-25.
그런데,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한 것 같다.
-24, 23, 22....
121. 까짓거 한번 해 보죠
상처를 지혈하고 있던 잔일 페제와 로밴튼 박사에게도 목소리는 들렸다.
-30초 후, 소각 절차가 시작됩니다.
요란한 경보음 후에 울린 그 목소리를 말이다.
"소, 소각?"
"불태운다는 거겠지. 이 끔찍한 곳을!"
로밴튼 박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잔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무리 저가 박사고 잔일이 그저 레인저라고 해도.
말도 못 알아듣는 바보 취급을 하는 건가.
잔일도 울컥했다.
"나도 알아 이 새끼야!"
확 화를 내니까 로밴튼 박사가 움찔 굳는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다. 혼자 날아다니는 뱀에 의해 손가락 셋이 잘렸으니 어쩔 수 없겠지.
결국 잔일도 한숨을 내쉬며 화를 억눌렀다.
"하아,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일단, 일단은 우리끼리 다툴 게 아니라...."
"그래.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아봐야지."
로밴튼 박사가 왁 울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소각이 시작된다고 했으니 불길이 미치지 않을 곳을 찾거나... 아니면 소각을 취소할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넉넉지는 않을 것 같았다.
-25, 24, 23....
실시간으로 카운트다운이 들렸다.
"제기랄, 저, 저쪽으로...!"
이곳이 던전의 중심부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 괴악한 수조며 실험 공간이 던전의 외곽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레인저의 방향 감각을 믿자면 역시 그러했다.
"저기서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복잡한 기계장치들이 놓여 있는 방이 있었다.
그 위에 조각된 글씨를 로밴튼이 읽었다.
"제, 제어실...!"
로밴튼 박사도 펠레리안의 던전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다.
세상에 가장 많은 던전을 남기고 간 마도사 아닌가.
그가 활동했던 시절 또한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종종 펠레리안의 던전이 새로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맹세코 이런 던전이 존재할지는 몰랐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드워프들이 말하길, 던전의 절반은 펠레리안 본인이 축조했다나.
그의 원소 마법이 하늘에 닿았다는 것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마도정령을 이용해서 던전을 통제하는 시스템이야말로 진짜였다.
"마도정령, 응답하라!"
로밴튼이 제어 장치 앞에서 그리 소리쳤다.
그것을 잔일 페제가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부르셨습니까.
그런데 정말, 허공에서 답이 돌아왔다.
로밴튼 박사는 희망찬 얼굴로 외쳤다.
"소각, 소각 절차를 당장 중지해라!"
타지에서는 동향 사람만 만나도 반가운 법이다.
곧 화염으로 가득 찰 던전 안에서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로밴튼과 잔일의 얼굴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절차를 중지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나 조작할 수는 없게 만들었겠지.
그렇다면 얌전히 갇혀서 죽어야 한다.
"뭐 어떻게든 해 보쇼!"
"으, 으아아악!"
-12, 11, 10....
제어실에는 이상한 기계장치들이 잔뜩 있었다.
그것은 학자인 로밴튼 박사조차 사용 방법을 짐작하지 못할 것들이었다.
요정의 기술일까, 아니 그것보다는 펠레리안 고유의 기술이겠지.
각종 레버며 버튼을 조작해 본다.
아주 잠깐 그 사용방법을 파악해 보려 고민했지만.
-8, 7, 6....
그럴 시간은 없다.
유아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마구마구 두들기고, 당기고, 누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 아아...!"
잔일이 탄식을 내뱉었다.
천장에서 긴 대롱 같은 게 쑤욱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각'을 위한 기계장치라는 것은 분명했다.
즉, 이곳 제어실마저 불 탈 것이라는 뜻이다.
-5, 4, 3....
잔일도 끼어들어 어떤 버튼을 부서져라 눌러 댔다.
콰앙!
"무슨 짓이야!"
"잠깐, 뭐가 되는 것 같기도...!"
삐익- 하는 효과음이 울리더니.
마도 정령이 한마디 내뱉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음악을 재생합니다.
"지미럴!"
이번에는 로밴튼이 냅다 붉은 레버를 당겨 보았다.
과연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압축된 공기가 배출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소각 절차가 멈춘 걸까.
-...1. 소각을 실시합니다.
-...양액을 배출, 조작합니다.
마도정령의 목소리가 겹쳐 뒤쪽 말은 잘 안 들렸지만, 소각이 시작된다는 것은 들었다.
잔일과 로밴튼이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껴안았다.
하지만 하늘이 도운 것일까.
혹은, 그들이 마구잡이로 기계장치를 조작하던 게 효과를 본 것일까.
기적이 일어났다.
-실험체가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소각 절차를 일시적으로 중단합니다.
천장에서 노출된 노즐들이 다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뜨거운 불길을 뿜어내지도 않았다.
"뭐, 뭐야...."
"뭔가를 잘 건드린 것 같은데?"
실험체가 회수되지 않았다니, 무슨 말인가.
실험체라 함은 벽면의 수조에 둥둥 떠다니던 그 괴생물체들을 말하는 것일 텐데, 비어 있던 수조는 없었다.
"...우선 나가 보지."
지금은 오히려 로밴튼이 용감해 보였다.
잔일 페제는 감명 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감하시군, 박사."
"두려운 것은 츄고타의 둥지에 물려 갔을 때가 더했어. 이 정도는 별것 아니야."
그리 말하는 것치고는 조금 전의 비명이 작지는 않았는데.
허나 잔일은 조용히 로밴튼을 따라갔다.
하긴, 누가 뭐라 해도 박사는 대단한 인물이다.
끔찍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결국 다시 산맥에 돌아온 것 아닌가.
박사가 가진 숭고한 의지는 잔일마저 감명받게 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어."
그리 중얼거리는 박사.
그리고 제어실 바깥으로 나오자....
"엇."
제어실 바깥의 복도는 둥글게 이어지는 구조였다.
안쪽에 제어실이 있고, 그 바깥쪽 벽면에는 수조가 있다.
철벅.
그런데 바닥이 축축했다.
끈적하고 비린 냄새가 나는 액체가 발목까지 고여 있었다.
액체가 흘러나오는 곳은 뻔했다.
수조에 담겨 있는 배양액이 유출되고 있는 것이다.
"레버를 당겨서 이렇게 된 걸까."
수조 안에 있는 괴물들이 혹시 깨어나지는 않았을까.
잔일만 그런 걱정을 했는지.
로밴튼 박사는 수조 가까이 다가갔다.
"배양액을 배출해서 이놈들을 죽이는 레버였을지, 아니면 ...."
아니면 뭐?
그런 궁금증이 들었는데.
터엉!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조 내부의 빛이 꺼졌다.
마법적 조명이 작동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원래도 어두컴컴했던 복도였는데, 수조의 빛마저 꺼지자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참."
로밴튼 박사는 수조를 손가락으로 퉁퉁 두드렸다.
"좀...."
불안함을 느낀 잔일이 한마디 했다.
"조금 떨어지...."
쩌적-!
갑자기 수조에 금이 쩍 갔다.
손가락으로 좀 두드렸다고 저리된 건가 싶어서 보니, 아니었다.
수조의 유리를 무언가가 뚫고 나왔다.
그것이 로밴튼 박사의 배에 쑤셔 박혀 있었다.
"커헉, 컥."
로밴튼 박사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쩌저적, 콰창-!
수조가 터지면서 안에 남은 배양액이 쏟아져 나왔다.
잔일은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얼른 균형을 잡고 고개를 들어 보니.
수조 안에 갇혀 있던 것이 어느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배.
눈도 코도 없이 입만 달려 있는 대가리.
촉수같이 긴 팔.
그 한 손에는 배가 꿰인 로밴튼 박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잔일은 박사와 옆에 붙어 있는 명판을 번갈아 보았다.
──────────────
〔시험육, No.05〕: 배불뚝이
──────────────
사방에서 유리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수조 안에 잠자고 있던 키메라들이 풀려난 것이다.
'대체 뭘 한 거요, 로밴튼.'
박사는 곱게 죽지 못했다.
"꾸에에엑!"
배가 꿰뚫린 채 입에서는 피와 토사물을 와라락 뱉어 낸다.
"바, 박사아아아!"
"사아아악!"
잔일과 함께 비명을 지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어느새 옆에 그 자그마한 뱀이 나타난 것이다.
* * *
함께 깨끗하게 불타 죽자는 펠레리안의 제의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각 절차가 멈췄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동안 평안해졌던 펠레리안의 얼굴이 다시 악귀나찰처럼 일그러졌다.
-쥐새끼들이 수조를 열었어.... 다, 다 죽여라-!
펠레리안이 다시 활기를 얻어서 기쁘다.
나는 제어실로 달려갔다.
제어실의 입구는 세상에나, 5번 수조의 옆에 숨겨져 있었으니.
펠레리안은 키메라들에 정신이 팔려 그걸 말해 주지도 않은 것이다.
그 앞에 조금 전의 인간들이 있었고.
튀어나온 키메라가 이미 그중 하나의 배를 꿰뚫은 채였다.
"사아아아악!"
내가 포효하자, 인간 하나를 꼬치구이처럼 들고 있던 키메라 녀석은 겁을 먹고 도망치려 했다.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키메라들도 제각기 괴성을 뿌리며 복도를 달렸다.
-놔두면, 놓치면 안 돼!
펠레리안으로서는 자신의 비밀일기장이 펄럭펄럭 날아가는 것을 보는 기분일 거다.
나는 도망치는 녀석에게 고개를 돌리고.
'이실아-!'
이실이에게 부탁했다.
'화염 방사!'
도망치는 키메라들을 한 번에 잡을 생각이었다.
내 앞으로 덩굴을 뻗친 이실이.
녀석의 덩굴 끝에서 보랏빛 불꽃이 방출되었다.
화르르르륵!
좁은 공간에서의 화염방사기는 끔찍할 만큼 위력적인 법이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지옥불이 번지면서 저 어둠 너머에 있는 것들이 드러났다.
벌써 도망친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발이 느린 것들은 미처 도망치지 못했나 보다.
첫 번째로 불에 삼켜진 것은 가까이 있던 5번 배불뚝이.
*「시험육 5번 배불뚝이lv50을 처치했습니다.」
그 뒤로는 다리가 없는 고깃덩어리.
*「시험육 1번 고깃덩어리lv30을 처치했습니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외다리는 불꽃에 삼켜지지 않았다.
녀석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깽깽이발을 쓰고 있었다.
그야말로 외발 준족이라는 이명이 어울릴 법한 모습이다.
대신 다리 셋이 달린 세눈박이는 쉽게 불탔다.
*「시험육 3번 세눈박이lv50을 처치했습니다.」
한 번에 셋을 잡았으니 많다면 많은 것이고.
이미 남은 일곱이 도망쳐 버렸으니 부족하기도 했다.
-나머지도 무조건 잡아야 한다!
펠레리안이 그리 외쳤다.
저 키메라들은 펠레리안의 수치였다.
영혼까지 손상시킬 정도로 부끄러운, 존재 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키메라들.
아마 이것이 게임이라면 지금은 신규 퀘스트창이 떴으리라.
──────────────
[펠레리안의 키메라 처치(A)]
도망친 키메라들이 던전을 벗어나기 전에 모두 처치하세요.
그 끔찍한 수치의 산물을 세상에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남은 키메라: 7/9
보상: ???
수락하시겠습니까?
Y/N
──────────────
그런 식으로 말이다.
사실 그리 반가운 요구는 아니다.
이 어둠 속, 던전 안에서 징그럽게 생긴 키메라들과 추격전을 펼치라니.
펠레리안과 내 사이를 생각하면 도와줄 만하긴 하지만.
-뭐 해, 왜 굳어 있어!
나는 밀려오는 고양감을 버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폭룡적인 마성이 밀려오면서 레벨이 쭉 올랐기 때문이다.
키메라들은 결코 강하지 않았다.
레벨도 그리 높지 않아서 이런 정도의 마성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순식간에 40레벨이 넘어 버렸다.
50레벨에 또 한 번 진화를 한다고 가정하면, 아니 60레벨도 충분할 것 같다.
키메라는 어마어마한 경험치 덩어리였다.
-인마!
'좋아요.'
퀘스트를 수락했다.
'까짓거, 한번 해 보죠.'
-고, 고맙다!
윽박을 지르던 펠레리안도 나의 선택에 감동받은 듯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인간을 찾았다.
없다.
배불뚝이에게 꿰여 죽은 시체 하나만 남아 있고, 또 다른 인간 하나는 어느새 도망쳐 버렸다.
빠르기도 하군.
-그놈들이 던전 바깥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문을 닫아야 해. 빨리 제어실로 들어가라!
키메라들이 던전 바깥으로 도망친다면 추격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얼른 제어실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기계장치들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젠장, 음성 명령을 할 수 있으면 쉬울 텐데. 엉망진창으로 건드려 놨군 ... 저기 석영 뚜껑을 열어 봐라.
나는 그리했다.
그러자, 안에 복잡하게 연결된 철사며 핀들이 보였다.
-노란색 핀과 빨간색 핀을 다 뽑아 봐.
마치 공대생 같은 매력이 있는 요정 노인이다.
나는 전생에도 컴퓨터 조립조차 못 했던 사람이니, 그냥 펠레리안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터엉-!
무언가 천장에서 쑤욱 내려왔다.
아, 저건 뭔지 알겠다.
-반지를 꽂아.
그리했다.
꼬리에 있는 반지를 쑥 밀어 넣으니.
-신원이 인식되었습니다.
-환영합니다. 펠레리안 님.
마도정령이 나를 반겨 줬다.
안타깝게도 대답을 해 주지는 못한다.
-수동 조작으로 바꾼다!
펠레리안의 지시대로 더 조작하자.
-던전의 출입구를 폐쇄합니다.
그런 소리와 함께 멀리서 둔중한 충격음이 울렸다.
문은 닫았다.
-그다음에는 저 수정판 가까이 가서 핀을 오른쪽으로 돌려 봐.
놀랍게도, 이곳 제어실에서는 던전 내부의 현황을 볼 수 있었다.
생명 반응을 감지해 침입자와 키메라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핀을 돌리자 수정판에 지도 같은 것이 떠올랐다.
-우선 가까이 있는 키메라부터 찾아....
중앙에 있는 작은 흰 점 둘이 나와 이실이다.
그리고.
-어?
우리의 바로 뒤.
생명 반응이 하나 더 있었다.
-뒤다!
"사아아악!"
나는 펄쩍 뛰어올라 몸을 돌렸다.
122. 키메라 사냥
온순하고 작은 마물일수록 살아남기 쉬우며.
포악하고 거대한 마물일수록 살아남기가 어렵다.
투쟁적인 마물들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싸움에서 지면 죽는다.
승리하더라도 부상을 입으면 움직임이 둔해진다.
그 탓에 또 다른 상대를 만난다면 패배하여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큰 덩치와 강한 힘 또한 생존에 유리하지는 않다.
그런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양분과 마성이 많이 필요하다.
배고픔을 더 자주 느끼고, 또 더 많이 싸워야 한다.
오히려 작고 잘 숨는 것들이 생존하기는 쉽다.
오래 살아남은 마물일수록 강하다는 말을 고려한다면, 어디 바위 밑바닥에 붙어사는 바퀴벌레 마물이 가장 강할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투쟁적인 마물일수록 마성을 흡수할 기회가 많다.
그렇기에 더 많이 진화하고 더 강해진다.
와이번은 대표적인 대형-육식 마물이다.
산맥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와이번도 한 지역의 패자 노릇을 할만하다.
그러나 이곳은 하늘이 내린 마경.
원래부터 강하고 포악한 와이번들이 수백 수천 모여 산다.
이곳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와이번들은 모두 진짜배기다.
셀레타 역시 그랬다.
델프람 남부의 지배자, 셀레타.
그녀는 '검은 여왕'이라는 이명까지 얻었다.
그런 것치고는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마물인 그녀가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세고 있을 리는 없었다.
다만, 가늠해 보자면.
오보에 어를 거의 모른다는 것으로 세대를 짐작할 수 있다.
먼 옛날, 인간과 와이번이 가까웠고 함께 살며 소통했던 시절.
그때는 인간과 와이번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어가 따로 있었더랬다.
