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공물을 바쳐라.
그 마물은.
쾅, 콰앙!
뱀이라기에는, 나무껍질로 뒤덮여 있었고.
나무라기에는, 너무 생동감 있게 움직였다.
놈이 꼬리를 흔들자 거기에 얻어맞은 오소리 마물 하나가 팽그그르 회전하며 날아갔다.
"그워어어어!"
포효 소리는 전혀 뱀 같지 않았다.
굳이 빗대자면 거대한 동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 소리 같다.
성량이라고 해야 할까. 폐활량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것이 대단해 돌풍이 불어닥쳤다.
심지어는 마차의 창문, 그 창살 뒤에 숨어서 지켜보던 라니아에게까지 그 바람이 와닿았다.
생물의 입에서 나온 바람인 만큼, 당연하게도 입 냄새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냄새는······.
'향기로워.'
라니아는 문득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대수림의 상쾌한 바람 냄새였다.
물론 그 끝에, 약간의 비릿한 혈향이 섞여 있었지만.
라니아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그 거대한 나무 뱀의 목덜미에, 또 하나의 머리가 돋아나 있는 것이다.
왕관을 쓴, 작은 흰 뱀이.
그 흰 뱀에 시선을 빼앗긴 것은 라니아만이 아니었다.
올리버도, 기사 자인도 놀란 눈으로 흰 뱀을 쳐다봤다.
흰 뱀은 땅바닥에 연속적으로 광선을 발사했다.
말이 광선이지 화살을 쏘는 것과 다름없는 위력이었다.
그것을 왜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 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니.
거대한 나무 뱀이 그 광선을 쫓아 빙글빙글 도는 것이다.
그 속도가 점점 가속했다.
피피피피피핑
"그워어어어!"
나무 뱀이 회전하는 속도가 빨라져 마치 소용돌이처럼 보일 지경이다.
일순간 마물들마저 접근하지 못하고. 몬스터 웨이브가 확연히 느려졌다.
잠시 후, 올리버가 경박하게도 외쳤다.
"머, 멈췄다아!"
그러했다.
광선이 우뚝 끊기자, 나무 뱀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머리가 핑 도는지 땅바닥에 대가리를 쾅, 뉘었다.
우두머리가 멈췄기 때문일까.
특히 강대해 보이는 몇몇 마물들이 자리를 잡고 휴식하기 시작했다.
그 주변에 있는 마물들도 하나둘 배를 깔고 누웠다.
즉, 국소적으로 몬스터 웨이브가 멈춰 버린 것이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이 업적을 이룬 것이, 저 새송이버섯처럼 돋아나 있는 작은 뱀 한 마리라는 것을.
키메라 뱀이 드러눕자. 작은 뱀은 꼿꼿이 몸을 세웠다.
그 모습이 자못 위풍당당하다.
그리고 홉 고블린 나나루크가 거침없이 나무 뱀 위로 뛰어올랐다.
"이렇게 다시 보다니!"
사이가 막역한 듯했다.
서로 껴안고 난리가 났다.
고블린이 뱀 마물과도 사이가 좋을 수 있을까.
수수께끼인 것은 저 홉 고블린도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키가 크고 강한 고블린은 처음 봤다.
게다가······.
"사악, 사아악."
"아, 포션 남는 거 있으면 달라고? 당연히 그래야지. 몇 병 줄까. 열 병?"
"쉬쉿 쉬잇."
"하하하, 정말? 푸하하하. 넌 역시 재미있다니까."
"쉬시싯."
"그만해, 그만, 하하하!"
자인은 생각했다.
'저거 못 알아듣는데 그냥 알아듣는 척하는 거 아닐까.'
대체 어떤 농담을 들었길래 저리 웃는 거지.
아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저 고블린과 어떻게 대화가 통하는 거지!'
그 사실을 깨달은 자인은 등골이 쭈뼛했다.
나나루크가 자신의 몸에 올라탄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키메라가 슬쩍 머리를 들며 으르렁댔다.
그때, 작은 뱀이 호통을 쳤다.
"사아아악!"
"구우······."
키메라는 다시 털썩 머리를 떨구었다.
명백히 키메라의 우위에 있는 모습이었다.
'저 작은 뱀이 사실 본체일지도!'
자인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 *
까, 깜짝 놀랐네.
키메라 뱀이 나나루크를 잡아먹을 뻔했다.
냅다 호통을 치긴 했지만, 설마 녀석이 얌전하게 다시 드러누울 줄은 몰랐다.
지배의 왕관은 분명 통하지 않았는데.
함께한 시간이 꽤 되는 만큼 이제 내 말을 좀 들어주는 걸까.
나나루크는 자기가 방금 죽을 뻔한지도 모르고 내 등을 마구 쓰다듬었다.
나는 더욱 당당하게 몸을 치켜세웠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성공이다! 성공이야!'
"뭐가?"
'그냥! 별거 아니야!'
뱀을 완전히 멈추는 데에 성공한 것 말이다.
잠깐 멈추는 것은 여태까지도 몇 번 성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예 쉬게 만든 것은 처음이다.
몬스터 웨이브라고 해도 쉬는 시간은 필요했다.
나무로 만들어져서인지 잘 쉬지 않는 키메라였지만, 종종 드러누우면 서너 시간 정도 잠을 잤다.
지금도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면(뱀답지 않게도 놈은 눈꺼풀이 있었다.) 자려는 것이 확실했다.
대단한 업적이 분명하다.
-아주 자화자찬이구나.
펠레리안이 빈정댔지만 그것은 그의 성격이 꼬였기 때문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업적 '몬스터 웨이브의 저지자'를 달성했습니다.」
뭐라고오.
나는 얼른 확인했다.
──────────────
[몬스터 웨이브의 저지자]
일시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멈췄습니다.
포효에 위엄이 더해집니다.
──────────────
······이걸 업적으로 쳐도 되나?
아니, 내가 몬스터 웨이브를 잠깐이나마 멈춘 것은 사실이지.
그렇다면 더 당당해져도 될 것이다.
게다가 실질적인 이득까지 얻었다.
서너 시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나루크와 잠시 회포를 풀 수 있겠군.
'야, 패왕.'
"왜, 우르오로스?"
나나루크가 씨익 웃었다.
서로 주먹을 부딪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아쉽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대수림을 평정한 거야?'
룬가 부족이 강대한 부족이라고 해도 수가 한정되어 있었다.
혼자서 홉 고블린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나나루크 정도밖에 없었다.
"비밀이 있지."
나나루크가 고함을 지르자 홉 고블린 전사들이 달려왔다.
"봐봐. 익숙한 얼굴들이지?"
'아 저거 네 동생이잖아!'
홉 고블린 중에는 데쉬난에게 죽을 뻔한 나나루크의 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덩치가 훨씬 커졌다. 게다가 고블린답지 않게 근육질.
눈에 힘을 줘서 그들을 살펴보았다.
──────────────
[홉 고블린 워리어 카디람lv4]
······
──────────────
어라,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
홉 고블린들은 또 한 번 진화를 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나랑 전투 몇 번 하니까 다들 진화하더라고."
나나루크의 설명은 그러했다.
홉 고블린 킹으로 진화한 그녀가 직접 전사들을 이끌고 싸우다 보니, 그중 몇 명이 홉 고블린 워리어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역시 '왕'이구만.
아버지가 고유종이었다면 나나루크는 '특수종'에 속하는 마물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서 조금 주눅이 들어 버렸다.
'나보다 너가 더 대단하네······.'
나도 물론 열심히 싸우긴 했지만 ······.
"무슨 말이야?"
하지만 나나루크는 얼토당토않다는 듯 웃었다.
"이 몬스터 웨이브 네가 이끄는 거 아니야?"
'······뭐?'
그럴 리가 없다.
세상을 휩쓸듯 달려가는 마물들을 지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키메라 녀석이다.
'나, 납치된 거야.'
"엥."
엥은 무슨 엥이냐.
"당연히 너가 조종하는 줄 알았지."
'왜 그렇게 생각했지?'
"아니, 이 나무 뱀이 네 말을 듣잖아. 그리고 뭣보다······ 너 왕관 쓰고 있고."
이 탐스러운 왕관을 말하는 건가.
나나루크가 당연하다는 듯 그리 말했다.
나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챘다.
설마, 군터랑 그 마법사들도 나를 몬스터 웨이브의 주동자쯤으로 생각할까.
-대륙의 공적이 될지도 모르겠군.
이미 무림공적으로 지정된 바 있는 펠레리안이 한 말이기에 더 신빙성 있었다.
나는 두려움에 달달 떨었다.
-뭘 그리 걱정하나?
'저를 잡기 위한 천라지망이 펼쳐지면······.'
-무슨 헛소리인지. 그럴 거였으면 고블린들의 뱀신부터 되지 말았어야지.
펠레리안의 설명은 그러했다.
-사실 저 고블린 여자애를 홉 고블린 킹으로 진화시킨 것도 너 아니더냐.
'내가 그런 건가!'
-저 고블린들이 대륙으로 넘어가서 세를 확장하면 너는 금방 유명해질 것이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나나루크.
그래, 너였구나. 처음부터 너였어.
내가 뿌려 둔 복선이.
-어차피 네가 마물인 이상 사냥하려는 놈들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괜히 쫄지 마.
'예에······.'
-나를 보아라. 내가 천하의 공적 취급을 받았지만 어느 시점 이후로는 내게 덤비는 놈조차 없었다. 강하면 되는 것이다. 감히 덤비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너도 진작 자신만만하게 말하지 않았냐.
'······아.'
-사무녕이 되어라!
그래, 펠레리안의 말이 맞다.
순간 쫄았던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소시민적 사고를 버리자!
그때, 나나루크가 수하들을 시켜 포션을 가져다주었다.
대나무 통에 담긴 포션 스무 병.
"네 포션 덕택에 수십 명은 살렸어. 더 필요하면 남은 거 다 줄게."
대수림을 벗어난다면 포션을 더 만들기 힘들 것이다.
고블린들의 수가 많으니 그녀 역시 포션을 물 쓰듯 할 수 없을 테고.
스무 병이면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나는 투명한 손 마법으로 포션 한 병을 땄다.
그리고 나나루크에게 손을 내밀게 한 뒤 포션을 조금 부었다.
"이거 그냥 침 바르면 나을 텐데."
손에 꿰뚫린 상처가 있는데도 터프하기 그지없다.
"포, 포션이라니!"
누군가 그리 소리쳤다.
돌아보니 웬 인간 둘이 서 있었다.
마차 안에도 여자애 하나가 숨어 있는 것 같고.
'어라.'
-왜 그러냐.
'아니, 뭔가 익숙한 얼굴 같아서요.'
저 갑옷을 입고 있는 젊은 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반파된 마차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튀어나온 것은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꼬마애였다.
"배, 뱀님!"
그녀는 마치 축구선수가 세레머니하듯 내 앞에 미끄러지며 무릎을 꿇었다.
"저희를 살려주세요!"
그리고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한다.
음, 예법이 탁월한 인간이구나.
"포션을 나눠 주세요. 올리버랑 자인 경이 많이 다쳤어요."
어.
의외의 부탁이었다.
저렇게 어린 꼬마애가, 자기를 살려 달라는 게 아니라 아저씨 둘을 구해 달라고 뱀한테 절을 하다니.
'으음······.'
솔직히 조금 마음이 울렸다고 해야 할까.
불쌍하기도 하고.
"무슨 소리냐 인간!"
하지만 나나루크가 호통쳤다.
"뻔뻔하기 그지없군. 얘들아. 당장 깨끗하게 처리······. 어, 왜?"
당황한 내가 나나루크의 옷자락을 깨물고 늘어졌다.
역시 패왕인가, 가차 없다.
'잠깐, 아직 죽이지는 말고.'
"직접 처치하게? 아, 그게 낫겠구나. 마성을 흡수하려면."
'아니 그게 아니라······.'
펠레리안이 혀를 쯧쯧 찼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들을 죽이길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난 죽여도 상관없는데?
무시했다.
나나루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뭔가, 뭔가 마물다운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나나루크에게 내 말을 전해 달라고 시켰다.
나나루크가 흔쾌히 통역사 역할을 했다.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나, 마물의 왕 우르오로스가 묻겠다."
'······.'
통역이 아주 극적이다.
'저어······ 일단, 이름이 뭐니 꼬마야.'
"목숨을 구걸하기 전에 이름을 밝히거라!"
나나루크의 통역은 펠레리안의 마음을 쏙 사로잡은 것 같았다.
-훌륭하군! 역시 왕이 되어서인가. 위엄이 무엇인 줄 알아.
원래부터 이 엘프는 허례허식을 좋아하고 허세가 있었지.
여자아이가 침착하게도 대답했다.
"저, 저는 그레이림 자작의 딸인 라니아 그레이림이라고 합니다······."
아.
조금 전에 나와 마물들이 완전히 뭉개고 간 그 영지의 영애였던 것 같다.
시신들이 참 많았는데 말이야.
"군터 그 나쁜 놈이······ 아버지를 잡아가고 어머니를 탑에 가뒀어요······ 그래서 외할아버지댁을 찾아가던 중이었어요."
역시 군터는 악의 주구가 틀림없다.
분명 영지에서 부서진 탑을 본 것 같은데······.
자신을 라니아라고 소개한 여자애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지 마. 참, 맘이 안 좋네.'
"듣기 싫다. 울음소리를 내지 마라."
'······.'
그래, 이렇게 된 거 그냥 마물답게 가자.
'포션이야 한 병 나눠 줄 수 있는데. 뭐 대가로 줄 것 있니?'
처음으로 대화를 나눠 보는 인간들이다.
저 귀족 여자애야 아무것도 모르는 듯하지만 기사나 아저씨는 아는 게 좀 있을 것 같다.
정보라든가 ······ 갑옷도 좀 탐나고.
어!
기사의 갑옷. 군터와 그 따까리들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다.
그제야 기억났다.
내 꼬리에 입을 맞췄던 미친 변태 기사 아닌가.
경비대장이 저 기사를 구하고 목숨을 잃었더랬다.
이번에도 살아남았다니, 정말 명줄 한번 질긴 놈이다.
'물어볼 것들도 있고. 아 그리고 혹시 칼 남는 거 있나?'
"목숨을 구걸하려거든 공물을 바쳐라. 값진 지식이든, 질 좋은 무구든."
'햐. 대단한데 나나루크.'
나도 조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인면 거미를 0.9 나나루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나루크야말로 대체할 수 없는 완벽한 통역사이다.
그녀에게 고블린의 왕국을 세우려는 꿈이 없었다면 계속 함께 다니고 싶을 정도였다.
엘븐 브로드 소드가 부러져서 물어본 것이었다.
고블린들의 칼은 솔직히 조악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서 숙덕거렸다.
"아가씨,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
"괜찮아요. 가문의 보물이든 어떻든 우리가 살아야지요."
그러더니 기사가 단검 한 자루를 가지고 와서 조심스럽게 치켜들었다.
"그레이림 영지의 보물입니다······."
엇.
멋진 단검이다.
월도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는 단검.
칼날이 흰빛으로 반짝이는 게 내 마음에 꼭 들었다.
"이름은 새벽의 아쉬라. 백은철로 만든 단검입니다만······."
아쉬라. 이름조차 예쁘기 그지없었다.
──────────────
[새벽의 아쉬라]
백은철로 만든 단검.
너무 가벼운 것이 흠이나, 칼날이 무뎌지지 않는 마법이 깃들어 있다.
──────────────
나는 투명한 손 마법으로 그 단검을 들었다.
가볍다! 단검이라 그런지 몰라도 확실히 엘븐 브로드소드보다 가벼웠다.
아아, 이 서늘한 감각.
검을 잡은 건 오랜만이군.
나는 그대로 검무를 췄다.
허공을 가른 검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다.
*「어설픈 검술lv2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전혀 어설퍼 보이지 않는데.
기사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이다.
왜 저리 쳐다보는지 물었다.
나나루크가 통역해 줬다.
"불경한 눈빛이로군."
"아, 앗 죄송합니다."
"뭐가 이상하기라도 하나?"
"단검술이 아닌 검술의 움직임이기에······."
단검술하고 검술하고 다른 건가?
나는 기사의 상태창을 훔쳐봤다.
──────────────
[기사 자인lv27]
······
──────────────
별 볼 일 없는 녀석은 맞았다.
다만 스킬 중에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
[스킬]
······[철사자 제식 검법lv12], [단검술lv2] ······
──────────────
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에 있는 아저씨도 살펴봤다.
──────────────
[사냥꾼 올리버lv36]
[스킬]
······[페랑 유파 단검술lv20] ······
──────────────
입에서 침이 뚝 흘러나왔다.
찾은 것 같다.
대가로 받을 값진 지식을.
< 과격한 성기사들 >
071. 과격한 성기사들
자인은 장검을 쥐었다.
철사자 기사단의 제식 장검이 아닌 고블린제의 조악한 칼이다.
무게중심도 이상하지만 그래도 장검은 장검이었다.
검을 쥔 순간부터 자인은 한 명의 기사가 되었다.
기사단에 입단한 지 3개월 뒤부터는 결코 그러지 않았지만, 그는 검을 휘두르면서 외쳤다.
"휘두를 때는 산만큼 무겁게, 철사자 제식 중검, 일식!"
후웅!
도끼로 장작을 패듯 검을 내리긋는다.
"체중을 앞으로 이동하며 무게를 싣는다!"
교관은 분명 그리 말했다.
앞발을 내디디면서 검에 체중을 싣는 것이 중검의 기초적인 묘리다.
철사자 제식 검법은 철저하게 실전성을 중시한 검술이었다.
"연계식, 사, 사자 찌르기!"
그리고 또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다.
동시에 아래로 내렸던 검을 마치 창 찌르듯 앞으로 내민다.
팔을 완전히 뻗은 자세이기 때문에, 검이 닿는 거리는 상대가 예상하는 범위를 넘어서기 마련이다.
뒤로 물러난 상대의 목을 찌르는 연계식이다.
짝짝짝짝-
자인을 지켜보던 자들이 박수를 쳤다.
라니아도 열성적으로 손뼉을 쳤으며, 올리버는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문제는 그 관중들에 고블린 또한 포함됐다는 것이다.
자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주목을 받으면 흥분하는 이상 성벽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 상황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거 꿈인가?'
마물과 고블린에게 둘러싸여서 검술 시범을 보이고 있다니.
게다가 마물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요구한 건 한 마물이었다.
저 거대한 키메라 뱀······ 의 목덜미에 달려 있는 작은 흰 뱀.
아무리 봐도 하찮아 보이는 마물이다.
비늘이 수정 같고 머리에 달려 있는 왕관이 범상찮기는 했으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입을 헤 벌리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것이다.
대체 뱀이 검술을 왜 배우고 싶다는 것일까.
"이것이 중검 일식과 그 연계식입니다 ······."
"보기에 흡족하구나."
뱀의 말을 통역해 준 것은 고블린들의 왕이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통역인지도 의심된다.
저 작은 흰 뱀이 저리 고풍스럽고 위엄있는 말투를 쓰지는 않을 듯하니.
"직접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자인이 그리 물었다.
처음에는 뱀이 어떻게 검을 휘두르겠다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뱀은 마법을 쓸 수 있었으니.
빼앗아 간 단검 아쉬라를 마치 장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었다.
즉, 허공에 검이 두둥 떠올랐다는 말이다.
"어, 그러니까, 이제 앞발에 체중을 실으시고 ······."
자인은 하던 말을 멈췄다.
뱀에게는 앞발이 없다.
게다가 본체는 저리 나무줄기에 박혀 있음에야.
"······검을 아래로 내리그으십쇼."
후웅!
검이 맥없이 하강한다.
"또 한 걸음 내디디며 창처럼 쏘아 내십······ 쇼."
단검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러곤 하늘 높이 휘익.
투명한 손은 그대로 하늘을 한 바퀴 돌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
이건 명백히 검술이 아니었다.
짝짝짝짝-
하지만 고블린들은 손뼉을 쳤고, 졸고 있던 라니아도 화들짝 따라 박수를 쳤다.
뱀은 기쁨의 춤을 추고 있었다.
대체 왜 뿌듯해하는 건지 자인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제식 검법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데······.'
당연하게도, 허락 없이 타인에게 철사자 기사단의 제식검법을 전수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뱀에게 전수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
자인은 그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게다가 이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은 자인뿐만이 아니었다.
그 과거가 수상쩍기 그지없는 사냥꾼 올리버.
그 역시 뱀에게 단검술을 전수할 것을 요구받았다.
올리버는 극도로 싫은 기색이었지만, 라니아를 위해 참았다.
"페랑 유파 단검술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마물을 잡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냥꾼이다.
설마 사냥감에게 단검술을 전수하게 될 줄이야.
자신의 단검술이 특별한 것임을 눈치챈 것일까.
대체 어떻게?
통역을 맡은 고블린은 정확히 페랑 유파 단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지목했다.
그 내막을 올리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페랑 유파 단검술.
페랑이라 함은 제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대도(大盜)의 이름이다.
아직까지도 로그들의 우상처럼 취급받는 '처인 페랑'.
올리버는 놀랍게도 그의 단검술을 이어받은 자였다.
당연히 비밀이었다. 이미 올리버가 습득하고 있는 게 자인과 라니아에게 드러나 버렸지만.
