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허세 부리기는!
이 노인네 왜 이래.
내가 고블린 어를 똑바로 전달했을 뿐인데 역정을 낸다.
펠레리안과 나의 관계는 묘했다.
그는 한 번 내 뒤통수를 쳤고, 나는 재차 그에게 맹세를 받아 내며 관계를 재정립했다.
내가 그에게 마법을 배우며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아니다.
평소에는 반말을 하긴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에서 나고 자란 나다.
그한테 마법을 배우거나, 종종 그의 주름살이 눈에 띌 때면 존댓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물론 존중이라는 것은 주고받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띠껍게 나올 때면 내 입에서도 고운 말이 나오지 않는다.
-고블린 말을 알아듣는 척하는 것 아니냐! 뻔하지.
'뭔 개소리래.'
놀라운 사실은, 내가 존댓말을 하든 이렇게 반말을 하든 펠레리안이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위로 똘똘 뭉친 노인네인 줄 알았는데 왜일까.
처음에 미물이라고 부르던 것을 보면 나를 존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며칠간 대화를 하면서 나는 그 이유를 알아냈다.
참으로 놀라운 내막이었다.
그는 의외로 마물을 얕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인간과 드워프 등보다 마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펠레리안이 각 종족을 존중하는 정도를 부등호로 표기해 보면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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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마물>>>>>똥!ㅋㅋ>인간을 비롯한 잡다한 '사람'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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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내가 마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펠레리안은 더욱 성깔 더럽게 굴었으리라.
그것을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이란.
'내가 엘프 말 알아듣는 건 안 이상하고, 고블린 말 알아듣는 건 이상하나.'
-엘프 말이야 그럴 수 있지.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축복 같은 것도 있으니까. 하지만 고블린어는 그게 안 돼.
나는 명백히 고블린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펠레리안이 저리 확고히 말하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고블린은 통일된 국가가 없고 대규모 문명을 이루지 못한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살면서 언어가 제각기지. 마치 방언처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노인장도 대충 이해하긴 했잖아.'
-나는 오래된 연구를 통해서 그 통일된 어근을 습득했기 때문이지. 이 대수림이 아닌 다른 곳의 고블린어라면 나라도 아예 못 알아들을 거다.
그 와중에도 펠리컨 부리 속에서 허우적대는 고블린이 소리를 질러 댔다.
"살려 줘어!"
그래, 내 입장에서는 펠레리안이 뭐라고 하든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고블린어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어쩌라고요, 알아듣겠는데.'
-······.
펠레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 뭐 들리는데 어쩌겠어.
-근데 네 말대로라면 저 고블린 그냥 죽게 놔둬도 되겠나?
'아.'
고블린은 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그 말은 강이 어디 있는지 안다는 거겠지.
펠리컨은 이미 고블린을 완전히 삼켜 버렸다.
'악!'
벌써 죽었으려나.
나는 수풀에서 튀어나갔다.
내 등장에 펠리컨은 깜짝 놀라서 홰를 쳤다.
날아서 도망치려는 듯 퍼득였는데, 몸이 무거워져서인지 철푸덕 엎어진다.
역시 조류들이란.
포악하고 욕심이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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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펠리컨lv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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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약한 마물에 당한 것을 보면 고블린도 별거 없는 것 같다.
나는 펠리컨의 목을 물었다.
별다른 독 내성도 없는 녀석이어서 잠깐도 버티지 못했다.
꽥 죽어 버렸는데 경험치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고블린은 다행히 살아있었다.
펠리컨의 부리를 벌리고 탁한 초록빛의 손이 확 튀어나왔다.
고블린은 잔뜩 지쳤는지 녹초가 되어서 기어 나왔다.
"허억!"
그러곤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쩐지, 체구가 작다.
고블린이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뭔가 어려 보인다는 말이다.
고블린 소년쯤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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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고블린lv11]
[특성]
[고블린], [호기심]
[스킬]
[은밀lv3], [돌팔매lv4], [달리기lv6], [길찾기lv2]
[상태]
[기진맥진], [부상],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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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다!
와, 진짜 허접하다.
싸울 때 쓸 만한 것은 돌팔매밖에 안 보인다.
달리기는 가속의 하위 스킬인가? 내가 한때 가지고 있었던 빠르게 기기랑 비슷해 보인다.
레벨이 11쯤이나 되는데 이럴 수도 있구나.
길 찾기 하나는 부럽다.
빌리는 뿔로 배우면 좋겠지만 이미 천뢰령이라는 스킬을 빌리고 있다.
그것을 습득할 때까지 빌리는 뿔은 봉인해 둬야겠지.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겁쟁이 고블린 같으니라고.
소년 고블린은 내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
뭐, 고블린보다는 팰리컨이 훨씬 더 맛있어 보이니 잡아먹을 생각은 없다.
경험치도 안 줄 것 같고.
됐고, 강이 어디 있는지 안내해라!
"잡아먹지만 말아 주세요!"
하지만 내게는 말을 전달할 수단이 없었다.
나는 펠레리안에게 눈치를 줬다.
'노인장이 말해 봐요.'
-······할 수 없다.
'예? 고블린어 할 줄 안다면서요.'
-언어 문제가 아니라, 이놈한테는 내가 보이지도, 내 말이 들리지도 않을 거라는 말이다.
'나한테는 보이는데?'
-마력이 있었다면 목소리를 전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너한테밖에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터.
충격.
정말 생각보다도 쓸모없군.
내 생각을 눈치챈 걸까. 펠레리안의 얼굴에 은은한 패배감이 서렸다.
나는 안심시키려는 듯 고블린의 어깨를 꼬리로 툭툭 두들겨 줬다.
그러자 소년 고블린은 경기를 일으키며 덜덜 떨었다.
"히, 히이익!"
안 잡아먹을 테니까 가라.
꼬리를 휙휙 저었다. 가라는 뜻이다.
"가도, 가도 되는 건가요?"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구만.
소년은 슬금슬금 물러났다.
나는 가까이 가지 않고 꼬리를 계속 휘휘 저었다.
그리고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슬쩍 머리를 숙여 보았다.
지네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고블린은 어리둥절하더니 내 자세를 따라 했다.
그래, 인사를 나누는 것부터 교류가 시작되는 거란다.
고블린 소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수풀 너머로 나아가려다가 갑자기 나를 돌아봤다.
"······울루울룰루?"
그러고는 휙 사라졌다.
뭔데.
울루울룰루는 또 뭔데.
언어에 통달한 내가 들어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였다.
'쟤 나한테 욕한 거예요?'
-분명 그렇겠지.
음, 펠레리안은 삐진 것 같았다.
내가 그저 자비심 때문에 고블린을 놔준 것은 아니었다.
-머리는 돌아가는군. 이제 저 고블린을 따라가면 되겠어.
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 고블린을 추적한다면 강에 도착할 수 있겠지.
'한 입만 먹고 가야겠네.'
펠리컨 고기는 무슨 맛일까.
나는 서둘러 식사를 했다.
소년 고블린은 작았지만 발이 빨랐다.
그를 몰래 쫓아가는 것은 꽤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 * *
고블린은 마물이다.
마물은 진화를 한다.
성체가 되지 못한 유체 고블린이 어느 정도 자라고, 레벨을 충족시키면 성체 고블린으로 자란다.
그리고 그 고블린이 자라서 자신의 적성을 찾는다면 전사가 되고 주술사가 되며 사냥꾼과 채집꾼이 된다.
그중 소수의 고블린은 또 한 번의 진화를 한다.
그것이 홉고블린이다.
고블린의 상위종이라고 할 수 있다.
키가 커지며, 피부색이 붉어지고 근력이 강해진다.
뛰어난 전투력을 가지며 고블린 무리를 이끌게 된다.
나나루크라는 홉고블린이 있다.
그녀는 옛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룬가부족 최고의 전사이다.
머리를 질끈 묶고 숲속을 뛰어다닐 때는 요정 부럽지 않게 날렵하다.
나나루크의 고양이 같은 황금빛 눈동자는 큼지막한 고무나무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그 고무나무 기둥에 붙어 있는 도마뱀 가죽.
뾰족한 화살촉으로 나무에 박아 고정해 둔 것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예쁘게 뾰족한 덧니가 드러난다.
잘 펴 말린 도마뱀 가죽은 종이의 역할을 한다.
과연 줄글이 적혀 있었다.
이 가죽은 편지였던 것이다.
그것도 나나루크의 정인이 남겨 두고 간 편지.
"찬달······."
조심스럽게 연인의 이름을 중얼거린 나나루크가 편지를 읽었다.
하지만 연서(戀書)를 읽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나루크의 표정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 ······나나, 미안해. 하지만 우리 아버지를 막을 수는 없었어.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가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고! 부족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도망쳐 나왔으면 좋겠어. 아버지께는 잘 말해 볼게. 너와 네 동생들만은 구할 수 있을 거야. 네 아버지는 족장이라서 어쩔 수 없겠지만.
사랑해 나나.
답장은 이 아래에 적어 줘. 장소와 날짜를 알려 주면 전사들을 데리고 너와 동생들을 마중 나갈게.
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찬달이.'
답장을 적을 공간을 남겨 둬야 하기 때문에 편지는 짧았다.
그 빈 공간이 공허했다.
나나루크는 답장을 적는 대신.
파지직.
도마뱀 가죽을 찢어 버렸다.
조각조각 내서 흩뿌린다.
그녀의 마음 역시 찢어지는 듯했다.
찬달의 아버지 크록은 이웃 부족의 족장이었다.
예전에는 사이가 좋았다. 찬달과의 혼담도 진작부터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홉고블린이었던 크록이 또 한 번의 진화에 성공한 뒤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다.
크록 부족은 주변의 다른 고블린 부족을 침략하고 흡수하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되고 큰 부족이었던 룬가보다도 강해진 지금.
그들은 룬가 부족에게도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찬달이 자신의 아비를 설득해 주기를 바랐는데······.
도망쳐 나오라고?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나나루크는 룬가의 전사였다.
비통한 마음에 안색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누나, 누나아!"
그녀의 동생이 나타났다.
나나루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어.
"왜 이렇게 늦었어! 걱정했잖아!"
"나, 울루울룰루가 나를 구해줬어!"
아이들의 설명이란 중요한 것들을 휙휙 건너뛰곤 하는 법이다.
"울루울룰루?"
"응, 펠리컨한테 잡아먹힐 뻔했는데, 울루울룰루가 나를 살려 줬어!"
울루울룰루란 전설의 뱀이다.
자초지종을 대강 들은 그녀는 동생의 등짝을 퍽 쳤다.
"악!"
"울루울룰루는 무슨, 너 죽을 뻔한 거야!"
"아닌데······ 진짜인데."
"애초에 흰 뱀이랑 울루울룰루는 색부터 다르잖아."
"그렇긴 하지만, 분명 나를 구해줘서······. 말도 통했고."
"옆에 펠리컨이 있으니까 살려 보내 준 거겠지."
소년 고블린이 반박하려고 했지만 나나루크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늦었다. 이러다 배 출발하겠어."
"아, 맞다."
"업혀!"
나나루크는 동생을 휙 업어 들었다.
그리고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 * *
바람이 시원하다.
소년 고블린을 따라가다가 놓쳤다는 점.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펠레리안도 나도 서로 그것을 탓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고블린의 자취를 놓쳤을 때부터 냄새가 났다.
물비린내였다.
그 냄새를 쫓아 달렸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펠레리안이 그리 여러 번 강조한 메데이라 강을 만날 수 있었다.
"샤아!"
캬아-, 라는 뜻이었다.
물비린내는 고약했지만 강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래, 솔직히 한강에 비할 만큼 크지는 않았고 청계천 하류랑 비슷한 크기의 강이다.
물은 검은색과 갈색의 중간이었다.
더러워서라기보다는 흙탕물이 섞인 것 같았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해요? 거의 다 왔나?'
-흠.
펠레리안은 메데이라 강만 찾으면 자신의 던전에 다 온 거라고 말했다.
여태까지 그래서 죽어라 강을 찾은 것이었다.
그러면 던전은 어디 있나.
-흠.
펠레리안은 먼 산만 보고 있었다.
저 강 너머에 눈에 띄는 바위산이 있다.
태양 빛을 받아서 주황빛으로 번쩍이는 불타는 고구마 같은 바위산이.
-저 뒤쪽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요?'
-강만 건너가면 되겠군.
'그럼 되겠네.'
그래, 강을 건너자.
뭐 배를 타거나 날아갈 수는 없으니, 이대로 강을 따라가다 보면 다리가 나오겠지.
······순간 대한민국 시민의 상식으로 생각해 버렸다.
이 깊고 깊은 열대우림의 강에 다리가 설치되어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 건너요?'
-······.
'강에 도착하면 바로 찾을 수 있다면서요.
-내가 이쪽인 줄 알았나, 저쪽인 줄 알았지······.
펠레리안이 헛기침을 했다.
-수영해서 건너가면 되지 않나.
'못하는데요······.
수영은 내가 비행보다도 싫어하는 것이다.
열대우림이라고 해도 강물은 차가우니까, 위험하지 않을까?
-뱀인 주제에 수영을 못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내가 단순히 수영을 싫어해서만 주저하는게 아니다.
저기 악어 떠다니는거 봐.
아직 수중전은 자신없었다.
-그러면······ 음.
펠레리안도 입을 꾹 다물었다.
망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표현은 망했다는 것뿐이었다.
상류로 올라가면 내가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강폭이 좁아질까?
그런 불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얼마나 오래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걸까.
-저기, 저기 봐라!
호들갑을 떠는 펠레리안의 목소리에 뚱하니 고개를 돌렸다.
강변을 따라서 그래도 시야가 꽤 트여 있었다.
덕택에 볼 수 있었다.
강에 배를 띄우려는 고블린들을.
첫 이명은 품위 있는 게 좋겠어
031.
굳이 서둘러 던전을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 대신, 이곳에서 차근차근 성장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레벨을 올리고 진화조건을 달성해서 빅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쯤으로 진화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안 된다!
우선, 나는 수식어로 빅 하나 정도 붙이는 진화로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앞으로도 뿔이 더 달리든지, 무늬가 홀로그램이 되든지 정도의 특수 진화를 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에서 시간 낭비를 할 수야 없겠지.
펠레리안은 내게 말해 주었다.
내가 엘프에게 완전히 찍혔을 거라고.
나를 밟으려고 하더니 칼질까지 했던 그 사이코 엘프 여자는 다름 아닌 '황금이파리 조사관'이라는 신분이었다.
그게 뭐냐고 물어본바.
요정 중에서 인정받은 사냥꾼이, 조사를 위해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역할이란다.
그러니까 1인이나 소수로 이루어진 광역수사대, 특별수사본부, 뭐 그런 거였다.
그리고 지금 황금이파리 조사관으로 임명되어 나를 죽이려던 게 이리스 셀레나라는 요정.
성격이 아주 지독하고 한 번 문 것은 절대 놓지 않는 미친개라고 한다.
아는 사이냐고 물어봤지만 펠레리안은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솔직히 말해 주기로 하지 않았냐고 갈구니까, 개인적인 일이라고 해서 그냥 안 물어보고 넘어가 줬다.
그 엘프가 나를 쫓을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키메라 좀 잡아 죽이고 펠레리안의 반지 좀 끼고 있었을 뿐인데.
이 대수림이 얼마나 넓은데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 말을 했더니 펠레리안은 웃지도 않고 단언했다.
찾아낼 거라고.
찾아내서 고문한 뒤, 어떤 마물인지 낱낱이 실험할 거라고.
너무 펠레리안적 사고 아닌가.
하지만 여태까지 만나 본 요정들의 비인간성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두려워할 만했다.
그러기 위해서 바뀌고, 강해져야 했다.
그 여자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진화하여 바뀌든지.
아니면 요정들조차 사로잡을 수 없도록 강해지든지.
기왕이면 후자가 더 좋겠다.
"키싯, 퀴익. 췌링 나나루크!"
"나나루크미 취잇 키싯- 텅."
고블린 어의 발음은 대강 이런 느낌이다. 침이 꽤 튀는 언어였다.
나는 바위 뒤에 숨어서 고블린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
나나루크라는 고블린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사람 열 명은 거뜬히 탈 수 있는 나룻배를 강변에 대고 있었다.
물에 밀어 넣은 뒤 올라타서 노를 젓는 원시적인 배였다.
그리고 강을 건너기 위해 내게 필요한 도구이기도 했다.
'태워 달라고 하면 안 태워 주겠죠?'
-가서 물어봐라.
펠레리안도 농담이 는 것 같다.
-농담 아니다.
뱀이 나타나면 즉시 공격하겠지.
차선책은 뭘까.
나는 내 책사에게 계책을 요구했다.
-다 죽이자.
몰살의 계책이라.
화공을 쓸 수 없는 게 아쉽다. 배가 불타면 다 끝장이니까.
다만 몰살의 계책도 문제점이 있다.
'근데 그러면 노는 누가 저어요. 난 손이 없는데.'
-한 놈만 살려 둬. 그놈이 노를 젓도록.
천잰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나는 고블린들을 살폈다.
고블린이 여섯 마리.
행색이 다양하다.
할머니로 보이는 고블린도 있었고, 젊은 전사로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띈다.
피부가 혼자 붉은 고블린이었다.
키도 큼지막하고 몸에도 근육이 붙어 있었다. 전사로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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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 고블린lv10]
[특성]
[고블린], [전사], [신중함]
[스킬]
[창술lv7], [궁술lv3], [방패술lv3], [달리기lv10], [고함 지르기lv10]
[상태]
[초조함]
──────────────
흠.
창술이며 궁술이며 방패술까지.
확실히 전투원 같다.
싸우면 그래도 내가 이기겠지.
하지만.
'몰살 계책 말고 설득을 해 보죠. 얻어 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른 이들도 칼이며 활 같은 것을 매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일대일 싸움은 여러 번 해 본 적 있지만 다수와 싸운 경험은 없어서 부담스럽다.
나나루크라는 고블린이 강한지 약한지는 모르겠지만 그사이 또 합류할지도 모르고.
-그래, 그게 낫겠군.
의외로 펠레리안도 내 선택을 긍정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쟤들이 와락 겁먹고 공격하지 않을까.
나같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뱀은 이런 게 난처하다.
이 세상도 외모지상주의인 것이다.
-······.
나는 방법을 떠올려 냈다.
* * *
"배, 뱀이다!"
고블린 한 명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자 할머니 고블린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무기를 뽑아 들고 활을 겨누는 이들도 있었다.
역시 뱀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어그로가 엄청나다.
하지만 이미 수를 써 놨다.
"잠깐······."
과연 고블린들도 멈칫했다.
"꽃을 물고 있어."
나는 꽃을 물고 있었다.
그뿐이랴. 뿔과 뿔 사이에 꽃 한 송이를 걸쳐 놓기도 했다.
그 충격적인 비주얼에 고블린들도 놀랐다.
바로 활을 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꽃을 달고 다니는 뱀이 있나."
"수상한데."
