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스크롤'이란 마법을 담은 문서이다.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어서, 그것을 찢는 것만으로도 마법을 쓸 수 있다.
하다못해 평생 마법은 보지도 못한 일곱살 어린 아이도 스크롤만 있다면 불덩이를 날릴 수 있다.
그 신비로운 마도구의 제작방법은 몹시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사실상 마탑이 독점으로 관리하고 있기에 스크롤의 가격은 상당히 비싸다.
영웅의 수행기사인 자인이라고 해도 여러 개 가지고 있지는 못할 정도.
그러나 키메라의 등장은 스크롤을 사용할 충분한 명분이다.
자인은 단련된 팔힘으로 그 파피루스 종이를 확 찢었다.
부욱-
효과는 훌륭했다.
종이가 찢어진 곳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뿜어져나오더니, 그대로 그 빛이 키메라에게 날아갔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키메라를 감싼 빛무리는 곧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키메라가 스스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노란색과 주황색의 사이 정도일까. 몸의 부위마다 색이 다르다.
뾰족하고 단단한 다리는 주황빛, 그리고 몸체는 노란 빛.
휘황찬란하게 발광하는 키메라는 놀랐는지 허둥댔다.
그 발광하는 빛이야말로 마탑의 간파마법이었다.
한 천재적인 마법사가 개발해낸 직관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마법.
"전체적으로 노란빛!"
"4단계라······ 할만 할 것 같습니다!"
자인과 경비대장의 목소리에는 밝은 기색이 깃들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발광하는 마물의 빛깔이야 말로 상대의 강함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였다.
무해한 생물은 흰색.
그리고 푸른색, 초록색,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 보라색, 마지막으로 검은색까지.
수행 기사 한 명과 경비대장, 그리고 정예병 넷.
키메라의 등장을 위해 준비해둔 함정까지 있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쏴랏!"
경비대장이 그리 외쳤다.
그러자 병사들이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네 자루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파프나챠에게 날아갔다.
티티티팅!
그러나 화살은 놈의 갑각에 맞고 튕겨나갔다.
그레이림의 활은 모두 마물의 뿔을 이용해서 만든 각궁(角弓)이다.
장력이 보통이 아니어서 어지간한 나무 방패들도 꿰뚫는데, 불똥을 튕기며 자국만 남길 뿐이었다.
대단한 강도의 갑각.
표정이 심각해진 경비대장이 직접 각궁을 쏘았다.
퍼억!
"퀘에에엑!"
키메라가 포효했다.
각궁의 화살은 정확히 키메라의 관절 사이에 박혔다.
그야말로 명궁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기예였다.
문제는 키메라의 다리가 여덟개나 된다는 것.
그리고 놈이 분노해서 날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비대장은 훌쩍 물러나며 자인의 이름을 외쳤다.
"자인 경!"
일신의 무력으로 가장 강한 것은 역시 기사.
자인은 분명히 서임받은 정식 기사였다.
심지어 그는 군터에게 직접 도끼창을 사사했으니.
군터의 거대한 도끼창보다는 작았지만, 충분히 긴 도끼창을 꺼내들었다.
"하압!"
정직한 기합.
그리고 자인의 도끼창이 빛나기 시작했다.
도끼창의 날에 맺힌 빛무리는 분명 선명한 오러였다.
창이 키메라에게 휘둘러졌다.
콰작!
도끼창이 키메라의 갑각을 뚫고 박혔다.
자인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반발력에 놀랐다.
"이놈, 엄청나게 단단합니다!"
"최대한 상처를 입혀주십쇼! 다리를 자르면 좋습니다!"
자인은 그리했다.
키메라는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고통에 놀란 듯했다.
그러나 겁을 먹지는 않았다.
자신의 갑각을 부수고 있는 처음 보는 원숭이에게 분노했을 뿐.
놈의 다리는 확실히 거미와는 달랐다.
거미의 다리는 휘둘러서 상대를 후려치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을테니.
카카카캉!
자인은 간신히 막아냈다.
역시, 키메라는 두렵기 그지없는 마물이다.
이자리에 군터가 있었다면 쉽게 토벌했겠지만, 자인 홀로 상대하기는 버거운 적이다.
상관 없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물러나십시오!"
자인은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뒤로 달렸다.
키메라는 순간 놀라 움찔했다가, 곧 쫓아오려 했다.
그리고 병사들이 기름병을 던졌다.
인간이 불을 친구로 삼은 이래, 불은 짐승을 겁주는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니.
"불붙여!"
경비대장은 또 한번 화공을 썼다.
횃불이 허공을 날았다.
* * *
와 저 미친, 공명의 재림같은 인간을 보았나.
저 지긋지긋한 나의 숙적은 심지어 키메라를 상대로도 화공을 실시했다.
적벽대전, 아니 절벽대전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번쩍번쩍 노랗게 빛나던 키메라는 이제 화염에 휩싸였다.
"퀴에에엑!"
나무 위에 숨어있던 나는 귀뚜라미를 와삭와삭 씹으며 싸움을 관람했다.
기사가 찢은 스크롤은 내가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마법을 발동시켰다.
색깔을 통해 상대의 전투력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물건 같았다.
쟤들은 상태창을 못보나?
모르겠다. 나도 지네 내단을 먹기 전에는 볼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간파 마법이라는 것은 제법 효과적인 것 같았다.
나는 상대의 전투력을 상태창을 보고 파악해야한다.
아예 안보이면 엄청나게 센 놈이니까 바로 대피.
레벨이 높고 스킬이 평범하지 않으면 강할테니까 대피하거나 탐색.
직관적이지 않다.
사실 약해보였는데 싸워보니까 엄청나게 강할 확률이 있는 것이다.
저렇게 색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더 편할지도.
"거리를 유지한다아! 화살 더 쏴!"
경비대장이 통솔했다.
싸움은 기사가 더 잘하고, 그 외는 경비대장이 더 세보인다는 말이지.
둘 사이에 묘한 신경전을 벌이던 것을 보니, 왠지 호감 가는 쪽은 경비대장이었다.
저 젊은 기사는 뭔가 건방져.
어른인 경비대장한테 따박따박 맞서고말야.
내 마음속에는 동방예의지국의 기상이 남아있는 것 같다.
"이놈, 끈질기군요! 흡."
키메라는 불이 붙은채로도 미친 듯 날뛰었다.
인간들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야, 열 내성이 높은걸.
"이놈, 열 내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거미와 두더지가 섞인 놈 아닙니까! 불이 붙어도 멀쩡할 이유는······."
당황한 저들의 외침이 들렸다.
음, 역시 상대의 상태창은 못보는건가.
내 환생자 특성은 통번역 기능만 있는게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내게 보이는 키메라의 상태창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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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 파프나챠lv20+++]
[특성]
[키메라], [지하 괴물], [용의 혈통], [탈피]
[스킬]
[탈피: 긴급lv2]
[갑각lv10], [땅굴lv9], [열 내성lv6], [자가 치유lv3], [마력 감지lv4], [후각lv7], [발광lv20], [자르기lv10], [분신lv3], [두 개의 심장lv1]
※진화 가능
[갑각lv10], [발광lv20], [자르기lv10]
[상태]
[탈피 가능], [화상], [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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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평범한 놈이 아니다.
눈에 띄는 것은 레벨이 20에서 한계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태에 '진화가능'이 떠있지 않다는 것.
아무래도 파프나챠는 진화 조건을 맞추지 못한 것 같다.
펠레리안이 이 사실을 안다면 슬퍼하겠지.
대신 '발광'이라는 상태가 떠올랐다.
스킬에도 레벨 20짜리 발광이 찬란하게 존재감을 뿜고 있었더랬다.
키메라의 움직임이 빨라진 것이 그순간이었다.
불이 붙은 다리가 매섭게 휘둘러졌다.
마치 쥐불놀이를 하듯 환상적인 공격이다.
카가각!
기사가 도끼창을 들어 죽을 뻔한 병사를 구해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거의 튕겨나가다시피 밀려났다.
"무슨 힘이······!"
불만 붙이면 순식간에 불타 오그라들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긴, 아무리 열 내성이 있다고 해도 몸에 불이 붙었는데 멀쩡할리가 없다.
발광이라는 스킬이 무한정으로 쓸 수 있을리는 없을테니 곧 죽겠지.
아니면······.
──────────────
[탈피: 긴급lv2]
──────────────
저 스킬이 눈에 띈다.
특성에도 탈피가 있는데, 스킬에도 탈피에 관련된 것이 있다.
저게 내 '빌리는 뿔'과 비슷한 수준의 스킬이라면 아마도 승부는······.
"죽어라아-!"
기사는 승부를 내려는 듯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을 짜내 오러를 키운다.
도끼창의 오러가 확 커지더니, 키메라의 몸을 강타한다.
콰작!
갑각이 부서지며 도끼창이 몸통에 틀어박힌다.
불똥이 확 튀고 피가 솟았다.
그 피가 불에 눌어붙으며 매캐한 연기를 확 뿜어냈다.
확실한 유효타.
자인과 병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기뻐하기는 일렀으니.
탈피:긴급은 정말 쾌속하게 이루어졌다.
내 눈에 놈의 상태가 신속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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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발광], [화상], [긴급 탈피], [회복], [스킬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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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탈피란 본디 오래 걸리는 것이다.
탈피 전에도 준비과정이 필요하고 그것을 실행하는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몹시 취약해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파프나챠의 탈피는 달랐다.
마치 분신술이라도 쓴 듯했다.
불타는 껍질이 그대로 자리에 남았고.
놈은 점액질에 휩싸인 채 자신의 갑각에서 탈출했다.
"아니."
그것이 한슨이라는 병사의 유언이었다.
키메라의 다리가 쑤욱 늘어났다.
딱딱했던 갑각에 덮여있을때와 달리, 지금의 다리는 마치 촉수처럼 유연했다.
퍼억!
그것이 기사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뒤에 있던 병사의 가슴을 관통했다.
키메라는 풀쩍 뛰어올랐다.
몸에는 상처가 남아있었지만 가장 크게 괴롭히던 불꽃은 사라졌다.
병사들의 사이로 난입한 파프나챠는 사방으로 다리를 휘둘렀다.
마치 광전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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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 파프나챠lv20]
[스킬]
······[광전사lv1], [참격lv1], [철갑lv1(비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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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광이 광전사로, 자르기가 참격으로, 갑각이 철갑으로 변했다.
탈피라는 과정을 통해 스킬 진화까지 해치운 것이다.
과연, 긴급 탈피는 빌리는 뿔만큼이나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아직 기사와 경비대장은 키메라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지 못했다.
간파 스크롤의 효과가 끝났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기사는 미친 듯 도끼창을 휘둘렀다.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키메라는 교활했다.
놈은 상대적으로 약한 병사들부터 해치웠다.
탈피 직후라 그런지 도끼창은 오히려 놈의 몸에 쉽게 상처를 남겼다.
석둑-
그러나 참격, 키메라의 새로운 스킬이 병사들의 몸을 동강냈다.
눈이 돌아간 기사가 목숨을 도외시한채 키메라에게 덤벼들려던 순간.
경비대장이 그를 밀쳤다.
"도망······."
나는 그 과정을 전부 보고 말았다.
경비대장이 기사의 몸을 밀쳐서 목숨을 구했다.
푹!
그 대가로, 키메라의 다리가 경비대장의 가슴을 관통해서 삐져나왔다.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나왔다.
"컥!"
"아, 안돼."
기사는 경비대장이 벌어준 기회를 잡지 못했다.
키메라의 촉수에 가슴팍을 맞았다.
터엉!
입고있는 풀플레이트 메일 덕에 그는 몸이 잘리는 대신 튕겨나갔다.
땅바닥을 몇 바퀴 구르더니 미동도 하지 않는다.
죽었나.
아니 관심없다.
'경비대장······!'
나는 경비대장의 행동에 진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어보였는데.
자신의 목숨을 바쳐 기사를 구한 것이다.
상처입은 키메라는 얼른 죽어 나자빠진 병사 몇의 시신를 삼키더니 땅을 파기 시작했다.
파파팍!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쉽지 않은 싸움인 것은 놈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허겁지겁 도망친다.
장내에는 피냄새와 침묵만이 남았다.
두 눈을 뜨고 있는 것도 나뿐이다.
조용히 정적을 깨뜨려보았다.
"쉬익."
나는 나무에서 내려왔다.
허.
제법 잘 싸웠는데 말이지.
이들의 분투는 박수를 쳐줄만큼 훌륭했다.
상대가 하필이면 만렙이었고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는게 문제였겠지.
긴급 탈피만 없었고 스킬 진화만 없었다면 이들이 이겼을 것이다.
뭐 덕택에 나는 키메라를 잡을 단서를 얻어버렸지만 말이지.
쉭쉭. 비겁하게 혀를 낼름거려 본다.
내가 멈춰선 곳은 경비대장의 앞이었다.
그래.
경비대장은 훌륭한 사나이였다.
비록 난 뱀의 심장을 가지고 있지만, 내 차가운 피가 뜨겁게 끓어오를 정도로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그의 희생은 알려지지 못할 것이다.
전우를 구하고 대신 꿰뚫린 그 용맹. 무공 훈장을 받아도 부족함이 없겠지.
하지만 나는 보았다.
이 내가 그 희생을 기억하리라.
RIP 경비대장.
떠나갈 그곳에서는 평안하길.
어쩐지 가슴이 뜨거웠다.
가슴이 뚫린 경비대장은 눈을 뜬채 죽어있었다.
음, 눈이라도 감겨줄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슬쩍 꼬리를 들어보았다.
그때였다.
경비대장의 눈동자가 휘릭 돌아가서 나를 보았다.
"으, 으어, 배, 뱀. 쿨럭!"
투지의 사나이여.
경비대장은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손에 잡힌 단검을 휘둘러 나를 베려 한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죽어가는 군인의 힘없는 칼질에 베일 내가 아니다.
탁!
휙, 몸을 피한뒤 오히려 그 손목을 깨물어줬다.
······어?
"컥, 커헉."
경비대장의 눈이 휘릭 돌아가서 흰자만 보였다.
어, 어.
어어어!
아냐, 내가 아니야!
*「경비대장lv24를 처치했습니다.」
*「업적 '경비대장 살해'를 달성했습니다.」
아아아악!
여신님
021.
으아아악, 시발!
경비대장!
죽으면 안 돼!
그래, 한때는 원수였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형제자매들이 눈앞에 선명하다.
나는 이 경비대장이라는 인간을 증오해야 마땅할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솔직히 형제자매에 대한 정 따위는 하나도 없잖아.
나는 경비대장의 희생에 감동한 직후였다
그런데 솔직히 너무하긴 했어.
보자마자 칼을 휘둘렀으니까.
본 뱀의 반사신경이 너무 뛰어난 덕택이었다.
피하자마자 스치듯 팔을 물고 지나가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빨리 죽은 것 아닌가.
정말 내가 죽인거 맞아?
아, 생각해보면 그때도 그랬다.
나와 싸우던 형(리틀 그린 스네이크lv3)이 칼톱박쥐와 동귀어진 했을때였다.
내가 직접 숨통을 끊은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처치한 것으로 되었지.
이것도 그런 거 아닐까.
경비대장을 죽인 것은 키메라다.
내가 아니라.
아마 가만히 있었어도 죽었겠지······.
저리 멋진 콧수염을 지닌 경비대장을 내가 죽였을리 없다.
*「업적 '경비대장 살해'를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
특성, 스킬, 상태에 이어서 업적까지 있었을 줄이야.
아주 내가 경비대장을 죽였다고 확인사살을 하는 수준이다.
뭐라고? 확인사살은 니가 한 거 아니냐고?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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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경비대장 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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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록이 남아도 돼?
이거 인권침해 아닌가.
누가 보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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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대장 살해]
한 영지의 경비대장을 살해했습니다.
경비대를 상대로 싸울때 쉽게 지치지 않고 힘이 솟습니다.
당신은 경비대에게 묘한 적의를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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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인간 경비대가 나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구만.
당장 효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감사히 여기자.
이건 경비대장의 유산이다.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사실 경비대장의 유산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경비대장의 품을 뒤졌다.
소지품을 노획하려는 것이 맞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버리고 갈 수는 없잖아.
짐승이 뜯어먹고 버려지는 것보다는 내가 챙겨가서 잘쓰는걸 경비대장 역시 기뻐할 것이다.
분명 그렇겠지.
와!
이거 진짜 화공에 미친놈이네.
경비대장은 품속에 기름병을 몇 개나 더 가지고 있었다.
다 쓸데가 있을 것 같으니까 챙긴다.
뭐야, 이건 기름이 들어있는게 아니네?
코르크 마개가 막힌 병에는 붉은 액체가 찰랑대고 있었다.
꼬리로 그것을 간신히 땄다.
뽕-
상쾌한 소리와 함께 퍼지는 것은 달큼한 향기.
혀를 낼름내서 맛보니 몸이 따스해지는 느낌이다.
정말로 몸에 났던 생채기가 스르륵 치유되었다.
──────────────
[축성의 물]
여신교의 사제에게 축성 받은 물. 상처를 치유해주고 마력을 북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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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포션이잖아.
체력포션인 동시에 마력포션이라니, 귀하다. 판타지 세계가 맞군.
그리고 여신이 존재하는 걸까. 난 원래 무신론자였는데.