"아주 어려운 단검술이니······ 못 따라 하시는 게 당연한 겁니다."
허리춤에 메어 있는 홀스터에서 단검을 발검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도, 도, 도, 독수리 죽이기······!"
단검술을 하면서 기술명을 외쳐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올리버는 단검을 뽑는 동시에 던졌다.
단검이 허공에서 팽그르르 회전했다.
이어서 올리버의 몸이 아래로 푹 꺼지더니 귀신같은 발차기가 펼쳐졌다.
단검의 손잡이를 정확히 걷어차자.
쐐액- 퍽!
날아간 단검이 땅에 틀어박혀 진동했다.
실전성은 떨어지는 동작이지만 뒤지게 멋있다는 점에서 페랑 유파 단검술다웠다.
그 모습을 본 뱀의 반응은 격렬했다.
"사아아악!"
"몹시 흡족하도다!"
나나루크가 굳이 통역하지 않아도, 뱀이 만족했음은 확실했다.
"한번 해 보시죠."
발도 없는 뱀이 어찌 독수리 죽이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뱀은 해냈다.
휘리리릭!
단검 아쉬라가 허공에서 핑그르르 회전했다.
문제는, 그 회전이 느렸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미친.'
검병을 잡고 있을 투명한 손.
그 손목까지밖에 구현되지 않은 마법이 허공에서 검을 돌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오히려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오오오!"
"와아아아아!"
고블린들이 박수를 치며 함성을 내질렀다.
검이 끝없이 회전하는 모습이 마법 같았기 때문일까.(실제로 마법이 맞다.)
퍽!
발로 걷어차는 대신 단검은 그대로 땅바닥에 꽂혔다.
그 기세가 전혀 대단하다고 할 수 없었으나.
룬가의 고블린들이 앞서 뱀의 이름을 제창했다.
"우르오로스! 우르오로스!"
"우르오로스! 카악 칭깃!"
뜨거운 열기가 번지는 것이 마치 광신도들의 모습 같다.
그런 것치고는, 그 신앙의 대상인 흰 뱀은 우스꽝스러운 춤이나 추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올리버는 가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이러다가 화병이 생길 것 같다.
"후우······."
한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마음을 다잡는다.
자인과 올리버의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려 들었던 사이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동병상련의 애환을 느꼈다.
다만 그들에게도 위안이 되는 것은 있었다.
'절대 제대로 습득하지는 못하겠지.'
뛰어난 검술은 그 자체로 상위 스킬이 된다.
하지만 마물이 검술을 성공적으로 습득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손발이 제대로 달려 있는 이족형의 마물들이 극히 드물게 검술 비슷한 것을 습득할 따름이다.
즉, 저런 마법 쓰는 뱀이 검술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극히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불가능'.
페랑 유파 단검술이나 철사자 제식 검법이 유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흉내나 내도록 두자.'
그것이 자인과 올리버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 * *
「특성 '정진'으로 인해 스킬의 습득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페랑 유파 단검술lv1'을 습득했습니다.」
'아아, 이 정돈가······.'
세 시간 만에 나는 페랑 유파 단검술을 습득하는 데 성공했다.
철사자 제식 검법은 물론이다.
원래 지니고 있던 어설픈 검술 스킬은 사라졌다.
아무래도 철사자 제식 검법이 그 상위 스킬로 취급되나 보지.
드디어,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고 단검술까지 습득했다.
그냥 '검술'만 얻어도 감지덕지였는데 이름까지 붙어 있다니.
저 펠레리안도 차마 이 스킬들이 후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제기랄, 저 인간들을 미리 죽여 놨어야 했는데. 차라리 허접한 검술이었으면 칼 들고 헛짓거리도 안 했을 거고······.
'거 너무 걱정 마십쇼.'
-뭔 소리냐 또!
'마법도 열심히 배울 테니까.'
-퉷.
마음에 들면 마음에 든다는 티를 내면 될 것이지.
역시 성격 참 되바라진 노인네다.
하지만 나는 마검사가 되기로 결심한 바.
펠레리안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워어어······."
그때, 키메라 뱀이 또 한 번 울음소리를 냈다.
일어나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겨우 세 시간밖에 안 잤으면서 벌써 떠나자고 보채는 것이다.
내가 호통을 쳐도 이젠 안 먹힐 터.
확실히, 키메라 뱀은 그저 대륙으로 나아가는 것에 미쳐 있는 마물이었다.
'나나루크!'
나는 나나루크를 불렀다.
아쉽지만 벌써 석별의 정을 나눌 시간이 다가왔다.
'협곡, 등반할 수 있겠어?'
"뭐 어쩔 수 없지. 이러다가는 우리도 몬스터 웨이브에 휩쓸릴 테니까."
나나루크와 함께 가면 좋겠지만, 내 욕심으로 그녀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딸린 식구가 수백은 되지 않은가.
듣자 하니, 지금은 싸울 수 있는 전사들을 데리고 대륙원정을 나선 듯했다.
나머지 비전투 인원들은 대수림에서 함께 모여 왕국의 기반을 다지고 포션과 무기를 제작 중이라고 한다.
언젠가 대륙에 고블린들의 붉은 광풍이 몰아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만나자구!"
나나루크의 눈에도 아쉬운 빛이 깃들어 있었다.
'나나루크, 주먹을 내밀어 봐.'
"······이렇게?"
나나루크가 주먹을 내밀어 보였다.
꼬리가 자유로우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나는 나나루크의 주먹에 머리를 콩 박았다.
'이게 우리의 인사법이야.'
"멋진걸······."
우정의 온도가 뜨거워서 지구온난화가 와 버릴 것 같다.
-지랄을 하는군.
펠레리안은 싹 무시했다.
나나루크가 키뱀이의 등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자아, 떠나자아!"
고블린들이 자리에 일어섰다.
그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게 공손히 인사했다.
몇몇은 무릎 꿇고 내게 기도하기도 했다.
우르오로스로서의 위상이 많이 올라간 것 같다.
인간들을 싹 쓸어버리려고 했던 나나루크였지만, 그래도 그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너희 인간들도 살아남길 바라지."
특히 라니아라는 소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나루크의 외모는 이제 어지간한 인간이나 요정만큼 말끔했으니, 그 눈에 멋져 보일 것이다.
"감사했습니다. 포션도······."
"내 것도 아닌데 뭐."
나나루크가 슬쩍 주먹을 들었다.
피스트 범프를 금방 습득한 듯했다.
바로 라니아의 이마를 쳤으니.
꾸웅.
"아악."
라니아가 이마를 감싸 쥐고 물러났다.
자인과 올리버가 당황했지만 나나루크는 그저 인사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자기도 이마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너도 쳐."
"네에······."
라니아는 소소심하게 툭, 나나루크의 이마를 쳤다.
"그우우우!"
마침내 키메라 뱀이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본 다른 마물들도 휴식을 멈췄다.
이제는 내 통제도 먹히지 않을 터.
'잘 있어라 인간들!'
인간들은 살려 두기로 했다.
'마차에 숨어 있기라도 해. 너희들은 살려 주도록 하지!'
나나루크가 내 말을 위엄 있는 방식으로 해석해 주었다.
그러자 올리버가 라니아를 업어 메고 마차의 잔해로 들어갔다.
*「초급원소마법:흙lv5를 사용합니다.」
마차는 진작 바위 사이에 밀어 두었다.
그 위에 흙까지 끼얹었으니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뭐, 마물들이 찾아내게 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정도면 해 줄 것은 다 하지 않았나.
"그럼, 작별이다!"
나나루크가 외치고, 다시 웨이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키메라뱀이 주도하는 파도가 대륙을 뒤덮을 터.
키뱀이는 포효하며 출발했다.
아니, 출발했어야 했다.
놈이 설마 갑자기 그런 짓을 벌일 줄은 몰랐다.
"그워어어어어!"
포효한 키메라의 등에서 수십 개의 나무줄기가 쏘아졌다.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다만 키메라가 노린 것은 고블린이 아니었다.
내가 애써 숨겨 둔 마차.
인간 셋이 숨어 있는 그 마차를 나무줄기가 휘감아 버렸다.
그리고 나를 납치했던 것처럼, 그 마차째로 들어 자신의 등 위에 올렸다.
"구워어어!"
새로운 인형을 얻어서 만족스러운 듯한 모습이다.
이 미친 아기 나무뱀아!
흡족한 키메라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마차는 나무줄기에 꽁꽁 묶여 있어서 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그 창문에 달린 창살의 틈새로, 나는 라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시킨 거 아니야!'
하지만 이제 내 곁에 나나루크가 없었으니.
그 뜻을 전달할 방법은 없었다.
키메라 하나, 흰 뱀 하나, 엘프 유령 하나.
그리고 인간 셋.
무수한, 마물들.
모두 함께 협곡을 달린다.
* * *
제라드 마르테인.
속칭, 호랑이 후작.
팔 영웅 중 일인.
강철의 군터가 거느린 기사단의 이름이 철사자 기사단이기 때문일까.
군터 프리한센과 제라드 마르테인은 대중들에게 라이벌 관계처럼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라드 후작 앞에서 언급한다면 그의 분노를 살 것이다.
제라드 후작은 군터를 자신의 라이벌로 보지 않았다.
군터는 천민 출신의 근본도 없는 놈이며 그렇기에 왕가의 사냥개 노릇을 하고 산다.
심지어는 그의 기사단마저 어딘가에서 빌어먹던 용병 놈들로 채웠다.
반면 제라드 후작은 명망 높은 마르테인 가문이었다.
그가 거느린 광명 성기사단은 어떠한가.
'성기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광명교로부터 인정받은 전통 깊은 기사단이다.
그의 영지를 향해서 마물들의 무리가 밀려오고 있다는 흉참한 소식을 들었을 때.
후작은 지체하지 않고 갑옷을 걸쳤다.
병사들을 소집하고, 성기사단을 모두 불러냈다.
이대로라면 몬스터 웨이브에 의해 영지가 무너질 것이다.
아무도 감히 후작의 심정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레이림도 이미 무너졌다.'
확실했다.
강철의 군터가 후작의 사위인 그레이림 영주를 수도로 압송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비극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제 딸의 구원 요청도 듣지 않던 냉정한 후작이니······.'
딸의 편지를 몇 통이나 받았지만 제라드 후작은 직접 나서지 않았다.
귀족원의 2인자쯤 되는 인물로서 함부로 왕실과 대립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 대가로 돌아온 소식이 바로 몬스터 웨이브였다.
영주부인인 제라드 후작의 딸은 죽었을 것이다. 후작의 손녀 또한 함께.
준비태세를 마무리 지은 후작이 곧장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교회였다.
마르테인에서 가장 품계가 높은 주교가 신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교당으로 후작이 걸어 들어갔다.
원래도 6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장대한 체구이다.
그 위에 황금빛 갑옷까지 걸치니, 교당의 중앙복도가 좁아 보일 정도였다.
거대한 태양 모양 부조 앞에 주교가 서 있었고, 마르테인 후작이 그 계단 아래에서 멈춰섰다.
"무릎을 꿇으십시오."
마르테인 후작이 한쪽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다.
주교가 자신 옆의 작은 종을 뎅- 하고 쳤다.
"들으라. 광명 성기사단의 단장, 신의 미천한 종 제라드 마르테인에게 신탁이 내렸다."
뎅-
"고개를 드십시오."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극적 효과를 위해, 주교는 신성 마법으로 비롯한 후광을 두르고 있었다.
뎅-
"기사단은 수많은 마물들과 격돌할 것이며."
당연한 일이다.
이미 마물들이 저 지평선 너머로 보였으니까.
뎅-
"그 우두머리인 사악한 뱀을 물리치리라."
신탁이 떨어졌다.
마르테인 후작은 거침없이 일어섰다.
"조오아!"
그의 목소리가 교당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주교가 화들짝 놀라 귀를 막을 정도였다.
"신탁이 떨어졌으니, 우리는 승리한다."
"승리한다!"
도열한 성기사단이 검을 들어 제창했다.
제라드 후작은 그 성량을 억누르지 않고 외쳤다.
"가자아아!"
마력이 담긴 목소리가 기어코 교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박살 냈다.
콰차차창!
흩날리는 오색 빛깔의 유리 조각 아래.
후작과 성기사들이 걸어나갔다.
< 2페이즈 >
072. 2페이즈
광명교는 여러 교단 중에서 가장 자주 신탁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교 이상의 신성력이 있는 사제들이 자신의 신성력을 소모하여 신탁을 내려받는 것이다.
신은 전능하고 전지적이니, 신탁이 이뤄지지 않거나 틀릴 수는 없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그러하다.
다만 암암리에 알려지길 광명교의 신탁은 다른 교단에 비해서 그 정확도가 떨어진다나.
신탁이 틀렸다는 이야기가 종종 전해지고는 했다.
그러나 제라드 마르테인은 그런 헛소문을 믿지 않았다.
신탁을 받으려면 교회에 막대한 헌금을 내야 한다.
광명교의 연 수입 중 상당 부분을 신탁헌금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성기사단의 단장이자 교단에 소속된 마르테인 후작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신탁이 틀리는 경우는, 애초에 그게 진짜 신탁이 아니었을 공산이 크다.
부패한 주교가 돈을 받고 거짓 신탁을 내렸겠지.
하지만 이번에 제라드에게 내린 신탁은 진짜였다.
그는 사악한 뱀을 무찌르고 승리할 것이다.
저 지평선 너머로 밀려오는 마물들의 무리를 보았을 때.
전열을 이루고 있는 병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심지어 후작을 따르는 성기사들조차 긴장했다.
그러나 제라드는 희열을 느꼈다.
'저게 사악한 뱀이로구나.'
몬스터 웨이브를 이끄는 우두머리.
그 마물은 틀림없는 뱀이었다.
신탁이 실현되고 있다.
"크큭."
제라드 후작이 웃었다.
몬스터 웨이브는 거대하고, 이곳에 3천 명의 병사와 기사단이 모였다고 해도 승리를 점치기 어렵다.
곧 자신의 영지가 초토화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어찌 웃는 걸까.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후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신탁을 받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이제는 희미해진 어린 시절.
스무 살 시점에도 신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신탁의 내용은 흉하기 그지없었다.
제라드 후작은 아무에게도 그 신탁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그리고 오늘, 그 불길한 신탁을 떨칠 수 있을 것 같다.
"투석기를 장전하라."
후작이 첫 지시를 내렸다.
공성병기로 쓰이는 투석기 수십 대를 모조리 끌고 왔다.
마르테인 령은 제국과 접경해 있었으니,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제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투석기들이 오늘 톡톡히 활약하리라.
병사들이 투석기에 바위를 올렸다.
"활을 쏠 준비 해라."
변경백이기도 한 마르테인 후작.
여기 그의 강병들이 모였다.
'산맥'에서 조달한 물소 뿔로 만든 각궁은 제국의 군대마저 두려워했다.
"성기사단이 충각전술로 중심을 돌파한다."
제라드 후작이 말을 타고 병사들의 앞을 달렸다.
그의 유명한 황금 창을 높게 치켜들며 외치길.
"마르테-인-!"
마력을 담은 웅혼한 목소리가 평야를 쩌렁쩌렁 울린다.
"여기에, 죽기 싫은 겁쟁이들이 있나-!"
"없습니다-!"
병사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몬스터 웨이브를 겪어 보지 못한 애송이들이 있나-!"
"없습니다!"
마르테인의 강병들은 몬스터 웨이브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영지와 접해 있는 '산맥'의 끝자락에서 국소적인 몬스터 웨이브가 주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영지가, 너희들이 가족이 짓밟힐 텐데 도망치고 싶은 겁쟁이가 있나-!"
"없습니다악!"
"이 내가-!"
화륵.
마르테인의 창끝에서 불꽃을 담은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병사들이 하나같이 그것을 홀린 듯 쳐다봤다.
저 중앙의 한량들은 모르겠지만, 마르테인 후작이야말로 늘 선봉에 서는 진짜 영웅이다.
"우두머리를 쳐죽이겠다-!"
"마르테인!"
"너희들은, 남은 떨거지만 청소하면 된다. 할 수 있겠지!"
"마르테인!"
그사이에도 마물의 군세가 다가왔다.
기세 좋게 외치는 병사들 사이에서도 불안감이 엿보였다.
가까워지니 알 수 있었다.
저것들은 수만 많은 것이 아니다.
거대하고, 강력해 보였다.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대수림에서 나오지 않은 진정한 괴물들이 섞여 있는 것이다.
드드드드-
지축이 울린다.
겁먹은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활을 발사하려고 했고.
지휘관들이 윽박을 지르며 그것을 막았다.
후작이 창을 들고 외쳤다.
"투석기이-!"
기수들이 깃발을 높게 치켜들고.
"발사아-!"
깃발이 일제히 내려갔다.
터터터텅!
투석기들이 하늘로 바위를 쏘아 올렸다.
* * *
불편한 동행이 이어졌다.
나나루크와 헤어질 때, 이 멍청한 키메라가 인간들이 숨은 마차를 챙긴 것이다.
인간들이 나랑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부럽기라도 했던 걸까.
처음 납치당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제법 소유욕이 있는 친구일지도 모른다.
키메라는 수백 줄기의 가지로 마차를 감싸 자기의 등 뒤에 올려놓았다.
달팽이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키메라의 몸은 점점 커져서 달팽이라기보다는 초등학생용 책가방을 멘 어른처럼 보였다.
"이런······."
문제는 마차와 나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지들 사이로 인간들과 계속 눈이 마주쳤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해명을 요구하는 듯해서 난처했다.
내가 시킨 게 아닌데 말이다.
저들이 마차에 갇힌 지 삼 일째.
허약한 인간답게 멀미로 토악질을 하곤 했다.
다행히 물은 있어서 갈증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배가 고플 것이다.
나는 기사 자인에게 먹을 것을 건넸다.
"사아악."
"머, 먹을 수 없습니다."
한 끼도 못 먹은 걸 봤는데 거절하다니.
저것이 기사의 자존심인가.
거절하는 자인에게 다시 한번 음식을 들이밀었다.
"이거, 벌레 아닙니까······!"
거참.
내가 달리는 키메라 등 위에서 투명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먹잇감은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먹을 만한 곱등이를 잡아 준 건데.
"사아악!"
"······못 먹습니다."
기사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그럴 만한 일이다.
곱등이는 내가 분지에 떨어진 뒤에 먹었던 음식이다.
다리만 떼면 몸은 꽤 오동통해서 눈 감고 먹으면 반쯤 썩은 새우 맛쯤은 될 것이다.
나약한 놈 같으니.
저리 투정을 부리니 어쩔 수 없었다.
*「마법: 투명한 손lv10을 사용합니다.」
내 옆을 달리고 있는 거대한 기린의 몸.
거기에 붙어 피를 빨고 있던 설치류 한 마리를 떼어 냈다.
"사삭, 사악."
그럼 이걸 먹어라 인간.
모스키토 랫이다.
"감사······ 합니다."
쥐 고기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기사는 모스키토 랫을 받았다.
곁에 있던 라니아가 울상을 지으며 주린 배를 감싸 쥐었다.
너는 이거 먹어라.
나는 아공간 안에 보관해 뒀던 새 알 몇 개를 건네줬다.
"고맙습니다!"
"아, 아아······."
자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새 알을 호로록 먹는 라니아를 바라봤다.
그래, 밥을 먹었으니 기운이 좀 나겠지.
사실 지금은 억지로라도 기운을 차려야 했다.
-이야, 날아오는구나.
그랬다.
투석기가 발사되고.
사람 머리통만 한 바위 수백 개가 하늘을 수놓았으니.
다들 꽉 잡아!
"사아아아악!"
마차에 갇혀 있는 인간들이 비명을 질렀다.
바위들은 그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하며 지상을 강타했다.
콰콰콰콰쾅!
직격한 마물들은 그대로 으깨졌다.
피와 육편, 돌조각들이 사방에 튀었다.
내 옆에 있던 기린의 대가리에도 바위가 떨어졌다.
목이 꺾여 버린 기린은 허우적대면서 땅을 굴렀다.
바위의 기세는 그러고도 죽지 않아서 굴러가며 마물 몇 마리의 뼈를 바수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쏟아지는 바위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부디 키메라 뱀이 멍청하게 굴다 다 죽지 않기를.
내 기도는 통했다.
키메라 뱀의 목덜미에서 사자의 갈기처럼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와 내 뒤의 마차를 감쌌다.
이중 삼중의 장벽을 세운 것과 다름없었다.
터엉!
날아온 바위 하나가 기어코 그 나무줄기에 맞아 튕겨 나갔다.
우리는 멀쩡했다.
비록 튕겨 나간 바위가 뒤에 따라붙은 마물들을 으깨 놨지만.
-오, 이번엔 화살이군.
자기는 또 죽을 일 없다고 저리 태평한 펠레리안을 보라.
그의 말대로였다.
나무줄기 틈으로 보이는 하늘이 새카맣다.
수천 자루의 화살이 발사된 게 분명했다.
파파파파파팍!
그것이 달려오는 마물들을 꿰뚫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사실 화살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키메라 뱀의 나무줄기는 투석기도 견뎌 내지 않았던가.
팍!
내 코앞에 화살이 꽂히면서 그 생각은 쏙 들어갔다.
