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각 차원에 세워진 검은 탑.
그리고 탑을 공략하는 플레이어.
사실 검은 탑은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라갈수록 플레이어에게 불리해진다.
특히 81층부터 나타나는 거대 괴수는 한층 한층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그 어떤 플레이어도 이 구간을 넘기지 못했다.
여기 1,001번 지구는 조금 사정이 다르지만.
뭐, 좋다.
다 잡는다고 치자.
89층은 어떡할 건데.
무려 드래곤이 출몰한다.
마룡, 혹은 광룡 등, 타락한 파괴 성향의 진짜 드래곤이 말이다.
그리고 90층.
검은 탑 입장에선 든든한 버팀막.
사상 최강의 생명체 고룡, 에이션트 드래곤이 버티고 있는 난공불락의 방벽.
이것이 바로 1,001번 검은 탑 관리자들이 소환사를 포기하고 마음대로 탑을 올라가게끔 내버려둔 이유.
결국 멈출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 끝이 바로 드래곤 구간이다.
그 와중에 놈이 나타났다.
대한민국 검은 탑 88층에 입장한 소환사.
[드디어 왔습니다.]
파밧!
홀로그램 영상이 띄워졌다.
[달라진 건 없지?]
[네, 기존 구성원들 모두 그대로입니다.]
[핵폭발 금지 패치는? 변동 사항 있나?]
[여전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핵은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흐음.]
하지만 안심해선 안 된다.
매번 그래 왔다.
이번엔 못 잡겠지, 하면서 안심하고 있으면 눈 깜짝할 새에 공략하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그래서 샌드 드래곤도 공략당할 수 있다는 걸 가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89층 자유 계약 드래곤 광룡 하스푸스에겐 미리 언질을 줬다.
자만하지 말라고.
놈인 여태까지 봐 왔던 소환 플레이어 중 최강의 존재라고.
90층은… 뭐.
얘기해 줄 필요가 있나?
바로 그때!
[헉!]
깜짝 놀라는 관리자 엔지니어.
[왜? 무슨 일이야?]
[어음, 노, 놈의 레벨이… 90입니다.]
[…뭐?]
90레벨이라니.
레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88층 샌드 드래곤뿐만 아니라, 89층을 공략했다는 의미.
[저놈이 89층 자유 계약 드래곤을 잡았다고?]
[…그, 그렇겠죠.]
여기 지구 검은 탑은 아니다.
아직 미공략 상태.
그렇다면?
675번 지구다.
그곳의 검은 탑 89층 자유 계약 드래곤이 공략당했다.
[미치겠네, 대체 그놈들은 탑을 어떻게 운영한 거야?]
드래곤이 잡히도록 놔뒀어?
아무리 90층 고룡 에이션트 드래곤을 믿고 있다고 해도.
허접한 새끼들.
관리자로서 자격이 없다.
무슨 낯짝으로 변명하는지 들어나 보자.
[675번 관리자들에게 통신 날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야겠어.]
하지만.
[아, 안 됩니다. 연락할 수 없어요.]
이 새끼들이.
[우리가 전에 통신 씹었다고 복수하는 거 아냐?]
아무리 밉더라도 드래곤이 털렸다면 서로 협조는 해야지.
[…그게.]
엔지니어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현재 부재 상태입니다. 상태 메시지에 그렇게 적혀 있어요.]
부재라니?
[디자이너, 엔지니어, 메이커, 모두?]
[그런 것 같습니다.]
3명 모두 자리를 비웠다면?
[설마 상부에서....]
바로 그때!
[어!]
[응?]
[미, 미친!]
관리자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홀로그램으로 송출되는 88층 샌드 드래곤의 영상.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단 한 명의 피소환인에 의해 말이다.
세상에!
샌드 드래곤이 저렇게 쉽게?
* * *
광마가 보여 준 신위.
솔직히 놀랐다.
주파수를 맞춘 영혼과 육체의 위력이 이 정도였어?
'달라도 너무 달라졌잖아.'
초승달 흠집도 내지 못했던 놈을 지금은 초승달 강기 믹서로 갈아 버려?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심상의 공간에서 그 악룡과 대결하고 있었을 때, 검선께서 나타나셨소. 본신 대신 원신을 보냈다면서...."
원신?
게임 이름인가?
일종의 아바타 개념이란다.
영혼의 공간 비슷한 곳에서 검선의 원신이 각각의 피소환인들에게 개별 지도를 해 줬다는 말인데.
"오!"
다른 피소환인들은?
그래서 주혁은 내친김에 2번 탑 88층도 공략했다.
반복 공략도 했다.
총 5번의 88층 공략.
먼저 거대화 고방.
우리의 과묵한 형님.
과거 거대화 스킬이 몸을 부풀린 풍선과 같았다면, 영육 주파수 합일과 검선 가르침 이후의 거대화는 차원이 달라졌다.
고방의 근육은 압축, 또 압축되어서 더 강해졌고, 더 빨라졌으며, 더 민첩해졌다.
샌드 드래곤과 힘 겨루기 하다가, 어느새 놈의 배후로 넘어가더니 꼬리를 잡아 휙휙 돌린 후에 모랫바닥에 쾅쾅쾅쾅! 내팽개쳤다.
"캬! 아주 단순하고 무자비해! 이게 바로 야만이지."
"전사는 소환사의 칭찬이 마음에 든다."
"꼬리 있는 몬스터는 조심해야겠어요. 우리 고방 씨가 잡고 패대기치면 끝이니까."
코사크는?
그림자 발걸음과 하르트만 검식의 완벽한 조화.
"슉슉! 슈슈슛! 슈슈슈슈슈슈!"
"저기, 굳이 입으로 소리 안 내도 될 것 같은데...."
"효과음이 생생해야 실감 남다. 슈슈슛!"
그러더니.
스팟, 스팟, 스팟!
눈으로 좇을 수도 없는 몸놀림으로 샌드 드래곤에게 다가가.
서걱, 샌드 드래곤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서걱, 꼬리를 자르고, 서걱, 머리까지 잘라 버렸다.
"합격! 그랜드 마스터 코사크 씨."
"스스로가 전율스럽슴다. 완전체가 됐슴다. 문무겸비 코사크 아임까?"
"제갈량과 조자룡을 합쳐 놓은 거 같네요. 하하하하!"
"아유, 과찬임다. 헤헤헤헤."
바르딘의 광휘엔 선기의 영험함이 깃들었다.
언데드뿐만아니라 모든 삿된 것들을 무력화하는 신비의 빛.
그걸 방패에 적용하니.
"빛이여!!!"
방패에서 마치 광선처럼 뻗어 나가는 광휘의 빛.
광휘에 노출되자, 샌드 드래곤은 눈이 멀어 버렸다.
"어휴, 내 눈도 멀어 버릴 뻔했어. 방패 든든합니다."
"충! 주군의 영광을 위하여!"
베 원사의 경우도.
그녀는 마력이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사용자의 마력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지는 마총.
더불어 마력에 포함된 극미량의 선기.
그걸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예전엔 견제와 풀링 목적이었던 소형탄.
그러나 달라진 그녀의 소형탄은 샌드 드래곤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혔다.
놈을 처치하기 위해 아광속탄을 쏠 필요도 없었다.
연발 소형탄으로 피부에 구멍 내고 그 안에 대형탄 꽂아 넣으면 끝이었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강해진 파괴력만큼 마총의 반동도 커졌다는 건데.
파죽, 파주죽!
출렁! 추울렁!
소형탄 발사임에도 가해지는 치명적인 반동.
'…크흠.'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백발백중에 파괴력까지! 우리 베 원사, 진급합시다. 이 정도면 별 다세요. 원사는 개뿔 원사!"
"진급입니까?"
"그래요. 위관, 영관, 다 뛰어넘고 바로 준장 갑시다, 준장."
"…준장은 좀."
너무 올려 쳤나?
"대령?"
도리도리.
"…중령?"
"으음."
"소령 달아요. 앞으로 베 소령!"
끄덕끄덕.
이로써 고속 진급.
소환사가 피소환인 진급시키겠다는데 누가 말려?
"소령 베로니카 캘리버! 지휘관님을 향해 받들어 마총!"
9서클 대마법사 매켄지.
영혼과 육체의 주파수 합일.
심장의 새겨진 9개의 마력 서클이 더 두꺼워지고, 회전 속도는 더 맹렬해졌다.
주문과 주문 사이 시전 간격은 거의 사라졌다시피 했으며 화염 마법의 위력은 샌드 드래곤의 외피를 녹여 버릴 정도.
"우리 화염 매 마법사님, 과연 화끈합니다."
"뭐, 이 정도야, 사실 화염 마법 따윈 아무것도 아닙니다."
"넴? 그럼...."
"본 마법사가 진정으로 얻은 가르침은 바로."
순간!
스웅, 스웅.
매켄지의 배후에 뜬 스마트폰 2대.
"염력폰이지요. 진정한 촬영감독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아직 모자라지만."
"...."
그리고 견달래.
어쩌면 가장 혜택을 많이 받았을지도 모를 피소환인.
부적 한 장으로 샌드 드래곤의 육체를 묶어 버렸고, 부적 한 장으로 약화하고. 부적 한 장으로 드래곤을 바보로 만들었다.
선기로 인한 부적 능력 향상.
그렇다면....
"혹시 행운 부적도?"
"이미 최상의 행운력을 가진 공자님이신지라, 오히려 역효과를...."
"욕심부리지 말라는 말이죠?"
"황송하옵나이다."
반면 제페트와 혈랑,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다.
강해지긴 했지만 큰 임팩트는 없었다.
아마도 등급 문제 때문일까?
"괜찮아요.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네에."
"끼잉."
알리아마리 또한....
뭐, 그녀는 연금술사니까.
탑 등반에도 잘 행차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그래도.
"본 소환사, 여러분의 눈부신 성장에 감격했습니다. 다 함께 자축의 박수를!"
짝짝짝짝짝!
"아울러 아낌없이 주고 가신 검선님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비록 한 번의 만남이지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지구를 구원해 주신 검선님.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더 좋은 바이크, 더 좋은 간식, 더 좋은 술, 많이 많이 준비해 놓을게요.
총결산.
누적 배지 214개.
남아 있는 배지는 81개가 되어야 하지만, 이번 비욘드 초월 무작위 소환으로 배지 30개가 소모되는 바람에 현물 배지는 51개.
특전 2개는 받겠다.
당장 확인하지 말고 모아서 까 버려야지.
자, 이제 어떡하지?
89층으로 올라가나?
"문제없소, 설령 90층이라고 해도."
"맞슴다. 지고마룡이든, 에이션트든, 바꿔치기해도 잡슴다. 2마리도 잡슴다."
"거뜬하옵나이다. 다만 여기 탑이 아니라 675번 지구부터 올라가심이."
그렇지.
975번 지구도 갔다 와야 한다.
관리자 직권남용으로 89층과 90층의 임무 대상이 교체됐으니, 지금 675번 지구 검은 탑엔 89층 몬스터가 들어앉아 있다.
지고마룡도 잡았는데, 그놈쯤이야.
놀러 간다는 느낌으로 다녀오자.
'그러고 보니 아직 보상도 못 받았네.'
오류 수정됐나?
가 보면 알겠고.
하지만 그 전에.
"새 식구 맞이하러 갑시다."
무작위 소환 고고!
"참으로 오랜만이옵니다."
"예압! 신입 교육 걱정 마십쇼."
새로운 영혼들에게 자랑해야지.
우린 드래곤도 잡는 파티라고.
그리고 주혁이 88층 샌드 드래곤을 5번이나 잡고 있을 때쯤.
