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예전엔 그랬다.
피소환인 등급 상승도, 등급 돌파도, 사망한 피소환인이 100일 동안 소환 불가 상태로 대기해야 했던 곳도, 다 영혼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백색 탑 17층이 그 모든 걸 대신한다.
먼저 혈랑의 경우.
[컹컹컹컹!]
"…호, 호에?"
육신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만질 수도 없었다.
흐릿한 영체의 몸.
그래서 컹컹 짓는 소리도 텔레파시처럼 들렸고.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룬 하나를 꺼냈다.
<피소환인 부활의 룬>
효과 : 사망한 피소환인 한 명을 부활시킵니다. 한번 사용하면 사라집니다.
처음 써보는 아이템.
어떻게 사용하나?
'보통 룬은 먹는 거잖아.'
근데 먹을 수 있기나 한 건가?
툭, 던져 주자.
[컹! 크릉, 킁킁.]
가까이 와서 부활의 룬을 꿀떡 삼키는 혈랑.
영체인데도 룬은 용케 먹네.
[카탈로그 소속 혈랑에게 부활의 룬을 사용하셨습니다.]
결과는?
화아아아앗!
마치 소환할 때와 비슷한 빛무리가 여기저기서 생겨나서 혈랑에게 쇄도했다.
츠파파팟!
빛이 한군데로 모여 흐릿하던 영체가 어느새 선명해졌다.
[혈랑의 100일간 소환 불가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 지정소환이 가능합니다.]
"오!"
살았다.
"컹! 컹컹컹!"
이젠 텔레파시처럼 말하지도 않고 직접 소리를 내는 혈랑.
"호에!"
둘이 함께 뒹굴고 난리가 났다.
훈훈한 모습.
다신 죽지 마라.
'괜히 코가 시큰거리네.'
순간!
띠링! 울리는 알림음.
엥?
이거 설마?
[업적 : 최초로 전투에서 사망한 카탈로그 소속 소환체를 부활시켰습니다.]
"아싸!"
최초면 보상을 줘야지.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보상 어서 오고!"
[앞으로 하루 4회 탑 입장이 가능합니다.]
"…보상 저리 가고."
에이 씨,
너무 심한 거 아냐?
'회사원에게 매일매일 연장 근무하라는 것과 뭐가 달라.'
백색 탑 관련 보상이나 나올 것이지.
하루 4번 탑 입장은 개뿔.
아무튼 하나는 처리했고, 다음은?
베 상사의 등급 돌파.
경험자는 알겠지.
우리 달래 선녀님이 해 보셨으니까.
"보통은 돌파를 어떻게 하죠?"
"영혼의 세상에서 공자님께서 하사하진 배지를 달고 돌파 룬을 삼키면 되옵니다."
"아하!"
"먹는 즉시 가사 상태에 빠져서 움직이지도 말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거라서...."
그럼?
"조용한 장소가 필요할 듯합니다. 방해받지 않는 곳."
조용한 곳이라.
주혁은 베로니카에게 제안했다.
"베 상사님, 저기 61층 꼭대기 어떠세요?"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마음에 듭니다. 저 하늘 높이 솟은 빌딩처럼 쭉쭉 돌파해서 진급에 성공하겠습니다."
"좋아요."
"콘도르 새 새끼는 산산조각을 만들어 버릴 겁니다. 필승!"
"필승!"
그리하여 베 상사는 백색 탑 랜드마크 61층 빌딩 꼭대기에서 등급 돌파에 들어갔다.
폐관 수련 시작.
등급 돌파 예정 시간은 2주였다.
그리고 베 상사가 돌아오면 무작위 소환 쿨타임도 돌아올 것이고.
"우린 뭐 함까?"
"…으음, 놀면 되죠."
"팔찌나 만들겠슴다."
어휴.
"그놈의 팔찌, 팔찌… 팔찌 만들다 세월 다 보내겠네."
주혁이 지겹다는 투로 쏘아붙이자.
"다 봉 소환사님 잘되자고 하는 검다. 저만큼 충성스러운 피소환인이 어디 있슴까?"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광마 영감님만 해도 봉 소환사님 안 계시면 농땡이 치고 혼자 술이나 홀짝홀짝 거림다. 완전 월급 루팡임다."
뭐라고?
혼자서 술을 드신다니.
같이 안 먹고?
이거 섭섭한데.
그런데 묵묵히 듣고 있던 광마가.
"소환사."
"네."
"그… 부활의 룬이 몇 개나 되오?"
"두세 개 있는데, 왜 그러세요?"
"두세 번 정도는 죽여도 된다는 말이군."
"누굴 죽인다고...."
"그럴 놈이 있소. 시시때때로 노부의 살심을 자극하는 하룻강아지 놈이."
그게 누군지 뻔하다.
"노부는 무척 궁금하다오. 백색 탑 17층에서 피소환인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오."
그 말에 코사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광마 님은 정신이 있슴까, 없슴까? 부활의 룬은 아껴야 함다. 아무 데나 막 쓰고 그러면 안 됨다. 나이가 들어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나 본데, 정 써보시고 싶으시면 직접 해 보십쇼."
지잉!
광마가 초승달 강기를 발현했다.
"당장 실험해 봅시다. 목을 자르면 달려 있을까? 분리되어 있을까?"
"으힉?"
스팟!
도망치는 코사크.
스파파팟!
추격하는 광마.
'저러다 언젠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네.'
부활의 룬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
미국 국토안보부.
맥밀란 장관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안토니오 국장과 단둘이서 대화 중.
표정이 심각했다.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그랬으니까.
"중국 탑 저층에서 그게 나온다는 말이잖습니까. 그러니까 71층 이하에서."
"그래, 그 때문에 암시장 길드원들도 중국으로 움직이는 중이고."
"하! 암시장 길드원까지? 그놈들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요."
"해방의 룬 목걸이니까,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욕심낼 만하지."
중국에서 특이한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해방의 룬 목걸이가 중국 탑 저층에서도 나온단다.
원래는 71층 이상에서만 나오던 목걸이었다.
그래서 국가 육성 플레이어들만 획득 가능했던 물건.
그런데 저층이라고?
심지어 30층대 플레이어가 보상으로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
일반 플레이어들 대부분은 60레벨 미만의 저레벨.
그러나 숫자가 매우 많다.
정확히 몇 명인지 파악도 할 수 없다.
등록하지 않고 활동하는 플레이어들도 다수 있고.
이게 진짜 사실이라면....
"누가, 몇 개를 획득했는지도 모를걸."
"문제가 생기겠네요."
"그래, 큰 사회 문제가 될 거야. 범죄의 도구로 사용될 수도, 이거 차고 은행을 턴다고 생각해 보게."
은행을 터는 건 차라리 애교 수준.
"중국 정부는 파악하고 있습니까?"
"알고 있겠지.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필 중국이라.
중국 정부와 일반 플레이어 간의 갈등이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
지금은 일반 플레이어들이 정부의 공권력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상황이지만… 해방의 룬 목걸이가 확보되면?
공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물리력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
자칫하면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게다가 암시장 길드원들도 냄새를 맡았다.
전 세계로 유통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군요."
"맞아. 중국만의 일이 아니게 됐어."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맥밀란은 안토니오 국장의 손목에서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팔찌?
시계도 아니고.
무슨 남자가 장신구 액세서리를.
"안토니오, 그 팔찌는 뭔가?"
"아! 이거요. 친구한테서 받았습니다."
"자네의 성 정체성이 의심되는군. 이참에 커밍아웃이라도 하게? 뭐,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참나! 팔찌 하나 찼다고, 게이가 되는 겁니까?"
"여긴 미국이잖아! 마초들의 나라라고! 어쨌든, 자네에게 팔찌 준 친구가 누군데?"
"전광일 청장이요. 항공 배송으로 보내 주던데요."
"…응?"
가만 있자.
팔찌, 그리고 각성 관리청장이 선물로 보내 줘?
이거 설마?
"…혹시 그거 비만 탈출의 팔찌?"
"빙고! 장관님도 아시는군요."
"모를 리가! 어떤가? 효과는?"
"죽여줍니다. 살도 빠지고 혈압과 당 수치도 내려갔어요."
"어어… 정말?"
"그럼 거짓말하겠습니까? 누가 이걸 만들어 냈는지 알 것도 같은데."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맥밀란.
그렇긴 하지.
미스터 봉 아니면 누구겠나?
하지만 탑 보상 아이템이라고 보기엔 물량이 너무 많은데.
혹시 제조법 같은 걸 보상으로 받았을 수도.
"그거 나한테 팔게. 값은 두 배로 쳐 주지."
"싫습니다."
"하나 더 받으면 되잖아."
"어차피 유효기간 지나면 또 부탁해야 합니다만."
"제발 팔아 주면 안 될까?"
"좀 전까지 저더러 게이라고 하시더니, 장관님이 직접 연락해 보시던가요."
"끄응, 알았어."
맥밀란 장관도 풍채가 남다른 편.
당연하다.
미국인이니까.
미국의 성인 비만율은 전체 성인 인구의 약 40%.
즉, 10명 중 4명이 비만이라는 의미.
그래서 미국의 비만 클리닉 시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에도 한국 라직스 물산의 비만 탈출 팔찌 소식이 전해진 건 당연한 일.
└ 와우! 정말? 효과가 있다고?
└ 너튜브를 봐. 온통 그 얘기뿐이야.
└ 흠, 난 아직도 믿을 수 없어서.
└ 이거 진짜야. 내가 경험했어.
└ 어떻게?
└ 나 한국 살거든, 거기서 운 좋게 구매했지.
└ 미국에 판다는 소식은 없어?
└ 생산량이 부족해서… 한국 가서 사 와야지.
└ 아니 팔찌가 가장 필요한 곳은 바로 미국이라고. 지금 당장 마트를 가봐.
└ 한국인들은 필요가 없잖아. 그 나라 비만인들은 미국에선 지극히 정상적인데.
미국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라직스 물산을 말이다.
해외 바이어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비만 탈출 팔찌 해외 수출 의사를 타진해 왔다.
하지만 라직스 물산에선 수출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물량이 부족한 판에.
*
주혁은 오래간만에 집으로 왔다.
얼굴도 비추고, 또 부모님께 드릴 말씀도 있고.
"다들 계셨네요."
"우리야 계속 여기 있었지. 너만 없었고."
"그런가?"
맞는 말이다.
"아무튼 돈 잘 버는 아드님 오셨으니까 대접 잘해 드려야겠네."
"한 상 거하게 차려오세요."
"네네."
이렇게 함께 식탁에 모인 게 얼마 만인지.
뭐, 다 커서 독립한 아들이 너무 자주 집에 오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오순도순 모여서 밥을 먹고 난 후, 거실에 앉아서 함께 TV도 보고.
마침 뉴스에서 비만 탈출 팔찌의 보도가 흘러나오자.
"저 팔찌, 딱 봐도 사기잖아. 쯧쯧. 아직도 저런 거에 속는 사람이 있다니."
아버지 봉수철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민혁이가 피식 웃으시며.
"아버진 뭘 모르시네. 저거 진짜라고 판명난 지가 언젠데, 효과 있다는 후기도 넘치고."
"후기야 조작하면 되지."
"판매량은?"
"그것도 조작할 수 있잖아. 인터넷에서 파는 건데."
"…그런가?"
"내가 구하지 못하는 건 다 조작이야."
"아하."
쯧쯧.
주혁도 혀를 차며 말했다.
"팔찌 욕심나면 욕심난다고 말씀을 하시지. 다 가짜래."
"그럼 하나 구해 줄래? 하긴 네가 아무리 대단해도 팔찌는… 안 될 거야. 그치?"
사람 우습게 보시나?
바로 그때!
띠링!
주혁의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알림음.
확인해 보니.
"형, 무슨 문자야? 대출?"
"아니, 미국 국토부장관이 팔찌 하나 구해달란다. 이런 청탁은 난감한데."
"…무슨 개소리야?"
"정말이야. 보여 줄게."
주혁은 민혁이에게 맥밀란 장관에게서 온 문자를 보여 줬다.
<미국 맥밀란 장관> : 미스터 봉! 팔찌 하나만 구해 주시면 너무나 감사하겠어요. 부탁드릴게요. 요즘 늘어나는 체중 때문에 제 주치의에게 경고를 받았거든요.
메시지를 읽어 보는 민혁.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미국 장관이 한글로 메시지를 날리시네. …나보고 이걸 믿으라고?"
"좀 그렇지?"
솔직히 자신이라도 못 믿긴 하겠다.
아무튼.
"알았어. 내가 팔찌 하나씩 드릴게요. 사실 미리 준비해 왔어요."
스슷.
인벤토리에서 팔찌를 꺼내.
"자요, 받으세요."
"뭐냐? 이거?"
"비만 탈출의 팔찌요. 하나씩 착용하세요."
"무슨?"
팔찌를 들고 요모조모 살펴보는 가족들.
처음엔 모조품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다.
매우 정교했다.
게다가 TV나 SNS 영상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지, 진짜냐?"
"네, 봉씨 가문의 명예를 걸죠."
"오!"
"어머? 이, 이 귀한걸?"
엄마 홍금자가 황홀한 눈빛으로 팔찌를 어루만지며 주혁에게 물었다.
"근데 어디서 구했니?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운이 따라야 살 수 있다던데."
"이 팔찌 만드는 회사가 어딘지나 아세요?"
"라닉스 물산이잖아."
"그 라직스 물산이 제 회사거든요."
"뭐?"
"응?"
"마, 말도 안 되는...."
입꼬리 길게 찢으며 득의만면한 웃음을 짓는 주혁.
"라직스 물산 본사가 어디 있게요?"
"헉!"
"아...."
"진짜?"
이미 가족들은 강남대로 61층 빌딩이 주혁의 소유인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저 사실 세계 최고 플레이어입니다."