나무줄기 사이로 기어코 들어온 것이다.
바보 같은 나무 뱀. 저것도 못 막고.
그리고 또 다른 화살 한 대가 나를 맞출 뻔했다.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본능적으로 대응했으니.
콱!
정신을 차려 보니, 날아오는 화살을 입으로 물어 채는 데에 성공했다.
-어떻게 했냐!
'······그러게요?'
나도 모르게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의 경지에 올라 버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정말 날아오는 칼날에도 대응할 수 있을지 모른다.
화살 비가 멈췄다.
그리고 인간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투석기와 활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이제 백병전이 시작되리라.
평야에 도착하자, 인간의 군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정말 마왕이라도 된 기분이다.
마물의 군세를 이끄는 마왕!
"그워어어어어어!"
키뱀이도 포효를 내질렀다.
하긴, 사실 마왕은 이 키메라고 나는 그 뒤의 흑막쯤 되겠지.
그리고 이 싸움에 마차의 세 명은 굳이 휘말릴 필요가 없으리라.
"사악!"
나는 라니아와 인간들에게 포효했다.
'살려 줄 테니, 목숨값은 나중에 갚아라.'
그리고 단검을 휘둘렀다.
*「철사자 제식 검법lv1을 사용합니다」
*「참격lv4를 사용합니다.」
마차를 묶고 있는 나무줄기를 하나씩 잘랐다.
이전에 시도했을 때는 이 키메라 녀석이 오히려 마차를 자기 줄기로 칭칭 감아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 쓸 여유가 없으리라.
툭, 투둑
줄기 몇 개만 남자, 마차가 기울어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비명을 지르고.
마차가 땅에 닿을락 말락 할 때.
마지막 남은 줄기에 칼을 휘둘렀다.
*「참격lv4를 사용합니다.」
쿠웅!
나무줄기에 감싸진 마차가 바닥에 무사히 착지했다.
몸이 가벼운 마물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옆으로 피해 간다.
인간들이 두려워했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차를 칭칭 감싸고 있는 나무줄기는 아주 튼튼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화가 집중될 보스 몬스터 등에 붙어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고.
키메라 뱀은 떨어지는 마차를 놔두고 전진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탈출할 차례.
'잘 가 키뱀아.'
저 앞에서 말을 탄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다.
특히 황금갑옷을 걸친 거대한 성기사는 너무너무 무섭게 생겼다.
"날- 봐라-!"
그 기사의 거대한 창이 키메라 뱀을 향한다.
나는 격돌의 직전을 노렸다.
보였다, 빈틈의 실.
'탈추울!'
검을 휘둘러 내가 박혀 있는 주변에 칼침을 놓았다.
*「참격lv4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스킬을 연쇄적으로 사용하며 마력을 쏟아 넣었다.
*「흑린lv2를 사용합니다.」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식심의 도약lv3을 사용합니다.」
*「은밀lv8을 사용합니다.」
쑤욱.
몸이 뽑혔다!
절체절명의 순간, 키메라의 몸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이대로 마물들 틈에 파고들어 도망치면 될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탈출이었다.
키메라 뱀도 달려오는 기사들 앞에서 내게 주의를 돌릴 수는 없을 터.
······분명 그래야만 했다.
-저, 저놈 보게.
키뱀이는 내 탈출을 알아차리자마자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애타는 눈으로 나를 봤다.
"므아아아아!"
구슬프게 울며 나무줄기를 나한테 뻗친다.
그것이 꼭 엄마- 하고 부르는 것 같았다.
'아악!'
그 때문이었을까.
내게 감기는 나무줄기들을 뿌리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은.
머리를 돌린 탓에 키메라 뱀의 목덜미는 기사들에게 훤히 노출되었다.
"죽-어-라아!"
거대한 성기사가 그 황금빛 창을 키메라의 몸뚱이에 박아 넣었다.
콰아아앙!
투석기에 맞았을 때보다 더 큰 굉음이 울렸다.
성기사의 뒤를 생각하지 않은 마상 돌격은 과연 무시무시했다.
선두에 섰던 기사의 군마는 아예 목이 부러져 죽어 버렸고, 그 거대한 키메라 뱀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그워어-!"
처음으로 키메라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창이 박힌 상처에서 시커먼 연기가 풀풀 피어올랐다.
'이 멍청한 놈.'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네 부모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집착이냐.'
이놈은 그냥 세계수가 나를 본떠 만든 시한부 키메라일 뿐인데 말이다.
나는 다시 키메라의 목덜미에 찰싹 달라붙게 되었다.
'그리고 멍청하게 그냥 창을 맞으면 어떡해!'
열심히 키메라 뱀의 몸뚱이에 창을 박아 대는 성기사들이 코앞에 보였다.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성기사는 황당한 표정을 하더니 재빠르게 작은 석궁을 들어 나를 쐈다.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팍!
이번에도.
화살을 물어 채는 데 성공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쪽도 이제 생존의 문제가 달렸다.
죽엇!
*「광선lv2를 사용합니다.」
"끄아악!"
광선은 성기사의 드러난 안면을 맞췄다.
즉사는 아니었지만 성기사는 낙마해 버렸다.
와작!
놀라 날뛴 말이 불운하게도 기사의 안면을 밟았다.
*「광명 성기사lv23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광선에 키메라도 기운을 차린 것인가.
키뱀이의 몸에서 줄기들이 가시처럼 튀어나왔다.
퓨퓨퓨퓩!
다른 줄기들과 달리, 검게 빛나는 나뭇가지들.
키메라의 상태창을 봤기 때문에 뭘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가시구르기lv10', 그 스킬이 분명하다.
뱀답지 않게 키뱀이는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다.
성기사 다섯 이상이 순식간에 그 아래로 깔려 버렸다.
와작, 우드드득-
비명조차 남지 않았다.
나는 놀라서 수그렸던 머리를 다시 들었다.
'나도 깔려 죽을 뻔했네!'
"그워어어어!"
키메라의 몸에 돋아난 가시에는 꿰이고 박살 난 성기사 여러 명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건 이제 부정할 수 없는 보스 몬스터의 비주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경악해서 이쪽을 바라보는 적들의 대장.
──────────────
[광명 성기사단장lv???]
──────────────
척 봐도 엄청나게 강해 보이는 노기사가 분노로 포효했다.
"개-자-식아-!"
귀가 터질 뻔했다.
그가 들고 있는 창에서 휘황찬란한 오러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오지 마!
*「광선lv2를 사용합니다.」
기사는 놀랍게도 그 빛살 같은 광선을 쳐냈다.
군터 정도나 보여 줬던 기예다.
"그워어어!"
키뱀이는 기 죽지 않고 맞서 달렸다.
영웅 대 키메라.
그 격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싱겁게 흘러갔다.
기사의 창이 키뱀이의 몸에 틀어박히려는 순간이었다.
쩌억.
키뱀이의 몸 한가운데가 확 벌어졌다.
진짜 뱀이 아니라 나무줄기로 이루어져 있는 몸이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오러가 치솟는 창은 허공을 꿰뚫고.
키메라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새카만 가시 줄기 하나가 키뱀이의 목 아래에서 튀어나왔다.
아마도 이 키메라가 지니고 있는 유일한 상위 스킬.
[세계수의 가시lv1]
퍼억!
그 가시는 투구와 흉갑 사이에 있는 틈을 정확히 관통했다.
"컥!"
기사의 입에서 피가 확 뿜어져 나왔다.
손에 들고 있던 창마저 바닥에 떨어졌다.
가시에 꿰뚫린 채로 몸이 추욱 늘어져서 대롱거렸다.
'어, 어어!'
설마.
한 방 컷?
저지능이라더니, 방금 키뱀이의 회피와 공격 연계는 너무나도 완벽했다.
목을 꿰뚫었으니 즉사일 터.
그 순간이었다.
펠레리안이 극악한 한 마디를 내뱉은 것은.
-해치웠나!
'미친.'
-······왜, 뭐가.
그리고.
과연 역천의 마도사는 천리를 거스르는 위대한 마법사였으니.
꿈틀.
축 늘어졌던 기사가 움직인다.
펠레리안이 시전한 부활 주문이 성공했다.
< 마르테인 최고의 춤꾼! >
073. 마르테인 최고의 춤꾼!
"너는 뱀에게 물려 한 번 죽으리라."
그것이 스무 살 제라드 마르테인에게 떨어진 신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강단이 있고 비범했던 그였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신탁을 들었을 때, 제라드에게 든 생각은 이러했다.
'드디어 이 주교 새끼가 미쳤나.'
마르테인 가문은 광명교 교단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해당 교구에도 매년 막대한 헌금을 쏟아부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테인 가문에서는 종종 신탁을 받을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된 마르테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묻고자 주교를 찾아왔다.
'헌금을 더 달라고 꼬장을 부리는 건가.'
때문에 제라드 마르테인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가 신탁을 부탁한 주교는 그 신앙심보다도 돈 욕심이 더하기로 유명한 자였으니.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서 그렇게 물었다.
신탁 중에 끼어들어 말하는 것은 금기였음에도.
제라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기대하며 주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곤 흠칫 놀랐다.
주교의 눈은 검은자위가 없고 흰자위만 있었다.
머리카락은 저절로 나풀거렸고, 그 머리 뒤에서는 후광 같은 게 뿜어져 나왔다.
주교들이 신성 마법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지금은 뭔가 다르다.
제라드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주교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너너는 뱀뱀에 물물려 한한번 죽죽으으리리라."
"어 씨 깜짝이야!"
목소리가 마치 동굴에서 나온 것처럼 메아리쳤다.
놀란 제라드가 다급히 물었다.
"죽어요?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런 흉한 신탁을 내릴 거면 어떻게 이겨 내야 할지라도 말해 줘야지.
하지만 주교는 코피를 흘리며 푹 쓰러질 뿐이었다.
틀림없는 진짜 신탁이었다.
진짜 신탁.
천하의 마르테인이라고 해도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뱀에 물려 죽으리라는 말 아닌가.
제라드가 가장 먼저 한 짓은 그 신탁을 숨기는 것이었다.
심지어 주교마저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으니 쉬운 일이었다.
그다음으로 했던 것이, 신탁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죽으리라는 예언을 피할 방법이 없을까.
제라드는 여러 방면에서 조사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절망적이었다.
예언이 진실이라면 제라드는 틀림없이 죽으리라.
그렇다면 그냥 신탁이 틀렸겠거니 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제라드는 마르테인답게 굴었다.
가만히 앉아서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끝까지 싸우며 방법을 찾기로 결심한 것이다.
'한 번' 죽으리라.
그 '한 번'이라는 단어에 집착했다.
한 번이 있으면 두 번도 있나?
그럴지도 모른다.
애초에 죽음이란 무엇인가.
심장이 멈추면 죽음인가? 혹은 온몸의 마성이 유실되면 죽음인가.
그 불명확한 개념을 이용하면, 어쩌면 예언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무 살 때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뱀의 몸에서 튀어나온 가시가 목을 꿰뚫었을 때.
제라드 마르테인은 생각했다.
'이것도 물려 죽은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겠지?'
그것이 마지막 생각이었다.
경동맥이 찢어지고 척수신경까지 손상되었으니 틀림없는 치명상이다.
의식은 암전했고 심장은 분명, 멈췄다.
오래된 안배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 그때였다.
제라드 마르테인의 맨몸뚱이에는 기묘한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이교도 야만인의 주술 같은 문신이었고, 실제로 그 효과도 비슷했다.
터엉!
가슴팍의 문신이 빛나더니 몸이 경련했다.
멈췄던 심장이 억지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터질 듯 팽팽했던 제라드의 근육이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 에너지는 그대로 상처의 치유에 소모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황금갑옷을 탄탄하게 채웠던 후작의 장대한 체구가 작아진다.
피부도 쪼그라든다.
사라졌던 청력이 가장 먼저 되돌아왔다.
"사아아악!"
놀란 듯한 뱀의 울음소리다.
생긴 것과 달리 경박한 울음소리군, 그리 생각했다.
몸의 살이 재생되면서 목에 박혔던 가시가 밀려 나왔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그가 바닥에 떨어졌다.
쿠웅!
중심을 잡아서 착지했다.
"빌어먹을 신탁."
예언은 예언이라는 것일까.
제라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입은 갑옷은 미스틸골드로 만든 드워프제로, 축성까지 받은 판금 갑옷이다.
그런데 가시는 정확히 투구와 흉갑의 틈 사이로 쑥 들어왔다.
이걸 기가 막힌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갑옷이 헐겁다.'
갑옷을 가득 채웠던 근육이 쪼그라들었으니 덜거덕거리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작의 기력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늘 그를 괴롭히던 죽음의 위험이 해소되었기 때문일까.
오히려 정신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조오아!"
그가 박수를 번쩍, 쳤다.
주군의 부활을 목격한 성기사들이 눈물로 환호했다.
"어디 제대로 붙어 보자."
눈앞의 뱀에게 그리 말하며.
*「폭투법lv5을 사용합니다.」
*「광명의 가호lv10을 사용합니다.」
*「마르테인 전투술lv20을 사용합니다.」
스킬을 일제히 사용한다.
그의 몸에서 괴력이 솟아올랐다.
갑옷을 덜컥거리며, 주먹으로 뱀의 몸을 후려쳤다.
콰아아앙!
톱밥 같은 나무 조각이 확 튀었다.
그 거대한 키메라 뱀의 몸이 살짝 떠오를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놈의 몸에서 튀어나온 나무줄기가 후작의 몸을 꿰뚫으려 했다.
터터텅!
하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의 단단한 판금 갑옷에는 흠집도 내지 못한다.
콰앙!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러 뱀의 몸을 파괴한다.
너클 부분이 뾰족한 건틀릿이 한 번 가격할 때마다 톱밥이 튀었다.
수백 줄기의 가느다란 가지들이 후작에게 쇄도했다.
후작을 꿰어 죽일 수 없으니, 키메라 뱀은 몸을 옭아매기로 결심한 듯했다.
후작은 그에 맞서 갑옷에 얽힌 가지를 잡아 뜯고 주먹을 휘둘렀다.
"저, 저희가 돕겠습니다."
말을 탄 성기사들이 가세했다.
그들 역시 제대로 된 기사들이었다.
검이며 창에 오러가 깃들었다.
콱, 콰각!
그 무기들이 가지를 베고 나무줄기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지금은 상성이 안 좋다.
인간의 팔은 두 개고, 그 팔 하나하나보다 강인한 나무줄기는 수백 개가 넘었다.
그 나무줄기들이 말의 다리를 걸었다.
기사들은 어쩔 도리 없이 낙마했다.
그것만으로 죽는 이들은 없었지만, 운이 나쁘게 발목이 휘감긴 기사가 있었다.
"어엇!"
키메라는 기사를 들어 올린 뒤 마치 망치처럼 휘둘렀다.
창으로 쳐내려던 후작이 경악해서 창을 내렸다.
콰앙!
후작과 기사가 한데 뒤엉켜 나뒹굴었다.
후작은 얼른 기사를 밀치며 일어났다.
쿠구구구궁!
그 자리를 뱀이 깔아뭉개고 지나갔다.
땅에 깊은 고랑이 새겨졌다.
후작은 이를 악물고 수하들을 물렸다.
"방해하지 말고 물러나라! 다른 마물들을 처죽여!"
이곳에 위험한 것은 우두머리만이 아니다.
사실, 개떼처럼 밀려오는 저 마물의 군세가 가장 위험했다.
"예!"
기사들은 다시 말에 타고 산개해 주변의 마물들과 싸웠다.
키메라 뱀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수백 줄기의 나무가 후작과 그 주변을 감쌌다.
이윽고, 후작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다.
가시의 숲에서 후작은 한 마리의 호랑이처럼 날뛰었다.
난투극이 시작되었다.
* * *
아깝다.
너무 아까워.
저 노기사가 죽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 버렸다.
목이 꿰뚫렸는데 살아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마물에게도 어려운 일일 텐데.
아주 미친 할아버지다.
'부활 같은 스킬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비록 그 부작용 때문인지 몸이 비쩍 말라 버렸지만.
그래도 끔찍하리만큼 강했다.
어쩌면 군터보다 강할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마르텡 후작인가.
듣자 하니 영웅 같았다.
그 또한 어마어마한 스킬들을 지닌 것 같았다.
'아깝다!'
*「'강탈의 왕관lv4'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거대화lv0'을 빌린 상태입니다.」
아직 아버지에게 빌린 거대화lv0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거대화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전에는 강탈의 왕관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거대화를 수련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
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거대화는 완벽하지 못하다.
덩치가 커지는 것에 비해 힘이나 몸의 강도는 덜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사방에 적들이 몰린 곳에서 거대화를 썼다가는 화살에 고슴도치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고슴도치 서펜트로 진화할지도 모르겠다.
콰아앙!
"꾸워어어어!"
키뱀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사실, 스킬을 빌리고 말고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다.
'죽어라! 마르텡!'
*「초급원소마법:불lv4를 사용합니다.」
놈의 얼굴에 불덩이를 쏘았다.
"제기랄 또!"
나도 나름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있었다.
마르텡은 박치기로 불덩이를 박살 냈다.
그러고도 얼굴이 불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
하지만 애초에 불덩이를 쏜 것부터 시야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광선lv2를 사용합니다.」
죽음의 빛.
내 입에서 영웅의 목숨을 앗아 갈 광선이 쏘아졌다.
피잉-
"앗따거, 제기랄!"
아니! 그 강인한 실버백 아킴스의 근육에도 박혀 들었던 광선인데.
회심의 광선은 볼에 여드름 터진 정도의 상처를 남겼을 뿐이었다.
갑옷만 믿고 싸우던 것이 아니었나.
-기초적인 오러 운용법이다.
무지막지한 전투 한가운데에서 펠레리안이 해설을 시작했다.
-저 인간 영웅은 훌륭한 갑옷을 입고 있으니, 노출된 안면에만 오러를 둘러 보호하는 것이겠지.
마치 격투 만화에서 해설하는 캐릭터를 보는 듯하다.
자기가 부활 마법으로 일을 다 망쳐 둔 주제에 말이다.
화가 난 노기사가 내게 창을 내질렀다.
원래라면 창이 닿지 않을 거리였는데.
후웅!
창끝의 오러가 내게 발사되었다.
검기, 아니 창기가 분명하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키뱀이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나무줄기를 회수해 나를 보호한다.
콰드드득!
투석기도 막아 냈던 나무줄기 수십 개가 단번에 박살 났다.
그러나, 노기사는 오히려 기뻐했다.
"저 검은 뱀이 네놈의 약점이구나!"
검은 뱀은 흑린을 쓴 나를 말하는 것이리라.
인간의 교활함이란 무지막지했다.
놈은 키뱀이의 몸을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내게 창질을 시작했다.
콰득, 콰드드득-
그럴수록 더 많은 가지들이 뻗어 나와 나를 막아선다.
기사는 아예 방어를 도외시하고 공격 일변도로 돌아섰다.
키뱀이가 나를 지키려는지 허둥지둥했기 때문이다.
"으하하하!"
동시에, 나를 공격하는 척 키뱀이의 몸을 깎아 내고.
또 키뱀이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나를 노리면서 전투를 지속한다.
나도 마법을 쓰고 검을 휘두르면서 저항했지만 승기가 점점 기울었다.
"그워어어!"
키뱀이가 고통스럽게 포효했다.
나무로 이뤄진 몸의 재생이 점차 느려졌다.
불타는 듯 뜨거운 저 기사의 오러가 나쁜 상성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야 이 자식아! 그냥 나 내려놓고 싸워!'
그러나 여태까지 계속 그랬듯.
키뱀이는 머리가 나빠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 바보 같으니라고.
'너도 지금 아기한테 뭐 하는 짓이야!'
후작에게도 일갈했으나.
아무래도 키뱀이가 너무 노안이기는 했나 보다.
"그리 거대해질 정도로 오래된 마물이면 평생 대수림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굳이 죽을 자리를 찾아왔나. 하하하!"
창이 오히려 더 가속했다.
쭈그러든 몸에서 어찌 저런 괴력이 나오는지.
"죽어라."
그리고 창끝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군터의 단월참처럼, 이 기사의 특별한 스킬인 것 같다.
'······안 돼.'
창끝은 무정하게도 키뱀이의 몸을 파고들었다.
텅-!
양철 북을 두드린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키뱀이의 몸이 확 부풀더니 터져 나갔다.
일순간.
수백 줄기의 가지가 마치 폭발하듯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키뱀이의 의지가 아닌 것 같았다.
그 무수한 가지가 장막처럼 주변에 드리워서, 순간 대수림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뻥 뚫린 키뱀이의 몸뚱이 안에 새빨간 무언가가 보였다.
키메라의 심장, 마석, 혹은······ 씨앗?
"므아아······."
키뱀이가 힘없게 울었다.
기사는 씨익 웃으며 그 빨간 무언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라고.
나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뚜걱.
마침내 나를 묶고 있던 줄기들을 끊어 냈다.
*「가속lv7을 사용합니다.」
*「식심의 도약lv3을 사용합니다.」
갑옷을 뚫을 수는 없다.
안면을 공격하는 것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갑옷 틈으로 쏙 들어가 주마.
키뱀이의 목숨을 끊는 데에 열중한 놈은 가속을 사용한 나를 미처 쳐내지 못했다.