너튜브에서 영상 하나가 떴다.
제목은.
<우리 친구 마그누스 기간트 2호기를 추모하며.>
영상 설명 : 생전 고인의 개쩌는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 2호기 영상?
└ 개쩌는 건 맞는데, 추모라니.
└ 또 죽었어?
└ 3호기도 나오나?
* * *
선계(仙界).
인간의 격을 초월해서 등선한 신선들이 모여 사는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는 선계는 어떤 곳일까?
보통은 이렇다.
험준한 산속에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선학들과 영물들이 노닐고, 널따란 반석 위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는 별유천지(別有天地).
하지만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벗어나는 희한한 선계(仙界)도 존재한다.
차원 이동의 영향으로 평행 우주 지구 문명이 이식된 선계.
그래서 이곳이 선계인지, 21세기 지구인지 분간이 안 되는 곳, 도저히 선계라고 부를 수 없는 세상.
그런 선계의 도심지.
이곳저곳에 세워진 건물들.
그중에서 가장 높이 솟아오른 빌딩.
선계 멀티플렉스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
부르륵, 부릉.
검선의 바이크가 쫙 깔린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 멀티플렉스에 도착했다.
"어이, 검선."
"어이, 귀곡."
귀곡이라 불린 신선이 검선의 바이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못 보던 바이크군."
"하나 장만했지."
"얼마 주고? 최소 선도 30,000개는 줘야 할 것 같은데, 할부로 긁었나?"
"선물로 받은 거야."
"으잉? 선물? 선계 법 위반일 텐데, 그러다 압수당해!"
"괜찮아. 다른 지구에서 받아 온 거니까."
눈을 끔뻑거리며 의문을 표하는 귀곡 선인.
"…무슨? 우리와 연결된 지구 말고 완전히 다른 지구?"
"맞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별개의 지구, 그렇지 않아도 보여 줄 것이 있으니, 다 모이라고 해."
소문이 퍼졌다.
검선이 선계와 연결된 지구가 아닌 다른 평행 우주 지구에 갔다 왔다.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신선들이 가득 모였다.
그리고 검선이 찍어 온 영상이 상영됐다.
검선의 설명도 가미됐다.
봉대협이라는 사람이 사는 평행 우주 지구의 현 상태.
그 지구에 어떤 위험이 닥쳤는지.
인류는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는지.
그러나 신선들은 검은 탑이고, 탑 공략이고, 괴물이고, 지고마룡이고, 그것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검선이 증거랍시고 무한 공간에 넣어 온 물건들을 보며 탐욕의 눈빛을 번뜩였다.
"허어, 사과 패드 프로 8세대라니, 저쪽 지구에선 벌써 출시됐나? 여긴 아직 예약 판매도 안 하고 있다던데."
"벌써 출시됐지. 하이엔드급으로 받았고."
"안드로메다 28S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 향상됐던가?"
"디지털 200배 줌이더군."
"검선, 그 술 뭔가? 조니 위커 퍼플 라벨이라는 것도 있었어?"
"최고 등급이야. 한 병에 300만 원이 넘어."
신선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즐기며 말을 이어 가는 검선.
"그리고 그거 아나?"
"뭘?"
"우리가 봤던 드라마 말일세, 재벌집 셋째 아들."
"응? 원작 웹소설 결말 말아먹은 그거?"
"그래, 그쪽 지구에도 드라마화됐더군. 제목은 재벌집 넷째 아들."
"허어, 겨, 결말은?"
"시원한 사이다 결말이야. 원작을 충실하게 따른."
"오오오! '앗 시발 꿈!' 결말이 아니라고?"
"그렇지. 이 패드 안에 다운 받아 왔네. 조금 있다가 상영하지. 관람료는 선도 10개."
웅성웅성.
시끄러워지는 상영관.
그런데?
"그 귀한 물건들을 다 받아 오면서, 당신은 뭘 주고 왔나?"
"…으음."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리는 검선.
천천히 입술을 떼면서.
"봉대협 조력자들의 조화롭지 않은 신체를 선기로 바로 잡아 줬어. 후우, 얼마나 힘들었던지, 고생 좀 했네."
"겨우?"
"아! 선도도 주고 왔고."
"몇 개나?"
"꽤 많이."
"그러니까 몇 개? 속이려고 하지 말고."
검선은 우물쭈물하다 대답했다.
"…백여 개 정도?"
"헐?"
"선도 백 개?"
"미쳤나?"
"저저저저...."
벌떡 일어나서 검선에게 삿대질하는 신선들.
"내 이럴 줄 알았다."
"아주 도둑놈이군."
"고작 선도 백 개로 이 귀한 물건들을 챙겨 왔다고?"
"흉악한 사기꾼이로다."
"검선 사기꾼인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은 너무 했어."
"사과 패드만 해도 선도 3,000개는 훨씬 넘겠구만."
그러자 검선이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서, 선도가 그것밖에 없어서, 아참! 원숭이 털도 주고 왔네."
"원숭이 털? 아니 여의봉을 주고 와도 모자랄 판에 털? 지저분한 털 몇 가닥 주고 온 게 자랑이야?"
"양심도 없구만."
"최소한 검은 탑 , 뭐시기는 모조리 해결해 주고 왔어야지."
"옳은 말이야. 그래야 인연의 끈도 더 선명해질 테고,"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 두고 후일을 기약했어야 했어."
"그래, 혹시 알아? 우리도 소환될 수 있는 거잖아."
"소탐대실이로군. 검선의 탐욕이 일을 그르쳤어."
"우리도 그쪽 차원 최고 부자 봉대협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비난은 끝이 없었다.
"검은 탑은 개뿔, 나 같으면 그딴 거 발로 툭 차서 다 부수고 왔다."
"본선이 소환되면 90층이 아니라, 900층도 공략하지."
"정 힘에 부치면 염라 부르면 되잖아."
"상제 그 영감도 할 일 없어 맨날 놀더만,"
"멍청해서 그래, 칼 써서 등선한 신선들은 원래 머리가 잘 안 돌아가."
"왜 싸잡아서 비난이야? 검선이 그런 건데."
급기야.
"검선을 황천계로 보냅시다. 사기와 비리 혐의로 초열지옥에 처넣어!"
"그전에 무한 공간부터 토해 내고."
"맞아! 다 꺼내."
"안 꺼내면 확 일러 버린다?"
"지금 당장 전화할까?"
검선은 한숨을 푹 쉬었다.
'씨발, 괜히 얘기했네.'
자랑하지 말고 혼자 먹을걸.
어쩔 수 없이 물건 풀어야겠다.
입막음해야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면 매우 곤란해지니까.
209화
초월 소환으로 오신 검선님.
많은 걸 주시고 선계로 돌아가셨다.
그동안 밀려 있던 일들을 차례대로 처리해 보자.
675번 지구 검은 탑 오류 수정이 끝났는지 가 봐야 한다.
보상은 받아야지.
또한 라직스 아공간에 보관 중인 지고마룡의 사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한다.
무작위 소환도 미뤘던 일 중 하나.
그래서 주혁과 피소환인들은 펜트하우스 거실에 모였다.
마리와 혈랑 빼고 모두 11명의 피소환인들.
현재 주혁의 상태창 카탈로그에 등록된 피소환인들은 모두 13명, 그리고 특성 동시 소환 숫자도 13명.
딱 맞는 듯하지만 사실 자리가 남는다.
연금술사 마리는 보통 백색 탑 17층, 자신의 집 방구석에 있는 경우가 많기에 선발보다는 주로 후보 선수.
또한 혈랑의 위치도 애매하다.
원래는 라직스 차원대머슴의 탈 것 역할.
하지만 라직스가 르스스알로 승급한 후, 태앵, 팽그르르, 기동력이 몰라보게 향상되어 요즘은 잘 타고 다니지도 않는다.
지금 혈랑의 위치는 백색 탑에서 집 지키는 개.
굳이 데려갈 이유가.
그래서 2자리가 비었다고 보면 된다.
마침 무작위 소환 가능 숫자도 둘.
이번에 티켓을 2장 쓸 예정.
하나는 LSSR 등급 확정 소환 티켓.
다른 하나는 스킬 쿨타임 초기화 티켓.
"자, 불러 볼까요?"
긴장되는 순간.
새로운 식구들을 맞이한 게 얼마 만인지.
"봉 소환사님."
"왜요?"
"효과음 넣슴까?"
"음, 뭐, 마음대로."
"예압! 두구두구두구두구...."
그러자 매켄지가.
"쯧쯧, 두구두구가 뭐냐? 촌스럽게."
"넴?"
"기대감을 증폭시키고, 극적 효과를 키우려면...."
쿠궁! 두두둥! 콰앙!
거실에 울려 퍼지는 매켄지의 배경음악 마법.
아울러 시각 효과 마법도.
펑펑! 작은 불꽃놀이와 번쩍번쩍, 위에서 비추는 조명들.
"이 정도는 되어야지."
"...."
코사크가 부들부들 떨었다.
또 자신의 고유 역할을 빼앗겼다.
반면 매켄지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고.
아아.
코사크 씨, 저건 어쩔 수 없어요.
각자의 특기가 있는 거잖아요.
몇 가지는 매 마법사님에게 양보해 줍시다.
어쨌든 첫 번째 무작위 소환.
먼저 LSSR 등급 확정부터.
찌이익!
주혁은 티켓을 찢었다.
[LSSR 등급 확정 소환 티켓을 사용하셨습니다.]
[다음 무작위 소환 시 LSSR 등급의 피소환인이 확정적으로 소환됩니다.]
영혼의 세상 르스스알 피소환인님.
확정 티켓 사뿐히 지르밟고 오세요.
"무작위 소환."
[무작위 소환을 시작합니다.]
시작됐다.
화아아아앗!
팬트하우스 거실을 가득 채우는 다채로운 빛무리.
'100일 만인가?'
마도 공학자 엘의 피소환인 자격 회복 페널티로 받은 무작위 소환 100일 중지.
그 길고 긴 기다림 속에서 소환된 영혼은 과연 누구?
정체를 밝혀 주세요.
콰광!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파밧!
집중 조명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
"…으어?"
사람인가?
아닌 것 같은데.
"소환. 감사."
"…네네."
놀라면 안 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
무작위 소환의 가능 범위.
인간 및 아인종.
아인종이라고 함은 인간과 유사한 종족까지도 포함한다.
우리 차원대머슴 라직스도 아인종이지 않나.
생김새로만 따지면 현재 소환된 피소환인은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일단 거구, 거대화 고방보다는 조금 작다.
힘이 세시겠네.
그리고 팔이 6개.
양 옆구리에 3개씩.
많이 들고 다니시겠네.
다리는 삼발이처럼 3개.
이동에 안정적이시겠다.
머리는 사람같이 생겼으며 1개.
덕분에 인간처럼 보이신다.
그러나 눈이 앞뒤로 2개씩 총 4개
시야가 광범위하시겠다.
직업은?
전투 클래스인가?
<카탈로그 : 땅을 사랑하고 땅과 함께하는 엘파민 종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농부.>
- 이름 : 두우.
- 등급 : LSSR(레전드 스페셜 슈퍼 레어)
- 유형 : 농부(엘파민)
종족이 엘파민?
혹시 아는 사람 있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들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생소하다는 뜻.
- 두우는 땅의 정령들에게 사랑받은 농부, 그가 경작하는 농작물은 언제나 축복받았다. 병충해 피해를 비껴가는 건 물론이고, 풍작은 기본, 품질도 최상급이었다.