"...."
"...."
"...."
주혁의 충격 선언에 조용해지는 거실.
"정말이라니까요? 아들 못 믿어요?"
"...."
"...."
"...."
모두 꿀 먹은 벙어리.
"제가 말이죠, 전광일 청장하고 함께 술도 먹고, 북한 인민무력부장 고사극과 절친이고, 김인중 위원장과도 서로 안부 묻고, 참! 미국 국토부장관이 메시지 보낸 거 보셨죠? 그거 진짜 그분입니다. 미국 대통령 감사 편지도 받았어요."
"...."
"...."
"...."
주혁의 가족들이 대꾸하지 못하는 이유, 진짜 그럴 것 같아서다.
아들이 세계 최고 플레이어라고 말하는 거, 표정을 보니 장난이 아닌 듯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처음 각성해서 엘리트 계약을 맺었다고 주장했을 때도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사실이었다.
이후 성검의 주인이라고 주장했을 때도 어림도 없는 소리 말라고 콧방귀 꼈지만 그것도 사실.
그래서 지금 세계 최고 플레이어라는 선언.
설마 이것도?
가족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해한다.
많이 놀랐겠지.
하지만 어쩌나?
앞으로 더 놀랄 텐데.
"혹시 평양 테러 사건 때, TV 생중계에서 햄스터처럼 생긴 사람이 와서 스슷! 하고 해결한 거 보셨어요?"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영상이 나돌고 있는데.
"자, 마음의 준비 하시고."
뭘?
"라직스 지정소환!"
스팟!
"호엥?"
주혁의 본가에 나타난 라직스.
"에구머니나!"
"으아아아아!"
"해, 햄스터다. 빅 햄스터!"
서로 소개부터.
"어머니 아버지, 이쪽은 라직스 씨라고, 라직스 씨, 우리 가족입니다."
"호에!"
"...."
"...."
"...."
어디서 이런 귀여운 생명체가.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가족들.
"코사크 지정 소환."
스팟!
"충! 봉 소환사님의 오른팔, 언제나 부르면 달려가는 이 시대 최고의 심부름꾼, 매서운 눈으로 월급 루팡 잡아내는 17층 작업반장 코사크 왔슴다."
이 사람은 또 뭐지?
"코사크, 혹은 인민무력부장 고사극 씨죠."
눈치 빠른 코사크.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내레, 주체적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공화국의 인민무력부장임네다. 위대한 봉씨 혈통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이 한몸 바치갔시오. 주혁 동지 아바이, 오마니, 만세! 만세! 만세!"
또또, 오바한다.
그냥 다 일괄 소환.
"소녀, 인사드리겠나이다. 공자님을 모시는 견달래라 하옵나이다."
"전사는 소환사를 지키는 방패다. 반갑다."
"허허허, 노부는 광마라고 하오. 소환사의 칼이자 검."
"빛이여!!! 봉씨 가문에 축복을!"
"매켄지입니다. 마법사죠."
.
.
.
갑자기 늘어난 사람들.
바글바글한 거실.
왁자지껄 시장바닥 같았다.
연신 만세를 외치는 인민무력부장,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눈빛의 백발노인, 날아갈 듯 절을 하는 날개옷의 선녀, 몸이 쑥쑥 커지는 거인, 몸에서 빛이 나는 인간, 집중 조명과 머리 위에 작은 불꽃을 팡팡 터트리는 노년의 서양인, 시뻘건 털의 개, 창백한 흡혈귀, 요염한 몽마....
어질어질.
야단법석.
가족들은 모두 얼어붙은 채 덜덜 떨었다.
뭐야.
저 사람들.
무서워.
그 와중에 라직스는.
데구르르르르, 온 집안을 굴러다니며.
"호에!"
슥슥싹싹.
열심히 청소하고 있었다.
어찌나 잘하는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169화
등급 돌파 중인 베 상사와 알리아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주혁의 본가로 불려 나온 상황.
가족들과 대화하는 주혁의 뒤에 소복이 모여 앉아 있는 피소환인들.
거실이 꽉 찼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직 불안한 표정.
낯선 사람들이 거실에 한가득 모였는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일단 설명해 드리긴 했다.
처음 소환 특성을 얻어 탑에 입장했을 때부터, 피소환인들의 도움으로 S++, S+++ 등급 공략을 성공시키며 현재 세계 최고 플레이어라고 불리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을 말이다.
간략하게 알아듣기 쉽게 요약해서.
물론 뺄 건 뺐다.
세세한 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분들이 주혁이, 널 도와주신다는 거지?"
"예압!"
"…차, 참 고마운 분들이시네. 은혜는 충분히 갚고 있고?"
"항상 잘해드리고 있어요."
민혁이도 피소환인들의 눈치를 보며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와! 날로 먹는 우리 형."
"…틀린 말은 아니지."
영구 입주권도 드렸다.
미리 발급받아 온 것.
한 장씩 나눠주니 정 대표처럼 백색 탑 17층 입장 스킬이 생성됐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바로 입장 스킬을 사용해서 백색탑 17층으로 들어가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흐음, 아, 알았다. 천천히 들어가 보마."
"나도."
아무래도 가족들은 피소환인들이 부담스러운 듯.
하긴, 그럴 수밖에.
가족들에게 그들은 아직 낯선 존재들.
영혼의 격 때문이랄까.
눈만 마주쳐도 움츠러드는데.
심지어 이들 중 한 명이 북한 인민무력부장이라고 주장하는 판국에.
썩 좋은 느낌은 아닐 것이다.
아직은 무서운 사람들이겠지.
"민혁이, 넌 심심하면 자주 놀러 와."
와서 일도 좀 하고.
"그, 글쎄, 일단 친해져야 하지 않을까?"
"자주 와야 친해지지."
그 와중에 라직스는 황금 청소 도구를 들고 이 방 저 방 옮겨 가며 여전히 청소 중이었다.
데구르르, 후다다닥, 후다닥!
슥슥, 싹싹, 데굴데굴, 데굴데굴.
그런 라직스를 따라 시선을 옮기는 가족들.
때로는 신기한 눈빛, 또 때로는 흐뭇한 미소.
확실히 라직스는 가족들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아무튼 안면은 익혔다.
가족들의 안전도 확보했고.
이제 집에 불이 나도, 바다에 빠져 익사할 지경이 되어도, 탑이 붕괴하여 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가족들은 안전할 것이다.
백색 탑 17층 입장이라고 외치면 끝.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사람들과도 친해질 것이다.
심심하면 한 번씩 들러 보실 테고, 그러다 보면 얼굴도 익히고, 그렇게 천천히 익숙해지는 거지.
*
드디어 가족들에게 밝혔다.
말해 놓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네.
진작 말할걸.
커밍아웃한 이후에도 일상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베 상사가 등급 돌파를 위해 백색 탑 랜드마크 61층에서 폐관 수련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팔찌 제작은 계속.
라직스 물산은 한국 귀금속 거리의 거의 모든 액세서리 하청 업체에 일감을 주었다.
만들어진 엄청난 양의 팔찌 본체는 17층 안으로 공수됐고.
하지만 완전 판매가 아닌 구독제.
판매 물량 조절에, 재고도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이번 판매도 전처럼 3,000개 선착순.
판매량을 늘려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지만 그러지 않았다.
넉넉하게 만들어도 그냥 쌓아 두기만 했다.
많이 팔면 3개월 후에 돌아올 엄청난 숫자의 팔찌 교체를 감당해 내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띄엄띄엄 순차적으로 팔고 있었다.
한번 차면 결코 벗지 못하는 마성의 아티팩트.
물량 공급을 위해 연일 계속되는 인챈트 작업.
작업반장 코사크가 일꾼들을 닦달했다.
"어이, 노가다 매 씨, 지금 뭐 함까? 얼렁얼렁 인챈트 주문 시전해서 마무리 하십쇼."
"제자가 있잖아."
"마법사 정 씨는 불량률이 많잖슴까? 10개 중 3개가 불량인데."
"그 불량품은 내가 처리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게."
"처음부터 매 씨가 하면 불량도 안 날 텐데 말임다."
"거참! 자꾸 경력직만 찾으면 신입은 어떻게 경력 쌓으라고."
주혁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다.
이렇게 자꾸 일만 하면 언제 놀겠다고.
"아무래도 인력 충원이 필요하겠네요. 다들 너무 일만 하니까."
그러자 견달래가.
"공자님의 어진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사람을 잘 들이셔야 하옵니다. 자칫하면 문제가...."
"그렇슴다. 요즘 MZ들 다루기 힘듬다. 전 청장이나 정 대표 같은 사람은 몰라도."
맞다.
여기가 보통 작업장인가?
체험권, 월세권, 입주권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는 곳.
어떻게 아무나 데려와?
'민혁이 이놈이 오면 좋겠는데… 에이, 하남자 새끼.'
한 명을 충원할 계획은 있다.
곧 무작위 소환 날짜가 다가오니까.
새로운 피소환인 영입 말이다.
'확률이 낮긴 해도 마도 공학자만 뽑으면....'
공장을 세울 수 있다.
완전 자동화 공장 말이다.
그럼 팔찌를 찍어 내는 거지.
'그나저나 베 상사 오려면 아직 열흘이나 남았네.'
폐관에 들어간 지 고작 4일.
그런데도 빈자리가 너무 커 보인다.
오기만 하면 바로 84층 공략이다.
대머리독수리 새끼, 박살을 내버려야지.
그때 라직스가 죽을 뻔했던 일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우리 혈랑 복수도 하고.
참! 당시에 라직스는 왜 그렇게 급하게 뛰쳐나갔던 걸까?
대체 무슨 냄새를 맡았길래.
라직스를 불러 물어보니.
"호에, 찐한 냄새였어요."
"…어떤 거?"
"찐한 거요. 호에에."
그럼?
"혹시 상급 마정석 광맥?"
"호에, …진했어요."
그렇단 말이지?
이제 라직스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
백색 탑 17층 꾸미기에 상급 마정석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떠들어 댔는데, 라직스 입장에서 눈이 돌아갈 수밖에.
'우주대머슴, 두고 봅시다.'
이번 84층에서 대박이라도 하나 건지면 바로 배지 2개 달아 준다.
그럼 25개.
르스스알 스킬이 5개.
LSSR 등급 피소환이 되기 위한 최소 조건.
차곡차곡 공을 세워서 받은 배지 개수.
피소환인 최초다.
너무나 기대된다.
LSSR 우주대머슴.
어떤 모습일까?
어쨌거나 연일 돌아가는 백색 탑 17층 공방.
가끔은 가죽도 벗기고, 고된 노동 후 회식도 하고, 주당들은 모여서 술도 한잔씩 하고.
"정 대표, 점점 실력이 늘고 있어."
"아유, 스승님,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우리 소환사 좋자고 하는 일인데, 어떤가? 슬슬 다른 주문도 배우고 싶지 않나?"
"괘, 괜찮습니다. 인챈트 활성화 주문, 이거 하나면 됩니다."
"욕심이 없구만. 그래도 3서클까지는 달려보세. 어디 가서 나 매켄지 드로낙의 제자로 행세하려면 3서클 정도는 되어야지."
솔직히 다들 알고 있었다.
매켄지가 왜 정동훈에게 마법을 가르쳤는지.
부려 먹기 편하자고 하는 수작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래도 결과는 좋으니까.
정 대표도 만족하고 있고.
가끔 동생 민혁이도 17층을 방문했다.
가족들 빼고는 심하게 낯을 가리는 놈이다.
심지어 자기가 다니는 대학교에서도 다템 유닛이란 별명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진짜배기 하남자.
"오! 봉 소환사님 동생 오셨슴다. 귀한 봉씨 혈통임다."
"어서 오시지요, 둘째 공자님."
"자주 들리시오. 노부가 쓸 만한 무공이라도 몇 개 전수해...."
그러나.
"...."
뻘쭘하게 한동안 서 있다가.
스팟!
사라지는 민혁이.
쯧쯧.
친해지려면 오래 걸리겠다.
그렇게 3일이 더 흘렀다.
뭐, 계속 팔찌를 찍어 내고는 있지만.
하다 보니 점점 익숙해졌다.
피소환인들과 전광일 청장, 정동훈 대표와 함께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함께 나누는 재미도 있고.
'아무튼 일주일 후면 베 상사 올 텐데.'
주혁은 눈을 돌려 베 상사가 등급 돌파 중인 빌딩을 바라봤다.
'한번 올라가 볼까?'
하지만 방해될까 걱정되고.
'그래도 살금살금 올라가서 들여다보면....'
바로 그 순간!
화아아아앗!
마치 등대처럼 빛나는 랜드마크 빌딩의 꼭대기.
"오!"
"저건?"
"벌써...."
무언가 일어났다.
혹시 등급 돌파?
'아직 일주일이나 더 남았는데.'
혹시 잘못된 거 아니야?
불안한 마음.
우르르르르.
백색 탑 랜드마크 건물로 주혁과 피소환인들이 달려갔다.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헉!"
"음?"
"우, 움직임다."
건물 안 엘리베이터 LED 전광판에서 화살표가 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61, 60, 59....
내려온다.
40, 39, 38....
당연히 베 상사겠고.
20, 19, 18....
어떻게 변했을까?
5, F, 3....
예상보다 빠른데 설마 실패한 건 아니겠지?
…1, 땡!
왔다.
긴장되는 순간.
스르르륵.
문이 열리고.
나타난 베 상사.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지휘관님에 의해 0월 0일 0시 부로 원사 진급을 명 받았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아아아.
베 상사, 아니, 이젠 베 원사.
"생각보다 빠르게 돌파했습니다. 백색 탑에서 육체를 가지고 진급을 시도한 덕분 같습니다."
환경이 달라져서 돌파 기간에도 영향을 미친 모양.