그 인간들의 문명은 멸망했지만 지혜로운 어미들은 그 언어를 후대에 남겼다.
비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언어를 알고 있는 와이번들은 거의 남지 않았으나, 나이가 많은 와이번은 종종 오보에 어를 할 줄 알았다.
저 츄고타가 그러했다.
츄고타는 셀레타가 태어났을 때 이미 한 지역의 패자였다.
그녀는 분명 지혜롭고 강한 와이번이었다.
적절한 표현일지 싶지마는.
어린 셀레타는 츄고타를 존경했을지도 모르겠다.
셀레타는 충분히 강해진 뒤로도 츄고타의 영역을 침범할 생각은 안 했다.
츄고타가 아직 머리 하나만 있을 시절, 그 흰 몸으로 비행할 때, 셀레타는 얌전히 돌기둥에 내려앉고는 했다.
물론 과거의 일이다.
츄고타가 첫 번째 알을 낳고, 그 새끼를 지키지 못하고 사라진 뒤.
머리가 셋이 되어 돌아온 츄고타는 미쳐 있었다.
츄고타는 더 이상 산맥 동부의 지혜로운 여왕이 아니었다.
셀레타 역시 제 첫 새끼를 낳았다.
그중에는 작고 날개도 없이 태어난 모자란 막내가 있었다.
그리고 미쳐 버린 츄고타가 그 막내를 제 새끼로 착각하고 있으니.
"쿠가가가가각!"
셀레타는 그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츄고타가 매서운 속도로 땅을 기어오고.
셀레타는 하늘 위에서부터 떨어지듯 활강했다.
서로의 입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파괴광선이 쏘아진다.
광선은 서로를 타격하는 대신, 그 사이에 있던 골렘을 타격했다.
셀레타의 파괴광선은 골렘의 안면부에.
그리고 츄고타의 파괴광선은 골렘의 하반신에.
콰앙-!
광선에 담긴 충격량 탓에 골렘은 허공에서 핑그르르 회전했다.
이대로 덮친다.
셀레타는 그런 각오로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쿠우웅-
흙먼지가 확 치솟았다.
골렘에게도 충분히 타격을 입힐 만한 공격이었을 텐데.
충격의 순간, 골렘의 몸은 세 조각으로 해체되었다.
셀레타가 깔고 뭉갠 것은 그중 하나뿐.
발톱으로 움켜쥔 골렘의 일부에서 팔 같은 것이 뻗어 나와 셀레타의 다리를 찔렀다.
게다가 분리된 골렘 둘이 다시 셀레타를 공격하러 달려왔으니.
위기의 상황에서 그녀를 구한 것은 다름 아닌 츄고타였다.
"구우우우!" "케에겍," "구륵, 구르륵!"
기묘한 3중주의 울음소리와 함께, 츄고타는 그저 엉겨 붙었다.
엉겨 붙었다는 말이 적당할 것이다.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날개를 활짝 펼친 뒤 끌어안듯 부딪치는 것이다.
자가수복 능력을 믿는다고 해도 분명 미친 짓이었다.
골렘의 억센 힘에 의해 날개의 피막이 찢어지고 가죽에는 구멍이 난다.
하지만 츄고타의 그런 막무가내 공격 덕에 셀레타는 틈을 벌었다.
그녀를 덮치려던 골렘 두 마리는 이제 츄고타를 공격하고 있었다.
새끼들을 근처에 숨겨둬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큰일이 벌어졌으리라.
츄고타가 두 마리를.
그리고 셀레타가 한 마리를 담당하고 있는 지금.
이변이 일어났다.
싸움에 집중하고 있던 골렘의 눈이 돌연 번쩍 빛나더니.
놈들의 대가리가 일제히 석탑 쪽으로 돌아갔다.
석탑 안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골렘들이 일제히 몸을 빼기 시작했다.
셀레타에게 달라붙어서 상처를 내던 골렘 또한 마찬가지였다.
골렘은 셀레타를 내팽개치고 다시 석탑으로 달려갔다.
끔찍한 놈들이다.
상처 입은 셀레타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비로소 자유로워진 셀레타가 얼른 날아올랐다.
"삐이이익!"
저 돌기둥 뒤에서 첫째 딸이 삑삑거리고 있다.
숨어 있으라고 했더니만 응원한답시고 나온 것이다.
돌아가면 엉덩이를 때려 줄 일이다.
골렘은 셀레타를 내팽개치고 다시 석탑으로 달려갔다.
끔찍한 놈들이다.
상처 입은 셀레타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일순간, 셀레타가 느낀 것은 해방감이었다.
끔찍한 골렘을 몸에서 떼어놓았다는 것에 대한 자유, 안도감.
그러나....
"구르르르르르-!"
츄고타는 아니었나 보다.
늙고 미친 흰 여왕은 달려가는 골렘에게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날개가 또 한 번 부러져 버린 탓에 날지도 못하면서, 매섭게 달라붙으며 골렘들의 전진을 막았다.
그제야 셀레타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막내.
막내가 석탑에 들어갔더랬다.
"꾸각!"
츄고타가 둘을 붙잡았으니, 나머지 하나라도 잡아야 한다.
파괴광선을 쏘았으나, 골렘은 한 바퀴 구르더니 다시 일어났다.
이제는 마력을 다 썼다.
그래서, 셀레타는 골렘을 그냥 물어 챘다.
그리고 땅바닥을 굴렀다.
꾸구구궁-!
목이 부러져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충격이 밀려왔다.
골렘은 뭐로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몹시 단단했다.
셀레타의 치악력은 능히 암석을 부술 정도였으나 골렘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결국 골렘은 셀레타의 아가리에서 벗어났다.
츄고타가 붙잡은 두 골렘들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순식간에 다시 하나로 뭉쳤고, 방열판을 날개처럼 활짝 폈다.
그리고 초가속을 준비했다.
"꾸아악!"
두 와이번 여왕의 시간 끌기가 헛수고는 아니었다.
석탑 곳곳에 뚫린 구멍이 일순간 닫혀 버렸다.
골렘의 초가속은 그 직후에 발동되었다.
콰앙!
눈 깜빡하는 사이에 골렘은 이미 석탑 중간 부분에 도달해 있었다.
허나 그 강인한 골렘이라고 해도 폐쇄된 석탑에 강제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피유우우웅-
게다가 골렘은 갑자기 끈 떨어진 인형마냥 축 늘어졌다.
그러고는 죽은 매미처럼 힘없이 굳어 버렸다.
"구구구...."
비로소 츄고타는 발작을 멈추고 바닥에 대가리를 쿵 뉘었다.
셀레타가 가까이 가 보니, 츄고타의 상태는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가 둘, 아니 셋 이상이다.
숨을 쌕쌕 내쉬고 들이쉬는데, 그럴 때마다 피거품이 입가에서 주르륵 흘렀다.
끔찍한 집념.
그리고 그 집념은, 자식을 지키겠다는 마음에 비롯된 것이리라.
비록 그 자식이 제 자식이 아니라 셀레타의 자식일진대.
츄고타에게 가진 감정은 적의뿐이었지만.
이 순간, 셀레타는 오래된 감정을 다시 느꼈다.
그것은 존중.
오래된 여왕에게 보내는.
이미 자식을 키우고 또 잃어 본 어미에게 보내는.
리스펙트...!
* * *
뒤를 돌아보니.
"사아악!"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유령처럼 몸을 투명하게 할 수 있는 녀석이 있던 거 아니야?
그런 의심이 들어서 둘러봤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는 게 없다.
콰아앙!
대신 먼 곳에서 운석이라도 충돌한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석탑 전체가 진동하는 것 같다.
-골렘이 던전으로 복귀하려는 것 같다. 강제로 문을 열려나 본데.
'그럼 안 되잖아요.'
-안 되지. 강제 정지시켜라!
문을 열었다가 안에 있던 것들이 밖으로 도망치면 큰일이다.
나는 펠레리안이 시키는 대로 골렘을 강제 정지시켰다.
-제기랄, 조금만 빨랐으면.
어떻게 아귀가 딱 맞았으면 골렘을 수하처럼 부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골렘이 던전의 문을 뜯어 버리려고 하니 강제로 정지시킬 수밖에.
결국 키메라는 내가 잡아야겠군.
그리고 마성도 다 내 차지다.
-봐라, 분명 바로 근처에 생명 반응이 있는데.
수정판에 떠 있는 지도에는 흰색 점이 우리 근처에서 점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봐도 키메라는 보이지 않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없었다.
내게 갑자기 석궁을 쐈던 미친 노인네의 시체 말고는.
노인은 불쌍하게도 키메라에 의해 배가 뚫려 죽었다.
혹시 키메라를 보자마자 키메라 새끼! 하면서 석궁을 쏜 거 아닐까.
나처럼 자비롭지 않을 키메라는 곧장 가혹하게 응징했을 것이고.
시체가 창백했다.
가슴팍은 아주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어?
죽은 사람이 왜 숨을 쉬지 했는데.
순간 비늘이 촤르륵 곤두서면서 위기감이 느껴졌다.
나는 가까이 들이댔던 머리를 휙 꺾었다.
죽은 노인의 가슴팍이 불룩 부풀더니.
푸확!
그곳에서 사람 팔뚝만 한 괴생물체가 튀어나왔다.
'으악! 체스트버스터다!'
노인네의 배를 뚫은 키메라의 팔뚝은 사실 생식기관이었던 걸까.
다음에 만나면 깨물지는 말아야겠다.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나는 반사적으로 대응했다.
투명한 손으로 석양을 잡고 휘둘렀다는 말이다.
거머리같이 생긴 마물을 썩둑 잘랐다.
피가 촥 튀었다.
다행히 산성 피는 아니었지만, 고약한 냄새가 났다.
잘린 뒤에도 꿈틀거리는 마물.
──────────────
[시험육 5번 배불뚝이의 기생체lv1][특성]
[기생], [재감염], [분열]
──────────────
윽.
만약 저놈한테 물리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내게 독 내성이 있긴 했지만, 어째선지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는 상대다.
게다가 이놈은 마성도 별로 안 줄 것 같다
키메라들을 소탕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듯하다.
배불뚝이를 만났을 때는 불 마법을 잘 활용해야겠다.
-니미럴 왜 저딴 징그러운 키메라를 만든 거야!
펠레리안이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일이다.
'태워 버리죠 뭐.'
나는 불을 뿜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이실이가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이실이가 이러는 건 드물어서, 나는 마법을 쓰려던 것을 멈췄다.
그러자 이실이가 스멀스멀 덩굴을 뻗치기 시작했다.
'지지야, 지지!'
화들짝 놀라서 막으려는데, 이실이는 내가 막아도 덩굴을 뻗쳤다.
그래.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불을 뿜어서 씻겨 주면 되겠지. 이실이는 화염 면역이니까.
그래도 무슨 마음인진 궁금해서 이실이의 몸에 꼬리를 얹었다.
다행히 이실이는 내 의도를 철석같이 알아들었다.
*「악마사냥꾼의 덩굴풀 이실lv2가 교감lv2를 사용합니다.」
덩굴의 끝을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거머리에게 가져다 대니.
*「특성 '키메라'에 의해 정수를 흡수합니다.」
*「마성을 획득합니다.」
*「정수가 축적됩니다.」
이실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녀석은 뭔가를 흡수하고 있던 것이다.
실제로 거머리는 곧 쪼글쪼글 말라붙어 버렸다.
나는 이실이가 정수를 흡수하고 있다는 말을 펠레리안에게 전해 줬다.
그러자 펠레리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정수가 뭔데요?'
-키메라는 여러 마물의 특성을 합성하여 만든다는 것은 알지? 마물의 특성을 발현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정수이다.
키메라는 원시저그 같은 것일까?
-그런데 이미 완성된 마물이 다른 키메라로부터 정수를 흡수하다니.
이실, 재능 많음. 세계수 수저를 타고남. 다른 키메라의 정수를 흡수. 스스로 진화함.
어쨌든 좋은 일임이 틀림없었다.
펠레리안의 말에 의하면, 다음에 이실이가 진화할 때 미리 흡수해 둔 정수들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키메라들은 경험치만 많이 주는 게 아니라 정수도 주는구나.
한층 의욕이 솟아서 다시 수정판 쪽으로 돌아갔다.
이 수정판의 지도가 정확하다는 것은 방금 확인했다.
'제일 가까운 키메라가....'
지도를 둘러보니, 키메라들은 제각기 움직이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던전 안을 돌아다니는 녀석도 있었고, 상대적으로 느릿느릿한 것도 있다.
다행히 무리를 이루는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있구나.
가까운 곳에 한 놈이 있었다.
놈이 멀리 가지 못한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얘, 계단을 못 올라가고 있는데요?'
-그 네 번째 수조에 있던 놈이구만.
'아하!'
그래, 그렇다면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막혀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잡기 쉽겠네요.'
-얕보지 말아라.
'예에.'
펠레리안이 경고했다.
원래의 그였다면, '누가 만든 키메라인데 방만하게 마음을 놓냐.' 하면서 거들먹거렸으리라.
하지만 솔직히 긴장하려고 해도 그게 쉽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4번 키메라는 그 이름부터 생김새까지 허접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악!"
일단 가 보자!
우리는 지도에 표시된 곳을 향해 출발했다.
123. 최고의 구르기스트
자, 일단 이곳에 있는 키메라의 목록을 정리해 보자.
펠레리안 던전의 키메라 열람.
1번부터 9번까지, 총 아홉 마리의 키메라가 있었다.
아홉 개의 수조는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시험육 No.1: 고깃덩어리'가 최초로 만들어진 키메라였다.
고깃덩어리에 대해서는 그리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없으리라.
왜냐하면 이미 불타 죽어 버렸거든.
다리가 없어서 이실이의 지옥불 공격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한 입 먹어 보려고 했는데 완전 숯덩이가 되어 버려서 맛은 보지 못했다.
두 번째 키메라는.
──────────────
〔시험육, No.02〕: 외다리
──────────────
그 녀석은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녀석이다.
어디선가 본 요괴 같기도 하고 도깨비 같기도 했다.
제대로 된 몸통에 다리가 달린 게 아니라, 마치 럭비공에 다리 한 짝이 달린 모양새다.
눈이 몸 주변으로 둥글게 나서 전방위를 볼 수 있을 듯하다.
다리가 하나뿐인 주제에 빠르기는 제법이었다. 깽깽이 발로 순식간에 달려서 사라졌다.
세 번째는 세눈박이.
눈이 세 개나 달리고 다리도 세 개인 녀석이다.
다리가 세 개인 이유는, 두 번째 키메라의 다리가 하나뿐이라는 것에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래서 펠레리안이 다리를 하나 더 붙이려다가 너무 많이 붙인 것 아닐지.
여하튼 녀석은 불에 삼켜져 내 경험치가 되었다.
네 번째 키메라는 우선 넘어가고 다섯 번째부터 분석해보자면.
'시험육 No.5 배불뚝이다.'
이름대로 배가 불룩 나와 있었고, 팔다리는 가늘었다.
피부는 창백했으니. 누런 난닝구를 걸쳤으면 어울렸으리라.
팔에는 손 대신 촉수 같은 게 달려 있었는데, 그 촉수는 사실 생식기였음이 분명했다.
녀석에게 배를 뚫려 죽은 인간의 몸에서 새끼 촉수가 자라나고 있었으니.
녀석이 불에 타 죽어서 다행이다.
그보다 끔찍한 녀석은 더 없기를 바란다.
그래, 그리고 다시 4번으로 돌아가자면.
──────────────
〔시험육, No.04〕: 피비늘
──────────────
펠레리안(본체)은 녀석의 닉네임을 피비늘이라고 지어 두었다.
왜 그렇게 지었는지는 알 것 같다.
녀석의 몸에는 비늘이 나 있었다.
그런데 그 비늘이 영, 내 것처럼 아름다운 면이 없었다.
빼곡히 자라난 게 아니라 억지로 살가죽을 뚫고 나온 모습이다.
개중에서는 꼭 인그로운 헤어마냥 피부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도 있다.
그 탓에 핏기가 가시지 못했으니, 피비늘이다.
하지만 나라면 녀석의 이름을 다르게 지었을 것이다.