내가 생각한 것처럼 호의적인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쪽팔려 죽겠군.
난 괜찮은데 펠레리안이 오히려 호들갑이다.
어느 정도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멈칫하면서 다시 칼을 치켜든다.
그래, 아직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지는 못한 거지.
하지만 나는 지네 부부를 만나면서 배운 것들이 있다.
툭.
나는 꽃만 물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방금 전에 나무를 타고 다니던 다람쥐 한 마리를 잡았다.
그것을 꽃과 함께 내려놓았다.
"다람쥐잖아······."
"우리한테 주겠다는 것 같은데."
그래, 머리가 좀 돌아가는 고블린이 있었구만.
나는 고개를 수그리며 인사했다.
여기서 상대방이 인사를 받아 주는 순간, 그때부터 '교류'는 시작되는 것이다.
고블린 몇 명이 어물쩍거리면서 고개를 숙이려 했다.
그때였다. 한 놈이 초를 친 것은.
"뭐 하는 거야! 마물이잖아!"
혼자 피부가 빨간 홉고블린이었다.
너희 고블린도 마물인데.
"활 들어! 뭘 인사를 하려고 해!"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그 홉고블린 때문에 분위기가 다시 싸늘해졌다.
활시위를 매기는 자들도 있었다.
-허허, 잘 안 되는구먼.
어쩔 수 없군.
모조리 쓸어버릴까?
아예 도륙(屠戮)을 내 버릴 수도 있다.
"자디람!"
그때, 산등성이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또 한 명의 홉고블린이 나타났다.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 고블린이다.
그녀는 익숙한 소년 고블린을 업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나나루크, 웬 뱀이 나타났어."
"뱀? 어머."
그녀는 내 머리에 꽂혀 있는 꽃을 눈치챘다.
"꽃을 가져왔네."
"너까지 그럴 거야? 뱀은 위험하다고."
"아니······."
그리고 나와 소년 고블린의 눈이 마주쳤다.
"울루울룰루다! 누나, 저 뱀이야. 나를 구해 준 뱀!"
아, 역시 선행을 하면 보답을 받는 걸까?
팰리컨의 마수에서 내가 꺼내 줌으로써 구해 낸 소년이 이제 또 다른 이들의 목숨을 살렸다.
물론 나 말고 내 앞의 고블린들을 말하는 거다.
"레치를 살려 줬다고?"
"어머, 정말이었나 보네. 신기한걸."
나나루크라는 고블린 누나가 내게 다가왔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건가?"
그래 잘 물어봐 줬다.
나는 꼬리를 들어 배를 통통 두드리고, 또 저 강 너머를 가리키는 것을 반복했다.
이러면 알아들을 수 있겠지.
"배를 같이 타서 강을 건너고 싶다는데?"
"절대 안 돼! 배 위에서 저 뱀이 난동이라도 부리면?"
"괜찮지 않나?"
고블린들 사이에 옥신각신 언쟁이 벌어졌다.
뱀에게 홀리기라도 했느니 어쩌고 한다.
나나루크와 소년 고블린은 내게 호의적이었지만 다른 고블린들은 잔뜩 겁먹은 것 같았다.
이야기가 잘 되려나 걱정이었는데.
"쿨룩, 켈룩 컬록!"
고블린 어가 아니라 기침이었다.
숨넘어가는 듯한 기침을 한 것은 폭삭 늙은 할머니 고블린이었다.
할머니 고블린은 살벌하게도 온몸이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다.
"자디람, 나나루-크."
"예 할머님."
옥신각신 대던 두 홉고블린들이 조용해졌다.
"예로부터 뱀은 영험한 동물이었다. 우리 말을 알아듣는 것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쿨럭!"
할머니 말 한번 잘하셨소.
"타게 해라. 배가 그 정도로 좁지는 않으니이······."
저 할머니는 그냥 고블린이었고, 둘은 홉고블린이다.
꼭 홉고블린이라고 지위가 높은 것은 아닌 듯했다.
내게 빽빽거리던 고블린이 입을 닥쳤으니.
"잘됐네. 다들 올라타. 건너가자!"
나나루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냉큼 배 위로 올라탔다.
곧바로 특등석을 차지했다.
앞쪽, 내게 친절했던 할머니와 나나루크라는 고블린 사이였다.
"끄응차!"
강변에서 배를 밀자 출렁, 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이 막 튄다.
할머니 고블린은 나를 바라보더니 손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고개를 마주 숙여 주었다.
고맙소이다.
강폭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유속이 생각보다 빨랐다.
청년 홉고블린이 열심히 노를 저었다.
-고블린은 무시받는 마물이지만, 생각보다 지능이 낮지 않아.
'그래 보이네요.'
-물론 그들의 문명 수준이 각 부족마다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여기는 제법 수준이 높군. 연장자에 대한 공경하며, 제법 관계가 평등해 보여.
고블린 하면 숨어서 독침이나 쏘는 잡몹인 줄만 알았는데.
내 얄팍한 편견에 다시 한번 반성한다.
"얘."
나나루크라는 홉고블린 누나였다.
고양이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특징이다.
그러고 보니 외모에 대한 편견도 깨졌다.
일반 고블린은 내 편견과 비슷하게 생겼다.
작은 체구에, 뾰족한 귀, 초록빛 피부,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외모.
하지만 홉고블린은 사람의 미적 기준으로 봐도 볼 만했다.
피부가 살짝 붉고, 눈이 좀 크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너는 이름이 뭐니?"
내 이름?
그러게.
한국에서 쓰던 세 글자짜리 이름을 말할 수도 없고.
어디 한번 좀 멋진 이름을 지어 볼까.
제갈유룡, 남궁천마 같은 거.
아아,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 황보백사라고 합니다.
-답하지마라!
그때 갑자기 펠레리안이 끼어들었다.
깜짝이야.
-너는 아직 이름이 없지 않냐, 뱀. 이름이라는 것은 중요한 힘이 깃든 것이다. 함부로 지어내지도 마.
'아니 내가 뭔 수로 말을 해요.'
-······.
가만 보면 펠레리안도 바보 같다는 말이지.
이름이 없는 것을 차치해도 말할 수가 없다.
나는 혀만 낼름거렸다.
나나루크도 설마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거 봐라."
그녀는 손을 강물에 담갔다.
그리고 꺼내자, 놀랍게도 물고기 한 마리가 손가락을 물고 있었다.
나나루크는 아하하 웃더니 내게 물고기를 던져주었다.
한입에 받아먹어 꿀꺽 삼켰다.
"배에 잘 탔어. 수영해서 건너려고 했으면 순식간에 뼈만 남았을걸."
그러게 말이다.
살벌한 강이었구만.
물고기는 이빨이 뾰족해서, 나나루크의 손가락에도 피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한번 쪽 빨고 씩 웃을 따름이었다.
반할 뻔했네.
쟤는 고블린이야, 나는 뱀이고!
강을 건너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건너편 강변에는 수풀이 높게 자라 있었다.
사람 가슴께 정도로 자란 수풀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여름의 억새밭 같다.
"다 왔다!"
소년 고블린이 신나서 일어섰다.
그탓에 배가 흔들렸다.
어른 고블린이 그런 소년을 끌어당기며 짜증을 냈다.
"배 멈출 때까지 얌전히 있어 이 새끼야."
그가 먼저 배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어라.
억새밭에서 무언가가 쏘아져 나왔다.
팍!
조금 전 소년에게 짜증을 냈던 고블린의 눈에 화살이 박혔다. 깊숙하게.
그는 뻣뻣하게 굳어 쓰러졌다.
풍덩!
물보라가 일었다.
그리고 내 등허리에서도 뜨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팍!
-어, 화살이다.
펠레리안의 해설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화살이 내 몸에 박혔다.
아프다! 엄청!
"화살이다. 매복이야!"
나나루크가 쩌렁쩌렁 외치며 소년의 머리를 눌러 숙였다.
할머니와 소년을 제외한 고블린들이 우르르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아, 왜 하필 나한테 화살이!
나는 배 밑바닥에 착 붙어 있어서 화살을 맞을 확률이 제일 적었는데.
요즘 운이 좀 좋다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불운이 닥쳐왔다.
"잡아, 미친 새끼들 기습을!"
"자디람! 혼자 들어가지 마! 수풀 속으로 유인하는 거다!"
화살은 그리 깊이 박히지 않았다.
진화하면서 내 가죽도 많이 질겨졌으니까.
하지만 마음에 입은 상처가 분노를 불태웠다.
-가라.
나 역시 배 위에서 뛰어나왔다.
수풀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저 안쪽에서 화살을 쏜 것이다.
산발적으로 화살이 튀어나왔지만 맞출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일렬로 함께 들어간다!"
나나루크는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고블린은 체구가 작다, 수풀 속에서 숨어다니는 놈들을 찾아 죽이기는 쉽지 않으리라.
물론, 나에게는 예외였다.
'노인장, 위에서는 보이죠."
-나 말이냐? 음, 보이지.
펠레리안은 반지 주변 2m 반경까지는 둥둥 떠다닐 수 있었다.
즉, 나보다 높은 곳에서 수풀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면 방향 좀 알려 줘요.'
-어려울 것 없지. 앞으로 쭉 가라.
수풀로 들어간다.
고블린들과 달리, 내가 파고들어도 수풀은 흔들리지 않았다.
-더, 조금 오른쪽. 총 열 놈이군.
수풀을 지나갈때 뱀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상식 아닌가.
게다가 그게 무척이나 분노한 독사라면.
-두 놈이 모여 있다.
수풀을 헤쳐나가자, 활을 들고 있는 고블린 두 놈이 있었다.
네놈들이렸다.
도약.
가속.
그리고, 옷도 입지 않고 있어 훤히 드러난 고블린의 가슴팍에.
물어뜯기.
콰작!
내가 바닥에 착지하고, 쓰러진 고블린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한 나머지 한 놈이 비명을 질렀다.
"흐아악! 심장 파먹는 뱀이다!"
'심장 파먹는 뱀'.
그것이 내 첫 이명(異名)이 될 줄이야.
펠레리안적 사고
32. 펠레리안적 사고
울어라, 나약한 고블린들아.
너희의 공포가 여기 도래했다.
심장 파먹는 뱀이다!
그리 외친 고블린은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블린들은 뱀을 무서워하는 게 패시브라도 되는 것 같다.
아니, 생각해 보면 갑자기 튀어나온 뱀이 동료의 심장을 파먹었으니 무서운 것도 당연하겠지.
가만히 있으면 깔끔하게 해치워 주려고 했는데.
"이 사악한 뱀아. 악마의 화신아. 물러가라!"
고블린은 침을 튀기며 제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추악한 형상아 물러가라!"
이거 조금 마음이 상한다.
심장 파먹는 뱀은 그 이름다운 행동을 하는 수밖에.
당연히 저런 목걸이를 무서워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물러나지 않자, 고블린은 녹슨 칼을 휘둘렀다.
어이쿠.
칼이 조금 전 내가 있던 바닥을 찍었다.
하지만 형편없는 칼질이다.
엘프의 그 매서운 검술과 비교해 보면 느리기 그지없다.
나는 오히려 고블린의 녹슨 칼을, 놈의 손목을 타고 올랐다.
갑옷이라도 입지 그랬어.
콰직!
*「물어뜯기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물어뜯기lv9가 물어뜯기lv10이 되었습니다」
옳지.
이제 물어뜯기도 lv10이 되었다.
고블린 습격자들은 어느 정도의 경험치를 줬다.
하지만 마석을 가지고 있는 놈은 아무도 없군.
"시, 심장 파먹는, 뱀······!"
나 불렀냐.
그게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고블린의 유언이었다.
펠레리안 내비게이션이 흡족하게 웃으며 나를 지켜봤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한 놈이 더 온다.
매복 기습을 한 고블린들에게도 전우애는 있는 듯하다.
그 살벌한 비명 소리를 듣고도 달려오다니.
수풀을 헤치고 칼 든 고블린이 튀어나왔다.
그는 동료의 사체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외쳤다.
"뱀······. 심장 파먹는!"
얘들은 저 말밖에 못 하나.
놈은 칼을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이전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으윽, 컥!"
가슴에 구멍이 난 고블린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두 명이 더 온다.
둘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나는 흙 마법을 준비했다.
한 놈을 넘어뜨리고 다른 한 놈부터 처치하자.
곧 두 마리의 고블린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곧바로 드잡이질이 벌어지지 않았다.
"정말, 심장 파먹는······ 뱀이 있었다니."
"도, 도망쳐어!"
그들은 동료 셋의 시체를 보자마자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곧바로 수풀 속으로 도망치는 고블린들.
나는 그들을 쫓으려다 멈췄다.
자비심이 솟아서는 아니었다.
*「이명, '심장 파먹는 뱀'을 얻었습니다.」
이명? 귀에서 삐이이 소리 나는 그것은 분명 아닐 터였다.
'강철'의 군터, '역천'의 펠레리안과 같은 별칭을 말하는 걸까.
-뭐 하나, 쫓아가서 피의 축제를 벌여야지.
펠레리안이 의아해하길래 목소리의 내용을 말해 줬다.
-이명이 생겼다고!
그는 껄껄 웃었다.
-내 살다 살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마물이 이명을 얻는 것은 처음 보는군. 어떤 이명이냐, 심장 파먹는 뱀은!
어떤 이명일까. 나도 궁금했다.
정신을 집중하자 내 상태창이 떠올랐다.
──────────────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lv3]
[이명]심장 파먹는 뱀
──────────────
오, 이름 아래에 이명이 붙었다.
심장 파먹는 뱀이라는 살벌한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갑자기 이명이 생긴 원리가 뭐지.
-이명이라 함은 본명을 제외한 또 하나의 이름. 그리고 이름이라 하면 그리 불러주는 자들이 존재함으로 인해 탄생하는 것이다.
대충 풀어 말하자면 고블린들이 나를 '심장 파먹는 뱀'이라고 불렀기에 그런 이명이 붙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한테 흰둥이라고 부르거나 뱀뱀이라고 부르면 그게 이명이 되는 겁니까?'
흰둥이.
만약 그런 이명이 붙는다면 내 위엄이 크게 손상될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펠레리안은 부정했다.
-겨우 몇 명에게 그리 불린다고 이명이 생기지는 않는다. 적어도 수백 명이 너를 그 이름으로 불러야 생기는 게 이명이지.
'그러면 방금은 어떻게 된 건데요?'
-아마도, 저 고블린들에게 '심장 파먹는 뱀'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인 것이겠지. 구전되는 전승이라거나 옛이야기처럼.
아하, 그러니까 전래동화로 치면 내 이명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 호랑이'같은 거구나.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또한 그 이명에 걸맞는 행적을 보여야지.
생각해보니까 나는 이번만 심장을 파먹은게 아니었다.
혼재규어니 키메라니 적들도 심장을 파먹어 해치우지 않았던가.
그러면 강철이나 역천은 뭐지.
-하늘의 법칙을 거스르는 대마도사가 나였느니.
'아 예.'
-이명에는 힘이 깃들어 있다. 더 강력한 이명일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이명을 부를수록 힘이 강해지지.
그래서 펠레리안이 이름에는 힘이 깃들었고 어쩌고 했던 것 같다.
내 새 이름을 더 자세히 살펴봤다.
──────────────
[심장 파먹는 뱀]
팔라무 우림 크록 부족에게 전승되는 공포의 뱀.
아직 그 악명이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이빨이 날카로워진다.
사냥감의 심장을 포식하면 더 많은 마성을 얻을 수 있다.
──────────────
펠레리안의 말이 정말이었다.
게다가 부가 효과까지 있다.
이빨이 날카로워지고 경험치를 많이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둘 다 내게 필요한 효과들이었다.
생각지 못한 이득을 얻은 것 같아서 기쁘구만.
-하나가 더 온다.
다시 싸울 준비를 했다.
이놈들, 생각보다 끈질기다.
-아니, 아니군.
뭐가 아닌지는 알 수 있었다.
수풀을 헤치고 튀어나온 것은 나나루크였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고블린들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깜짝 놀라 외쳤다.
"흰둥아!"
흰둥이?
이 심장 파먹는 뱀을 부르는 건가?
"네가 전부 처리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나루크는 기뻐하고 감탄했다.
"대단한걸. 전사들을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하다니."
이 정도야 뭐, 간단한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나나루크의 칼에도 피가 진득히 묻어 있었다.
상처는 하나도 없다.
혼자서 몇 명은 처리한 것 같다.
아, 그녀의 상태창을 확인한바. 나나루크라는 저 홉고블린은 꽤나 강했다.
당연히 엘프나 군터에 비견할 바는 아니었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던 고블린의 수준보다는 훨씬 높았다.
"화살이 박혔어. 이거 치료해야겠는데."
그녀는 내 상처를 보고 걱정하듯 말했다.
어느새 화살대는 부러져 있었고, 촉만 남아 박혀 있다.
"가만히 있어 봐."
괜찮은데, 어차피 포션 남은 거 마시면 아물 테고.
하지만 그녀는 화살촉을 빼냈다.
피가 쵹, 하고 솟는다.
품속에서 대나무 통을 꺼내더니, 그 안에 담겨 있던 초록빛 연고를 덕지덕지 붙였다.
신기하게 피가 멎었다.
"임시 조치야. 내가 마을로 데려가서 치료해 줄게."
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포션도 아낄 겸.
-고블린 마을에 잠입하게 되다니. 이런 놀라운 경험을 ······.
펠레리안을 보니 그 역시 기뻐한다.
나나루크는 갑자기 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를 목도리마냥 양쪽 어깨에 둘렀다.
이 자세, 편한데?
"가자."
머리에 화살을 맞아 죽은 불쌍한 고블린 한 명.
그를 제외하고 희생자는 없었다.
나는 고블린들과 함께 그들의 부족에 도착했다.
* * *
고블린들이 동굴에 모여 산다거나.
원시인처럼 움막을 짓고 산다는 것은 편견이었다.
당연히 실제로 그렇게 사는 고블린 부족도 있겠지만, 이곳 팔라무 우림의 룬가 부족은 아니었다.
그들이 이곳 우림에 이주한 지가 어느덧 삼백여 년.
룬가 부족의 마을은 제대로 된 목조 건축물들을 가지고 있었다.
워낙 비가 오기 때문에, 집들은 지면으로부터 50cm씩 떨어져 있었다.
나무 기둥으로 지탱한 집들 사이에 고블린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돌아온 전사들을 지켜봤다.
"흰 뱀이야."
"나나루크가 데려온 건가 봐."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우와아."
아이들은 잔뜩 흥분해서 주위를 맴돌았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한다. 뱀이 무서운 것 같았다.
돌아온 고블린 중에서 그들과 동년배인 소년이 있었다.
"레치, 저 뱀은 뭐야?"
내게 목숨을 구해진 소년은 어째선지 자기가 우쭐한 얼굴이었다.
"울루울룰루일지도 몰라."
"울루울룰루?"
"응, 나를 구해 줬어. 그리고 크록의 고블린들을 해치워 줬어. 심장을 파먹어서."
