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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040-050

040. (긴박한 배경음악 ON)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치는 영웅들이 그렇듯.

혹은 천하에 악명이 자자한 악당들이 그렇듯.

역천의 마도사 펠레리안이 가진 이명은 '역천' 하나가 아니었다.

그의 수많은 이명 중 유명했던 것 하나가 바로 '던전 마스터'.

마도사라는 족속이 던전 만들기 좋아하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펠레리안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가 만든 던전의 개수는 100단위를 가뿐히 넘어선다. 심지어는 500개 이상 된다고 추정하는 자들 또한 있다.

그가 장생족인 엘프라고 해도 믿기 어려운 수치다.

일 년에 두 개를 지어도 250년이 걸리는 것 아닌가.

펠레리안의 던전 중에는 대형 이상으로 분류되는 것도 많음을 생각해 보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치다.

하지만 그의 던전이 전 대륙에 퍼져 있으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곳도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역천의 노괴는 어떻게 그렇게 빠른 속도로 던전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우선 그 비결 중 첫 번째는 압도적인 원소 마법 능력일 것이다.

원소 마법에 한해 펠레리안은 역사상 최흉(最凶)의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그가 사흘 만에 산 하나를 무너뜨린 일화를 떠올려보면,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지반 공사도 순식간에 해치웠을 것이다.

땅의 정령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 시간은 더욱 단축되었으리라.

두 번째로 추정되는 것은 그가 드워프, 그리고 노움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가 흉악한 대마도사라고 하여도 던전은 땅을 파는 기술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던전 내부의 구조물, 복잡한 함정, 각종 기계 장치까지.

그것은 분명 일정 수준 이상의 인력이 필요하다.

요정이 드워프, 노움과 협력할 수 있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펠레리안 본인이 이미 요정 사회에서 겉도는 아웃사이더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가 요정임에도 불구하고 드워프 광산, 그림자 요정 둥지에 방문했다는 기록 또한 여럿 존재한다.

다만 펠레리안은 함정 기술에 매료된 인물이었다.

던전의 함정들은 분명 그가 직접 설계하였을 것이다.

「역천의 흉성에 대하여 中, 마탑 발간」

* * *

달칵, 달칵.

'젠장, 제기랄!'

홉 고블린 킹 크록.

그는 자신의 팔찌를 계속 매만졌다.

콩알만 한 마석이 박혀 있는 특이한 디자인이다.

마석의 바로 옆에 누르면 들어가는 걸쇠 같은 것이 있다.

크록은 그것을 누르기를 반복했다.

달칵, 달칵, 달칵.

마석이 반짝거리며 점멸했다.

이 팔찌를 넘겨 준 자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결코 팔찌를 사용할 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적들이 코앞까지 따라왔다.

팔찌는 발신기였다.

어느 날, 요정이 그에게 찾아왔다.

평범한 요정이 아닌 그림자 요정이었다. 이름은 데쉬난이라 하였던가.

피부는 잿빛이었고, 어둡고 음침한 기운이 스믈스믈 풍겨왔다.

그는 크록이 홉 고블린 킹으로 진화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비밀을 알려 주었다.

이곳 코끼리 바위 아래에 마도사의 던전이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유산을 사용하면 크록도 홉 고블린 킹 다음의 진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란 마물의 본능.

게다가 한 번 진화를 성공한 크록에게는 야심이 생겼다.

모든 고블린의 군주가 되고 싶은 마음이.

요정은 던전의 입구까지 도달하면 팔찌를 이용해 자신을 부르라고 말했다.

그 던전 내부는 마경이나 다름없으니, 자신이 필요할 것이라면서.

그러겠다 약조했지만 당연히 부를 생각은 없었다.

크록은 전부 독차지하고 싶었으니까.

'왜 안 오는 거야······!'

하지만 지금, 크록은 미친 듯 팔찌를 조작했다.

저 뱀이.

미친 뱀이 함정을 돌파하고 있었다.

"쉬잇!"

뱀이 혀를 낼름거리자 뒤따라오던 룬가의 고블린들이 멈췄다.

저 미친 고블린들은 무섭지도 않은지 뱀을 뒤따르고 있었다.

뱀은 놀랍게도 함정을 해체하고 있었다.

꼬리로 바닥을 몇 번 두드리더니, 쑤욱, 하고 뭐가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후두두둑!

천장의 구멍에서 화살이 힘없이 떨어졌다.

뱀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위풍당당하게 기어왔다.

미친 뱀, 미친 뱀.

함정을 해체하는 뱀이라니.

저게 그 멍청한 부하 놈들이 말한 심장 파먹는 뱀일까.

뱀의 지휘에 따라 룬가의 고블린들은 공동의 절반까지 다가왔다.

이 공동을 주파하느라 크록은 부하 전부를 희생시켰는데.

그러고도 천운이 따라 통과했는데, 저들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뱀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벽에 붙어 있는 뭔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벽의 타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곳에서 손잡이 같은 것이 나오더니.

뱀은 꼬리로 그것을 잡아당겼다.

철컹-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크록에게만 불길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격 체제가 중단됩니다.

-환영합니다.

크록은 경악, 하지는 않았다.

울리는 목소리는 요정어였으니 크록이 이해할 리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좋은 뜻은 아닌 듯했다.

뱀은 룬가 부족의 고블린을 돌아봤다.

그리고 꼬리와 몸짓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듯했다.

"함정이 해제됐단 말이지!"

나나루크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어떻게 뱀의 말을 알아듣는지 크록으로서는 짐작도 못 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크록에게 달려왔다.

정말로 함정은 작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끼 두 자루를 들고 덤볐다.

"좋다! 이 건방진 것!"

크록 역시 무기를 뽑았다.

육중한 박도가 그의 무기였다.

나나루크가 도끼를 들고 훌쩍 뛰어올랐다.

"죽어엇!"

"덤벼라앗! 어디 한번 암수를 겨뤄 보자-!"

"자웅이겠지 이 무식한 놈아!"

나나루크는 몸을 활짝 폈다가 웅크리듯 도끼를 내려찍었다.

그에 대응해 크록은 아래에서부터 박도를 올려쳤다.

쩌어엉!

놀랍게도 튕겨 나간 것은 나나루크였다.

체급의 차이, 그리고 근질의 차이.

진화를 한 번 더 한 만큼의 격차가 둘 사이에는 있었다.

크록은 자신이 더욱 우세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칠 정도로 어리숙한 전사가 아니었다.

바닥을 구르며 일어나려는 나나루크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박도가 나나루크를 양단하기 위해 낙하했다.

그런 크록에게 홉 고블린들이 달라붙었다.

자디람이 창을 찔렀고, 나나루크의 동생인 카디람은 도끼를 휘둘렀다.

카가가각!

하지만 합공에도 불구하고 크록을 해치지는 못했다.

그는 제대로 된 비늘갑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원피스를 입은 형태라 멋있지는 않았지만 방어력은 충분하다.

뻐억!

크록이 카디람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 위력이 엄청나서 카디람은 붕 나가떨어져 굴렀다.

"카디라암!"

나나루크는 마치 튕기듯 일어섰다.

그러곤 엄청난 속도로 도끼를 휘둘렀다.

카강- 캉! 카앙!

"이, 이런 미친!"

크록도 경악했다.

나나루크는 점점 가속하고 있었다.

기껏 홉 고블린이 크록과 비슷한 수준의 신체 능력을 보인다고!

그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크록도 눈치채 버렸다.

"너, 진화하고 있구나-!"

"무슨 개소리야!"

나나루크는 화를 내며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크록이 보기에는 틀림없었다.

룬가의 새 족장은 진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홉 고블린 다음의 경지, 크록과 같은 경지로.

그 사실에 크록은 다시 없을 만큼의 위기감을 느꼈다.

"어떻게-!"

"닥쳐!"

도끼와 박도가 거의 대등하게 맞부딪쳤다.

하지만 크록에게는 불리하게도, 나나루크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직 멀쩡한 자디람이 창을 들고 덤벼 댔다.

크록의 몸에 상처가 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패배한다.

크록이 자신의 죽음을 짐작한 시점이었다.

"나, 나, 나나루크-!"

덜덜 떠는 목소리.

그 한심한 아들의 목소리가 이토록 반가울 수 있었던가.

"찬달!"

한때 나나루크와 혼인을 약속했던 찬달이 있었다.

카디람의 뒤에서 목에 칼을 대고 있다.

"멈춰! 멈추라고!"

나나루크와 크록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찬달, 뭐 하는 짓이야!"

나나루크가 분노했다.

하지만 찬달은 당장이라도 카디람의 목을 찌르겠다고 고래고래 협박했다.

"도끼 내려놔! 안 그러면 네 동생은 죽어어!"

던전의 입구는 확실히 지키고 있을 텐데 찬달이 어떻게 들어온 것인가.

그 이유는 사실 놀라울 정도로 간단했다.

찬달은 크록과 함께 던전으로 진입했다가, 더는 무서워서 못 가겠다며 포기했다.

홀로 낙오한 그는 나나루크와 룬가 전사들이 들어오자 시체인 척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렇게 뒤를 치게 되었다.

"누나, 이 새끼 무시해! 그냥 크록 저거 얼른 죽여!"

"닥쳐!"

찬달의 단검이 카디람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나나루크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크록이 쾌재를 불렀다.

멍청한 연놈들이다.

서로 혼인했으면 딱 좋았겠군.

찬달 나름에게도 생각은 있었다.

"도끼 내려놔 나나루크! 그리고 아버지!"

그의 요구사항은.

"항복하면, 나나루크와 그 동생들도 살려 주는 겁니다아!"

크록이 자식에게 명령했기를.

나나루크의 동생을 죽이라고 했다. 그러면 살려 주겠다고 하며.

찬달은 그 명령을 취소하라고 외친 것이다.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자식이 있을 수 있을까.

"오냐야, 내 당연히 그리해야지!"

크록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물론, 일이 끝나고 나면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또다시, 천장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요격 체제가 재가동됩니다.

-요격기관을 수동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다.

요정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요정어를 알아듣는 뱀은 한 마리 있었다.

이 황당한 인질극에서 홀로 떨어져 뜯어진 벽의 기계 장치를 조절하는 뱀 한 마리가.

-야 이 자식아! 거기가 아니라 아래쪽.

'여기요?'

-그래, 그걸 당겨라. 옆에 거 당기면 다 죽어.

뱀과 요정의 혼령.

그 둘의 대화는 들을 수 있는 사람들조차 없었으니.

설마 뱀이 기계 장치를 요리조리 조작하는 것이 그러한 결과를 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퉁.

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이곳에 장치된 함정들은 코카트리스가 자리 잡았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창을 좋아하는 펠레리안의 취향은 그대로였으니.

벽 한쪽에 뚫려 있는 구멍에서 철창이 회전하며 쏘아졌다.

콰드드드득!

철창은 크록의 비늘갑옷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의 거죽을 뚫고, 갈비뼈를 부숴 놓았으며, 내장을 헤집었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 반대쪽의 갑옷마저 뚫었다.

철창에 얽혀 버린 갑옷과 갈비뼈 탓에, 크록은 창과 함께 부웅 날았다.

콰앙!

그리고 그대로 옆의 벽면에 처박혔다.

뱀은 생각했다.

'파격적인 비주얼의 고블린 꼬치군.'

그 비주얼을 보고 고블린들은 경악했다.

심지어 인질극을 벌이던 찬달마저.

카디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숙였다.

"누나!"

훤히 드러난 찬달의 가슴팍.

나나루크는 전남친을 향해 도끼를 던졌다.

* * *

팍!

나이스샷.

인질범은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나나루크가 치명적인 여자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찬달이라는 저 얼간이는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별을 겪게 되었다.

"꾸에엑!"

쿵 하면서 쓰러진 찬달.

안 죽었나?

비명을 지르며 바둥대는 것을 보면 심장이 아니라 어깨를 맞았나 보다.

나나루크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얼른 일어난 카디람이 찬달의 배 위에 올라타서 마구 주먹질을 해 댔다.

"이 개자식! 형으로 따랐는데!"

찬달이 죽을지 살아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편히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음, 훌륭하게 마무리되었군.

-큰일 날 뻔했어.

펠레리안이 투덜댔다.

-조금 늦어서 저 크록이라는 놈이 문을 강제로 열었다면 틀림없이 전부 무너졌을 것이다.

악당의 비밀기지도 아니고, 이 던전에는 자폭 장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저 안쪽의 문을 억지로 열면 코끼리바위와 던전 전체가 무너지는 장치였다.

왜 그렇게 극단적인 방식을 썼냐 물으니, 귀한 마석을 도굴꾼한테 넘겨줄 수는 없다나.

지당한 말이 틀림없었다.

-참 나 원. 나를 뭐 길 찾는 마도 정령쯤으로 부리다니.

펠레리안이 투덜댔다.

지금은 용납하도록 하자.

그 귀한 마석을 내가 다 먹어 치울 계획이니까.

그리고 그 덕택에 크록이라는 고블린을 쉽게 잡았다.

크록은 창에 꿰인 상태에서도 아직 살아 있었다.

"네, 네놈, 크릅."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린다.

두 눈에 핏발이 서서 무시무시하기 그지없었다.

"한낱 뱀에게 내······ 컥, 원대한······."

"사아악!"

"케엑."

내가 한 마디 대꾸해 주자 풀썩 고개를 떨군다.

해치웠나.

*「레벨이 올랐습니다.」

해치웠다.

그리고 레벨업의 향연은 끝나지 않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미친.

아, 또다시 그분이 떠오르고 마는 순간이다.

나는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크록이 나나루크랑 비슷한 정도로 강했던 걸 생각하면 이렇게 경험치를 많이 줘도 되나 싶은데.

하긴, 펠레리안의 함정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홉 고블린 킹이라 그런지 경험치가 내 기대 이상으로 막대했다.

역시 상위 종 마물은 다른가 보다.

*「레벨이 한계치에 다다랐습니다.」

*「진화의 조건이 일부 충족되었습니다.」

'화이트 더블혼 서펜트lv20'.

강림.

타이밍이 아주 좋다.

진화 조건을 더 충족해야 하기는 하는데, 나머지는 던전에서 채울 수 있을 듯했다.

그러면 이제 이별의 순간이 왔구나.

던전 안으로는 나 혼자만 들어갈 것이다.

나는 나나루크에게 돌아갔다.

"아으······."

나나루크는 풀썩, 주저앉았다.

깜짝 놀라서 다가갔다.

다른 고블린들도 달려왔다.

"왜 그래 누나!"

"괜찮아, 그냥, 어지럽고······ 좀 졸리네."

부상을 입어서 그런가 했는데 아니었다.

나나루크는 손을 떨며 말했다.

"나······."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곧, 진화할 수 있을 것 같아."

"진화······?"

아, 설마.

펠레리안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깜짝이야, 뭐요!'

-그렇구만, 그게 홉 고블린 킹의 진화 조건이었어!

홉 고블린 킹.

고블린의 상위 진화종.

조금 전에 죽은 크록이 바로 그 홉 고블린 킹이었다.

-애초에 한 개체만 존재할 수 있는 종이었구만. 조금 전에 전대의 홉 고블린 킹이 죽어서 저것도 진화 조건이 충족된 거다! 드디어 비밀이 풀렸군. 나는 천재야!

'아 예.'

-기록이 있었지. 어쩌면, 이 고블린은 한 단계 더 너머까지 갈 수 있겠어.

뭔지 모르겠지만 펠레리안은 신나서 혼자 중얼거렸다.

들어 보니, 나나루크가 홉 고블린 킹으로 진화할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가 전 대륙의 고블린 부족을 통일할 고블린의 제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좀 오바하시네.'

-원래도 잠재력이 있는 것 같았어.

잠재력?

잠재력 20인 나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나나루크에게 다가가 그녀의 수고를 치하해주었다.

'나나루크 고생했어.'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응······ 아니야, 너도 고생했어."

'아냐 너가 더 고생했······ 어?'

나나루크와 내 눈이 서로 마주쳤다.

"어라?"

'들려?'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이심전심을 넘어서 이제는 내 말을 알아듣는다.

충격적이기 그지없다.

──────────────

[홉 고블린 나나루크lv30(진화 중)]

[특성]

[전사], [족장], [소통(new)] ······.

──────────────

와!

진화는 잠잘 때만 하는 게 아니었나.

나나루크에게 소통이라는 특성이 생겼다.

-고블린의 제왕은 대륙의 모든 고블린이 따르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이 통해야겠지.

나는 그런 특성 없어도 말 잘 통하는데.

-말도 못 하는 뱀 주제에······.

'······그리고 크록은 제 말 못알아듣는 것 같았어요.'

-제대로 진화한 놈이 아닌가보지.

나나루크와는 분명 말이 통했다.

그녀와 나는 서로의 대화가 통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고마워······ 네 도움은 잊지 않을 거야."

나나루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맹세할게. 너는 우리 고블린들의 영원한 친구일 거야."

'민망하게······. 고마워.'

*「업적, '고블린의 맹우'를 달성했습니다.」

거참, 업적 달성하려고 그런 건 아닌데.

이건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다.

빨리 던전에 들어가 보고 싶다.

"같이 가줄까?"

'아니, 괜찮아.'

던전은 혼자 들어갈 생각이다.

'나나루크, 혹시 말하는 건데. 내가 던전에 들어가고 코끼리바위 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면 말이야······.'

나는 중요한 사실을 설명해 줬다.

만약 던전에서 푸른빛이 솟은 뒤에도 내가 나오지 않으면 최대한 멀리 물러나라. 룬가 부족으로 돌아가고, 가능하면 더 멀리 떠나라.

언제 엘프 조사관이 찾아올지 모르니까.

"들렀다 가. 우리는 위에 있을테니까"

'좋아.'

나나루크가 손을 내밀었다.

나도 꼬리를 내밀어 그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씨익 웃고, 나도 웃었다.

웃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겠다만.

그러면 던전에 들어가 볼까.

자자, 선수 입장.

비늘 하나씩 팔면 금방 부자

041.

-펠레리안 님, 환영합니다.

목소리가 나오고.

쿠웅.

내가 조금 전 통과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철문은 이제 누구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이전에는 노크만 몇 번 했더니 열린 것과 달리, 이번 문에는 한층 복잡한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괜히 본인인증 장치를 해 놔서 고생했군.

'그러게 말이에요.'

원래 펠레리안은 철문에 본인의 피를 흘려 넣어야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를 해 두었다.

동시에 목소리를 인증하고 본인의 고유 마력 파동을 흘려보내야 문이 열렸다.

철저하기가 심했다. 하마터면 코앞까지 와서 들어가지 못할 뻔했다.

다행히 그 보안장치를 설계한 것이 펠레리안의 본인이었다.

백도어를 만들어 놔서 여차저차 문을 열 수 있었다.

'무슨 공인인증서 시스템도 아니고.'

-그게 뭐냐?

'그런 게 있습니다.'

조명이 켜졌다.

퉁, 퉁, 퉁, 퉁, 퉁.

헐리웃 영화에서 버려진 창고에 들어갔을 때, 할로겐 램프등이 켜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또 갑자기 골렘이 일어나면 어떡해.

던전이 잘 보존된 것을 보니, 예전처럼 경비 골렘이 반파되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골렘들은 어마어마하게 강했다.

아마 지금의 나라고 해도 절대 못 이기지 않을까.

-허허, 걱정하지 마라. 이곳 내부에는 함정이나 경비장치가 없어.

펠레리안은 내가 겁먹은 것을 보고 껄껄거리며 즐거워했다.

못된 노인네 같으니라고.

'여긴 뭐가 다른 거예요?'

-123번 던전은 외부인의 입장을 가정한 곳이 아니다. 오로지 내가 들어갈 것만 상정하고 만든 곳이지. 때문에 외부 보안은 강력하지만 안에는 쾌적하게 만들어 놨어.

하긴.

이번에는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펠레리안 님 환영합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전 던전의 정확한 명칭은'실험실'. 그리고 이곳은 '마석 보관소'이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근데 뭐, 던전이 한두 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들여보낼 수도 있잖아요.'

-아······.

'친구한테 부탁해서 마석 좀 가져와 달라고 할 수도 있고.'

이렇게 보안이 철저해서야 불가능한 일 아닌가.

매번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면 귀찮기 그지없으리라.

펠레리안은 침묵했다.

내가 질문했던 것도 깜빡할 때쯤 입을 열었다.

-······친구 없지.

'어떻게 알았어요!'

난 화들짝 놀랐다.

-어?

'아······ 본인이 친구 없으시다고.'

-그래.

순간 나한테 친구 없다고 한 줄 알았다.

부끄러웠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되물었다.

'그러면 믿을 만한 동료는요?'

-······.

펠레리안은 또다시 침묵했다.

한참 뒤에 답한다.

