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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198-204

198화

검은 탑은 이질적이다.

원래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던 에너지, 마력을 품고 있는 구조물.

지구 입장에서 탑이란 외부에서 들어온 바이러스, 세균, 제국주의 침략자와 다를 바 없다.

물론 마정석이라는 신(新)에너지 소재로 과학 문명과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지만, 탑이 가진 위험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미 솟아난 탑은 없앨 수 없다.

그저 탑이 붕괴하지 않도록 막는 수밖에.

검은 탑은 지구에 있지만 실상은 분리된 공간.

검은 탑만의 규칙이 적용되는 곳.

그래서 탑으로 출입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

소수의 각성한 플레이어만이 탑 층을 등반해서 임무를 수행하고 마정석 보상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은 마냥 자유로울까?

아니다.

그들도 규칙을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하루 1회 입장 같은 거.

인벤토리 능력도 그렇다.

플레이어의 범용 스킬, 인벤토리엔 탑 전용이라는 수식어가 달려 있다.

인벤토리에 들어가는 건 오직 탑에서 나온 물건들만.

지구의 물건은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일부 예외 조항도 있긴 하다.

의류나 신발, 혹은 손에 들 수 있고 주머니에도 들어가는 작은 물건에 대해선 소지품 판정을 받아 탑 속 반입이 가능.

이런 규칙 때문에 지구의 대량살상 무기를 탑 안에 가지고 들어가는 건 처음부터 막혀 있었다.

소지품 판정도 못 받고, 인벤토리에도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게 뭔가?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들은 아직도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핵이 터져? 왜?]

핵이 터지는 거야, 특별한 일도 아니다.

과거 675번 지구에서 일어났던 세계 대전.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핵이 몇 발인데.

아마 탑에서 나온 몬스터에 의해 죽은 인간의 숫자보다 핵으로 죽은 인간의 숫자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터진 건 바깥이 아니다.

탑 속에서 터졌다.

탑의 규칙 파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그러나 그 방법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소환사 플레이어의 특성에 의해 소환된 피소환인, 그가 가진 고유의 스킬로 핵폭탄을 바깥에서 가지고 들어왔다.

[저 햄스터 수인족, 대체 저놈은 뭐지?]

마그누스 기간트를 꺼내고 집어 넣을 때도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다.

어차피 기간트도 탑 속 물건 아닌가?

그저 아공간이 광대하구나.

이렇게만 생각했었는데.

[시스템에 화약 반응 및 핵분열, 핵융합 금지 조항 넣을까? 저들이 퇴장하면 당장 실행할 수 있어.]

엔지니어의 제안에 잠시 생각하는 675번 지구 검은 탑 디자이너.

[그보다는 저 수인족 일꾼을 제재할 방법은?]

[현재로선 저놈을 건드릴 수 없어. 아무리 시스템이라도 피소환인의 고유 스킬엔 개입하지 못하니까.]

맞다.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저런 스킬을 가지지도 못했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야. 화약 반응 불가 패치.]

치욕적이다.

보복은 꿈도 꾸지 못하면서, '다음부턴 그걸로 나 때리지 마? 많이 아팠어.' 하고 투정하는 꼴.

[…그래, 놈들 퇴장하면 당장 패치 시작해.]

[알았어.]

그건 그렇고.

[89층 자유 계약자 찾았어?]

마룡 카라토스가 소멸해서 89층의 책임자가 공석이 됐다.

지금은 드래곤의 뼈로 만든 용아병으로 대체된 층.

[현재 적당한 드래곤으로 섭외 중이야.]

[빨리 해. 89층까지 올라올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은데. 어차피 86층 공략도 어려울 테니까.]

[맞아, 불사조는 핵무기도 안 통해. 최고위 불의 정령이라 핵을 터뜨리면 오히려 더 강해질걸?]

그러나 불사조도 공략해 버릴 것 같다.

86층마저 성공하면 87층, 88층은 금방일 듯.

갑자기 궁금해진다.

놈은 1,001번 지구의 불사조를 공략했을까?

[…1,001번 지구 관리자들과는 아직 연락이 안 돼?]

[어, 안 받고 있어.]

씨발!

개새끼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675번 지구와 1,001번 지구.

같은 검은 탑 관리자라고 해도 맡은 영역이 다르다.

목적은 같지만 상하관계도 아니고, 그리 친하지도 않고, 따라서 반드시 서로 협조해야 하는 의무감도 없고.

알고 보면 경쟁 업체.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후우.]

한숨만 나온다.

어쩌다가 저런 날벼락이 떨어졌을까.

[어쨌든 시간은 좀 벌 수 있으니까, 놈의 등반을 막을 방안이나 연구해 보자고.]

맞다.

불사조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해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

현재까지 지켜본 바로는 소환자의 부하 중 불사조의 불을 끌 수 있는 빙결계 능력을 갖춘 자는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딱 하나 남은 검은 탑.

빨리 완전 붕괴시켜야 한다.

저 플레이어만 죽일 수 있다면.

그래야 프로젝트가 재개될 수 있을 테니까.

[놈에게 주어질 보상의 정도는 얼마만큼일까?]

[우리가 저울에 너무 많은 걸 올렸어. 85층에서 죽였다면 그냥 무마됐겠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보상은 계약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저놈들 좋아하는 꼴을 보고 있어야 해?

차라리 안 보는 게 낫겠다.

[…홀로그램 영상 꺼.]

픽!

* * *

공략이 끝난 85층.

핵폭발의 여파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일단 임무는 성공했고.

"밖엔 아직 뜨겁겠죠?"

조금 식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 라직스가.

"호에."

스슷, 스스슷.

아공간 배낭에서 물약 몇 병을 꺼냈다.

"응?"

화염 저항의 비약.

소방 공략 준비하면서 남은 것들.

이거 먹고 나가면 될 듯.

"저 주십쇼. 제가 먹고 나가보겠슴다."

코시크가 물약을 꿀꺽 마시더니.

방공호 입구의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후끈!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뜨거운 열기.

"앗! 뜨뜨뜨뜨...."

서둘러 입구문을 닫는 코사크.

"으아, 화상 입을 뻔했슴다."

아직 뜨겁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이.

"전 골렘이니까 뜨겁지 않을 겁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아니, 진작 말을 하지 그랬슴까?"

"먼저 나가려는 거 보니 자신 있는 줄 알았죠."

"...."

바로 그때!

슥슥, 슥슥슥슥.

종이에 글씨를 적어 주혁에게 건네주는 마리.

- 냉기 포션을 머금은 호문쿨루스들을 먼저 밖으로 내보낼게요♥♪♪♪

냉기 포션의 호문?

그건 또 언제 만들었대?

슥슥슥슥.

- 전에 냉기 속성의 피소환인이 없다고 하셔서,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바깥의 열기는 충분히 식힐 수 있을 거예요♡♪♡♪

전에 말한 기억이 난다.

탱커에, 근접 딜, 원거리 딜, 신성 속성, 화염 속성, 서포터 계열, 다 있는데, 냉기 속성만 없다고.

"아유, 우리 마리 씨, 내가 부르길 잘했어."

마리가 주혁의 칭찬에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 나서 촤르르르르르르!

냉기의 호문이들을 벙커 바깥으로 내보냈다.

촤라라랏!

머금고 있는 냉기 포션을 뿌리며 바깥 온도를 낮추는 호문이들.

이제 나가보자.

엘이 앞장서고.

"괜찮을 듯합니다."

뒤를 이어 바르딘, 매켄지, 코사크, 라직스와 주혁까지.

여전히 후끈하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

주혁은 저 멀리 핵이 터진 장소를 바라봤다.

황량했다.

운석이 떨어지는 것처럼 대형 구덩이도 움푹 파여 있었다.

그나저나.

'확정 보상은?'

순간!

띠링!

[확정 보상이 지급됩니다.]

기대된다.

화끈하게 했잖아?

[특성 강화의 룬 1개가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일단 하나.

다음은?

[상급 마정석 5,000톤을 지급합니다.]

'음?'

더 주네?

계약은 3,000톤인데, 2,000톤이 플러스.

다만 궁금한 건....

'이 많은 양을 어떤 방식으로 주나?'

그때였다.

지이잉!

하늘에서 투명한 문 같은 것이 열리더니.

투둑, 투두둑, 투두두두두....

반짝반짝, 빛나는 돌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야!"

이렇게 주는 거구나.

"호아아앗!"

데구르르, 태앵! 팽그르르.

공중제비 라직스.

진공청소기 아공간 수납 능력으로 떨어지는 상급 마정석을 한 톨도 남김없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차원대머슴!"

"흡입력이 장난 아임다."

"거의 블랙홀 수준이군요."

"믿고 쓰는 피소환인이지."

"괜히 1인자가 아니죠."

뒤를 이어.

[최상급 마정석 1.5톤을 지급합니다.]

"오올!"

최마도 약속한 거보다 많이 준다.

무려 500kg이나 더.

이게 어딘가?

최마 1.5톤이면 백색 탑 입주권이 1,500장, 마검 인챈트 재료에도 쓰이고, 베 원사 아광속탄도 모자람 없이 쓸 수 있고.

상마든 최마든.

모조리 아공간 배낭으로 수납한 라직스.

이제 남은 보상은 배지.

S+++ 등급 공략은 무조건인데.

계약은 20개였다.

'안 주기만 해봐.'

띠링!

[세계 공지 : 검은 탑 (독일)의 85층 공략 등급 EX를 달성하셨습니다.]

"…음?"

잘못 들었나?

EX 등급이라니.

그럼 보상은....

[EX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0개+30개, 총 50개를 수여합니다.]

"헉!"

이거 뭐야?

20+30, 플러스 30.

아니, 이렇게 막 퍼준다고?

"50개다아!!!"

"넴? 뭐가 50개임까?"

"플래티넘 배지가요."

"흐익? 진짬까?"

"거짓말이겠어요?"

세상에.

S+++ 등급보다 더 위가 있었다고?

어쩌면 당연하다.

놀랄 것도 없다.

이게 어디 보통 공략인가?

거대 기간트 1마리와 초거대 괴수 3마리를 한 방에 날려 버렸는데.

"만세 삼창이라도 하죠."

"당연히 불러야 함다. 만세!!!"

"만세!"

"만세!"

"라직스 만세!"

"기간트 1호기 만세!"

"주혁 만세!"

그리고.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떠나간 우리 1호기 기간트를 위해 묵념."

주혁과 함께 1호기를 추모하는 피소환인들.

안녕, 나의 첫 기간트.

이제 받을 거 다 받았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공략.

관리자들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감사한 건 감사한 거고.

괘씸한 건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익스트림 헬 모드로 난이도를 올린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중도 포기 금지 조건을 걸어?

"망할 놈들."

"아주 나쁜 놈들임다."

"호랏!"

675번 관리자 이 새끼들은 우리 지구 관리자들보다 더 나쁜 새끼들이다.

핵무기를 넉넉하게 10개 챙겨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탑에 묶여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 복수하지? 확! 때려 버릴 수도 없고.'

딱 하나가 있긴 하다.

탑 관리자들을 괴롭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미처 상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탑을 공략해 주는 것.

거기에 EX 등급 공략까지 더해주면?

지구에서 한 것보다 더 빠르게 공략하면 가능할지도.

"돌아가자마자 86층 소방 공략 준비하고 다시 옵시다."

"예압!"

"준비하겠습니다."

슥슥슥슥.

- 저도 냉기의 호문쿨루스로 도울게요♥♡♪♬

"고마워요. 마리 씨."

[확정 보상이 모두 지급되었습니다.]

[독일 검은 탑 85층의 난이도가 일반 모드로 변경되었습니다.]

[독일 검은 탑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 * *

주혁과 피소환인들은 백색 탑 1층으로 돌아왔다.

무사히 공략을 끝내고 돌아오자 전전긍긍 주혁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피소환인들이 반색하며 열화와 같은 박수로 맞이해 줬다.

짝짝짝짝짝짝짝짝!

그런 후에 85층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니.

"저저저,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보상이 좋다고 해서 너그러이 대하시면 절대 아니되옵나이다. 응징이 필요하옵니다."

"전사는 관리자들이 어디 사는지 궁금하다."

"나도, 주소 아는 사람?"

"있겠슴까?"

"호아앗!"

EX 등급 공략.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낸 최상의 결과였다.

북한을 접수한 코사크.

그래서 핵폭탄을 무리 없이 구할 수 있었다.

라직스는 말해 뭐해?

그가 없었다면 이런 공략을 생각해내지도 못했을 텐데.

그밖에 기간트를 조종한 엘, 방공호에서 사람들을 보호해 준 매켄지, 바르딘, 마리, 다들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냈다.

자, 그럼 정산해볼까?

먼저 전리품부터 정리.

"라직스 씨, 최마 1.5톤만 꺼내봅시다."

"호앗!"

좌르르르륵!

쏟아지는 최상급 마정석.

눈이 부시다.

얼마나 영롱한지.

당분간 최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그리고 특성 강화의 룬.

바로 먹어야지.

꿀꺽.

[특성] : 소환(동시 소환 : 13)

현재 카탈로그 피소환인, 전향 귀순자 디아마트까지 합쳐서 13명.

동시 소환 인원수도 13명.

딱 들어맞는다.

깔끔하다.

사실 마리가 소환되는 일은 잘 없으니까 한 자리가 남는다고 봐도 된다.

'다음 무작위 소환은 언제야?'

