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저건 대체 무슨 생물인가.
대가리는 아주 친숙하다. 수탉의 그것이었다.
시뻘건 닭벼슬이 펄럭였고 눈알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닭의 눈 그자체였다.
몸통은 좀 이상하다.
깃털이 듬성듬성 빠져서 거친 회색 피부가 드러나있었다.
그것이 파충류를 연상시켰는데, 정확히는 공룡 같았다.
닭의 조상이 공룡이라고 하니 어울리는 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꼬리에 와서는 그냥 어이가 없었다.
명명백백한 뱀의 꼬리다.
길쭉한 것이 마치 별개의 생물인듯 꿈틀댔다.
꼭 여러 생물들을 합쳐놓은 듯한 모습이다.
그 크기도 닭만했으면 좋았을텐데 사람보다 훨씬 컸다.
덩치는 혼 재규어 못지 않았다.
──────────────
[코카트리스lv12]
──────────────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 상태창이었다.
레벨이 12다. 꼭 레벨이 높다고 강한 마물은 아니었지만,적어도 저놈은 분명 강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 말고는 상태창을 간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혼 재규어처럼 강한 마물들이 그러했다.
저런 마물을 만났을때는 도망치는게 상책이다.
하지만 지네 남편은 도망치지 않았다.
자신보다 거대한 코카트리스에게 오히려 덤벼들었다.
백개는 되어보이는 다리로 쾌속하게 돌진한다.
코카트리스의 몸을 기어올라 독니를 그 몸에 박아넣었다.
투지가 대단했다.
그런 용기를 보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리라.
뒤에 아내가 있기 때문.
신부가 돌이 되어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미안한 일이지만 남의 아내를 깨물 수밖에 없었다. 응급상황이니까.
이빨이 박히지는 않았지만 독액이 쭉 나왔다.
진화하기 전보다는 확실히 많고 진한 독액이 흘러나왔다.
된다. 효과가 있다!
이전의 경험을 믿고 시도해봤지만 효과가 충분히 발휘되었다.
독액이 묻은 지점부터 지네 새댁의 색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코카트리스든, 메두사맘이든 석화공격의 원리는 비슷할지도 몰랐다.
콰작.
위험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았다.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네 남편의 몸이 두쪽이 났다.
코카트리스가 발톱으로 지네를 찢어버린 것이다.
지네 남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었다.
코카트리스를 막으려는 듯 쫓았으나, 코카트리스의 질주는 대단히 빨랐다.
놈이 향하는 방향은 돌이 되어버린 지네 아내가 있는 이쪽이었다.
지네 남편의 독니도 약하지 않을텐데 코카트리스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독내성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 다리에 밟히기만 해도 나는 죽을 것이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 이럴때는 도망치고 싶은 본능의 반대로 하면 되더라.
나는 놈에게 마주 달려갔다.
빠르게 기기의 레벨이 올라서 내 속도도 제법 빨랐다.
코카트리스는 끼에에엑! 하는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혼 재규어에게 밀리지 않는 기운찬 포효가 땅을 진동시켰다.
이거 뭐 계명성이냐, 네가 레콘이냐.
놈의 날카로운 발톱이 나를 짓밟으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전신에 힘을 주어 몸을 튕겼다.
아직 도약을 빌린 상태다.
*「도약의 숙련도가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도약lv1이 도약 lv2가 되었습니다.」
*「스킬, '도약'을 완전히 획득했습니다.」
빌린 스킬도 진화할 수 있는건가.
게다가 이제는 완전히 내 스킬이 되었단다.
하지만 겨우 이정도로 달가워할만큼 만만한 순간이 아니었다.
놈은 레콘 같은 행동을 하나 더했다.
그 큼지막한 부리로 허공에 있는 나를 쪼으려 한 것이다.
나는 허공에서 춤을 추듯 또 한번 움직였다.
부리는 피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코카트리스의 황금빛 눈과 시선이 맞았다.
아!
위기감에 전신이 짜릿했다.
메두사맘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상대를 돌로 만들었다.
코카트리스도 지네 새댁을 석화시켰던 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싸우다가 눈을 감는 것은 미친 짓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뜨끔한 통증.
눈을 다시 떴다.
내 몸을 스치고 간 놈의 꼬리가 보였다.
그 꼬리 끝에는 뾰족한 가시 하나가 돋아 있었다.
저 비겁한 놈······ 뱀은 저런 꼬리침이 없는데.
나는 바닥에 툭 떨어졌다.
몸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코카트리스의 석화는 눈빛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고급 기술은 우리 엄마나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달려가던 코카트리스는 지네 새댁과 그대로 충돌했다.
콰아앙!
어떤 교통사고도 그보다 끔찍할수는 없으리라.
미처 석화가 다 풀리지 못한 지네 새댁은 말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잡아온 개구리를 이사떡의 답례로 건네던 그 따스한 마음씨.
그녀의 예쁜 미소도 이제는 볼 수 없겠지.
돌조각이 바닥을 놔뒹굴었다.
한 지네의 아내를 처참하게 살해한 코카트리스는, 그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돌조각 사이를 부리로 콕콕 쪼아댔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아내를 잃은 남편은.
"꿰에에에에엑!"
비통하기 그지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누가 벌레에게는 감정이 없다고 했나.
적어도 그 남편은 아내를 사랑했음이 분명했다.
그는 몸통이 반쪽난 채 코카트리스에게 엉겨붙었다.
말리고싶다.
참아! 지금 덤비면 너도 개죽음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코카트리스는 남편을 봐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둘이서도 못 이긴 것을 하나가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코카트리스는 가볍게 지네 남편을 제압했다.
육중한 발로 몸통을 찍어누르자 지네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위로 코카트리스의 부리가 추락하듯 내려찍었다.
저 닭대가리에게는 지능이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적어도 '죽여서 먹는다'라는 것 외에 다른 사고를 할 수 있는게 분명했다.
놈은 지네 남편을 찍어 죽이는 대신 그 다리를 전부 끊어냈다.
가장 위험한 독니도 마찬가지로 떼어냈다.
완전히 무력화된 지네를 자신의 뱀꼬리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도 함께.
시발 나는 왜데려가.
애초에 내가 붙어있는 것을 모르나?
코카트리스의 체구에 비해서 나는 아주 작은 편이었다.
지네 남편을 꼬리로 휘감으면서 나도 함께 딸려갔다.
왜 안 도망쳤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미 석화되었다.
*「석화 내성lv1을 얻었습니다.」
응~ 빨리도 얻었다~
메두사맘의 피를 이은 적법하고 마땅한 혈족의 계승자인 본인이니까, 어쩌면 석화에 면역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나는 코카트리스에게 찔리자마자 돌이 되어버렸다.
다만 머리까지는 아니었다.
석화는 목 부분에서 멈췄다.
아마도 머릿속에 있는 독샘 때문이 아닐까.
지금도 석화가 올라오려던 목덜미쪽이 간질간질하다.
*「석화 내성의 숙련도가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석화는 저절로 풀릴 것 같다.
그러든 어쩌든 지금은 끌려가고있는 신세다.
코카트리스는 지네를 전리품처럼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속도가 대단했다. 놈은 마치 타조처럼 가볍게 달렸다.
그러면서도 머리와 꼬리는 그리 흔들리지 않았다.
탑승감이 제법이군.
나는 축 늘어진 지네 남편을 보았다.
불쌍한 친구.
그는 만신창이었다.
끊어진 몸이며 다리에서 누런 체액을 뚝뚝 흘렸다.
입에서는 거품이 보글보글 나왔다.
붉게 빛나던 두 눈은 천천히 빛을 잃고 있다.
아무리 마물의 생명이 끈질기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꼭두새벽에 이게 대체 무슨 비극인가.
죽음을 앞둔 지네 남편이 가여웠다.
내가 그럴 처지는 아닐 지도 모른다. 나 또한 당장 잡아먹혀 죽을지도 모르니.
하지만 죽은 아내의 복수를 하지도 못하는 지네의 눈빛이 처연하다.
미물이라도 마음은 있는 듯하니.
아,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코카트리스는 계속 달렸다.
내 몸의 석화도 거의 풀렸다.
지금 여기서 툭 떨어져서 도망치면 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지네 남편이 나를 보고 더듬이를 꿈틀댔다.
그리고 입에서 거품을 막 뿜어내더니.
무언가가 입속에서 튀어나왔다.
······설마 그거.
──────────────
[내단: 레드티스 왕지네]
──────────────
저번에 지네 부부가 낯부끄러운 짓을 하면서 만들던 내단이다.
설마, 코카트리스가 저 내단 때문에 이렇게 멀리와서 사냥을 한걸까.
나로서는 그 내막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저 내단을 입에서 토해낸 거니.
나 주려는거야 혹시?
지네 남편은 더듬이를 까딱까딱 움직였다.
'맞아, 너 주려는거야.'
나는 그런 대답을 상상해보았다.
진실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네 남편의 몸은 점점 굳어갔다.
더듬이도 축 늘어지고 눈은 빛을 잃는다.
턱의 힘도 빠졌는지.
툭.
내단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걸 물어챘다.
아깝게,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음, 지네의 체액맛이 난다.
내 눈에서도 짭짤한 눈물이 흘렀다.
아니, 눈물이 아니라 이것도 지네 체액이 묻은거군.
*「내단을 섭취했습니다.」
무슨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받았다고.
뱃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끓어올랐다.
* * *
해가 절벽 위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새벽의 어둠이 완전히 걷히고 아침이 시작되었다.
코카트리스는 자신의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놈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포효했다.
"꼬끼오오오오-!"
승리의 계명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쫓던 지네 부부를 사냥했다.
승리하였지만, 원하던 것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뿌듯함과 아쉬움이 혼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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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트리스 lv12]
[특성]
[보물광], [예리함]
[스킬]
[석화 lv4], [도약lv6], [가속lv5], [꼬리 휘두르기lv7], [열 감지lv3], [마력 감지lv2], [추적 lv5], [독 내성lv9]
[상태]
[뿌듯함], [아쉬움]
──────────────
놈의 거처는 동굴이었다.
동굴을 거처로 삼는다는 것은 제법 강한 마물이라는 뜻을 방증했다.
하지만 코카트리스의 보금자리는 더욱 특별했다.
입구는 평범했지만, 들어가자마자 평평한 바닥과 벽이 나왔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다만, 아주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는지.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통로를 들어가다보니 바닥이 타일로 이뤄진 구역이 나타났다.
코카트리스의 눈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놈에게는 마력을 감지하는 스킬이 있었다.
수없이 많이 건넌 구역이지만, 새빨갛게 빛나는 타일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것을 피해서 훌쩍훌쩍 통로를 건너뛰었다.
누가 그를 '닭대가리'라고 폄하할까.
코카트리스는 지능이 높은 마물이었다.
귀한것을 모으는, 반짝반짝 빛난 것을 모으는 취미까지 있었다.
놈이 멈춘 것은 거대한 석문 앞.
그 너머는 들어갈 생각도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여기까지만 해도 감히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할 최고의 은신처였다.
"꼭께겍껙."
코카트리스는 '흥얼거렸다.'
이곳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돌과, 어디서 주워온 갑옷과 무기들. 심지어 금붙이까지 있었다.
탐욕스러운 놈의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잡아온 지네를 여기서 해체해 먹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몸속에 내단이 있을지도 모르니.
지네가 내단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태까지 그 지네 부부를 오랫동안 추적해온 것이다.
텅.
코카트리스가 내려놓은 지네의 사체를 마구 쪼아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빠르게 튀어나와 코카트리스의 다리 사이로 지나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희끄무레 한 게 바로 이몸이시다.
사상 최악의 흰 뱀!
코카트리스의 눈에는 내가 조금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은 것 같다.
쟤가 왜 여기있지 하고 대가리를 갸웃거리니까.
하지만 나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내단을 소화하자 내게는 변화가 일어났다.
*「내단을 섭취해 격이 상승합니다.」
*「이제 더 자세히, 멀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싱거운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지네 부부의 유산은 내게 아주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보였다.
코카트리스의 스킬이.
──────────────
[코카트리스 lv12]
······
[스킬]
······[마력 감지lv2], [추적 lv5], [독 내성lv9]
──────────────
그리고 또 보이는게 있었다.
이 공간이 어디인가 하니.
──────────────
[던전: 요정 마도사 펠레리안의 임시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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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옷!
이 세상에는 던전 같은 거도 있었던 거냐고!
코카트리스의 스킬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놈의 스킬을 빌릴 수 있다는 뜻이다.
놈이 타일이 깔린 구역에서 이상하게 펄쩍거리는 것을 보고 마력감지를 빌렸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미친 판단력이었다
그덕에 코카트리스가 붉게 빛나는 타일만 비껴 밟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거대한 석문.
석문의 손잡이는 확실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향해 똑바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코카트리스는 당황해서 나를 쫓았다.
놈은 확실히 빨랐지만, 나를 쫓기에는 부족했다.
내게는 도약이 있다.
휙 뛰어오른 나는 그대로 석문의 손잡이를 물어챘다.
철컹.
뭔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석문 바로 앞까지 쫓아온 코카트리스.
보였거든.
누가 봐도 수상한 천장의 구멍들이.
천장에서 창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퍼버버벅!
뒤늦게 도망치려던 코카트리스의 몸에 연속적으로 창이 박혔다.
깃털이 사방에 나부끼고, 흔들리는 꼬리가 땅과 벽을 후려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놈은 창 여러개에 꿰인 그대로 축 늘어졌다.
파격적인 비주얼의 닭꼬치군.
가게에서 이런걸 팔았다가는 바로 영업정지 당하겠지만.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물고있던 손잡이를 놓고 툭 떨어졌다.
그리고 이미 산산조각난 지네 신랑을 돌아봤다.
복수, 해줬다고!
저는 오늘부터 요정입니다.
011.
냠, 냠, 냠.
우적우적우적
아, 맛없다.
내가 아무거나 잘먹는 착한 뱀이 되었다고 해도 미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코카트리스는 정말 맛없는 편이었다.
──────────────
[코카트리스의 사체]
──────────────
당연히 사체겠지.
눈에 힘을 풀자 떠오른 창이 사라졌다.
지네 내단의 힘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되었다.
역시 영물은 뭐가 다르다니까.
나는 열심히 코카트리스를 먹기 시작했다.
늘 생각하던 거지만 연비가 안좋은 몸이 되었다.
자동차로 비교하자면 페라리나 람보르기니처럼 기름을 퍼먹는 것과 다름없다.
열심히 움직이거나 스킬을 써대다보면 순식간에 배가 고파왔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역류성 식도염때문에 매일 고생했었지.
소화가 안되는 것보다는 편한 걸지도.
코카트리스의 근육은 마치 쇠심줄같이 질겼다.
아잇, 이빨이 하나 부러졌다.
저번에도 부러졌었는데, 다행인 것은 이빨이 빠질때마다 새로 난다는 것이다.
마치 상어 같다. 상어도 이빨이 부러지면 계속 자라난다고 한다.
걱정없이 먹어치우자!
*「중독되었습니다. 독 내성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에라.
이놈은 어떻게 된게 고기에도 독이 들어있는 걸까.
지가 무슨 복어도 아니고.
배가 살살 아파왔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아니었다. 물린 것도 아니고 발톱에 찍힌 것도 아니다.
*「독 내성lv3이 독 내성lv4가 되었습니다.」
독 내성이 올랐다.
살에 배인 독기 정도야 최강의 독사인 나는 버틸 수 있다.
열심히 배를 채우던 나는 결국 놈의 심장 어림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턱을 움직였다.
잘근잘근 씹기를 반복하자, 입가가 토마토파스타를 먹은 어린애처럼 벌겋게 물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찾아냈다.
와득.
결석 같은게 있었다.
혼 재규어의 심장에서 마석을 찾아냈을때와 똑같았다.
그때는 이게 요로결석인지 뭔지 헷갈려서 먹는게 주저했지만 지금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마석을 물고 나왔다.
얼굴에 묻은 피를 꼬리로 닦고나서 눈에 힘을 줬다.
──────────────
[코카트리스의 마석: 2등급]
──────────────
마석이 맞았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그 등급이었다.
그때 얻었던 것은 3등급 마석. 그리고 지금은 2등급이다.
아무래도 코카트리스보다는 혼 재규어가 더 강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놈을 몸속에서부터 싸워 이긴 것은 천운이었다.
그러면 잘먹겠습니다.