나는 다른 병사들의 품도 뒤졌다.
허리가 양단되어서 하반신과 상반신이 떨어져 있는 녀석들이 있어서 조금 수고로웠다.
윽, 내장.
갈색 물이 안 묻도록 조심했다.
······어라.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있는 것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절단났는데 나는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물이 묻지 않는걸 신경쓰고 있다.
원래 그럴 차례 아닌가.
'우욱! 사람의 시체가······!'
'사람을 죽인 충격이, 크윽.'
이래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나처럼 담담한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다.
좋은데?
징징대는 것보다 지금이 훨씬 나은 것 같다.
당당한 한 마리의 뱀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정신력 20 만세.
내가 챙긴 노획물들은 다양했다.
우선 가장 귀한 포션 한 병. 건조 식량이 꽤 있고.
전부 챙겨두고.
그리고 화살이며 날붙이들도 전부 그러모았다.
손도 없는 내가 어떻게 쓸 거냐 묻는다면 다 활용할 구석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전부 반지의 아공간에 쓸어넣었다.
키메라가 병사 한명 반 정도를 물고 떠났으니, 남은 것은 경비대장을 포함해 네명 반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조촐한 장례식을 치러주기로 했다.
감상에 젖어서만은 아니고, 키메라가 다시 와서 나머지를 먹어치우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서였다.
놈이 배고파져야지 내가 끌어내서 사냥할 수 있을테니.
내 작은 몸들로 시체를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행인지, 키메라가 아주 조각을 내놨기 때문에 하나씩 끌고 올 수 있었다.
갑옷을 입고있는 기사는 무거우니 못 옮기고.
나머지는 사지가 성한 경비대장의 근처로 모았다.
기름병 하나를 따서 기름을 흩뿌리고 .
초급원소마법, 불.
화르르륵!
검은 연기를 피워내며 죽은 자들이 화장된다.
제대로 된 화장방법은 아니겠지만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무아미타불.
현세에는 허무히 죽었으나, 내세에는 좋은 곳에서 태어나 행복하길.
나처럼 뱀으로 환생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거고.
남은 것은 경비대장이 구했던 자인이었다.
그 희생이 무색하게 이미 죽은 것 같지만.
그에게 기름을 뿌리던 나는 흠칫 놀랐다.
살아있는 것 같은데 이거.
느리지만 분명 호흡하고 있었다.
입가에 피 한줄기가 흐르는 것을 보니 내출혈이 있는 것 같다.
갑옷의 가슴팍이 우그러들 정도였으니 그럴만하다.
──────────────
[기사 자인lv16]
[특성]
[기사], [애송이]
······
──────────────
와 이놈 특성이 '애송이'야.
자기 특성이 애송이라는걸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엄청 쪽팔릴텐데.
경비대장과 달리 이름을 들어서 그런가, 자인이라는 본명이 적혀 있다.
기사답게 처음 보는 스킬이 몇 개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오러lv2'과 '중급검술lv5'
'오러'라는 이름에 내 사나이 가슴이 뛴다.
검기 쓰고 그런 거 아니야?
내 독니에 오러를 두를 수 있으면 두려울 게 없겠지.
빌리는 뿔로 오러를 빌리려 했다.
*「오러lv2를 빌리지 못했습니다.」
몇 번 시도해봤지만 마력만 쓰고 실패.
빌리는 뿔의 숙련도가 부족한 것 같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어차피 파프나챠에게 스킬 하나를 빌려놓은 게 있었다.
자칫하면 산채로 불태워 죽일 뻔했네.
흠······.
솔직히 잠시 고민하기는 했다.
기사를 슥삭 해치울 수 있는 기회 아닌가.
살짝만 물어주면 된다.
신경독은 부상당한 기사를 깔끔하게 죽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내가 인정한 사나이, 경비대장이 이 기사를 구하다 죽지 않았는가.
비록 이 애송이를 구하고 죽는 것이 가치있는 일일지야 모르겠지만, 나는 경비대장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뭐 내가 실수로 경비대장을 끝장낸 것도 미안하고, 그리고 지금 레벨이 만렙이라서 기사를 죽여봤자 경험치를 못 먹는다는 것도 영향을 끼쳤다.
조금 아쉽긴 한데······.
어라.
그의 목에 반짝이는 뭔가가 있었다.
──────────────
[축성 받은 목걸이]
약간의 행운이 따릅니다. 어쩌면 그 행운 덕에 목숨을 건질 수도 있겠지요.
──────────────
음, 이것 때문에 기사가 살아있는 건가?
그건 아닐 것 같지만.
이 정도는 목숨값으로 받아가도 되겠지.
나는 승리자로서 당당하게 노획물을 챙기기로 했다.
이거 왜이렇게 단단해.
내 꼬리로 목걸이를 풀 수는 없었으니 챙기는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흠칫 놀랐다. 기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던 것이다.
너무 놀라서 독니를 목에 박아버릴 뻔했다.
자기가 방금 죽을 뻔한 걸 모르는지 가만히 있는 기사.
정신이 든 것은 아닌 듯했다. 의식이 없어보인다.
깜짝 놀랐네.
툭.
목걸이가 빠졌다.
잘 챙길게.
그때였다.
츕.
기사가 내 반지에 입을 맞췄다.
" ······으어. 에. ······님."
미친 새끼.
나도 모르게 기사의 코를 꼬리로 후려쳤다.
놈은 코피를 흘리면서도 히죽히죽 웃었다.
아, 경비대장님.
당신은 이런 미친놈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한 번 경비대장에게 애도를 표하고, 나는 자리를 떠났다.
다음에 키메라를 만나서, 그때는 놈을 사냥하고 진화할 것이다.
* * *
자인의 갑옷은 왕국의 수도에서 맞춘 것이다.
군터가 그를 수행기사로 삼은 날 직접 공방에 의뢰해준 풀플레이트 메일이다.
기사라고 해서 전부 이런 갑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만든 풀플레이트 메일은 금화 여러 자루가 필요하니까.
때문에 그것은 주군의 은혜였다.
주군의 은혜가 자인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보통 사슬갑옷이었다면 키메라의 참격을 맞고 동강났을 터.
판금갑옷은 우그러지는 정도로 끝났다.
자인은 튕겨나가 의식을 잃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아직 수행이 완성되지 못한 기사는 가라앉은 의식 속에서 꿈을 꾸었다.
꿈의 종류는 분명 악몽이었다.
기사가 된 이후로 종종 꾸는 그 꿈이었다.
죽는 꿈.
어느날 이길 수 없는 전투에 참여하거나.
대적할 수 없는 마물과 싸우다가 죽는 꿈이었다.
결국 늘 자신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곤 했다.
꿈에서도 그러했다.
배에 구멍이 났는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입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정말 죽어가는 느낌이었다.
자인은 피묻은 손을 덜덜 떨며 제 목덜미로 가져갔다.
그곳에 목걸이가 있었다.
자인은 화로와 불의 여신을 믿는 신도였다.
죽으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사제님이 말해주셨다.
자인도 그렇게 될까.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사아악.
어디서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린다.
그를 데리러 온 죽음의 사자가 도래했는가.
사악!
그리고 무언가가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자인이 혼미한 정신으로 눈을 뜬게 그때였다.
'여신님?'
불꽃이 사방에 솟고 있었다.
죽은 자들이 불타고 있다.
화로와 불의 여신의 신전에 가면, 늘 저런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 매캐한 냄새는 신전의 냄새였다.
나는 죽은 건가.
자인은 그리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
"여신······ 님."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자인은 여신을 불렀다.
그리고, 차갑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자인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반지를 낀 손가락이었다.
자인은 그것이 여신의 손임을 눈치챘다.
"여신이시여······."
식어가던 마음속의 신앙에 불씨가 살아난 듯했다.
자인은 기꺼이 여신의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사아악!
바람이 불고.
무언가가 자인의 얼굴을 철썩 때렸다
의식이 다시 가라앉았다.
한참이 지나, 자인은 눈을 떴다.
"허억. 큭!"
꿈속에서와 달리 몸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입가에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갑옷이 움푹 우그러든 것을 보면 죽지 않은게 다행이다.
" ······아, 경비대장!"
자인은 그제야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허나 주변을 둘러본 자인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다.
"전부······. 크윽!"
전부 죽어있었다.
게다가, 그 시신은 한 군데 모여 불타 재가 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일을."
여신이 나온 꿈을 꾼 것은 어렴풋이 기억났다.
하지만 정말로 다른 이들이 화장되어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자인으로서는 도저히 추론할 단서가 없었다.
그는 주먹을 꾸욱 움켜쥐었다.
패배였다.
두말할 것 없는 임무 실패.
이제는 다시 그레이림 영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혼자 살아남았다는 오명.
그의 마음이 무거웠다.
* * *
"그래서, 눈을 떴더니 주변에 불이 붙어 있었다고?"
" ······예 그렇습니다."
영주의 질문에, 자인은 초췌한 얼굴로 답했다.
"경비대장과 병사들은 모두 죽어있었고."
"예, 제가 의식을 잃기 전에 보아 확인했습니다."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목이 잘리고, 허리가 양단되었으며, 가슴이 뚫렸습니다."
"허어, 그 키메라가 그리 강하단 건가. 간파 스크롤이 있는데도 몰랐나?"
"처음에는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탈피를 하더니,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지요."
영주는 난감한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난감하군, 난감해."
"수치스럽게도 홀로 살아돌아왔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기필코 그 키메라를 잡아죽이겠습니다."
자인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 자못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일어나라 자인."
자인에게 명령한 것은 영주가 아니었다.
영주의 옆에 서있는 거구의 사내.
진정한 도끼창의 주인.
팔영웅 중 일인.
이명, 강철(鋼鐵).
군터 프리한센이 이곳에 돌아와 있었다.
"흥미롭군. 키메라의 이야기도, 여신의 이야기도."
이곳 그레이림에 돌아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군터는 다시 나갈 심산인 듯했다.
"너는 나와 함께 그곳으로 출발한다. 쉴 시간이 필요한가?"
"괜찮습니다!"
"그럼 준비하지."
"예!"
자인도 우렁차게 답했다.
무림초출의 사나이
022.
영웅이 아캄 분지를 주시했다.
그리고 황금이파리 조사관 역시 아캄 분지로 향했다.
황금이파리 조사관은 임명된 이후로 장로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다.
또한 그녀는 동시에 엘븐우드의 특사였으니, 대륙의 어느 왕국에 가더라도 귀빈 대우를 받을 것이다.
그녀가 인간이었다면. 아마 이런 험지까지 홀로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근처에 있는 그레이림 영지의 협조를 받았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어쩌면 영웅 군터와 함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리스 셀레나는 요정이었다.
요정 중에서도 홀로 외딴 섬처럼 살고있는 대수림의 고행자.
때문에 그녀는 아캄분지에 홀로 찾아왔다.
자인과 경비대장이 찾아온 곳이 아캄분지의 서쪽 경계라면, 대수림 깊숙한 곳에서 출발한 이리스는 동쪽 경계에 도착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기온이 높은 대수림의 태양은 저 서쪽의 태양보다 훨씬 붉다.
마치 태양이 하늘과 구름을 불사르는 듯했다.
실시간으로 땅아래 모든 것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엘프의 시력은 독수리에 못지 않다.
그녀의 눈이 분지 전체를 살폈다.
그런다고 펠레리안의 던전을 바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리스에게는 경험이 있었다.
세계수에서도 관측된 빛.
그리고 수정구를 통해서 감지한 신호.
그것을 이용해 파악한 대략적인 좌표이며 방위가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늙은 마도사가 던전을 짓기 좋아하는 장소가 어딘지에 대한 지식 또한 있었다.
이리스는 주저하지 않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경비대장과 자인이 조심스럽게 줄을 타고 내려갔던 것과 대비되는 모습.
툭.
추락사 하기 충분한 높이였지만 그저 가벼운 착지음만 났을 뿐이다.
이리스는 다리를 살짝 스트레칭 한 뒤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사슴같이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그녀는 아캄 분지를 수색했다.
이리스에게 지식과 경험이 있다고 해도 분지는 넓었다.
의심되는 지역 중 가장 가까운 곳부터 차례차례 수색했다.
그 과정이 기계적일만큼 꼼꼼했다.
마침내, 그녀는 펠레리안의 던전을 찾아냈다.
처음으로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펠레리안의 던전은 그 정확한 개수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는 자신의 던전에 번호를 매겼다.
현재 발견된 던전 중 가장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던전의 번호는 623번이었다.
던전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바닥 타일에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리스는 가볍게 그 함정들을 돌파해냈다.
" ······초기의 던전인가."
던전에 설치된 얄팍한 함정들을 보고 그리 생각했다.
석문이 나타났다.
"코카트리스?"
완전히 부패한 코카트리스의 사체가 있었다.
마물이 펠레리안의 던전을 거처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마물 역시 누군가에게 사냥당한걸까.
썩어버린 육신에는 곳곳에 파먹힌 흔적이 있다.
이리스는 실망했다.
펠레리안은 던전에 없는 것 같다.
그가 이곳에 있었다면 저런 마물이 자리잡게 두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펠레리안이 마물을 해치웠다면 재도 남지 않았으리라.
똑, 똑, 똑, 똑, 똑, 똑, 똑-
일곱번의 노크.
그리고 석문이 열렸다.
이리스는 던전 내부를 살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누가 이곳을······."
이미 누군가 다녀갔다.
누군가가 머물렀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지진이 일어났던건지 반쯤 뒤틀린 금고의 문앞에 이리스가 다가갔다.
'초기의 던전이 맞는데······ 이 금고는 수준이 달라.'
이상한 던전이다.
설계된 양식이며 조악한 함정들은 전형적인 펠레리안의 초기 던전이었다.
하지만 이 마법 금고는 펠레리안의 후기 던전에서나 발견되는 것이었다.
초기 던전과 후기 던전이 지어진 시간대가 수백년 간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하다.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던전은 수백년 전에 지어졌지만, 펠레리안이 근 일백 년 사이에 여기 머물렀던 것 같다.
백 년이라고 하면 인간에게는 무지막지하게 긴 시간이지만 엘프에게는 아니었다.
"간발의 차······ 조금만 일찍 올걸."
이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15년 살면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뱀 같은 종족이 들었다면 어이가 없을 말이다.
이리스는 금고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문이 뒤틀려 틈이 생겨있지만 사람이 지나갈 공간은 아니었다.
해봤자 주먹도 들어가기 어려운 너비.
펠레리안의 단서는 모두 모아야 했다. 어쩌면 귀한 물건이 있을지도.
그 금고를 해체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이리스는 무려 두 시간을 써서 노출된 경첩을 부수는데에 성공했다.
터엉!
부서진 문이 넘어가고.
금고 내부로 들어간 이리스.
그녀는 그제야 금고의 내용물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 ······."
책 몇 권 정도만 나뒹굴고 있다.
선명한 먼지 자국이 도둑의 흔적을 명확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대체 어떻게······.'
이리스는 던전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많은 것들을 발견했다.
우선 투구와 망토를 뒤집어쓴채 작동정지한 요격골렘이 있었다.
"······."
꿈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체 왜 그런 꼴로 처치되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박살나 있는 수조.
여기서 그녀는 펠레리안이 키메라를 만들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키메라의 허물까지 발견했다.
실험은 실패했겠지, 키메라가 홀로 살아 도망쳤으니.
"제거해야겠군."
'키메라를 제거해서 표본을 회수'한다.
이리스는 앞으로의 행동지침을 그렇게 정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던전을 떠나려던 그녀의 발이 멈췄다.
벽에 걸려있는 초상화 한 점이 이리스를 멈춘 것이다.
나르시시스트 답게, 펠레리안 그 노괴는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
엘프답지 않게 주름진 얼굴. 자신만만한 미소.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그 초상화에도 두텁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물렀던 누군가가 그 초상화에 낙서를 해두었다.
아마도 손가락으로 그림의 먼지를 지우면서 만든 글씨.
그런데 그 글씨가 도저히 이리스의 지식으로 알아볼 수 없었다.
'뭐지 이 글은. 아니, 그림인가?'
써있기를 묘사해보자면.
──────────────
廿人
ㄷН머己l
──────────────
대체 이게 무슨 문자라는 말인가.
" ······룬문자?"
이리스는 상대적으로 마법적인 지식은 부족했더랬다.
그 펠레리안의 던전인 만큼, 어떤한 마법적 표식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어째선지 정감이 가는 표식이다.
이리스는 그림 속의 펠레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녀가 슬쩍, 브로드소드를 발도했다.
파바바바박!
한 번 휘둘렀을뿐인데 파공음이 연속적으로 들렸다.
곧, 산산조각난 펠레리안의 초상화가 후두둑 떨어졌다.
이리스는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요정 조사관은 키메라를 사냥할 것이다.
* * *
휘이이잉.
오늘은, 바람이 조금 소란스럽군.
사나이의 웅지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기분.
갑자기 내 반지에 입을 맞춘 기사가 생각나서 좀 기분이 더러워졌다. 미친놈, 명명백백한 사나이인 내게.
나뭇잎이 날아와 내 얼굴에 철썩 붙었다.
그것을 털어내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청명하니 쨍한 날씨다.
맑은 하늘이 보인다는 것은 이곳이 키메라를 사냥하기 좋은 곳임을 의미한다.