아직 한참 남았다.

뭐, 그때까지 마검이 만들어지면 좋겠는데.

새로운 피소환인을 뽑아서 상층 공략으로.

드래곤이 나타나면 마검으로 슥삭!

마지막으로 플래티넘 배지.

총 50개나 받았다.

이전까지 받은 누적 배지는 150개.

현물 30개.

지금은?

50개를 더해서.

누적 배지 200개.

현물 80개.

그래서 인벤토리를 열어 배지가 잘 들어왔나 확인했는데.

순간!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플래티넘 배지 155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다국적 탑 이용 티켓 한 장을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플래티넘 배지 160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LSSR 등급 확정 소환 티켓 한 장을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

.

.

"…으잉?"

.

.

.

[플래티넘 배지 195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 한 장을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플래티넘 배지 200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아이템 추가 획득의 티켓 한 장을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헐!"

뭐지?

이 특전들은?

"미, 미친!"

그러고 보니 보통 배지가 아니었지?

탑 층 공략으로 주어지는 공식 플래티넘 배지.

"이거 진짜 대박인데?"

지난번에 럭키 랜덤 박스를 통해 똑같이 50개의 플래티넘 배지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누적 배지에 포함되지 않은 별도의 배지였고 따라서 특전 획득도 불가능했다.

물론 피소환인들에게 수여해서 등급을 돌파하는 용도로 활용하는 데엔 문제가 없었지만.

하지만 이번에 받은 플래티넘 배지는 다르다.

675번 관리자들과의 등가 교환 거래로 강화된 익스트림 헬 모드 임무.

핵탄두를 터뜨려 버리니 EX 등급 공략 성공.

거기에 약속한 20개에, 30개 플러스

공략 성공으로 받은 배지다.

당연히 특전도 유효하다.

그것도 10번이나 떴다.

"미친!"

특전 지급 메시지.

인벤토리에 아이템들이 막 들어왔다.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수가."

사랑해요.

익스트림 헬 모드.

바로 그때!

[업적 : 전 우주를 통틀어 최초로 누적 배지 200개를 달성하셨습니다.]

"…어머나?"

이럴 수가!

업적이라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감사! 압도적인 감사!

누적 배지 200개.

네네, 한국 최초도 아니고, 세계 최초도 아니고, 우주 최초가 접니다.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우주 최초라면 보상도 다르겠죠?

[초월(비욘드) 피소환인을 딱 한 번 소환할 수 있는 1회용 스킬을 상태창에 등록합니다.]

"???"

[초월(비욘드) 피소환인을 소환하려면 플래티넘 배지 30개가 필요합니다.]

[초월(비욘드) 소환 1회용 스킬은 사용하고 나면 상태창에서 삭제됩니다.]

[소환된 초월(비욘드) 피소환인의 현신 시한은 10분입니다. 10분이 지나면 자동 소환 해제됩니다.]

초월, 비욘드 피소환인이라고?

플래티넘 배지 30개를 소모해서?

이건 대체?

즉사기 장착인가?

199화

중국 국무위원 웨이콴은 비공식적인 경로로 한국에 입국했다.

그리고 곧바로 각성 관리청을 방문해 전광일 청장과 만났다.

목적은 마력 봉쇄 스크롤 중국 반입.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웨이콴은 전광일을 만나자마자 백기 들고 투항했다.

"중국 정부를 대표해서 왔습니다. 모든 조건을 다 수락하겠습니다."

그가 수락한다는 조건.

중국 일반 플레이어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 철회, 불법 수감된 플레이어들 즉시 석방, 그리고 원하는 플레이어들에 한해 망명 허락.

다만 범죄자 빌런 플레이어들은 제외.

이들은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하니까.

고민하는 전광일.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스크롤은 몇 장 정도 필요하시죠?"

"먼저 1억 장 정도만...."

"음."

1억 장이면 한국 돈으로 10조 원.

확실히 중국은 중국.

기본 단위부터가 다르다.

"1억 장 어렵습니까?"

"단시간 안에 찍어 내지는 못하더라도 미리 만들어 둔 것도 있고, 인쇄 노동자들이 야근 좀 하면… 한두 달?"

"아! 그럼 수출을?"

사실 봉주혁 플레이어와 이미 논의했었다.

웬만하면 수출을 해주기로.

중국 정부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저대로 내버려 둘 순 없다.

당장 탑 공략에 차질이 생기면 어떡하나?

탑 붕괴는 막아야지.

중국이 따로 떨어진 섬나라도 아니고, 알고 보면 하나의 대륙 안에 있는데.

"대금은 어떻게, 위안화로 드릴까요? 아니면...."

굉장히 급한 모양.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모든 공권력이 해방 플레이어 대응에 집중하고 있는 중, 국가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경제에도 엄청난 타격을 입고 있다.

주가지수 하락에, 소비심리 위축, 생산성 저하, 외국인 투자자도 발을 빼고.

"돈은 즉시 입금해 드릴 수 있습니다. 물건만 빨리, 1차분만이라도."

"돈 때문이 아니라서요."

"그럼?"

"제가 최종 결재를 받을 데가 있어서."

아무리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하나, 마지막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야지.

난감한 표정의 웨이콴.

"으음, 되도록 빠, 빠르게...."

"일단은 구두계약으로 하고, 결정만 되면 바로 처리할 수 있도록 물량 준비는 해 놓을게요."

"우리도 스크롤 즉시 실어 갈 항공기 평양 공항에 대기시키겠습니다. 꼭 해주셔야 합니다."

"네."

전광일은 웨이콴과 헤어지고 난 뒤, 바로 백색 탑 17층으로 갔다.

봉주혁 플레이어에게 최종 결재를 받기 위해서.

스팟!

'아무도 없나?'

조용한 백색 탑 17층.

있는 거라고는 우뚝 세워져 있는 마그누스 기간트들… 가만!

'기간트들? …들? 들이라니.'

뭐지?

'....'

난시인가?

한 대가 아니었다.

백색 탑 광장에 3열 종대로 세워진 기간트.

전투를 기다리는 병사들처럼.

하나, 둘, 셋, 넷....

총 15대.

"세, 세상에!"

기간트가 자가 분열이라도 한 것 같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을 테고.

봉 플레이어가 가지고 왔겠지.

"…하하."

이 정도 기간트 병력이면 지구 정복도 가능하겠다.

'다음에 오자.'

지금은 탑 공략하러 자리를 비운 거 같으니까.

"퇴장."

스팟!

* * *

초월, 비욘드 피소환인.

등급이라는 말도 없다.

말 그대로 넘어섰다는 표현.

'스킬이 등록됐다고 했으니까....'

상태창은?

[특성 스킬] : 지정 소환/ 무작위 소환/ 소환 해제/ 초월(비욘드) 무작위 소환(1회)

이렇게 됐다.

초월은 초월인데 무작위.

그럼 초월자들의 숫자도 다수라는 뜻인데.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피소환인들은 알고 있을까?

그래서.

"다들 이리 와봐요."

우르르르르.

동그랗게 모인 피소환인들.

"혹시 초월, 비욘드 피소환인에 대해 들어본 사람?"

주혁은 방금 받은 업적 보상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자.

"으음, 제가 전에 한번 말씀드렸슴다. 기억나심까?"

"…뭐라고 했죠?"

"세상 어딘가에 등급 외, 인간의 격을 초월하는 반신급 괴물들도 몇 있다고 말씀드린 거."

"아!"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다.

아주 초기에.

탑 공략에 관해 확신이 아직 서지 않았을 때.

등반 초기, 죽거나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탑을 올라갈 수 있을까? 하면서 고민하고 있던 참에 코사크가 해줬던 말.

"그럼 초월 피소환인이 등외, 반신급이란 말인가요?"

"그럴 검다."

"어디에 있죠? 영혼의 세상에?"

"그건 저도 모름다.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슴다. 우리 피소환인들 사이에서도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라."

전설 속 전설.

그저 얘기는 들어봤다 하는 수준.

심장이 콩닥거린다.

신에 근접한 존재를 소환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하지만.

"10분이면 너무 짧네요. 1회성인 것도 그렇고."

그러자 광마가.

"영혼의 격 자체가 너무나 강력해서 10분 정도만 세상에 머무를 수 있을 거요. 뭐, 10분도 길지. 반신급 존재가 현신하면 웬만한 탑 층은 순식간에 공략할 테니까."

매켄지도.

"맞습니다. 대적할 만한 존재가 있을까요? 설령 에이션트 드래곤 로드라 하더라도."

"에이션트 드래곤 로드?"

"최강의 드래곤이지요. 운석 소환으로도 죽일 수 없는, 하지만 그 드래곤 로드에게도 반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아하!"

드래곤 로드도 반신급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걸리면 푹! 찍!

그런데 견달래는 의견이 다른 듯.

"허나 신중해야 하옵니다. 초월자들은 피소환인 3원칙도 초월할 수도 있다는 존재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하옵니다."

얼레?

그것도 그러네.

불러냈는데, 되레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막 쓰면 안 되겠구나.'

딱 1번의 기회.

그리고 소환했을 때 생길지도 모를 리스크.

결정적인 순간에, 도저히 공략 불가능이라고 판단될 때 써야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하기로 하고.

다음으로 특전 보상.

모두 10개.

정리해 보자면.

아이템 추가 획득의 티켓 1장, LSSR 등급 확정 소환 티켓 1장, 피소환인 등급 상승의 룬 1개, 탑 층 난입 티켓 1장, 그밖에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과 다국적 탑 이용 티켓은 중복으로 각 2장씩, 더불어 피소환인 스킬 복사.

"…와!"

특성 강화 룬이 없다.

10연속 뽑기인데 말이다.

뭐, 그만큼 특강 룬이 귀하다는 방증이겠지.

그래도 특이점이 하나 있다면....

'피소환인 스킬 복사가 떴네?'

이건 좋은 거다.

복사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니까.

"제가 특전으로 여러분들이 가진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기회를 보상받았거든요. 그래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번쩍번쩍 드는 피소환인들.

"제걸 배우십쇼. 은신, 은신 말임다."

"흥! 은신이야 은폐의 장막이 있으니, 소환사님, 운석 소환 어떠십니까?"

"빛이여!!! 광휘를 배우소서. 사람들이 주군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소녀의 부적술을… 쓰임새가 많을 것이옵니다."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군인은 사격술입니다."

"꿈의 영역은 어떠세요. 저와 함께 달콤한 꿈을."

"거대화를 배워라. 키가 커진다."

"컹컹컹컹!"

"호아아앗!"

띠링!

<마리> : 연금술 좋아요♡♡♬♬

그러나.

"말씀은 고맙지만 이미 결정한 바가 있어서."

주혁은 라직스를 보며 말했다.

"우리 차원대머슴 스킬 하나 복사해도 되죠?"

"호에?"

"아공간 배낭을 복사하려고 하는데."

"호엥!"

허락했다.

그럼 해볼까?

동시에.

띠링!

떠오르는 메시지.

[특전 : 피소환자가 가진 스킬 중 1개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선택하세요.]

대상에서 라직스를 선택한 후, 그의 스킬 목록에서 아공간 배낭을 콕 찍어서.

'아공간 배낭 복사 습득.'

그런데?

[피소환인 라직스의 아공간 배낭 스킬은 복사가 불가능합니다.]

"…응?"

안 돼?

왜?

"아공간 배낭은 복사가 안 되네요."

"후에."

실망한 표정의 라직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럼?

"…운석 소환이나 배워볼까요?"

[피소환인 메켄지의 운석 소환 스킬은 복사가 불가능합니다.]

이것도 안 돼?

"부적술을...."

[피소환인 견달래의 부적술 스킬은 복사가 불가능합니다.]

"...."

광마가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마 각 피소환인들의 특정한 고유 스킬은 배울 수 없을 것이오. 바르딘의 광휘라든가, 고방의 거대화 스킬이라든가."

그런가?

하긴 아공간 배낭이 보통 스킬인가?

지구 물건, 탑 물건 가릴 것 없이 핵탄두도 막 넣고, 그 큰 기간트도 수납하고, 소방차에, 안 들어가는 게 없는데.

'복사라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구나.'

뭐, 이거까지 되면 너무 날로 먹는 거니까.

솔직히 라직스만 곁에 두면 굳이 배울 필요도 없지.

"일반적인 전투 스킬은 가능할 거요. 노부는 매 마법사의 배리어 스킬을 추천해드리오."

"찬성임다. 역시 자기 보호 스킬이 최고임다. 에너지 방어막과 배리어 마법이면 더더욱 안전하실 검다."

"소녀도 찬성입니다."

매켄지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 마법사가 화염 마법이 전문이긴 하지만 배리어 마법도 쓸 만합니다. 어서 배우시죠."

주혁도 동의했다.

배리어 마법을 배우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걸어줄 수 있고.

[스킬 : 배리어 보호막 스킬을 습득합니다.]

[상태창에 배리어 보호막 스킬이 등록되었습니다.]

상태창에도.

[전투 스킬] : 그림자 발걸음/ 혼원벽력곤/ 혈옥강기/ 아이스 스피어/ 배리어 보호막.

이제 오늘 일정 끝.

"자! 우리 배지 수여식을...."

하지만.

"에이, 배지 안 받아도 됨다. 넣어 두십쇼."

"그러하옵나이다. 배지를 아끼시지요."

"이제 배지의 사용처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호에에에!"

