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675번 지구.
작업이 완료된 차원이었다.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가만히 나눠도 알아서 흘러가는 마지막 단계였다.
그런데 갑자기 89층의 책임자이자 자유 계약 영혼인 마룡 카라토스가 소멸해 버렸다.
뜬금없이.
어떻게 된 일이지?
원인은 운석이었다.
떨어지는 운석에 맞고 죽었다.
아니, 운석이 낙하하면 텔레포트로 피하면 될 일 아닌가?
왜 그걸 가만히 처맞고 죽어?
675번 지구 관리자들은 베를린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은 운석으로 사라진 도시.
그리고 그곳에 남은 강렬한 마력의 흐름.
단순한 운석이 아니었다.
[…메테오?]
[그런 것 같은데.]
[카라토스가 소환한 건가? 설마 자살?]
[걔가 자살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맞아. 그 탐욕스러운 놈이.]
심지어 시스템에서 오류까지 발생했다.
메테오가 아무리 대단한들 시스템에 영향을 줄 일은 결코 없는데.
어쨌든 수정을 위해 셧다운.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스팟!
메테오가 떨어진 거대 크레이터에 나타난 누군가.
[쟤는 누구지?]
한 명이 아니었다.
우르르, 떼로 나타났다.
[소환사 같은데....]
[그러니까 왜 여기 소환사가 있냐고?]
[난들 알아?]
이곳 차원엔 소환사가 없다.
있다고 해도 초반에 죽었거나.
[아무래도 저놈이 시스템 오류의 원인 같아.]
[시스템 로그 기록 뒤져 봐. 누군지 알아야겠어.]
[셧다운 해서 아직 복구가… 아! 이제 됐다.]
[기록은?]
[…어?]
[왜 그래?]
[이, 일단 업적이 떴어.]
[무슨 업적?]
[드래곤 슬레이어.]
[…뭐?]
저자가 카라토스를 죽였다는 뜻.
인간이 드래곤을 죽여?
사실 드래곤 하나 죽었다고 해서 큰일은 아니다.
어차피 소모품인데.
문제는 업적이 떠 버렸다는 것.
업적이 주어지는 대상은 오직 플레이어뿐.
그것도 이 세상에 소속된.
[대체 왜 업적이?]
이곳 검은 탑 소속도 아니면서.
[…그, 그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방금 국적을 취득했어.]
[....]
무슨?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구, 국적 취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지금 장난해?]
[근데 실제로 일어났는걸.]
맙소사.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설마 675번 지구 생존자? 플레이어가 아직 남아 있었나? 그것도 등록되지 않은?]
[아니야. 백색 탑에서 나온 것 같아.]
[백색 탑이라면?]
가능한 경로는 하나밖에 없다.
[엘리베이터구나!]
[맞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1번 지구에서 왔어.]
[....]
돌아 버리겠다.
[그러니까 타 차원의 플레이어가 우리 동네로 와서 국적을 취득했단 말이지?]
[맞아.]
[…하하하.]
미치고 팔짝 뛸 노릇.
하도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만 나온다.
[병신 같은 1,001번 관리자 새끼들. 저놈이 활개 치고 다니는 동안 뭘 했길래?]
[통신망 열까?]
[빨리 열어.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어야겠어.]
[아냐. 욕하지 마. 항의 수준에서 그치라고. 이렇게 된 이상 저쪽 관리자들의 협조를 구해야 해.]
환장하겠다.
플레이어가 완전히 사라진 세상.
반면 아직 한 명이 남은 세상.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인과율이 개입할 테니까.
세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법칙 말이다.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쿠구구구구구구!
베를린에서 솟아올라오는 검은 탑.
원래 675번 지구엔 검은 탑이 없었다.
모조리 사라졌었다.
왜?
소속 플레이어들이 죄다 죽거나 각성이 취소됐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없는데 검은 탑이 존재할 이유가.
이미 몬스터들이 전 세계를 점령한 상태였고.
그래서 자신들의 신분도 675번 검은 탑 관리자가 아닌 675번 지구 관리자.
하지만 이제 유일한 검은 탑이 675번 지구에 생성됐다.
딱 한 명의 소속 플레이어를 위해 말이다.
[망했군.]
저러다 저 탑이 완전히 공략되면?
상상도 하기 싫다.
* * *
백색 탑 17층.
대인기피 방구석 연금술사 알리아마리는 자신의 집에서 홀로 최상급 마정석 연성 작업 중.
엘리베이터라는 게 생겼으니 앞으로 왕복 운행에 드는 최상급 마정석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자연산으로는 부족하다.
검은 탑 광맥이 언제 고갈될지도 모르고.
지금은 업적 보상 덕에 소환사님께서 공짜로 엘리베이터 타셨지만, 나중에 혹여 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마 10kg 정도는 항상 구비하고 있어야지.
사실 최마 연성은 매우 지루한 작업.
단순 반복 노가다나 다름없다.
연금술사의 솥에 상마를 가열해 정제하고, 농축하고, 순수 결정을 남기고, 또다시 가열, 정제, 농축.
1,000대 1의 비율.
상마 1톤을 연성해야 겨우 1kg의 최마를 얻을 수 있다.
하루에 기껏해야 300g 정도?
빨리빨리 하루 할당량을 끝내고 게임에 접속해야 하는데.
그래야 협곡에서 영혼의 한타를 때릴 수 있을 텐데.
그나저나 소환사님은 언제 오시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물론 피소환인들이 따라갔으니 별일은 없겠지만.
바로 그때!
후다다다닥!
시끄러워지는 17층.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
'오셨구나.'
소환사님이다.
마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런데?
똑똑.
"마리 씨?"
마리는 얼른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태블릿으로.
띠링!
<마리> : 네♡♥♪♬
그러자.
철컥!
문이 열리고 안으로 굴러 들어오는 거대한 정팔면체의 보석 덩어리.
띠링!
<상남자> : 이거 오다 주웠는데요, 매켄지 마법사님이 드래곤 하트래요. 감정 부탁.
마리는 피식 웃었다.
드래곤 하트를 주워오다니.
그게 어디 땅에 널려 있는 건가?
아무리 소환사님이라고 해도 장난이 지나치시네.
무슨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응?'
이게 뭐야?
문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발치에 놓인 거대 보석.
심상치 않은 빛깔,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폭발적인 마력.
파르르르.
마리의 눈꼬리가 떨렸다.
보석 표면에다가 두 손을 올렸는데.
'지, 진짜?'
그랬다.
드래곤 하트다.
드래곤이 죽을 때 남기는, 방대한 마력이 뭉치고 뭉쳐 보석 형태로 응집되는 마력원.
이걸 주워왔다고?
어디서?
<마리> : 마, 맞아요. 드래곤 하트에요.
그때!
"드래곤 하트 맞답니다. 르스스알 연금술사가 직접 감정했어요."
"본 마법사가 말했잖소. 하트 맞다고."
"이걸로 뭘 만듬까?"
"당연히 소환사님 넥타르지. 천 년 이상 사셔야 해."
"그것보다는 강화의 엘릭서가 좋을 듯하오. 신체가 금강불괴가 되면 그 어떤 공격에도 무사할 수 있으니."
"에이, 그래도 넥타르를."
"전 강화 엘릭서에 한 표."
"난 넥타르."
의견이 분분하다.
바로 그때.
띠링!
<마리> : 근데 이건 못 써요.
"으힉?"
"뭐?"
"왜?"
"못 쓰다니."
"드래곤 하트라면서."
"혹시 속이고 뒤로 빼돌리려는 검까?"
<마리> : 기운이 혼탁해. 순수한 마력이 아니라 마기가 가득 들어찼어. 그래서 약재로 사용할 순 없어.
마기(魔氣)라니.
<마리> : 마룡의 타락한 드래곤 하트가 틀림없어. 니들 소환사님 육신과 영혼을 마기로 오염시키려고 작정했니? 뒈질래?
"아!"
급실망하는 피소환인들.
드래곤 하트 주워서 얼마나 기뻐했나?
그런데 불량 식품?
"에라이, 좋다 말았네."
"내 이럴 줄 알았슴다. 매 영감이 했던 일 중에 제대로 한 게 뭐가 있슴까?"
"왜 날 걸고 넘어져? 라직스가 캤잖아."
"호엑!!!"
반면 주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괜찮아요. 굳이 약이 급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피소환인들은 아쉽다는 반응.
"다른 쓰임새는 없나?"
"정화해서 쓰는 건?"
"그래, 더러운 옷도 깨끗하게 빨면 입을 만하잖아."
"세탁기에 넣슴까? 세제는 정화의 비약으로."
<마리> : 다른 용도가 있긴 하지만....
"뭔데?"
"어서 말해 봐."
"어우, 답답해서 미치겠슴다."
<마리> : 무기를 만드는 재료로 쓸 수 있어. 실제로 만든 적도 있었고, 내 세상에선 그걸 마검(魔剣)이라 불렀지.
"마검(魔剣)?"
"흠, 마검이라, 강호에도 있었다. 동남동녀 100명의 인신 공양을 통해 만드는 극악한 검이었지."
"본 마법사의 세상에도, 마왕의 뼈와 심장을 제련해서 만드는 방식이었는데."
"소녀 세상에도 있었지요. 악령의 영혼을 검에 봉인하면 마검이 되지요."
각각 만드는 방법은 달랐지만 마검이 있었다는 말.
"그런데 이 경우는 의외로 간단하옵나이다."
"그렇군. 마룡의 하트만 있으면 된다고 하니."
"근데 이걸로 만들려면 검이 커질 것 같슴다."
"커지면 어때? 고방도 있고."
효용성이 있을까.
<상남자> : 쓸 만한가요?
<마리> : 파괴력 하나만 놓고 보면 그만한 무기도 없어요. 드래곤도 단칼에 죽여 버려요.
오!
괜찮네.
드래곤 킬러.
미공략 상층에서 드래곤이 나올 것이라는 건 거의 확실시된다.
맞춤형 무기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띠링!
<마리> : 그러나 만든다고 해도 쓸 수 없어요. 아니, 절대 쓰면 안 돼요.
<상남자> : 왜죠?
<마리> :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기 때문에, 영혼을 마기(魔氣)로 물들게 해서 결국은 미치게 만들어요.
<상남자> : 아!
무엇 하나 쉽게 가는 방법이 없네.
'가만!'
마기(魔氣)로 물들게 하고 미쳐 버린다?
주혁과 피소환인들의 눈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한 명 있잖아.'
안성맞춤이네.
"왜 다들 본좌를 쳐다보는가?"
광마(狂魔)니까요.
이름에 미칠 광(狂)에 마(魔) 자가 모두 들어가잖아요.
"커험! 뭐, 그까짓 마기 정도야, 제어 못 하면 본좌의 이름을 갈아야지."
하지만.
<마리> : 어림도 없어. 인간이 이길 수 있는 마기가 아니야. 처음엔 괜찮을지 몰라도 점점 마기가 골수에 박히면....
"주화입마에 든다는 말이군."
<마리> : 맞아. 그래서 당신은 절대 들면 안 돼. 그렇지 않아도 반쯤 미쳤는데 완전히 미치면 소환사님께서 위험해질 수도.
"맞슴다. 피소환인 3원칙, 막 어기면 어떡함까? 노망나서 벽에 똥칠할 수도...."
"갈! 노부를 너무 낮게 보는구나. 입마에 들면 차라리 자결을 택할 것이다."
"영혼이 아작 난다는 말 못 들었슴까? 죽어도 그대로일 검다. 미친 노망 틀딱 귀신처럼 17층 돌아다닐 검까?"
"…이 새끼가."
광마도 안 된다.
<마리> : 오히려 그 반대 성향이라면 몰라도, 영혼이 고결하고 성스러운… 예를 들어 성녀나 성기사 같은.
성기사?
또 모두의 시선이 바르딘에게 모였지만.
"흠."
"큼."
"음."
"어휴...."
"에이!"
다들 비슷한 생각.
쟤가 고결하고 성스러워?
변태 광신도 성기사가?
지나가는 라직스가 웃겠다.
"호엥!"
어떡하지?
그냥 버릴까?
순간!
마도공학자 엘이.
"인간이 들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네.
인간이 아니면 되지.
마침 인간 아닌, 골렘께서 눈앞에 계시고.
"그럼 엘 씨가?"
"아뇨. 전 아닙니다. 들면 안 됩니다."
"왜죠?"
"저도 영혼이 존재하니까요."
아! 맞다.
몸만 골렘이었지?
"그럼 누가."
"기간트요."
기간트?
"탑승형이 아닌 자동형 에고 기간트에게 주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오오오!"
그렇다.
자동형 에고 기간트는 영혼이 없기에 마기(魔氣)에 침범당하지 않는다.
미리 설정된 마공학 에고 지능에 따라 움직일 테니까.
그러면 에고 기간트를 어디서?
제작은....
"최소 1년 이상, 아니,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당장은 어렵고.
그렇다면?
"우리 차원대머슴이 85층에서 통째로 가지고 오는 게 제일 빠르겠네요."
원래 85층 기간트는 엘이 직접 조종하는 탑승형.
그녀가 피소환인 자격을 회복해서 탑에서 이탈한 후, 자동형으로 교체됐다.
하지만 가능할까?
빌딩 크기만 한 놈을.
"자동형 마그누스 기간트의 체고는 지구 단위로 환산해서 약 100m입니다."
크다.
넣어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라직스가 스스알일 때 대형 덤프트럭 정도는 충분히 들어갔다.
그보다 더 큰 것도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은 르스스알로 돌파한 라직스.
아공간 배낭의 용량도 훨씬 더 커졌을 터.
"놈을 눕혀서 머리부터 살살 집어넣으면 될지도."
"어깨너비가 25m에서 30m 사이니까… 글쎄요.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호에에."
궁금하다.
기간트가 들어가나?
"해보죠. 들고 올 수 있는지."
"호랏!"
"마력 EMP 준비하겠습니다."
마검이 필요한 이유는?
드래곤 때문이다.
막스 크루거의 세상에서 드래곤이 존재한다는 건 확인했다.
그러나 또 잡을 수 있을까?
운석으로 잡긴 했지만 그건 사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랬던 거고.
탑에서 만난다면?
놈이 운석 소환 주문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 줄 리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드래곤을 무찌를 수 있는 공략법.
마검이 바로 그 해답.
'뭐, 해볼 만해.'
업적 보상도 있고.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
모든 종류의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공격력 및 방어력 상승, 소환수에게도 적용.
기간트.
알고 보면 거대 로봇 아닌가.
비슷한 영화도 있다.
괴수와 로봇의 대격돌.
'마검을 든 거대 로봇과 드래곤의 불꽃 튀는 대결이라.'
갑자기 탑 등반이 매우 흥미로워지네.
* * *
아직 망하지 않은 차원.
아니, 망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이 지긋지긋한 소환사의 지구.
1,001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들은 이미 자신감을 잃은 지 오래됐다.
지금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그저 중국 검은 탑에 해방의 룬 목걸이만 밀어 넣는 것뿐.
솔직히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 목걸이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 갈등이 여기저기서 터지면 보람이라도 있겠지만....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이미 대응을 끝낸 상황.
마력 봉쇄 스크롤로.
중국에서만 효과가 있었다.
퍼져 나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다 그놈 때문이다.
사사건건 방해를 놓는 소환사.
중국 탑 붕괴?
소환사가 붕괴하도록 내버려 둘까?
다국적 탑 이용 티켓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되는데.
이제 이 짓도 그만하고 싶다.
뭐, 90층대 올라가도록 내버려 두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디, 디자이너, …675번 지구에서 기, 긴급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다소 떨리는 듯한 엔지니어의 음성.
[음?]
675번 지구라면 이미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차원.
거기서 왜?
[용건은?]
[우리 차원 소환사 플레이어에 관해서 묻더군요, 그자가 왜 675번 지구에 나타났는지....]
[…뭐?]
잘못 들었나?
[소환사가 675번 지구에 나타났었다고?]