"헉. 심장을······."
"걔들은 심장 파먹는 뱀이라고 부르더라."
"와아······."
그래 꼬마야.
내 명성을 더욱 퍼뜨리렴.
그나저나 울루울룰루는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이름이 너무 우스꽝스러운 거 같은데 말이야.
펠레리안이 뭘 하고 있나 보니, 그는 둥둥 떠다니면서 주변을 관찰하기 바빴다.
-화아, 이 고블린 부족은 엄청나게 발전했군.
'예전엔 없었어요?'
-그때 봤을 때는 동굴에 사는 원시 부족이었어. 싹 쓸어버릴까 고민했었는데 놔 두길 잘했다.
그는 고블린의 마을이 몹시 흥미로운 듯했다.
이럴 때 보면 학자 같은 면모가 있다. 매드사이언티스트 쪽이라는 게 문제지만.
"널 치료해 줄게."
나나루크가 그리 말했다.
설마 병원이라도 있는 걸까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녀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주술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화려한 장신구를 차고 온몸에 문신을 한 주술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대주술사님."
대주술사가 누군가 했더니.
놀라운 사실.
나를 배에 태우라고 시켰던 할머니였다.
높으신 분이었던 것 같다.
주술사들이 할머니 고블린에게 관을 씌우고 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순식간에 위험해 보이는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이 뱀은······."
주술사들이 나에 대해 묻자 할머니가 답하길.
"내가 아무래도 영험한 뱀을 만난 것 같다."
"영험한 뱀이요······."
"치유의 연고와 붕대를 가져와라. 치료해 드려야겠으니."
주술사들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그들은 마치 상전 모시듯 나를 조심스레 옮겼다.
갑자기 왜 이래 이거.
주술사들이 내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 줬다.
주술사들의 사당에는 신비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날개 달린 검은 뱀의 그림이었다.
검은 뱀의 주변으로 벼락이 내려치고 있고, 그 아래 붉은 뱀이 죽어 있었다.
멋진 형제군.
나나루크가 내게 속삭였다.
"저게 울루울룰루야."
아, 저 분이시구만.
그런데 나를 검은 뱀으로 오해하다니 흰색과 검은색은 너무 차이가 나잖아.
솔직히 검은색 멋있는 거 인정하는데, 난 흰색이 더 좋다.
검은 뱀은 너무 나빠 보이잖아.
"근데 이 반지는 뭐야?"
나나루크가 내 반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대답해 줄 수는 없으니 그냥 꼬리를 슬슬 흔들어 보았다.
"솔직히 좀 아니다. 촌스러워. 생긴 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펠레리안이 물었다.
-뭐라고 한 거냐? 내 반지에 대해 물어본 것 같은데.
'반지 생긴 게 엄청 멋지다는데요.'
-후후, 고블린이라도 미적 감각은 있구만. 내가 직접 디자인한 인장이다.
자기 인장을 직접 만들다니. 역시 자의식이 넘치는 요정이다.
나나루크는 할 짓도 없는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펠레리안에게 말했더니, 그도 좋아했다.
나는 꼬리로 나나루크의 손등을 툭툭 쳤다.
그리고 한 물건을 가리켰다.
"물감? 저걸 가져와 달라고?"
역시, 척하면 탁 알아들어서 좋구만.
이곳 사당에는 주술을 위한 도구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원시적인 형태의 물감도 있었다.
먹과 비슷한 것을 요구하자, 주술사들은 흥미로워하면서 목판과 물감을 가져왔다.
나는 꼬리에 검은색 물감을 묻혔다.
-자, 코끼리 모양 바위이다. 이렇게 그리면 돼.
내가 떠오른 아이디어가 뭔가 하니.
바로 내 목적지 주변에 있는 바위를 그려서 길을 묻는 것이다.
펠레리안의 말만 듣고 던전을 찾았다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그런데 길을 물으려던 행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파장을 일으켰다.
"허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정말 영험하군요 대주술사님."
"설마······. 허!"
주술사들이 전부 내 주변으로 몰렸다.
왠지 긴장돼서 꼬리가 살살 떨리는걸.
마치 영재가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구경하기라도 하는 모습이다.
나는 훌륭하게 코끼리 모양 바위를 그려 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나루크가 그걸 알아봤다.
"여기 코끼리 바위잖아!"
아자!
던전은 코끼리 바위의 바로 아래쪽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마석을 저장한 곳인 만큼, 펠레리안은 몹시 강력한 보안으로 설계했다고 한다.
지진이 나도 무너질 일 없도록 튼튼하게는 물론이다.
-다행히 무사한가 보군.
'요정들이 먼저 찾아서 털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는 없다.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냐고 물으니.
-강제로 돌파하려다간 바위가 통째로 무너지도록 만들어 놨기 때문이지.
' ······.'
-크큭, 건방진 침입자들은 마석과 함께 생매장당할 것이다.
이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희희낙락 던전에 들어갔었는데. 섬찟하다.
나는 코끼리 바위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에 가고 싶은 거야?"
나나루크의 질문에 고개를 격렬히 끄덕여 줬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여기는 일 년 전부터 크록 부족이 점거했는데."
뭐라고?
내가 처치했던 그 고블린들의 부족 아니었나.
"원래는 우리 부족 땅이었는데. 크록 족장이 침략해서 본거지로 삼고 있어. 바위 밑에서 땅을 파는 것 같은데······ 보안이 삼엄해서 가까이 가기 힘들걸."
충격!
고블린들이 설마 던전을 찾은 걸까.
아직 들어가지는 못한 것 같지만.
그러나 펠레리안의 분노는 대단했다.
-쥐새끼 같은 것들이!
손 한 뼘 만한 대갈장군 노인 요정이 격분했다.
-가라 뱀! 어서 가서 놈들의 심장을 전부 파먹어 버려라-!
아니, 말하는 건 쉽지.
하지만 나도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감히 내 마석을 노리다니!'
-놈들을 죽여 전부 박제로 만들어 버리겠다!
울루울룰루!울루울룰루!울루울룰루!
033.
세상에는 타고나길 광부로 난 종족들이 있다.
드워프가 그럴 것이고, 지금은 그 수가 극히 줄어든 노움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고블린 역시 타고난 광부들이다.
근력은 약하지만 작은 체구는 땅을 파고 들어가기 유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실함이라는 미덕이 있다.
성실함이란 즉, 복종을 잘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고블린은 뭉치지 못한다. 그게 상식이다.
그들은 부족사회로 흩어져 살며 제대로된 왕국을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고블린의 왕이 있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왕국과 왕 중에 무엇이 먼저냐 하면 당연히 왕국이 먼저일 것이다.
통치받을 신민 없이 왕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하지만 고블린과 같은 아인(亞人) 종족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고블린에서 '군주'로 진화한 개체가 둘 있었다.
고블린 군주는 대륙에 흩어진 수많은 고블린들을 규합했다.
그럴 때마다 대륙이 화마에 휩싸였다.
현대에 이르러 고블린들을 우습게 여기는 인식이 만연하지만.
확률적으로 고블린 군주는 언제든 탄생할 수 있다.
그런 상재적인 위험을 인지하고 이를 대비해 왕국은······.
「아인 분석: 고블린 편中- 작자 미상」
* * *
카앙- 캉- 카앙
코끼리 바위 아래에서 매일 요란한 소음이 나게 된 것이 거의 일 년째.
크록 부족이 코끼리 바위를 점거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코끼리 바위는 말 그대로 거대한 암석 봉우리였다.
바위는 당연하게도 땅속 깊이까지 그 뿌리를 뻗고 있었다.
소음은 그 지하의 암석을 깨면서 나는 소리였다.
카앙- 캉!
고블린들의 조악한 철기로는 채굴이 느리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느덧, 꽤 깊이 파 내려 갔다.
"똑바로 안 파 이 새끼들아!"
잘 먹었는지 배가 툭 튀어나온 홉고블린이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을 맞은 고블린 한 명이 쓰러졌다.
크록 부족이 침략해서 노예로 삼은 다른 부족의 고블린이었다.
"어이 늙은이, 엄살 부리지 말지."
"죄송, 죄송합니다. 컥!"
홉고블린은 일어나려던 늙은 고블린을 걷어찼다.
"어쭈, 안 일어나?"
"컥, 으억."
일어나려고 하면 걷어차고, 채찍을 휘두르기를 반복한다.
노인 고블린은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나서야 다시 곡괭이를 잡을 수 있었다.
다른 고블린들은 그것을 못 본 척 땅을 파기만 했다.
고블린을 지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공포였으니.
이들이 조금도 반항할 생각을 하지 않는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이렇게 코끼리 바위 아래에서 땅을 파는 것은 최저의 계급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들보다 불쌍한 자들은 따로 있었다.
"어."
곡괭이를 휘두르던 고블린 한 명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곤 얼른 손을 들어 외쳤다.
"또 뭐가 나왔습니다!"
"뭣!"
채찍을 들고 있던 크록 부족의 고블린이 얼른 달려왔다.
그는 조금 전 곡괭이가 파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구조물의 흔적이다. 자연적인 암석지대 사이에 이런 인공적인 무언가가 숨겨져 있던 것이다.
"한 달 만이군 ······!"
족장의 명령에 의해 발굴을 시작한 이래, 총 네 번의 인공 구조물을 발견했다.
처음 발견한 뒤로 점점 발견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발굴이 점차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음을 의미하리라.
물론 저 아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족장밖에 모르는 것 같지만.
"죄수들을 데려와라!"
그 말이 떨어지자, 땅을 파던 고블린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잠시 쉴 수 있을 것이다.
홉고블린들에 의해 세 명의 고블린들이 끌려왔다.
하나같이 얼굴에 두들겨 맞은 흔적이 있는 놈들이었다.
강변에서 룬가 부족의 전사들을 습격했다가 실패해 도망친 놈들이었다.
그들은 곡괭이를 들고 벌벌 떨었다.
홉고블린이 그중 한 명을 지목했다.
"너부터, 가서 파!"
"레데카, 제발 살려 줘요!"
이들은 노예가 아니라 원래 크록 부족의 전사였다.
감독하는 홉고블린과도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홉고블린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고블린의 뺨을 때렸다.
"이 새끼야, 죄수가 되고 싶지 않았으면 그냥 싸우다 죽지 그랬어."
"흐윽."
"심장 파먹는 뱀이라고? 그딴 헛소리를 족장한테 하니까 처맞고 이 꼴이 된 거 아니야."
패배자들은 노예보다 못한 죄수가 된다.
고블린은 어쩔 수 없이 곡괭이를 들고 드러난 구조물에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흙을 파 들어간다.
곡괭이질이 멈춘다면 끔찍한 매질이 시작될 것이다.
"잘만하면 살 수도 있지. 족장님이 기뻐하신다면 말이야."
그런 희망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곡괭이를 든다.
나머지 모두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죄수 고블린 한 명만 남아 조심스럽게 발굴을 시작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어?"
뭔가를 발견한 듯한 탄성이었다.
그리고, 기묘한 소리가 났다.
팅.
안에서부터 불꽃이 뿜어져 나온 것이 그 순간이었다.
"아악, 아아아악!"
곡괭이를 들고 있던 고블린이 불길에 휩싸였다.
그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더니 털썩 쓰러졌다.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홉고블린이었다.
"다음."
"흐윽, 으으······."
"다음!"
이것이 그들이 함정을 돌파하는 방법이었다.
죄수들과 노예를 갈아 넣어 함정을 모두 소진시키는 무식한 방법.
시간이 많이 걸리고 피가 흘렀지만 분명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다.
이 모든 일을 지시한 것이 바로 족장.
홉 고블린 킹, 크록이다.
보통의 홉 고블린보다도 머리 하나가 큰 우람한 전사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록은 철 조각을 엮어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다.
본디 고블린 부족은 족장과 주술사가 권력을 나눠 가진다.
하지만 크록은 아니었다.
그는 제 손으로 대주술사를 죽였으며, 스스로 대주술사의 자리에 올랐다.
다른 부족의 족장들을 죽여 그들의 해골을 목걸이로 만들어 걸었다.
그 자태가 살벌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겁도 없이 그 옆에서 언성을 높이는 젊은 홉고블린이 있었다.
"아버지!"
허나 역시 그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저 무뚝뚝한 아버지였던 크록은 이제 포악한 제왕이 되었으니.
"제발, 제가 부탁드립니다. 나나루크와 그 동생들만 살려 주십쇼."
"······."
"아버지가 바라시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크록은 마치 아들의 부탁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아들을 돌아보았다.
"찬달."
나나루크의 정인, 찬달은 순간 숨이 막혔다.
아버지의 눈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
그가 갑자기 찬달의 안면을 움켜쥐었다.
꾸우욱!
"크우웁."
"너는 나를 분노케 하는구나."
찬달이 발악을 했지만 아버지의 손아귀는 마치 바위 같았다.
크록이 손에 힘을 줘 찬달을 아예 들어 올렸다.
"네놈이 나나루크만 살려 달라고 했으면 들어줬을지 모르지. 제 여자를 챙기는 건 사내의 본능이니. 헌데······ 그 동생까지 살려 달라고?"
"꾸읍, 끅."
"내 아들이!"
크록은 입에서 불길을 뿜을 것처럼 화를 냈다.
"그딴 나약한 요구를 해에!"
"끅."
"네가 직접 나나루크 그것의 동생을 죽여라."
찬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네 손으로 직접 그 어린 고블린들을 죽이면, 내가 네 여자는 살려 두마."
"······."
"그러지 않으면 찬달 너도, 네 여자도 죽을 것이다."
족장 크록은 결코 실언을 하지 않는다.
그가 아들을 내팽개쳤다.
찬달은 제가 처한 운명을 깨달았다.
다 터져 버린 그의 입에서 피와 침이 섞여 줄줄 흘렀다.
아들이 울부짖든 말든 크록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지금 발굴 중인 저것뿐이었다.
저 안에 있을 것이다.
크록을 진정한 고블린의 왕으로.
대륙 모든 고블린들의 군주로 만들어 줄 힘이······!
* * *
후후.
뱀이 되어서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뭐 노래 부르는 취미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닌데, 기분이 좋아도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가 없다.
쉿쉿 혀를 낼름 대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진화에는 꼬리에 방울이 생기면 좋겠다.
래틀 스네이크, 방울뱀이란 것도 있지 않은가.
꼬리에 악기가 달리는 것이니 나쁘지 않을 터이다.
내가 기분 좋은 이유는 별다른 게 없었다.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와작.
나무에 달려 있는 새빨간 과실을 입에 넣어 씹었다.
과즙이 쫙 퍼져 나오면서 달콤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사람 시절에도, 뱀이 된 이후에도 역시 과일은 맛있다.
나나루크 역시 나를 따라 과일을 먹었다.
그러더니 퉤, 하고 뱉었다.
"이거 독이 있어서 먹으면 배 아플걸. 괜찮아?"
음, 속이 뜨끈뜨끈하다 싶더니 그래서였나.
하지만 내 독 내성은 이미 충분히 높았다. 이 정도 과일로는 끄떡없다.
"역시 뱀은 대단하네. 나도 뱀으로 태어났으면 좋을 텐데."
나나루크는 뭘 좀 아는 고블린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마을 근처의 숲을 걷고 있었다.
데이트 비슷한 거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저기도 푸른물별초가 있잖아.
펠레리안이 재촉했다.
내가 나나루크의 어깨를 툭툭 치고 꼬리로 가리키자, 나나루크는 그 약초를 캤다.
"이거 말이지?"
고개를 끄덕여 줬다.
펠레리안이 지목한 약초들이다.
그런 것들이 이미 망태에 많이 쌓여 있었다.
코끼리 바위가 크록 부족이라는 고블린들에게 점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펠레리안은 급해졌다.
-겨우 고블린들이 내 던전의 방어를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몇 겹의 방어 장치를 해 두고 지킬 수호자까지 준비해 뒀으니.
말은 저리 하지만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무리 철저한 방비를 해 두었다고 해도 시간의 힘은 무서운 법이다.
그 고블린이 정말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갈 수도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기분이 나쁜 것이다.
-내 것을 건드리려 하다니······.
맞다. 그래서 나도 무척 화가 난다.
거기에 있는 것들은 펠레리안의 것인 동시에 내 것 아니던가.
-저기, 저 은방울꽃도 뽑아 가라.
나는 나나루크의 어깨를 툭툭 쳐서 은방울꽃을 뽑았다.
-이 정도면 다 된 것 같구만.
채집이 다 끝났다.
나나루크의 어깨를 두드려서 돌아가자는 신호를 했다.
물론, 고개를 휘휘 젓고 꼬리를 빙글빙글 돌렸을 뿐이다.
나나루크는 신기하게 그것을 알아들었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고블린이 있을 줄이야.
"넌 참 신기한 뱀이야. 가끔 보면 마물이 아니라 꼭 고블린 같아. 우리 말도 알아듣잖아."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나나루크.
우리는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이 고블린 마을에서 주목의 대상이었다.
말을 알아듣는 뱀이라니 나 같아도 신기하겠다.
게다가 그 뱀은 특이한 일까지 꾸미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봐."
그렇게 말한 나나루크는 큼지막한 솥을 가져왔다.
내가 오늘 아침에 꼬리로 가리켜 요구했던 무쇠솥이다.
-물을 채우게 해라.
그렇게 했다.
훌륭한 조수 나나루크 덕에 일이 쉽게 쉽게 진행되고 있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냐 묻는다면.
바로, 포션 만들기다.
-대수림에는 온갖 종류의 식물이 자라지. 구할 수 없는 재료가 드물 정도야.
펠레리안이 마도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짜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 수준이었다.
심지어 포션의 제조 방법까지 알았다.
포션이 거의 남지 않은 상황. 고블린들의 경비를 뚫고 펠레리안의 던전까지 돌파하려면 포션이 더 필요했다.
-으깨 놓은 블러디 프로그를 먼저 넣어라. 거품을 걷어내야 해.
거품을 걷어내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지.
나는 열심히 거품을 걷는 시늉을 해 봤다.
나나루크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이렇게 거품을 걷어내라는 거야?"
흠.
'펠레리안 대신 나나루크와 함께 다니고 싶군.'
-이놈!
펠레리안이 들어 버렸다.
-이 포션의 제조법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아느냐. 나는 포션 제작법을 하나 팔아서 성 한 채를 얻었어.
'흠, 그 정돈가.'
-그 정도다!
그러면 나도 외워 놔야겠다.
언젠가 팔아서 내 성을 얻을 수 있을지도.
큰 솥 하나를 가득 채운 포션을 끈적할 때까지 졸이자 절반도 남지 않았다.
음식이라도 만드는 건 줄 아는지, 고블린들이 여럿 몰려들었다. 그중 주술사들도 섞여 있다.
"대체 뭘 만드는 거야?"
나나루크도 내가 뭘 만드는지 알지 못했다.
다 곧 알게 될 거야.
나나루크는 대나무로 만든 물병 열 개를 준비해 줬다.
