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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PIENTEDELAPOCALIP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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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001-010

꽈추 길이

001. 꽈추길이

매일 같이 시간을 죽치는 것이 내 삶이었다.

뉴스에서는 '일하지 않는 청년'이 사회문제라는 소식이 매일같이 올라왔다.

그것이 마치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아서 티비는 잘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산적인 뭔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침대에 누워 폰으로 커뮤니티의 유머글 따위나 보면서 낄낄대는 게 주다.

마치 방바닥에 눌어붙은 라면 국물처럼 볼품없고 지저분한 몰골로, 그날도 유머글을 보고 있었다.

──────────────

[제목:240으로 키+몸무게+꽈추길이 분배하기.txt]

──────────────

나처럼 할짓 없는 인간들이 무척 많은 것 같았다.

그 별 내용 없는 게시글에 댓글이 무려 100개가 넘게 달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관심없을 자기의견들을 열심히 표출했다.

──────────────

(익명1)평균키 174 하고 몸무게 50 야추 16 하면 되겠네ㅋ

(익명2)177 5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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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기 그지없는 결정들이다.

사실, 그것은 다들 열심히 고민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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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5)키 185 몸무게 40 야추15

ㄴ(익명1)185에 40키로면 일상생활 가능하냐? ㅋㅋㅋ

ㄴ(익명5)지금 내 스펙인데

(익명7)160하고 45kg에 왕꺽츄 35cm

ㄴ(익명1)지랄ㅋㅋㅋㅋㅋ

──────────────

물론 대충 질러보는 댓글도 많았다.

문득 조금 진지해졌다. 만약 나라면 어떻게 분배할까.

240을 가지고 어떻게 분배해도 만족스럽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다 허무해져서 뒤로가기를 누르려던 순간. 추천을 가장 많이받은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

(익명32)190cm 70kg -20cm

ㄴ(익명31)마이너스는 뭐야 ㅅㅂㅋ

ㄴ(익명48)난 강한여자가 좋음.

ㄴ(익명50)여자가 190에 70이면 뭐냐ㅋㅋㅋㅋ

ㄴ(익명72)운동선수하면 되지 ㅇㅇ 190에 70이면 딱좋음.

ㄴ(익명54)천재네

ㄴ(익명12)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와, 똑똑하다.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하나를 과감히 포기하면 다른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포기해야 하는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 게시글은 흥미롭게 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 너머로 흩어졌지만.

설마, 한참 나중에 그 게시글이 다시 떠오를 줄이야.

* * *

다 눈앞에 떠 있는 이것 때문이었다.

──────────────

[스탯을 분배하세요.]

※주의: 한 번 설정한 스탯은 수정할 수 없습니다. 주의 깊게 분배하세요.

──────────────

이 반투명한 창을 뭐라고 불러야할까.

상태창? 스테이터스? 메시지?

게임에서 볼 법한 이것은 분명 현실이었다.

오랜만에 외출했던 내가 떨어지는 간판에 쳐맞아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이곳은 사후세계가 아닐까.

"지금 혼수상태는 아니겠지..."

두려운 상상이었다.

하지만 쓰러진 내게 몰려든 사람들이 '아악, 저거 뇌 아냐?'라고 소리친 것을 들었으니 분명 나는 죽었을 것이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그 아래 문장을 읽었다.

──────────────

-분배 가능 스탯: 60

-분배 가능 항목:

[정신력] [건강] [운] [잠재력] [출신성분]

──────────────

"이게 뭔······."

죽었더니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가서 어쩌고 하는 웹소설은 많이 봤다.

내 시간 죽이기에는 웹소설 또한 포함되어 있으므로.

하지만 나는 게임은 잘 하지 않을 뿐더러, 스탯으로 분배하는 능력치가 게임이라기에는 요상했다.

보통 힘, 민첩, 지능, 마력 등등이 나오는게 보통 아닌가.

잠재력이나 출신성분은 또 뭔가 싶었다.

우선 스탯은 1이 제일 낮고 20이 가장 좋은 것이겠지.

다행히도 설명은 적혀 있었다.

──────────────

※ 표준적인 인간의 평균 스탯이 10입니다.

분배된 스탯에 따라 당신의 다음 삶이 정해집니다.

──────────────

즉 정신력 10이면 평범한 사람의 정신력이라는 뜻이다. 운과 건강등 나머지 항목도 마찬가지일테고.

"그러면 어떻게 분배를 해야하나······."

그리 중얼거리면서 나는 내가 조금 신났다는 것을 눈치챘다.

두 번째 기회 아닌가.

허무하게 죽었지만 그것조차 별로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단 조금 특이한 항목들이 무슨 뜻인지를 분석해야했다.

정신력, 건강, 운은 직관적이었다.

셋 다 중요한 항목들이다.

사람의 평균이 10이라고 했으니 내 지난 생의 스탯은 각각 4, 5, 7정도 되지 않았을까.

난 정신도 썩어빠졌고 몸도 안좋았으며 운도 나쁜 편이었으니.

"5분의 1씩 나눠도 12씩이니까 나쁘지는 않고."

240이라는 애매한 수치로 키와 몸무게, 그것 길이를 분배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냥 다 12으로 나누면 평균보다 조금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마다하지 않고 12점씩 골고루 배분하려 했다.

"······."

하지만 손가락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내 시궁창 같던 삶과 비교해보면 평균적인 삶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이번에는 또 특별한 삶을 살아보고 싶은 것 같았다.

"······잠재력, 출신성분."

그것부터 생각해보자.

잠재력이라는 표현이 애매하다. 재능 같은 걸까?

공부에 대한 잠재력, 운동에 대한 잠재력?

적어도 지난 생의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은 확실했다.

난 음악도 건드려보고 공부도 해봤으며 미술도 해봤다.

재능이라고는 눈 씻고도 없어서 제대로 한 것이 없었다.

물론 근성이 없어서 금방 포기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반면 출신성분은 대충 와닿았다.

이거 수저 이야기 아닌가.

누구 자식으로 태어났고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관한 것.

만약 내가 새로 태어나는 곳이 내가 아는 지구가 아니라면, 뭐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날지 귀족으로 태어날지가 갈릴지도 모른다.

'잠깐, 다른 게 괜찮으면 이건 극복할 수 있는 거 아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꽈추 길이를 과감하게 마이너스로 분배하고 다른 수치를 챙겨간 그 댓글처럼.

'정신력, 운, 건강, 잠재력. 다 챙긴다면 출신 성분을 조금 포기해도···.'

사실 내 한심한 삶과 달리 부모님은 부유했다.

두 분은 이혼하셨지만 나는 부족함 없이 유복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백수로 지낼 수도 있던 것이다.

만약 수저를 조금 잘못타고나도 다른 스탯들을 챙기면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한참 고민하는 나는 상태창이 불길하게 깜빡이는 것을 보고 마음을 정했다.

그리하여 분배한 스탯은······

──────────────

[정신력] 20*

[건 강] 10

[ 운 ] 9

[잠재력] 20*

[출신성분] 1*

──────────────

"오···."

과감한 선택을 하자, 20을 꽉 채운 항목의 글자가 두꺼워졌다.

조금 불안한 것은 1로 설정한 출신성분도 깜빡거리며 점멸하기 시작했다는건데.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감한 선택, 정신력을 20으로 설정했습니다. 당신은 불굴의 정신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가장 혐오스러운 악마를, 가장 위대한 신을 마주해도 마음은 무너지지 않겠지요.」

어쩐지 분위기 있는 목소리다.

설명이 만족스럽기 그지 없었다.

정신력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항목이었다.

내 멘탈이 쓰레기 같았기 때문이다. 늘 쉽게 포기하고, 혼자 상처받았으며 다른 사람이나 환경만을 탓하기 바빴다.

이제는 그리 살지 않을 것이다.

*「평균적인 건강을 타고났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리지는 않겠으나, 대단히 건강하지도 않을 겁니다.」

*「평균적인 운을 타고났습니다. 삶을 뒤흔들만한 대운을 겪지도, 어처구니 없는 불운을 겪지도 않을 것입니다.」

건강과 운은 평균 정도로 만족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력과, 그 노력으로 개화시킬 수 있을 잠재력이다.

*「과감한 선택, 잠재력을 20으로 설정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크나큰 불운이 닥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대는 찬란하게 개화할 것입니다.」

아주 좋다.

이번 생은 다를 것이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가슴이 뛰는데, 가장 긴장하던 '출신성분' 항목에 대한 목소리가 울렸다.

* 「극단적인 선택, 출신성분을 1로 설정했습니다. 당신은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떠할지는 당신이 책임져야 하겠지요. 가장 미천하게 시작할 당신의 끝이 어떨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

극단적인 선택이라.

그래, 여기까지는 예측한 일이었다.

아마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어쩌면 부모님이 없이 고아신세로 시작할지도 모른다.

건강이 낮지 않으니 설마 신체 한군데가 불편하게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예측이라는 것이.

내 각오라는 것이 얼마나 가벼웠던 것인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 * *

시자 수림.

시자 나무는 이곳 변경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품종이었다.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난다습한 곳에서 번성하는 품종인 만큼, 이곳 수림 역시 울창하기 그지 없었다.

풍성하게 자란 나뭇잎이 햇볕을 거의 막아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하다.

땅은 축축하고 바람이 많지 않아서 이끼가 곳곳에 자라 있었다.

그 숲을 걷는 이들이 있었다.

시자 수림에는 마물들이 많이 살아 위험하기 그지없는데, 발걸음이 거침없었다.

이곳의 원주민들도 독사나 벌레 때문에 발치를 조심한다.

허나 철컥거리는 풀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게다가 그 갑주를 입은 사내는 이곳 영주도 두려워할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를 수행하던 토박이 농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강철의 군터······ 팔영웅 중 제일은 아니라던데 무시무시하구만.'

시자 수림에 얼마 전 위험한 마물이 이주해왔다.

마물이 영주의 병사 여럿을 죽이자 영주가 수도에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래서 온 것이 여덟 영웅 중 하나인 군터였다.

"저곳인가?"

군터가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숲 속 절벽 틈에 난 동굴이었다.

농부는 얼른 대답했다.

"예, 저기가 숨골입니다. 그놈이 저기 자리잡았죠."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군."

군터는 그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으로 유명한 자였다.

다른 영웅들과 달리, 그는 가장 비천한 천민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강철과 같은 정신력을 가졌고, 그보다 더 빛나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용병으로 시작해서 도끼창 한자루로 왕국의 팔영웅이 되었으니, 이곳 촌부들의 눈에는 신비롭게만 보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나무에 걸터앉아있던 군터가 갑자기 일어섰다.

"온다."

아무도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건만.

과연 불길한 소리가 숨골로부터 울려나왔다.

쉬잇, 쉿.

농부의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거대한 무언가가 저 안에서 미끄러져 나오고 있었다.

"눈을 감아라. 돌이 되기 싫으면."

군터의 경고에 다들 눈을 질끈 감았다.

몇명만이 용기있게 손거울을 꺼내서 군터의 무용을 구경하고자 했다.

농부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때탄 손거울로 숨골에서 뭐가 기어나올지 지켜봤다.

그래야 그 마물의 눈빛을 피할 수 있었다.

"흐익."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나타난 것은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저 딴 것은 뱀이 아니었다.

이름에는 서펜트라는 말이 붙지만, 어찌 마물이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름드리 나무만큼 두꺼운 뱀의 몸통, 그리고 사람의 얼굴.

머리카락은 한올 한올이 사실 작은 새끼뱀들이다.

머리에 붙어 나풀거리는 초록빛 뱀들이 쉿쉿거리며 독니를 드러낸다.

"쉬리릿-"

그리고 그 메두사 서펜트의 입술에서 팔랑이는 보랏빛 긴 혀.

그 요요롭게 빛나는 눈빛이 군터를 향했다.

저항력이 없는 자는 놈과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몸이 굳는다.

하지만 군터는 움찔하지도 않고 달려갔다.

도끼창을 치켜들고 무모하리만큼 정직하게 돌진.

그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농부는 그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사아악!"

메두사 서펜트의 입이 쩍 벌어지며 군터를 향해 쇄도했다.

갑옷을 입었다고 해도 그 거대한 입에 물리면 통채로 으스러질 것이다.

그 이후에 군터가 보여준 움직임은 농부의 눈으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것이었다.

번쩍 하더니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거대한 도끼창을 휘두르자–

서걱- 쿵!

메두사 서펜트의 대가리가 잘렸다.

머리 잃은 몸통이 사방팔방 꿈틀거렸다.

하지만 군터는 신경도 쓰지 않고 도끼창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영주에게 놈을 토벌했다 알려라."

" ······예, 예에!"

농부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단 한 방. 군터는 겨우 한 방에 저 괴물을 잡았다.

오늘 그가 본 것은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어엇, 으악!"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그곳에서는 징그럽기 그지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메두사 서펜트의 머리카락. 그 수천 마리의 작은 실뱀들이 죽은 머리통에서 우수수 떨어진 것이다.

그 작은 뱀들은 감히 군터가 있는 쪽으로는 가지 못하고 허겁지겁 제 어미가 자리를 잡았던 숨골로 도망쳐갔다.

"저거는 어떡합니까."

농부가 저도 모르게 그리 물었다.

군터는 차가운 눈으로 농부를 바라봤다.

"내가 저런 새끼뱀들까지 잡으란 말인가."

"죄, 죄송합니다앗!"

찔끔한 농부가 얼른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 ······저 동굴은 안이 막혀있나?"

"그렇습니다."

"그러면 영지병들을 시켜 토벌하면 되겠군. 불을 지르든 해라."

군터는 그리 말하고 거침없이 돌아섰다.

자리에 남아있는 농부들은 황망하게 숨골을 바라볼 뿐이었다.

수 천 마리의 뱀들은 마치 벌레떼처럼 동굴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여기 지키고 있어야겠구만."

"불이라도 피워두자고 ··· 누구 백반 있나?"

저 새끼뱀들이야 그리 위험하지 않았지만, 농부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중 하나가 기어가는 뱀떼를 가리켰다.

"저거, 흰 놈도 섞여 있네."

"흰머리인가보지. 허허."

* * *

그래, 그리고 그 수천마리의 실뱀 중 하나가 나였다.

그것도 유독 작고 약하게 태어난, 홀로 흰 개체.

──────────────

[리틀 화이트 스네이크 lv1]

──────────────

메두사 서펜트는 제 머리에 새끼들을 붙여서 양육한다.

알에서 태어난 나는 그래서 어미의 몸에 딱 붙어서 버텨왔다.

괴물같은 놈한테 어머니 머리통이 날아갔지만.

'시발 출신성분이 종족 포함이었냐고!'

거지로 태어나는 것은 각오했다.

고아원에서 성격 나쁜 원장에게 맞고 자라는 것도 각오했다.

하지만 뱀. 그것도 괴물 뱀의 새끼로 태어난 것은 무슨 지랄인가.

그때, 목이 잘린 어머니의 몸통이 펄떡거리면서 내 형제들을 뭉갰다.

자칫하면 죽을뻔했다.

피떡이 된 형제들을 피해 간신히 스쳐지나갔다.

