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아이템 중에는 해외 반출이 금지된 것들이 있다.
보통 상급 마정석 같은 탑 재료들, 혹은 공략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룬이나 티켓, 그리고 탑 보상 아이템 등등.
지금으로선 해방의 룬 목걸이.
반입도, 반출도 금지된 물건.
소지 자체가 불법.
국가가 금지하고는 있다지만 실제로 적발해 내지는 못한다.
플레이어가 인벤토리에 넣으면 끝인데.
공항 검색대에도 안 걸리는 걸 무슨 수로 찾아내나?
거래도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언제 어디서든, 만나서 인벤토리에서 빼주면 끝.
물론 계좌 기록이 남기 때문에 보통은 코인이나 무기명 채권으로 거래하지만.
그런 식으로 중국산(産) 해방의 룬 목걸이가 전 세계로 번지고 있었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재 일어나는 일본 관광 붐.
도쿄 시내 한가운데 솟아난 검은 탑.
검은 탑이 포함된 도쿄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사진 한 방 찍어서 SNS에 올리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미국, 유럽, 대만, 중국, 한국 등등.
수많은 관광객이 일본으로 몰려와 이질적인 도심의 검은 탑을 구경하고 간다.
물론 관광객 중에는 인벤토리에 해방의 룬 목걸이를 몰래 넣어 가지고 온 플레이어도 있었고.
일본의 긴자의 조용한 술집.
마주 앉은 한 명의 노인과 험악하게 생긴 청년.
"여기 있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거야."
노인의 손에 의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목걸이 하나.
"자네도 플레이어니까 확인할 수 있겠지?"
노무라 다이킨조는 해방의 룬 목걸이를 묵묵히 바라보다 손을 뻗어 정보를 확인했다.
1시간 동안 플레이어의 능력을 탑 바깥에서도 발현, 그리고 총 3회 사용 가능.
"중국산입니까?"
"그럼 일본산일 줄 알았나? 해방 목걸이가 다 중국산이지."
노무라는 야쿠자다.
동시에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것도 국가 전산망에 없는 미등록 플레이어.
야쿠자 신분에서 각성하여 지금은 도쿄 신주쿠 한 구역을 관리하는 조장.
"이거 쓰고 나면 반납해야 합니까?"
"천만에! 임무만 완수하면 목걸이는 자네 거야. 횟수가 몇 번 남았든 상관없네."
임무라는 건 다름 아닌 청부 살인.
한 사람만 죽이면 된단다.
하지만 상당히 까다로운 목표.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설령 힘을 해방했다고 하더라도.
왜냐하면 청부 대상도 플레이어이기 때문.
그리고 매우 잘 알려진 사람이다.
평상시엔 접근조차 못 하는 신분.
"플레이어를 죽이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거 아시죠?"
"알고 있네. 탑으로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지."
맞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탑에 들어가면 그만.
닭 쫓던 개처럼 손가락만 빨아야 하고.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놈이 하루 입장 기회를 소모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다 알 수 있으니까."
노무라는 고민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평범한 놈이 아니라서 그렇지.
"그자도 해방의 룬 목걸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자네보다 레벨이 낮지 않나?"
그렇다.
목표 대상의 알려진 레벨은 31LV.
반면 자신의 레벨은 그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다.
"성공만 해. 뒤처리는 우리가 하지. 그럼 신주쿠, 롯폰기, 가부키초, 아사쿠사는 자네 구역이야. 아니, 도쿄 전체 구역을 넘겨주겠네."
"후우."
솔직히 노무라는 점점 마음이 끌리고 있다.
어렵긴 하지만 성공해내면 그에 따른 보상도 확실하다.
눈앞의 이 노인은 그럴 만한 힘을 가진 존재이니까.
"마력 봉쇄 스크롤은요? 그거 있으면 마력 자체가 무효화 된다던데."
"아직 일본에 없는 물건이야."
"확실합니까?"
"내 말을 못 믿나? 우리가 그런 사전 조사도 없이 일을 벌일까 봐?"
고개를 끄덕이는 노무라.
그래,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이후의 일들은 이들이 다 책임져 줄 것이다.
"좋습니다. 해보죠."
"클클클, 잘 생각했어."
의뢰 수락.
"밥상은 우리가 차려주지. 자넨 먹기만 하면 돼. 얼마나 쉬운가?"
"알겠습니다."
노무라는 이 일이 실패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청부 대상이 자신처럼 해방의 룬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기본 레벨이 30 가까이 차이 나는데.
실패할 리가.
* * *
탑 관리자들은 탑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안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
누가 몇 층에 올랐는지, 공략 성공인지, 실패인지, 성공이라면 어떤 보상을 받아갔는지.
그럼 탑 바깥은?
현실 세상은 어떻게 파악할까?
인과율을 소모해서 탑에 들어온 플레이어의 의식을 훑어보면 제일 빠르다.
세세한 사항까진 다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현재 탑 바깥에서 일어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대충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매우 제한적이지만 중국에서 첫 번째 해방의 룬 목걸이 사태가 발생한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중국의 충칭에서 시작된 사건.
사망자가 무려 50명 이상.
됐다.
마침내 뿌린 씨앗이 싹을 틔웠다.
이제 연쇄 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해방의 룬 목걸이는 일종의 바이러스.
효과를 목격한 이상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충칭을 시작으로 해방의 룬 목걸이 사용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우물쭈물, 디자이너에게 보고하는 엔지니어.
[…저기, 마력 봉쇄 스크롤이라는 게 나왔다는데.]
[응? 그건 또 뭐야?]
[자칫하면 해방의 룬 목걸이가 무력화될지도.]
대체 무슨?
[해방의 룬 목걸이는 탑 아이템이야. 사용기한이 다할 때까지 부서질 일도 없고, 또한 고장 나지도 않아.]
[그게....]
이어지는 엔지니어의 설명.
해방의 룬 목걸이 작동 방식엔 관여하지 않지만 그 이후 플레이어의 몸에 발현된 마력을 묶어 버린다는 말.
또 소환사다.
놈이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수량은? 몇 장 없으면 찻잔 속의 태풍 아닌가?]
[찍어낸다고 합니다. 양산화 과정에 들어갔다고.]
[....]
맞다.
잠시 간과했다.
마연공.
그 개 같은 삼위일체.
[미국에서 스크롤의 효과가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해방의 룬 목걸이 사용 플레이어를 손쉽게 제압했답니다. 인명피해 하나 없이.]
[....]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를 던지면 그 하나에 관한 대책이 너무나 빠르게 나온다.
도무지 손을 쓸 수 없을 지경.
어떻게 하지?
계획을 백지화해야 하나?
이 엿 같은 소환사.
분통이 터져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버릴 지경.
[메이커, 해방의 룬 목걸이를 더 밀어 넣어.]
[하지만 인과율이....]
[내 말대로 해. …끝까지 가보는 거야.]
그래, 해보자.
누가 이기는지.
* * *
영혼의 세상.
그곳에 사는 영혼들의 소원은 소환사의 선택을 받아 이 지긋지긋한 무한의 감옥에서 나가는 것.
더불어 종속 계약에서의 완전한 해방.
『슬슬 무작위 소환 일정이 다가오지 않았나?』
『벌써 지난 것 같은데.』
『그럼 누가 나갔지?』
『글쎄, 그거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 백색 탑이 생긴 이후로 한번 나간 새끼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그래도 꼬박꼬박 자랑질은 하고 갔잖아. 그전의 놈들도 그랬고, 관종 마법사 새끼도 마찬가지였고.』
『장담하는데, 여기 중에 누구라도 불려 나갔다면 소환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기로 돌아와 우리들 놀려 댔을 거다.』
『듣고 보니 그러네. 맞아. 그걸 어떻게 참아?』
『나도 소환되었으면 최소 3번 이상은 자랑질하고 나서 입주권 받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조용하다는 말은… 아이 참! 걱정되잖아. 무작위 소환이 안 되는 거 아냐?』
『설마?』
『혹시 관리자 새끼들이 또?』
『후우, 바깥 상황 알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나?』
영혼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소환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지 하면서.
* * *
플레이어 출신 마에다 일본 총리는 도쿄대에서 열리는 특별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탄 관용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강연의 내용은 특별한 것 없었다.
일본 플레이어로서 가지는 의무와 권리, 그리고 향후 탑 등반에 대한 청사진, 상급 마정석 등 신 자원을 기반으로 한 일본의 4차산업, 등등.
그 과정에서 중국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한국으로부터 마력 봉쇄 스크롤 도입을 결정했다고 발표할 예정.
하지만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이 발표로 우익단체들이 또 개떼처럼 달려들 것을 생각하면.
또 한국에 의존하느냐.
마력 봉쇄 스크롤은 필요 없다.
우리 일본인들의 민도는 세계 제일이다.
해방의 룬 목걸이로 인한 사고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중국이나 한국에서 입국하는 관광객들을 철저하게 조사해라.
그러나 마에다 총리는 정면 돌파를 결심했다.
어차피 우익들은 자신을 흠집 내기 위해 별별 꼬투리를 다 잡는 자들이니까.
'쯧, 아직까지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일본의 거품은 완전히 꺼졌다.
현재 세계 검은 탑 공략을 주도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인데.
자신이라고 한국이 좋을까?
전략적으로 친한 척 하는 거지.
어떻게든 도쿄 탑 붕괴를 막으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사건건....'
그때였다.
덜커덩!
갑자기 멈추는 자동차.
'…응?'
마에다는 이상함을 느꼈다.
'왜?'
총리를 태운 차량이 운행 중에 정지할 리가, 그것도 고가도로 위에서.
기분이 싸하다.
운전기사와 수행비서, 경호원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고.
"이봐? 다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대답이 없다.
'이거 혹시....'
마에다 총리의 판단은 빨랐다.
자신이 왜 해방의 룬 목걸이를 착용하고 다닐까?
혹시라도 돌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
바로 지금 같은 경우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읊조렸다.
'해방.'
순간!
그그극!
갈라지는 자동차 천장.
푸욱!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검은색 창.
마에다도 반사적으로 자동차 옆문을 몸으로 밀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콰직! 우지끈!
그러나.
뜨끔!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
푸푸푸푸푹!
자동차 바깥에서도 검은색 창이 마에다 총리를 집요하게 노려왔다.
고가도로 위를 데굴데굴 회피하는 마에다.
푹! 푸푹! 푸푸푸푹!
다행히 급소는 피했지만 창의 공격에 마에다의 전신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로 인벤토리에서 탑 보상 아이템인 장검을 꺼내 들면서.
채챙! 채채챙!
서거걱, 서거걱!
반격과 동시에 뒤로 물러나니,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킬러겠지.
해방의 룬 목걸이를 발현한.
정체불명의 괴한도 마에다의 공격에 상의가 넝마처럼 잘려 나갔다.
그리고 괴한의 가슴팍에 새겨진 무시무시한 형상의 오니 문신.
"…야쿠자?"
패션 문신은 아니다.
야쿠자 문신이 맞다.
놈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레벨을 속였구나. 총리라는 새끼가."
그럼 당연히 속여야지.
총리로서의 개인 정보는 국가 기밀인데.
마에다 총리의 알려진 레벨은 31, 하지만 지금은 45레벨.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것 같나?"
"어, 난 무사할 거야. 너만 죽으면."
파앗!
야쿠자, 혹은 킬러가 순식간에 마에다에게 짓쳐 들었다.
츠핏! 핏핏핏핏!
채챙! 챙챙챙챙!
마력이 담긴 매서운 장창 공격에 연신 뒤로 물러나는 마에다.
역부족이다.
같이 해방의 룬 목걸이를 발동했지만 이놈의 레벨이 더 높다.
더구나 뒤따라오던 수행 차량에 타고 있을 경호원들도 내리지 않고 있다.
미리 설계된 함정이라는 의미.
노무라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
놈에게 분명 치명상을 입혔는데도, 아직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무는 중.
'힐링 포션도 마시지 않았는데… 아이템인가?'
탑 전용이란 수식어가 없는?
그런 것 같다.
마에다의 허리띠가 붉은빛으로 번쩍번쩍 빛나자 몸에 입은 상처가 회복되고 있었으니까.
"이런, 제기랄!"
스파팟!
창을 들고 돌진하는 노무라.
마에다는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몸을 피해야 한다.
여기 있다간 죽는다.
스팟!
빠르게 몸을 돌려 도망치는 마에다 총리.
버틴다.
버티면 산다.
비록 놈의 레벨이 자신보다 높다고는 하지만 버틸 수 있는 수단도 있다.
자신이 가진 최고의 보물.
바로 착용하고 있는 허리띠.
이거 덕택에 단기간에 14레벨이나 올렸고.
어쨌든 도망은 어디로?
일단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 좋겠다.
그의 눈에 도쿄 도심에 세워진 검은 탑이 보인다.
'저기, 저곳으로 가야 해.'
목적지는 도쿄 검은 탑.
도쿄 제일의 관광지.
따라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
마에다는 정신없이 도망쳤다.
노무라도 그 뒤를 바짝 쫓았다.
* * *
백색 탑 17층.
주혁은 동생 민혁이의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 형! 간첩이었어?
하아, 이 새끼가!
"내가 전에도 이야기했잖아. 김 위원장과는 잘 아는 사이라고."
- 그니까, 잘 알면 안 되지. 아직 통일 멀었다고.
"시끄럿! 전화 끊어!"
그러나 엄마에게서도 전화가 와서.
- 아들, 요즘 이상한 사람 만나고 다니는 건 아니지? 나는 아들 믿는다. …아니지?
"하아!"
하는 수 없이 전광일 청장이 나섰다.
"네네, 어머님, 정부에서도 다 알고 있는 사안입니다. 그렇죠. 그러니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덕분에.
- 내 이럴 줄 알았다. 이 양반이 무슨 국보법 위반이네 벌벌 떨면서, 호들갑이 아들보다 더 심해.
맞아요, 엄마.
전 엄마 피가 섞였잖아요.
아버지와는 다르게.
확실히 높은 공무원이 나서니까 해결됐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뭘요."
마침 옆에 전광일 청장이 있어서 다행.
뭐, 요즘 틈만 나면 드나드니까.
이왕 온 김에 80층 대 공략 계획 이야기도.
"잘만 하면 81층 이상 거대괴수 구간 공략법이 나올 것 같아요."
"…네? 어, 어떻게?"
"자세하게 말하기 어려운데, 언데드 구간 성검 대여 기억나시죠?"
"네, 나다마다요."
"그것과 비슷하게, 지금 제작 중인 무기가 있는데, 성공하면 거대괴수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어어."
"아직은 계획 단계니까, 어디 가서 밝히진 마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운은 띄워뒀다.
마도 공학자 엘이 개량형 마총만 만들어 주기만 기다리면 된다.
순간!
띠링!
전광일의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알림음.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문자에 찍힌 너튜브 링크를 터치하는 전광일,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했다.
"헉!"
"왜요? 무슨 일이라도."
"으음."
스마트폰을 주혁에게 보여 주면서.
"해방 플레이어 두 명이 도심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답니다."
"그래요? 어딘데요? 중국?"
"일본입니다."
일본?
주혁도 스마트폰을 봤다.
도쿄 도심의 검은 탑을 배경으로.
장검을 든 정장 차림의 남자와 장창을 든 채, 찢긴 옷 사이로 징그러운 문신이 언뜻언뜻 보이는 남자.
"와! 문신 봐라. 야쿠자인가요?"
"아마도...."
"근데 이 사람은 어디서 많이 봤는데."
"일본 총리입니다, 마에다 켄지 총리."
"아하, 일본 총리구나, 총리, …네?"
이게 무슨 일이야?
"일본 총리와 야쿠자가 서로 붙었습니다."
"…AI 딥페이크 영상인가요?"
"아니, 현실입니다만."
세상에!
총리와 야쿠자?
이게 어떤 느낌이냐 하면.
킹콩과 고질라.
슈퍼맨과 배트맨.
에일리언과 프레데터.
딱 이랬다.
일본 애니메이션 혹은 실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도쿄 한복판에서 말이다.
"X밥들 싸움났슴다."
누군가에겐 X밥.
"저 일본 총리가 착용한 허리띠… 마도 공학 아이템입니다. 그것도 최신 버전이네요. 분해해서 연구해 보면 좋겠는데."
누군가에겐 연구 자료.
"포션 자동 주입기 같습니다. 아이템에 최하급 인벤토리 마법 수식이 새겨져 있을 겁니다. 제 전공 분야는 아니지만 저 허리띠 분해하면 마력 회로도 정도는 파악할 수 있으니까...."
역시 총리라서 좋은 걸 가지고 다니는구나.
나중에 빌려서라도 마도 공학자 엘이 연구할 수 있게끔 하면 좋겠는데.
아무튼 별일이 다 있다.
과연 누가 이길까?
182화
마에다 총리는 천신만고 끝에 검은 탑까지 도망쳤다.
사람들로 가득한 번화가에 도착하자.
"어?"
"저 사람 뭐, 뭐야? 왜 무기를 들고?"
"낯이 익어. …총리 아니야? 마에다 총리."
"총리 맞는 것 같은데?"
"헉! 한 명 더 있다. 창을 들었어."
"폰, 폰 꺼내, 빨리."
"이거 찍어야 해."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는 사람들.
이 기이한 상황을 어떻게 놓쳐?
마에다를 쫓아 역시 검은 탑 번화가에 도착한 야쿠자 노무라 다이킨조.
매우 당혹스러웠다.
애초에 정보가 부족했다.
그래서 판단도 잘못됐고.
총리가 해방의 룬 목걸이를 착용했을 수도 있다는 건 예상 범위 안이었다.
일본도 71층에 올랐으니까.
계산에 넣지 못했던 건 두 가지.
하나는 레벨.
마에다 총리의 레벨은 31LV이 아니었다.
올렸다 해도 고작해야 2, 3레벨 정도로 생각했는데.
언제 저렇게 레벨을 올렸지?
정치인 주제에 탑이나 등반하고 말이야.
자신의 레벨은 60.
일본 국가 육성 플레이어를 제외하고, 일반 플레이어 중에 자신보다 더 레벨이 높은 사람이 있나?
등록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 최고 수준일 터.
판단 착오로 인해 첫 단추가 어긋났다.
고가도로에서 총리를 죽였어야 했다.
죽이고 난 다음 중국 플레이어의 난동으로 사건을 조작했어야 했다.
해방 빌런 플레이어 하면 중국 아닌가?
별 의심 없이 그렇게 넘어갔을 것이다.
일본 정치인들은 중국 플레이어에게 죽은 마에다 총리를 추모하며 즉각적인 군사 행동에 들어가겠고.
과거 쿠데타 실패 이후, 잔뜩 쪼그라든 자위대는 다시 찬란하게 부활하여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과 함께 일본을 장악하려 하겠고.
자신은 관동 전체를 아우르는 도쿄 야쿠자 조직의 오야붕이 되는 것이고.
이랬어야 했다.
이게 옳게 된 시나리오.
그런데 뭐지?
총리가 자신의 일격을 막아 내고 반격하면서 여기까지 도망 왔는데, 아직도 어쩌지 못하고 있다니.
그리고 또 하나의 변수.
마에다가 착용한 허리띠.
반짝반짝 붉은빛이 날 때마다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아이템.
저것도 계산에 없었다.
가장 큰 장애물.
물약 병을 입에다 꽂고 싸우는 것과 다름없었다.
인벤토리에서 물약을 꺼내고, 뚜껑을 열어, 몸에 뿌리거나 입으로 가져가 마시는 번잡한 행위가 모조리 생략되니까.
사기 템이다.
갖고 싶다.
반드시 죽이고 빼앗는다.
경찰 특공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칙쇼!!!"
츠핏! 피피피핏!
노무라가 섬전 같은 찌르기로 마에다 총리의 목을 노렸다.
채챙!
장검으로 막아 내는 마에다.
하지만 힘에 부쳤다.
겨우겨우 급소만 막아 냈다.
막았는데도 충격 때문에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온다.
