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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 090-100

090. 아아, 네 운철검 말인가?

지하 최강의 드워프 로제나.

그녀가 지상에서 살았다면, 그 수식어는 '지상 최강'의 드워프가 되었을 것이다.

붉은 모루 광산의 모든 드워프들이 동의하는 일이다.

나이가 많아서 이제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그녀는 어르신보다는 그냥 로제나 님이라고 불린다.

그럴 만도 했다.

터질 듯한 근육은 젊은 드워프들보다 강인했으며, 수염과 머리카락 모두 새치 없이 새빨갰다.

근육을 제외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는 피처럼 붉은 적발이었다.

로제나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몹시 사랑했다.

어쩔 때는 땋기도 하고, 평소에는 기름을 발라 잘 관리했다.

적발을 그리 아끼는 이유를 누군가가 묻자 로제나가 답하길, 피가 묻어도 티가 나지 않아서 좋다나.

장신구를 만드는 것으로 마이스터까지 오른 만큼, 특제 수염걸이를 만들어 보석을 치렁치렁 붙이기도 했다.

에메랄드나 루비 따위를 걸어 두어 화려하게 찰랑이는 장신구들.

한 자루 도끼를 들고 싸울 때도 그 장신구를 착용했지만, 공방에 있을 때만은 장신구를 벗는다.

망치를 두드릴 때.

세공을 할 때.

모든 집중력을 전부 쏟아부어야 할 때만은 장신구를 차지 않는 것이다.

카앙, 카앙-

로제나가 쥐고 있는 망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정밀함이 요구되는 목걸이 세공에 이런 망치를 쓴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모루 위에서 불똥이 마구 튀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금속을 망치로 칠 때마다 신기하게 모양이 잡혔다.

원래는 작은 정과 줄톱을 이용해 금속이 식은 다음에 해야 하는 공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달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일.

로제나의 망치질이 이어질 때마다 순금 장식의 모양이 잡혀 갔다.

신비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달궈진 순금 장식을 물에 넣자 파그르르, 거품이 솟았다.

완성된 것은 태양 모양의 펜던트였다.

로제나는 그 펜던트에 손톱만 한 루비며 사파이어 등을 가져다 대 보았다.

어떤 보석을 가져다 대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정작 로제나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쯔읏."

그녀는 호탕하게도 혀를 찼다.

아직 따듯한 순금 조각을 손에 올리고 꾸욱 쥔다.

그러자.

우드득, 꾸우욱.

아무리 순금이 무르다고 해도, 망치로 내려쳐서 제련해야 하는 금속이다.

하지만 너무도 쉽게 구부러지고 응축된다.

로제나의 팔뚝에 핏줄이 확 솟는가 싶더니.

손을 펴자 순금 태양장식이 둥그렇게 뭉쳐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단단한 금속을 마치 수제비 뜨듯 다룬다.

그것을 물에 넣자 치이익 하면서 김이 뿜어져 나왔다.

마이스터 로제나는 요즘 가슴에 뭐가 얹힌 듯 답답했다.

그녀의 천 번째 컬렉션, 태양의 넥클리스를 만드는 데에 진전이 없는 것이다.

"루비도 아니야, 사파이어도, 에메랄드도 아니야.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태양장식에 장식할 쥬얼을 어떻게 세팅해야 할지 모르겠다.

맑고 환한 태양 빛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보석이 좋을까.

다이아몬드를 박아도 태양의 따스함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루비 같은 붉은 보석을 박기에는 너무 천박하고 단순한 표현이 아닌가.

따듯하고, 투명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보석이 필요하다.

'어쩌면, 태양 빛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면 씁쓸해졌다.

광산 군주가 붉은 모루 광산의 문을 걸어 잠근 지도 한참이 되었다.

그전에는 로제나 역시 태양 빛 아래 살았었다.

그 시절의 경험은 여전히 로제나의 마음속에 남아 영감이 돼 주었다.

특히 그 괴팍한 엘프 마도사와 겪었던 모험은······.

푸른 수염과 함께 마셨던 지상의 와인 또한.

"······."

로제나는 결국 망치를 놓았다.

과거의 추억이 미망이 되어서 그녀를 붙잡고 있다.

지금의 푸른 수염은 더 이상 예전의 그 빛나던 청년이 아니었다.

로제나가 늙은 것처럼 푸른 수염도 늙었고, 그의 맑았던 눈동자에는 어두운 불꽃만 일렁였다.

새로운 광산군주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겠지.

푸른 수염은 로제나 역시 심층으로 합류하기를 바랐지만 그녀가 거절했다.

그 탓에 이곳 심층의 문 앞에 있는 공방에서 자신의 작업에만 열중하던 것이다.

오늘도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예레미아가 심층으로 가 버려서, 그가 받아야 할 소개장을 로제나가 받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헬무트가 보낸 소개장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뱀이라고······?'

두 눈으로 직접 봐야 알 것이다.

그래서 나갔다.

그곳에 정말 뱀이 있었다.

완벽한 소재를 비늘로 지닌 뱀이.

태양 빛을 수정으로 빚어 만든다면 이럴까.

"완벽하게 아름다워!"

몸통을 움켜잡고 그리 외쳤으니, 뱀이 질색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 * *

강하다.

손이 대체 뭐로 만들어진 거야!

내 비늘은 칼날처럼 날카로운데, 드워프의 굳은살 배긴 손에는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이게 말이 되나?

-기초적인 마력 운용법이다.

드워프들도 마력을 쓰나 보다.

지들이 기사도 아닌데.

──────────────

[드워프 마이스터 로제나lv???]

[이명] 지하최강의 드워프

[특성]

[장인], [전사]······.

──────────────

아니 뭔데 레벨이 안 보여.

너도 영웅이냐!

확실히 마물과 '사람'은 다르다.

마물의 강함은 직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더 고등한 마물, 더 거대한 마물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 요정, 드워프는 생긴 것만으로 강함을 측정할 수 없다.

–인간 영웅을 네가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지가 싸우는 거 아니라고 펠레리안은 침착하게도 말했다.

-저 드워프 여자는 영웅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업적들을 세웠어. 망치 한 자루로 와이번 열 마리를 때려잡았으니까.

그건 거의 토르 아닌가!

내가 공격을 할 때마다 로제나라는 드워프는 손을 들어 막았다.

"하하하! 귀엽구나!"

독사가 무섭지도 않나.

괘씸해서 한 번 깨물어 주려고 했는데, 계속 허공만 깨문다.

정작 그녀는 나를 공격하지는 않는다.

비늘 떨어지게 열심히 움직였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이런 식으로 나오면 검을 뽑을 수밖에 없어.

그때, 로제나의 손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오!"

허공에 흩날리는 내 비늘을 검지와 중지로 잡아챈 것이다.

"예쁘군, 아주 예뻐."

파바바박!

손을 번개같이 움직여 비늘 네 개를 더 잡아챘다.

"다섯 개,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깜짝이야.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그래, 꼭 싸울 필요가 있을까.

사이좋게 지내면 얼마나 좋아.

"심층 내려가기 전에 잠깐 따라올래? 네 비늘로 목걸이를 만들 거야."

예전에 만났던 랑그레이라는 인간도 내 비늘을 탐냈는데.

수정 비늘이 예쁘기는 한가 보다. 드워프 장인도 원하는 것을 보니.

'좋아.'

고개를 끄덕이고 로제나를 따라갔다.

정말 내 비늘만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일단 가볍게 펜던트를 하나 만들어 볼게."

드워프 장인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다.

심층으로 이어지는 문 바로 옆에 그녀의 공방이 있었다.

금실을 무척이나 얇게 뽑아내서 체인을 만들었다.

-다시 봐도 훌륭한 솜씨군.

펠레리안도 로제나의 손재주를 인정했다.

순식간이었다.

팔찌 하나가 완성된 것은.

금으로 만든 실에 내 비늘을 꽃 모양으로 둘러 만든 팔찌였다.

"오, 호오, 오······!"

그녀는 자기가 만든 팔찌의 만듦새에 스스로 감탄했다.

근데 분명 펜던트를 만든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팔찌로 바꾼 걸까.

"괜찮은 목걸이야. 이 소재만 있으면 컬렉션을 완성할 수 있겠어."

그러더니 그 팔찌를 내 목에 걸어 줬다.

팔찌가 아니라 목걸이가 맞았던 것이다!

"사악!"

깜짝 놀라서 감동해 버렸다.

목걸이는 처음부터 나를 위해 만든 것처럼 딱 어울렸다.

생긴 것도 무섭고 하는 행동도 야만적이지만, 좋은 드워프였구나.

"푸른 수염을 만나러 갈 거라는 거지?"

'맞아요.'

나는 수첩과 펜을 꺼내 글씨를 적어 주었다.

다른 드워프들이 그랬듯 로제나 역시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정말 신통한 뱀이네. 왜 만나려는지 물어봐도 되나?"

나는 펠레리안을 돌아봤다.

그가 로제나와 푸른 수염을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펠레리안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말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눈치다.

-둘 사이 관계가 묘하기는 했지······.

'그게 무슨 말?'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로제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상관없어. 잡아 죽이든 어쩌든."

쿨한 여자다.

"근데, 말이 잘 안 통할 수도 있을 거야."

'왜요?'

"푸른수염은······ 불에 홀렸거든."

불에 홀렸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펠레리안이 '불홀림?'하며 중얼거렸다.

'불에 홀리는 게 뭐에요?'

"지하 드워프가 땅을 파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러게요?'

인간이 광산을 파는 이유는 그곳에서 광석을 캐 팔기 위해서였다.

즉,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거다.

그런데 이곳의 드워프들은 딱히 돈벌이에 관심이 없는 느낌이었다.

마치 광산을 파고 내려가는 것 자체에 몰두하는 느낌.

"본능이지. 요정들이 숲에 살고 싶어 하고. 인간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처럼. 드워프는 최고의 소재와 불꽃을 찾기 위해 땅을 파."

그리 말하니 확 이해가 된다.

그런데 불꽃을 찾는다면서 왜 땅을 파는 걸까.

"산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불꽃이 나온단다."

땅속에 불꽃이 있다고?

설마 드워프들이 아무리 땅을 깊게 판다고 해도 저 마그마가 있는 곳까지 들어갈 수는 없을 텐데.

아니, 그건 현대인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모든 산에 있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칼레아 산에는 있을지도 몰라. 산의 심장이······."

-산의 심장!

탄성을 터뜨린 것은 다름 아닌 펠레리안이었다.

산의 심장이 뭔데.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불꽃 중 하나지. 모든 금속을 녹이고, 모든 것을 제련할 수 있으며, 그 덕에 최고의 금속을 제련할 수 있어."

'운철보다 더 좋은 거요?'

"셀레스티움?"

그래, 푸른 수염이 훔쳐 간 내 운철!

"종류는 다르지만, 비슷하지. 훨씬 더 많은 양을 제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더 그렇고."

듣기에는 확실히 대단하다.

"그런데, 그런 불꽃들은 드워프를 홀리기 마련이야. 그게 바로 불홀림이지."

로제나의 표정은 조금 씁쓸했다.

이곳의 드워프들은 그 산의 심장이라는 것을 이미 찾은 걸까?

"글쎄. 나는 관심 없어서."

로제나는 첫인상보다 훨씬 더 친절한 드워프였다.

나는 그녀에게 내 비늘을 몇 개 뽑아 나눠 주었다.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은 뒤, 심층으로 통하는 문으로 데려갔다.

"아래는 아주 뜨거울 거야."

"사악!"

걱정 마십쇼.

내 열 내성은 무려 12레벨이니까.

"조심하고."

그리고 그녀가 심층으로 통하는 철문을 열어 주었을 때.

후우우웅-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풍에 조금 두려워졌다.

이거 비늘 다 벗겨지는 거 아닌가 싶다.

"잘 다녀오렴. 으하하!"

호탕하게 웃는 로제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에라잇!

나는 심층으로 뛰어들었다.

* * *

이거 지구 온난화인가?

지구 온난화가 아니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아, 한 가지 가능성이 존재하긴 한다.

드워프들의 채굴력이 대단해서 마침내 지각을 뚫고 맨틀까지 도달해 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더위는 말이 안 된다.

아니, 더위도 아니다 이건.

뜨거움이라고 말해야 한다.

최소 50도는 되는 것 같은데, 당연히 생물이 살 만한 공간이 아니다.

*「열 내성의 숙련도가 오릅니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열 내성이 올랐다.

좀 더 머물면 레벨도 오르겠네 싶다.

심층은 광산의 밑바닥 층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다만 인프라라고 해야 하나, 제대로 된 주거지는 없었다.

벽면을 따라 나선형으로 내리막이 나 있고, 지하수를 끌어왔는지 곳곳에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물이 신기하게도 시원해서 그나마 드워프들이 살 수 있는 것 같다.

"뭐야, 뱀이야?"

"어우, 저거 로제나 님의 목걸이 아니야?"

드워프들은 나를 신기하게 봤지만 막아서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그들은 내가 건 목걸이가 로제나의 것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녀의 목걸이를 걸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드워프들이 쉽게 접근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악명이 높은 걸까.

그런데 사실 이곳의 드워프들도 내가 보기에는 조금 무섭게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흰 천으로 얼굴을 칭칭 감고 있는 것이다. 꼭 미라처럼.

아마 뜨거운 열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거겠지.

그래도 처음 온 곳이니 길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푸른 수염은 어디 있나요.'

"뱀이 글씨를······!"

벌써 수십 번은 겪어 본 반응이다.

심드렁하게 있다가, 나는 경악해서 펄쩍 뛰고 말았다.

드워프가 얼굴을 감아 둔 붕대를 풀자, 입 주변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씨익 웃는데 벌어진 입 안도 피범벅이었다.

"켈록, 컬럭!"

기침을 하는 그에게서 멀찍이 물러섰다.

전염병 같은 거면 어떡해.

"최심부로 가 봐. 곧 나오실 거야."

'네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나는 얼른 그를 지나쳐 내려갔다.

요즘 붉은 모루 광산의 드워프들에게 병이 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심층에 머무는 드워프일수록 환자가 더 많다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최심부'가 어디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심층의 가장 밑바닥.

그곳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철문이 존재했다.

그 근처의 드워프들이 철문에 주기적으로 물을 끼얹었다.

치이이이익!

그러면 물이 증발하면서 어마어마한 김을 뿜어 댔다.

대체 저 아래는 얼마나 뜨거운 건지.

그 앞에서 딱 기다리고 있으려니, 드워프들이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하지만 굳이 나를 막거나 끌고 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기다리고 있기도 심심해서 펠레리안에게 물어봤다.

'푸른 수염, 많이 세요?'

-로제나보다는 약했었지만, 당연히 강하지. 무려 드워프 광산군주 아니냐.

아마도 그렇기 때문 아닐까.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믿는 것이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뱀 한 마리가 드워프 왕과 그 측근들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여기 서 있는가 하니.

'진짜 영감님 말대로 하면 되는 거죠?'

-걱정 마라.

펠레리안이 호언장담을 했기 때문이다.

-놈은 마도사와의 계약을 어겼어. 약속의 문구를 말하는 순간 너의 노예가 될 것이다.

펠레리안과 드워프 왕이 했던 계약은 그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약속을 어긴 자가 상대의 노예가 되는.

뭐 나는 드워프 노예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셀레스티움을 되찾아서 검이나 만들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글로 써서 보여도 되는 거죠 정말?'

-된다니까는!

내가 말을 할 수 없으니까, 혹시나 해서 확인해 봤다.

쾅!

그때, 최심부로 통하는 철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저 너머에서 두드린 것이다.

누군가 외쳤다.

"문, 열어-!"

최심부의 철문은 바닥에 달려 있었으니, 쇠사슬과 도르래로 열 수 있는 구조였다.

힘 좋은 드워프들이 쇠사슬을 당기자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그그긍.

계단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드워프들도.

저 중 푸른 수염이 누굴까.

모두 얼굴과 몸을 흰 천으로 싸매고 있어서 바로 알 수가 없다.

-아마 셀레스티움으로 만든 물건을 가지고 있는 놈일 것이다!

운철.

운철은 검은색이라고 한다.

내 시선이 드워프 하나에게 멈췄다.

새카만 금속으로 만든 물건을 들고 있는 자였다.

-저, 저놈!

그가 푸른 수염이었다.

그리고 내 전신의 비늘이 곤두섰다.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었다.

< 멸망의 주문(삽화) >

091. 멸망의 주문

푸른 수염과 그의 측근들이 최심부에서 올라왔다.

마이스터 넷과 강인한 대장장이 다섯이 끼어 있는, 붉은 모루의 정예들이다.

그들이 몸을 감싸고 있는 흰 천을 풀었다.

이곳 심층의 기온도 푹푹 찌지만, 최심부에서 나오니 선선하게까지 느껴졌다.

천은 푹 젖어 있었다.

선선한 지하수에 온도를 유지시켜 주는 냉각석 가루를 넣어 냉각수를 만들고.

흰 천을 거기에 푹 적셔서 몸에 두르는 사용방식이었다.

몸에 좋을 리는 없었지만 이것 없이는 최심부에서 작업을 할 수 없다.

최심부에 들어가는 드워프들은 붉은 모루의 정예였다.

뜨거운 열기에 오래 노출되어 열 내성이 오를 대로 오른, 전사 중의 전사들이 푸른 수염과 함께했다.

그런 이들이 방비를 한 채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며 피부가 붉게 익어 버렸다.

푸른 수염.

그 이름에 걸맞게, 군주의 수염은 눈에 띄는 푸른색이었다.

한때 로제나는 그의 수염이 바다와 같은 색이라며 좋아했었다.

그들 중 바다를 직접 본 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일까.

혹은 너무나도 뜨거운 불에 오래 노출되어서일까.

지금 그의 수염은 더 이상 예전 같은 푸른색이 아니었다.

그을리고 꼬부라져, 희미하게 검푸른 기운만 남아 있을 뿐.

"후우우······."

깊은숨을 내쉰 푸른 수염은, 비로소 소란을 알아챘다.

"뭐지?"

"웬 뱀이······ 군주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젊은 드워프 하나가 그리 설명했다.

뱀? 하고 중얼거리며 걸어 나가니, 정말 뱀이 있었다.

놀랍게도 뱀은 공용어를 할 줄 알았다.

허공에 수첩이 떠오르고, 그 위에 펜을 움직여 의사소통하는 방식이었다.

수많은 신비를 보아 온 푸른 수염도 처음 보는 조화였다.

그리고, 그 뱀의 말은 더욱 놀라운 내용이었다.

"펠레리안이라고?"

너무나도 오랜만에 들은 이름.

그래, 그 요정 마도사와 계약을 했더랬다.

그때도 펠레리안은 악명 높은 인물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마도사가 제시한 대가를 거절할 수 없었다.

"계약 위반이라······."

그 계약의 전말을 아는 것은 늙은 드워프들뿐이었다.

젊은이들은 대체 뱀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는 눈치다.

허공의 수첩이 저절로 넘어가더니 한 문구가 적혔다.

'내 운철검은 어디 있지?'

"······아아, 셀레스티움검을 말하는 거군."

보구의 방.

인간들이 펠레리안의 던전을 찾아냈을 때.

푸른 수염과 드워프들은 나서서 그 던전을 해체해 주었다.

대신 그 과정에서 보구의 방에 숨겨져 있던 가장 귀한 것들을 몰래 빼돌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셀레스티움.

내열성이 지독하게도 높은 그 금속이 '산의 심장'을 채굴하기 위해 필요했으므로.

"이것을······."

그것으로 만든 물건은 지금 푸른 수염의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이걸 찾는 건가?"

쇠사슬과 양동이.

찐득하게 검은 얼룩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더러운 물건들.

그것이 한때 아름다움을 뽐내던 셀레스티움검의 현재 모습이었다.

