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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080-090

080.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키야아아악!

펠레리안이 거품을 무는 일이 잦다.

조금 전에는 너무 오바하지 말라고 핀잔을 줬던 나였다.

"사아아아악!"

하지만 이번에는 나 또한 거품을 물 수밖에 없었다.

보구의 방.

펠레리안이 자신의 가디언에게 줄 무구들을 모아 둔 비밀 방.

인간들이 이곳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음은 분명했다.

다른 곳처럼 횃불이 걸려 있지도 않다.

무기 거치대에 유리 진열장을 씌워 놓지도 않았다.

원활한 관람을 위한 동선 재배치도 당연히 없었다.

무엇보다, 아주 오랫동안 방 안에 들어온 자가 없는 듯하다.

먼지가 곳곳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내가 들어온 흔적을 따라 길다란 자국이 남을 정도로.

-보존 마법이 해제되었어. 보안 마법을 부술 때 같이 무너졌나 보지.

사람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분노하면 오히려 침착해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펠레리안처럼 말이다.

'그러면 여기 있는 무기들도 진작 털린 거네요?'

펠레리안과 내가 동시에 거품을 문 이유가 그것이었다.

보구의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깔끔하게 텅텅 비었다. 먼지 쌓인 거치대만이 우리를 반겨 준 것이다.

-그래, 인간들이 훔쳐간 것은 아닌 듯하다. 이곳을 강제로 열려면 최소한 설계도가 있어야 해. 안 그러면 무너지게 만들었으니.

펠레리안은 그리 확신했다.

밖에 남아 있는 무기들도 절반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것은 아마 인간들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보구의 방은 분명 발견하지 못했을텐데, 이곳의 내용물은 어디로 갔겠는가.

'드워프가 이 던전을 만들어 줬다고 했죠.'

-그래.

펠레리안은 이를 갈았다.

-푸른수염, 모루의 군주. 화염망치. 내게 막대한 재물을 받고 고용된 그 난쟁이가.

입에서 불을 뿜어낼 듯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나를 배신하고 내 물건을 훔쳐가아-!

지금 펠레리안의 몸통은 조막만 하고 머리는 커서 SD 캐릭터 같은 모습이다.

그런 그가 드워프들에게 난쟁이라는 멸칭을 써도 되는 걸지 모르겠지만.

-뱀!

'넵.'

-핏값을 받을 시간이다. 그 배신자 드워프들의 수염을 뽑고 목을 베어서 단죄할 시간이야. 마땅히! 그리하여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펠레리안은 피의 복수를 부르짖었다.

-놈들이 살고 있던 광산이 여전히 근처에 있는 것 같더군. 쳐들어가자. 가서 푸른수염에게 죄를 묻는 것이다! 이 펠레리안이, 너 우르오로스와 함께!

'어······ 그 푸른수염이 드워프 왕이에요?'

-바보 같은 놈. 드워프는 왕이 없다!

'뭐 모루의 군주라면서요.'

-그것은 그놈의 이명일 뿐이고! 녀석은 그저 광산에 사는 드워프들의 책임자 같은 거지. 족장 같은 거다!

'왕 같은 존재인가······.'

-당장 쳐들어간다! 학살극을 벌이는 거다. 광산을 드워프들의 피로 물들여!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삭, 삭."

-왜!

'일단 진정 좀 합시다.'

진정하란다고 진정할 상황은 아니지만.

펠레리안도 나이를 똥구멍으로만 먹은 노인은 아니었다.

그는 애써 화를 억눌렀다.

'저 혼자 광산에 쳐들어가서 그 파란수염 드워프를 만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자신 없는 거냐?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기초적인 격장지계군.

'솔직히 그 드워프들이 정말 무기를 가져간 건지 확실하지도 않고, 만약 가져갔으면 아직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

-끄응.

드워프들은 무기 제작에 뛰어난 자들이지, 무기를 다루는 데에 뛰어난 자들은 아니다.

물론 드워프 전사의 용맹함이야 유명하지만 대체 왜 펠레리안의 무기들을 가져간 걸까.

-의욕이 안 난다 이거지이?

펠레리안은 나를 노려봤다.

아니 의욕의 문제가 아니라 좀 더 침착하게 하자는······.

그렇게 변명하려던 순간. 펠레리안이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드워프들이 가져간 게 확실하다. 아주 확실해.

'그래요?'

-내가 푸른수염에게 주문해서 만든 무구는 검과 방패 한 쌍, 그리고 창 한 자루였지. 그리고 그 무구들은 모두 셀레스티움을 섞어 제련한 것들이다.

셀레스티움이 뭔데.

내가 심드렁하고 있자 펠레리안이 그 정체를 말해 줬다.

-광산을 죽을 때까지 파 봐도 구할 수 없는 금속이지. 그 키 작은 대장장이들이 가장 탐내는 금속. 별철로 만든 무구이기 때문이다.

'별철, 별철······. 어?'

순간 내 전신의 비늘이 곤두섰다.

'운철이요?'

-그래, 운석에 섞여 있는 금속을 추출해 제련한 금속이 셀레스티움이다.

'그럼 그 만들었다는 검은, 운철검······?'

검의 길을 걷는 자가 어떻게 운철검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냥 검사가 아니라 마검사(魔劍蛇)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하다. 세상에 나왔다면 멋진 이름을 받았을 명검이었어.

간장, 막야와 비견될 천하의 명검이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드워프 야장들이 그것을 훔쳐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몸이 부들부들 떨리자 펠레리안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말했지,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이 내 것이라고.'

내 마음의 빈틈을 찾아낸 펠레리안.

마치 악마가 속삭이는 듯했다.

'그렇······죠.'

-너 제대로 된 장검을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냐. 그치? 암은, 검을 휘두르려면 명검이 필요하지. 너,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 들어 봤지?

'들어 봤어요.'

-그건 완전 새빨간 거짓말이다. 어디 좋은 도구 하나 마련 못 하는 떨거지들이, 가진 자들 부러워서 하는 헛소리지.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기사는 최강의 명검을 가지고 있었고, 나 역천의 마도사 역시 불사조의 깃털과 인어의 진주로 만든 스태프가 있었다.

맞는 말이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마음에 꽂히고 있었다.

내가 펠레리안에 대해서 잘 알게 된 만큼.

펠레리안 역시 나에 대해서 잘 알게 된 것 같다.

마치 뱀이 유혹하듯 달콤한 말을 이어 간다.

정작 뱀은 나인데······.

-네가 가져 마땅할 검이다. 나도 당연히 네게 주고 싶어서 여기로 찾아온 것 아니겠느냐.

'정말요?'

-그래! 설마 그러면 내가 휘두르려고 검을 찾게! '영웅살해자'라면 셀레스티움 검을 들 자격이 있지.

운철검이라.

어떻게 생겼을까.

한번 보고 싶긴 하다.

그러면, 그 푸른수염의 드워프한테 가서 따지면 되는 걸까.

드워프들의 쪽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이제 만만한 마물은 아니다.

거대화를 쓰고 앞에서 으름장을 놓으면 훔쳐간 운철검을 돌려주지 않을까.

학살극까지는 벌이지 않더라도 엄하게 따져야 할 사태기는 했다.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도중.

펠레리안이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그 참람된 드워프 놈은 이미 운철검과 무구들을 녹여 버렸을 것이다.

"사아악!"

-굳이 내 것들을 훔쳐간 것을 보면 분명하지. 녹여서 주괴로 만들었든, 다른 물건으로 만들었든.

방금 내 세상이 무너졌어.

'그러면 어떻게 해요!'

-가야지, 가서 따져야지! 셀레스티움을 내놓고 그것으로 제대로 된 새로운 검을 제련해 달라고!

구미가 당겼다.

펠레리안이 마지막 한 수를 던졌다.

-겁먹을 필요가 없다. 대체 무슨 용기로 내 물건을 훔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겠지. 마법사와의 계약이란 그리 쉽게 파기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하기는, 그 펠레리안이 손 놓고 당할 위인은 아니다.

-대면하기만 하면 돼. 그 푸른수염의 면상 앞에 나를 데려가 놓으면, 놈의 수염을 모조리 뽑아 버리고 위약금을 배로 받아 내 주겠다. 놈은 감히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펠레리안이 뭘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당함이 믿음직스럽기 그지없었다.

'······좋습니다.'

가 볼까.

내 운철검을 돌려받으러, 드워프의 지하 도시로.

* * *

그런데 어떻게 가지?

일단 드워프 광산에 들어가서, 광산의 군주인 푸른수염을 만나서 따진다.

펠레리안과의 계약을 멋대로 어긴 대가로 위약금을 받아내고, 내게 딱 맞춘 운철검 한 자루를 제작해 온다.

말은 쉽지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애초에 드워프 광산에 어떻게 들어갈지부터 해결해야 했으니.

나는 로일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붉은 모루 광산 말입니까."

로일이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답했다.

보구의 방에서 나온 나는 다시 그의 외투 안으로 들어갔고, 로일은 외투를 두고 왔다며 나를 그대로 챙겨서 나왔다.

몸과 옷이 젖긴 했어도 완벽한 팀플레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칼레아 시가 생기기 전부터 이 산에 자리 잡고 있던 드워프들이라고 하지요. 원래는 질 좋은 무구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했는데?

"광산을 폐쇄하고 두문불출한 지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펠레리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자식들, 내가 두려워서 숨어 버렸구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그 이유가 뭔지 물었다.

로일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도 잘 모릅니다. 드워프들 행동방식이야 워낙 제멋대로고······ 광산마다 문화도 다르니. 아, 군주의 이름은 푸른수염이 맞는 것 같습니다."

광산이 폐쇄되었으면 아예 들어갈 방법이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드워프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드워프들이 광산 안에서 목축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소규모로 교역을 하긴 합니다. 그래서 칼레아 시에 맥주가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이죠."

광산 안에서 어떻게 목축을 한다는 거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 매주 정해진 날짜가 되면 소규모의 드워프들이 나와 맥주를 가져갑니다. 그 대가로 정련된 금속 주괴나 별로 대단하지 않은 도구들을 팝니다. 드워프들이 만든 것은 괭이만 돼도 비싸게 팔리니까요. 저도 언젠가 드워프들과 교역을 트는 게 꿈입니다! 제대로 된 상단 또한 만들 겁니다. 로일과 아마엔의 리들 상단!"

로일은 묻지도 않은 꿈을 말하며 행복해했다.

거상이 되고 싶니. 부자가 되고 싶어?

"저도요. 아빠를 도와서 거상이 될 거예요."

똘똘한 아마엔이 옆에서 그리 말했다.

나는 아마엔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말을 들어 보니 나 혼자서 드워프들의 광산에 잠입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평소에는 튼튼한 철문으로 꽁꽁 틀어막고 있다나.

맥주를 가지고 들어갈 때가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면······ 흐음.

머릿속에 방법이 선다.

무려 은밀lv10을 보유한 본 뱀이니, 분명 들어갈 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여.'

나는 수첩에 고풍스러운 필체로 글을 썼다.

어느덧, 투명한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도 많이 익숙해졌다.

'탐욕은 인간을 죽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다른 종족보다 번성하게 만드는 미덕이지.'

그럴듯한 말에 아마엔의 눈이 빛났다.

아직 중2병에 걸리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일 텐데.

'나는 너의 탐욕이 퍽 기껍구나 로일.'

"가, 감사합니다?"

'단신족들의 광산에 들어가 푸른수염이 내게 진 빚을 받아낼 것이다. 그동안 네가 수행할 과업이 있으니······.'

야망 있지만 가난한 상인 로일.

내가 지켜본바, 심성도 나쁘지 않고 의외로 수완도 괜찮아 보였다.

나는 꼬리를 스윽 들었다.

아공간 반지의 적절한 활용 덕에, 제법 멋진 장면이 연출되었다.

떨그렁.

내 꼬리에서 금붙이가 마구 떨어진다.

로일에게 줬던 순금 막대의 몇 배, 아니 몇십 배의 재보가 객실 바닥에 쌓인다.

펠레리안의 던전에서 챙긴 재물의 일부였다.

"이, 이것은! 설마 제게······!"

'투자라고 할 수 있겠지. 네게 그저 주는 것은 아니다.'

"당연, 당연한 일입니다!"

로일의 눈에 황금이 비쳤다.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진솔해 보였다.

'이것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펠레리안으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수도에 가면 제값을 받고 환금할 수 있을 것이다. 저 고대 금화들은 칼로 표면을 깎아내서 언제 물건인지 알지 못하게 해. 값은 떨어져도 뒤가 구린 입장에선 그게 안전하다.

아주 오랫동안 악당으로서 살아온 펠레리안이다.

그는 다른 요정들과 달리 세상일에 잔뼈가 굵었다.

-수도에 창고를 하나 빌려 두라고 말해라. 돈을 굴리기 위해서는 거점이 필요해. 돈 아낀다고 보증금이 싼 싸구려 업체는 안 쓰는 게 옳다. 이번에 푸른수염에게 위약금을 받아내면 그걸 보관할 장소도 필요할 것이다. 드워프에게는 보석으로 받는 것보다 현물로 받는 게 훨씬 나으니 창고가 필요하겠지.

이미 펠레리안과 내게는 계획이 다 있었다.

-네 그 고블린 친구들과도 연락의 끈을 이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이건 나중에 얘기하고.

나머지 것들은 전부 로일에게 지시해 두었다.

그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지고.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저 로일 리들. 귀하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도록 신명을 바치겠습니다."

순금 막대 하나를 줬을 때보다 더 격한 반응이었다.

다만, 그저 감사 인사만을 했으면 기대한 정도에 그쳤을 텐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로일은 내 펜을 가져가더니 갑자기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한참 걸려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계약서였다.

"이런 막대한 투자금을 구두로 약속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세히 읽어 봐 주십쇼. 계약서입니다."

계약서에는 자세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내가 로일과 그 상단에 투자하고, 이익 비율은 어느 정도이며, 상환 기간은 언제까지인지.

"자금의 사용 계획은 이러합니다."

돈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내용이 막힘없이 쏟아져 나왔다.

보아하니 진작부터 돈이 생기면 어떻게 쓸지를 계획해 둔 것 같다.

-흠, 어설퍼 보였는데 그냥 쭉정이는 아니었군.

칭찬에 인색한 펠레리안마저 그리 평가했다.

로일은 눈치빠르게 내 존재 대해 비밀 유지 조항까지 적어 뒀다.

초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답을 주었다.

'계약서라, 참으로 인간답군.'

"그러면······."

'훌륭하다.'

계약서라고는 알바 근로계약서밖에 안 써 본 나였지만.

멋지게 사인을 했다.

제대로 된 문자는 아니고 그냥 뱀이 기어가는 듯 휘갈긴 것이다.

그게 오히려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감사합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로일은 계약서를 받아 든 뒤 아마엔을 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아마엔 역시 기쁜 눈치였다.

'그리고, 드워프들이 광산에서 언제 나오는지 알아봐 줘.'

로일은 알겠다며 곧장 뛰어나갔다.

나도 슬슬 준비해야겠군.

창가에 올려 둔 화분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싹이 틀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걱정인걸.

싹이 트면 뭐가 자라날까. 싹이 트긴 할까. 궁금하다.

그리고 얼마 뒤, 로일이 돌아왔다.

"알아왔습니다."

로일이 급박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이랍니다!"

'뭣!'

서둘러야겠다.

나는 키뱀이의 화분을 다시 아공간에 넣었다.

* * *

"굳이 직접 보고 싶으시다니 어쩔 수 없는데······."

배불뚝이 사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깨달은 로일이 넉살 좋게 달라붙었다.

"그러지 마시고, 제가 드워프들을 꼭 만나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은화 몇 푼이 배불뚝이에게 건네졌다.

"아이참, 이러려고 말한 게 아닌데······."

이제 로일도 이 정도 돈쯤은 쉽게 건넬 수 있었다.

배불뚝이가 슬쩍 은화를 받아 챙겼다.

"드워프들한테 말 걸어 봤자 소용 없을 거예요. 우리랑은 한마디도 안 하거든."

"예, 그냥 맥주 가져갈 때. 얼굴만 보면 됩니다."

"안면이라도 익혀서 혹시 교역을 틀 수 있지 않을까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 있던 것도 아니거든요? 그냥 너무 기대하지 마시라고 말하는 겁니다."

"예예, 알겠습니다."

로일이 가져온 맥주는 제법 상등품이었다.

드워프에게 팔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들에게 그 오크통이 전달되는 날이었다.

로일은 은화를 적당히 사용함으로써 그 인도 과정에 직접 참관하게 되었다.

"나온다."

끼이이익

광산의 입구가 열리고 드워프들이 나왔다.

드워프들은 금속 주괴가 담긴 상자를 들고 있었다.

과연 힘 좋은 종족답게, 그 무거운 상자들을 쉽게도 옮긴다.

터엉!

상자들을 내려놓고 오크통을 슬쩍 바라본다.

덥수룩한 수염이 뒤덮은 입술이 꿈틀거렸다.

"맥주?"

"예, 스무 통이요."

드워프들은 과묵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크통을 굴려 옮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배불뚝이는 드워프들이 가지고 나온 금속 주괴들을 살폈다.

그러고는 입이 찢어져라 웃는다.

겨우 맥줏값으로 받기에는 차고 넘치는 값어치였다.

참관하겠다고 조르던 로일은 의외로 얌전했다.

그저 드워프들이 제대로 맥주통을 옮기는지만 확인할 뿐.

하지만 사실, 로일의 등에는 식은땀이 주륵 흐르고 있었다.

'저거 괜찮나?'

뱀 님이 고안한 계획은 그야말로 과격하기 그지없었다.

맥주통 안에 숨어서 함께 드워프 광산에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맥주에 익사하지는 않겠지.'

도수 낮은 맥주라도 결코 안전해 보이지는 않는 계획.

하지만 로일로서는 그 뱀의 무사를 기원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뱀술 한 통이 광산으로 섞여 들어갔다.

< 비밀스럽게 잠입 성공 >

081. 비밀스럽게 잠입 성공

맥주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라거'와 '에일'.

자세하게 구분하자면 라거는 맥주통 아래 가라앉은 효모를 이용해 발효한 하면 발효 기법을 사용했고, 에일은 위로 뜬 효모를 사용한 상면 발효 기법을 사용했고 어쩌구 한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간단히 구분하는 방법이 있으니.

맥주가 맑고 구수하며 맛이 청량하면 라거이고, 향이 풍부하며 탁하고 목 넘김이 묵직하면 에일이다.

로일이 가져온 오크통, 즉 내가 잠입한 통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에일이었다.

에일의 특징답게 향이 기가 막히다.

'어어······.'

꽃향기 비슷한 아로마가 내 콧속을 가득 채웠다.

'조금 취할 것 같기도······.'

원래도 술이 약한 나였다.

뱀이 된 뒤에도 체질이 바뀌지는 않았나 보다.

맥주 도수가 낮아서 다행이지, 와인이라도 담겨 있었으면 냄새만으로도 만취했을 것이다.

-얌전히 참아라.

펠레리안은 유난히 적극적이었다.

깨끗하게 몸을 씻기는 했지만, 마실 수 없게 되어 버린 에일 한 통에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광산에 잠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드워프들이 나왔는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좋아, 안으로 잠입할 때까지만 여기서 견디자.

마시지만 않으면 괜찮겠지.

오크통 안에는 숨 쉴 공간이 있었고 숨구멍까지 작게 뚫어 놨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때였다.

내가 담겨 있는 오크통이 확 기울은 것은.

꼬로로로록

머리까지 맥주에 잠겨 버렸다.

얼른 몸의 중심을 잡았지만, 맥주를 잔뜩 들이켜고 말았다.

"딸꾹."

뱀도 딸꾹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순간 처음 알았다.

'어어······ 오······ 좋은데.'

잔뜩 들이마신 맥주 탓에 배가 빵빵하다.

어쩐지 기분이 좋고 알딸딸해진다.

취한 거다. 나는 취하고 있다!

'으음 좀 취한다······.'

-야 인마, 얼마나 마셨다고 벌써 취해!

