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누군가에게는 안타깝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특히, 새아빠가 생기는 줄 알고 신난 삼 남매가 듣는다면 무척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지네 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새 남편이 될 생각도 전혀! 없었다.
당연한 소리 아닌가.
나는 뱀이고 쟤는 지네다.
종부터 다르다.
지네 맘이 성품도 곱고 마음씨도 착하며, 그런 동시에 어쩔 때는 강단이 있는 매력적인 연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무척 강하기도 하고.
하지만 솔직히 생긴 게······ 내 취향이 아니다.
나는 팔다리가 여리여리 쭉 뻗고 피부가 매끈한 타입이 취향이다.
아니, 지네 맘의 팔다리도 체구에 비해서 여리여리한 것은 사실인데.
피부는 아니어도 갑각이 매끈하기도 하고.
······적어도 독 발톱이나 더듬이는 없어야 한다.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은 영입 제안이다.
적의 장수인 대왕지네에게, 부하들을 데리고 동물원의 짐승들로 들어오라는 제안.
이 제안이 성공한다면 판세가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천하삼분지계의 완성이다.
우리 촉나라, 아니 무리는 다른 무리들과 대등한 전력을 지니게 되리라.
-아직도 대답이 없나?
하지만 아쉽게도 길들이기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의 결과가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지네 맘은 계속 더듬이만 까닥거리고 굳어 있었다.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왠지 몰라도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왜 대답을 안 해 주는 거야.
경계하는 듯 주변을 둘러보는 지네 맘.
펠레리안이 경고했다.
-거미다!
제기랄.
주변에 거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 확인했는데.
어디서 튀어나왔나 했더니, 놀랍게도 내가 나온 땅굴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새카만, 밤톨만 한 거미들이 무수히 많게 기어나온다.
지네 맘이 으르렁댔다.
"케엣!"
*「'크림슨 티스 대왕지네lv60'을 길들이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이런!
대사를 그르친 거미들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설득이 실패할 경우는 생각 안 했는데!
내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나보다.
그래도 지네 맘과 내 사이가 어색해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나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저 작은 거미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 듯하고.
스스슥.
그 거미들이 한군데 뭉치기 시작했다.
마법처럼, 거미의 군집은 한 마리 거대한 거미가 되었다.
데몬 페이스 타란튤라.
먼 거리에서 보았던 불길한 거미.
아마도 대왕지네의 라이벌인 듯한 그 마물이 나타났다.
대왕지네가 위협스럽게 더듬이를 까닥인다.
저 거미가 갑자기 여기 나타났다는 말은······.
"재미있는, 계획을, 꾸미셨군요, 뱀."
놈의 배에 달린 입술이 꿈틀댄다.
이런, 전부 다 들었나.
"역시, 한 무리의, 우두머리답습니다."
더듬거리기는 해도 말투가 신사적이다.
하지만 그 존댓말 하는 태도가 더 악당 같다는 것을 이 거미는 모르는 걸까.
그래, 계획이 들켜 버린 이상 여기서 저 거미를 죽인다.
못 죽일 것 같으면 바로 도망가고.
몸을 슬쩍 웅크렸다.
지네 맘도 여기서 거미를 해치우려는 생각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대왕지네의 지배하에 있던 벌레들이 천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땅굴이 다른 곳으로 연결되었는지, 그 구멍에서 미친 듯 거미들이 기어 나왔다.
일촉즉발의 상황.
내가 놈의 심장이 어디쯤 있을까 고민하면서 식심의 도약을 준비하는 와중이었다.
"오해를, 하는군요. 당신들을 어찌할 생각은, 없습니다."
거미의 배에 달린 얼굴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탁월한 생각이,에요. 어차피 우리는 그리 사이가 안 좋지 않았습니, 까?"
"께께."
지네 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슬쩍 앞으로 나섰다.
'뭐, 그래서 그냥 눈감고 있겠다는 건가?'
"맞습, 니다."
놀랍게도 녀석과는 대화가 곧잘 됐다.
0.9 나나루크.
하지만 비호감으로는 1.2 은색 침팬지.
-수상하기 그지없는 녀석인 건 알지?
모를 리가 있나요.
다만 그 의도가 궁금했다.
그래서 대놓고 물어봤다.
'왜지? 사이가 안 좋다고 동료의 배신을 눈감아 주겠다는 거야?'
"동료?"
거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렇군, 지네는 동료가 아니라는 건가.
"배신?"
그리고 배신 또한.
"둘, 다 아닙니다. 우리는, 군집. 나는 필요 없어요, 저 지네와 벌레들."
하긴 그럴 것이다.
저 녀석의 입장에서 지네 맘은 리옥크가 공유할 경험치도 나눠 갖는 눈엣가시일 테니까.
게다가 거미와 지네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이 세계에서 상식이나 다를 바 없는 듯하고.
"그러니, 제발로 나가 주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저 리옥크는 아닐 텐데.'
"늪의 괴물, 말이군요."
역시, 제 우두머리를 언급할 때 존경이나 친애는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얼굴이 있어서 표정을 읽기가 쉽다.
사실, 리옥크를 언급한 것은 녀석을 떠보려는 것이었다.
과연 리옥크의 지성이 어느 정도일까.
적어도 수하들을 지키려 하거나, 혹은 적어도 소유욕 같은 건 있는 걸까.
"맞는, 말입니다. 화를, 내겠지요."
좋지 않은 일이군.
놈이 신경을 안 쓰면 지네 맘을 쉽게 데려갈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거래를 제안합니다. 뱀에게."
거미가 간사하게 앞다리를 들었다.
"내가, 눈감아 줍니다. 지네를 데려가십시오. 대신······."
'대신?'
"지금은 안 됩니다. 곧, 싸움이 시작됩니다. 늪지 괴물과, 은색 원숭이 간의. 그 이후에 데려가십시오. 눈감아 주겠습니다."
그것이 거미의 제안이었다.
지네 맘의 영입을 눈감아 줄 테니 기다려라. 리옥크와 원숭이가 싸울 때까지.
언뜻 나쁠 것 없는 제안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해 보겠다는 뜻으로 꼬리를 들었다.
그리고 지네 맘의 곁에서 펠레리안과 조용히 논의했다.
-들어서 손해 볼 것은 없겠어.
'실망입니다.'
-뭣.
'협상의 기본을 모르시는군요.'
펠레리안은 괘씸하다는 표정을 했다.
-설명해라.
'그렇게 말랑하게 나가서는 협상이 안 돼요.'
이건 내가 전생에서 직접 겪으며 배운 일이다.
협상을 할 때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거미.'
인면거미가 나를 바라봤다.
'겨우 그걸로는 안 되겠어.'
"무슨, 말이죠?"
'받기만 하는 게 거래는 아니지. 이건 삥 뜯는 거 아닌가. 갑자기 찾아와서 자기 말대로 하라니.'
"삥 뜯는, 게 뭐지요?"
'어차피 리옥크가 화나든 말든 넌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거래라면 서로 교환하는 게 있어야 한다 이 말이야.'
거미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역시, 말은 신사답게 해도 지능은 그리 높지 않은 듯했다.
내가 복잡하게 말하니까 저리 얼 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제안하지. 얌전히 지네들과 함께 물러선 다음에는 원숭이부터 친다.'
"그러고는? 원숭이들이 죽으면?"
'그때는 알아서 해야지.'
"합리적······이군요."
'너도 뭔가 대가를 줘야지. 물질적인 것이든 뭐든, 개인적으로 나는······.'
그냥 던지듯 가볍게 말했다.
'혹시 내단 같은 거 줄 거 없나?'
"······어떻게 알았죠?"
'뭐가.'
"내단을 만드는 것을······."
거미가 경계심을 보였다.
어떻게 알기는······.
──────────────
[데몬 페이스 타란튤라lv65]
[특성]
[모사꾼],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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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특성.
그것은 그립기 그지없는 지네 부부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게다가 원래 인면지주(人面蜘蛛)는 내단을 가지고 있는 게 무협지에서도 국룰 아니던가.
거미는 고민하듯 앞다리를 까닥였다.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인면 거미가 몸을 돌리자, 놈의 몸을 작은 거미들이 뒤덮었다.
뭔가 숨기는 듯한 모습이다.
다시 작은 거미들이 물러나더니, 놈은 새카만 구슬 같은 것을 꺼내 왔다.
-호오!
마성이 범상찮은 것이 정말 내단이 맞다.
이미 두 개나 먹어 본 나는 바로 알았다.
'받아 간다.'
"약속, 지키시길."
나는 지네 맘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그러면 조금 이따 봅시다.'
"께께."
지네 맘이 수줍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내가 찾아왔던 땅굴에는 거미들이 득실거릴 것이다.
그리고 육로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
나는 마지막으로 거미를 바라봤다.
놈은 마치 내가 땅굴로 들어가기를 기대하는 듯했다.
'경고하지. 허튼 생각 말도록.'
*「긴급귀환lv20을 사용합니다.」
나는 내 무리로 다시 돌아갔다.
* * *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비정상적으로 마성이 풍부한 탓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공기.
지상에 들끓는 수많은 마물들.
놈들이 우짖는 포효소리, 서로 죽여 먹어 치운 탓에 풍기는 피 냄새.
무엇보다도 하늘을 찌르는 살기.
우두머리들이 아직 가만히 있었기에 큰 싸움은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부 시간문제였다.
벌레군단의 우두머리인 리옥크조차 침을 줄줄 흘리고 있지 않은가.
놈은 당장이라도 마물들을 씹어 삼키고 싶어 했다.
그 뱃속을 가득 채운 기생충 덕택에 무한한 허기를 겪게 된 벌레 마물.
리옥크가 평소에는 늪에 잠겨 초록빛 늪을 끊임없이 삼키고 또 그 자리에서 배설하며 허기를 채운다는 사실을 인면거미는 알고 있었다.
참으로 비참하고 추한 생물이다.
저놈이 우두머리가 된 것은 오직 가장 거대하고 강력하기 때문이었다.
거미에게는 욕심이 있었다.
찬란한 열매를 차지하려는 욕심이.
그리고 그것은 그리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사실 가장 견제되는 것이 리옥크가 아닌 대왕 지네였을 정도다.
인면 거미는 이미 이 자리에서 대왕지네와 그 일가를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워 두었다.
작은 뱀이 나타난 것은 의외였지만······.
얼른 달려갔다가 내단까지 빼앗겨 버렸다.
하지만 뭐, 감수할 만한 손해였다.
지네와 그 동물무리까지 싹 쓸어버리면 될 테니 대가로는 싼 편이다.
거미가 교활하게 웃었다.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 녀석들은 곧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퍼엉!
그때였다.
거대하게 솟은 세계수의 뿌리를 두르고 있던 가시덤불에 불이 붙었다.
가시덤불은 순식간에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시작된다.
더욱 확실한 징조가 있었으니.
"아, 달콤한 향기."
뱃속이 뜨겁고 근질거리는 허기.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끈적한 침.
천상의 향기가 저 뿌리 위에서 퍼지고 있다.
찬란한 열매가 맺혔으리라.
"뀌이이이이이이!"
충왕 리옥크가 포효했다.
"꾸어어어!"
그리고 실버백 아킴스까지.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숭이들과 벌레들이 격돌하면서 끈적한 진액이 튀고 원숭이들의 팔다리가 하늘로 솟았다.
그리고 인면 거미는 가까스로 자제심을 발휘했다.
그의 주변에는 들개만 한 거미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인면 거미가 가지고 있는 스킬 중 가장 강력한 것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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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여덟 다리 분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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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하나를 부러뜨릴 때마다 마법 하나를 쓰는 것과 다름없다.
본디 자신의 다리를 전부 부러뜨리면서 쓰는 저주다.
인면 거미는 수하를 하나씩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그것을 갈음했다.
그가 가장 앞에 있던 녀석의 머리를 앞발로 찍었다.
콰직.
"첫째······."
그렇게 저주를 실행하려던 순간이었다.
퍼드득.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벌레가 아니라 새가 날아다니는 소리다.
왜 이런 곳에서?
고개를 들어 보니 보라색 깃털의 앵무새가 날아다니고 있다.
"거미, 거미! 반짝."
말까지 한다.
그러더니 휙 하늘 높이 올라갔다.
거미는 불길함을 느꼈다.
저 멀리.
멀리서도 눈에 띄는 크고 멋진 뱀이 정확히 거미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언제부터?
그리고 입은 왜 벌리고 있는 걸까.
반짝.
큰 뱀의 입에 빛이 맺혔다.
그것이 어지간한 마물은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광선이라는 것을.
또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응축해서, 고출력으로 뿜어냈다는 것을 인면 거미는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아······ 뱀."
그것이 인면 거미의 마지막 한마디였다.
파괴광선이 인면 거미와 주변의 거미들을 모두 불태웠다.
* * *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
와아.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무려 레벨이 두 개나!
내 기대 이상의 수익이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지? 5분의 1만 공유받을 텐데 레벨 63 거미가 그렇게 셌나.
아니면 주변에 그놈 제일가는 수하들이 얌전히 한데 뭉쳐 있기라도 했나.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마력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좁은 구역만 짧게 지졌을 뿐이다.
새로 얻은 앵무새 파수병 덕택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는 어떻게 그놈이 배신할 줄 알았냐.
'거미잖아요.'
-그게 답이 되나······.
근거 없는 거미 혐오가 아니었다.
내단을 받아 든 순간, 이 거미를 먼저 쳐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
[저주받은 내단:데몬 페이스 타란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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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내단이라잖아.
그사이에 저주를 걸어 둔 것이다.
대가로 받기로 한 음식에 말도 안 하고 캡사이신을 뿌려서 내놓은 것과 다름없는 짓.
무조건 먼저 쳐야 할 녀석이었다.
문득 다시 내단을 꺼내보았다.
어!
──────────────
[내단: 데몬 페이스 타란튤라]
──────────────
설명이 바뀌어 있다.
혹시 저주를 건 놈이 죽어서 저주까지 해주된 건가?
좋은 일이다. 이따 아버지에게 드려야겠다.
내단을 집어넣은 뒤 고릴라 여사 위에 탑승했다.
'이제 대왕 지네랑 합류한다.'
"가자아!"
리옥크와 은색 침팬지가 싸우는 동안 지네 맘과 합세한다.
그게 내 계획이었다.
-잠깐.
펠레리안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키고 있는 중앙 뿌리를 바라봤다.
원숭이와 벌레들이 무지막지하게 싸우고 있었다.
내 기대대로였다.
-거기 말고 위 말이다!
어.
뿌리 중간중간에는 수호자라는 골렘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은색 원숭이 한 마리가 드잡이질 중이었다.
즉, 실버백 아킴스가 뿌리를 기어오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리옥크는?
우우웅!
어디서 헬기가 나타난 줄 알았다.
리옥크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였다.
놈은 날아올랐다.
그 둔중한 몸을 아주 잠깐 띄운 것조차 기적 같았다.
쿠우우웅!
그리고 가까이 있는, 가장 마물이 많은 곳에 추락하듯 내려앉았다.
-정말 지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마물이군.
상위종이라고 다 똑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설마 저럴 줄은 몰랐는데.
놈은 배고픔에 미친 듯, 지상의 마물을 전부 집어삼키려 했다.
원숭이도, 벌레도, 거미도, 지네도······.
어.
< 넌 네가 길들인 것에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
061.
리옥크는 구부러진 앞다리로 제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갈퀴처럼 그러모았다.
다리를 쭉 핀다면 그 길이가 10m에 조금 모자랄 것이다.
날카로운 돌기가 달린 앞다리를 마구 휘저으면 원숭이든 마물이든 얻어맞거나 끌려오곤 했다.
마치 별개의 생물인 듯 끊임없이 저작(咀嚼)하는 이빨에 가까워지는 이상 끝이다.
폐기물 공장에서 돌아가는 파쇄기처럼. 리옥크는 끊임없이 물어뜯고 부수어 삼키며 전진했다.
그가 지나간 곳에 피의 융단이 깔렸다.
본디 리옥크의 눈은 새카맣다.
다만 저 충왕은 달랐다.
혼탁한 눈 속에서 벌레 같은 것이 유영하고 있다.
공생충이 기어코 그 조그마한 눈까지 점령했음을 의미했다.
적어도 우두머리의 역할이 뭔지는 알았을 리옥크였건만, 이제는 본능밖에 남지 않았으니.
끔찍한 허기가 놈을 지배하고 있었다.
함께 강함을 겨루던 은색 원숭이를 내팽개치고 가까운 먹이부터 탐하게 될 정도로.
놈은 날아올랐고, 또 추락에 가까운 착지를 했다.
주변에 가장 마물이 많은 곳으로 향했으니.
그곳이 거미와 벌레들, 원숭이까지 모여 있는 진형의 우익이었던 것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이 대왕 지네가 있던 곳이었으며.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이 그 끔찍한 혼란에 휘말린 건 우연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우연.
"께에에에에!"
비통하기 그지없는 포효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퍼져서 내가 있는 곳까지 울렸다.
마치 소용돌이치듯 움직이는 마물들.
그사이에 우뚝 선 대왕 지네는 확실히 눈에 띈다.
늘 그녀의 등에 매달려 있는 삼 남매.
아니, 셋이 아니라 둘밖에 없다.
흰 것은 꾸벅이일 것이고.
한 마리는 둘째······ 아니 셋째인가.
알 수 없었다.
"께에에에에! 께에!"
대왕 지네는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주변을 헤집는다.
자식 하나가 휩쓸려 사라졌음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도 리옥크는 끊임없이 마물들을 잡아먹으면서 접근하고 있었다.
-이놈아, 정신 차려라.
전신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계수의 뿌리.
나는 리옥크와 대왕 지네.
그리고 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이곳에는 내 무리가 있다.
내가 길들인 마물들과, 그리고 병든 아버지.
문득 그 구절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넌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한 파일럿이 쓴 어린 왕자의 이야기에서 읽은 구절이다.
그것을 줄줄 외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께 말해 주고 싶었는데, 결국 그러지는 못했더랬다.
나는 내가 대왕 지네를, 그리고 그 작은 아기 지네들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길들인 이 무리를 리옥크의 앞에 던져 놓을 수도 없었다.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바로 이어졌다.
'아버지.'
늘 그렇듯, 그는 우묵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 좀 지켜 주세요. 그리고 제가 정 위험해 보이면. 광선 한 번만 쏴 주시고.'
그리고 고릴라에게.
'너무 가까이 오지도 말고, 멀리 떨어지지도 말고 뭉쳐 있어.'
"대장······!"
고릴라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이미 지네들을 향해 출발했다.
*「가속lv6을 사용합니다.」
다리는 없어도 전속력으로.
내달리듯 앞으로 기어간다.
도망치는 마물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쾅쾅 달리는 원숭이들의 발에 깔려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패왕lv2를 사용합니다.」
나는 아낌없이 기세를 내뿜었다.
공포와 살의에 취해 있는 마물에게도 스킬이 먹히기는 했다.
아니, 놈들을 지휘하던 마물들이 이젠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걸지도.
마물들이 갈라지며 길이 났다.
나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피하지 않는 녀석은 심장을 물어뜯어 주기도 했고.
거대한 원숭이의 다리 사이를 지나가기도 했다.
엉겨 붙는 벌레들은 그냥 무시하고 나아갔다.
"께에에에!"
어미 지네는 이제 아예 광분하고 있었다.
사라진 것은 왕눈이었다.
제일 밥을 잘 먹던 녀석이었는데.
제일······.
콰앙.
충격과 함께 부웅 떠올랐다.
네 발로 달려든 고릴라였다.
고릴라 여사와 다른 종족인 듯 어금니가 유독 길다.
내가 멀쩡히 다시 몸을 세우자 당황한 눈치.
*「식심의 도약lv2를 사용합니다.」
놈의 심장을 물어뜯지는 못했지만 독니를 박아 넣어 주었다.
퍼득거리는 놈을 무시하고 더 나아갔다.
들개만 한 메뚜기가 나를 덮쳤다.
입에서 불을 뿜어 주었다.
그놈은 불이 붙은 채로 내 몸에 엉겨 붙었다.
덕분에 화상을 입었지만 버틸 만했다.
벌레들이 내 몸을 뒤덮고, 그 위로 다른 마물들이 짓밟고 간다.
아.
이 근처 어딘가에서 왕눈이도 이런 꼴을 당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고.