뱀의 비늘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키, 키······."

뱀이 분노로 포효했다.

"키사아아아악!"

* * *

이자시이익!

검을 양동이로 바꿔 버린 저 미친 드워프에게 천벌 있으라.

드워프의 심장이 무슨 맛인지 궁금했다.

내게 남아 있는 한줄기 이성이 간신히 나를 붙잡았다.

그래, 되돌려 받으면 되는 일이다.

저 드워프에게 다시 요구할 것이다.

저 거지 같은 양동이와 사슬을 녹여서 멋진 검을 만들어 돌려 달라고.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요구했다.

'내 운철검 당장 내놔! 이 도둑놈들아!'

드워프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푸른 수염은 놀라지도, 상황을 회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설마 역천이 아직 살아 있나?"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나는 적법한 펠레리안의 대리자니까!'

펠레리안이 설명해 준 대로 당당하게 나갔다.

'이 계약 위반자야. 마음대로 계약을 어기고 물건을 훔쳐 가? 그 후환이 두렵지도 않았나?'

"······정말인가 보군."

그래, 정말이다.

"미안한 일이다. 사과하지. 한 마디 사과로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아니겠지만, 나는 셀레스티움을 돌려줄 수 없다."

'그래, 그렇다면 계약 위반의 대가를 치르라.'

푸른 수염에 대한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나는 계약 위반의 키워드를 말하고자 했다.

단번에 푸른 수염을 죽음보다 못한 상태로 떨어뜨릴 수 있는 한 마디를.

"지금 당장은 말이다. 작업이 끝난다면 바로 돌려줄 수 있지. 내가 직접 좋은 재료와 함께 최고의 검을 만들어서 말이야."

'······?'

"너는 내가 셀레스티움을 굳이 회수해서 계약을 어긴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아니 하나도 안 궁금한데?

그럼 이만, 죽어라.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역천 또한 납득할 것이다. 진짜 산의 심장이야!"

-잠깐.

펠레리안이 그런 나를 막았다.

아 왜요!

-한 번 키워드를 말하면 돌이킬 수 없어. 게다가 궁금하긴 하군. 정말 저 난쟁이 놈이 산의 심장을 찾아낸 건지. 일단 조금 들어 보자꾸나.

웬일로 펠레리안은 나를 달래듯 말했다.

마도사의 호기심.

그놈의 것이 자극된 것이 틀림없다.

"원한다면 보겠나? 이 셀레스티움으로 뭘 하는 건지."

푸른 수염은 건조한 어투로 그리 제안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허튼수작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도 보면 이해할 것이다. 내가 굳이 계약을 위반하면서도 셀레스티움을 챙겨 온 이유를."

푸른 수염은 잠시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기뻐 보이지는 않는다.

무척이나 피로한 얼굴로 외칠 뿐이다.

"다시 최심부로 들어간다! 준비해라."

"군주님, 위험합니다.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냉각수와 천을 준비해."

다른 수하들이 만류했지만 푸른 수염은 듣지 않았다.

결국 푸른 수염과 함께 다시 최심부로 들어갈 드워프들이 모였다.

"예레미아를 데려와라."

예레미아는 원래 내가 로제나 대신 만났어야 할 마이스터였다.

이 심층에 있었던가.

그리고 나타난 드워프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완전 송장 수준이네.'

여태까지 만났던 드워프들은 다들 튼튼해 보였다.

심지어 둥켈과 함께 돼지를 치던 헬무트라는 노인도, 나이는 많아 보였지만 충분히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마이스터라는 저 노인은 아니었다.

비쩍 말랐고 머리카락이며 수염은 듬성듬성하다.

기침을 하는데 입에서 피가 나왔다.

누가 봐도 오늘내일하는 상태 같다.

내가 슬쩍 뒤로 물러서니, 다른 드워프가 내게 다가왔다.

"얌전히 있어라."

네?

그러더니 물에 푹 적신 흰 천을 내게 두르기 시작했다.

질색해서 피하려다가 너무 시원해서 얌전히 있었다.

"최심부는 아주 뜨거우니까 이게 필요할 거야."

그렇군.

냉각수를 적신 천이라고 했다.

전투태세에 들어갔었는데 약간 김이 새긴 한다.

"문을 열어라-!"

푸른 수염이 그리 외쳤다.

드워프들이 도르래의 사슬을 당겨 최심부의 철문을 열었다.

곧 어마어마한 열풍이 몰아쳤다.

와악.

*「열 내성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열 내성lv12가 열 내성lv13이 되었습니다.」

결국 열 내성의 레벨이 하나 더 올라 버렸다.

냉각수를 적신 천이 없었다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나도 이렇게 뜨거운데 저 예레미아라는 노인은 괜찮을까?

하지만 그는 부축을 받으면서도 기어코 최심부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산의 심장. 정말 있는 건가.

'그게 대체 뭔데요?'

-드워프의 전설 같은 것이다.

쿠웅.

철문이 닫혔다.

푸른 수염과 함께, 나는 칼레아 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왔다.

'상황이 조금 재밌네요.'

-뭐가 말이냐?

'아니 공교로운 것 같아서요.'

나는 '심장 파 먹는 뱀'이니까.

* * *

[산의 심장을 찾는 지하의 드워프들에 대하여.]

비버라는 동물을 아는가.

놀랍게도, 그것들은 한낱 동물인 주제에 댐을 건축하는 데 일생을 보낸다.

나뭇가지를 얽어서 강에 댐을 만드는 것인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본능에 의한 행동이다.

그 동물들이 댐을 만드는 데에 어떤 장황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하 드워프들이 땅을 파는 것도 비슷하다.

그들은 귀한 광물을 채굴하고자 하며, 그것을 제련하여 더 대단한 물건을 만들고자 한다.

필자는 더 깊숙이 땅을 파고드는 드워프의 행동 기제가 비버의 그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다.

'산의 심장'이란 그런 점에서 비버의 '완벽한 댐'과 비슷하다

드워프들은 산의 심장이라는 것을 찾아내겠다며 땅을 깊게 파고 들어간다.

종종, 그들은 그 깊은 지하에서 거대한 용암 지대를 만난다.

드워프들은 그 용암 지대에 완벽하고 순수한 불꽃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불꽃의 정수, '화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것이다.

그것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금속을 녹이고 제련할 수 있으며, 그것을 굳히고 식히면 최고의 금속으로 탄생한다는 전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실존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말 '산의 심장'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으로 만든 물건은 왜 볼 수 없는가?

사실 산의 심장은 그저 불에 홀린 드워프들의 전설일지도 모른다.

한 번 불에 홀린 드워프들은 점점 용암지대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다.

결국 뜨거운 열에 불타고 병들어 용암 화맥을 자극해 광산 전체가 불꽃에 삼켜지니, 그것이 불에 홀린 광산의 비참한 최후이리라······.

* * *

"용암 따위가 아니야."

푸른 수염이 말했다.

뜨겁고 건조한 공기에 갈라진 목소리였다.

"내가 병신도 아니고, 용암과 산의 심장을 구분하지 못할 리는 없지."

펠레리안이 물어보라고 시켜서 물어보니, 그런 말이 돌아왔다.

"가장 순수한 불이 저 아래 용암 호수에 있어. 더 아래로 파고든다면 분명 산의 심장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산의 심장이란 걸 찾아서 뭘 어쩌려는 것인가.

그걸 물어보니, 푸른 수염은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내게 눈치를 줬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우린 그걸 가지고 지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드워프들의 왕국이 탄생할 것이야."

생각해 보니까 드워프 역시 왕국이 없는 종족이다.

엘프는 적어도 대수림과 세계수라는 거점이 있는데, 드워프들은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산다.

"산의 심장을 지상으로 옮겨서 거대한 화로를 만들 것이다. 전 대륙의 드워프들이 모일 거야. 태초의 대장간을 보기 위해서."

그냥 단순히 땅 파는 게 좋아서 파는 것은 아닌 듯했다.

푸른 수염에게도 야망이 있던 것이다.

'태초의 대장간?'

"화정으로 세상 모든 금속을 녹이고 제련할 수 있는 전설의 대장간을 말한다."

불에 홀렸다길래 광기가 이글거릴 줄 알았는데, 푸른 수염은 생각보다 침착했다.

물론 왕국을 세우겠다는 야망은 결코 무난한 것이 아니었지만.

제왕병자가 여기 또 있었다니, 이미 고블린 왕국을 세우겠다는 나나루크가 있는데.

"왕이 될 생각은 없다. 나는 산의 심장만 채굴하고 물러날 거야. 그것이 내 소명이니."

그게 정말이라면 제왕병자는 아니군.

그때가 되면 또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나는 최심부의 중앙에 도달했다.

거대한 우물처럼 절벽이 둥글게 있었고, 저 아래에 용암 호수가 보였다.

"저 안에, 산의 심장이 있다."

엄청나게 뜨겁다.

*「열 내성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냉각수를 두른 천조차 뜨거워지고 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다.

"셀레스티움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어지간한 금속은 저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녹아 버리니까."

푸른 수염은 셀레스티움으로 사슬과 양동이를 만들고, 나머지로는 망치 등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화정 일부를 채취하는 것을 보여 주지. 너도 산의 심장이 품은 가능성을 보아야 하니."

수하들에게 쇠사슬을 잡게 한 뒤, 푸른 수염은 양동이를 저 아래로 던졌다.

양동이가 용암 호수 위로 떨어졌다.

당연하게도, 가라앉는 대신 둥둥 떠 있다.

산의 심장을 어떻게 퍼 올린다는 걸까.

근데, 저 용암 호수는 그냥 평범한 용암처럼 보인다.

그리 생각했을 뿐인데, 푸른 수염은 내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말했다.

"자세히 보아라. 저건 그저 용암일 뿐이야. 산의 심장은 저 안에 있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뭔가 불길하다.

나를 확 밀어버리는 거 아닌가 걱정돼서 조금 경계했다.

"잘 봐야 해, 아주 잠깐일 테니까."

"사악."

알겠으니까 가까이 오지 마.

펠레리안도 내 옆에 서서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대체 뭐가 있다는 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다시 푸른 수염을 돌아보니.

그는 예레미아라는 늙은 드워프를 끌어안고 있었다.

저게 뭐 하는 거여.

"수고 많았소, 예레미아."

"늙고 병든 몸. 이렇게 쓰이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쿨럭."

예레미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피가 묻는데도 푸른 수염은 개의치 않았다.

"내 도와드릴까."

"그래 주신다면······."

예레미아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절벽 앞에 섰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푸른 수염이 망설임 없이 그 병든 드워프를 밀어버린 것이다.

추락은 길지 않았다.

풍덩, 하는 소리도 없이 새빨간 용암 속에 드워프의 육신이 삼켜졌다.

취이익!

연기가 그 위치에서 솟아올랐다.

'뭐, 뭐 하는 거얏!'

나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진귀한 것의 등장을 기다리듯 절벽 앞에 다가와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르르륵!

용암 호수의 표면에서 주황빛 불꽃이 솟아 나왔다.

용암과는 명백히 다른 무언가였다.

마치, 지옥의 괴물이 혀를 날름대는 듯했다.

뿜어져 나오는 그 빛이 드워프들의 눈동자에 비쳤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몽롱한 얼굴로 그 불꽃의 춤사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푸른 수염이 마침내 정적을 깼다.

"아름답지······ 않은가."

그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저 불꽃을 보아라.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불꽃이니······."

아름답지 않냐고······?

전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내 눈에는 그저 불꽃으로만 보일 뿐.

-미쳤군, 불홀림이 맞아.

펠레리안이 혀를 찼다.

여태까지 멀쩡해 보였던 푸른 수염은 이제 정말 미친 것처럼 보였다.

불홀림이 무엇인지 확 와닿았다.

-하지만, 과연 아름다운 불꽃이긴 해 ······.

그런데 펠레리안의 목소리도 조금 이상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이어지는 불꽃의 춤을 보고 있었다.

대체 뭐가 아름답다는 거야.

아무리 자세히 봐도 도저히 그런 감상은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몇 번 들어 본 메시지가 들린 것은.

*「특성 '불굴'에 의해 정신 공격에 면역입니다.」

아.

아하.

이제야 알 것 같군.

'저건 요사한 불이다.'

드워프라서 불에 홀린 것이 아니다.

저 용암 호수 아래에 있는 무언가는, 실질적인 위험성을 지닌 불꽃이었다.

"사아악!"

-헉, 깜짝이야, 뭐, 뭐냐!

협상은 끝났다.

나까지 불에 홀리도록 음모를 꾸미다니.

지금 당장 운철검을 내놔.

푸른 수염은 혀를 찼다.

"직접 보고도 저 아름다움을 모르다니. 그저 미물일 뿐이구나."

미물.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저 뱀을 잡아 아래로 던져라!"

푸른 수염이 본색을 드러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수첩과 펜을 꺼내 키워드를 적으려 했다.

치이이익!

그런데 펜의 잉크가 부글대며 눌어붙었다.

수첩은 누렇게 변하더니 마침내 불까지 붙어 버렸다.

"잡앗!"

그 사이 드워프 하나가 나를 덮쳤다.

펜과 종이가 사라져도 상관없다.

다른 펜과 종이를 쓰면 되니까.

"컥!"

달려든 드워프의 발목을 묶어 그대로 자빠뜨렸다.

넘어진 드워프의 엉덩이 위에, 단검 아쉬라를 꺼내 휘둘렀다.

칙, 치익- 칙!

"아악!"

화끈한 통증에 드워프가 비명을 지르고.

그의 궁둥이에 글씨가 새겨졌다.

푸른 수염도 그 글자를 읽고 말았다.

바보 같으니라고, 눈 감고 있었으면 안 통했을 텐데.

"컥!"

푸른 수염의 몸이 우뚝 굳었다.

계약 위반의 대가를 요구하는, 징벌의 룬어.

나는 그것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외쳤다.

'바루스!'

< 전여친 전남친 >

092. 전여친 전남친

'바루스!'

그리 말하자, 펠레리안이 지적했다.

-바루스가 아니라 바라스다. 적기는 잘 적어 놓고 왜 달리 말하나.

'그냥 기분이에요 기분.'

발음은 바라스였지만 바루스라고 외쳐 보고 싶어서 그랬다.

룬어는 그 자체로 마법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푸른 수염은 펠레리안과 맺은 계약으로 묶여 있었고.

역천의 마도사 펠레리안은 단 한 마디의 룬어로 그 위약금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바라스'라는 룬어를 말하는 것만으로 드워프 광산 군주를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무서운 계약이었다.

'근데 푸른 수염은 왜 그런 무시무시한 계약에 동의한 거예요?'

-원래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다른 것 아니냐.

'그런 지저분한 비유를.'

-세상 이치가 그러하다. 돈 빌릴 때 태도와 돈 갚을 때 태도가 다른 것이야. 저 어리석은 드워프는 진실로 자기가 계약을 위반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거겠지.

펠레리안은 생긴 것만 늙은 게 아니라 실제로도 세상 경험이 많았다.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봤을 그는 확실히 냉소적인 면이 있었으니.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을 거고, 셀레스티움이 필요하게 되자 내가 죽었다고 여기고 계약을 그냥 위반해 버린 거겠지.

'호오.'

-그리고 무엇보다······.

펠레리안은 뻔뻔하게 말했다.

-저놈은 룬어 한 마디에 자기 신세가 저리될지 몰랐을 거다. 계약서에 관련 조항을 세심하게 숨겨 뒀거든.

'헉.'

너무나도 펠레리안다운 행적 아닌가.

어찌 되었든, 그의 교활한 안배는 지금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푸른 수염이 마치 밀랍인형처럼 굳은 것이다.

'손 들어라, 푸른 수염!'

그렇게 명령하니, 마치 기계처럼 뻣뻣한 움직임으로 두 손을 든다.

마물을 '지배'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와, 이거 무슨 원리에요?'

-계약에 영혼을 저당 잡힌 것과 비슷한 상황이지.

'······그거 악마 아니에요?'

-어떻게 알았냐? 악마들이 자주 쓰는 그 방법이 맞다.

완전 루시퍼.

펠레리안은 수단이나 도구에는 어떠한 가치판단이 필요 없다는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나는 푸른 수염에게 쇠사슬과 양동이를 끌어 올리라고 명령했다.

푸른 수염은 별다른 말 없이 셀레스티움 양동이를 끌어 올렸다.

치이익-

땀방울이 사슬에 떨어지자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다.

정말 지옥처럼 뜨거운 곳이다. 어딘가에 악마가 살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저······ 괜찮으십니까."

"광산 군주님."

푸른 수염이 갑자기 얌전해지니 드워프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푸른 수염은 말없이 쇠사슬만 끌어 올릴 뿐이다.

까불고 있어.

이제 너희 왕의 생사 여탈권은 내가 쥐고 있다!

나는 당당하게 그들 앞에서 머리를 치켜들었다.

미라 같은 몰골의 드워프들은 어쩔 줄 모르고 상황을 지켜봤다.

'뭐 지배가 풀리거나 할 일은 없죠?'

-내가 말하지 않았냐. 영혼을 저당 잡힌 것과 다름없다고. 푸른 수염이 죽기 전까진 마법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동이와 쇠사슬을 제외한 남은 셀레스티움도 회수하고, 그걸로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또한 앞으로 인신 공양같이 야만적인 짓은 그만두라고 단단히 말해 줘야지.

그런데, 내 날카로운 관찰력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쇠사슬을 잡아당기는 푸른 수염의 팔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잡고 있는 사슬이 뜨거워서 그런 건가?

그런데 양동이를 거의 다 끌어 올린 시점에는 입술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푸른 수염의 입술이 달싹이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아."

"예?"

"······자, 잡."

불길하다.

"잡아······ 저, 뱀."

이에 드워프들이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얼른 푸른 수염에게 명령했다.

'입 다물어! 그리고 양동이를 나한테 넘겨라!'

명령은 통했다.

양동이 안에는 신비로운 주황빛 불꽃이 담겨 있었다.

용암 같은 게 아니었다. 저 용암 호수에서 춤사위를 추던 불꽃 그 자체가 분명하다.

드워프들을 홀리는, 정신 공격을 하는 나쁜 불.

양동이에는 달랑거리는 뚜껑이 달려 있었다.

얼른 뚜껑을 닫고 잠금쇠를 걸었다.

셀레스티움의 내열성이 대단하긴 한지, 뜨겁긴 해도 견딜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푸른 수염이 잡고 있는 사슬을 놓지 않는다.

'놔!'

"자, 잡으래도 ······!"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그리 외친다.

그제야 드워프들이 내게 달려든다.

상황은 뻔했다.

펠레리안이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푸른 수염은 마법의 지배력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이, 이럴 리가!

'아니, 절대 안 풀리는 마법이라면서요!'

혹시 저 드워프, 정신력이 19쯤 되는 건가.

-정신력 따위로 벗어날 수 있는 계약이 아니야. 말 그대로 혼에 묶인 계약이란 말이다!

펠레리안이 아무리 그리 말해 봤자 지금 상황은 분명 현실이었다.

나는 푸른 수염의 손등을 왁 물어 주었다.

그러고는 적당한 양의 신경독을 주입했다.

──────────────

[드워프 광산 군주 푸른수염lv159]

──────────────

나보다 강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죽지는 않겠지.

아니, 죽든 말든 무슨 상관.

그제야 푸른 수염이 쇠사슬을 놓았다.

나는 양동이와 쇠사슬을 채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키뱀아, 이거 위험한 거니까 절대 만지지 마라!

"으-아아아!"

그리고 푸른 수염은 기어코 계약의 마법에서 벗어났다.

그가 내게 덮쳐들었다.

나는 푸른 수염의 옆구리 옆으로 파고들어 몸을 피했다.

뒤에서 나를 덮치려고 했던 드워프가 푸른 수염과 뒤엉켰다.

