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메가 진화
"꾸물대지 마, 이 새끼들아!"
경비대장이 병사들을 닦달했다.
칼레아 시를 지키는 병사들은 결코 게으르지도, 유약하지도 않다.
당연한 일이다, 엄연히 '산맥'이라는 마경을 접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밀려오는 마물들을 막아 내 본 경험들이 있기에, 칼레아 시의 정병은 모두 강골이다.
내륙 경비병들과 비교하면 혼자 두셋은 당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가 가서 뭐합니까."
하지만 지금 병사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긴장만이 엿보였다.
"그냥 화산이 터진 것 같은데······."
"칼레아 산이 화산이라는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 봤어."
"그거를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나요······."
경비대장이 구시렁대는 병사의 투구를 확 내리쳤다.
"내가 봤다고, 그거 도마뱀이었어. 불도마뱀!"
"아잇······ 술 드신 거 아닙니까."
"맥주 두 잔에 내가 취하기라도 했다는 거냐! 그리고 시장님까지 나오신 거 보면 몰라?"
경비대장이 이렇게 군기가 잔뜩 든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무려 칼레아 시장이 친히 나왔다.
시장은 자신이 분명 불 도마뱀을 보았다고 말했다.
"드워프들이 광산에서 나왔으니 따라오신 거겠죠."
"그래, 그거지. 그러니까 입 닥치고 발맞춰 걸어라."
칼레아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산을 올랐다.
그들 뒤를 시장이 말을 타고 뒤따랐다.
그들은 결국 불이 솟아올랐던 지점까지 올랐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불도마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진짜 존재했다면 시체라도 남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다만, 주변에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똥이 타닥거리면서 연기를 뿜고 있었고.
만나기가 몹시 어려웠던 드워프들이 잔뜩 있었다.
드워프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를 입은 자들도 많았고, 하나같이 몸이 푹 젖어 있었다.
근육이 우락부락 옹골찬 드워프들은 아무 데나 널브러져 앉아 있었다.
마치 역전의 용사들 같은 모습이어서, 경비대장도 침을 꿀꺽 삼켰다.
"저어······ 소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만."
"소란? 다 끝났는데."
"그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드워프들은 친절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더니 별다른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고.
경비대장이 재차 질문했다.
"여기, 혹시 책임자 계십니까?"
"책임자? 으음, 우리 책임자가 누구지?"
드워프들이 서로 책임자가 누군지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다.
제대로 답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경비대장은 참으로 난감해졌다.
용감한 칼레아 시장이 다가와서 재촉했다.
"나는 칼레아 시의 시장입니다. 책임자분 안 계십니까?'
그러자, 드워프들의 책임자가 정말 나왔다.
"지금 여기서 책임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군."
수염이 풍성한 드워프였다.
칼레아 시장이 아는 척을 했다.
"아, 당신이 광산 군주 푸른 수염입니까."
푸른 수염이라고 불린 드워프, 로제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는 시장의 코앞까지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리고 겁먹은 시장에게 자신의 수염을 내밀었다.
"어이, 내 수염이 파랗게 보이나?"
"아, 아니······."
"파랗게 보이면 눈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나는 그냥 로제나라고 한다."
"예에, 로제나 님. 저는 칼레아의 시장입니다. 혹시 그러면 광산 군주님은······."
"푸른 수염은 죽었어. 불타 죽었지."
"예에? 어쩌다가 그렇게 됐습니까?"
로제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역으로 물었다.
"산 아래 깊숙한 곳에서 불이 솟아 나왔는데, 그러면 그건 화산 분화일까."
"어······. 그렇죠? 칼레아 산이 화산이었습니까?"
"나도 모르지, 당신이 지금 화산이라고 말해 준 거 아닌가."
"그런가요."
"푸른 수염은 화산 분화 때문에 죽었다고 할 수 있겠군."
"조의를 표합니다."
"그럴 필요 없소, 그래 마땅한 놈이었으니."
듣고 있으면 바보들의 대화 같았다.
로제나는 한숨을 푹 쉬고 팔짱을 풀었다.
"내가 임시 광산 군주를 맡게 되었으니까 대표로 사과드리지."
"네에?"
"우리가 통제하지 못한 불 탓에 그대들의 재산이 손괴되고 인명을 잃게 되었소. 이에 붉은 모루 광산의 대표로서 사과하고 피해 보상을 위해 노력하겠소."
로제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대충 주저앉아 있던 드워프들도 눈치를 보며 일어나더니 따라 고개를 숙였다.
"어 ······ 재산 손괴라 함은 저 하역장이 불탄 거를 말씀하시는 것 같고 ······."
하지만 시장은 오히려 드워프들의 사과에 당황했다.
그는 경비대장을 불러서 인명 손실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 배턴이 죽은 것 같습니다?"
"배턴? 그게 누군데?"
"그 대머리에 배불뚝이 있지 않습니까. 하역장의 책임자였던."
"아, 아아 그놈!"
그러더니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놈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몰래 수수료를 떼먹다가 걸려서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
"재난 상황에서 그깟 게 문제겠습니까. 걱정 마십쇼, 걱정 마세요."
칼레아 시장은 배불뚝이의 죽음에 조금의 유감도 없는 듯했다.
오히려 로제나가 머쓱할 정도였다.
"하역장도 저희가 보수할 테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지만······."
시장의 목소리는 마치 간이라도 떼 줄 듯 부드러웠다.
"이번 기회에 다시 문호를 개방하시는 것은 어떱니까. 저희 칼레아 시는 계속 붉은 모루 광산과의 교역이 재개되기를 바랐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지. 우리도 새 물건을 만들어 팔고 싶었으니 ······."
"정말이십니까!"
시장은 기뻐서 까무러치기라도 할 기색이었다.
로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번에 화산 폭발로 광산 내부의 설비가 많이 불탔는데······. 복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서."
"시간이요? 얼마나요?"
"예산이 부족해서 말이야. 적어도 십 년은 걸리지 않을지······."
"저희가 돕겠습니다. 이웃의 고통은 함께 나눠야 하는 법이지요."
"정말이오? 우하하하!"
로제나가 기뻐하며 시장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시장은 몹시 아픈 듯했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고 웃었다.
"아 맞다!"
로제나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저 멀리 우물쭈물 서 있는 로일을 끌고 왔다.
"아주 훌륭한 인간의 도움을 받았어. 로인이라고 하는 친구인데."
"로일입니다."
"그래, 로일!"
시장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 친구가 화산의 불을 끄는 걸 도와줬다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 말이야. 이 친구 아니었으면 몇이나 더 죽었을지 몰라. 교역을 재개할 때 이 친구가 도와주면 좋겠는데······."
"이, 이런. 로일······."
시장은 로일과 이미 안면이 있었다.
그는 로일의 손을 덥석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자네가 우리 칼레아의 복덩이었구만!"
로일은 난처한 듯 웃었다.
소탈해 보이는 그 모습이 칼레아 시장의 환심을 더욱 샀으리라.
"그러면 이 친구하고 더 얘기해 보라고."
로제나는 그 둘을 남겨 두고 스윽 물러났다.
찌뿌둥한 몸을 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강인한 전사였으나, 로제나는 이미 충분히 늙었다.
임시라지만 이 나이에 광산 군주라니.
그런 것을 하기에 그녀는 너무 나이를 먹었다.
빨리 공방에 돌아가 1,001번째 컬렉션을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광산 군주 자리를 넘겨줘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로제나 님."
"아, 둥켈."
광산 안쪽으로 들어오니 둥켈이 그녀를 반겼다.
둥켈의 손은 피로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상처 입은 드워프들을 돌보고 있던 것이다.
"······고생했다."
둥켈의 어깨 위에는 뱀이 있었다.
뱀은 당당하게 몸을 세우고 있었다.
로제나는 뱀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냐?"
'완전 잘했어요.'
펜과 종이가 허공에서 움직이며 글을 썼다.
로일을 언급하는 것은 뱀의 요청이었다.
그 덕에 앞으로 로일은 붉은 모루 광산의 교역권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뱀에게는 간교한 꾀가 하나 있었으니.
'고블린의 손에 맞는 무기라. 재미있겠는걸.'
로제나가 씨익 웃었다.
이 뱀은 고블린과도 친교를 맺는 관계였던 건가.
지켜보면 앞으로도 무척 재미있을 텐데. 아쉽군, 생각하며.
씨익 웃으며, 로제나가 우렁차게 외쳤다.
"주모옥!"
드워프들이 다들 로제나를 바라봤다.
"다들 고생 많았다. 당분간 내가 푸른 수염 대신 붉은 모루 광산의 광산 군주를 맡을 거다. 불만 있는 놈은 지금 손들어."
당연하지만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환호가 터져 나왔다.
로제나는 할 일을 미루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곧바로 폭탄 같은 발언을 꺼냈다.
"그리고 광산 군주직의 차기 후계자는, 푸른 수염의 아들이자 내 양자인 둥켈로 생각 중이다."
충격! 파격!
모든 드워프들이 입을 떡 벌렸다.
특히, 갑자기 그런 중대한 직위를 맡게 된 둥켈의 충격이 가장 컸다.
"불만 있는 놈은 손들어."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있을 것이다.
이건 로제나가 아무리 강하고 존경받는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파격이었다.
대가 센 드워프들은 결코 둥켈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됩니다!"
과연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름 아닌 둥켈 본인이었다.
"다 괜찮다는데 왜 혼자 지랄이야 넌?"
"예? 다 괜찮다고요?"
둥켈이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전처럼 환호가 터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손을 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체 왜일까? 그렇게 둥켈을 경멸하던 자들이.
"당장 넘겨준다는 게 아니야. 한 명의 당당한 드워프 노릇을 하게 되면, 그때 임명한다는 거지."
로제나가 둥켈의 손을 꽉 잡았다.
달궈진 밸브를 돌리느라 벗겨진 손바닥의 상처가 찌릿했다.
"고생했다."
로제나가 웃었다.
* * *
드워프 둥켈 이야기의 감동적인 결말에 지네 박수.
캉캉캉.
하지만, 동화책과 달리 세상일은 그렇게 깔끔하게 기승전결로 나뉘지 않는다.
광산 군주 자리에 오르기까지 둥켈은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다.
모든 드워프들이 둥켈에게 마음으로 탄복한 것은 아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불길에 뛰어들어 붉은 모루 광산을 구해 낸 것은 맞지만.
실제로 그 활약을 보지 못한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둥켈이 광산 군주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 친구니까, 친구가 높은 사람이 되면 좋은 것 아닌가.
하지만 내게는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따듯한 보금자리를 준비해라-!'
"너무 온도만 높으면 안 좋아. 대수림에서 난 녀석이니까 습도가 높으면 좋겠지. 물을 끓여 둘게."
우리는 키뱀이의 진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허겁지겁 우당탕탕 움직인다.
- 진화를 얘가 하는 거지 네들이 하냐?
펠레리안이 면박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키뱀이를 조심스럽게 화분에서 떠내서 지하 정원에 옮겨 심었다.
잎이 시들었을 때 주는 영양액을 뿌려 주기도 했다.
키뱀이는 어제부터 이파리를 오므린 채 가만히 있었다.
더 이상 춤을 추지 않는 모습에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가 도와줄 거예요.'
- 흐음.
그렇다, 키뱀이가 혼자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다수의 진화 경험으로 무장한 내가 직접 키뱀이의 진화를 보조해 줄 생각이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일 거다.
하지만 나와 키뱀이 사이라면 가능했다.
'키뱀아 손 줘 봐, 손.'
조용하다.
'착하지, 손.'
다행히, 오므라들었던 키뱀이의 덩굴손 하나가 천천히 펴진다.
그것이 내 꼬리를 맞잡았다.
*「교감lv2를 사용합니다.」
키뱀이가 가진 특별한 스킬 덕이다.
곧바로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 한숨 잘 테니까. 잘 지키고 있어.'
"걱정 마."
둥켈이 책임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화를 하기 위해서 잠을 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감을 유지한 상태에서 함께 잠들면, 어쩌면 진화에 개입할 수 있지 않을까?
키뱀이의 진화를 마치면 이름을 지어 주고 운철검을 만들어서 나가야지.
계획적인 게 완전 J뱀.
뱀이 되고 나서 좋은 점은, 신경이 굵어졌다는 것이다.
정신력이 20이나 되어서 그런 거겠지.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잠들 수 있다.
그거 하나는 아주 만족스럽다.
그렇게······ 나는 수마에 빠졌다.
정신을 차렸다.
마치 꿈을 꾸는 듯 예의 검은 공간이 나타났다.
'성공이다!'
성공했다.
왜냐하면, 그곳에 키뱀이 역시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새싹 하나가 돋아 있었다.
나를 보자 반갑게 이파리를 까닥인다.
*「진화가 가능합니다.」
메시지가 울렸다.
*「특수 진화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키뱀이와 내 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
[새싹의 키메라lv10]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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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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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틀 트렌트]
2. [덩굴의 키메라]
······
──────────────
와!
역시, 세계수 수저인 키뱀이는 첫 진화부터 다르다.
내 첫 진화 선택지는 겨우 리틀 그린 스네이크 따위였는데,
키뱀이의 진화 선택지는 시작부터 여럿이었다.
'트렌트'는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나무 종족이다.
리틀 트렌트니까 작은 나무가 되는 거 아닌가. 그거는 너무 그X트 같다는 점에서 끌리지 않는다.
두 번째는 덩굴의 키메라.
키뱀이는 자기 덩굴손을 참 잘 썼다.
내 손을 잡는 데 쓰기도 하고, 아직 진짜 손처럼 쓰지는 못했지만 이쪽으로 가면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키뱀이한테도 검술을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제법 마음에 드는 선택지.
이 아래는 전부 특수 진화 루트인 것 같다.
특히 키뱀이가 얻었던 '불' 특성과 '뼈' 특성이 반영된 거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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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켈레톤 키메라]
4. [화염 이끼 키메라]
······
──────────────
둘 다 강력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솔직히 스켈레톤 키메라가 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식물이 아니잖아.
뼈다구가 싫은 건 아닌데, 귀여운 맛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화염 이끼 키메라는······ 왜 하필 이끼일까.
슬라임처럼 꿈틀거릴 수는 있는 걸까.
뭔가, 화염 이끼 키메라로 진화하면 더 이상 나랑 붙어 다니지는 못할 것 같다.
뜨거우니까!
너무 고민된다.
이럴 때 마물과 키메라 전문가인 펠레리안 선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꼭 필요할 때는 없다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마지막 선택지까지 보는 게 중요했다.
파이몬이라는 고위 악마의 힘이 깃든 마석.
키뱀이는 무려 그것을 먹어 치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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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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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구조부터 다르다.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무언가의 이명일 듯한 이름.
덩굴풀이라는 이름을 보면 식물 계통은 확실하고.
덩굴을 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긴 하다.
다만 '악마 사냥꾼의'라는 수식어가 조금 아리까리한데.
악마 같은 놈과 싸울 때 강해지는 그런 걸까.
악마와 싸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기도 하고······ 생김새가 어떨지 짐작이 안 간다.
하지만······.
펠레리안의 조언을 떠올려보자.
우선 '키메라 계통에 머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다. 다른 것으로 나아가도 좋을 것 같구나. 키메라는 분명 한계가 있는 계통이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리틀 트렌트와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만 남는다.
다만 '트렌트는 오히려 대단할 것 없는 종족'이라고 들었다.
생각해 보니 펠레리안이 도움이 됐네!
그렇다면, 선택지를 하나로 좁혀도 될 것 같다.
'키뱀아, 난 5번이 좋을 것 같아. 넌 어떻니?'
나도 좋아요.
끄덕끄덕
그렇게 말하는 게 분명하다.
그러면 5번으로 가자!
*「'새싹의 키메라'가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로 진화합니다.」
< 수염의 문제 >
101. 수염의 문제
진화의 과정을 내 눈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아마 제법 신기한 광경이 아닐까 싶다.
포켓몬처럼 진화할까 아니면 디지몬처럼 진화할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디지몬보다는 포켓몬에 가까울 것 같다.
──────────────
오잉······!?
새싹키뱀이의 상태가······!
축하합니다!
새싹키뱀이는(은)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으)로 진화했다!
──────────────
그런 느낌 아닐까.
결론적으로, 나는 그것을 직접 보지 못했다.
눈을 뜨고 나니 키뱀이는 이미 진화해 있었다.
"사악!"
둥켈, 너는 봤냐!
둥켈은 감동한 표정이었다.
"너무 대단해 ······!"
'진화 과정을 본 거야?'
"그래, 살면서 처음 본 것 같아. 정말 엄청났어······."
자식의 유치원 졸업식에 가지 못하면 이런 기분일까!
- 대단했어, 대단한 광경이었어.
심지어 펠레리안까지 그 모습을 보았다.
키메라와 마물을 좋아하는 변태답게, 펠레리안은 눈을 지그시 감고 박수를 치며 그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젠장 부럽다.
그래도 키뱀이는 나를 가장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많이 바뀌지는 않았네?'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 탓에, 징그럽게 변하는 거 아닐까 조금 걱정했는데, 아니었다.
'그냥 풀 그대로잖아!'
까딱까딱!
땅에 심겨 있는 키뱀이는 확실히 자라 있었다.
다만 여전히 식물의 모습이었으니, 담쟁이덩굴이 벽에 붙어 있지 않은 모습이랄까.
이파리의 생김새가 조금 변했다. 잎 손이 다섯 개인, 마치 단풍잎 같은 모양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 직후에 벌어졌다.
키뱀이가 땅에서 나온 것이다!
"서, 섰다!"
둥켈!
그렇게 말할 거면 주어를 붙여야지!
키뱀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걸까!
곧 '아이엠 키뱀'이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것은 아니었다.
키뱀이는 휘청이듯 하면서 앞으로 엎어졌다.
이파리 네 개로 움직이는 사족 보행의 형태였다.
꼬리도 있어서 다람쥐 같기도 했고, 그것보다는 훨씬 느릿한 것이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아니면 카멜레온이나.
키뱀이는 엉금엉금 기어 와서 내 꼬리 위에 올라탔다.
오호, 덩굴손을 그렇게 쓰는 거구나.
담쟁이덩굴처럼 내 꼬리에 딱 붙었다.
꼬리를 흔들어 주자 그 위에서 나풀나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제 꼭 화분에 심어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진 것 같다.
어디 한번 상태창을 확인해 볼까.
──────────────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lv1]
[특성]
[아기], [세계수], [지옥불]
······
──────────────
그래그래, 키뱀이는 아직 아가야.
다양했던 특성들이 단순해졌다.
세계수라는 중요한 특성은 아직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눈에 띄는 것은 지옥불이었다.
펠레리안에게 그것을 이야기하니.
- 지옥불이라······ 자연에서는 평범하게 발생할 수 없는 특성이야.
와! 유니크 특성.
- 그 이름부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더니 ······.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이요?'
OOO의 키메라나, 리틀 트렌트 등에 비해서 확실히 이질적인 개체명이었다.
- 오래된 책에서 읽어 본 적 있어. 마계에 사는 식물형 마물로서, 다른 종족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지만 악마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성을 발휘한다더군.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괜히 특수 진화가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고대종 뭐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스킬도 생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키뱀이의 상태창을 더 살펴보았다.
──────────────
[스킬]
[육감lv1], [인지확장lv2], [흡수성장lv6], [잎 흔들기lv4], [덩굴손lv1], [교감lv2], [재배lv10], [화염 면역lv.max], [지옥불lv1]
──────────────
허, 허, 허, 허억!