*「천뢰령lv1을 사용합니다.」
쩌저저정!
내 몸에 붙어 있던 마물들이 새카맣게 불탔다.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
대왕 지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놀라 굳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빨리 애 찾아요.'
알아듣기를 바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떨어진 벼락에 놀라 날 바라본 것은 지네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가까워진 리옥크 역시 나를 봤다.
벼락이 놈의 흐려진 이성을 잠깐 되찾게 한 것일까.
그렇기에 나를 적수로 본 것일까.
사실 나를 요란하게 반짝이는 먹잇감쯤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놈은 마물을 씹어 삼키는 것을 멈췄다.
그래, 차라리 내 쪽으로 와라.
나는 대왕 지네와 멀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리옥크의 고개가 나를 따라온다.
좋군.
놈의 시선을 끌 만한 스킬을 더 사용했다.
*「천둥포효lv1을 사용합니다.」
"사아아악!"
그 포효가 놈에게는 어떤 신호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퀴이이익!"
나를 향해 똑바로 달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놈을 유인해야겠다.
기왕이면 원숭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만 내 착오가 있었다.
-빨리 기어라, 따라잡히겠다!
첫 번째로는 리옥크가 내 생각보다 빨랐다는 것이다.
멀리서 봤을 때는 그 거대한 체구 때문에 빠른지 몰랐다.
하지만 가까이서 놈이 접근하는 것을 보니 나보다 훨씬 빠르다.
*「가속lv6을 사용합니다.」
가속을 영구히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벌써부터 마력이 슬슬 부족해지는 느낌이다.
크리스탈 파이톤이 된 후 마력이 엄청 늘었는데도 이 정도인가.
두 번째 문제점은, 리옥크가 이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저 앞의 마물들도 내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뱀보다 무겁고 또 빠른 마물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도망치는 녀석들이 나를 밀치고 짓밟기도 했다.
어쩔 수 없다.
지네를 향하던 리옥크의 방향이 바뀌었으니 천둥 포효를 버리더라도 일단 탈출하자.
의외로 근처에 날벌레는 거의 없었다. 하긴 있었다면 진작 도망쳤겠지.
간신히 매미 비슷한 놈을 찾았다.
*「빌리는 뿔lv4로 '비행lv8'을 빌립니다.」
*「성공했습니다.」
됐다.
*「일시적으로 '비행lv3'을 얻었습니다.」
*「비행lv3을 사용합니다.」
몸이 붕 떠올랐다.
비행이라기보다는 부양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내가 방향을 틀 수도 속도를 조절할 수도 없다.
하지만 땅굴을 팔 수도 없고 긴급귀환도 쓰지 못하는 지금은 이 수밖에······.
그때였다.
파바박.
벌레 한 놈이 내 몸에 매달렸다.
아니 두 놈, 세 놈.
몸이 무거워진다.
이럴 줄, 알았다.
내가 괜히 비행을 쓰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마침내 긴다리 원숭이 한 마리가 나를 움켜잡았고.
애써 빌린 비행lv3으로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끼이익! 우이이!"
원숭이들과 벌레들의 소음이 정신없다.
놈들에게 또 뒤덮이고 말았다.
마구 물어뜯으며 탈출을 시도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런 소리가 언뜻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기뻐할 틈도 없다.
바닥나 가는 마나를 끌어모아 천뢰령을 썼다.
*「천뢰령lv1을 사용합니다.」
쩌저저정!
천뢰령의 레벨이 1로 올라서 그나마 이렇게 몇 번 쓸 수가 있었다.
새카맣게 불탄 마물 사체를 비집고 기어 나왔다.
그리고, 리옥크가 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놈의 앞발이 나를 잡아채려 다가왔다.
*「식심의 도약lv2를 사용합니다」
오직 도주를 위해서만 도약을 사용했다.
후웅!
내 바로 뒤를 발톱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지네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께에에에!"
그녀의 앞발에는 축 늘어진 왕눈이가 들려 있었다.
저건 기쁨의 탄성일까, 아니면 슬픈 절규일까.
알 수 없었다.
쿠웅, 쿵!
리옥크가 바로 내 뒤까지 따라잡았다.
천뢰령이라도 한 번 먹이면······.
*「마력이 부족합니다.」
아······!
가속조차 쓰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딨지.
왜 파괴광선을 써 주지 않은 거지?
-피해라, 더 움직여!
아니, 안 된다. 피할 구석이 없다.
죽는다. 분명.
저 벌레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다 내 잘못이다.
병신 같으니라고, 무슨 자신감으로?
지네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죽게 생겼다.
평생 찌질하게 살았던 나였는데, 뱀으로 태어난 뒤 몇 달 만에 영웅 노릇이라도 할 생각이었나.
'안돼. 이러다 죽는······.'
정신력 20인지 뭔지 하나도 소용없다.
와락 무서워지고 끔찍할 만큼 후회된다.
그때.
지네 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께께, 께에······."
그것에 안도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오른쪽을 돌아봤다.
왕눈이가 살아 있다.
움찔, 꿈틀거리며 제 어미에게 매달린다.
'아······.'
나는 우뚝 멈춰섰다.
-이놈아, 뭐해! 도망 안 치고.
'······도망치고 싶어도 마력이 없어요.'
내게 남은 수단은 하나뿐이다.
다가오는 리옥크를 돌아봤다.
그래, 저놈의 입속으로 들어가서 심장을 파먹어 주지.
안에 있는 기생충과 싸워야겠지만.
놈의 톱니처럼 된 이빨이 다각거린다.
저 박자에 맞춰 뛰어드는 거다.
그래, 시팔 죽기밖에 더하겠나.
다음 생에는 지렁이로 태어나려나.
놈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도약도, 가속도 쓰지 못했지만.
나는 뛰어올랐다.
탁!
그리고 눈앞이 새카매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나를 한입에 넣은 것이다.
리옥크가 아니라 다른 것이.
물컹한 잇몸이며 축축한 혀, 굳게 맞물린 하얀 이빨들이 보였다.
어쩐지 익숙하고 따듯하다.
쿠웅!
나를 입에 넣은 그가 그대로 리옥크와 몸통박치기를 했다.
천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입안에서 요동쳤다.
나는 아버지의 목구멍으로 홀라당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그래, 아버지다.
어느새 아버지가 다가와 나를 입에 넣었다.
위험할 때 파괴광선이나 한 방 쏴 달라니까.
마력이 없으셨나, 기어코 직접 찾아와서는······.
'아빠!'
도저히 그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저 내려놔요!'
입을 다물고 어떻게 싸운다는 말인가.
그 파괴적인 광선을 못 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물어뜯지도, 독니를 박아 넣지도 못하면 뱀에게는 조르기밖에 남지 않는다.
원래부터 아버지보다 강한 벌레를 목 졸라 죽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를 내려놔야 한다.
아니면 그냥 꿀꺽 삼키시든가.
'뱉으라고요!'
그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물리적 충격이었다.
콰앙!
순간 몸이 부웅 떠올랐다.
리옥크의 울음소리가 바깥에서도 들린다.
그리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피 냄새.
아버지의 목구멍에서 왈칵 핏물이 밀려 나왔다.
좀······!
그 이후로도 충격.
핏물.
리옥크의 포효.
아버지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고,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꿈틀대며 어디론가 향할 뿐.
그러던 와중.
아버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들렸다.
그것은 내게 하는 충고도 아니었고, 리옥크에게 하는 경고 또한 아니었다.
「······여보.」
그게 끝이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웃을 구석이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나는 펠레리안에게 부탁했다.
'바깥으로 나가서, 상황이 어떤지 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그래 보마.
펠레리안은 그리 했다.
* * *
-오 이런.
늙은 마도사 펠레리안의 영혼, 그 일부가 탄식을 내뱉었다.
잔혹한 것을 수도 없이 본 그였지만 눈앞의 광경은 정녕 끔찍했다.
아름답게 빛나던 뱀의 상태가 처참하다.
별빛을 담은 비늘은 등허리가 가죽째로 벗겨져 너덜거렸다.
꼬리로부터 3분의 1 지점은 반쯤 잘려서 덜렁거렸다.
한쪽 눈에서는 피가 줄줄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물고, 천천히 기어간다.
저 뒤에는 리옥크가 있었다.
놈의 상태도 보통이 아니었다.
여섯 개의 다리 중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더듬이는 부러져 있었고 찌그러진 배와 꽁무니에서는 뱀만 한 기생충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의가, 혹은 허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천천히 뱀을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역시 그 아비도, 범상치 않았구나.
펠레리안이 씁쓸히 중얼거렸다.
기우뚱.
서펜트가 결국 쓰러졌다.
* * *
쿠웅.
충격과 함께 시야가 환해진다.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나는 비척비척 기어 나왔다.
내 몸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다 아버지가 토해 낸 피였다.
그의 상태를 살폈다.
눈에 초점이 없다.
죽지는 않았다. 쌔액쌔액 숨을 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난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
뱀은 울지 못하는데,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뚝 흐를 것 같다.
나나루크가 준 포션을 거의 다 썼다.
전부 아버지 목구멍으로 쏟아부었다가, 딱 한 병만 남겼다.
아버지의 상태창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남겨 둔 거다.
'왜 그리 숨겼던 거예요?'
아버지는 답하지 않았다.
초점이 돌아와,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그만하고 좀 쉬어요. 포션도 줄 테니까······.'
아버지가 내 말을 들어준 건지는 모르겠다.
──────────────
[폴라리스 서펜트lv100]
[특성]
[북극성의 관찰자], [겁쟁이], [애처가], [회피형]
······
──────────────
아마도 체력이나 마력이 다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고, 끔찍한 사투였으니.
──────────────
[스킬]
[맹독:신경혈액독lv10], [지옥조르기lv20], [파괴광선lv20]······
[거대화lv10]······
──────────────
그의 스킬 목록 중에 눈에 띄는.
'거대화lv10.'
아버지의 거대한 체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계속 사용하고 있던 거대화가 해제된 것이다.
──────────────
[상태]
[공포], [안도], [부상], [빈사], [실혈], [불구], [거대화]······
──────────────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리옥크보다 작아지더니, 고릴라보다 작아지고, 점박이보다도 작아진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저리 커서 어찌 어머니를 만났나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대였나.
크기가 줄어드는 게 드디어 멈췄다.
아버지의 진짜 크기는 나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그리 작지도 않으셨구만.'
아버지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포션을 꺼내 입에 흘려 넣고 상처에 부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답답하리만큼 느리지만.
아버지를 돌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뀌이이이익!"
지독한 벌레 놈.
리옥크가 두 개 남은 다리로 몸을 질질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이번에는 내가 싸울 테니.
그러니까, 서로 조금 일찍부터 솔직했으면 좋았잖아요.
*「뛰어넘는 뿔lv3로 스킬 '빌리는 뿔lv4'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일시적으로 '빌리는 뿔lv10'을 얻었습니다.」
귀한 마석을 잔뜩 삼켜서 마력은 복구해두었다.
그것으로 리옥크와 싸울 수단을 빌린다.
*「빌리는 뿔lv10으로 '거대화lv10'을 빌립니다.」
*「성공했습니다.」
*「일시적으로 '거대화lv0'을 얻었습니다.」
*「뛰어넘는 뿔lv3로 스킬 '거대화lv0'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일시적으로 '거대화lv1'을 얻었습니다.」
애써 복구한 마력이 일순간에 전부 소모되었다.
*「거대화lv1를 사용합니다.」
시야가 상승한다.
몸이 커진다.
*「거대해집니다.」
마침내.
잠시겠지만.
아버지만큼.
< 눈물 >
062.
강해지는 것은 마물의 본능이다.
아마도 생존 다음으로 우선시되는 본능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짐승과 마물이 구별되는 부분이다.
더 강하게, 더 단단하게, 더 빠르게.
그리고 더 크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마물은 끊임없이 진화를 반복한다.
실버백 침팬지 아킴스는 진화 과정 중 크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큰 것은 나무를 탈 수도 없고, 말을 하기도 어렵다. 그 목구멍과 성대마저 거대해지면서 발화(發話)의 유리함이 사라질 테니.
또한 거대한 몸은 강한 만큼 먹이를 많이 소모한다.
숲의 자원은 한계가 있다.
대신 그는, 빠르고 강하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리옥크는 다르다.
작은 것이 당연한 '벌레'여서였을까.
체급이 힘인 것이 확실한 종족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놈이 아무거나 잘 처먹었으며, 또한 식생이 풍부한 늪지에서 자라난 것이기 때문일까.
놈은 무엇보다 '크기'에 집착하여 진화했으리라.
그것의 끔찍한 허기에는 그 체구를 유지하기 위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쩌다 그리 거대한 마물로 진화했을까.
진작 그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작은 뱀이 대수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는 자기보다 큰 적을 사냥하기 위해 몸을 키웠으리라.
혹은 '구애'를 위한 것일지도 모르지.
나랑 다르게 아버지는 비슷한 뱀에게 이끌리는 본능을 가지고 있었을 테다.
어쩌면 메두사 서펜트인 어머니가 연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크고 강력한 수컷이 인기 있는 것은 흔한 일이니, 어머니에게 반한 아버지가 덩치 크게 진화한 걸지도······.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거대화라니.'
왜 그걸 상상하지 못했을까.
단서는 여럿 있었다.
그 고질적인 마력 부족을 제외해도 그랬다.
종종 갑자기 사라지던 아버지.
텔레포트도 아닐 텐데 기척도 없이 제자리에서 휙 사라졌던 것은 사실 거대화 스킬을 해제한 게 아니었을까.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는 바위틈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어떻게 그랬을까. 그 거대한 몸으로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원래 작은 크기였기에, 그렇기에 바위틈으로 들어가 자고 있다가 거대화를 쓴 것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내가 상태창을 엿보려고 했을 때 화들짝 놀란 것도 그 때문일까.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그냥 싸울 때만 거대화를 썼으면 됐을 텐데.
하지만 나를 구하고 쓰러진 아버지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가 제 몸을 갉아 먹으면서까지 거대화를 유지했던 건 이성적인 판단 때문이 아니었을 테니까.
뭐, 개인적인 이유가 있겠지.
내 몸의 성장이 멈췄다.
이제는 리옥크마저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아버지보다는 작았지만 엄청나게 커졌다.
마력이 부족해서 구역질이 나온다.
무엇보다. 몸이 끔찍하게 무겁다.
'이게 아버지의 무게인가!'
이제야 깨달아요.
늘 이런 무거운 부담과 책임감을······.
-그건 아비의 무게가 아니라 네 몸무게다. 힘이 달리니 당연한 일이지.
펠레리안이 분위기를 깼다.
그가 깃든 반지는 크기 조절 마법 탓에 이제 훌라후프만큼 커졌지만, 정작 펠레리안의 크기는 그대로였다.
-덩치가 커져 봤자 네 본질은 그대로 아니냐.
'말하는 사람이 너무 쪼그매서 안 들리는데.'
-뭣.
그래, 어느 점에서 아버지가 이해되긴 한다.
거대해지고 나니까 더 이상 리옥크가 무섭지 않다.
아버지를 구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지만, 왠지 할 만해 보인다.
나는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그그그긍-
원래라면 걸리적거렸을 마물들의 사체가 내 체중에 으깨진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듯 버거웠지만, 온몸의 힘을 이끌어 내 달렸다.
"뀌이이이익!"
리옥크도 맞서 포효했다.
이 더러운 벌레야!
어쩐지, 거대화했으니까 그리 외쳐야 할 것 같았다.
'날 봐라-!'
천둥 같은 포효와 함께 나는 도약했다.
비기(祕技).
거대화 도약.
*「식심의 도약lv2를 사용합니다.」
'으아아아!'
-떴다!
떴다.
지상에서 10cm 정도.
원래 크기였다면 화살처럼 날아갔겠지만 지금은 이게 한계였다.
나는 리옥크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대신, 그 코앞에서 굉음을 내며 착지했다.
콰아앙!
흙먼지가 치솟았다.
결과가 나쁘지는 않았다.
끔찍하게 무거워진 질량 탓에 관성 역시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나는 흙먼지와 함께 놈에게 격돌했다.
쿠웅!
그리고 지옥의 난장질이 시작됐다.
놈의 몸을 휘감았다.
두 개밖에 남지 않은 다리 사이를 피해 그 퉁퉁한 배를 감아 죄었다.
그리고 놈의 대가리에 독니를 박아 넣었다.
으아악!
입안에 뭐 이상한 꿈틀거리는 게 들어왔다.
등골이 오싹해져 바로 퉤 뱉고 불꽃으로 입안을 소독했다.
깨물어 죽이기는 포기한다.
대신 몸에 힘을 주었다.
와드드드득!
적어도 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근력이다.
리옥크가 날개를 펼치고 두 개 남은 다리를 버둥댔지만 소용없다.
놈 역시 아버지와 싸우면서 큰 부상을 입은 것이다.
"퀴이이이익!"
귀 앞에서 들으니까 더 X같은 울음소리다.
죽어!
우득, 빠직-
놈의 갑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녀석의 몸에는 흉악한 돌기들이 나 있었지만, 내 비늘도 그만큼 두꺼워졌다. 흑린 스킬로 강화되기도 했고.
조금 있으면 거대화가 풀릴 것 같다.
아버지는 마력이 얼마나 많았길래 거대화를 그리 오래 지속할 수 있던 걸까.
'으아아아!'
빠직!
가늘었던 놈의 목이 끊어지고, 머리가 텅, 하고 굴러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멋대로 움직였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마치 새카맣게 과숙되어 버린 바나나를 세게 움켜쥔 것처럼.
콰자자작!
놈은 제 내용물을 성대하게 터뜨리며 으깨졌다.
잡았다.
지치고 부상당한 놈이라고 해도 분명 네임드 마물을.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업의 향연이 펼쳐졌다.
'허억, 헉.'
지쳤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인마, 굴러라!
'으아아아!'
나는 펠레리안의 충고를 따랐다.
죽은 리옥크의 몸에서는 사람 팔뚝만 한 기생충들이 꿈틀꿈틀 기어 나왔다.
놈들이 내 몸에 달라붙지 못하도록 얼른 굴렀다.
퍼퍼퍼퍽-
소리는 듣지 말자, 토 나올 것 같으니까.
다행히 공기 중에 노출되면 살아갈 수 없는지.
기생충들은 곧 뻣뻣하게 굳어서 죽어 버렸다.
얼른 몸을 세웠다.
몸이 거대해진 지금 해치워야 할 일이 있다.
지저분하고 찝찝하긴 하지만.
*「참격lv3을 사용합니다.」
꼬리로 어떻게든 놈의 몸뚱이를 갈랐다. 반쯤 으깨져 있어서 그나마 할 만했다.
심장, 심장이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네임드 마물답게 놈에게는 마석이 존재했다.
혹시 모르니까 소독도 해야지.
*「초급원소마법:불lv3을 사용합니다.」
화르르륵!
불꽃으로 마석을 휘감았다.
역겨운 잔여물들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불탔다.
그것을 허겁지겁 아공간에 넣었다.
얼른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러 돌아가자.
*「거대화가 해제됩니다.」
그리고 기어코 거대화가 끝났다.
몸이 거대해질 때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렸는데, 그 스킬이 풀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몸이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어우, 가벼워.
가벼우면 더 열심히 달릴 수 있다.
*「가속lv6을 사용합니다.」
얼마 없는 마력을 쥐어짜면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아, 저기 고릴라가 있다.
정말 똑똑하기 그지없는 참모다.
그녀가 마물들을 이끌고 빙 돌아와서 아버지가 있는 곳을 미리 차지한 것이다.
고릴라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대-장-!"
그리고 외치길.
"얼른- 와!"
불길함이 와락 치밀었다.
안 그래도 빨리 가고 있어.
더, 빠르게, 빨리.
*「가속lv6이 가속lv7이 됩니다.」
*「흑린lv1이 흑린lv2이 됩니다.」
스킬이 레벨업했다는 소리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부하들이 몰려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저 너머로 들리는 것은.
"흐윽, 흑."
울음소리다.
어떤 새끼가 재수 없게 울고 지랄이야!
나는 미친 듯 부하들의 틈을 비집고 나아갔다.
여전히 쓰러져 있는 아버지.
아직 살아 있다. 정말 다행이다.
의식이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옆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것은······.