팔이 베이고, 어깨가 찔리고, 옆구리도 찔리고, 허벅지도 베이고,
그래도 번쩍번쩍, 허리띠에 붉은빛이 감돌면 자동으로 치유되는 상처.
그러나 이제 곧 허리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허리띠 안에 넣어 둔 힐링 포션이 다 소모되면 자동 상처 치유도 끝.
탑 전용 수식어가 없는 매우 비싼 힐링 포션인데, 이것도 어렵게 구해서 허리띠 안에 채워 넣은 건데.
그래도 어떻게든 버틴다.
마에다 총리는 있는 힘을 다해 스킬을 발현하고는 장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가까스로 반격했지만.
마력이 실린 장검을 창대로 막은 후, 그대로 마에다의 복부를 후려 차버리는 노무라.
퍼억!
"큭!"
발차기에 맞아 부웅 날아가는 총리.
슈우웅!
검은 탑 주변은 관광지였다.
크고 작은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들이 밀집한 지역.
총리의 몸이 다코야키 가게에 처박혔다.
콰아앙!
"으악!"
"이, 이런!"
"도망쳐!"
"내 가게가...."
"빨리 피해! 지금 가게가 문제야?"
혼비백산하며 흩어지는 사람들.
비틀비틀, 마에다 총리는 끈질기게 다시 일어섰다.
살아야지.
살아서 복수해야지.
야쿠자 플레이어.
이놈 배후는 누굴까?
당연히 자유당 우익세력일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을까 봐?'
자신도 나름 사무라이 집안의 후예.
근성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살아남으면 이긴다.
경찰이 올 때까지.
그 와중에 라이브 생방송은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일본 총리와 야쿠자 간의 대결이라는 기상천외한 이벤트에 모두 환호했다.
└ 총리냐, 야쿠자냐! 누굴 응원해야 해?
└ 당연히 총리 아니야?
└ 간바레! 마에다, 간바레!
└ 총리의 힘을 보여 줘!
└ 저저, 문신 봐라. 어우, 징그러운 야쿠자 새끼.
└ 아무튼 박진감 하나는 끝내준다.
└ 둘 다 해방 플레이어잖아.
└ 그런데 쟤들 레벨은? 되게 세네. 총리 레벨 31아니었나?
└ 설마 31일 리가, 최소 40층대 후반이다.
└ 아니, 정치인이 언제 거기까지 등반했데?
└ 그러니까 일본 정치가 이 모양 이 꼴이지.
마치 히어로 액션 무비와 같은 영상.
그렇게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일어나는 총리.
악착같이 죽이려는 야쿠자.
└ 근데 마력 봉쇄 스크롤은 없나? 아무나 찢어 버리면 상황 끝날 텐데.
└ 일본엔 아직 도입되지 않았대.
└ 쯧쯧,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인데.
└ 어떻게 단 한 장도 없어? 누구 한 명 비행기 타고 한국 가서 구해와라.
└ 그래, 저러다 일반인이라도 휘말리면 큰일이잖아.
전투가 벌어진 지 벌써 10분이 훌쩍 지났다.
누가 봐도 야쿠자가 우세했지만 총리는 더 끈질겼다.
* * *
백색 탑 17층.
스마트폰 하나를 두고 동그랗게 모여 머리를 맞댄 피소환인들.
생방송 스트리밍으로 중계되는 해방 플레이어들 간의 대결.
상상이나 되나?
일본 총리와 야쿠자가 현실에서 마력을 발현해 싸운다고?
"아이고! 아깝다."
"어허! 그걸 놓치다니, 발차기 들어왔으면 발목 잡고 바로 잘랐어야지."
"이렇게 잡고, 팍!"
"말이 쉽지, 쟤들이 할 수 있겠슴까? 저래 봬도 쟤들 최선을 다하는 검다."
"일본 총리로서 자격이 없어. 국가의 지도자라면 최소 60레벨은 되어야...."
레벨과 일본 총리 자격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어쩌나?
저러다 총리 죽겠다.
살려 주긴 해야겠는데.
정권이 교체된 일본 내각.
자신의 주요 고객이다.
최소한 자유당 정권보다는 훨씬 낫다.
그리고 계속 저러다 보면 일반인들이 휘말릴 수도 있고.
영상 보니까 어린아이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아이들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편치 않다.
어릴 때부터 저런 걸 보고 자라면 자아 형성에 매우 좋지 않은데.
좋은 것만 보고 자라도 모자랄 판에.
그러자 광마가 주혁의 찌푸려진 표정을 힐끗 보더니 전광일에게.
"험험, 전 청장?"
"네, 광마 님."
"왜 일본엔 마력 봉쇄 스크롤이 없소?"
"주문이 들어왔지만 물량이 부족해서, 먼저 주문한 순서대로 공급하고 있어서요."
"저 총리란 작자는 참으로 멍청하군. 중국과 거리가 먼 미국도 발 빠르게 움직였는데."
맞다.
진작 준비해 뒀으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 아닌가.
안 되겠다.
일본에 가서 스크롤을 사용하고 와야지.
"제가 일본에 갔다올게요. 퇴장의 가락지 쓰면 금방이니까."
"…넴?"
화들짝 놀라는 코사크.
견달래도.
"아니 되옵니다. 어차피 왜놈들끼리 벌어진 분쟁이옵니다. 공자님께서 심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사오니, 거두어주십시오."
광마 또한.
"달래 선녀 말이 맞소. 눈먼 칼에 피부라도 베이면 어쩌시려고? 정 가시려면 노부와 함께 갑시다. 소환사는 그저 노부를 일본 탑으로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되오."
다른 피소환인들도.
"차라리 본 마법사를 데려가시오. 불덩어리 던져서 바싹 태우면."
"아니에요. 저와 함께 가요. 그 자리에서 재우고 올게요."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마비탄 각각 한 발씩이면 끝입니다."
"전사가 간다. 내게 맡겨라."
"신 바르딘도 있습니다."
"호에에엣!"
흠.
서로 가겠다고 난리다.
"그럼 다 같이 가죠."
혈랑하고 마리는 빼고.
"예압!"
"준비하겠소."
"일본만 두 번째군."
"일 끝내고 라멘 먹슴까?"
주혁은 백색 탑에서 나와 펜트하우스에서 피소환인들을 불러냈다.
탑으로 입장, 그리고 퇴장.
스팟!
일본 검은 탑에 나타난 주혁 일행.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
사람들의 시선이 총리와 야쿠자에게 몰려 있어 자신들이 나타났는지 눈치챈 사람들은 없었다.
있다고 해도 상관없고.
"마력 봉쇄 스크롤부터 먼저 쓸까요?"
"흐음, 격렬한 전투 중에 마력이 사라지면 힘이 빠져 무기를 놓치게 될 수도, 그렇게 되면 창이나 검이 애먼 곳으로 날아가 사람이 다칠 수 있소."
무기부터 빼앗자는 말.
"그래요. 무장 해제부터 시킵시다. 누가 가실래요?"
"노부가 공수탈백인으로...."
"제가 감다, 은신으로 몰래 들어가서...."
"주군이시여! 소신에게 기회를 주옵소서."
"전사가 한 놈씩...."
"제가 저격으로...."
힘쓸 필요가 있나?
"디아마트 씨?"
"네, 주인님."
"꿈의 영역으로 쟤들 싹 재워...."
바로 그 순간!
"호엣! 호에에에! 저요, 저요!"
깡총깡총 뛰면서 연신 손을 휙휙! 드는 라직스.
아니, 라직스는 왜?
일꾼이 뭐 하려고?
"우리 차원대머슴님은 위험해요.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후에, 할 수 있어요."
안된다니까 자꾸 그러네.
위험하게 말이야.
그러자 피식 웃는 코사크.
"일꾼 얕보면 안 됨다. X밥들은 차원대머슴 곡괭이 선에서 정리됨다."
"그건 암살자 말이 맞소. 원래 노동으로 다져진 생활 근육이 진짜배기지."
"곡괭이까지 갈 것도 없지요. 빗자루로 쓸면 쓸릴 것이옵니다."
"르스스알쯤 되면 옆에서 데굴데굴 굴러도 쟤들은 그냥 쓰러질걸요?"
그런가.
갑자기 궁금해지네.
우리 라직스의 싸움 방식이.
"자신 있어요?"
"호에!"
"해봅시다."
주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태앵! 허공으로 튀어 오르며, 팽그르르, 공중 3회전 이후, 데구르르, 빛살처럼 굴러가는 라직스.
"…빠르네."
진짜 무지하게 빨랐다.
* * *
콰쾅!
검은 탑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전투.
두 해방 플레이어 간의 격돌로 풍비박산이 난 검은 탑 주변의 간이음식점과 상점들.
마에다 총리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제 허리띠의 힐링 포션도 거의 바닥이 났다.
후회가 막심하다.
'오늘은 쉬었어야 했어.'
탑에만 들어가지 않았어도.
탑 공략에 재미가 붙어 새벽에 일어나 등반하고 나오는 것이 루틴이었다.
그것이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면 벌써 상황이 종료되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었다.
'젠장!'
경찰들은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건가?
이렇게 소동이 일어났으면 지금쯤 벌써 도착했어야 했다.
뻔하다.
경찰 출동을 지연시키는 자가 있겠지.
경찰 내부에, 그것도 계급 높은 놈이.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권력층 내부에서 자신의 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죽하면 설거지 총리라는 별명이 있겠나?
자유당의 실정을 수습하기 위해 단기 알바처럼 정권을 잡은 거라고.
한편.
노무라도 마음이 급했다.
이대로라면 경찰이 온다.
헬기도 뜬다.
저격수도 배치될 것이다.
이제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노무라는 악착같이 마에다에게 달려들었다.
치열한 전투.
점점 끝나간다.
마에다 총리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휘릿!
쐐애액!
도망가는 마에다 총리의 등을 향해 창을 투척한 노무라.
푸욱!
장창이 마에다를 꼬치처럼 꿰뚫었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마에다 총리.
노무라는 저벅저벅 걸어가 등에 꽂힌 창을 뽑았다.
"흐흐흐,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사람 귀찮게."
"크헉, 너, 너, 이 새끼, 바, 반드시."
"네가 뭘 어쩐다고?"
내버려 둬도 죽을 테지만.
창을 머리 위로 치켜드는 노무라.
"시간 없다. 빨리 죽여 주마. 나도 바쁘거든, 안전한 곳에서 탑으로 들어가...."
그때였다.
태앵! 팽그르르르.
'어?'
탱탱! 데구르르르!
'무슨...?'
도쿄 검은 탑 쪽이었다.
노무라는 고개를 돌렸다.
'음?'
저게 뭐야?
하얗고 둥그런 무언가가 통통 튀어 오르며 빠르게 굴러왔다.
탱탱! 팽그르르르. 태앵! 데구르르르.
마치 털 달린 탱탱볼처럼.
'대체?'
노무라는 마에다 총리를 죽이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털 뭉치 탱탱볼을 바라봤다.
마에다 총리도 마찬가지.
죽음 직전이었다.
아니, 이대로 있어도 곧 죽는다.
포기하고 다 내려놓으려 했는데.
'저건....'
강아지인가?
아니다.
저렇게 둥글 리가 없는데.
통통통통! 태앵! 팽그르르르, 데굴데굴.
자신에게 돌진해 오는 탱탱볼에 위협을 느낀 노무라가 반사적으로 공격 자세를 취했는데.
"호랏!!!"
스슷!
"헉!"
손에서 사라지는 장창.
심지어.
스슷, 스슷, 스스슷....
입고 있던 바지도, 신발도, 찢긴 상의도, 속옷으로 입고 있던 훈도시도, 그리고 목에 건 해방의 룬 목걸이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완전한 무장 해제.
남은 건 문신이 뒤덮인 알몸.
마에다 총리도 비슷한 처지였다.
탱탱! 팽그르르르.
"호엥!"
스슷, 스스스슷,
방어구가 사라졌다.
들고 있던 장검도, 똑같이 해방의 룬 목걸이도.
다행히 입고 있는 옷만큼은 벗겨지지 않았지만.
'미친!'
귀신이 곡할 노릇.
'저 생명체, 어디서 많이… 아!'
이제야 기억났다.
평양 각성 관리청 개소식 테러 사건 당시 나타났던 그 생물.
테러범의 핵배낭을 스르륵, 사라지게 했던 그 햄스터.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자신을 구해 줄까?
노무라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자신.
저놈이다.
사람 같지도 않은 짐승 새끼가 감히!
"요시!!!"
스슷!
노무라는 인벤토리에서 탑 금속 제작 양산품 일본도를 꺼냈다.
그리고 털 뭉치를 겨냥하며.
"죽어라!!!"
그러나.
"호랏!"
태앵! 팽그르르, 퍼억!
허공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는 라직스의 롤링 어택에 그대로 얻어맞고는.
"켁!"
슈웃!
콰당!
검은 탑 기념품 가게에 처박혀 정신을 잃어버렸다.
위협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아공간으로 수납해 버린 라직스.
르스스알이 되면서 진화한 아공간 능력.
바로 원거리 수납.
이제 웬만한 건 다 집어넣었으니....
라직스는 도약해서 죽어가는 마에다 총리 앞에 착지했다.
태앵! 팽그르르, 차악!
"호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스슷!
인벤토리에서 탑 전용 수식어가 없는 힐링 포션을 마에다 총리에게 마구마구 뿌렸다.
치익, 치지지직, 치직.
치유되는 상처.
출혈도 멎었고.
"아, 아리가또...."
또 새로운 힐링 포션을 한 병 더 꺼내 젖병처럼 마에다의 입에 물려 주고는.
비로소 마력 봉쇄의 스크롤을 꺼냈다.
찌이이익!
파아아앗!
퍼져 나가는 파동.
"하하하, 참나!"
주혁은 허탈하게 웃었다.
"다 잡아 놓고 봉쇄 스크롤을 쓰네."
순서가 좀 잘못된 감이 있지만.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요."
도쿄 격돌 종료.
야쿠자는 제압하고, 총리는 살리고.
그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은 열광했다.
터져 나오는 박수.
짝짝짝짝짝짝!
SNS도 폭발했다.
└ 쟤 또 왔다!!!
└ 귀여운 애다!!!
└ 내 심장 공격하려고? 아주 악랄해.
└ 호엥!
└ 호에!
└ 호랏!
총리와 야쿠자 간의 생사가 걸린 혈투.
매우 박진감이 넘쳤고, 흥미진진한 이벤트였다고나 할까.
복슬복슬한 탱탱볼 털 뭉치가 현장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털 뭉치가 야쿠자의 장비와 옷가지를 모두 빨아들인 것처럼 사람들의 관심도 모조리 빨아먹었다.
검은 탑을 구경하러 왔다가 진기한 장면을 보게 된 관광객들.
짝짝짝짝짝짝!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환호에 화답하는 라직스.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짧은 팔을 흔들었다.
"호에에에."
사람들도 같이 팔을 흔들었다.
인사를 하는데 어떻게 안 받아 줘?
그렇게 가슴을 쫙 편 채,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현장을 한 바퀴 도는 라직스.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는 피소환인들.
"인정 욕구가 매 마법사보다 더하군."
"사람들의 관심이 고팠나 보지요."
"르스스알이 된 걸 자랑하고 싶었을지도."
"원래 관종은 불치병이요. 맛보면 끊을 수가 없지."
"저 정도면 우주대관종임다."
그리고.
데구르르르르.
다시 구르기 시작하는 라직스.
슈슈슈슉! 슈슈슈슈슈슉!
탱탱! 팽그르르르.
슈슈슈슉! 슈슈슈슈슈슉!
주혁은 입을 떡 벌렸다.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청소하는 것 같슴다."
"아니, 왜 지금 청소를...."
"더러운 건 못 참으니까요, 차원을 담당하는 대일꾼 아니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퍼포먼스거나."
그런 것 같다.
깨끗한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바닥.
└ 귀요미 청소한다!
└ 심지어 잘해!
└ 어우, 진공청소기는 비교도 안 되는구나.
└ 우리 집에 와서 내 방도 좀....
└ 내 전 남친 쓰레긴데, 걔도 치워 줘!
순간!
위이이잉!
사이렌을 울리며 뒤늦게 출동한 경찰.
참 빨리도 왔다.
야쿠자가 체포되는 것까지 지켜보고 난 뒤.
"이만 가죠."
"예압!"
그리고.
스팟!
멀리서 지켜보던 주혁은 일행과 함께 탑에 입장했다.
이로써 라직스의 도쿄 실황 공연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183화
라직스의 도쿄 실황 공연.
전 세계가 또 한 번 들끓었다.
평양 핵배낭 테러 사건 때보다 더 뜨거운 반응.
그때는 임무만 완수하고 바로 사라졌었지만.
도쿄에선 야쿠자도 잡고, 총리도 구하고, 한 바퀴 돌면서 손도 흔들어 주는 팬서비스까지.
쟤는 대체 누구지?
소환수인가?
정령이나 환수 같은?
언론이 속보를 내보내고, 방송국에선 특별 프로그램이 편성되고, 종일 라직스 도쿄 팽그르르 영상이 SNS와 너튜브를 집어삼켰다.
그 와중에 백색 탑 17층.
주혁은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라직스를 치하했다.
"아유, 우리 차원대머슴, 아주 평화로운 방법이었습니다. 마음에 쏙 들어요."
"호엥!"
"하지만 속옷까지 벗겨 버린 건 좀...."
"후에...."
"속옷은 태워 버립시다."
"호에!"
견달래가 기다렸다는 듯.
"소녀, 왜놈의 벌거숭이 나체를 보고 난 후,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책임을 지세요. 라직스 차원대머슴."
"호에?"
"소녀의 품에 안기세요. 힐링이 필요합니다."
"호앗!"
"어딜 가시오!!!"
기겁하면서 도망치는 라직스.
데구르르르, 탱탱, 팽그르르르.
순간 멈칫!
마도 공학자 엘의 앞에서 착! 착지하더니.
스슷!
도쿄에서 수거해 온 아이템과 옷가지들을 꺼내 놓았다.
"...."
엘은 머뭇거리며 훈도시와 찢긴 옷가지 사이에 있는 포션 자동 주입 허리띠를 손가락 두 개로 집어 들었다.
"고맙습니다. 차원대머슴."
"호엥!"
"열심히 연구해 볼게요. 그리고...."
"호에?"
"다른 건 필요 없으니까 제가 태워 버릴게요."
"호에!"
찌잉!
엘의 눈에서 발사되는 파괴광선.
파악!
화르륵!
옷가지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주혁도 봤다.
라직스가 챙겨온 마에다 총리의 허리띠 아이템.
'저걸 가지고 왔네.'
무장 해제를 시켜야 할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긴 해도.
'엘이 연구를 다 끝내면 다시 돌려줘야지.'
그런데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코사크.
"그나저나 이거 선을 넘은 것 같슴다."
"뭐가요?"
"관리자들 말임다. 이것들이 정신이 나갔슴다. 정상화 운운하더니."
광마도.
"그렇소. 해방의 룬 목걸이 사태가 계속 지속되면 세상에 피바람이 불 것이오."
매켄지도.
"마력 봉쇄 스크롤이 있다 해도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멈추지 않고 일어날 겁니다."
하긴.
법이 있다고 해서 범죄 저지를 놈들이 안 저지르나?
원천적으로 막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상태에선 뾰족한 수가 없고.
"관리자들을 강하게 압박해야 함다. 두고만 보지 않겠다고."
"어떻게요?"
"누구 한 명 영혼의 세상으로 출장을 보내는 게 어떻슴까?"
"출장?"
"영혼의 세상으로 가서 우리 상황을 알리는 검다. 이거 명백한 인과율 위반 아임까?"
"흠."
전에 해본 적이 있다.
카탈로그 확장이 막혔을 때 코사크를 비롯한 피소환인들이 영혼들을 규합해서 시위도 하고 그랬지.
"암살자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우리들 모두 백색 탑 주민이 되었는데 어떤 방법으로 영혼의 세상으로 간단 말이냐."
"무, 무작위 소환을 해서."