그놈은 어차피 땅속을 기어다니는 주제에 꼭 이렇게 공터가 있는 곳에서만 출몰했다.
내가 놈을 만난 곳이 절벽 주변인 이유도 그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왜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이유가 짐작이 된다.
놈은 땅굴을 파고 다닌다.
그리고 대수림의 큼지막한 나무들은 땅 밑으로도 뿌리를 깊게 뻗치고 있기 마련이다.
당연히 그 뿌리를 피해서 땅굴을 파고 다니겠지.
내가 놈의 습성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증거였다.
그 키메라는 지능이 높지 않다.
함정을 파놓으면 족족 나타나준다는 말이지.
아니면 자신감이 워낙 넘쳐서 어차피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오늘 놈을 끝장낼 것이다.
사실 저번에 놈이 흘렸던 피를 핥아먹어보고, 잘린 다리의 살을 쪽쪽 빨아먹어봤지만 진화 트리는 갱신되지 않았다.
진짜 벌컥벌컥 마시는 정도가 되어야 조건이 충족되나보다.
키메라를 잡아도 설마 조건 달성이 안되는 건 아니겠지?
일단, 열심히 해봐야겠다.
놈을 끌어내기 위해서 당연히 미끼를 준비했다.
땅은 마물의 피로 젖어있었고, 그 위에는 멧돼지 모양의 흙 모형을 준비해두었다.
그래, 진짜 마물이 아니라 흙 모형이었다.
내가 이제 갓 레벨이 4가 된 기초원소마법으로 만든 멧돼지 모형이었다.
땅속에 있는 그놈은 아무것도 모른채 멧돼지 모형을 삼킬 것이다.
그리고 흙 맛에 깜짝 놀라겠지.
하지만 겨우 그놈을 맛으로 놀래키려고 이런 귀찮은 짓을 한건 아니다.
저걸 만드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으니까.
두두두-
그래, 와라.
나는 '준비'를 마쳤다.
두두두두두-
놈이 땅을 부수며 튀어나왔다.
아우 질리지도 않나.
쟤는 꼭 씹지도 않고 한입에 삼키려고 하더라.
그 식탐이 이번에는 내게 도움이 되었다.
놈은 흙 인형을 와작 하고 삼켰다.
신경독을 잔뜩 주입한 멧돼지를 삼키고도 멀쩡했던 키메라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퀘에에에에엑!"
키메라가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어떻게 했냐고?
그야, 흙 인형 속에 칼과 화살, 창을 엄청나게 박아놨기 때문이다.
병사들에게 회수한 날붙이들을 마치 밤송이처럼 만들어두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당연히 신경독도 잔뜩 발라뒀지.
"퀘에엑!"
놈은 입에서 피를 계속 토하며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즉사 할 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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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격분], [광전사], [중독], [살의], [탈피 직후], [취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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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은 며칠 전 '갑각'스킬을 '철갑'스킬로 진화시켰다.
하지만 탈피 후에는 그 단단했던 갑각이 물렁해진다는 약점이 있다.
지난 일로부터 이틀이 꼬박 지난 지금.
아직 놈의 갑각은 굳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아아아아악!"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내달렸다.
놈은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기회였다.
하루를 또한 꼬박 활용해서 갈고닦은 기술을 시험하는 것이다.
가속을 이용해 빠르게 접근하는 나.
그리고 내 꼬리에는 다름아닌 소검 한자루가 들려 있었다.
엘븐 브로드소드. 기묘하게 가벼운 그 칼.
이제는 잡고 달리는 것도 가능하다.
신체 구조상 제대로 휘두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
하지만 나는 스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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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빌리는 뿔lv4: 참격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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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키메라에게 빌린 스킬이다.
자르기의 상위 스킬.
그리고 나는 몇 번의 실험 끝에 알아냈으니.
제대로 된 날붙이를 들고 있을 때, 참격의 스킬 효과는 배가 되는 것이다.
나는 놈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가는데에 성공했다.
*「참격lv1을 발동합니다.」
검을 휘두르는 힘은, 아마도 어린아이보다 못했을 것이다.
허나 스킬의 힘이 깃든 검은 제 목적을 다했다.
서걱-
다리의 관절을 정확히 가르고 지나가는 검.
푸슈우우-
잘린 관절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나왔다.
그것을 피해 지나간다.
또 한 번, 태극검식!
뚜걱!
이번에는 관절을 정확히 베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 하나가 중간부터 잘려나갔다.
놈도 경악해서 나를 잡으려 했다.
마치 탭댄스를 추는 듯 호다닥 남은 다리를 움직였다는 것이다.
옆에서 보기에는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당사자인 나에게는 아니었다.
쾅, 쾅, 땅을 찍는 저 다리에 한 번이라도 밟히면 그대로 죽겠지.
허나 검사의 감각은 위기상황에서 더 예민해지는 법이다.
내 정신이 마침내 심적권청(心滴券聽)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으악!
진짜 죽을 뻔했네.
한 번만, 한 번만 더.
*「참격lv1을 발동합니다.」
이 스킬은 마나를 꽤 많이 소비한다는 말이지.
그러나 내 검은 마침내 또 하나의 다리를 잘라냈다.
놈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서걱- 쿠우웅!
다리 여덟 중 세개가 잘렸으니 쓰러질 수밖에.
"퀘에에엑!"
아직 전의는 살아있나보군.
덤벼라.
무림초출 검사(劍蛇)인 내가 상대해주지.
팅!
앗.
놈의 다리에 맞아서 브로드소드가 날아갔다. 꼬리로 쥐는 힘은 약해서다.
그래 뭐, 내 주특기는 칼이 아니니까.
사실 다리를 세 개나 벨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안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요리 시작이다.
두 번째 진화
023.
으앙!
애처럼 징징 우는게 아니다.
용맹스럽게 키메라의 몸통을 깨무는 효과음이었다.
독샘이 쫙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독샘 안에 고여있던 신경독을 한계까지 주입했기 때문이다.
텅텅 비었다 이제.
"퀘엑!"
키메라가 피를 마구 뿜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빠르게 움직인다.
질기기도 해라.
하긴, 체급만 봐도 코끼리보다 커보이는 녀석이다.
무게를 잰다면 톤 단위는 가볍게 넘어가겠지.
게다가 나는 얼마 전에 확신을 가진 것이 있었다.
독내성 lv3인 토끼, 독내성 lv2인 메두사맘이 있다면 누가 더 독에 강할까.
직관적으로 와닿는게 정답이다.
당연히 메두사맘이 더 강하다. 어지간한 맹독에도 끄덕 없을 것이다.
스킬은 분명 유의미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물리적인 체급의 영향이 있다.
사마귀의 참격lv10보다 질럿의 참격lv1이 강한게 당연하다.
그리고 체질이라고 해야할까, 마물의 격이랄까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허접해도 독사인 나는 어릴 적부터 독에 강한 편이었다.
그런 면에서 키메라 저놈도 우습게 볼 수 없다.
용의 혈통이라고 하지 않았나.
펠레리안이 가오 때문에 용의 피를 구해다 섞어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모종의 효과가 있겠지.
파바박!
놈의 성한 다리가 나를 찍어죽이기 위해 죽음의 무도를 춘다.
저 다리에 사람의 몸은 정육점 고기처럼 쉽게 썰렸다.
그러나 나는 작다.
아직도 아기 팔뚝만한 굵기.
저렇게 거대한 다리를 휘둘러봤자 닿을리 없다.
악!
꼬리가 살짝 찝혔다.
피가 나네.
원래도 집중하긴 했는데 더 집중했다.
가속을 이용해 다리를 피해 놈의 몸 안쪽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되면.
쿠웅!
역시나.
놈은 제 다리가 엉켜 넘어졌다.
원래라면 몰라도 이미 놈의 다리를 세 개나 잘라낸 참이다.
좋아 넘어졌으니 이제 불을 끼얹으면 될 터.
어엇!
내 생각처럼 돌아가지는 않았다.
놈은 발광lv20을 광전사lv1로 진화시켰었다.
광전사라 함은 무엇인가.
화살을 맞아도, 찢어진 배에서 내장을 흘리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놈은 자꾸 넘어지자 미친 짓을 했다.
튼튼한 앞다리 두 개를 다리 삼아 몸을 세운것이다.
즉.
'섰다······! 이 자식 섰어!'
너무 어이없는 광경에 나는 싸우던 것도 잊고 감탄을 내질렀다.
하여튼, 그리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선 상태에서 놈이 할 수 있는 것은 남은 다리들을 허우적대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안아줘요!'하고 달려드는 날다람쥐 캐릭터가 생각나는 모습이다.
"구웨에엑!"
놈은 피섞인 구토를 뿜어냈다.
윽, 왠지 위험해보여서 얼른 피했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구토를 하자마자 몸을 내게 던졌다.
그 벌어진 입이 나를 삼키려 쩍 벌어졌다.
*「초급원소마법:흙lv4를 사용합니다.」
나는 골렘에게 활용했던 그 마법을 썼다.
놈이 서있는 바닥을 미끄럽게 만든 것이다.
저 자세로는 넘어지기 더 쉬울 수밖에 없다.
놈은 나를 덮치는 대신 제가 쏟아놓은 토사물 위로 엎어졌다.
철퍼억!
으 드러.
"뀌익, 뀌익!"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이제.
놈은 기어오듯 내게 접근했다.
투지 하나는 정말 대단하군.
그래, 이제 끝내주마.
독니를 박아넣는 짓은 이제 할 수 없다.
거리를 뒀다가는 애써 궁지로 몰았던 저놈이 다시 도망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끝장을 보는 수밖에.
나는 어느새 튕겨나간 엘븐 브로드소드 옆에 있었다.
이 가벼운 검은 사실 꼬리보다 입으로 깨무는게 더 편하다.
독니를 쓸 수 있도록 여태까지는 꼬리로 잡아 휘둘렀지만 이제는 상관없겠지.
꽈악.
깨물어서 들었다.
아아, 이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
검사로 돌아갈 때가 왔다.
나는 현문정종의 도가검법을 발휘했다.
검을 물고 열심히 달렸다는 뜻이다.
헛짓거리가 아니다. 이렇게 칼을 쓰는 검사를 만화에서도 봤다.
흡!
마력을 전부 써서 참격을 발휘했다.
놈도 나를 죽이려 다리를 휘둘렀다.
쐐애액!
그 다리가 내 몸을 스치듯 지나가고.
나는 대신 놈의 다리 사이를 통과했다.
몸을 회전하며 놈의 몸통을 벤 것은 물론이다.
뱀도류, 키메라 자르기.
*「참격lv1을 사용합니다.」
서걱-
깊게 들어갔다.
갈라진 놈의 몸에서 시뻘건 내장덩어리 같은게 튀어나왔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나는 과감하게 도약을 사용했다.
시뻘겋게 뻥 뚫려있는 상처로, 놈의 몸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짓거리는 한 번 해봐서 익숙하다.
혼재규어도 당했다.
그때는 내가 작디작은 실뱀이었는데도 효과가 출중했다.
어디 키메라 너도 한 번 견뎌봐라.
나는 물만난 미꾸라지처럼 놈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구 주변을 물어뜯었다.
내 덩치와 치악력도 이전과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놈은 괴성을 지르며 발악했다.
물론 나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몸 속에서는 숨을 쉬기가 아주 어렵다.
다행히 내가 숨참기 스킬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지.
질식사 하기 전에 놈을 죽이면 된다.
아니면 놈의 허파를 먼저 찾아내든지.
그러기 위해서 나는 열심히도 놈의 몸속을 휘저었다.
으퉤퉤, 써라. 이거 쓸개인가.
참 나도 비위도 좋아졌단 말이지.
그러다 쑤욱,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놈이 혼 재규어처럼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은 아니리라.
본능적으로 땅굴 속으로 도망치려는 것이다.
이거 얼른 해치워야겠는걸.
그리고 난 마침내 찾아냈다.
뜨겁게 맥동치는 놈의 심장을.
콰악.
아무리 광전사라고 해도 심장이 터진채로 싸우는 괴물은 없으리라.
키메라, 네가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그럴 거고.
놈의 움직임이 멎었다.
쿠웅.
곧이어, 대량의 '경험치'가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면 마성이라고 표현하는게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대량의 마성을 흡수합니다.」
*「레벨이 한계치 입니다」
*「흡수하지 못한 마성이 저장됩니다.」
아 이거 아까운걸.
원래라면 분명 혼재규어를 잡았을 때처럼 폭렙을 했을 것이다.
확실히 키메라는 혼재규어보다 훨씬 강한 놈이었으니까.
물론 쌓인 마성으로 스킬을 진화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아쉽긴 하다는 말이지.
*「축적된 마성이 임계점에 가까워집니다.」
뭐지, 무슨 임계점?
다시 한 번 내 상태창을 확인했다.
──────────────
[화이트 혼 스네이크lv10+++]
──────────────
lv옆의 +표시가 세 개가 되었다.
흐음.
일단 마석부터 챙기자.
여태까지 그랬듯, 키메라 역시 심장 안에 마석을 지니고 있었다.
키메라의 레벨은 20이었다.
혼 재규어의 레벨이 30이 넘었으니까, 레벨만 보면 혼 재규어가 더 강해보였다.
하지만 역시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키메라의 마석은 크고 아름다웠다.
──────────────
[파프나챠의 마석: 4등급]
──────────────
잘먹겠습니다.
아니!
파프나챠의 마석을 먹은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맛이 다르잖아.
코카트리스의 마석은 뜨끈한 동시에 싸한 맛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파프나챠의 마석은 그보다 훨씬 더 달았다.
용의 혈통이 섞여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마치 달고나처럼 확연한 단맛이 느껴졌다.
맛있다는 뜻이다. 훌륭해.
*「육체에 마성이 깃듭니다.」
*「격이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축적된 마성이 임계점에 가까워집니다.」
다시 한번 마성이 임계점에 가까워졌다는 말이 들렸다.
임계점은 뭐며 임계점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걸까.
궁금하긴 한데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더 이상 진화를 늦추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못참겠어!
나는 키메라의 몸속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캄캄한 땅굴 속이다.
고약한 냄새가 나고 옆에 파프나챠의 사체가 있지만 이곳보다 안전한 곳은 드물 것이다.
즉, 진화를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해볼까?
진화를 위해서는 잠을 자야한다.
나는 키메라의 사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전생에는 잠에 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쩌면 누워서 스마트폰을 하는 버릇이 들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곤 하면 여러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생각, 뭔가 잠들기 아깝다는 느낌도 들었고.
그래서 불면증으로 고생했는데 이제는 달랐다.
눈을 감으면 금방 잠에 들 수 있었다.
어쩌면 불면증도 정신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지금 뱀으로 사는게 생각보다 만족스럽기도 하고.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새롭게 진화해 있겠지.
잘있어라, 세상아.
나는 어둠 같은 잠에 잠겨 들······
지 않았다.
잠깐.
눈이 번쩍 떠졌다.
생각나는게 있었기 때문이다
파프나챠의 상태창.
지금은 놈이 죽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없지만 기억나는 게 있다.
──────────────
[두 개의 심장lv1]
──────────────
그런 스킬이 있었다.
지가 뭐 박지성이야 싶었는데, 무슨 스킬이었을까.
경기장을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지치지 않는 스킬일까.
아니면 혹시······.
마력감지를 사용했다.
보이는 시야가 달라졌다.
키메라의 피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온 사방이 살짝 붉게 빛났으나, 특히 놈의 몸 한 곳에 밝은 빛무리가 뭉쳐 있었다.
아마도, 마석이 있는 곳.
나는 놈의 몸을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존재했다. 또 하나의 심장이.
두 개의 심장이라는 스킬은 말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런데 심장이 두 개면 하나쯤 터졌다고 안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만화 같이 되지는 않겠지.
──────────────
[파프나챠의 마석: 4등급]
──────────────
이쪽 심장에도 역시 마석이 있었다.
마석이 두 개지요.
이것 역시 와작 삼켰다.
역시 달콤한 맛이 입안에 번졌고, 그 맛보다도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축적된 마성이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육체에 깃든 마성이 진화를 촉진합니다.」
*「진화하세요.」
어 진화할거다.
뭔가 바뀌었으려나.
파프나챠를 해치우면서 그놈의 피도 배가 빵빵하게 삼켰다.
진화트리가 바뀌었을지 궁금하다.
얼른 잠을 청했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어쩐지 잠이 잘 들지 않는······
──────────────
[레벨10을 달성하여 진화할 수 있습니다.]
[진화를 하시겠습니까?]
──────────────
하하, 머리가 땅에 닿자마자 잠든 수준이었다.
어느새 눈 앞에 상태창이 보였다.
그리고 기존에는 없었던 내용도 있다.
──────────────
[마성의 축적으로 진화가 촉진됩니다.]
──────────────
촉진이란다.
그리고 떠오르는 진화 선택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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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혼 스네이크lv10]에서
1. [그린 혼 스네이크](+)
2. [포이즌 화이트 스네이크](+)
3. [늪 화이트 혼 스네이크](+)
4. [트랩 혼 스네이크](+)
5. [더블 혼 스네이크](+)
6. [화이트 혼 파이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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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진화 선택지에 '+' 표시가 떴다.