나는 그의 목덜미 사이로 쑤욱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지독한 놈.
놈은 마지막까지 키뱀이의 심장을 뜯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우득!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갑옷 내부는 내가 충분히 들어갈 만큼 헐거웠다.
내가 몸부림치자 기사가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으악, 으히익!"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 타입이군!
갑옷 안은 지독한 땀 냄새가 났다.
잠깐만 견디자.
안에 걸쳐 입고 있는 린넨 옷을 이빨로 마구 찢어 버렸다.
'배꼽으로 들어가 주마 인간!'
왁, 깨물었지만.
무슨 생고무를 씹은 것처럼 피부가 질겼다.
오히려 내 이빨이 아플 정도다.
인간의 육신이 이 정도로 단련되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포기.
쑤욱-
그렇다면 맹독을 주입한다.
"크아아아악!"
간지러워하던 소리가 고통의 비명으로 바뀌었다.
쾅, 꽈아앙!
그는 나를 잡으려는 듯 자신의 갑옷을 마구 두드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자기 갑옷을 찢어서 나를 꺼낼 수는 없었다.
투구를 아예 벗고 갑옷에 손을 넣으려 들었지만 그것도 안 됐다.
이런 판금 갑옷은 종자의 도움을 받아서야 입고 벗을 수 있는 물건이다.
기사는 고통으로 발악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나를 짓누르려 하지만, 나는 미꾸라지처럼 계속 움직였다.
*「독비늘lv1을 사용합니다.」
놈의 살가죽에 상처를 내고.
그 위에 맹독을 덧바른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인간.
이게 키뱀이의 복수가 아니다.
그저 죽고 죽이는 야생의 법칙일 뿐.
나는 얼음 조각으로 된 눈물을 흘리며 죽음의 춤을 췄다.
* * *
성기사들의 눈에는 후작도, 우두머리 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키메라가 뿜어낸 수백 줄기의 나뭇가지 때문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마치 전장 한가운데에 숲이 생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빛.
"오오!"
성기사들은 그것이 단장의 비기라는 것을 알았다.
'광명섬'. 군터의 단월참과 비교되는 마르테인의 절기.
그 치명적인 찌르기가 나무 뱀의 목숨을 앗아 갔음이 분명했다.
살아 있는 듯 움직이던 나무줄기들이 뻣뻣이 굳더니, 놀라운 기세로 시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려졌던 내부가 드러났다.
거대한 뱀은 쓰러져 있었고 그들의 기사단장이 당당히 살아남았다.
"우오오오오! 단장님!"
"광명신이시여!"
성기사둘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우두머리를 죽였다고 몬스터 웨이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위업이었다.
당장 후작에게 달려가려 했는데.
성기사들은 주춤 굳어 버렸다.
"다, 단장님?"
그도 그럴 것이.
제라드 마르테인 후작은 춤을 추고 있었다.
타닥, 타닥!
마치 북방의 전통춤처럼 경쾌하게 스텝을 밟는다.
후작이 흥이 많아서 술만 마시면 춤판을 벌인다 해도, 설마 전장에서까지 이럴 줄이야.
승리한 게 그리 기쁜 걸까.
"너, 너희들. 흐익!"
성기사들을 본 후작은 갑자기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고릴라 비슷한 행동이었다.
성기사들은 크게 당황했다.
"우, 우리도 같이 가서 춤춰야 하나?"
"무슨 헛소리야······!"
그들의 당황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아아악!"
후작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춤을 추던 후작이 결국 픽 쓰러졌다.
기사들이 얼른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케엑, 켁."
"다, 단장님! 왜 그러십니까!"
얼굴이 보랏빛이다.
이미 한참 전부터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듯했다.
신경독에 중독된 증상.
"배, 뱀이이······."
"뱀 말입니까! 후작님이 이미 처치하셨습니다!"
키메라 뱀의 독에 당한 듯하다.
하지만 갑옷에 구멍 같은 건 안 보이는데.
"아니, 힉. 그게 아니, 이색······ 힉."
결국 후작의 눈동자가 휙 돌아갔다.
"사제, 사제에게 모셔 간다!"
성기사들이 제 주군을 업었다.
* * *
-해치웠다!
주문이 살짝 틀려서 그런지.
이번에는 펠레리안의 부활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후작의 몸에서 한 인간이 품고 있었다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마성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완전한 죽음이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폭풍과 같은 전율이 밀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업적 '영웅 살해'를 달성했습니다.」
위대한 영웅 제라드 마르테인.
여기, 두 번 죽다.
<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
74.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감미로운 레벨업의 향연.
온몸에 짜르르 퍼지는 뜨거운 온기.
평소라면 기쁨의 춤을 췄으리라.
'흑흑.'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좋지 않다.
불쌍한 키메라 뱀.
아직 아기였는데, 늙은 노기사한테 심장이 뜯겨 죽어 버렸다.
그 녀석이 비록 인간이든 마물이든 가리지 않고 퍽퍽 터뜨려 죽이는 화끈한 녀석이긴 했지만.
몸에 돋아난 가시에 성기사들을 주렁주렁 꿰고 다니며 보스 몬스터 같은 몰골을 보이기도 했지만.
또한 대수림에서부터 수만 마리의 마물을 이끌고 나와 대륙의 인간들이 끔찍하게 많이 죽겠지만.
태어나서 처음 본 나를 납치해서 이곳까지 끌고 와 버렸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옹호하기가 힘들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아기 아니던가.
녀석이 몬스터 웨이브를 이끌도록 태어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닐 터다.
차라리 세계수를 원망하는 게 더 맞겠지.
무엇보다, 나는 아무래도 녀석에게 정이 들어 버린 것 같다.
'네 덕이야 키뱀아.'
내가 기사를 해치운 것은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가능한 일이었다.
키뱀이가 놈을 한 번 죽였다.
기사는 한 번 부활하면서 빼빼 마른 몸으로 변했다.
그렇기에 갑옷이 헐거워져서 내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던 것이다.
사람은 옷 속에 벌레 하나만 들어가도 발작하는 법이다.
그런데 무려 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 한 마리가 들어갔으니, 영웅이라도 버틸 도리가 없었으리라.
죽은 기사는 축 늘어졌다.
그가 안에 걸쳐 입었던 린넨 옷은 그와 나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흑흑, 냄새나.'
땀 냄새와 피 냄새가 잔뜩 섞여 보통 불쾌한 환경이 아니다.
키뱀아, 아기야. 네 등에 매달려 있을 때가 그립구나.
-주접 그만 떨거라. 아가는 무슨. 솔직히 징그럽기 그지없는 키메라였다.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닌 엘프이니 당연한 일이지. 레벨이 얼마나 올랐더냐.
'열 개요.'
-캬.
캬 막 이런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지.
얻은 것은 얻은 것이다.
게다가 '영웅 살해'라는 업적 역시 달성했다.
상대가 영웅임이 분명했으니 오히려 레벨업 10번도 조금 부족한 것 아닌가 싶다.
다음 진화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다.
그래,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복수는 내가 해 줬어 키뱀아. 거기 가서는 행복하게 살렴.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다고 대륙의 모든 인간들이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키뱀이가 수천 수백 명을 죽인 뒤, 끝내 펠레리안 같은 괴팍한 마도사에게 잡혀 생체실험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원래도 키뱀이는 시한부였는데. 그렇게 치면 행복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니까!
웃자, 웃어.
하지만 마냥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덜컹!
내가 미처 갑옷에서 빠져나가기도 전에, 성기사들이 몰려들었다.
"맥박이 없는 것 같습니다!"
"후방으로 모시고 가겠다."
"그러면 지휘는······."
"광명 기사단은 물러서지 않는다."
"······끝까지 남아 싸우겠습니다!"
비장한 말이 동서남북에서 오고 간다.
누군가 시신을 갑옷째로 쑤욱 들어 올렸다.
엄청나게 무거울 텐데.
"내가 업고 달리겠다."
"저희가 엄호하겠습니다."
괴력을 가진 성기사가 분명했다.
갑옷째로 마구 흔들린다.
아주 살짝, 갑옷의 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봤다.
'으악!'
나는 기겁해서 잽싸게 머리를 집어넣었다.
성기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이들은 후작의 시체를 업고 달리는 중이었다.
마물들을 베어 넘기고 돌파하면서.
'어떡하지······.'
갑옷 속에 갇힌 채로 인간들의 본거지까지 가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얼른 탈출해야 하나.
혹여 기사가 검이라도 휘두르면 머리가 잘려 죽을 거고,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튀어 나가자마자 거대화를 쓸까?
아니, 그러면 너무 눈에 띈다.
키뱀이의 보호가 사라진 이상, 마물들도 내 적이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금 내 존재를 들킨다면 내가 영웅을 죽인 게 만천하에 드러날 거고.
'아, 천뢰령!'
벼락을 불러낸다면 나를 업은 기사까지 통째로 감전될 것이다.
신나서 천뢰령을 시전했지만.
*「마력이 부족합니다.」
이런.
키뱀이에게 도망치려고 했을 때부터 마력을 너무 많이 쓴 것 같다.
특히 흑린 스킬을 오래 유지하고 있었던 게 크다.
그렇다면 방법은······.
'영감님!'
-왜.
'인간한테도 마석이 있나요?'
영웅의 마석을 먹으면 되지 않을까.
펠레리안은 감탄하며 답했다.
-없다.
아쉽게도 그랬다.
생각해보니까 마석은 내 반지 안에도 있었지.
먹는다고 마력이 즉시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성기사들의 충성심은 아주 대단했나 보다.
기어코 마물들을 돌파해 인간들의 진영까지 도착했으니.
"후작님은 괜찮으신가!"
"괜찮아 보이오? 어서 대주교님을 불러!"
사방이 우왕좌왕이다.
무수한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말어라.
'흡.'
그리고 그 말은, 여기서 내 존재를 들켰다가는 그대로 뱀장어구이가 되어 버리라는 사실이었다.
"갑옷을 풀어라!"
"자, 잘 안 됩니다."
"이 멍청한 새끼!"
욕설과 악다구니가 들린다.
어디로, 어디로 숨지.
*「은밀lv8을 사용합니다.」
숨을 참고.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일단 하체 쪽으로 몸을 피했다.
철컥.
옳은 선택이었다.
허리 부분의 잠금쇠를 풀었는지, 안으로 빛이 들어왔다.
상반신의 갑옷을 벗긴 뒤, 죽어 있는 기사단장을 질질 끌어낸다.
나는 얼른 비어 있는 부츠 부분으로 숨어 들어갔다.
'우욱!'
발 냄새가 지독하다.
"아아, 후작니이임!"
절망이 담긴 비명이었다.
"치, 치료 마법을 부탁드립니다!"
여기까지 후작을 업고 온 성기사가 애걸했다.
"어쩌다 이리 피투성이가······."
"뱀에게 물리셨습니다. 중독되신 듯했습니다."
"판금 갑옷을 입으셨는데 어찌?"
"아······."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는 후작의 몸 이곳저곳을 물어뜯었다.
뱀에게 물린 작은 상처를 발견하면 어떡하지.
갑옷 안에 뱀 한 마리가 숨어들어 갔음을 눈치챌지도 모른다.
"저 키메라 뱀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미스틸골드 갑옷을 뚫고······. 아!"
눈치챘나!
"영체화 공격인가. 그리 상위의 마물일 줄이야······."
아오.
들킨 줄 알고 부츠에서 뛰쳐나갈 뻔했다.
누군가의 주절거림이 짜증 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성기사가 버럭 화를 냈다.
"지금 그딴 게 중요합니까! 치료 마법을 쓰십시오!"
"이미 돌아가신 것 같은데······."
후작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내가 직접 건너보냈다.
*「은밀lv8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은밀lv8이 은밀lv9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긴장하고 숨을 죽였는지 은밀 스킬의 레벨이 올랐다.
바깥에서 환한 빛이 번쩍였다.
치료 마법을 쓰는 것 같다.
"깨끗한 물과 천을 가져와! 대주교님은 왜 안 오시는 거야!"
인간들은 어떻게든 후작을 살리려고 애썼다.
그나저나 옷을 벗기면 내 이빨 자국이 드러날 텐데.
어떻게 나갈 수도 없고, 계속 숨어 있을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다.
덜컹!
누군가가 내가 숨어 있는 갑옷을 건드렸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저어······."
갑옷을 건드린 자는 앳되고 어수룩한 목소리를 냈다.
기사의 종자쯤 되는 걸까.
"저기이······."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끈질기게도 누군가를 불렀다.
"저어······."
"왜! 뭔데!"
성기사로 추정되는 자가 결국 받아줬다.
"저 죄송한데······ 이 갑옷 말입니다."
"갑옷이 뭐!"
"정리해 둘까요? 평소처럼."
헉.
나는 경악했다.
물어보는 말투며 질문에서 숨길 수 없는 폐급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
"야 이 새끼야아악!"
성기사로 추정되는 인물은 분통이 터지는 듯 소리를 질렀다.
"씨팔 지금 갑옷 치우고 말고가 중요해애!"
"어, 죄, 죄송······. 씻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놔둘지······ 피가 묻어서······."
아무래도 무척 비싸고 귀할 후작의 갑옷을 관리하던 병사 같았다.
"이 개자식이 진짜아. 놔! 이 새끼 내가 죽여 버리게!"
"죄,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분노한 성기사를 말렸다.
"진정해! 야, 거기, 넌 얼른 갑옷 가지고 가!"
"네, 넵. 충서엉!"
경례를 하는 것을 보니 병사인가 보다.
목소리만으로도 관심병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 마물과 싸우는 대신 후방에서 잡일을 하는 것을 보면 평소에 후작의 시중을 드는 보직이 아니었을까.
지휘관이 죽고 몬스터 웨이브가 코앞에 닥친 상황이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성기사를 붙잡고 갑옷을 놔둘지 치울지를 묻는 것은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 역시 군대를 다녀왔고, 아르바이트도 몇 번 해 본 적이 있다.
폐급이라는 이야기를 대놓고 들어 본 적도 있고 뒤에서는 훨씬 많이 들었다.
'녀석······.'
나는 꼬리로 코를 킁 훔쳤다.
병사가 낑낑대며 갑옷을 수레에 올렸다.
"오늘따라 무겁네에."
캬.
혼잣말을 하는 것마저 완벽하다.
갑옷에 내가 들어 있는 것도 모르고, 참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운도 좋구나. 웬 멍청한 놈 덕택에.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쟤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는 병사를 변호해 주었다.
녀석을 보니, 내 전생 생각이 난다.
화려했던 군대 시절은 굳이 설명할 것도 없었다.
전역한 뒤에도 내 소심한 성격이나 굼뜬 점은 고쳐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것을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
알바라도 하라고 재촉하셨고, 나는 여러 군데에 지원했다.
도대체 왜 그런지는 몰랐지만 지원하는 곳마다 면접에서 떨어진 게 문제였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어머니는 지인이 운영하는 술집에 알바 자리를 만들어 주셨다.
'네가 걔구나?'
하면서 반겨 줬던 사장님이 떠오른다.
인상이 푸근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괜찮은 분이셨지.
첫날, 나는 맥주잔 세 개를 깨 먹고 3번 테이블에 나가던 부대 전골을 바닥에 엎어 버렸다.
사장님은 난처하게 웃으시고 말았지만, 같이 일하던 다른 알바는 아니었다.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애였는데, 팔에 문신이 있고 잘생긴 친구였다.
'아 형, 존나 왜 그래요? 개짜증나는데.'
그가 그러면 나는 그저,
'미, 미안······.'
사과할 뿐이었다.
매일매일 너무 힘들었다.
하루하루 자존감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손님도 적어서 사장님이 푹푹 한숨을 쉬니 더 눈치가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장마 때문인지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 그날따라 유독 손님이 없었다.
'얘들아, 오늘은 좀 일찍 닫자.'
기쁜 티를 참고 있으니 사장님이 같이 한잔하자면서 소주잔을 꺼내셨다.
술은 별로 안 좋아했는데, 눈치가 보여서 술잔을 받았다.
사장님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같이 알바하는 동생이 분위기를 띄웠다.
나도 술이 좀 들어가니 들떴고, 사장님이 그런 나를 보며 웃으며 칭찬해 줬다.
'고생 많지?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너도.'
아주 기뻤다.
그래서 술을 더 마신 게 문제였을 것이다.
'오늘은 손님이 진짜 없었네.'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셨을 때.
'네, 맨날 오늘처럼 한가했으면 좋겠어요. 헤헤.'
그 순간.
내리는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렇게 차가운 눈빛의 사장님은 처음이었다.
정적을 깬 것은 네 살 어린 동료 알바의 웃음소리.
'아 진짜 개웃겨. 형 왜 그렇게 폐급이에요?'
그 말은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는 그곳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조용하자 펠레리안이 침묵을 깼다.
-왜 그렇게 아련한 표정을 하고 그러냐.
'아니에요. 후후.'
그리운 추억이었다.
부대전골 먹고 싶네.
관심병사는 나와 갑옷을 어딘가에 내려놨다.
그리고 떠났다.
어두컴컴한 게 실내가 분명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사아악!"
살았다!
이곳은 아무도 없는 막사 내부였다.
아무래도 내가 처치한 영웅이 쓰던 곳 같았다.
큼지막한 무구며, 세밀한 지도가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 지도에 시선을 빼앗겼다.
'지도다······.'
제법 자세하게 그려진 지도.
새삼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이 와닿았다.
왕국과 제국이 그려져 있으며, 대수림이라고 써 있는 곳도 있다.
-전술 지도군!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제대로 된 지도는 예로부터 국가가 관리하는 전략자료다.
지도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대륙과 왕국에 걸친 거대한 산맥이 그려져 있었다.
'회색 산맥이구나 저게.'
대륙의 오대 마경이었나 칠대 마경이었나.
그중에서 반드시 꼽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산맥'이었다.
-벌써 우리가 이쯤까지 왔구나. 대수림보다 회색 산맥이 가까워졌어.
펠레리안은 신나서 지도에 다가갔다.
-이곳, 그리고 이곳.
산맥의 초입과 산맥의 깊숙한 곳을 각각 가리킨다.
-이곳에 내 던전들이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던전의 정체는.
-여기가 내 병기창이지.
병기창, 다른 말로는 무기 저장소.
'무기 수집도 했습니까!'
-그래, 우선 이곳으로 가면 되겠군.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야 하는 법이다.
마물인 내가 숨기에는 마경이 최고일 것이다.
안 그래도 장검 하나를 가지고 싶었는데 잘됐다.
던전 안에 어떤 무기들이 있는지는 나중에 물어봐야지.
-지도부터 챙겨!
내 존재가 곧 들킬 것이다.
나는 펠레리안의 말대로 지도를 챙겼다.
지도를 챙겨 간 김에 털어 갈 수 있는 것은 다 털어 가는 게 좋을 테다.
아공간에 남는 공간이 많지는 않았으니 최대한 귀해 보이는 것부터 털었다.
그리고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어, 어!'
후작의 갑옷.
정확히는 건틀릿 부분.
키뱀이의 심장을 뜯어 간 그 장갑은 여전히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가느다란 나무줄기가 건틀릿을 뒤덮고 있었고, 그 안에 새빨간 무언가가 있다.
이건 설마 키뱀이의 마석?
──────────────
[뿌리의 씨앗]
키메라의 제작에 사용된 근원.
──────────────
아니었다.
씨앗이라는 단어를 보니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혹시 씨앗을 어디 심어서 싹이 트면 미니 키뱀이가 탄생하는 게 아닐까.
그러면 좋겠다.
그때는 내가 꼭 잘 챙겨 줘야지.
다음 생에는 바보 같고 포악한, 똥구멍도 없는 어설픈 키메라로 자라지 않도록.
어릴 적부터 훌륭히 양육해 줄 것이다.
-진실로 귀한 표본이로다! 반드시 챙기거라! 아공간이 부족하면 금붙이를 버려도 돼!
저 못된 마도사에게 교육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파프나챠처럼 거미를 닮은 못된 마물로 성장할지도 모르니까.
이걸 그냥 놔둔 채로 떠나다니, 그 병사도 정말 제법이다.
나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일지도.
나는 키뱀이의 씨앗을 회수하려고 했다.
'이거, 왜 안 펴져.'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건틀릿이 씨앗을 꽉 쥐고 있었고, 그 위에 나무뿌리 같은 게 뒤덮여서 펴지지가 않는다.
한참을 낑낑대던 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답답한 폐급이 아니다.
건틀릿을 펼 수 없으면 건틀릿째로 가져가면 되는 일 아닌가.
철컥!
이음쇠를 풀자 건틀릿이 툭 떨어졌다.
나는 아공간에 건틀릿을 집어넣었다.
이미 아공간이 꽉꽉 차서, 어쩔 수 없이 펠레리안의 던전에서 찾은 금붙이를 버렸다.
-그래, 잘했다. 빨리 가라!
'잘 가져갑니다!'
이제 진짜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바깥이 소란스럽다.
어디로 가지.
아, 저쪽으로!
막사의 벽 쪽에 땅굴을 파면서 아래로 파고들었다.
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갑옷 안에 아무것도 없었던 거 맞나!"
"어, 예에, 아마도 그렇습니다."
불쌍한 병사 같으니라고.
내가 바깥으로 빠져나온 순간.