- 혼자서 농사를 짓지만 경작 범위는 방대했다. 파종에서 수확까지 걸리는 시간도 매우 짧았고. 농사 실력 하나로만 따지만 거의 초월급.
- 그렇게 두우는 200년 동안, 죽는 날까지 농사에 전념하다가 땅의 정령들에게 축복을 받으며 생을 마감했다.
농부.
생산직.
'아니, 무슨 탑 공략 피소환인 중에 농부가.'
일꾼이야 채집 특성이 있긴 하지만.
농사지어서 몬스터 때려잡나?
하지만 속단해선 안 된다.
당장 장르 소설 제목만 훑어봐도 <농부가 너무 강함>, <농부 스킬만 찍었는데 세계 최강>,
그래서 푸근한 미소와 함께.
"어서 오세요.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좋은 분이 오셨네."
피소환인들도 한마디씩.
"아유, 미, 믿음직하게 생기셨슴다."
"그렇군. 손이 6개니까 농사 잘 짓겠어."
"환영하옵니다."
"앞으로 상추 걱정은 없겠군."
"그러네요. 삼겹살 구워 먹을 때 편하겠어요."
"요즘 배추값, 고춧값 비싼데."
"우리 차원대머슴 간식인 당근 농사도 가능하겠죠?"
"후에에...."
농부 두우도 히죽 웃으며 답했다.
"환영 감사. 마음에 새김."
웃으니까 그래도 사람 같다.
아무튼.
"두우 씨, 백색 탑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시죠?"
"영혼의 세상. 가장 유명한 이슈. 알고 있음."
말투가 희한하긴 하지만.
"지금 당장 입주권 받으실래요?"
"기대 만발. 당장 입장 희망. 농사지을 땅 탐색."
바로 들어가서 농사짓고 싶다는 것 같은데.
괜찮을 것이다.
백색 탑 17층은 넓으니까.
게다가 너른 들판에 흐르는 강까지 농사에 딱 좋은 환경.
순간!
띠링!
[업적 : 최초로 LSSR 등급 히든 클래스 피소환인 소환에 성공했습니다.]
'으잉?'
업적이라니.
그것도 히든 클래스 피소환인.
'그게 농부였어?'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뭐지?'
[백색 탑 17층 및 1층의 생태계 환경이 농사에 맞게 변화합니다.]
[백색 탑 17층 및 1층 강에서 지구 생태계의 수중 동식물 및 각종 물고기가 서식합니다.]
[백색 탑 17층 및 1층 들판에서 지구 생태계의 미생물 등 각종 생명체가 서식합니다.]
'....'
그동안 없었나?
어쨌거나 농사에도 적합해지고, 지구 생태계의 생명체들까지 산다고?
'완전 자급자족의 백색 탑이네.'
사실 원래 백색 탑은 피난처 개념이었다.
세상이 망해도 여기서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잊을 만하면 상기시켜 주는구나.'
아무튼 주파수 조절은 나중에.
농부 두우에게 입주권을 꺼내 주니.
스스슥! 입주민 등록 완료.
"이제 입주민이 되셨어요."
"감사, 소환 해제 부탁."
"그래요. 두우, 소환 해제."
스팟!
백색 탑으로 들어간 농부 두우.
좀 이따가 봐요, 농부님.
농사지으려면 종자도 필요할 텐데, 나중에 사서 가야 하나?
그래도 만족한다.
괜찮은 피소환인이다.
아인종이지만 함께 오래 지내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그리고 두 번째.
스킬 쿨타임 초기화 티켓을 찌익, 찢어서.
"한 번 더 갑니다. …무작위 소환."
화아아아앗!
펜트하우스 거실에 퍼지는 두 번째 빛무리.
그리고.
파앗! 나타나는 인간의 형체.
이번엔 누구냐?
일단은 인간인 것 같다.
팔 2개, 다리 2개의 평범한 사람.
체구는 약간 작다.
그런데?
"어우, 어디 창문을 열어 놨나? 왜 이렇게 추워?"
"싸늘함다."
"흠흠, 무릎이 시리군."
"공자님, 이분...."
응?
그러고 보니 방금 소환된 피소환인의 몸이 아직 하얗다.
마치 서리가 낀 것처럼 얼어 있었다.
…무슨 얼음덩어리가 왔어?
몸을 꼭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는 의문의 피소환인.
정신을 잃은 듯 두 눈을 꼭 감고 있는데.
"괘, 괜찮아요? 여보세요?"
"정신을 잃은 것 같슴다."
"추워서 그런가? 난로 가지고 와요. 좀 녹여 보게."
"제가 먼저 깨워 보겠슴다.
찰싹, 찰싹.
얼음덩어리 피소환인의 얼굴을 때리는 코사크.
"일어나십쇼. 살아 있슴까?"
찰싹, 찰싹.
순간!
"으힉?"
"왜 그래요?"
"소, 손바닥이 얼굴에 달라붙었슴다."
"헐!"
"전사가 떼 주겠다."
"으아아아! 피, 피부 벗겨진다."
"본 마법사가 녹여 주지. 파이어 핸드."
"으엑! 더 차가워짐다."
"호엥?"
"안 됨다. 차원 대머슴, 만지면 달라붙슴...."
"…호아아아앗?"
"아이고, 내가 달라붙는다고 했잖슴까?"
접촉하면 손이 달라붙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냉기였다.
대체 어떤 피소환이지?
왜 이런 상태로 소환됐고?
<카탈로그 : 인간 빙정 북해 빙궁의 소궁주.>
- 이름 : 백단아
- 등급 : R(레어)
- 유형 : 무림인(인간)
- 현신 기한 : 6시간
북해 빙궁?
강호인이야?
인간 빙정은 또 뭐고.
- 백단아는 북해 빙궁의 소궁주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빙궁 구성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기재. 언젠가는 빙공의 극의를 이뤄 내 강호에 북해 빙궁의 이름을 널리 떨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하지만 마교의 발호, 천마의 북해 침략으로 궁주인 아버지와 대부인 어머니, 그리고 빙궁의 무사들이 전멸당했다.
- 복수를 맹세한 백단아, 그녀는 빙궁의 비고에 들어가 만년 빙정을 삼킨 후, 빙공의 완성을 꿈꾸었지만, 그만 주화입마에 들어 만년 빙정에게 먹혀 인간 빙정이 되고 말았다. 그게 향년 25세, 백단아의 최후였다.
인간 빙정 백단아.
인간 성검에 이어 이젠 인간 빙정이라니.
덜덜덜덜.
인간 빙정 상태에서 사망한 백단아.
그래서 사망 직전의 육체를 그대로 가지고 소환된 모양.
"허어, 북해 빙궁의 소궁주였군."
"잘 아세요?"
"노부와 같은 강호인지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어떤 곳인지는 대충 알지."
"아!"
강호에서도 가장 추운 곳에 위치한 빙궁.
그래서 빙궁 사람들은 저마다 빙공의 고수들이라던데.
"만년 빙정은 북해의 보물이요. 어찌 보면 드래곤 하트보다 더 귀하다고 할까. 보통은 만년 빙정과 가까운 곳에서 빙공을 수련하는 게 원칙인데.... 그걸 통째로 무식하게 삼켜 버렸구나. 쯧쯧."
간접적으로 기운을 받아들이는 용도의 만년 빙정.
그걸 직접 먹어 버렸으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용하오. …곧 죽겠지만."
이거 어쩌나?
부모를 잃고, 북해 빙궁을 침략당하고, 인간 빙정 신세로 전락한 백단아.
심지어 소환되자마자 죽을 신세라고?
그래서 알(R), 레어 등급일지도.
소환하면 곧 죽을 테니까.
서두르자.
뭐라도 해 봐야지.
우선 입주권을 손에 꼭 쥐여 주고는 귀에 대고 속삭이면서.
"입주권 받아요,"
스스스슷!
다행히 의식은 있는 듯.
이름이 새겨졌다.
그럼 등록된 거다.
"백단아 소환 해제."
스팟!
그리고 다른 피소환인들도 일괄 소환 해제.
주혁도 백색 탑 입장.
* * *
백색 탑 광장.
그곳에서 백단아는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한의 한기.
입술이 새파래졌다.
"사망 일보 직전임다."
"으음."
그런 것 같다.
희박한 확률을 뚫고 바깥으로 나왔지만 곧 죽을 위기에 놓인 백단아.
"영혼과 육체의 주파수를 맞추면 나아질까요?"
"노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생전에 이미 만년 빙정에 먹혀서 인간 빙정이 된 상태에서 죽었소. 주파수를 맞추면 더 심해질지도."
그렇다.
기억 회귀가 주화입마를 치료하는 술법은 아니다.
추우니까 불을 피워 주면 괜찮으려나.
그래서 매켄지에게.
"뭔가 따뜻해지는 거 없을까요?"
"본 마법사가 열기를 피워 보겠습니다."
그렇지.
9서클 대마법사 아닌가.
그것도 화염 마법의 거장.
"파이어 월!"
화륵!
백단아의 몸 주위에서 생성되는 불의 벽.
…됐나?
따듯해졌어?
그런데?
스스스스스....
백단아의 몸에서 휘몰아치는 냉기.
만년 빙정이 뜨거운 열기에 저항이라도 하는 듯 더더욱 거세게 냉기를 뿜어 댔다.
"파이어 월!"
한 번 더 중첩.
스스스스스스스.
하지만 만년 빙정도 더 강한 냉기 발현.
왜 그런 거지?
설명은 광마가.
"매 마법사의 화염 마법이 일가를 이루긴 했지만, 만년 빙정 또한 영성을 가진 기물. 본능적으로 열기에 반항하고 있소."
영성을 가졌다니.
그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건데.
"흥! 이까짓 빙정쯤이야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봅시다."
네, 힘내세요.
화염의 대마법사님, 화이팅!
그러나 광마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말했다.
"굴복이야 시키겠지, 허나 이 여협은?"
"아!"
"견딜 수 있겠나? 아마 그 전에 죽어 버리고 말걸?"
그러네.
지금도 곧 죽을 판이다.
"소녀도 그렇게 생각하옵나이다. 만년 빙정은 평범한 물건이 아니옵니다. 열기로 냉기를 굴복시키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옵니다."
어떡하지?
이대로 놔두기엔 뭣하고.
저 냉기를 확 빼앗을 방법이 없을까?
'…가만!'
방법이 떠 올랐다.
될지는 모르겠지만.
"베 원… 아니 베 소령님."
"소령 베로니카 캘리버."
"속성 흡수로 냉기 한번 빨아들여 보세요. 마총 한계까지."
"네! 알겠습니다."
백단아에게 다가가는 베 소령.
속성 흡수 실행.
쯔즈즈즈즈즉!
마도 공학의 궁극 병기 최신 버전 마총이다.
뭐, 그래도 티끌도 안 되는 속성 흡수량이겠지만....
그때였다.
변화가 일어났다.
스르르륵.
냉기가 움츠러들고 있었다.
"오!"
"된다, 돼!"
"빙정 새끼, 지 기운 안 뺏기려고 도망침다."
예상대로다.
만년 빙정은 영성을 가졌다.
즉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다를 바 없다는 의미.
자신의 냉기를 훔쳐 가는 존재가 나타났는데 당연히 숨어야지.
"하하, 소환사 그대는 역시 영민하시오."
"신의 한 수이옵니다."
"확실히 문무겸비 이 코사크의 소환사가 될 자격이 있으심다."
뭘 이거 가지고.
"더 빨아 보세요."
"먼저 흡수한 속성부터 해소시키겠습니다."
베 소령이 총구를 하늘로 돌렸다.
그리고.
지이이잉!
파쭉!
출렁!
대형탄 발사.
퍼엉!