'······쟤, 누구예요?'
-나한테 물어본 거냐? 내가 어떻게 알아.
처음 보는 인간 여자였다.
가죽바지를 입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으어어어어!"
아니, 훌쩍이는 정도가 아니라 대성통곡을 한다.
소름 끼친다.
너무 황당해서 흑린 스킬이 해제되어 버릴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인간 여자가 울면서 말하길.
"아빠······ 흐어어, 아빠······."
등골이 서늘했다.
저 인간 여자가 진짜 아버지의 혼외자라든가.
인간화라는 마물의 금기를 범해 버린 내 진짜 누나가 아니라면 상황은 확실했다.
'미친 여자다······!'
상처 입은 뱀을 아빠라고 부르는 인간이 정상일 리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대수림 한복판에 어떻게 나타난 건지 알 수가 없다.
고릴라가 내게 다가와서 조심스레 속삭였다.
"저 여자, 갑자기 휙 나타나더니 우리 애들······ 때려눕혔어."
자세히 보니 여자와 아버지의 근처에 쓰러져 있는 마물이 여럿 있다.
인간 여자를 해치우려다가 되려 맞았다는 설명이었다.
"다 살아 있어······ 그리고 저 인간이 멋진 뱀한테 포션······ 줬어."
저 여성분이?
그 이야기를 듣자 여자에 대한 평가가 조금 상승했다.
나는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여자는 마치 나를 원래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외쳤다.
"작은- 뱀아! 흐흐으으."
작은 뱀 아니다. 그냥 뱀이야.
이제는 거대화 스킬도 생겼어.
평가가 다시 내려갔다.
"너무, 감동적이었어. 으흐윽."
하지만 다행히 오해는 곧 풀렸다.
다행히 그녀가 부르짖던 '아빠'는 자신의 인간 아빠인 것 같았으니.
"네 아빠도 너무 멋있었어. 죽은 우리 아빠만큼. 흐흐윽. 계속 지켜봤는데······."
인간이란······. 자기 동족도 아니고 뱀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생물인가.
그보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알고 있었어요?'
-아니, 전혀.
'소름 끼치네.'
나와 아버지를 계속 보고 있었는데 전혀 알지 못했던 것 아닌가.
왜 스토킹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아버지의 분투를 지켜보고 마음이 벅차오른 걸까.
"프흐흐흐흑. 우욱."
울다가 힘에 부치는지 구역질까지 한다.
소름 끼치니까 그만 울면 좋겠다.
"나도, 너처럼······ 너처럼 했었어야 할 텐데······ 으흐흐흑."
'······.'
"그러면 아빠도, 안 죽었을 텐데······."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 같다.
그녀가 횡설수설 중얼거리는 게 자기 옛 사연 같은데, 솔직히 관심 없었다.
나는 무시하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좀?'
「괜찮다.」
"배, 뱀이 말했다아!"
여자가 울다가 화들짝 놀랐다.
말하는 뱀 처음 보나.
다행히 그녀는 우는 것을 멈췄다.
'그런데 왜 계속 누워 있어요.'
「지치는군.」
목숨은 건져서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몸이 완전히 낫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 정도 상처를 입었으니, 포션 좀 먹었다고 멀쩡해지지는 못하겠지.
'마석을 드릴까요. 아니면 내단을······.'
-내단! 내단을 먹여라.
그래. 마석은 소화하는데도 체력이 필요하다고 했지.
독이 있을까 조금 걱정되었지만 인면 거미의 내단을 꺼내서 드렸다.
아버지는 잠시 거부하다가 결국 씹어 삼켰다.
표정이 조금 나아진 듯도 하다.
"께에에!"
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확 돌렸다.
대왕지네, 그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품에는 왕눈이가 있다.
"께에, 께."
그녀는 움직이지 못하는 왕눈이를 내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포션이 없다.
나는 인간 여자를 바라봤다.
이제 미친 여자라고 부르지 않을 테니까 부디······.
"포션 달라고? 킁, 알겠어······."
정신이 조금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포션을 꺼내서 왕눈이의 몸에 뿌렸다.
"살다 살다 마물한테 포션을 다 주네."
"께께께······."
왕눈이가 힘없이 울었다.
고생했어, 너도 고생했다.
아버지도, 왕눈이도, 대왕지네도.
그리고 나도 살아남았다.
정말 끔찍한 격전이었다.
다만, 입맛이 썼다.
세상일이 계획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 것 같다.
저 거대한 뿌리.
이미 그 은색 원숭이가 중턱까지 기어 올라가 있었다.
저놈이 결국 찬란한 열매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아버지가 무겁게 말했다.
「원숭이가 먹으면, 분명 복수, 한다······.」
우리는 얼마 전에 합동 공격으로 아킴스를 쫓아낸 적이 있다.
성격 더러운 녀석이다.
놈이 앙심을 품었으리라는 것은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그 열매, 반드시 얻어야 해.」
아버지는 꼬리를 들어서 내 몸을 끌어당겼다.
「반드시.」
오늘은 과묵하기 그지없는 아버지가 가장 많은 말을 한 날이었다.
그 말에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 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저 뿌리 앞에 아직 남아 있는 영장류들을 돌파하더라도 실버백 아킴스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따라잡는다 해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지금 내가 마석을 씹어 삼켜도 마력으로 소화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리리라.
"저기."
고민하고 있는데 끼어든 것은 인간 여자였다.
"내 이름은 헤일릿 랑그레이라고 해."
그렇구나.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직업은 마물을 사냥하는 거고 취미는 마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거야."
놀라서 껑충 뛰어 버렸다.
무시무시하기 그지없는 인간 아닌가.
갑자기 우릴 위협하려는 걸까.
"그래서 너희들도 사냥하려고 감시했던 건데. 마음을 바꿨어."
위험한 인간인 것은 확실했다.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실력이 상당할 것 같다.
"대신, 그 원숭이나 잡아가기로 마음을 바꿨는데······."
그녀는 아주 민망한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발끝으로 땅을 긁어댔다.
"원한다면 저 원숭이가 있는 곳까지 데려가 줄게. 작은 대가만 주면."
'······.'
"정말 데려가 줄 수 있어. 난 빠르기도 하고."
그녀가 자신의 달리기 실력을 과시하려는지 제자리에서 통통 튄다.
사실 깜짝 놀라긴 했다.
뛰어오르는 속도가 내 식심의 도약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싫은가······?"
싫은 게 아니라, 솔직히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나는 뒤에 숨어 있는 고릴라 여사를 끌고 왔다.
그리고 통역을 시켜서 물었으니.
"대가가······ 뭔데?"
"아, 정말 별거 아니야!"
헤일릿 랑그레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반면 나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 광선 >
063. 광선
헤일릿 랑그레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기를.
'가죽 조금만 벗겨 줘. 팔토시로 쓰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럴까 봐 나는 달달 떨었다.
무서운 인간 아닌가.
생긴 것은 별로 강해 보이지 않아도 아주 셀 것이 분명했다.
──────────────
[헤일릿 랑그레이lv???]
──────────────
상태창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저 여자는 이미 아버지와 왕눈이를 구해 준 데다가, 나를 실버백 아킴스에게 데려가 주고 그 원숭이를 잡아 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내 입장으로서는 거절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정말 진짜 가죽을 벗겨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팔토시 만들 정도로는 무리고, 발목 양말 한 짝 만들 정도로 타협을 봐야 하나.
그래, 그렇게 하자.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
나는 의연하게 그녀의 요구를 기다렸다.
"비늘 몇 개만 뽑아 줘. 두 개, 세 개, 아니······ 다섯 개?"
'······.'
"······네 개?"
고릴라 여사를 통해 내 뜻을 전했다.
"열 개······ 준다."
헤일릿 랑그레이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정도면 목걸이도 만들 수 있겠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 얼른 비늘을 뜯어 가게 했다.
조금 따가워서 피가 나기도 했지만 값싼 대가다.
"액세서리를 만들 생각은 별로 안 해 봤는데, 이런 방법도 있구나."
그녀는 내 비늘을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하긴, 크리스탈 파이톤으로 진화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내 비늘도 보석이랑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저 여자도 이번 일로 마물을 죽이지 않고도 그 부산물을 취할 수 있음을 깨달았을 테니.
나로서는 이번 일 덕택에 저 밀렵꾼이 개심하기를 바랄 뿐이다.
헤일릿 랑그레이가 여태까지 마물을 상대로 얼마나 잔혹하게 굴었든.
그녀는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지금도 그랬다.
나나루크의 어깨에 매달렸을 때와 비슷한 자세였는데, 탑승감이 어마어마하다.
후우우웅-
육상선수 이상의 스프린트다.
놀라운 사실은 이곳이 트랙 위가 아니라 마물의 사체가 널려 있는 숲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바람 소리만 난다.
서스펜션이 훌륭한가.
"조금만 기다려! 금방 도착하니까. 거 신기하네, 마물을 어깨에 태우고 달리게 되다니. 세상에 별일이 다 있어."
엉엉 울어 댈 때는 그냥 미친 여자 같았는데. 생각보다 털털한 성격 같았다.
"에이 괜히 울어서 쪽팔리네. 잊어줘. 어차피 마물이니까 소문 날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치고는 나랑 대화라도 나누려는 듯 계속 중얼거린다.
"너는 품종이 뭐니. 결정 도마뱀하고 비슷한 품종인가."
'크리스탈 더블혼 파이톤이야.'
나도 대강 어울려 주었다.
"네 아버지도 엄청 멋있게 생겼더라고. 말도 하는 것 보니까 지능 높은 상위종 같은데. 넌 왜 말 못 하니?"
'아직 레벨이 낮아서 그렇지 뭐.'
"진화 몇 번 하면 너도 말할 수 있을 거야. 나중에 혹시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그 작은 뱀이라고 말해 줘. 꼭 미리 말하는 게 좋을 거고."
'알아 둘게.'
진화를 하면 모습이 바뀐다.
만약 미리 말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게다가 진화한다고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여자와 다시 마주치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하자고 결심했다.
체력도 보충할 겸 잠깐 확인 좀 해 볼까.
──────────────
[크리스탈 더블혼 파이톤lv30+]
[이명]우르오로스, 심장 파먹는 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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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 말은 이제 진화할 수 있다는 거다.
이번 일만 마치면 바로 진화해야지.
다음에는 어떻게 진화할까.
이번에야말로 서펜트가 될 수 있을까?
솔직히 아직은 무리일 것 같다.
내가 본 서펜트는 아버지와 어머니 둘뿐이다.
폴라리스 서펜트인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메두사 서펜트인 어머니도 지금의 나보다는 셀 것 같다.
다다음 진화쯤에는 꼭 서펜트가 되고 싶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헤일릿은 뿌리 가까이까지 도착했다.
가까이 와 보니 확실히 원숭이들이 많이 남아 있다.
리옥크가 죽고 인면 거미도 죽었으며 지네맘도 이탈한 지금. 벌레 군단은 와해되어 버렸다.
원숭이들이 기어코 남아 있는 벌레들을 상대로 승리를 차지한 것 같았다.
그들은 뿌리를 지키듯 주위에 몰려 있었다.
원숭이들이 헤일릿과 나에게 경계 어린 시선을 던졌다.
뿌리로 올라간 것은 실버백 침팬지 아킴스뿐인 것 같다.
혹시 부하들이 열매를 노릴까 봐 혼자 올라갔나.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헤일릿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뚝 멈췄다.
'뚫고 들어가야 하지 않아?'
내가 물어봤지만 당연히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녀는 자신의 백팩을 내려놓았다.
"저런 쭉정이들은 상대할 필요 없어. 빨리 올라가야지."
내 말을 알아들은 줄 알았네.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길게 휘어진 막대였다.
그런데 그 막대가 끊임없이 나온다.
펠레리안이 그것을 알아봤다.
-아공간 배낭이군.
'오.'
아무래도 마도구 같다.
'왜 불편하게 백팩을 들고 다니지? 아공간 반지 같은 건 없나?'
-어리석은 뱀아. 아공간 마법이 깃든 장신구가 흔한 물건인 줄 아나!
펠레리안이 으스대는 건지 꾸짖는 건지 모를 말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노움이 가지고 있을 투명망토도 가져가야 하는데.
아니,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대궁이군.
막대라고 생각했던 것은 다름 아닌 활이었다. 그것도 아주 큰 대궁.
새까맣게 빛나는 것이 아무래도 마물의 뿔로 만든 것 아닐까.
그녀는 궁을 땅에 박더니 힘을 주어 눌렀다.
까드드득!
시위를 걸고. 줄을 퉁 튕겨 본다.
배낭에서 화살 역시 꺼냈다.
언뜻 보면 가느다란 창처럼도 보이는 쇠 화살, 철시(鐵矢)였다.
그 장궁을 들어 위로 겨누더니.
그그극, 그극.
살벌한 소리를 내면서 시위를 당겼다.
역시 힘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터엉!
화살이 쐐액 하고 날아갔다.
아킴스를 맞추지는 못한 것 같은데, 헤일릿은 씩 웃었다.
"이걸로 올라가자."
활로?
어떻게?
그녀의 방식은 내 생각보다도 화끈한 것이었다.
* * *
"우워!"
실버백 아킴스는 크게 포효했다.
새하얀 이빨이 뾰족하다.
그 이빨로 적을, 수호자의 목을 물어뜯었다.
우지직, 우지지직!
목이 뜯어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뜨거운 피가 솟아 나오지는 않았다.
찬란한 열매를 지키는 수호자들은 트렌트(Trent)였으니까.
몸이 나무로 이뤄진 마물이었다.
나무라고 둔하거나 순한 생물은 아니었다.
생긴 것도 제각각이었고 무척 공격적이다.
지금도 그렇다.
목이 뜯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은 살아 움직였다.
가시나 다름없는 팔로 실버백 아킴스의 몸을 두드린다.
퍼억, 퍽!
아킴스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혼자서 뿌리를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트렌트의 팔을 뽑아 버렸다.
우두둑!
그리고 짓밟는다.
쾅, 쾅. 줄기를 뜯어 버리고 파헤쳤다.
"허억, 헉!"
입에서 한줄기 피가 흘렀다. 그것을 팔로 스윽 닦는다.
아킴스는 지쳤다.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분명 미소가 떠올랐다.
"다, 됐다."
숙적이었던 리옥크는 눈앞의 허기에 미쳐서 나무를 오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신경 쓰였던 뱀들과 싸우다가 죽는 것을 흘끗 확인했다.
뿌리를 기어오르는 것을 막던 수호자들도 모두 처리했다.
"찬란한, 열매."
저 위에 열매가 보인다.
찬란한 열매는 사과를 닮았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황금 사과.
저 열매에서 풍기는 향기에 머리가 아찔할 정도였다.
이제 곧 열매가 손에 들어올 것이다.
달콤한 과육을 씹으면 아킴스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더 높은 경지로.
이제 진화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지만.
그 벽을 뚫고 또 한 번의 진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세계수가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아킴스는 천천히.
여유로워서가 아니라 힘들어서 천천히 걸었다.
그의 털이 일순간 확 부풀었다.
고개를 꺾은 것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쐐애액!
쇠로 만들어진 화살이 아킴스의 머리가 있던 곳을 지나쳤다.
아킴스의 귓불이 찢어졌다.
피가 흐르는 귀를 부여잡으며 아킴스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화살은 무기다.
그렇다면 누가?
요정이나 인간이 이곳에 있던가.
혹은 그 매번 숨어다니던 노움?
알 수 없었으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화살은 분명 하늘 높이 날아갔지만,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몸을 틀어 피했으나.
퍼억!
오른쪽 날갯죽지에 쇠 화살이 박혔다.
화살이 살아 있는 것처럼 되돌아온 것이다.
화살을 뽑으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화살대에 쐐기가 달려 있다. 제작자의 악의가 담긴 화살이었다.
억지로 뽑는다면 엄청난 출혈이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대의 화살이 쏘아졌다.
아킴스는 경계하며 몸을 움직였지만 화살은 그를 지나쳐 갔다.
파악!
위로 뻗은 뿌리의 한 지점에 푹 박혀 든 화살.
화살대에는 철사를 꼬아 만든 와이어가 이어져 있었다.
그 와이어의 용도를 곧바로 알아채지 못한 것으로 아킴스를 탓할 수는 없으리라.
마물인 그가 화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비상한 일이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 하나가 와이어를 타고 기어올라 왔다.
거의 날아오다시피 빠른 움직임이었다.
아킴스는 인간보다 그 어깨에 앉아 있는 마물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배앰!"
그리고 그 뱀이 아킴스에게 날아들었다.
* * *
침팬지, 네가 이긴 줄 알았겠지.
그렇지 않다!
내 상태도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침팬지의 상태는 훨씬 나쁘다.
*「식심의 도약lv2를 사용합니다.」
내가 노린 것은 놈의 오른쪽 어깻죽지.
화살이 박혀 있는 그곳이었다.
침팬지는 손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뜨끔했는지 비틀거렸다.
그 덕에 놈의 어깨를 물어 주는 데에 성공했다.
쭈욱.
독샘에 남아 있는 신경독이 단숨에 주입되었다.
"크헝!"
지가 호랑이라도 되는 줄 아는 듯한 포효.
대형 마물도 순식간에 고꾸라뜨리는 내 맹독이지만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되려 성한 왼팔로 내 몸을 콱 움켜잡았다.
그대로 땅바닥으로 후려치려는 듯 손을 치켜든다.
여기까지도 예상했다.
*「천뢰령lv1을 사용합니다.」
천뢰령의 가장 큰 장점은 그것이 즉발형 스킬이라는 것이고.
단점은 나 역시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 괴물 같은 침팬지라고 해도 열 내성과 전격 내성은 나보다 덜할 터.
쩌저정!
침팬지의 눈이 새하얗게 뒤집어졌다.
이제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면 된다.
하지만 내가 미처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감전되면 근육이 수축한다는 것이다.
나를 꽉 잡았던 침팬지의 힘은 오히려 더욱 거세졌다.
그 고통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크윽."
게다가 아킴스의 정신이 결국 돌아왔다.
그가 마침내 헐크마냥 나를 패대기치려는 순간이었다.
서걱!
아킴스의 손목이 나를 움켜쥔 채로 잘렸다.
긴 월도를 들고 있는 헤일릿의 가세 덕택이었다.
"우아아아아!"
아킴스의 손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제법 기백이 있는 놈이다.
저 상태로도 헤일릿에게 달려들어 발차기를 먹이려 한다.
놈의 털이 가시처럼 뾰족해지더니, 발과 칼이 부딪치는데도 쇠가 캉캉거리는 소리를 냈다.
"얌전히 뒤져!"
하지만 헤일릿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휘어진 칼을 마치 자기 손발처럼 수월하게 쓴다.
나는 그녀에게 가세하려다가 머리를 돌렸다.
우리가 잡고 올랐던 와이어.
그것을 따라 원숭이들이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우끼잇, 낏!"
"끼이익!"
제 우두머리를 도우러 온 것이다.
가만 놔둘 수 없다.
나는 뿌리를 타고 올라 와이어가 이어진 쇠 화살까지 접근했다.
*「참격lv3을 사용합니다.」
쇠 화살을 자르지는 못했지만.
카각!
안 그래도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화살을 뽑아낼 수는 있었다.
"우끼이이익!"
이 높은 곳까지 거의 올라왔던 원숭이들이 일제히 추락했다.
그들이 서로 뭉치고 뒤얽혀서 지상에 처박혔음은 물론이다.
*「마성을 흡수합니다.」
*「마성을 공유합니다.」
레벨이 더 오르지는 않았지만 마성이 꽤 넉넉하게 들어왔다.
영장류들을 단체 추락사시킨 것이 헤일릿에게 조금 도움이 됐던 걸까.
"꾸아아아아!"
그사이 결국 아킴스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
놈이 헤일릿을 몸으로 밀친 것이 그 순간이었다.
헤일릿은 여태까지의 용맹이 무색하게 튕겨 나가서 뿌리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잠깐 승기를 잡은 것도 같았던 아킴스는 곧바로 내달렸다.
아니, 도망치는 것이다.
저 뿌리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다.
"저, 저 안 돼에!"
헤일릿이 비명을 질렀다.
뱀을 포기하고 은색 원숭이 가죽을 노리려던 그녀였다.