"이, 이 미친!"
뒤에서 성기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얼른 도망가자!
< 지배의 뱀 >
075. 지배의 뱀
제라드 마르테인.
호랑이 후작, 전사.
근 10년 내에 영웅이 죽었던 적이 없건만, 갑자기 발생한 초유의 몬스터 웨이브에 의해 마르테인 후작이 사망했다.
바야흐로 격동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태양창 한 자루로 제국을 두렵게 했던 마르테인 후작은 그 이름값에 걸맞은 최후를 보였다.
몬스터 웨이브를 이끌던 우두머리 마물을 처치하고 양패구상한 것이다.
그 마물은 울음소리로 몬스터 웨이브를 이끌었더랬다.
우두머리가 죽자, 몬스터 웨이브의 응집력은 약해졌다.
유체의 흐름은 그것이 한군데에 집중될수록 빠르고 강력해진다.
구심점을 잃은 몬스터 웨이브는 마치 강폭이 점차 넓어지듯 확산했다.
며칠 내내 전투가 벌어졌다.
그 여파로 마르테인 후작령은 초토화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물에게 물려 죽었고, 태고의 숲에서 서로 잡아먹던 괴물들이 인간의 맛을 알아 버렸다.
농토와 집들이 불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작의 분투는 의미가 있었다.
마르테인 가의 전사들은 영주성을 비롯해서 영지의 가장 중요한 도시를 지켜 낸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마물들은 기어코 국경을 넘어 제국에까지 이르렀으니.
무수한 마물들을 처치하는 것은 이제 제국의 몫이 되었다.
마르테인 령의 살아남은 자들은 뒷수습을 시작했다.
그중에는 처음으로 마물들과 격돌한 에인돌 평야를 조사하는 것도 있었다.
후작의 목숨을 앗아간 트윈 헤드 키메라의 사체를 수집하고 병사들의 시신 또한 수습해야 할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병사들은 그곳 한가운데에서 웬 마차를 찾았다.
나무줄기에 휘감겨 있는 마차.
근처에 알짱대는 들개 비슷한 마물들을 해치우고 나서, 마차에 뒤덮인 나무줄기를 도끼로 뜯어냈다.
안에는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병사들은 곧바로 영주성으로 데려갔다.
메리 마르테인 후작 부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레이림의 사냥꾼, 올리버입니다."
올리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자기를 소개했다.
옆에 있던 자인도 자기를 소개하려던 순간.
"옆에는 그레이림의 기사, 자레인 경입니다."
"······자레인입니다."
철사자 기사단의 자인이라는 말 대신, 그리 소개했다.
그것이 올리버의 배려라는 것을 자인 또한 곧바로 알아챘다.
"라니아 그레이림, 입니다."
라니아는 잔뜩 긴장해서 스스로를 소개했다.
지금 그녀는 귀족 영애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췌한 몰골이다.
얼굴과 옷은 씻지 못해 더러워졌으며, 잠도 못 자 볼이 핼쑥하다.
"대체 어떤 연유로 그곳에 계셨는지······ 여쭤도 될지요?"
그리 물어본 것은 후작 부인이 아니라 영주성의 집사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후작 부인은 그 속마음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마물들이 마르테인을 휩쓸고 갔지만 영주성은 여전히 화려했다.
그레이림보다 훨씬 더.
라니아는 몸이 벌벌 떨렸다.
"이곳 마르테인으로 도망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거대한 키메라 뱀이 저희를 납치······ 했어요."
더듬더듬, 라니아가 여태까지의 사정을 말했다.
다만, 흰 뱀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하게 함구했다.
이미 올리버, 자인과 그러기로 약속한 내용이었다.
"어찌 그런······."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마르테인의 가신들이 웅성거렸다.
라니아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외할아버지가 죽었단다. 그 강인한 영웅이.
애초에 라니아가 마르테인으로 향했던 것이 그에게 구원 요청을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사이 그레이림이 무너지고 마르테인 령까지 초토화되어 버렸다.
라니아의 운명은 이제 어떻게 될까.
처음 만나는 외할머니는 너무나도 무서워 보였다.
이대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불타 버린 그레이림으로 돌아가야 할 테지.
군터가 아직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뒤이어 입을 연 것은 후작 부인이었다.
"라니아."
후작 부인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화려한 옷은 아니었지만, 사뿐히 내려앉는 발끝에서 귀족의 품위가 느껴졌다.
키도 아주 컸다.
라니아는 어쩐지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의 추레한 몰골이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후작 부인이 라니아를 와락 끌어안은 것은.
"살아서 다행이구나. 으흐흑."
그녀는 무너지듯 라니아의 앞에 주저앉았다.
라니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후작 부인의 품에 안겼다.
"할머님······."
"네가, 네가······."
후작 부인은 놀라운 사실을 말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후작님의 직계 혈육이야."
"아."
올리버와 자인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굳었다.
후작에게는 자식들이 있었다.
후작위를 이어받을 아들도, 손주도 있을 텐데.
"전부, 죽어 버렸어."
늘 선봉에 서는 마르테인의 정신.
그것이 결국 마르테인을 죽였다.
그 말이 의미하기로는······.
"이제 네가 후작님의 후계란다."
처음 만난 외할머니가 자신을 끌어안고 울고 있다.
라니아는 지금 상황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어쩐지 느껴지는 것은.
이제 라니아 그레이림이 아니라 라니아 '마르테인'으로 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 * *
회색 산맥.
대륙의 오대 마경 중 하나.
그러나, 회색 산맥을 겨우 산 몇 개의 군집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수림이나 '사막'과 비교해서는 면적이 좁다 하나, 그 길이가 어마어마하다.
괜히 회색 산맥이 대륙의 등뼈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왕국을 걸쳐서 대륙까지 이어지는 오릴라테 대간(大幹)이 산맥의 척추.
그리고 척추에는 응당 갈비뼈가 달려 있는 법이다.
드높은 오릴라테 대간에서 갈비뼈처럼 더 작은 산맥들이 뻗어 나간다.
산맥과 산맥 사이에는 사람들이 살고 도시 또한 있다.
종종 마물들이 밀려 내려온다고 해도, 산맥의 풍부한 자원은 인간과 드워프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광산 도시로 이름을 날린 칼레아 시 또한 그곳에 있다.
칼레아 시로 이어지는 도로의 초입 부분에는 중간 교역소가 하나 있다.
물류가 모이고 상단 또한 모이는 장소다.
오늘도 칼레아 시로 향하는 마차상들이 그곳에 있었다.
교역소의 도매상이 마차상에게 물건 가격을 고지했다.
"오크통 하나에 보증금 50실버씩 붙어. 다시 반납하면 돌려주고."
"아니 그걸 내가 모르나? 원래는 30실버였는데 왜 갑자기 50실버로 올랐느냔 말이지."
"산적들한테 몇 번이나 털려서 오크통도 많이 잃어버린 걸 어째."
도매상은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게 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말해서 되나?"
"싫으면 말고. 에일 사 갈 마차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야."
맥주는 가져가기만 하면 완판되는 칼레아 시의 인기 상품이다.
도매상의 말대로 에일을 사 가려는 마차상은 널렸다.
상인은 난처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유, 참."
마차상이란 짐 마차 한 대로 떠돌이 장사를 하는 이들이다.
말과 마차를 보유했다는 것을 빼면 보부상과 다름없다.
도매상에게 가격 인상을 통보받은 상인도 그닥 부유해 보이지는 않는다.
순해 보이는 얼굴 하며, 수염을 제대로 깎지 않아 꺼끌꺼끌한 턱.
피곤해서 퀭한 두 눈이 아무리 봐도 거상의 자질은 없어 보인다.
"로일. 빨리 정해. 지금 에일 사면 육포 한 상자 더 얹어 줄게."
도매상이 선심 쓰듯 말하자 로일이라 불린 상인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대금은 저기서 치르고. 마차에는 내가 애들 시켜서 상차해 둘게."
"고맙네, 고마워."
"그리고 꼭 다른 마차들이랑 같이 움직이고. 요즘 산적 많은 거 알지? 자네는 아들놈도 같이 데리고 다니니까 더 조심해야지."
"그래야지······."
로일은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그의 뒤로, 방금 전까지는 웃으며 걱정해 주던 도매상이 표정을 싹 굳혔다.
"구질구질한 새끼. 어차피 사 갈 거면서 꼭 가격을 깎으려 든다니까."
칼레아 시에 에일을 가져가서 팔면 다음에 또 방문해서 팔아 둔 오크통을 수거해 와야 한다.
그걸 다른 사람한테 맡겼다가는 수수료를 대폭 뜯기고, 만약 오크통을 잃어버리면 손해가 막심하다.
도매상들은 그것을 알고 있기에 마차상들에게 세게 나갈 수가 있었다.
교역소의 짐꾼이 낄낄거리며 끼어들었다.
"로일은 지 아들을 상행에도 데리고다니는 홀애비 아닙니까. 돈이 많이 필요하다던데요. 아들을 아카데미로 보내고 싶어 해서."
"아카데미는 무슨, 무지렁이 놈이."
"그쵸? 하하."
"너도 게으름 그만 피우고 이거 저놈 마차에 실어 둬라."
도매상이 발치에 있는 나무상자를 툭 걷어차며 말했다.
상미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육포였다.
로일에게 선심 쓰듯 주겠다고 한 그 물건이었다.
짐꾼은 영차 소리를 내며 상자를 들어 올렸다.
"오, 오늘따라 좀 묵직한데요? 좀 많이 넣어주셨나?"
"헛소리는, 엄살 피우지 말고 가."
짐꾼은 머쓱하게 웃으며 육포 상자를 들고 나갔다.
도매상의 오해와는 달리, 그는 헛소리를 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감각이 날카로운 직원이라고 칭찬을 받을 만했다.
상인 로일의 마차에 실리게 된 육포 상자는 정확히 뱀 한 마리 만큼 무게가 더 나갔기 때문이다.
* * *
*「은밀lv9가 은밀lv10이 되었습니다.」
어쌔신 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
짐 마차에 잠입 성공.
나는 옆에 있는 육포를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짭짤하고 질긴 것이 입맛이 절로 돈다.
오랫동안 마물을 생으로 잡아먹다가 조미료 맛을 보니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이게 여행이고 이게 행복이지.'
처음부터 즐거운 여정은 아니었다.
인간들의 군대에서 도망쳐 나올 때는 진짜 위험했다.
지나가던 수레 안에 들어가서 함께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병자를 호송하는 마차의 밑바닥에 붙어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다가 운 좋게 북쪽으로 향하는 상단을 마주쳤다.
불침번을 서던 용병이 수풀에서 오줌을 싸는 동안, 나귀가 메고 있던 짐 안에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이곳 교역소까지 도착했다.
나는 또 한 번 목적지로 향하는 상인의 마차에 잠입했다.
짐칸에는 맥주가 담긴 오크통이 차곡차곡 들어섰다.
"다 채웠습니다. 육포도 안쪽에 넣어 뒀어요."
"고마워요."
무게 때문인지 짐칸에는 자리가 꽤 남았다.
즉, 내가 앞으로 지낼 공간이 여유롭다는 것을 의미했다.
러브하우스나 다름없다.
'따라다라따-'
익숙한 음악을 흥얼거리며 숙소를 점검했다.
몸을 쫙 피고 뒹굴거려도 남을 만한 공간이다.
육포뿐만 아니라, 상인이 먹을 식량이며 가재도구도 한구석에 있었다.
잠시 신세를 지기에는 오성급 호텔 부럽지 않았다.
육포값이랑 숙박비는 나갈때 남겨두고 가면 되겠지!
"다 모였으면, 출발할까!"
"가지."
잠시간의 소란이 끝나고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아공간에서 지도를 꺼내 보았다.
지도 곳곳에는 검붉은 점이 그려져 있었다.
펠레리안의 던전이 있는 곳을 표시해 둔 것이다.
붉은 물감의 정체는 사실······.
킁킁.
음, 체리 냄새가 여전히 은은하군.
사실 저번에 훔쳐먹은 체리즙으로 찍어 둔 점들이다.
그리고 나는 지도에서 '칼레아'라는 도시를 찾아냈다.
이 마차의 목적지다.
그 도시의 경계선에도 붉은 점이 그려져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펠레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왜요. 여기 맞지 않아요?'
-그래서 문제다. 내가 던전을 만들었을 때는 이딴 도시가 없었어!
그가 궁시렁댔다.
나도 조금 걱정된다.
'이미 던전이 털려 버린 거 아닌가 몰라.'
-쉽게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던전이니까.
역천의 마도사가 이곳에 던전을 지었을 때, 칼레아 산은 드워프들의 영토였다고 한다.
-드워프들이 사라진 것도 아닐 텐데 인간들이 그곳에 도시를 지은 것부터 말이 안 돼.
하지만 현실이 그런 것을 어쩌나.
'갔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실망스러운데.'
-걱정 마라······ 그러지는 않을 테니.
펠레리안의 목소리는 퍽 자신감이 없었다.
던전이 멀쩡하기를 바라자!
이 '영웅 살해자' 우르오로스에게 뛰어난 검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이니.
키뱀이를 죽인 그 성기사.
내가 해치운 그자는 알고 보니 대단한 유명인사였다.
왕국에서 손에 꼽히는 대귀족이며, 성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한 화경의 고수.
호랑이 후작 제라드 마르테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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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살해]
영웅으로 불리는, 인세에 특출난 인물을 살해했습니다.
마성의 격이 오릅니다. 위엄이 오릅니다.
카르마가 쌓입니다.
영웅을 상대할 때, 한층 더 강인해지고 마력이 솟아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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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을 달성해 버렸지 뭐야.
카르마가 쌓인다는 말이 조금 신경 쓰이지만 원래 산다는 것이 업을 쌓는 일 아니겠는가.
제라드 마르테인을 수식하는 표현은 많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와닿은 것은 '군터의 라이벌'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 하나를 의미한다.
'나는 강해졌다.'
내가 그의 라이벌을 해치웠으니.
'군터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야.'
그리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헛소리! 빨리 마법이나 수련해라.
'네.'
펠레리안이 질린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지금의 호캉스를 즐기고 있다지만 아예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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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lv12]
[이명] 우르오로스, 심장 파먹는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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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 12까지 올랐다.
저번 진화를 레벨 30에 해냈으니, 다음 진화는 레벨 40이나 50은 되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다.
확실히 내가 다른 마물들보다 진화를 자주 하기는 하는 것 같다.
이번에는 꼭 서펜트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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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 왕관
[강탈lv4]: 거대화lv0, [극복lv2], [지배lv2]
▸ 마법
[초급원소]: 불lv6, 흙lv6, 물lv4, 바람lv4
[투명한 손lv11], [경량화lv3]
▸ 기술
...
──────────────
마법을 주로 수련했다.
원소 마법의 레벨이 전반적으로 올랐고, 투명한 손은 10의 벽을 넘었으며 경량화도 lv3이 되었다.
생각보다 경량화 마법이 아주 쓸모가 있었다.
*「마법:경량화lv3을 사용합니다.」
오크통은 배럴보다는 작은 사이즈였지만 한 통에 100리터는 넘게 들어갈 것 같다.
그러니까 100kg도 넘는 용량이다.
하지만 경량화 마법을 쓰면 내가 낑낑거리면서 옮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크통을 밀어서 벽을 쌓았다.
안에 있는 내가 보이지 않게 가린 것이다.
조용히 마법 수련에 정진하기 위한 노력이다.
'경비도 세워 둬야지.'
여기서 내가 얻은 새로운 수단을 써야 했다.
'이놈이면 되겠군.'
낡은 짐 마차가 으레 그렇듯, 짐칸 안에 귀뚜라미가 기어 다니는 정도는 흔한 일이었다.
나는 귀뚜라미를 간식으로 먹는 대신, 다르게 활용하기로 했다.
*「지배의 왕관lv1을 사용합니다.」
'빌리는 뿔'은 '강탈의 왕관'으로.
'뛰어넘는 뿔'은 '극복의 왕관'으로.
'길들이기'는 '지배의 왕관'으로 변화했다.
키메라 뱀에게 지배의 왕관을 사용했을 때는 실패해 버렸다.
다만 부분적으로 길들이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그래서 당시에는 지배의 왕관이 대체 무슨 스킬인지 알지 못했다.
이제는 안다.
지배의 왕관은 아주, 대단히 잠재력이 높은 스킬이었으니.
*「귀뚜라미를 지배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귀뚜라미를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지배'
그것은 말 그대로 상대를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는 스킬이었다.
'너, 누가 짐칸에 접근하면 울어서 나한테 알려 다오.'
귀뚜라미는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길들인 마물에게 명령을 하는 것과는 아예 다른 감각이었다.
*「현재 지배력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아직은 벌레 한 마리 부리는 정도지만.
지배의 왕관 레벨이 오른다면?
거기에 극복의 왕관까지 함께 사용한다면?
어쩌면 사람도 지배할 수 있지 않을까.
군터 같은 놈들이라든가!
즐거운 상상을 하며, 나는 마법 수련을 시작했다.
< 방패는 필요 없어 >
076. 방패는 필요 없어
왕국의 수도.
솔리온 임펠.
제국에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만 솔리온 왕국의 국력은 약하지 않다.
솔리온은 그들이 보유한 영웅의 강력함을 제외하더라도 제국이 견제할 만한 왕국이다.
수도 역시 그 국력에 걸맞은 대도시였다.
솔리온 임펠 중앙에 있는 궁성 솔라리움, 통칭 태양궁성.
매일같이 수천 명이 드나드는 궁성이었지만 마탑의 도움을 받아 건설한 만큼 여전히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었다.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관료들은 종종 길을 잃었다.
한참을 헤매다 보면 드물게 한 건물 앞에 도착하게 된다.
화려하게 치장된 다른 건물과 달리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평범한 건물.
하지만 그 건물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닥 관찰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도 금방 알 수 있다.
비정상적으로 창문이 적은 건물이다.
사 층짜리 건물인데 꼭대기 층만 제외하고는 창문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궁성의 건물들은 대부분 문이 동서남북으로 네 개. 아무리 적어도 두 개는 있었다.
하지만 이 건물은 가드들이 지키고 있는 정문 말고는 출입문조차 없다.
이곳이 대체 어떤 곳일까.
길 잃은 관료가 호기심을 느낄 때쯤 누군가 나타난다.
"물러나시죠.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어엇, 하는 사이에 강제로 쫓겨나게 된다.
젊은 관료는 선배들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그곳의 이름을 듣게 된다.
스왈로우 하우스.
통칭, '제비집'.
왕국 최고의 첩보기관인 왕실정보국이 존재하는 건물이었다.
그 사실은 젊은 관료들의 호기심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대체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창문이 없는 이유는 안에서 고문과 처형을 비롯한 비인간적인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라던데.
호기심을 못 이긴 관료가 제비집을 알짱거리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괴담은 어느 부서에든 돌고 있었다.
무수한 추측과 괴담 중에는 맞는 것도 있고 완전히 헛된 것도 있었다.
3층까지 창문이 하나도 없는 것은 보안 때문이 맞다.
고문과 처형을 숨기기 위해서만은 아니고 마법적인 도청과 감청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다.
그렇다면 꼭대기 층인 4층에는 왜 창문이 있을까.
그 이유는 사실 실망스러울 정도로 간단했다.
건축 당시에는 창문이 없었다.
하지만 몇 년 뒤, 건물 내 환기를 위한 창문을 뚫을 수밖에 없었다.
피로에 절은 왕실정보국의 관료들이 회의 때마다 도합 수백 대의 연초를 뻑뻑 피워 댔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는 업무 중 폐 질환으로 인한 순직자가 대량 발생하고, 보훈 보상금 소요가 증가해 왕실 재정에 부담을 주리라는 보고서가 올라올 정도였다.
오늘도 4층 창문에서는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왕실정보국 위협 요소 안보회의가 48시간째 이어지고 있으니, 관료들은 피로에 절여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국장님, 제국 측 요원으로부터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콜록!"
국장이라고 불린 자는 생각보다 젊은 여성이었다.
다만 키는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컸고, 한쪽 눈이 없는지 안대를 차고 있었다.
"어떻다는데."
"제국 제4 보병사단이 전멸했다는군요. 쿨럭, 희생이 있었지만 결국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냈나 봅니다."
"겨우 그 정도? 아쉽구만."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그녀는 하늘로 연기를 내뿜고 다시 물었다.
"우리한테, 뭐 입장표명 한 것 없어?"
왕국은 몬스터 웨이브를 제국 쪽으로 유도했다.
철저히 비밀로 감춘 일이지만 정보국장을 필두로 한 이곳의 인물들은 알고 있었다.
"준비 중인 것 같습니다만. 아직 공식적인 루트로 온 것은 없습니다."
"비공식적으로는?"
"마르테인 후작의 사망과 그 영지의 피해에 대해 심심한 조의를 표한답니다."
"푸흐흐."
국장은 낄낄 웃었다.
영웅이자 후작인 마르테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국이 조의를 표할 만큼 큰일이 맞다.
하지만 자신들의 피해도 큰 상황에서 곧바로 이런 말을 전할 줄이야.
"황제폐하께서 친히 마르테인 령의 피해복구를 물심양면 도우라고 하셨답니다만."
"거절하면 지랄을 하겠지?"
"그렇겠죠."