식후 디저트로 마석이라니 호화롭기 그지없다.
마석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사탕처럼 달달한 느낌이 들기도.
*「2등급 마석을 섭취했습니다.」
혼재규어의 3등급 마석을 먹었을때.
의외로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육체에 미약한 마성이 깃듭니다.」
*「격이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육체가 더 강인해지고 마력이 충만해집니다.」
오오 뭐냐고~!
전신에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퍼진다.
레벨업 했을때의 기분좋은 따듯함과는 또 달랐다.
독한 술을 마셨을때처럼, 혹은 박하사탕을 먹을 때처럼 화한 감촉이 뱃속에서부터 퍼졌다.
내 몸에 깃들었다는 마성.
그리고 충만해졌다는 마력.
확실히, 빌리는 뿔 같은 스킬을 썼을때 소모하던 그것의 양이 늘어난 기분이다.
나는 성장했다.
코카트리스를 사냥한 것은 그만큼의 보상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그렇다면 내 상태창을 확인할 때가 되었다는 거겠지.
──────────────
[화이트 혼 스네이크 lv5]
[특성]
[불굴], [정진] ,[뿔]
[스킬]
[빌리는 뿔lv2]: 마력감지lv1
[암시야lv6], [독니lv4], [숨참기lv4], [포식lv3], [물어뜯기lv4], [독 내성lv4], [출혈 내성lv2], [고통 내성lv4], [열 내성lv2], [생존본능lv4], [도약lv2], [은밀lv2]
······.
──────────────
확실히 나는 스킬이 많다.
심지어 나보다 훨씬 강한 게 분명한 코카트리스보다 스킬 수가 훨씬 많았다.
이것도 잠재력 20의 효과 같았다.
생각해보면 나보다 스킬이 대단했던 우리 형(리틀 그린 스네이크lv3, 추락사)은 얼마나 대단했던 걸까.
살아남았다면 언젠가 어머니를 능가하는 대단한 뱀이 되었을지 모르지.
그러나, 강한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법.
상태창을 더 읽어보았다.
──────────────
※진화 가능:
[빠르게 기기lv10]
[상태]
[마력 포화], [뿌듯함]
──────────────
어라 뭔가 바뀌었잖아!
뭐냐고 진화가능이라니!
빠르게 기기가 어느새 lv10이 되었다.
레벨 10이 된 스킬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위엄있는 뿔뱀이 된 것처럼, 빠르게기기도 환골탈태하는 걸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빠르게 기기는 내가 가장 잘 활용하는 스킬이었다.
진화!
내 마음속에서 디지몬 진화BGM이 웅장하게 울리고.
*「마성을 소모해 스킬을 진화시킵니다.」
공짜가 아니었냐.
으윽, 힘이 빠진다.
빌리는 뿔을 여러번 사용했을 때처럼 현기증이 핑 돌았다.
배는 불렀지만 속이 헛헛해진다.
만약 코카트리스의 마석을 먹지 않았다면 스킬을 진화시키지 못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빠르게 기기가 상위스킬로 진화합니다.」
그래, 새 스킬이 내 마성보다 가치있기를.
*「빠르게 기기lv10이 가속lv1이 되었습니다.」
어.
아, 아?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결과가 조금 미묘했다.
가속은 갤로퍼 호크가 가지고 있던 스킬이다.
하지만 빠르게 기기도 이제는 제법 빨랐는 걸, 가속은 얼마나 좋은 거야.
잠시 고민하다가 한 번 시험해보기로 결심했다.
몸을 웅크린다.
전신에 힘을 주고 펄쩍 뛰어오른다.
빌리는 뿔로부터 완전히 습득한 도약을 써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가속.
*「가속lv1을 사용합니다.」
후웅, 하면서 얼굴이 시원해진다.
나는 바람을 갈랐다.
빌리는 뿔처럼 마력을 사용하는 종류의 스킬이었다.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서 멋지게 착지했다.
이제는 판단이 확실히 섰다.
대박이다!
가속은 빠르게 기기의 확실한 상위스킬이었다.
내가 자주 사용했던 은밀-도약 연계의 사냥법은 만약 상대방에게 들킨다면 제대로 써먹을 수 없었다.
내가 도약해봤자. 상대가 슥 피해버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속을 연계한 도약은 보고도 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이거 도약말고도 활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할 것 같은데.
나는 코카트리스의 공격을 받는 상상을 했다.
놈이 큼지막한 부리로 나를 쪼려 하면.
휙, 이렇게, 핫! 이렇게!
옆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헉헉.
회피기동이 가능해졌다는 것만해도 대단한 스킬이었다.
이거, 다른 스킬들도 이렇게 진화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더 시험해보고싶지만 이제는 진짜 마력이 부족하다.
숨을 고른 뒤, 이제는 산산조각난 지네 남편을 보았다.
모두 새신랑 덕분입니다.
지네의 내단이 없었다면 코카트리스를 사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꼬리를 이용해서 지네 남편의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그리고 그 위에 흙을 뿌렸다.
이정도면 훌륭한 무덤 아닌가.
음 장식이 없으니까 너무 밋밋하다.
위패 대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대충 굴러다니는 황금 왕관을 무덤 위에 올려두었다.
······뭐야 이거!
그제야 주변에 널려있던 잡동사니들을 알아봤다.
이 미친 마물놈.
코카트리스의 특성에 '보물광'이라는게 있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 근처에는 놈이 모아둔 잡동사니가 널려 있었다.
썩어버린 나뭇가지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조개껍데기.
그런 것만 있으면 모르겠지만, 금화나 보석류 또한 존재했다.
심지어 갑옷과 무기도 있다.
다 녹슬었지만 먼 옛적 어떤 전사가 저것들을 입고와서 죽었던 거겠지.
나는 이제 부자다!
라고 기뻐하기에는 전부 쓸데없는 것들이다.
금화로 내가 뭘 하라고. 메이X스토리처럼 메소 던지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가방이라도 있어서 귀한것만 담아두면 언젠가 쓸 일이 생기려나.
이 세상에 동전을 쓸수 있는 자판기 같은게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주변을 둘러봤다.
지네의 내단은 볼 수 없던 것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 들어와서부터 제일 신경쓰이던 게 있었다.
저 석문이다.
──────────────
[던전: 요정 마도사 펠레리안의 임시거처]
──────────────
그래, 이곳은 던전이었던 것이다.
마물들이 있으면 모험도 있을것이고 던전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요정 마도사라니. 이 세상에는 엘프도 있었나.
이곳에 함정을 덕지덕지 발라둔 것을 보면 둘중 하나일 것이다.
뭔가 귀한 것을 숨겨뒀을지, 아니면 저 마도사의 성격이 잔혹하든지.
아니면 둘 다 일지도?
여기서 아무것도 모른 척 돌아나가는 것은 하남자.
던전의 보물을 내놓으라며 쳐들어가는 것은 상남자.
나는 중남자정도 되니까, 우선 석문과 주변을 자세히 살펴봤다.
*「마력감지lv1을 사용합니다.」
이미 죽은 코카트리스에게 이 스킬을 빌린 것이 다행이다.
건드리면 안 되는 곳이 붉게 보였다.
사실 위험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뭔가 마력이 모여있는 부분들 같다.
그 말은 즉, 함정일 수도 있고 문을 여는 장치일 수도 있다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아까 좀 위험했었네.
천장 누가 봐도 수상한 구멍이 뚫려있길래 함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초인종이었으면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잡아먹혔을 것이다.
주변을 자세히 훑어봐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마력이 부족해져서 스킬을 해제했다.
이거 못 여는 걸까.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복잡하게 장식되어있는 석문의 위쪽에 글이 쓰여 있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때도 놀랐는데, 아무래도 나는 글도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요정들이여, 문을 일곱 번 두드려라.]
나는 요정이 아니라 뱀인데.
생각해보니까 마도사가 요정이라고 했지.
······설마, 저거 요정들의 문자인가?
내가 읽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저게 사람들의 문자인지 요정의 문자인지는 몰랐다.
알 수 없으니 해볼 수밖에.
두드려라.
콩, 콩, 콩, 콩, 콩, 콩, 콩
그러면 열릴 것이다.
그그그그긍.
자동문이었나보다.
문이 열렸다.
석문은 사람 주먹보다 두꺼웠다.
아마 총을 가져와 갈기더라도 석문을 부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임시 거처라면서 왜 이렇게 튼튼하게 막아놨어.
대체 무슨 보물을 숨기고 있는거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우 먼지냄새.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최소 수백년은 되었을 것 같은데.
그 사이 지진이라도 일어났던 건지, 복도에 있던 조각상등이 부서져 있었다.
조각상의 머리 하나를 기어넘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조각상도 귀가 길쭉한게 요정은 엘프가 맞군.
자고로 엘프는 늙지 않으며 미남 미녀만 있다고 하는데.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나는 온몸을 먼지투성이로 만들며 기어갔다.
마력감지를 이용해 주변을 잘 살폈다.
혹시나 함정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복도를 지나는 내내 어떤 함정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캄캄해서야 나같이 암시야 스킬이 없으면 못 지나갈 것 같다.
복도를 지나치니 큼지막한 방이 나왔다.
방의 한가운데에는 왠 수정구가 있었다.
척봐도 비싸보이는 뭔가다.
그리고 그 앞에 다가선 순간, 수정구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오, 마력이 몰려들고있다.
수정구에서 뿜어져나오는 빛이 사람의 형상, 아니 요정족의 형상을 이뤘다.
-낯선 자여, 환영하네.
목소리가 그리 좋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지긋하게 먹은 노인이었다.
엘프는 다 젊은 줄 알았는데, 노인은 폭삭 늙어보였다.
생긴 것도 미형은 커녕 심술보가 그득해보였다.
귀가 뾰족하지 않았다면 엘프인지도 몰랐겠지.
-이곳은 나 대마도사 펠레리안의 실험실.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하지만 말투는 인자하다.
생긴걸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되지.
-문을 열고 들어왔으면 우수하고도 깨끗한 우리 동족이겠지.
그 말이 끝난 순간. 요정의 환영은 갑자기 다른 언어로 말했다.
*"다른 더러운 열등종족이 아니고 순혈의 요정이라면 고대요정어를 알겠지. 당장 머리를 숙이게, 지금!"
아저씨 뭔데.
나는 아무래도 여러 언어를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숙일 것도 없었다.
나는 땅바닥에 붙어있었으니까.
그리고 어디선가 창이 날아와 내 머리 위를 꿰뚫고 지나갔다.
후웅- 콰앙!
이 노인네 저 함정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창을 발사하는 함정을.
요정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싹 거두고 말했다.
-세계수에 영광있으라. 반갑군 동족이여.
인종차별자 엘프군 이거.
요격이 확인되었습니다.
012.
이거 나 안보이는거지?
나는 꼬리를 흔들기도 하고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춤도 춰봤다.
-혹시나 무단으로 침입하는 쓰레기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도굴꾼, 모험가, 사냥꾼들 같은 놈들 말이야.
펠레리안의 환영은 대화하듯 그리 말했다.
실제 나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마도 오래 전에 녹음했든 뭐든 한거겠지.
그나저나 생긴 것부터 괴팍하다더니, 성격도 그랬다.
-놀랐다면 미안하네. 보안이 중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창을 발사한 주제에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생각해보면, 마도사라면서 왜 이런 아날로그적인 함정만 준비한거야.
창 애호가라도되나.
-나는 대수림을 비롯해 대륙 곳곳에 이러한 실험실을 만들어두었네. 이곳은 008번 실험실이지.
공사비가 꽤 많이 들었겠구만.
돈 많은 인종차별주의자다.
-그 탓에 내가 모은 재산이 바닥났어. 아주 탈탈 털었네. 땅그지야 땅그지 아하하.
하하하 참 재미있다.
펠레리안이라는 엘프는 여러모로 내가 생각하는 엘프의 이미지와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었다.
귀만 길다 뿐이지, 그냥 성격 나쁜 노인네 아닌가.
그는 왜 이런 비밀스러운 실험실을 만들었으며, 여기는 무엇을 위한 공간일까.
-이곳 대수림 아칸 분지는 먼 옛날 운석이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지형이지. 나는 이곳에서 시간의 힘이 필요한 실험을 시작했네. 최소한 삼백 년이 필요했어.
분지에 대한 비밀이 조금 밝혀졌다.
어쩐지 독특한 지형이다 싶었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펠레리안은 3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 환영을 보고 있다면 삼백 년의 시간이 지났다는 거겠지. 그 전에 들어오려고 했다가는 동족이고 뭐고 불타 죽었을테니. 껄껄껄.
······300년이 지났나보다.
불타 죽을뻔했네.
그런데, 아무래도 이곳 상태가 말이 아닌데
나는 수정구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암시야가 없었다면 보이는게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저런 환영을 보여주는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도사가 던전을 이렇게 어둡게 꾸몄을까.
게다가 곳곳에 부서지고 무너진 흔적이 있었다.
혹시 이전에 도굴이라도 당한걸까 싶었는데 그렇다기에는 중구난방이다.
정말 지진이 났던 것 같다.
-동족이여. 부탁할 것이 있다.
펠레리안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구상한 실험에 대해서 장로들은 의견이 갈렸지. 반대하는 어리석은 자들도 많았다. 종족의 미래가 걸린 일인데. 그들은 결국 요정에게는 멸종의 길만 남았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어.
음울한 분노가 느껴진다.
-진화의 비밀을 밝히지 못한다면 끝이야. 그대도 알지 않나. '사람'은 진화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요정도, 그리고 난쟁이들과 인간들도 마찬가지지.
오호, 하긴 그렇겠지.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그렇다.
그레이트 인간 같은건 없을 거 아냐.
-수명이 짧은 종족은 상관없네. 하지만 우리 엘프같은 장생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체하는 법이야. 인간 중에서 나보다 강한 마도사가 나타났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
그 말을 하는 펠레리안의 표정은 몹시 자존심이 상해보였다.
할배요, 뱀으로 환생한 나도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런거 너무 신경쓰지 마쇼.
-답은 진화하는 것뿐. 우리 요정이 하이-엘프로 거듭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마물의 진화를 밝히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어. 진화의 조건을 밝히고 그 원리를 규명하고자 했지. ······마침내 성과를 보았다.
펠레리안은 손을 휙 들어 저 안쪽을 가리켰다.
이어지는 복도가 있었다.
-나는 마물을 창조해냈다.
뭐요?
-고위 마물 아룡의 푸른피와 이곳 대수림의 그레이 타란튤라, 그리고 지저의 피두더지를 이용해 키메라를 연성해냈어. 그리고 놈의 진화과정을 연구하며 성과를 얻었다.
이거 그냥 인종차별주의자인줄 알았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기도 했다.
실적을 위해 키메라를 만드는 국가연금술사 같은 걸까.
펠레리안 아······빠······.
-다만, 문제가 있었지.
펠레리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마지막 진화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삼백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든 키메라를 동면시켜두었지. 삼백년이 지난 뒤 진화시키기 위해. 내가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그것이다.
펠레리안은 주먹을 확 들며 말했다.
-저 안에 들어가 키메라를 동면에서 깨워라. 그러면 된다.
응 싫어~
-그래, 싫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깜짝이야.
내 말을 들은 줄 알았네.
-동면에서 깨어나면 놈은 곧바로 진화할 것이다. 진화과정은 자동으로 기록되어 세계수에 전송될거야. 진화가 끝나면 너는 레버를 당겨 키메라를 소각시키면 된다. 간단한 일이지.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하는데.
-용감한 일에는 보상이 따르는 법. 모든 일을 완수하면 막대한 보상이 뒤따를 것이다.
쩌렁쩌렁 외치는 펠레리안이 이번에는 오른쪽을 가리켰다.
-저 금고방은 키메라가 소각된 다음 열리도록 만들었지. 내가 가진 여러가지 마법무구와 아티팩트가 존재하니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다.
아 그렇군요.
-그러면, 요정의 영원한 승리를 위하여.
펠레리안의 환영이 사라졌다.
끝까지 요정요정 하는데, 참 뱀 입장에서는 공감도 안가고.
보상이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저 노인네의 명령을 따를 생각은 없다.
키메라라니, 생각만해도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
금고방, 열려있잖아.
지진이 났던게 사실인 듯했다.
단단한 철문이 뒤틀려서 틈이 생겼다.
사람은 죽어도 못들어갈만큼 좁은 틈이었는데, 뱀인 내게는 상관없었다.
아니 마도사라면서 마법금고같은거나 만들지.
