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TORREHANAM / Chapter 6 - 174-180

Chapter 6 - 174-180

174화

주혁은 피소환인들을 전부 소환 해제하고 백색 탑으로 돌아왔다.

하루 2번 S+++ 등급.

매우 만족스러운 공략이었다.

84층은 아광속탄 한 방, 85층은 마력 전자기 펄스 EMP로.

"역시 공략은 딸깍이야."

속이 시원하네.

얼마나 좋아?

압도적인, 그래서 위험 부담 하나도 없는, 뒷산 약수터를 산책 등반하는 느낌으로.

"정말 대단하죠? 마력 EMP라니."

옆에 있는 매켄지에게 소감을 물어보니.

"뭐, 별로… 마법에도 비슷한 주문이 있습니다."

시큰둥한 반응.

이 양반, 은근히 속이 좁다.

경쟁심도 대단하고.

"아, 그래요?"

"마력 EMP보다는 스펠 파워 바인딩 블록이죠."

"…스펠, 뭐요?"

주문 명칭이 왜 이리 길어?

"대상 마력의 흐름을 묶어서 봉쇄하는 마법 주문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스크롤에 저장해서 사용할 수도."

주섬주섬 로브 품속에서 돌돌 말린 종이 하나를 보여 주는 매켄지.

"아… 네네."

마법 스크롤.

좋은 거겠지.

쓸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엘은 아직 안 깨어나네.'

순간!

"보옹 소환사님!"

주혁이 백색 탑에 나타나자 헐레벌떡 뛰어오는 코사크.

"짧게 말하세요. 보옹이 아니라 봉!"

"예압! 봉봉 소환사님!"

"...."

봉봉은 무슨.

음료수 이름이야?

"2번 탑 85층도 공략 완료했슴까?"

"맞아요. S+++ 등급으로, 마력 EMP, 전자기 펄스라고 들어 보셨나 모르겠네."

"훌륭하심다. 공화국 인민무력부장 고사극으로서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슴다."

갑자기 인민무력부장은 무슨?

"제가 봉 소환사님께 결재를 맡아야 할 일이 있슴다."

"뭔데요?"

"공화국에 팔찌 양산 설비 및 라직스 물산 제조업 공장을 세우면 어떻겠슴까?"

북한에 공장이라.

"인건비도 싸고, 확실한 정경유착으로 온갖 혜택 다 받으며 최고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슴다."

"...."

정경유착이란 단어를 저렇게 뻔뻔하게 언급한다.

뭐, 당연하겠지.

지가 인민무력부장인 동시에 북한 최고의 권력자인데.

"정 대표는 의견은요?"

"적극적으로 찬성임다."

"김 위원장도?"

"공화국 린민들 쌀밥에 고깃국 먹이는 일임다. 반대 못함다."

"공장을 세우려면 어디에?"

"평양 검은 탑 주변 부지 어떻슴까? 붕괴할 일도 없고, 상징성도 충분하고."

"너무 넓지 않아요? 고작 팔찌 생산하는 공장만 지을 텐데."

정색하는 코사크.

"아임다. 팔찌는 시작일 뿐임다. 공장장 왔는데 놀리면 됨까? 갈아넣어야 함다. 어차피 골렘이라 과로사할 일도 없슴다."

와! 이 악덕 작업반장.

사실 맞는 말이다.

골렘이 과로사할 일이 있나.

"…알았어요. 추진해 보세요."

"충!"

한때는 암살자, 한때는 정치인, 이제는 사업가로.

변신의 귀재 코사크.

어떤 의미에선 라직스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다.

아무튼 엘은 괜찮나?

일단 함께 퇴장하고 소환 해제로 백색 탑에 입장도 한 상황.

그런데 아직도 움직이지 않으니....

다가가서 쿡쿡 찔러 보기도 하고 만질만질한 금속 이마에 손바닥을 슬쩍 대 보기도 하고.

순간!

끼릭!

돌아가는 엘의 머리.

"헛, 싯팔, 깜짝이야!"

"죄송합니다."

"아, 아뇨. 내가 더 미안하죠."

깜짝 놀랐다.

그래도 움직이니 다행.

"…몸은 괜찮아요?"

"아직 주요 기능 회복은 되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흠, EMP 자꾸 맞으면 골렘 의체에 무리가 갈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단순한 블랙아웃 현상일 뿐입니다."

블랙아웃이 왜 단순해?

주혁의 불안한 표정에 아무 일도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엘.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회복되니까요."

"그래도 자꾸 맞으면 그러니까 마력 전자기 펄스를 무력화하는 수단을 찾아보세요."

물총도 세게 맞으면 아프다.

"어차피 마력 EMP도 딱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가요?"

당분간 85층 반복 공략은 한 번밖에 못 하겠구나.

상관없다.

EMP 자꾸 맞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낫지.

"새로운 EMP를 제작하면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꼭 찾으세요."

기간트는 멈추게 하고 자신은 멀쩡하게 회피하는 방법.

잘 해낼 것이다.

르스스알 마도 공학자인데.

아무튼 오늘 일은 끝.

"집에 가셔서 푹 쉬세요. 오늘은 블랙아웃 겪어서 어질어질할 테니 천천히 회복하시고."

"전 골렘입니다. 휴식은 제게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러고는.

"작업장으로 가서 비만 탈출의 팔찌 양산화 방안을… 어?"

멈칫!

발걸음을 멈춘 엘.

"어음, 어...."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서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늘 무표정이던 엘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놀라움, 불신, 경악.

"호, 혹시 여기가 아직 검은 탑 85층입니까?"

"그럴 리가요."

"그런데 저것들이 왜 여기에?"

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들.

좀 전에 라직스가 작업장 앞에 가져다 둔 5개의 마력 코어 엔진.

잘못 봤나?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보인다.

블랙아웃 후유증으로 인한 착시현상?

아니다.

신경계통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엘.

혼란스럽다.

저 마력 코어 엔진들은 85층에서 반출될 수 없는, 반출되지 말아야 하는 물건들.

"아하! 저거 말씀하시는구나."

"마, 맞습니다. 대체...?"

"우리 라직스 일꾼이 가지고 온 겁니다."

"어, 어떻게요?"

직접 보여 주는 게 편하겠다.

주혁은 백색 탑 17층을 청소 중인 라직스를 불렀다.

"라직스 씨."

"호에!"

소환사의 부름에 빠르게 데굴데굴 굴러오는 우주대머슴.

"저거 아공간에 넣어 보세요."

"호에!"

스슷, 스슷, 스슷....

거대 골렘의 마력 코어 엔진 5개가 차례대로 라직스 아공간 배낭에 들어갔다.

"다시 꺼내시고."

"호에!"

스슷, 스슷, 스슷....

"이렇게 가져온 거죠."

"...."

어때요?

우리 라직스 맛을 본 느낌이?

"라직스 별명이 우주대머슴이거든요. 탑 안에서 웬만한 물건은 다 가져올 수 있어요."

"...."

"광석도 캐오고, 가죽도 벗기고, 마정석 광맥 찾아서 상마, 최마도 캐오고...."

"...."

미친!

이게 말이 돼?

…되니까 여기 있는 거겠지.

엘은 어제 암살자가 했던 자기소개를 떠올렸다.

자기는 서열 2위라고, 일꾼 다음이라고.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

무력으로 따지면 개보다 약한 라직스가 왜 서열 1위인지.

그가 보유한 능력.

이건 시스템의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다.

무시무시하다.

탑 공략의 판도를 바꾸는 룰 브레이커.

단순히 마력 코어 엔진 몇 개가 생기는 일이 아니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하나의 층이 공략되면 즉시 리셋된다.

부서진 기간트가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는 말이다.

공략할 때마다 마력 코어 엔진 5개를 계속 확보할 수 있다.

'85층이 마력 코어 엔진 공장으로 되어 버렸어.'

검은 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저도 모르죠."

혹시?

"그럼 기간트를 통째로 가져올 수도 있을까요?"

"글쎄요. 크기가...."

라직스의 신비한 아공간 능력.

그러나 그것도 약간의 한계가 있다.

바로 넣을 수 있는 물건의 크기.

캠핑카는 가능하다.

그보다 더 큰 덤프트럭이나 버스 같은 것도 넣을 수 있다고 했고.

하지만 기간트는 빌딩 하나 크기인데.

"팔 한쪽도 간당간당하겠어요."

"아쉽습니다."

통째로 들고 오면 게임 끝인데.

"그렇죠? 그래도 주요 부품 정도는 분리만 하면 가져올 수 있겠네요."

활짝!

밝아지는 엘의 얼굴.

주요 부품.

예를 들어 마력 기판이나 장착된 무기, 골렘 관절 장치 등등.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또 라직스 씨 등급이 현재 스스알인데, 르스스알로 승급하면 팔이나 다리 정도는 넣어 올 수 있을지도."

"아!"

이번에도 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스스알이란다.

시스템 법칙을 무시하는 능력을 갖춘 햄스터 일꾼이 겨우 스스알이라고?

"곧 등급 돌파 보낼 거예요. 어느 정도까지 발전할지 기대됩니다."

"저, 저도요."

말을 하면서도 주혁은 씁쓸한 심정.

솔직히 라직스 보내기 싫은데.

"그런데 마력 코어 엔진으로 뭘 할 수 있어요?"

"마도 공학 기술이 총망라된 집합체입니다. 자체 발전 기능도 갖고 있습니다. 마정석 에너지로 골렘을 기동하게 하고, 여러 마공학 장비에 에너지를 공급하며, 다양한 분야에 응용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공급하며 골렘을 기동하게 한다.

대단한 거였구나.

"설계 과정이 복잡하고, 각종 희귀 금속과 재료, 섬세한 공정 기술이 필요한 터라 저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건데 이렇게 쉽게...."

한 가지 궁금한 점.

"골렘 제작도 가능할까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만들 수 있습니다. 핵심 부품 몇 가지만 더 있으면."

좋네.

내일 한 번 더 들어가 반복 공략를 해 보자.

오늘은 엘이 블랙아웃 당해서 쉬어야 할 필요가 있으니.

작업장 앞에 쌓인 마력 코어 엔진으로 다가가는 엘.

혼자 살펴보게 내버려 두고.

자, 그럼 결산.

2번 탑을 S+++ 등급으로 84층 공략했으니 배지 2개와 상마 광산 하나 뚫었고.

그리고 85층.

1번 탑은 S+++ 등급 공략에 실패했지만 2번 탑은 성공, 그래서 배지 2개.

누적 배지 142개.

현물 46개.

특전도 하나 받는다.

뭐지?

[플래티넘 배지 140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특전 :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이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괜찮다.

좋은 게 나왔다.

*

세계 공지로 알려진 대한민국 2번 탑 84층과 85층 공략.

그리고 84층과 85층 몬스터의 정체가 동영상을 통해 알려졌다.

84층.

저 높은 하늘을 유유히 날며 공격 및 방어 수단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얼음매를 소환하는 거대 조수 프로즌 콜로서스 콘도르.

85층.

땅속에서 솟아오른 고층 빌딩만 한 크기, 이족보행임에도 자유롭게 기동하는 거대 골렘 마그누스 에고 기간트.

└ 거대 콘도르, 너무 높이 나는데?

└ 원거리 특성 플레이어들도 저기까진 못 날리겠다.

└ 아니, 날린다고 해도 꽂히기나 하겠냐?

└ 못 잡아. 저건 죽어도 안 돼.

└ 남조선 동무들은 너무 포기가 빠르구만 기래.

└ 그럼 네가 해 보던가? 주체적 혁명정신으로.

└ 내레, 아직 와이번 구간이라서.... 근데 와이번 아새끼도 잡기 힘들어 죽을 지경이야.

└ 씨발, 비행 거대 괴수까지는 그렇다 치고, 거대 로봇이 나와?

└ 로봇이 아니라 골렘이라고.

└ 그거나 저거나.

└ 나도 골렘 소환 특성인데, 비교가 안되는 구나.

└ 그래도 굳이 비교하면?

└ 생쥐하고 성인 남자 정도?

└ 밟히면 끝난다는 말이네.

└ 이런 걸 보여 줘서 어쩌겠다는 거야? 거대 괴수들은 잡지도 못할 것 같은데.

└ 우리 최고 플레이어 동지는 저런 놈들은 어케 잡았디?

└ 그러니까 최고지.

└ 글쿠만. 우린 최고 플레이어만 믿으면 되지 안카서?

└ 우리야 문제 있겠냐? 다른 나라들이 큰일났지.

└ 이러다 또 임시귀화 요청이 오면?

└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디도 말라우. 최고 플레이어 동지는 임시귀화 대상이 아니야.

└ 그건 그렇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각국 플레이어들도 이 동영상을 봤다.

소감은 다 똑같았다.

84층이든, 85층이든, 아니, 81층부터 시작해서 그 어떤 몬스터도 절대 못 잡는다.

언데드 구간보다 더 어렵다.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한국, 세계 최고 플레이어.

*

북한 평양.

김인중 위원장은 중국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부터 날아온 보고서를 읽고 있는 중.

요즘 중국 분위기가 좋지 않다.

중국 플레이어 협회라는 곳에서 대놓고 중국 정부와 맞서고 있다.

간덩이가 부었다.

플레이어 개인이 정부와 맞서려고 해?

물론 김인중도 보고서를 읽어서 안다.

중국에서 해방의 룬 목걸이 보상이 다량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건 멍청한 생각.

해방의 룬 목걸이는 만능이 아니다.

세 번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지속 시간도 겨우 1시간.

그게 다 소진되면 어쩔 건데?

이미 중국 내 거의 모든 플레이어가 정부에 의해 감시받고 있었다.

혹시라도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는지.

감시받는 중국 플레이어라고 가만히 있을까?

중국 정부에 저항하려 하겠고.

그런 식으로 갈등은 점점 깊어만 갔다.

이 때문에 상급 마정석 매입도 쉽지 않았다.

가격도 올라가고, 물량도 줄어들었고.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그분의 지시에 따라 중국 일반 플레이어에게서 다량의 상급 마정석을 매입 중인 김인중 위원장.

그렇게 매입한 상급 마정석은 각성 관리청 평양 지부에 보내지고, 그쪽 플레이어에 의해 남한의 서울로 옮겨지는 식.

그런데 야단났다.

목표량에 미달할 위기.

능력이 없다고 내쳐질 수도 있다.

인민무력부장 고사극 눈 밖에 나면 교체되는 건 한순간.

뭐가 어려울까?

뇌경색이나 심장마비 같은 사고사로 처리하면 끝인데.

'망할 중국 종간나새끼들.'

중국 정부만 문제인가?

플레이어들도 다 똑같은 놈들이다.

역시 공화국에 있어 중국은 천년의 적.

순간!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사극.

"고, 고사극 동지!"

"여어, 김 위원장 동무, 얼굴이 좋아졌구만 기래. 팔찌가 효과가 있었나?"

"기, 기렇슴메다. 살이 많이 빠졌디요."

"좋아. 항상 은혜를 잊지 말라우."

코사크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기런데 말이디… 상급 마정석 매입 말인데."

김 위원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다.

"죄, 죄송함메다. 중국 플레이어 에미나이들이 좀처럼 상급 마정석을 팔디 않아서리… 목표량에 한참 미달했슴메다. 요, 용서해 주시라요."

"이유는?"

김인중은 중국 주제 평양 대사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고사극에게 보여 줬다.

"해방의 룬 목걸이라...."

"이제 시작임메다. 공화국과 남조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요."

피식, 웃는 고사극.

"설마 해방된 플레이어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서?"

"호, 혹시나 해서리."

"일없으니까 걱정하디 말라우."

"아, 알갔습메다."

"중국 플레이어 아새끼레 100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쳐도 문제 없어야, 알간?"

"당연함메다."

그러고 나서.

"기건 기렇고, 앞으로 상급 마정석은 매입 중단해도 좋아."

"어어...."