나는 경악했다.
화염 면역.
그런 스킬도 있었구나.
혹시 열 내성이 최종 진화하면 저런 것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엄청나게 대단한 스킬임이 틀림없었다.
겨우 진화 한 번 한 것으로 이렇게 대단한 스킬을 얻게 될 줄이야.
게다가 화염 면역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지옥불이라는 스킬 역시 있었다. 이 또한 상위 스킬의 냄새가 고소하게 풍긴다.
첫 진화로 이런 대단한 스킬을 두 개나 얻어 버리다니.
'멋지다. 키뱀아.'
내가 다 뿌듯했다.
나중에 지옥불 스킬이 어떤 건지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이름을 지어 줄 거라고 했지?"
'응.'
이제는 뱀도 아니고 그냥 키메라도 아닌데 계속 키뱀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줄 생각이었다.
- 또 왕눈이니 대갈이니 하는 이름을 지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에요, 멋진 걸로 지어 줄 건데.'
그렇다고 왕눈이와 꾸벅이 등등의 이름이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키뱀이는 흐음······.
둥켈도 같이 열심히 고민해 주었다.
"그린 이런 건 어떨까?"
'별로.'
"덩구리?"
'오, 그 이름은 괜찮은데?'
하지만 덩구리는 펠레리안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귀엽기만 하구만.
- 특징을 좀 더 고려해서 지어 봐라. 카발라데트리드세피로티아는 어떠냐?
'우우 개구려.'
하지만 특징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식물이고······ 살아 움직이며, 불을 뿜는다.
어, 이거 완전······.
"아스화리탈은 어때요?"
- 오! 멋진데!
아니다, 그렇게 지으면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넘어가자.
"세계수의 또 다른 이름, 이그드라실을 줄여서 이실이라고 부르는 거 어때?"
'어!'
좋다.
둥켈, 제법인걸?
키뱀이한테 물어보니 녀석도 좋아했다.
네 이름은 이제 이실, 이실이야.
굳이 지배의 왕관을 쓰지 않더라도.
길들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키뱀이는 내가 지은 자신의 이름을 받아들였다.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lv1의 이름을 '이실'로 지었습니다.」
아니, 둥켈이 지은 건가? 하여튼.
*「악마 사냥꾼의 덩굴풀 이실lv1이 자신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휴우, 잘됐네."
둥켈이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쳤다.
"넌 이제 할 일을 다 마쳤으니 이제 나만 잘하면 되겠다."
'고마워, 바쁜데 도와줘서.'
사실 둥켈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잠시 후, 로제나가 광산의 모든 드워프들을 한자리에 모을 것이다.
거기서 그녀는 자신이 임시로 광산 군주직을 맡을 것이며, 후계자로 둥켈을 소개할 예정이었다.
"분명 날 싫어하는 사람도 많을 텐데, 하아······."
둥켈은 저렇게 말하면서도 도망치진 않았다.
광산과 드워프들을 바꾸려는 야망이 있는 사나이였으니, 광산 군주가 되고 싶었던 꿈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나 모자라도 쓸까?"
둥켈이 진지하게 그리 말했다.
그는 수염과 머리카락이 없이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오랜 시간 배척받았다.
'그래도 되는데, 머리는 가려져도 수염은 어쩔 수 없잖아.'
"······너 생각보다 냉정하구나:"
뱀이니까 당연하지.
둥켈은 자신의 외모 때문에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실이는 아주 똑똑했다.
자신이 진화하는 데에 둥켈이 도움을 줬다는 것을 잘 이해한 것 같았다.
이실이가 둥켈에 다가가서 이파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둥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가까이하니, 느릿느릿 바닥의 흙을 이파리로 잡아 둥켈의 얼굴에 발랐다.
"어푸, 갑자기 뭐야?"
둥켈은 얼굴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키뱀이는 계속해야 한다는 듯 이파리를 흔들었다.
둥켈이 한숨을 쉬고 다시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리고, 엄청난 일이 벌어졌으니.
"사아아아악!"
"허어어억!"
나도, 둥켈도 경악해 버렸다.
"이, 이거 괜찮은 걸까?"
"삭, 사사삭."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악!"
내 설득에 둥켈도 넘어갔다.
"그래, 일단 이러고 한번 가 보자."
목소리에서 짙은 결의가 느껴졌다.
* * *
로제나는 성격이 화통하다.
"······그래서 후계자로 둥켈을 지목한다."
그녀가 그리 말하자 다른 드워프들이 웅성거렸다.
붉은 모루 광산에서 둥켈의 이미지는 요 며칠간 급변했다.
하지만 역시나, 반대 의견이 나왔다.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습니다."
"그것이야 내가 가르치면 된다. 마이스터들이 광산 군주로서의 소양을 길러 줄 것이다."
"달리 광산 군주가 될 인재들이 있을 텐데요."
"누구 말이냐. 광산 군주직에 도전할 녀석 손들어 봐."
손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로제나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실 광산 군주가 되고 싶어 하는 드워프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일만 엄청나게 많아지고, 종종 대륙을 이동하면서 외교까지 담당해야 하는 그 귀찮은 직위를 뭐하러 받는가.
인간과 달리 드워프들은 권력욕이 많지 않았다.
둥켈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서 있었다.
그 위축된 모습을 더 안 좋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내, 둥켈이 걱정했던 지적 또한 튀어나왔다.
"생긴 게 좀 그렇지 않습니까! 수염도 없고 머리카락도 없어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광산 군주는 우리 광산의 대표인데, 언젠가 열두 모루 회의에도 참석할 거고. 그러면 그쪽에서 수염도 머리도 없는 둥켈을 얕보고 함부로 대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참 뼈아픈 지적이었다.
그런데 로제나가 갑자기 낄낄 웃기 시작했다.
"걱정 말어라, 둥켈에게 수염이 생겼으니까."
" ······예?"
"나와라 둥켈, 보여 줘!"
둥켈은 후드만 부여잡고 있었다.
그러자 로제나가 둥켈의 등짝을 때리고, 뱀이 종아리를 꼬리로 때렸다.
둥켈은 결국 우물쭈물대며 후드를 벗고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충격으로 인한 아주 잠깐의 침묵.
곧, 모두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하하하!"
"정말 수염이 생겼구만!"
둥켈의 얼굴에 수염이 생겼다.
키뱀이, 아니 이실의 도움이었다.
"이제 괜찮지?"
"으하하하하!"
얼굴에 묻힌 진흙.
그곳에서 이끼인지 새싹인지 모를 초록빛 가느다란 풀이 잔뜩 자라났다.
분명 풍성한 수염이 맞았다.
"둥켈, 부끄러워하지 마라, 다들 좋아하잖아."
로제나의 말대로였다.
드워프들은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식물로 이루어진 수염을 달고 있는 둥켈.
그리고 누군가 외쳤으니.
"초록 수염, 초록 수염이구만!"
초록 수염 둥켈.
둥켈의 새로운 이명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드워프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둥켈이 머쓱하게 뱀 앞에 주먹을 내밀었다.
그러자 뱀이 주먹을 톡 쳐 주었다.
이실 역시 이파리를 내밀었으니.
"고마워 얘들아."
'나도 고마웠어 둥켈.'
초록 수염.
떠나기 전, 뱀과 덩굴풀이 둥켈에게 선사한 작별 선물이었다.
* * *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함께했던 불지옥은 이제 추억으로 남기고.
서로 가야 할 길 찾아서 떠나야 해요.
머릿속에서 자꾸 그런 멜로디가 맴돈다.
그래도 광산을 떠나면서 축축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물론 둥켈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유약한 녀석,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광산 군주가 될지도 모를 녀석이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쓰나.
후계자 지목이 있던 날.
나는 드워프들과 함께 거한 술자리를 벌였다.
무시무시하게도, 칼레아 시에서 새로 받은 맥주 수십 통을 하룻밤만에 전부 해치웠다.
나는 이제 마경인 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테니 어찌 보면 송별회라고 할 수 있었다.
햄과 맥주를 워낙 많이 먹어서 아직도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이거 씹어라."
그리 말하면서 내게 이상한 약초를 건넨 것은 헬무트였다.
나는 헬무트 노인과 함께 산맥으로 향했다.
이 뜬금없는 동행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붉은 모루 광산의 최고 검장(劍匠)은 다름 아닌 헬무트였다.
운철로 검을 만든다면 당연히 검의 마이스터가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붉은 모루 광산에서 검을 만들어 가지고 나온다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운철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그만한 설비가 필요하다.
그런데 불도마뱀 그놈이 난장을 피우면서 설비 대부분이 파괴된 것이다.
운철을 녹이고 정제할 수 있는 설비들도 그 탓에 무너졌다.
"회색 망치 마을은 곧 나올 거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웃의 드워프 마을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로제나가 편지를 써 주었고, 동행한 헬무트는 다른 마을의 드워프들에게도 존경받는 장인.
설비와 도구들을 빌려 달라고 하면 거절할 리 없었다.
"힘들면 가방에 올라와. 너 정도야 들어줄 수 있으니까."
'됐어요.'
"눈이 침침해서 안 보인다. 글자 좀 크게 쓰라니까."
'괜찮다구요!!!'
헬무트와의 어색한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뚝뚝한 드워프 장인이었지만, 그래도 헬무트는 펠레리안보다는 착한 사람이었다.
- 하아······.
운철검을 잔뜩 기대하는 나와 달리, 펠레리안은 심사가 복잡해 보였다.
회색 망치 마을에서 운철검을 만든 뒤로는 더 깊숙이 들어갈 것이다.
산맥 안 델프람이라는 지역에 펠레리안의 던전이 하나 있었다.
저번 대수림에서 펠레리안이 자신의 위치를 추적했을 때, 그 신호는 델프람의 던전으로 향했다.
어쩌면 펠레리안의 해골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시체를 확인하러 떠나는 여정이라니.
그것참 가슴 아픈······.
"회색 망치 마을이다."
'와! 드디어 도착이다!'
나는 헬무트의 어깨 위에 휙 올라탔다.
처음 만나는 드워프들이니 나를 경계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도 착한 뱀의 태도를 유지해야지.
그렇게 결심한 것도 무색하게.
"왜 아무도 없지······."
회색 망치 마을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조용하다.
'이사 간 거 아니에요?'
"그런 것 같다만······ 급하게 떠난 것 같다."
정식으로 이사를 갔다면 챙겨 갔을 법한 물건들도 남아 있었다.
특히 대장간에 있는 도구들이 그랬다.
아마 헬무트가 인간이었다면, 스산한 마을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대체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파악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뭐,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중에 살펴봐도 될 것이고."
하지만 헬무트는 훌륭한 장인답게 빈 대장간에 들어갔다.
그리고 셀레스티움 양동이며 망치 등을 꺼내 작업 준비를 들어갔다.
"바로 한번 만들어 볼까."
"사악!"
나도 드디어 운철검 제작이 시작된다는 사실에 기뻤다.
하지만 일이 조금 어긋나려 했다.
"이런······."
대화로의 불을 필요한 만큼 달구기 위해서는 아주 질 좋은 숯이 필요했다.
"숯에 습기가 차 버렸군."
그런데 헬무트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숯을 아쉬워했다.
"이러면 충분한 화력을 내지 못해. 일단 가마를 찾아서 숯부터 만들어야겠다."
일이 복잡해지려는 순간.
나는 헬무트의 발목을 툭툭 쳤다.
"뭐? 비켜 보라고?"
나는 화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수첩에 글을 써서 보여 줬다.
'이 정도 불이면 괜찮지 않을까요. 한번 보세요.'
그리고 키뱀이, 아니 이실이에게 부탁했으니.
이실이 화구 앞에 섰다.
나는 얼른 헬무트와 함께 물러났다.
멀리 물러나야 한다, 꽤 멀리.
"호들갑은······."
피식 웃는 헬무트의 얼굴은.
키뱀이가 불을 뿜어낸 순간 굳었다.
화아아아아악!
보랏빛 불꽃이 화로 안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열풍.
얼굴 살이 벗겨질 듯한 뜨거움을 느끼며, 헬무트가 전율했다.
"그래 충분······ 충분하고말고."
'그러면 바로 시작합시다!'
숯에 습기가 들고 말고는, 지옥불 앞에서 관계없는 일이었다.
< 여명과 석양 >
102. 여명과 석양
대륙 모험가 연합.
줄여서 대모연.
그 이전에는 대륙 다국적 모험가 연합.
이건 줄이면 대다모.
물론 모험가 연합을 대모연이나 대다모라고 부르는 얼빠진 녀석들은 별로 없다.
모험가 연합은 한 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닌 초국적 단체이다.
당연히, 대륙을 넘나드는 그 거대한 정보망이며 단체를 모험가들 스스로 이룩한 것이 아니다.
사냥꾼 이상으로 개인주의적인 게 바로 모험가라는 치들이다.
이전에는 길드 정도만 산발적으로 존재했던 모험가들이 조직적으로 모였다.
그들이 대륙적 규모로 연합을 이룬 것은 다름 아닌 제국의 묵인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종 의뢰들은 퀘스트라는 이름이 되어 랭크가 매겨지고 그 보상과 수령이 철저하게 관리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모험가들에게도 랭크가 부여되어, 신분패 역할을 하는 모험가 패도 생긴 것이다.
이전까지 모험가는 사실상 '꿈 많은 백수', '일확천금을 노리는 불한당'과 동의어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다.
바야흐로 모험가는 당당한 직업이 되었다.
왕국에도 그러한 모험가 연합이 있었다.
대륙모험가연합 솔리온 임펠 지부.
왕국의 성세에 어울리게도, 왕국에는 S랭크의 모험가 다수와 규격 외 모험가 1인이 존재했다.
왕국 팔 영웅 중 일인이 바로 모험가 연합에 소속된 규격 외 모험가였다.
솔리온 임펠 지부에 고시된 임무 중 하나가 바로 이곳 '산맥'에서 수행되고 있었다.
일곱 명의 모험가들이 산을 걷고 있었다.
A급 모험가가 둘, 나머지 다섯은 전부 B급 모험가였다.
S급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수준 높은 구성이었다.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가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적어도 A랭크 이상의 퀘스트이리라.
"맑은 바람, 쾌청한 하늘, 험난한 고산준봉."
A급 모험가 한 명이 그리 중얼거렸다.
"이런 아름다운 산맥이 마경이라고 불리다니. 참 우스운 일이야. 인간의 관점으로 보니 그럴 텐데······."
눈빛이 맑은 청년이었다.
안 그래도 힘든 산행 중에 저리 속 편하게 지껄이니.
듣고 있는 다른 모험가들의 표정이 묘했다.
"판단, 산맥은 개 같은 곳이야."
"그래? 내가 보기에는 아름답기만 한데."
턱이 조금 길고 볼이 움푹 들어간 청년이 빈정거렸다.
"판단 너는 제국 동부 출신이라고 했나? A급 달 때까지 산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나 보지?"
모험가 연합이 전 대륙에 퍼져 있는 만큼, 판단이라는 모험가는 제국 출신이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제리코 너는 산맥을 몇 번 와 봤나 보네?"
"솔리온 임펠에서 가장 가까운 마경이니까."
"나는 초원하고 사막 정도나 가 봤어. 둘 다 끔찍한 곳이지. 여기는 그곳에 비해 나아 보이는걸."
"와이번과 흰개미들을 만나면 그 생각이 확 들어갈 거다."
제리코라고 불린 사내가 바로 이번 퀘스트의 책임자였다.
그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연합이 기어코 판단이라는 A급 탐험가를 하나 더 붙였다.
제리코는 정말 산전수전 다 겪고 A급에 오른 사내였다.
반면 판단은 아직 어릴 뿐만이 아니라 아주 얼빠져 보인다.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오, 연기다."
판단이 저 아래를 가리켰다.
제리코는 지도를 펼쳐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 망치 마을에 도착했어."
대부분의 마경이 그렇듯, 어느 한 지점부터 이곳이 마경이다 아니다 딱 갈리는 것이 아니다.
마물들이 자주 출몰하기는 하지만 거주와 생활이 가능한 지역이 있다.
그 한계선쯤에 위치한 것이 바로 회색 망치 마을이었다.
산맥 더 깊숙한 곳으로 가려는 모험가나 사냥꾼들은 그곳에서 보급을 했다.
"회색 망치의 드워프들은 욕심이 많아. 방문자를 등쳐먹으려고 하기도 하니까 다들 조심해라."
제리코가 묵직하게 말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판단은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드워프 맥주를 마실 수 있겠네······.'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제리코는 작게 혀를 차고 계속 걸었다.
그런데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낌새가 이상했다.
"왜 아무도 없······."
그리 중얼거리는 모험가 한 명을 얼른 조용히 시킨다.
제리코가 천천히 허리춤의 무기에 손을 얹었다.
회색 망치 마을에는 아무도 없었다.
늘 활기찬 소음으로 가득 찬 마을이었는데, 예상외의 상황이다.
그리고 무릇 소양 있는 모험가라면 예상외의 상황을 경계하는 법이다.
판단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제리코를 뒤따랐다.
쾅- 쾅-
쥐죽은 듯 조용한 마을에 쇠 두드리는 소리만 난다.
드워프 마을에서 대장간의 소음이 나는 게 뭐 이상하겠느냐만, 다른 소음은 전혀 없다는 게 이상하다.
"불의 냄새가 나는군."
침묵을 깬 것은 판단의 혼잣말이었다.
제리코가 얼굴을 찡그리며 판단을 노려봤다.
판단은 눈치라는 게 전혀 없는 사람처럼 감탄했다.
"공기가 따듯하지 않아?"
"무슨 헛소리야."
"봐봐, 뜨거운 바람이 불고 있어."
뜨거운 바람이라.
놀랍게도 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소음은 대장간에서 나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갈수록 공기가 점차 뜨거워졌다.
대장간 주변이 더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마을 전체에 그 열기가 퍼지는 거라면 대장간이 얼마나 뜨거워야 하는 것인가.
"문이 열려 있어."
대장간에서는 한 드워프가 그 문을 활짝 열고 작업 중이었다.
왜 그런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대장간의 열린 문에서 어마어마한 열풍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살인적인 열풍이었다.
문을 닫고 작업한다면, 대장간 자체가 거대한 오븐이 되어 버릴 정도로.
"크윽!"
B급 모험가들이 뜨거운 열풍에 얼굴을 가렸다.
다만 판단과 제리코는 눈을 부릅뜨고 대장간에서의 작업을 바라봤다.
카앙- 카앙!
드워프 장인이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이를 내려치고 있다.
폭삭 늙은 드워프였다.
팔뚝이며 머리카락은 그 자신의 땀으로 푹 젖어 있다.
놀랍게도 드워프는 외팔이었다.
그런데도 망치로 쇳덩이를 내리치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망치가 부딪칠 때마다 불똥이 미친 듯 튄다.
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과정을 리듬감 있게 반복한다.
"······마이스터야."
판단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마이스터가 칼을 만들고 있다고."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될까 봐 두렵다는 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제리코 또한 그것을 바로 알았다.
검을 쓰는 이로서, 마이스터가 도검을 만드는 것을 볼 기회는 몹시 드물었다.
제대로 된 검장은 드워프 중에서도 드물고, 인간이 그 과정을 볼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드워프 마이스터 헬무트는 달궈진 쇳덩이를 구부리고 다시 두드리는 접쇠 과정을 반복했다.
쇠가 식으면 그것을 다시 화로에 넣어 달군다.