이렇게 철문이나 가져다 박아서, 참 감사합니다.
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말 보상이 있었다.
와! 번쩍거리는 풀플레이트 메일!
정말 요정이 썼을 법한 화려한 검!
금은보화!
생각보다 괜찮은 노인네인걸.
물론 나한테는 쓸모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거 너무 아까운데.
특히 이 소검.
──────────────
[엘븐 브로드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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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예쁘게 생겼다.
그리고 아주아주 날카로워보인다.
크기도 작아서 어쩌면 꼬리로 들 수 있을지도.
손잡이를 꼬리로 움켜잡아 들어보니 정말 들렸다.
무슨 재질인지는 몰라도 가볍다.
사상최초 검사(劍蛇)-'사'는 뱀 사(蛇)임-가 되어버려볼까.
나는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검이 휙 떨어져서 꼬리가 잘릴뻔했다.
취소, 검은 안 드는게 나을 것 같다.
정말 마음에 안드는군.
실망한 내가 금고방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눈에 들어온 물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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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리안의 인장 반지(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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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뭐야.
반지는 번쩍거리는 다른 무구들과 달리 평범해보였다.
실제로 펠레리안이 사용했던 것인지 선반에 올라가 있었고 손때도 묻어있다.
십자가 모양의 장식이 달려있다. 금으로 만든것 같긴 한데, 알 수 없는 금속들이 복잡한 장식을 이뤘다.
가장 신경 쓰이는 점은 봉인이라는 표시.
봉인된 마법반지라니, 어쩐지 마음이 끓어오른다.
반지를 꼬리에 끼워보았다.
오히려 꼬리에 끼우기에는 반지가 너무 작았지만.
쑤욱, 하고 크기가 늘어났다.
와! 크기조절 마법.
반지는 손가락 세개는 들어갈만큼 커져서 내 꼬리 중간에 딱 맞게 끼워졌다.
억지로 빼려고 하니 빠졌지만 흔드는 정도로는 빠지지 않았다.
이거 예쁜걸.
하지만 반지는 단순한 장식품만이 아니었다.
반지를 착용한 순간, 그 기능을 알 수 있었다.
──────────────
[펠레리안의 인장 반지(봉인)]
-아공간 보관 마법.
-그 외의 기능은 봉인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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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법이라는 단어에 매혹되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뱀이라니.
생각해보니까 당연하다. 해리포터에서도 읽었다.
뱀이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상식이잖아?
그리고 아공간 보관 마법이라고 하면 뜻이 직관적이었다.
나같이 백팩을 맬 수 없는 뱀도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 그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나.
스킬을 쓸 때처럼 마력을 반지에 보내보니.
휘리리릭, 금화들이 반지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좋아, 이 반지를 얻은 것만으로도 여기 들어온 보람이 있었다.
아공간에 보관할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금화 조금과 브로드소드를 챙겼다.
검사의 꿈은 아직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든든한 기분으로 금고방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다시 왔던길로 돌아나가면 된다.
······.
음, 펠레리안 무시무시한 노인네.
한참을 나아가서 석문에 도착했지만 석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안에서 열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수정구가 있는 공동으로 돌아왔다.
나아가는 길은 하나뿐, 그 키메라가 동면중이라는 방이었다.
그래, 뭐 그놈을 깨우지만 않으면 상관없는 일 아닌가.
나는 조심스럽게 수정구를 지나쳐 복도로 나아갔다.
이번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아보인다.
복도 너머에 열린 문이 있었다. 아마도 키메라가 있다는 방 같았다.
그리고 복도의 양 옆에는 다 부서져가는 조각상들이 있다.
지진이 나기는 했나보다. 조각상 하나는 오른팔이 없었고 하나는 다리가 없었다.
게다가 덩굴식물같은 것이 몸을 뒤덮고 있다.
가여운 녀석들.
그리 생각하면서 복도 안으로 진입한 순간이었다.
-마물의 침입을 감지했습니다.
네?
어디 스피커라도 달렸나.
아니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내가 들어온걸 알아차리는데.
키메라가 있는 이쪽은 보안구역이다 이건가. 반대로 키메라가 이 복도를 통해 나오는 것을 경계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근데 마물의 침입을 감지해서 어쩔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요격 골렘을 가동합니다.
할 수 있는게 있었구나.
요격 골렘이라니, 듣기만해도 무시무시하다.
어디있냐 그거!
우드득, 우득.
덩굴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다 무너져가는 조각상이 바로 요격골렘의 정체였다.
굉장히 무시무시해 보이는걸.
──────────────
[펠레리안의 경비병A]
[특성]
[수호자], [골렘]
[스킬]
[강타lv10], [견고함lv10], [충격파lv10], [마력 내성 lv6], [참격 내성lv10], [열 내성lv10], [위협 감지 lv3], [자가 수복 lv2], [파괴 광선lv6], [중급 원소마법: 불lv10], [초급 원소마법: 불lv10]
[상태]
[반파], [고장]
──────────────
미친 존나 세잖아!
파괴광선은 또 뭔데.
골렘은 코카트리스는 혼자서 가지고 놀만큼 강해보였다.
옆에 있는 펠레리안의 경비병B라는 골렘도 비슷하게 강했다.
다만 원소마법이 이쪽은 흙 계통이다.
와드득 하며 마침내 놈들을 덮고있던 덩굴이 뜯겨나갔다.
놈들의 하나뿐인 눈에서는 시뻘건 안광이 폭사되었다.
나를 요격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해보인다.
다만, 그순간, 다리가 없는 골렘이 앞으로 철푸덕 엎어졌다.
──────────────
[펠레리안의 경비병A]
[특성]
[수호자], [골렘]
[스킬]
[초급 원소마법: 불lv10], [열 내성lv10]
※'반파'로 인한 사용불가
[강타lv10], [견고함lv10], [충격파lv10], [마력 내성 lv6], [참격 내성lv10], [위협 감지 lv3], [자가 수복 lv2], [파괴 광선lv6], [중급 원소마법: 불lv10]
[상태]
[반파], [고장], [엎어짐.]
──────────────
헤에.
막강한 요격 골렘은 순식간에 스킬이 하나 남은 허접골렘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불쌍하게 고개를 든 허접골렘의 입에서 불꽃이 뿜어져나왔다.
화르르륵-
악, 비늘이 다 탈뻔했다.
황급히 몸을 피해서 간신히 살았다.
어라, 바닥이 울렁울렁거린다.
도약을 이용해서 훌쩍 뛰어올랐는데.
쿠웅!
바닥의 석판이 박수를 치듯 내가 있던 공간을 강타했다.
옆을 보니, 팔 없는 골렘친구였다.
위험한데.
일단 물러난다.
복도의 경계선 밖으로 물러난 순간이었다.
-요격이 확인되었습니다.
키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골렘의 눈빛이 착해졌다.
놈들은 자신들이 원래 처박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아니 요격 아직 안됐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고개를 들이밀어보았다.
-마물의 침입을 감지했습니다. 요격골렘을 가동합니다.
다시 골렘이 벌떡 일어서고.
복도에서 몸을 뺐다.
-요격이 확인되었습니다.
머리를 들이밀고.
-마물의 침입을 감지······.
-요격이 확인되었습니다.
이거 재미있네.
골렘에게 앉았다 일어나기를 열번정도 시킨 뒤.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곧바로 시도해보았다.
어이, 경비병 B.
──────────────
[펠레리안의 경비병B]
[스킬]
······[초급 원소마법: 흙lv10]
······
──────────────
잠깐 빌릴게~
*「빌리는 뿔lv2로 초급원소마법: 흙lv10을 빌립니다.」
*「성공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초급원소마법: 흙lv1을 얻었습니다.」
잘하면, 여기서 진짜 마법을 배울 수도 있겠는데.
발휘해볼까, '진심'을.
013.
스킬, '빌리는 뿔'.
내가 가진 가장 활용도가 높은 스킬이다.
단순히 깨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뱀을 심지어 비행까지 가능하게 하는 초절정의 스킬이라 이말이다.
물론, 내가 아닌 다른 뱀이 이 스킬을 얻어봤자 활용에 제한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빌리는 뿔로 빌릴 수 있는 스킬에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뱀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만 빌릴 수 있다.
빠르게 기거나, 비늘을 단단하게 하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사기적인 특전이 있었으니, 잠재력 스탯이 20인 덕에 얻은 '정진' 특성이었다.
*「특성 '정진'에 의해 발전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사상최악의 마법사(魔法蛇)-뱀 사(蛇)임-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아마도 무슨 스킬이든 배울 수 있었다.
솔직히 요격 골렘에게 빼앗고 싶은 스킬은 따로 있었다.
초급 마법 따위를 뭐하러 빌리나, 저 탐스러운 스킬이 있는데.
*「빌리는 뿔lv2로 파괴광선lv6을 빌립니다.」
무려 파괴광선이란다.
포켓몬스터 게임을 할때부터 그리 탐나던 기술이었다.
갸라도스나 쓸 수 있던 파괴광선을 내가 쓰게되다니.
다른 마물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 그러면 잡아먹을게 안남으려나.
하지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빌리는 뿔lv2의 숙련도가 부족해 파괴광선lv6를 빌릴 수 없습니다.」
헉.
발이 묶인 것은 빌리는 스킬의 레벨이 너무 낮아서였다.
아직 lv2밖에 안되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빌릴 수 있는 스킬과 빌릴 수 없는 스킬이 나뉘는 기준은 단순히 대상 스킬의 레벨 때문은 아닌 듯했다.
*「빌리는 뿔lv2로 초급원소마법: 흙lv10을 빌립니다.」
*「성공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초급원소마법: 흙lv1을 얻었습니다.」
초급원소 마법은 배울 수 있었으니까.
다만 여기서도 유의할 점이 있다.
레벨10의 스킬을 빌렸는데 내가 정작 쓸 수 있는 것은 lv1수준이라는 것이다.
도약은 레벨 6짜리를 빌려도 도약lv2로 들어왔음을 떠올려보면 아무래도 기초마법이라는 스킬의 수준이 꽤 높은 것 아닐까.
하긴, 마법을 폴짝 뛰는 스킬과 비교하는 것도 웃기다.
그래서 그 흙 마법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합!
땅을 좀 더 푹신하게 만들 수 있었다.
골렘들이 하도 쿵쾅거리면서 돌아다녔던터라, 바닥의 석재는 깨지고 맨땅이 드러났다.
그 땅이 물러진 것이다.
나같은 뱀이야 그 위를 기어다녀도 상관없었지만 골렘이 밟으면.
미끄덩, 하고 엎어진다.
쿠웅!
우스꽝스럽게 넘어져도 그 소리는 보통 큰게 아니다.
엎어진 것은 다리가 있는 흙골렘이다.
불 마법을 쓰는 놈은 불골렘, 흙 마법을 쓰는 놈은 흙골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흙골렘이 엎어진 이 순간이 내 기회였다.
나는 흙골렘의 머리통으로 기어올라갔다.
가속을 이용하자 그 속도가 제법 빨랐다.
넘어져있는 흙골렘이 파리 때려잡듯 하나남은 손을 휘둘렀지만.
텅!
제 머리를 후려칠 뿐이었다.
나는 마침내 흙골렘의 정수리에 도달했다.
이곳에 빛나는 마석 하나가 붙어 있었다.
아마도 약점이 분명하겠지. 나는 입을 쫙 벌리고 독니를 박아넣었다.
까드득!
안 박힌다!
이빨이 부러질 뻔했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 사이, 불골렘이 늘 하던 짓거리를 했다.
놈의 주둥이에서 불꽃이 뿜어졌다.
화르르르르륵!
열풍이 복도 내부를 휩쓴다.
제 동료가 불에 휩싸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실제로 흙골렘은 불꽃을 맞아도 상관없었다.
열 내성10lv덕택인지 아니면 생물이 아니라 골렘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려 열 내성lv2가 있는 나는 어떨까.
앗뜨뜨뜨뜨.
불판 위에 올라간 꼼장어처럼 발작하며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후퇴다 후퇴.
천만 다행인 것은 복도의 경계선 밖으로만 나오면 골렘들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요격이 확인되었습니다.
골렘들이 돌아간 것을 보고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등쪽이 후끈후끈 쓰라리다.
비늘이 까슬까슬하게 일어난 것보니,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방금은 제법 안정적으로 살아돌아왔다.
네 번째 시도에서는 정말 죽을뻔했다.
그래, 골렘들과 드잡이질을 한 것이 벌써 다섯 번째다.
아마 하루 정도 지나지 않았으려나.
이전에 코카트리스 고기를 많이 먹어둬서 아직 배는 고프지 않다.
목이 조금 말랐지만 그것도 해결책이 있었다.
지진이 났던 탓인지, 천장도 곳곳이 뜯어져 있었다.
그중 물이 똑똑 떨어지는 종유석이 있었다.
그 아래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으면 된다.
크, 시원하다.
등의 화상은 천천히 회복되었다. 역시 내가 마물은 마물인가보다.
이번에도 골렘들을 이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배운 것은 있었다.
우선, 머리에 있는 마석을 물어뜯어버리는 것은 포기.
그게 약점일 줄 알았는데, 수정 같은 것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내 물어뜯기 스킬정도로는 깨부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흙 마법으로 미끄러뜨리기는 아주 훌륭하단 말이지.
골렘들은 학습능력이 없었다.
한 번 먹혔던 전략은 또 사용할 수 있었다.
'유효한 공격.'
그게 필요하다.
내 공격력의 9할 이상은 사실 독니라는 스킬에 기인한다.
한 번만 물면 어지간한 마물들도 중독된다.
나머지 1할은 물어뜯기다.
그런데 골렘에게는 둘 중 어느쪽도 사용할 수 없었다.
바윗덩어리를 물어봤자 내 이빨만 부러질 터.
그렇다고 목을 졸라 죽일수도 없고. 답답한 상황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즐거웠다.
이건 생존 너머를 추구하는 상황이었다.
'나보다 강한 골렘을 상대로 싸우는 법을 연습한다.', 그런 거다.
게다가 마법이라는 재미있는 능력도 얻을 수 있었다.
조금 더 흙 마법을 쓰다보면 완전습득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미끄러뜨리기 말고 다른 전략도 사용할 수 있겠지.
당장이라도 다시 한 번 골렘에게 도전하고 싶다.
하지만 마력이 찰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잠을 자며 쉬는 것 말고도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나는 금고방에 들어갔다.
이곳에는 진귀한 보물들 이외에도 책이 꽂힌 서가가 하나 있었다.
책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이번엔 뭘 볼까.
그래, 이거지.
[대수림의 네임드 마물들]
이 문자가 요정어인지 아니면 어디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말은 물론이고 펠레리안의 요정어까지 이해할 수 있었으니, 아무래도 나는 환생 특전을 얻어버린 것 같다.
책을 물어서 뺐다.
최소 수백년 전의 책이라서 그런지, 곰팡내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금고방 안에 있는 책들은 상태가 나았다.
바깥의 서가에 있던 것들은 아예 삭아서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직도 은은히 빛을 뿜고있는 수정구 앞에 가져와 책을 읽었다.
매일 웹소설만 읽던 나지만 어렸을때는 독서 자체가 취미였다.
그 취미가 되살아난 기분이다.
꼬리로 종이를 넘기다가 관심이 가는 부분 위주로 읽어봤다.
네임드 마물이라, 어떤 마물들일까.
메두사맘 정도 되는 것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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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에무라]
육지 거북형 마물.
추정 나이, 1200세 이상.
7년 전 관측 기준으로 크기는 작은 성(城)에 비견된다.
연중 대부분을 수면으로 보내지만, 하룻밤에 10km를 움직였던 기록이 존재한다.
성품이 온순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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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구라도 정도 껏 해야지.
1200살이 지금까지 살아있으면 최소 1500살이란 것 아닌가.
······음, 아무래도 사실이면 세상에는 엄청난 괴물들이 많은 것 같다.
우리 엄마도 사실 별것 아닌 잡몹이었던거야?
그것 말고도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다만, 반쯤은 전설을 모아둔 것 같았다. 책에서도 존재가 확실하지 않다는 서술이 많았다.
······아.
책을 보다가 곯아떨어졌다.
수험생 시절이 떠오르는군.
눈을 뜨니 다시 마력이 보충된 것이 느껴졌다.
좋아, 그러면 다시 골렘을 잡으러 가볼까.
자 사냥의 시간이다.
* * *
퍽!