더 정확한 닉네임을 지어 본다면 아마....
'썩은 김밥.'
그렇게 이름을 지었으리라.
녀석의 몸은 길쭉한 원통형이었다.
'머리'라고 해야 할 부분은 털이며 촉수 같은 게 삐져나와 꼭 김밥 자투리 같았고.
아래에 있는 다리 역시 짧고 빈약해서 김밥 자투리 같았다.
피부에는 빨간 비늘이 나 있고 창백한 거죽이 뒤덮여서 꼭 김밥에 곰팡이가 핀 듯한 모양이다.
썩은 김밥보다 적절한 이름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세상에도 김밥이 있었다면 펠레리안도 이름을 그리 지었으리라.
키메라 4호는 신체 구조상 제대로 걷거나 뛰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단 지역을 통과하지 못하는 놈을 보고 녀석을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짐작은 사실로 밝혀졌다.
-쉿.
'쉿.'
까딱까딱.
우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서 저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쪽에 피비늘, 혹은 썩은 김밥이 있었다.
-계단을 못 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걷지도 못하는군.
펠레리안이 중얼거렸다.
생긴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 피비늘은 제대로 걷지 못했다.
그 대신, 놈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구르는 솜씨는 제법 괜찮다.
오히려 내가 기는 속도보다도 더 빠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구르는 것으로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
여기서 피김밥, 아니 피비늘은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였다.
생선이 튀어 오르듯 몸을 튕겨 점프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단을 오른다.
여기까지는 아주 훌륭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이어진다.
팔다리로 땅을 지지해서 올라간 게 아니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 힘들다.
가파른 계단 위로 올라가도, 관성 탓에 더 구르다가 데굴데굴 떨어진다.
쿠웅!
제법 뻐근할 것이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면 그랬다.
녀석은 잠시 그러고 있다가 똑같은 시도를 반복했다.
계단을 전부 오르려면 그런 뛰어오르기를 열 번은 연속으로 성공해야 할 터.
'저런 허접한 키메라라니.'
아무래도 지능이 그리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허접... 끄응.
펠레리안은 뭐라 반박하려다가, 반박하는 게 더 이상하다 싶었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계속 구경하면서 눈에 힘을 줘 보았다.
──────────────
[시험육 4번 피비늘lv70]
[특성]
[노력가], [외곬]
....
──────────────
포기하지도 않고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노력가라는 특성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레벨도 70이면 낮지 않다.
레벨만 따지면 나보다 높기는 하니까.
일단 느껴지는 기세로는 알 수 있는 게 없으니, 스킬을 살펴봐야 했다.
생긴 것을 보아하니 그리 위력적인 스킬은 없을 것 같은데.
──────────────
[스킬]
[구르기lv20], [튕겨 오르기lv10], [독비늘lv10], [충격 내성lv10], [참격 내성lv10], [열 내성lv10]....
──────────────
어라!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구르기lv20이었다.
어떤 스킬이든 20레벨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위 스킬이든 그보다는 하등한 스킬이든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나는 아직 그 정도로 갈고 닦은 스킬이 없다.
'구르기'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스킬이다.
하지만 진심을 다한 20레벨의 구르기라면 ...?
-그냥 데굴거리겠지.
하지만 엄청나게 잘 데굴거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얕볼 게 아니에요.'
떠올랐다.
수조가 있던 곳의 구조상, 피비늘은 배불뚝이 다음으로 나와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실이가 지옥불을 뿜었을 때 놈은 이미 자리에서 벗어난 뒤였다.
그럴 틈이 있었던가?
아주 잠깐 사이 피비늘은 자리에서 도망친 것이다.
저 빈약한 다리로 뛰었을 리는 없고 굴러갔을 텐데, 그렇다면 그 구르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리라.
'빌려 볼까.'
어느 순간부터 빌리는 뿔로는 고급 스킬만 빌리고자 했다.
천뢰령이나 거대화 같은 게 대표적인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단점이 있었다. 상위 스킬을 완전습득하는 데에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동안은 탐나는 스킬이 많아도 손가락만, 아니 꼬리만 빨 수밖에 없었다.
'구르기를...!'
거대화를 완전습득한 지금, 나는 빌리는 뿔이 진화한 '강탈의 왕관'으로 구르기를 빌리고자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강탈의 왕관에는 내 기대 이상의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강탈할 수 있는 스킬입니다.」
순간 그것이 무슨 뜻인지 고민했다.
강탈의 왕관은 빌리는 뿔로부터 진화한 스킬이다.
'빌리는' 것과 '강탈'은 엄연히 다른 법인데.
왜 그리 흉참한 수식어가 붙었는가 싶더니만....
나는 상대방의 구르기를 빼앗을 수 있었다.
*「'구르기lv20'을 강탈합니다.」
*「일시적으로 '구르기lv10'을 얻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기존 '빌리는 뿔'의 매커니즘과 같다.
아니, 아무리 하위 스킬이라고 해도 단번에 레벨 10으로 빌린 것을 보니 효율이 나아졌나?
여하튼, '강탈의 왕관'이 가진 진짜 효용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일시적으로 대상의 '구르기lv20'이 '구르기lv13'이 됩니다.」
어어!
말 그대로 강탈이다.
일시적이긴 해도, 상대방에게 강력한 디버프를 안겨 주는 스킬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좋은 스킬이었다니.
다만, 강탈의 왕관을 몰래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나 보다.
"뚜룩."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놈이 내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게 '머리'라는 것은 그때 알 수 있었다.
김밥 속이 튀어나오듯 봉두난발로 뻗어 있는 촉수와 털 사이에 검은 눈 여럿이 박혀 있었다.
"뚜루루루룩!"
놈이 분노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대로 나를 향해 구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구르기가 내 생각과는 달랐다.
놈은 옆으로만 구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몸을 굴렁쇠처럼 둥글게 말아 앞으로, 마치 바퀴 구르듯 구를 수도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속도는 내 상상 이상이었다.
레이싱카가 달려오고 있다.
내가 옆으로 '구르지' 않았다면 피하기 힘들었으리라.
피비늘은 나를 지나쳐 뒤의 벽에 부딪혔다.
콰앙!
나는 방금 내 속도를 체감하고 몸을 떨었다.
'엄청나게 빨랐다!'
식심의 도약 못지않은 속도였다.
하긴, 나같이 길쭉한 생물들에게 회전은 의외로 잘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이다.
-피해라!
피비늘이 '튕겨 오르기'를 이용해 날아왔다.
하지만 내게는 식심의 도약이라는 상위 스킬이 있다.
피하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그조차도 예상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곳은 사방이 막혀 있는 실내.
구르기와 튕겨 오르기의 조합으로, 녀석은 벽에 닿을 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튕겨 나왔다.
럭비공을 방 안에서 세게 던지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그 덩치가 미친 듯 움직인다.
텅, 텅, 텅, 텅, 텅-!
깔리면 최소한 압사.
게다가 놈에게는 독비늘이라는 스킬도 있다.
한 번 부딪칠 때마다 상대방을 중독시키는, 나름의 효율적인 전투방식인가 보다.
재빨리 피하던 나도 결국 놈에게 스쳤다.
치익-
물론 내게는 수정 비늘 + 흑린이 있다.
놈의 되다 만 비늘하고 비교할 수는 없으리라.
오히려 상처를 입은 것은 놈이었다.
투웅!
놈은 한쪽 구석에서 멈췄다.
아예 한 번에 나를 뭉개 버릴 생각인 것 같다.
몸을 자벌레처럼 웅크린 것은 추진력을 모으기 위함일 터.
나는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놈을 노려봤다.
축적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언제 놈이 튀어 오를지.
...바로 지금.
투웅!
놈이 내게 쇄도한 순간.
나는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부딪치기 직전까지 기다린 다음에 튀어 올랐을 따름이다.
녀석이 몸을 꺾지 못하도록.
그래서 내 뒤에 숨겨 둔 장검에 스스로 꿰뚫리도록 말이다.
셀레스티움 장검은 충분히 날카로웠고.
날아오던 피비늘의 속도 역시 충분했다.
퍼억!
놈은 주둥이부터 꿰뚫렸다.
석양의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박혔다.
퍼덕, 퍼더덕!
몇 차례 몸을 퍼덕였지만.
놈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절명했다.
쉬웠다면 쉬운 사냥 과정이었지만.
키메라가 남긴 마성은 내 기대 이상이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단숨에 두 번의 레벨업.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업에 필요한 마성의 양이 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후하기 그지없는 보상이다.
짜릿한 고양감이 느껴진다.
현재 내 상황을 한번 점검해 보자.
──────────────
[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lv45]
[이명] 우르오로스, 심장 파먹는 뱀
[특성]
[불굴], [정진], [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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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파, 레벨 45 달성.
진화 가능한 레벨이 50이라고 가정하면 이제는 정말 고지가 코앞이다.
이제는 서펜트로 진화할 수 있으려나?
──────────────
[스킬]
▸ 왕관
[강탈lv4]: 구르기lv10, [극복lv2], [지배lv1]
──────────────
이번에 '강탈의 왕관'이 가진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좋은 스킬을 빌려오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잘한 스킬들도 배워 둬야겠다.
일단 구르기는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 마법
[초급원소]:불lv8, 흙lv7, 물lv5, 바람lv6
[투명한 손lv14], [경량화lv5]
──────────────
마법사(魔法蛇 )로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최근 원소마법의 스킬이 꽤 올랐고, 투명한 손과 경량화는 워낙 검술을 갈고닦다 보니 저절로 늘었다.
──────────────
▸ 기술
[거대화lv2], [철사자 제식 검법lv2], [페랑 유파 단검술lv4], [광선lv3], [천뢰령lv2], [식심의 도약lv4], [맹독:신경독lv5], [독비늘lv2], [꼬리치기lv3], [참격lv5], [마력 감지lv3], [가속lv7]
▸ 생존
[내성]: 독lv7, 출혈lv3, 고통lv8, 열lv12, 냉기lv1, 석화lv1, 전격lv1, 충격lv2
[생존본능lv7], [흑린lv3], [수영lv1],[숨 참기lv10], [은밀lv10]....
──────────────
이 외에도 꽤나 다양한 스킬이 있었지만.
스킬의 종류가 많아진 것에 비해 제각기의 레벨은 많이 못 올린 것 같다.
반성할 일이다.
너무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일까.
진득히 수련해서 강해질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가 진작 말했지만. 마법만 제대로 갈고 닦아도 세상이 너의 것이 될 텐데.
펠레리안이 저리 말했지만, 사실 그건 엘프의 기준이다.
제대로 갈고닦으려면 100년쯤은 걸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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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경비대장 살해], [지네의 친구], [고블린의 맹우], [마물의 우두머리],
[몬스터웨이브의 저지자], [악마 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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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황찬란한 업적도 많이 늘었다.
이제 서펜트로 진화만 하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까딱까딱.
내가 가만히 있지 이실이가 이파리로 나를 두드렸다.
이실이는 쪼글쪼글 노랗게 말라붙어 있었다.
지옥불을 써서 많이 무리했나 보다. 게다가 배고프기도 하겠지.
'좋아! 돌아가서 밥 먹자!'
메뉴는 두구두구.
키메라 김밥입니다.
나는 죽은 키메라를 질질 끌고 제어실로 돌아갔다.
124. 친해지고 싶어
던전은 컸다.
잘 찾아보니 놀랍게도 곳곳에 비상식량이 있었다.
다만 그 '비상식량'의 대부분이 키메라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에 타면 걸쭉해지는 가루인데 끔찍하게 맛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은 그냥 반지의 아공간에 조금 챙겼다. 언젠가는 비상식량이 되어 줄 것이다.
아주 조금이지만 펠레리안의 식량도 있었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더라고 해도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먹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다만 꿀과 향신료, 찻잎 같은 것이 있어서 조금 챙겼다.
펠레리안이 썼을 법한 가구들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의자를 몇 개 챙겨서 손수 부쉈다.
거기에 불을 붙였다.
이러면 모닥불은 완성이다.
중요한 것은 고기를 구울 철판을 찾는 것인데.
적당한 게 없었다.
그래서 그냥 제어실에 있던 수정판을 뜯어 버렸다.
불판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사실, 나는 마물이니까 그냥 생으로 삼켜도 상관없었지만.
이런 것도 기분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 키메라들은 못생긴 게 정말 식욕이 돋지 않는다.
바싹 잘 구워 먹어야 먹을 맛이 날 것이다.
우선 질긴 가죽을 벗겨 낸 뒤, 몸통을 썰어 낸다.
스르륵.
내장을 손질하면 꼭 생선을 토막 친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이 정도면 뼈가 붙은 스테이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니고 있던 소금과 향신료를 뿌린다.
향신료는 허브를 말린 것이었는데, 펠레리안의 말로는 같은 양의 금보다 비싼 거라고 했다.
향은 로즈마리와 비슷했다.
달궈진 불판에 고기를 올렸다.
치이이이익!
고기의 지방이 녹아들며 기가 막히는 소리가 났다.
버터 같은 게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렇게 고기를 굽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난다.
메두사맘의 둥지에서 빠져나와 아캄 분지에 떨어졌던 시절 말이다.
'하긴, 그때에 비해서는 장족의 발전이지.'
뱀으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고기를 구워 먹었던 게 언제였지.
펠레리안의 첫 던전을 탈출하고 난 다음이었던 것 같다.
혹시나 연기가 피어올라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땅을 파고 그 아래 숯과 달군 돌을 넣어서 덮는 둥 갖은 수고를 다 했던 것 같다.
소금간도 없이 그냥 구워 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무슨 고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도, 살살 녹았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아주 호사를 누리는 것과 다름없다.
적어도 양념된 스테이크 아닌가.
재료는 키메라라도 말이지.
예전에 유튜브에서 본 바로, 이렇게 큼지막한 고기는 레스팅을 해야지 속이 균일하게 익는다고 했다.
앞뒤로 노릇하게 구운 뒤 고기를 따로 옮겨 놔두었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구르기를 연마한다.
그럴 계획이었는데.
-잠깐만.
펠레리안이 또 뭔가를 시키려 했다.
-저 명령어 핀을 돌린 뒤 오른쪽으로 두 번, 아래로 세 번 딸깍해 다오.
음성 인식 기능을 사용할 수 없으니 마도정령을 조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복잡한 암호를 입력하듯 조심스럽게 제어실의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면....
마도 정령이 응답을 해 준다.
-기록된 일지가 없습니다.
그러면 펠레리안이 성질을 와락 낸다.
-에잇!
'뭐 한 거예요?'
-혹시 본체가 일지라도 남겼는지 확인해 본 거다. 일지도 안 남겼다니....
펠레리안 역시 나름의 고민과 성찰을 하고 있었다.
생전의 그가 죽음이 두려워서 키메라로 몸을 갈아타려고 했다니.
오만함과 자부심의 화신 같던 펠레리안으로서는 충격이 컸으리라.
하지만 거기서 주저앉는 것은 하수.
일류는 진상을 확실히 파악하려 할 터.
펠레리안은 과연 일류의 빌런이었다.
-키메라가 더 있다면 모르겠지만, 수조에 빈자리는 없었어. 내 생각에는 분명 미완성된 실험이다.
'하기는, 분명 마지막 키메라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펠레리안의 바람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나는 더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말았다.
'더 중요한 게 뭔데요?'
-그래서 결국, 나는 죽은 것인가? 왜 시신은 없지.
펠레리안이 기억하고 있는바.
그는 죽음을 앞두게 되면 이곳 던전으로 돌아오기를 계획했었다.
만약 치명상을 입을 경우, 던전으로 강제 텔레포트.
수명이 다하거나 죽을병, 혹은 맹독에 중독되었을 경우에는 제 발로 던전을 찾아오는 계획이었다.
둘 중 하나의 경우에 처해서 펠레리안이 죽었다면.
적어도 이곳에는 그 시체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저번에 그 유적에서는 영감님이 인간들한테 죽었다고 써 있었잖아요.'
-신빙성이 없는 기록이었어.
'혹시 이곳에 미처 텔레포트 하지 못하고 죽은 것은 아닐까요.'
-으음....
펠레리안이 침음성을 흘렸다.
어떤 가정을 생각해 봐도 아예 불가능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헷갈렸다.