정보국에서는 곧바로 제국의 의중을 짐작했다.
대수림에서 왜 갑자기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그 몬스터 웨이브가 제국까지 향했는지를 조사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라고 해. 후작령이 박살 난 거나 보고 가겠지."
하지만 제국이라고 해서 대놓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리라.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명백히 왕국이다.
수도가 무너지는 것은 면했지만, 몬스터 웨이브를 막다가 그놈들이 제국 쪽으로 경로를 튼 것을 어찌하겠는가.
트집 잡을 명분은 찾을 수 없으리라.
"알겠습니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왕실정보국.
그들은 또 한 번 왕국을 멸망에서 구해 냈다.
"그것보다 말이야. 그 녀석은 아직도 못 찾았어?"
"그 녀석······ 말입니까?"
"아이씨, 척하면 딱 알아들어야지. 그 검은 뱀!"
국장은 반도 피우지 않은 연초를 비벼 껐다.
"새로운 재앙의 탄생일지도 몰라."
마르테인 후작은 몬스터 웨이브의 키메라와 양패구상했다.
겉으로 알려진 것은 그 정도지만, 그 키메라에게 작은 머리 하나가 더 달려 있었다는 점은.
게다가 직접적인 후작의 사인이 검은 뱀에 의한 것이라는 정보가 국장을 흥분시켰다.
"내 촉이 느껴진단 말이야. 확실해."
"그 촉 믿고 날려 버린 예산이 한두 푼입니까."
"너는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참 귀여웠는데. 하여튼 목격 정보가 없었다는 말이지?"
"예, 목격 정보는 들어온 게 없습니다. 아마 못 찾지 않을까요? 작은 뱀 한 마리면."
"그렇겠지. 흐음······. 우리나라에 남아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몬스터 웨이브는 마물을 홀리니까요."
제국 녀석들도 귀찮게 되겠군. 하며 국장이 중얼거렸다.
"정 신경 쓰이시면 요주의 마물로 올려두고 현상금도 걸까요?"
요주의 마물.
그런 마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사냥꾼들이며, 각 마경의 감시자들에게 전달되는 리스트다.
국장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니, 그러지 마. 제국 좋은 일을 뭐 하러?"
한 마리의 검은 뱀(사실 흰 뱀)의 운명이 조금 바뀐 순간이었다.
"대신 관리 대상에는 올려두자고."
"그러겠습니다. 그러면 이름은 뭐라고 쓸까요?"
많은 마물들이 그녀의 센스에 의해 형편없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의 뱀 마물은 어떻게 될까.
"검은색이니까 까만······."
"검은은 어떨까요."
"그래, 검은······."
왕관을 쓴 검은 뱀.
그 이름이 마침내 정해졌다.
"······검은 사왕."
* * *
*「마법: 경량화lv3을 사용합니다.」
*「투명한 손lv11을 사용합니다.」
기사의 건틀릿에 경량화 마법을 사용했다.
그 건틀릿은 아주 크고, 몹시 무거웠다.
레벨이 많이 올라간 투명한 손 마법으로도 그저 휘적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경량화 마법을 사용하니 제법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투명한 손에 건틀릿을 끼웠다.
더 이상 투명한 손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건틀릿이 되었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뒤지게 멋있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드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단한 건틀릿 위에 내가 올라갈 수 있었다.
꼬리로 건틀릿을 한 바퀴 감아 몸을 고정한다.
그리고 조심히,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집중.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기회다, 집중해.
아.
완전히 몸이 떠올랐다.
살아 있는 건틀릿에 탄 무시무시한 흰 뱀 우르오로스 완성이다.
나와는 도저히 궁합이 맞지 않는 '비행' 스킬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건틀릿에 검까지 쥐면 그야말로 어검비행술의 완성이다.
허공에 붕 뜨는 것까지는 분명 성공했다.
-말도 안 돼!
펠레리안이 경악했다.
내가 이것을 시도하겠다고 말했을 때, 펠레리안은 어디 한번 해 보라면서 비웃을 따름이었다.
절대 불가능할 거라는 태도여서 오기가 생겼다.
수십 차례의 실패 끝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건틀릿을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움찔한 순간 투명한 손을 이루던 마력이 흩어져 버렸다.
쿵!
나는 건틀릿과 함께 떨어졌다.
바깥에 들리지는 않았겠지?
다행히 밖은 조용했다.
-푸하하핫!
펠레리안은 언제 긴장했냐는 듯 또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경량화 마법을 생물에게 쓰지 못하는 것과 똑같아. 이게 가능했다면 진작 염동술사들은 날아다녔을 것이다.
투명한 손 마법으로 비행을 못 하는 이유에는 과학적, 아니 마법적인 근거들이 있었다.
펠레리안의 설명에 따르자면.
-네 시도는 마치 허공에 뛰어오른 뒤 자신의 발등을 밟고 또 한 번 뛰어오르려는 것과 다름없지.
'발보등공이라는 경공이군요.'
-혹은 큼지막한 나무 한 그루를 뽑아 던져, 그 위에 올라타서 날아간다는 발상과 같다.
'그건 드래곤볼에서 본 것 같은데.'
아쉽기 그지없다.
-쓸데없는 짓은 여기까지. 이제는 제대로 된 것을 배울 차례이다.
'넵.'
나는 얌전히 펠레리안의 교습을 경청했다.
그와 나의 약속은 이런 방식이었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한번 시도해 보고, 펠레리안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것을 그다음에 듣는 것이다.
-오늘 배울 것은 만다라와 마법진, 그리고 부적 마법이다.
생긴 것도 성격도 꼬장꼬장한 펠레리안이다.
어쩐지 '정통 마법'을 추구하고 그 외의 학문을 무시할 것 같은 인상이었지만, 적어도 마법 관련해서는 달랐다.
그는 다양한 마법에 박식했고, 그 습득과 활용에 거리낌이 없었다.
-네가 여러 행운을 통해 마력 량을 많이 늘렸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그게 사실이지.
어쩌겠는가.
사실 지네 삼 남매와 나이는 비슷할 텐데.
그러고 보니 그 애들이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지네 맘이 잘 돌보고 있겠지?
-네 아비와 비교해 본다면 너도 와닿겠지.
'아버지는 거대화랑 파괴광선도 잘 썼으니까요.'
세월이 지날수록 마력 보유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진화를 통해서 마력을 늘리는 것 외에도, 기사나 마법사들이 수련하는 것처럼 마력을 쌓는 것을 병행해야 한다.
'설마, 호흡을 통해 세상의 마력을 흡수하는 건가요?'
-어떻게 알았냐?
'그냥 추측입니다.'
-그래, 사실 뱀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 볼 만은 하겠지.
내공심법을 배운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면 오러도 마력으로 뿜는 거 맞죠? 속성도 막 다른 것 같던데. 군터는 벼락을 뿜어댔고 저번 그 기사는 불꽃을 뿜었고,'
-쓸데없는 데에 관심 갖지 말거라.
펠레리안이 경계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마나 브리딩을 배우는 동시에, 적은 마력으로도 뛰어난 효율을 낼 수 있는 마법을 배우는 게 좋을 거다. 그게 바로 만다라, 부적, 마법진을 활용하는 것이지.
펠레리안의 설명은 그러했다.
마법진을 그려서 마법을 쓰면 마력을 훨씬 적게 소모할 수 있다.
다만 준비시간이 길다는 게 문제인데, 미리 그려 놓으면 상관없다는 논리다.
-필기구가 필요할 텐데, 일단은······.
그때였다.
펠레리안의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려던 순간.
찌르르륵, 찌르륵.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배해서 경계용으로 써먹고 있던 놈이다.
*「지배한 귀뚜라미가 사망했습니다.」
*「지배력이 회수되었습니다.」
보초 귀뚜라미가 죽었다.
침입자다!
암살자라도 찾아온 것일까.
나는 경계하면서 짐칸의 입구로 향했다.
'······에휴.'
거기 있던 것은 그저 개 한 마리였다.
"헥헥, 멍!"
'쉿, 조용히 해, 이 자식아!'
짐 마차의 주인인 로일이라는 인간이 기르고 있는 개다.
이름은 재키.
녀석이 또 귀뚜라미를 잡아먹은 것이다.
'이걸 확 어떻게 해 버릴 수도 없고.'
이미 개에게도 지배를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길들이는 데에만 성공했을 뿐, 지배는 실패했다.
녀석은 내 첫 귀뚜라미를 잡아먹은 이후로 이곳이 간식 귀뚜라미 배급소라도 되는 줄 아는지 자꾸 찾아왔다.
'당장 꺼지지 못해!'
"왕!"
재키가 내 얼굴을 핥았다.
귀여우니까 봐준다.
그때였다.
"뭐야 재키, 왜 그래."
사람 목소리가 들려 일단 얼른 숨었다.
* * *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얌마, 이리와."
재키가 또 짐칸에서 알짱거렸다.
거기에 올라가겠다고 앞다리를 걸치고 낑낑대는 것이다.
로일은 그런 재키를 강제로 끌고 갔다.
"육포는 못 준다니까는."
에일을 사고 덤으로 얻은 육포 때문일 게 뻔했다.
그 냄새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상인들은 잠시 마차를 멈추고 노새를 쉬게 하던 참이었다.
"아마엔, 재키 밥 줬니?"
로일은 자신의 아들을 찾았다.
대답한 것은 아들이 아니라 동료 상인이었다.
"방금 주는 것 봤어."
"그래? 이런, 공부 중이었구만."
로일이 씨익 웃으며 자신의 아들을 보았다.
이제 열두 살 된 어린 아들이다.
아버지를 따라 상행에 동행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진대, 아마엔은 불평 한마디 없었다.
너무 일찍 철이 든 아들의 모습에 종종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아들은 로일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그 마나 수련인지 뭔지 하는 거야?"
"응, 내년에 아카데미 들어가려면 열심히 해야 하니까."
놀랍게도, 로일의 아들은 마법에 재능이 있었다.
떠돌이 마법사 한 명이 아마엔에게 그가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로일은 마법사에게 비싼 돈을 주고 마나 수련법을 얻었다.
거기다 기초적인 마법 수련법이 담긴 마도서까지 구매했다.
지금 아마엔은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명상 중이었다.
기특하기 그지없다.
가진 돈을 전부 털어서라도 내년에는 아마엔을 괜찮은 아카데미에 보낼 생각이다.
사실, 이러한 로일의 생각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조금 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지렁이가 할 법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떠돌이 마법사의 무엇을 믿고 아들을 마법사로 키우려는가.
이제는 마법이 꽤 흔해졌다고 하나, 여전히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단한 재능이 필요하다.
무지막지한 돈이 드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아마엔은 진짜로 재능이 있었다.
한 번의 가르침으로 마나 수련 방법을 깨우치고.
한 권밖에 없는 마도서는 너덜거릴 정도로 탐독했다.
지금 하고 있는 호흡 수련도 제대로 된 방식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주변의 마력을 조금씩 흡수한다.
어린 나이에도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아마엔의 감각에는 주변의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후우우."
조용히 숨을 내쉬는 소년의 볼이 불그스름했다.
조금 긴장한 탓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착각이 아니다.
아버지의 짐 마차.
그 짐칸에서 또다시 마력의 흐름이 발생하고 있었다.
'진짜인가.'
아마엔이 품에 안고 있는 마도서.
「현자 리베르타의 신비로운 마법학 입문」 에는 다양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서는 신비로운 생물들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름을 타고 다니는 마물이며, 뱃속에 인어들을 품고 다니는 고래.
그리고 마법을 쓰는 뱀까지.
저자 리베르타는 특히 뱀을 마법사의 친구라고 설명했다.
가장 마력에 친화적인 생물 중 하나라던가.
오래 살아서 진화한 뱀 마물과는 대화도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아마엔은 책을 뒤적였다.
거기에 뱀의 언어라는 '사어(蛇語)'가 설명되어 있었다.
이것을 처음 읽었을 때는 터무니없다고 느꼈지만. 이번에야말로 확인해 볼 기회였다.
짐칸 안에 뱀이 타고 있다.
재키가 뱀의 얼굴을 핥는 모습을 분명 보았다.
그 똑똑하고 충실한 사냥개가 뱀을 물어 죽이는 대신 꼬리를 흔들다니.
범상찮은 뱀이었다.
일찍 철들었다고는 하지만 아마엔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아버지에게 말하면 혼나겠지?'
소년의 호기심이 불타올랐다.
"스튜 끓일게."
"난 장작 좀 모아 오지."
어른들이 바쁜 지금이 기회였다.
아마엔은 조용히 마차 짐칸을 향했다.
무서우니까 재키를 데리고.
날이 어두워지니 짐칸 안이 캄캄해서 보이지 않았다.
아마엔은 목을 가다듬고 책에서 읽은 사어를 따라 했다.
"사아앗, 사악. 쉬릿."
뱀이여 거기 있습니까.
답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아앗, 사악, 쉬릿."
침묵은 이어졌다.
소용없나, 싶어 아마엔이 실망하려던 참이었다.
스르륵, 스륵.
어둠 속에서 흰 뱀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크지 않다. 생긴 게 무섭지도 않다.
다만, 비늘은 수정처럼 빛났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쉬리릿."
뱀이 아마엔의 부름에 답해 주었다.
* * *
'얘 지금 뭐라는 거예요?'
밖에서 사악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조심히 나와 봤는데.
웬 꼬맹이 하나가 책을 꼭 껴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고 알겠나.
꼬마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보고 말했다.
"쉬잇, 사라라락."
음 아무래도 이거.
-미친 꼬마 인간이군.
그런 것 같다.
< 슬리데X은 안 돼. >
077. 슬리데X은 안 돼.
눈앞의 소년은 라니아라는 꼬맹이 여자애와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
가난한 상인의 아들답게 옷차림은 꼬질꼬질하다.
그래도 머리는 곱슬기가 있는 크림색이어서 그런지, 제법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다.
나이가 들면 꽤 인기를 끌겠구만.
소년이 다시 한번 뱀 소리를 냈다.
"사아악, 사악."
역시 정신은 온전치 못한 것 같다.
불쌍한 녀석이군. 인기남이 되긴 글렀어.
"사앗, 삿."
"사아악!"
내가 어울리듯 한 마디 해 주자 녀석은 얼굴까지 새빨개져서 삭삭거렸다.
콧김을 쉭쉭 뿜는 게 엄청 흥분한 것 같다.
슬슬 놀리는 것도 그만둘까.
그나저나 어떡하지.
숨어 있던 걸 들켜 버렸다.
꼬마가 상인들에게 말하면 분명 쫓겨날 텐데.
마차 여행은 제법 즐겁고 여유로워서 만족 중이었다.
내 목적지인 칼레아 시까지는 아직도 며칠은 더 가야 할 것 같고.
-음, 살인멸구를 할 계획이냐?
펠레리안이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그러면 안 되겠죠. 상인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맞는 말이다.
이 인간 꼬맹이를 잡아먹는다고 해도 마차 여행이 끝나는 것은 마찬가지이리라.
운이 좋구나 꼬마야.
그나저나 얘는 내가 숨어 있던 것을 어떻게 안 걸까.
바로 쉿쉿거리는 것을 보면 미리 알아챈 것 같은데.
이럴 때마다 얻지 못한 투명망토가 떠오른다.
그 물건만 있었다면 아주 편했을 텐데.
여전히 대수림의 노움 손에 있겠지? 아깝기 그지없다.
-잠깐.
그때, 펠레리안이 진지하게 말했다.
-저 인간 꼬마의 책. 저거, 저거를 가져와 봐라.
책?
꼬마가 들고 있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현자 리베르타의 신비로운 마법학 입문」
마법 개론서 비슷한 건가.
나는 꼬마와 책을 향해 꼬리를 휙휙 까딱였다.
어이, 책을 이리 가져와 봐라.
"쉬쉬싯!"
또 뱀 소리네. 확, 혼나기 전에 가져와 봐.
초등학생 삥을 뜯는 일진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나는 투명한 손 마법으로 소년의 책을 슬쩍 가져왔다.
"와아, 마법······!"
하지만 소년은 당황하는 대신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부담스런 눈빛을 무시하고 책을 펼쳐 봤다.
안에 잉크가 들어 있는 제법 고급스러운 펜이 꽂혀 있었다.
펼쳐진 페이지에 적혀 있기를.
'간단하게 배우는 실전 사어 회화.
1) 처음 보는 뱀에게 인사하는 법.'
헉.
이거 미안하게 된 일이다.
그저 머리가 이상한 꼬마인 줄 알았는데, 책을 보고 따라 한 건가.
'설마 정말 뱀이 쓰는 언어가 있는 거예요?'
나도 모르는 뱀 말이 있었다니, 혁신적인 일이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전부 다 헛소리구만.
자기가 뱀도 아닌 주제에 펠레리안은 딱 잘라 단언했다.
-리베르타, 리베르타,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펠레리안은 서론 부분을 펴 보라고 한 뒤 열심히 읽어 내려갔다.
그사이 나는 투명한 손 마법으로 펜을 잡았다.
'공용어로 쓰면 되겠지.'
그러곤 책의 귀퉁이에 글씨를 썼다.
'너, 리베르타가 누군지 아느냐?'
나도 모르게 나나루크에게 배운 말투를 써 버렸다.
"아! 아······ 사삭······."
꼬마는 다시 한번 쉿쉿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회화 레벨이 그리 높지는 않은 것 같다.
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쩔쩔매는 게 조금 재미있었다.
더 즐기려다가 그냥 말았다.
'사어는 헛소리다. 인간이 뱀의 말을 배울 방법은 없어.'
"그, 그런가요?"
'말하거라, 리베르타가 누군지 아느냐?'
"위대한······ 대마법사였다고 들었어요. 백 년 전쯤 활동한."
펠레리안은 '대마법사? 으음······.'하며 고민했다.
나는 소년의 설명을 더 기다렸다.
"모든 원소 마법에 정통하고······ 늘 황금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다녀서 황금 가면의 현자라고 불렸대요.'
제법 낭만적인 마법사였군.
그때였다.
-아 그 사기꾼 자식!
펠레리안이 드디어 기억났다는 듯 자신의 큼지막한 머리를 쳤다.
'아는 인간이에요? 사기꾼?'
-그래. 지가 대마법사라고 허풍을 치면서 인간들을 등쳐먹고 다니는 어린 놈이었지.
'호오.'
-황금 가면이라니, 왜 그딴 것을 쓰고 다녔는지 알겠어.
아무래도 펠레리안은 저 마도서의 저자와 인연이 있던 것 같다.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봐 주었다.
그러자 펠레리안은 신나서 답했다.
-나한테도 사기를 치려고 들더군. 어찌나 건방을 떨던지 그 높은 코를 위아래 거꾸로 만들어 붙여 주었다.
'······.'
-그 후로 비만 오면 그리 기침을 해 댔다는데. 으하하.
역시 펠레리안은 대륙의 공적이 될 만큼 악독한 마법사였다.
'그러면 얘는 사기꾼이 헛소리해 둔 책으로 마법을 배우고 있는 거네요?'
-마법 입문서쯤이야 그놈도 쓸 수 있겠지만······ 사어 회화 챕터를 보니 제 버릇을 끝까지 고치지는 못했군.
인간 꼬마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진실을 아는 게 낫겠지.
'어린 인간아, 리베르타는 형편없는 반푼이 마법사였다. 보고 배울 것이 못 돼.'
나는 꼬마애가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헉, 설마 리베르타를 만나 보신 거예요?"
눈이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고민한 뒤 답했다.
'그러하니라. 형편없는 녀석이더군. 콧대를 세우고 건방지게 굴기에 그 콧대를 뒤집어 놓았더니 황금 가면을 얹고 다녔나 보구나.'
헤헤, 재미있다.
꼬마는 엄청나게 감탄했다.
"와아······."
'그 내면의 추함은 황금으로도 가릴 수 없을진대.'
"그러면 대체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생후 4개월이라고 답하려다가 얼른 바꿨다.
'사······백 년 정도 된 것 같구나.'
"허억!"
펠레리안이 '사천 살이라고 하지 그릇이 작구나' 하며 핀잔을 주었다.
지구의 꼬마들이 무서운 공룡을 좋아하듯, 이 세상 꼬마들은 마물을 좋아하는 건가.
"엄청 오래된 뱀이시군요······. 그러면 서펜트인가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우르오로스라고 부르라. 우르로 불러도 되고.'
"우르 님······."
이미 시작해 버린 장난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소년이 간곡하게 말했다.
"제,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음.
역시 애는 애구나.
처음 보는 뱀한테 마법을 가르쳐 달라니, 용기가 가상하다.
-리베르타 이놈은 정말 한결같이 쓰레기 같은 녀석이군. 마도서가 형편없어.
저런 것을 보고 마법을 배우다니, 불쌍하긴 하다.
'어떡할까요, 얘.'
-응?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데.'
-뭐 마음대로 해라.
'음······ 아!'
장난기가 들기도 했지만,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르침을 원하느냐?'
"네······!"
'마땅한 공물을 바치고 태도를 바르게 한다면 네게 지식을 주겠다.'
"공물이라 하시면······."
어쩌면, 이 아이와 상부상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필기구와 종이, 그리고 먹을 것을 가져오라.'
지금보다도 더 안락하게 지낼 수도 있을 거고.
