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이젠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대로 두고 봐선 안 된다.
저놈이 죽든, 자신이 죽든 사생결단을 내는 수밖에.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다.
소환사, 그놈은 항상 한발 앞서 있었다.
기껏 고심해서 짜놓은 계획을 너무나도 쉽게 무력화하고, 머리 위에 올라서서 자신들을 조롱했다.
이제는 안 될 거야, 어림도 없어, 실패할 것이 분명해, 하며 안심하고 있으면 보란 듯이 성공해 버린다.
여기 오자마자 운석을 떨어뜨려 카라토스를 죽였고.
기간트를 끌고 와서 거대 괴수를 밟아 버렸고.
등가교환 거래에선 핵을 터트렸으며.
불가능하다 여겼던 불사조도 소방차 공략으로.
언데드 본 드래곤은 성기사와 마총사 단 두 명으로 끝냈다.
그렇게 구한 드래곤 하트로 마검과 방패를 만들어 와서 88층 샌드 드래곤을 죽였다.
두 번째 반복 공략에선 마법사를 시켜 영상을 찍게 하고는, 자기들은 관람석에 편하게 앉아 야구 경기를 보러 온 것처럼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그리고 이제 끝났나 싶은 와중에 느닷없는 89층 등반.
이제 갓 계약해서 준비도 덜된 반마룡을 공략하겠다고?
[그놈을 89층에서 막을 가능성은? 우리 계약자가 놈을 죽일 수 있을까?]
[…오히려 공략해 버릴걸?]
[그렇군.]
안 물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기간트 한 대만 가지고도 샌드 드래곤을 공략했는데.
뒷짐 지고 서서 구경만 했던 피소환인들이 기간트와 함께 가세하면?
자유 계약자 드래곤은 밥상 위에 놓인 도마뱀 구이일 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분노로 인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X 같은 엘리베이터.
X 같은 유산 상속.
X 같은 소환사.
지금도 웃고 떠들면서 노닥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꼴 보기 싫은지.
저놈의 모든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관리자라고 감정이 없나?
놈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인내심으로 참아 보기엔 이미 늦었다.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영혼을 불살라서라도.
같이 동귀어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과율은 개뿔.
탑 규칙?
그거 좀 어기면 어때?
[난 이제 더 못 보겠어.]
[…호, 홀로그램 영상 꺼버릴까?]
[아니, 그 뜻이 아니야.]
놈은 89층을 공략해 낼 것이다.
보상을 받고 자신의 피소환인들과 웃고 떠들면서 기뻐하겠지.
상상만 해도 미칠 지경.
[탑 몬스터 교체해.]
[교체라니.]
[89층과 90층 책임자 교체하라고. 뒷문 열고 재배치 이동.]
[뭐? 자, 잠깐!]
[디자이너, 그건 규칙에 어긋나....]
[해! 명령이야.]
[다시 생각해 봐.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싯팔! 까라면 까!!! 죽고 싶어?]
관리자들은 평등하지 않다.
지위도, 그리고 가지고 있는 능력도.
[모든 책임은 내가 져. 그러니 89층 신규 자유계약 드래곤은 90층으로 올리고, 90층 드래곤을 밑으로 내려.]
이거 큰일이다.
무조건 처벌이 가해진다.
[만약 실패하면 우리 영혼은 소멸할 거야.]
[성공하면 돼. 90층 보스가 저놈들에게 당할 거라 생각해?]
물론 아니다.
단일 개체로서, 신이 아니고서는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90층 책임자니까.
[…알겠어. 재배치 실행할게.]
이렇게 된 이상 성공하길 빌어야 한다.
만약 소환사가 사망한다면 어떻게든 덮을 수 있다.
보통 인과율이라는 것이 당사자가 소멸하면 같이 사라지는 법이니까.
* * *
고룡.
최소 만 년 이상을 살아온 드래곤에게 붙여지는 칭호.
드래곤의 삶은 길고 지루하다.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단생종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애초에 시간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다.
드래곤에게 있어 100년은 매우 짧은 시간.
잠 한번 잤다가 깨면 100년이 지나 있는데.
열 번 자면 1,000년이고 백 번 자면 10,000년이다.
그렇게 드래곤은 지루한 삶을 긴 수면으로 때우곤 한다.
혹은 인간 문명 세계로 유희하러 다닌다거나.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잠을 자는 것도 재미가 없고, 유희도 지겹다.
게다가 주어진 사명도 완수해야 하고.
조화와 균형의 존재로서의 드래곤.
사실 그는 이것이 가장 큰 불만이었다.
사명을 수행하려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억눌러야 한다.
아무것도 못 한다고 보면 된다.
드래곤이 인간의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순간 조화와 균형은 깨지니까.
공허한 삶이다.
의미도 없다.
왜 드래곤은 힘을 추구하면 안 되나?
강력한 권능으로 세상에 군림하며 하등한 종족들을 발아래 두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욕망을 거세당한 채 평생을 벌레 같은 단생종의 뒷바라지나 하며 살아야 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타락해 버렸다.
마룡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것.
아마 고룡으로서 마룡에 든 드래곤은 자신이 유일할 터.
마룡이 되어 세상을 파괴하는 게 얼마나 재미가 있던지.
여기 675번 지구에서도 그랬다.
탑과 세상의 경계가 사라지자마자, 바깥으로 나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불사르고 파괴했다.
이제 프로젝트가 끝나면 또 새로운 삶이 열릴 것이다.
다른 지구로 넘어가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변해 버린 세상.
검은 탑이 다시 솟아올랐다.
그로 인해 바깥에 있던 자신은 꼼짝없이 탑에 묶여 버렸고.
대체 왜?
이유를 알아보니 딱 한 놈 때문이었다.
다른 지구에서 넘어와 이곳 지구의 플레이어로 등록한 한 명의 인간.
그놈 때문에 탑이 재생성된 것.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기약 없이 갇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관리자의 책임자 교체 요청.
뒷문을 열어 줄 테니 89층으로 가라.
거기서 플레이어를 죽여라.
그는 기꺼이 수락했다.
이제 가자.
놈을 죽이러.
* * *
[독일 검은 탑 89층에 입장합니다.]
환경은 우거진 숲,
나무가 빽빽한 밀림.
"보옹 소환사님 89층 입장하심다. 구텐 탁! 당케 쉔! 이히 리베 디히!"
원래는 88층까지만 공략하고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기껏 발걸음했는데, 윗동네 구경은 하고 가야지.
"라직스 씨?"
"호에!"
스스스스슷.
기간트 꺼내고.
끄드드드득.
일으켜 세운 후.
주혁은 피소환인들을 불러 모았다.
"공략에 들어가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는데."
"어서 하시오."
"소녀, 경청하겠나이다."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열중쉬어."
"호에?"
궁금해하는 피소환인들.
주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번에 89층을 공략하고 나면 당분간 상층 공략은 중단입니다."
원래는 90층도 찍먹 하려고 했다.
힘들 것 같으면 나오면 되니까.
하지만 관리자 새끼들의 행태를 보면 90층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현재로선 말이다.
"당분간이라고 하오면?"
"최소 3년… 아니, 그 이상?"
피소환인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상층 등반이야 오롯이 소환사의 몫이긴 하지만, 이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소?"
광마에 말에 대답하는 주혁.
"초심을 잃은 것 같아서요."
"초심이라니."
"너무 겁 없이 올라갔어요. 우리 처음엔 안 그랬잖아요. 돌다리도 두들겨 가면서, 건널 수 있는 돌다리도 건너지 말자고 했는데."
"아!"
"천천히 가요, 천천히, 돈도 벌 만큼 벌었겠다, 붕괴 시한도 충분히 중첩해 뒀고."
여태까지 너무 무턱대고 날뛰었다.
그만큼 쉬웠으니까.
생각했던 대로 다 이루어졌으니까.
하지만 쉽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편함은 사람을 무뎌지게 하고, 욕심은 화를 부른다.
이제 장기 주차 티켓을 끊어야겠다.
하남자 마인드가 필요한 시점.
그리고 가장 큰 이유.
한계에 봉착한 피소환인들의 능력.
88층을 공략하면서 깨달았다.
한 층 한 층 올라갈수록 버거워지는 기분을.
광마의 초승달 강기는 샌드 드래곤에 정확하게 명중하고도 흠집도 내지 못했다.
9서클 대마법사 매켄지는 자신이 자랑하는 화염 마법을 포기하고 플라이 마법을 이용해 영상 촬영이나 하고 있다.
파티의 탱커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터벅터벅 걸어 다니기만 하는 고방, 코사크가 전장에서 전투에 뛰어든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고.
주혁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간트 같은 변칙 탑 공략으로 인해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피소환인들.
이러니 배지 수여할 기회도 없다.
공을 세워야 주든지 말든지 하지.
반면 라직스의 아공간 능력만 잔뜩 부각됐다.
그걸로 공략을 다 해냈다.
물론 라직스의 능력이 대단한 건 주혁도 인정한다.
그러나 피소환인이 어디 라직스 혼자뿐인가?
고방도 그렇고, 견달래도 그렇고, 이젠 광마까지 존재감이 흐릿해질 지경이니.
이래서는 안 된다.
탑 공략은 이들과 함께 가야 한다.