"100일 동안 막혔는데? 한 90일 남았나?"
"쯧쯧, 내 저럴 줄 알았다. 대안도 없이."
"...."
하지만 주혁이 나서서.
"될 것도 같은데요?"
"넴?"
"무슨?"
"어떻게?"
방법을 설명해 줬다.
"추방이요. 백색 탑에서 나가면 되니까."
"아!"
<추방>
- 등록된 입주민 자격을 취소하고 백색 탑에서 추방합니다.
이렇게 하면 주소지가 바뀌니까 소환 해제하면 영혼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러나 문제가 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재등록이 가능하냐는 것.
그게 안 되면 섣불리 추방할 수 없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식구 막 추방하면 되겠습니까? 없었던 걸로 합시다."
코사크는 아쉽다는 표정.
"실험 정도는 해보십쇼. 추방되면 어떻게 될 건지 메시지로 미리 뜨지 않겠슴까?"
"누굴요? 코사크 씨가 해보실래요?"
"넴?"
"추방해 보자면서요?"
"그, 그건...."
위험 부담이 크다.
물론 카탈로그 추방이 아닌 백색 탑 추방이지만 여기 상황 알리자고 엄한 사람 쫓아내고 그러면 쓰나.
그런데 바로 그때!
번쩍 손을 드는 제페트.
"소환사님."
"네?"
"절 추방해 주십시오."
으잉?
갑자기?
"왜...."
"소환된 후 계속, 제 존재감이 바닥이었습니다. 있으나 마나입니다."
"...."
부정을 못 하겠다.
"누구나 다 공을 세우는데 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절 영혼의 세상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곳과 백색 탑 17층의 연락책이 되어 소환사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간곡한 제페트의 요청.
아아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자신의 잘못도 있다.
그동안 제페트를 챙기지 못한 죄.
"괜찮아요. 어렵게 공을 세울 필요 없어요. 백색 탑에서 푹 쉬고 있기만 해도 전 만족합니다. 등급 돌파도 룬과 배지가 모이면 꼭 시켜드릴 거고요."
그럼에도 완강하게 버티는 제페트.
"제발 보내 주십시오. 이게 저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임무를 수행할 기회를 주십시오."
하아.
이거 어쩌나?
애절한 표정의 제페트.
그의 희생정신에 숙연해진 피소환인들.
…한번 해봐?
'추방은 어떻게 진행되나?'
주혁은 입주민 명단을 불러왔다.
거기서 제페트 항목을 터치하니 그 옆에 생성된 단추.
<추방>
누르자마자 추방되는 건 아니겠지?
쿡!
터치해보니.
[입주민 제페트를 추방하시겠습니까? 추방 시 한 달간 재등록이 불가능합니다.]
"오!"
그럼?
[한 달 후 재등록시 새로운 입주권을 발급받아야 합니다. 재등록 입주권도 최상급 마정석 1kg이 필요합니다.]
등록 불가 한 달.
그러나 재등록 가능.
'최마 1kg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그 정도 페널티라면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그리고 제페트가 저렇게 원하고 있고.
그래서 추방 시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고 나서.
"한 달 파견 근무 보내드릴게요. 어차피 소환은 계속해 드릴 테니까. 백색 탑 대신에 펜트하우스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제페트의 희생정신에 큰 박수.
짝짝짝짝짝짝짝짝!
쑥스러워하는 제페트.
그리하여.
[입주민 제페트가 추방되었습니다. 백색 탑 17층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제페트는 주혁의 임무를 받고 영혼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다행이다.
영영 추방되는 게 아니라서.
한 달 후에 다시 입주시키면 되니까.
그런데 매켄지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
우물쭈물 망설이더니.
"소환사, 이걸로는 부족하오. 본 마법사가 생각이 있는데."
"말씀해 보세요."
"모두의 생각을 모아야 해서. 브리핑이 필요할 것 같소만."
브리핑이라.
"할 거 있으면 해야죠."
"하하하, 고맙습니다. 본 마법사가 열심히 준비해 보겠소."
순간!
눈을 가늘게 뜨며 매켄지를 노려보는 코사크.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보는 매켄지.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
* * *
매켄지의 브리핑 현장.
주혁과 피소환인들이 한군데 모였다.
마리와 소통하기 위한 모니터도 설치했고.
그런데 코사크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
심기가 편치 않았다.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고 있었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브리핑의 사회자는 자신.
이 역할로 특별한 권력을 누리며 2인자 자리까지 올라섰는데,
갑자기 매 영감이 브리핑 사회자 자리를 꿰찬 것.
실로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안녕하시오들, 본 마법사, 브리핑 자리의 사회자가 된 걸 내 생애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소이다."
단상 앞에 선 9서클 마법사 매켄지.
잘 차려입은 로브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집중 조명.
흡사 아이템 기업 신제품을 홍보하는 CEO처럼.
"본 마법사는 93층 아라크로이드를 S+++ 등급으로 공략한 화염의 지배자이자, 비만 탈출 인챈트 마법을 팔찌에 적용해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으며, 스크롤 마법을 가장 먼저 제안하여 소환사의 고민을 한 방에 날리면서, 그와 동시에 탄환 속성 연구에도 참여하...."
순간!
말을 자르며 나서는 광마.
"너무 길다. 그만해라. 암살자 놈도 그렇게 길게는 안 한다."
"…아니, 아직 남았소만."
"매켄지 님, 고작 공 몇 번 세웠다고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하찮기 그지없습니다."
"사,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스크롤은 지가 혼자 만들었나? 방구석하고 엘이 다 했지. 금형 금속판 몇 개 새긴 걸로 그렇게 자랑질하다니."
당황해하는 매켄지.
그 모습을 보며 비릿하게 웃는 코사크.
'끄응, 망할 놈들이....'
어쩔 수 없다.
논공행상 어필은 실패했으니 바로 본론으로.
"…이번 사태를 봐서도 알 수 있듯이 관리자들의 농간이 점점 도를 넘고 있소."
그 사실엔 동의한다는 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들이 해방의 룬 목걸이를 무분별하게 뿌린 이유가 뭐겠소? 이게 다 우리 소환사님을 겨냥한 것이오."
누가 봐도 뻔하다.
탑 안에선 어찌할 수 없으니까 탑 밖에서 뭔가를 해 보려 하는 것.
그것도 한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중국에서.
"자칫하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오. 물론 그딴 짓거리 하는 놈들은 본 마법사가 운석 소환으로 초토화시켜 버리겠지만."
그러자 손을 번쩍 드는 코사크.
잠시 주저하는 매켄지.
'으음.'
저놈이 무슨 말을 하려고 손을 들었지?
어쩔 수 없이 지목하자.
"매 영감님은 아직도 버릇을 못 고쳤슴까? 운석 소환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다 핵에 반격당하면 어찌함까?"
"백색 탑 17층으로 피신하면...."
"다른 사람들은? 세상 다 망하고 우리만 살아남으면 뭐 함까? 운석 발언 취소하십쇼."
"...."
주혁도 고개를 끄덕여 코사크의 말에 동의했다.
맞다.
혼자 살아남으면 뭐 해?
찔끔.
매켄지가 슬쩍 곁눈질로 주혁의 눈치를 살피고는.
"아, 알겠소. 취소하겠소."
"앞으로 생각하고 입을 여십쇼."
"커험!!!"
헛기침 한번 해 주고.
"어쨌든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첫째도 소환사님의 안전, 두 번째도 소환사님의 안전, 세 번째도 소환사님의 안전입니다. 이를 위해 소환사가 더 강해질 필요가 있소."
허공에 손을 휘젓는 매켄지.
촤르르르르르....
작은 반딧불이들이 모여 글자가 만들어졌다.
하나는.
'최상급 넥타르.'
다른 하나는.
'최상급 엘릭서.'
"관리자들의 야욕을 사전에 분쇄할 수단, 소환사가 빠르게 강해지는 것."
그러나.
화르르륵!
불타오르는 시각 마법을 발현한 매켄지.
동시에 그의 머리 바로 위에 뜬 두 글자.
'분노.'
매켄지가 추상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허나 본 마법사는 아직 이해되지 않습니다. 대체 그대들은 지금까지 뭘 했단 말입니까? 80층까지 올라왔으면 최상급 넥타르나, 최상급 엘릭서 정도는 하나 만들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넥타르.
복용하면 인간의 자연 수명을 대폭 늘려주는 약.
엘릭서.
종류에 따라 육체 강화, 사망 즉시 부활, 완전 치유 등의 효능을 보여 주는 약.
주혁도 들어 본 적이 있다.
마리에게서.
'그러고 보니 80층대로 올라가면 슬슬 재료를 구할 수 있다고 했는데.'
하지만 어느 층인지 확실한 답변은 하지 못했다.
금제에 걸려 있겠지.
"…그런 이유로 본 마법사는 사회자의 권한으로 방구석 연금술사 알리아마리를 소환하겠소!"
청문회야, 뭐야?
그러자 바로 옆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톡방 화면이 나타나더니.
띠링!
<마리> : 바쁜데 왜 부르고 지랄이야? 이런 $#&@&들이....
마리도 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지만 대화는 톡으로.
"소환사님 바로 옆에 계신다."
<마리> : 네에, 부르셨어요?♪♡♬ 헤헷♬♬♬
마리를 추궁하는 매켄지.
"연금술사로서 엘릭서와 넥타르를 제일 먼저 제조해야 하는데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마리> : 재료 때문에, 지금 구한 건 범용성이 뛰어난 천년 여우의 구슬과 최상급 마정석, 그리고 몽마 군주의 눈알, 이 3가지밖에 없어서.
"천년 여우의 구슬이 범용성이 뛰어나다면, 대체할 수 있는 건?"
<마리> : 불사조의 깃털과 세계수의 열매.
"그럼 불사조의 깃털과 세계수의 열매, 하나만 더 구하면 되겠군."
<마리> : 맞아. 하지만 같은 재료라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다다익선이잖아. 불사조의 재가 나오면 금상첨화고.
"몽마 군주의 눈알은?"
<마리> : 그것도 다 들어가, 수명이 긴 최상급 마족의 육체 일부라서 넥타르의 재료나 엘릭서의 재료로도 다 쓸 수 있어.
바로 그때!
손을 번쩍 들고 질문하는 코사크.
"여기 마침 귀순한 몽마가 있슴다. 디아마트, 얘 눈알 빼버리면 또 재료로 계속 쓸 수 있는 검까?"
흠칫!
몸을 부르르 떠는 디아마트.
기억난다.
자신의 복사본이 80층에서 공략당해 <디아마트의 눈>이 보상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설마?
<마리> : 안 돼.
"왬까?"
<마리> : 현재 저 몽마 년은 스스알에 불과해. 군주가 아니란 말이지. 그래서 눈알을 빼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휴우.
디아마트는 안도했다.
만약 르스스알 서큐버스 퀸, 몽마의 군주의 신분이었다면 당장 눈알이 뽑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뭐, 죽여도 또 살리면 되니까.
'등급 돌파를 절대 하지 말아야겠어.'
서큐버스 퀸이 되면 눈알 채취용 가축으로 취급당할지도 모를 일.
"아무튼 재료가 부족해서 만들 수 없다면 재료를 구하면 되겠군."
<마리> : 문제는 드래곤 하트야. 웜급, 아니 해츨링이라도 하트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알겠소이다."
브리핑 사회자 매켄지가 주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해답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촤르르르르르....
다시 머리 위에 새겨지는 글자.
'미공략 상층 등반.'
"소환사, 이제 결정하시지요. 우리가 목숨을 걸고 따르겠습니다. 상층으로 등반을...."
"싫은데요?"
"…넴? 왜요?"
당황한 매켄지.
"좀 쉽시다. 맨날 일이야? 탑 붕괴 시한도 넉넉한 판에."
"아, 아니, 관리자들 놈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대책을...."
"세웠잖아요. 마력 봉쇄 스크롤."
"넥타르를 복용하면 천년을 더 살 수도...."
"에이, 혼자서 오래 살면 뭐 해요? 당장 내가 결혼했다고 쳐! 아이도 낳았어요. 그럼 내 자식들이 나보다 먼저 죽을 건데? 그건 좀...."
"으음."
바로 그때 견달래가.
"그러하오면 엘릭서로 방향을 돌려보심이 어떠한지요?"
엘릭서라.
"육체를 강화하는 엘릭서로 공자님이 더 강건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며, 부활의 엘릭서와 치유의 엘릭서로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불행에 대비할 수도 있사옵니다."
흠.
이건 좀 솔깃하네.
특히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부활의 엘릭서를 몇 병 정도 구비해 두면?
"…올라가 볼까요?"
"올라가셔야 합니다."
"등반하는 게 맞슴다."
"르스스알이 9명이요. 두려울 게 뭐가 있겠소?"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전투 준비 완료!"
"호아아앗!!!!"
에이, 귀찮은데.
관리자 놈들은 왜 그런 사고를 쳐서는.
매켄지는 코사크를 보며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브리핑 성공.
드디어 한 걸음 따라갔다.
2인자로서의 자신.
이건 중대한 사안이다.
탑이 모조리 공략되고, 해방의 세상이 왔을 때, 소환사의 양옆에 누가 서 있겠나?
1인자와 2인자다.
한 자리는 이미 정해졌다.
라직스가 오른쪽에 서 있겠지.
그럼 왼쪽은?
무조건 자신이 되어야 한다.
코사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매켄지를 노려봤고.
갈수록 피 튀기는 2인자 싸움이었다.
* * *
아무튼 주혁은 86층 공략을 결정했다.
[대한민국 검은 탑(NO.1) 86층에 입장합니다.]
86층에 입장.
환경은 후끈후끈한 화산지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화산.
그런데?
[86층 임무 : 초열겁화 불사조 1마리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완료 조건 : 초열겁화 불사조 0/1]
"…불사조네?"
"불사조군."
"불사조다."
"불사조요."
"불사조임다."
"불사조라니?"
"주작(朱雀)이구나."
저거 어떻게 잡는 거지?
이거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또 써야 할지도.
184화
영혼의 세상.
여전히 노심초사 바깥세상의 소환사를 걱정하는 영혼들.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바깥 사정을 어떻게 알아?
백색 탑 때문에 외부와의 연결 고리도 사라진 판에.
그런데?
『안녕들 하셨습니까? 형님 누나들, 제페트 인사 올립니다.』
『제페트? 저건 뭔데?』
『왜 나한테 물어봐? 어떤 듣보잡인지 내가 어떻게 안다고.』
『아! 그러고 보니 들은 것 같다. 미식가 운운하는 스스알 진혈 뱀파이어 새끼 이름이 제페트였지?』
『뱀파이어였어? 근데 뭐가 대단하다고 인사씩이나 올린다는 거냐.』
『꼴에 진혈이라고 으스대는 거겠지.』
『꺼져! 새끼야! 안 그래도 바깥세상 소환사가 걱정되어서 마음이 심란한 판에.』
제페트는 허탈한 마음.
이들은 자신이 바깥으로 소환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지구든, 영혼의 세상이든, 존재감이 없는 건 마찬가지.
『저기, 제가 백색 탑 주민이었거든요?』
『무슨 소리야?』
『망상은 자유지만, 까불지 마라. 장난 받아 줄 기분 아니니까.』
『저 긍지 높은 진혈의 뱀파이어입니다. 그리고 소환사에게 선택받은 피소환인이란 말이죠. 지금은 일이 있어 파견 나왔을 뿐입니다.』
순간 조용해지는 영혼의 세상.
이곳은 음성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닌 정신파로 소통하는 곳.
그래서 거짓말은 무조건 티가 나게 되어 있다.
『흐음, 거짓이 아니란 걸 알겠다. 근데 어째서?』
『우리도 백색 탑의 존재를 알고 있어. 그런데도 네가 여기 돌아왔다는 말은?』
『저놈 사고 쳐서 쫓겨난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소환사에게 외면받아?』
『그게 아니라....』
천천히, 자세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제페트.
해방의 룬 목걸이의 이상한 보상 방식부터 시작해서, 그로 인해 지구에 일어나고 있는 일, 더불어 자신이 여기에 온 사연도, 또 무작위 소환이 되고 있지 않은 이유까지.
그러자.
『훌륭하다. 뱀파이어 제페트. 널 우습게 봤던 걸 사과하마.』
『맞다. 백색 탑 17층의 달콤함을 뿌리치다니, 너의 절제와 희생정신에 찬사를 보낸다.』
『과연 진혈이야. 네가 불려 나간 이유를 알겠다.』
『네가 바로 진정한 충신이구나. 인정한다.』
쏟아지는 칭찬들.
제페트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칭찬을 언제 들어 봤을까?
동시에 관리자들에 대한 비난도.
한마디씩 하는 영혼들.
『신임 관리자가 이번에도 선을 넘었군.』
『인과율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어.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고.』
『그냥 둬선 안 돼!』
『그래도 마도 공학자가 합류한 건 소환사에겐 행운이다. 그깟 100일이야 충분히 기다릴 용의도 있고.』
『그럼 시작해 볼까? 이번에도 관리자를 끌어내려야지.』
『이 제페트, 형님 누나들만 믿고 있겠습니다.』
영혼들의 열망이 또 하나로 모였다.
그들의 내뿜는 정신파.
거대한 흐름이 되어 무한의 결계를 흔들기 시작했다.
* * *
검은 탑 86층의 환경은 화산 지형.
저 멀리 화산의 분화구가 보인다.
그 위에서 강렬하게 타오르는 비행 몬스터.
'잡으려면 저기까지 가야 하나?'
풀링이 되는지 모르겠다.
뭐, 된다 해도 달라질 건 크게 없지만.
불사조, 피닉스.
혹은 사신수 중 하나인 주작(朱雀).
원래 불사조의 불은 죽지 아니할 불(不).
불사(不死)에 새 조(鳥)이니 죽지 않는 새라는 뜻이지만.
다른 불, 즉 화(火) 속성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온몸이 불덩어리다.
불사조의 재와 깃털이 여러 종류의 엘릭서에 들어간다는 재료.
또한 넥타르에도 쓰인단다.
천년 여우 구슬로도 대체 가능하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니.
화르르르르르르....
날개를 한 번 펄럭일 때마다 무시무시한 화염의 불꽃이 전신에 일렁이는 불사조의 위용.
저놈을 처음 목격한 주혁의 심정은....
"아름답네요."
이거 진심이다.
몬스터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9서클 마법사 매켄지도 주혁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화염 계열 마법을 익혔다고 해서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 불은 각 차원의 문화권에서 영혼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썩어 문드러지는 육신과는 달리 영혼의 본질은 영원함이지요. 그리하여 불사조는 불멸의 화신이요, 순수한 화염으로 이루어진 정령체...."
순간!
피식, 옆에서 들려오는 비웃음.
"순수하기는 개뿔!"
"뭐냐? 불만 있으면 말로 해라."
"지금 불사조 품평할 때임까? 저거 어떻게 공략할 검까?"
"어음, 그, 그게."
"매 영감님이 자랑하는 화염 마법으로 공략할 수 있슴까?"
"...."
사실 못 한다.
불로 불을 어떻게 공략하나?
더구나 육신이 없는 정령체.
불사조에게 헬파이어라도 발현하면 그 화기를 흡수해서 힘을 더 키워나가겠지.
"누가 86층 공략하자고 했더라… 일단 난 아임다."
뭐?
"전사도 아니다."
"노부도 처음엔 가만히 있었다."
"소녀도 매 영감님이 하도 자신하기에 따라간 것뿐이지요."
"빛이여!!! 스스알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등반하자고 하니 따른 거지."
"저도요."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작전을 입안한 사람이 책임져야 합니다."
"호아앗!"
이 배신자들.
역시 믿어선 안 되는 놈들이었다.
소환사에게 복용하게 할 넥타르와 엘릭서 재료 구하자고 할 땐 너도나도 찬성하더니.
"그래서 방법이 있슴까? 없슴까?"
"…실버 드래곤 아이스 브레스라면 저 불을 꺼트릴 수 있을 것이요."
"가능한 얘길 하십쇼. 여기 드래곤이 어디 있슴까?"