뱀이 된 뒤로는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지만.

전생의 경험에 의해, 술을 마시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제기랄, 힘들어 죽겠군."

"수레에 싣기 전까지만 굴려서 가."

드워프가 오크통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나 역시 데굴데굴 굴렀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취하면 안 되는데.

'나는 취하면······.'

폐급이 되어 버리는데······!

* * *

['고집스러운 장인' 뒤에 숨겨진 드워프라는 종족의 본질적이고 신비로운 특성에 대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알려진 드워프는 '완고한 장인' 혹은 '섬세한 대장장이' 정도로 인식된다.

하지만 드워프를 그저 대장장이 종족으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인 사고방식이다.

우선 드워프들은 지상의 드워프와 지하의 드워프로 나뉜다.

지상의 드워프들은 대장장이라기보다는 건축의 대가들이 많으며, 태양궁성을 비롯한 위대한 건축물들은 대부분 지상 드워프들의 솜씨이다.

유쾌한 성격 덕에 고고한 숲의 요정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반면 지하의 드워프들은 다르다.

주로 광산에서 살며 점점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가는 그들의 도시에 들어가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상의 드워프밖에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은 지하의 드워프를 보고 깜짝 놀란다.

작은 키와 단단한 근육은 다를 바 없으나, 우선 피부가 창백하게 희다.

그리고 깊게 푹 파인 눈두덩이, 엄청나게 풍성한 수염 탓에 공포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땅을 파고 내려간 끝에 마침내는 산의 뿌리까지 갉아 먹는 흰개미와 같으니.

일평생 광산을 개척하고, 지하를 던전처럼 복잡하게 만들며 사는 이들이다.

그런 지하의 드워프들이야말로 진짜 대장장이들이다.

좀처럼 지상에 나오지는 않으나, 그들이 만든 무구는 전 대륙에 위명을 떨치곤 한다.

하지만 확고히 말하건대, 드워프들은 본디 지하에서 살도록 설계된 종족이 아니다.

척박한 지하에서 수염의 풍성함 따위에나 집착하는 그들의 수명은 지상의 드워프보다 확연히 짧다.

채 20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대부분일 정도다.

극심한 폐 질환, 광산이 무너져 압사, 지하에서 솟아 나온 마물들에게 물려 죽는 등, 그들의 사인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연구자들을 특히 매료시키는 증상이 있다.

불홀림, 혹은 불홀림증이라고 불리는 정신의 병이다.

아무리 강대한 정신력을 지닌 드워프라도 불홀림이 시작되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불에 홀린 드워프들은 기어코 한 마리 불나방처럼······.

* * *

인간들의 착각처럼.

지하의 드워프들이 늘 우중충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질 좋은 맥주만 있다면 드워프들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

"건-배!"

나무로 만든 맥주잔들이 허공에서 부서져라 맞부딪쳤다.

흰 맥주 거품이 사방으로 튄다.

붉은 모루 광산의 드워프들은 한 파인트짜리 에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다섯 명의 드워프 중 맥주잔을 내리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맥주를 원샷했다.

"크하아!"

"끄어어어어억!"

마치 드래곤의 브레스 같은 트림을 내뿜는다.

왁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붉은 모루 광산은 단순한 광산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규모는 거대해졌고, 이제는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최상층은 드워프들의 주거지와 각종 편의시설들이 위치했다.

하층으로 내려가서 하루 종일 광석을 채굴했던 드워프들은 최상층으로 올라와 맥주 한잔으로 피로를 푼다.

얼굴에 묻은 시커먼 검댕을 닦기도 전에 맥주를 뱃속에 쏟아붓는 것이다.

그 특유의 대단한 주량 덕택에 드워프들이 하루에 소모하는 맥주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구만."

"돼지 한 마리 통째로 구워 오라고 할까."

"햄도 추가해!"

드워프들은 이 깊은 광산에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

이곳 붉은 모루 광산과 인간들의 교역량이 크지 않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붉은 모루의 드워프들은 어느 정도 자급자족을 해내고 있었다.

그들의 접시 위에 두툼한 햄이 올랐다.

그리고 발효한 양배추절임, 으깬 감자까지.

드워프는 햄을 썰지도 않고 포크로 푹 찍어 입에 넣었다.

우적우적 씹는 그 햄은 '돼지'로 만든 것이고.

그 '돼지'는 사실 지상의 돼지와는 다른 품종이었다.

정확히는 마물.

신비롭게도 철광석을 먹고 사는 스틸 호그를 광산 내에 키우고 있는 것이다.

감자나 양배추도 마찬가지이다.

지하에서도 자라는 독특한 품종의 식물들로, 이곳 드워프들의 주식이었다.

돼지, 감자, 흰양배추.

초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드워프들의 식단 전부였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개의치 않았다.

맥주만 있으면 형편없는 음식도 맛있어지는 법이다.

그들은 순식간에 내리 석 잔을 마셨다.

그 정도면 배가 부를 법도 했는데, 오늘의 드워프들은 특히 신이 난 듯했다.

"술잔을 부딪치고 호-!"

건배를 멈추지 않는다.

"망치를 휘두르고 호! 땅을 파내고 광석을 캐낸다, 호!"

거나하게 취해서 시뻘게진 얼굴로 노래를 불렀다.

"마침내 광산 깊은 곳, 새빨간 불에 홀려 죽을 때까지, 호!"

술집을 운영하는 드워프 노인이 혀를 차며 젊은 광부들을 보았다.

"주인장! 여기 맥주 더!"

"아니 그냥 오크통째로 주쇼!"

그것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적당히들 마셔'라는, 어차피 듣지 않을 무의미한 말은 하지 않았다.

주인장은 오늘 새로 들어온 오크통을 끌고 왔다.

가까이 오니 술 냄새가 더 지독했다.

드워프들의 눈은 이미 풀려 있었다.

"토하지나 말라고······."

"안 해애~! 안 하지이."

"쯔쯔."

주인장은 그냥 오크통을 옆에 가져다 두고 떠났다.

원래는 따라 마시기 위해 뚜껑을 따야 하는데, 드워프는 더 무식한 방법을 썼다.

망치를 꺼내 번개같이 휘두른 것이다.

터엉!

오크통의 윗부분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러고도 나무 부스러기가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떼어낸 오크통 뚜껑을 바닥에 버린 드워프가 입맛을 다시며 맥주잔을 들었다.

그대로 에일을 퍼 올리려던 순간.

휘익!

오크통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맥주에 흠뻑 젖은 한 마리 뱀이었다.

마치 수정처럼 아름다운 비늘을 가진 뱀이, 음식이 놓인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잔뜩 취한 드워프들도 일제히 굳었다.

지금 상황을 곧바로 이해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오크통 안에 있었을 뱀은 취했는지 테이블 위에서 머리를 빙빙 돌렸다.

드워프 중 하나가 소리쳤다.

"배, 뱀술이다앗!"

그 한마디가 경직되었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뱀수울!?"

"나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데에."

"이 미친놈들, 푸하하하!"

잔뜩 취한 드워프들이 오크통에 달려들었다.

뱀이 담겨 있었던 에일을 뱀술이라고 부르며 마구 퍼담는다.

술 마신 사내들에게 '미친놈'이라는 말은 극찬이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 미친놈스러운 짓을 했다.

방금 전까지 뱀이 들어 있던 맥주를 들이켜는 것이다.

"너도 먹어라!"

누군가가 뱀에게 햄 한 덩이를 줬다.

뱀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먹자 드워프들의 흥은 극에 달했다.

"맥주도 마시겠냐!"

"사아악!"

뱀은 자기 앞에 놓인 맥주잔에 코를 박고 맥주를 마셨다.

"으하하하하!"

"잘 마시는데!"

뱀의 등장으로 잠깐 멈췄던 노래를 다시 부른다.

"뱀술을 마시고, 호! 미친 짓을 벌이고, 호!"

"사악!"

"광산 막장에 버려져 죽어 가도! 호!"

"사악!"

뱀이 '호!'라는 구호에 맞춰서 함께 울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너무 취해서 환상을 보고 있는 건가.

드워프들은 웃으면서 맥주를 퍼마셨다.

술자리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결국 주당인 드워프들마저 만취해 버렸다.

"나, 손끝의 감각이 없어."

"나는 이, 입술이 계속 떨려."

평소 아무리 술을 마셔도 겪어 본 적 없던 증상이 찾아오기도 했다.

손발의 감각이 무뎌지고, 입술이 경련하는 등이었다.

미량의 신경독에 중독되었을 때 일어날 법한 증상.

"으하하하! 뱀술이라 그런가 보구만!"

"푸하하하!"

그러나 그 또한 술자리의 여흥처럼 취급되었다.

필름이 끊겼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를 반복한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셋!"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테이블 주변에 둘러서 박수를 치며 뱀을 응원했다.

음식이며 접시가 다 바닥에 떨어졌고, 테이블 위에는 뱀이 춤을 추고 있었다.

"잘 춘다!"

그걸 춤이라고 해야 할지, 몸부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구경하던 드워프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뱀의 춤사위에 끼어들었다.

오늘 술집에는 이 드워프 일행밖에 없었고.

오크통을 통째로 던져준 주인장은 방에 들어가 쉬고 있었다.

소란이 너무 심해져서 마침내 주인장이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배, 뱀이다앗!"

자기 술집의 테이블 위에서 뱀이 춤을 추고 있었으니.

게다가 범상찮은 모습이 틀림없는 마물이었다.

"저리 갓, 쉬잇!"

"거 우리 친구한테 뭐 하는 거요!"

"이 미친놈!"

주인장이 매달리는 드워프를 밀치자, 만취한 청년은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뱀은 머리를 휘청거리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주인장은 그 뱀에게 빗자루를 휘둘렀다.

퍽, 뱀이 튕겨 나가야 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텅!

오히려 빗자루가 튕겨 나갔다.

뱀이 꼬리를 휘둘러 빗자루를 쳐낸 것이다.

주인장은 당황해서 다시 빗자루를 휘둘렀다.

텅- 티잉! 탁!

세 번 휘둘렀는데 세 번 모두 꼬리로 튕겨 냈다.

"쉬쉬쉬쉿."

뱀이 낄낄 웃는다고 느낀 건 그의 피해의식일까.

"푸하하하!"

"멋지군, 멋져."

취한 드워프들이 빈 맥주잔을 흔들며 감탄했다.

뱀이 그에 화답하는 것처럼 당당하게 몸을 쭉 폈다.

"야 이 새끼들아! 다들 나가!"

주인장은 노성을 질렀다.

그 역시 한때는 이름 날리던 드워프 전사였다.

매일 취객들을 상대하는 술집 주인이 대가 약할 리도 없다.

그는 뱀을 해치우기 위해 부엌에 들어가 칼을 찾았다.

치링-

누군가 술집 안에 들어온 것도 그 순간이었다.

만취한 객들도, 때마침 부엌에 칼을 가지러 들어간 주인장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이놈의 새끼들, 아직도 안 꺼져!"

칼을 들고 나온 주인장이 씩씩거리며 달려들었다.

분노로 눈에 뵈는 것이 없는지 휘두르는 꼴이 퍽 위협적이었다.

"어엇!"

새로 들어온 손님이 당황해서 외쳤다.

하지만 칼은 멈추지 않았다.

* * *

'고, 공수 입빽인!'

날아오는 칼날을 입으로 물었다.

이빨에 힘을 주자 콰창! 하고 칼날이 깨져 나가······ 지는 않았다.

아파!

이빨이 아프다아.

우에엑!

나는 칼을 입에서 놓고 구역질을 했다.

간신히 토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다.

"우아아악."

"끄억. 푸핫!"

여기 와서 새로 사귄 술친구 드워프들이 웃었다.

테이블 위에 토할 뻔했네.

성인이 되고 첫 술자리에 갔을 때가 생각나는구운.

그때는 신기하게 술이 잘 들어갔다.

'신기해요, 저 술이 하나도 안 취해요!'하고 소맥을 마구 퍼마시다가······.

-너는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하지만 더 떠올릴 수가 없다.

머리가 핑핑 돌았기 때문이다.

-드워프들과 전투를 시작할 줄 알았는데······ 설마 같이 술을 퍼마실 줄은 몰랐다.

그래그래, 다같이 친하게 지내면 좋지.

테이블도 좀 정리해야겠다.

너무 어지럽힌 것 같으니까,

초급마법원소물을 사용합니다아······.

물이 나오지 않는다.

"으아아!"

다른 드워프들은 괜찮은데.

저 노인 드워프는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그가 또 한 번 칼을 내게 휘둘렀다.

죄송합니다, 금방 나갈게요. 테이블만 치우고.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때, 후드를 뒤집어쓴 드워프 하나가 주인장을 덮쳤다.

칼을 강제로 빼앗고 외친다.

"말 못 하는 짐승에게 너무한 것 아닙니까!"

"너, 너는······."

노인장은 당황했다.

그러곤 억울한 듯 말했다.

"저 미친놈들이 내 술집에 뱀을 데려왔어!"

"우리가 아니야······ 오크통에서 튀어 나왔다구. 이 꼬마 친구가."

"오크통? 헛소리는!"

투닥거리려는 이들을 후드 쓴 사내가 막았다.

"내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러고는 내게 다가온다.

너가 누군데, 나 그리고 말 못 하는 짐승 아니야.

내 새로 사귄 술친구들이 그것을 막으려 했다.

우-정의 힘이다!

"무슨 짓을······!"

후드를 막으려던 내 친구가 흠칫 놀랐다.

후드 쓴 사내의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바닥에 침을 퉤 뱉는다.

"에이, 술맛 떨어지게."

그러더니 후드 사내를 내버려 둔다.

이 배신자들.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돼?

후드 사내가 나를 움켜잡았다.

피하려고 했는데, 휘청 어지러워서 그대로 쓰러졌다.

"밖에서 들어왔나 보군. 불쌍하기도 하지."

"사아악."

안 불쌍해, 일부러 들어온 거야.

그는 나를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술집에서 빠져나왔다.

아무도 우리를 잡지 않았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드워프가 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납치범······.

다른 드워프들이 보이지 않는 인적없는 곳에 접어들고.

그가 후드를 벗었다.

몽롱한 시야에 드워프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 사악!"

깜짝 놀라 버렸다.

드워프라고 하면 모두 수염이 덥수룩하다. 심지어 여자 드워프마저.

하지만 눈앞의 드워프는 달랐다.

순하게 생겨 가지고, 눈썹 조금 말고는 얼굴에 털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며 수염이며 매끈하다.

-무모증 드워프인가······.

펠레리안이 황당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드워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나처럼 민둥하구나."

뭐라고오!

드워프는 내게 멋대로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비슷한 신세네."

억울했다.

나는 민둥한 게 아니라 매끈한 거니까.

< 숙취의 뱀이 되었다 >

082. 숙취의 뱀이 되었다

세상에는 탈모를 희화화하는 일이 꽤 있다.

전생에서도 그런 밈이 있지 않았던가.

자라나라 머리머리라느니, 탈모빔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밈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탈모였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물론 나는 뱀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머리 빠질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이제는 머리에 탐스러운 뿔, 아니 왕관까지 달고 있었으니.

"후후, 어쩐지 그냥 놔두지 못하겠더라고."

그런데 이 드워프는 내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대머리가!

우수수수-

나는 전신의 비늘을 곤두세웠다.

"너도 맨들······ 하지는 않구나."

드워프가 당황했다.

"기분이 안 좋았니? 그렇다면 미안······."

아니, 그렇다고 왜 또 사과를 하고 그래.

저렇게 반응하니까 내가 좀 미안해진다.

"내 이름은 둥켈이야. 넌 바깥에서 온 것 같은데,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얼굴이 둥그러니 둥켈일까.

성격도 둥글둥글 유약한 드워프 같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곤두세웠던 비늘을 가라앉히고 몸에 힘을 뺐다.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팽팽 돈다.

한숨 자야겠어.

* * *

끄아악.

머릿속에 작은 뱀 한 마리가 들어간 게 틀림없다.

'뇌 파먹는 뱀'이 내 머릿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머리가 아플 수 없었다.

그 뱀의 이름은 분명, 두통의 뱀 '숙취.'

나는 몸부림을 쳤다.

이곳은 침대 위였다.

둥켈, 그 드워프가 나를 침대에 뉘어 둔 것이다.

"일어났구나."

둥켈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깜찍한 잠옷을 입고서.

"살면서 술을 마시는 마물은 처음 봤어. 이거라도 마셔. 꿀물이니까."

둥켈은 상냥하게도 주철 컵에 꿀물을 담아 줬다.

나는 컵 손잡이를 꼬리로 감아 조심스럽게 꿀물을 마셨다.

그 모습을 둥켈이 감탄하며 지켜봤다.

"정말 똑똑하네, 마물같지 않게."

뭘 이 정도 가지고, 꿀물은 고맙게 마실게.

둥켈은 드워프답게 키가 작고 몸집이 두툼했다.

그저 살이 찐 것은 아니고 지방층 아래에 튼실한 근육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자고로 드워프라면 풍성한 수염이 얼굴을 뒤덮고, 팔뚝에도 털이 부숭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둥켈은 얼굴뿐만 아니라 팔마저 매끈했다.

-날 때부터 저리 태어났나 보군.

'그런가요?'

-그래, 아니면 병에 걸렸든지.

무모증이라는 것이 있다.

눈썹을 비롯해 전신에 털이 없거나 적은 것을 의미한다.

둥켈은 눈썹은 있었지만 다른 털이 거의 없었다.

'으, 꿀물 먹으니까 좀 살 것 같네.'

쓰린 속에 달콤한 꿀물이 짜르르 퍼지는 것 같았다.

꿀물의 향이 묘하다. 꿀만이 아니라 허브와 비슷한 향까지 느껴졌다.

"갈화즙을 함께 넣은 거야. 숙취 해소에 좋지."

둥켈이 말했다.

펠레리안이 덧붙여 설명했다.

-드워프들은 술을 좋아하는 만큼 숙취 해소법에도 전문적이지. 워낙 술꾼들이기에 당연한 일이야.

그런데 둥켈은 의외의 말을 했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셔서, 이거 만드는 것도 오랜만이네."

술을 잘 안 마신다라.

나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펠레리안은 아주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수염도 없고 술도 잘 못 마신다라······ 저 드워프의 삶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는구나.

'어땠는데요?'

-어디 모자란 취급을 받고 살았겠지.

가차 없는 평가다.

마음씨 좋은 드워프 같은데 이게 그 정도로 박한 평가를 받을 일인가.

수염이 뭐 그리 중요하길래?

-여자도 수염이 나는 게 드워프다. 그리고 수염은 곧 명예이며 강함이지. 풍성하고 수염의 질이 좋을수록 더 대접받는 게 그 종족이야.

그럴 수가.

그 무슨 끔찍한 수염성애자들이라는 말인가.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만나야 하는 드워프 왕의 이름도 푸른수염이라고 했다.

그 정도로 수염이 중요한 건가.

-수염은 물론이고 털조차 없는 녀석이 무슨 대접을 받겠나. 너도 생각해 보아라. 뱀굴에서 태어난 형제자매 중에 비늘 없이 태어난 개체가 있다면. 그 녀석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조금 징그럽게 느껴지긴 할 것 같다.

하지만 뭐, 나도 혼자 하위종인 리틀 화이트 스네이크로 태어났는데······.

-술을 못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지. 성격부터 괴팍하고 독선적으로 태어나는 녀석들이 유일하게 친교를 다지는 방법이 술자리야. 그것도 못 마시면 배척받는 것도 당연하지. 가여울 정도로 한심한 태생이로다······.

둥켈을 평가하는 말이 독설이나 다름없다.

또, 또 말 밉게 한다 싶어서 펠레리안을 바라봤다.

엘프우월주의자답게 둥켈을 경멸을 담아 쳐다보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웬걸.

펠레리안은 마치 먼 곳을 보고 있는 듯 아련한 눈빛이다.

-태어날 때부터 받은 천형은 과연 누구의 죄인가······.

그는 어쩌면 둥켈에게서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수염이 없는 드워프.