꾸엑.
나는 골렘의 팔에 맞아 날아갔다.
그나마 다행이다. 깔려 죽었으면 그대로 쥐포가 되었을테니.
아니 뱀포인가, 하하.
나는 튕겨나가는 기세로 한바퀴 또 굴렀다.
생존본능이 그러라고 조언했다.
화르르륵!
내가 있던 자리를 불길이 휩쓸고 지나갔다.
조금 전에 불골렘을 무력화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번은 일곱번째 도전이었다.
골렘을 뒤로 넘어뜨려 마석을 깨뜨리려는 시도를 했는데 튼튼하기도 해라.
-요격이 확인되었습니다.
다시 복도의 경계를 넘어 물러섰다.
종유석에서 떨어진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한방울씩 먹는게 감질나서 그 아래 금고방에 있던 투구를 가져와 물그릇으로 썼다.
슬슬 배가 고프다.
빨리 탈출해야겠는데.
그러면 저놈들을 때려눕혀야겠지.
* * *
아앗! 그냥 지나가기 실패!
나는 골렘들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는 방법을 시도해봤다.
그리고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흙골렘이 내 앞의 길을 막았다.
그리고 불골렘이 불덩이를 소환해 던졌다.
도약으로 피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통구이가 될 뻔했다.
오히려 근접전이 나았을 줄이야.
결코 저놈들을 못이겨서 도망친게 아니라 이게 가능한지 시험해본거였다.
암 그렇고말고.
-요격이 확인되었습니다.
간신히, 다시 수정구 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도전해야지.
* * *
아, 이번에는 진짜 죽을뻔했다.
꼬리가 잘릴뻔했다.
흙골렘이 내 꼬리를 밟았으니까 , 틀림없이 납작해질 운명이었다.
꼬리를 잃지 않은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믿고 있었다고 마법반지!
반지는 정말 더럽게 튼튼했다.
내 꼬리에 껴있는 반지는 골렘이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휘지도 않았다.
그 덕에 꼬리가 욱신 거리는 정도로 끝났다.
나는 흙 마법으로 만든 물그릇에 다가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투구를 물그릇으로 쓰는 것은 그만뒀다.
흠, 물그릇을 좀더 깊게 만들어볼까.
흙 마법을 사용한 순간이었다.
*초급원소마법: 흙lv1이 초급원소마법: 흙lv2가 되었습니다.」
*「스킬, '초급원소마법: 흙'을 완전히 획득했습니다.」
아.
드디어 됐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마력이 차오르기를 기다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이제, 진짜 진심을 다해볼까.
여태까지는 진짜가 아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못 믿는다면 보여주면 되겠지.
나는 천천히 복도로 나아갔다.
이번이 몇 번째 시도지?
스무 번을 넘긴 뒤에는 세지 않았다.
이제 진짜 배고파 죽을것 같다.
-마물의 침입을 감지했습니다. 요격골렘을 가동합니다.
지겹지도 않은지, 양 옆으로 돌아가 있던 골렘들이 일어섰다.
아아, 나는 이제 지겹다.
앞으로 나아갔다.
골렘을 신경쓰지도 않는 듯 당당하게.
그러면 오른쪽에서 흙골렘이 먼저 나선다.
여기서 잠깐 멈춘다.
콰앙!
눈앞의 땅바닥이 접히며 코앞의 공간을 강타한다.
그 충격파를 무시하고 오른쪽으로 돌아가 살짝 숨는다.
불 골렘의 차례다.
화르르륵!
불꽃이 땅을 휩쓴다.
뜨겁긴 하지만 흙 마법으로 생성된 암반 뒤에 숨어있으면 버틸만하다.
*「열 내성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열 내성lv7이 열 내성lv8이 되었습니다..」
어 형은 이제 뜨거운 것도 잘버텨.
가만히 있도록 놔둘 골렘들이 아니었다.
다리가 멀쩡한 흙골렘이 나를 걷어차려 한다.
나는 여기서 익숙해진 흙마법을 사용했다.
걷어차려는 디딤발 밑의 흙을 부드럽게 만든다.
흙골렘은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여기서는 내 피지컬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가속을 이용해 빠르게 놈의 몸을 타넘었다.
놈이 날파리 잡듯 한 팔을 휘둘렀지만 피하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놈의 어깨 위에 도착한 나는, 꼬리를 흔들었다.
반지야 반지야, 이 골렘친구한테 선물을 주렴.
그리고 아공간 안에 담아둔 물그릇, 아니 투구가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정확히 골렘의 머리통을 감싸는 투구.
투구는 거꾸로 떨어져서 놈의 눈이 완전히 가려졌다.
그순간, 흙 골렘의 움직임이 멈췄다.
여기까지는 스무번째의 도전에서 확인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번쩍 도약했다.
흙골렘의 머리를 향해 불꽃이 쏘아졌다.
불골렘은 동료의식따위는 없는 놈이니까.
그리고 놈이 불꽃을 쏘아낸 뒤에는 잠깐의 빈틈이 생긴다.
다리가 없는 불골렘의 대가리 위에 올라가기는 훨씬 쉬웠다.
다시 한 번 꼬리의 반지를 휘두른다.
금고 방 안에 있던 너덜너덜한 로브였다.
그 곰팡내 나는 옷이 불 골렘의 머리를 감쌌다.
머리에 투구를 씌우는 것보다 로브를 씌우는게 훨씬 쉽다.
하지만 자칫 흙골렘의 머리에 먼저 로브를 씌웠다가는 불 골렘에 의해 태워먹을 가능성이 높았다.
천신만고 끝에 성공한 작전.
그리고 내 가설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요격이 확인되었습니다.
두 골렘이 완전히 정지했다.
머리에 투구와 로브를 뒤집어쓴채로.
아자!
이곳에 씨씨티비는 없다.
뭐 마법적 장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역시 두 골렘의 시야가 씨씨티비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둘 다의 눈을 가리자, 내가 복도에서 사라진 것과 같게 취급되었다.
자, 이제 무력화된 골렘을 처치해볼까.
아차.
챙길 건 챙겨야지
*「빌리는 뿔lv2로 초급원소마법: 불lv10을 빌립니다.」
*「성공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초급원소마법: 불lv1을 얻었습니다.」
흙 마법은 완전히 습득했으니, 이제 불뿜는 뱀이 되어주마.
*「빌리는 뿔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빌리는 뿔lv2가 빌리는 뿔lv3이 되었습니다.」
오, 보너스도!
특수진화의 단서
014.
어리석은 골렘들이여.
눈 가리면 얌전해지는 것이 마치 닭대가리 같다.
만약 이 골렘들이 제상태였다면 얼마나 강했을까.
놈들의 상태창에는 '반파'와 '고장'이 적혀 있었다.
한 놈은 다리가 없었고 한 놈은 외팔.
게다가 대부분의 스킬들이 비활성화 상태였다.
아마 골렘 하나가 코카트리스 따위의 마물은 몇 마리도 잡아낼 정도로 강력했으리라.
물론 지금은 작동정지해서 엎어져있는 신세지만.
꼬르르륵-
배가 무척 고프다.
며칠 간 먹은 것은 동굴에 사는 벌레며 작은 도마뱀 뿐이었다.
게다가 가만히 쉬고 있던 것도 아니고 골렘과 드잡이질을 계속 했으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골렘 같은 돌덩이를 소화할 수는 없을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저 마석.
골렘의 머리에 붙어있는 마석만 봐도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마석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그 마석을 어떻게 먹느냐가 문제였다.
놈들의 마석은 정수리와 뒤통수 사이에 존재한다.
노출되어 있는 것 같지만 수정같은 걸로 뒤덮여 있어서 내 이빨이 들어가지가 않는다.
내게는 망치도 없고 망치를 휘두를 손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 수정을 깨뜨려서 마석을 호로록 먹어치울까.
방법은 있었다.
우선 흙골렘의 머리에 얹어둔 투구를 조심스럽게 건드린다.
자칫해서 투구가 훌러덩 벗겨지면 골렘도 다시 작동할 것이다.
나는 놈의 머리통에 투구를 거꾸로 씌워두었다.
즉, 본디 얼굴을 가리는 면갑을 올리면 뒤통수가 드러난다.
탐스러운 마석이 반짝거렸다.
*「초급원소마법: 불lv1을 사용합니다.」
나는 입을 벌리고 불꽃을 쏘아냈다.
이거 아주 기분 좋은데.
뱀이 아니라 용이 된 것같은 기분이다.
사실 꼭 입으로 불을 뿜을 필요는 없었지만 기분이 중요한 것 아니겠나.
내가 뿜어대는 불꽃은 골렘의 것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고장난 라이터가 불을 확 피워내는 정도.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이정도 불꽃에 눈썹과 앞머리를 태워먹은 흡연자가 세상에 한둘이 아닐테니.
얼굴이 후끈후끈해질 정도로 불꽃을 뿜어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마석을 보호하는 수정이 녹아내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골렘들은 대단히 높은 열 내성을 가지고 있거든.
그러면 왜 이렇게 수고로운 짓을 했는가.
모든 것은 유튜브 덕택이다.
침대에 누워 보던 쇼츠에서는 온갖 영상들이 나온다.
그 중에서는 과학 실험을 하는 영상도 많았다.
과학 수업 때 맨날 자던 나였지만, 워낙 재미있어서 계속 봤다.
물론 영상의 시청자 타겟이 초등학생 같긴 했지만 ······ 재미있는 걸 어떡해.
그때 본 것을 뱀이 된 지금 써먹기도 하고있고.
나는 아공간에 담아놨던 물병을 꺼냈다.
말이 물병이지, 흙 마법으로 만든 조악한 구체다.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그것을 이 투박한 물병에 담아두었다.
찬물이 담긴 물병을 달궈진 골렘의 뒤통수에 깨뜨리자.
치이이익!
새하얀 김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기다리던 소리가 났다.
쩌저적- 쩍.
갈라졌다!
잔뜩 뜨겁게 달궈진 컵을 얼음물에 담그면 깨지는 것과 똑같은 원리다.
안되면 어쩔 수 없겠다 생각했는데 정말 됐다.
고마워요 x팝 실험실! x분 과학!
수정조각을 꼬리로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아직 따끈따끈한 마석이 허공에 노출되었다.
아니 이럴수가.
당연히 단단할 줄 알았는데 마치 크림처럼 부드럽다.
냄새는, 음······ 곰팡내.
이것도 풍미라고 치자.
나는 머리를 처박고 부드러운 마석을 남김없이 먹었다.
이거 마치 간장게장 등딱지 긁어먹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녹진한 마력의 맛이 충만하기 그지없었다. 어디 공기밥 없나.
*「정제된 마석을 섭취합니다.」
*「마성이 깃듭니다.」
*「육체가 더 강인해지고 마력이 충만해집니다.」
다행히 이것도 마석은 마석인 듯하다.
정제된 마석이라니, 그런 것도 있었나.
그리고 기대하지 못한 수확이 뒤따라왔다.
*「펠레리안의 경비병B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어이!!
골렘은 마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레벨은 안 오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무려 세 개나 한번에 올랐다.
골렘이 그만큼 강하시다는 거잖아.
마석을 먹기 위해 이 고생을 한 거였는데, 그렇다면 불 골렘의 마석도 해치워야 할 것 같다.
나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경비병A의 뒤통수를 깨서 호로록 마석을 먹어치웠다는 뜻이다.
*「펠레리안의 경비병A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번에는 두 개의 레벨이 올랐다.
잠깐 이러면 슬슬 레벨이 오를만큼 오르지 않았나.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
[화이트 혼 스네이크 lv10]
[특성]
[불굴], [정진], [뿔]
[스킬]
[빌리는 뿔lv3]: 초급원소마법:불lv1
[암시야lv7], [독니lv4], [숨참기lv4], [은밀lv4], [포식lv3], [물어뜯기lv5], [독 내성lv4], [출혈 내성lv3], [고통 내성lv5], [열 내성lv8], [생존본능lv5], [도약lv5], [마력감지lv2], [가속lv3], [초급원소마법:흙lv2]
──────────────
저는 마법사가 되었습니다.
한층 더 풍성해진 스킬 항목은 차치하고, 나는 아래에 있는 '상태'에 집중했다.
──────────────
[상태]
[진화 가능], [영양실조]
──────────────
10레벨이 만렙이었다!
이번에도 레벨 10이 되자 진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가슴이 뛰네~ 옆에 있는 영양실조가 조금 신경쓰인다만.
그래도, 이 자리에서 바로 진화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진화든 뭐든 배를 채워야 할 수 있는법이다.
영양실조 상태에서 진화하려다가 배고파 죽으면 어떡해.
또, 신경쓰이는게 있다.
이번에는 뭐로 진화할 수 있을까.
처음 진화가 가능했을때의 선택지는 실망스러웠다.
형누나들과 똑같은 '리틀 그린 스네이크'가 되거나.
아니면 아마도 덩치만 커졌을 '화이트 스네이크'가 되거나.
둘중 어느쪽으로 진화했어도 고만고만한 결과였을 것이다.
특수조건을 달성한 덕에 화이트 혼 스네이크로 진화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빌리는 뿔이라는 치명적인 스킬을 얻을 수 있던 것이다.
혼재규어의 마석을 먹은 것이 나비효과로 돌아왔다.
'답은 특수진화다.'
확신이 들었다.
이번에도 가능하다면 특수조건을 달성해 특별한 진화를 하고싶다.
그러나 그게 특수조건이 뭔지도 모르고 애초에 특수진화가 매번 가능한지도 모른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자.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여기 앉아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복도는 안쪽으로 계속 길게 이어졌다.
바깥에서는 큼지막한 언덕처럼 보였는데, 그 지하가 전부 던전이었던 것 같다.
어두컴컴한 공간이 나타나고.
갑자기 펠레리안이 튀어나왔다.
-이곳이 바로 내 연구실이다.
다행히 환영이었다.
가상의 요정 한 명이 있다고 가정한 듯하다, 눈높이가 확실히 높아.
아저씨 저는 요 아래 있습니다.
-마정석으로 구동하는 최신식이지. 마탑의 기술력을 빌려 만들었어. 장로들은 그조차 마음에 안들어했지만······ 전원은 저쪽에 있다.
기계처럼 보이는 것이 여럿 있었다.
다만, SF영화에서나 보던 실험실 같지는 않다.
묘하게 투박하고 고풍스러운 것이 확실히 전기가 아니라 마력으로 작동할것 같은 기계들.
나는 독수리 모양으로 조각된 전원 레버를 당겼다.
철컹, 우우웅-
그리고 벽면에 붙어있던 수정들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방 안이 환해졌다.
수백년 동안 빛을 받지 못한채 지진까지 겪어야 했던 여러 기계장치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대부분이 부서져 있다. 무슨 용도인지는 짐작도 안갔다.
-어떤가. 압도당했지? 당연하다. 내 마도기술의 총아이니······. 이곳에서 나는 진화를 연구했다.
펠레리안은 환영인 주제에 거들먹거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도록 동족. 자네가 할 임무는 간단해. 복잡한 일은 내가 제작한 마도정령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손뼉을 두번 쳐보도록.
그렇게 난감한 요구를.
이거 완전 뱀 차별주의자 아닌가. 나같이 손이 없는 사람은 어쩌라고.
하는 수 없지.
나는 꼬리로 바닥을 두 번 때렸다.
짝짝-
박수 비슷한 소리가 났다.
그러자, 천장에 있는 수정이 번쩍 거리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어우 깜짝이야.
'마물의 침입을 감지했습니다.'하는 말을 하던 그 목소리였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네.
펠레리안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 내가 만든 키메라, 파프나챠가 동면 중이다. 파프나챠의 특수진화 조건에는 300년의 세월을 견디는 것이 있지. 우측에 있는 기계로 그것을 분석해냈어.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특수진화의 조건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300년의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특수조건도 있는 것 같다.
혹시 나도 그러면 어떡하지.
-저 앞의 수조 안에 놈이 갇혀있네.
나는 펠레리안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동면을 깨우고 진화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을 기록하고 전송하면 돼.
'저기요, 근데.'
펠레리안의 환영이 가리키는 방향.
그곳에는 분명 수조 비슷한게 있기는 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다만, 완전히 박살나 있다.
지진이 원인인지 수정판이 산산조각 나있다.
그리고 그 안에도 아무 것도 없다.
사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조차 없이 텅텅 비어있다.
-두려워 말라. 다 내게 맡기면 돼.