왜들 이러는지 알겠다.

초월, 비욘드 소환의 길이 열렸다.

지금은 1회용이지만 나중에 기회가 더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환 비용으로 플래티넘 배지가 30개.

그래서 배지를 아껴야 한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

정체도 모르는 초월자보다 현재 곁에 있는 피소환인들이 훨씬 중요하다.

"싹 다 하나씩 받으세요."

13명 전부.

혈랑, 개까지 준다.

그런 이유로 남은 배지는 80개 빼기 13개, 67개.

'참! 바깥으로 나가서 제페트도 소환해야지.'

이번에 675번 지구 검은 탑 공략 과정도 이야기해 주고, 배지도 달아 줄 겸.

* * *

다음 날.

주혁은 백색 탑에 들어온 전광일 청장과 만났다.

"봉 플레이어님."

"어서 오세요."

"어젠 안 계시더라고요."

"아… 탑 등반 좀 하느라."

다른 세상에서요.

핵무기도 터뜨리고.

무려 10발이나.

'상황 봐서 알려 줘야겠네.'

서로 알 거 다 아는 사이인데.

또 비밀로 할 이유도 없고.

먼저 마검 제작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이야기한 다음.

전광일은 마력 봉쇄 스크롤 중국 수출 계약 건에 관해 설명했다.

"총 1억 장 선주문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더 주문할 수 있다고."

"아, 네네."

"한화로 10조 원가량인데, 위안화로 받을까요, 아니면 달러로...."

헐.

한 번에 매출 10조 원.

엄청난 돈이다.

하지만 요즘 금전 감각이 둔해져서 그런지 그리 큰돈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또한 돈은 충분하다.

그래서.

"돈 말고 다른 걸 받으면 안 될까요?"

"다른 거라면...?"

뭐가 있지?

옆나라 중화인민공화국이 소유한 것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게 뭐더라.

인구, 천연자원, 그리고 광대한 영토.

'땅이라.'

좋네.

땅을 받자.

이왕이면 국가 간 조약 체결로 영원히 양도 받는 식으로.

"예를 들어 땅 같은 거."

"아!"

"백두산 중국 영역 달라고 해보세요. 그 정도면 받을 만한 것 같은데."

현재 백두산의 절반은 북한, 절반은 중국 땅.

전광일 청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백두산을 완전히 북한에 귀속시키는 식으로 말입니까?"

"네, 어차피 통일될 테고."

괜찮은 생각이다.

아직 중국 특사 웨이콴이 마지막 계약을 위해 한국에 머물고 있으니.

"알겠습니다. 의사를 타진해 보겠습니다."

"잘 안되면 몇 가지 더 추가해 주세요. 마총 우선 예약이나, 아니면 탑 공략도 해준다고."

충분히 먹힌다.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전례가 있으니까.

국가 간 땅 양도.

검은 탑 생성 이후로 굉장히 흔하게 벌어지는 일.

과거 중국과 러시아의 임시귀화 계약 때도 그랬다.

러시아의 플레이어가 중국 탑 3개를 동시에 공략해 준 대가로 중국 정부는 헤이룽장성 일부 지역을 러시아로 넘겼다.

백두산 반쪽이면 해 볼 만한 거래지.

러시아에 양보한 땅보다 더 작은데.

무조건 받아 내자.

'나, 요즘 간이 많이 커졌네.'

하남자가 대국 땅도 막 먹어 버리고.

"참! 그리고 소방 공략 한 번 더 하려고 하는데, 준비 좀 해주실래요?"

"소방 공략이라면… 어디에서?"

대한민국 2개 탑 86층은 전에 공략했다.

다른 국가 검은 탑은 아직 멀었고.

"공략할 탑이 하나 더 있어서요. 핵을 10발 정도 터뜨리긴 했는데 성이 차지 않아서, 아주 나쁜 새끼들이라."

"…네?"

대체 무슨?

"핵이라뇨? 제가 생각하는 그 핵 맞습니까?"

"넵! 그 핵입니다."

과거 봉 플레이어가 핵으로 초거대 괴수를 잡았다는 사실을 듣긴 했지만.

"탑 안에서 핵 사용이 가능해졌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금지되지 않았나요?"

"1,001번 지구에선 관리자들이 금지했지만 675번 지구는 아직 패치되지 않았거든요."

"…에?"

얼빠진 표정의 전광일.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1,001번 지구? 675번 지구?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주혁은 전광일 청장에게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더불어 관리자들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충격받은 표정의 전광일.

차원 이동, 다른 세상, 멸망한 세계, 그리고 그곳의 검은 탑.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경악할 만한 사실은.

"과, 관리자들요?"

탑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심지어 3번이나 만났단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어떤 놈들인지?"

"저도 몰라요. 사실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정체도, 목적도."

주혁은 고개를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다만 저한테 접촉해서 자꾸만 탑 공략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 뿐."

"...."

전광일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알게 된 사실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거 비밀 사항입니까?"

"천만에요. 공개해도 상관없어요. 사람들이 믿어 줄진 모르겠지만."

"아아...."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그동안 힘드셨겠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는지...."

"에이, 고생은 무슨! 이번에도 시원하게 스트레스 풀고 왔는데"

그러고는 옆에 있는 노트북의 전원을 켜서.

"핵 터지는 영상 보실래요?"

"찌, 찍어 오셨습니까?"

"당연히 찍어야죠."

주혁은 노트북을 대형 모니터에 연결해 영상을 재생했다.

"저기 보이는 놈들이 초거대 괴수입니다. 타이탄 베헤모스, 메가 뮤턴트 아포피스, 데모닉 아라크로이드."

"…마, 맙소사!"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크기.

예를 들어 일반 베헤모스가 치와와라면 타이탄 베헤모스는 코끼리 수준.

다른 초거대 괴수들도 다를 바 없었다.

'저걸 어떻게 공략해?'

그런데 공략했다.

양손에 중형 전술 핵탄두 10개를 수류탄처럼 들고 전진하는 봉 플레이어의 기간트.

가까이 접근하더니 번쩍!

콰콰콰콰콰콰콰쾅!!!!

그리고 암전.

"하하하...."

"대단하죠?"

"네, 저, 정말, 하아, 대단합니다."

핵 터지는 모습이 대단한 게 아니라 봉주혁 플레이어 자체가.

보면 볼수록 대단한 사람이다.

우리 지구에서도 그렇고, 다른 세상 지구에서도 그렇고.

검은 탑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의 온갖 술수와 방해를 보란 듯이 분쇄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영상 하나 공개할까요?"

"핵폭발 말입니까?"

"아뇨. 이거 말고."

핵폭발 영상 공개는 하지 않을 것이다.

폭탄의 출처도 그렇고, 매우 민감한 사항이니까.

"예전에 촬영했던 우리 기간트와 베헤모스의 격돌 영상."

베헤모스를 피떡으로 만드는 우리 기간트 1호기의 대활약상이 담긴.

"아하, 그거요?"

전광일도 시청한 바 있다.

"네, 각성 관리청 너튜브 채널에서 공개하겠습니다."

불쌍한 우리 기간트 1호기.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베헤모스를 짓밟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무생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게 좀스럽지 않냐고?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폐차시킬 때도 눈물을 흘린다던데.

원폭 10개를 들고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한 기간트 1호기라면 충분한 자격이 있지.

시간이 흐르고.

주혁이 675번 지구 검은 탑 86층 불사조 소방 공략을 위해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 후.

너튜브에서 영상 하나가 떴다.

제목은.

<우리 친구 마그누스 기간트 1호기를 추모하며.>

영상 설명 : 생전 고인의 개쩌는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00화

그동안 주혁은 각성 관리청 너튜브 채널을 통해 거대 괴수들의 면면을 생생하게 공개해 왔다.

81층 베헤모스, 82층 아포피스, 83층 아라크로이드, 84층 콜로서스 콘도르, 85층 마그누스 기간트, 86층 초열겁화 불사조까지.

정보 공개를 위한 목적이었기에 몬스터 모습만 나왔다.

일반인들에겐 재미도 없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고.

마음 불편하게 왜 이런 걸 보여 주냐며 악플 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영상.

이전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리 친구 마그누스 기간트 1호기라니.

생전 고인의 개쩌는 영상을 보여 준다고?

영상의 내용은 이랬다.

마그누스 기간트가 유려한 몸놀림으로 베헤모스를 제압하는 격투 장면.

파괴 광선으로 눈을 멀게 하고, 돌진하여 쓰러뜨리고, 파운딩 후에 깔고 앉아 주먹으로 퍽퍽퍽! 마무리.

박진감이 흘러넘쳤다.

촬영도 얼마나 잘했는지 매우 현실적이었다.

CG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지상에서, 하늘에서.

줌 인과 줌 아웃.

드론도 저렇게는 못 찍을 터.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한국 각성 관리청 너튜브 채널 구독자가 떡상했고, 조회수는 하루 만에 1억뷰를 달성했다.

└ 미쳤다. 개쩌는 게 맞네. 끝장났다.

└ 평생 소장 각인데?

└ 제랄드도 힘들게 잡은 베헤모스를 주먹으로 조져놓다니.

└ 그럴 수밖에, 저게 진짜 그 마그누스 기간트라면 81렙과 85렙 싸움이잖아.

└ 근데 왜 몬스터끼리 싸워?

└ 제목 봐라. 기간트는 우리 친구.

└ 우리 친구라, 최고 플레이어겠지?

└ 그럼 그 양반 말고 누가 있어?

└ 어떻게 손에 넣은 거야?

└ 최고 플레이어 특성이 소환사라는 소문이 있으니까, 소환수겠지.

└ 저놈 가지고 탑을 공략했군. S+++ 등급 공략은 당연한 거였어.

└ 씨발, 내 골렘은 장난감이네.

└ 클라스가 달라. 100m도 넘겠다.

└ 인민의 주체적 혁명 정신으로 무장한 기간트구만 기래!

└ 그런데 추모 영상이면 죽은 건가? 이젠 볼 수 없다고?

└ 제목이 1호기야, 2호기도 있을걸?

└ 와! 몇 호기까지 있는 거야?

└ 수수께끼가 풀렸다.

└ 무슨 수수께끼?

└ 내가 제철소 근무하고 있는데, 현재 60m짜리 검을 만들고 있거든.

└ 오타 났다. 60cm겠지.

└ 정확하게 썼어. 60미터라고.

└ 에이, 설마?

└ 생각해봐. 60미터 무기, 그걸 누가 쓰겠어?

└ 그러네. 100m 높이 기간트가 들기에 딱 좋은데?

└ 그럼 곧 60m짜리 검을 들고 싸우는 100m 기간트를 볼 수 있다는 말?

└ 올해 블록버스터 영화는 망했구나.

└ 저거 극장에서 상영 안 하나?

└ 큰 화면에서 보면 더 실감 날 거야.

└ 개봉해라!

└ 맞아! 개봉해!

└ 고조, 공화국에도 극장이 있디.

쏟아지는 언론 기사들.

영상의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 각성 관리청엔 전화가 빗발쳤고.

기간트는 거대 로봇이라고 해도 진배없었다.

로봇과 괴수의 싸움이라니.

애든 어른이든, 남자들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기간트 1호기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실제로 각성 관리청에선 '거대 기간트 VS 베헤모스' 대결 영상을 극장에 걸었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영상이라 본 영화 상영 앞에 광고를 보여 주는 식으로 잠깐.

극장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였다.

본 영화보다 광고 인기가 더 많았다.

그렇게 주혁의 1호기 기간트는 사람들에게 깊이 기억됐다.

* * *

주혁과 피소환인들은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백색 탑 1층으로 왔다.

목적은 초열겁화 불사조 처치.

675번 지구 검은 탑 86층 소방 공략.

그래서 은폐 장막을 뒤집어쓰고 바깥으로 나가 피소환인들을 차례대로 소환했는데.

순간!

띠링!

[세계 공지 : 앞으로 탑 안에서의 열병기 사용은 엄격하게 제한됩니다. 화약 혹은 핵분열과 핵융합 등 지구 과학에 기반한 폭발 반응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막았네."

"막았슴다."

"막혔사옵니다."

"막았구나."

"막았다."

"호에."

아쉽다.

핵 공략은 또 불가능.

"관리자 놈들은 어째 패기가 없어."

1,001번이나 675번이나 다 똑같다.

조금만 처맞아도 엉엉 울면서 있던 규칙을 바꾸기나 하고 말이야.

"에이, 하남자 새끼들."

탑 공략이나 하자.

그런데 코사크가.

"봉 소환사님."

"왜요?"

"제가 생각해 봤는데, 앞으로 여기 검은 탑은 찍먹용으로 활용하면 괜찮을 것 같슴다."

찍먹용이라니.

"어차피 공략 실패해도 더는 망할 일이 없는 세상 아임까."

고개를 끄덕이는 주혁.

675번 지구 인류 최후의 생존자 막스 크루거가 죽고 난 뒤, 완전하게 망해 버린 세상.

"우리 지구는 다름다. 망하면 큰일 남다."

그렇고 말고.

"봉 소환사님께서도 경험했듯이, 70층 보스, 80층 보스 때는 반드시 현실 세상에 영향을 주는 놈들이 나타남다."

맞다.

70층 카발란, 80층 디아마트.

탑이 아닌 실제 현실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었다.

"그런 이유에서 90층은? 괜히 먼저 올라갔다가 세상이 어떻게 되면 큰일 아임까?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검다."