그리고 폭삭 늙은 노인의 외모로 태어난 요정.

나는 그에게 농을 던졌다.

'오오, 공감 능력, 동병상련.'

-그래.

성질을 확 낼 줄 알았는데, 펠레리안은 오히려 씩 웃었다.

-뱀아, 너도 열등한 흰색으로 태어났으니까 무슨 기분인지 알겠지.

'······.'

설마, 예전에 형이 날 보자마자 죽이려 한 것도. 내가 흰색이어서 그랬나?

펠레리안에게 한 방 먹어 버렸다.

'흰색은 열등하지 않아.'

펠레리안은 얄밉게 웃을 따름이었다.

둥켈이 다가왔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떠드는지도 모르고,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와, 구경시켜 줄게."

드워프의 집은 지하에 흙과 바위를 파고들어 만든 것이었다.

좁아도 제법 아늑하기는 해도 구경할 만한 건 없을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둥켈이 등불을 들고 방을 나갔다.

나는 그런 둥켈을 따라갔다.

"나만의 비밀 공간인데······. 네가 잠깐 지내도 되고."

드워프의 비밀 공간이라.

뭔가를 만드는 공방이나 작업 공간인가?

그리 생각하며 둥켈을 따라갔다.

둥켈의 집은 드넓은 광산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지 다른 드워프들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좁은 계단이 나왔다.

숙취 때문에 계단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그냥 둥켈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둥켈은 살짝 놀란 듯했으나, 곧 오히려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내부가 밝아졌다.

등불이 없어도 될 정도였다.

"여기야."

그도 그럴 것이.

이 땅속에 햇볕이 비추는 공간이 존재했던 것이다.

"내 비밀 정원이지."

지하 정원.

그것이 정말 존재했다.

공동 안에는 각종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햇볕이 없으면 푸른 잎들이 이렇게 무성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늘의 햇볕은 이 지하까지 들어와 주었다.

"수직 동굴이 있어서."

위를 올려다보니 저 천장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바깥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

"여기서 먹을 수 있는 과일을 기르기도 하고······ 꿀도 이곳에서 채취한 거야."

벌들이 윙윙 날아다닌다.

신기하기도 하지.

햇볕이 든다고 해도 이렇게 정원을 가꾸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둥켈 이 친구는 숫제 드워프보다는 엘프에 가까운 성격 같다.

그는 산딸기 한 알을 따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하나를 더 따서 내게 던져주었다.

씹어 먹으니 새콤한 즙이 퍼지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내 감상을 말해 줘야겠다.

나는 아공간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여기서 잠깐 지내도 돼. 밖으로 나갈 방법은 내가 알아봐 줄 테니······. 엇."

둥켈이 움찔 굳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갑자기 종이 하나가 떠오르더니, 펜이 저절로 움직여 글씨를 썼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정원이군, 드워프.'

둥켈은 종이의 글씨와 나를 번갈아 봤다.

"네가 쓴 거니?"

'그러하다.'

그리고 곧 둥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젠장, 이거 부끄러운데."

너도 나처럼 민둥하니 하면서 내게 이런저런 말을 주절거린 게 생각난 듯했다.

하긴, 설마 내가 제대로 알아들으리라는 생각도 못 했겠지.

아마 혼잣말을 하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딱 봐도 친구가 없어 보이니까.

'부끄러워할 것 없느니라, 드워프여. 나는 그대가 베푼 호의에 감사하고 있다.'

"······근데."

둥켈이 그 순박한 눈망울을 찌푸렸다.

"너 왜 그렇게 오글거리는 말투로 말하는 거니?"

'······.'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펠레리안이 낄낄 비웃었다.

분명히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아마엔은 멋지다고 감탄했는데······.

하다못해 나나루크가 이렇게 통역할 때만 해도 잘 먹혔던 것 같은데.

'하여튼 고맙다고.'

그냥 편하게 말투를 바꿨다.

확실히 이게 편하다.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런데, 너 엄청 상위의 마물 그런 건가 보구나. 글씨도 쓸 수 있고 마법도 쓸 수 있고."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마물만 보면 호들갑을 떨던 인간과 달리.

둥켈은 내게도 호의적으로 대했다.

'너, 푸른수염이라는 드워프를 아니?'

"······당연히 알지. 우리 모루의 주인이니까."

'난 그 드워프를 만나러 왔어.'

"그분을 왜?"

'예전에 계약한 것이 있거든. 만나서 계약 얘기를 좀 해야겠어.'

다행히 그 푸른수염이라는 드워프가 늙어 죽지는 않은 듯했다.

그런데 둥켈의 반응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심층에 계시긴 한데, 만나 뵙기는 힘들걸."

아무리 그래도 정체 모를 마물을 왕에게 데려갈 수는 없다는 걸까.

하지만 어쩐지 그런 눈치는 아니었다.

'왜지?'

"그게······."

그때였다.

천장에서 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뱀아, 숨어!"

숨기는 뭘.

그렇게 말한 둥켈은 정작 삽 한 자루를 치켜들었다.

"이 자식들 설마 또!"

퍼드득거리는 소리는 위의 수직 동굴에서 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박쥐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푸드드득!

어라, 익숙한 녀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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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톱 박쥐lv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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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이 톱날 같은 박쥐들.

형 누나들의 원수들!

둥켈은 열심히 삽을 휘둘렀다.

하지만 저렇게 굼뜬 동작으로 날쌘 박쥐들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삽은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동굴에 박쥐가 들어올 수도 있지 뭐 저리 과민반응을 하나.

하지만 둥켈이 저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퍼드득!

생쥐만 한 칼톱 박쥐와 달리.

웬 고양이만 한 박쥐들이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

──────────────

[왕칼톱 도둑 박쥐lv12]

──────────────

이 녀석들은 덩치도 크고 강해 보인다.

오히려 그 덕에 둥켈이 삽을 휘둘러 맞출 수 있지만, 문제는 한 놈만 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박쥐들은 수풀을 헤집고 칼날 같은 발톱으로 땅을 팠다.

"안 돼! 어떻게 기른 건데!"

박쥐 한 마리가 기어코 땅에 박혀 있는 무언가를 뽑아냈다.

마치 산삼같이 생긴 뿌리식물이었다.

신비롭게도, 그 뿌리가 파랗게 빛났다.

-저건 마력초인데, 설마 이 드워프가 땅 아래에서 마력초를 길러 낸 건가!

뭔지 모르겠지만 귀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꿀물의 값을 치르기로 했다.

*「식심의 도약lv3을 사용합니다.」

박쥐가 날쌔다고 해도 설마 나보다 더 빠를까.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박쥐가 추락했다.

놈이 마력초를 떨구자, 다른 박쥐들도 이쪽으로 덤벼들었다.

"어어······!"

둥켈이 당황했다.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도와주려고 하다가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퍼버벅!

내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칼톱 도둑 박쥐lv12을 처치했습니다.」

*「칼톱박쥐lv14를 처치했습니다.」

*「칼톱박쥐lv13를 처치했습니다.」

친구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가자, 박쥐들도 무서움을 깨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둥켈이 도망치는 박쥐들에게 삽을 휘둘렀지만, 단 한 놈도 맞아 주지 않았다.

이 약한 드워프 같으니라고.

*「광선lv2를 사용합니다.」

내 입에서 뿜어져 나온 광선이 날아가는 박쥐들의 몸을 꿰뚫었다.

파괴광선은 아니지만 박쥐 정도야 쉽게 잡을 수 있다.

놈들이 벌레처럼 픽픽 떨어졌다.

순식간에 박쥐들이 깔끔히 정리되었다.

"와, 와아!"

둥켈이 감탄해서 박수를 쳤다.

"고마워, 정말! 마력초가 싹튼 뒤부터 저렇게 박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거든. 골치였는데 참."

둥켈은 다가와 악수를 청하려다가 내게 손이 없다는 걸 깨닫고 흠칫했다.

허공을 맴도는 그의 손을 꼬리로 잡아 흔들어 주었다.

-요정도 아니고 드워프가 마력초를 길러 냈다고! 게다가 개화까지 시켰어!

'많이 어려운 거예요?'

-어렵다마다. 요정 중에서도 정원사쯤은 되어야 저 블레티풀을 길러 낼 수 있다. 가까이 좀 가 봐라.

마력초라는 것에 다가가 봤다.

자세히 보니, 확연한 마력이 느껴졌다.

'아, 마력 포션을 만들 때 쓰던 그거구나!'

대수림에서 본 적이 있는 식물이다.

그런데 설마 이 먼 산맥에서 이 풀을 길러 내다니.

자연 친화적인 드워프가 내 앞에 있었다.

던전을 건축하고 골렘을 만드는 게 취미인 엘프도 옆에 있었고······.

'아!'

무언가가 번개같이 떠올랐다.

"정말 고마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지?"

안 그래도 너에게 부탁할 일이 생겼단다.

'이것 좀 봐 줄래?'

"으응?"

나는 아공간에서 키뱀이의 씨앗을 심은 스튜 그릇을 꺼냈다.

여전히, 싹이 틀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건 대수림 깊숙한 곳에서 얻은 씨앗인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까.

에라 모르겠다.

나는 꽤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줬다.

세계수의 뿌리에서 키메라가 만들어졌는데, 그 키메라가 몸속에 마석 대신 품고 있던 씨앗이라고.

얼마 전에 심었는데 싹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세, 세계수······. 너 혹시 대수림에서 온 거니?"

둥켈은 세계수라는 이름을 듣고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맞아.'

"난 죽기 전에 대수림에 가 보는 게 소원이야. 대수림에 가서, 세계수도 직접 보고······!"

정말 드워프답지 못하다.

'알겠으니까 빨리 봐 줘.'

므아아 하고 울며 나를 바라보던 키뱀이를 떠올리니 울적해졌다.

둥켈은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냈다.

그리고 키뱀이의 씨앗을 찾아냈다.

"호오, 이거 큰일 날 뻔했는데. 씨앗이 썩을 뻔했어."

씨앗은 젖어서 그런지 조금 거뭇했다.

싹이 트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어떡해, 얘 죽는 거야 그러면?'

"죽기는······ 그러진 않을 거고."

약간 유약해 보이던 둥켈이 지금은 이X종 교수님처럼 근엄하고 멋있어 보인다.

그는 정말로 수술용 메스 비슷한 작은 칼을 가져왔다.

"아직 씨앗이 제대로 여물기 전에 채취해서 그런가. 겉껍질이 갈라져야 하는데 질겨서 열리지를 못하고 있었어."

그러고는 갈색 겉껍질을 세심하게 갈라 낸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우리 애 살릴 수 있는 거죠?'

"물론."

둥켈이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겉껍질을 잘라 내자, 푸른 씨눈이 드러났다.

"내가 책임지고 싹틔워 줄게."

그래.

진정한 자연의 친구는 오늘부터 엘프가 아니라 드워프다.

< 새키 >

083. 새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는군.

이미 죽었으면서 펠레리안이 감탄했다.

솔직히, 나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드워프라니.

그런 인식이 있다.

요정 입장에서 드워프는 아주 못돼 먹은 자연 파괴자들이라는 인식.

드워프는 숲을 개간하고, 화로의 불을 지피기 위해 나무를 불태운다.

광산을 채굴한답시고 땅의 지맥을 훼손하는 것도 다반사이다.

그렇기에 자연 애호가인 요정들이 드워프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요정과 드워프 간의 사이가 안 좋은 이유에 대해서 인간들이 추측해 본 것인데, 실상은 일부분만 맞다.

인간들은 요정의 외모 때문에 그들의 심성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요정은 그렇게까지 자연 보호에 힘쓰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저 숲속에서 살 뿐, 고기도 먹고 나무를 베어 집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드워프들이 자연 보호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진짜다.

그런 면에서 실내 정원을 꾸미고 식물학에 해박한 둥켈은 드워프의 이단아였다.

그런 이단아를 만난 덕에 키뱀이의 씨앗이 썩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하늘이 점지한 인연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나는 펠레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내 시선이 곱지 않았나 보다.

펠레리안은 키뱀이의 씨앗이 싹트지 못하는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적다. 세상의 무수한 분야에 통섭해 있다고 할 수 있지.

'근데 왜 몰랐어요?'

-대마도사에게 일개 정원사의 지식까지 기대하는 네가 과한 것 아닐까?

나는 코웃음을 팽! 하고 쳐 주었다.

당당한 척 말하는 펠레리안도 제법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둥켈은 아주 멋있는 단안경을 쓰고 조명까지 비추며 키뱀이의 씨앗을 살피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겉껍질을 해체하고 발아를 촉진한다는 영약액을 붓으로 바르고 있었다.

완전 멋있다.

그리고 그는 스튜 그릇 대신 아주 예쁜 토분을 가져왔다.

하트 문양이 그려진 토분에는 새카맣고 질 좋은 흙이 담겨 있다.

그곳에 키뱀이의 씨앗을 심고 드디어 이마의 땀을 훔쳤다.

"다 됐어."

'햇볕 아래에 둬야 하는 것 아니야?'

"광발아 종자는 아닌 것 같아. 오히려 응달에 둬야 해."

전문가의 말은 듣는 게 옳을 것이다.

'나도 보답으로 네 정원을 보수해 줄게.'

"오······!"

세상에 정원사 드워프가 있다면, 던전과 그 건축에 해박한 요정도 있는 법이다.

펠레리안이 그러했다.

-환기가 잘 안 되고 있어. 박쥐를 막기 위해서는 철사로 수직 동굴을 막아 두는 방법도 있겠지만. 간단한 해결책이 떠오르는군.

수직 동굴은 저 지상까지 뚫려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서 완전히 수직은 아니었다.

살짝 비스듬하게 뚫려 있는 것이다.

그 덕에 비가 내릴 때 하늘에서 곧바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동굴 벽을 따라 후두둑 떨어졌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네 고민을 해결할 수 있어.'

습기와 환기의 문제 때문에 곳곳에 곰팡이가 스는 게 둥켈의 고민이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나?"

건축에 해박한 드워프라면 진작 알았을 텐데.

정원은 둥켈의 비밀 장소였고, 아무래도 그에게는 달리 조언해 줄 친구도 없는 듯했다.

나는 투명한 손으로 근처에 널려 있던 장대를 땅에 박아 세웠다.

수직 동굴 바로 아래였다.

몇 개를 비스듬하게 교차시켜 세우자, 그 위에 둥근 솥 하나를 올릴 수 있었다.

장작 몇 개를 솥에 담았다.

둥켈은 대체 뭘 하려는 건가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꼬리로 바닥을 탁 하고 후려쳤다.

필요한 동작은 아니었고, 그저 극적인 연출을 위함이었다.

*「초급원소마법:불lv6을 사용합니다.」

장작에 불이 붙었다.

화륵!

간이 화톳불 완성.

조명을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둥켈의 눈썹이 선선한 바람에 흔들렸다.

늘 축축한 공기가 고여 있는 곳이었는데 어디서 바람이?

"아······!"

둥켈도 드워프였기 때문에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불을 이용한 환기 장치를 만든 거구나."

'늘 피워 둘 필요는 없고, 종종 켜서 습도를 조절하라고.'

"똑똑한걸! 간단하고!"

펠레리안이 알려 준 것을 내 지식처럼 말하니 둥켈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좋아, 이제 싹을 틔워 볼까."

'지금 바로?'

둥켈의 말에 당황했다.

싹이 트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닌가.

"이건 분명 마력초야. 세계수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했지?"

'그렇지?'

"발아하기 위해서도 마력이 필요할 거야. 마석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상급 마석이면 최고겠지만 일단 내가 가진 1등급 마석으로라도······."

'상급 마석이 있으면 좋은 거야?'

"마력초의 품질은 얼마나 정순한 마력을 흡수하였는지에 따라 결정되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펠레리안을 보았다.

펠레리안은 창백해진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좋아, 그러면 허락은 받았고!

'마석 있어!'

나는 아공간에서 마석을 꺼냈다.

무려 9등급짜리 마석이.

내가 가지고 있는 마석 중에서 제일 고등급의 마석이었다.

둥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게 며, 몇 등급 마석이야?"

'9등급.'

"이런 고등급 마석을 어떻게······!"

나는 꼬리로 코를 스윽 훔쳤다.

어쩌다 보니 구한 거야.

펠레리안의 던전에서 구한 마석도 어느덧 몇 개 남지 않았다.

평생 써먹어도 될 것같이 넉넉했는데, 아무래도 아버지한테 준 마석의 양이 적지 않았다.

뭐 다 못 쓰고 죽는 것보다는 낫지.

펠레리안이 거칠게 호흡했다.

스트레스를 다스리기 좋은 호흡법이라고 내가 알려 준 방법이었다.

"네가 직접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둥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방법이라 함은 마석을 키뱀이의 씨앗과 함께 올려놓고 직접 마력을 더 불어넣으라는 말이었다.

"주인은 너니까. 네가 직접 해야지."

'그래.'

어쩐지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키뱀이의 씨앗을 살짝 묻고, 그 위에 루비 같은 9등급 마석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 꼬리를 살짝 위에 얹는다.

마석을 어쩌라는 거지, 그냥 마력만 불어넣으면 되나?

-너 스스로를 통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력을 무작정 불어넣는 게 아니라, 살짝 문을 열어 놓는다고 생각해.

의외로 빠르게 진정한 펠레리안이 조언을 해 주었다.

마석을 무척이나 아까워할 줄 알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저것 또한 세계수의 씨앗 아니겠느냐. 9등급 마석쯤이야, 그 가치에 비해서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그 정도로 대단한 건가, 키뱀이가.

나는 펠레리안의 조언대로 했다.

어려운 것은 없었다.

이내 마석이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오!"

녹아내린 마석은 마력의 정수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키뱀이의 씨앗이 그 막대한 마력을 게걸스럽게 흡수하기 시작했다.

9등급 마석이 품은 마력의 양은 엄청나다.

이 몸도 아마 먹어서 소화하기는 쉽지 않을 터.

그런데 그 대량의 마력이 순식간에 씨앗에 흡수되었다.

툭-

그리고 발아가 시작되었다.

씨앗의 속껍질이 갈라지더니, 새싹이 솟아난다.

떡잎이 움트더니, 톡, 이파리가 터진다.

그 사이에도 마력은 계속 흡수된다.

마침내, 마석의 마력이 전부 흡수되고 나의 마력까지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말라죽기 싫으면.

'이, 이 녀서억!'

내 몸에 있는 마력마저 키뱀이의 씨앗으로 흡수된다.

나는 꼬리에 힘을 딱 주고 버텼다.

굶주린 아이가 젖을 먹듯 게걸스럽게 마력을 탐하던 새싹의 성장이 느려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흡수를 멈췄다.

그제야 나도 꼬리를 뗄 수 있었다.

-허어.

"와."

펠레리안과 둥켈이 동시에 감탄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돋아난 새싹이.

마치 춤을 추듯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두 개의 떡잎이 앙증맞기 그지없다.

나는 천천히 꼬리를 들어 떡잎을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자.

"따라온다!"

"사악!"

오히려 떡잎이 내 꼬리를 향해 스스로를 움직였다.

꼬리의 위치를 바꿔 봐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주인인 걸 아나 봐."

둥켈이 그리 말했다.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키뱀아······.

──────────────

[새싹의 키메라lv1]

──────────────

이제는 키뱀이 아니라 새키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새키야······.

-네 마력을 받고 태어나서 너를 따르나 보구나.

펠레리안의 말대로인 듯했다.

혹은 키뱀이의 마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잠시 감동의 여운을 만끽하고.

나는 둥켈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 광산 군주님을 뵙고 싶다고 했지."

푸른수염을 만나는 건에 대해서였다.

"일단 광산 군주는 지금 심층에 계셔."

심층이라 함은 이 광산의 가장 깊은 곳을 말했다.

땅을 더 깊게 파 내려가고 있는 채굴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왕 같은 존재라고 하는데 직접 일을 하는 건가.

'나를 그곳에 데려가 줄 수 있어?'

둥켈에게 그리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제법 당황한 듯했다.