만약 저 안에 그런 괴물이 있다면 나라도 동면에서 깨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펠레리안은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마도정령에게 직접 명령한 것이다.
-정령, 복도를 폐쇄한다.
-네, 요격 골렘 가동.
그 요격 골렘 내가 다 부숴놨는데.
펠레리안의 표정은 음흉하기 그지없다.
-미안하네 동족. 진화 조건 중에선 요정족의 피를 섭취하는 것도 필요해서 말이야. 동면 해제.
-동면을 해제합니다.
이 인종차별 엘프가 설마······.
-자네의 희생은 우리 요정족 전체의 발전을 위한 것일세.
-파프나챠를 해방합니다. 실험내용을 전송합니다.
-그럼 이만.
펠레리안의 환영은 휙 사라졌다.
그리고 다 부서진 수조가 깜빡깜빡 빛을 뿜었다.
-동면 해제가 불가능합니다.
목소리는 담담하게 그리 말할 뿐이었다.
당연하지, 수조고 뭐고 박살나 있으니까.
그리고 안에 들어가 있던 파프나챠인지 파프리카인지는 이미 도망친 듯했다.
수조 뒤쪽 벽이 박살나 있었으니까.
나는 펠레리안이라는 요정 마도사에게 감탄하고 말았다.
이 세상의 엘프는 믿을만한 놈이 안되는구만.
그 요정우월주의 늙은이는 자신의 연구를 위해 동족까지 제물로 바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간교하고 음흉한 계획은 시간이라는 괴물에게 무너졌다.
지진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의 목적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진화 조건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이지.
나는 오른쪽의 기계장치로 다가가 두리번 거렸다.
여기도 부서진 것 같긴한데, 작동이 되나?
뭔가 잡아당기는 것도 있고 누르는 것도 있었다.
내가 새빨간 손잡이를 끌어당기는 순간이었다.
철컥.
덮개 같은 것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뭔가를 끼울만한 십자가 모양의 홈이 있었는데.
······이거, 반지의 인장하고 똑같은 모양이잖아.
나는 조심스럽게 꼬리의 인장 반지를 그곳에 가져다댔다.
찌릿, 하고 느낌이 오더니.
-펠레리안 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목소리가 울렸다.
나를 인종차별주의자 싸이코패스 노인네 요정으로 착각하는건 억울하지만.
뭘 시켜볼까.
수십 시간 이상 불꽃에 노출될 것
015.
-펠레리안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음음 그래그래, 내가 펠레리안이다.
나는 펠레리안이 창조했다는 마도 정령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쉬쉬잇."(내 진화조건은 무엇이지?)
"쉿, 쉬잇. 쉿."(왜 대답을 안하나?)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열심히 말해봤자 정령이라는 놈은 대꾸조차 해주지 않았다.
이 정령도 인종차별주의자인가.
"사아아아악!"
호통을 한 번 쳐봤지만 여전히 무시다.
뭔 헛짓거리냐.
부아가 치밀어서 놈의 뒤통수 한대를 쳤다.
물론 그냥 앞에 있는 기계를 쳤다는 뜻이다.
철컹.
깜짝이야.
기계에서 무언가 쑥 튀어나왔다.
자그만한 금속 침이었다.
-마물의 혈액을 추출해주십시오.
어, 정말?
저 수상한 침으로?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거 파상풍 걸리는 거 아니야?
그래도 녹이 슨 것 같지는 않았다.
에이, 설마 죽기야 하겠나.
조심스럽게 꼬리를 들이대보았다.
푸욱.
금속 침의 첨단은 몹시 뾰족해서 내 비늘을 가볍게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쭈우욱 하면서 피가 빨리는 게 느껴졌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해당 마물을 수정판 위에 올려주십시오. 정확한 스캔을 위해 죽이거나 마취시키는 것을 추천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령이다.
죽을 수는 없었으니, 나는 수정판 위에 올라가 대자로, 아니 일자로 드러누웠다.
터엉-
조명이 확 켜졌다.
수정판 위에 마력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스캔을 시작합니다.
-독사류 마물, 혼 계열의 마물로 분석됩니다.
아, 이거 딱 그 느낌이다.
엑스레이 기계 위에 올라간 느낌.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다.
중학교때, 애들은 맨날 나를 골키퍼를 시켰다.
난 당연히 축구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항상 나는 골키퍼를 하게 되었다.
골키퍼는 중요한 포지션 아닌가? 왜 날 시켰을까.
축구에 관심도 없고 운동신경도 없으니, 체육시간 내내 멍을 때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옆반 덩치의 초강력 슈팅에 가슴을 얻어맞았다.
하늘이 노래지고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늘을 보며 누워있었다.
평소에는 성격이 더럽던 체육선생이 깜짝 놀라서 병원에 데려가주었다.
솔직히 병원에 도착할때쯤은 괜찮았는데, 그냥 아픈척 했다.
그때도 가슴 엑스레이를 찍는다 뭐다 난리였었지.
아름다운 추억이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결과지를 출력합니다.
수정판 위에서 내려왔다.
나는 마도기술이라는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300년 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저런 기계장치는 마치 현대기술로 만든 것 같다.
지금도 프린터마냥 종이를 출력중 아닌가.
-분석 결과를 기록하고 전송하시겠습니까?
어? 어디로 전송해.
그러고보니 펠레리안이 뭐 자신이 만든 키메라로 실험을 한뒤 결과를 전송하고 어쩌고 했다.
절대 싫다.
누구한테 내 정보를 전송해 임마, 싫어!
-자동 전송을 준비합니다.
으악!
그러자 기계의 꼭대기에 달린 막대에서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말을 못하니 이게 문제다.
나는 잽싸게 도약해서 그 막대를 물어뜯었다.
와작, 하고 막대가 부러졌다.
-전송이 불가능합니다.
후우, 그래.
다행이다. 내 귀한 개인정보가 털릴 뻔했어.
그리고 그사이 결과지가 완전히 출력되었다.
나는 팔랑팔랑 떨어진 종이조각을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정말 내 진화조건들이 적혀 있었다.
뭐야 이거.
하나가 아니잖아.
──────────────
[독사류 마물, 뿔 계열.]
-정확한 품종을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해당 개체가 독사류 마물이 아닐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 외 추정할 수 있는 품종은 아래와 같습니다.
[조류 마물], [설치류 마물], [거북류 마물], [도마뱀류 마물], [토끼류 마물], [재규어류 마물], [지네류 마물], [거미류 마물], [박쥐류 마물], [인간], [요정]······.
──────────────
뭔데.
이게 뭔데.
나처럼 매끈한 비늘과 아름다운 독니를 가진 게 뱀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리고 솔직히 거북류 마물과 지네류 마물은 너무 떨어져있는 것 아닌가.
결과가 왜 이렇게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잠재력 때문인가.
잠재력 20은 내게 정진이라는 특성을 주었다. 발전 가능성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 아래에 적혀있는 글이 내 추론에 신빙성을 더했다.
──────────────
-개체의 진화 가능성이 비정상적으로 다양하게 분석되었습니다.
-독사류 마물이라는 가정하에 특수 진화 가능 조건들을 분석했습니다.
1.주 서식지를 늪지로 조성.
2.주 서식지를 담수로 조성
3.주 서식지를 해양으로 조성
4.주 서식지를 사막으로 조성
5.주 서식지를 동굴로 조성
······
──────────────
엄청나게 다양하다.
특수 진화 조건은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 조건들을 달성한다면 어떤 마물로 진화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선 서식지를 바꾸는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대충 알 것 같다.
바다에 살면 바다뱀이 되고 사막에 살면 사막뱀이 되는 거겠지.
그래도 그것 뿐이면 좀 심심한데.
그 아래에도 조건은 무수히 많았다.
눈에 띄는 것들 또한 있었다.
──────────────
······
7. 주 서식지를 화산으로 조성
8. 대량의 맹독 섭취
9. 수십 시간 이상 비행
10. 수십 시간 이상 불꽃에 노출
11. 10년 이상 냉동상태로 동면
······
──────────────
뒤지라는 거지?
그래, 화산에서 살면 화산뱀이 되고, 맹독을 많이 먹으면 맹독의 독사가 되겠지.
무려 날아다니라는 것도 있다.
플라잉 스네이크는 정식 진화트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저 진화조건을 달성하려다가는 죽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진화조건들이 의미심장해졌다.
이거 어쩐지, 아래에 적혀있는 것들이 더 특이한 돌연변이 같은 것 같은데.
그런 것 있지 않나.
이브이는 다양한 포켓몬으로 진화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진화 난이도가 어렵고 더 강한 진화트리가 있는 법이다.
──────────────
······
27. 10등급 이상의 마석 섭취.
28. 용종의 피 섭취.
29. 악마와의 계약.
30. 천족의 피 섭취.
31. 신의 축복.
──────────────
와.
가슴이 뛰는걸.
드래곤-스네이크, 데몬-스네이크, 갓-스네이크가 될 수 있는걸까.
듣기만 해도 대단한 놈들의 피를 섭취하는 것이 몇 개 있었다.
잠깐, 그러고보니 펠레리안이 만들었다는 키메라.
그 키메라가 어떤 마물의 피를 섞어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흐음,그 키메라가 만약 살아있다면 구경이라도 해봐야겠다.
어차피 이 분지 안에 있을거 아냐?
왠지 어마어마하게 셀 것 같아서 엮이기는 싫지만 말이야.
슬슬 이곳 던전에서 볼일은 다 끝낸 것 같다.
나는 혹시 몰라서 내 분석결과지를 냠냠 먹어삼켰다.
개인정보는 중요하니까.
자, 마도정령.
이제 자폭해라.
-······.
당연히 정령은 답하지 않았다.
저놈은 이곳에서 전원이 꺼질때까지 계속 명령을 기다리겠지.
불쌍한 일이다.
잠시 방을 둘러본 나는 출구를 찾아냈다.
정식으로 만든 출구는 아닌 것 같았다.
두더지처럼 벽을 파고 나갔는지, 흙이며 바위 조각들이 널려 있었으니까.
수조에 갇혀 있던 키메라의 소행이 분명했다.
음, 탈출한지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이 던전을 초토화시킨 지진은 언제 일어난걸까?
생후 삼 주 정도밖에 안된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직 아기뱀이니까.
땅굴은 사람 두셋이 한줄로 걸어가도 넉넉하게 컸다.
그말은 키메라도 이정도 크기는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굴 중간에서 나는 놈의 흔적을 발견했다.
사실 깜짝 놀라서 펄쩍 뛰어버렸다.
날 잡아먹으려고 기다린 건 줄 알았네.
일순간 키메라라고 착각했던 것은 놈의 허물이었다.
이야 이거 명물이네.
탈피를 하는 종류의 마물 같았다.
그러니까, 단단한 외골격이 있다는 뜻이다.
놈은 과장하면 집채만했다.
신장은 3m정도 되고, 좌우로 나있는 다리까지 하면 폭은 6m는 될 것 같다.
게 같기도 하고 거미 같기도 하다.
대수림의 타란튤라를 섞어만들었다고 했나.
다만 거미처럼 다리가 얇지는 않았고 땅을 파기 좋아보일정도로 두꺼운 앞발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다리, 뭔가 익숙한데.
······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랍게도, 나는 키메라와 만난 적이 있었다.
땅속에서 나타나 혼재규어의 사체를 한입에 삼켜간 그놈이다.
내가 본 것은 땅에서 솟아났던 여러개의 다리뿐이어서 눈치채는게 늦었다.
이거, 키메라가 정말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요정 마도사의 꿈은 반 정도만 실현되었구만.
나와 이미 인연을 맺었었다니.
다음에 다시 만나면 빼앗긴 고기의 원한을 갚겠다.
그리 결심하고 나는 굴을 빠져나왔다.
내가 처음에 코카트리스에게 납치당해 들어갔던 곳과 전혀 다른 위치였다.
수풀이 우거져서 그냥 자연적으로 생긴 땅굴처럼 보일 뿐이다.
잘있어라 던전.
나는 쿨하게 떠나지 못했다.
며칠 지낸 던전을 떠난게 아쉬워서는 아니었다.
봐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빠져나온 언덕 위로, 아마도 수조가 있던 그 방의 위치 바로 위에 무언가 솟아올라있었다.
안테나같은 무엇이었다.
그곳에서 푸른 빛이 하늘로 솟고 있었다.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이었다.
하늘을 가르는 푸른 선은 명확하게 보였다.
아마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저 선이 보이겠지.
뭔가를 전송하는건가, 설마 내 분석결과?
아니, 그건 아니었다.
펠레리안이 키메라의 동면을 해제하라 어쩌고 했던 순간이 있었다.
-동면을 해제합니다. 실험내용을 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들었다.
아마도 실험 내용을 어딘가에 살아있는 펠레리안이 받아볼 수 있도록 하는 거겠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 ······내 알바?''
내가 알바냐.
야밤에 저런 빛의 기둥이 솟구쳤으니 마물들이 놀랐을 것이다.
어쩌면 이 근처에 사는 영지민들도 놀랐겠지.
아, 혹시 조사대를 파견하는 거 아니야?
그때는 조심해야겠다. 혹시 내 숙적 경비대장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분지가 보통 넓은게 아니니 숨어있으면 상관 없겠지.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때의 원한 잊지 않았다.
다시 만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경비대장.
그때까지 진화를 하고 새로 얻은 스킬들을 단련해야겠다.
꼬르르륵.
배가 너무 고프다.
지금이라면 모스키토 랫도 반가울 것 같다.
얼른 먹고 강해져야지.
나는 신나서 숲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때의 나는 솟아오른 빛의 파급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내가 상상하지 못한 자들조차 그것을 감지했으니.
대수림 깊숙한 곳에.
은거하듯 살고있던 장생족들이······.
* * *
본디 요정은 늙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을 벗삼아 숲에서 살아간다.
피부는 마치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길게 뻗은 귀에서는 기품이 느껴진다.
일천 살에 가까운 장로들조차 얼굴에 주름 하나 없다.
긴 다리로 훌쩍 뛰어다니는 요정은 마치 사슴같다.
때문에 한 요정의 나이를 겉보기만으로 짐작하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대수림 깊숙한 곳을 달리고 있는 요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호리호리하게 긴 다리로 울퉁불퉁한 나무뿌리들을 휙휙 타넘는다.
적당한 길이로 자른 은빛 단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이목구비는 아름답기 그지없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흉터가 얼굴에 나 있었다.
왼쪽 눈을 뒤덮고있는 긴 칼자국.
외눈의 아름다운 엘프 전사.
그녀는 장로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펠레리안의 흔적을 감지했다는 이유였다.
펠레리안.
그 저주스러운 마도사의 이름.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요정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배방구 우르르르
016.
이리스 셀레나.
요정의 이름이었다.
셀레나라는 성은 요정 중에서도 명망있는 가문의 성씨였다.
현재 요정족 전체가 멸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해도, 이리스 셀레나라는 이름을 알아보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인간으로 치면 귀족이겠지만, 이리스의 생활은 호화로운 삶과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대수림의 고행자였다.
모든 요정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세계수에서도 떨어져 혼자 산다.
매일 같이 검을 수련하고 활 솜씨를 다듬었다.
만약 펠레리안의 흔적을 찾았다는 소식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스는 계속 달렸다.
펠레리안의 이름을 듣고 나서부터 계속 잃어버린 왼쪽 눈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눈의 통증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마음의 구멍이었다.
그녀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마도사에게 희생된. 아직 너무 어렸던 동생이.
세계수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던 이리스가 우뚝 멈춰섰다.
대수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세계수와 가까워질수록 나무의 크기는 엄청나게 커진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의 나무들은 그 높이가 모두 100m 이상이다.
어두컴컴한 생명의 그늘 속에서 그녀는 살기를 느꼈다.
이리스가 검을 휘둘렀다.
티티팅!
그녀의 전방 허공에서 불똥이 연속적으로 튀겼다.
무언가가 날아오고, 그것을 검을 휘둘러 쳐낸 것이다.
일련의 과정이 너무 빨라서 보이는 것은 불똥 뿐이었다.
이리스는 습격자들의 정체를 알아봤다.
앵무새 무리였다.
깃털 대신 뾰족한 가시 같은 것들이 돋아있어서 위험한 마물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가시뼈 앵무들이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극도로 위험한 녀석들이다.
몸 색이 화려한 녀석이 날개를 펄럭이며 덤벼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가시 여러개가 쏘아져 나온다.