-없다.

'믿을 만한 부하는?'

또 침묵.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정말 나쁜 뱀이라면 이렇게 물어봤을 거다.

아니, 엘프씩이나 되면 엄청 오래 살았을 텐데 어떻게 그래요?

그래도 가족은 있을 거 아닙니까. 그 정도 부탁할 수 있는 가족은 있지 않으신가? 형제자매나 하다못해 부모님이라도!

그렇게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 정도로 무자비한 뱀은 아니다.

펠레리안은 내게 맹세했다.

내가 묻는 것에 솔직히 대답하고, 내 말을 따르리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펠레리안을 무급 노예로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면 억지로 묻지 않는다.

조금 전 같은 질문을 정말로 했다면 펠레리안은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를 거둘 때는 마음으로 품어야 하는 법이다.

진심으로 충성하는 부하는 결코 강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펠레리안 본인은 내가 자신을 부하라고 여길 줄은 모르겠지만.

-뭘 봐.

저걸 보면 알 수 있다.

'뭘 보긴요. 빨리 마석 창고로 가야지.'

-가고 있잖나!

펠레리안은 나와 아웅 대면서도 대화를 이어 나갔다.

진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언제 틱틱 댔냐는 듯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 결과지는 이제 잊어라.

이전에 키메라의 던전에서 내 특수 진화조건들을 알아본 것을 말하는 거였다.

-내가 보기에, 네 진화트리는 한계가 없다고 봐도 무방해.

'헉.'

내 잠재력 20을 꿰뚫어 보다니. 역시 펠레리안인가.

나는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그러면 제가 갑자기 다른 마물로 진화할 수도 있는 거예요?'

-다른 마물?

'예, 지네 같은 거요.'

떠오르는 것이 지네여서 문득 그리 물었다.

-불가능하기도 하고 가능하기도 하다.

난 이렇게 뜬구름 잡는 대답이 싫더라.

다행히 펠레리안은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다음 진화에서 다리를 달고, 그다음 진화에서 갑각을 달고, 그다음 진화에서 독발톱을 단다면 지네 계통의 마물로 진화할 수 있겠지. 하지만 뭐하러?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너는 아주 효율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각 마물당 진화할 수 있는 횟수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설명했지.

'네 선생님.'

-너는 어째선지 짧은 기간에 진화를 반복했지만, 아직도 한참 진화할 수 있을 것 같군. 뱀, 지네, 거미 같은 미물들이 진화를 여러 번 할 수 있다고 해도 신기한 일이야.

미물이라고 안 하기로 했는데.

하지만 칭찬 같으니까 얌전히 들어줬다.

'효율적으로 진화했다는 말은 뭔가요?'

-효율적인 진화가 반드시 강한 마물로 진화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지.

'그러면?'

-더욱 잠재력이 큰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이쪽이 아니라 다른 트리로 진화했다고 가정해 보자.

펠레리안 교수님이 강의를 시작했다.

-리틀 그린 스네이크의 진화트리는 다양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향은 그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리틀 그린스네이크에서, 그린 스네이크로, 그리고 자이언트 그린 스네이크로.

-거기가 끝이다.

'겨우!'

-운이 좋다면 그린 스네이크 킹까지 갈 수도 있겠지.

자이언트 그린 스네이크는 10m에 달하는 거대한 뱀이다.

하지만 겨우 세 번 진화했을 뿐인데 거기서 끝이라니.

내가 3번 진화해서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으로 진화한 것을 생각해 보면 너무 아쉽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이언트 그린 스네이크가 되기 전에 더 상위종으로 진화해야지. 너처럼 파이톤이 되는 길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메두사맘은요?'

-메두사 서펜트 말인가. 그것 또한 특수한 진화과정을 밟은 거야.

'서펜트'.

그것은 스네이크, 혹은 파이톤보다도 상위종의 뱀 마물이었다.

-서펜트가 된 마물이 석화 능력을 얻어서 진화하게 된 것이 메두사 서펜트일 거다. 그러나 그것도 아쉬운 방향이야. 메두사 서펜트는 한 번의 진화밖에 더 못 할 테니.

오호.

메두사 맘이 더 진화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은 사실이었다.

-너도 서펜트를 목표로 진화하는 게 맞을 것이다. 서펜트는 다른 네임드 뱀 마물들도 거친 특수진화과정이거든.

메두사 서펜트가 되기는 싫다. 너무 못생겼으니까.

펠레리안의 말 중에서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네임드 뱀 마물이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고, 살아 있다고 추정되는 개체도 있지. 그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하지. 일단 지금의 진화가 중요하니까.

내가 우선적으로 달성할 특수 진화조건.

펠레리안은 가볍게 말했다.

-효율적이고 확실한 방법이 있다. 나만 아는 비법인데······.

'뭡니까!'

생각보다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고등급의 마석을 많이 먹는 것이다.

'아하.'

-본래라면 결코 네 수준에서 달성할 수 없는 진화조건이지. 마물이 어디서 그만한 양의 마석을 구하겠나.

실로 그러했다.

모든 마물이 마석을 품은 것도 아니고.

고등급의 마석을 가진 마물은 하나같이 엄청 강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펠레리안의 마석 저장소.

그야말로 뷔페 식당이나 다름없다.

-이전처럼 마력 포화로 진화의 수준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일이지. 대량의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품종으로 진화할 수 있을 테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드디어 진짜 검사가 될 수 있겠군요!'

인비저블 핸드 마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뛴다.

반드시 뱀검술의 대종사가 될 것이다.

-······마법이야말로 궁극의 학문이거늘.

펠레리안은 혀를 차면서도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저 레버를 당겨라.

나는 그렇게 했다.

철컥.

하더니, 벽면이 열린다.

슈우욱 하며 허연 김이 뭉게뭉게 흘러나왔다.

차가운 기운이 든다.

그리고 진열장 같은 게 툭 튀어나왔다.

-저것이 내 마석 컬렉션이다. 보아라, 그리고 갈채하라.

'와!'

나는 감탄했다.

보관소라고 해서 먼지 잔뜩 낀 창고를 생각했는데 이게 뭐야.

수정판을 덮어서 진열한 것이 마치 보석함 같았다.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꼭 고급 쇼콜라티에의 초콜릿 진열장 같기도 했다.

마석 수십 개가 빼곡하게 자리해 있었다.

가장 작은 것은 콩알만 한 1등급 마석들.

──────────────

[1등급 마석], [1등급 마석], [1등급 마석], [1등급 마석], [2등급 마석], [2등급 마석], [2등급 마석], [2등급 마석], [2등급 마석], [2등급 마석], [2등급 마석], [2등급 마석], [3등급 마석], [3등급 마석], [3등급 마석], [3등급 마석], [3등급 마석], [4등급 마석], [4등급 마석], [4등급 마석]······

──────────────

그 옆으로 2급, 3급, 4급까지, 4급 마석 같은 경우에는 도토리만큼 커졌다.

펠레리안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감사히 먹어라 뱀, 먹을 수 있는 만큼은 다 먹어도 좋다! 아마 어느 정도 먹으면 마력 포화상태가 되어서 더 못 먹겠지만······.

그 키메라의 마석조차 4등급 마석이었다.

두 개 먹었을 때는 마력이 꽉 차 버렸지.

펠레리안은 더욱 배포가 큰 결정을 내렸다.

-남는 것은 아공간에 남는 자리만큼 가져가도 좋다.

아, 그 말은 하지 말지.

-······왜 아무 말도 없지? 너무 감사해서 할 말을 잊은 것이냐 뱀?

펠레리안의 말투는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오면 내가 의심하기 싫어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펠레리안의 인성에 대해서 파악하기에는 차고 남는 기간이었다.

'더 있죠?'

-응?

'마석, 이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내가 먹은 최고의 마석은 키메라가 가지고 있던 두 개의 4등급 마석이었다.

키메라는 내 입장에서 무시무시한 적이었다. 지금 싸워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펠레리안도 그럴까?

그가 이렇게까지 거대한 던전을 만들어서 숨겨 둔 게 고작 4등급 마석이라고?

그럴 리 없었다.

나는 고풍스럽게 불만을 표했다.

'센터 까기 전에 더 보여 주시죠.'

-······.

'입 다문다고 되는 거 아닙니다. 솔직히 공개해요.'

조금 전에는 서로의 신뢰니 뭐니 운운했지만.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지.

펠레리안은 한참을 끙끙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의 레버를 또 당겨라.

나는 그리했다.

취이익-

그리고 조금 전처럼, 진열장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그제야 나도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

[5등급 마석], [5등급 마석], [5등급 마석], [6등급 마석], [6등급 마석], [7등급 마석], ······[9등급 마석]

──────────────

수는 적지만 씨알이 굵다.

무려 9등급 마석까지 하나 있었다

마석 등급이 대체 몇까지 있는 거야.

'진짜 더 숨긴 건 없죠?'

-마석이 어디 마물만 잡으면 툭 튀어나오는 줄 아나 제길-! 더 고등급은 팔아서 돈으로 받았다. 됐냐!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펠레리안은 씩씩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위로했다.

'어차피 제가 안 챙기면 요정들이 와서 털어갈걸요.'

-모르지······ 아예 바위를 무너뜨리면 못 찾을지도.

'어허.'

펠레리안도 결국은 내 말을 인정했다.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먹는 거야. 남으면 나중에 돌려줘야 해.

펠레리안이 혹시나 몸을 되찾으면의 이야기다.

-저등급 마석부터 먹어라. 아니면 진짜 몸이 터져 죽을 수도 있어.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그러면 먹겠습니다.'

1등급 마석부터 먹었다.

이건 어떤 마물에서 추출한 걸까.

같은 등급의 마석들도 제각기 맛이 달랐다.

그 원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갈리는 것 같다.

-잘 먹는구나.

1등급 마석 10개를 전부 먹어 치웠다.

*「대량의 마성을 흡수합니다.」

*「레벨이 한계치입니다」

*「흡수하지 못한 마성이 저장됩니다.」

──────────────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lv20+]

──────────────

레벨 옆에 +가 붙었다.

그다음에는 2등급 마석이다.

2등급 마석 10개도 가볍게 먹어 치웠다.

-슬슬 배가 부르지 않나? 피부가 가려워진다거나.

'아뇽.'

괜찮은데용.

3등급 마석부터는 그 질이 다르다.

혼재규어의 마석 하나만 해도 예전의 내게는 호화로운 식사였으니.

*「대량의 마성을 흡수합니다.」

*「흡수하지 못한 마성이 저장됩니다.」

+가 두 개가 되었다.

-이상한데, 이상한데에······.

펠레리안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먹을 수 있었다

몸의 부담도 별로 없었다.

내 잠재력은 푸드파이터의 재능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일까.

3등급 마석을 전부 먹어 치웠다.

슬슬 배가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4등급 마석은 과연 버거웠다.

거의 전부 다 먹어 치워 가는데, 반응이 왔다.

몸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위장이 차서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미친, 정말 잘 먹는군.

펠레리안은 아쉬워하다 못해 아예 감탄하기 시작했다.

-더 무리하지 말고······.

'잠깐.'

아직, 내게는 한 수가 남아 있다.

스킬 중에 레벨 10을 찍은 게 몇 개 있었더랬다.

──────────────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lv20+++]

[스킬]

······

※진화 가능:

[물어뜯기lv10], [도약lv10]

······

──────────────

그래, 진화하자.

그런데, 내 기대 이상의 뭔가가 적혀 있었다.

──────────────

※이명 '심장 파먹는 뱀'의 특전에 의해 스킬을 융합 진화할 수 있습니다.

* '심장을 파먹는 특별한 기술이 있다고 전해진다'

──────────────

문구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습니다.

*「마성을 소모해 스킬을 융합 진화합니다.」

*「물어뜯기lv10과 도약lv10이 융합합니다.」

두근두근.

*「스킬, '식심의 도약lv1'을 얻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물리적으로 훔칠 수 있는 뱀이 되어 버렸다.

근데 이러면 도약과 물어뜯기 스킬은 따로는 못 쓰는 건가?

확인해 봐야겠다.

"끄윽."

마성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나는 다시 먹방을 시작했다.

-어디까지 먹는 거냐아앗!

펠레리안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4등급 마석을 전부 먹고, 기어코 5등급 마석까지 먹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5등급 마석을 두 개 먹자마자 배가 끝까지 불렀다.

──────────────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lv20++++]

······

[상태]

[진화 가능]

──────────────

*「진화의 특수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가 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다섯 배는 더 먹었어 ······.

하얗게 불타 버린 듯한 펠레리안이 중얼거렸다.

그러면, 바로 진화를 시작해 볼까.

안 그래도 배가 너무 불러서 식곤증이 도졌다.

-마력포화랑 연관이 있는 진화 가능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제대로 살펴봐!

펠레리안의 잔소리가 아니라도 그럴 생각이었다.

자리를 잡은 나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도 그렇듯.

나는 순식간에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lv20]에서

1. [롱 더블혼 파이톤]

2. [포이즌 더블혼 파이톤]

3. [핫핑크 더블혼 파이톤]

──────────────

잠깐, 핫핑크 뭔데.

설마, 크림슨 타란튤라 킹의 내단을 먹어서 그런 건가?

흰색하고 빨간색이 섞여서······.

이건 무조건 패스다.

위엄을 잃기는 싫다.

더 읽어 보았다.

──────────────

4. [그린 더블혼 파이톤]

──────────────

아니 그린 안 한다고요.

그린의 선택지는 언제 사라지는 것인가.

마석에 관련된 게 없나.

그리고, 마지막 선택지.

그것을 본 나는 비늘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

5. [크리스탈 더블혼 파이톤]

──────────────

크리스탈(Crystal).

수정, 혹은 결정.

상상이 된다. 가죽이 수정처럼 빛나는 나의 모습이.

자고로 결정 뱀, 결정 도마뱀 등은 게임에서도 아주 귀한 몬스터였다.

크리스탈도 엄밀히 말하면 흰색.

이것은 흰색을 포기하지 않은 내게 하늘이 주는 선물 아닐까?

내가 먹방을 펼친 마석도 어떤 면에서는 수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른 선택지는 영 아니었다.

색이 변하거나, 혹은 마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다.

혹시 비늘이 강화되는 형식의 진화일까.

무늬도 제 효과가 있었던 만큼 비늘도 뭔가 다른 게 있겠지.

그래, 망설일 이유는 없다.

*「크리스탈 더블혼 파이톤을 선택했습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나는 진화를 시작했다.

* * *

그리고, 밖.

새 족장 나나루크와 신성한 뱀 울루울룰루가 크록을 쳐죽인 지 하루째.

나나루크는 크록의 거처로 쓰였던 오두막에서 진화 중이었고, 울루울룰루는 아직도 지하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곳을 새로 점거한 룬가 부족의 전사들은 모두 표정이 밝았다.

새롭게 탄생할 고블린들의 왕.

크록과는 달리 그 인품마저 훌륭한 나나루크는 대수림의 고블린들을 새로운 길로 이끌 것이다.

전투에 참가했던 자디람을 비롯한 홉 고블린들도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위협적인 적도 없었지만 자디람과 카디람은 자처해서 경비를 섰다.

"족장님은 괜찮으시대?"

"네, 쓰러지시긴 했는데 곧 눈을 뜰 것 같대요. 헤헤."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던 둘.

누군가 접근한 것이 그 순간이었다.

"어이. 홉 고블린들."

카디람과 자디람은 깜짝 놀랐다.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바로 앞에 나타나 있었다.

이 무더운 대수림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긴 코트. 그리고 모자.

호리호리한 장신의 사내.

외모는 아름답지만, 피부가 잿빛이다.

무엇보다 그 긴 귀.

다름 아닌 그림자 요정이었다.

"크록은 어디 있지?"

그가 음울하게 물었다.

어눌하지만 분명 고블린 말이었다.

자디람과 카디람은 무기를 들고 외쳤다.

"누구냐 넌!"

"······흐음."

그림자 요정은 혀를 쯧쯧 찼다.

"그 멍청한 놈. 결국 죽었나 보군."

"정체를 밝히라니까!"

카디람이 위협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림자 요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카디람이 어떻게 할지 곤란해서 자디람을 돌아보니.

"케엑, 켁."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자디람의 목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피가 왈칵, 쏟아져나오더니 자디람이 풀썩 쓰러졌다.

"너."

그림자 요정이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던전으로 안내해라."

머리 없는 붉은 뱀

042.

"찬물을 갈아와라."

대주술사의 목소리에서는 그녀의 노쇠함이 느껴졌다.

"대나무 잎을 더 가져와."

그녀가 지시하면 다른 주술사들이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며 따랐다.

고블린은 50세가 넘으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대주술사의 얼굴에는 세월이 남긴 깊은 주름이 가득했다.

그녀의 전신과 얼굴에 새겨진 문신이야말로 대주술사의 상징.

그 문신의 먹조차 세월이 흘러 뿌옇게 흐려졌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고, 움직임에는 절도가 있었다.

대주술사는 하룻밤을 꼬박 새면서 나나루크를 보조했다.

진화란 마물에게 내린 축복이자 저주이다.

진화를 함으로써 마물은 수명이 연장되고 더욱 강인해진다.

하지만 모두에게 진화가 허락된 것은 아니니, 이미 진화를 마친 대주술사는 머지않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리라.

하지만, 두렵거나 덧없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종족 전체의 미래가.

수건에 찬물을 적셔 나나루크의 팔을 천천히 닦았다.

어린 족장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진화의 과정을 이겨 내고 있다.

피부에 묻은 물기는 순식간에 증발되었다.

펄펄 끓는 고열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분명히 나아졌다.

어젯밤에는 수건으로 닦을 때마다 피부가 허물처럼 벗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피부가 조금 붉은 인간 여인 같다.

부드러웠으며, 동시에 고무처럼 질겨 보인다. 햇볕을 받으면 마치 사금 가루를 흩뿌린 듯 살결이 반짝반짝거렸다.

원래도 호리호리하고 훤칠했던 나나루크였지만 키가 더 커졌다.

어지간한 엘프만큼 커졌을 것이다.

머리카락은 하루 만에 확 자라 치렁치렁 늘어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다른 고블린들은 옆에 서면 아이처럼 보이겠군.'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좋다.

나나루크는 종족의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종족의 왕이라 함은, 누가 보아도 위엄 있는 모습이어야 할 테니.

"······대주술사님."

나나루크가 눈을 떴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신이 드셨군요."

"제가 얼마나······ 앗."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나나루크는 휘청하더니 다시 누웠다.

"조금 더 쉬십시오.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 듯하니."

"아니에요. 지금 제가 없으면······."

"쉬십시오. 잡다한 일들은 제가 처리할 테니. 그리고 이제부터는 제게 존칭을 생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어떻게 그래요."

나나루크가 기저귀를 차고 다닐 때도 대주술사는 할머니였으며, 또 대주술사였다.

"나나루크 님은 더 이상 족장이 아닙니다."

"그럼······."

"대족장, 혹은 왕이시지요."

"왕이라니······."

나나루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손을 젓거나 민망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어 버렸군요."

홉 고블린 킹.

그녀는 홉 고블린 다음의 단계로 진화해 버렸다.

그리고 상위종으로서의 의무 또한 알고 있었다.

"익숙해지실 겁니다."

"울루울룰루는······ 어디 있나요?"

"아직 던전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나나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주술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아이들이 와서 수발을 들 것입니다. 쉬고 계시지요."

꾸벅, 공손하게도 인사하고 나왔다.

대주술사의 주름진 얼굴은 표정을 읽기 힘들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그 뱀의 이름이 맴돌고 있었다.

'울루울룰루.'

그 뱀이 룬가를 구원했다.

크록은 포악한 왕이었다.

제대로 된 재목이 아니었는데, 신성한 뱀이 그런 가짜 왕을 해치웠다.

지금 룬가의 고블린들은 모두 뱀신을 믿고 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있다.

아무도 감히 짐작조차 못 할 비밀이.

'대체 어디서 온 뱀일까.'

대주술사 본인은, 사실 그 뱀이 신이라고 믿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사라졌던 뱀이 다시 돌아왔을 때.

눈물을 흘리며 그 뱀이 울루울룰루임을 인정한 장본인이 대주술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범상찮은 마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구전에 나오는 울루울룰루는 분명 아니다.

울루울룰루는 검고, 산을 감쌀 만큼 거대하며, 벼락을 부리는 진정한 신이었다.

그 작은 뱀이 어찌 울루울룰루가 될 수 있겠는가.

부족에서 가장 강한 고블린은 족장이 되고, 가장 현명한 고블린이 대주술사가 된다.

대주술사는 현명했다.

그렇기에 그 뱀을 울루울루루라고 인정하며 겁 많은 부족민들을 하나로 규합한 것이다.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대주술사가 고개를 돌렸다.