그러나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팔라무 우림의 마석 보관소에서, 신호를 전송했을 때 말이다.
그 던전에서 펠레리안은 송신 기능이 델프람을 향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수집된 정보는 분명 델프람으로 갔어.
던전의 정보는 펠레리안의 본체가 있는 곳으로 향하게 만들어 두었다.
분명 이곳으로 도달했기에 펠레리안은 자신의 본체가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기 시체는 없죠.'
펠레리안의 죽은 시체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신호가 정확히 어디로 간 거예요? 머릿속에 칩이라도 박아 두고 다니셨나.'
-내가 들고 다니던 수신기가 있지.
'일단 그게 여기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수신기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숨겨진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어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지도에도 없는 숨겨진 공간이?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 던전에 대한 기억은 내 눈앞의 펠레리안에게서 지워진 듯하니.
'아!'
-왜! 떠오르는 것이 있느냐.
'아니, 고기 식을 것 같아서요.'
펠레리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밥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철판 위에 옮겨놓은 키메라 스테이크.
겉보기에는 훌륭히 익었다.
단검으로 스윽 스테이크를 갈라 보니.
그 단면이 핑크빛으로 아름다웠다.
"사아악!"(잘 먹겠습니다.)
굳이 인간처럼 썰어 먹거나.
평범한 뱀처럼 맛도 보지 않고 삼킬 필요는 없었다.
우적.
크리스탈 크라운 파스톤은 물어뜯는 것도 잘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미디움 레어로 익은 키메라 스테이크는 부드럽게 베어 먹을 수 있었다.
육즙이 아주 풍부하다.
음음.
아무리 포장해도 맛있다고는 못 하겠군.
엄청 맛없는 소고기 >>>>> 키메라 썩은김밥 > 모스키토랫 구이 >>> 회색 곱등이
이 정도 될 것 같다.
물론 나는 밥투정을 안 하는 훌륭한 뱀이므로 얌전히 스테이크를 먹어 치웠다.
몸에 좋은 것이 입에 쓰다고. 건강에는 좋지 않을까?
까딱까딱.
이실이는 그것이 무척 부러웠나 보다.
녀석은 지금 간이 화분에 들어가 있었다.
평소에는 내 몸에 붙어서 다니지만, 이렇게 쉴 때는 꼭 화분에 들어가서 쉬고는 했다.
화분을 제 방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밥을 먹을 때도 화분을 활용했다.
'알겠어 너도 나눠 줄게.'
나는 스테이크를 잘게 찢어서 이실이의 화분에 올려놔 주었다.
원예와 농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게 무슨 뱀짓거리냐고 등짝을 때릴 일이지만.
이실이에게는 이게 잘 먹혔다.
화분에 올려둔 고기 조각들은 슬금슬금 흙 아래로 가라앉았다.
잘게 찢어 주고 익히기까지 하면 쉽게 흡수할 수 있나 보다. 이 육식식물!
이렇게 식사도 하고.
펠레리안과 함께 고민도 하다 보니까 발견이 조금 늦었던 것 같다.
"사악!"
미니맵, 아니 수정판을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생명 반응 두 개가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떠오르는 가장 유력한 가설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가능성.
키메라 둘이 빼빼로 하나를 나눠 먹는 게임을 하고 있다.
두 번째 가능성.
둘이 싸우고 있다.
빼빼로 게임은 할 수 있지만 이 세상에 빼빼로가 없을 테니 불가능할 거고.
그렇다면 둘이 싸우는 게 틀림없다.
한쪽 경험치가 내 다른 쪽 경험치를 빼앗게 둘 수는 없다.
'가자, 이실아!'
이제 척하면 딱이다.
이실이는 화분에서 쑤욱 튀어나와 내게 착 달라붙었다.
'밥도 맛있게 먹었으니, 식후 운동을 할 차례네.'
이제 이 던전 내부의 구조도 뻔했다.
녀석들이 있는 곳은 항아리 모양의 방이었다.
통로를 열심히 지나 그쪽으로 다가가니.
저 앞쪽에서 쿵쾅거리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놈들!' 외치며 곧바로 튀어 나가지는 않았다.
일단 누군지는 봐야 할 것 아닌가.
혹시 그 무용수 키메라 같은 녀석이면 일단 얼마나 센지를 봐야 ....
"뀌룩, 뀌루룩."
"무투투투투!"
이곳 키메라들은 울음소리가 참 개성 넘친단 말이지.
발레리나는 없었다.
대신 이곳에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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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육 2번 외다리lv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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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하나뿐인 외다리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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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육 7번 듀라한lv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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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머리가 없는 친구.
듀라한이라고 하면 아주 유명한 언데드 몬스터이다.
대충 그 먼 옛날 유행했던 다X메이지 등등을 보면 데스나이트 다음가는 언데드 몬스터로 묘사되는 것이다.
머리 잃은 전사, 혹은 기사.
자신의 옆구리에 머리를 끼워 든 채 달려서 싸우는 괴물.
인간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외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키메라도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들고 다니냐 하면, 조금 달랐다.
목 위에 머리통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 대신, 머리가 옆구리에 돋아나 버렸다.
그것 말고 사지는 제법 멀쩡했다.
"무투투투!"
얼굴은 사람 같기도 한데 저리 외치는 것을 보면 뇌는 없는 듯하다.
그에 맞서는 외다리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듀라한이 맨손으로 두들겨 팬 것 같았다.
'음.'
둘이 투닥거리는 것을 보고 판단을 내렸다.
할 만한 상대다.
외다리는 조금 빠르고, 듀라한은 맷집이 강해 보일 뿐.
이실이가 회복을 좀 했으니 지옥불을 써 볼까 했는데....
'잠깐, 얘들 다 피부가 좀 변한 것 같은데요.'
외다리를 비롯한 키메라들의 피부는 원래 매끈하고 축축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라서 제법 질겨 보였다.
-내성을 갖추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까. 내가 본디 키메라를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니.
나는 눈에 힘을 주어서 상태창을 살폈다.
──────────────
[스킬]
...[참격 내성lv10], [열 내성lv15], [전격 내성lv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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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내성 구성이 제법 알차다.
피부가 마르면서 내성도 보충된 걸까.
으음, 그래도 지옥불은 통할 것 같지만 나는 마음을 바꿨다.
계속 이실이의 지옥불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아아악!"
쩌렁쩌렁 포효하면서 나섰다.
위엄을 아낌없이 뿜어내며.
'서로 싸우는 것을 멈춰라, 너희들은 둘 다 내 먹이니까 사이좋게 지내.'
그런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다투던 키메라들이 일순간 멈췄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는 녀석들.
나는 그들이 내게 합공할 것까지 각오했다.
하지만 설마....
"뀌룩, 뀌루룩."
"무투투투투!"
개같이 무시하고 계속 싸울 줄이야.
아무래도 내 모습이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나 보다.
그러면, 알려 줄 수밖에.
둘 다 한 번에 사냥해 볼까.
*「거대화lv2를 사용합니다.」
둘을 한 번에 끌고 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커지고.
*「흑린lv3을 사용합니다.」
놈들의 발톱에 상하지 않도록 비늘을 강화한다.
그제야 놈들은 싸움을 멈췄다.
그리고 경계하듯 나를 바라봤다.
"쉬리릿-"
이제서야 겁을 먹니.
늦었다 이 녀석아.
* * *
그리고.
이 던전에 갇힌.
그리고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 잔일 페제.
뱀은 수정판의 지도를 보면서 잔일 페제가 어디로 간 것일까 궁금해했다.
지도에서 유독 열심히 움직이는 흰 점을 보고 이게 그 인간이 아닐까 추측했더랬다.
놀랍게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잔일은 정말이지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잔일 페제는 정말 대단히 노련한 레인저였으나, 일신의 무력으로 위기를 타개하는 영웅은 아니었다.
수조에 갇혀 있던 키메라들이 살아나서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끔찍한 녀석들이었다.
배불뚝이 키메라가 박사를 죽였을 때, 잔일은 순간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꼈다.
그보다 강하거나 그와 비슷한 녀석이 여덟이나 되었다.
하지만 뱀이, 뱀에 붙어 있던 식물이 끔찍한 불꽃을 뿜어냈을 때는 정말 오줌을 지릴 뻔했다.
그런 놈을 포획하겠다고 그물을 던졌으니.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죽어라 도망쳤다.
그런데 설마, 던전의 문이 전부 닫혔을 줄이야.
"후우, 후."
처음부터 이런 임무를 받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거절이 허락되지 않은 임무였다. 보랏빛 인장이 찍혀 있던 명령서니까.
잔일이 극비리에 받은 임무는, 황실에서 받은 약물을 실제로 사용해 보는 것이다.
어떻게 사용할지도 정해져 있다.
받은 약물 중 첫 번째는 상대적으로 개발된 지 시간이 꽤 흐른 '마물 기피제'.
그것은 역겨운 냄새를 풍겨서 마물을 쫓아내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이곳 마경에서도 확실히 톡톡한 효과를 보여 줬다.
중요한 두 번째가, '마물 흥분제'였다.
말 그대로 흥분시키는 약제이다. 짐승을 교배시킬 때 쓰는 종류는 아니고, 더 포악하고 잔인해지도록 만드는 약물이었다.
어느 정도의 양을,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노출시키느냐에 따라 그 성능이 달라질 것이다.
잔일 페제는 그것을 산맥의 와이번들에게 사용했다.
츄고타, 이제는 늙어서 그 광기마저 사그라들던 마물에게 사용하라는 지시사항이었다.
잔일은 와이번이 좋아하는 먹잇감에 일정량의 약물을 발라서 츄고타가 먹도록 만들었다.
한 달이 지나자, 츄고타와 그 무리의 와이번들이 다른 와이번 무리를 침략했다.
또 한 달이 지나자, 산맥 전체에 전쟁의 광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효과였다.
어쩌면 제국은 마물 무리의 병기화라도 꿈꾸고 있는 것일까.
그저 도구일 뿐인 잔일로서는 알 수 없다.
'이 임무도 살아 돌아가야 완수할 수 있는 거지.'
잔일은 열심히 숨어다녔고.
아직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조금 전 들은 '사아악!' 소리.
뱀의 소리였다.
그 소리를 좇아와서 몰래 지켜보니.
"뀌꾹...."
"무투, 무투투...."
검게 물든 뱀이 잔일의 눈앞에서 키메라 둘을 혼자 해치워 버렸다.
그야말로 비정한.
검은 사신.
잔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날카로운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저 뱀과 가까워져야 한다.'
그래야 이 던전을 살아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125. 던전의 발레리나
'저 뱀과 친해져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런 발상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하물며 평범한 뱀도 아니다, 머리에 왕관을 쓰고 비늘이 수정으로 된 마물이다.
키메라를 썰어 스테이크로 구워 먹는 무시무시한 개체다.
그러나 잔일 페제는 그리 확신했다.
마물에게 협력하겠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기서부터 그의 사고방식이 일반인과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마물에 대해서 잘 아는 이들.
이지를 갖추고 말이 통하는 네임드 마물을 본 적 있는 이라면 잔일같이 판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녀석은 네임드 마물... 은 아니라도. 분명 똑똑한 녀석이다.'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뱀은 '사아악!'하고 포효할 뿐 말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행동거지를 지켜보면 알 수 있었다. 놈에게는 분명 이성과 지능이 있다.
지금 하는 짓만 봐도 그렇다.
왜 처음에는 반지를 끼고 있다는 것도 못 알아챘을까.
아공간 마법이 깃든 반지가 분명했다. 반지를 낀 꼬리를 흔들었더니 허공에서 단검이 튀어나왔으니까.
아공간 마법을 건 배낭이나 주머니는 많이 보았지만 반지라니, 저 작은 것에 어찌 그 정도의 고위 마법을?
황제의 보물창고에나 들어가 있을 귀한 물건을 어찌 뱀이 끼고 다닌다는 말인가.
칼, 일단 저 칼이 문제였다.
지금 뱀이 칼로 하는 일은 분명 '해체'였다.
우선 마석이 있는지를 확인하려 이곳저곳 뒤적거린다.
마물들 역시 하는 일이긴 하지만, 마물이라기보다는 꼭 사냥꾼 같은 모습이다.
기어코 도토리만 한 마석을 찾아내더니 이번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래, 춤이다.
기쁨의 춤을 추는 마물이라.
역시 평범하지 않다.
게다가 마석을 바로 먹어 치우는 대신 아공간을 열어 저장한다.
고기 중에서 먹을 만한 것도 냉큼 챙기더니, 뱀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잔일은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그가 와이번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몸에 뿌린 앰플의 효과는 겨우 몇 시간 지속될 뿐이니, 냄새는 이제 가셨으리라.
호흡마저 참으며 존재감을 숨기자 뱀은 조용히 지나갔다.
잔일은 천천히 뱀을 미행했다.
그 역시 이곳 던전의 구조를 머릿속에 파악해 둔 덕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갈 수 있었다.
뱀은 제어실을 자신의 집으로 삼았다.
잔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제어실 앞까지 접근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뱀이 하는 짓을 보았다.
'분명 그 제어장치를 다루고 있었어.'
석학인 로밴튼 박사조차 다루지 못한 복잡한 기계장치.
한낱 뱀이 그 장치들을 조작했다.
심지어 뱀은 지도로 다른 키메라나 잔일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을 알게 된 뒤로는 제어실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위험하고 똑똑한 마물.
자칫하면 잔일 역시 순식간에 살해당할지도 몰랐으니까.
'흰 마물을 모으는 황제가 본다면 침을 흘릴 텐데.'
현 황제가 흰 마물을 수집한다는 것은 알 사람들은 다 안다.
저런 귀한 마물은 말 그대로 '천금'에 팔릴 것이다.
잔일은 고개를 흔들어서 망념을 떨쳐냈다.
지금 그딴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살아서 돌아가는 게 가장 중요하고, 그렇다면 저 뱀과 협력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똑똑한 놈이라고 해도, 마물과 친해지는 데에는 확실한 방법이 있지.'
잔일은 그걸 알았다.
그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어둠에 녹아들었다.
* * *
"사아아악!"
구르기!
*「구르기lv10을 사용합니다.」
핑그르르르-
나는 허공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바닥이 아니라 허공에서 굴렀다.
돌면서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다.
뛰어오른 뒤 돌아야 한다.
지금 당장 뛰어올라서 회전해 보면 알 것이다.
그게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을.
다 각운동량 보존 때문이다.
당연히 이것도 X튜브에서 본 건데, 허공에서 상체를 왼쪽으로 돌리려고 하면 하체는 오른쪽으로 돌게 되는 원리다.
회전하는 의자에 앉아서 시험해 보면 확실히 체감할 수 있다.
-별걸 다 아는구나.
'하지만, 고양이는 가능하죠.'
-뭐?
'고양이를 하늘에서 뒤집어 떨어뜨리면, 무조건 다리부터 떨어지는 것 알아요?'
-하늘에서 떨어지면 위험하잖아.
'아.'
그렇지, 위험하긴 하지.
펠레리안이 상식적으로 말해서 당황했다.
하여튼 허공에서도 몸을 돌리는 방법은 분명 존재한다.
고양이나 피겨스케이트 선수처럼 관성모멘트를 조절하든지.
아니면 나처럼 구르기 스킬을 사용하든지.
휘리리리릭!
나는 허공에서 매섭게 회전했다.
확실히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내가 강탈했던 구르기의 레벨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10레벨 그대로였다.
하지만 허공에서 한 번에 구르는 횟수는 점점 늘고 있었다.
지금은 한 번 뛰어오를 때 무려 열아홉 바퀴를 회전한다.
구르기의 숙련도가 오르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처음 회전수는 겨우 다섯 바퀴였기 때문이다.
'흐읍!'
휘리리리리릭!
내가 옆에서 회전하고 있으니 이실이도 따라서 회전한다.
물론 이실이는 점프도 못 했고, 그냥 땅바닥에서 철푸덕, 철푸덕 회전했을 따름이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이실이가 흥미를 잃고 화분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았다.
심심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로는, '구르기'라는 스킬에서 어떠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 주력기 중 하나가 된 '식심의 도약'.
그 스킬의 원형은 그저 물어뜯기와 도약이라는 평범한 스킬들이었다.