이리스는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달려들었다.
가시뼈 앵무는 총 다섯 마리. 이 정도면 고위 마물도 피해간다.
앵무들이 깍깍대며 이리스에게 덤벼들었다.
놈들이 흩뿌리는 가시깃털에는 마비독이 묻어있어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요정의 기술로 제련된 브로드소드가 빛의 궤적을 그리고.
가시들이 튀며 불똥이 연속적으로 튀며.
마침내 가시뼈 앵무를 가르고 지나간다.
이리스는 마치 가시뼈 앵무 무리를 그냥 통과해서 지나친 것처럼 보였다.
허나 그 결과는 극적이었다.
후두두둑!
핏물이 터질 새도 없이 수십 조각이 되어 떨어지는 앵무새들.
그런데도 절삭음마저 들리지 않았다.
뒤쪽에 있어서 살아남은 앵무새 둘이 화들짝 놀라서 도망쳤다.
평소 같았으면 쫓아 섬멸했겠지만, 이리스는 그냥 칼날의 피만 털어냈다.
백섬(百閃).
이리스가 가진 여러 고유 스킬 중 하나였다.
일순간에 상대를 산산조각내는 최상위의 검법이었다.
"마물이 세계수 근처까지······."
이 바로 앞에 요정의 도시가 있다.
원래라면 감히 이곳에서는 마물이 활동할 리 없었다.
이것은 쇠락의 증거였다.
가시뼈 앵무 수준의 마물마저 요정을 두려워하지 않게된 것이다.
"······."
이리스는 혀를 쯧 차고 달려갔다.
세계수가 보이는 대수림의 중앙 부분에 도시가 있었다.
자주 오는 곳은 아니었지만 이리스는 가야할 곳을 알았다.
장로의 거처였다.
흰 돌로 깨끗하게 꾸며진, 사원 같은 집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장로가 있었다.
일천 세에 가까운 장로는 인간의 노인처럼 주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묘하게 색이 바랜듯, 식물처럼 보였다.
"왔구나 이리스."
"펠레리안을 찾았습니까?'
바로 튀어나오는 질문.
장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아니, 이번에도 그가 곳곳에 만들어둔 던전의 신호를 잡았을 뿐이다."
장로의 앞에는 수정구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펠레리안의 발명품이다. 그 추악한 마도사가 추방당하기 전에 남겨둔 물건.
그것은 지금 펠레리안의 흔적을 찾는데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자가 있을 확률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 확률이야 있겠지."
이미 몇 차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펠레리안은 대륙 곳곳에 자신의 던전을 만들어두었다.
그곳에서 온갖 수상한 연구를 자행하는 듯했다.
연구되는 자료는 어딘가에 숨어있는 자신에게 전송하는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이곳에 있는 수정구에서도 신호를 수신했다.
"네가 가서 조사하겠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신호가 잡힐 때마다, 이리스는 자처해서 해당 지역을 찾아갔다.
아쉽게도 펠레리안 본인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 네게 조사관의 자격을 부여하마."
장로는 이리스에게 브로치 하나를 건넸다. 세계수의 이파리를 금으로 세공한 브로치였다.
"이리스 셀레나, 이제 너는 엘븐우드의 특사이며, 정식으로 임명된 황금이파리 조사관이다. 요정의 품위를 잊지 말 것이며, 대충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네."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니 장로는 자질구레한 의례를 생략했다.
이리스도 익숙하게 브로치를 가슴팍에 찼다.
"언제 떠날 생각이지?"
"지금요."
그리 말한 이리스는 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장로의 거처는 높은 나무 한가운데 지어져 있지만, 장로도 이리스를 걱정하지 않았다.
장로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녀석, 급하기도."
마음 속에 쌓인 증오를 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죽음이라는 끝이 찾아오기에, 인간의 증오는 해봤자 수십 년이 갈 뿐이다.
하지만 엘프의 증오라는 것은 수백 년을 넘기기 마련이다.
수백 년 묵은 증오는 이윽고 증오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버리고 만다.
장로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왜 이제서야?'
새로 발견된 던전의 위치는 다름 아닌 대수림 외곽에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펠레리안의 던전이 발견된 것이 20년은 넘었다. 그 전에 대수림 안에 있는 던전은 싸그리 색출해서 소각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던전이 남아있었다니.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서 숨겨두었나.'
그런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고민해봤자 의미없는 일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리스 셀레나가 나섰다.
그녀라면 펠레리안이 무엇을 남겨두었다고 해도 깨끗하게 소각해낼 것이다.
* * *
한 엘프가 황금 브로치를 달고 출발한 시점.
그 전날 밤.
그레이림 영주성에는 저녁식사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갔는지, 영주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기분좋은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은수저로 자신의 잔을 칭칭, 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영주가 기쁘게 말했다.
"기사 자인을 위하여."
영주가 잔을 들었다.
그러자 식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었다.
심지어는 영주의 딸인 라니아도 오렌지 주스를 들었다.
"그리고 영웅 군터를 위하여."
모두 포도주를 마셨다.
사람들은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그레이림 영지는 워낙 대수림과 가까이 접했기 때문에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륙 오대 마경에 접한 영지 치고는 살기 좋은 영지였다.
'산맥'은 와이번 떼가 날뛰고, '초원'은 오크 부락이 약탈을 위해 기어나온다.
그러나 '수림'에서는 어지간해서 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강대한 네임드 마물도 많이 살았지만 숲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상관없는 일.
영주로서는 가끔 문제가 생길 때 조사하기만 하면 된다.
"이번에는 정말 큰 도움을 받았네. 메두사 서펜트를 그리 가볍게 토벌하다니."
얼마 전 메두사 서펜트가 나타났을 때가 그랬다.
다른 마경과 접한 영지들은 변경백이 통치하며 자체적인 군대를 운용한다.
하지만 그레이림 영지는 그렇지 않았고, 그탓에 수도에서 영웅 군터가 지원을 나온 것이다.
"저희가 뭐 한 것 있겠습니까. 모두 군터님이 하신 일이죠."
기사 자인이 겸양을 떨었다.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그는 술 한잔을 마시고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하하 겸손도."
영주가 자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는 이 젊고 어리숙한 기사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군터님은 언제 돌아오시는 건가."
"아 그건······.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영주의 질문에 자인이 난처해했다.
군터는 이곳에 자인을 포함한 수행원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잠시 처리할 일이 있다는 말만 남겼을 뿐이었다.
군터는 종종 그리 행동했다.
"아마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이번에는 좀 오래 머물다 가시면 좋겠군."
영주는 불콰하게 취한 듯했다.
사람이 술을 마시면, 본래는 잘 하지 않던 이야기도 하는 법이다.
"그레이림 영지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좋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안전하고요."
"그래, 좋은 곳이지 ······. 그런데 말이야."
영주는 잠시 뜸을 들였다.
"왕국은 대수림을 너무 얕보고 있어."
"······."
"우리 가문에 오랫동안 내려오는 격언이 있지. 뭔지 아나?"
"뭡니까?"
"숲을 두려워 하라."
"아."
"대수림은 깊어. 마물의 수만 해도 어떤 마경보다 많지. 우리가 이름을 아는 것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들도 많이 있을테고."
"그렇습니다."
"선조께서는 경고하셨지. 종말의 마물은 언젠가 대수림에서 탄생하리라고."
영주는 무시무시한 옛 이야기를 설명하는 듯했다.
자인은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은 아니다.
마경 근처에 사는 자들은 모두 마물을 두려워했다.
언젠가 모든 마물을 잡아먹고 세상을 멸망시키리라는 '종말의 마물'은 그레이림 뿐만이 아니라 전 대륙에 퍼져있는 이야기다.
"······믿지 않는구만. 표정이 그래."
"아닙니다! 대수림은 군터 님도 가장 경계하는 마경입니다."
"하하하. 됐네, 내가 좋은 날에 분위기를 깨뜨리는 이야기를 했구만, 그것보다······."
당황한 자인이 영주의 말을 기다렸지만, 어째선지 영주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심기가 상한 것일까.
자인이 다시 한 번 사과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저."
영주는 자인을 보고있지 않았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발코니 너머로는 영지가. 그리고 그 너머에는 대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저, 저건 무슨······."
누군가 탄식을 흘렸다.
대수림에서, 푸른 빛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가느다란 선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히 보였다.
" ······이상현상이 관측되었다."
영주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다.
술기운이 싹 달아났는지, 그는 정색해서 중얼거렸다.
"마경에서 관측된 괴사는 반드시 조사하는 것이 의무."
모두가 창가로 달려가 빛이 솟는 곳을 보았다.
"시자수림 너머 같은데. 제길, 올리버는 어디있나?"
올리버는 영주마저 신뢰하는, 그레이림 최고의 사냥꾼이자 대수림 전문가였다.
집사는 난처한 기색으로 그가 영지에 없다는 사실을 알렸다.
"일단 경비대장을 불러오고······. 으음."
자인이 손을 들었다.
"제가 조사대에 참여하겠습니다."
"그래주겠나? 그거 감사한 일이군."
군터의 수행기사로서 마경을 조사하는 것은 자인의 의무이기도 했다.
영주는 점차 희미해지는 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불길해, 아주 불길해······."
당신이 그러시니 더 불길합니다.
자인은 그리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 * *
그리고 분지.
펠레리안의 던전에서 빠져나온 다음날.
나는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했다.
온몸에 썩은내 나는 수초를 뒤집어쓴 악어가 늪지에서 기어오르고 있었다.
──────────────
[늪 앨리게이터lv16]
──────────────
저놈은 강하다.
아마도, 코카트리스랑 비슷한 수준인 것 같았다.
정면승부로는 나같이 작고 앙증맞은 뱀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놈이다.
그렇기에 놈도 나를 얕보고 늪 밖으로 기어나오는 것일테고.
파충류 특유의 날카롭게 갈라진 동공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한데 나도 파충류라 안쫄아.
가만히 서 있자, 놈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뒤뚱뒤뚱거리는 것이 둔해보이지만, 마물을 얕보는 것은 바보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입을 쩍 벌리고 가속했다.
그것은 내가 도약을 쓰는 속도보다 빨랐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마법을 쓴다는 점.
그리고 매직 스네이크는 무적이라는 점.
*「초급원소마법:흙lv3을 사용합니다.」
벌써 레벨이 오른 흙 마법이다.
그래봤자 아무것도 없는 땅에 흙벽을 솟아오르게 하는 것뿐이지만, 잘 활용하면 효과적이었다.
달려오는 악어의 턱 아래에서 흙벽이 솟구쳤다.
뉴턴 선생이 말한 관성의 법칙은 이곳에서도 적용되었다.
악어는 엄청나게 빨랐고, 그리 빨리달리는 놈은 흙벽으로 어퍼컷을 맞았다.
뻐억!
악어는 묘기 운전을 하는 액션카처럼 허공에서 한바퀴 돌아 전복되었다.
놈의 새하얀 배때지가 드러났다.
그 부드러운 뱃가죽에 배방구, 아니 독니lv8을 박아주었다.
쭈욱 독을 주입해주니 놈은 미친듯 바둥거린다.
우르르르! 까꿍.
몸을 뒤집으려는 것을 흙 마법으로 계속 방해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은 깨꼬닥 절명했다.
후후, 쉽다. 너무도 쉽다.
그렇다.
나는 강해졌다.
으하하.
키메라 파프나챠
017.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쭈욱 펴면 고향의 안방.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실제로는 쉿쉿거릴 뿐이었지만-나는 노동을 했다.
그 내용은 간단했다.
내가 잡은 늪 앨리게이터를 해체하는 것이다.
놈의 덩치는 나보다 훨씬 크다. 한 입에 삼키는 것은 어불성설.
원래같으면 부드러운 뱃가죽을 뚫고 들어가 안에서부터 놈을 뜯어먹었으리라.
그러나, 오늘은 힘들게 일한 내게 상을 주기로 했다.
펠레리안의 던전에서 빠져나온 지 며칠이 지났다.
나는 잠을 자는 시간 빼고는 스킬의 레벨을 올리는데에 집중했다.
비로소, '초급원소마법:흙'에 이어서 '초급원소마법:불'까지 내 스킬로 만들었다.
물과 바람 마법도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얻을 수 있으면 좋겠군.
그리고 불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요리를 해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치스럽게도, 나는 악어를 구워먹고자 했다.
아주 배가 불렀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불 마법을 쓸 수 있게되었을 때부터 생각했던 일인데 지금까지 참았다고.
오히려 칭찬을 해줘야할 시점 아닐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칭찬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혹시나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기까지 했단 말이지.
구덩이를 판 다음, 젖지 않은 나뭇가지들을 모아 넣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잘라낸 악어꼬리를 진흙에 감싸서 불구덩이에 처넣었다.
예전에 이런 조리방법을 유튜브에서 본 적 있다.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외국 유튜버가 만든 영상이었다.
그때는 악어고기가 아니라 닭고기로 만든 요리였지만, 악어의 식감이 닭이랑 꼭 닮았다고 하지 않았나.
괜찮겠지 뭐.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래, 이제 고기가 익을때까지 좀 쉬어야겠다.
잠깐 눈을 붙이는 것도 좋겠고.
내 상태창은 요 며칠간 더욱 풍성해졌다.
──────────────
[화이트 혼 스네이크lv10+]
[특성]
[불굴], [정진], [뿔]
······.
──────────────
레벨 10이 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레벨업을 할 수 없었다.
각오한 일이었다. 만렙이니 진화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지.
열심히 사냥을 한게 좀 아쉽긴 했는데 받아들였다.
그런데 계속 사냥을 하다보니 이상한 메시지가 나왔다.
*「흡수하지 못한 마성이 저장됩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온 뒤, 저렇게 레벨 뒤에 +표기가 붙었다.
뭐 좋은 거겠지.
중요한건 여기가 아니라 스킬창이라고.
──────────────
······
[스킬]
[빌리는 뿔lv3]: 자르기lv1
[초급원소마법:불lv3], [초급원소마법:흙lv3], [독니lv10], [포식lv7], [물어뜯기lv8], [은밀lv6]
[독 내성lv5], [출혈 내성lv3], [고통 내성lv6], [열 내성lv8], [석화 내성lv1], [숨참기lv4], [생존본능lv5], [도약lv5], [마력 감지lv2], [가속lv3]
······.
──────────────
와하하, 스킬의 개수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레벨도 많이 상승했다.
지금 내가 빌리는 뿔로 빌린 것은 '자르기'라는 스킬이다.
낫 같은 발톱을 가지고 있는 들개만한 사마귀한테 배운 것이다.
본디 발톱 따위가 없는 나였지만, 정진 덕택에 배울 수 있었다.
꼬리를 휙 휘두르면 물렁한 것은 벨 수 있었다.
반드시 습득해야할 스킬이다.
이걸로 악어 꼬리도 잘랐다.
레벨업을 하지 못해도 계속 사냥을 해야하는 이유.
그것은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었다.
떴다!
──────────────
※진화가능:
[독니lv10]
──────────────
빠르게 기기라는 애매했던 스킬은 lv10을 달성한 뒤, '가속'이라는 초특급 스킬로 진화했다.
그렇다면 독니는 어떻게 될까.
독니야 말로 내 공격력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의외로, 초급원소마법:불의 공격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지금 마력을 엄청나게 소비해서 뿜어낼 수 있는 불은 아마 라이터 다섯개 분량의 출력정도 될 것이다.
상대가 재빨리 몸을 피한다면 화상을 입히기도 어렵다.
때문에 독니의 진화는 내가 가장 우선시했던 과제였다.
그리고 지금이 그 결실을 맛볼 순간이었다.
잠깐, 일단 악어고기도 맛보면서.
헛뜨뜨, 맛있다.
육즙이 아주 촉촉하다.
자, 진화해볼까.
*「마성을 소모해 스킬을 진화시킵니다.」
여태까지 레벨업을 못하는 대신 축적된 마성.
그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독니lv10이 상위스킬로 진화합니다.」
그래, 가보자!
*「독니lv10이 맹독lv1이 되었습니다!」
아자!
맹독이라니, 낭만적인 스킬명이다.
하지만 낭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맹독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경독]
[출혈독]
──────────────
선택지만 보면 가슴이 뛴다는 말이지.
삶에서 내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런가?
가속과 달리, 독니의 진화방향은 두가지였다.
'맹독: 신경독', 그리고 '맹독: 혈액독'.
신경독과 출혈독의 차이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안다.
