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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050-060

050.

마물들은 다 개인플레이만 한다는 인식이 내게 있었다.

여태까지 만난 마물들이 대부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편견이었나 보다.

적어도 이곳의 마물들은 무리를 지어 함께 움직였다.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 손을 쓰는 영장류끼리 모이고.

그리고 징그러운 벌레 친구들끼리 모인다.

지금 상황을 보면 벌레 군단이 손 있는 친구들을 습격한 것 같다.

다행히 고릴라는 혼란을 틈타 도망쳤다.

이건 전쟁이었다.

그리고 대왕지네 여사는 벌레 군단에서 간부급 서열인 듯했다.

"께께께께께!"

그녀가 포효하자, 다른 벌레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나는 그 덕에 꾸벅이와의 감동적 상봉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하얀색으로, 희게 진화했구나! 누구 닮아서 그랬을까!'

마음 속에서 애정이 퐁퐁 솟아올랐다.

지네와 뱀은 종부터 다르지만 꾸벅이와 나는 이제 색이 같다.

원래 같은 색끼리는 마음으로 연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너 내 아들 해라.'

-허어, 색이 저리 눈에 띄니. 야생에서 살아남기는 글렀어.

펠레리안이 악담을 했다.

무시하려고 했는데 문득 걱정이 되긴 했다.

대수림에서는 흰색이 불리한 점이 많다.

지금이야 지네맘이 옆에 함께 있으니 상관없겠지만······.

-뱀 한 마리 때문에 신세를 망쳤구만.

'에이, 이거라도 먹고 쑥쑥 크자.'

나는 아공간에서 잽싸게 작은 마석 한 덩이를 꺼내서 꾸벅이에게 먹였다.

펠레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어서 돌아가.'

다른 두 남매한테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꾸벅이는 마석을 냠냠 먹으며 지네맘의 등 위로 돌아갔다.

때맞춰 내 몸 위로 안경원숭이들이 뛰어들었다.

놈들은 나를 할퀴고 물어뜯으려 애썼다.

*「독비늘lv2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

수정처럼 단단한 내 비늘이 오히려 원숭이들을 상처입혔다.

그리고 한 번 독이 주입되면 끝이다.

놈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나도 본격적인 전쟁에 뛰어들었다.

칼을 휘둘러 원숭이들을 벤다.

불꽃을 뿜고 땅을 흔든다.

내게 덤벼드는 개코원숭이의 마음을 물리적으로 빼앗아 준다.

그리고, 나를 죽이라 명했던 현자 오랑우탄.

"물러나, 후-퇴 한, 다-!"

그가 그리 외쳤다.

척 봐도 저 오랑우탄이 지휘관이겠지

지팡이도 들고 있고, 의복이라고 부를 만한 가죽 넝마도 걸치고 있었으며, 얼룩덜룩한 보따리 같은 가방도 허리춤에 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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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더 오랑우탄lv51]

[이명] 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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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 정도면 내가 봤던 마물 중에서 레벨이 거의 제일 높은 거 아닌가.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이명까지 있다.

즉, 아주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이라는 말이다.

나는 은밀하게 오랑우탄을 향해 기어갔다.

오랑우탄은 내가 접근하는 것도 모르고 고함만 지르고 있었다.

"우우-! 대장님을 불렀다- 우우! 우선 물러나아!"

대장님.

그 은빛 털의 원숭이를 불렀다는 이야기였다.

그놈도 따지고 보면 화이트의 일족이군. 확실히 강할지도.

"께게께께."

그때였다.

대왕지네 맘이 퇴각 신호를 내린 것은.

그게 퇴각 신호라는 것은 나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벌레들이 썰물처럼 물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 되는데 이거.

오랑우탄 역시 뒤돌아 도망친다.

그냥 보내 주지 않겠다.

*「식심의 도약lv1을 사용합니다.」

빛살처럼 날아갔다.

하지만, 놈도 그냥 나이만 먹은 오랑우탄은 아니었던 것 같다.

"히-익!"

뒤에서의 살기를 감지했는지 몸을 웅크리며 피한다.

애초에 심장을 노릴 수는 없는 위치였다.

나는 놈의 등짝 대신 냄새나는 가죽 보따리를 물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찌이익!

가죽 보따리가 찢어졌다.

그리고 그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 이딴 걸 모아서 들고 다니고 있냐 얘는.

각종 예쁜 돌이며, 바나나, 나무 열매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 안 돼!"

오랑우탄은 마치 나라라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당황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쏟아진 잡동사니 중에서 나는 가장 귀한 것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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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의 설익은 뿌리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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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만 한 주황색 열매 두 알.

순간, 찰나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와 오랑우탄, 그리고 언제부턴가 옆에 있던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서로를 보았다.

가장 빨리 움직인 것은 나였다.

두 열매를 순식간에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오랑우탄의 눈에는 열매 두 개가 마치 허공에서 사라진 듯 보였으리라.

"안 돼-에!"

'돼!'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른 벌레들과 함께 도망치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대왕지네 님의 등에 휙 올라탔다.

꾸벅이를 비롯한 삼 남매가 반겨 주었다.

"우어어어-!"

뒤에서 오랑우탄의 비통한 절규가 울렸다.

* * *

한때 들판을 자유로이 누볐던 하이에나 무리.

함께 있으면 대형 마물도 두렵지 않았던 어금니 하이에나에게는 우두머리가 있었다.

행복하게 들판을 뛰어놀던 하이에나 무리는 분명 행복했더랬다.

하지만 (전)어금니 하이에나 우두머리 (현)점박이의 행복은 어느 날 산산조각이 났다.

그림자 요정이 나타나 그 무리를 전부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비좁은 철창 안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점박이는 그 모든 일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처참하게 죽어 간 무리의 하이에나들.

결국 점박이 홀로 살아남아 죽을 날만을 기다릴 때 나타난 것이 흰 뱀이었다.

결론적으로 점박이는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흰 뱀은 밥도 잘 주고, 바깥에서 뛰어다닐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말을 듣지 않는 마물들에게는 가차 없지만, 그것은 우두머리로서 갖춰야 할 당연한 덕목이었다.

이곳 들판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뱀의 명령.

점박이는 얌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긴 어금니로 땅을 헤집어 나온 통통한 벌레들을 주워 먹기도 하면서.

두두두-

땅이 흔들리며 무언가가 접근한다.

점박이는 순간 그녀의 새 주인, 뱀이 돌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몰려오는 것은 벌레 군단.

거대한 지네를 선두로 해서 각종 벌레들이 숲에서 밀려 나오고 있었다.

"끼잉 께에엥!"

겁먹은 점박이가 낑낑댔다.

조금 전에 흰 뱀은 숲에 들어갔었다.

저 무서운 벌레들에게 잡아먹혔겠지. 점박이는 슬피 울며 도망치려 했다.

그때였다.

지네의 등 위에서 흰 뱀이 뛰쳐 오른 것은.

뱀은 점박이의 등 위에 정확히 안착했다.

반가워할 틈도 없이, 뱀은 꼬리를 세 번 두드렸다.

달리라는 뜻이다.

점박이는 열심히 달렸다.

그녀의 옆으로 대왕 지네가 함께 달렸다.

원숭이들의 숲이 멀어지고, 늪지대가 보이는 지점에서 뱀은 점박이를 멈춰 세웠다.

그러자 벌레들의 우두머리처럼 보이던 지네 역시 멈춰 섰다.

뱀은 대왕지네의 앞에 서서, 당당히 대화를 나누는 듯 보였다.

점박이는 그 순간 눈치챘다.

'아, 주인이 결국 저 벌레들마저 부리게 되었구나.'

분명 다시 나타났을 때 대왕지네에 탑승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곳에서 벌레 군단이 얼마나 강력한지.

또한 저 대왕지네가 벌레 군단의 간부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떠올리면 엄청난 일이었다.

점박이의 마음속에 한층 깊은 충성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 * *

*「어금니 하이에나 점박이lv31와의 유대감이 깊어집니다.」

*「점박이가 당신에게 더욱 충성합니다.」

어, 뭐야.

대왕지네 님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표하고 꼬리를 팔랑팔랑 흔들고 있는데 갑자기 그런 메시지가 들렸다.

대충 알 것 같다.

강하고 훌륭하신 대왕지네 님과 내가 친한 사이라는 것에 점박이도 감동한 거겠지.

나 같아도 그럴 것 같다.

대왕지네에 대한 내 마음속 평가는 이번에 한 번 더 올라갔다.

강인하고, 온화하며, 또한 삼 남매의 훌륭한 어머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더십까지 있었을 줄이야.

영장류 마물들과 대립한다는 벌레 군단에서도 간부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다만 대왕지네는 내게 영입 제안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나는 벌레가 아니라 크리스탈 더블혼 파이톤이니까.

"께께, 께."

원숭이들과의 대화가 빨리 끝나 버려서 미처 질문하지 못했던 것들을 대왕지네에게 물어보았다.

내 앞의 흙바닥에는 복잡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낙서는 인간 시절 때부터의 내 취미였기에 꽤 알아보기 쉬울 것이다.

독특한 외양을 가진 뱀을 한 마리 그렸다.

이건 내가 아니라 데쉬난의 일지에 적혀 있던 한 뱀을 묘사한 것이다.

그 옆에 그린 작은 뱀이 바로 나다.

나는 작은 뱀과 큰 뱀을 번갈아 가리키고.

지네 삼 남매와 대왕지네 님을 또 번갈아 가리켰다.

'이 뱀이 내 아비요. 혹시 본 적이 있소?'

-퍽이나 알아듣겠구나.

그리고 대왕지네는 알아들었다.

-이걸 이해했다고!

지네는 휙,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어쩐지 겁을 먹은 듯 독발톱을 캉캉댄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보기에도 험난해 보이는 바위지대가 있었다.

'저기에 있다고요?'

다시 한번 끄덕이는 대왕지네.

나는 머릿속에서 불똥이 튀는 듯한 흥분을 느꼈다.

드디어 아버지의 행방을 찾았다.

어머니는 말 안 듣는 자식들을 피떡으로 만드는 악덕 메두사 서펜트였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그래, 아버지는 메두사 서펜트가 아니었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제법 충격이었다.

'메두사'라 불리는 이유는 머리카락처럼 붙어 있는 수많은 실뱀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실뱀들은 모두 직접 산란한 자식이다.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당연히 메두사 서펜트는 암컷만 존재한다.

내 생물학적 아버지는 서펜트이되 메두사 서펜트가 아니었다.

훨씬 더 멋있는 이름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이유는 그 특별한 종족명도 있었다.

-나도 처음 들어 보는 개체였으니까, 고유종이라니.

펠레리안은 그리 설명했다.

평범한 마물의 진화트리에서 벗어난 마물, 고유종.

희귀한 품종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여 거듭난 종을 의미한다.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라. 고유종이라고 모두 강력하고 우수한 것도 아니니.

어찌 되었든 적어도 구경이라도 해 보고 싶다.

내게는 빌리는 뿔이라는 특별한 스킬이 있는 바.

데쉬난의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특별한 마물답게 특별한 스킬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빌려갈 수도 있겠지.

벌레 군단에게 인사하고 떠나려던 참이었다.

-저거 뭐냐. 징그럽군.

늪지대 쪽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싸움을 마친 대왕지네와 그 무리를 위한 환영회 같은 건가.

나는 위화감을 감지했다.

'전부 거미들인데요.'

벌레들은 모양도 크기도 작았지만 전부 거미들이었다.

특히 그들을 이끌고 있는 큼지막한 거미.

그 거미의 배에는 사람의 얼굴 같은 게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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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페이스 타란튤라lv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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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은 위험해 보인다.

놈의 배에 달린 얼굴과 눈이 마주친 듯했다.

"께께껙!"

대왕 지네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나를 밀쳤다.

어서 떠나라는 듯했다.

"사악!"

나는 점박이를 불러 얼른 그 위에 탔다.

그리고 바위지대를 향해 출발시켰다.

"컹!"

점박이는 시원하게도 짖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려서 벌레 군단들과 멀어졌다.

그때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대왕지네와 인면 거미가 서로 마주 보며 기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사이가 안 좋은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어, 또 나를 보네.

인면 거미의 몸통에 달린 얼굴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기분 나쁜 얼굴이다.

기괴한 미소를 띠고 히죽 웃는데, 그 눈알이 분명 나를 향하고 있다.

거미와는 좋은 인연이 있던 적이 없다.

나는 그 시선을 뿌리치며 점박이와 함께 열심히 달렸다.

이상한 점을 알아챈 것은 바위지대에 진입할 때쯤이었다.

-주변에 거미들이 많다.

펠레리안이 경고했다.

바위지대는 거미가 살기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뾰족한 바위들이 곳곳에 솟아 있다.

그런데도 주먹만 한 거미들이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바위틈 사이에 축축한 이끼들이 자라고 있으나, 이렇게 여러 마리의 거미들이 살 만한 곳은 아니다.

지네와 인면 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지 오래인데.

'우연은 아니겠죠?'

-네가 보기엔 어떻냐.

'늪지대에서부터 우리를 쫓아오지는 못했을 텐데요.'

거미들은 나로부터 열 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감시하듯 맴돌았다.

놈들을 경계하면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드넓은 바위지대에 나 말고 뱀은 없었다.

그 정도 크기의 서펜트가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

-네 아비를 찾을 게 아니라 은신처나 먼저 찾아야겠구만.

날이 어두워졌다.

점박이를 타고 도망가려고 하니 바위지대에서는 점박이도 제대로 속력을 내지 못했다.

게다가 거미들이 경로를 막고 서서히 포위를 좁혀왔다.

어느 순간부터 들개만 한 거미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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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즌 농발거미lv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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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이면 감히 나한테 덤비지 못할 놈들이다.

하지만 놈들은 바위에 붙어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한 놈당 눈알 여덟 개.

수백 개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 떠오른다.

그 눈들은 전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먹이를 몰이 사냥하는 듯한 기세다.

나를 우습게 보는군.

"깨앵!"

그때 점박이가 비명을 질렀다.

주먹만 한 거미가 뛰어들어 점박이를 물려고 한 것이다.

얼른 도약해서 거미를 물어 챘다.

내가 와작와작 씹어서 복수해 주자, 점박이는 으르릉대며 주변을 경계했다.

-위험한데.

제법 위험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인면 거미가 벌인 짓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설마 내가 오랑우탄의 열매를 챙긴 걸 알아챘나?

머리를 굴려 봤자 알 수 있는 건 없다.

그렇다면 실력을 보여 주는 수밖에.

울루울룰루. 아니, 우르오로스를 어찌 하려면 인면 거미 자신이 직접 왔어야지.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입에서 불을 뿜으며 물보라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흙 마법을 통해 땅을 흔들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룬가의 고블린들은 이 모습을 보고 벌벌 떨었더랬다.

드드드-

효과는 훌륭했다.

내게 접근하던 거미들이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초급 원소마법이 이렇게 강력했나.

거의 지진이 난 수준이다.

그때, 무언가가 달빛을 가리고 그림자를 드리웠다.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뒤덮고 무럭무럭 자라더니, 거미들마저 뒤덮었다.

그제야.

내 뒤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때문에 도망간 게 아니었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

어디 숨어 계셨나 했더니.

처음부터 바위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었나.

나와 거미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다를 반복했던 것은, 사실 자고 있는 뱀의 몸 위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그 뱀은 거대했다.

쿵, 쿠웅.

뱀의 몸을 뒤덮고 있던 바위들이 떨어지며 굉음을 울렸다.

그가 나타났다.

전율이 일었다.

그의 비늘은 나와 똑같은 흰색이었다.

아니, 별빛의 색인가.

비늘에 별을 품은 서펜트가, 북극성 같은 두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조심스럽게 그 호칭을 입에 담아 보았다.

'······아빠?'

혹은 아버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

< 뱀이 효도를 못함(삽화) >

051. 뱀이 효도를 못함

그저 종이 같기에 모인 것들이거나.

혹은 개체 수가 십수 마리 정도로 그치는 작은 무리가 아닌 경우.

그 수가 수백을 넘어갈 때.

혹은 벌레 군단처럼 수천수만 마리의 마물이 군집했을 때.

그 무리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강력한 우두머리가 필요하다.

은색의 원숭이가 영장류 무리에 존재하는 것처럼, 벌레 군단에도 늪의 괴물이 존재한다.

하지만 조직은 우두머리만으로 기능할 수 없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무리라면 우두머리의 의지를 현실적으로 수행할 참모가 필요하다.

영장류 마물들의 참모는 '현자'라고 불리는 늙은 오랑우탄이다.

오랑우탄은 그 강함 때문에 참모가 된 것이 아니다.

지능이 높고, 언어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된 것이다.

그리고 벌레 군단에도 참모가 존재했다.

그는 한 마리의 거미이다.

데몬 페이스 타란튤라.

그 퉁퉁한 배 위에 악마의 얼굴이 떠올라 있는 마물.

오랑우탄과 인면 거미의 공통점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면 거미는 배에 달려 있는 입으로 말을 한다.

그리고 사념(思念)을 들을 수 있어 다른 마물들의 생각을 이해한다.

차이점은 전투력이리라.

데몬 페이스 타란튤라의 강함은 크림슨 티스 대왕지네를 능가한다.

게다가 그가 복속시켜서 수족처럼 부리는 거미들까지 포함한다면 진정한 벌레 군단의 2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

거미와 지네는 사이가 좋지 않다.

천상의 과수원에서 최초로 감이 열린 이래.

최장(最長)의 지네와 최대(最大)의 거미가 싸움을 시작해서 호수를 만들고 서로 양패구상한 이후로 이어져 온 악연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벌레들은 기어코 무리를 이뤘다.

늪의 괴물의 지배력 아래에 거미와 지네가 연합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두 벌레 마물 간의 신경전이 벌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철컹, 철컹.

대왕지네가 불만스러운 듯 독발톱을 부딪쳤다.

그녀의 곁에는 지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딱정벌레, 풍뎅이 류, 노래기, 벌, 다양한 종류의 마물들이 대왕지네의 뒤에 있었다.

반면 인면 거미의 뒤에는 거미들, 수많은 종류들의 거미만이 존재했다.

인면 거미의 배에 돋아나 있는 얼굴의 입술이 기괴하게 움직였다.

"당신은, 그 뱀을 살려 보냈으면, 안 됐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수백 마리의 거미들이 합창하듯 기묘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작지만, 강해 보이는, 마물. 잡아먹었으면, 훌륭한 영양분이었겠지요."

간드러지듯 하는 그의 목소리는 분명 지네를 비난하고 있었다.

인면 거미의 목소리에는 사념이 깃들어 있었다.

지능이 떨어지는 벌레들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지성이 싹튼 마물들은 이 비난의 의미를 알아들었으리라.

"쫓아서, 죽여야 합니다!"

"께께께······."

대답하는 대왕지네의 울음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그 뱀을 건드리지 마라. 그렇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늪의, 괴물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인면 거미 역시 대왕지네를 협박했다.