"9서클 광역 빙결 마법인 블리자드와 프로즌 스톰, 그리고 프로스트 오브라면...."
"매 영감님이 빙계 마법사임까? 블리자드 쓸 수 있슴까?"
"...."
매켄지는 죽을 맛이다.
아니 86층에 불사조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이거 큰일임다. 또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 소모하게 생겼슴다. 매번 탑 올라갈 때마다 티켓 쓰면 살림살이 거덜남다."
그런 매켄지의 모습이 측은한 주혁.
불쌍한 매 영감님.
그러길래 왜 브리핑 한다며 나서셨는지.
'너무 무리하셨어.'
가만히 눈치 보다 따라만 가도 충분한 것을.
이래서 E 성향 분들은 위험해.
분위기를 주도하다가 되치기를 당할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어쨌거나 빙 속성 마법이나 공격 수단이 필요하겠네요. 제가 예전에 아이스 스피어라는 스킬을 배웠는데...."
그러자 견달래가 급하게 나서면서.
"공자님을 폄훼하려는 건 아니지만 웬만한 빙결계 수단으론 불사조의 깃털 하나 얼릴 수 없을 것이옵니다."
맞다.
딱 봐도 무리다.
"실제 육체는 없는 거죠? 정령체라면...."
"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만 소멸할 때 깃털과 재를 남긴다던데,"
"죽일 방법은?"
"불을 꺼트리면 됩니다."
물이라도 끼얹어야 하나?
"물로는 부족하지요. 바다에 집어넣지 않는 한 닿자마자 수증기로 변할 것이옵니다."
안 되는구나.
"내 이럴 줄 알았슴다. 화염 마법은 낡았슴다. 요즘 트랜드에 뒤처지는 마법 아임까! 뜨끈뜨끈한 칼국수보다 냉면이 더 맛있는 법임다."
코사크, 얘는 왜 이래?
우리 불쌍한 매 영감님 너무 갈궈 대잖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 지르는 사람이 아임다. 불 끄는 사람임다."
풀 죽은 매켄지.
쯧쯧.
"너무 그러지 마세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잖아요, 전에 핵으로 초거대 괴수 타이탄 베헤모스를 폭사시킨 것처럼."
주혁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하는 엘.
"…핵이라뇨? 설마 탑 안에서 핵폭발을?"
"모르셨슴까? 하긴, 그 당시엔 탑의 몬스터가 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때였으니."
그랬다.
피소환인 신분이 박탈당했던 시절.
한낱 기간트를 조종하던 몬스터에 불과했으니까.
"허허허, 최고의 순간이었지."
"맞슴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짜릿함다."
"발상의 전환이었죠. 아마 관리자들이 기절초풍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막혔지만."
매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81층의 핵폭발.
"그때 영혼의 세상도 떠들썩했었습니다."
엘은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핵을?
순간!
엘의 눈에 들어온 라직스.
"아!"
알 것 같다.
어떻게 핵을 탑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는지.
그의 아공간 배낭에 가지고 오지 못하는 게 없으니까.
달리 1인자인가?
보면 볼수록 신기한 피소환인.
한편 매켄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몰두하는 중.
머리가 간질간질하다.
'뭔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응?'
갑자기 눈을 번쩍 뜬 매켄지.
조금 전 암살자 놈이 했던 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 지르는 사람이 아임다. 불 끄는 사람임다.'
그리고 핵 공략이라는 발상의 전환.
더불어 라직스의 아공간.
그럼?
"소, 소환사!"
"왜요?"
"본 마법사가 방금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있는데."
"뭐든 말씀해 보세요."
"탑 안으로 소방차를 끌고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소방차?"
"그래요. 본 마법사가 평소 불에 관심이 있어서 뉴스로 본 적이 있습니다."
매켄지가 부연 설명했다.
"소방차 중에는 물 대신에 특수 소화 약제를 뿌리는 화학소방차가 있는데."
엥?
"…화학소방차요?"
"맞습니다. 그것들을 탑 안으로 가지고 와서, 저 불사조에게 뿌려댄다면...."
오!
"발상 괜찮은데요?"
"차원대머슴이 르스스알이라 화학소방차 10대 정도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호아?"
10대가 뭐야?
20대, 아니, 30대도 될걸?
해볼 만하다.
수십 대의 소방차가 한꺼번에 화학 소방 약제를 분출하면 그게 드래곤 브레스지.
"아유, 우리 매켄지 천재 대마법사님, 역시 9서클이십니다. 머리가 아주 비상하세요."
"과, 과찬입니다."
주혁의 칭찬에 온몸에서 블링블링 빛을 발하는 매켄지.
"86층 소방 공략이라,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하하하하! 불을 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끄는 것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요! 역시 전문가셔."
주혁의 칭찬에 잔뜩 고무된 매켄지.
코사크도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했는지.
"저도 방금 막 제안하려던 참이었슴다. 소방차 공략, 좋은 생각임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사용 시 자동으로 퇴장하고, 해당 층의 임무가 리셋되며, 입장 기록이 삭제됩니다.]
찌익!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사용하셨습니다. 탑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먼저 전광일 청장에게 전화부터 해보자.
소방차를 구하려면 전광일 청장에게 말해봐야 한다.
소방 업무에 피해가 없게끔 부탁해야 하고.
* * *
다시 백색 탑 17층 도착.
17층이 있어서 좋은 점은 전광일 부청장과 만날 때다.
메시지만 날리면 10초 안에 도착한다.
물론 별다른 일이 없을 시.
그래서 아예 영구 입주권을 줘 버렸다.
정동훈 대표도 같이.
갑자기 입주권 생각하니 제페트가 떠오르네.
우리 미식가 흡혈귀님.
'내 피가 먹고 싶다고 했지.'
언제 시간 내서 헌혈이라도 해서 피 뽑아 놓을게요.
빨대까지 꽂아서.
스팟!
주혁의 연락에 17층에 입장한 전광일.
"봉 플레이어님. 저 왔습니다."
"아! 미안해요 자꾸 오라가라 그래서."
"천만에요. 자주 불러주십시오"
주혁은 카메라로 찍은 검은 탑 86층의 몬스터 초열겁화의 불사조를 보여 줬다.
"이, 이거 혹시?"
"네, 86층. 불사조입니다."
"…불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 새군요. 콜로서스 콘도르와는 정반대로."
"정령체라고 하더라고요."
정령체.
육신이 없다는 말.
"잡을 수 있습니까?"
"확실치는 않지만 해볼 방법이 있긴 한데."
주혁은 화학소방차를 이용한 화재 진압 및 소방 공략 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네?"
얼빠진 표정의 전광일.
"소, 소방차요? 제가 생각하는 그 소방차 맞습니까?"
"그래요. 그 소방차."
그리고 라직스를 가리키며.
"우리 라직스 씨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고요."
"아!"
맞다.
진짜 기상천외하지만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공략.
"그래서 소방차 섭외가 필요한데, 화학소방차요. 물 말고 특수 소화 약제를 발사할 수 있는 거."
"몇 대 정도?"
"최소 20에서 30대 이상? 넉넉하게 준비해 보려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전광일.
"가능합니다. 소방청에 연락해 보겠습니다."
"혹시라도 이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까, 소방 업무에 차질이 없는 선에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량 확보가 안 되면 주한 미군에 요청 넣어 보겠습니다."
주한미군이라.
"거기도 자체 소방대를 운용하고 있어서."
오!
미군 장비면 크고 우수하겠지.
"될까요?"
"전화 한 통이면 됩니다. 들어줄 겁니다."
그래.
맥밀란 장관에게 부탁하면 되겠구나.
아무튼 공짜로 빌릴 수는 없다.
대가가 있어야지.
뭐가 좋을까?
가진 게 돈밖에 없으니.
"저기, 청장님."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우리나라 소방청에 으음, 기부 좀 하려고 하려는데."
불 끄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겪어보니 알겠다.
우리나라 소방관들.
아니, 전 세계 소방관들이 다 그렇지만.
실제 현실에서 불사조 같은 마수와 싸우시는 분들이다.
그분들에게서 소방차를 맨입으로 빌리면 얌체 짓이지.
"아, 네, 그럼 혹시 어느 정도 금액을 기부하시려는지?"
얼마나 해야 하나?
액수가 감히 안 잡힌다.
'기부를 해본 적이 있어야지.'
한 1억?
솔직히 그건 좀 짜친다.
100억?
글쎄, 이것도 별로.
전광일 청장이야 자신이 얼마 버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텐데.
비만 탈출 팔찌에, 마력 봉쇄 스크롤, 꿈 저항 키트, 각종 아이템 장사, 곧 있으면 마총 대여도 시작할 예정.
돈은 넘쳐난다.
계좌에 얼마나 들어 있을지 모를 정도로.
아마 조 단위는 훨씬 넘을 터.
에라이, 모르겠다.
예전에 강남 1조 3천억짜리 빌딩도 시원하게 질렀잖아.
소방관님들.
제가 한번 쏠게요.
장비 좋은 거 많이 많이 구매하셔서 안전한 화재 진압되시길.
그래서 쩨쩨하게 일이백 억 하는 것보다는....
"한 천억 정도 기부하려고요."
이게 바로 상남자의 기부다!
"…네?"
그러자 반응하는 피소환인들.
"헉!"
"오!"
"와!"
"아주 화끈함다!"
"역시 소환사시오."
"실로 담대하시옵니다."
"호에에에...."
주혁은 가슴이 웅장해졌다.
"으음, 그럴 필요까지는."
"돈 벌어서 뭐 합니까? 이럴 때 쓰려고 버는 거죠."
"아, 알겠습니다. 최고 플레이어 명의로 기부한다고 소방청에 연락하겠습니다."
됐다.
이래야 마음도 편하고.
그리하여 화학소방차 확보 작전이 시작됐다.
섭외한 소방차들은 속속 각성 관리청 주차장으로 이동했고.
주혁은 시간이 날 때마다 라직스를 소환해 아공간에 소방차를 넣어 백색 탑으로 옮겨 놓았고.
그렇게 확보된 소방차만 30대.
다 들어가느냐고?
당연히 들어가지.
르스스알인데.
특수 소화 약제도 주문에 들어갔다.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중에 액화 질소.
절대영도까진 아니더라도, 마이너스 196도까진 떨어뜨릴 수 있는 물질.
꽤나 흔한 편이다.
학교 교보재나 요리용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
그걸 불사조에게 대량으로 뿌려 버리면?
액화 질소도 대량으로 구입해서 금속 탱크 안에 넣어 백색 탑에 쌓아 뒀다.
이제 남은 건 소방 장비 사용 방법.
매뉴얼 혹은 영상을 구해 능숙해질 때까지 열심히 연습.
거의 모든 피소환인이 연습에 참여했다.
마리도 가세했다.
비록 86층에 직접 들어가지 못했지만 몬스터가 불사조라는 사실을 듣고 난 뒤.
띠링!
<마리> : 저도 냉기 포션을 만들어 볼게요. 불사조를 괴롭힐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마도 공학자 엘은 라직스가 빌려(?) 온 포션 자동 주입기 허리띠를 연구해서 특수 탄환 제작에 들어갔다.
인벤토리 마법 마력 회로도를 탄환에 적용하여, 소방 공략에 보탬이 될 수 있게끔.
시간이 흘렀다.
공략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185화
라직스의 도쿄 실황 공연 이후.
일본 마에다 내각도 나름의 성과를 올렸다.
야쿠자 빌런 플레이어에게 끝까지 맞섰던 총리의 처절한 사투.
일본 전역에도 생생하게 방영됐다.
일본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고 지지율이 올라갔다.
사건을 저질렀던 야쿠자 빌런 플레이어도 체포되어 감방에 갇혔다.
곧 심문에 들어갈 예정.
그래서 하루빨리 마력 봉쇄 스크롤을 수입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렸다.
주한 일본 대사가 비밀리에 한국 각성 관리청 전광일 청장과 만났다.
그곳에서 가지고 온 노트북으로.
"총리님이 청장님과 영상으로 뵙길 원합니다. 현재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마에다 총리도 암살 시도 이후로 정리할 일이 많을 것이다.
당장 배후도 밝혀야 하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 그렇게 하죠."
청장실에서 노트북 화상 회의 프로그램을 이용에 얼굴을 마주한 마에다 총리와 전광일.
일본 대사는 통역 담당.
- 하루라도 빨리 마력 봉쇄 스크롤이 필요합니다.
이번 사태로 혼이 난 마에다 총리.
천신만고 끝에 위기는 넘겼지만 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공급만 해주신다면....
난색을 표하는 전광일.
"하아, 저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이게 주문 순서대로 각국에 순차적으로 공급되는 거라."
지금 밀린 물량이 얼마나 많은데.
"일본에 먼저 공급한 걸 다른 국가들이 알게 되면 섭섭해할 겁니다."
- 많이도 필요 없습니다. 일선 경찰들에게만 지급하면 되는 거라서, 25만 장만이라도.
"흠."
25만 장.
그 정도면 평양 인쇄 노동자들이 하루 이틀 야근하면 충분히 뽑아낼 수 있는 물량이긴 해도.
"글쎄요. 아시다시피 마력 봉쇄 스크롤을 각성 관리청에서 제작하는 게 아니라서."
- 아!
"저희는 유통만 담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총리님 사정을 대신 이야기해드릴 수는 있지요."
- 그럼 청장님이 좀 전달해 주셨으면....
전광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통해 지그시 마에다 총리를 바라볼 뿐.
맨입으로?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치사해 보일지는 몰라도, 이런 게 원래 정상적인 국가 간의 거래다.
마에다도 눈치챘다.
뭘 줘야 하지?
- 가격을 두 배로 쳐 드리면....
"돈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신용 문제라서."
- 그, 그럼 아이템 같은 건 어떻습니까? 국가가 보유하는 아이템을 대가로 드리죠.
"…아이템요? 아이템이라, 아참!"
뭔가 생각났다는 듯.
전광일은 인벤토리에서 장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노트북 카메라에 비추면서.
"이거 총리님 거죠? 귀한 아이템 같은데, 돌려드리겠습니다."
깜짝 놀라는 마에다.
맞다.
허리띠, 포션 자동 주입기.
- 그, 그건?
도쿄 검은 탑 전투 도중에 이상한 털 뭉치가 와서 강탈해 간 물건.
이게 왜 각성 관리청에....
- 혹시?
이제야 알겠다.
그 털 뭉치는 한국의 세계 최고 플레이어와 관련된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최고 플레이어의 특성이 소환이라는 건 들은 적이 있기도 했다.
그럼 자신의 생명을 최고 플레이어가 구해 준 건가?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 최, 최고 플레이어님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고.
"네."
- 그리고 그 허리띠 안 돌려주셔도 됩니다. 그냥 드리겠습니다.
"아뇨, 돌려드려야죠. 우리 물건도 아닌데."
사실 마도 공학자 엘님이 분해해서 연구가 다 끝난 물건.
가지고 있어 봤자 뭘 해?
언제든지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인데.
더 성능 좋은 아이템으로.
"사람을 보내시면 바로 허리띠 보내드리겠습니다."
아이템을 넘긴다고 해도 전광일의 심드렁한 반응.
마에다 총리는 조급해졌다.
급기야 화면에 종이 한 장을 비춰 보이면서.
- 내각 국가 기록물 금고에 보관된 아이템 목록입니다. 원하시는 물건, 골라보십시오.
흘깃, 화면을 훔쳐보는 전광일.
쯧, 일본어잖아.
보여 줄 거면 한국어로 번역해서 보여 줄 것이지.
하는 수 없이 스마트폰 번역 앱을 실행해서 카메라로 찍어보니....
'별거 없네. 특성 강화의 룬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다가.
'응?'
뭔가를 발견한 전광일.
'저게 있었네?'
예전에 봉 플레이어와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다.
그에게 가장 쓸모 있다고 판단되는 아이템들이 뭐가 있는지.
특성 강화의 룬을 포함해서 봉 플레이어가 이야기했던 아이템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물건.
'스킬 쿨타임 초기화 티켓.'
쿨타임이 존재하는 특성 스킬이나 전투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제거해 주는 아이템.
전광일이 무심한 표정으로 목록에 있는 아이템을 언급했다.
"스킬 쿨타임 초기화 티켓, 참 재미있는 아이템이네요."
물론 노골적으로 달라고 하지 않았다.
- 드, 드리겠습니다.
다 알아먹으니까.
그래서 며칠 후.
잘 포장된 마력 봉쇄 스크롤 25만 장이 페리호에 실려져 부산항에서 후쿠오카항으로 떠났다.
더불어 총리 최측근 비서가 스킬 쿨타임 초기화 티켓을 가지고 한국으로 출발했다.
* * *
영혼의 세상.
파견 근무로 하루 한 번 출근하는 제페트.
『안녕들 하셨습니까? 오늘도 왔습니다.』
『왔다!!!』
『뱀파이어 왔어? 기다렸잖아.』
『왜 이렇게 늦게 왔나?』
『빨리빨리 말해주게,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제페트는 뿌듯하다.
백색 탑 17층에선 혈랑에게조차 밀렸던 존재감 없던 피소환인었는데 여기선 초인기 영혼.
그래.
이거지.
파견 근무는 꿀맛이다.
『현재 소환사님 엘릭서 제조에 드는 재료 수집을 목적으로 상층 등반을 결정하셨는데.』
『몇 층인가?』
『86층입니다.』
『헉! 세상에! 언제 거기까지.』
『몬스터는? 86층이라면 평범한 놈은 아닐 텐데.』
『초열겁화의 불사조요.』
『헐!』
『미친!』
『그게 뭔데 그래?』
『자네 세상의 주작이라 보면 돼.』
『사신수 중 남쪽을 지키는 신수(神獸) 말인가? 이거 큰일이군.』
『내가 살았던 세상에서도 불사조는 국가 재난급 마수였지.』
『실버 드래곤의 아이스 브레스나 9서클 빙결계 궁극 마법 아니면 힘들어.』
『북해 빙궁의 빙정 같은 건 없나?』
『소환사는 어떤 식으로 공략한다던가?』
떠들썩해진 영혼의 세상.
그래서 계획에 대해 말해 주자.
『허허, 허허허허!』
『…도무지 말이 안 나오는군.』
『핵폭탄 공략할 때 이미 알아봤지만.』
『소방 공략이라, 그렇지. 지구 화학 기술이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당연히 가능하지. 당장 핵폭탄만 봐도 알 수 있잖아. 핵에 견딜 수 있는 존재가 있기나 해? 탑에서 지구 과학 기술이 적용되면 일사천리 아닌가.』
『탑 안에서 소화 약제에, 액화 질소를 뿌린다라, 정말 대단해. 상상만 해도 짜릿하구나.』
『꼭 나가서 라직스라는 수인족 일꾼을 만나보고 싶군.』
『나도 그래. 실로 드림팀 아닌가? 그 안에 내가 속할 수만 있어도....』
『소환사 바로 옆에 제가 서 있는 것이 본녀의 꿈이에요.』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소환사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응원하세. 영!』
『차!』
『영!』
『차!』
『영!』
.
.
.
동시에 신임 관리자에 대한 성토도.
『관리자들은 당장 비열한 수작질을 즉시 중단하라!』
『차라리 탑 안에서 승부를 봐라! 탑 밖에서 헛짓거리하지 말고.』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때려쳐!』
『인과율은 무너졌냐? 이 새끼야?』
오늘도 영혼의 세상은 뜨거웠다.
* * *
86층 소방 공략.
지구 소방 기술의 차가운 맛을 보여 준다.
온갖 종류의 소화 약제를 담은 화학소방차 30대가 백색 탑 17층에 준비됐다.
그리고 무려 100여 개의 대형 금속 물탱크.
안에는 액화 질소가 가득 들어 있었다.
돈이 많이 들어갔다.
뭐, 이럴 때 쓰려고 돈을 버는 건데.
소방청 기부금도 그렇고.
그뿐인가?
방구석 연금술사 마리의 약제 제조 능력.
우선.