*「빠르게 기기lv1을 획득했습니다.」

*「타고난 잠재력으로 숙련도가 빠르게 상승합니다.」

아오, 잠재력은 개뿔.

나는 필사적으로 기었다.

지옥 같았던 가정 폭력

002. 지옥 같았던 가정 폭력

스탯을 분배한 직후의 시점.

내 시야는 흰 빛으로 가득 찼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시간이 한참 지속되었다.

그러던 도중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정신력이 20입니다. 특전으로 고유특성 '불굴'을 획득합니다.」

*「잠재력이 20입니다. 특전으로 고유특성 '정진'을 획득합니다.」

내심 쾌재를 내질렀다.

듣기만 해도 범상치 않은 이야기 아닌가.

스탯을 분배하라고 했을때부터 느꼈지만 아무래도 이 세상에는 게임 요소 같은 것이 적용되는 듯했다.

불굴이나 정진이라는 특성이 무슨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유특성 어쩌고 하는 것을 보면 분명 비범하겠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웹소설에서 봤듯, 아기로 태어날까.

이성과 기억이 유지된 채 어릴 때부터 천재소리를 듣고 자랄 지도 모른다.

문득, 몸이 생겨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끈끈하고 따듯한 액체가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찌직,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아직 성숙치 못한 눈에 빛이 들어왔다.

나는 세상속에 던져졌다.

태어난 것이다.

미리 준비한 대로, 힘차게 '응애!"하고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사아악!"

뭔소리야, 입에선 그런 소리만 나왔다.

힘겹게 눈을 떴다.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어머니의 따스한 미소가 아니었다.

아니, 분명 여자의 얼굴이긴 하지만 사람이 아니다.

저렇게 거대한 몸통이나 매끈한 비늘을 지닌 사람은 없을테니.

주변에는 수천개의 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알에서 일제히 내 형제자매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점액과 함께 실뱀들이 알에서 주르륵 흘러나온다.

몸이 떨렸다.

설마 '출신성분'이라는 것이 단순히 신분이나 수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던 건가.

종족도 포함한 건가.

10 평균적인 사람이라며.

그러면 1은 뱀이고 20은 용이야?

······그런건가.

어두운 동굴 속에 무수한 새끼들과 그 괴물같은 어미가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올려다봤다.

시발 저 괴물이 우리 엄마라고?

──────────────

[메두사 서펜트 lv89]

──────────────

메두사 서펜트란다.

아무래도 지구가 아닌 곳에서 태어난 것은 분명했다.

저딴 뱀이 존재할리가 없으니까.

어미는 조용히 새끼들이 부화하는 것을 지켜봤다.

대부분의 개체가 알을 깨고 나온 순간이었다.

어미의 입술에서 보랏빛 혀가 낼름댔다.

쉬리리리릿-

바람이 좁은 곳을 지나는 소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전신이 뻣뻣하게 굳었다.

맹수 앞에 서면 오금이 저린다는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뱀이 되어서 오금같은 부위는 없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벌레처럼 꿈틀거리던 내 모든 형제들 역시 일제히 멈췄다.

공포에 떨며 태변을 뿍뿍 지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도 정신이 붕괴할 정도의 공포에 질려서······

*「서펜트의 피어에 노출되었습니다. 특성 '불굴'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똥을 지리지는 않았다.

오줌 지릴 정도로 무섭기는 한데, 몸이 덜덜 떨리기는 한데, 어떻게 진짜 미쳐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평범한 소시민인 내가 뱀으로 환생해서, 저런 인면 괴물의 아들내미인지 딸내미인지가 되었다.

진짜 미쳐버릴 만큼 끔찍한 상황 아닌가.

그런데 어찌저찌 침착한 것 같기도 했다.

'정신력 20의 위엄인가.'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

······아니, 애초에 출신성분을 한 5정도 까지만 배분했던게 진짜 좋은 선택이었겠지만.

츳츳!

그때 어미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자꾸 어미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엄마라고 부르기는 죽어도 싫었으니 메두사 맘이라고 부르려고 정한 순간.

다른 형제자매들이 일제히 메두사맘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공포에 떨던 것이 거짓말 같다.

새끼 뱀들은 그 거대한 몸을 타고 기어올라 메두사맘의 두피에서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몸이 딱 두피에 고정되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따라갔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 선택은 옳았다.

메두사맘의 두피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빼곡하게 홈이 파여 있었다.

그곳에 꼬리를 집어넣자 몸이 단단히 고정됐다.

즉, 수천마리의 형제자매들이 빡빡이 어머니의 가발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살아있는 듯 일렁이는, 아니 실제로 살아있는 머리카락이다.

샴푸 광고 못지 않게 화려하게 찰랑이는 머릿결.

어머니는 만족스러운듯 머리를 치켜들더니, 아직까지 뻣뻣이 굳어서 남아있는 자식들을 훑어봤다.

공포에 질려서 명령도 듣지 못하는 자식들.

어머니는 그들에게 사랑의 회초리를 들었다.

즉, 꼬리를 휘둘렀다는 뜻이다.

퍼버버버벅!

거대한 꼬리가 지나가자 남은 것은 피와 살점 뿐이었다.

수백마리의 형제자매가 일순간 피떡이 되어버렸다.

메두사맘은 자식교육에 대단히 엄한 편인 것 같다.

그런 모친 아래 태어난 내 운명은 모두 출신성분 1의 덕이리라.

······내가 지금 미친건지 아니면 정상적인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의 머리에 붙어서 찰랑댔다.

아마, 그렇게 태어난 날로부터 일주일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군터라고 불리던 갑옷 사나이가 엄마, 아니 메두사맘의 머리를 뎅강 잘라버릴 줄이야.

괴물 같은 어머니가 죽어버렸다.

스탯 분배할 때 걱정한 대로 조실부모한 천애고아가 되어버렸다.

이것 역시 출신성분 1덕인가보다.

* * *

와.

진짜 꼬리 빠지게 기었다.

몸에는 어머니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어떻게 도망쳤는지 정신이 없었다.

동굴로 들어간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 괴물같은 기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마을 촌부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불 여러개 피워. 도망쳐 나오는 놈들 있을지도 모르니깐!"

"난 성에 보고하러 갈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벌벌 떨던 촌부들은 조금 신난듯 보였다.

저들은 이곳에 태어나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어째선지 그들이 말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맘 같아선 나도 저쪽으로 가서 말이라도 걸고싶다.

내가 사실 뱀이 아니라 사람인데······ 여기서 쪼매 구해주소. 내 몸이 이래가. 하고 부탁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사아악!'이나 '쉬릿쉬릿'정도이니 불가능한 일이다.

"싸그리 소탕해버려야지."

"지금 아직 미성숙할때 전부 죽여놔야해. 자라면 위험해질수도 있어."

그리고 저 촌부들은 나와 형제자매들을 죽이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알기로는 동굴 안에 빠져나갈 길은 없을텐데······ 큰일이다.

그래, 어쨌든 지금 나 혼자서 어찌 도망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파악해야한다.

나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눈을 감았다.

눈을 질끈 감고 정신을 집중하면 재미있는 것이 보인다.

──────────────

[리틀 화이트 스네이크 lv1]

──────────────

그렇다! 나는 메두사 서펜트 lv1이 아니었다.

어머니와는 종부터 다른 것이다.

그럴 것 같긴했다. 내 형제자매들을 보아도 사람 얼굴을 가진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눈빛을 발사해서 사냥감을 돌로 만들어버릴 능력도 없었다.

추론을 해보자면, 언젠가 저 레벨이라는게 오른다면 진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것.

아니면 뱀은 탈피를 하는 생물이니 그런 식으로 뭔가가 바뀔지도 모른다.

알 수 있는 것은 내 품종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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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불굴], [정진]

[스킬]

[암시야lv5], [독니lv1], [빠르게 기기lv1(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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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들이다.

특성 불굴은 정신력과 연관이 있는 것. 정진은 잘 감이 안잡혔다.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암시야나 빠르게 기기, 독니 같은 스킬들이었다.

암시야는 태어났을때부터 지니고 있었다.

덕택에 어두운 동굴에서도 볼 수 있었다.

독니라는 것을 보면 내가 독사는 맞는 것 같다.

근데 솔직히 얼마나 활용할 수 있을지, 얼마나 강한 독일지는 모르겠다.

살아남기에는 아직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이번에 얻은 것이 빠르게 기기라는 스킬이었다.

조금 전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갔을때 획득했다.

이름이 시시하긴 했지만 중요해보인다.

빠르게기기! 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도 스킬이 발동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쓰면 되나······'

그래서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보았다.

스르륵, 몸이 움직이고.

······조금 빨라진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말해서 엄청 빨라지지는 않았다.

메두사맘은 동굴에서 휴식할때 자식들을 풀어놓았다.

그때 열심히 기어다녀봤지만 이런 스킬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번에는 스킬을 얻었을까.

혼신의 힘을 다해 빨리 기었기 때문이 아닐까.

짚이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그래서 한 번 열과 성을 다해 기어보았다.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냉혈동물이라 땀을 흘리지 못할 따름이지, 죽어라 기었다.

그러자 변화가 있었다.

*「대단한 잠재력에 의해 스킬의 숙련도가 빠르게 상승합니다.」

*「빠르게 기기lv1이 빠르게기기lv2가 되었습니다.」

빠르게 기기가 lv2로 상승했다.

그러자 조금 더 빨라진 것이 체감되었다.

여전히, 사람이 달리는 속도보다는 한참 늦다.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수련해서 lv10까지 올리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응 안 돼~

그럴 수는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기었더니 온몸이 기진맥진했다.

생후 일주일이면 걸음마가 아니라 옹알이만 해도 대단한 거 아닌가.

잠재력 20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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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배고픔, 기진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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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배가 고프다.

메두사 맘은 자기가 직접 잡은 사냥감을 입에서 토해 새끼들을 먹였다.

반쯤 소화되어 역겹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열심히 그 곤죽 같은 고기를 매일 먹었다.

하루하루 몸이 자라는 성장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꼬박 하루를 굶었으니 도저히 에너지가 없었다.

열심히 기다보니 허기가 더 심해졌다.

일단 동굴 깊숙한 곳, 형제자매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겠다.

수천마리의 뱀들과 함께 움직인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이다.

전생에는 외동이었는데. 이제는 든든한 형제자매가 아주 많아졌다.

그런 내 안일한 기대는 곧 산산히 흩어졌다.

어두운 동굴 안쪽에서 형제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격하게 포옹하는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놈들은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통제할 메두사맘이 사라지자 마자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 한심한 놈들!

뱀은 원래 사냥감을 한입에 삼키고 소화한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형제자매들의 이빨은 마치 상어의 것처럼 빼곡하고 뾰족했다. 먹잇감을 찢을 수 있도록 진화한 듯했다.

그 이빨로 서로의 살점을 물어뜯고 있다.

계획 수정이다.

일단 저놈들이 배고픔을 채울때까지는 기다리는게 좋을 듯했다.

몸을 돌려 바위틈으로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쉬리릿."

나보다 덩치 큰 뱀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고 혀를 낼름댔다.

어, 형, 좀 비켜줄 수 있을까.

나도 혀를 낼름거려봤지만 녀석은 비켜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눈알에 힘을 집중해 포악한 형을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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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그린 스네이크 lv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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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난 혼자 몸이 흰색이니 눈에 띌 수 밖에 없구나.

형의 레벨은 나보다 둘 이나 높았다.

언제 엄마 몰래 벌레나 박쥐라도 훔쳐먹었을까.

아니, 입주변에 묻어있는 피를 보니 방금 다른 동생 잡아먹은 것 같았다.

가정폭력범의 특성과 스킬을 살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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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포악함]

[스킬]

[암시야lv3], [독니lv2], [빠르게 기기lv2], [물어뜯기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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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더 스킬이 좋은데.

형도 혹시 잠재력 20이야?

대답 대신, 형님은 '사아악!'하며 내게 몸을 날렸다.

형이라는 작자의 수차례 독니 공격

003.

배고프다.

우습게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는 극렬한 허기를 느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 평범한 동물도 아니고 마물(魔物)이리라.

마물이든 사람이든 먹지 않으면 죽는다.

다만 사람과 마물의 차이점은 그 허기를 느끼는 정도일 것이다.

극렬한 배고픔이었다.

목숨을 걸어서 사냥을 나서게 만드는 본능.

내 앞에 있는 뱀을 보고 나는 그런 허기를 느꼈다.

싸워서 물어뜯고싶다.

저 비늘을 뜯어 벗기면 달콤한 피와 속살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을 먹어 소화하면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다른 형제자매들도 그런 충동 탓에 저리 싸우리라.

하지만 내게는 이성이 있었다.

또한, 그런 본능을 이겨낼만큼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저 형님과 싸워서 좋을 일은 없다.

사아악! 하고 덤벼드는 형을 피해 쉬리릿 하고 스쳐지나갔다.

빠르게 기기 lv2! 역시 탁월하다.

하지만 상대하는 형님의 빠르게 기기도 lv2라는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회피에 성공했지만 형님은 무서운 기세로 나를 쫓아왔다.

나보다 빠르다.

바위 틈으로 피해봤자 같은 뱀인 형은 따라 기어올 것이다.

그렇다면 싸워서 이겨야 하나.

일단 눈 앞에 보이는 바위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러자 저 너머에 보이는 광경.

순간 그것을 보고 얼이 빠졌지만, 곧 날카로운 통증이 정신을 차리게 했다.

형이 내 엉덩이를 물었다.

아직 아무한테도 엉덩이를 물려본 적이 없는데.

나는 고통과 놀람으로 몸부림쳤다.

엉덩이가 화끈하게 뜨거워졌다. 상처 때문만이 아니라 독이 주입된 것 같았다.

형도 독니를 지니고 있으니 당연한 일일터.

나는 발버둥침과 동시에 형의 옆구리를 물어주었다.

내 양쪽 볼 속에 들어있는 독샘에서 무언가가 쭈욱 빠져나간다.

독 공격이다!

*「독니lv1의 숙련도가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독니lv1이 독니lv2가 되었습니다.」

효과는 훌륭했다.

형도 나와 비슷한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엉덩이의 감각이 천천히 무뎌져갔다.

내가 문 것은 형의 옆구리니까 좀 더 유리할 것 같다.

이제 슬슬 이길만하지 않을까.

퍽!

아니었다.

나는 몸을 튕기는 형에 의해 날아가서 데구르르 굴렀다.

막싸움에서는 체급 차이가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서로가 가진 독이라고 해봤자 대단한 것은 못 되어서, 형도 나도 대강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형이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가오는 것을 지켜봤다.

푸드득, 푸득.

그 소리를 듣자마자 한 번 하늘을 올려다 보고, 근처의 돌 틈으로 재빨리 숨었다.

조금 전하고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형이 내 꼬리를 깨문 것이다. 다시 한번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다만 독샘의 독액도 무한하지 않은 덕에 견딜만했다.

그리고 나 대신 누군가가 형을 응징해주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박쥐였다.

원래는 감히 메두사맘이 두려워 까불지 않던 이 동굴의 거주민이 형의 몸통을 물어챈 것이다.