"아."
이 미친듯한 열풍의 근원을 알아냈다.
대화로 안에서 보랏빛 불꽃이 일렁이고 있다.
식어 가던 쇳덩이를 그곳에 집어넣자, 불꽃이 확 휘몰아친다.
마치 악마가 그 보라색 혀를 낼름대는 느낌이다.
그리고 끔찍하리만큼 강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 ······아름다워."
판단이 그리 말했다.
제리코의 등허리도 이미 축축하게 젖었다.
더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경지에 다다른 무언가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사가 홀로 펼치는 대마법처럼.
혹은 검술의 마스터가 뿜어내는 찬란한 오러블레이드처럼.
저 다 늙은 드워프가 검을 만드는 광경은 그만큼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드워프는 자신을 구경 중인 모험가들에게 단 한 번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완벽한 검을 만들고.
그 검의 날을 세우기 위해 혼을 바칠 뿐이다.
판단과 제리코는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그 과정을 구경했다.
다른 모험가들은 반복되는 작업에 질려서 이미 자리를 잡고 쉬는 동안에도 계속.
그리고 마침내 드워프가 작업을 마쳤다.
"후우······."
완성된 것은 한 자루의 장검.
그것은 이미 만들어 둔 단검과 형제인 듯 비슷했다.
그 칼날이 검게 빛나는 것이, 평범한 금속이 아님이 분명했다.
짝짝짝짝짝.
박수를 친 것은 다름 아닌 판단이었다.
"아름다웠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헬무트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걸어 나왔다.
그의 살갗은 벌겋게 익어 있었고, 오랜 작업으로 손발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뜨거운 공기를 코앞에서 삼켜서 목은 완전히 쉬어 있었다.
"인간들? 쿨럭."
판단이 친근하게 말을 붙이려 했다.
"혹시 위대한 마이스터의 이름을 여쭐 수 있겠습니까?"
"만약 작업을 조금이라도 방해했으면 모두 쳐죽였을 텐데."
드워프 장인들이 괴팍하다곤 하지만 설마 처음 뱉은 말이 위협이라니.
기분이 상할 법도 한 일이었지만 판단은 조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설마 그런 무례를 저지를까요!"
"말은 잘하는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쭤보고 싶은 게······ 저 단검과 장검 한 쌍. 이미 주인이 정해져 있는 물건입니까?"
척 봐도 어마어마한 가치의 물건이다.
모험가들의 돈이 많다고 해도 쉬이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미 주인이 있지."
"아······!"
판단이 안타깝다는 듯 입을 벌렸다.
"혹시 그 주인분과 말을 나눠 보고 싶은데, 이 근처에 계신지 ······."
"나도 하나 묻지."
헬무트는 턱,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너희들, 마물과 친하게 지낼 수 있나?"
"예?"
황당하게 되물은 것은 다름 아닌 제리코였다.
"인간들은 특히 마물을 무서워하잖나. 말이 통한다면 마물하고 잘 지낼 수 있냐는 질문이야."
"아······."
"특히 뱀 같은 것하고."
제리코는 대답을 못 했지만, 판단이 냉큼 답했다.
"당연하지요! 말만 통하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마물하고도 친분을 맺어 보고 싶었습니다!"
"잘됐군, 이야기해 봐 그러면."
"오, 네?"
"저 검들의 주인과 이야기해 보고 싶다며."
듣고 있던 제리코가, 이 드워프가 노망이 난 건가 생각했을 때였다.
툭.
목덜미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묵직한 무언가가 제리코의 목과 어깨를 휘감았다.
대체 언제, 어디서?
A급 모험가답게 본능적으로 대응하려던 순간이었다.
챠르르륵.
비늘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목에 한기가 느껴졌다.
뱀이 제리코의 목을 물기 직전이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물려 죽는다.
맹독의 독사에게 목을 물리면 결과는 뻔하다.
그나마 일순간 멈춘 것만으로 제리코의 판단력을 엿볼 수 있었다.
허공에 종이 하나가 팔랑대며 떠올랐다.
펜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내 칼 탐내면 죽어.'
사각사각, 그런 글씨를 적는다.
'그리고, 칼 뽑아도 죽고.'
판단이 검을 뽑으려던 것을 멈췄다.
그러곤 놀랍다는 듯 파하핫 웃었다.
"대단해!"
* * *
A랭크 모험가라니 멋진걸.
마물에게도 그런 랭크가 있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나한테도 랭크가 붙으면 좋을 텐데.
S랭크 마물, 종말의 뱀 우르오로스.
이렇게 말이다.
마물 사전에도 올라가겠지?
인간들은 나를 두려워하긴 했지만, 내가 문자로 소통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그리고 특히 판단이라는 녀석의 넉살이 대단했다.
듣자 하니 왕국민이 아니라 제국 출신의 인간이라는데.
"제가 검을 사고 싶습니다."
내 검이라고 하니까 그런 제안을 하는 것 아니던가.
뱀이 검을 주문했다니 경악하는 그 옆의 인간보다는 나은 반응이었다.
'얼마에?'
내가 그리 묻자.
"여명에 제국 금화 500닢, 석양에 제국 금화 1,000닢이요. 어떠십니까."
어떻긴 어때.
나는 일단 '흠······.' 하고 적어 주었다.
여명과 석양은 각기 운철 단검과 운철 장검을 말하는 것이다.
헬무트는 운철로 단검 한 자루와 장검 한 자루를 만들었다.
둘은 형제검으로서, 희미한 여명을 상징하는 것이 단검이고. 석양의 강렬한 빛을 상징하는 것이 장검이라나.
작품명에 스토리텔링까지 담아내는 것을 보면 헬무트는 확실히 마이스터가 맞았다.
'너무 싼데.'
"큭······ 그러면 둘 합쳐서 2,000닢 어떻습니까."
'흐음······.'
곧바로 가격 오르는 것 봐라.
좀 더 놀아 주려다가 그만뒀다.
'안 팔아.'
애초에 나는 돈이 많다.
돈이 더 있어도 딱히 쓸 데도 없고.
저게 어떻게 만든 운철검인데 돈을 받고 팔겠는가.
라니아에게는 미안하게도 새벽의 단검 아쉬라를 잃었으니, 새로 얻은 저 두 검은 아껴 쓸 것이다.
다만 판단이 제시한 금액이 엄청나긴 했던 것 같다.
다른 인간들이 경악했기 때문이다.
"그, 그렇게 돈이 많았나?"
"그냥 막 지르는 거 아니야?
속닥거리는 소리가 내게는 들렸다.
- 가난뱅이 모험가들의 세상에야 그렇겠지. 쯔쯔, 드워프 마이스터가 만든 셀레스티움 소드 세트를 겨우 금화 2,000닢에 구하려고 해?
'그렇죠?'
- 저 염치없는 인간을 죽여 버려라, 뱀!
그럴까!
하지만 나는 일단 그 결정을 보류했다.
판단이 나를 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없는 부러움과 선망이 그의 눈빛에 깃들어 있었다.
나를 저런 시선으로 보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물론 로제나나 그 랑그레이라고 하는 이상한 여자는 내 비늘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 눈은 부러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런데 판단은 아주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어찌 그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뱀 씨는 손도 없으니까 검도 못 쓰실 텐데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은 참을 수 없었다.
'나 검 잘 쓰는데?'
"에이, 농담도······."
한번 뜰까? 말하면서 투명한 손으로 검을 들었다.
여명 단검을 들어서 허공에서 팽그르르르 돌린 것이다.
"어라······?"
'농담인 줄 알았어?'
판단 또한 호승심이 드는 듯했다.
그는 번쩍 뛰어오르더니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고 착지했다.
"제가 살던 곳의 표현을 써 보자면."
그러고는 떠오른 단검 앞에 서서 자신의 단검을 뽑았다.
"한 합을 겨뤄 보시겠습니까?"
좋지, 하고 대답하는 대신.
나는 꼬리로 바닥을 탁, 쳤다.
내 단검이 허공을 가르고.
판단의 단검 역시 날카롭게 짓쳐들었다.
후후.
하지만 내 단검술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페랑 유파 단검술lv1을 사용합니다.」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졌다가 턱밑을 노리는 무서운 의외성.
내 단검이 뚝 떨어진 순간이었다.
판단 역시, 단검을 뚝 떨궜다.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은 경로로 짓쳐든 단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카앙!
단검의 품질 차이 탓에 판단의 검만 이가 나갔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서로의 단검술이 정확히 일치했다는 점.
판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기를······.
"······혹시, 동문?"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사문이······?
< 페랑 유파 단검술의 전승자 >
103. 페랑 유파 단검술의 전승자
'동문? 그게 뭔데?'
나는 시치미를 뗐다.
내 단검술은 올리버라는 사냥꾼에게 전수받은 것이다.
올리버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만약에 올리버와 눈앞의 판단이라는 모험가가 같은 사문 출신이라면.
어쩌면 판단이 내 윗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처음 만난 인간을 사형이나 사숙쯤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그 단검술은 대체 어디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뱀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판단이 그런 나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뱀 씨가 정말 검을 쓸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만."
그러나 아예 시치미를 뗀다고 판단이 의심을 거두지는 않을 것이다.
"마물에게 단검술을 가르칠 만큼 특이한 사람은 없을 텐데 ······."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눈을 번쩍 뜨고 속삭이듯 물었다.
"혹시, 머리카락이 백발이고, 손가락이 여섯 개인 노인 아니었습니까?"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
이렇게 말하면 분명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음에도 알아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판단 역시 그랬다.
"혹시, 전설의 처인 페랑이 아직 살아 있던 건가······!"
나는 아예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페랑이라, '페랑 유파 단검술'을 만든 사람인 것 같았다.
"합을 더 맞춰 보시겠습니까?"
'좋지.'
내 탁월한 기억력이 아니었다면 슬슬 단검술을 까먹어 버렸을 것이다.
스킬로 습득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아예 잊어버렸을 것이고.
나는 올리버에게 배운 단검술을 시전해 보았다.
허공에 단검을 휙 던진다.
그리고 다시 역수로 잡아서 상대방의 어깨를 노린다.
"3식 2형, 하단 매사냥이군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속삭이며 감탄한다.
"다 좋지만 직선으로 찍는 것은 의외로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사삭?"
"이렇게, 호선을 그리면서 내려가는 게 신기하게도 더 빠르지요."
올리버가 강할지, 아니면 판단이 강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심드렁한 기색으로 나를 가르쳤던 올리버와 달리, 판단은 열의가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페랑 유파 단검술'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페랑 유파 단검술의 숙련도가 상승한 것이다.
판단이 내 단검술의 교정해 줄 때마다 그런 효과가 일어났다.
*「페랑 유파 단검술lv1이 페랑 유파 단검술lv2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레벨까지 올랐다.
사실, 그만큼 내 단검술에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어쩔 수 없지, 실전에서 제대로 검술을 쓸 일이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아주 훌륭한 검수였다.
"도저히 당해 낼 방법이 없군요."
괜히 어검술이 절대 고수의 상징이 아니다.
어검술을 쓰는 검사와 싸우는 장면을 상상해 보아라.
어떤 방법을 써서, 상대의 검을 쳐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어떻게든 빈틈을 노려서 상대를 찌르거나 베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검에 붙어 있는 손이 없으니 공격할 방법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검술이 미진할지언정, 판단에게는 검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벨 방법이 없었다.
어떠냐 내 검술이!
- 검술이 아니라 마법이겠지.
펠레리안이 부당하게 비난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페랑 유파 단검술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그 음해와 상관없이 스킬이 내가 검사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하하,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판단이 땀을 흘리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와 대화를 나눠 본 바.
다행히 제국이라는 곳이 무림과 똑 닮은 곳은 아니었다.
문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협지 같은 세상도 아니었다.
"무명이 있습니까?"
'뭐 몇 개 있지.'
"괜찮으시면, 제가 하나 지어 올리겠습니다, 뱀 씨."
다만 그런 낭만적인 풍습과 문화 같은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도검 어떻습니까."
'사도검!'
제국 특유의 표의 문자를 사용한 작명법이다.
사도검이라는 것이 곧바로 내 이명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헤헤, 그러면 혹시 아직도 검을 파실 생각은."
'없어.'
당연히 딱 잘라 거절해 주었다.
이제 충분히 재미있게 놀았다.
모험가들은 바깥에 아무렇게나 캠프를 차렸으니, 나는 헬무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헬무트는 몸을 씻은 뒤 앉아서 쉬는 중이었다.
"후우······."
그는 곰방대를 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따라 고개를 들어 보니 달이 예쁘게 떠 있었다.
지구의 달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달이었다.
"······내가 만든 소드 세트 중에서도, 특히 잘 만들어진 것이다. 부디 아껴 주어라."
'그럴게요.'
헬무트는 자신의 일을 마쳤으니, 다시 붉은 모루 광산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나이가 아주 많으니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르겠지.
"산맥 안으로 들어갈 거라고?"
'네.'
"아주 위험한 곳이다. 네가 제법 강하더라도 혼자 가는 건 위험할 텐데."
해봤자 대수림하고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전혀 위축되지 않자 헬무트가 피식 웃었다.
"하기사, 마물에게 마경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군."
그러하다.
"저 인간들과 동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것도 괜찮을지도요.'
인간 모험가들도 산맥 안쪽에 임무가 있는 듯했다.
헬무트는 평평한 돌바닥에 그냥 드러누웠다.
단단한 자신의 의수를 머리맡에 깔았는데, 곧 놀랍도록 빠르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도 잠을 자려고 드러누웠다.
헬무트의 망치 위에 펠레리안이 걸터앉아 있었다.
그가 자려던 내게 말을 걸었다.
- 델프람으로 가기 위해서는 칼날 석주 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칼날 석주 지대가 어떤 곳인가 하니, 그 이름을 분석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석주(石柱)란 돌기둥.
즉, 칼날처럼 날카로운 돌기둥이 가득 찬 지대였다.
- 저 인간들과 함께 가라.
헬무트와 똑같은 이야기다.
펠레리안이 설마 파티 결성을 제안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신의 던전이 남들에게 들키기를 바라지 않는 그였으니, 아주 의외였다.
'혼자서는 돌파하기 어렵나 보죠?'
- 그렇지. 저 인간들을 미끼로 쓰면 좋을 것이다.
펠레리안은 칼날 석주 지대의 위험성을 설파했다.
- 와이번들이 얼마나 위험한 마물인지 아느냐. 비행형 마물 중에서는 그놈들만큼 성가신 것들이 없어. 게다가 한둘이 아니지.
대저, 예로부터 나는 다리 여덟 개인 것들이나 날개 달린 녀석들과의 사이가 안 좋았다.
- 매서운 속도로 내리꽂은 다음에, 물고 저 높이 올라가 떨어뜨린다. 사냥감이 산산조각 나면 그 길쭉한 아가리를 벌려서 씹어 삼키지.
무시무시한 놈들.
하늘 나는 것은 수영보다 더 싫은데.
'하긴 인간들하고 같이 다니면 쟤들 먼저 노리겠군요.'
- 그렇지!
펠레리안다운 꾀였다.
하지만 나는 조금 의아했다.
'차라리 혼자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조용히 움직이면 안 들킬 것 같은데. 이실이도 아주 조용한 녀석이고.'
나는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으니, 숨어다니는 데 어려움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에 대한 답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 칼날 석주 지대의 밑바닥 역시 위험해. 토굴을 파는 흰개미들이 많거든.
흰개미?
듣자 하니 별로 위험해 보이는 마물들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흰 마물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 겪어 보면 알 것이다. 하여튼 너 혼자 갔다간 흰개미들이 먹잇감쯤으로 여길 테니 고생 좀 할 거야. 지능이 아예 없다시피 한 놈들이어서 겁도 없을 테고.
내 장점 중 하나는 남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다.
인간들과 같이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어떻게 꾀어 내지.
판단과는 그나마 친해졌지만, 제리코라는 인간과 나머지 모험가는 나를 꺼려 하는 듯했다.
일단 판단하고라도 어떻게 딜을 쳐 볼까······.
그러던 와중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판단일까.
심심한데 술 한잔하자고 할지도.
약간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판단 대신 제리코라는 모험가가 서 있었다.
"아, 저······."
그는 내가 문을 열자 당황한 눈치였다.
헬무트를 보려고 찾아온 건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판단에게 들었는데, 저 산맥 안쪽으로 향한다고······."
'그렇지.'
"혹시 저희랑 같이 다니시겠습니까? 칼날 석주 지대는 몹시 위험해서요."
이게 웬 말이야.
인간들 틈에 껴서 편하게 갈 계획을 고민 중이었는데, 오히려 인간 측에서 먼저 동행을 제안했다.
* * *
제리코의 제안에 뱀은 쉽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 날카로운 눈빛 하며, 쉬리릿, 움직이는 보랏빛 혀라니.
게다가 말을 할 수 있는 마물이다.
제리코는 어쩐지 손발이 떨렸다.
하지만 결국 그날 밤, 뱀은 제안을 수락했다.
뱀과의 임시 동행이 결성된 것이다.
그게 맞는 선택이었을지는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직 완료되지 못한 퀘스트에 대해서는 원래 함부로 말해선 안 되지만······."
뱀은 의심이 많았다.
영리하게도 모험가들이 왜 회색 산맥에 찾아왔는지부터 확인하려 든 것이다.
"사실 이미 모험가들 몇 명이 먼저 회색 산맥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편지로 지원 요청을 보냈고 저희는 그들을 도우러 가던 중이었죠."
실제로 그러했다.
"저희는 지원 역이어서 원래 그들이 무슨 퀘스트를 받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대충 짐작은 하고 있어요."
제리코는 작게 말했다.
"칼날 석주 지대를 지나면 고대 유적들이 여럿 존재하죠. 그곳에서 쓸 만한 유물을 찾으려는 듯합니다."
실제로 여러 유물이 아직까지 발견되는 곳이다.
"고대 유물이야 무척 비싼 물건들이죠, 황제의 탄신일에 보낼 선물이라는 소문도 있고요. 저희도 확실히는 알지 못합니다."
뱀은 관심을 조금 보였다.
제리코의 조리 있는 설명이 그 마물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는지도 모르겠다.
제리코가 돌아오자 동행한 모험가들이 얼른 물었다.
"따라오겠대요?"
"그래."
"허허, 잘됐네!"
그들은 기뻐했다.
모험가들이 판단처럼 마물과도 친해질 수 있는 괴짜들이기 때문은 아니었으리라.
"잡아서 수도로 데려가면 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마탑에서 매입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들은 뱀에게서 어마어마한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러면 그 검들도 우리 게 될 거고."
"근데 등에 붙어 있는 그 풀떼기는 뭐야."
"몰라,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떼다 버리면 되지."
그때, 제리코가 눈썹을 찡그리며 경고했다.
"야 이 새끼들아."
그가 모험가들을 노려봤다.
"일의 선후를 생각해. 저 뱀보다 퀘스트가 중요한 거 알잖아."
"뭐 그렇긴 하죠."
"같이 다니다가 기회가 되면 뱀도 포획해 가자고."
'고대 유물을 찾는 것 같다.'
뱀에게는 그리 말했지만, 사실 거짓말이었다.
고대 유물만큼 귀한 것은 아니지만, 고대 유물보다 더 비싸게 팔릴 것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저 뱀 역시 포획해 갈 만했다.
"그거, 잘 간수해 놔."
모험가들에게는 '그것'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배낭 옆에 기름종이로 싸 꽂아 둔.