하지만 먹잇감이 코앞에서 달아나 버렸다.
나도 얼른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살아 있다!'
엄청나게 튼튼한 몸이다.
게다가 놈은 다른 원숭이들의 시신 더미를 쿠션 삼아서 뛰어내렸다.
다리를 접질렸는지 절뚝거리면서 도망치고 있었다.
'화살 쏴 바보야!'
나는 꼬리로 화살을 가리키며 헤일릿을 재촉했다.
그녀는 얼른 활을 꺼내서 시위를 매기려 했지만, 얼굴이 하얗게 되어서 중얼거렸다.
"아, 팔 부러졌다······."
헤일릿의 손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조금 전 아킴스에게 부딪쳤을 때 당한 것인가.
인간이란 이렇게 나약하기 그지없는 생물인 것이다.
헤일릿도 군터 같은 영웅인가 싶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
-여기서 놓치면 안 될 것 같은데.
아킴스는 절뚝거리면서도 꽤나 빨랐다.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저 영악한 원숭이는 엉덩이에 난 종기처럼 끝까지 날 귀찮게 굴 것이다.
내가 가진 원거리 기술은······.
없다.
마법으로는 저기까지 닿지 않는다.
"내가 내려가야겠어."
헤일릿이 뿌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래에는 여전히 원숭이들이 남아 있다.
아킴스가 뭐라고 지시했는지, 도망치기는커녕 헤일릿을 막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나는 계속 아킴스를 노려봤다.
-거 뭐 하고 있냐. 입만 쩌억 벌리고.
'조용히 해 봐요. 집중하고 있으니까.'
그래.
아버지에게 미처 다 배우지 못한 스킬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충분히 습득할 만한 스킬이다.
아버지도 지니고 있던 스킬이니까.
-서, 설마, 그걸 시도하는 것이냐!
펠레리안은 놀라서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집중하라는 배려였다.
그래서 그리했다.
마력을 입에 모아, 토해 내듯 하라고 했다.
남은 마력을 박박 그러모아.
입 앞의 한 지점에 모으듯.
그래, 투명한 손을 연성할 때처럼 모아서.
더.
더, 강하게.
-오오······!
펠레리안이 탄성을 내뱉었다.
내 입에서 빛무리가 모이기 시작했다.
*「특성 '정진'에 의해 스킬의 습득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되나.
되는 것인가.
끝까지 집중하자.
그래, 마치 마력을 토해 내듯······.
"우욱."
정말 구역질이 나오는 순간.
내 입에서 광선이 쏘아져 나갔다.
피잉-!
그 광선은 아킴스의 허벅지에 적중했다.
놈의 질긴 육신을 꿰뚫지는 못했으나. 지건을 풀파워로 맞은 듯한 상처가 생겼다.
아킴스가 비명을 지르며 풀썩 엎어졌다.
그를 쫓아가던 헤일릿이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성공했구나!
그래그래, 놀랍게도 사실이다.
나는 천재적이게도 홀로 습득해 내고 말았다.
위대한 마물의 필수 소양이라고 할 수 있는 스킬.
'파괴광선'을.
*「광선lv1을 습득했습니다.」
······그냥 광선을!
마침내 헤일릿 랑그레이가 아킴스에게 다가가 단숨에 놈의 목을 베었다.
어쨌든.
찬란한 열매는 이제 우리 것이다.
<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
064.
──────────────
[찬란한 열매]
세계수의 정수가 담긴 찬란한 열매.
──────────────
종종 생각하는 일인데.
이 설명이라는 것이 참 쓸모없는 경우가 많다.
세계수의 정수가 담겨서 뭐 어쩌라는 말인가.
어떤 효과가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 양심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 정보의 일부분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무나 누리지 못하는 특혜니까.
냄새가 기가 막히기는 한다.
입에 침이 고인다.
당장이라도 씹어 삼켜 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일단 아공간에 넣었다.
'반드시 열매를 얻어야 한다.'
아버지는 그리 말했다.
과묵한 그가 여러 번 강조했던 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열매임이 분명했다.
아버지의 몸을 고칠 수 있는 치료 약일지도 몰라.
······생각해 보니까 아버지는 이제 괜찮아진 건가?
그의 고질적인 마력 부족은 거대화를 끊임없이 유지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사실 거대화를 유지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병에 걸린 걸지도······.
이런저런 상상을 해 봤다.
어찌 되었든 효심 깊은 뱀은 그 열매를 가지고 아버지께 돌아갔다.
그 사이, 아버지는 다시 거대해져 있었다.
나는 마구 화를 냈다.
상처가 다 치료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짓이냐고.
마력도 부족한데 왜 자꾸 거대화를 쓰는 거냐고.
내가 펄쩍 뛰면서 화를 내자 아버지는 그답게 대처했다.
안 들리는 척 무시하는 것이다.
'그럼 왜 계속 거대화를 쓰고 있는 건데요! 이유라도 좀 말해 주시죠.'
원래라면 대답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아버지는 답해 주었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 주겠다는 건가.
열매를 먹고?
아니면 내일? 열 밤 자고 나면?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열매를 꺼냈다.
'자, 말하신 대로 따 왔어요. 드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먹어라.」
'아니 꼭 따 와야 한다고 해서 기껏 따 왔더니.'
여태까지 계속 그랬듯, 아버지는 열매를 먹는 것을 거절했다.
모든 마물은 강해지려는 본능이 있다는데 왜 자꾸 그러시는 걸까.
이게 '닭 다리는 네가 먹어라' 같은 아버지의 간접적인 애정표현인지 조금 헷갈렸다.
「나는 이미 먹었다.」
'아빠는 다리 별로 안 좋아한다.' 순간 그런 의미로 착각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였다.
「저번에.」
'예······ 어?'
아버지는 찬란한 열매를 먹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예전, 대수림의 다른 어딘가에서 열렸던 보랏빛 연회에서 열매를 차지했다 말했다.
「······그리고, 진화했다.」
그전에는 어떤 뱀이었을까.
폴라리스 파이톤 같은 거였을까. 아니면 그냥 화이트 서펜트였을지도.
아버지가 침팬지나 리옥크보다 강하지 않아서, 설마 그렇게 화려한 전적이 있었을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번 '축제'에 몰려든 마물이 유독 강했던 걸까.
「그러니까 열매를 또 먹는 건, 소용없어.」
아무래도 열매의 효과는 한 번 뿐인 것 같았다.
「그러니, 네가 먹어라.」
아버지가 다시 한번 강조하듯 말했다.
그리 말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먹자.
-진화에 영향을 끼치는 열매라니, 기대되는군. 진화의 비밀이 이렇게 또 하나 풀리는구나.
펠레리안의 감상에 동의했다.
아버지는 고유종으로 진화했다.
고유종이라고 무조건 우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희귀한 만큼 그 지닌바 능력이 특출난 경우가 있다는 듯하다.
네임드 마물 중 상당수가 고유종이고, 재앙으로 불리는 녀석들 중에서도 고유종이 많다나.
'저도 이걸 먹으면 고유종이 되는 걸까요?'
-가능성이 낮지는 않을 것 같군······!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한다.
펠레리안은 진화라는 것에 과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진화하고 싶다.
열매를 먹고 곧바로 안전한 곳을 찾아야겠다.
"대······장."
그때였다
고릴라가 다가왔다.
헉, 혹시 열매의 지분을 요구하려는 걸까.
내 속 좁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씩 웃었다.
왜 그리 순하게 웃어.
나는 내 부하들을 슥 돌아봤다.
전부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60이 넘지 않는다.
최대한 어부지리를 노리는 방식으로 싸웠는데도, 절반에 가까운 마물들이 싸우다 죽은 것이다.
어쩐지 속이 쓰렸다.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다'라고?
그 말을 떠올리며 홀로 나가 지네 가족을 구했다.
아버지도 그 비슷한 생각으로 나를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길들인 모든 마물들이 무사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 구절을 외는 것조차 자기만족이요 기만일지도 모르겠다.
"고마······ 워."
'뭐?'
하지만 고릴라는 뜻밖의 말을 해 줬다.
"우리, 싸웠어. 그런데 도움, 별로 안 됐어."
'뭐······.'
그렇긴 하지.
오늘 싸움은 나와 아버지가 전부 했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나였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너희들이 없었으면 천하삼분지계도 불가능했어.
"뱀하고, 아빠뱀만, 열심히 싸웠다. 그런데 우리, 살아남았어."
'응······.'
"그리고 레벨도, 올랐어. 많이 강해졌, 다."
고릴라가 양팔을 들어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하긴, 나와 아버지가 잡은 마물들의 경험치는 고스란히 무리에게 돌아갔다.
"대장이 아니었으면······ 다 죽었다."
그렇게 말한 고릴라가 손을 들어 자기의 눈썹 부근에 가져다 댔다.
"충서엉······."
저것은 내가 심심해서 가르쳐 준 경례 자세였다.
용케 기억하고 있구나.
물론 다른 마물들은 멍하니 있었다.
점박이 정도나 앞발을 들어 휘저으며 고릴라를 따라 할 뿐이었다.
그래도······ 뭔가 가슴이 찡했다.
'그거 왼손 경례야, 오른손으로 해야지.'
"아, 아아······."
생각해 보니까 마물들을 너무 우습게 본 것 같다.
내가 길들였다고 해도 이들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제각기, 더 강해지기 위해. 진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전사들 아닌가.
나는 아공간에서 열매를 꺼냈다.
'지금까지 고마웠고······.'
크루의 대장으로서, 나는 건배사를 하듯 말했다.
'앞으로도 잘해 보자 얘들아!'
"와아······!"
고릴라 여사의 박수를 받으며, 나는 찬란한 열매를 입에 넣었다.
와삭!
생긴 것에서부터 예상되던 식감이었다.
와작와작한 과육을 씹자 입안에 과즙이 확 번졌다.
그 달콤한 과일을 꿀꺽 삼켰다.
속이 뜨끈해지는 게 약발이 올라오는 것 같다.
과연 찬란한 열매의 효과는 뭘까.
효과를 확인한 다음에 절벽으로 돌아가서 진화를 시도해 봐야겠다.
*「진화가 준비됩니다.」
뭐라고!
진화를 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곳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이 여태까지의 규칙이었건만.
왜 갑자기 이 자리에서 진화를 시작한다는 말인가.
*「진화하는 마물을 보호합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우드드득-
땅에서 갑자기 세계수의 뿌리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유독 희고 가느다란 뿌리다.
마치 담쟁이덩굴 같은 잔뿌리들이 나를 휘감는다.
깜짝 놀라서 벗어나려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리옥크에게 당할 뻔했을 땐 바로 달려왔던 그가, 지금은 그저 평온해 보였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도 겪어 본 과정인가.
잔뿌리를 피해 도망치려고 했던 걸 멈췄다.
다행히, 잔뿌리는 나를 옭아매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감싸 왔다.
'이따 못 한 이야기 좀 하죠!'
나는 아버지께 그리 말했다.
궁금한 것이 많다.
거대화에 대한 것도 물어보고 싶고, 어쩌다가 폴라리스 서펜트가 되었는지도 물어보고 싶고.
어머니는 어떻게 만났는지, 왜 그때 그렇게 도망갔는지도 묻고 싶다.
레벨이 100이던데 혹시 진화를 앞두고 있는지도. 만약 그렇다면 도와주고 싶으니까.
또 군터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군터는 언젠가 복수해야 할 대상이 될지도 모르니.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시야가 점점 나무뿌리에 가려졌다.
결국, 마치 고치에 감싸진 누에 벌레처럼.
나는 세계수의 흰 뿌리에 휘감겼다.
*「공기 중의 마성 농도가 높아집니다.」
그때, 이상한 메시지가 들렸다.
*「열매를 맺지 못한 뿌리들이 썩어 갑니다.」
*「썩은 뿌리에서 부취가 풍깁니다.」
무슨 말이야.
하지만 새하얀 공간 안에 갇힌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엇.
펠레리안도 외마디 비명과 함께 쏙, 반지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투명하고 끈적한 점액이 내가 있는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 * *
헤일릿 랑그레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기 중의 마성 농도가 높아서 보랏빛을 띠던 하늘이다.
찬란한 열매가 떨어졌으니 축제는 끝나야 할 터.
이곳을 돔처럼 덮어 보호하던 결계는 사라졌다.
하지만 대기 중 마성의 농도는 오히려 더 짙어진 것 같다.
지금의 하늘은 피처럼 붉었다.
'기다리고 있던 마물들이 몰려들려나?'
그녀는 결계 바깥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던 마물들을 보았다.
그중에서는 실버백 아킴스나 충왕 리옥크에 못지않은 강자도 있을지 모른다.
원하던 '옷'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이곳에 찾아와서 재미있는 경험을 마쳤다.
작은 뱀과 그 아비의 분투는 헤일릿 랑그레이의 가슴을 울렸다.
지금 작은 뱀은 마치 고치에 갇힌 듯한 모습이었다.
세계수의 흰 뿌리가 그를 지키고 있다.
헤일릿은 빛살 같은 속도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고치를 이루고 있는 뿌리의 가장자리를 내려쳤다.
카앙!
칼이 미친 듯 떨렸다.
하지만 흰 뿌리에는 흠집도 남지 않았다.
"다행이네."
폴라리스 서펜트가 슬쩍 꼬리를 내렸다.
헤일릿에게 적의가 없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작은 뱀이 무사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그녀가 신경 쓸 것은 큰 뱀뿐이었다.
고릴라며 나머지 마물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고.
"뱀 아저씨."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헤일릿은 인생 경험이 풍부했다.
느낌이 왔다.
진작부터 떠날 사람, 아니 떠날 뱀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것이었다.
"바로 떠나게······요?"
왠지 존댓말이 나와 버렸다.
놀랍게도 폴라리스 서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념파로 말할 수 있으면서, 과묵한 마물이다.
생긴 것처럼 사념파에서 느껴지는 목소리 또한 멋졌는데.
"더 진화하고 싶나 보네요."
진화는 모든 마물의 본능이다.
더 이상 진화의 길이 보이지 않는 마물조차 끊임없이 진화를 바란다.
'죽고 싶지 않은' 본능 다음으로 강렬한 것이 아니던가.
거대화를 유지하는 것마저 벅차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지금의 상태로 만족하지는 않을 터.
뱀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야 또 진화할 수 있는지는 알고······요?"
상위종의 경우는 자신의 길을 미리 깨닫는 경우가 있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만.
「별에 닿아야 한다.」
"아."
헤일릿은 그 어울림에 감탄했다.
폴라리스. 그 이름다운 진화조건이구나.
게다가 낭만적이기도 하다.
그것을 이룰 방법은 도무지 없어 보이지만.
"애한테 마지막 인사는 하고 가요. 아버지가 말없이 사라지면 자식은 비뚤어지는 법이니까."
그리 말하고 헤일릿은 휙, 몸을 돌렸다.
마치 요정 같은 몸놀림으로 달려서 떠난다. 마물들이 몰려오기 전에 피해야 할 테니.
폴라리스 서펜트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침묵했다.
약간의 망설임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꼬리를 들어 흰 고치를 어루만졌다.
자신의 아들에게 전할 말을 고민하며.
「······고마웠다.」
아내에게는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했더랬다.
「언젠가, 다시, 보자.」
그리 말하고 폴라리스 서펜트는 거대한 몸을 돌렸다.
대수림 더 깊숙한 곳을 향해서.
조용히, 천천히.
다시 고독함을 찾아.
그리고 고릴라를 포함한 마물들은 멍하니 그 자리에 남았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달큰한 향기가 어지러웠다.
* * *
'어디 가아!'
고치 안에서도 바깥의 대화 소리는 들렸다.
나는 고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벽을 때렸다.
'아빠아!
하지만 고치의 내부는 투명하고 끈적한 점액으로 가득 차 있었다.
꼬리를 휘둘러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씨!'
답답해 죽겠다.
점액이 콧구멍과 폐까지 들어갔을 때는 이렇게 익사해서 죽는가 싶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숨이 쉬어졌다.
정확히는 질식하지 않았다고 표현해야겠지만. 이거 LCL 용액도 아니고 뭐.
'아빠!'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떠난 것 같았다.
별을 찾으러 떠난다니.
역시 뱀이라 그런지 천문학 지식이 전혀 없음이 분명하다.
별은 아주 먼 곳에 있어 갈 수도 없고, 닿으면 불타 죽을 것이다. 열기 내성이 100레벨이라도 그럴 테고.
꾸웅.
고치는 뚫릴 생각이 없었다.
'······그래.'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다.
만남에는 반드시 헤어짐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거자필반'이라, 서로 무사하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나는 속으로 문자를 써 대면서 쓰린 마음을 달랬다.
그러던 중, 눈앞이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바깥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내 몸이 빛을 내고 있었다.
*「진화를 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진화할 때는 늘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꿈을 꿨는데 지금은 그 반대다.
이번에는 어떤 선택지가 나오는 걸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선택지가 나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행적과 잠재력을 고려합니다.」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찬란한 열매를 먹어서 그런 걸까.
*「파이톤입니다.」
그렇지, 나는 비단뱀이올시다.
*「혼 계열의 마물입니다.」
내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다.
그 뿔로 헤쳐나간 위험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정 비늘을 지녔습니다.」
마석을 엄청나게 먹고 크리스탈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펠레리안의 말에 따르면 그 마석의 가치가 영지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치면 내 비늘 하나는 정말 보석이나 다를바 없을지도 모른다.
*「우두머리였습니다.」
동물원의 짐승들, 그 전설과 같은 크루의 우두머리이기도 했지.
마침내 축제에서 승리한.
*「일부 고블린들의 신앙을 받고 있습니다.」
우르오로스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나나루크는 대수림의 고블린들을 일통했을까.
내 행적이 이번 진화를 결정짓는 것 같다.
그리고 잠재력 또한.
*「잠재력을 판정합니다.」
*「특성 '정진'에 의해 진화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어떻게 진화할지 궁금한데.
나도 혹시······.
*「고유 계열 '왕관'을 얻습니다.」
'고유'! 계열.
*「특성 '왕관'을 얻었습니다.」
*「특성 '뿔'이 '왕관'에 통합됩니다.」
*「특성 '무늬'가 '왕관'에 통합됩니다.」
*「특성 '비늘'이 '왕관'에 통합됩니다.」
이어지는 목소리에 머리가 간질간질했다.
돋아난 두 개의 뿔과 비슷한 뿔들이 자라나더니.
뭉치고 정렬하며 모양을 바꿔 간다.
마치······ 왕관을 쓴 뱀처럼.
*「스킬 '왕관'을 얻습니다.」
*「'빌리는 뿔lv4'이 '왕관'에 통합됩니다.」
*「'뛰어넘는 뿔lv2'가 '왕관'에 통합됩니다.」
*「'길들이기lv10'이 '왕관'에 통합됩니다.」
만능 스킬이구나 왕관.
그리고 마침내 내가 진화할 이름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으로 진화합니다.」
진화가 시작되었다.
< 뱀 모양 인형 >
065.
쿵쿵.
'아!'
눈을 떴다.
이번에는 각성 상태로 진화를 맞이하는 건가 싶었었다만, 아니었다.
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 줄여서 크크파로 진화한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뭔가 변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거울이 없어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머리에 두 개 나 있던 뿔이 형태를 바꿨다.
꼬리로 매만져 보니 왕관 모양이 된 것 같았다.
몸이 커진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간 더 작아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커지는 데에 흥미가 떨어졌다.
어차피 거대화라는 스킬을 습득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펠레리안은 어째선지 반지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이 고치 때문인지, 아니면 점액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진화의 결과를 자세히 확인해 볼까.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
[크리스탈 크라운 파이톤lv1]
[이명] 우르오로스, 심장 파먹는 뱀
[특성]
[불굴], [정진], [왕관]
······
──────────────
서펜트가 되지 못한 것은 아쉽다.
하지만 여러 특성들이 '왕관'이라는 특성으로 통합된 것은 기껍기 그지없었다.
분명 '고유 계열'이라고 했지.
즉, 왕관이라는 특성을 가진 마물은 내가 처음일지도 모른다.
나는 뿌리를 굳이 따지자면 뱀 계열, 그리고 혼 계열 마물일 것이다.
이름에 '혼'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뿔이 달린 것이 혼 계열 마물이다. 이 대수림에서는 흔히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그러면 내가 바로 왕관 계열 마물의 대종사라고 할 수 있겠군.