이곳에 있는 벌레들이 늪의 괴물을 존경하고 친애하여 따르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오직 공포, 압도적으로 강한 벌레에 대한 공포만이 벌레들을 모으는 구심점이었다.

과연 거미가 늪의 괴물을 언급하자 몇몇 벌레들이 두려워했다.

"께륵."

지네가 몸을 치켜들었다.

더는 듣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 뱀이랑 어떤 관계길래?' 인면 거미는 그런 호기심이 들었다.

아마도 토벌을 더 주장한다면 지네와의 싸움을 불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네와 함께 원숭이들에게 보냈던 작은 거미가 찾아와서 이미 귀띔해 주었다.

뱀이 오랑우탄이 가지고 있던 설익은 열매 두 알을 챙겼다고.

그것을 이야기한다면 뱀을 잡아 죽일 명분이 될 것이다.

대왕지네도 계속 뻗대기는 어렵겠지.

"이 일은,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인면 거미는 지네에게 명분적인 불리함만 안겨 주고 그만두었다.

뭐하러 열매의 존재를 알리겠는가. 몰래 챙긴다면 인면 거미의 것이 될 텐데.

이미 그는 수하들을 보냈다.

감고 있는 세 개의 눈알을 통해서 뱀을 쫓은 수하들의 시야가 공유되었다.

'바위지대.'

어리석은 뱀이군.

하필 가도 바위지대로 갔다는 말인가.

그곳에는 '그것'이 사는데.

물론 그것은 하루 종일 바위 속에 파묻혀 잠만 잘뿐이다.

어지간해서는 나오지 않으니 늪의 괴물도, 은색 원숭이도 가만히 놔두는 것일 테고.

당연히 그리 생각했지만.

'······무슨.'

설마.

그것이 달빛 아래 몸을 일으켜 세울 줄이야.

'퇴각해라-!'

그 먼 거리에서, 인면 거미는 권속들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퍼버벅!

시야가 암전되면서 여덟 개의 눈 중 세 개가 저절로 터져 나갔다.

터진 눈에서 누런 액체가 흘러나왔다.

새끼거미들이 걱정스러운 듯 몰려왔다.

인면 거미는 그 작은 것들을 작은 앞발로 물어 채서 입에 넣었다.

놀란 작은 것들이 우수수 흩어졌다.

'대체 무슨······.'

애써 키운 권속들이 죽어서 인면 거미에게까지 해를 입혔다.

이 손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는 끈적한 분노를 불태웠다.

* * *

'그림자 속에서 태어나 동물원장이라는 이명까지 얻은 나다. 나는 수많은 마물들을 지켜보고 또 길들였으며 죽여 왔다. 하지만 그 서펜트는, 그 거대한 뱀은 내가 보았던 마물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아름다웠다.

가장 강한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만 해도 백색의 원숭이나 늪의 벌레가 그 아이보다 더 강대할 것이다.

하지만 본연의 아름다움으로서는 서펜트와 비교할 수 없다.

비늘은 별빛으로 반짝이며, 심유한 두 눈동자는 마치 하늘의 북극성을 가져다 박은 듯했다.

포악한 메두사 서펜트도 남편에게는 구애의 춤을 추곤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심지어는 종이 전혀 다른 마물까지 그 서펜트를 추종했으니.

그 아이는 고유종이었다.

스스로 진화의 궤도를 틀어 새로운 종으로 거듭난 시조.

북극성을 쫓는 뱀.

그 이름은······.

「데쉬난의 사육일지 中」

* * *

──────────────

[폴라리스 서펜트l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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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이 내 아버지.

데쉬난의 사육일지에서 본 그 이름이다.

폴라리스, 북극성.

대양을 항해하는 모든 배들의 길잡이.

그 이름이 서펜트의 접두어로 붙었다.

이름만 가지고 아버지가 어떤 마물인지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슨 가오 잡는 이름이래? 하는 불효자적인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실물을 보게 되자, 나는 그 이름의 의미를 곧바로 깨달았다.

저 우수에 잠긴 듯한 눈빛을 보아라.

하늘에 북극성이 세 개나 뜬 듯한 눈빛이다.

오연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북극성을 찾는 젊은 선장만도 같았다.

뱀한테 어떻게 그런 게 느껴지냐고 묻는다면, 실제로 와서 보라고 말하고 싶다.

눈에 힘을 집중해도 좀처럼 자세한 정보를 알 수가 없다.

심지어 군터보다도 어려웠다.

간신히 이명 하나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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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크고 멋진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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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인 이명이군.

나는 그제야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떻게 맺어졌는지 깨달았다.

메두사 맘은,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틀림없는 '얼빠'였을 것이다.

-배, 뱀이 뭐 저리 잘생겼다는 말인가.

그렇다.

폴라리스 서펜트는 내가 본 어떤 마물보다 잘생겼다.

데쉬난이 징그럽게도 '아름답다' 어쩌고 한 것은 그가 변태여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생김새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별빛처럼 빛나는 눈이며 비늘을 제외하고라도, 완벽한 조형미가 혼을 빼앗는 듯했다.

덩치도 엄청 크다.

메두사맘에 비해서도 확실히 거대해서 대체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외모에 놀란 것은 심지어 거미들도 마찬가지였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던 녀석들은 우뚝 멈춰 섰다.

마치 혼이라도 빼앗긴 것처럼.

아버지의 꼬리가 움직인 것이 그 순간이었다.

마치 사람이 파리를 잡듯, 가벼운 후려침이었다.

콰아아아앙!

나는 지면을 강타하는 꼬리의 충격에 부웅 떠올랐다가 착지했다.

돌아보니, 거미들은 모두 3D에서 2D로 전환되어 있었다.

납작해졌다는 의미였다.

익숙한 전율이 등 뒤로 타고 올랐다.

꼬리로 피떡 만들기는 메두사 맘만의 고유기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거미들이 그제야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채신머리없게 거미들을 쫓지는 않았다.

그저 살짝, 그 기품있는 입을 열었을 따름이었다.

입안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자꾸 이러기는 싫은데, 또 한 번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그가 뭘 하려는 것인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설마, 그건 뱀이 아니라 용한테나 허락되는 일일 텐데.

키이잉!

아버지의 입에서 광선이 뿜어져 나와 도망치는 거미들을 불태웠다.

저건 틀림없이 브레스다.

-파괴광선이군!

펠레리안이 초를 쳤다.

아니, 파괴광선도 나름대로 멋지기는 하다.

생각해 보니까 펠레리안의 던전에 있던 골렘들도 파괴광선 스킬을 가지고 있었지.

그 골렘들도 저런 광선을 쏠 수 있었던 걸까.

-저 정도 출력이 나오지는 않겠지. 그것보다 확실하군······.

펠레리안은 재미있다는 어투였다.

-마력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어. 아마도 저 서펜트가 가진 고유의 능력이겠지.

아무리 아버지가 잘생긴 뱀이라고 해도 종도 다른 거미들이 얼음처럼 굳을 이유는 없었다.

펠레리안은 그 이유를 폴라리스 서펜트의 능력이라고 보는 듯했다.

-매혹과 관련된 정신계 능력이겠지.

물론 불굴 특전을 가지고 있는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신기한 것을 보듯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지 않은 것이 신기한 걸까.

혹은, 내가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알아본 걸까?

아버지는 그 거대한 머리를 수그려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겼군.

내 외모도 뱀치고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랑 비교하면 하찮을 지경이다.

-조심해라. 조심해 봤자 저놈이 어쩌려고 하면 소용없겠지만.

펠레리안이 하느니만 못한 조언을 했다.

내 최강의 기술인 천뢰령을 써도 아버지는 따끔하고 말 것이다.

그만큼 압도적인 전력 차가 존재할 터.

하지만 어째선지, 나는 겁이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서는 조금의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푸르고 깊은 눈동자에 서린 감정은 분명 호기심.

혀를 쉬리릿, 낼름거린다.

뱀이기에 저 행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냄새를 맡는 것이다.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나는 그동안 아버지의 상태창을 살피려고 했다.

군터 때도 그랬듯 눈에 힘을 주고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것처럼 아버지의 레벨조차 알 수 없었다.

"쉬리릿."

나도 아버지와 비슷하게 혀를 낼름댔다.

어쩐지, 푸근한 느낌이 든다.

피가 이어졌기 때문일까.

아버지, 당신의 아들이 여기 돌아왔습니다.

*「혈통이 감응합니다.」

착각이 아니었나.

나는 방금 들은 메시지를 펠레리안에게 전했다.

-혈통 감응? 네 어미였던 메두사 서펜트는 본디 자식을 제대로 양육하는 마물은 아니었지······. 저것은 품종이 다르기 때문인가.

아버지가 나를 알아본 것 같다.

나는 내 미래를 직감했다.

꾸벅이, 왕눈이, 대갈이처럼 나도 이제 아버지의 등 뒤에 타고 다닐 것이다.

그러면 무서울 게 없겠지. 군터만 만나지 않는다면!

하지만 내가 꿈꾸던 행복한 미래는 찾아오지 않았다.

*「폴라리스 서펜트가 두려움을 느낍니다.」

*「혈통 감응이 중단됩니다.」

아버지는 화들짝 놀란 듯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난처한 듯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서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설마 엄마가 주변에 있는 줄 아는 건가.

내가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갑자기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디 가요!

나는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체급이 차이 나기 때문일까.

아버지는 엄청나게 빨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휙, 하더니 아버지가 사라졌다.

온데간데없었다.

그 거대한 몸뚱이를 어디 숨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마치 증발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펠레리안에게 물어봤다.

'텔레포트 한 거 아니에요?'

설마 아버지도 매직 서펜트였던가.

그것도 고위 마도사(魔道蛇)······.

하지만 펠레리안은 확고히 부정했다.

'텔레포트는 사용할 수 있는 마도사가 내 대에도 손에 꼽던 고위 마법이다. 뱀 마물이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는데 펠레리안도 명확히 답하지 못했다.

-투명화라면 기척이 느껴졌을 거고······ 마력감지를 써 봐라.

그렇게 했다.

하지만 딱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을 가볍게 먹기로 했다.

다시 찾아오지 뭐.

아버지가 나를 잡아먹으려 한다면 몰라도, 무서워서 도망친 거라면 이쪽에서 겁먹을 것은 없었다.

언젠가 아버지의 등을 타고 다니는 미래를 꿈꾸며 오늘은 돌아가자.

돌아보니 점박이는 엄청 겁을 먹었는지 바위틈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나는 점박이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점박이는 펄쩍 뛰어오르더니, 나를 알아보고 내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돌아가자 일단.'

어쨌든 수확물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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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의 설익은 뿌리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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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두 알.

대체 이게 뭐길래 마물들이 미쳐 날뛰고 있는지.

한번 먹어 봐야겠다.

< 비오는 밤의 방문자 >

052.

열매의 냄새는 어떤가.

끝내준다.

천상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넥타르의 향기가 이러할까.

저절로 군침이 흐른다. 나는 주로 육식을 하는데도 이 정도로 유혹적인 향기를 뿜을 줄이야.

아공간에 보관해서 다행이었다.

지금 기억해 보면 원숭이들을 만났을 때도 어딘가 좋은 냄새가 난다는 느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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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의 설익은 뿌리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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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만큼, 완전히 익은 열매만큼의 효능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향기도 덜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히 마력적이다.

어서, 어서 먹어야 한다.

*「특성 '불굴'에 의해 정신공격에 면역입니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공격이라니. 아무래도 이 열매의 향기는 마물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게 확실하다.

-역시 세계수군.

펠레리안이 감탄했다.

-축제를 내 눈앞에서 직관할 수 있게 될 줄이야.

'세계수는 그 뭐냐 신성한 나무 아니에요?'

나는 황당해서 물었다.

'신성한 나무가 이렇게 정신공격으로 마물들을 끌어모으는 건 좀 이상하지 싶은데.'

-신성한 것은 신성한 것이고, 신성한 것이 선한 것은 아니지. 악신도 신이지 않은가. 신성한 것이 전부 선한 것이라면 세상에 악덕이 존재할 리 없지.

펠레리안은 신학적인 화두를 던졌다.

사실 그건 알 바 아니고, 세계수가 선할 이유는 없다는 게 확 와닿았다.

'하긴 요정들도 세계수에서 태어났다고 하니까.'

-뭣.

그 열매가 눈앞에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와작.

한입에 씹어 넘겼다.

아, 향만 좋은 게 아니다.

이게 어떻게 설익은 열매일 수 있다는 말인가.

적당히 탄력 있는 과육은 마치 사과처럼 아작아작 씹혔다.

그리고 상큼한 동시에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쭉 퍼졌다.

천상의 열매이다.

*「몸이 굳습니다.」

열매를 먹으면 '멈춘다'고 했나.

정말 그러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안전한 곳에서 먹어야겠다.

열매의 효능이 점차 나타났다.

*「세계수의 설익은 뿌리열매가 몸의 부정함을 태웁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하다.

마치 아버지의 찬장에 있던 싸구려 위스키를 몰래 한잔 들이킨 것 같은 느낌이다.

불타는 듯한 열기가 느껴지더니.

"끄읍."

입을 통해서 새카만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더러운 놈.

놀랍게도 속이 확 시원해졌다.

*「비효율적인 신체 구조가 개선됩니다.」

진짜 세계수의 뿌리열매가 가진 효과는 그 이후에 나왔다.

비효율적인 구조.

모든 생물은 완벽히 효율적으로 진화할 수 없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70세를 넘어가도 치아의 자연 수명은 40년에 불과하다.

기도와 식도가 쓸데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떡을 먹다가도 질식사를 하고는 한다.

나, '크리스탈 더블혼 파이톤'도 비효율적인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독비늘을 쓸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샘은 머리 안쪽에만 있다.

그렇기에 분비 가능한 독액의 양도 제한된다.

이빨은 어떤가. 다른 뱀들과 달리 물어뜯는 게 가능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부러지는 이빨이 나온다.

이빨이 부러지면 다시 다음 진화까지 기다려야 복구되는 것이다.

*「이제 부러진 이는 빠지고 다시 납니다.」

그리고 그 '비효율성'이 개선되었다.

잇몸이 간질간질하다.

상어의 경우에는 이빨이 부러질 때마다 아래서 새로운 이가 돋아난다고 한다.

나 또한 그렇게 된 것이다.

*「열매가 설익었기에 효과가 떨어집니다.」

떨어진 효과가 이 정도라니, 나는 감탄했다.

펠레리안에게 방금 내가 겪은 사실을 설명했더니 그 역시 감탄했다.

-발견이군, 대발견이야. 그래서 축제를 겪어 내고 난 마물이 그토록 강해졌던 건가.

'역시!'

-비효율적인 신체구조의 개선이라니. 역시 세계수의 은총은 놀랍도다.

세계수라는 것이 어쩐지 구리기는 하지만 놀라운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이빨이 새로 돋아나는 정도지만, 만약 설익은 열매가 아니라 진짜 열매를 먹는다면?

그리고 효율적으로 개선되는 것이 정말 강력한 것이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비늘 하나하나마다 작은 독샘이 새로 생긴다면······.

그러면 나는 포옹도 할 수 없고 친구를 사귈 수 없게 되겠군. 그건 문제다.

-다만, 내가 알던 내용과는 확실히 달라. 어쩌면 세계수의 열매가 가진 효능은 이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열매마다 그 지닌바 효능이 다를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열매 콜렉팅의 재미가 또 있겠군.

나는 나머지 열매 한 알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낼름 삼키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활용처가 있을 듯한데.

'이걸로 마물들을 조련할 수도 있겠군요.'

-그 정도로 유혹적인 향기를 뿜으니······ 어쩌면 중독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려 '매혹' 능력을 지닌 열매다.

이런 열매 몇 알만 더 있으면 실내 동물원의 마물들을 완전히 복속시킬 수 있을지도.

하지만 나눠 주기에는 또 아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

'이럴 때는 다 계책이 있죠.'

-계책? 무슨 계책?

*「참격lv2를 사용합니다.」

꼬리로 열매를 뚜걱, 반으로 갈랐다.

하나는 먹고 남은 반 개로는 마물들을 조련한다.

그야말로 뱀갈공명적 면모.

-그냥 헛소리였군.

나는 열매 반쪽을 냉큼 집어삼켰다.

* * *

설익은 열매 반쪽으로 마물을 길들이기.

그 결과를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대성공'이었다.

펠레리안이 설명한 길들이기 방법론의 삼 요소는 '친애, 존경, 공포'였다.

하지만 나는 그 낡은 이론을 보완해 내는 데에 성공했다.

삼 요소가 아니라 사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욕망'을 추가해서.

"헥헥헥헥헥."

혀를 내밀고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마물이 내게 배를 까고 복종심을 표출했다.

그 충성스러운 녀석은 점박이가 아니었다.

점박이는 이미 열매 반쪽의 3분의 1, 그러니까 열매 한 알의 6분의 1을 먹고 늠름하게 나를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박이는 늘 혀가 입 옆쪽으로 삐져나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열매 6분의 1이 그의 지능을 조금 올려 준 것 같다.

지금도 혀는 내밀어져 있지만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니, 그냥 자기 서열이 높아져서 폼을 잡는 걸지도 모른다.

"낑, 낑."

내 앞에서 배를 까고 있는 것은 바로 '연막 흰 여우lv19'.

흰 털 색이 어쩐지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다만, 워낙 도도하게 굴어서 내 한 끼 식사로 떨어질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싹 태도를 바꿨다.

여태까지 살아남은 실내 동물원의 마물들은 지금 모두 철창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여우야.'

내 꼬리에 들려 있는 열매 12분의 1조각.

그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우는 아주 환장하는 눈치다.

'먼저 충성을 맹세해라.'

다시 한번 길들이기를 시전했다.

이제 마력이 부족할 정도.

*「길들이기lv7을 사용합니다.」

*「서리 흰 여우lv19를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업적, '마물의 우두머리'의 격이 상승합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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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의 우두머리]

20마리 이상의 마물을 길들였다.

길들인 마물들에 대한 지배력이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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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실내 동물원에 남아 있는 20여 마리의 마물들을 모두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철창에 갇혀 죽어 가던 불쌍한 마물들을 훌륭히 구조해 낸 것이다.

물론, 원래는 50마리 정도가 있었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으리라.

나는 열매 조각을 흰 여우에게 던져주었다.

여우는 열매를 냉큼 받아먹고 빙글빙글 공중제비를 돌기 시작했다.

잔뜩 흥분한 놈의 몸에서 시야를 가리는 연기가 매섭게 뿜어져 나왔다.

'어우, 거기 너.'

내가 가리킨 곳에는 올빼미 한 한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대고 있었다.

'연기 좀 걷어 내라.'

올빼미는 한참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연기가 자기한테 오고 나서야 퍼덕퍼덕 날갯짓을 했다.

-아주 난장판이군, 난장판이야.

펠레리안의 표현에는 과장이 없었다.

내가 봐도 그랬다.

아기 지네들을 처음 길들였을 때도 느꼈지만, 길들인다는 것은 곧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듣는 녀석은 드물었다.

점박이 정도가 그나마 조금 알아들었지.