"걱정 말라. 김 위원장 잘못이 아니라 더는 상급 마정석 매입이 필요 없어서 그런 거이니까니."

"아!"

다행이다.

생명 연장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통보가 올 거이니 준비하고."

"무슨?"

"라직스 물산 알디?"

당연히 안다.

자신이 손목에 착용한 비만 탈출 팔찌를 만들어서 파는 회사.

"곧 공화국에 대규모 투자를 발표할 거이야. 라직스 물산이 공화국 린민들을 위해 은혜를 베푸는 거디."

"가, 감사함메다."

김인중으로서도 환영할 일.

요즘 들어 남한 기업들이 북한에 투자 계획서를 보내고 있긴 하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아직은 북한 정부를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투자 규모가 작았다.

논의를 시작했다가 엎어지는 일도 많았고.

그런데 라직스 물산에서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다?

북한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라직스 물산이 북한에 진출만 하면 그 어떤 지원도 아끼디 않갔시오."

만족한 미소의 코사크.

"먼저 사업하려면 땅이 필요해서 말이디."

"평양 노른자 땅으로 준비하갔슴메다."

"기것도 괜찮지만 먼저 평양 검은 탑을 중심으로 200만 평 정도면 적당하갔어."

"거, 검은 탑 주변 말임메까?"

"기래, 린민들 투입해서 기초 작업 실시하라우, 예산은 라직스 물산에서 지원할 거이니까."

"알갔습메다."

곧 라직스 물산의 근거지는 북한이 될 것이다.

통일되면 땅값이 오를 거니 미리미리 사 둬야지.

"그리고 개성 공단하고, 원산 리조트 투자, 신의주도...."

"말씀만 하시라요. 내레 라직스 물산에게 혁명적인 특혜를 약속 드리갔습메다."

"낄낄낄, 아주 좋아, 길티만 살살하라우, 뒷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니."

"걱정 마시라요. 주혁 만세!"

"주혁 만세!"

그리하여 라직스 물산의 평양 진출이 결정됐다.

175화

비만 탈출 팔찌.

수공업 인챈트 제작은 잠정 중단했다.

이제 기계식 대량 인챈트 생산 체제로 전환을 준비할 시점.

이를 위해 따로 단체 톡방이 만들어졌다.

9서클 마법사 매켄지, 방구석 연금술사 알리아마리, 마도 공학자 엘, 사업가 코사크, 전광일 청장, 라직스 물산 대표 정동훈이 참여하는.

늘 하던 생각이지만 백색 탑 통신탑은 정말 사기적.

탑 안에 있는 사람, 탑 밖에 있는 사람이 SNS 대화방에서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종일 논의만 한 건 아니다.

탑 등반도 했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먼저 2번 탑 84층.

2번 탑에도 똑같이 상급 마정석 광맥이 존재하는지, 거기도 자연산 최마가 있는지.

역시 1번 탑과 같은 환경.

설원 배경, 거대한 빙벽, 숨겨진 동굴에 존재한 상마 광맥, 자연산 최마도 동굴 벽에 박혀 있었다.

확인 끝.

여긴 일단 내버려 둔다.

1번 탑 84층 광맥이 고갈되면 그때 캐기로 하고.

다음은 2번 탑 85층.

마력 코어 엔진 수거 및 기간트의 다른 부품도 수거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엘이 마력 EMP를 맞아야 한다.

미뤄도 괜찮다고 했지만 이왕 할 거 빨리 해치우자는 엘의 의견 때문에 연속 등반 결정.

라직스를 비롯해 엘, 고방과 코사크, 광마, 그리고 바르딘이 선발 명단.

"전사는 감개무량하다.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소신도 이제야 밥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빛이여."

"호에!"

그 와중에 코사크는.

"하아, 바빠 죽겠는데, 빨리빨리 끝내야 함다. 북한 가서 공사 현장 감독해야 함다. 시간이 돈임다."

이젠 완전 사업가로 빙의한 모양.

며칠 전엔 자기 뺐다고 오만 투정을 다 부리더니.

이랬다저랬다 하고 말이야.

그리하여 다시 85층에 입장한 주혁과 피소환인들.

공략 준비.

이번에도 엘이 나섰다.

한 번만 더 맞자.

남은 마력 EMP 탄은 딱 하나.

엘의 왼쪽 허벅지 수납장에 보관된 것.

뭐, 나중에 새로 만들 수 있다니까.

그때는 사용자가 EMP에 영향을 받지 않게 개조해서 만들겠지.

쿵쿵쿵쿵!

무턱대고 돌진해 오는 마그누스 에고 기간트.

에고가 장착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영리한 놈은 아닌 것 같다.

지구 AI 기술에 한참 못 미치는 지능.

드르르륵!

번쩍! 파직! 파파팟!

터져나가는 빛의 파장.

멈칫! 멈칫!

동시에 정지하는 기간트와 엘.

"5분입니다. 작업하죠."

먼저 손가락 분리 작업부터.

쑤우욱!

거대화 고방과 바르딘이 기간트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찌이잉!

스우웅!

소드마스터 코사크의 검강.

더불어 광마의 혈옥강기.

그걱, 그거거걱, 서거걱!

어렵지 않게 잘라 내고.

관절이 붙은 손가락 토막 하나만 해도 자동차 한 대 크기.

"호에!"

라직스가 아공간 배낭에 집어넣었다.

다음으로 장갑판 열기.

코어 엔진과 함께 기간트의 핵심 부품이 들어 있는 심장 부분.

시간이 많지 않다.

공략 완료 메시지가 뜨기 전에 얼른얼른.

오랜만에 활약하는 근접 클래스 피소환인들.

힘을 합쳐 부품과 장비를 조심조심 뜯어 냈다.

뜯어 간 건 전체 기간트의 극히 일부분.

하지만 시작일 뿐이다.

언젠가는 통째로 들고 나올 날이 있겠지.

임무 완료 메시지가 뜨고 백색 탑으로 귀환.

스슷, 스슷, 스슷....

라직스가 85층에서 수거해 온 기간트의 손가락과 코어 엔진, 부품들을 꺼내 놓았다.

잠시 후.

블랙 아웃에서 깨어난 마도 공학자 엘.

수북하게 쌓인 기간트의 부품들을 바라보면서.

"아아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엘의 표정.

이젠 마력 코어 엔진이 10개.

그것도 마도 제국 최종병기인 마그누스 기간트의 코어가 말이다.

"놀랐슴까?"

"…놀라지 않을 리가."

"이게 우리 봉 소환사님 탑 공략법임다. 날로 먹는 거."

맞다.

날로 꿀꺽했다.

세상에 이런 공략이 있을 줄이야.

"이제부터는 비만 탈출 팔찌 양산화 체제 완성해야 함다. 돈을 벌어야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옷도 사 입고, 다 할 수 있는 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부품들을 확보한 이상, 한 달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

"아유, 우리 공장장님, 포부도 대단하셔. 나중에 최고급 윤활유 선물로 드리겠슴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연공 첫 합작품은 비만 탈출의 팔찌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첫 번째 양산 제품은 팔찌가 아니었다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

중국 충칭.

인구 3천만의 대도시.

충칭시에 등록된 일반 플레이어 숫자만 해도 3천에서 6천 명 사이.

하오렌도 충칭에서 살고 있다.

레벨 58의 일반 플레이어.

나름대로 재능이 있어서 국가 육성 플레이어 제안을 받기도 했던 그.

그러나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일반 플레이어 계약을 맺었다.

하오렌은 요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충칭시 공안들의 과도한 감시와 간섭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집에 찾아와 소재를 확인하고, 또 탑에 출입했는지, 했으면 어떤 아이템을 보상받았는지 묻고 다녔다.

오늘도 찾아왔다.

무장한 2명의 공안이 말이다.

"하오렌, 집에 있었군."

"있어야죠. 나가면 미행당할 것이 뻔한데."

"흥, 여전히 까칠해. 좀 협조적으로 나올 수 없나?"

"그것보다 왜 자꾸 찾아오는 겁니까? 어제도 왔으면서 너무 심하지 않아요?"

"자네가 충칭 일반 플레이어 중에서 레벨이 가장 높으니까."

"후우."

속이 뒤집어질 지경.

레벨이 높으면 존중을 받아야지, 도리어 감시의 대상이 되다니.

사실 공안들에게 있어서 레벨 높은 일반 플레이어들은 경계의 대상, 이들의 인벤토리에 해방의 룬 목걸이라도 들어 있으면 매우 위험하니까.

처음엔 이해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이런 강압적인 플레이어 탄압은 언제부터였을까?

꽤 오래됐다.

중국 최고 플레이어 바이룽이 처음 71층에 등반했을 때가 그 시작.

탑 점핑 티켓으로 71층 4종 선물 세트를 획득한 바이룽.

그런데 당시 중국 주석이었던 왕위안이 강제로 아이템을 빼앗으려 했다.

이에 반감을 느낀 바이룽이 중국 주석 왕위안을 살해한 후 도망쳤고.

게다가 베이징 위기 관리 본부 폭파 사건이 터지면서 중국 정치 권력자들에게 플레이어들은 잠재적 위험 요소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유로 플레이어들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했다.

이들이 만약 해방의 룬 목걸이를 보상받았다면?

그걸 몰래 인벤토리에 감추고 국가 전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면?

"오늘은 몇 층에 올랐지?"

"등반하지 않았습니다만."

"…오늘도?"

"네."

"이거 수상하군."

하오렌은 기가 막혔다.

"어이가 없군요. 등반하면 뭘 보상받았는지 인벤토리 까 보라고 하고, 등반 안 하면 수상하다고 하고."

그러자 비릿하게 미소 짓는 충칭시 공안.

"보상받은 상급 마정석을 해외 브로커들에게 팔아먹기 위해 등반한 걸 숨기는 놈들도 많다고 해서, 상급 마정석은 국가 자산이잖아."

"...."

이쯤 되니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어쩌긴, 네가 알아서 처신해야지."

이럴 줄 알았다.

돈을 달라는 이야기다.

공안들이 플레이어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이유.

정부에서 내려온 지침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몫 잡으려고 달려든다.

플레이어들은 벌이가 좋으니까.

"얼마를 원하십니까?"

"흐음, 대놓고 뇌물을 주겠다는 건가?"

"원하시는 바가 그거 아닌가요?"

"이 건방진 농민공 출신 거지새끼 주제에, 운 좋게 각성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지?"

"...."

"너 오늘 잘 걸렸다. 본때를 보여 주지. 이놈 수갑 채워!"

뭔가 이상하다.

보통은 돈을 받고 돌아가는데.

철컥!

그의 두 손목에 채워지는 수갑.

심지어 발목엔 구속구까지.

"목을 검사해 봐!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 있어?"

"없습니다."

"그래?"

그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르, 그의 집에 들이닥친 무장 병력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

"응? …왜?"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하오렌! 중국 플레이어 협회 충칭 지부장!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아...."

들켰다.

알고 왔음이 틀림없다.

처음에 쓸데없이 등반 어쩌고저쩌고 심문한 건 자신의 팔과 다리에 구속구를 채우기 위한 수작이었고.

'어떻게 발각된 거지?'

둘 중 하나일 터.

공안의 수사력이 뛰어나거나, 혹은 내부에 배신자가 있거나.

하오렌은 눈을 감았다.

심호흡 한번 하고.

그래.

참을 만큼 참았다.

어차피 지금 끌려가면 사형.

허무하게 죽을 바엔 일 벌이고 중국을 뜬다.

스슷!

인벤토리를 열고.

아무도 모르게 그의 손에 쥐어진 해방의 룬 목걸이.

꼭 목에 걸어야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발동.'

쑤우우욱!

차오르는 강렬한 마력의 기운.

마력이다.

탑 안과 탑 밖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

마력이 있느냐, 없느냐.

이제 자신은 몬스터를 공략하는 플레이어.

그리고 여기.

공안들은 탑 밖의 몬스터.

하오렌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엔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넘쳤다.

공안들은 깜짝 놀랐다.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하오렌, 너...."

우두둑! 두두둑!

손목에 발목에 채워진 구속구가 눈 깜짝할 새에 끊어졌다.

공안들이 서둘러 권총을 하오렌에게 겨눴다.

"죽여!!!"

탕탕! 타타탕!

반사적으로 발사되는 권총 탄환.

자동화기를 든 무장 병력들도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탕!

그러나 이미 하오렌은 그 자리에 없었다.

츠핏! 츠피핏! 서거거걱! 서걱!

사방에서 번뜩이는 하오렌의 참마도(斬馬刀).

이것도 탑 전용 수식어가 없는 아이템.

그래서 참마도에 달린 옵션을 현실에서도 오롯이 쓸 수 있었다.

투툭, 투두두둑.

데구르르르.

잘린 머리통들이 하오렌의 집 바닥으로 굴렀다.

레벨 58.

무시무시한 와이번을 공략하며 등반 중인 하오렌.

해방된 그의 힘을 평범한 공안들이 어떻게 감당할까?

"크윽."

하오렌도 무사한 건 아니다.

총알 몇 방이 가슴과 허벅다리에 명중했다.

인벤토리에서 붉은 액체가 든 병을 꺼낸 하오렌.

상처에 뿌리고.

치이익!

나머지는 마시고.

꿀꺽.

탑 전용 수식어가 없는 힐링 포션.

그래서 현실에서도 효과를 발휘하는 아이템.

몸에 박힌 총알이 밖으로 밀려 나왔다.

출혈도 멈췄다.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진 몸.

"후우."

기어코 피를 보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 밖에도 무장 병력들이 있었다.

"모두 정신 차려!!!"

"도망치게 놔두면 안 돼."

"생포할 필요 없다. 무조건 사살해."

해방의 룬 지속 시간은 1시간.

횟수는 2번 남았다.

여분의 힐링 포션은 1개밖에 없고.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 중국을 뜬다.

하오렌의 눈에 핏발이 섰다.

스팟! 파바바밧!

"저기다!"

"옥상이야!"

"놈이 도망친다!"

타타타탕! 타타탕! 탕탕!

빗발치는 총알.

하늘엔 수십 대의 헬기.

이날.

충칭시 전역은 해방된 플레이어 한 명 때문에 대혼란에 빠졌다.

충칭시에서 죽은 무장 공안만 해도 50명.

하오렌도 무사하지 못했다.

결국 사살됐다.

아무리 해방된 플레이어라지만 지상에선 수백 명의 공안 병력, 하늘에 뜬 수십 대의 헬기 추적을 피할 수는 없었으니까.

충칭 대참사.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이것과 비슷한 일들이 중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외신과 SNS를 통해서.

*

백색 탑 17층.

심각한 표정의 주혁.

이젠 더는 미룰 수 없다.

라직스의 등급 돌파.

아마 짧게는 7일, 길게는 14일까지도 보지 못하겠지.

그러나 아쉽다고 해서 붙들고 있으면 등급 돌파는 언제 해?

계속 스스알로 내버려 둘 건가?

지금이라도 빨리 보내 줘야지.

백색 탑 17층의 랜드마크 고층빌딩의 로비에서 배지 수여식이 열렸다.

현재 라직스가 획득한 누적 배지는 23개.

2개만 더 달면 25개.

그냥 막 달아 준 것이 아니다.

소환사가 인정하는 논공행상의 방식으로.

스스로도 받을 만했다는 피소환인의 기준에 부합해서.

상호 간의 합의에 따라 주어진 배지들이었다.

이렇게 25개를 받게 될 피소환인은 라직스가 최초.

다른 사람들은 죄다 돌파 룬의 도움을 받아 지름길로 질러가서 등급을 올렸다.

솔직히 아직 확신은 서지 않았다.

과연 룬 없이 배지 25개만으로도 돌파가 가능할지.

뭐, 안 되면 돌파 룬을 손에 쥐여 주면 되니까.

메인 수여식 대신.

식전 행사부터.

"전향 귀순자 디아마트 씨 앞으로."