저게 진화의 촉진이라는 것 같다. 정확히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추가된 6번 선택지.
나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드디어 '스네이크'가 아닌 선택지가 나왔기 때문이다.
파이톤(Python)이란다.
한국으로 번역하면 비단뱀정도 될까.
어린왕자에 나오는 그 보아뱀하고도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뱀이다.
파이톤의 그 가장 큰 특징은 무늬와 크기다.
'비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처럼 아름다운 무늬가 있고 종에 따라 사람마저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커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아나콘다와 비슷한 수준까지 자라기도 한다.
메두사맘의 명칭이 서펜트였던 것처럼, 명확히 스네이크의 다음 단계 같다.
역시 용의 혈통!
──────────────
[화이트 혼 파이톤]
보기 드문 흰 개체의 파이톤. 마력에 의해 아름다운 무늬를 지녔다.
흰 빛깔의 몸은 생존에 불리하지만, 그 색깔 덕에 무늬가 독특한 마력을 지니게 되었다.
──────────────
설명마저 아름답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그린은 가라! 드디어 화이트가 인정받는 시대가 온 것인가.
예의상 아주 잠깐만 고민했다.
그래 달리 선택할게 있겠나.
*「화이트 혼 파이톤을 선택했습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특수 진화!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촉진'의 의미가 드러났다.
*「축적된 마성에 의해 진화가 촉진됩니다.」
*「대상이 달성한 조건에 기반해, 진화의 과정이 가속합니다.」
어.
드디어 내 노력이 합당하게 평가되는건가?
그런건가.
*「뿔을 가장 많이 활용했습니다.」
그렇지, 뿔.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으로 진화합니다.」
오오.
머리가 간지럽고 뿔이 하나 더 자라난다.
몸이 커지고, 희고 매끈했던 비늘에 아름다운 살구색 무늬가 떠오른다.
그렇게 나는 진화했다.
귀 긴 사이코들
024.
아, 아름다운 아침이다.
햇볕이 따사롭지도 않았고, 쪼로롱 노래를 부르는 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아침임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아침이 아름답고 말고는 내가 정하는 것 아닌가.
지옥 속에 빠져 있더라도.
땅굴 속에, 키메라의 피로 젖은 진창 위를 뒹굴고 있더라고 해도 나만 행복하면 아름다운 아침인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리 믿었다.
그래도 햇볕이 없는 건 아쉽군.
내 두 뿔과 비늘의 무늬가 햇볕 아래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다.
그렇다. 나는 진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여전히 뿔의 크기는 귀여울 정도로 작았지만, 양쪽에 하나씩 균형 있게 난 것이 조금 멋진 것 같기도 했다.
확실히 뿔이 돋아난 이후로 내 삶이 달라졌다.
내가 누구?
'빌리는 뿔' 오너.
그리고 동시에, '뛰어넘는 뿔' 오너.
──────────────
[뛰어넘는 뿔lv1]
정신을 집중하고 온 힘을 다해 뛰어넘습니다.
──────────────
그래 뛰어넘는 뿔이란다.
이거 의미불명인 건 빌리는 뿔보다 더하네.
······음.
진화를 하면서 볼 수 있는 게 더 많아졌다.
뛰어넘는 뿔에 대한 설명도 있었지만, 그래서 뭘 뛰어넘는다는지 알 수 없었다.
뭐 이것도 쓰다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스네이크가 아니라 파이톤이다.
물론 스네이크이긴 한데, 누가 불러준다면 스네이크 말고 파이톤이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뉴욕 사는 사람이 저 'USA 살아요~' 하지 않고 '저 뉴욕 살아요~' 하는 것처럼.
그리고 파이톤의 특징이야말로 바로 무늬였다.
암시야가 있다고 해도 아주 선명하게 볼 수는 없었는데, 흰 몸에 살구색 무늬가 아름답게 떠올랐다.
단순히 장식용이 아니라는 것은 내 상태창만 봐도 알았다.
──────────────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lv1]
[특성]
[불굴], [정진], [뿔], [무늬]
······
──────────────
그래, 특성에 무늬가 생겼다.
──────────────
[무늬]
마법이 깃든 무늬를 지녔습니다. 쉽게 상하지 않으며, 일정 수준 이하의 마법과 주술을 튕겨 냅니다.
──────────────
이거 그러니까 방어 버프 같은 거다.
게다가 마법을 튕겨 내다니.
일정 수준 이하라는 말이 어느 정도냐가 문제인데, 그래도 확실히 고마운 특성이었다.
조오타.
이제 키메라도 잡았겠다.
이 분지에서 왕처럼 떵떵거리면서 살아 볼까.
이곳이 대수림의 초입 부분 아닌가 싶다. 적어도 키메라보다 강한 마물은 안 보였으니.
나는 쉿쉿 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세상에 과연 신이 있었던 것일까.
오만한 자에게 천벌을 내리는······.
무늬가 떨렸다.
아니 비늘이 떨렸을지도.
내 친구 생존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도망치라고.
하지만 어디로?
땅굴은 두 방향이다. 앞, 그리고 뒤.
아무 쪽이나 선택했다.
생존본능의 경고와 내 대응 사이에는 정말 그리 큰 틈이 없었다.
신속하게 가속 스킬을 쓰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땅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착각했다.
정확히는 무너지는 게 아니었다.
땅이 솟아오르고 있다.
땅굴은 제법 깊숙한 지하에 뚫려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천장에서 무너지는 흙이 양옆의 통로를 막고, 키메라와 내가 있는 지면은 빠르게 상승했다.
명백하게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마치 흙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이거 마법인가?
마력감지를 써 보았다.
아, 나는 몸을 떨고 말았다.
사방에 마력의 격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빛나는 마력의 물길이 흙에 흐른다.
이것이 마법이라면, 뭐 고급원소마법 그런 것 아닐까.
앗, 천장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벌써 지상까지 끌어올려진 것이다.
젠장, 일단은 키메라 밑으로 들어가서 숨었다.
촤아악!
순식간에 지상에 도달했다.
그리고 키메라 사체의 그림자 속에서.
나는 이 모든 짓을 벌인 자를 목격했다.
'귀쟁이다!'
명명백백한 요정이 그곳에 있었다.
펠레리안과 달리 젊고 아름다우며, 귀가 긴 엘프.
내 선입견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 * *
"고마워."
이리스가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의 발치에는 앞발을 들고 킁킁대는 두더지가 있었다.
반투명한 것이 분명 평범한 동물도, 심지어는 마물조차 아니었다.
"이제 돌아가도 돼, 클레이."
그것은 정령이었다.
4원소 중의 하나. 땅, 혹은 흙의 원소를 관장하는 정령.
이리스가 마법에 통달하지는 못했지만, 고귀한 엘프 가문 출신답게 정령을 부릴 줄은 알았다.
하지만 정령은 이리스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떠나도 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이는 코를 킁킁대며 알짱거렸다.
이리스는 정령에 대한 신경을 껐다.
그녀는 펠레리안의 저주받은 산물을 발견해 냈다.
다만, 놈은 죽어 있었다.
그것도 땅굴 속에서.
정령을 통해 감지해 냈을 때부터 이미 죽어 있었다.
'처참하다.'
키메라의 사체를 보자마자 든 감상이었다.
그녀는 수라장을 거쳐 온 엘프였다. 뛰어난 전사이자 사냥꾼인 만큼 대형 마물과 싸웠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키메라의 상태는 그런 이리스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엉망이었다.
무참하게 잘려 나간 다리들.
온몸에 난 상처, 중독되었는지 악취를 풍기는 검은 피.
내장과 피를 흘리며 기어 가던 몰골 그대로 죽어 있다.
누가.
누가 이 키메라를 상대로 이렇게 싸웠을까.
그리고 어쩌다가 땅굴 속에서 죽어 있는가.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놈의 피를 채취하고 품고 있을지도 모를 마석을 회수해야겠다.
그렇게 결정한 이리스가 검을 뽑아 든 순간이었다.
톡톡.
클레이, 두더지를 닮은 작은 정령이 이리스의 발을 두드렸다.
"왜 그러니?"
정령은 키메라의 사체를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는······.
"그래? ······그렇군."
그러면, 잠깐 도와줄래?
이리스는 정령에게 그런 의념을 전달했다.
정령은 소환자의 뜻에 따랐다.
투웅!
땅이 솟아올랐다.
그 다리를 여럿 잃었음에도 무거운 키메라가 튕겨 올라 핑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그 밑에 숨어 있었던 흰 뱀이 드러난 것도 물론이다.
"흐음."
머리에 뿔이 달렸다.
혼 계열의 마물.
'흰 개체. 알비노군.'
알비노로 태어난 마물들은 눈에 띈다.
대부분 얼마 자라지 못하고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그런 것치고는 성체까지 자란 것 같다. 게다가 더블 혼.
제법 가상한 일이었다.
이리스는 그 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저 작은 뱀이 키메라를 죽였으리라고는.
뱀은 도망치려는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뱀의 모가지를 밟으려 했다.
휘릭-
그리고, 그 뱀이 이리스의 발을 피했다.
피했을 뿐인가 놀라운 빠르기로 뛰어올라 반격한다.
그 독니가 대단히 뾰족했다.
맹독을 가졌을 게 분명해 보인다.
이리스는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때, 흙이 솟아올라 그녀의 발을 묶었다.
정령의 짓이 아니었다.
'설마, 이 뱀이!'
발이 묶인 상태에서 독사의 공격.
이리스가 아직 어린 요정이었다면 당했을 것이다.
허나, 황금이파리 조사관을 겨우 기초적인 흙 마법으로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녀는 흙을 뿌리치고 물러났다.
뱀은 허공을 깨물고 떨어졌다.
이리스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마법을 습득했군."
마물이 자연적으로 마법을 습득하는 일은 종종 있다.
하지만 겨우 이렇게 작은 미물이? 겨우 뱀이?
"자라면 위험하겠어."
삭초제근이라. 미리 죽여 둘 만한 놈이다.
이리스는 그리 판단했다.
그녀의 실행력은 요정 장로들도 인정한 바였다.
다시 도약한 뱀에게 브로드 소드를 휘두른다.
썩둑- 하고 머리가 잘리지는 않았다.
카각!
그 대신 불똥이 튀겼다.
* * *
미친 귀쟁이.
죽을 뻔했다.
갑자기 밟아 죽이려 하더니 칼질이라니!
작은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목이 쩍 갈라져서 상처가 났다.
피가 주륵 흘러나온다.
하지만 잘리지는 않았다.
허억, 헉, 살아 있다.
아드레날린 비슷한 뭔가가 쫙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온몸이 저릿저릿하고 붕 떠오르는 기분이다.
저 칼.
엘븐 브로드 소드다. 내가 써 봐서 안다.
엄청나게 가볍고 무지하게 날카롭다.
그런데 내 목을 베지 못하고 불똥만 튀겼다.
그것은 내가 일순간 뛰어넘는 뿔의 사용법을 깨달은 덕택이었다.
검이 날아온 순간.
그 검격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막아 내야 할 것이다.
내게 철갑이나 갑각 같은 스킬은 없었다.
그렇다면 무늬뿐.
특성인 무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없을까.
그런 일련의 생각은 일 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뤄졌다.
나는 간절히 바랐고.
*「뛰어넘는 뿔lv1로 특성 '무늬'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특성 '무늬'가 일시적으로 '마법진:방어'가 됩니다.」
그래.
뛰어넘는 뿔은 한계를 뛰어넘는 스킬이었다.
그 덕에 목의 피부가 갈라지는 정도로 끝났다.
생각해 보면 아찔했다.
내가 만약 키메라의 마석 또 하나를 찾지 못했다면.
그래서 새 뿔을 얻지 못했다면 방금 꼼짝없이 목이 잘렸겠지.
놀랍게도 살아남았다.
경악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요정은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야 내가 더 놀랐어.
"······."
미친 살인광 요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엘븐 브로드 소드에 찬란한 빛이 서렸다.
오러가 분명하다. 게다가 그 자인이라는 애송이 기사가 썼던 것보다 훨씬 밝고 선명한 오러.
저거에 맞으면 바로 죽는다.
나는 얼른 도망치려 했다.
퉁!
그런데 제기랄.
땅이 솟더니 내 몸이 붕 떠올랐다.
저 옆에서 입을 가리고 웃는 두더지 정령이 보였다.
놈을 마음속 살생부에 적어 뒀다.
저 미친 사이코패스 엘프 여자 바로 아래다.
아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 봤자 별거 없었다.
모스키토 랫에 물렸던 일.
친근한 지네부부와 이웃의 정을 나눴던 일.
처음으로 진화한 날.
그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저 빛나는 칼을 막을 수단이 내게는 없었다.
뛰어넘는 뿔은 내 마력의 대부분을 앗아갔다.
잘 있어라 세상.
잠재력 20이고 뭐고 아무 소용 없구나.
정신력 20은······.
음, 끝까지 포기 안 해야 당당한 정신력 20답겠지?
번쩍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골렘에게 꼬리를 밟혔을 때.
그때 당연히 꼬리가 뭉개질 줄 알았는데 무사했다.
반지 덕택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꼬리를 말아 들었다.
솔직히 반지가 아무리 튼튼해도 저 검을 막아 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 아주 짧은 순간.
내 반지를 본 엘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오러와 반지가 충돌했다.
쩌어엉!
코앞에 벼락이 떨어지면 이런 굉음이 날까.
충격파가 터졌다. 단순히 금속과 금속이 부딪쳐서 생길 수 없는 것이었다.
잠깐.
의식이 암전했다.
눈을 떠 보니 옆에 구름이 있었다.
미친, 하늘이었다.
나는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간 것이다.
저 멀리 당황한 엘프와 키메라의 사체가 보인다.
쐐애애액!
공기가 미친 듯 내 몸을 때렸다.
이 아캄분지가 전부 내려다보인다.
맑은 하늘 속에서 어쩌면 태양에 꼬리가 닿을 듯했다.
아, 내 꼬리, 그리고 반지 전부 무사하구나.
대체 뭘로 만든 거야 이거.
그러나 중력은 좀처럼 제 것을 포기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나는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이거 꼼짝없이 죽을 것 같은데.
오러를 담은 검격에서도 무사했는데 추락사라니, 웃기지도 않을 일이다.
하지만 내 운은 아직 남아 있던 것 같다.
지면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나는 나뭇가지를 몇 개나 부러뜨리며 떨어졌다.
그리고 수면.
퍼엉!
물보라를 일으키며 웅덩이에 빠졌다.
전신이 시리도록 차갑다.
온몸이 터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진화한 지 얼마나 됐다고 뼈 여럿이 부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정신을 빼놓고 있을 수는 없다.
변온동물인 나는 순식간에 몸이 굳어 버릴 것이다.
미친 듯 몸을 흔들었다.
물가로, 지상으로.
*「특성 정진에 의해 스킬의 습득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수영lv1을 습득했습니다.」
어 고마워~
근데 이미 물 위로 올라왔어.
헉, 헉, 진짜 죽을 뻔했다.
온몸이 차갑다.
저 멀리, 키메라 옆에 서 있는 엘프가 보인다.
나는 얼른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오늘 이 순간 결심했다.
귀 긴 종족, 엘프, 요정.
그들은 하나같이 미친 연놈들이니 믿지 않겠다고.
아아, 분노가 타오른다.
-미친 기집애 같으니라고.
완전 미쳤지.
-보자마자 칼질하는 게 성깔 한번 끔찍하게 더럽구먼.
누군지 모르겠지만 내 뒤에서 자꾸 옳은 말 하기 있습니까?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
[펠레리안의 인장 반지:봉인 해제]
──────────────
어랏.
반지가 봉인 해제되어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 앞에 반투명한, 사람을 겨우 한 뼘 길이로 축소시킨 듯한 늙은 요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요정은 세상에 둘뿐이니.
저 멀리 서 있는 미친 여자는 아니었고.
펠레리안?
설마 진짜 본인?
금방 돌려준다니까.
025.
-흐음, 반지의 봉인이 깨졌어. 던전에 침입한 건가.
펠레리안을 SD캐릭터로 축소시켜 놓은 듯한 모습이다.
크기는 겨우 사람 손바닥만 하고, 머리가 크고 눈도 크다.
당연히 귀염뽀짝해야 할 모습인데 그렇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펠레리안은 홀로그램에서 본 그대로 못생겼기 때문이다.
폭삭 늙기도 했고. 대머리라고 하기엔 좀 그랬지만 이마에 M자가 선명하다.
얼굴에 심술이 그득그득하기도 했다.
저런 건 요정이 아니라 그렘린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눈만 조금 맑아서 오히려 맑눈광 같았다. 맑은 눈의 광인.
-이리스 저 도라이 같은 게 내 파프나챠를, 저 귀여운 아이를······.
펠레리안은 화가 났는지 씨근덕거렸다.
그보다 귀여운 아이라니, 그 키메라가?
미적감각이 한 바퀴 돌아가 있구만.
뭐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이 있으니까.
펠레리안은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마치 내 존재는 신경도 안 쓰는 듯한 모습이다.
-웬 뱀 새끼가 내 반지를 끼고 있지? 쯔쯔.
'말이 좀 심하네. 인종 차별 늙은이가.'
내가 펠레리안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머릿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뱀이 된 이후로 사람의 말을 할 방법이 없었으니.