"흠."

이해했다.

과거 플레이어 기욤이 70층에 먼저 올랐다가 프랑스가 민폐 국가로 낙인 찍힐 뻔했다.

미국도 마찬가지.

디아마트의 현혹 스킬에 당한 플레이어가 80층에 제일 먼저 도달했었다.

그래서 디아마트가 탑에서 나왔고.

덕분에 미국도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었다.

결과적으로 디아마트는 전향 귀순해서 지금 옆에 있지만.

"그러니까 90층은 675번 지구에서 등반하자?"

"90층뿐만이 아임다. 87층부터 찍먹해 보심이."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

여기 검은 탑은 미공략 상층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는 용도로 쓰면 딱 좋다.

이를테면 미공략 상층 등반 실험과 정보 획득의 장.

"우리 지략가 코사크 씨,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대? 천재야, 천재!"

"이 코사크, 우주 최고 천재 봉 소환사님에게 어울리는 피소환인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슴다."

"아유, 달달하게 말씀도 잘하셔. 하하하하!"

"헤헤헤헤! 과찬이심다."

반면 표정이 썩 좋지 않은 피소환인들.

겉으로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간신 본능 어디 가겠어?'

'아부만큼은 초월자구나.'

'약삭 빨라. 질투가 날 정도로.'

'저놈을 어떻게 제치지?'

'후에에에....'

아무튼 탑 등반 시작.

먼저 확인해 볼 사항.

서로 다른 세상의 관리자들이 원활하게 소통하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

"라직스 씨."

"호엥?"

"기간트 한 대 들어갈 자리 있나요?"

"호엥!"

있단다.

그렇다면.

스팟!

[독일 검은 탑 85층에 입장합니다.]

675번 지구산(産) 기간트 하나 업어오자.

우리 자폭 전사가 여기서 순직했으니, 새로운 전사도 여기서 영입해야지.

이게 바로 진정한 등가교환 아닌가.

일단 기간트 대응용 제작 마총으로 마력 EMP탄 발사.

번쩍!

기동을 멈춘 후에 광마 코사크 투입.

서거거걱, 거걱!

장갑판 열고.

엘 님, 그 회로도 봐 봐. 혹시 자폭이야?

회로도가 자폭이 아니라는 데 내 돈 모두하고 손모가지를 건다. 쫄리면....

"일반 자동형입니다. 자폭 회로도는 없습니다."

아싸.

"관리자 애들, 서로 소통 안 하는 것 같죠?"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소통했다면 핵 공략 이전에 모두 패치를 했을 것이옵니다."

역시 모든 갈등의 원인은 소통의 부재.

덕분에 자신이 이득을 보는 거지만.

"가져갑시다."

스스스스스스스스....

이제는 기간트를 부드럽게 집어넣는 라직스.

반복 공략 성공.

대충 보상받고.

[독일 검은 탑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다시 들어가고.

[독일 검은 탑 86층에 입장합니다.]

초열겁화 불사조 공략.

압도적이어야 한다.

관리자들이 기절초풍하게끔.

그를 위해 화학소방차도 40대를 가지고 왔고, 액화 질소도 최대한 많이 준비했다.

소방차 조종은 누가 하냐고?

화학소방차는 호스로 뿌리는 게 아니라 소방 약제 발사기가 상단에 위치해 있다.

원격 자동 발사도 가능하다.

그리고 매켄지가 플라이 마법으로 초반부터 라직스를 데리고 하늘을 날아서 한꺼번에 액화 질소 탱크를 떨어뜨린다.

광마와 베 원사가 탱크를 터뜨려 내용물을 쏟아내면 끝.

3번째 공략.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견달래의 굿거리장단을 신호로 해서.

"베 원사, 풀링해와요."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배달 준비 완료."

불사조 공략이 시작됐다.

쫘자자자자자자작!

사방에 흩뿌려지는 소방 약제.

떨어지는 액체 질소의 폭우.

그리고 이전 공략과 다른 점.

바로 마리의 합류.

촤라라라라라락!

냉기 포션을 머금은 호문쿨루스가 초열겁화 불사조의 몸통을 휘감았다.

지가 무슨 수로 버틸 건데?

띠링!

[초열겁화 불사조 1/1]

[86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 : 불사조의 깃털/ 상급 마정석 860kg]

진짜 압도적으로 잡았다.

깃털도 하나 더 득템.

결과는?

[세계 공지 : 검은 탑 (독일)의 85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흠."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실망이야.

솔직히 EX 등급을 기대했다.

'에이, 최대한 빠르게 잡았는데.'

확실히 공략은 임팩트가 있어야 해.

빨리 잡는 건 문제가 아니다.

'왠지 성이 차지 않네.'

주혁은 아직 배가 고팠다.

* * *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실.

[쟤들 또 왔네. 지긋지긋한 놈들.]

[설마 86층?]

[아니, 85층에 입장했어.]

다행이다.

86층을 공략하는 줄 알았네.

근데 뭘 하려고 85층을?

반복 공략?

[어?]

[…후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왜?]

[일꾼 놈이 아공간에 기간트 넣어 가는데?]

넣어 가다니.

[어떻게?]

[마력 EMP로 기동 정지시키고 회로도 조작해서.]

[아아....]

여태껏 그런 식으로 가져갔구나.

[어떡할까? 저 기간트도 패치해야 할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는 디자이너.

그러고는.

[놔둬.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라고 해.]

어차피 86층 이상부터는 쓰지도 못할 물건.

저걸로 불사조와 드래곤들을 공략하기엔 턱없이 모자란다.

[어?]

[어?]

[어.]

이젠 어? 소리 하든 말든.

[뭔데? 말해봐.]

[쟤들 방금 86층에 입장했어. 불사조 공략인가?]

[…뭐?]

불사조라니.

공략하려고?

[호, 홀로그램 띄워.]

픽!

공략이 시작됐다.

관리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소방차?]

대체 몇 대야?

날개를 편 새처럼 소방차를 넓게 정렬시키더니.

쫙쫙쫙쫙! 쫘자자자자자작! 쭈주주주주죽!

뿌려지는 초대량의 소방 약제.

심지어 하늘에서도 열대성 폭우처럼 액체 질소가 내렸다.

[그렇군.]

잊고 있었다.

[저놈은 아직 망하지 않은 세상에서 왔었지.]

[핵뿐이 아니었어, 뭐든 다 들어가는 아공간이니까, 아직 안 망한 지구 과학 문명의 화재 진압 기술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테고.]

[미치겠네.]

결국 86층도 따였다.

포기해야 하나?

그런데 왜 저놈은 S+++ 등급으로 공략하고도 저렇게 실망한 표정일까?

* * *

스팟!

주혁은 탑 바깥으로 나왔다.

생각해 왔던 대로 86층도 공략했고, 불사조 깃털도 하나 더 얻었고, 배지도 받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쯧.'

좀 더 관리자들의 약을 바짝 올려 주고 싶은데.

'한층 더 올라가?'

코사크 말대로 675번 지구 검은 탑은 찍먹탑 아닌가?

그럼 찍먹은 해봐야지.

안되면 그냥 나오면 되고.

"한 번 더 들어갔다 와볼까요?"

"…넴?"

"87층 콜?"

"콜임다!"

"전사는 좋다고 생각한다."

"거침없이 나아가시옵소서."

다들 한마음.

한 명만 동의해 준다면.

"…마리 씨는?"

저 옆에 쭈그려 앉은 마리.

슥슥슥슥.

- 소환사님, 곁에 있을게요.

좋다.

다 함께 가즈아!

87층으로 올라간다.

뭐가 나올까?

[독일 검은 탑 87층에 입장합니다.]

스팟!

87층에 도달한 주혁과 피소환인.

환경은 들판이었다.

말라 죽어 버린 풀밭.

악취도 풍겼다.

동물 사체가 썩는 듯한 냄새.

'으스스하네.'

괜히 왔나?

후회된다.

가슴에 뽕이 차오를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

자만은 금물인데.

만족하고 돌아갈 걸 그랬다.

그런데?

"하!"

탄성을 지르는 바르딘.

그러더니.

"빛이여!!!"

화아아아아악!

찬란하고 짙디짙은 광휘가 87층을 가득 채웠다.

"소신이 앞장서겠나이다."

뭐야?

르스스알로 승급하고 나서 라직스처럼 탐색 기술이라도 익혔나?

저벅저벅 걸어가는 바르딘.

그리고 잠시 후.

띠링!

[87층 임무 : 진명을 상실한 언데드 본 드래곤을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완료 조건 : 진명을 상실한 언데드 본 드래곤 0/1]

동시에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는 물체.

펄럭펄럭!

머리는 해골, 몸체는 아직 가죽과 육신이 남아 있었지만 군데군데 드러난 뼈.

좀비와 스켈레톤을 섞어놓은 모습.

"드래곤이네."

"드래곤임다."

"드래곤이군."

"드래곤인가?"

"그런데 언데드라서...."

"언데드 드래곤이면 드래곤이라 부를 수 없지."

"게다가 진명까지 상실했으니."

"실제 드래곤에 한참 못 미치는 놈이야."

"근데 잡을 수 있을까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언데드라면 여기 천적이 있잖아.

르스스알 성기사 바르딘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가슴을 쫙 펴고 거대한 방패를 들어 올렸다.

"빛이여!!!"

아아아!

저 눈부신 광휘를 보라.

언데드와는 상극.

삿된 것을 물리치는 성기사의 위용.

"빛이여!!!"

찬란하다.

눈부시다.

그래.

바르딘만 믿고 가자.

그런데 바로 그때!

쯔즈즈즈즈즉!

피식.

사라지는 광휘.

뭐야?

왜 빛이 꺼져?

바르딘도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빛이여!!!"

화아아아아악!

그러나,

쯔즈즈즈즈즉!

피식.

또 빛이 꺼졌다.

"...."

어이가 없네.

조루 광휘?

르스스알 성기사가?

"비, 빛이여!!!"

화아아아아악!

쯔즈즈즈즈즉!

피식.

"왜 자꾸… 아하!"

이유를 알았다.

범인이 있었다.

바르딘의 몸에 마총 총구를 대고 있는 베 원사.

그녀의 손에 든 마총이 신성한 기운으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속성 흡수 시전해 봤습니다."

"...."

그러고 보니 속성 흡수가 있었지?

베로니카의 속성 흡수는 스스알(SSR)일 때 익힌 스킬.

그녀도 르스스알(LSSR)로 승급했으니.

르스스알 광휘를 르스스알 속성 흡수로 쪽 빨아 버린 것.

"아니, 왜 내 광휘를...?"

"비행 몬스터입니다. 풀링은 해야죠."

"어어어."

베 원사가 자세를 잡았다.

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

마총이 미친 듯이 진동하며 달아올랐다.

"푸, 풀링한다면서 아광속탄을?"

크릭!

방아쇠를 손가락으로 당긴 베 원사.

"그냥 소형탄 발사하면 되잖아!!!"

바르딘의 처절한 절규를 뒤로한 채.

부아앙!

일어나는 엄청난 후폭풍.

추울렁!!!

펑!

빠쮸쮸쮸쮸쮸쮸쮸쮸쮹!!!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신성 속성의 아광속탄이 진명을 상실한 언데드 본 드래곤의 몸체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쿠아아아아악!"

광휘는 언데드의 천적.

게다가 르스스알로 강화된 광휘.

더불어 아광속탄.

속절없이 추락하는 언데드 본 드래곤.

"한 방이네?"

"한 방임다."

"한 방이구나."

"한 방인가?"

"한 방까지는...."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한 발 더 쏘면?"

그리고.

"빛이여!!!"

언데드 드래곤이 추락한 장소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성기사 바르딘.

비록 선빵은 빼앗겼지만.

그렇지.

마무리는 성기사가 해야지.

관리자들 보고 있나?

이분들이 나의 피소환인님들이시다.

* * *

[....]

[....]

[....]

675번 관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1화

언데드 본 드래곤.

처음 나타났을 때의 모습은 처참했다.

곧 뒈져도 무방할 만큼 엉망이었다.

몸통과 날개는 비교적 온전했지만 머리는 해골, 꼬리도 뼈만 남았고, 팔다리도 한쪽은 괜찮고, 다른 한쪽은 썩어서 떨어져 나갔다.

그렇더라도 드래곤은 드래곤.

더불어 언데드답게 온몸을 감싸고 있는 암흑 오라.

허접한 좀비의 암흑 오라도 견디기 힘든 판에 드래곤이라니?

그래서 어렵다고 판단해 포기하고 나갈까 생각했지만.

고작 한 방이었다.

언데드 본 드래곤은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신성 아광속탄에 명중 당해 추락해 버렸다.

바르딘의 르스스알 광휘.

베 원사의 속성 흡수 아광속탄.

그 둘의 환상적인 콜라보....

"콜라보는 개뿔!!!"

바르딘은 미친 듯이 앞으로 뛰었다.

아니, 언데드가 매 층마다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간만에 건수 하나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치사한 베 원사.

타고난 피지컬로 가만히 있어도 상위권이잖아.

뭐가 부족하다고?

"치사하게 가로채기나 하고 말이야."

르스스알로 돌파한 후 맞이하는 첫 실전이었다.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소환사, 아니, 주군께 견식시켜 드릴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남의 광휘로 공을 세우겠다고?

진짜 너무한다, 너무해.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늦지 않았다.