적어도 머리에 달린 이게 장식은 아닐 것이다.
분명 스킬 여러 개가 통합되었다는 메시지도 들었으니까.
어.
스킬이 달라졌다.
그것도 많이!
──────────────
[스킬]
▸왕관
[강탈lv4]: 거대화lv0, [극복lv2], [지배lv1]
▸마법
[초급원소]:불lv4, 흙lv5, 물lv2, 바람lv3
[투명한 손lv3]······
──────────────
뿔이 사라지고 왕관으로 바뀌었다.
왕관이라는 큰 스킬 아래에 세 개의 스킬이 존재하는 형태였다.
빌리는 뿔이······ 강탈로 변한 것 같은데. 그러면 강탈의 왕관이라고 불러야 하나.
뺏는 게 아니라 빌리는 건데 왜 강탈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네.
억울한 일이다.
그러면 뛰어넘는 뿔은 극복의 왕관이 된 거고······ 지배는 왜 생겼지.
아, 길들이기가 지배라는 스킬로 변한 건가.
요즘 스킬이 너무 많아져서 상태창 읽기도 버거웠는데 확실히 보기 편해졌다.
마법 스킬이 정리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더 살펴보니 다른 스킬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
▸기술
[천뢰령lv1], [식심의 도약lv2], [맹독:신경독lv5], [독비늘lv1], [어설픈 검술lv1], [꼬리치기lv1], [참격lv3], [가속lv6], [포식lv7], [마력 감지lv3]
▸생존
[내성]: 독lv7, 출혈lv3, 고통lv8, 열lv10, 냉기lv1, 석화lv1, 전격lv1
[생존본능lv6], [흑린lv2], [수영lv1],[숨 참기lv5], [은밀lv8]······
──────────────
이제 좀 읽을 만하구만.
왜 상태창이 바뀐 걸까.
이것도 진화 덕택일까.
하긴, 이번 진화는 무려 세계수의 보조를 받은 진화였다.
그냥 진화가 아니라 메가진화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다.
혹은 내 무의식이 답답한 상태창을 정리한 걸지도 모르고.
이렇게 자신이나 남의 상태를 '자세히' 꿰뚫어 보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 같았으니까.
나중에 펠레리안에게 다시 물어봐야겠다.
그때였다.
*「고블린들의 신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명 '우르오로스'의 격이 조금 오릅니다.」
나나루크가 뭔가를 해낸 걸까!
곧바로 확인해 봤다.
──────────────
[우르오로스]
······
현재 대수림의 고블린들이 신앙하고 있다.
그 신앙이 널리 퍼질수록, 이명의 주인은 합당한 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
나는 비상한 기억력을 동원해 달라진 점을 알아냈다.
원래는 '극히 일부의 고블린'들이 신앙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게 '대수림의 고블린'들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나나루크가 결국 대수림을 일통한 것이다.
'너무 빠른 거 아니니, 나나루크.'
혀를 내두를 만큼의 속도였다.
내가 겨우 그림자 숲 지역에서 천하삼분지계를 논하는 동안, 그녀는 벌써 대수림의 고블린 대부분을 장악한 것이다.
어떻게 한 것일까.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인데.
물론 응원하긴 했지만, 정말 실현 가능한 일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건 혹시······ 질투하는 건가 내가!
잠시 자아 성찰 시간을 가졌다.
그래, 나나루크 족장이 나 대신 여기에 있었어도 나만큼 잘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다.
나한테도 아끼는 부하들이 있고 지네맘도 있으니까.
자신감을 가져야겠다.
쿵쿵쿵-
그리고 무언가가 바깥에서 고치를 두드렸다.
잠에서 깼던 것도 이 소리 때문이었던가.
대······ 장.
고치 바깥에서 들리는 것은 고릴라의 목소리 같았다.
나와야······ 해!
웅웅거려 잘 들리진 않았지만 분명 급박한 어조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
우리를 노릴 만한 마물은 주변에 없을 텐데.
마음이 급해졌다.
진화를 마쳤으니 이제 고치에서 우화해야 할 순간이다.
*「참격lv3을 사용합니다.」
꼬리를 여차저차 휘두르니 고치에 흠집이 생겼다.
진화를 마치면서 고치의 내구도도 약해졌나 보다.
그곳으로 점액이 조금씩 빠져나간다.
*「참격lv3을 사용합니다.」
엘븐 브로드 소드가 있었으면 수월했을 텐데.
확 이 상태에서 거대화 써 봐?
그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역할을 수행해라······.
고릴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니.
아니, 고릴라가 아닌 것 같다.
그녀의 목소리는 훨씬 걸걸하며 따듯하다.
당황하던 중, 쇠로 된 고릴라의 의수가 고치의 틈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고치를 찢다시피 열었다.
우지직!
급하기도 해라.
나는 익숙하게 그녀의 의수를 타고 어깨까지 올라갔다.
"콜록, 켁!"
배 속에 있는 점액이 콧구멍과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격렬한 기침과 함께 그 점액들을 전부 게워냈다.
이제야 살 것 같구만.
그제야 주변 상황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내린 판단은······.
'꿈인가?'
이게 꿈이라면 분명히 악몽일 것이다.
-꿈은 무슨 꿈이냐!
펠레리안도 드디어 반지에서 튀어나왔다.
꿈이 아니라면 문제다.
이곳은 지옥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
보랏빛 하늘이 파랗게 쾌청해졌을 줄 알았건만.
고릴라가 현자에게 들은 것도 그랬고, 펠레리안의 설명도 그랬으며, 데쉬난의 기록 또한 그리 말했다.
축제가 끝나면 다시 평범한 나날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시뻘건 하늘이 나를 반겼다.
공기 중의 마성이 워낙 짙어 입이 텁텁할 정도였다.
'여기 어디야?'
"큰, 뿌리······ 위."
고릴라가 나를 고치째로 이곳까지 옮겨 둔 것 같았다.
그 탓에 주변이 한눈에 들어왔다.
'뭔 마물들이 이렇게 많아.'
수많은 마물들이 뿌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벌레군단과 원숭이 군단들이 싸웠을 때보다 더 많은 마물들이 평야를 가득 채운 것이다.
그 수가 족히 만이 넘어 보였다.
거대한 녀석부터 작은 녀석까지 다양하다.
"어제, 갑자기······ 몰려왔어."
'내가 진화하기 시작하고?'
"일제히 여기로······."
나는 뒤늦게서야 내 부하 중 고릴라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나머지는 어디 있어!'
"내가, 도망치게······ 했어."
설마 저 마물들에게 잡아먹혔거나 저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인가 싶었는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잘했어.'
고릴라를 영입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몬스터 웨이브다.
펠레리안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건 몬스터 웨이브가 틀림없어.
'그 마물들이 몰려서 대륙 안쪽으로 떼돌격하는 거요?'
-그래.
'대수림에서는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는다면서요.'
-여태까지는 그랬지. 내가 살아 있을 때까지도 그랬고.
펠레리안의 표정 역시 당혹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겠나······.
그럴 것이다.
어느 날 미친 마물들이 한데 모여 도원결의한 뒤 대수림 밖으로 소풍을 나가는 날이 온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바로 오늘.
-몬스터 웨이브라면 우두머리가 있을 텐데?
몬스터 웨이브에는 가장 앞에서 포효하는 우두머리 마물이 있다.
마물들은 광기에 빠지게 되고, 그 우두머리를 따라 대륙의 중앙을 향해 달려간다.
그 미친 마물은 어디 있을까.
저 아래에서 돌고 있는 거대한 코끼리인가.
아니면 민달팽이를 닮은 녀석?
수많은 사상자를 낼 광기의 지휘자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어, 어어 대······장!"
그때, 고릴라가 나를 보며 당황했다.
뭔데. 왜 그러는데.
펠레리안도 화들짝 놀라 외쳤다.
-너 인마, 떠 있어!
내 몸이 둥둥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던 마물들이 일제히 멈춰섰다.
*「우두머리가 선출됩니다.」
그놈들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설마 이거.
······나야?
내가 마물들을 이끌고 나가는 건가?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찌릿.
그때, 머릿속에 둔중한 충격이 울렸다.
속이 울컥, 뜨거워진다.
뱃속이 불타는 듯하다.
어째선지, 광기와 분노가 내 머릿속을 잠식하는 것 같다.
속에서 용암이 들끓는다.
우우.
우욱.
"우엑!"
나는 배 속에 남아 있던 점액을 마저 게워냈다.
음, 속이 편해지고 머릿속도 맑아졌다.
*「특성 '불굴'에 의해 정신공격에 면역입니다.」
설마.
방금 나한테 누가 정신공격을 걸었던 걸까.
마물들과 함께 몬스터웨이브를 이끌라는?
펠레리안에게 방금 일을 설명했다.
-무슨, 설마 그렇다면 ······.
그런 일이 가능할 만한 것은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내 진화를 도와주고, 찬란한 열매를 맺어서 먹인 것은.
향기를 내뿜어 마물들을 유인한 것은 하나뿐이니.
-세계수가 몬스터 웨이브를 조장한다고!
세계수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나무였다.
내가 우두머리가 되지 않아서일까.
이변이 벌어졌다.
뿌리가 흔들리더니, 지면에서 가시처럼 뾰족한 뿌리들이 돋아났다.
파바바바박!
지면을 가득 메운 마물 일부가 꼬챙이 같은 뿌리에 꿰였다.
그들은 흡혈귀에게 피를 빨린 것처럼 순식간에 말라 비틀어졌다.
그그긍.
그리고 찬란한 열매가 맺혔던 바로 그 위치에 무언가 맺히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새빨간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난다.
'어, 도망쳐야 할 것 같은데요.'
어디로?
갈 데가 없다.
아래에는 마물의 무리가 빼곡했으니.
새빨간 열매는 기어코 황소만 한 크기로 자라났다.
퓨욱-
열매의 껍질이 터지며 새빨간 액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한 마리의 마물이었다.
-트렌트인가.
트렌트라고 하면 걸어 다니는 나무와 같은 마물이다.
놈의 몸은 나무껍질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생김새가 꼭 뱀 같았다.
꼭 나나 아버지를 본뜬 것처럼.
"······그우우."
피처럼 보이는 새빨간 과즙에 뒤덮인 나무 뱀.
나는 얼른 눈에 힘을 줘 보았다.
──────────────
[뿌리의 키메라lv100]
[특성]
[광기], [포악함], [우두머리], [저지능], [아기], [왕관]······.
──────────────
미친 아기 나무 뱀이다!
레벨도 백이고, 압도적인 강함이 느껴진다.
싸워도 못 이길 것 같다.
놈이 나와 고릴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나무인데, 설마 육식성인가?
이빨이 뾰족뾰족하다.
입 같은 것에선 침이 뚝뚝 떨어진다.
"우, 아아······!"
고릴라가 내 뒤에 숨어서 덜덜 떨었다.
나도 무섭다.
무서워!
하지만, 아기니까. 그리고 저지능이니까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에라 모르겠다.
*「지배의 왕관lv1을 사용합니다.」
*「'뿌리의 키메라lv100'를 지배하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잘 있어라 세상아.
왕관은 무슨 개뿔이.
*「'뿌리의 키메라lv100'를 길들이는 데에 일부 성공했습니다.」
뭐라고. 그럼 된 건가!
왕관 최고!
그때, 놈이 내 머리를 왁, 하고 깨물었다.
천뢰령을 발동할 뻔했다.
나는 미친 자제심을 발휘해 참았다.
"주, 죽었어······?"
고릴라가 비명을 질렀지만.
키메라는 나를 씹지 않았다.
대신 아주 살짝 물더니 혀로 나를 핥았다.
'?'
나를 지 엄마로 알기라도 하는 건가.
놈의 머리에는 나와 비슷한 모양의 왕관이 달려 있었다.
그 스킬까지 똑같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어쩌면 축제의 승리자인 나를 본떠 만든 키메라일지도 모른다.
특성에도 떡하니 '왕관'이 적혀 있었고.
나랑 달리 아주 못생겼지만······.
우드득-
놈의 목덜미에서 팔 같은 나무뿌리가 돋아나더니 나를 휘감았다.
마치 아이가 인형을 들듯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쥔 것이다.
손발이 없어야 진짜 뱀인데!
놈은 나를 움켜쥔 그대로 뿌리 위에서 뛰어내렸다.
콰아앙!
바닥에 깔려 있던 마물들이 마치 토마토처럼 터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놈 하나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마물 모두가 광기에 젖은 것 같다.
그중 누가 봐도 제일 미친 놈처럼 보이는 나무 뱀이 몸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전혀 뱀 같지 않게 포효했다.
"그-워어어어어어-!"
다른 마물들이 일제히 울부짖으며 호응했다.
키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마물들이 살아 있는 군체처럼 따랐다.
-이곳이, 몬스터 웨이브의 시작점이구나.
그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에게 인형처럼 꼭 붙들린 채.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나무 위의 고릴라를 봤다.
그녀는 몹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었다.
경례 자세였다.
'······좆됐다.'
아무래도 그런 것이 확실했다.
* * *
그리고.
그림자 숲에서 더 멀리.
이제는 고블린들이 사라진 팔라무 우림의 경계 부근에서.
군터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 곁에는 마탑의 마도사가 있었다.
마도사는 조금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오른손을 쥐어 원통을 만든 뒤, 그곳에 보물이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눈알을 가져다 댄 것이다.
영문 모를 짓을 시작한 지가 15분째.
마침내 마도사는 환히 웃었다.
"보인다, 보여!"
앞니가 빠진 탓에 바람이 새는 목소리로, 그가 군터에게 알렸다.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됐어! 이쪽으로 오는구먼!"
마도사는 패밀리어(familiar)를 통해 먼 지역의 상황을 살피고 있던 것이다.
군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
"고맙소."
그가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시작되었다. 다들 준비해라!"
< 트윈헤드 스네이크 등장 >
066. 트윈헤드 스네이크 등장
군터와 그의 기사단, 그리고 병사들이 원정을 떠나고 며칠 뒤.
그레이림에 남아 있던 철사자 기사단은 영지를 아예 봉쇄했다.
'초원'을 제외한다면 대륙에서 손꼽히는 크기의 평야를 가진 대수림이지만, 서쪽 변경은 암석지대와 산맥이 무척 험난했다.
그 험난한 지대가 깔때기처럼 좁아지고, 그 위에 비옥한 농토가 자리한 곳이 바로 그레이림이다.
즉, 마물의 무리가 대량으로 밀려 나올 경우 필연적으로 그레이림 령을 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위험한 곳에 영지가 지어진 이유는 달리 없었다.
애초에 처음 개척되었을 때부터 요새도시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대수림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될 경우 첫 번째로 무너져야 하는 첨탑처럼.
때문에 영지 그레이림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소'였다'.
시작은 그러했지만 몬스터 웨이브가 실제로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성벽만 있다뿐이지 그레이림은 점차 평범한 영지로 남았다.
조금 가난하고, 조금 순수한 사람들이 사는.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노인과 기사, 병사 조금밖에 남지 않아 유령마을처럼 허전해진 이곳.
원래도 분위기가 스산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동이 트기도 전의 새벽, 마차 한 대가 성문을 열고 나갔다.
그 마차에 영주의 딸인 라니아 그레임이 타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새벽의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것은 군터의 기사나 병사가 아니었다.
원래 그레이림에 거주하던 영지민, 그것도 폭삭 늙은 노인네였다.
가족이 영지를 떠나자 자처해서 영지병 노릇을 하던 이였다.
종종 기사들에게 감자를 구워 나눠 주기도 했던 노인이 성문을 조용히 열어 라니아를 내보내 줬다.
기사 자인이 노인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죽을 각오는 했겠지."
자인은 칼을 뽑아 들었다.
당장이라도 즉결 처형을 할 기세였지만, 노인의 눈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이 늙은 목숨 며칠 더 이어 가 봤자 무슨 영화가 있겠습니까······."
"칼이 들어가는 동안에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보지."
자인이 노인의 목에 칼을 겨눴다.
칼날이 피부를 살짝 파고들자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노인은 뭐라고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경험 많은 노인은 자인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았다.
자인의 입술이 아주 살짝 달싹였다.
'빨리 무릎 꿇고 빌어라.'
입 모양으로 전한 충고였다.
자인의 뒤에는 그의 선배 기사들이 있었다.
자인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임무를 방기한 노인의 목을 지체 없이 베었을 것이다.
노인은 용서를 빌지 않았고, 자인도 차마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자인, 잠깐 내려놔 봐. 어이 노인."
선배 기사가 심드렁하게 끼어들었다.
"마차가 북서쪽으로 간 거지?"
"······."
"확인차 물어본 거야. 이미 진술 다 확보했어."
그러더니 기사는 또 다른 동료기사와 숙덕거렸다.
"그러면 아킨즈로우 협곡인가?"
"그래, 제라드 후작한테 가나 본데."
"거참 난감하긴 한데······."
자인은 선배들의 눈치를 봤다.
선배들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분노하거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운도 없는 녀석들이군. 단장께서는 이것도 예상했으려나."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리 중얼거리기도 했다.
자인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이 노인은 감옥에 처넣고 더 심문해 보겠습니다."
"엉? 그래, 그렇게 해라."
노인의 죽음은 당분간 유예될 것이다.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추적, 해야겠지?"
'나한테 물어보는 건가.' 자인은 순간 그리 생각했다.
"······추적대를 꾸릴까요? 아킨즈로우 협곡으로."
"그래, 그래야겠지.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선배님도 가실 겁니까?"
"아니 네가 가라. 우리는 이 자리를 지켜야 해."
자인이 판단하기에 라니아의 탈출은 큰 일이었다.
특히 그녀가 서남쪽을 향했으며, 그쪽이 라니아의 외가인 제라드 후작이 지배하고 있는 영토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하지만 어째선지 선배들은 침착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심드렁하기까지 한 눈치다.
"병사 몇을 데려가. 마차 정도야 금방 따라잡을 수 있겠지. 협곡에서는 마차로 달릴 수도 없을 테니."
그러나 내려지는 명령은 확실했다.
"사로잡는 게 여의치 않다면 죽여도 좋다."
선배가 자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혹시나 위험하다 싶으면 너라도 살아라. 얼른 내빼고. 가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자인은 경례했다.
찜찜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 * *
화르륵!
대수림 한가운데 거대한 불길이 번졌다.
다행히, 요 며칠은 비가 오지 않았다.
기름과 마도사의 도움 덕택에 화재는 적절하게 통제되었다.
꼭 하늘이 왕국을 돕는 듯했다.
"잘 타네."
병사들이 도끼를 들고 불길을 관람했다.
칼이나 활을 쓸 줄 알았는데, 가장 많이 쓴 것은 도끼였다.
나무를 베고 쌓아서 화재를 조절하는 목적이었다.
그 탓에 불길은 사방으로 확산되는 대신 일직선으로 그어졌다.
불꽃의 방벽이 완성된 것이었다.
가장 짧은 불꽃 방벽이 1km를 넘었다.
"마도사가 대단하긴 해······. 불꽃이 저리 좋을까."
"쉿."
병사 한 명이 손가락을 들어 입을 가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수염이 그슬릴 정도로 불길 가까이 서 있는 노인이 있었다.
이스헨이라는 이름의 염화술사였다. 마탑에서도 염화술로는 손꼽히는 마스터.
그가 불꽃을 조종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사상 최대의 화재를 만들었다.
게다가 불꽃이 좌우로 번지지 않고 장벽처럼 길게 늘어지기만 했다.
"물러나! 다 했으면 물러나, 뒤지기 싫으면!"
십인장들이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그 말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곳에 있는 병사들이 용맹하든 어떻든 몬스터 웨이브에 한번 휩쓸리면 끝이니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불꽃의 방벽이 웨이브의 방향을 바꾸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
영웅, 군터 프리한센.
그를 중심으로 옆에 선 두 명의 마도사.
그리고 기사들이 불꽃이 없는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마스터 알칸두라, 관측됩니까?"
앞니 없는 마도사는 여전히 손으로 원통을 만들어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고 있어, 오고 있구먼. 흐흐, 내 살다 살다 몬스터웨이브를 코앞에서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다니."
"거리는?"
"2km 정도. 엄청나게 빠르군. 진형이 좁고 길어졌어. 이스헨이 잘해 줬구먼."