내가 바위 너머로 본 광경이 그런 것이었다.

박쥐들이 퍼득대면서 홀로 있는 뱀들을 잡아채갔다.

그리고 내 흰 몸에 시선을 끌린 박쥐가 다가와서 돌 틈에 숨은 나 대신 형을 잡아챈 것이다.

그때,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형은 박쥐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내 꼬리를 단단히 물고 버티는 것이다.

나는 같이 끌려가지 않기 위해 돌 틈에 내 이를 박았다.

그리고.

툭.

미친.

꼬리가 끊어졌다.

다행히 중요기관들은 무사했지만 꼬리가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이 뜯겨나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공중에서 형과 박쥐가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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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톱 박쥐l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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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답게, 박쥐는 칼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지니고 있었다.

과연 내 형은 포악했다.

그들은 서로 뒤엉킨채로 추락했다.

박쥐는 날개가 부러졌는지 꿈틀대고 있었고, 형은 걸레짝이 되어 숨을 거두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 해야할 일을 눈치챘다.

잘려나간 꼬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배에서는 지독한 허기가 느껴졌다.

영양을 보충해야했다.

꼭꼭 씹어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하나는 뱀으로 태어난게 이득이었다.

입을 쩌억 벌리고, 먼저 박쥐부터 삼켰다.

해봤자 아기 주먹만한 크기의 놈이다.

날카로워서 배가 찢어질지도 모르니까 발톱만 똑 남겨두었다.

그리고 형도 먹어치우려 했는데 너무 덩치가 컸다.

미안 형, 나대신 다른 형누나들이 뒷처리는 해줄거야.

아, 정말 머리가 어지럽다.

피를 너무 흘린 것 같았다.

나는 잔뜩 무거워진 몸을 끌고 바위 틈으로 숨었다.

최대한 흙을 흩뿌려서 몸을 가린다.

난리고 뭐고 일단 몸을 회복해야했다.

*「리틀 그린 스네이크lv3과 칼톱 박쥐lv4을 처치했습니다.」

어라, 내가 해치운 걸로 치는건가.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포식lv1를 획득했습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곧, 견딜 수 없는 수마가 밀려왔다.

* * *

헉! 자버렸다.

잠 때문에 날려버린 기회가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실제로 수능날 늦잠을 자서 재수를 했다.

당연히 아버지에게 뒤지게 맞았고,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열가지 행동 중 5위쯤 된다.

그러면 새 삶을 살게된 지금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이냐.

당장 촌민들이 뱀떼를 소탕한다 어쩌고 하는데 잠이나 퍼질러 잔 것이냐 묻는다면 할말은 있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잠이었다.

아마 몸이 어느 정도 이상의 데미지를 입었고 박쥐 한마리를 통채로 삼켰기 때문일듯했다.

지금은 상쾌하다.

어지러웠던 정신도 맑아졌고 몸도 가벼워졌다.

뱃속이 든든하긴 하지만 움직이는데에 문제가 없었다.

나는 바위틈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우선 중요한 것부터 체크했다.

분명 레벨이 올랐다는 목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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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화이트 스네이크 lv3]

[스킬]

[암시야 lv6], [독니lv2], [빠르게 기기lv3], [포식lv2], [물어뜯기lv1], [독 내성lv1], [출혈 내성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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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허전했던 스킬창이 잡다하게 늘었다.

포식, 물어뜯기, 독내성, 출혈내성. 여태까지 없던 스킬이 한번에 생긴 것이다.

게다가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스킬들의 레벨이 올랐다.

독니나 빠르게 기기 같은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암시야는 왜 갑자기 레벨이 상승한 것일까.

음, 레벨이 오른 것과 연관있는 것 같았다.

박쥐와 형님을 내가 처치했다는 것으로 판정되어서 레벨이 올랐다.

그탓에 스킬 숙련도도 상승한 것 아닐까.

아니면 말고.

어차피 살아남는다면 나중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독 내성과 출혈 내성은 아무래도 자는 중에 습득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획득했다는 목소리를 못 들었기 때문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여기서 제일 작은 나였지만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포기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결의를 굳히며, 나는 바위 틈에서 나왔다.

아, 포기하고 싶네.

저 동굴 바깥에 사람이 잔뜩 늘었다.

횃불을 들고있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동굴에 진입할 기세였다.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동굴 입구쪽으로 다가갔다.

다른 형제들보다, 심지어는 죽은 메두사맘보다 내가 우월한 점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병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그냥 불을 질러서 연기를 피우면 다 죽지 않겠습니까?"

병사 한 명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그리 물었다.

경비대장인지 갑옷을 입고있는 자가 짜증을 내며 횃불을 가리켰다.

횃불은 바람을 맞아 한쪽으로 일렁댔다.

"지금 바람이 안에서 바깥으로 나오는데 그게 되겠냐? 그리고 연기로 조지려고 해봤자 뱀은 땅바닥에 붙어 있어서 그게 안 돼."

"예에······"

"쫄지 말아라. 어차피 어미가 무서운거지 새끼들은 마물도 아니고 그냥 뱀이나 다를바가 없어. 각반 잘 차고. 갬비슨 입으면 돼."

경비대장이 부하들을 다독였다.

그와 병사들은 갬비슨이라는 이름의 누비갑옷을 입고 있었다.

튼튼한 아마포를 넣어 만든 외투같은 것인데, 저정도만 되도 독니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우리 형제자매가 많다고 해도 금방 토벌당할 터.

"동이 트면 곧바로 진입한다."

나는 다시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사람의 능력치도 간파할 수 있을까.

눈을 집중해서 경비대장을 분석하려 했다.

──────────────

[경비대장 lv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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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종족이 경비대장인가.

웃기지도 않았다.

나는 그것만 확인하고 더 알아보는 것을 포기했다.

알 수 있는 게 이름과 레벨 뿐이었다.

어머니의 능력치를 보려고 했을때와 똑같았다.

아무래도 나보다 훨씬 강한 상대는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시간 낭비를 그만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동굴 내부는 난장판이었다.

배를 채운 형제자매들은 이제 동족상잔을 멈췄다.

박쥐들도 우리 뱀들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시체 쪼가리만 탐낼 뿐이었다.

딱 봐도 천 마리 이하로 줄어버린 형제자매들.

"저놈들이 진입하기 전에 모두 일제히 도망친다! 운이 좋은 이들은 분명 살아남을 수 있을터. 언젠가 살아서 다시 만나자!"

하고 연설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순 없다.

나는 나를 보는 형제들을 지나쳐서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거처로 선택한 동굴은 그리 크지도 깊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장 안쪽에는 제법 큼지막한 공동이 있었다.

어머니가 잠을 자는 거처였다. 안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아, 이곳에 돌아오니 돌아가신 어머니의 추억이······ 떠오지는 않았다.

곳곳에 널린 오물의 역겨운 냄새만 난다. 다 어머니의 흔적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것들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는 열쇠였다.

계획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 저기 있다.

내가 찾아낸 것은 동물들의 조각상이었다.

물론 어머니에게 미술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을리는 없었고, 어머니가 석화시켜서 보관하는 도시락들이었다.

메두사맘에게는 안좋은 습관이 있었으니, 잠자리 근처에 먹을 것들을 보관하고 누워서 그것을 까먹는 것이었다.

석화는 놀라운 능력이었다.

어금니가 대단한 재규어도, 코가 엄청나게 길쭉한 멧돼지 같은 것도 어머니 눈만 보면 꼼짝 못하고 굳었다.

썩지도 않고 유지되었다가 석화를 풀기만 하면 살아있는 신선식품으로 돌아오기때문에, 어머니는 이렇게 여러 마물들을 전시해두었다.

나는 눈알에 힘을 주어서 그들의 이름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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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재규어lv33(석화)]

[가이거 호그 lv29(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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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서는, 이 둘이 가장 강해보였다.

굳이 레벨이나 이름을 보지 않아도 확실히 그랬다. 어머니가 사냥했을때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이놈들이 풀려나면 저 바깥에 있던 경비대장이나 병사들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혼란을 틈타 도망간다면 좋을 터.

나는 이 마물들의 석화를 푸는 방법을 보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됐었나.

나는 두 마물의 머리 위에 올라가서 최대한 독을 짜냈다.

내가 독니로 독을 듬뿍 내뿜을 수 있는 것은 두 번 정도인 것 같았다.

이빨로 바위를 꿰뚫을 수는 없어서 묻히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독 묻은 혀로 석상을 한번씩 핥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금세 색이 돌아오면서 석화가 풀렸다.

아, 나는 메두사맘의 자식이 맞기는 했던 것 같다.

내가 독액을 뿌리자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마물의 석화가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천천히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마물들은 곧바로 동굴을 빠져나가려고 할 터. 그때의 혼란을 노려서 나가면 된다······!

"들어가자!"

그때, 동굴의 입구쪽에서 그리 외치는 소리가 났다.

벌써 동이 튼 건가. 입구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석화는?

아직 안 풀렸다!

두 마물의 색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지만 아직은 움찔거리지도 않는다.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서 입구쪽을 살폈다.

병사들이 진입하고 있었다.

두 줄로 떨어져 서서 횃불을 들고 있다.

"바위 틈을 잘 살펴라! 창으로 한 번만 찌르면 된다!"

역시 경비대장이 위험한 놈이었다.

바위 틈에 숨어있다가 빠져나올 생각도 했지만 포기하길 잘했다.

병사들은 틈에 숨어있는 형제자매들을 꼼꼼하게도 찔러죽였다.

"놓치는 놈들은 놔둬! 어차피 밖에서도 대기중이니까!"

한두마리가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지만 그것조차 대비해둔 듯했다.

뭐 이런 촌구석의 병사들도 저리 꼼꼼하단 말인가.

대부분의 형제자매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즉, 병사들을 피해 동굴의 안쪽으로 더 도망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안쪽으로 진입했다.

어머니의 침실은 결코 좁지 않았다.

하지만 천마리에 가까운 뱀들이 바닥을 차지하자, 발 디딜틈도 없이 좁아보였다.

이곳까지 도착한 병사들도 감히 더 진입하지 못했다.

"어떡합니까."

"저기 들어가기는 좀 그런데요······."

병사들이 자신없는 표정을 했다.

나는 안도했다.

여기, 구석에 숨겨져있는 석화된 마물들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마물들이 풀려날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내게는 기회였다.

"흐음."

그러나 경비대장은 과연 지독했다.

그는 횃불을 들어 불꽃이 일렁이는 방향을 바라봤다.

"역시 바람 구멍은 있었구만. 동이 터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면······."

"기름병을 꺼내라!"

그러자 병사들이 희희낙락해서 허리춤에 매고있던 갈색 유리병들을 들었다.

내 형제자매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곧바로 상황을 눈치챘다.

"불 붙이면 바로 물러난다. 던져!"

갈색병 수십개가 일제히 하늘을 날았다.

챙그랑 챙그랑 요란하게 떨어지며 고약한 기름을 사방에 흩뿌렸다.

그 냄새에 뱀들이 질겁했지만, 진정 두려워할 것은 냄새따위가 아니었다.

"불 붙여!"

병사 몇이 횃불을 던지고.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집이, 불타오르네.

FLY HIGH!

004.

불지옥이다.

죽으면 간다는 지옥이 이만큼 끔찍할까.

저 경비대장은 정말 끔찍한 녀석이었다.

바람의 방향을 읽어서 화공이라니, 지가 뭐 제갈량이냐고.

남동풍이 불지는 않았지만, 정말 동굴 안에는 바람구멍이 있었던 것 같다.

불길은 땅에서 일렁이는 정도가 아니라 열풍을 일으키며 하늘로 솟았다.

병사들은 얼굴을 가리며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동굴 입구로 물러나서 지킨다!"

경비대장은 그렇게 말하며 부하들을 통솔했다.

혹시나 한 마리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몸에 불이 붙은 형제자매들은 순식간에 오그라들어죽었다.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꼼장어같다.

그러면 불길에서 벗어나 있는 나는 멀쩡한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열 내성의 숙련도가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열 내성lv1을 얻었습니다.」

그저 열기만으로 비늘이 허옇게 그슬리기 시작했다.

생존본능이 이 불길을 피해 도망치라고 경고했다.

어서 축축한 바위틈으로 숨으라며 비늘이 떨렸다.

*「생존본능 lv1을 얻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

하지만 나는 생존본능의 경고를 따르지 않았다.

기름을 따라 불이 번지고 있는데 바위 틈에 숨어봤자 노릇노릇 잘익은 뱀구이가 될 뿐이다.

나는 그 대신 물러나는 경비대장을 노려봤다.

네 얼굴 기억했다.

이 원한 잊지 않으리.

여유는 거기까지였다.

이러다가 정말 뒤지겠다.

내가 여태까지 기다린 것도 돌이 된 마물의 석화가 어느정도 풀려야 했기 때문이다.

놈들의 혈색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아직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조금씩 움찔거렸다.

이제는 살에 내 이빨도 박히겠지.

내가 하려는 건 분명 미친짓이었다.

하지만 미친짓이라도 안하면 불지옥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나는 활짝 벌어져 있는 혼 재규어의 아가리로 직접 기어들어갔다.

혼 재규어의 덩치는 황소보다 크다.

놈은 어머니를 보고 겁에 질려 포효했는데,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즉, 육식동물 특유의 광활한 목구멍이 활짝 열려 있었다는 것이다.

뾰족뾰족한 이빨 사이로 들어가자 혀가 나왔고, 저 안에 달랑거리는 목젖이 있었다.

앙~

목젖을 물었다.

석화가 어느정도 풀려서 이빨이 푹 파고 들었다.

이렇게 되면 목젖이 뜯어지지 않는 이상 나는 혼 재규어의 입안에 숨어있을 수 있으리라.

자 가라 혼 재규어!

마침내 석화가 풀렸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목젖이 물린 마물이 시작한 것은 구역질이었다.

"켁! 케게겍! 퀘에엑!"

나같아도 목젖에 뭐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으면 죽을만큼 토악질을 해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실뱀이라고 부를만한 정도로 작은 놈이다.

내가 평범한 동물이었으면 옥죄이는 목구멍의 괄약근에 짜부가 되든, 켁! 하고 튕겨나오든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씹지 않은 고기를 꿀꺽꿀꺽 삼켜대는 광활한 목구멍으로는 나를 토해낼 수 없었다.

나는 꿋꿋하게 놈의 목구멍에 매달렸다.

비수면 위내시경이라고 생각해줘 재규어야.

멈춰! 구역질 멈춰!

"구웨에엑!"

아악! 위산 공격을.

놈은 뱃속에 있는 쓴물을 게워냈다.

불에 그을려 쓰라린 피부를 혼 재규어의 위액이 휩쓸고 지나갔다.

무척이나 아프다. 조금 더 당했으면 고통 내성이 올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계속 매달려 있었다.

그제야 혼 재규어도 지금 자신이 불바다속에 있음을 눈치챘다.

마물이고 사람이고 불을 무서워하는 것은 같았다.

놈의 옆에서 함께 석화가 풀렸던 가이거 호그가 우렁차게 울며 달리기 시작했다.

"꿰에에엑!"