한 발 맞고 지상으로 추락했지만 여전히 꿈틀거리는 언데드 본 드래곤.

파파팟! 팟팟!

바르딘은 놈을 향해 돌진했다.

임팩트 있는 마무리.

탄성과 박수가 저절로 터져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아직 죽지 마라! 죽으면 안 돼!!!"

언데드 본 드래곤도 달려오는 바르딘을 발견했다.

그리고 저 너머 주혁과 나머지 피소환인들도.

"쿠에, 쿠에엑, 쿠에에에...."

비틀비틀 일어나는 언데드 본 드래곤.

아싸! 아직 안 죽었다.

"크르륵!"

놈의 목울대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드래곤의 고유한 공격 기술 브레스.

언데드이기에 암흑 속성의 브레스.

목표는 바르딘과 저 뒤쪽에 있는 주혁 일행까지.

일직선으로, 한꺼번에.

크게 벌려지는 입.

그리고.

촤롸롸롸롸롸롸롸롸롹!!!

시꺼먼 불길이 언데드 본 드래곤의 입에서 사정없이 쏟아졌다.

그러나 브레스가 쏘아지기 전에 그 자리에서 멈춰 선 바르딘.

손에 든 방패를 앞에 세우고.

"빛이여!!!"

쑤우우욱!

방패가 거대해진다.

쑥쑥 커진다.

그리고 찬란한 광휘가 빛을 발했다.

드드드드드드드드....

광휘의 벽 앞에 완전히 차단된 암흑 브레스.

바르딘은 굳세게 전진했다.

강력한 암흑 브레스를 방패로 밀어내면서.

촤롸롸롸롸롸롸롸....

암흑 브레스는 계속해서 쏘아졌다.

그러나 방패에 막혀 무기력하게 사그라들었고.

아아아!

무시무시한 암흑 브레스를 혼자서 막아 내는 르스스알 광휘의 성기사 바르딘의 위용.

저게 바로 진정한 광휘지.

저분이 바로 옳게 된 성기사지.

"빛이여!!!"

잠시 후.

브레스 공격이 끝이 나자.

츠핏!

거대 방패를 들고 힘껏 위로 쳐들면서 도약하는 바르딘.

"사라져라! 티끌 하나 남기지 말고 소멸해라! 순리를 거스르는 더러운 것아!"

콰직!

진한 광휘의 방패가 언데드 본 드래곤의 머리에 떨어졌다.

파사사삭!

으깨지는 드래곤의 해골.

콰직! 콰직! 콰직!

방패가 방어만을 위한 것인가?

그럴 리가?

쓰기에 따라 매우 훌륭한 공격 무기다.

브레스는 최후의 발악이었을 뿐.

암흑 오라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언데드 본 드래곤은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콰직! 콰악! 꽈득! 콱콱!

광휘의 방패가 해골을 부수고 몸통까지 짓밟아 버리니.

프스스스스.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하는 언데드 본 드래곤의 썩은 육신.

[진명을 상실한 언데드 본 드래곤 처치 1/1]

[87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르스스알 성기사.

속성 흡수의 성(聖) 마총사.

언데드는 불사조보다 더 쉬웠다.

임무 성공.

레벨도 올랐다.

1,001번 지구가 아닌, 675번 지구에서.

보상은?

[보상 : 암흑에 의해 침식당한 드래곤 하트/ 최상급 마정석 1kg]

'…음.'

하트가 보상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이것도 제대로 된 드래곤 하트가 아니네.'

하긴!

언데드 본 드래곤이니까.

놈이 주는 드래곤 하트도 썩었겠지.

이걸 어디다 써?

딱 봐도 못 먹는 거.

다른 용도로는?

"…이것도 마검 제작에 쓰일 수 있나요?"

그러자 마리가.

슥슥슥슥.

- 마룡의 하트와 언데드의 하트는 속성이 달라요. 같이 사용할 수는 없지만 다른 속성의 검을 하나 더 만들 순 있어요.

쌍검인가?

그것도 괜찮을 듯한데.

- 하지만 검보다는 방패로 만들면....

으잉?

방패?

- 암흑 오라의 방패요. 생명체가 들면 암흑 오라에 침식당하겠지만 기간트가 손에 들면 아무런 영향도 없으니까.

맞다.

문제없다.

그렇게 되면....

성기사의 방패와 정반대 속성.

광휘의 방패와 암흑 오라의 방패.

다만.

"암흑 오라는 기분이 별론데."

암흑 오라 방패를 직접 들진 않더라도 곁에 두게 되는 셈이니까.

엘이 대안을 제시했다.

"온오프 스위치 마력 회로도를 적용하면 됩니다. 평상시엔 암흑 오라를 오프시키고, 전투 시 스위치를 온으로 해서 암흑 오라를 발현하는 식으로...."

아하!

켰다, 껐다가 된다는 말이지?

"알았어요. 추진해 봅시다."

그리고 또 다른 보상.

최상급 마정석 1kg.

얼마 전이었다면 좋아서 펄쩍펄쩍 뛰고 난리가 났겠지만.

1kg가 뭐야, 1kg가.

누구 코에 붙이라고.

'관리자야, 보상이 짜다.'

어쨌든.

"바르딘 성기사님, 멋졌습니다. 다 함께 박수!!!"

주혁이 바르딘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자 피소환인들도.

짝짝짝짝짝짝짝짝....

아낌없은 칭찬과 격려의 말을 쏟아냈다.

"깨끗한 마무리다. 르스스알 성기사답다."

"오랜만에 존재감을 드러내셨군요. 본녀의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열심히 해야 함다. 방심하면 묻힘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될 검다."

"성기사는 역시 도리깨보다는 방패지. 암! 그렇고말고."

"전사는 성기사가 자랑스럽다."

"제가 특별히 마무리 양보해 드린 겁니다."

"호에에엥!"

매켄지는 마법으로 축하했다.

바르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집중 조명, 팡팡, 터지는 화려한 불꽃.

'그래, 이 느낌이야.'

바르딘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서야 주군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동료들의 인정.

처음엔 그릇된 신념 때문에 다른 피소환인들에게 구박도 많이 받았지만.

"충!"

한쪽 무릎을 꿇고.

"신 바르딘, 드디어 주군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모두 주군 덕분입니다. 이후로도 교만하지 않고 주군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되겠습니다."

아유, 믿음직해라.

87층에 안 들어왔으면 어쩔 뻔했어?

"주군을 위해, 빛이여!!!"

화아아아앗!!!

아이고, 눈부셔라.

그러나.

쯔즈즈즈즈즉!

피식.

"...."

"…아, 좀!!!"

어깨를 으쓱하며 변명하는 베 원사.

"그냥, 반사적으로, 미안."

그리고.

띠링!

[세계 공지 : 검은 탑 (독일)의 87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베지 2개 획득.

[독일 검은 탑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바깥으로 나온 주혁과 일행들.

부족함 없이 매우 만족스러운 공략.

'이왕 올라간 김에 88층도 올라가 봐?'

못할 것도 없다.

뭐가 무서워?

"88층 콜?"

"갑시다. 이왕 왔으니."

"어차피 부담도 없으니 간만 보고 나오시지요."

"이번에도 소신이 길을 열겠습니다."

"화염에 약한 놈이 나왔으면 좋겠군."

"전사도 활약하고 싶다."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마총이 불능 상태지만 온몸으로 부딪치겠습니다."

"저한테 부딪치십쇼."

"호앗!"

좋다.

임무 확인해서 해볼 만하면 공략하고, 안되면 뒤로 빠지고.

그래서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 손에 꼭 쥐고.

스팟!

[독일 검은 탑 88층에 입장합니다.]

다시 시작된 미공략 상층 등반.

환경은 사막 지형.

그것도 굴곡 하나 없는 평평한 모래사막.

뭐든 쉬워야 재미가 있다.

탑 등반뿐만 아니라, 일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게임도 그렇고.

이른바 딸깍 공략.

공략이 어려웠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터.

88층도 딸깍할 수 있을까?

잠시 후.

띠링!

떠오르는 임무.

[88층 임무 : 아룡(亞龍) 샌드 드래곤을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완료 조건 : 아룡(亞龍) 샌드 드래곤 0/1]

"…응?"

뭐야?

"또 드래곤이네"

"또 드래곤이군."

"또 드래곤인가?"

"또 드래곤이다."

"또드 임다. 또드."

"샌드 드래곤이라."

"저놈도 진명이 없는 놈이긴 한데."

순간!

파악!

저 멀리서 모랫바닥을 뚫고 하늘로 솟구치는 거대한 몸체.

샌드 드래곤이었다.

비늘로 덮인 몸통, 긴 꼬리와 짧은 팔다리.

날개는 퇴화해서 작은 거 두 개가 등 쪽에 달렸다.

다만 머리만큼은 드래곤처럼 생기긴 했다.

"으...."

정말 기괴하다.

저게 드래곤이라고?

아룡.

용과 비슷하지만 모자란다는 의미.

"샌드 드래곤이라, 본 마법사가 들어 본 적은 있소."

"어떤 놈이죠?"

주혁에게 설명하는 매켄지.

"진명도 없고, 날개가 없어 날지도 못 하고, 마법 사용도 불가능한 반쪽짜리긴 하나 육체는 웬만한 드래곤보다 훨씬 강해서 최강의 물리력을 자랑하는 놈이라고."

아!

한마디로 단단하다는 뜻.

"노부가 한번 건드려 보지."

지잉!

광마의 손에 떠오른 초승달 강기.

츠피피핏!

무서운 속도로 아룡 샌드 드래곤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태앵!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나오는 초승달 강기.

"...."

"큼."

"애걔...."

"실망이옵니다."

"흠집 하나 없네."

"호에에."

"광마도 별거 없구나."

"안 쪽팔림까?"

"이놈!!!"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샌드 드래곤의 어그로만 끌었을 뿐.

"꾸에에에엑!"

순간!

모래 속으로 쑥! 들어가는 놈.

다시 나와서 푸핫! 솟구치고.

쑥! 푸핫! 쑥! 푸핫! 쑥! 푸핫....

여기가 바다인가, 사막인가?

마치 돌고래 같았다.

모래에서 헤엄치듯 주혁 일행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못 잡겠죠?"

"…지금으로선."

"아광속탄은 쿨타임 때문에 발사가 불가능합니다."

"된다고 해도 어려울 수 있슴다."

그래 보인다.

광마의 강기가 씨알도 안 먹히는 판에.

"마검이라면 가능할지도."

맞다.

마검이 있었지?

그럼....

"일단 나가죠."

주혁은 손에 쥔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양손으로 잡고.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시 자동으로 퇴장하고, 해당 층의 임무가 리셋되며, 입장 기록이 삭제됩니다.]

찌이익!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사용하셨습니다. 탑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밖으로 나온 주혁과 피소환인들.

조금만 기다려라.

마검 들고 다시 온다.

* * *

검은 탑이 있는 모든 평행우주에는 피소환인들을 소환하는 특성의 플레이어가 존재할까?

소환사가 있는 차원도 있고, 없는 차원도 있지 않나?

1,001번 지구와 675번 지구처럼.

사실 675번 지구에도 소환사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

모든 차원엔 소환 특성의 자질을 가진 인간이 무조건 한 명씩은 탄생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자들은 탑 붕괴를 통해 세상을 멸망시킨다.

세상과 탑의 경계를 사라지게 만들어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으로 테라포밍하는 것.

반면 검은 탑에 의해 침범당한 세상에도 탑 붕괴를 막을 힘이 주어진다.

그게 바로 인과율의 법칙.

검은 탑이 생성됨으로써 플레이어가 각성한다.

플레이어가 있음으로써 검은 탑은 공략할 수 있게 된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어야 하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소환사 플레이어는 검은 탑의 대적자.

관리자 입장에서 소환사 플레이어가 존재하지 않으면 작업은 매우 쉽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60층 언데드 구간, 혹은 70층에서 무너진다.

그런데 675번 왜 지구엔 소환사가 존재하지 않는 건가?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에 있었는데 일찍 죽었을 수도 있고, 혹은 등반을 포기해서 플레이어 자격이 취소되었을 수도 있고.

사망 원인도 여러 가지.

탑 밖에서 죽었을 수도 있고, 탑 안에서 죽었을 수도 있다.

각성하기도 전에 죽었거나, 소환사로 각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몬스터에게 막 돌진하다가 죽었거나, 현실 지구에서 우연한 사고를 당했다거나, 범죄의 표적이 되었다거나.

포기의 이유도 다양하다.

탑 등반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거나, 플레이어를 할 이유가 없었다거나, 아니면 외부적 환경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거나.

이런 이유에서인지 675번 지구도 소환사가 없었다.

덕분에 탑 등반 관리도 매우 수월했고.

그런데 뜬금없이 없던 소환사가 다시 나타나?

그것도 다른 차원에서?

심지어 모든 차원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소환사.

어떤 차원에서도 저만큼 성장한 소환사는 없었다.

그의 피소환인들도 마찬가지.

처음엔 일꾼 하나만 위협적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저런 놈들을 뽑았을까?

이제 공감이 된다.

놈을 경험했던 1,001번 지구 관리자들의 심정을.

[한마디로 재앙이군.]

[다행히 88층에서 멈췄잖아.]

[…으음.]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88층도 공략당할 거라 염두에 둬야 해.]

[그럼 어떻게?]