"으음, 음. 어······."

그러더니 고개를 젓고 말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둘이서 하는 일이거든. 내가 혼자 빠져도 되는지 모르겠어. 한번 물어봐야 할 것 같아."

'그러면 같이 물어보러 가자. 잠깐 휴가 좀 쓰겠다고.'

"어······."

둥켈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저거 돌려 말해서 거절하려는 거 아니냐?

헉, 설마 그런 거였나!

난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둥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 안 되겠지만, 물어보러 가자."

* * *

붉은 모루 광산의 드워프들은 대부분이 광부, 그다음은 대장장이가 가장 많다.

하지만 둥켈은 광부도 대장장이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식량을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드워프가 보기에 끔찍하게 재미없고 지저분하기만 한 일이었다.

지하에서도 자랄 수 있는 감자며 양배추를 기르고.

철광석을 먹고 사는 스틸호그를 기른다.

둥켈과 그 동료는 스틸호그 일백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풀도 자라지 않는 농장은 무척이나 넓었고, 그곳을 큼지막하고 시뻘건 돼지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한쪽에는 놈들의 먹이인 철광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것을 먹이면 스틸호그는 냄새나는 똥을 싼다.

그 똥을 모아 퇴비로 삭힌 뒤 감자와 양배추를 기르는 데에 쓴다.

무척이나 고된 일이다.

특히, 스틸호그들이 문제다.

놈들이 순하다고는 해도 엄연한 마물이다.

종종 서로 싸우기도 하고 주인에게 엄니를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겨우 드워프 둘이서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둥켈도 제 동료에게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텅- 텅!

둥켈의 동료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드워프 노인은 인간 노인과 달리 병약하지 않다.

수염은 희고 머리는 벗겨졌어도, 드러난 상체의 근육은 우람하다.

"조금 어렵겠죠? 아무래도 요즘 바쁘기도 하고 돼지들이 말을 안 들어서 ······."

나와 둥켈이 도착했을 때, 그는 목장 앞의 작업장에서 울타리를 보수 중이었다.

큼지막한 해머로 울타리를 퉁퉁 박아넣는데 보통 터프한 게 아니다.

게다가 그 드워프는 팔 한쪽이 없었다.

왼팔 팔꿈치부터는 살 대신 금속으로 만든 갈고리 의수가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얼른 돼지 밥부터 실어 올······."

"가!"

노인이 그리 말했다.

그가 형형한 눈으로 둥켈을 바라봤다.

"가래도."

"······네?"

"언제까지 돼지 똥이나 치우면서 살 거냐, 둥켈."

노인의 눈은 푹 들어가서 새카만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멋진 장인이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펠레리안이 그리 중얼거렸다.

저 드워프도 나이가 많아 보이니, 어쩌면 펠레리안과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저는 지금 일에 나름 만족을······."

"그 뱀이 푸른 수염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지."

"······네."

"잘됐군. 푸른 수염도 정신 차릴 때가 됐어. 아니면 빨리 뒈져서 후계를 넘겨주거나."

그래도 왕 같은 존재라고 들었는데.

푸른 수염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드워프들은 저러냐고 펠레리안에게 물어보니, 고개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니, 가. 그리고 어지간하면 여기로 돌아오지 말어라."

"······."

둥켈은 설마 노인이 저렇게 말할 줄 상상도 하지 못한 듯했다.

잠시 고개를 푹 숙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돼지들 밥이나 주고 갈게요."

"······."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눈치로, 드워프 노인은 답 없이 계속 울타리만 박았다.

태도가 차갑다.

사이가 그리 좋지 않나?

둥켈의 어깨 위에 올라탄 채로 물어보니, 둥켈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키워 주신 분이야. 나는 고아거든."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리 무뚝뚝하게 말하다니.

"내가 광부가 되길 바라셨어. 드워프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며."

'그랬구나.'

"뭐, 이번 기회에 하층으로 내려가 보기도 하면 좋겠지."

애써 밝게 말한 둥켈이 수레에 철광석을 담았다.

이것이 저 스틸호그라는 마물들에게 주는 사료였다.

스틸호그, 재미있는 동물들이구만.

──────────────

[스틸호그lv9]

[특성]

[돼지], [맛좋음], [겁쟁이]

──────────────

특성에 겁쟁이라고 써 있는 녀석이 많다.

하지만 겁쟁이치고는 전혀 온순하지 않았다.

"뀌이이이익!"

"퀘에엑!"

물소만큼 큰 돼지들이 포효하며 푸릉댔다.

당장이라도 이쪽을 들이받으려는 듯하다.

둥켈은 겁먹은 눈치로 얼른 수레의 철광석을 쏟았다.

그러자 스틸호그들이 몰려와 게걸스럽게 철광석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후우, 이래서 문제인데."

둥켈이 떠나기를 주저했던 이유가 있었다.

"스틸호그들은 난폭하거든. 자칫하면 다칠 수도 있어. 할아버지 혼자서 이놈들을 다 다루기는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게 걱정인 것 같다.

마음씨 곱기도 하지.

내가 둥켈의 등을 떠민 입장이다.

그렇다면, 약간의 도움을 주고 떠나는 게 옳을 것이다.

툭.

나는 둥켈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잠깐 물러나 있어.'

수첩에 저절로 적히는 글씨를 보고 둥켈이 당황했다.

"뭐 해, 위험해······!"

하지만 나는 둥켈의 만류를 무시하고 스틸호그들에게 접근했다.

정신없이 철광석을 먹어 치우던 놈들은 나의 등장에 고개를 들고 경계했다.

"크릉······!"

꼭 철광석만 먹는 것은 아닌가 보지. 침을 흘리는 걸 보면.

"뱀아!"

"사아아악!"

조용!

한때 대수림에서 동물원의 짐승들을 이끌던 나였다.

임시로 얻었던 패왕 같은 스킬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이룬 업적들이 남아 있으니.

──────────────

[마물의 우두머리]

100마리 이상의 마물을 길들였습니다.

마물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됩니다.

자연스러운 위엄이 흘러나옵니다.

──────────────

사료나 먹고 자라는 집돼지들이.

어찌 내게 이빨을 드러내겠는가.

주춤, 주춤.

내가 다가갈 때마다 스틸호그들이 조금씩 물러섰다.

둥켈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 뱀들린 곡괭이질 >

084. 뱀들린 곡괭이질

"뀌익, 뀌이익!"

조금 전까지 건방지게 굴던 스틸호그들이다.

하지만 겁쟁이라는 특성이 괜히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스틸호그들이 내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를 느끼고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때 술집에서 먹었던 햄이 저 스틸호그의 고기라고 했던 것 같다.

엄청 맛있었지.

그것을 생각하니까 입에서 침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뀌에엑!"

제일 앞에 있던 스틸호그 한 마리가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마물 100마리 이상을 길들이고 난 뒤로부터, '마물의 우두머리' 업적의 격이 많이 올라갔다.

그렇다 해도 이놈들의 반응은 기대보다 극적이었다.

심지어는 겁먹어서 오줌을 지리는 녀석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몬스터 웨이브의 마물들은 나를 보고 군침을 흘리기까지 했는데.

역시 야생의 마물들과 이놈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충분히 겁을 줘서 기세를 꺾어 놔야 할 텐데.

이 정도로는 조금 부족하다.

그때였다.

작은 스틸호그 한 마리가 뒤돌아서 헐레벌떡 도망쳤다.

놈은 숨는 게 아니라, 저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큼직한 스틸호그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머리를 마구 놈에게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큼지막한 스틸호그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튀어나온 엄니도 제법 거대한 녀석이다.

──────────────

[스틸호그 킹lv14]

[특성]

[우두머리], [폭군], [겁쟁이]

──────────────

"무리의 대장이야."

둥켈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상태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놈은 내게 겁먹지 않고 발을 굴렀다.

당장이라도 돌진하려는 듯하다.

그래도 나한테는 훤히 보인다는 말이지.

특성에 떡하니 붙어 있는 '겁쟁이'마저도.

오히려 잘됐다.

극복의 왕관을 사용하고.

푹 쉬어서 회복된 마력의 절반 이상을 한 번에 사용했다.

*「거대화lv1을 사용합니다.」

내 몸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둥켈은 물론이고, 무관심한 척 울타리를 보수하던 드워프 노인도 망치를 툭 떨어뜨렸다.

무엇보다, 스틸호그들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내 몸을 따라 커진 그림자가 놈들 위에 드리웠다.

"사아악!"

한 번 포효해 주자 멧돼지들은 마치 염소 떼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조금 전까지는 기세등등하던 스틸호그 우두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똥을 후두둑 흘리는 놈은 내게 완전히 압도된 듯했다.

굳이 실력 행사를 할 필요도 없겠다.

*「지배의 왕관lv1을 사용합니다.」

길들이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스틸 호그 킹lv14를 지배하는 데에 일부 성공했습니다.」

*「스틸 호그 킹lv14를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정신적으로 굴복해서일까.

일부나마 놈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 말은, 내 마음대로 우두머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내 의지에 따라 놈은 무릎을 꿇었다.

다른 스틸호그들도 제 우두머리를 따라 비슷하게 무릎을 꿇었다.

거대화를 풀어도 그것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스틸호그 우두머리에게 다가가 놈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하자, 응?'

"꾸이익······."

얌전하게 밥이나 먹고 지내라.

드워프 노인한테 함부로 굴지 말고.

나는 그리 명령했다.

'길들이기'와 '지배'의 차이점이었다.

내가 어떤 마물을 길들인다고 해서 그 녀석을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마물한테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배하는 데에 일부 성공한 덕택에, 나는 스틸호그 우두머리에게 명령을 전할 수가 있었다.

'이제는 걱정 없을 거야.'

둥켈에게 그리 전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했다.

저 멀리서 드워프 노인이 망치를 놓고 다가왔다.

그는 내게 다가와서 조심스레 말했다.

"뱀이여······."

처음엔 나를 신경도 쓰지 않더니 말투가 변했다.

"푸른수염을 만나서, 그를 죽일 거요?"

글쎄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데용.

고개를 가로저으려고 했더니 펠레리안이 끼어들었다.

-놈이 계약 위반에 대해 뻔뻔하게 군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러면 죽일 수도 있겠구나.

어떻게 답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어깨를 으쓱해 줬다.

나는 어깨가 없으니까 대충 머리를 으쓱했다는 뜻이다.

"그렇군······. 잠시만 기다려라, 둥켈."

그러더니 노인은 허겁지겁 달려가 무언가를 가져왔다.

그것은 각종 공구를 끼워 둔 벨트와 곡괭이였다.

그중 곡괭이는 특히 재미있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머리를 삽으로 바꿀 수 있는 형태였는데, 역시 드워프제다운 대단한 만듦새다.

"이걸 가지고 가라."

"이건······ 할아버지 물건 아닙니까."

"그래, 아래로 들어가려면 너도 광부 노릇을 해야 할 것 아니냐."

내 활약이 저 노인의 마음을 바꿔 놓은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푸른수염을 만나면 말이오."

노인의 검은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겼다.

"한 번의 기회를 주시게. 그자도 불쌍한 자이니."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둥켈을 돌아보고 말했다.

"가라!"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광산에서 태어나 돼지를 치며 살던, 수염 없는 드워프.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마음 착한 둥켈이.

마침내 불과 강철의 심층으로 향하는 날이 도래했다.

* * *

드워프들의 광산은 전 대륙에 흩어져 있지만.

특히 '산맥'에 위치한 광산이 많다.

붉은 모루 광산 역시 마찬가지이다.

'붉은'이라는 수식어는 피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지만 드워프들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대개는 철광석을 의미한다. 산화되어 붉게 녹슨 철광석에서 따온 수식어일 것이다.

즉, 붉은 모루 광산에서는 철이 많이 채굴된다.

하지만 산맥에 위치한 광산이 대개 그렇듯, 다른 광석 또한 여럿 존재한다.

마경은 마경인 것인지, 산 아래를 깊이 파고들수록 신비로운 광석이 많다.

그중에서 특히 독특한 광석은 '골정석'이라는 것이다.

지하광산의 서쪽에서 뻗어 나간 지선 갱도 하나에서 몇 달 전 골정석이 발견되었다 들었다.

골정석은 마치 상아처럼 희고 무척이나 단단하다.

그 이름에 걸맞게, 생물의 뼈가 시간과 마력의 힘으로 단단히 압축된 금속이었다.

'금속'이라는 표현은 영 틀린 것이 아니었다.

센 불에 달궈도 타지 않고 망치로 두드려 제련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골정석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참 경이로운 일이다.

아마도 아주 거대한 생물의 뼈였을 것이다. 주먹만 한 골정석의 원래 크기는 분명 열 배 이상 거대했을 테니.

산맥이 대륙의 등뼈라는 표현은 어쩌면 말 그대로일지 모른다.

갱도에서 채굴을 하는 드워프들은 광부인 동시에 전사이기도 했다.

산맥의 지상에도 마물이 있지만, 이곳 지하에도 마물이 있다.

땅속에서 사는 피두더지며, 박쥐들, 시력이 퇴화된 벌레 마물들은 끊임없이 드워프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살아남은 광부들은 그만큼 여러 마물들을 처죽여 왔다.

곡괭이로, 때로는 삽으로 말이다.

골정석 갱도 앞에서 쉬고 있는 드워프들 역시 역전의 전사였다.

트랄 패거리라는 젊은 드워프들의 클랜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이다.

"으어, 빨리 올라가서 맥주 한 잔 걸치고 싶구만."

드워프들이 얼굴에 묻은 먼지를 팔로 훔치며 말했다.

한 번 하층으로 내려가면 일주일이 지나야 올라갈 수 있다.

"이 새끼들, 내려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징징대."

그중 가장 선배인 드워프가 핀잔을 줬다.

이름은 만진, 트랄을 비롯해 가장 숙련된 광부 중 하나였다.

어린 드워프들이 멋쩍은 표정을 했다.

"만진 선배는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희는 손이 이렇게 떨리는데."

하루 종일 곡괭이로 바위를 쪼개다 보면 팔에 부담이 오는 법이다.

실제로 드워프들 대부분은 가만히 있어도 손이 덜덜 떨렸다.

다만 선배 드워프인 만진은 멀쩡했다.

"얼마 전에 뱀술을 먹어서 그래."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뱀술이요······!"

"아, 그 오크통에서 나왔다는 뱀."

이미 뱀술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지만, 후배들은 또 한 번 눈을 빛냈다.

술 이야기는 늘 그들의 흥미를 유발했다.

게다가 신비한 효험을 지닌 뱀술이라고 하니.

"그래, 그때는 오히려 손발의 감각이 무뎌지는 듯하더니."

맥주에 뱀독이 조금 섞였던 것 같다.

약간의 중독 증세를 보였던 만진이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니 오히려 상황이 좋아졌다.

"봐."

만진이 팔뚝을 걷어서 자신의 근육을 보여 줬다.

뱀술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람한 근육이 불끈거렸다.

"원래 내가 손목 건초염으로 고생했었는데, 싹 나았지 뭐야. 힘이 아주 불끈불끈 난다고."

"진짜 부럽습니다······."

"사실 맛이 가장 끝내줬지. 살면서 그렇게 맛있는 에일은 먹어 본 적이 없어."

트랄 패거리가 마신 뱀술 이야기는 이제 전설처럼 퍼졌다.

다시 그 뱀을 만나기를 바라는 드워프들이 많았다.

휴식을 마친 드워프들이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평소에는 광부들을 위한 합숙소에서 머물렀다.

지하수로 대충 몸을 씻고 오늘의 휴식을 취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광장이 조금 북적이는 듯했다.

만진을 따르는 젊은 드워프 하나가 누군가를 알아봤다.

"저거 둥켈 아닙니까?"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수염 하나 없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는 곡괭이와 삽을 등에 메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눈을 확 찌푸렸다.

"둥켈 저 새끼, 여기는 왜 내려왔지?"

젊은 드워프 하나가 중얼거렸다.

둥켈이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그에 대한 존중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설마 광부 되겠다고 내려온 거야?"

"곡괭이 메고 온 걸 보면 그런 것 같은데."

"미친 새끼. 그냥 평생 돼지나 치고 살 것이지 뭔 생각으로?"

그리 말한 자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침을 탁, 뱉었다.

만진은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어린 드워프들은 유독 둥켈을 싫어했다.

사실 둥켈과 대화를 나눠 본 이조차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수염도 머리카락도 없고 광부 일도 하지 않는.

고기보다 풀 따위를 좋아하는 드워프가 치기 어린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보이겠는가.

유약하고 한심하다 여기리라.

게다가 늙은 원로들이 둥켈을 불쌍히 여겨 감싸고 도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였다.

"이 새꺄! 네가 내려가고 싶다고 하면 내가 들여보내 줘야 해? 곡괭이 한번 휘둘러 본 적 없는 놈이."

이곳의 감독관 역시 둥켈을 싫어하는 드워프 중 하나였다.

근처에 구경꾼들이 몰린 이유도 뻔했다.

둥켈이 창피를 당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건방지게 후드는······ 으악!"

그때 감독관이 화들짝 놀라서 손을 뺐다.

둥켈의 옷에서 뱀이 머리를 내민 것이다.

"뭐, 뭔 뱀이야!"

"아, 제 친구입니다."

"미친 새끼!"

근처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만진 선배. 저 뱀 ······."

"······."

"혹시 말씀하신 그 뱀 아닙니까?"

만진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술을 마셨던 그 뱀이 저기 있었다.

* * *

"평소에 또라이짓 많이 하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드워프 감독관이 둥켈과 나를 노려봤다.

겁쟁이 자식, 물려던 것도 아닌데 지 혼자 쫄아 가지고.

나는 둥켈과 함께 하층으로 내려왔다.

그 푸른 수염을 만나려면 우선 가장 깊은 심층까지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푸른 수염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 말한다고 직통으로 만날 수는 없나 보다.

왕 같은 존재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문제는 심층으로 곧바로 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푸른 수염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직속 수하거나, 혹은 드워프들에게 인정받는 장인, '마이스터'여야 한다나.

둥켈과 함께 일하던 노인장은 소개장을 써 주었다.

푸른 수염에게 접근할 수 있는 마이스터에게 전하는 편지와 비슷한 거다.

그런 것을 보면 그 노인도 제법 높은 신분 같은데.

왜 최상층에서 돼지를 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난 네가 싫다 둥켈."

감독관은 곡괭이를 들고 찾아온 둥켈에게 적의 어린 시선을 보냈다.

"평생 광부 일에서 도망만 치던 놈이 이제 와서 곡괭이를 들고 찾아오다니. 그리고 바로 심층까지 가고 싶다고? 네가 보기엔 광부 일이 그렇게 만만하냐."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둥켈은 위축된 기색이었지만 비굴하게 굴지는 않았다.

잘한다 둥켈.

"너는 능력이 안 돼. 땅도 제대로 못 팔 거다."

광부로서 내려가겠다는 둥켈의 요구에 감독관은 코웃음을 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로는 부족해. 다른 놈들의 짐은 되지 말아야지."

"잘할 수 있습니다."

"해 봐 그러면."

"······예?"

"이 벽을 파 보라고."

감독관은 두툼한 엄지로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황갈빛 사암이 드러난 토벽이었다.

"곡괭이질도 못 하겠나?"

"아니요, 해 보겠습니다."

곡괭이로 벽을 쪼개고.

삽으로 흙을 파고 나르는 것.

그게 갱도 채굴의 기본이었다.

둥켈은 초조한 얼굴로 곡괭이를 잡았다.

곡괭이질을 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겠느냐만, 주변에 보는 시선이 많았다.

광부들이 둥켈의 하는 꼴을 보겠다고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다.

둥켈이 곡괭이를 잡았을 뿐인데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거 자세 봐."

"똥이나 푸던 놈이 무슨, 으하하."

감독관은 이러한 반응을 예상한 듯 비웃었다.

"해 봐!"

둥켈이 이를 악물었다.

곡괭이를 휘둘렀다.

퍽!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그리 형편없는 곡괭이질도 아니었다.

퍽, 퍽.