부족민들이 소란스러웠다.

이미 어두워진 그녀의 귀에도 들릴 정도의 소란이었다.

전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쪽으로 다가간 대주술사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카디람, 왕의 남동생이 누군가를 데리고 나타났다.

카디람 또한 훌륭한 전사였는데,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가 데려온 건 요정이었다.

대주술사는 그가 평범한 요정이 아니라 사악한 그림자 요정이라는 것을 알아볼 만한 식견이 있었다.

그림자 요정은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는 던전으로 통하는 입구가 아닌 것 같은데."

전사들이 쉬던 곳이지.

그가 카디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 말고 다른 고블린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어."

"던전에는 울루울룰루가 계시다. 널 들여보낼 수 없다."

"울루울룰루는 또 뭐야?"

전사들이 무기를 들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림자 요정은 조금의 압박감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것도 모르나? 신성한 뱀신이시다."

"뱀신? 너희들의 토속신앙인가 보지."

"정말로 계시다!"

카디람, 용맹한 전사가 되었구나.

대주술사가 이를 악물며 조용히 손짓했다.

전사들이 그 손짓에 따라 무기를 들고 활을 겨눴다.

"관심 없으니, 던전으로나······."

"침입자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쏴!"

카디람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사들이 모인 곳에 요정을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전사들은 차마 활을 쏘지 못했다.

카디람이 맞을 것을 걱정해 무기를 들고 접근할 뿐이었다.

그림자 요정이 비웃었다.

"용감하기도 하지. 용기를 낸 보람이 없어서야 쓰겠나."

카디람의 가슴에서 새빨간 피가 솟은 게 그 순간이었다.

아니, 그냥 피가 아니었다.

핏물이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카디람의 몸을 꿰뚫었다.

홉 고블린 전사들이 눈이 돌아 달려들었다.

"이야아아!"

"개자식!"

전사 한 명이 쓰러진 카디람을 질질 끌고 갔고, 나머지는 제각기 무기를 그림자 요정에게 휘둘렀다.

"정말 귀찮게 만드는구나."

요정의 코트 소매에서 독특한 모양의 반월도가 나왔다.

그 작은 검으로 전사들의 칼날에 대응한다.

카카캉!

그 무기가 신묘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마법적 처리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반월도가 지나갈 때마다 전사들의 무기는 쉽게 부러져 버렸다.

그림자 요정은 무기를 잃은 전사들을 직접 처죽이지는 않았다.

그저 양팔을 휙 들었을 뿐.

소매의 어둠이 마치 괴물의 목구멍처럼 시커멨다.

그 어둠 속에서 새빨간 뱀 십수 마리가 튀어나왔다.

피로 만들어진 머리 없는 붉은 뱀들이.

친절한 흰 뱀과 달리, 붉은 뱀들은 전사들의 몸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퍼버버벅!

부러진 칼을 휘둘러 쳐내려는 자도 있었지만 뱀은 그 칼날을 타 넘어와서 기어코 전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악!"

"아악!"

"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이 일제히 울렸다.

공포스러운 합창 속에서 대주술사가 외쳤다.

"활을 쏴! 물러나서 대응해라!"

전사들은 그리했다.

티티팅!

다양한 각도에서 발사되는 화살이다.

아주 특출난 전사, 이를테면 나나루크 같은 자들이라고 해도 한두 개 쳐내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그림자 요정은 열 개의 화살을 너무도 쉽게 막아 냈다.

그의 소매에서 튀어나온 붉은 뱀들이 제각기 화살 하나씩을 막아 냈다.

"귀찮게 구는군. 너희들이 나를 던전으로 안내하기 전까지 계속 죽이겠다."

그림자 요정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다.

크록 부족과도 싸워 승리한 역전의 고블린 전사들.

그들이 하나하나 살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모되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목숨들이다.

대주술사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저 살인광 요정을 울루울룰루에게 데려가야 하는가.

그녀는 그리하려 했다.

"무슨 개 같은 짓거리야-!"

나나루크가 갑옷도 입지 않은 채 도끼를 들고 나타나 버렸다.

대주술사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나루크는 전사들을 학살한 저 요정을 용서할 리 없었으니.

역시 그러했다.

"아아아아!"

분노한 나나루크가 포효했다.

자리에 있는 모든 고블린들은 전신의 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것은 왕의 포효였고, 왕의 분노였다.

나나루크가 도끼를 던졌다.

회전하는 도끼는 포물선이 아니라 직선을 그렸다.

공기를 찢으며 매섭게 날아간다.

쐐애애액!

바람을 찢는 도끼의 기세가 무섭다.

나나루크는 제대로 된 진화를 마쳤다.

심지어는 크록 또한 지금의 나나루크와 비교할 수 없으리라.

그림자 요정이 처음으로 긴장했다.

그의 소매에서 튀어나오는 피의 뱀들이 모두 도끼를 막아섰다.

콰자자자작!

뱀 하나가 으깨지고.

또 하나, 또, 하나.

열두 개의 뱀 중 열 한 개의 뱀까지 으깨졌을 때.

도끼는 힘을 잃고 멈췄다.

떵그렁-

아.

전심전력을 다한 나나루크의 투척도 막아 낸 것인가.

그에 더해 으깨진 피의 뱀은 다시 뭉쳐서 제 형상을 되찾았다.

절망이 내려앉았다.

"흥미롭군. 크록이 죽자마자 새 왕이 탄생했어?"

그는 턱을 매만지며 감탄했다.

"게다가 훨씬 제대로 되었군. 결정했다."

그림자 요정은 선언했다.

"좋다. 너는 내가 포획해 데려가지. 잘 사육해 주마."

"그림자 요정."

나나루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희게 웃었다. 분노의 미소였다.

"머리가 쪼개지고 나서도 그딴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

나나루크가 도끼를 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귀밑머리 아래로 흘러내리는 식은땀.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 상태.

대주술사는 나나루크가 무사하길 기도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 *

커어, 잘 잤다!

정말 숙면을 취했다.

게다가 좋은 꿈을 꿨다.

뷔페에 가는 꿈이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뱀이었지만, 간만에 사람이 만든 요리들을 먹을 수 있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육회를 한 접시 가득 퍼서 먹는데 문득 생각난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육회는 맨날 먹는 메뉴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잠에서 깨 버렸다.

아쉽다, 호박죽하고 김밥도 먹었어야 했는데.

참고로 내가 뷔페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육회와 호박죽, 김밥, 떡이다.

육회는 몰라도 나머지 세 메뉴를 퍼담을 때마다 너는 뷔페 오면 안 되는 놈이라고 혼났지만.

-깼냐!

펠레리안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으허허허, 드디어 깼구만. 어떠냐.

어떻기는······. 헉!

이번 진화로 몸이 커지지는 않았다.

뿔의 개수가 늘지도 않았다.

나는 내 몸 상태를 보고 안도했다.

'다행이다! 아직 하얀색이야!'

-색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오!'

몸의 색깔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빛깔은 분명 바뀌었다.

'크리스탈(Crystal)'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내 비늘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뱀의 비늘이란 사실 피부조직의 일부이다.

거죽, 즉 표피가 경질화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파충류는 대부분이 그러하다.

뱀의 비늘도 그러했다.

품종에 따라서 비늘의 형태나 강도가 조금 다르지만, 몇몇 특별한 품종을 제외하고는 비늘이 그리 단단하지 않다.

뱀을 만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매끈하며, 의외로 적당하게 말랑거린다.

'단단해졌어!'

비늘이 말이다.

지금의 내 비늘은 뱀의 비늘 같지 않다.

하나하나가 단단하고 매끄러웠으며,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자세히 보니까 흰색이라기보다는 반투명한 정도인 것도 같다.

빛을 받으면 은은히 여러 색으로 산란된다.

이건 정말 수정 같다.

-꼭 잉어 비늘 같구나!

'용 비늘도 아니고.'

-용에 비견할 건 아니지.

펠레리안은 T가 분명하다.

'단단해 보이네요.'

나는 꼬리로 내 몸을 쓸어 보았다.

'오 뭐야, 생각보다 부드러운데?'

오히려 촉감은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한번 이번에는 바닥을 찰싹 두드려 보았다.

캉!

뭐야.

충격을 주자 마치 금속성 같은 소리가 났다.

천천히 만지면 부드럽고 충격을 주면 단단해지는 건가.

꿈의 신소재나 다름없다.

현대의 소재 기업이 내 비늘을 본다면 군침을 흘리지 않을까.

뿌듯함에 전율이 인다.

챠르르륵

그러자 비늘이 떨리면서 그런 소리를 냈다.

오, 제법 위협적이다.

방울뱀이 되지는 못했지만 독특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상태창을 살폈다.

──────────────

[크리스탈 더블혼 파이톤lv1]

[이명] 심장 파먹는 뱀

[특성]

[불굴], [정진], [뿔], [무늬], [비늘]

[스킬]

[빌리는 뿔lv4]: 천뢰령lv0, [뛰어넘는 뿔lv1], [식심의 도약lv1]······.

──────────────

헤헤.

마석 먹방을 한 것은 헛수고가 아니었다.

마력통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전과 비교하면 족히 세 배는 되는 마력이 내 몸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다.

천뢰령이라는 군터의 스킬도 이제 쓸 수 있을 것 같다.

척 봐도 필살기 같은 스킬을 얻어 놓고 한 번도 못 쓰고 있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진화로 인해 새로운 스킬을 하나 얻었다.

비늘과 관련된 것이었다.

'엄청난데 이거.'

이름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번 시험 삼아 스킬을 써 볼까 했던 순간이었다.

-이제 전송을 시작하자.

펠레리안이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이전 던전에서는 실험 결과를 펠레리안 자신에게 전송하는 장치가 있었다.

이곳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었다.

펠레리안은 그것을 꼭 작동시키고 싶어 했다.

그러면 자신의 본체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다는 것 같다.

'예, 뭐 해 보죠.'

잔뜩 긴장한 얼굴로 펠레리안이 장치의 조작법을 설명했다.

아마도, 신호를 전송하면 엘프 측에서도 감지하는 것 같다.

곧바로 도망칠 계획이다.

-가랏!

-전송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언가 작동하는 소음이 울렸다.

기계장치의 한가운데는 원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원판에 붙어 있는 좁쌀만 한 금속 조각들이 신비한 배열을 그리며 움직였다.

-남쪽······ 그리고 동쪽 ······ 왜, 북쪽이 아니라.

펠레리안은 그 의미를 해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점점 심각해진다.

-왕국을 건너서······ 산맥.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한참 침묵했다.

-······죽었군.

펠레리안은 탄식을 내뱉었다.

'네?'

-신호는 델프람의 던전으로 가고 있다. 내가 죽었다. 아마도.

'내가 죽었다. 아마도.'

뭔가 실존주의 소설의 첫 문구로 나올 법하다.

나는 펠레리안을 위로하려 했다.

콰아앙!

저 멀리서 폭발음이 들리지 않았으면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고블린들의 비명 소리도 들렸다.

나와 펠레리안은 동시에 경악했다.

'귀쟁이들이 벌써!'

-아니 뭐 이리 빨리 쫓아왔다는 말이냐.

우리는 황금이파리 조사관이 우리를 찾아냈다고 착각한 것이다.

'도망치죠.'

-싹 다 챙겨라!

마석을 아공간에 쓸어 담았다.

귀한 것부터 챙겨 넣고 담지 못한 몇 개는 입으로 삼킨다.

허겁지겁 문을 열고 던전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불쌍한 우리 고블린들이 엘프들에게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긴 복도를 지나.

철문을 연다.

크록의 시체가 있는 공동을 지나.

여러 고블린들의 사체를 타 넘고 땅굴을 기어오른다.

마침내 햇빛이 비치는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피 냄새가 훅, 하고 밀려왔다.

나와 펠레리안의 걱정은 반만 들어맞았다.

요정이 있었다.

다만, 피부가 잿빛인 그림자 요정 한 명이었고.

그는 나나루크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림자 요정이 나를 돌아봤다.

"호오, 정말 뱀이 있군."

나나루크는 입가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

아.

분노의 색은 분명 검을 것이다.

내 마음이 검게 물들었으니까.

그리고 내 비늘 역시 마음의 색으로 물들었다.

츠츠츠츠-

이렇게 사용하는 거군.

처음 쓰는 써보는 스킬임에도 불구하고 사용법은 쉬웠다.

이게 진화를 통해 얻어낸 새 스킬.

*「스킬, 흑린lv1을 발동했습니다.」

잠깐만, 검은 뱀이 될게.

벼락

043.

그림자 요정 데쉬난.

이명은 '동물원장'

대륙의 일급 수배범.

하지만 그에게 일급 수배령이 내린 지가 이미 일백 년이 지났다.

막대한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잡히지 않았으며, 대수림의 어두운 부분에서 자신을 수배범으로 만든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데쉬난은 마물의 탐구자였다.

위험한 마물을 사육하고 길들이는 능력은 심지어 역천의 펠레리안마저 인정한 것이었다.

펠레리안이 죽었다는 확신이 들고, 데쉬난은 그의 던전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몹시 발굴이 어려운 던전을 하나 발견해 냈다.

고블린을 이용해 그 던전을 발굴하려던 계획은 정말로 묘수였다.

계획이 약간 틀어진 지금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새로운 홉 고블린 킹을 생포했다.

데쉬난의 볼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상처에서 주륵, 흐르는 피를 혀로 핥았다.

설마, 이제 갓 진화한 고블린이 자신에게 상처를 낼 줄이야.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데쉬난은 가슴에 난 상처가 욱신거릴 정도로 웃었다.

지금 그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키우려던 마물에게 물린 게 문제였다. 그 마물의 어금니가 팔뚝만 했으니, 몸에도 그만한 구멍이 다섯 개가 뚫려 있었다.

마도무장도 많이 망가져서 대부분 수리 중이다.

평소 전력의 절반의 절반 정도 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데쉬난의 주특기인 혈마법은 쓸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듯 스스로 움직이는 '열두 마리 피의 뱀'은 방어용으로도 쓸 수 있다.

나나루크라는 고블린은 그 모든 뱀을 으깨고 데쉬난의 볼에 상처를 냈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 개체군."

하지만 그런 나나루크도 지금은 데쉬난에게 목이 잡혀 축 늘어졌다.

나나루크의 복부에는 피의 뱀 한 마리가 상처를 후벼 파고 있었다.

"강하고 아름다우며, 정신력까지 뛰어나."

데쉬난은 나나루크를 포획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의 '동물원'에 처넣을 것이다.

"왜 말하지 않는 거지? 정말 그 뱀신이 있어서야?"

던전에 울루울룰루라는 뱀이 있다고 들었다.

겨우 그딴 이유에서일까. 나나루크는 끝까지 던전의 입구를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을 뒤지면 바로 찾아낼 입구다.

데쉬난의 눈에는 쓸데없는 발버둥으로만 보였다.

그가 피의 뱀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나나루크의 상처에 박힌 피의 뱀이 꿈틀댔다.

"아아아아아악!"

"너, 네가 대신 말해라. 그 뱀에 대해."

지목당한 것은 어린 주술사였다.

그녀는 눈치를 보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울루울룰루는······."

하지만 데쉬난은 설명을 듣고도 불만족스러운 듯 눈을 찌푸렸다.

"마물인가? 뱀 종류? 왜 신이라는 거지?"

"그, 그분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마법을 부리며, 우리 고블린들을 이끌어줬어요."

"크록을 죽인 게 그 뱀인가 보군. 너희들은 그 뱀 마물을 신으로 섬기고. 정말 고블린다운 행동이야. 자기들이 사람이라고 믿는 마물다운······."

데쉬난은 제법 오래 살아 온 그림자 요정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은 깊고도 넓다.

주술사의 설명을 바탕으로 그 지식들을 되짚어보았다.

"언제 그 마물이 너희들에게 나타났지? 크기는? 생긴 것은?"

주술사는 더듬거리며 설명했다.

데쉬난은 뱀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고블린들의 표정이 진지해지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했다.

"그래 그렇군. 별것 아니었어."

곧, 흥미가 떨어졌다.

데쉬난은 뱀 종류의 마물과 고블린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았다.

심지어는 그에 얽힌 설화까지.

"원형이 따로 있는, 파생된 신화군."

신화에는 원형이 있다.

태양에 대한 여러 신화가 있는 것처럼.

그 자매인 달에 대한 여러 신화가 있는 것처럼.

뱀에 대한 신화 또한 다양하다.

특히 고블린들이 모시는 뱀신이라니.

"세상의 다양한 지역에 고블린들이 흩어져 있고, 그 고블린들이 뱀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 또한 다양하다. 이름도, 디테일도 제각기 다르지."

그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교수처럼 손가락을 휙휙 허공에 휘저었다.

"뿔이 달린 뱀부터, 말을 하는 뱀, 산을 휘감을 정도로 큰 뱀, 깃털이 달린 뱀, 수수께끼를 내는 뱀. 죽었다 살아나는 뱀. 그리고 그런 것 중에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신화가 있다. 울루울룰루? 비슷한 건덕지는 있군."

아마 이곳에 자리 잡은 룬가 부족에서, 시간이 지나 뱀신의 이름이 변형된 것이겠지.

"우르오로스다."

오래된 뱀신의 원래 이름은 분명 그러했다.

"종말의 우르-오로스. 이름이 변형되는 경우도 많지. 우르키오스, 울르보로스, 우로보로스. 하지만 울루울룰루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은 처음이군. 하하."

데쉬난이 고블린들을 비웃었다.

창백해진 고블린들은 우르오로스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어쩐지, 힘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오래된 힘이.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그 단어의 무게에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검은 뱀도 아니야. 원래의 우르오로스는 흰 뱀이지."

아주 거대한 흰 뱀 말이다.

그때,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났다.

"이 병신아."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나나루크였다.

그녀는 데쉬난을 노려보며 말했다.

"걔는 원래 흰색이었어."

데쉬난이 불쾌한 듯 눈을 찡그렸다.

그녀의 뱃속까지 파고든 붉은 뱀이 꿈틀댔다.

"아아아악!"

"입이 거칠군. 낙인이 찍히고 나면 좀 순해지겠지."

나나루크는 고통을 못 이기고 결국 혼절했다.

"이것이 죽는 꼴을 보기 싫으면 던전을 안내해라."

의식을 잃은 나나루크.

고블린들은 데쉬난의 요구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들은 데쉬난을 코끼리 바위 아래 뚫린 여러 구멍 중 하나로 안내했다.

마음속으로 선한 흰 뱀에게 사죄하며.

울루울룰루, 혹은 우르오로스에게 사죄하며.

데쉬난은 펠레리안의 던전을 앞두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보안체계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

이 홉 고블린 한 명을 들고 돌파하기는 쉽지 않을 터.

남은 고블린들을 전부 죽여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순간이었다.

정말 흰 뱀이 기어 나올 줄이야.

범상찮은 마물이기는 했다.

크기는 평범한 뱀 수준.

하지만 머리에 달린 뿔이며, 아름답게 빛나는 비늘.

"호오, 정말 뱀이 있군."

데쉬난이 감탄을 내뱉었지만 뱀은 도망치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치켜세웠다.

나나루크를 응시하는 것이다.

그 뱀의 비늘이 검게 물든 것이 그 순간이었다.

색을 바꾸는 마물은 꽤 있다.

대부분이 위장색.

도망치려는 것인가.

하지만 데쉬난의 오랜 감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고했다.

저것은 전투태세였다.

비늘의 색을 바꾸며 전투태세로 들어가는 뱀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다.

타앙-!

총소리가 났다.

뱀이 똑바로 데쉬난에게 쏘아지는 소리였다.

그것이 화살의 속도에 비해도 부족함이 없다.

벌린 입의 독니가 날카롭다.

다만 한 손으로도 막아 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직감이 데쉬난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직감에 충실히 따랐다.

나나루크를 과감하게 내팽개친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마법을 캐스팅했다.

혈마법, 둔화의 핏방울 정도면 괜찮겠지.

자체적인 물리력은 거의 없다시피 해도 상대를 느리게 만드는 덴 충분했다.

핏방울이 날아가서 뱀의 몸에 닿았다.

그것이 데쉬난의 첫 번째 실책이었다.

뱀의 무늬가 빛나면서 핏방울이 튕겨 나갔다.

'마법 방어?'

저 정도 마물이 그런 수단을 지닐 가능성은 낮은데.

그렇다면 물리적으로 대응한다.

손목 안쪽에 감춰 둔 반월도를 던졌다.

뱀 정도는 썩둑 잘릴 터.

그 순간이었다.

땅이 흔들렸다.

반월도는 터무니없게 빗나갔다.

'마법까지 쓰나!'

그것을 예상 못 한 것이 두 번째 실책.

펠레리안이 뱀을 보고 했던 경탄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간다.