"크허엉!"

두 마물이 마구 달린다.

본능적으로 불을 피해, 저 바깥에 도망치는 병사들이 있는 방향으로.

놈들은 엄청나게 빨랐다.

달리는 전차에 올라탄 것처럼 끝내주는 탑승감이었다.

두 마물은 발바닥에서 꿈틀대는 뱀들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퍽퍽 형제자매들을 짓밟으며 달려갔다.

혼 재규어가 괴로운 듯 입을 벌리고 달렸기 때문에 나는 그 광경이 모조리 보였다.

역시 내 형제자매들은 파이팅이 있었다.

지나가는 가이거 호그와 재규어의 다리를 본능적으로 깨문 것이다.

두 마물들은 형제자매들을 털어내지도 못하고 계속 달렸다.

수십 마리 정도가 마물의 몸에 붙어 같이 빠져나갔다.

다만 형제들과 나의 탑승환경은 퍼스트클래스와 이코노미 간의 차이정도가 있었다.

불길에 그을리고 달리는 기세에 이빨이 부러져 튕겨나가는 것들이 다수였다.

잘있어 형누나들.

마침내, 혼 재규어는 동굴 입구까지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경악했다.

"으아아악!"

"저, 저거 뭐야!"

여기서 허겁지겁 기어나오는 뱀들이나 잡으려고 했으리라.

갬비슨을 비롯한 무장도 그저 뱀을 잡기 위한 수준이었다.

심지어는 창 대신 바닥을 기는 뱀을 잡기 위해 삽과 괭이를 든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집채만한 마물 둘이 튀어나왔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괴물이다아아!"

병사들이 조금 담이 작은 것 같기는 하다.

그렇게 외친 병사의 뒤통수를 경비대장이 퍽 쳤다.

"이 새끼야. 자세히 봐라. 저건 그냥 마물이야."

"아, 뱀이······ 아하."

마물이나 괴물이나 크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나는 병사들의 반응을 보고 눈치챘다.

혼 재규어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수십마리의 뱀을 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경악스러울것도 당연했다.

마음 같아서는 입안에 있는 나도 까꿍하고 얼굴을 내밀어주고싶구만.

물론 그러다가는 화가 난 혼 재규어에게 앙 하고 물릴 것이다.

그러고보니 혼 재규어의 입에서 나갈때가 문제다.

'빌어먹게 신세 많이졌습니다!', 하며 인사하고 나갈 수는 없을테니.

어쨌든.

"대열 유지이이!"

여기서는 혼 재규어의 분투를 바랄수밖에.

"창 들어엇!"

그리고 내 숙적인 경비대장은 끝까지 맡은바 소임을 다했다.

그의 호령에 병사들이 얼른 창을 치켜들었다.

창을 든 병사 여럿이면 어지간한 맹수도 때려잡을 수 있다.

그것은 마물을 상대로도 마찬가지.

"꿰에에엑!"

용감한 가이거 호그가 먼저 병사들 사이로 돌진했다.

한국의 군사분계선 근처에 산다는 초거대 멧돼지보다 큰 멧돼지가 창에 꿰뚫렸다.

퍼버벅!

운 나쁜 병사 두명이 마치 차에 치인 듯 날아갔지만 가이거 호그의 몸에도 무려 창 다섯 개가 꽂혔다.

튼튼한 마물이라도 어쩔 수 없다.

놈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대가리를 땅에 처박았다.

"방심하지 마랏! 한 놈 더 온다!"

경비대장의 호령과 함께 혼 재규어가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놈의 목젖을 꽉 붙잡고 있는 것뿐.

마음 속으로 불안이 퍼졌다. 병사들의 포위망이 생각보다 촘촘했다.

"크허어엉!"

맹수의 포효를 목구멍 안에서부터 듣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 머리뼈에 붙어있는 내이(內耳)가 진동하며 전신이 짜릿했다.

그리고, 몸이 붕 떴다.

무중력상태.

혼 재규어는 높이 뛰어오른 것이다.

저 아래에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혼 재규어의 각력은 그들이 상상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나는 경비대장과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쿠웅!

족히 건물 하나는 뛰어넘었을만한 도약이었는데, 착지는 가벼웠다.

혼 재규어는 꼬랑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동쪽의 숲으로.

깊이 우거져, 감히 인간들이 쫓아올 수 없는 태고의 수림으로.

······그럼 이제 여기서 어떻게 나가냐.

재규어의 축축하고 뜨거운 입냄새를 맡으며 나는 고민했다.

* * *

시자 수림에는 수많은 짐승이 산다.

그중에는 마성이 깃든 마물도 있었고, 평범한 짐승들도 있었다.

기상천외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이곳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독특한 일이 벌어졌다.

원숭이며 토끼 같은 산짐승들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지켜봤다.

"쿠웽 쿠에에엥!"

혼 재규어.

시자 수림에는 없고 저 대삼림까지 진입해야만 볼 수 있는 위험한 마물.

이 시자 수림에는 혼 재규어를 해칠만한 위협이 없었다.

그런 혼 재규어가 지금 아주 개발작 중이었다.

"쿠웩! 켁!"

어지간한 나무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높게 뛰어오르기도 했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쿵!

그러다가 나무에 대가리를 박았다.

놀란 산새들이 날아오르고 원숭이들이 끽끽대며 도망쳤다.

"크허어엉!"

놈은 거칠게 포효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그러자 나무가 우지끈 부러져 넘어갔다.

혼 재규어는 이미 피투성이었다.

누군가에게 공격받은 것은 분명 아니었고, 제 풀에 날뛰다가 발톱이 부러지고 얼굴에 상처가 난 것이다.

지금 놈이 있는 곳은 시자 수림과 대수림의 경계였다.

숲에 국경선이 있는 것도 아니니, 위험한 마물들이 늘어나고 시자나무가 드물어지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절벽이 빙 둘러져 움푹 파여있는 분지 앞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이었다.

혼 재규어는 숨이 콱 막힌듯 켁켁댔다.

"켁, 케엥!"

거칠게 기침을 하더니 어느 순간 그것조차 하지 못하게 됐다.

놈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마침내 숨통을 막은 것인가.

역시 숲을 활보하던 맹수답게, 혼 재규어는 죽기 직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놈은 갑자기 마구 달리더니 절벽 위에서 몸을 던졌다.

미친 재규어가 발작하더니 마침내 투신 쇼를 선보인 것이다.

구경하던 산짐승들도 슬그머니 나와 혼재규어가 뛰어내린 곳을 살폈다.

절벽은 충분히 높았다.

혼 재규어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으리라.

* * *

끄아아아악!

내적 비명을 질렀다.

불타 죽기 vs 혼 재규어한테 잡아먹혀 죽기.

더 싫은 것을 고르자면 이제는 후자가 되었다.

죽어! 죽어어!

마음속으로 그리 외쳤다.

당연하겠지만 저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길과 병사들을 뚫고 빠져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 혼재규어의 입에서 얌전히 빠져나오기는 정말 불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필사적으로 놈의 목젖을 물고있는 것뿐이었다.

목젖을 놓친다면 내게 다가올 운명은 오직 둘 중 하나뿐이었다.

잘근잘근 씹어먹히거나, 씹지도 않고 생으로 삼켜지거나.

*「고통 내성lv2이 고통 내성 lv3가 되었습니다.」

*「숨참기lv2이 숨참기lv3가 되었습니다.」

*「물어뜯기lv2가 물어뜯기 lv3이되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버텼기 때문에 스킬의 숙련도는 무지막지하게 빨리 올랐다.

누가 먼저 지치냐의 싸움이다.

정신력에 스탯 20을 몰빵한 것 하나는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다.

나는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내가 선택한 뱀의 삶······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러나 대가리를 흔들며 켁켁대는 놈의 발악에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마침내, 내 정신도 흐릿해지고 턱에 힘이 빠진 순간이었다.

놈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실뱀이라고 부를만큼 작은 나는 놈의 기도로 쑥 빨려들어갔다.

"케엥!"

승기가 완전히 내게 넘어온 순간이었다.

더 이상 놈은 나를 해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놈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잠입했다.

폐 속이었다.

나는 순대 먹을때마다 아줌마한테 허파 많이 달라고 요청하던 놈이다.

물어뜯기를 마구 시전했다. 뜨거운 피가 내 주변에 고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물어뜯기의 숙련도가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결국, 폐에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몸이 부웅 떠올랐다.

어, 이거.

익숙한 감각.

상어가 엉덩이를 물어뜯을듯한 아찔함.

롯데월드 자이로드롭 탈때 느끼는 그거였다.

낙하감이다.

이 미친 재규어가 어디서 몸을 던진 것이다.

적을 끌어안고 절벽에 몸을 던진 논개 정신인가.

높은 곳이었는지 추락은 꽤나 길었다.

아무리 튼튼한 마물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삼겹살 일인분도 안 될정도로 가볍고 여기는 푹신한 뱃속인걸.

쿠웅!

그럼에도 충격은 별똥별이 보일 정도로 거셌지만.

나는 살았다.

물론, 재규어는 살아남지 못한 것 같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업의 향연 덕택이었다.

이거 뭐 김X호 소설이냐고.

달콤한 레벨업의 맛

아아 달콤하다.

이것이 레벨업의 맛.

레벨 3인 내가 단번에 일곱 번의 레벨업을 했다.

이게 저번에 레벨이 한번에 두 개나 올라갔을때 느꼈던 거지만, 레벨업을 할때는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어떤 느낌인가 하니,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그는 느낌과 비슷하다.

그런데 레벨이 일곱개나 갑자기 올랐다.

굳이 비교하자면 엄동설한에 맨몸으로 방치되었다가 온천을 발견한 느낌.

얼어죽기 직전에 뜨끈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몸이 후끈해질 때쯤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는 느낌.

그렇게 생각하니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

내가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올까.

괜히 우울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예전에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랬다.

운좋게 목숨을 건졌다. 두번째 삶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사실, 낙하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뼈 몇개가 부러졌음에 틀림없다.

다행인 것은 체감할 수 있는 속도로 몸이 치료되고 있다는 것.

레벨업 덕분인가.

하긴, 저번에 레벨이 두 개나 오른 뒤로 몸이 조금 커진 느낌이 났다.

지금도 그렇다. 혼 재규어의 허파 내부는 내가 빠르게 기기를 연습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과장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급격한 레벨업으로 육체의 개변이 지연됩니다.」

*「갑자기 얻은 것은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영양을 보충하고 힘을 비축하세요.」

어라.

확실히, 몸의 성장이 멈췄다.

레벨업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몸이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보다 신경쓰이는게 따로 있었다.

뭔가 목소리가 인간적이었다는 말이지.

대부분의 경우 AI가 하는 말처럼 삭막하게 들렸는데 방금은 아니었다.

혹시 거기 사람있습니까.

그렇게 물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기다려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는 몸을 꿈틀대보았다.

잘 움직인다.

내가 가진 갈비뼈 개수가 수백개는 될 것이고, 그중 최소한 수십개는 부러졌던 것 같은데 통증이 사라졌다.

그리고 너덜너덜했던 턱도 붙었다.

사실, 기도로 빨려들어갔던 것은 내 계획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때 혹사당했던 턱이 빠져버린 것이다.

운을 평균으로 설정했던것도 잘한 일 같았다.

그렇게 치면 스탯을 잘못 분배한 것은 또 아닌 것 같다는 말이지.

······아니 애초에 뱀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위험인가.

꼬르르륵.

뱃속에 든 거지가 아우성이다.

박쥐를 통째로 삼키고 든든했었는데 지금은 배고파 죽을것 같다.

이 허기는 확실히 비정상이었다.

뭐 문제는 없지.

지금 나는 재규어의 몸속이다.

그 말은, 천장, 벽, 바닥, 못 먹는게 없다는 것이다.

나는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군침을 삼켰다.

잘먹겠습니다!

물어뜯기!

살맛이 훌륭하다. 조금 질기긴 하지만 감칠맛이 있다.

안간힘을 써서 목젖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일까. 물어뜯기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다.

아무리 내가 평범한 뱀이 아니라고 하지만 본디 뱀은 살아있는 동물을 한 입에 삼켜 소화하는 방식으로 식사를 한다.

이렇게 살을 뜯어 먹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스킬 덕택이다.

생각해보면 스킬이란건 엄청 대단하단 말이야.

만약 '비행'같은 스킬을 배울 수 있으면 나도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것 아닐까.

물론 상상이 되지는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날아보려고 해도 비행 스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런 상상을 하면서 계속 배를 채웠다.

혼 재규어가 강하기는 한 것 같았다. 살이 질기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씹고 삼키기를 반복했다.

어렵고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맛있다.

내가 어렸을때는 반찬투정을 뒤지게 해서 매일같이 엉덩이를 맞았다는데,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장하다 우리 아들하고 기뻐하시지 않을까.

적어도 방에 처박혀서 백수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좋아해줄지도.

음, 확실히 맛있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메두사맘이 토해준 고깃덩어리도 먹을만했던 것을 보면, 뱀이 되고나서 입맛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잘 먹는 것도 재능이다. 지금 정도의 재능이라면 먹방을 해도 될 정도다.

나는 무아지경으로 고기를 먹어치웠다.

지난번에는 박쥐 하나를 먹고 배가 불렀는데, 지금은 그 세 배를 넘게 먹었는데도 계속 들어갔다.

그러다가 이빨이 부러졌다.

와드득!

악!

단단한 뭔가를 씹어버린 것이다.

이빨 세개 정도가 한번에 나갔는데 이거 괜찮나.

아니, 나는 아직 생후 2주도 안 됐으니 지금 나있는 것은 유치 아닐까.

한 번 빠지면 다시 안 나는 영구치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임플란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이게 뭐야.

내가 씹은 것은 뼈가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혼재규어의 심장 어림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그곳에 빛나는 돌 같은게 있었다.

요로결석인가.

아니, 지금 나는 심장 안에 있으니 요로결석은 아니겠지.

결석을 앙 깨물었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나라도 입맛이 떨어진다.

비범하게도 빛을 흩뿌리는 도토리만한 돌.

따스한 열기 같은 것도 느껴진다.

저절로 빛이 나는 방사성 결석이 아니라면, 이것도 판타지적인 무엇이겠지.

마물의 몸속에 있으니까 마석이라는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고기를 먹었을때와는 또 다른 식욕이 들었다.

이것을 먹으면 더 강해질 수 있다.

분명한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요로결석이 아니길 바라며.

와앙.

물어뜯는 대신 한입에 삼켰다.

다행히 목소리가 내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해줬다.

*「3등급 마석을 섭취했습니다.」

삼등급 마석이란다.

좋은 건가!

고기나 수능은 1등급이 좋은 건데, 사이오닉 에너지는 12등급이 제일 높은 거다.

뭐 혼재규어가 얼마나 대단한 마물인지 모르겠으니 알 수가 없네.

한 번 상태창을 확인해보자.