"90층은 아시다시피, 뭔가 있을 게 분명하니까."
"...."
"89층에서 멈추는 게 딱 좋을 것 같아서요."
"...."
"당분간 탑 등반 안 하고 푹 쉽시다. 여행 가는 거 어때요? 국내도 좋고, 해외도 좋고."
"...."
주혁의 말에 침묵하는 피소환인들.
모두 침통한 표정들.
왜들 이래?
내색하지도 않았는데.
"어쨌든 공략 시작하죠. 엘 박사님?"
"…네."
"기간트 앞으로 전진."
"실행하겠습니다."
쿵쿵쿵쿵!
기간트가 앞장섰다.
그리고 밀림 초입에 들어서자.
띠링!
떠오르는 임무.
[89층 임무 : 반마룡(半魔龍), 하프 이블 드래곤 크랙커스를 처치....]
반마룡.
반반 치킨인가?
왠지 쉬울 것 같다.
그런데?
[…반마룡 크랙커스, 크랙…, 크, 크, 크…, 처, 처, 처, 처....]
'응?'
시스템 메시지가 왜 이렇게 더듬거려?
뭔 일 있나?
순간!
띠링!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혹시 관리자 새끼들이....
[89층 반마룡 하프 이블 드래곤 크랙커스의 개인적 사정으로 탑 임무 생성이 불가능합니다.]
몬스터도 개인적 사정이 있었냐?
근데 플레이어보고 어떡하라고?
[관리자가 직권을 남용해 89층과 90층의 임무 대상을 교체했습니다.]
헐!
잘못 들었나?
"하하...."
기가 막힌다.
뻔뻔하게도 직권 남용을 시스템 메시지로 공표한다고?
[임무를 변경합니다.]
이건 아니지.
[89층 임무 : 지고마룡 헬크라수스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시간 이내.]
[완료 조건 : 지고마룡 헬크라수스 0/1]
"…지고마룡?"
90층 보스가 89층에 나타났다.
수식어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데.
주혁은 서둘러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꺼냈다.
그러나.
[시스템 임시 점검이 있을 예정이오니, 앞으로 1시간 동안 탑 입장 및 퇴장이 불가능합니다.]
"…와!"
외통수다.
예전 등기교환 거래는 그나마 양반.
나 너 죽이고 싶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거지?'
그리고,
펄럭펄럭!
가공할 풍압과 함께 저 멀리서 날아오는 드래곤.
"허어."
"으음."
"이런...."
"씨발!"
"미친!"
"...."
크다.
거대하다.
온몸이 새빨간 거대 용.
동시에 89층 전체를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
등장만으로 무시무시하다.
저릿저릿한 정수리.
어느새 돋아난 닭살.
닥쳐오는 원초적인 공포.
[세계 공지 : 지고마룡 헬크라수스가 출현했습니다.]
세계 공지?
들을 사람도 없잖아?
펄럭, 펄럭, 펄럭.
천천히 날갯짓하며 지상을 굽어보는 지고마룡 헬크라수스.
순간!
쿵쿵쿵쿵쿵!
마검과 방패를 들고 기간트가 움직였다.
그래, 드래곤 킬러!
우리 2호기.
"역시 너밖에 믿을...."
그때였다.
화르르르르륵!
준비 동작도 없이 지고마룡 헬크라수스의 목울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옥불의 브레스.
후끈!
달아오르는 89층.
그그그극, 그걱, 찌그걱, 그그그....
흐물흐물.
기간트가 머리부터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
아이고.
녹았네.
저렇게 쉽게?
기간트도 녹고, 방패도 녹고, 마검도 녹고.
'나도 곧 녹겠고.'
진짜 여기서 죽나?
그동안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다음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하지만.
쑤욱!
고방이 거대화로 몸을 키웠다.
스웅!
광마가 초승달 강기를 발현했다.
휘릿!
주혁의 머리 위에서 흩날리는 견달래의 부적.
지잉, 지잉, 지잉, 지잉!
연신 주혁의 몸에 중첩되는 매켄지의 배리어 보호막.
찌이이이이잉!
아광속탄 발사를 준비하는 베 원사.
촤라라락!
마리의 호문쿨루스가 주혁의 주위에서 소용돌이쳤고.
"빛이여!!!"
주혁의 앞을 막은 바르딘 광휘의 방패.
"주인님!"
몸을 와락 껴안아 오는 디아마트와 제페트.
"호아아아앗!"
스슷, 스슷, 스슷....
광석이든, 마정석이든, 생활용품이든 아공간 배낭에서 마구마구 물건을 꺼내 방벽을 쌓는 라직스.
그리고.
스팟!
주혁의 옆에 바짝 붙어서 귀에 대고 속삭이는 코사크.
"뭘 그리 걱정이심까? 염려하지 마십쇼. 다 방법이 있슴다."
"…넴?"
"초월의 은폐 장막 꺼내 쓰시면 됨다. 쓰시고 블링크 시전해서 저기 반대편에 숨으십쇼. 쿨타임 지나면 다시 활성화하고."
"으음."
"한 시간만 버티시면 됨다. 그리고 탑 퇴장하셔서 백색 탑 1층으로 입장하시면 끝남다."
맞다.
초월의 은폐 장막이 있었지?
관리자의 눈마저도 가릴 수 있는 아이템.
하지만 이들은?
저 말도 안 되는 용 새끼에게 당할 텐데.
"먼저 소환 해제를...."
"하지 마십쇼. 우린 여기서 죽을 검다. 악착같이 1시간 끌어보겠슴다. 봉 소환사님께서 안전해지실 때까지 우리가 저 새끼 붙잡고 있을 검다."
"아!"
우리가 막겠다.
그러니 당신은 빨리 튀어라.
"어차피 백색 탑 1층에서 다시 만날 텐데 뭐가 문제임까?"
그러네.
1층의 거주민이 되었으니까 죽어도 유령 상태로 1층에 머무르겠지.
"그리고 피소환인 부활의 룬 있잖슴까? 그것도 없으면 100일만 기다리면 되고."
맞는 말이긴 한데.
"명심하십쇼, 봉 소환사님만 무사하시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슴다. 단지 시간만 약간 지체될 뿐임다."
흠.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것도 아닌 게 맞다.
이들은 죽어도 상관없다.
나만 살면 된다.
"역시 지략가야."
"헤헤헤헤. 그 소환사에 그 피소환인임다."
"하하하하!"
주혁과 코사크는 웃었지만 다른 피소환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웃을 시간에 빨리 피해.
초월의 은폐 장막 뒤집어쓰고 숨어 있어.
이놈은 우리가 막을 테니.
제발 가요.
지금 당장.
호에!
그런데.
[다 웃었느냐?]
아직 덜 웃었는데.
[네놈이 관리자들을 절벽까지 내몬 소환사구나.]
응, 나야, 들기름… 아니, 봉주혁.
[담력 하나는 인정한다. 감히 내 앞에서도 그렇게 웃을 수 있다니.]
웃는 것도 안 되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옛말도 있는 판에.
딱 봐도 나쁜 새끼다.
[네놈 때문에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그 벌을 달게 받거라.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주마.]
에이, 무슨?
탑 공략이 죄야?
그럴 거면 탑은 왜 만들었어?
그 와중에 주혁의 소매를 툭툭 잡아당기며 필사적인 표정으로 호소하는 코사크.
"지금 뭐 하심까? 빨리 초월의 은페 장막 작동하십쇼."
"아...."
"초월! 빨리 초월! 그리고 블링크로 텨텨텨!"
"네네, 알았어요. 초월."
"아유, 영민하심다."
초월, 그래 초월
초월이면 다 해결되겠지.
주혁은 조용히 읊조렸다.
"초월, 비욘드, 무작위 소환!"
"…넴?"
왜 그리 놀라?
설마 내가 혼자 도망갈 줄 알았어?
장막 뒤집어쓰고?
그렇게는 못 하지.
[뭐냐?]
고개를 갸웃하는 헬크라수스.
[그게 유언이냐?]
"…유언은 아닌데,"
왜 아무 일 없지?
혹시 무작위 소환도 막혔나?
바로 그때!
츠파파파파파파파파!
89층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충격파.
[…무슨?]
쩌저저저저적!
무언가 찢어지고 있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찌직, 찌지직, 찌지지지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지고마룡 헬크라수스의 바로 옆에서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마치 유리에 실금이 생기는 것처럼.
찌지지직!
동시에 그 균열을 비집고 나타난 누군가.
찌직, 쑤욱!
'....'
사람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 가죽 바지와 가죽 조끼, 가죽 부츠, 머리엔 빨간색 두건을 맨 노인네, 심지어 오토바이까지 타고 있다.
'현대인이 왔네?'
초월자를 불렀는데.
노년의 할배 라이더가?
바깥에서 만났다면 엄지 한 번 치켜세워 줄 만큼 멋있는 노인네이긴 하지만.
좀 이상하다.
분명 하늘에서 나타났다.
바이크까지 탔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떠 있다.
가만히 보니 바이크 바퀴 밑에 뭐가 있는데.
'검(劍)?'
그랬다.
두 자루의 검이 노인이 탄 바이크 바퀴를 각각 받치고 있었다.
둥실둥실.
중력을 거역한 채 하늘에 떠 있는 검.
검 위에 바이크, 바이크 위에 노인.