'저도 참모가 필요할지도요.'

괜히 원숭이들을 지도하는 현자 오랑우탄이 있던 게 아닌 듯하다.

하지만 말을 할 줄 알고 지능이 있는 마물은 스무 마리 중 없었다.

에이 아주 여기저기 똥 싸고 난리구만.

나는 마물들을 다시 철창 안으로 집어넣었다.

"사아악!"

그러는 데에도 꽤나 시간과 수고로움이 들었다.

내가 제갈공명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난세의 간웅 조조쯤 되는 것 같았다.

어디 순욱 같은 훌륭한 참모가 없으려나.

* * *

"죄송, 죄송 합니다아······."

늙은 오랑우탄은 머리를 땅에 박듯 숙였다.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영장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히 고개를 들어서 우두머리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있는 이들은 없었다.

오랑우탄, 현자는 고개를 들어 걸음을 걷는 왕의 발만 보았다.

저벅, 저벅.

그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는 않다.

우두머리는 언뜻 고릴라 같기도, 혹은 개코원숭이 같기도 했다.

꼭 인간처럼 곧게 서서 다닌다는 점.

그리고 그 팔이 땅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다는 점이 눈에 띈다.

우두머리가 뒤돌아섰다.

등을 보인다는 것은 발언을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오랑우탄이 고개를 들었다.

우두머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은빛 털로 뒤덮여 있는 침팬지.

그렇기에 왕의 이름은, '실버백 아킴스.'

이곳의 우두머리.

"벌레들이, 가져갔습니다. 열매 두 알을······."

뱀이 가져간 것을 보았지만, 오랑우탄은 그리 보고했다.

우두머리가 분노할 것을 알았기에.

"크허엉-!"

마치 천둥소리 같은 포효였다.

귀가 터질 것 같았지만 아무도 감히 자신들의 귀를 막지 못했다.

"벌레들을 친, 다."

왕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전면전의 선포였다.

"그 큰 놈을, 늪에서 꺼내 놔라-."

실버백 아킴스의 적수가 될 만한 마물은 하나뿐이다.

벌레 군단의 우두머리인 늪의 괴물.

하지만 그 마물을 어떻게 늪에서 끌어내라는 말인가.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랑우탄은 죽음이 두려워 그리 답했다.

"그리고, 고릴라는······."

그림자 요정에게 잡혀갔던 고릴라.

그는 뱀을 데리고 돌아왔고, 그 뱀이 오랑우탄이 보관하던 열매를 훔쳤다.

하지만 이 사실이 듣고 우두머리가 분노할까 두려워한 오랑우탄 덕에, 고릴라가 뱀을 데려왔다는 사실은 숨겨졌다.

"돌아왔습니, 다. 어떻게, 할까요."

겁을 먹은 눈빛으로 떨고 있는 고릴라.

그녀는 벌레들이 쳐들어왔을 때 도망치고자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잡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실버백 아킴스가 몸을 돌려 고릴라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얼굴.

그리고 튀어나와 있는 주둥이와 날카롭게 뾰족한 이빨들.

어쩌면 우두머리가 고릴라를 다시 받아주지 않을까.

그녀는 일순간 그런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우두머리는 고릴라에게 덮쳐들었다.

퍼버벅!

고릴라는 아찔한 고통을 느꼈다.

자신을 지나친 우두머리의 입에는 고릴라의 오른팔이 물려 있었고.

바닥에는 그녀의 왼팔이 나뒹굴었다.

"꾸아아아아!"

순식간에 양팔을 잃은 것이다.

피가 죽죽 뿜어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약한 놈, 필요 없어."

실버백 아킴스가 명령했다.

"추방."

* * *

비가 오는 밤.

우어엉.

잠자고 있는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펠레리안이 코 고는 소리인가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는 반지 안에 들어갔다.

그러면 점박이인가.

우어어어엉.

아니다, 바깥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다.

어떤 놈이 재수 없게 울고 지랄이야!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쿵, 쿵, 쿵.

노크 소리까지 선명하다.

점박이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으르렁댄다.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문을 벌컥 열며 침입자를 격퇴하려 했다.

'으아악!'

못 볼 것 많이 본 나였지만 야밤의 방문자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릴라 여사였다.

살아있었구나!

근데 양팔이 사라져 있다.

"우워어어어, 배앰······."

그녀는 엉엉 울고 있었다.

노크를 어떻게 했는지 알아챘다. 이마로 문을 두드린 것이다.

"우어어엉, 어어엉! 들어가도······ 돼······?"

갈 곳 잃은 여성이 비 오는 날 울면서 내 집에 찾아오다니.

마치 드라마 같은 상황.

그게 암컷 고릴라라는 것을 뺀다면 말이다.

일단 들어와.

나는 고릴라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녀는 내게 신의를 지켜 준 좋은 고릴라다.

나는 얼른 포션을 꺼내 그녀의 다친 팔에 뿌렸다.

어쩌면 데쉬난이 가지고 있던 의수의 주인을 찾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 부전자전 >

053.

고블린들의 도움이 없이 포션을 만들기는 몹시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제는 마물들을 부릴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내 말을 이해해 주던 나나루크의 빈자리가 이토록 허전하다.

지금 나나루크는 대수림의 고블린 부족을 정복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알렉산더 대왕처럼 용맹하게.

하지만 아직도 우르오로스라는 이명의 격이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하긴 아직 헤어진 이후로 한 달도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인가.

하여튼, 제법 귀하다고 할 수 있는 포션을 고릴라에게 아낌없이 사용했다.

"꾸어어엉, 가족인데, 우어엉! 팔을······ 뜯어 갔어······!"

고릴라 여사는 팔의 고통보다 무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긴 나한테도 가족으로 받아주겠다, 사랑을 준다 어쩌고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하다.

그리고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고릴라가 이렇게 된 것이 내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 포악한 우두머리가 미친 원숭이기 때문이겠지만.

그때 원숭이 숲에서 싸우다 보니 어느 순간 고릴라의 행방을 놓쳤던 것이다.

"우어어엉."

'그만 울어.'

나는 입을 다물라는 제스쳐를 했다.

나라도 침착해야겠지.

냉정한 모습을 연기할 때는 군터를 흉내 내면 된다.

'여기 머물러도 돼. 원한다면 팔도 달아 주지.'

사실 안 그래도 고릴라 여사가 필요했던 참이다.

이 고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다른 마물에 비해서는 훨씬 명석해 보인다.

점박이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똑똑한 부하가 필요하다.

*「길들이기lv7을 사용합니다.」

내 부하가 된다면!

고릴라 여사가 화들짝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가족으로······ 받아주는 거야······?"

가족이 아니라 부하라니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마워어······."

*「스트롱 암 고릴라lv40을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길들이기lv7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길들이기lv7가 길들이기lv8이 되었습니다.」

스킬의 레벨이 올랐다.

아무래도 제법 길들이기 쉽지 않은 마물이었나 보다.

"누나가······ 되어 주면 되는 건가······?"

'아니라고.'

저번에 엄마 운운했을 때 꼬리로 때려 줬더니, 이번에는 누나 운운한다.

"아, 아니구나아······."

'그래, 너는 내 부하다. 그리고 참모지.'

"으응······."

'음······.'

조금 뒤늦게 알아챘다.

고릴라는 마치 내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대답했다.

'참모야.'

*「스트롱 암 고릴라lv40의 이름을 '참모'로 지었습니다.」

'헉, 그냥 부른 건데.'

"내 이름······ 이야?"

*「스트롱 암 고릴라 참모lv40가 자신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길들인 마물과의 유대가 깊어집니다.」

자기가 좋아한다면 뭐.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겠어?'

"대······ 충······."

설마 길들이기의 효과인가.

어쩐지 점박이가 요즘 내 지시를 잘 알아듣는 것 같더니만.

스킬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다만 대부분의 마물들은 내 생각을 아예 가늠도 못 하는 수준이었다.

고릴라가 지능이 높아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혹은 적성이 높든지.

'이 정도면 0.7 나나루크.'

아쉽게도 나나루크처럼 귀신같이 이해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튼 머리가 똑똑하고 팔이 없는 참모를 얻었다.

'팔이 필요하지?'

이제 팔 없는 참모에게 팔을 달아 줄 시간이었다.

"으응······!"

나는 진열장에 나뒹굴고 있던 의수를 가져왔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거대한 의수.

드디어 이 잡동사니가 주인을 찾은 것 같다.

'아플 수도 있지만 참아.'

"허, 허억!"

의수를 착용하기 위해서는 15cm 길이의 침을 잘린 어깨에 박아넣어야 했다.

나는 고릴라의 얼굴도 창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날 처음 알았다.

* * *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 메시지가 울린 것은.

*「가까운 뿌리에 설익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여태까지 들은 메시지들은 모두 나 자신, 혹은 내 눈앞에 있는 무언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 주변 어딘가에 돋아난 세계수의 뿌리에 열매가 맺힌 것까지 알려 주다니.

그 순간 주변에 있던 마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든 것을 보면, 다른 마물들도 그것을 느낀 것 같다.

자동 반사적으로 마물들의 입에서 침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미 열매 맛을 본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좌백호 우청룡이라는 표현이 있다.

지금 내 상황에 걸맞은 어휘로 고쳐 쓴다면 좌고릴라 우하이에나 쯤이 될 것 같다.

스트롱 암 고릴라 참모lv40는 이제 '스트롱 암'이라는 수식어가 정말로 어울리는 마물이 되어 버렸다.

'가자!'

내가 그리 외치면 곧바로 알아듣고 포효한다.

"가-자아아아-!"

"아우우우우!"

점박이가 지지 않겠다는 듯 하울링하고.

내 휘하에 있는 스무 마물들이 저 구릉 아래로 달렸다.

구릉 아래에는 뿌리 하나가 돋아 있었고, 그 돋아난 뿌리에 열매가 세 개나 맺혀 있었다.

주황색인 것을 보면 아직 설익은 열매.

하지만 그 향기가 구릉 위인 이곳까지 달큰하게 퍼진다.

나는 풀쩍, 고릴라의 등 위로 올라탔다.

어디 그녀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한번 확인해 볼 심산이었다.

아무래도 고릴라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강한 마물이었던 것 같다.

단숨에 부웅 날아올랐다.

그 도약력이 너무 강해, 마치 비행처럼 느껴지는 수준이다.

높이 올라간 만큼 한참을 하강했다.

그 육중한 체중과 더불어, 새로 얻은 팔로 바닥을 기어 다니던 마물들을 내려찍는다.

꽈아아앙!

바닥에 우글우글 몰려든 것은 벌레 떼들이었다.

아무래도 벌레 군단에 속한 마물인 것 같다.

열매가 돋아나자마자 달려왔는데도 벌레들이 이미 뿌리로 접근하고 있었다.

대왕지네 님의 부하들일까.

하지만 이 야생에서 그런 것을 전부 따지고 살아남을 수는 없겠지.

치솟는 흙먼지를 넘어 고양이만 한 여치들이 튀어 올랐다.

──────────────

[검은 톱더듬이 여치lv21]

──────────────

저 징그러운 것들이 다섯, 아니 일곱 마리.

내가 나설까 했었는데 아직은 고릴라를 믿어 볼 만할 것 같다.

그녀는 생각보다 낭만이 있는 전사였다.

즉, 기술명을 외칠 줄 아는 것이다.

"래-리어트으-!"

양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돈다.

저게 래리어트가 맞나.

하지만 쇳덩어리의 회전은 가히 폭풍에 비교할 만한 것이었다.

퍼버버벅!

여치들은 보랏빛 즙을 뿌리며 터져 나갔다.

훌륭하다. 무력에 지력까지 높으니. 삼국지에 비교하자면 의외로 강유 같은 인재일지도 모른다.

이곳에 모인 벌레들의 수는 우리보다 많았지만 그 질은 훨씬 떨어졌다.

내 크루 '동물원의 짐승들'은 벌레 군단의 무리를 쉽게 무찔렀다.

솔직히 조금 안도했다.

그리 센 적들은 없었으니까.

이미 뿌리의 주변에는 내 부하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그런데 그때, 고릴라가 뿌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거침없이 뿌리를 기어오르던 일곱발 도마뱀lv16이 갑자기 열매 하나를 물어 챈 것이다.

고릴라 참모가 놈의 꼬리를 붙잡았다.

"안······돼!"

콰앙!

참모는 도마뱀의 꼬리를 잡은 채 내려쳤다.

입에서 튀어나온 열매를 점박이가 물어 챘다.

점박이는 참으로 기특하게도 그 열매를 씹어 삼키는 대신 내게 가져왔다.

그리고 고릴라는 감히 먼저 침을 바르려던 도마뱀에게.

"벌이야······!"

깡! 하고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도마뱀은 머리가 움푹 들어간 채 후다닥 물러났다.

안 죽는 건가 저거.

어쨌든, 고릴라는 상벌이 확실한 스타일의 참모 같았다.

이 정도면 훌륭한 인재 등용이었다.

열매 세 개가 내 앞에 놓였다.

참고로 동물원의 짐승들 크루는 독재 체제다.

우두머리가 모든 열매의 소유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벌레 군단과 영장류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체제에 익숙한 고릴라는 내가 열매 전부를 독식하는 데에 아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기꺼운 일이다.

열매 하나를 우선 내가 먹는다.

잠시 몸이 굳었지만 아무도 열매를 건드리지 않는다.

*「세계수의 설익은 뿌리열매가 몸의 부정함을 태웁니다.」

정화의 효과는 이제 딱히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효율적인 신체 구조가 개선됩니다.」

다만 이것은 확실한 효과가 있다.

*「독샘이 튼튼해지고, 더 많은 양의 독액을 분비할 수 있게 됩니다.」

머릿속에 있는 독샘이 움찔거린다.

음, 이번에 먹은 열매도 저번과 똑같은 효능을 보였다.

그리고 하나는 아공간에 넣는다.

'이건 내가 활용하겠다.'

고릴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경악시킨 것은 그다음으로 한 행동이었다.

나는 남은 열매 한 알을 내밀었다.

그리고 꼬리로 반을 뚝 잘라서 고릴라에게 던졌다.

'반은 네가 먹고, 나머지 반은 네가 알아서 공적대로 애들 나눠 ······.'

"꾸어어어어엉!"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고릴라가 울부짖었다.

"우어어어! 고마-워-!"

'그렇게 감동할 정도인가.'

아무래도 원숭이 무리는 이름만 가족이지 노동 착취에 가까운 형태였음이 분명하다.

"정말······ 고마······워!"

'그래그래.'

점박이가 아쉬워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고릴라의 활약이 높았다.

-거참 세 개 중 하나 주고 엄청나게 생색내는구나. 혼자 두 개를 홀라당 까 먹어 놓고.

'하나는 내가 먹을 거 아닙니다.'

나는 펠레리안에게 그 점을 확실히 했다.

고릴라에게 나머지 마물들의 통솔을 맡겼다.

'여기서 대기해. 내가 돌아올 때까지.'

"대장······은?"

'저 바위지대로 간다.'

꼬리를 들어 바위지대를 가리켰다.

"크고 멋진 뱀 있는 곳······ 대장, 죽어."

'괜찮아.'

"왜 가?"

'가족을 만나러 간다.'

그렇게 대답했다.

그 한마디가 고릴라 여사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린 것 같다.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무운······을!"

그리 비장하게 말할 줄이야.

마물들이 나를 배웅했다.

나는 바위지대로 향했다.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거미 추적자들이 붙지 않았다.

아공간에서 열매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래, 지난번에는 아버지가 나를 보고 갑자기 도망쳤다.

나는 반드시 아버지의 등 뒤에 타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열매를 준비했다.

-기대가 되는군.

펠레리안마저 흥분했다.

'폴라리스 서펜트' 그것은 대마도사조차 흥분시키는 희귀한 마물이었다.

마물들의 정신을 홀리는 향기를 뿜는 열매.

그것이 내 아버지도 붙잡을까.

바위지대에 도착했을 때였다.

한참 찾아보았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아예 떠나 버렸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바위 더미 속에서 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또 한 번 보게 되는 극적인 등장이다.

──────────────

[폴라리스 서펜트lv???]

──────────────

역시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시고.

"사아악!"

나는 아버지에게 외쳤다.

당신의 아들이 여기 돌아왔다고.

맛좋은 세계수의 열매를 가지고!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보지 않았다.

또다시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를 본다.

깜짝 놀랄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네, 어미는······?」

아버지는 말을 했다.

아니, 저게 말인가?

-사념파군! 대단해! 역시 상위종이야!

구강구조 상 제대로 말하기는 힘든 게 우리 뱀들이다.

무협지에 나오는 전음이나 육합전성 같은 걸지도 모르지.

나는 그 재주를 따라 할 수 없었으니 그저 몸짓을 동원해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엄숙한 표정으로, 꼬리를 들어 목 앞에서 슥슥 그었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다.

「휴우.」

어, 잠깐.

저거 안도의 한숨 아닌가.

내가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까.

갑자기 아버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눈가에 반짝이는 것은 분명 눈물.

툭, 투둑.

바닥에 얼음 조각이 떨어진다.

무려, 얼음으로 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다.

뱀은 눈에 막이 있어서 울지 못하고 말고는 그 순간부터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너는······ 내 자식?」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맞습니다.

나는 열매를 치켜들었다.

아버지가 천천히 그 머리를 내게 숙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아버지의 머리.

열매에 관심을 가진 걸까.

빈틈이 생겼다.

사실 내게는 망설였던 계획이 하나 있었다.

레벨이 8로 오른 '길들이기'를 시전해 볼까 하는.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아마 통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그냥 잠깐만 고민했을 뿐이다.

*「폴라리스 서펜트가 '길들이기lv10'를 사용했습니다.」

'······.'

설마 저쪽에서 선수를 칠 줄이야.

*「특성 '불굴'에 의해 정신공격에 면역입니다.」

나한테는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미안······.」

명백한 당황이 느껴진다.

에라 모르겠다!

*「길들이기lv8을 사용합니다.」

*「'폴라리스 서펜트'를 길들이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펠레리안이 상황을 보고 한마디 던졌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군.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 * *

뱀이 바위지대로 떠나고.

동물원의 짐승들에 속한 마물들은 모두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렸다.

마물들을 이끌 우두머리라면 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을 먹여 살릴 수 있어야 한다.

뱀은 그런 면에서 훌륭한 우두머리였다.

먹이를 잘 챙겨 준다는 점에서 마물들은 뱀을 존경하고 또 친애했다.

덩치는 작은 주제에 여태까지 만난 모든 마물에게 승리했다는 점에서, 마물들은 뱀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뱀은 '크고 멋진 뱀'을 만나러 갔다.

"컹, 컹."

점박이가 고릴라에게 짖었다.

그러자 고릴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에, 자살과, 다름없어어······."

마물들이 보기에 뱀은 죽으러 간 것과 다름없었다.

'크고 멋진 뱀'.

실버백 아킴스와 늪의 괴물보다야 약하지만, 그 두 강자들마저 함부로 대적하지 않는 마물이다.