"네에!"

그녀의 공도 꽤 크다.

"귀하는 꿈의 영역 전개로 마그누스 기간트를 공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고 그로 인해 마도 공학자 엘을 영입하는 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으므로 이에 플래티넘 배지를 수여합니다."

디아마트가 헤실헤실 웃으며 몸을 살짝 비틀고는 가슴을 슬며시 주혁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저저저, 요사스러운 것, 기술 쓰지 마라!"

"…안 썼는데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디아마트.

"뭐? 안 썼어? 웃기고 있네. 그럼 몸은 왜 비트는 것이냐?"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누가 몽마 아니랄까 봐."

"지가 무슨 베 원사인 줄 아나?"

"저렇게 순진하신 소환사님 현혹해서 나중에 배지 하나 더 받아 보려는 수작이지."

"우리 봉 소환사님, 여자 면역 체계가 최하위 수준임다, 연애도 못 해 본 모태솔로란 말임다. 아직 예방 주사도 맞지 못했슴다. 기술 들어가면 큰일 임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

솔직히 디아마트는 억울했다.

남자를 유혹하는 것이 몽마의 본능인데 어쩌라고?

"거참! 다들 왜 이러세요? 어? 무슨 여자 면역력이 없다고! 어? 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입니까?"

주혁이 버럭 화를 내자 조용해지는 피소환인들.

"디아마트 씨."

"네에!"

"가까이 오세요. 배지 달아 드릴 테니."

디아마트의 가슴 부분에 배지를 가져다 대는 주혁.

매혹적인 향기가 코를 찔렀다.

아찔해지는 정신.

덜덜덜덜.

손이 떨린다.

이마에선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어우.'

도저히 안 되겠다.

가슴 말고 옆구리 부분에.

콕!

달아 주고.

"봤죠? 아무렇지도 않은 거."

"...."

"...."

"...."

.

.

.

"다음 우주대머슴 라직스 씨."

"호엥!"

이번에도 엄청난 공을 세웠다.

배지 3개도 충분하지만.

"귀하는 검은 탑 84층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상마 마정석 광맥을 발견하고, 심지어 자연산 최마까지 캐냄으로써 향후 백색 탑 발전의 기초를 이룩하는 공을 세웠으므로 이에 플래티넘 배지를 수여합니다."

"호에!"

짝짝짝짝!

디아마트와는 다르게 열광적으로 쏟아지는 박수갈채.

이제 24개.

하나 더.

"귀하는 검은 탑 85층에서 마그누스 기간트의 마력 코어 엔진을 아공간 배낭에 넣어서 나와 향후 지구 마도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므로 이에 플래티넘 배지를 수여합니다."

"후에."

과연 어떻게 될까?

바로 돌파가 시작될까?

쿡!

25개.

그때였다.

화아아아앗!

라직스의 몸이 빛과 함께 허공으로 살짝 떠올랐다.

"호엣!"

마치 바르딘이 발하는 광휘와 비슷했다.

아니, 그보다 더 찬란하고 눈부셨다.

계속되는 빛.

동시에 라직스의 뒤통수에서 둥글게 모이는 후광.

광배, 혹은 헤일로, 마치 성자와 같은 모습.

시간이 흐르고,

허공에 떠올랐던 몸이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혼자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라직스.

목적지는 랜드마크 로비에 있는 엘리베이터.

아마 베로니카가 돌파했던 최상층으로 올라가려는 듯.

그리고 폴짝 뛰어올라 짧은 손으로 단추를 눌렀다.

스르륵,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다시 폴짝 뛰어서 61층 단추를 누르고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호에."

다녀올게요.

기다려요.

주혁도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요.

스르륵.

문이 닫혔다.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후우."

바로 밀려오는 후회.

보내지 말걸.

라직스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지?

176화

중국에서 충칭에서 일어난 대참사.

해방된 플레이어가 참마도를 들고 시가지를 누볐다.

그 한 명을 잡기 위해 무수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해방된 플레이어 한 명이 무려 50여 명이 넘는 사람을 참살한 사상 초유의 대사건.

벌건 대낮에 벌어진 일이었다.

목격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언론 통제도 되지 않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실감했다.

능력이 해방된 플레이어가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다.

그리고 충칭 사건은 시작일 뿐이었다.

상하이에선 공안부 청사가 2명의 해방된 플레이어들에게 습격당했다.

뒤를 이어 텐진, 서안, 항저우, 광저우, 청두, 신장위구르… 해방된 플레이어와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전 세계가 경악했다.

자신의 국가에서도 저런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한국에도 중국 사태가 언론을 통해 속보로 전해졌다.

<기어코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 중국 전역이 난리.>

<중국 탑 저층에서도 해방의 룬 목걸이를 보상받는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해방된 플레이어의 위력, 중국의 공안들이 탑 속 몬스터처럼 썰렸다.>

<대물 저격총으로 간신히 사살, 갑옷이나 방어구를 착용했다면 또 모른다.>

<한국도 안심할 때가 아니다. 대책 마련이 시급.>

언론을 통할 필요도 없었다.

SNS를 통해 급속도로 번지고 있으니까.

주혁도 백색 탑 17층에서 뉴스를 접했다.

라직스 떠나보낸 후 하릴없이 노닥거리다가 심심해서 TV를 켰는데.

"헐...."

어떻게 저런 일이?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예상은 했었지만.

사실 예전에 전광일 청장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중국 탑에서 유독 해방의 룬 목걸이가 많이 나오고, 심지어 저층에서 나온다는 소문도 들린다고.

워낙 인구가 많아서 그런가 싶었는데....

"저거 관리자 놈들 짓이죠?"

딱 봐도 알겠다.

"맞슴다. 그 새끼들이 농간 부린 게 확실함다."

"소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제가 서큐버스 퀸 시절 그놈들과 한편이 되어 봐서 알아요. 관리자들만이 보상 아이템을 저런 식으로 편성할 수 있죠."

"이런 개자식들,"

"내가 언제고 꼭 놈들의 머리 위에 운석을 떨어뜨리고 말 것이야."

소리를 높여 관리자들을 성토하는 피소환인들.

주혁도 내심 화가 났다.

하라는 탑 관리는 안 하고, 왜 현실에다 저런 아이템을 뿌리고 지랄이야.

그것도 저층에다, 비정상적으로!

"와, 뒤통수 맞았네. 뭐? 정상화? 이게 정상화야?"

"고정하십쇼. 혈압 올라감다."

"가장 비정상적인 작자들이 정상인 행세하고 있사옵니다."

"전임 관리자나, 신임 관리자나 다 똑같은 놈들이었어요."

"결국 노부의 생각이 옳았군. 세계 정복! 그랬다면 관리자들이 아무리 설쳐도...."

"아니, 영감님은 불난 집에 부채질 하심까?"

71층 등반 선물로 주어졌던 4종 선물 세트.

그중 가장 보상 확률이 높은 것이 바로 해방의 룬 목걸였다.

형상 변환의 반지나 회춘의 비약, 질병 치료의 포션은 보상 확률이 매우 희박했다.

굉장히 의도적인 보상 설계.

해방의 룬 목걸이는 요물이다.

플레이어의 욕망을 자극해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층간 소음 문제로 다툼하는 사람들에게 권총 한 자루씩 나눠주는 것과 다름없다.

미국에선 하루에도 수백 건씩 발생하는 총기 사건이 한국에선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한국엔 총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칼부림 사건은 많이 일어난다.

왜?

칼이 있으니까.

'당장 한국에서도 해방의 룬 목걸이가 퍼지게 되면....'

아니, 퍼지게 될 것이다.

가능성이 매우 높다.

관리자들이 의도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일 터.

중국과 가까운 한국.

서로 왕래도 활발하고.

맞다.

해방의 룬 목걸이가 번진다고 생각하면 한국이 제일 위험하다.

공항 검색대에도 걸리지 않는 플레이어의 인벤토리를 어떻게 적발하나?

물론 중국의 상황이 가장 심각하지만 그보다는 한국으로 번지게 될까 봐 더 걱정.

원래 내 손톱 밑의 가시가 가장 아픈 법.

그리고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

관리자들의 비열한 농간에 이대로 당하고만 있어야 해?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해방의 룬 목걸이를 무력화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시스템 보상이라 힘든가?"

조용히 던진 주혁의 한마디에.

쫑긋!

움직이는 매켄지의 귀.

"어음, 마력을 묶어 버리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엥?

뭘 묶어?

"본 마법사가 예전에 보여 드린 마법 스크롤 기억나십니까?"

"…아! 스펠 뭐시기 하던 거 말인가요?"

"스펠 파워 바인딩 블록, 대상의 마력을 일정 시간 동안 묶어 버리는 주문이지요."

스펠 파워, 마력.

바인딩, 묶는다.

블록, 봉쇄.

품에서 돌돌 말린 종이 몇 장을 꺼낸 매켄지.

"여기 이거...."

보기엔 그냥 종이다.

그러니까 이걸로 마력을 묶을 수 있단 말이지?

"가능할까요? 해방의 룬 목걸이는 시스템이 허용한 아이템인데."

주혁이 가진 의문.

인간의 마법이 시스템 법칙을 어길 수 있느냐는 것.

"물론 스킬이나 아이템 발동 방식에 직접 간섭하지는 못하지요."

"그럼?"

"발동한 후에 생기는 마력에 관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즉 플레이어의 마력이요."

흠.

"그러니까 아이템이 발동하는 것 자체는 막지 못하지만… 발동하고 나서 일어나는 마력만큼은 제어가 가능하다는 말이죠?"

매켄지가 자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스펠 파워 바인딩 블록 스크롤이면 봉쇄할 수 있습니다."

듣고 보니 범상치 않은데?

마력 EMP만큼이나 위력적인 아이템.

"귀한 거네요."

"뭐, 별로 귀하지 않습니다."

"네?"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들 집에 스크롤 몇 장쯤은 구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

"만드는 것도 딱히 어렵지 않아서. 특수한 종이와 잉크만 있으면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려서 만든다.

흔한 거구나.

적어도 다른 세상에선.

"제가 살았던 세상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마도 공학자 엘도 거들었다.

"스크롤이야 누구나 몇 장씩 소지하고 다녔습니다. 예를 들어 라이트나 파이어 팁 같은 주문서요. 지구의 플래시, 라이터 대용이었죠."

생필품 같은 거였나?

"다만 스펠 파워 바인딩 블록 스크롤의 한계가 있다면...."

뭐지?

"파훼법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마법 스크롤은 마법사 언령의 의지가 담겨 있지 않은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매켄지는 마른 입술에 살짝 침을 바르고 말을 이어갔다.

"또한 레벨이 높을수록, 그러니까 마력이 많을수록 지속 시간도 짧아지고 실패 확률도 올라갑니다. 심지어 스스알 등급, 혹은 7서클,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부터는 주문 자체가 먹히지 않고요."

그럼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허나 지구 플레이어들에겐 상관없을 겁니다. 무조건 적용될 겁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점.

"근데 이 주문서는 한 장 가지고 되겠어요? 손으로 그린다고 해도 걸리는 시간이...."

"할 수 있습니다."

"넴?"

어떻게?

"마법사, 연금술사, 마도 공학자가 한군데 모여 있습니다. 불가능이라는 게 존재할까요?"

맞다.

심지어 그들 모두 LSSR, 르스스알이다.

갑자기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 사람들을 두고 대체 왜 고민하는 거지?

주혁아, 주혁아.

아직 상남자 되려면 한참 멀었다.

"소환사, 지시만 내리십시오. 그대가 결심하면 우리가 방법을 찾습니다. 안되는 것도 되게 만듭니다."

"으음."

바로 그때!

광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매켄지에게 말했다.

"좋다, 다 좋은데… 우리 소환사가 마법 스크롤에 당하면 어찌하느냐?"

"응?"

"마도 공학자 엘도 마력 EMP를 쓰다가 기간트와 같이 정지했다. 스크롤 영향권에 소환사가 휘말릴 경우의 대책은?"

"아!"

매켄지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자신의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를 벗으며 말했다.

"제가 이 목걸이를 드리지요."

"그건?"

"마법 저항의 목걸이입니다. 사실 이게 파훼법이죠. 스크롤 마법은 다 튕겨냅니다. 공격 마법이든, 디버프 마법이든."

아싸!

아이템 하나 받겠다.

"이리 오시지요. 제가 걸어드리겠습니다."

주혁은 매켄지 앞으로 다가갔다.

"험험! 귀하는 평소 훌륭한 인품과 자애로운 심성으로 피소환인들에게 모범이 되어 탑 등반을 통한 세계평화...."

뭐야?

수여식인가?

그동안 주기만 했는데 받는 것도 경험해 보네.

순간!

싸늘한 눈빛으로 매켄지를 노려보며 정색하는 코사크.

"매 영감님, 지금 뭐 하는 검까? 감히 누구 흉내를 내려고 하심까? 미쳤슴까?"

"아, 아니 난 그저 재미로...."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피소환인들.

"재미? 쯧쯧, 잘나가다가 기어코 선을 넘는구나."

"피소환인 주제에 수여식을 해? 그것도 소환사께?"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저건 하극상이죠. 즉결처분입니다."

"가만히 놔두니 주군의 머리 위에 올라서려 하는군."

"주인님이 만만하나요?"

"컹컹! 크르르릉."

"호엥! 호에에엑!"

호엥은 또 누구야?

안 그래도 라직스가 없어서 심란한 판에.

"누가 라직스 흉내를 내요?"

"호, 호엥,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죄송함다."

코사크구나.

그럴 줄 알았다.

그때!

매켄지의 번뜩이는 눈빛.

반격의 기회.

"암살자야, 넌 생각이란 게 없느냐? 우주대머슴 빈자리 때문에 소환사께서 얼마나 상심하고 있는지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아, 아니 난 그저 재미로...."

화살은 다시 코사크에게.

"재미와 경거망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구나."

"어째 요즘 조용하다 했다."

"저 입이 만악의 근원이야."

"흉내 낼 사람이 없어서… 우리 우주대머슴을."

"소환사를 놀려먹으려고 드는군."

"매켄지와 코사크, 둘 다 나란히 목을 베어서 저 통신탑에 효수하시지요. 백색 탑 17층의 기강을 세우소서."

"목은 내가 베마."

에이, 이 양반들은 틈만 나면 싸우네.

지들끼리 알아서 놀게 내버려 두고.

일단 나가서 실험해 봐야지.

해방의 룬 목걸이야 인벤토리에 많이 들어 있고, 잘 아는 플레이어도 있으니까.

*

한국 정부도 중국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전광일은 대책 회의를 위해 청와대로 들어가려던 참.

그런데 봉 플레이어에게서 연락이 왔다.

급히 관리청 재료 창고에서 만나자면서.

그럼 봉 플레이어가 우선.

청와대는 나중에 들어가기로 하고.

각성 관리청 재료 창고.

잠시 기다리니 도착한 주혁.

"봉 플레이어님."

"청장님, 제가 좀 늦었나요?"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장소를 바깥으로 정한 이유.

백색 탑에선 플레이어 능력이 그대로 발현된다.

주혁이 알아보려고 하는 것.

룬 목걸이로 해방된 마력을 스크롤로 봉쇄할 수 있느냐?

"청장님, 현재 레벨은 어떻게 됩니까?"

"41레벨입니다. 막 바실리스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폭렙 중이시네요."

"하하하, 장비가 워낙 좋아서,"

"잠깐만요. 부를 사람이 있어서."

주혁은 매켄지와 엘, 그리고 광마와 코사크도 소환했다.

스팟! 스팟! 스팟....

"어이, 전 청장."

"안녕하심까? 사업가 코사크 임다."

"또 뵙네요."

"전 청장, 노부도 왔소."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받으세요."

전광일에게 목걸이 하나를 내미는 주혁.

화들짝 놀라는 전광일.

뜬금없이 목걸이를?

게다가 이건....