──────────────

[리틀 화이트 스네이크 lv10(-)]

[특성]

[불굴], [정진]

[스킬]

[암시야 lv6], [독니 lv3], [빠르게 기기 lv3], [숨참기 lv4], [포식 lv3], [물어뜯기 lv4], [독 내성 lv2], [출혈 내성 lv2], [고통 내성 lv4], [열 내성lv2], [생존본능 lv3]

[상태]

[성장 중], [마력 포화], [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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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별 것 없었던 상태창이 꽤 풍성해졌다.

드디어 lv10을 달성했는데, 옆에 (-)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뭐 육체의 개변이 지연됐다는 말이 이것 같았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소령(진), 대위 (진)같은 거 아닐까.

그래도 상태창은 내가 헤쳐온 분투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숨참기, 고통내성, 물어뜯기가 특히 레벨이 많이 오른 것을 보라.

얼마나 고통스러운 여정이었는지 알 수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은 생존본능 lv3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할텐데, 그것을 본능인 뭔가뭔가로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정말 생존본능을 따라가야되는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동물은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있지만, 어쩔때는 살아남기 위해 높은 나무를 기어올라야 할 때가 있을테니.

[상태]라니, 이건 또 못본건데.

상태창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라도 되는 걸까.

나는 성장중이고 졸음을 느끼고 있었다.

마력 포화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마석을 먹어서 그런 것 같기도하고.

어쨌든, 마석을 먹자마자 신비하게도 나를 괴롭혔던 허기가 가라앉았다.

하아, 나른해진다.

내 적응력은 대단한 것이, 이 혼 재규어의 몸안이 썩 나쁘지 않았다.

피랑 체액이 조금 끈적거리고 냄새가 났지만 장점도 있다.

위아래좌우사방천지가 음식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뱃속에 있는 동안에는 나를 괴롭힐만한 위협도 없다.

여기서 조금 쉬는 것도 좋겠다.

이전에 그랬듯,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가뿐해질 것 같았다.

조금 눈을 붙여볼까.

그렇게 나는 또 한번 수마에 몸을 맡기······지는 않았다.

조금 불안한데.

감았던 눈을 떴다.

이게 옳은 선택일까.

이 따듯하고 어두운 곳은 내게 본능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바깥은 어떤 환경이지? 혼 재규어가 추락했던 곳이 사실 위험한 곳이었다면?

죽은 동물의 시체에는 청소부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벌레 정도 꼬이는 것은 문제 없었지만 혹시 혼 재규어만큼이나 위험한 마물이 나타나면 큰일이다.

무언가가 혼재규어의 사체를 통채로 삼킨다면, 나는 페레로로쉐속의 헤이즐넛처럼, 아니면 김밥 속의 단무지처럼 먹는 즐거움이 될것이다.

이러한 불안도 어쩌면 생존본능lv3의 작용일지도 모르지.

일단 나가보자.

나는 이리저리 꿈틀거린 끝에 나가는 길을 찾았다.

혀를 쭉 내밀고 죽어있는 혼 재규어의 입을 통해 나왔다.

와 이거 아주 묵사발이 나있네.

혼재규어가 떨어진 절벽은 아주 높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이곳은 움푹 파인 분지지형이다.

그리고 혼재규어는 평평한 땅 위에 노출되어 있었다.

위험한 상황인지 아닌지 조금 헷갈린다.

저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버려두고 가기는 조금 아까웠으니, 나는 일단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스르륵 기어서 근처의 수풀속으로 들어갔다.

둥-

어라.

땅바닥에 붙어있는 복부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뱀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법에는 시각 말고도 수단들이 있다.

특히, 진동을 감지하는 것은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듯했다.

두두- 두-

무언가가 땅속을 움직이고 있는게 명확하게 느껴졌다.

나는 우선 얼른 단단한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동은 더욱 거세졌다.

무언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침묵했다.

아, 내 바로 아래를 지나갔다.

바위 아래를 지나간 무언가가 향한 곳은 바로 혼재규어의 사체가 있는 곳.

그리고 지면이 불쑥 솟았다.

갑각이 달린 다리같은 것이 네 개가 솟더니.

콰작.

혼재규어의 사체를 껴안고 그대로 땅 속으로 사라졌다.

쿠구구구구구-

그리고 놈은 수확물을 챙겨서 사라졌다.

······생존본능님 감사합니다.

나타난 마물이 어떤 놈인지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분명 혼재규어보다 크고 강력해보였다.

저런놈이 땅속에 기어다니다니 여기 괜찮은 건가?

나는 한참 동안 바위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놈이 완전히 떠난 것을 확신하고 나서야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잠 잘 곳을 찾아야겠다.

이제 맨땅에서 자고싶은 마음은 죽어도 들지 않았다.

해가 지기 직전, 나는 몸을 숨길 수 있을만한 바위틈을 찾아냈다.

그 안에 들어간 뒤, 흙을 몸에 뿌려서 위장했다.

그놈, 설마 바위채로 삼킬 수 있지는 않겠지.

오늘은 악몽을 꿀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긴장한채로 눈을 감았다.

* * *

악몽은 꾸지 않았다.

내 정신력은 끝내주게 튼튼하니까.

오히려 좋은 꿈을 꾸었다고 할 수 있는데, 잠에 들자마자 상태메시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레벨10을 달성하여 진화할 수 있습니다.]

[진화를 하시겠습니까?]

당근빳다죠!

구해줘 홈즈

진화.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다.

내게 진화가 가능하냐 아니냐는 아주 중요했다.

평생 이 쪼만한 흰 뱀으로 살아야 하냐 아니냐가 달린 것이다.

그렇다고 메두사맘처럼 못생긴 인면 거대뱀이 되고 싶은 건 당연히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사람 비슷한 것으로 진화하고 싶은데.

아니면 크고 아름다운 뱀으로라도.

그래, 그러면 어떤 것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선택지 같은 게 있겠지? 반드시 그래야한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선택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뭐야 이거.

어떤 것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가 나와있지 않다.

대신 부가 설명같은게 있기는 했다.

──────────────

[※진화를 위해서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

그렇구나, 어떤 조건이 필요하니.

피카츄가 라이츄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번개의 돌이 필요했다.

나도 그런 게 필요한 걸까.

──────────────

-수면을 취할 것.

──────────────

음음, 내가 잠에 든 뒤에 이런 메시지를 본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잠을 자야 키가 크고 진화도 하는 것이다.

──────────────

-1등급 마석을 섭취할 것.

──────────────

어라.

1등급 마석을 섭취해야 진화할 수 있다는 말.

내가 먹은게 마석이 맞다면, 이로써 나는 판단할 수 있었다.

마석의 등급은 그 숫자가 높을 수록 귀한 것같다.

그게 아니라면 1등급은 최고 등급의 마석일텐데, 설마 나같은 실뱀이 진화한다고 그런 마석이 필요하지는 않겠지

혼재규어의 마석이 3등급. 놈만 해도 내가 정정당당히는 결코 싸워 이길 수 없는 마물이었다.

조금 아깝네.

그러면 내가 먹었던 마석 역시 귀한 것이겠지.

1등급 마석만 있으면 되는 건데 3등급 짜리를 먹어버린 것 아닌가.

내가 초등학생 때 집에 있던 소고기를 라면에 넣어먹은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한테 귀한 한우를 라면에 처넣었냐고 배를 걷어차인 적이 있다.

꼭 그때랑 비슷하군 음음.

하지만 그때 먹은 라면은 기깔나게 맛있었고, 나도 진화할 수 있게되었다.

그러면 되는거지.

진화를 시작해볼까.

일단 하고나면 어떻게 진화할 지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또다시 고민했다.

아까 혼 재규어의 사체가 맞이했던 최후가 떠올랐다.

내가 놈의 몸속에서 한숨 자는 것을 선택했다면 함께 땅속으로 끌려갔겠지.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래 ,일단 진화는 좀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서 시도하는게 좋겠다.

게다가 그런 생각을 하니까 어쩐지 몸이 따끔따끔했다.

이게 바로 생존본능의 발현인가.

아니, 진짜로 따가운데.

아, 악!

시발!

눈을 뜨자마자 욕이 튀어나왔다.

무언가 내 몸에 붙어 있었다.

밤송이 만한 그 동물은 회색 털을 가지고 있었고, 털없이 붉은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 쥐였다.

미친놈의 쥐새끼가 뱀 무서운줄 모르고 뱀님한테 살을 부비고 있나.

그 뻔뻔스러운 낯짝을 확인하려던 나는 경악했다.

분명 쥐라고 생각했는데, 뭐 이리 좆같이 생겼어.

놈의 눈은 불룩 튀어나와 있었는데, 마치 곤충의 눈 같았다.

주둥이는 길쭉한 돌기처럼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주둥이의 끝이 내 몸뚱이에 박혀 있었다.

쭉쭉, 내 피를 빨아먹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놈의 이름을 살폈다.

──────────────

[모스키토 랫 lv3]

[특성]

[흡혈귀]

[스킬]

[흡혈 lv2], [독침 lv3]

──────────────

으아아아악!

이런 지옥같은 생물이 있을 수 있나.

무려 모기와 쥐를 합쳐놓은 마물이었다.

게다가 그 독침을 내 옆구리에 박아넣고 있다.

살의가 솟구쳤다.

내 독니 맛도 보아라.

나는 순식간에 놈을 물어챘다.

씹을 것도 없이 꿀떡꿀떡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

놈이 빼앗은 피는 그렇게 다시 회수했다.

생각해보니까 바로 삼켜서 독니 맛도 제대로 못보여줬군.

어쨌든, 이 정도 마물은 내가 어떻게 해치울 수 있는 것이다.

뿌듯하기 그지없다. 돌아가신 메두사맘도 아마 나를 자랑스러워 하겠지.

앗, 한마리가 더 있었다.

놈은 내가 노려보자 스르륵 도망쳤다.

진짜 짜증나는 생물이다.

역시 진화를 곧바로 하지 않기를 잘했다.

저런 흡혈쥐 걱정은 안해도 될 은신처부터 찾아보자.

모스키토 랫은 내 한끼 간식이 되었지만 놈이 남겨둔 상처가 간지러웠다.

놈에게 독침lv3이 있기는 했지만 저번에 형한테 물린 것보다는 덜 아프다.

독 내성이 있으니 걱정 없겠지.

피가 조금 흘렀지만 꾹 참고 바위 틈에서 나왔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이제부터 내 집마련 프로젝트 시작이다.

이 드넓은 분지에 내 한몸 뉘일 곳 없으랴.

나는 찬바람을 피하고 몸 숨길 곳을 찾아서 기어갔다.

* * *

먼 옛날 선비들은 안분지족하는 삶에 대해 노래하곤 했다.

그 선비들은 구름을 이불삼고 달빛아래 누워서 잠을 청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했나.

교과서에서 그런 시조들을 많이 읽었다.

나는 도저히 그들과 같은 경지에 오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그 시조들 지은 사람들 다 높은 관리였잖아.

역시 한칸짜리 초가집에서 살아도 행복할수 있다 어쩌고는 다 기만질이었네.

그러니까 나도 좋은 집을 찾고 싶었다.

내집마련의 꿈을 위해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위이이이잉-

쓸만한 바위 틈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서 벌들이 튀어나왔다.

쓸만하지 않은 바위 틈을 골랐으면 괜찮았을텐데. 모두 내 욕심이다.

내가 벌들을 피해 숨은 곳은 수풀 안에 뻥 뚫린 구멍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친 것은 여덟 개의 붉은 눈알이었다.

아니 거미도 땅 속에 사나?

뱀도 후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니나니나니고릴라다~

마음 속으로 엘리제를 위하여를 흥얼거리며 천천히 물러섰다.

벌에 쏘인 곳이 퉁퉁 부어서 쓰라리다.

왜 이렇게 독을 가진 마물이 많냐.

독 내성의 레벨이 하나 올랐다.

그게 없었으면 이미 퉁퉁 불어 죽었을 것이다.

······이거 문제가 크다.

'안전하고 좋은' 은신처란 무척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괜찮은 곳은 이미 전부 주인이 있었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에게는 늘 애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베스트중 베스트는 동굴인데, 그곳야말로 가장 강한 마물들이 집으로 삼고 있었다.

거대한 아울베어가 동굴에서 튀어나왔을때 느낀 공포감이란.

가장 흔하고 찾기 쉬운 것은 바위 틈.

그러나 바위틈은 안전하지 않았다.

아잇 씨 여기도 있다!

입을 벌리고 사아악!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멀찍이서 기웃거리던 모스키토 랫이 도망쳤다.

저 새끼들이 내 가장 큰 문제였다.

쥐도 끔찍한 생물이고 모기는 최악의 벌레였는데, 무려 그 좆같음을 합쳐놓은 품종이다.

조금 노출된 곳에서 잠을 자려고 하면 저놈들이 와서 피를 쪽쪽 빨고갔다.

발바닥에 솜털같은 것이 나 있어서 미리 알아채지도 못한다.

그리고 저 주둥이에서 분비하는 독.

그독은 내 피부를 마취시키고 피의 응고를 막았다.

하루에 세 대나 물린 적이 있는데, 그날은 정말 과다출혈로 죽을 뻔했다.

저놈들이 없는 곳을 찾는게 내 목표였다.

그리고 꼬박 삼일이 지나, 나는 기가막힌 장소를 찾아냈다.

괜찮은데 여기!

아니, 내가 찾아낸 장소중에 제일 마음에 든다.

언젠가 벼락이 내려친 적이 있는 지역 같다.

말라 죽은 나무 몇 그루가 모여 있었다.

나뭇잎이 없이 앙상했는데, 뻥 뚫린 옹이구멍들이 보였다.

죽은 나무들은 저렇게 속에 빈 공간이 있는 경우가 있다.

적당히 습하며 따듯하고, 나무를 기어오를 수 없는 위협요소에서 안전하다.

즉. 씹스키토 랫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뜻이다.

씹스키토 씹은 나무를 탈 수 없을테니.

잘있어라 씹씹키토 씹!

후우, 흥분을 가라앉히자.

여태까지 경험으로 배운 것들이 있다.

먼저 이곳이 정말 좋은 은신처인지 살펴봐야 했다.

나는 고목들의 주변을 살폈다.

위험한 조류 마물의 둥지는 없는지.

어디 말벌집같은게 있는지.

나무를 타고 오르는 마물의 발톱자국이 있는지.

체크리스트를 전부 확인한 결과.

두구두구두구, 최고의 상급지가 맞다.

거의 한남동 고급빌라촌 수준이었다.

나는 가장 큼지막한 고목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위험한 선객이 살고있으면 도루묵이다.

제발 아무도 안 살거나 내가 이길 수 있는 녀석이 상대면 좋을텐데.

고목의 중간에 큼지막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고개를 그 안에 들이밀어 보았다.

와! 아무도 없다.

고목 안에는 쾌적하고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살던 자취방보다 좋은 것 같다.

문제는 아무도 없는 대신 죽어있는 모스키토 랫 한마리가 있다는 것인데.

저 모스키토 랫이 날수 있는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물고 왔을 것이다.

끼리릭, 끼릭.

그리고 괴상한 소리가 저 나무 위에서 울렸다.

아, 집보러 왔는데 주인분이 계셨네.

집주인은 큼지막한 지네였다.

내 몸의 두께가 천하장사 소시지보다 조금 두꺼운데, 저 지네의 몸통은 족히 아기 팔뚝만했다.