[89층에 집중해야지. 진짜 드래곤이 나오는 층 말이야. 빨리 카라토스를 대체할 수 있는 드래곤을 찾아.]

[알았어. 마침 적당한 대상을 찾아 교섭 중이니까.]

일이 많이 꼬였다.

87층 공략으로 탑 붕괴 시한이 48개월이나 중첩됐다.

4년 동안 프로젝트가 지연된다는 의미.

뭐, 4년이야 극히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한 번 더 등가교환 거래를 해보는 게 어때?]

[안 돼, 그러다 실패하면 더 걷잡을 수 없어. 차라니 내버려 두는 게 맞아.]

관리자들은 일종의 주시자 역할.

플레이어와 직접 대면해서 그들을 어찌하는 행위는 인과율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만약 규칙을 어기게 되면 그 반작용으로 플레이어의 힘은 더더욱 강해지게 되어 있다.

지금 저놈처럼 말이다.

[그래, 어차피 90층은 힘들 거야.]

과연 그럴까?

* * *

주혁과 피소환인들은 함께 백색 탑 17층으로 복귀했다.

보람찬 675번 탑 공략.

비록 88층에서 멈췄지만.

마검만 제작하면 된다.

더불어 방패도.

검방일체.

암흑 오라 방패로 몬스터를 약화하고, 마검으로 서걱!

아이고,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네.

"2호기는 어느 걸로 할까요?"

"다 똑같지 않슴까? 아무거나 고르면."

"그래도 좀 꾸며 봅시다, 페인트칠도 하고."

"예압!"

순간!

스팟!

때마침 백색 탑으로 입장한 전광일 청장.

"봉 플레이어님."

"오! 청장님 잘 오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릴 게 있는데."

"무슨?"

"검 만드는 김에, 방패도 하나 제작할까 하는데...."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전광일.

사실 중국과의 백두산 경계 영토 협정이 타결됐다고 말하려 온 건데.

"…방패 말입니까?"

"네."

"기간트가 드는 겁니까?"

"네."

"당연히 커야겠죠?"

"네."

"탑 금속으로...?"

"네."

탑 금속 공급이야 뭐가 어려울까?

라직스와 함께 기간트 분해해서 가져와도 되고. 아니면 광석 캐서 가져다 줘도 되고.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스팟!

다시 사라지는 전광일.

방패 제작도 의뢰했으니,

이제 뭘 하지?

간단하다.

좀 쉬자.

열심히 했잖아?

설렁설렁 탑 층 반복 공략하면서 가죽도 채집하고, 연금술 약초 재료도 구하고, 광석도 캐고, 그러다 심심하면 대한민국 검은 탑 87층도 공략하고.

그나저나 무작위 소환 언제 재개되지?

마도 공학자 엘을 받아들임으로써 받은 페널티.

100일간 무작위 소환 일시 중단.

하지만 후회 없다.

그동안 엘이 해낸 일이 얼만데?

'이제 한 달 정도 남았구나.'

새로운 피소환인 받고, 88층 공략하러 가면 딱 맞겠다.

202화

영혼들의 세상.

최고 소환사의 피소환인이자 지구와 영혼 세상의 연락책인 제페트의 설명을 듣고 있는 영혼들.

『…그러니까 한마디로 두 차원을 동시에 정복해 버렸다, 이 말씀입니다. 제 소환사, 주인님께서요.』

원래 영혼의 세상에서 소통 방식은 의념으로 전달되는 텔레파시.

그래서 소리로 주고받는 방식보다 더 실감 났다.

말하는 사람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식이니까.

『지금까지 이런 분이 계셨습니까? 두 차원 관리자들을 발밑에 깔고 탑 등반하시는 분요.』

『없었어.』

『있었을 리가.』

『맞다. 유일한 소환사지.』

『관리자들도 처음 경험했을걸? 우리처럼.』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

피소환인들이 특별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그 피소환인들을 뽑은 사람이 누군데.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은 또 누군데.

탑 공략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누군데?

피소환인들이 아무리 잘나봐야 소환사가 별 볼 일 없으면 그들도 별 볼 일 없어진다.

『저도 이번에 배지 하나 받았습니다. 하하하하! 번쩍번쩍 빛나는 플래티넘 배지, 보여드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

『....』

『....』

『....』

저 새끼는 소통하러 온 거야? 자랑하러 온 거야?

『아쉽지만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마지막이라니?』

『사실 파견 근무가 예전에 끝났거든요. 다시 입주권을 받아 백색 탑에 들어갈 수 있지만 여러분들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오게 된 겁니다.』

희생은 개뿔.

바깥 얘기 풀어놓으면 영혼들이 관심 가져 주니까 그게 좋았던 거겠지.

『아무튼 저는 떠나지만 곧 있으면 무작위 소환입니다. 여러분들이 뽑기에 당첨되면 어떤 혜택을 받을까요?』

혜택이라.

『먼저 어마어마한 자긍심, 우리가 왜 피소환인 계약에 사인했습니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일념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지금까지 죄다 실패였습니다. 소환사를 지키지 못했고, 세상들은 모조리 멸망했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은 무너졌고요.』

맞다.

계속된 실패로 패배감에 찌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성공이 눈에 보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거룩한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거죠. 우리 소원도 이룰 수 있고.』

좋다.

소환되고 싶다.

그의 옆에 있고 싶다.

『사내 복지는 말할 것도 없죠. 영혼 감옥 탈출, 백색 탑 17층 영구 거주, 이걸로 끝난 거 아닙니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

『마지막으로 기쁜 소식 하나 더 알려드리며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기쁜 소식?

『소환사님께서 스킬 쿨타임 초기화 티켓 한 장을 확보하셨습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응?

『네, 이번엔 2명입니다. 기대하세요. 그럼 전 이만.]

[소환사님이 곧 부를 시간이 돼서.... 제가 가서 할 일이 많거든요. 저도 이제 인정받는 피소환인이니까. 하하하하!』

작별 인사는 들리지도 않았다.

2명이나 나갈 수 있다고?

『결국 나보고 나가라는 건가? 어쩔 수 없군. 나가 주지.』

『준비해야겠네. 아무래도 첫인상이 중요하니.』

『미리 인사할게. 얘들아, 잘 있… 아니다. 입주권 받기 전에 한 번은 다시 올 테니까.』

『그래, 누가 나가는지 두고 보자.』

영혼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스킬 쿨타임 초기화 티켓.

당첨 확률 2배 아닌가?

* * *

1,001번 지구, 그러니까 주혁이 사는 지구 검은 탑의 관리자들.

그동안 무료했지만 한편으론 고즈넉한 평화를 즐기는 중이었다.

최소한 상층 등반 S+++ 등급 공략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헉!]

화들짝 놀라는 엔지니어.

[무슨 일이야?]

[소, 소환사가 대한민국 탑에 입장했습니다.]

[…응?]

돌아왔다고?

[왜?]

[저야 모르죠.]

계속 거기 있지.

한동안 잠잠해서 좋았는데.

[탑에 들어와서 뭘 해? 혹시 상층 올라갔나?]

[가죽 채집하고 있는데요? 약초도 캐고, 광석도 캐고.]

[아....]

다행이다.

탑 상층 등반 아니구나.

[85층에도 입장했습니다.]

[기간트? 그거 이제 못 가져가잖아.]

[자폭하고 남은 잔해를 수거해 가네요. 금속이 필요한 건가?]

[그래?]

아무튼 그것도 채집 활동.

하긴 팔찌나 스크롤 등등 벌려놓은 일이 많으니 재료가 많이 필요하겠지.

순간!

[어?]

[뭐야? 상층 등반이야?]

[그, 그건 아닌데, 으음, 소환자 저놈 레벨이....]

[레벨이 어쨌는데?]

[88레벨입니다.]

[…허?]

88레벨이라니.

87층을 공략했다는 말.

[우리 검은 탑 87층 언데드 본 드래곤 아직 공략 안 됐지?]

[네, 미공략입니다.]

그렇다면?

[675번 지구에서....]

[맞습니다. 그쪽 검은 탑 87층은 먹혔어요.]

[캬아! 꿀맛이구나.]

절로 웃음이 나온다.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 놈들이 얼마나 혼쭐이 났을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어때?

맵지?

앞으로도 쭉 매울 거야.

[하하하, 하하, 하....]

아니다.

웃으면 안 된다.

[흠.]

이게 웃을 일인가?

그쪽을 먹었다는 건 이쪽 87층도 먹힐 수 있다는 의미.

하는 수 없다.

87층은 먹혔다 치자.

대신.

[88층이 샌드 드래곤이었지?]

[네, 그렇습니다.]

웬만하면 공략할 수 없는 놈이긴 하지만… 거기도 먹힐 거라 가정하고.

[우리 89층 계약자는?]

[광룡 하스푸스입니다.]

탑 방어를 위해 영입한 자유계약 드래곤.

[진본은 어디 있어?]

[미국 서부 탑에서 수면 중인데요.]

탑 생성 초기엔 미국이 최고 탑 등반국이었으니까.

[그만 자고 대한민국 탑으로 옮기라고 해. 남부든, 북부든.]

[알겠습니다.]

[그리고 소환사가 곧 올라올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일러두고.]

지긋지긋하다.

왜 벌써 왔어?

아예 675번 지구에서 쭉 살지.

* * *

오늘도 대한민국은 평화로웠다.

졸지에 탑이 2개나 생겨 버렸지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최고 플레이어가 한국인인데.

그로 인해 북한도 변화하고 있었다.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고 통일이 가까워졌다.

그 와중에 전해진 속보.

<라직스 물산 평양 지점, 비만 탈출의 팔찌 생산 재개, 구독제 예약 개시, 효과 다한 팔찌 교체 서비스도 시작.>

└ 오오오! 기다렸다고!

└ 나 이제 살 안 쪄도 되는 거야?

└ 팔찌가 무슨 만능이야?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지.

└ 이번엔 물량이 충분했으면 좋겠는데.

└ 아마 구독 예약 더 어려워질걸?

└ 왜?

└ 예전엔 한국인들끼리만 경쟁했는데,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경쟁자니까.

└ 아!

실제로 그랬다.

기사가 나가고 난 후, 전 세계에서도 비만 탈출의 팔찌 생산 재개를 톱기사로 다루며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기사.

<라직스 물산 평양 지점, 마력 봉쇄 스크롤 중국 수출 결정, 1차분 천만 장, 수송기를 통해 베이징에 도착.>

└ 에이, 중국엔 왜 팔아?

└ 팔아야지. 중국 망하면 우린 영향이 없겠냐?

└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 이제 중국도 안정되겠네. 아무리 빌런 해방 플레이어들이 설쳐대도 종이 한 장만 찢으면 되니까.

└ 근데 이것도 라직스 물산이 생산하는 거야?

└ 당연한 거 아니겠어? 최고 플레이어 회사라던데.

└ 우리 최고 플레이어 S+++ 등급 부자 되겠다. 장당 얼마나 받았을까?

└ 한 2배 이상 받았으면 좋겠다.

스크롤 수출의 대가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는 기사도 나왔다.

<북한 정부, 중국 정부와 백두산 경계 국경 재설정 조약 체결. 백두산! 온전히 북한 영토로 편입.>

└ 이거구나! 스크롤을 중국에 수출한 이유가!

└ 진작 말하지. 백두산이면 스크롤 수출과 바꿀 만하잖아.

└ 중국 쟤들은 매번 위험이 있을 때마다 땅 팔아서 해결하네.

└ 뭐, 땅이 넓으니까. 그리고 백두산도 알고 보면 변방 아니겠어?

└ 이제 통일만 하면 되는 건가?

└ 그러게. 언제 되지?

└ 설마 북한 놈들이 뒤통수치는 건....

통일 시기에 대한 답도 금방 나왔다.

오랜만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영방송에 출연한 김인중 위원장.

- 친애하는 한반도 모든 국민 여러분, 백두산이 완전하게 우리 민족의 품으로 되돌아왔슴메다. 그리하여 더는 미룰 수 없슴메다. 본격적인 통일 작업에 들어갈 것임을 공화국 인민들을 대표하여 선포하는 바입메다. -

한국에서도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 한반도의 허리를 갈랐던 휴전선을 철거하고 주둔해있던 인민 해방군을 즉각 철수하갔슴메다. 또한 북남 철도와 도로 개방, 경제 통일을 위한 화폐 통합, 북한 인민회의 위원 총선거 시행, 아울러.... -

공식적이고 전면적인 통일 선언.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및 실무자 회의 개최.

꿈만 같은 일이었다.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다니.

남북한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

1년 전만 해도 미사일을 쏴대고, 삐라 날리고, 서로 비난하고, 앙숙 같은 사이였는데.

통일에 반대하는 나라는 없었다.

중국도, 일본도, 미국도, 러시아도.

그리고 통일 선언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세계 공지 : 검은 탑 NO.1(한국)의 87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하루는 1번 탑.

[세계 공지 : 검은 탑 NO.2(한국)의 87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다음 날은 2번 탑.

이틀 연속 S+++ 등급 공략 공지가 전 세계에 울려 퍼졌다.

* * *

1,001번 지구로 복귀한 주혁.

가죽 채집도 하고, 광석과 약초도 캐고, 통일 선언 기념으로 남북한 검은 탑 87층도 차례대로 공략했고.

이곳 우리 지구 검은 탑 87층에선 드래곤 하트가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거라곤 최마 조금과 상마뿐.

'675번 지구에선 드래곤 하트가 잘만 떨어지더니.'