[그렇다고 했습니다.]
아!
어찌 된 일인지 알겠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서 가동했군.]
예견된 일이었다.
84층에서 그렇게 상마를 캐댔는대.
사실 의외다.
소환사는 그다지 담력이 썩 강하지 않는 인물.
엘리베이더 설치는 물론 가동도 미루고 안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보고 어쩌라고, 엘리베이터야 업적 세워서 받은 거잖아.]
[그게....]
675번 지구 관리자 측에서 항의한 내용을 설명하는 엔지니어.
각성 등록, 드래곤 슬레이어, 더불어.
[…구, 국적 취득을 했다고.]
[네.]
국적 취득이라니.
차원을 넘어 그 세상의 공식적인 주민이 됐다는 말 아닌가.
[크하하하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알박기구나.]
소환사가 675번 지구의 플레이어로서 자격을 유지하는 한, 그쪽 프로젝트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서 말이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우리도 모르겠다고 하고 씹어!]
너희도 한번 매운맛을 보라지.
지구 소환사가 얼마나 지긋지긋한 놈인지.
191화
너무 달렸다.
잠시 정비할 시간도 필요하다.
마룡의 드래곤 하트로 마검 제작 결정.
뼈대를 만드는 것이 우선.
마검은 기간트가 드는 무기이기에, 그에 맞춰 초대형으로 만들어야 한다.
백색 탑 17층 설비로는 어렵다.
굳이 어렵게 왜 직접 만들어?
바깥에서 만드는 게 낫지.
외부 하청 방식으로.
지구, 대한민국의 제철 기술은 매우 뛰어난 편.
탑 금속을 다루는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다.
마리도 인정했다.
드워프 땅꼬마들보다 더 잘 만든다고.
초대형 검의 뼈대에 마기(魔氣)의 하트를 박아넣고, 검날, 검신, 검 자루에 인챈트와 연금술, 마도 공학을 가미하면 끝.
다만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85층으로 가서 기간트를 가져오는 것부터 먼저.
주혁은 펜트하우스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른 차원에 다녀오느라 제페트를 소환하지 못했다.
영혼의 세상에서 얼마나 힘들까.
백색 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지정 소환해서 제페트에게도 백색 탑 1층에서 있었던 이야길 들려줬다.
두런두런 대화하다가.
"그럼 쭉 쉬시다가 알아서 돌아가세요."
"벌써 흥미진진합니다. 영혼들이 화들짝 놀랄 것이 눈에 뻔히 보여서."
"하하하, 그런가요?"
"흐흐흐, 그렇습니다."
제페트는 영혼 세상의 대스타가 되었단다.
그가 물어오는 바깥세상의 이야기들.
덕분에 영혼들도 더는 무료하지 않게 됐고.
이번 백색 탑 1층 엘리베이터 차원 이동 사건도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인가?
평행우주의 플레이어, 그에게서 유산 상속, 백색 탑 1층 인수, 드래곤 킬, 그리고....
'국적 취득.'
맞다.
다른 세상 주민이 됐다.
그것도 이미 망해 버린.
'이것도 유산 상속의 일부?'
처음엔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갔는데.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소속 1] : 검은 탑(1,001번 지구 대한민국)
[소속 2] : 검은 탑(675번 지구 독일)
이렇게 변했다.
'여기가 1,001번 지구였구나.'
처음 알았다.
평행우주는 전부터 인지했지만.
한편 막스 크루거의 세상은 675번.
평행우주마다 번호를 매기나?
'촌스럽게 번호는 무슨.'
제일 간단한 네이밍 방식이긴 해도.
아무튼.
'이중 국적이잖아.'
원래 플레이어들은 이중 국적 허용이 안 된다.
그런데 떡하니 상태창으로 명시된 이중 국적.
'동일 차원에선 불가능하지만 서로 다른 차원이라 가능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675번 지구에 검은 탑도 있다는 말인데....
나중에 가서 확인해 보면 된다.
진짜 있는지.
있으면 등반할 수 있을 테고.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쉰다.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주혁은 백색 탑 17층으로 입장했다.
즐거운 파티 시작.
배지 수여식도 행해졌다.
누적 배지 144개.
현물 45개.
매켄지에게 하나.
2개를 주려고 했는데, 순정 하트라면 모를까, 마룡 드래곤 하트 획득은 그리 큰 공로가 아니라는 코사크와 견달래의 의견을 받아들여 1개만.
그래도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9서클 대마법사님.
그리고 성기사 바르딘.
인간성검 그만합시다. 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등급 돌파하고 오세요. 르스스알의 성기사로."
피소환인 등급 돌파의 룬은 딱 하나가 남아 있었다.
더불어 바르딘의 가슴에 달린 배지가 5개니까, 20개를 한꺼번에 막 달아 주고는.
"실패해도 좋으니 무사히, 아시겠죠?"
"충! 소신, 주군의 지엄한 명령을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빛이여!!!"
"지금 가라는 말은 아니고, 좀 더 노시다가."
"아닙니다. 시간은 금입니다."
그리하여 바르딘은 랜드마크 꼭대기로 혼자 씩씩하게 올라갔다.
이제 남은 배지는 24개.
확 줄었네.
뭐, 또 차근차근 모아가 봐야지.
랜덤 럭키 박스 하나 안 주나?
거기서 배지 50개 정도 얻으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순간!
지잉!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진동.
전광일 청장이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마침 잘 됐다.
안 그래도 만날 일이 있었는데.
약속 장소는 역시 백색 탑 17층.
스팟! 나타난 전광일 청장.
"봉 플레이어님."
"안녕하세요. 청장님."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습니다. 아침에도 안 계시길래."
"하하, 어디 좀 갔다 왔어요."
다른 차원에요.
믿지 못하시겠지만.
언제 시간 내서 같이 한번 다녀옵시다.
"참! 소방 약제 보충은 다 끝났는지."
"네, 그전보다 더 많이 준비했습니다. 소방차도 5대 더 확보했고요."
"너무 감사하네요. 번거로우실 텐데."
"천만에요. 탑 공략과 관계된 일인데요."
이로써 2번 탑 불사조 공략 준비 완료.
"그리고 이거 받으십시오."
"어, 티켓이네요?"
"일본 총리가 마력 봉쇄 스크롤을 수출해 줘서 감사하다며 보내 왔습니다."
"무슨… 헐! 스킬 초기화 티켓?"
"그렇습니다."
와!
좋은 일이 연달아 닥치네.
이러면 다음 무작위 소환에서 피소환인들을 한 명 더 뽑을 수 있다.
"아유, 뭐 이런 걸 다… 감사하다고 대신 전해 주세요."
일본에게 이런 도움도 다 받아 보고.
총리 살려 주길 잘했다.
"저기, 중국은? 여전히 반응 없나? 마력 봉쇄 스크롤 안 필요한가요?"
"연락이 없습니다. 아직 살 만한가 봅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이제 본격적인 용건.
"전에 80층대 거대 괴수 구간 공략법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네, 기억납니다."
"그거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아!"
"괜찮은 무기를 만들었거든요. 뭐냐고 하면...."
전광일에게 거대 괴수 대응 무기인 마총과 전용 탄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주혁.
그러고 나서.
"이따가 가실 때 마도 공학자 엘 씨 만나서 마총하고 탄환 받아가세요."
"아, 알겠습니다."
"85층까지는 무리 없이 공략할 겁니다. 마총 다루긴 힘들겠지만… 연습을 통해 극복하면 되니까요."
처음엔 잘 안 맞을 것이다.
그래서 총알은 무척 잘 팔리겠지.
솔직히 돈엔 별로 욕심 없다.
가만히 있어도 계좌에 돈이 술술 들어오는데.
당장 비만 탈출의 팔찌도 그렇다.
평양 공장에 양산화 설비가 거의 완성되고 있다.
보름 안에 끝난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경제 발전.
라직스 물산의 정 대표가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마검 제작.
이미 매켄지와 마리, 엘, 그리고 라직스는 마검 제작을 위해 따로 단톡방을 팠다,
마연공 삼위 일체.
아니, 라직스까지 합류했으니, 마연공슴 사위일체인가?
주혁도 초대받았는데 뭐, 알아들을 수나 있나?
그저.
띠링!
<마리> : 소환사님, 마검 만들 때 추가 재료로 '디아마트 눈' 쓰려고 하는데, 써도 돼요?
과거 디아마트가 80층 보스였을 때 복사본 잡고 받은 보상, 연금술 재료.
<상남자> : 필요하면 쓰셔야죠.
<마리> : 네에♥♡♬♬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디아마트도 빨리 등급 돌파해서 몽마 군주의 지위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아아.
불가촉천민 디아마트를 위해주는 마음씨 고운 마리.
<마리> : 그래야 눈알 빼서 약 만들 때도 사용하고, 무기 만들 때도 쓰고.
'....'
우리 디아마트 등급 돌파는 못 하겠다.
* * *
영혼의 세상.
무한의 감옥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그곳.
하지만 요즘은 하루하루가 기대감의 연속.
피소환인 제페트가 물어오는 소환사의 동향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심상치 않다.
백색 탑 엘리베이터?
그게 차원과 차원을 넘나드는 장치라고?
게다가 실제 운행을 해서 1층으로 갔다니.
『거, 거짓말.』
『에이, 참말인 줄 알면서.』
『너무 놀라서 그랬다.』
『그건 그렇죠.』
하지만 뒷이야기는 꽉 막힌 고구마.
완전히 망한 차원.
목숨을 끊어 버린 불행한 플레이어.
그의 유산을 넘겨받은 소환사.
『누구 675번 지구에 가본 적이 있나?』
『없을걸? 세상마다 소환사가 있는 건 아니잖아.』
『전에 멸망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공지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찝찝해진 영혼들.
아무리 관계없는 세상이라지만, 망했다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그럼 형님 누님 분들, 제가 속이 뻥 뚫리는 이야기, 해드릴까요?』
『어서 해 보거라, 고구마만 먹었더니 속이 꽉 막혔어.』
『시원한 사이다라도 있어?』
『흐흐흐, 당연히 있죠.』
『뭔데?』
『소환사님께서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를 다셨습니다.』
『흠.』
『그렇군.』
『좋네.』
『축하한다고 대신 전해… 가만! 뭐?』
『으잉?』
『무, 무슨?』
『드래곤 슬레이어?』
『그건 드래곤을 잡아야 하잖아.』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제페트는 백색 탑 1층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풀어놓았다.
복수 차원에서 운석 낙하를 시도했는데 지나가던 드래곤이 우연히 죽었다는 믿지 못할 사실.
『캬아, 기멕히죠? 쩔었죠? 드래곤이 알아서 와서 머리를 들이밀었죠?』
『타락한 마룡 새끼, 아주 잘 죽었군.』
『매켄지가 한 건 해냈구나.』
『과연 9서클이야. 본좌는 그가 너무나 부럽다.』
『매켄지, 그놈 이제 자리를 완전히 잡았군.』
『소환사의 신임을 듬뿍 받겠어.』
『당연하잖아. 드래곤을 처치했는데,』
『어쩌면 수인족 일꾼을 넘어섰을 수도, 매켄지가 심복 1위, 다음이 일꾼인가.』
『소환사 바로 옆에 서 있을 거야. 다른 피소환인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소환사가 매켄지를 너무 의지하면 안 되는데.』
『....』
쓸데없는 걱정이시네.
겨우 드래곤 한 마리 잡아 놓고, 소환사의 신임?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제페트가 보기엔 매 마법사는 아직 하위권.
베 원사나 선녀 공주는커녕 광마나 야만 전사에도 못 비빈다.
변태 성기사보다는 살짝 나을지 몰라도.
하지만 굳이 영혼들에겐 말하지 않았다.
이들도 직접 겪어 봐야 안다.
* * *
미국 국무부 탑 등반 관리국.
오늘도 한군데 모여 회의 중인 맥밀란 장관, 안토니오 국장, 그리고 제랄드 플레이어.
안건은 81층 베헤모스 공략에 관한 것.
도통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70층대는 정말 쉬웠는데.
80층도 꿈 저항 키트로 간단하게 넘겼는데.
그러나 81층 거대괴수 구간에서 난이도가 확 올랐다.
너무 큰 베헤모스.
섣불리 접근하다가 밟혀서 죽는다.
"후우, 마법으로도 안 되는 거야?"
"무빙으로 움직이면서 스킬을 써 봤는데 타격을 입히지 못했어요. 게다가 느리긴 하지만 보폭이 커서 도망치는 것도 힘들었고요."
"궁극기로도?"
"멈칫! 하긴 하던데… 바디캠 찍어왔으니까 검토해보시든가요."
검토한들 뾰족한 수가 있을까?
대전차 미사일을 무더기로 들고 탑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모를까.
"이제부터는 최고 플레이어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어요."
맞다.
오직 그만이 해답이다.
임시귀화라든가, 혹은 다국적 탑 이용 티켓을 활용해서.
솔직히 81층 어찌어찌 공략한들.
82층은? 83층은?
심지어 86층은 불사조, 피닉스 아닌가.
전설 속에 나오는 존재를 어떻게 잡아?
하지만 최고 플레이어는 그마저도 넘어섰다.
그 피닉스를 공략해 버린 봉주혁 플레이어인데.
순간!
지이잉!
안토니오 국장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누군데? 전(前) 마누라?"
"거,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전광일 청장입니다."
"미스터 전? 잘됐군. 자네가 대신 물어봐. 비만 탈출의 팔찌 재생산이 언제 되냐고?"
"하아, 지금 81층을 어떻게 공략하느냐 마느냐 하는 순간에...."
안토니오 국장은 맥밀란을 한번 째려보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미스터 전! 오랜만이에요."
- 별일 없었죠? 국장님.
"나야, 늘 똑같죠. 그런데 왜 전화를? 혹시 비만 탈출 팔찌 재생산이?"
- 아! 그것도 곧 되겠지만, 제가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라....
통화에 집중하는 안토니오.
그러다가.
"자, 잠깐만요. 거, 거대 괴수 구간 공략법요? 찾았다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맥밀란 장관과 제랄드 플레이어도 깜짝 놀랐다.
공략법이라니, 어떻게?
"네네, 지금 바로 날아가서 뵙죠. 그래요. 제랄드 플레이어도 함께."
안토니오의 표정이 흥분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맥밀란 장관도 마찬가지.
급하다, 급해.
"비, 비행기, 빨리 한 대 수배해 주세요."
"알았어. 바로 공항에 대기시킬게."
"들었지? 제랄드, 집에 가서 짐이나 싸."
"짐은 무슨, 지금 가면 돼요."
그날 저녁.
안토니오 국장과 제랄드 플레이어를 태운 전용기가 워싱턴 공항에서 이륙했다.
* * *
[대한민국 검은 탑(NO.2) 86층에 입장합니다.]
2번 탑 초열겁화 불사조 소방 공략.
이미 해봤다.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베 원사 풀링.
소방차 학익진.
방사되는 소방 약제.
그리고 매켄지와 라직스가 하늘 위로 날아서 액화 질소가 든 탱크 투하.
슈슛! 슈슈슈슈슛!
광마가 초승달 강기로.
서걱! 서거거걱!
액화 질소 샤워.
[초열겁화 불사조 1/1]
[86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 : 상급 마정석 860kg]
[세계 공지 : 검은 탑 NO.2(한국)의 86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깃털하고 재는 안 주네.'
뭐, 86층은 메인이 아니다.
식전 행사에 불과하지.
그래도 특전은 확인하고 가자.
배지 2개를 받아서 누적 배지가 146개니까.
[플래티넘 배지 145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뭔가요?
[특전 : 초월의 은폐 장막이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오호?"
오랜만에 특전 아이템.
인벤토리에서 꺼내 보니 망토였다,
<초월의 은폐 장막>
효과 : 모습과 기척을 감춥니다. 10분간 지속/ 재사용 대기 시간 10분.
한계 : 공격 행위 시 들킵니다.