반사적으로 두 눈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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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티스 왕지네 lv6]

[특성]

[온화함], [장인]

[스킬]

[독니lv8], [은밀lv3], [빠르게 기기lv2], [갑각lv4], [찢기lv5]

[상태]

[배부름], [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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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였다!

상태창이 보인다는 것은 상대의 수준이 해볼만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보기에는 무시무시해보이지만 생각보다 약한 걸까.

특성에 온화함 따위가 있으니까 그럴지도.

장인은 또 뭐야, 스킬은 무섭게 찢기 같은게 들어있으면서.

잠깐, 온화함······?

마물에게는 처음보는 특성이었다.

놈은 아주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 멈춰서서 더듬이를 꿈틀꿈틀 움직였다.

마치 나를 탐색하려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듯 천천히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지네는 꼬리의 흔들림에 맞춰서 자기 더듬이를 까딱까딱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꼬리 흔드는 것을 멈췄다.

지네 역시 더듬이 흔들기를 멈췄다.

음, 괜히 온화하다는 게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다른 마물처럼 나를 잡아먹으려 들지는 않았으니.

그렇다면 이제 친구지?

내가 가만히 있자 왕지네는 흥미를 잃은 듯했다.

천천히 자신의 집, 고목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런 친구의 옆구리를 깨물어서 선빵을 날릴까 고민했다.

독 내성이 없는 것을 보면 해볼만할지도 모른다.

저 집이 너무 좋아보이는걸.

내 특성에는 비겁함 같은게 숨겨져 있을지도.

하지만 나는 그것을 포기했다.

상태에 적혀있던 '신혼'.

그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무 위쪽에서 조금 더 큼지막한 지네 한마리가 또 튀어나왔다.

────────────── 

[레드티스 왕지네 lv7]

[특성]

[온화함]

······

──────────────

두분 금슬이 좋으시네.

생각해보니까 원래 지네는 암수 한쌍이 같이 다닌다고 했다.

난 일단 그들이 사는 나무에서 내려왔다.

문득 번쩍 떠오르는게 있다.

······아, 그래서 설마.

이 근처에는 그 흔하던 모스키토 랫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저 지네부부 덕택이 아닐까.

잠시 고민했다.

다른 곳을 찾아볼까, 아니면 이 근처에 머물러볼까.

선택이 쉽지 않았는데.

우르릉-

불길한 천둥소리가 내 선택을 재촉했다.

하늘을 보니 먹장구름이 우중충했다.

큰일이다. 난 비를 맞으면 안된다.

냉혈동물은 자칫하면 얼어죽는다고.

떠난다는 선택지는 없는 것 같다.

여기는 지네 부부의 집 말고도 괜찮은 고목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에서 괜찮은 구멍을 찾았다.

딱 내가 간신히 들어갈만큼 작은 옹이구멍이 있었다.

속에는 또아리를 틀고 누울만큼의 공간이 있었는데, 저 지네 부부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입구가 작다.

이정도면 괜찮겠지.

그래도 옆집에 머무는데 아무런 인사도 없는 것은 좀 그럴 터.

나는 시루떡 대신 근처로 나가 모스키토 랫 한마리를 잡아왔다.

그것을 지네부부가 사는 나무 아래에 놔뒀다.

이사떡이라고 생각하세요.

내 새 집으로 올라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네 부부중 남편이 열심히 모스키토 랫을 옮기고 있었다.

괜히 마음이 훈훈해진다. 이게 이웃간의 정 아닐까.

절대 저 지네부부가 배고파지지 않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우르르릉!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비오는 소리 덕택에 잠이 금방 들었다.

그렇다면.

진화의 시간이다!

* * *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

진화를 하겠냐는 물음에 당당히 그러겠다 답했다.

그러자 그제야 진화의 선택지가 나왔다.

다행히도 진화트리가 고정되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떠오른 선택창을 읽어보았다.

──────────────

[리틀 화이트 스네이크lv10]에서

1. [화이트 스네이크]

2. [리틀 그린 스네이크]

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

······이거 뭐야 시발.

선택지는 두개.

그래, 나는 '리틀' 화이트 스네이크였으니까 진화 선택지 중에 그냥 '화이트 스네이크'가 있을 것은 예상했다.

덩치를 키우는 것은 중요했다.

체급이야말로 싸움의 기본 아닌가.

지금의 나는 작아도 너무 작았다.

모스키토 랫 이상의 동물도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크기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화 선택지 중에 있는 '리틀 그린 스네이크'는 뭐냐고.

저건 내 형제자매들의 종족명이다.

그러면 사실, 내가 그들보다 진화가 덜된 열등종이었다는 것인가.

거짓말이야.

이거 다 거짓말이야!

나는 나 혼자 흰색인게 특별하고 좋은 것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진화에 대한 기대감이 팍 꺾이던 순간이었다.

목소리가 내게 희망을 주었다.

*「진화의 특수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새로운 진화 트리가 해금됩니다.」

아자!

특수조건! 내가 뭘 했지?

내가 해낸게 분명 있었다.

──────────────

※특수조건: 3등급 이상의 마석 섭취

──────────────

아 재규어님 이제야 당신의 큰 은혜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진화를 위한 조건 중 마석 섭취가 있었다.

1등급 마석만 먹으면 되는 것을 나는 무려 3등급을 처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새 선택지가 생기기를.

──────────────

[리틀 화이트 스네이크lv10]에서

1. [화이트 스네이크 ]

2. [리틀 그린 스네이크]

3. [화이트 혼 스네이크]

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

와! 뿔이 생겼다.

혼(horn) 재규어가 뿔달린 재규어였으니, 혼 스네이크라 함은 뿔달린 뱀이 틀림없었다.

······뱀한테 뿔이 달려서 그걸로 뭐하지.

하지만, 리틀 그린 스네이크는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

*「화이트 혼 스네이크를 선택했습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특수 진화!

Billy is a horn

007.

꿈틀꿈틀.

몸이 변한다.

꿈틀꿈틀꿈틀꿈틀

덩치가 커지고 이마가 간질간질하다.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

몸이 그리 움직였다.

마치 몸 속에서 뭔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비늘 덮인 피부가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아, 아프다.

몸이 터질 것 같다.

나는 미물이다.

더 이상 걸을 수도 없고 티비를 볼 수도 없으며 컴퓨터를 하지도 못한다.

아버지에게 맞지도, 어머니에게 욕을 먹지도 못한다.

무엇보다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도 없었다.

한낱 뱀이 되어 썩은 나무 속에서 꿈틀거린다.

질려서 잘 먹지 않던 라면이 먹고싶다.

쥐를 먹고 썩은 고기를 먹고 벌레를 잡아먹기 싫다.

등의 비늘이 불룩 튀어나왔다.

마침내, 안에서부터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살갗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부욱.

살이 갈라지고 튀어나온 것은 흰 손.

피묻은 손이 또 하나 더 튀어나오고, 배를 가르며 몸속에서 기어 나왔다.

분명 사람의 손이다.

열 개의 손가락이 꼼질거렸다.

나는 이제 사람인가.

사람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버렸나.

꼬끼오–

맞춰놓은 알람소리가 들렸다.

그래, 여태까지 전부 꿈이었던 거야?

······아쉬운데.

꼬끼오오–

내가 설정했겠지만 알람 소리 한번 시원하다.

정말 닭이 우는 것처럼 생생한 소리다.

······어?

***

꼬끼오오오!

나는 눈을 떴다.

어두컴컴한 옹이구멍 속이었다.

아니 어디서 진짜 닭이 울고 있네.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쏟아지고 있다.

닭이 저렇게 꼬끼오 울어대면 다른 마물들에게 들켜 잡아먹히지 않으려나.

기운찬 놈이다. 언제 한번 찾아가서 잡아먹어야지.

악몽을 꿔버렸다.

꿈속에서의 나는 정신력 20인 지금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나약했다.

엄마가 보고싶어~ 티비가 보고싶어~

라면먹고싶어 힝힝.

갈!!!

쥐를 먹는 것이 어떻고 벌레랑 싸우는 것이 어떻다고.

한심한 꿈속의 나 같으니라고.

자유를 갈구할 수 있는 이들이 진짜 사람이다.

적어도 전생의 나보다는 뱀의 몸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더 자유롭다.

그리고 뱀이나 벌레도 생각보다 먹을만하다.

······근데 왜 이렇게 좁냐.

내가 잠을 자던 옹이구멍은 좁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장소가 비좁기 그지 없었다.

진화를 하던 중에 몸이 커진 것 같았다.

옹이구멍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그것을 확실히 체감했다.

이거 못나가겠잖아.

구멍은 딱 내가 간신히 들어갈만한 크기였다.

그리고 몸이 커진 지금은 통과하는게 확실히 불가능했다.

지금 내 몸통의 둘레는 최소한 진주햄 분홍소시지만큼 커진 듯하다.

자칫하다가는 이 옹이구멍이 내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럴 수는 없었기에 나는 좁은 옹이구멍을 넓히고자했다.

구멍의 가장자리를 물어뜯는 방식으로.

와자작, 와작!

어라!

턱 힘도 강해진 것 같다.

원래라면 갉작갉작 갉아내야 했었을텐데, 지금은 와작와작 씹힌다.

어이쿠, 너무 넓히지는 말자.

혹시나 지네 부부가 집들이를 시도할 수도 있으니까.

이웃사촌이라고 해도 아직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다.

옹이구멍에서 나온 나는 울퉁불퉁한 나무의 결을 타고 내려왔다.

몸이 무거워졌지만 힘은 훨씬 좋아져서 어렵지 않았다.

그나저나, 전생에 동물 관련 유튜브를 많이 본게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원래 다리가 없는 뱀이 나무를 타고 오르기는 몹시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꼬리를 엮어 올가미처럼 만들면 나무를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이다.

탁, 하고 바닥에 착지했다.

위풍당당해진 기분이다.

그러면, 진화함으로써 뭐가 변했는지 한 번 확인해볼까.

──────────────

[화이트 혼 스네이크 lv1]

[특성]

[불굴], [정진] ,[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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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하하!

더 이상 '리틀'같이 허접스러운 수식어는 붙지 않았다.

나는 작지 않다.

솔직히 큰편은 아니지만 그렇게 작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시 레벨이 1로 돌아간 것은 예상했던 것이다.

메두사맘이 89레벨이었던가.

그러면 엄마는 얼마나 강했던 걸까.

그녀는 이러한 진화과정을 전부 거쳐서 메두사 서펜트가 된 뒤 또 89까지 레벨을 올린 것이다.

그런걸 보면 레벨10이 늘 진화시점인 것은 아닌 것 같고.

메두사맘도 레벨 100, 혹은 그 이상이 되면 또 다른 것으로 진화했으려나.

어쨌든, 나는 엄마처럼 못생긴 마물이 되고싶지는 않았다.

나는 특성에 추가된 '뿔'을 보았다.

특성이 뿔인건 또 뭐야.

불굴과 정진은 각각 정신력과 잠재력 스탯을 20으로 설정하면서 얻은 특전이었다.

그만큼 대단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데, 아직 자세한 활용법은 모르지만······.

뿔이라는 것도 그만큼 중요한 것일까.

머리에 뿔이 난 것 같기는 하다.

거울이 없으니 제대로 볼 수가 없구만.

꼬리로 한번 머리를 매만져봤다.

그리고 감탄했다.

이야, 이거 아주 크고 우람한 뿔이네.

······반어법이다.

내 머리에 달린 뿔은 뿔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돌기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뱀 중에는 뿔뱀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이 있다.

사막에서 사는 모래뱀인데, 이녀석의 뿔은 장식이나 다를 바가 없다.

내 뿔도 그랬다.

이걸로는 내 장엄한 계획을 실천할 수 없을 것 같다.

빠르게 기기와 함께 활용해서 적을 꿰뚫어버리는 미친 국가권력급 뿔뱀이 되고싶었는데.

일단 그래도 특수 조건을 맞춰서 진화한 만큼 뭔가 다른게 있겠지

스킬을 더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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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빌리는 뿔lv1](new!),

[암시야lv6], [독니lv3], [빠르게 기기lv3], [숨참기lv4], [포식lv3], [물어뜯기lv4], [독 내성lv3], [출혈 내성lv2], [고통 내성lv4],[열 내성lv2], [생존본능lv3]

[상태]

-

──────────────

있다!

새 스킬이 생겨 있었다.

다른 스킬들은 딱히 레벨이 크게 오르지도 않았고 변화가 적었는데, 도저히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름의 스킬이 생겼다.

'빌리는 뿔'이 뭘까.

빌리가 대체 누군데!

······.

조금 실망스러워서 정신이 나갈 뻔했다.

뿔 미사일 같은 스킬이었으면 좋았을텐데.

게임에서 처럼 스킬 이름을 외치는 것으로는 스킬을 발동할 수 없다.

빠르게 기기처럼 집중해서 그 행위를 해야하는데, 빌리는 뿔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 순간이었다.

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왕지네 부부 중 아내분이 계셨다.

확실히 진화를 하고 나니까 감각이 예민해졌다.

안녕하세요.

새댁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는지, 다리로 개구리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어쩐지 당황한 것처럼 더듬이를 까딱거리며 경계한다.

아, 내 몸이 좀 커졌구나. 뿔도 생기고.

지네의 시력이 좋지 않다고 해도 긴가민가 할것이다.

나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꼬리를 까딱까딱 하며 머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그러자 맘씨 고운 새댁도 더듬이를 까딱거리며 나를 따라했다.

그녀는 툭, 자기가 들고있던 개구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슬금슬금 물러난다.

내게 주려는 것 같다.

나는 그 순간 놀라울 정도로 감동했다.

혹시 이사떡의 답례인가요?

전에 살던 자취방에서는 옆집 사람과 2년동안 한 번도 인사를 안했는데.

사람보다 지네가 낫다!

호의를 무시할 수 없었으니 나는 개구리를 감사히 먹었다.

지네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마음만으로도 따듯하다.

촉촉한 개구리를 꿀떡 삼켜넘겼다.

*「독 내성의 숙련도가 조금 상승합니다.」

배가 살살 아파오는 것보니 독개구리였나보다.

하지만 새댁의 호의를 의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입에서 노란 침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지 않은가.

개구리는 귀한 식량이었다.

오고가는게 이웃의 정이다.

나도 나중에 사냥감을 나눠줘야겠다.

지네 새댁을 보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나와 지네중 누가 더 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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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티스 왕지네 lv7]

[특성]

[온화함] 

[스킬]

[독니lv9], [은밀lv3], [빠르게 기기lv2], [갑각lv3], [찢기lv5]

[상태]

[배고픔], [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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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네는 암컷이 덩치가 더 크다.

마물도 마찬가지였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 신랑보다 더 강한 것 같았다.

다만, 내성 같은게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스킬 종류는 내가 확실히 많다.

생각나는 이유는 역시 잠재력 덕택이겠지.

그래도 레드티스 왕지네에게는 내게 없는 스킬들이 있다.

은밀, 갑각, 찢기.

셋 다 활용도가 좋아보인다. 특히 갑각이 아주 부럽다.