[너, 넌, 누구...?]
할배 라이더는 지고마룡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슥! 그었을 뿐.
그리고.
서거걱! 쩌어어억!
지고마룡 헬크라수스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205화
1,001번 지구.
주혁의 세상.
주혁이 몰래 여의도 공원에 기간트를 놓고 간 후.
마침내 전시용 기간트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영업자 김모 씨는 밤새 식당 영업을 끝낸 후, 새벽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도중에 그걸 봤다.
취준생 박모 씨는 공부하다가 동이 터 오는 새벽녘에 머리를 식히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는데 유리창 너머로 그걸 발견했다.
증권사에 근무하는 정모 씨는 아침 출근을 위해 여의도 지하철역 3번 출구에서 나오다가 그걸 목격했다.
여의도 유치원 병아리반 이모 군은 등원하다가 그걸 보고는 유치원에 안 가고 공원에 가자고 떼를 쓰는 바람에 아빠를 곤란하게 했다.
평소 거대 로봇 매니아인 정모 씨는 동호회 친구의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여의도로 가서 그것과 만났다.
은퇴한 공무원 윤모 씨는 한강 변에서 아침 산책하다 그걸 보고는 기겁해서 바지에 살짝 지렸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 속옷을 갈아입었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 살거나, 해외 사람들은 뉴스나 SNS를 통해 그걸 접했다.
어제까진 없었다.
하루아침에 생겼다.
영상으로 보던 기간트가 실제로 나타났다.
무광페인트로 그럴듯하게 도색된 상태로.
심지어 가끔 움직이기까지 하면서.
너튜브 BJ들이 여의도 공원에 총출동했다.
어마어마한 콘텐츠 아닌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순하게 라이브 방송만 해도 시청자들이 미어 터졌다.
└ 진짜 있었구나. 실제 하는 거였어.
└ 나 어제 공원 갔을 땐 없었는데, 언제 생긴 거야?
└ 밤에 최고 플레이어가 몰래 세워두고 갔겠지.
└ 크긴 정말 크다.
└ 고조, 평양 만수대 앞에 저걸 세워놓아야 하는데.
└ 씨발, 같은 세금 내면서 서울 새끼들을 자기 집 베란다에서도 저걸 보네.
└ 색깔 이쁘게 칠했다. 과하지도 않게.
└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 칠한 모양이야.
└ 어어! 움직인다. 와! 고개도 막 돌리고.
└ 저러다 사람들 막 밟는 건 아니겠지?
└ 이동하거나 그러지는 않아. 팔이나 고개만 살짝 움직일 뿐.
└ 그런데 등판에 광고는 뭐야? 저건 좀 지웠으면 좋겠다.
└ 내 말이! 광고 지워라!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대한민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기간트 실물을 직접 보기 위해 사람들이 한국으로 몰려왔다.
각국 공항 항공사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가 다 매진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쿄 도심의 검은 탑이 가장 유명한 핫플레이스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렇게 기간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덕분에 라직스 물산도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래서 강남 라직스 물산 본사도 매우 바쁜 상황.
다들 정신이 없었다.
"대표님."
"어, 오비서, 홈페이지 복구됐나?"
"방금 기술진에서 서버 열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하아, 미치겠네."
홈페이지만 다운됐나?
전화도 빗발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다 광고 덕분이었다.
사람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항의 강도가 어느 정도야?"
"거의 협박 수준이죠."
"끄응."
"당장 기간트 등에 있는 광고 문구를 안 지우면 불매 운동 들어간다고."
"...."
"우리 친구 기간트를 꼭 그렇게 웃음거리를 만들어야 했냐며."
"...."
그랬다.
광고 효과 때문이 아니라 광고 자체가 문제였다.
"후우."
깊게 한숨 쉬는 정동훈 대표.
비서 오진숙이 눈치를 보며.
"어떡할까요? 등판 광고 지울 계획이라는 임시 공지라도...."
"아냐.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가서 허락받아서 올게."
"…알겠습니다."
오진숙은 대표실을 나왔다.
허락을 받아야 광고를 지울 수 있다는데.
'최고 플레이어가 허락해야 하나?'
라직스 물산의 실소유주.
그러나 정체가 베일에 가려져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짐작이 가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하다.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긴 하지만.
예전에.
그러니까 오진숙이 정동훈 대표 비서가 되기 전 총무과 사원으로 재직할 당시, 라직스 물산 본사를 방문했던 동창 봉주혁.
그를 대했던 정동훈 대표의 태도.
더불어 뜬금없었던 비서실 인사 발령.
'혹시 주혁이가 최고 플레이어....'
에이!
설마!
너무나 착해서 벌레 한 마리 못 잡던 애가 어떻게?
심지어 학교 일진 놈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도 있었다.
주혁이는 모르겠지만 그 일진 놈에게 찾아가서 착한 애 괴롭히지 말라고 엄포를 놨던 기억도 나고.
당시 오진숙은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사귀던 오빠가 운동부 주장이어서.
'아무튼 주혁이는 아닐 거야.'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안전한 층에서 반복 공략 정도나 하겠지.
* * *
89층으로 내려온 90층 보스 지고마룡 헬크라수스.
이름만 들어도 섬뜩하지 않나?
그냥 마룡도 아니고, 지고(至高), 지극히 헬하신 새끼.
실제로 그랬다.
무시무시했고, 소름 끼쳤으며, 은폐 장막을 뒤집어쓰고 숨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죽었다.
바이크 할배의 손짓 한 번에 저세상으로 갔다.
관리자가 직권 남용을 해 가며 어렵게 보낸 90층 보스일 텐데, 넌 누구? 하다가 서걱, 쩌억! 해 버렸다.
반갈죽.
반으로 갈라져 죽음.
그것도 아주 깨끗한 단면으로.
띠링!
[지고마룡 헬크라수스 처… 치. 1/1]
[…90. …89층 임무에 성공하셔… 셨습니다.]
[레벨이 올라… 라 갔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도 엉망.
오류인지, 아니면 반갈죽이 어이가 없는지, 아니면 허공을 찢고 나타난 할배 라이더 때문인지.
[보사… 사, 상....]
결국.
띠링!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675번 검은 탑 관리자들이 부재중입니다. 보상 및 업적 판정을 연기합니다.]
[오류 수정 후 정상적인 공략 보상과 업적 보상이 주어집니다.]
메시지가 막 떠올랐지만 주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하늘에서 바이크를 타고 있는 노인만 보일 뿐.
다른 피소환인들도 바짝 긴장했다.
코사크는 말을 잃었고, 고방은 식은땀을, 베로니카는 경계했으며, 바르딘은 부들부들 떨었다.
라직스는 호에, 하면서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엘은 표정 없이 관찰 중, 마리도 곁눈질로 노인을 훔쳐봤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광마도, 매켄지도, 디아마트도, 제페트도.
특히 견달래.
그녀는 남들과 다르게 경외심에 가득 찬 표정.
두 손을 꼭 모으고 기도하듯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견달래 눈빛을 보니 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순간!
스윽!
노인의 등 뒤에 나타난 무언가.
'…어?'
스마트폰이었다.
날아다닌다.
마치 살아 있는 새처럼 스마트폰이 움직이고 있었다.
촬영하는 건가?
저분도 찍는 거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스마트폰을 배후에 띄워 놓고는.
부릉! 부르릉!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이크.
온다.
내려온다.
어떡하나?
인사는 해야겠지? 감사하다는 말도 하고, 그랜절이라도 할까? 그냥 진심을 담아서 박수를 보낼까?
저 사람은 초월자.
피소환인이라고 규정되지 않은 존재.
그래서 피소환인 3원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즉, 수틀리면 여기 있는 사람도 저 지고마룡처럼 반갈죽 당할 수도 있다.
부릉부릉.
착!
바이크가 지상으로 착륙했다.
멋진 포즈로 안장에서 내리는 노인.
그러고는 주혁과 그를 둘러싼 피소환인들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쯧쯧쯧."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혀를 차기까지.
심기가 불편한가?
'그러면 안되는데.'
꿀꺽.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노인의 시선이 이리저리 떠돌다가.
마침내 주혁을 보고는.
"오!"
탄성을 지르면서.
"대협은...?"
"아! 안녕하세요. 전 봉주혁입니다."
"봉 대협이었구려. 본도는 검선(劍仙)이라는 허명을 가지고 있소이다."
검선?
선(仙)이라면?
'신선이셨구나.'
도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불로불사의 신화적 존재.
그렇지.
신선이면 무조건 초월자라고 부를 수 있지.
그런데 신선이 왜 이런 옷을?
게다가 바이크라니.
주혁의 마음을 아는 듯, 검선이 미소를 지으며.
"본도가 사는 선계仙界)는 특이하다오. 지구와 문물을 교류해서 많이 발전했거든. 극장도 있고, 쇼핑몰도 있고, 놀이공원도 있고, 뭐 다 있다고 보면 되오."
헐.
신선들이 사는 곳이 선계(仙界) 아닌가?
그런데 속세, 지구 문명이 이식되었다고?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지?
"뭘 그리 놀라시나? 봉 대협도 차원 이동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우리 세상이라고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겠소?"
듣고 보니 맞다.
차원 이동.
그거라면 가능하다.
세상과 세상의 교류.