하지만 구경꾼들은 비웃거나 한숨을 내쉬며 조롱했다.

애초에 탁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상 둥켈이 욕먹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독관도 대충 트집을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둥켈이 곡괭이를 휘두른 곳에서 큼지막한 암석이 빠져나오며 흙더미가 떨어졌다.

후두두둑-

감독관이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둥켈은 묵묵히 곡괭이질을 했다.

퍽, 후두둑.

그가 곡괭이질을 한 곳마다 암석과 흙이 우수수 떨어졌다.

삽은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 굴이 파지고 있었다.

그 속도가 무척 빠르다.

"무슨······."

진짜 숙련된 드워프 광부들은 척 보는 것만으로도 바위와 흙을 꿰뚫어 본다.

가장 약한 지점을 곡괭이로 후려치면 단단한 벽도 금방 허물어진다.

둥켈의 곡괭이질이 꼭 그러했다.

순식간에 토벽을 파고 들어간다.

광부 다섯은 모여야 가능할 법한 퍼포먼스.

둥켈이 곡괭이질을 멈췄다.

"······나, 천재인가."

나는 그런 둥켈의 뺨을 꼬리로 철썩 때렸다.

"사아악!"

정신 차리고 빨리 파!

아직 구경꾼들의 입이 충분히 벌어지지 못했다.

둥켈이 곡괭이질을 재개하고.

나도 다시 마법을 펼쳤다.

*「초급원소마법:흙lv6을 사용합니다.」

*「투명한 손lv11을 사용합니다.」

흙 마법이 벽면을 허물고.

투명한 손이 암석을 헤집는다.

영락없이 둥켈의 곡괭이에 신이 깃든 것처럼 보였다.

화려한 퍼포먼스에 드워프 광부들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 새싹키뱀이의 마음 따듯한 선물 >

085. 새싹키뱀이의 마음 따듯한 선물

드워프 장인들.

그중에서도 그 능력이 탁월하여 '마이스터'의 칭호를 받은 자들.

단순히 대장장이나 건축공만이 마이스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일평생 광산 속에서 채굴에 매진하여, 광부로서 마이스터가 된 자들도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기로, 채굴의 경지가 극에 달하면 바위의 결이 보인다고 한다.

그 결을 툭 쳐주면 거대한 바위도 쉽게 쪼개진다고 하니.

어떤 면에서 검의 달인이 하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칼 한 자루 뒤에 몸을 숨긴다거나, 나뭇가지를 휘둘러 사람의 목을 벤다는 그런 이들 말이다.

지금 이 자리에 그런 경지에 오른 드워프 광부는 없었다.

하지만 둥켈의 곡괭이질은 꼭 그런 마이스터들의 곡괭이질처럼 보였다.

툭, 퍼버벅.

곡괭이에 담긴 힘이 그리 대단하지 않음에도 벽을 파내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다.

"후욱, 후욱."

둥켈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근처에는 흙과 바위 조각이 가득했다.

비웃음을 띠고 구경하던 드워프들의 표정도 변했다.

'의외다.'라는 수준을 넘어서 경악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둥켈을 밉게 보던 감독관도 마찬가지였다.

"······줘 봐."

"예?"

"그 곡괭이 줘 보라고!"

숨을 고르고 있는 둥켈의 곡괭이를 빼앗듯이 가져간다.

곡괭이에 비밀이라도 있는 줄 아는 건가?

"네가 만든 곡괭이냐?"

"아니요······."

"그러면 누가?"

"헬무트 할아버지요."

그 외팔 노인 드워프의 이름이 헬무트인가 보다. 터프하기도 하지.

"그럼 그렇지!"

그런데 감독관의 반응이 격했다.

그 할아버지가 소싯적에 좀 치던 드워프였나 보다.

"장비빨로 어떻게 해 보려는 것 같은데. 아주 건방지기 그지없어."

이 멍청한 드워프.

장비 덕이 아니라 이 몸 덕인데.

그는 곡괭이를 쥐더니 벽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퍽!

확실히 둥켈보다 폼이 좋다.

하지만 나는 얌전히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초급원소마법:흙lv6을 사용합니다.」

오히려 흙을 벽에 단단히 붙여 놓았다.

퍽, 퍽

"이, 이거 왜 이래!"

아무리 휘둘러도 작은 상처만 날 뿐,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초급원소마법:흙lv6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초급원소마법:흙lv6이 초급원소마법:흙lv7이 되었습니다.」

오, 마법 수련.

다양한 방식의 활용 덕에 마법의 숙련도가 올랐다.

역시, 마도의 길은 깊고 넓구나.

감독관의 헛발질이 이어지자, 주변 드워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머를 아는 종족이다.

결국 감독관은 씨뻘게진 얼굴로 곡괭이를 내동댕이쳤다.

싸가지 없는 놈.

둥켈이 곡괭이를 주워 들자, 감독관이 다가와서 손가락으로 둥켈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모르겠는데. 난 널 믿지 않아!"

드워프는 다 호탕한 줄 알았는데.

옹졸함이 요정과 비슷한 수준이다.

"내가 오랫동안 지켜와 봤는데······!"

코앞에서 말하는데 침이 마구 튄다.

입 냄새도 보통이 아닌 게 위장병이 있는 것 같다.

"너 같은······."

철썩!

헉!

나도 모르게 꼬리로 감독관의 뺨을 치고 말았다.

감독관은 멍한 표정으로 나와 둥켈을 번갈아 보았다.

둥켈은 조심스럽게 나를 후드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감독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순간.

"무슨 행패냐!"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감독관과 같은 복장을 한 노인 드워프였다.

드워프는 수염이 풍성할수록 나이가 많았고, 저 노인은 수염이 희게 새기까지 했다.

"선배님, 잘 오셨습니다. 이 둥켈이 뱀을 데리고 행패를······."

"행패를 부리는 건 너잖아!"

"예, 예에?"

감독관이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그의 얼굴에 빨간 꼬리 자국이 남아 있어서 꼴이 우스웠다.

"내가 보기엔 충분히 잘하더구먼. 왜 그리 트집이야."

"······."

"쯔쯔, 새끼."

드워프 노인의 손에는 소개장이 들려 있었다.

둥켈의 동료 드워프 헬무트가 써 준 소개장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네가 헬무트와 내 안목을 무시하는 거냐?"

"······아닙니다."

기고만장하던 감독관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드워프는 경로 우대가 잘 되는 종족인 것 같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래."

"알겠습니다."

노인 드워프는 그리 말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감독관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래도, 갱도에 혼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조를 배정해야 하는데."

밝아졌던 둥켈의 표정이 곧 어두워졌다.

"너희 중. 둥켈을 데려갈 놈들 있나?"

감독관이 모여 있는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그 많은 드워프 중 손을 드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아무 데나 쑤셔 넣기 전에 빨리 손 들어. 빈자리 있는 놈들 있을 거 아냐."

광부들은 조를 짜서 채굴을 한다.

당연히, 광부가 되기 위해서는 둥켈 역시 다른 광부들의 조에 편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둥켈을 받아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싫은 듯 시선을 피하고, 슬쩍 자리를 떠나는 자들도 있었다.

'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다들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야?'

둥켈을 바라보며 그런 눈치를 줬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약해졌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대견할 정도로 참담한 표정이다.

윽, 머리가······!

중학생 시절이 떠오른다.

수학여행 방을 정할 때,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혼자 남았던 그때가······.

더 이상 둥켈이 내게 정신공격을 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얼른 주변을 돌아봤다.

그렇다고 아는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 리는······ 있다!

드워프 하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갈색 수염을 양 갈래로 곱게 딴 근육질 드워프.

어찌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악!"

나는 반가움에 그리 외치며 풀쩍 뛰어내렸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드워프들이, 으어어 하고 놀라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리고 나는 '친구'의 앞에 도달했다.

'야! 오랜만이야!'

"어······."

눈앞에 있는 친구의 이름은 만진이었다.

그날, 함께 술을 마시면서 우정을 나눈 그 드워프였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그런데 만진은 무슨 이유인지 당황한 눈치였다.

설마 나를 못 알아볼 일은 없을 거고.

그때 술을 너무 마셔서 필름이 끊겼었나?

-쟤는 너 기억 못 하나 본데, 흐흐.

'그럴 리가 없죠. 그때 분명 친구 하기로 했는데.'

펠레리안이 못되게 말했다.

같이 불렀던 노래를 불러주면 기억하겠지.

술잔을 부딪치고 호!

"쉿쉬쉬쉿쉿 사악!"

그때 불렀던 노래와 함께 율동을 추자, 드워프들이 수군거렸다.

"만진 형님, 설마 쟤가 그 뱀입니까?"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요! 하하."

만진은 웃는 드워프들의 뒤통수를 쳤다.

"조, 조용히 해 이 자식들아!"

왜 저러는 거지.

주목받으면 수줍어하는 타입인가?

-네가 부끄러운 것 아니냐?

그럴 리 없다.

설마 나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건가.

충격이다.

얼음 조각으로 된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았다.

내가 멍하니 만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만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오, 바, 반가워."

그제야 주먹을 슬쩍 내민다.

그래, 우리 친구 맞지?

나도 그 주먹에 꼬리를 맞부딪혀 줬다.

"잘됐네, 만진! 네가 둥켈을 데려가라!"

감독관이 냉큼 그리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만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둥켈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슬쩍, 인사했다.

"만진."

"둥켈."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그들의 사이에 서서 양쪽의 발목을 툭툭 쳐 줬다.

'사이가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걱정 마.'

금방 친해질 수 있을 테니까.

* * *

드워프들이 갱도를 걸었다.

'만진 조'의 조장은 당연히 만진이었고, 그가 이끄는 젊은 드워프들까지 총 넷이었다.

이제는 둥켈이 추가되고 뱀 한 마리까지 추가되었으니 여섯.

골정석을 채굴하기 위해 다섯의 드워프와 뱀 한마리가 갱도를 걸어갔다.

한참을 걷던 만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둥켈."

만진의 뒤에서 걷고 있던 둥켈이 고개를 들었다.

"후드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머리 깨지기 싫으면 이거 쓰시오."

"아, 고맙소."

둥켈은 멋쩍은 표정으로 만진이 건넨 여분의 안전모를 받았다.

그가 후드를 벗자, 번쩍거리는 민머리가 드러났다.

다른 드워프들이 그것을 보고 낄낄 웃었다.

그만큼 둥켈의 외모는 드워프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이었다.

둥켈의 얼굴이 벌게졌다.

"골정석 갱도에 들어가 본 적 있소?"

"없지."

"피두더지를 만나 본 적은?"

"두 번 정도."

피두더지는 갱도에서 종종 출몰하는 마물이다.

그 이름답게 땅을 파고 다니며, 빛을 극도로 싫어한다.

한 마리는 그리 위험하지 않지만 여럿이 몰려오면 위험하다.

실수로 채굴 중에 피두더지의 둥지를 건드리는 것은 모든 광부들에게 악몽 같은 것이었다.

"골정석은 특히 놈들이 좋아하는 거지. 만약 피두더지가 나오면 기름 등을 들어 빛을 비추시오."

광부들은 모두 허리춤에 기름랜턴을 걸고 다녔다.

둥켈이 긴장한 표정으로 랜턴을 만지작거렸다.

어린 드워프들이 그것을 보고 쿡쿡댔다.

그들은 뒤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만진 형님하고 둥켈은 무슨 사이지?'

'원래 서로 알던 것 같은데.'

그래 보였다.

만진은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멋진 사내였다.

양 갈래로 땋아 묶은 갈색 수염도 멋지고, 허세는 조금 있어도 화통한 성격이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그 '모자람 없는' 둥켈과 아는 사이 같았다.

어지간해서 둥켈과 말을 안 붙이는 이유가 있던 걸까.

지금은 의욕 넘치는 표정을 한 둥켈.

하지만 본격적으로 채굴이 시작되면 생각보다 고된 일에 틀림없이 울상이 될 것이다.

'저 표정이 언제 무너질까 궁금한데.'

'나는 세 시간 본다.'

'그럼 난 두 시간.'

청년들은 모두 그리 생각했다.

자리에 멈춰선 만진은 벽면을 살피더니, 혀로 흙의 맛을 보기까지 했다.

"이쪽을 파고 들어가 보자, 광맥이 아래로 뻗어 나간 것 같아."

그리고 가장 고된 작업인 갱도 채굴이 시작되었다.

모두는 둥켈이 금방 나가떨어지리라고 생각했다.

곡괭이질을 잘하는 것과 체력의 문제는 완전히 다른 거니까.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났다.

'생각보다 잘 버티는데?'

둥켈은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구슬 같은 땀을 송골송골 흘리면서도 삽질을 이어 갔다.

한참 뒤, 만진이 휴식을 선언했다.

"잠시 쉬고, 밥 먹고 더 하자."

그제야 둥켈도 삽을 내려놨다.

그 손아귀가 조금 찢어져 피가 났다.

그것을 보면 확실히 광부 일에 익숙한 것 같지는 않았다.

둥켈은 붕대로 제 손을 칭칭 감았다.

그것을 지켜본 젊은 드워프들의 표정도 조금은 바뀌었다.

'듣던 것만큼 뺀질거리지는 않네.'

둥켈이 게을러서 광부 일을 안 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둥켈은, 적어도 게을러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 드워프들은 곧 다시 눈을 찌푸렸다.

"우웩."

"뭐 먹는 거예요?"

둥켈은 처음 보는 식물의 이파리며 뭔가를 나무 주발에 담아 비비고 있었다.

"아, 샐러드······."

"샐러드?"

"너희도 먹을래?"

"됐어요."

샐러드는 무슨 샐러드라는 말인가.

지가 요정인 줄 아나.

둥켈은 멋쩍은 듯 웃더니 그 초록빛 괴식을 와삭와삭 씹어 먹었다.

그 반면, 둥켈과 함께 온 동행은 달랐다.

뱀은 만진의 옆에 딱 붙었다.

"그래, 너도 밥 먹어야지."

둥켈이 샐러드를 나눠 주겠다고 했지만 질색팔색을 하며 도망친 것이다.

"햄이면 되나?"

"사악!"

만진이 준 햄을 뱀은 한입에 꿀떡꿀떡 받아 삼켰다.

씹지도 않는 듯 몹시 쾌속하다.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는 묘한 즐거움을 준다.

다른 드워프들도 다가와 너도나도 햄을 나눠 줬다.

뱀은 사양하지 않고 계속 받아 먹었다.

덩치는 훨씬 작은데 거의 드워프 한 명 분의 음식을 먹은 것 같다.

식량이 생각보다 많이 소모되었음에도 드워프들은 즐거웠다.

"으하하."

"이 녀석 귀여운데요?"

아무리 만진의 친구라도 마물이긴 하니까 경계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드워프들은 생각했다.

위험한 골정석 갱도이니까, 우리가 이 작은 뱀 녀석을 지켜 줘야겠다고.

* * *

수염이 덥수룩해서 그렇지, 생각보다 순진하고 착한 녀석들이군.

햄도 얻어 먹었으니 내가 지켜 줘야겠네.

나는 그리 생각했다.

휴식시간이 끝나기 전, 아공간에서 키뱀이의 화분을 꺼냈다.

드워프들이 관심을 보였다.

"화분인가."

"새싹이네. 지하인데 어떻게 싹이 텄지?"

우리 키뱀이 귀엽지?

원래는 둥켈의 지하 정원에 놔두려고 했는데,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되어서 그냥 가져왔다.

혹시나 박쥐들이 들어와서 화분을 깨뜨리면 안 되니까.

이런, 흙이 벌써 말랐네.

새싹키뱀이는 식탐이 무척 많았다.

물을 주면 금방 흡수했고, 마석도 금방 흡수했다.

그렇게 잘 먹는 것치고는 성장이 빠르지 않아서 아직 떡잎 두 개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춤을 출까?'

키뱀이는 살아 있는 것처럼, 아니 살아 있긴 하지.

하여튼 조금씩 춤을 추듯 살랑대곤 했다.

내 꼬리를 가까이 대면 안아 달라는 듯 떡잎을 가까이하는데, 오늘은 가만히 있어도 춤을 추고 있었다.

"으음······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식사를 마친 만진이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골정석이 많이 있을 법한 광맥을 찾는 것이다.

광맥을 찾는 것은 숙련된 광부라고 해도 반쯤은 운에 의존해야 했다.

일단 수상한 벽을 파 보고, 광맥이 나오지 않으면 더 들어가서 또 파 보고 하는 식이다.

"어이고. 이건 또 뭐야."

"막 춤을 추네, 새싹이."

어린 드워프 녀석들이 키뱀이의 춤에 관심을 보였다.

씩 웃어 주고 키뱀이를 다시 집어넣으려는데.

"저쪽에 뭐가 있나?"

드워프 중 한 명이 그리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가 하고 키뱀이를 보니.

'어라.'

키뱀이가 한쪽을 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녀석을 들어 벽에 가까이하니 더 확실했다.

벽 너머에 뭐가 숨어 있기라도 한지 떡잎을 대차게 흔들고 있다.

"저쪽에 골정석 광맥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우리한테 알려 주려고 하는 거라고? 하하."

드워프들이 그리 말하며 웃었다.

혹시, 정말 그런 거 아닌가?

이 드워프들은 모르지만 키뱀이는 무려 세계수에서 나온 대단한 녀석이다.

나는 꼬리를 들어 곡괭이와 벽을 가리켰다.

"뭐? 파 보라고?"

"무슨 일이야."

만진까지 다가왔다.

"얘가 벽을 파 보라는데요?"

만진은 어린 드워프들의 말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파 봐, 한번."

"예, 뭐, 그러죠."

못 할 것도 없었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흙이 후두둑 떨어지고, 순도 높은 골정석 광맥이 드러날지.

드워프가 내심 기대를 가지고 곡괭이를 휘둘렀다.

푸욱.

끝에 닿는 촉감이 이상했다.

"어?"

그리고 곡괭이가 찍은 곳에서 피가 퓩 뿜어져 나왔다.

"끼에에에에엑!"

구멍에서 피를 뿜는 두더지 마물 하나가 튀어나왔다.

"피, 피두더지다앗!"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둥발! >

086. 둥발!

피두더지.

이름 그대로 두더지와 닮은 마물.

'피'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놈의 미끄덩한 몸이 피처럼 붉기 때문에.

혹은, 시각이 거의 퇴화한 녀석들이 피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고 몰려들기 때문에.

좁은 갱도에서 만나는 피두더지는 곤란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채굴 작업 중 상처가 나면 반드시 붕대 등으로 빠르게 상처를 처리해야 한다.

피를 흘리고 다니다가 피두더지가 꼬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도, 도망친다."

"잡앗!"

상처 입은 피두더지는 사방팔방 날뛰었다.

곡괭이들이 헛되이 땅바닥을 찍었다.

'느려.'

내가 나섰다.

파박!

피두더지를 확 물어 채자, 놈은 꿈틀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독 내성이 없는 소형 마물이 신경독에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우 씨, 깜짝 놀랐네."

"잘했다, 뱀아!"

드워프들이 나를 칭찬했다.

하지만 진짜 칭찬받을 것은 내가 아니라 새싹키뱀이었다.

"피두더지가 가까이 있는 것을 알아챈 건가?"

"신기한 일일세."

당황했던 드워프들도 곧 진정했다.

피두더지 한 마리는 그리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여러 마리가 한 번에 달려드는 것이 문제였지.

새싹키뱀이는 계속 피두더지 쪽으로 떡잎을 흔들었다.

아, 이제 알겠다.

나는 단검 아쉬라를 꺼내 피두더지를 해체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마석이 있었다.

겨우 콩알만 한 1등급 마석이었지만 분명 마석이었다.

운이 좋기도 하지.

그 마석을 키뱀이의 이파리 위에 얹어두자마자.

스르륵.

마석이 녹아서 사라졌다.

키뱀이는 기분 좋은 듯 춤을 추었다.

나도 눈치 못 챘는데, 감각이 제법인걸.

아마 이 녀석이 가진 스킬 덕택이리라.