앗!

자칫 용암 호수로 떨어질 뻔했다.

내 뒤에는 용암 호수.

그리고 앞에는 내 탈출을 막으려는 드워프들.

푸른 수염은 물린 손목을 꾸욱 움켜잡으며 노호성을 질렀다.

"잡아-!"

"사아아악!"

그리고 나도 마주 외쳤다.

'나를 지켜라 푸른 수염!'

아직, 지배력이 조금 남아 있었나 보다.

내게 달려들려던 부하를 오히려 푸른 수염이 후려친 것이다.

얻어맞은 드워프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포위망을 벗어났다.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자랑스러운 얘기는 아니지만.

줄행랑은 예전부터 내 특기였다.

문제는 이곳이 너무 뜨겁다는 것.

'지금은 수영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수영도 지금은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드워프들이 악을 지르며 나를 뒤쫓았다.

푸른 수염도 완전히 내 지배에서 벗어난 것 같다.

펠레리안에게 또 한마디 궁시렁대려다가 참았다.

정작 본인이 가장 충격을 받은 눈치였기 때문이다.

-계약이 처음부터 불완전했던 건가, 아니, 그렇다면 아예 룬어가 통하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내 계약 설계에 구조적 결함이 있었던가······ 그것보다는 차라리 드워프 녀석에게 대처 방법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무슨 수로?

혼자서 계속 중얼중얼거리는 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하지만 푸른 수염이 어떻게 펠레리안의 마법에서 벗어났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저 불에 홀린 드워프들에게서 벗어나는 것.

나는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

최심부와 심층으로 이어지는 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거의 달려들다시피 문에 몸을 부딪쳤다.

쾅, 쾅쾅!

이렇게 노크를 하면 저 바깥에서 문을 열어 주는 구조다.

과연,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그 문틈 새로 확 튀어 나갔다.

"으아아악!"

도르래의 사슬을 당기며 문을 열던 드워프들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하니, 내가 갑자기 튀어나올 줄 몰랐으리라.

그들이 사슬을 놓치자, 조금 열렸던 문이 다시 쿵 닫혔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문을 아예 못 열게 만들면 좋지 않겠는가.

나는 단검 아쉬라를 꺼내 도르래와 연결된 사슬에 내리쳤다.

카앙!

사슬은 끊어질 기미가 없었다.

젠장, 드워프들 쓸데없이 만들기는 잘해 가지고.

그 대신 나는 위에 고정된 도르래에 매달렸다.

온몸의 근육을 수축시키며 도르래를 잡아당기니.

우둑.

도르래가 부러졌다.

"뭐, 뭐 하는 짓이야!"

드워프들이 뭐라고 외치는 것을 무시했다.

콰앙!

바닥에 있는 문에서 쿵 소리가 났다.

푸른 수염과 드워프들도 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못 열겠지, 거기서 드워프 찜이나 돼라.

그러나 안심하기는 일렀다.

끼긱, 끼이익!

드워프들은 엄청나게 힘이 좋은 종족이니.

푸른 수염과 그 수하들은 기어코 오버헤드프레스 자세로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렸다.

심층을 벗어난다.

일단 위로, 또 위로.

"저 뱀 잡아앗!"

기어코 최심부에서 기어 올라온 것이다.

이번에는 근처에 있던 다른 드워프들까지 나를 쫓았다.

내려오는 길이던 드워프 하나가 나를 막기 위해 양팔을 벌리고 엉거주춤 자세를 취한다.

*「식심의 도약lv3을 사용합니다.」

불쌍한 드워프의 가슴에 시뻘건 구멍이 뻥 뚫리······ 지는 않았다.

나는 그의 목을 휙 스치고 지나갔다.

드워프는 등골이 서늘했는지 목덜미를 매만지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를 지나치자, 곧바로 심층의 문이 보였다.

심층과 그 위층을 연결하는 문은 중력의 힘으로 작동하는 문이다.

즉, 수레바퀴 비슷한 것을 빙글빙글 돌려야 열리며, 그 끈을 자르는 순간 쾅 하고 철문이 닫히는 구조다.

"문 닫아!"

열린 문을 지키고 있던 드워프는 졸고 있었다.

그리고 푸른 수염이 다시 한번 외쳤다.

"닫으라고 이 자식아!"

내 위로 도끼 하나가 휘리릭 날아가더니 벽에 쾅 부딪혀 떨어졌다.

그 탓에 졸고 있던 드워프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닫-아-!"

그가 허겁지겁 수레바퀴를 돌린다.

그러자 문이 그그긍 소리를 내며 닫히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몸을 빠르게 했다.

그리고, 뒤에서 또 한 자루의 도끼가 날아왔다.

카앙!

문을 지탱하는 사슬이 한 번에 끊어졌다.

육중한 철문이 중력에 몸을 맡기며 하강했다.

*「식심의 도약lv3을 사용합니다.」

좁아지는 문틈 사이로 구르듯 몸을 던졌다.

콰아앙!

자칫하면 꼬리가 잘릴 뻔했다.

하지만 내 명백한 승리.

문을 들어 올리는 쇠사슬이 끊어졌으니, 또 시간을 벌었다.

뒤에서는 철문이 쾅쾅거린다.

푸른 수염이 악을 지르는 소리 역시 들렸다.

"무슨 일이얏-!"

쩌렁쩌렁 외치며 나타난 것은 로제나였다.

아, 쟤는 못 이길 것 같은데 ······.

내게 주어진 선택은 세 가지.

로제나를 쓰러뜨리고 도망친다.

혹은 슥 그녀를 피해서 도망친다.

일단 앞의 두 개는 안 될 것 같고.

세 번째 선택지가 있기는 하다.

'푸른 수염이 미쳤어요!'

내가 본 것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예레미아라는 나이 많은 드워프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어요. 완전히 미쳤다니까요. 산의 심장을 파내서 드워프 왕국을 만들겠다고······.'

"뭐, 뭐어?"

나는 푸른 수염이 저지른 만행을 솔직히 까발렸다.

완전히 솔직히는 아니고 조금 과장하긴 했다.

-이런, 안 된다!

그때 갑자기 펠레리안이 소리쳤다.

-저 여자는 푸른 수염과 사귀는 사이였어!

'예?'

헉, 설마.

'그러면 아직도 사귀고 있는 거예요?'

-어······ 글쎄?

헤어졌으면 완전 문제없는 일이잖아.

혹시, 아직도 서로 애틋한 마음이 남아 있나?

로제나의 표정을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구겨질 대로 완전히 구겨졌다.

"젠제로 이 씨벌롬이······."

아, 헤어진 게 확실해 보인다.

그것도 제법 안 좋게.

푸른 수염의 이름이 젠제로였나 보다.

"언젠가 정신 차리겠지 하고 두고 봤더니만 결국 사달을 ······."

'믿어주는 거예요?"

"그래."

로제나는 양팔의 소매를 걷어서 우람한 근육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망치를 잡아 쥐었다.

그걸로 나를 내려칠까 봐 쫄았는데, 그냥 스윽 건넨다.

"뱀아, 둥켈하고 같이 왔다고 했지."

'예.'

"이거 가져가라."

로제나의 망치는 조금 낡았지만 훌륭한 물건이었다.

자세히 보니, 세밀한 장식이 보통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마이스터의 지위에 걸맞은 훌륭한 물건.

"둥켈과 합류해서 헬무트를 만나라. 만나서 내가 보냈다고 하고 전해줘."

헬무트, 역시 평범한 노인은 아닌 것 같더라니.

"광산에 새로운 군주를 세워야겠다고. 젠제로 이 새끼가 결국 돌아 버렸으니."

로제나는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망치를 아공간 속에 넣었다.

"자, 가!"

안 그래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로제나를 뒤로하고 도망쳤다.

그녀가 푸른 수염을 혼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 * *

로제나는 떠나는 뱀을 바라봤다.

푸른 수염 젠제로에게는 저 뱀이 갑작스러운 재난처럼 느껴졌겠지만, 로제나가 생각하기에는 글쎄.

오히려 쇠락해가는 광산에 나타난 행운의 뱀이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도구를 살폈다.

뱀에게 준 망치 말고도 위협적인 도구들이 많다.

칼도 있었고, 워해머로 쓸 만한 대형 망치도 있었다.

하지만 무기를 쓸 수는 없겠지.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로제나는 졸릴 때 베고 자던 목침 하나를 잡아 들었다.

콰앙- 쾅!

심층과 연결된 문에서 요란스러운 소음이 났다.

푸른 수염은 기어코 그 문을 열었다.

그와 측근들이 조금 열린 문틈으로 기어 나왔다.

"하."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로제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엔 그래도 봐 줄 만한 상판이었는데 ······."

푸른 수염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땀에 젖은 흰 천.

오그라들어 구불구불한 수염이며 머리카락.

"젠제로."

"······로제나?"

목침을 어깨에 걸치고 기다리고 있던 로제나의 모습에, 푸른 수염 역시 조금 놀랐으리라.

"뱀을 못 봤나?"

"못 봤다 이 새끼야. 아래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후우······."

오랜만에 만난 옛 연인.

푸른 수염은 그런 로제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로제나 너."

"어."

"옛날부터 지금까지, 정말 피곤한 스타일인 거 알고 있나?"

"이······."

로제나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이 씹쌔끼가!"

< 불 속성 식물 >

093. 불 속성 식물

"개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딴 짓을 벌여 놓고. 머리에 뇌 대신 불꽃만 들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구멍 좀 내서 압력 좀 빼줄까?"

로제나가 손에 들고 있는 목침을 휘리릭 돌렸다.

그녀의 강함을 알고 있는 드워프라면 결코 농담으로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비켜라 로제나. 이것은 광산 군주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푸른 수염 젠제로는 차갑게도 말했다.

"네가 왕인 줄 알아?"

"그러나 광산의 주인이지."

드워프의 광산 군주는 왕이 아니다.

그 종족적인 특성상, 드워프들은 광산 군주에게 절대복종하며 충성을 바치지는 않는다.

인간과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광산의 거주민은 광산 군주가 내리는 명령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로제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곳은 내 공방이야. 그리고 마이스터는 자기 공방에 침입하는 자를 쫓아낼 권리가 있어."

목침을 탁, 탁 부딪치며 말한다.

"지금 작업 중이다 이 말인가?"

"그래, 내 마지막 컬렉션을 완성하던 중이었다고."

그녀의 작업대 위에는 실제로 미완성의 목걸이가 있었다.

천 번째 컬렉션, 태양의 넥클리스가.

"그 컬렉션은 결코 완성하지 못하겠군."

푸른 수염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잠시,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로제나는 푸른 수염의 눈동자를 보았다.

움푹 들어가서 새카만 눈.

예전의 그 맑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

푸른 수염과 직접 대면한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벌써 5년은 넘은 것 같다.

그런데 그사이, 푸른 수염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정말 뱀이 말한 게 사실이구나, 불에 홀려도 제대로 홀렸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쩔 도리가 없이, 끈적하고 축축한 감정이 로제나의 마음을 휩쓸었다.

미망이고, 미혹이다.

한때 사랑했던 관계 아니던가. 서로 늙고 너무도 달라져 있었지만······.

"무기를 뽑아라. 마이스터 로제나가 광산 군주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때, 푸른 수염이 제 수하들에게 그리 명령했다.

광산 군주의 최측근에서 그를 따르는 드워프들이었지만, 순간 당황해서 저들의 군주를 바라봤다.

"안 들리나? 무기를 뽑아서 마이스터 로제나를 제압해라."

메이스, 워해머, 전쟁 도끼.

다른 드워프들과 달리, 푸른 수염의 측근들은 그런 무기들을 지니고 있었다.

"여의치 않다면 죽여도 좋다."

푸른 수염의 명령이 떨어졌다.

"하."

로제나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무기를 든다고.

같은 광산의 드워프끼리,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이다.

워해머며 도끼를 빼 든 드워프들이 슬금슬금 로제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눈빛 역시 범상치 않다.

로제나는 불꽃에 홀린 드워프가 푸른 수염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흐읍!"

도끼가 날아온다.

충분한 살의가 담긴 일격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으리라.

로제나 역시 번개같이 움직였다.

손에 잡고 있는 목침으로 그 드워프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퍼석!

목침이 박살 나고 도끼를 휘두르던 드워프는 코피를 뿜으며 엎어졌다.

일순간, 달려들려던 드워프들도 멈칫했다.

그 정도로 로제나의 투기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젠제로."

로제나는 웃고 있었지만, 그 눈가에서는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이게 너를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야."

"······."

푸른 수염은 말없이 자신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한 번에 덮쳐라. 방심하지 말고!"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로제나는 과연 붉은 모루 광산 최강의 드워프였다.

그녀가 전장에 나선 지가 오래되었지만, 그 무위는 여전했다.

목침이 부서져 맨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두 명의 드워프를 제압했다.

하지만 그녀는 살수를 쓰지 않았고.

다른 드워프들은 로제나를 죽일 기세로 덤벼들었다.

특히 푸른 수염은 로제나와 맞상대를 할 수 있을 만큼 강자였으니.

그녀의 몸에 점차 상처가 늘어났다.

메이스가 그녀의 다리를 내려친 것이 치명적이었다.

빠악!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음과 함께 로제나의 몸이 휘청였다.

그것이 승부의 결착이었다.

드워프들의 억센 손아귀가 로제나를 덮쳤다.

그녀는 순식간에 구속되었다.

"후우······."

푸른 수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수하에게 명령했다.

"가민, 불꽃의 정수를 가져와라."

"예!"

그리고 푸른 수염은 말없이 로제나의 옆에 섰다.

로제나가 거친 욕설을 퍼부어도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다시 심층으로 돌아간 드워프가 돌아왔다.

로제나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뜨겁게 달궈지는 것을 느꼈다.

주황빛 불꽃이 일렁이고 그림자가 졌다.

"로제나, 내가 허튼소리를 한다고 했지. 산의 심장을 찾는 일을 너는 비웃었어."

"병신."

"직접 보아라. 내가 찾아낸 불꽃의 정수를."

푸른 수염은 로제나의 등을 무릎으로 누르고 머리를 강제로 잡아 들었다.

그녀의 얼굴 앞에는 횃불 하나가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주황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불꽃이.

마치 살아 있는 한 마리의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봐."

푸른 수염의 목소리는 마치 뱀의 속삭임처럼 쉿쉿거렸다.

로제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실로, 마성이 느껴지는 불꽃이다.

무엇이든 녹여 버릴 것처럼, 악마가 혀를 낼름대듯······.

으득.

로제나가 자신의 볼 안쪽을 깨물었다.

피 맛과 고통 탓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퉤!"

그녀는 살점과 핏물을 뱉어 내고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쯧."

푸른 수염이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놓았다.

땅에 얼굴을 처박으며, 로제나는 생각했다.

무기를 들었어야 했다고.

무기를 들고 맞서야 했다.

'순수한 불꽃, 산의 심장?'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저 불꽃의 요사함을 눈치챘다.

붉은 모루 광산의 운명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푸른 수염이 땅속에서 사악한 것을 파냈다.

* * *

-악마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싶다.

펠레리안의 분석은 그러했다.

-화마(火魔)라는 것이 있지. 악마의 한 종류이다.

'악마는 원래 뿔 달리고 피부가 검거나 빨간, 그런 괴물 아니에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악마는 그 종류가 무수하고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아. 자연현상에 가까운 부정형의 악마 또한 존재한다.

아무래도 이 세상에는 악마라는 것이 실존하는 듯했다.

나는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놈을 만나 본 적이 있다.

데쉬난의 집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내 머릿속으로 쑥 들어오더니 콧물과 함께 나온 녀석이었다.

-악마에게 이미 혼을 빼앗겼다면, 영혼을 담보로 잡았던 계약의 마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펠레리안이 내린 판단에는 그런 근거가 있었다.

원래라면 계약을 위반한 푸른 수염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부려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푸른 수염이 너무나 쉽게 마법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면 그 악마가 드워프들을 홀려서 뭘 하려는 건가요.'

-악마와 엮인 이상, 멸망뿐이지.

펠레리안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이 세상에서도 악마는 나쁜 놈들인가 보다.

사실 악마가 의외로 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긴 했는데.

왜 그렇지 않은가, 인간들이 무서워하는 마물 중에서도 착한 것들이 있다.

고릴라 여사 같은 맘씨 좋은 마물이 있으니, 착한 악마도 있지 않을까.

-그거참 얼빠진 생각이군.

펠레리안은 확고하게 말했다.

-악마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피와 영혼을 탐한다. 결국에는 다른 드워프들을 홀려서 이 광산의 모든 드워프들을 불태워 죽이는 것이 목표겠지.

푸른 수염이 그 늙고 병든 드워프를 용암 호수로 밀어 넣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그러면 내 운철검은 누가 만들어 줘요!'

아직도 절반가량의 셀레스티움을 회수하지 못했다.

게다가 셀레스티움을 제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드워프뿐, 그것도 경지에 다다른 마이스터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운철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게나 말이다.

푸른 수염, 아니, 그 꼬불 수염은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로제나의 조언대로 곧바로 둥켈을 찾아갔다.

둥켈은 작별인사를 했던 내가 너무 빨리 돌아오자 깜짝 놀랐다.

그는 만진과 사이가 꽤 가까워졌다.

그 덕에 만진이 소속되어 있는 트랄 클랜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트랄 클랜은 트랄이라는 코가 큰 드워프가 이끌고 있는, 그러니까 뭐, 패거리 같은 것 같았다.

"뭐라고······?"

나는 둥켈과 만진에게 내가 겪었던 일을 모두 말해 줬다.

트랄 패거리 역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나와 술자리를 가지면서 함께 우정을 나눈 바 있다.

내가 겪은 일들을 듣는다면 모두 함께 분개해 주겠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푸른 수염님이······."

"아니, 예레미아 님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다고!"

엄청나게 놀라워한다.

하긴, 내가 봐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자, 다 말해 줬으니까 얼른 가서 뒤엎어라.

붉은 모루 광산에 혁명의 붉은 바람을 일으키는 거야!

그러나, 의외로 혁명의 불꽃이 바로 불타오르지는 않았다.

"믿을 수 없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

대부분의 드워프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특히, 클랜의 대빵인 트랄의 반응이 가장 별로였다.

"마이스터 예레미아는 내게 곡괭이 다루는 법을 알려 주신 분이야. 그분이 제 발로 불구덩이로 뛰어들다니. 말도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떨어질 때는 푸른 수염이 밀었다니까!'

"푸른 수염님은 광산 군주야! 그분이 왜 그런 짓을 해!"

트랄이 호통을 확 쳤다.

"장난이 너무 지나쳐. 너, 뱀이 아니라 드워프였으면 내가 가만두지 않았을걸."

트랄은 맘에 안 든다는 듯 주먹으로 벽을 쾅 쳤다.

나는 크게 상처받았다.

마치 양치기 소년이 된 기분이다.

그리고 인마, 나랑 한번 싸워 볼래?

만약에 트랄이 내게 주먹을 날리면, 그냥 사악 피해 가지고 바로 목덜미를 물어 줄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마음을 물리적으로 빼앗을 수도 있고.

물론 친구니까 그런 짓은 안 할 생각이지만.

내 말을 믿게 해 줄 물건들이 몇 개 있다.

로제나에게 받은 망치를 보여 주려고 하는데, 트랄은 이미 자기 똘마니를 데리고 확 나가 버린 후였다.

저 자식! 뱀 무안하게.

"이런······."

둥켈도 난감해했다.

다행히, 둥켈과 만진 일행은 이곳에 남아 있었다.

'너희들은 나 믿어주는 거야?'

둥켈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진이 끼어들어서 트랄을 변호해 주었다.

"트랄 형님을 너무 미워하지 마. 푸른 수염님 하고 마이스터 예레미아가 트랄 형을 키워 주셨거든."