"어, 설마?"

"네, 해방의 룬 목걸이 맞아요. 이거 착용하고 활성화해보세요."

"…지금 말입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확인만 해보려고 하는 거니까."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해보자.

그로서도 처음 사용하는 물건.

전광일은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리고 아이템을 사용했다.

스웅!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마력.

힘이 넘친다.

특히 특성이 [괴력난신]인 전광일은 그 효과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울룩불룩.

양복이 찢어질 듯 부풀어 오르는 근육.

꽈드드득!

떡 벌어지는 어깨와 가슴.

"오오오!"

"멋짐다. 저 정도면 3대 5천은 치겠슴다. 헬스 너튜버 하시면 10만 구독자는 금방임다."

짝짝짝짝!

박수 한 번 쳐주고.

"자, 그럼 해볼게요."

"뭘...."

주혁은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내 그대로 찢어 버렸다.

찌이익!

바로 그때!

우우웅!

파아앗!

넓디넓은 창고 안을 가득 채우는 끈끈한 기운.

그리고 기운의 물결이 전광일에게 닿았을 때!

"…헉!"

전광일은 그만 힘이 쭉 빠져 버렸다.

피시시식! 부풀었던 근육이 삽시간에 꺼져 버렸고.

가슴도 답답했다.

뭔가 속에서 체한 듯한 기분.

"대, 대체 무슨?"

반면 주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력 저항 목걸이가 스크롤 마법을 무마시킨 것.

여전히 어리둥절, 영문을 몰라라 하는 전광일.

"다시 한번 해방의 룬 목걸이를 발동해 보세요."

"어음, 네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분명 해방의 룬 목걸이 사용 횟수가 줄었는데도 말이다.

"이거 스펠 파워 바인딩 블록이라고, 너무 기니까 짧게 마력 봉쇄 스크롤이라고 할게요. 약 1시간 동안 대상자의 마력을 봉쇄하는 마법 주문인데...."

멍하니 설명을 듣는 전광일.

"그, 그런 아이템도 있었습니까?"

"탑 보상 아이템은 아닙니다."

"그럼?"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죠."

주혁은 매켄지에게 말했다.

"이거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죠?"

"당연합니다. 스크롤이라 어린아이도 쓸 수 있는 거지요."

"위험하지는 않은지?"

"전혀요. 마력만 묶는 겁니다, 마력이 없으면 위험할 일도 없고."

안전한 물건이란 말.

"범위는 어디까지?"

"반경 30m 안에 모든 대상, 파장으로 퍼지는 마법 주문이기 때문에 피하기 힘들 겁니다."

범위도 넓고.

"대량 생산은 어떻게?"

"찍어내면 됩니다. 먼저 금속판에다 마법 수식을 새깁니다. 그런 다음 인쇄기에 장착해서...."

"인쇄기?"

엘이 보충 설명했다.

"스크롤 인쇄기는 마도 공학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설비 공정입니다. 만들기도 쉽고, 스크롤 특수 용지와 마력 잉크만 있으면 됩니다."

"용지와 잉크는?"

"연금술사라면 누구나 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방구석 연금술사 마리씨에게 톡을 날려 물어보니.

띠링!

<마리> : 스크롤용 특수 종이와 마력 잉크는 금방 만들어요.

역시.

<마리> : 일반 종이에 약품 처리하면 되거든요. 마력 잉크도 마찬가지예요.

<상남자> : 재료는요?

<마리> : 약초 몇 가지하고 마정석인데, 마정석이야 충분하고 약초도 우리 머슴이 틈틈이 가져다줘서 쓸 만큼은 있어요. 스크롤 정도는 수천만 장이라도 찍어낼걸요?

뭔가 일이 착착 진행된다.

드림팀 구성이라고나 할까.

스펠 파워 바인딩 블록이라는 마법 수식을 알고 있는 마법사, 스크롤 인쇄기를 만들 수 있는 마도 공학자, 그리고 스크롤용 특수 용지와 마력 잉크를 제조할 수 있는 연금술사.

이것이 바로 르스스알 마법, 연금, 공학의 완벽한 삼위일체.

어느새 사업가 모드로 변신한 코사크도.

"흠, 생각해 보니 괜찮은 사업 아이템임다. 일명 가정 상비 스크롤, 집집마다 스크롤 한 장씩 가질 수 있게 하는 검다. 남북한 인구가 7천만 임다. 최소 7천만 장은 찍어야 함다."

광마도 한마디 거들었다.

"만약 목걸이의 힘을 억제할 수 있다면 관리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소."

전광일 또한.

"예방 효과도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스크롤의 존재가 알려지면 플레이어도 해방의 룬 목걸이를 섣불리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요."

좋았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모두 일시 중단하고 스크롤부터 제작합시다."

"예압!"

"당장 착수하겠습니다."

"더불어 이번 사업으로 비만 탈출의 팔찌 대량 생산 기반도 만들어야 함다."

"에이, 그놈의 팔찌."

"어차피 스크롤 장사는 일시적임다. 팔찌 장사는 천년만년 우려먹을 수 있슴다."

전광일도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먼저 이걸 경찰서나 일선 파출소에 공급하면 해방된 플레이어에 대한 억제력을 갖추게 될 터.

"전 청장, 필요한 게 있는데."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아날로그 기계식 인쇄기가 필요하오. 잉크를 묻혀서 찍을 수 있는...."

순간!

뭔가 떠올랐다는 듯 코사크가 눈을 반짝이면서.

"위대하신 봉주혁 소환사 동지."

얘는 왜 또 인민무력부장 빙의래.

"…왜요?"

"인쇄 작업은 우리 공화국에 맡겨 주시라요."

북한에서 인쇄한다고?

"괜찮겠어요?"

"공화국 하면 삐라 아임까? 삐라 찍어내듯 스크롤 생산하갔슴메다."

"...."

"고조 공화국 삐라 제작 기술은 남조선에 뒤지지 않디요."

틀린 말은 아니지.

그동안 쌓인 삐라, 선전·선동 전단지 제작의 노하우가 엄청날 텐데.

"그렇게 합시다."

"충!"

관리자 놈들.

표정이 궁금하다.

계획이 실패한 걸 알아차렸을 때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177화

스펠 파워 바인딩 블록, 일명 마력 봉쇄 스크롤.

대량 제작에 필요한 요소를 손에 꼽아 보자면.

첫 번째.

마법 스크롤을 제작할 장소와 인쇄 기계들.

코사크가 맡았다.

평양 검은 탑 주변 평지에 간단하게 기초 공사 작업을 한 후 혁명 일꾼들을 모아서 가건물을 설치, 이미 예전부터 진행하고 있던 터라 금방이었다.

그런 다음 평양 곳곳의 관공서에서 오래된 인쇄기를 징발해 왔다.

인쇄 작업을 할 베테랑 노동자들도.

여러 선전 선동 찌라시와 삐라를 만들었던 노련한 숙련공들.

두 번째.

그 인쇄 기계에 끼울 금형 원판을 제작하는 과정.

매켄지가 나섰다.

각인 마법을 통해 스펠 파워 바인딩 블록 마법 문양과 수식을 금속판에 새겼다.

필요한 원판만 해도 100여 개.

각 인쇄 기계마다 하나씩, 그리고 손상되면 갈아 끼울 것까지 포함해서.

단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불량.

그래서 정신 집중은 필수.

세 번째.

기존의 기계식 인쇄기들을 마도 공학 스크롤 인쇄기로 개조하는 작업.

마도 공학자 엘이 나섰다.

그녀는 골렘 의체. 따라서 무한한 작업 시간과 효율성은 이미 보장되어 있었다.

<자동화> 마력 회도로를 비롯해 <정밀 출력> <완전 흡착>, <균등 분포> 등등 여러 종류의 마력 회로 기판을 손수 제작해서 인쇄기마다 설치했다.

네 번째.

스크롤 특수 용지와 마력 잉크.

방구석 연금술사 마리가 평양 검은 탑에 직접 행차했다.

대형 솥을 걸어 불을 지피고, 정제수과 약초, 마정석을 일정 비율로 섞은 후 약품 제조.

그리고 인쇄 용지를 일정 시간 그 안에 담갔다 꺼내 말리면 스크롤 용지 완성.

또 마력 잉크도 제작했다.

염료는 따로 구해서 마정석과 약초를 넣고 잉크 자체에 마력을 고정시키는 작업.

여기에 탑 금속이 들어간다.

잉크 1L에 오리할콘 가루 10g 정도?

아주 극소량이라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양.

북한 인쇄 노동자들도 대거 투입됐다.

아무래도 단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라서.

매우 열심히 했다.

시키지 않은 일도 막 한다.

이들이 원래 근면해서?

천만에!

시급이 1만 원이다.

남한 최저임금의 같다는 말.

당연히 미친 듯이 일해야지.

불과 3일 만에 시범 생산에 들어갔다.

차차착! 차차차차차차착!

인쇄기 롤러에 찍혀 나오는 마법 스크롤.

다음 절단기로 이동.

여기에도 마력 회로가 장착됐다.

<정밀 검수> 마력 회로.

불량이 있으면 즉시 찾아내는 장치.

그렇게 모든 과정을 통과하면 노동자들이 묶음 포장 해서 끝.

주혁은 만들어진 스크롤을 실험해 보고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역할, 사장님이니까.

이번에도 실험 대상은 전광일 청장.

횟수가 1회 남은 해방의 룬 목걸이를 건네서 옵션 효과를 발현하게 하니.

으드드득!

괴력난신으로 몸이 거대해지는 전광일.

하지만 스크롤이라면?

찌직!

마법사의 언령 의지가 담겨 있지 않아 같은 종류의 마법이라도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스크롤 마법이지만.

"…적용되었습니다. 마력이 묶였어요."

성공.

양산형도 그 전처럼 훌륭한 효과를 보여 줬다.

"발표해도 되겠네요."

"기자회견 준비하겠습니다."

* * *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혼란 상황.

해방의 룬 목걸이를 이용한 플레이어들의 실력 행사.

유형은 여러 가지였다.

정부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목걸이를 사용하는 것.

그래서 공격 대상이 공안 혹은 공산당 간부, 고위 관료들.

다음 개인적 복수.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해 잠자코 있어야 했던 플레이어들이 목걸이를 사용해 사적인 복수를 감행했다.

마지막은 탐욕이었다.

힘을 해방하여 은행을 털거나, 상급 마정석 보관 창고를 습격한다거나, 살인이나 강간 같은 범죄를 자행한다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고가 터졌다.

급기야 중국 중앙 비상위원회 합의로 계엄령까지 선포했다.

사실 아무리 해방의 룬 목걸이를 사용했다 해도 레벨이 낮으면 한계가 있다.

총 맞으면 죽는다.

권총 같은 소형 화기 말고 대구경 자동 화기나 저격총에 말이다.

그렇게 플레이어들도 죽고, 공안도 죽고, 군인들도 죽고, 애꿎은 일반인도 피해를 당하고.

세계가 중국을 주시하고 있었다.

과연 이 사태는 어떤 식으로 마무리될까?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미국도 백악관에서 긴급 참모 회의가 열렸다.

"소문이 진짜였군."

"네, 그렇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증명된 셈이죠."

중국 탑 71층 미만 저층에서도 해방의 룬 목걸이 보상 확률이 매우 높다는 소문.

하지만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대체 중국에서 룬 목걸이가 몇 개나 풀린 거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중국 국적의 일반 플레이어 숫자만 해도 20만에 육박합니다. 하루에 몇 명이 탑을 등반하는지도 모르는 판에."

20만이라.

아마 그 정도 되겠지.

플레이어 숫자는 인구에 비례한다.

추정컨대 중국에서만 하루 최대 20만 번의 탑 등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저층에서도 나오는 거니까 전체 층에서 등반 보상 확률이 훌쩍 올라가서 0.01%만 된다고 쳐도....

"매일매일 20개의 룬 목걸이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군."

"그 절반인 10개씩만 나와도 끔찍할 겁니다. 한 달만 지나도 풀리는 양이...."

"맙소사!"

통제하지 못하는 플레이어들의 손에 들린 해방의 룬 목걸이.

그보다 더 위험한 아이템이 또 어디 있을까?

해방의 룬 목걸이가 그렇게 초 희귀한 아이템은 아니다.

당장 미국 탑에서도 간간이 나오고 있으니까.

그러나 71층 이상이다.

처음 세계 공지 시스템 메시지가 떴을 때도 그렇게 명시했었다.

71층 이상은 주로 국가 육성 플레이어들이 오를 수 있는 층.

일반 플레이어들은 잘해 봐야 60층대에서 장기 주차.

아무리 약화되었다고 해도 성검 없이 성수만으로 데스나이트와 리치를 공략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탑 한정 71층 미만에서도 나오는 목걸이.

단순한 오류인가? 아니면 시스템의 의도일까?

미국 대통령 로이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나서.

"대책 마련은?"

"일반 플레이어들을 국가 감시 대상에 포함해야...."

"그건 절대 안 돼. 중국 사태가 뭣 때문에 일어났는지 잊었나?"

부작용이 더 크다.

지금 사태도 중국이 플레이어와 정부 간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결과 아닌가.

이래저래 답답한 노릇이다.

탑 붕괴의 위험성이 줄어들어 안심하고 있던 판국에, 탑 밖에서 일이 터지다니.

자칫하면 플레이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탑 붕괴를 막아 주고 마정석을 공급하는 긍정적인 이미지에서 위험한 능력을 지닌 부정적인 이미지로.

이건 막아야 한다.

플레이어 보호 차원에서도.

"앞으로 중국에서 오는 모든 항공기나 선박에 대해 검문 검색 철저하게 해."

"중국에서 항의가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 필요하다면 입국 금지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으니까."

로이드 대통령은 단호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목걸이가 중국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불행은 중국에서 끝나야 하니까.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스스로 보호할 총기 소지를 확대 허가하는 법안을...."

바로 그때!

똑똑, 벌컥!

백악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맥밀란 장관.

"이봐, 맥! 늦었잖아. 회의 다 끝난 후에 오면 어쩌자는 건가?"

"그럴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인데? 늦어도 뻔뻔한 걸 보니, …뭔가 있나?"

"한국 각성 관리청 전광일 청장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요."

"응? 무슨 이야기?"

"일단 너튜브나 같이 보시죠. 오늘 기자회견이 예정되었으니."

"어...."

백악관 회의실 벽면 TV가 켜졌다.

한국 각성 관리청 채널에서 생방송 기자회견이 실시되고 있었다.

전광일 청장이 단상 위에 섰다.

* * *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전광일.

원래는 국내에 한정한 기자회견이었다.

그런데 외신 기자들도 상당히 많이 보였다.

하긴!

한국 각성 관리청의 공식 발표는 언제나 세계적 관심의 대상.

탑 등반 최강국으로서의 지위 때문이었다.

또한 지금까지 벌여 왔던 일들이 다 평범했던가?

싹 다 세상을 뒤흔들 만한 것들이었다.

성검 대여 발표, 바실리스크, 와이번 가죽 민간 공급, 카발란 공략, 탑 보상 아이템 대량 판매 실시....

과연 이번엔 뭘까?

또 어떤 발표로 세상을 놀래 주려는 거지?

"험험!"

먼저 목소리부터 가다듬고.

천천히 열리는 입술.

"안녕하십니까. 한국 각성 관리청장 전광일입니다."

인사를 시작으로.

"먼저 검은 탑 붕괴 방지를 위해 지금도 등반 노력을 멈추지 않은 플레이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탑 공략을 통한 붕괴 시한 중첩, 상급 마정석 보상으로 이루어지는 문명의 발전, 80층대 거대 괴수 구간의 악몽, 여러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절망적인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차차차착! 착착!

터지는 플래시.

기자들은 알고 있다.

전광일이 말한 절망적인 일이 무엇인지.

중국에서 일어나 해방의 룬 목걸이 사태.