제국 측 모험가 연합에게 빌려온 물건이다.
말이 나온 김에 제리코는 자신의 물건을 살폈다.
기름종이를 벗기자 나온 것은 기다란 금속 원통 같은 것이었다.
어깨에 견착할 수 있는 개머리판과 방아쇠가 달린.
'전격 그물총'이라는 물건이었다.
대 마물 포획 및 제압에 혁신적인 성능을 보여 준 물건이다.
신기하게도 뱀은 인간의 문물을 알았고 칼까지 쓸 수 있었지만, 이게 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총이라는 것은 제국에서 최근에 개발된 물건으로, 한낱 마물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물 총이 몹시 든든하게 느껴졌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함부로 쏘지 말아라."
"예."
모험가들이 실실 웃었다.
* * *
'와 여기에도 총이 있네.'
내가 그리 감탄하자 펠레리안이 나를 바라봤다.
- 총? 그게 뭐냐.
'그 쟤들이 들고 다니는 길쭉한 저거요. 화약으로 탄을 발사하는 도구 있잖아요.'
- 화포를 말하는 거냐? 화포는 아주 크고 비효율적인 물건이야.
'그 화포를 작게 만든 게 총이란 거예요. 영감님.'
펠레리안의 저 표정을 보아하니, 총이란 게 흔한 물건은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보니까 화약을 쓴 물건이 아닐 것 같기도 하다.
은은하게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리고 그물 총 같다. 모험가 중 한 명이 큼지막한 탄두를 점검했는데 안에 그물 같은 것이 들어 있었으니까.
재미있는 물건이구만.
경계해 둬야지.
혹시 나한테 발사하려고 하면 바로 죽음이야.
"이제부터 칼날 석주 지대입니다."
판단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실실거리는 낯짝이 이 녀석도 속이 음흉해 보인다.
차라리 저 뒤에 있는 제리코랑 모험가들이 좀 더 친근할 지경이다.
헬무트와 작별한 뒤, 모험가들과 나는 칼날 석주 지대에 도착했다.
"하늘에서는 와이번이 나올 거고, 여기서부터는 흰개미를 조심해야 하지요."
판단이 그리 말했다.
신기하게도, 칼날 석주 지대의 땅은 아주 희었다.
왜인지 궁금해서 꼬리로 땅을 긁어 보았다.
'왜 땅이 흰 거죠?'
- 오랫동안 구아노가 쌓여서 그런 거지.
'구아······.'
구아노라면 박쥐나 조류 등의 배설물이 굳어서 암석질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 지역 전체가 와이번 똥이라는 것 아닌가.
갑자기 땅바닥을 기기가 싫어졌다.
나는 얼른 모험가 하나의 어깨 위로 휙 올라탔다.
"히으엑!"
모험가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한번 왁자하게 웃음이 터져 나오고, 판단이 요상한 물건을 꺼냈다.
동그란 새장 안에 닭 한 마리가 있었다.
"이걸로 흰개미들의 위치를 찾아낼 겁니다."
자꾸 흰개미를 걱정하는데, 겨우 개미가 뭐 그리 두렵다고?
판단은 저 앞으로 새장을 던졌다.
퍼드드득!
새장 안에서 닭이 홰를 치며 꼭끼오 울어댔다.
그리고 이변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없었던 흰 바닥에, 마치 뚜껑 열리듯 구멍이 뚫리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퀘에에에엑!'
흰개미?
개미가 멧돼지만 하게 되어 있나?
──────────────
[지옥 투구 흰개미lv32]
[특성]
[매복], [군집],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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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지막한 흰개미들이 땅에서 튀어나왔다.
음, 어지간하면 인간들의 어깨 위에서 내려오지 말아야겠다.
< 드워프 건축공 살해자 >
104. 드워프 건축공 살해자
불쌍한 닭.
저 닭이 노란 병아리였을 때.
설마 자신이 흰개미 마물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사용되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꼭끼에에엑!"
그래도 참 용맹한 수탉임에 틀림없다.
새똥을 지리면서 퍼더덕대자 몸이 새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흰개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새장 채로 씹어먹을 기세로 달려든다.
그러나, 길을 갈 때마다 닭을 한 마리씩 소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재활용을 위해 새장에는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판단이 사슬을 얼른 당겼다.
카앙!
흰개미의 강인한 턱이 새장 대신 허공을 물어 챘다.
모험가들이 새장을 얼른 회수하자, 흰개미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연달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모험가들이 일제히 양팔을 벌리고 몸을 크게 부풀린 뒤, 고함을 지른 것이다.
"우아아아아아!"
"그라라라라라!"
"키야아아악!"
아무것도 몰랐다면 미친 놈들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X튜브에서 본, 등산하다 곰을 마주쳤을 때의 대처법과 똑같았다.
몸을 크게 부풀리고, 함부로 덤비면 얄짤 없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나도 가만히 있기 뭐해서 몸을 세우며 크게 포효했다.
"사아아아아악!"
놀랍게도 그것이 통했다.
흰개미들은 주춤거리더니 덤벼들기를 포기했다.
그러고는 다시 땅을 파고 들어갔다.
흰개미들의 정확한 이름은 '지옥 투구 흰개미'
지옥이라는 수식어는 왜 붙었는지 모르겠지만, '투구'가 붙은 이유는 확실했다.
놈들의 머리 위에 판떼기 같은 흰 갑각이 붙어 있다.
투구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대학생들이 졸업할 때 쓰는 학사모 같기도 했는데, 그 이유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위장용 갑각!'
땅굴에 몸을 숨긴 뒤, 그 머리까지 집어넣으니 아주 감쪽같았다.
머리의 평평한 갑각이 구멍을 완전히 숨긴 것이다.
저러니 보이지가 않지.
함정을 파고 매복하는 데에 특화된 마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쪽에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돌아서 가면 됩니다."
판단이 그리 말했다.
'그냥 지나가도 돼?'
"저희가 위협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먼저 덤벼들지는 않을 겁니다. 바로 위를 지나가면 반사적으로 덮치겠지만요."
모험가들에게는 확실히 이 지대를 돌파하는 노하우가 있었다.
"저희랑 같이 움직이시길 잘했죠?"
그렇군.
확실히 이렇게 다니면 편하긴 할 것이다.
혼자였으면 갑자기 땅속에서 튀어나온 흰개미들에게 몹시 당황했겠지.
'아 나 렙업해야 하는데.'
다만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 문제였다.
쉽게 가는 게 좋긴 하지만 레벨 업을 하기에는 힘들겠다는 느낌이다.
물론 그런 배부른 고민을 굳이 모험가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저쪽에도 던져 봐!"
첫 길목을 지난 다음, 수상해 보이는 곳에는 계속 새장을 던졌다.
흰개미들이 기척을 느끼고 올라오면.
"끼야아아아악!"
"꾸어어엉!"
"크롸롸롸롸!"
"사아아악!"
다 같이 소리를 지르며 위협한다.
중간에 크라드메서 한 마리가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자.
재미있는 게, 내 등에 매달려 있는 이실이도 함께 이파리를 흔들었다는 것이다.
아마 입이 있었다면 새싸싸싸싸싹! 하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도 싱겁게, 우리는 단 한 번의 싸움도 없이 석주 지대를 돌파해 갔다.
"생각보다 쉬운걸?"
"그래도 긴장 딱 해, 알지?"
"그래그래, 사고는 항상 방심했을 때 터지지."
그리 말하면서도 모험가들의 긴장이 풀린 게 느껴진다.
하지만 마경은 극히 위험한 곳이다.
이곳 산맥도 마경이니, 대수림과 같다고 가정한다면 결코 안심해선 안 된다.
마경에서 완벽한 대처법이나 공략법 같은 것은 없는 법이다.
실전에는 항상 예외가 존재한다.
그리고 예외를 맞닥뜨리면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는 법이다.
"조심히 건너."
제리코가 그리 말하고, 모험가들이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너무 조용히 움직이는 것도 좋지 않다.
이 위를 지나가고 있다고 흰개미들에게 경고하듯 약간의 기척을 내는 게 좋다.
이쪽의 무리가 수가 많고 위협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흰개미는 가만히 숨어 있는다.
하지만 그중에서 조금 용감한 놈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잠을 자느라 주변에 무슨 상황이 일어났는지 몰랐다거나.
혹은 너무 굶어서 배고픔을 이겨 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놈이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급작스러웠다.
나야 물론 반응할 수 있었지만, 운 나쁘게 그 옆을 지나갔던 모험가는 아니었다.
콰작!
그는 순식간에 발목을 물렸다.
흰개미는 물어 챈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어찌 반항할 틈도 없이 놈이 모험가를 끌고 들어갔다.
"끄아아아악!"
모험가가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악했다.
손톱을 땅에 박았지만 손톱자국을 만들며 끌려갈 뿐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톱들이 부러지고 뒤집혔다.
늦게나마 모험가들도 반응했다.
망치를 든 제리코가 흰개미를 후려쳤다.
터엉!
하지만 벌레형 마물답게 흰개미는 단단한 외골격을 지니고 있었다.
움푹 파이기는 했지만 치명상을 입히기는 무리다.
먹이를 문 흰개미는 악착같이 구멍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내가 움직였다.
쉬익-
헬무트가 제련해 낸 운철 단검은 아주 단단했고, 또 놀랍게도 날카로웠다.
여명이 흰개미의 미간에 정확히 꽂혔다.
뇌가 파괴되면 벌레형 마물이라고 해도 어지간하면 죽는다.
*「지옥 투구 흰개미lv39를 처치했습니다.」
마성이 흡수된다.
그러나, 이미 발생한 피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악, 놔줘, 살려 줘!"
흰개미는 죽어서도 턱 힘을 풀지 않았다.
다리를 물린 모험가는 흰개미가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고 계속 악을 질렀다.
"이 새끼야 조용히 해!"
제리코가 그런 모험가의 입을 막아서 진정시켰다.
다른 모험가가 도끼를 꺼내서 얼른 흰개미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나이프를 꺼내 흰개미의 턱을 해체하다시피 했다.
"허억······ 끄윽······."
모험가의 발목에는 흉한 상처가 나 있었다.
흰개미가 문 곳 안쪽으로 보이는 흰 것은 분명 뼈.
제리코가 상처에 포션을 부었다.
부글부글 끓으며 살이 조금 아물었지만 상처는 여전히 남았다.
"제기랄. 하필 발목을 물려서."
흰개미의 턱에 독 같은 게 묻어 있나 보다.
포션 한 병을 다 쓰고나서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 붕대를 묶었다.
붕대는 금방 피로 젖었다.
"걸을 수 있겠냐?"
"아, 아니요······."
"거기 너, 너가 얘 좀 부축해라."
지목받은 모험가는 싫은 표정을 하면서도 어깨를 내줬다.
제리코는 부상당한 모험가를 돌려 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부상당한 자 역시 그것을 눈치채고 억지로 걸었다.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부상자가 있으니 속도는 훨씬 느려졌다.
게다가 한 명은 부상자를 부축해야 하므로 전투력 손실이 더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보고 느꼈다.
'흠, 생각보다 별거 없는 친구들이군.'
제리코와 판단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다른 모험가들은 너무 어설퍼 보였다.
B급이라고 했는데 그 수준이 저 정도일까.
이들이 대수림 한가운데에 떨어졌다면 아마 며칠 가지 못하고 다 죽었을 것이다.
그림자 숲은 물론이거니와, 팔라무 우림도 버티지 못하겠지.
- 네 기준이 많이 올라간 것이다.
흠.
하긴 내가 만난 인간들은 거의 영웅이거나 마도사거나 그랬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이들의 솜씨가 내 눈에 찰 리 없었다.
'저, 저, 쯔쯔. 피 나는 거 봐.'
다리를 다친 모험가의 붕대에서 핏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일단 안전한 곳에 가서 상처를 한 번 더 보자고. 먼저 갔던 모험가 중에 치유사가 있을 거야."
"아, 알겠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피를 흘리고 다니면 다른 마물들의 식욕을 자극할 것이다.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마물인 내게는 피 냄새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근처 흰개미들도 배고파하겠구만.
"사악!"
판단을 불렀다.
그리고 경고했다. 피 냄새가 진동을 한다고.
내 경고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저것들은 뭐야······!"
어느 순간부터, 우리 일행을 따라오는 흰개미들이 생겼다.
놈들도 분명 흰개미였다.
하지만 다른 점은 그 투구의 모양새였다.
평평한 판떼기를 붙이고 다니는 듯한 다른 개미들과 달리, 뾰족한 뿔 같은 것들이 달려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살펴보니.
──────────────
[지옥 뿔 흰개미lv43]
[특성]
[추적], [협공]
──────────────
품종이 약간 다르다.
좀 더 강한 녀석들 같다.
"스캐빈져들이군."
제리코가 이를 악물었다.
"왜 벌써 나타났지?"
듣자 하니, 칼날 석주 지대의 초입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녀석들이라고 한다.
당황한 모험가들이 수군거렸다.
"안 그래도 저놈들 피해서 돌아가고 있었는데······.'
'겨우 이런 것으로 당황하지 말거라.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도저히 그냥 봐 줄 수가 없어서 한마디 했다.
대수림에도 절대 몬스터웨이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결국 일어나지 않았던가.
'마경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으니 마경인 것이다.'
"아니 갑자기 왜 말투를······."
그때였다.
"퀘에에엑!"
또다시 흰개미들이 땅에서 솟아 나와 기습했다.
모험가들은 이를 악물고 대응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조금 전처럼 물려서 끌려가는 인원은 없었다.
모험가들은 무기를 빼 들고 흰개미들에게 대항했다.
"대열 잃지 마! 거기! 튀어 나가지 말라고 이 새끼야!"
싸움 실력은 평범한 병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은데.
아무래도 호흡을 맞추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싸움이 일어나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나였다.
*「페랑 유파 단검술lv2를 사용합니다.」
팍!
투명한 손의 스킬 레벨이 꽤 많이 오르고, 제법 멀리까지 검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모험가들의 한가운데에 서서 검을 움직였다.
제리코의 다리 사이로 단검을 쏘아내 흰개미 하나의 미간을 꿰뚫는다.
제리코는 가랑이가 서늘해졌는지 다리를 휘청거렸다.
*「지옥 투구 흰개미lv29를 처치했습니다.」
피 냄새가 저들을 끌어들였을까.
우리를 뒤따르던 추적자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덤벼들었다.
휘익, 검을 긋는다.
*「지옥 뿔 흰개미lv46을 처치했습니다.」
마성, 경험치가 들어온다.
내게는 체액 한 방울 튀지 않았다.
모험가들이 악다구니를 지르고, 흰개미들이 괴상하게 딱딱 된다.
그리고 나는 이 협주곡의 지휘자처럼 중앙에서 칼만 휘두를 뿐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음.
펠레리안과 헬무트의 조언을 따른 것은 옳은 선택 같았다.
'자리요!'
굳이 앞에서 흰개미의 심장을 찾아내 물고 뜯고 하는 것보다, 튼튼한 모험가들에게 전열을 맡기고 뒤에서 싸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 마성이 아주 쑥쑥 오른다.
이게 바로 검술의 효용인가.
펠레리안 영감님, 제가 검술 배우면 다 쓸모가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 인마! 전열 뒤에서 원거리 화력을 뿜는 전장의 꽃은 검사가 아니라 마법사다!
그런가.
하여튼, 칼로 싸우면 검술 아니겠는가.
나는 검을 마구 휘둘렀다.
레벨을 하나 더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던 시점에 싸움이 멈췄다.
"허억, 헉."
"제기랄, 알고 있던 정보와 완전 다르잖아. 뭐 이리 많이 몰려와."
이렇게 습격이 잦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원래도 이렇게 위험했어요?'
- 위험했지. 그런데 유독 흰개미들이 많이 보이기는 하는구나.
펠레리안이 이곳에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것도 한참 전이다.
지금과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잠깐!"
그때 제리코가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땅바닥에 발자국이 몇 개 남아 있었다.
이곳의 땅은 그리 축축하지 않다.
진흙탕과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기에 남아 있는 발자국이었다.
"먼저 갔던 모험가들이야?"
"아니······."
발자국들의 모양이 유난히 두툼하다.
"드워프들의 발자국 같은데?"
호오.
회색 망치 마을의 드워프들은 피난이라도 간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들이 단체로 마경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대체 왜?
일단 흔적을 따라서 더 나아갔다.
곧이어 나타난 지형에, 모험가들의 안색이 환해졌다.
"아, 안전한 곳이야!"
석주와 석주가 좁게 모여서 천장을 가리고 있으며, 땅바닥은 축축한 검은 흙으로 되어 있는 지형이었다.
이런 곳이야말로 칼날 석주 지대의 안전지역이었다.
젖은 흙에는 흰개미들이 얼씬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지나간 드워프들 역시 이곳에서 쉬었나 보다.
불을 피운 잔해라든지 야영의 흔적들이 곳곳에 있었다.
"잠깐."
바람이 불자, 피 냄새가 났다.
"싸움의 흔적이 있어."
드워프들이 이곳에서 싸웠던 것 같다.
그렇다면 안전지대인 줄 알았는데 사실 마물이 숨어 있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드워프가 싸운 것은 마물이 아니었다.
자기들끼리 싸웠거나, 혹은 인간들과 싸웠던 것 같다.
시체들을 모아 불태운 것이 있었는데 인간과 드워프들의 뼈가 섞여 있었다.
"저기······ 살아 있는 거 아냐?"
모험가 한 명이 조용히 말했다.
저 구석에, 드워프 하나가 벽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꾸욱 누르고 있는 모습이다.
손에 댄 천은 말라붙은 피 탓에 고동색이었다.
"가까이 가 봐."
제리코가 그렇게 명령했다.
지목받은 모험가는 싫은 표정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 살아 있습니까?"
"······."
"저기요."
드워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왼손을 휘둘렀다.
뻑!
"크아악!"
망치에 볼을 맞은 모험가가 튕겨 나갔다.
드워프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이, 인간들, 이 더러운 인간드을!"
지상 드워프들은 친근하고 호탕한 종족이라고 들었는데.
아주 귀신 같은 몰골이었다.
"무슨 짓이야!"
"네,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한 줄 아나! 인간!"
드워프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너희들 때문에, 모두가 죽을 거야아!"
쇳소리 긁는 듯한 목소리로 그리 외친다.
흥분한 모험가들이 무기를 뽑아 드워프를 죽이려 들었다.
거기서 내가 영웅처럼 나섰다.
"사악!"(다들 멈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해라.
나는 드워프 앞에 똑바로 멈춰서 그의 눈을 봤다.
'드워프 친구. 나 뱀이올시다.'
붉은 모루 광산에서 드워프들과 친해진 경험이 있는 나다.
그렇기에, 자신감이 과했을지도 모른다.
"배, 뱀 마물이다앗!"
그는 내게 갑자기 망치를 던지고 주변에 있는 물건들까지 집어 던지려 했다.
'진정햇!'
다행히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니다.
이번에는 예전 경비대장 때처럼 반사적으로 깨물지 않았다.
실수는 한 번이면 충분하다.
"사아아아악!"
나는 위압감 있게 포효해서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을 본 드워프가 도망치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목에 난 상처가 다시 터져 버렸다.
피익!
그의 목덜미에서 피가 쭈욱 뿜어져 나오더니.
털썩.
드워프는 푹 쓰러졌다.
*「드워프 건축공lv60을 처치했습니다.」
으, 으음······.
이건 솔직히 진짜 내 잘못 아니다.