"먹을 거면······ 쥐나 개구리 같은 걸 잡아 올까요."
'이놈!'
"그, 그러면요?"
'구운 감자와 소시지를 가져오라.'
안 그래도 인간들이 먹는 음식이 너무 먹고 싶었다.
육포만 먹기도 질려 버렸고.
"알겠습니다!"
소년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신을 아직 소개하지 않았구나.'
"아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아마엔이에요."
'그래 아마엔.'
약속해야 한다.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
제대로 엄포를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네 아비도, 저 인간들도, 전부 잡아먹을 수밖에 없을 테니.'
"아······."
'오랜만에 인간의 고기로 주린 배를 채우는 것도 좋겠구나······.'
나는 혀를 쉬리릿, 내밀며 다시 짐칸의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꼬마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새하얗게 질렸다.
펠레리안이 나지막이 물었다.
-재밌나?
'네, 헤헤.'
참 재미있었다.
* * *
사실, 꼬마애에게 마법을 제대로 전수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직 펠레리안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는 내가 누굴 제대로 가르칠까.
좀 더 오래 마차에서 지내고 싶었고, 아마엔을 이용해서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을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딱 그 정도의 발상이었다.
언제든 다른 인간들에게 들키면 마차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꼬마애를 회유한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아마엔은 아직 어린데도 똘똘한 녀석이었다.
"아빠, 나 짐칸에 들어가서 수련 좀 할게."
"또 들어가게?"
"응, 그쪽이 조용하고 어두워서 집중이 잘돼."
아마엔은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그리 말한 뒤 짐칸으로 휙 넘어 들어왔다.
로일이라는 상인은 제 아들을 터럭조차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짐칸은 기름 먹인 천으로 튼튼하게 씌워 뒀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지 않는 이상 마법을 수련하기에 괜찮은 곳이었다.
아마엔이 짐칸에 드나들기 시작한 지 이틀째인데 아직도 내 존재를 들키지 않았다.
'왔느냐.'
"네, 스승님."
녀석은 똘똘한 것뿐만 아니라 예의도 바른 소년이었다.
나는 그에게 받은 잉크 펜을 이용해 필담을 나눴다.
'내가 말한 것은?'
나는 오늘 아침 아마엔에게 물건을 요구했다.
검은 흙을 채운 화분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이런 산길에서 화분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기대하지 않았건만, 아마엔은 훌륭하게 내 요구를 들어줬다.
"적당한 스튜 그릇이 있어서 거기에 흙을 담아 왔어요."
공손하게 말하며 나무로 만든 밥그릇을 하나 건넨다.
이 정도면 훌륭한 화분이다. 여기에 키뱀이의 씨앗을 심으면 될 것 같았다.
야무지기도 하지.
'훌륭하다. 마나 브리딩은 잘 습득했고?'
"네."
'한번 해 봐라.'
아마엔은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호흡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가 수련하고 있던 호흡법은 조악한 수준이었다.
이것은 펠레리안이 가르쳐 준 호흡법이다.
'잘하는군.'
덜컹거리는 마차 위에서 집중하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나 역시 아마엔이 훌륭히 호흡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간이나 엘프와 달리 단전이 없는 것 같다.
호흡법을 통해 마력을 축적하는 게 쉽지 않았다.
조금 침울했지만, 이 꼬마가 잘 배우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허어, 자질이 있군. 자질이 있어.
펠레리안은 아마엔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놈을 가르쳤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그러면 나 말고 얘랑 같이 다니시든지.'
부아가 치밀어서 그리 말했건만, 펠레리안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한참 뒤 그가 결국 고개를 가로젓고 답했다.
-안 되지. 인간은 너무 열등한 종족이야. 기껏 해 봐야 육십 년 살고 죽기도 하고. 진화도 못 하고.
'······.'
펠레리안이 인간보다 뱀이 낫다고 인정해 버렸다.
아마엔은 마나 브리딩을 훌륭히 마쳤다.
'잘했다. 오늘 네게 전해 줄 지식은 원소 마법진에 대한 것이다.'
"원소 마법진!"
당장 오늘 아침에 펠레리안에게 배운 거지만, 글씨를 써서 말할 때는 연기할 필요가 없어서 참 좋다.
'불의 마법진에 마력을 담는 방법을 알려 주지.'
새로 습득한 지식을 남에게 가르칠 때, 그 지식을 또 한 번 내 것으로 체화할 수 있다.
마법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펠레리안의 도움을 받으며 나는 종이에 작은 마법진을 그렸다.
'이곳에 마력을 잘 담은 후.'
그리고 그것을 내 단검 아쉬라에 붙였다.
단검을 치켜든 뒤.
'이러면.'
마력을 살짝 주입하자.
화륵!
단검에 기름이라도 칠한 듯 불이 붙었다.
아마엔의 눈동자에 선망의 빛이 깃들었다.
'불의 오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새끼.
사술을 사용하긴 했지만.
나는 드디어 일류 마검사가 되었다.
* * *
짐 마차 세 대가 중간 교역소에서 칼레아 시로 출발한 지 일주일이 조금 안 된 시점.
드디어 내일이면 칼레아 시에 도달할 것이다.
근 삼 일 내내 노숙을 한 탓에 상인들의 몰골은 꾀죄죄하기 그지없었다.
"으으, 내일이면 도시에 들어갈 수 있겠지."
"바로 여관부터 가서 좀 씻어야겠어."
캄캄한 밤이 되었다.
상인들은 모닥불 하나를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막 밤이니, 몸도 데울 겸 럼주를 조금씩 나눠 마셨다.
따듯한 스튜에 럼주면 추운 밤도 견딜 만할 것이다.
다만, 그중 한 명은 그릇 대신 컵에 스튜를 담아 마셨다.
"젠장, 내 그릇이 대체 어디 간 거야."
"설거지 당번이 너였잖아 잭슨, 네가 알지 누가 알겠어."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잭슨이라는 상인은 코가 새빨갰다.
워낙 평소에 술을 달고 살아서 그렇다.
좋지 않은 버릇이지만 주변에서 말려도 듣지 않았다.
로일의 옆에 누워 있던 아마엔이 졸린 듯 몸을 웅크렸다.
"으음, 아빠아······."
"춥나 보구나. 담요도 덮어라."
로일은 자신의 담요를 아마엔에게 덮어 주었다.
그 모습이 자못 따스하다.
잭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애가 참 똘똘해. 귀엽기도 하고."
"하하."
로일과 잭슨이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았다.
"네 아들도 상인이 되고 싶다고 했지?"
"아, 아아······."
"언제 한번 데리고 나오지 그래. 제수씨가 싫어하려나?"
잭슨은 우물쭈물하더니 답했다.
"뭐······ 그렇지."
애매한 잭슨의 태도에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찌륵찌륵 벌레 우는 소리만 난다.
침묵을 깬 것은 잭슨이었다.
"오늘 불침번 초번은 내가 서도 되나? 좀 많이 피곤해서."
"아 그래. 그러면 두 번째는 내가 할게. 이따 깨워 줘."
이들은 불침번을 섰다.
최근 들어 산적 이야기도 종종 들리고, 혹시나 굶주린 마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쪽은 엄연히 마경인 산맥과 가까웠으니.
잭슨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하나둘 침낭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들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하고, 모두가 잠들었을 때.
잭슨이 럼주를 한 잔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좆같네."
사람 좋은 얼굴로 자빠져 자고 있는 로일.
그리고 그 품에 안겨서 잠들어 있는 그의 아들.
보기 좋은 모습이었지만 잭슨에게는 아니꼽게만 보였다.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잭슨은 생각했다.
'로일 이 새끼도 나를 비웃는 건가.'
아들을 데려오는 게 어떻냐고?
아들놈 낯짝을 못 본 지가 오래다.
어느 날이었다.
간만에 집에 일찍 돌아갔는데, 침대 위에 모르는 남자가 아내와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눈이 돌아가서 사내와 아내를 두들겨 팼다.
남자 놈은 도망가고, 아내의 뺨을 때리려는데 그 여자가 잭슨의 손목을 물었다.
술도 들어간 데다가 워낙 화가 나서 정말 죽일 기세로 두들겨 팼더랬다.
그러다 등허리가 뜨끔해서 돌아보니. 어린 아들이 잭슨의 등을 식칼로 찌른 것이었다.
칼을 잡은 손을 덜덜 떨면서도, 시뻘건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더라.
다행히 그 칼은 피부만 조금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코피를 줄줄 흘리던 아내가 아들을 껴안고 울며 외쳤다.
제발 가라고. 꺼져 달라고.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잭슨은 도망치듯 나왔다.
술을 마시고 동료 상인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니, 어느새 소문이 쫙 퍼졌다.
로일 저 새끼는 그 이야기도 못 들었나.
아니면 알면서도 놀리려고 모르는 척 말한 건가.
'개새끼. 아주 지 잘났다 이거지.'
술을 마시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확 저 애새끼도, 로일의 면상도 으깨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그리 행동하지는 않았다.
헌데, 잭슨이 뿜어대는 적의를 느끼기라도 한 건가.
자고 있던 아마엔이 살짝 눈을 떴다.
잭슨이 소년과 눈을 마주친 그 순간이었다.
퍼억!
뜨거운 통증과 함께 무언가 잭슨의 볼을 관통했다.
그것이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라는 것은 그 직후에 알았다.
"으억, 끄어어어억!"
잭슨이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화살들이 발사되었다.
퍼퍼퍽!
세 대의 화살이 잭슨의 몸에 박혔다.
즉사였다.
잭슨은 기우뚱, 모닥불 위로 쓰러졌다.
퍼억!
불티가 요란하게 튀어 올랐다.
소란에 자고 있던 자들이 전부 깨어났다.
어둠 속에서, 험악하게 생긴 이들이 석궁이며 철퇴 같은 것을 들고 나왔다.
"한 방에 못 죽였으니까 내 승리."
"아니, 그냥 놔뒀어도 죽었다니까."
"장난하냐? 한참 나중에 늙어 죽었겠지. 으하하!"
사람을 죽인 것으로 웃으며 농담하는 이들.
개가 컹컹 짖기 시작하고.
"사, 산적이다!"
아마엔이 비명을 질렀다.
< 녹림토벌 >
78. 녹림토벌
"산적?"
"우리 보고 말하는 거겠지."
"흐흐, 참 우리도 격이 떨어졌구만."
명백히 산적으로 보이는 자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 사이, 죽은 잭슨 옆에 있던 상인이 엉금엉금 뒤쪽으로 기어갔다.
도망이라도 치려는 걸까.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 산적 납셨다! 돈과 목숨을 내놔라!"
수염 난 사내 하나가 그런 상인을 걷어찼다.
"아악, 살려 주십쇼. 다, 다 드리겠습니다!"
상인은 곧바로 목숨을 구걸했다.
옳은 선택이었다.
두들겨 맞자마자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납작 엎드렸으니.
수염 사내가 그 돈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에이, 푼돈이구만."
"마차에 있는 물건들도 다 드리겠습니다!"
"그중에 맥주도 있나?"
"맥주는 없고······."
"그럼 필요 없어!"
수염 사내는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뎅겅, 하고 상인의 목이 날아갔다.
비명을 지르려는 아마엔의 입을 로일이 틀어막았다.
살인에 익숙한 자들이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두려운 것은 로일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아들이 곁에 있는데 떨고만 있을 수는 없다.
아마엔을 데리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을 도망치게 놔둘 리는 없었다.
"어이 애새끼 데리고 있는 아저씨."
"······."
"그쪽은 우리가 누구로 보이나? 산적처럼 보이나?"
로일의 등에 짐 마차가 닿았다.
어떻게, 아마엔만이라도 도망치게 할 수 없을까.
"여, 영웅들처럼 보입니다."
"영웅? 으하하하!"
사내들은 마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로일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제, 제 마차에는 에일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칼레아 시에 팔려던 것이죠. 이것도 기회이니, 영웅들에게 전부 드리고 싶습니다."
"호오, 칼레아 시에 납품되는 맥주들은 다 맛있더라고."
"그렇지요. 한 통에 1골드짜리 최상품 에일입니다······. 제가 가진 돈도 다 드리겠습니다. 짐 마차와 노새도요!"
그러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길.
허나, 낄낄대던 사내들 중 하나가 정색하며 비아냥댔다.
"당연한 걸 가지고 왜 그리 생색을 내. 우리가 나쁜 놈들인 것처럼 말하는 게 섭섭한걸."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당연히 나리들 것이지요."
로일은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비굴하게 굴었다.
품속에 떨고 있는 아들이 있기에.
"다 드리겠습니다. 제 목숨도······."
조금 어수룩한 사람일 뿐, 바보는 아니었다.
저들이 이쪽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제 아들만 살려 주십시오.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허, 이것 참. 마음이 뭉클하구만."
로일은 벌벌 떨며 아마엔을 껴안았다.
그리고 작게, 귓속말했다.
'아마엔, 바로 수풀로 도망쳐라. 바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마음속으로 셋을 센 뒤에.'
아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우리를 무슨 천하의 나쁜 놈인 줄 아는 것 같은데. 우리라고 재미로 사람 죽이고 그러지는 않아."
"예에."
"그런데, 너희들이 우리를 봤다는 소문을 내면 어쩌겠어. 아, 산적 운운하는 것 보니 벌써 소문이 났나?"
셋을 센 뒤 산적들에게 덤벼든다.
찢겨 죽겠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기를.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절대요······."
둘,
하나.
로일이 아마엔을 옆으로 밀치고 산적에게 덤벼들려던 순간이었다.
"스, 스승님."
가냘픈 목소리로 아마엔이 부르짖었다.
로일은 멈칫 굳어 버렸다.
분명 도망치라 말했던 아마엔이 마차의 짐칸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말했다.
"스승님, 도와주세요······."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뭐야 이 새끼들?"
산적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칼을 뽑아 들었다.
"안에 누구 있어? 아니면 무서워서 돌아 버린 거야."
"저 애새끼 오줌 지렸잖아."
"어, 진짜네? 하하핫."
산적은 한번 웃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른을 놀려?"
그는 거침없이 아마엔에게 칼을 휘둘렀다.
로일이 뛰어들어 그 칼을 대신 맞았다.
퍼억!
피가 솟았다.
로일은 자신의 얼굴에 튄 피에 당황했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
산적은 칼을 휘두르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끄럭."
그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와 함께 피가 흘러나왔다.
가슴 한복판에 단검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산적이 쿵 쓰러지고 나서야 다른 이들이 상황을 파악했다.
"뭐, 뭐야!"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선명한 소리가 울렸다.
쉬리릿- 쉬릿.
뱀 소리다.
로일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짐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기어 나와 그의 어깨 위에 올라왔다.
쉬리릿.
그것은 뱀이었다.
수정 비늘이 뒤덮여 있고, 왕관을 쓴, 그리 크지 않은 뱀.
"마물?"
산적 한 명이 멍하니 중얼거린 그 순간.
죽은 사내의 가슴에 박혀 있던 단검이 저절로 뽑혀 나왔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산적이 단검에 목을 베였다.
"으아아악!"
쉬잇-
뱀이 휘파람 소리를 낼 때마다 산적 하나가 죽어 나갔다.
순식간에 세 명의 산적이 더 죽었다.
"석궁, 석궁을 쏴!"
누군가 그리 외쳤다.
뱀 한 마리를 정확히 맞힐 실력자는 없었건만 일단 로일을 향해서 석궁을 겨눈다.
피피핑!
"아악!"
볼트 하나가 로일의 허벅지에 적중했다.
볼트 중 하나는 정확히 흰 뱀의 머리로 날아갔다.
콰작!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뱀이 날아오는 볼트를 물어 채서 부순 것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산적들의 전의가 뚝 떨어졌다.
뱀은 로일의 어깨를 타 넘고 툭,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곤 산적들을 향해 기어간다.
아마엔이 얼른 제 아비의 상처를 살피고 있는데, 그가 늘 껴안고 있는 책이 저절로 펼쳐졌다.
펜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책의 빈 곳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아마엔은 애써 침착을 되찾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적혀 있는 글씨를 따라 읽었다.
"우, 우르오로스가 묻는다."
그가 뱀을 대신하여 말한다는 것은 명확했다.
"이곳에 모인 버러지들은 너희가 전부인가?"
얌전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장니임!"
다만 산적들이 그리 부르짖을 뿐.
그 산적의 입에 단검 아쉬라가 틀어박히는 순간,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손목에 쇠로 만든 차꼬를 차고 있는, 기이한 복장.
"헉······!'
로일은 곧바로 그를 알아봤다.
현상 수배서에서 본 적 있는 탈주범이다.
들개 야투스, 였나.
동료 죄수들과 감옥에서 탈주하고 자취를 감췄다고 했는데, 설마 마경 중 하나인 산맥에 숨어들었던가.
"뭔 뱀이야앗!"
야투스는 박도를 빼 들고 있었다.
그 칼에 오러가 깃들었다.
그는 말을 타고 뱀을 향해 달려왔다.
뱀 역시 우습게 보지 않고 허공에 단검을 세웠다.
그리고.
틱.
단검이 화려한 불꽃에 휩싸였다.
죄수들도, 로일도 경악했다.
"오, 오러다아-!"
그게 설마 마물이 펼칠 수 있는 기예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 * *
짜릿해.
'오러래요!'
-들었어 이 자식아!
잠을 자고 있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워 나와 봤을 뿐이다.
그런데 세상에, 산적들이 몰려왔을 줄이야.
이 세상에도 녹림도들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고로, 강호 초출의 후기지수들은 녹림도 사냥으로 무림 데뷔하는 것이 정석 아니던가.
놈들은 통행세를 받고 물러나기는커녕, 나타나자마자 상인들을 죽였다.
천하의 악적들.
염화검법의 검기를 가득 담은 단검이 놈의 목을 향해 날아간다.
'오러라잖아요!'
-들었다고!
단검에 마법진을 그린 종이를 붙여 둠으로써 만들어 낸 유사 검기.
그것이 다른 산적들이 보기에도 오러 같았나 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놈은 이곳의 채주쯤 되는 것 같았다.
놈의 박도와 내 단검이 부딪쳤다.
결과는 조금 아쉬웠다.
카앙!
단검이 팽그르르 날아갔다.
오러를 흉내 내던 불꽃 마법도 흩어지고, 그 충격에 투명한 손마저 해제되었다.
"뭐야 이거!"
산적 채주 역시 황당한 눈치였다.
박도를 너무 강하게 휘둘러서 낙마할 뻔했다.
-푸핫!
내 단검이 날아가자 펠레리안이 비웃었다.
그래, 사실 겉모습만 흉내 낸 오러니까 어쩔 수 없지.
이럴 줄은 알았다.
"괴상한 요술이나 부리는 뱀이었구나!"
놈은 나를 아예 짓밟으려는 듯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러나, 사실 단검과 오러도 그저 눈속임일 뿐이었다.
내가 시전할 수 있는 투명한 손은 두 개였다.
아마엔의 책에 글씨를 끄적이던 펜은 이미 어둠 속을 빙 돌아 날고 있었다.
쐐액-
불꽃에 흐려진 채주의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었으리라.
날카로운 펜촉이 그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케엑!"
채주는 그대로 낙마했다.
이게 뱀의 싸움법이다, 산적들아.
*「식심의 도약lv3을 사용합니다.」
근처에 얼쩡거리던 산적 하나의 마음을 빼앗았다.
그리고 제 채주를 구하려는 듯 다가가는 산적의 발목을 콱 물어 준다.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녀석은 없으리라.
오늘은 살인멸구 데이다.
쭉정이들은 전부 죽었는데, 정작 목에 펜이 박혀 있는 채주가 벌떡 일어났다.
타고 온 말은 조금 전에 놀라 도망친바.
그는 어둠 속으로 마구 달려갔다.
목이 꿰뚫려서 그런지 비명도 못 지른다.
'야, 내 펜 내놔!'
이 펜 도둑놈!
달리기가 무척 빠르다.
벌써 저기까지 갔네.
음, 다른 산적들도 처리했고.
제자와 그 아빠한테도 내 존재를 들키고 말았으니, 에라 모르겠다.
한밤중인 데다 인적도 없겠다, 지금이 아니면 그 스킬을 어떻게 연습하겠는가.
*「극복의 왕관lv2로 스킬 '거대화lv0'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거대화lv0'이 일시적으로 '거대화lv1'이 됩니다.」
오히려 좋은 기회다.
*「거대화lv1을 사용합니다.」
막대한 양의 마력이 빠져나간다.
이번에는 크기를 조절해 보자.
저번에는 아버지만큼 거대해져서 내 몸조차 제대로 못 가눴다.
"어어, 어어어!"
뒤에서 로일의 비명이 들렸다.
내 몸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달빛에 반사된 비늘이 투명하게 반짝인다.
시야가 높아졌다.
저 멀리 도망가던 녀석이 뒤를 보고 비명을 지른다.
"흐에에에엑!"
나는 암시야lv8이 있다.
대수림만큼 나무가 빽빽한 곳이 아니라서 주변이 훤히 보였다.
어디 숨어 있는 녀석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식심의 도약lv3을 사용합니다.」
거대해진 몸만큼, 도약은 육중해졌다.
굳이 물어뜯을 필요도 없이 나는 채주를 깔아뭉갰다.
쿠우우웅!