하늘에서 터지는 대형탄.
그러자.
"…와!"
"후에?"
"허어."
"어머?"
"화이트 백색 탑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
어우야, 분위기 좋네.
쯔즈즈즈즈즉!
다시 속성 흡수.
이렇게 몇 번 빨아들이고 나니.
백단아의 육체에 어렸던 한기가 거의 사라지고 혈색도 제 색깔로 되돌아왔다.
표정도 한결 편안해진 느낌.
"괜찮아진 것 같죠?"
광마가 백단아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기 흐름이 안정적이오. 고비는 넘겼군."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백단아.
"지친 상태라서 그렇소.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지켜보자.
뭐, 또 만년 빙정이 고개를 쳐들면 속성 흡수로 빨아 당기면 된다.
그리고 방법 하나 더.
'피소환인 등급 상승의 룬이....'
2개 정도 있다.
등급을 올리면....
'스알이나, 스스알만 돼도 냉기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말고.
나중에 정신 차리면 이야기 나눠 봐야지.
이로써 무작위 소환 모두 종료.
결과는?
이번 소환은 실패일까?
르스스알 피소환인은 농부, 생산직이고, 북해 빙궁 소궁주는 만년 빙정에게 먹힌 인간 빙정 상태.
그러나.
'성공, 실패가 어디 있어?'
식구가 될 사람들인데.
그리고 냉정하게 따져도 실패는 아니다.
지금도 저 들판에서 다리 3개로 걸어다니며 농사지을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는 두우.
히든 클래스 아닌가?
업적도 떴다.
보상으로 생태계도 변했다.
특히 백색 탑 17층 들판을 가로지르는 강.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겠지.
낚시도 가능할 듯싶은데.
'날 잡아서 아버지와 같이 낚시나 해 봐야지.'
하지만 그전에.
미뤄 뒀던 두 번째 일 처리하자.
엘리베이터 타고.
675번 지구 검은 탑에서.
* * *
주혁은 피소환인들과 함께 백색 탑 1층으로 왔다.
베 소령은 두고 왔다.
혹시라도 백단아의 몸에서 만년 빙정이 또 기어 나올지 모르니까.
지금 이 인원만으로 충분하다.
원래 90층 몬스터는 잡은 상태고, 지금은 그보다 못한 놈이 90층 지키고 있을 텐데.
먼저 바깥으로 나가 피소환인들을 불러냈는데.
순간!
띠링!
[독일 검은 탑이 정상화되었습니다.]
"오!"
그럼?
[89층 공략 보상을 판정합니다.]
드디어 보상받는구나.
210화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들의 직권 남용.
그로 인해 교체된 89층과 90층의 몬스터.
솔직히 지고마룡이 나타났을 때 암담했다.
죽는 줄 알았다.
특히 믿었던 마검 전사 기간트 2호기가 놈의 브레스로 살살 녹아 버렸을 때는.
저걸 어떻게 잡아?
샌드 드래곤에게도 맥을 못 추던 우리 피소환인들인데.
하지만 두둥!
검·선·강·림.
동시에 지고마룡은 반갈죽.
관리자들아, 많이 놀랐지?
그래서 오류가 생긴 거잖아.
오류 수정했으면 보상 내놔.
하지만 그전에 사과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
안 하네.
소인배 새끼들.
하지만 참아 줄 수 있다.
상남자니까.
대신 보상은 제대로 줘.
[지고마룡 헬크라수스 처치 1/1]
[89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 : 최상급 마정석 100kg]
최마 100kg.
"쯧, 드래곤 하트는 안 주냐?"
하긴! 드래곤 하트 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지고마룡 사체를 통째로 업어 갔는데.
그거 해체하면 마룡의 드래곤 하트 나오겠지.
[세계 공지 : 지고마룡 헬크라수스가 소멸했습니다.]
[계약에 근거해서 검은 탑 89층의 몬스터가 용아병으로 대체됩니다.]
음?
복사본 대체가 아니고?
자유계약 경험자인 디아마트의 설명.
"어떻게 계약하느냐에 따라 달라요. 복사 영혼으로 재활용될 수 있고, 아니면 완전하게 탑에서 이탈할 수도 있고."
아하.
"영혼 재활용은 탑에 종속되기 때문에 보통은 잘 안 해요. 나중에 부활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럼 반복 공략은 못 하겠네.
공략은 한 번으로 끝.
그리고.
띠링!
[업적 : 최초로 타락한 에이션트 드래곤을 처치했습니다.]
예상했다.
업적 안 뜨면 이상한 거지.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기대되네.'
[아이템 : 전능의 에테르 변환 말뚝 토템이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이게 뭐야?
전능의 에테르 변환 말뚝 토템이라니.
인벤토리에서 꺼내 확인해 보니.
텐트 칠 때 땅에 박는 거무칙칙한 쇠 말뚝처럼 생긴 물건.
크기도 그만큼.
'아이템 정보는?'
<전능의 에테르 변환 말뚝 토템>
효과 : 말뚝에 특정 기운을 주입하면 전능의 에테르가 그 특정 기운으로 변환됩니다. 땅에 박으면 선택한 특정 기운이 활성화되어 주위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계 : 땅에 박아야 효과가 생깁니다. 한번 박으면 뽑을 수 없습니다. 영향이 미치는 범위는 말뚝 토템을 중심으로 반경 1m 범위입니다.
특징 : 주입할 수 있는 기운의 종류는 제한이 없습니다.
'흐음.'
뭔가 괜찮은 것 같은데.
피소환인들에게 설명해 주니.
"수련용 말뚝이군."
"그런가요?"
자세하게 말해 주는 광마.
"내공을 주입하면 내공 수련에 도움이 되고, 마력을 주입하면 마법 수련에 도움이 되고, 신성력을 주입하면 신성력이 올라가겠고, 냉기를 주입하면 만년 빙정처럼 변해서 빙공에 도움이 되겠고."
아하!
특정 기운의 능력 향상을 도와주는 아이템.
그래서 범위도 겨우 반경 1m.
적당한 곳에 박아 두고 바로 그 옆에서 수련하라는 의미.
우리 피소환인들 성장에 도움이 되겠다.
어떤 기운을 주입할지는 나중에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세계 공지 : 검은 탑 (독일)의 89층 공략 등급 EX를 달성하셨습니다.]
'EX라고?'
[EX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30개, 총 32개를 수여합니다.]
아싸!
배지 32개 획득.
그렇지.
우리 초월자 검선님이 직접 하신 공략인데.
당연히 EX 등급이지.
'EX 등급 공략 보상은 플래티넘 배지 30개 추가구나.'
자, 이제 90층 등반해 볼까?
능력이 기가 막히게 향상된 피소환인들의 활약 감상하는 걸 어떻게 참아?
만약 위험한 일이 또 발생하면....
그래도 괜찮다.
검선님이 주고 가신 원숭이 털도 있고.
* * *
675번 지구 관리자들.
그들은 살아남았다.
처벌을 받긴 했지만.
인과율 규칙 위반에 대한 반작용.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다.
영혼에 작용하는 형벌.
차라리 유배를 갔으면 갔지, 너무나 참기 어려운 고통.
거의 영혼 붕괴 직전까지 다다랐다.
까딱했으면 영혼이 소멸했을지도.
후유증도 심각했다.
영혼의 격이 하락하여 탑 관리에 관한 직무 권한도 박탈당했다.
임무를 새롭게 설계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보상이나 시스템에 개입할 수도 없다.
그저 관찰만 할 수 있을 뿐.
그 와중에 90층 입장한 소환사.
[왔다.]
[왔네.]
[왔어.]
[그런데 초월자는 없군.]
[자기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갔을걸, 오래 머무르지 못하니까.]
[기고만장했구나. 초월자도 없이 드래곤을 잡겠다고? 아무리 고룡이 아니라고 해도....]
[글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오지 않았겠어?]
[....]
그렇다.
방법을 찾았겠지.
저 새끼가 그런 생각도 안 하고 움직였을까?
언제나 준비된 놈이었다.
머리 꼭대기에서 논다.
89층에서도 그랬다.
초월자 소환이라는 궁극기를 보유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저 소환사는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났다.
지금은 실수만을 바라야 할 처지.
그건 그렇고.
[1,001번 지구에서 계속 통신 요청이 들어오는데, 어떡할까?]
[씹어.]
[그러려고 했어.]
정보 교환 같은 건 결코 없다.
그놈들도 똑같이 당해 봐야 한다.
망할 새끼.
초월자 소환을 왜 여기서 써?
지 세상 탑에서나 쓸 것이지.
* * *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의 사명은 자연을 보호하여 인류가 세운 문명과의 조화 및 균형을 유지하는 것.
만약 인류가 과도하게 환경을 파괴하면 즉각 개입해서 문명을 삭제해 버린다.
매번 그런 식이다.
드래곤은 절대 특이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레드 드래곤은 인간 문명에서 불이 진화하는 걸 막고.
실버 드래곤은 강과 하천, 바다의 오염을 방지하고.
블루 드래곤은 천연자원과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제한하며.
골드 드래곤은 학문의 발달을 통제한다.
어떤 분야든 발전의 기미가 보이면 아예 싹을 지워 버린다.
그래서 인간의 세상은 변화와 발전이 없다.
수천, 수만 년 지나도 거의 고정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사실 웃기는 짓이다.
조화와 균형?
실상은 균형을 핑계로 인류의 진화를 부수는 파괴자 역할 아닌가.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는 그게 불만이었다.
드래곤 사이에서도 별종으로 통했던 그는 진짜 파괴가 뭔지 보여 주기로 했다.
자신이 아끼고 보호해야 할 숲과 동식물을 파괴하는 것으로.
자연의 수호자가 아닌 자연의 파괴자.
보이는 족족 숲을 태우고 동식물을 말려 죽였다.
그로 인해 마룡으로 타락한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
드래곤들의 공적으로 몰렸다.
주어진 사명을 거부한 드래곤은 제거되어야 하기에.
그렇게 같은 드래곤에게 쫓기며 살다가, 크랙커스는 누군가와 만났다.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라는 존재와.
희한한 놈이었다.
분명 모습은 인지할 수 있었지만 환영 마법처럼 실체가 없었다.
그리고 그 관리자는 자신에게 계약서 한 장을 들이밀었다.
수락하면 이 세상에서 탈출시켜 주겠다고, 원한다면 오히려 더 큰 힘을 가지게 해 주겠다고.
그러면서 이야기를 쭉 늘어놓는데....
검은 탑?
그건 뭐야?
게다가 지구라니.
어떤 세상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인 듯한데, 앞에 번호가 매겨진 것도 우습고.
어쨌든 관리자가 제시한 계약 조건.
세상을 멸망시켜야 하는데 걸림돌이 나타났단다.
단생종인 인간, 그것도 딱 한 명.
그놈을 만나면 죽여 달라는 제안.
거절할 수 없었다.
어떤 인간인지는 잘 모르지만, 여기서 같은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계약 기간 100년.
원하면 연장 가능.
하지만 계약 임의 파기하면 페널티를 받는 방식.
페널티가 뭐냐고 하면 성체 드래곤의 능력이 해츨링 수준으로 하락하는 것.
뭐, 파기 안 하면 그만 아닌가?
크랙커스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래서 675번 지구 검은 탑 89층에서 언제 올지 모를 플레이어라는 인간을 기다리던 중이었고.
그런데 갑작스러운 층간 책임자 교체.
먼저 계약한 고룡 헬크라수스가 89층으로 내려오고 자신은 90층으로 올라갔다.
손해 볼 것 있나?
오히려 좋지.