실패는 확실히 아니다.
눈으로 확인 가능한데.
<카탈로그 :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압살하는 마도 제국 레인저 베테랑 원사.>
- 이름 : 베로니카 캘리버
- 등급 : LSSR(레전드 스페셜 슈퍼 레어)
- 유형 : 마총사(인간)
- 현신 기한 : 5시간
- 만족도 평가 : 없음.
- 재소환 대기 시간: 3시간(소환 해제 후 적용)
짝짝짝짝짝짝짝!
열렬한 박수갈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장비들.
마총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그런 총 같다.
방어력과 기동력도 상승한 듯.
천 소재의 타이츠 복장이 번들번들한 검정색 라텍스 소재로 변했다.
'…저 옷, 통풍이나 될까?'
아찔하다.
진짜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압살할 정도로.
베 원사.
나 죽어.
*
검은 탑 관리실.
설계자 디자이너는 불안했다.
전에 했던 대화에서 메이커가 마도 공학자 합류 운운하면서 이상한 소릴 해 댔기 때문이다.
진짜 마도 공학자를 뽑으면 어떡하지?
마도 공학자가 그리 대단한 직업은 아니다.
말 그대로 공학자, 골렘이나 기계 장치를 만들어 내는 게 전부.
하지만 마법사, 연금술사, 그리고 마도 공학자가 한자리에서 만나면?
심지어 그 셋이 전심전력으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협력한다면?
마연공의 삼위일체.
그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
탑 관리자 입장으로선 재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엔지니어에게 지시했다.
현재 영혼의 세상에서 대기 중인 마도 공학자가 있는지.
[조사해 왔습니다.]
[부디 좋은 소식이길 바랄 뿐이야.]
[하하하, 안심하시죠. 기대하시던 대로입니다.]
[빨리 듣고 싶군.]
[아주 오래전에 LSSR 등급 마도 공학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만.]
[그런데?]
[NO. 442 지구의 소환사가 사망한 후,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영혼이 붕괴해 버렸습니다. 바로 재활용했고요.]
붕괴한 영혼은 탑으로 집어넣어 재활용하는 것이 원칙.
[그럼?]
[네, 현재 영혼의 대기실엔 마도 공학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다행이다.
솔직히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불안했을 텐데.
미친 운빨의 소유자인 그 소환사가 기어코 뽑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영혼의 세상엔 없다.
그러니 뽑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제 안심해도 된다.
그런데....
[여전히 불안하군.]
그랬다.
마음 한구석의 찜찜함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왜?
대체 뭘까?
이 불안감은?
가만!
[현재 소환사의 탑 등반 층수는?]
[84층에 도전 중입니다.]
84층.
그럼 다음 층이 85층이다.
80층대 전반부 거대괴수 구간의 보스.
[85층이라, …이거 혹시?]
비로소 디자이너는 그가 가진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애초에 불가능....]
아니다.
실현될 수도 있다.
그놈은 늘 그래 왔으니까.
[제기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무리 관리자라도 탑 공략엔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으니까.
제발 그렇게 되지 않길 비는 수밖에.
*
기다릴 필요 없다.
즉시 복수에 나선 주혁과 일행들.
[대한민국 검은 탑(NO.1) 84층에 입장합니다.]
콘도르 새끼.
베 원사 데리고 왔다.
넌 오늘 끝장이야.
[84층 임무 :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 1마리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완료 조건 :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 0/1]
임무를 받고.
"베 원사님,"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한 방 먹여 보죠."
"필승!"
사실 업그레이드된 마총은 단점이 명확하다.
어쩌면 심각할 수도 있는 단점.
그것은 마총의 탄환으로 상급 마정석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덕분에 유지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다는 것.
물론 위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르스스알의 공격력답게 말이다.
무엇보다 이 총의 숨겨진 비밀 하나.
48시간의 쿨타임으로 궁극기를 사용할 수 있다.
바로 <아광속탄>.
빛에 근접한 속도로 발사되는 탄환.
딱 한 발.
그러나 아광속탄의 단점은 더더욱 심각하다.
바로 탄환으로 최상급 마정석 1kg이 필요하다는 것.
무려 최마다.
연금술로 연성 시 상마 1톤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최마 1kg.
즉, 상마 1톤의 위력을 아광속탄 한 발로 뽑아내는 것.
극강의 화력.
하지만 48시간 쿨타임.
게다가 그동안은 대형탄도 봉인이다.
마총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또 유도탄 기능도 적용이 안 된다.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빗나갈 위험도 있다.
그래도 쏴 봐야지.
이걸 어떻게 참아?
그래서 마리에게 어렵게 부탁해 최마 1개를 구해 왔다.
철커덕.
최마 덩어리 하나 마총에 집어넣고.
"조준하겠습니다. 발사 시 후폭풍에 주의하십시오."
꿀꺽.
긴장되는 순간.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가 저 먼 하늘에서 유유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
베 원사의 마총이 하얗게 달아올랐다.
"카운트다운, …3, 2, 1, 발사! 지휘관님을 위하여!!!"
엄청난 후폭풍,
쿠구구구구구구구구....
하마터면 뒤로 나가떨어질 정도.
그와 동시에.
펑!
저 하늘에서 그대로 터져 나가는 콜로서스 콘도르.
마총이 발사되는 소리는 놈이 터진 다음에 들려왔다.
총알이 날아가는 속도가 소리보다 훨씬 빨랐으니까.
빠쮸쮸쮸쮸쮸쮸쮸쮸쮹!!!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그냥 터졌다.
대형 풍선이 터지듯 말이다.
펑!
그걸로 끝이었다.
허무했다.
저게 자신을 괴롭혔던 그 우주전함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가 맞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리 놈의 몸체가 매우 느렸고, 집채만큼 커서 조준이 쉬웠다고는 하지만....
피소환인들은 박수를 보내는 것도 잊었다.
"미, 미친!"
"아니, 대체?"
"터졌어? 한 방에?"
"…알고 보니 좆밥이었슴다."
"실로 무시무시하옵나이다. 아무리 궁극기라도 해도."
"호에에."
"크러렁, 컹컹!"
이 정도 위력이라니.
마치 초대형 레일건인 듯.
'한 번 더 보고 싶네.'
85층까지 가 봐?
못 갈 것도 없잖아.
궁금하다.
아광속탄이 85층 거대괴수 몬스터한테도 통하는지.
'85층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곧바로 반복 공략.
우리 라직스가 뭘 가지고 오나 봐야지.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 1/1]
[84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보상 : 상급 마정석 84kg/ 다국적 탑 이용 티켓]
[세계 공지 : 검은 탑 NO.1(한국)의 84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170화
첫 공략은 S+++ 등급으로 해치웠다.
역시 베 원사였다.
르스스알 마총의 궁극기 아광속탄.
딱 한 발이었다.
유도 기능도 없는 아광속탄 한 발로 거대한 콜로서스 콘도르를 정확하게 명중해서 폭사시켰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몇몇 조건이 있었다.
과녁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몸체에, 느린 속도, 적절한 방어 수단도 없이 그저 얼음 매만을 이용해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는 놈.
맞히기 쉬웠다.
그리고 맞히기만 하면 끝이었다.
한마디로 아광속탄은 84층 콜로서스 콘도르에 최적화된 스킬이었단 의미.
지금은 봉인된 상태.
다시 보려면 48시간이 지나야 한다.
가격도 매우 비싸다.
최마 1kg 가격이 22억이다.
한 발에 22억이 날아간다.
뭐, 어때?
요즘 웬만한 미사일도 보통 그 정도 하는데.
지금은 같은 1번 탑 반복 공략.
[대한민국 검은 탑(NO.1) 84층에 입장합니다.]
라직스에게 기회를 줘야지.
실패를 만회할 기회 말이다.
냄새 맡고 뛰쳐나가다가 자기는 죽을 뻔했고, 혈랑은 진짜 죽었는데....
부활의 룬으로 다시 살려 내긴 했어도.
"우리가 콜로서스 콘도르를 상대하는 동안, 고방, 코사크, 바르딘, 제페트, 디아마트, 다섯 분이 라직스 씨와 혈랑을 보호해 주세요."
근접에 스스알들은 라직스 경호 임무만.
이들은 여기서 할 일이 없으니까.
전투 멤버는 르스스알 4명.
베 원사, 광마, 매켄지, 견달래.
"라직스 씨가 충분히 작업할 때까지 시간만 끌어요."
안 죽여도 된다.
반복 공략인데.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유인 작전 실행하겠습니다."
공중전함 거대괴수 콜로서스 콘도르.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도는 얼음 매들.
현재 사용할 수 있는 탄환은 소형탄.
아광속탄 궁극기 때문에 마총에 무리를 주는 대형탄도 48시간 동안 봉인.
소형탄뿐이라고 해도 위력은 이전과 같지 않다.
상마의 마력이 그대로 적용된 소형탄.
'하아, 상마 아깝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라직스가 이보다 더 많은 수확을 가져오길 기대해야지.
둥둥, 두두두둥!
채챙! 챙채재쟁!
전장에 울리는 북과 꽹과리 소리.
견달래의 버프가 피소환인들에게 전달되자.
"조정간 연발! 사격 개시!"
파죽, 파주죽, 파주주주....
마총 소형탄이 콜로서스 콘도르의 부하 얼음 매들에게 쏘아졌다.
동시에.
스웅! 주혁과 견달래를 보호하는 매켄지의 보호막.
광마의 초승달 강기가 떨어지는 얼음 매들을 부숴 버렸다.
매켄지의 화염 마법도 하늘을 수놓았다.
시선을 한쪽으로 끌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호에에엑!"
혈랑의 등에 올라탄 라직스.
황금 곡괭이를 가리키자.
휘릿! 타다다닷!
혈랑이 매우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갔다.
경호원들도 함께 달렸다.
*
라직스의 뭉툭한 코에 희미한 마력의 냄새가 감지됐다.
몰아치는 눈보라에 섞여서.
'호에.'
라직스는 방향을 몇 번이나 꺾어 가며 냄새를 따라 달렸다.
옆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오는 동료들.
"라직스 머슴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슴까?"
"후엑!"
"알겠슴다. 닥치고 있겠슴다."
한참을 달렸다.
꽤 멀리 왔다.
편한 길도 아니었다.
푹푹 빠지는 발, 세찬 눈보라.
스파파팟!
그림자 발걸음의 코사크.
디아마트는 날개로 날고, 제페트는 박쥐로 변해서.
거대화 고방은 보폭이 워낙 크기에 성큼성큼 걷기만 해도 따라가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다만 이렇다 할 이동 기술이 없는 중갑의 성기사 바르딘이 문제였지만.
"오라, 바르딘!"
"빛이여!!!"
상관없다.
고방이 들고 가면 되니까.
휘릿!
풀쩍 뛰어서 고방의 손에 장착된 성기사 인간성검 바르딘.
휘이잇! 휘이이이이잇!
점점 거세지는 눈보라.
하지만 라직스는 초집중 상태였다.
반드시 한 건 해내고야 말겠다는 집념.
그리고.
"후에에."
라직스의 손짓에 달리는 걸 멈춘 혈랑.
그들의 앞엔 거대한 빙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으잉? 막다른 길 아임까?"
"절벽이군."
"…설마 올라가야 하나요?"
어마어마한 높이의 얼음 장벽.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쭉 이어져 있었다.
착!
혈랑의 등에서 내려온 라직스.
데구르르.
벽 쪽으로 가까이 굴러가서.
킁킁킁킁.
한번 냄새를 맡고.
데구르르.
다시 굴러서 냄새 킁킁.
데굴데굴.
얼음 장벽을 따라 쭉 구르다가.
"호에?"
한쪽 무릎을 굽히며 앉은 라직스가 짧은 팔을 위로 쭉 뻗으며 외쳤다.
"호에엑!!! 여기...."
우르르 달려오는 피소환인들.
"여길 깨라고 하는 검까?"
"호에, 네에."
"이 뒤에 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알았다. 빨리 깬다."
거대화 고방이 인간성검 바르딘을 들어 올렸다.
"빛이여!!!"
휘릿!
콰악!
"빛이여!!!"
콱! 콱! 콰직, 콱콱! 콰지직, 콱콱콱!
깨어져 나가는 얼음덩어리.
라직스도 곡괭이를 들었다.
콰직! 콱콱콱콱콱!
지잉!
오러마스터 코사크도 강기를 이용해 얼음벽을 잘라 냈고.
서거걱, 서걱! 서거걱!
떨어져 나간 얼음덩어리가 금세 수북하게 쌓였다.
순간!
퍽!
얼음벽에 뻥! 하고 생겨난 작은 구멍.
"헉!"
"오!"
"아!"
"이거였구나."
헤벌쭉 웃는 라직스.
곡괭이질은 점점 더 빨라졌다.
마침내.
콰직! 퍽!
동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어질어질할 정도로 진하게 풍겨오는 마력의 향기.
"동굴임다. 동굴엔 항상 보물이 숨겨져 있슴다. 이거 클리셰임다."
입구를 조금 더 넓히고는.
라직스와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뭐가 있을까?
의문은 금방 풀렸다.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원래 동굴은 어둡다.
빛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84층 빙벽의 동굴은 그렇지 않았다.
매우 밝았다.
마치 원래부터 조명이 설치된 것처럼.
이 조명의 정체는?
벽면마다 가득 박혀 있는 엄청난 양의 마정석들.
"…왐마!"
"맙소사!"
"어머나?"
"빛이… 흐음."
"호엥!"
"컹컹!"
그냥 마정석이 아니다.
하나같이 다 상급.
짙고 짙은 농밀한 마력의.
뛰쳐 나갈 만했다.
이런 냄새를 맡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
"라직스 일꾼!"
"호엥?"
"해도 해도 너무함다. 층층 마다 대박 치면 우린 뭐 먹고 삼까?"