구르기 역시 그런 요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두 번째로, 어서 구르기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구르기lv10을 완전히 습득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되어야 강탈의 왕관을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있다.
구르기가 레벨 11이 되는 대신 레벨10에서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
[스킬]
...
※진화 가능
[구르기lv10]....
──────────────
구르기가 진화 가능하다고 나왔다.
도약과 물어뜯기 역시 레벨10을 달성했을 때 진화가 가능했었다.
다만, 레벨을 한계치까지 올린 뒤 마성이 포화상태에 이르러야 했는데....
──────────────
[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lv49]
──────────────
지금의 본 뱀이 그러기 직전이었다.
어제 듀라한과 외다리를 잡으면서 나는 만렙에 가까워졌다.
진화 가능한 레벨은 50임이 분명하다.
마성이 포화상태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남은 키메라는 셋.
7번, 8번, 9번.
셋 다 강력한 키메라니까 진화를 위한 경험치로는 충분할 것이다.
셋 중 하나만 잡아도 50레벨이 될지도 모르고.
나머지 둘까지 잡으면 스킬을 진화하기에도 충분하겠지.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때였다.
기척이 느껴진다.
생존본능이 발동하지는 않았는데.
반사적으로 수정판의 지도 기능을 켰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은 인기척을 숨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똑똑."
노크를 했다.
그런데 그 노크가 나를 멈칫하게 했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입과 손으로 동시에 노크를 하는 사람을 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잔일 페제."
나타난 것은 쥐새끼처럼 도망갔던 인간이었다.
분명 나와 좋은 관계는 아니었을 텐데.
자기 이름을 소개한 인간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진정하시오. 화친을 위해서 찾아왔으니...."
내가 말을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인간은 얼굴에 걸린 미소와는 대비되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험난한 싸움을 마치고 온 듯했다.
행색과 표정의 괴리가 기묘해서 기분 나빴다.
꼭 광인 같다고 해야 할까.
광인은 곧바로 다가오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서 나를 빤히 봤다.
눈싸움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인간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깜빡, 깜빡.
순간 무슨 뜻인지 몰라 얼빠져 있었는데.
머릿속에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고양이 키스다.
처음 보는 고양이를 만났을 때 친해지기 위해서, 눈을 마주치고 천천히 깜빡이는 그거.
그걸 왜 나한테?
당황한 탓에 그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음에도 가만히 굳어 버렸다.
그것을 좋은 신호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나는 그가 무언가를 끌고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보자기처럼 뭔가를 감싼 모양새다.
"위대한 뱀이여. 화친의 의미로 내가 공물을 가져왔소."
그는 천천히 내 앞에 보자기를 가져다 놓고는 물러났다.
묵직해 보인다.
불안한 예감이 비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설마....
"이 먹이를 받고 나를 그대의 친구로 받아주지 않겠소이까?"
또박또박 말하는 그의 말을 끊었다.
단검 여명을 치켜든 뒤.
휙, 보자기에 그었다.
후두둑.
그 안에는 고깃덩이가 들어 있었다.
한때, 키메라였을 고깃덩이다.
"하하, 키메라들을 사냥하시는 것 같길래.... 잡느라 정말 죽을뻔했소."
그리고 내 귀중한 경험치 덩어리이기도 했다.
"맛있게 잡수시고,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사아아악!"
이 경험치 도둑놈-!
저 인간을 해치워도 키메라를 잡는 것보다 훨씬 손해일 것 같은데.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수정판을 조작해 보았다.
생명 반응을 찾아보자.
없다.
보이지 않아.
이 근처를 제외하면 두 마리밖에 보이지 않는다.
보자기 안에 있던 것은 6번 키메라 '피그맨'.
저 멍청한 인간이 죽여서 끌고 온 돼지를 닮은 키메라.
"사아아악!"
"어, 어 왜 그러시오. 선물이 마음에 안 들으셨나."
인간은 당황했다.
맹세코 나는 그의 멍청한 얼굴에 광선을 쏘아 버리기 직전이었다.
아니면 이기어검술로 목을 날려 버리거나.
"뭔지는 모르겠는데 미안. 미안하오!"
"사아악!"
"뭐든 드릴게, 다른 키메라도 잡아 올까?"
필요 없다, 죽어라!
-잠깐.
펠레리안이 나의 분노를 멈췄다.
자비를 베풀기를 권하는 걸까?
-그 인간은 조금 이따 죽이고, 이것 좀 봐라.
'뭔데요!'
지도에서 깜빡이는 흰색 점은 생명 반응.
그중 하나가 이쪽 제어실로 다가오고 있다.
'어....'
그런데 그 속도가 이상하다.
지도가 고장 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3층의 계단을 한 번에 뛰어넘어, 4층의 광장을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력 질주는 마치 화살이 쏘아지듯.
이곳, 제어실을 향했다.
탕.
처음에는 저 멀리서 그런 소리가 들리더니.
탕, 탕.
무슨 소리인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확연히 가까워진다.
탕, 탕, 탕, 탕.
가까워지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땅을 박차는 소리였다.
네 개의 발로 땅을 디딘 뒤, 무릎을 쭉 펼쳐서 뛰는 소리.
그다음에는 벽에 붙어서 다시 뛰고, 또 벽으로, 가끔은 천장으로.
키메라 8번, 무용수였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저 모습이 무용이라면, 그 춤의 이름은 뭘까.
깡충거미의 춤?
그런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네 개의 다리가 달린 키메라가 내게 덮쳐들었다.
카아아앙!
본능적으로 검이 먼저 튀어 나갔으니.
나도 어느덧 한 명의 당당한 검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푸욱-도 서걱-도 아니고 카앙!이다.
살을 벨 때는 나올 수 없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무용수가 내 칼을 정강이로 받아냈기 때문이다.
거죽은 베었지만 뼈는 베지 못했다.
무슨 몸이 저리 단단하단 말인가.
일순간 놈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재미있는 일이다. 녀석은 눈이 없는데.
웃는 것처럼 씨익 벌어진 저 새빨간 입이, 어째선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놈에게 인간이 덤벼들었다.
카가각!
"돕겠소!"
인간도 제법이었다.
그는 어느새 양손에 단검을 뽑아 들어 마구 휘둘렀다.
키메라도 정강이 말고는 그리 단단하지 않은 것 같다. 칼날이 박히는 것을 보니 그렇다.
놈은 휘익 물러나더니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타앙-!
마치 총 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튕겨 올랐다.
무용수는 순식간에 천장에 매달렸다.
'센 놈이다....'
아마, 여태까지 마주친 키메라 중에서는 가장 강할 것이다.
7번인 듀라한과 비교해서도 압도적 격차가 있다.
타앙!
놈이 또 한 번 몸을 튕겼다.
나는 대응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고 해야 하나.
나 대신 인간이 맞았다.
"쿠에엑!"
인간은 배를 얻어맞았는지 몇 바퀴 구르며 밀려 났다.
그래도 제 목숨은 지킨 것 같다.
움직임이 엄청난 키메라다.
'특별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눈에 힘을 주어서 녀석을 살펴보았다.
──────────────
[시험육 8번 무용수lv90]
[특성]
[쾌속], [거미]
[스킬]
....
──────────────
아, 저 스킬인가.
나도 모르게 군침이 나올 뻔했다.
구르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그 덕에 강탈의 왕관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타앙!
놈이 내게 쇄도한 것과.
*「탄성폭주lv3을 강탈합니다.」
내가 놈의 스킬을 빼앗은 것은 동시였다.
126. 후각이 발달된 타입
본디, 강한 것들은 이름이 네 글자인 법이다.
파괴광선.
불사신검.
카이도우.
신라천정.
그리고... 탄성폭주.
나는 그 스킬을 강탈하는 데에 성공했다.
저 강해 보이는 키메라가 겨우 3레벨로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그게 상위 스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탄성(彈性), 그리고 폭주(暴走)
단어만 봐도 느낌이 오기도 하고!
*「일시적으로 대상의 '탄성폭주lv3'이 '탄성폭주lv2'가 됩니다.」
또한 내가 빼앗은 탄성폭주는 1레벨.
나는 주저하지 않고 스킬을 사용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눈 한 번 깜빡일 시간 동안 일어난 그 일들을 자세히 묘사하자면 A4 몇 페이지를 빼곡히 채울 수도 있을 거다.
그걸 간단히 요약하자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무용수의 공격을 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동시에 탄성폭주를 강탈하는 데에는 반쯤 실패했다.
처음에 튀어 오르는 것까지는 좋았다.
뛰어오를 때에 반탄력이 원래보다 훨씬 더 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괜히 '폭주'라는 단어가 붙은 것이 아니었다.
그 탄력과 가속은 내가 제어할 수 없었음에.
저번 피비늘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사방으로 튕기기 시작했다.
마치 럭비공처럼, 다만 그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투타타타타타!
일곱 번 정도 벽에 충돌하고 나서야 바닥에 착지할 수 있었다.
"사욱-"
토악질이 나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천장의 벽 한구석에 무용수가 달라붙어 있었다.
내가 자기와 비슷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눈도 없는 녀석이....
놈의 눈과 귀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쩌억 벌어진 새빨간 입만 눈에 띌 뿐.
자세히 보니까 콧구멍은 있구나.
하지만 나는 그 징그러운 얼굴보다 어떻게 저놈이 균형을 저리 잘 잡는지가 궁금했다.
난 도저히 나를 제어할 수가 없었는데, 나보다 훨씬 무거운 쟤가 어떻게 ....
'...아, 다리!'
그리고 깨달음이 찾아왔다.
놈은 팔 위치에 달려 있는 다리를 이용해서 사족보행을 한다.
무릎이 서스펜션 역할을 해서 충격을 감소시켜 주는데, 그런 게 무려 네 개다.
균형을 잡기 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발바닥에 빨판 비슷한 것도 달려 있는 듯하다. 아니면 발톱으로 매달리는 건가.
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다리의 개수는... 0개!
'못 써먹을 스킬이군.'
다른 스킬을 강탈할 수 있을지 시도해 봤다.
*「아직 강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강탈의 왕관은 연속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하기사, 그러면 어디 스킬 좋은 놈 하나 가둬 놓고 양털 깎듯 주기적으로 스킬만 뽑아 갈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일단 탄성폭주는 치워 두고.
내 다른 능력으로 싸운다.
내게도 빠른 기술은 존재한다.
피잉!
장검 한 자루가 천장에 매달린 무용수에게 매섭게 쏘아졌다.
키메라 녀석도 이기어검술은 오늘 처음 봤겠지.
검만큼 단단한 정강이로 걷어차는 대신, 놈은 좀 더 똑똑하게 굴었다.
즉, 일단 검을 피한 것이다.
타앙!
튀어 올라 다른 곳으로 몸을 뺀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내 노림수였다.
직선으로 쏘아 보낸 석양과 별개로, 그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여명이 호선을 그리면서 날아가고 있었다.
더 가벼운 단검이 곡선을 그리며 덮쳐드니.
놈은 그것을 착지하는 순간에야 알았다.
여명이 놈의 모가지에 꽂히려던 순간.
팅!
그 자리에서 불똥이 튀며 여명이 튕겨 나갔다.
네 개의 정강이 중 하나를 치켜들어 날아오는 칼을 막은 것이다.
역시 얕볼 수 있는 놈은 아니었다.
놈은 이제 자기 차례라는 듯 몸을 튕겨 내게 달려들었다.
나도 사실 한 도약 한다.
맞서 대응했다.
*「식심의 도약lv4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태까지처럼 심장을 파 먹을 엄두가 나지는 않았다.
녀석의 정강이에 얻어맞으면 쇠파이프에 맞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허공에서 몸을 피하기 힘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구르기스트가 되기 위해 연습한 것은 사실 이런 상황을 대비한 것이다.
*「구르기lv10을 사용합니다.」
멋있으려고 구른 것이 아니었다.
나를 후려치던 놈의 정강이를 회전하며 타고 오를 수 있었다.
이빨을 박아 주려는데.
송곳니 끝이 살가죽을 아주 파고들기도 전에 몸이 홱 쏠렸다.
놈이 나를 뿌리친 것이다.
나는 허공에서 팽그르르 돌며 튕겨 나갔다.
빠르기도 해라.
놈은 나를 경계하듯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입체기동을 했다.
그것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입을 벌렸다.
*「광선lv3을 사용합니다.」
*「광선lv3을 사용합니다.」
*「광선lv3을 사용합니다.」
피피핑, 하는 소리를 내며 연속적으로 광선을 쐈다.
무용수도 처음 두 방은 용케 피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내가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 빠르기는 힘들 터.
피잉-!
결국 광선 하나가 놈에게 적중했다.
배때기에 새빨간 구멍이 났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다. 지건을 아주 강하게 맞은 정도일까.
그 일격 때문인지. 놈은 뛰어다니다가 툭 떨어졌다.
얼른 일어나서 다시 몸을 움직였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 스킬 레벨이 낮아져서....'
강탈의 왕관 덕택에 놈의 '탄성폭주'는 일시적으로 레벨이 떨어졌다.
그래서 움직임이 둔해진 것 같은데.
녀석은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슬금슬금 물러났다.
-지금이 아니면 못 잡을 녀석이구만.
펠레리안의 의견에 동의한다.
녀석은 너무 빠르다.
생각보다 단단하기도 했다.
아직 지능이 발달한 것 같지는 않은데, 시간이 지나면 더 똑똑해질지도 모르는 놈이다.
지금 놓치면 쉽게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진화하고 나서가 아니라면....
그런데 이 던전 안에서 경험치를 수급할 방법은 키메라들밖에 없으니....
-저 인간 놈도 있잖냐. 도시락 아니었나.
'간에 기별도 안 갈 걸요!'
저놈을 이곳에서 잡는다.
그런 결심으로 놈에게 돌진했다.
내가 가진 공격 수단 중 순간 화력이 가장 센 것이 무엇인가.
당연히....
'이실아!'
이실에몽의 무엇이든 태우는 불이다.
참고로 이실이의 지옥불을 '빌리고자' 해 본 적이 있었지만 실패했다.
지옥불은 아직 이실이만 사용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보랏빛 불꽃이.
화륵-
내게 마주 달리던 놈에게 쏘아졌다.
불꽃이 녀석을 휩쓸 것이라 생각했다.
마석이고 고기고 불타 버리겠지만 어쩔 수 없지.
지옥에서 올라온 보라색 혓바닥이 다리 넷의 키메라를 핥으려던 순간이었다.
터엉!
놀랍게도 무용수는 전진을 멈췄다.
다리를 펼쳐서 벽에 걸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몸의 일부가 불에 닿기 직전, 반대 방향으로 역돌격을 감행했다.
도망쳤다는 뜻이다.
지옥불이 쏘아지는 것보다 놈이 도망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살갗에 화상을 조금 입기는 했으려나.
확인할 수 없었다.
놈은 나타났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하아.'
한숨이 푸욱 나왔다
모든 수단을 다 썼는데, 결국 못 잡았다.
엄마 보고 싶다.
진짜 엄마는 아니지만, 와이번 맘과 삼 남매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그녀는 나를 지키기 위해 싸웠었다.
설마 날 기다리고 있지는 않겠지?
던전 문이 닫힌 뒤로 며칠이 지났으니 슬슬 돌아갔을 것이다.
그 미친 와이번과는 더 싸우지 않고 잘 지내 줬으면 좋겠군.
"후우...."
그때 인간이 한숨을 내쉬었다.
뭘 했다고 한숨을 쉬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빠르군."
"사악!"
어이 인간.
하고 그를 불렀다.
나 혼자서는 무용수를 못 잡을 것 같다.
하지만 고양이 손, 아니 인간 손을 빌리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날 돕겠다고 했지?'
내가 수첩을 꺼내서 글을 쓰자.
"헉!"
인간은 화들짝 놀랐다.
* * *
츄고타가 골렘 한 기를 물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
아찔한 비행이었다.
셋으로 나뉜 골렘 중 하나라고 해도, 어마어마하게 무겁다.
돌덩이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무거운 것을 물고 츄고타는 높이, 더 높이 올라갔다.
눈빛만으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현명한 여왕'으로 불리던 츄고타였건만, 그때의 총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츄고타는 지상에서 점으로 보일 때까지 올라갔다.