플레이어가 일찍 죽으면 계약이 빨리 끝난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이다.
인간이 고룡을 어떻게 감당한다고.
그래서 90층에서 느긋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
계약이 해소되면 이곳 675번 지구 검은 탑 밖으로 나가 멸망한 세상 구경이나 해 볼까 하는 생각이나 하면서.
바로 그때!
띠링!
[세계 공지 : …라수스가 소멸했습니다.]
"음?"
90층.
험준한 산맥의 동굴에서 엎드린 채 있다가 고개를 든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
잘못 들었나?
잠결에 뭐가 소멸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헬크라수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자살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지고마룡이 왜 죽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크랙커스는 또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시 후.
띠링!
[플레이어가 검은 탑 90층에 입장했습니다.]
[90층 임무가 발생했습니다.]
[플레이어의 임무 완수를 방어하거나 혹은 플레이어에게 죽음을 선사하십시오.]
"…뭐야?"
번쩍 떠진 크랙커스의 눈.
플레이어가 입장했다고?
"대체 무슨?"
크랙커스도 탑 등반 시스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
90층에 올라오려면 89층을 공략해야 한다.
이곳에 놈이 올라왔다는 건....
"진짜 헬크라수스가… 주, 죽었어? 고룡이? 에이션트 드래곤이?"
맙소사!
어떻게 그럴 수가.
크랙커스는 드래곤의 눈 용언 마법으로 방금 입장한 인간을 관찰했다.
기운이 느껴진다.
하나가 아닌 여럿.
"…이런!"
부들부들 떨리는 몸.
최소 6명.
어마어마한 기운을 품고 있는 자들.
저놈들이다.
89층에서 헬크라수스를 죽이고 90층으로 올라왔다.
헬크라수스가 누군가?
고룡이다.
신에 근접한 권능을 가진 최고위 드래곤.
반면 자신은 갓 성체가 된 드래곤.
고룡을 죽인 놈들과 맞설 수 있을까?
'미치겠군.'
기껏 다른 세상에서 드래곤들을 피해 다른 세상으로 도망쳤는데, 여기서 죽게 생겼다.
'어떡하지?'
그래서 크랙커스는 꼼짝하지 않았다.
움직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여기 숨어서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는 게 최선.
* * *
[독일 검은 탑 90층에 입장합니다.]
기어코 90층까지 왔다.
입장하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건 높디높은 바위산.
처음엔 찍먹이나 해 보려고 다른 세상 검은 탑을 등반했는데, 이젠 찍먹이든 부먹이든, 마음껏 먹어 치워도 된다.
앞으로 전진!
띠링!
떠오르는 임무.
[89층 임무 : 반마룡(半魔龍), 하프 이블 드래곤 크랙커스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완료 조건 : 하프 이블 드래곤 크랙커스 0/1]
응?
"…반마룡?"
"반반 드래곤임까?"
"반반이군."
"반반이네."
"반반이옵니다."
"반반이다."
"반만 마룡이면...."
매켄지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드래곤 하트도 반반이겠습니다."
"반반이면 좋은 거 아닌가? 치킨도 반반인데."
"어정쩡합니다."
어정쩡하다면?
"완전한 마룡의 하트라면 마검 제작에 사용할 수 있고, 순수한 드래곤 하트라면 약으로 쓸 수 있지만 이건...."
썩으려면 아예 다 썩지, 반쯤 썩은 건 쓸데도 없다는 매켄지의 말.
'아니, 순정 드래곤 하트 획득하기 이렇게 어렵나?'
그나마 마룡 드래곤 하트와 언데드 드래곤 하트는 장비로 만들었지, 샌드 드래곤과 하프 뭐시기 드래곤 하트는 얻다 써?
"일단 준비합시다."
그래도 잡아 보자.
임무가 떴으니까.
그런데 코사크가 슬며시 다가와서.
"봉 소환사님,"
"네?"
"은폐의 장막 착용하고 계시면 안 되겠슴까?"
"왜요?"
"드래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름다. 그러니 안전을 위해...."
아마 헬크라수스를 잡을 때 위험했던 상황이 생각난 듯.
"참 나, 내가 겁쟁이로 보여요?"
"그게 아니라, 날씨도 쌀쌀하고, 망토 하나 걸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런가?
"…솔직히 좀 춥네요."
"맞슴다. 게다가 얼음덩어리 피소환인 때문에 냉기에 노출된 영향도 있슴다. 그러니 은폐 장막 미리 걸치십쇼."
그래야겠다.
"…제가 드래곤 무서워서 입는 게 아니라 춥기 때문인 거 다 아시죠?"
"아유, 제가 그걸 모르겠슴까?"
그러자 매켄지가.
"추우시면 본 마법사가 파이어 마법으로...."
"거참! 매 영감님은 눈치도 없이."
"쯧쯧, 머리가 그렇게 우둔해서야, 9서클에 어떻게 올랐나?"
"마법사는 전사보다 더 멍청하다."
"호엣!"
아무튼 은폐 장막을 걸치고.
반마룡 크랙커스라는 드래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
한참 동안.
"...."
하지만 잠잠하다.
그 어떤 기척도 없었다.
"왜 안 나타나죠?"
"글쎄요. 겁먹었나?"
"그럴 만도 하오. 에이션트 드래곤이 죽었다는 걸 알고 있다면...."
직접 찾아봐야 하나?
"노부가 찾아보겠소."
매켄지도 손을 들며
"본 촬영감독이 저 숲으로 들어가 실시간 중계를...."
"안 됩니다. 드래곤은 교활하다면서요. 함정을 파 놓았을 수도 있어요."
그때!
"이건 어떻슴까?"
의견을 내는 지략가 코사크.
"뭘요?"
"드론을 보내 보는 검다."
드론?
"드론을 어디서?"
"제가 미리 준비해 뒀슴다. 혹시라도 이런 상황이 있을까 해서."
그러고는.
"라직스 차원대머슴, 제가 전에 드린 거 꺼내십쇼."
"호엥!"
라직스가 아공간에서 촬영용 드론들을 꺼냈다.
"아유, 이게 다 몇 대야? 우리 코사크 씨, 언제나 준비가 철저해요. 하하하하!"
"헤헤헤헤! 제가 누굼까? 유비무환, 제갈 조자룡, 코사크 아임까?"
사실 촬영감독 역할을 매켄지에게 빼앗긴 터라 그 역할을 찾아오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전 청장에게 부탁해서 비싼 군사용 드론들을 구해 뒀고.
"모든 기능이 다 달려 있슴다. 카메라 줌 기능은 물론, 스피커, 마이크까지."
"한 대만 보내 보죠."
"예압!"
윙!
액정 화면이 달린 조종기로 능숙하게 드론을 조종하는 코사크.
"찾기 어렵지는 않을 검다. 드래곤이 좀 큼까?"
위잉! 위이이이이잉!
저공비행으로 높디높은 산봉우리를 탐색하는 코사크의 드론.
잠시 후.
"찾은 것 같슴다. 화면에 동굴 보이심까?"
"보여요,"
"놈이 있는 레어일 검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 봐요."
"예압!"
드론에서 송출되는 영상.
거대한 물체가 조종기 스크린 화면에 나타났다.
드래곤이었다.
"초록이네."
"그린임다."
"아직 색깔이 남아 있는 걸 보니 확실히 반반 마룡이고,"
"헉! 놈이 드론을 발견했슴다."
"그러네요. 조금 놀란 듯한데."
순간!
펑!
사라지는 거대한 그린 드래곤.
"엥? 어디 갔어?"
스윽!
초록색 머리의 인간이 다시 화면에 잡혔다.
"폴리모프로군."
"마법이 능숙함다."
그리고 갑자기 두 손을 번쩍 들면서.
- 항복하겠다. 살려 다오.
응?
"방금 항복이라고 했죠?"
"맞슴다."
"확실히 지고마룡이 죽었다는 걸 알고 있군."
"쫄았네요.
항복이라.
그렇다면?
어차피 잡아 봐야 쓰지도 못할 드래곤 하트.
"쟤 받아들일까요?"
"전향 귀순 말이옵니까?"
"괜찮은 생각임다. 요즘 집집마다 드래곤 한 마리 장만하는 게 유행 아임까."
"그런 유행도 있었나?"
"가정 상비 드래곤임다."
좋다.
권유해 보자.
드론 조종기 마이크에 대고.
"살고 싶으면 귀순 요청하세요."
- …귀, 귀순?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드래곤의 음성.
"그래요. 귀순, 진심을 담아서, 전향 귀순하면 살려는 드릴게요."
크랙커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 하겠다, 귀순.
띠링!
[90층 책임자 반마룡 크랙커스가 자신에게 허락된 자유의지를 근거로 플레이어에게 귀순을 요청해 왔습니다.]
오호.
"귀순 요청 수락."
[반마룡(半魔龍), 하프 이블 드래곤 크랙커스의 귀순 절차를 시작합니다.]
[크랙커스와 탑 관리자 간의 계약이 파기되었습니다.]
[계약에 근거해서 검은 탑 90층의 몬스터가 용아병으로 대체됩니다.]
[크랙커스가 성체 드래곤에서 해츨링으로 능력이 하락합니다.]
[전향 귀순자의 낙인을 찍습니다.]
아유, 생각지도 못하게 드래곤 한 마리 주워 가네.
그것도 산채로.
211화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 항복.
전향 귀순 요청 수락.
그리하여 675번 지구 검은 탑 90층 공략 성공.
[90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보상 : 상급 마정석 900kg]
그러나 S+++ 등급 공략 메시지는 울리지 않았다.
보상도 변변치 않고.
정상적인 공략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항복 받는 게 어때서?
평화적인 방법이잖아.
S+++가 아니라 EX도 주겠다.
그런데?
[업적 : 최초로 검은 탑 90층을 공략 성공했습니다.]
'업적은 인정해 주네.'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뭘까?
[검은 탑 외부 세상의 복구가 진행됩니다.]
[지구의 마력 농도가 희박해집니다.]
[지구의 자연 생태계가 회복됩니다.]
[탑 붕괴로 생겨난 구멍들이 서서히 메워집니다.]
[탑 밖으로 나온 몬스터들이 서서히 사라집니다.]
흠.
좋은 건가?
잘 모르겠다.
인제 와서 세상이 복구되면 뭘 해?
여기서 살아갈 사람들이 없는데.
하지만 우리 지구에 적용된다면 의미 있는 보상.
뚫린 구멍이 메꿔지니까.
'인도와 일본에 구멍이 나 있지?'
그걸 없앨 수 있다.
우리 지구, 1,001번 지구 검은 탑 90층을 공략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펄럭펄럭.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이쪽으로 날아오는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
"크기가 작아졌네."
"해츨링으로 변했슴다. 응애! 아기 드래곤."
"...."
능력치 하락은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회복하긴 해야겠는데.
"해츨링이라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피소환인 기준으로 르스스알에 조금 못 미치는 스스알로 보는 게 맞습니다."
그런 것 같다.
새끼 드래곤도 드래곤.
"마룡 타락 상태도 벗어난 것 같습니다."
"으잉? 그럼 온전한 드래곤 하트를 지니고 있는 검까?"
"그래 보이는군. 색깔을 보면 초록색이 선명해. 자기 정체성을 찾았어."
"오!"
반짝이는 눈빛의 코사크.
매켄지를 보며.
"매 영감님, 저놈 드래곤 하트 빼내면 우리 봉 소환사님 약 만들 수 있슴까?"
"있지. 한데 부활하면 드래곤 하트가 또 생겨날지는 모르겠어."
"생겨나면 좋겠슴다. 드래곤 하트 자판기 아임까?"