<현자가 제조한 화염 저항의 비약>
효과 : 복용 시 10시간 동안 화염 저항력이 대폭 강화됩니다.
이건 공략에 참여하는 사람 수에 맞게, 각각 한 병씩 마시게 하고.
또한 불사조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공격용 무기인.
<현자가 제조한 냉기 속성 피해의 포션>
효과 : 투척 혹은 직접 주입 시 대상에게 냉기 속성 피해를 줍니다.
냉기 피해의 포션도 대량으로.
소방차 약제 탱크 안에 넣어서 쓰게?
아니다.
베 원사가 마총으로 발사할 냉기 포션 주입 탄환 용도로.
이 탄환 하나하나에 최하급 인벤토리 마법 회로도가 적용됐다.
마도공학자 엘이 포션 자동 주입기 허리띠를 분해해서 그것에 새겨진 인벤토리 마법 회로도 연구에 성공한 덕분에.
인벤토리 마법 회로도는 플레이어의 인벤토리와 비슷하다.
지구에서 제조한 지구 물질의 소방 약제는 들어가지 않는다.
오직 탑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물품만 들어간다.
즉, 마리가 만든 냉기 속성 피해 액체 같은 거 말이다.
한 발의 탄환 내부에 꽤 많은 액체가 들어갔다.
이거 맞으면 약 500L가량의 포션을 뒤집어쓰게 되는 셈.
그리하여 모든 준비가 끝나고.
백색 탑 17층에서 열린 출정식.
공략에 참여하는 피소환인원은 모두 11명.
코사크, 고방, 견달래, 라직스, 광마, 베 원사. 바르딘, 마리, 디아마트, 매켄지, 엘.
그중 라직스는 정동훈 대표가 맞춤 제작한 소방모자와 소방복을 입었다.
"호에?"
매우 귀여웠다.
"이제 입장하죠."
모든 장비는 라직스 아공간 배낭에 넣고.
펜트하우스에서 피소환인들을 소환한 뒤.
'입장.'
[대한민국 검은 탑(NO.1) 86층에 입장합니다.]
* * *
검은 탑 관리자.
영혼들의 아우성은 그들의 귀에도 들려왔다.
[흥! 아무리 떠들어 봐라.]
인과율?
아무렴 그것도 모르고 실행했을까?
다 계산된 허용 범위였다.
조금 지나치긴 했지만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멍청한 것들, 내가 전임 관리자인 줄 아나?]
그런데?
[디자이너님, 지구 소환사가 대한민국 1번탑 86층에 입장했습니다.]
[뭐?]
지긋지긋한 놈.
끝도 없이 올라가는구나.
이러다 90층도 금방이겠다.
가만!
[86층의 마수라면....]
뭐였지?
[지옥겁화 불사조지요.]
그래?
[현재 소환사가 거느리는 인원 중에 냉기 마법사나 음한 계열 무림인이 있나?]
[없습니다. 연금술사가 있긴 하지만, 그래 봐야 냉기 포션 정도겠죠.]
[흠.]
그럼 공략 못 한다.
지옥겁화 불사조는 화염의 최고위급 정령.
정령왕과 맞먹는다.
어떻게 불을 꺼?
[실패하겠군.]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한민국 1번탑 86층 현장을 홀로그램으로 띄워. 놈들의 실패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마침 잘됐다.
이 기회에 스트레스 좀 풀어보자.
소환사가 실패하는 꼴을 보면서.
* * *
86층.
임무는 초열겁화 불사조 처치.
공략 방식은 소방 공략.
핵 공략이 먹혔는데 소방 공략이라고 안 먹힐 리가.
지구 소방 기술의 매운맛을 보여 준다.
불사조가 왜 어려운 마수인가?
물로는 그 불을 꺼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소 물의 정령왕 엘라하임의 권능.
웜급 이상 실버 드래곤의 아이스 브레스.
혹은 9서클 빙계 마법사가 블리자드, 프로즌 스톰, 프로스트 노바 같은 광역 주문을 쏟아붓는다거나.
이렇게 해야 겨우 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화학소방차 30대가 동시에 소화 약제를 뿌려 대면?
공략은 불사조를 소방차가 있는 곳까지 끌어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풀링은 당연히 베 원사가 맡고.
라직스가 평지 지형에 화학소방차 30대를 배치했다.
스슷, 스스슷. 스슷, 스스스스....
진형은 학익진.
웅장하다.
이순신 장군님께서 왜적을 쳐부술 때 사용했던 검증된 진법 아닌가.
소방차 학익진 안으로 불사조를 끌어와서 가두고 한 번에 일제 발사.
아주 소화 약제 범벅을 만들어 주는 거다.
이게 바로 지구 소방 과학 기술의 권능이지.
소화 약제 브레스, 소화 약제 블리자드이고.
"봉 소환사님, 신에게는 아직 화학소방차 30대가 있슴다. 너도나도 불조심, 자나 깨나 불조심임다."
네네.
준비하시고요.
더불어 견달래의 부적도 각 소방차마다 다닥다닥 붙여졌다.
소방차에게 신령한 기운을!
축원굿도 한번 해주고.
"베 원사님?"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준비됐습니다."
"모두 위치로!"
다들 소방차 두세 대씩 맡았다.
소화 약제를 즉시 발사할 수 있게끔.
베 원사 소방차는 풀링 완료하고 합류.
주혁도 3대를 맡았다.
호문이들을 이용하면 되니까.
저 멀리 보이는 화산.
분화구가 둥지인 듯, 그 위에서 날갯짓하는 불사조.
그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
스팟!
출동 베 원사.
파파파팟!
속보 전진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찌이잉!
마총을 겨냥했다.
늘 사용하던 마총이 아니다.
최신 버전의 마총은 속성 흡수를 통해 냉기 탄환을 발사할 수 있지만.
냉기 계열 법사가 없어 속성 마력 흡수가 안 되기에 만들어진 탄환을 장착해야 쏠 수 있는 구식 마총으로.
그래서 냉기 포션 주입 탄환 장착.
인벤토리 마법 회로 인챈트로 어마어마한 양의 냉기 액체가 들어가 있는 탄환.
파주주죽!
출렁!
탄환이 불사조의 몸에 적중했다.
파앗!
사그라드는 화염.
탄환을 맞은 불사조 화염체의 몸에서 일순 구멍이 뚫렸다.
곧 다시 화염으로 메꿔졌지만.
"타라라라라라!!!"
괴성을 지르는 초열겁화 불사조.
화르르륵!
베 원사를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는 베 원사.
전술 기동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한 발 더.
찌이잉!
파주죽!
출렁!
파앗!
"타르르릇!"
불사조가 광분하며 미친 듯이 날개짓했다.
계속 물러나면서, 장전 발사, 파주죽! 장전 발사, 파주죽! 장전 발사, 파주죽....
어그로가 끌렸다.
불사조는 오직 베 원사만 보고 있었다.
이제 거의 학익진의 중앙에 다다를 때쯤.
"가즈아!!!"
주혁의 외침.
일제히 발사를 시작하는 화학소방차.
쫘아아아아악!
엄청난 양의 소화 약제가 불사조에게 퍼부어졌다.
"퍼부어!!!"
초당 약 100L.
그게 30대니까 초당 3,000L.
계면활성제가 섞인 소화 약제라 불사조의 몸이 거품으로 뒤덮였다.
온몸에 일어나는 거품, 산소도 차단되고.
그리하여 점점 잦아드는 불길.
초열겁화?
어쩌라고?
"멈추지 마십쇼. 계속 쏴야 함다."
이제 결정타.
매켄지가 라직스를 들고 플라이 마법으로 하늘 높이 날았다.
그리고 쇠약해진 불사조 위에서 아공간을 열더니.
"호엑!"
쑤욱!
대형 금속 탱크를 불사조 머리 위로 떨어뜨렸다.
츠핏! 츠피피핏!
이어지는 광마의 초승달 강기.
서거거거걱!
허공에서 잘리는 탱크.
그리고 그 안에서.
콰콰콰콰콰!
쏟아져 나오는 액화 질소.
뭐, 탱크가 하나뿐이야?
쑥! 쑥! 쑥! 쑥! 쑥! 쑥....
연달아 떨어진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다.
탱크가 떨어지는 족족 광마의 강기에 잘려 엄청난 양의 액화 질소를 쏟아냈다.
콰콰콰콰콰! 콰콰콰콰콰! 콰콰콰콰콰!
순수한 물도 이 정도 맞으면 꺼지겠다.
"꺼짐다! 그러나 꺼진 불도 다시 봄다!!!"
효과는 예상대로였다.
소방차의 소화 약제, 그리고 액화 질소 샤워까지 곁들여지니.
"타르르, 타르르륵, 타르르...."
띠링!
[초열겁화 불사조 1/1]
[86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보상 : 불사조의 재/ 불사조의 깃털]
[세계 공지 : 검은 탑 NO.1(한국)의 86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 * *
관리자들은 경악했다.
저런 공략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 미친놈들!]
[세상에, 저게 말이 됩니까?]
[아니, 불사조에게 소방차라니요.]
소방차를 동원하다니.
말이 돼?
어처구니가 없었다.
특히 저 일꾼.
햄스터 수인족 라직스.
[저놈 존재 자체가 바로 인과율 위반 아닌가?]
[탑 정상화는 우리가 할 게 아니라 소환사가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부질없는 목소리였다.
아무리 관리자라도 피소환인의 고유 스킬엔 간섭하지 못하니까.
관리자들의 스트레스는 더더욱 가중됐다.
186화
주혁 일행이 86층 불사조를 상대로 소방차 학익진 공략을 막 진행하려던 때에, 바깥에선 기사 하나가 떴다.
<속보) 최고 플레이어, 대한민국 소방청에 1천억 전격 기부 결정>
짤막했다.
제목이 곧 내용.
하지만 반향은 컸다.
1천억이라는 액수 때문에?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기부의 주체가 최고 플레이어라는 공식 오피셜.
처음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최고 플레이어가 했을 것이라 판단되는 여러 일은 다들 추정에 불과했다.
성검 대여에서부터, 마력 봉쇄 스크롤 양산까지.
단 한 번도 최고 플레이어가 벌인 사업이다! 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가 아니면 누가 했는데?
하지만 이번엔 각성 관리청에 의해 공식 입장으로 떴다.
이런 경우는 처음.
└ 기부도 S+++ 등급으로 하네.
└ 돈 씀씀이가 완전 상남자야.
└ 나도 천억 기부할 정도로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 고조, 천억이면 고깃국이 몇 그릇이간?
└ 북한, 너희들 가치 기준은 고깃국이냐?
└ 내레, 고기 못 먹고 자란 게 한이 돼서 기래.
└ 근데 천억은 좀 짜다. 최소 1조는 되어야지.
└ 동무는 1원이라도 기부해 봤소?
└ 씨발, 안 해봤다, 왜? 하지만 내가 최고 플레이어라면 무조건 1조는 했을 거야. 쪼잔하게 1천억 말고.
└ 간나 새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놀려대는구만. 책임질 수 있네?
└ 워워, 진정해. 저 새끼, 그냥 분탕질일 뿐이야.
대부분 호의적인 반응.
특히 기부 결정이 공식적인 경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관한 사람들의 반응은.
└ 슬슬 자신을 드러내려고 준비하는 거 아냐?
└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고? 설마!
└ 곧 누군지 알게 되겠네.
└ 그거 별로 안 좋은데,
└ 기렇디. 이 안에서도 분탕질 종간나 새끼들이 판을 치는데, 현실에서 알려진다고 생각해 보라우. 끔찍하지 않카서?
그 와중에 너튜브 영상이 하나 떴다.
한국 각성 관리청이 공개한 미공략 상층, 86층의 정보였다.
86층은 또 어떤 무시무시한 놈일까, 사람들은 기대하며 영상을 시청했다.
그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86층의 배경.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화산.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시뻘건 화염.
자세히 보니 단순한 화염이 아니었다.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저건 뭐지?
자막이 떠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정체를 알았다.
- 86층 몬스터, 초열겁화 불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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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 불사조?
└ 피닉스라고?
└ 어어, 주, 주작?
└ 전설 속 생명체가....
└ 불사조면 죽일 수 없다는 뜻이잖아.
└ 설마 안 죽기야 하려고? 죽긴 하지만 어렵다는 말이겠지.
└ 화염 때문에 접근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겠네.
└ 불을 끄는 게 먼저겠는데, 어떻게 꺼?
└ 혹시 그래서 소방청에 기부한 거냐?
└ 기부하고 불사조하고 무슨 상관인데?
└ 공략 불가능한 86층을 접하고 화재 진압의 중요성을 깨달은 뒤, 소방관님들의 희생에 감명받아 기부를 결정했을지도.
└ 어쨌든 넌 최고 플레이어가 불사조를 못 잡는다고 판단한 거구나.
└ 신화 속 존재를 인간이 잡을 수 있겠어?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저건 못 잡아.
└ 동감이다. 공략 불가능.
└ 이름이 괜히 불사조야? 칼도 안 박히고, 어정쩡한 마법으론 어림도 없고,
└ 장담한다. 무조건 실패!.
└ 앞으로 세계 공지가 뜰 일은 없겠구나.
하지만.
[세계 공지 : 검은 탑 NO.1(한국)의 86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 으잉?
└ 공략했네?
└ 했다고?
└ 했는데?
└ 했잖아.
└ 했구만 기래!
└ 간나 새끼들, 기케 의심만 많으면 어카네?
└ 최고 플레이어 동지 만세!
└ 최플 동지 만세!
└ 주체적 혁명정신으로 최플 동지 만세!
└ 주혁 최플 동지 만세!
└ 공략 불가능은 무슨!
└ 크크크, 매번 그랬지. 공략 불가능 운운하더니 결과는 S+++!
└ 근데 어떻게 공략했지?
└ 나도 모르지.
물이라도 끼얹었나?
* * *
공략은 순식간에 끝났다.
역대 공략 중 아마 손에 꼽을 정도의 빠르기.
베 원사에게 풀링되어서 소방차 학익진 포위망에 진입하는 순간 불사조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
총 30대의 화학소방차에서 퍼부어진 초당 3000L, 즉 1초에 3톤의 소화 약제, 1분이면 180톤.
거기에 차원대소방관 라직스가 허공에서 투하한 초대량의 액화 질소까지 합쳐졌으니.
[87층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검은 탑(NO.1)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주혁과 일행은 펜트하우스로 나왔다.
피소환인들의 휴식은 백색 탑에서.
모조리 소환 해제.
그리고.
"제페트 지정소환."
화아앗!
"주인님!"
"어서 오세요. 제페트 씨, 영혼의 세상에서 계시느라 힘들었죠?"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고, 공략은?"
"하하하, 당연히 성공했죠."
"아! 믿고 있었습니다!"
주혁은 제페트에게 86층 불사조를 어떻게 공략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감격한 표정의 제페트.
"빠, 빨리 소환 해제해 주십시오. 영혼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집에서 좀 쉬었다가 가세요."
"아닙니다. 그쪽 형님 누님분들도 불사조 공략에 관심이 많아서...."
"그래도 여기서 놀다가 현신 기한 다 지나면 그때 가시면 되죠."
"아,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혁도 백색 탑으로 입장.
광장에 모여 오순도순 서로 자축하는 피소환인들.
"완벽한 공략이었다."
"맞다. 놈이 대응하기도 전에 끝내 버렸으니."
"대단한 소방차 브레스였어. 실버드래곤 아이스 브레스보다 훨씬 낫군."
"학익진 전술을 선택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베 원사의 완벽한 풀링이었습니다. 어그로가 완벽하게 끌렸어요."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보급 사령관님 덕분입니다."
"호에."
서로 칭찬도 주고받으며.
"매 영감님도 고생했슴다. 차원대소방관과 함께 플라이로 날아서 액화 질소 투하! 캬! 거의 폭격기 아임까? 불사조 폭격기."
"광마의 초승달 강기가 하나도 빗나가지 않아서 가능한 것도 있었고."
"마도공학자와 방구석 연금술사도 한몫 톡톡히 했죠."
띠링!
<마리> : 난 원래 내 할 일 알아서 잘해. 그런데 너희들도 잘했어.
그러자 견달래가 막 백색 탑에 입장한 주혁을 바라보며.
"허나 다들 명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공자님의 진두지휘 아래 이루어졌다는 걸."
"노부가 그걸 모를까? 수고하셨소이다. 소환사."
"훌륭한 지휘였슴다."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필승!"
"호앗!"
쩝.
쑥스럽게 왜들 이래?
아무튼 이번 공략으로 얻은 아이템.
불사조의 재와 깃털.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마리> : 원래 불사조의 재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 깃털은 화염의 정수예요♥♬♪
아하.
<마리> : 재를 오랫동안 방치하면 재가 불사조로 부활하게 돼요. 물론 소환사님 드실 엘릭서와 넥타르의 재료로 쓰이겠지만♡♡♬♬
넥타르는 관심 없고.
깃털은?
<마리> : 화염의 힘으로 육체와 정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강화의 엘릭서로 사용해요. 여우 구슬이 있으니 이제 세계수의 열매와 드래곤 하트만 있으면....
'흠.'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생각.
과거에 마리는 80층대에서 넥타르와 엘릭서의 재료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86층에서 불사조가 나왔고.
그렇다면 87층은? 88층과 89층, 90층은?
"이거 세계수나 드래곤 같은 게 몬스터로 나오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
조용.
침묵이 흘렀다.
피소환인들도 예상하고 있는 듯.
"혹시라도 드래곤이 나오면? …잡을 수 있나요?"
섣불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매켄지가 대표로 나서서.
"…드래곤 공략 파티에 한 번이라도 합류해서 성공한 사람들은 누구나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를 부여받지요."
그런데?
"본 마법사도 생전의 세상에서 훌륭한 동료들 덕분에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오! 역시 9서클 대마법사.
"쉽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르스스알의 동료들, 기술 클래스의 마도공학자와 연금술사, 그리고 라직스의 능력을 감안해 본다면… 잡을 수는 있습니다."
코사크도.
"드래곤은 인간보다 더 똑똑함다. 편법 같은 건 잘 안 통함다. 하지만 S+++ 등급을 포기하고 상대하면 잡슴다."
그거야 뭐.
S+++ 공략이 중요한가?
배지 2개 못 받을 수도 있지.
문제는....
"위험하진 않겠죠? 누구 하나 다친다거나."
또 다시 흐르는 침묵.
그러다가.
"드래곤의 위험성은 노부도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바, 피해가 없다고는 장담 못 하오. 허나 죽으면 또 어떻소? 죽는다고 한들 백색 탑에서 영혼 상태로 나타날 터이고, 더구나 부활의 룬도 있으니."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건 좀...."
사실 백색 탑이 생긴 이후, 피소환인의 죽음은 그리 큰 부담은 아니게 됐다.
하지만 피소환인들이 탑 안에서 죽는 걸 직접 눈으로 어떻게 봐?
그걸 보고도 태연할 자신이 없다.
"일단 소화 약제 보충해서 2번 탑 86층 공략한 후에 생각해 봅시다. 87층에 오를지 말지."
어차피 시간은 넉넉하다.
굳이 바득바득 올라갈 필요가.
또한 슬슬 문제가 생길 때가 됐다.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기든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한다든가.
지금은 파티를 정비할 때.
첫 번째 목표는 현재 스스알에 스스알에 머무르고 있는 피소환인들 등급 돌파, 올 르스스알 등급 달성.
두 번째 목표는 마도공학자 엘의 활용.
함께한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이템 대량 생산 체제를 완성했으며, 81층 이상 거대괴수 구간의 공략법도 만들어 냈다.
그녀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드래곤도 잡을 수 있는 기상천외한 공략법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그래서 당분간 상층 공략은 보류.
이제 뭘 하지?
"반복 공략이나 할까요?"
"반복 공략은 너무 지루하지 않슴까?"
"아니, 미공략 상층 등반은 안 그런가? 탑 등반하고 공략하고 보상 받고, 또 탑 등반하고… 똑같은 패턴이잖아요."
뭐가 달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푹 쉽시다."