특징 :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투명망토구나.'
괜찮은 느낌이 든다.
탑 전용도 아니고.
게다가 짤막한 옵션 설명.
애매하지 않고 직관적.
다만.
'쯧, 하남자 아이템을 주네.'
치사하게 숨어다니란 말인가?
이젠 상남자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말이다.
보상도 받았고.
이제 하이라이트.
[대한민국 검은 탑(NO.1) 85층에 입장합니다.]
안녕, 기간트야.
잘 있었지?
통째로 납치해 줄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끄드드드득!
쿠쿠쿠쿠쿡!
쑤우우우욱!
땅속에서 올라오는 자동형 마그누스 에고 기간트.
먼저 정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백발백중 베 원사가 마총을 들었다.
마력 EMP 특수 탄환을 사용하는 특수 제작 총.
원거리 EMP이기 때문에 엘이 함께 정지될 일은 없다.
철컥!
쐐애애액!
퍽!
놈의 몸통에 그대로 명중한 마력 EMP 탄환.
번쩍!
파직! 파파팟!
강렬한 빛의 파장.
멈칫!
마그누스 에고 기간트가 순간 정지했다.
"작업 시작합시다."
"예압!"
"금방 끝내겠소."
먼저 거대화 고방이.
"끄응!"
엄청난 힘으로 정지한 마그누스 기간트를 밀어 넘어뜨렸다.
쿠쿵!
소드마스터 코사크와 광마가 놈의 가슴 위로 올라가.
서걱! 서거걱!
강기로 장갑판을 자르자.
쁘드드득!
손으로 뜯어낸 고방.
드러난 병렬 연결 마력 코어 엔진 5개.
다음 순서는 엘.
엔진과 회로도를 만져서 움직일 수 없게끔 조작한 다음.
"호엑!"
라직스 등장.
킁킁!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당당한 발걸음으로 쓰러진 기간트 앞에 섰다.
짤막한 손을 앞으로 뻗은 라직스.
스우우웅!
천천히 열리는 입구.
처음 봤다.
아공간 배낭의 입구를 말이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물건을 넣지 않았다.
웬만한 건 손만 대도 스슷, 스슷, 들어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태껏 넣은 물건 중 가장 거대한 것.
그래서 입구를 최대한 개방해야 한다.
"호에에에에에에!"
입구를 활짝 연 채.
라직스는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아장, 아장!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쑤욱! 쑥.
사라지는 기간트의 머리.
계속 앞으로 전진.
아장, 아장, 아장.
쑤우우우....
신중한 라직스의 표정.
"힘내십쇼! 라직스 갓갓 차원대머슴!"
"호아앗!"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호아앗!"
"반드시 해낼 것이옵니다."
"호아앗!"
"르스스알 아공간 파이팅!"
"호아앗!"
급기야.
쑤욱!
완전히 다 들어간 머리.
관건은 어깨.
제일 중요한 과정.
어깨가 들어가면 끝난 게임.
하지만.
찌직, 찌지직.
어깨가 입구에 걸렸다.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 라직스.
"더 크게 벌려!"
"쫙쫙, 넓히십시오."
"욱여넣으십쇼. 설마 아공간 배낭 찢어지겠슴까?"
"호에에에에엑!"
찌직, 스읏, 찌지직, 스으으읏!
간다.
나아간다.
아장아장 나아간다.
아공간 배낭의 입구를 있는 힘껏 벌리고 전진, 또 전진.
"쑥! 들어가라!"
"쑥! 들어감다."
"쑥! 쑥! 쑥!"
"쑥! 쑥!"
"쑥!"
"쑥!"
"쑥!"
"쑥!"
조금만 더, 조금만.
"호에엑!!! 호랏! 호아아앗!"
쑥!
들어가는 기간트의 어깨.
쑤수수숫!
거침이 없었다.
손을 뻗어 전진하는 라직스.
그때마다 사라지는 기간트의 거대한 몸체.
결국 상체를 먹고, 하체까지.
쑤욱!
"만세!"
"만세!"
"잘했다!"
"라직스 차원대머슴 만세."
"주혁 만세!"
그 거대한 기간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아아아아아아앗!"
85층에 울려 퍼지는 라직스의 포효!
그리고.
띠링!
공략 성공을 알리는 메시지.
성공이다.
마그누스 에고 기간트 몸체.
통째로 확보 성공.
192화
오늘도 평화로운 백색 탑 17층.
큰형님이 오셨다.
말 그대로 '큰'형님.
엔진이 정지된 채, 광장에 세워진 거대 마그누스 에고 기간트.
그 큰놈을 쑥! 집어넣어서.
스슷! 하고 뱉어내는 라직스 차원대머슴 아공간의 어마어마한 능력.
이게 정말 가능했을 줄이야.
대체 쟤는 정체가 멀까?
으뜸 머슴에서 우주대머슴, 급기야 차원대머슴으로 진화한 라직스.
아무튼 그의 능력으로 기간트를 업어왔다.
보면 볼수록 거대하고 웅장한 거대 로봇을.
"…멋지네요."
"예압!"
주혁뿐만 아니라 코사크도, 고방도, 광마도, 매켄지도, 다들 흐뭇한 표정으로 기간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라면 가슴이 콩닥콩닥 뛸 수밖에.
"봉 소환사님."
"왜요?"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슴다."
"아이디어라니?"
"마그누스 기간트 밖에다 전시해서 사람들에게 구경시켜 주면 어떻슴까?"
이 큰걸?
"당연히 관람료와 사진 촬영료 받고, 캬아! 멋짐다. 세워만 둬도 꿀 빨 거 아임까?"
또또또, 사업가 마인드 나왔다.
머리에 든 게 돈 버는 거 말고 없나?
공무원이 말이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인민무력부장이면서,
하지만 괜찮은 생각.
서울 말고 지방 같은 곳에 땅을 사서 떡! 세워 놓으면 관광 명소가 되겠지.
아무튼 기간트 가슴팍에 올라서서 열심히 작업 중인 마도공학자 엘.
기간트 기동 방식을 변경할 예정.
그래서 마력 회로를 수정 중이란다.
자동형 에고 기간트는 너무 멍청하고.
탑승형으로 바꾸면 마검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지시형으로.
명령을 입력해서 움직이기.
자동형과 탑승형의 중간.
일일이 명령을 입력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피아식별 되고 기본적인 전투 능력은 변함이 없다니까.
그러나 다 좋을 것 같지만 기간트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 자식 연비가 최악이다.
24시간 가동에 상마 1톤.
전투 기동하면 15시간.
이게 말이 되나?
등판 연료 투입구에 상마 1톤을 투입해야 움직인단다.
부서지면 수리도 거의 불가능하고.
그래도 상마 1톤이 문제야?
부서지면 어때?
새 걸로 하나 업어오면 되는 것이고.
'수정은 언제 끝나나, 빨리 실험해 보고 싶은데.'
마검(魔剣)은 아직 제작되지 않았다.
대신 적당한 철제 H빔을 구해 뒀다.
기간트가 잡고 휘두를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실험 장소는?
당연히 탑으로 가야지.
문제는 어느 탑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
탑이 다 똑같은데 뭘 고르느냐고?
지금 주혁은 이중 국적.
1,001번 지구와 675번 지구.
'675번 지구에도 검은 탑이 있을 거야. 분명해.'
상태창이 증명해주고 있다.
[소속 2] : 검은 탑(675번 지구 독일)
이렇게.
가서 확인해 보면 간단하다.
엘리베이터 비용도 공짜 아닌가?
바로 그때.
주혁에게 다가온 엘.
"소환사님, 개조가 끝났습니다."
"오! 생각보다 빠르네요."
"마력 회로 수정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명령 입력 방식만 바꾸면 되는 거라서."
"그럼 실험가동 할 수 있죠?"
"네, 가능합니다."
됐다.
가지고 가자.
라직스를 불러서.
"이거 다시 아공간 배낭에 입고해 주세요."
"호엥!"
세워져 있으니까 엎드리게 해서.
엘이 기간트에게 지시했다.
과연? 잘 알아들을까?
- 기동 지시, 기동 방식 입력, 포복 실행.
순간!
그우우웅! 쿵! 그우웅! 쿠쿵!
그 큰 몸집을 땅에 납작 엎드리는 마그누스 에고 기간트.
"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엘의 지시에 정확하게 따르는 기간트.
"똑똑함다. …손 달라고 하면 손 줌까?"
이 양반이?
기간트가 애완견인 줄 아나?
다음으로 라직스의 아공간 배낭 기간트 입고.
스읏, 찌이… 스으으으읏!
한번 해봐서 그런지 전보다는 쉽게 들어갔다.
"입구가 늘어났슴다. 몇 번 더 넣다 빼면 더 잘 들어갈검다."
옷이나 신발도 그렇지.
자주 입거나 신다 보면 늘어나는 법이니까.
이제 준비 완료.
그리고 실험 장소는.
"엘리베이터 타러 가죠."
"…넴?"
"왜요?"
"백색 탑 1층 말이옵니까?"
"무슨 이유로 거길… 설마?"
주혁의 의도를 알아챈 피소환인들.
"으흠."
"그건 좀...."
"위험할 것 같아서."
"소녀, 심히 우려되옵니다. 괜찮으실는지 모르겠나이다."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
"가면서 설명해드릴게요. 일단 타세요."
엘리베이터 탑승.
차원 이동.
백색 탑 1층 도착.
아유, 공짜니까 얼마나 좋아?
종종 이용해야지.
주혁은 피소환인들에게 백색 탑 1층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달라진 상태창, 이중 국적.
혹시나 망한 세상에 입장할 수 있는 탑이 존재한다면?
공략해야지.
쪽쪽 빨아먹어야지.
당장 84층 빙벽 광산 자연산 최마만 해도 어디인가.
겸사겸사 막스의 복수도 하고
"흐음, 소환사."
"말씀하세요."
광마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
"675번 지구에 탑이 있다고 해도, 탑에 입장하려면 일단 백색 탑 1층을 나가야 하오."
"그렇죠."
백색 탑에서 검은 탑 직행 입장은 막혀 있다.
일단 밖을 경유해서 들어가야 한다.
"허나 매켄지의 운석 소환으로 그대의 존재가 노출되었을 수도 있소."
무슨 말인지 알겠다.
드래곤이 시끌벅적하게 죽었으니까.
"드래곤보다 더 무시무시한 놈이 바깥에서 그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흠.
가능성 있는 이야기
"특히 관리자들, 놈들을 우습게 보면 안 되오. 지금 나가면 위험하오."
여기서 관리자란 675번 지구의 관리자.
그들도 주혁의 존재를 인지했음이 틀림없다.
더구나 탑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세상.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상황.
'피소환인들과 함께 백색 탑을 나가면 안전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왜?
피소환인들에겐 상태창이 없다.
따라서 백색 탑 입장 퇴장 스킬이 등록되지 않았다.
그들은 주혁이 소환해야 나갈 수 있다.
바깥에서든, 혹은 검은 탑 안에서든.
어쨌거나 소환사가 홀로 백색 탑을 나간다?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건 피소환인들에게 있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부분.
검은 탑에도 혼자 입장하지 못하게 호들갑을 떨었던 그들인데.
"안 나가면 안 됨까?"
"에너지 방어막에, 매켄지 님 배리어 보호막 받고, 달래 선녀님 부적까지 붙이고...."
"그래도 위험하오. 만약 드래곤이 브레스라도 사용한다 생각해 보시오."
"드래곤은 죽었는데?"
"한 마리 더 있을 수 있슴다."
"튀면 되죠. 탑 입장으로."
"그럴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 양반들이!
왜 이렇게 사람 겁을 줘?
솔직히 주혁도 쫄리긴 했다.
진짜 나가면 드래곤 같은 새끼가 가만히 매복하고 있다가 확 덮치면 어떡하라고?
관리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탑에 입장할 방법은 없....
'…가만!'
시도해 볼 방법이 있다.
주혁은 인벤토리 열었다.
거기서 아이템을 꺼내 착용하니.
스르륵!
사라지는 주혁의 몸.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리는 피소환인들.
"헉!"
"어?"
"어, 어디?"
"없다. 사라졌다."
"…설마."
백색 탑 1층 바깥으로?
뭐가 있을지도 모를 그 위험한 곳에?
"나, 나가신 건가?"
"나가신 것 같습니다."
"허어, 진짜 사라졌군. 여긴 없는 것이 확실해."
"호에에에...."
코사크가 풀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고래고래 고함 질렀다.
"아이고, 큰일 났슴다. 우리 봉 소환사님, 간이 커졌슴다. 상남자가 다 되셨슴다. 하남자로 남으셔야 하는데, 이게 웬일임까?"
그러고는 매켄지를 확! 노려보며.
"이게 다 매 영감님 때문임다. 괜히 운석 소환 그딴 거 해서 주의만 끌어놓고는, 결국 봉 소환사님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슴다."
매켄지는 당황했다.
"아, 아니… 소환사께서 떨어뜨려 달라고 하셔서."
쏟아지는 비난.
"거절하셨어야죠. 나이를 먹으실 만큼 먹으신 양반이 사리 분별이 그리도 안 됩니까?"
"호엑!"
"운석이 뭐 별거라고, 소환사님 노출만 시키고."
"…드, 드래곤 하트를."
"그게 뭐? 먹지도 못하는걸."
"소, 소녀 심장이 떨려 미치겠습니다. 공자님께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만약 소환사가 잘못되면 내가 너의 목을 베어주마."
"지휘관님 잘못되면 다 죽는 겁니다. 나도 죽고, 당신도 죽고, 다 죽어요!"
순간!
스르륵!
나타나는 주혁.
"내 이럴 줄 알았다. 틈만 나면 싸우네. 이러니 자리를 비울 수가 있어야지."
헐!
이게 뭐야?
"아!"
"오!"
"다행이야."
"으잉? 다시 들어왔슴까?"
"그건 아니고, 잠시 은신을...."
"은신이라니, 그럼 노부가 알아차렸을 터인데."
"맞슴다. 은신은 제가 전문가 아임까? 아무리 숨어도 다 걸림다."
주혁은 등에 착용한 망토를 보여주며 말했다.
"특전으로 받은 아이템이에요. 이걸 써 봤는데… 어때요?"
<초월의 은폐 장막>
효과 : 모습과 기척을 감춥니다. 10분간 지속/ 재사용 대기 시간 10분.
한계 : 공격 행위 시 들킵니다.
특징 :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의 피소환인들.
"호오! 은폐 장막이라."
"은신보다 더 상위 스킬임다. 이러면 아무도 모름다. 드래곤도 모름다."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다… 간략한 설명이라 더 믿음이 가오."
"신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특전이 나왔습니다."
"10분이라는 지속 시간이 아쉽긴 하지만."
"소녀, 감탄했사옵니다. 천지신명께서 공자님을 보우하시는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주혁도 동의했다.
르스스알 피소환인들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은폐 능력의 아이템.
'이럴 때 사용하라고 준 건가?'
아무튼 공격만 안 하면 은폐가 풀리지 않으니까.
"나갔다 와도 되겠죠?"
"될 것도 같은데."
"불안하지만… 조, 조심해서,"
"절대 공격하면 안 됨다. 살살 움직이십쇼."
"분위기 이상하면 즉시 후퇴하시고요."
다시 10분을 기다린 후.
주혁은 초월의 은폐 장막을 활성화하고.
스팟!
백색 탑 1층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미친!'
확실히 피소환인들의 우려는 틀린 게 아니었다.
저벅저벅.
바로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데스나이트 한 마리.
아니, 한 마리뿐이 아니다.
온 천지에 몬스터.
운석 소환으로 깨끗하게 정리한 폐허의 도시였다.
그러나 전보다 더 엄청난 숫자의 다양한 몬스터들이 이곳을 활보하고 있었다.
다행히 누구도 주혁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옆으로 지나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완벽한 효과의 은폐 장막.
'먼저 검은 탑이 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눈앞에 높디높은 검은 탑이 떡하니 세워져 있었으니까.