'그래?'

"트랄 형님은 부모님이 안 계셔. 대신 자식이 없는 그 두 분이 아들처럼 키워 줬어."

듣자 하니 그런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더욱 비극적인 일인데.

"차기 광산 군주는 트랄 형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어. 푸른 수염 님하고 마이스터 예레미아가 심층으로 들어간 뒤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래서 평소에 트랄 형님도 많이 심란해했어."

아마도 그 둘이 악마의 불에 홀린 이후로 일어난 사태 아닐까.

'트랄하고 걔들도 곧 알게 될 거야. 푸른 수염이 날 쫓아 나왔을 거거든.'

로제나가 잘 막아 줬으면 좋겠는데.

"정말 최악의 상황이야. 불 홀림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가."

그리 중얼거리는 둥켈에게 펠레리안의 추측을 말해 줬다.

"악마라니······."

"뭐어?"

둥켈은 안색이 창백해지고, 만진은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 아니냐는 태도였다.

그래, 직접 본다면 알게 되겠지.

내 아공간 속에는 드워프들을 홀린 그 불꽃이 들어 있었다.

나야 정신 공격에 면역이니까 문제없었지만 ······ 뭐 잠깐만 보여 주고 다시 뚜껑을 닫으면 되겠지.

아공간에 넣어 둔 셀레스티움 양동이와 사슬을 꺼냈다.

'자, 다들 실눈 떠봐.'

"실눈을 뜨라고? 이렇게?"

'그래, 그 이상한 불꽃을 가져왔으니까. 살짝만 보는 거야. 안 그러면 너희들도 불에 홀릴 수도 있어.'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만진도 둥켈도 실눈을 떴다.

그리고 내가 양동이의 뚜껑을 열려고 했다.

'어.'

-어라.

나도, 펠레리안도 멈칫했다.

양동이에 초록빛 덩굴손이 붙어 있었다.

'키뱀아, 너 뭐 하고 있니······?'

화분에 넣어 둔 키뱀이가 함께 딸려 나온 것이다.

녀석은 순진무구한 태도로 이파리를 까딱였다.

그런데, 그 덩굴손이 양동이의 틈 사이로 들어가 있었다.

불길하다,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키뱀아, 손.'

까딱까딱.

'손 줘!'

키뱀이가 덩굴손 하나를 살짝 뻗치고, 나는 그 덩굴손을 꼬리로 맞잡았다.

*「새싹의 키메라lv8이 '교감lv1'을 사용합니다.」

잠깐만.

너 레벨 7이었잖아.

왜 아공간 속에 있었는데 레벨이 오른 거야.

새싹 키뱀이와 교감을 시작하자, 메시지들이 연속적으로 울렸다.

*「화마의 불을 흡수합니다.」

*「화마의 불을 흡수합니다.」

*「화마의 불을 흡수합니다.」

······

야 인마!

나는 얼른 양동이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촛불 크기로 줄어 버린 화마의 불이 보였다.

노랗게 그을린 덩굴손이 불꽃을 흡수하고 있는 모양새다.

'지지! 지지야! 그런 거 먹으면 안 돼!'

뚜껑이 열리자, 만진과 둥켈의 입이 헤 벌어졌다.

동공이 열리는 것이, 확실히 드워프를 홀리는 불꽃 같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화마의 불을 흡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키뱀이가 지저분한 그 불을 말끔하게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대체 식물이 불을 왜 먹는 거야.

아니, 어떻게 먹은 거야.

누가 키메라 아니랄까 봐.

아무리 아기는 잘 먹는 게 귀엽다고 해도 이런······.

*「특성 '불'을 얻었습니다.」

*「열 내성lv20을 얻었습니다.」

이 재능 식물 같으니라고.

내가 간신히 레벨 12까지 올린 열 내성을 단번에 20짜리로 얻어 버렸다.

특성 '불'을 얻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대체 식물이 '불' 속성을 어떻게 얻은 걸까.

'뼈' 특성도 그렇고.

-오오, 역시 세계수!

펠레리안은 박수를 짝짝 치면서 감탄했다.

"이게, 무슨······."

"정말 이상한 불이었어."

둥켈과 만진은 여전히 몽롱한 눈치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라며 그들의 뺨을 쳤다.

그때였다.

씩씩거리며 나갔던 트랄과 그 패거리가 돌아온 것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조금만 일찍 돌아오지. 그랬으면 그 악마의 불을 보여 줬을 텐데.

하지만 그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트랄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구, 군주님이."

바깥에서 무엇을 본 건가.

"군주님이, 병든 환자를 산 채로 불태웠어."

이미 바깥에서는 미친 짓이 벌어지고 있었다.

< 초등학생 시절 독서왕이었어서 >

094. 초등학생 시절 독서왕이었어서

발광석이며 횃불이며 잔뜩 사용해서 최대한 밝은 환경을 조성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는 지하, 바깥보다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둠이야말로 나 같은 은밀한 어쌔신을 위한 무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조용히 어둠 속을 기었다.

*「은밀lv10을 사용합니다.」

절정에 다다른 은잠술로 모습을 숨기고 천천히 기어간다.

그리고 그런 내 뒤를 드워프들이 살금살금 따라왔다.

"어이쿠!"

둥켈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저 멍청한 자식!

만진과 트랄이 깜짝 놀라서 몸을 낮췄다.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

드워프들의 행동이 굼뜬 만큼, 감각이 예민한 자들도 별로 없었으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트랄이 돌아와서 내뱉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푸른 수염이 죽어 가던 환자를 산 채로 불태웠다는 건데.

그 불이 어째선지 평범한 불이 아닐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러 나왔다.

실제로, 그 야만적인 행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타닥, 탁

정말 산 채로 불태웠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때 살아 움직였을 드워프들이 지금은 화장되고 있었다.

선명한 주황색 불꽃이 불타오른다.

마력을 가진, 키뱀이가 먹어 치웠던 화마의 불이 분명하다.

양동이와 쇠사슬은 내가 뺏어 왔는데, 설마 미리 비축해 둔 불 같은 게 있었던 걸까.

환자를 산 채로 불태웠다면, 아무리 광산 군주의 명이라 해도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푸른 수염을 성토하는 사람이 없었다.

드워프들은 사람을 태우는 불 앞에 모여서 그것을 홀린 듯 보고 있었다.

'악마의 불이 맞네요.'

-드워프들을 홀리고 있군. 이 내 정신마저 아찔하게 만들었던 불꽃이니······. 마음에 안 드는구나.

펠레리안이 눈을 찌푸렸다.

그는 다른 드워프들처럼 불에 홀리지는 않았다.

다만, 처음 불을 봤을 때는 묘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졌다나.

지금은 오히려 불을 볼 때마다 추하다고 욕을 뱉고 있다.

-경지에 오른 마도사의 정신은 마치 강철 같아서 아주 강인하기 마련이지.

자화자찬이다.

문득 궁금해진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푸른 수염 같은 드워프들도 꽤 강한 것 같은데. 너무 쉽게 홀린 거 아니에요?'

-그것은, 드워프라는 종족 자체가 유독 불에 잘 홀리기 때문이겠지.

포켓몬으로 치면 풀 포켓몬이 불 포켓몬한테 약한, 그런 건가.

상성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너는 아예 멀쩡하구나.

'내 정신력이 좀 강인하거든요.'

나는 꼬리로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전생에서는 이런 말을 직접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나는 슬쩍 드워프들을 돌아봤다.

쟤들도 많이 충격을 먹었겠지, 싶었는데.

그들은 멍한 표정으로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악!"

안 돼!

나는 펄쩍 뛰어올라서 셋의 뺨을 차례대로 쳤다.

그들은 얼굴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신 차려!'

세상에.

꽤 멀리 떨어져서 본 것뿐인데도 홀릴 뻔했다.

"허억, 정말 위험한 불이야."

둥켈이 심호흡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드워프들이 저리 홀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다행히 멀리서 보거나, 본 시간이 짧으면 금방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데.

-저 푸른 수염 놈처럼 완전히 혼을 빼앗긴다면 그때는 늦은 거다.

지금 불꽃을 둘러싸고 있는 드워프들.

저들도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혼이 팔릴지도 모른다.

죽어 가던 드워프들을 삼킨 주황빛 불꽃은 점점 커졌다.

그것만 봐도 확실히 평범한 불은 아니다.

마치 드워프의 육신과 영혼을 먹어 치워서 덩치를 키우는 것 같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어진 뒤에도 불꽃은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 일렁였다.

불 곁에 서 있던 푸른 수염이 수하들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드워프 몇 명이 화로에 불꽃을 옮겼다.

아, 저것도 셀레스티움 같다.

망치 말고도 셀레스티움이 더 있었던 건가.

그들이 불꽃의 일부를 다시 심층이 있는 방향으로 가져갔다.

일련의 과정을 관찰하고 있자,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저 불꽃을 다른 드워프들한테는 숨겨 왔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주 대놓고 움직이네요?'

그랬다.

로제나만 봐도 연인이었던 푸른 수염이 수상한 짓을 벌이고 있던 것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 푸른 수염은 아예 저 화마의 불을 가지고 올라왔고, 게다가 환자들을 산 채로 불태우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드워프들을 불에 홀리게 만든 것은 덤이었다.

-전형적인 악마의 방식이다. 그놈들이 공동체 하나를 붕괴시키는 과정 중 삼 단계라고 할 수 있어.

펠레리안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악마가 집단을 파괴하는 방식.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악마는 그 힘이 미약하다.

그렇기에 마치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듯, 누군가가 자기를 발견하기 기다린다.

우연의 뒤에 숨어서 첫 먹잇감과 조우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 단계다.

아마 푸른 수염 본인이거나, 땅을 파던 드워프 중 하나가 그 첫 번째 조우자일 것이다.

-두 번째 단계로는 조용히 그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지.

심층의 출입을 막고 그 안에서 비밀스럽게 드워프를 불구덩이에 던지며 불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 사이에 심층에서 활동하던 드워프들은 천천히 홀렸을 것이다.

꼬리 싸대기 몇 번 때려 준다고 정신을 차리지는 않겠지.

-세 번째가 전면에 드러나는 시기다.

그리고 나로 인해 셀레스티움 양동이를 잃어버리자, 푸른 수염은 과감하게 나왔다.

아예 불꽃을 퍼 와서 다른 드워프들까지 불에 홀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 행동에 어쩌면 불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 아닐까.

이어지는 불의 의지······!

'네 번째 단계는요?'

-뭐긴 뭐야. 초전박살이지. 결국 모두가 악마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몰살당하는 게 결말이다.

그렇군.

붉은 모루 광산은 그리 멸망하는 건가.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물을 부어서 저 불을 꺼 버려야지."

둥켈의 고민에 트랄이 씩씩거렸다.

그는 푸른 수염을 존경했던 만큼 지금 그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었다.

나는 저 불꽃을 꺼 봤자 심층에 아예 용암 호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래도, 어쨌든 저 불만 꺼도 제정신을 차릴 동료들이 꽤 될걸?"

그건 또 맞는 말 같았다.

사실 트랄은 젊은 드워프들 사이에 큰형님으로 대접받는, 제법 능력 있는 드워프였다.

즉흥적으로 떠올린 발상 같지만, 덧붙이는 계획이 제법 그럴듯했다.

"나를 비롯해서 발이 빠른 놈들로 특공대를 꾸린 다음에 물을 부어 불을 꺼 버리는 거야. 그다음에 다른 드워프들이 정신 차리도록 돕고, 매복해 있다가 광산 군주님을 기습하는 거지."

매복과 기습은 언제든 옳다.

계획한 대로만 잘된다면 말이다.

'할 수 있겠어?'

"걱정 마, 최대한 불을 안 보고 실눈 뜨고 하면 할 만할 테니."

트랄이 팔뚝을 걷어서 자신의 근육을 자랑했다.

근육하고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트랄.

'좋아.'

하지만 나는 그를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트랄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키뱀이를 쓰다듬었다.

키뱀이는 아공간에 들어가 있기보다 나와 있기를 선호했다.

그리하여 나는 레옹의 마틸다라도 된 것처럼 화분을 들고 다니게 된 것이다.

키뱀이가 이파리를 흔들거렸다.

배고픈가 보구나.

그래도 저렇게 지저분한 불은 함부로 먹으면 안 돼.

키뱀이가 악마의 불을 먹어 치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탓에 키뱀이의 덩굴손 몇 개가 새카맣게 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새싹키뱀이의 레벨이 벌써 9가 되었다.

얘도 진화할 수 있겠지?

그러면 레벨 10에 진화하려나? 생각보다 잠재력이 높은 키뱀이니까 20은 되어야 진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커지면 조금 곤란한데.

일단, 트랄의 활약을 기대해 보자.

우리는 며칠 동안 숨어서 푸른 수염을 관찰했다.

* * *

트랄이 특공대를 꾸려서 작전을 결행한 것은 이틀 뒤였다.

둥켈은 발이 느려서 탈락이고.

나와 만진은 일단 남아서 트랄의 행동을 지켜봤다.

그리고 트랄은 놀라운 활약을 보여 줬다.

"우어어······."

처음에는 그가 장난하는 줄 알았다.

트랄은 실눈을 뜨고 조심조심 불에 다가가더니, 불 앞에 도착했을 때는 멍하니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우어, 우어어······."

그러더니 물동이를 툭 놓치고 우두커니 불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를 따르던 특공대(웃음)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 병신!

펠레리안의 감상에 동의했다.

'실눈 뜨고 가까이 가서 불 끄는 계획은 폐지.'

내가 엄숙하게 계획의 실패를 선언했다.

드워프들은 저 불꽃에 도저히 홀리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얼빠진 좀비처럼 변하다니. 아무래도 지능에 따라서 정신 공격에 대한 저항 능력이 다른 것 아닐까.

둥켈이 침음성을 흘렸다.

"더 이상 우리 광산의 드워프들로만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어."

트랄 패거리에서 멀쩡히 남아 있는 건 둥켈과 만진을 비롯해 소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전부 불에 홀린 것이다.

"이전에는 죽기 직전의 중환자만 불태웠는데, 오늘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불태웠다고!"

만진이 초조해했다.

푸른 수염 일행의 만행은 점점 지독해졌다.

붉은 모루 광산의 드워프들에게는 예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질이 퍼지고 있었다.

피부가 창백해지고, 두 눈이 푹 꺼지며, 입에서는 피를 흘리는 병이었다.

푸른 수염은 그 환자들이 전염병을 옮기고 있다면서 격리시키고, 가장 위중한 자부터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있었다.

원래라면 드워프들이 들고 일어났을 상황이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혁명을 일으키기는커녕 주황빛 불꽃 앞에서 쭈그려 앉아 있을 뿐이다.

무슨 캠프파이어 하는 것도 아니고.

"산맥 안으로 들어가면 회색 망치 마을이 있어. 그곳에 가서 도움을 청해야겠어."

둥켈의 주장은 그러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로 감당할 수는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로제나는 헬무트 노인한테 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래 봤자 뭐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조용히 빠져나가자."

만진이 그렇게 말했다.

만진 패거리가 총 넷, 둥켈, 그리고 나까지.

여섯이서 몰래 층을 오르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고 입구까지 나가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드워프들이 불 앞에 앉아 있기만 해서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다만, 광산의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미 상황이 글렀음을 깨달았다.

"아예 무너져 있어······."

입구가 무너져 있었다.

"폭약으로 터뜨린 건가."

"대체 왜······."

"뒷일은 생각도 안 한 거지."

푸른 수염이 바위를 발파할 때 쓰는 폭약으로 광산의 입구를 폐쇄한 것이다.

시간을 들인다면 입구를 뚫을 수 있겠지만, 저 앞에는 무너진 입구를 지키는 인원까지 있었다.

'일단 로제나 할머니 말을 들어 보자구!'

나는 침울해하는 둥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래, 헬무트 할아버지께 가 보자."

푸른 수염이 이미 돼지 치는 곳까지 찾아갔을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이쪽에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문제가 일어나 있었다.

스틸 호그들이 한군데 몰려 있는 걸 본 순간부터 불길했다.

놈들이 주둥이로 무언가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드워프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하, 할아버지이!"

둥켈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나도 얼른 달려갔다.

다행히, 스틸 호그들이 노인에게 해를 가한 것은 아니었다.

푸릉, 하면서 콧김을 내뿜는 것은 내가 굴복시켰던 스틸 호그 킹이었다.

밥 주던 노인이 쓰러지자 이놈들이 지키고 있던 것이다.

헬무트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이런······."

그러나 도저히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설마, 병에 걸린 걸 숨기셨던 건가요."

헬무트도 증상이 똑같았다.

전형적인, 요즘 유행하는 드워프 괴질에 걸린 모습이었다.

아마 푸른 수염이 이곳을 먼저 찾아왔다면 헬무트도 장작 신세가 되었으리라.

"난감하네, 하아."

"어쩌면 좋을지······."

"대체 무슨 병인지도 모르겠고······. 둥켈 형은 알아?"

만진의 질문에 둥켈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다른 드워프들에 비해서 의술의 조예가 있다고 해도, 제대로 된 의사는 아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니 치료할 방법도 알 수 없다.

둥켈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자기를 키워 준 할아버지가 쓰러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코끝이 시려 온다.

전생의 부모님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게 잘해 주셨다.

둥켈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된다.

'저, 모르는 것이 없는 역천의 대마도사님.'

-······.

'혹시 저게 무슨 병인지 아시나요?'

-으음 모르겠다······.

펠레리안은 몹시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실망스럽습니다.

'치료법도 모르겠으니, 포션이라도 먹이면 일단은 좋아지지 않을까요.'

-포션으로는 병을 치료할 수 없어.

'에효.'

-한숨 쉬지 마라. ······아!

펠레리안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잠을 푹 자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먹으며 휴식을 취하면 좋을 것이다.

'에효오.'

자신만만하길래 뭐 대단한 아이디어라도 있는 줄 알았네.

'······흠.'

갑자기, 머릿속 한 군데가 간질간질하다.

뭔가 단서를 잡은 것 같은데.

무한한 인터넷과 유튜브의 바닷속을 헤엄치면서 얻은 정보 중에서.

지금 쓸 만한 것이······.

난 게다가 초등학생 때 독서왕이었다.

수많은 책들을 섭렵했다는 뜻이다.

그때, 둥켈이 한탄하듯 말했다.

"대체 어떻게 전염되신 건지. 여기 밖으로는 절대 안 나오시고 마주칠 사람도 없는데······."

어!

전염병을, 전염될 수 없는 환경에서 전염되었다.

그 말은 즉, 사실 전염병이 아니라는 것 아니야?

게다가 펠레리안이 했던 말.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드워프들은 안 그러죠.'

원래는 붉은 모루 광산의 드워프들도 교역을 한다.

바깥에서 음식들을 들여오고, 과일이나 다른 것들도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점차 줄이고 몇 년 전부터는 감자와 햄, 지하에서 기른 양배추 정도만 먹고 살았다는데.

음, 양배추에는 비타민이 들어 있긴 할 텐데 지하에서 기른 건 또 다르려나.

알 수는 없지만.

입에서 피를 흘리고, 창백해진 얼굴, 푹 꺼진 두 눈은 한 질환을 떠올리게 한다.

'둥켈.'

한때, 오랫동안 보존식만 먹으면서 항해했던 선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공포의 병.

그러나, 겨우 오렌지 몇 개로 곧바로 나아 버린 그 병.

'내가 전문가는 아닌데 말야.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어."

'그거, 괴혈병 아니야?'

자고로.

의술의 신을 상징하는 동물은 '뱀'이었다고 한다.

< 레몬과 폭약 >

095. 레몬과 폭약

살다 보면 그런 경우가 있다.

혹시나 싶어서 말을 꺼냈는데, 말을 이어 갈수록 스스로의 의견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상황 말이다.