< 특등사수 >
105. 특등사수
성격 급한 드워프다.
뱀이 다 나쁜 마물이라는 것은 너무 차별적인 생각 아닐까.
오히려 내가 치료해 줬을지도 모르는데.
저 혼자 놀라서 후다닥 움직이다가 상처가 터져서 죽어 버렸다.
경험치는 꽤 많이 들어왔다.
불쌍한 드워프는 마성이 되어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 숨쉬리라.
'불태워 주자.'
나는 모험가들에게 그리 부탁했다.
그들은 떨떠름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시체를 놔둬 봤자 썩은 냄새를 풍기면서 굶주린 마물들이나 끌어들일 것이다.
드워프들이 괜히 다른 사체들을 불태운 흔적이 있는 게 아니었다.
화르륵-
내가 굳이 도울 필요도 없이 모험가들은 금세 화장을 거행했다.
이름 모를 드워프는 뼛조각만 남기고 불탔다.
하늘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제리코가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보겠군."
칼날 석주 지대의 시계가 좁다고 하나, 하늘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분명 눈에 띄는 것이다.
이 근처에 있는 이들은 전부 연기를 볼 테다.
"이게 어떤 결과를 낼지는 모르겠지만."
드워프들이 볼 수도 있고, 먼저 진입했다던 다른 모험가들이 볼 수도 있다.
후자의 상황이라면 그들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자라면······ 글쎄.
죽은 드워프는 인간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를 보였다.
"먼저 가 있던 놈들이 드워프들한테 뭔 짓을 저지른 건가?"
"아니 퀘스트 받아 간 놈들이 드워프들하고는 왜 싸워."
"싸울 이유가 없지."
혹시 인간들이 드워프들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그래서 드워프들이 인간들을 추적하러 다 같이 산맥 안으로 들어갔고, 함께 만나서 싸운 걸까.
아귀가 맞는 듯도 하지만 도저히 그럴 이유가 짐작 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한마디를 던졌다.
"철수하자."
B급 모험가 중 한 명이었다.
"퀘스트에 고지되지 않은 상황이야. 드워프 마을 전체가 나선 것 같은데 모험가들 몇이 어떻게 대적해?"
"야, 여기서 내빼면 받은 선금 두 배가 위약금이야. 난 위약금 빨리면 끝이라고."
다른 모험가가 왈칵 화를 냈다.
"지금 같은 상황이면 철수 가능해. 위약금도 안 물릴 수 있어."
"그건 네 생각이겠지. 연합이 그렇게 봐줄 리가 없어. 이게 그렇게 만만한 퀘스트였으면 선금이 그렇게 넉넉했겠냐?"
대체 퀘스트 보수가 얼마였기에 그래.
나도 지금 참가하고 있는데 나눠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제리코나 판단에게 한번 진지하게 말해 봐야겠다.
모험가들은 내 생각보다 용감하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철수해야 하느니 안 된다느니 하며 갑론을박을 벌였다.
너희들이 떠나면 나 혼자 돌파해야 하는데.
그럼 안 되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이실이 내 위에서 이파리를 파닥댔다.
자기도 있다는 듯 말하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인간들이 나와 이실을 한 몸쯤으로 안다는 것이다.
이실이가 하루 종일 내 몸에 붙어 있으니, 아마 담쟁이덩굴을 붙이고 다니는 특이한 뱀쯤으로 아는 듯하다.
그때 제리코가 묵직하게 말했다.
"철수하지 않는다. 적어도 먼저 갔던 모험가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인해야 해."
역시 모험가들의 암묵적 리더.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리자 몇 명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대놓고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냥 돌아가면, 위약금으로 끝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와이번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건 이미 고지됐어."
제리코의 그 말에는 묘한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
판단과 제리코는 따로 아는 게 더 있는 듯하다.
다른 모험가들도 뭔가를 눈치챘는지 얼굴이 흙색이 되었다.
"제길, 똥 밟았네."
"이래서 파란 퀘스트 용지는 건드리는 게 아닌데."
아무래도 받은 퀘스트가 특별한 것 같다.
"그래도 다친 한슨을 포함해서 한 명 정도는 돌아가는 게 좋겠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험가들의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정작 한슨은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나, 나를 버리겠다는 거잖아."
"무슨 개소리야! 그래서 한 명 붙여 주잖아."
"그래도, 겨우 둘이서 돌아가다간······."
"냉정하게 생각해. 다친 다리로 함께 계속 가는 게 안전할지. 완수금은 포기하더라도 여기서 돌아가는 게 나을지."
"······."
함께한다고 더 안전한 것은 아니다.
만약 필요한 경우라면, 모험가들은 분명 다리를 다친 한슨을 미끼로 쓸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다리를 다친 자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둘이서 물러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지원자가 있었다.
"난 이런 곳에서 뒤질 생각 없다고······."
그냥 조용히 가면 되지 꼭 저렇게 초를 치는 녀석들이 있어.
분위기가 아주 썩어들어 갔다.
'자, 가자가자.'
나와 이실이가 분위기 메이커를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제리코 어깨 위에 올라가서 등을 툭툭 쳐주니 제리코도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한다."
휴식은 취할 만큼 취했다.
모험가들이 조심조심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전에 저 흰 봉우리까지 가고 싶은데 ······."
제리코가 중얼거렸다.
'으음, 긴장의 냄새.'
뱀은 후각이 좋다.
나도 후각이 좋다.
그 덕에 알게 된 것이 있는데.
긴장한 사람이 흘리는 식은땀에서는 긴장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별로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지금, 모험가들은 밤이 찾아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긴, 암시야도 없는 애들이니 캄캄한 곳이 얼마나 무섭겠어.
수상한 길목이 나타났다.
제리코가 여태까지 했던 일을 반복했다.
닭이 들어 있는 새장을 길목에 던진 것이다.
터엉, 푸드드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숨어 있던 흰개미들이 땅에서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 수가 조금 많다.
우리가 인간 다섯, 뱀 하나, 덩굴풀 하나.
흰개미는 열이 넘는다.
이쪽에서 고함을 질러 보았지만, 저놈들도 쪽수는 셀 수 있는 것 같다.
"퀴이이이익!"
흰개미들은 싸우기를 택했다.
모험가들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나는 오히려 좋아다.
전투가 시작되고.
판단이 왼손에 든 버클러로 흰개미의 안면을 후려쳤다.
터엉!
그러면 내가 석양을 날려서 흰개미 머리통을 뎅강 베어 버린다.
*「지옥 투구 흰개미lv34를 처치했습니다.」
자, 사냥의 시간이······.
'어.'
이변이 벌어졌다.
흰개미들이 일제히 싸움을 멈춘 것이다.
놈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이다.
구름 말고는 딱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타닥, 타닥, 타다닥.
그런데 흰개미들이 일제히 턱을 부딪치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어어!"
제리코의 안색이 하얘지고.
흰개미들이 허겁지겁 자기들이 빠져나온 토굴로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우리한테 쫄아서 도망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와이번이다앗!"
구름 사이에 검은 점 같은 게 보였다.
드디어 와이번을 만나는 건가.
나와 달리 모험가들은 혼비백산했다.
어지간하면 제리코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던 판단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흰개미 잡아! 두 마리는 더 잡아야 돼!"
그는 장검을 빼 들어 도망치는 흰개미를 쫓았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흰개미 하나의 머리통을 잘라 냈다.
생각보다 더 빠른 몸놀림이다.
저 녀석, 실력을 숨기고 있던 건가.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팔을 기어올라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와이번이 나타났는데 왜 흰개미를 잡아야 하나 싶었는데,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판단은 과감하게 흰개미가 숨어 있었던 토굴로 뛰어들었다.
곧바로 흰개미의 머리를 뚜껑처럼 써서 위를 막았다.
흰개미의 위장 방법을 빌린 것이다.
이게 와이번이 출몰했을 때의 대처법인 것 같았다.
똑똑한걸.
"후우, 후."
판단이 거칠게 호흡했다.
그 역시 다른 모험가들처럼 긴장한 것이다.
다행히 모든 모험가들이 숨을 수 있었다.
다만, 구멍을 덮은 흰개미의 갑각에 약간의 틈이 있었다.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부디 들키지 않기를.'하고 바라는 듯한 판단의 표정이 보였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대체 와이번이 어떤 놈들일까 더 궁금해졌다.
나는 틈으로 바깥을 살펴봤다.
와이번이 접근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냥 처음부터 이쪽을 못 본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었고, 그것은 판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다만 모험가 중 누구도 토굴에서 기어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계속 이어지고 조금 잠이 올 것 같아지는 시점이었다.
쿠웅!
정말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조류보다는 파충류의 것에 가까운 튼실한 발이 보였다.
새카맣게 빛나는 발톱은 독수리의 발톱처럼 날카롭다.
'와, 완전 조용히 날아오네.'
- 무음 비행 능력을 지닌 와이번이 많지. 먹이 경쟁이 심할 테니.
'깜짝이야!'
옆에서 펠레리안이 갑자기 소리를 내서 조금 놀랐다.
와이번은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일단, 저놈이 얼마나 강한지부터 살펴볼까.
──────────────
[그레이 혼 와이번lv97]
[특성]
[간교함], [무음], [부부]
──────────────
다행히, 상태창이 아예 안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산맥에 있는 와이번이 한두 마리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 정도급이 나오면 조금 쫄았으리라.
이름이 뭔가 내가 '화이트 혼 스네이크'였을 때와 비슷한 느낌인데.
그 강함은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
스킬창도 화려하다.
──────────────
[스킬]
[무음 비행lv10], [물어찢기lv17], [날개치기lv9], [휩쓸기lv4], [울부짖기lv10], [초토화lv5], [추락lv10], [가속lv5], [참격 내성lv10], [열 내성lv5], [독 내성lv10]······
──────────────
공격에 쓸 만한 스킬만 있는 게 아니다.
녀석은 내성류도 제법 잘 갖추고 있다.
모험가들이 괜히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태창에는 적혀 있지 않은 체급의 문제가 있다.
쿠웅, 쿵.
날아올 때는 조금의 소음도 내지 않았던 놈이, 무겁기는 꽤 무거운 것 같다.
놈이 걸을 때마다 바닥이 쿵쿵댄다.
다행히 눈썰미가 아주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좀처럼 포기하고 떠나려 하지를 않는다.
따다다닥, 딱, 딱.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다닌다.
마치 개구리가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벌레가 내는 소리 같기도 하다.
따다닥, 딱.
그런 소리가 날 때마다 판단이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놈이 무언가를 툭 떨어뜨린 것은.
사람의 상반신이었다.
조금 전, 다리를 다친 채 돌아갔던 모험가다.
죽어서도 공포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흐읍."
판단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제법 겁먹은 것 같다.
'진정해, 너무 걱정 마 판단.'
내가 판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이실 역시 이파리를 내밀어 판단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사람의 상반신을 땅에 떨군 와이번이 식사를 시작했다.
보통 잔인한 광경이 아니었다.
다른 모험가들도 많이 무서워할 것 같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면.
'독 내성이 조금 높은 것 같기는 한데······ 전격 내성은 약하고.'
재고 있었다.
'날개 피막을 확 그어 버리면······. 아니 땅에서도 세려나?'
와이번의 강함과 내 강함을 말이다.
저 녀석은 강해 보이지만 싸워서 못 이길 녀석은 아닌 것 같다.
새와 뱀의 상성 차가 있어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나, 우르오로스.
얼마 전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불도마뱀도 사냥한 거물 아니신가.
조용히 기습하려던 나는, 잠시 후 생각을 바꿨다.
음, 지금은 아니다.
지금보다는······ 차라리.
그때, 식사를 마친 와이번이 날아올랐다.
자세히 들어 보니 날갯짓 소리가 미세하게 나기는 한다.
그것도 점점 멀어지더니 사라졌다.
한참을 기다렸다.
하지만 판단은 여전히 나갈 생각을 안 했다.
다른 모험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슬슬 나가자.'
판단에게 그리 말했지만,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틈으로 쑤욱 나가 버렸다.
"익, 엡!"
판단이 내 꼬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바깥에는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밤이 될 것 같았다.
와이번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흔적, 핏자국. 그리고 와이번 놈이 싸지르고 간 푸짐한 똥 한 사발이 놓여 있을 뿐이다.
"사아아악!"
내가 크게 호통을 질렀다.
그제야 겁많은 모험가 녀석들이 비칠비칠 토굴에서 기어 나왔다.
와이번이 완전히 떠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제기랄 진짜 무서워서 똥 지릴 뻔했네."
"나는 오줌 쌌어······."
아니 이런 겁쟁이들이 다 있나.
너무 황당했지만, 이들에게도 나름 변명할 것이 있는 듯했다.
"이게 바로 와이번 피어인가."
드래곤 피어도 아니고 와이번 피어가 있나.
와이번이 내던 괴상한 소리가 인간들에게는 제법 공포스럽게 들리나 보다.
"곧 밤이 된다. 저기, 저쪽으로 가서 야숙을 하자."
제리코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그리 말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땅이 검고 석주가 하늘을 가리고 있는 지형이 보였다.
모험가들이 비칠비칠 그쪽으로 향했다.
* * *
"제리코 선배."
모험가 한 명이 제리코의 귀에 속삭였다.
"돌아가죠. 이건 미친 짓입니다."
"······."
제리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와이번이 나올 때가 아니에요. 그레이 혼 와이번이 칼날 석주 지대의 초입부에 나온다는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고요"
조금 전에 이미 후퇴는 안 된다는 말을 나눈 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리코도 잠자코 들었다.
"이미 산맥에서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원래 우리가 알았던 정보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으음."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그러면, 저 뱀을 잡아가는 거 어떻습니까."
제리코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거 잡아가면 의뢰자 쪽도 만족할걸요? 생긴 것도 보통 특이한 게 아니고 척 보기에 고유종 마물 같은데······."
하긴, 원래 그들이 지원하려던 모험가 파티도 '귀한 것'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지 않았던가.
"제법 강한 마물이야. 크기가 작고 하는 짓이 새끼고양이처럼 유치하긴 해도."
모험가는 대답하는 대신, 자기 등에 메고 있던 전격 그물 총을 툭툭 두드렸다.
이것을 쓰면 저런 뱀 같은 것은 쉽게 포획할 수 있을 것이다.
제리코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가 결정을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어어, 뭐야, 뭐 해!"
모험가 한 명이 당황해서 외치고 있었다.
저렇게 큰 소리를 내면서 날뛰다니, 제리코가 인상을 와락 찡그리고 돌아보니.
"허어억!"
"내려놔, 내려놔! 위험한 거야!"
뱀이 그물 총을 들고 있었다.
당연히 손으로 든 것은 아니고.
검을 쓸 때처럼 마법을 이용해서 든 것 같다.
"진정해! 무슨 일이야!"
저렇게 당황하다니 등신같이. 제리코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뱀이 총을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전장치까지 달려 있지 않은가.
그냥 호기심에 만져 본 것 같은데 이렇게 당황하면······.
그때였다.
뱀이 자연스럽게 탄환을 장전한 것은.
철컥!
그리고 안전장치까지 풀어서 제리코를 겨냥한다.
제리코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탄창 결합!
노리쇠 전진!
조정간 단발!
조정간은 없지만.
대충 이렇게 하면 될 것 같다.
나도 총은 쏴 봤으니까.
그리고 중언부언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준비된 사수로부터 사격 개시.
터엉!
화약식이 아니어서일까, 소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탄두가 허공을 갈랐다.
제리코의 정수리 위를 지나고.
돌기둥에 착 달라붙어 숨어 있던 와이번에게 적중했다.
퍼엉!
하늘에서 펼쳐진 그물이 와이번을 휘감았다.
타다다다다닥!
전격의 불똥이 요란하게 튀긴다.
와이번이 고통의 포효를 질렀다.
< 와이번 굴 >
106. 와이번 굴
'와!'
가까이서 와이번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이 그물 총이라는 것의 성능이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그물은 놀랍게도 크게 펼쳐졌다.
저 거대한 와이번의 한쪽 날개에 완전히 엉겨 붙는 수준.
그것뿐이라면 별것 아니겠지만, 내 눈에는 명확히 보였다.
그물 총의 가운데에 마석 같은 것이 박혀 있다.
그리고 마석에는 복잡한 문양의 룬어가 적혀 있었다.
- 마누스 임펄스, 라고 읽는 것이다. 저것이 내가 가르쳐 준 각인 마법의 응용이로다.
알아요!
그리고 와이번의 날개를 휘감은 그물에서 푸른 불똥이 튀었다.
상대를 감전시키는 벼락의 마법이 분명했다.
당연히, 천뢰령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효율적이었다.
"꾸오오오오오!"
와이번이 쩌렁쩌렁한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기 때문이다.
푸른 불똥 덕에 인간들에게도 놈의 모습이 잘 보였으리라.
그것은 정말이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아까 본 그놈이었다.
조용히 이곳 석주에 붙어서 인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매, 매복을 하고 있었다고······!"
와이번의 지능이 결코 낮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곳이 인간들이 쉴 만한 곳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리 숨어 있었으니.
모험가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겨우 그물 총 한 발로 저렇게 큰 와이번을 대적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종이에 글을 휘갈겨 제리코의 코앞에 들이 댔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물 총을 더 쏴.'
제리코는 당황한 상태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내 차례다.
"구오오, 구옥!"
감전되었던 와이번이 몸을 일으켰다.
그물의 재질이 약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날개를 억지로 펴자 뿌드득 하면서 그물이 끊어진다.
놈이 홰를 쳤다.
날아오르려는 것이 분명했다.
'저렇게 큰데 날 수가 있다니.'
몸이 천천히 떠오르려 한다.
공중전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식심의 도약lv3을 사용합니다.」
훤히 드러난 놈의 가슴팍, 심장을 뜯어낼 생각으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역시 와이번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놈의 길쭉한 주둥이가 휙 움직였다.
자칫하면 물릴 뻔했다.
몸을 간신히 피했다.
심장 대신, 놈의 어깻죽지 부근을 물었다.
까드득!
쑤욱 들어가는 느낌 대신, 이빨을 간신히 박아 넣는 데에 그쳤다.
독액이 들어가는 기세도 수월하지 않다.
가죽과 근육이 보통 질긴 것이 아니리라.
그나저나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히 알 수 있겠다.
와이번은 드래곤이랑 닮았을 줄 알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 대가리는 아니었다.
몸의 전체적인 실루엣은 상상 속의 드래곤과 같았지만 목부터 머리까지는 꼭 뱀과 닮았다.
그러니까, 날개와 다리가 돋아난, 이상하게 생긴 뱀 친척 같았다는 말이다.
"구워어어억!"
무릇 뱀이라고 하면 '사아악!'하고 울어야 하거늘.
구워억이라니 너는 뱀 실격이다.
뱀의 특징은 그 근육이 몹시 유연하다는 것이다.
와이번 역시 그랬다.
무려 자신의 어깻죽지에 매달린 나를 물어 채려고 목 근육을 둥글게 비튼 것이다.
쩌엉!
이빨이 내가 있던 곳을 깨물자 천둥소리 같은 게 났다.
간신히 피해서 놈의 어깨를 타 넘고 등허리로 매달렸다.
등줄기에는 척추를 따라서 돌기가 뾰족뾰족하게 나 있었다.
그러자 놈은 무려 림보를 하듯 모가지를 뒤로 꺾었다.
물리지는 않았지만 그 대가리에 맞아서 튕겨 나갔다.
땅바닥을 한 바퀴 구르며 착지했다.