"노는 것도 지겨워서,"
"마리 씨를 봐요. 혼자서도 잘 놀잖아요."
"…예, 예압!"
하긴 코사크 말도 맞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러다가 또 상층 공략하자고 할라.
이들의 관심을 돌리게 할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무언가가 말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우리 창고에 보관된 상마가 어느 정도 되죠? 1,000톤은 넘나?"
"잘은 모르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될 겁니다."
상마 물량은 충분하고.
그럼?
"우리 엘리베이터를 건설해 볼까요?"
"어떤...."
"백색 탑 17층 엘리베이터."
"아!"
괜찮은 아이디어다.
미공략 상층 등반해서 무시무시한 드래곤 같은 존재와 맞닥뜨리는 것보다는 나을 듯.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고 해서 이득 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네."
"그건 저도 잘...."
"설치해 봐야 알 것 같사옵니다."
상마 1,000톤을 낭비하는 게 아닐지.
그걸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백색 탑 메뉴에 엘리베이터 설치 항목이 괜히 생겼을까?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한번 건설해 보는 것도.'
만들어 볼까?
할 수 있으면 해보는 거지.
그러나 쓸모가 없으면?
혹은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또 결정 장애 도졌네.'
이럴 때 필요한 건?
결정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
예를 들어.
"선녀 공주님."
"말씀하시옵소서, 공자님."
"오랜만에 점이나 쳐볼까요? 엘리베이터 설치가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
사실 이성적 판단보다 점괘에 의지하는 건 없어 보이는 일이긴 하다.
누가 보면 미신이라고 욕하겠지.
하지만 견달래는 진짜 무녀 아닌가?
르스스알 선녀가 떡하니 눈앞에 있는데.
그녀의 점괘에 의지하는 건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지.
"알겠사옵나이다, 점괘를 풀어 보겠나이다."
밥상 하나를 놓고 바닥에 앉은 견달래.
좌라라락! 쌀알을 밥상 위에 뿌리고, 방울을 딸랑딸랑 흔들며.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공자님 가시는 길에 등불을 비추어 주시옵소서."
딸랑딸랑.
방울도 흔들고.
슥슥슥슥.
밥상 위 쌀알도 더듬어 보고.
덜그럭, 덜그럭.
산통 안에 든 산가지 하나를 뽑아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점괘가 나왔사옵니다."
오!
기대된다.
"대길(大吉)이옵이다."
대길?
그냥 길도 아니고 대(大) 자가 붙었다.
"아싸!"
"오예!"
"호에!"
"멋짐다. 당장 설치하십쇼."
"설치해도 괜찮을 듯하오."
"대길이라는데, 지체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
그깟 상마 1,000톤, 대길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당장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
위치는 어디가 좋을까?
'여기가 17층 광장이니까 중심지가 좋겠지?'
관리자 메뉴를 불러내고.
엘리베이터 설치 항목을 터치하자.
[백색 탑 17층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시겠습니까? 비용은 상급 마정석 1,000톤입니다.]
'설치.'
[백색 탑 17층 엘리베이터를 설치합니다.]
우우우웅!
백색 탑 17층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차착! 차착!
광장 중앙에 만들어지는 찬란한 빛.
그리고 나타난 건....
"엥? 진짜 엘리베이터네?"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실제 엘리베이터, 직육면체 형태의 단층 구조물, 좌우로 열리는 문도 있고, 심지어 버튼까지.
우르르르르,
피소환인들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이거야?"
"똑같이 생겼네."
"이게 열림 버튼인가?"
"어어어! 왜 눌러? 지휘관님도 아직 안 만지셨는데."
"괜찮슴다. 막 눌러 보십쇼. 위험한 건지 아닌지 우리가 먼저 해 봐야 함다."
그 와중에 주혁은.
띠링!
[업적 : 최초로 백색 탑 17층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셨습니다.]
'왜 안 뜨나 했다.'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보상은?
[1회에 한해서 엘리베이터 왕복 가동 비용이 면제됩니다.]
면제라서 좋긴 하지만.
겨우 1회?
'그런데 가동 비용도 있었어? 만들고 나면 끝 아니야?'
[1회당 엘리베이터 왕복 가동 비용은 최상급 마정석 10kg입니다.]
'미친!'
이거 완전 도둑놈들이네!
설치하게 하고 야금야금 최마를 빼먹겠다는 소리잖아?
에이!
1회는 공짜니까 한번 타본다.
그다음부턴 생각 좀 해보고.
* * *
영혼의 세상.
『제페트 왔습니다! 형님 누나들, 인사 올립니다.』
『왔다.』
『왜 이제 와?』
『기다렸다고!』
『86층 공략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성공했겠지? 응? 맞지? 불사조 죽였나?』
『소방 공략이 통하든가?』
『조용히 해봐! 일단 들어보자고!』
제페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설명하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먼저 화산 위에 뜬 불사조를 베 원사가 마도공학자 엘이 만든 특수 탄환으로 풀링했습니다. 그렇게 어그로가 끌린 놈을 소방차 학익진 안으로 유인한 후....』
숨죽이며 제페트의 설명을 듣는 영혼들.
마지막 부분에 액화 질소 샤워 공략으로 불사조를 죽이고 재와 깃털까지 획득했다고 하자.
『만세!』
『해치웠구나.』
『불사조의 재가 나왔어! 재라고, 넥타르의 재료란 말이지.』
『마리 년이 넥타르 제조하면 소환사는 최소 1,000년은 족히 살 수 있겠군.』
『한숨 돌렸어. 이제 시간은 소환사의 편이야.』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화의 엘릭서도 제작해야 해.』
『그거야 시간문제잖아, 드래곤 하트만 확보하면.』
『드래곤이 무슨 애 이름이냐?』
『내가 나가야 하는데… 본좌가 왕년의 드래곤 슬레이어였거든.』
『슬레이어 타이틀은 기본적으로 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 거 아냐?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래. 지 혼자 잡은 것도 아니면서.』
『아무튼 나가려면 한 80일만 기다리면 되겠지?』
『빨리 무작위 소환이 재개됐으면 좋겠다.』
『이번엔 나다. 꼭 나간다.』
『반드시 합류해서 탑의 역사에 내 이름을 남기는 거야.』
그 어떤 공략이라도 거뜬하게 해내는 소환사.
고난과 역경도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
그야말로 최고의 팀 아닌가?
소환되기만 하면 그 팀에 소속되는 것이고.
그것만 해도 영광이지.
187화
백색 탑 17층 엘리베이터.
설치하면 대길(大吉)이라는 달래 선녀의 점괘에 만들긴 했지만....
그러나 가공할 비용.
뭐? 1회 왕복 운행에 최마 10kg?
상마 현 시세 100g당 약 20만 원.
상마 1톤에 최마 1kg 비율이니.
'왕복 운행에 2백억 정도 하나?'
아주 홀라당 벗겨 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돈으로만 따질 것도 아니다.
최마가 얼마나 귀한 건데.
쓰임새도 많다.
없어서 못 쓰는 것.
영구 입주권에, 베 원사 아광속탄에, 고위급 연금술 약물 재료에, 마도공학 아이템 제작까지.
뭐, 그래도 업적 보상 덕분에 1회 왕복 운행비 면제.
딱 한 번만 써 본다.
진짜 대박이 맞으면 두 번 쓸 수도 있고.
'근데 저 양반은 또 왜....'
샤삿! 샤샤샷!
엘리베이터 앞에서 현란한 스텝을 밟아 대는 코사크.
외부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면 샤삿!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가, 닫히면 중앙에 서서 문 닫히는 걸 막고, 또 열리면 샤샷! 밖으로 나왔다가.
"…저기, 뭐 하세요?"
"안전 점검 중임다."
아하.
샤삿! 샤샤샤샷!
"그래서 안전한가요?"
"아직은 별일 없슴다."
그런가 보네.
왔다 갔다 해도 멀쩡한 걸 보면.
들어가 볼까?
주혁이 엘리베이터에 타려고 하자, 그를 제치고 우르르 몰려와서 먼저 타는 피소환인들.
"어허, 새치기!"
"죄송함다."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노부가 연장자라서."
"부녀자가 우선이지요."
"호랏!"
이 사람들이 진짜!
예의 없이 말이야!
물론 왜 먼저 타려고 하는지 안다.
혹시 주혁에게 위험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겠지.
아무튼 제일 늦게 타서 살펴보니 내부가 상당히 컸다.
'널찍하네.'
흡사 화물용 엘리베이터?
한 50명 이상 들어가도 남을 듯.
또한 실제 엘리베이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내부 인테리어.
거울도 달렸고, 손잡이도 있고.
그러나 층수를 지정하는 벽 쪽엔 오직 단추 두 개만 붙어 있었다.
이곳의 층수인 17층과 1층.
'갈 수 있는 곳이 1층밖에 없나?'
순간!
띠링!
주혁의 뇌리에 울리는 메시지.
[현재 엘리베이터 등급은 1등급입니다. 따라서 잠금 해제된 백색 탑 층은 1층입니다.]
참나, 엘리베이터도 등급제야?
[향후 등급 상승에 따라 잠금 해제된 백색 탑 층이 순차적으로 개방됩니다.]
무슨 대단한 게 있다고 층을 잠가 뒀어?
'1층이라.'
백색 탑의 다른 층.
전부터 궁금했다.
거긴 어디와 연결된 곳일까?
주혁은 시스템에 의해 백색 탑 층을 분양받았다.
지구와 연결된 17층을 말이다.
다른 층도 비슷한 시스템이라면?
'플레이어를 만나게 될 수도....'
그것도 다른 차원의 플레이어와.
"…가지 말까?"
"왬까?"
"갑자기 불안해서요."
"저만 믿으십쇼. 뭐가 됐던 간에 제가 대신 상대함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피소환인들도.
"전사는 소환사의 방패다."
"소녀, 언제나 공자님의 지척에서 보필하겠나이다."
"지휘관님, 요인 경호 작전 준비 완료."
"소환사, 노부가...."
"본 마법사가 절대 방어 주문으로...."
"빛이여!"
"호앗!"
.
.
.
어우, 시끄러워라.
괜히 말 꺼냈네.
서둘러 1층 버튼을 누르고.
[1층을 선택하셨습니다.]
[현재 백색 탑 1층은 소유권자가 권리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소유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입장할 수 있습니다.]
아!
이런 식이구나.
원래는 허락이 있어야 방문이 가능한 듯.
그런데 소유권자가 어떻게 권리를 상실했다는 말이지?
잃었다는 거야, 아니면 빼앗겼다는 거야?
그때였다.
스우우웅!
진동하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
그러더니.
스샤샤앗!
으드드득!
몸 전체를 짓누르는 가공할 압력.
"큭!"
지이잉!
화아앗! 바르딘의 광휘, 그리고 메켄지의 베리어와 몸에 달라붙은 견달래의 부적.
스샤샤샤샤....
드드드드드....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
이윽고.
위잉!
스읏.
띠링!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습니다.]
왔다.
드디어 도착!
[체류 기간은 24시간입니다.]
[체류 기간이 초과하면 엘리베이터로 강제 이동됩니다.]
[1층 소유권자가 부재 상태입니다.]
[따라서 백색 탑 17층의 소유권자가 24시간 동안 백색 탑 1층의 임시 소유권자가 됩니다.]
24시간 동안은 여기가 주혁의 소유라는 의미.
[소유권자의 동행인들도 1층 거주민으로 자동 등록되었습니다. 24시간 동안 유효합니다.]
피소환인들도 임시 거주민이 되었고.
[24시간 동안 임시로 백색 탑 1층 입장 및 퇴장 스킬이 등록되었습니다.]
스킬도 등록해 주고.
'왕복 운행비, 비싼 이유가 있었네.'
스르르륵!
문이 열렸다.
그러자.
"…와!"
"헐!"
"흐음."
"오!"
"허허."
주혁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
도시였다.
현재 위치한 곳은 도시 가장자리, 외곽.
5층 이하의 작은 꼬마 빌딩들이 양쪽으로 줄줄이 늘어선 시가지, 그 사이로 난 도로, 그리고 통신탑과 발전소.
맞다.
매우 비슷하다.
주혁의 백색 탑 17층과 말이다.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적막하고 황량한 도시의 분위기.
길가에 자동차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새하얀 먼지로 덮여 있어 시동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도시의 면적도 생각보다 매우 작은 듯.
기껏해야 군부대 연병장 크기 정도?
"소환사, 저쪽을 보시오."
광마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을 돌리니.
"으음,"
도시 외곽의 초록색 벌판이 눈에 들어온다.
자그마한 강도 흐르고.
그 뒤로는 푸르른 숲.
'자연 생태계는 작동하는구나.'
주혁의 백색 탑 17층도 그러하니까.
"사람이 진짜 아무도 없나?"
혹시 건물 안엔?
눈치 빠른 코사크가 문을 열고 먼저.
샤샤샷!
뒤를 이어 베 원사와 바르딘, 고방이.
"클리어임다. 아무도 없슴다."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안전 확인했습니다."
"빛이여!!!"
주혁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없구나.'
그저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으스스해지는 기분.
주혁은 밖으로 나갔다.
"도시 안쪽으로 더 들어가 봐요."
"예압!"
"전사가 앞장선다."
도시 안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산한 분위기.
관리가 되지 않아 죽어 버린 도시.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죠?"
"없소이다, 노부의 기감에 걸려드는 생명의 기운은 전무하오."
"…네."
그런데?
스슷, 샤샤샷!
저 앞에서 온갖 오두방정을 다 떠는 코사크.
건물로 들어갔다, 나왔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가....
마법사 매켄지도 질세라.
자신의 머리 위에 '엄중 경호'라는 글자를 띄우고 플라이 마법으로 날았다가, 착지했다가, 지이잉! 주혁에게 와서 배리어도 걸어 주고....
왜들 이래?
호들갑도 정도껏 떨어야지.
광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바보들은 신경 쓰지 마시오. 이해하려고 들 필요조차 없소. 괜히 심력만 소모되니."
베 원사도.
"저것들 다 쏴버릴까요?"
철컥!
정말 쏘려는 듯.
"…쏘지 마세요. 맞으면 아플 텐데."
이윽고.
저 멀리 보이는 넓은 광장.
끝까지 걸어서 광장에 도착했다.
여기도 마찬가지.
도무지 사람, 아니, 사람이 살았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두 죽어 버렸나? 혹은 처음부터 없었나?
도시 전체를 다 돌아봐도 똑같았다.
온통 건물만,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느낌.
'흠.'
순간 주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
1층에 도달했을 때 들은 메시지.
[24시간 동안 임시로 백색 탑 1층 입장 및 퇴장 스킬이 등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주혁의 범용 스킬창.
[범용 스킬] : 탑 입장(1일 4회)/ 탑 전용 인벤토리/ 백색 탑 17층 입장 및 퇴장(사용 불가)/ 백색 탑 1층 입장 및 퇴장(24시간 유효).
사람들이 여기 없다면 밖에는 있지 않을까?
마침 스킬도 있으니.
"밖으로 나가 볼까요?"
그러자 표정이 안 좋아지는 피소환인들.
검은 탑 입장이라면 함께 들어가지만, 여기선 주혁 혼자 나가야 한다.
그래서 지구에서도 17층에서 바로 탑에 입장하지 못했다.
펜트하우스로 먼저 나간 뒤, 피소환인들을 불러내서 검은 탑에 입장하곤 했다.
만약 혼자 나가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소환사,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겠소?"
"광마 님 말씀이 옳사옵니다."
"맞슴다. 나가지 마십쇼."
"호에."
그들의 걱정도 이해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호기심도 참을 수 없다.
백색 탑 1층의 바깥은 어떤 세상일까?
지구? 아니면 다른 세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나갔다가 위험하면 다시 들어오면 되죠, 아니면 여러분들을 즉시 소환하거나."
"으음."
"후우."
"흠."
뭐가 위험해?
"그럼 나갔다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스슷.
착착착착!
주혁의 온몸에 덕지덕지 부적을 붙이는 견달래.
찌잉!
매켄지의 배리어 보호막.
마도 공학자 엘도 주혁에게 허리띠를 채워 주며.
"전에 입수한 허리띠를 본떠 만들었습니다. 자동 포션 주입 장치입니다. 힐링 포션도 가득 채워 놓았고요."
이 정도면 너무 과보호 같은데.
'내가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야.'
하지만 받아들인다.
걱정하는 마음을 아니까.
"나가자마자 부르시오. 누구든!"
이제 나가보자.
주혁은 천천히, 또박또박 읊조렸다.
"백색 탑 1층 퇴장."
스팟!
1층 바깥.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여긴 어디지?'
건물 옥상 같은데.
아무튼 피소환인들이나 소환해 볼까?
"광마 지정 소… 음."
주혁은 말을 멈췄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 때문에.
"이, 이게 무슨?"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우중충한 하늘이었다.
짙은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근데 놀란 이유는 우중충한 하늘과 먹구름 때문이 아니다.
무언가 날아다녔다.
그것도 아주 많이.
펄럭펄럭.
"…맙소사!"
날갯짓하며 비행하는 와이번과 그리핀 무리,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얼음 매와 함께 유유히 활강하는 거대조수 콜로서스 콘도르.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다.
"...."
여기가 검은 탑인가?
그럴 리 없지.
이곳은 백색 탑 1층 바깥.
거기와 연결된 세상.
아마도 다른 차원.
순간!
쿵쿵쿵쿵!
건물 옥상이 진동으로 인해 흔들거렸다.
난간 가까이 가서 밑을 내려다보니.
"미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들.
"캬아아아!"
"쿠오오오."
"크엑!"
"키아아...."
죄다 몬스터들이었다.
고블린, 오크, 바실리스크, 트롤, 오우거… 그리고 베헤모스, 곳곳에 거미줄을 친 거대 여왕 거미, 지하도 밑에서 몸을 드러내는 아포피스.
그뿐만이 아니다.
거리를 배회하는 좀비, 구울, 스켈레톤, 듀라한, 스펙터… 데스나이트.
소름 끼치는 언데드 무리들.
이제야 깨달았다.
이곳은 탑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세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일부 지역.
세계 곳곳이 다 이렇다면....
"하아."
망했구나.
쫄딱 망했어.
돌아가자.
더는 볼 것도 없다.
"백색 탑 1층 입장."
스팟!
"소환사님!!!"
"하아, 소녀 걱정했사옵니다."
"왜 소환을 안 하셨소이까?"
"으아, 진짜 가슴이 쿵! 내려앉는 줄 알았슴다."
어쨌든 바깥에서 목격한 사실을 피소환인들에게 알려주는 주혁.
그러자 모두 침통한 표정들, 분위기도 무거워졌다.
세상은 망했고 백색 탑 1층만 남았다.
여긴 파괴되지 않는 곳.
주혁도 백색 탑을 분양받았을 때 들었다.
[절대 붕괴하지 않습니다. 영구적으로 존재합니다.]
영구적이면 뭘 해?
본진이 사라졌는데.
씁쓸하다.
지구의 미래가 이런 식이면 어떡하지?
그런데....
"응?"
얘는 또 어디 갔어?
"라직스 씨?"
설마?
"혹시 라직스 씨, 보신 분?"
"…어? 방금까지 저기 있었는데"
"저 건물로 들어간 것 같슴다."
"아!"
광장 전면에 위치한 꽤나 고풍스러운 건물.
츠핏!
주혁은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다른 피소환인들.
건물 내부는 관공서 민원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대체 어디 간 거야?
"라직스 씨!!!"
"호에!"
위쪽인가?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 라직스를 찾았는데.
"아이고, 또또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셨네!"
복도 끝.
부들부들 떨고 있는 라직스가 조막만 한 손으로 방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그러지 마시라고 했어… 응? 아!"
라직스가 가리킨 건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의 시신.
완전히 썩지 않고 미라 상태로 바싹 마른.
시신의 가슴엔 단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순간!
띠링!
[1층 소유권자의 유산과 마주했습니다. 그가 남긴 기억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어?"
이건 또 무슨?
'이 사람이 1층 소유권자였어?'