코사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라직스에게 따졌다.
"내가 어? 봉 소환사님께 달라붙는 날파리도 처치하고, 어? 위험 요소도 미리 제거하고, 어? 인민무력부장으로서 통일의 선봉장 역할도 하고, 어? 마! 다했슴다."
"호에?"
"근데 그러면 뭘 함까? 우리 일꾼 울트라 카운터 강펀치 한 방에 그대로 나가떨어지는데."
코사크의 푸념 섞인 칭찬.
고방과 바르딘도.
"역시 우주대머슴이다. 전사는 언제나 존경하고 있다."
"후에에에."
"부럽기 그지없소. 라직스 공, 나는 불이나 밝혀대는 LED 전구 신세인데."
"호엣!"
제페트와 디아마트도.
"부럽습니다. 선배님."
"호에!"
"으응, 대머슴님, 저도 공적 하나만 나눠주세요. 우리 같이 살아요. 좋은 꿈 꾸게 해 드릴게요."
"후엥?"
모두 다 부러워했다.
만족한 미소의 라직스.
슬슬 시작해 볼까?
냄새는 저 동굴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오고 있었다.
규모가 꽤나 큰 동굴이다.
상마 매장량 추정치를 대충 계산해봐도 최소 수만 톤 단위.
1번 탑만 있나?
2번 탑까지 합치면 이제 상마 걱정은 덜어도 된다.
그리고.
'호헤헤헤헤헤.'
심상치 않은 것도 눈에 들어온다.
정말 찐한 무언가가 말이다.
콰악!
라직스의 황금 곡괭이가 동굴 벽면을 찍었다.
덜컥, 곡괭이 끝에 걸려 나오는 상급 마정석.
지금부터는 수확의 시간이다.
*
84층 반복 공략의 목표.
라직스의 탐색 작업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
어렵지는 않다.
일단 저 빌어먹을 공중전함 거대 조류 새 새끼는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대가리 처박고 폭격해 오는 얼음 매만 상대하면 된다.
뭐,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지만.
한 3시간쯤 지났나?
대체 이 많은 얼음 매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어휴, 힘들어 죽겠네."
물론 하는 일은 없다.
매켄지의 보호막 안에서, 그가 피워 놓은 파이어 히터의 열기로 뜨뜻하게 앉아만 있으면 되는데.
다만 지루할 뿐이지.
냄새 맡고 임무를 수행하러 떠난 라직스는 기약도 없고.
가만 있자, 이참에 저거 죽여 봐?
그러고 보니 꼭 베 원사 아광속탄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매켄지 마법사님."
"말씀하십시오. 소환사."
"혹시 운석 소환 가능할까요? 떨어뜨릴 수 있다면 한번 해보고 싶은데."
"당연히 됩니다."
으잉?
된다고?
주혁의 질문에 뿌듯한 미소로 답하는 매켄지.
"먼저 설명부터 드리겠습니다."
파밧!
매켄지의 머리 위에 뜬 영상.
우주, 은하계의 모습이었다.
"진짜 우주는 아닙니다. 심상의 우주, 나의 의식 안에서 만든 가상의 우주이지요."
오오오!
심상에 우주를 재현하다니.
확실히 9서클은 9서클이다.
"심상의 우주에서 운석을 만들어 내는 것이 1단계, 시간은 약 1시간 정도 걸립니다. 남들은 2시간 이상 걸리지만 난 좀 재능이 뛰어난 편이라."
"아유, 딱 봐도 그래 보이시는데요. 하하하하."
"하하하하, 아무튼 1단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게 되어야 2단계로 넘어갈 수 있거든요."
설명도 어찌나 친절한지.
"2단계는 심상 우주의 운석을 현실의 하늘에 소환하는 것입니다. 마력이 엄청나게 많이 들지요."
"탑 하늘에서도 되나요?"
"아무럼요. 그러나 단번에 나타나게 할 수는 없고, 충분한 실체를 갖출 때까지 지속적으로 마력을 주입해야 합니다."
"시간은 얼마나?"
"2단계도 약 1시간 정도입니다."
흠.
1단계도 1시간, 2단계도 1시간.
두 단계만 해도 합이 2시간.
"쯧,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핵폭탄이면 설치하고 버튼만 누르면 끝인데."
조금 텐션이 떨어진 주혁의 말투에 매켄지는 당황했다.
"어음, 그, 그래도 방사능은 없는 친환경 운석이라."
"핵폭탄도 탑 안에서 터졌어요. 그것도 알고 보면 친환경이죠."
"…하지만 운석은 마력만 있다면 끊임없이 소환할 수 있는 거여서."
"핵폭탄도 만들어 내는 데는 한계가 없는 편이고, 지금 지구에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데."
"...."
머쓱해진 매켄지.
"어쨌든 그다음은요?"
"3단계는 좌표를 지정하고 내리꽂으면 되오. 이건 금방이긴 하지만… 문제는 안전이오."
안전.
그렇지.
운석이 떨어지는데 몬스터만 죽나?
다 뒈지는 거지.
"보호막으로는 어림도 없소. 땅속으로 방공호를 파고 들어가면 모를까. 그래도 위험하겠지만."
흠.
사용하려면 무리가 있는 운석 소환 마법.
시간도 많이 걸리고, 안전 문제도 있고.
주혁은 살짝 실망한 표정.
'에이, 운석 소환도 별거 아니네.'
차라리 핵폭탄이 낫겠다.
물론 제한이 걸려서 사용할 순 없지마는.
한편 매켄지는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운석 소환이 어필에 실패했다.
소환사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 듯.
당장 실망한 표정만 봐도 안다.
'어떡하지? 이러면 큰일인데.'
슬슬 다가오는 무작위 소환.
피소환인도 한 명 더 늘어날 테고.
그럼 현재 상태로는 위태위태하다.
특히 베 원사는 르스스알 등급으로 돌파한 나머지 굳이 자신을 데려다 쓸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솔직히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아광속탄이라니.
'아니, 한방에 84층 거대괴수를 터뜨려?'
일격필살의 즉사기.
자신은 흉내도 못 낸다.
반복 공략에 불려오지 않았느냐고?
시간만 끌면 되는 거다.
마법사는 없어도 된다.
광마 늙은이와 선녀, 두 명이면 충분하다.
또 팔찌 인챈트?
제자가 있지 않나.
요즘 많이 늘어서 불량률도 거의 제로.
'자리를 빼앗길지도 몰라.'
괜히 제자를 들였다.
편하자고 가르쳤지만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셈.
사실 인챈트 사업도 문제가 있다.
요즘 소환사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썩 좋지 않았다.
야심 차게 시작한 비만 탈출의 팔찌 인챈트 사업.
기뻐할 줄 알았는데, 처음만 그랬지, 지금은 그 반대였다.
소환사의 불만.
이거 때문에 일만 하고 놀 시간이 없다는 게 이유.
'또 전처럼 퇴출당하는 거 아냐?'
물론 백색 탑 17층에서 대기해도 된다.
영혼의 세상으론 돌아가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건 자존심의 문제.
취직을 못 해서 백수 골방 늙은이로 전락해 소환사의 기억에서 잊혀질지도 모른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소환사에게 자신의 필요성을 확고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제기랄! 소환사 마음에 들 만한 다른 사업은 없나?'
원거리 클래스는 베 원사에게 밀리고, 돈벌이는 라직스에게 압살 당하고, 인챈트 사업은 애물단지로 전락할 위기이고.
순간!
펑펑펑펑!
저 먼 하늘에서 터지는 신호탄.
작업이 마무리됐다는 뜻.
이제 집에 가자.
먼저 멀리 나가 있는 피소환인들부터.
라직스, 혈랑, 고방, 코사크, 바르딘, 제페트, 디아마트, 일괄 소환 해제.
그런 후에.
"우리도 가죠."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후퇴 준비 완료!"
"알겠사옵나이다."
"허허허, 이것도 일이라고 피곤하군. 나가서 한잔합시다."
안전지대로 가서.
"임무 포기."
[임무 포기를 선언하셨습니다.]
[임무에 실패하셨습니다.]
[대한민국 검은 탑(NO.1)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
백색 탑 17층.
84층 공략 정산의 시간.
마침 전광일 청장과 정동훈 대표도 와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봉 플레이어님, 세계 공지 들었습니다."
"저도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궁금한 듯 물어오는 전광일.
"그런데 84층은...."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라고, 비행형 거대 몬스터입니다. 나중에 영상 찍어서 보여 드릴게요."
"헉! 비, 비행이요?"
"맞아요, 비행 몬스터입니다. 방금도 그놈하고 3시간 동안 씨름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그, 그렇게 힘듭니까? 봉 플레이어님도 3시간이라면...."
"아! 반복 공략이 3시간이요. 첫 공략은 3분도 안 걸렸어요."
"…네?"
이게 무슨 소리야?
3분?
"반복 공략은 찾을 게 있어서… 우리 같이 한번 확인해 봐요."
"으음. 네네."
주혁은 라직스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라직스 씨, 성과가 있었나요?"
"호엡!"
"오! 뭔데요?"
행동으로 보여 주는 라직스.
스슷, 스스스스슷, 스스슷.
17층 땅바닥에 쌓이기 시작하는 상급 마정석들.
"와아아아!"
"이게 뭐야!"
광맥이다.
광맥을 찾은 게 틀림없다.
아니면 이렇게 많이 캐올 리가.
'금방 1,000톤 달성하겠는데.'
그런데 옆에서 가소롭다는 투로 말하는 코사크.
"봉 소환사님, 겨우 이것 가지고 놀람까? 간이 많이 약해지셨슴다. 에휴, 간에 좋은 음식이 뭐가 있나?"
뭐야?
또 있어?
코사크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주대머슴."
"호엥?"
"보여드리십쇼. 우리 봉 소환사님 침을 질질 흘리실지도 모르니 닦아 드릴 준비하시고."
"호엣!"
꿀꺽.
진짜 흘릴지도 모르니 침 한번 삼킨 후에.
스슷!
라직스가 물건을 꺼내 놓았다.
"어...."
이것도 마정석 같았다.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마트 플라스틱 장바구니에 담기는 양 정도.
그런데 저 빛깔은?
이거 설마.
"최, 최마?"
최상급 마정석.
"맞슴다. 자연산 최마임다. 양식 최마가 아임다. 귀한 검다."
헐!
이럴 수가.
최마가 자연 상태에서도 발견되는 거였어?
흐르릅!
흘러내리는 침을 삼키고는 한 덩어리 잡고 관찰해 보니… 확실히 최마가 맞다.
비록 양은 적지만 최소 30kg은 훌쩍 넘겠다.
'베 원사 아광속탄 보충은 걱정 없겠네.'
영구 입주권도.
우리 마리 씨, 연성 작업도 안 해도 되고.
미치겠다.
우리 우주대머슴이 냄새 맡자마자 뛰쳐 나간 이유를 이제 알겠다.
'찐하다는 게 최마 냄새였구나.'
이걸 어떻게 참아?
와락! 껴안고는.
"아유! 우리 우주대머슴!"
"호엥엥."
배지 2개, 아니, 3개 이상 달아 줘도 충분하다.
그래서 인벤토리에서 플래티넘 배지를 꺼내려고 했는데.
'아니야.'
지금 달아 주면 등급 돌파한다고 랜드마크 꼭대기로 올라갈 수도.
그럼 최소 일주일 이상은 걸리는데.
일주일 동안 어떻게 라직스 얼굴을 못 봐?
천천히 보내자, 천천히.
같이 84층 반복 공략도 하고, 85층도 깨고.
1번 탑만 탑인가? 2번 탑도 공략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 후 무작위 소환까지.
새로운 피소환인 환영 파티하고 라직스 돌파 보내야지.
171화
1번 탑 84층 반복 공략.
하루에 탑 입장이 4번 가능하지만 실제로 작업하는 건 하루 딱 한 번.
언제나 그렇듯.
주혁의 최대 목표는 피소환인들과 함께 아무 걱정 안 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
그래서 일은 최소한으로.
남는 시간은 흥청망청 시간 낭비하면서 놀기.
'하루 4번은 개뿔.'
탑에서 일만 하다 죽으라고?
그렇게는 못 하지.
하루에 한 번이라도 상마가 쏟아진다.
최마도 한 번 작업에 최소 15kg에서 30kg까지 캔다.
이제 상마를 굳이 외부에서 사 오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팔찌 사업 시작한 것도 상급 마정석 매입을 위해서였는데, 이젠 캐면 그만이니까.
덕분에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의 여유가 생겼다.
기존 계좌에 있던 돈과 최근에 가죽 판매로 받은 대금까지 합하면 수천억 원대.
평생 놀고먹어도 될 돈.
하지만 코사크의 생각은 다른 듯.
"돈은 묵히는 게 아임다. 투자해야 함다."
투자라.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있슴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슴다. 돈은 가장 순수한 권력임다. 안 되는 일도 되게 할 수 있슴다.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벌어 둬야 함다."
흠.
어떡할까?
뭐, 돈을 많이 벌어서 나쁠 건 없다.
그래서 어디에 투자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니.
"투자의 귀재, 주식 차트의 지배자, 발끝에서 사서 머리 꼭대기에서 판다. 호재인가요? 아니, 화재입니다. 한강물 수온 체크는 필요 없다. 왜? 안 들어갈 테니까. 월스트리트가 벌벌 떠는 회귀한 재벌집 서자 망나니, 바로 저 코사크임다."
뭐래?
"투자의 핵심은 미래 가치임다."
"그렇죠."
"지금 당장은 가치가 낮아 보이지만 미래에 확실하게 흥하는 분야에 투자를 해야함다."
"오!"
진짜 투자 전문가 같은 코사크.
"그래서 정답은 부동산임다."
"...."
"땅이 있어야 사업도 할 수 있는 검다."