'선계와 다른 세상의 지구가 서로 교류했다는 거네.'
평행우주, 어느 지구의 문물이 그쪽으로 전해졌다는 뜻.
그래서 신선이 바이크를 탈 수 있는 거고.
당장 675번 지구가 망하지 않고 온전했더라면 주혁의 1,001번 지구와 교류가 가능했을 것이다.
"어떻게 귀한 신선님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에?"
"부르니까 왔지. 원래 본도는 누가 부르면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라."
"너무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큰 은혜를 입었어요."
뒤늦은 감사 인사에 검선이 손사레를 치면서.
"은혜랄 것까지야, 다 인연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소? 게다가 이따위 요괴 놈, 처리하는 건 식후 요깃거리도 안 되오."
아이고, 겸손도 하셔라.
"저기 혹시 몇 번 지구에서 오셨습니까?"
"응? 지구가 지구지, 무슨 번호가 있겠소. 아무리 평행우주라 하더라도."
하긴.
평행우주에 번호를 매기는 건 관리자 놈들이나 하는 것.
"거기도 검은 탑이 있나요?"
"여기 이 사이한 공간 말이요?"
"네."
"없소. 만약 있었다고 해도 진즉에 부숴 버렸겠지."
"아!"
얘기를 나눠 보니 좋은 분이신 것 같다.
그러나 피소환인들은 여전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고.
초월자라 그런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으면 친해질 수도.
그러나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어우, 겨우 5분 남았다.
"검선님."
"말씀하시오, 봉 대협."
"괜찮으시면 여기 며칠 머물러 보시는 게...."
"본도도 그러고 싶지만 그건 어렵소.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이 세상이 날 밀어낼 거요."
될진 모르겠지만.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입주권을 꺼내 검선에게 건네줬다.
"이건...?"
잠시 살펴보더니 도리도리 고개를 흔드는 검선.
"이 카드엔 영혼을 특정한 공간에 구속하는 힘이 있구려."
오!
확실히 신선은 신선이다.
"허나 본도의 영혼은 구속할 수 없소, 애초에 가능할 리가!"
그럴 줄 알았다.
초월자의 영혼을 어떻게 강제해?
강제당하면 초월자가 아니지.
"뭐, 굳이 머무르고자 한다면 받아 줄 수는 있지만."
되긴 된다는 말인데.
"제가 정중하게 초대를...."
"앞서 말했듯 밖으로 나가면 세상의 법칙이 어그러질 테요. 아시다시피 본도가 보통 인간은 아니지 않소?"
맞다.
신선님이시지.
"그리고 바쁘기도 하다오. 이래저래 찾는 사람이 많아. 하하하."
안타깝다.
이렇게 거절하시니 더는 권유할 수도 없고.
"그나저나 봉 대협, 본도가 부탁이 있는데."
으잉!
"뭐, 뭐든 말씀하세요. 뭐든!"
무조건 들어줘야지.
안 그래도 어떻게 은혜를 갚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어어, 혹시 지구에서 먹는 주전부리 같은 게 있는지?"
주전부리라면....
"간식 같은 거요?"
"그렇소. 간식."
지구와 교류한 선계라면서.
과자나 음식은 없나?
"선계 쇼핑몰에서 지구 음식을 팔긴 해도, 매우 비싸다오. 운송비가 어마어마하다고 해서."
"아하."
이해한다.
당장 산 밑에서 파는 음료수와 산꼭대기에서 파는 음료수 가격도 차이가 나는데.
차원과 차원을 넘는 거니까 많이 들 수밖에.
그래서.
"라직스 씨?"
"호에?"
"아공간에 우리가 먹는 간식 들어 있죠?"
"호엥!"
"좋습니다. 다 꺼내세요."
순간!
주혁은 목격했다.
번뜩!
검선의 눈에 비치는 욕망의 그림자를.
스슷!
라직스가 물건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사탕과 젤리 각 한 봉지씩, 막대 초콜릿 3개, 캔 음료수 5개, 빵 몇 봉지.
뭐야?
왜 이것밖에 없어?
"이게 다예요?"
"호에."
아니, 라직스가 간식 정도는 보통 아공간에 꽉꽉 채워서 다니는데.
"누가 간식을 다 먹은 거야?"
고개를 돌려 피소환인들을 바라보니.
슬며시 주혁의 눈을 피하는 고방, 그리고 코사크.
쯧!
먹는 거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런데?
"오오오오! 이렇게나 많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좋아하는 검선.
이게 많다고?
"이건 신제품 초콜릿이구려. 안에 피스타치오가 들어 있는."
"잘 아시네요."
"본도가 아는 선계의 선인은 이 초콜릿을 사느라 가산을 탕진했소, 현재는 거지 신세지."
"네?"
겨우 초콜릿 하나가 얼마나 비싸다는 거야?
"본도가 가져도 되겠소?"
"아유, 드려야죠."
"껄껄껄, 여기 온 보람이 있군."
소박한 신선님.
갑자기 측은한 마음.
"하아,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더 많이 사드렸을 텐데."
"허허허, 이 정도면 충분...."
"아예 쇼핑몰을 하나 차려 드릴 수도 있어요."
쫑긋!
움직이는 검선의 귀.
"호, 혹시 봉 대협, 부자시오?"
"네! 엄청! "
"헉! 귀한 분이시군."
"에이, 별말씀을,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세계 최고 부자가 저라고."
쫑긋!
또 귀가 움직인다.
반응이 즉각적.
'…흠.'
세속적인 걸 좋아하시나?
신선임에도 물욕이 상당하신 것 같고.
그럼....
"오토바이도 새 걸로 사드리고 싶고."
쫑긋! 쫑긋!
"커스텀으로 제작해서, 검선 님만의 단 한 대뿐인 오토바이로. 전화만 하면 되거든요."
쫑긋! 쫑긋! 쫑긋....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검선의 귀.
그러나.
"후우, 마음이 동하긴 하지만, 본도는 이질적인 존재요. 현실에 머물면 세상이 위험할까 걱정이 되어서...."
"제가 사는 집은 현실과 분리된 곳입니다."
쫑긋!
"분리라면?"
"전혀 새로운 공간이죠. 여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허어, 그런 곳이?"
"그래도 인터넷은 됩니다. 전기 사용도 가능하고."
쫑긋! 쫑긋!
"인터넷도 된다고?"
"TV 시청도요. 영화도 마음대로 볼 수 있죠."
쫑긋! 쫑긋! 쫑긋....
넘어올 것 같은데.
"잠깐 가셔서 확인해 보실래요?"
"흐음. 하긴 본도도 이대로 떠나기엔 아쉽군."
"저도 마찬가집니다."
"무리해서라도 좀 더 남아 볼까.... 한 일주일 정도?"
넘어왔다.
"후회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꼭 새로운 바이크가 욕심나는 것 때문은 아니오."
평소 코사크에게 습득한 아부 기술을 총동원해서.
"아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속세를 초탈하고 등선하신 신선님이신데, 어디 그깟 물욕에 움직이실 분인가? 이렇게 풍모도 대단하신 분이, 보면 볼수록 느끼는 거지만, 그야말로 신선님의 표상이십니다."
"험험."
"여기...."
스윽.
입주권을 건네는 주혁.
슬며시 손을 뻗어 받는 검선.
스슥, 스스스슥, 스슥.
카드 뒷면에 글자가 새겨졌다.
그런데?
- 백색 탑 임시 입주민 : 검선 -
임시구나.
영구히 머물지는 못하는 듯.
어서 모시고 집으로 가자.
가기 전에 2호기에 대해 묵념.
우리 2호기도 굉장한 영상을 찍어 뒀으니까.
나중에 공개하면 되겠고.
"호엥!"
탱, 태앵! 팽그르르르.
라직스가 움직였다.
어디로?
반갈죽된 지고마룡 헬크라수스 사체.
스슷, 스스스스스슷.
통째로 집어넣은 라직스.
그리고 녹아서 형체도 거의 사라진 기간트와 마검, 방패도 수거해서.
그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검선.
'이야! 역시 우리 알뜰한 차원대머슴이야.'
그래.
보상도 연기됐다는데, 저거라도 챙겨가야지.
206화
임시지만 입주권에 이름이 새겨진 검선.
탑 바깥으로 나가보자.
같이 나올 수 있을까?
카탈로그에 등록된 피소환인도 아닌데.
일단 퇴장.
스팟!
그런데,
"…응?"
주위를 둘러보니.
"어디 가셨어?"
피소환인들은 나왔지만 검선 님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같이 못 나가는 거...."
순간!
찌이익!
허공에 생겨나는 균열.
검 한 자루를 들고 그곳을 통해 빠져나오는 검선.
"…나오셨네요."
"봉 대협의 기운을 쫓아 공간을 검으로 베어서 왔지."
"바이크는요?"
"무한공간에 넣어 뒀소."
무한공간?
"아공간과 같은 술법이오. 내 아는 신선에게 사정해서 하나 장만했지. 그리 큰 건 아니지만."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검선.
"황량한 곳이군. 설마 여기가 봉 대협이 사는 세상인가?"
"아뇨. 다른 세상이요. 이미 망했고요."
"안타깝도다."
이제 백색 탑 1층으로 이동.
다른 피소환인들이야 소환을 해제하면 되지만....