그러나 펠레리안의 표정은 놀랄 만큼 확 변했다.
눈이 커지고 입이 쩍 벌어진다.
-으악! 뱀이 말한다!
나도 깜짝 놀라서 내적 비명을 질렀다.
내 말이 들려요?
-차, 착각인가. 그래, 착각이겠지.
뭐야 이번엔 또 못 듣네.
조금 전과는 뭐가 달랐을까.
마치 말하듯이 좀 더 힘을 줘서 내면의 독백을 해 보았다.
'내 말이 들리냐고요!'
-으억! 뱀이 진짜 말한다!
펠레리안이 다시 한번 놀랐다.
키메라 실험을 하는 미친 마도사인 주제에 생각보다 담이 작은 것 같다.
-너 뭐냐, 진짜 뱀이야? 아무리 봐도 그냥 미물인데.
'사람한테 미물이 뭡니까.'
-사람? 네가 사람이라고?
'아니, 사람은 아니고 뱀이 맞기는 한데······.'
-자기가 사람이라는 뱀이라니······ 미치겠군. 세상이 변했나.
펠레리안 역시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네가 왜 내 반지를 끼고 있나.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주워 가지고.'
환영과 대화를 하다니, 이상한 기분이다.
그건 펠레리안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어이가 없구만. 한낱 마물이 내 인장반지를······. 저가 사람인 양 말도 하고.
'그쪽이야말로 뭔데요. 진짜 펠레리안 맞습니까?'
-그러면 내가 펠레리안이지 누가 펠레리안인가. 비록 그 영혼 중 일부라고 하나 내가 역천의 마도사가 맞느니라.
정체를 묻자 갑자기 말이 길고 근엄해진다.
영혼 중 일부는 또 뭔 소리래.
'그러면 마법도 막 쓰고 할 수 있나?'
-음, ······수준 낮은 질문이군.
'마도사한테 마법 쓸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게 왜 수준 낮은 질문인데요.'
-이런, 저쪽!
펠레리안이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뻔한 시선 돌리기였지만 넘어가 주기로 했다.
나는 그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전신의 비늘이 떨려 왔다.
오한이 확 들었다.
경비대장을 다시 봤을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이다.
저자가 왜 여기 와 있는 건가.
내 어머니의 목을 일수에 베어 버린 괴물.
영웅 군터가.
그의 기사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다.
* * *
이리스는 도저히 자신이 방금 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당연히 뱀을 단칼에 벨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검에서 느껴지던 강한 반발력.
이리스는 겨우 살덩이 하나를 베지 못했다.
그래,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가죽이 질긴 마물 쯤이야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다음은?
분명 소검에 오러를 둘렀다.
그리고 스킬, '백섬'을 사용했다.
가시뼈 앵무가 그랬듯, 수십 조각이 났어야 했다.
그런데 뱀이 꼬리를 들어 막았다.
정확히는 꼬리에 끼고 있던 반지로.
강철 갑옷조차 벨 수 있는 게 그녀의 오러였다.
충격파가 터지며 뱀은 하늘 높이 튕겨 날아갔다.
브로드 소드를 보니, 칼날에 이가 나가 있었다.
겨우 반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애초에 뱀이 반지를 왜 끼고 있다는 말인가.
무엇 보다. 그 반지의 문양은······.
"······펠레리안."
언뜻 보아서 확신할 수는 없다.
펠레리안을 상징하는 인장이 그 반지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곳에 펠레리안의 키메라가 있는바.
'혹시 그 뱀도 펠레리안이 만든 마물인가.'
그렇다면 키메라보다 엄청난. 대단한 역작임에 틀림없었다.
날아간 뱀을 추격해야 한다.
일단 키메라의 사체를 아공간 마법으로 회수해야 한다.
허리를 숙이려던 이리스가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
기척을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육중한 판금 갑옷이 철컥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곳은 하늘이 드러난 개활지.
그리고 서쪽의 수풀을 헤치고 일단의 무리가 드러났다.
중갑옷을 입은 기사들이다.
기세가 평범한 자들이 없었다.
갑옷의 어깨 부분에 모두 포효하는 사자가 조각되어 있었다.
식견 있는 자들이라면 이들이 철사자 기사단이라는 것을 눈치챘으리라.
이리스에게는 식견이 있었다.
저 철사자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짧은 머리의 사내가 팔 영웅 중 일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들은 철컥철컥 다가오더니 일렬로 도열했다.
모든 기사들이 멈춰선 채, 움직이는 것은 군터뿐이었다.
그는 홀로 이리스에게 접근했다.
멈춰서고는, 입을 연다.
"군터 프리한센. 철사자 기사단 단장."
"······이리스 셀레나, 황금이파리 조사관."
이리스도 답했다.
검을 집어넣지는 않았다.
군터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요정의 특사셨군. 셀레나 가문이라면 들은 바가 있어. 반갑소."
"그리 반가운 상황은 아니군. 기사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여서야."
"포위한 것은 아니오. 장소가 대수림인 만큼 군기를 잃지 않았을 뿐."
"그래서 내게 용건이 있나?"
이리스의 투명한 눈이 군터를 응시했다.
군터는 슬쩍 키메라의 사체를 눈짓했다.
"당신이 처치한 것이오?"
" ······아니,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러면 잘됐군. 당신이 사냥한 것이 아니니."
"무슨 말이지?"
"우리가 키메라의 사체를 회수해야겠소. 양보를 부탁하지."
이리스가 눈을 찌푸렸다.
"어처구니없는 요구군. 이 키메라가 누구의 소산인지 알고 있나?"
"역천. 그 마도사의 유산이겠지."
" ······알고 있군. 그렇다면 마땅히 요정이 처리해야 할 일임도 알 테고."
이리스는 검을 들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철사자 기사단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채채채챙-!
요란한 금속성의 합창이 웅장하다.
군터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군기 잡힌 기사들은 다시 무기를 집어넣었다.
이리스는 싸우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검을 잡은 손의 손목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한쪽 눈으로부터 이마까지 이어지는 긴 상처가 드러났다.
"펠레리안에게 입은 상처다."
" ······."
"나는 직접적인 복수의 대속자. 장로 의회에서 임명받은 정식 조사관. 그대도 왕국의 사람이라면 엘븐우드의 뜻을 존중하라."
당연하게도 왕국은 요정과 우호 관계였다.
이리스는 그것을 들어 군터를 압박한 것이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물러나겠지. 이리스는 그리 생각했다.
"미안하군. 저 키메라 사체가 필요하게 되어서 말이지."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펠레리안이 만든 키메라 사체.
겨우 그딴 게 인간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감당할 수 있나?"
마지막 경고.
군터는 그 질문에 웃었다.
"나는 늘 감당해 왔어."
그는 도끼창을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은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군터는 철사자 기사단을 상대로 끼어들지 말라는 제스처를 했다.
이리스가 군터를 노려봤다.
흉터가 지나간 눈은 회백색으로 탁하다.
그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군터를 꿰뚫어 보려 했다.
정의로운 기사라는 자가 왜 요정에게 강도질인가.
"······당신."
그녀는 판단을 내렸다.
"악인이군."
세간의 평가와 달리, 군터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괴물이라고.
"호오, 그런 종류의 꿰뚫어 보는 기술이라도 있나?"
"······."
"심판자의 눈? 천칭? 뭐 상관없지."
아름다운 요정의 평가에도 철사자 기사단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곧 죽을 자의 평가 따위는 상관없으니."
도끼창이 바람을 찢으며 날아들었다.
이리스 역시 맞서 검을 휘둘렀다.
* * *
-뭐야 저 인간 기사들은. 폼은 더럽게 잡는군.
내가 군터의 위용에 달달 떨고 있으려니 펠레리안은 그리 평가했다.
-나는 특히 기사라는 족속들이 싫어. 멋진 척은 열심히 하는데 사실 쪼도 없는 녀석들이 대부분이거든.
'······.'
-결국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여태까지 폼 잡던 거 그만두고 제발 살려만 주십쇼 마도사님 하고 빌지. 그런 놈들만 벌써 수십은 봤다.
원래 나이 먹으면 말이 많아진다더니, 수백 살은 족히 먹어서 그런 걸까.
펠레리안은 묻지도 않는 것을 주절주절 말했다.
아 진짜.
어머니의 원수가 등장한 참이다.
비장한 기분 좀 느끼려고 했는데. 초를 치는구만.
나는 바위 뒤에 숨어서 등장한 군터와 요정 간의 대립을 훔쳐봤다.
여유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에서는 여전히 피가 줄줄 흐르고 마력 또한 바닥이 났다.
회복이 시급했다.
반지의 아공간 속에 넣어 놨던 포션을 꺼냈다.
이빨로 코르크 뚜껑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마셨다.
한 세 번은 나눠 마실 수 있겠구만.
-허이고. 아공간도 쓸 줄 알아? 엄청난 돌연변이군······. 포션도 마시고.
나를 보는 펠레리안의 시선에는 흥미가 깃들었다.
뭔가 지렁이를 보는 눈에서 귀한 실험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바뀐 것 같아 찝찝하다만.
잠깐.
웹소설에서 보면 이쯤 되었을 때 이렇게 정령? 그런 펫 같은 걸 얻게 되던데.
'그러면 펠레리안이 내 펫인가?'
-뭐라고? 펫? 이 내가 네놈의?
펠레리안은 어이없어하면서 화를 냈다.
너무 크게 중얼거렸나. 생각하는 것과 속으로 말하는 것을 구분하기가 살짝 어렵다.
하아, 포션을 먹으니까 좀 살 것 같네.
효과는 뛰어났다.
상처가 스물스물 아물었으며 텅 비었던 마력도 차올랐다.
좋아.
나는 또 한 번 살아남았다.
여기서 당장 뒤돌아 도망치면 하수.
그리고 군터와 엘프의 만남을 구경하면 고수겠지.
-어, 저놈들 왜 저러나.
펠레리안은 이미 바위 너머를 구경 중이었다.
나도 대가리를 슬쩍 내밀어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둘은 서로 무기를 들고 대치 중이었다.
왜 갑자기 싸우려는 거냐 쟤들.
엘프는 칼을 들고 있었고 군터도 도끼창을 뽑았다.
저 도끼창.
나는 도끼창이 메두사 맘의 목을 가르는 순간을 코앞에서 직관했다.
그리 쉬울 수 없었다.
도끼창은 마치 두부라도 자르는 듯 메두사 맘의 살과 척추를 갈랐다.
그래 봤자 사람이 들고 휘두를 만한 크기의 무기인데.
-안 되는데······.
사이코패스 마도사 펠레리안은 저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듯했다.
역시 같은 요정이다 이건가?
내 입장에서는 양쪽 다 공멸했으면 좋겠는데.
혹시 운이 좋으면 이번에도 막타를······ 크흠.
영웅 살해 같은 업적은 못 참지.
하지만 공멸은 요원할 것 같다.
명백히 엘프의 형세가 불리했기 때문이다.
-감히 인간이.
어라, 저거 그 기사 아닌가.
저 중에 내가 살려 줬던 기사 자인이 끼어 있었다.
표정이 창백해 보이는데, 그리 당하고 금방 여기까지 돌아온 건가.
문득, 나는 궁금해졌다.
군터의 상태창은 어떨까.
거리가 조금 멀지만 시도해 볼 만할지도.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눈에 힘을 줬다.
그러자.
──────────────
[영웅 군터lv???]
······
──────────────
으윽, 보일락 말락.
보일락 말락 한다.
이번에 진화하면서 꿰뚫어 보는 능력이 더 높아진 것 같은데, 그래도 잘 안 보이네.
심지어 레벨마저 물음표다.
──────────────
[특성]
[영웅], [기사], [철혈], [???]······
──────────────
특성도 일부만 보이고.
-미물, 뭐 하는 거냐?
펠레리안은 무시하고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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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발라리안 도끼창술lv50], [진두지휘lv10], [???]······ [천뢰령lv10]······[???], [단월참lv10]······
──────────────
끄으으.
헛!
집중이 흐트러진 순간 상태창이 흩어졌다.
하지만, 내 심장은 이미 뛰기 시작했다.
뭐야.
스킬은 베기, 숨 참기, 다 그런 거 아니었나.
천뢰령이니 단월참이니 하는 건 뭔데.
혹시.
뛰어넘는 뿔을 쓴다면.
그것과 빌리는 뿔을 조합한다면.
영웅 군터의 상위 스킬을 '빌릴' 수 있는 것 아닐까?
훔치는 게 아니라 잠깐 빌리는 거니까.
램프의 펠레리안
026.
자인은 멍했다.
"어이, 표정이 왜 그래?"
" ······예?"
"이 새끼 완전 얼이 빠져 있구만."
그리 말한 선배 기사가 자인의 등을 퍽 쳤다.
언사는 거칠지만 표정이 험악하지는 않았다.
철사자 기사단에서 자인은 막내쯤으로 여겨지는 포지션이었다.
군터의 수행기사는 본디 아직 기사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수습 기사들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자인 역시 그랬다.
아직 부족한 애송이. 하지만 혈기 하나는 넘치는 성격.
선배들이 귀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뭐야, 진짜 좀 안 좋은가 본데.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괜찮겠냐?"
자인은 키메라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고 그의 선배 기사는 생각했다.
"저, 카일 경."
자인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안 돼."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지만, 선배 기사의 눈빛은 차가웠다.
"묻지 마라."
"······."
"너는 철사자 기사단이냐?"
"당연한 질문을 하십니까."
"그래, 그러면 계율을 잊지 마라."
용맹, 복종, 정진. 철사자의 세 계율.
자인은 질문을 하지 못했다.
'왜 수도에 있어야 할 철사자 기사단이 모두 그레이림에 몰려왔습니까.'
진정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는데.
아캄 분지로 출발하려던 시점, 자인은 군터가 기사단을 전부 데려왔음을 알았다.
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철사자 기사단으로 대수림 원정 사냥을 나가는 것은 아닐 텐데.
그의 기사단장은 무슨 생각인 걸까.
어째선지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원정을 따라나섰다.
대수림 초입에서 철사자 기사단의 진격을 막을 마물은 없었다.
마침내, 키메라와 요정이 있는 곳까지 찾아왔다.
그리 무시무시했던 키메라는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던 요정.
군터가 요정과 대립하기 시작할 때부터 불안함이 강해졌다.
기사의 의무는 키메라의 퇴치까지다. 굳이 그 사체를 확보할 필요가 있는가.
게다가 그 상대가 요정의 황금이파리 조사관이라면 함부로 적대할 수 없는 신분인데.
군터는 기어코 엘프와 대립하기로 선택했다.
대체 왜?
"당신, 악인이군."
엘프가 군터를 그리 평했다.
군터를 악인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아마 적국의 군인뿐이리라.
하지만 군터는 불쾌해하지도 않고 오히려 웃었다.
그렇게 결투가 시작되었다.
그래, 그건 결투(決鬪)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었다.
소검에 서린 오러와 도끼창에 서린 오러가 맞부딪쳤다.
쩌어어엉!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충격파는 눈에 보였다.
군터와 요정을 중심으로 풀들이 일제히 드러누웠다.
풍압이 매서웠다.
철사자 기사단은 군터가 얼마나 강한지 알았다.
그래서 엘프의 무용에 경악했다.
이리스는 버티고 있었다.
도끼창에 실린 힘을 오롯이 감당할 수는 없는지 최선을 다해 흘려 낸다.
그사이에 날카로운 공격을 감행했다.
브로드 소드가 도끼창의 자루를 스치고 군터의 목을 노렸다.
군터는 피하는 대신 왼쪽 어깨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검이 어깨의 사자 조각을 타격했다.
카가가가강!
한 번의 충돌이었는데 연속적인 굉음이 울렸다.
갑옷에서 불똥이 매섭게 튀었다.
사자의 조각은 완전히 훼손되었다.
필경 어깨가 시큰할 테지만 군터가 웃었다.
"이것도 피해 보겠나?"
그리고 그는 도끼창을 횡으로 들었다.
빈틈이 커 보이는 자세다.
요정의 예민함 때문일까. 이리스는 오히려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군터의 도끼창이 횡으로 그어졌다.
여태까지에 비해서 그리 빠른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눈의 착각일 뿐.
메두사 서펜트의 목을 잘랐던 한 수가 펼쳐졌다.
도끼창이 그리는 완벽한 곡선의 궤적.
그리고 궤적 이상의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단월참.
강철의 군터가 가진 고유스킬.
소리는 그 뒤에 따라왔다.
쩌어엉!
엘프의 기술로 정련한 브로드 소드가 산산 조각났다.
이리스는 죽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입가에서 붉은 피 한 줄기가 흘러내린다.
"호오. 버텨 냈군."
하지만 무기를 잃고 내상을 입은 이리스.
그녀가 손을 확 펼치자, 흙이 솟구쳐서 군터의 전신을 옭아맸다.
이리스가 부리는 정령의 조화였다.
군터는 그조차 뿌리쳤다.
진각을 밟자, 굉음이 흘리며 흙먼지가 솟구쳤다.
그 먼지를 뚫고 돌진한 군터가 다시 한번 도끼창을 휘둘렀다.
이리스는 피하기 급급했다.
단검 하나를 빼 들었지만 겨우 그런 것으로 도끼창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완전히 수세에 몰렸다.