'뭐야? 저거 언제 세워진 거지?'
분명 전에 없던 거였는데.
그럼....
'독일 검은 탑 진척도 확인.'
띠링!
[위치] : 독일 베를린 검은 탑
[완료] : 79층
[진행] : 80층
[시한] : 179일 13시간 34분 52초
'아!'
막스가 공략하던 탑이었나?
'검은 탑도 물려받았구나.'
꽤 높이 등반했네.
하긴, 특성 강화만 20번인데.
들어가 보자.
80층까지 뚫렸지만 거긴 보스가 나올 수도 있으니 몸풀기 격으로 79층부터.
주혁은 조용히 읊조렸다.
'베를린 검은 탑 79층 입장.'
스팟!
'....'
다르다.
1,001번 지구의 79층과.
주혁의 세상에서 79층 환경은 바라티온 제국의 황궁.
코사크의 테마층, 타임 어택 임무.
하지만 여긴....
시커먼 대지.
붉은 하늘.
타다 만 나무들.
여긴 어떤 곳일까?
임무는?
'먼저 소환부터.'
은폐의 장막을 해제하고.
스팟, 스팟, 스팟, 스팟, 스팟....
피소환인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호오."
"여긴...."
"망한 세상의 검은 탑임까?"
"호에."
"몇 층인지?"
대답하는 주혁.
"79층요. 많이 다르죠?"
"그렇소. 완전히 다르오. 테마층이 아니군."
"이 세상에 소환사 같으신 플레이어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맞아. 피소환인들도 존재치 않으니, 스토리 테마층 또한 생성되지 않았을 테지."
"임무가 뭔지 궁금함다."
하지만 그전에.
"라직스 씨?"
"호에?"
"기간트 출고."
"호엥!"
손은 뻗은 후,
뒷걸음질 치는 라직스.
스슷, 스스스스… 찌그덩, 찌지직!
천천히 아공간에서 빠져나오는 기간트.
동시에 임시 무기인 기다란 철제 H빔도.
"엘 씨?"
"네, 소환사님."
"시작해요."
"알겠습니다."
지시형 기간트.
엘이 기간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 기동 지시, 기동 방식 입력, 기립 실행.
끄드드득.
몸을 일으키는 기간트.
- 기동 지시, 기동 방식 입력, 무기 착용.
커다란 손으로 철제 H빔을 잡고.
"갑시다."
- 기동 지시, 기동 방법 입력, 앞으로 이동.
쿵! 쿵! 쿵! 쿵!
널찍한 보폭으로 천천히 전진하는 기간트.
뒤에서 멀찍이 따라가는 주혁과 피소환인들.
잠시 후.
띠링!
임무가 떠올랐다.
[79층 임무 : 지옥의 문지기 켈베로스 80마리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4시간 이내.]
[실패 조건 : 사망 혹은 임무 포기]
"…켈베로스?"
순간!
스슷, 스스슷!
새카만 대지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개들.
크기는 코끼리보다 더 크고 머리는 3개나 달렸다.
"대형종이네."
"그래 봤자 거대 괴수 미만임다."
속성은?
입에서 화염을 뿜는 놈, 냉기를 뿜는 놈, 언데드 켈베로스, 다른 것보다 몸집이 큰 놈....
"잡슴까?"
"아뇨.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엘을 쳐다보는 주혁.
고개를 끄덕이는 엘.
- 전투 지시, 전투 유형 입력, 모든 켈베로스… 말살!
찌잉, 철컥!
기간트가 허리를 숙였다.
마치 스프린트 자세의 육상 선수처럼.
그리고.
콱콱콱콱콱!
집채만 한 다리를 움직여 무수한 켈베로스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곧이어 벌어진 전투.
아니, 이게 무슨 전투야?
"학살이네."
"양학임다."
"짓밟고 있사옵니다."
"화끈합니다."
파바바바바박!
발에 채여 튕겨 나가는 켈베로스, 밟혀 죽는 켈베로스, H빔에 맞아 반갈죽 되는 켈베로스, 기간트 손에 잡혀 몸이 터져 버리는 켈베로스.
"대단하군."
"우리 편이라서 마음이 놓이옵니다."
"편안함다."
"누구 팝콘 있는 사람?"
"호에!"
"오! 보급 사령관님 감사! …혹시 콜라도?"
"먹을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학살, 대학살.
그래서 불쌍한 대형 켈베로스.
기간트는 전장의 폭군이었다.
무자비했다.
기계처럼 살육했다.
아참, 원래 기계지?
상성도 그렇고, 체급도 그렇고.
애초에 상대가 될 리가?
기간트는 85층 거대 괴수.
이놈들은 79층에 켈베로스 무리.
콰직!
콰콰콰콰콱!
거의 끝나가는 공략.
겨우 3분 정도 지났나?
압도적이었다.
주혁이 원하는 그런 공략이었다.
'맘에 들어.'
하루 4번의 탑 입장.
이왕 온 김에 82층까지.
레벨 차로 인한 S+++ 등급 공략 판정.
82층부터 배지를 받을 수 있으니까.
* * *
675번 지구의 관리자.
지금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검은 탑을 관리하는 그들.
[어?]
[뭐야? 내가 어?라고 말하지 말랬지? 그게 얼마나....]
[할 수밖에 없다고. 어! 어!]
[…무슨 일인데?]
[시스템상에서 79층 임무가 발생했어.]
뭐?
[누군가 탑에 입장했다는 거야?]
[맞아.]
[…띄워 봐.]
파팟!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관리자들은 기절초풍했다.
[미, 미친!]
[내, 내가 보고 있는 거… 맞아?]
[여, 영상이 잘못됐나? 아닌데?]
675번 지구의 검은 탑은 하나.
거길 공략할 수 있는 플레이어도 한 명.
국적을 취득한 1,001번 지구의 소환사.
그렇다면 소환사들의 전투 방식은?
뻔하지.
피소환인들이 소환사를 대신해 싸우겠지.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홀로그램 영상 속 모습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경악스러웠다.
[마, 마그누스 기간트가 왜 저기서?]
85층의 거대 괴수가 79층에 나타났다고?
게다가 탑 몬스터, 아군이나 마찬가지인 켈베로스를 공격, 아니 학살하고 있었다.
[....]
[....]
[....]
하도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고, 공략 끝났어.]
[나도 보고 있다고.]
켈베로스가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놈은 아니지만....
3분.
고작 3분이었다.
80마리 대형종 켈베로스가 으깨지기까지 걸린 시간.
소환사는 뭘 하고 있을까?
와그작, 와그작,
팝콘을 씹어먹는 중.
[하하, 하하하, 하....]
실소가 흘러나왔다.
뭐, 이런 공략이 다 있어?
[대체 1,001번 지구는 어떤 곳이지? 어떻게 저런 놈을....]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193화
베를린에 솟아오른 유일무이한 검은 탑.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들도 경계는 하고 있었다.
1,001번 지구의 소환사.
그놈이 반드시 검은 탑을 공략하려고 나타날 것이다.
어떻게든 공략을 막아야 한다.
놈이 방심할 거라 예상하고 작전을 세웠다.
검은 탑으로 입장하기 위해 백색 탑에서 나올 것을 가정해서 말이다.
운석 소환 이후이기에 베를린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때를 노린다면?
그래서 놈이 처음 나타난 장소, 운석이 소환된 그곳에 몬스터를 풀었다.
빈틈없이 쫙 깔았다.
나타나면 즉시 공격이 가능하게끔.
멋모르고 혼자 밖에 나왔다가 스치면 사망이다.
제아무리 밖에서 힘을 발현할 수 있으면 뭘 해?
탑 입장 스킬을 외칠 겨를도 없이 푹! 찍! 하면 끝일 텐데.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저 소환사 놈은 언제 나와서 탑에 입장했을까?
79층 탑 공략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대 괴수 구간의 마그누스 기간트라니.
저것도 소환 능력의 일부인가?
기간트가 피소환인일 리가 없는데.
영혼도 없는 기계가 무슨.
탑이 새로 생성되어서 오류가 생겼나.
85층에 있어야 할 몬스터가 왜 79층에 나타난 건가.
게다가 같은 편을 학살하기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확인해 봐. 베를린 검은 탑 85층에 마그누스 기간트가 있는지.]
[존재하고 있어.]
[조종사는?]
[없어.]
[…없다니?]
[로그 기록을 봤더니 기간트가 교체됐네. 그것도 최근에.]
[뭐?]
교체?
[85층 기간트는 전에 탑의 의지에 의해 이미 한번 교체된 거잖아. 자동형 에고 기간트에서 탑승형으로.]
[또 바뀌었다니까. 다시 자동형이야.]
탑 몬스터 교체.
물론 이뤄질 수도 있다.
탑의 의지에 따라, 혹은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그런데 한 번 교체된 것이 또?
이건 흔한 상황이 아니다.
가장 신빙성 있는 추측.
탑승형은 조종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조종사에게 무슨 일이....
바로 그 순간!
소환사 플레이어 일행 중 눈에 띄는 한 존재.
[자, 잠깐. 저기 저 골렘, 낯이 익어. 어디서 봤더라? ]
[…어?]
[야! 어? 하지 말랬잖아.]
[아, 아니, 저 골렘, 마도 공학자 엘인데?]
[무, 무슨?]
마도 공학자 엘.
관리자들도 안다.
85층 탑승형 마그누스의 기간트의 조종사.
멍청한 기간트의 에고 지능을 보완하고자, 발탁된 재활용 영혼.
원래는 피소환인이었다.
하지만 소환사를 잃고 영혼에 심각한 타격을 입어 재생 불능이 된 그녀를 조종사로 앉혔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소환사 옆에 있다고?
피소환인 자격을 회복했나?
[서, 설마?]
뭔지 알겠다.
탑 영혼 이탈.
해방이든, 귀순이든, 자격회복이든.
조건만 충족되면 세상, 아니 모든 평행우주의 검은 탑의 영혼이 이탈하는 시스템.
그 영혼이 복사본이든 진본이든 간에.
마도 공학자 엘의 영혼이 피소환인 자격을 회복하고, 탑에서 이탈해서, 저 소환사에게 선택받았다는 말인데.
[좋아, 엘의 영혼이 이탈했다고 쳐, 하지만 저 기간트는 뭐냐고?]
[엘이 제작한 건가? 마도 공학자니까.]
[마그누스 기간트가 그렇게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이야? 어림도 없어.]
마도 공학 기술의 집약체.
따라서 고작 공학자 한 명이 해낼 리는 만무하다.
[만들었다고 해도 저걸 무슨 방법으로 가지고 올 건데, 저게 주머니에 들어가는 물건이야?]
[근데 저기 있잖아.]
[그래, 왜 있냐고?]
[나도 잘....]
바로 그때!
[…어?]
[…어?]
[…어?]
금기어 어?를 연달아 내뱉는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들.
[미, 미친!]
[하하, 하하하....]
[맙소사!]
이제야 알았다.
저 거대 괴수 기간트가 어떤 방식으로 79층에 들어왔는지 말이다.
허접해 보이는 햄스터 수인족.
소환사 주위를 데굴데굴 구르면서 심심하면 땅이나 파던 털 뭉치 일꾼이.
공략이 끝나자마자 마그누스 기간트를 다시 수거하고 있었다.
아공간 스킬인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저 큰걸.
[저놈 뭐야?]
* * *
공략까지 총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백색 탑 1층 바깥으로 나와서 검은 탑을 구경하고 탑 진척도 확인, 탑으로 입장.
은폐 장막을 해제하고 피소환인들 소환.
그들과 대화하는 시간 약 1분.
라직스 기간트 꺼내는 데 약 1분.
일으켜 세우고 H빔 드는 데 약 1분.
임무지까지 이동하는 데 약 1분.
켈베로스 공략 약 3분.
그리고.
공략 끝나자마자.
[지옥의 문지기 켈베로스 처치 80/80]
[79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 : 마정석 2.9kg/ 상급 마정석 7kg]
기간트에게 지시를 내리는 엘.
- 기동 지시, 기동 방식 입력, 포복 실행.
동시에.
"호에에에엑!"
스스스스....
라직스가 빠르게 기간트를 아공간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소환수가 아니라서 반드시 챙겨가야 하는 기간트.
한 3번 정도 집어넣다 보니 라직스도 숙련됐고, 입구도 넓어졌고.
원래 임무 완료 메시지와 S+++ 등급 판정, 그리고 퇴장 메시지가 차례대로 나올 때, 그 중간중간의 간격이 꽤나 긴 편이다.
그런 이유로 예전 레인보우 바실리스크 가죽 채집 공략 때, 완료 메시지 뜨고 나서도, 가죽 벗기고, 집어넣고, 환호하고, 박수치고… 다 했다.
점점 사라지는 기간트.
아주 잘 들어간다.
중간에 한번 살짝 걸렸지만.
"호랏!"
쑤욱!
"오! 다 들어갔다."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곧 있으면 스슷, 쑥 할 수 있을검다."
이제 퇴장 준비.
은폐 장막 재사용 시간이 돌아왔나?
뭐, 써도 되고 안 써도 된다.
밖으로 나가는 게 뭐가 무서워?
혼자 나갈 때가 무섭지, 이렇게 한꺼번에 밖으로 함께 나가는데.
'S+++ 등급 공략 판정은 안 뜨네.'
레벨 차이 때문일 듯.
[독일 검은 탑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순간!
"크르르르륵!"
"캬악!"
"쿠오오오!"
"케륵!"
주혁 일행을 향해 물밀듯이 달려드는 몬스터들.
찌잉! 에너지 방어막 발동.
스우웅! 매켄지 배리어 보호막에.
촤르르르! 견달래의 부적이 흩날리면서.
쑤우우욱!
고방이 성큼성큼 나섰다.
육체의 거대화, 어깨에 둘러멘 몰살의 대지진 거대화 망치도 거대해졌고.
휘리릿!
망치를 하늘 위로 쭉 올렸다가 그대로 땅을 내려찍어 버리는 야만 전사 고방.
콰쾅!
산산이 부서지는 각종 몬스터.
쩌저저저저저저....
전방으로 갈라지는 땅.
망치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지진.
쿠구구구구궁!
땅이 무너진다.
무너진 땅속으로 몬스터가 함께 파묻힌다.
주혁에게 받은 몰살의 대지진 거대화 망치를 처음으로 사용해 본 고방, 더없이 만족한 듯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때요?
무기 좋죠?
바르딘 씨 안 들어도 되겠죠?
인간성검은 그만 놔 줍시다.
르스스알 성기사를 잡고 휘두를 순 없잖아요.
그밖에도 매켄지는 사방에 광역 화염 마법을, 소드마스트 코사크는 빠른 발을 이용해 전장을 휩쓸었고, 베 원사와 광마는 하늘에서 날아오는 비행 몬스터를 눈에 보이는 족족 떨어뜨렸다.
한편 라직스는?
데구르르, 태앵! 팽그르르르!
전장을 마음대로 활개 치고 돌아다니면서 진공청소기 능력으로 마정석을 흡수하고 가죽도 벗기고.
든든하다.
혼자일 땐 모르지만 함께라면 두려운 것이 없다.
그래도 탑 밖에서 몸 좀 풀었네.
이제 그만해도 되겠지?
"베를린 검은 탑 80층 입장."
스팟!
* * *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들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현재 풀어놓은 잡 몬스터로는 상대가 안 된다.
그저 준비운동 정도겠지.
지금처럼.
그럼 놈들을 어떻게 죽여?
물론 방법은 있다.
90층 이상의 강대한 진본 자유 계약 영혼.
그들이라면 해낼 수 있다.
아예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것도 불가능.
왜?
탑이 재생성됐기 때문에.
그래서 현실 세상에 있던 진본 자유 계약 영혼들은 다시 검은 탑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묶여 버렸다.
단 하나의 탑 안에.
[대비해야겠어. 내일 놈들이 또 올지도 몰라. 80층은 누가 지키고 있었지?]