누구보다 거대하고, 끔찍한 파괴광선을 지녔다.

뱀은 가족을 만나러 간다고 말했지만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 고릴라마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컹!"

"구하러······ 가자고?"

점박이의 제안에 고릴라는 고개를 저었다.

"대장이 말했다······ 돌아오겠다고."

고릴라는 기다리기로 했다.

"가족의 약속을······ 믿는다."

새 가족이, 새 우두머리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어느덧 캄캄한 밤이 되었다.

모두가 기다리다 지쳐 주저앉아 있을 때였다.

드드드드-

땅이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일까.

혹은 새로운 세계수의 뿌리가 돋아난 걸까.

"아우우우우!"

점박이의 울음소리가 마물들을 깨웠다.

"아우우우우우!"

기쁨의 하울링이다.

그걸 눈치챈 고릴라도 얼른 점박이의 옆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고릴라 역시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꾸워어어어어-!"

거대한 뱀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것뿐이라면, 오히려 두려워할 일.

하지만 놀랍게도 그 거대한 뱀의 머리 위에 작은 뱀 한 마리가 올라가 있었으니.

"배앰-! 대자아앙!"

대장이 크고 멋진 뱀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 출신성분 1의 대역전 >

054. 출신성분 1의 대역전

아버지, 폴라리스 서펜트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 역시 작은 리틀 그린 스네이크로 태어났을까.

혹은 나처럼 흰 뱀으로 태어났을까.

그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에서 유생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뱀인 만큼, 시작부터 창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 빈약하고 작은 실뱀으로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어난 이후에는 형제들과 먹이를 다투면서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삼촌이나 고모 몇을 죽이고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새끼 뱀들의 포악함이란 나 역시 본 바 있었으니까.

그리 살아남은 뒤에는 부모의 곁을 떠났을 것이다.

펠레리안의 말에 따르자면, 부성애나 모성애가 강한 뱀은 별로 없다고 한다.

자식을 업어 키우던 지네와는 다르다.

메두사 맘만 해도 최소한의 양육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아마 군터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가 어머니의 두피에 매달리기에는 너무 커졌다면.

어머니는 우리를 야생으로 내보내고 다시 대머리로 돌아갔으리라.

아버지는 성장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뱀들은 평범한 야생동물과 다를 바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자이언트 그린 스네이크가 평범한 뱀 마물이 겪는 마지막 진화라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느 순간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흰 비늘은 대수림에서 눈에 띈다.

그런 마물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

그 몸체가 지금만큼 거대해지고.

입에서는 광선을 뿜어 적들을 태울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아마도, 어느 숲 하나를 지배하는 최강의 마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났겠지.

나는 그 로맨스가 어땠을지 상상해 보았다.

뱀들의 로맨스.

부모님의 로맨스.

'음······.'

사실 로맨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전생의 부모님은 어떻게 만났었다고 했지?

아, 기억났다.

아버지에게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왼손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 것 같았는데, 아버지는 그 장애를 늘 부끄러워했다.

그는 늘 실리콘으로 만든 가짜 손가락, '의지'를 끼고 다녔다.

어머니와 처음 만나서 좋은 관계를 쌓아 가고 있었을 때.

아버지는 혼자 속이 썩어 갔다고 한다.

세 번째 데이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손가락의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당차고 예쁜 어머니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검지와 중지가 없다는 것을 들키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두려웠으리라.

아버지는 그래서 늘 어머니의 왼쪽에서만 걸었다.

오른손으로만 손을 잡고, 맞은 편에 앉을 때면 왼손을 품 안에 감추고, 주먹을 쥐고 있으며.

용케도 들키지 않았다.

아니, 그리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행동거지에서 어색함을 느꼈다.

나이를 드시고도 그랬지만 원체 여장부인 타입이었다.

그녀가 아버지의 왼편에 선 순간, 아버지가 어색하게 다시 어머니의 왼편으로 움직였다.

그것이 반복되자, 어머니는 거침없이 아버지의 왼손을 움켜잡았다.

딱 걸렸어.

이거 뭐야!

라고 소리치는 대신 어머니는 웃었다고 한다.

'뭐야. 사실 유부남이어서 결혼반지라도 숨기고 있는 줄 알았네.'

'아, 아하하······.'

'앞으로 나한테 뭐 숨기면 죽어요.'

그 대사에서 어떤 사랑스러움을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결혼까지 갔다.

대신, 어머니의 성격은 보통이 아니어서 결국 아버지는 꽉 잡혀 사는 운명을 맞이했다.

불같았던 사랑은 결국 불같은 불화로 이어졌다.

어쩌면 (현)아버지도 비슷한 로맨스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메두사 맘이 인간 영웅에게 꽥 가셨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안도의 한숨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그 직후 얼음으로 된 눈물을 흘렸지만.

싸우고 헤어졌다고 하니 그 내막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와 길들이기를 한 수씩 교환하고 나서 서로 마음이 통한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등에 태우고 돌아왔다.

그 기분은 정말 끝내주는 것이었다.

지상의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감각.

비행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거대한 아버지가 나를 탄탄히 받쳐주었으니.

아버지가 실내 동물원에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었으니, 아버지는 절벽 위의 집 바깥에 머물렀다.

그리고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아버지는 잠을 잘 때마다 어디론가 휙 사라졌다.

텔레포트도 아니었고 투명화도 아니었다.

나도 자러 들어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나와 보면 어느새 아버지가 돌아와 있었다.

내 일과에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추가되었다.

물론 하하호호 부자지간의 담소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뱀으로서의 전투기술을 전수받았다.

'이렇게?'

나는 꼬리를 허공에 후려쳤다.

'꼬리치기'의 연습이었다.

평범한 뱀은 '꼬리치기'라는 기술을 쓰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마물만의 기술일 것이다.

'맞아요?'

나는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이 아니라는 듯한 눈치다.

그는 과묵한 타입이어서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시범을 보여 주었다.

큼지막한 꼬리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척추부터 웨이브를 타듯 꿀렁 움직이더니, 꼬리로 허공을 후려친다.

그 파동이 꼬리 끝으로 이어지면서 일순간 채찍처럼 가속했다.

쩌어엉!

천둥소리나 다름없었다.

꼬리 끝이 타격점에서 휘어지는 순간, 분명 음속을 돌파한 소닉붐이 일어났다.

엄청난 기술.

역시 폴라리스 서펜트가 되기까지 외모 덕만 본 것은 아닌 듯했다.

나는 아버지가 보여 준 기술을 여러 번 반복했다.

점차 감을 잡아 가는 것 같다.

그리고 드디어, 꼬리를 허공에 후려쳤을 때 원하던 소리가 났다.

파앙!

역시, 중요한 것은 몸에 웨이브를 주는 거구나.

내 꼬리를 채찍처럼 활용하는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파앙! 팡!

나는 신나게 팡팡 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물끄러미 나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스킬, '꼬리치기lv1'을 습득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들은 실제 스킬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배운다고 무조건 스킬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듯 꼬리치기 같은 스킬이 족족 생겨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뱀이 배우기 쉬운 스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즉,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뱀에게 뱀의 기술을 전수받고 있는 것이다.

이 꼬리치기는 우습게 볼 수 없는 스킬이다.

*「독비늘lv2를 사용합니다.」

*「꼬리치기lv1을 사용합니다.」

파앙!

날카로운 사금파리를 붙여 둔 채찍에, 독까지 발라 휘두르는 것과 마찬가지.

물어뜯기 외에도 훌륭한 근접 공격 수단이 생겼다.

그다음에 또 배울 것은······.

역시 파괴광선이지.

나는 아버지에게 파괴광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졸린 듯 크게 하품하고 드러누웠다.

이럴 때는 어떻게 졸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천뢰령을 써 보면 혹시 일어나시려나.

-제법 아비 노릇을 하는군.

펠레리안이 멍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어쩐지 생각에 깊이 잠긴 눈치다.

자식 생각이 나나?

내가 알기로 그는 자식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의외네요.'

-뭐가 말이냐.

펠레리안과 제법 오래 함께했다.

대충 그의 성향을 눈치채기도 했다.

'저는 노인장이 아버지를 슥삭 해치우라고 할 줄 알았는데.'

비정한 대수림에서 나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지금 저 폴라리스 서펜트가 방심한 상태니 해치워서 레벨을 올리고 진화해라.

그런 제안을 할 것마저 예상했다.

-그것은 자살행위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마 독 내성도 엄청 높으실 거고.'

-아니 만약에 정말 네 아비를 해치운다면 말이다.

펠레리안은 조용히 읊조렸다.

-곧 축제가 시작된다. 그러면 이 지역에서 나갈 수도 없을 것이며, 그 원숭이와 벌레의 네임드 마물도 날뛰겠지. 네가 또 한 번 더 진화하더라도 그놈들을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도 많이 강해진 것 같은데, 펠레리안은 확신하며 말했다.

-다만 네 아비라면 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음, 그럴지도.

아직 내 아버지, 폴라리스 서펜트가 얼마나 강한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사실, 그 원숭이들이나 벌레 군단의 우두머리가 얼마나 센지도 모른다.

-문제가 있다면······.

'문제요?'

-네 아비가 그리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지.

나는 그런 생각 못 해 봤는데.

돌아보니 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쉽게 피곤해하는 것 같긴 하다.

저번에 설익은 열매 하나를 줬더니 좀 기운을 차린 것 같지만.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펠레리안에게 물으려던 참이었다.

츠츠츠츠츠-

순간, 비늘이 전부 곤두섰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여서, 천천히 그 몸을 일으켰다.

돌아보니 한가로이 쉬고 있던 다른 마물들도 전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말하기가 무섭게 시작되는군.

원래도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었다.

그리고 하늘의 한 지점부터 그 색이 진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물감이 번지듯, 선명한 보랏빛이 하늘을 따라 흘러내린다.

지상으로, 사방으로.

*「공기 중의 마성 농도가 짙어집니다.」

-지역이 마경화 된다.

마경이라. 어울리는 표현이다.

고릴라가 내게 다가왔다.

"대장······ 시작됐다······."

한때 원숭이들 사이에서 간부 노릇을 했던 고릴라다.

들어 알고있는 것들이 있었다.

"현자가, 말해 줬다······ 현자는 아주 오래 살았어······."

그 오랑우탄은 이미 몇 번의 축제를 몸소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살아남았다니 제법이군.

데쉬난의 기록에도 적혀 있지 않은 생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한 무리만, 살아남았어."

절벽 위이기에 주변이 널리 보였다.

저 멀리 경계선 같은 게 빙 둘러지기 시작했다.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돔 같은 마경이 형성된 것이다.

*「마경에 세계수의 뿌리가 솟아오릅니다.」

드드드드-

그리고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보이는 숲의 중앙 구역에 거대한 뿌리가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 그 순간이었다.

돋아나는 뿌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 뿌리들이 서로 얽히고 뒤엉켜 거대한 나무처럼 자라난다.

그리고 그 뿌리 틈 사이로 움직이는 것들이 있었다.

"수호자들, 아주 세다. 빛나는 열매, 지켜"

저곳에 빛나는 열매가 맺히는 건가.

맺히는 열매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열매를 위해 수많은 마물들이 싸울 것이라는 것은 눈치챘다.

*「마경에 존재하는 무리가 셋입니다.」

영장류들, 벌레들, 그리고 우리 동물원의 짐승들······!

*「왕관의 열매 세 알이 맺힙니다.」

그리고 절벽에서 가까운 곳에 뿌리 하나가 돋아났다.

콰드드득!

그 돋아나는 속도가 일반적인 식물의 수준을 넘어섰다.

열매가 맺히는 속도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열매에는 노르스름한 문양이 기하학적으로 번져 있다.

*「무리의 우두머리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동물원의 짐승들'의 우두머리는 이미 난데?

'가자!'

나는 잽싸게 고릴라의 어깨에 올라탔다.

절벽에서 멀지 않다고 해도 혹시나 다른 마물이 홀라당 먹어 치우면 곤란한 일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이런 순간을 기다린 마물들이 있는 것 같았다.

"개코원숭이들이다-!"

고릴라가 경고했다.

얼굴이 길쭉한 원숭이들이 저 숲 아래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특공대 같은 녀석들인지 제법 움직이는 게 빨랐다.

'괜찮아, 우리가 더 빨라.'

하지만 새로 돋아난 뿌리는 전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도 일어나서 나와 함께 달리니.

어라.

아버지가 나와 고릴라보다 더 빠르다.

게다가 키가 커서 높이 돋아난 뿌리의 열매를 채가기에도 훨씬 쉬울 것이다.

내가 뿌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뿌리 맨 위에 돋아난 열매를 따 버렸다.

-어이고!

'설마······ 하극상인가!'

물론 폴라리스 서펜트가 나보다 훨씬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생긴 것도 나보다 잘생기고 아주 거대하다.

또한 명성도 널리 퍼져 있어서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물이 없다.

달려오던 원숭이들도 움찔 쫄아서 속도가 느려졌을 정도니까.

그래도······.

동물원의 짐승들은 내가 만든 무리인데.

이대로 아버지에게 우두머리의 자리를 홀라당 빼앗기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열매의 꼭지를 물고 머리를 내렸다.

그리고 내 앞에 열매를 떨어뜨려 주었다.

"사아악!"

나는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퇴근길에 통닭을 사 온 아버지처럼 무심하게 열매를 던져놓는 모습에 효심이 들끓어 오를 지경이다.

먹지 않는 것이 불효이리라.

──────────────

[왕관의 뿌리열매]

──────────────

재미있는 이름이구나.

나는 열매를 와작 삼켰다.

*「포식lv7을 사용합니다.」

오, 포식이 저절로 발동되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임시 이명, '우두머리'를 얻었습니다.」

······끝인가?

아니, 임시 이명을 얻었다고 했다.

이명의 효과를 제대로 알아봐야겠지.

──────────────

[우두머리(임시)]

마물들의 무리를 통솔한다.

세계수의 열매가 떨어지기 전까지 무리가 흡수하는 마성을 공유한다.

──────────────

어떻게 보면 평범한 설명.

하지만 마지막 문장의 진가는 곧 알 수 있었다.

피이이잉-

아버지의 입가에 빛무리가 모이고.

광선 한 줄기가 발사된 후.

달려오던 개코원숭이 무리가 일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리자.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

파티사냥, 대리사냥, 자동사냥.

어떻게 표현하든.

이건 아빠찬스가 맞다.

< 아니면 아빠 불러올까 >

055.

흡수한 마성의 공유.

그것을 간단히 번역해 보면 파티 내 경험치 공유.

'왕관의 열매'를 먹으면서 나는 '우두머리'라는 임시 이명을 얻게 되었다.

원래도 크루의 대장은 내가 맞았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릴라 참모.'

"응, 대장······."

'사형!'

검투사의 죽음을 선고하는 시저처럼.

나는 꼬리를 들어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고릴라가 의수를 치켜들었다.

놀랍게도 의수를 착용한 순간, 그녀는 새로운 스킬을 얻었다.

'철권lv5'

자이언트 긴다리 원숭이에게 쇠주먹이 날아갔다.

"잘가아······ 옛, 가족."

퍼엉!

주먹이 육신을 때렸다기에는 믿기지 않는 소리가 울렸다.

긴다리 원숭이의 몸통이 아예 터져 나갔다.

고릴라 참모의 눈가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녀는 프로페셔널한 마물이었다.

"우어어어!"

과거의 가족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원숭이 마물들에게 손을 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적 한 놈을 터뜨려 죽이자마자 마치 날아가듯 뛰어올랐다.

그리고 원숭이들의 틈에 떨어져 마구 날뛰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는 원숭이들의 무리와 싸우고 있었다.

우두머리라는 이명을 얻고 나서 벌이는 첫 전투였다.

절벽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뿌리가 돋아나더니 열매가 맺힌 것이다.

원숭이들 역시 그 열매를 노리고 찾아왔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메시지가 울렸다.

고릴라가 흡수한 마성이 내게 공유되는 것이다.

열매를 먹으면서 새로 얻은 임시 이명의 효과였다.

──────────────

[우두머리(임시)]

······

무리가 흡수하는 마성을 공유한다.

──────────────

'마성을 흡수한다'라는 말에 흥분한 나는 그 작용 방식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 알아낸 것은, 내 부하가 마물을 죽일 때 얻는 마성의 5분의 1가량이 내게 흡수된다는 것.

완전히 정확한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그 정도 되는 것 같다.

몇 차례의 실험 끝에 알아낸 사실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싸우는 것은 고릴라뿐만이 아니다.

데쉬난의 집에 갇혀 있었던 많은 마물들이 원숭이들을 상대로 아낌없이 그 흉포함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이 적을 죽이며 흡수하는 마성들.

그 일부분이 내게 공유되고 있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세금, 세금을 내라 부하들아.

그때, 아울베어 한 마리가 내 부하들을 두들겨 패며 올라오는 것을 목격했다.

래피드 스컹크가 독한 가스를 뿜으며 저항했지만, 큼지막한 주먹에 얻어맞아 튕겨나간다.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 양손을 깍지끼고 들어 올리는 놈.

*「식심의 도약lv2를 사용합니다.」

아울베어의 가슴에 새빨간 구멍이 뚫렸다.

일격필살.

방심한 마물이라면 이렇게 한 방에 쓰러뜨리는 것도 가능하다.

*「아울베어lv21을 처치했습니다.」

*「마성을 흡수합니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내가 부하들로부터 마성을 공유받듯.

*「마성을 무리에게 공유합니다.」

내가 사냥을 통해서 흡수한 마성을 부하들에게 공유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공유 비율은 생각보다 세다.

절반 이상의 마성이 내 무리에 소속된 부하들에게 골고루 분리된다.

슬슬 레벨업에 필요한 마성의 양이 늘었다는 점에서 꽤 큰 공유비다.

즉, 서로 골고루 성장하게 되는 구조라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이끄는 무리의 수가 많아질수록 공유받을 수 있는 마성 역시 많다.

다만 문제는 우리 동물원의 짐승들 크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다.

벌레 군단의 경우에는 수천 수만 마리의 벌레가 속해 있는 것 같고, 원숭이들도 아울베어 같은 마물들을 영입해 수백 마리 이상의 군집을 꾸렸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흡수하는 마성의 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다만 아마 두 무리의 우두머리 전부 네임드에 준하는 마물 같으니 쉽게 레벨이 올라가지는 않겠지.

무리를 키울수록 우두머리는 유리하고.

우두머리가 강할수록 소속된 마물들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구조다.

마치 잘 설계된 게임 같다.

세계수라는 것의 의지가 느껴진다.

강한 마물들을 끌어들여 싸움 붙이려는 의지.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수 역시 한 마리의 마물 같은 걸지도 모르겠네.

하여튼.

구조적으로 세 무리 중 가장 불리해야 할 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동짐 크루의 최강자는 우두머리인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우리 폴라리스 서펜트가 사실 제일 세다.

'꼬리치기 해 주세요!'

아버지는 꼬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큼지막하게 솟아오른 세계수의 뿌리를 기어오르고 있는 원숭이들.