거기에 포션을 담으니, 딱 맞게 떨어졌다.
──────────────
[아드리아나 식 레드 포션]
상처치유에 대단한 효과를 보인다.
그 제조법은 몹시 비밀스러워 좀처럼 구하기 힘든 귀품(貴品)
──────────────
어, 정말이었네.
진짜 괜찮은 포션 같다.
마력회복의 효과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자인이라는 애송이 기사가 가지고있는 포션보다 좋아보였다.
-속고만 살았구먼.
열 개 중 셋을 나나루크에게 스윽 밀어 줬다.
수고비였다.
-하이고 아까운 것.
'부려먹은 게 있는데 이 정도는 줘야죠. 얘가 다했는데.'
나나루크도 고마워했다.
"근데 뭔지 모르겠네. 먹는 거야?"
나나루크가 죽통의 마개를 열어서 마시려 했다.
포션이 뭔지도 모르면서 겁도 없구나.
나는 그녀를 말렸다.
성능을 보여 주는 게 빠르겠지.
그리고 구경하고 있던 고블린 하나에게 다가갔다.
따라오쇼.
"나, 나요?"
손에 상처가 나 있는 고블린이었다.
"알겠습니다."
이 고블린은 왜 나한테 존댓말을 하는 거지.
일단, 나나루크가 개봉한 포션 병을 꼬리로 감아 들어 고블린의 상처에 부었다.
치이익
"어엇!"
고블린은 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자 깜짝 놀랐다.
곧 손의 상처가 아물었다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저, 정말 울루울룰루였어!"
그가 갑자기 그리 외쳤다.
그러자 구경하던 고블린들이 웅성웅성했다.
뭐야, 왜 또 울루울룰루 얘기야.
그리고 지켜보고 있던 주술사 고블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나와 솥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 이게 생명의 물입니까."
포션인데요.
아무래도 고블린에게는 포션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살벌하게도, 주술사는 칼을 들어 제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그러더니 솥에 남아 있던 포션을 치덕치덕 처발랐다.
김이 솟고, 상처가 아물었다.
펠레리안 특제 포션의 효과가 제법이다.
"아아······. 신성한 뱀은 우리의 말을 알아듣고, 생명의 물을 베푼다더니······."
주술사가 창백한 얼굴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울루울룰루······."
구경하던 고블린 몇 명이 합장을 하며 울루울루루라 제창한다.
-어이고? 이거······.
펠레리안의 표정이 묘하게 음흉해졌다.
나도 뭔가 재미있어서 꼬리를 흔들어 보았다.
"울루울룰루! 울루울룰루!"
고블린 몇몇이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재밌네 이거.
없으면 어쩔 수 없지.
034.
룬가 부족의 고블린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나를 전설의 뱀 '울루울룰루'의 현신이라고 생각하는 얼간이들 소수.
그리고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생각하는 다수.
비율은 대략 2대 8 정도 될까.
사실 2할도 생각보다 높은 비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던 울루울룰루는 날아다니는 검은 뱀이었는걸.
나랑 비슷한 점이라곤 뱀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울루울룰루!"
"아, 울루울룰루."
내가 울루울룰루라고 생각하는 고블린들은 날 볼 때마다 그 이름을 외치며 합장을 했다.
마치 길거리에 있는 불상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대체 왜 이런 오해가 일어나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처음에 만났던 주술사 할머니 고블린이 분명 '뱀은 영험한 동물'이라고 말했다.
이 고블린 룬가 부족에서는 실제로 뱀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뱀이 사악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부 몰상식한 사람의 편견이다.
어떤 곳에서는 뱀을 풍요의 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의 제주도에서는 예전에 '칠성(七星)'이라는 뱀신을 모셨다.
이곳도 비슷했다.
주술사들은 고블린의 여러 신들에게 기도한다.
그중, 울루울룰루라는 강력한 뱀신이 있다.
악신인 '붉고 머리가 없는 뱀'을 무찌르는 강력한 뱀신.
왜 나를 그 뱀신으로 생각했는지 물어봤다.
물론, '물어봤다'라고 간단히 말했지만 그 과정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주술사들의 경전에 관심이 있는 척해서 주술사 한 명이 하루 종일 그 경전을 읽어 줬다.
그래서 대충 가닥을 잡은 것이다.
1번, 영험한 뱀신 울루울룰루는 고블린의 말을 알아듣는다.
일반적인 마물이나 동물이라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고블린의 말을 알아듣는 울루울룰루는 친절하고 상냥하다.
룬가의 고블린들과 함께하며 고블린의 적들을 물리쳐 주는 고마운 존재.
그래 이건 내가 맞다.
부정할 수가 없이 그냥 나 자체구만.
친절하지, 상냥하지, 적대 부족 고블린 심장도 몇 개나 먹어 줬지.
2번, 울루울룰루는 생명의 물을 토해 낸다.
생명의 물은 부상당한 자들을 고쳐 주고 그것을 먹으면 무병장수하게 된다.
생명의 물은 뭔데.
내가 포션을 만들자 울루울룰루를 외친 고블린들이 있었다. 이것 때문이었다.
포션이 뭔지 모르는 고블린들에게는 생명의 물처럼 보였나 보다.
근데 토해 낸 것도 아니고 나나루크의 도움을 받아 끓여 만든 건데.
뱀이 토한 물을 마신다니 너무 드럽다.
무병장수한다는 것도 웃긴다.
펠레리안의 포션에는 그런 효과가 없다. 그저 상처를 치유해 줄 뿐.
-음, 내가 포션 제조법을 팔 때 사실 매수자에게 설명 안 한 게 있지.
'뭔데요.'
-오랫동안 장복하면 병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 말이야.
'······?'
무슨 병이냐고 묻자.
-크흠, 무정자증이다.
무시무시하다.
그러면 여자는 먹어도 상관없는 건가.
그 사실을 속이고 판 펠레리안도 대단하다.
-자기가 그 병에 걸린 것도 모를 테니까. 나도 키메라를 대상으로 연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실이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기죄라는 주장이었다.
그보다 키메라의 정자까지 연구한 건가.
정말 매드사이언티스트라는 말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번식 가능한 키메라는 내 꿈이었다.
아하.
그래서 연구한 거구만.
번식 가능한 키메라, 듣고 보니 확실히 대단하다.
한 종을 창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 아닌가.
이야기가 옆으로 샌 것 같지만.
어쨌든 나는 울루울룰루가 아니다.
그런 이야기 속 뱀으로 오해받는 것도 딱히 반갑지 않다.
-왜 그러나. 좋은 기회야. 흐흐······.
펠레리안이 음흉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더 마음에 안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전승에 따르자면 울루울룰루는 결국 죽는다고 한다.
머리 없는 붉은 뱀과 싸워 이기지만, 그 대가로 지치고 상처 입게 된다.
결국 스스로 불길 속에 뛰어들어 하늘로 승천한다는 결말을 맺는다.
죽는다는 거다.
'그러다가 저 고블린들이 날 산채로 불에 던지면 어쩔라고요.'
광신도만큼 무서운 게 없다.
나는 실제로 전생에서 광신도를 만나 본 적이 있다.
인간관계가 협소하기 그지없는 내게 먼저 다가와 준 친구가 있었다.
어쩐지 친절하더라니.
얼마나 친절했냐면, 내 조상님까지 걱정해 준 수준이었다.
조상님이 한을 품고 내게 달라붙어서 일이 잘 안 풀린다나.
오백만 원짜리 굿을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 줘서 아버지한테 이야기했다가 뒤지게 맞았다.
친구한테 미안하다고 하니까 싹 정색하면서 나를 산속의 기도원으로 끌고 간 적이 있었다.
맨발로 탈출했다가 택시비가 없어서 혼난 적이 있었지.
'하여튼 싫어요.'
-어리석은 고블린들을 네 추종자로 만들어서 고기 방패로 쓰면 좋을 텐데.
나는 펠레리안을 무시했다.
적어도 나나루크를 비롯한 정상적인 고블린들은 나를 울루울룰루로 착각하지는 않았다.
"저, 뱀신님."
나를 울루울룰루라고 부르는 고블린들을 무시했더니, 내게 다가온 고블린은 '뱀신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래, 이 정도는 넘어가자.
"제 아이가 아픕니다."
고블린 아줌마는 자신의 아이를 들이밀었다.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인다.
병에 걸린 것 같은데.
"부디······ 으흐흑."
아니 나보고 어떡하라고요.
의사나 주술사를 찾아가세요.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어미를 무시하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여렸다.
-딱 봐도 탈수구만. 더러운 물을 마시고 설사병에 걸려서 음식도 제대로 못 먹었겠지.
그러나 내 곁에는 펠GPT가 있었다.
그의 원격의료는 훌륭했다.
-깨끗한 물로 고깃국이나 끓여 먹으면 나을 거다.
들었죠, 아주머니.
"어흐흐흑."
하지만 내게는 그 말을 전달할 수단이 없었다.
포션을 나눠 줄 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나는 반지를 낀 꼬리를 휘둘렀다.
내 아공간 배낭에는 다양한 것이 들어 있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많이는 못 넣었지만, 비상식량도 들어있다.
토막 난 악어 꼬리 고기가 튀어나왔다.
"이, 이건······."
아기도, 그 어미도 홀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블린들이 사이가 좋다고 해도 굶주리는 자들은 있는 것이다.
*「초급원소마법: 물lv1을 사용합니다.」
불쌍한 고블린에게 물대포를 쏜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물줄기가 쪼르륵 떨어지기 시작한다.
고블린들이 놀라 입을 벌렸다.
"울루울룰루가 울부짖자 마른하늘에 비가 내리더라······."
"울루울룰루다!"
아니 구경꾼 중에서 또 주술사가 끼어 있을 줄이야.
사아악!
나는 울부짖지도 않았고 이건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고블린 아주머니는 나와 물줄기를 번갈아 보더니 가죽 물통을 꺼내 받았다.
"신성한 물······ 감사합니다."
그냥 물이에요.
그래도 흙탕물을 퍼마시는 것보다는 백배 나을 것이다.
깨끗할 테니까.
"울루울룰루는 생명의 물을 토해 내 병자들을 치유할지니······."
"울루울룰루! 울루울룰루!"
저 미친 주술사.
잡아먹으면 경험치가 나올까?
한번 실험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모여 있는 군중들을 피해 도망쳤다.
하지만 한 번 박힌 선입견은 무서웠다.
그 이후로 나를 울루울룰루라고 착각하는 이벤트는 몇 번이나 벌어졌다.
뱀에게는 야콥슨 기관이라는 게 있다.
입 안에 있는 또 하나의 후각기관인데, 혀에 묻은 화학물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뱀이 자꾸 혀를 날름대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물로 태어난 내게도 야콥슨 기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야콥슨 기관은 내게 특별한 능력을 선사해 주었다.
비가 오기 전에 알아채는 능력이었다.
한가롭게 햇살을 쬐면서 체온을 올리던 시점이었다. 고블린들도 날씨가 좋아서 빨래를 널곤 했다.
그런데 비 냄새가 났다.
변온동물인 뱀은 비를 맞으면 상태가 영 안 좋아지기 때문에 일단 허겁지겁 지붕 아래로 피했다.
우르릉-
그러자마자 뇌우가 쏟아지더니.
"울루울룰루는 벼락과 비를 부린다더니······."
"울루울룰루!"
어이가 없었다.
뇌우를 부리는 뱀이 왜 비를 피해 지붕 아래에 숨어 있어.
펠레리안은 껄껄거리며 즐거워했다.
그는 추앙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추앙받는 거지 사실 자기가 추앙받는 게 아닌데.
또 다른 일도 있었다.
던전을 찾아가기 전 레벨업을 하기 위해 사냥을 나섰다.
그러다가 큼지막한 곰을 잡는 데에 성공했다.
꼭 올빼미를 닮은 아울베어였다.
혼자 옮기기가 어려워서 고블린들을 불러 옮겼는데.
그중 한 고블린이 아울베어를 보고 울부짖었다.
"아아악, 아악!"
화들짝 놀랐다.
알고 보니 아울베어가 그 고블린의 아버지를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놈이야, 그놈이 맞아!"
"울루울룰루!"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정말 그 아울베어가 맞아?
난 고블린 얼굴도 잘 못 구별하겠던데 왜 저리 확신하는지 모르겠다.
조금 지쳤다.
펠레리안한테 진지하게 쟤들이 왜 저러는 건지 물어봤다.
-고블린이라는 종족이 원래 그러하다.
레이시스트다운 발언이었지만 잠자코 들어 봤다.
-고블린들은 본능적으로 믿고 의지할 대상을 찾는 종족이야. 성실한 만큼 복종을 잘하지, 태어나기를 피지배층으로 난 자들이다.
'말이 너무 심하시네.'
-모욕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지. 세상은 원래 양면적인 것이다. 고블린들은 신의 있고 충실한 종족이야, 오히려 인간보다 낫지. 다만 믿고 따를 대상이 필요할 뿐. 가련한 자들이라······.
그렇단다.
어쨌든 난 그들의 뱀신으로 군림할 생각은 없다.
슬슬 떠날 날이 다가왔다.
-좋은 생각이다. 저 고블린들을 노예로 삼으면 최고겠지만, 그러기 싫으면 하루빨리 내 던전으로 가야 해.
내 레벨도 어느덧 5가 넘었다.
아직 천뢰령은 쓰지 못했지만, 포션도 갖췄겠다. 슬슬 출발해야 했다.
진짜 고블린들이 던전을 털어 버리면 어떡해.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이곳에는 내가 머무는 집이 있었다.
다름 아닌 나나루크의 집이었다.
기둥을 기어 올라가 창문으로 스윽 들어갔다.
그러자 나나루크의 동생들이 반겨 줬다.
"흰둥아!"
"돌아왔네."
울루울룰루보다는 흰둥이가 나을지도?
얘들은 나를 뱀신님이라 부르며 귀찮게 하지 않았다.
너희 누나는 아직 안 돌아왔니?
"누나는 아버지한테 혼나고 있어. 금방 올 거야."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대답해 줘서 깜짝 놀랐다.
나나루크의 아버지는 이곳의 족장이었다.
굳이 따져 보면 그녀도 공주 같은 신분이었나 보다. 칼 들고 잘 싸우길래 상상도 못 했지.
그런데 아무래도 족장과는 사이가 나쁜 것 같다.
날이 어둑어둑해졌을 때였다.
나나루크가 돌아왔다.
"레치, 리안달, 카디람, 나 왔어."
나나루크는 남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레치와 리안달은 아직 애. 카디람은 홉고블린으로 진화한 전사였다.
그녀는 내게도 인사했다.
어라.
나나루크의 얼굴이 살짝 부어 있었다.
어디서 울기라도 했나?
그녀의 무신경한 동생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나나루크도 평소와 다른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 집은 나나루크와 동생들이 전부이니 구성원들은 다 모였다.
다 같이 저녁 식사를 나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고깃국이었다.
배를 잔뜩 채운 다음에는 잘 시간이었다.
방 하나에 지푸라기 같은 것을 푹신하게 깔아 두고 거기에 이불을 올려서 모여 잤다.
나나루크의 남동생들은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창문에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여기서의 나날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만.
펠레리안도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반지 속으로 들어갔다.
사실 그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반지 속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나는 간만의 조용함을 즐겼다.
솔직히, 유혹에 빠질 뻔했다.
이곳에서 그냥 머물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고블린들도 나한테 잘해 주고, 안락하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언제 요정 추적자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 이곳 고블린들도 위험해질지 모르고.
나는 더 강해져야 했다.
나는 나나루크를 보았다.
그녀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너도 고마웠어.
잘 지내렴.
내일 동이 트면 바로 떠나야겠다.
나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오늘은 좋은 꿈을 꾸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좋은 꿈을 꾸지 못했다.
세상에, 꿈속에서 그 미친 엘프 여자를 만난 것이다.
엘프 여자는 소검을 들어 나를 장어구이처럼 토막 냈다.
'꿈이었구나! 후우······.'
눈을 뜨니.
내 몸은 무사했다.
다만 심장이 계속 두근거린다.
그제야 악몽의 원인을 알아챘다.
생존본능, 내 친구가 위험을 알려 줬다.
방 안에 홉고블린 하나가 서 있었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칼을 들고 있는.
나나루크를 찔러 죽이려는 암살자가.
나는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은밀lv6을 사용합니다.」
*「가속lv5를 사용합니다.」
조용하고도 빠르게 접근하여.
놈의 발목을 콱 물어 주었다.
"흡!"
놀란 숨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보는 암살자 고블린.
안녕.
너 혹시 독 내성 있니?
딱 두 번까지 거절한다
035. 딱 두 번까지 거절한다
맹독: 신경독lv3이 우스워?
홉고블린 정도는 독 내성이 레벨 10 정도 되지 않는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쓰러지는 것조차 느리구나
아니, 안 쓰러지네.
홉고블린은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내게 칼을 휘둘렀다.
휘잉!
검은 나를 베지 못했다.
제법 빠른데, 강변에서 만났던 고블린들보다는 훨씬 낫다.
바닥에 부딪혀 소리가 나지 않도록 거리를 조절해 칼을 휘두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물 마법을 캐스팅해 대응했다.
"어푸푸푸!"
코를 골고 있던 나나루크가 일어났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머리맡에 놓아 둔 도끼를 움켜잡았다.
나나루크는 베개 아래에 도끼를 놔두는 참전사였다.
그녀의 도끼질은 쾌속하기 그지없었다.
쐐액!
하지만 도끼는 암살자의 목을 치는 대신 그 머리 위를 지나쳤다.
나나루크가 잠결에 실수한 것은 아니었다.
뻣뻣하게 굳은 암살자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그제야 신경독이 제대로 퍼진 것이다.
쿠웅!
"컥, 크헉, 컥!"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컥컥댄다.
정체를 밝혀라 암살자 고블린.
──────────────
[홉 고블린lv21]
[특성]
[암살자], [홉고블린]
[스킬]
[은밀lv10], [검술lv8], [암살lv7], [독 내성lv8] ······
──────────────
진짜 있었구나 독 내성.
생각보다 강하잖아!
나는 고블린 암살자의 강함에 깜짝 놀랐다.
그래도 내 신경독이 강하긴 한 것 같다. 독 내성이 lv8인데도 중독사시켰으니까.
그리고 진짜 기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헉!
당장 레벨이 오른 지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그 말인즉, 암살자 고블린이 준 경험치가 꽤나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 혼자 열심히 사냥했던 것보다 훨씬 효율이 좋다.
"암살자야, 크록이 보냈나?"
나나루크가 창백해져서 중얼거렸다.
그래, 희희낙락할 때가 아니었지.
펠레리안! 일어나!
펠레리안도 반지에서 튀어나왔다.
그도 잠은 자는 것 같았다. 비몽사몽한 얼굴로 손가락을 드는 것을 보니.
-저기 또.
창밖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나나루크가 칼을 휘둘렀다.
그녀는 제법 뛰어난 기예를 보여 주었다.
티잉!