그사이 뱀은 지척까지 다가왔다.

'어쩔 수 없다.'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쓰고 있던 마력까지 전부 회수한다.

나나루크에 의해 파훼되었던 열두 마리의 뱀들이 복구되었다.

심장을 물어뜯을 기세였던 뱀은 새빨간 피의 뱀들에 의해 칭칭 묶였다.

'죽이지 말고 잡아!'

데쉬난이 아니라 다른 그림자 요정이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데쉬난은 욕심 탓에 뱀을 죽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실책이었다.

묶여 버린 뱀은 기세가 죽지 않았다.

그저 똑바로 데쉬난을 노려볼 뿐.

뱀으로부터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데쉬난의 머리카락이 부스스 떠오르기 시작했다.

옷자락에서 정전기가 파직, 튀었다.

딱 한 번 겪어 본 적 있는 경우다.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이었다.

데쉬난이 키우던 고양이는 지붕에 앉아 있었다.

그 고양이의 털이 저절로 곤두서기 시작하더니······.

"설마······."

데쉬난이 다급히 뱀의 목을 분지르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뱀의 비늘에서 푸른 불똥이 타닥 튀고.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친 것은.

* * *

정신을 차려 보니 저지르고 있었다.

*「스킬 뛰어넘는 뿔을 사용합니다.」

*「'천뢰령lv0'이 일시적으로 '천뢰령lv1'이 됩니다. 」

뛰어넘는 뿔 자체부터 마력 소모가 많은 스킬이다.

세 배로 늘어난 마력통 덕에 그래도 마력이 많이 남았다.

*「천뢰령lv1을 사용합니다.」

그 마력이 일시에 모두 소진되었다.

'하늘의 번개를 마음에 담으라.'

천뢰령의 설명이었다.

하늘의 벼락이 내게 떨어졌다.

쩌저저정!

머릿속의 내이가 손상된 것 같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섬광과 함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내 몸을 감싸 쥐고 있던 붉은 촉수들이 불탔다.

그림자 요정은 감전되었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명확했다.

마무리, 해야 한다.

벼락이 그의 시야도 앗아갔을까.

-앞이다. 처치해!

펠레리안이 조언했다.

그는 앞이 보이는 것 같다.

물까.

아니, 물어서는 안 된다.

그것으로는 저 그림자 요정을 죽일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조금 더 오른쪽, 그래, 한 걸음 정도 앞.

펠레리안이 영점을 잡아 줬다.

나는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아공간에 있던 검을 소환했다.

보이지 않아도, 쉽게 꼬리로 그 검의 손잡이를 잡아챘다.

며칠은 연습했던 기술이다.

펠레리안은 꼴에 겉멋이 들었냐고 질책했지만 보아라.

훌륭하지 않은가.

내 몸에는 여전히 벼락이 깃들어 있었다.

꼬리를 타고 그 벼락이 검까지 번지는 걸 느꼈다.

-그래, 거기가 목이다.

알겠어요.

천뢰검법.

제1식.

목 자르기.

*「참격lv1을 발동합니다.」

검이 무언가를 자르고 지나갔다.

삐-하는 이명을 뚫고 그 소리는 명확하게 울렸다.

툭, 데구루루루.

아, 머리 떨어지는 소리가 맞다.

* * *

아프다, 엉엉.

내가 울 수만 있었으면 지금 눈물을 줄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뱀은 눈에 투명한 막이 있어서 울 수가 없다.

그래서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도 꾹꾹 삼킬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대주술사 할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징징대라.

펠레리안의 퉁명스러운 잔소리가 얄밉다.

촤르륵.

시원한 액체가 전신을 적셨다.

포션이었다.

몸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천뢰령의 벼락은 내 몸까지 불태웠다.

감전은 안 되었어도 그 열기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아, 앞이 보인다!

나나루크는?

다행히 나나루크는 누워서 숨을 쌕쌕대고 있었다.

죽은 게 아니었나 보다.

그녀의 몸에도 포션이 잔뜩 묻어 있었다.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봤어요?'

-뭘 말이냐.

천뢰검법, 아니 천뢰령 말이요.

-봤지. 엄청난 기술이더군.

펠레리안도 솔직히 말해 줬다.

아니 군터, 이런 스킬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벼락을 부르는 스킬이라니. 엄청났다.

덕택에 그림자 요정의 목 잘린 시체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풀풀 나고 있었다.

-그렇게 활용하는 스킬이 아닌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싸우다가 갑자기 자기 몸에 번개를 맞아서 어쩌자고.

같이 싸우던 동료들하고 일제히 감전사당하기 위해 쓰는 스킬은 아니겠지.

어쨌든 이 스킬 덕에 나는 그림자 요정을 해치웠다.

말하자면 필살기 같은 스킬을 얻은 것이다.

몇 번만 더 이 고생을 하면 빌리는 뿔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레벨이 왜 안 오르냐.

설마 그 정도로 잡범이었나.

펠레리안은 그림자 요정을 본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얕보는 기색이 명확했었다.

-그림자 요정인 게 문제가 아니라 황금이파리 조사관이 아니라서 다행인 거지. 뭐 이런 곳에서 고블린이나 괴롭힐 정도면 별거 없는 잡놈일 것이다.

펠레리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림자 요정을 차별하는 어투다. 같은 요정 취급은 안 해 주나 보네.

그래도 레벨 하나쯤은 오를 줄 알았는데.

엄청 세지 않았나?

"끄윽."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그도 그럴 게, 잘린 머리통이 신음을 내뱉은 것이다.

"겨우······ 이깟······ 마물에게······."

목이 잘렸는데 어떻게 말하는 거야?

천하의 펠레리안마저 경악해서 그 그림자 요정의 머리통을 봤다.

-어, 어, 잠깐. 아는 놈인데?

뭐라고요?

-이거 동물원장, 그 미친 그림자 요정 데쉬난 아니야! 악마한테 영혼을 판!

잡놈이라면서.

-물러나라! 가까이 가지 마.

나는 얌전히 말을 들었다.

놈의 머리통에서 물러난 순간이었다.

"끼에에엑!"

머리통이 비명을 지르더니, 그림자가 새카맣게 길어졌다.

곧, 놈의 머리통은 그림자 속으로 녹아내렸다.

*「그림자 요정 데쉬난을 처치했습니다.」

*「당신이 데쉬난을 처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전 대륙에 그 명성이 퍼질 것입니다.」

전혀 잡몹이 아닌데.

*「이미 악마에게 혼이 저당잡힌 인물입니다.」

*「마성의 회수가 10분의 1로 격감합니다!」

아이고! 내 경험치.

폭렙의 기회였는데.

하지만 실망하기는 일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다섯 개나 한 번에?

10분의 1인데?

만약 전부 받았으면 곧바로 진화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에이,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대충 보니까 내가 한 방에 잡은 게 기적 같은데.

-당연한 소리를. 너 아주 평생 운 다 쓴 줄 알아라.

저렇게 말하니까 조금 무섭다.

당분간 조심조심 살아야겠구만.

'저게 노인장보다 세요?'

-저놈이? 허허.

펠레리안은 그저 웃었다.

-워낙 이상한 놈이라서 기억하고 있는 거지 감히 나랑 비교할 수 있겠느냐.

'아 네!'

거드름피우는 것을 보면 말이 길어질 듯한 패턴이다.

나는 딴청을 피우며 목을 잃은 놈의 사체를 뒤졌다.

사냥에 성공했으면 루팅을 시작하는 게 지당한 법이다.

신기한 물건이 많이 있구만.

툭.

그때였다.

반쯤 타 버린 수첩이 떨어진 것은.

'뭐야, 일기인가?'

직접 적은 흔적이 있는 기록물이었다.

대충 페이지를 넘겨 보니 읽을 수 있는 문자였다.

마물에 대한 온갖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나는 문득 한 글귀를 읽고 말았다.

'이거 뭐야.'

-뭔데.

아니 설마······.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메두사 서펜트 한 마리가 탈출했다. 산란 직전의 놈이었다. 유독 특별한 개체였는데.」

아빠는 어떤 뱀일까

044. 아빠는 어떤 뱀일까

요정어로 적힌 일지.

'아름답고 훌륭한 개체다. 몸은 건강하고 비늘에 윤기가 돌았다. 포악한 것이야 메두사 서펜트의 특성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목덜미의 반점 같은 무늬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반점 같은 무늬. 분명 있었다.

변태 같은 놈.

남의 엄마한테 아름답다 뭐다······.

'그 아이는 남쪽으로, 아캄분지를 지나쳐 대수림 외곽까지 빠져나갔다. 새끼를 밴 마물이 안전한 외곽으로 이동하는 것은 흔한 습성이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더하다. 너무 멀리 떠났다.'

엄마가 맞다는 확신이 점점 들고 있다.

듣자 하니, 메두사 서펜트 정도의 마물이 그 지역에서 출몰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라고 했다.

'아마도 남편과 겪은 불화 때문이겠지. 마음이 여린 개체였으니까.'

역시 아빠도 있었다.

부부싸움 때문에 집을 나간 건가.

메두사 맘의 마음이 여렸다니, 그게 제일 충격이다.

'한 달쯤 지났으니 무사히 산란했다면 새끼들이 태어났겠지. 그러면 다시 데려올 것······'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끊겼다.

벼락을 맞아서 그런지 일지도 일부분이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크흠.

어쩐지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아 눈에 모래가 들어간 거군······.

메두사 맘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남편도 못 만날 거고.

대체 어떻게 싸웠길래 알 밴 엄마가 남편을 놔두고 혼자 여정을 떠났을까.

-이상한 놈이군. 이 그림자 요정.

동의한다.

데쉬난, 이 그림자 요정은 진짜 또라이 같은 놈이 틀림없었다.

일지를 살펴보니 놈은 마물을 사육하는 것 같았다.

대수림 안에 자신의 '동물원'을 꾸리고 있는 것이다.

'아는 놈이라고 했죠. 그리고 그림자 요정은 또 뭐예요?'

다크엘프 같은 걸까. 피부가 잿빛이고 딱 봐도 사악한 마법을 쓰는 것을 보면 그랬다.

-그림자 요정은 말 그대로 요정의 어두운 그림자 같은 종족이지. 요정이 세계수에서 비롯된 것처럼 그림자 요정은 세계수의 뿌리에서 비롯된 종족이다.

'뿌리요?'

펠레리안은 요정과 세계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대수림 깊숙한 곳에 있는 거대한 나무가 세계수.

세계수는 양(+)의 마력을 흩뿌리며 요정은 그 세계수의 마력을 받아 태어난다.

세계수는 어마어마하게 강력하고 큰 나무라고 한다. 나무가 어떻게 강력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나게 크다는 것은 안다.

높이 올라가 보면 저 멀리 뿌연 나무의 형태가 어디서든 보인다.

그런데 사실, 그 기둥과 가지보다 뿌리가 훨씬 길고 넓게 퍼져 있단다.

-대수림 전체에 뻗어 있을 정도지. 그리고 뿌리 중에서는 종종 지상 위로 노출되어 자라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대수림의 뿌리들.

-그 뿌리에서는 반대로 음의 마력을 발산하지. 그림자 요정은 그 음의 마력을 받아 태어난 요정이다. 말하자면······.

펠레리안은 엄숙히 선언했다.

-천출인 것이다. 태생부터 사악하고 뒤틀린 녀석들이지.

나는 감탄했다.

펠레리안은 단순히 종족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신분 차별주의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보느냐. 저놈 보면 몰라? 정신이 빠졌으니까 마물 동물원 같은 것을 만들어서 혼자 수백 년이나 음침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지.

맞기는 한데. 키메라도 만드는 요정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악마에게 혼까지 판 놈하고 나를 비교하는 것은 모욕이다. 이놈은 수배범이기도 해. 저 귀걸이 챙겨라.

귀걸이는 데쉬난의 머리통이 사라진 곳에 놓여 있었다.

──────────────

[데쉬난의 귀걸이]

그가 악마에게 혼을 팔았다는 증표.

──────────────

평범한 귀걸이 같지는 않았다.

설명을 봐서 그런지 음침한 기운이 풍기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걸 왜 챙기라는 거요.

-이놈에게 걸린 현상금이 어마어마해. 이 귀걸이면 사냥의 증표가 되어 줄 것이다. 놈이 결코 풀 수 없는 귀걸이였으니.

'아 수배범이라고 했지. 얼만데요?'

-라다크 금화로 3000닢.

와!

라다크 금화가 뭔데.

어쨌든 금화니까 삼천 닢이면 엄청나게 비싼 금액이겠지.

근데 내가 현상금을 받을 수 있을까.

현상금 받는 곳에 뱀이 들어가면 곧바로 사냥당하는 거 아닌가?

-걱정 마라. 너도 현상금을 수령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렇다면 문제없겠지.

그런데 이 그림자 요정은 왜 수배범이 된 걸까. 조금 변태 같고 기분 나쁜 요정이긴 하지만 그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다.

-자기 목적을 위해 수많은 것들을 훔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니. 그러고도 아무도 놈을 잡을 수 없어서 현상금이 점점 올라갔다.

펠레리안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나 또한 내 귀한 마법촉매를 도둑맞았다.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용의 비늘이었는데······.

'용의 비늘?'

어쩐지 귀가 솔깃해진다. 데쉬난은 그걸 왜 훔친 걸까.

-놈은 마물의 품종개량에 미쳤었지. 시간을 들여서 마물을 원하는 대로 교배하고 훈련시켜서 궁극의 마물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어. 용의 비늘로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의 비늘을 먹으면 용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단순하겠느냐······ 하여튼 이 역천의 대마도사도 저놈을 잡지 못했다.

'그렇게 센 놈이었어요?'

펠레리안도 잡지 못한 상대를 내가 죽였으니.

그 말은 내가 이제 펠레리안과 동급이라는 것 아닌가.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럴 리가. 놈은 고대의 마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어디서든 완벽히 몸을 숨길 수 있는 망토 비슷한 물건이었는데. 그 물건 덕택에 잡히지도 않았고 위험한 마물들도 다룰 수 있었던 거겠지······ 지금은 없는 것 같군.

그 말을 듣고 눈이 돌아서 데쉬난의 사체를 뒤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망토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것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텐데.

어둠 속을 누비는 살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잠깐,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이제 이놈이 죽었으니까······ 그 물건들은 주인을 잃었겠네요?'

-어?

나와 펠레리안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투명망토!'

-용의 비늘이!

놈의 본거지가 근처에 있지 않을까?

-일지를 더 뒤져 봐라.

이럴 때만큼은 펠레리안과 죽이 맞아서, 나는 이미 일지를 뒤져 보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단서가 있었다.

'북동쪽의 그림자 숲으로 이동해서 새로 집을 지었다. 곧 '축제'가 이쪽에서 열릴 것 같아서였다. 새빨간 세계수의 뿌리가 크게 돋아나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절벽에 있어서 안전하기도 하고 석양이 세계수 바로 위에서 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웅장해진다. 마물 군집이 두 종류가 있다. 벌레와 영장류······.'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것 말고도 단서는 여럿 있었다.

-이 정도 단서면 찾을 수 있겠어.

좋아 지금 당장 내 투명망토를 얻으러······!

"일어나셨다!"

그때였다.

고블린들이 기쁨의 탄성을 내지른 것이.

돌아보니, 나나루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데쉬난에게 당하던 것이 마지막 기억일 테니.

주변의 고블린들이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나를 가리키는 것을 보면 내가 해치웠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나나루크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가슴을 꼿꼿이 들었다.

그래 나야, 내가 저 그림자 요정을 해치웠어.

나나루크는 나를 껴안으며 빙빙 돌았다.

"네가 날 또 살려 줬어!"

빙글빙글 돌더니 내게 뽀뽀를 퍼부었다.

엄청나게 기쁜 것 같다.

이런, 5살 이후로 누구에게 뽀뽀를 받아 본 게 처음이군.

그 첫 뽀뽀의 상대가 고블린이라니.

너무 행운이다.

나나루크는 처음부터 고양이상의 미녀였으니까. 진화하니까 더 예뻐진 것 같다.

그녀는 나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헹가래를 치기 시작했다.

어지러워.

혼자서 헹가래라니. 헹가래는 원래 여러 명이서 같이 하는 거야 나나루크.

돌아보니 고블린들도 손을 흔들며 기뻐하고 있었다.

아 저 멀리 지네 맘도 보인다. 아직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구나.

누군가가 내 이름을 외쳤다.

"울루울룰루!"

"우르오로스시여!"

잠깐, 울루울룰루를 누가 잘못 말한 것 같은데.

보니까 대주술사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나를 우르오로스라고 부르기 시작하자.

다른 고블린들도 우르오로스라고 제창하기 시작했다.

노망이 나셨나 왜 이름을 잘못 불러.

솔직히 울루울룰루가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긴 했지만.

"우르오로스! 우르오로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여태까지 죽어도 이명이 생기지 않더니만.

*「이명, '우르오로스'를 얻었습니다.」

어이고?

우르오로스.

멋진 이명이다.

심장 파먹는 뱀도 마음에 들긴 했는데,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우르오로스]

혹은 울루울룰루.

벼락을 부르는 뱀, 악을 잡아먹는 뱀. 혹은 그러한 뱀신.

현재 극히 일부의 고블린들이 신앙하고 있다.

그 신앙이 널리 퍼질수록, 이명의 주인은 합당한 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

멋지다.

너무 멋지다, 뱀신이래.

심장 파먹는 뱀과는 확실히 다른 이명이었다.

명확한 이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격을 가진다는 말이 내 마음속 흑염룡을 자극하고 있었다.

펠레리안에게 이 말을 했더니 놀라워했다.

-그것은 확실히 사람이 아닌 마물의 이명이군······. 이제는 마물의 격을 초월한 재앙들이 가졌을 법한 이명이야.

마물 중에서 그 격이 가장 드높은 마물들.

그런 마물들이 있다는 것 같다.

-이것은 특히도 성장하는 이명이다. 네 명성이 퍼질수록 이명의 힘도 강력해질 것이야.

우르오로스.

어쩐지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 * *

펠레리안의 던전이 또 한 번 발견되었다.

그 소식은 아직 황금이파리 조사관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이리스 셀레나에게 전달되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다시 세계수를 찾아왔다.

장로의 거처.

그곳에 오르는 이리스의 표정은 결연하기 그지없었다.

한 번의 패배.

그리고 한 번의 물러남.

펠레리안을 찾기는커녕, 영웅 군터에 의해 키메라의 표본조차 회수하지 못한 그녀다.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분한 일이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모든 전력을 다하지 못했더라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력을 다했어도 아마 그 인간 영웅은 이길 수 없었겠지.

돌아온 이후 이리스는 절치부심했다.

원래도 빼먹지 않았던 훈련을 가혹할 정도로 반복했다.

육체도, 정신도 날카롭게 다듬었다.

지금 이리스 셀레나의 기세는 한 자루의 칼과 다름없었다.

"장로님, 제가 왔습······."

그런 이리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 버렸다.

사람의 표정이 저리 급격히 바뀔 수 있다니.

특히 그 침착한 이리스가 이렇게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한 방만한 자세로 요정 과자를 와삭와삭 씹어먹는 인간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스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어, 패배자 왔네!"

강렬한 인사말이었다.

버터가 묻어 있는 손가락을 대충 휙휙 젓는 여자.

불꽃 같은 주황색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 내렸고, 웃옷은 타이트한 재킷을 걸쳤다.

길쭉한 다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새까만 가죽바지.

그리고 자신의 몸뚱이만큼 큰 백팩을 대충 발치에 내려놓은 인물.

"장로님, 이 여자가 왜 이곳에 있습니까."

"나도 모른다."

장로는 딴청을 피우며 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이리스의 날카로운 시선에 무언가 들어왔다.

화려한 찻잎 통이 탁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금속으로 장식된 화려한 호사품이다. 엘프의 것이 아닌 인간의 찻잎이었다.

이리스는 내막을 깨달았다.

드디어 이 여자가 뇌물로 장로를 매수했구나.

"랑그레이. 왜 이곳까지 찾아왔지?"

"사냥꾼이 대수림에 들어오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리고 성 말고 이름으로 불러 달라니까."

사냥꾼.

인간 여자의 직업은 분명 마물을 잡는 사냥꾼이었다.

하지만 헤일릿 랑그레이는 사냥꾼보다 여덟 영웅 중 하나로 더 유명했다.

대마물 전투로는 여덟 영웅 중 수위를 다투는 인물이다.

아직 20대라는 젊은 나이로서는 믿을 수 없는 무력.

이리스는 이 무례하고 야만적인 인간을 무시하고자 했다.

"장로님, 부르신 일은······."

"군터한테 얻어맞고 도망쳤다며? 우에엥 하고 말야."

"······."

하지만 이리스는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하지 못했다.