[기만의 군주 그레모리.]
그레모리라.
[그레모리가 해줄까?]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마도 공학자 엘이 합류했다는 게 뭘 의미하나?
놈이 1,001번 지구의 검은 탑을 최소 85층까지 등반했다는 뜻.
큰일이다.
매우 불안하다.
이 상태라면 85층까진 고속도로다.
기간트를 가지고 다니는 놈인데 기간트를 못 잡을까?
[일단 80층 그레모리 소환해. 같이 머리를 맞대고....]
[어?]
[젠장! 어, 어, 어? 왜 또 어야?]
[지금 80층 입장했어.]
뭐?
하루 2번 탑 등반이라고?
[저런 미친 새끼들을 봤나!]
대체 몇 층까지 올라가려고.
* * *
[독일 검은 탑 80층에 입장합니다.]
80층은 보스가 존재한다.
여기도 그럴 것이다.
주혁의 세상에서 80층 몬스터는?
바로 귀순 용사.
몽마의 군주 디아마트.
"주인님? 왜 절 쳐다보세요?"
"그냥요."
"헤헤헤."
디아마트가 몸을 배배 꼬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저저저, 또 기술 쓴다."
"안 썼거든요?"
"사람 홀리게 만드는 웃음과 몸짓이 기술 아니면 뭐냐?"
"그, 그건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핑계 대지 마라. 요망한 것아."
"그럼 베 원사는요?"
"난 기술 쓰지 않았어."
"존재 자체가 기술인데?"
"그건 저도 인정함다."
또 싸운다, 또 싸워.
어쨌거나.
"디아마트 씨, 여기 80층도 자유 계약 영혼이겠죠?"
"네엠, 진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군주일지도."
대체 어떤 놈일까?
만약 디아마트와 비슷하다면 그와도 전향 귀순 계약이 가능할까?
하여튼 기간트는 꺼내지 않는 게 좋겠다.
연료 아깝다.
80층 환경은 평범했다.
친절하게도 돌판으로 길이 깔렸고, 그 길을 따라가면 보이는 작은 오두막.
띠링!
[80층 임무 : 마물의 군주 그레모리(진본)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역시 디아마트와 같은 마물의 군주.
그런데.
"진본이네."
"진본임까?"
"진본이군요."
"진본이라면."
"기간트 꺼낼까요?"
"아니, 그것보다는...."
순간!
삐걱.
오두막 문이 열리면서 나타나는 사람.
"어머? 드디어...."
젊은 여자였다.
저 사람이 그레모리?
매우 순진해 보이는 인상.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고 할까.
푸근하다.
전형적인 선한 얼굴.
저 여인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그려질 정도.
호감까지 생겨났다.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까지도.
그런 이유로 주혁은 깨달았다.
80층 군주들의 유형을.
'이런 식이었구나.'
물리력은 별거 없지만 대신 다른 쪽으로 특화된 몬스터.
현혹이나 매혹 같은 정신 공격 스킬을 기본적으로 장착한 군주.
디아마트도 그랬다.
사실 주혁은 현혹 정신 공격에 거의 면역 상태.
왜?
조금 전에도 그랬듯.
디아마트가 주혁의 호감을 얻기 위해 은근슬쩍 기술을 건 적이 몇 번인가?
그러다 들켜서 피소환인들에게 걸려서 욕먹고.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다.
몽마의 본능 아닌가?
이성에게 무의식적으로 기술이 나가는 거.
덕분에 웬만한 현혹 기술은 하도 많이 경험해서 면역.
물론 완전한 것이 아니라서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긴 하지만.
"절 해방시켜 주실 분이 이제야 찾아오셨네요."
"…해방?"
"네, 탑에서 해방이요."
그레모리는 처연한 미소로 말을 이어갔다.
"하아, 제가 탑 몬스터라니, 전 진짜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관리자들에게 속아서 이렇게 된 거예요."
쯧쯧.
"처음부터 잘못된 계약이었어요. 전 바보처럼 약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서명해 버렸으니까요. 그 결과 셀 수 없이 기나긴 세월 동안 탑에 묶여 있었습니다."
역시 계약은 신중해야 한다.
"제발 절 해방시켜 주세요."
불쌍해라.
애절한 표정의 그레모리.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
뭐, 도와줘야지.
알고 보면 그레모리도 피해자 아닌가?
당연히 도와주는 것이 인지상정.
"해방은 어떻게? 귀순이라도 하실래요?"
"…귀순요?"
"그래요. 저한테 오세요."
"으음."
잠시 고민하는 그레모리.
"그래요. 귀순할게요. 제가 플레이어님에게 가면 되는 건가요?"
그레모리가 주혁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왔다.
"제 손을 잡아 주세요. 저와 함께...."
그런데 바로 그때!
"지랄을 떨어라, 입벌구 같은 놈이."
"…뭐?"
고방 뒤쪽에 숨어 있던 디아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그레모리.
"아! 으음, …디아마트. 네년이 왜 여기에?"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
디아마트가 조소했다.
"소환사님, 쟤 믿지 마세요. 입만 열면 구라치는 새끼니까."
그런가?
"그리고 사실 쟤 여자도 아니에요."
으잉?
"남자예요. 덜렁덜렁."
"...."
이건 예상 못 했다.
"전 알고 있었슴다. 저 승모근 보십쇼. 저게 여자 승모근임까?"
그러네.
"기만의 요괴로구나. 저런 것들은 귀순을 받아 줄 필요가 없소."
"맞습니다. 저놈에 비하면 디아마트는 선녀입니다."
견달래도.
"소녀, 선경(仙鏡)으로 저 요마의 본체를 드러내 보이겠나이다."
순간!
화아아아악!
빛을 발하는 청동거울.
동시에 드러나는 그레모리의 진면목.
순진한 얼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주걱턱에, 쭉 찢어진 눈.
얇고 붉은 입술에서 날름거리는 긴 혀.
"거짓말 맞사옵니다. 내면이 썩어 문드러진 교활한 요마이옵니다."
헐!
징그러워라.
당황해하는 그레모리.
"아, 아니에요.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플레이어님께서 저 몽마 년에게 속고 있는 거예요. 전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나 가차 없는 견달래.
"거짓이옵니다."
디아마트도.
"구라예요."
베 원사도.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기만전술입니다."
그런가?
"어, 억울해요. 살려 주세요. 제발… 아아아, 제발, 저, 절 믿어 주...."
뭐, 그럼.
"지금 당장 전향해서 귀순하세요."
"…네?"
"전향하면 우리 편 되는 거죠. 능력치는 대폭 하락하겠지만."
얼굴이 환해진 그레모리.
"할게요. 전향! 플레이어님에게 귀순할게요. 귀순! 됐죠?"
하지만 조용한 시스템 메시지.
디아마트 때는 이랬는데.
'80층 보스 진본 디아마트가 자신에게 허락된 자유의지를 근거로 플레이어에게 귀순을 요청해 왔습니다.'
이렇게 메시지가 떴다.
하지만 그레모리의 귀순 요청에는 묵묵부답.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그레모리 씨? 진심을 담아서,"
"아, 알았어요. 귀순하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조용.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거짓말하지 마시고."
"네네, 저 그레모리는 플레이어님에게 진실하게 맹세합니다. 귀순을 원합니다. 제발 귀순을 받아 주세요."
여전히 조용.
대단하다. 대단해.
다 거짓말이다.
디아마트가 픽! 하며 비웃었다.
"보셨죠? 숨 쉬듯이 구라치는 거, 저거 삶 자체가 거짓이에요. 답이 없는 놈이라니까요."
얼굴이 일그러지는 그레모리.
촤르르릇!
등 뒤에서 솟아난 날개, 귀밑까지 찢어지는 입, 돋아나는 날카로운 이빨, 동시에 입에서 삐져 나온 시뻘건 혀.
"이런 썅! 이렇게 된 이상 정정당당히 싸워 줄게. 당장 여기서 다 죽여 버리겠다. 덤벼! 새끼들아!"
츠핏!
날아서 도망치는 그레모리.
와!
도망치는 순간까지 구라야?
"…베 원사님?"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철컥!
마총 장전.
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
하얗게 달아오르는 총신.
엄청난 후폭풍과 함께.
추울렁!
펑!
도망가던 그레모리의 육신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빠쮸쮸쮸쮸쮸쮸쮸쮸쮹!!!
아광속탄의 발사음은 나중에.
[마물의 군주 그레모리(진본) 처치 1/1]
[80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 : 마정석 80kg/ 그레모리의 혀.]
'…으음.'
혀를 왜 줘?
기분 나쁘게.
방구석 연금술사 마리에게 갖다 줘야지.
띠링!
[마물의 군주 기만의 그레모리 진본이 소멸했습니다.]
[앞으로 독일 검은 탑 80층 보스 그레모리는 복사본으로 대체됩니다.]
[업적 : 최초로 마물의 군주 기만의 그레모리(진본)를 처치하셨습니다.]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앞으로 하루 5회 탑 입장이 가능합니다.]
'....'
에이!
입장 횟수 또 늘었네.
왜 자꾸만 이런 걸 줘?
이러다 10번 채우는 거 아니야?
195화
제랄드가 81층을 공략하고 난 뒤 이틀 후.
전 세계로 터져 나온 언론 보도.
<미국 제랄드 플레이어, 아메리카 검은 탑 81층 베헤모스 공략 성공.>
<공략법은 마총, 너튜브에 공략 영상 공개.>
<총이라니! 그게 가능한가? 탑 내부 화약 반응은 여전히 막혀 있어.>
<화약이 아닌 마력의 힘으로 발사되는 아이템으로 추정.>
<베헤모스를 내부에서 터뜨려 버리는 마총 특수 탄환의 위엄.>
<각성 관리청, 최대 85층까지 마총으로 공략이 가능하다.>
<성검 대여와 비슷한 방식. 각국 최고 플레이어가 대상.>
<마총은 무료 대여, 탄환은 구매, 제작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드디어 거대 괴수 구간 공략 방법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언론 기사뿐만 아니라 실제 공략 영상이 너튜브에 올려졌다.
플레이어 제랄드가 마치 BJ 스트리머처럼 코멘트와 함께 공략을 진행하는 영상.
1번 탑, 첫 공략 때 찍은 건 아니었다.
처음엔 너무 어렵게 잡았다.
대신 두 번째, 아메리카 2번 탑 공략 영상으로.
- 저게 베헤모스야. 지금부터 저놈을 잡을 건데… 이건 마총, 이 뾰족한 건 송곳 지연 탄환, 총알이 꽤 크지?
철컥!
마총을 장전하는 제랄드.
- 이제 잡아 볼게.
조준 시작.
- 못 맞춘다고 욕하지 마. 마력 주입할 때 진동이 장난이 아니거든.
파죽!
- 지저스! 빗나갔네. 다시.
파죽!
또 실패.
2발 빗나가자.
- 꾸에에엑!
베헤모스가 제랄드를 향해 무섭게 달려왔다.
쿵쿵쿵쿵!
- 어그로 끌렸다. 이번엔 맞춰야 하는데.
파죽!
푹!
- 오! 명중! 송곳이라서 일단 명중만 하면 베헤모스 가죽은 쉽게 파고들어.
스파팟!
블링크로 거리를 벌리는 마검사 특성 제랄드.
- 왜 베헤모스가 멀쩡하냐고? 지금은 바늘에 찔린 정도일걸? 한 5초만 기다리면....
퍼억!
베헤모스의 몸 일부가 터져 나갔다.
- 봤지? 지연 폭발, 벙커버스터 같은 거야. 겉에서 터지는 게 아니라, 외피를 파고 들어가서 안에서 폭발하는.
그러나 한 방으론 어림도 없었다.
쿵쿵쿵쿵!
분노하며 달려드는 베헤모스.
스파파팟! 파파팟!
그래도 제랄드는 열심히 거리를 벌려가며.
파죽!
마총을 발사했다.
- 베헤모스 공략하려면 잘 알아두라고, 중요한 건 기동력이야. 스킬이든, 아이템이든, 기동력부터 챙기고 들어와야 해.
푹!
또 적중하는 송곳 지연 탄환.
- 밖에서 미리 연습해 보는 것도 좋아. 마력 주입 진동을 제어하는 연습.
상처를 입었음에도 베헤모스는 커다란 보폭으로 악착같이 제랄드를 쫓아왔다.
쿵쿵쿵쿵!
상당히 빠르다.
방심하면 따라잡힐 정도.
- 왜 기동력을 말했는지 알겠지? 총 쏘는 것보다 도망치는 게 더 중요해.
파파파팟!
도망치고, 멀어졌다 싶으면, 파죽!
또 반대편으로 도망치다가 한 발, 파죽!
퍼억!
명중하기도 하고.
쌩!
빗나가기도 하고.
그렇게 81층 전체를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닌 후에야 비로소.
- 꾸어어억!
쿵!
베헤모스가 쓰러졌다.
50분 만에 공략 성공.
- 하아, 됐다.
제랄드의 거친 숨소리.
- 그리 어렵지는 않아. 하지만 명심해. 중요한 건 기동력, 그리고 명중률, 이 두 개만 챙기면 마총과 송곳 지연 폭발 탄환이 알아서 잡아 줄 거야.
그리고 퇴장하기 전에 한마디.
- 한 10발 정도 맞히면 되지만, 보다시피 정말 어려워. 그러니까 탄환을 넉넉하게 사라고, 20발로도 모자랄 수 있어.
더불어.
- 안 되겠다 싶으면 무조건 공략 포기해. 언제든지 재도전하면 되니까.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잖아.
이로써 제랄드가 올린 영상은 끝.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세상이 조금 더 안전해졌다.
81층대를 뚫고 탑 붕괴 시한을 더 많이, 오래도록 중첩시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세계 각국 정부와 국가 육성 플레이어들도 제랄드의 영상을 토대로 공략 준비에 나섰다.
또한 그가 영상에서 언급한 기동력.
이동 스킬 옵션이 붙은 아이템 가격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런 특성 스킬을 습득한 플레이어들의 주가도 올라갔고.
각성 관리청에도 마총 예약이 빗발쳤다.
당장 공략은 어려울지라도 마총의 진동과 발사 시 반동이 얼마만큼 되는지 직접 몸으로 겪어 봐야 하니까.
주혁도 백색 탑 17층에서 영상을 접했다.
마총이 효과가 있어서 다행,
다만 한 마리를 잡는 데 탄환 소모가 너무 많다.
아무리 총알 장사라고 해도.
"진동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줄 방법 없나? 마총 개조는 안 되는 거죠?"
그러자 마도 공학자 엘이.
"마총의 태생적 한계입니다. 지금으로선 저게 최선입니다."
어쩔 수 없단다.
"사실 베 원사가 소유한 마도 공학 궁극의 마총도 진동과 반동이 엄청납니다. 쏠 때마다 베 원사 몸이 출렁거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맞다.
그래도 잘만 쏘긴 하지만.
뭐, 베 원사야 클래스가 마총사.
한편 코사크는 기분이 좋은 듯.
히죽 웃으며 주혁에게 말했다.
"제랄드 플레이어, 아주 훌륭함다. 살려 준 보람이 있슴다. 탄환 넉넉하게 사라고 직접 말도 해주고, 얼마나 좋슴까? 장사 잘될 겁니다. 성검보다 더 쏠쏠할 검다."
이 양반은 돈 귀신이 들었나.
"그리고 영상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슴다."
"무슨 아이디어?"
"기동력 말임다. 우리가 해결해 주면 안 되겠슴까?"
"어떻게요?"
"몸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비약이나 포션을 만들어 총알과 함께 세트로 파는 검다."
"...."
또 뭘 팔아?
돈 귀신 든 거 맞네.
"봉 소환사님께서 직접 마리에게 물어보십쇼. 제가 말하면 욕부터 먼저 날아옴다."
솔직히 좋은 생각이긴 하다.
약 팔아서 돈을 벌려는 목적보다 플레이어들의 안전한 공략을 위해.