그녀의 목숨은 폭풍 앞의 가랑잎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 * *
아이, 씨 흙먼지 때문에 가리네.
나는 군터의 상태창을 제대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빌리는 뿔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상태창을 봐야 했다.
그런데 저 둘은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며 싸운다.
군터는 어마어마하게 강하다.
요정 역시 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메두사 맘도 한 방에 죽었는데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했다.
차라리 요정의 스킬을 빌려 볼까 싶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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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l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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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은 아예 상태창을 볼 수가 없었다.
강하기로는 군터가 더해 보이는데 왜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군터의 스킬을 빌리는 게 최선일 터.
뛰어넘는 뿔과 빌리는 뿔의 시너지가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집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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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군터l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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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에!
에이씨.
옆에서 펠레리안이 계속 시끄럽게 굴어서 집중이 쉽지 않았다.
-어딜, 감히, 인간이, 황금이파리 조사관을!
요정우월주의자답게, 펠레리안은 군터가 요정을 공격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요정이 죽을 것 같기는 한데, 뭐 그래서 어떡하려고.
-뱀! 저 요정을 구해라.
'예?'
-가서 인간으로부터 요정을 구하란 말이다!
펠레리안은 마치 당연한 요구를 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코가 막힐 지경.
'무슨 수로요.'
내가? 저 사이로 들어가서 막으라고?
왜냐고 묻기 전에 어떻게가 문제였다.
펠레리안도 그건 아는 모양이었다.
-음, 저 사이로 ······ 끼어들어서. 뭐, 잘 설득하면 어리석은 인간들이라도 자신들의 죄를 이해할 수도 있고.
'미친놈.'
-뭐라고!
노망이라도 났나. 뻔뻔하기도 하지.
펠레리안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안 들리는 척했다.
그러자, 그는 전략을 바꿨다.
-나 역천의 마도사가 내 모든 마성과 영혼에 걸고 맹세하지. 네가 저 요정을 구해준다면 소원을 들어주겠다.
'······.'
명령에서 설득으로 방식을 바꾼 것 같다.
-마도사의 맹세는 결코 어길 수 없다. 그리고 이 역천이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은 무궁무진해. 너 같은 미물에게 다시 찾아올 일 없는 기회란 말이다!
'응 안 들려.'
역천의 마도사고 뭐고, 맹세고 소원이고 뭐고,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니까.
근데 왜 갑자기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실험을 위해 엘프를 희생시키는 것도 감수했던 미친놈이다.
그런데 저 엘프를 구하려고 한다고? 아는 사이인가?
-소원 하나가 아니라 둘을 들어주지. 마지막 제안이다.
뭐 어찌 되었든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다.
포기하시오, 노인장.
-셋! 셋을 들어주마! 진짜 한계야!
정신력 20은 이런 부분에서도 도움이 된다.
옆에서 아무리 빽빽 소리를 질러도 배에 힘 딱 주고 정신 차리면 집중을 이어 갈 수 있는 것이다.
──────────────
[영웅 군터lv???]
[특성]
[영웅]······
[스킬]
[발라리안 도끼창술lv50], [진두지휘lv10], [???]······
──────────────
집중.
집중.
빌려 갈 스킬은 정해 뒀다.
이름들이 특이해서 어떤 스킬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모두가 엄청나 보인다.
내가 가진 여타 스킬들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겠지.
뛰어넘는 뿔을 먼저 사용한다.
한쪽 뿔이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뛰어넘는 뿔lv1로 스킬 '빌리는 뿔lv4'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빌리는 뿔lv4'이 일시적으로 '빌리는 뿔lv10'이 됩니다.」
빌리는 뿔의 레벨이 10이 되었다.
그래, 이번에는 빌리는 뿔.
나머지 한쪽 뿔에도 열기가 깃들었다.
흡!
*「'빌리는 뿔lv10'으로스킬 '천뢰령lv10'을 빌립니다.」
*「천뢰령lv10을 빌리지 못했습니다.」
실패다.
마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겨우 스킬 두 개를 사용했을 뿐인데.
한 번밖에 더 사용하지 못할 것 같다.
나는 더욱더 집중했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결국 주륵, 코피가 흘러나왔다.
뚝뚝 흐르는 코피를 혀로 핥았다.
군터는 요정을 몰아세웠다.
요정의 몸에도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일격을 맞는다면 죽겠지.
그리고 군터의 도끼창이 확 빛을 뿜었다.
끝장을 내려는 게 분명했다.
나 또한, 끝장을 내고자 했다.
마력이 휙 빠져나가고.
*「성공했습니다.」
아, 됐다!
*「일시적으로 '천뢰령lv0'을 얻었습니다.」
어라, 레벨0?
스킬의 격이 너무 높아서 그런가.
그걸 알아볼 여유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군터는 엘프를 끝장내지 않았다.
대신 내가 있는 방향을 돌아봤다.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창 하나를 뽑아 던졌다는 것은 그 직후에 알았다.
쐐액!
공기를 찢으며 단창이 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서 있는 사람의 몸통이 있을 만한 높이였다.
콰아아앙!
단창은 뒤에 있던 아름드리나무를 관통했다.
군터는 뭐라뭐라 외쳤다.
그러자, 구경 중이던 철사자 기사단이 일제히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미친, 설마 스킬을 빌려 간 걸 눈치챈 걸까?
다른 마물들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군터의 스킬을 빌린 내 행동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이끌어 냈다.
군터에 의해 수세에 몰렸던 엘프가 틈을 얻었다.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부욱 찢었다.
그러자 마치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휙 사라졌다.
텔레포트 스크롤 같은 걸까.
-오오! 성공했다! 구해 냈어!
펠레리안이 쾌재를 내질렀다.
어, 그렇게 되는 건가.
-뱀!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거냐!
대답해 주긴 싫었지만, 내가 구했다고 판단하는 듯하니 어울려 줘도 되겠지.
그리고 내가 구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소원 진짜 들어주는 거죠.'
-음······!
'일단 여기서 나 좀 구해 주십쇼. 무사하게!'
무거운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마치 말이 달리는 듯한 속도로 몰려오고 있다.
나같이 작은 뱀쯤은 순식간에 짓밟혀 죽을 것이다.
솔직히 펠레리안의 소원도 그리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좋다. 첫 번째 소원을 접수했으니.
펠레리안은 뭔가 어려운 말들을 중얼거렸다.
반투명한 그의 몸 주변으로 마력이 응집한다.
마치 램프의 지니처럼 든든해 보인다.
-동쪽으로 괜찮겠나?
'어디든요!'
-'비상 탈출'이다!
퍼엉!
그리고 나는 공중으로 사출되었다.
마치 전투기 조종석이 비상탈출하는 것처럼, 공기를 찢으며 하늘로 솟아오른다.
비행을 빌렸을 때보다 훨씬 더 무섭다.
내가 있던 곳에 몰려든 기사들이 개미 떼처럼 보였다.
다시는 비행하지 않겠다 결심했는데!
* * *
"음."
군터가 침음성을 흘렸다.
엘프가 도망쳤다.
텔레포트가 가능한 마도구를 지니고 있던가.
마탑에도 없는 물건일 텐데, 역시 요정들은 숨기는 것이 많다.
"단장님, 괜찮겠습니까?"
그의 곁에 남아 있었던 기사 카일이 물었다.
황금이파리 조사관을 공격했는데 죽이지 못하고 놓쳤다.
후폭풍이 있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이미 쇠락한 족속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군터는 딱 잘라 말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카일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키메라는 확보했다."
이곳 그레이림 근처에 펠레리안의 유산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철사자기사단과 돌아온 군터는 자인으로부터 키메라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그레이림 영지는 몇 번이나 펠레리안의 흔적을 찾았던 것 같다.
그것을 왕성에도 숨기고 있었으니, 이렇게 형편 좋은 일이 있을까.
키메라의 사체는 군터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의 '명분'이 되어 줄 것이다.
'······악인이라.'
요정은 군터를 그리 평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목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악인이라면 군터는 이미 악인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조금 전의 그 감각은.'
무언가 군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짓'을 했다.
마법, 주술, 저주,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단창을 던져 버렸다.
그 방향으로 달려갔던 기사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무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답과 함께.
"되었다. 키메라를 챙겨 그레이림으로 돌아간다."
"예!!"
군터는 몸을 돌렸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자잘한 것들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참교육
027.
라니아는 영주부인의 곁에서 꾸벅 졸았다.
어젯밤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이다.
영웅 군터가 그레이림에 돌아왔다.
그것도 철사자 기사단 전부를 데리고.
라니아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녀는 영웅 군터를 좋아하는 것만큼 그의 기사단 역시 좋아했다.
동경의 대상이 그레이림에 찾아온 것이다.
소녀가 두근거려 밤을 지새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철사자 기사단의 방문은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그날 이후로 어쩐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불안해 보였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병사들로부터 소식이 전달되었다.
군터와 철사자 기사들이 도착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영주성에서는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군터 경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갑옷을 입은 군터와 마찬가지로 완전무장한 기사들이 걸어 들어왔다.
누군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기사들은 키메라의 사체를 끌고 들어왔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키메라는 부패해 있었다.
다리는 잘려 있었고, 온몸에는 말라붙은 검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고약한 피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그, 그게 그 키메라구만."
영주도 겁을 먹은 눈치였다.
사냥한 키메라를 직접 보는 것은 그 또한 처음이었다.
"맞소."
"고생 많으셨소. 역시 철사자 기사단은 용맹하군."
"그리고 엄정하지. 역천의 유적을 발견했소. 그 존재를 알고도 방치하셨더군, 자작."
"······그게 무슨?"
군터는 영웅이었고, 영주는 귀족이다.
실제의 권세야 군터가 더 드높겠지만,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지금 군터의 말투에는 존중이 없었다.
"증인과 증언을 이미 확보했소."
"증언이라니, 무슨 증언?"
영주는 당황했다.
장내에 싸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직 어린 라니아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졸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고, 기사 중에 반가운 얼굴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무장을 전부 갖춘 채 도열해 있는 철사자 기사단.
삼엄한 기세가 피어오르는 그들 중에 라니아가 아는 기사가 있었다.
귀찮은 질문에도 친절히 답해 주던 젊은 기사 자인.
오른쪽 끄트머리에 그가 있었다.
라니아가 자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자인 역시 라니아를 보았다.
평소와 달리 안색이 창백하기 그지없다.
라니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원래의 자인이라면 가벼운 눈인사라도 해 줬을 것이다.
"······."
하지만 아니었다.
자인은 마치 울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슬쩍 눈을 피한다.
라니아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려던 순간.
영주부인이 얼른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손길이 다급하고 억세서 라니아도 깜짝 놀랐다.
그제야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
채채챙!
그레이림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터와 철사자 기사단은 무기를 뽑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뽑은 영지 기사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영주가 벌게진 얼굴로 화를 냈다.
"무슨 참람된 소리요! 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국법을 어겼다니!"
당황한 영주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군터는 대답 대신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텅.
황금으로 주조된 신분패였다.
머리가 셋인 독수리가 뱀을 물고 있는, 왕가의 문장.
"나 군터 프리한센은 왕명에 의해 감찰관으로 임명받았소. 이에 그레이림 영지를 감찰한바. 마경의 감시에 소홀하였으며 그 군기가 해이해졌음을 확인했소. 접경지역 위수 방위금의 착복과 부정 사용 또한 적발되었으니, 그대 그레이림 자작을 수도로 소환하는 바요."
"······이럴 수는 없어. 아무리 왕가라고 해도!"
처음에는 어처구니없어했던 영주도 이제는 상황을 눈치챘다.
애초에 메두사 서펜트 토벌을 위해 영웅 군터가 직접 찾아왔을 때부터 이상했더라니.
처음부터 왕가와 합작하여 영주를 끌어내리려 했던 걸까.
왜?
이깟 작은 영지를······.
"억울한 면이 있다면 성실히 조사에 임하면 되는 것이오."
"귀족원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당신이 걱정할 일인가? 자작은 귀족의 합당한 권리를 누릴 테니 신경 쓰지 마시오. 모셔라."
철사자 기사들이 영주에게 다가갔다.
영지기사가 그것을 막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영주가 손을 들어 막았다.
"군터!"
그 기백이 사내다웠다.
군터도 잠자코 들어주었다.
"내 가족들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음."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패배자의 울부짖음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아는 영주는 힘없이 끌려갔다.
"자작께서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실 때까지. 영주대행은 왕명으로 인정받은 감찰관인 나, 그리고 영주부인이 동시에 맡을 것이다."
군터는 그리 천명했다.
천민에서 시작해 영웅의 자리에 오른 사내.
그와 그 기사단이 그레이림 영지를 점유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 *
와 상쾌해!
시원한 바람이 탁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리는 기분이다.
사실 시원하기를 넘어서 슬슬 추울 지경이다.
너무 오래 날았기 때문이다.
이 더운 대수림에서 얼어 죽는다면 그만큼 우스운 일이 없겠지.
오늘 하루에만 두 번이나 구름과 인사했다.
비행은 안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그래도 기사들한테 사냥당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정말 무서웠다.
그놈들, 확실히 평범한 인간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 묵직한 판금 갑옷을 입고 철컥철컥 달려오는데, 무슨 오토바이 같은 속도였다.
땅이 두두두 떨리는 게 매드맥X 찍는 줄 알았다니까.
거기서 빠져나온 것은 펠레리안 덕택이었다.
그 노인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니, 반지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높은 게 무섭다나. 웃기는 양반이다.
-내 덕에 목숨을 건진 것이다. 미물.
아이고, 내적 독백을 너무 또박또박했나.
친절하게 대꾸해 줬다.
'다시 한번 미물이라고 부르면 가만 안 있는다.'
-······흥, 뱀 주제에.
조금 전까지는 내가 요정을 구해 줬다고 고마워하더니 태도가 싹 바뀌었다.
역시 귀 긴 것들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니까.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동쪽.
'목적지는 없고요?'
-음, 대충 동쪽으로 향하니, 팔라무 우림 유역으로 도착하겠지.
'자기도 모르는 것 같은데······.'
-······긴급탈출이라는 스킬이 원래 그런 거다.
'긴급탈출'이라고 외치더니 그게 스킬인가 보다.
마도사면 텔레포트 같은 것도 쓸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건 약간 비행의 상위 스킬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지금의 내 상태로는 쓸 수 있는 마법이 거의 없으니. 이걸로 만족해라 뱀.
내 의문을 예측한 것처럼 그리 말한다.
그래도 미물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 말은 듣는구만.
나는 만족했다.
하강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어어!'
-떨어지냐, 떨어지고 있는 거냐?
'떨어지잖아요!'
-마력이 부족하니까 어쩔 수 없다.
젠장, 역시 비행은 나랑 맞지 않다.
떨어지는 속력에 가속이 붙었다.
다행히 요정 여자한테 튕겨 나갔을 때처럼 자유 낙하하는 것은 아니었다.
땅으로 접근하니 습하고 뜨거운 기운이 확 느껴졌다.
아캄 분지에 비해서도 확연히 열대에 가까운 기후.
나무들이 훨씬 커졌다.
덩굴식물들이 나무들 사이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우드드득-
그 덩굴들이 낙하의 충격을 감소시켜 줬다.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며 착지했다.
땅조차 푹신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끼가 바닥에 이불처럼 깔려 있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파도 소리.
'살았다!'
그래, 나는 또다시 살아남았다.
이제 진짜 비행 따위는 안 할 생각이다.
여기가 팔라무 우림이라고 했나.
펠레리안이 반지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놀라운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정말 살았군!
저 노인네 마음에 안 든다.
후우, 정말 마음 편한 날이 없다.
드디어 키메라를 잡고 분지의 지배자가 될 줄 알았건만,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오게 되다니.
여기도 위험한 마물이 많겠지?
키메라보다 강한 녀석들이 많을 것이다.
더 동쪽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혼 재규어 같은 놈들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한 번도 못 만나 본 아빠를 여기서 만날지도.
숨도 돌릴 겸, 나는 상태창을 점검해 보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lv1]
[특성]
[불굴], [정진], [뿔], [무늬]
──────────────
여기까지는 저번에 확인했고.
──────────────
[스킬]
[빌리는 뿔lv4]: 천뢰령lv0, [뛰어넘는 뿔lv1]
[초급원소마법:불lv3], [초급원소마법:흙lv4], [맹독: 신경독lv1], [포식lv7], [물어뜯기lv9], [은밀lv6]
[독 내성lv5], [출혈 내성lv3], [고통 내성lv7], [열 내성lv8], [냉기 내성lv1], [석화 내성lv1] [생존본능lv6], [도약lv6], [마력 감지lv3], [가속lv4], [수영lv1], [숨 참기lv5], [참격lv1],
[상태]
[기진맥진]
[업적]
[경비대장 살해]
──────────────
냉기 내성이라는 스킬이 생겨 버렸다. 그 정도로 추웠기 때문이다.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아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하지만 미소가 실실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빌리는 뿔, 그것으로 영웅의 스킬을 훔쳐냈기 때문이다.
아니, 훔친 게 아니라 빌리는 거였지.
하여튼 '천뢰령'이란다. 이름부터 범상찮기 그지없다.
레벨이 0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나는 천뢰령이 어떤 스킬인지 살펴봤다.
──────────────
[천뢰령lv0]
하늘의 번개를 마음에 담으라.