놈들을 후려쳤다.

쩌어어엉!

천둥소리가 울렸다.

꼬리에 직접 닿은 마물들은 으깨진 체리처럼 빨갛게 자국만 남았다.

그 큼지막한 세계수의 뿌리가 부러졌으며, 그 충격으로 튕겨 나간 마물들은 내 다른 부하들이 처리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마성을 공유받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거거든.

아빠찬스가 너무 짜릿하다.

-잘하면 이번 보랏빛 연회 동안 새로이 진화할 수도 있겠구나.

그다음 진화로 나도 서펜트가 될 수 있을까?

혹은 뿔이 늘거나 다른 방향으로 진화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무척이나 기대되는 일이다.

"열매-를 챙겨어······!"

고릴라가 내 뜻을 전파해 주었다.

이곳에 나타난 뿌리는 무려 다섯 개였다.

각 뿌리마다 자그마한 열매가 몇 개씩 났다.

저번에 먹었던 설익은 열매와 비슷한 효과를 지닌 것이다. 몸의 비효율적인 구조를 개선해 주는.

하지만 내가 노리고 있는 열매는 다른 것이었다.

-가장 오른쪽 뿌리 위다.

높은 뿌리의 맨 위에 달린 열매가 있다.

혼자서 범상찮은 푸른색을 띠는 열매였다.

──────────────

[긴급기동의 뿌리열매]

──────────────

정확히 무슨 효과를 지녔을지는 먹어 봐야 알겠지만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뿌리를 타고 오르는 것은 우리보다 원숭이들이 전문이다.

전투력이 높지 않은 안경원숭이들이 잽싸게 오른쪽 뿌리를 기어올랐다.

놈들의 목적 역시 저 열매를 채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안경원숭이들이 푸른 열매를 탈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열매가 스스로 '긴급기동'을 했기 때문이다.

-또 옆 뿌리로 옮겨 갔어!

깜빡, 점멸하듯 사라지더니 그 왼쪽의 뿌리 위로 움직였다.

즉, 텔레포트를 하는 열매였다.

챙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지금만을 기다려 왔다.

올빼미야!

"사아악!"

실내 동물원에는 놀랍게도 비행 마물이 있었다.

나는 하늘을 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지만, 이럴 때마저 그걸 변명으로 내뺄 수는 없을 터.

──────────────

[라이온 올빼미lv12]

[특성]

[겁쟁이]

──────────────

멋진 사자 갈기가 달렸다는 것을 빼면 쓸모가 없던 겁쟁이 올빼미.

겁이 많아서 금방 복종하고, 그 덕에 살아남은 올빼미.

드디어 녀석이 활약할 때가 찾아왔다.

나를 잡아채서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순식간에 휘익 올라갔다.

'너 잘못 떨어뜨리면 죽는다.'

"꼬로로록, 꼬로로로록!"

어쩐지 신나 보이는 울음소리다.

내가 순식간에 날아오르자, 역시 원숭이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물들의 근력은 일반적인 짐승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놈들이 돌팔매질을 하자, 손을 떠난 돌멩이들이 쐐액 거리면서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더 높이 올라가!'

꼬리를 들어 위를 가리키자 올빼미가 알았다는 듯 고도를 높인다.

순식간에 나무뿌리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지금!'

올빼미가 발톱의 힘을 풀었다.

나는 다시 중력의 손아귀에 이끌려 추락했다.

뱀에게는 날개가 없으니 제대로 활공할 수 있을 리 없다.

오직 올빼미의 감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올빼미는 첫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강 궤도를 맞춰 주었다.

다만, 아주 조금.

조금 부족했다.

'여기서 그냥 떨어지면 죽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참 가관이겠군.

펠레리안이 아니꼬와서라도 추락사할 수는 없었다.

*「초급원소마법: 바람lv3을 사용합니다.」

최대한의 출력을 이끌어 내서 불러낸 돌풍.

그것이 내 몸을 앞으로 밀어 냈다.

부족한 한 치가 메워졌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내 역량.

나는 공중에서 몸을 쫙 폈다.

푸른 열매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연속적으로 순간이동 할 수는 없는 것 같더니만.

팍.

열매를 물어 챘다.

동시에,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터엉, 텅!

나뭇가지처럼 돋아난 잔뿌리들이 완충재 역할을 했다.

나는 구르듯 바닥에 착지했다.

주변에는 원숭이들이 가득했다.

이 나무로 옮겨진 푸른 열매를 얻고자 몰려온 것이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열매를 얼른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자, 다들 덤벼라.

"사아악!"

"우끼이익!"

하지만 원숭이 중 용맹한 자는 없었다.

놈들은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열매를 탈취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바로 물러나는 것이다.

상황판단이 빠르다.

역시, 우두머리가 '열매를 탈취해라'라며 시킨 것이 분명했다.

"대자앙!"

"왕! 왕!"

고릴라와 점박이가 달려와 내 곁을 호위하듯 했다.

든든하구나.

원숭이들이 물러나자 그들도 긴장을 풀었다.

휴우, 멋진 싸움이었다.

-내 계책이 또 한 번 맞아들어 갔군.

펠레리안이 흐뭇해했다.

어제 왕관의 열매를 먹고 우두머리가 된 뒤, 펠레리안은 마치 책사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축제 기간 동안 열리는 열매가 말도 안 되는 효능을 보이는 것을 보고 눈이 돌아간 것이다.

-역시 세계수의 힘은 전능하구나.

'원숭이들, 별것 아니던데요.'

-이놈들은 주력이 아닐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레 군단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원숭이들의 절벽 위에서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오늘 아침, 원숭이 숲에서 은색의 원숭이들과 강해 보이는 녀석들이 늪지대를 향해 출발한 것을 보았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다른 쪽에 돋아난 뿌리들을 향해 우리가 출발한 것이다.

'참모.'

"응, 대장······."

'그 은색 원숭이가 슬슬 우리를 노리지 않을까.'

원숭이 무리의 왕.

슬슬 놈이 심기가 상할 때도 됐다.

"그럴지도······ 왕이 찾아오면, 도망, 가야 해······."

고릴라의 표정이 공포로 물들었다.

우리 쪽에 아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로 겁을 먹다니.

얼마나 센 놈인지 구경 한번 해 보고 싶다.

-힘의 균형이 중요하다.

펠레리안이 끼어들었다.

-그 원숭이의 호적수는 늪에 있다는 벌레 마물이겠지. 우리는, 아니 너는 그렇기에 힘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해야 한다.

놀랍게도 펠레리안이 설명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전략 중 하나와 비슷했다.

-너무 날뛰면 안 될 것이다. 두 무리가 서로 싸우는 지금이 가장 좋으니, 서로가 물어뜯고 소모되도록 놔두는 것이 좋겠지

어부지리의 계책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또한 너무 약해 보여서도 안 될 것이다. 그리하면 단번에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품고 찾아올 수도 있으니.

펠레리안은 손가락을 들어 무형의 지도를 삼 등분 하듯 그었다.

-패권을 셋이 나눠 가지는 것이다.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럴 수가, 이곳의 제갈량은 내가 아니었던가.

큼지막한 머리를 끄덕이는 펠레리안을 보며 감탄했다.

'대갈공명.'

-헛소리 말고, 빨리 열매의 효능이나 알아봐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나는 데쉬난의 집으로 들어가 아공간에서 열매를 꺼냈다.

새파란 것이 무슨 맛일지 궁금하다.

와삭.

한입에 씹어 삼키자.

*「'긴급기동의 뿌리 열매'를 섭취했습니다.」

달콤한 맛과 함께 그 효능이 드러났다.

*「열매에 의해 임시 스킬 '긴급귀환lv20'을 획득합니다.」

스킬?

이름은 언뜻 평범해 보여도 무려 20레벨 스킬이다.

처음 얻은 20레벨 스킬의 효과가 어떤지 살펴보았다.

──────────────

[긴급귀환lv20(임시)]

하루에 한 번, 스킬을 사용하는 즉시. 무리가 있는 곳으로 텔레포트 할 수 있습니다.

──────────────

어어!

펠레리안에게 스킬을 설명했다.

-20레벨의 긴급귀환이라고! 믿기지 않는군.

'원래 있는 스킬이에요?'

-원래는 마법의 일종이다. 공간 이동 계열의 마법이다. 내가 텔레포트가 얼마나 고위의 마법인지 설명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펠레리안은 그리 말했었다.

순간적으로 먼 거리를 이동하는 마법은 펠레리안의 말에 따르면 몹시 어려운 마법이라고 한다.

-긴급귀환은 마경에 떨어진 마도사들이 안전한 귀환을 위해 개발한 마법이야. 다만 준비 과정이 족히 하루는 걸리는데······ 즉시 돌아올 수 있다니.

'확실히······.'

-여벌의 목숨을 하나 더 가지게 된 것과 다름없구만.

실로 그러했다.

무리와 함께 위험에 처한다면 쓸 수 없겠지만 나 혼자라면 언제든 몸을 뺄 수 있다.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목이 썩둑 잘리지 않는다면, 군터와 마주쳐도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발상이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고릴라야!'

쉬고 있던 고릴라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왜애······."

'너네 대장이 간 늪지대, 여기서 많이 먼가?'

듣자 하니, 점박이를 타고 전속력으로 가면 금방 도착할 것 같다.

"정말 갈 거야······?"

내 계획을 들은 고릴라가 무서움에 떨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곳을 지키고 있으라 말해 줬다.

"조심해······ 옛날 대장도······ 벌레도."

그 네임드 마물들이 얼마나 강한지.

놈들을 잡아먹으면 과연 얼마나 맛있을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둘이 맞붙을지도 모르는 지금이 기회였다.

'점박아!'

"왕!"

나는 점박이의 등 위에 올라탔다.

자고로 제갈공명보다 뛰어난 전략가인 손무 선생의 손자병법에서 '지피지기, 백전불태'라 하였다.

적을 알아보기 위해, 나는 점박이와 함께 달렸다.

* * *

'너는 먼저 돌아가 있어.'

내 얼굴이 사탕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점박이가 계속 핥아 댔다.

코를 툭 쳐주니 점박이가 다시 뒤돌아서 떠났다.

아직 늪지대에 진입하지 않았지만 나는 진작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 위장을 하고 잠입해야 함도 있거니와.

콰앙- 쾅!

천지를 진동하며 울리는 이 굉음은 분명 싸움의 소음이었다.

원숭이 대장과 벌레 대장이 싸우고 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기 있다!'

갑자기 한 마리 은색의 침팬지가 훌쩍 뛰어올라 나무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점프력이 보통이 아니군.

마침 잘됐다 하며 눈에 힘을 줘 보았다.

──────────────

[실버백 침팬지 아킴스lv???]

──────────────

덩치는 평범한 인간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그 상대일 벌레 측은······.

그그그긍!

축축한 물을 흩뿌리며 등장한 것은 거대한 갈색의 벌레.

귀뚜라미나 메뚜기와 비슷하기도 한 듯한.

날카로운 이빨과 튼튼한 갑각을 가진 괴물이었다.

──────────────

[충왕 그랜드 리옥크lv???]

──────────────

끔찍하게 생긴 거대벌레.

그 괴물을 상대로 은색 침팬지는 쫄지도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리옥크의 주둥이로.

콰아아앙!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긴급귀환, 그냥 지금 쓸까?

< "바친다." >

056. "바친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겠지.

그러면 크루의 우두머리로서 위엄이 떨어지는 일이다.

이곳 늪지대에는 마물뿐만 아니라 평범한 짐승이나 벌레도 많다.

다만, 나도 그중 하나로 위장해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수정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본 뱀의 비늘 탓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진창에서 마구 굴렀다.

진흙이 비늘의 빛을 가려 줄 것이다.

언젠가 흑린 스킬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훨씬 편해질 텐데.

끈적거리는 진흙을 몸에 잔뜩 묻혔으니 그다음에는 반쯤 썩은 나뭇잎들 위에서 구를 차례였다.

나뭇잎들이 몸에 붙자, 가만히 있으면 정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감쪽같아졌다.

천연 길리슈트 완성이다.

조심스럽게 기어갔다.

물론 이것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다.

*「은밀lv7을 사용합니다.」

존재감을 지운다.

풀 스치는 소리도 나지 않게.

그림자 사이에 숨어서 눈빛도 드러내지 않고.

*「은밀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늪지대 안쪽으로 진입했다.

내가 은밀히 움직여서인가. 풀벌레들이 내 몸 위를 기어서 지나가기도 한다.

벌레 군단의 마물은 아니었다.

그놈들은 늪지대 안쪽에 모여 있지 이쪽에서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내가 기어가는 곳이 영장류들이 모여 있는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쿠웅!

벌레 왕과 원숭이 대장이 싸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겸손해졌다.

실내동물원의 마물들 사이에서는 왕처럼 군림했는데.

원숭이들의 숲에서 포위되었을 때도 그리 겁을 먹지 않았는데.

마치 코카트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압박감이 느껴진다.

늪지에서 기어 올라온 벌레의 왕을 먼저 살펴보았다.

충왕(蟲王) 그랜드 리옥크란다.

벌레들의 왕이라면 역시 거대해야겠지.

체장이 15m는 넘어 보인다. 굳이 크기를 비교하자면 어지간한 빌라만 하다고 할 수 있다.

무게는 어떠할까. 적어도 수십 톤은 되겠지.

'리옥크'라는 종은 알고 있었다.

열대기후 지역에 살고 있는 여치 비슷한 놈이다.

더운 기후에 사는 벌레들이 으레 그렇듯 원래도 큼지막한 것들이다.

갈색의 단단한 갑피를 지녔고, 빈약하지 않은 튼실한 다리가 있다.

그 다리 힘과 턱 힘이 보통이 아닌 데다가 무척 포악한 성질로 유명하다.

벌레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매니악한 대회에서 수도 없이 우승을 했다나.

그래 봤자 사람 손바닥만 한 지구의 벌레와 저 마물을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놈은 평소에는 늪지에 잠겨서 그 무게를 지탱하는지 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놈이 퍼득거리며 흩뿌려진 물보라가 하늘에 무지개를 그렸다.

괴물이 뾰족한 이빨로 은색 침팬지를 깨물었다.

카아앙!

하지만 물어 챈 것은 잔상일 뿐.

어느덧 원숭이는 리옥크의 등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마치 추락하듯 떨어져 리옥크의 앞발 관절을 수도로 내려친다.

콰작!

은색 침팬지도 대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슨 무림 고수도 아니고 어찌 저리 움직인다는 말인가.

결국 리옥크의 앞다리 하나가 뜯어졌다.

보아하니 내게는 리옥크보다 저 침팬지와의 상성이 안 좋을 것 같다.

저리 잽싸서는 독니를 박아 넣기도 힘들 테고.

반면 리옥크처럼 덩치가 큰 놈이 오히려 할 만할지도 모르겠다.

단단한 갑피만 어떻게 하면 몸속으로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 키메라 때처럼 기어들어 가 벌레의 심장을 파먹으면 되지 않을까?

벌레와 포유류의 장기는 구조가 많이 다르겠지만, 뭐 심장 비슷한 것은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내 망상일 뿐이었다.

잘려 나간 리옥크의 몸통 단면에서 촉수 같은 것들이 튀어나온 것이 그 순간이었다.

슈루루루룩-

그 촉수들이 뻗어 나가 잘려 나가던 다리를 붙잡았다.

마치 촉수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생물 같았는데······.

나는 깨달았다.

'우웩.'

촉수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기생충이었다.

기생충들은 리옥크와 공생 관계인지 잘려 나간 다리를 다시 붙여 놓았다.

저런 놈의 몸통에 들어가서 심장을 파먹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기생충 한 마리 한 마리가 나랑 비슷한 크기다.

-멈춰라!

나는 얼른 가만히 몸에 힘을 뺐다.

원숭이들이 나를 지나 뚜벅뚜벅 걸어갔다.

──────────────

[자이언트 맨드릴lv59]

[특성]

[잔혹함], [충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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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과 비슷한 무기를 들고 있는 큼지막한 원숭이들이다.

얼굴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알록달록하다.

제법 강해 보이는 게 은색 원숭이의 친위대쯤 되는 것일까.

원숭이들은 벌레들과 싸우고 있지 않았다.

얌전히 제 우두머리의 싸움을 구경 중이다.

그것은 벌레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여포와 장비의 일기토를 구경하는 것마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으르렁대며 서로를 경계하지만 내가 기대하던 전면전은 아니었다.

그 이유를 눈치챘다.

'저거, 열매죠.'

원숭이들의 정예와 벌레들의 정예가 나무뿌리 하나를 두고 맞서고 있었다.

그 나무뿌리의 끄트머리에 진홍색의 달걀만 한 열매 하나가 맺혀 있다.

꽤 먼데다가 열매가 너무 작아서 열매의 효과를 알아보기는 어렵다.

지금 이 순간에는 원숭이들이 뿌리 주변을 점거한 상황이다.

뿌리를 등진 채 빙 둘러서 벌레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다만, 그 열매를 따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벌레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일단 우두머리들의 결투에 승부가 나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둘 다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냐?

'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이다.

저 원숭이와 벌레 모두 진심을 다해 싸우고 있지 않다.

마치 서로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는 듯, 탐색전과도 같아 보인다.

그러면 어디 빌려 볼까······!

오랫동안 품어 왔던 빌리는 뿔 스킬이 징징 울고 있다.

난 영웅으로부터 벼락을 부르는 스킬마저 훔쳐 온 전적이 있다.

물론 천뢰령은 아직도 레벨이 0이라서 뛰어넘는 뿔과 함께 사용해야 쓸 수 있지만.

눈에 힘을 주었다.

우선 제일 탐나는 것은 저 흰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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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백 침팬지 아킴스lv129]

[이명] 은색의 왕······.

──────────────

으,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하긴 한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정신력이 소모되는 느낌.

군터를 살펴봤을 때만큼 어려운 것 같다.

레벨 129라니 무시무시하다. 처음으로 확인하는 세 자리 레벨이다.

스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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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원숭이 참수lv10]······[은빛 털가죽lv20]······[손날치기lv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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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코피가 났다.

꿰뚫어 보기가 쉽지 않다.

원숭이 참수와 은빛 털가죽이라는 스킬은 어쩐지 빌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다.

털 달린 뱀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손날치기는 빌려도 내게 손날이 없어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른 이가 가진 스킬과 특성을 알 수 있다는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무리하지 마라, 네 정신이 무너질 것이다.

펠레리안이 심각하게 경고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남의 정보를 보는 것은 원래 정말 엄청나게 대단한 것들만 가능했던 일이라고 한다. 용이나, 뭐 신의 사도 같은 그런 놈들 말이다.

아무리 내가 정신력 20이라고 해도 잠깐 멈추긴 해야겠다.

일단 원숭이는 놔두고, 저 징그러운 벌레를 한번 살펴보자.

──────────────

[충왕 그랜드 리옥크lv138]

[이명] 충왕, 늪의 괴물

[특성]

[포악함], [군단], [기생충]······.

──────────────

아, 조금 더 수월하게 보인다.