억지로 쓴 가면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울지는 않았다. 장로님이 그리 말했나?"

"글쎄에."

장로를 노려보니 그는 딴청을 피웠다.

"왜 대수림에 왔는지 물었다 랑그레이!"

"여기가 장로님 집이지 네 집이야? 뭐······ 그래 뭐, 묻는다면 알려 줄게."

랑그레이는 버터가 묻은 손으로 제 머리를 빙빙 꼬았다.

"마탑에서 정보를 물어 줬어. 곧 대수림에서 '축제'가 열린다며."

"음."

벌써 그럴 때가 되었나.

이리스는 눈을 찌푸렸다.

'축제'라는 건 당연히 엘프가 여는 연례행사 같은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마물들을 위한, 수십 년에 한 번 있는 자연현상이다.

세계수의 마력이 포화되어 꽃을 피우고, 그 뿌리들이 열매를 맺으며 마물들을 유혹하는.

그래서 모인 마물들이 서로를 잡아먹고 그 과정에서 진화를 반복하며 네임드 마물이 탄생한다.

"이번에는 그 규모가 꽤 클 거래. 그래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네."

"너는 그 어리석은 종말론자들을 믿나?"

대수림에서는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이 상식.

하지만 언젠가 대수림의 몬스터들이 내륙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대륙의 문명이 오랫동안 잊었던 공포와 재앙들이 왕국을 휩쓸 것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이리스가 살아 있던 동안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 나는 어찌 되든 상관없어. 이번에도 마물이나 좀 잡고, 그 수배범 그림자 요정이나 사냥하려고 왔거든."

"데쉬난?"

"응, 그 새끼도 챙겨가서 현상금이나 타야지."

"돈이 궁한가 보군."

"꼬우면 용돈이라도 챙겨 주든지 할머니."

"······!"

이리스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엘프의 나이로는 청년기라고 하지만, 랑그레이는 종종 이렇게 할머니라고 놀렸다.

"이 바지 예쁘지?"

랑그레이는 일어서서 자신의 바지를 자랑했다.

새카만 가죽이 범상치 않다.

"블랙 쉐도우링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만들었어."

"야만적이다."

"너도 옷 좀 바꿔 입어. 맨날 촌스럽게. 이번에는 재킷 하나 만들 생각인데. 가능하면 음······."

자신이 사냥한 몬스터로 직접 의복을 만들어 입는 헤일릿 랑그레이.

"뱀 가죽으로. 난 뱀이 좋더라."

"······."

"웬 뱀이 펠레리안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며. 그것도 결국 못 잡았고."

장로가 슬쩍 일어나서 자리를 피했다.

이 여자는 어디까지 들은 걸까.

"근데 진짜 군터랑 왜 싸운 거야? 내가 걔는 위험하다고 말했잖아. 네 설익은 검술로는 못 이겨. 차라리 펠레리안에게 배운 마법을 쓰든지."

"······."

"어머, 설마 아직도 기억을 봉인해 둔 거야? 지지리 궁상이다 진짜."

이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말싸움을 잘 못 한다.

꼭 싸우고 나서 '아 그때 그렇게 말할걸' 하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하여튼 난 먼저 가 볼 테니까······. 뭐, 뭐야."

실실 웃던 랑그레이가 멈칫했다.

그녀는 크게 당황했다.

이리스의 눈가에 고인 것은 설마······.

"꺼져."

"그, 그럼 이만."

이리스의 차가운 축객령에 랑그레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떠나버린 그녀. 과연 여덟 영웅답게 쾌속한 퇴장이었다.

"크흠, 음······."

장로가 헛기침을 하며 탁상을 정리하는 척했다.

"장로님."

" ·····어, 불렀느냐."

"펠레리안의 던전······ 어딥니까."

"그래, 알려줘야지. 알려줘야하고 말고."

장로는 이리스의 눈가가 반짝거리는 것을 애써 못본척했다.

펠레리안마저 경악하고

045.

작지만 평화로운 마을.

화려함은 없지만 소박한 영지.

그레이림을 수식하는 것은 늘 그런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작금의 그레이림에는 묵빛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걸어 다녔다.

비가 오는 날에도 기사들은 갑주를 벗지 않는다. 육중한 기사들이 걸어 다니자 도로를 포장했던 판석이 깨지고 부서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군터는 철사자 기사단 이외의 사병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

그 사병들이 기존의 영지병 대신 외성 안쪽을 돌아다녔다.

영주가 수도로 압송당했다.

가장 충실한 가신들은 여러 죄목을 빌미로 유폐되었고, 심지어는 반항하다 죽은 자들도 있었다.

평범한 영지민들이야 그런 사정과 상관없을 법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스산한 바람은 위에서 아래로 몰아쳤다.

거리에 즐거이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우르르릉.

비가 제법 거세게 내리는 날이었다.

로브를 걸친 어린아이가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동행하던 사내가 막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성벽 근처에 붙어 있는 방앗간.

이렇게 비가 거세게 오는 날은 방앗간도 일을 쉬기 마련이다.

아이와 사내가 함께 방앗간 내부로 들어갔다.

촛불 몇 개만 밝혀져 있어 어둑어둑하다.

안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내와 아이가 로브를 벗었다.

사내는 그레이림 최고의 사냥꾼 올리버였고, 아이는 영주의 딸 라니아였다.

"어머니!"

방앗간 안에는 영주부인 또한 있었다.

라니아가 영주부인의 품에 꼭 안겼다.

모녀가 만난 것도 오랜만이었다.

"고생했어요, 올리버."

올리버가 고개를 까딱 숙여 영주부인에게 예를 표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영주에게 충성하는 인물이었다.

그레이림 자작이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복은 있었다.

"모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부인의 호출에 이렇게 비밀스럽게 힘을 모은 것이다.

"군터 그자가 영주님을 압송한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왕성과 귀족원에도 서신을 보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대응이 안 되고 있습니다."

영주부인의 안색은 초췌했다.

"이러다가 영주님께 큰 변고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아니 될 일이겠지요."

영주부인과 가신들은 영주를 구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사용했다.

하지만 왕성은 적법한 절차라고 완고한 답을 반복했고. 귀족원은 노력해 보겠다는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이대로면 안 된다. 안 되고말고.

결국 영주부인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후작님의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아······."

누군가 탄식을 내뱉었다.

후작, 호랑이 후작 제라드.

영주부인의 아버지. 팔 영웅 중 일인.

가신이 탄식을 내뱉은 이유는 달리 없었다.

영주부인의 아비는 무서운 사내였다. 어쩌면 군터보다도 더.

늑대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를 불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원래 영지의 주인이던 너구리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으니.

영주성의 집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차를 수배했습니다."

"서신을 전하는 정도로는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 분이니까요."

제라드 후작도 귀족원을 통해 소식을 들었을 텐데 여태까지 가만히 있었다.

아마도 명분을 준비 중이거나, 손익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저나 라니아가 직접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주부인은 군터의 감시하에 있었다.

오늘 이곳에 나온 것도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다.

결국 어린 딸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영주부인은 자신이 직접 적은 서찰을 라니아에게 건넸다.

라니아는 주눅 든 자세로 서찰을 품에 넣었다.

"올리버가 도와주실 겁니다."

"영주님께는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올리버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영주부인도 가볍게 감사를 표했다.

모인 사람들은 그 이후 대략적인 계획을 나눴다.

가까운 시일 내에 마차 한 대가 그레이림을 떠날 것이다.

라니아와 그녀가 품은 서신과 함께.

"그러면, 모두 무운을."

영주부인의 선언과 함께 사람들이 차례차례 흩어졌다.

라니아와 올리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번에는 라니아가 먼저 혼자 나갔다.

그녀는 영주 성에서 일하는 하녀로 위장한 상태였다.

밀가루를 담은 바구니를 품에 안고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는 라니아.

"어이."

그녀를 병사들이 멈춰 세웠다.

라니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영지의 병사들이 아니다. 군터가 데려온 이들이었다.

"뭘 가져오는 거지?"

"미, 밀가루를······."

"비가 이렇게 오는데?"

병사는 퉁명스럽게 바구니 안을 확인했다.

밀가루가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라니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 이렇게 떨어? 뭐 숨기는 거라도 있나?"

"아니, 아니에요."

"예쁘장하게도 생겼구만. 하녀가."

일부러 먼지를 뒤집어쓰고 추레하게 꾸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실실 웃으며 관심을 가졌다.

내성 안에 계속 갇혀 있던 라니아.

새로 온 일개 병사들이 라니아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디 몸수색 좀 해 보자. 떠는 거 보니까 수상하기 그지없어."

라니아가 공포에 떨었다.

서신이 들키면 끝장이다.

병사가 라니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따악!

누군가 병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어떤 새······ 앗, 충성!"

나타난 것은 기사 자인이었다.

라니아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새끼들아, 니들 상판대기가 험상궂으니까 하녀가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지."

"······헤헤."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병사가 라니아를 들여보냈다.

라니아는 안간힘을 써서 뛰고 싶은 마음을 자제했다.

멀어지는 그녀를 자인이 물끄러미 보았다.

어딘가 복잡한 표정이었다.

자인 역시 순찰을 마저 돌러 사라졌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는 나무의 뒤편.

올리버가 비를 맞으며 숨어 있었다.

철컥.

뽑아 두었던 단검을 다시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흐음······."

혼자서 비를 맞으며 순찰하는 자인을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축제, 개화기(開花期), 열매의 주간, 보랏빛 연회.

이 모든 표현들은 대수림의 한 자연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전 세계의 수많은 비경 중에서 세계수가 있는 대수림에서만 볼 수 있는 극적인 현상.

세계수가 평범한 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명확하게 밝혀진 사실이다.

세계수는 식물인 동시에 육식동물과 같은 성질을 지닌다.

그들은 자신의 양분을 위해 마물을 잡아먹는다.

세계수의 뿌리는 대수림 전체에 퍼져 있다.

그중에서는 종종 지상으로 노출되는 뿌리가 있는데,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와 다를 바 없는 그 뿌리에서 열매를 맺는 때가 있다.

세계수가 품은 마력이 임계치 이상으로 올라갔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뿌리에서는 아주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들이 마물을 유혹한다.

세계수가 지닌 음의 마력을 잔뜩 머금은 열매는 마물의 마성을 강화시켜 준다.

그리하여 마물들은 강해지게 되고, 잔뜩 모인 마물들이 서로 싸우며 더욱 강해진다.

그 과정에 죽은 마물들은 그대로 썩고 분해되어 세계수의 뿌리에 흡수되는 것이다.

미끼를 이용하여 양분을 흡수하는 이 일련의 과정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훌륭한 사냥법이다.

이런 과정은 대수림의 다양한 지역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특히 '축제'라는 표현이 소규모로 활용되는 지역이 매번 생긴다.

유독 새빨간 빛깔이 선명한 열매를 맺는 뿌리가 하나씩 생긴다.

가장 위험한 네임드 마물들이 몰려드는 곳.

그렇기에 혼돈과 약육강식의 마경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현자 파르비안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마물 사전: 대수림 편中」

* * *

나는 나나루크에게 포션의 제조법을 말해 주었다.

펠레리안이 돈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까워했지만 고블린들은 돈이 없는걸.

나나루크는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언젠가 값을 쳐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음 착한 아이다.

다만 조건을 걸었다.

제조법을 유출하지 말 것.

다른 종족은 물론이거니와 룬가 부족 안에서도 주술사들에게만 알려 줄 것.

나나루크는 맹세했다.

믿음직한 친구니까 알아서 잘할 것이다. 어차피 이 포션의 재료들은 대수림이 아니면 구하기 어렵기도 하고.

내가 포션의 제조법을 알려 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새로 얻은 이름 우르오로스.

그 이명의 설명에는 이러한 문구가 있었다.

'현재 극히 일부의 고블린들이 신앙하고 있다. 그 신앙이 널리 퍼질수록, 이명의 주인은 합당한 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나루크와 룬가 부족은 계속 이 팔라무 우림에 있을 생각이 아니었다.

"우선 대수림의 고블린 부족을 통일할 거야. 그리고 대륙으로 가야지."

나나루크가 이렇게 야망 넘치는 고블린이었을 줄이야.

그녀와 룬가 부족의 계획은 원대했다.

그리고 룬가 부족이 세력을 넓힐수록 내 이명도 널리 퍼질 것이다.

언젠가 '띠링, 당신의 신앙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같은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포션이 있으면 다른 고블린 부족에게 밀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나루크와 고블린들은 내게 먹을 것을 잔뜩 챙겨 줬다.

아공간이 꽉 차서 집어넣을 공간이 없었다는 게 문제.

큼지막한 보따리에 넣었는데, 뱀인 내가 그걸 끌고 다닐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게는 새로운 동료가 생겼으니.

"께에에엑!"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달리는 지네 맘.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있는 세 마리의 지네 유생들.

바람이 시원한지, 자유를 얻은 아이들이 기뻐 포효했다.

"께께께!"

"께에에~"

"께!"

"사아악!"

마지막이 나다.

나는 지네 맘의 등딱지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보따리도 지네 맘의 등에 백팩처럼 맸다.

고블린들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였다.

나는 나나루크에게 조언해 주었다.

'귀 긴 종족은 절대 믿지 말고! 그리고 서쪽으로 가다 보면 그레이림 영지라고 인간들의 도시가 있거든. 거기는 꼭 피해 가. 거기 괴물 같은 놈이 있어.'

군터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나나루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다시 만나자."

'응.'

나나루크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꼭 껴안아 줬다.

데쉬난의 거처가 있는 곳을 찾아 출발하려는 내게 지네 맘이 다가온 게 그때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였다.

인사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태워 줄 테니 등에 타. 그런 말이었다.

설마 지네 맘도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걸까.

"께에에엣!"

저 소리밖에 안 내는 것을 보면 모르겠다.

하여튼 지네 맘의 탑승감은 아주 끝내줬다.

다리가 여러 쌍인 만큼 위아래의 흔들림이 최소화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나 센지, 어지간한 마물은 덤벼들지도 않았다.

우리는 점점 깊은 숲속으로 나아갔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

지네 맘이 멈췄다.

점심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어우 뻐근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심심한 일이었다.

먹을 음식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나는 사냥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네 맘에게 탑승료를 지불해야 할 것이 아닌가.

펠레리안은 자고 있다.

간만의 정적을 즐기면서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고블린들과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것도 좋지.

나는 숲의 어둠을 기는 뱀, 침묵은 나의 친구다.

그르릉.

그리고 침묵 속에서 소음을 내는 어리석은 짐승이 있었다.

나는 비늘에 흙을 묻혔다.

새로운 비늘은 빛을 받으면 아주 화려했지만 어둠 속에서는 오히려 예전보다 눈에 덜 띄었다.

흑린 스킬로 검게 물들이면 더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다.

새 스킬은 내가 무척 화나야지만 발동한다는 치명적인 조건이 있었다.

까득, 까드득.

소음을 내는 범인을 발견했다.

분명한 육식동물이었다.

표범보다는 작고, 고양이보다는 큰 생물.

──────────────

[격자 무늬 살쾡이lv21]

[특성]

[포악함]

──────────────

만만해 보이지 않는 녀석이다.

자신보다 더 큼지막한 원숭이 한 마리를 우적우적 뜯어 먹고 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었다.

목덜미 위를 콱 물고 놈의 몸에 얽혀든다.

살쾡이는 힘이 좋아서 내가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펄쩍 뛰어올랐다.

"퀘에에엥!"

살쾡이는 쾌애앵 하고 우는구나.

나는 놈의 몸을 졸랐다. 아기 지네들도 먹을 거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독니는 쓰지 않았다.

발톱이 있는 마물을 조를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이제는 나도 숙련되어서 불쌍한 살쾡이는 나를 물 수도 할퀼 수도 없었다.

우득-

후우. 생각보다 끈질기군.

나는 훌륭하게 놈을 처치했다.

그리고 달콤한 경험치를 기다렸으나 ······.

그런 건 없었다.

아주 조금의 마성만 느껴질 뿐.

설마 내 수준이 높아져서 효율이 안 나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육식동물인데, 레벨이 21이나 됐는데.

이거 상황이 쉽지 않다.

역시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더 강한 놈들을 사냥해야 하나.

어찌 되었든 '사냥'이라는 측면에서는 성공이었다.

나는 지네 맘과 아이들이 있는 곳까지 살쾡이를 끌고 갔다.

그들은 내가 살쾡이를 가져오자 입에서 침을 뚝뚝 흘렸다.

'잠깐만 기다려라 얘들아.'

그냥 대충 고기를 던져 줄 생각은 아니었다.

나도 이제 요리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살쾡이를 하늘이 보이는 개활지로 끌고 간다.

아공간에서 포션을 하나 꺼내서 미리 옆에 놔둔다.

살쾡이 위에 올라간 뒤, 정신을 집중한다.

*「스킬 뛰어넘는 뿔을 사용합니다.」

*「'천뢰령lv0'이 일시적으로 '천뢰령lv1'이 됩니다. 」

공기가 잠잠해지고.

죽은 살쾡이의 털이 부스스 곤두선다.

*「천뢰령lv1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벼락이 내게 내리꽂혔다.

쩌저저저정!

이번에는 진작 머리를 내 품속에 넣어서 눈을 가렸다.

하지만 짜릿한 격통은 여전하다.

*「열기 내성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열기 내성lv8이 열기 내성lv9가 되었습니다.」

*「전격 내성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전격 내성lv3이 전격 내성lv4가 되었습니다.」

아아악! 아파!

몸이 화끈화끈하다.

놀랍게도 천뢰령을 쓴다고 아예 감전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나는 구르다시피 포션으로 다가갔다.

대나무 통을 입으로 깨부수면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바닥에 흘린 포션 위를 굴렀다.

허어, 죽을 뻔했네.

이 짓거리도 벌써 몇 번을 반복했다.

*「스킬, 천뢰령lv0을 완전히 습득했습니다.」

보람은 있었다.

끄으.

-또 지랄이구나. 하하.

펠레리안이 반지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스킬의 습득을 위해서만 한 짓은 아니었다.

살쾡이 고기는 허연 김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잘 익었다는 뜻이다.

살쾡이 전기구이 완성.

기다렸지 얘들아.

아기 지네 세 마리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께께께!"

"께에에."

"께!"

기뻐하는 거 봐. 귀엽게.

박수도 쳐야지 얘들아.

나는 꼬리로 바닥을 탕탕 쳐서 알렸다.

그러자 아기 지네들이 독 발톱을 찰캉찰캉 부딪쳤다.

저게 지네들의 박수였다.

똑똑하구나.

'자, 줄 서서 밥 먹자.'

지네맘은 가만히 있었다.

그게 마치 자식들과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듯했다.

나는 직접 고기를 찢어서 지네들한테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다.

-잘 따르는구나 이제.

예전에는 날 좀 무서워하는 듯했는데.

이제는 내 등에도 매달리고 아주 친해졌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순수한 호의였을 뿐이다.

설마 그런 메시지가 울릴 줄이야.

*「지네 유생lv3을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스킬, '길들이기lv1'을 습득했습니다.」

어?

나는 화들짝 놀라 펠레리안을 바라봤다.

-뭐냐.

'아니, 길들이기를 성공했다는데요.'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그러면 안 됐는데.

-허어?

펠레리안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래, 그런 목적이었다는 말이지. 나조차 상상치 못했어.

'아니.'

-지네 노예를 부릴 생각이었다니.

'아니라고.'

억울하다.

빈집털이범

046. 빈집털이범

-거짓말하지 마라, 이 교활한 뱀아!

'아니야!'

펠레리안이 준엄하게 나를 꾸짖었다.

-너는 틀림없이 지네를 노예로 삼아 저 어미까지 부릴 계획을 했겠지!

'아니라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 칭찬하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탁월한 판단이야. 마도사라면 진정 그리해야지.

'장난은 여기까지 칩시다. 슬슬 재미없네.'

-장난 아닌데.

분명 장난이 맞겠지.

나는 지네를 내 노예로 부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기 지네들을 바라봤다.

'얘는 귀엽긴 해.'

분명 어미와 자식인데 이렇게 생긴 게 다를 수 있을까.

아기 지네는 아직도 피부가 노르스름하게 투명했다.

그리고 요즘 잘 먹어서 그런지 몸도 오동통하다. 다리도 그리 많지 않아서 징그럽지 않다.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

이 애들도 나랑 함께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이 따라쟁이들아.

-애초에 길들이기 스킬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만능은 아닐 거다. 궁금하면 시험해 봐.

'어떻게 시험해요?'

-뭘 시켜 보면 되지 않겠냐.

지금 내가 길들이기에 성공했다고 나온 것은 맏이뿐이다.

나는 셋 모두를 바라보며 지시했다.

'자 이쪽으로 가 봐.'