"걱정 마시오. 따라 들어가리다. 이 입주권이란 걸 만져보니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알겠소."
그럼.
피소환인들 소환 해제부터.
스팟! 스팟! 스팟....
그리고 주혁도.
스팟!
백색 탑 1층.
잠시 후.
찌이익!
균열이 생겨나고 검선이 거길 통해 나왔다.
"여기요? 봉 대협이 말했던 현실과 분리된 공간이?"
"맞긴 하는데, 여긴 별장 같은 곳이고, 한 번 더 이동해야 합니다."
"번거롭군. 그럼 먼저 가시오."
"아뇨. 여기서부턴 같이 가도 됩니다. 저기 엘리베이터타고."
"엘리베이터?"
그리하여 함께 이동.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하! 이거로군. 차원 이동의 도구가."
"네, 맞습니다."
"참으로 기발하오. 게이트, 문을 여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다니."
다 함께 타서 엘리베이터 가동.
스샤샤샤샤....
드드드드드....
스르륵.
문이 열리고.
"잘 오셨어요. 여기가 바로 우리 집, 백색 탑 17층이자 제 세상과 연결된 별도의 공간입니다."
"…호오?"
초월자 검선도 살짝 놀란 듯했다.
하긴!
백색 탑 1층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인데.
일단 오자마자 보이는 61층짜리 고층빌딩.
그리고 주택가, 주차장에 세워진 고급 자동차, 넓은 도로, 광장에 세워진 기간트.
"허어!"
검선도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주혁이 만든 공간을 구경하고 있었다.
"쉬고 계세요. 전 볼일 보고 오겠습니다."
"본도는 괘념치 마시길."
누가 안내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소녀가 모시겠나이다."
우리 달래 공주님이라면 걱정 없지.
"그래 주실래요?"
"공자님의 체면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러자 검선이.
"흐음, 본도가 어떻게 봉 대협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봉 대협의 곁에 나와 인연이 있는 아이가 있었구나."
응?
무슨 말이지?
견달래와 인연이 있다고?
"네 스승이 여우렸다?"
"그러하옵니다."
"그래, 네 스승은 잘 있단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거라."
"…가, 감사하옵나이다."
아아!
그랬구나.
깨달음으로 등선을 이뤄내 탑 속박 영혼에서 이탈한 견달래의 스승, 천년 여우 해령.
어디로 등선했나 했더니 검선이 살던 선계였다.
이렇게 인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결국엔 검선이라는 초월자를 불러낼 수 있었던 것.
"그럼 대화 나누고 계세요. 전 커스텀 바이크 주문을 의뢰해 보겠습니다."
"아! 바이크 말인데."
"네."
"전기 배터리 말고 휘발유, 기름으로 가는 바이크면 좋겠소."
"아유, 그러셔야죠. 바이크라면 모름지기, 부릉, 부르릉, 부륵! 소리가 나야 제맛 아닙니까?"
"역시 봉 대협이오. 휘발유가 연소할 때 나는 기름 냄새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지."
빨리 준비해 두자.
언제 떠나실지 모르니.
당장 오늘 바로 백화점 하나 털어와야겠다.
모조리 최고급으로 마련해야지.
* * *
주혁이 볼일을 보러 바깥으로 나간 후.
검선은 백색 탑 17층 광장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 앉아, 견달래가 준 다과와 음료를 마시며 한참 동안 태블릿 삼매경에 빠졌다.
처음엔 볼 게 뭐 있나 싶었는데.
다른 세상의 콘텐츠.
선계와 연결된 지구의 문화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
'한 며칠 푹 쉬다 돌아가면 되겠군.'
그나저나 검은 탑이란 게 뭘까?
요괴들이 출몰하는 곳 말이다.
실제 현실에서 공간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분리된 것 같고.
뭐, 이런 이질적인 것들이 한둘인가?
모습은 다양해도 결국은 내차원에 대한 외차원의 침략.
차원과 차원이 서로 부딪치면서 먹고 먹히는 그런 전쟁일 터.
어떤 경우엔 마나를 직접 전송해서, 혹은 게이트를 통해서, 여기 이 지구처럼 탑이란 걸 만들어서, 차원의 법칙을 변질시키고, 동화시키면서, 종래엔 먹어 치운다.
이런 일들이 전 우주 곳곳에서 일어난다.
자신도 경험한 바 있고.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
저 하늘에 떠 있는 별의 숫자만 해도 몇 개인데?
감히 세어보지도 못한다.
평행우주만 해도 그렇다.
수많은 세상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수천만 개? 아니, 1억 개 이상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저 멀리서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늙은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잘 됐다.
"어이, 거기!"
광마가 검선의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이리 오너라."
쭈뼛쭈뼛 다가오는 광마.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과, 광마… 요."
"그래? 흐음, 혹시 천마나 혈마는 아느냐?"
"혈마는 잘 모르겠고, 천마와는 한번 손속을 나눈 적이 있소."
"호오, 그렇다면 너와 겨룬 적이 있다던 그 천마에 대해 소상히 말해보아라. 더불어 네가 살던 강호도."
광마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비록 자신도 강호에서 일가를 이룬 대종사지만 신선의 말을 어떻게 거역해?
하라는데 해야지.
그래서 다 설명했다.
광마의 말을 다 들은 검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렇군. 너의 강호와 본도가 알고 있는 강호는 서로 다른 세상이구나."
광마도 그렇게 생각했다.
강호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다.
당장 동일한 마도 문명을 공유하는 마도 공학자 엘의 세상과 베 원사의 세상도 서로 다른 판국에.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자꾸나.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것들이 어떻게 봉 대협의 옆에 붙어 있고, 또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시작된 광마의 설명.
검은 탑, 탑 붕괴, 각성, 플레이어, 탑 공략, 보상, 그리고 소환사와 피소환인.
'뭔지 알 것 같군.'
검은 탑이 외차원의 침략 수단이라면 플레이어와 소환사는 침략을 막아 내는 내차원의 방어 수단일 터.
공격이 있으면 수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과율이니까.
"그럼 너와 저자들이 봉 대협을 도와 이 1,001번 지구라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한다고?"
"맞습니다."
"쯧쯧, 허접한 반쪽짜리들이 잘도 세상을 구하겠다."
"무슨?"
반쪽이라니?
"왜 반쪽인지 궁금하냐?"
"그렇소."
"그럼 어디 한번 네가 가장 자신 있는 무공을 펼쳐 보아라."
"...."
혹시 가르침을 주려는 건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있는 와중이었다.
소환사도 그걸 알고 있는 눈치였고.
오죽하면 당분간 탑 등반을 중단하자고 권유했겠나?
가르침을 주면 배워야지.
그게 소환사를 위한 길이니까.
자존심 같은 게 뭐가 중요해?
검선.
신선이기도 하거니와 지고마룡 헬크라수스를 손짓 한 번에 갈라 버린 사람 아닌가?
"후우."
심호흡하고 혈옥강기를 끌어 올리려는 그때!
"검선 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응? 누가 날 불렀느냐?"
"점다."
"네가 누군데?"
코사크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불운한 과거를 딛고, 암살자에서 시작해, 아부지의 영혼에게 검을 배워 소드마스터가 된 입지전적인 피소환인, 봉 소환사님의 오른팔, 이 바닥의 2인자, 검선은 못 되어도 검왕 정도는 해낸다. 검술의 천재, 코사크임다."
"...."
희한한 놈이네.
"그래서?"
"저도 검술 시연해 보겠슴다. 가르침이 필요함다."
"흠."
안 될 건 없지.
"해 보거라."
그러자.
"저도!"
"손! 손!"
"전사도 배우고 싶다."
"빛이여!!!"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훈련 준비 완료."
"소녀도...."
우르르르,
앞으로 나오는 피소환인들.
"그래, 다 해라, 다 해."
그리하여 각자의 특기들이 백색 탑 17층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광마의 초승달 강기가 하늘을 갈랐다.
코사크는 그림자 발걸음과 하르트만 검식을, 고방은 거대화로 망치를 들고 지면을 내려찍었고.
견달래는 부적술, 베로니카는 마총 사격, 바르딘은 광휘와 방패술, 제페트는 박쥐로 변신했다가 팟팟팟! 빠르게 움직였다가.
디아마트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매혹을 뿌려댔고, 매켄지도 파이어 스피어와 헬파이어를 마구마구 시전했다.
심지어 혈랑도 광폭화로 컹컹, 엘도 눈빛 파괴광선, 집에 숨어 있다가 어느새 슬며시 밖으로 나온 알리아마리는 호문쿨루스를.
다들 열심이었다.
그럴 수밖에.
초월자에게 지도를 받을 기회가 어디 흔할까?
"그만!"
검선의 외침에 우뚝 멈춰선 피소환인들.
"알았다. 본도가 도움을 주마. 하지만...."
검선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너와 넌 빠져 있거라. 너희에겐 딱히 가르침이 필요 없을 듯하구나."
지목받은 피소환인은 디아마트와 엘.
"…왜요? 우린 왜 안 되죠?"
"필요 없으니까."
"기준이 있어요? 저기 개도 있는데."
"그게...."
그때였다.
"와! 여기 다 모여계셨네."
주혁이었다.
라직스도 함께 있었다.