까딱까딱.
'이실아 괜찮니!'
이실이는 내 몸에 딱 붙어 있었다.
다행히 땅바닥을 구른 정도로 이파리나 줄기가 뭉개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실이는 보기보다 아주 튼튼했다.
모험가들도 제 할 일을 했다.
"발사아!"
그들이 그물 총을 들어 와이번에게 일제히 발사했다.
퍼퍼펑!
그물 세 개가 단번에 와이번을 휘감았다.
파지지지직!
불똥이 튀면서 와이번이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분명 전격 내성이 높지는 않았는데, 나자빠지거나 죽을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이래서 마물들이 위험한 거다.
"구어어어어!"
하지만 내게는 아직 쓸 수 있는 수가 많이 남았다.
*「투명한 손v13을 사용합니다.」
장검 한 자루가 어둠을 가르며 날아갔다.
놈의 목을 향해.
푸욱!
석양이 얼마나 뾰족하고 날카로운지를 생각하면, 검신의 3분의 1밖에 박히지 않은 것이 놀랍다.
아주 질긴 놈이었다.
힘을 줘서 목을 베어 내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그대로 놈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이 나를 뭉개려는 듯 그 대가리를 찍어 내렸다.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피했다!
터엉!
놈이 터프하게 얼굴을 땅에 처박은 탓에, 뒤에서 흙이 확 치솟았다.
그사이 나는 녀석의 가랑이 아래로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그물 총에 감전되는 정도론 끄떡없다면.
*「천뢰령lv2를 사용합니다.」
더 강력한 벼락을 불러내면 되는 일 아닌가.
다만, 천뢰령의 끔찍한 단점은 바로 스스로에게 벼락이 떨어진다는 점이니.
이실이를 몸에 붙이고 다니게 된 후,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고심했었다.
벼락은 하늘 위에서 떨어지니.
적의 아래로 들어가고 위에 피뢰침까지 박아 넣으면 되는 것 아닐까.
이번 과학 실험은 다행히 대성공이었다.
쩌저저저정!
'파지직' 따위가 아니라 훨씬 더 호쾌한 소리가 울렸다.
모험가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제 눈을 감싸 쥐었다.
벼락은 내게 떨어지는 대신 와이번의 목에 박아 넣었던 장검에 떨어졌다.
강력한 전격이 놈의 몸을 뻣뻣하게 마비시켰다.
피가 주르륵 떨어진다.
나와 보니, 놈은 두 발로 선 채 굳어 있었다.
연기인지 수증기인지 모를 것이 놈의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험가들은 판단과 제리코를 제외하고 전부 두 눈을 부여잡고 있다.
한심한 녀석들!
어쨌든 나는 훌륭하게 와이번을 해치웠다.
다만······
왜 마성이 흡수되지 않는 거지 싶었는데.
꿈틀.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도망치려는 듯 날개를 다리처럼 써서 움직인다.
그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놓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는 휘익 뛰어올랐다.
여전히 놈의 목에 박혀 있는 검의 손잡이를 앙 물어서······
치이익!
악!
입이 화끈하게 데여 버렸다.
벼락 때문에 검이 달궈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검을 놓치고 다시 떨어지려던 순간.
이실이 나섰다.
휘리리릭!
내 몸에 붙어 있던 이실이 덩굴을 휙 뻗어 낸 것이다.
길게 뻗어 낸 덩굴 가닥들이 검 손잡이를 칭칭 감았다.
화염 면역을 갖추고 있어서 이 정도 뜨거움은 상관없는 것 같다.
'잘했어!'
착지한 내가 단단히 땅에 붙어서 버티려고 하는데.
'이런,'
체급 차가 너무 크다.
검을 꽉 잡았지만 나는 질질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거대화를 써야 하나 고민하는데.
"으아아!"
"빨리 와서 도와! 잡아앗!"
모험가들이 달려왔다.
그러곤 내 몸을 두 손으로 움켜잡아서 당기기 시작했다.
줄다리기도 아니고.
'아파!'
하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검을 와이번의 목에 박아 넣고 세게 잡아당겼으니.
뿌드득- 뿌각!
날카로운 운철검은 기어코 와이번의 가죽과 목뼈를 갈라 냈다.
푸화아악!
피가 솟으며 와이번의 거대한 몸뚱이가 기울었다.
흙먼지가 확 솟구치는 충격.
마침내.
*「'그레이 혼 와이번lv97'을 처치했습니다.」
*「마성을 흡수합니다.」
이실이와 내 사이가 가까워서 그럴까.
사냥을 하면서 얻은 마성이 이실이에도 공유되는 것이 명백히 느껴졌다.
모험가들에게는 안 나눠지는 것 같은데.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실이와 마성을 나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양이 보통이 아니다.
순식간에 레벨 업을 두 번이나 했다.
역시 자잘자잘한 흰개미를 때려잡는 것보다 와이번같이 큰 놈 한 마리를 잡는 게 백 배 낫다.
'그래도 쉽진 않았네.'
- 와이번은 결코 만만한 마물이 아니다. 특히 떼로 덤빈다면 아주 위험하지.
펠레리안이 그리 말했다.
하긴, 만약에 나 혼자였다거나 와이번이 한 마리만 더 있었다면 위험했으리라.
'영감님은 대체 왜 이런 곳에 던전을 지은 거예요?'
펠레리안의 던전은 칼날 석주 지대를 통과해서도 더 나아가야 있었다.
- 들어가기가 개같이 어려우니까 지은 것 아니겠느냐. 아무나 오지 못하니까.
'하긴······그런데 영감님은 어떻게 들어간 거예요?'
델프람의 던전은 침입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공중은 와이번이, 지상은 흰개미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그러면 펠레리안은 어떻게 던전을 찾아갔을까.
- 뭘 어찌하나. 투명화 마법을 쓰고 날아가면 되지.
투명화와 비행 마법.
나도 아직 익히지 못한 고급 마법들이었다.
내심 역시 마검사의 길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도 열심히 배워야지.
펠레리안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참 좋아했을 텐데.
하지만 말해 줄 기회가 없었다.
"구오오오오오-"
"꾸오오옥!"
어두워진 밤하늘에서 와이번의 포효가 울렸기 때문이다.
"더, 더 있었어!"
모험가들이 경악했다.
그레이 혼 와이번 한 마리를 잡긴 했지만, 이놈 하나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한 마리 정도는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괜히 처음에 기습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놈의 특성에 적혀 있던 '부부'.
그렇다면 또 한 마리의 와이번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구오!"
- 저게 아내인가 보군.
방금 잡은 것만큼 큰 녀석이 하나.
"꾸레레레."
"꾸게게게게겍!"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작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녀석들이 셋.
부부가 아니라 가족이었나.
무려 네 마리의 와이번이 더 가세했다.
이러면 거대화를 써도 위험하겠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돔황챠-!'
"도망쳐엇!"
죽자고 달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모험가 중에서 가장 다리가 빠를 듯한 녀석 위에 올라탔다.
판단의 어깨였다.
"황제폐하 맙소사-!"
제국민스러운 표현을 하는 판단.
그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여유로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물 초옹!"
제리코가 그리 외치자 모험가들이 허겁지겁 그물 총을 장전했다.
그물 총의 수는 총 네 개.
네 개 다 조금 전에 한 번 발사했다.
총의 구조가 현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탄환을 총구를 통해 집어넣는 전장식(前裝式)이었다.
물론 화약 무기가 아니니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다만.
모험가들이 허겁지겁 달리면서 탄환을 총구로 집어넣으려 애썼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리코가 가장 빠르게 총을 장전했다.
퍼엉!
새끼 한 마리가 그물에 맞았다.
놈이 추락했지만, 분명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펑- 퍼엉!
나머지 둘도 그물 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둘 다 아무도 맞추지 못했다.
와이번들은 회피기동을 하며 그물을 피했다.
죽은 와이번의 반려가 매섭게 하강했다.
하나 남은 그물 총을 장전하던 모험가가 겁을 먹곤.
"아앗!"
바보같이 탄환을 떨어뜨렸다.
와이번은 그 틈을 노렸다.
퍼억!
와이번이 내려꽂혔다 상승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험가가 사라졌다.
"으아아악!"
비명 소리가 멀어졌다.
하늘 높이 올라간 와이번은 그대로 물고갔던 모험가를 떨어뜨렸다.
긴 추락.
그리고 비명이 멎었다.
고기 조각이 된 모험가에게는 관심도 없는지, 와이번은 다시 이쪽으로 날아왔다.
혹시나 해서 놈에게 광선을 쏘아 보았다.
녀석은 끄떡도 안 했다.
'광선도 소용없네.'
하긴, 칼도 잘 들어가지 않는 가죽이었다.
파괴광선도 아니고 그냥 '광선'으로는 타격을 입히기 어려웠다.
나야 괜찮았지만 모험가들은 공포에 질려 버렸다.
"씨발, 씨발!"
제리코마저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밤하늘에서 한 줄기 희망이 올라온 것은.
희망의 색은 붉은색이었나 보다.
저쪽 하늘에서 빛나는 붉은 선은 분명 신호탄이었으니.
누가 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와이번보다는 안전하라라.
"저쪽이야! 달려!"
모험가들은 미친 듯 달렸다.
와이번들이 기어코 뒤처진 자 하나를 물어 챘다.
새끼들이 허공에서 불쌍한 모험가를 물어뜯고 난도질했다.
그가 일평생 소중히 품고 있던 장기들이 피와 함께 후두둑 떨어진다.
"이쪽으로, 여기로오!"
신호탄이 쏘아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후드를 쓴 사람이었다.
제리코와 판단의 표정이 밝아졌다.
모험가였다.
그들이 지원하기 위해서 찾고 있던 모험가들이, 정작 판단과 제리코를 도운 것이다.
그는 땅바닥에 뻥 뚫려 있는 구멍 앞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들어오라는 제스쳐다.
저게 흰개미의 토굴이라면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일 텐데.
하지만 모험가들에게 주저할 틈은 없었다.
그들은 순서대로 토굴에 뛰어들었다.
기다리고 있던 자부터.
제리코.
그리고 나와 판단까지.
"퀘에에!"
뒤늦게 도착한 와이번이 미친 듯 구멍에 대가리를 집어넣으려 했다.
*「광선lv3을 사용합니다.」
치명적인 상처는 못 내도 무척 따갑게 할 수는 있으리라.
우리를 잡지 못한 와이번이 분노로 포효했다.
"꿰에에에에에엑!"
토굴 안쪽이 쩌렁쩌렁 울렸다.
"허억, 허어억······."
제리코와 판단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순식간에 그 많던 동료들이 다 죽고 둘밖에 남지 않았다.
"제리코!"
우리를 인도했던 사내가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야콥!"
제리코도 놀라서 아는 체를 했다.
"지원 온다는 게 너였구만!"
하지만 야콥이라는 자는 전혀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설마 너희 둘이 전부는 아니겠지?"
"아니, 나머지는 다 죽었어."
"다 죽었다고? 마법사는, 투명화를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어딨어! 우리가 지원해 달라고 했던 마법사!"
그런 요구를 했었나 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일행 중 마법사는 없었는데.
"마법사는 애초에 없었어."
"무슨 개소리야!"
야콥이라는 모험가가 악을 질렀다.
지금 보니, 그의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온몸은 땟국물로 젖어 있었고, 충혈된 눈동자며 떨리는 손을 보면 안다.
"왜 너희들만 온 건데!"
"고위 마법사 자원은 한정적인 것 알잖아."
"제기랄, 우린 이제 다 뒤졌군!"
야콥은 기어코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침묵을 깬 것은 판단이었다.
"······여긴 어디예요?"
때마침 내가 궁금했던 것을 질문해 주었다.
그래, 여기는 대체 어디냐?
흰개미의 토굴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바닥에는 돌이 깔려 있었고, 어둠 속으로 긴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발견한 지하 유적이야. 와이번을 피해서 들어왔어."
"이런 곳이······ 그런데 왜 이렇게 와이번이 날뛰는 겁니까."
"임무에 반쯤 성공했으니까······."
저게 무슨 말일까.
"다행히 이곳을 찾아서 숨을 수 있었지만······ 이 유적도 뭐 하는 곳인지는 모르겠단 말이야."
"적어도 와이번한테는 안전하겠네요."
"그치, 일단 따라와. 일행은 저 안쪽에 있으니까."
그런데, 이들의 나쁜 운은 겨우 이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펠레리안에게 확인차 물어봤다.
'여기, 뭐 하는 곳이에요?'
- 나도 처음 보는 곳이다만. 대충 읽어 보자면 ······.
고대유적에는 뭐라도 적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와 펠레리안은 벽면의 글귀를 읽을 수 있었으니.
'와이번의 제단?'
그것이 모험가들이 와이번을 피해서 숨은 유적의 이름이었다.
< 퀸 등장 >
107. 퀸 등장
대륙에 퍼져 있는 수많은 고대 유적들을 그저 '고대 유적'이라 칭하고.
그것을 짓고 생활했던 이들을 그저 '고대인'이라고 뭉뚱그리는 것은.
마치 인간과 드워프, 요정, 심지어는 저 오크나 고블린마저 '사람'으로 묶어 부르는 것과 다름없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확한 표현도 아니라는 뜻이다.
고대 유적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양식이 전혀 다르다.
현대와 벨레포크 시대까지의 간격보다, 벨레포크 시대와 오보에 시대의 간격이 훨씬 크다.
오보에 시대에 지어진 고대 유적은 벨레포크 시대에도 이미 고대 유적으로 취급되었으리라.
이번 챕터에서는 특히 오래된 문명인 오보에 문명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오보에 문명은 대륙 북동부.
지금의 '산맥'을 중심으로 발전된 문명이다.
당시의 기후는 지금과 많이 달랐으리라.
지금의 온난하고 비옥한 중부평야는 위험한 마물들로 가득 차 있었고, 오히려 험난한 산맥이야말로 당시 문명의 보금자리가 되어 줬을 것이다.
그때도 산맥에는 와이번이 존재했다.
허나 지금과는 달리 털이 났고 사람의 말을 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당시 오보에인들은 지금의 인간보다 더 털이 많고 체구가 컸으니, 이런 특징이 그들과 와이번의 관계를 돈독하게 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벨레포크 시대에 이미 오보에 문명의 유적을 탐구했던 기록이 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오보에 문명이지만, 당시만 해도 보존된 게 있었던 것 같다.
벨레포크인들이 오보에 문명에 대해 서술하기를.
'사람과 결혼한 와이번이 있었다.'
'와이번과 결혼한 사람이 있었다.'
'고대에는 사람도 마물도 같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런 놀라운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소양 있는 학자라면 오래된 기록을 곧이 믿지 않는 법이다.
사람과 와이번이 맺어질 수는 없다.
아무리 수천 년 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와이번과 사람 간에는 넘을 수 없는 종간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만큼 와이번과 오보에인들이 가깝게 지냈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마물과 고대인의 관계에서 흔히 관찰되는, 신앙이 결부된 관계이리라.
그들은 와이번에게 식량을 바치고.
와이번은 다른 두려운 마물로부터 오보에 인을 지켜준다.
그런 관계가 이어져 왔으리라 추정한다······.
「현자 파르비안의 고대 유적 탐구中」
* * *
"와이번들한테 쫓겼어. 그놈들은 미쳤다고."
야콥이라는 모험가가 그리 말했다.
"그나마 여기를 찾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들은 와이번들에게 쫓겼다고 한다.
포악한 와이번들에 의해 원래 무리가 열 명이었는데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나.
그러던 와중에 지하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이쪽으로 쭉 나가면 큰 공간이 나와. 그쪽이 유적의 중앙부야.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지만 중앙 부분에서 여러 갈래로 통로가 나 있는 것 같아."
뭐 하는 곳인지 모르다니.
'와이번의 제단'이라는 단어만큼, 뭔가 수상한 유적 같은데.
나는 펠레리안에게 질문했다.
'뭐 아는 것 없어요?'
- 오보에인들이 이쪽에 살았던가, 그들이 와이번을 신처럼 모셨다고 들었는데.
그 고대인들이 이 유적을 지었다면 그 목적은 뭘까.
제단이라면 종교적인 시설 같기도 한데.
"퀘스트는 완수한 건가?"
제리코가 야콥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진 완수했지, 구했어."
제리코가 말하길, 모험가들은 고대 유적에서 유물을 찾으러 떠난 거라고 했었다.
사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러면 왜 아직도 여기 있었던 거야? 통로가 있으면 도망칠 수도 있었잖아!"
제리코가 지적했다.
목소리에는 분노의 기색마저 담겨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괜히 여기까지 왔다가 몇 번을 죽을 뻔했으니까.
야콥도 울컥해서 외쳤다.
"시팔, 나도 돌아가고 싶었다고!"
"그럼 왜!"
"가 보면 알아. 제기랄,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고대어를 알고 투명화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투명화는 그렇다 쳐도, 고대어 아는 마법사와 뱀 하나는 여기 있는데.
하지만 나는 굳이 내가 고대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들이 수상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벽화를 살폈다.
통로의 벽면에는 벽화가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만. 마치 전쟁포로들을 이끌고 가는 듯한 그림이 있었다.
손이 묶인 사람들이 어딘가로 끌려간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제단에 바쳐져 와이번에게 잡아먹힌다.
포로를 끌고 가 와이번에게 바친 인간들은 손을 높이 들며 와이번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수상한 거 알겠다!'
나만 그것을 눈치챈 게 아니었다.
"벽화의 내용이 범상치 않은데?"
판단이 그리 중얼거렸다.
"뭐, 찜찜해도 어쩔 수야 없겠지만······."
하기사, 이곳에 들어온 모험가들도 심심해서 들어온 것은 아니리라.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
그리고, 곧 이들이 왜 유적을 떠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 시간이 넘게 걸어간 끝에 통로의 끝이 나타난 것이다.
둥근 공동이었다.
바닥에는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안에 사람 여럿이 앉아 있었다.
"오, 왔구나!"
다만 특이한 것이라 하면, 공동 중앙에 새장과 같은 감옥이 있었다는 것이다.
철창 사이로 손 정도나 간신히 통과할까, 창살이 아주 촘촘했다.
그 안에 사람이 하나 갇혀 있었다.
"빨리, 나 좀 구해 줘!"
제리코가 얼굴을 찌푸렸다.
"저건······."
"우리 대장이야."
"뭐? 그러면 저 사람이 옴베르토라고!"
모험가들이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명을 해 줄 친구가 필요하다.
나는 얼른 판단을 툭툭 쳤다.
다행히 판단은 금방 내가 원하는 것을 파악했다.
"옴베르토 유만은 S급 모험가입니다."
'S급!'
S급 모험가는 왕국에 다섯 명밖에 없다고 한다.
물론 모험가의 랭크가 높다고 무조건 강한가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옴베르토는 다르죠. 그는 모험가답지 않게 레이피어 한 자루로 기사 여럿을 홀로 이겼으니까요."
기사 여럿 이긴 게 뭐 대수인가?
흐음, 하긴 기사가 무섭긴 하지만, 나는 무려 성기사 단장을 해치운 몸이니까.
"오러블레이드의 사용자이기도 하지요."
'선배 검수셨군.'
옴베르토의 강함이 곧바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것치고 지금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왜 갇혀 있다는 말인가.
"제기랄, 내가 이런 꼴인 게 웃기지? 유적을 잘못 건드려서 그래. 그러니까 빨리 와서 꺼내 달라고."
그렇단다.