그래서 없다고 한 거구나.
죽었으니까.
기억 접속이라.
피소환인 배경 설명을 보는 것과 같은 건가?
마침 잘됐다.
궁금증을 풀 기회.
'접속.'
동시에 변하는 환경.
1층 소유권자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름은 막스 크루거.
세계 최강국 독일의 플레이어.
최강국이 미국이 아닌 독일이라.
평행우주가 확실하다.
지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세상.
아무튼 그는 독일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였다.
특성은 근접, 대형 망치를 다루는 해머 마스터.
각성 초기 때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그.
정부에 의해 집중적으로 육성됐다.
한 층 한 층.
무난하게 상층을 등반하는 막스.
힘에 부친다 싶으면 즉시 정부가 지원해 줬고.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그가 먹은 특성 강화의 룬만 해도 무려 20개.
20번의 특성 강화였다.
그에 힘입어 파죽지세로 탑을 공략해 나갔다.
소형 몬스터 구간, 육상 중형 몬스터 구간, 비행 몬스터 구간, 언데드 구간....
그리고 마침내!
막스 크루거, 그가 살던 세상은 70층 보스 카발란과 맞닥뜨렸다.
평균의 저주.
그 지독한 악몽의 시작.
평균 이하와 평균 이상 국가 간의 갈등.
갈등은 전쟁으로 번져 나갔고.
그로 인해 여기저기서 거듭되는 탑 붕괴.
그래도 막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을 넘나들면서, 필요하다면 임시 귀화, 혹은 다국적 탑 이용 티켓으로 70층 진본 카발란을 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탑 강점 선포 확성기라는 아이템을 보상으로 얻은 후, 실제로 사용해서 업적 보상으로 백색 탑도 분양받았고.
그 대가로 전쟁은 더더욱 심화되었지만.
'…백색 탑을 분양받은 방식은 나하고 똑같네.'
천신만고 끝에 진본 카발란은 공략했다.
71층에 올라 4종 선물 세트에, 상급 마정석 개방이라는 보상도 얻어냈고.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탑 붕괴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됐다.
그 와중에도 계속되는 인간의 전쟁.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세상과 탑의 경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탑 밖으로 나온 몬스터.
홍수가 난 것처럼 쏟아졌다.
더불어 아직 등반하지 않았던, 미공략 상층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괴물들이 나왔다.
특히 거대괴수들.
세상이 망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막스 크루거는 홀로 백색 탑에 들어왔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거주민 등록이 가능했다면 이곳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있었을 텐데.
최상급 마정석을 구할 수 있어야 말이지.
'1일 체험권이나 월세권도 영구 거주민을 등록해야 업적 보상으로 뜨는 거니까.'
마지막 장면.
뾰족한 단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막스 크루거.
'하.'
끝.
[1층 소유권자 막스 크루거와의 기억 접속이 해제되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다.
한 차원의 멸망을 간접 체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플레이어의 기억을 엿봤는데.
또 한 가지 알아낸 사실.
'백색 탑을 꼭 소환 특성만 받는 게 아니었어.'
탑 강점 선포 확성기를 사용해서 성공하면 타국 검은 탑의 국적이 변경된다.
그럼 업적.
더불어 백색 탑 분양 보상.
업적을 세운 플레이어는 누구라도 다 자격이 있는 모양.
어쨌거나 세상이 망하고 막스 크루거는 홀로 남았을 것이다.
열심히 탑에 등반해 상급 마정석을 채굴하여.
창조의 권능인 복사와 붙여넣기로 이곳을 꾸미고.
언젠가는 사람들과 함께 살날을 꿈꾸면서.
하지만 그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에 만났더라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혹시 백색 탑 다른 탑 층에서는 살아 있는 소유권자를 만날 수 있을까?'
요기 1층 말고 2층이나 3층에서.
바로 그때!
띠링!
[기억 접속으로 인해 막스 크루거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를 취득했습니다.]
'유산?'
[막스 크루거의 유산이 탑 전용 인벤토리로 상속됩니다.]
동시에.
스스스스스스스....
막스 크루거의 시신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
뒤를 이어 정신없이 떠오르는 메시지.
[유산 : 다국적 탑 이용 티켓 25장을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유산 : 전투 스킬 룬 3개를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유산 : 상급 마정석 152kg을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유산 : 힐링 포션 843개를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유산 : 몰살의 대지진 거대화 망치를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유산 : 리스토어(복원) 주문서 2장을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
.
.
그리고.
[유산 :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 11장을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마지막으로.
[유산 : 특성 강화의 룬을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이게 다 뭐야?
188화
70층 보스.
고위급 마족 카발란 공작.
지구에선 거의 잊혀져 가는 이름.
왜?
약해 빠진 몬스터가 되었으니까.
지구를 덮친 카발란 평균의 저주.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순탄하게 넘겼다.
그로 인해 붕괴한 탑은 일본 후지산 탑 하나뿐.
사실 지구도 평균의 저주가 기나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혁이 피소환인들의 도움으로 빠르게 진본 카발란을 찾아내서 죽였으니 망정이지.
지금도 지구 검은 탑 70층에 복사본 카발란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힘이 약화되어서 웬만한 국가 육성 플레이어라면 성검을 들고 쉽게 잡는 수준.
하지만 막스 크루거의 세상은 그렇지 못했다.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남은 건 백색 탑 1층과 그의 유산뿐.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연신 주혁의 인벤토리로 들어오는 아이템.
아마 막스의 인벤토리에 들어 있던 것이겠지.
기분이 좋냐고?
글쎄, 이렇게 꼭 필요한 것들을 얻게 됐으니 기분이 안 좋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무려 특성 강화의 룬도 있는데.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먹먹한 심정.
막스 크루거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띠링!
[1층 소유권자 인벤토리 상속 작업이 끝났습니다.]
주혁은 고개를 푹 숙이며 가루로 사라져 가는 막스 크루거의 명복을 빌었다.
순간!
앞으로 나서는 견달래.
짤랑짤랑, 방울을 흔들며 진심 어린 위로와 절제된 춤사위.
"…수고하시었소. 고생하시었소. 그대의 무거운 짐은 마침내 가벼워졌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시길, 피안의 세계에서 행복하시길."
피소환인들도 고개를 숙이며 죽은 막스의 영혼을 위로했다.
그런데?
띠링!
메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뭐가 또 남았어?
[상속인의 정당한 권리로 백색 탑 1층을 인수할 수 있습니다.]
'응?'
인수라니.
[상급 마정석 45,179kg으로 백색 탑 1층을 인수하시겠습니까?]
'....'
상마 45,179kg, 약 45톤.
상세하게 명시된 인수 비용.
그럼 이건?
'막스 크루거가 백색 탑 1층 꾸미기에 쓴 상마의 양이구나.'
이곳엔 통신탑과 발전소도 있었다.
그 둘을 합쳐서 상마 30톤.
나머지 15톤은 건물이나 도로 등을 붙여넣는 데 든 비용인 듯.
고민이다.
여길 인수해서 뭘 한다고?
딱히 이 공간이 필요한 건 아니다.
'뭐, 그래도.'
고작 45톤이잖아.
백색 탑 17층에 랜드마크 빌딩을 지을 때도 50톤 팍팍 써댔었다.
"라직스 씨?"
"호에?"
"지금 아공간에 상마 얼마나 들어 있어요? 45톤 넘어요?"
"호에, 많아요. 있어요."
인수가 가능하다.
까짓거 사버리지.
"그럼 저쪽에 좀 쌓아 두세요."
"호엥!"
스슷, 스슷, 스스슷.
수북하게 쌓인 상마 더미.
라직스가 차원대머슴이면 자신은 차원대재벌.
차원대재벌이라면 차원부동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지.
'인수!'
스르르륵!
그득 쌓인 상마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백색 탑 1층 정식 소유권자가 되었습니다.]
[임시 체류 기간이 삭제되었습니다. 언제든 원하는 시간만큼 머무를 수 있습니다.]
'좋네.'
오래 있어도 되고.
[백색 탑 1층 입장 및 퇴장 스킬이 영구 등록되었습니다.]
[백색 탑 1층 소유권자 메뉴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백색 탑 17층 거주민도 추가 비용 없이 1층 거주민 명단에 영구 등록되었습니다.]
피소환인들도 자동 등록.
가족들과 전 청장, 정 대표까지.
띠링!
[업적 : 최초로 다른 백색 탑 층을 인수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인수한 층에 한정해 엘리베이터 왕복 운행 비용이 면제됩니다.]
'오우!'
업적과 보상도.
이제 1층 방문은 공짜.
기분이 묘하다.
엘리베이터 덕분에 차원과 차원을 이동할 수 있게 됐다.
좋은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차원 엘리베이터라고 불러야 하나?'
생각할수록 신기한 물건.
가만!
"저 엘리베이터 언제 보상으로 받았더라?"
"얘 잡고 받은 거 아임까? 몽마."
"아하!"
맞다.
디아마트.
80층 보스였지?
탑 몬스터를 전향시키고 귀순을 받아들인 업적.
그러고 보니 궁금한 점 하나.
이곳이 평행우주라면....
"디아마트 씨?"
"…어음, 네? 주인님?"
"여기 세상 검은 탑에도 디아마트 씨가 있나요?"
"천만에요. 있을 리가 없죠."
"왜요? 카발란도 있는데."
디아마트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카발란, 걔는 탑에 종속된 영혼이잖아요. 일종의 노예 같은 거, 그래서 막 복사해서 이 차원, 저 차원, 여기저기 써먹는 거고요."
그러고는 은근슬쩍 몸을 비틀면서.
"반면 전 자유 계약이에요. 지구 검은 탑하고만 한정 계약을 맺었어요. 다른 차원엔 제가 없답니다."
그런 식이구나.
"그렇다면 이 세상 검은 탑에선 누가 80층을...?"
"특별한 존재겠죠. 탑과 계약할 자격을 갖춘."
"예를 들어?"
"으흥, 저와 비슷한 마족의 군주 중 한 명이겠죠."
"디아마트 씨도 대단하네요."
"헤헤, 주인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간드러지는 디아마트의 목소리에 말에 베 원사가 빈정거리는 투로.
"근데 자유 계약 영혼이 탑 노예 카발란보다 더 약해 보인다?"
카발란은 한 차원을 멸망시킬 만큼 강대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반면 디아마트는 딱히 한 일도 없이 중국에 숨어 있다가 잡혔다.
그런 이유로 약하다는 뜻.
순간 발끈하는 디아마트.
"어머? 저도 들키지만 않았어도 지구는 지금쯤 멸망했을걸요? 국가 간의 핵전쟁으로."
비릿한 미소의 베 원사.
"어쨌든 들켰잖아. 살려달라고 귀순도 했고."
"그야 우리 주인님께서 너무 대단하셔서 그런 거죠. 제가 아무한테나 막 귀순하는 값싼 몽마인 줄 아세요?"
"값싼 거 맞는데?"
"아닌데요?"
팽팽한 기 싸움.
코사크와 매켄지에 이은 또 다른 라이벌 매치인가?
끼어들지 말아야겠다.
저러다 친해지겠지.
아무튼 차원 엘리베이터 덕분에 아이템도 획득하고, 심지어 이제 자신의 소유가 된 백색 탑 1층.
왜 굳이 여길 인수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막스 크루거를 기리려는 의도.
그가 남긴 흔적 아닌가?
보존해야지.
그리고 두 번째는.
"저기, 매켄지 님."
"말씀하십시오."
"운석 소환 가능하시죠? 되도록 큰 걸로."
"어디다 떨어뜨릴 건지."
"1층 바깥에요."
"시간만 주어진다면야,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네, 한번 해보죠."
X같은 몬스터 새끼들.
다 죽이지는 못해도 최소한의 복수는 해주고 간다.
* * *
백색 탑 1층과 연결된 세상.
이미 망해서 온 사방이 몬스터 천지인 곳.
주혁은 조금 전에 왔었던 그 고층빌딩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오자마자 피소환인들부터 소환.
스팟! 스팟! 스팟! 스팟....
그리고 그들도 목격했다.
탑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세상을.
"허허허."
"다 튀어나왔군."
"실로 참혹하옵나이다."
"후우, 눈으로 보기조차 힘드네요."
"호에에."
주혁도 같은 심정.
저것들을 싹 쓸어버리면 조금 기분이 나아지겠지.
"바로 한방 꽂아 버리죠."
"운석 소환이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소환사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괜찮아요. 떨어지기 전에 피하면 돼요."
"알겠습니다. 시작해 보겠습니다."
먼저 1단계.
심상의 우주에서 운석을 만들어 내기.
1단계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매켄지가 양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명상에 들어갔다.
엄숙하고 진지한 그의 표정.
눈을 지그시 감으니 그럴듯해 보이는 대마법사의 풍모.
아아아.
9서클 대마법사 매켄지 님.
당신의 힘을 보여 주세요.
그동안 괄시 많이 받았잖아요.
특히 코사크에게.
이번엔 코를 납작 눌러 줍시다.
1시간은 금방이었다.
곧이어 2단계.
심상 우주의 운석을 현실의 하늘에 소환하는 과정.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위험합니다. 운석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곳 세상의 마력을 인위적으로 끌어와야 하지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력의 흐름 때문에 몬스터가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공격을 해올 수 있으니."
그러자 광마가 안심하라는 듯.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네놈 하나 못 지킬까?"
"내가 언제 날 걱정했나? 소환사님 때문이지."
"아유, 매 영감님도, 당연히 봉 소환사님이 1순위지 말임다. 매 영감님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쓸 검다."
"…좋다. 시작하겠다."
매켄지가 두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소용돌이 치는 마력.
드드드드드드득!
탑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졌기에 사방에 가득 찬 농밀한 마력.
그 무형의 힘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흐름을 이루더니 매켄지의 손짓에 따라 하늘로 치솟았다.
마력이 뭉쳐진다.
저 하늘 꼭대기, 대기권 밖에서.
바로 그때!
"크라라라락!"
"캬아악!"
"쿠악!"
낌새를 눈치챘는지 고층빌딩으로 몰려드는 몬스터들.
하늘에선 와이번과 그리핀, 그리고 얼음매.
파죽, 파주주주죽!
베원사의 마총이 불을 뿜었다.
촤라라라랏!
견달래의 부적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찌이잉!
마도공학자 엘의 눈에서 파괴광선이 발사됐다.
꿈의 영역을 시전 하는 디아마트.
후두둑, 떨어지는 와이번과 그리핀.
지상에서도 육상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광분하며 빌딩으로 달려들었다.
놈들이 벽을 타고 옥상을 향해 기어 올라왔다.
흠.
이거 생각보다 위험한데?
"전사가 밑으로 내려간다."
"고방공, 이 바르딘이 따르겠소."
"노부도 함께하지."
"나도 감다."
고방, 코사크, 광마, 바르딘이 빌딩에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쿵!
전투가 벌어졌다.
오랜만에 바르딘을 손에 든 고방.
파파파파팍!
바르딘에 맞고 썰려 나가는 육상 몬스터들.
소드마스터 코사크와 광마의 초승달 강기도 몬스터들을 휩쓸었다.
그 와중에도 매켄지의 2단계 운석 생성은 계속됐다.
아주 먼 하늘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점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창백해지는 매켄지의 얼굴.
송골송골 맺히는 식은땀.
가서 얼굴이라도 닦아주고 싶지만....
기력이 많이 소모되는 운석 생성 단계.
작은 건 금방 만들겠지.
위력도 약하고.
그러나 지금 만들고 있는 건 아마 크기가 꽤 큰 모양.
떨어진다면 엄청난 위력일 것이 분명했다.
콰쾅! 파파팍! 파죽! 파주죽!
피소환인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건물 위에서.
건물 밑에서.
소환사의 안전과 매켄지의 운석 생성 성공을 위해.
조마조마하다.
피소환인들의 능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몬스터들이 너무 많다.
1시간만 버티면 된다지만 그게 어디 쉬울까?
바로 그때.
"우오오오오오오!!!"
폐허의 도시에 울려 퍼지는 르스스알 고방의 포효.
도발의 외침이었다.
"아이고야."
전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거대화 고방에게 물밀듯이 몰려오는 몬스터들.
지상뿐만 아니라 공중에서도.
동시에 피소환인들의 화력이 고방 주변으로 집중됐다.
주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군분투하는 고방과 그의 손에 들린 바르딘이 안타까워서.
보면 볼수록 저건 아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들고 싸워?
'왜 도발 스킬을 써가지고서는.'
아마 자신과 매켄지를 지키기 위해서겠지.
모든 공격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면서.
울컥, 눈물이 흐를 뻔.
저대로 두면 안 되겠다.
우선 등급 돌파의 룬이 하나 남았으니 바르딘을 하루빨리 등급 돌파시켜 주자.
그리고 고방은....
'무기 하나 줘야겠어.'
마침 적당한 것이 생겼으니까.
아무튼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큭!"
2단계 완성.
두 손을 거두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매켄지.
"허억, 허억, 허어...."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다, 다 끝났소이다."
거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
"…수고하셨어요."
다음부터는 안 시킬게요.
"빨리 떨어뜨리죠."
"알겠습니다. 하지만 낙하하기 전에 피해야 합니다."
"왜요?"
떨어지는 것까지 보고 가고 싶은데.
"운석이 지면에 가까이 접근하면 엄청난 마력의 격류가 휘몰아칩니다. 마력 왜곡 현상이 일어나서 마법 주문이나 무공, 스킬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아!
하긴, 그럼 위험해지지.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면 당장 피소환인들의 전투가 불가능해진다.
지금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당장 떨어뜨리고 튀죠."
마침내 마지막 주문.
9서클 대마법사 매켄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지상과 하늘, 존재하는 걸 모두 부숴버릴지어다. 파괴의 사신이여, 낙하하라!"
대마법사의 언령.
번쩍!
저 먼 하늘에서 반짝이는 빛.
낙하 지점은 여기.
과연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지금 확인할 수는 없다.
조금 이따가 다시 와서 확인하는 수밖에.
먼저 지상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피소환인부터 소환 해제.
스팟! 스팟! 스팟...!
옥상의 피소환인들도.
스팟! 스팟! 스팟...!
끝으로.
홀로 남은 주혁도.
"백색 탑 1층 입장."
스팟!
모두 사라졌다.
* * *
NO. 675 지구.
아포칼립스 단계를 넘어 멸망이 확정된 세상.
675번 지구 검은 탑 89층을 책임지고 있던 마룡 카라토스는 독일 베를린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몬스터 특유의 광포한 마력이 아닌 인간의 정제된 마력.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이 있었나?
그럼 영혼을 빼먹어야지.
마룡 카라토스.
원래 드래곤은 조화와 균형의 존재.
하지만 주어진 사명을 외면하고 힘과 욕망을 탐하면 마룡으로 타락한다.
블루드래곤 카라토스는 성체가 되자마자 마룡이 됐다.
타락?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더 높은 경지를 위해 힘을 추구하는 것이 뭐가 문제라고.
그래서 자신에게 더 큰 힘을 줄 수 있는 존재와 자유의지로서 계약을 맺었다.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와 말이다.
사실 검은 탑이 세워질 동안 단 한 번도 힘을 쓴 적이 없었다.
이곳의 인간들은 고작 70층대에서 파멸해 버렸으니까.
그리고 탑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지금.
진본 카라토스는 검은 탑 89층에서 뛰쳐나와 인간의 영혼을 사냥했다.
하지만 아쉬웠다.
전쟁으로 인해 너무 많은 인간이 죽었기 때문에.
게다가 경쟁자들도 많아서 카라토스가 흡수할 수 있었던 인간의 영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인간이 살아 있었다니.
심지어 먼 거리에서도 알아차릴 만큼의 마력을 발현하는 인간이.
스팟!
마룡 카라토스는 베를린의 고층빌딩에 나타났다.
한때는 세계 최고의 대도시였지만, 이제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베를린에.
"…흐음, 이상하군.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틀림없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
이곳으로 몰려든 셀 수 없을 정도의 몬스터.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각각 다양한 마력의 잔향.