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원숭이 때보다는 정신력이 덜 소모된다.

강함과 상태창을 엿볼 수 있는가가 완전히 정비례하는 것 같지는 않다.

혹시, 대상의 지능이 높을수록 꿰뚫어 보기 어렵나?

음, 그렇게 친다면 군터의 지능이 원숭이와 비슷하다는 말이 된다.

아닐 것 같네.

중요한 것은 빌려 갈 만한 스킬이 있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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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깨물어치기lv20] ······[높이 뛰어오르기lv20], [부패의 체액lv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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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얘는 스킬들이 왜 이래.

벌레라 그런가 멋진 스킬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레벨은 높아도 그리 고등해 보이는 스킬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높이 뛰어오르기는 완전 내 빠르게 기기랑 다름없는 스킬 아닌가.

펠레리안한테 물어보니 답이 돌아왔다.

-비효율적인 진화에는 스킬 역시 포함된 것이지. 너는 제대로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진화한 개체를 보고 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강해 보이지만.

대단한 스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

[공생충lv30]······[공생충 주입lv10], [공생회복lv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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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몸속에 기생충을 바글바글 키워서 전력을 강화시키는 방향 같다.

쓸모가 많아 보이기는 한다. 적에게 주입할 수도 있고 기생충을 희생시켜 몸을 회복하는 것도 가능해 보이니.

하지만 싫다. 절대로 저건 안 익힐 거다.

그러면 다시 원숭이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는데······.

'잠깐.'

나는 문득 깨달았다.

여기서 챙겨 갈 수 있는 게 스킬밖에 없나?

내 눈에 저 멀리 있는 새빨간 열매가 들어왔다.

뿌리를 지키듯 등지고 둥글게 서 있는 원숭이들.

내가 아무리 천연 길리슈트를 입고 은밀 스킬을 사용한다고 해도 저기까지 몰래 잠입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 전에 발각되고 난리가 나겠지.

하지만 벌레들이 지키고 있는 것보다는 덜 삼엄하리라.

적어도 땅을 파먹고 다니는 원숭이는 없을 테니.

부하 중 하나가 쓸 만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할 줄 아는 것은 땅굴을 파서 도망치는 것밖에 없는 '뾰족코 땅굴 두더지lv10'.

그리고 녀석에게 빌린 '땅굴파기lv3'.

그 덕에 나는 원숭이들의 숲에서도 도망칠 자신이 생겼었다.

*「뛰어넘는 뿔lv2로 스킬 '땅굴파기lv3'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땅굴파기lv3'이 일시적으로 '땅굴파기lv10'가 됩니다.」

나는 일순간 키메라 파프나챠만큼의 땅굴 파는 실력을 얻었다.

고마워 땅굴 두더지야!

파바바박-

* * *

"께께······."

크림슨 티스 대왕지네가 자신의 왕을 바라보았다.

충왕 그랜드 리옥크.

그와의 유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홀몸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아직 어린 자식들이 있는 그녀였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벌레 군단에 몸을 담았다.

리옥크와 실버백 아킴스 둘 다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마물이다.

만약 언젠가 그녀도 진화를 할 수 있다면, 그때는 겨뤄 볼 만할까.

알 수 없었다.

"께께께."

꾸벅이가 그녀의 등 위에서 애교를 부렸다.

적어도 이 아이들이 한 마리의 훌륭한 왕지네 노릇을 하고 나서야 진화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본디 지네의 시력은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마물' 왕지네는 아니었다.

타고나기를 맹금류에 가까운 날카로운 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수상한 것이 들어왔다.

'께께?'

원숭이들이 일시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나무뿌리.

뿌리 바로 옆의 땅이 불룩 솟고 있었다.

설마, 벌레 한 마리가 땅굴을 뚫고 나아간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익숙한 누군가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희고 작은 뱀이었다.

그 친구는 눈만 살짝 내놓은 채 위를 올려다봤다.

아직 원숭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꼭대기에 달려 있던 진홍색 열매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께께께!(투명한 손!)'

흰 뱀 친구는 신기한 마법을 부렸다.

그것으로 열매를 따려는 것이 분명했다.

벌레 군단의 일원으로서 지금 상황을 알리고 외쳐야 할까.

아니, 그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열매가 똑 떨어졌다.

떨어진 열매를 작은 뱀이 물어 챘다.

그리고 작은 뱀은 그 자리에서 뿅 사라졌다.

대왕지네가 얼떨떨해하는 순간,

"늪지의 괴물도, 은색의 원숭이도······ 결판을 낼 생각은 없, 어 보이는군요."

지네는 화들짝 놀라서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말을 건 것은 그녀와 사이가 안 좋은 거미였다.

"열매는, 아무래도 원숭이들의, 차지가 될 것 같습니다."

배에 달린 면상이 히죽 웃는다.

지네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대왕 지네는 차갑게 대답했다.

"께께."

"······!"

인면거미의 표정이 굳었다.

'싸가지 없기는. 네가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며.

그때, 대왕지네의 등에 올라가 있던 새끼 한 마리가 뭐라고 말하려 했다.

"께······."

"꼑!"

대왕지네가 고함을 지르자 새끼는 화들짝 놀라 머리를 수그렸다.

그 모습이 인면 거미에게는 고깝게 보였다.

'계속 그리 건방지게 굴어라. 곧 너희들 전부 쓸어버릴 테니.'

인면거미는 검은 속내를 지니고 있었다.

머지않은 날, 거미를 제외한 모든 벌레들을 싸그리 소탕할 것이다.

벌레 군단은 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경험치의 분산에도, 열매의 분배에도 불리하다.

그런 인면거미가 이번에 열린 그 열매를 슬쩍 살펴본 순간이었다.

"······어, 없어?"

없어졌다.

조금 전까지 원숭이들이 지키고 있던 그 열매가 사라졌다.

원숭이들이 결국 열매를 챙긴 건가. 어느 틈에!

"잡아라, 열매를, 도둑맞았어-!"

인면거미의 눈이 새빨개졌다.

리옥크와 아킴스 간의 싸움도 멈췄다.

"다시, 빼앗아······!"

원숭이들과 벌레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 * *

나는 천재다!

능히 해냈다.

*「긴급귀환lv20을 사용합니다.」

절벽 위로 돌아왔다.

새빨간 열매를 문 채로.

어리둥절하게 눈을 뜬 부하들이 우두머리의 귀환을 반겨 주었다.

열매를 훔치는 데에 성공했다.

유독 작고 새빨간 열매.

그 이름은······.

──────────────

[패왕의 뿌리열매]

──────────────

당장이라도 뭔가 소중한 것을 바쳐야 할 것 같은 열매였다.

< 실버백 침팬지 아킴스lv129 >

057. 실버백 침팬지 아킴스lv129

패왕의 열매라니.

약간 불길한 이름이기는 해도 이름만 보면 여태까지 본 열매 중에 제일 좋아 보인다.

이름만큼은 저 중앙지대의 거대한 뿌리에 며칠 뒤 맺히리라는 '찬란한 열매'보다 좋아 보이지 않는가.

효과는 뭘까.

'강인하고 잔혹한 패왕이 됩니다.'

그런 효과가 아닐까.

하지만 설명을 살펴보니.

──────────────

[패왕의 뿌리 열매]

패도적인 기세를 내뿜을 수 있습니다.

그 기운의 정도는 복용한 마물의 힘에 비례합니다.

──────────────

뭔가 미묘하다.

패도적인 기세라니 어떤 걸까.

패기 같은 건가.

모 해적만화에 나온 그런 기술은 아니겠지.

하지만 '패도적인 기세'를 줄여서 패기라고 불러도 문제는 없으리라.

'애매한데······.'

그런 감상이 들었다.

여태까지 먹었던 열매들은 모두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다.

육체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고, 경험치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 주고, 긴급귀환과 같은 쓸모있는 스킬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패도적인 기세라니.

-'위압'과 같은 정신계열 스킬이라면 네 생각보다는 나을 것이다.

정신계열 스킬이라.

생각해 보니 정신 관련 스킬은 하나도 없긴 했네.

그래도 무엇보다 납득이 안 되는 점이 있었으니.

'저는 이미 충분히 패도적인 기세를 내뿜고 있지 않나요.'

-?

나를 보는 펠레리안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거 보세요.'

우두머리가 적장들의 코앞까지 잠입해서 열매를 탈취해 왔건만, 팔자 좋게 놀고 있는 마물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나는 거칠게 호통을 쳤다.

"사아아악!"

그러자 놈들은 난리가 났다.

올빼미는 날개를 홰치며 퍼덕거렸고 두더지는 땅을 파고 숨어들었다.

펠레리안에게 좀 보라는 눈치를 주었다.

-깜짝 놀래키는 게 패도적인 기세면, 침대 밑에서 튀어나오는 바퀴벌레는 패왕 중의 패왕이겠군.

'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정신계 스킬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네 아버지 쪽을 보면 알겠지.

아버지도 매혹 비슷한 정신계 스킬을 지닌 것 같다고 했었지.

상태창을 아주 꼼꼼히 숨겨서 제대로 확인을 못 했네.

곧바로 아버지를 찾아보았다.

낮잠 주무시고 계셨네.

'어······.'

그런데 조금 상태가 이상하다.

왠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평소에는 잠을 자는 모습을 잘 보여 주지 않았다.

잘 때가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었는데 지금은 그냥 힘없게 누워 있다.

고릴라에게 지금의 상황을 물었다.

"크고 멋진 뱀······ 아픈 것 같다."

역시 그냥 자는 게 아니었다.

"저번부터, 기운이 없······ 다."

다른 마물들은 아버지 곁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나한테는 거침없이 가까이 오면서 왜 아버지한테는 반경 10m 이내로 접근하지 않는 것이지.

-차라리 패도적인 기세는 저 뱀이 더 있겠지.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군.

하지만 어쩐지, 괜히 걱정이 된다.

나는 슬금슬금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았다.

-호오, 정말 안 좋아 보이는데.

펠레리안이 턱을 긁적이며 흥미로워했다.

남의 아버지 아픈 모습에 저렇게 흥미를 보여도 되나?

-크흠, 내가 마물의 생태에 또 박식하지 않나. 뭐가 문젠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야.

펠레리안이 변명했다. 저렇게 머쓱해할 줄은 또 몰랐다.

-나도 조금씩 힘을 비축하고 있으니 진찰 정도야 할 수 있겠지.

그러더니 선심을 쓰듯 말한다.

-반지 채로 네 아비의 몸에 가져다 대 보아라.

'이렇······ 게요?'

나는 살짝.

아주 살짝 아빠의 몸에 내 꼬리를 얹었다.

말이 아빠지 사실 아직 조금 무섭고 어렵다.

언제 돌변해서 나를 잡아먹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전생에서부터 내게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였다.

-잠시만 기다려 봐라.

펠레리안은 묘한 주문을 외웠다.

나랑 다르게 그는 무영창 마법을 못 하는 것 같다. 가엽기도 하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펠레리안은 주문을 마쳤다.

그러자 반지가 조금 따듯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펠레리안은 아버지의 몸에 귀를 대고 있었다.

-어어······.

그러고는 눈을 찌푸린다.

뭔데. 뭔데요.

-마력 고갈이군. 아니, 이럴 수가 있나.

펠레리안은 특이 질환을 찾아낸 의사처럼 말했다.

-이 정도의 마물이 이렇게 마력 회복이 늦을 수는 없을 텐데.

'저한테도 설명 좀 해 줘요.'

-몸의 균형이 어긋나 있다.

펠레리안의 설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물들에게는 마력이 존재한다.

내가 이런저런 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마력을 소모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마력은 실존하는 힘이니, 그것을 전부 쓰면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많이 피곤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보충되는 것이 마력이다.

아버지는 그런 몸의 회복작용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마력의 회복이 터무니없이 늦다.

-근래에 파괴광선같이 마력을 많이 소모하는 스킬을 써서 그런 것 같은데······ 그래도 이상하다. 진작 회복할 때는 지났어.

'병이라도 걸린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펠레리안은 더욱 집중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건 유실되고 있는 것 같다. 보충되는 마력의 대부분이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있어.

그 마력은 어디로 빠져나가는 것일까.

혹시 단전 같은 거에 금이 가거나 한 걸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 별다른 방법이 있나.

몸의 문제라면 그것을 찾아 고치든지, 아니면 마력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들을 먹어야 할 것이다.

마력 포션이라든가.

펠레리안의 진찰이 너무 과격했던 걸까.

갑자기 아버지가 일어섰다.

안광을 번쩍 빛내며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아.」

그러더니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진작 땅을 파고 숨어 들어가던 도중이었다.

다행히 나를 알아본 것 같아서 다시 나왔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확실히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진홍색 뿌리열매는 아직 먹지 않았다.

효과가 애매해서도 있었지만, 여태까지 먹었던 열매들의 효과가 떠올라서였다.

'이거 그냥 아빠 줄까요?'

-그 열매를?

여태까지 먹었던 열매는 모두 영양이 풍부했다.

포션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효과와 별개로 마력이 풍부하게 담겨 있었다.

물론 그것보다 더 큰 이유도 있었다.

-효율은 그게 낫겠군.

패왕의 열매에 붙어 있던 설명.

'기운의 정도는 복용한 마물의 힘에 비례합니다.'

내가 많이 강해졌다고 해도 우리 크루의 최강 전력은 역시 아버지였다.

생긴 것도 멋지고 거대하니 패도적인 기세를 내뿜는 데에도 유리할 것이다.

잠시 고민하며 열매를 들어 보였다.

아버지가 탐을 낼지 궁금했는데.

스스슥-

그는 꼬리로 내 몸을 휘감았다.

이게 무슨 짓이요!

「네가 먹어라.」

'예?'

자식이 효도 좀 하겠다는데.

'또 제가요?'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본다.

어쩔수 없이 패왕의 열매를 와작 씹어 삼켰다.

달콤하긴 하네.

그것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는 내 몸을 풀어 주었다.

과묵하기 그지없는 사내다.

그는 꼬리로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패왕의 뿌리열매'를 섭취합니다.」

*「스킬, 패왕lv2를 임시로 획득합니다.」

어어어!

긴급귀환의 레벨이 20이었나.

이번에 얻은 스킬의 레벨은 2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더 흥분했다.

'상위스킬 같은데요.'

-맞다. 이름만 봐도 느낌이 오는 법이지.

천뢰령lv1과, 마법:정전기lv10을 비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상위 스킬은 이름부터 느낌이 달랐다.

──────────────

[패왕(覇王)lv2(임시)]

패도적인 기세를 내뿜습니다. 대상의 격과 상관없이 위압감을 느낍니다.

낮은 격의 마물은 압도적인 공포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

이거 X왕색의 패기인가!

내게 설명을 전달받은 펠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왕은 위압의 상위 스킬이다.

'아는 스킬이에요?'

-그래, 당대의 영웅들. 그것도 재능있는 일부나 가지고 있던 스킬을 겨우 뱀이 쓸 수 있게 되다니.'

저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었다.

실사용을 해 보는 수밖에.

이미 내 휘하로 들어간 마물들을 상대로 시험해 봤자 의미 없을 것이다.

나는 점박이를 타고 절벽을 내려갔다.

이 그림자 숲 지대에 원숭이들과 벌레들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무리가 그 둘이라는 거지 다른 마물들의 수도 많을 것이다.

물론 은색 원숭이와 벌레 왕에게 대항할 만한 놈은 없으리라.

그런 놈들을 찾아 나섰다.

발견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사슴 떼 하나가 풀을 뜯고 있었다.

점박이의 머리를 한 번 두드리자 천천히 그 앞에서 멈춰섰다.

평범한 사슴들이 아니다. 종종 육식도 하는 마물들이다.

뾰족한 이빨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수사슴이 머리를 치켜들고 나를 경계했다.

"크르릉······."

사슴치고는 터프한 울음소리다.

──────────────

[가시나무뿔 사슴lv19]

──────────────

그래, 나름 대장이라는 거지.

다른 녀석들을 지키려는 듯 앞으로 나와서 내게 으르렁댄다.

뿔이 흉악했다.

보통 사슴과 달리, 놈의 뿔은 마치 가시나무를 가져다 박은 것처럼 뾰족했다.

피가 묻어 가시가 붉다. 썩은 살점과 찢어진 가죽들이 너덜너덜 걸려 있다.

"크릉!"

전투마라도 되는 것처럼 발굽을 지면에 긁는다.

그 기세가 가상하다.

너 마음에 드는군.

나는 새로 얻은 스킬을 시험해 보았다.

*「'패왕lv2'를 사용합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신계 스킬이라고 하니 상대방에게만 적용되는 줄 알았지.

쏴아아아아!

설마 일진광풍이(一陣狂風)이 몰아치며 풀이 일제히 드러눕고.

주변이 어두워지며 일순간 기온이 몇 도쯤 떨어질 줄이야.

내게 만약 머리카락이 있었다면 지금쯤 미친 듯 휘날리고 있을 것이다.

마치 인세에 강림한 마왕처럼······!

물론 머리카락은 없었으니 점박이의 갈기만 흔들렸다.

그리고 내 무형지기를 정통으로 맞은 사슴들.

후두둑.

겁많은 녀석들은 구슬 같은 똥을 흘렸다.

뒤에 서 있는 놈을 슬쩍 보자. 놈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픽, 무릎을 꿇는다.

와, 이거 마력을 엄청 많이 소모한다.

그러나 우두머리 수사슴은 우뚝 서 있다.

-기개가 있는 사슴이군.

놈을 노려보고 패왕 스킬을 유지했다.

'아.'

깨달았다.

우두머리는 선 채로 기절해 있었다.

눈이 풀려 있다.

'엄청나네, 이거.'

패왕 스킬의 효과는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정신계 스킬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구나.

나는 수사슴의 앞으로 뛰어올라 꼬리로 놈의 목을 쳤다.

그제야 사슴은 정신을 차리고 낑낑댔다.

'너, 그리고 너, 너.'

우두머리 수사슴을 포함해 전투력이 있어 보이는 녀석 셋을 뽑았다.

'우리 크루로 들어와라.'

지금의 스무 마리는 적어도 너무 적지 않은가.

한번 마음이 꺾인 마물들은 쉽게 길들일 수 있었다.

*「길들이기lv8을 사용합니다.」

*「'가시나무뿔 사슴lv19'을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가시나무뿔 사슴lv16'을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가시나무뿔 사슴lv17'을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런.

이렇게 쉬울 줄이야.

진작 있었으면 실내동물원에서도 편했을 텐데.

*「길들이기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길들이기lv8이 길들이기lv9가 되었습니다.」

우선 50마리 정도만 채워 볼까.

* * *

절벽은 작은 뱀과 큰 뱀이 지배한다.

주변의 마물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까.

그럴 것 같다.

이 절벽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마물들은 싹 사라졌다.

동물원의 짐승들에 흡수되거나.

혹은 뱀이 두려워 멀리 도망쳤든가.

격이 더 올라간 업적을 살펴보았다.

──────────────

[마물의 우두머리]

50마리 이상의 마물을 길들였습니다.