지금이 그랬다.

'괴혈병 맞는 것 같아!'

증상이 딱 그렇지 않은가.

내가 의사는 아니어도 괴혈병에 대해서는 알았다.

워낙 재미있는 역사가 있던 질병이기에, 나X위키에도 문서가 등록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괴혈병이 뭔데?"

만진이 그리 중얼거렸다.

사실, 요즘은 딱히 자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엄연히 한국어가 아니라 이곳의 '공용어'로 대화 중이었다.

그 말은 즉 이곳에도 괴혈병이라는 게 알려져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괴혈······? 발음이 신기하네."

모르는 것 같다.

'아 괴혈병 모르시는구나!'

그렇다면 일단 괴혈병의 증상부터 설명해 줘 보자.

'괴혈병이라는 것은 사실 비타민C 결핍증으로서 사람은 비타민C를 체내에서 합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섭취해야 하거든. 그런데 오랫동안 영양섭취의 불균형이 지속되면 비타민이 부족해져서, 무기력하고 나른한 증상이 시작되지!'

"······?"

'그러다가 식욕이 부진해지고, 잇몸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면서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도 푹 꺼지고, 심하면 내출혈도 일어나고 그러다 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증상이야! 오랫동안 배 위에서 생활하던 선원들에게 주로 자주 발병되었지!'

내가 열심히 설명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드워프들은 '그게 뭔데 십덕아'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긴, 비타민이 뭔지도 모를 것이다.

다행히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뱃사람 병을 말하는 것이냐?

펠레리안이었다.

'알고 있어요?'

-인간 선원들 사이에 자주 발병하던 병이지. 배에서 내리고 항구에 도착하면 나아 버리는 이상한 병.

'맞네, 그거 맞는 것 같아요.'

이 세상에도 괴혈병은 있는 것 같았다.

-네가 그 치료법을 안다고? 한낱 미······. 아니, 마물이!

펠레리안에게 경고 1점.

'생각보다 간단해요. 비타민······ 그러니까 그게 들어 있는 신선한 과일을 먹으면 해결됩니다.'

-그렇게 간단할 리가······.

바야흐로 현대의학이 이세계에서 승리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괴혈병과 그 치료법에 대해서 드워프들에게 설명했다.

그들 역시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믿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는데.

'과일 있어?'

문이 닫힌 이상 광산 안에서 신선한 과일을 구하는 것은 원래 요원한 일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정원을 가꾸는 게 취미인 특이한 드워프가 한 명 있었으니.

"레몬을 키우던 게 있어. 열매가 맺히긴 했는데······."

'잘됐다! 그거 가져와.'

둥켈은 고개를 끄덕이곤 헐레벌떡 뛰어갔다.

그동안 다른 드워프들이 헬무트를 돌봤다.

다행히 헬무트는 정신을 차렸다.

사경을 헤매던 것은 아니고, 혼자서 일하느라 피로가 누적되어서 쓰러진 것 같았다.

"조금 누워 계세요."

"크윽······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니."

헬무트에게 푸른 수염의 일을 설명해 줬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만진의 제지로 다시 누웠다.

둥켈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펠레리안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뱃사람 병은 인간에게만 생기는 병 아닌가.

'예?'

-나는 드워프가 뱃사람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 심지어 선원 일을 한 드워프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

괴혈병은 인간이 비타민C를 자체 합성할 수 없기에 생기는 병이다.

사실 드워프의 신체구조는 다른 거 아닐까.

그렇다면 애초에 괴혈병이라는 추론 자체도 틀렸을지도 모른다.

조금 자신감이 떨어지려는데, 둥켈이 달려왔다.

샛노란 레몬 한 바가지를 든 채였다.

에잇, 일단 레몬을 먹여 보자.

"레몬······ 그딴 것 안 먹는다."

헬무트는 꼬장꼬장한 드워프답게 생레몬을 먹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투정을 받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양팔 잡어."

"이, 이 녀석!"

둥켈의 주도하에, 헬무트는 반강제로 레몬을 먹게 되었다.

"크으으윽!"

헬무트는 얼굴을 꾸깃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레몬을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만진은 그 모습에 와락 겁을 먹었다.

"대체 어떤 맛이길래······."

"너도 하나 먹어 볼래?"

"아니, 괜찮아!"

만약 저 증상이 괴혈병이 맞다면, 만진도 비타민C가 풍부한 레몬을 먹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만진은 헬무트가 낫는지 보고 먹겠다고 약속했다.

일단 기다려 봐야 했다.

시간이 넉넉지는 않았지만.

겨우 하루의 기다림으로 판가름이 났다.

"몸이······ 놀라울 정도로 가벼워졌어."

헬무트를 괴롭히던 증상이 나았다.

잇몸에서 나오던 피도 멈췄고, 무기력함 또한 사라졌다.

드워프 광산에 돌던 '전염병'이, 사실 괴혈병이 맞았던 것이다.

나는 내 추측이 맞았음에 기뻐하려 했다.

하지만 얼른 분위기를 읽고 멈췄다.

"이건, 말도 안 돼."

둥켈이 주먹을 꾸욱 쥐고 떨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단 말이야? 겨우 레몬만 먹었어도 살 수 있었는데······."

사실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는 것이 오히려 비극적이었다.

아마 드워프는 어지간해서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 체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봉쇄가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 영양 불균형이 극심해진 것이다.

게다가 푸른 수염이 최근 중환자들을 불에 태우기까지 했으니.

"푸른 수염······."

순둥하던 둥켈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래도 둥켈, 혼잣말을 그렇게 하는 건 옆에서 보면 그리 멋지지 않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레몬을 더 잘 활용할 방법이 있을 것 같아."

만진이 레몬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어, 나도 그런데.

만진과 내가 동시에 말했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할 수 있을 거야!"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을 거야!'

둥켈이 내가 쓴 메모를 읽으려 해서 얼른 구겨 버렸다.

"맛이 엄청 시니까, 어쩌면 불에 홀린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음, 그렇게 쉽게 되려나.'

조금 의문이긴 해도, 어차피 지금 우리만으로 푸른 수염을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트랄 형님을 구해 오면 큰 도움이 될 거야. 날 믿어 봐."

만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하지만 만진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니, 레몬을 조금 나눠 주는 것도 좋을 듯했다.

둥켈이 레몬 몇 알을 만진에게 건네줬다.

만진은 지체하지 않고 레몬을 챙겨서 떠났다.

"먹일 사람은 많은데, 큰일이네."

'뭐가?'

"레몬, 말이야. 이게 전부거든."

그리 말한 둥켈은 헬무트가 먹고 뱉은 씨앗을 챙겼다.

실내 정원이 있다고 해도, 레몬을 다시 심고 키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금 그것을 기다릴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때였다.

키뱀이가 씨앗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새싹 키뱀이의 눈에는 레몬 씨앗이 아기처럼 보일까?

'혹시 몰라 말하는 건데 먹으면 안 된다 키뱀아.'

워낙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혹시나 해서 그리 말했다.

다행히 키뱀이는 씨앗을 먹지 않았다.

대신 가느다란 덩굴손으로 이리저리 만지더니, 땅에 심었다.

둥켈이 다시 씨앗을 파내려다가 한숨을 쉬고 그냥 놔뒀다.

"어차피 싹이 나서 열매가 열릴 때까지는 몇 달이 걸릴지······ 허억!"

키뱀이의 덩굴손에서 무언가 꿀렁꿀렁 씨앗으로 넘어가더니.

햇볕도 들지 않는 지하에서 레몬의 싹이 쏙 돋아났다.

이건 또 무슨 진기명기니.

나는 내가 놓친 것이 있는가 싶어서 키뱀이의 상태창을 다시 한번 확인해 봤다.

──────────────

[새싹의 키메라lv9]

[특성]

[새싹], [아기], [세계수], [뼈], [불]

[스킬]

[육감lv1], [인지확장lv2], [흡수성장lv6], [잎 흔들기lv4], [덩굴손lv1], [교감lv1], [재배lv2]

[상태]

[배고픔]

──────────────

'재배lv2'라는 스킬이 있다.

본 적이 있는 것이다. 다름 아닌 둥켈이 드워프답지 않게 보유하고 있던 스킬이다.

그러나 저 스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둥켈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식물을 키우고 관리할 뿐이었다.

키뱀이처럼 마법 같은 일을 해내지는 못했다.

이게 재능의 차이라는 건가.

역시 세계수 수저의 마물은 다르다. 질투가 날 정도였다.

'둥켈, 키뱀이가 배고프대.'

"어? 그, 그래, 물 주면 되나?"

'그거 말고.'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둥켈에게 요청했다.

'햄 줘 봐.'

녀석도 당당한 키메라 아니던가.

둥켈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햄 조각을 잘라 키뱀이의 화분에 올려 두었다.

쏘소속.

햄이 흙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키뱀이의 풀 죽었던 이파리가 다시 튼튼하게 솟았다.

육식 식물(특성 '뼈', '불' 보유)이라니.

영양을 섭취하자, 키뱀이는 다시 레몬의 성장을 촉진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씨앗이었던 레몬이 어느덧 키뱀이보다 커졌다.

자기는 아직도 아기면서 다른 식물은 쑥쑥 키울 수 있나 보다.

키뱀이가 가진 재배의 스킬 레벨도 점점 올라갈 테니, 레몬을 생각보다 금방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둥켈은 물론이고 헬무트까지 입을 헤 벌리고 키뱀이의 묘기를 구경하는 사이.

만진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성공이야!"

그는 놀랍게도 트랄과 그 패거리 다섯 명을 한 번에 데려오는 데에 성공했다.

"정말 레몬이 통한 거야?"

"그래. 한 조각 먹더니 바로 정신을 차리던데."

트랄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실눈 뜨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 불꽃이 너무 예뻐서 말이지. 보고 있으면 그냥 정신이 멍해져서······."

트랄은 그리 말하면서 갑자기 그대로 멈췄다.

그러자 만진이 레몬 반쪽을 껍질도 까지 않고 트랄의 입속에 처넣었다.

"크으윽, 괜찮아. 이제 진짜 괜찮아."

아무래도 당분간은 주기적인 레몬 섭취가 필요할 듯하다.

그래도, 불에 홀린 지 얼마 안 된 드워프들은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둥켈이 밝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러면 일단 레몬을 대량으로 재배해서 천천히 사람들을 모으면······."

"안 돼."

둥켈의 물렁한 발상을 막은 것은 헬무트였다.

"한 번 부러진 칼을 다시 붙여서 쓰려는 것은 멍청이들의 방식이다. 푸른 수염은 안 돼. 그는 더 이상 기회를 잡을 자격이 없다."

처음에는 나한테 푸른 수염에게 기회를 주라고 말했던 헬무트였다.

그러나 지금은 푸른 수염이 선을 넘어도 너무 넘은 것이다.

"악마의 불에 홀렸든 어쨌든, 광산 군주라면 그래서는 안 되지. 푸른 수염을 쓰러뜨리고 그 악마의 불꽃이라는 것을 꺼 버리든지 묻어 버리든지 해야겠다."

"저희도 그러고 싶긴 한데······."

트랄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불꽃이라는 것은 저 최심부에 있는데. 물 조금 퍼붓는다고 해서 끌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뭣보다, 전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저희 수가 아홉밖에 안 되는데 ······ 그 불꽃을 가까이서 보면 정신을 못 차리기도 하겠고요."

잠깐.

열하나야.

나랑 새싹키뱀이도 포함해야지.

그리고 나는 우르오로스야.

그러나 내가 굳이 트랄의 주장을 반박할 필요는 없었다.

헬무트가 눈을 빛냈다.

"내가 무슨 마이스터인지, 알고 있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헬무트는 마이스터였던 것 같다.

"어······."

그런데 트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고 있는 눈치다.

그는 답을 알고 있을 만한 둥켈을 바라봤다.

둥켈이 대신 답해 주었다.

"검과 폭발의 마이스터 아니십니까."

"그래."

헬무트는 의수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빛났다.

"한때, 붉은 모루 광산의 폭약 절반은 내가 만들었다."

광산에서는 폭약이 쓰인다.

바위 지대를 곡괭이만으로 파고드는 것은 몹시 비효율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정밀한 계산을 근거로 곳곳에 폭약을 박아 두고 폭파시키는 발파(發破)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은퇴하기 전까지 수많은 갱도를 직접 발파해서 뚫었지."

그런 전문가였던 건가.

"따라와."

헬무트가 그리 말하고 우리를 자신의 창고로 안내했다.

창고의 문을 열자 기묘한 냄새가 났다.

'뭔가 구린내가 나네요.'

-저번처럼 불 마법 쓰지는 말어라.

그럴 생각도 없었다.

창고의 안에는 뭔가가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 천을 걷어내자.

습기가 들지 않도록 종이로 감싸 둔 내용물이 드러났다.

트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게 전부 ······ 폭약입니까!"

창고 안에는 이 주변을 전부 박살 낼 만큼 대량의 폭약이 보관되어 있던 것이다.

둥켈도 몰랐던 건지, 경악해서 헬무트에게 따졌다.

"이 정도 양이면 뭐, 테러라도 하려고 했어요?"

"내가 뭐하러? 비축하고 치장해 둔 물자다. 푸른 수염도 여기를 알고 있으니 곧 찾아오겠지."

푸른 수염도 이 폭약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놈이 이걸 빼앗아 가기 전에 제대로 써먹어. 그 용암 호수도 무너뜨려서 덮어 버리면 될 것 아니냐."

이 정도의 폭약이 있다면 할 만하다.

그런 분위기가 흘렀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닌가!

하지만 폭약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의견은 제각기 달랐다.

"묻어 뒀다가 오면 그냥 바로 폭발을 ······."

"뇌관 조절이 말처럼 쉬운 줄 알아?"

"기둥에 붙여 둬서 단번에 매장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광산 다 무너뜨릴 일 있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떡해. 다 죽이자고?"

그리고, 내 머릿속 어딘가가 간질간질했다.

대단한 계략이 튀어나올 것 같다.

'그래, 그거다.'

이 자리에.

대수림의 뱀갈공명이 재림하는 순간이었다.

'제게 전략이 있습니다.'

드워프들이 전부 나를 봤다.

나는 수첩 대신 창고의 벽면에 아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브리핑이 이어질수록, 반신반의하던 드워프들이 감탄하기 시작했다.

브리핑이 끝나고, 헬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정말 통할까?"

'환기 장치는 잘 되어 있죠?'

"광산에 환기 장치는 가장 중요한 것이야. 안 그러면 전부 질식해 죽을 테니."

'그러면, 충분합니다. 역사적으로 몇 번이고 증명된 전략이에요.'

"좋아······."

헬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폭약은, 뱀의 작전대로 쓴다."

그러고는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였다.

"거참, 뱀이 낸 계획에 광산의 운명이 달리다니 ······."

나중에는 내게 감사하게 될 거요.

솔직히, 가슴이 두근두근한 계획이라고.

그러니까 만진과 트랄도 저리 흥분한 표정을 짓는 거 아니겠는가.

후회는 없을 것이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나는 추가적인 사항을 덧붙였다.

헬무트에게 물건들의 제작을 부탁한 것이다.

"하루면 만들 수 있지. 하긴, 있으면 좋겠군."

'그러면 부탁합니다.'

* * *

일단 결단을 내리면 빨리 행동해야 한다.

겨우 하루 만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헬무트는 내가 부탁한 물건을 밤새 만들어 주었다.

"자, 눈에 써 보라고."

그것은 다름 아닌 검은 수정으로 만든 선글라스였다.

투박한 형태긴 하지만 엄연히 선글라스처럼 보였다.

"이야, 멋진데?"

"왠지 가슴이 두근거려."

살면서 처음 보는 물건일 텐데도 불구하고, 드워프들은 선글라스의 매력을 곧바로 이해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대비책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맨눈으로 불에 노출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네 것도 만들었다."

헬무트가 아주 작은 선글라스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눈에 올렸다.

고정하기 위해서 천으로 칭칭 감아야 하는 게 아쉬웠지만, 나름 만족했다.

'작전명, 붉은 파도.'

몹시 맘에 들었다.

키뱀이가 내게 덩굴손을 올렸다.

마치 자기도 선글라스를 달라는 듯한 기색이다.

'넌 안 돼. 눈이 없잖니.'

눈 생기면 만들어 줄게.

-그런데 말이다······.

그때, 펠레리안이 지적했다.

-너는 굳이 그 괴상한 걸 낄 필요가 없지 않냐?

그의 쓸데없는 지적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 뱀 내려온다.(삽화) >

096. 뱀 내려온다.

트랄 클랜은 이미 무너졌으니.

내가 선글라스 클랜을 새로 세웠다.

사실, 선글라스가 드워프들을 불로부터 완전히 보호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실눈만 뜨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도 불은 맨눈으로 보지 않는다. 누가 멍하니 굳으면 바로 서로 뺨을 때려 줘."

행동 지침을 다시 한번 숙지한다.

드워프들은 인원을 둘로 나누었다.

둥켈, 만진, 트랄. 이렇게 셋.

그리고 나머지 드워프들과 헬무트.

두 무리는 각기 다른 임무를 맡을 것이다.

할 일은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다.

불에 홀린 푸른 수염을 제압하고, 그 원흉인 화마를 꺼뜨리는 것.

헬무트가 외쳤다.

"폭약은 조심히 다뤄야 한다. 떨구면 곧바로 터져서 다 뒤지는 거라고 생각해!"

트랄을 따르던 젊은 드워프들이 사색이 됐다.

그들은 각기 배낭에 폭약을 든든하게 싣고 있는 상태였다.

"진짜 떨구면 바로 터집니까?"

"터진다고 생각하라고 이 자식아!"

"네, 넵!"

헬무트는 한 팔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무서웠다.

저쪽은 훌륭한 노병이 리더를 맡았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걱정이 되는 것은 이쪽이다.

"제, 제가 정말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둥켈이 그리 말했다.

헬무트와 내가 진지하게 고민을 한바, 리더는 둥켈이 맡기로 했다.

리더라고 해서 별다를 게 있는 건 아니다.

가장 앞에 서고, 급변하는 상황에 대응하여 지휘하고, 상황이 벌어졌을 때 대화를 맡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고 보니 결코 가벼운 역할은 아니군.

헬무트는 뚜벅뚜벅 다가와서 둥켈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의 품속에서, 더러운 양말 같은 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둥켈의 머리에 씌웠다.

"푸른 수염이 젊을 적 쓰던 모자다."

양말이 아니었구나.

근데 그것을 왜 헬무트 저 노인이 가지고 있는 걸까.

"네가 훨씬 잘 어울리는구나."

"······예에."

둥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있는 나 또한 비슷한 감상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비로소 헬무트가 둥켈을 격려하려는가 싶었는데.

"네가 실패해도 다 죽는 것 말고 더 있겠느냐."

그래, 맞는 말이다.

나는 둥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할 수 있다!"

'가자!'

타닥타닥, 자자, 선수 입장.

* * *

결코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는 광산일지라도.

드워프들은 늘 활기가 넘쳤다.

고된 노동을 할 때도, 노동을 마치고 술자리를 가질 때도.

늘 드워프들은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그런 노랫소리가 며칠째 들리지 않는다.

캉캉 곡괭이 휘두르는 소리도, 텅텅 망치 내려치는 소리도 울리지 않는다.

노동을 멈추는 드워프는 죽은 드워프뿐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붉은 모루 광산은 이미 죽음으로 가득 찬지도 모르겠다.

주황빛 불꽃이 하층 곳곳에 있었다.

드워프들은 멍하니 그 주변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곳에 선글라스를 쓴 젊은 드워프 셋이 나타났다.

드워프를 유혹하는 불꽃이 주변에 있었지만, 결코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

저벅, 저벅,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제 허벅지를 꼬집으며, 때로는 레몬을 씹으며 정신을 유지했다.