군터의 첫 번째 목표는 몬스터웨이브의 모양을 다듬는 것이었다.
사방으로 산개한 둥근 모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어떤 방벽을 만든다고 해도 서로 밀치며 부수고 넘어갈 것이다.
몬스터웨이브가 뿌리는 광기는 주변의 마물들까지 끌어 들여 점점 덩치를 불려 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방향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좁고 길게 늘어지는 대형으로 만들어야 한다.
마치 뱀이 기어 가는 것처럼.
"마스터 데자카. 대마법은 준비되고 있습니까?"
"내가 정치는 잘 모르지만 말이야."
잘생긴 노인 마도사가 군터에게 물었다.
"몬스터 웨이브를 놔둘 수 없는 것은 알아. 수도까지 직행하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몬스터 웨이브의 징조를 알아챈 것은 마탑이었다.
보고를 들었던 국왕은 당연히 대경실색했고.
천민 출신이기에 귀족파가 아니라 왕실파였던 영웅 군터에게 밀명을 내렸다.
결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밀명을.
병사들조차 마물들을 토벌하는 작전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에 깊게 참여한 마탑의 마도사들마저 내막을 모를 수는 없었다.
"웨이브를 틀어서 제국으로 보내 버리면, 전쟁이 나는 것 아닌가? 그 경로에 있는 영지들도 박살 날 테고 말이야."
군터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당신들이 그 뒷감당을 걱정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냉담하기는. 클클."
어찌 되었든, 몬스터 웨이브를 이 정도 병력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이번 웨이브의 규모는 엄청날 테니.
"좋은 소식을 알려 주지."
마스터 알칸두라가 말했다.
"우두머리가 그리 강해 보이진 않아. 웨이브의 규모에 비한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군. 저게 뱀인지 트렌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길 것 같은데. 히히."
마도사가 웃었다.
"여기서 우두머리를 죽여 볼까?"
그렇다고 이미 시작된 웨이브가 멈출 리는 없겠지만, 기세는 분명 약해질 것이다.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드드드드드-
땅이 뒤흔들렸다.
계획대로라면, 몬스터 웨이브는 군터와 마도사의 앞을 지나칠 터.
"마물들이 보입니다, 단장!"
"말하지 않아도 안다. 효시를 쏴."
군터 옆의 기사가 하늘로 화살을 쐈다.
삐이이이익!
화살촉에 뚫어 둔 구멍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게다가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는지, 초저녁의 하늘에 새빨간 궤적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 효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삐이익-
삐이-
마치 봉화를 피우듯, 하늘에 순차적으로 붉은 선이 쏘아진다.
"데자카! 시작하자!"
알칸두라가 동료 마도사에게 뛰어갔다.
행동거지가 방정맞기 그지없지만, 그들이 지금 시전하려는 마법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이스헨도 여기 왔다!"
염화술사 역시 달려왔다.
미리 주변의 풀을 뽑고 땅을 다져 깨끗하게 만들어 두었다.
그 위에 흰 자갈로 거대한 마법진까지 그려 두었다.
마법진의 한가운데에는 흰 소의 머리가 잘려 있었고, 그 이마 위에 마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무려 10등급 마석이다.
무영창 마법을 자연스럽게 쓰는 마도사들이지만 대마법에는 주문을 외는 것이 필요했다.
"나 알칸두라, 데 마지카."
"나는 이스헨, 데 마지카요."
"데자카 데 마지카!"
땅의 진동이 더욱 거세지고 달려오는 마물들이 시야에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도사들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들이 계속 룬어를 중얼거리자.
화륵!
흰 소의 머리가 저절로 불타올랐다.
불에 타지 않는 마석조차 불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강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이 마법진에 의해 증폭된다.
증폭된 마력이 마도사들에게 전달되었다가 다시 방출되면서 공명하듯 크기를 불렸다.
외부 개입에 대한 안정성을 포기하고 그 위력만 극대화시킨 마법이었다.
염화술사 이스헨이 그 대마법에 방점을 찍었다.
"드라코- 플람메. 이그니트!"
마법진에서 불꽃으로 이루어진 용이 솟아올랐다.
그 열기가 어마어마해서, 마치 빛의 덩어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가라앗!"
염룡의 대마법.
그것이 몰려오는 마물들을 향해 쏘아졌다.
군터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용,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마물들.
나무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 그리고 그 뱀의 목에 돋아나있는······ 작은 흰 뱀.
* * *
'일단 얌전히 있다가. 상황을 봐서 이 나무 키메라로부터 도망치자.'
그것이 내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결국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사아악'이 아니라 '그워어' 하고 우는 이 가짜 뱀은 나를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나를 움켜쥐었던 나무줄기가 점차 놈의 몸으로 가까워지는 것 아니던가.
그렇게 나는 놈과 하나가 되었다.
다른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였다.
몸의 절반이 놈의 나무 몸에 파묻혀 버렸다.
'길들이기'가 일부 성공했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그 이후에도 몇 번 탈출시도를 했다.
진짜 안간힘을 다해서 마물들 틈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성공인가! 라고 생각할 때마다 나무줄기가 확 튀어나와서 나를 다시 끌어당겼다.
그 이후로는 이렇게 머리만 볼록 나오게 되었다.
꼭 머리가 두 개 달린 트윈헤드 스네이크 같다.
머리 하나가 비정상 적으로 작고, 그게 나라는게 문제였지만.
키메라는 화가 났는지 그 화풀이를 주변 마물에게 했다.
다른 마물들은 별다른 반항 없이 곧이곧대로 잡아먹혔고, 키메라는 더욱 덩치를 불렸다.
무시무시한 키메라였다.
-최악의 키메라다. 형편없는 만듦새야.
하지만 자칭타칭 키메라 전문가인 펠레리안의 눈에는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세계수가 키메라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한 그였지만, 키메라의 상태는 제대로 되지 못했다.
나를 본떠 만들었는지 뱀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외관뿐이다.
항문을 비롯한 신체의 중요기관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듯했다.
-똥구멍도 없이 급조한 키메라라니······. 세계수가······.
──────────────
[상태]
[광기], [허기], [시한부]
──────────────
게다가 시한부라는 상태가 떡하니 적혀 있기도 했다.
'그냥 택시 탔다고 생각하게요.'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중앙대륙을 향해 가야 하긴 하지.
펠레리안은 지금 상황을 조금 기뻐하는 듯했다.
그는 내가 자신의 다른 던전들을 찾아가기를 바랐다.
특히 자신의 시신이 남아 있을 한 던전에 꼭 가 보고 싶어 했다.
그곳은 대수림에 없으니, 이대로 몬스터 웨이브에 휩쓸려 대륙까지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지.
생각보다 갑작스러운 흐름이지만 말이다.
나나루크는 무사하려나.
그녀는 아직 대수림에 있을까?
그렇다면 이 몬스터 웨이브에 휩쓸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또 불꽃이다.
마물들이 또 한 번 진로를 바꿨다.
곳곳에 화재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쩐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삐이이익-
하늘에 효시가 쏘아진 것이 그 순간이었다.
저 앞에서 무언가 불길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기도 불이 난 건가 싶었는데.
'어, 어어!'
불꽃으로 이루어진 용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정확히 나, 아니 키메라 뱀을 향해서였다.
'타 죽는다!'
키메라 뱀은 몰라도 나는 확실히 죽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탈출을 시도하려는데.
-드라코 플람메다, 대마법이야.
펠레리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 지식자랑이라도 할 생각인가.
-왜 저따구로 연성했지? 정신 빠진 놈들이군. 어이 뱀, 물을 뒤집어써라.
'물이요?'
-그래 물 마법!
버럭 소리를 지르는 펠레리안 선생님.
역천의 마도사인 그를 이번만 믿어 보기로 했다.
*「초급원소마법:물lv2를 사용합니다.」
진화한 뒤로 마력이 제법 늘었다.
나만 아니라 키메라 뱀까지 흠뻑 젖을 만큼의 물을 뿌릴 수 있었다.
"그워어!"
키메라 뱀이 기분 좋은 듯 포효했다. 나무라 물을 좋아하나 보지?
'이, 이걸로 저 마법을 막을 수 있어요?'
-미쳤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면요!'
-저 위에 불덩이를 만들어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을 거리로. 그래, 저 나무의 열매 높이쯤.
가타부타 따질 여유가 없었다.
*「초급원소마법:불lv4를 사용합니다.」
사람 머리통만 한 불꽃을 허공에 만들어 냈다.
그사이 염룡(炎龍)이 가까워졌다.
키메라 뱀은 두려움도 모르는지 계속 달렸다.
살아 있는 진짜 용처럼, 염룡이 입을 쩌억 벌렸다.
그리고 내게 덮쳐들어 뱀 통구이로 만들어 버리는 대신.
화륵-
머리를 휙 꺾어서 내가 허공에 만들어 낸 불꽃을 삼켰다.
그리고 우리를 뒤따르던 마물의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뒤에서 열풍이 몰아쳤다.
뜨끈한 게 뒤통수가 조금 익은 것 같았다.
내 열 내성의 레벨이 이미 10이고 직격타가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비늘이 곤두서는 일이다.
몸에 뒤집어썼던 물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감사를 표해도 좋다.
으쓱거리는 펠레리안에게 나는 칭찬세례를 퍼부어 줬다.
수십 마리의 마물이 통구이가 되었건만,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마법을 쓴 것으로 보이는 노인네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 명의 노인들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서로 투닥거리고 있다.
"이스헨 이 모자란 새끼야!! 그것 하나 못 맞추냐."
"니미럴, 네가 해 보든지!"
마법을 못 맞춘 것으로 서로 싸우고 있는 듯하다.
대마법을 쓰길래 대단한 놈들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생각보다 쭉정이 마법사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기사를 본 순간.
차르르륵-
비늘이 곤두섰다.
*「흑린lv2를 사용합니다.」
일순간 그 색이 시커멓게 변했음은 물론이었다.
'군터다!'
군터.
메두사맘을 죽였으며.
내게 창을 던졌던 인간 영웅.
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니까 마법사를 데려온 것도 저놈 같았다.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냥 그렇게 휙 떠나 버린 무정한 아버지.
하지만 미쳐 날뛰는 마물들을 보고 있자니, 아버지가 떠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이곳에 있었다면.
아내의 원수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군터.
순간. 기회가 찾아왔음을 눈치챘다.
그대로 꿰뚫려 죽어라 군터.
파괴광선, 발사.
*「'광선'lv1을 사용합니다.」
내 입에서 광선이 쏘아졌다.
티잉!
놀랍게도 군터는 팔을 들어 막았다.
광선은 팔을 감싼 갑옷에 맞아 허무하게도 흩어졌다.
군터가 그 악명높은 도끼 창을 뽑아 들었다.
'좆됐다!'
후회가 와락 치밀어 오른 순간.
"구어어어!"
이쪽을 향한 적의를 느낀 걸까.
키메라 뱀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놈의 몸에서 쏘아진 줄기가 군터를 강타했다.
잘한다!
< 아저씨 아니야, 너랑 거의 비슷하게 태어났어. >
067.
아마도 세계수가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키메라.
그렇기 때문일까.
놈은 확실히 범상찮았다.
──────────────
[뿌리의 키메라lv100+++]
[특성]
[광기], [포악함], [우두머리], [저지능], [아기], [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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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은 100에서 오르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100이었으니 그렇게 고정된 걸까.
하지만 '아기'는 '아기'였는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컸다.
원래는 황소만 하던 녀석이었는데 마물 몇 마리 잡아먹더니 리옥크보다 커졌다.
거대화한 아버지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거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나를 모방해서 만든 키메라이기 때문일까.
혹은 '저지능'에 '아기'이기 때문일까.
상태창이 수월히 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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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물어뜯기lv20], [포효lv10], [몸통 박치기lv10], [가지뻗기lv20], [빠르게 기기]······
[상태]
[광기], [시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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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봐도 그리 고등해 보이지는 않은 스킬들을 고레벨로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어느 정도 강한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세기는 오지게 셀 것 같은데, 그 정도가 어떻게 될까.
몰려든 마물 중에서는 아킴스나 리옥크에게 밀리지 않을 것 같은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키메라와 대적하지 않고 그저 함께 뒤따랐다.
거리를 조금 두고 있으니 저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아마 이 키메라도 그들과 비슷하게 강할 것 같다.
그리고 내 생각에, 비슷하게 강한 정도로는 군터를 이길 수 없으리라.
메두사맘이 한 방에 삼도천을 건넌 것을 봐서 안다.
정작 화나서 군터에게 광선을 날린 것은 분명 나였지만 조금 무섭다.
서걱!
군터가 도끼창을 휘둘러 키메라 뱀이 쏘아 낸 줄기들을 단숨에 잘라 버렸다.
키메라 뱀은 용맹했다.
줄기를 쏘아 냄과 동시에 군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 조심해!'
놈은 군터를 한입에 삼키려 했다.
콰앙!
그러나 군터는 훌쩍 뛰어올라 피했다.
만약 키메라가 평범한 뱀이었다면 효과적인 회피였을 것이다.
하지만 키메라의 몸은 나무로 이뤄져 있었다.
몸에서 또 한 번 가지가 뻗어 나가 군터에게 쇄도했다.
쐐애액-
이번에는 군터도 가지를 전부 잘라 내지 못했다.
몇 개의 가지가 군터의 갑옷을 꿰뚫고자 했다.
터터터터텅!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군터는 휘익 튕겨 나갔다.
날아가는 중에도 허공에서 자세를 잡고는, 바닥에 깊은 고랑을 남기며 착지했다.
단단해 보이는 판금 갑옷에 우그러진 자국이 선명하다.
어라, 해볼 만할 것 같기도 하다.
'가라 키뱀아!'
키메라 뱀과 나의 관계는 묘했다.
분명 나는 놈을 지배하는 데에 실패했다.
내가 명령을 해도 듣지 않는다.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마물들이 내게 으르렁대면 가만두지 않는다.
내 탈출을 용납하지 않기도 했다.
아무튼.
놈은 군터에게 달려들었다.
군터 곁의 기사들이 합세하려고 했지만.
"오지 마라!"
군터는 그것을 막았다.
놈은 겁도 없이 우리를 향해 마주 달려왔다.
그러곤 휙 뛰어들더니, 큼직한 팔로 도끼창을 휘두른다.
그 자세를 알아봤다.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단 한 방에 메두사맘의 목을 잘라 버린 그 일격이다.
한때 엿보았던 군터의 상태창을 참고한다면.
'단월참'. 아마 그 스킬일지도 모른다.
'키뱀아 도망쳐엇!'
-거참 되게 왔다 갔다 하는구나!
키메라 뱀은 도망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도망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키메라 뱀과 나의 목이 동시에 잘릴 위기.
하지만, 일순간.
키메라 뱀의 목덜미에서 수백 개의 가지가 뻗어 나와 앞을 가렸다.
콰드드드드득!
군터의 도끼창은 그 모든 가지를 갈랐다.
그리고 키메라 뱀의 안면부에 콱 박혀 들었다.
하지만 군터는 자신의 스킬에 반응할 것이라 상상도 못 했는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평범한 마물이었다면 즉사했겠지만.
몸이 나무로 되어 있는 키메라 뱀은 달랐다.
죽지 않고 군터를 덮쳤다.
콰아앙!
흙먼지가 치솟았다.
군터는 회수한 도끼창을 휘두르며 쇄도하는 가지를 쳐냈다.
그리고 나는.
*「광선lv1을 사용합니다.」
시의적절하게 광선을 쏘며 군터를 괴롭혔다.
그리고 곧,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광선을 쏠 때마다 키메라 뱀이 그쪽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푱, 콰앙!
푱, 콰앙!
그것을 알아채고 난 뒤로는 광선의 방향을 시의적절하게 조절했다.
그러니까. 군터로부터 멀어지도록 다시 마물 무리 쪽으로 방향을 유도한 것이다.
아무리 봐도 못 이길 것 같았으니까.
콰앙!
키메라 뱀은 어느 순간부터 군터와 싸우던 것도 잊어버리고 광선을 쫓았다.
지가 고양이인 줄 아나.
레이저포인터로 고양이를 놀아 주는 기분이다.
군터는 덮쳐들지 않고 도끼창을 빼 들고 서 있었다.
그가 혼자가 아니듯, 이쪽도 혼자가 아니다.
우두머리인 키메라 뱀이 한눈을 팔아서 그런지, 마물 무리가 군터에게 달려들었다.
저 괴물 같은 인간이 맛좋은 먹잇감으로라도 보이는 것일까.
군터가 온갖 마물에게 뒤덮이려던 순간.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떠올랐다.
'저, 저거······!'
내가 몰라볼리 없었다.
천뢰령이다.
그것도 내가 빌린 레벨 1짜리 천뢰령이 아니라, 진짜 천뢰령.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쩌저저저정!
일순간이지만 몬스터 웨이브마저 멈출 벼락이었다.
나와는 출력부터가 달랐다.
자기 자신에게 벼락이 떨어지는 스킬의 특성상, 저 정도 출력이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
마물이 아니라 인간이니 더 버티기 힘들 텐데.
하지만 군터는 멀쩡했다.
그는 한 손으로 그 긴 도끼창을 치켜들고 있었다.
벼락은 그 도끼창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건틀릿을 통해 군터를 감전시키는 대신, 그 도끼창 안에서만 푸르게 맴도는 듯했다.
-역시, 저리 쓰는 기술이었군.
'아오 장비빨.'
건틀릿 덕택일까.
그렇다면 나도 절연 장갑 같은 것을 꼬리에 껴야 천뢰령을 제대로 쓸 수 있을 듯하다.
비록 레벨 1짜리긴 하지만.
그리고 군터의 도끼창에서 오러가 치솟았다.
벼락을 닮아 푸르게 빛나는 오러가.
자신을 덮치는 마물을 향해 그것을 휘두르니.
쩌저저정!
그 푸른 벼락이 오러와 뒤섞여 마물들을 불태웠다.
한 방에 몇 마리나 죽인 거지?
최소, 스물, 아니 서른 마리는 일격에 참한 것 같다.
"물러나라, 대형을 유지해."
군터는 침착하게도 수하들을 관리했다.
음.
역시.
*「광선lv1을 사용합니다.」
푱-
나는 키메라를 광선으로 유인했다.
다시 달리는 마물들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도망쳐어!'
슬쩍 돌아보니 군터와 기사들이 쫓아올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마법사로 보이는 늙은이들이 호들갑이었다.
"그려, 빨리 그려 놔!"
"대단한 마물이다! 머리가 두 개 달린 뱀 키메라라니."
머리 두 개 중 하나는 나를 말하는 건가?
그들은 종이를 꺼내 들고는 나와 키메라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다 그렸어! 솜씨 좀 보라고."
"이야. 학계에 발표할 만한 놈이구만. 하나 건졌어."
"근데 트윈헤드 마물의 머리가 하나만 이리 작은 경우가 있나. 혹시 종양 같은 거 아니야?"
종양이라니.
그리고 그 순간, 군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다음에 보면 가만두지 않겠다, 군터.'
-앞에서 좀 그리 말하지 그러냐.
'제가 뱀이라 말을 못 해서.'
다음에 만날 그날이 군터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 * *
"괜찮으십니까, 단장님!"
"괜찮다."
부하들의 염려에 군터가 손을 저었다.
그 멀쩡한 모습에 기사들이 감탄했다.
"생긴 건 그리 안 세 보였는데, 단월참을 버티는 마물은 오랜만에 봤습니다."
"이곳에서 처치했으면 웨이브의 기세가 많이 약해졌을 텐데, 아쉽군."
"아직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 기회를 잡으려면 움직여야지. 다들 물러난다."
기사들이 얼른 채비를 했다.
몬스터 웨이브의 경로를 조정한다는 초유의 작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할 일이 많았다.
기사들이 얼른 채비를 시작하고.
움직이려던 군터는 뜨끔 하는 통증을 느꼈다.
속에서 피가 올라오는 것을 꿀꺽 삼켰다.
내상을 조금 입은 듯하다.
생각보다도 강인한 마물이었다.
게다가 그 작은 뱀.
새카맣게 빛나던 두 번째 머리는 군터에게 분명 적의를 보였다.
그런 마물은 본 적이 없는데.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마스터 알칸두라, 마스터 이스헨, 마스터 데자카."