마물에 대한 지배력이 상승합니다.

우두머리다운 기운을 풍깁니다.

──────────────

부하가 쉰이 넘었다.

길거리 캐스팅을 진행하고, 종종은 사냥도 하면서 수를 불린 탓이다.

아직도 세 무리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지만 그래도 정예만 모았다고 자부한다.

업적에 적혀 있는 '우두머리다운 기운을 풍깁니다.'라는 문구.

내 스스로는 체감하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겉보기에 위엄을 갖춘 것 같다.

예전에는 내 작은 덩치를 얕보고 덤벼드는 놈이 꽤 많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패왕 스킬을 쓰지 않아도 선공을 당하는 일이 줄었다.

이제 저 중앙에 돋아난 거대한 뿌리.

그곳에 맺힐 찬란한 열매를 노릴 때가 다가오고 있다.

아버지의 상태는 당장에는 나아졌다.

주변의 마물들을 사냥하면서 마석을 수확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버지에게 주었다.

'마석을 먹는 것'의 효과는 의외로 한정되어 있다.

마석은 마성을 잔뜩 품고 있어서 진화에 꼭 필요하며, 먹으면 천천히 마력이 보충된다.

하지만 먹는다고 레벨이 막 오르거나 먹은 만큼 즉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귀한 마석을 마력 포션처럼 사용하는 것은 아주 효율이 떨어지는 행동이다.

-마석에도 소화가 필요하다. 너는 소화 효율이 그나마 좋았지만 제대로 소화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 특히 고등급 마석일수록 먹어서 마력으로 흡수하는데에 체력의 부담이 클거고.

'마석 털리기 싫어서 그러는거 아니에요?'

-······그런 맘도 없지는 않지만 진실이다. 저 뱀은 체력 또한 약해보이니.

진실을 말하기로 한 맹세는 아직 유지되고 있나보다. 저리 말하는거보면.

그에 대해 펠레리안이 설명하길.

-마석의 진가는 마법이나 연금술에서 발휘되는 법이다. 특히 한낱 개인이 대마법을 사용할 때는 고등급 마석이 촉매로써 필요한 법이지. 포션을 만들때도 그렇고.

'초급마법에는 그런 거 필요 없던데.'

-대마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마석이 엄청 비싸게 팔린다면서요. 그러면 마법사는 돈 잡아먹는 귀신이겠네요.'

-전통적으로 그러했다.

펠레리안이 요정 사회에서 추방되기 전에 요정들의 재정을 파탄 냈다는 것 같다.

'그래도, 그 고등급 마석 좀 씁시다.'

-······.

'갈아서 포션 만들수 있다면서요. 싫으면 그냥 통채로 먹고.'

-알겠다. 알겠어, 만들면 될거 아니냐.

'감사합니당.'

그리고 나는 펠레리안의 도움을 받아 마력 포션을 만들었다.

체력 포션보다 훨씬 만들기 어려워서 겨우 두 병 만든 게 전부였다.

이걸로는 아버지의 마력을 조금 채우는 게 전부일 것이다.

그래도, 며칠 더 쓰면 두세 병은 만들 수 있으리라.

잠깐의 여유.

나와 마물들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재난은 예고하지 않은 시점에서 찾아온다.

그것은 능히 재난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었다.

사자와 같은 갈기를 가지고 있는 라이온 올빼미가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다니던 시점이었다.

평소에는 야행성이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랬을까.

하늘이 보랏빛이어서 낮밤 구분이 안 되는 걸까.

혹은 스스로 주변을 정찰하겠다던 기특한 생각이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아버지 곁에 드러누워서 날아다니는 올빼미를 구경 중이었다.

퍼엉!

올빼미가 깃털만 남기고 분해되었다.

몸은 아예 사라지다시피 했고, 깃털만이 폭발해서 나풀나풀 떨어졌다.

그것이 총알처럼 쏘아진 돌팔매에 의한 일이라는 것은 그 직후에 알았다.

'오, 올빼미야아앗!'

경악과 분노로 벌떡 일어섰다.

드러누워 있는 게 하루에 절반 이상이었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나타났다.

평소에는 늘 용감했던 고릴라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대, 대, 대, 대자앙······!"

내 뒤에 몸을 숨기려는 헛된 시도를 하는 고릴라.

그녀가 나를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홀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은색의 원숭이를 보고 한 말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

[실버백 침팬지 아킴스lv129]

──────────────

적장이 홀로 나타났다.

나타나자마자 내 부하를 죽이며.

츠츠츠-

내 비늘이 저절로 검게 물들었다.

그런 내 앞을 아버지가 가로막았다.

아버지가 몸을 일으키자 그 거대한 위용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은색의 침팬지는 조금도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크고, 멋진······ 뱀. 결국, 새 무리를 이뤘나?"

그는 웃고 있었다.

두렵지 않은 것인가.

-우두머리가 네 아비라고 착각했나 보군.

아, 그런 건가.

음, 으음. 여기서 굳이 내가 우두머리라고 나설 필요는 없겠지.

나는 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서 슬쩍 침팬지를 바라봤다.

「은색 원숭이······.」

아버지의 사념파가 그르렁대듯 울렸다.

「죽고, 싶어서 왔나?」

잘한다!

혼자 오다니, 미친 원숭이 아니야.

하지만 침팬지는 우끽 웃고 말했다.

"죽이러 왔다, 너와 네 부하들."

저렇게 자신감 넘치는 것을 보니 조금 찜찜하기는 했다.

설마······.

"너. 반푼이."

침팬지는 아버지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마력, 부족한 병든 뱀!"

이미 아버지의 문제를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기에 정말 혼자 우리를 다 해치울 수 있다는 생각에 찾아온 건가.

실버백 침팬지 아킴스가 선언했다.

"나 혼자, 다! 죽일 수 있다."

< 금사빠 >

058.

건방진 원숭이.

비늘이 저절로 곤두서기를 반복하면서 챠르륵 댔다.

일부러가 아니라 화가 나서였다.

무도한 놈이다.

혼자서 우리를 다 쓸어버리겠다고?

나와 아빠를?

정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이곳에는 아버지만 있는 것도 아니다.

새끼 때 키메라를 때려죽였으며, 미친 그림자엘프를 시꺼멓게 태워 죽인 수정 비단뱀이 여기 독니를 숨기고 있다.

빈틈만 제대로 노릴 수 있다면 저 원숭이도 심장에 구멍이 뚫리는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땅굴을 파서 다리 아래로 접근할까.

조금 지저분하긴 해도 가랑이 사이는 약점일 수밖에 없겠지.

거기에 식심의 도약을 쓰면 저 원숭이라고 배길까.

물보라를 일으켜서 시야를 가리면 조금 더 나을 것이다.

혹시 털에 불이 잘 붙지 않을까.

놈의 빈틈을 찾으며 슬금슬금 접근하려 하는 나를 무언가가 움켜잡았다.

아버지의 꼬리였다.

「함부로 구는군······.」

그의 시선은 여전히 원숭이를 향해 있었지만 어째선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흑린 스킬이 발동되면 조금 감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츠츠츠······.

검게 물든 비늘의 색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화가 가라앉은 건 아닌데 신기한 일이다.

-이놈이 눈깔이 돌아가더니 귀도 막혔나. 인마!

펠레리안이 갑자기 나한테 화를 냈다.

'왜요.'

-왜 사람 말을 무시해!

'아?'

듣자 하니 펠레리안은 내게 계속 뭐라고 말을 했다는 듯하다.

저 원숭이를 어떻게 해치울지 열중해서 못 들어 버렸다.

-저 원숭이 놈, 내가 보기에는 아주 교활한 놈이다.

훌륭한 학생이라면 선생의 말에 있는 행간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펠레리안이 내게 선생님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므로 나는 그 말을 곱씹어 봤다.

'······그런 것 같네요.'

실버백 침팬지 아킴스는 정말 아버지와 우리를 혼자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르겠다. 하지만 마냥 허세 부리는 건 아닌 듯하다.

그랜드 리옥크와 싸우는 것을 봐서 안다. 게다가 아버지의 컨디션이 안 좋기도 하고.

그렇다면, 아버지와 싸우는 게 그에게는 전혀 부담되는 일이 아닌가?

이것은 확실히 아니다.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진작 아버지를 해치우고 레벨을 올렸으리라.

반대로 어려운 일이었다면 굳이 혼자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혼자 왔다는 게 수상하네요.'

그래, 굳이 혼자 올 이유가 없다.

놈의 부하들은 우리보다 확실히 많고, 그중에서는 정예로 꼽을 마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 모든 이점을 버린 이유가 있으리라.

-확실하군. 저놈은······.

'간을 보고 있네요.'

우리에게 간을 보고 있다.

차라리 기습을 했다면 모르지, 저렇게 나타나서 허세도 떨고 뜸을 두는 것을 보니 수상하다.

'이쪽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줘야겠네요.'

칼침을 한 방 놔 주면 자기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겠지.

안 그래도 잘됐다.

저번에는 타이밍이 안 맞아서 할 수 없었는데 스킬 하나 빌려 가야겠다.

──────────────

[실버백 침팬지 아킴스lv129]

······

[스킬]

······[원숭이 참수lv10]······.

──────────────

역시 자세히 꿰뚫어 보기는 힘들다.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저번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

나는 초뱀적인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기어코 빌려 갈 만한 스킬을 하나 찾아냈다.

*「뛰어넘는 뿔lv2로 스킬 '빌리는 뿔lv4'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빌리는 뿔lv4'이 일시적으로 '빌리는 뿔lv10'이 됩니다.」

군터 때의 경험을 살려 우선 빌리는 뿔 자체를 강화한다.

*「빌리는 뿔lv10으로 '천둥포효lv10'을 빌립니다.」

결과는······.

*「성공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천둥포효lv1'을 얻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덤벼들려고 했던 원숭이가 움찔 멈췄다.

"뱀······! 뭘, 한 거지!"

군터도 그렇고 어느 정도 강한 것들은 스킬을 빌려 갈 때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는 것 같다.

다만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원숭이의 물음에 침묵하며 노려볼 뿐이었다.

그의 눈이 북극성처럼 번쩍였다.

분위기가 장난 아니다.

사실 그냥 뭔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뿐일 텐데.

이래서 생긴 게 중요한가 보다.

난 아버지의 등 위로 휙 올라갔다.

작전이 섰다.

"상관없다······ 어차피 죽일 것."

여전히 센척하며 뜸을 들이는 저 원숭이에게 이쪽의 전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파괴광선 해 주세요!'

내 말을 잘 따를지는 모르겠다.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최대 출력으로요!'

「건방진 원숭이.」

아버지가 자식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입에서 빛무리가 모이더니.

피이이잉!

광선이 사출된다.

그리고 건방진 침팬지는 회피하지 않았다.

역시, 아버지의 힘을 가늠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마력의 소모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최대 출력의 파괴광선이다.

자신의 상상을 초월한 그 출력에 원숭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잿더미가 되어 버릴 것을 조금은 기대했다.

하지만 녀석도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콰콰콰-!

놈이 양팔을 뻗어 광선을 막았다.

광선은 그의 손바닥에 부딪혀 굴절되더니 하늘로 솟았다.

콰콰콰콰콰-

그 물리력마저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숭이는 땅에 발을 단단히 박아 넣었지만 점점 밀리면서 고랑이 파였다.

"으-아아아아!"

고함을 지르면서도 어떻게든 버텨 낸다.

과연 무시무시한 놈이다.

아버지는 내 말을 그대로 따라 주었다.

조금 회복한 마력을 그 짧은 순간에 다 써 버린 것이다.

파괴광선이 멎고 실버백 아킴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놈은 살아 있었다.

다만 양팔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두 손바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저것으로 파괴광선을 막아 낸 것을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저런 괴물을 일순간에 상처입힌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으, 흐. 흐."

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싸움이 수 교환이라면 아버지는 단번에 여러 수를 썼다.

그리고 원숭이는 한 수를 둬서 그것을 막아 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놈의 자신감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는 아버지의 머리 위에 올라섰다.

침팬지와 눈이 마주쳤다.

내 등장에 어리둥절해 보이는 녀석.

그리고 일단 포효.

*「'천둥포효lv1'을 사용합니다.」

동시에 패왕의 기세를.

*「'패왕lv2'를 사용합니다.」

광풍이 몰아치고 공기가 서늘해진다.

내 입에서 정말 천둥과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아아아악!"

동시에 원숭이의 전신 털이 확 부풀었다.

쫄았음이 분명하다. 일그러진 입매를 보면 안다.

「내 아들이다.」

시의적절하게 아버지가 한마디 해 줬다.

원숭아, 네가 대적해야 할 적은 하나가 아니다.

'아버지, 꼬리치기를.'

그리고 아버지는 그렇게 해 주었다.

그의 꼬리가 파동을 그리는 순간 나도 돌진했다.

*「식심의 도약lv2을 사용합니다.」

내 속도는 침팬지에게도 놀라웠던 듯하다.

놈은 내게 맞서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아버지의 꼬리를 보았다.

"크윽!"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선 거대한 꼬리부터 쳐내려는 듯 주먹을 휘두른다.

쩌어어엉!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침팬지는 또 한 번 버텨 냈다.

그 사이에 내가 접근했다.

놈의 심장을 파먹는다거나, 혹은 독니를 박아 넣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

허공에 검을 소환해 휘둘렀다.

무려 검술 스킬까지 있는 몸이시다.

거기에 참격 스킬까지 더했다.

천뢰검법 제2식.

심장 가르기.

과연 녀석은 대단했다.

시뻘겋게 가죽이 벗겨진 손을 휙 내밀더니.

콰악!

내 검을 손바닥으로 받아 냈다.

칼날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에 그쳤다.

엄청 아플 텐데, 지독한 놈.

"크큭."

언제까지 그리 웃을 수 있는지 보자.

천뢰검법은 본디 벼락을 담는 것으로 완성되는 검술이니.

*「뛰어넘는 뿔lv2로 '천뢰령lv0'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일시적으로 '천뢰령lv0'이 '천뢰령lv1'이 되었습니다.」

*「천뢰령lv1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벼락이 떨어졌다.

또 내게.

쩌저저정!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벼락은 검에도 번진다.

그리고 그것이 틀어박힌 원숭이의 손바닥.

벼락은 끈적한 피와 혈관을 타고 들어가 놈의 몸을 감전시켰다.

"카아아아악!"

이 끈질긴 놈.

검을 놔주지 않는다.

아니 놓지 못하는 것일까.

놈이 꽉 쥐고 있는 엘븐 브로드소드.

내 애검이 결국 그 힘을 버텨 내지 못했다.

콰창!

검이 산산조각 났다.

흩어지는 파편이 내게도 상처를 냈다.

"배 뱀······,"

적어도 몸은 데쉬난보다 튼튼한 것 같다.

원숭이는 몸에서 허연 김을 내뿜으면서 우리를 노려봤다.

그리고.

"키익!"

휙, 사라져 버렸다.

-역시, 저놈도 먹었나 보군.

긴급 기동의 열매.

저 원숭이 역시 그것을 먹지 않았을까 추정했다.

굳이 무리를 데려오지 않고 혼자 탐색하러 찾아온 것을 근거로 판단한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온몸이 욱신욱신 아팠다.

얼른 포션을 꺼내 몸을 적셨다.

그 녀석은 포션이 없을 테니 꽤나 고생하겠지.

이번에 확 죽여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에게도 마력 포션을 주었다.

-칼이 부러졌으니 이제는 그놈의 검사 소리 좀 안 듣겠구만.

펠레리안은 후련한 듯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조금 울적해졌다.

'내 칼······.'

원숭이 놈이 칼을 산산조각 냈다.

나름 오랫동안 잘 써먹었지만 섭섭할 따름이다.

그렇게 가볍고 날카로운 검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클클, 때려치워라! 너는 마법이 어울려. 손도 없는 놈이 무얼.

하지만 펠레리안의 기쁨이 무색하게도.

*「업적 '부서질 때까지 휘두른 검'을 달성했습니다.」

어.

어?

-뭐야, 왜 그러는데.

'아니, 새 업적이······.'

확인해 보자.

──────────────

[부서질 때까지 휘두른 검]

검이 부서지도록 분투했습니다.

검술의 숙련효율이 상승합니다.

──────────────

그리 대단한 업적은 아니었지만.

하늘이 말하고 있었다.

검의 길을 버리지는 말라고.

-육시럴.

* * *

영웅.

박제사, 헤일릿 랑그레이.

그녀는 기어코 그림자 숲 유역에 진입했다.

이 위험한 마경에서도 헤일릿은 한가로이 걸을 수 있었다.

약한 마물들은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고, 위협이 될 만한 것들에게는 몸을 숨길 방법이 있으므로.

가죽바지를 입어 검게 빛나는 긴 다리로 마경의 경계를 산책했다.

"정말 안으로 못 들어오나 보네."

열매 주간, 보랏빛 연회, 축제.

그림자 숲에 그녀가 들어온 뒤에 그것이 시작되었다.

둥근 돔 같은 것이 반경 수십 키로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반투명한 벽이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고 있었다.

텅텅!

단검을 뽑아 폼멜로 두드려 보니 반탄력이 보통이 아니다.

대마법 같은 것을 쏘면 그래도 부서지지 않을까 싶긴 해도.

"얘들아. 이 안에 뭐 그리 맛있는 게 있다고 기웃거리니."

그녀는 돔의 안쪽에서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한 벽 너머에는 마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침을 줄줄 흘리며 헤일릿을 노려보는 것들.

벽을 물어뜯는 녀석도 있었고 대가리를 쿵쿵 박아 대는 녀석도 있었다.

"벽이 있어서 다행인 것은 니들이야."

그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바깥에는 제법 대단한 마물들도 많았다.

그러나 헤일릿의 눈에는 사냥감으로 보일 따름이다.

지금 헤일릿이 경계를 따라 걸은 것이 3km 정도 되었을까.

그녀는 산책을 하고 나서 확신했다.

"정말 일어날 것 같네."

몬스터 웨이브가.

걷는 내내 몰려 있는 마물들을 보았다.

마물들이 이렇게 한 장소에 많이 모이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다.

정확히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는 마탑의 마법사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일정 수 이상의 마물이 모이면 놈들은 거대한 군체처럼 움직인다.

저 바깥으로.

마경에서 인간이 사는 대륙의 중심으로 파도처럼 밀려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있는 헤일릿 랑그레이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녀는 이제 그림자 숲의 중심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사냥감을 찾기 위함이다.

새 재킷을 만들 재료를 찾고.

그림자 엘프 데쉬난을 죽이고 귀를 잘라 가 현상금을 탈 생각이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 탁월한 기량 덕에 헤일릿은 조용히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마법과 같은 수준은 아니어도 평범한 마물 정도는 속일 수 있다.

거리만 조금 유지한다면, 공격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접근과 관찰이 가능하다.

마침내, 그녀가 첫 번째로 점찍은 사냥감은 은빛 원숭이였다.

'어머, 괜찮네.'

은색의 반짝이는 침팬지였다.