암흑에 침식당했다 하더라도.

두 번이나 공략했는데 하나도 안 나와?

'그쪽은 탑이 1개뿐이라서 그런가?'

아마도 그런 듯.

1개니까 확률이 높을 수밖에.

반대로 여긴 탑이 146개나 있어서 그만큼 확률이 떨어지는 것일 수도.

'흠, 675번 지구 검은 탑을 자주 공략해야 할 이유가 늘었네.'

그럼 하면 되지.

먼저 작업부터 끝내고.

바깥은 통일 착수 작업으로 매우 시끌벅적하다.

한편 백색 탑 17층도 다른 작업으로 부산했다.

기간트 도색에 여념이 없는 주혁과 피소환인들.

저마다 페인트 붓을 들고 기간트의 몸체를 칠하고 있는 중.

제페트도 합류했다.

오랜 파견 근무를 끝내고 주혁에게 입주권을 새로 받아 17층에 돌아왔지만.

"거참! 거긴 파란색이라고, 빨간색이 아니라, 무슨 뱀파이어가 말귀를 못 알아먹어?"

"...."

"일할 생각 없으면 베 원사처럼 안 보이는 곳에서 짱박혀 잠이나 자쇼!"

"...."

오자마자 구박받는 불쌍한 제페트.

영혼의 세상에선 매일매일 이쁨받는다고 좋아라, 하더니만.

마리를 제외한 모든 피소환인이 도색 작업에 참여했다.

기간트 몸체가 워낙 커서 들어가는 페인트의 양도 많다.

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기 피소환인들이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엘이 기간트를 조종해서 눕힌 후에 앞판 도색, 다 마르면 엎드리게 해서 뒤판 도색, 작업은 금방이었다.

그러나 도색해야 하는 기간트는 총 2대.

하나는 기간트 2호기, 다른 하나는....

"저기, 코사크 씨?"

"넴?"

"지금 뭐 하는 거죠?"

"우리 전시용 기간트 인테리어하고 있지 않슴까."

"그건 나도 아는데, 등판에 글씨는 왜?"

"아하! 광고임다. 우리 회사를 널리 알려야 함다."

광고 안 해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그냥 보여 주면 낭비임다. 어차피 입장료도 못 받는데, 광고는 해야 하지 않슴까?"

"...."

코사크가 등판에 적고 있는 글.

<세계로 뻗어가는 라직스 물산>

<바실리스크와 와이번 가죽 제품, 럭셔리 패션의 정점, 절찬 판매 중.>

<비만 탈출의 팔찌 구독 개시. 보증금 500만 원에, 월 49만 9천 900원.>

<빌런 해방 플레이어가 걱정되십니까? 이 기회에 마력 봉쇄 스크롤 하나 구입하세요. 당신의 안전을 지켜 줄 겁니다.>

심지어.

<기타 광고판 문의도 받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라직스 물산 홍보부로 전화 주세요.>

미치겠네.

저렇게 정성스럽게 쓰는데 지워 버리라 할 수도 없고.

"…앞판엔 광고 문구 쓰지 마세요."

"예압!"

"그리고 우리 2호기엔 아무것도 쓰지 말고."

"넴."

전시용 기간트를 준비하는 이유.

사실 우리 친구 기간트 1호기의 개쩌는 격투 영상의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았다.

대형 화면에서 영화를 상영하니 더더욱 박진감이 흘러넘쳤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요청이 들어왔다.

자국의 영화관에서도 상영하게 해 달라고.

그리고 후속편에 대한 기대.

과연 기간트가 60m짜리 검을 들 것인가?

뿐인가?

초대형 방패도 제작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더더욱 열광했다.

사람들의 관심 탓인지 검과 방패 제작에 가속도가 붙었다.

기간트 장비가 제작되는 곳은 포항의 제철소.

전국의 난다긴다하는 기술자들이 모조리 이곳으로 투입됐다.

연이은 야근과 교대 작업.

빠르고 튼튼하게.

검과 방패가 제작되는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전국, 아니, 전 세계의 기자들이 포항으로 몰려왔다.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을 외면할 수 있나?

그래서 주혁은 먼저 우리 친구 기간트의 실물 공개를 결정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스팟!

전광일 청장이 백색 탑 17층으로 들어와서.

"검과 방패 제작이 모두 끝났습니다. 검수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생각보다 튼튼하게 잘 만들어졌습니다."

오예!

완료 공정 예상보다 일주일 빠르게 했단다.

역시 한국인의 본성.

뭐든 빨리빨리.

"제작에 참여한 모든 분께 보너스 100%씩 쏘세요."

"알겠습니다."

한밤중에 주혁은 포항에 있는 제철소로 갔다.

직원들이 다 퇴근해서 조용한 시간에.

"라직스 지정 소환."

"호에!"

"집어넣죠."

스스슷, 스스슷,

제작한 검과 방패를 넣고 17층으로 돌아와서.

이제 마연공 3인방의 인챈트 및 마력 회로도 적용, 더불어 강화 작업.

검에는 마룡의 드래곤 하트.

방패엔 암흑으로 침식된 드래곤 하트.

마리가 이미 연금술로 가공을 끝마친 것들.

검과 방패에 각각 드래곤 하트를 집어넣을 공간, 최마를 박을 홈도 만들었다.

인챈트와 마력 회로도 작업도 금방이었다.

톡방에서 연구와 논의를 거쳐 설계도까지 나왔기 때문에.

드래곤 하트에, 검을 만들 때 들어간 상마, 인챈트 작업에 때려 넣은 최마.

마족의 혀와 눈, 불사조의 깃털도 추가.

이게 다 돈이 얼마야?

자가 수복, 내구도 강화, 절삭력 강화, 무게 감소 인챈트, 온오프 스위치 회로도....

넣을 수 있는 건 모두 넣었다.

그리하여 백색 탑 중앙에 우뚝 세워진 2대의 도색 기간트.

한 대는 검과 방패를 든 기간트 2호기.

한 대는 아무것도 들지 않고 색깔만 칠한 전시용 기간트.

"감격스럽네요."

"코끝이 찡함다."

"소녀도 어서 위력을 견식하고 싶사옵니다."

"당장 샌드 드래곤 잡으러 가봅시다."

하지만 그전에.

"엘 박사님, 라직스 차원대머슴님."

"호에!"

"네, 소환사님."

"기간트 전시합시다."

주혁은 해도 안 뜬 이른 새벽에 코사크와 함께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여의도 공원.

오기 전에 이야기가 된 터라 공원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가로등과 조명도 모두 꺼버렸다.

주혁을 마중 나온 전광일 청장.

"봉 플레이어님,"

"안녕하세요. 청장님. 장소는 어디에."

"저쪽에… 다 준비해 뒀습니다."

예전보다는 많이 좁아진 여의도 공원이었지만 그래도 기간트 한 대 전시할 공간은 있었다.

"라직스 지정 소환."

"호엥!"

라직스가 나와서 멋지게 도색된 기간트를 꺼내고.

스스스스스스슷!

다음으로.

"엘 지정 소환."

나오자마자.

- 기동 지시, 기동 방식 입력, 기립 실행.

끄드드드드득!

그 거대한 몸을 스스로 일으키는 전시용 기간트.

마지막으로.

- 기동 지시, 기동 방식 입력, 1시간마다 10초씩 입력한 동작 수행.

끄드득.

전시용 기간트가 알겠다는 듯 팔을 들어 올렸다.

그냥 멍하니 서 있기만 하면 보는 재미가 있을까?

가끔 움직이기도 해야지.

단 하체는 고정, 움직이는 건 상체만.

"연료는 얼마나 갈까요?"

"1년은 무리 없이 움직일 겁니다. 아주 간단한 동작들뿐이라."

연료는 거의 들지 않을 것이다.

동작이라 해봐야 걷지도 않고, 머리를 움직이거나 팔을 들어 올리는 게 고작.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다.

영화보다 실물이 훨씬 낫잖아.

이제 날이 밝으면 사람들 눈에 띌 것이다.

지금 보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자, 이젠 우리도 돌아가죠."

작업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무작위 소환 쿨타임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러면 일정 변경이지.'

드래곤부터 잡고 온다.

무작위 소환은 그다음.

* * *

마침내 주혁과 피소환인들은 675번 지구 검은 탑 88층에 입장했다.

관리자들도 즉각 알아차렸다.

[어?]

[....]

[소환사가 왔어.]

[또?]

[씨발!]

제발 가라.

너네 동네로.

안 오면 안 되겠니?

203화

[독일 검은 탑 88층에 입장합니다.]

675번 지구 검은 탑.

소환사가 샌드 드래곤을 잡으러 행차했다.

먼저 라직스 아공간에서 기간트를 꺼내고.

끄드드드드드득!

엘의 지시에 따라 기립한 기간트 2호기.

한 손엔 검, 한 손엔 방패.

동시에 기간트 앞에 펼쳐진 광활한 사막.

그 뒤에 서 있는 주혁과 피소환인들.

"…와!"

벌써 한 장면 건졌다.

사막의 모래를 밟고 우뚝 선 검방일체의 거대 기간트.

뭔가 거대 로봇 영화 도입부를 보는 듯한 느낌.

"이게 되는 그림이구나."

샌드 드래곤 딱 기다려!

물론 기간트만 믿고 가는 건 아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 봐야 85층 몬스터.

반면 샌드 드래곤은 88층 몬스터.

3단계 이상 차이가 난다.

둘이 붙여 놓으면 누가 이길지 뻔하다.

하지만 기간트가 어디 맨몸인가.

마룡의 하트가 장착된 마검.

암흑 하트가 장착된 방패.

두 가지, 서로 비슷한 속성의 드래곤 하트로 만들어 낸 장비를 착용했다.

아니, 드래곤 하트로 무구를 만들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모든 차원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

매켄지와 엘, 광마가 확인시켜 줬다.

"드래곤 하트라면 노부의 세상에선 여의주나 마찬가지인데, 여의주로 무기를 만든다? 전설에서나 그랬겠지. 제천대성의 여의봉 말이오."

"본 마법사의 세상에서도 드래곤 하트로 무기를 만드는 일은 없었습니다. 귀한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무도 몰라서."

"연구가 어려우니까요. 누가 드래곤 하트를 만져 보기나 했을까요? 하트가 무슨 마정석도 아니고."

마력을 품고 있는 물질 중 가장 대표적인 게 마정석.

등급에 따라 마력의 농도와 질, 그리고 양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드래곤 하트 또한 마력을 품고 있다.

하트, 심장이라고 해서 장기 비슷한 모양이라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다.

커다란 보석의 원석처럼 생겼다.

어떻게 보면 드래곤 하트도 마정석과 같다.

다만 최상급 마정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마력량에서 차이가 나는 거지.

그러나 드래곤 하트가 가지는 단점 하나.

엘이 했던 말처럼 가공하기가 어렵다는 것.

드래곤 하트의 마력을 제대로 끌어내려면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정제, 가공을 해야 하는데....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당연하다.

어느 세상이든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용을 만날 일이 있을까?

하물며 드래곤 하트라니.

구경조차 못 하는 게 현실.

그런데 피소환인 중에 있다.

드래곤 하트를 만져 본 사람이.

방구석 대인기피증 연금술사 알리아마리.

그녀의 배경 설명에 나오는 내용.

엘프 연금술사 알리아마리가 어릴 적 같은 종족에 의해 고룡 블랙드래곤 카시우루스에게 제물로 바쳐졌다고.

고룡 카시우루스는 마리보다 일찍 죽었으며, 그녀는 드래곤이 죽은 후에도 레어에 홀로 남아 연금술을 연구했다는 내용.

고룡 카시우루스가 죽으면서 남긴 물건 중 하나가 바로 드래곤 하트

심지어 고룡의 것이다.

얼마나 강하고 농밀한 마력을 품었겠나?

그래서 드래곤 하트를 가공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기간트의 검과 방패.

드래곤 하트의 마력 잠재력을 모조리 끌어냈다.

물론 마리의 노력만 있었겠나?

9서클 대마법사 매켄지와 마도 공학자 엘 박사.

매켄지는 이제 수준급으로 올라온 인챈트 마법으로 검과 방패를 강화했고, 엘은 마력 회로도를 이용해 무구의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마연공의 삼위일체.

셋이 모이면 불가능은 없다.

아직도 이게 왜 대단한지 모르겠다고?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면.

핵 잠수함에 설치하는 소형 원자로를 검과 방패에 장착했다고 보면 된다.

그리하여 핵 발전소에서 전기를 뽑아 쓰듯, 드래곤 하트의 강대한 마력을 마구마구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

더불어 핵 방사능처럼 암흑의 마기가 검과 방패에서 줄줄 새어 나온다.

가까이 가서도 안 되는 끔찍한 기운에 상시적으로 노출되는 거다.

그래서 접촉해서도, 착용할 수도 없는 저주받은 악마의 무구들.

물론 생명체에 한해서 그렇다는 말.

생명체가 아닌 기간트이기에 착용이 가능하다.

어쨌든.

"갑시다! 고고!"

쿵쿵쿵쿵!

기간트가 발걸음을 움직여 사막 안쪽으로 나아갔다.

띠링!

임무가 떠오르자마자.

쿵쿵!

기간트 2호기 VS 아룡 샌드 드래곤.

엘의 지시로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 전투 준비 지시, 마력 회로 작동, …스위치 온!

스웅!