"혀 꼬이시겠구먼."
"처리를 부탁합니다."
"걱정 말게."
마물들이 접근을 꺼리는 향을 뿌려 두고.
여러 마법적 트랩을 곳곳에 깔아 두었다.
마지막으로 마도사 알칸두라가 말뚝 비슷한 것을 땅에 쾅쾅 박았다.
"음, 이 정도면 되겠지."
"빨리 가자고 알칸두라."
"잠깐, 나 혼자서 말 못 타는 거 알잖어."
알칸두라는 데자카의 도움을 받아서야 끙끙거리며 말에 올라탔다.
그들도 얼른 군터와 기사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마물들을 마주해서였을까.
잘 훈련된 군마임에도 불구하고 말의 숨은 거칠었다.
"진정해라, 진정해."
데자카가 말을 진정시키려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또 한 번 폭음이 울렸다.
꽈과과광!
"어우, 말, 말! 고삐 잡아!"
"제기랄, 깜짝 놀랐네."
데자카가 투덜댔다.
"뭐야. 트랩 잘못 설치한 거 아니야?"
"나를 뭘로 알고. 당연히 제대로 설치했지."
"그런데 벌써 작동하나?"
"걱정 마. 저절로 충전되게 만들었으니까."
"그럼 됐구."
운 나쁘게 길을 이탈한 마물이 타죽었으리라.
그 굉음과 마물의 시체들이 점차 방벽 역할을 할 것이고.
* * *
그림자 숲에 남겨진 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니까.
흰 뱀이 진화를 위해 흰 고치에 들어가 있을 때.
숲을 지키던 방벽이 사라지고, 세계수의 나무뿌리가 썩으며 달큰한 향기를 풍길 때.
그리하여 바깥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던 마물들이 밀려 왔을 때.
흰 뱀이 이끌던 무리는 어찌 되었는가.
현명한 고릴라에 의해 그들은 도망칠 수 있었다.
마물들의 이성을 잃게 하는 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괜찮았다.
지능이 높아서 견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을 길들인 뱀이 건재했기 때문일 공산이 컸다.
다행히 그들은 숲으로 도망쳤다.
흰 뱀의 아비는 진작 떠났고, 헤일릿 랑그레이 역시 목적을 이루고 떠났다.
숨어서 이 과정을 지켜보던 노움 한 명도 떠났다.
그를 노예처럼 부리던 데쉬난의 죽음 역시 확실해진 바였다.
다만 큰 불행을 겪은 마물들이 있었다.
크림슨 티스 대왕지네.
이제는 진화를 앞두고 있는 마물 하나.
그리고 그녀가 업고 다니는 아기들.
그녀는 종래까지 흰 뱀에게 길들여지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였다기보다는, 그럴 수 없었다는 설명이 적절할 것이다.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했으므로.
모든 상황이 끝났으니 앞으로는 흰 뱀과 같이 지내면 좋을 듯싶었다.
흰 뱀 역시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흰 뱀이 자못 마음에 들었으니.
특히 아비를 잃은 아이들이 흰 뱀을 잘 따랐다.
비록 종은 다를지언정 가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했다.
*「공기 중의 마성 농도가 높아집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뿌리들이 썩어갑니다.」
*「썩은 뿌리에서 부취가 풍깁니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지지 않아서였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대왕지네는 이미 마물들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본능에 이끌려, 향에 취해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께께."
"께에에!"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아이들 때문이었다.
왕눈이와 대갈이가 그녀의 더듬이를 잘근잘근 씹어 깨운 것이다.
그리고 어미는 깨달았다.
자식이 둘뿐이었다.
혼자 희게 물들어 언제나 걱정거리였던 딸, 꾸벅이가 없었다.
"께엑!"
화들짝 놀란 대왕지네가 다급히 꾸벅이를 찾았다.
보이지 않는다.
허겁지겁하며 주변을 다 뒤져 봐도 없었다.
그리고 마물들의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의 군체처럼, 대수림 바깥을 향해서.
"께게, 께에에?"
"께!"
대갈이에게 꾸벅이의 행방을 물으니, 저쪽이라며 독발톱을 캉캉대며 알려 줬다.
대왕지네는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다급해진 어미에게는 이제 마물을 홀리는 향기도 통하지 않았다.
세계수시여, 제발 딸을 지켜 주시길.
꾸벅이가 죽지 않았기를.
아아, 흰 뱀이 이 상황을 알면 얼마나 놀랄까.
무척 화를 낼 게 틀림없다.
왕눈이도 한 번 잃어버려 놓고 또 애를 놓쳤냐고.
이 다급한 상황에서 대왕지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꾸벅이 걱정에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미친 듯이 꾸벅이를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천만다행으로.
혹은 그녀의 기도가 통했는지.
꾸벅이는 죽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
꾸벅이는 한쪽 방향으로 향하는 마물들의 틈에 떨어져, 영문도 모르고 함께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꾸워어어."
"크르릉-!"
각종 마물들이 뒤섞여 있었다.
사자 비슷한 것도 있었고, 코끼리 비슷한 것도 있었다.
기린처럼 생긴 거대한 마물도 있다.
그들의 발굽이 꾸벅이의 지척에 떨어졌다.
쿠웅!
"께엣!"
꾸벅이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두려웠다.
어머니의 품에서 툭 떨어졌을 뿐인데 금세 어머니를 잃어버렸다.
두리번 대던 꾸벅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저 멀리 있는 흰 뱀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흰 뱀은 큰 나무 뱀과 함께 있었다.
모든 마물들이 흰 뱀을 따라갔다.
꾸벅이가 할 수 있는 것도 흰 뱀을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께에에!"
목놓아 흰 뱀을 불렀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어머니도, 흰 뱀도 꾸벅이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 같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꾸벅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계속 달렸다.
달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러면 곧장 뒤따라 오는 마물들에게 깔려 죽거나 잡아먹힐 것 같다.
이러다가 지쳐 죽을 듯해서 몇 번이나 옆으로 빠지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앞에 불길이 확 치솟고 마물들이 더 몰려왔다.
꾸벅이가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흰 뱀을 따라잡지도 못했다.
점점 멀어져만 가던 흰 뱀 아저씨는 이제 시야에 잡히지도 않았다.
"께에······."
마침내 어린 흰 지네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이었다.
쩌저저정!
저 앞에서 벼락이 쳤다!
그 벼락을 어떻게 몰라볼 수 있겠는가.
흰 뱀 아저씨가 고기를 구워 줄 때 치던 그 벼락이었다.
꾸벅이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했다.
다리가 끊어질 듯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벼락이 친 그곳에 도착했을 때, 꾸벅이는 간신히 마물들의 군세에서 이탈하는 데에 성공했다.
"······께에?"
하지만 흰 뱀은 그곳에도 없었다.
다만, 거친 싸움의 흔적과 흰 뱀의 것으로 보이는 비늘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타닥타닥 불타고 있는 노움의 시체 한 구.
노움은 화려한 도구며 장비 같은 것을 잔뜩 걸치고 있었다.
배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어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표정은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다. 설마 자신이 여기서 죽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듯.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 노움이 유독 시선을 끄는 이유가 있었다.
몸이 절반만 남아 있다.
신기하게도, 하반신과 몸의 오른팔이 없었다.
잘린 것은 아니었다. 피도, 내장도 없었으니까. 냉동 고기를 자른 듯한 깔끔한 단면만 남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노움의 몸을 뒤적거리던 꾸벅이는 그 이유를 알아챘다.
망토였다.
보이지는 않는데, 분명 망토 같은 것이 노움의 오른팔과 하반신에 덮여 있던 것이다.
그것을 독발톱으로 물어서 뜯었다.
"께!"
이건, 틀림없는 마법 도구다.
뱀 아저씨가 끼고 있던 반지랑 비슷한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꾸벅이의 몸 중 망토로 가린 부분이 투명해졌다.
꾸벅이는 안간힘을 써서 망토를 뒤집어쓰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자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께께께께."
이것만 있으면 더 이상 마물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나 흰 뱀도 곧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사냥도 할 수 있겠지.
데쉬난의 망토 이외에도 여러 마도구가 노움의 몸에 남아 있었지만 꾸벅이가 그것까지 신경 쓰지는 못했다.
곧, 불이 번져 노움의 몸에도 붙어 버렸다.
투명해진 꾸벅이가 숲속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흰 침묵.
혹은 암살공(暗殺公)으로 불리는 전설의 시작은.
이렇듯 작은 불운과 행운의 조화로 이루어졌더랬다.
< 패왕이라니 너무 부럽다. >
068.
"히랴!"
자인이 달리는 말을 재촉했다.
군마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속도를 높였다.
그의 뒤에는 잘 훈련된 병사 둘이 뒤따르고 있었다.
말 타는 솜씨가 뛰어난 기병들이다.
저 앞에 있는 마차를 쫓고 있는 것이다.
새벽에 출발했던 마차는 기어이 아킨즈로우 협곡 가까이 도달했다.
"협곡 위의 험로로 가는 것 같습니다!"
다만 마차는 협곡 아래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기사, 협곡 아래로 향한다면 자인과 병사들에게 곧바로 따라잡힐 것이 분명했다.
"미쳤군. 죽고 싶은 건가."
그러나 협곡의 가장자리로 달리는 험로 또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인이 눈썹을 찡그렸다.
'올리버, 그 작자인가.'
그 사냥꾼의 발상이 분명했다.
이두 마차로 추격을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훨씬 일찍 출발한 저들을 거의 따라잡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올리버도 승부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때였다.
자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마차의 창문으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알아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쓸데없이 마물에 대해 호기심이 많던 소녀.
귀족 영애로서 어울리지 않게 영웅이나 사냥꾼이 되고 싶다고 하던 발랄한 꼬마애였다.
라니아가 머리를 내밀고 뒤따라 오는 자인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자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옆에서 달리던 기병이 석궁을 겨눴다.
자인은 가까스로 기병의 어깨를 쳤다.
티잉!
날아간 볼트는 라니아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가 라니아를 마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자인은 격노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아, 아니······."
기병은 오히려 당황한 눈치였다.
"기사님들이 여의치 않으면 사살하라고······."
"······."
지금이 그렇게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냐고 쏘아붙이려다 참았다.
"죽일지 사로잡을지는 내가 판단한다."
자인은 마차를 노려봤다.
"길이 좁아지기 전에 마차를 멈춘다. 난 좌측, 너희는 우측으로 가라."
그들은 다시 한번 말을 가속했다.
말의 입에 흰 거품이 흘렀다. 이렇게 격하게 달리다가는 말과 기수 모두 위험하다.
하지만 지금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
기어코 자인과 기병들은 마차를 따라잡았다.
"어엇!"
마부가 황급히 마차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그것을 피하려던 병사 하나가 결국 낙마했다.
하지만 나머지 병사 하나가 기어코 마부석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마부와 드잡이질하는 사이, 자인도 마차로 도약했다.
간신히 매달려 마차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오히려 안에 있던 누군가가 마차 문을 걷어차 열었다.
자인은 달리는 마차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문을 붙잡아서 살았다.
그리고 그 마차의 창문 틈 사이로 칼 한 자루가 쑥 튀어나왔다.
고개를 돌려 피했다.
하지만 볼이 확 찢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큭······!"
자인 역시 훈련받은 기사다.
그는 놀랍도록 재빠른 몸짓으로 마차 위로 올라갔다.
칼을 내밀었던 자 역시 바람처럼 쾌속하게 마차 위로 올라왔다.
역시, 그는 올리버였다.
"기사 나리, 무덤 자리를 찾으러 오셨나? 아킨즈로우 협곡에 떨어졌다가는 들개들한테 뜯어먹혀 시신도 못 찾을 텐데."
"라니아 아가씨를 내놔라, 사냥꾼."
올리버와 자인은 함께 라니아를 돌봤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에게 칼을 겨눴다.
자인이 눈을 빛냈다.
사냥꾼이 마물 사냥의 전문가라고 해도 감히 기사를 상대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올리버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꺼지라는 말은 안 하겠다. 어차피 듣지도 않을 테니."
올리버가 웃었다.
자인은 어쩐지 눈앞의 사냥꾼을 얕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시작부터 검에 오러를 덧씌웠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올리버가 품에서 손을 꺼내는 동시.
다섯 자루의 단검이 폭사되었다.
티티팅!
세 자루는 검으로 튕겨 냈다.
두 자루는 갑옷으로 받아 냈다.
단검에 담긴 힘이 묵직하다.
단검을 흩뿌린 올리버는 허리춤에서 그보다 조금 더 큰 소검을 꺼냈다.
카카가가강!
장검과 소검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러나 올리버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그의 소검에는 찬란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저 또한 분명 오러였다.
자인의 눈이 커졌다.
"당신 같은 실력자가······ 왜 변방에서 사냥꾼 노릇을?"
한 수의 교환이었지만 올리버의 실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실력자? 기사 나리가 나를 너무 고평가하는구만. 아니면 자기 자신을 고평가한 건지."
"이······."
자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올리버가 발을 쭉 앞으로 뻗었다.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다.
그의 신발 끝에서 칼날이 확 튀어나왔으니, 자인은 목을 찔릴 위기였다.
덜컹!
그때, 마차가 거세게 흔들렸다.
돌부리를 밟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덕택에 자인은 목숨을 건졌다.
다시 칼을 휘둘렀다.
채앵! 챙!
칼날과 칼날이 부딪쳤다.
이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도 자인과 올리버는 싸움을 이어 갔다.
덜컹- 쿠웅!
하지만 도저히 더 싸울 수 없을 정도로 마차가 흔들렸다.
자인이 경악했다.
마부와 드잡이질했던 병사가 저 뒤로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제기랄!"
하지만 욕설을 내뱉은 것은 오히려 올리버였다.
그는 자인을 내버려 두고 얼른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제게 안기십쇼!"
자인이 고개를 돌려 마부석을 바라보았다.
마부는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있다.
그는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옆구리에는 칼이 꽂혀, 새빨간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말들은 제 마부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폭주 중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협곡을 아래로 두고 있는 절벽 위의 험로.
말이 발을 헛디디고.
아차 하는 순간 절벽 아래로 미끄러졌다.
덜컹!
마차가 붕 떠올랐다.
그리고, 충격.
마차가 그대로 끌려 떨어진다.
자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차 위의 장식을 움켜잡고 매달리는 것뿐.
마차, 말 두 마리, 그리고 사람 셋이 추락했다.
저 아킨즈로우 협곡 아래로.
* * *
냠냠.
아 맛있다.
이름 모를 산새의 알이지만 고소하기 그지없었다.
몬스터 웨이브는 좀처럼 끊기지 않았다.
휴식도 잠깐씩만 취할 뿐이다.
때문에 전진하는 속도도 어마어마했다.
원래 내 속도라면 대수림을 주파하는 데 한참 걸렸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 동쪽에 보이는 분지가 바로 아캄 분지 같았다.
겨우 이틀 만에 이곳까지 온 것이다.
내가 딱 붙어 있는 뿌리의 키메라는 평범한 마물이 아니다.
생긴 것은 뱀과 같았지만 몸이 나무로 이뤄져 있다.
군터의 도끼창이 꽝 박혔던 얼굴도 다시 줄기가 덮여 멀쩡해졌다.
밥도 잘 안 먹고 똥도 안 쌌다.
다만 문제는 나였다.
'이대로라면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는다.'
키메라를 멈추고 사냥할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성공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레이저 포인터로 고양이를 조련하듯 키메라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리면 된다.
한참 그러고 나면 놈은 어지러운 듯 잠깐 멈췄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오늘 식사는 둥지에 놓여 있던 새알 다섯 개였다.
투명한 손으로 주워 온 뒤 구멍을 통 뚫어서 후루룩 마시면 된다.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나니 키메라 뱀이 비로소 다시 일어섰다.
녀석은 잘 때 빼고 오랫동안 쉬는 법이 없었다.
저 대수림 바깥에 뭐가 있길래 저리 열심인가.
산들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유롭네요.'
이제는 내 앞뒤에서 포효를 질러 대는 기괴한 마물들도.
종종 나타나는 병사들과 불길도 적응해 버렸다.
배부르고 날씨가 좋으니 다 같이 소풍이라도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힘들 때 우는 것은 삼류, 웃는 것은 일류라고 했던가.
나는 일류답게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여행이라고 생각하거라.
'그러면 여긴 완전 특등석이네요.'
아무리 놀라운 것도 계속 가까이서 보다 보면 평범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심심했던 나는 간만의 여유를 활용하기로 했다.
-그리 심심하면 마법이나 수련해라.
펠레리안의 제안 덕택이었다.
그는 이 기회에 자신에게 마법을 배우라고 말했다.
원래라면 심드렁했을 나였지만 흔쾌히 그러겠다 답했다.
얼마 전에 봤던 인간 마법사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불꽃 용은 정말 멋있었다.
나도 그런 마법을 써 보고 싶다고 말하자 펠레리안은 비웃었다.
-그깟 마법에 홀려서는 쯔쯔······. 내 가르침을 제대로 잇는다면 너는 능히 대마도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깟 마법이라고요? 그 노인네들 엄청 대단해 보이던데.
세 명의 마법사들은 생김새가 제각각이었지만 분명 대마법사 같아 보였다.
-마탑의 복장이긴 했으나, 별것 아니다.
'마탑의 마스터들은 다 대단하다고 던전에 있던 책에서 봤는데······.'
-그저 내가 없는 시대에 태어났을 뿐인 범부들이다.
펠레리안의 그 오만한 말투가 나를 더 두근거리게 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하였다. 투명한 손을 써 봐라.
'네.'
*「마법: 투명한 손lv7을 사용합니다.」
요즘 열심히 연습했더니 투명한 손 마법의 레벨이 꽤 올랐다.
-저기, 저놈 한번 건드려 봐라.
저 앞에 털이 없는 멧돼지 한 마리가 그저 앞을 향해 열심히 달리는 중이었다.
-최대한의 출력으로.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캄캄한 어둠 속.
내 마음 한가운데에 손 하나가 떠오른다.
그 손을 휘둘러 쳤다.
철썩!
"뀌이익!"
털 없는 멧돼지는 엉덩이를 맞자 홱 머리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화가 났는지 씩씩거렸지만 그 뒤에는 나와 키메라 뱀뿐.
멧돼지는 깜짝 놀라 앞으로 달려나가 도망쳤다.
-투명한 손의 위력은 실상 그 정도인 것이지.
'더 수련하면 달라지지 않아요?'
사실 이 정도도 레벨이 올라서 위력이 세진 것이다.
원래라면 이렇게 찰진 소리가 나지는 않았을 터다.
-경지에 오르면 손을 두 개 쓰는 것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물리력이 극적으로 상승하지는 않겠지. 원래 염동력 계열 마법들이 그러하다.
'손 두 개라······ 그러면 양손으로 칼 두 자루에 꼬리까지 하면 삼도류 가능······.
-일곱 자루 마검!
깜짝이야.
펠레리안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왜 저러지.
-무려 검 일곱 자루를 다루는 마법이 존재한다. 어떠냐 흥미롭지?
'예, 예에······. 흥미롭네요.'
-투명한 손과 같은 계열의 마법이지, 염동력 파에 조작계 마법. 그 마법을 상대하는 자는 일곱 자루의 검이 살아 움직이며 쇄도하는 것을 막아야 해.
가만 들어 보니 정말 구미가 당겼다.
엄청나기 그지없는 경지 아닌가.
그야말로 조화경의 경지에 이른 술수요, 기(技)를 넘어 예(藝)에 이르고 도(道)에까지 닿은 마법임이 틀림없었다.
-배우고 싶으냐?
'네.'
-휘파람으로 군대를 상대하는 염동술사가 되고 싶어!
'네!'
-그러면 진지하게 마법을 배워라. 우선 경량화 마법이다.
당분간은 열의 있는 학생이 되어야겠다.
안 그러면 펠레리안의 성격이 더욱 괴팍해질 것 같다.
-경량화 마법의 적절한 사용이야말로 염동술의 기초이다. 칼을 쥐더라도 그 칼을 먼저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면 마력의 소모가 극히 비효율적이니······.
펠레리안은 훌륭한 강의자였다.
나는 한가로운 여정 동안 그의 마법을 배우며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마침내 대수림에서 완전히 벗어나 시자수림에 도착했다.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숲이다.