"오! 봉 대협, 볼일은 잘 보셨소?"
"네, 일단 쇼핑 좀 하느라."
"쇼핑이라면?"
주혁은 라직스를 보며 말했다.
"라직스 씨, 쇼핑한 거 다 꺼내세요."
"호랏!"
스슷, 스슷, 스슷,
아공간 배낭에서 나오는 물건들.
각종 과자나 음료 같은 간식은 물론이고, 노트북, 스마트폰, 태블릿 등 전자기기, 양주, 맥주, 증류식 소주, 일본술, 중국술, 그리고 안주.
각종 고급 상품들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왔다.
"어이쿠! 봉 대협! 과연 부자가 틀림없군. 이 귀한 것들을...."
탄성을 지르는 검선.
"우선 넣어 두세요. 검선 님 무한공간의 크기가 얼마인지 알아볼 겸. 그리고 바이크 들어갈 자리도 있어야 하니."
검선이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러나 이 비싼 물건들을 공짜로 가질 수 없지. 값을 치르겠소."
"안 그러셔도 됩니다만."
"오는 게 있으며 가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목숨을 구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어허, 그게 무슨 대수라고."
쑤욱!
이번에 검선이 물건을 꺼냈다.
"이건...."
과일인가?
복숭아 같은데.
어린애 머리통만큼 크다.
"복숭아, 선도(仙桃)라고 불리오."
선도라면 신선이 먹는 복숭아?
세상에!
이거 보물이잖아.
"선계에선 선도가 화폐라오."
"아!"
복숭아가 돈?
이번엔 라직스의 눈에서 떠오른 욕망의 빛.
복숭아의 가치를 알아차린 모양.
"한 100여 개 정도 있는데. 이걸로 값을 치르기엔 어림도 없지만 성의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시오."
"자, 잠깐! 이건 너무...."
"맞소. 이 물건들에 비하면 복숭아 몇 개 따윈 너무 푼돈이지."
"...."
"그렇다고 업신여기진 말아 주시오. 선도도 나름의 가치가 있으니까."
아아.
선계는 대체 어떤 세상인가?
귀한 선도 복숭아가 고작 이런 지구 물건을 구매하는 데 사용되다니.
거절할 새도 없었다.
스슷!
라직스는 검선이 꺼낸 복숭아 100여 개를 아공간에 족족 쓸어 담았다.
"호아아앗!"
검선은 라직스가 꺼낸 지구 물건을 집어넣었고.
"대박이로구나."
둘 다 어찌나 손이 빠른지.
스스스스스스, 쑤수수수수쑥!
"으하하하!"
"호에에엣!"
순식간에 이뤄진 물물 교환.
거래가 끝이 나자 검선이 라직스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훌륭하도다. 이.... 대협의 이름이 뭔지?"
"라직스 씨요."
"아하! 이제 보니 라 대협이군. 라 대협! 고맙소,"
"호에에에."
"내 한눈에 알아봤지, 우리 라 대협은 다른 자들과 비교해서 육신 자체가 달랐으니까."
당연하다.
"수인족이시니까요."
"종족을 뜻하는 게 아니요."
"네?"
"정기신(精氣神)의 조화가 완벽하다는 뜻이오."
무슨 말인지?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는데."
검선이 피소환인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들의 육신은 아마 만들어진 것일 테요. 본래 자신이 가진 육신이 아니라."
맞다.
원래는 영혼의 세상에서 있다가 주혁이 소환하면 몸이 실체화되어 밖으로 나오는 식.
'확실히 초월자답네.'
한눈에 알아차리다니.
"영혼의 격에 따라 육신을 만들어 주는 것, 본도에겐 매우 익숙하오. 선계, 아니 지옥에서도 급에 따라서 육신을 만들어 주거든."
지옥에서 육신을 만들어 준다니.
"죄인에게 몸을 만들어 주는 이유는 물리적 고통을 가해 벌을 주기 위함이지."
"아하."
"반대로 천인, 즉 천당에서 사는 거주민들을 위해서도 몸을 만들어 주는데, 이 경우는 기쁨과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고."
각자 다른 이유에서 몸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
몸이 있어야 진정한 고통을 당하고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영혼들이 피소환인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이유도 알고 보면 이것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그 만들어진 몸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거요."
문제?
"영혼과 육신의 주파수가 맞지 않다고 보면 되오. 예를 들어."
검선이 광마에게 물었다.
"네 현재 육체가 생전의 육체와 같은가?"
도리도리.
부정하는 광마.
같을 리가 있나?
소환되면서 생성된 육신인데.
"영혼 성장의 바탕이 된 진짜 육신은 사라졌고 대신 새로 만든 육체를 뒤집어쓴 셈이다. 허면 그 육체가 네 영혼과 조화를 이룰까?"
계속 설명을 이어나가는 검선,
"영혼과 육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정기신(精氣神)이 이미 어긋나 있는데, 어찌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영혼과 육신의 주파수가 다르다는 것.
그래서 더는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
"방법이 없을까요?"
"왜 없겠소? 있으니까 다 불러 모았지."
"오!"
"어긋난 영혼과 육신을 조화롭게 만들어 볼 작정이오. 정기신(精氣神)의 합일을 통해."
오!
"단! 저 둘은 빼고."
검선이 가리키는 사람은 엘과 디아마트.
"저기, 저 요녀는 아마 본신의 육신일 것이오. 능력이 퇴보했지만 다시 성장하면 되니까 건드릴 필요가 없고, 저 골렘은 육신이라고 하기엔 뭣하고."
엘과 디아마트가 제외된 이유.
"나머지는 노부가 선기(仙氣)를 풀어 정기신의 합일을 유도해 보겠소."
검선이 손을 들었다.
"…지, 지금 바로요?"
"미룰 필요가 있나?"
스파파파팟!
검선의 몸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기세.
동시에.
스웅, 스웅, 스웅, 스웅....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수십 개의 스마트폰이 동영상 촬영 모드로 설정된 채, 백색 탑 17층 위에서 날았다.
몇 개는 원거리에서, 몇 개는 근거리에서, 검선의 정면, 검선의 배후, 오른쪽, 왼쪽, 그렇게 자리를 잡을 걸 확인하고는.
"봉 대협의 조력자들아. 내 너희들의 사명을 인정하겠다. 실로 고결한 자기희생 정신이라 불러도 무방하도다. 허나!"
형형한 검선의 눈빛.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놈들이 그깟 비루한 용 새끼 하나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뒷짐을 지고 한 걸음 나서면서.
"본도가 해결해 주겠다. 선계의 대표자로서, 상제와 염라가 인정하는 검의 종주, 나 검선이! 이 지구를 위해 가르침을 내리겠노라."
촤라라라라라락!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마치 검처럼.
광마의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이기어검?"
아니지.
저건 검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니까.
'이기어… 폰인가?'
장엄하고 신비로운 검선의 위용.
안정된 시선 처리, 생생한 구도, 현실감 있는 표정 연기, 완벽한 연출.
아아.
이것이 바로 신선의 촬영이다.
그 모습에 깊이 감명받은 매켄지.
저건 배워야 한다.
반드시!
그리고.
검선의 손에서 풀어져 나오는 영험한 기운.
가느다란 실처럼 엮이고 엮여 피소환인들에게 뻗어 나갔다.
스르르르륵!
"정기신의 조화로움은 그 첫 단계, 잘못 잠근 단추를 풀어 다시 끼우는 것."
촤라라락!
화면 전환.
주혁과 피소환인들을 비추는 스마트폰.
"그러고 난 후 두 번째 단계, 바로 성장이다. 경지를 깨우쳐라. 한계를 부숴라. 벽을 넘어야 한다. 본도가 도와주겠다!"
촤라라라락!
절정으로 치달은 연출.
먼저 고방.
스르륵!
기운이 그의 몸에 닿자.
"헉!"
픽 하고 쓰러져 버렸다.
쿵!
"걱정하지 마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알을 깨고 나오려면 고통이 필요한 법이니."
그리고 코사크, 견달래 광마, 바르딘, 베 원사… 심지어 혈랑까지.
선기가 그들의 정기신(精氣神) 주파수를 조정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검선의 연출된 일장 연설을 멍하니 듣고 있던 주혁도.
스르륵.
"어?"
난 왜?
현기증이라도 난 듯 머리가 핑 돈다.
주혁도 깜빡 정신을 잃었다.
그리하여 백색 탑 17층에 영험하고 상서로운 선기(仙氣)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207화
영혼과 육신의 주파수 합일.
대체 어떻게?
이런 식이었다.
광마의 머릿속으로 검선의 선기(仙氣)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광마는 과거로 회귀했다.
회귀라니?
진짜는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억 회귀.
현실의 자신이 과거 기억 속 자신에게 빙의됐다고나 할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즉, 빙의는 했지만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것에 간섭하지 못하는, 그저 관조만 할 수 있는.
그러나 경험은 직접적이었다.
탄생에서 유년기를 거쳐,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의 생을 고스란히 복기하는 중이었다.
모든 감각이 실제처럼 느껴졌다.
고아 시절 주린 배를 부둥켜안고 구걸할 때의 고통과 비참함, 다른 동네 거지와 구역 문제로 전쟁을 벌였을 당시 뱃속으로 쑥 찔러 들어온 차가운 칼날의 감촉.