지네는 단단한 외골격을 가지고 있다.

저러면 모스키토 랫 같은 놈들에게 피를 빨릴 일도 없을텐데.

내게도 갑각이라는 스킬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

어째선지, 뿔이 후끈후끈하다.

후앗.

*「'갑각'을 빌리겠습니까?」

어? 네!

그리고 뿔이 뜨거워지며 몸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

*「갑각lv3을 빌렸습니다. 일시적으로 갑각lv1을 획득합니다.」

빌리는 뿔.

그것은 말 그대로 스킬을 빌릴 수 있는 스킬인 것 같았다.

괜히 불굴과 정진 옆에 뿔이라는 특성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엄청난 놈이다.

일순간 내 비늘이 단단하게 굳었다.

마치 비늘갑옷을 입은 듯했다.

꼬리로 몸을 툭툭 쳐보니 찰캉찰캉하는 소리가 났다.

갑각이라더니 분명 느낌이 다르다.

단단해졌다.

나 단단해졌어!

내가 말을 못해서 다행이다.

옆집 새댁 앞에서 그리 외쳤다가는 당장 경찰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새 스킬을 얻은 나는 기쁨의 춤을 췄다.

지네가 멍하니 나를 구경했다.

앗차, 조금 실례였나.

상대의 스킬을 빌릴 수 있는 스킬.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제한 없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닐 터.

스킬의 한계와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꼬르륵.

그리고 그걸 알아보는 데에는 사냥만큼 좋은게 없겠지.

안녕히 계십쇼.

나는 사냥을 위해 떠났다.

* * *

이곳의 자연환경을 지구와 비교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산에서 야생동물을 마주치기는 쉬운일이 아니다.

해봤자 너구리나 멧돼지, 고라니 정도나 아주 가끔 볼 수 있을뿐 아닌가.

하지만 여기는 다르다.

특히 이곳 분지는 아주 생태동물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작고 약한 동물부터 크고 강한 마물까지 다양했다.

나같이 연약하고 작은 뱀이 굶어죽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다행이었다.

곱등이 같은 벌레는 바삭바삭해서 좋고 모스키토 랫은 겁도 없이 얼쩡거렸다.

먹고 살수는 있었는데, 문제는 레벨업이다.

곱등이와 모스키토 랫을 아무리 처먹어도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

즉, 어느정도 내 격에 맞는 마물을 사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난이도가 확 올라간다.

우선 내가 덤빌만 한 상대를 잘 골라야 한다.

내가 아무리 빠르게 기기를 단련한다고 해도 전력질주하는 모스키토 랫보다 느리다.

한 번 싸움을 벌이면 반드시 끝장을 봐야했다.

열심히 돌아다니던 나는 비로소 목숨을 걸어볼만한 맞상대를 맞이했다.

녀석도 뿔이 달린 마물이었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앞니.

부드러운 털.

앙증맞게 긴 두 귀.

풀을 갉작대는 저 위험한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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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래빗 lv3]

[특성]

[겁쟁이]

[스킬]

[도약lv5], [땅파기lv3], [암시야lv3]

[상태]

[경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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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였다.

저녀석은 뿔이 달린 주제에 나와 같은 뿔 특성이나 빌리는 뿔 같은 스킬이 없다.

별 것 없는 애송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특성이나 상태만 봐도 그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엄청나게 빠르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갔다간 휙 도망쳐서 땅으로 숨어버린다.

때문에 나는 수풀에 숨어서 벌써 한 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었다.

놈이 어느정도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며.

갉작갉작.

그리고 놈이 내게 등을 보이며 풀을 뜯어먹는 순간.

기회가 왔다.

*「도약lv5를 빌렸습니다.」 

*「일시적으로 도약 lv1을 얻었습니다.」

뱀이 점프를 할 수 있는 건 상식이라고!

내가 뛰어오르자 토끼가 화들짝 고개를 들어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놈의 엉덩이를 깨물었다.

깜짝 놀란 토끼가 검은콩 같은 똥을 후두둑 흘리며 도망쳤다.

누군가 보면 놓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끼잉."

땅을 파던 토끼가 풀썩, 엎어졌다.

이래뵈도 나는 독사.

사냥 성공이었다.

*「빌리는 뿔lv1이 빌리는 뿔lv2가 되었습니다.」

아자!

으악! 플라잉 스네이크다!

008.

합, 하압, 헙.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다.

한 입에 많은 양을 넣는 것이다.

입안을 가득 채운 상추쌈을 생각해보라.

우적우적, 씹기가 조금 어려울 정도로 큰 쌈을 씹어 삼킨 뒤, 살짝 목이 막히는 와중에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키면 그렇게 충만할수가 없다.

뱀인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이빨로 고기를 뜯어먹을 수 있겠지만 한입에 삼키는 것이 좋다.

내가 뱀이기 때문에 있는 본능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런 야생에서 한가롭게 고기를 뜯어먹는 것보다는 한 입에 먹이를 삼킨 뒤 이동하는게 안전하기도 하다.

토끼를 한 입에 삼킨 뒤 나는 수풀 속에서 쉬었다.

소화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아 어지러워.

빌리는 뿔을 몇 번 사용하면서 확실히 감을 잡았다.

다른 스킬에서는 별로 체감하지 못했지만, 이 스킬은 확실히 무언가를 소모한다.

처음에는 기운이 쭉 빠지는 것처럼 느꼈다.

다른 마물의 스킬을 빌려쓴다니,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스킬인 만큼 그 비용을 치러야하는 것이다.

정신력을 소모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마력을 소모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뭔가 채우기 위해서는 다른 마물을 잡아먹고 쉬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빌리는 뿔의 레벨은 올랐는데 아직 내 레벨은 오르지 않았단 말이지.

설마 그 위험한 토끼가 내게 걸맞은 적수가 아니라는 걸까.

앞니만 봐도 무시무시한 놈인데 너무 가혹하다.

그래, 뭐 토끼보다 센 놈을 노려볼 때도 되기는 했지.

나는 천천히 기어갔다.

사냥을 나서면서 중요한 스킬을 하나 얻었다.

*「은밀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이건 지네 부부도 가지고 있던 스킬이었다.

나같이 쿨한 뱀이라면 반드시 익혀야할 스킬.

사냥감에게 조용히 접근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수풀을 헤치면서 나는 소리가 확실히 작아졌다.

한참을 그리 나아가던 나는 우뚝 멈췄다.

저 앞에 양지바른 곳이 있었다.

나뭇잎이 가리지 않은 푸른 하늘에서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받고 있으면 기분이 좋을 듯한 햇빛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닌지, 이미 선객이 있었다.

나와 덩치가 비슷한 도마뱀이었다.

눈에 힘을 줘서 놈을 파악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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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테일 게코 lv7]

[특성]

[비늘]

[스킬]

[물어뜯기lv7], [벽타기lv2], [꼬리 휘두르기lv10]

[상태]

[체온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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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휘두르기!

10레벨 짜리 스킬이다. 약한 놈들에게는 보기 어려운 스킬이었다.

놈은 그 이름답게 꼬리가 길었다.

그리고 그 꼬리 끝에 철퇴처럼 가시가 삐죽삐죽한 무언가가 달려있다.

저것을 휘둘러 싸우는 놈 같았다.

확실히, 내가 만난 마물 중에서는 제법 강한 축 같았다.

싸울 보람이 나는 군.

놈은 햇볕을 쬐며 체온을 조절하고 있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것이 무척 기분이 좋아보인다.

······음, 저 꼬리 휘두르기 탐나는데

나도 꼬리는 있다. 꼬리를 철썩철썩 휘두르며 싸울 수 있다면 제법 좋을 것 같다.

지금 내가 빌린 스킬은 토끼한테 얻은 '도약'.

저 꼬리 휘두르기를 빌려볼까.

내가 파악한 바로는 더 레벨이 높은 스킬을 빌리는 편이 유리하다.

3레벨 스킬에서는 1레벨 스킬을 얻을 수 있고, 6레벨 스킬을 빌리면 2레벨 스킬을 얻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저 꼬리휘두르기는 맛있어보이는 10레벨이다.

잠시 고민했던 나는 마음을 정했다.

굳이 빌리지 말자.

마력이 부족하다. 조금 쉬는 정도로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안 부족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보수적으로 계산하는게 낫겠지.

그리고 기습을 하는데에는 꼬리 휘두르기보다 도약이 편하다.

이렇게 숨어있다가 몸을 웅크리고, 확 튀어나와서 저놈의 옆구리를 한번 물고 도망치면된다.

나는 온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몸을 쫙 피며 날아올랐다.

탓!

그야말로 플라잉 스네이크.

햇볕을 쬐고있는 롱테일 게코는 내 도약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리고 내가 놈을 깨물려던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하늘로부터 떨어졌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타앙!

총이라도 쏜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롱테일 게코가 있던 곳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허무하게도 착지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도마뱀은 보이지 않았다.

놈이 있던 곳에는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롱테일 게코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퍼억!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머리가 꺾였다.

묵사발이 난 롱테일 게코.

참 맛있겠다라고 생각하면 미친놈이겠지?

새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앞의 큰 나무 위에 새 한마리가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는 보지 못한 녀석이다.

짐승이 가장 취약할때는 다른 놈을 사냥하는 순간인 법.

그것을 아는 나는 도약을 하기 전에 사주경계를 철저히했다.

저 새는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새는 롱테일 게코를 잡아서 날아오를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두 눈은 부리부리하고, 깃털은 새빨갛다.

큼지막하고 누런 부리는 끝이 뾰족하게 휘어있어서, 놈이 고기를 뜯어먹는 맹금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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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로퍼 호크 lv9]

[특성]

[맹금]

[스킬]

[비행 lv7], [가속lv5], [쪼기lv4], [발톱lv3], [무음 lv2]

[상태]

[호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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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진짜 적이군.

맹금류가 뱀의 천적인 것은 상식이다.

아무래도 저놈은 위험한데.

훨훨 날아다니는 새와 땅을 기는 뱀은 상성이 안좋다.

내 먹잇감을 빼앗았지만 이번만큼은 용서해주마.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냥 넘어갔으면 좋았을텐데.

놈은 건방지게도 내게 호기심을 보이는 듯했다.

날개를 활짝 펴서 천천히 떠오른다.

위험.

생존본능이 경고하고, 나는 수풀을 향해 빠르게 기어갔다.

그리고 강력한 통증이 등을 강타했다

타앙!

총소리 같은 게 어떻게 난 건지 알아냈다.

날아다니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다.

갑자기 휙 가속해서 사냥감을 발톱으로 내려찍는 것이다.

시야가 빙그르르 돌았다.

불쌍한 도마뱀처럼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버리려는 걸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충격 때문에 튕겨나갔을 뿐 다시 땅에 착지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갤로퍼 호크는 얌전히 날개를 접고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놈의 발톱이 찍고 지나간 등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뭐지, 분명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을텐데 왜 물러난걸까.

내 독니의 무서움을 알아챘나.

놈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당하지 않으리.

토끼에게 빌렸던 도약을 사용했다.

젠장, 피할 수가 없다.

탕!

끔찍한 통증이 이번에는 배를 훑고 지나갔다.

만전의 상태라도 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지만, 뱃속에 토끼 한마리가 통째로 있으니 몸이 더 무겁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니, 후회는 늦다.

애초에 열심히 주변을 경계했는데도 저 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으니.

이번에야말로 죽는것 아닌가 싶었는데, 놈은 또 다시 나뭇가지에 앉았다.

어떡하지.

한 번만 깨물 수 있으면 중독시켜 이길 수 있을텐데.

땅바닥을 기면서는 도저히 그런 기회가 나지 않았다.

퍽!

놈은 또 한번 나를 치고 지나갔다.

큰 상처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죽고 말 것이다.

저 자식이 왜 자꾸 이런 짓을 반복할까.

나는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놈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깍까각, 깍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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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로퍼 호크 lv9]

······

[상태]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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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씹쌔가!

나를 가지고 놀고 있던 것이다.

격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우습게 봤다 이거지.

내 뱃속에서도 그리 깍깍댈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짐승은 먹이를 사냥하는 순간 가장 방심한다고 했었나.

취소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때 가장 방심하는 법이다.

저놈은 나를 완전히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기회였다.

빌려서 얻은 도약lv1로는 저렇게 높이 튀어오르지 못한다.

하지만 내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으니.

저놈이 가진 비행lv7, 그것을 빌린다.

난 천재인가.

내 발상의 유연함에 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다.

*「종족 특성상 빌릴 수 없는 스킬입니다.」

응~ 되겠냐~

도약은 뱀도 튀어오를 수 있으니 빌릴 수 있었다.

갑각 역시 내게는 비늘이 있으니 빌려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비행은 아니었다.

날개는 커녕 손발도 없는 내가 어떻게 날 수 있다는 말인가.

······젠장, 혹시나 했는데 스킬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바보가 아니다.

비행 스킬을 빌릴 수 없다면 가속lv5를 빌린다.

저 새의 엄청나게 빠른 비행속도는 아마 가속의 영향인 것 같았다.

내 빠르게 기기와 조합한다면 나무그늘 아래로 숨을 수 있을 것이다.

복수는 못하겠지만 살아남기만 한다면야.

*「특성 '정진'에 의해 발전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뭐라고?

*「비행lv7을 빌립니다. 일시적으로 비행 lv2을 획득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잠재력 20, 믿고 있었다고!

잠재력 스탯을 20으로 설정하면서 얻은 정진.

대충 감을 잡았던 '불굴'과 달리 '정진'의 효과는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었다.

잠재력이라고 하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나는 본디 배울 수 없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비행lv2를 사용합니다.」

그말은 즉, 진짜 플라잉 스네이크가 되어버린 것이다.

몸이 떠올랐다.

그것도 제법 빠른 속도로 휘익 날아가기 시작했다.

땅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더럽게 무섭다.

내가 향한 방향은 나무에 앉아있는 갤로퍼 호크.

깍깍대며 웃던 새는 지금 일어나는 상황에 경악한 듯했다.

뒤늦게 날개를 퍼덕이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놈에게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날고 있었지만 날개가 없다.

방향도 속도도 조절할 수 없었다.

처음에 나아갔던 방향 그대로 날아가고 있을뿐.

놈이 기겁해서 홰를 쳤지만, 나는 웅크렸던 몸을 쫙 폈다.

콰악!

물었다!

내 독니가 놈의 날갯죽지를 파고드는게 명확하게 느껴졌다.

독샘이 쫘악 조이는 감각과 함께 놈이 미친듯 퍼덕였다.

나는 놈의 몸통을 내 몸으로 칭칭 감았다.

벗어나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몸에 힘을 줘서 놈을 옥죄었다.

아무리 새라고 해도 날개가 묶였으니 날 수 있을리 없었다.

놈과 함께 땅에 추락했다.

쿠웅!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쳐서 몸의 힘이 빠질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줄을 붙잡았다.

퍼덕거리는 힘이 점점 약해졌다.

놈은 깍깍대더니, 결국 절명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사냥 성공.

흐흐, 더럽게 아프다.

이번에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숟가락을 얹으려는 다른 마물은 보이지 않는다.

한숨이 나왔다.