날아오는 무언가를 칼로 튕겨 낸 것이다.
"독침!"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독침을 주워들었다.
아마도 바람 총으로 쏘아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독침을 쏜 것으로 보이는 홉고블린 암살자가 창문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나나루크가 독침을 손으로 되던졌다.
팍!
무림 고수인 줄 알았네.
나나루크가 던진 독침이 암살자의 어깨에 맞았다.
하지만 암살자는 쓰러지는 대신 낫 같은 무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독이 이 정도로 약하면 뭐하러 독침을 쏜 거야.
위험해 나나루크!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내가 도약했다.
암살자들은 갑옷 같은 것을 입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심장 파먹는 뱀의 시간이다.
콰작!
"아아악!"
진짜 어쌔신들은 칼에 찔려도 비명을 안 지른다던데. 훈련이 부족하구나.
암살자는 피를 뿜으며 넘어갔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진짜······ 심장 파먹는······."
그 심장 파먹는 뱀이 맞으시다.
어째선지 울루울룰루라는 이명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심장 파먹는 뱀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사냥감의 심장을 포식하면 더 많은 마성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내 이명의 특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확연하게 많은 양의 마성이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한 놈 정도만 더 잡으면 또 레벨업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간만의 폭렙에 신이 난 순간이었다.
"고마워, 너 덕에 살았어!"
나나루크가 나를 껴안고 감사를 표했다.
막타를 빼앗아서 솔직히 조금 미안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구해 준 거네.
당당하자.
"암살자가 왜 왔지 ······아!"
나나루크는 벌떡 일어섰다.
"족장님이, 아버지가 위험해!"
내가 알기로 나나루크는 룬가 부족 최고의 전사다.
홉고블린 중에서도 특히 강하고, 그녀를 추종하는 전사들이 많다.
전사 중에서는 나나루크를 새 족장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자들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암살자들이 굳이 나나루크만 암살하려 들까.
여기까지 암살자들이 왔다면 족장의 집에도 갔을 것이 분명했다.
"가자!"
안 그래도 갈 생각이었다.
레벨업은 못 참지.
나는 나나루크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내가 빠르게 기는 것보다 그녀가 달리는 게 훨씬 빨랐다.
"암살자다! 전사들은 모여!"
나나루크는 그렇게 외치며 달렸다.
기본적인 경비 체계는 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요란하게 종을 울렸다.
족장의 집은 마을의 중앙에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싸우고 있는지 멀리서부터 고함 소리가 들렸다.
죽어 나자빠진 고블린들이 여럿 있었다.
공기 중에 맴도는 피 맛이 혀에서 느껴진다.
죽은 이들은 모두 룬가 부족의 고블린들이었다.
그중에서는 나를 울루울룰루라고 부르며 호들갑을 떨던 이들도 있었다.
나는 나나루크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암살자 한 명이 족장을 지원하려고 달려오는 룬가 부족의 전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족장의 집은 불이 붙어 있다.
"부탁할게!"
내가 뛰어내린 것만으로도 나나루크는 내 의도를 짐작했다.
역시 말이 잘 통한단 말이야.
너는 내가 먹어 주마.
암살자 홉고블린이 그런 나나루크에게 달려들었지만.
*「초급원소마법: 흙lv4를 사용합니다.」
지면에서 흙 기둥이 솟아 암살자의 다리를 붙잡았다.
암살자는 몸을 한 바퀴 구르며 구속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품속에서 무언가를 흩뿌렸다.
조악하게 만든 단검 세 개가 한 번에 쏘아졌다.
나는 가볍게 피했······.
촤악!
앗.
단검은 내 생각보다도 빨랐다.
가죽이 갈라지며 긴 상처가 났다.
*「중독되었습니다.」
*「독 내성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아프다!
마치 불이 붙은 듯 상처가 뜨거웠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안 된다.
내 독 내성을 믿자.
도약과 가속을 연계했다.
두 스킬의 레벨이 꽤 올랐다. 나는 화살처럼 빠르게 튀어나갔다.
여기에 제대로 반응하는 고블린은 못 봤다.
"흐읍!"
그런 고블린이 여기 있었구나!
암살자 홉고블린은 반사신경이 뛰어났다.
놈이 뻗은 칼이 내 몸을 두 동강 낼 듯했다.
허공에서 간신히 몸을 비틀어 칼날을 피해 냈다.
이거 왜 이렇게 강해!
-쯔쯔, 홉고블린을 우습게 봤군.
나나루크의 집에서 암살자를 처치했을 때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들을 쉽게 잡은 것은 오로지 내가 기습을 했기 때문이었다.
-뱀의 사냥법을 잊었으니 그렇지.
잔소리하는 펠레리안.
하지만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오만했던 것 같다.
나는 아직 생후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
마법 좀 배웠다고 너무 세상을 만만하게 본 것인가.
괜히 암살자들이 경험치를 대량으로 준 게 아니었다.
정면에서 그들을 상대하려면 나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초급원소마법: 물lv1를 사용합니다.」
쪼르륵 흘러내리는 물이 암살자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리고 복면이 물에 젖으면 숨을 쉴 수 없는 법이다.
"업풉푸."
숨을 못 쉬자, 암살자도 당황했다.
그가 얼른 복면을 벗어 재꼈을 때.
나는 이미 그의 발목을 물고 지나갔다.
"큭!"
이 홉고블린도 독 내성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제 뱀의 사냥법을 떠올린 뒤다.
그대로 물러나서 숨어 버렸다.
심장은 다음에 먹어 주마.
결국, 암살자가 픽 쓰러졌다.
그래도 역시 성과는 짭짤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음, 오늘의 교훈을 잊지 말자.
내 분투로 인해 상황은 금방 진정되었다.
룬가 부족의 홉고블린 전사들도 달려와서 암살자 한 놈을 더 잡았다.
전사들이 불타는 족장의 집으로 난입했다.
곧, 나나루크가 족장을 부축하며 나왔다.
안에 잠입했던 암살자들도 무찌른 것 같았다.
생포한 적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쉽군.
족장의 부인은 무려 세 명이나 됐다.
셋 다 잔뜩 겁에 질린 모습으로 뛰쳐나왔다.
나나루크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의 피는 아닌 것 같고, 암살자의 것인 듯하다.
아니, 상처도 입었구나. 팔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뛰어난 홉고블린이군. 더 진화할 수도 있겠어.
펠레리안도 감탄했다.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고생했구나 나나루크.
네가 아버지를 구했어.
이제 부녀가 포옹하며 안도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겠지.
그리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족장은 상처 입은 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 첩들만 열심히 챙긴다.
내가 알기로 본처인 나나루크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래서 자식들이 따로 사는 것 같았고.
족장은 한참 지나서 나나루크에게 다가갔다.
고맙다 우리 딸, 그러겠지 싶었는데.
"이게 다 네년 때문이야!"
철썩, 하는 소리.
족장이 나나루크의 뺨을 때리는 소리였다.
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고블린들은 아닌 듯했다.
그들은 묘한 표정으로 부녀의 갈등을 바라봤다.
"네가 크록 족장의 심기를 건드려서 이런 것 아니냐! 진작, 진작 숙이고 들어갔으면······."
족장은 울먹거리고 있었다.
암살자들이 찾아온 게 그리 두려웠던 것이다.
"크록 족장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암살자라니······. 지금 당장 화친의 사절을 보내야겠다. 주술사!"
"족장님, 진정하십시오."
"진정하긴 뭘 진정해! 나나루크 저것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냐!"
"족장님!"
고성이 오고 갔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부녀관계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맘에 드는 놈이군.
'저 족장이?'
-저런 겁쟁이들이 다루기가 참 편하단 말이지.
나도 마음에 든다. 확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나나루크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울상을 짓고 있지 않았다.
나를 보더니 빙긋 웃으며 손을 내민다.
그 팔을 타고 올라가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소란스러운 밤이었다.
나나루크는 자신의 방에 돌아갈 때까지 울지 않았다.
* * *
눈물샘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좀처럼 울지 않지만, 한 번 울 때 마치 댐이 무너지듯 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눈물샘의 빗장이 부서지면 기어코 그 모든 내용물을 토해 낼 때까지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나루크가 그랬다.
동생들을 물려 놓고, 그녀는 작은 방에 틀어박혀 울었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며 말을 울음과 함께 토해 냈다.
그것을 통해 나는 여러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얼마나 비겁하고, 그녀가 얼마나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지.
룬가 부족이 얼마나 '좆된' 상황이며 크록이라는 자가 기어코 룬가를 습격해서 모두를 죽일 거라는 사실.
그녀는 그게 두렵다는 것까지.
내가 그녀의 오열을 1열 직관한 것은 오로지 내가 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나루크는 내 몸에 제 눈두덩이를 대고 있었다.
시원하지?
"이러면 눈이 덜 붓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네.
"······너는 울루울룰루가 아니지?"
얘까지 그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줬다.
당연히 아니지.
"네가 그 뱀이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크록도 물리쳐 줬겠지?"
그랬을지도.
하지만 나는 울루울룰루가 아니다.
암살자 홉고블린 하나도 간신히 상대하는 미약한 뱀일 뿐.
모르겠다.
언젠가 진화하면 정말 그 울루울룰루처럼 강해질까.
그러면 내게 친절했던 이 불쌍한 홉고블린 여자애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떠나지 마."
나나루크는 내가 아침에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말했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생명의 물을 만들어서 챙겼잖아. 그리고 오늘은 동생들이 장난치는 것도 얌전히 받아 줬고. 원래 떠날 사람은 갑자기 친절해지는 법이거든."
음, 똑똑한 아이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오히려 내가 여기 남는 게 더 위험할걸.
언제 요정 추적자가 찾아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이코패스 같던 요정들이 나랑 친한 고블린들을 가만히 둘까.
-음, 부정할 수가 없군.
펠레리안이 인정한 사실이다.
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젓자, 나나루크는 슬퍼했다.
그러다 그녀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는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정말 울루울룰루일지도 몰라."
'아니라니까 그거.'
"어쩌면 지금은 아니라도 울루울룰루로 진화할지도 모르지."
'······어라, 그런가?'
내 진화트리에 울루울룰루가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잠깐 기다려 봐."
그녀는 갑자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자를 꺼내서 올라가더니, 천장의 나무판자를 조심스럽게 뜯어 낸다.
거기서 뒤적뒤적 무언가를 꺼내 왔다.
그것은 아주 잘 밀봉된 작은 상자였다.
"이거 우리 어머니가 남겨 주신 건데······."
뭐야, 뭔데.
아주 오래된 것 같은 상자는 벌집을 녹여서 발라 꼼꼼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그것을 거침없이 뜯어 내는 나나루크.
상자를 연 순간 청아한 향기가 퍼졌다.
"네가 먹어 봐. 그러면 진화할지도 몰라."
음······.
이거.
──────────────
[내단: 크림슨 타란튤라 킹]
──────────────
아, 음.
"우리 어머니의 아버지가 결사대를 꾸려서 사냥한 마물의 내단이야. 먹으면 진화할 수 있대."
아니, 내단을 먹는다고 진화는 못 할걸.
그리고 그런 귀한 걸 왜 나한테.
아무리 몸에 좋은 걸 좋아한다고 해도 눈치가 보인다.
그러나 눈이 돌아간 사람, 정확히는 요정이 한 명 있었다.
-먹어라-!
펠레리안이 강력히 외쳤다.
아니 그래도······.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먹어 봐."
-먹어!
왜 이래 둘 다.
내가 돌아와 너희를 이끌겠노라
036. 내가 돌아와 너희를 이끌겠노라
'크림슨 타란튤라 킹'이래.
레드가 아니라 크림슨(Crimson)이란다.
블랙보다 다크가 멋있고, 블루보다 울트라 마린이 멋진 것처럼.
레드보다 크림슨이 더 멋지다.
그리고 내 경험상, 멋진 수식어가 붙은 마물일수록 강하다.
킹이라는 명칭도 그렇다.
왕이란다. 거미 왕.
엄청나게 강한 마물 아닐까.
나도 언젠가 파이톤 킹 같은 게 되고 싶다.
-고블린들이 크림슨 타란튤라 킹을 잡았다고······.
펠레리안은 그 마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에 대해 질문했다.
절대 내단이 탐나서는 아니었다.
-크림슨 타란튤라는 내가 파프나챠를 만들 때 융합하고 싶었던 마물이지. 하지만 그 개체가 무척 희귀해서 그레이 타란튤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킹은 또 뭔데요.'
-크림슨 타란튤라 중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고 성장한 개체는 킹으로 진화한다.
하여튼 강한 마물이라고 한다.
고블린들이 다수라고 해도 많은 희생을 치렀음이 분명했다.
나나루크의 할아버지가 죽을 각오로 잡아 후손에게 남겨 준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날름 먹어 치울 수는 없다.
다시 가져가.
내가 내단이 담긴 상자를 다시 밀어 냈다.
-크림슨 타란튤라가 내단을 만든 케이스는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대체 얼마나 엄청난 효과를 가지고 있을지!
'······.'
저 사악한 노인네가 자꾸 내 마음에 심마를 심어 놓으려고 한다.
들리지 않는다. 귀가 없어서 막을 수도 없고.
그런데 나나루크는 다시 한번 상자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난 못 먹어. 네가 먹어."
너 지금 감성적인 상태라니까.
내일 후회할 수도 있어.
하지만 나나루크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나는 이걸 못 먹어. 내단의 존재는 아버지한테 비밀로 했거든."
자초지종이 있었다.
나나루크의 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렴풋이 내단의 존재를 알았던 족장은 그것을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전처는 필사적으로 내단을 숨겨서 자신의 딸에게 넘겼다.
나나루크는 그것을 계속 비밀로 간직하고 있었고.
"이 내단에는 독이 섞여 있어. 채취할 때 잘못해서 섞여들어 갔나 봐. 나는 독 내성이 그리 높지 않아서 먹으면 분명 중독될 거야. 그리고 먹은 뒤에는 분명 티가 나겠지······."
강해져서 티가 날 거라는 뜻인가.
그게 왜 문제일까.
"아버지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지금도 나를 미워하시는데."
나나루크.
바보 같고 마음 약한 나나루크야.
그 한심한 아버지가 너를 미워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니.
내가 보기엔 차라리 네가 족장을 하는 게 낫겠더라.
"어차피 먹을 사람도 없어. 그리고 워낙 오래돼서 효과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
"네가 울루울룰루가 되지 못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게."
그리 말한다면 먹어 주는 것이 도리겠지.
사실 입에 침이 고이기는 했다.
나는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최대한 근엄하게 내단을 먹었다.
이야, 맛이 쌉싸름하다.
독이 들어 있다는 게 정말이었다.
*「중독되었습니다.」
*「독 내성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으 취한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실수 안 하도록 조심해야겠다.
"너, 몸이 뜨거워지고 있어."
나나루크가 나를 걱정했다.
괜찮아. 난 독 내성이 높으니까.
*「독 내성lv6이 독 내성lv7이 되었습니다.」
스킬 레벨까지 올랐다.
덕택에 조금 더 속이 편해졌다.
그리고 내단의 효험이 몸에 퍼졌다.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
이것은 처음부터 독 때문이 아니었다.
몸이 뜨겁다.
마치 불덩이를 삼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친절한 지네 부부의 내단을 먹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아프고 고통스럽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꿈틀댔다.
그래도 고통은 가시지가 않았다.
"어떡해······!"
나나루크가 호들갑을 떨었다.
왜, 뭔데.
-살가죽이 벗겨지고 있군.
뜨악. 정말이다.
나나루크의 손바닥에는 내 가죽이 붙어 있었다.
살구색 무늬가 선명한 흰 가죽이.
*「육체가 급속도로 성장합니다.」
*「탈피가 시작됩니다.」
아 탈피였구나. 다행이네.
당황하는 나나루크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제야 그녀도 진정했다.
*「비늘이 강인해집니다.」
*「특성, 비늘이 생성됩니다.」
*「무늬가 선명해집니다.」
*「무늬에 마성이 깃듭니다.」
내단의 효과는 대단했다.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확연히 몸이 커진 느낌이 났다.
원래 탈피도 제법 고생스러운 일일 텐데,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물론 아프기는 더럽게 아팠다.
내가 땀샘이 있었다면 식은땀 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몸이 이렇게 쑥쑥 자라났는데.
나는 확연히 변했다.
우선 몸이 굵고 길어졌다.
2m 정도 됐었는데, 그것보다 확실히 길어진 듯하다.
몸통도 두꺼워져서 이제는 결코 작은 뱀이라고 부를 수 없으리라.
다른 것보다 확연한 변화는 비늘과 무늬였다.
연한 살구색 무늬는 색이 선명해졌다.
비늘은 도톰해졌고 윤기가 돈다.
특성에 비늘이라는 게 생겼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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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더블혼 파이톤lv5]
[특성]
[불굴], [정진], [뿔], [무늬], [비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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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었다.
──────────────
[비늘]
강인한 비늘을 가졌습니다.
──────────────
전체적으로 방어력이 올라가는 류의 특성인 것 같다.
무늬와 시너지 효과가 나지 않을까.
무늬는 마법 방어, 비늘은 물리 방어라는 식으로.
역시 내단의 효과는 훌륭하다.
거미는 지네만큼이나 무협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영물.
지네 부부의 내단이 내 눈을 밝게 했다면 타란튤라의 내단은 종합선물세트 그 자체였다.
하지만, 기뻐하기는 조금 일렀다.
*「크림슨 타란튤라의 원혼이 서린 내단을 섭취했습니다.」
에이.
내가 사냥한 것도 아닌데.
*「크림슨 타란튤라는 고블린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당신은 거미형 마물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사게될 것입니다.」
키메라때도 그렇고 거미와는 악연을 맺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점도 돌아왔다.
*「지네형 마물과의 우호도가 상승합니다.」
*「지네형 마물이 호의를 베풀 확률이 올라갑니다.」
지네랑 거미랑 사이가 안좋고 그런건가.
오히려 좋다. 나는 지네가 좋거든.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명을 한 번 더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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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심장 파먹는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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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명은 그대로 심장 파먹는 뱀 뿐이었다.
그렇게 여러 고블린들이 나를 울루울룰루라고 부르는데, 새 이명으로 붙지는 않았다.
번개를 뿜지 못해서일까.
나는 여전히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이다.
울루울룰루 따위가 아니었다.
날개도 달리지 않았고, 검기는커녕 흰 뱀이다.
미안, 나나루크.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조금 슬퍼 보이는 것 같았는데.
"아하하, 역시, 아니었구나."
아니라고 했잖니.
"이제 자자, 미안 나 때문에 고생했네."
나나루크는 촛불을 껐다.
그러고는 이불을 대충 껴안고 드러누웠다.
잠을 청하는 듯하다.
곧 새벽 동이 틀 것 같은데.
나도 옆에 똬리를 틀고 누웠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
* * *
어우 개운해.
솔직히, 아주 푹 잘 잤다.
피곤했는지 금방 곯아떨어졌다.
새 사람, 아니 새 뱀이라도 된 기분이다.