독사라고 해도 모두가 같은 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뱀, 혹은 코브라의 경우에는 대개 신경독을 가지고 있다.
그 이름답게, 신경독을 가진 독사에게 물리면 신경세포가 마비된다.
중추신경까지 그 독성이 번지면 횡격막이 마비되어 호흡이 불가능하게 된다.
말 그대로 숨이 꼴깍 넘어가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독이 아닐 수 없다.
출혈독 역시 끔찍한 것은 마찬가지다.
출혈독을 가진 독사에게 물리면, 그 부위는 그냥 좆되는거라고 봐도 된다.
이것도 유튜브에서 봤는데······.
······그래, 내가 가진 지식의 3할정도는 유튜브에서 본거다.
하여튼 사람의 피에 살무사의 출혈독 한 방울을 섞어보는 실험영상이 있었다.
넉넉한 피에 겨우 한 방울 섞었을 뿐인데, 묽었던 피가 젤리처럼 굳어버렸다.
그러한 작용이 물린 상처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
일단 물리자 마자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출혈독이 세포막을 파괴하고 녹여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색하면서 괴사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독이 혈관으로 퍼져나가면서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
그 고통만큼은 신경독을 압도할 것이다.
요란하고 고통스러운 출혈독, 치명적이고 상대적으로 조용한 신경독.
그렇다면 내 선택은······.
*「신경독을 선택했습니다.」
*「독니lv10이 맹독:신경독lv1이 되었습니다.」.
내게 상대방의 고통을 즐기는 새디스틱한 기질은 없다.
물론, 출혈독 나름의 장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신경독이 더 유리할 것 같다.
몇몇 독사가 그렇듯, 출혈독과 신경독을 둘 다 보유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혹시 그렇게 되려나?
모르는 일이지.
좋아, 독니도 진화시켰겠다.
오늘의 투두리스트를 달성해볼까.
내게는 요즘 매일 같이 하는 일과가 생겼다.
그것은 한 마물을 관찰하는 것이다.
내게 관음증 같은 건 전혀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마물이 보통 흥미로운게 아니거든.
무려 요정 대마도사가 만든 키메라라니까.
이미 놈과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혼재규어와 함께 이곳 분지에 추락했을 때였다.
그때는 도망쳐서 이름도 확인 못했지만 놈에 대해 알게된 뒤로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찾으려 하니 쉽지 않았다.
땅 속을 기어다니는 놈을 이 드넓은 분지에서 어떻게 찾아?
한참 고민했는데, 단서는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처음 발견한 곳. 그러니까 분지의 외곽을 찾아보면 되는 일이었다.
혼재규어가 추락한 곳을 찾았다.
추억이 아른거리는 장소였지만, 그 사건을 떠올리게하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절벽과, 나무나 풀이 자라지 않은 맨땅만 있을 뿐.
이야, 절벽이 참 높기도 하다.
게다가 각도가 수직에 가까워서 도저히 타고오를 수 없어보인다.
비행을 빌린다고 해도 아마 마력이 먼저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보니까 난 이제 평생 이곳 분지에 살아야되는건가.
······에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자, 준비해놓자.
* * *
나는 큼지막한 나무 위에 숨었다.
이전에는 바위 위에 올라타 있었지만, 어쩐지 그것도 꺼림칙해서 이곳에 올라왔다.
그리고 혼재규어가 있던 자리.
그곳에는 대신 큼지막한 멧돼지 한마리가 죽어 있었다.
내 작품이다.
당연히 절벽에서 떨어뜨린 것은 아니고 사냥한 것이다.
쉽던데? 은밀로 조용히 다가가서 엉덩이를 깨물었더니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놈을 이곳 절벽 앞까지 유인했다.
놈은 제풀에 씩씩거리더니 숨을 쉬지 못하고 꼴까닥 죽어버렸다.
독사를 너무 만만히 보는거 아니냐고.
마물도 아니고 그냥 멧돼지면서.
누가 보면 잔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죽은 멧돼지의 사체에 한 가지 처리를 했다.
몸이 식기 전에 그 경동맥을 물어뜯은 것이다.
발전한 물어뜯기 덕택에 가능했다.
죽은 멧돼지의 목덜미에서 피가 울컥울컥 흘렀다.
피가 웅덩이를 만들고, 그 피는 천천히 흙에 스몄다.
여기까지가 혼 재규어의 때와 똑같은 조건이다.
조건을 같게 만들었다고 그놈이 꼭 찾아오리라는 법은 없지만, 어제는 성공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였다.
두두두-
놈이 찾아오고 있었다.
땅에 스며든 피냄새를 맡기라도 한 걸까.
지가 무슨 상어야?
두두두두두-
확실한 것은, 놈이 땅을 울릴 정도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배고프겠지.
놈의 덩치를 보면 저 멧돼지도 한입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와라. 와서 멧돼지를 먹어.
내가 너를 위해 차려놓은 잔치상이다.
두두두두두두두-
아, 나무 근처를 지나갔다.
나무가 둔중하게 흔들려서 자칫하면 튕겨나갈 뻔했다.
그리고 마침내 놈이 땅속에서 튀어나왔다.
콰아앙!
힘이 어찌나 좋은지 땅을 부수고 나오는 수준이었다.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여덟 개의 다리.
타란튤라 뭐시기 마물을 섞어 만들어서 그런지 거미 같기도 하다.
갑각으로 뒤덮인 다리에는 뾰족한 가시들이 여럿 나 있었다.
그것으로 멧돼지의 사체를 확 껴안는다.
정말 짜릿하기 그지없는 포옹 방식이다.
이전에는 못봤던 것도 볼 수 있었다.
놈이 움직이는 방식은 마치 뒤집어진 거미와도 같았다.
다만 거미는 입이 달린 대가리가 있는 법인데, 놈의 아가리는 몸통 한가운데 있었다.
마치 불가사리처럼, 몸통에 달린 거대한 입으로 멧돼지를 단번에 삼킨다.
놈은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좋군.
놈이 내가 열심히 잡은 멧돼지를 '한입충'하고 다시 땅으로 들어갔지만 화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멧돼지의 몸에 처리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생활관 음식도둑을 응징하기 위해 냉동식품에 설사약을 타놓는 마음으로, 나는 멧돼지의 몸속에 신경독을 잔뜩 주입해두었다.
독샘이 텅텅 비어서 머리가 아플정도였으니, 저놈이 어지간해도 크게 앓을 것이다.
과연, 놈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대신 땅 위에 모습을 드러낸채로 움찔거렸다.
독이 먹혔나? 중독된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놈이 입에서 무언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쿠웨에엑! 쿠웩"
각혈(咯血)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아니었다.
놈은 입에서 뼈다귀를 분수처럼 뱉어냈다.
"끄억."
그리고 천둥같은 트림을 하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잘 먹고 갑니다~'하는 꼴이었다.
아무래도 중독이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조금 실망스럽지만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신경독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다.
피를 통해서 작용하는 독이기 때문에 소화기관으로 섭취해봤자인 경우가 많다.
흐음, 비장의 수 1번이 안 통한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놈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분명했다.
──────────────
[키메라 파프나챠lv20+++]
[특성]
[키메라], [지하 괴물], [용의 혈통], [탈피]
······
──────────────
저 '용의 혈통'이라는 특성.
저게 내 특수진화의 조건중 하나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놈 상태창 한 번 무시무시하구만.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그린 좀 치워라!
018.
──────────────
[키메라 파프나챠lv20+++]
[특성]
[키메라], [지하 괴물], [용의 혈통], [탈피]
[스킬]
······[발광lv20], [갑각lv10], [땅굴lv9], [열 내성lv6], [자가 치유lv3], [마력 감지lv4], [후각lv7], [자르기lv10], [분신lv3]······
······
──────────────
키메라에게는 유의할만한 특성과 스킬들이 여럿 있었다.
'용의 혈통'은 놈을 만드는데 아룡의 피라는 것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리라.
진짜 용이 아니라 아룡의 피를 섞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의 혈통이라는 특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 특수 진화조건중 하나인 '용족의 피를 섭취.'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었던 특성은 다름 아닌 '탈피'다.
거기서 나는 거대한 충격을 느꼈다.
'난 왜 탈피 안해?'
생각해보면 뱀은 파충류.
게다가 당연하게도 탈피를 하는 종족이다.
그런데 왜 아직도 나는 한 번의 탈피도 안했을까.
잠시 고민한 뒤, 나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직 응애였구나 나.
진화로 인해서 덩치가 커져서 깜빡 잊었는데, 나 겨우 태어난지 한달 좀 넘었다.
얼마 지나면 탈피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키메라는 특성에 당당히 '탈피'라고 적혀 있었다.
내 특성에 '뿔'이 적힌 것과 비슷했다.
놈도 탈피와 관련된 특이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킬 중에서 '발광lv20'.
이거 뭐냐.
무려 발광(發狂)이란다.
지랄발광할때 그 발광 되시겠다.
무려 레벨이 20이나 되는 스킬이었다. 스킬 레벨 역시 항상 10이 끝인 것은 아닌 듯했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점들이 많았지만, 전부 다 짚기에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나는 내 거처로 돌아왔다.
며칠 간 늪에서 살았다가 오늘부터 다시 고목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공터에는 나뭇가지로 만든 십자가 묘비가 두 개 꽂혀 있었다.
내가 만든 것이다.
한때, 이곳에 신혼집을 꾸렸던 마음 착한 신혼부부를 위해.
툭.
나무에 앉아있던 새 한마리가 그 위에 새똥을 싸질렀다.
저 새새끼가.
나는 아무래도 조류와 나쁜 인연을 계속 맺게되는 듯하다.
새똥은 반드시 복수하겠어.
그리 다짐하며 나는 고목의 옹이구멍으로 들어갔다.
일단 잠은 자야하니까······.
나한테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새를 잡는 것은 여전히 난이도가 높은 일이다.
수면은 필수적이다.
특히, 내게 잠은 또 새로운 기회의 창이나 다름없었다.
휴식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닌 말 그대로 기회의 상태창.
어느새 잠이 들자, 눈앞에 상태메시지가 떠올랐다.
──────────────
[레벨10을 달성하여 진화할 수 있습니다.]
[진화를 하시겠습니까?]
──────────────
이 메시지를 처음 보았을때 느꼈던 짜릿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진화 한사바리 하겠냐는 상태메시지에게 '예스오브콜스지 임마! 큭큭.'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신중해졌다.
──────────────
[※진화를 위해서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수면을 취할 것.
-2등급 마석을 섭취할 것
-레벨 10 달성.
──────────────
진화를 위한 조건은 셋.
저 조건은 진작 달성했다.
내가 레벨 10을 달성하는 족족 진화 조건을 맞췄지만, 생각보다 조건이 가혹하단 말이지.
빌리는 뿔이라는 사기급 스킬과 지네 부부의 희생이 없었다면 코카트리스를 잡지 못했으리라.
아니, 그 두개가 있었어도 정공법으로는 코카트리스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창 함정이 아니었어봐.
나같은 뱀이 어떻게 그 공룡같은 마물하고 싸워 이겨.
그런 코카트리스가 가지고 있던 마석이 2등급 짜리였다.
원래라면 레벨 10을 달성했어도 진화조건을 맞추기는 요원했을 것이다.
흐음, 키메라의 진화조건은 어떨려나.
놈의 레벨 옆에 +표기가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꽤 오래 진화를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나처럼 쉽게 진화를 할 수 있는 마물은 드물겠지.
뭐 팩트가 그렇다는 거고 나는 조건을 다 달성했다.
저번에 진화할때는 이 시점에서 진화의 선택지를 알 수 없었다.
여기서 지네 부부의 덕을 한번 더 봤다.
그들의 내단을 먹은 내게는 보였다.
진화의 선택지가!
──────────────
[화이트 혼 스네이크lv10]에서
1. [그린 혼 스네이크]
2. [포이즌 화이트 스네이크]
······
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
그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진화의 선택지에 대한 정보도 보였다.
근데 이거 내단 때문이 맞나?
아무리 내단을 먹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바뀌는 것은 좀 신기하다.
어쨌든 감사의 마음을 가져서 나쁠 것은 없겠지.
──────────────
[그린 혼 스네이크]
그린 스네이크의 성체.
몸이 커지고 강인해진다.
──────────────
제발 그린 좀 치워라!
난 흰색이 좋다고. 이건 무조건 제외다.
그런 면에서 '포이즌 화이트 스네이크'도 아웃.
포이즌이라는 수식어 답게, 이쪽을 선택하면 독성이 강화된다고 한다.
유용하긴 하겠지만 굳이 뿔을 버리고?
내게 뿔이 없어지면 그냥 독사랑 다를 바가 없다.
뿔은 내 정체성이며 자존심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선견지명을 발휘해 독니를 맹독으로 강화한 참이다.
사실, 진짜 탐나는 선택지들은 그 아래에 있었다.
──────────────
[※진화의 특수조건을 달성해 새로운 진화트리가 해금되었습니다.]
3. [늪 화이트 혼 스네이크]
4. [트랩 혼 스네이크]
5. [더블 혼 스네이크]
──────────────
특수진화 만세다.
펠레리안의 던전에서, 나는 여러 특수 진화조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3번의 늪 어쩌고는 늪에서 지내라는 특수진화 조건을 달성한 뒤 얻은 것이다.
늪에서 아주 강해진다는 애매한 능력이니 이건 패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읽은 특수조건들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4번과 5번이 그랬다.
──────────────
[트랩 혼 스네이크]
던전을 홀로 돌파한 뱀은 함정의 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자신만의 던전을 만들어 그곳을 지배할수도 있겠지요.
──────────────
붙어있는 설명의 어투부터 다르다. 어째선지 친절한 것 같기도 하다.
'펠레리안의 임시거처'는 분명 던전이었다.
그것을 돌파한 것이 진화조건인 것 같았다.
──────────────
[더블 혼 스네이크]
뿔이 두 개가 됩니다. 새로운 뿔에 담길 힘은 마음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
뿔이 두 개지요~
'빌리는 뿔'은 내가 가진 최고의 스킬이었다.
그와 비슷한 스킬이 하나 더 생긴다면 그만큼 좋을 게 없었다.
아마도 내가 빌리는 뿔을 잘 사용해서 특수조건이 달성되지 않았을지.
4번과 5번 선택지 둘 다 매력적이었다.
내 고민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그냥 진화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런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굳이 용족의 피를 먹고 어쩌고하는 진화조건까지 달성해야하나.
그렇다고 더블 혼 스네이크보다 낫게 진화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지금 정도의 강함으로는 키메라를 잡기가 어려울 것 같다.
차라리 진화한 뒤 강해진 다음에, 그때 키메라를 잡아도 될 것 같다.
그게 안정적이다.
흐음.
잠시 고민한 나는 결정했다.
좋아.
며칠만 더 관찰해보자.
키메라를 사냥할 각을 보고, 각이 도저히 안보이면 그때 진화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합리성의 화신 같은 뱀이었다.
마음을 확실히 정했다.
자.
그래서 이 결정은 어떠한 결과를 내었는가.
결론만 말하자면 결정을 미루는 내 선택은 옳았다.
세상에는 '때'라는게 있는 법이다.
나의 선택으로 인해 평행세계는 무수히 많은 수로 갈라진다.
그중 어떤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분기점에서 옳은 선택을 해야한다.
괜히 부유한 부부가 월에 수백 씩 쓰면서 애들을 영어 유치원으로 보내는게 아니다.
뇌가 아직 말랑말랑할때, 그때 영어를 때려박아야 '안녕 Daddy, 힘내세요 today도.'라며 인사해주는 다중언어(Multilingual) 자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영어를 못한다. 억지로 본 토익이 신발사이즈와 비슷하게 나왔던 것 같다.
하여튼 내 진화도 비슷했다.
진화는 하면 할 수록 조건을 달성하기 어려워진다.
아직 미약할 때 밟아놔야할 진화트리가 있었다.
* * *
흐암. 졸려라.
진화를 미루며 내가 정해둔 기한은 사흘이었다.
3일 동안 키메라를 관찰하고, 해치울 방법이 보이지 않으면 진화부터 한다.
그리 결심했다.
그로부터 어느덧 3일차가 되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허무했다.
각이 안 보인다.
나 혼자서는 키메라를 잡을 수 없을 것 같다.
동료가 있으면 몰라도.
나무 위에 올라타 있는 나.
저 아래에는 죽어서 피를 흘리고 있는 마물 사체가 있었다.