체력 낭비였지만, 그녀는 몸이 회복될 때마다 저 짓거리를 반복했다.
높이 올라가서.
물고 있던 골렘을 떨어뜨린다.
중력은 잠시 와이번에게 빼앗길 뻔했던 제 소유물을 되돌려받는다.
골렘은 새똥 떨어지듯 가볍게 추락했다.
하지만 충돌은 장대했다.
콰아아아앙!
굉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삐삐삐삐"
"께께에"
"츄이이이!"
셀레타의 곁에 붙어 있던 새끼들이 소리를 지르며 빙글빙글 뛰어 다녔다.
놀라고 겁먹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벌써 며칠 내내 반복된 일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정말 무서워서 울었지만 이제는 사실상 놀이가 되어 버렸다.
새끼들은 한바탕 빙글빙글 돌다가 흙먼지가 걷히면 골렘을 구경했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골렘이 완전히 박살 나지는 않았다.
끔찍하리만큼 단단한 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락의 충격이 누적되니 이제는 큼지막한 금이 가 버렸다.
새끼들은 갈라진 외장재 안으로 보이는 신비로운 푸른 빛에 깍깍대며 신기해했다.
"꾸가각...."
셀레타가 하느니만 못한 경고를 했다.
골렘은 며칠 전부터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와이번들의 승리가 분명하다. 셀레타는 그리 판단했다.
그러나 미친 츄고타는 기어코 골렘 세 기를 전부 부숴야 만족할 듯했다.
며칠 저 짓을 반복했는데 아직 한 마리도 다 해치우지도 못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저 짓을 반복할까.
"꾸각...."
셀레타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츄고타가 없었다면, 살아남은 새끼 셋을 데리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츄고타가 석탑 앞을 떠나지 않으니 셀레타도 그러지 못했다.
혹시 막내가 석탑에서 살아서 빠져나왔는데.
츄고타가 호로록 잡아 삼켜먹으면 어떡하나.
쿠웅.
츄고타가 거칠게 내려앉았다.
정작 그녀는 골렘의 상태를 살피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체력이 바닥났을 것이다.
선 채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츄고타와 셀레타는 어느 순간부터 싸우지 않았다.
이런 기묘한 동거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로 접근하지는 않은 채....
셀레타도 지친 나머지, 잠깐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의 체력은 본디 어른보다 나은 법이어서. 새끼들은 잠들지 않았다.
평소 삼 남매는 셀레타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 주변만 알짱대곤 했는데, 이날은 무슨 일인지....
"삐이."
가장 용감한 첫째를 필두로.
그들은 슬금슬금 츄고타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케에엑."
"츄이...."
둘째와 셋째는 겁먹은 기색으로 뒤따랐다.
잠자고 있는 츄고타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이 이상으로는 용감한 삐삐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쯤.
서성거리고 있자, 츄고타의 머리 셋 중 하나가 눈을 떴다.
'고'였다.
고의 머리는 마치 꽈배기처럼 배배 꼬이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삼 남매의 앞에서 멈추더니 삐삐와 눈을 마주쳤다.
고의 입이 쩍 벌어지고.
"구워어어어어어어-!"
고약한 입 냄새가 나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삐아아아악!"
새끼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 도망쳤다.
깜빡 졸았던 셀레타가 기겁해서 날아오르고.
다시 한번 죽음의 혈투가 벌어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새끼들을 쫓아낸 고는 다시 눈을 감고 졸기 시작했다.
"꾸각...."
셀레타는 뻘쭘한 기색으로 다시 내려앉았다.
그녀가 새끼들을 노려보았다.
삼 남매는 혼날 것을 직감하고 허겁지겁 숨었다.
* * *
허공에서 수첩이 팔랑거리고.
펜이 움직이며 글씨를 적는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
범상치 않은 뱀이라는 것도 알았고, 지능이 높은 놈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리 글씨를 쓰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줄이야.
잔일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왜 대답을 안 하지?'
"아, 예, 알겠...소."
그리고 뱀과 잔일은 대화를 나누었다.
'무용수'라는 키메라를 사냥할 방법에 대해서 의견을 나눈 것이었다.
다리 넷 달린 그 키메라는 엄청나게 빨랐다.
놈을 사냥하는 것은 아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뱀은 꼭 그 키메라를 잡고 싶은 것 같았다.
솔직히 힘을 합쳐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침착하기만 하면 돼....'
뱀의 계획을 들어 보니 꽤 그럴듯했다.
아니, 애초에 뱀 마물이 어떻게 그런 발상을 냈는지도 궁금했다.
"제길, 이게 맞는지 모르겠네."
다만 계획의 성공 가능성은 둘째치고, 잔일이 위험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사냥법이란 잔일을 미끼처럼 쓰는 방법이었으니.
타닥.
무용수는 좀처럼 울지 않았다.
탁, 탁, 타앙-!
그저 다가오는 소리만 낼 뿐.
어제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타앙!
저 통로 너머 놈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까지 접근했다는 것은, 저놈에게 이길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즉, 잔일과 뱀을 홀로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걸 텐데.
"우아아아!"
잔일이 포효했지만 무용수는 조용히 달려올 뿐이었다.
이렇게 된 거, 뱀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잔일에게는 마물이 기피하는 향을 뿜는 앰플이 하나 남아 있었으니.
그것을 정수리에 부딪쳐 깨뜨렸다.
그리고, 뱀이 예고한 대로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원소마법이 앰플의 냄새를 싣고 날았다.
달려오는 무용수를 향해.
"쥬레."
무용수가 멈칫, 굳더니 기묘한 소리를 냈다.
"쥬레레레레렉!"
그러고는 배를 붙잡고 구역질을 시작했다.
"쥬레에엑! 쥬엑!"
뱀이 명명하길, 작전명 '숨 참고 던전다이브'.
그것이 분명 통하고 있었다.
127. 실패작
뱀에게도 귀가 있을까?
당연히 없지.
뱀의 매력은 매끈하고 둥근 머리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머리통에 귀 같은 게 달려 있다면 그리 멋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귀가 없다'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뱀으로 태어나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귓구멍은 없지만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가죽 아래 머리뼈에 내이(內耳)가 붙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딱히 인간이었던 시절에 비해 청력이 약해진 것 같지도 않다.
원래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내가 평범한 뱀이 아니라 마물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왜 그런 것들을 떠올렸냐면.
'무용수' 역시 귓구멍이 없었기 때문이다.
눈도 귀도 없고, 새빨간 아가리만 보인다.
그래도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것 같다. 기척에 반응했던 것을 보면.
하지만 눈은 안 보이는 게 틀림없겠지.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빨리 움직일까.
소리만 듣고?
아니면 뱀이 피트 기관으로 열을 감지하듯, 놈도 그런 걸까.
나는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다. 아마도 분명 그렇다.
날카로운 추론을 통해 답을 도출해 냈다.
놈은 먼 곳에서 갑자기 달려온 적이 있다.
나와 인간이 만난 순간이었다.
멀리서부터 우리의 체온을 감지할 수 있을 리는 없을 테니, 대화 소리를 들었거나 우리의 냄새를 맡았겠지.
그때 인간은 피에 흠뻑 젖어서, 토막 난 키메라 고기를 가지고 왔다.
어쩌면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을 갖고 놈을 살펴보니, 확실히 콧구멍이 있었다.
그뿐이랴.
새빨갛게 벌어진 입의 내부가 기괴했고, 혀는 나처럼 길게 나와서 자꾸 낼름댔다.
뱀이 혀를 낼름대는 이유는 공기 중의 냄새 분자를 끌어모으기 위함이다.
녀석도 그런 거라면?
무용수는 후각이 많이 발달한 것 아닐까.
싸울 때도 그랬다.
내가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도 이쪽을 바라봤다.
그 가설을 펠레리안에게 말하자.
-...믿기지 않는군.
워낙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길래, 내가 이상한 소리를 했나 싶었다.
-아주 그럴듯한 가설이야.
그 반대였다. 펠레리안은 내게 감탄했던 것이다.
우리는 곧장 확보했던 키메라 고기와 피를 이용해서 함정을 팠고. 무용수를 끌어들였다.
녀석은 배가 고팠는지 금방도 나타났다.
잔일이 시의적절하게 앰플을 깨뜨렸고.
파삭.
나는 마법을 썼다.
*「초급원소마법:바람lv6을 사용합니다.」
대단할 것 없는 바람이었다.
바람 사이에 칼날을 넣어서 공격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충분히 강한 바람이.
앰플의 향을 듬뿍 머금고 무용수를 휩쓸었을 뿐.
"쥬레레레레렉!"
독특한 울음소리와 함께 토사물을 뿜어낸다.
내 예측이 사실이었다.
놈은 특히 후각이 예민한 마물이었던 것이다.
마물이 가장 취약해질 때는.
바로 구토하는 순간이다.
푸욱!
처음으로 유효타를 먹였다.
석양이 놈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쥬켁!"
놈의 입에서 토사물과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잡았나!
-키메라의 생명력을 평범한 마물 수준으로 착각하지 마라!
펠레리안의 말이 맞았다.
놈은 토악질을 멈추지 못했지만 칼이 박힌 채로 달아나려 했다.
막아야 한다.
*「극복의 왕관lv2로 초급원소마법:흙lv7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중급원소마법:흙lv1을 사용합니다.」
중급으로 올라간 흙마법은 토벽이 아니라 석벽을 만들 수 있다.
바닥의 석재가 불쑥 솟아서 도망치는 무용수의 퇴로를 막았다.
콰앙!
무용수가 제 상태였다면 얇은 암벽쯤은 쉽게 부수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끔찍한 냄새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 덕에 암벽은 부서지지 않았다.
놈은 바닥에서 퍼덕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아무리 끔찍한 악취라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는 법이다.
저놈이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처치해야 한다.
퇴로를 막았으니 지옥불을 쓰기 딱 좋은 상황.
그런데 잔일이 꾸물거렸다.
"흐아압!"
유엽비도를 흩뿌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해할 만했다.
몸을 일으킨 무용수가 접근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등을 보이고 달아나다가 등허리를 찍히기라도 하면 죽을 테니까.
파바박!
그런데 그 공격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정신을 못 차리는 무용수의 몸에 비도가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그 비도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으니,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터엉!
무용수가 몸통박치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잔일에게 달려들었다.
잔일은 멧돼지에게 받힌 것처럼 뒤로 튕겨 나왔다.
내 뒤로 말이다.
그리고, 바람은 여전히 뒤에서 앞으로 불고 있었으니.
잔일이 깨뜨린 앰플에서 휘발되는 냄새 분자들도 함께 밀려 왔다.
"사욱!"
숨을 들이쉬어 버렸다.
참고로 뱀 역시 후각이 좋은 편이다.
"사우에엑!"
"쥬레레레레엑!"
나와 무용수가 함께 구역질을 시작했다.
정말 끔찍한 냄새다.
일주일 동안 갈아신지 않은 양말에 취두부와 까나리액젓을 넣은 뒤, 삼 일 동안 뜨끈한 전기담요 안에서 숙성시킨 냄새가 이러할까.
그래도 내 곁에는 코가 없는 동료가 하나 있었다.
까딱....
이실이.
어떻게 된 것인지, 식물인 이실이마저 냄새에 괴로워하는 듯했지만.
어찌 되었든 불을 뿜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지옥불이 뿜어져 나왔다.
화르르륵!
통로는 넓지 않았고, 벽은 막혀 있다.
도망칠 구석은 없었으니 아무리 몸이 날랜 무용수라고 해도 지옥불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극열의 불꽃에 휩싸이면 순식간에 화상을 입고 몸이 오그라든다.
그렇게 근육이 익어 버리는 순간 끝이다.
하지만 무용수는 제법 높은 열 내성을 지니고 있었고.
탄성폭주라는 스킬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저 발악이었을 것이다.
전심전력으로 땅을 박차고, 막힌 벽에 몸을 부딪친 것은.
터어엉!
마법으로 만들어 낸 석벽이 부서졌다.
다만 지옥불은 기어코 무용수의 다리 둘을 삼켜 버렸다.
다리 둘이 불타는 상황에서 무용수는 꿈틀거리며 도망치려 했다.
*「광선lv3을 사용합니다.」
일어서려는 놈의 엉덩이에 광선을 맞췄다.
사실 노렸던 것은 종아리였지만, 아무튼 놈은 철푸덕 넘어졌다.
"사우우욱!"
"맡기시오!"
잔일이 달려왔다.
그와 함께 가까워지는 냄새에 나는 또 한 번 구역질했다.
다행히 잔일은 나를 지나쳐 무용수에게 달려갔다.
혹시 그가 막타를 빼앗으려는 것 아닌가 잠시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그런 천인공노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마비독을 바른 비도를 마구 날려 댔고, 그 뒤에 그물을 던졌다.
끝까지 퍼덕대던 무용수도 결국 그렇게 제압되었다.
"으읏차!"
잔일은 그물을 잡아 천천히 무용수를 끌어당겼다.
하긴, 내가 그렇게 강조했으니.
숨통을 끊는 것은 나라고.
"끈질긴 놈...."
잔일이 씨익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너무 냄새나니까 더 다가오지 마라.
잔일을 앞에서 멈춰 세웠다.
'고생했어.'
"후후. 별것 아니오."
그는 허리가 아픈 듯 등을 두드렸다.
그동안 나는 투명한 손으로 조심조심 무용수의 몸에 박힌 석양을 빼내려 했다.
"참, 산맥에 올 때마다 이렇게 고생한다니까는.... 괜히 또 와이번들을 건드렸다가."
잔일의 말에, 나는 멈칫 굳어 버렸다.
'와이번들을 건드려?'
노트에 적어 물어보자.
잔일의 표정이 묘해졌다.
답해도 될지 안 될지 헷갈려 하는 표정이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뱀이니, 가볍게 말해 줘.
"그러고 보니 뱀, 그대도 와이번과 싸우고 있으셨지."
와이번과 싸웠다고?
하긴, 멀리서 숨어 이쪽을 지켜보던 인간들에게는 그리 보였을 것이다.
설마 와이번 퀸 둘에게 자식으로 착각당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못하겠지.'
"나는 제국으로부터 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소."
잔일이 뭐 자세히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사항 둘이 있었다.
"모험가들이 셀레타의 알을 훔치는 것을 도왔는데, 그놈들은 제대로 도망갔는지 모르겠군. 한심한 놈들...."
첫 번째로는, 와이번맘의 알을 훔친 것과 잔일이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말이오. 예전에 난 츄고타라는 와이번퀸의 새끼를 훔쳐내는 데에 성공했소이다."
잔일은 자부심 넘치는 표정이었다.
"다른 동료 셋은 다 죽었지만, 나는 기어코 황도까지 그놈을 옮겼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솔직히, '이놈, 너였구나아!'하고 소리를 칠 마음이...들지는 않았지만.
'너 때문이었어?'
놀랍기는 했다.
셀레타, 츄고타, 그 강대한 네임드 마물 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간이 코앞에 있던 것이다.
정작 두 와이번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를 텐데.
그런데 아무래도 나만 놀란 게 아니었나 보다.
죽은 듯 축 늘어져 있던 무용수도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놈은 어찌나 놀랐는지 벌떡 일어나서 다리를 퍼득였다.
설마 고관절 쪽에서 새빨간 연골이 튀어나올지 누가 알았을까.
푸욱!
그 뾰족한 뼈 가시가 잔일의 가슴팍을 관통해서 튀어나왔다.
오늘이 해적처럼 말하기의 날이었나.
"얽...."
잔일 페제는 갑자기 Arrr...!하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심장이 터졌으니 유언일 수밖에 없겠지.
"쥬레레레렉!"
무용수의 부러지거나 타 버린 다리 사이에서 새빨간 연골 다리가 더 돋아 나왔다.
이렇게 되면 다리의 개수가 총 여덟 개.
마치 거미 같다.
괜히 특성에 '거미'가 붙어 있던 게 아니었군.
새로 돋아난 다리로 놈은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잡아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특성을 보고 내 숙적이라는 것을 예측했어야 했는데.
"쥬레레렉!"
"사우욱!"
우리는 토악질을 참으며 함께 달렸다.