아마 이번 기자회견이 그에 관련된 것인가?

"네, 맞습니다. 해방의 룬 목걸이 이야기입니다. 탑 붕괴를 막는 데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그래서 없어도 되는 아이템 말이죠."

탑 붕괴는 탑을 등반함으로써 막을 수 있는 것.

현실에서 힘을 발현하는 목걸이가 왜 필요해?

"그래서 그동안 각국 정부는 그 목걸이를 철저하게 관리하고 통제해 왔습니다."

한국도, 미국도, 유럽의 국가들도.

"그런데 오류인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해방의 룬 목걸이가 저층에서도 나오면서 마구잡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차차차착! 차차차차차착!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더 시끄러워졌다.

"소수 빌런 플레이어들의 어긋난 행동으로 일반인과 대다수의 선량한 플레이어들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중국뿐 아니라 그 주변국, 아니 전 세계가 해방의 룬 목걸이를 경계해야 할 지경까지 왔습니다."

전광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점.

"이에 각성 관리청은 해방의 룬 목걸이의 무분별한 사용을 억제할 수 있는 아이템을 개발했습니다."

웅성웅성.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는 회견장.

전광일이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바로 이겁니다. 스펠 파워 바인딩 블록, 일명 마력 봉쇄 스크롤, 종이처럼 보이지만 대상을 정하고 찢으면 효력이 발생합니다. 사용 범위는 반경 50m, 모든 방향으로."

"스크롤 마법에 노출된 대상은 현실에서 마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최소 1시간, 길게는 2시간까지 봉쇄됩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저게 진짜라고?

"이 스크롤 아이템은 해방 빌런 플레이어들을 안전하게 제압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또한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끔 미연에 방지하는 억제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카메라 화면을 직시하는 전광일 청장.

"우리 각성 관리청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래서 해방의 룬 목걸이를 획득한 플레이어들에게도 간절하게 당부합니다."

"부디 잘못된 판단으로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진심 어린 인사를 했다.

발표 끝.

"이상으로 기자회견을 마치고 질문받겠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이 미친 듯이 손을 들었다.

전광일이 한 명 지목하자.

"수량은 충분합니까? 효과는 그렇다 쳐도 쓸 수 있는 양이 부족하면...."

"이미 대량 생산 체제를 완료했습니다. 종이로 된 아이템이라 필요한 만큼 찍어 낼 것입니다."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먼저 정부 기관부터 공급할 예정입니다. 지금도 한국 경찰서 및 파출소에 공급되고 있고요. 민간 공급은 나중에...."

"가격은요?"

"적당한 선에서 고민 중입니다만 장당 10만 원 선이 되지 않을까요."

또 다른 기자가 손을 들어.

"플레이어의 마력을 봉쇄한다는 게 올바른 일인지 의문입니다. 억압 수단으로도 사용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억압이라뇨. 원래부터 플레이어들은 현실에서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오직 탑 안에서만 발현됐죠."

"그래서 플레이어는 보호와 존중의 대상이었습니다. 현실에선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목숨 걸고 탑을 등반해 주니까."

"그러나 해방의 룬 목걸이 이후 플레이어들은 감시의 대상과 두려움의 존재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탑 붕괴를 막고 마정석을 채굴해 산업의 발전을 이끄는 분들입니다. 존경받아야 마땅합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전광일.

"하지만 전에 없던 갈등의 씨앗이 던져졌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의 플레이어가 해방의 룬 목걸이로 힘을 발현해서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의 표정엔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네, 제압해야 합니다. 총이나 미사일 헬기와 전차, 군대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상이 벌어질 겁니다. 중국처럼."

"하지만 이 스크롤이면 비교적 안전하게 문제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스크롤의 존재 이유.

알고 보면 억압이 아닌 보호.

"아이템 명칭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해방의 목걸이가 아니라 이간질의 목걸이입니다. 일반인과 플레이어를 갈라치는 아이템입니다."

악마가 뿌린 씨앗과 뭐가 다를까?

"이 목걸이가 퍼지면 퍼질수록 공동체 갈등은 점점 심화될 것이며 결국 탑 등반은 더 어려워질 겁니다."

그렇다.

전광일의 말이 맞다.

탑 등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물건.

오히려 중국처럼 분란만 일으킬 뿐.

바로 그때!

지목하지 않았는데도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 한 명, 중국에서 온 특파원 기자였다.

"중국엔 언제 공급할 예정이십니까? 현재 피해가 극심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공급해 주실 의사는 없으십니까?"

"글쎄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만."

전광일의 미온적인 태도에 이상함을 느낀 중국 기자가.

"지금 뭐죠? 중국에 판매하지 않겠다는 의사로 들리는데요?"

전광일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답했다.

"맞습니다. 당장은 중국에 마력 봉쇄 스크롤을 팔 생각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중국과 적대하겠다는 선언인가요?"

"만약 마력 봉쇄 스크롤을 중국에 공급하면 중국 정부가 선량한 플레이어에 대해 탄압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렇다.

중국은 다른 국가와 다르다.

해방의 룬 목걸이 이전부터 플레이어들을 억압해 왔다.

당장 과거 타국 플레이어 납치 사건만 봐도 안다.

그런 이유 탓에 마력 봉쇄 스크롤로 플레이어를 더 강하게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지금 중국이 이 지경까지 온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정부와 플레이어 간의 갈등 때문 아닌가요?"

전광일의 물음에 침묵하는 중국 기자.

"중국 정부는 자국 플레이어와 먼저 대화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동안의 부당한 탄압에 대해 먼저 사과하고 원만한 합의를 끌어내야 합니다."

"노력을 통해 관계가 정상화되면… 아니, 그러겠다고 약속만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마력 봉쇄의 스크롤을 공급하겠습니다."

중국 기자가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사과만 하면 되나요?"

"아니, 실질적인 행동을 보여 줘야죠."

"어떤...?"

"1차적으로 구금된 중국 플레이어 협회 회원 및 간부들을 석방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해외 망명을 원하면 그것도 허락하십시오."

"그, 그게 가능하리라고 봅니까?"

"가능하지 않으면 공급도 없습니다. 우리 각성 관리청은 처음부터 끝까지 플레이어들 편입니다. 국적 상관없이."

"...."

기자회견이 끝이 났다.

이로써 널리 알려진 마력 봉쇄 스크롤의 존재.

또 한 번 대한민국과 각성 관리청의 이름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 * *

백악관 회의실.

TV 화면으로 기자회견을 끝까지 지켜보던 로이드 대통령이 맥밀란 장관에게 물었다.

"사실이겠지?"

"거짓일 리가요."

"이번에도 봉 플레이어?"

"당연하죠."

그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당장 구매해서 경찰들에게 지급하고, 또 일반인도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쓸데없이 민간인 총기 소지나 확대하지 말고."

"흐음."

"일상에선 그저 단순한 종잇조각입니다. 하지만 해방된 빌런 플레이어에겐 효과가 확실하고요."

맞다.

용도가 특정된 아이템.

평상시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그래서 매우 안전한 아이템이고.

"지금 뭘 하나? 당장 각성 관리청에 연락해서 수량을 확보해야지."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예산만 집행해 주세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 와중에도 평양 탑 공장의 마력 봉쇄 스크롤 인쇄기는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178화

한국 각성 관리청의 기자회견은 또 한 번 전 세계를 강타했다.

스펠 파워 바인딩 블록, 일명 마력 봉쇄 스크롤.

그저 종이였다.

심지어 플레이어 인벤토리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제작에 쓰인 종이가 지구 물건이기 때문에.

솔직히 효과가 있는지도 의문.

저걸 찢는다고 진짜 달라져?

가끔 올라오는 중국 사태에 관한 SNS 동영상을 보면, 해방 플레이어들은 거의 초인급의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슈퍼 파워 빌런들을 종이 하나로 제압한다니.

하지만 제일 먼저 스크롤 공급을 요청한 국가는 미국.

그것도 1차 물량으로 300만 장, 2억 2천만 달러어치였다.

과연 미국이 효과도 없는 종이 쪼가리를 2억 2천만 달러나 주고 살까?

걔들이 바보야?

마력 봉쇄 효과는 분명할 것이다.

한국 각성 관리청이 세계적으로 사기 칠 일은 없지 않나?

일단은 주문하고 보자.

이게 총기 같은 무기류였다면 수입이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단순한 전단지.

종이 묶음 비행기에 실어 오면 된다.

한 장씩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돌발 상황이 생기면 찢으면 그만.

이걸 써야 할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러면 오히려 더 좋지.

세계 각국에서 주문이 빗발쳤다.

하지만 물량도 순서가 있는 법.

1순위는 대한민국 관공서 공급부터, 그런 다음 주문한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마력 봉쇄 스크롤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했다.

└ 저걸 찢으면 돼? 되게 간단하네.

└ 탑 안에서도 될까?

└ 될걸? 마력을 묶는 거니까. 하지만 안에서 사용하는 미친놈은 없겠지?

└ 저걸로는 부족하지 않나? 해방 빌런 플레이어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쓰기도 전에....

└ 그래도 총보다는 낫잖아.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쓸 수도 있고.

└ 빨리 민간에도 팔았으면 좋겠다. 한 장 가지고 다니게.

이 스크롤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국 사태처럼 일을 키우지 않고 비교적 안전하게 제압이 가능하다는 것.

또한 억제제 역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플레이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 해방의 룬 목걸이가 만능은 아니다.

- 마력은 언제든 봉쇄될 수 있다.

- 심지어 일반인에게도.

- 그러니 무력으로 뭘 해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물론 우려 섞인 시선도 있었다.

중국에서 그 사태가 벌어진 건 정부가 별 이유 없이 플레이어들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 중국 정부를 탓해야지. 왜 불쌍한 플레이어들을 봉쇄해?

└ 그래서 중국은 수출 안 하잖아.

└ 다른 나라 플레이어들은? 해방의 룬 목걸이도 탑에서 나온 아이템인데, 아예 못 쓰게 하는 거잖아.

└ 그러니까 목걸이를 왜 사용해? 아하! 너 하나 가지고 있구나?

└ 수상한데, 그걸로 뭘 하려고.

└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하지 마라.

└ 저런 놈들을 위해 스크롤을 만든 거였어.

└ 나도 플레이어지만 힘을 쓰고 싶으면 탑 안에서 해. 현실 말고.

중국은 특별한 경우.

그곳에서 억압받는 사람이 어디 플레이어뿐인가?

독재국가다.

일반인이고 플레이어이고, 가릴 것 없이 탄압하는 국가.

과거 전력을 보면 답이 나온다.

시민들의 정당한 비판, 그리고 그에 따른 저항과 시위, 단체 행동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총칼과 탱크로 짓밟고, 잡아 가두고.

플레이어라고 해서 다를까?

└ 중국이 사과하겠어? 플레이어들 납치해서 강제로 귀화시켰던 놈들인데.

└ 사과한다고 해도 하는 척만 할걸?

└ 아마 붙잡힌 저항 플레이어들도 이미 사형시켰을 거야.

└ 아무튼 절대 중국엔 스크롤을 한 장도 넘어가지 못 하게 해야 해.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중국 정부가 절대 사과하지 않으리라는 걸.

*

중국 정부 입장에서도 이 갈등을 오래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봉합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일이 한번 터지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도 터지고, 저기서도 터지고.

심지어 중국 국가 육성 플레이어들도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미공략 상층 등반의 핵심 인력들 말이다.

어찌 됐든 그들도 같은 플레이어.

해방의 룬 목걸이가 적용되는 위험 분자들.

게다가 레벨도 높다.

아이템 풀장착하면 진짜 미사일이나 로켓이 아니고서는 상처도 내지 못한다.

겉으로 보면 달래는 척 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국가 육성 플레이어에게도 감시를 강화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알려진 마력 봉쇄 스크롤.

이번에도 역시 한국에서 유통하는 외부 제작 아이템.

현재 중국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이다.

어쩌면 해방된 플레이어들을 안전하게 제압할 유일한 수단이다.

그래서 발표하자마자 귀가 솔깃했는데.

선결 조건?

자국 플레이어들에게 사과하고, 원하는 자에게 망명을 허락하라고?

감히! 누가 누굴 보고?

"이건 내정간섭이오. 공식적으로 항의해야지."

중국 공산당 간부 및 정부 관리가 모인 중앙 비상 위원 회의.

"항의는 무슨! 선전포고로 가야 합니다."

"맞소.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줍시다."

"고작해야 탑을 등반하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

"먼저 경제 제재부터 가해야죠. 중국 내 모든 한국 기업, 모조리 문 닫게 해야 합니다."

"북한도 그냥 둬선 안 되죠. 다 한통속이에요. 배은망덕하게, 그동안 돌봐준 은혜도 모르고."

"전 인민해방군 비상령 선포하고, 서해로 항모와 잠수함 이동시킵시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었다.

"망명 허락까지는 몰라도 일반 플레이어들과 대화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그래요. 계속 이대로 가면 수습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를지도 몰라요."

"우리가 먼저 양보해야 합니다. 플레이어 협회 수뇌부 풀어주고 대화합시다."

그러나 강경파들이 훨씬 많은 상황,

"제정신입니까? 지금 사고를 일으킨 플레이어들 죄다 범죄자들이에요. 범죄자들과 무슨 대화를!"

"플레이어 협회? 국가 전복 세력과 말이오?"

"그래 봐야 한 줌이에요. 싹 잡아들여 처단해야 합니다."

"우리 정부가 녹록하지 않다는 걸 인식시켜 줘야 해요."

"솔직히 플레이어들, 그놈들이 뭘 한 게 있다고?"

사실 중국 정치권에서 플레이어들에 대한 인식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중국 지도자들의 자국 플레이어 불신은 오래됐다.

국가가 육성하는 플레이어조차도.

그럴 만한 배경도 있었다.

탑 등반 초기.

중국에 솟아난 3개의 탑.

탑 붕괴를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 플레이어들을 키워 왔나?

하지만 날이 갈수록 결과는 대실망이었다.

59층의 벽을 넘지 못해 허덕였다.

오죽하면 타국 플레이어들을 납치까지 해서 탑을 등반하려 했을까?

결국 러시아의 힘을 빌려서 탑을 공략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이권을 양보해야 했고.

언데드 구간을 돌파해서 71층에 올라간 것도 그렇다.

탑 점핑 티켓을 이용한 편법 공략.

그렇게 간신히 올려보내 줬더니 바이룽이란 놈은 은혜도 모르고 국가 주석 왕위안을 살해했고.

이래저래 자국 플레이어들에 대한 신뢰감이 바닥에 떨어진 중국 정부.

보호는 개뿔, 능력도 없는 것들이.

반면 한국은?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탑 등반 국가.

탑 클래스 플레이어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당장 세계 최고 플레이어를 제외해도 남가은이라든지, 이민아라든지, 그 외 엘리트 플레이어 수십 명이 70층대에 등반 중.

치욕적인 일이다.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공지가 들릴 때마다 질투가 끓어올랐다.

그런데 뭐?

중국 플레이어 협회원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고?

구금된 자들을 풀어 주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그럴 가치조차 없다.

"먼저 한국에 대한 제재 방안부터 검토합시다. 이제부터 한국은 중국의 적대국입니다."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북한이 남한과 붙었어요. 이제 한국도 핵보유국이죠."

"북한은 그렇다 치고 미국은? 미국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요."

"그럼 이대로 넘어가자고요?"

만나면 싸워 대기 바쁜 중국 권력자들.

"이게 다 중국을 이끄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석 선출부터 서두릅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말이 되는 소립니까?"

"의사 결정이 하나도 안 되잖아요."

"주석이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말해요."

사실상 사태 해결 의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

일본 도쿄 총리 관저.

플레이어 출신의 민혁당 마에다 총리가 주재하는 회의.

정권 교체가 되었지만 민혁당의 지지기반은 극히 허약하다.

일본 자유당 정권이 우익을 등에 업고 일본을 장악한 세월이 70년.