"으음."
에이.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있는 줄 알았다.
부동산은 무슨.
안 그래도 좁은 땅에 투자할 곳이 어디 있다고.
"한국이 아임다. 현재 가치가 가장 낮은 곳, 북한에 투자를 해야 함다."
응?
북한?
"통일은 무조건임다. 통일되면 땅값이 수천 배 이상 뛸 검다. 미리 선점해서 땅을 사고, 거기 공장도 짓고, 빌딩도 짓고...."
맞다.
북한.
코사크를 비롯해 피소환인들이 개입했으니 통일은 시간문제일 테고.
"…좋은데요?"
"제가 누굼까? 봉 소환사님은 가만히 계셔도 됨다. 재산을 수천 배 이상 불려드림다. 암중에서 세계 경제를 쥐고 흔드는 흑막으로 만들어 드리겠슴다."
주혁은 코사크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아이고. 역시 우리 코사크 씨야, 툭! 찌르면 바로바로 해답이 나와요."
"과, 과찬임다. 자세한 플랜은 정 대표와 직접 논의해서 결정하겠슴다."
"얼마든지요. 코사크 씨 결정이 곧 나의 결정입니다."
"아유우, 제가 피소환인 중 2인자 아임까. 라직스 일꾼 바로 다음으로."
"당연하죠. 굳건한 2인자 지위, 제가 인정합니다. 하하하하."
"헤헤헤헤."
이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는 매켄지.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 영상으로 뜬 먹구름.
2인자의 자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무슨 수를 내야 한다.
'후우, 최소 넘버 쓰리까지는 올라가 줘야 하는데.'
요즘 매켄지의 최고 고민이었다.
*
베 상사의 아광속탄 쿨타임은 48시간.
즉 이틀이다.
시간은 금방 갔다.
"지휘관님, 준비됐습니다."
"그래요?"
계속 놀다 보면 지겹다.
반복 공략도 그렇고.
가끔 기분 전환도 해야지.
베 원사의 아광속탄을 한 번 더 견식 할 기회.
라직스 덕분에 최마 보유량은 넉넉하니까.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
첫 번째는 2번 탑 84층을 먼저 공략할 것인가.
두 번째는 1번 탑 미공략 상층인 85층을 먼저 공략할 것인가.
뭘 택해도 상관없다.
백색 탑에 틀어박혀 팔찌만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이왕이면 새로운 층으로....'
베 원사의 아광속탄 스킬.
과연 85층에서도 통할까?
자신이 보기엔 충분할 것 같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공중전함 비행 몬스터 콜로서스 콘도르가 하늘에서 펑 하고 터지던 광경이.
그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공략 아닌가.
압도적인 딸깍 공략.
그렇다면 이번에도?
결정했다.
상층 등반 간다.
2번 탑은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서.
파티를 구성해야지.
하지만 전과는 조금 다르게.
80층 초반대 거대괴수 구간을 공략하면서 얻은 교훈.
소환 가능한 숫자만큼 모조리 불러내지 않아도 된다.
예전엔 피소환인들을 불러내지 않으면 영혼의 세상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게 안쓰러워서 웬만하면 모두 소환했었다.
지금은 백색 탑 17층이 있다.
불러내지 않아도 거기서 놀면 되잖아.
선발진과 후보진을 나눈다.
각층에 걸맞은 최적화된 선발진.
돌발 변수가 생기면 즉시 합류할 후보진.
주혁이 85층 공략을 선언하자 우르르 몰려드는 피소환인들.
하지만.
"코사크 씨, 고방 씨와 바르딘 씨, 라직스 일꾼, 혈랑은 한 타임 쉬어요. 후보진입니다. 85층 올라가서 상황을 보고 소환 결정할게요."
그러자.
"호엑?"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바들바들 떠는 라직스.
자신이 제외라니.
이럴 수가!
"미안해요. 어차피 빠르게 공략하고 나올 예정이니 일할 시간도 없을 거예요. 이번 한 번만 참아요."
"후에에에에...."
코사크, 고방과 바르딘도 충격을 받은 듯.
"아니, 왜 저는 뺌까?"
"거대괴수 구간이라, 근접은 좀...."
"저, 전사는 소환사의 방패다. 바, 방패는 반드시 챙겨야 한다."
"그럴 일이 생기면 즉시 부를게요."
"아아, 소신은 반성하고 있겠습니다. 이게 다 제가 무능력한 탓입니다. 빛이여!!!"
코사크는 여전히 뚱한 표정.
"제페트와 디아마트는 왜 데려가심까?"
"아직 신입이잖아요. 이분들도 성장할 기회를 줍시다."
"...."
"날아다닐 수도 있고."
거대괴수 구간.
근접의 역할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심지어 위험하다.
거대괴수에게 붙었다간 자칫 죽을 수도 있다.
탑 공략 리셋 티켓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힘들면 리셋하면 되지.
그러나 부활의 룬은 쓰기 싫다.
아깝기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 죽는 걸 보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성한 파티.
광견베매제디 선발 출전, 코고알바라혈 후보 대기.
"매 영감님, 거, 왜 실실 웃슴까? 기분 안 좋슴다."
"커험! 내가 언제 웃었다고 그러나?"
"그럼 머리 위에 뜬 방긋방긋 스마일 기호는 뭠니까? 좀 지우십쇼."
매켄지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
선발진에 선택된 자신, 반면 후보로 전락한 2인자 코사크.
단번에 역전된 지위.
이런 게 바로 인생이지.
*
[대한민국 검은 탑(NO.1) 85층에 입장합니다.]
들어오자마자 주혁은 베 원사에게 미리 최마 1kg을 넘겨줬다.
"마총에 장전해 두세요."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나오자마자 꿰뚫어 버리겠습니다."
85층 배경은 황량한 사막지대.
하지만 사막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앞에 황폐해진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도시네?'
군데군데 보이는 인간이 만든 구조물, 반쯤 무너진 장벽, 끊어진 도로, 그리고 주저앉은 건물들.
자, 이번엔 뭘까?
거대괴수 구간이니, 뭔가 거대한 것이 나오겠지?
예를 들어 배경으로 설정한 도시를 망하게 만든 주범이라든지.
"아무래도 임무 유형이 도시 시가전 같소만."
"네, 들어가 보죠."
주혁과 일행은 천천히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떠오르는 임무.
[85층 임무 : 마도 제국 최종 병기 거대 골렘 마그누스 기간트 1개체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완료 조건 : 거대 골렘 마그누스 기간트 0/1]
'…마그누스 기간트?'
골렘이야 익히 알고 있다.
당장 소환 특성의 플레이어 중 골렘을 소환하는 클래스도 있으니까.
거대 골렘 기간트라니,
대체 얼마나 크길래.
"베 원사님, 마도 제국 최종 병기 마그누스 기간트래요. 혹시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 들어 봤습니다."
엥?
마도 제국 레인저 부대 소속이었으면서.
"최소한 제가 살았던 시대엔 마그누스 기간트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명칭도 처음입니다."
아!
혹시?
"아마 제가 죽고 난 다음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사실 르스스알로 승급하고 나서 받은 이 아광속탄 마총도 제 시대엔 없었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마그누스 기간트가 만들어진 시대는 베 원사가 살았던 이후의 미래 세상일 수도.
그때였다.
쿠쿵, 쿠쿠쿠쿠쿠쿠쿠....
강하게 흔들리는 지표면.
그리고.
콰드득, 쑤욱!
거대하고 길쭉한 무언가가 땅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기둥?'
아니었다.
짙은 회색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팔 한쪽.
'어....'
고작 팔 하나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크다.
'와!'
뒤를 이어 나오는 머리.
역시 사람처럼 생겼다.
끄드드드득!
머리통이 올라오고.
쿠쿠쿠쿠쿡!
몸체가 나오면서.
쑤우우우욱!
몸체보다 더 큰 두 다리까지.
하체 비만의 인간형 거대 골렘.
키는 어림잡아 30층 빌딩 정도.
몸체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듯했고.
'로봇이야, 뭐야?'
어릴 적 만화영화에 나왔던 추억의 거대 로봇.
순간!
- 적 침입, 적 침입.
'말도 하네?'
소름 끼치는 기계음.
- 적 침입. 대응 모색 필요. 대응 수단 결정.
거대 골렘 마그누스 기간트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주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삐이이잉!
마그누스 기간트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이거 심상치 않다.
"헉!"
"지,지휘관님!"
"소환사!!!"
"안 돼!!!"
반사적으로 그림자 발걸음을 시전한 주혁.
스팟! 스파파파팟!
동시에 반지에 새겨진 스킬인 블링크도.
팟! 팟! 팟! 팟! 팟....
치지직!
주혁이 움직인 직후, 놈의 두 눈에서 마치 레이저 광선처럼 발사되는 시뻘건 빛줄기.
쩌저저저적!
레이저 광선이 지나간 자리가 빨갛게 타올랐다.
"…어어."
거기 가만히 있었으면 죽을 뻔.
"이노옴!!!!"
격분하는 광마.
우우웅!
온몸으로 발현한 혈옥강기.
츠피핏!
어느새 광마는 기간트의 머리 위에 있었다.
"감히 소환사를? 머리를 뜯어 주마."
지이잉!
선명한 혈옥강기의 수강.
푸욱!
광마의 손이 놈의 머리를 깊숙이 찔러 댔다.
찌르고 또 찔렀다.
푹푹푹푹!
그러나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찌르는 깊이가 얕았기 때문인가?
쿵쿵쿵쿵.
광마를 머리에 단 채 아무렇지도 않게 발걸음을 옮기는 기간트.
- 적 근접 공격. 대응 모색. 대응 수단 결정.
순간!
파츠츠츠츠츠츠츠!
기간트의 전신을 덮기 시작하는 푸른빛의 전류막.
"이런!"
스파파팟!
위기감을 느낀 광마가 서둘러 몸을 피했다.
파치칙, 치칙, 칙, 치칙, 칙, 치칙....
번개 줄기를 몸에 두른 기간트.
가까이 붙으면 감전당할지도.
본격적인 전투 돌입.
스팟! 스팟!
광마가 놈의 주위에서 번뜩번뜩, 빠르게 움직였다.
츠피핏! 츠핏!
쏟아지는 초승달 강기.
쩌저저적!
발사되는 붉은 광선.
콰콰쾅!
피하고 때리고, 때리고 피하고.
그럴 때마다 기간트의 몸에 새겨지는 초승달 모양의 상흔.
하지만 놈은 금속체.
워낙에 단단했다.
그래도 놈의 전진은 막아 냈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광마의 공격만 받아 내는 기간트.
"베 원사야! 조준은 끝났느냐?"
"하고 있어요. 조금만 버티세요."
아광속탄은 단 한 발.
베 원사의 조준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홀로 나선 광마.
찌지지지지지지지지....
마총이 하얗게 달아올랐다.
스파파파팟!
광마도 멀찌감치 피했다.
조준 완료.
그런데?
- 아광속탄 공격 예상. 대응 모색. 대응 수단 결정.
"…뭐?"
아광속탄을 알아?
게다가 대응 수단도 있다고?
베 원사의 몸이 출렁거렸다.
아광속 탄환 발사.
그와 동시에 마그누스 기간트의 전면에서 일어난 대형 폭발.
마총이 일으킨 폭발이 아니다.
기간트가 스스로 만들어 낸 폭발.
콰쾅! 콰콰콰콰콰콰쾅!
빠쮸쮸쮸쮸쮸쮸쮸쮸쮹!!!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폭발의 여파에 거대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잠시 후, 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기간트의 모습.
'헐.'
놈은 멀쩡했다.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고 말았다.
아광속탄이 목표물 기간트가 아닌 바로 옆 건물을 부숴 버렸다.
기간트가 일으킨 대응 폭발에 영향을 받아 방향이 비틀린 아광속탄.
'설마?'
예상하건대 마그누스 기간트는 베 원사와 같은 문명에서 만들어진 미래의 마도 제국 병기.
따라서 아광속탄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기술도 탑재된 모양.
- 적 제압 필요. 제압 수단 모색. 제압 수단 결정.
그 와중에 행동을 개시한 마그누스 기간트.
쿠쿵! 쿵쿵쿵쿵!
주혁이 서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돌진해 왔다.
마치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또 빨랐다.
'육탄공격이라,'
이거 어쩌지?
칼질도 안 먹힐 텐데.
그래도 다행인 건 코사크, 고방, 바르딘을 두고 온 것.
이들을 데려왔다면 위험했을 수도.
'…임무를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또 리셋?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고민하던 그때!
"디그, 디그, 디그...."
기간트가 돌진해 오는 경로에 움푹움푹 파이는 구덩이.
그 구덩이에 발을 헛디뎌 콰당 넘어지는 기간트.
9서클의 마법사.
그가 시전하는 기초 마법 디그.
한 번 주문을 시전할 때마다 지면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래.
아직 희망이 있다.
- 적 기동력 제한 공격. 대응 모색. 대응 수단 결정.
휘리릿!
그 큰 몸집을 가지고 땅으로 굴러서 너무나 쉽게 벌떡 일어나는 기간트.
그러나 매켄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광마도 합세했다.
"헬파이어!"
콰르륵!
지면에서 솟아 나오는 용암.
- 적 화염 마법 공격. 대응 모색. 대응 수단 결정.
"디그, 헬파이어, 디그, 헬파이어...."
움푹! 콰르륵, 움푹! 콰르륵, 움푹! 콰르륵....
쿵쿵쿵쿵쿵!
기간트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매켄지가 만들어 낸 용암 구덩이와 땅 구덩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달려왔다.
츠핏! 츠피피핏!
광마의 원거리 공격도 받아 내면서 말이다.
와!
정말 빠르네.
거대한 놈이 빠르기까지 하면 어떡하자는 말이야?
하는 수 없다.