이미 몸에 칼집을 내 줬고 마비독이 발린 비도까지 여럿 박혔으니, 달리는 것 자체로도 대단한 일이다.
놈은 피를 후두둑 흘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와장창 내려가고 수평 복도에 도달했다.
펠레리안이 이를 갈았다.
-저기...!
저 복도 건너편에 누군가 서 있었다.
사람 같아 보이지만, 사람이 아니다.
서 있는 것은 분명 키메라였다.
엘프와 가장 닮은 9번 키메라, 이름은 '미정'이었던가.
놈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무용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달렸다.
'혹시 같은 키메라라고 편 먹고 덤비는 것 아니야?'
잠깐 그런 상상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내 눈으로는 잡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나.
상처 입었다고는 하나 충분히 빠르고 강했던 무용수를.
9번 키메라는 단숨에 틀어잡았다.
무용수의 목을, 꽈악 쥐고 이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일어난 일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실패작."
9번 키메라가 말을 했다.
어눌하긴 했지만 분명 제대로 된 단어였다.
게다가 요정어이기까지 했으니.
그것을 들은 펠레리안이 격노했다.
-이노오오옴!
그리고 나 또한 격노했다.
놈이 손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둑!
무용수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저놈이이!
'막타를 빼앗으려고!'
미정아.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흑린lv3을 사용합니다.」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식심의 도약lv4를 사용합니다.」
나는 한줄기 검은 벼락이 되어 쏘아졌다.
마성을 빼앗긴 복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은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으니.
*「참격lv5를 사용합니다.」
내가 벤 것은 바로, 무용수의 부러진 목이었다.
서걱!
아예 뎅겅 잘랐다, 생명을 잃어 가던 놈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즉, 막타를 친 것은 나다 이 말이다.
*「'시험육 8번 무용수lv90'을 처치했습니다.」
마성이 밀려든다.
확실히 강했던 만큼.
무용수는 이전까지의 키메라들에 비해서도 확연히 많은 경험치를 주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 덕에 나 또한 레벨이 올랐으니, 기분도 각별했다.
*「진화가 가능합니다.」
빨리 내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다.
물론, 그러려면.
눈앞에 있는 이 괴물을 먼저 해치워야 할 것이다.
"실패, 작."
물고기와 엘프를 지점토와 함께 열심히 섞은 것처럼 생긴 괴물이 누구 보고!
놈이 손에 힘을 주자 무용수의 머리가 퍽 하고 터져 버렸다.
비산하는 핏덩이가 마치 석류의 낱알 같다.
나는 얼른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일단 상대를 꿰뚫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허억!'
깜짝 놀랐다.
놈은 레벨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그리고 '미정'이 아닌 다른 이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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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육 9번 실패작l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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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작.
펠레리안은 ㅡ 녀석을 계속 그리 불렀나 보다.
"실패...."
억울하게 엘프를 닮게 태어난 키메라는 내게 증오를 보였다.
"펠레...리안-!"
놈이 내게 접근하고.
내 몸을 걷어찰 때까지.
그 과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터엉!
이 녀석은 세상에서 제일 강한 실패작이 분명했다.
128. 소각
레벨이 올랐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무용수가 품고 있던 마성은 충분히 많아서 만렙을 찍고도 마성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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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lv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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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 오르면 강해진다.
즉,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더 강하다는 것이다.
무용수도 아주 강했지만 '실패작'은 그 이상이었다.
내가 튕겨 나가는 와중에도 눈에 힘을 준 것은 아마 습관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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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육 9번 실패작lv1?0]
[특성]
[모조품], [따라쟁이]... [감정폭주]... [마법], [키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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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을 많이도 때려 넣었군.
저걸 만든 펠레리안의 의지가 반영된 걸까.
그렇다면 참으로 욕심쟁이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저놈과 내 체급 차는 수십 배는 될 것이다.
쐐애애액-!
그런 놈에게 걷어차였으니, 내 몸에 가해진 에너지는 대부분 운동에너지로 전환되었다.
걷어차인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튕겨 나간 것이다.
벽에 부딪히는 순간 잠시 유예되었던 충격이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펑 터져서 납작한 뱀포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럴 수는 없지.
*「탄성폭주lv1을 사용합니다.」
'폭주' 말고 '탄성'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움직임을 제어할 수는 없었지만, 내 몸은 터져 나가는 대신 튕기기 시작했다.
태태태태태탱!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튕김.
토를 하지 않도록 입을 꾸욱 다물었다.
여덟 번 정도를 튕겼을 쯤인가.
놀랍게도 실패작은 호랑이처럼 달려와서 나를 또 걷어차려 했다.
허공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놈의 발은 나 대신 벽면을 부쉈다.
콰앙!
던전의 벽은 몹시 단단하다.
그런데 그 벽이 두부처럼 부서졌다.
그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 있었다.
'저거, 던전을 빠져나갈 수도 있었겠어요!'
아무리 던전의 소재가 단단하다고 해도, 저 정도 힘이라면 닫힌 문을 부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얌전히 있었던 이유는 뻔하다.
-...새장 속을 세상의 전부로 알았겠지.
갑자기 내던져진 키메라는 이 던전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으리라.
그래서 도망칠 생각을 하지도 않고 던전을 배회했던 것이다.
'배고파지면 결국 빠져나갔을 거예요.'
하지만 언제까지 그랬을까.
저 괴물은 결국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떠났으리라.
그리고 환한 태양빛 아래에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겠지.
흐음, 어떻게 생각해 보면 불쌍....
"실패-! 작!"
퍼억!
불쌍히 여기다가 얻어맞았다.
놈은 엄청나게 빨랐다.
뾰족한 발톱이 있거나, 칼날 같은 정강이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어린아이가 싸우듯 원초적인 방법으로 나를 차고 후렸다.
"수치! 부끄러움! 실패! 요저엉!"
네가 두억시니냐.
펠레리안에게 들었을 법한 단어를 마구잡이로 내뱉는다.
아주 괴상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저 괴상한 놈이 엄청나게 힘이 세고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이다.
내가 느린 편이 아닌데 나보다 훨씬 빠르다.
콰앙!
탄성폭주를 빌려서 다행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진작 몸이 터져서 죽었을 것이다.
탄성폭주 스킬에는 '타격 면역'과 비슷한 효과가 있었다.
날붙이로 찍으면 상처를 입었겠지만 주먹질이나 발차기에는 그리 타격을 입지 않았다.
터터터터터텅!
다만 몸이 수십 번 튕기면서 뇌가 으깨질 것 같다는 약점이 있었다.
'왜 저따구로 세게 만들었어요.'
-끄응....
그래, 갈아탈 몸이 강하고 단단하면 좋겠지.
'책임져!'
-책임져야지. 내가 지겠다.
그가 어떻게 책임을 질지는 모르겠지만.
튕겨 나간 내가 몸을 일으키자 놈이 나를 향해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셀-레나!"
뭐라는 거얏!
-으아아! 제기랄!
"사아아악!"
*「식심의 도약lv5를 사용합니다.」
나는 뛰어올랐다.
놈에게 맞서서가 아니라, 훌쩍, 위로!
그리고 실패작은 내가 있던 곳을 지나쳤다.
콰아앙!
놈은 벽을 그대로 깨부수고 지나갔다.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벌었다.
*「은밀lv10을 사용합니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작전상 후퇴다.
사실 대수림에서 어둠 속의 암살자라고 불리던 나였다.
녀석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제어실로, 제어실로 가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맞부딪치고 나니까 확실히 알겠다.
무용수도 간신히 상대했던 만큼, 정공법으로는 저 실패작을 이길 수 없었다.
'저 키메라는 뭐로 만든 것 같아요?'
키메라라고 하면 여러 마물들을 합성한 것이다.
마물의 특성을 발현시키는 정수들을 모아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는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정.
'허억!'
끔찍한 노인네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마침내 자기 종족들을 마물과 섞어서 인체실험까지 강행했던 건가.
-내 피를 썼겠지 당연히!
펠레리안이 으르렁대며 변명했다.
'어쩐지 못생겼더니만.'
-그리고... 글쎄다. 용족과... 세계수? 일단 확실해 보이는 것은 그러하다.
맙소사.
발상이 자캐를 만드는 초등학생 수준이다.
혼돈과 빛의 후예이며 용의 피가 흐르는, 좌안으로는 거짓을 꿰뚫어 보고 우안으로는 미래를 보는 타락한 천사.
그 정도의 사기 설정을 때려 박은 키메라 아닌가.
'요정 피만 뺐으면 최고였을 텐데.'
-그래 봤자 실패작이다. 저 몰골을 보면 알잖아.
그랬다.
뒤에서 쾅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보이지 않자 사방을 들쑤시며 찾아다니는 것 같다.
간신히 제어실에 도착했지만, 금방이라도 쫓아올 거 같아서 무섭다.
빨리 해치워야겠다.
나는 펠레리안에게 물었다.
'그 방법을 쓸 거죠?'
-그래.
서로 말을 나누지 않아도 마음은 통했다.
정공법으로 상대할 수 없으면 다른 방법으로 사냥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리고 며칠 이곳에서 지내면서 생각해 본 바.
이런 상황에서 충분히 활용할 만한 수단이 있었다.
-진작 다 불태워 버려야 했어.
나는 펠레리안이 지시한 대로 제어실의 기계장치들을 조정했다.
핀을 뽑고 돌리고를 반복한다.
아무리 해 봐도 대체 이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각 절차를 재시동합니다.
-시험육들이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소각이 불가능합니다.
마도정령이 이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잔일과 동료 인간이 기계장치를 마구 건드린 탓에 키메라들이 풀려났다.
그 탓에 진행되고 있던 소각 절차가 중지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펠레리안은 소각 절차를 다시 진행시키려 하고 있었다.
자살 시도는 아니다. 내게도 다 계획이 있었다.
'이실아, 도와줄 수 있지?'
내 곁에는 이실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탈의 왕관으로 이실이의 화염 면역을 빼앗을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교감이야...!'
이실이는 내게 스킬을 공유할 수 있다.
녀석이 가진 '화염 면역'.
그것만 있다면 소각 절차 도중에도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지된 소각 절차를 어떻게 재개하느냐가 문제인데.
닥터 펠레리안에게는 다 방법이 있었다.
-시험육의 수조에 파손이 감지되었습니-
-시험육을 회수하지 못했습-.
-시험육의 생명유지장치를 폐쇄합-.
영혼의 일부일 뿐인 내 곁의 펠레리안은 기억의 일부를 잃었지만.
엄연히 이 거대한 시스템과 던전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시키는 대로만 조작했을 뿐인데, 마도정령의 목소리가 연속적으로 흘러나온다.
소각 절차가 '실험의 미완' 때문에 멈췄다면 그것을 완성시키면 되는 일이다.
-실험 내용을 전송합니다.
다른 던전에서도 반복했던 일이다.
실험 내용을 전송한다.
펠레리안이 있는 곳으로.
그렇다면 이곳, 산맥의 '묘비'에서 전송하는 데이터는 어디로 갈까.
수정판의 빛이 복잡하게 점멸했다.
펠레리안은 그 의미를 이해했나 보다.
-아, 아래.
'네?'
-이곳 아래, 던전, 지하...? 지하가 있었나.
수정판의 지도를 수십 번 봤지만 지하는 없었다.
-숨겨져 있던 것이겠지. 신호는 지금 아래로 향하고 있다. 내 시체가 땅 밑에 파묻혔든지 지하 공간이 있든지 둘 중 하나야.
그렇다면....
그때, 마도 정령이 선고했다.
-소각, 및 폭파 절차를 재개합니다.
-곧 소각이 진행됩니다.
-10....
어라, 이전에는 30초 아니었던가?
쿵쿵거리는 소리도 점점 가까워진다.
실패작이 기어코 나를 쫓아온 것이다.
소리가 너무 무서운데!
어 일단은....
-환풍구로 들어가라! 아래로 내려가자!
그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환풍구로 호로록 기어들어 가려는 순간이었다.
콰앙!
마침내 실패작이 나타났다.
요정을 닮은 긴 귀가 쫑긋거리며 나를 향해 움직인다.
귀를 너무 잘 움직이는 것이 확실히 짐승 같다.
눈을 마주친 것은 잠시.
나는 곧바로 환풍구 안으로 몸을 쑤셔 넣었다.
아무리 저놈이 빠르고 날래더라도 비좁은 환풍구를 비집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나는 미꾸라지처럼 기어들어 갔다.
-9... 8....
카운트다운은 계속 진행되었다.
펠레리안이 오른쪽! 왼쪽! 왼쪽! 하며 방향을 지시해 주었다.
뭐 아는 게 있는 건가 싶었는데.
덜컹!
환풍구가 갑자기 넓어졌다.
그리고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 환풍구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가 있었다.
먼지뿐만이 아니라 지저분한 검댕 같은 게 잔뜩 묻어 있었다.
통로도 확 넓어져서, 환풍을 위해서라기엔 너무 크다.
미끄러지듯 아래를 향해 뚫린 것을 보면, 꼭 뭔가를 버리기 위한 통로 같기도 하다.
-내 기억에 따르면 던전의 가장 아래는 폐기물들을 소각하고 버리는 장소다.
'그럼 그 아래에 비밀의 방이?'
-글쎄....
그렇다면 이곳은 쓰레기들을 버리는 통로가 틀림없다.
-7... 6....
위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실패작 역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기어코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우리는 초면인데 대체 왜 저렇게까지?
내가 낀 펠레리안의 반지 때문인가.
"부끄러운, 괴무울...!"
'행복은 불타는 이단 옆차기!'
놈이 아무리 빠르다고 하나 떨어지는 속도마저 빠르지는 못했다.
나무 공이든 쇠공이든 떨어지는 속도는 거의 같다.
마침내 통로가 끝나고 추락할 때까지 놈과 나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나는 꿍,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콰아앙!
훨씬 무거운 키메라는 훨씬 요란하게 추락했다.
잿가루가 엄청나게 솟아올랐다.
-4...3...
그 사이에도 시간이 흘렀다.
나는 얼른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이실이의 스킬도 언제까지나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 이실이 교감lv2를 사용했습니다.」
*「화염 면역lv-을 공유합니다.」
오.
엄청난 속도로 마력이 소모되는 게 느껴진다.
이실이도 마찬가지겠지.
'이실아 꽉 잡아야 해.'
이 던전 전체를 태우는 불이라면 엄청난 열풍 또한 불어 재낄 것이다.
소각은 이곳 폐기물 처리장까지 뺌 없이 진행될 것이다.
-2...1...
잿가루가 가라앉자 실패작의 모습이 보였다.
놈의 기괴한 육신은 새카만 잿가루에 뒤덮여서,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같았다.
고통스러워 보이는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키메라 아닌가.
어째선지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녀석이지만 동정심이 들었다.
'왜 저런 걸 만들었대요?'
-그러게, 정말이지 저걸 만든 놈을 죽여 버리고 싶구나.
펠레리안 역시 펠레리안을 증오하게 되어 버린 것 같다.
"실패- , 뱀- 요정- 셀레나-!"
'펠레리안은 내가 대신 혼내 주마.'
잘 가.
-소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치이이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천장에서 삐져나온 노즐로부터 무언가가 분사되는 소리였다.
틱-
하는 것은 점화의 소리였으리라.
가스폭발과 비견될 속도로 불꽃이 퍼졌다.
눈 한 번 깜빡일 사이에 이 넓은 공간이 불꽃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급격한 압력의 상승으로 파괴적인 충격파가 퍼졌다.
퍼어엉!
나는 이미 똥 모양으로 몸을 돌돌 만 뒤였다.
흑린 스킬까지 발동했으니.
허공에서 몇 바퀴 돌고 난 뒤 착지 비슷한 걸 할 수 있었다.
주변은 시뻘겠다.
마치 드워프 광산의 최정상에서 용암 호수 아래쪽으로 내려온 듯한 기분이다
천장의 노즐에서는 계속 알 수 없는 액체가 분사되었다.
그것은 불꽃의 비가 되어 아래로 내렸다.
불꽃이 휘몰아친다.
불이 범람한다.
인세에 불지옥이 구현되었다.
하지만, 그 끔찍한 불꽃은 나를 상하게 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화염 면역의 효과...!
까딱까딱.