"하지만 해츨링이라서 약효는 떨어질 거야."
크랙커스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폴리모프 마법으로 펑! 변신.
초록색 머리의 소년으로.
"해츨링 됐다고 폴리모프도 애 모습임다."
귀엽게는 생겼다.
전향 귀순자가 되었으니 정보는?
<전향 귀순자 : 생존을 위해 굴종을 택한 그린 드래곤.>
- 이름 : 크랙커스
- 등급 : SSR+++ (스페셜 슈퍼 레어+++)
- 유형 : 그린 해츨링(드래곤)
- 현신 기한 : 3시간
플러스 3개 스스알.
얘는 능력을 어떻게 올려 주지?
전향 귀순자 등급 상승 룬도 스스알까지인데.
본체라서 기억 회귀 술법도 안 먹힐 테고.
천천히 고민해 보자.
우선 식구 들어왔으니.
"크랙커스 씨."
"넵!"
"우리 잘해 봐요."
"…네."
아직은 어리둥절한 듯, 크랙커스는 주혁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드래곤을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데, 할 수 있겠어요?"
"문제 될 것 없습니다."
"정말요? 그래도 동족인데."
"인간이라고 해서 같은 인간을 죽이지 않는 건 아니니까요."
"...."
팩트 폭격.
뭐, 모기 다음으로 가장 인간을 많이 죽이는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긴 하지.
그나저나 그린 드래곤은 뭘 잘할까?
"제 사명은 숲과 동식물을 파괴, 아니 보호하는 겁니다."
"그래요? 그거 잘됐네요."
"잘됐다고요?"
"우리 집에 가서 농부님 소개해 드릴 테니까. 둘이서 잘 협력해 봐요."
"아하!"
농부와 초록.
매우 잘 어울린다.
시너지 효과도 발생하겠고.
"그럼 집으로 가 볼까요?"
알찬 공략이었다.
'91층은....'
일단 보류.
우리 지구 89층과 90층부터 해결하고 나서.
* * *
이제는 권한도 박탈당해서 구경 말고는 할 게 없는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들.
[....]
[....]
[....]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상상하던 놈은 상상 그 이상.
열심히 다른 차원 돌아다니며 자유계약 드래곤 배치해 뒀더니, 하나는 반갈죽 당하고, 하나는 산채로 빼앗겼다.
[…저쪽엔 절대로 알려 주지 마.]
[미쳤다고 알려 줘?]
[그래도 기겁할 1,001번 관리자들을 상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어.]
맞다.
그거라도 위안 삼아야지.
* * *
백색 탑 17층.
천천히 눈을 뜬 인간 빙정 백단아.
'…내가 살았어?'
어떻게 살았지?
'대체...?'
영혼의 세상에서 거주하는 영혼들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무작위 소환을 바라는 건 아니다.
제발 소환되지 않았으면 하는 영혼도 있었다.
백단아가 그 대표적인 예.
과거 그녀는 소환사에 의해 바깥으로 나간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나가자마자 만년 빙정이 요동치는 바람에 덜덜 떨다가 죽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당시 자신을 불러 준 소환사에게 얼마나 미안했던지.
이번에도 나가면 즉시 죽을 것이 분명했다.
카탈로그에 이름만 차지하는, 처치 곤란한 피소환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소환에 불리지 않길 희망했다.
결국 불리고 말았지만.
그런데 왜 멀쩡해?
만년 빙정이 사라졌나?
그럴 리가.
'아냐, 혹시 또 모르니....'
백단아는 슬며시 빙백 신공을 운용했다.
북해 빙궁의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
우웅!
단전에서 움직여지는 차가운 기운.
혈맥을 따라 움직이는 빙백 진기.
하지만.
스스스스스스스스!
"아흑!"
아니나 다를까.
다시 요동치는 만년 빙정.
빙백 신공을 운용하자 빚어진 결과였다.
눈 깜짝할 새에 육신이 얼어 버렸다.
쯔저저저.... 얼굴에 살얼음이 뒤덮었다.
"으으으윽!"
몸을 웅크리고 부들부들 떠는 백단아.
'내, 내가 미쳤지. 왜 빙백 신공을 운용해서는.'
그때였다.
쯔즈즈즈즈즉!
순식간에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가는 냉기.
"…응?"
스르르륵.
지랄 난리를 떨던 만년 빙정이 금새 진정됐다.
아예 꼬리를 말고 숨어 버렸다.
"괜찮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누, 누구?"
새하얀 서리가 낀 막대기를 들고 있는 누군가.
들고 있는 건 화포 같은데, 동료 피소환인인가?
"걱정하지 마. 내가 만년 빙정 같은 건 쪽쪽 빨아 줄게."
그러더니 하늘에다가.
찌이잉!
파죽!
출렁!
화포를 발사해 버렸다.
펑!
하늘에서 퍼지는 빙정의 기운.
동시에 펑펑 쏟아지는 눈꽃 송이.
"아!"
짐작이 간다.
'흡성 대법.'
하지만 사람이 직접 무공을 이용해 진기를 흡수하는 방식이 아닌, 저 화포를 이용한 간접 흡수.
흡성 대법으로 만년 빙정을 다스리는 건 단점이 명확하다.
누군가 대법을 이용해 직접 냉기를 빨아들이면 그 사람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냉기에 잡아먹힐 테니까.
그런데 저 화포라면?
매우 간단하고 안전한 방법.
"…전 백단아에요."
"알아. 난 베로니카 캘리버, 베 소령이라고 불러."
"고마워요. 베 소령님, 절 살려 주셔서."
"으흠, 감사는 우리 지휘관님, 아니 소환사님께 해. 방법을 알려 주신 분이 소환사님이시니까."
아아아.
그랬구나.
소환사님이셨어.
너무나 감사하게도.
"소환사님께선...?"
"잠깐 볼일 보러 다른 세상에 가셨거든."
다른 세상?
그러고 듣긴 했다.
두 차원의 지배자인 이곳 지구의 소환사.
대단하다고 소문을 듣긴 했지만 자신의 천형을 치유해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축하해. 백색 탑 주민이 된 걸."
"으음,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전 쓸모가 없어서, 몸이 이래서 아무것도 못 하거든요."
"왜 아무것도 못 해? 탑 공략하러 갈 때 내 옆에 딱 붙어 있으면 돼."
베로니카는 백단아가 마음에 꼭 들었다.
소중한 냉기 탄환 보급병 아닌가?
몸도 치료해 주고, 냉기 속성 흡수도 하고.
서로 윈윈이지.
순간!
"아! 저기 지휘관님, 오시네."
띵!
저기 보이는 여닫이문.
문이 스르륵 열리자 나오는 사람들.
백단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중에 소환사가 누구신지.
서둘러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고양이 세수로 얼굴을 정돈한 뒤.
"소환사님."
"오! 깨어났어요?"
"네, 덕분에."
"하하하, 늦었지만 환영해요."
"몸을 치료해 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응급조치만 했을 뿐이에요. 하루빨리 근본적인 치유법을 찾읍시다."
"...."
백단아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쩌면 이렇게 인자하실까.
최하등급의, 쓸모도 없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심지어 치료까지 해 주신다니.
주혁도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러나 지금은 멀쩡해 보인다.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앞으로 차근차근 등급 올리며 만년 빙정을 다스릴 방법만 찾으면 된다.
"자자자, 식구가 3명이나 늘었네요. 환영식 해야죠."
고개를 갸웃하는 베로니카.
"2명 아닌가요?"
"아뇨. 여기 크랙커스 씨라고, 드래곤인데, 우리 팀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예? …드래곤?"
잘못 들었나?
그러고 보니 못 보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작은 키에, 머리는 초록색의 어린아이.
"반갑다. 난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코사크.
"지금 뭐 하자는 검까? 전향 귀순자 불가촉천민이 우리 베 소령에게 반말? 영관급 장교가 장난임까?"
"어음, 모, 몰랐어요."
"본 군기반장 코사크는 절대 이런 꼴 못 봅니다. 백색 탑 17층에서 행복한 용생을 보내려면 위계질서는 엄격하게 지키십쇼."
"…네에."
사실 크랙커스는 현재 정신이 없었다.
백색 탑 1층만 해도 놀랐는데, 17층에 올라와 보니 별천지였다.
올라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마천루.
세상에!
저렇게 높은 건축물이라니.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올라갔는데, 무너지지 않나?
그뿐만이 아니다.
광장에 세워진 초대형 골렘, 이국적인 주택, 검정색의 단단한 무언가로 만든 도로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철 마차 같은 것들.
여태까지 경험했던 인간의 문명이 아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진화한 문명이지?
갑자기.
띠링!
알림음이 들리더니.
직사각형의 커다란 판때기에서 새겨지는 글씨.
<마리> : 코사크, 드래곤 영입했다고?
마리였다.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해 그녀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이 대형 스탠드 모니터에 미러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예압! 봉 소환사님께서 귀순 받아들이셨슴다."
<마리> : 혹시 또 마룡이야?
"반반 마룡임다. 하지만 능력 하락으로 마룡 신세는 벗어났슴다. 초록이로."
<마리> : 그린이면 딱 좋다. 드래곤 하트도 깨끗하겠고. 빼낼 수 있을까?
으잉?
창백해진 크랙커스의 안색.
왜 자신의 하트를 빼내겠다는 거야?
"깨끗하긴 한데 해츨링임다. 괜찮겠슴까?"
<마리> : 아씨, 해츨링? 좋다 말았네. 괜찮지 않아. 약효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키워서 빼내야겠어.
뭐야?
키워서 빼낸다니.
어떻게 저런 흉악한 말을.
저 마리란 년은 누구지?
악마인가? 마족 출신 피소환인?
띠링!
<마리> : 소환사님♥♬♡♪
소환사에겐 왜 저리 살살거려?
"네, 마리씨."
<마리> :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마리> : 전에 샌드 드래곤에게 보상받은 드래곤 하트 있죠?
"네, 있긴 합니다만."
딱딱하게 굳어 버린 샌드 드래곤 하트.
이걸 말하는 모양.
<마리> : 그거 저 그린 해츨링 주세요♥♡
응?
"쓸모없는 거 아니었어요?"
<마리> : 드래곤이면 흡수할 수 있을 거예요. 하나로는 부족하지만 한 서너 개 먹으면 해츨링 탈출해서 빠르게 성체로 올라갈 수 있을걸요.
"어...."
주혁은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를 바라봤다.
"마리 씨 말이 맞아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크랙커스.
"샌드 드래곤도 드래곤이 맞습니다. 하트를 섭취하면 능력 향상에 도움은 돼요."
되는구나.
그래서 인벤토리에서 딱딱하게 굳어 버린 샌드 드래곤 하트를 꺼내.
"자, 여기, 딱딱하니까 조심조심 녹여 드세요."
"...."
크랙커스는 살짝 주저했다.
"이거 먹이고 절 키우셔서 하트를...."
"에이, 안 빼내요. 내가 왜 우리 식구 드래곤 하트를?"
"...."
"빨리 힘을 회복하세요. 그래야 농장도 관리하고 가축도 키우고 하지."
"고, 고맙습니다."
안심이다.
소환사는 그러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지금도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노려보는 피소환인들.
싸늘하다.
다들 자신의 드래곤 하트를 노리고 있었다.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눈빛.
무엇 때문에 드래곤 하트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빠른 시일 안에 대체재를 찾아야 한다.
자신 말고 다른 드래곤의 하트 말이다.
'여기도 검은 탑이 있으니까.'
89층에 자유계약 드래곤이 존재하겠지.
'빨리 공략하자고 건의해 봐야겠군.'