──────────────

[새싹의 키메라lv2]

[특성]

[새싹], [아기], [세계수]

──────────────

어!

레벨이 올랐다.

설마 마석을 먹어서 레벨이 오른 건가?

나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마석을 먹는다 해도 레벨이 오르지는 않았다.

하긴, 새싹이 어떻게 사냥을 하고 경험치를 얻을까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마석을 먹는 것으로 마성을 흡수해 낸 것 같았다.

어쩌면 특성 중 하나가 그런 효과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세계수'라는 특성.

저것이 몹시 대단해 보인다.

새싹키뱀이는 스킬 또한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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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육감lv1], [인지확장lv2], [흡수성장lv1], [잎 흔들기lv4]

[상태]

[행복]

──────────────

화려한 스킬창이다.

왜일까, 내 어릴 적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은.

내가 처음 가지고 있던 스킬은 '독니', 그리고 '빠르게 기기'가 전부였는데.

'인지 확장'이니 '육감'이니 '흡수 성장'이니.

모두 대단하다.

출신성분을 따지자면, 적어도 키뱀이는 10 후반대가 아닐까.

그리고 잠재력 역시 높은 게 분명했다.

그래, 네가 행복하게 자라 준다면 뭐든 난 상관없단다.

키뱀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야."

만진이 그리 말하는 게 들렸다.

좋은 일이라니, 마물을 만난 게?

"피두더지가 있다는 것은 골정석 광맥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거니까."

들어 보니 그랬다.

피두더지라는 마물들은 골정석을 몹시 좋아한다고 한다.

새 광맥을 찾고 있는 지금, 피두더지를 만난 건 오히려 행운이라는 이야기였다.

"어이 친구."

만진이 내게 웃으며 부탁했다.

"그 새싹이랑 계속 같이 다닐 수 있나?"

물론, 안 될 것 없지.

새싹키뱀이도 아공간보다는 내 곁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갱도 더욱 깊은 곳으로 향했다.

어느 순간.

키뱀이가 다시 이상행동을 했다.

나는 둥켈에게 그것을 알렸다.

"잠깐."

둥켈이 드워프들을 멈춰 세웠다.

키뱀이가 한쪽 벽을 향해 이파리를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도 피두더지일까.

드워프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조용히 하라는 수신호와 함께 만진이 자세를 잡는다.

만진과 드워프 한 명이 곡괭이를 잡고, 다른 이들은 조명을 비췄다.

"흡!"

그리고 만진 홀로 벽면에 곡괭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머지 한 명은 피두더지가 튀어나올 것을 경계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푹 소리가 나지도 않았고 피가 뿜어져 나오지도 않았다.

카앙!

선명한 금속성과 함께 벽면을 덮고 있던 흙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새하얀 금속질의 광맥이 드러났다.

"오, 골정석 광맥이다!"

만진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작은 정을 들어 골정석을 두드렸다.

쪼개진 조각을 유심히 살피더니.

"순도가 대단해!"

또 피두더지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외려 골정석 광맥이 나올 줄이야.

새싹키뱀이가 아주 사람 맘을 들었다 놨다 할 줄 알았다.

"아예 여기서 광석을 채굴해 가자. 모두들 좋아하겠군."

만진이 그리 말했다.

갱도에 들어온 지 4시간쯤 되었으려나.

원래는 며칠에 걸쳐 골정석 광맥을 찾고 본격적으로 채굴을 시작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드워프들이 밝은 표정으로 열심히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카앙- 카앙-

곡괭이가 불똥을 튀길 때마다 골정석 조각들이 떨어졌다.

오늘은 짊어지고 움직일 수 있을 정도만 채굴해 갈 것이고, 다음부터는 레일을 깔아 둔 곳까지 수레로 옮겨 이동할 터다.

'키뱀아, 이건 왜 찾은 거야?'

키뱀이가 피두더지를 감지한 것은 아마도 그 마석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저 광석일 뿐인 골정석에는 왜 반응한 걸까.

-그저 광석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펠레리안이 그리 말했다.

'골정석이 정말 마물의 뼈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크다. 원래는 거대한 생물의 뼈였을 텐데. 그 정도로 거대한 동물이라면 틀림없이 마물이겠지.

골정석이라는 광물은 원래 생물의 뼈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마 화석 비슷한 거겠지.

장생족인 엘프조차 '고대'라고 부를 과거의 생물이라면······.

'공룡 뼈 아니에요?'

-공룡? 그게 뭐냐.

답은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드래곤 같은 거 있잖아요. 머리 엄청 크고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거.'

-처음 듣는 마물이군. 드래곤일 리는 없다. 드래곤 본 같은 귀한 것이 이렇게 널려 있을 리는 없겠지.'

공룡도 모르다니. 바보 같은 펠레리안.

골정석 조각을 키뱀이에게 가까이 가져가 봤다.

그러자 키뱀이는 떡잎을 뻗어 골정석 조각을 받아 들었다.

이파리를 마치 손처럼 쓰는 모습이 재미있고 귀엽다.

그리고.

츠츠츠츠-

은은하게 흰빛을 띠던 골정석의 색이 바랬다.

종래에는 탁한 회색으로 물들었다.

탁.

골정석이 바닥에 떨어지며 파사삭 부서졌다.

'이파리에 윤기가 도는 것 같은데요!'

아직 여리기 그지없던 키뱀이의 떡잎이 조금 더 푸르게 변했다.

-오오! 광석에서 마성을 흡수한 건가!

'생각해 보니까 뼈에는 인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죠.'

-인?

'왜 있잖아요, 뼛가루를 비료로 쓰기도 하고.'

-별걸 다 아는구나.

자기가 모르는 지식을 내가 알고 있자 펠레리안이 놀라워했다.

그나저나 키뱀이는 참 놀라운 모습을 많이 보여 준다.

그 잠재력의 끝을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원래 잠재력이 높은 것은 내 캐릭터였는데, 그래도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훈훈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쪽과 달리.

골정석을 캐고 있던 드워프들 사이에서 갑자기 고성이 터져 나왔다.

"헛소리 좀 그만해!"

만진이 둥켈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데면데면 굴던 그가 왜 갑자기 둥켈에게 성질을 낸 걸까.

"헛소리 아니야."

"헛소리가 아니긴, 헛소리지. 뭐 드워프 사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둘이 갑자기 반말을 쓰고 있다.

원래 반말하는 사이였던 건가.

격양된 만진의 표정에도 둥켈은 침착하게 반박했다.

"이대로는 안 되지. 교역을 완전히 그만두고 계속 땅만 파고 있잖아. 지금 광산 군주님도 다른 일은 제쳐두고 심층에서만······."

"계속 땅만 판다라. 계속 땅만 판다고?"

"왜 말 한마디에 꽂혀서 트집이야?"

"광부 일이 우습지?"

"그 말이 아닌 것 알잖아."

둥켈과 만진이 말다툼한다.

어린 드워프들은 당황해서 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둥켈이 차분하게 말했다.

"광산에서는 광부 일이 가장 중요하지. 우리는 광석을 제련하고 그것으로 물건을 만드는 종족이 맞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뭔가를 만들어도 쓰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지? 다시 교역을 시작해서 드워프의 물건을 세상에 내보내야 해."

"그건 어르신들이 결정할 일이야."

"그 어르신들이 심층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하 씨······ 아, 둥켈 형!"

'형'이라는 말에 드워프들이 흠칫 놀랐다.

나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맨들맨들한 둥켈과 수염이 풍성한 만진.

당연히 만진의 나이가 훨씬 많을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던 건가.

"형이 어렸을 때부터 왜 그렇게 따돌림당했는 줄 알아? 왜 아무도 형을 안 좋아하는 줄 아냐고."

"······."

내가 보기에는 만진이 급발진하는 것 같은데.

사실 저 둘 사이에도 복잡 미묘한 역사가 있었겠지.

"털이 없어서, 수염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아니야. 허구한 날 분수도 모르고 헛소리나 하고 있으니까. 실제로는 한 사람 역할도 못 하면서 듣기 번지르르한 속 터지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거야."

"만진."

"그게 싫었으면 곡괭이나 계속 잡을 것이지. 뭐 교역술을 배운다, 의학을 배운다, 경영학을 배운다. 그러더니 지금은 돼지 똥이나 치우고 있잖아!"

만진은 말하다 보니 점점 화가 치미는 듯했다.

그래도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예전에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욕을 먹으면서도 둥켈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조금 난처한 듯 씁쓸히 웃을 뿐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

"······."

"돼지를 기르는 것도, 하다못해 똥을 치우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지 광산이 돌아가잖아."

둥켈의 말이 맞다.

그렇기에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게 무의미한 일 아니던가.

싸늘한 분위기 속.

갑작스러운 일은 그때 벌어졌다.

휘릭.

새싹키뱀이가 이파리를 움츠린 것이다.

마치 뭔가를 피해 숨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니 키뱀아?'

위협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일까.

내가 보유한 '생존본능'은 딱히 위협을 경고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내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위협이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실제로 그러했다.

파바바박!

조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다.

벽면이 불룩 솟더니, 마물의 새빨간 대가리가 튀어나왔다.

또 피두더지였다.

미끈한 대가리에는 거의 퇴화된 눈이 단춧구멍처럼 박혀 있었고, 입술 없는 뾰족한 이빨 사이로 침이 뚝뚝 떨어졌다.

"흐아아압!"

드워프 하나가 얼른 곡괭이를 휘둘렀다.

놈의 안면에 곡괭이가 퍽 틀어박히고 피가 튀었다.

"됐······ 어억!"

그러나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번에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천장에서도, 벽에서도 피두더지가 연달아 튀어나왔다.

벽에서 막 튀어나온 피두더지 한 마리가 곡괭이를 잡고 있는 드워프의 몸에 달라붙었다.

"으아아악!"

피두더지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이용해 드워프의 배로 파고들려 했다.

저 자식, 저건 내가 쓰던 전술인데.

"랜턴 들어!"

갑작스러운 사태에 만진이 드워프들을 지휘했다.

피두더지는 밝은 빛을 싫어한다.

기름랜턴을 들이대면 물러나곤 했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도 했다.

하지만 드워프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마물 역시 학습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티딕, 키디딕."

그 요상한 울음소리는, 혼자 거죽 색이 어두운 피두더지가 낸 것이었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지자, 도망치던 피두더지들이 오히려 랜턴에 달려들었다.

챙그랑.

놈들이 거침없이 기름 등을 물어뜯는다.

기름 등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유리가 깨지면 바로 불이 꺼지게 설계되었다.

그것이 오히려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놈들은 두려움도 모르고 랜턴에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랜턴이 전부 꺼졌다.

갱도에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그리고 수많은 피두더지.

'이런.'

광부들이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다.

* * *

어둠 속.

"한데 뭉쳐! 비상등 켜. 성냥이라도!"

만진이 소리를 질렀다.

두려운 티는 내지 말아야 한다.

조장인 그라도 침착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으아아아악."

"끄아아악!"

그러나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았다.

만진 또한 당장이라도 곡괭이부터 휘두르고 싶은 상황인데.

푸확, 하면서 얼굴에 뜨거운 액체가 끼얹어졌다.

동시에 쇠 비린내가 났다.

피였다. 아마도 그를 따르는 청년들의.

"안 돼, 안 돼······!"

당황한 만진의 목덜미로.

어둠 속에서 피두더지 하나가 튀어 올랐다.

그리고.

피잉-!

어둠을 꿰뚫는 광선이 그 피두더지를 꿰뚫고 지나갔다.

순간의 착각인가 싶었는데.

피잉-

다시 어둠 속에서 광선이 쏘아졌다.

이번에는 몰라볼 수 없었다.

뱀이었다.

뱀이 어둠 속에서 광선쇼를 펼쳤다.

그리고.

화륵, 화르륵!

허공에서 불꽃이 피어올라 주변을 밝혔다.

뱀이 부린 마법임이 틀림없었다.

이 갱도에 어느새 열 마리도 넘는 피두더지가 등장해 있었다.

그들은 랜턴을 깨뜨렸던 것처럼 불덩이에도 뛰어들었으나, 오히려 몸이 불탈 뿐이었다.

"고, 고······!"

만진은 잠기려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곡괭이 들어! 다 죽여라!"

그가 곡괭이를 힘차게 휘둘렀다.

< 번쩍 >

087. 번쩍

사실, 공식적으로 드워프 사회에는 '전사'라는 직업이 없다.

땅을 파고 무기를 만들며, 건축을 하는 종족에게 굳이 전사가 필요할까.

지금이 그 옛적처럼 전란의 시대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광부, 건축공, 장인은 모두 동시에 전사였다.

드워프의 키는 작지만 근력은 인간의 두 배를 가뿐히 넘는다.

짧지만 두툼한 몸에는 강철같은 근육이 들어차 있다.

맷집도 대단하고, 드워프의 성정 자체가 저돌적이고 용감하다.

망치로 달궈진 쇠를 두드리든, 워해머로 적들의 골통을 두드리든 비슷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광부들도 모두 전사가 될 수 있다.

즉, 불만 환하게 켜져 있다면.

피두더지 몇 마리 따위는 드워프 광부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캄캄했던 어둠을 뱀이 밝혀 주었다.

만진은 기합을 지르며 곡괭이를 휘둘렀다.

"으아아압!"

곡괭이는 정확하게 피두더지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털어 내듯 뿌리치자, 피두더지의 몸이 허공에서 팽그르르 날았다.

그것이 뱀에게 날아가자 뱀은 한입에 피두더지를 삼켰다.

햄을 먹일 때부터 느꼈지만, 복스럽게 먹는 것이 밥 주는 보람이 있는 녀석이다.

드워프들은 맹렬하게 피두더지와 싸웠다.

피두더지들은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아니, 동서남북 수준이 아니다, 바닥에서도, 천장에서도 툭 툭 떨어졌다.

넓지 않은 갱도의 바닥에 피두더지들의 사체가 점점 쌓였다.

피비린내가 아득하다.

드워프 중 피두더지를 가장 많이 죽인 것은 만진.

그리고 뱀은 그러한 만진보다도 더 많은 피두더지를 죽였다.

입에서 광선을 뿜기도 하고, 한번 도약하면 화살처럼 쏘아졌다.

슬쩍 물고 지나가면 피두더지들은 몸을 퍼득 떨며 즉사했다.

술통에서 튀어나온 뱀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여흥이었고.

다시 만났을 때도 그저 귀엽고 얼빠진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뱀은 대단히 강했고, 이곳의 드워프들은 저 뱀이 아니었다면 모두 죽었으리라.

잠시 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피두더지의 습격이 멈췄다.

하지만 만진은 안심하고 쉬지 못했다.

"으아아악!"

"나, 날뛰지 마! 피 나오잖아!"

드워프들도 멀쩡하지 못했다.

팔다리에 상처가 난 것은 괜찮다.

하지만 그중 하나는 결국 복부를 부여잡고 쓰러져 버렸다.

"마, 막내야!"

만진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쓰러진 것은 막내였다.

복부에서는 피가 철철 나오고 있었다.

드워프 하나가 어쩔 줄 모르고 그 상처를 지혈하려 억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가 울컥울컥 나온다.

"오, 옷부터 벗겨."

광부가 다치는 일이야 흔하다.

응급조치를 위한 도구도 가지고 있었고 처치할 기본 지식 또한 있다.

하지만 막내의 상의를 벗겼을 때, 만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창자가······."

피두더지가 복부를 물어뜯었다.

벌어진 곳으로 창자가 삐져나와 있었다.

간단한 응급처치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만진은 알고 있었다.

내장이 흘러나오면 사람은 죽는다.

"허억, 헉. 혀, 형님······."

"······."

"살려, 살려 주세요."

막내가 만진의 팔뚝을 꾸욱 잡았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그 손이 희게 질려 있었다.

만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모두가 만진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 달라는 듯.

멍청한 자식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만진은 조장이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

죽어 가는 막내에게 넌 이제 끝났으니 그냥 포기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졌다.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살짝 밀었을 때, 만진이 너무도 쉽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은 것은.

"비켜 봐."

만진이 있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둥켈이었다.

"물하고 포션 줘."

"어? 아, 그치."

만진은 허겁지겁 물과 포션을 꺼냈다.

그래, 포션은 무척 귀한 물건이었지만 만진은 포션을 가지고 다녔다.

만진이 얼른 포션을 막내의 상처에 부으려던 순간.

"만진!"

둥켈이 만진을 노려보며 외쳤다.

움찔 굳은 만진이 들고 있던 포션을 홱 낚아챈다.

"그냥 상처에 부었다가는 환부가 오염될 수도 있어."

"어어······."

"물 따라 봐. 상처 말고 이쪽에."

만진은 멍하니 둥켈이 시키는 대로 했다.

수통의 물을 붓자 둥켈은 자신의 손부터 닦았다.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도 뭐라고 말을 얹지 못했다.

그리고 둥켈은 수통을 빼앗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삐져나온 내장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 낸다.

"으으, 흐으아악!"

"못 움직이게 팔다리를 잡아."

둥켈의 말에 곧장 따르는 드워프들은 없었다.

그러자 둥켈이 분노한 듯 외쳤다.

"뭐 하는 거야, 이 새끼들아! 빨리 잡아!"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만진이었다.

만진이 막내의 다리를 부여잡자 다른 드워프들이 양팔을 붙잡았다.

막내는 발악했다.

고통과 두려움에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둥켈은 그게 들리지 않는 것처럼 천천히, 내장을 다시 밀어 넣었다.

"창자가 상하지는 않았어. 배에 구멍이 뚫리고, 복압 때문에 내장이 밀려 나온 것뿐이야."

"그러면, 막내 살 수 있는 거야?"

"어떻게든 해 봐야지."

한심하고 게으른 둥켈.

그가 그렇게 욕을 먹을 때, 거들지는 않았어도 내심 동의했던 만진이었다.

그런데 지금 둥켈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 자리의 누구보다 믿음직스럽다.

둥켈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깨끗한 흰 천에 감겨 있는 것은 그가 지니고 다니는 응급처치 도구 같았다.

그중에서는 머리카락만큼 가느다란 명주실과 바늘도 있었다.

"상처를 임시로 꿰맬 거니까 꼭 붙잡아라."

둥켈은 흉하게 벌어진 복부의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그 손이 떨린다.

둥켈 역시 긴장한 것이다.

둥켈은 잠시 바늘을 내려놓더니, 자신의 뺨을 손등으로 세차게 때렸다.

짜악!

"후우."

그러고는 다시 바늘을 잡는다.

우스울 수 있는 모습이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는 결국 막내의 상처를 봉합해 냈다.

그 모습을 보고 만진은 과거를 떠올렸다.

어릴 적.

뛰놀다가 다쳤을 때 그 상처를 치료해 주던 것은 늘 둥켈 형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만진의 마음을 휩쓸었다.

"포션을 경구 복용시켜."

"경구?"

"먹이라는 말이야."

"아, 알겠어."

만진이 막내에게 포션을 먹였다.

막내는 제대로 포션을 삼키지도 못했다. 절반 이상은 흘린 것 같다.

뱀이 다가왔다.

놀랍게도, 어디서 구했는지 포션 한 병을 꼬리로 들고 있었다.

"이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좋은 포션이네."

포션의 냄새를 맡아 본 둥켈이 그리 말했다.

뱀이 고개를 끄덕이고, 둥켈은 비로소 꿰매어 둔 상처에 포션을 조금 부었다.

상처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아물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잃은 막내는 눈을 뜨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쇼크가 온 걸 수도 있고."

"얼른 업고 나가야지!"

" ······그러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제대로 치료한 게 아니니까. 들것에 실어 조심스럽게 옮겨야 해."

둥켈이 그리 말했다.

"너, 가서 사람을 불러와라! 얼른!"

만진의 지시에 드워프 한 명이 얼른 달려나갔다.

식은땀을 훔치는 둥켈에게, 만진이 조심스레 말했다.

"형."

"그래, 만진."

"상황이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이야?"

만진이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광부 일에 대해서는, 특히 피두더지에 대해서는 만진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땅바닥에 죽어 있는 피두더지들의 수가 스물이 넘어간다.