──────────────
어~ 자세한 설명 고맙고.
이런 설명은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제대로 된 효과를 알아보려면 스킬을 사용해 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기진맥진하다.
체력을 회복하고 나서 써 봐야겠다.
무슨 효과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안전한 곳을 우선 찾아보자.
이 정글에는 온갖 소리가 가득하다.
생명의 소리. 안전한 곳을 찾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전에, 해야 할 것이 있다.
펠레리안과의 대화였다.
-뱀.
'예.'
펠레리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기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면 안 된다.
원래는 사람 눈을 잘 못 마주쳤던 나였지만, 뱀이 되고 나서는 아니었다.
음, 아닌가. 좀 힘들긴 하네. 억지로 눈을 마주쳤다.
어라, 펠레리안이 먼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저 요정도 사람 눈 쳐다보는 게 어렵나? 조금 동질감이 들 뻔했다.
-눈알이 징그럽게 생겼군.
'······.'
키메라한테 귀엽다고 했던 사람이 저리 말하니 좀 상처다.
-네 정체가 무엇이냐.
'나요? 뱀이죠.'
-뱀이 말을 하고, 마법을 그리 쓴다고?
'마물이라고 말을 못 하는 법이 있나. 그리고 진짜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생각하는 건데 그쪽이 듣는 거죠.'
-상위 마물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너는 미물······ 아니, 아직 진화가 덜 된 뱀 아니냐.
그냥 한 말인데 저리 답한다.
정말 진화를 많이 한 마물은 말도 하고 그러나?
엄마가 말을 하는 것은 본 적 없는데.
내 생각보다도 '상위 마물'의 커트라인은 높은 것 같았다.
나는 펠레리안에게 구구절절 내 과거사를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전생의 이야기를 해 줄 이유는 없으니.
-설명해 다오.
저리 간절히 말하니,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의 이야기를 했다.
메두사 서펜트의 새끼로 태어나고, 아캄 분지로 도망쳐서 일어난 이야기.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지성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펠레리안의 던전에 들어가 지냈던 것도.
물론 그의 초상화에다 대머리라고 낙서를 해 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펠레리안은 크게 놀랐다.
-돌연변이······!
'예, 뭐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죠.'
돌연변이라고 나처럼 똑똑한 뱀이 나올 수 있나?
아무래도 이 마도사에게 과학적 지식은 없는 것 같다.
-겨우 그 정도 시간 만에 진화를 두 번이나 했다고!
'두 번 했지요.'
-믿기지 않는 잠재력이야. 이런 표본은 처음이다! 아름답기까지 하군.
어쩐지 조금 우쭐해진다.
나는 그런 티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물었다.
'그런 그쪽은 뭡니까. 정말 펠레리안이에요? 왜 반지 속에 있는 겁니까.'
그 던전을 만든 괴팍한 마도사 본인이 맞냐는 질문이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나는 내 혼백의 일부를 찢었다.
'네? 왜요?'
-들어라. 그리고 그 찢은 혼백을 내 소지품에 깃들게 했지. 네가 차고 있던 내 인장 반지가 그 물건이다.
이거 자기가 무슨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자'인 줄 아나. 영혼을 찢어 물건에 넣다니.
생각해 보니까 어둠의 마도사인 건 똑같구나.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영원히 살고 싶기라도 했어요?'
-무슨 소리냐. 요정이 수명 걱정을 할 이유가 있나?
그리 말하면서도 제대로 된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처음 만난 마물이 너 같은 돌연변이라니. 행운이군.
나는 펠레리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약속은 잊지 마십쇼. 소원 두 개 남았으니까.'
-그래 소원 말이지. 당연하다,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니까.
'뭐든지 되는 겁니까?'
-뭐든지.
이 괴짜 마도사에게 어떤 것을 부탁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런데, 펠레리안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익숙했다.
나를 키메라가 동면되어 있는 수조로 안내했을 때 지었던 딱 그 미소였다.
음흉하기 그지없는.
-허나 역천의 대마도사가 마물에게 봉사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
펠레리안의 눈이 번쩍 빛났다.
엄청난 속도로 마력이 응집된다.
-복종하라, 마물!
그리고 그 마력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제부터 내가 네 주인이다. 내 목소리에 따르라.
펠레리안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한 줌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마력으로 지성이 있는 돌연변이를 테이밍하다니.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전형적인 미친 마도사.
비겁하기 그지없는 그의 정신계 마법에, 나는 정신이 몽롱해져서 그의 말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래, 나는 멀쩡했다.
'이럴 것 같더라니.'
-어, 뭐냐. 뭐 하는 거야.
음.
혹여 정신공격 같은 걸 당하면 내 정신력 20은 어떻게 작용할까 싶었는데.
*「특성, '불굴'에 의해 '길들이기lv10'이 무효화 됩니다.」
역시 정신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어허! 가만히 있으래두!
나는 반지를 꼬리에서 빼냈다.
이거 어떻게 참교육시키면 좋을까.
Real Magic Python
028.
'닥쳐.'
나는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보라색 혀를 낼름거리고 독니를 드러냈다.
사아악.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사아악거리는 것은 뱀보다는 고양이가 하는 짓 같은데.
어지간한 마물은 내가 이렇게 위협하면 쫄곤 했다.
-마, 말도 안 돼.
펠레리안에게도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실패할 수도, 혹은 효과가 짧게 지속될 수는 있어. 하지만 아예 안 통하다니······.
아니, 나한테 겁을 먹은 게 아니었나.
나는 준엄하게 꾸짖었다.
'사과부터 해야지 펠레리안.'
-뭐가 문제였지? 대체 어떤 돌연변이길래!
말이 안 통한다.
나는 반지에 불을 뿜어 보았다.
화르르륵!
혹시나 앗 뜨거워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아니, 마법까지 쓴다고오! 믿기지 않는구나!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마법을 쓴다는 사실에 좋아서 뒤로 넘어갈 지경이다.
그의 눈에는 내가 엄청 진귀하게 보이는 것 같다.
나는 반지를 두들겨 보기도 하고, 물웅덩이 속에 처박아 보기도 했다.
효과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펠레리안은 계속 내 특별함에 감탄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떠올린 방법을 시도해 보는 수밖에.
'두 번째 소원을 말하지. 내가 물어보는 질문들에 앞으로 솔직히 답해 줘라.'
-음, 그래. ······알겠다.
펠레리안은 떨떠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끝? 이 상황에서도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애초에 마도사의 맹세는 어길 수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바보 멍청이겠지.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뱀이 아니다.
일단 물어봐 보았다.
'내가 당신을 해칠 방법이 있나?'
-반지에 깃든, ······내 영혼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을 줄 방법은?'
-쯧, 반지에 마력을 주입해서 내게 고통을 줄 수 있겠지. 방법은 나도 가르쳐 주기 어렵다. 세밀한 마력 컨트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해 보면 안다.
나는 꼬리를 반지 위에 얹었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했을 때처럼, 마력을 주입해 보았다.
고통의 비명을 질러 봐라 펠레리안.
-우흐힉!
그러나 펠레리안은 기묘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명백히 간지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몸도 없는 주제에 감각은 있나 보지.
하지만 간지러움조차 지속되다 보면 고통으로 변하는 법이다.
그는 점차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만, 아악!
마력을 주입하는 속도와 정도를 조절하다 보니 결국 펠레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그만해라! 제길, 배우는 게 빠르기도 하군.
저게 고통스러워하는 연기라면 마도사가 아니라 배우를 했어야겠지.
그러면 솔직히 말한 건 맞는 듯하고.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뭐지?"
-······.
펠레리안이 머뭇거렸다.
'대답해.'
-죽는 것, 어둠 속에 내팽개쳐지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조금 방정맞기까지 하던 노인네였으나, 지금은 달랐다.
너무 오래 살아와서 마치 말라붙은 고목처럼 건조한, 그런 얼굴이었다.
-언젠가 찾아올 죽음 이전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썩어 가듯 남아 있는 것이다.
그 건조한 목소리 속에 한기가 깃들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좋지.
나는 꼬리로 반지를 잡아 들었다.
'그러면 딱 좋은 방법이 있네.'
-뭐 하는······거냐.
웅덩이 앞에서 폴짝거리는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았다.
여차저차 개구리의 몸에 반지를 끼울 수 있었다.
축 늘어진 개구리를 꼬리로 감아 들었다.
나는 수풀과 나무를 헤치며 나아갔다.
펠레리안이 불안한 기색으로 계속 뭐 하는 건지 묻는다.
무시했다.
숲을 나아가다 보니, 멧돼지 한 마리를 발견했다.
땅을 파면서 뭔가를 주워 먹고 있었다.
마물은 아니고 그냥 멧돼지 같다.
내 등장을 알아채자, 겁을 먹은 건지 뀍뀍 댄다.
-대답 안 하나! 뭐 하는 것이냐고 묻고 있다!
'그냥 얌전히 약속한 소원이나 들어주지 그랬어. 반지에 갇혀서 방치되는 것보다는 나랑 같이 다니는 게 낫지 않았을까?'
-······.
그래 할 말이 없겠지. 맞는 말이니까.
잘 가라!
'돼지 똥이나 돼라!'
-잠까안!
뀌익 대는 멧돼지의 입에 반지가 끼워진 개구리를 던졌다.
놈은 입에 음식이 들어오자 놀라더니, 본능적으로 꿀떡꿀떡 삼켰다.
그리고는 멀뚱댄다.
내가 공격할 기색 없이 물러나자, 다시 땅을 킁킁거린다.
바보 같은 짐승이군.
그리고 펠레리안은 그 바보 같은 짐승에게 꿀꺽 삼켜졌다.
언젠가 똥이 되어 나올 것이고, 그리 방치된 채 버려지겠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말을 맞이하리라.
이곳 우림 한가운데에서 엘프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나 그를 구해 줄 확률이 얼마나 될까.
펠레리안은 분명 내게 길들이기 스킬을 쓴 뒤 '마지막 남은 한 줌 마력으로'라는 말을 했다.
혹시나 탈출을 시도할까 지켜봤는데 그런 기색은 없었다.
뱃속에서는 그 환영 같은 것도 내보낼 수 없는 것 같다. 아니면 그조차도 못하게 되었든지.
내세에는 착하게 살도록 펠레리안.
요정 같은 나쁜 종족으로는 태어나지 말고.
뱀처럼 선한 동물로 태어나거라.
굿바이.
* * *
역천의 마도사 펠레리안.
그가 역천이라는 거창한 이명을 처음부터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펠레리안이 어릴 적부터, 그에게 따라붙던 수식어는 따로 있었다.
'흉측한' 펠레리안.
아아, 흉측한 펠레리안.
아름다운 요정 종족으로 태어난 주제에, 펠레리안의 외모는 흉측했다.
천상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매끈한 피부,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이며, 길고 낭창낭창한 사지는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늙은 인간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키는 작았고 다리는 짧았으며 허리는 묘하게 굽어 있었다.
말하자면 천형이었다.
하늘이 펠레리안을 흉측하게 낳은 것이다.
펠레리안의 부모는 결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훌륭한 요정들이었으니.
그러나 외모의 흉측함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펠레리안은 외모가 못난 대신 어떤 요정들보다 뛰어난 마법적 재능과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으니.
진정하게 흉측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제길, 제기랄!
그의 마음이었으며, 그의 영혼이었다.
펠레리안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이 깊은 곳에 품고 있는 추악함을.
질시, 분노, 억울함, 증오, 비뚤어짐.
내면이 추악하니 외면으로라도 그것을 가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외면조차 추하니 어찌할까.
펠레리안은 종족에 자신을 이입했다.
그가 마물의 진화에 몰입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 과정에 피를 묻혔다.
후회는 없다.
종족 전체의 진화를 위해서는 필요한 희생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멧돼지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지금.
그는 당당하지 못했다.
뱀을 속이려 해서?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길들이려 한 죄책감으로?
아니다. 그럴리 없다.
그는 뱀의 의문에 답해 주지 못했다.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펠레리안이 맞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지만 당당하지 못했다.
영혼을 찢어서 반지에 봉인했다는 사실은 기억난다.
하지만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왜 그렇게 됐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안 났다.
마지막 기억에 의하면, 자신은 분명 진화의 비밀에 다가섰었다.
종족 전체를 하이-엘프로 진화시킬 단서를 손에 넣었다.
숙원의 달성을 코앞에 뒀는데, 왜 영혼은 찢겨졌을까.
반지에 깃든 그는 본체의 '보험'이 분명했다.
리치가 라이프베슬을 숨겨 놓듯, 본체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남겨둔 보험.
본체에게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는 이제 마력조차 없었다.
예전처럼 마력이 샘솟는 상태도 아니고 그저 반지에 귀속된 몸.
탈출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이대로 똥이 될 것이다.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땅에 처박혀 영원한 침묵을 맞이하겠지.
마침내 영겁의 시간이 지나 자아가 붕괴할 때까지 끊임없이 고통받으며.
와락, 두려워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펠레리안은 정신적으로 떨었다.
위대한 마도사였던 그가 진정 최악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냥 소원 들어줄걸······!
때늦은 후회.
-누구 없나! 나 펠레리안이 여기 갇혀 있다!
하지만 펠레리안은 위액 속에서 흔들릴 뿐이었다.
고통을 느끼지는 않지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었으며 냄새를 맡을 수는 있었다.
멧돼지의 뱃속에서는 끔찍한 냄새가 났다.
대장으로 넘어가면 더 끔찍하겠지.
위장에서 세 시간.
-제발······.
그리고 소장에서 네 시간.
-어흐흐흑.
기사단에 사로잡혀 고문을 당했을 때도 독기를 잃지 않았던 펠레리안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고통보다 무서운 것이 서러움이리라.
펠레리안은 지금 죽도록 서러웠다.
그리고 대장으로 넘어가, 그가 완전히 똥 속에 파묻히기 직전.
꾸에에엑!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 똥들의 주인인 멧돼지가 지르는 비명이다.
그리고 천지가 뒤집히듯 데굴데굴.
펠레리안은 멧돼지의 장 속에서 위아래로 흔들렸다.
정신이 없었다.
그때, 빛이 내리쬐었다.
누군가가 멧돼지의 배를 갈랐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정체는.
'어이.'
뱀이다.
놈은 자신이 무섭게 생겼다고 착각하는 듯했지만 아니었다.
비단뱀이라는 족속이 원래 그렇다. 살무사나 코브라와 달리 맹하게 생기고 눈도 까맣고 동그랗다.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살다 보니 뱀의 얼굴이 반가운 것은 처음이었다.
뱀은 펠레리안을 꺼내 주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기만 했다.
펠레리안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민은 없었다. 곧바로 튀어나왔다.
-미안해!
'음.'
-내 사과하지. 사과할게, 속이려 들고 그래서 미안해. 소원도 들어줄게. 내가 지금 마력이 없어서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뭐든 할 수 있는 거라면······!
뱀은 역천의 대마도사를 사과하게 만들었다.
펠레리안이 어릴 적 이후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사과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하지만 그 뱀 본인은 그것을 모를 터였다.
'구해주려는 거 아닌데, 뭐 좀 질문하고 다시 다른 동물한테 먹일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말고, 진짜 내가 잘하지. 잘할 테니까······.
이리도 저자세로 나오다니.
한 번 자존심을 굽히고 나니까 그다음은 어려울 게 없었다.
'그래? 음, 그러면 세 번째 소원으로 하나 약속해 줘.'
-뭔데, 무엇이든!
'어떠한 방법으로도 나를 해치려 하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내게 피해가 가는 쪽으로 유도하는 것도 안 돼.'
-맹세한다. 나 펠레리안, 역천의 마도사의 영혼에 걸고.
'그리고 앞으로 내 말에 따른다. 시키는거 얌전히 하고.'
-소원이 하나가 아닌 것 같은데······.
'싫어?'
-좋다, 맹세하지!
펠레리안은 결코 어길 수 없는 맹세를 했다.
뱀은 웃었다.
분명 웃는 것처럼 보였다.
'흠, 좋아 그리 말한다면. 아 그리고 나 마법 좀 알려 줄 수 있나? 지금은 흙과 불 초급원소마법밖에 못해서.'
소원은 다 썼으면서 뻔뻔하기도 하지.
-네 앞에 있는 것이 역천의 대마도사이다. 쉽기 그지없는 일이지.
하지만 펠레리안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절로 나왔다.
그제야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 앞으로 영원히 제자를 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이것도 설마 제자라고 쳐야 하나.
'고마워, 그런데 사부님 대접은 기대하지 말고. 그런 건 아니니까.'
-좋다.
그러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
펠레리안은 안도했다.
* * *
내 재능은 뛰어나다.
내가 잘난 척하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이, 나를 전생시킨 그 거대한 힘이 인정해 준 것이다.
무려 잠재력 20 아닌가.
마법을 배우는 데에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펠레리안은 한 번 똥이 될 뻔한 뒤로 많이 고분고분해졌다.
그 반지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도 꽤 고생이었다.
사실, 또 한 번 허튼짓하면 바로 똥 덩어리로 만들어 주겠다고 협박했지만, 어지간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껴야 하는 반지 아닌가. 지금도 조금 구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펠레리안이 배신만 안 한다면 이 반지는 내게 필수품이나 다름없었다.