마침내 일행이 멈춘 곳은 심층으로 이어지는 문 앞이었다.

"정지."

원래는 로제나가 지키고 있던 문이지만, 지금은 푸른 수염의 다섯 손가락이라고 불리는 드워프 중 하나가 서 있었다.

그 옛날, 오크와 싸우다가 코끝이 잘려 나간 전사 해피였다.

"둥켈, 너 인마, 어디 있던 거야!"

그가 둥켈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아저씨,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은 무슨 씨."

둥켈은 조심히 물었다.

"아저씨도······ 불에 홀리신 건가요?"

"홀리긴 뭐가 홀려?"

전사는 터무니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 완전 제정신이다."

"환자들을 불태웠다면서요."

"그건 인마, 나도 좋아서 그런 게 아니야. 전염병이 도는데 어떡하나? 최대한 빨리 격리하고 소독해야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리고 그거, 전염병이 아니었어요. 치료법도 알아냈고요."

"아이 나는 모른다니까. 왜자꾸나한테그래이 새-끼야-!"

전사가 갑자기 분노를 터뜨렸다.

둥켈과 만진이 깜짝 놀랐다.

트랄이 저도 모르게 도끼에 손을 뻗는 것을 둥켈이 저지했다.

눈앞의 전사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직접 만나 뵈려고요."

"뭐어?"

"푸른 수염, 광산군주님을요."

그래도 충성심은 남아 있는 것인지.

전사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군주님을? 아서라, 그분은 널 싫어하시잖아."

"맞아요, 그래도 만나야 해요.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둥켈은 진지한 얼굴로 전사를 바라봤다.

전사는 잠시 고민하듯 머리를 긁적였다.

"안 되겠다."

그는 도끼를 뽑아 들었다.

"너도 불꽃을 봐야지. 그냥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너도 불꽃을 먼저 보는 게 좋을 거다. 진짜 대단하거든 그거."

그리 말하면서 왜 도끼를 뽑아 드는가.

다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도 예상한 범주 내였다.

다행히 둥켈은 늦지 않게 말할 수 있었다.

"찾아왔어요!"

놀랍도록 빠르게 배낭에서 양동이와 사슬을 꺼낸다.

뱀이 훔쳐 간 셀레스티움 양동이였다.

"이건······."

"그 뱀이 훔쳐 간 것 아닙니까. 제가 찾아왔어요. 이걸 푸른 수염님께 직접 드릴 겁니다."

"이야, 그 뱀 보통 날랜 게 아니던데 어떻게 잡았냐?"

"열심히 뛰었죠."

"그래도 그냥 내가 전해주면······."

"뱀도 잡아 왔습니다!"

전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가 조심스럽게 뚜껑이 닫힌 양동이를 건드리자.

터터터텅!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 날뛰는 소리가 났다.

"이야 이건 좀 용하네······."

"직접, 전해 드리고 싶어요."

"이 정도면 그럴 만하겠지."

좋아, 설득이 먹혔다.

"그래 따라와. 거기! 너, 네가 나 대신 여길 지켜라."

전사는 다른 드워프에게 경비를 대신 맡기고 심층의 문을 열었다.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심층에 들어가 보는 것은 셋 모두 처음이었다.

가장 용감한 트랄이 오히려 긴장했고, 의외로 겁이 많은 둥켈이 가장 과감했다.

"빨리 안 오고 뭐해!"

전사가 외치자, 셋은 얼른 따라갔다.

"후우, 원래도 이렇게 뜨거웠습니까."

둥켈이 흐르는 땀을 훔쳤다.

심층은 놀라울 정도로 더웠다.

열에 강한 드워프로서도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예전보다 훨씬 뜨거워졌지. 불이 점점 커지고 있으니까."

"불이요."

"그래, 산의 심장."

산의 심장이 아닙니다.

그건 요사하고 사악한 악마의 불입니다.

둥켈은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심층에 있는 자들은 안면과 몸을 냉각수로 적신 천을 덮어 기괴한 모습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좀처럼 위로 나오지 않아서 영양섭취가 가장 불균형했던 이들이다.

괴혈병, 뱃사람 병에 걸린 이들도 가장 많았으리라.

그런데 지금 심층엔 드워프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미 불타 죽은 걸까.

알 수 없었다.

"둥켈."

만진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저 아래를 가리켰다.

최심부로 통하는 바닥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그 아래로 통하는 계단 앞에 푸른 수염이 있었다.

다행히 정신을 홀리는 주황빛 불은 이곳에 없었다.

이미 불에 홀린 이들만 심층에 있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푸른 수염과 둥켈의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푸른 수염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둥켈은 괜히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터터텅.

양동이에서 꿈틀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정신 차려야지.

둥켈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푸른 수염 앞에 도달했다.

"해피. 무슨 일이냐."

푸른 수염이 인상을 찡그리며 전사에게 상황을 물었다.

전사는 푸른 수염에게 다가가 여태까지의 일을 말했다.

푸른 수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둥켈이 들고 있는 것이, 잃어버렸던 셀레스티움 양동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걸 가져왔다고, 네가?"

"예."

푸른 수염은 둥켈 앞에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둥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양동이를 건넸다.

터터텅!

양동이 안에서 또 한 번 뱀이 발버둥 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생각이 들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잘했다."

푸른 수염이 둥켈을 칭찬했다.

그것이 푸른 수염에게 처음 들어 보는 칭찬이어서, 둥켈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났다.

그리고 푸른 수염이 양동이의 뚜껑을 연 순간이었다.

퍼드드득!

양동이 안에서 박쥐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엥?"

둥켈 일행을 안내한 전사 해피가 황당해했다.

박쥐는 허둥지둥 날아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푸른 수염은 말없이 둥켈을 잠시 노려봤다.

곧, 양동이의 밑바닥에 종이 하나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 싶어서 자세히 보다가, 퍼뜩 양동이를 옆으로 던졌다.

화륵!

순간 양동이 안에서 불이 솟았다.

"······둥켈, 내게 장난치는 건가?"

장난이라면 질 나쁜 장난이다. 기습이라면 허접한 기습이었고.

하지만 둥켈은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푸른 수염의 수염이라도 태우고자 꾸민 짓이 아니었다.

"정신이 번쩍 드셨습니까?"

"재미없었다."

둥켈은 쓰게 웃었다.

푸른 수염에게 장난을 친 것은 처음이었다.

늘 푸른 수염을 골탕 먹이는 상상을 했음에도.

"생각보다 즐겁지는 않네요."

그리고, 잠시 한 박자 쉬더니.

"······아버지."

장내에 싸늘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경악, 충격.

지금 농담이라도 한 건가? 싶은 얼굴들.

만진과 트랄이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으로 둥켈을 바라봤다.

* * *

화르륵.

깜짝이얏!

내가 꼬리로 들고 다니던 부적에 불이 붙었다.

그 말은, 이것과 연결된 다른 부적의 마법이 발동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펠레리안의 도움을 받아서 그린 연동-부적이었다.

내 부적과 연동되어 있는 부적은 셀레스티움 양동이 안쪽에 붙어 있었다.

뚜껑이 열리면 곧 불타게 되어 있으니, 적어도 양동이가 푸른 수염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과감한 투자를 했다.

셀레스티움 양동이를 잃어버릴 것을 각오하고 작전을 짠 것이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나는 붉은 모루 광산의 수호룡이 되겠지.

그러면 드워프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을 것이다.

이미 헬무트와 둥켈에게 협상을 마친 사실이다.

"사아아악!"

내가 포효했다.

앉아서 쉬고 있던 드워프들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게 중요했다.

사실, 우리는 둥켈 일행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둥켈은 우리보다 하루 늦게 출발했다.

그리고 꼬박 하루 동안 우리는 심층 바로 위로 연결되는 갱도를 파고 들어갔다.

드워프 광부들에게는 악몽 같은 상황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조명을 잃은 채 피두더지 떼와 조우하는 것이다.

이미 나는 그 상황을 이겨 내 본 바가 있다.

그리고 그것보다 일어날 가능성은 드물지만, 만약 일어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재난이 되는 경우가 있었으니.

지하 수맥과 접촉하는 것이다.

지하수는 생각보다 흔해서 만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땅을 팠는데 흙이 젖어 있다거나 하면 피해서 가면 된다.

그러나 아주 가끔, 불운에 불운이 겹쳐서 지하에 생성된 호수와 맞닥뜨리게 될 때가 있다.

물이 고여 있는 그곳을 잘못 건드리면 그 수압에 의해 물이 뿜어져 나오게 된다.

자칫하면 땅속에서 익사하는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숙련된 광부들은 지하 호수의 흔적을 미리 찾아내고 피한다.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지하 호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 하루를 꼬박 파고 들어갔다.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발파 전문가인 헬무트는 세심한 계산을 바탕으로 곳곳에 폭약을 매설해 두었다.

"물러난다. 고지대로, 고지대로 피해!"

그가 드워프들을 지휘했다.

"빨리빨리 움직여 이 새끼들아! 도화선 밟지 말고!"

드워프들은 잔뜩 흥분해서 달렸다.

이들 중 물과 친한 자들은 없었다.

모두가 고지대로 피했다.

"후우, 후."

연륜 있는 헬무트도 조금 긴장한 얼굴이다.

"내 죽기 전에 이런 짜릿한 일을 해 볼 줄은 몰랐군."

아니, 긴장한 게 아니라 흥분한 거였군.

헬무트는 내 선글라스가 쉽게 빠지지 않도록 조정해 주었다.

"너 진짜 괜찮겠나? 아주 위험할 거라고."

'괜찮아요. 뭐, 이정도야.'

나는 둥켈 대신 헬무트 쪽에 붙어서 움직였다.

키뱀이의 능력이 수맥을 찾기에 아주 훌륭했기 때문이다.

녀석은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으니 꼭 이렇게 함께 있어야 했다.

키뱀이는 아공간 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아주 익스트림할 테니.

"그러면, 무운을 빌지. 발파 준비!"

헬무트가 기폭 장치 앞에 다가갔다.

"셋, 둘, 하나, 발파!"

기폭 장치를 꾹 누르자.

도화선이 놀라운 속도로 타들어 갔다.

파지지지지직-

그리고,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폭약이 지하 호수의 벽을 터뜨렸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수압에 의해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돌 더미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귀가 멍멍해서 헬무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저 아래에 엄청난 기세의 수류가 쏟아지고 있었다.

돌조각이 지나가고, 순수한 물만이 쏟아지는 지금.

*「흑린lv3을 사용합니다.」

이제는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 흑린을 사용하고.

나는 물로 뛰어들었다.

*「수영lv1을 사용합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수영.

그것도 끔찍하게 무서운 워터슬라이드.

나는 물과 함께 쏟아져 내려갔다.

저 아래 뻥 뚫린 구멍을 따라, 심층으로.

* * *

"나는 너 같은 자식을 두지 않았다."

"저를 버리셨으니까요."

"······헬무트가 말해 줬나?"

"네."

둥켈이 창백한 낯빛으로 답했다.

털이 없이 태어난 아기.

게다가, 사생아.

푸른 수염은 둥켈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둥켈은 평생을 고아로 살았다.

"내게 사과라도 바라고 찾아온 거냐?"

"아니요."

둥켈은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을 쓰러뜨리고 광산을 구할 겁니다."

"하······."

푸른 수염이 비웃으려던 순간이었다.

콰아앙!

저 높은 천장에서 폭음이 울렸다.

돌 부스러기가 마구 떨어진다.

폭발의 결과로, 천장에 구멍이 생겼다.

그들의 바로 위였다.

"무슨!"

그그그그그그-

그리고 무언가 밀려 오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놀란 푸른 수염이 둥켈과 그 일행을 바라보자, 그들은 이미 뒤돌아 달려서 고지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쫓······."

쫓으라는 말도 마치지 못했다.

천장에서 물줄기가 쏟아졌다.

마치 폭포처럼 거센 물줄기 사이에, 뱀이 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그 작은 흰 뱀이 맞다.

뱀은 정확히 푸른 수염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그리 두려운 것이 없었으나.

갑자기 그 뱀이 확 거대해졌다는 게 문제였다.

저 깊은 광산 가장 아래.

뱀 내려온다.

<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

097.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푸른 수염에게 제압되어 갇힌 로제나.

그녀는 죄지은 이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감옥이라고 해 봤자 몇 명 정도를 잠시 가두는 공간이기에, 지금 내부에 갇혀 있는 것은 로제나뿐이었다.

정원이 여섯 명인 방을 혼자서 쓰고 있지만, 공간은 결코 쾌적하지 못했다.

붉은 모루 광산 최강의 전사인 로제나다.

오랫동안 쌓아 온 마력과 강철같은 근육.

그저 쇠창살로 그녀를 가둘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드워프들은 특별한 구속구를 사용했다.

왼손과 오른손을 뒤로 묶어서 구속한 것이다.

그 구속구는 특별히 제련한 백강철로 만들었기에 힘을 줘도 끊어지지 않는다.

불편한 자세로 로제나는 며칠째 식음을 전폐했다.

간수들이 준 식사를 먹기 위해서는 개처럼 머리를 박고 먹어야 했다.

그러기를 그녀는 거부했다.

썩어 가는 음식에 파리가 왱왱댔다.

로제나는 마치 잠이 든 것처럼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쿠우웅!

폭발의 굉음은 로제나가 갇혀 있는 곳까지 들렸다.

"뭐, 뭐야!"

"천장에서 물이······!"

간수 드워프들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역시 불에 홀린 자들이다.

지금도 어쩔 줄 모르고 빙글거리는 것을 보면, 마치 혼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로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정말 천장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흰 뱀 한 마리가 섞여 떨어지더니.

갑자기 뱀의 덩치가 거대해졌다.

콰아앙!

성대한 추락.

"하하핫!"

로제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희망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저 주황빛 불꽃을 바라보면 그녀마저 정신을 잃을 것 같았으니.

하지만 지금은 이 심층에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로제나의 눈이 번뜩였다.

뒤로 묶인 손으로,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았다.

그리고 검지와 엄지를 사용해서 머리카락을 꼬기 시작했다.

그게 마치 방적기를 사용해 실을 뽑아내듯 정교했다.

원래도 억센 로제나의 머리카락이었다.

그것을 단단히 꼬아내자, 마치 철사처럼 뻣뻣해졌다.

그녀는 엄지와 중지만을 사용해서 구속구의 열쇠 구멍에 머리카락을 밀어 넣었다.

그렇다, 오직 손재주만으로 구속구를 해제하려는 시도였다.

가능할 리가 없는 시도였지만, 로제나는 다름 아닌 장신구의 마이스터다.

이곳 붉은 모루 광산에서 손재주가 가장 섬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컥!

거짓말처럼 구속구가 떨어졌다.

그것을 간수들도 보았다.

"어억! 가만히 있으세요!"

"다가오지 마십쇼!"

그러나 말을 들을 이유가 있는가.

로제나는 백강철로 만든 구속구를 버리는 대신, 마치 갈고리처럼 잡았다.

그러고는 쇠창살에 걸더니.

끼기기기긱!

쇠창살을 엿가락처럼 휘어 버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간수들은 도망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흐흐."

로제나는 벌벌 떠는 드워프들에게 명했다.

"여기 망치나 도끼 있냐?"

"어, 예에."

"가져와."

"어······."

로제나가 숨을 크게 들이쉬곤 외쳤다.

"당자앙!"

그 사자후로 인해, 불에 홀렸던 드워프들의 정신이 잠시 돌아온 것은.

그리 이상할 일이 아닐 것이다.

* * *

후룸라이드를 타는 기분이었다.

쏟아지는 지하수의 격류와 함께 흐르는 것은 말이다.

그리고 아찔한 낙하의 시간.

헬무트 영감의 계산은 정확해서, 바로 아래에 최심부의 문과 드워프들이 있었다.

*「거대화lv1을 사용합니다.」

마력을 잘 조절해야 했다.

그림자 숲에서처럼 덩치를 너무 키우면 내가 내 육신을 감당할 수 없다.

덩치를 키울수록 내구도 역시 떨어지는 것 같다.

몸길이를 9m 정도로 키웠다.

그리고 그대로 푸른 수염의 부하들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깔린 드워프들이 어찌 될지는 난 모르겠고!

그들은 마치 볼링핀처럼 튕겨 나갔다.

완벽한 스트라이크였다.

내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은 추락의 충격이었다.

내 비명이 포효처럼 들렸으면 좋겠다.

"사아아악!"

아프다!

너무 아프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열심히 움직이며 드워프들을 밀쳐 냈다.

"문, 문 닫아!"

푸른 수염은 그 상황에서도 올바른 지시를 내렸다.

뻥 뚫린 천장에서는 여전히 무서운 기세로 물이 떨어지고 있다.

중력에 의해, 물은 곧바로 최심부로 통하는 계단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푸른 수염의 명에 따라 드워프들이 최심부의 문을 닫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 놔둘 수는 없다.

*「광선lv2를 사용합니다.」

"아악!"

도르래에 걸린 쇠사슬을 잡아당기려던 드워프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쳤다.

중심을 잃은 드워프는 그대로 자빠지더니, 허무하게도 계단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이것이 내가 거대화를 쓴 이유 중 하나다.

쏟아지는 물은 키 작은 드워프들의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유속이 빠르기까지 하니, 제대로 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 역시 원래라면 물에 휩쓸렸겠지만, 거대화한 지금은 오히려 남들보다 자유로웠다.

드워프들이 내가 한때 부숴 놓은 도르래를 용케 다시 고쳐 놓았지만.

빠각!

이번에는 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도르래를 부숴 버렸다.

물이 흐르는 지금 최심부로 통하는 문을 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둥켈! 만진!'

그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가자!

둥켈과 만진이 내 몸 위로 올라탔다.

뛰어내리기 전에 몸에 걸친 모든 것은 아공간에 넣어 뒀다.

둘이 잡을 것은 내 머리 위의 왕관뿐이었다.

나는 포효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이, 이노옴!"

그런데 푸른 수염 역시 내게 뛰어올랐다.

놈은 무도하게도 내 몸을 잡아 뜯으며 매달렸다.

악!

비늘 몇 개가 뒤집혔다.

원래 맨손으로는 비늘을 결코 상하게 할 수 없었겠지만, 거대화를 쓴 탓에 내구도가 약해졌나 보다.

비늘 뜯어진 곳에 피가 났다.

계단을 따라 물이 쏟아져 내린다.

나는 물과 함께 미끄러져 내려갔다.

"죽어라앗!"

푸른 수염이 내게 매달린 채로 도끼를 뽑아 들었다.

팔을 번쩍 들어서 도끼를 내려치려 한다.

나는 꼬리를 휘둘러 몸부림을 쳐 주었다.

푸른 수염이 매달린 부분이 부웅 떠올라 천장에 부딪혔다.

정수리를 부딪친 푸른 수염이 도끼를 놓쳤다.

"크아악!"

그럼에도 놈은 악착같이 내 몸에 붙어서 버텼다.

심지어는 조금씩 머리 쪽으로 기어오르려 했다.

"두, 둥켈 형!"

만진이 당황해서 외치고, 둥켈은 침착하게 몸에 달고 있는 것들을 푸른 수염에게 던졌다.

손 망치가 핑그르르 돌아 푸른 수염의 얼굴을 치고 지나간다.

푸른 수염은 코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버텼다.

저놈은 레몬을 아무리 처먹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걸 본 만진과 둥켈은 가지고 있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다 던졌다.

하지만 푸른 수염은 끄떡도 하지 않고 조금씩 내 머리 쪽으로 기어 올라왔다.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워터슬라이드나 다름없는 속도인데, 대단하다.

결국 둥켈과 만진은 신발까지 벗어 던져 댔다.

"억!"

운 좋게 만진의 작업화가 푸른 수염의 손톱을 후려쳤다.