아직 한 장 남은 히든카드.
이것까지 써 버려야지.
얼마 전 폭발형 호문이들을 보충했다고 톡으로 알려온 우리 방구석 대인기피증 연금술사.
"알리아마리 지정소환."
화아앗!
스팟!
소환되자마자 상황을 알아차린 알리아마리.
그녀의 품 안에서 붉은색 금속 구체가 툭툭툭툭, 데구르르 굴러 나왔다.
허물어지는 금속 구체.
붉은색 알갱이.
폭발형 호문쿨루스,
급류처럼 흘러서 돌진해 오는 기간트의 몸체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닥! 다다다닥! 다다다다닥!
- 능동형 소형 폭탄 공격 예상. 대응 모색. 대응 수단 결정.
'이 새끼가?'
츠츠츠츠츠츳!
기간트의 전신에 씌워졌던 푸른빛의 전류가 촘촘한 거미줄 형태로 변해 사방으로 뿌려졌다.
폭발형 호문이들이 달라붙었다.
그러나 전류에 휘말려 몸체에 붙지도 못하고 그전에 터져 나가는 호문이들.
콰콰콰콰콰콰콰쾅!
무시무시한 연쇄 폭발.
그리고 여전히 돌진해 오는 놈.
이거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마그누스 기간트는 물리력이든, 마법이든, 폭발이든, 모든 외부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하아, 씨이발...."
남은 피소환인들을 모조리 불러내 놈에게 붙이면 방법이야 있겠지.
하지만 그러다 한 명이라도 죽으면?
부활의 룬이 있다고, 죽어도 17층에서 만난다고, 그냥 막 들이대?
그들이 죽는 모습을 어떻게 보라는 건가.
차라리 공략을 포기하고 말지.
그래, 뭐 리셋하자.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티켓을 꺼냈다.
그런데.
"자, 잠시만요! 주인님."
주혁을 제지하는 몽마 디아마트.
"왜...?"
"꿈의 영역이 먹힐 것 같아요."
무슨?
무생물임이 분명한 골렘 기간트인데 꿈의 영역, 즉 정신 공격이 먹힌다니.
"가능해요. 하지만 상대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서.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되는데."
견달래가 눈빛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정말이냐?"
"네."
"그렇다면 본녀가 도와주마."
스우웅!
현장에서 피어나는 신성한 선녀의 기운.
파라라락!
흩날리는 부적.
몽마 디아마트에겐 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버프의 부적이.
파라라락!
거대 골렘 마그누스 기간트에겐 능력을 하락시키고 무기력함을 가져다주는 디버프의 부적이.
차차차차착!
각각 두 종류의 부적이 대상에게 달라붙었다.
능력이 향상된 스스알의 몽마 디아마트가 가만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꿈의 영역 선포.
진짜 먹힐까?
바로 그때!
쿵쿵! 쿠궁, 쿵....
빠르게 돌진해 오던 마그누스 기간트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지더니, 곧 쓰러질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쿠궁!
급기야 한쪽 무릎을 꿇은 기간트.
그러나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또 한걸음.
순간!
채챙! 채채채채챙!
둥둥, 두둥둥둥둥!
견달래의 굿거리장단도 가세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쿵, 쿵, 쿵....
방향감을 상실한 듯,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그 자리에서 팽이처럼 맴돌더니....
기우뚱!
통나무처럼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기간트.
콰쾅!
먹혔다.
디아마트가 견달래의 도움을 받아 꿈의 영역 스킬로 기간트를 쓰러뜨려 버렸다.
광마의 무공도, 베 원사의 아광속탄도, 매켄지의 화려한 마법도, 알리아마리의 폭발형 호문이들에게도 끄떡없었던 그 기간트가.
근데 저놈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대체 어떻게?
하지만 아직 공략 완료 메시지는 울리지 않았다.
디아마트가 큰 소리로 힘껏 외쳤다.
"광마 님, 가슴이요, 가슴! 기간트 가슴에 뭔가 있어요."
"알았다."
스파파팟!
쓰러진 기간트의 가슴 부분에 올라간 광마
그리고 손으로 퉁퉁 두들기고는.
"여기가 비었구나. 약한 부분이 있었어."
지이잉!
혈옥강기를 발현해서,
그그그그극, 그극, 그극.
특정 가슴 부위를 잘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잘라 내 가슴 장갑판을 뜯어내자.
뿌드득!
"허허."
"뭐가 있어요?"
"글쎄올시다. 이게 뭔지… 사람인가?"
스파팟!
주혁도 서둘러 기간트의 몸 위로 올라왔다.
"어...."
광마 말이 맞았다.
사람 비슷한 존재가 그 안에 있었다.
거대 로봇의 조종석 같은 곳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는 또 하나의 소형 골렘.
골렘 속에 골렘?
'정보는?'
<지독한 상실감에 영혼이 손상된 마도 공학자 엘>
- 등급 : LSSR (레전드 스페셜 슈퍼 레어)
- 유형 : 골렘(인간)
마도 공학자였다.
172화
기간트는 본체가 아니었다.
본체는 따로 있었다.
기간트 탑승석에서 디아마트가 펼친 꿈의 영역에 당해 잠을 자는 마도 공학자 엘.
크지 않은 몸집이었다.
160센티미터 초반대의 키?
기간트처럼 은빛 금속으로 만들어진 몸.
옷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민머리, 갸름한 얼굴, 얇은 입술, 가지런한 눈매, 오뚝한 콧날, 전반적인 외모와 체형을 보니 여성형인 것 같고.
이름표가 달렸다.
지독한 상실감에 영혼이 손상되었다는 수식어와 함께.
그럼 배경 설명도 볼 수 있겠지.
광마가 혈옥강기로 시뻘게진 손을 들어 올리며 주혁에게 허락을 구했다.
"소환사, 노부가 처리하게 해주시오. 아무래도 이놈을 죽여야 공략 완료 판정이 뜰 듯하니."
"...."
하지만 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S+++ 등급 공략이 힘들 수도 있소. 지시만 내리시오."
"...."
하아.
어떻게 죽여?
이미 배경 설명을 봐 버렸는데.
- 마도 공학자 엘은 사실 영혼 세상의 피소환인이었다. 살아 있을 적 그녀는 마도 공학 연구에 강한 집착을 가졌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골렘 의체에 옮겨 수백 년 동안 연구에만 몰두했다. 엘의 사망 원인은 주변국과의 전쟁 때문, 적군에게 죽임을 당한 후 그녀는 피소환인 계약에 응했다. 죽어서도 마도 공학 연구를 하기 위해서.
- 그러다 엘은 NO.442 지구의 소환사에게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망해가는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도 공학자 엘은 지구의 소환사와 함께 전 세계 탑의 미공략 상층을 등반하면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노력했다. 그 기간만큼은 행복했다. NO.442 지구의 소환사는 엘을 믿고 의지했고, 엘 또한 그를 위해 모든 걸 다했다.
- 하지만 멸망은 피할 수 없었다. 급기야 엘의 눈앞에서 사망한 소환사, 강제로 영혼의 세상으로 돌아온 그녀는 미쳐 버렸다. 영혼의 붕괴, 피소환인 계약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지경, 결국 그녀는 피소환인 당시의 기억을 상실한 채 영혼 재활용을 당했다. 그래서 영혼이 수도 없이 복사되었고, 지금 그녀의 역할은 검은 탑 85층 거대 골렘 마그누스 탑승형 기간트 조종사였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프다.
엘은 괴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피소환인이었다.
기억을 잃고 복사된 영혼으로 재활용되어 탑 몬스터 전락한 불쌍한 존재.
"…이분 피소환인이었대요."
"네?"
"허어!"
"무슨?"
"...."
깜짝 놀라는 피소환인들.
주혁은 마도 공학자 엘의 배경을 설명해 줬다.
"그럼 과거 영혼의 세상에 존재했었다던 마도 공학자가 바로 이자란 말인가?"
"그렇군요."
"하아, 참으로 기구한 삶이옵니다."
"어쩐지, 죽이고 싶진 않더라니."
그렇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런 배경을 알고도 어떻게 죽여?
살리고 싶다.
탑 괴물이라는 굴레를 벗겨 주고 싶다.
'방법이 없을까?'
마도 공학자 엘, 지금까지 만났던 탑의 속박 영혼들과는 완전하게 다르다.
견달래의 스승 해령이나 코사크의 아버지 하르트만은 처음부터 탑의 몬스터로 선택된 인물들.
그래서 '해방'이라는 방법으로 탑에서 풀려났다.
옆에 있는 디아마트는 또 어떻고?
탑 관리자와 자유의지에 기반한 계약을 맺어 스스로 탑층 보스가 된 서큐버스퀸, 몽마의 군주.
그런 이유로 등급이 떨어지는 페널티를 받고 '귀순'이라는 방법을 통해 탑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엘의 본질은 원래부터 피소환인.
나중에 탑에 의해 속박된 영혼.
해방 혹은 귀순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새근새근.
아무것도 모르고 잠에 빠져든 엘.
보면 볼수록 측은하다.
주혁은 손을 들어 마도 공학자 엘, 그녀의 영혼이 들어간 골렘 의체의 머리를 무심결에 쓰다듬었다.
스윽.
그렇게 손바닥과 엘의 머리가 접촉했다.
"…맨질맨질하네."
움찔!
잠든 채 몸을 부르르 떠는 엘.
그와 동시에.
띠링!
[플래티넘 배지 5개로 마도 공학자 엘의 영혼을 복구하여 피소환인 자격을 회복하시겠습니까?]
"…어?"
[엘의 피소환인 자격이 회복되면 즉시 카탈로그 소속으로 영입이 가능해집니다.]
"오...."
[피소환인 자격 회복과 카탈로그 소속 영입 시 플레이어에게 페널티가 가해집니다.]
"엥?"
플래티넘 배지 5개야 그렇다 쳐도.
'페널티?'
뭔데?
[마도 공학자 엘의 피소환인 자격 회복과 카탈로그 소속 영입 시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페널티는 100일간 무작위 소환 일시 중단입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별거 아니네.
*
엘은 꿈을 꾸고 있었다.
오랜만에 꾸는 행복한 꿈이었다.
오랜만이라....
과거에 꿈을 꾼 적이라도 있었나?
그러고 보니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도 공학자로서 살았던 시절은 기억난다.
그리고 전쟁이 터져 사망했을 때도.
현재의 자신은 마그누스 기간트 조종사.
기간트를 움직여서 85층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들을 죽여라, 라는 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지금 생각나는 건 그거 하나뿐.
사실 다른 기억도 있기는 했다.
지워지지 않은 단 하나의 장면과 말.
얼굴 생김새도 모르는, 실루엣으로 보이는 한 명의 사람, 그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는 장면.
실루엣만 떠올려도 마음이 푸근하다.
게다가 쓰다듬을 때마다 했던 말.
- 맨질맨질해. 촉감이 좋다.
지금 꾸는 꿈이 바로 이 장면.
그래서 잠에서 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
그저 계속 꿈만 꾸고 싶을 뿐.
대체 누굴까?
나는 왜 그 사람을 그토록 그리워하고 있는 거지?
바로 그 순간!
엘은 느꼈다.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음을.
그리고.
'…맨질맨질하네.'
아아아.
뭐지?
이 행복한 듯 고통스러운 감정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짐작 간다.
아마 플레이어일 것이다.
85층을 공략하기 위해 입장한 자.
반면 자신은 플레이어를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의무가 있고.
그러나 실패했다.
플레이어를 죽이기 직전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후 제압당한 것이 분명하다.
탑승석의 해치가 열렸으니까.
'빨리 죽여.'
마침 잘 됐다.
살아 있는 것도 귀찮으니까.
그런데?
'…응?'
화아아앗!
가슴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기운.
'뭐, 뭐지?'
더불어 맑아지는 머리.
'아아아… 그래, 그랬었지.'
이제야 깨달았다.
원래 자신이 누구였는지.
'난 피소환인이었어.'
잊고 있었던 기억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처음엔 뒤죽박죽 섞였지만 천천히 정리되고 있었다.
NO.442 지구라는 차원에서 만났던 한 명의 소환사.
그와 함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세월.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안타깝고 비통했다.
두 개의 모순된 감정.
그가 결국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맞다.
자신의 소환사는 사라졌다.
그의 세상이 멸망했기에 그의 영혼도 소멸했겠지.
자아를 인식하자 점점 명료해지는 정신.
이제 잠에서 깨어날 때.
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한 명의 남자.
'…누구?'
자신의 옛 소환사는 아니다.
그와 느낌이 매우 비슷했지만, 전혀 다른 사람.
그런데?
"우리와 함께할래요?"
"…네?"
뜬금없이 훅 들어온 제안.
'어떡하지?'
엘은 좀처럼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누구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당장 그의 주위에 함께 서 있는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모두 피소환인들.
다들 행복해 보인다.
소환사의 손을 잡을까?
이번엔 이 사람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그럼으로써 영혼에 새겨진 후회와 아픔이 조금이라도 씻겨 나갈까?
엘은 결심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
주혁은 페널티를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피소환인에서 탑의 괴물이 된 가슴 아픈 영혼이었다.
소환사로서 자격을 회복시켜 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에 대한 대가로 100일간 무작위 소환 중지.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100일이면 석 달하고도 10일.
금방 지나간다.
먼저 플래티넘 배지부터.
몸 전체가 금속으로 되어 있어서 달아 줄 데가 없다.
그래서 조심조심 몸 위에다 배지 5개를 올려놓으니.
화아아앗!
배지 5개가 스며들 듯 녹아서 엘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마도 공학자 엘의 영혼을 복구합니다.]
[마도 공학자 엘의 피소환인 자격이 회복되었습니다.]
[마도 공학자 엘을 카탈로그 소속으로 영입하시겠습니까?]
주혁은 잠시 대답을 멈췄다.