오히려 이실이는 기분이 좋다는 듯 이파리를 살랑거렸다.
하드보일드한 덩굴풀이다.
나 또한 숨쉬기 힘들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러면 적은?
시험육 9번 실패작은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다.
화르륵 타오르고 있다.
그런데, 아직 죽지 않았다.
몸에 붙은 불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버티고 서 있었다.
놈이 뭐라고 입을 뻐끔거렸다.
휘몰아치는 열풍 때문에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실패작.'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더냐.
그래, 태어난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주마.
불타는 키메라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 역시 마주 다가갔다.
이곳의 공간은 충분히 널찍했다.
*「거대화lv2를 사용합니다.」
내가 마음껏 몸집을 불리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한 방에 끝내 주지.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식심의 도약lv4를 사용합니다.」
내 입이 키메라보다 거대해졌으니.
나는 놈을 통째로 씹었다.
와작!
불타고 있던 녀석은 저항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일격이었다.
*「시험육 9번 실패작lv120을 처치했습니다.」
129. 은신처와 일기장
새파란 창공.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
누군가 칼로 깎아 낸 듯 선명하게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능선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다.
꾸우우우-
와이번이 우는 소리가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험난한 마경을 두 여자가 걷고 있었다.
외모로부터 유추되는 나이대는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둘은 도무지 일행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은 요정이었으며, 한 명은 인간이었다.
요정은 은빛의 머리카락을 하고, 흰색의 전통 복식을 갖췄다.
인간은 불꽃 같은 적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새카만 가죽 바지와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실제로 함께 하는 동안 대화조차 드물었다.
그래도 공통점은 있었으니.
험난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몸놀림이 가볍다는 점이었다.
끔찍한 오르막을 오르는 것도.
그리고 미끄러질 듯 아찔한 내리막을 내려가는 것도.
한 번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산양처럼 가볍게 통통 움직인다.
"...마물이 생각보다 별로 없네."
입을 연 것은 헤일릿 랑그레이였다.
"대수림에 비해서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곳이야."
이리스가 그리 답했다.
대수림은 모든 마경, 아니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식생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다.
사방에 풀과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고.
아무 나무나 잡아도 벌레가 기어 다녔으며, 뱀이 살았고, 수풀에서 표범이 튀어나와 쥐를 물어 채 가는 곳이다.
"척박하다고까지 말할 곳은 아니지."
헤일릿이 핫, 하고 웃었다.
"그런가?"
"산맥이 척박하면, 사막이나 설원은 어떻게 표현하겠어."
실제로 산맥에는 꽤 많은 생물이 산다.
마물들을 제외하고라도 그랬다.
"그래도 쥐 죽은 듯 조용하잖아."
"그래서 이상한 거야. 아무래도...."
헤일릿이 고민했다.
주변이 묘하게 조용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흰개미니 뭐니 하면서 마주치는 마물들이 꽤 있었는데, 오늘은 하나도 없었다.
헤일릿과 이리스가 놀라운 속도로 마경 중심부까지 향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이 주변에...."
그때였다.
앞서 나가던 이리스가 우뚝 멈춘 것은.
헤일릿도 '뭐야?'라고 물어보는 얼빠진 짓은 하지 않았다.
이리스의 뾰족한 귀가 고양이처럼 쫑긋거렸기 때문이다.
근처에 무언가 있다.
일단 그것을 알았으니 헤일릿으로서도 뭔가 보여 줘야 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큼지막한 배낭에 손을 넣었다.
아공간 마법이 걸려 있는 배낭의 내부는 거의 창고 하나를 통째로 집어넣은 수준이었다.
배낭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물.
그물의 가장자리에 매달린 추에는 룬어 각인이 있다.
헤일릿은 그물을 꺼내는 동시에 휙 던졌다.
회전을 주며 던졌기 때문에 원심력에 의해 그물이 펼쳐졌다.
그물추가 파랗게 빛나더니, 그물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어딘가를 덮쳤다.
평범한 바위였다.
그런데 그 바위가 그물에 휘감기자마자 우그러졌다.
"아아, 앗!"
바위가 아니라, 누군가 망토를 뒤집어쓴 것이었다.
회색빛의 질감이 묘한 망토가 위장막 역할을 했었다.
마법도 아니었고, 그저 더러운 천과 모래를 이용한 잔재주였다.
"살려, 살려 주십쇼!"
그물은 저절로 움직이며 사냥감의 몸에 휘감겼다.
위력적인 기세는 없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대경실색한 일이다.
"뭐야, 인간이잖아?"
헤일릿은 김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물 좀, 풀어 주십쇼. 전 진짜 수상한 놈 아닙니다."
바위로 위장한 자가 스스로 '수상한 놈이 아니다'라고 말하니.
그보다 수상해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헤일릿은 그물을 회수했다.
"난 또 바위로 위장하는 신기한 마물인 줄 알았지. 김샜네."
"아니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판당이라고 합니다...."
판당, 혹은 판단.
숨어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모험가였다.
"왜 그렇게 숨어 있던 거야?"
"저도 두 분이 사람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어? 우리가 왜?"
"아...."
그 험한 산맥을 쉬지도 않고 뛰어 내려오길래, 산맥에 숨어 산다는 전설의 산고블린이 아닌가 싶었다고.
그리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고...요정인 줄 알았습니다."
"사람도 맞고 요정도 맞아. 난 아니고 저 할머니만."
할머니라고 지칭받은 이리스는 눈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판당은 그제야 이리스의 귀가 뾰족함을 눈치챘다.
희귀한 요정을 마주치다니, 심지어 대수림과 이렇게 먼 산맥에서.
"왜 여기 숨어 있는 거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판당은 화들짝 놀랐다.
그가 뭐라고 변명하려던 순간이었다.
판당은 헤일릿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저는 모험가입니다. 임무를 위해 이곳에 왔구요...."
묘하게 속을 알 수 없는 눈이다.
" ...동료는 다 죽었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제국민입니다."
마지막 말은 왜 굳이 덧붙였는지 모르겠다.
헤일릿은 그제야 씩 웃었다.
"억양을 보니 그런 것 같았어."
"예에."
방금은 제국민 티가 전혀 나지 않을 억양을 썼는데.
판당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임무 실패하고 다 죽었으면 떠나지 왜 이런 곳에서 혼자 꾸물대고 있었지?"
"아...."
여기서 말을 잘해야 한다.
기분 나쁘게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여자이니, 티가 나지 않게.
"이 근처에 와이번 퀸이 둘이나 모여 있는데요...."
그때였다.
콰아앙!
저 북서쪽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돌아보니 하늘에서 불기둥이 솟고 있었다.
그리고 흑백의 거대한 와이번 두 마리가.
어쩔 줄 모르고 그 불기둥 주변을 날았다.
"저거, 저거입니다."
이리스와 랑그레이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녀들이 찾고 있던 펠레리안의 던전.
혹시 저곳에 있는 게 아닐까.
"가자!"
랑그레이와 이리스가 달리려 했다.
판당이 슬쩍 몸을 빼려는 순간.
"너도 따라와!"
"예에?"
판당은 어째선지 도망칠 엄두가 안 났다.
"아, 알겠습니다."
셋이 함께 달렸다.
불기둥을 뿜는 석탑을 향해.
* * *
*「시험육 9번 실패작lv120을 처치했습니다.」
*「마성을 흡수합니다.」
*「이미 마성이 포화상태입니다.」
막대한 양의 마성이었다.
9번 키메라는 완전히 숯덩이가 되어 버렸다.
A랭크 퀘스트, '펠레리안의 키메라 처치'는 훌륭하게 완수된 것이다.
펠레리안이 세상에 남긴 추악한 과거.
그 증거인 키메라들은 모두 처치되어 내 경험치가 되었다.
소각 절차가 시작되어서 던전 내부 전체가 불꽃에 휩싸였으니, 증거마저 깨끗하게 불타 사라졌으리라.
하지만 어째선지, 내 입맛은 썼다.
'퉤퉤!'
아, 입에 숯덩이가 된 키메라의 일부가 들어 있어서 그랬나 보다.
입에 있는 것을 뱉으니까 더는 쓰지 않았다.
퍼석.
9번 키메라의 몸은 다 탄 연탄재처럼 부서졌다.
놈은 마석조차 품고 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뜨거운 불길에 마석이 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거대화 스킬을 쓰면 근력과 체중이 늘어나지만 부작용도 있다.
그만큼 몸의 내구성이 약해지고, 속력 또한 느려진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몸의 크기를 줄였다.
안 그래도 슬슬 마력이 달렸다.
아직 던전 내부는 사방에 불꽃이 휘몰아치고 있다.
만약 이실이에게 공유받은 화염 면역을 잃는다면, 나는 노릇노릇한 뱀 구이가 되어 버릴 것이다.
다행히 곧 불의 비가 멎었다.
-소각... 절차를... 중지합니다.
너무나도 뜨거운 열기 탓일까.
마도정령의 목소리까지 일그러졌다.
'자아, 이제 여기 어딘가에 통로가 있는지 찾아봐야겠네요.'
-그렇지, 빨리 찾는 게 좋을 거다.
펠레리안이 그리 말했다.
빨리 찾아내라고 재촉하는 건가 싶어서 뚱하게 쳐다보니, 펠레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 그대로 빨리 찾는 게 좋을 거라고. 뜨겁지 않겠냐.
'어?'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
불은 꺼졌지만 내부는 여전히 뜨겁다. 돌이 달궈져서 화덕 내부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화염 면역을 잃는 순간, 나는 곧바로 구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내 열 내성이 낮지는 않으니까 어느 정도 버티기야 하겠지만 잠깐뿐이겠지.
하지만 상황은 설상가상으로 흘러갔다.
-폭파... 절차로, 들어갑니 ...다.
내부를 깨끗하게 소각한 다음에는 던전을 아예 붕괴시킨다.
역시 펠레리안은 지독하고 철저한 요정이었다.
빨리 지하의 공간을 찾아야 한다.
-마력 감지를 써 봐. 지하에 공간을 몰래 만들었다면 틀림없이 마법을 써서 지었겠지.
마력 감지를 사용하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다만 푸른빛과 붉은빛 선이 사방에 혼재해서 알아보기가 어렵다.
'파란 선이 격자로 그려진, 네모난 거가 있어요!'
-그 아래 기판이 있는 것 같다.
재가 바닥에 잔뜩 쌓여 있다.
급한 대로 바람 마법을 썼고,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켈사악!"
흩날리는 잿가루 때문에 재채기가 나오고 눈이 매웠다.
-지랄을 하는구나 아주!
얼른 물을 뿌렸다.
치이익!
잿가루는 가라앉았지만, 물이 순식간에 증발되어 수증기가 되었다.
앞까지 잘 안 보이는 위험한 상황.
그런데, 바닥의 잿가루가 씻겨 내려가자 드러난 게 있었다.
요정어였다.
더듬더듬 읽어 보았다.
'나의... 관?'
던전의 이름은 '묘비'.
묘비 아래에는 관이 묻혀 있는 게 당연하다.
-저것이 문이다!
정사각형의 네모난 쇳덩이가 바닥에 있었다.
잡아당길 수 있는 고리가 있는 것을 보면 문이 맞는 것 같은데, 문틈에 잿가루가 빼곡하게 박혀서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에 단검 여명을 끼웠다.
그리고 그 여명의 손잡이를 꽉 물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끼긱, 끼기긱....
열리려나 싶었는데.
그 순간 마력이 바닥나 버렸다.
사실, 나는 괜찮았는데 이실이가 먼저 퍼져 버렸다.
*「교감lv2가 중단됩니다.」
*「화염 면역lv-의 공유가 중단됩니다.」
전신의 비늘이 오그라드는 뜨거움이었다.
누가 갑자기 나를 펄펄 끓는 온천에 밀어 넣은 느낌이다.
숨을 멈췄다.
시간을 오래 끌면 분명 죽는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실이도 덩굴을 뻗쳐서 그것을 도왔다.
솔직히 도움은 하나도 안 됐다.
그래도 귀여우니까 됐다.
끼이이이-
결국 문이 열렸다.
-폭...파.
콰아앙!
이번에는 친절한 카운트다운이 없었다.
폭발의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바닥의 열린 문으로 뛰어들었다.
문을 닫는 것은 잊지 않았다.
원래는 내려가는 사다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냥 떨어졌다.
어딘가에 걸려서 우당탕탕 미끄러지다가 바닥에 착지했다.
쿠구구구궁-
저 위에서 엄청난 진동과 폭발음이 울렸다.
그 높은 석탑이 무너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땅이 흔들려서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솔직히, 이 지하 공간도 함께 무너지는 거 아닌가 걱정됐다.
하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이 지하 공간은 던전이 붕괴해도 견디도록 만들었나 보다.
붕괴는 한참이 지나서야 멈췄다.
석탑이 폭삭 무너졌다면, 여기서는 어떻게 빠져나가지?
그런 걱정이 잠깐 들었지만, 일단 나중의 일이다.
우선 안을 둘러봐야겠다.
나는 천천히 내부로 들어갔다.
끼익.
바닥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흠칫, 놀랐다.
나무다.
나무로 마루를 짰나 보다.
펠레리안의 던전에서는 드문 방식이다.
'앞이 잘 안 보이네.'
내게 암시야가 있기는 해도, 불꽃이 번쩍이던 곳에서 막 들어왔다.
약간의 조명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공간을 뒤적여 초를 꺼냈다.
누가 줬었지, 아마엔이었나, 둥켈이었나.
*「초급원소마법:불lv8을 사용합니다.」
작은 불꽃을 피워내 붙였다.
마력이 없어서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이 장소가 안전하다면, 얼른 진화를 하고 싶다.
그러면 마력도 더 풍부해지겠지.
이번에야말로 서펜트로 진화하는 거야.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아.
누가 이렇게 푹푹 한숨을 쉬어 대나!
당연하겠지만 펠레리안이었다.
-내가 살던 집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만들었구만.
그는 이곳의 인테리어를 평가하고 있었다.
'집이요?'
-그래, 대수림에 있던 집 말이다.
펠레리안도 옛날에는 대수림에 살았을 것이다.
비록 쫓겨나서 다시는 고향을 밟지 못했지만.
이곳은 대수림에 있던 그의 집을 추억하며 만든 공간 같았다.
그러니까, 아주 사적인 공간이라는 뜻이었다.
던전의 제어실에서 전송한 신호는 이곳 지하까지 이어졌다.
그러면 설마 펠레리안이 여기 숨어 살고 있던 걸까....
"사악!"
나는 깜짝 놀라서 촛불을 떨어뜨릴 뻔했다.
저 앞에, 의자가 보였다.
그리고 의자에 누군가가 팔을 걸친 채 있는 것 같다.
'시체다앗!'
뼈다귀밖에 남지 않은 시체였다.
펠레리안이다. 펠레리안인 게 틀림없다!
-허, 허허어억!
"사아아악!"
펠레리안도 깜짝 놀랐는지 이상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 뼈를 만나니까 솔직히 무서웠다.
차마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뭐 해...! 빨리 가까이 가 봐라.
'으....'
펠레리안의 재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까이 갔다.
그리고 가까워지니까 알 수 있었다.
'팔만. 팔만 남아 있는데요?'
이쪽에서 보이는 것은 팔 뼈뿐이었다.
가까이 가 보니, 시체가 아니라 의자에 팔뼈 하나가 놓여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손아귀에는 더러운 수정구슬이 놓여 있었다.
-수신기다!
저게 실험 정보를 전송받는 수신기였던가.
그러면 이 팔의 주인은 어쨌든....
-내 팔찌며 장신구야. 내, 내 팔이 맞다.
펠레리안 본인의 팔이었다.
그런데 왜 다른 부위는 없고 팔만 여기 놓여 있을까.
나는 탁상 위를 확인했다.
먼지가 소복이 쌓인 그곳에, 몇 가지 잡동사니가 놓여 있었다.
독특한 모양새의 황금열쇠.
그리고, 검은 가죽으로 양장된 일기장.
나는 조심스럽게 일기장부터 펼쳐봤다.
복잡한 요정어가 적혀 있었다.
펠레리안과 나는 천천히 그것을 읽어 보았고.
-허어.
그래.
놀랄 수밖에 없었다.
130. Le Pet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