그런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뀔까?

관료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기업들도 그렇고.

아직 일본의 중심 권력은 자유당.

그러나 마에다 총리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플레이어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본 정치계를 야금야금 장악하고 있었다.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뿌리 깊은 우익 세력이 그리 만만할 리가.

지지율도 정체 상태고.

그 와중에 터진 중국 사태.

더불어 한국 각성 관리청의 발표.

"우리도 마력 봉쇄 스크롤을 들여와야 합니다."

"그래요. 일본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일한 관계도 좋아졌으니."

"일선 경찰관들에게 나눠 줄 스크롤이 시급합니다."

"하지만 생각 잘해야 해요. 지지율이 떨어질 겁니다. 또 한국에 손을 벌린다고, 이번에는 뭘 퍼다 줄 거냐면서."

"지금 지지율이 문제입니까? 중국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그러다 사고라도 일어나면? 그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할 텐데."

같은 민혁당 안에서도 갑론을박.

하지만 마에다 총리는 이미 결심했다.

"도입합시다."

"네, 대사관을 통해 주문을 넣어 보겠습니다."

주문한다고 해도 한참 걸릴 터.

최소 한 달 이상.

다른 국가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으나 일본은 이것저것 재느라 결정이 늦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늦게나마 했으니.

'그나저나 이 목걸이는 이제 필요 없겠군.'

사실 플레이어 출신의 마에다 총리도 아무도 모르게 해방의 룬 목걸이를 옷 속에 착용하고 있었다.

일본도 71층에 올라 4종 선물 세트를 받았으니까.

다른 아이템들은 곱게 국가 기록 보관실 안에 모셔져 있었다.

목걸이만 몰래 빼돌렸고.

왜?

지금까지의 일본 총리 수난사.

가와구치 총리는 신규 탑 생성 사고로 죽고, 우스다 총리 대행은 쿠데타 세력에게 죽고.

그런 이유로 마에다는 무리를 해서라도 해방의 룬 목걸이를 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력 봉쇄 스크롤이 나왔으니.

'괜히 빼돌렸어.'

어차피 스크롤 한 장이면 무력화되는데 말이다.

*

평양 검은 탑 주변.

이곳이 마력 봉쇄 스크롤을 생산하는 곳이라는 걸 사람들은 아직 잘 모른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 중 하나인 북한.

그래서 보안만큼은 최고 수준.

아직은 가건물밖에 없는 황량한 공장 부지였다.

그러나 마공학 스크롤 인쇄기는 쉴 틈 없이 돌아갔다.

촤촤촤촤촤촤촤촤....

만들어진 마법 스크롤은 트럭에 실어 각성 관리청에 1차 납품.

거기서 주문받은 수량대로 2차 유통.

라직스 물산을 통한 판매는 나중에.

민간인들에게 유통할 때.

한국은 물론 미국에도 항공편으로 팔려 나갔다.

거기가 제일 먼저 주문한 국가라서.

다른 나라에서도 주문이 밀려들었다.

북한 노동자들도 정신없이 일했다.

약품으로 가공된 인쇄지 바싹 말리고, 말린 용지를 인쇄기에 장착하고, 인쇄된 스크롤을 장수에 맞게 묶어서 쌓아 두고, 트럭이 오면 실어 주고.

뿐인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기초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비만 탈출의 팔찌 양산 공장.

그리고 마도 공학자 엘이 자동화 기계를 제작하고 있는 중.

코사크는 감격한 눈초리.

설비도 제대로 안 된 이 가건물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량이라니.

가능성을 확인했다.

앞으로 인챈트 비만 탈출의 팔찌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생산하면 된다.

"산업역군 동무들! 고생이 많구만 기래, 상부에 보고해서 동무들 보너스 두둑이 챙겨갈 수 있게 하갔어!"

북한 노동자들은 감격했다.

세상에!

보너스도 준다고?

이런 건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일이나 어려우면 그러려니 하지.

힘든 일도 아니다.

밥도 주고 간식도 주는 판에.

일당 또한 달러나 원화로 바로바로 쳐준다.

요즘은 달러보다 원화의 인기가 높다.

그래서 다들 한국 돈으로 일당을 받았다.

장마당에서도 원화만 받는다.

공화국 화폐 같은 건 휴짓조각이나 다름없었다.

당국의 규제도 없는 상황이고.

아아아.

이 달콤한 자본주의의 꿀맛.

빨리 통일 안 되나?

벌어 둔 돈 제대로 쓰고 싶은데.

그런 의미에서.

"인민무력부장 동지! 내레 드릴 말씀이 있습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북한 노동자 작업반장이 대표로 나와 고사극에게 말했다.

"뭐이가? 말해보라우!"

"맨날 거짓부렁 삐라만 작업하다가, 일케 세계평화를 위한 혁명적 과업을 수행하니 스스로가 자랑스럽습메다."

"기래서?"

"야근을 허락해 주시라요. 이 한 몸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일하겠습네다."

인민무력부장 고사극은 더없이 만족했다.

야근을 자처하다니.

참으로 훌륭한 머슴들 아닌가?

이런 머슴들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동무들의 눈물 어린 충심, 내레 감격했어. 좋디, 오늘부터 야근 허락하갔어! 야근 수당도 챙겨줄 거이니까니, 열심히 일해보라우!"

"…야근 수당도 주신단 말임메까?"

"기카면 공짜로 부릴 줄 알았네? 야근 수당은 주간 수당의 1.5배가 기본이디."

"가, 감사함메다!"

야근 허락 소식에 우르르 몰려오는 코사크 주위로 몰려오는 북한 노동자들.

모두 환희에 찬 표정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어."

"우매한 인민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라요, 인민무력부장 동지."

"라직스 물산 알디?"

어떻게 모를 수가.

"앞으로 이 공장은 쭉 라직스 물산 북한 지사에서 운영할 계획이야. 기카면 동무들은 라직스 물산의 정규직이 되는 거디. 어떠네?"

북한 노동자들의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들도 눈과 귀가 있다.

라직스 물산.

남한에서도 매우 인기가 높아 취직하기도 힘든 기업.

대기업과 비교해도 연봉, 복지, 직원 처우,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그런 기업의 정규직이라고?

여기서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어디서 만세를 부르나?

"인민무력부장 고사극 동지 만세!"

하지만 코사크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고조 큰일 날 소리 하디 말라우! 누가 보면 내가 공화국 지도자인 줄 알가써야!"

그럼?

"동무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주체적 혁명 정신이야! 주혁 정신으로 똘똘 뭉쳐 혁명 과업을 완수해야 하지 않카서?"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북한 노동자들.

"맞습메다. 주체적 혁명 정신으로 주어진 과업을 1,000% 이상 달성하갔습메다."

"좋아!"

감동이라도 받은 듯 눈시울이 붉어진 코사크.

착!

발을 모아 차렷 자세를 만들더니.

절도 있는 자세로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주혁 만세! 라직스 만세!"

코사크의 선창.

"주혁 만세! 라직스 만세!"

"주혁 만세! 라직스 만세!"

"주혁 만세! 라직스 만세!"

.

.

.

연신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치는 북한 노동자들.

코사크의 눈빛에 광기가 흘렀다.

누구보다 큰 동작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광기는 전염되는 법.

북한 노동자들도 팔이 빠질 정도로 힘차게, 목청이 터질 정도로 크게 만세를 불렀다.

"허허."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는 광마.

"살다 살다 저 암살자 같은 놈은 처음이야. 실로 신기한 놈이로다."

"그야말로 찐 광기지요."

"사이비 교주도 저 정도는 아니겠습니다."

"당장 사이비 교주를 해도 밥 먹고 살겠는데요?"

"소녀도 가끔 코사크 님이 다중 인격자가 아닐지 의심하고 있사옵니다."

"그래도 전사는 인정한다. 소환사에게 도움이 되고 있으니."

"맞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9서클 마법사 매켄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는 해야 2인자구나.'

무서운 놈이다.

감히 심계를 측량할 수도 없는 놈.

원래 2인자의 숙명이 그렇다.

욕심을 내면 1인자에게 밟힌다.

라직스 만세를 유도함으로써 1인자의 지위를 욕심내지 않고 2인자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

'후우, 그래, 훌륭하다. 하지만!'

매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에서 좌절하면 되나?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다.

코사크를 밟고 2인자로 우뚝 설 기회가 말이다.

*

백색 탑 17층.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순조로운 스크롤 생산.

평양 검은 탑 공장은 시끌벅적했지만 백색 탑은 조용하다.

피소환인 다들 공장에 파견 나가 일하는 중이기에.

홀로 남은 주혁은 의자를 놓고 앉았다.

느긋하게 상체를 눕혀 저 랜드마크 빌딩 정상만 바라봤다.

라직스가 폐관 수련을 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베 원사도 일주일 만에 왔다.

육체를 가지고 백색 탑에서 돌파하니 시간이 절반이나 단축된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고.

그렇다면 오늘.

저 랜드마크 꼭대기에서 빛이 솟아오를 것이다.

언제 오지?

빠르면 오전 안으로 올 텐데.

179화

주혁은 백색 탑에서 계속 라직스를 기다렸다.

피소환인들은 다 평양 검은 탑 현장에 나가 있었다.

주문 물량이 밀렸느니.

일손이 부족하다느니.

비만 탈출 팔찌의 양산화도 서둘러야 한다느니 하면서.

오죽하면 방구석 대인기피증 연금술사 마리도 불려 나갔을까.

스크롤 용지 처리 약품과 잉크를 만드라고.

혼자 시간 보내는 거, 예전에 자주 해봐서 괜찮다.

이렇게 기다리다 보니.

스팟!

전광일 청장이 찾아왔고.

"어서 오세요. 청장님."

"아, 혼자 계셨네요."

"다들 가버렸어요."

"네? 으흠, 어, 어딜?"

"평양 공장에요."

"…아."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해방의 룬 목걸이를 하나 더 사용해 실험해 봤습니다."

"어떤 실험요?"

"고레벨 플레이어에 대한 저항성 실험입니다."

스크롤도 한계가 있다.

마력이 높을수록 저항력이 강해진다는 것.

"70레벨대 이상 플레이어도 마력 봉쇄 효과는 같습니다. 다만 지속 시간이 짧아졌습니다."

50레벨 대와 비교하면 절반 이하란다.

하긴 20레벨 차이면 엄청난데.

전에 매켄지가 이야기한바 있다.

스스알이나 7서클,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는 스크롤 마법을 무시할 수 있다고.

"같은 레벨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고요."

"재능의 차이인가요?"

"아마도요."

이런저런 대화로 시간이 흐르고.

전광일은 업무 때문에 다시 밖으로 나가고.

주혁은 또 계속 혼자서 라직스 기다리기.

그런데 저 빌딩은 언제 빛나나?

'오랜만에 호젓하니 좋긴 하지만.'

슬슬 졸린다.

깜빡 졸았다가 다시 눈을 뜨고.

이렇게 하염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화아아아앗!

"오!!!"

의자에서 발딱 일어나는 주혁.

빛이다.

랜드마크 꼭대기가 등대처럼 빛났다.

"온다!!!"

스파파팟!

주혁은 서둘러 달려가서 빌딩 로비에 도착했다.

내려온다.

엘리베이트가 천천히 하강하고 있다.

랜드마크 꼭대기에서.

근데 왜 저렇게 느려 터졌지?

빨리 좀 내려와라.

스스알이었을 때 우주대머슴 카탈로그 명칭은 이랬다.

<카탈로그 : 수인족 출신의 충실하고 믿음직한 만능 천재 일꾼>

딱 들어맞는 수식어.

충실한 건 기본, 누구보다 믿음직했고, 못 하는 게 없는 만능이었고, 또한 천재였다.

그럼 르스스알 라직스는 어떤 모습일까?

'빨리 내려와라. 빨리.'

위이이잉!

거의 다 내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띵!

도착을 울리는 기계음.

스르륵.

문이 열린다.

"호아!!!"

맑고 청량한 햄스터의 힘찬 포효.

라직스였다.

"왔구나!!!"

라직스도 주혁을 봤다.

"라직스 씨!"

보자마자 데구르르르르, 힘차게 굴러왔다.

그러더니, 주혁 앞에서 퉁! 튀어 올라 허공으로.

휘리리릿!

"와!"

팽그르르르!

마치 체조선수처럼 허공에서 공중제비 5회전을 한 후.

"호랏!"

차악!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한 손은 바닥, 다른 한 손은 뒤로 쭉 뻗어서 잠시 정지.

히어로 착지였다.

"아이고, 우리 우주대머슴!!!"

덥석!

"후엣?"

주혁은 라직스를 와락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호엣! 후아앗!"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한참을 끌어안고 욕망을 한껏 채운 뒤에야 라직스를 풀어주는 주혁.

"후아아아...."

"하하하하!"

이제야 눈에 들어온 라직스.

외형의 변화는 크게 없었다.

더 보들보들 윤기 나는 털, 예전처럼 동글동글한 머리와 몸, 짤막한 팔다리.

어떻게 보면 더 귀여워진 것 같기도.

다만 머리에 쓴 안전모가 변했다.

예전엔 황금이었는데 지금은 은백색의 안전모.

실버 재질은 아니다.

무광에 고풍스러운 빛깔.

'이거 혹시....'

플래티넘.

맞다.

플래티넘 재질과 똑같다.

'황금 도구에서 플래티넘 도구로 교체된 건가?'

정보는?

돌파 성공?

<카탈로그 : 일꾼으로서 더 올라갈 곳 없이 정점에 다다른 차원 최고의 거장.>

- 이름 : 라직스

- 등급 : LSSR(레전드 스페셜 슈퍼 레어)

차원 최고의 거장!

그럼 차원대머슴!

"잠깐만 기다려요. 여기 있어요."

"호아?"

"조금 있다가 불러줄 테니까."

이 기쁨을 혼자서 누릴 수 없다.

사람들에게 알려 줘야지.

주혁은 서둘러 밖으로 나와 탑에 입장했다.

그러고 나서 탑 퇴장의 가락지를 이용해 평양 검은 탑으로 빠져나오자.

"봉 소환사님 오셨슴까?"

"굳이 나오지 않으셔도 되옵니다만,"

"일은 우리가 다 한다. 소환사는 놀아라."

"그래도 이왕 오셨으니 대동강 들쭉술이나 한잔합시다."

광마의 말에 핀잔을 주는 코사크.

"거, 광 영감님은 틈만 나면 술임까? 일 좀 하십쇼. 우리 방구석 연금술사는 저 건물에서 혼자 잉크 만드느라 태블릿 덕질도 못 하고 있슴다."

"커험!"

주혁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소개해드릴 분이 계셔서요."

"누굴...."

"제가 좋아하는 분."

"으잉? 서, 설마 여자친구?"

"경사스러운 일이옵니다. 봉씨 집안의 대를 이어나갈 수 있겠사옵니다."

"…설마 진숙이는 아니겠지 말임다. 진숙이라면 연애는 오케이, 결혼은 반대임다."

뭐래?

"여자친구 아닙니다."

"넴?"

"부를게요."

심호흡 한번 하고.

"라직스 지정 소환!"

깜짝 놀라는 피소환인들.

"엥?"

"헉!"

"오!"

"아...."

"벌써?"

라직스? 진짜 라직스라고?

그리고, 스팟!

"호아앗!!!"

두 손을 번쩍 들고 모습을 드러낸 복슬복슬한 털뭉치.

"호에! 왔다."

"호에에, 호에에엥이다!!!"

"호엥 만세!"

"이제 호에 아임다. 호아앗임다. 어휘력이 늘었슴다."

"허허허, 어서 오시오."

"소녀, 감탄이 절로 나옵나이다. 이렇게 듬직하신 모습이라니."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보급 참모 사령관님께 경례! 필승!"

평양 검은 탑 인쇄 공장 경비견으로 임무를 부여받아 주위를 순찰 중이던 혈랑도.