"알았어요. 제가 부탁해볼게요."
"예압!"
싱글벙글 웃음이 그치지 않는 코사크.
"돈이 그렇게 좋아요?"
"돈 들어갈 때 많슴다. 당장 마검 베이스 제작하는 데도 어마어마하게 들어감다. 그거 다 어디서 조달할 검까?"
하긴.
60m 아다만트 초대형 검 제작인데.
재료비는 둘째 쳐도 인건비가 얼마나 많이 들까?
그런데 만들 수 있을까?
만들어 주겠지?
만들어야 한다.
시간이야 넉넉하다.
만들기 전엔 상층 등반을 안 하면 그만 아닌가.
어쨌거나.
"참! 코사크 씨!"
"넴?"
"북한에 가서 김 위원장 만나고 와줄래요? 평양 탑에 데려나 줄 테니까."
"알겠슴다. 시키실 일은?"
"핵탄두 몇 개만 달라고… 전처럼 단추만 누르면 터질 수 있게 개조해서."
"그거야 말만 하면 되지만, 그런데 어디에 쓰시려고 하심까?"
"글쎄요. 675번 지구 검은 탑에서 쓸 건데, …드래곤 나오면 써볼까요?"
하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코사크.
"드래곤에겐 안 통할 검다. 걔들 똑똑함다. 처음부터 막힘다."
그럴지도.
핵인 줄 알아채고 바짝 붙어 버리면 방법이 없다.
그럼 뭐.
"아무 데나 터뜨려 보죠. 최소한 깜짝 놀라게는 해 줄 수 있을 거니까."
그리하여 검은 탑에 입장해서 퇴장의 가락지를 이용해 평양 공장으로 코사크를 데려다주고 난 후.
주혁은 마리를 만나러 갔다.
그녀가 사는 집의 문을 노크해서.
똑똑!
"마리 씨?"
후다닥!
현관문 너머로 들리는 마리의 기척.
띠링!
대답은 태블릿 톡 앱으로.
<마리> : 네에♪♪♪
삐걱, 문을 반쯤 열고 난 뒤.
675번 80층에서 받은 그레모리의 혀를 문틈으로 슬쩍 넣어 주면서.
"마물의 군주 그레모리의 혀라네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으면 쓰세요."
<마리> : 어머나! 너무 좋아요. 마검 완성도가 점점 올라갈 거예요. 소환사님 최고♥♬♪
"하하하, 뭘요. 참! 물어볼 것이 있는데."
<마리> : 얼마든지요.
"플레이어의 기동성을 높여 줄 수 있는 약 같은 거 없을까요?"
<마리> : 있어요! 최상급 민첩의 비약, 순간속도 폭발의 포션요.
"제작할 수 있을까요? 마총 대여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나눠줄 거라서."
<마리> : 알았어요♡♬♡♪ 만들게요.
"하하하. 매번 감사해요. 그리고 원하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마리> : 그래서 말인데요.
"네?"
<마리> : 전 청장에게 마검 베이스 제작을 의뢰하셨다고 하셨죠.
"그래요, 했죠."
<마리> : 제작팀 회의 결과 재료가 변경됐어요.
"어떤?"
<마리> : 아다만트 대신 기간트 몸체 금속으로, 주물 작업할 때 상급 마정석도 같이 녹여 줘야 하고.
"그 정도야 뭐,"
기간트 금속이야 2대만 해체하면 되니까.
"상마는 얼마나요?"
<마리> : 상마는 최소 200톤, 그리고 인챈트 작업할 때도 최상급 마정석 30kg 정도 필요해요.
"...."
미치겠네.
상마 200톤에 최마 30kg?
마검 제작하려다가 집안 살림 거덜 나겠다.
괜히 만든다고 했나?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우리 마리 씨는 아무런 걱정하지 마시고 연구에만 전념하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마리> : 넹♪♪♬
아이고.
상마 더 열심히 캐야겠네.
마검 베이스 제작에 공급하려면.
열심히 탑 등반을 해야 한다.
하루 5회 탑 입장이라서 다행.
이러라고 업적 보상을 줬나?
아참!
특전도 확인해야지.
누적 배지 150개인데.
[플래티넘 배지 150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이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좋은 거 나왔다.
막스 크루거에게 받은 유산 상속으로 10장 넘게 가지고 있지만… 다다익선이잖아.
* * *
코사크는 평양 마력 봉쇄 스크롤 인쇄 공장과 비만 탈출의 팔찌 자동화 공장에 먼저 들렀다.
시범 생산에 들어간 팔찌.
미리 제작한 본체를 엘이 만든 마도 공학 인챈트 자동 새김 장치에 넣으면, 알아서 문양이 새겨져 완성품이 하나씩 툭툭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자동으로 만든 팔찌는 다시 검수 장치에 넣어서 불량품이 있는지 체크하고, 다 통과되면 포장 공정.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다.
아니, 필요하지 않아도 사람을 많이 썼다.
수요가 얼만데?
3개월마다 교체도 해줘야 하고.
비만 탈출 팔찌 하나만 해도 북한 전체가 먹고살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경제력이 올라오면 천천히 통일로 나아가는 거지.
그렇게 시찰을 끝내고 난 뒤.
코사크는 평양 주석궁으로 갔다.
"어서 오시라요. 고사극 동지!"
"김 위원장 동무, 잘 지냈디?"
"일 없슴메다. 위대하신 최고 플레이어 동지의 영도 아래, 우리 인민들, 배불리 잘 지내고 있디요."
"좋아! 다른 게 아니라...."
김인중에게 자신의 용건을 설명하는 코사크.
"…핵탄두 말임네까?"
"기래, 예전처럼 기폭장치까지 장착해서."
"며, 몇 개나?"
"최대한 많이! 싹 긁어 오라우."
"어어."
잠시 주저하는 김인중.
"그거이, 어렵지는 않디만, …혹시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입메까?"
"기카면 내 독단적인 판단이갔서? 그분의 명령이야."
"어음,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슴메까?"
"물어보라우."
"핵을 어디에 쓰실 건지?"
코사크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고조 반동분자, 검은 탑 제국주의 침략자, 탑 몬스터 승냥이 간나 새끼들에게 핵 불맛을 보여 주려고 하는 거디."
알았다는 듯 김인중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갔슴메다. 즉시 준비하갔슴메다."
"좋아. 든든하구만 기래."
"언제든 말씀만 하시라요! 민족의 철천지원수, 탑 몬스터들에게 공화국의 무자비한 징벌을! 주혁 만세!"
"주혁 만세!"
얼굴을 마주 보며 만세를 외치는 두 사람.
"…기런데 탑 안에서 핵이 터지긴 함메까? 세계 공지로 핵분열이 금지되었다고 한 것 같아서리."
"다 방법이 있디. 걱정 말라우."
어디 검은 탑이 이 세상에만 있나?
* * *
다시 시작된 1,001번 지구 검은 탑 공략.
아니, 1,001번이라 부르지 말아야겠다.
번호는 무슨!
그냥 우리 지구지.
주혁은 84층과 85층을 반복해서 공략했다.
84층에선 상마, 최마를 캐고.
콱콱콱콱!
"호에에엑!"
85층에선 기간트 업어오고.
"호아아앗!"
우리 차원대머슴.
열일 하는 라직스.
하루 5번 탑 입장이라고 해도 기간트 5대를 업어올 수 있는 건 아니다.
넓고도 넓은 라직스의 아공간 배낭이지만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기간트의 대수는 한 대.
한 대를 넣은 상태에서 또 한 개체의 기간트를 넣으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라직스를 소환 해제해서 백색 탑에 기간트 세워 두고 난 다음, 3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들어가 업어와야 한다.
그래서 하루에 최대로 가져올 수 있는 대수는 2대, 무리하면 3대.
뭐, 그게 어딘가?
기간트가 복사되는 85층.
정신없이 업어왔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
관리자들은 뭐 하지?
이걸 이렇게 내버려 둬?
핵을 터뜨렸을 때는 즉각 반응했으면서.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건가?'
어느덧 일주일째 되는 시점.
오늘도 기간트를 업어가기 위해 85층에 입장한 주혁과 일행.
마력 EMP 탄을 터뜨리자.
파바밧!
정지하는 기간트.
찌이잉! 소드마스터 코사크와 광마가 강기를 발현해서 장갑판을 자르고.
엘이 기간트 마력 회로를 조작했는데.
"…음?"
고개를 갸웃하는 엘.
"왜 그래요?"
"…기간트 중앙 처리 장치에서 처음 보는 회로도를 발견했습니다."
"무슨?"
"살펴보니 자폭 회로도 같습니다."
자폭?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엘은 마력 회로도를 손으로 더듬어가면서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 후에.
"자폭 회로 맞습니다. 공략 시작하고 1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폭발하게끔 만들어져 있습니다."
관리자들이 손을 썼구나.
그거 모르고 업어갔다간 큰일 날 뻔.
이런 교활한 새끼들.
공지도 없이 잠수함 패치를?
"자폭 회로만 제거할 순 없나요?"
파란선, 빨간선 자르는 식으로.
영화에 많이 나오는 클리셰 같은 거 말이다.
"안 됩니다. 제거하려고 들면 즉시 터질 겁니다.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에이.
아깝네.
그런데 좋은 점도 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기간트를 공략할 때.
사실 마총 대여를 통한 85층 기간트 공략에는 아직 해결 못 한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5분간 정지시키는 건 가능하지만 차후에 어떻게 처리할지 하는 것, 5분이 지나면 다시 작동하니까.
정지했을 때 공략해야 하는데, 플레이어 중 기간트 장갑판을 자를 능력을 갖춘 이들이 있을까?
광마와 코사크가 힘을 합쳐야 겨우 자를 수 있는 금속 장갑판을?
"그럼 1시간만 기다리면 자동으로 임무가 완료되는 건가요?"
"그건 저도 잘...."
실험해보자.
기간트가 마력 EMP 탄의 효과에서 벗어나 움직이면 다시 EMP 탄을 사용하고, 또 움직이면 또 사용하고.
5분간 정지니까 12발이면 1시간 동안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자.
[잠시 후 기간트가 자폭합니다. 안전지대로 대피해 주세요. 10, 9, 8....]
폭발 시점은 알려 주는구나.
안전지대로 피신하는 주혁과 일행.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콰쾅! 쿠구구구궁!
건물 폭발 해체 공법처럼 내부에서부터 허물어지는 기간트.
[거대 골렘 마그누스 기간트 1/1]
[85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 : 상급 마정석 85kg]
공략 성공.
순간!
데구르르, 태앵, 팽그르르.
"호라랏!"
라직스가 땅바닥에 흩어진 기간트 금속 파편들을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였다.
'아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잘하네.'
알뜰한 우리 머슴.
저 폐금속들은 마검 제작에 쓰라고 주면 되겠지.
아무튼 잘 됐다.
오히려 쉬워졌잖아.
EMP 탄을 써서 1시간 버티면 공략 완료니까.
하지만 이제 기간트 업어오기는 끝.
그래도 수확은 쏠쏠하다.
백색 탑에 돌아온 주혁과 피소환인들.
그동안 업어온 기간트 대수는?
"와!"
백색 탑 광장에 세워진 총 16대의 마그누스 기간트.
"멋지다, 멋져."
그리고 창고도에 가득 들어찬 상마와 최마.
하지만 반갑지 않은 일도 있다.
84층 상마 최마 광맥.
벌써 1번 탑이 고갈됐다.
라직스 채굴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탓도 있지만.
'곳간을 다 털어먹었네.'
이제 2번 탑 84층 광맥만 남았는데.
불안하다.
이것마저 다 털어먹으면 어떡하나.
결국 675번 지구 검은 탑 84층을 뚫어놓아야 한다.
상마랑 최마가 들어가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
'내일쯤 들어갔다 와야겠어.'
길만 뚫어놓자.
배지도 받아오고.
그때였다.
화아아아앗!
등대처럼 빛나는 랜드마크 꼭대기.
저게 빛난다는 건?
"왔다!!!"
바르딘이다.
성기사가 온다.
등급 돌파를 성공해서.
196화
중국은 여전히 국가 비상 상황이었다.
해방의 룬 목걸이로 인한 대혼란.
중국 전역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안과 인민해방군을 투입해서 진화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해방된 빌런 플레이어들은 예전처럼 무식하게 달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치고 빠지기 게릴라전이나 활이나 석궁을 이용한 원거리 저격,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표적 암살 등, 지극히 교묘하게 목걸이를 사용했다.
정부 고위 관료 및 공산당 정치 지도자들은 밖으로 외출하는 것조차 꺼렸다.
비밀 결사 조직이 되어 버린 중국 플레이어 협회, 레지스탕스 해방 플레이어의 주요 목표물이 바로 그들이었으니까.
중국 베이징.
철저하게 통제된 장소에서 열린 중국 정부 비상 대책 회의.
"산시성 당서기가 사망했습니다."
"사망 원인은?"
"집에서 피습당했습니다. 열린 창문으로 날아온 화살에 이마를 맞고...."
"용의자는 잡지 못했나?"
"이미 사라져서… 그러나 추적 중입니다."
추적이라.
잡을 수나 있을까?
레지스탕스 해방 플레이어들은 갈수록 은밀하게 움직였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
"놈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젠 추산할 수 없을 정도예요."
"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미치겠군."
어떡하지?
현재까지 죽어간 고위급 정치가와 관료가 몇 명인가?
자칫하면 정부가 전복될 수 있다.
방법이 있다면 탑 등반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밖에 없는데, 그게 가능하기나 해?
도무지 방법이 없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갈 지경.
아니, 딱 하나 있긴 하다.
바로 마력 봉쇄의 스크롤.
매우 안정적인 방법으로 해방 플레이어들을 무력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
한 1억 장 들여오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마력 봉쇄 스크롤이 평양에서 생산된다고 했지?"
"맞습니다."
"김 위원장에게 이야기해봤나?"
"이미 접촉해봤습니다만,"
"뭐라던가?"
"유통은 한국 기업과 각성 관리청에서 전담한다고, 자신들은 하청 생산이라며...."
"제기랄!"
빌어먹을 놈.
김인중은 이제 노선을 확실히 틀었다.
남한과 완전히 붙어먹었다.
"암살조를 보내 죽여버립시다."
"그래 봐야 소용없어요. 북한의 실세는 김인중이 아닙니다."
"아! 그렇죠."
현재 북한의 가장 강력한 실권자는 바로 인민무력부장 고사극.
"그럼 고사극을...."
"차라리 평양 공장 습격해서 인쇄 설비를 뜯어오면...."
"먼저 선제 타격부터."
하지만 반대 의견도 있었다.
"아아, 이러지 맙시다. 왜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합니까? 지금은 전쟁할 여력도 없어요. 그랬다간 해방 플레이어 놈들이 더 좋아할 겁니다."
맞는 말이다.
김인중과 고사극을 죽인다 한들, 없던 마력 봉쇄 스크롤이 생기나?
오히려 부작용만 생기지.
설비 강탈도 문제다.
이미 마력 봉쇄 스크롤을 몇 장 구해다가 연구해 봤다.
어떻게 따라 할 엄두도 못 낼 물건들.
특수한 종이와 잉크가 있어야 가능하다던데.
"대안이 있소?"
"한국 각성 관리청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게 최선입니다."
"흠."
"중국 비상 대책위 공동 성명으로 플레이어들에게 사과하고 성의를 보여봅시다. 그럼 각성 관리청에서도 스크롤 수출을 허용해 줄 겁니다."
"끄응!"
그것이 유일한 대안이긴 하지만....
문제는 무너질 것이 뻔한 대국으로서의 자존심.
이건 구걸이나 마찬가지다.
백기 투항이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한국 각성 관리청에, …화해하는 방법."
"…찬성입니다."
"뭐, 그 방법 말고는 없으니, 찬성요."
"저도 찬성입니다."
"찬성이오."
"찬성합니다."
의견 일치.