하늘을 나는 기분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말이 비행이지,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전혀 방향을 조절할 수 없었다.

놈에게 매달리지 못했다면 혼자서 날아가다가 떨어져서 추락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뱀은 역시 날아다니는 것보다는 땅을 기어다니는 게 어울리는 듯했다.

모르겠다. 언젠가 익숙해진다면 써먹을 수 있을지도.

빌리는 뿔로 빌릴 수 있는 스킬은 한 번에 하나뿐이니까 그게 가능하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나는 눈앞에 있는 저녁식사 두 놈을 보았다.

어느 쪽도 한끼 식사로 든든할 것 같았다.

슬슬 해가질 것 같은데, 돌아가볼까.

* * *

롱테일 게코는 한입에 삼켰다.

며칠은 밥을 안먹어도 든든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갤로퍼 호크는 어찌했나.

난 무려 보금자리까지 그것을 물고왔다.

가방같은게 있으면 참 좋을텐데. 새가 몸이 가벼워서 그나마 다행이다.

도시락처럼 보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마음씨 고운 지네부부에게 먹이를 나눠주고자 해서였다.

혹시 마석이 있을까 해서 배를 뜯어먹어보긴 했지만, 충분히 기뻐할 것이다.

그렇게 따듯한 마음으로 가져왔건만.

끔찍한 광경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지네 부부는 노을빛 아래 함께 있었다.

한가로이 노을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고. 서로 껴안고 있었다.

완전히 뒤엉켜서 꿈틀꿈틀 거리는게, 무슨 짓을 하는 지 명확했다.

이거 X스잖아.

남사스럽게 야외에서!

좋은 이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경악해서 입을 쩍 벌린 탓에 갤로퍼 호크가 툭 떨어졌다.

그 기척에 놀란 지네부부가 화들짝 떨어졌다.

그래, 부끄러워 하는게 당연하지. 마땅히 그래야지.

하지만 모두 내 오해였던 것 같다.

그들은 사랑을 나누던 것이 아니었다.

뭔가를 품고 있었다.

알인가?

아니, 알인 것 같지는 않은데.

새카맣고 윤이 나는 동그란 덩어리였다.

남편이 그 동그란 구체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나는 문득 떠오르는게 있었다.

무협지에서, 지네같은 영물은 으레 무언가를 품고 산다.

내단?

내단이야?

주인공이 먹으면 경지를 상승시켜주는 그런 건가.

나는 눈에 힘을 줘서 간파를 사용해봤다.

[내단:제작 중]

내단 맞네 그거.

새벽의 불청객

009.

입에서 침이 주륵 흘러나왔다.

이거 실례.

하지만 군침이 도는걸 어떻게 하나.

나는 신사답게 꼬리로 입가의 침을 닦았다.

내가 보던 웹소설 중에서는 무협도 많았다.

내단을 먹은 주인공은 으레 그 효험을 바탕으로 환골탈태를 하곤 했다.

나도 저것을 먹으면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어쩌면 그레이트 화이트 수퍼 스네이크로 진화할지도 모른다.

내가 군침을 흘리자 지네 새신랑이 경계하듯 더듬이를 까딱거렸다.

설마 내가 내단을 강탈하기라도 할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건 참 마음아픈 오해다.

좋은 이웃을 상대로 강도짓을 할리가 없다.

나는 정당한 거래를 제시했다.

보기만해도 맛좋아보이는 갤로퍼 호크를 툭툭 건드리면서 꼬리로 내단을 가리켰다.

일대일 교환이다.

나는 치킨을 줄테니 너희들은 그 내단을 주지 않겠니.

원래 선물로 주려고 했던 거였지만 상황이 바뀌었으니 임기응변을 발휘해보았다.

타다닥!

하지만 지네 부부는 이빨을 탕탕 부딪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화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값이 조금 안맞긴 하다.

나는 갤로퍼 호크의 사체를 놔두고 물러섰다.

그냥 드세요.

장난이었습니다.

그러자, 지네 새댁이 조심스럽게 갤로퍼 호크의 사체를 물어서 챙겼다.

그때였다.

꼬끼오오오-

또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닭은 경우가 없나.

꼭두새벽이고 밤이고 신경쓰지 않고 울어댄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 찾아가서 진짜 치킨맛좀 봐야겠다.

나는 지네부부에게 인사했다.

좋은밤 되세요~

밖에서 애정행각은 자제해주시구요.

지네부부도 나를 따라서 머리를 슬쩍 숙였다.

진짜 내가 인사하는 걸 이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옹이구멍에 들어갔다.

오늘 아침에 분명 입구를 넓혔는데, 겨우 한나절만에 들어가기가 조금 어려워졌다.

더 넓은 집을 찾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 아쉬움과는 별개로, 피로했던 나는 금방 곯아떨어졌다.

* * *

──────────────

······

대륙의 오대마경 중 대수림은 그 독특한 특성을 가진다.

그 식생의 풍부함이다.

황량한 '사막'은 차치하더라도, 대수림의 풍성함은 '산맥'이나 '초원'을 압도한다.

대수림의 면적은 사막, 그리고 '동토' 다음이다. 즉, 오대마경 중 세번째로 넓은 것이다.

하지만 살고있는 마물의 수를 계산하자면 사막과 동토의 마물을 모두 합치더라도 그 수가 열배를 넘으리라는 것이 합리적인 계산이다.

온난하고 다습한 기후로 녹음이 우거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텐데, 유의할 점은 점은 대수림의 위도가 그리 낮지 않다는 것이다.

실지로 대수림과 접경하고 있는 왕국 최동단의 그레이림 영지는 한여름에도 선선한 기후이다.

하지만 영지에 붙어있는 시자 수림을 거쳐 대수림이 있는 동쪽으로 나아갈수록 기온은 급격하게 상승한다.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다양한 석학들이 연구에 매진했지만, 아직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요정의 고대마법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멸종을 향해 달려가는 요정족들은 고대로부터 극동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드물게 발견되는 대수림의 유적들에는 고대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 당시 요정들이 거주하기 좋은 기후를 조성하기 위해 대규모의 마법적 조치가 취해졌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요정들도 고대의 기록을 지니고있지는 않으니 내막을 알 수 없는 일이다.

본 저서의 대수림편에서는 대수림의 다양한 마물들과 이미 발견된 것들,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

「현자 파르비안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마물 사전: 대수림 편, 서문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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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웅 군터의 수행기사 자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앞에 서있는 소녀 때문이었다.

이곳 영주의 하나뿐인 딸인 라니아 그레이림이었다.

군터는 메두사 서펜트를 토벌하자 마자 다시 수도로 떠났다.

대신 자인을 비롯한 그의 수행원 몇을 이곳 그레이림 영지에 남겨두었다.

한가로운 나날이었지만, 자인은 종종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저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영애 때문이었다.

어렸을때는 병약해서 죽을 위기를 몇번이나 넘겼다고 했는데, 그탓일까.

이 나이대 영애들이 좋아할 법한 것 대신, 라니아는 영웅이니 마물이니 하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영애."

물론 그래도 레이디는 레이디.

기사 자인으로서는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라니아는 까딱 무릎을 굽혔다 펴는 인사를 하곤 말했다.

"물어볼게 있어서요 기사 자인."

그래, 그러시겠지.

자인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또 그 책입니까? 현자의 마물 사전."

"네! 메두사 서펜트에 대해 궁금한게 또 생겼어요. 혼 재규어랑요."

"훌륭한 레이디라면 마물같은 흉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법입니다."

"저는 나중에 영웅이 되고싶은걸요!"

라니아는 당차게도 말했다.

그러더니, 자인의 옆에 앉아있는 사내를 보고 덧붙이듯 말했다.

"아니면 사냥꾼이 되든지요."

"으하하핫!"

곰방대로 연기를 뿜고있던 사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이곳 그레이림에 거주하는 사냥꾼이었다.

마물 사냥꾼들 중 대부분은 사실상 낭인에 가까운 치들이지만, 그중 일부는 진짜배기들이다.

이 사내는 진짜배기였기 자인도 그를 존중했다.

"아가씨가 뭐하러 사냥꾼이 됩니까. 라니아 아가씨는 영웅이 되어야지요."

"그래? 그렇지?"

"그런 지저분한 일은 저 올리버 같은 망나니들에게나 맡기십쇼."

그리 말하며 올리버는 담배연기를 뻐끔뻐끔 내뿜었다.

"그래서, 물어보실 것은 뭡니까."

자인은 빨리 이 철부지 영애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메두사 서펜트의 새끼들을 놓쳤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놈들이 메두사 서펜트로 성장해서 돌아오면 어떡하죠?"

"······하하, 그건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메두사 서펜트는 한번에 수천마리씩의 자식을 낳아요. 만약 새끼들이 그 절반만 메두사 서펜트로 자라났어도 왕국은 멸망했을 겁니다."

"그러면······."

"마물 중에서는 특히 그 진화의 과정이 긴 종류가 있지요. 태어났을 때부터 강한 용들과 달리 뱀들은 거의 벌레류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메두사 서펜트는 그중 돌연변이인데다가 상위종이기도하구요."

자인은 군터를 수행해왔다.

마물에 대한 그의 지식은 마물사냥꾼에 비해 뒤쳐지지 않았다.

"새끼 천 마리 중에서 서펜트 수준까지 진화하는 녀석들은 한두마리가 될까말까 합니다."

"아하."

거기서 올리버가 끼어들었다.

"기사님, 그것은 산맥 기준이고, 대수림은 또 다릅니다."

" ······그래요?"

지적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인은 별로 불쾌해하지 않았다.

"대수림의 마물들은 워낙 제각기로 진화하지요. 메두사 서펜트의 자식이라고 똑같은 메두사 서펜트로만 진화하는게 아닌것은 아가씨도 아시죠?"

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인도 마찬가지.

"대수림은 식생이 풍부한만큼 마물의 종다양성이 가장 큽니다. 또한 먹이감이 많아서 강한 놈들이 많이 탄생하기도하죠. 천 마리 중에 서펜트까지 진화할 놈이 다섯은 넘을 겁니다."

"그거 정말 무시무시하네."

"아마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진화하는 녀석이 나올수도 있죠. 서펜트 이상이 되거나."

"레비아탄 같은거?"

라니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레비아탄는 그녀가 들고있는 책에도 적혀있는 전설의 마물이었다.

바다에 잠겨있는 그 뱀이 몸을 일으킨다면 전 세계의 해수면이 확 낮아질 정도로 거대하고 강력한 마물.

올리버는 피식 웃었다.

"예, 어쩌면 레비아탄처럼요. 그런데 종말의 뱀은 아마 실존하지 않을 겁니다."

"예에······. 책에 써있는데."

"책에 써있다고 다 진실은 아니겠지요. 아, 맞아. 그러고 보니 경비대장이 그랬다죠. 새끼뱀 중에 혼자서 흰 개체가 있었다고."

"그럴걸?"

경비대장은 새끼뱀 몇 마리를 놓치고 근신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유능하다는 것은 영주도 잘 알고있다. 아마 영주는 곧 징계를 거둘 것이다.

그리고 경비대장이 진술하길, 새끼 뱀중에서 홀로 흰 놈이 있었다고 한다.

"작고 약해보였다는데 그런놈이 사실 위험합니다."

"왜?"

"돌연변이일 확률이 높거든요. 그리고 돌연변이는 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내죠."

"작고 약하면 거기서 죽지 않았을까."

"만일 살아남았다면. 그리고 진화한다면 또 달라질겁니다. 마물은 더 강해질 수 있다는게 문제에요. 약하게 시작한 놈일수록 더 많이 진화할 수 있고, 그건 더 위험해질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태까지 실실거리던 사냥꾼이 제법 진지해졌다.

그는 담배를 한번 빨아들이곤 물었다.

"그런데, 메두사 서펜트에 대해 정말 관심이 많으시군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물이 뱀 계열이거든."

"이야, 안목이 탁월하신데요."

듣고있던 자인은 내심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게 과연 귀족영애와 나눌 대화라는 말인가.

"아, 맞아 궁금한게 있는데. 이것도 뱀 계통의 마물이야?"

라니아는 책을 펼쳐서 특정한 페이지를 보여줬다.

그곳에는 한 마물에 대한 설명과 삽화가 있었다.

"코카트리스군요."

"응, 이것도 뱀 계통인지 헷갈려서."

"뱀 계통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굳이 말하면 키메라 계통인데. 아주 희귀한 놈입니다. 이놈을 만나게 되면 둘 중 하나라고 해요."

"뭔데?"

"살해당해 잡아먹히거나, 아니면 일확천금의 부자가 되거나."

"일확천금······?"

올리버가 설명해주려던 순간이었다.

"아가씨!"

하녀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라니아에게 다가왔다.

"다도 수업을 받는 날인데 도망치시면 어떡해요."

"까, 깜빡했던거야."

"그러면 얼른 가셔야지요."

"잠깐만 시간을 주면······."

"안돼요!"

라니아는 울상을 지으며 떠났다.

그모습을 보고 올리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라니아가 사라지니 자리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자인은 생각했다.

'그래서 일확천금은 무슨 말이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끊겨버렸다.

하지만 젊은 기사의 자존심은 재차 질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자인은 속으로 혼자 앓을 수밖에 없었다.

* * *

꼬끼오오-

나는 머리를 내 몸통 사이로 숨겼다.

뱀의 귀는 다른 동물과 달리 머리 뼈쪽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런걸까.

저 미친 닭새끼 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왜 계속 우는 거야.

멀리 떨어져서 우는 것도 아니고.

꼭 가까운 거리에서 우는 것처럼.

꼬끼오오오오!

정말 가까워졌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나며 전신의 비늘이 떨렸다.

나는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생존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바깥에 뭔가가 있다. 위험한 뭔가가 있으니 대가리를 박고 죽은 척을 해라.

혹은 도망치거나!

생존본능은 그런 불친절한 방식으로 위험을 경고한다.

나는 나가서 위협을 파악할수도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곳 옹이구멍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

뭐가 진정 살길인지는 알 수 없다.

콰앙!

뭔가가 나무를 강타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있는 고목은 아니었지만, 우지끈 나무가 부러져 쓰러진 듯했다.

나는 숨어있지 않기로 선택했다.

조심스럽게 옹이구멍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다.

캄캄했으나, 암시야가 있는 덕에 앞이 잘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지네 새댁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무슨 일인지 아시나요.

반갑게 그리 질문하고 싶었지만, 멈칫했다.

새댁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문자그대로, 그녀는 돌로 석화되어 있었다.

불길함이 치밀어올랐다.

이렇게 마물을 통채로 돌로 만들어버리는 괴물은 하나밖에 몰랐다.

엄마?

아니, 혹시 아빠야?

얼굴도 보지 못한 아빠가 자식을 만나러 돌아온 걸까.

"퀴이익!"

포효소리.

지네 신랑이 한 마물과 싸우고 있었다.

그 마물의 생김새는 정말 끔찍한 것이었다.

닭의 머리, 파충류 같은 몸, 그리고 뱀의 꼬리.

끔찍한 혼종과 같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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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트리스lv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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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의 습격자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특제 닭꼬치

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