명백히 드문 일이다.

이 정도로 많은 수의 피두더지가 몰려왔다는 것은······.

"어쩌면······ 근처에 둥지가 있을지도 몰라."

"둥지?"

"그래, 피두더지들과, 그 퀸이 모여 사는 곳."

피두더지들은 골정석을 좋아한다.

그 이유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골정석에 담겨 있는 모종의 힘이 마물들을 끌어들이는 걸지도 모른다.

종종, 골정석이 대량으로 모여 있는 곳에 피두더지들이 둥지를 튼다.

평소에는 적당히 드워프를 피해 다니는 피두더지들이지만, 둥지에 접근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그러면······."

"확실하지는 않아. 우연히 근처에 이놈들이 몰려 있었을지도 모르지."

만약 정말로 근처에 피두더지의 둥지가 있다면.

놈들은 다시 한번 습격할 것이다.

"그러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막내를 옮겨야겠지."

"상처를 꿰맸다고 끝이 아니야. 내장이 터지지는 않았어도 속에 출혈이 일어났어. 수레도 없는데 옮기는 건 무리일 텐데."

아닌 게 아니라, 막내의 입가에서 피 한 줄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만진은 괴로워했다.

근처에 둥지가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막내를 끌고 나가는 게 맞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괜히 들것도 없이 막내를 옮겼다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달려나간 녀석이 제대로 된 의사와 함께 들것을 가지고 온다면 충분히 살릴 수도 있을 텐데.

딜레마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것이 조장의 역할이다.

허나 막내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만진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톡톡.

뱀이 그의 발꿈치를 두드린 것이 그때였다.

"어······."

왜 그러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허공에 수첩이 떠올랐다.

그리고 펜이 저절로 움직이며 글씨를 썼다.

'내가 확인하고 올게. 둥지가 있는지.'

"뭐?"

만진은 뱀이 글을 써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황한 만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은.

"왜······?"

'친구니까.'

뱀이 꼬리를 치켜들었다.

그것이 따봉을 의미하리라는 것을 어째선지 알 수 있었다.

뱀이 휙 튀어 올랐다.

그리고 피두더지들이 등장한 구멍으로 쑥 들어간다.

드워프들에게는 팔뚝을 집어 넣기도 어려운 작은 구멍이지만 뱀에게는 거칠 것이 없는 듯했다.

흰 꼬리가 팔랑이더니, 뱀은 검은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자, 잠깐마안!"

멍하니 있던 만진이 화들짝 놀라서 뱀을 붙잡았다.

하지만 어둠 속으로 사라진 뱀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둥켈이 놀라서 만진을 바라봤다.

"왜, 왜 그래?"

"아니, 말해 줘야 하는 게 있어서."

"그게 뭔데."

"피두더지들의 둥지는 위험해. 마물 때문이 아니라······."

만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위험한 독가스가 가득 차 있어서."

* * *

친구니까 돕지.

그리고, 만진과 둥켈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키뱀이가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까.

키뱀이는 우선 아공간 안에 집어넣어 두었다.

들어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것을 억지로 집어넣었다.

위험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 둥지라는 것, 틀림없이 있다.

펠레리안은 둥지의 존재를 확신했다.

-마물에 대해서는 내가 더 전문가 아니겠느냐.

실로 그러하다.

나는 땅굴을 따라 계속 기어갔다.

땅굴을 파고 다니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땅굴을 기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내 심장 뛰는 소리에 집중했다.

음, 평온하다.

생존본능은 아무런 경고를 하지 않았다.

저 앞에, 우글거리는 마물들의 기척이 분명 느껴지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우리 막내 배에 구멍 낸 녀석들에게 벌을 주러 가 볼까.

땅굴의 끝이 다가왔다.

저 너머로 희미한 빛이 보인다.

이놈들!

"사아악!"

우렁차게 포효하며 땅굴에서 튀어나왔다.

사방에 골정석이 드러나 있다.

골정석으로 이루어진 공동과 다름없었다.

희미한 빛은 그 골정석들이 뿜어내는 빛이었다.

골정석에 풍부한 인의 작용으로 도깨비불 같은 것이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빛 아래에 수많은 피두더지들이 모여 있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피두더지들이.

새빨간 눈을 빛내며 불청객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 거대한 피두더지가 있다.

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고, 길쭉한 주둥이에는 마치 거미처럼 여덟 개의 눈이 나 있다.

그 다리 또한 여덟 개.

──────────────

[피두더지 퀸lv40]

[특성]

[여왕], [산란]

──────────────

아, 잘못 찾아왔네요.

안녕히 계세요.

내가 떠나려고 한 순간이었다.

"퀘에에엑!"

굳이 통역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저놈 잡아라!' 그런 말이겠지.

그 입 냄새가 여기까지 난다.

마치 방귀 냄새처럼 구리다. 좀 이상한데.

"퀴이이익."

"케엑!"

수백 마리의 피두더지가 내게 몰려왔다.

이 좁은 곳에서 거대화를 쓰기는 좀 그렇고.

*「독비늘lv2를 사용합니다.」

어디 한번 육탄전을 벌여 볼까.

나는 피두더지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날카로운 수정 비늘이 놈들의 매끈한 피부에 상처를 입혔다.

그 상처에 묻은 신경독만으로도 놈들은 비틀거렸다.

그리고 놈들이 나를 물 때는.

카앙!

이빨이 비늘을 뚫지 못했다.

소형 마물인 데다가 수준도 낮은 녀석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내 몸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인중여포, 피두더지 중 우르오로스라.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아아, 이 기분이지.

그림자 숲 이후로 제대로 싸움을 벌여 본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전투본능이 자극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한 마리 한 마리 물어 죽이려다가는 내 이빨이 먼저 부러지겠다.

-마법을 써라, 마법을.

펠레리안이 조언했다.

자고로 다대일 전투에서는 마법을 쓰는 게 효율적인 법이다.

'알겠어요.'

특히 이런 곳에서는 불 마법이 효과적이겠지.

*「초급원소마법: 불lv6을 사용합니다.」

불덩이를 쏘아 낼 생각이었다.

허공에 만들어 낸 불꽃에서.

티딕.

그런 소리가 나더니.

일순간 공간 전체에 불이 붙었다.

마치 가스 폭발처럼.

아니, 가스 폭발이 맞나.

퍼퍼퍼퍼퍼펑!

빛과 폭음,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나는 충격에 휩쓸려서 허공을 휘익 날았고.

피두더지들은, 아마 그대로 떼죽음 당했음이 분명했다.

*「피두더지lv18을 처치했습니다.」

*「피두더지lv12을 처치했습니다.」

*「피두더지lv21을 처치했습니다.」

*「피두더지lv9을 처치했습니다.」

*「피두더지lv18을 처치했습니다.」

*「피두더지lv5을 처치했습니다.」

*「피두더지lv10을 처치했습니다.」

······

*「피두더지 퀸lv40을 처치했습니다.」

그리고 그 퀸도.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도 오르고.

*「열 내성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충격 내성lv1을 얻었습니다.」

*「고통 내성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근데, 나.

혹시 이렇게 죽는 거 아닌가?

< 제비입니다만 >

088. 제비입니다만

켁!

기침을 했다.

켈록, 켁!

입과 콧구멍에서 재인지 흙인지 모를 거뭇한 게 튀어나왔다.

한참을 기침하고 나서야 맑은 콧물이 주륵 흘러나왔다.

죽는 줄 알았네.

'저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요?'

-삼 일 정도.

나는 사아악! 하고 놀랐다.

그러자 펠레리안이 웃었다.

-거짓말이다. 삼 분 정도였나.

아이 깜짝이야.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막 그런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살아남기는 한 것 아닌가.

나는 얼른 내 몸이 무사한지 살폈다.

그리고 경악했다.

아악.

내 몸이······!

나의 아름다운 수정 비늘이 걸레짝처럼 너덜거렸다.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음은 물론이다.

-진정해라, 껍질이 벗겨진 것뿐이니까.

아 그랬구나.

슬슬 탈피할 때가 되었다 싶기는 했지만.

폭발의 여파로 덜 분리된 허물들이 날아간 것이다.

'그래도 엄청 아프네요.'

그러나 상처가 난 것은 사실이다.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일 정도로 큰 폭발이기는 했다.

아무래도 여태까지 열 내성을 많이 높여 둔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스킬의 숙련도가 올랐다는 메시지를 들었는데 ······.

──────────────

······

▸ 생존

[내성]: 독lv7, 출혈lv4, 고통lv8, 열lv12, 냉기lv1, 석화lv1, 전격lv1, 충격lv2

[생존본능lv7], [흑린lv3], [수영lv1],[숨 참기lv10], [은밀lv10]

──────────────

와.

출혈 내성의 레벨이 1 오르고, 열 내성도 1 오르고, 충격 내성lv2가 아예 새로 생겼다.

어지간해서는 잘 오르지 않았던 생존 본능과 흑린 스킬의 레벨도 하나씩 올랐다.

생각해 보니까 생존 본능은 이번에도 경고를 해 주지 않았는데, 이거 완전 쓸모없는 스킬 아닌가?

-그래도 목숨은 무사하지 않으냐.

펠레리안이 생존 본능의 변호를 해 줬다.

말투가 친절하기 그지없다.

이 할아버지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나는 안다.

'아, 마법 쓰라면서요!'

-그래! 그래서 덕분에 쉽게 다 한 번에 잡았잖아!

그런데 나마저 뱀 구이가 되어 버릴 줄은 몰랐지.

설마 이곳 공동에서 났던 구린내가 가연성 가스의 냄새일 줄은 몰랐다.

하긴 광산에서 종종 가스 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은 예전에 과학 만화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크흠······.

'에효.'

어쨌든, 이곳을 위협하던 피두더지들은 이제 구워져 죽어 있었다.

골정석들이야 원래 금속인 만큼 무사했다.

구수한 냄새가 나서 식욕이 돋았지만.

나는 우선 새싹키뱀이부터 꺼냈다.

'자, 얘네들 때문에 여기 오고 싶었니?'

키뱀이는 나오자마자 흔들흔들 춤을 췄다.

여기 모여 있는 피두더지들 때문에 반응했던 건가 싶었는데,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피두더지 퀸의 마석을 꺼내 주었는데도 반응이 없다.

저번에는 그렇게 마석을 탐내더니 왜일까.

대신 마석은 내가 홀라당 먹어 치웠다.

*「4등급 마석을 섭취합니다.」

참고로 피두더지 퀸이 가지고 있던 마석은 4등급짜리였다.

마석을 우물우물 꿀꺽 삼키고 나니,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새싹키뱀이의 몸에서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연두색 촉수 같은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자라났다.

저건 전문용어로 덩굴손이라고 하는 것이다. 담쟁이덩굴이 자라면서 나오는 그 가느다란 줄기.

그걸 나한테 뻗는다.

'손 잡아 달라구? 그래.'

내게 손은 없었지만, 대신 꼬리를 내밀어 주었다.

그러자 새싹키뱀이의 작은 덩굴손이 내 꼬리를 잡았다.

*「새싹의 키메라lv3이 '교감lv1'을 사용합니다.」

어!

뭔가 꼬리 끝이 간질간질했다.

살짝 긴장되긴 했지만, 키뱀이가 하려는 대로 놔두었다.

교감이라니, 저번에는 없던 스킬인데.

눈에 힘을 주고 키뱀이를 살펴보니.

──────────────

[새싹의 키메라lv3]

[스킬]

[육감lv1], [인지확장lv2], [흡수성장lv1], [잎 흔들기lv4], [덩굴손lv1], [교감lv1]

──────────────

어느새 레벨 하나가 또 올랐고 덩굴손이며 교감이라는 스킬이 생겨났다.

그리고 내가 본래는 들을 수 없었던 메시지가 들렸다.

*「인지확장lv2를 사용합니다.」

*「주변의 마성과 광맥을 감지합니다.」

이 메시지의 대상은 내가 아니다.

아마도 키뱀이가 들었어야 할 메시지.

내가 본 바로는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친절한 메시지를 듣지는 못하는 것 같던데.

내가 키뱀이와 교감한 덕일까.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키뱀이의 감각을 공유했다.

인지확장이 무슨 스킬인지 궁금했었는데.

마치 엄청나게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다.

주변의 골정석이 품고 있는 마성이며 특이한 마력이 전부 느껴졌다.

*「덩굴손lv1을 사용합니다.」

*「흡수성장lv1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키뱀이가 덩굴손을 골정석에 가져다 대더니.

그 골정석에 담긴 마성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흡수성장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흡수성장lv1이 흡수성장lv2가 되었습니다.」

*「흡수성장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흡수성장lv2이 흡수성장lv3가 되었습니다.」

으아악.

골정석의 마성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새싹 키뱀이의 레벨이 또 올랐다.

흡수성장의 레벨 또한 함께 오른다.

마성을 흡수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사방에 가득 차서 아름답게 빛나던 골정석 광맥.

그 모든 골정석들이 빛을 잃고 회색이 되어 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키뱀아! 다 먹어 버리면 어떡해!

*「교감lv1에 의해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새싹의 키메라lv7이 치유lv1을 사용합니다.」

새싹 키뱀이의 덩굴손을 통해서 꽤 많은 양의 마성이 전달되었다.

게다가 포션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몸의 상처가 치유되었다.

설마, 나를 도와주려고 골정석의 마성을 먹어 치운 거니?

그러면 이해해 줘야 할 일이겠지.

*「새싹의 키메라lv7이 특성 '뼈'를 얻었습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혼자 멋진 특성도 얻고 말이다.

근데, 식물이 가지면 안 될 것 같은 특성인데······.

키뱀이의 몸이 많이 자랐다.

이제 이파리도 무려 다섯 개가 넘었다.

나는 녀석의 이파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다시 키뱀이를 아공간에 넣고.

주변을 슥 둘러봤다.

'큰일이네.'

이 많은 골정석이 다 못쓰게 되어 버렸다.

키뱀이가 먹어 치웠다는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겠다.

한참 뒤적거리고 나서야 내가 왔던 땅굴을 찾아냈다.

초반 부분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조금 파고들어 가 보니 원래의 땅굴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용케 아예 무너지지 않은게 신기하다.

피두더지들은 땅굴 파기의 달인이었군.

땅굴을 열심히 기어가자.

곧 둥켈과 만진이 있는 곳이 나왔다.

"허, 허어어억!"

나 왔어!

그런데 드워프들은 내가 등장하자마자 놀라 뒤집어졌다.

내게 곡괭이를 휘두르려는 녀석도 있었다.

"그, 그게 무슨 꼴이야!"

둥켈이 내게 그리 외쳤다.

내 꼴이 어때서.

하지만 내 외모를 지적하려던 것은 아닌 듯했다.

"너 괜찮은 거야? 상처가 심각해 포션, 포션이······."

아, 그렇구나.

내 몸 곳곳이 그을리고 피딱지까지 엉겨 붙어 있으니, 크게 다친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나는 꼬리를 들어 호들갑 떠는 둥켈을 막았다.

만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둥지가······ 있었던 거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면, 설마 그렇게 다친 것도······. 싸워서?"

다시 한번 끄덕이고.

드워프들이 경악해서 입을 벌렸다.

"지진이 난줄 알았어. 그 정도로 난리였거든. 대체 어떤 싸움을 벌인 거야."

종이와 펜을 꺼냈다.

내 엄청난 활약을 구구절절 적으려다가, 문득 키뱀이가 골정석을 전부 못 쓰게 만든 것이 떠올랐다.

잠시 고민한 뒤 적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허!"

너무 대충 얼버무렸나?

'둥지는 이제 없어. 내가 전부 해치웠으니까.'

조심스레 만진의 얼굴을 바라보니.

"허, 참. 허!"

감동한 듯, 눈동자가 떨렸다.

"······고마워."

뭘 그렇게 고마워하고 그래.

나는 아공간에서 키뱀이를 꺼냈다.

'키뱀아, 저 다친 막내 드워프도 치유해 줄 수 있겠니?'

키뱀이가 이파리를 끄덕였다.

* * *

솔리온 임펠.

왕국의 수도.

수도답게, 솔리온 임펠에는 왕국 전역의 부가 몰려든다.

한 끼 식사에 평범한 4인 가족 한 달 생활비를 받는 고급 레스토랑도 있고.

오로지 귀족들의 드레스와 정장만을 주문 제작하는 디자이너 의류 브랜드도 있었다.

또한 유물과 어느 정도 이상의 가치를 지닌 보석들을 매입하고 판매하는 보석상 또한 존재했다.

수도의 명품가라고 할 수 있는 퓨어웰 대로에도 그런 건물이 있었다.

검은 흑단나무로 외장을 꾸민 삼 층짜리 건물이다.

금박을 입힌 간판에는 다니엘 앤 퍼렐이라는 상호가 적혀 있다.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있는 가드가 허리춤에 칼을 찬 채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보안을 위해 설치된 각종 마도 장치의 수준 또한 대단할 것이다.

그 건물의 삼 층에서는 다니엘 앤 퍼렐의 전문 감정사가 있었다.

보라색 벨벳 조끼를 입고 있는 감정사가 확대경으로 왕관을 살폈다.

"허어······."

진귀한 보석이며 장신구를 일평생 감정해 온 사내다.

그의 입에서 감탄이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 왕관은 북부 야만족들의 물건이군요. 어찌 이렇게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이번에는 작은 은장도를 살핀다.

"이거는 제국의 세도가 여식이 쓸 법한 은장도입니다. 보면 용 무늬가 그려져 있죠? 아무나 쓸 수 없는, 대단히 신분이 높은 규수나 차고 있었을 패물입니다. 가치야 뭐 말할 것 없겠습니다만."

말하는 투에 약간의 흥분이 담겨 있었다.

이 물건들을 가져온 상인은 그저 부드러운 미소만 띨 뿐 침묵했다.

"다만 금화들이 아쉬운데. 하필이면 문양들이 전부 훼손되어 있어서······."

상인이 가져온 물건 중에는 옛 양식으로 만들어진 금화 역시 있었다.

"이게 만약 세이룬 금화라면 경매에 부쳐서 금값 네 배는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다만 금화의 문양이 칼 같은 것으로 깎여 있다는 게 흠.

"혹시 어떻게 구하신 물건인지는······."

감정사가 조심스럽게 그리 물었다.

사실 이런 질문은 원래 금기시되어 있다.

그래도 보석상으로서의 욕망이 끓어올라 물어봤다만은.

"하하."

물건을 가져온 상인, 로일은 부드럽게 웃을 따름이었다.

감정사는 곧바로 사과를 건넸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잠시 응접실에 내려가 계시겠습니까? 감정을 마치고 대금을 마련해 드리지요."

"고맙습니다."

"대금의 수령 방식은 어떤 쪽을 선호하십니까? 금화로 받으셔도 되지만 무게가 꽤 나갈 텐데요."

"왕립 은행의 어음으로 절반, 제국 채권으로 절반 부탁드립니다."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그러면 모시겠습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로일과 아마엔을 데려갔다.

그리고 감정사는 로일이 가져온 물건들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로일이라는 상인은 다니엘 앤 퍼렐과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 온 단골이 아니다.

당연히 회원 등급도 높지 않았고, 그 탓에 막대한 수수료가 붙을 것이다.

감정사 역시 꽤 많은 수입을 올릴 것이고.

'아니지, 회원 등급을 올려주고 수수료를 조금 깎아 줄까.'

좀처럼 하지 않는 생각 또한 했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거래 상대였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상인의 관록이 느껴지는 분위기다.

가져온 물건도 대단하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이어 가면 좋겠지.

감정사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와 금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세이룬 금화 같은데 이거."

"무슨······!"

누가 감히 선임 감정사가 감정 중인 물건을 건드리나.

발끈해서 고개를 든 감정사는 흠칫 굳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던 물건인데, 정작 문양은 훼손됐고. 도굴품 같은데요. 이거?"

별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사내였다.

피로한 듯 눈가에 그늘이 져 있고,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사는 움찔 굳었다.