일인전승 문파의 사부를 만나 무공을 수련하면서 처음으로 단전에 생성된 내공, 그 따뜻한 느낌.
실전을 거치면서 정립되어 가는 무공.
어느새 강호 최고 고수가 된 자신.
그리고 말년의 처절한 전투.
무림 공적으로 홀로 관군과 정사마 무인들과 대적했던 기억.
찔리고, 베이고, 찍히고.
아무튼 너무너무 생생했다.
주파수를 맞춘다는 것.
삶을 살면서 받아들인 기억의 집합체를 처음부터 다시 경험해라.
그 기억 정보가 자신이 가진 새로운 육체에 오롯이 새겨지게끔.
그것이 바로 기억 회귀의 목적이다.
기억은 의식에 박히는 게 아니라 육체에 박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이 기억하니까.
하지만 이전의 몸은 사라졌다.
몸에 기억된 정보들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
그걸 바로 잡기 위해 기억 정보를 재차 되풀이하고 복기함으로써 몸에 새기는 것이고.
무식한 방법이다.
하지만 신묘한 술법이기도 하다.
신선이기에 이런 일도 가능하겠지.
광마뿐만이 아니었다.
코사크도, 고방도, 견달래도, 베 원사도… 검선에 의해 쓰러진 모든 피소환인이 기억 회귀를 경험하고 있었다.
슬픔, 기쁨, 절망, 희망, 후회, 고통, 환희, 인내, 성취....
잊고 싶었던 순간, 또 접하고 싶은 순간, 하도 오래되어서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모든 순간이 다시 육신에 아로새겨졌다.
한편 주혁은....
* * *
이상한 곳에 있었다.
마치 재판장을 연상케 하는 장소.
'여기가 어디야?'
검선이 그랬나?
왜 자신을 여기로 보냈지?
그리고 눈앞의 한 사람.
푸짐한 체형, 머리엔 관을 쓰고, 붉은 대추 같은 얼굴색, 시커먼 수염의 중년인이 주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죄인은 누구냐?"
"넴? 저 죄인 아닌데요? 봉주혁이라고 합니다만?"
"죄인이 아니면 여긴 왜 왔느냐? 그것도 영혼의 상태로?"
"…영혼이라뇨? 저 죽었나요?"
"글쎄...."
책을 뒤적거리는 중년인.
"흐음, 일단 봉주혁이라는 이름은 명부책에 없군."
…명부책?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단어인데.
"어디 한번 살펴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주혁의 영혼을 콕 찔렀다.
"호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쯧쯧, 이럴 줄 알았다. 하여간 검선, 그놈은… 에잉!"
어? 검선 님을 알아?
"미리 설명이나 해 주고 보낼 것이지."
어떤 설명?
주혁을 보며 미소 짓는 중년인.
"어쨌거나 지옥에 온 걸 환영하오. 봉 대협."
으힉!
지, 지옥?
주혁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 죽었나?
죽어서 지옥에 온 거야?
"저기...."
"아! 염려하지 마시오. 죽어서 온 것이 아니니까."
"그럼?"
"심상의 연결일 뿐이요. 영혼이 아주 잠깐 차원을 건너뛰었다고나 할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한 30초 후에."
아!
다행이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당장 육신과 영혼의 주파수를 맞추는 술법을 전수하겠소."
"…네?"
갑자기?
"기억 회귀라고 하오. 보통 지옥의 판관들이 재판 과정에서 죄인이 저지른 죄과를 인식시키기 위해 과거 전 생애를 온전하게 보여 주는 건데."
그러면서 또 손을 들어 휙휙 휘저어 버리니.
"어어어."
의식 속에서 술법을 깨우쳐 버린 주혁.
"이제 됐소."
"…그러네요."
"기억 회귀 술법을 사용하려면 그에 맞는 영험한 기운이 필요하오. 선기(仙氣)라면 적당할 거요."
선기(仙氣)라뇨.
"전 마력과 내공 말고는 다른 기운이 없는데요?"
"검선이 주고 간 선도가 있지 않소? 꾸준히 드시오. 하루 한 개씩, 마침 선근(仙根)도 가지고 있으니 선기가 잘 자리 잡을 거요."
그렇지.
선도.
신선들이 먹는 음식.
선계의 화폐.
"이제 다 끝났군. 살펴 가시오. 꼭 세상을 구원하시길."
"감사합니… 저어, 그런데 누구신지?"
중년인이 푸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염라라고 하오."
"...."
그리고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더니.
팟!
주혁은 눈을 떴다.
익숙한 하늘이 보였다.
백색 탑 17층.
'우와!'
이게 믿겨져?
'나 방금 지옥을 갔다 왔네.'
염라대왕까지 만났다.
다른 세상의 지옥이긴 해도.
'착하게 살아야지.'
아무튼 기억 회귀 술법을 배워 왔다.
영혼에 심어졌기 때문에 선기만 있으면 즉시 사용이 가능한 것.
이걸 왜 배우게 했는지도 짐작이 간다.
지금 피소환인들에게 걸려 있는 술법이 바로 기억 회귀겠지.
살아온 모든 경험을 지금의 육체에 다시 경험하게 하여 주파수를 맞추는 방식.
차후, 다른 피소환들을 무작위로 불러낼 때, 그들에게도 기억 회귀를 통해 주파수를 맞춰 주라는 것.
아아.
현명하시고 따뜻하신 우리 검선 님.
'근데 이건 스킬 적용이 되나?'
바로 그때!
띠링!
[스킬 : 기억 회귀를 습득합니다.]
[상태창 특성 스킬 항목에 기억 회귀가 등록되었습니다.]
'상태창은?'
[특성 스킬] : 지정 소환/ 무작위 소환/ 소환 해제/ 기억 회귀
됐다.
시스템도 인정한 스킬.
'그럼 슬슬 일어나 볼… 헐?'
그러고 보니 뒤통수가 푹신푹신했다.
거위털 구스 베개라도 벴나?
심지어 꽃 냄새 같은 향기까지.
'어디서 이런 좋은 냄새가.'
머리를 옆으로 돌려 올려다보니.
"주인님?"
"...."
디아마트였다.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주혁.
"으음...."
"일어나셨어요?"
두근거리는 가슴.
'틈만 나면 기술이 들어오네.'
이럴 땐 모른 체하고 넘어가는 게 최선.
"제가 얼마나 오래 누워 있었죠?"
"한 3분? 계속 누워 계셔도 돼요."
"아뇨. 그럴 순 없죠. 무거울 텐데."
"하나도 안 무거워요. 헤헤헤."
가슴이 콩닥콩닥 쉴 새 없이 뛰고 있었지만.
태연한 척,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슬며시 일어나서.
아직 바닥에 널브러져 쓰려져 있는 피소환인들.
그리고 저쪽에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검선과 라직스.
"허허허, 저 기간트라는 기물도 집어넣고 소방차도 30대나 집어넣었다고?"
"호에!"
"그 몸집만 큰 용의 시체도 안에 들어 있고?"
"호엥!"
"실로 엄청난 무한공간 능력이오. 본도가 사는 선계에도 무한공간을 쓰는 선인이 있는데, 언젠가 기회가 오면 서로 만나게 해드리리다."
"후에?"
엘은?
기간트를 눕히고 마력 회로도 작업 중.
아마 3호기를 준비하려는 것 같은데.
"검선 님."
"오! 봉 대협, 잘 배워 오셨소?"
"네, 덕분에."
"다행이오. 쓸 만한 술법이지. 본도도 지옥 재판장에 아르바이트 겸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배운 술법이라오."
"네에."
무슨 신선이 아르바이트도 다녀?
거기도 살기 어렵나 보다.
아무튼 주혁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다시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이분들은 언제 깨어나죠? 기억 회귀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지...."
"기억 회귀는 벌써 끝났소. 다만 심상의 공간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깨어날 수 있으니."
임무 수행?
"본도가 처리한 그… 뭐더라? 도마뱀처럼 생긴 용새끼,"
"지고마룡 헬크라수스."
"아! 헬 뭐시기, 본도가 심상의 공간에서 그놈과 똑같은 용을 재현했소. 대결해서 이기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거요."
"네?"
그놈을 어떻게 잡으라고.
"염려하지 마시오. 해내고 올 테니. 혼자도 아니고 10명이나 달라붙을 텐데."
"그, 그런가요?"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믿소. 딱 2마리만 풀어놓았거든."
"...."
2마리라니.
지고마룡을 2마리?
"원래 3마리를 풀려고 했지만, 천천히 맛만 보라고, 어디 첫술에 배가 부를까?"
아니, 첫술을 뜨지도 못할 텐데요?
이거 어쩌나.
해낼 수 있을까?
* * *
강남 라직스 물산 본사.
오진숙 비서의 보고를 받는 정동훈 대표.
"여기 커스텀 바이크 최종 시안입니다. 전면에 검선이라는 글씨와 검 자루를 재현한 손잡이, 바퀴 휠과 발판도 검 디자인을 적용했습니다."
디자인 시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동훈.
이 정도면 봉 플레이어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 같은데.
'사진을 보내 볼까?'
디자인을 찍어서 톡으로 보내니.
잠시 후 도착한 답장.
띠링!
- 좋네요. 이대로 진행해 주세요. 최대한 빠르게.