어젯밤에 했던 첫 탈피 덕택이겠지.
몸에 좋은 내단을 먹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나는 혼자였다.
룬가 마을에서 떠났다 이 말이다.
작별은 생각보다 싱거웠다.
나를 울루울룰루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피해서 몰래 새벽에 나왔기 때문이다.
나나루크는 잠을 못 잔 게 분명했다.
내가 슬그머니 나오려고 했을 때 곧바로 일어나서 배웅해 줬거든.
그녀가 선물해 준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 삼켰다.
맛있구만.
뒤를 돌아봤다.
잠시 신세를 졌던 룬가 부족의 마을이 저 아래 내려다보였다.
다시 볼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건강하게들 지내세요.
결국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게 뱀생인 법이다.
펠레리안도 잠을 자고 있었다.
깨어 있을 때는 하루 종일 주절대는 양반이지만, 늘 깨어 있지는 못했다.
마력이 부족해서란다.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듯, 공기 중에 있는 마력을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다만 그것으로 마법을 쓰기는커녕 형태를 구현하고 정신을 깨우는 게 한계라는 이야기였다.
확인해 본바,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저 산봉우리 너머가 목표이다.
나는 혼자였지만 숲은 조용하지 않았다.
온갖 새소리와 벌레 우는 소리.
수풀이 버스럭대는 소리가 가득하다.
축축한 이끼를 타고 기어가는 내게는 조금의 소음도 나지 않았다.
작은 동물들이 나를 보고 도망쳤다.
다람쥐도 도망치고, 귀뚜라미는 펄쩍 뛰어나간다.
냄새가 진한 꽃에 붙어 있던 나비 수십 마리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이러니까 확실히 내가 더 이상 옛날의 그 실뱀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숲의 포식자 지나가신다.
위풍당당하게 한참을 기어갔다.
쿠웅!
깜짝이야.
반사적으로 나무뿌리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너무 체면 떨어지는 짓 아닌가 생각했는데, 옳은 판단이었다.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
평범한 코끼리가 아니라 마물 코끼리다.
긴 코끝에 철퇴 같은 것이 달려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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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스타 코끼리lv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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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무서워.
레벨은 9밖에 안 되지만 자세한 상태창이 안 보인다.
나보다 강한 것이 틀림없었다.
군터 때처럼 정신을 집중하면 드문드문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잠깐만 나무뿌리 아래에 숨어 있자.
우지끈.
꾸-오오오-
모닝스타 코끼리가 내 앞을 지나쳐 갔다.
놈은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지 코를 휙 저었다.
쾅, 하며 애꿎은 나무 하나가 부러졌다.
무섭다 대수림.
멀어지는 코끼리를 보니, 엉덩이에 상처가 나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싸우다가 도망치기라도 하는 중인가.
저런 코끼리를 쫓아내려면 아주 강하거나 쪽수가 많아야 할 것이다.
조심스레 다시 전진했다.
오늘 내로는 바위 봉우리 앞까지 도착하면 좋겠다.
그러면 내일쯤에는 코끼리 바위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내 전진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두두두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근처에는 피할 만한 바위틈이나 나무 뿌리가 안 보였다.
다 내가 너무 커져 버린 탓이다.
나는 검은 흙에 물이 고인 진창에 굴렀다.
위장크림이라도 바른 것처럼 몸이 가려졌다.
흰색이 멋지긴 하지만 눈에 띈다는 단점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나무 그림자 아래에 웅크려 있자 발소리의 주인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타조 떼였다.
머리에 뿔이 달린 타조들이 요란하게 숲을 지나갔다.
다섯 마리는 되는 것 같다. 역시 만만한 놈들은 아닐 터.
깜짝 놀랐다.
마지막으로 지나가는 타조의 엉덩이에 꽂혀 있는 것은 분명 화살이었다.
화살이라고?
룬가 부족의 사냥꾼들이라도 있나.
하지만 어째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타조가 달려온 방향으로 기어가 보았다.
내 귀에도 명확한 소음이 들렸다.
고블린 여럿이 모여 있는 듯한 소리다.
팔라무 우림은 숲이 우거졌다.
조금 움푹이 들어가 있는 저지대는, 높은 곳에서 관찰하지 않는 이상 뭐가 있어도 알 수 없다.
그런 은밀한 장소에 고블린들이 있었다.
"으하하하, 병신."
"닥쳐 이 새끼야!"
거친 고블린 전사들이다.
그들이 이곳에 숙영지를 차려 두고 있었다.
조악한 천막이 있었고, 천막에는 빨간 염료로 칼과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저 문양.
내 명석한 두뇌는 곧바로 떠올렸다.
나를 심장 파먹는 뱀이라고 불렀던 크록 부족의 고블린.
놈이 '물러나라 추악한 형상아!'라고 외치며 들었던 그 목걸이였다.
지금 내 아공간에도 바로 그 목걸이가 있었는데.
즉, 저들은 크록 부족의 전사들이다!
그들이 왜 여기에 모여 있을까.
수가 일백은 넘는 것 같다.
특히 잘 무장한 홉고블린 전사도 서른은 되어 보였다.
가죽 갑옷까지 입고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심장을 파먹을 수도 없을 듯하다.
"아유타르 대장! 타조 이거 다 구웠습니다!"
"오냐!"
덩치가 큰 홉고블린 하나가 천막을 열고 나왔다.
──────────────
[홉 고블린 대장 아유타르lv30]
[이명]골통분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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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이 대장이구나.
강해 보인다.
게다가 골통분쇄자라는 심상찮은 이명도 있다.
이명이 있는 고블린은 처음 보네.
나나루크보다도 강하려나.
크록 부족이 얼마나 강할지 모르겠지만, 룬가보다 조금 나을 정도라면 정예들을 모아 둔 것 같다.
이들이 룬가 부족을 기습하려는 것이다.
지금 룬가 부족은 적들이 쳐들어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다.
'어······ 어떡하지.'
나는 반지를 흔들었다.
일어나 보세요, 영감님.
곧 펠레리안이 반지에서 튀어나왔다.
머리는 잘 돌아가는 양반이다.
내가 추론한 것을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도 상황을 곧바로 파악했다.
-하늘이 나를, 우리를 돕는구나!
그리고 그는 곧바로 쾌재를 내질렀다.
-룬가 부족이 미끼가 되어 주겠구만. 정예를 빼 놨으니 크록 그놈들의 본진은 텅텅 비었을 것이다. 쳐들어가자!
와!
역시 선생님.
솔직히, 그건 저도 이미 생각한 겁니다.
근데 그러면 룬가 부족은 아주 박살이 나겠죠?
-내가 본 꼬라지로는 분명 그리되겠지. 그런데 무슨 상관이냐? 그깟 고블린들이 서로 죽이고 자빠지든.
펠레리안적 사고를 한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펠레리안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나는 펠레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싫으냐?
'근데 생각해 보면, 저기는 족장이 없네요. 크록 부족에서 제일 강하다는 게 그 족장이라는데.'
-그렇지.
'그러면 족장은 코끼리 바위에 있겠죠? 거기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면 뭐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고. 아마 던전의 입구를 찾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합리적인 추론이야.
'애초에 경비가 조금 느슨해졌다고 해도 저 혼자 던전 입구까지 잠입하는 건 어렵지 않겠냐는 말이에요. 투명화 마법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또한 맞다.
'차라리 어리석은 룬가 부족의 고블린들을 이용해서 소란을 일으키고, 그사이에 입구를 찾는 게 맞는 것 같다는 말이죠. 흠.'
아마도 내가 안경을 썼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슬쩍 안경을 치켜올렸으리라.
하지만 냉철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펠레리안은 음흉히 웃을 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애초에 결정을 내려두고 상황을 끼워 맞추는 듯하구만.
사실이다.
뭐, 나는 마음을 이미 정했다.
-그래도 저놈들이 습격할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냐. 평범한 뱀이 손짓 발짓해 봤자 들어 줄 리가 없지 않나.
'평범한 뱀은 이미 죽었습니다.'
-오잉?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해 줘야지.
-난 지금부터 울루울룰루에요.
그게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 * *
"누나, 흰둥이는 갔어?"
레치가 그리 물었다.
소년은 뱀을 계속 울루울룰루라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누나를 따라 흰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나루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응 갔어."
"정말 하늘로 승천한 거야?"
뱀을 진지하게 울루울룰루라고 믿던 이들은 뱀이 사라지자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나나루크는 그 착한 뱀이 코끼리 바위로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동생에게는 그리 말할 뿐.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나나루크!"
"뭐야 자디람."
자디람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울루울룰루가, 울루울룰루가 돌아왔어!"
"뭐라고?"
자디람은 그 뱀을 한 번도 울루울룰루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나나루크는 얼른 나가서 자디람을 따라갔다.
이미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나나루크는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리고 경악했다.
뱀이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 뱀은 온몸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강풍이 사방에 몰아친다.
땅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덜덜 떨렸다.
마른하늘에 물보라가 흩날리고.
무엇보다 뱀이 입에서 불을 뿜고 있었다.
"아아······."
가장 앞에 있던 늙은 대주술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루울룰루가 돌아왔다!"
그녀가 뱀의 이름을 외쳤다.
번쩍
037.
이 정도면 당당한 한 마리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초급원소마법: 물lv2를 사용합니다.」
*「초급원소마법: 불lv3을 사용합니다.」
*「초급원소마법: 흙lv4를 사용합니다.」
*「초급원소마법: 바람lv2를 사용합니다.」
내가 쓸 수 있는 마법 네 가지를 전부 사용한다.
입에서 불을 뿜고, 허공에는 물보라가 몰아치며, 땅은 꿈틀대며 진동한다.
각각의 현상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 개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자 제법 장관이었다.
물론 이 짓을 오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3.
2.
1.
끝!
*「마력이 고갈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마력통이 크지 않은 나다.
네 가지 마법을 최대 출력으로 뿜어 대자, 금방 마력을 다 써 버렸다.
마력이 고갈되면 끔찍할 정도로 졸리다. 몸이 피곤함은 물론이다.
게다가 크록 부족의 전사들을 보자마자 전속력으로 돌아왔으니,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억지로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흰둥이면 몰라도, 울루울룰루라면 이렇게 쓰러지면 안 된다.
수고로움을 무릅쓴 보람이 있었다.
장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나를 울루울룰루라고 제창하던 고블린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를 전설의 뱀이라고 믿는 이들은 합장을 하고 있다.
고개를 들고 있는 이는 하나뿐이었다.
나나루크.
그녀는 환히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나루크가 찾아와서 다행이다.
다른 고블린들한테는 지금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울루울룰루, 돌아왔구나."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던 나나루크가 그렇게 말했다.
장난기가 섞여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주 진지해.
뱀은 성대가 없다.
그러니까 마법과 꼬리, 그리고 몇 가지 물건을 이용해서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꽤 떨어진 언덕 너머에 크록 부족의 전사가 백 명 넘게 있다.
밤이 되면 그들이 이곳을 습격할 거야. 모두 대비해야 해!
말하지 않고 그런 내용을 설명하기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예전에 전리품으로 얻었던 크록 부족 목걸이를 아공간에서 꺼냈다.
그리고 바닥에 고블린 숫자로 100을 쓰고, 언덕을 가리키고, 꼬리로 창질하는 고블린을 흉내 내면서.
이쪽으로 왔다가 저쪽으로 왔다가 우루루루 울룰룰루.
일백 고블린의 울음소리 산곡중에 가득허고 골통분쇄자의 대병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헉헉.
혼자서 적벽가 판소리를 완창한 듯 힘들다.
내가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고블린들은 다 얼빠진 듯 쳐다본다.
확실히 어리석은 자들에게 드높은 뜻을 전하는 것은 무리였나 싶었는데.
나나루크가 경악해서 외쳤다.
"크록 부족의 고블린 전사들이 오고 있다고!"
"뭐야?"
"저, 정말!"
뜻을 알아주는 친구는 한 명으로 족하다더니.
척하면 딱 알아주는 나나루크가 새삼 고마웠다.
아니, 이 정도로 잘 알아듣는 건 신기할 정도인데.
어쨌든, 이제부터 나는 고개만 끄덕이면 됐다.
탄식과 경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울루울룰루님, 진실입니까!"
얼굴에 문신이 빼곡한 할머니, 대주술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음음 그래그래. 놀랍지만 사실이야.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확인해 줬다.
역시 울루울룰루의 권위를 빌린 것은 잘한 것 같았다.
-이명이 새로 생기지는 않았군.
혹시나 이명이 생기지 않을까 했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이미 충분히 많은 고블린들한테 울루울룰루라고 불리는 것을 감안하면, 그 이름에 걸맞은 행적을 보여야 하는 걸까.
-원래 대단한 이명일수록 얻기 어려운 법이다.
펠레리안이 그리 말했다.
하긴, 그럴 것 같다.
나나루크의 표정이 냉철해졌다.
"자디람, 당장 타조를 타고 가서 확인해 봐. 깃발 가져가고."
역시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한 고블린이다.
자디람이라는 홉고블린이 타조를 타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전사들은 모두 무장한다. 홉고블린 서른이면 크록 부족의 정예가 분명해."
그녀의 명령에 따라 고블린들은 무장을 준비하러 흩어졌다.
"크록 족장도 혹시 있었어? 해골 목걸이를 차고 있고 나보다 머리 두 개는 큰 고블린인데."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들의 우두머리는 골통분쇄자 아유타르라는 고블린이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나나루크가 안도했다.
그 크록이라는 족장이 그 정도로 강한가? 한번 보고 싶네.
고블린들은 내 주장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나를 울루울룰루로 믿어서인지, 아니면 원체 순진한 종족이기 때문인지 헷갈렸다.
룬가 부족은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분주한 와중이었다.
배가 불룩 나온 고블린이 나타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앗!"
다름 아닌 족장이었다.
"저게 울루울루루라고, 그냥 검은 진흙 묻은 뱀이잖아!"
헉, 유전은 유전인가.
나나루크도 그랬지만, 족장은 내가 울루울룰루라고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족장!"
대주술사 할머니가 엄하게 외쳤다.
족장은 듣는 척도 안 했다.
"크록 족장이 갑자기 전사들을 보냈을 리 없어. 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는데!"
"아버지, 크록은 포악한 자예요!"
"네가, 네가 족장인 나를 무시하는 거냐!"
어제부터 느꼈지만, 나나루크의 아버지는 나를 나쁜 뱀으로 만든다.
자꾸 발목을 물어 주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멈춰라, 전사장이 아니라 족장의 말을 들어!"
썩어도 족장은 족장이라는 건가.
무장을 갖추려던 전사들은 어쩔 줄 몰라 머뭇거렸다.
나나루크가 재차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무장 갖춰! 타조 준비하고."
"네가 날 거역하는 것이냐, 모두 멈춰!"
나나루크와 족장의 대립이 확실해졌다.
나나루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꽉 쥔 주먹이 희게 질려 있었다.
그래, 그걸로 족장을 후려쳐.
아니면 내가 해치워 줄게.
"저기!"
그때, 어린 고블린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모두가 돌아봤다.
저 언덕 위에, 떠났던 자디람이 타조를 탄 채 달려오고 있었다.
점처럼 작게 보이지만, 그가 깃발을 든 것은 분명했다.
붉은 깃발.
적들을 찾았다는 신호였다.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모두가 나나루크와 족장을 돌아봤다.
이제 족장도 정신이 좀 들었겠지 싶었는데.
"침략을 위해서 온 것은 아닐 거다······ 사절일지도 몰라."
종종.
안 좋아지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가 있다.
기어코 벼랑 끝까지 밀려나서 추락하기 직전까지 현실을 회피하는 자들.
나도 한때 비슷한 인간이었기에 무슨 마음인 줄은 알았으나.
-저리 놔 둘 거냐?
'아뇨.'
나는 족장을 깨물겠다고 결심했다.
조용히 기어가는 내 옆을, 나나루크가 지나쳤다.
그녀가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족장은 턱을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컥, 바, 반란······."
나나루크는 족장이 더 말하게 두지 않았다.
족장의 팔을 뒤로 꺾는다.
허리춤에서 노끈을 꺼내 족장의 양손을 묶었다.
족장이 발악했지만 나나루크는 아예 그의 입까지 틀어막았다.
모두가 이 갑작스러운 반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 ······족장님이 제정신이 아니시다."
그러나 나나루크는 차갑게 명령했다.
"자택으로 모셔 둬. 전사들은 출전을 준비해라. 모여서 진격한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홉고블린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꿈틀대는 족장을 끌고 갔다.
그다음으로 대주술사 할머니가 나섰다.
"전사장 나나루크여."
그녀는 전사들이 족장을 끌고 가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족장이 차고 있던 비취 목걸이를 빼앗아 나나루크에게 걸어 주었다.
"대주술사가 참관한 결투에서 승리했으니."
결투라고.
화끈한 할머니다.
"지금부터 그대가 룬가의 족장이다."
나나루크는 싱긋 웃었다.
그녀를 따르는 전사들도 활짝 웃는다.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몰래 눈물을 훔치던 소녀는 더 이상 없었다.
한 부족을 이끄는 전사만이 남았을 뿐.
나나루크의 지휘에 따라 전사들이 모였다.
최소한의 경비 인원을 제외하고 결집한 전사의 수는 대략 여든 명.
그중 홉고블린은 스물.
말처럼 타고 다닐 수 있게 길들인 레드 크로우 타조가 서른 마리.
크록 부족의 정예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적은 수였다.
"나가서 격퇴한다."
나나루크가 내린 결정은 그랬다.
마을까지 적들을 접근하게 둘 수는 없다.
이곳에 성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전투 인원이 많은 마을에서의 전투는 어불성설.
그녀의 명령에 의해 룬가의 전사들이 출격을 시작했다.
"울루울룰루."
나나루크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옷에 검은 진흙이 묻었다.
"윽, 진흙."
감수해라, 새 족장.
"확실히 무거워졌네."
그녀는 내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돌아와 줘서. 알려 줘서."
어차피 나도 너희들이 필요해서였어.
나나루크는 과감한 사람이었다.
단순히 공격을 방어할 생각이 아니었다.
적의 정예들을 깨부수고, 그 기세로 빈집이 된 크록 부족까지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동안 나는 던전의 입구를 찾아 들어갈 거다.
"출격!"
나나루크가 외쳤다.
* * *
날이 어두워졌다.
도시의 밤과 대수림의 밤은 비교할 수 없다.
하늘에는 별빛이 빼곡하지만 지상에는 어둠의 장막이 드리웠다.
드높이 자란 나무들 때문에 횃불을 들고 걸어도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룬가 부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눈앞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즉, 지금 크록 부족 전사들이 있는 곳이 저지대라는 것이다.
그들의 습격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대장, 애들이 많이 흥분했습니다."
아유타르의 곁에 외눈의 고블린 전사가 다가왔다.
"약탈을 허락해 주시죠."
아유타르가 수하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불허할 이유가 없었다.
이 정도 병력이면 룬가 부족을 쳐부수기는 충분하다.