"컹컹컹컹!"

라직스를 보자마자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달려들었다.

"후이?"

"끼이잉!"

할짝할짝!

연신 라직스의 얼굴을 핥아대는 혈랑.

"자자, 뭐 하심까? 헹가래 한번 쳐야함다."

그리하여 평양 검은 탑 하늘 상공으로 번쩍번쩍 올라가는 라직스의 몸.

"호라라라랏!"

우리 차원대머슴, 이제는 헹가래를 당해도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심지어 즐기고 있었다.

공중제비 팽그르르, 돌면서.

이쯤에서 궁금한 점.

실질적인 능력은 얼마나 발전했을까?

스스알 등급이었을 때도 웬만한 르스스알을 기겁하게 했던 룰 브레이커 라직스.

알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뭐, 급한 거 있나?'

천천히 알아보면 되지.

원래 맛있는 건 아껴먹는 법이다.

*

백색 탑 17층.

차원대머슴 라직스.

그의 돌파를 축하하는 환영식.

피소환인은 물론 정동훈 대표도 초대됐다.

"정 대표님, 어서 오세요. 마법은 많이 늘었습니까?"

"스, 스승님 덕분에...."

전광일 청장도 빠질 수 있나?

주혁에 호출에 하던 일 잠시 멈추고 백색 탑으로.

"오! 전 청장, 기자회견 잘 봤네. 언변이 청산유수더군."

"나도 들었슴다. 우리 각성 관리청은 플레이어 편임다! 캬! 감동적이었슴다."

"역시 큰일을 할 자격이 되옵니다."

정동훈과 전광일도 등급을 돌파하고 돌아온 라직스를 축하해 줬다.

미리 선물도 준비한 모양.

정동훈이 라직스에게.

"창업주님, 특별 주문 제작한 물건입니다. 딱 맞으실 겁니다."

"후아?"

라직스 얼굴 크기에 딱 맞춘 선글라스.

벗겨지지 않게 안경다리에 체인까지 달아서.

"오오오! 카리스마!"

"호엥!"

"특수 비밀 요원 같슴다."

"호아?"

"보급 참모 사령관님에게 너무 잘 어울립니다."

띠링!

<마리> : 귀여워요.

잔뜩 바람이 들어간 라직스의 부푼 가슴.

매켄지가 특별히 스포트라이트 마법을 그에게 비춰졌다.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며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라직스.

동시에 그를 따라다니는 집중조명, 더불어 그의 머리 위에서 터지는 불꽃.

펑펑펑펑!

"호아아앗!"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당찬 기합을 내지르는 라직스.

"아유, 르스스알의 걸음걸이임다."

"소녀, 너무 흐뭇해서 안아보고 싶사옵니다."

"안전모도 멋집니다."

"그래, 황금은 너무 촌스러웠어. 플래티넘이 더 고급져."

파티 준비나 해보자.

일단 의자와 탁자를 꺼내서....

그런데 갑자기 스윽, 손을 들어 올리는 라직스.

그러자!

파바바바바박!

순식간에 나타나는 탁자와 의자들, 그리고 그 위에 잘 차려진 음식들.

"와!"

"원터치 상차림!"

"이게 바로 르스스알이다!!!"

시끌벅적한 잔치가 이어졌다.

라직스가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베 원사가 노래를 부르고, 견달래가 춤을 추고....

그렇게 시끌벅적했던 잔치도 끝나고.

차원대머슴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연히 청소였다.

솔직히 라직스가 등급 돌파하려고 자리를 비운 사이, 17층은 난장판이었다.

주택가로 가서 청소 시작, 그런 후에 랜드마크건물도, 도로도 쓸고, 창고도 정비하고.

마지막은 마도 공학자 엘의 작업장.

여기가 가장 더럽긴 했다.

"후아아아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현장을 보며 경악한 후에.

데구르르, 쓱쓱, 데구르르, 싹싹.

참 열심히도 한다.

그렇다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한번 훑고 지나가면 청소 끝.

번쩍번쩍!

그가 지나온 길엔 윤기까지 흘렀다.

과연 르스스알 일꾼의 청소 실력.

주혁은 라직스가 청소하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이게 보는 재미가 있다.

더러운 쓰레기장이 차곡차곡 정리된 공간으로 변하는 모습.

'이런 게 힐링이지.'

마도 공학자 엘도 이상한 막대기 하나를 들고 멍하니 지켜만 봤다.

막대기라.

저건 왜 들고 있어?

아마 라직스가 쓰레기로 착각해서 버릴까 봐 손에 들고 있는 모양인데.

가만!

저거 많이 보던 거다.

생긴 게 흡사....

'마총?'

맞다!

마총이다.

SR 시절의 베 중사가 들고 다녔던 그 마총과 비슷했다.

구식 마총 말이다.

"엘 씨, 혹시 그거 마총인가요?"

"네, 거대괴수 공략용으로 제작해 봤습니다."

대여용 마총이었다.

일전에 만들어 보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타 플레이어들이 81층을 공략할 수 있게끔.

"초기 버전 마총입니다."

"이것도 마정석 탄환을 사용하나요?"

"아닙니다. 탄환은 특별 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작업장 구석에 놓인 나무 상자를 열어서.

"여기 이 탄환들입니다. 괴수 종류에 따라 적용되는 탄환의 속성도 다릅니다."

"아하!"

"이건 송곳 지연 폭발 탄환 마총, 81층 베헤모스에 특화된 거죠.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 내부에서 터집니다."

82층도.

"82층은 톱니 칼날 회전탄입니다, 아포피스 가죽이 비교적 약하다는 부분에 착안했습니다. 탄환 크기가 작지만 회전으로 놈을 찢어 버립니다."

83층은?

"광역 소이 탄환, 매켄지 씨가 파이어 계열 마법을 인챈트한 특수 탄환입니다. 싹 다 불태워 버립니다."

83층은 여왕 거미와 새끼들이 나오니 불태우는 게 맞지.

어쨌든 상자 안의 탄환은 모두 3종류.

"아직 연구 중이라 제작은 못 했지만 84층 콜로서스 콘도르는 맹독 쐐기 탄환을 적용할 계획입니다."

맹독이라.

연금술사가 있으니 독을 만드는 것쯤이야.

"85층도 가능할까요?"

"네, EMP 폭탄을 탄환 형식으로 만들어 보려고요."

역시 마도 공학자다.

벌써 3종류의 속성 탄환을 뚝딱 만들어 내다니.

"기간트에서 얻어낸 특수 금속과 부품, 마력 회로가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저기, 라직스 씨가 없었다면 훨씬 오래 걸렸을 테죠."

겸손하기까지.

"제가 그 마총 들어봐도...."

"얼마든지요. 하지만 프로토타입이라 많이 부족합니다."

들어보니 꽤 묵직하다.

"유도 기능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집어넣으려면 시간이 매우 많이 걸려서."

감회가 새롭네.

군시절 고생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주혁의 군 생활은 어땠을까?

의외로 괜찮았다.

수년간의 생존 본능으로 다져진 분위기 파악 능력 때문에.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지.

"쏴봐도 되나요?"

"네, 표적판 세우겠습니다."

"표적 말고 실전에서 쏴보죠. 81층부터."

사람들을 모아 볼까?

오랜만에 탑 공략.

목적은 프로토타입 마총 실전 실험.

*

주혁은 피소환인들을 소집했다.

프로토타입 마총 실험하러 가는 데 인원이 많이 필요할까?

딱 필요한 사람만.

나머진 평양 검은 탑 공장을 지키고.

코사크, 고방, 광마, 베 원사, 매켄지, 견달래, 마도공학자 엘, 그리고 라직스.

[대한민국 검은 탑(NO.1) 81층에 입장합니다.]

임무 받고.

[81층 임무 : 거대괴수 베헤모스 1마리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엄청나게 큰 체구의 대형 곰.

사족보행의 거대 육상 괴수.

쿵! 쿵! 쿵! 쿵!

한 발씩 움직일 때마다 땅이 들썩인다.

다시 봐도 크긴 크다.

한번 맞혀 볼까?

"혹시 마총을 쓰신 경험은 있으신지."

"조준하고 방아쇠 당기면 되는 거 아닌가요?"

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마총은 사용자의 마력으로 격발됩니다. 마력의 총량에 따라 위력도 달라지고요. 여기 손잡이를 잡고 마력을 불어넣으시면...."

아!

마력이 있어야 하는구나.

그래서 마총이겠지.

"맞히기 어려우실 겁니다. 실패해도 괜찮으니...."

순간 끼어드는 코사크.

"에이, 지금 우리 군필 봉 소환사님 무시하심까?"

그렇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군필 상남자를 뭘로 보고.

저렇게 큰 놈인데, 대충 쏴도 맞을 것 같은데

"백발백중 봉 병장 아임까! 우리 봉 병장님 사격 만발로 포상 휴가까지 받았지 말임다."

"호에?"

"...."

아니, 왜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

사람 부담스럽게.

특히 베 원사의 초롱초롱한 눈빛.

신중하게 베헤모스 조준해서,

손잡이를 통해 마력을 지이이잉....

'어우.'

이게 조준만 하면 괜찮겠는데 마력도 동시에 불어넣으려고 하니 총열이 마구마구 떨린다.

'그래도....'

검지에 힘을 줘서.

크릭!

바주주주죽!!!

순간!

"헉!"

엄청난 반동.

총구가 위로 번쩍 들렸다.

쐐애애애액!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송곳 지연 폭발 탄환.

그러나 베헤모스 머리 위로 멀리 점이 되어 사라졌다.

목표물과는 한참 멀었다.

하도 터무니없이 빗나가서 베헤모스는 자신에게 공격이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호, 홈런임다."

"...."

방정맞은 코사크의 말에 찌릿! 살벌하게 노려보는 피소환인들.

아아아.

민망해라.

"저런...?"

베 원사가 재빨리 엘을 추궁했다.

"영점도 안 잡힌 총이군요. 저런 불량 마총을 어떻게 지휘관님께 드렸습니까?"

"베 원사 말이 맞사옵니다. 마총이 잘못한 겁니다."

"불쾌하군. 마력을 주입하는 데 총열이 저렇게 떨려서야, 노부도 맞히지 못한다."

"하다못해 레이저 조준기라도 달아야지."

홈런이라고 말했던 코사크도 재빠르게.

"베헤모스 저놈도 잘못했슴다. 봉 소환사님께서 직접 총을 쏘시는데, 알아서 대가리를 들이밀어야 하는 거 아임까?"

"전사가 놈의 머리를 잡고 있겠다."

"호앗!!!"

마도 공학자 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잘못이 맞습니다. 불량품입니다."

"알면 됐소."

"르스스알 마도 공학자가 이딴 총이나 만들고, 소환사님 심기 불편하게."

"엘 동무! 자아비판 하시오! 아니면 인민무력부장 권한으로 인민재판에 회부하겠소."

제발 그만해요.

더 쪽팔리잖아요.

"…한 번만 더 쏴볼게요."

꿀꺽.

침을 삼키고는.

조준, 그리고 마력 주입.

지이이이이....

드드드드드드.

진동하는 마총.

이거 제어하기 어렵다.

86레벨의 플레이어인 자신인데도 말이다.

꿀꺽!

집중, 또 집중.

총열에 바둑알을 놓고 사격 연습하던 경험을 떠올리며.

바주주주죽!!!

쐐애애애액!

파앗!

이어지는 반동.

베헤모스 머리 위를 살짝 빗나가는 탄환.

"아!"

"아깝사옵니다."

"바람 때문임다. 조준은 정확했슴다."

"후아아아...."

바람은 무슨!

총알이 골프공이야?

그래도 전보다는 좀 낫다.

베헤모스가 움직임을 멈추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계속 쏠까, 말까?

포기는 없다.

이번엔 맞힌다.

체면이 있지.

힘내자 봉 병장.

지이이이잉!

바주주주죽!

쐐애애애액!

푹!

"꾸익?"

이번에는 정확하게 베헤모스 몸통에 명중.

바로 이거지!

"내가 바로 예비력 병장 봉주혁이다!!!"

그리고 퍽!

총알이 들어간 베헤모스의 몸체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꾸에에에엑!

고통스러워하는 베헤모스.

만회 성공!

"백발백중 봉 뱀!!!"

"이제 영점이 잡히셨군요."

"실로 명사수이옵니다."

"하하하, 멋지시오."

짝짝짝짝짝!

어후, 간신히 체면치레는 했네.

갑자기 드는 궁금증.

베 원사는 어떨까?

"한번 쏴 보실래요?"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해보겠습니다."

"영점이 안 잡혔으니까 못 맞히실 수도."

"괜찮습니다."

프로토타입 마총을 넘겨받은 베 원사.

마침 잔뜩 성이 난 채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베헤모스.

쿵쿵쿵쿵!

베 원사가 마총을 어깨에 견착했다.

조준이랄 것도 없었다.

마력 주입도 금방.

총열이 진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견착하자마자 발사.

찌잉!

파죽!

반동?

베 원사에겐 극히 미약한 수준.

따라서 출렁임도 없었고.

푹!

탄환이 베헤모스의 무릎에 정확히 명중했다.

잠시 후.

퍼억!

지연 폭발까지.

쿵! 쓰러지는 베헤모스.

'흠.'

확실히 차원이 다르다.

너무 쉽게 쏘고, 너무 간단하게 맞힌다.

"거참, 베 원사도 눈치 없게, 그걸 그냥 맞혀?"

"원사 짬밥이 아깝습니다."

"총 잘 쏜다고 자랑하나?"

"군대 축구 못 해봤슴까? 어? 상관이 공격수면 알아서 쓰러지는 것처럼, 알아서 빗나가게 만들어야지."

"...."

그나저나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이 마총을 다루기 어려울 것 같다.

마력을 주입할 때 마총의 진동이 너무 강해 제어하기 힘들뿐더러, 어마어마한 반동은 또 어떻게 이겨?

"다시 만들어 보겠습니다."

반성하는 엘.

그러나 코사크가.

"괜찮슴다. 아주 잘 만들었슴다. 마도 공학자, 칭찬함다."

"왜요?"

"어차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대여하려고 만든 거 아임까?"

그렇긴 하지.

"총알 장사하면 됨다. 잘 안 맞아야 총알이 더 많이 팔림다."

뼛속까지 장사꾼 마인드.

그래도 내 통장을 걱정해 주는 사람은 코사크뿐이네.

180화

프로토타입 마총.

주혁으로서도 다루기 힘들었다.

총 성능 실험은 총 잘 쏘는 사람이 해야지.

그래서 다음 층부턴 베 원사에게 맡겼다.

효과가 있는지만 살펴보면 되니까.

마력도 약하게, 플레이어 수준에 맞춰.

"원사 베로니카 캘리버, 지휘관님보다 더 약하게 마력을 주입해 보겠습니다."

이후 진행된 성능 실험.

82층 거대 뱀 아포피스 톱니 칼날 회전탄.

83층 거대 여왕 거미 아라크로이드 광역 소이탄.

모두 성공적이었다.

다만 일반 플레이어들에겐 아직 무리.

약간의 개량 작업이 필요하다.

사용하는데 까다로움이 있고, 마력 주입 시 일어나는 진동이나 발사 시 반동 적응 등.

아무리 총알 장사라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맞출 정도는 되어야지.

어쨌든 계획된 마총 시험 발사는 모두 끝났다.

각 속성 탄환이 어떤 효과를 보여 주는지도 확인했고.

'대여 사업 진행해도 되겠어.'

방식은 성검 대여할 때와 똑같이 적용하면 될 것 같다.

각국 플레이어들이 한국으로 입국해서 각성 관리청에서 대여.

거기서 마총과 탄환을 받은 후 입장.

그리고 공략이 끝나면 반납하는 식으로.

'근데 총알은 한 발당 얼마를 받아야 하지?'

사실 돈은 충분히 벌었다.