마음에 든 모양.
그래서.
"지금 당장 작업하라고 전해요."
"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적어도 사흘 안에."
"알겠습니다."
"아참! 한 가지 더."
정동훈 대표가 책상 위에 놓인 기간트 피규어를 가리키며.
"여의도 공원에 있는 전시용 기간트 등판 광고 지워도 됩니다. 오늘 당장 작업 들어가죠."
"아… 그럼 허락을?"
"네, 받았습니다."
다행이다.
계속 눈에 거슬렸는데.
"곧 기간트 2호기 영상 뜰 거예요. 공장에 연락해서 판매 시작할 거니까 준비하라고 전하시고."
이번에 영상이 공개되면 피규어 판매도 개시할 예정.
방패와 검을 든 기간트 모형으로.
싼 건 플라스틱으로.
프리미엄은 금속으로 제작할 예정.
매우 잘 팔릴 것이다.
영상을 보면 안 사고 못 배기지.
자신도 출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판에.
* * *
백색 탑 17층.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아직 피소환인들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깨어나지?
이러다 영영 잘못되는 건 아니야?
걱정되는 마음에 검선에게 물어보니.
"곧 깨어날 거요. 다들 그만한 잠재력은 있는 자들이니, 봉 대협도 알지 않소?"
그건 아는데.
흔들어 깨우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한다.
가만히 놔두는 게 상책이라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여전히 심상의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피소환인들.
"쯧쯧, 생각보다 허약하군."
"…그야 검선 님 기준이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양반 신선이라더니.
함부로 믿으면 안 되겠다.
"하는 수 없군. 본도가 힘을 조금 써보지."
매우 귀찮다는 표정으로 쓰러진 피소환인들에게 다가가 여기저기 쿡쿡 찔러 대는 검선.
저걸로 된 건가?
제발 무사히 깨어났으면.
그 와중에 완성된 커스텀 바이크.
주혁은 라직스와 함께 밖에 나가 바이크를 가져다줬다.
검선이 뛸 듯이 기뻐하면서.
"하하하하! 본도의 정체성에 딱 맞는 커스텀이구려. 타 봐도 되겠소?"
"검선 님 바이크인데요. 얼마든지."
"고맙소!"
고마우면 우리 피소환인이나 어떻게 해봐요.
이런 바이크 100대도 사 드릴 수 있으니까.
부르릉! 부륵, 부르르륵!
뭐가 급한지 마이크를 타고 백색 탑 17층 도로를 질주하는 검선.
그의 뒤를 따르는 스마트폰.
주혁은 피소환인들 곁에 있었다.
그들이 깨어나길 기다리면서.
사실 무작위 소환 쿨타임도 돌아와 있었다.
당장이라도 새로운 피소환인들을 불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새로운 식구들을 맞이해?
'모두가 정신을 차린 후에....'
순간!
"끄응...."
신음과 함께.
벌떡 상체를 일으키는 광마.
오!
드디어!
"과, 광마 님!"
"…소환사."
"일어나셨군요. "
"미안하오. 노부가 부족한 터라 시간이 오래 걸렸소."
"아이고, 일어나셨으면 그걸로 됐죠."
다른 사람들은?
"예아!!!"
코사크도.
"전사는 힘겨웠다."
고방도.
"공자님, 걱정을 끼쳐드렸사옵니다."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복귀하였음을 신고합니다."
"빛이여!!!"
"저도 왔습니다."
"컹컹컹컹!"
다 정신을 차렸다.
신이 난 주혁.
"아유, 배고플 텐데, 다들 이거 하나씩 듭시다. 라직스 씨?"
"호엥?"
"선도 꺼내 봐요."
"호에!"
스슷, 스슷, 스슷....
그리하여 피고환인들에게 하나씩 주어지는 선도 복숭아.
"하나씩 드세요. 몸조리해야죠."
"이건...."
"안 됨다. 봉 소환사님 혼자 드셔야 함다. 저흰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이나 돌려주십쇼."
"맞소. 수량도 얼마 안 되는데."
"공자님만을 위한 선도가 되어야 할 것이옵니다. 거두어주시지요."
"전 전투 식량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되어야 제가 잘되는 거죠. 전 이미 많이 먹었어요."
거짓말은 아니다.
이미 5개나 먹었다.
"그래도...."
"절대복종?"
"이건 3원칙 3항으로 거부할 수도 있는 경우임다."
"나참, 백색 탑에서 쫓겨나고 싶은가? 그럼 기껏 맞춰놓은 몸도 다시 사라지겠고...."
"바로 먹겠습니다. 주십쇼."
그렇게 선도 하나씩을 들고 으적으적 씹어 대는데.
모두 다 황홀한 표정.
그랬다.
선도가 어디 보통 과일인가?
주혁도 처음 먹을 때 깜짝 놀랐다.
"쯧쯧, 저 아까운 것을...."
어느새 나타난 검선.
"뭐, 그럴 줄은 알고 있었소. 하지만 되도록 남에게 주지 말고 아끼시길."
"하하, 네네."
"아무튼 이별할 때가 된 것 같소."
"…어?"
떠난다는 말.
아니, 왜!
"좀 더 머물다가 가시면...."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나게 되면 반드시 헤어짐도 있는 법이니."
"그, 그래도."
"정해진 헤어짐은 빠를수록 좋소. 그럼… 아참!"
검선이 무한공간에서 뭔가를 꺼내 주혁에게 내밀었다.
털이었다.
수북했다.
"…털이네요."
"그렇소. 털이요."
"...."
털을 준다고?
무슨 의미지?
사람 당황스럽게.
"큼큼, 본도의 털이 아니오. 원숭이 털이지."
"아하, 원숭이 털...."
근데 왜 원숭이 털을?
"위급할 때 그대를 도와줄 수단이 될 거요."
"이 털이요?"
"힘에 부친다 싶거든 입김을 불어서 뿌려보시오. 한 절반 정도만 써도 충분하겠소만."
흠.
신선님이 주시는 건데 안 받을 수도 없고.
"어떤 원숭이에게서 이 털을?"
"아! 제천대성이라 불리는 원숭이 요괴인데."
"…넴?"
제천대성이라면?
'에이, 설마!'
검선이 검을 들었다.
"본도는 이만."
"어? 벌써?"
그리고 허공에다가.
서걱!
일검을 펼치니.
쩌저저적!
가느다란 금과 함께 생겨난 균열.
"부디 목적을 이루시길."
"자, 잠깐!"
쑤욱!
균열을 통해 사라지는 검선.
"가셨네."
"가셨군."
"가셨다."
"가셨슴다."
"가셨어."
"가셨어요"
"가셨사옵니다."
"후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많은 걸 주고 가신 검선 님.
본인에겐 겨우 바이크 한 대와 지구 물건 몇 가지 정도 챙겨드렸을 뿐인데.
"그럼 이제...."
솔직히 궁금해 죽겠다.
영혼과 육신의 주파수를 합일시킨 이들.
그리고 심상의 공간에서 수련해서 당당하게 깨어난 이들.
대체 얼마나 달라졌지?
"우리 잠깐 탑에 들어갔다가 올까요?"
"예압!"
빨리 들어갔다 와보자.
* * *
[대한민국 검은 탑(NO.1) 88층에 입장합니다.]
주혁은 1,001번 지구 검은 탑에 입장했다.
샌드 드래곤이 나오는 층.
아직 미공략 상층이고.
675번 지구 검은 탑에선 광마 님의 초승달 강기가 놈의 몸에 맞고도 흠집조차 내지 못했었지.
파악!
거대한 몸체의 샌드 드래곤이 모랫바닥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노부가 먼저...."
찌잉!
광마가 초승달 강기 하나를 발현했다.
그전보다 절반 이하로 작았지만 색깔은 더 짙었다.
압축된 듯한 느낌.
츠핏!
짧은 파공음과 함께.
아룡 샌드 드래곤에게 날아가서.
푸욱!
"케엑!"
놈의 몸을 완전히 관통해 버렸다.
"이야!"
수련의 효과가 있었구나.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찌잉, 찡, 찡, 찡, 찡....
치켜올린 광마의 손 위로 순식간에 생겨난 수백 개의 압축 초승달.
츠피피피피피피피핏!
마치 메뚜기처럼 무리를 지어 샌드 드래곤을 덮쳐 버렸다.
서걱! 서거걱, 서거거거거거....
과일이 믹서기에 갈리는 것처럼 조각조각 찢기는 샌드 드래곤.
'....'
뭐야?
저렇게 쉽게?
[아룡(亞龍) 샌드 드래곤 처치 1/1]
[88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아니? 뭐 하심까? 이 검왕 코사크, 몸도 안 풀었슴다."
"쯧쯧,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습니까?"
"여기 샌드 드래곤 못 잡는 사람 누가 있나?"
"혼자 주파수 맞췄어? 혼자 수련했어?"
"옛말에 늙으면 욕심이 많아진다고 했다."
"에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려고 잔뜩 준비했더니만."
"반복 공략 때는 광마 빼요!"
"백색 탑에서 청소나 하십쇼."
"호아앗!"
비난이 쏟아졌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르는 광마.
그리고.
[세계 공지 : 검은 탑 NO.1(한국)의 88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그 모습에 1,001번 지구 관리자들도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