제법 강해 보인다.

하지만 헤일릿이 하려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사냥이다.

빈틈을 노리고 함정을 판다면 충분히 사냥할 만하다.

'털 옷을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다고 저 은빛 털을 그냥 버리기는 아쉽고.

일단 마음속 수첩에 적어 두었다.

그다음에 찾은 것은 거대한 벌레, 리옥크.

'이건 탈락이네.'

리옥크를 사냥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놈이 강해 보여서가 아니라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늪에 반쯤 잠겨 살아 가는 거대한 벌레를 잡아서 뭐 하겠는가.

헤일릿 랑그레이의 취향에 너무 떨어져 있는 놈이다.

무엇보다 옷으로 만들 수도 없다.

건설 자재로 쓴다면 모를까.

그래서 패스.

그러던 와중에, 데쉬난의 흔적을 찾았다.

절벽 위에 있는 집이 있었다.

그녀는 절벽을 곧바로 기어 올라갔다.

바위를 타고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

설마, 그곳에서 거대한 뱀을 만날 줄이야.

"······아앗."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 버렸다.

자칫하면 들킬 뻔했다.

헤일릿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저, 저게 뭐야.'

그녀가 본 어떤 마물과 비교해도 가장 아름답고 거대한 뱀이다.

마치 심장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건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마물에 대한 애호는 보통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게다가 커, 저 정도면 평생 옷 걱정은 없겠어.'

별빛의 가죽 재킷.

별빛의 지갑.

별빛의 바지.

별빛의 코트.

머릿속이 욕망으로 가득 찼다.

광대뼈가 하늘로 치솟는 와중에 은색의 침팬지까지 나타났다.

'이렇게 어부지리까지!'

이 자리에서 별빛 가죽 코트에 은빛의 퍼까지 달 수 있을지도.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싸움을 관람했다.

그때, 크고 멋진 뱀의 뒤에 있는 작은 뱀을 발견했다.

'저건 뭐야······?'

헤일릿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 갔다.

방방 뛰며 화내는 작은 뱀을 큰 뱀이 말리고.

작은 뱀이 큰 뱀의 등에 올라타더니 큰 뱀이 광선포를 쏘고.

원숭이가 그것을 튕겨 내고.

작은 뱀이 겁도 없이 튀어 나가더니.

어디선가 나타난 칼을 휘둘렀다.

번쩍.

벼락이 쳤다.

작은 뱀이 침팬지를 물리쳤다.

으쓱한 자세로 뿌듯해하는 작은 뱀.

'아······.'

몰래 지켜보는 헤일릿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벼락의 잔상과 작은 뱀이 머물고 있었다.

첫사랑을 발견한 지 5분이 흘러.

헤일릿 랑그레이.

두 번째 사랑을 만나다.

< 상뱀 >

059.

그레이림 영지.

하늘도 그레이림이 처한 상황을 알기 때문일까.

맑은 날은 거의 없었고 하늘은 매일 우중충했다.

그날은 유독 흐린 날씨였다.

차라리 비라도 우악스럽게 퍼부었으면 좋았을 텐데.

찔끔찔끔, 안개인지 빗방울인지 헷갈릴 정도로만 내렸다.

병사들의 머리카락은 그렇기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출진 준비이-!"

지휘관이 그리 외쳤다.

십인장들은 제각기 맡은 병사들과 함께 대열을 이루었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험상궂게 생겼다.

사선(死線)을 한 번 이상은 넘어 본 이들만 이곳에 모였다.

그것도 마물과 싸워 본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병사 일천과 기사 일백.

이번 원정을 떠나는 구성원이었다.

병사의 수에 비해 기사의 비중이 꽤 높다. 이번 원정대가 정예로 꾸려졌음을 의미한다.

자인은 원정대에 끼지 않았다.

그는 대수림을 막듯 세워진 성벽 위에서 병사들의 도열을 보고 있었다.

젖은 앞머리에서 빗물이 또르륵 볼을 타고 떨어졌다.

자인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원정대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수상한 점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확실히 이상해.'

갑자기 대수림 원정을 왜 나간다는 말인가.

가만히 놔둔다면 저들끼리 싸우고 죽을 마물들이다.

영지의 안전을 위해 주변에 있는 마물을 소탕하겠다고?

대수림의 외곽에 있는 마물은 그리 위험하지 않다.

대수림의 심부에 있는 마물들은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상식 아니던가.

하지만 그의 주군인 군터는 마치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듯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다.'

갑옷 대신 로브를 입고 있는 노인 세 명이 군터의 곁에 있다.

마탑을 상징하는 문양이 로브에 그려져 있지도 않았고 마법을 쓰지도 않았지만 그들이 마탑의 마도사들임은 확실했다.

그 괴팍한 노인네들은 어마어마하게 자존심이 세며, 끔찍하게도 돈을 탐내는 수전노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군터가 사비를 들여 초청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마탑의 마도사는 한 명이 공성병기 수십 대와 같은 위상을 지녔다.

'왕실이 요청한 일인가.'

자인으로서는 그런 추측을 할 뿐이다.

수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그레이림 령 자체가 변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과 화약이 비축되었다.

게다가 젊거나 어린 자들은 미개척 지대의 개간을 빌미로 전부 떠났다.

개간은 무슨 놈의 개간이라는 말인가.

때문에 마을에 남은 것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 혹은 병자들뿐이었다.

아니면 여전히 성에 갇혀 있는 영주의 가족들이나······.

그때였다. 누군가 자인에게 다가왔다.

"나리, 추워 보이십니다. 와서 불 좀 쬐시지요······."

"······괜찮네."

지금 자인에게 몸을 녹이라 권하는 자 역시 노인네였다.

원래는 따듯한 방 안에서 시간이나 때웠을 치다.

하지만 자식들이 모두 미개척 지대를 개간하러 떠난 뒤, 이렇게 나와서 불을 쬐며 감자나 구워 먹고 있었다.

"그러지 마시고, 감자가 다 익었습니다. 와서 자시지요."

"······."

입맛은 없었지만 일단 불가에 앉았다.

노인은 불쏘시개로 장작을 뒤적이며 말했다.

"뒈질 날이 다가온 듯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느낌이 그래요. 죽을 때가 되었지요. 나만 그렇겠습니까. 저는 물론이고 여 남은 노인네들 다 그리 생각합니다."

심지어 영지에 남은 무지렁이 노인들마저 불길한 상황임을 느끼고 있었다.

자인은 왠지 몰라도 신경질적으로 굴어 버렸다.

"그리 불길하면 떠나면 되지 않나. 느낌이 안 좋으면 노인네들끼리 손잡고 도망이라도 쳐."

"허허······."

기사가 화를 내도 노인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아마 칼을 꺼내도 무서워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질긴 목숨, 여까지 죽지 않고 버텨 온 것도 참으로 아이들에게 미안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몹시 감사한 일은 애들을 내보냈다는 것이죠. 제 아들놈도, 손주 놈도 떠났습니다. 예, 참으로 감사스런 일입니다. 나리들께······."

자인은 울컥했다.

'나리'라는 표현은 군터와 철사자 기사단, 그리고 자인까지 포함한 말일 것이다.

어찌 모두를 한데 묶어서 나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인은 원정대에 끼지도 못한 수행기사일 뿐인데.

"자인!"

기사 한 명이 나타나 자인의 등을 텅 두드렸다.

"새끼야, 왜 그리 죽상이야. 원정도 안 가고 꿀 빨게 생겼으면 좋아해야지."

씨익 웃는 그 기사 역시 선배 철사자 기사였다.

기사단의 베테랑 몇 명이 이곳에 남았다.

그것이 되레 불길했지만.

"일어서서 손이라도 흔들어라. 원정대가 곧 출발할 테니."

부우우우우-

때마침 출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개무우운!"

성문이 열렸다.

자인도 선배에게 이끌려 경례 자세를 취했다.

말없이, 한참을.

말을 타고 선두에서 나서는 군터.

그가 뒤를 돌아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늘 그렇듯 군터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군터가 시선을 돌리자 그의 옆에 있던 기사며 마도사들까지 따라 뒤를 돌아봤다.

그들의 눈에는 성벽 위에서 경례를 하는 자인과 기사들이 보였으리라.

"왜 그러십니까, 단장."

기사 한 명이 군터에게 물었다.

"아니다."

"흐흐, 자인 저놈 표정이 죽상이군요."

군터에게 이렇게 넉살 좋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와 함께 전장을 헤쳐온 이들뿐이었다.

"요즘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던데 말입니다."

"그렇더군."

"······원정대에 데려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슬쩍 던진 질문에는 어쩐지 무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놔두어라. 기사가 되지 않았으면 원래는 가문의 일을 잇고 편하게 살았을 녀석이니."

"그리 말하신다면."

"경!"

마지막 한마디는 마탑의 마도사가 끼어든 것이다.

앞니 두 개가 없는 마도사는 히, 웃으며 말했다.

"닭 두 마리와 화약을 준비해 주시오. 이쪽에 미리 마법진을 하나 그려야 할 것 같어."

"그러시게."

군터는 담담했고, 그 옆의 기사는 눈을 찌푸렸다.

"흐아, 원정 시작부터 빡셀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잘됐군."

군터가 슬쩍 웃었다.

"각오해 둬라. 분명 최악의 원정이 될 테니."

* * *

탁!

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것을 차갑게 쳐냈다.

'건드리지 마세요.'

때늦은 사춘기가 온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싸웠기 때문이다.

스윽.

'아 건드리지 말라고요!'

그러자 아버지의 꼬리가 이번에는 나를 퍽 쳤다.

그 탓에 허공에서 세 바퀴 돌아서 착지했다.

"사아악!"

내가 화를 내자, 아버지 역시 혀를 낼름거리며 화난 표정을 지었다.

거참 화해하자고 하려면 끝까지 하실 것이지.

확 패왕 스킬을 써 버릴까 고민하던 도중, 아버지가 먼저 고개를 팩 돌렸다.

입맛이 쓰다.

아버지한테 마음이 상한 이유는 그가 나를 꼬리로 내려쳤기 때문이다.

갈비뼈가 적어도 열 개는 부러진 것 같다. 포션이 없었다면 자칫 죽을 뻔했다.

"사악!"

생각하니까 다시 화나네.

전생에 아버지한테 많이 두들겨 맞아 봐서 익숙한 게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이거 가정폭력으로 신고 감이야!

-적어도 사과는 하잖냐.

······그렇기는 하다.

이번 생의 아버지는 적어도 때리고 나서 사과는 했다.

-그리고 뭐, 일부러도 아닌 것 같드만. 속은 좁아 가지고······.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꼬리로 후려친 것이 고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눈을 뜨고 나와 보니.

아버지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자고 있는 듯한데, 웬일로 사라지지 않고 앞에 있었다.

깜빡 졸아 버린 걸까.

문득 궁금했을 뿐이다.

아버지의 레벨이며, 특성, 스킬 등이.

나는 눈에 힘을 주어서 아버지의 상태창을 엿보았다.

──────────────

[폴라리스 서펜트lv100]

──────────────

아버지의 레벨은 딱 100이었다.

주무시고 계셔서 그런지, 어떻게 조금 더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더 집중해서 특성이며 스킬도 알아보려던 순간.

아버지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나는 쾅, 땅에 처박혔다.

아버지가 나를 꼬리로 후려쳤다는 것은 직후에 알았다.

뭐, 그렇게 된 것이다.

조금 데면데면해졌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겠지.

아버지를 돌아봤다.

감정을 알기 어려운 눈빛으로,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역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이러면 되겠지.

'참모.'

"응 대장······."

'출진!'

고릴라 여사는 내 나팔수 역할을 해 준다.

그 충만한 성량으로.

"출지이이인-!"

쩌렁쩌렁 외친다.

그리고 동물원의 짐승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마물의 우두머리]

100마리 이상의 마물을 길들였습니다.

마물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됩니다.

자연스러운 위엄이 흘러나옵니다.

──────────────

내 무리의 수도 결국 100을 넘어섰다.

여전히 벌레 군단이나 영장류 무리보다는 떨어지는 전력이지만 많은 게 달라졌다.

이제는 두 세력들도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 못한다.

원숭이나 벌레들의 습격도 멈췄다.

결국 오늘까지 무사히 버티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천하삼분지계는 먹혀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중앙지대에 돋아난 뿌리에서 찬란한 열매가 맺히는 날이 찾아왔으니.

모든 무리가 거대한 중앙 뿌리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원숭이들의 무리, 그리고 벌레들의 무리들이 보였다.

'징글징글하게 많구나.'

놀라고 감탄했다.

벌레 군단의 압도적인 물량 때문이었다.

늪지대에 저렇게 많은 벌레 마물이 숨어 있었나. 적어도 만 단위로 세야 할 것이다.

아, 저기 대왕지네도 보인다.

보아하니 리옥크와 침팬지 중에서는 침팬지가 좀 더 센 것 같다.

반면 무리의 전력은 벌레 군단이 물량빨로 우위일 듯하고.

중앙의 거대한 뿌리 주변에는 가시덤불들이 자라 있었다.

접근을 막는 역할 같지만 마물들이 넘어가고자 한다면 금방 박살 날 방벽이다.

그 주변을 원숭이들과 벌레들이 둘러쌌다.

서로 겨루려는 듯 으르렁댄다.

저들은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찬란한 열매는 또 얼마나 유혹적인 냄새를 풍길까.

리옥크와 은색 원숭이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이전에 결판내지 못한 승부를 다시 가르려는 듯.

'정지.'

"멈춰어!"

우리는 그 사이에 끼지 않았다.

조금 물러서서 무리를 멈춰 세웠다.

잔뜩 겁을 먹었던 녀석들이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적당한 전력. 두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무리가 우리다.

이번에도 나는 악착같이 어부지리를 노릴 것이다.

*「곧 찬란한 열매가 맺힙니다.」

또 한 번, 메시지가 울렸다.

아버지에게도 마력 포션을 충분히 먹여 뒀다.

과묵하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열매, 반드시 얻어야 한다.」

아무런 관심도 없던 것처럼 바위 아래에서 주무시던 양반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

상관없는 일이다. 나도 꼭 그 열매를 얻을 생각이니.

'두더지야.'

나와 함께 고릴라의 어깨에 올라타 오는 영광을 누린 땅굴 두더지.

'다녀와라.'

그가 내 명령에 따라 땅을 파고 들어갔다.

땅파기 하나는 귀신같은 녀석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다른 두 무리를 제치고 열매를 챙길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결국 충돌할 것은 틀림없었다.

어부지리를 위해서는 적어도 싸우고 살아남을 둘 중 한 놈은 해치워야 하지 않겠는가.

나와 펠레리안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수백 가지 경우의 수 중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한 가지 계책을 고안해 냈다.

'통하겠죠?'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겠지.

그럴 것이다.

계책을 떠올려 낸 배경이 있었다.

'어떤 무리에 소속되느냐는 길들이기의 문제가 아닌 듯하니.'

처음에는 착각했다.

길들이기를 성공해야 무리로 편입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알아채고 말았다.

분명 내가 길들인 꾸벅이, 대갈이, 왕눈이는 내 무리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들로부터 경험치를 공유받은 적은 없었다.

애들이 아직 어리다고 사냥을 안 한 건 아닐 테다.

반면, 길들이는 데 실패한 아버지는 내 무리에 속해 있다.

아버지께 공유받은 경험치 덕에 벌써 레벨 20이 훌쩍 넘었다.

그렇다면 추정해 볼 만한 것이다.

벌레 군단은 어떠할까.

저 지성 없는 리옥크가 다른 모든 벌레들을 길들였을까?

그 인면거미나 대왕지네는 리옥크에 의해 길들여졌을까?

아닐 것 같았다.

심지어 그 거미는 리옥크를 괴물 운운하면서 경멸하는 눈치까지 보였다.

한 무리에 소속된다는 것은 '그 마물의 지배하에 놓이는가'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우두머리의 명령과 통솔을 따름으로써 무리에 편입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 지휘를 따르는 것처럼.

그렇다면 나는······.

"대장."

고릴라가 나를 불렀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두더지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찾았냐? 가도 되겠어?'

두더지가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까 교차검증을 한다.

하늘 위에는 보라색 앵무새 한 마리가 퍼덕거리고 있었다.

──────────────

[외눈박이 보라앵무lv12]

──────────────

올빼미가 죽고 새로 영입한 정찰용 마물이다.

깃털 색이 보라색이라서 비행할 때 눈에 덜 띈다.

녀석이 꽥꽥대며 답했다.

"있다! 있어!"

그렇다면, 도박을 한번 걸어 볼 만하리라.

고릴라와 아버지에게 신신당부했다.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전력을 아껴 두라고.

나는 긴급귀환으로 쉽게 돌아올 수 있을 테니.

「다녀와라.」

아버지의 배웅을 받았다.

두더지를 따라 땅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비좁지만 충분히 기어갈 만한 땅굴이다.

한참을 나아가다 보니, 두더지가 어느 순간 멈춰섰다.

위를 가리키더니, 자기는 옆의 공간으로 슬쩍 빠진다.

'넌 돌아가 있어.'

두더지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

나는 위로, 지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수한 수의 벌레들.

키긱,타닥, 탁. 틱, 킥. 지직, 바박. 칙. 다각, 도가각, 각, 키긱,타닥, 탁. 틱, 킥. 지직, 바박. 칙. 다각, 도가각, 각,키긱,타닥, 탁. 틱, 킥. 지직, 바박. 칙. 다각, 도가각, 각, 키긱,타닥, 탁. 틱, 킥. 지직, 바박. 칙. 다각, 도가각, 각

이곳은 벌레군단의 우익(右翼) 진형 한가운데였다.

벌레 마물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봤다.

이질적인 파충류는 놈들에게 먹이로 보일 것인가.

뛰어들어서 벌레들과 드잡이질 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께에!"

당황한 대왕지네 맘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네는 얼른 주변의 벌레들을 물렸다.

이곳에 있는 벌레들은 확실히 지네 맘의 지배력 아래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인 일이다.

그녀의 앞에 서서 꼿꼿이 몸을 세웠다.

'대왕지네 씨.'

예전에는 대왕지네 님이라 부르며 알아 모셨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한 무리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

위엄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대왕지네 역시 당황한 기색으로 독발톱을 움찔거렸다.

'제안을 하러 왔어요.'

꾸벅이, 대갈이, 왕눈이가 나를 반가워한다.

애써 모른 척했다.

그래, 너희들과 싸울 수는 없지.

너희들을 죽게 놔둘 수는 더욱 없고.

"께께······."

잔뜩 긴장한 듯 보이는 지네 맘에게 꼬리를 살짝 내밀었다.

'내 무리로 들어와요.'

대왕지네와 그녀의 무리를 영입하는 것.

그게 내 계획이었다.

*「길들이기lv9를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확고하게 말할 것이다.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아, 이게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나한테 와.'

지네 맘이 어쩔 줄 모르며 더듬이를 흔들고.

어째선지 삼 남매가 독발톱을 캉캉대며 지네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 아수라장(阿修羅場) >

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