호오.

그러면 다음 명령.

'자 저쪽으로 가 봐 그러면.'

와.

결과는 놀라웠다.

'아무도 말을 안 듣는데요.'

아기 지네들은 멀뚱멀뚱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길들이기에 성공했다는 맏이도 멍만 때렸다.

-그래, 그런 거다.

이유는 두 가지.

-네 길들이기의 수준이 떨어지고. 그리고 대상의 지능이 낮기 때문이겠지.

펠레리안이 길들이기라는 스킬의 원리를 대충 설명해 줬다.

말 그대로 노예로 부리는 스킬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얘기했잖아. 그때 내가 너한테 길들이기를 썼던 게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니까?

'그런 말을 했다고요?'

-그래!

기억 안 나는데.

하지만 펠레리안의 인성을 믿을 바에야 거미가 착하다는 말을 믿는 게 나으리라.

'마지막으로, 다 같이 인사.'

지네 셋이 꾸벅 나를 따라 인사했다.

*「지네 유생lv2를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길들이기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헉.

레벨 2는 둘째였다.

그냥 인사만 했을 뿐인데 길들이기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애초에 마물이 길들이기 스킬을 가질 수 있었다니. 몰랐다.

원래 사람 종족들만 보유할 수 있는 스킬인 건가.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것도 잠재력20의 조화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막내가 너무 불쌍해지잖아.

아, 내가 직접 스킬을 써 보면 어떻게 되는 걸까.

흠······.

*「길들이기lv2를 사용합니다.」

*「지네 유생lv1을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길들이기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와~

성공했다.

나는 지네 맘을 돌아보았다.

대왕지네 님은 어쩐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흠······.

그래, 안 해 볼 수는 없겠지.

이런 기회가 다시 있기는 힘들 테니까.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대왕지네를 바라봤다.

*「길들이기lv2를 사용합니다.」

*「크림슨 티스 대왕지네lv33을 길들이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잘 있어라 세상아.

짧은 뱀생이었지만 치열하게도 살았다.

나는 다가올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대왕지네는 어떻게 응징할까.

독 발톱 참수, 짓눌러 으깨기, 꼬리 후려쳐서 몸통 터뜨리기.

내 사인(死因)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며 잠시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끔찍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지네맘은 멀뚱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혹시 길들이기 스킬을 사용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그리 생각했지만, 아니라는 듯 지네 맘이 고개를 저었다.

혹은, '너는 아직 자격이 없다.'하고 선언하는 것 같기도 하고.

-푸하핫, 가당키나 하겠나!

펠레리안은 엄청나게 즐거워했다.

-한참 모자라다 한참!! 고양이가 주인을 길들이려는 것과 다름없군.

이 노인네, 아무래도 내게 길들이기를 실패했던 사실에 앙심을 품은 게 틀림없다.

그리고 고양이는 실제로 주인을 길들이기도 한다.

-아주 재미있는 꼴을 보았으니 내가 좋은 팁을 가르쳐 주마.

펠레리안이 조용히 읊조렸다.

-이름을 지어 줘 봐라.

'이름을요? 아기들한테?"

-그래, 유생들에게 이름을 붙여 줘. 저 어미가 붙여 줄 것 같지는 않으니.

이름을 붙이는 것은 지성을 가진 종족들의 특혜이다.

메두사 맘은 수천 마리의 자식을 낳았지만 아무에게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지네 아기들이 멀뚱거리며 나를 보았다.

지네 맘 역시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다.

그래 뭐, 나만 마음속으로 부를 이름인데 상관없겠지.

나는 각각 지네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름을 지어 줬다.

'첫째는 특히 예의가 바르니 꾸벅이.'

'너는 눈이 크니까 왕눈이.'

'얘는 머리가 좀 더 크니까 대갈이.'

이름을 짓고 보니까 대갈이가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후회할 겨를은 없었다.

*「지네 유생lv3의 이름을 '꾸벅이'로 지었습니다.」

*「지네 유생lv2의 이름을 '왕눈이'로 지었습니다.」

*「지네 유생lv1의 이름을 '대갈이'로 지었습니다.」

헉, 내가 지은 이름이 공식 인정되는 건가.

*「지네 유생 대갈이lv1가 자신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길들인 마물과의 유대가 깊어집니다.」

*「길들이기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유대가 이렇게 깊어지는 것인가.

이름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다른 애들의 상태창도 살펴봤다.

──────────────

[지네 유생 꾸벅이lv3]

──────────────

정말 상태창에 내가 지은 이름이 나왔다.

이거 어째선지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름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이명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지어졌냐?

'예.'

-와 이게 되나.

'뭐에요.'

-정말 될 줄은 몰랐군. 아무래도 같은 마물이라 친밀도가 다른 걸까.

으스대며 말한 것치고 펠레리안도 성공할지는 몰랐던 것 같다.

-마물을 길들이는 데에 필요한 삼 요소가 무엇인 줄 아나?

그가 설명하길.

-친애, 존경, 그리고 공포다.

대충 알 법한 것이다.

친밀하면 따를 것이고, 자신보다 우월하여 존경한다면 따를 것이다.

너무 두렵더라도 따를 것이고.

'그럼 얘들은 분명 저를 존경하고 있나 보군요.'

-허허.

펠레리안은 내 주장을 무시했다.

-어느 방식이라도 좋다. 네가 이름을 지어 준 저 마물들과 가까워져 보아라. 그 어미도 싫어하지 않는 눈치이니.

'왜요?'

-재미있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가.

점점 대수림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데쉬난의 일지에 적혀 있는 여러 요소들을 점검한바, 분명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니요. 그럴 시간이 없어요. 빨리 강해져야죠. 그러려면 수련해야 하고.'

나는 차갑게 답했다.

-기특하군. 마법을?

'검술을.'

-······.

내 목적이 무엇인가.

다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할 뱀이 되는 것이다.

영웅도, 엘프도, 그리고 마물들도 덤벼들지 못하는 뱀.

즉, 사무령이 되는 것이다.

* * *

지네 모자, 혹은 모녀들과 여정을 떠난 지가 삼 일이다.

저 멀리 일지에 적혀 있는 바로 그 절벽을 찾아냈다.

대왕지네 님에 탑승하지 않았다면 열흘은 족히 걸렸으리라.

아무래도 데쉬난에게는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우끼이, 우끼끼!"

지금 내 위에서는 원숭이가 나무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

[긴 다리 원숭이lv17]

[특성]

[긴 다리], [포악함], [무리]

──────────────

처음 보는 저 원숭이는 겁도 없었다.

나를 보며 춤을 추면서 무언가를 던졌다.

가볍게 피해 준다.

철퍽!

내가 있던 자리에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똥이었다.

놈은 내게 똥을 던진 것이었다.

"우끽!"

박수를 치면서 좋아한다.

땅을 기는 뱀에게는 원거리 공격수단이 없음을 믿고 저러는 것이다.

놈은 조금 전에 대갈이를 납치해 가려다가 내게 막혔다.

그것에 원한을 품었는지 저렇게 알짱대고 있다.

정신을 집중하자.

"께께께께!"

화나겠지만 참아 대갈아. 내가 처리한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지금, 실수는 할 수 없다.

내 정신이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졌다.

또 한 번 똥을 던지려는 긴다리 원숭이.

놈의 코앞에 칼 한 자루가 떠오른 게 그 순간이었다.

칼이 떠오르는 속도는 무척 느렸다.

게다가 한평생 밀림 속에서 살았을 원숭이가 어디 '엘븐 브로드소드'를 본 적이나 있을까.

놈은 반짝거리는 칼에 매료되었는지 천천히 손을 뻗기까지 했다.

그리고 공중에 부유하던 칼이 휘둘러졌다.

*「참격lv2를 사용합니다.」

자르기의 상위 스킬 참격.

칼은 너무도 쉽게 원숭이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펄쩍거리던 원숭이가 맥없이 떨어졌다.

*「마법: 투명한 손lv2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마법도 수련하고 검술도 수련하였다.

이제는 투명한 손을 소환해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이 보기에는 마치 검 한 자루가 알아서 움직이며 싸우는 것처럼 보이겠지.

즉, 이기어검술을 쓰는 초절정 검사가 된 것이다.

실제로 꼬리로 검을 휘두를 때는 죽어도 얻지 못한 검술 스킬을 얻었다.

이것이야말로 내 노력의 증표.

*「어설픈 검술lv1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그냥 검술이면 됐지 명백한 하위 스킬을 얻었다는 것만 좀 불만족스러웠다.

"께께께-!"

"께에!"

지네들이 나자빠진 원숭이에게 달려들어 두들겨 팼다.

아이들의 말을 번역하면 대충 '죽어!', '이 건방진 새끼!' 정도쯤 될 것이다.

애들과 사이가 좋아지니까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어쩐지 대왕지네 님이 내 생각을 이해하는 것 같더니, 이런 거였나.

지네 아기들은 원숭이 고기로 포식했고, 나는 나나루크가 준 마지막 식량을 해치웠다.

드디어 이 아름다운 동행도 끝이다.

"께에."

지네 맘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고 느껴진 것은 내 착각일까.

-몇 번째 눈 말이냐, 네 번째 눈알?

펠레리안이 또 분위기를 깼다.

절벽으로 함께 가자는 내 요구에 대왕지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나를 따라오려는 자신의 새끼들을 끌고 와 품었다.

여기서 헤어지자는 말이었다.

나도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젠 서로 갈길 가야 하지 않겠는가.

애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나랑 다녀서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피로 범벅된 길을 걸을 테니······.

식사를 마쳤으면 진짜 이제 이별의 시간이다.

아기 지네들은 내가 떠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앞에 가만히 있자 또 놀려는 줄 알고 등에 올라타려고 한다.

이제는 이런 것도 귀여워 보이는 게 문제다.

사람 시절이었으면 지네가 달라붙자마자 바로 브레이크 댄스 페스티벌이었을 텐데.

내가 꼬리로 녀석들을 밀치자 세 남매는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이제 많이 친해진 것 같은데 아직도 뭐 딱히 변하는 게 없네요?'

펠레리안은 내게 도전과제를 안겨 줬다.

이름을 지어 준 세 남매의 충성심을 사라는 내용이었다.

분명 삼 일 새 더 가까워졌는데

-음······ 너무 친밀해지기만 한 게 문제가 아닌지.

그럴 리가.

내가 벼락도 떨어뜨리고 어검술을 써서 원숭이도 잡아 줬는데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렇지 얘들아?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하는 법이다.

작별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나는 세 지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자.

꾸벅이, 왕눈이, 대갈이.

그때는 훌륭한 왕지네로 성장해 있으면 좋겠네.

그때였다.

*「지네 유생 꾸벅이lv4와의 유대가 깊어졌습니다.」

오?

*「지네 유생 꾸벅이가 당신의 영향을 받아 성장합니다.」

뭔가 일어나긴 일어났다.

하지만 그 영향이라는 게 어떻게 진행될지는 알 수가 없군.

그렇게 마지막으로 꾸벅 인사하고 떠났다.

뒷모습이 쿨해야 진짜 멋있는 뱀일 것이다.

한참을 지나서야 돌아보니, 대왕지네 가족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의 색이 이상하네요.'

비가 오지 않은 날이면 대수림의 하늘은 푸르고 투명하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어쩐지 불길한 보랏빛이다.

'그림자 숲은 원래 이래요?'

이곳의 이름이 그림자 숲이다. 듣자 하니 그림자 요정과는 별 관계 없는 이름이라고 했다.

-아니, 보랏빛 연회를 앞두고 대기 중의 마성 농도가 올라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빛이 산란하면서 보랏빛을 띠는 거지.

어쩐지 공기 냄새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썩은 듯한 구린내······.

-그 냄새는 저 집에서 나는 것 같군.

절벽을 우회해서 올라가느라 꽤 힘들었다.

하지만 그 보람이 있게도, 그 위에는 정말 집이 있었다.

'이게 뭐야.'

절벽 아래에서는 집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작은 집이구나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집이 있었다.

높이는 높지 않지만, 그저 나무로 벽을 세운 듯한 조악한 건물이었지만.

마치 대형 창고처럼 면적이 크다.

그 그림자 요정이 저 안에 '동물원'을 꾸민 것일까.

저 정도라면 충분히 마물들을 사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빨리 들어가 봐라!

펠레리안이 나를 재촉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다만 함정 같은 게 있을 수 있으니 제대로 살피고 들어가.

무슨 얼큰하고 담백한 짬뽕을 만들어 달라는 듯한 모순적인 요구란 말인가.

나는 신중을 기해서 주변을 살폈다.

마력감지도 써 보고 펠레리안의 도움을 받아 함정이 있는지도 살폈다.

-함정은 없는 것 같군.

결론이 내려졌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달칵.

도둑을 걱정하지는 않았는지,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실내로 기어들어 갔다.

타닥, 탁.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새카만······ 유령?

부정형의 무언가가 방의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다.

도저히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악마의 하수인이다! 피해라!

"끼끼끼낏!"

놈은 분명 웃었다.

나는 꼬리를 휘둘러 쳐내려고 했지만.

스윽-

그 검은 형체는 내 꼬리를 관통해서 안면을 덮쳤다.

'헉.'

그놈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확실했다.

머릿속에서 기이한 웃음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으니까.

유령 같은 뭐 그런 건가.

와락, 무서워지기도 전에.

*「끼긱, 끼기기긱.」

*「특성 '불굴'에 의해 정신공격에 면역입니다.」

엇.

내 콧구멍에서 거무스름한 악마의 하수인이 툭 튀어나왔다.

파들파들 떨더니,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하급 악마의 하수인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뭐야 이건.

압박 면접 시작

047. 면접 시작

나는 벙찐 표정으로 악마의 하수인을 바라봤다.

악마의 하수인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악마가 보낸 걸까.

-같은 요정으로 묶이는 게 수치스러운 수준이군. 악마에게 혼을 팔다니.

펠레리안의 목소리에서는 경멸이 뚝뚝 묻어나왔다.

'악마의 하수인은 또 뭐예요?'

-말 그대로다. 악마가 이놈의 집에 하수인을 보낸 거겠지. 영체에 가까운 놈이군. 아마도 지성이 떨어지는 마물의 머릿속에 파고들어 본체를 조종하는 것 같은데······.

놈은 나를 평범한 마물 쯤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곧장 머릿속으로 파고들었고.

지성이 떨어지는 마물?

근데 내 머릿속엔 왜?

'사람이나 요정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요, 그러면?'

-하급 하수인이 그럴 수 있을 리는 없지. 너를 아마 평범한 뱀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무척 불쾌한 일이다.

내 불굴 특전이 없었어도 조종당할 리는 없었을 것 같은데.

죽어라 이놈!

나는 죽어 나자빠진 악마의 하수인을 물어뜯어 보았다.

내 꼬리를 휙 관통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물 수 있었다.

-무슨 맛이냐.

'청포묵 같은 맛이요.'

펠레리안은 '또 의미를 알 수 없는 헛소리군.' 하는 표정을 지었다.

*「포식lv7을 사용합니다.」

*「악마의 하수인을 소화합니다.」

어.

포식은 사실 그 존재 의의를 알기 어려운 스킬이었다.

그저 좀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스킬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맛은 별로 없었지만 놈을 완전히 먹어 치워 보았다.

*「당신은 악마의 하수인을 사냥하여 먹어 치웠습니다.」

*「악마의 하수인은 당신을 조금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런 거구나.

포식의 효과는 무언가를 먹어 치움으로써 아웃풋을 내는 것 같다.

아무거나 먹는다고 다 뭔가 생기는 건 아니고, 이런 진귀한 먹거리를 먹었을 때만 효과가 나오는 걸까.

앞으로는 미식가 뱀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만 미적거리고 빨리 뒤져 보자고!

펠레리안이 재촉했다.

용의 비늘, 그리고 투명망토.

데쉬난의 집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던 두 보물.

'예!'

나라고 기대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림자 요정의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 * *

-왜 없는 거야!

펠레리안이 화가 나서 방방 뛰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스프링처럼 만들어서 펄쩍펄쩍 뛰었다.

'내 투명망토!'

데쉬난은 분명 몸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마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는 펠레리안과 영웅급의 강자마저 피해서 도망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만 있으면 나는 완벽해질 것이다.

어쩌면 메두사 맘의 원수인 군터마저 해치울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 망토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용의 비늘도 마찬가지였다.

듣자 하니 용의 비늘은 저절로 신비로운 마력을 뿜어낸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데쉬난의 집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서랍이며 진열장 같은 것들이 전부 열려 있고, 그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마룻바닥에 가득하다.

여러 잡동사니가 있었지만 내가 찾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건진 게 있다면.

'밥걱정은 덜었네.'

포댓자루에 가득 담겨 있는 건조 '사료'들.

그것은 분명 사료였다. 아마도 마물을 먹이기 위한 것들.

알 수 없는 고기와 잡곡을 갈아 뭉친 것 같은데, 어쩐지 마력이 느껴진다.

적은 양이지만 마석까지 갈아 넣은 듯했다. 아마도.

-저 안에 있을 마물들을 먹이려는 거겠지.

데쉬난의 집은 거대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생활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집 전체 면적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나머지 공간으로 통하는 문에 적혀 있기로는 '실내 동물원'.

그림자 요정은 마물들을 자기 집 안에 키우고 있던 것이다.

'이 의수는 뭘까요.'

내가 찾은 또 하나의 물건은 바로 의수였다.

처음에는 장난감인 줄 알았다.

두 개의 팔 모형이 진열장 안에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만듦새가 보통 정교한 게 아니었다.

손가락의 관절 하나하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재질인 금속 역시 범상치 않다.

-사람이 차기에는 너무 큰 의수인데.

의수의 접합부에는 보기만 해도 흉악한 침이 달려 있다.

이걸 아마도 몸통에 푹 꽂으면 의수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자이언트 의수]

몸에 꽂으면 새 팔로 쓸 수 있다.

──────────────

설명도 대충 적혀 있어서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쓸 수는 없겠네요. 너무 커서.'

잠시 그런 상상을 한 게 사실이다.

팔 달린 뱀이라니. '투명한 손' 마법을 이용했을 때보다 훌륭한 검술을 구사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려울 것 같다.

의수를 몸통과 연결하는 접합부의 침.

저걸 내 몸에 꽂으면 아예 몸이 관통되어 버릴 것이다.

사이즈의 문제였다.

지네 맘 정도면 착용할 수 있지 않을까.

나와 함께 의수를 살피던 펠레리안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작게 새겨진 장인의 문장이었다.

-노움의 문장, 노움이 만든 물건이군.

드워프만큼이나 장인 정신이 뛰어난 것이 노움족이라고 했다.

-처음 보는 문장인데.

'어 잠깐, 본 적 있는 문장 같은데요.'

-네가?

'예.'

그것도 조금 전이었던 것 같다.

나는 현관 앞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뒤졌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다. 편지 한 통이.

편지에는 의수에 새겨진 문장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나는 꼬리로 편지의 봉인을 뜯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별 대단한 내용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짧게 적혀 있기를.

'지난번에 맡겨 주신 마도구들의 수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망토의 수리가 어려워서 쉽지 않군요. 축제 기간이 끝날쯤에는 수리가 완료될 것 같습니다. 그때 집 앞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아, 수리를 맡겨 둔 건가.

이 근처에 한 노움 장인이 숨어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투명망토는 실존했다. 참말로 다행이었다.

'노움을 찾아내서 약탈할까요!'

당연히 펠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줄 알았건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그는 나를 꾸짖었다.

순간 풀이 죽을 뻔했다.

-노움이 얼마나 잘 숨는 놈들인데. 기다렸다가 그놈이 나타났을 때 잡아 족쳐야겠지.

'아하.'

역시 나보다 한 수 앞을 바라보는 요정다웠다.

일단 이곳에 머물면서 그 열매 주간이니 축제이니 하는 시간을 지내 봐야겠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방에 있는 서류들을 최대한 많이 읽어 보았다.

눈이 아프고 배가 고파질 시점, 나는 용의 비늘의 행방을 알아냈다.

표지에 '사육일지'라고 적혀 있는 책이었다.

'용의 비늘을 갈아 사료에 뿌린 뒤 메두사 서펜트에게 급여했다. 그 배필도 함께 먹었으니, 운이 좋다면 다음 세대에는 유의미한 변종이 나오겠지.'

펠레리안이 입을 쩍 벌렸다.

'······.'

-······.

펠레리안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사, 사, 사료에 섞어 먹여······.

'······.'

-그 귀, 귀한 마법 촉매를······!

'제가 한 게 아니고. 그림자 요정이······.'

-그 멍청한 놈! 그저 똥이 되겠지 유의미한 변종은 무슨! 이딴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마물을 교배시키던 건가! 무식의 극치야!