그녀의 의사도 물어봐야지.
물론 자신이 영입한다고 하면 시스템에 의해 바로 카탈로그 소속이 되겠지만.
일단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자.
이윽고, 그녀가 눈을 떴다.
마도 공학자 엘과 눈이 마주친 주혁.
그녀도 상황을 알아차린 것 같다.
영혼이 복구되고 피소환인 자격이 회복되었으니.
"우리와 함께할래요?"
"…네?"
엘은 잠시 침묵했다가.
"저는… 네, 함께하고 싶어요."
"좋아요! 잘 생각하셨어요."
됐다.
영입한다.
[마도 공학자 엘이 시스템 카탈로그 명단에 등록되었습니다.]
[앞으로 100일간 무작위 소환이 불가능합니다.]
[마도 공학자 엘이 탑에서 벗어나 영혼의 세상으로 복귀합니다.]
[3시간 후 지정 소환이 가능해집니다.]
일단 영혼의 세상으로 돌아가는구나.
"조금 이따가 봐요."
"…네."
스팟!
사라지는 마도 공학자 엘.
그와 동시에.
[마도 공학자 엘의 이탈로 인해 모든 검은 탑의 85층 거대 몬스터가 탑승형 마그누스 기간트에서 자동형 마그누스 에고 기간트로 변경됩니다.]
자동형 마그누스 에고 기간트라.
좀 쉬워졌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참! 임무 공략은?
띠링!
[거대 골렘 마그누스 기간트 1/1]
[85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보상 : 상급 마정석 85kg]
공략 성공 메시지도.
하지만 S+++ 등급 공략 판정은 뜨지 않았다.
너무 시간을 지체한 것이 이유인 듯.
뭐, 그게 중요해?
잘못된 곳에 있었던 피소환인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는데.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바로 그때!
[업적 : 최초로 탑에 속박된 피소환인의 영혼을 복구하고 자격을 회복시켰습니다.]
업적도 주네.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모든 피소환인들의 현신 기한이 일괄적으로 3시간 연장됩니다.]
흠.
백색 탑 17층이 있어서 있으나 마나 한 보상이지만....
그래도 뭐, 현실에서 살아가는 시간도 중요하니까.
아무튼 준비하자.
3시간 후, 환영 파티 해야지.
영구 입주권도 준비해 두고.
*
검은 탑 관리실.
[....]
[....]
[....]
관리자들은 침묵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마연공 삼위일체의 현실화.
미치겠다.
어이가 없어 한숨만 나온다.
불가항력이었다.
NO. 1001 지구의 소환사 놈은 대체 어떤 놈이지?
저놈을 막을 방법이라도 있나?
이전 관리자의 마음이 어땠는지 알 것 같다.
같은 입장이 되어 보니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인과율을 어겨서라도 놈을 저지하고 싶다.
[하아.]
[후우.]
[흐음.]
시간이 흐른 후.
엔지니어가 디자이너에게 물었다.
[왜 피소환인의 영혼을 재활용했을까요. 반드시 그래야만 했을 이유가...?]
[탑의 난이도 때문이지. 에고 기간트는 문제가 있었거든.]
[어떤 문제?]
[기간트의 자체 성능은 매우 우수했지만… 멍청했어.]
[아!]
[과거 마도 제국에서도 처음엔 기간트를 에고형으로 설계했지만 나중엔 다 탑승형으로 교체했었지. 탑승형과 에고형의 기동 능력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야.]
공략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탑 85층 거대괴수도 탑승형으로 교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정말 어려워졌으니까.
물론 그것이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지만.
[메이커, 향후 예상되는 결과는?]
[마도 공학의 정점은 마력을 이용한 무기입니다. 지구 과학무기에 준하는 장비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마법사와 연금술사가 도와준다면 말이죠.]
[탑 층에서도 사용 가능한?]
[네, 인벤토리에도 들어갈 겁니다.]
마법 이론과 마도 공학, 그리고 연금술.
사용자의 마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여러 아이템.
마력 총, 마력 대포, 마력 포탄, 마력 전자기 펄스, 마력 전차....
그것들이 탑 안에서도 사용할 수 있고, 인벤토리에도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관리자들의 입장에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84층까지는 거대 괴수 공략이 쉬워질지도....]
소환사뿐만 아니라 일반 플레이어들도 80층대를 등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력 무기를 손에 든다면 말이다.
[그래도 85층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마력 무기를 들었다고 해도 기간트는 그걸 무력화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바뀌었잖아?]
[네?]
[85층 몬스터는 이제부터 에고 기간트야.]
[아!]
[에고 기간트는 멍청하다고, 그래서 능동적인 대처가 어려워.]
[그럼?]
[어리버리 움직이다가 결국엔 마력 폭탄이나 처맞고 부서지겠지. 물론 마도 공학자가 그런 물건을 만들어 퍼뜨린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지만.]
[....]
끔찍하다.
마연공, 3명이 합작해서 만들 아이템.
80층대는 포기하자.
될 대로 되라지.
90층대에서 승부를 볼 수밖에.
아니면 현실에서.
그나저나 해방의 룬 목걸이를 대량으로 뿌려 댔는데, 결과는 언제 나타나는 거지?
갈등이 번져 내란으로, 내란이 번져 국가 간 전쟁으로. 그렇게 이어져야 하는데 말이다.
*
백색 탑 17층.
검은 탑 85층에서 마도 공학자가 영입되었다는 소식이 모든 피소환인에게 전해졌다.
3시간 후 백색 탑 17층 새로운 입주민으로 등록한다는 사실도.
현재 소환사가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바깥 펜트하우스에서 대기하는 중,
그래서 17층은 곧 입주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다.
레드카펫도 깔고, 색색의 풍선도 불어서 띄우고, 환영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도 설치하고.
그런데 9서클 대마법사 매켄지 드로낙은 살짝 불만 섞인 표정.
"형평성이 맞지 않아."
"매 영감님은 매사에 그렇게 불평 투성이임까? 풍선이나 부십쇼."
"환영식이 너무 과다해. 나도 레드카펫 정도는 깔아 줬어야지."
"아이고, 역시 관종 마법사답슴다."
"관종이 어때서?"
그러자 견달래가.
"소환사를 잃고 영혼이 손상되어 탑에 의해 괴물이 되었던 피소환인이었습니다. 우리와 같을 수 있나요?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생각만 하면 본녀도 가슴이 아픈데."
광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동의한다. 불쌍한 영혼이었어. 허나 소환사에게 구원을 받았으니 축하와 환영은 마땅히 해 줘야지."
코사크도 거들었다.
"맞슴다. 이젠 불쌍하지 않슴다. 제가 잘 보살펴 줄 검다. 정작 불쌍한 사람들은 영혼의 세상에서 영차영차 무작위 소환만 기다리고 있을 영혼들 아임까."
맞는 말이다.
어쩌면 그들이 제일 큰 피해를 받았을지도.
"흠."
"쯧쯧."
"이번엔 꼭 나갈 거라고 장담하고 있었을 텐데, 그만 100일 동안 묶일 판이니."
다들 숙연한 분위기.
"그나저나 마공학자가 합류했으니 뭐부터 먼저 하지?"
"생각할 게 뭐가 있슴까? 팔찌 대량 생산임다."
"그렇군. 그게 제일 급한 사안이니."
"앞으로 컨베이어 벨트에서 팔찌가 하나씩 척척 나올 걸 생각하니 좋아 죽겠슴다. 헤헤헤헤."
"나도 그래. 하하하하."
마도 공학자의 합류로 비만 탈출 팔찌를 대량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신이 난 피소환인들.
"공장은 어디에 세우나? 이곳 17층에?"
"그야 봉 소환사님 결정에 달렸지만 전 바깥에 설치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함다."
"그렇지. 아무리 자동화라고 하더라고 포장이나 유통에 인력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
"바깥이라면 어디에?"
"북한이 최적임다. 관리도 편하고, 보안도 괜찮고."
순간!
스팟!
백색 탑 17층에 나타난 두 명의 사람.
한 명은 주혁이었고 다른 하나는 골렘이었다.
"오오!"
"환영함다. 레드카펫 밟으십쇼!"
"어서 오십시오."
"공장장 왔다!"
"컨베이어 벨트 돌리자!"
"생산량 초과 달성, 어서 오고!"
"호에에에에!"
"박수!"
짝짝짝짝짝짝.
17층이 열화와 같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173화
환영식 행사에 앞서 서로 인사부터.
85층에서 본 사람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고.
"봉 소환사님의 오른팔, 피소환인 서열 2위… 이거 중요함다. 꼭 기억해 두십쇼. 제가 일꾼 다음으로 2인자임다. 아무튼 인민무력부장, 소드마스터 코사크임다."
코사크를 시작으로.
"전사는 소환사의 고기 방패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녀 견달래이옵니다."
"호에에, 일꾼, 1위...."
"컹컹!"
차례대로 한 명씩.
"베 원사다. 같은 세상의 주민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앞으로 잘해 보자."
"나 바르딘은 주군의 앞길을 비추는 등대요."
"광마다. 이름은 들어 봤겠지?"
"저기, 존재감 없는 흡혈귀 제페트입니다. 정말입니다. 할 일이 없어요. 귀순자에게도 밀렸거든요. 저 좀 기억해 주세요."
"재가 그 귀순자예요. 몽마 디아마트, 어때요? 꿈은 잘 꾸셨어요?"
마리의 경우엔 톡으로, 전면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띠링!
<마리> : 어서 와라. 물어볼 것 있으면 톡 날려.
매켄지는 온갖 비주얼 및 특수효과 마법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짜잔! 펑펑펑펑! 스팟! 쿠구구구구, 화르르릇!
"마법사 매켄지 드로낙, 등장."
전광일과 정동훈도 밖에서 잠깐 불려 왔다.
앞으로 쭉 얼굴을 볼 테니 안면을 터야지.
비록 인사할 상대가 예상도 못 했던 인물, 아니, 골렘이지만,
"…전광일입니다. 봉 플레이어의 바깥 현실 업무와 법적 문제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저, 정동훈입니다. 재산 관리인 역할입니다."
길다, 길어.
이 많은 사람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니.
만약 이들을 데리고 예능 프로그램 촬영을 하면 소개와 인사만으로 분량을 다 채울 정도.
물론 마도 공학자 엘도 답례를 했다.
무표정으로, 필요한 말만, 간단하게.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냉정할 수도 있는 모습.
골렘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인간이었을 때부터 성격이 저런 건지.
사실 펜트하우스에서 지정소환 후, 입주권을 목에 걸어 주었을 때도 덤덤한 반응이었다.
백색 탑 17층에 입장한 후에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하지만 괜찮다.
사람이 좀 냉정하면 어때?
- 상대방 인사. 대응 모색 필요. 인사 실행.
이렇게 말하는 거보다는 훨씬 낫지.
게다가 여기 피소환인들이 어디 다 평범한 사람들인가?
하나같이 약간씩 나사가 빠져 있는 사람들.
"그럼, 우리 먹고 마시며...."
"소환사님."
"넴?"
"잠시 저기에 다녀오면 안 되겠습니까?."
엘이 가리키는 곳은 17층 통신탑과 발전소.
"다녀오고 싶어요?"
"네,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어,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순간!
푸슉!
골렘 몸체 엘의 발바닥에서 일어나는 불길.
츠피피핏!
쏜살같이 튀어 나가는 몸체.
이미 통신탑 앞에 도달해 있었다.
"와!"
"발바닥에 로켓이 달렸나."
"골렘은 골렘이군."
"저러다 가슴에서 미사일이라도 발사되는 건 아닌지 몰라."
"흠, 그 말 들으니 갑자기 기대됨다."
"근데 저긴 왜 갔을까요?"
"딱 봐도 설비 장치처럼 보이잖아. 공학자로서 궁금하겠지."
마도 공학자 엘의 통신탑과 발전소 탐방.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방 돌아왔다.
"어때요? 마도 공학과 관련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럼?"
"겉보기엔 공학 설비 장치처럼 꾸몄지만… 솔직히 저도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고차원의 마법인가요?"
"전혀요. 통신탑과 발전소는 창조의 힘입니다. 마법에 속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신(神)의 영역입니다."
백색 탑 통신탑과 발전소.
자체 공간뿐만 아니라 외부와의 통신도 가능하고 전자 기기를 코드 연결도 없이 작동하게 해 준다.
이곳에서 스마트폰은 항상 100% 풀충전 상태.
통신사 가입 없이도 너튜브, SNS, 인터넷 게임이 다 된다.
그런데 원리를 모른단다.
9서클 마법사도, 마도 공학자도.
하긴 이곳에서 랜드마크 고층 빌딩이 솟아올랐을 때 9서클 마법사 매켄지도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뭐, 검은 탑이나 백색 탑이나.
기본적인 과학 원리를 무시하는 건 똑같지.
복잡한 생각은 집어치우자.
마도 공학자도 정체를 알 수 없다는데.
자신이라고 어떻게 알아?
탑을 오르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오겠지.
"자, 그럼 회식이나 하죠. 엘 씨는 골렘… 음, 특이한 몸이어서 음식은 안 드시죠?"
"네, 못 먹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아쉽네요. 같이 밥도 먹고 술도 한잔하면 좋을 텐데."
"술은 먹습니다."
"…넴?"
골렘이 술을?
"에너지 보충 때문입니다."
"아!"
"보통은 마정석을 이용하지만… 고농도 알코올로도 마력 코어 엔진 구동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충당할 수 있습니다."
액체는 섭취할 수 있다는 말.
"많이 마시면 취하기도 합니다. 알코올이 골렘 신경계에 영향을 미쳐서."
좋다.
술친구가 한 명 더 늘었다.
그럼 판을 벌여 볼까?
골렘과 함께 술을.
먼저 신입 환영회의 주인공에게 한잔.