그리하여 잔치가 열렸다.
멀리서 땅을 갈고 있는 농부 두우도 불러왔다.
"두우 씨, 여긴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 씨, 앞으로 두우 씨 도와서 농작물을 보살펴 주실 겁니다."
"초록 용. 농사. 도움 됨."
둘이 인사시키고.
"호라라랏!"
파티 시작.
라직스의 아공간에서 음식과 술들이 나왔다.
고방과 바르딘은 고기 구울 준비를 하고.
대형 스피커로 음악도 틀면서.
이게 바로 행복이지.
얼마나 좋아?
점점 무르익어 가는 분위기.
새로운 식구인 두우와 백단아, 크랙커스도 곧잘 어울렸다.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다들 열심히 해 줬으니 보상도 있어야지.
그러나 플래티넘 배지 대신에.
"라직스 씨,"
"호에?"
"선도 꺼내세요. 사람 수대로."
"후에에에,"
곤란하다는 기색의 라직스.
다른 피소환인들도.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기(仙氣)가 깃든 귀한 선도입니다. 공자님만 드셔야 하옵니다."
"맞슴다. 우린 안 먹어도 됨다."
"그렇소. 아끼시오."
버럭 화를 내는 주혁.
"거참! 전에 말했잖아요. 여러분이 힘이 곧 나의 힘이라고. 무조건 먹어요. 절대복종!"
주혁의 지시에 피소환인들은 어쩔 수 없이 선도 하나씩 손에 들었다.
"자! 빨리 먹어요."
으적으적.
몇 번 씹자 금방 사라지는 선도.
선기 보충은 둘째치고 참 맛있단 말이야.
하지만 이젠 60여 개밖에 없으니 아깝긴 하다.
뭐 어때?
아껴서 뭘 한다고.
빨리 먹어 치우는 게 낫지.
그런데.
'음?'
선도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농부 두우.
"왜 그래요? 입맛이 없어요?"
"아님. 귀한 과일. 재배 욕심. 키우고 싶음."
어?
재배?
선도를 재배할 수 있다는 말이야?
"선도에는 씨앗도 없는데요?"
"열매 상태로 충분. 싹 틔움 가능."
와!
그제야 농부 두우의 배경 설명이 떠올랐다.
농사 실력 하나로만 따지면 거의 초월급.
"그럼 심어 봐요."
"문제 있음. 해결해야 함."
"무슨?"
"기운을 받고 자라는 선도. 거름이 될 기운이 없으면 성장 불가."
아하!
그러니까 선도는 선기(仙氣)를 먹고 자라는 과일.
선계에서만 자생하는 것.
하지만 여긴 선계가 아니니.
"선기 공급 후 재배 가능. 선기 없인 불가능. 그래서 안타까움."
쩝! 그러면 안 되지.
선기를 어디서 끌어와?
마력이나 내공이면 몰라도.
'…응?'
문득 떠오르는 생각.
업적 보상으로 받은....
'전능의 에테르 변환 말뚝 토템'
특정 기운을 주입하면 에테르가 그 기운으로 변화해서 주위에 영향을 미친다던데.
될까?
될지도 모른다.
임무 보상도 아니다.
특전 보상도 아니다.
무려 업적 보상이다.
특히 아이템 수식어.
전능(全能).
어떤 것이든 못 하는 게 없다는 의미.
어떻게 보면 매우 건방진 표현.
하지만 진짜 전능한 신화급 아이템이라면?
그리고 아이템 설명에도 나와 있다.
주입할 수 있는 기운의 종류에 제한이 없다고.
'효과가 반경 1m가 범위니까 이걸 활성화시켜 땅에 박아 넣고 바로 옆에 선도를....'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토템을 꺼냈다.
어떤 기운을 주입할지 고민했는데, 이제 정해졌다.
선기(仙氣).
주입해 보자.
지금까지 선도 많이 먹었다.
염라대왕에게 기억 회귀 술법을 가르침 받았을 때 선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깨달았다.
피소환인들도 주혁이 뭘 하려는지 눈치챈 모양.
모두 탄성을 질러 댔다.
"으엑?"
"공자님, 설마?"
"이야!"
"허허, 묘수로다."
"기, 기가 막힘다."
"호에에...."
현재 주혁의 몸속에 내재한 기운들.
내공과 마력, 그리고 선기.
선기만 쏙 빼서 전능의 에테르 변환 말뚝 토템 주입해야 한다.
정신 집중.
선기를 손바닥으로 모은 후에.
조심스럽게 토템 안으로 밀어 넣으니.
지이이이이....
찬연하고 영험하게 빛나는 토템.
"됐다!!!"
주혁은 토템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대단하시오, 소환사."
"전사는 소환사가 자랑스럽다."
"만세!!!"
"주혁 만세!"
"토템 만세!"
"선기 만세!"
"호엥!"
그래, 이거지.
더 크게 환호하세요.
내가 누구? 소환사 봉주혁.
검은 탑을 정복할 플레이어.
가슴이 웅장해졌다.
토템을 번쩍 들고 한 바퀴 원을 그리며 걸어가는 주혁.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찬사를 한 몸에 받은 후.
주혁이 두우에게 물었다.
"이 정도 기운이면 가능할까요?"
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
좋다.
적당한 장소 골라 땅속에 박아 보자.
선도 농사 시작이다.
212화
백색 탑 17층은 상당히 넓다.
전체 면적이 얼마만큼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주혁이 건설한 도시는 백색 탑 17층의 극히 일부분.
놀고 있는 땅이 더 많다.
그러나 이젠 괜찮다.
히든 클래스 농부 두우가 왔으니까.
게다가 소환 업적으로 농사에 적합한 환경으로 변하면서 지구의 동식물 생태계도 조성됐고.
벌써 들판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토끼인가? 사슴같이 큰 초식동물도 보이고.
따라서 선도를 아무 데나 심으면 안 된다.
초식동물들이 와서 낼름 먹어 버리면 큰일 나니까.
도시와 가까운 곳에.
고개만 돌리면 바로 볼 수 있는 장소.
동시에 땅이 비옥해서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땅.
"여기. 적당."
농부 두우가 자리를 정했다.
그러자 견달래가.
"소녀가 금줄로 결계를 치겠사옵니다."
그린 드래곤 해츨링 크랙커스도.
"저도 보호 마법을 설치할게요. 다른 해충이나 동물이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안전장치 마련해야지.
선도는 소중하니까.
고방이 삽으로 땅을 팠다.
너무 깊게는 말고, 토템과 씨앗을 심을 만한 정도로.
먼저 선기(仙氣)를 공급해 주는 전능의 에테르 변환 말뚝 토템부터 심어 보자.
한 번 박으면 끝.
빼내지 못한다.
신중하게.
콱!
박아 놓고.
다음은 선도 심기.
농부 두우가 6개의 손으로 큼지막한 선도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땅의 축복. 씨앗 생성. 성장. 촉진. 쑥쑥. 풍요. 수확."
스우우웅.
두우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영험한 기운을 뿌리는 선도.
그리고 토템 바로 위에 선도를 올리고 흙으로 덮은 후, 듬뿍 물을 줬다.
남은 건 기다림.
"언제쯤 싹이 올라올까요?"
"내일 예상. 선기 충분. 빠른 수확 기대."
사실 선기(仙氣)만 있다고 해서 이 귀한 선도(仙桃)를 재배할 수 있을까?
씨앗도 없는 과일을?
보통 사람들은 난초 키우기도 힘들다.
조금만 신경을 덜 써도 금세 죽어 버리는 게 식물.
그러나 주혁은 믿었다.
초월자에 준하는 히든 클래스 농부님을.
그리고 소작농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도.
선도가 싹을 틔우고, 묘목으로 성장해서,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 열매가 맺히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자, 이제 다음 할 일은?
특전 확인하고 지고마룡 헬크라수스 사체 해체해 볼까?
* * *
기존 누적 배지는 214개.
이번에 연기된 89층 배지 보상이 EX 등급으로 판정받아 32개 추가.
90층은 받지 못했지만.
그리하여 누적 배지 246개.
현물 배지 83개.
받을 수 있는 특전만 9개다.
인벤토리를 열어 반짝반짝 빛나는 플래티넘 배지를 확인하니.
띠링!
특전 보상 메시지 출발!
[플래티넘 배지 205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카탈로그 확장권 한 장이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
.
.
마구마구 떠오르는 특전 보상.
카탈로그 확장권을 시작으로 다국적 탑 이용 티켓에, 임무 리셋 티켓 등이 나오더니.
[플래티넘 배지 225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피소환인 등급 상승의 룬이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오! 좋다.
필요한 거다.
인간 빙정 백단아 등급 상승해 줘야지.
전에 받아 둔 것도 있으니 스스알까진 충분하다.
[플래티넘 배지 230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카탈로그 확장권 한 장이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확장권이 2장이나 나왔네.
띠링!
[특전 : 카탈로그 확장권 한 장을....]
3장.
[특전 : 카탈로그 확장권 한 장을....]
4장.
아니, 확장권만 나와?
이번 특전도 꽝이야?
[플래티넘 배지 245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특성 강화의 룬이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어.
'....'
흠.
'....'
잘못 들었나?
'에이, 설마?'
떨리는 마음으로 인벤토리를 확인했는데.
'있네?'
진짜네.
"으라차차차찻!!!"
주혁의 환호성에 우르르, 몰려오는 피소환인들.
"무, 무슨 일이시옵니까?"
"큰일이라도 생겼나?"
"주군이시여. 소신 바르딘이 해결하겠습니다."
"동창회 모임 문자 왔슴까? 걱정하지 마십쇼. 준비하고 있슴다."
"그게 아니라...."
인벤토리에서 방금 뽑은 따끈따끈한 특성 강화의 룬을 힘차게 치켜들며.
"특성 강화 룬 뽑기 성공!"
"으잉?"
"와아아아!"
"감축드리오."
"축하합니다."
"호에!"
"소녀, 항상 믿고 있었사옵니다."
"식기 전에 얼른 드십쇼."
특전으로 특성 강화 룬을 뽑다니.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이로써 상태창은.
[특성] : 소환(동시 소환 : 14)
14명 동시 소환.
"흐흐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더 안전해지고, 더 강해진 파티.
다음으로 마지막 하이라이트.
지고마룡 헬크라수스 사체 해체.
"라직스 씨."
"호엥!"
"사체 꺼냅시다."
백색 탑 17층 광장에, 잡다한 거 옆으로 치우고 자리를 확보한 후.
스스스슷!
세로로 반갈죽 된 지고마룡의 오른쪽 신체 꺼내고.
스스스슷!
왼쪽 신체 꺼내고.
"와!"
크다.
검선은 이걸 어떻게 반으로 잘랐나.
뭐, 신선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드래곤 하트는 어디 있죠?"
고개를 돌려 크랙커스에게 물어보니.
"…네, 네?"
멍하니 입을 떡 벌리며 지고마룡의 사체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크랙커스가 주혁의 물음에 화들짝 놀랐다.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드래곤 하트가 어디쯤...?"
"아아. 보, 보통은 목과 몸이 연결된 부위에서 왼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그렇구나.
사체 왼쪽.
"코사크 씨!"
"예압! 찾아보겠슴다."
크랙커스는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 없었다.
그냥 성체도 아니고 무려 에이션트 드래곤이 세로로 잘려 죽었다니.
새삼 관리자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들을 어떡하라고?
죽여?
어림도 없는 계약이었다.
자살하라는 것과 뭐가 달라?
그 와중에 코사크가 단검으로 지고마룡의 왼쪽 사체 단면을 칼로 후비적거리더니.