상무위원 6인이 찬성한 판에.
행동만 남았다.
"그럼 특사로 누가?"
"제가 가죠. 가서 전광일 청장을 만나보겠습니다."
"최소 1억 장은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효과가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1억 장이면 한 원화로 10조 되나?
뭐, 돈이 문제겠나?
자칫하면 망할 판인데.
* * *
인간성검 바르딘.
고방의 손에 잡혀 빛이여!!!를 외쳤던 그 바르딘이 돌아온다.
르스스알 등급으로.
주혁은 바르딘을 마중하기 위해 랜드마크 빌딩으로 달려갔다.
피소환인들도 함께.
긴장된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리 르스스알 성기사의 진면목은?
잠시 후.
바르딘이 랜드마크 로비에 도착했다.
"빛이여!!!"
한마디 외치고는.
저벅저벅.
"어휴, 눈을 못 뜨겠네."
"완전 빛덩어리야."
"서치라이트 수준이옵니다."
"전에도 말했잖슴까? 언데드 같은 건 줄줄 녹을 검다."
너무나 찬란한 광휘.
언데드에겐 악몽이겠지만 주혁에겐 너무나 따뜻했다.
심지어 몸이 치유되는 듯한 느낌.
"주군이시여! 신 바르딘, 무사히 등급을 돌파하고 돌아왔나이다."
<카탈로그 : 마침내 본분을 깨달은 불요불굴 철벽의 성기사.>
- 이름 : 루시우스 바르딘
- 등급 : LSSR(레전드 스폐셜 슈퍼 레어)
아아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찬란한 은빛 갑옷으로 중무장한 성기사.
그런데 도리깨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제 몸보다 훨씬 큰 방패를 차고 왔다.
그렇지.
성기사는 방패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바르딘 씨?"
"하명하십시오."
"이제 더는 인간성검 안 하실 거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야 본분을 깨달았습니다. 성검은 저의 역할이 아닙니다."
"오!!!"
더없이 반가운 소리.
"대신 제 역할은...."
철컥!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앞으로 들더니.
콱!
바닥에 내려찍는 바르딘.
"주군의 방패입니다."
그때였다.
쑤우우우욱!
이미 커다란 방패.
더 커진다.
계속 거대해진다.
엄청나게 거대해진다.
그 어떤 외부 공격도 막을 수 있을 만큼 크게.
하지만.
'…또 거대화라, 이거 불안한데.'
거대한 방패를 든 바르딘.
그리고 저쪽엔 한 손에 거대한 망치를 들고 있는 거대화 고방.
고방의 손 하나가 비어 있다.
거대한 무언가를 충분히 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거대 방패 같은.
"설마 고방 손에...."
"앞서 말했든. 전 주군의 방패입니다. 주군만 지킵니다."
…휴우.
다행이다.
인간성검처럼 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코사크의 생각은 다른 듯.
바르딘을 보며 피식 웃으며.
"제 버릇 개 못 줌다. 언젠간 고방 손에 들려질 검다."
무슨!
어림도 없는 소리.
'절대 용납 못 하지.'
들려지기만 해봐!
입주권 빼앗아 한 달 동안 영혼의 세상으로 유배 보낼 거니까.
고방과 바르딘 둘 다.
가슴이 아프겠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아무튼 바르딘의 등급 돌파.
그리하여 현재 주혁과 함께하는 르스스알 등급의 피소환인은 무려 10명.
백색 탑 17층에 큰 잔치가 열렸다.
모두가 달라진 바르딘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보냈다.
방패를 들고 왔지 않나?
소환사를 지킨다는 목적으로.
"칭찬함다. 방패 제대로 사용하십쇼."
"전사는 성기사가 자랑스럽다."
"참으로 기특하시오. 공자님을 잘 부탁하오."
"보아하니 광휘에 치유의 기운도 깃들어 있는 듯한데, 탑 등반할 때 반드시 소환사 곁에 붙어 있거라."
"바르딘 부관, 축하합니다."
"호엥!"
그의 달라진 능력도 알아봐야지.
일단 변화된 건 광휘의 밝기와 도리깨 대신 들고 있는 방패.
설마 그것밖에 없을라고.
탑에 입장해서 알아보자.
그렇다면 어디로?
마침 해야 할 일이 있다.
675번 지구 검은 탑 84층 뚫어놓기.
그렇게 해서 상마 최마 곳간 채우기.
'거기도 광맥이 있겠지?'
한번은 S+++ 등급 공략으로.
한번은 광맥 탐색.
"우리 바르딘 씨, 신고식 겸해서 675번 지구 검은 탑 84층 딱 2번만 돌고 옵시다."
"준비하겠사옵니다."
"넵!"
주혁과 일행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백색 탑 1층으로 왔다.
먼저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초월의 은폐 장막을 뒤집어쓰고 백색 탑을 퇴장했는데.
"…음?"
뭐지?
'아무것도 없네?'
전엔 발 디딜 틈 없이 몬스터들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없나?
그래도 모르니까 지정소환.
스팟! 스팟! 스팟....
"엥? 왜 이리 썰렁함까?"
"글쎄요, 나름 긴장하고 나왔는데, 이러면 은폐 장막도 필요없는 건가?"
견달래가 손사레를 치면서.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장막은 상시 착용하셔야 하옵니다."
"선녀 말이 맞소. 언제나 조심하셔야 하오."
탑에 들어가 보자.
피소환인들과 함께.
스팟!
[독일 검은 탑 84층에 입장합니다.]
이곳의 환경.
눈보라가 흩날리는 설원.
우리 지구 검은 탑 환경과 똑같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
뭐지?
저 앞에 서 있는 사람 하나.
그러자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서는 바르딘, 거대화로 몸을 키우는 고방, 우웅, 초승달 강기의 광마, 지잉! 주혁을 보호하는 매켄지의 배리어 보호막.
주혁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시감.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그랬다.
실제가 아닌 홀로그램.
달걀처럼 생긴 머리통,
머리카락도, 눈썹도 없는.
설마 또?
"관리자네."
"관리자임다."
"관리자군."
"관리자였어."
"675번 관리자인가?"
"관리자 놈이 왜?"
"눈깔아, 새꺄!"
"호앗!"
관리자들은 죄다 똑같이 생겼네.
천천히 열리는 놈의 입.
[봉주혁, 남의 세상에 와서 너무 설치고 다니는군. 이곳이 네 세상인가?]
엥?
웃기고 있다.
'지는? 지도 동네 사람이 아니면서'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혹시 또 등가교환 저울?"
[역시 한번 해봐서 잘 알고 있군. 말이 통해.]
"뭘 줄 건데요?"
[네가 원하는 걸 먼저 말해라.]
순간!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혀가 짧다. 좋은 말 할 때 존댓말 써라. 계속 반말 지껄이면 갈가리 찢어버린다."
오올!
이게 웬일?
코사크가 똑 부러지게 말하다니.
관리자도 가만 있지 않았다.
비웃는 듯한 미소로.
[주인은 가만히 있는데 개가 먼저 나서는구나. 교육 좀 제대로 시켜야겠어.]
'뭐?'
이런 건방진 놈이.
우리 코사크한테 개라고?
나 말리지 마.
이제부터 막 나간다.
르스스알 피소환인 10명 믿고....
"야!"
[음? 나보고 말하는 건가?]
"그래, 너 말이야, 싯팔! 누가 누굴 보고 개야? 꺼져. 등가교환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까."
[....]
"예의는 밥 말아 처먹었나?"
[…왜 갑자기.]
"꺼지라고!"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건가?]
대화는 개뿔.
"대화하고 싶으면 사과하고 존댓말."
[무슨?]
"존댓말 하라고, 아니면 안 들어."
난 반말할 테니.
[....]
"안 해?"
나 나간다?
[그렇게, …하죠.]
"사과는?"
[미안합니다.]
기선제압 성공.
어디 감히 상남자에게 덤벼?
[앞서 말했듯 등가교환 저울 거래 제안을 하려고 왔, …습니다.]
"싫은데? 나 그냥 탑 등반하게 내버려 두면 안 돼?"
등반 잘하고 있는데 왜 자꾸 괴롭히나?
[…스스로도 아시잖아요. 내버려 둘 상황이 아니라는 거, 어떻게 기간트를 가지고 탑 공략을… 게다가 하루 5번 공략은 너무 하지 않나요?]
"음."
[고난이 있어야 성장하는 법입니다. 당신에게 있어 탑 등반은 고난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저 놀이일 뿐이죠. 최소한 힘이 들어야지 성취감도 있을 것 아닙니까?]
개소리를 하고 있다.
"내 탑 등반 철학이 날로 먹는 건데?"
[네, 날로 먹게 해드리죠. 등가교환 저울 거래, 1,001번 지구에서 성공하셨잖아요. 여기서도 그렇게 하세요.]
'....'
마음이 흔들린다.
날로 먹는 공략, 날로 먹는 보상.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설정할 층수는 85층입니다. 원하는 걸 저울에 올리세요. 그에 따라 난이도가 결정될 겁니다.]
어떡할까?
일단 다들 집합.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수군수군.
"해볼까요?"
"뭘 고민하심까? 당장 수락하십쇼."
"특성 강화의 룬은 필수로 올리시고."
"드래곤 하트도."
"아예 강화의 엘릭서 한 병 달라고 할까요?"
"최마 1톤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 간 크네.
그러다 실패하면 어쩌려고?
"뭐 어떻슴까? 어차피 망한 세상의 탑임다. 안 되면 포기하면 그만임다."
듣고 보니 그러네.
이곳 탑이 붕괴한들 자신이 사는 지구엔 피해가 없다.
'막 올려봐?'
하지만 광마가.
"너무 많이 올리지는 맙시다. 공략할 수 있는 정도만."
견달래도.
"그러하옵니다. 이건 기회입니다. 저울에 올린 물건들을 가지고 갈 수 있어야 하옵니다."
그렇다면?
"특성 강화의 룬 가능?"
[저울에 올리겠습니다.]
"상급 마정석 3,000톤, 최상급 마정석 1톤도."
[올려드리죠.]
하나 더 간다.
"S+++ 등급 공략 성공하면 플래티넘 배지 획득 10배로."
20개 달라는 뜻.
[올렸습니다. 그 밖에 다른 건?]
너무 많이 불렀다.
하나 더 올리면 손댈 수조차 없을 터.
드래곤 하트야, 드래곤을 잡으면 되고.
엘릭서나 넥타르는 재료 모아서 만들면 되고.
참자.
욕심은 충분히 부렸다.
"없어."
[그래요. 훌륭한 거래였습니다.]
만족한 듯한 표정의 관리자.
'나도 만족해.'
반드시 성공해서 싹 다 챙겨갈게.
"미리 말하는데."
[네?]
"고마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스슷!
사라지는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자.
가는 순간까지도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래, 웃어라.
마지막에 누가 웃는지 보자.
그건 그렇고.
"저 이만하면 상남자 아닌가요?"
누가 봐도 그랬잖아.
그러니 칭찬 좀....
"최곰다. 극상남자임다."
"대인배 중에 대인배지."
"공자님은 군자의 표상이십니다."
"원래부터 강인하셨습니다."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모든 지휘관의 모범이십니다."
"지구 제국을 이끌어 가실 황제가 되실 겁니다. 빛이여!!!"
"전 차원을 둘러봐도 주인님 같은 남자는 없어요. 헤헤."
"호에!"
아유! 왜들 이래.
낯 뜨겁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처리합시다."
"예압!"
패치되기 전에.
우선 84층부터 공략.
베 원사의 아광속 탄으로.
찌이이이이잉!
빠주주주주죽!
추울렁!
펑!
터져 나가는 콜로서스 콘도르.
[세계 공지 : 검은 탑(독일)의 84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다음 반복 공략.
광맥이 존재하는지 알아보기.
당연히 있었다.
이제 캐오면 된다.
그리고.
"코사크 씨,"
"넴?"
"그거 준비됐겠죠?"
우리 지구에선 안 되지만 675번 지구에선 유효한 그것.
"준비됐을 검다."
"그럼 라직스 차원대머슴과 같이 북한 가서 가지고 옵시다."
"예압!"
이번엔 몇 개 정도 터뜨릴까?
한 5개 정도면 충분하려나?
상황 봐서 조절하면 되고.
'어우.'
갑자기 가슴이 쿵덕거리네.
기대된다.
검은 탑 85층에서 그게 터지면 관리자들은 기분이 어떨까?
197화
675번 지구 검은 탑 관리실.
[계약 체결했어.]
[후우, 시작됐구나. 그쪽에서 저울에 올린 건 뭐야?]
[특성 강화의 룬, 상급 마정석 3,000톤, 최상급 마정석 1톤, 그리고 플래티넘 배지 20개, 총 4가지.]
[…욕심에 눈이 멀었네. 저울추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모르고.]
[한번 성공해 봤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거지. 또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여겼을 거야.]
[멍청한 새끼.]
계약하기 전, 1,001번 지구에서 놈이 체결한 등가교환 저울 거래의 조건에 관해 알아봤다.
그때는 저울에 딱 하나 올렸단다.
바로 탑 영혼 해방.
물론 예속된 영혼이 탑에서 이탈하는 건 인과율을 비트는 엄청난 일이긴 하다.
그로 인해 헬 모드 난이도가 충분히 성립됐고.
하지만 이번에 놈은 너무 욕심을 부렸다.
무려 4가지의 보상을 저울에 올렸다.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고민이군.]
[원래 85층 몬스터는 마그누스 기간트지?]
[그래. 하지만 놈은 강화할 수는 없어.]
[맞아. 그게 최종 버전이니까.]
[기간트 빼고 임무를 설계해 보자고.]
탑 층 몬스터 강화의 룰.
없는 존재를 상상으로 꾸며서 배치하는 건 규칙에 어긋난다.
실존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베헤모스의 최종 진화 루트인 초거대 타이탄 베헤모스.
상상 속 몬스터가 아니다.
특정 차원에 진짜 존재하는 놈이다.
반면 마그누스 기간트는 제작품.
이보다 더 강한 기간트 골렘은 없다.
그래서 기존 임무는 그대로 두고.
[…이렇게 설계하면 어때?]
[흠, 글쎄, 우리 쪽으로 너무 기울었어. 이런 식이면 인과율 위배잖아.]
[괜찮아. 이대로 진행해.]
무리한 게 맞다.
마지막으로 추가한 조건이 컸다.
그걸 빼면 저울은 균형을 이루겠지만.
사실 평범하게 갈 수도 있었다.
85층을 공략 불가 층으로 설계해서 더는 탑을 등반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도만.
그러나 소환사는 선을 넘었다.
부하들 앞에서 자신을 모욕하고 망신을 줬다.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준다.
[소환사는 85층에서 죽겠군.]
[어서 빨리 봤으면 좋겠어. 놈이 죽어가는 모습을.]
[이렇게 되면 1,001번 지구 관리자들을 도와주는 건가.]
[그래, 손도 안 대고 코 풀어주는 격이지.]
[그건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뭐, 얄밉지만 어쩌겠어?]
* * *
주혁은 빠르게 움직였다.
시간 싸움이다.
만약 675번 관리자와 1,001번 관리자 사이에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중이라면, 등가교환 거래가 왜 실패했는지 저들도 알게 될 것이다.
그전에 핵 공략을 끝낸다.
패치하면 골치 아프니까.
코사크, 라직스와 함께 북한에 방문한 주혁.
영변 지하 핵기지 시설을 찾아가니, 시한 신관 기폭장치까지 장착된 중형 전술 핵탄두 10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우야, 10개는 너무 많지 않나? 언제 저걸 다 터뜨려요? 3개나 4개면 충분할 것 같은데."
우리 지구 등가교환 저울 거래 때도 2개만 터뜨렸다.
"나머지는 비상용임다. 넣어두면 언젠가 쓸데가 또 있겠지 않슴까."
하긴.
모자라는 것보다는 남는 게 낫지.
필요 없으면 탑에다 버리고 오면 되고.