*「탈주범 야투스lv30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얍.
나는 거대화를 바로 해제했다.
*「거대화lv0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레벨1로 올리면 완전 습득이 가능하겠지.
나는 깜짝 놀랐다.
채주는 그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내 펜!'
다행히, 펜은 무사했다.
나는 펜을 챙겨서 로일과 아마엔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스승님!"
"흐어어어억!"
나를 반기는 소년과 달리, 그 아비는 몸을 벌벌 떨며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에는 제법 용감해 보였는데 잠깐이었구만.
오히려 아마엔이 공손하게 감사를 표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른스러워 보일 행동이었지만 바지가 축축한 게 그리 의젓하지는 못하군.
"어, 으으. 어. 감사······ 합니다."
로일도 아들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감사를 표했다.
뭘 이 정도로.
여태까지 귀하의 마차에서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내가 먹어 치운 육포를 생각해 보면 좀 더 도움을 줘도 괜찮을 것이다.
로일에게 다가가자 그의 눈에 공포가 더해졌다.
나는 로일의 허벅지에 박힌 볼트를 냅다 뽑아 버렸다.
"아악!"
그리고 아공간에서 포션을 꺼내 상처에 부었다.
치이이익.
로일의 상처가 점차 치유되기 시작했다.
"와······ 포션."
"이, 귀한 포션을······ 감사합니다."
나는 방긋 웃었다.
"히익."
로일이 어째선지 두려운 듯 움찔했지만.
뭐, 이 정도면 숙박비는 충분히 치른 것 같고.
"사악."
제자인 아마엔을 불렀다.
아마엔은 익숙한 듯 수첩과 펜을 꺼냈다.
거기에 글을 적었다.
'조금 더 신세를 지겠다.'
"신세······요? 아, 예 그러셔야지요. 저희가 목숨을 빚졌는데."
횡설수설 고개를 끄덕이는 로일.
좋아. 이제는 합법 숙박이다!
* * *
그리고 다음 날.
결국 마차는 칼레아 시에 무사히 도착했다.
산 중턱에 위치한 칼레아 시였지만, 제법 큰 도시였다.
광산의 자원 덕택에 제대로 된 성벽도 있었다.
그 성벽 앞에서 병사들이 들어오려는 이들을 검문했다.
로일과 그 짐 마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짐칸에 직접 들어가서 수색해."
성문 앞에 서서 묵직하게 명령하는 사내는 바로 칼레아의 경비대장이었다.
오늘따라 검문이 철저해서 줄이 길게 늘어섰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못했다.
병사들은 경비대장의 말에 따라 짐칸 안으로 들어갔다.
에일이 담긴 오크통들이 있다.
그리고······.
"육포 한 상자랑 오크통 다섯 개입니다!"
"오크통도 살펴봐."
"살펴보라고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보라고!"
"아, 옙!"
병사들은 오크통을 밀어 보기도 하고 뚜껑을 열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보았다.
"문제없습니다."
"그래?"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경비대장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마부석에 있던 로일과 아마엔에게 다가갔다.
"너무 빡빡하게 굴어서 미안하오. 요즘 노상강도가 설치고 있다는 말이 돌아서. 그 녀석들이 도시에 들어오려는 것 같다는 말이지."
"하하, 아닙니다."
로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전과 달리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투 안에 내가 있다.
나는 숨죽인 상태로 허리띠처럼 로일의 복부를 휘감고 있었다.
"그 외투."
갑자기 경비대장이 외투를 지목했다.
나는 몰래 바깥을 훔쳐보다 황급히 머리를 숨겼다.
"외, 외투 말입니까?"
"멋진 외투군. 따듯해 보여."
"예,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요. 하하."
"그렇군. 들어가시게."
"감사합니다."
병사들이 마차를 들여 보내줬다.
십 년 감수했다.
뒤에서 경비대장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피 냄새가 난 것 같았는데······."
이 세상의 경비대장들은 왜 이렇게 유능한 걸까.
'경비대장 살해'라는 업적을 달고 있는 입장에서는 얼른 피하는 게 상책이다.
나는 로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잘했다고 칭찬해 줬다.
이 마을에 있는 동안, 나는 로일과 아마엔에게 신세를 질 계획이다.
펠레리안의 던전이 도시에 붙어 있는 것이 확실한 이상, 마물이 혼자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좋아, 얼른 던전으로 가자고!
펠레리안은 몸이 달았는지 서둘렀다.
나 또한 얼른 찾아가 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로일과 아마엔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게 우선이다.
혹시 이상한 동굴 같은 게 있다는 소문이 돌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도굴당해서 이미 물건들이 다 털렸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내 상상력이 한참 부족했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여관을 찾은 로일이 주인에게 '칼레아 시 서쪽에 큰 나무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물어봤을 때.
여관 주인이 이렇게 답했기 때문이었다.
"아, 펠레리안의 던전이 있는 곳 말이에요?"
"······예?"
주인은 맥주잔을 닦으며 말했다.
"애 데리고 온 외지인인데 그것도 몰라요? 칼레아 처음 오셨죠?"
"처음은 아니고, 두 번째입니다."
"나름 알려진 곳이에요. 이 도시에서 제일가는 관광지. 애들이랑 가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죠."
펠레리안.
그 던전의 주인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 비밀의 방 >
079. 비밀의 방
-키야아아아악!
펠레리안은 말 그대로 거품을 물었다.
-관광지? 애들과 함께 가 볼 만한 곳?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역천의 대마도사'라고 불리던 펠레리안의 던전이 관광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아마도 여기가 현대였으면 네이버 검색 키워드로 '칼레아 시 가 볼 만한 곳. 칼레아 시 맛집 추천.' 이런 블로그 글에 언급되지 않았을까.
우리 아이가 많이 좋아했어요. 아이 있는 분들께 필수코스로 강추합니다! 하면서.
-이렇게 내 명예가 철저히 찢기고 능욕당할 수가 있나!
그래도 너무 오바하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해 줬다.
'뭐, 옛적에 털린 건가 보네요. 영감님이 워낙 유명했으니까 관광지가 된 것 같고.'
-던전이 어떻게 관광지가 돼!
'못 될 것 있나. 여기에는 뭐 전쟁 기념관 그런 곳 없어요?'
-······그게 무슨.
'워낙 악명이 높았다면서요. 사람들은 원래 악당에게 끌리잖아요. 그 악당이 만든 던전이 있다면 나라도 가 보고 싶겠다.'
-그런가······.
목청 좋고 성격 센 노인을 대하는 데 도가 튼 느낌이다.
펠레리안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 씩씩댔지만, 일단 소리 지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서 가 봐야 해. 가 봐야 하고말고.
'당연히 가 봐야죠.'
나도 던전이 어떤 상태일지 몹시 궁금하다.
무려 지역 명물 관광지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일단, 방을 잡고 짐을 풀자.
"가장 좋은 방을 주십쇼. 침대 두 개 있고 깨끗한."
"오오, 좋지. 이 층으로 가십쇼. 복도 안쪽 방이 비었어요."
"식사를 안 해서 밥도 먹으면 좋겠는데."
여관 주인이 반색했다.
"우리 여관이 음식 솜씨로는 칼레아 최고지. 구운 닭고기가 메인에 디저트로는 크림을 넣은 체리 파이가 있는데. 맥주도 한잔 가져다드릴까?"
"한낮이니까 맥주는 됐고, 주스 있나요?"
"신선한 오렌지를 짜서 만든 주스가 있고, 커피도 있고."
"주스 하나랑 커피 한 잔. 아니······ 주스 두 잔에 커피 한 잔."
내가 톡톡 두드리자 로일이 주문을 수정했다.
"선불이요."
우리가 찾은 여관이며 구한 방은 꽤나 비쌌다.
로일이 한 번의 상행으로 겨우 손에 넣는 돈을 생각하면 좀처럼 묵을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로일은 주저하지 않고 금액을 치렀다.
방으로 들어간 순간, 로일은 바로 외투를 벗었다.
외투를 벗자마자 나는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놀랍도록 쾌속하게 침대 하나를 차지했다.
'와! 침대다!'
깨끗한 볏짚이 풍성하게 들어 있는 매트리스.
그리고 오리털을 채운 이불.
아, 썩은 나무 구멍도 호텔처럼 여겼던 나였는데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다니.
너무 기분이 좋아서 침대 위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매트리스의 탄성 덕택에 뛰는 맛이 산다.
"와아, 침대에요!"
나를 본 아마엔도 옆에 있는 침대에 올라가서 펄쩍펄쩍 따라 뛰었다.
강아지 재키도 덩달아 신나서 짖어댄다.
즐겁다.
"흐어어······."
잔뜩 긴장했었는지 로일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 손이 덜덜 떨린다.
담이 작은 인간이군.
"심장이 벌렁벌렁하네."
겨우 이 정도로 그렇게 긴장했다가는 오래 못 산다.
나는 그런 로일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이제는 내가 접근하는 것으로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아마엔이 내게 준 수첩과 펜을 꺼내 글을 적었다.
'두려워 말라.'
"아, 넵. 이제 괜찮습니다."
로일은 양심이 있는 상인이었다.
내가 자기와 아들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을 고마워하고 있었다.
펠레리안의 던전을 살펴볼 때까지, 그는 나를 도울 것이다.
내 존재는 비밀로 하겠다는 맹세를 받았다.
그래도 조금은 걱정이 돼서, 만약 비밀을 지키지 않는다면 아마엔과 로일 모두 피를 토하고 죽는 저주를 걸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때 로일의 얼굴이 얼마나 하얗게 질렸는지를 떠올리면 배신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나는 자비로운 뱀이니 품삯도 줄 생각이었다.
아공간에서 금붙이 하나를 꺼냈다.
툭.
로일 앞에 떨어진 것은 세공이 되어 있는 순금 막대였다.
'이것을 팔아 은화로 바꾸어라. 필요한 것들을 사고 나머지 재물은 네가 가져도 좋다.'
펠레리안의 던전에서 챙긴 금붙이 중 하나였다.
대도시에서 제대로 팔면 더 비싸게 받을 물건이라지만 어쩔 수 없지.
로일은 순금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런 귀한 것을 제게······ 목숨을 구해 주신 것만으로도 모자라······."
로일은 순금을 껴안고 펑펑 울었다.
침대에서 뛰며 좋아하던 아마엔도 눈물을 흘리며 제 아버지를 껴안았다.
"반 년 상행해도 못 벌 돈을 이리 주시다니······."
헉, 그 정도로 비싼 물건이었나.
지금이라도 반 잘라서 다시 달라고 하면 너무 그렇겠지.
"고맙습니다, 스승님. 히잉."
아마엔까지 잉잉 울고 있는 지금, 아무리 나라도 그러면 너무 폐급스러울 것이다.
나는 그저 자비롭게 미소를 지었다.
-내 것으로 아주 지 물건처럼 생색내는구나.
'제 것이 영감님 거고 영감님 게 제 것 아닙니까.'
로일이 꾸벅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나와 아마엔이 방에 남아 있는 동안, 여관 주인이 음식을 가져왔다.
김이 풀풀 나는 닭다리 구이에 갈색빛 달콤한 소스가 끼얹어 있었다.
크림이 듬뿍 들어간 체리 파이가 특히 끝내줬다.
'맛있다!'
꿀에 절인 체리를 과육만 집어 넣은 것 같다.
거기에 블랙커피까지.
간만에 행복한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창가에 밥그릇, 아니 화분을 올려두었다.
키뱀이의 씨앗을 여기에 심어 두었다.
물도 적당히 줬다.
햇볕이 잘 비치는 곳이니 싹이 텄으면 좋겠다.
로일이 돌아온 것은 얼마 뒤였다.
그는 야무지게도 펠레리안의 던전에 대해서 더 알아오기까지 했다.
"오후 여섯 시까지 운영하고. 지역민은 입장 무료. 성인은 1실버에 13세 미만 어린이는 5코퍼라고 합니다!"
그러면 뱀은 얼마지.
비쌀지도 모르니까 숨어 들어가야겠다.
어찌 됐든, 가 볼까.
* * *
[역천의 마도사 펠레리안]
「펠레리안 어글리푸스는 대수림의 엘프 마을에서 그 추한 생애를 시작했다.
요정은 미형으로 태어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외모였다.
인간 사이에서도 추남이라고 불릴 만한 펠레리안은 어렸을 때부터 노인의 외모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요정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뚤어지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편견은 선후를 바꿔 추론하는 오류이다.
그의 외견이 비뚤어져서 심성이 비뚤어진 것이 아니라.
심성부터 비뚤어진 채 태어나서 외견마저 비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모든 요정은 달의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 아름다우며, 세계수의 마력을 받아 장수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확실한 일이다.
역천의 펠레리안은 신에게마저 버림받은 추한 요정인 것이다······.」
-크아아악!
펠레리안이 분노로 길길이 날뛰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펠레리안의 던전 앞에 있는 안내판의 내용이었다.
던전은 정말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원래는 그 모습을 숨기고 있어야 할 던전 입구는 뻥 뚫려 있었고, 그 앞에 매표소까지 있었다.
-어떤 개자식이 이딴 헛소리를 적어 둔 거야!
'진정해요.'
이러다가는 펠레리안이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내가 보기에도 엄청난 독설이 적혀 있었다. 완전 악질이다.
'근데 어글리푸스였어요? 어떻게 사람 성이 어글리······.'
-아니야! 그럴 리가 있냐. 내 성은······ 제기랄!
펠레리안은 자기 성을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름까지 바꾸다니, 대단한 왜곡이다.
'조금만 참아요, 더 읽어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요?'
저런 안내판을 읽어 보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기억 못 하는 것들이 적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내 곁에 있는 펠레리안은, 엄밀히 말하면 펠레리안의 영혼 일부이다.
그 본체는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바. 펠레리안의 기억은 본체에서 분리된 이후로는 없었다.
-그래······.
그 역시 자신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펠레리안이 생전에 벌인 악행은 전부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페지테 섬의 대학살이 있을 것이다. 그 날 왕국민 700명과 요정 30명이 그에 의해 사망했다······.」
나는 조용히 펠레리안을 바라봤다.
-뭐! 나 악당인 거 몰라서 그러냐?
펠레리안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죽인 것이 맞다. 이 내가.
'누가 뭐래요?'
나는 다시 펠레리안의 생애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펠레리안은 요정우월주의자 아니었나.
요정 30명은 어쩌다 죽었을까.
같은 요정의 죄를 갚기 위해 인간 편에서 펠레리안과 싸운 걸까?
「그러나 신들은 그 요정의 패악을 용서하지 않았다.
수십 일 간의 싸움 끝에, 제국과 왕국은 영웅들과 병사를 동원해 부상당한 펠레리안을 쫓았다.
역천의 숨통을 끊는 데에 당시 최고의 대마도사인 카이라 마탑주의 활약이 컸다는 사실은 왕국의 축복이었다.
펠레리안은 죽어 목이 잘렸다.
바야흐로 악마의 최후가 찾아온 것이다.」
아.
펠레리안은 그렇게 죽은 것이다.
-카이라스······.
펠레리안이 아는 인물인 것 같았다.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니.
-결국 네놈이 나를 죽였구나.
저런, 안타깝군.
내가 로일의 외투 안에 숨어 있지만 않았어도 펠레리안의 등을 두드려 줬을 텐데.
생각해 보니까 펠레리안은 종종 자기보다 뛰어난 인간 마도사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카이라스라는 마도사가 그 인간 마법사일까.
"어라, 제가 배운 역사와는 다르네요."
똘똘한 아마엔이 그리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니?
혹시 펠레리안이 죽지 않았다는 설도 있는 건가.
"제가 본 책에서는 펠레리안이 말뚝에 매달려 산 채로 화형당했다던데."
"나는 황제가 손수 찢어 까마귀밥으로 줬다고 알고 있어."
로일도 그리 말했다.
혹시나 하며 밝아졌던 펠레리안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에잇! 들어갑시다!'
모르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엘프들도 펠레리안의 행적을 쫒고 있잖아. 나중에 제대로 알아봐야 할 일이다.
나는 로일을 재촉해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어두컴컴했을 던전 곳곳에는 횃불이 밝혀져 있었다.
이 칼레아 시에 관광객들이 오기나 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꽤 있었다.
특히 아이 손을 잡고 있는 부모들이 많다.
애들은 던전 곳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기뻐했다.
"여기 있는 것들이 펠레리안이 모은 병기들입니다. 이 던전이 펠레리안의 무기창고였다고 추정되는 이유이죠."
심지어는 해설사까지 있었다.
던전 곳곳에는 무기의 거치대가 있었고, 종류별로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그 주변에 세워진 유리 장식장들이 무기들을 보호하고 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날에 녹이 슬지 않은 것은 펠레리안이 걸어 둔 보존 마법 때문입니다. 보존 마법의 지속시간이 마도사의 경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그의 마법 실력이 대단히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무기들은 여전히 번쩍거리며 살상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체 왜 무기들을 모아 둔 거예요, 근데?'
나는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펠레리안은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다.
하지만 여기 있는 것들은 족히 수백 명은 무장시킬 수 있을 만한 무기들이다.
펠레리안은 주저하더니 답했다.
-가디언들을 만들려고 했다.
'가디언이요?'
가디언이라 함은 마법사를 지키는 자들이다.
즉 근접 방어력이 약한 마법사의 호위무사라고 할 수 있다.
'전에는 고독한 늑대처럼 지냈다고 하더니?'
하지만 친구 없는 것으로 유명한 펠레리안 아니던가.
비록 노움이나 드워프들과는 친교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대륙의 공적인 펠레리안을 위해 함께 싸워 주지는 않았을 것 같다.
-골렘으로 만들고자 했지.
'······.'
친구가 없으니까 친구를 직접 만들겠다는 그 정신.
조금 짠하게 느껴진다.
해설사는 계속 해설을 이어 갔다.
"보시다시피 몇몇 무구는 그 만듦새가 아주 뛰어납니다. 드워프제의 무기라는 추정이 있지만 이곳의 드워프들은 자신들이 만든 무기가 아니라고 강력히 부정했지요."
-배알도 없는 녀석들. 지들이 만든 거 맞으면서.
이곳 칼레아 시 근처에는 드워프들이 살고 있는 광산이 있었다.
로일이 가져온 맥주도 그들에게 판다는 것 같다.
우리는 한참 던전을 둘러봤다.
드워프제라고 하지만 오래되고 평범한 물건들뿐이다.
차라리 내가 전에 썼던 엘븐 브로드소드가 훨씬 좋아 보인다.
이거 좀 실망스러운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서야 가져갈 수도 없을 거고.
내가 실망한 반면, 펠레리안은 아니었다.
-다행이군, 천만다행이야.
'뭐가 다행이에요?'
-다 털린 게 아니었다!
펠레리안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가장 중요한, 보구의 방이 여전히 숨겨져 있어.
보구의 방.
펠레리안이 설명하기를, 그곳에는 특히 귀한 무기와 갑옷들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내 바로 곁을 지킬 네 마리의 골렘, '수신호위'에게 착용시킬 무기 중 일부를 보구의 방에 숨겨 놨다. 바로 저쪽에 있지.
펠레리안이 가리킨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매끈한 벽뿐.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인간들은 펠레리안의 던전을 찾아냈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방은 찾지 못한 것이다.
-기관 장치로 숨겨 놨지. 저 오른쪽 귀퉁이의 조각이 보이나?
매끈한 벽의 반대쪽 벽에는 화려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뭔가 숨겨져 있다면 차라리 저 벽 너머일 것 같았는데.
-저 독수리의 머리에 네 꼬리를 얹고 마력을 불어넣으면 된다. 내가 알려 줄 패턴대로.
사실 매끈한 벽에 숨겨져 있다니.
당장 들어가 보고 싶다.
'너무 사람이 많은데요.'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서야.
영업이 끝난 뒤를 노려야 할지도.
-그럴 필요 없다.
펠레리안은 방법을 가르쳐 줬다.
듣고 있자니 아주 그럴듯했다.
게다가 어차피 영업시간 끝나고 잠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으니까.
나는 그 작전을 실행하기로 했다.
"또한 펠레리안의 던전은 각종 마법적, 기관적 장치로 유지 보수되고 있습니다. 혹시나 있을 화재에 대비해서도 이런······."
사람들의 시선이 해설사에게 몰린 순간을 노렸다.
*「초급원소마법:불lv6을 사용합니다.」
천장에 불을 질렀다.
마치 횃불이 갑자기 확 타오른 것처럼.
삐이이이이이-
곧바로 경보음이 울렸다.
취익-!
천장에서 물이 마구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모두 나가세요, 나가요!"
해설사가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아이들은 이 상황이 마냥 재미있는지 깔깔 웃었다.
로일과 아마엔도 그들 사이에 섞여 나갔다.
다만 로일은 마치 깜빡한 것처럼 외투를 벤치 위에 올려 두었다.
내가 숨어 있는 외투다.
스르륵-
이윽고 던전에는 나와 펠레리안만 남게 되었다.
나는 펠레리안이 가리키는 벽면의 조각으로 다가갔다.
꼬리를 길게 뻗어 독수리를 어루만지고.
-마력을 주입해라.
펠레리안의 말대로 마력을 불어넣자.
그그그그긍-
매끈한 벽면이 열렸다.
'보구의 방'이다.
<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
080.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