마검의 검신이 짙디짙은 흑색 강기로 덧씌워졌다.

동시에 우우웅!

암흑 방패에도 검붉은 암흑 오라가 생성됐다.

마기와 암흑의 본질은 같다.

발현 방식에서 차이가 나서 효과가 다르게 나타날 뿐.

마룡의 드래곤 하트의 속성.

파괴, 폭력, 잔인, 무자비, 억압.

암흑에 침식된 드래곤 하트의 속성.

부패, 타락, 오염, 약화, 혼란.

츠핏!

주혁의 2번째 기간트.

검방 전사가 샌드 드래곤에게 돌진했다.

* * *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

[…저 새낀 왜 또 왔어?]

전에 88층에 입장했다가, 샌드 드래곤을 마주하고는 입장 기록을 삭제하며 퇴장해 버렸는데.

그때는 안도했었다.

아! 드디어 88층에서 멈추는구나.

그래,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샌드 드래곤은 아니지.

검은 탑 몬스터 중에서 육체 능력 하나만을 놓고 보면 가히 탑 최고 수준.

핵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러나 패치해서 화약 반응은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이 나타났다는 말은?

[저 샌드 드래곤을 공략할 방법이 있다는 건가?]

[방법이 있으니까 왔겠지.]

[그게 뭐냐고?]

[내가 어떻게....]

한번 찔러 보려고 왔나?

혹은 저쪽 지구에서 88층 공략에 성공했나?

[놈의 레벨은?]

[아직 88이야.]

그럼 그쪽 지구에서도 88층을 공략하지 못했다는 말.

[상층 등반을 여기서 시도하는 것 같아.]

[자기 지구 검은 탑이나 공략할 것이지.]

[내 말이!]

[어떻게 잡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홀로그램 영상이 띄워졌다.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잠시 후 아공간 배낭에서 나온 거대한 물체.

[…기간트?]

결국 믿는 구석이 저거였나?

[몇 대?]

[한 대.]

[…겨우?]

기간트 한 대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건지.

한 100대를 동시에 데리고 온다면 승산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거 봐. 기간트가 검과 무기를 들고 있어.]

어쩌라고?

[무기가 있으면 달라질 것 같....]

바로 그때!

[헉!]

[어?]

[미, 미친?]

기간트의 검이 흑색의 강기로 덮였다.

방패도 마찬가지였다.

진한 암흑의 오라.

[설마....]

[드래곤 하트야. 하트를 무기에 장착했어. 방패에도.]

[검은 마룡의 것, 방패는 언데드 본 드래곤의 것.]

[어떻게 한 거야? 할 수 있는 거였어?]

[거의 불가능하지.]

[쟤들은 했잖아.]

[저게 성립하려면 각 분야에서 정점의 기술들이 총동원되어야 해.]

[어떤?]

[하트를 가공할 수 있는 연금술에, 하트의 마력을 견뎌 낼 수 있게끔 무기 본체를 강화하는 인챈트 마법에, 에너지를 무기나 방패 구석구석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마력 회로도를… 어?]

가만히 보니....

[다, 다 있네.]

[다 있었어.]

[다 있었군.]

마법사, 연금술사, 마도 공학자 피소환인이 말이다.

모두 각 분야의 대가들이고.

저게 놈의 믿는 구석이었다.

* * *

쿠쿵! 쿠쿠쿠쿠쿠쿵! 쿵쿵쿵!

엘이 기간트 2호기를 개조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 바로 전투 기동.

기존의 전투 마력 회로도는 맨몸 격투술이었다.

장비를 착용한 이상 격투 마력 회로도는 수정되어야 했다.

검을 들었으니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야지.

검술 마력 회로도를 이식하려면 검술에 잘 아는 검사의 자문이 필요했다.

현재 피소환인들 중에서 검을 사용하거나, 혹은 검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내 첫 제자가 기간트가 될 줄 꿈에도 몰랐슴다."

"제자는 무슨, 그깟 초식 하나 입력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래도 제자는 제자임다."

"그렇게 따지면 내 제자이기도 하지. 방패술 마력 회로도는 내 걸 참고했으니까."

코사크가 하르트만 검식을 기간트에 입력하도록 도움을 줬고, 방패술은 바르딘이 맡았다.

스팟!

전투 시작.

모래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거대한 샌드 드래곤.

크기는 기간트보다 살짝 더 컸다.

예전이었다면 무지막지하게 달려들어 기간트를 넘어뜨리고 마음껏 공격해 댔겠지만.

우우웅!

검과 방패에서 발현하는 불길한 기운에 주춤하는 샌드 드래곤.

놈도 알아챘다.

드래곤 하트의 기운을.

그렇게 우물쭈물하더니.

"쿠아아악!"

휘리릿!

샌드 드래곤이 화살처럼 자신의 몸을 회전시켜 몸통 박치기를 가해왔다.

왼발을 옆으로 틀어 슬쩍 피하고는 그대로 샌드 드래곤의 머리를 방패로 후려 갈기는 기간트 2호기.

퍼어어억!

"으잉? 몸놀림 보소! 광 영감님 보법임까?"

"맞다. 본좌도 숟가락 얹어봤다."

"아니, 쟤는 사부가 몇이야?"

"전사는 가르칠 것이 없었다."

"당연하지. 고방 넌, 기간트와 캐릭터가 겹치잖아."

"그래서 전사는 우울하다."

우리 불쌍한 고방.

"걱정하지 마세요. 저놈은 연비가 너무 나가서 자주 쓰지는 못해요."

"맞슴다. 기간트 함부로 막 가동했다간 살림 거덜 남다. 우리 고방이는 소고기 몇 점이면 충분하지 않슴까."

광마도.

"기간트 자체가 강한 건 아니지 않느냐, 쌍 드래곤 하트로 만든 무기가 무시무시한 거지. 우리가 들지도 못하는 무기들 말이다."

흑색 강기의 마검.

암흑 오라의 방패.

온갖 부정한 기운들.

몬스터라도 해서 영향을 받지 않을까?

접근하기만 해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생명체라면 무조건.

그래서인지 샌드 드래곤도 방패를 치켜들 때마다 움찔, 멈칫하면서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에 피소환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 격돌부터 견적이 나왔다.

"압도할 겁니다."

"안심해도 되겠소."

"모래무지 새끼, X밥 됐슴다."

"빨리 끝내죠."

전투가 진행될수록 힘의 차이가 극명해졌다.

샌드 드래곤도 그걸 느꼈는지, 모래 속을 파고들어 도망치려고 했고.

그러나 기간트 2호기는 놈이 모래 속으로 도망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콱!

꼬리를 잡아당겨 잡아 끄집어 내고.

"…쿠, 쿠에에에엑!"

퍼억! 퍽! 퍽퍽퍽퍽!

저항하는 샌드 드래곤의 공격을 방패로 막고, 동시에 반격까지.

그럴 때마다 놈의 동작이 점점 둔화하고 있었다.

암흑 오라의 저주가 놈의 육신을 천천히 갉아먹고 있었다.

방패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없었겠지.

"방패의 효과는 충분하고."

마검은?

"기회가 오면 끝내겠습니다."

엘이 기간트에게 전투 지시를 내렸다.

60m 대검을 한 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기간트 2호기.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오는 샌드 드래곤의 머리통을 방패로 확 밀친 후에.

찌이잉!

기간트의 대검에 어리는 소름 끼치는 흑색 강기.

츠핏! 츠피피피핏!

기간트의 손에서 펼쳐진 하르트만 검술 1식.

"아부지!!! 보고 계심까? 하르트만 검술 기간트임다!"

서거거거거걱!

툭!

떨어지는 샌드 드래곤의 머리통.

거대 대검의 가공할 기본 크기와 질량, 드래곤 하트의 마기, 인챈트와 마력 회로도로 강화된 공격력과 절삭력.

[아룡(亞龍) 샌드 드래곤 처치 1/1]

[88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예상보다 싱거웠다.

보상은?

[보상 : 딱딱하게 굳어 버린 샌드 드래곤 하트/ 최상급 마정석 2kg]

"보상 나왔슴까? 좋은 검까?"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또 드래곤 하트네요."

"또드하?"

"네, 또드하."

아이템이 잘 나오는 건 좋다.

그런데 딱딱하게 굳어 있다고?

'제대로 된 드래곤 하트는 언제 나오는 거야?'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 버린 걸 또 어디다 써?

주혁이 한쪽에 쭈그리고 앉은 마리를 쳐다보자.

슥슥슥슥슥.

- 원래 샌드 드래곤의 하트는 저렇다고 들었어요. 마력이 봉인되어서. 가공하기도 정말 힘들고.

봉인된 마력의 샌드 드래곤 하트.

놈이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유도 저거 때문인 듯.

[세계 공지 : 검은 탑 (독일)의 88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하지만 공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고작 한 번인데.

* * *

탑에서 퇴장한 후, 주혁은 곧바로 88층 반복 공략을 결정했다.

첫 공략은 S+++ 등급을 위해.

두 번째 공략은?

"플라이 촬영의 거장, 지상과 하늘을 노니는 인간 드론 카메라, 대충 찍어도 작품이 된다, CG를 거부하는 극사실주의 작가 정신, 검은 탑에서 피어오르는 예술혼, 촬영감독 매켄지, 출진하겠습니다."

"...."

스마트폰이 아닌 초고화질 손 떨림 방지 짐벌이 달린 비싼 카메라를 든 매켄지.

표정에도 자부심이 가득했다.

마법사가 아닌 촬영감독으로서 말이다.

이제 마법사 때려치우셨나?

쉬이잇!

매켄지가 촬영을 위해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라직스.

적당한 장소를 고룬 후.

데구르르르, 착!

"호엥!"

벼락같은 손놀림으로 아공간 배낭에서 계단식으로 붙여 만든 가설 관람석을 꺼냈다.

미리 만들어 온 거다.

편하게 앉아서 관람할 수 있게끔.

옆쪽으로 대형 모니터도 설치하고.

주혁이 관람석에 앉았다.

그러자 다른 피소환인들도 의자에 착석.

"차원대머슴, 캐러멜 팝콘하고 콜라 부탁드림다."

"소녀는 버터구이 오징어를...."

"전사는 저쪽에서 고기를 굽겠다."

"치킨 가져왔죠?"

"소주와 맥주 없나?"

"아이스박스에 가득 채워 왔을 텐데."

"호에!"

"노부가 시원하게 한잔 말아 보겠소."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

보고 먹고 즐길 준비.

반복 공략 2차전.

검과 방패를 들고 나아가는 기간트.

전투가 시작됐다.

퍼퍽! 퍽퍽퍽!

든든한 2호기가 방패 하나만으로도 샌드 드래곤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잘한다!!!"

"흐음, 역시 기간트라 그런지 연결 동작은 매끄럽지 않아."

"저 정도면 준수함다. 소맥이나 한 잔 더 말아 주십쇼."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전 알쓰라 안 마심다. 봉 소환사님 잔 비었슴다."

"어이쿠, 그럼 안 되지."

"주인님, 안주도 드시고 하세요. 제가 먹여드릴게요. 아! 해보세요, 아...."

"네 이년! 기술 쓰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뭐만 하면 기술이래?"

"방패술은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구나."

"그야 당연하지요. 르스스알 성기사 방패술인데."

"엘 박사님, 너무 빨리 끝내지는 말아 주세요."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영상을 길게 찍어야 한다.

분량이 나와야지 공개를 하든 말든 하지.

그렇다고 질질 끌면 안 되고.

* * *

빌어먹을 소환사 놈들.

지금 뭐 하는 짓거리인가?

이건 모욕이다.

농락당하는 거다.

[기가 막히는군.]

[이 새끼들이....]

소풍 왔나?

어느새 관람석까지 갖추고 자리에 앉아 술과 음식을 먹으며 시시덕거리는 소환사.

[건방진!]

[대체 우릴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거냐!]

심지어 마법사 놈은 카메라를 들고 기간트와 샌드 드래곤의 격투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탑 등반이 장난인가?

장난일 수가 없다.

장난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저놈에겐 놀이밖에 안 되는 모양.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웃다가, 또 한 번 샌드 드래곤을 공략한 후, 그제야 주섬주섬 짐을 챙겨 퇴장하는 놈.

[…아무래도 대책을 세워야겠군.]

[89층은? 계약했어?]

[했어. 지금은 적응 중이야.]

원래는 마룡 카라토스가 89층의 책임자.

지금은 놈의 심장이 저 기간트의 검에 들어가 있지만.

늦지 않게 새로운 드래곤과 계약했다.

89층의 신입 책임자로서.

[마룡이겠지?]

[완전한 건 아니야. 마룡으로 진행하는 중이고.]

[기존 속성은?]

[그린.]

그렇다면 89층 자유계약 드래곤을 관리실로 불러와서 소환사에 대해 자세히 알려 줄 필요가 있다.

물론 계약할 때 이야기해 두긴 했지만.

바로 그때!

[어?]

[왜?]

[지금 바로 89층으로 등반했어.]

[뭐?]

퇴장하자마자?

[…89층 신입 자유계약 드래곤에게 마검과 암흑 방패에 관해 이야기해 줬겠지?]

[그럴 새가 없었잖아. 우리도 방금 알았고.]

탑에 입장한 이상 개입하면 안 되는 것이 규칙.

[제기랄!]

수상할 정도로 부지런한 새끼.

브레이크 타임도 모르나?

20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