아공간 마법을 익히기 전까지는 배낭이 필요했으니까.
귀한 포션이 남아 있기도 하다.
-빌리는 뿔이라고······ 처음 들어 보는 스킬이군.
'뿔 달린 마물은 가지고 있는 것 아니야?'
-장난하나? 혼 계열 마물이라고 해도 그저 적을 찌르는 용도로 활용하는 게 대부분이지. 그 정도로 강한 인간의 스킬을 강탈할 수 있는 것은 말도 안 돼.
'강탈이 아니라 빌리는 거야.'
펠레리안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리고 뛰어넘는 뿔인지 뭔지도 말도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 정도면 상위 마물의 고유 스킬이나 다름없어.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우쭐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펠레리안은 설명했다.
-골렘의 마법을 빌렸다라. 그래서 초급 원소마법 중 둘을 깨우쳤군. 이제야 비밀이 풀렸어.
'그런 거지.'
-하지만, 그런 편법으로 마법을 배워서는 진정 마법에 입문했다고 할 수 없다.
마법을 가르치면서 펠레리안은 점점 기고만장했다.
-마도의 조종(祖宗)인 내가!
그의 안광이 번쩍 빛나는 듯했다.
-나머지 두 원소. 물과 바람의 마법을 알려 주마.
진정한 매직 스네이크의 길이 시작되었다.
나는 두 마법을 배웠다.
키르륵, 켁, 취엣 퀘스타.
029.
대수림을 하나의 숲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 엘프, 드워프가 모두 사람이라는 말과 다를바가 없다.
틀린 말은 아니겠으나 정확하지도 않으며 해도 무의미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대수림의 면적이 어지간한 국가를 뛰어넘으니 그 안에도 수많은 비경(秘境)들이 존재한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산을 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호수.
그리고 매일같이 뇌우가 몰아치는 산봉우리.
팔라무 우림도 대수림의 여러 비경 중 하나이다.
우림(雨林)답게, 연중 절반 이상이 비가 오는 구역이다.
몹시 습하기 때문에 사람이 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심지어는 엘프조차 그 무더운 기후에 질려 접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팔라무 우림을 가로지르는 메데이라 강, 그리고 그 강가에 발달한 맹그로브 숲.
생명의 보고인 대수림에서도 특히 생물 다양성이 높은 팔라무 우림은 지성체가 살기 적합한 지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문명을 이룬 종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국에 의해 토벌되었던 고블린들.
한때 산간의 골칫거리로 여겨졌던 고블린들이 거의 사라진 지금, 수많은 고블린들이 팔라무 유역에 자리를 잡았다는 목격담이 종종 제기되었다.
심지어는 문명을 이뤘다는 말까지.
하지만 본 저자는 그것을 과대망상증 환자들의 망상이라고 확신한다.
종종 고블린을 '사람'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 미개한 종족이 우리 인간이나 요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벌레를 잡아먹고 진화까지 하는 고블린들은 지능을 가진 마물로 분류하는 것이 학술적으로 옳으리라.
그들이 팔라무 유역에 몇 개의 군락지를 이루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문명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마물' 고블린들이 사람과 대비되는 특성을 열거하자면······.
「현자 파르비안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마물 사전: 대수림 편, 팔라무 우림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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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놈 천산갑lv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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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갑이라 함은 전신에 큼지막하고 단단한 비늘을 달고 있는 포유류를 말한다.
그리고 마물 '베놈 천산갑'은 그 천산갑이라는 동물의 아주 위험한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원래도 포유류 중 가장 단단한 갑각을 지닌 동물인데, 놈의 광택 도는 비늘은 특히나 단단하다.
화살도 가볍게 튕겨 낼 만큼 강인하여 짐승의 이빨은 박히지 않는다.
게다가 '베놈'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만큼. 놈의 타액은 훌륭한 맹독이다.
뛰어난 방어능력과 그에 못지않은 공격력.
덩치는 사람보다 작지만 이곳 팔라무 우림에서도 포식자 노릇을 하는 개체다.
베놈 천산갑은 지금 막 사냥에 성공한 참이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놈의 발톱 아래에 있었다.
베놈 천산갑이 날카로운 이빨로 원숭이의 팔을 물어뜯었다.
까득, 까드득.
뼈도 씹어 삼키는 강인한 턱힘이다.
살벌한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포식 중인 천산갑의 머리 위로 물벼락이 떨어진 게 그 순간이었다.
쏴아아아!
천산갑은 화들짝 놀라서 발작했다.
마른하늘에 웬 물벼락 세례인가.
당연히, 천산갑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몸의 구조상 위를 올려다보기 위해서는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찌르륵, 찌륵.
아무것도 없었다.
벌레 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천산갑의 곤두선 비늘이 가라앉고, 놈이 다시 식사를 이어 가려는 순간이었다.
차갑고 매끈한 것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그래, 그 매끈한 게 이 몸이시다.
은밀하게 다가간 나는 일어선 천산갑의 몸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이제 내 몸은 성인 팔뚝 굵기고, 길이는 아마 2m를 넘을 것이다.
천산갑의 몸을 휘감는 것도 가능했다.
놈의 다리 안쪽에서 몸통을 휘감고, 옆구리를 지나쳐 겨드랑이 쪽을 파고든다.
순식간에 목까지 휘감는다.
여기서도 가속을 사용했기에 눈 한 번 깜짝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조르기.
*「조르기lv2를 사용합니다.」
단순히 조르는 흉내가 아니라 엄연한 스킬이다. 이번에 새로 얻었다.
사실 뱀의 전투방법은 독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태까지 조르는 방식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너무 작고 약해서였다.
우람한 파이톤으로 진화한 지금, 천산갑 정도의 마물은 조를 수 있다.
조를 수 있다 수준이 아니지.
까드드득-
놈의 비늘이 뒤틀리며 살벌한 소음이 울렸다.
아마, 체중은 훨씬 더 나갔을 전생보다 지금이 힘은 훨씬 세지 않을까.
내 독니로는 천산갑의 비늘을 뚫을 수 없었다.
또 검 들고 위험한 칼춤 추는 것보다 조르기가 최선이었다.
놈의 목을 조른다.
베놈 천산갑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리가 짧고 관절이 발달되어 있지는 않았다.
내 몸을 할퀴려 발악했으나 겨우 생채기만 조금 날 뿐이었다.
생각보다 끈질기구만.
나도 몸에 힘을 줬다.
사실, 천산갑 사냥은 이번이 두 번째 시도였다.
첫 번째는 어설프게 덤볐다가 물려서 죽을 뻔했다.
내가 독내성이 높아서 다행이지.
쿠웅!
몸에 힘이 빠질 뻔했다.
놈이 나무에 몸통박치기를 한 것이다.
떨어지면 끝장이다.
나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했다.
다시 한번 나무에 들이받으려는 놈의 발을 흙 마법으로 잡은 것이다.
놈은 발라당 엎어졌다.
컥.
그 충격도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놈이 다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는 것을 더욱 조였다.
까드드드득!
많이 질겨진 내 피부에 천산갑의 딱딱한 비늘이 박혀 든다.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멈출 수 없다.
"구익, 귁."
목이 졸린 천산갑은 포효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그것이 놈의 단말마였다.
우둑!
놈의 목뼈에서 상쾌한 소리가 났다.
내 승리!
*「베놈 천산갑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목소리다.
파이톤으로 진화하기 전에는 이 소리를 한참 동안 못 들었었다.
그리고 진화를 마친 뒤, 내가 강해진 만큼 약한 마물로는 경험치를 못 올렸다.
──────────────
[화이트 더블혼 파이톤lv3]
──────────────
레벨이 어느덧 3이 되었다.
펠레리안과 함께했던 일주일간의 성과였다.
뭐 사실 펠레리안이 레벨업에 도움 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전의 마법사인지 뭔지는 몰라도 그는 마법 하나 못 썼기 때문이다.
긴급탈출과 세뇌마법은 어떻게 썼는지 물어봤더니, 그게 마지막 남은 마력이었다나.
할 줄 아는 것은 반지의 요정이라도 된 듯 둥둥 떠다니며 주절거리는 것뿐이다.
내가 천신만고 끝에 베놈 천산갑을 잡는 동안 펠레리안은 뭘 했는가.
근처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내 사냥을 1열 직관했을 뿐이다.
자기는 마물한테 안 보인다 이거지.
나는 혼자 여유로운 펠레리안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선생님, 이 정도면 통과 아닌가요?'
-통과? 토옹과?
펠레리안 선생님은 코웃음을 쳤다.
-그것을 마법의 활용이라고 볼 수 있나.
'아니, 원소 물 마법으로 적의 시선을 돌리고 그사이에 기습해서 잡았잖아요. 이게 마법의 활용이지 뭐야.'
실로 그러했다.
마법과 물리 공격의 연계가 물 흐르듯 했다.
칼만 안 들었다뿐이지 마검사를 자처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펠레리안 선생의 눈에는 안 차는 것인가.
-아직도 물 마법으로 겨우 물줄기 쪼르륵 떨어뜨리는 것밖에 못 하냐. 차라리 돌을 던지는 게 시선 끌기는 좋았겠군. 느리기 그지없어.
'······무슨 소리지. 내 마법 재능은 뛰어날 텐데.'
펠레리안의 말이 심기를 거슬렀다.
-재능? 푸핫.
놈은 시원하게도 웃었다.
-내가 단언하지. 네 마법 재능은 형편없다!
'······.'
거짓말이겠지.
역시 내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요정우월주의 배신자답다.
······그러고 보니 내가 물어보는 것에는 전부 솔직히 답하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았나?
둘 중 하나겠군. 맹세를 어겼든지 아니면 정말 내 재능이 떨어진다든지.
후자일 리는 없으니 나는 펠레리안을 이번에는 어떤 동물의 똥으로 만들지 고민했다.
-어쨌든 사대 원소의 기초 마법은 이것으로 전부 습득했군. 그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어.
'다음?'
펠레리안의 수명이 조금 연장되는 순간이었다.
이미 영혼 상태니까 사실 죽은 요정이나 다름없지만.
-너 검을 쓰고 싶다고 했지.
'그치.'
-저번에 꼬리로 감싸 쥐고 입으로 물어서 칼춤을 쓰는 것을 본 바로는 아주 형편없었다. 검술이 아니라 미친 뱀 같았을 뿐이야.
그 미친 뱀이 당신 키메라를 썰어 죽였는데.
-칼을 쓰려면 손이 있어야지.
'그러면 팔이 돋아나는 마법인가?'
-아주 흉측한 꼴이겠군.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건 '투명한 손'이라는 마법이다.
이름이 직관적이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나무 열매 정도밖에 들지 못하겠지만, 수준이 오른다면 검을 잡고 휘두를 수도 있겠지.
뱀은 팔다리가 없다.
그런 면에서 손이 생긴다는 것은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드디어 제대로 된 마법을 배우는군.
-자, 여태까지 사대원소마법을 미리 습득한 이유는 따로 있다. 사대원소야말로 이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요소이기 때문이지.
펠레리안은 투명한 손을 구현하는 방식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마법의 정의를 기억하나?
'현상의 재구현.'
-그래, 때문에 직관력이 덜 필요하고 단순할수록 초급의 마법이지. 염동력이 아니라 투명한 손을 구현하는 마법을 굳이 개발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사물을 움직이는 것보다 투명한 손을 상상하는 게 더 쉬운 거지.
직접 시범을 보여 주는 것이 불가능한 게 문제였지만, 펠레리안의 강의력은 생각보다 뛰어났다.
가르치는 것을 몇 번 해 본 듯하다. 제자를 키운 적이 있나?
나는 여차저차 인비저블 핸드 마법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내가 마법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꾸만 실패했기 때문이다.
잠재력 20이라는 게 무언가를 배우는 재능하고 직결되는 것은 또 아닌 듯했다.
'그만. 여기까지 할래.'
-벌써 포기인가?
'마력이 부족해서.'
-음, 마력량 자체는 확실히 적군. 너무 빠른 기간 안에 두 번이나 진화해서 그렇겠지.
펠레리안이 그리 평가했다.
저 노인네는 내가 한 달 조금 넘어서 두 번 진화했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감탄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 마력통이었다.
초급 원소마법쯤이야 여러 번 사용할 수 있어도 큼지막한 스킬을 쓰는 데에는 부족했다.
빌리는 뿔이나 뛰어넘는 뿔은 한두 번만 사용해도 마력이 텅텅 비고는 했다.
특히 '천뢰령'이라는 스킬이 문제였다.
군터에게 빌린 그 스킬은 레벨이 0으로 표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마력을 소모했다.
나는 스킬을 미처 사용하지도 못하고 바로 기절해 버렸다.
만약 실전에서 마물과 싸우는 도중에 그랬으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마력 용량을 늘리는 방법은 네 가지나 되지.
펠레리안은 이미 해 준 설명을 반복했다.
-진화하는 것.
-수많은 마물을 사냥하며 마성을 깃들게 하는 것.
-마석이나 내단, 영약 같은 것을 먹는 것.
-그리고, 마력을 늘려 주는 마도구를 착용하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은 아무래도 시간이 걸린다.
파이톤으로 진화하는 과정도 아주 힘들었다.
결국 세 번째와 네 번째 방법이 있는데, 내 곁에 바로 보물 고블린 같은 존재가 있었다.
-123번 던전을 찾기만 한다면야······ 마력을 늘릴 수 있겠지.
펠레리안의 123번 던전
내가 이곳 팔라무 우림에서 목적지로 삼은 곳이다.
펠레리안의 던전이 이곳 팔라무 우림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곳은 키메라 제조소 같은 혐오시설이 아니었다.
-마석을 연구하던 곳이니까 고등급 마석이 여럿 남아 있을 거다. 자연 분해되지 않도록 처리해 뒀으니.
내단을 먹은 뒤로 몸에 좋은 것들만 보면 눈이 돌아가 버린다.
-그걸 주겠다만 약속은 지켜라, 내 연구 데이터를 본체에게 전송해 주는 거다.
'네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맹세했잖나. 마도사의 맹세를 우습게 아는군. 내가 그 원리를 설명해 줬는데도.
펠레리안이 짜증을 냈다.
늙으면 짜증이 많아진다더니.
확실히, 펠레리안이 나를 해치거나 함정을 파기는 어려울 것이다.
굳이 나와 동반자살이라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맹세를 못 어기겠지.
'아니, 그래서 왜 길을 못 찾는 건데.'
-음······ 분명 이쪽이 맞을 거다.
'그 말만 벌써 세 번째잖아.'
문제는, 펠레리안이 영 길을 못 찾는다는 것이다.
원래는 날아다니고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길 찾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고 변명하는데.
-강만, 메데이라 강만 찾으면 돼.
그놈의 강을 아직도 못 찾고 있었다.
우선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번에는 강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이번에도 강이 아니었다.
다음날, 천산갑이 소화되어 슬슬 배가 고프던 시점이었다.
나는 펠리컨에게 산채로 잡아먹히고 있는 고블린을 만났다.
* * *
펠레리안과 뱀은 숨어서 구경 중이었다.
'와 쩐다.'
펠레리안은 경박하게 감탄하는 뱀을 흘끗 보았다.
놀라운 모습이긴 했다.
거대한 팰리컨이 고블린을 삼키려는 모습이다.
'저거 질식 안 하나?'
뱀이야말로 먹이를 산채로 삼키는 대표적인 마물 아닌가.
저놈은 마치 자신이 뱀이란 것을 모르는 것처럼 종종 행동했다.
-바보 같은 놈.
'저 고블린 말이지?'
뱀에게는 마법에 대한 재능이 없다고 쏘아붙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뱀의 마법적 재능은 무시무시했다.
그 습득 속도가 아니라, 그 적성에 한계가 없는 것 같았다.
사대원소 모두를 다룰 수 있는 마법사는 사실 매우 희귀하다.
습득 속도에도 차이가 나는 법인데 이 뱀은 배우는 속도마저 똑같았다.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적 재능이 없다고 쏘아붙인 이유는 하나였다.
우쭐대는 게 보기 싫어서.
맹세를 어기지는 않았다. 놈이 질문한 것에 솔직히 답하겠다고 한 거였으니까.
이쪽에서 먼저 말한 것은 예외였다.
이러다가 밑천이 떨어져서 저 뱀에게 우습게 보이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때, 고블린이 뭐라고 비명을 질렀다.
"키르륵, 켁, 취엣 퀘스타. 팅깃 킷!"
파찰음과 파열음의 향연이다.
옆을 보니, 뱀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래, 당연히 못 알아듣겠지.
고블린의 언어는 지역마다 다르고 발음이 특이해서 이해하는 자가 거의 없다.
하지만 온갖 마물에 통달한 펠레리안은 그 뜻을 알고 있었다.
-해석해 줄까?
'예?'
-강의 신이시여, 저를 구해주소서.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는군.
뱀의 표정이 묘해졌다.
펠레리안은 우쭐했다.
감탄해라 뱀아.
하지만 뱀은 건방진 소리를 했다.
'뭐라는 거야. 그 뜻 아닌데.'
-뭐라고?
'강으로 돌아가야 해! 놔줘! 누나 살려줘요! 그러잖아.'
꼭 고블린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당당하군.
터무니없다.
펠레리안은 인상을 팍 썼다.
고양이상 미녀 전사 나나루크
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