한 손을 놓치자 푸른 수염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그는 우당탕 바닥에 떨어졌다.

둥켈과 만진이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기뻐하기는 아직 이르다.

"사아악!"

나는 앞에 바위가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그들은 내가 바위에 부딪히기 전까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콰아아앙!

머리가 깨지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내 몸은 교통사고 난 자동차처럼 허공에서 전복되었다.

둥켈과 만진 역시 손아귀에 힘이 풀려 날아갔다.

밀려 내려가던 관성 탓에 나는 계속 바닥을 굴렀다.

빠르게 흐르는 물 때문에 멈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놀랍게도, 차가웠던 지하수가 뜨끈하다.

이곳의 지열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용암 호수가 코앞이다.

취이이이익!

저 앞에서 엄청난 기세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흐읍!'

꼬리치기로 땅을 후려쳤다.

그것도 부족해서 이빨을 땅에 박아 넣었다.

그그그극!

간신히, 용암 호수에 빠지기 직전에 멈추는 데에 성공했다.

둥켈과 만진은?

보이지 않는다.

알아서 살아남았겠지!

반갑지 않은 드워프만 만났다.

"으아아아!"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는 푸른 수염.

그가 분노해서 포효했다.

시시각각, 용암 호수로 물이 쏟아지고 있다.

얼마나 뜨거운지,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주황빛 불꽃이 여기까지 번쩍인다.

하지만 불이 아무리 강해도 대량의 물을 쏟아부으면 꺼질 수밖에 없다.

포켓몬에서 증명된 상성의 법칙이란 게 있으니까.

'덤벼, 푸른 수염!'

불이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푸른 수염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아니, 이미 그는 너무 깊이 미쳤을지도 모른다.

"네, 놈이······! 기껏 뱀이! 미물이!"

입에서 불을 토해 내듯 분노하는······.

아니, 실제로 푸른 수염의 입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단춧구멍처럼 시커멨던 눈동자도 불타는 듯 이글거린다.

-화마가 위협을 느끼고 발악하는군.

펠레리안의 해설이 아니더라도 그런 것 같았다.

푸른 수염의 얼굴에 난 구멍 전부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다.

그것은 곧 그의 수염과 머리카락에 옮겨붙었다.

이제는 푸른 수염이 아니라 붉은 수염으로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죽어랏-!"

너나 죽어!

달려오는 푸른 수염에게 마주 달려갔다.

불 주먹 푸른 수염이 이글이글 펀치를 날렸다.

거대한 몸으로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거대화를 해제하면 간단한 일이다.

휘익!

푸른 수염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식심의 도약lv3을 사용합니다.」

몸이 가벼워진 만큼 속도도 빨라진다.

나는 말 그대로 화살같이 날아갔다.

푸른 수염의 심장을 파 먹기 위해.

카득!

하지만 오히려 이빨이 부러질 뻔했다.

비겁한 푸른 수염은 옷 아래에 드워프제 사슬갑옷을 입고 있던 것이다.

푸른 수염이 불타는 손으로 내 몸을 잡아채려 했다.

몸에 손자국이 남는 것은 싫으니까 나는 얼른 그의 옆구리 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근접전에서는 비장의 수단이 있다.

*「천뢰령lv1을 사용합니다.」

-이 멍청한 놈.

'아차!'

여기 땅속이지!

내 바보 같은 판단력에 자책하려던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평소의 '쩌저정!'에 비해서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효과음이었지만.

푸른 전격이 나와 푸른 수염을 동시에 감전시켰다.

그리고 그나마 전격 내성이 높은 내가 먼저 몸을 회복했다.

와작!

놈의 발목을 깨물어 주는 데에 성공했다.

푸른 수염이 비명을 질렀다.

그래,

아무래도 나는 푸른 수염보다 강한 것 같다.

* * *

취이이이익!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용암 호수로 쏟아지는 물은 그대로 기화하여 뭉게뭉게 김을 피워올린다.

습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서 100도를 훨씬 능가하는 김이 대기를 가득 채운다.

둥켈은, 이 상황의 위험성을 곧바로 깨달았다.

막대한 양의 수증기가 광산을 가득 채우면, 몰살이다.

숨을 들이쉬는 즉시 폐가 익어 버릴 테니 당연한 일이다.

용암 호수에 물을 쏟아붓는다면 막대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올 것이라는 건 이미 예측했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그리 걱정할 게 아니었다.

광산이라는 곳은 원래에도 환기 시스템이 중요하다.

특히나 인간들보다 훨씬 깊게 땅을 파고드는 드워프의 광산은 대단한 환기 설비들이 준비되어 있다.

그것이 제대로 정비관리 되고 있다면 이 수증기들은 곧바로 지면까지 연결된 환풍구로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않는다.

오히려 공간 전체가 수증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전부 죽어."

둥켈은 그걸 알았기에 결단을 내렸다.

만진이 그에게서 불길한 기색을 느꼈다.

"형, 무슨 생각이야."

"너는 뱀을 도와."

"둥켈 혀엉!"

만진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둥켈이 뜨거운 수증기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순식간에 살이 시뻘겋게 익어 간다.

몹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숨을 쉴 수도 없다.

둥켈은 숨을 참은 채로 벽면에 설치된 계단을 마구 올랐다.

환풍구와 그 설비들이 있는 곳이다.

역시,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서 곳곳에 녹이 슬어 있다.

드워프들이 불에 홀리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밸브, 밸브다!'

다행히 강제적으로 환풍구를 열 수 있는 큼지막한 밸브가 있었다.

이미 숨이 턱끝까지 차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뛰었다.

밸브를 돌리기 위해 손을 댔을 때, 자칫하면 둥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밸브가 엄청나게 뜨거웠다.

그러나 둥켈은 이를 악물고 밸브를 다시 잡았다.

손바닥이 다 벗겨지더라도 밸브를 돌려야 한다.

팔뚝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힘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밸브는 돌아가지 않았다.

끼긱, 끽.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을 좀 더 열심히 해 둘걸.

후회 때문인지, 아니면 수증기가 자욱해서인지 눈물이 났다.

두툼한 손이 밸브 위에 얹어진 게 그 순간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로제나가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씨익 웃은 뒤, 밸브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끼리리릭!

그 뻑뻑했던 밸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환풍기가 작동했다.

후우우우웅!

대기를 가득 메웠던 수증기가 하늘 위로 빨려 올라간다.

드디어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이 되었다.

로제나가 둥켈의 등을 퍽 쳤다.

화상을 입은 등이 짜릿하게 아팠다.

"잘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 있었다.

수증기를 조금 흡입한 것 같았다.

"예에, 감사, 감사합니다."

왜 눈물이 주룩주룩 난다는 말인가.

둥켈은 자신의 작은 마음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아래를 내려다볼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뱀은?

악마가 숨어 있다는 용암 호수는?

그리고 아버지, 아니 푸른 수염은 어떻게 되었는가.

끊임없이 주황빛 불을 낼름대던 용암 호수는 결국 그 불이 꺼졌다.

수증기는 여전히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물이 고인 게 보였다.

하지만, 아직 꺼지지 않은 불 한 덩이가 있었으니.

로제나가 중얼거렸다.

"젠제로······."

푸른 수염의 몸에 불이 붙어 있었다.

뱀은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고.

불붙은 푸른 수염은 비칠, 비칠, 용암 호수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치 거짓말처럼.

그는 호수 아래로 투신했다.

* * *

*「악마의 불을 꺼뜨렸습니다.」

*「파이몬의 화마를 처치했습니다.」

해치웠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확실히!

*「업적 '악마 살해자'를 획득했습니다.」

< 이건 기회야, 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는 거야. >

098. 이건 기회야, 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는 거야.

강물이 도도히 흐르듯,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

대륙 동쪽 끝에서 비극이 일어날 때, 대륙 남쪽 끝에서는 공주가 태어나기도 한다.

그렇듯, 붉은 모루 광산이 화마의 태동으로 홍역을 겪고 있을 때.

마르테인 령은 혼란 속에서 영지의 복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호랑이 후작의 죽음은 후작령에 크나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라드 마르테인은 무력으로써 영웅이 되었으나, 그의 영웅성은 무력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귀족원의 유력자로서 정치적인 입지 또한 강고했다.

만약 대수림으로부터의 몬스터 웨이브라는 초유의 재앙이 아니었다면.

수도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왕실의 물밑 계획이 있지 않았더라면.

그 영웅 역시 죽지 않았을 텐데.

제라드 후작의 죽음이 크긴 했지만 마르테인에도 역사와 힘은 남아 있다.

마르테인을 다시 위대하게!

다만, 마르테인의 직계 혈육이 그레이림 영지의 소녀 라니아 말고는 모두 죽었으므로.

-참으로 불운한 일이었다. 그들이 싸움에 물러서지 않는 기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영주부인 파와 제라드 마르테인의 형제자매들, 즉 방계 파의 힘 싸움이 시작된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기구한 운명의 라니아 그레이림.

이제 라니아 마르테인이 되어 버린 소녀.

그녀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후우······."

라니아를 지켜보며 한숨을 내쉰 것은 다름 아닌 올리버였다.

그가 그레이림 영지에 몸을 의탁하기는 했지만 설마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갈지는 몰랐다.

라니아를 마르테인 령에 무사히 데려다준 뒤에는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처지를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잃고, 외할아버지를 잃었으며, 평생 살던 고향을 잃은 소녀였다.

아비인 자작은 다행히 풀려났지만, 무너진 영지를 복구하려면 그 남은 평생을 바쳐야 할 것이다.

마르테인의 후작위는 지금 공석이었고, 후작부인이 후작 대리로서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녀는 라니아가 마르테인 후작의 직계 혈육이니, 마땅히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거기에 반기를 든 것이 제라드 마르테인의 형제자매들이다.

원래는 방계로서 감히 후작위를 넘볼 수 없던 자들이, 후작령의 복구를 명분으로 영주성에 몰려든 것이다.

그들이 힘 있고 나이 많은 가신들을 업고 후작부인과 으르렁대고 있었다.

"불쌍한 아가씨."

그리 중얼거린 것은 자인이었다.

이곳에서는 자레인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지만.

"자레인, 자네가 더 불쌍한데."

"내가 왜."

"이름 높은 기사단의 정식 기사가 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여기서 철부지 아가씨 호위무사 노릇이나 하고 있지 않은가. 평생 원래 이름은 쓰지도 못할걸. 살아 있단 걸 알면 척살령이 떨어질지도 모르지."

올리버와 자인은······.

어떻게 보면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라니아의 곁에 머물면서 호위무사를 자처했다.

아는 사람이 올리버와 자인밖에 남지 않은 라니아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자인, 아니 자레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난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모르겠어."

"뭐?"

"어릴 적부터 기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야. 그런데······ 그곳은 내가 생각한 기사가 될 수 있는 곳이 아니더라고."

철사자 기사단의 세 계율.

용맹, 복종, 정진.

복종의 계율을 어겼으니, 이제 자인은 파문기사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오히려 마음이 뻥 뚫린 듯했다.

"팔자 좋군."

올리버가 혀를 찼다.

정원에서 대기하던 그는 흘긋, 창문 안쪽의 라니아를 바라봤다.

지금 그녀는 수도에서 초빙해 온 교수의 강의를 받고 있었다.

원래라면 일대일 강의였겠지만, 숙부와 숙모의 강력한 주장 탓에 그 자제들도 함께 있었다.

라니아는 그 어린 것들에게 은근히 무시받는 상황이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시면 좀 나아지겠지. 난 그때까지만 이곳에 머문다."

올리버가 그리 말했다.

라니아는 왕립 아카데미인 스쿨 에메랄드에 들어가기로 결정되었다.

"그 정도면 내 할 일은 다 한 거야."

"나가서 뭐 할 일이라도 있나?"

"······."

올리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레인도 걱정스레 라니아를 바라봤다.

라니아는 졸음을 참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요."

강의를 위해 초빙된 이는 종교사의 권위자인 밀리언 교수였다.

종교사라는 학문이 재미있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라니아는 애써 관심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귀 가문의 역사와 광명기사단의 역사 중, 어느 쪽이 더 긴지 아나요?"

광명기사단은 마르테인 영지에 소속된 기사단이다.

당연히, 마르테인 가의 역사가 더 긴 것이 그럴듯했지만 그렇게 뻔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으리라.

'광명기사단이겠지.'

라니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옆에 앉아 있는 사촌 허미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오호, 허미트 군, 말씀해 보세요."

"광명기사단입니다!"

"오오. 정답입니다!"

라니아는 심드렁했다.

하지만 허미트는 어째선지,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라니아를 돌아봤다.

뭐 어쩌라고, 하고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러면, 그 이유도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이, 이유요?"

허미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밀리언 교수는 이해한다는 듯 웃어 주었다.

"광명기사단의 기원은 본디 악마 사냥꾼이었습니다. 한때 광명교단은 악마와 가장 활발하게 싸우던 교단이었고, 마르테인 가문의 역사는 당대의 캡틴이 기사로 서임받으며 시작되었죠."

그것은 마르테인 가 인물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오래된 역사였다.

그제야 라니아도 흥미가 조금 생겼다.

"당시, 악마 사냥꾼을 이끌던 초대 마르테인께서 한 마을을 궤멸시킨 역병의 악마를 처단하셨지요. 그 공로로 기사 서임을 받으셨지만, 그분께서는 며칠 뒤 전사하셨습니다."

악마를 잡았다면서 왜?

"악마 사냥의 오랜 금언을 잊어서라고 평가됩니다. 불태워 죽인 악마도 그 재를 다시 불태워야 한다는······."

한때 마물과 사냥에 관심이 많았던 라니아다.

악마라는 것에도 관심이 이었다.

"그 역병마는 아스모데우스의 권속이었지요. 그 악마 귀족이 권속의 죽음에 복수했습니다."

"어떻게요?"

질문을 던진 것은 라니아였다.

"역병마의 역병으로 죽었던 시체들이 모두 일어났지요. 네크로맨시라고 해야 할지, 좀비라고 해야 할지······. 여러분들은 모두 마르테인의 귀족인 만큼, 언젠가 악마와 대적할지도 모릅니다."

후작이 되는 자는 동시에 광명성기사단의 단장이 될 것이다.

수업을 듣고 있는 이들의 표정이 제각기 변했다.

밀리언 교수는 흥미롭다는 듯 아이들을 둘러보더니, 정확히 라니아를 보고 말했다.

"그러니 염두에 두십시오. 주인이 있는 악마를 처단할 때는 그 후를 더 조심해야 합니다."

종교사의 전문가는 즉 악마학의 전문가이기도 했으니.

"악마 귀족이 분노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교수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 * *

일동.

죽은 푸른 수염에 대해 묵념.

허나, 그는 사실 별로 묵념을 해 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태가 일단 마무리되고 나서야 알았다.

손바닥이 다 까진 둥켈에게 포션을 뿌려 주니, 로제나가 다가와서 갑자기 사과를 한 것이다.

"미안하다, 둥켈."

"······네?"

둥켈은 놀랍게도 푸른 수염의 자식이었다.

그러니까 나름 왕자님 비슷한 신분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가 푸른 수염의 피를 이었다는 것은 숨겨진 사실이었는데, 로제나가 갑자기 사과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평소에 너를 안 좋게 보던 것 말이야."

"아······ 에이 뭐, 딱히 제게 뭘 하신 것도 아닌데."

"그래도 아이들은 어른들 생각보다 예민한 법이지. 내가 널 좋아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

"······어차피 다들 그런데요. 뭐."

"네 어머니는 붉은 모루 광산의 드워프가 아니야. 외부의 드워프였지."

"······."

둥켈도 거기까지는 알고 있었나 보다.

"바깥으로 여행을 떠났던 푸른 수염이 돌아왔을 때, 너를 데리고 왔어. 자식이라더군. 그래서 내가 젠제로와 헤어졌던 거야."

충격적인 이야기다.

푸른 수염은 진짜 여러 의미로 대단한 놈이었구나.

"그리고 그는 널 버렸지. 나라도 너를 가엾게 여겼어야 했는데. 너마저 미워했던 것 같다."

"하하······."

둥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는 모습이 오히려 로제나의 마음을 슬프게 했던 것 같다.

로제나가 둥켈을 와락 껴안았으니.

"내가 아들은 없지만. 너를 아들처럼 생각하고 싶구나."

둥켈은 어쩔 줄 모르며 가만히 있었다.

보기 좋구나.

둥켈의 종아리를 두들기고 있으려니, 로제나가 갑자기 나도 끌어안았다.

"너도 이리 와라. 너도 내 자식 할래?"

"쉬잇."

윽 아니요.

드워프 엄마(수염 나고 아주 강함)는 사양할래요.

물을 퍼부어서 화마를 죽이겠다는 작전은 성공했다.

푸른 수염은 불이 붙은 채로 저 끓는 물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푸른 수염을 처치했다는 메시지 역시 들렸으니 확실하다.

다만 그 스스로 투신해서였는지, 마성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니면 이미 악마에게 영혼이 팔렸는지 어쨌는지 해서 그런가.

아무튼 조금 전에 새로 얻은 업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악마 살해자'.

경비대장 살해자에서, 영웅 살해자, 그리고 악마 살해자까지.

점점 화려한 업적들이 늘어간다.

──────────────

[악마 살해자]

처음으로 악마를 살해했습니다.

악마를 상대할 때 정신 공격에 저항력을 갖습니다.

악마의 마기에 쉽게 오염되지 않습니다.

천족에게 호의를 얻습니다.

악마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특전이 내게는 아쉬웠다.

난 어차피 정신공격에 면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말이 조금 신경 쓰이는데······.

-음, 파이몬, 파이몬······.

펠레리안이 자꾸 중얼거렸다.

그는 푸른 수염에 대한 자신의 마법이 망가진 이후로 몹시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펠레리안에 대한 나의 신뢰도 조금 무너졌을지도.

-뱀.

그렇기에 펠레리안도 자신의 위신을 복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듯했다.

'왜요.'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어야 더 큰 보답을 얻는 법이다.

'갑자기 그런 말을.'

이제 운철검만 제조하면 될 것 같은데, 펠레리안은 불길한 소리를 했다.

-저 화마가 정말 파이몬의 권속이라면, 후폭풍이 있을 것이다. 파이몬은 악마 귀족 중에서도 특히 인세에 개입이 잦은 악마거든.

'그러면요······ 잠깐!'

나는 용암 호수(였던 것)의 가까이로 가 보았다.

물이 끓던 것이 분명 멈췄었다.

점차 식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사아아악!"

쉬고 있던 드워프들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일은 생각보다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방의 왕 파이몬이 악마살해자를 주시합니다.」

어, 나요?

뭔가 나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스믈스믈한 오한이······.

*「특성 '정진'에 의해 정신공격에 면역입니다.」

들었다가 사라졌다.

대신, 저 아래 고였던 물이 순식간에 기화되었다.

그리고, 불꽃으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어어, 어어어!"

마치 불꽃으로 빚은 도마뱀 같은 괴물이었다.

끔찍한 점은, 그 머리통이 마치 푸른 수염의 얼굴 같았다는 것이다.

이마에는 긴 뿔 또한 달려 있다.

──────────────

[파이몬의 불 도마뱀lv140]

[특성]

[광기], [시한부]

──────────────

키뱀이에 이어서 두 번째 시한부 특성이다.

놈은 절벽을 놀라운 속도로 기어올랐다.

정신이 돌아온 드워프들이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또 한 번 불에 홀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또 무슨 미친 지랄이얏-!"

로제나가 고함을 치면서 워해머를 던졌다.

충분히 머리통을 깨뜨릴 만한 위력이다.

퍼억!

그 워해머가 도마뱀의 관자놀이쯤에 푸욱 박혔다.

하지만 골통이 깨져 뇌수가 흐르지는 않았다.