그래서 고대 유적은 함부로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펠레리안의 던전을 몇 차례 격파해 본 나는 기관장치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윽, 냄새."
판단이 코를 감싸 쥐었다.
구리구리한 냄새는 다름 아닌 S급 선배에게서 풍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철창 안에 갇힌 지가 며칠은 된 것 같은데, 그 안에 화장실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한구석에는 그의 것이 분명한 분뇨가 쌓여 있었다.
옴베르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똥 던지기 전에 빨리 와서 꺼내 달라고! 마법사 어딨어!"
윽, 똥 던지면 바로 광선으로 지져 버려야겠다.
누군가는 저 불쌍한 모험가에게 안타까운 사실을 말해 줘야 했다.
"저······ 대장."
야콥이라는 모험가가 설명해 줬다.
모험가 연합에서 마법사를 보내주지 않았다고.
대신 그물 총을 든 모험가들을 여럿 보내줬다는 말을.
"시, 시발 어떻게 그렇게 되는데."
"걔들 우리 말 안 들어주는 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나 옴베르토가 요구한 거잖아. 우리나라에 다섯밖에 없는 S급이 요구한 거잖아!"
자기 입으로 저렇게 말하니까 그리 멋져 보이지는 않는다.
"왜 저런 떨거지밖에 안 왔는데!"
"떨거지라니 말이 심하시네."
"씨이팔!"
옴베르토는 정말 무언가를 던졌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멀찍이 물러났다.
철퍽!
조금 전까지 판단이 서 있던 곳에 갈색의 무언가가 철퍽 떨어졌다.
그것의 정체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나는 분노했다.
심지어 키뱀이마저 이파리를 파드드 떨었다.
'죽일까 마스터?'
마치 그리 물어보는 것 같았다.
저 옴베르토라는 모험가는 방금 내 살생부에 올라갔다.
다만 더러우니까 깨물어 죽일 자신은 없다.
야콥이 진땀을 흘리며 옴베르토를 진정시켰다.
"대장님, 그렇게 됐으니까. 일단 고정하시고······."
듣자 하니, 이들은 이곳 유적에서 무언가를 잘못 건드린 듯하다.
그 탓에 옴베르토가 가운데에서 돋아난 철창에 갇혔다나.
뭐로 만들었는지 창살이 잘리지도 않았고 열 방법도 없었단다.
옴베르토의 오러블레이드가 그나마 흠집을 낼 수 있었으나, 레이피어는 창살을 자르기에는 부적합한 무기였다.
옴베르토의 마력이 바닥나는 것이 훨씬 빨랐다.
만약 철창에 갇힌 이가 옴베르토가 아니었다면.
S급 모험가이자 이들의 대장이 아니었다면 아마 진작 포기하고 돌아섰을 것이다.
"씨발 언제까지 이 지랄을······."
야콥이 중얼거렸다.
그 역시 지친 것이다.
사실, 옴베르토가 대장이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이 지옥 같은 마경에서 얼른 도망쳤을 것이다.
이미 퀘스트를 달성한 것 아닌가. 그들이 찾는 물건은 이미 확보한 뒤였다.
"대장님,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야콥이 오물에 맞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그것을 저희한테 넘겨 주십쇼."
"뭐어?"
옴베르토가 또 한 번 오물을 집어 던지려 했다.
야콥은 묵묵히 다시 한번 말했다.
"그걸 가지고 돌아가지 않으면 모두가 곤란합니다. 아마 모험가 연합도 대장님이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는 몰랐을 거예요. 그러니까 마법사도 안 불러준 것일 테고."
"이 새끼야, 그래서 네가 날 두고 가겠다고?"
"일단 물건이라도 보여 줘야지 그놈들이 마법사를 보내주지 않겠습니까! 파견 와서 대장님을 구해주지 않으면 물건을 안 넘겨주겠다고 협박할게요."
"야콥 이 개새끼야!"
옴베르토가 악을 질렀다.
상황은 그러했다.
그들은 이미 이곳 마경에서 찾던 물건을 구했고, 그것을 옴베르토가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모험가들은 차마 옴베르토를 두고 떠나지 못했다.
옴베르토도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니 쉽게 그 물건을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런데 딱히 뭘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내 눈에 옴베르토가 지니고 있는 물건은 별것 없어 보였다.
검과 허리춤에 찬 작은 주머니 정도?
그 주머니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야, 해 봤자 귀금속 정도 같은데.
야콥은 옴베르토를 설득하려 하고, 옴베르토는 미친 사람처럼 화를 냈다.
그동안 나는 이 공동을 살펴보기로 했다.
- 아무리 봐도 찝찝한 유적이야. 철창이 왜 있겠느냐. 뭘 가두려고 한 거겠지.
펠레리안의 지적대로였다.
내 날카로운 이성은 결코 이 공동이 평범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철창이 가운데 있다는 건, 구경의 대상이라는 건데.'
- 오호라, 제법이구나.
내가 살던 세상에는 동물원이라는 게 있었다.
동물을 우리에 가두고, 사람들이 그 주변에 둘러서 구경을 하는 그런 곳이다.
가운데 박혀 있는 철창은 딱 그런 동물원을 연상시켰다.
이 세상에도 동물원 같은 게 있을까?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마물들이 있는 마물원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데쉬난 같은 미친놈이 만든 곳이 아니더라도.
- 저 벽으로 가 봐라.
나는 펠레리안의 말에 따라. 공동의 벽면으로 갔다.
벽에는 신비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인공으로 그린 게 아니라 마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물결무늬 같은 게 있었는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 이건, 일부러 새긴 게 아니군.
'그러면요?'
- 흔적이 남은 거다.
음.
벽에 물결무늬가 생길 만한 일이라면······ 아!
생각보다 아주 다이나믹한 일이 벌어졌던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다들 모여!"
뒤에서 악을 지르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움베르토와 모험가들의 합의가 성사되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새끼 잡아서 물건 뺏자!"
야콥의 발상은 그러했다.
모험가들이 협동해서 움베르토를 제압하고 물건을 탈취하겠다는 생각이다.
"오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지."
몰골은 거지꼴이었지만 그래도 S급 헌터라는 건가.
그가 레이피어를 휙 뽑아 창살 너머로 찌르자 야콥이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손등에 구멍이 난 야콥이 외쳤다.
"화살, 석궁 가져와!"
"으아아아!"
이곳에 머물고 있던 모험가들은 진작 철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냄새나는 철창 앞에서, 그들의 드잡이질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나는 판단의 곁으로 다가갔다.
'판단.'
"네, 뱀 씨."
야만적인 모험가들 중에서 판단은 그나마 좀 마음에 들었다.
페랑 유파 단검술을 배운 동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판단에게 목숨을 건사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너희들이 찾는 물건이 뭐야? 솔직히 말해 봐.'
"음······."
판단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요."
'응'
"와이번 알이에요."
생각보다도 시원하게 말해 줬다.
좋아.
그러면 너는 살려 줄게.
'솔직히 말해 줬으니 조언해 줄게. 너는 지금 당장 여기서 도······.'
도망치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 글씨 쓰는 속도가 너무 느렸나 보다.
철컥!
순간.
공동과 연결된 모든 통로가 닫혔다.
통로마다 철창들이 확 떨어진 것이다.
"그마안!"
동시에 옴베르토가 외쳤다.
그의 몸에는 어느새 화살이 몇 대 박혀 있었다.
이제 굴복하려는 것일까.
"내게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다 끝이야!"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쑤욱 벌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주머니의 크기에 비해 훨씬 큼지막한 내용물이 튀어나왔다.
아공간 주머니였음에 틀림없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마치 흑진주처럼 검고 거대한 알이었다.
"바로 깨뜨려 버릴 테니까. 알겠어!"
"대장! 진정해요!"
"진정은 무슨 씨팔!"
모험가들은 정말 와이번 알을 훔쳐온 것이다.
- 오 이런. 큰일 났군.
펠레리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와이번 알을 훔치다니 용기도 가상하다.
- 어떤 와이번의 알을 훔쳤느냐에 따라 상황이 갈리겠지만.
펠레리안은 실실 웃었다.
- 와이번은 알 도둑을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끝까지 쫓지.
그래서 와이번들이 그리 소란스러웠나 보다.
돌아다니는 와이번이 꽤 많았는데, 알은 하나뿐인 건가?
- 알을 도둑맞은 어미 와이번의 무리이거나······ 가족일 수도 있고.
그그그그긍-
"뭐, 뭐야!"
씩씩대던 옴베르토도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것 같다.
공동 전체가 위로 상승하고 있다.
벽면의 물결무늬는 공동이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남은 흔적이었다.
"어어, 처, 천장!"
천장이 저렇게 열리는 거구나.
모험가들도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뭐냐고오!"
뭐긴 뭐야.
여기는 와이번의 제단이고.
바쳐질 먹잇감이 충분히 모여서 제단이 작동했나 보지.
여명이 트기 직전의 어두운 새벽.
흰 구름이 하늘에 떠다니고.
높은 돌기둥들이 그런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리고 그 기둥들에 와이번들이 붙어 쉬고 있었다.
녀석들은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을 보고 울부짖었다.
"구오옥, 구오오오."
"구오오오오오!"
누군가에게 알리는 듯한 울음소리다.
도둑놈을 찾았다.
도둑놈을 찾았어!
그러는 것처럼.
그리고, 곧 구름 속에서 검고 거대한 와이번이 천천히 하강했다.
"아아, 죽었어, 우린 다 죽었어."
야콥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 저놈이구만. 알 주인이.
모험가들이 누구의 알을 훔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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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리비언 와이번 퀸 셀레타l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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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것은 와이번 여왕이었다.
네임드의, 아주 강한 마물.
< 뜻밖의 여정 >
108. 뜻밖의 여정
세상에 '던전 축조를 사랑하는 모임.'
줄여서 던사모가 있다면 펠레리안은 분명 우수회원이었을 것이다.
혹은 창립 멤버쯤 되었을지도 모른다.
던전을 만드는 자들이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고수로부터 전수받는 정신이 있었으니.
'하늘 아래 새로운 던전은 없다.'라거나 '모방은 던전 창조의 어머니다.' 등의 말이다.
문명이 흥망성쇠를 반복하던 수만 년 동안.
이 대륙에 얼마나 많은 던전이 생겼을까.
후대에 이르러 그 아름다운 던전들은 '유적'이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려졌다.
당연히, 펠레리안에게는 유적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
수많은 유적들을 직접 답사하면서까지 건축기술과 기관 설치에 대한 공부를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에 맞닥뜨린 '와이번의 제단'이라는 던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는 반투명한 영체와 비슷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빠르지는 못했지만 휙휙 날아다니는 것도 가능했으니.
옆에서 무슨 소란이 있든 말든 유적을 살피는 데에 바빴다.
벽의 부조에는 먼지가 끼어서 알아보기 어려웠다.
펠레리안은 후 바람을 불고는, 자신이 입바람조차 불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이 끊어진 부조들을 이어서 살펴본다.
훌륭한 추론 능력을 바탕으로 그는 이 제단의 작동 기제와 목적을 알아냈다.
- 7인의 제단이군. 일곱, 그래 7이라는 숫자는 주술적으로 의미가 있지. 오보에 문명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간만에 보여 주는 학자로서의 면모였다.
- 잡아 온 포로 일곱 명을 제단에 올리면 작동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제물은 중앙의 철창에 놓고······.
아하! 그래서 저 인간 한 놈이 갇혀 있었던 거구나.
처음에 모험가들이 유적에 들어왔을 때는 겨우 다섯뿐이었다.
그래서 아마 제단의 기관장치들이 작동하지 않은 것 아닐까.
판단과 제리코까지 둘이 더 들어와 일곱이 되자 이 난리가 시작된 것이다.
수수께끼가 풀렸다!
제단의 바닥이 상승하고 출구가 봉쇄되며, 천장이 열린다.
그러면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던 와이번들이 날아와서 피의 축제를 벌인다.
- 그런 것이다!
'영감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신난 펠레리안에게 핀잔을 줬다.
그래, 이 제단이 어떻게 작동하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돌기둥 위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 무슨 말이냐. 적어도 이 유적이 오랫동안, 아마 수천 년은 사용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잖아.
'그래서 그게 뭐요?'
- 그래서 저 와이번들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우물쭈물대는 것 아니겠느냐.
흠, 자세히 보니 그런 것도 같다.
갑자기 땅이 열리면서 인간들이 담긴 먹이 그릇이 나타난 것과 비슷한 상황일 텐데.
처음 겪는 상황이라 의심스러운지 곧바로 날아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험가들은 이미 잔뜩 흥분했다.
"으아아! 망했어. 망했어어!"
"다 죽게 생겼어!"
A급이고 S급이고 상관없이, 전부 공포에 질려 있다.
이해할 만하다.
그만큼 무서운 상황이었으니까.
모험가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칠 방법을 찾았다.
출구는 완전히 사라졌다.
숨을 곳도 없으니 도망치기 위해서는 벽면을 기어 올라가야 한다.
그것을 시도해 보았지만 미끄러운 돌벽을 맨손으로 기어오르기는 불가능했다.
나야 거대화를 쓰면 가능할 것 같지만, 그러면 와이번들에게 엄청 눈에 띄겠지?
다들 패닉에 빠졌다.
가만히 경계하던 와이번들도 조금씩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와이번들이 이 알 도둑놈들을 응징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여기에 알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알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와이번은 구름 아래로 내려와 돌기둥 위에 앉았다.
그러곤 이쪽을 살펴보듯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 와이번의 시력이나 지능이 그리 훌륭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와이번의 모성은 결코 희미하지 않았다.
- 알을 도둑맞은 와이번은 결코 포기하지 않아. 저 모험가들이 와이번의 무서움을 잊었나 보구나. 혹은 그만한 대가를 받으려 한 건지.
와이번 알을 대체 어디에다 쓴다고 가져가려고 했을까.
- 길들이려는 것이 분명해. 와이번 기사단이라도 만들려고 하나.
'아!'
곧바로 이해됐다.
와이번 기사단이라니, 그건 정말 낭만의 끝 아닌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긴 창으로 공중돌격을 감행하는 와이번 기수라.
천금을 주고서도 와이번 알을 구할 가치가 있었다.
다만, 솔직히 그 위험부담이 너무 큰 일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거대한 와이번은 분명 규격 외 강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태창을 꿰뚫어 보기 힘든 마물은 오랜만이다.
나도 강해진 만큼, 더 정신을 집중하니 그나마 보이는 게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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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리비언 와이번 퀸 셀레타lv151]
[이명] 검은 여왕
[특성]
[여왕], [델프람 남부의 지배자], [복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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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151 레벨?
물론 레벨로만 강함을 평가할 수는 없다.
실제로 얼마 전에 때려잡은 파이몬의 불도마뱀. 그것의 레벨은 140 정도로 이 와이번 퀸과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강함의 차이는 겨우 10레벨 정도가 아닐 것이다.
'쟤는 확실히, 거대 리옥크나, 그 흰 원숭이보다 강하다.'
느낌이 왔다.
스킬을 보니 느껴졌다.
──────────────
[스킬]
······[태풍의 눈lv20], [초고속 비행lv10], [파괴 광선lv10], [와이번 피어lv20]······
──────────────
일단 전부 꿰뚫어 볼 수도 없었거니와 지니고 있는 스킬들이 범상치 않다.
'파괴광선이다!'
나도 광선 말고 제대로 된 파괴광선을 가지고 싶었다.
이런, 거대화만 빨리 내 것으로 만들면 빌릴 수 있을 텐데.
터엉!
그때였다.
옴베르토를 가두고 있던 철창이 다시 바닥으로 쑤욱 들어갔다.
그는 와이번들의 마지막 식사로 준비된 처지였는데, 수천 년 전이었다면 아마 와이번들이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먹을 타이밍이었나 보다.
조금 전까지는 서로 다투던 옴베르토와 모험가들이다.
하지만 철창에서 자유로워진 지금은 오히려 싸움을 멈췄다.
옴베르토는 S급 탐험가답지 않게 털썩 주저앉았다.
"아, 알을 되돌려줘야 해."
제리코가 문득 중얼거렸다.
"알을 되돌려주면, 살려 줄지도 모르지."
제리코 이 바보야.
설마 알 돌려주면 와이번이 고맙다 하고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나 그 발상에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느낀 것일까.
모험가들은 물에 빠진 사람이 동아줄을 부여잡듯 그 말에 집착했다.
"알, 알 내놔."
"싫어 이 자식아."
"알 내놓으라고 이 씹쌔야!"
야콥과 모험가들이 움베르토에게 접근했다.
옴베르토는 한 손에 알을 들고, 한 손으로는 레이피어를 들어 휘둘렀다.
"오지 마악!"
누군가가 석궁을 발사했다.
옆구리에 볼트가 박힌 옴베르토가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꺾었다.
동시에 모험가들이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야, 야아!"
옴베르토는 S급 모험가다운 투지를 보였다.
끝까지 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손을 번쩍 든 것이다.
그 탓에, 알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안 돼에!"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알을 잡으려는 손이 하나 뻗어 나왔지만.
손에 묻은 피 탓에 오히려 알이 미끄러졌다.
나는 얼른 알이 날아오는 경로로 달려갔다.
불쌍한 알을 깨뜨리면 안 되지.
투명한 손으로 붙잡는 것도 조심스러워서 나는 직접 뛰어올랐다.
일단 허공에서 몸으로 받아내어 완충 작용을······.
미끄덩!
헉, 왜 이렇게 미끄러워.
알은 미끈미끈한 기름기로 뒤덮여 있었다.
하긴, 깨끗하게 세척한 달걀과 비슷한 감촉일 거라 생각한 내가 잘못인가.
그러나 다행히도.
알이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 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실아!'
이실이가 나선 것이다.
얼마 전, 덩굴을 뻗어 검 손잡이를 움켜잡은 것처럼.
녀석은 덩굴을 길게 뻗어 허공의 와이번 알을 움켜잡았다.
와이번 알이 보통 큰 게 아닌데.
타조 알의 몇 배나 되는데도 제법이었다.
생각보다 힘이 센 것 같았다.
'잘했어, 너무 잘했······.'
하지만 칭찬이 너무 일렀던 것 같다.
혹은, 이실이는 지금 하는 게 공놀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휘익-
다시 와이번 알을 날아왔던 곳으로 던졌기 때문이다.
"아, 안 돼애!"
'이 녀석아-!'
공놀이가 아니야!
와이번 알은 핑그르르 회전하며 허공을 날았다.
아마도 야콥이 그것을 잡으려고 한 것 같았다.
레이피어에 의해 꿰뚫린 손으로 묵직한 와이번 알을 잡았으니.
"아얏!"
비명을 지르며 놓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퍼석!
그 무거운 중량 때문인지 알은 곧바로 깨졌다.
구멍이 뻥 뚫렸는데, 그 안에서 흰자와 노른자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프라이팬만 있었다면 바로 달걀 후라이를 해 먹어도 되었을 텐데.
"아아아아악!"
야콥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마치 와이번들을 움직이게 하는 신호탄 같았다.
놈들이 마침내 하강했으니.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지르던 야콥을 와이번 한 마리가 덮쳤다.
콰앙!
발톱으로 야콥을 찍어 누르더니.
뱀과 비슷한 대가리로 마구 물어뜯는다.
"으아아악!"
다른 모험가들이 비명을 질렀다.
와이번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내려왔다.
제리코가 칼을 들고 저항했다.
그는 와이번 한 마리의 면상에 긴 상처를 내는 데에 성공했다.