잠시 그 동굴에 가 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시자수림마저 통과했다.
얼마 안 가 인간들의 영지가 보였다.
'그레이림'이라는 이름이었던가.
영지를 지키고 있던 성벽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통과한 마물이 이미 쓸고 지나간 것 같다.
나와 키메라 뱀도 곧 저곳을 통과할 것이다.
그때였다. 내 눈에 뭔가 들어온 것은.
'저거, 고블린 아니에요?'
내 옆에 달리고 있는 마물 중에서 눈에 띄게도 이족보행을 하는 것이 있었다.
작은 고블린이었다.
다른 마물과 다름없이 이성을 잃은 느낌이다.
침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니 확실하다.
-맞는 것 같은데.
'룬가 부족에서 만났던 놈인가?'
-내가 고블린 따위의 얼굴을 다 기억할 성싶으냐?
그럴 리 없었다.
나는 작은 고블린의 정신을 일깨우려 했다.
*「투명한 손lv8을 사용합니다.」
철썩!
그사이 또 레벨이 오른 투명한 손으로 고블린의 뺨을 친 것이다.
"끼약!"
고블린은 화들짝 놀랐다.
그래도 다시 뛰려는 것을 이번에는 물 마법을 써서 머리 위에 부어 주었다.
그제야 고블린은 정신을 차렸다.
"허, 허억! 뭐, 뭐야!"
룬가 부족과 같은 말을 쓴다.
자신이 마물 사이에 섞여서 달리고 있던 것도 몰랐던 걸까.
나를 돌아보는데,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나를 알아본 눈치다.
"우, 울루올로스!"
우르오로스다.
그런데 뒤에 붙는 수식어가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사, 사악한 룬가의 뱀이다!"
뭐라고오.
고블린이 허겁지겁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이 수많은 마물들을 헤치고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한 일.
여기서 도망치는 게 쉬웠으면 내가 먼저 도망쳤을 것이다.
*「광선lv1을 사용합니다.」
키메라 뱀은 훌륭하게도 광선을 쫓아 뛰어올랐다.
콰앙!
고블린 앞에 있던 마물들을 피떡으로 만들며 착지.
나는 능숙하게 키메라 뱀을 운전해서 정차했다.
'어이, 너는 어디 고블린이야. 나를 아나?'
당연히 고블린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오늘따라 나나루크가 그립네.
'나나루크는 잘 있나!'
"우아아악!"
고블린이 또 한 번 도망치려고 했다.
-잡아라!
나는 그리했다.
투명한 손으로 고블린의 묶인 머리를 잡은 것이다.
누구든 머리카락이 잡히면 힘을 쓰기 어려운 법이다.
고블린 또한 그러했다.
"아 아파, 아팟!"
머리카락이 뽑히는 건 싫었는지 알아서 다가왔다.
쉽지 않았지만 기어코 고블린을 내 앞, 즉 키메라 뱀의 등 위까지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고블린은 공포로 벌벌 떨었다.
보기에 흡족한 모습이군.
'알고 있는 것을 다 털어놓아라.'
고블린은 납죽 엎드려서 이런저런 말을 주절거렸다.
룬가에게 정복당한 부족의 고블린이라며 자기소개를 한다.
지금은 죽은 전 족장의 자식이라나.
듣자 하니, 내가 룬가의 수호신쯤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패, 패왕 나나루크는 이미 대수림을 떠났습니다. 저희 부족들도 다 함께······."
'패왕이라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언제 그렇게 멋진 별호를 얻어 버린 거야 나나루크.
부럽다. 너무 부럽다.
'그래서, 지금 나나루크는 먼저 떠났다는 말이지?'
고블린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기대한 답을 다 들으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저 앞의 영지가 폭발했다.
꽤 먼 곳이었음에도 이곳까지 열풍이 몰아닥친다.
뜨거운 바람에는 기름 냄새가 섞여 있다.
아마 내가 키메라를 멈추지 않았다면 저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을까.
내심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으려니.
"흐아아악, 살려 주십쇼!"
내가 사로잡은 고블린이 납작 엎드려 벌벌 떨었다.
저거 내가 한 거 아니야.
< 웃어! >
069.
아킨즈로우 협곡에 마차가 추락하고.
바위에 쿵.
그 아래의 바위에 또 한 번 쿵.
마차의 지붕에 매달려 자인도 쿵.
그렇게 자인의 의식은 암전되었다.
얼마나 지났을지.
다시 눈을 뜬 자인은 끔찍한 고통이 찾아올 것을 대비했다.
하지만 조금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이미 죽은 것일까.
절벽에서 떨어졌으니 그럴지도.
하지만 원통하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부끄러운 일을 하다가 죽지 않았던가.
영지를 찬탈하고 그 적법한 주인의 딸을 추격하던 중이었으니.
그가 철사자 기사단에 입단할 때 복종의 맹세를 하지 않았다면 진작 다 포기하고 떠났으리라.
'매캐한 냄새······.'
불붙은 제단에서 풍기는 냄새.
신전의 냄새가 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불과 화로의 신전이었다.
자인은 저도 모르게 목걸이를 매만졌다.
원래는 신앙심이 희박했던 그였으나, 이제는 달랐다.
얼마 전 아캄 분지에서 목숨을 건진 그날 이후부터였다.
그는 꿈속에서 여신을 만나고, 살아남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후로 매일 밤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았나 보지.'
그래야 마땅할 한심한 놈일진대.
라니아 영애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지도 모른다.
혹 죽지 않았더라고 해도 크게 다쳤을 것이고, 결국 그레이림에서 나온 병사들에게 잡혀갈 테고.
죄책감이 자인의 가슴을 후벼팠다.
자인은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크윽······."
그리고 엎드린 그의 앞에, 흰 발 하나가 허공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앉았다.
흠칫 놀란 자인이었지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후세계인지 꿈인지 모르겠지만.
눈앞에 나타난 이가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여신님······?"
여신이 자인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었다.
「고개를 들라.」
조심스레, 자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아······."
여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불꽃 같은 후광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이다.
여신은 왜 자인의 앞에 나타난 것일까.
「네 역할을 다하라, 기사.」
무슨 말이십니까. 제 할 일이요?
하지만 신탁이 그러하듯 여신은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지 않았다.
「네 역할을 다해.」
어찌 그런 명령을 하시나이까.
너무나도 화로의 여신다운 명령이었다. 너무나도.
이것은 신탁일까.
그럴 리는 없었다. 자인은 사제도 아니었으며, 화로의 신전에서도 신탁을 받았다는 소식은 수십 년 이래 없었으니.
자인은 여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더 들었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아악!"
「철사자의 계율 일 번. 복종할 것.」
여신의 얼굴이 군터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번엔 아버지의 얼굴로 바뀌었다.
「한심한 놈, 벌벌 떨기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자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여······ 신, 니임······."
자인이 여신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누군가가 움찔했다.
"징그러워요, 자인 경."
" ······허억!"
번쩍 눈을 뜬 자인이 경악해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털썩 쓰러졌다.
온몸에 통증이 극심하다.
어깨며 왼팔, 갈비뼈도 부러진 것 같다.
"라, 라니아 양."
"······."
자인을 돌보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라니아였다.
그가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하던 바로 그 대상.
왼팔을 보니 붕대가 감겨 있었고 부목까지 대어져 있었다.
"마지막 남은 포션을 쓰긴 했는데······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감사, 합니다······."
저 어린 여자아이가 그를 치료해 준 것일까.
"올리버가 해 준 거예요."
" ······."
올리버가 왜 나를?
지금은 그가 보이지 않았다.
자인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눈치챘다.
반파된 마차 안이었다.
안에 철골로 뼈대가 붙어 있었는지, 마차의 객실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퀴며 의자, 내부 집기가 다 박살 나긴 했지만, 기적 같은 일이다.
라니아를 보던 자인이 흠칫 놀랐다.
소녀의 이마에 핏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피가 납니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조금 까진 것 같아요."
라니아는 손으로 피를 스윽 닦고 말았다.
그 모습이 자못 담담하다.
저리 씩씩한 아이였던가.
그리 철부지 같던 영애가······.
그녀의 천진난만함을 앗아간 것은 군터와 철사자 기사단이리라.
동시에, 당연히 자인의 탓이기도 하고.
"왜, 저를 구하셨습니까."
"······."
"그냥 죽게 놔두실 것을."
자인은 진심으로 궁금하여 물었다.
그가 본 사냥꾼 올리버는 냉철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갑자기 온정이 들어서 자신을 추적하던 기사를 살리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눈앞의 라니아가 자인을 살려 달라고 부탁한 것일 텐데.
대체 왜?
라니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비 오는 날. 절 알아보시고도 들여보내 주셨죠? 병사들이 저를 괴롭힐 때."
"아······."
그런 적이 분명 있었더랬다.
검문을 하는 병사들을 내쫓고, 두려움에 떠는 라니아를 들여보낸 적이.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을지 한참을 고민했건만.
"자인 경."
"예에."
"영지가, 영지가, 불타고 있어요."
라니아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무슨 말인가.
자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보였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레이림 영지가 있는 방향이다.
그리고 수도까지 이어지는 관도와 평야가 있는 방향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른다.
자인은 영지 내에 비축되고 있던 기름과 폭약을 떠올렸다.
설마, 선배들이 결국······.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요. 어머니는 어떻게 되신 걸까요? 외할아버지께 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눈물을 흘리는 라니아에게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자인의 입술이 떨렸다.
쿵!
그때 바깥에서 충격음이 울렸다.
찢어지는 듯한 올리버의 목소리도.
"기사! 정신이 들었으면 칼을 들고 나와라!"
목소리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마물이 나타났어!"
"마, 마물······!"
아킨즈로우 협곡에 사는 마물들이 나타난 것 같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자인에게 칼은 없었다. 떨어질 때 잃어버렸나.
그때, 라니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검 한 자루를 건넸다.
"자인 경, 저를 도와주세요······."
자인은 순간 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라니아의 가족과 집을 앗아 간 그 장본인 아니던가.
저렇게 눈물 섞인 부탁을 받을 자격도 없었다.
그의 망설임이 거절의 뜻인 줄 알았을까. 라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 번 더 부탁했다.
"제발······."
"자인! 네가 기사라면 의무를 다해! 어서 나와!"
동시에 올리버도 다시 한번 재촉했다.
자인은 라니아의 단검을 조심스레 받았다.
그리고 마치 서약의 장검을 다루듯, 칼날을 자신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예, 레이디 라니아."
라니아가 멍하니 자인을 바라봤다.
"기사 자인 크로츠가 목숨 바쳐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자인은 기사로서 서약했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섰다.
뚜둑!
몸에서 불길한 파열음이 울렸다.
갈비뼈 사이에 송곳 여러 개가 박혀 있는 듯한 고통.
부목을 댄 왼팔에는 아예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자인은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장식이 쓸데없이 화려한 단검 한 자루를 들고 반파된 마차를 나선다.
육체는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은 아니었다.
근 몇 년 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다.
복종의 의무를 어겼지만, 자인은 비로소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단검 한 자루를 들고 휘적휘적 걸으며.
"드디어 나왔군!"
그 앞에는 올리버가 마물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올리버의 상태 역시 자인 못지않았다.
검을 들고 있는 손가락이 기괴한 모양으로 꺾여 있었다.
머리에서는 피가 줄줄 나기도 했다.
자인은 나아가서 올리버의 옆에 섰다.
"어디서 튀어나온 마물들이지."
"고블린들과 싸워 본 경험이 있나?"
올리버가 씨익 웃었다.
마차를 습격하려는 것처럼 모여있는 마물들은 다름 아닌 고블린들이었다.
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저들이 그레이림 영지를 통과해서 온 건가."
영지가 있는 방향에서 솟아오른 불길을 보고 떠올렸다.
그러나 올리버는 고개를 저었다.
"협곡을 기어올라 왔어. 아마도 대수림에서부터."
"······부족들의 이동일까."
"모르지."
그래,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고블린들은 조악한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그 수가 많았다.
"키르륵."
"취잇 케엑! 킹깃!"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적의가 들끓고 있다.
지금 쓰러져 있는 고블린들은 전부 올리버의 솜씨일 것이다.
부상당한 상태라고 해도 평범한 고블린들은 쉽게 해치울 수 있는 자였다.
"만만히 보지 마."
올리버가 경고했다.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작은 고블린들 사이로 큰 고블린 몇이 쿵쿵거리며 달려왔다.
"홉 고블린!"
피부가 붉은 것이 홉 고블린이 확실하다.
다만 조금 이상했다.
기존에 알려진 홉 고블린보다 더 크고 근육이 우람하다.
놈이 휘두른 몽둥이를 막아 냈을 때 확신했다.
콰앙!
그 힘이 보통이 아니다.
자인은 팔이 부러질 듯한 충격을 느꼈다.
도저히 단검으로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인은 어깨로 고블린의 가슴을 들이받고 그 팔에 매달렸다.
기사 훈련을 통해 습득한 관절기였다.
우드득!
"퀘에에엑!"
홉 고블린, 아니, 분명 홉 고블린에서 한 단계 진화했을 고블린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이미 완벽하게 관절을 제압한 상태.
이대로 체중을 실어 매달리면 어깨가 빠져 버릴 것이었다.
"쿠욱, 취에에!"
그러나 홉 고블린은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오크 전사 같은 힘으로 자인을 그대로 들어 올린 것이다.
이대로 땅바닥에 내려친다면 자인이 당할 위기였다.
다행히 올리버가 가세했다.
파악!
홉 고블린의 팔뚝이 석둑 베이며 자인은 자유로워졌다.
허겁지겁 단검을 다시 주워드는 자인.
그러나 지켜보고 있던 고블린들이 달려들었다.
크기는 작아도 수가 많아서 위협적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누군가가 외쳤다.
"이 더러운 새끼들이-!"
사람의 목소리였다.
지원군이라도 온 것인가 하는 기쁨에 고개를 돌려 보니.
고블린들 사이에서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았다.
피부가 조금 붉었으며, 고블린들보다 확연히 키가 크고.
아름다운, 고양이와 비슷한 얼굴을 한 여인의 모습이었으니.
그러나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홉 고블린이었다.
이들의 제왕이며, 대수림의 고블린을 일통하고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패왕이다.
나나루크가 호랑이처럼 달려와 올리버를 걷어찼다.
터엉!
올리버는 마치 공처럼 튕겨 나갔다.
가까스로 착지에 성공했지만 왈칵 피를 토해 낸다.
그사이 자인이 나나루크에게 덮쳐들었다.
단검이 그녀의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
하지만 나나루크는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퍽!
단검이 손바닥을 관통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단검을 쥔 자인의 손을 움켜잡는다.
그 모습에 자인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너, 너는 사람이냐 아니면 고블린이냐!"
"보면 모르겠냐! 고블린 왕이다!"
왕이라고?
자인의 머리에 나나루크의 주먹이 꽂혀 들었다.
쐐액!
턱을 젖혀 간신히 피해 냈다.
자인은 근접 격투술 역시 수련했다.
한낱 이족 보행 마물에게 싸움으로 질 이유가 없었다.
후웅- 훙-
다만 나나루크의 주먹은 한 방 한 방이 살인적이었다.
하나라도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자인의 열세가 확실했다.
"미친 고블린이!"
올리버가 가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나루크가 더 강했다.
하다못해 자인과 올리버의 상태가 정상적이었다면 모르겠지만 ······.
"제법 하는 인간들이군."
나나루크는 땅을 발로 쾅 찍더니 자인과 올리버를 밀어 냈다.
그들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물러났다.
그때, 나나루크의 곁에 늙은 고블린 한 명이 다가와 뭐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혀를 차고 자인을 노려봤다.
"어린 인간 여자 하나를 지키고 있나 본데."
"이놈-! 아가씨를······."
"닥쳐,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부하들이 다쳐 분노한 나나루크의 목소리에는 초저주파가 깃들어 있었다.
자인은 오금이 저렸으나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다만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으니.
나나루크가 부하들에게 장검 두 자루를 받아 던졌다.
"들어."
검으로 승부를 내자, 뭐 그런 것일까.
그러나 나나루크는 그딴 이유로 무기를 준 것이 아니었다.
"너희들도 칼 들고 싸워. 여기서 다 죽기 싫으면."
자인은 나나루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다만 조심스럽게 장검을 주워 들 뿐.
나나루크는 그 순간부터 그들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머리를 질끈 묶더니, 자신의 도끼를 꺼내 든다.
"웨이브 피해서 이쪽으로 왔는데, 하필 여기로 몰려든다니."
그녀가 외쳤다.
"벽으로, 우측 벽으로 최대한 붙어. 홉 고블린들이 가장 앞에 선다!"
그러자 고블린들이 협곡의 우측 벽면으로 뭉쳤다.
가장 강한 홉 고블린들이 동족을 지키듯 선두에 선다.
자인과 올리버도 일단 마차 앞으로 물러났다.
마차는 마침 협곡의 우측 벽면 앞에 추락해 있었다.
"퀴이이익!"
고블린 하나가 소리치고.
"온다아앗!"
나나루크가 외쳤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드드······.
지축을 흔들면서 몰려오는 것은 마물들.
끝도 없는 마물의 행렬이었다.
사냥꾼이기에 마물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올리버는 지금 무엇이 일어나는 건지 알아챘다.
"모, 몬스터 웨이브."
대수림에서부터 몬스터 웨이브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파괴된 마차 안쪽에 숨어 있는 라니아에게 당부했다.
"아가씨, 눈을 감고 마차에 숨어 계십시오."
"뭐에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빨리! 절대 나오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그는 부서진 마차의 잔해로 그 문을 틀어막았다.
형편없는 방비지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두두두두두두!
그리고 마물들이 다가왔다.
곰, 벌레, 날짐승, 기린, 코끼리, 개, 표범, 재규어 ······.
함께 다니지 않는 마물들이 미친 듯 뭉쳐 있다.
광기에 빠진 마물들 대부분은 고블린들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몇몇은 이쪽에 눈독을 들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끔찍하게 위험했다.
"으아아아!"
자인이 멧돼지 한 마리의 안면을 단검으로 푹푹 쑤셨다.
그러나 미친 멧돼지는 몸에 칼이 박히면서도 자인의 몸을 밀어 냈다.
올리버가 달려와 그 멧돼지의 척추에 칼을 박았다.
쿵, 쿠웅!
기린 비슷한 마물이 발로 올리버를 으깰 뻔했다.
몸을 굴려 간신히 피했다.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고블린들도 하나둘 죽어 나간다.
올리버의 등에 마차가 탁 부딪쳤다.
부끄러웠지만, 지금이라도 마차 안으로 들어가 라니아와 함께 숨어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올리버의 눈에 마물 한 마리가 들어왔다.
눈에 띄게 거대한 마물이었다.
아마도, 뱀의 형태를 한 키메라.
나무로 된 몸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에는 왕관 같은 것이 씌워져 있다.
"그워어어어어-!"
놈이 포효하자 다른 마물들이 전부 함께 포효했다.
틀림없이 저것이 우두머리이리라.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 앞에서. 올리버는 몸을 덜덜 떨었다.
너무나도 기괴한 마물이다.
그 목덜미에 뭔가 흰 버섯 같은 것이 솟아 있다.
아니 버섯이 아니라······. 저것도 뱀인가.
그때였다.
"어, 어어!"
미친 듯 싸우던 홉 고블린 나나루크가 소리를 빽 질렀다.
"흰둥아!"
흰둥이? 누가?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명 환희와 같은 기쁨이 깃들어 있었다.
* * *
'나나루크?!'
나를 부르는 그녀를 몰라볼 리는 없었다.
나나루크와 고블린들이 마물에게 공격받고 있었다.
*「광선lv1을 사용합니다.」
그 앞에 광선을 쏘았다.
그리고 우리 키뱀이가 풀쩍 뛰어올랐다.
고블린들을 공격하던 다른 마물들을 깔아뭉개며 착지.
콰아아앙!
마물들의 피가 확 튀고.
나를 처음 보는 고블린들이 깜짝 놀라 서로를 얼싸안았다.
살려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거 분위기 왜 이래!'
"그래, 다들 웃어! 웃어야지!"
나나루크가 고블린들에게 그리 외쳤다.
나도 방긋, 웃었다.
< 공물을 바쳐라 >
070. 공물을 바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