"마음껏 약탈하고 깨부숴라."
"감사합니다, 으하하핫!"
소리를 낮춘 웃음소리가 퍼졌다.
룬가 부족이 타조 부대를 운영하는 것과 달리, 크록에서는 늑대를 탈것으로 활용했다.
늑대는 포악해서 길들이기가 힘들지만 타조보다 더 강했다.
늑대 기수들이 저들의 늑대를 달래면서 조용히 걸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나무가 적어지고 노출된 개활지가 나타났다.
저곳을 통과해서 언덕을 넘어야 룬가 부족의 마을이 보일 것이다.
그때였다.
아유타르가 갑자기 전사들을 멈췄다.
"무슨 일입니까."
아유타르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언덕을 응시했다.
"······척후로 늑대 기수들을 보내라."
여태까지 척후조는 보내지도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하지만 아유타르의 지시에 반문하는 것은 금지였다.
그의 수하는 늑대 기수 둘을 보냈다.
늑대 기수들은 정찰을 위해 언덕 너머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돌아 내려왔다.
횃불도 없이 출발한 이들이었다.
내려오는 그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왜 저리 비틀거려?"
다만, 조금 이상했다.
숙련된 기수들일 텐데 늑대에 타고 있는 자세가 불안정하다.
무언가를 후두둑 흘리기도 했다.
그들이 횃불의 빛이 닿는 곳까지 다가왔고.
곧,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모, 목이······!"
기수 하나는 목이 잘린 채 돌아왔다.
결국 철푸덕 떨어졌다.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늑대가 죽은 기수를 물어뜯는다.
나머지 하나는 목이 붙어 있었다.
아유타르가 분노해서 그 기수에게 다가갔다.
"뭐야, 이 얼간이 같은 새끼야!"
왜 목이 잘려 돌아왔냐. 그렇게 윽박을 지르려 했다.
"켁, 케엑."
하지만 기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숨넘어가는 소리만 했다.
"샬려, 켁, 케엑!"
겁도 없이 아유타르에게 쓰러지듯 매달린다.
중독된 게 틀림없다.
경험적으로 그것을 눈치챈 아유타르가 수하를 밀쳤다.
수하는 그대로 바닥에 철푸덕 쓰러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늑대 기수 둘 다 홉고블린이다.
정예 전사가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
아유타르는 낮게 으르렁댔다.
"전부 횃불 꺼라."
횃불을 전부 끄자, 전사들은 어둠 속에 휩싸였다.
휘익!
아유타르가 휘파람을 불자, 크록의 전사들이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개활지로 진입했다.
양옆에는 숲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좌우를 신경 쓰며 간다.
그런 명령이 앞에서부터 뒤로 전달되었다.
선두에서 걷던 아유타르가 우뚝 멈춰 섰다.
언덕 위에 타조를 탄 홉고블린 몇 명이 나타났다.
"······용케 우리의 접근을 눈치챘나 보군."
"룬가 족장, 나나루크."
젊은 홉고블린 여자가 앞으로 나서서 자신을 소개했다.
"골통분쇄자 아유타르다. 나나루크? 전사 여자 아닌가."
"이제 족장이다."
"원래 족장이었던 멍청한 놈이 드디어 뒈졌나 보군."
나나루크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오는 걸 알았으면서 겨우 네놈들밖에 없나?'
홉고블린 몇으로 일백 전사를 상대하려는 것인가.
그 터무니없는 만용에 크록의 고블린들이 비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리고, 언덕 너머에서 수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섯 대의 수레에는 바위가 꽉 차 있었고, 뾰족한 창까지 묶어 두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어."
"이- 미친-!"
아유타르는 나나루크의 계획을 곧바로 눈치챘다.
수레를 밀고 올라온 고블린들이 손을 놓았다.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아니, 빠르지 않아 보였을 뿐이다.
육중한 무게가 실린 수레는 경사를 따라 내려오면서 점차 가속도가 붙었다.
드드드드드-
창이 꽂혀 있는 것보다 그 중량 자체가 문제였다.
치이면 그대로 으깨질 것이다.
아유타르가 이를 악물었다.
저것만 피하면 문제는 없다.
"양옆으로 산개해-!"
그의 목소리가 어두운 언덕을 쩌렁쩌렁 울렸다.
수하들은 즉시 명령에 따랐다.
아니, 따르려고 했다.
양옆의 숲.
그 어둠 속에서 화살이 날아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피피피핑-
나나루크의 명령에 따라 몰래 우회해 온 고블린들.
횃불도 없는 어둠 속에서, 그들의 화살은 크록의 전사들을 쉽게도 꿰뚫었다.
"앞으로, 수레 피해서 앞으로!"
아유타르가 전략을 바꿨다.
몸이 날랜 홉고블린들을 중심으로 돌파한다.
그리고 룬가의 전사들 또한 수레를 뒤따라 달려 내려왔다.
* * *
전쟁이다!
나, 뱀갈공명과 덕장(德將) 나나루크 현덕이 힘을 합쳤다!
양옆의 화살 부대는 나나루크가 떠올렸지만 수레는 내가 계획한 작전이다.
콰작, 하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크록의 고블린들이 피떡이 되었다.
지형을 잘 활용한 훌륭한 계책이었다.
척후조로 늑대 기수 둘이 나타났을 때는 아찔했지만 잘 처리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디 있을까.
나나루크의 곁.
정확히는, 그녀가 타고 있는 타조의 날개 위.
이제 뱀갈공명은 죽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독니 한 쌍.
인중룡, 아니 고블린 속의 뱀 한 마리가 있을 뿐.
나나루크가 골통분쇄자에게 도끼를 휘두르고.
카앙!
곤봉과 도끼가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아유타르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찰나의 섬광속에서, 튀어나오는 나를 본 것이다.
심장 파먹는 뱀이 돌아왔다.
세상에 나쁜 XX는 없다.
038.
도약- 가속- 물어뜯기의 연계는 쾌속하다.
스킬 셋의 콜라보레이션, 아니 콤비네이션인가.
하여튼 그 조합은 마치 하나의 스킬을 쓰는 것처럼 빠르게 이어진다.
어지간한 고블린이라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심장을 파먹히리라.
하지만 골통분쇄자 아유타르는 어지간한 고블린이 아니었다.
게다가 놈은 다른 놈들과 달리 상반신을 가리는 갑옷까지 입고 있다.
필경 몸의 드러난 부분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손, 혹은 목.
나는 목을 노렸다.
불똥이 튀면서 내 모습이 드러난 것은 찰나였다.
강렬한 빛이 사라지고 나면 더욱 진한 어둠이 찾아오는 법.
그리고 어둠은 내 무대였다.
나는 소리도 내지 않고 놈의 목덜미에 접근했다.
냄새나는 목에 독니를 박아 넣어 주지.
"우오오옷!"
그때였다.
아유타르가 괴성을 지르며 곤봉의 궤도를 바꿨다.
동시에 그 팔뚝으로 나를 후려쳤다.
나는 허공으로 부웅 튕겨 나갔다.
이런, 알아챘구나.
내가 노릴 곳이 목덜미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어딜 공격할지 안다면 막을 수 있다.
체급이 작아서 서럽다.
나는 한참이나 하늘을 날았다.
내가 착지한 곳은 한 고블린의 어깨 위였다.
"우아아아악!"
차갑고 미끈한 것이 어둠 속에서 달라붙었다.
크록의 고블린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럴 만하지.
"물러나라 귀신아!"
정말 귀신이 자기 목을 조른 줄 알고 있었다.
암시야를 지닌 내게는 고블린의 행동이 보였다.
자꾸 몸을 돌리며 사방에 칼을 휘둘렀다.
괜찮아요! 괜! 찮! 아! 요!
나는 고블린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의 등허리를 물고 목을 조름으로써.
"꾸어억!"
단말마와 함께.
*「레벨이 올랐습니다.」
역시, 고블린들이 주는 경험치는 가성비가 좋다.
나는 툭, 바닥에 내려왔다.
전장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고블린들이 사람보다는 어둠을 잘 꿰뚫어 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은 어둡다.
조금 전까지 횃불을 들고 다니던 크록의 고블린들은 아직 암순응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별빛에 의존하여 앞을 볼 수밖에 없다.
피피핑-
그런데 양옆의 숲에서는 화살이 쏘아진다.
활을 쏘는 룬가의 고블린들도 앞이 안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쏘다 보면 맞기 마련이다.
벌써 수십의 고블린들이 화살을 맞거나 수레에 깔려 죽었다.
"방패 든 놈끼리 모여! 늑대 기수들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 와중에서도 지휘 비슷한 것을 하는 놈들이 있었다.
애초에 화살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블린들의 야금술은 수준이 낮았으니까.
그렇다면 백병전일 뿐.
숲속에서 타조 떼가 튀어나왔다.
타조에 탄 룬가의 고블린들이 밤의 들판을 가로질렀다.
레드 크로우 타조는 야행성이다. 어둠 속에서도 잘 달렸다.
게다가 평범한 타조도 아니고, '레드 크로우 타조'.
원래도 위협적인 타조의 발톱은 마치 칼날 같았다.
"크아아악!"
심장 가르는 타조!
희생된 고블린은 피를 뿜으며 비명을 질렀다.
발톱은 흰색인데 왜 레드 크로우인가 했는데, 피가 묻어서 시뻘겋다.
"크헝!"
그런 타조를 이번에는 늑대가 덮쳤다.
늑대의 기수는 머리에 화살을 맞은 채 덜렁덜렁 매달려 죽어 있다.
그럼에도 피 맛을 본 늑대는 물어뜯기를 멈추지 않았다.
난전이다.
아무리 뱀갈공명의 계책이 효과적이었다고 해도 피를 안 흘릴 수는 없다.
룬가 부족과 크록 부족의 고블린들이 서로 섞여 싸웠다.
하지만.
-네 무대나 다름없구나.
횃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밤.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수풀.
수풀을 헤치는 소리를 가려 줄 비명과 고함 소리.
이런 환경이야말로 뱀이 날뛰기 가장 좋다.
스르륵-
지나가며 그저 발목을 한 번 물어 줄 뿐이다.
*「맹독:신경독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흰 뱀이 검은 뱀보다 멋진건 사실이다.
하지만 검은 뱀은 눈에 덜 띈다. 실용성이 있는 것이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
*「은밀lv6이 은밀lv7이 되었습니다.」
내가 지나간 곳마다 고블린 하나씩이 쓰러진다.
툭, 툭, 그리고 툭.
*「레벨이 올랐습니다.」
잘 올리기 힘들었던 맹독의 숙련도가 쭉쭉 오른다.
*「맹독:신경독lv4가 맹독:신경독lv5가 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쓰러뜨린 고블린의 수가 열이 넘어간 시점부터, 슬슬 크록의 고블린들도 내 존재를 알아챘다.
그들의 곁에 죽음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조심해, 뱀이야!"
"젠장, 으아악!"
바람에 수풀이 흔들리는 것을 나로 착각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칼을 휘두르며 발악하지만, 나는 이미 그들의 곁에 없었다.
카앙, 쾅!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서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두 홉고블린의 앞.
나나루크와 아유타르.
가장 강한 둘은 여전히 불똥을 튀기며 싸우고 있었다.
*「초급원소마법:흙lv5를 사용합니다.」
아유타르의 발을 묶자, 놈이 휘청 기운다.
나나루크의 칼이 아유타르의 어깨를 강타한다.
쩌엉!
조잡한 갑옷이 칼날이 파고드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어깨가 끊어질 듯 아프겠지.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도약했다.
놈의 드러난 왼손을 깨물고.
독샘에 남아 있는 모든 독을 짜냈다.
"크아아악!"
신경독은 순식간에 놈의 전신에 퍼질 것이다.
승리는 나의 것.
아유타르와 내 눈이 마주쳤다.
골통분쇄자는 그 이명을 공짜로 얻은 게 아니었다.
아유타르에게는 기백이 있었다.
"우오오오오!"
그는 곤봉을 내던지고 허리춤에 찬 박도를 뽑아 들었다.
"도, 독사아앗!"
그리고 그 박도로 내게 물린 왼팔을 잘랐다.
써억!
"허억, 허억! 살았다!"
이 고블린.
뱀을 얼마나 무서워하는 거야.
잘린 그의 왼팔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피 분수를 가르며 날카로운 도끼날이 지나갔다.
나나루크였다.
서걱!
목을 노렸으리라.
하지만 아유타르는 그 창졸간에 오른손을 들어 막았다.
툭.
잘려 떨어진 것은 머리가 아닌 오른손이었다.
양손을 잃었으니 패배는 확정적이었다.
헌데 아유타르는 이 상황에서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체구가 더 큼을 이용해 나나루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아악!"
역전의 전사인 나나루크라고 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 고블린이 왜 이렇게 투지가 세.
고블린이 잡몹이라는 편견은 이제 부서지고 찢어져 흔적도 남지 않았다.
나나루크도 상대를 밀치고 머리를 제껴서 벗어나려고 한다.
위험해!
나는 아유타르의 다리를 타고 기어올랐다.
내 힘으로 저놈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숨통을 끊는 수밖에.
다리로 기어오른 뒤, 쩔렁이는 갑옷 상의의 틈으로 들어갔다.
욱, 땀 냄새.
하지만 나는 비위가 좋은 편이다.
놈의 배를 마구 물어 줬다.
"아아아악!"
놈이 쩌렁쩌렁 비명을 질렀다.
운 좋은 줄 알아.
내가 예전의 작은 사이즈였으면 배꼽으로 쏙 들어가서 입으로 나와 줬을 거다.
놈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우뚱, 놈의 몸이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쾅 하는 충격과 함께 중력의 방향이 바뀌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골통분쇄자.
간만에 겪는 짜릿한 연쇄 레벨업이 시작되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무려 세 번의 레벨업이었다.
레벨이 10을 넘었다.
짜릿한 쾌감이 전신에 퍼졌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변태 같으려나.
기분 좋은 상쾌함 정도라고 하자.
잠깐만 이렇게 쉬자.
갑옷에 덮여 있겠다. 잠깐 체력을 회복해야겠다.
키메라와 혼 재규어의 몸속에 들어갔을 때처럼 지금의 상황이 안락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어우, 냄새.
솔직히 키메라의 뱃속보다는 나은 환경이지만, 어쩐지 불쾌했다.
머리를 돌려서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피가 범벅이라 쉽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정면돌파를 결심했다.
아유타르의 갑옷은 철 조각들을 엮어 만든 조악한 것이었다.
섬유의 틈을 천천히 벌린다면 구멍을 내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그리했다.
머리를 억지로 들이밀어 나오려 하니 빛이 나를 반겨 줬다.
싸움이 끝났는지 횃불을 켠 것 같다.
당연히 우리 쪽의 승리겠지.
푸확!
나는 결국 아유타르의 가슴팍 부분을 뚫고 나왔다.
고블린들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 주지는 않았다.
물론 나나루크만은 웃고 있었지만 크록의 다른 고블린들은 아니었다.
포로로 잡혀서 무릎을 꿇고 있는 그들은 경악했다.
"아유타르의 심장을 파먹었어!"
"심장 파먹는 뱀이, 정말!"
아, 그렇게 보였겠구나.
이번에는 꼭 심장을 파먹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입가가 새빨간 뱀이 대장의 가슴팍을 뚫고 나왔으니 그리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명, '심장 파먹는 뱀'이 더 널리 퍼집니다.」
*「이명의 격이 상승했습니다.」
뭐라고오!
울루울룰루라는 이명은 아직도 안 생겼는데 심파뱀의 이명은 격이 상승했단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
[심장 파먹는 뱀]
대수림에 존재하는 크록 부족의 공포.
심장을 파먹으면서 성장하는 뱀으로, 크록의 전사장 아유타르의 심장을 파먹었다.
심장을 파먹는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다.
적의 심장을 포식함으로써 마성을 더 많이 획득한다.
──────────────
오, 확실히 설명이 달라졌다.
조금 더 화려해졌고, 내가 활동한 행적이 확실히 적혀 있었다.
'심장을 파먹는 특별한' 기술은 따로 없다는 점은 신경 쓰이지만.
그러면 울루울룰루라는 이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행적이 필요할까.
역시 번개를 뿜으면서 그 머리 없는 붉은 뱀인지 뭔지를 죽여야 하나?
쉽지 않군.
"어떻게 됐어?"
나나루크는 전사들을 시켜 상황을 정리했다.
그녀의 목덜미에 생겼던 물어뜯긴 상처가 사라졌다.
포션의 덕택이었다.
"포로 열다섯 명을 잡았습니다."
"사망자랑 부상자는."
"여섯이 죽었습니다. 팔다리가 잘린 녀석이 다섯이요."
80여 명의 고블린 중 열 명 정도가 전투불능이 되었다.
하지만 70마리의 고블린이 아직도 건재했다.
이 정도면 대승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덕분이지.
펠레리안의 포션 덕택이었다.
스무 병에 가깝게 모아 둔 포션의 절반 이상을 고블린들에게 투자했다.
포션의 효과는 무척 뛰어나서, 사지가 잘린 정도의 부상이 아니라면 싸울 만할 정도로 치료됐다.
"이 포로들로 협상을 할 겁니까 족장?"
자디람이 나나루크에게 물었다.
쯔쯔,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어떡하나.
"아니."
나나루크와 내 계획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대로 크록을 친다."
제 전사들을 모두 사지로 내몬 크록.
그를 부수고 내 던전을 되찾는다.
-정확히는 내 던전이지.
아무튼 간에.
* * *
"족장님! 족장니임!"
크록의 수하가 헉헉대며 달려왔다.
"나와 보십쇼!"
"뭔데."
크록이 살벌하게 눈을 부라렸다.
그는 며칠 전부터 발굴 현장에 계속 나와 있었다.
드디어 큰 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메인 입구를 발견했다.
함정이 엄청나게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그 탓에 이미 죄수들은 모조리 소모해 버렸다.
지금은 부족의 고블린 중 늙고 병든 이들을 들여보내 죄수처럼 썼다.
부족의 민심이 안 좋아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크록에게 거역할 수 없었으니.
아무튼 이런 중요한 순간에 왜 불러내는 것인가.
"아유타르와 전사들이 전부 죽었답니다."
"뭐?"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늑대 기수를 몇이나 붙여 줬는데!
게다가 아유타르는 크록 다음으로 강한 홉고블린이었다.
크록이 밖에 나가자, 팔이 잘린 홉고블린 하나가 주저앉아 있었다.
아유타르와 함께 떠났던 전사였다.
"죄, 죄송합니다, 족장."
"······다른 부족들이 연합이라도 했나?"
그러지 않았으면 물렁하기 그지없는 룬가에게 당했을 리가 없다.
"그렇진 않았는데······ 기습을 당했습니다."
까드득, 하는 소리가 울렸다.
크록이 이를 가는 소리였다.
"룬가의 피해는. 다 죽였나?"
그러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부족 최강의 전사는 아유타르가 아니라 크록 본인이었으니.