미끼로는 멧돼지가 가장 좋은데, 이번에는 구하지 못했다.
오늘의 사냥감은 사슴이었다.
사슴이라고 하면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밤비를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저놈은 그런 귀여운 동물이 아니다.
혀가 두갈래로 갈라지고 이빨이 뾰족뾰족한 육식성 사슴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구멍난 목에서 피를 왈칵왈칵 흘리며 죽어나자빠진 상태.
드드드드-
아, 멀리서 키메라가 오고 있다.
그놈도 이곳에 날이면 날마다 음식이 준비된다는 것을 눈치챈듯하다.
내가 무료급식소를 운영한 것과 다름없다.
내일부터 음식이 없을텐데 그러면 얼마나 당황할까.
이제는 긴장도 안되서 그런 상상을 하면서 쉭쉭 웃었다.
내가 하늘을 올려다본 것은 아마도 우연일 것이다.
아니, 혹시 갑옷에서 반사된 빛이 반짝였던가.
그래, 절벽 위에 사람들이 있었다.
여섯명 정도였다.
그들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래로 내려갈 방법을 논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중에 내 숙적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경비대자앙!'
저자 때문에 꼼장어구이가 되어버린 형누나들이 몇이던가!
언젠가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재회하게 될 줄이야.
하필이면 드넓은 절벽 중 이쪽 방향에서 나타난 것은 하늘의 도우심 아닐까.
아니, 생각해보면 메두사맘의 동굴에서 일직선으로 달려오면 이쪽 방향이니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건 어쩌면, 변수.
키메라 사냥을 포기하려던 내게 변수가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 * *
"여기로 내려가면 되겠습니까?"
자인이 그리 물었다.
경비대장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예, 빛의 기둥이 솟았다는 곳이 이곳임이 분명합니다."
" ······그 말씀이 벌써 세 번째 아닙니까."
"크흠."
경비대장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분명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이곳 아캄 분지까지 찾아오는데는 무려 열흘이 넘게 걸렸다.
"저도 애매한 진술만으로 방향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예에 뭐."
어쩔 수 없었다.
밤하늘에 선명히 보였던 빛의 기둥은 일 분도 안되어서 사라졌다.
그곳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도 용한 일이다.
"줄 타고 절벽 내려가는 것은 가능하십니까?"
"훈련을 받았는지라. 물론입니다."
기사 자인과 경비대장, 그리고 대수림에 대한 경험이 있는 정예병 네명.
소수였지만 조사대는 분명 정예였다.
병사들이 로프를 절벽 아래로 늘어뜨리는 동안 경비대장은 아래를 살폈다.
어째선지 죽어 나자빠져 있는 마물 한마리.
그리고······.
"음?"
경비대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자인이 그것을 보고 다가왔다.
"기괴하게 생긴 사슴이 죽어있군요. 마물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무에서 꿈틀거리는 흰 무언가를 본 것 같은데요.
경비대장은 그 말을 삼켰다.
아무래도 착각인 것 같았다.
그레이림 최고의 춤꾼!
019.
"아닙니다."
경비대장이 그리 중얼거렸다.
자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별 싱거운 사람이 다 있군, 하고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저 마물 사체말이죠."
"예, 스플릿텅 사슴 같은데요."
"맞네요. 혀가 두 갈래네."
경비대장은 이곳 그레이림 영지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고 자인은 영웅 군터의 수행 기사였다.
마물에 대한 지식은 둘 다 깊었다.
이 높은 절벽 위에서 내려다봤는데도 곧바로 알아볼 정도였다.
"목을 물어뜯은 것 같은데, 그것 말고는 신기하게도 사체가 깔끔합니다."
"왜 애써 사냥하고 먹어치우지 않았을까요."
"종종 자신의 영역만 침범해도 공격적으로 나서는 놈들이 있죠. 꼭 먹이를 위한 사냥이 아니더라도."
"으음, 많이 위험할까요?"
그리 묻는 자인의 어투는 조금 어색했다.
혹시나 기사인 자신이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 같았다.
경비대장은 그것을 눈치챘다.
"뭐 저희가 걱정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제가 먼저 내려가지요. 기사님은 마지막에 내려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아뇨 제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자인이 그리 말했다.
젊은 기사는 경비대장의 배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기사가 준귀족이라고 하나, 자인은 영지를 받은 기사도 아니었으며 그저 수행 기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경비대장은 영주의 신임을 받는 이곳 그레이림의 부대장.
둘 사이의 위계가 애매한 만큼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다.
"그러면 감사한일이지요. 그렇다면 저는 후방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예."
"혹시나 위험할 수 있으니 둘씩 내려가는게 좋겠습니다. 한슨, 네가 기사님과 함께 내려가라."
팔뚝이 굵은 병사가 명령에 복창했다.
자인과 병사는 로프를 잡고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경사다.
발을 조심스럽게 디디며 내려가야 했다.
밞은 지점의 돌부리가 후두둑 부서져 떨어졌다.
자인은 내심 간담이 서늘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가 하강하는 속도가 병사보다 빨랐다.
이까짓 절벽 하강쯤이야, 여태까지 받은 훈련을 떠올리면 두려울 것도 없었다.
문득, 자인은 내려가는 속도를 늦췄다..
드드드-
어디선가 진동음이 들렸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다.
함께 내려오는 병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드드드드-
아니었다.
진동은 점점 명확해졌다.
자인은 본능적으로 진동이 느껴지는 땅을 내려다봤다.
누군가가 죽이고 과시하듯 내버려뒀다고 생각했던 마물의 사체.
그쪽으로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
"멈춰!"
당연히 다가오는 놈에게 외친 것은 아니었다.
함께 내려오던 한슨이라는 병사는 왜 갑자기 지랄이냐는 듯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면상에 주먹을 꽂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자인은 참았다.
대신, 손가락을 들어 저 땅을 가리켰다.
병사의 눈도 화등잔만큼 커졌다.
사슴 사체의 주변으로 땅이 불룩 솟더니.
콰앙!
여러 개의 다리가 땅으로 솟구쳤다.
나타난 것은 '괴물'이었다.
그놈이 사슴 마물 하나를 통채로 삼켜 먹어치운뒤 떠났다.
일련의 과정까지 겨우 일 분 쯤 걸렸을까.
그동안 자인을 비롯한 사람들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듯 굳어있는 그들 중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용감한 기사였다.
"내려가지."
"저 아래에 말입니까?"
"아니면, 여기서 계속 매달려 있을 건가?"
자인이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팔뚝이 굵은 병사는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라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보자, 경비대장도 내려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자인과 한슨은 핏자국만 남아있는 땅 위로 내려섰다.
그리고 위에 남아있던 병사들도 뒤따라 땅으로 내려왔다.
지면의 흔적을 살펴보고 있는 자인 옆으로 경비대장이 다가왔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자인은 고개를 저었다.
"경비대장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본 적 없는 마물입니다."
"제가 대수림의 모든 마물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예, 저도 처음 보는 마물입니다."
"마찬가지군요."
"아예 모르겠다는게 신경쓰이는군요."
"저도 그게 가장 신경쓰입니다."
병사들은 둘의 대화에 서로 눈치만 봤다.
모르겠으면 모르겠는 거지 신경쓰일건 또 뭐란 말인가.
그들은 마치 저들만 아는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다리의 개수는 여덟개였던걸로 기억합니다."
"저도 확인했습니다."
"거미일까요?"
"예전에 바다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갑각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레드 머드 크랩처럼요."
"저는 평생 대수림 옆에서만 있어서 잘 모르겠군요. 이곳은 숲 속이니까요."
"······그렇군요. 게보다는 거미일 확률이 높아보입니다."
"그레이 타란튤라라는 마물이 있습니다."
"그놈이 땅을 파나요?"
"그렇진 않아요. 두더지 계통의 마물이 따로 있습니다. 가시두더지나, 피두더지 같은 놈들이요."
조금 전의 그 괴물과 연관성이 있는 마물을 서로 열거한다.
둘의 눈빛이 서로 교차하고.
"······키메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자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키메라를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자인이야 군터를 따라다니다보니 식견이 넓어졌다.
키메라라는 끔찍한 괴물들도 몇 번을 본 적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잔뼈 굵은 경비대장이라고 해도 너무 침착하지 않은가.
"키메라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어느 정도는 압니다."
"코카트리스 같은 키메라 계통 마물과 진짜 키메라는 완전히 다릅니다."
경비대장이 자인을 슬쩍 돌아봤다.
"예, 압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마물이며 신벌을 받을 대죄의 산물이지요."
정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키메라를 추적해봐야겠습니다."
" ······예? 저희가 맡은 임무는 그게 아닌데요."
자인이 황당해했다.
키메라를 쫓는 것은 기사의 의무지 경비대장의 의무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영주에게 빛 기둥의 정체를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지 않았는가.
중요도의 선후가 달랐다.
"이것부터 하는게 옳을 듯합니다."
"빛이 솟은 곳을 찾아내는게 우선이겠지요."
"키메라를 잡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인은 결국 짜증을 냈다.
처음부터 걸리는 점들이 있었다.
"경비대장. 나를 바보 취급하는 거요?"
"······."
"뭔가를 숨기고 있군. 말하시오."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병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 * *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팝콘이 있었다면 좋을텐데.
역시 싸움 구경 만큼 재미있는게 없단 말이야.
갑자기 나타난 저들을 나무 위에 숨어서 구경했다.
그들은 설마 왠 뱀 한마리가 나뭇가지에 딱 달라붙어서 자신들을 지켜볼줄은 모르고 있으리라.
"딱히 숨기는 것은 아닙니다."
경비대장 나의 숙적.
가족과 집의 원수.
그는 무뚝한 표정으로 기사와 대립하고있었다.
"키메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데 말이야. 그 빛의 기둥이 키메라와 연관이 있나?"
"그렇습니다."
잘한다 경비대장. 저 젊은 애송이한테 쫄지 마.
분명 내 숙적이건만, 어째선지 경비대장을 응원하게 된다.
저 중후한 콧수염이 마음에 들어서인가. 음음.
"숨길 것도 아니니 말씀드리지요. 대수림에서는 종종 키메라가 발견되었습니다."
"종종?"
"수십 년에 한 번 쯤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살아있는 흑마도사가 있나?"
"아니요. 유적입니다. 던전이고요. 펠레리안의 던전이 대수림 곳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펠레리안.
그 이름을 몇 번 중얼거리던 기사는 경악해서 외쳤다.
"역천 말입니까! 그 역천의 미친 요정 마도사의 던전이요!"
우와.
전신에 소름이 돋았, 아니 비늘이 곤두섰다.
역천(逆天)이래.
미친거 아냐?
그 인종차별주의자 요정 노인네, 엄청난 별명을 지니고 있다.
하늘을 거스르는 마도사라니. 꼬리가 오그라들 것 같다.
그 던전을 만든게 삼백년 이상 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유명한가보다.
혹시 살아 있으려나? 요정이긴 해도 진짜 폭삭 늙어보였는데.
"역천은 이미 죽었다고 들었는데 ······."
"예전에 만들어둔 던전입니다. 종종 그 던전에서 빛이 뿜어져나오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키메라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종종 있습니다."
"영주께서도 그런 이야기는 안해주셨습니다."
"이야기가 퍼져서 좋을 것은 아니니까요."
"······하긴, 그렇겠군요. 역천의 유산이 남아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 이야기는 함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인 경."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던전이 대단한 뭔가였나보다.
내가 보기엔 그냥 노망난 노인네였는데 말이지.
그들은 키메라를 추적해보기로 합의했다.
우선 상대를 살펴보고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인지를 파악하겠다고 한다.
"혹시 간파 스크롤을 지니고 계십니까."
"예, 저는 늘 가지고 다닙니다."
"다행이군요. 우선 놈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간파 스크롤이라니.
뭘 간파한다는 걸까.
무엇보다, 저들이 어떻게 키메라를 추적할지가 궁금했다.
경비대장과 기사가 키메라의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은 감탄이 나왔다.
그레이 타란튤라에 피두더지까지, 한 번 본 것으로 키메라의 정체를 대충 파악한 것이다.
보고 있으면 배울 점들이 많았다.
"땅을 파봐라."
병사들은 곧바로 야전삽을 꺼내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키메라가 찾아오는게 두렵지도 않은 건가.
그동안 경비대장은 땅에 귀를 대고 있었다.
병사들은 땅을 파내려갔다.
사실 나도 진작 해본 짓이다. 키메라가 나타난 곳을 흙 마법으로 뒤집어봤지만 흔적이 없었다.
역시 땅을 파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병사들 역시 멀뚱한 표정을 했다.
"더 파내려가."
경비대장은 엄한 표정으로 더 파내려가기를 지시했다.
그리고 조금 뒤, 병사 한명이 쑥, 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으악!"
"뭐, 뭐야! 괜찮아?"
"어어, 괜찮아. 전 괜찮습니다. 우욱, 냄새가."
땅 속에 빠진 병사는 무사해보였다.
경비대장이 횃불을 켜고 들어갔다.
"역시, 한참 아래에 땅굴이 있었군요."
"예측하셨습니까?"
"예, 그렇게 거대한 놈이 실시간으로 땅을 파면서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죠. 땅 위로 기어나올때는 흙으로 퇴로를 막았지만 안에는 미리 파둔 통로가 있었습니다."
그랬던건가!
경비대장은 마물의 생태에 빠삭해보였다.
"음, 거미줄 같은 것이 쳐져있습니다. 이걸로 진동을 감지하는 듯한데요."
그리고 아마 피냄새도 맡을 수 있을거야.
꼭 피를 내야지 키메라가 찾아오더라고.
그리 조언을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경비대장은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땅굴에서 기어 올라갔다.
그는 몸에 묻은 거미줄을 털어내고 말했다.
"놈을 토벌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겠군요."
뭐라고오, 이자식······.
나, 빡치다.
저리 쉽게 말하다니. 키메라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저희끼리도 가능할 듯합니다."
"작전을 세워볼까요."
나는 최대한 귀를 기울여 그들의 계획을 엿들었다.
그리고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자식들, 악독하다.
인간의 무서움이란······ 뱀보다 사악한 것들이 인간이었다.
나는 나무 위를 기어다니던 딱정벌레 한마리를 휙 물어챘다.
바삭 바삭.
팝콘 대신 이거나 먹고 지켜봐야지.
너희들이 만약 키메라를 잡더라도 어부지리는 내 차지야.
* * *
인간들은 정말 대단한 볼거리를 내게 안겨줬다.
그들은 키메라를 사냥하기 위해 만전의 준비를 했다.
그 준비를 마치고 나서는, 팔뚝이 굵은 병사 한슨이 자리에 남았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셋!"
뭐 사실 정확하게 그런 가사는 아니었지만, 대충 그런류의 노래였다.
왜냐하면, 한슨이 춤을 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손뼉에 맞춰서 땅을 구르고 펄쩍펄쩍 뛴다.
"이야, 역시 그레이림 최고의 춤꾼이야!"
경비대장은 역시 무시무시한 놈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사 자인은 경비대장 옆에서 스크롤을 들고 서 있었다.
키메라가 나타나면 그놈을 함정에 빠뜨리고, 그사이 스크롤을 찢어 놈의 강함을 파악.
토벌할지, 그대로 도망칠지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한슨이라는 병사는 숨을 헐떡일 정도로 열심히 춤을 췄다.
그리고 분명 그 보람이 있었다.
드드드드-
진동음이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슨은 움찔 춤을 멈췄다.
"더 춰!"
저 미친 경비대장.
한슨의 춤사위가 느려졌다.
마치 수련회날 무대에서 '반에서 가장 조용한' 친구를 끌어내 억지로 춤을 추게 시킨 듯했다.
와하하.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정신공격 저항이 오를 뻔했네.
드드드드드-
진동이 거세졌다.
경비대장도 가혹행위를 멈췄다.
"끌어 올린다!"
그리고 한슨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가 플라잉 휴먼이어서는 아니었다.
허리에 로프를 묶어서 절벽의 돌부리 위에 걸쳐두고, 다른 병사들이 일제히 로프를 잡아당겼을 뿐이다.
어쨌든 한슨은 지면에서 충분한 거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가 춤을 추던 위치에서 땅이 불룩 솟았다.
콰아앙!
여덟 개의 다리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물어뜯었다.
부욱-
자인이 스크롤을 찢었다.
'간파'라고?
수수한 그 이름과 달리. 내가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누가 죄인인가~
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