쪼르륵.
"감사합니다."
쭈욱!
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엘.
"허허, 호쾌하군. 그 독한 술을 안주도 없이 한입에!"
"시원시원해."
"딱 봐도 말술 같은데."
"이번엔 노부가 따라 주지."
광마가 병을 기울여 쪼르륵 따르자.
이번에도 쭈우욱, 캬!
"오오오!"
"연타구나."
"쭉쭉 들이켜시오."
쪼르륵.
쭈욱.
흐뭇한 미소를 짓는 꼰대들.
술 잘하는 신입은 어디서나 환영받는다.
"내 술도 한 잔 받고."
쪼르륵.
쭈욱.
이 기이한 술친구와의 대작에 흥이 오르는 모양인지 광마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얌체같이 혼자 마시지만 말고 노부도 한잔 따라 주시오. 술은 함께 나눠야 더 맛이 나는 법이니. 허허허!"
그래서 엘 앞에 잔을 들이밀었는데.
"뭐 인마? 얌체?"
"…음?"
살짝 눈이 풀린 엘.
"이 새끼가 술맛 떨어지게...."
"허?"
첨엔 충격받은 듯 멍하니 있다가 순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광마.
"이, 이런 미친년이...."
바로 그때!
- 진상 발견, 대응 모색 필요. 대응 방법 결정.
으잉?
광마는 어이가 없었다.
"본좌가 지, 진상이라고?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
그리고 골렘 마도 공학자 엘의 두 눈이 붉게 빛나면서.
삐잉!
치직!
째앵!
퍼억!
광마가 들고 있던 잔이 엘이 발사한 눈빛 광선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렸다.
"...."
그래놓고 술병을 들어 자기의 잔에 스스로 쪼르륵, 한잔 채운 후, 쭈욱.
"넌 술 먹지 마. 나 혼자 먹을 거야."
주혁도 황당했다.
어째 본인이 더 진상 같은데.
"저기, 엘 씨, 술자리에서 그런 행동은 위험하니까, 자제 좀 해 주셨으면."
순간!
획!
엘이 주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 소환사 발견, 대응 모색 필요. 대응 방법 결정.
꿀꺽.
'설마 눈빛 광선을 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스슷!
주혁에게 가까이 다가와.
슬며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엘.
"헤헤헤, 기분 좋다."
"...."
뭐, 어쩔 수 없지.
기분이 좋다고 하니까 다행이긴 하다.
- 술 취함, 대응 모색 필요. 대응 방법 결정.
"쿠울...."
술주정의 느낌이 나지만 냉정하고 삭막한 태도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풀어진 모습이 나은 것 같다.
귀엽기도 하고.
*
다음 날.
펜트하우스에서 잠을 깬 주혁.
간단하게 씻고 백색 탑으로 들어갔다.
스팟!
언제 일어났는지 멀쩡한 모습으로 베로니카와 대화를 나누는 엘.
술은 다 깼나?
"괜찮아요?"
"네."
"…어제 일은 기억나시고?"
"납니다.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구나."
안 부끄러울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고농도 알코올에 의해 신경계통이 교란되었기 때문입니다."
"…네네."
"제 책임이 아닙니다. 술 때문입니다."
"그렇… 겠죠?"
취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태도.
표정도 떳떳, 아니, 뻔뻔하고.
"근데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마도 제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도 공학자 엘, 그리고 마도 제국 레인저 베로니카.
"서로 접점이 있나요?"
"아닙니다. 각자 다른 세상입니다, 다만 마도 문명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입니다."
"아하!"
하긴.
지구 문명도 여러 개인데.
마도 문명 세상이라고 하나일 리가.
그 와중에 엘은 베 원사의 마총을 요모조모 살피고 있었다.
혹시 개조가 가능할까?
좀 더 성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개조할 필요 없습니다. 최신 버전에 최고 등급 마총입니다. 제가 살았던 마도 문명에서도 고작 10자루 정도 존재했던 무기입니다."
"그런가요?"
"우리 세상에서도 아광속탄은 궁극의 기술이었습니다."
역시 르스스알 베 원사의 무기답네
"그런데 막혔잖아요."
"마그누스 기간트도 최종병기니까요. 그러나 아광속탄 마총사가 3명 정도만 더 있었어도 기간트는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흠.
베 원사 혼자였기에 못 잡았다는 의미.
"마총을 하나 더 만들 수 있는지?"
"…최신 버전은 안 됩니다. 현재로선 이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하위 버전 마총만 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하위 버전이면 어때.
만들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위력은요? 거대괴수에게 통하겠죠?"
하위 버전 마총도 효과가 있다면 하나 정도 제작해 대여 형식으로 빌려줄 수도 있겠는데.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말이다.
언데드 구간의 성검처럼.
"효과는 있을 겁니다. 상황에 맞는 특수 탄환을 제작해 준다면."
"오오오! 특수 탄환 제작도 가능하고요?"
"만들 수 있습니다. 상급 마정석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능하단다.
그럼 마총 대여 사업도 할 수 있겠네.
하나 더.
"혹시 기간트 제작은?"
"그건 불가능합니다. 핵심 부품을 확보할 수 없어서, 게다가 수작업으로 만들 수 없는 부품이라 저 혼자로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긴!
마도 공학자 한 명이 왔다고 모든 마도 공학 제품들을 척척 만들어 내진 못하겠지.
아쉽다.
기간트도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탑승형 기간트에 올라타서 조종해 보는 상상.
남자라면 누구라도 꿈꿔 봄 직한 로망 아닌가.
"일단은 급한 것부터 먼저 처리하겠습니다."
"급한 거라뇨? 마총?"
"비만 탈출의 팔찌 대량 생산 설비입니다. 암살자와 마법사가 부탁해 왔습니다."
에이, 그놈의 팔찌.
뭐, 대량 생산이 가능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괜찮습니다. 암살자가 라직스 물산 정 대표와 논의해서 다 구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
"소환사님은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
진짜 날로 먹네.
탑 공략도 피소환인들이 해.
돈도 피소환인들이 벌어.
사업도 다른 사람이 대신해.
뭐 하는 게 있어야지.
봉주혁, 인생 참 편하게 산다.
*
또 하루가 지났다.
베 원사 마총의 아광속탄 쿨타임이 돌아왔다.
그럼 2번 탑을 공략해야지.
84층 말이다.
그러면 파티 모집.
"혹시 이번에도 근접 제외임까?"
"네, 편하게 쉬고 계세요. 후딱 끝내고 오게."
"예압!"
출동 인원은 5명.
베로니카, 견달래, 광마, 매켄지, 그리고 마도 공학자 엘.
솔직히 84층 콜로서스 콘도르는 베 원사 한 명이면 족하다.
엘은 신입이니까 경험 삼아 데려가는 거고.
우리 공략은 이렇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대한민국 검은 탑(NO.2) 84층에 입장합니다.]
임무가 떴다.
매우 느린 속도로 활강하는 공중전함 콜로서스 콘도르.
놈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날파리 같은 얼음 매.
"빨리 끝내고 나가죠."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조준하겠습니다."
"준비되시면 바로 쏘세요."
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
하얗게 달아오른 베 원사의 마총.
추울렁!!!
쿠쿠쿠쿵!
밀려드는 후폭풍.
펑!
콜로서스 콘도르가 터지고 난 후 울리는 소리.
빠쮸쮸쮸쮸쮸쮸쮸쮸쮹!!!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임무 완료.
[세계 공지 : 검은 탑 NO.2(한국)의 84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어휴, 화끈한 베 원사.
이게 바로 제대로 된 공략이지.
배지 2개 겟.
[대한민국 검은 탑(NO.2)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주혁과 일행은 펜트하우스로 돌아갔다.
"수고하셨어요."
"바로 우주대머슴 불러서 반복 공략을 하는 게...."
"쉬엄쉬엄해요. 상마 캐는 데 한두 시간 걸리는 것도 아니고, 소환 해제해 드릴 테니 17층에서 푹 쉬시시길."
"그럼 2번 탑 85층은?"
85층이라.
엘의 피소환인 자격 회복으로 에고 기간트로 변경되긴 했지만.
"그래도 기간트인데 힘들지 않을까요? 베 원사 아광속탄 쿨타임도 걸려 있고."
사실 고민이다.
어떻게 잡아야 할지.
자동형 에고 기간트.
즉, 조종사가 없다.
따라서 영혼도 없다.
그런 이유로 디아마트 꿈의 영역 스킬이 먹히지 않는다.
어찌 보면 쉬워진 게 아니라 더 어려워졌을 수도.
그런데?
"85층 들어가도 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말하는 마도 공학자 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S+++ 등급 공략도 가능합니다."
"응?"
무슨 소리야?
아직 술이 덜 깼나?
"어떻게요?"
"들어가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럼 가야지.
저렇게 자신하는데.
[대한민국 검은 탑(NO.2) 85층에 입장합니다.]
황폐화한 사막 도시에 나타난 주혁과 피소환인들.
역시 임무를 받자.
쿠쿠쿠쿠쿠쿠쿠쿠....
지표면을 뚫고 거대 골렘 마그누스 에고 기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방법으로 기간트를 상대하려 할까?
저 무시무시한 거대 골렘을 말이다.
"곧 있으면 기간트가 멈출 겁니다. 약 5분 동안."
"멈춘다고요?"
"네, 그리고 저도 같이 멈춥니다."
"…왜요?"
기간트도 멈추고, 엘도 멈추고.
대체 무슨 말인지.
"마력 EMP, 전자기 펄스를 사용할 겁니다."
아!
"일반 생물에겐 타격이 없지만 마도 공학의 골렘은 일시적으로 가동이 중단됩니다. 저도 골렘이고요."
그렇구나.
"그런데 왜 굳이 같이 맞아요? 저놈 혼자만 멈추게 할 수 없어요?"
"저만이 쓸 수 있는 무기라서요. 거리도 가까워야 하고, 또 사용하면 즉시 터져 버립니다."
"…괜찮은 거죠? 후유증이 남는다던가."
자폭 무기 같은 거면 곤란한데.
"아군이 있어서 상관없습니다."
맞다.
엘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기간트의 약점은 마력 코어 엔진, 가슴 장갑판 안에 병렬 연결된 엔진이 5개 있으니까, 놈이 멈추면 모조리 뜯어 버리세요."
멈춰 놓고 요리하면 된다는 말이지?
"마력 코어 엔진은 골렘의 핵심 부품 중 하나입니다. 저게 있으면 골렘 생산도 가능하죠. 다른 분야에도 쓸 수 있고."
그래?
귀가 솔깃해진다.
"하지만 보상 아이템이 아니라서 가질 수 없습니다. 그냥 부숴 버리십시오."
앞으로 나아가는 엘.
엘을 발견하고 기동을 시작하는 에고 기간트.
쿵쿵쿵쿵!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시작하겠습니다."
- 적 발견, 대응 모색 필요. 대응 방법 결정.
쿵쿵쿵쿵쿵!
엘이 행동을 시작했다.
푸슉!
츠피피핏!
전진하는 기간트에게 달려가는 그녀.
위잉.
오른쪽 허벅다리 일부가 열리더니.
철컥!
튀어나오는 원통형 막대기 하나.
'저게 마력 EMP인가?'
엘과 기간트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저러다 밟힐라.
그럼 개미처럼 납작해질 텐데.
어느덧 둘의 간격이 3m도 채 안 되는 초근접 거리에서.
드르르륵!
엘은 막대기 양쪽을 손으로 잡고 힘차게 비틀었다.
그리고.
번쩍! 파직! 파파팟!
강렬한 빛의 파장과 함께 터져 나가는 마력 EMP.
멈칫!
멈칫!
거대 골렘과 마도 공학자 골렘이 순간 정지했다.
"정말 멈췄군."
"저렇게 쉬운걸."
"노부가 마무리하겠소."
스핏!
광마가 정지한 에고 기간트의 가슴팍으로 올라갔다.
타닥, 타다닥, 타닥!
지이잉!
혈옥강기 발현.
그거걱, 그걱, 서걱.
1번 탑 85층에서 경험이 있던 터라 조종석 장갑판을 뜯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장갑판을 뜯어 내자 보이는 마력 코어 엔진들.
가로 세로 높이 각각 60cm 정도 되는 정육면체 큐브 모양의 장치 5개가 오각형 형태로 놈의 몸에 장착되어 있었다.
빠드드득! 뿌득!
하나를 뜯어 내니 슈우웅! 땅바닥에 떨어지는 정육면체 마력 코어 엔진.
"어어! 부서지겠다."
주혁의 외침에 매켄지가 텔레키네시스 마법으로, 스윽! 툭! 조심조심 땅에 안착.
그다음 차례대로 둘, 셋, 넷, 다섯 개의 엔진도.
그러자.
[거대 골렘 마그누스 기간트 1/1]
[85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임무가 완료됐다.
'저것들이 핵심 부품이란 거지?'
쓸모가 많다고 했고.
일단 보상 아이템이 아닌 건 맞다.
플레이어 인벤토리에도 들어갈 수 없고.
하지만 그건 일반 플레이어들에게나 적용되는 규칙.
'훗! 가지고 나갈 방법이 왜 없어?'
만능 일꾼이 있는데.
"라직스 지정 소환."
스팟!
"호에에?"
우주대머슴 말이다.
"저기 네모난 것들 있죠? 아공간 배낭에 넣어요."
"호엥!"
스슷! 스슷! 스슷....
라직스가 마력 코어 엔진들을 아공간 배낭에 넣었다.
우리 라직스 최고.
저러니 1인자지.
[세계 공지 : 검은 탑 NO.2(한국)의 85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등급 공략 메시지가 뜨고.
스팟!
탑을 퇴장했다.
물론 여전히 기동을 중지한 상태인 마도 공학자이자 골렘인 엘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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