"집어넣읍시다."
"호에."
스슷.
순식간에 라직스의 아공간으로 들어가는 핵탄두 10개.
그다음으로 방공호 보강 작업.
기존 납판과 철판,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든 방공호에, 마도공학자 엘이 충격 흡수 회로도를 장착했고, 견달래의 부적, 그리고 매켄지의 배리어 인챈트 마법진도 추가했다.
"이 정도면 됐겠죠?"
"아임다, 하나 남았슴다."
"뭐가?"
"핵이 터지는 장면도 찍어야 함다."
"맞다. 그걸 깜빡했네."
일반적인 공략도 아니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공략이니까.
'기념으로 남겨야지.'
그러자 매켄지가 냉큼 손을 들고 말했다.
"본 마법사가 플라이로 공중 촬영을 하겠습니다."
코사크가 기겁하는 표정으로.
"아이고, 매 영감님, 핵폭발 직접 찍으면 큰일 남다. 어쩌려고 그러심까?"
으잉? 코사크가 웬일이래.
매켄지 님 걱정을 해주는 건가?
"괜찮다. 한번 죽으면 어떤가? 운석도 맞아본 몸이다. 나중에 부활의 룬으로 되살아나면...."
"매 영감님이야 죽든 말든 무슨 상관임까? 근데 폭발 때문에 스마트폰 녹아 버리면 나중에 영상 확인하지 못함다."
그럴 줄 알았다.
이래야 코사크지.
"…자네는 방법이 있나?"
"외부에 카메라 렌즈를 거치해두고 방공호 안까지 선을 연결해서 노트북으로 실시간 저장하면 됨다."
"어어, 그, 그렇군."
"생각 좀 하고 사십쇼. 지구에 왔으면 지구 문명을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맨날 마법, 마법… 그러니 발전이 없는 검다."
"...."
그래서.
"이번 촬영은 코사크 씨가 알아서 해주세요."
"예압!"
활짝 웃는 코사크.
반면 시무룩한 매켄지.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결전의 날.
주혁은 모든 피소환인들과 함께 백색 탑 1층으로 갔다.
방구석 마리도 열외 없었다.
엘리베이터 한구석에서 벽을 보며 쪼그려 앉은 채로 같이 왔다.
핵 공략 파티 짜기.
선발 인원부터.
배달 기사 라직스, 기간트 운전기사 엘, 카메라 촬영기사 코사크, 성기사 바르딘, 잡일 담당 매켄지.
나머지는 후보 선수들.
이들은 백색 탑 1층에서 대기.
주혁은 먼저 초월의 은폐 장막을 뒤집어쓰고, 바깥으로 나가 선발선수들을 지정 소환했다.
그러고 난 뒤 탑으로 입장.
스팟!
[독일 검은 탑 85층에 입장합니다.]
드디어 왔다.
계약으로 난이도가 조정된 층.
순간!
[계약으로 인해 독일 검은 탑 85층의 난이도 단계가 익스트림 헬 모드로 변경될 예정입니다.]
"…엥?"
익스트림 헬?
저건 또 뭐야?
헬보다 더 어려운 건가?
그럼 곤란한데.
욕심을 너무 부린 듯.
[공략이 성공하면 독일 검은 탑 85층의 난이도가 다시 일반 모드로 하락합니다.]
[계약 조건을 확인하셨습니까?]
'으음.'
어떡하나.
하지 말까.
에라이!
왔으니까 하자.
헬이든, 익스트림 헬이든 그게 그거 아닌가?
임무 확인하고 나서 안 될 것 같으면 포기하면 되고, 혹은 리셋하거나.
'확인.'
[계약이 이행되었습니다.]
[독일 검은 탑 85층의 임무가 변경되었습니다.]
[임무 완료 시 특성 강화의 룬, 상급 마정석 3,000톤, 최상급 마정석 1톤, 플래티넘 배지 20개를 확정 보상합니다.]
듣기만 해도 황홀한 보상들.
'욕심 좀 부리면 어때?'
성공하면 되지.
먼저 임무 받기 전에.
"라직스 씨."
"호에?"
"그거 꺼내 주세요."
"호엥!"
스슷!
라직스가 주혁에게 건네준 것은 바로 폭죽.
여름철 해변에서 많이 가지고 노는 거.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치지지직!
심지가 타들어 가자.
슈우우웃!
펑! 펑! 펑! 펑....
폭죽이 터졌다.
형형색색의 불꽃으로 말이다.
여전히 적용되는 화약 폭발.
아직 패치하지 않았다.
'아름답네.'
불꽃도 그렇고, 앞으로 들어올 보상도 그렇고.
* * *
한편.
[소환사가 85층에 입장했어. 계약 확인도 했고.]
[그래?]
첫 단계는 성공.
[임무는? 아직 안 받았어?]
[현재 안전 구역에 있으니까, 곧 있으면 메시지 뜰 거야.]
[겁먹고 도망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보상이 눈에 아른거릴 텐데.]
무조건 임무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계획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때!
[어?]
[하아, …뭐, 그래. 어어, 또 왜 어야?]
[쟤들 폭죽 터뜨리는데?]
폭죽이라니.
[불꽃놀이 할 때 쓰는 거?]
[미리 공략 성공 축하라도 하려는 거 아냐?]
[낄낄낄, 가소로운 새끼들. 어디 임무 받고 나서도 계속 저러는지 보자.]
* * *
핵탄두가 유효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주혁은 손을 쭉 뻗어 앞으로 가리켰다.
"앞으로 전진."
"예압!"
임무 받으러 가자.
받고 나서 필요에 따라 고방도 부르고, 광마 님, 달래 공주, 베 원사, 디아마트, 마리도 부르고,
'핵탄두는 서너 발만 터뜨려도 충분할 거야.'
중형 전술 핵탄두라고 해도.
하나하나가 과거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보다 더 강력하다.
기간트가 어떤 식으로 강화됐는지 모르지만 핵폭발을 어떻게 이겨?
그리고 잠시 후.
띠링!
임무 메시지가 떴다.
[85층 임무 : 거대 골렘 마그누스 기간트/ 초거대 괴수 타이탄 베헤모스/ 초거대 뱀 메가 뮤턴트 아포피스/ 초거대 여왕 거미 데모닉 아라크로이드 각 1마리를 모두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제한 없음.]
…이게 뭐야?
"헐."
미친 건가?
[완료 조건 1 : 거대 골렘 마그누스 기간트 0/1]
[완료 조건 2 : 초거대 괴수 타이탄 베헤모스 0/1]
[완료 조건 3 : 초거대 뱀 메가 뮤턴트 아포피스 0/1]
[완료 조건 4 : 초거대 여왕 거미 데모닉 아라크로이드 0/1]
'....'
저걸 다 잡으라고?
초거대에, 타이탄, 뮤턴트, 데모닉, 듣기에도 심상치 않은 수식어가 붙은 괴수들을?
타이탄 베헤모스는 견식해 봤지만.
나머지 놈들은?
'어디… 옴마?'
굳이 찾아보지 않으려고 해도 된다.
고개만 돌려도 보인다.
쿠궁, 쿠궁, 쿠궁....
저 멀리, 거대한 무언가들이 꿈틀거리는 모습.
기괴하다.
너무나 커서 차마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뱀도 그렇고, 거미도 그렇고.
마그누스 기간트도 보였다.
제일 조그맣다.
마치 장난감처럼
'…포기할까?'
핵탄두를 설치하는 것도 문제.
하지만.
[중도 포기가 불가능합니다. 임무에 성공해야 퇴장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완료 시한이 왜 무제한인가 싶었는데.
함정이었다.
공략을 못 하면 여기서 죽으라는 뜻.
이건 생각도 못 했다.
"야, 이 개 같은 관리자 새끼들아!!!"
"이놈들!"
"감히 소환사님을 함정에… 참을 수 없습니다."
"저보다 야비한 놈들임다. 감탄했슴다."
"후에에에."
분노하는 피소환인들.
주혁도 그랬다.
"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플레이어가 탑을 등반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해?
그렇게 날 죽이고 싶었어?
뭐, 중도 포기 금지 콘텐츠야 한번 경험해 보긴 했지만.
잡을 수 있을까?
아니, 잡아야지.
무조건.
"우리가 핵탄두 몇 개 가져왔더라...."
"총 10개 임다."
"…충분하겠죠?"
"오히려 넘침다."
그렇지.
아무리 커봐야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생명체들.
중형 전술핵 10개가 터지면 전략핵과 맞먹는다.
그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어떻게 감당할 건데?
"그 정도면 본 마법사가 떨어뜨린 운석보다 파괴력이 더 강할 것이오."
안심된다.
드래곤도 소멸시킨 매켄지의 운석, 그보다 더 강력하다면?
'2개로는 턱없이 모자랄 뻔했어.'
10개를 가져와서 다행.
"다 꺼내죠."
"예압!"
이렇게 된 이상, 모조리 터뜨려 버린다.
"방공호 설치부터 하겠슴다."
작업 시작.
깊숙하게 땅을 팠다.
그리고 두꺼운 철판 문이 달린 방공호를 묻었다.
촬영도 생각하고 왔으니 카메라도 설치.
총 3개의 카메라.
마지막까지 촬영할 수 있도록 카메라에도 배리어 보호막을 씌우고, 유선으로 방공호 안에 있는 노트북과 연결.
기본 준비 완료.
* * *
[됐어. 임무 받았어.]
[좋았어! 영상 띄워.]
이제 놈들은 도망갈 수 없다.
생생하게 눈으로 보면서 즐기면 된다.
[흐흐흐.]
홀로그램 영상에서 보이는 놈의 표정.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절망해라!
눈물을 흘리며 빌어보라고.
그럼 혹시 알아?
목숨은 살려 줄지.
그런데?
[…으음, 쟤들 뭐 하는 거지?]
[땅 파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왜 땅을 파고 있냐고?]
[땅을 파서 밑으로 내려가면 다른 층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닐까?]
[설마....]
[저놈은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네. 여기저기에.]
[대체 무슨...?]
도무지 모르겠다.
스스로 들어갈 무덤을 만드는 건 아닐 테고.
* * *
방공호가 튼튼한지, 카메라는 잘 작동하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난 뒤.
"차원대머슴, 핵탄두 꺼내십쇼. 10개 설치하려면 서둘러야 함다."
"소신도 돕겠습니다."
"본 마법사도...."
"피소환인들을 더 소환해야 하지 않을까요?"
"…으음."
직접 설치는 너무 위험한데.
밟히면 그냥 사망이다.
안전하게 설치할 방법이, …가만!
"잠깐만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라직스 씨?"
"호에?"
"기간트 꺼내요."
"호엥!"
스스스스스슷!
아공간 배낭에서 빠져나오는 기간트.
핵탄두 운반은 기간트에게 맡기자.
그게 더 빠르고 확실하니까.
"호오! 이 방법이 있었군."
"주군의 영민함에, 이 바르딘, 감탄했습니다."
"아유, 우리 봉 소환사님,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셨대?"
하지만 가슴이 아프다.
눈물마저 핑 돌았다.
나의 첫 기간트.
그러나 지금은 자폭 테러 전사.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해하지 마.
새것들 업어왔다고 널 버리는 거 아니야.
여기저기 부서지고, 긁히고, 연료도 고작 한 시간 분량 남았다고 해서 그러는 거 절대 아니야.
내 맘 알지?
영혼이 없으니까 터질 때 아프지는 않겠지?
마도 공학자 엘의 지시에 따라 몸을 일으켜 핵탄두 10개를 두 손에 담은 기간트.
이제 이동.
자폭 테러 전사 기간트의 비장한 출정.
- 기동 지시, 기동 방식 입력, 전진.
쿵쿵쿵쿵쿵!
기간트가 전진한다.
중형 전술 핵탄두 10발을 든 소환사의 충직한 전사가, 85층 익스트림 헬 모드 공략을 완수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간다.
"…기간트야!"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미, 미안하다아아아!!!"
우리 1호기.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이제 방공호 안으로 들어가셔야 함다."
"하아."
주혁은 당당하게 걸어가는 기간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기억할게."
꼭.
"들어갑시다."
방공호 안으로 들어갔다.
피소환인들도 차례로.
마지막으로 엘이 끝까지 남아서.
도달 거리와 시간을 가늠한 후.
쿡!
시한 격발 장치 작동.
"60초 남았습니다."
엘도 입구 뚜껑을 덮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방공호.
"빛이여!!!"
화아아앗!
퍼져 나가는 따뜻한 광휘.
동시에.
쑤우우욱!
바르딘의 방패가 방공호 내부 전체를 덮었다.
"베리어, 배리어, 배리어...."
매켄지가 주혁과 피소환인들에게 보호막 주문을 중첩하고.
"알리아마리 지정 소환."
스팟!
소환되자마자 방어형 호문쿨루스를 불러낸 마리.
촤르르르르르.
방공호 안에 오밀조밀하게 퍼졌다.
스웅, 스웅, 스웅, 스웅, 스웅···….
실드 보호막을 실행한 마리의 호문이들.
완충재 역할로 방공호 촘촘하게 안을 채웠다.
그럼 이제.
"10초 남았습니다."
외부 카메라를 조작해서 줌으로 땡기자 노트북 화면으로 보이는 광경.
핵탄두를 손에 쥔 기간트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초거대 괴수 무리들.
기간트가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거대 괴수들과 마주했다.
그들에게 이렇게 하는 듯했다.
수줍게 핵탄두를 올린 손을 보여 주고는.
이거 받으세요.
뭐지? 먹는 거야?
네, 맛있을 거예요.
"3, 2, 1, …터집니다."
그때였다.
번쩍!
쿠쿵! 쿠쿠쿠쿠쿠쿠쿠쿠쿠쿠쿠쿠쿠....
사정없이 흔들리는 방공호.
폭발하는 장면이 보이면서, 핏! 꺼지는 노트북 화면.
그리고.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무시무시한 핵폭발의 충격파가 방공호 내부까지 전달됐다.
"윽!"
"큭!"
"으음."
"하...."
대폭발이었다.
태양의 중심온도에 근접하는 초고열 플라즈마가 85층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녹여 버렸다.
방공호 내부까지 열기가 전달되는 듯했다.
사실상 그걸로 끝이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팍!!!
뒤를 이어 덮쳐오는 강대한 충격파는 혹시라도 살아있을지 모르는 초거대 괴수들을 확인 사살하는 역할.
한꺼번에 터진 10개의 핵탄두.
피어오른 초대형 버섯구름.
결과는?
[거대 골렘 마그누스 기간트 1/1]
[초거대 괴수 타이탄 베헤모스 1/1]
[초거대 뱀 메가 뮤턴트 아포피스 1/1]
[초거대 여왕 거미 데모닉 아라크로이드 1/1]
[85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어우, 짜릿하네.
이러다 중독되겠어.
* * *
675번 지구의 관리자들.
모두가 말이 없었다.
[....]
[....]
[....]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경악, 당혹, 분노, 허무, 체념…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중.
[…놈이 폭죽을 터뜨린 이유가 있었군.]
실험 차원이었겠지.
화약이 터지나, 안 터지나 알아보기 위해서.
[1,001번 지구 관리자 새끼들은 알고 있었을까?]
[…다, 당연히! 거기서도 음, 저, 저렇게 공략했을 테니까.]
[이런 개새끼들이!]
저 소환사가 미웠다.
그러나 1,001번 새끼들은 더 미웠다.
[통신 연결해.]
* * *
1,001번 지구 관리자들.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할 일도 없다.
플레이어들이 탑을 등반하든 말든.
마총을 대여해서 거대 괴수 구간 공략하든 말든.
포기하면 얼마나 편한가.
적어도 90층대까진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보낼 생각.
그런데.
[디자이너, 675번 쪽에서 통신을 요청해 왔습니다.]
하아, 이 새끼들 진짜 귀찮게 하네.
이번엔 또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받아 주지 마.]
[네.]
왜 자꾸 연락하고 난리야?
19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