물론 많이 벌수록 좋은 일이지만.

이번 마총 대여는 탑 붕괴를 막는 대의적인 차원에서.

'원가만 받을까?'

그러나 들어가는 재료가 만만치 않다.

먼저 기간트에서 채취한 특수 금속, 상급 마정석, 우리 방구석 연금술사 마리와 매켄지, 마도 공학자 엘의 인건비 등등을 생각하면....

'싸게 받는 건 좀 그렇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시간은 많이 남았다.

아직 80층도 공략 못 한 국가들이 수두룩하니까.

더불어 마력 봉쇄 스크롤이 충분히 풀리고, 해방의 룬 목걸이 사태가 잠잠해지고 나서.

'그래도 걱정 하나는 덜었네.'

공략 불가의 거대괴수 구간.

남의 나라 탑을 대신 공략해 주는 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마총만 대여해 주면 되니까.

그리하여 오늘.

무려 3번의 탑 등반.

하지만 아직 한 번 더 들어갈 수 있다.

주혁은 4번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84층.

상마 광맥이 존재하는 층.

솔직히 보고 싶다.

라직스가 어디서 상마와 자연산 최마를 캐서 오는지.

그래서 84층에 입장해서 베 원사와 견달래, 매켄지, 광마에게 콜로서스 콘도르를 잡고 있으라 하고.

주혁은 라직스와 고방, 코사크와 함께 광맥이 숨겨진 설원의 빙벽으로 갔다.

라직스는 고방의 어깨 위에 태우고.

스파파팟!

마침내 도착한 빙벽.

그리고 숨겨진 광산.

'여기구나.'

처음 와본다.

"와아… 이게 다 뭐야?"

"저도 처음엔 많이 놀랐슴다."

"눈이 부실 정도네요."

사방이 반짝반짝하다.

엄청난 양의 마정석이 동굴 벽 곳곳에 박혀 있었다.

'이렇게 많았다고?'

이윽고.

아공간 배낭에서 무광의 플래티넘 곡괭이를 꺼낸 라직스.

채굴을 시작하려는 모양.

과연 르스스알의 채굴 실력은?

곡괭이를 높게 들어 머리 뒤로 넘긴 라직스.

그러더니.

"호엣!"

스핏!

콰직!

마정석이 박힌 벽이 아닌 땅바닥에다 곡괭이를 찍었다.

'…왜?'

순간!

쩌저저저적, 쩌저저저저저저....

곡괭이에서 터져 나온 기의 물결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후두두두두두두두!

벽에 박힌 상급 마정석들이 알아서 떨어진다.

곡괭이질 한 번에 광산 바닥에 쫙 깔린 무수한 상급 마정석들.

"호아앗!"

아아! 위대한 르스스알의 광부.

코사크가 유난히 반짝이는 돌덩이 하나를 손으로 주워 주혁에게 보여 줬다.

"봉 소환사님, 이거 보십쇼."

"오!"

자연산 최마였다.

"왕건이임다. 이거 하나만 해도 3kg은 족히 넘슴다."

백색 탑 17층 영구 입주권 3장짜리.

베 원사 아광속탄 3발짜리.

"이 귀한걸...."

그때였다.

슈슈슛! 슈슈슈슈슈슛!

"으잉?"

이게 무슨 소리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라직스였다.

그가 바닥에 깔린 상마들을 쓸어 담고 있었다.

어떻게?

그냥 손을 앞으로 쭉 뻗자 동굴 바닥의 상마들이 슉슉, 아공간 배낭 안으로 날아서 들어갔다.

슈슈슛! 슈슈슈슈슈슛!

코사크가 손에 들고 있던 최마도.

"헐, 원격 수납임다."

그랬다.

원거리에서도 아공간 수납이 가능.

예전엔 라직스가 직접 손으로 접촉해야 들어갔는데.

'미쳤네, 미쳤어.'

지금은 닿지 않아도 마구마구 들어간다.

'이건 마치....'

이제야 알았다.

르스스알 라직스의 청소 실력의 비밀을.

조금 전에도 청소하는 걸 눈으로 직접 봤었다.

워낙 청소를 잘하는 라직스라 그러려니 했는데.

'먼지나 쓰레기를 이런 식으로 아공간 배낭에 빨아당기는 거였어.'

진공청소기였다.

아무거나 무턱대고 빨아들이는 게 아닌 원하는 것만 선별해서 아공간 배낭으로 흡수하는 차원대머슴.

그러고 나서 먼지와 쓰레기는 따로 분류해서 밖으로 꺼내면 되고.

이러면 청소는 장난이지.

주혁은 흐뭇했다.

그동안 청소하는 라직스가 보기 안쓰러웠는데, 이렇게 편하게 청소한다는 걸 알게 됐으니 얼마나 좋아.

* * *

탑 등반 초기에 플레이어들은 형편이 썩 좋지 않았다.

탑에서는 마력을 갖추고 몬스터를 공략하며 탑을 등반하는 초인이었지만, 정작 현실에선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

그래서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죽하면 탑 안에서 죽는 플레이어보다 탑 밖에서 죽는 플레이어가 더 많다고 했을까?

하지만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플레이어 보호에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플레이어들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됐다.

그중에 재능이 뛰어난 플레이어들은 정부가 직접 세심하게 관리했다.

연봉도 보장해 주고, 안전한 거처도 마련해 주고, 경호원도 붙여 주고.

일반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

새로운 자원인 마정석을 캐오는 산업역군 아닌가?

국가 육성 플레이어보다는 모자라지만, 그들에게도 충분한 보호 장치를 만들어 줬다.

하지만 해방의 룬 목걸이는 이런 플레이어들의 보호 장치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물건.

플레이어가 공동체의 적으로 인식되는 순간,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마력 봉쇄 스크롤 확보에 열을 올릴 수밖에.

정부 기관에 먼저 배포되기 시작한 스크롤.

경찰서, 파출소, 소방서....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북한에도 공급했다.

특히 중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말고는 아직 조용했다.

현재로선 중국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러나 간과하는 사실 하나.

각 국적 소속의 플레이어들은 꼭 자국에 있어야 탑 입장이 가능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 사는 플레이어라도 상태창 국적이 중국이면 중국 검은 탑으로 들어간다.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국경 봉쇄나 중국인 입국 금지는 별 효과가 없다는 것도.

급기야 중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첫 해방의 룬 목걸이 관련 사건이 터졌다.

미국이었다.

유학비자를 받아 미국에 학위를 따러 온 중국 유학생 플레이어.

대학교 안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처음엔 단순한 말다툼에서 비롯되었지만 늘 그렇듯 인종 차별 사태로 비화됐다.

해방의 룬 목걸이를 보유하고 있던 중국인 유학생 플레이어.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간간이 중국 탑에 들어가 보상받은 물건.

말다툼이 물리적 다툼으로 발전하자 유학생 플레이어는 즉시 가지고 있던 목걸이 옵션 효과를 발동했다.

그러나 그 유학생은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원래 그것이 일반적이다.

플레이어들도 어떻게 보면 보통의 사람들.

몬스터라면 몰라도 사람을 죽이는 게 어디 쉽나?

유학생 플레이어의 특성은 마법 계열.

목걸이를 이용해 힘을 해방한 후, 기숙사에서 불덩어리를 난사하며 난동을 부렸다.

즉시 미국 경찰들이 출동했다.

마력 봉쇄 스크롤을 찢어 힘을 뺀 다음, 테이저건으로 가볍게 제압.

탑으로 도망?

그래 봤자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사고를 친 중국 유학생 플레이어는 즉시 기물 파손과 방화 혐의로 플레이어 전용 감옥으로 수감됐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사망자 부상자 모두 무(無).

맥밀란 장관과 안토니오 국장도 매우 만족했다.

"큰일 날 뻔했어. 스크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 되긴요. 아마 총격전이 벌어졌겠죠. 해방 플레이어도 끝까지 저항했을 테고."

맞다.

인명 피해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덩어리를 쏘아 대는 해방 빌런, 경찰들은 총부터 갈겨 댔을 테니까.

"이게 다 나 때문인 줄 알라고."

"갑자기요?"

"내가 발 빠르게 선점해서 스크롤이 일찍 들어온 거잖아."

"아...."

"성검 대여도 우리가 먼저였지? 80층 꿈 저항 키트도."

"그건 제가 먼저...."

"하지만 백악관에서 예산 따오는 건 나지."

맥밀란의 자화자찬에 피식 웃는 안토니오.

"앞으로 한국만 주시하면 돼. 거기서 뭔가 하려고 하면 손부터 번쩍 들어. 우리도 같이하자고."

"네네, 그래야죠."

맥밀란도, 안토니오도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게 세계 최고 플레이어 봉주혁 덕분이란 걸.

"미스터 봉에게 감사 전화나 해드리세요."

"해봤는데 안 받아."

"그럼 전 청장에게라도,"

"그 사람에겐 벌써 했고."

어쨌든 사건은 잘 마무리됐다.

남은 건.

"그나저나 그 유학생은 어떡하지?"

"수사 결과 인종 차별적 발언이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흠."

"평소에도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고요."

"빌어먹을 레이시스트!"

"정상 참작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정상 참작이라.

고민해 볼 문제.

힘을 해방하고 나서도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았던 유학생 플레이어.

위력 행사만 했다.

심지어 기숙사에서 사람들이 다 대피하길 기다려 준 정황도 있다.

그래서 혐의도 기물 파손과 방화.

"이참에 미국으로 귀화시킬까요?"

"…응? 빌런 해방 플레이어인데?"

"처음엔 실수했지만 그래도 사람에게 스킬을 쓴 건 아니니까, 통제력도 있는 것 같고, 우리가 관리하면 됩니다. 이대로 중국으로 돌려보내면 죽으라는 거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맥밀란.

"광고 효과도 있겠군. 마력 봉쇄 스크롤이면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수 있으니."

"제가 접촉해 보겠습니다."

이로써 미국 사건은 해방 빌런 플레이어를 평화롭게 제압한 첫 번째 사례로 마무리됐다.

백악관에서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리고 CCTV에 고스란히 찍힌 검거 과정을 전 세계로 공개했다.

마력 봉쇄 스크롤의 실제 효과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중국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저렇게 쉽게 제압한다고?

* * *

마총 성능 실험도 끝냈고.

이제 본격적인 양산 작업에 들어간 마력 봉쇄 스크롤.

굳이 간섭하지 않아도 인쇄 공장은 자연스럽게 잘 돌아갔다.

피소환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스크롤용 특수 용지와 마력 잉크를 보급해 주는 일.

그마저도 라직스가 귀환했기 때문에 대량으로 재료를 공급해 줄 수 있었다.

주혁은 코사크와 단둘이 평양 주석궁으로 갔다.

김인중 위원장과 만나기 위해.

앞으로 북한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벌일 계획.

그럼 직접 얼굴 보고 잘 부탁한다는 말 정도는 해야지.

만나기 불편한 건 아니다.

예전에 안면도 텄고, 자신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고.

"생각 잘 하셨슴다. 주인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머슴을 춤추게 함다."

"…그래도 북한 최고 지도자인데 머슴은 좀."

"죽이려 했던 놈을 살려 줬는데, 머슴이면 신분 상승 아임까."

주석궁에 도착한 주혁과 일행은 김인중과 만났다.

바짝 얼어붙은 김인중 위원장.

"최, 최고 플레이어 동지, 어, 어서 오시라요."

"오랜만입니다. 북한에 공장을 짓게 해주셔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아임메다. 얼마든지 쓰시라요. 필요하시다면 주석궁도 비우겠습메다."

"아유, 주석궁은 무슨, …통일되면 몰라도."

"토, 통일 작업도 빠르게 완수하갔시요!"

흠.

이렇게 착한 사람이 왜 그동안 속을 썩였을까.

미사일이나 쏴대고 말이야.

주혁이 소파에 앉았다.

그런 그의 뒤편에서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코사크.

"코사크 씨도 앉아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서 있어도 됨다. 헤헤헤헤."

김인중 위원장은 긴장했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저 인민무력부장이 저렇게 알랑거리는 모습이라니.

'조심해야겠어.'

말실수라도 했다간 바로 목이 날아갈 수도.

"아참! 제가 평양 검은 탑 공장 현장을 보면서 느낀 건데."

"말씀하시라요."

"아무래도 노동력이 부족하더라고요. 앞으로 일할 사람들이 더 필요해서요."

"걱정하디 마십시오. 공화국 인민들 총동원령 내리갔습메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저기 휴전선 전방 부대 군인분들 데리고 와서 슬슬 일을 시켜보는 게...."

"아!"

"제가 다 고용하겠습니다. 한국 기준 노동자 임금으로."

휴전선 군인들이 왜 필요해?

전쟁이 날 이유도 없는데.

"고조, 현명하신 생각이십메다, 최고 플레이어 동지! 즉시 착수하갔시요."

노동력 문제는 해결됐고.

"이거 늘 신세만 져서… 원하는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들어드릴게요."

"없슴네다. 내레 오래오래 살고 싶은 소원 말고는."

"하하하, 그렇게 되실 거예요."

"저, 정말임메까?"

"당연하죠. 갑자기 병이라도 생겨서 잘못되면 모를까."

"...."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김인중.

이건 경고다.

확실히 하지 않으면 제거될 거라는.

갑작스러운 질병이 뭘 의미하겠나?

심근경색이나 뇌경색 등등, 발병하면 죽는 병이겠지.

무서운 사람이다.

선한 얼굴 뒤에 숨은 잔인함.

그리고 그의 뒤에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인민무력부장.

허튼수작 부리면 즉각 죽이겠다는 무언의 의사.

"며,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여, 열심히 하갔슴메다."

"하하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벌떡 일어나는 김인중.

두 팔을 위로 번쩍 들면서.

"주혁 만...."

"잠깐!"

"네?"

"그거 하지 마세요."

무슨 주혁 만세야?

듣기만 해도 오글거리는 판에.

반면 코사크는 아쉽다는 눈빛이지만.

잘 끝났다.

아무리 협조적이라도 북한 최고 지도자를 만나 이야기하는 게 어디 쉽나?

뭐, 그래도 좋은 덕담이 오고 간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북한 공장도 알아서 잘 돌아가겠지.

"그럼 이만...."

바로 그때!

순간.

지이잉.

주혁의 스마트폰으로 걸려오는 전화.

'누구지?'

아버지 봉수철이었다.

그것도 영상 통화로.

남한과 북한이 통신망으로 연결된 건 이미 오래됐다.

한국 각성 관리청 평양지부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그래서 북한 플레이어들도 자유롭게 SNS나 인터넷 게시판에 드나들 수 있고.

"잠시 전화 좀 받을게요."

양해를 구한 후.

"네, 아버지, 무슨 일인데요?"

- 아들 얼굴이나 보려고 전화했다. …별일 없지? 요즘 세상이 해방, 뭐시기 하면서 뒤숭숭하던데.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걱정되는 모양.

역시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은 가족밖에 없다.

아! 피소환인들 빼고.

"괜찮아요. 제가 누굽니까?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위험할 것 같으면 근처에도 안 갑니다."

- 그건 알지만 걱정돼서, 그런데 지금 어디냐?

"북한 평양이요."

- …뭐?

"주석궁에서 김인중 위원장과 만나고 있어요."

스마트폰 화면에서 보이는 봉수철의 황당한 표정.

- 말도 안 되는....

주혁은 스마트폰을 돌려 김인중 위원의 얼굴을 비췄다.

그러자.

"아바이 동무! 내레 김인중이라요. 처음 뵙겠슴메다."

- 허억!

봉수철이 기겁했다.

그러더니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 이, 이적행위, 구, 국가보안법 위반.

"…넴?"

뭐래?

이적행위는 무슨.

뚝!

끊기는 전화.

아무래도 아버지가 많이 놀란 모양이다.

하긴, 김 위원장이 보통 사람은 아니니까.