전혀 타격을 입은 눈치가 아니다.

오히려 머리에 박힌 망치가 스멀스멀 녹더니 자루만 떨어졌다.

놈은 엄청난 열기를 뿜고 있었다.

나는 둥켈에게 달려갔다.

내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둥켈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아냈다.

셀레스티움으로 만든 양동이를 빙글빙글 돌려 던진 것이다.

턱!

그것이 불도마뱀의 뿔을 한 바퀴 휘감으며 걸렸다.

나와 드워프들이 얼른 사슬에 매달렸다.

역시, 내열성이 뛰어난 셀레스티움 사슬은 녹지 않았다.

"으아악!"

하지만 불도마뱀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사슬을 잡은 드워프들이 도마뱀과 함께 끌려갔다.

결국 손을 놓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쫓아가, 다 같이 쫓아간다!"

로제나를 필두로 다 같이 도마뱀을 쫓는다.

그리고 나는, 당연하게도 사슬을 혼자 꽉 붙잡고 있었다.

나약한 드워프들 같으니라고.

저 불도마뱀은 어떻게 잡을까.

내가 여러 수단을 고민하고 있는데, 펠레리안이 말했다.

-놔둬라. 지금은 놔둬! 일단 놈이 밖으로 나가게 두어라.

'그래도 돼요?'

-어차피 지금 건드려 봤자 이곳의 피해만 늘 것이다. 저놈이 폐쇄된 이곳에서 난장을 부리기 시작하면 끝이야!

그 말도 그럴듯했다.

-일단 놔둬, 날 믿어라!

펠레리안이 확고하게 말했다.

불도마뱀은, 과연 지상으로 나가려는 듯 허겁지겁 광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만 그 과정이 얌전하지는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드워프들.

불도마뱀은 곳곳에 불꽃을 퉤퉤 뱉으면서 지나갔다.

그 불이 어찌나 강한지, 광산의 건물이며 설비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저건 어째요?'

-큰일을 위해 약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음 그렇긴 하지.

그리고 마침내, 무너진 광산의 입구에 도달했다.

불도마뱀이 입을 벌리더니.

콰아아아아아-

입에서 나온 불기둥이 광산의 입구를 확 뚫어 버렸다.

환하게 들이치는 햇빛.

불도마뱀이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순간.

나는 데자뷔를 느꼈다.

이거, 키뱀이한테 납치되었을 때와 비슷한 흐름이다.

-지금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그때 한 번으로 족하다.

*「거대화lv1을 사용합니다.」

최대한, 크고 무겁게.

아버지만큼 거대하게.

저따위 불 도마뱀보다 더 크게.

나는 광산의 뚫린 입구를 꽉 붙잡고 버텼고.

쇠사슬이 팽팽해지며 놈의 뿔을 잡아당겼다.

카앙!

불도마뱀은 머리가 꺾여 땅에 쿵 떨어졌다.

-악마의 권속은 본디 태양 아래에서 상대해야 하는 법이다.

푸른 수염을 닮은 도마뱀이 나를 보고 포효했다.

< 특수 진화 준비 완료. >

099. 특수 진화 준비 완료.

로일과 아마엔은 수도에서 다시 칼레아로 돌아왔다.

뱀의 요구대로 그가 준 금은보화들을 모두 환금했으며, 그것으로 수도에 기반을 마련하고 이곳 칼레아시에도 창고 하나를 매입했다.

그저 평범한 마차상이었던 로일이다.

하지만 뜻을 펼 수 있는 날개가 생기자, 로일은 비범한 능력을 보였다.

일 처리의 방식이 간결하고 쾌속했다.

그저 돈을 쓸데없이 뿌리는 것이 아니다.

칼레아시 중심지에 놀고 있던 부지를 창고로 만들고, 일이 없는 손들을 불러모아 일자리를 만듦으로써 칼레아 시장의 환심을 샀다.

드워프들과의 교역을 맡고 있던 배불뚝이는 붉은 모루 광산이 문을 걸어 잠근 뒤 알거지가 되었으므로, 로일은 칼레아 시장을 설득해 그 자리를 자신이 가져갔다.

더 이상 드워프들이 맥주를 받지도 않고 주괴를 팔지도 않는다고 들었지만, 글쎄.

뱀이 들어간 뒤에 일어난 일 아니던가.

뱀이 문제를 곧 해결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일은 제법 큰 돈을 기부채납해서 대 드워프 교역 책임자가 되었으므로, 과감한 투자였다.

혹은 바보 같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로일은 아마엔을 목마 태우고 무너진 광산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드워프들에게 맥주를 넘겨주던 바로 그 장소였다.

로일을 우습게 여겼던 배불뚝이는 일개 하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뒤에서 몰래, 마치 죽일 듯한 눈빛으로 로일 부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스승님은 언제 나오실까요."

"그러게······. 생각보다 일이 오래 걸리시나 보다."

"빨리 보고 싶네요."

마도사의 말에는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법사 지망생쯤 되는 아마엔의 말에도, 미약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콰아아아앙!

갑자기 산 중턱이 박살 나더니, 불꽃이 솟아 나왔다.

뻥 뚫린 구멍에서 튀어나온 것은 정말 기괴한 생물이었다.

불꽃으로 몸이 이루어진 도마뱀.

다만, 그 머리통은 마치 드워프 같은.

놈은 그대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칼레아시,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을 향해서였다.

그런데 그 뿔에 사슬이 걸려 있으니, 놈은 머리가 홱 꺾여 다시 추락했다.

사슬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였다.

흰 뱀, 거대한 흰 뱀.

그 괴한들이 쳐들어온 날 밤, 놈들을 물리쳤던 모습이다.

"와!"

아마엔은 탄성을 내지르고.

"으아아아악!"

뒤에서 눈을 부라리던 배불뚝이는 비명을 질렀다.

이곳은 산 중턱.

불 도마뱀은 칼레아시에서도 보일 테지만, 흰 뱀의 모습까지 본 것은 이곳에 있는 셋뿐이리라.

배불뚝이는 괴물들의 등장에 허겁지겁 도망치려 했다.

로일은 순간 어찌할지 모르고 뱀과 배불뚝이를 번갈아 보았다.

"아빠, 저거······!"

아마엔이 손가락질을 했다.

그곳에 불꽃의 도마뱀이 불덩이를 뱉어내고 있었다.

하늘로.

그 불덩이들이 로일과 아마엔이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로일은 아마엔을 껴안고 구르다시피 몸을 던졌다.

다행히 그들은 불덩이를 피했으나, 도망치던 배불뚝이는 그러지 못했다.

퍼엉!

불덩이 하나가 그를 깔아뭉갰으니.

비명도 남기지 못한 즉사였다.

"오우 씻."

"아빠, 저쪽으로 가자."

"뭐?"

자신의 아들이지만, 정말 겁이 없었다.

아마엔은 오히려 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고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와줘야지!"

"오히려 방해만 될 거야!"

로일은 무시하고 아마엔을 뒤로 업었다.

말을 타고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아마엔이 화가 났는지 뭐라 중얼거렸다.

"······리아 아쿠아맨시!"

구시렁댄 게 아니라 마법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업힌 채로 마법을 쓴 것이 퍽 대단하다.

불 도마뱀의 머리 위에 물줄기가 쏟아졌다.

치이이이익!

불을 끄는 것이 물이라고 하지만 크기와 화력이 압도적이다.

모닥불에 침 한 번 뱉은 것과 다름없으리라.

하지만 불 도마뱀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아마엔의 물줄기는 정확히 놈의 눈두덩이에 떨어졌다.

"카아아아악!"

불도마뱀이 고통으로 포효했다.

뱀과 아마엔의 눈이 마주쳤다.

뱀은 꼬리를 들어 주었다.

그것이 따봉이라는 것을 아마엔은 어째선지 알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불 도마뱀의 머리에 물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뱀의 마법이었다.

치이이이익!

아마엔에 비해서 대단할 것은 없는 물줄기였지만, 역시 이번에도 눈을 지지는 듯한 효과가 있었다.

"역시 스승님!"

"아마엔, 그냥 도망치는 게······!"

쩌저저저정!

그리고 이번에는 벼락이 떨어졌다.

불에 벼락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자연에서는 오히려 커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불도마뱀의 불길이 확 사그라들었다.

척 봐도 사악한 마물이었다.

마력에 민감한 아마엔은 불도마뱀이 저 어두운 마계의 소산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역시 스승님이야!"

또 한 번 뱀에게 감탄.

아마엔은 마도서를 읽은 적 있었다.

벼락의 힘은 특별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뇌정은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다던가. 제국의 전설적인 도사인 허 뭐시기는 뇌위진동변경인이라는 주문을 읊으며 악마들을 사냥했다고 읽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뱀은 벼락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칼을 들어 불도마뱀을 마구 난자하기도 했다.

타격은 분명 있었지만, 어째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뱀은 다시 벼락을 부르지 못했다.

아마엔이 제 아비의 귀에 대고 외쳤다.

"스승님을 도와드려야 해. 아빠, 그냥 도망가면 안 돼!"

"우리가 어떻게 말이야!"

"우리, 마력 포션을 사 왔잖아."

뱀은 로일에게 마력 포션을 사 올 것을 주문했다.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최고급으로.

마력 포션이라는 것이 원체 비싼 탓에, 그 수도에서도 많은 물량을 사 오지는 못했다.

뱀이 마력 포션을 필요로 했다면, 마력을 보충해야 할 상황이 생기리라는 것을 예상한 것 아닐까.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인 것 같았다.

로일도 아마엔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상인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은 바로 판단력이다.

리스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괜찮은 상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이 함께 있는 지금, 얼른 달려 도망치는 것도 준수한 선택이리라.

그리고, 리스크를 짊어지고 투자함으로써 돌아올 대가를 계산하고.

또한 인의를 잊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상의 재질이다.

로일은 아직 거상이 되지 못했지만, 거상의 선택을 내렸다.

"너는 지금 당장 도망쳐라. 곧바로 달려내려 가!"

"하지만······."

"당장!"

엄하게 말하여 아마엔을 쫓아낸다.

아마엔은 총명하게도 그 지시를 따랐다.

대신 로일은 수도에서 비싸게 주고 사 온 말에 올라탔다.

"내가 미쳤지······."

굳이 무리해서 좋은 말을 샀던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말은 잔뜩 겁먹은 상황에서도 앞을 향해 달렸다.

협탁 위에 올려 둔 자루를 로일이 확 잡아챘다.

이 안에 마력 포션이 있다.

뱀과 불도마뱀이 싸우자 불덩이가 마구 흩날렸다.

콰앙!

로일과 말의 바로 앞에도 불덩이가 떨어졌다.

말이 깜짝 놀라서 앞발을 치켜들고 히히힝 울었다.

로일은 그 자리에서 낙마했다.

놀란 말은 주인을 놔두고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내가 금화를 얼마나 주고 널 샀는데!"

불타 죽기 직전이다.

"으아아아 우르니임! 마력 포션입니다아!"

말을 따라가기엔 글렀고, 뱀에게 마력 포션이라도 줘야지.

뱀이 로일을 돌아봤다.

로일은 온 힘을 다해서.

어깨가 부서져라 마력 포션이 담긴 자루를 하늘로 던졌다.

"제길, 운동 좀 해 둘걸!"

하지만 아쉽게 힘이 모자란다.

그 귀한 마력 포션이 바닥에 와장창 떨어지려는 순간.

투명한, 무언가가 자루를 허공에서 잡아챘다.

뱀의 마법이 분명했다.

"사아아악!"

뱀이 포효하며 그 자루를 한입에 삼켰다.

로일은 그것을 보자마자 등을 돌려 도망쳤다.

쩌저저저정!

뒤에서 벼락이 번쩍 떨어진다.

* * *

교양있는 문화뱀으로서.

마실 것을 뚜껑도 안 따고 병째 씹어 먹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급상황 중의 위급상황 아닌가.

입안에 들어온 자루가 뭔지 몰랐는데, 씹어 먹고 나니까 쏴아아 시원한 기운이 목을 타고 번진다.

물론 뾰족뾰족한 유리 조각의 날카로운 식감도 느껴진다.

내 소화 능력을 한번 믿어 보자.

*「천뢰령lv1을 사용합니다.」

*「천뢰령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천뢰령lv1이 천뢰령lv2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 기술도 레벨이 올랐다.

*「천뢰령lv2를 사용합니다.」

쩌저저저정!

위력이 한층 더 강해진 번개가 불도마뱀에 내리쳤다.

저 봉우리 반대편 마을에서는 칼레아 산이 사실 화산이었나 생각할 것이다.

불덩이가 하늘로 솟고 벼락이 연속적으로 떨어지니.

'어!'

벼락은 신기하게도 불도마뱀의 불길을 걷어내는 효과가 있었다.

펠레리안의 조언 덕에 알게 된 것이다.

- 저거, 저거다!

펠레리안이 손가락질하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내 눈에도 보인다.

불길이 사그라든, 도마뱀의 몸통 안에.

명백히 눈에 띄는 보랏빛 덩어리가 있었다.

- 악마의 마석이야!

악마의 열매 같은 건가!

- 저놈은 어차피 고위 악마의 화풀이로 만들어진 것. 주변의 것들을 불태운 뒤에는 스스로마저 불타 사라질 것이다. 저 마석이 그 에너지원일 것이고.

펠레리안은 그러기 전에 저놈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악마의 마석이야말로 최고의 마법 촉매 중 하나지. 네 진화의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특수 진화 조건 중에 악마 어쩌구가 있었던 것 같다.

그걸 생각해 보면 지금은 분명 기회였다.

한 건 했군요. 펠 영감님.

"뱀아!"

"우리가 왔다아!"

그리고 때마침 드워프들도 우르르 달려 나왔다.

그들의 몸은 흠뻑 젖어 있었다. 손에는 양동이 같은 것들도 들고 있다.

심층에 들어갈 때 쓰는 냉각수가 분명했다.

"나한테 맡겨!"

여태까지 잡고 있던 사슬을 로제나와 드워프들이 잡았다.

이번에는 딸려 나가지 않도록 바위기둥에 한 바퀴 감아서 단단히 고정한다.

"손 놓치는 새끼들은 내가 죽인다앗!"

로제나가 무섭게도 외쳤다.

새 광산 군주는 그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무리 봐도 그게 맞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불도마뱀이 내게 반격을 가했다.

콰악!

놈이 내 몸을 콱 물은 것이다.

엄청나게 뜨겁고 아팠다. 게다가 그 얼굴이 푸른 수염하고 똑같이 생겨서 기분도 더럽다.

*「거대화를 해제합니다.」

유연한 사고를 통해 그 위험에서 벗어났다.

일순간, 내 배 속에 있는 유리 조각들은 괜찮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유리 조각이 그대로 남아 배가 터지지는 않았다.

놈은 허공을 물어 챘다.

그사이 나는 툭 떨어졌다.

아공간을 열었다.

새벽의 단검 아쉬라.

그것을 입에 꽉 물었다.

'이런, 키뱀아!'

단검에 키뱀이가 딸려 나왔다.

녀석은 다시 아공간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덩굴손을 휘감아 꽁꽁 달라붙었다.

얼른 풀려고 했지만 놔주질 않는다.

'갑자기 왜 그래!'

- 뭔 걱정이냐! 너보다 열 내성도 높은 세계수의 키메라인데!

펠레리안의 말이 맞았다.

에라 모르겠다!

사그라들었던 놈의 몸이 다시 복구되기 전.

나는 튀어 올랐다.

*「식심의 도약lv4를 사용합니다.」

투명한 손은 뜨거운 열기 때문에 파훼되므로 어쩔 수 없다.

비늘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놈의 마석을 향해 접근했다.

뱀도류.

*「페랑 유파 단검술lv1을 사용합니다.」

악마 가르기.

서걱!

마석이 갈라지는 감각이 똑똑히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극한의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쉬라의 칼날이 녹아내렸다.

안 돼.

이건 내 열 내성으로는 버틸 수가······.

*「새싹의 키메라가 교감lv1을 사용했습니다.」

*「열 내성lv20을 공유합니다.」

그때, 열기의 부담이 확 덜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불이 붙은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사아아악!"

내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자, 누군가가 냉각수를 확 끼얹었다.

"괘, 괜찮아?"

민머리에 둥글둥글한 얼굴.

순한 눈.

둥켈이었다.

아프다. 안 괜찮아.

"엄청 아파 보여."

그 표정을 보니 내 몸을 확인하기가 두렵다.

둥켈은 내 몸에 체력 포션을 끼얹었다.

다행히, 고통이 확 가시면서 몸이 낫기 시작했다.

그 불도마뱀 자식은······.

아, 잡았다.

*「파이몬의 불도마뱀lv140을 처치했습니다.」

도마뱀의 몸체는 완전히 무너졌다.

시뻘겠던 불꽃이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름답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연속적으로 올랐다.

그럼으로써, 내 레벨은 31이 되었다.

생각보다도 빠른 레벨업이었지만 아직 진화가 가능하지는 않았다.

역시 40레벨이나 50레벨이 되어야 하는 건가.

그때였다.

*「진화가 가능합니다.」

그런 메시지가 들린 것은.

나한테 하는 소리였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

[새싹의 키메라lv10]

······

[상태]

[진화 가능]

──────────────

오 드디어!

키뱀이도 진화의 순간을 맞이했다.

키뱀이가 새로 진화한다면 그때는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줘야겠다.

계속 새싹키뱀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 빨리 악마의 마석을 취하거라.

펠레리안이 재촉했다.

불도마뱀이 사라진 자리에는 보랏빛 마석이 있었다.

──────────────

[악마의 마석: 파이몬]

──────────────

이건 몇 등급 마석이다 하면서 분석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키뱀이가 덩굴손을 까닥이며 관심을 가졌다.

너한테는 아직 일러.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마치 양보하려는 듯 덩굴손을 움츠렸다.

그것이 몹시 기특했다.

아버지에게 닭 다리를 양보하는 자식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나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석을 삼키려 했다.

"프사아아악!"

그리고 이빨이 불타는 듯한 통증에 얼른 입을 뗐다.

- 뭐하냐.

'아, 너무 뜨겁잖아요!'

이걸 먹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 뜨거워서는 목구멍이고 몸통이고 싹 다 불탈 것이다.

내 열 내성 11레벨로도 부족한 것일까.

'물이라도 부을까요?'

- 그러면 안 되지! 지금도 시시각각 힘이 유출되고 있는데.

보랏빛 마석에서는 마력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듯할 때 먹어야 맛있는 그런 건가 보다.

'음······.'

나는 키뱀이를 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덩굴손을 꼼지락대고 있다.

키뱀이는 불 특성이 있다, 나보다 열 내성이 높기도 하고.

나는 눈을 딱 감고 조심스럽게 펠레리안에게 물었다.

'이거 키뱀이한테 주는 건 어떨까요.'

- 뭐어?

그냥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얘도 이제 진화할 것 같은데, 특수 진화 조건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 그것참 좋은 생각이다.

'······네?'

- 네가 먹는 것보다 훨씬 낫겠어!

그리 말하는 펠레리안에게 왜인지 조금 섭섭했다.

나는 눈을 꾹 감고 키뱀이를 톡톡 두드렸다.

'네, 네가 먹으렴.'

키뱀이가 새싹을 까닥였다.

예의상 한 번 거절할 것을 기대했지만.

키뱀이는 순식간에 덩굴손을 뻗쳤다.

과연, 마석이 뿜고 있던 보랏빛이 키뱀이의 덩굴로 꿀렁꿀렁 넘어갔다.

아이 잘 먹는다.

막상 잘 먹는 걸 보니 기분이 썩 흐뭇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곧바로 돌아왔다.

*「특수 진화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이제 키뱀이의 진화 타임이다.

< 메가 진화 >

100. 메가 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