눈앞의 사내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제비집', 즉 정보국 소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굴품이라니, 던전 같은 곳에서 정당하게 출토한 물건일 수도 있겠지요."

"굳이 문양을 훼손한 건요?"

"그렇게 유통되는 게 유별난 일도 아니고······."

"누가 판 거예요? 한번 만나 볼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감정사는 딱 잘라 거절했다.

다니엘 앤 퍼렐에서는 유물 같은 것도 매입하기 때문에, 이렇게 정보국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 고객의 정보를 함부로 유출할 수 있겠는가.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요."

"말 못 한다니까요."

"돌아갔나? 연락처는······ 아니. 응접실?"

"······."

감정사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정보국 요원이 갑자기 씩 웃었다.

"아직 응접실에 있군요."

아니, 젠장, 어떻게 알아낸 거지.

감정사는 당황했다.

정보국 요원을 상대하는 것은 이래서 늘 어려웠다.

얼굴 표정만 보고도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으니까.

요원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잠깐! 그러지 마시고 일단······."

"오."

그러더니 이번에는 웃지도 않고 돌아본다.

"응접실이 맞나 보네요."

애초에 떠본 것인가.

웃음기 없는 저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물론 상상만 할 뿐이었다.

"······제가 알려 준 건 아닙니다."

"물론이죠."

정보국 요원은 참담한 표정의 감정사를 뒤로하고 층을 걸어 내려갔다.

응접실은 2층에 있었다.

이곳을 찾는 고객들의 격에 맞게 아름답게 꾸며진 방이다.

동양에서 수입한 카펫이 바닥에 깔려 있고, 벽에는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걸렸다.

샹들리에 아래에 고급스러운 소파와 테이블이 흩어져 있었다.

한낮의 오후, 응접실에 있는 손님은 둘뿐이었다.

아마엔과 로일이 다과를 앞에 두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요원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훈련받은 콜드리딩 기술 덕택에, 그 와중에도 수많은 정보들을 캐치해 낸다.

젊은 남자, 옷은 고급.

하지만 수염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았다.

미소 짓는 게 익숙한 얼굴.

상인인 것 같은데, 피부가 그을려 있다. 직접 상행에 나서는 건가.

그런 유물을 접할 것 같지는 않은 인물인데.

그리고 꼬마.

아버지와 그리 닮지 않았다.

피부가 하얗고 크림색 금발이 마치 귀족가의 자제 같다.

걸친 옷은 완전히 새 옷. 과자 부스러기를 흘렸군, 예법 교육을 받지 않았네.

어.

어라.

요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꼬마가 손장난을 한다.

마법을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새파란 마력 구체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꼬마의 손가락 사이를 움직인다.

놀랍도록 정교한 마력 컨트롤이다.

저 나이에, 저런 기술을 가지고 있다니.

타고난 건가?

당연히 타고났겠지.

저런 재능의 원석을 데리고 다니는 남자.

그리고 가치가 높은 유물들을 매각.

어쩐지 세상 물정에 익숙해 보이지 않는 옷차림이며 행동거지.

정보국 요원의 머릿속에서 여태까지의 추론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그리고 드디어 아귀가 맞춰졌다.

눈 앞에 있는 이들이 어디서 왔을지 확신이 들었다.

"저······."

정보국 요원이 나타나 가만히 서 있자, 로일이 당황한 듯 물었다.

"누구신지?"

요원은 양발을 탁 부딪치더니 답했다.

"우연히 들른 제비집의 제비입니다."

"네?"

로일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요원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마탑에서 오신 분들이시군요.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

< 비늘이 예쁜 탓 >

089. 비늘이 예쁜 탓

정보국은 엘리트 관료들의 집합소나 다름없다.

훌륭한 성적으로 왕실 관료가 된 젊은이, 혹은 사관학교 우수 졸업자들 중에 애국심이 충분하고 결격사유가 없는 자들에게 조심스러운 제안이 들어온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시험과 면접을 통해서 정보국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국장이 신임하는 수하는 많지 않다.

정보국장이 보기에는 전부 배에 헛바람만 들어간 애송이들처럼 보인다나.

과한 독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스스로도 왕국 팔 영웅의 일인인 정보국장에게 그런 지적을 할 사람은 없었다.

애쉬튼은 그런 정보국장의 신임을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수하 중 하나였다.

당장에 검은 사왕의 네이밍에 일조한 것도 그였다.

애쉬튼의 장기는 놀라운 관찰력을 바탕으로 한 추론 능력이다.

다만 워낙 머리가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종종 자기 멋대로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다.

사실, 그의 상사인 정보국장은 애쉬튼의 그런 실수를 무척 좋아한다.

일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보고 있으면 웃겨 죽겠다면서.

로일과 아마엔을 마탑에서 온 이들이라 착각한 것도.

아마 국장이 보았으면 박장대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하하, 이런 실수를. 민망하군요."

다행히 그 오해는 금방 풀 수 있었다.

애쉬튼은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건가요. 하하."

로일도 마주 웃으며 다과를 건넸다.

"입고 계신 옷, 여기 퓨어웰 대로에 있는 테일러빌로에서 맞춘 정장이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 하기에는 우스운 말이지만, 제가 눈썰미가 좋아서요. 그리고 테일러빌로는 마탑과 계약을 맺은 업체거든요. 수도에 온 마도사들은 테일러빌로에서 새 옷을 맞춰 입고 다닙니다."

애쉬튼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그가 이들을 마탑의 마도사라고 추론한 것은 근거 없는 비약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드님의 마법 재능이 대단히 뛰어난 듯해서. 마탑에서 나오신 분인 줄 알았습니다."

로일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자식 칭찬을 싫어할 부모가 있을 리 없으니, 게다가 그 칭찬을 한 장본인이 정보국 요원이라면 더욱.

애쉬튼이 굳이 말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아마엔은 아무리 봐도 평민적인 행동거지를 보이고 있다.

마탑의 마도사들이 어리고 재능 있는 녀석들을 납치하다시피 끌고 가 부려 먹는 것도 흔한 일이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재미있어졌는데.'

애쉬튼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여태까지의 훈훈했던 분위기를 깨뜨리는 한마디를 던졌다.

"금화와 그 유물들을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네?"

"고대 유물이 섞여 있더군요. 그리고 왕국법상 고대 유물의 유통은 적법한 절차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저희 정보국의 관할 영역이죠."

애쉬튼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구하신 물건입니까?"

"그건······."

"제게는."

애쉬튼이 로일의 말을 끊었다.

"제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갑자기 정색하더니 안경을 톡톡 두드리며 말하길.

"거짓과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죠. 대단하게 들리겠지만 실상은 단순한 방법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몸에는 여러 징후들이 나타나거든요. 괜히 다리를 떨기도 하고.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손가락을 매만지거나, 식은땀을 흘려요. 그런 냄새가 나기도 하고. 하여튼 제 경험상 어떤 사람도 그런 징후를 모두 숨기지는 못해요. 제가 말하지 않은 사인도 당연히 있고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정중하지만, 상대는 분명 정보국 요원이었다.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이 물건들."

부유한 상인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로일의 본질은 그저 마차상이었다.

그런 그가 정보국 요원을 만났으니 얼마나 두렵겠는가.

아마엔도 분위기를 느끼고 긴장했다.

아버지의 팔을 꽉 잡는다.

"제가, 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있지요. 당신과 아드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싸늘한 공기 속.

결국 로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요.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 보물들은 원래 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저는 원래 마차상이었습니다. 칼레아 시에 맥주를 팔러 가던 길이었죠."

아마엔이 놀라서 로일을 돌아봤다.

애쉬튼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길에 만났습니다."

로일은 난처한 듯 말했다.

"죽어 있는 산적들을."

"······산적들이요?"

"네. 안 그래도 칼레아 산 근처에 산적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

칼레아 쪽에 산적이 출몰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나?

그랬다.

일단 통과.

"그 산적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보물들을요. 서로 싸우다 죽은 것 같았는데 ······."

"산적들이 이런 보물들을 가지고 있었다라······."

그게 가능할 법한 일인가?

뭐, 불가능할 일은 아니겠지만 타당하지 않다.

불통과.

"보물을 끌어안고 있던 자는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머리를 가로지르는 긴 흉터가 있었고, 덩치는 산만 했으며 손목에는 쇠로 만든 차꼬를······."

"그자, 피부색이 어땠습니까."

애쉬튼이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하는,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로일이 대답했다.

"아마······ 어두운 갈색이었던 것 같습니다."

탈주범 야투스.

들개 야투스.

감옥에서 동료 죄수들을 데리고 탈출했다던데, 설마 그쪽에 있었나.

충분히 그럴 법했다.

로일이 일을 꾸며내는 것이라면 그런 자극적인 내용을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일까?

알 수 없으니, 보류.

"으음······."

그렇다면 로일에 대한 종합평가는.

역시, 보류.

"그렇군요. 저희도 한번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애쉬튼은 다시 웃었다.

정말 야투스가 칼레아 시에서 출몰했을지 조사해 봐야겠다.

탈주범 야투스라면 이런 유물들을 가지고 있을 법도 했다.

원래는 모험가로 활동했던 놈이었으니.

"아, 네, 그러시지요."

로일이 얼떨떨하게 웃었다.

어수룩해 보이는 표정.

애초에, 애쉬튼에게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능력 따위는 없었다.

애쉬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저는 그러면 괜찮은 걸까요?"

걱정스럽게 묻는 로일.

"뭐, 죽은 범죄자의 물건을 얻으신 것도, 신께서 주신 행운 아니겠습니까."

"아······."

"수도에서 즐거운 여정 보내시길. 이건 제 명함입니다."

협박하듯 말했던 것과 달리, 애쉬튼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떠나려던 그가 막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아드님의 마법 재능은 진짜입니다. 아카데미에 입교하거나 마탑에 입탑하실 계획입니까?"

"아카데미가 좋을 듯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뭐, 왕국 최고의 아카데미는 한 곳뿐이죠. 저도 그곳을 나왔고."

애쉬튼은 아마엔을 보며 말했다.

"스쿨 에메랄드. 그곳을 추천드립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애쉬튼은 자리를 떠났다.

그가 완전히 떠나고 나서야 로일은 소파에 파묻히듯 등을 기댔다.

"후우."

떨려 죽는 줄 알았네.

그리 생각하며.

아마엔이 고생했다는 듯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어떻게 지내고 계시려나."

광산으로 들어간 뱀.

그 역시 고생 중이겠지.

드워프들이 갑자기 나타난 뱀 마물을 얌전히 받아 주지는 않을 테니까.

"갈까, 아마엔?"

"응."

그렇다고 해도, 계약은 계약.

그들은 뱀을 다시 만나기 위해 칼레아로 돌아갈 것이다.

* * *

키뱀이의 치유는 포션과는 그 방식을 달리했다.

포션의 작동 방식은, 그 대상이 가진 자가 치유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고급 포션과 저급 포션의 차이는 그 효율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원리는 같다.

그렇기 때문에 포션을 쏟아부어도 치료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내장이 상한 막내 드워프가 특히 그런 경우였다.

포션을 어느 정도 복용한 뒤로는 그 효율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새싹키뱀이의 치유는 키뱀이가 가지고 있던 생명력을 이용한 방식이었다.

덕택에 막내는 살아남았다.

바깥으로 뛰쳐나갔던 드워프가 들것과 다른 이들을 데려왔고, 막내는 안전히 실려 나갔다.

나머지 인원은 지친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마물과의 전투는 광부 일보다도 훨씬 고되었다.

모두 몸이 피에 절어 있다.

그래서였다.

나는 둥켈이 다친 것을 늦게 알아챘다.

"사아악!"

야 인마!

둥켈의 옆구리에서 피가 질질 나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옷이 피에 젖어 있었다고 해도 그걸 못 알아챌 수가 있나.

멋진 척이라도 하려던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으아아악!"

자기가 다쳤다는 것을 알자마자 저렇게 경박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니.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이미 드워프들의 포션은 막내에게 전부 쓴바.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진 포션을 조금 나눠 주기로 했다.

피두더지가 둥켈의 옆구리를 물어뜯은 것 같았다.

다행히 포션을 조금 뿌리니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너, 너무 열중해서 피나는지도 몰랐네."

쯔쯔, 이런 얼빠진 놈.

다른 드워프들이 또 비웃으려나 싶어서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비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둥켈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거나,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왜 태도가 바뀐 걸까.

"저기······."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둥켈을 욕했던 젊은 드워프가 다가왔다.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어? 아, 아니야."

둥켈이 손을 저었음에도 불구하고 드워프는 굳이 둥켈을 부축했다.

둥켈은 쑥스러운 표정이었고, 부축하는 드워프는 더욱 쑥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쟤네 뭐하니.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만진이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갑자기 햄을 꺼내 내밀었다.

"고생 많았어."

뭐, 냉큼 받아먹었다.

"돌아가면 또 한잔하자고."

'좋지!'

기대되는걸.

다행히 갱도를 빠져나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속도가 느렸지만 한 시간 조금 덜 걸렸으려나.

갱도를 빠져나간 뒤 도착한 광장에는 많은 드워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 나왔다."

"만진-!"

도움을 청하러 나갔었기 때문일까.

만진 조의 갱도에서 피두더지 떼가 튀어나왔다는 이야기가 쫙 퍼진 듯했다.

"고생했어."

"전부 살아 돌아왔다니. 기적 같은 일이구만!"

"올라가서 한잔해야지!"

왁자한 웃음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축하가 돌아왔다.

만진은 광부 중에서도 인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대부분이 그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둥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를 반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런 둥켈의 어깨 위에서 드워프들을 구경했다.

툭툭.

둥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너무 위축되지 마.

"둥켈이야?"

그때, 어디선가 둥켈의 이름이 들렸다.

돌아보니, 뺀질거리게 생긴 드워프 하나가 만진 일행에 붙어서 말하고 있었다.

"애꿎은 피두더지 둥지를 건드린 것 같은데. 누가 그랬어?"

"건드리긴 뭘 건드려. 갑자기 달려든 거지."

"그래? 난 또. 둥켈 저 새끼가 폐급짓한 거 아닌가 했지."

그는 낄낄거리며 둥켈의 욕을 했다.

"하여튼 저 민대머리 새끼가 갑자기 너희들한테 꼽사리 껴서 고생이 많다. 막내는 다쳐서 나왔는데 정작 저 새끼는 멀쩡해 보이······."

"야 이 새끼야!"

만진 조의 드워프 한 명이 그의 멱살을 콱 잡았다.

"뭐, 뭐야!"

"앞으로 내 앞에서 둥켈 형님 욕하거나 함부로 대하면 가만 안 둔다."

"갑자기 웬······. 놔!"

어라.

저놈들.

내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 사나이들이다.

어디선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둥켈이 콧물을 삼키고 있었다.

감동했나 보다.

나도 조금 감동했다.

"갑자기 지랄이야 이 새끼가!"

멱살을 잡힌 드워프가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퍽 하고 만진 조의 드워프가 나동그라졌다.

"쳤다! 쳤어!"

"개새끼!"

그러더니 만진이 주먹을 휘두르고 갑자기 패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다!"

"우하하하!"

패싸움은 순식간에 커졌다.

이 야만적인 드워프들.

"사아악!"

너도 가라 둥켈.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드워프도 아니야.

"나, 나는 싸우는 거 싫어해서."

이 한심한 놈.

시의적절하게 누군가가 밀려나면서 둥켈을 덮쳤다.

"으악!"

그렇다면 내가 복수하면 될 일.

나는 드워프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 * *

참 재미있었다.

패싸움 말이다.

그날 이후, 막내는 다행히 성공적으로 치료를 마쳤다.

드워프들 중에 제대로 된 의사가 적어서 둥켈이 또 고생을 했다.

그 덕일까.

더 이상 만진과 그 조원들은 둥켈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조원들은 둥켈을 형님이라고 불렀고, 만진 역시 둥켈을 다시 형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해서 둥켈의 입지가 단번에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너무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거겠지.

한 번 집단에게 왕따를 당하던 사람이 다시 입지를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험자로서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둥켈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처음 하층으로 내려온 뒤 어느덧 한 달째.

둥켈은 광부 일에 익숙해졌으며, 만진 조 이외의 드워프들도 둥켈에게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점차, 더 이상 둥켈을 욕하지 않는 드워프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심층으로 내려갈 기회가 생겼다.

심층은 광산의 최하층.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었고, 마이스터의 허락을 받아야 푸른수염의 곁에 접근할 수 있다.

"광산 군주님을 뵐 때, 나는 함께 못 있을 것 같아."

'그거야 뭐, 내가 알아서 할게.'

둥켈은 헬무트에게 받은 소개장을 심층의 수문장에게 건넸다.

심층의 문을 지키고 있는 마이스터에게 전하는 소개장이었다.

그 소개장이 없었다면 애초에 들어갈 수도 없었으리라.

"마이스터 예레미아는 친절하신 분이니까.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나는 둥켈의 어깨 위에서 내려왔다.

둥켈이 주먹을 내밀고, 나도 꼬리를 내밀어 부딪쳤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 너도 잘 지내고 있고.'

"응, 파이팅이야."

둥켈과 작별인사를 마치고, 그도 떠나갔다.

그러자 심층의 문을 지키고 있던 드워프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글씨를 쓰는 뱀이라. 신기하구나."

'뭘 이 정도로.'

"나중에 나랑도 술 한잔하겠나?"

우르오로스 에일은 지금 붉은 모루 광산에서 대유행이었다.

드워프들은 굳이 내가 한 번 수영한 에일을 마시기를 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드워프는 몹시 기뻐했다.

그는 곧 나를 대기실 같은 방에 데려왔다.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 곧 마이스터가 오실 거야."

'그 예레미아라는 마이스터가 검을 잘 만드는 장인이죠?'

어쩌면 내 운철검을 그 드워프가 만들어 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안내해 준 드워프는 이상한 표정을 했다.

"예레미아 님은 지금 여기 없어."

네?

"그 대신 다른 마이스터가 계시지. 곧 오실 거다."

안내해 준 드워프는 어쩐지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그는 방을 나가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모쪼록, 조심하고."

무슨 말이지?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징조가 시작되었다.

쿵, 쿵, 쿵

다른 곳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다.

츠츠츠츠-

비늘이 저절로 곤두섰다.

오랜만이지만, 잊을 수 없는 감각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 '생존본능lv7'의 작용이다.

피두더지의 둥지에 떨어졌을 때도.

가득 차 있던 가스에 불을 붙이려고 했을 때도 발동되지 않았던 스킬이.

왜 갑자기 지금 발동하는 걸까.

쾅쾅쾅.

이번엔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

발소리.

육중한 체중을 가진 드워프가 달려오는 소리였다.

어디 숨을 겨를도 없이, 문이 벌컥 열었다.

"뱀이라고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우렁찬 목소리.

나타난 것은 그야말로 전사 중의 전사같이 생긴 드워프였다.

긴 장발이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나부끼고.

수염은 마치 철사 같아서 초패왕 항우를 연상시킨다.

키는 드워프답게 작았지만, 옹골진 근육이 터질 것만 같다.

"이, 이 녀석!"

드워프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 듯했다.

-오 이런······.

펠레리안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이 드워프를 알아본 듯했다.

-도망쳐라, 저 여자는 붉은 모루 광산 최강이자 최악의 드워프 전사다.

'잠깐, 뭐요?'

수염이 나서 상상도 못 했지만.

여자였던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렇게 예쁜 뱀을 다 봤나!"

그녀는 호랑이처럼 펄쩍 뛰어올라 내게 덮쳐들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붙들렸다.

손아귀를 확 물어 버릴까.

되려 내 이빨이 부러질 것같이 단단해 보이는 팔뚝이다.

"완벽한 비늘이야. 새 목걸이를 만들 수 있겠어!"

-로제나······.

드워프를 늘 무시했던 펠레리안.

그가 침음성을 흘리며 드워프의 정체를 말했다.

-장신구의 마이스터. 지하최강의 드워프.

수정 뱀 살려!

< 아아, 네 운철검 말인가? >

090. 아아, 네 운철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