펠레리안은 입에서 불을 토해 내듯 화냈다.

하긴, 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계속 졸았던 나도 그 정도는 안다.

후천적으로 획득한 뭐시기는 유전되지 않는다.

용의 비늘을 먹인다고 그 자식의 비늘이 용의 비늘처럼 단단해질 리는 없다.

뭐, 과학적으로는 그렇다고 해도 마법적으로는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나 혼자 흰 뱀으로 태어난 것도 용의 비늘로 인한 돌연변이가 아닐까.

-그랬으면 하위종이 아니라 상위종 돌연변이가 나왔겠지.

'······.'

이번에 상처받은 것은 내 쪽이었다.

그래, 내 피 어딘가에 용혈이 흐를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자.

그나저나 데쉬난의 일지를 보니 이곳 어딘가에 우리 아버지도 있는 것 같다.

바깥에 있으려나, 아니면 혹시 실내 동물원에?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아버지는 아주 거대한 것 같으니.

'이제 슬슬 저 안을 살펴보죠.'

아직도 화를 내고 있는 펠레리안을 억지로 끌고 갔다.

현관의 대문은 잠가 두지 않은 주제에, 실내 동물원으로 연결되는 문은 튼튼한 철문이었다.

그래서 악마의 하수인도 들어가지 못한 것 같고.

똑똑.

나도 모르게 노크해 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철문을 잠그고 있는 걸쇠를 풀었다.

끼기기긱-

육중한 철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내부에 고여 있던 공기가 밀려 나왔다.

곧바로 느껴지는 것은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였다.

분변의 역겨운 냄새, 물비린내, 그리고 선명한 누린내, 피 냄새까지.

'동물원이라며······.'

이름이 주는 선입관이 얼마나 강한가.

어린이 대공원쯤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동물원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을 만한 환경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운데에 길이 있고, 양옆에는 철창으로 나누어진 구획이 있을 따름이다.

서식지의 환경을 나름 다르게 조성하기는 했는데 곳곳에 죽어 나자빠진 마물들이 보였다.

굶어 죽은 것은 아니고, 병들거나 서로 잡아먹은 것 같다.

'마물들이 왜······.'

처음에는 아무 마물도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마물들은 구석으로 재빨리 숨어 들어갔다.

두려움에 떨며 웅크리는 것이다.

녀석들, 며칠간 밥도 못 먹어서 배가 고플 텐데.

내가 그 정도로 무서워 보이나?

하긴, 무려 크리스탈 더블혼 파이톤이다.

비늘이 수정처럼 빛나는, 세 번이나 진화한 상위 뱀 마물의 등장에 겁을 먹는 것도 당연하리라.

-네가 아니라 원래 주인을 무서워하는 거 아니냐.

펠레리안이 옆에서 초를 쳤다.

안타깝게도 그 말은 곧 사실로 밝혀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마물들이 나를 보더니 철창 쪽으로 다가온 것이다.

"컹컹, 커엉!"

"우와아앙!"

"왜애애앵."

놈들은 화내듯 짖어 대고 철창을 잡고 흔들었다.

겁을 먹었던 것이 그리 쪽팔렸나.

'배고파하는 것 같네요.'

그래, 밥을 못 먹었을 테니 예민한 것은 이해한다.

하이에나처럼 생긴 마물은 빈 사료 포대를 물고 마구 흔들어 댔다.

밥 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확실히 철창 바깥에는 사료가 넘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굶주린 마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퍽.

날아오는 것을 피했다.

철창 안에서 무언가를 던진 마물은 어딘가 익숙한 생김새였다.

──────────────

[긴다리 원숭이lv18]

──────────────

놈이 또 무언가를 던졌다.

이번에도 피했지만.

철퍼억!

바닥에 있던 게 튀어서 내 몸에 묻었다.

똥이었다.

"컹컹컹!"

"왜애애앵!"

다른 마물들이 우습다는 듯 짖었다.

내 마음속의 자비심이 순식간에 휘발되어 버린 게 그 순간이었다.

츠츠츠츠-

이럴 수가.

억지로 쓰려고 해도 도무지 발동이 안 되던 흑린 스킬이 저절로 발동되었다.

비늘이 검어진다.

동시에 몸과 마음이 전투태세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 비늘이 검게 물들자, 마물들도 순간 기세가 죽었다.

"우끼잇!"

하지만 똥을 던진 긴다리 원숭이가 쫄지 말라는 듯 외치고, 다른 마물들도 다시 짖기 시작했다.

그래, 너부터다.

배가 고프다니, 나는 사료 포대를 질질 끌고 왔다.

*「마법:투명한 손lv2를 사용합니다.」

사료를 한 움큼 쥔다.

철창 앞에서 그 사료를 흔들자 긴다리 원숭이의 눈이 돌아갔다.

"우끼이이잇! 끼야악!"

팔을 철창 밖으로 내밀었음에도 손이 닿지 않자 놈은 개발작을 시작했다.

철창을 흔들고 악을 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놈의 팔목을 콱 물어 줬다.

"끽, 끼익."

펄쩍펄쩍 뛰는 긴다리 원숭이.

놈이 쓰러졌다.

*「긴다리 원숭이lv18를 처치했습니다.」

*「마성을 흡수합니다.」

레벨이 좀 있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경험치가 들어왔다.

음, 이제 좀 착한 원숭이가 되었군.

그러면 다음.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철창 내부의 공간은 꽤 넓었다.

잠을 잘 수 있는 보금자리도 있었고,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도 있었다.

나는 투명한 손으로 먹이를 들고 옆으로 움직였다.

조금 전부터 왜앵거리던 마물이었다.

──────────────

[포이즌 혼 고슴도치lv19]

[특성]

[교활함]······.

──────────────

놈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긴 다리 원숭이가 죽는 것을 봤는지 경거망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까이 오지 않으면 밥도 안 줄 거란다.

내가 가만히 있자, 놈도 가만히 있었다.

그때였다.

고슴도치가 머리를 꾸벅 숙이는 듯하더니.

파악!

놈의 이마 부분에 있던 가시가 내게 쏘아졌다.

마치 독침을 흩뿌리는 듯한 형태의 기습공격.

티티티팅!

하지만 내 비늘을 꿰뚫을 수 있는 가시는 하나도 없었다.

음, 교활한 친구구나.

그리고 재미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어.

*「빌리는 뿔lv4로 독침 발사lv5를 빌립니다.」

*「일시적으로 독침 발사lv2를 얻었습니다.」

입안에서 뭔가 돋아나는 것 같다.

퉷!

허겁지겁 도망치려던 고슴도치.

운 좋게도 내 입에서 튀어나온 독침이 놈의 엉덩이에 꽂혔다.

"왜애애앵!"

그것이 놈의 마지막 포효였다.

*「포이즌 혼 고슴도치lv19를 처치했습니다.」

*「마성을 흡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쉽고 맛있다.

드디어 완전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미쳐 날뛰던 마물들은 천천히 철창에서부터 물러났다.

하지만 배가 고픈 것은 어쩔 수 없는지 침을 뚝뚝 흘리며 사료만 본다.

나는 그 순간 체감했다.

이곳에 있는 마물들의 생사여탈권을 내가 쥐고 있다는 것을.

레벨도 올릴 수 있고, 쓸 만한 스킬들을 빼앗을······ 아니 빌릴 수도 있다.

그야말로 뷔페.

나는 조금 전 내게 컹컹 짖어 대던 하이에나에게 다가갔다.

──────────────

[어금니 하이에나lv31]

[특성]

[먹보], [단순함]

──────────────

이 녀석은 조금 강해 보이는구만.

어떻게 요리해 볼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하이에나가 발라당, 배를 까고 드러누웠다.

"왕! 왕!"

누가 봐도 복종의 자세라는 것이 확실했다.

'보는 눈은 있구나.'

나는 사료 한 알을 휙 던졌다.

그러자 하이에나는 공중으로 펄쩍 뛰어오르더니 사료를 받아먹었다.

꼬리가 마치 프로펠러처럼 흔들린다.

입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사료를 들이밀자 당장 대가리를 들이밀고 먹으려 든다.

"사아아악!"

먹지 말라고 막으니.

침을 뚝뚝 흘리면서도 눈치를 보며 제자리에 앉았다.

'이거 혹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시험해 봤다.

*「길들이기lv2를 사용합니다.」

*「어금니 하이에나lv31를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성공하다니.

레벨 31이잖아 너.

*「길들이기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길들이기lv2가 길들이기lv3이 되었습니다.」

이건 또 생각하지 못한 수확이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점박이여.

*「어금니 하이에나lv31의 이름을 '점박이'로 지었습니다.」

내가 지은 이름이 받아들여졌다.

*「어금니 하이에나 점박이lv31이 자신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길들이기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사람을, 아니 뱀을 너무 쉽게 따른다.

하이에나가 개과였나? 개같이 생기긴 했는데.

어쨌든 나는 앞으로의 행동지침을 결정했다.

이곳에 있는 마물들은 이제부터 '선별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전혀 고맙지 않아

048.

절벽 위에 새로 지은 집에는 실내 동물원을 조성해 보았다.

이곳 그림자 숲은 습하고 어두운 음지가 많아서 그런지 종 다양성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다만 만쉬 구릉 아래의 숲에는 영장류 마물이 많이 살며, 그 너머의 늪지대에는 벌레류 마물이 군집을 이룬 게 흥미롭다.

평원에는 그나마 하이에나 떼와 늑대, 뱀 등 다양한 마물이 서식 중이다.

그 뱀은 마음에 드는 곳이 없는지 계속 거처를 옮기고 있다.

길들이기의 방법론에 대하여 고민이 많다.

공포, 친밀함, 존경. 마물의 복종을 얻어내는 삼요소.

공포는 채찍질로, 존경은 서열을 확실시하고 먹이의 급여를 통해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친밀함은 도무지 충족할 수가 없다.

마물과 선민종족의 어쩔 수 없는 근본적 차이 때문이리라 추정한다.

신의 보살핌을 받는 요정, 드워프, 인간 등과 달리 마물은 신에게 버려진 것들.

그들의 추함이 내게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마물들은 그림자 요정인 내게 어쩔 수 없는 벽을 느끼는 것 같다.

내 사랑하는 고양이 칼리쉬가 나를 깊게 따르던 것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그렇기에 메두사 서펜트도 보금자리를 떠나 도망친 걸까.

그 남편과 싸워서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아,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번 달에는 하이에나 한 마리를 새로 길들인 것이 전부다.

그것도 먹이를 이용하거나 매질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복종하지 않는다.

배를 까고 드러눕기는커녕 틈만 나면 내 손을 물어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감히 손을 문 하이에나 두 마리를 우두머리가 보는 앞에서 베어 죽였다.

기강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언뜻 효과는 있어 보였다.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포악한 마물들은 이제 내가 쓰다듬는 것마저 거부한다.

슬픔이 가슴에 사무친다.

「데쉬난의 사육일지 中」

* * *

새로운 탈것을 얻었다.

지네 맘과 달리 새 탈것은 털이 북슬북슬했다.

빗자루처럼 뻣뻣한 털이지만 탑승감은 나쁘지 않다.

마치 사자만큼 큼직한 체급.

그리고 강인하고 굵은 목.

목 위에는 갈기가 푹신하게 깔려 있어서 내가 똬리를 틀고 쉬기에 충분했다.

'점박아!'

"캐행!"

애완견 점박이(개 아님, 어금니 하이에나lv31, 생각보다 강함)가 바로 새 탈것의 정체였다.

먹이를 줘서 그런가, 점박이는 생각보다 순했다.

이름을 지어주고 어느 정도 사이가 친해진 뒤로는 내 뜻을 곧장 알아듣는 것 같다.

나나루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초반에 만났던 그녀만큼 내 말을 잘 알아들었다.

이게 참 신기한 일이다.

지네 맘도 꼭 내 말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단 말이지.

펠레리안에게 물어봤지만 그 역시 확실한 대답은 해 주지 못했다.

나는 점박이의 목을 톡톡 세 번 두드렸다.

이러면 출발하라는 뜻이다.

점박이는 나를 태운 채 걷기 시작했다.

자고로 진정한 악당은 하이에나를 부리기 마련이다.

라이X킹의 그 무서운 삼촌 사자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점박이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실내 동물원에 입장했다.

내가 이곳에 머물기 시작한 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실내 동물원 내의 마물들에게 군림하기 시작했다.

내게 이빨을 드러내는 놈은 불꽃 세례를 맞았고.

똥을 던지는 녀석들은 팔다리를 부러뜨렸고.

복종하는 척하다가 덤벼드는 녀석들은 내 한 끼 식사가 되었다.

이곳에 잡혀 있는 마물들이 전부 만만한 녀석들은 아니었다.

진짜 센 놈들은 실외 동물원(사실 그냥 밖)에 있다고 사육일지에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데쉬난이 실내에 들여놓은 마물들이 허접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는 대수림의 심부였고 데쉬난은 강력한 그림자 요정이었으니.

내가 경험치를 올릴 수 있는 마물들도 있었으며 스킬을 빌릴 만한 녀석들도 있었다.

"끼잉, 끼이잉."

"우에에엥."

실내 동물원의 초입에 있는 마물들은 모두 내게 복종했다.

각자 굴복을 의미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벌러덩 드러누워 배를 까는 녀석들도 있었고, 고개를 숙여서 땅에 처박는 녀석들도 있었다.

몸을 웅크려서 자신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려는 놈 또한 있었다.

그들에게 사료를 뿌려 주었다.

마물들은 허겁지겁 사료를 먹고 내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그럴수록 점박이는 당당하게 목을 치켜들었다.

몇몇 마물들의 눈에 부러움이 서렸다.

-아랫것들을 부릴 줄 아는구나.

펠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해 주었다.

가장 빨리 복종하고 가장 충성스러웠던 점박이 하이에나에게는 특혜가 주어졌다.

다른 마물들과 달리 철창 바깥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점박이는 내게 더 충성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고, 다른 마물들은 점박이처럼 되기 위해서 더욱 내게 충성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깊은 곳으로 나아갈수록 복종의 자세를 취하는 마물들이 적어졌다.

그래. 여기 있는 것들은 평범한 짐승이 아니라 마물이다.

언제든지 기회가 있으면 내 목을 물어뜯고, 어쩌면 내 심장 속에 있을 마석을 취하려고 군침을 흘리는 녀석들.

그래도 이제 먼저 덤벼드는 녀석은 거의 없었다.

동물원이라는 이름답게, 철창은 구획별로 나뉘어 있었다.

여러 마물이 함께 서식했는데, 종종 독실도 있었다.

이 앞의 철창도 그랬다.

나무가 심어져 있고, 바위를 쌓아 동굴을 만들어 두었다.

그 지형지물에 거미줄이 뒤덮여 있었다.

동굴 안의 시커먼 어둠 속에서 붉은 눈알이 떠오른다.

──────────────

[크림슨 타란튤라lv32]

──────────────

저 이름을 보았을 때부터 악연을 짐작했다.

내가 크림슨 타란튤라 킹의 내단을 먹었으니, 그렇다고 그 하위종이 내게 어떤 억하심정을 가질 이유가 있겠느냐만.

"카각, 각, 가각."

나만 보면 여덟 개의 눈을 붉게 빛내면서 적의를 보이는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어제와 달리 먼저 덤벼들지 않았다. 어제 얻어맞은 게 아프긴 했나 보다.

나는 점박이의 등에서 내렸다.

점박이는 철창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물론 그런 걸 시킬 생각도 없었지만.

찰칵.

철창의 걸쇠를 풀었다.

나는 열린 문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내 앞에 사료를 흩뿌렸다.

'와서 먹어라.'

이것은 내가 이곳의 마물을 길들이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먹이를 줄 테니, 내게 복종하라는 선언이다.

얌전히 와서 먹이를 먹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철창 너머로 다른 마물들이 먹이를 얻고 복종하는 것을 본 마물들은 이 사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크림슨 타란튤라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놈은 나오지 않았다.

어제는 사료를 놔두고 나를 덮치려다가 두들겨 맞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얌전히 동굴 속에 숨어만 있다.

이제 복종할 마음이 든 걸까.

쐐액!

독침이 날아왔다.

고개를 기울여 피해 줬다.

첫날 만났던 고슴도치에게 저 스킬을 빌린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스킬을 더 쓰는 것은 포기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독침이 어디서 생성되는 것인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마법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몸의 칼슘을 급속도로 소진해서 발사할지도 모르겠다는 펠레리안의 추측이 있었다.

자칫하다간 골다공증에 걸릴지도 모른다.

대신, 다른 스킬을 하나 습득하는 중이다.

거미는 나오기를 포기하고 계속 독침을 발사해 댔다.

이러면 귀찮아진다.

나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몸에 거미줄이 엉겨붙은 것은.

위험하다.

몸을 버둥거리자, 오히려 거미줄이 더 엉겨들었다.

그 진동이 동굴에 숨어 있던 놈에게까지 전해졌다.

놈이 독침을 쏠까.

묶여서 바둥거리는 내게.

크림슨 타란튤라는 포악했다.

조금 더 화끈한 방법을 썼다.

투두두두두-

무서운 기세로 동굴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황소만 한 타란튤라.

새빨갛게 빛나는 독니.

저 독니가 품은 맹독은 내 신경독에 비해서도 그리 밀리지 않는다.

놈은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급원소마법:불lv4를 사용합니다.」

내 몸 주변에 불꽃을 형성했다.

철사처럼 질겼던 거미줄이 순식간에 불탔다.

불꽃은 저절로 번지며 주변에 있는 다른 거미줄까지 불태우기 시작했다.

콰앙!

크림슨 타란튤라는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을 덮쳤다.

흙먼지가 솟구치고 불티가 휘날린다.

겨우 이 정도의 불꽃으로 놈을 처치할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뛰어올라 놈의 몸에 엉겨붙었다.

재빠르게 얇은 허리에 몸을 휘감았다.

"퀘엑, 퀙!"

크림슨 타란튤라는 그 육중한 몸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민첩성을 가지고 있다.

즉, 나를 매달고 사방팔방 난동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타앙! 콰앙!

철창에 부딪히고 바위에 부딪힌다.

나를 떨구려는 시도다.

그리고 그 시도는 어느 정도의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성공할 것이다.

내 조르기로 이놈을 질식시켜 죽일 수는 없다.

심지어는 깨물기도 힘들다.

털과 단단한 갑각, 그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탓에 머리가 어지럽다.

나는 몸에 최대한 힘을 주었다.

어차피, 새로 얻은 스킬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독비늘lv2를 사용합니다.」

비늘에서 독을 분비하는 단순한 스킬이다.

이전이라면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뱀의 비늘이라고 해 봤자 무기로 쓸 수는 없을 테니까.

그저 만지기 찝찝한 뱀이나 되었겠지.

하지만 크리스탈 더블혼 파이톤으로 진화한 지금.

그렇기에 수정처럼 빛나며 날카로운 비늘을 가졌으며, 그것을 곤두세울 수도 있게 된 지금은 달랐다.

카카가각!

곤두선 비늘이 기어코 놈의 몸을 파고들었다.

독샘에서 분비된 신경독이 크림슨 타란튤라의 몸속에 주입되었음을 의미한다.

"퀙."

점점 느려지던 놈은 기어코 목숨이 끊어졌다.

길쭉한 다리가 확 오그라든다.

*「크림슨 타란튤라lv32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후우.

간만의 레벨업이다.

이곳에서 내가 생각한 것만큼의 폭렙은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 수준이 꽤 많이 올라온 것 같다.

점박이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들고 하울링을 했다.

"아우우우우!"

지가 늑대인 줄 아나. 너 개과도 아니었잖아.

하지만 승리를 축하하는 팡파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꼬리로 쓰다듬어 주었다.

점박이는 혀를 헥헥 내밀고 꼬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어디 한번 상태창을 점검해 볼까.

──────────────

[크리스탈 더블혼 파이톤lv10]

[이명] 우르오로스, 심장 파먹는 뱀

[특성]

[불굴], [정진], [뿔], [무늬], [비늘]

──────────────

레벨이 10이 되었다.

아마 데쉬난을 잡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레벨을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진화를 하려면 레벨을 몇까지 올려야 할까.

저번에는 20이었으니 이번에는 30쯤까지 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확실히 실내 동물원에서는 경험치 수급이 어렵다.

밖에 나가서 더 강한 마물을 상대해야 할지도.