"허억, 헉."
거칠게 숨을 내쉬는 제리코.
하지만 그 순간, 덩치가 큰 와이번 한 마리가 머리부터 깔아뭉갰다.
콰아아앙!
제리코는 순식간에 으깨졌다.
형편없게 박살 난 제리코의 육신을 와이번들이 서로 먹으려 다퉜다.
혼란의 도가니탕이다.
이 지옥도 속에서는 S급 탐험가고 A급 탐험가고 소용없는 것 같다.
사실, 나 또한 위험했다.
'거대화, 거대화 쓸까요!'
- 대놓고 시선을 끌 생각이냐!
일단 어디 숨을 곳 없나.
죽은 인간의 시체 아래에 숨어 있으면 ······ 아니, 와이번들은 인간을 남김없이 먹어 치울 생각인 것 같다.
와이번의 발에 몰래 매달려서 탈출할까.
그러다가 자칫해서 발톱에 붙잡히면 위험하긴 한데, 그 방법뿐일지도.
"뱀 씨."
그때, 잔뜩 겁먹은 판단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전 특별한 약을 쓸 겁니다! 마물을 쫓는 냄새인데······ 괜찮으면 제 곁에 숨으십쇼!"
그런 게 있다고!
역시 판단은 모험가들 중에 제일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제 바지춤에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곳에서, 갈색 앰플 비슷한 것을 꺼냈다.
주저 없이 앰플의 주둥이를 부러뜨려 깨뜨린 뒤, 그것을 몸에 끼얹었다.
나는 그런 판단에게 달라붙으려고 했다.
"사아아악!"
하지만 그 코를 찌르는 끔찍한 냄새.
그것은 정말 내 본능 깊숙한 불쾌감을 자극하는 냄새였다.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다. 토악질을 할 것 같았으니까.
판단은 역겨운 냄새를 풀풀 풍기며 피 웅덩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놀라운 연기력을 발휘해 죽은 척했다.
아, 도저히 저기는 안 되겠다.
그때였다.
저 돌기둥에 붙어 있던 거대한 와이번, 퀸 셀레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대일로 싸워도 결코 이기지 못할 녀석이다.
어쩌지,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리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알.
펠레리안이 꾀를 냈다.
- 일단 알 안으로 숨어라!
이 지옥도에서 숨을 곳은 없어 보였는데.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 해도, 알 안에 숨으라니.
곧바로 들키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시도하는 것이 나으리라.
조금 비좁긴 해도 와이번 알은 내가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았다.
신선한 알이었는지, 흰자와 노른자가 빠져나오자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조금 끈적거리긴 해도 이 정도야 참을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알에는 무리 없이 숨었지만, 구멍이 뻥 하고 뚫려 있지 않은가.
아무리 와이번의 시력이 나쁘다고 해도 구멍을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으리라.
'어떻게 투명한 손으로······.'
이실이 때문에 알이 깨지긴 했지만.
오히려 알이 깨졌기에 숨을 수 있었다.
'······앗, 이실아!'
그리고 녀석은 또 한 번 도움을 줬다.
깨진 알 껍질에 덩굴을 흡착시킨 뒤 감쪽같이 붙인 것이다.
덩굴에 달린 흡착근을 활용했다.
깨진 부분이 완벽히 매끈해졌다.
어.
이제 된 건가.
정말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된 걸까!
안에서는 바깥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영감님!'
하지만 펠레리안은 알 껍질도 통과할 수 있다.
'밖 좀 보고 와 주시죠!'
펠레리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알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데,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바깥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꾸게게게게게겍!"
펠레리안이 돌아온 것은 그 후였다.
그는 아주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 뭘 어떻게 되기는······.
펠레리안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말해 주었다.
- 인간들은 다 죽었고. 와이번은 제 알을 되찾아서 기뻐하는 중이지.
다행이다!
그러면 조금 이따 틈을 찾아서 알을 깨고 다시 도망치면······.
그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몸이 부웅 떠올랐다.
- 이제 둥지로 돌아가겠지.
둥지로?
······아차!
까딱까딱.
내 복잡한 마음도 모르고 이실이가 이파리를 파닥댔다.
< 따듯하고 고소한. >
109. 따듯하고 고소한.
인간들은 다 죽었고.
알을 되찾은 어미는 기뻐한다.
알 바깥에서 상황을 지켜본 펠레리안은 뱀에게 그리 설명했다.
하지만, 사실 그 설명은 조금 틀렸다.
인간들이 다 죽지는 않았다.
모험가 일곱 명 중 여섯이 죽고, 그 여섯 명의 시체는 수백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그마저도 와이번들이 먹어 치웠기에 성한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쪽 구석의 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시신.
정확히는, 죽은 척하고 있던 판단이 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와이번은 조용히 날 수 있으니, 혹시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정말로 전부 떠난 것 같았다.
"하아."
판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는 와이번이 싸지르고 간 똥이 잔뜩 있었다.
판단을 잡아먹으려고 접근하던 와이번들은 끔찍한 냄새에 경악해서 물러났다.
썩은 고기도 잘 먹는 와이번이지만, 판단이 풍기는 냄새는 견디지 못했다.
본능 어딘가를 건드리는 냄새였다.
가까이 갔다가는 당장이라도 병이 옮을 듯한 끔찍한 냄새.
부아가 치민 와이번들은 근처에 똥을 잔뜩 싸지르고 떠났다.
지저분하긴 해도. 목숨을 건지지 않았는가.
돌아가면 한잔해야겠다.
"어우 냄새."
판단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눈을 찌푸렸다.
그에게는 조금 역겨운 정도로 그쳤지만, 정말 와이번을 쫓아낼 정도일 줄은 몰랐다.
'솔직히 이 정도로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 물건을 처음 받았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마물의 접근을 차단하다니.
언뜻 들으면 별것 아닌 듯하지만, 그 실제적인 효과가 어떨지가 중요했다.
분노한 와이번들을 쫓아낼 정도였다니.
'같은 무게의 금보다 열 배 비쌀 거라는 게 거짓말이 아니었군.'
앰플을 받으면서 그런 설명을 들었다.
그때는 코웃음을 쳤는데, 아무래도 과장이 아니었나 보다.
판단은 손가락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드러난 이마에서 손톱을 긁적대더니, 끈적한 패치를 떼 냈다.
그러자 평소에는 가리고 있던 문신이 드러났다.
두 개의 반지가 서로 얽혀 있는 문양.
제국의 악명 높은 도적 길드 '투 링즈'의 표식이었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판단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빠진 이름이 본명이었다면 아마도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판단의 진짜 이름은 '판당'이었다.
손 빠른 판당.
대륙 모험가 연합의 A급 모험가이자, 동시에 도적 길드 투 링즈의 해결사.
모험가로서의 그는 이미 퀘스트에 실패했다.
파티가 전멸했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투 링즈 해결사로서의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와이번의 군마화에 대한 실제적 정보 수집이라······.'
그런 임무를 받으면서 이 앰플을 받았다.
이 정도 가치의 물건을 주면서 그런 임무를 맡길 세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말 황실이 와이번 기사단을 만들려는 걸까?'
겨우 도적 길드의 해결사가 알 수도, 알아 봤자 어쩔 수도 없는 일이다.
그저 남아서 할 수 있는 일을 더 할 뿐.
'차라리 뱀과 친구를 하는 것이 낫겠군. 레인저 부대에서 뱀을 키운다든지.'
화살 대신 뱀을 걸고 쏘아내면 아주 훌륭하지 않을까.
그 생각을 한 판당은 킥 웃었다.
"뱀 씨. 살아남으려나."
뱀은 놀랍게도 알 속에 숨는 기지를 보였다.
거기까지는 판당도 감탄했다.
분명 똑똑한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와이번은 그 알을 가지고 둥지로 돌아가 버렸다.
알에 숨어 있는 것이 자기 새끼가 아니라 뱀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와이번은 뱀을 산산조각 내서 찢어 버릴 것이다.
'그 와이번, 끔찍하게 무서웠지.'
알을 잃을 뻔한 어미의 모성이란 그리 무서운 것이었다.
와이번 피어가 남긴 울음소리는 판당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나가면······.'
그리고 바지를 축축하게 적시기까지 했으니.
'옷을 빨아야겠어.'
판당이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했다.
* * *
「와이번 둥지에서 살아 돌아온 로밴튼 씨의 인터뷰中」
솔리온의 아침 기자(이하 '기'): ······그렇다면 원래 로밴튼 씨는 마물 생태학의 권위자셨군요. 마탑에서도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면.
로밴튼 아이오드 박사(이하 '로'): 그렇죠. 지금은 강제로 겸손해졌지만 당시에는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에메랄드 아카데미에 특강을 나갔을 때는 학장님마저 정교수로 초청해 주셨으니까요.
기: 그런데도 마물 연구를 위해 직접 마경에 들어가시다니. 저로서는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십니다.
로: 지금 와서는 가장 후회하는 일이죠.
기: 하하······.
당시 내 인터뷰를 참관하고 있던 선배는 이 시점 강렬한 눈빛을 쏘아냈다.
내 웃음이 어색했나 싶었는데, 그가 노려보고 있는 것은 로밴튼 박사였다.
박사가 시종일관 다리를 떨고 있던 것이다.
보통 요란한 게 아니었다. 일부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저러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격렬한 다리 떨기였다.
기: 혹시 조금 긴장하셨을까요?
로: 아니요. 왜 물어보십니까.
기: 다리를······.
늙고 다친 박사에게 다리 떨지 말라고 지적하기는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얼버무렸는데, 로밴튼 씨는 갑자기 바지를 확 걷어 내렸다.
순간 그가 미친 사람인 줄 알았다.
로: 미안합니다. 내 다리가 이래서.
나도 수염 난 사내고, 로밴튼 박사도 수염 난 사내이니 부끄러울 것은 없었지만.
그 순간 깜찍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음을 고백한다.
그의 허벅지에는 정말 끔찍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불에 달군 대바늘로 살을 갈기갈기 찢은 다음에.
그 가죽으로 뜨개질을 한 것 같은 상처랄까.
기: 아, 아파 보이는군요.
로: 아프지, 몹시 아팠지요. 지금도 그때의 생각이 나는데······.
기: 박사님을 잡아갔던 사투르누 와이번 퀸, 츄고타의 짓입니까.
로: 그놈이? 푸하하하!
로밴튼 박사가 왜 웃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로: 그놈이 만든 상처는 이거요.
끔찍하게도 그는 아예 바지를 벗어 버렸다.
팬티만 입고 있는 꼴이었는데, 왼쪽 다리는 또 다른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무릎 아래가 아예 의족이었던 것이다.
로: 나를 새끼들의 교보재쯤으로 생각하더군. 이렇게 물어뜯으라며 내 왼 다리를 한입에 삼켜 버렸어. 오른쪽 허벅지는 새끼들이 그것을 따라 한 흔적이지.
참혹한 일을 겪은 이들은 많이 인터뷰해 봤지만. 로밴튼 씨의 과거는 확실히 사람 속을 울렁거리게 하는 점이 있었다.
로: 와이번들은 원래 사냥감을 갈기갈기 찢어 먹지. 하지만 새끼를 낳은 뒤에는 종종 먹잇감을 산 채로 잡아 가.
기: 새끼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일까요······?
로: 맞지요.
기: 마물에게 그 정도의 지능이 있군요.
로: 어리석은 소리. 그 정도 짓은 평범한 새들도 하는 일이야. 마물은 오히려 지능이 훨씬 높지. 보고타 그것은 수백 마리의 와이번을 이끌고 있는 진짜 여왕이었다고.
기: 네, 그렇지요.
로: 그것은 내가 혹시 제 새끼를 해하지 못하도록 양팔을 부러뜨렸어.
로밴튼은 양팔을 들었다.
왼팔은 저절로 떨렸으며, 한때 뼈가 튀어나왔음직한 흉터도 있었다.
기: 예, 알겠습니다.
로: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었지!
숙련된 인터뷰어로서, 나는 이 나이 많은 인터뷰이가 너무 과열되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말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흥분한 그는 갑자기 웃옷을 확 벗어젖혔다.
이미 바지를 벗은 뒤였으니, 그는 꼼짝없이 팬티만 입은 괴인이 되어 버렸다.
로: 이 흉터를 봐!
기: 박사님, 일단 옷을 걸치시고.
로: 보고타 그것이 나무 꼭대기에 나를 꿰어 놓고 자식들에게 사냥법을 가르쳤어.
로밴튼의 쇄골 부근에는 관통상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 흉터보다 잿빛으로 바랜 가슴 털이며 쭈글쭈글한 알몸이 보기 더 힘들었다.
기: 제발 진정하세요, 이러시면 기사가······.
로: 와이번은 끔찍한 생물이야. 잔혹하고 사악한 마물이지! 당장 제국에 연락해서 기사단을 총출동시켜!
그는 전쟁으로 정신적 후유증이 남은 상이군인보다 훨씬 끔찍한 상태였다.
박사가 팬티까지 벗기 전에 인터뷰를 멈춰야 했다.
로: 아, 아, 와이번 공습경보! 공습경보!
기: 하아.
로: 병력 총동원!
와이번은 정말이지 끔찍한 생물이 아닐 수 없었다.
* * *
'조졌다.'
그것도 제대로 조졌음이 분명했다.
알에 숨어서 살아남은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곧바로 둥지로 끌려갈 줄이야.
펠레리안이 바깥의 환경에 대해서 말해 줬다.
- 아주 전망 좋은 곳에 둥지를 지었더구나.
전망이 좋다는 것은 그 위치가 높다는 뜻이다.
거인족의 칼을 땅에 박아 넣은 것처럼 날카로운 수직 돌기둥.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와이번 퀸 셀레타의 둥지가 있었다.
- 옆에 알이 세 개 더 있고. 뭐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기회를 잡으면 탈출할 수 있겠지.
내게 비행 능력은 없지만.
이실이 덩굴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돌기둥 아래로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어미가 자리를 비우면 당장 탈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
- 어미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 보구나. 쫄쫄 굶으면서 제 알을 지키고 있어.
우리 메두사맘도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알을 돌봤을까?
말 안 듣는 아이에게 꼬리치기를 하셨던 걸 떠올리면 상상이 되지 않는데.
- 원래 자식을 한 번에 많이 낳는 마물과, 적게 낳는 마물은 태도가 다른 법이다. 와이번은 또한 일생에 단 한 번만 알을 낳기도 하고.
험난한 야생에서 알 네 개는 결코 많은 게 아니리라.
한 번 알을 도둑맞아 본 셀레타는 방심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어쩔 수 없이 포션을 물 대신 마시게 된 시점이었다.
- 오, 다른 알들이 깨어나고 있다.
안 그래도 소리가 들렸다.
타닥, 타닥, 알이 깨지는 소리.
"삐이이이."
"삐찌이!"
아기 새, 아니 새끼 와이번들이 낼 법한 시끄러운 소리다.
신기하게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알 세 개가 연속적으로 부화했다.
됐다, 이제 새끼들에게 먹일 먹이들을 구하러 가지 않으려나.
- 그럴 것 같지는 않다만······.
하지만 펠레리안은 영 부정적인 태도였다.
알 속에 갇혀 있는 내게 바깥의 정보를 얻을 창구는 펠레리안뿐이었다.
- 어라, 이거 좀.
그런데 펠레리안이 불길한 말을 내뱉었다.
- 네가 있는 알이 안 깨지니까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아니, 애초에 원래 있던 알도 생달걀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왜 벌써 다른 새끼들이 부화한 걸까.
- 원래 어미 품에 있어야 알이 성장하지 않겠냐. 차가운 아공간 속에 방치되어 있었으니 알이 제대로 여물었을 리 없지.
옴베르토는 아공간 확장 주머니에 알을 보관하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꾸구각!"
걱정스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와이번 어미가 알을 툭 툭 두드렸다.
'설마, 직접 알을 깨려는 건가.'
그런 무식한 방법을 쓰면 안 되지 않나!
하지만 와이번에게 이성적인 설득을 할 수는 없었다.
우직, 우지직-
기어코 녀석은 직접 알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이쪽에서 기습을 해야 하나.
이실이의 지옥불과 내 천뢰령을 사용하면 어떻게 한 방은 먹일 수 있으리라.
- 그러다 죽을 거다.
'네!'
펠레리안의 충고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알이 완전히 깨지고 어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필사적으로 갓난 와이번을 연기했다.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척 비틀거리며.
입으로는 와이번 새끼 같은 소리를 냈다.
"삐시이이-"
조금 다른가.
"삐이이이이!"
"찌이이이!"
다행히 때맞춰 다른 새끼들이 울어 주었다.
역시, 가까이서 본 와이번의 머리통은 확실히 뱀과 비슷했다.
어미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새끼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통할지도.'
혼신의 연기를 했다.
펠레리안이 푸흡 웃는 것을 듣고 순간 평정심을 잃을 뻔했는데.
"꾸그그그······."
어미 와이번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분노의 기색이 느껴진다.
젠장, 역시 안 되나!
생각해 보니까 나는 날개도 없고 심지어 혼자 흰색이다.
와이번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꾸가가가가가가각!"
어미 와이번이 쩌렁쩌렁 포효했다.
하늘 위에 파괴광선을 쏘아내기도 했다.
구름에 구멍이 뻥 뚫리는, 무서운 파괴력이었다.
'잘 있어라 세상아.'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방법이 없다.
이길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칠 자신도 없다.
높아도 너무 높은 돌기둥 위다.
게다가, 주변에 셀레타의 부하로 보이는 다른 와이번의 둥지도 잔뜩 있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생이었어.'
- 잠깐, 너한테 화난 게 아닌 것 같다.
'네?'
와이번은 자기 자식 흉내를 낸 뱀을 으깨 죽일 기미가 없었다.
대신 내 몸에 날개가 달렸는지 뒤집어서 확인하고. 발이 달렸는지 또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둘 다 없는 것을 깨닫자.
"꾸오오오오!"
와이번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 이거, 그거구만.
'설마······.'
- 못난이 자식이 태어나서 슬퍼하는 거야.
혼자서 흰 빛깔이고, 날개도 다리도 없이 태어난 막내 자식.
미운와이번새끼.
"꾸어어어어어억!"
알을 훔쳐갔던 인간들에게 분노한 걸까.
이 터무니없는 상황에 질린 내가 슬금슬금 물러서자.
셀레타가 나와 제 새끼들을 한 번에 끌어안았다.
틀림없는 포옹이었다.
- 축하한다. 와이번 엄마가 생겼구나.
새엄마의 품은 몹시 따듯했고, 썩은 고기 냄새가 났다.
그래, 뭐 일단 이렇게 지내다가······.
"삐이이익!"
"츄삐이!"
형제자매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고 울면서 입을 벌린다.
놀라서 가만히 있었더니, 와이번 맘의 시선이 느껴진다.
일단 얼른 그 모습을 따라 입을 벌렸다.
그때였다.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와이번 맘은 내 입안에 무언가를 쑤셔 넣었다.
뜨끈하고 걸쭉한 그것은 무려 와이번 맘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새끼를 위한 특제 영양죽이었다.
'우욱!'
- 토하면 안 된다, 먹어!
꿀꺽.
나도 모르게 삼켰다.
*「오블리비언 와이번 퀸 셀레타의 영양죽을 섭취했습니다.」
*「육체와 마성이 성장합니다.」
우우욱.
< 사악, 나 아기 와이번. >
110. 사악, 나 아기 와이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