"여기 있슴다. 시커먼 거."
찾는 건 금방이었다.
보기만 해도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거대한 지고마룡 드래곤 하트가 목 밑 부분에 박혀 있었으니까.
"근데 또 마기로 오염된 드래곤 하트임다. 에이! 재수 없게."
"쯧쯧,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군."
"어찌함까? 엘릭서 제작이 늦어지게 생겼슴다."
"뭐, 대안이 있긴 하지만...."
스윽.
크랙커스를 바라보는 광마.
움찔.
시선을 피하는 크랙커스.
순간!
마도 공학자 엘이 번쩍 손을 들면서.
"소환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하세요."
"지고마룡 드래곤 하트는 제가 사용하고 싶습니다."
"얻다 쓰시려고?"
"기간트 3호기 마력 코어 엔진을 지고마룡 드래곤 하트 기반으로 개조하면 어떨까 해서."
"아!"
기간트 가슴 장갑판 안에는 병렬로 연결된 5개의 마력 코어 엔진이 있다.
그걸로 기간트가 움직이는 거고.
"5등분해서 코어 엔진을 개조해 보겠습니다. 위력도 강해지고 연비 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드래곤 기간트가 되는 건가?
드래곤 하트 코어를 장착한 우리의 3호기.
어우, 상상만 해도 좋네.
반대할 이유가 있나?
"쓰세요. 마음껏 쓰세요."
그나저나 나머지 사체는 어떻게 활용하지?
드래곤 전문가 마리 씨에게 물어볼까?
띠링!
<마리> : 드래곤 사체는 속살 빼면 버릴 것이 없어요♥♬♡♪
<상남자> : 그런가요?
<마리> : 살은 너무 질겨서 먹지는 못하고, 대신 이빨이나 발톱, 뼈나 가죽 등등 무기나 방어구 만드는 재료로 쓰여요.
<상남자> : 가공은?
<마리> : 시간이 걸리겠지만, 천천히 해체하면 될 것 같아요.
<상남자> : 사체라 시간이 지나면 부패해 버릴지도....
<마리> : 절대 부패하지 않아요. 세상에 드래곤의 사체를 분해할 수 있는 미생물이나 균 같은 건 없어요. 굳어서 화석처럼 되는 경우는 있지만.
그럼 걱정 없다.
백색 탑 17층에 놔두자.
반으로 갈라진 오른쪽과 왼쪽을 대충 합쳐서.
엘이 기간트를 움직여 양쪽을 합쳐 놓았다.
길쭉하게 엎드려 있는 것이 그럴싸해 보인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기겁하겠지만.
* * *
675번 지구 검은 탑은 90층까지 공략했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89층과 90층의 임무 대상이 드래곤이라는 걸 빼면.
즉 90층에 입장했어도 70층 카발란이나 80층 디아마트 때처럼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구, 대한민국 검은 탑을 90층까지 공략한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겠지.
다만 이대로는 불안하다.
89층과 90층 공략이 어디 정상적으로 진행됐었나?
지고마룡 헬크라수스는 검선님이 강림해서.
반마룡 크랙커스는 전향 귀순으로.
운이 좋았던 거지.
하지만 이곳 지구, 대한민국 검은 탑에선 정상적인 공략에 임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력으로 드래곤을 압살하는 공략 말이다.
공략은 가능할 것이다.
피소환인들의 능력치가 몰라보게 향상되었으니까.
그러나 언제나 주혁이 원하는 건 압도적인 공략.
무조건 S+++ 든 EX 든 배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파티 스펙업이 필요해.'
힘을 키우자.
그러기 위해선.
첫 번째 지고마룡 드래곤 하트로 기간트의 마력 엔진 개조.
이건 지금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설계도 작업은 미리 끝내 놓았습니다. 마리가 지고마룡 드래곤 하트 정제를 끝내면 바로 5등분해서 엔진 코어에 장착하겠습니다."
두 번째 백단아의 승급.
목표는 스스알까지.
그래서 피소환인 등급 상승 룬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랜드마크 빌딩 꼭대기로 보냈다.
영육 주파수 합일을 위한 기억 회귀 술법은 백단아가 안정된 후에 진행하기로 하고.
희귀한 냉기 능력의 소유자이다.
만년 빙정을 억누르고 자유자재로 다룰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터.
다만 혼자 보낼 수는 없어서 베 소령을 동행시켰다.
또 빙정이 발작하면 빨아들여 줘야 하니까.
"매번 미안해요, 베 소령. 옆에서 잘 지켜 주세요."
"소령 베로니카 캘리버,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 번째는 해츨링 크랙커스의 성체 진화.
어찌 보면 가장 핵심.
크랙커스가 원래의 힘을 회복한다면 전력에 엄청난 도움이 될 터.
그래서 주혁과 피소환인들은 샌드 드래곤이 나오는 88층을 반복 공략하는 중이었다.
"고방아! 꼬리 단단히 잡아!"
"끄아아아악!"
"바르딘, 눈멀게 하고,"
"빛이여!!!"
"영감님, 모가지 싹둑!"
"알았다."
목적은 88층 공략 완료 메시지가 뜨기 전 샌드 드래곤의 왼쪽 목 부분에 있는 딱딱한 하트를 채집하려는 목적.
서거걱!
샌드 드래곤의 목이 잘려 나가면서.
"찾았다."
[아룡(亞龍) 샌드 드래곤 처치 1/1]
[88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퇴장 메시지가 들리기 전에.
"하트 추출해."
"잡고 벌리라고!"
"하고 있잖아."
"빨리빨리!"
"끄아아악!"
"됐다. 차원대머슴!"
"호아앗!"
스슷!
추출한 샌드 드래곤 하트 아공간 배낭에 수납 성공.
[대한민국 검은 탑에서 퇴장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해츨링 그린 드래곤 크랙커스.
두렵다.
공포스럽다.
소름이 쫙 끼쳤다.
성체 드래곤으로서도 샌드 드래곤은 까다로운 놈.
모래 속에 숨어 다니기 때문에 끄집어내기도 어렵고, 용케 상대한다고 해도 방어력이 막강해 맹독 브레스를 3번 정도는 쏴야 녹일 수 있는 놈이다.
그런데 저들이 협동 전술은?
거대화 고방이 도발의 포효로 샌드 드래곤의 어그로를 끌면 바르딘이 광휘의 방패로 눈을 멀게 하고, 코사크와 광마가 강기로 피부를 갈라 버렸다.
마지막으로 드래곤 하트를 추출하고.
일꾼 라직스가 아공간 배낭에 넣으면 끝.
손발이 척척 맞는다.
놈을 잡고 드래곤 하트를 꺼내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미쳤군. 미쳤어.'
자신이 임무 대상이었다면?
손쉽게 사냥당했겠지.
성체 드래곤이었다고 해도.
'귀화하길 잘했어.'
그러나 걱정도 있다.
이들이 샌드 드래곤 하트를 채집하는 이유가 뭘까?
자신에게 먹이기 위해서다.
성체 드래곤으로 진화시키려고.
소환사는 자신의 스팩업이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피소환인들은 과연 그럴까?
지금도 자신의 하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자칫하면 드래곤 하트가 뽑혀 나갈 판이다.
소환사가 안 된다고 했으니 안심해도 되지 않느냐고?
아니다.
이들은 소환사의 절대복종을 무시할 수 있다.
바로 피소환인 3원칙 3항.
소환사의 안전이 최우선.
드래곤 하트로 엘리서를 제조해서 소환사에게 먹이자.
그럼 소환사는 안전해진다.
명령을 어기는 한이 있어도 뽑아야 한다.
또 하나.
고작 샌드 드래곤 하트를 이용해 성체로 진화하는 건 무리가 있지 않으냐고?
천만에!
지금도 자신의 하트가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고 있었다.
소환사가 준 선도(仙桃)라는 기이한 과일 때문이다.
선도가 샌드 드래곤 하트의 마력을 온전하게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니 불안할 수밖에.
신비한 효험의 선도.
먹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하루빨리 소환사가 대한민국 검은 탑 89층을 공략해야 한다.
동시에 그곳의 책임자가 마룡이 아니길 바라야 한다.
드래곤 하트를 뽑아 쓸 수 있게끔.
"헤헤, 우리 어린이 드래곤, 어서어서 이 샌드 드래곤 하트 먹고 쑥쑥 자라십쇼."
"조금 있다가...."
"어허! 지금 먹으라니까. 바로 드래곤으로 변해서 꿀꺽 삼켜."
자신을 위해 주는 듯하지만.
'내 가슴은 왜 쳐다봐?'
악마 같은 암살자 새끼.
* * *
백색 탑 17층.
주혁이 88층 샌드 드래곤 반복 공략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스팟!
누군가가 입장했다.
전광일 청장이었다.
주혁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는데.
순간!
"…헉!"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치는 전광일.
"뭐, 뭐야?"
백색 탑 광장.
그 넓은 공터에 누워 있는 거대하고 징그러운 괴물.
"저, 저건?"
대체 뭐지?
황금색과 검은색이 어지럽게 섞인 괴물이었다.
날개도 달려 있다.
하지만 기간트로 면역이 된 터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꿀꺽.
침 한 번 삼키고.
자세히 보니 얼굴에 그러진 미세한 금.
'…좌우가 분리됐어?'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전체 몸이 반으로 잘린 놈이었다.
지금은 대충 합쳐 놓은 듯했고.
'죽은 놈이구나.'
누가 이랬겠나?
봉 플레이어와 그의 피소환인이겠지.
전광일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 셀카 모드로 찰칵!
공개할 생각은 없다.
그저 기념으로 찍어 놓은 것.
나중에 와서 물어봐야지.
'퇴장,'
스팟!
전광일이 떠나고 난 뒤.
스팟!
또 누군가가 입장했다.
정동훈 대표였다.
"허억!"
역시 깜짝 놀라서 뒤로 나가떨어지는 정동훈.
한참을 멍하니 보다가 그도 스마트폰을 들고 찰칵!
'저것도 피규어로 만들어 팔면 되겠는데.'
기간트가 놈의 사체를 밟고 있는 형상으로.
'…퇴장.'
정동훈도 나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스팟!
또 누군가 나타났다.
낚시 가방을 들고 입장한 주혁의 아버지 봉수철.
"주, 주혁아! 주혁아!"
불러 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놈 어디 간 거야?"
주혁에게서 메시지가 왔었다.
백색 탑 17층에 낚시터가 생겼다는 내용.
봉수철의 유일한 취미는 낚시.
좋은 낚시터가 생겼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이렇게 '입장!' 한마디로 올 수 있는 낚시터가 있다는 게 얼마나 편한데.
집에 갈 때도 '퇴장!'만 하면 되는데.
그래서 주혁의 동료들이 여전히 두렵긴 하지만, 꾹 참고 왔다.
바로 그때!
"…어?"
그의 눈에 들어온 거대한 무언가.
"으헤에에엑?"
봉수철은 펄쩍 뛰며 혼비백산했다.
괴물?
저렇게 큰 괴물이....
아들 주혁이는?
설마 저 괴물에게....
순간!
스윽!
"괜찮음. 안심 바람. 이미 사망. 사체 상태."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타나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아들의 동료?
마침 잘됐다.
주혁인 괜찮나?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저, 저기 괴, 괴물이, 괴물이, 괴물, 괴… 음."
봉수철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나타난 사람이 6개의 팔, 3개의 다리, 4개의 눈이 달린 농부 두우였기 때문에.
"어우...."
털썩!
기절하는 봉수철.
농부 두우는 머리를 잠시 긁적이더니 쓰러진 봉수철을 안고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