──────────────

[스킬]

[빌리는 뿔lv4]: 독비늘lv2 , [뛰어넘는 뿔lv2]

[천뢰령lv0], [초급원소마법:불lv4], [초급원소마법:흙lv5],[초급원소마법:물lv2], [초급원소마법:바람lv2], [마법: 투명한 손lv2 ], [맹독: 신경독lv5], [포식lv7], [식심의 도약lv1], [은밀lv7]

[독 내성lv7], [출혈 내성lv3], [고통 내성lv8], [열 내성lv10], [냉기 내성lv1], [석화내성lv1], [전격 내성lv4] [생존본능lv6] , [마력 감지lv3], [가속lv5], [수영lv1],[숨 참기lv5], [참격lv2], [흑린lv1], [길들이기lv5], [어설픈 검술lv1]

[상태]

[우쭐함]

──────────────

스킬창이 많이 복잡해졌다.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업적란이었다.

──────────────

[경비대장 살해], [지네의 친구], [고블린의 맹우], [마물의 우두머리]

──────────────

마물의 우두머리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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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의 우두머리]

다섯 마리 이상의 마물을 길들였습니다.

마물들이 당신에게 더 잘 복종할 것입니다.

──────────────

하하하.

실내 동물원의 일들이 헛짓거리가 아니었다는 게 증명되었다.

-네가 말했었지, 사무룡이 되고 싶다고. 그게 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펠레리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무령인데요.'

-그러니까 사무령이 뭔데.

내가 중학생 때 읽었던 한 무협지를 자세히 설명해 줄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영웅들도, 군대도, 마물조차 어찌할 수 없는 절대 무적.

혹은 왕국이 전력을 기울여도 건드릴 수 없는 무형(無形)의 독사.

한마디로 누구한테 쫓기거나 위협받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게 천하의 모든 악당이 바라는 경지라는 것은 알고 있지? 이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펠레리안은 자신 또한 그런 경지를 꿈꿨다고 한다.

그저 종 전체의 진화를 바라고 연구했을 뿐인데 세상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았다나.

-그런 경지에 이르는 방법은 두 가지지.

'뭔데요.'

-하나는 압도적인 무력을 손에 넣는 것이다. 하늘조차 뒤집는 최강의 마도사가 되든지. 검으로 바다를 가르는 신검이 되든지.

혹은 산을 휘감고 해일을 일으키는 거대한 뱀이 되거나.

-아니면 최대의 무리를 이루는 것이지. 그것이 왕국이 되었든 제국이 되었든.

'그러면 노인장은 첫 번째 방법을 시도했나 보군요.'

그리고 아마도 실패했을 것이다.

펠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답은 둘 다 추구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이제 와서 든다.

무리를 이루는 것.

내가 실내 동물원의 마물을 길들인 것은 사실 반쯤 장난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두머리라는 업적이 분명 내 상태창에 기록되었다.

'뭐, 일단 더 들어갑시다.'

크림슨 타란튤라를 잡았으니 실내 동물원은 거의 정복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 가장 안쪽의 철창만 남았다.

나는 점박이를 놔두고 그 안쪽으로 다가갔다.

이곳은 조명이 꺼져 있었다.

거기 있지, 나와 봐라!

"사악!"

그리 외쳤다.

저 안에는 분명 한 마물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놈은 내게 적대할까, 아니면 굴복할까.

어느 쪽도 마음에 든다.

안 나오면 직접 들어가 주지.

내가 철창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저벅.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걸어 나왔다.

덩치는 제법 크다.

크림슨 타란튤라와 비슷한 정도일까.

저벅, 저벅.

하지만 훨씬 육중해 보인다.

나는 비늘을 곤두세우면서 전투를 준비했다.

어쩐지, 강한 마물 같다.

그리고 강한 마물은 쉽게 굴복하지 않는 법이다.

나타난 것은 고릴라였다.

그것도, 양팔에 갑각이 돋아난 멋진 고릴라.

사료를 내밀고 놈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려는 순간.

"배앰······ 뱀."

어우, 깜짝 놀라서 사료를 다 쏟아 버렸다.

충격적인 사실, 놈은 다른 마물과 달리 말을 했다.

큼지막한 두 눈망울은 눈물에 젖어서 빛나고 있었다.

"나를······ 집으로······ 보내 줘."

어, 이 고릴라.

데쉬난의 사육일지에 적혀 있던 것 같다.

여기가 네 집이야 고릴라야.

"그러면, 내 가족······ 한다. 보답."

고릴라가 무슨 보답을 해 주는데.

바나나라도 줄 건가.

"너 손 있다······ 손 있으면 동족."

투명한 손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고릴라는 파멸적인 박애주의자였다.

"사랑을, 준다. 받아준다······ 우리 가족으로."

충격적인 입양 제안.

필요 없다.

흰 것은 아름답다

049.

내가 부모 잃은 천애고아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마 고릴라의 입양 제안을 받아들일 바보는 아니다.

그렇게 애정이 고프지도 않다.

물론, 가끔씩 보지도 못한 아버지를 만나 보고 싶기는 하다.

데쉬난의 일지에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나니 더욱 그랬다.

-아주 특별한 종의 서펜트라니. 기회가 된다면 꼭 나도 보고 싶군. 또 메두사 서펜트와 달리 온순하다고 하니 괜찮지 않겠냐.

펠레리안도 그리 말할 정도였다.

근데 내가 만약 고릴라의 가족이 된다면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지?

'너 암컷이냐 수컷이냐.'

나는 그것을 물어봤다.

당연히, 말은 할 수 없으니 고릴라에게 그것을 물어보는 방식은 꽤나 고역이었다.

온갖 기괴한 모양과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고 나서야 고릴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고릴라는 암컷이었다. 그러면 누나가 되는 건가.

풍채가 우람해서 수컷 고릴라일 줄 알았는데 충격이었다.

"네 엄마가······ 되어 주면······ 좋은 건, 가······. 그럼······. 풀어 줄 거야?"

아니야 인마!

하여튼, 나는 한참의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 말할 수 있는 고릴라를 철창에서 꺼내 준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고릴라는 꽤 말라 있었다.

그가 있던 철창에는 여러 마물의 사체가 말라붙어 있었다.

함께 갇혀 있던 놈이었는데 잡아먹은 흔적이 없다.

"나는 열매, 먹어······ 과일 좋아해······. 벌레도······."

들어 보니 고릴라의 식성은 생각보다 온화했다.

그런 것만 먹으면서 어떻게 근육이 그리 빵빵할까.

나는 고릴라의 목덜미를 살짝 죄어 줬다.

애정표현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말한 게 진실이 아니라면 죽여 버리겠다는 차가운 협박.

"나 약속 지켜······. 크고 멋진 뱀······ 본 적 있어. 현자는 알아, 어디 있는지······. 현자는, 다 알아."

고릴라를 꺼내 준 이유 1번.

고릴라는 우리 아빠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아빠의 위치를 자신의 동족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축제······ 열매를 따는 법도 알려 줄게······. 가는 길에 있으면······."

그리고 이곳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대해서 알려 주겠다는 말이었다.

-나도 종종 대수림에서 '열매 주간'이 진행된다는 것은 안다. 세계수의 가지에서는 꽃이 피고, 땅에 드러난 뿌리에서는 열매가 맺히는 기간이지. 그리고 그때마다 마물들이 강해지고 네임드 마물이 탄생한다는 것도 알아.

펠무위키조차 모르는 것이 있었다.

-다만 뿌리에 몰려든 마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열매 주간이 시작된 곳은 출입이 제한되기 때문이지.

마물들의 행동방식이나 자세한 생태에 대해서는 데쉬난의 지식이 오히려 상세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데쉬난의 방을 뒤져봐도 축제에 대해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뿐이었다.

"열매······를 위해, 마물들은······ 연합해. 우리도······ 벌레들도."

같은 종이 아닌 이상 마물들이 함께 무리를 이루는 것은 드문 일이다.

심지어 같은 종의 마물마저 서로 싸워 죽이는 게 다반사.

그것이 '강해져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품고 태어난 마물이란 족속의 본능이다.

그런데 이곳 그림자 숲의 마물들은 무리를 이뤘다.

데쉬난의 기록에 따르자면 현재 있는 무리는 두 개다.

손이 달려 있는, 아마도 영장류 마물들.

그리고 벌레형 마물들의 군단.

어쩌면 헤어진 대왕지네 님이 벌레형 마물 군단에 들어간 거 아닐까.

'왜 마물들이 무리를 이루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고릴라의 이마를 두 번 두드렸다.

이것은 아는 것을 전부 털어놓으라는 의미였다.

고릴라는 내 생각보다도 지능이 높았다.

펠레리안의 말에 의하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상위종의 마물 중 몇뿐이라고 했다.

이 고릴라가 그 정도로 상위종의 마물은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어눌하게나마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지능 높은 영장류이기 때문이겠지.

말을 할 수 있는 비밀이 스킬이었다면 빌리는 뿔로 빌릴 수 있었을 텐데.

고릴라가 하는 언어는 놀랍게도 인간의 말과 비슷했다.

억양도, 어휘도 꽤 많이 달랐지만 옆에 있는 펠레리안 또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하다.

펠레리안은 고릴라의 언어, 즉 인간의 언어가 '공용어'라고 설명했다.

아주 먼 고대부터 이어져 온 언어라나. 저절로 언어를 깨우친 마물들도, 지금은 볼 수 없는 용들조차 그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열매를 먹으면 강해진다······. 하지만 열매를 먹으면 멈춰. 지켜 줘야 한다······ 누군가가."

멈춘다라.

몸이 굳는다는 말일까.

하긴 그렇다면 날 지켜 줄 믿을 만한 동료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따라 오는 점박이를 보았다.

점박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꼬리를 휙휙 흔들었다.

저 점박이만 믿고 '열매'라는 것을 먹기에는 위험할 것 같긴 하다.

그렇다고 내가 고릴라의 가족이 될 생각인가.

그렇지는 않다. 차라리 대왕지네맘이 더 믿음직할 것이다.

그래도 고릴라의 무리가 어떤 놈들인지는 한번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게 될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그러면 아버지는 어떤 무리에도 안 속해 있는 걸까.

"원래는······ 한 무리가 더 있었다······ 이제는 없다. 우두머리가······ 죽어서."

그런 내막이.

각기 무리에는 우두머리가 있군.

"우리 대장은······ 은색 원숭이······ 아주 세다······."

영장류의 대장이라면 미후왕 손오공이라도 되는 걸까.

위험한 놈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릴라와 함께 놈들이 산다는 숲으로 가고 있었다.

원숭이 숲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구릉지대를 지나쳐야 한다.

그곳에는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저게 나무여 뭐여.'

-뿌리군.

마치 바오밥나무처럼 매끈하고 거대한 것이 눈에 띈다.

구릉 한가운데에 거대한 기둥 같은 것이 솟아 있었다.

-세계수의 노출된 뿌리다.

무슨 뿌리가 저리 크냐.

여러 갈래로 뻗은 잔뿌리가 꼭 나뭇가지 같았다. 하지만 나뭇잎이 없는 게 정말 뿌리인가 보다.

구릉 너머의 숲으로 가는 길에 그 뿌리들이 여럿 보였다.

저기서 열매가 맺힌다는 말이지.

아직 본격적인 열매 주간이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설익은 열매가 몇 개 맺혀 떨어졌다고 한다.

"저기, 저기다······ 우리의 숲."

저 앞에 어두운 숲이 보였다.

영장류들이 지배한 숲.

'점박아!'

나는 고릴라를 멈춰 세우고 점박이를 이곳에 대기시켰다.

돌아갈 때는 점박이를 타고 갈 것이다.

점박이의 스프린트 능력은 대단하다, 영장류들이 감히 쫓아오기 힘들 정도로.

여기까지 돌아오는 게 문제였는데.

그것을 대비해 나는 이미 동물원에서 한 마물에게 탈출에 쓸 만한 스킬을 빌려 둔 상태다.

*「마법: 투명한 손lv3을 사용합니다.」

검을 뽑아 들었다.

이것이 '입양 제안'을 받은 비결이었다.

투명하긴 해도 나는 분명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허튼짓하면 죽인다. 너도, 네 동족들도.'

나는 비늘을 곤두세우며 챠르륵 소리를 냈다.

마물들은 이 소리를 제법 위협적으로 느끼는 듯했다.

내가 칼을 들이대자 고릴라는 내 말을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숲으로 진입했다.

과연, 여러 마리의 원숭이들이 나무를 타고 다니며 우리를 관찰했다.

마물인지 그냥 짐승인지 헷갈릴 정도로 작고 약해 보인다.

파수병이라도 되는 것일까. 우끼끼거리며 화급히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반겨 줄, 것이다······."

고릴라의 목소리에서 기쁨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목을 두른 몸에 힘을 살짝 주었다.

어디 덤비기만 해 봐.

그때, 저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고릴라와 달리 두 발로 걷는 원숭이였다.

정확히는······.

'침팬지다!'

내가 아는 그 침팬지가 분명했다.

다만, 확실히 평범한 동물은 아니다.

저 침팬지는 손톱이 길게 자라 있었다. 할퀴기에 특화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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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크로 침팬지lv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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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 우!"

침팬지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고릴라를 맞았다.

나를 경계하는지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있다.

"뱀이······ 나를 구해줬어······ 고마워. 만나고 싶다······ 현자."

침팬지는 고릴라의 귀환에 별로 기뻐하지 않는 듯했다.

침을 바닥에 퉤 뱉은 것이다.

저 싸가지 없는 녀석.

"우우!"

침팬지는 그리 외치고 따라오라는 듯 먼저 갔다.

그가 인도한 곳에는 이미 온갖 영장류들이 모여 있었다.

보노보, 고릴라, 안경원숭이 같은 녀석, 그리고 뱃살이 두툼한 오랑우탄.

이런 광경을 어디서 본 적 있다.

완전 혹성탈출 아닌가.

아니, 꼭 영장류만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발로 서서 다니는 곰 같은 것도 있었고 아울베어도 보였다.

정말 손이 있는 마물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

'현자'가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풍채가 좋은 늙은 오랑우탄이 마치 주술사가 쓸 것 같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고릴라 여사······."

고릴라 여사라니.

내가 타고 있는 고릴라는 수줍게 머리를 숙였다.

"우선. 살아 돌아온 것을, 환영, 하오."

"고마······ 워."

오랑우탄은 고릴라보다 지능이 높은 것 같다.

말을 확실히 더 잘했다.

오랑우탄이 갑자기 지팡이로 나를 가리켰다.

"뱀은 사악해······ 나쁘오. 왜, 같이 있지?"

"이 뱀, 손이 있어. 좋은 뱀······ 나를 ······구해줬어."

나는 칼을 흔들며 손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몇몇 원숭이들이 겁먹고 물러나는 것을 보면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랑우탄은 알아봤다.

"투명한 손······. 마법!"

"맞아······ 좋은 뱀."

고릴라는 어눌한 목소리로 열심히 상황을 설명했다.

나를 좋게 말해 준다. 내가 자신을 구해줬으며 아주 강하다는 말까지.

"우리 새 가족······ 으로 해."

영입하자는 제안.

정작 나는 아직 받아들일 생각이 없지만.

"흠······."

오랑우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빈정대듯 말한다.

"고릴라 여사는, 요정한테 잡혔, 어. 약해."

"요정······은 세다. 죽었어 이제. 이 뱀이 죽였어······."

"거짓말, 그리고 약한 놈. 가족, 아니다."

가족이라면서요. 사랑을 준다면서요.

아무래도 콩가루 집안임이 분명했다.

고릴라는 격노해서 주먹으로 땅을 내려쳤다.

콰아앙!

꽤 오래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흙이 크게 치솟았다.

"나 강-해! 크허엉!"

고릴라가 흥분해서 포효하자, 처음에 우리를 안내했던 침팬지가 으르렁댄다.

싸우기라도 할 기세다.

잘한다, 고릴라.

"원한다면······ 증명- 해 준다-!"

고릴라가 침팬지와 오랑우탄을 번갈아 노려봤다.

상황이 험악해진다.

오랑우탄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법 손. 진짜 손도, 아니다······!"

맞는 말이다.

역시 현자라 그런가 똑똑하네.

"받아줄, 수 없어. 그리고······ 약한 고릴라도!"

"꾸우어어!"

"정 다시 돌아오고 싶으면, 그 뱀을 죽여라······!"

긴다리 원숭이와의 악연에서부터 느꼈지만, 영장류는 나와 맞지 않는걸까.

오랑우탄은 고릴라에게 나를 죽여야 무리로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그때였다.

-지금 먼저 공격해라.

역천의 마도사가 별빛으로 속삭였다.

-내 제······ 아니, 내 동료······ 아니, 동행인이 원숭이들에게 겁먹지는 않았겠지.

펠레리안은 내 호칭을 몇 번이나 정정하더니 결국 '동행인'이라는 어정쩡한 단어를 썼다.

'당연하죠.'

사악한 마도사의 동행인은 이미 나쁜 뱀이 될 준비를 마친 뒤다.

이미 내 칼이 징-징- 울고 있다.

주변을 살펴봤다.

상태창이 안 보일 만큼 강한 놈은 없었다.

은발의 원숭이라는 놈들의 우두머리도 안 보였다.

게다가 실내 동물원에서 한 마물에게 특별한 스킬까지 빌려왔으니.

해볼 만하다.

우선 고릴라의 목에 구멍을 뚫어놓고 바로 오랑우탄부터 해치우면······.

"그럴 수는 없어."

그때, 고릴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뱀은······ 나를 구해줬어. 나는 좋은 고릴라······. 배신은 안, 해."

아니, 세상에 착한 마물은 지네와 고블린 뿐 아니었던가.

고릴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오랑우탄이 비웃었다.

그는 무림공적을 선포하듯 우렁차게 외쳤다.

"그러면, 죽어어-!"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우리를 노려보던 침팬지였다.

펄쩍 뛰어올라서 칼날이나 다름없는 손톱을 휘두른다.

고릴라까지 노린 잔인한 살수(殺手).

쐐애액!

저거 무협지에서 봐서 안다.

금지된 무공인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 아니신가.

나는 그저 기초적인 삼재검법으로 대응했다.

카가각!

요정제 칼날은 침팬지의 손톱을 잘라 내고 말았다. 미리 손질해 둔 보람이 있군.

황당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침팬지.

나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식심의 도약lv1을 사용합니다.」

원래도 도약-가속-물어뜯기의 연계기는 쾌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치 빛살 같은 수준이다.

"꾸어어억!"

침팬지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놈의 가슴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새빨간 심장을 물고 있는 나를 본 마물들이 경악했다.

"쭉-여-!"

오랑우탄이 다시 한번 외친다.

입안에 있는 것을 꿀꺽 삼키고 싸울 준비를 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시작이 좋군.

한바탕 날뛰어 보려던 순간이었다.

우선 빌려온 그 스킬을 쓰고······.

"우우어, 현-자!"

큼지막한 보노보 한 마리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외쳤다.

"벌레야- 벌레들이 쳐들어-왔······, 억!"

마지막은 비명이었다.

놈의 목에는 주먹만 한 거미 한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요란한 진동음이 들렸다.

왜애애애앵-

귓가에서 장수말벌이 날아다니면 이런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날 것이다.

실제로 벌 몇 마리가 나타났다.

어지간한 멧돼지만큼 큰 벌 한 마리가 도망치려던 안경원숭이 하나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 강인한 턱으로 원숭이를 잡아 갉아먹는다.

와작와작와작.

잘린 원숭이의 머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침략- 침략이다!"

오랑우탄이 분노해서 포효했다.

이건 내가 예상했던 그림이 아닌데.

"께-께께께께!"

어디선가 익숙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원숭이들을 깔아뭉개며 등장한 것은 거대한 지네.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다.

"께에?"

지네 맘과 이렇게 빨리 재회하게 될 줄이야.

"께께."

"께."

"께!!"

겨우 며칠 지났다고, 제법 성장한 꾸벅이와 왕눈이, 그리고 대갈이도 제 어미의 등에 올라타 있었다.

반가워 얘들아.

나는 내게 덤벼들었던 긴다리 원숭이 한 마리의 숨통을 끊고 꼬리를 흔들어 주었다.

나를 보고 흥분한 꾸벅이가 뛰어내려서 내게 안겼다.

강아지처럼 꼬리가 있었다면 프로펠러처럼 맹렬히 흔들었으리라.

그런 꾸벅이를 마구 쓰다듬어줬다.

'지금은 위험하니까 다시 엄마한테로 돌아가아허억!'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지네 삼남매는 모두 덩치가 커졌다.

유생이라 그런지, 그사이에 진화한 것이다.

대왕 지네에 올라타있는 둘째와 셋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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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왕지네 왕눈이lv1]

[리틀 왕지네 대갈이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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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진화했다.

지네 본연의 적갈색을 띄는 멋진 녀석들로.

하지만 내게 안긴 아이.

유대가 깊어져 내 영향을 받기 시작한 맏이.

꾸벅이만은 달랐다.

새하얀, 하얀색의 지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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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화이트 왕지네 꾸벅이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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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의 계보.

W의 의지, 여기 이어지다.

별을 품은 뱀

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