"숫자도 꽤 많아. 최소 10명 이상."
플레이어들이 틀림없다.
멸망의 세상에서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인간들.
영혼의 무게가 남다를 것이 분명하다.
고난과 역경으로 단련된 영혼.
얼마나 달콤할까?
바로 그때!
쐐애애애액!
카라토스의 귓가에 들리는 소리.
"응?"
하늘 쪽인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는 카라토스.
'…별똥별이군.'
긴 불꽃의 꼬리를 단 운석.
아직은 자세히 봐야 보일 정도로 먼 거리.
'저건 어디로 떨어지는 건가?'
카라토스는 떨어지는 운석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 이상하다.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방향도 그렇고.
만약 여기에 떨어진다면....
"흥!"
코웃음치는 카라토스.
떨어진들 어쩌라고.
텔레포트로 피하면 되지.
그건 그렇고 인간들은 어디 갔나?
여기서 숨어 있으면 다시 나타날까?
그 와중에도 점점 커지는 굉음.
쐐애애애애애애액.
그런데!
"…어?"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육중한 질량의 무언가가 내리누르는 듯한 느낌.
드드드드드드드드....
동시에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마력의 흐름.
"서, 설마?"
카라토스는 마침내 깨달았다.
저 운석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마력으로 만들어져 현실에 실체화된 운석.
"…메테오?"
당황한 카라토스.
대체 뭐지?
왜 여기에 뜬금없이 메테오가?
궁극의 마법 주문이 어떻게 멸망한 세상에서.
"이, 이럴 때가 아니야."
피해야 한다.
저 운석에 직격당하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한다.
"텔레포트!"
스우우… 프스스스....
"헉!"
큰일이다.
주문이 먹히지 않았다.
크기가 거대하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뭉쳐 있었다.
평범한 운석이나 핵미사일이라면 간단하게 텔레포트로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마법으로 형성된 거대운석의 마력이 이 주변의 마력을 왜곡시키고 있었기에.
저 정도 크기면 9서클 대마법사가 몇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작업해야 띄울 수 있는 운석.
'이 지구에 9서클 마법사가 있었다고?'
급기야!
콰콰콰쾅!
허공에서부터 폭발하기 시작하는 메테오, 운석.
"미, 미친!"
쿠쿠쿠쿠쿠!
갈라진 파편들도 지면으로 충돌.
콰콰쾅! 콰콰콰콰쾅!
가장 큰 건더기는 여전히 이쪽으로.
카라토스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에이션트급 마룡이라면 모를까.
갓 성체로 마룡이 된 그로서는....
그리하여 주혁과 피소환인들이 사라진 폐허의 도시에서.
가공할 운석 낙하의 충격파가 터져 나갔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움직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지상에서 걸어 다니는 것들도,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것들도.
더불어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는 마룡 카라토스도.
"…아, 안 돼!!!"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도시를 휩쓸어가는 강렬한 운석 낙하의 충격파.
최강의 생명체라던 드래곤의 육신이 종잇조각처럼 찢겨졌다.
189화
백색 탑 1층.
모두가 지쳤다.
운석 소환의 주체인 매켄지는 물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피소환인들 전부.
그나마 멀쩡한 사람은....
"편하게 푹 쉬세요."
"호에!"
주혁과 라직스뿐.
뭐, 한 게 있어야지.
이제 기다렸다가 확인해 보자.
바깥세상에 떨어진 운석의 위력을.
기대된다.
핵폭탄 수백 배의 위력이라던데.
'그것만 보고 엘리베이터를 타야겠어.'
사실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다.
우리 지구에서도 할 일이 너무 많다.
2번 탑 86층 소방 공략도 끝내야 하고, 상마, 최마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하고.
특히 최마.
엘리베이터 가동으로 사용처가 하나 더 늘었다.
인공 최마는 마리가 만들 수 있다지만 품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
자연산 최마를 캐는 게 가장 빠르다.
현재 자연산 최마는 84층 빙벽의 광산에서 소량으로 채굴하는 것.
대한민국 검은 탑 1번과 2번 광맥이 고갈되면 이제 어디서 캐야 하나?
결국 다른 탑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타국의 검은 탑도 84층까지 길이 뚫려야 한다.
대한민국을 제외하면 현재 가장 빠른 곳이 미국.
81층 도전이니까, 84층까진 금방.
그러기 위해선 마도공학자 엘의 거대 괴수용 마총 완성이 시급하다.
마총 대여를 통해 타국 플레이어들이 84층까지 공략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먼저.
그런 다음 다국적 탑 이용 티켓으로 타국 84층 광맥에서 최마 상마 캐오면 된다.
어차피 84층에 광맥이 있는지도 모를 텐데.
안다고 해도 캐올 방법도 없을 것이고.
오직 주혁의 파티만이 콜로서스 콘도르를 한 자리에 묶어 놓고, 광산에 가서 최마 상마를 캐올 수 있다.
'빨리 완성해서 마총 대여 시작해야지.'
엘의 말로는 거의 완성 단계.
베헤모스 대응용 마총과 탄환은 바로 대여해도 된다고 했으니.
그렇게 일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순간!
띠링!
'…응?'
시스템 메시지인가?
[업◆ : 최◆로 성◆ ◆◆◆ 카◆토스를… 치지직!]
[◆◆ 보◆이 주◆… 찌직! 찌지직!]
[…◆◆◆ ◆레이어… 찌직!]
[찌지직! ◆호◆ 획◆했◆니다.]
'뭐야? 이건?'
띠링!
[시스템에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오류 수정을 위해 일시적으로 메시지 송출을 중단합니다.]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네.'
방금 뜬 오류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내용이 너무 띄엄띄엄해서 내용을 유추하기도 어렵고.
수정되면 알 수 있을지도.
그나저나 다들 회복했나?
도시 중앙 광장에서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매켄지.
그리고 피소환인들.
'많이 힘들었구나.'
하긴.
운석 생성해서 떨어뜨리는 게 쉬운 일인가?
"미안해요. 제가 괜히 운석 소환하자고 해서."
"아,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그 더러운 것들이 세상에 활개 치고 다니는 꼴을 어떻게 그냥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제 심장 써클이 조각조각 끊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언제든 지시만 내려 주시길."
그러자 코사크가.
"훌륭함다. 이 2인자 코사크, 이번만큼은 매 영감님 인정해 드리겠슴다. 서열 6위까진 올라왔슴다. 중간 이상 아임까? 기뻐하십쇼."
짝짝짝짝짝!
이어지는 박수.
그러나 썩 표정이 좋지 않은 매켄지.
6인자 운운하는 소리가 기분 나빴던 모양.
"…최소한 3인자는 되지 않나?"
"꿈 깨십쇼. 베 원사 감당할 수 있슴까?"
"음."
아이고.
주혁이 보기엔 의미 없는 경쟁.
무슨 서열 싸움이야?
어차피 라직스 미만 잡인데.
경쟁하든 말든 내버려 두고.
주혁은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막스에게 상속받은 유산.
각종 티켓에, 룬에, 상마, 포션 등등.
그중 가장 중요한 것.
'특성 강화의 룬.'
넣어 두면 뭘 해?
바로 먹어야지.
꿀꺽.
주혁은 룬을 삼켰다.
상태창은?
[특성] : 소환(동시 소환 : 12)
뿌듯하다.
이렇게 늘려 나가다 보면 언젠간 20명도 가능하겠지.
그리고 하나 더.
주혁이 상속받은 해머 마스터 막스의 무기.
<몰살의 대지진 거대화 망치>
효과 : 파괴 불가, 일 대 다 전투 시 공격력 및 방어력 향상, 지면 격파 시 광역 지진파 발생, 거대화, 강타 확률 증가.
한계 : 거대화 옵션 사용 시 망치의 크기에 따른 무게가 대폭 무거워집니다.
특징 : 망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파괴력도 증가합니다.
이건 주인이 정해졌다.
거대화 망치라는 명칭을 들을 때부터 생각한 바가 있었다.
고방 아니면 이걸 누가 써?
좀 전에도 얼마나 안쓰러웠나?
사람이 사람을 들고 싸우다니.
고방도 그렇고, 바르딘도 그렇고.
주혁은 몰살의 대지진 거대화 망치를 꺼냈다.
오함마 형태의, 손잡이와 자루, 망치 머리까지 하나의 금속으로 일체화.
거대화하기 전임에도 어찌나 무거운지.
쿵!
땅에 내려놓고.
"고방 씨."
"불렀나? 소환사?"
"이 망치, 고방 씨가 쓰세요."
"…이걸?"
"네,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홀린 듯한 표정의 고방.
주춤주춤 걸어가 망치를 집어 들더니.
"전사가 소환사에게 무기를 받았다."
순간!
쑤우우우욱!
고방의 거대화.
동시에 망치도 거대화.
"전사는 소환사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아아아!
그림 좋다.
거대 야만 전사와 거대 망치.
찰떡궁합이다.
"그럼 바르딘 씨를 손에 들지 않을 거죠? 무기가 생겼잖아요."
움찔!
반응하는 바르딘.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실망감.
그런 바르딘을 지그시 바라보는 고방.
이윽고.
"전사는… 손이 두 개다."
그래서?
"망치는 한 손으로 들어도 충분하다. 다른 한 손으로도 무기를 또 들 수 있다."
넴?
뭐라고요?
쌍수 무기 들겠다고?
그러니까 한 손엔 망치, 한 손엔 바르딘?
고방의 말에 빙그레 미소 짓는 바르딘.
'환장하겠네.'
변태야? 아니면 진짜 극한의 효율충이야?
고방도 똑같다.
확 망치 빼앗아 버려?
안 되겠다.
"바르딘 씨."
"충! 하명하십시오. 주군이시어."
"돌아가자마자 등급 돌파 준비하세요."
"…네?"
"르스스알 가야죠."
"아, 으음. 아, 알겠습니다."
르스스알 성기사가 되면 다른 역할을 맡겠지.
인간성검 역할 말고.
그러나 불길한 예감.
눈에 그려진다.
쌍수 무기, 거대화 망치와 광휘의 르스스알의 인간성검을 들고 몬스터를 쓸어버리는 고방의 모습이 말이다.
'어우, 이건 아닌데.'
주혁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상상하지 말자.
그대로 실현될라.
'슬슬 돌아가 볼까?'
하지만 그전에.
"저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요. 어떻게 됐는지 확인은 해봐야죠."
"흐음, 노부도 운석 소환 파괴력이 궁금하긴 하오,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소환 대기 시간이 끝나면."
"넵!"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에.
"백색 탑 1층 퇴장."
스팟!
주혁은 밖으로 나갔다.
나오자마자 머리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
'음?'
후두둑, 후두둑, 후두두두두둑.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
'비가 오네?'
그냥 비가 아니었다.
검회색 흙비였다.
운석 소환의 영향인 듯.
지이잉!
에너지 방어막으로 비를 막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는데.
"…어."
이게 뭐지?
아까 그곳이 맞나?
현재 서 있는 장소는 어마어마하게 큰 구덩이.
높았던 고층빌딩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와! 다 쓸어버린 거야?'
운석 한 방으로?
'미쳤구나.'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약점이 있지만 일단 한번 떨어지면 끝장나는 위력의 운석 낙하.
피소환인에게도 보여 주자.
다들 소환.
스팟, 스팟, 스팟....
"허어."
"여긴...."
"으잉? 아까 거기 맞슴까?"
"큰 구덩이다."
"운석이 떨어진 크레이터군요."
"일단 올라가 보죠."
그림자 발걸음으로 위로.
팟팟팟팟!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광경.
"헐!"
주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도시의 형태는 갖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많던 지상과 하늘의 몬스터들도 모조리 사라졌고.
그리고 곳곳에 생긴 거대한 구덩이들.
운석 파편에 직격당한 듯.
"오올! 매 영감님 다시 봤슴다. 운석 소환 대단함다. 서열 5위로 올려드림다."
"쯧쯧, 그놈의 서열, 어쨌거나 마법사! 그동안 노부가 널 은근히 얕잡아 본 걸 사과한다."
"소녀도 동의합니다. 실로 가공할 마법이군요."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운석 소환이 핵폭탄과 버금간다는 거, 인정합니다."
"호에!"
기분이 좋아진 매켄지.
싱글벙글 감추지 못하는 미소.
주혁도 흐뭇하다.
전생에선 마탑주까지 하셨던 엄청난 경력의 피소환인이셨는데, 여기선 동네북처럼 비난받고, 관종 마법사 취급을 당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까?
이 한 방으로 만회했다.
'확인도 했으니 이제 돌아가 볼까?'
계속 쏟아지는 비.
땅도 질척해졌고.
흙비가 점차 맑은 색의 보통 빗줄기로 변하고 있는 와중에.
"응?"
주혁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
"이거...."
땅바닥이었다.
빗물이 진흙탕에서 흐르자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
무수하게 깔린 돌멩이들.
그러나 단순한 돌멩이가 아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광채.
스스로 빛을 발하는 물질.
"…마정석?"
그러자 피소환인들도.
"헉!"
"오!"
"와!"
"이거 설마?"
온 바닥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싹 다 마정석이었다.
군데군데 상마도 꽤 많이 섞여 있었다.
"…마정석이 왜 여기에?"
매켄지가 뭔가 알았다는 듯 머리에 느낌표를 띄우며.
"본래 마정석이라는 건 에너지가 응집한 물건이지요. 마수나 몬스터들이 사망하면 놈들이 가지고 있던 마력이 응집하여 이렇게 결정을 만들어 내곤 합니다."
아하!
"이 마정석들은 운석 소환의 충격파에 몬스터들이 소멸하면서 남긴 것으로 추측되고요."
그러니까.
탑 안에서 몬스터를 잡으면 시스템에 의해 보상으로 받지만, 탑 밖에서 잡으면 이렇게 직접 마력이 응집해서 결정체 형태로 드랍한다는 뜻.
'양은 얼마나 될까?'
라직스 씨가 진공청소기 능력으로 싹 빨아들이면....
"으잉?"
우리 차원대머슴 또 어디로 갔어?
"라직스 씨! 또 어디로… 아!"
정해진 클리셰.
한두 번도 아니었다.
라직스가 없다.
없으면 어디선가 땅을 파는 중이다.
탐색 중이거나.
땅 파면 좋은 거 나온다.
그렇다면?
콱콱콱콱콱!
처음 나왔던 구덩이에서 들리는 곡괭이 소리.
다행히 멀리 안 갔다.
"거기서 뭐 해요?"
"호엑!"
콱콱콱콱콱!
라직스는 정신없이 땅을 파는 중이었다.
"후에에에, 후에엑!"
그의 눈에 흐르는 광기.
연신 땅을 파고드는 플래티넘 곡괭이.
분명 뭔가 찾았다.
눈빛이 심상치 않다.
과연 뭐길래?
드디어 곡괭이질을 멈추더니,
땅속에 손을 집어넣어 제 몸 크기 반만 한 커다란 결정체 하나를 두 손으로 번쩍 집어 올리는 라직스.
"호랏!!!"
대체 무슨...?
마정석인가?
상마, 아니 최마?
아니다.
특정 형태가 없는 마정석과는 달리 라직스가 방금 캐낸 건 형태가 있다.
입체형의 마름모꼴.
정팔면체의 결정.
"허어어억!"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매켄지.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라직스가 든 정팔면체 결정을 가리키며.
"드, 드래곤 하트?"
뭐?
에이.
이 양반이 뻔한 장난을.
'몰카야? 누가 속아?'
하지만 메켄지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설마?
"…정말요?"
끄덕끄덕.
"지, 진짜 드래곤 하트?"
끄덕끄덕.
"어어어...."
미친!
"아니, 저게 왜 여기서?"
"호랏!"
"아이고, 이젠 드래곤 하트를 땅에서 다 캐내네."
"호랏!"
"라직스가 라직스 한 거지."
"호랏!"
"빨리 넣으십쇼. 라직스 울트라 언리미티드 갓갓 차원대머슴."
"호랏!"
기가 막힌다.
드래곤 하트라는 게 팍팍 땅만 파면 나오는 건가?
* * *
백색 탑 1층으로 돌아온 일행.
전혀 예상치도 못한 득템.
어떻게 드래곤 하트가 거기 파묻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가장 가능성 있는 추측으로는....
"검은 탑에서 나온 드래곤이 망한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폐허의 도시에 잠깐 들렀을 것입니다."
"흠."
그럴 수도 있다.
탑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면 몬스터들이 바깥으로 나오니까.
몇 층에서 나온 놈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86층보다는 높겠지.
"그놈이 그 도시에 들렀던 때가 '우연'히 운석 소환 주문을 완성했을 시점이고요."
"아하."
"그리고 아마 운석이 지면 가까이 접근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던 겁니다."
"오호!"
"결국 본 마법사의 운석에 '우연'히 얻어맞고 소멸하면서 드래곤 하트를 뱉은 거죠."
"그렇군요!"
매켄지의 추측에, 주혁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이 된다.
하지만 코사크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빈정거리는 말투로.
"그니까 매 영감님 주장이라는 게 드래곤이 '우연'한 시간과 '우연'한 장소에서 운석을 맞고 뒈졌다는 말 아임까?"
"그렇지."
"솔직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라 생각하심까?"
"어음, 마, 말이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참나! 우연이라고 주장하면 다 되는 검까? 개연성은 어디 팔아먹었슴까?"
그런가?
"판타지 소설도 이렇게 쓰면 욕 먹슴다. 작가 편의적인 발상이다, 작위적이다, 흠… 이게 맞나? 하차함다, 작가님은 상하차나 하십쇼, 라는 댓글이 우수수 달릴 검다."
주혁은 코사크의 주장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이라는 게 전가의 보도도 아니고.
"그럼 자넨 왜 드래곤 하트가 거기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간단하게 생각하면 됨다. 우리 차원대머슴이 땅 파서 찾은 검다. 라직스에게 배지 3개 주십쇼."
으드득!
이를 갈면서 코사크를 노려보는 매켄지.
어떻게든 자신을 깎아내리려고 1인자 차원대머슴에게 공을 돌리려는 수작.
"그래, 차원대머슴이 찾은 건 맞다. 하지만 왜 드래곤 하트가 거기 있었냐고? 그게 무슨 광석처럼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잖아."
"...."
대답을 못 하는 코사크.
"우연을 우습게 보지 말게. 원래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우연에서 기인한 것들이 많으니까."
또 고개를 끄덕이는 주혁.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고.
순간!
띠링!
메시지가 울렸다.
[오류가 수정됐습니다.]
[플레이어 각성이 확인되었습니다.]
[국적을 신규로 등록합니다. 대상 플레이어의 검은 탑 소속은 독일입니다.]
아!
아까 오류는 각성과 국적 등록이 안 돼서 그런 거구나.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데?
[업적을 소급 적용합니다.]
[업적 : 최초로 성체 드래곤 카라토스를 처치했습니다.]
"헐!"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앞으로 모든 종류의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공격력 및 방어력이 상승합니다. 소환수에게도 적용됩니다.]
이런 거였어?
매켄지 씨 말이 맞았다.
드래곤이 죽어서 뱉은 거.
그럼 왜 죽었겠나?
운석 맞고 죽은 거겠지.
와락!
매켄지를 끌어안은 주혁.
"대단하세요. 9서클 대마법사님! 운석으로 드래곤까지 공략하시다니."
매켄지의 환한 미소.
위에서 떨어지는 집중 조명.
그리고 펑펑 터지는 불꽃.
반면 코사크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이젠 부인할 수 없다.
매켄지의 공로를 말이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야금야금 쫓아오는 9서클 대마법사.
역시 클래스는 영원한 건가?
이로써 백색탑 1층 일정 종료.
집으로 돌아가자.
드래곤 하트, 전문가에게 감정받아 봐야지.
* * *
675번 지구.
탑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
그래서 이곳 차원의 관리자들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일을 모두 다 알 수 있었다.
[쟤는 누구지?]
[소환사 같은데....]
[그러니까 왜 여기 소환사가 있냐고?]
[난들 알아?]
19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