"백 명 중 스물 정도는 해치운 것 같은데······."
"무슨 개소리를!"
살아 돌아온 전사를 걷어차려던 순간.
뎅뎅뎅뎅-
종이 쳤다.
얼기설기 세워 둔 망루 위에서 경비 중이던 고블린이 종을 울리고 있었다.
"적습입니다! 적습!"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
이곳 코끼리 바위에는 방어를 위한 목책조차 없었다.
"전사 대략 육십······ 아니 칠십! 타조 기수 다수!"
"흐어어억!"
살아 돌아온 아유타르의 수하가 경기를 일으켰다.
이미 공포가 각인된 걸까.
크록의 수하가 다급히 외쳤다.
"족장님! 전사들을 모으겠습니다."
"가서 놈들을 막아라."
"족장님은······."
크록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발굴 현장에 있겠다."
수하가 깜짝 놀랐다.
족장인 크록이 싸움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말 아닌가.
"그, 그러면······!"
"조련사 멜치를 불러!"
"아."
"막아 내라, 너희들이 모두 죽어도 상관없으니!"
그렇게 말한 크록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부족의 운명? 그것보다 중요한 게 아래 있다.
어느 날 그에게 찾아온 수수께끼의 사나이.
그를 홉고블린 킹으로 진화하도록 만들어 주었으며, 또한 그 위로 진화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준 사내.
그가 말하길, 역전의 마도사인지 뭔지의 유산이 여기 코끼리 바위에 숨겨져 있다고 했다.
* * *
나나루크와 함께 한나절을 꼬박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코끼리바위에 도착했다.
-저기다, 저기가 맞아!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정말!
코끼리 바위 아래에는 발굴의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직 바위가 무너지지는 않은 것을 보면 털리지는 않은 듯하다.
펠레리안이 빨리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고마웠어."
나나루크가 내게 윙크를 해 줬다.
이제부터는 고블린들과 따로 행동할 것이다.
난전이 벌어지면, 나는 곧바로 던전을 찾아서 들어간다.
타조 위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체력도 만전.
크록 부족의 잔당들도 종을 울리며 방어를 준비했다.
허겁지겁 전사들이 달려 나오고.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크록 고블린들이 환히 웃으며 기뻐했다.
"조련사 멜치가 왔다-!"
멸치인지 뭔지 하는 고블린이 나타났다.
비쩍 마른 고블린 주술사였는데, 갑옷 대신 시커먼 천 같은 걸 두르고 있다.
"다 죽여 버려 멜치!"
저 말라빠진 고블린의 등장에 크록의 전사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제길······ 위험하겠는데."
나나루크마저 긴장할 정도.
'조련사'라는 이명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놈은 마물 하나를 부렸다.
그것도 아주 크고 거대한 ······.
"왕지네야."
거대한 왕지네.
새빨간 독 발톱을 가진 왕지네가 룬가의 전사들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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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스 대왕지네lv31]
──────────────
아니 대왕지네군.
"다들 흩어질 준비해. 큭."
모두가 겁을 먹은 눈치.
나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왜 다들 긴장해.
왕지네가 착하다는 건 상식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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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스 대왕지네lv31]
[특성]
[온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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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봐!
경로를 설정합니다
039. 경로를 설정합니다
크림슨 티스 대왕지네.
레드 티스 왕지네의 상위종.
붉은 이빨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해 '독니'가 아니라 '독발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빨처럼 생긴 붉은 독발톱에 찔리면 극심한 통증을 느낀다.
평범한 지네의 독은 고통이 심할 뿐 맹독은 아니지만, 이 위험한 마물은 다르다.
그 산성독을 듬뿍 주입당하면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린다.
조련사 멜치는 대왕지네가 코끼리 한 마리를 통째로 녹여서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으하하하-!"
멜치가 크게 웃었다.
"저 겁쟁이 놈들."
룬가 부족의 전사들은 대왕지네를 마주하자 새하얗게 질렸다.
그럴 만한 것이다.
본디, 마물을 조련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늑대나 타조를 사육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달에 한 번은 늑대에게 물려 죽는 고블린이 나올 정도였다.
그보다 위험한 마물을 조련하려는 것은 자살 시도나 다름없다.
그리고 멜치는 그러한 자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이 팔라무 우림에서 가장 위험한 마물 중 하나인 대왕지네를 조련해 낸 것이다.
일 년 전, 그가 얌전히 구는 대왕지네와 함께 크록 부족에 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경악했다.
그날이 바로 고블린생 최고의 날이었다.
비쩍 말라서 전사가 되지 못한 멜치.
못생겨서 인기도 없었던 멜치.
하지만 그가 대왕지네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되면서, 크록 부족의 간부가 되었다.
'조련사'라는 이명을 얻기도 했다.
멜치가 어떻게 저 대왕지네를 조련할 수 있었을까.
지네는 멜치의 말밖에 듣지 않았다. 몇 명의 고블린이 지네 밥이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모두가 멜치의 조련 방법을 알고 싶어 했다.
그 조련 방법이 쉽고 보편적이라면 멜치의 가치는 다시 사라질 것이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멜치는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크록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답하지 않았으니.
멜치는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유일한 대왕지네의 조련사였다.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 년 전부터 잘 때도 벗지 않았던 외투.
마른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큼지막한 외투가 벗겨지지 않도록 늘 주의해 왔다.
멜치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지네여!"
대왕지네는 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저 룬가의 고블린들을 모조리 쳐 죽여라-!"
대왕지네는 곧바로 명령에 따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멜치는 혀를 찼다. 지네는 생긴 것과 다르게 그리 공격적이지 못한 마물이다.
"지금 당자앙!"
위엄있게 다시 한번 외치자 그제야 대왕지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장 9m, 무게 500kg.
단단한 갑각은 쇠도끼로 내려쳐도 흠집만 나는 정도.
다리는 42쌍. 84개.
뾰족한 다리 하나는 마치 단검과 같다.
즉, 84개의 흉기를 달고 있는 형태.
독니를 쓰지 않아도 그 육탄공격이 가히 살인적이다.
룬가의 고블린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산개해! 멀찍하게 산개해! 뭉쳐 있지 말아라!"
나나루크가 쩌렁쩌렁 지휘했다.
뭉쳐 있다가 깔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이다.
홉 고블린 전사고 뭐고 으깨져 버릴 것이다.
"으아아악!"
"와아악!"
용감한 전사들도 경악해서 펄쩍 뛰어올랐다.
지네의 돌진은 막대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바위를 깨고 땅을 파는 짓을 지속해서일까.
분진이 자욱하게 일어나서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시야가 흐려졌다.
나나루크의 시야에 그녀의 동생, 카디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카디람의 위로 지네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으니.
"카디람-!"
나나루크는 카디람을 밀치며 뛰쳐나갔다.
지네의 거대한 대가리가 쑤욱 다가왔다.
그 새빨간 독발톱도.
철컹!
독발톱이 나나루크의 코앞을 깨물고 지나갔다.
나나루크는 고개를 뒤로 젖히는 것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휘둘렀다.
카앙!
지네의 갑각을 후려치자 불똥이 일었다.
나나루크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도끼를 바라봤다.
날이 나가 있었다. 반면 지네의 갑각은 멀쩡했다.
즉, 나나루크조차 지네에게 타격을 입히려면 정확히 관절부를 후려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지네를 상대로 어찌 그리 하겠는가.
"방어적으로 싸우라니."
나나루크는 그런 요구를 받았다.
요구를 한 것은 다름아닌 뱀이었다. 믿을만할 것이다.
"음?"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나루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뱀의 요구를 알아들은 걸까.
유독 나나루크만이 뱀 친구 말을 잘 알아듣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심해진 것 같다.
꼬리 몇 번 흔드는 것만으로도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지네와 너무 열심히 싸우지 말고 물러나면서 방어적으로 싸워라.
그동안 내가 어떻게 해 볼 테니.
그런 요구를 나나루크는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어쩐지 머릿속이 간질간질한 것 같았다.
[홉 고블린 나나루크lv30]
룬가 부족 최고의 전사 나나루크.
그녀가 더 이상 레벨이 오르지 않게 된 지 1년째.
젊은 나이에 홉 고블린으로서 이룰 수 있는 경지의 끝까지 도달한 그녀의 육신과 정신에 무언가가 싹트기 시작한 이후였다.
하지만 정작 그녀 본인은 그런 변화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으니.
게다가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네가 다시 한번 덮쳐들었다.
콰아앙!
나나루크는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가 올라선 곳은 다름 아닌 지네의 등딱지 위.
나나루크는 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지네의 몸이 출렁, 움직이면서 어쩔 수 없이 허공에 튕겨 나간다.
그런 나나루크를 다른 고블린들이 받아 들었다.
나나루크는 씨익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직, 룬가 부족의 사상자는 하나도 없었다.
대왕지네가 날뛰고 있는 탓에 크록 부족들의 전사도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멀찍이서 지네를 응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나루크라는 홉 고블린 한 명이 홀로 지네의 주의를 끌고 있다.
"뭐 하는 거야 저게······."
"아오 답답해!"
지네도 영 의욕이 없어 보였다.
답답해하는 시선이 멜치에게 쏠렸다.
"뭐 좀 해 보십쇼!"
"지네가 왜 저리 비실댑니까!"
멜치는 부아가 확 치밀었다.
감히 간부인 자신에게, 조련사 멜치에게 저리 언성을 높이다니.
'만약 내가 아유타르였다면 저렇게 꽥꽥 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꿉꿉한 열등감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지네여! 똑바로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멜치가 대왕지네를 협박하려던 순간이었다.
후우우웅!
갑자기 돌개바람이 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는데 왜?
돌가루가 섞인 하얀 분진이 잔뜩 쌓여 있는 환경이다.
뿌연 바람이 몰아치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멜치도 얼른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아악!"
"억!'
주변에서 그런 비명이 울렸다.
눈에 모래가 들어간 것 정도로 저렇게 호들갑이라니.
센 척은 더럽게들 하면서 제기랄.
그렇게 생각하는 멜치가 어떻게든 눈을 뜨고자 했다.
시뻘게진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주변의 고블린들이 모두 쓰러져 있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양손으로 제 목을 부여잡고 캑캑댔다.
그리고.
뜨끔.
하는 통증이 들어 발치를 보니, 웬 뱀 한 마리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놈이 발목을 물었다.
독사이려나.
멜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심장 파먹는 뱀.'
처음 그 이름이 나왔을 때는 패배자의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리 강했던 아유타르마저 심장 파먹는 뱀에게 죽었다던가.
'도망쳐야······.'
뛰어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쿠웅!
멜치는 뒤통수를 땅에 박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뱀이 멜치의 몸 위로 기어올랐다.
'아아.'
이렇게 심장을 파먹혀 죽는가.
뱀이 입을 쩌억 벌렸다.
그 시야를 마지막으로, 멜치는 중독사했다.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뭐야, 깜짝이야.
왜 이렇게 약해.
내 맹독은 아주 효율적인 스킬이다.
약한 놈들을 대상으로는 여포와 같은 위용을 보일 수 있었다.
물론 물지 못하면 소용없었고 정말 독 내성이 강하다면 내 독조차 씹을 수 있겠지.
이놈도 간부처럼 보여서 잘 버틸 줄 알았는데 설마 심장을 파먹기도 전에 죽을 줄이야.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비쩍 마른 고블린을 잡아먹으려던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입을 벌리고 물어뜯었다.
놈의 외투를 말이다.
큼직한 외투와 달리 앙상하게 마른 몸뚱어리가 드러났다.
그리고, 역시 그곳에 있었다.
작은 지네들이.
아가들아 안녕.
어쩐지, 특성에 온화함이 있는 대왕지네가 우리랑 싸우는 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명백히 싸우기 싫어하는 티가 나지 않던가.
고블린들은 몰라봤지만 같은 마물인 나는 곧바로 알아봤다.
억지로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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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스 대왕지네lv31]
[특성]
[온화함],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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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지네 님을 부린 것은 놀랍게도 홉 고블린도 아닌 그냥 고블린이었다.
놈이 대체 어떤 능력을 지녔을까 궁금해서 눈에 힘을 줘 봤다.
앙상한 발목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 아기지네를 본 게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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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네 유생lv2]
[특성]
[아기], [귀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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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의 상태창이 아닌 아기지네의 상태창이 떠오른 것이다.
그 순간 퍼즐은 맞춰졌다.
나는 이 터무니없는 고블린 유괴범을 응징해 줬다.
자, 귀여운 아가들아 이리 와라.
아 묶여있구나.
지네들은 총 세 마리였다.
목에 끈이 묶여서 고블린의 몸뚱이와 이어져 있었다.
나는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서 끈을 잘랐다.
아이고 얌전해라.
아직 유생이라 그런지 작았고, 갑각이 반투명하며 노르스름한 색상이었다.
해 봤자 사람 팔뚝만 한 길이의 지네 아기들은 참으로 똑똑했다.
고블린의 몸에서 내 몸으로 옮겨 탄 것이다.
돌아가자.
너희 엄마한테.
콰아앙!
내가 아가들을 구했는지도 모르는 대왕지네.
그녀는 천둥 같은 굉음을 내며 난장을 피우고 있었다.
잠깐.
저걸 어떻게 멈추지?
참 소리를 지를 수 없는 게 이럴 때는 아쉽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이었다.
지네 아기들이 어미를 부르기 시작했다.
"께께께께."
"께에에에, 께께께."
"께께-"
거참 귀엽게들도 우는구나.
대왕지네님이 우뚝 멈췄다.
거대한 몸에 비해서는 참으로 작은 눈알들.
그녀는 나를 우묵히 보았다.
그래, 지금이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적이 가라앉았다.
대왕지네 님이 나를 향해 마주 꾸벅 인사했다.
휴우.
한숨 덜었다.
내 몸에 붙어 있던 새끼들이 떨어져 나왔다.
가만히 몸을 세우고 있는 제 어미에게 기어올라 그 배에 꼭 달라붙었다.
대왕지네는 다리 한 쌍으로 포근하게 그 새끼들을 감쌌다.
이제는 반드시 지켜 내겠다는 태도였다.
아, 감동적이라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돌아가신 메두사 맘도 생각났고.
우리 메두사 맘은 말 안 듣는 아이들은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아버지는 어디 계실까. 언젠가 한번 보고 싶다.
*「업적 '지네의 친구'를 달성했습니다.」
어라!
경비대장 살해(안타까운 사고)에 이어서 두 번째 업적을 달성해 버렸다.
나는 곧바로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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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네의 친구]
당신은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마물인 지네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지네형 마물들은 당신에게 호의를 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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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하고 잔혹하다니.
터무니없는 오해일 것이다.
여하튼 지네들과는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다.
역시 내 생각대로 지네는 온화한 생물이 맞았다.
그녀는 더 이상 우리를 적대하지 않았다.
아기들을 품에 안고 하늘을 보며 포효할 뿐.
"께에에에에엑!"
울어라 대왕지네.
대왕지네 님은 시원하게 포효한 뒤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죽은 멜치와 크록 부족의 전사들을 향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퍼버버벅!
멜치의 사체는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는 고기 반죽이 되었다.
감히 도망치지 않고 덤벼드는 크록의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심을 다한 대왕지네는 무시무시하게 강했다.
독발톱으로 꿰어 죽이고 거대한 몸뚱이로 찍어 누른다.
그리고, 그 말은 크록 부족의 방어 태세가 박살 났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흰······ 울루울룰루!"
달려오는 나나루크.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올라탔다.
"크록을 잡으러 가자! 다들 지네를 따라가!"
지네 누님이 적들을 흩어놓았으니 상황이 훨씬 쉬워졌다.
룬가의 전사들이 도망치는 크록 고블린들을 쉽게 해치웠다.
곧 발굴 현장까지 도달했다.
코끼리바위 아래.
뻥 뚫린 구멍과 인조 구조물의 흔적이 있었다.
사람 한둘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통로다.
수 십개의 구멍 중에 크록이 들어갔다는 구멍을 찾아냈다.
나나루크는 동반할 정예 홉 고블린 몇을 꼽고 나머지에게는 남으라 명령했다.
"여기 입구를 지키고 있어. 혹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바위에서 물러나라!"
그동안 나는 고개를 들어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
[펠레리안의 비밀 던전]
123번 던전, 마석을 보관하고 있다.
──────────────
드디어 도착했다.
-쥐새끼가 이미 들어갔구나. 빨리 쫓아가라!
펠레리안이 그리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8번 던전에서 지겹게도 들었던 그 대사를 중얼거렸다.
'마물의 침입이 감지되었습니다.'
요격 스네이크를 가동합니다.
* * *
시체의 밭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 던전에 장치되어 있던 함정 때문이었다.
'대체 함정을 얼마나 많이 설치한 건가요.'
-함정은 많을수록 좋다.
함많좋. 인정한다.
하지만 정말 많은 고블린이 죽어 있었다.
초반에는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명백히 고기 방패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화살, 창, 불, 추락, 사인은 다양했다.
그 다음은 얼굴에 분진 가루가 잔뜩 묻어 있는 고블린들.
주변에 널린 곡괭이들을 보면 던전을 발굴하던 노동자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덩치 좋은 홉 고블린들이었다.
크록의 곁을 지켰을 전사들이었다.
크록은 자기를 지키던 자들까지 희생시킨 것이다.
그 엄청난 폭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날 수 있었다.
수상한 공동이 펼쳐져 있었고, 저 앞에 철문이 있었다.
던전의 진짜 마지막 입구임이 분명했다. 똑같은 장식의 문이었으니까.
-저, 저노옴 ······!
그 문 앞에 크록이 붙어 있었다.
나나루크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크록!"
크록은 얼굴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크록에게 달려가려는 나나루크를 내가 막았다.
나나루크는 어리둥절해했고 크록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으흐흐흐, 이 병신들."
반쯤 정신이 나갔는지 혼자 웃어 댄다.
"죽고 싶어서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아쉽군."
나는 마력감지를 써 봤다.
천장, 벽, 바닥. 모든 곳이 붉게만 보였다.
"한 발자국만 더 왔어도 뒤졌을텐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던전의 보안은 내가 돌파했던 곳보다 압도적으로 수준이 높았다.
"잡으려면 와서 나를 잡아 봐! 으하하하하!"
저놈은 어떻게 저기까지 넘어간 거야?
분명, 함정을 돌파할 생로가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나루크와 고블린들은 공동을 건너갈 엄두를 못 냈다.
공동의 중간중간에 피떡이 되어 버린 사체들이 벽이며 천장에 붙어 있었다.
"으- 하하하!"
저 웃는 소리 좀 그만 듣고 싶군.
"큭······."
나나루크가 분해했다.
걱정 말어.
내가 직접 돌파하는 길을 알려 줄 테니.
'펠비게이션, 길 안내.'
-건방진 놈.
이 던전을 직접 설계한 노괴가 내 곁에 있으니.
펠레리안은 잠자코 길 안내를 시작했다.
(긴박한 배경음악 ON)
040. (긴박한 배경음악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